112화 전조 (3)
이 세상에는 악마를 숭배하는 어리석은 족속들이 존재했다.
흑마법을 연구하는 흑마법사들이 그러했고, 악마 교단의 신봉자들이 그러했다.
그중 최악은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대가로 팔아넘긴 것이었다.
오로지 강함만을 추구하기에 인간임을 버린 존재들.
세간에는 마인(魔人)이라 불리며 반드시 척살해야 할 인류의 적이라 규정되었다.
성직자였던 갤런이 그런 마인들의 마기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른 종교의 신성력을 구분하라면 난색을 표하겠지만, 마기는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그 편린만으로도 포착할 수 있었다.
녹스에 들어오기 전 숱하게 싸워 본 녀석들이었으니 말이다.
'모두 보통을 뛰어넘는 강함을 지닌 괴물들이었지.'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마인은 말 그대로 악마들에게 있어 한낮 유흥거리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흥이 식는다면 그대로 계약을 종료해 영혼과 육신을 빼앗아 가 버렸으니.
모든 사정을 아는 갤런의 눈에는 눈앞의 녀석들이 그렇게 어리석어 보일 수가 없었다.
"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나?"
"...."
갤런의 말에 주먹을 맞댄 남자는 씩 웃어 보였다.
그딴 것 따위는 하등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래, 애초에 동정할 가치가 없는 녀석들이었지.'
갤런은 짤막한 숨을 토해 내고는 두 눈을 사납게 떴다.
제정신이 박혀 있더라면 악마와 손을 잡는 짓거리는 하지 않겠지.
이들은 미래를 보지 않는다.
오로지 눈 앞에 펼쳐진 얄팍한 현재만을 주시하며 자신의 모든 걸 불사질렀다.
죽음 이후 다가올 끔찍한 고통을 예상조차 하지 못하며.
악마와의 계약을 무를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기적이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빠르게 이 이단 분자들을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뿐이었다.
'조금 진지해져 볼까.'
갤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침묵의 기도문을 되뇌며 가슴 밑바닥에 묻어 놓았던 신상을 불러일으켰다.
츠즈즈즈.
맞댄 주먹 위로 연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앞쪽에 있던 마인은 주먹 끝에서 느껴진 통증에 두 눈을 부릅뜨며 물러났지만, 갤런은 씩 웃으며 녀석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딜 도망가려고."
화아악!
새하얀 불길이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려 마인을 집어 삼켰다.
마기로 물든 피부와 살점이 썩는 것처럼 문드러졌고, 뼈까지 삭아 들어가며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기 시작했다.
악마에게 몸을 판 대가는 이처럼 혹독했으니.
순리를 벗어나 그릇된 힘을 탐한 어리석음을 향한 단죄였다.
"오."
디르센을 보호하며 갤런의 선전을 구경 중이던 식스는 나지막한 감탄을 터트렸다.
그가 성직자였다는 이야기는 조금 전에 본인에게 직접 들었다.
말뿐이었을 때는 몰랐는데 신성력을 사용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진짜 성직자였다는 사실이 제법 실감되었다.
펄럭.
갤런에게 붙잡힌 마인의 몸이 말끔하게 소멸했다.
옷가지만 깔끔하게 남긴 채 뼛조각까지 전부 타들어 가서 존재 자체가 소멸했다.
갤런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흘러내린 옷가지를 바닥에 흩뿌렸다.
"신성력 맛 좀 볼 사람?"
"...."
줄곧 여유롭던 마인들이 몸을 낮추며 자세를 취했다.
남은 마인은 둘.
그 전신으로 시커먼 마기가 피어오르며 갑옷처럼 몸에 둘렸다.
갤런은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투르가 쪽에 악마 숭배자 세력이 끼어든 건가? 녹스에서 조사하기로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수도 외곽에 서부 3상업 지구까지 손을 뻗어온 걸 보니 녀석들의 마수가 생각보다 더 깊게 뻗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마법사, 악마 숭배자는 모두 기본적으로 세간에서 배척받는 존재였다.
공식적인 루트로는 제국 수도에 감히 받을 내디딜 생각을 하지 못할 터.
하지만 이런 음지는 저들이 흘러들어오기 안성맞춤인 음습한 공간이었다.
더군다나 플릭의 특성상 무슨 일이 있어도 외부로 새어 나가기 어렵지 않은가.
악마나 마족 한 마리가 정체를 숨기고 똬리를 틀고 있어도 알아차리는 건 쉽지 않을 터.
'아무래도 생각보다 제국의 어둠이 깊을 듯하군.'
갤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와 동시에 남은 두 마인이 양옆으로 쇄도하며 들이닥쳤다.
쉬악!
휘둘러지는 병장기 위로 넘실거리는 마기가 담겨 있었다.
피부에 두드러기가 일어날 것 같은 거부 반응이 치솟았다.
갤런은 그 역겨움과 분노를 원동력 삼아 움직였다.
퉁.
떨어져 내리는 검을 손등으로 쳐 밀어내고는 그 가슴팍을 정권으로 후려쳤다.
옆구리를 찌르는 창은 한 발을 디뎌 축을 삼고 몸을 회전하는 것으로 피해낸바.
탁.
찔러진 창대를 붙잡고 힘으로 끌어당긴 그는 상대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우지끈.
안면 뼈가 함몰되며 새카만 피가 흩뿌려졌다.
그래도 마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던 탓인지 처음 녀석처럼 단번에 불타 죽지는 않았다.
'기량 차이는 이쪽이 우세다.'
갤런은 손을 털었다.
식스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설령 악마와 손을 잡고 힘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쪽은 과거부터 순수하게 힘을 쌓아 올렸다.
더욱이 마스터와 만난 이후로 그에게 여러 조언을 들으며 무술을 가다듬었으니.
꽈악.
갤런은 주먹을 내밀며 기수식을 취했다.
휘몰아치던 신성의 불꽃은 주먹 위에 맴돈 채 어둠을 밝히며 고고하게 타올랐다.
'둘 다 살려 둘 필요는 없다.'
악마와 손을 잡은 녀석들은 그 의지를 배반하지 못했다.
설령 사로잡는다고 해도 캐물을 수 있는 건 없겠지.
그렇다면 선택해야 할 쪽은 두론이라고 불렸던 그 우두머리 쪽이었다.
"...크윽."
두론은 흘러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주춤거리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여차하면 모든 걸 다 버리고 도망칠 기세였다.
남은 조직원들은 기척을 감추며 양옆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바.
아무래도 이쪽이 쌓인 사이 디르센을 직접 치려는 속셈인 듯했다.
'오히려 날 도와주는 셈이지.'
식스가 저딴 모지리들에게 당할 일은 없으니 자신은 마음 놓고 마인들을 두들겨 패면 되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이쪽의 우두머리인 두론도 붙잡고.
쿵.
갤런은 힘껏 땅을 박찼다.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디르센의 세력이 공격받고 있다는 건 투르가가 전면전을 벌여 왔다는 소리.
녹스에서는 이미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기에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
또 어떤 괴물 같은 녀석이 있을지 모르는 가운데 서둘러 이곳을 정리하고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쿵!
찔러지는 검끝과 주먹이 충돌하며 커다란 충격파를 뿜어냈다.
갤런은 더 이상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
속전속결을 각오했기에 진심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상대를 압박했다.
파각.
주먹과 충돌한 검신에 균열이 생겨났다.
검을 쥔 마인의 두 눈이 부릅 뜨였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
갤런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내 주먹이 좀 튼튼하거든. 너희 같은 새끼들 때려잡으려고 나름 열심히 단련했다."
쩌엉!
재차 주먹이 내려꽂혔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검신은 완전히 부러졌고 갤런은 한 번 더 가속하며 마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힘 더 꽉 줘."
"...!!"
마기가 모여들었다.
마치 호신강기처럼 몸을 지키고 부러진 칼날을 휘둘러 갤런의 목을 쳐 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갤런은 그 이전에 녀석의 가슴팍에 정권을 꽂아 넣었다.
콰직.
묵직한 타격과 함께 치솟은 신성력이 마인의 몸을 헤집었다.
"크아아아악!!!"
극상성의 기운이 체내에서 날뛰자 마인의 두 눈이 뒤집히며 엄청난 절규를 토해 냈다.
녀석은 곧 시커먼 피를 토하더니 뒤로 발라당 자빠지며 절명했다.
마찬가지로 새하얀 불길이 치솟으며 그 시체를 말끔하게 태워 버렸다.
"남은 건...."
쉬아아악!
마인이 힘껏 땅을 박찼다.
하지만 그 방향은 갤런과 반대 방향인바.
싸움이 성립되지 않은 걸 보고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갤런은 피식 웃으며 녀석을 향해 달려나갔다.
"...!!"
그래도 제법 벌려 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자 마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잠...!"
"시끄러워."
콰직.
마인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이쪽은 갤런이 신성력으로 태우기도 전에 악마와의 계약이 끊겨 한 줌의 핏물로 돌아가 버렸다.
탁탁.
가볍게 손을 털어 낸 갤런은 속이 다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갤런, 저 녀석 도망갑니다."
"아."
그 사이 두론은 자리를 벗어나 골목길로 도망치던 중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마인들까지 무너진 가운데 뚝심 있게 전장을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디르센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인질로 이용하겠지만, 그 옆에 붙어 있는 실눈 녀석도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두론은 힘껏 땅을 박찼다.
디르센을 사로잡거나 죽이면 막대한 보상을 약속받았다.
아예 이 플릭과 더불어 이쪽 구역 전부를 자신에게 양도해 줄 수도 있다는 투르가의 말에 혹한 것이 문제였다.
'저 안쪽의 습격이 실패했을 때 짐작했어야 했는데!'
녹스에서 나온 녀석들은 상상 이상의 괴물이었다.
어디서 저런 녀석들이 툭 튀어나온 걸까.
제국 음지의 중심가.
판게모니움에서 나온 녀석들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걸까?
'일단 플릭에 돌아가서.'
다른 수하들과 합류한 후 시간을 끌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턱.
뒤통수를 짓누르는 묵직한 느낌과 동시에 두론은 머리부터 땅에 처박혔다.
"커, 헉!"
반쯤 튕기듯 바닥을 구르다가 겨우 멈춰서고는 부러진 이빨과 피를 게워 냈다.
뒤쪽에서 그의 조직원들을 도륙하던 식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갤런에게 말했다.
"갤런, 이빨이 날아가면 발음이 이상해져서 알아듣기 힘듭니다."
"괜찮아, 신성력으로 치료해 주면 되니까."
"아하."
식스는 감탄했다.
성직자는 여러모로 편리한 존재인 것 같았으니.
갤런에게 하나 배웠다고도 할 수 있었다.
* * *
이른 아침.
설백의 방문에 카를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평소와 달리 요란하게 부리로 창문을 쪼아대는 걸 보니 꽤 급한 서신인 듯싶었다.
삑, 삐익, 삑.
아니나 다를까 방 안으로 들어온 설백은 대지급 서신이라는 신호를 뱉으며 카를을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카를은 설백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다리에 묶여 있던 서신을 확인했다.
"흠."
디르센과 대척점에 있던 라한의 이인자인 투르가가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사실 그들 성정을 생각해 본다면 많이 참았다고 할 수 있었다.
전체적인 균형으로 보면 투르가 쪽이 우세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디르센 쪽에 녹스가 합류했어도 느긋하게 기다렸을 것이다.
조직 하나가 붙어서 바뀔 판도였으면 진작 조직의 우두머리가 바뀌었을 테니까.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승부수를 띄웠다는 건가."
디르센은 녹스를 필두로 공격적인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그 규모가 투르가 쪽에 육박할 정도로 커지려는 낌새를 보이자 싹을 짓밟기 위해 나선 듯했다.
다만, 지금 상황 역시 녹스 쪽에서 예상하고 대비하던 것이었다.
서신에는 투르가 쪽의 공격은 큰 피해 없이 전부 막아 냈다는 승전보도 함께 적혀 있었다.
"마인이라는 것도 흥미롭군."
중원에서 마인이라고 함은 천마신교의 교도 정도인데.
마도천하의 지존인 천마를 숭상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진짜 악마나 마왕 같은 녀석들이 존재했다.
그들과 계약하고 영혼을 넘겨 힘을 받은 이들을 마인이라고 했었지.
어쩌면 투르가도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듯했다.
파아앗.
삼매진화로 서신을 태워 버린 카를은 설백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당분간 바빠지겠군."
물론, 녹스의 기회였다.
113화 전조 (4)
음지에서 활약하는 녹스가 바쁘게 돌아가는 사이.
바이에른은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 주 외부 견학이 예정되어 있는 걸 제외하고는 당분간 큰 이슈가 없었다.
남은 건 학기 말미에 예정되어 있는 기말 시험뿐.
물론 그와 더불어 다른 실습들이 물밑에서 준비 중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평화롭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카를은 현재 도서관에 자리하고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건 평소 함께하는 생도들이 아닌, 녹스의 조직원 루나.
그녀는 평소와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카를에게 보고했다.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만, 예상한 것보다 투르가 쪽 세력의 저력이 강했던 탓에 디르센 세력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렇겠지. 우리가 오기 전까지는 투르가 쪽이 주류 세력이었으니까."
카를에게 오는 보고 루트는 설백을 통하는 것과 나인의 직접 방문이 있었다.
아카데미 쪽에 집중하고 또 덜미를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연락 망을 최소한으로 구축했다.
대신 곳곳에 심어 놓은 조직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정보를 취득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이중 구조를 만들어 놓았으니.
필요에 따라 카를 본인이 직접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다.
"즉, 크게 문제는 없겠군."
"그렇습니다."
밀회의 장소는 도서관의 외진 곳.
바이에른 서고가 워낙 커다란 규모를 자랑했기에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이 많았다.
각종 괴담이나 소문의 근원지가 되는 곳이었지만, 카를에게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더불어 기막으로 주변 소리를 차단해 이중으로 보안을 신경 썼으니 이쪽의 이야기가 새어 나갈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그쪽은 어떻게 되었지?"
카를이 오늘 루나와 접촉한 건 녹스의 실시간 상황을 전해 듣는 것도 있었지만, 일전에 만났던 인외의 존재에 관해 묻기 위해서였다.
"둘 다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평범했다는 소리군."
"네. 바이에른 생도 중에 워낙 별난 유형이 많으니까요."
루나는 작성한 보고서를 공손히 카를에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세이라 쪽은 평범 그 자체입니다. 일반 학부의 행정 전공이고 성적은 중상위권입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큰 요소는 없습니다."
"사서라."
"아, 남자 생도들한테는 인기가 많습니다. 외모도 예쁘장하고 머리도 똑똑해서 평판이 좋습니다. 올해 학기가 시작하고 벌써 고백만 10번 넘게 받았을 거예요."
"흠."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지만, 사소한 포인트라도 허투루 하지 않아야 했다.
어느 곳에서 상대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을지 모르는 법이니까.
"가문도 평범하고, 마스터의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저희 녹스의 시야 안쪽에 걸려들 요소는 없었습니다."
"그렇긴 하군."
카를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적이 조금 뛰어나고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모난 점이 없었다.
정체를 숨기고 잡입 중이라면 정말로 솜씨가 뛰어난 세작이라는 소리였다.
"레이첼 쪽은...."
"뭐가 많군."
"네. 대부분 사건, 사고 쪽의 이슈입니다."
카를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레이첼의 기록을 넘겼다.
바이에른의 생활 자체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건지 성적은 최하위권, 강의에서 매번 잠만 자는 건지 태도 점수도 꽝이었고 교수나 교관들도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다만, 그 작은 체구를 가지고도 실기 쪽에서는 제법 우수한 성적을 보이고 있었다.
"2학년 17위권에 있는 생도를 대련에서 꺾었다고?"
"네. 세이라에게 치근덕거리던 생도였는데 대련을 신청해서 박살 냈다고 합니다.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압도적인 승부라고 하네요."
"광대 함몰, 두 팔 모두 골절, 옆구리 파열...."
카를은 헛웃음을 토해 냈다.
작정하고 두들겨 팬 것인지 상대는 거의 곤죽이 되어 있었다.
"이걸 보고도 계속해서 고백한 녀석들이 대단해 보이는군."
"나름대로 선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정도 이상으로 귀찮게 하면 직접 나서는 것 같고요. 생도들도 그걸 알기에 조심하는 추세입니다."
"둘의 연관점은?"
"최초 기록은 1학년 교양 강의에서입니다."
"그렇겠지. 학부가 다르니까."
세이라는 일반학부의 행정 전공.
레이첼은 마도학부의 검술 전공.
접점이 생길 만한 곳은 교양 강의나 동아리 같은 곳밖에 없을 터.
'이쪽의 의심대로라면 애초에 알던 사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
어쩌면 같은 조직에 속해 있을지도 몰랐다.
"2학년이 된 이후로 필수 전공을 제외하고는 다른 강의는 수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아마 바이에른 측이 모종의 배려를 해준 것 같은데...."
"위쪽도 무언갈 알고 있다는 소리군."
"네, 협의된 사안 같습니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런 사고뭉치를 바이에른에서 아무런 제재하지 않고 데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바이에른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이들이었기에 흠결이 남는 걸 싫어했으니까.
그럼에도 레이첼을 데리고 있다는 건 그런 오물을 감수할 만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소리겠지.
"뱀파이어, 그것도 상당한 혈족의 핏줄을 이었을 가능성이 크겠군."
"...어떻게, 마늘 가루라도 뿌려 볼까요?"
"흠."
카를도 고민했던 주제였다.
진짜 뱀파이어라면 무언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마늘과 십자가에 관련된 설화는 워낙 유명한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묻어 놓는다. 저들이 무언가를 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마주친 거니까."
잘못 하다간 바이에른이 물밑에서 숨기고 있던 것까지 건드릴 수 있었다.
착실하게 이미지를 쌓아 가는 와중 그런 잡음은 피해야 했다.
"그런데 다른 생도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건가? 레이첼이라는 생도를."
"네. 2학년 이상부터는 보통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각자 실리를 챙기는 쪽으로. 그런 면에서 이번 1학년 생도들이 이레귤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끈끈하지 않으니까요."
아무래도 입학시험부터 테러나 여러 사건이 있어서 그런지 1학년 생도 사이에 묘한 동료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학년이 더 올라가면 모르겠으나 기존 바이에른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위쪽에서는 이번 발푸르기스의 밤 축제에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결속력이 좋으니까."
"네. 아무래도 협동 플레이가 중요한 행사다 보니 말이죠. 똑똑하거나 뛰어난 사람들일수록 협력하는 건 어렵잖아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가뜩이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데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고 단체 행동을 할 수 있겠나.
"그럼 계속 감시는 부탁하지."
"네. 마스터, 다음 일정은...."
"레이시스와 만나기로 했다."
"아."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루나는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녀는 마스터의 보조 임무와 동시에 퀸에게서도 이중 임무를 부여받은 바가 있었다.
바로 마스터의 교우 관계에 관한 것이었으니.
'레이시스, 유리아, 에이미. 아직은 셋이긴 하지만....'
특히 마스터 곁에서 알짱거리는 여성 생도에 관한 보고를 철저하게 할 것을 명령 받았다.
학기 초에는 문제가 없었다.
생도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건 흔하게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이에 묘한 기류가 풍기더니, 중간 시험 때는 기어이 사고가 터져 버렸다.
"...."
루나는 그때 주말을 생각하니 정신이 살짝 아찔해져 왔다.
레이시스가 마스터의 어깨에 기대 다정하게 노을을 구경하고 있는 사진.
그 빌어먹을 사진은 당연하게도 퀸의 수중까지 들어갔고....
'무서웠어.'
더 철저하게 관련해서 조사를 할 것을 명령 받았다.
그 귀기 어린 눈을 보아하니 독살이라도 하실 것 같았는데.
주요 생도인 만큼 마스터께서도 눈여겨보는 만큼 아무리 그래도 그런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지만,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퀸이 움직일 수 있는 카드는 루나 자신 말고도 더없이 많았으니까.
"...아닙니다, 저도 그만 가 보겠습니다."
루나는 재차 말하고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카를보다 더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
잠시간 고개를 갸웃한 카를은 자리를 정리한 뒤 도서관을 나섰다.
'가볍게 몸을 풀 시간이군.'
중간 고사 이후.
카를은 실력의 일부를 레이시스에게 선보였다.
앞으로의 활동과 레이시스의 포섭을 위한 초석을 깔아 둔 것인바.
다만, 그 탓인지 레이시스에게 붙들려 정기적으로 대련을 벌이게 되었다.
'유리아와는 마법 스터디. 레이시스와는 검술 스터디인가.'
나쁘지 않은 구조였다.
더욱이 각각 따로 관계되어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무래도 인원이 많아질수록 결속력이 약해지는 법이니까.
끼익.
카를은 예정된 연무장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허공을 스치는 파공성을 보아하니 레이시스는 이미 수련 중에 있었던 듯하다.
쉭, 쉬악, 쉭!
한창 집중 중인 듯 카를의 등장에도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카를은 벽에 등을 기댄 체 잠시간 그 광경을 구경했다.
'깔끔하군.'
기본기가 튼튼하다.
검에 실린 힘과 날 선 궤적의 흔적만 보아도 얼마나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했는지 읽을 수 있었다.
중원으로 따지자면 정도 명문의 후기지수 중 손에 꼽히는 실력자일 테지.
어쩌면 오룡삼봉 중 하나로 꼽힐지도 몰랐다.
실제로 바이에른으로만 따지자면 네리안에 이어 2순위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무공을 가르쳐 볼까?'
카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중원에 존재하는 숱한 무공이 들어 있었다.
살수 생활을 하면서 여러 비급을 습득했고, 표적이 된 고수를 공략하기 위해 해당 무공을 낱낱이 분석한 적도 많았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강호에 이름을 알리는 유명 고수들의 무공도 말이다.
그렇기에 천하제일살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어쩌면 혼원일극신공이라는 절세무공을 무탈히 익힐 수 있던 것도 무공의 재능이 아니라 그간의 노력 덕분이 아닐까.
'레이시스에게 어울리는 무공이라면....'
정도의 무공에서 선택해야 할 터.
녹스의 블랙 라벨들에게 전수해 준 무공과 겹치지 않는 선에서 선택하자면.
화산의 이십사수 매화검법.
무당의 태극혜검.
점창의 사일검법.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법.
이 넷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아니, 처음부터 너무 좋은 무공을 주면 거래의 성립이 되지 않는다.'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레이시스에게 원하는 건 이쪽에 점점 스며드는 것이다.
새로운 검법을 배우고 좀 더 좋은 검법에 대한 욕심과 목마름으로 얽매이는.
빠져나갈 수 없는 늪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면 적당한 건.'
레이시스의 검이 멈췄을 때.
카를 역시 선택을 내렸다.
블랙 라벨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중원의 무공을 전수해 주고자 마음을 세운 것이었다.
"아, 카를. 미안해요. 집중하느라."
"괜찮습니다. 그보다...."
"그보다?"
"저에게 검을 배우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114화 전조 (5)
"...검이요?"
카를의 말에 레이시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미 그와 대련하면서 검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덕분에 아카데미의 강의를 듣거나 다른 생도와 대련하는 것보다 실력이 더 가파르게 늘고 있었다.
실력을 드러낸 카를은 대련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실전에서 만난 적보다 더 거세게 몰아쳤고, 가끔은 이번엔 진짜 죽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적도 몇 번 있었다.
'큰 도움이 되었지.'
이렇게 완벽히 완급 조절을 하며 상대가 다치지 않게 대련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만큼 카를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일 터.
그런 가운데 검을 배울 생각이 없냐니, 그게 무슨 말일까?
"네, 검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술이겠군요."
"라이프치히의 검술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저희 가문의 검술은 직계 혈족만 배울 수 있습니다."
피오레 검술.
분명 뛰어난 검술이긴 했다.
하지만 카를의 눈에는 검의 궤적 곳곳에서 어긋난 부분들이 보였다.
'피오레는 힘보다는 속도와 검로의 디테일로 승부를 보는 검술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선 강검으로 취급받으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와 다리우스는 아예 힘과 기세로 찍어 누르듯 피오레 검술을 펼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직계 혈족 중 카를을 제외하곤 피오레 검술을 가장 잘 이해하고 다루는 건 카리우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세심한 성격답게 피오레의 요지를 꿰뚫은바.
경지가 더 쌓인다면 아버지인 라이프치히 백작도 뛰어넘을 것이 분명했다.
"레이시스 양은 왕실의 검술을 익히셨습니까?"
"아니요. 왕실 비전은 제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저는 엘로디라는 기사분께 따로 검술을 배웠어요."
"왕궁의 기사입니까?"
"네, 어렸을 적부터 제 호위를 맡아 주신 분이에요. 지금은 자매 같은 사이로 지내고 있어요."
레이시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그 모습을 본 카를은 잘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낫군.'
왕실 가문에서 내려오는 비전 검술 정도 되는 것이면 아무리 못해도 일류 무공은 뛰어넘을 것이다.
그런 검술을 익히는 중에 새로운 무공도 익히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기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검술이라면 끼어들 여지가 충분했다.
'오히려 그 정도로 바이에른의 최상위권까지 다다른 것이 대단하군.'
그만큼 레이시스의 자질이 뛰어나고 피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증거.
그녀를 눈여겨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그럭.
카를은 연무장에 비치되어 있던 가검을 꺼내 들며 레이시스에게 말했다.
"이건 제 단순한 흥미이니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보고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두 눈 부릅뜨고 볼게요."
레이시스는 흥미가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이 저렇게 말해 온 건 처음이었기에, 대체 무슨 검을 보여 줄 것인지 궁금했다.
"아, 참고로 먼저 말씀드리자면."
"...?"
"이 검술에 속한 검 하나하나가 프라한 교관이 알려 준 검보다 뒤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그 정도라고요?"
레이시스의 두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프라한 교관이 알려 준 검, 아라크네는 레이시스에게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름 그대로 자신 주위의 영역을 쪼개 기세를 거미줄처럼 퍼트리는 것으로 검술이라기보다는 응용에 가까웠다.
익히는 건 정말로 어려웠지만, 어느 정도 기본기를 뗀 지금은 감각과 기세를 다루는 법에 한층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생도 수준에서는 검술로 밀리지 않으리라 자신감이 들 정도로.
물론 카를은 제외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은 검술이라고?
'당연한 이야기다.'
카를은 짧은 호흡을 토해 내며 검을 세웠다.
중원과 아르테니아의 차이.
그건 바로 역사의 깊이였다.
어디가 뛰어나고 어디가 뒤처진다는 둥 이분법으로 구분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각 세계에 돌아다니는 무공을 비교해 보면 그 깊이는 중원 쪽이 압도적으로 뛰어났다.
물론 제국이나 왕국, 혹은 역사가 오래된 비전 무술 같은 경우에는 견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아르테니아는 몇백 년, 혹은 일정 주기로 대륙이 뒤흔들릴 정도의 큰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그 탓에 수많은 왕국과 가문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으니 역사가 지속되기 힘든 것이었다.
'반면 중원은 다르다.'
설령 환란이 있다고 할지라도 무공은 계속해서 존속되었다.
몇백 년 정도는 가볍게 넘어서는 무공이 도처에 널린 것이었다.
쉬악.
준비를 마친 카를은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기억에 새겨진 보법을 밟으며 검 끝으로 허공을 쓸어 나갔다.
어느 때는 산들바람이.
어느 때는 질풍이 된 채로.
각기 다른 흐름을 품은 궤적이 허공에 어지러이 섞여 하나의 바람을 그려 냈다.
"...."
기묘해 보이는 카를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레이시스 역시 점차 그 광경에 빠져들었다.
휘둘러지는, 쏟아지는 궤적을 전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눈으로 보여도 머리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나를 기억하려는 중에도 새로운 하나가 들어왔으니, 자신의 머리로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수많은 감상과 생각이 가슴속에 떠올랐고 사라졌다.
그 가운데 오롯이 남은 건 단 하나.
'아름답다.'
아름다웠다.
카를이 휘두르는 검은 자신의 상식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었다.
검은 단순히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한 수단.
하지만 저 끝에서 그려지는 유려한 궤적은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 내는 붓질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
손발 끝이 움찔움찔했다.
어설프게라도 따라 하려 팔을 들었지만,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만큼 수준이 높은 검술이라는 소리일 터.
아라크네를 배울 때도 비슷했다.
전체적인 형태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디테일을 파고들면 끝이 없었다.
검을 쥔 손가락의 자세, 팔꿈치의 각도, 내디딘 발의 위치, 허리의 배분....
사흘간은 세세히 교정받은 뒤에서야 겨우 기본적인 형태를 펼칠 수 있는 출발선에 이르렀다.
'진짜였어.'
검 하나하나가 아라크네에 못지않은 검이다.
아무리 카를의 말이라고 해도 반신반의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카를이 펼치는 검은 아라크네보다 모두 월등히 뛰어난 것이라고.
'배우고 싶다.'
분명 어려운 길이 될 것이다.
아라크네를 익혔을 때보다 수 배, 수십 배는 더.
하지만 레이시스의 마음속에는 저 검을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물밀듯 샘솟았다.
쉬악.
마지막 궤적을 끝으로 한차례 검무를 끝낸 카를은 가볍게 검을 돌리며 아래로 내렸다.
"후."
짤막한 숨이 토해져 나왔다.
레이시스가 볼 수 있게끔 내력을 억제한 채로 한바탕 검법을 펼치는 건 제법 심력을 쏟는 일이었다.
그래도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한 듯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새파란 광망이 서려 있었다.
"어떻습니까?"
"...검술의 이름은 뭔가요?"
"이름은...."
카를은 멈칫했다.
그렇게 잠시간 입술을 꿈틀거리긴 했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창궁무애검법입니다."
아르테니아 식으로 바꿀 만한 적당한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리고 이름에는 그 무공의 본질이 서려 있었다.
제대로 익히려면 창궁무애검법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시스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창.... 이름이 어렵네요. 고대 문자인가요?"
"비슷합니다. 족히 천 년도 더 넘은 고류 무술이니, 아마 공식적으론 기록이 남아 있지도 않을 겁니다."
"카를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그건...."
카를은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영업 비밀입니다."
어중간하게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보다 해 줄 수 없다고 원천 봉쇄하는 쪽이 더 나을 터.
레이시스도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 주었다.
"그래서. 보시기에 어떠셨습니까?"
"뭔가, 막, 아름다웠어요. 왕궁 비전 검술이라고 해도 그렇게 유려한 궤적은 그려 내지 못할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는."
레이시스는 짤막한 한숨을 토해 냈다.
"제가 알던 상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에요."
그럴 수밖에.
아예 다른 세상에 있던 무공이니 말이다.
레이시스가 그런 감상을 느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질이 뛰어나기에 보고 느끼는 것이 더 많은 것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였나요?"
레이시스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뇌리를 더듬으며 검을 휘둘렀다.
물론 어설픈 궤적만을 지닌, 창궁무애검법의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는 검이었다.
"그럼 일단 이걸 상대로 한번 대련해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레이시스는 즉답했다.
검술은 결국 상대를 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저 아름답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니 그것을 직접 체감해 보고 싶었다.
툭툭.
레이시스는 가볍게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카를이 오기 전에 이미 완벽하게 몸을 풀어 두었다.
조금 전의 창궁무애검법을 본 것으로 달아오르기까지 했으니.
대련하기에는 최적의 상태였다.
쉬악!
그렇기에 그녀는 기습적으로 땅을 박차며 카를에게 쇄도했다.
둘의 대련은 보통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편이 많았으니까.
'분명 카를이라면.'
카를과 수많은 대련을 지나온 레이시스는 대충 그의 대응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정석적인 패턴이라면 여기서 막고 곧바로 카운터를 보여 올 터.
특히 창...이라는 새로운 검술을 선보였으니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그쪽을 대비했으나.
"아앗?!"
카를의 검이 부드럽게 휘둘러지며, 알 수 없는 힘으로 이쪽의 검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의도했던 궤적이 무너지고 무게 중심이 처참하게 흔들리는바.
당연히 그가 정면에서 대응하리라 생각했던 레이시스는 속수무책으로 넘어져야만 했다.
툭.
그래도 그간 경험을 많이 쌓은 덕인지, 앞으로 고꾸라지는 상황에서도 바닥을 툭 차는 것으로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공에 몸을 띄운 상태에서 공중제비를 한 것으로 힘을 상쇄하곤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착지했다.
"뭐예요, 그거?"
휘릭.
레이시스의 물음에 대답하듯 기묘한 궤적을 그린 카를의 검이 다시금 이쪽을 겨누었다.
"창궁무애라는 이름의 뜻은 여러 해석으로 갈립니다. 저 역시 하나의 해석을 내놓았지요."
무한(無限).
그렇기에 하늘을 숭상했으니.
다만, 그쪽에 매몰되면 창궁무애의 묘리를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주체는 바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하늘을 테두리 없는 도화지 삼아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것이고.
카를이, 무악이 해석한 창궁무애의 묘리는 바로 그러했다.
사아아아─.
명천신공의 기운이 일어나 창궁무애검법의 구결을 따라 움직이며 시퍼런 기운을 내뿜은바.
카를의 주변에 휘몰아치는 범상치 않은 기세에 레이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바람을 끊어 낼 수 있다면 레이시스 양의 승리입니다. 그러면 창궁무애검법을 가르쳐 드리도록 하죠."
카를은 조건을 바꿨다.
가벼운 도발에 눈빛을 바꿔 이쪽을 바라보는 레이시스의 기세를 보니 충분히 먹혀든 듯싶었다.
츠즈즈즈.
아라크네의 거미줄이 레이시스를 중심으로 사방을 옭아맨바.
그녀는 검을 위로 세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바꾸기 없기예요."
115화 전조 (6)
제도 폴포아르델의 밤은 낮보다 더 치열했다.
특히 밤낮의 구분이 없는 지하 도시인 플릭을 제외하고도 음지나 암흑가 쪽은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서야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사람인 만큼 밤이 깊으면 휴식에 들어가야 했다.
그래야 내일을 기약하며 다음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
스윽.
적막이 내려앉은 깊은 밤.
모두가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휴식에 들어갔을 때 야음을 틈 타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들이 있었다.
"...."
흑의를 뒤집어쓴 이들은 한 건물 앞에 멈추어 선 채 서로 시선을 나누었다.
목적지는 라한의 후계자인 디르센의 거점.
디르센은 현재 다른 곳의 일로 출타 중이라 공백이었지만, 주요 전력이나 간부진은 머물고 있었다.
툭, 데구르르.
살짝 열린 문 안쪽으로 동그란 구체가 굴러 들어갔다.
1층 카운터에 앉아 있던 조직원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동료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나?"
"...소리? 무슨 소리?"
"뭔가 굴러가는 소리."
"또 졸다가 깼냐? 헛소리하지 말고 자리에 앉아."
"으음."
진짜로 졸은 건가?
조직원이 주춤하며 자리에 앉으려 할 찰나.
콰아아앙!
건물 안쪽에 거센 폭발이 일어나 주변을 뒤흔들었다.
"컥!"
"뭐야?!"
자욱한 먼지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고 귀가 먹먹해진 상황.
그들은 주춤하며 일어났지만, 그보다 먼저 안쪽으로 닥쳐온 괴한들이 들이닥치는 것이 더 빨랐다.
서걱!
핏줄기가 솟구쳤다.
반항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두 조직원의 목을 베어 넘긴 괴한들은 칼날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부터 정리에 들어간다."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사살하도록."
라한의 이인자, 투르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내부에 심어둔 수하를 통해 디르센의 동선을 파악했고 저들이 대응하지 못하는 타이밍을 노려 병력을 움직였다.
디르센 쪽은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용병들이 직접 움직였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디르센의 기반이 되는 거점들.
그 본인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패해도 딱히 문제는 없었다.
녀석이 습격을 당해 시선이 끌리는 동안, 자신들은 그 팔다리를 전부 잘라 놓을 생각이니까.
"습격이다!"
"막아!"
2층으로 올라가자 디르센의 수하들이 무장을 들고 뛰쳐나왔다.
1층을 성대하게 날려 버렸으니 모를 수가 없을 터.
하지만 문제는 없었다.
작정하고 준비한 이쪽의 전력을 감당해 내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비켜라."
괴한들 선두에 선 남자는 투르가의 심복 중 하나.
음지에서 본브레이커로 불리는 그는 어지간한 성인 남성의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쇠몽둥이를 휘둘러 상대를 뼈째로 박살 내 버렸다.
콰직.
검이나 방패를 들고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일단 부딪치는 순간 압도적인 힘과 무게에 짓뭉개지며 모두 부러져 버렸으니까.
지금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떨어져 내린 쇠몽둥이를 막은 이의 머리가 으깨지며 박살 나 버렸다.
촤악.
몽둥이에 묻은 살점과 피를 털어 낸 본브레이커 불칸은 날 선 눈으로 난전 중인 주위를 둘러보았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
투르가 님이 라한을 위해 이때까지 얼마나 애를 쓰셨는데 모지리 같은 아들 녀석에게 붙어 고혈을 빨아먹고 있는가.
여기 있는 이들 모두 라한에 하등 필요 없는 벌레들.
즉, 죽어 마땅했다.
쿵, 콰직!
본브레이커의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디르센 쪽의 수하들도 나름 열심히 분전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밀려 버렸다.
"...."
그리고 그보다 몇 층 위.
겁에 질린 채 곰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문가에서는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부의 가구와 집기를 전부 끌어다 바리케이트를 설치한바.
하지만 그것으로도 안심하지 못했는지 초조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녹스는 언제 온다고 했었지?"
"...제때 맞추기는 그른 것 같군."
"빌어먹을. 하필 이쪽 간부들이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
주요 간부는 디르센과 함께 외부에 나가 있거나, 다른 거점에서 업무를 처리 중이었다.
전력적으로 공백이 생긴 상황이었지만, 다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이곳을 공격한다면 말 그대로 전면전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보스도 곧 돌아오실 거예요."
쌍둥이 호위 엘렌, 엘란은 겁에 질려 떠는 디르센의 딸을 다독이며 아래의 기척을 살폈다.
"...여차하면 이곳을 버리고 도망치는 것도 생각해 봐야겠어."
"일단은 기다려 보자고."
본래 이런 습격을 받게 되면 곧바로 도망치는 것이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쌍둥이 형제가 최상층에서 농성하기로 결정한 건 녹스의 지원과 이 집무실 자체의 방어 때문이었다.
'벽, 천장, 바닥 전부 두꺼운 쇠로 둘러져 있다. 녹스나 다른 곳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어.'
백날 두드려 봤자 일반 창칼로는 구멍조차 내는 것이 불가능할 테지.
그러니 둘은 그것을 믿고 도주를 포기한 체 이곳에서 버티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 기반에는 녹스에 관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
엘렌은 벽에 귀를 가까이 했다.
아래 쪽에서 들리던 소음이 점차 멎어 가기 시작한 것.
목숨을 걸고 계단을 사수하던 조직원들이 이제는 버티지 못한 듯싶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온다."
아래층으로부터 여러 기척이 이곳 앞까지 닥쳐왔고 곧 무차별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캉! 퍽!
다시금 쉴 새 없는 소음이 몰아치며 방 안에 진동했다.
그래도 예상했던 것처럼 적들은 쉽사리 이곳의 방어를 넘어오지 못했다.
"엘렌...."
"아가씨,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보스께서도 곧 오실 겁니다."
엘렌은 울먹이는 아가씨를 품에 안아 다독여 주었다.
암흑가의 아가씨라고 해도 고작해야 다섯 살 먹은 아이였다.
밖에서 서슬 퍼른 이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이곳을 노리고 있는데 어찌 무섭지 않을까.
자신들도 손이 떨리는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버텨 내야 했다.
"...?"
하지만 도중 밖에서 들려오던 소음이 멎었다.
공격을 포기한 건가 싶어 다시 귀를 기울였을 때.
쩌엉!!!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울림이 문으로부터 들이닥쳤다.
"큭?!"
귀를 가까이 가져갔던 엘란이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아가씨를 품에 안고 있던 엘렌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에, 엘란. 문이...."
"무슨."
두꺼운 철문이 무언가에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여 있었다.
"설마, 본브레이커?"
"...그 괴물이 여기에 있다고?"
엘렌은 힘없는 목소리로 형제의 말을 받았다.
검으로 철판을 쪼개기는 어려웠지만, 본브레이커의 힘이라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하필 최악의 상성을 지닌 괴물이 이곳에 닥쳐온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의도했을지도 모르지.'
엘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점 집무실 최상층의 방어 설비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설마 투르가 쪽에 이런 정보까지 넘어간 것인가.
쩌엉!!!
재차 휘둘러진 쇠몽둥이가 철문을 가격해 찌그러졌다.
아직은 버틸만 했지만, 저것이 언제 부서질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 되겠다."
아가씨를 안고 있던 엘렌은 엘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 통로로 나가자."
"적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에 가만히 있다간 전부 저 괴물한테 뭉개져서 죽을 거야."
"...."
진퇴양난이었다.
어딜 가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섣불리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콰아아앙!!!
하지만 세 번째 타격이 들이닥치는 순간 이전까지와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문과 벽에 균열이 생겼다.
이제 정말로 몇 번 버티지 못할 듯싶었기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달칵.
엘란이 집무실 집기를 만지작거리자 벽면 한쪽에 구멍이 생겨났다.
아래 쪽과 연결된 비밀 통로로 디르센을 제외하고 5명밖에 알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먼저 가."
"...엘란."
"걱정하지 말고."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 기척을 내면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미끼를 자처하는 형의 모습에 엘렌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가겠습니다. 꽉 붙잡아 주세요."
"...."
엘렌은 아가씨를 더욱 강하게 품에 안고는 구멍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내부는 기다란 미끄럼틀로 되어 있었다.
밖으로 기척이 새어 나가지 않아야 했기에 땅밑 깊은 곳까지 뚫어놓은 통로였다.
'설마 이것도 알고 있진 않겠지?'
아가씨를 품에 안은 채 몸을 일으킨 엘렌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하지만 몇 걸음 움직이지 못한 채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오네?"
왼쪽 눈 아래 눈물점이 찍힌 수려한 남성이 몇몇 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
"디르센의 뒷구멍이라고 하길래 기다렸더니 월척이 걸려들었군. 애지중지하던 딸내미가 사로잡히게 된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가스티아...."
투르가의 간부 중 하나인 가스티아였다.
단검술의 장인으로 대상의 살을 얇게 저미는 걸 좋아하는 변태 중의 변태라고 소문나 있었다.
"...."
엘렌은 무거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장 가스티아 한 명도 힘든데 그 수하들까지 감당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주에 집중한....'
팟.
허공에 얇은 궤적이 그려졌다.
동시에 엘렌은 피를 흩뿌리며 뒷걸음질쳤다.
어느새 닥쳐온 가스티아가 그의 손목을 베어 내며 핏줄을 찢어발긴 것이었다.
"얕군. 그래도 치명상이야. 그대로라면 5분도 채 버티기 힘들 텐데. 어쩔 텐가?"
"...가스티아. 아가씨는 보스의 핏줄이다."
"디르센의 딸이기도 하지. 투르가는 후환을 남겨두는 스타일은 아니야."
"그래서 보스의 핏줄을 죽이겠다고?"
"누가 죽인다나."
가스티아는 히죽 웃으며 손을 뻗어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만지려 했다.
쉬악!
빛살처럼 검을 뽑아 든 엘렌이 녀석의 팔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그 탓에 자상에서 흘러 나온 피가 흩날렸지만, 가스티아는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그것을 피해낸바.
"잠시 우리와 함께 가는 것...."
"누구 마음대로."
푹.
돌연 가스티아의 가슴팍을 꿰뚫고 한 자루의 창이 치솟아 올랐다.
이때까지 여유로움을 표방하던 가스티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왈칵 피를 토해낸 채로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머리나 몸이 박살난 채로 쓰러져 있던 수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툭툭.
가볍게 손을 털며 어둠 사이에서 그 앞으로 걸어온 세컨드가 가볍게 고개를 꺾었다.
"그쪽, 엘렌이지? 미안해, 좀 늦었어. 다른 곳들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아서 말이야."
"녹스! 녹스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촤아아악!
세컨드가 손을 뻗자 가스티아의 가슴팍을 꿰뚫고 있던 창이 저절로 움직이며 허공을 날아 다시 그녀의 손으로 되돌아 갔다.
"이제는 걱정하지 마."
"...큭."
재차 피를 토해 낸 가스티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녹스? 녹스라고?"
"그래."
"녹스의 전력은 이미, 디르센 쪽에 붙어 있을, 텐데, 어떻게...."
숨을 헐떡이며 가슴을 부여잡은 가스티아의 모습에 세컨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전력이 그 둘뿐이라고 누가 그래?"
116화 전조 (7)
콰직.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가스티아의 머리가 뭉개졌다.
창대를 휘둘러 피를 털어낸 세컨드는 코웃음을 치며 쓰러진 시신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쪽은 괜찮아?"
"...예, 덕분에."
엘렌은 옷을 기다랗게 찢어 손목을 꽉 동여맸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있던 포션을 뿌리고 지혈했으니 응급처치 정도는 될 터.
"아가씨는 괜찮으십니까?"
"응."
"다행입니다."
엘렌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녹스의 지원이 오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위험했을 터.
지금만큼 녹스와 손을 잡기로 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저희 본부 쪽도 습격받고 있습니다. 보스와 주요 간부진들이 자리를 비운 터라...."
"그쪽도 지원이 갔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그러면 괜찮지만, 괴물이 한 마리 끼어 있어서 말입니다."
"이 녀석보다 강해?"
"예."
엘렌은 바닥에 쓰러진 가스티아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브레이커라는 괴물입니다. 투르가 쪽의 행동대장이나 마찬가지인 녀석입니다."
"간부급이라는 거네. 가자."
세컨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이동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비상 통로를 벗어나 본부 쪽을 살피니 아직 교전 중인 듯 여러 기척이 뒤섞여 있었다.
'저항이 만만치 않나 보네.'
세컨드는 혀를 한 번 차고는 재빠르게 그 안으로 난입했다.
디르센 쪽으로부터 비상 통로의 존재는 이미 전해 들었다.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라면 이곳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어 그녀 혼자 이곳으로 왔던 것인데.
투르가 쪽도 이미 알고 있던 듯 이미 그쪽에 사람을 배치해 놓았다.
'배신자가 제법 많다는 소리겠지.'
디르센과 꽤 가까운 간부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소리인데.
이건 꽤 귀찮게 된 듯싶었다.
타다다닥!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간 세컨드는 뒤섞여 있는 시신들을 발견했다.
당연하게도 녹스는 없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정도로 허투루 가르치진 않았으니 말이다.
"위쪽인가."
최상층, 디르센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으로 올라가니 아니나 다를까 아직 십수 명의 인원이 뒤섞여서 싸우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크윽."
세컨드는 바닥을 나뒹구는 조직원들을 살폈다.
꽤 심하게 얻어맞은 듯했지만, 치명상은 피한 듯 사망자는 없었다.
다른 수하들에게 눈짓해서 그들을 수습하고는 디르센의 집무실 안쪽에서 날뛰고 있는 두 인영에 집중했다.
"흐음."
화이트 라벨의 조장과 덩치 큰 덩어리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쿵! 쩌엉!
내부 집기나 가구 같은 건 진즉 휘말려 박살이 난 상황.
서로 한 치의 밀림 없이 검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충돌했다.
'제법인데.'
세컨드는 개입하지 않았다.
말단 조직원들의 경험도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특히 화이트 라벨은 녹스의 밑을 받쳐 주는 중요한 위치였다.
언제까지고 자신들이 전부 챙겨 줄 순 없기에 저들도 사선을 넘나들며 경험과 실력을 쌓아야 했다.
"엘란!"
뒤늦게 따라온 엘렌이 바닥에 누워 있는 자신의 형제를 챙기며 다급히 불렀다.
어깨 쪽이 박살 나 있긴 했어도 숨은 붙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가운데 집무실 문가에 기대선 세컨드는 엘렌을 향해 물었다.
"저 녀석 이름이 뭐라고 했었지?"
"본브레이커, 불칸입니다. 라한 쪽의 주요 간부 중 한 명이죠."
"본브레이커."
세컨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의외의 원석을 발견했다.
당연히 본브레이커 불칸이 아니라 그와 맞서는 화이트라벨의 조장 쪽이었다.
조금만 더 키워서 성장시키면 무난하게 블랙 라벨 쪽에도 올라올 수 있을 정도의 재능 같은데.
애초에 조장의 위치라면 제법 주목받는 위치였다는 뜻이다.
'재밌네.'
둘의 광경을 구경하며 실실 웃고 있을 찰나, 세컨드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미약한 손길을 느꼈다.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예쁘장한 아이가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도, 도와주지 않아도 되나요?"
"음?"
디르센의 딸이었다.
이름은, 뭐였지?
디르센과의 순수 협력 관계였다면 최중요 포지션의 요인이었다.
하지만 디르센은 이미 천마신공의 탈혼백의 수법과 더불어 고독으로 인해 녹스의 하수인이 된 상태.
그런 가운데 딸의 존재는 큰 의의가 없었다.
하지만 세컨드는 아이들을 좋아했기에 아가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눈높이를 맞췄다.
"너희 아버지가 언제까지고 네 밥을 먹여 주지 않잖아. 스스로 손을 움직여서 수저와 포크를 쥘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 주었지?"
"...네."
"그래. 그것과 마찬가지란다. 대신 우리는 피를 먹고 자라나거든."
수저와 포크 대신 칼과 창을 쥐여 주었다.
밥을 먹는 대신 상대를 더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
피를 먹고 자라난다는 말에 아가씨는 겁을 먹었는지 흠칫했다.
세컨드는 웃음을 터트리며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엘렌에게 말했다.
"암흑가답지 않게 딸은 제법 순수하네."
"...애지중지 키우셨으니 말입니다."
"악마도 제 딸은 귀하게 여긴다는 건가."
허리를 펴고 일어난 세컨드는 집무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쾅! 쾅!
싸움은 절정에 다다라 있었다.
본브레이커 불칸과 화이트 라벨의 조장 둘 모두 여기저기 부상을 입은 가운데.
세컨드는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견적을 가늠했다.
'블랙 라벨 정도면 어렵지 않게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겠군. 화이트 라벨은 아직 무리인가.'
불칸의 신경 줄은 제법 굵은 듯싶었다.
이쪽에서 대놓고 기세로 긁어도 일절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눈앞의 적만을 노렸으니 말이다.
"우직한 성격인 것 같네. 그러니까 캐물어도 투르가의 정보는 말해 주지 않겠지?"
그런 우직함.
세컨드는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니 예우를 담아 자신이 직접 끝내 주고자 앞으로 나섰다.
휙.
세컨드의 손짓에 화이트 라벨의 조장은 그 즉시 자리에서 물러났다.
녹스의 위계 질서는 절대적인 법칙.
하물며 화이트 라벨과 블랙 라벨 사이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으니.
꽈아악.
세컨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본브레이커.
그 이름에 걸맞은 최후를 선사해 주기 위하여.
* * *
레이시스와 유리아는 오랜만에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동아리 활동이나 스터디, 대련 등으로 인해 서로 시간 대가 잘 맞지 않았던바.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중간중간 만나거나 티타임을 가진 적은 많았지만, 여유롭게 둘만의 시간을 가진 건 오랜만이었다.
"흠, 흠흠."
레이시스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흘리며 고기를 썰었다.
옆에서 파스타 면을 돌돌 말고 있던 유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무슨 좋은 일 있어?"
"네? 뭐가요?"
"아니, 고기 썰면서 콧노래까지 부르길래."
"아."
레이시스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것으로 짐짓 너스레를 떨며 자신의 나이프를 들어올렸다.
"티 났나요?"
"...왜 이래? 진짜."
"들어 봐요. 그러니까 제가...."
유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레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요새 좀 이상해졌어.'
원래도 이상하긴 했는데 근래 들어 더 이상해진 것 같았다.
마음이 어디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뭘 생각하는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 손을 움찔거리기도 하고.
한 번 도서관에서 그랬을 때는 옆에서 공부하고 있던 자신도 깜짝 놀랐다.
뭔가 심리적인 불안 요소 때문에 그러는가 싶었는데 입가에 미소가 깃들어 있는 걸 보면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고.
그렇기에 그 원흉을 알아내고자 레이시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카를하고 검술 대련을 계속해 오는 것 아시죠. 단둘이."
"응. 나도 마법 스터디 하잖아."
그게 뭐 특별하나며 되묻자 레이시스는 살짝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유리아도 카를이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 알죠? 저번에도 말했었고."
"그랬지. 검술 쪽은 더 대단하다며. 레이시스, 네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네. 진심을 드러내면 네리안 군도 상대가 되지 않을 거예요. 생도 수준에서 적수는 없겠죠."
"...흠."
유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를의 검술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신 마력 제어 능력으로 말미암아 본신에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뿐.
그 사실을 지적하자 카를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유리아 뿐이네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 줘 봤자 믿지 않을 테니까."
"하긴. 다들 실습에서는 카를을 자신의 아래로 보니까."
생도 대부분 카를의 높은 성적이 이론 점수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뚝 떼어 놓고 냉정하게 본다면 실기 쪽에서도 상당한 상승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카를이 갑자기 저한테 검을 배워 보겠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검을?"
유리아는 의아했다.
왜 갑자기 카를이 그녀에게 검을 배워 보라고 했을까.
"유리아도 알다시피 저는 알포람 왕국의 비전 검술을 익히지 못했어요."
"그 빌어먹을 왕족법 때문에."
"네. 지금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덕분에 지금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잖아요?"
알포람 왕국의 왕실은 다른 왕국보다 조금 더 까탈스러웠다.
제국과 깊이 연관되어 있던 탓에 전통과 규율을 중시했고 그 책무는 왕녀인 레이시스 역시 짊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왕족에서 오는 이득과 함께 모든 책임을 손에서 놓았다.
자신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다.
'인형은 질색이니까.'
물론 아직 왕족의 권리가 레이시스의 발목을 얽매고 있었다.
왕실에서 결정한다면 왕녀인 그녀는 왕국의 이득을 위해 그것이 무엇이든 따라야 했다.
가령 혼약의 상대 역시 말이다.
"하여튼 그래서 카를이 새로운 검술을 알려 줬어요. 들어 보니까 라이프치히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전 검술 같던데."
"아하, 그렇구나."
유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더니 결국엔 자랑이었나.
가끔 정신줄을 놓고 손가락이나 손을 허공에 휙휙 휘두르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새로운 검술을 배웠으니 좋겠지.'
그래도 레이시스는 왕녀 출신인 만큼 무술이나 공부에 관련해서 제법 눈이 높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건 카를이 선보인 검술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소리일 텐데.
'신기하네.'
유리아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카를 쪽으로 흥미를 옮겼다.
대체 카를은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카를에 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무슨 검술인데?"
"이름이 좀 어려워요. 저도 아직 제대로 발음하기가 어려운데. 창, 창...."
"창?"
"창무? 창...."
레이시스는 말을 더듬거리다가 생각이 났는지 겨우 그와 비슷한 발음을 내뱉었다.
"창궁애? 창궁무?"
"...."
별생각 없이 이야기를 듣던 유리아는 포크를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여전히 멈칫거리며 발음을 고민하던 레이시스에게 말했다.
"창궁무애검법?"
"아! 네! 그거예요! ...어?"
레이시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유리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유리아도 알고 있는 검술인가요?"
117화 의심
유리아.
유리아 유클리드.
유클리드라는 성은 스승인 마탑주의 양녀로 들어가며 받았다.
유리아는 그녀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이름이었다.
고아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부류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이름, 머리카락의 색과 스타일, 눈동자의 무늬, 이목구비, 외모, 신장, 몸매, 그리고 지닌 잠재력과 재능, 심지어 태어난 곳과 미래까지.
이름과 마찬가지로 유리아가 모두 스스로 선택한 것들이었다.
끼이이익.
여자 기숙사의 방안.
유리아는 마법으로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상태창."
짤막한 시동어였다.
마법도 룬어도 아닌 무언가.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주위로 푸르스름한 빛깔의 창들이 치솟아 올랐다.
[상태창]
이름: 유리아 유클리드
나이: 20살
칭호: 잿빛 수선화
재능: 마력감응(上), 마나친화력(上), 마안(上)....
그 안에는 '유리아 유클리드'라는 인물에 관한 내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
유리아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이며 칭호 쪽으로 향했다.
「잿빛 수선화」
외모의 매력 스테이터스가 일정 이상으로 올라가면 따라오는 칭호였다.
당장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잿빛 수선화 옆에 다른 칭호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바이에른의 기린아」
전체 수석의 칭호인 「신성」은 네리안 호펜하임의 것이었다.
이론은 몰라도 실기 쪽으로 그를 따라잡기는 어려웠기에 유리아는 이론 수석으로 만족했다.
애초에 기린아의 칭호만으로도 원하는 업적 보상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부에서는 성공적으로 수석의 위치를 방어해 냈다.
이제 대학부에서만 수석의 자리를 유지하면 보상을 얻을 수 있었지만....
'카를 때문에 실패했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지난 몇 년간의 노고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기에 카를에게 더 심술을 부렸던 것도 있었던 듯했다.
지금에 와서는 사과도 했고 서로 사이도 좋아졌지만.
그때는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정도로 분노에 몸서리쳤다.
툭.
유리아는 손을 들어 가볍게 허공을 터치했다.
그간 해놓았던 메모의 기록들이 떠오르며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며 카를에 관한 내용을 모조리 한곳에 모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하나씩 복기해 나갔고 짤막한 숨을 토해 내며 결론을 내렸다.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어."
유리아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원작'에서 카를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나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있을 가능성도 생각했어야 했는데."
유리아 유클리드.
아니, 한세희.
그녀는 신작 게임 '아르테니아 사가'에 빙의한 플레이어였다.
서브 컬쳐 장르를 좋아하던 한세희는 소설과 만화, 게임을 가리지 않고 취미를 즐겼다.
기대의 신작 게임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곧바로 아르테니아 사가를 플레이했고 한 달에 걸쳐 1회차 플레이를 끝냈다.
"재밌네, 이거."
RPG라고 해도 스토리의 볼륨이 장난 아니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선택지도 늘어났기에 2회차는 조금 더 각을 잡고 준비했다.
1회차에서는 용병 마법사로 굴렀으니 2회차에서는 로열로드를 걸으며 정점을 찍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마탑주의 제자 루트였다.
가장 포텐셜이 높은 잿빛 마탑을 선택하고 캐릭터를 만들었다.
새로운 루트의 공략법과 육성 루트를 철저하게 준비했고....
"이 몸에 빙의했지."
유리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소설이나 만화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내게 일어났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게임을 하던 것뿐인데 이 몸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다행인 점이라면 이미 1회차를 플레이했고, 2회차 플레이를 위해 철저한 준비를 마쳐 두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과 게임은 달랐다.
마탑에 들어간 뒤에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고 가까스로 원래 계획했던 궤도에 올라탈 수 있었다.
"...원작의 스토리와 달라진 건 이때부터네."
탁.
유리아의 검지가 기록의 한쪽을 콕 집었다.
「입학시험」
원작대로라면 네리안은 입학시험 도중 테러에 휘말려 사망했을 것이다.
유리아는 가능한 네리안을 살리고 싶었다.
원작에서도 싸가지가 없긴 했어도 제법 유능했고 나름대로 애착심을 가진 캐릭터이긴 했으니까.
그리고 그가 지닌 빙결의 권능은 아르테니아 사가의 스토리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원래 스토리와 흐름이 뒤틀렸다.
'이름도 확인이 불가능한 녀석이었어.'
신원을 감추는 아티팩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는 감히 대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강자라는 것일 터.
'2회차는 스토리가 다른 건가?'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1회차 때는 용병 마법사로 활동했기에 아카데미 쪽은 겪어보지 못했다.
아카데미 스토리는 2회차를 준비하며 다른 사람들이 플레이한 걸 공부한 것이고.
하지만 어떤 루트에도 그 흑의인이 나타나는 스토리는 없었다.
...아니면, 현실로 변해 버려서 바뀐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네리안은 살렸으니 되었다.
그 뒤로는 평범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보냈다.
솔직히 조금 재미있었다.
유리아, 한세희는 인간관계가 서툴렀다.
직설적이고 에둘러 말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현실에서도 친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요 캐릭터였기에 일찍이 안면을 튼 레이시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은 이 세상의 주민이 아닌 이방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를 덕분에 다른 생도들과 어울려 지내며 이제는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카를로스 라이프치히."
원작에서는 분명 존재하지 않던 이름이었다.
카를로스, 카를로스....
유리아는 입안에서 그 이름을 곱씹었다.
이미 졸업한 카리우스 라이프치히나 다리우스 라이프치히 쪽은 잘 알고 있었다.
바이에른에서도 워낙 유명한 이름이기도 했고, 중반 넘어서도 제법 활약을 해 주었으니까.
그 가운데 카를의 이름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 돌림병으로 인해 죽을 뻔했다고 했었지."
하지만 카를은 죽지 않고 오롯이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걸 뛰어넘어 바이에른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당장 자신의 업적을 깨뜨리고 아카데미 스토리의 흐름을 일부 비틀어 버렸을 정도니까.
'그래도 그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업적작은 실패했어도 카를에게 여러 도움을 받았다.
아카데미 생활을 제외하더라도 마법 스터디를 통해 자신의 비원인 「사계」를 구축하는 데도 도움을 받았고.
하지만.
"...창궁무애검법."
유리아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그 검법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르테니아 사가는 중세 판타지의 형태를 표방하고 있지만, 안쪽에는 여러 장르가 섞여 있었다.
특히 중후반부가 넘어가면 영웅들의 후예가 등장하며 그 비전 역시 하나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중원의 무공 역시 그중 하나였다.
영웅 중 중원에서 온 고수도 섞여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타이밍에 무공이 등장하는 건 부자연스럽다.
그리고 그걸 타인에게 가르쳐 준다고?
유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시스가 주요 캐릭터인 걸 알고 호감작을 해 놓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어.'
레이시스만이 아니었다.
네리안, 루이스, 막시밀리안, 게일, 포저스, 에이미....
같은 클래스의 생도뿐만 아니라 바이에른의 굵직굵직한 이들까지.
전부 한번씩 카를을 거쳐 지나가며 관계가 구축되었다.
"창궁무애검법은 숨겨진 히든 피스가 분명해."
카를은 그것을 미리 알고 구해 놓은 뒤 레이시스에게 호감작을 해 놓은 것일 터.
아직 아르테니아 사가의 모든 루트가 발견된 건 아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느 루트를 밟으며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겠지.
"...역시."
유리아는 다시 한번 결론을 내렸다.
카를로스 라이프치히는 자신과 같은 아르테니아 사가의 플레이어였다.
꽈아악.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우스운 건 서로 이미 긴밀한 관계를 구축 중이라는 것이었다.
"설마."
내가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접근한 건가?
잿빛 마탑의 유리아라는 이름 역시 원작 루트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물어보고 싶다.'
유리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기숙사를 뛰쳐나가 카를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웠다.
좋게 풀린다면 이만한 동료가 없을 것이다.
아마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고 손을 잡게 되는 관계가 될 테니 말이다.
서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동반자가 되겠지.
레이시스? 에이미?
아무리 까불어 봤자 자신과 카를 사이에는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그 모든 것보다 더 깊은 비밀이 서로 사이에 깃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반대라면?
'만약 카를이 날....'
죽이려 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를이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고 레이시스에게 전해 듣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머저리가 아니라면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카를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눈치채야 했다.
...아직, 클래스의 다른 생도들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다.
'확률은 반반이야.'
유리아는 입술을 씹었다.
자신 역시 숨기고 있는 힘 정도는 있었다.
문제는 카를 역시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창궁무애검법 정도 되는 무공을 레이시스에게 양보할 정도라면 더 강한 무공을 익혔다는 소리겠지.'
매화검법? 아니면 천마신공 같은 부류의 무공인가?
어찌 되었든 쉬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마법사.
만일 그런 상황이 되면 완벽하게 판을 짜두고 설계해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었다.
'기우일 수도 있지만....'
하필 아르테니아에 들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이 서로 함께 이세계에 들어온 빙의자를 사냥하는 이야기였다.
당장 카를과 자신이 그렇게 되지 말라는 장담은 없지 않은가.
"아아아아아아아악!"
점차 복잡해져 가는 머릿속에 유리아는 의자 위에서 몸부림을 쳤다.
무서웠다.
지금의 관계가 깨지는 것도.
카를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도.
툭.
그녀는 의자 위에서 몸을 축 늘어뜨리며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일단 사계나 완성하자."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바이에른의 기린아 칭호를 놓친 지금 다른 루트로 밟아 업적작을 새로이 얻어야 했다.
일단 어떤 루트든 최우선 목표는 사계의 완성.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루트의 방향성이 무의미해졌으니 말이다.
"...."
유리아의 시선이 흘깃 옆쪽으로 향했다.
빙의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따라다닐 아르테니아의 꼬리표.
[재앙까지... 1.7%]
사계를 완성해야 추후 이 세계를 뒤덮을 재앙을 막아 낼 수 있으니 말이다.
"...카를도 알고 있겠지?"
그도 플레이어라면 '재앙'에 관해 알고 있을 터.
어쩌면 자신보다 더 빠르게 대비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에휴, 모르겠다."
유리아는 힘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잠이 최고였으니까.
118화 집결 (1)
녹스의 간부들이 집결했다.
퀸, 세컨드, 갤런 포, 식스, 세븐, 에잇, 그리고 나인까지.
당장 맡은 임무가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더불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던 녹스의 전력도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는 전부 동원되었다.
그 숫자는 블랙 라벨 26명과 화이트 라벨 148명.
라이프치히에서 수도로 올라온 녹스의 거의 모든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수도의 한 상업지구를 점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숫자였다.
하지만 가장 낮은 계급의 화이트 라벨 개개인의 능력이 어지간한 조직의 정예들을 상대로도 우세한바.
소수 정예와 녹스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서부 3상업 지구에 영향력을 늘려 가고 있는 것이었다.
카를이 라한과 같은 조직을 아래로 들여 연합을 구축하려 한 것도 이들의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서였다.
녹스 특성상 한 명의 조직원을 길러 내는 데 제법 시간을 잡아먹었다.
효율을 높이고 구조를 단축한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빨리 충원이 가능했지만, 세력 확장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전력만은 어떤 조직과 전면전을 벌여도 절대로 꿀리지 않았다.
"출발한다. 다들 준비해."
녹스의 본부가 텅 비었다.
경계를 서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 밖으로 나와 어둠 사이로 스며들었으니.
블랙 라벨의 간부들만이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다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해. 오늘은 제법 중요한 자리니까."
"걱정하지 마. 간부들이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니까. 다들 어련히 알아서 잘할 거야."
"특히 세컨드 너한테 하는 소리야."
"...나도 포함된 거였어?"
"괜히 눈 돌아가서 상대한테 달려들지 말고."
"입 꾹 닫고 있을게...."
세컨드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받아쳤다.
퀸은 피식 웃은 뒤 갤런 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갤런, 너는 마인들에게 집중해 줘.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곧바로 알려 주고."
"예이."
"나머지도 경계를 철저하게 해 줘.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퀸의 말에 다른 간부들 역시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동안 디르센과 투르가의 세력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최초 공격을 받은 디르센 쪽이 휘청이는가 싶었지만, 녹스의 도움으로 무사히 적습을 격퇴해 낸 그들은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받았던 피해 그 이상을 되돌려주었고 지금에 이르러선 한 치의 밀림 없는 대치 상태에 이르렀다.
'투르가 쪽도 속이 타겠지.'
퀸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투르가의 대대적인 공세는 자신들의 압도적인 승리를 믿었기에 내린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녹스의 개입으로 인해 그쪽에도 큰 피해가 생겼다.
당장 주요 전력 쪽에 공백이 생겼고 하부 조직도 팔다리 한 쪽씩 날아가 버렸다.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했는지 그들은 급히 회담을 신청해 왔다.
디르센 쪽도 수습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회담을 받아들였고 녹스와 함께 저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물론 함정일 가능성이 높아.'
퀸은 처음 그 제안을 들었을 때 콧방귀를 끼며 거절하려 했다.
디르센 쪽을 고기 방패로 세우고 녹스가 게릴라로 투르가의 전력을 깎아 나간다면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기에.
그렇기에 작전 역시 치밀하게 세워 두었지만, 마스터의 판단에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 회담장으로 향했다.
다그닥다그닥.
밤이 그리 늦지 않았음에도 뒷골목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서부 3상업 지구의 운명을 결정짓는 날이라는 것을 아는지 다들 숨을 죽이고 바짝 엎드린 듯했다.
"...왔군."
약속 장소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디르센이 그들을 맞아 주었다.
디르센 뒤쪽으로 있던 수하들이 모두 녹스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전까지는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습격은 녹스가 아니었더라면 버티기 어려운 공세였다.
그렇기에 녹스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에 그 태도에 한층 존중이 깃들었다.
"녹스 경은 어디에 있는가?"
"마스터께서는 따로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습니다. 회담 도중 오실 예정입니다."
"그런가. 그래도 문제는 없겠지. 녹수의 전력을 이렇게나 보내 주었으니."
디르센은 흐뭇한 표정으로 블랙 라벨의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음지에도 녹스의 정보가 어느 정도 퍼진 상태였다.
하얀 가면은 화이트라벨.
일반 조직원임에도 일반 조직의 정예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준의 강자였다.
블랙 라벨은 각 조직의 수장급이고 가면 위에 숫자가 새겨진 이들은 한층 더 강한 간부들이었다.
퀸의 뒤쪽에 있는 이들의 검은 가면에는 모두 각자를 상징하는 황금빛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즉, 모두가 블랙라벨의 간부급이라는 소리일 터.
디르센과 함께 있던 조직원들 역시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장 저 둘만 해도 다른 조직을 압도적으로 휩쓸었으니까.'
불과 며칠 전 포와 식스의 활약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이들이었다.
그것이 7명이나 되었으니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가도록 하지."
카를의 대리로 자리에 나온 퀸은 디르센과 나란히 걸으며 회담장으로 이동했다.
회담 장소는 이전 서부 3상업 지구의 일축을 담당하던 비르테르소가 사용하던 건물이었다.
녹스에 의해 박살 난 그곳은 현재 팔린 상태였다.
녹스와도 라한과도 큰 관계가 없었기에 그곳을 회담 장소로 잡았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희미한 불빛에 밝혀진 어두컴컴한 내부가 그들을 반겼다.
디르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간 퀸은 슬쩍 내부를 훑어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네.'
열심히 숨긴 듯했지만, 곳곳에 잠복해 있는 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것저것 함정까지 설치해 놓은 듯한데.
회담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건가?
'마인들은, 모르겠네.'
퀸은 투르가 쪽의 조직원보다 갤런이 말한 마인들의 존재가 더 궁금했다.
악마와 손을 잡고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강함을 얻은 미련한 자들.
마스터께서도 흥미를 보이셨으니 샘플을 가져가고 싶었다.
"...투르가."
"디르센."
2층으로 올라가자 널찍한 장소에 준비 된 회담 자리가 보였다.
저 너머 투르가와 그 조직원들은 이미 자리하고 있던바.
소파에 앉은 투르가 뒤쪽으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이쪽을 노려봐 왔다.
'그리 닮은 것 같지는 않네.'
퀸은 서로를 바라보는 투르가와 디르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친척 관계임에도 느껴지는 기질이 정반대였다.
나름대로 댄디하게 꾸민 디르센과 달리 투르가 쪽은 야성적인 느낌이 강했다.
긴 머리는 뒤로 꽉 묶었고 덥수룩한 수염은 정리되지 않은 채 투박함을 내뿜고 있었다.
디르센의 2배는 될 법한 커다란 풍채에서 꿈틀거리는 근육은 그가 범상치 않은 강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
이미 라한을 거머쥔 듯 보스의 카리스마가 뿜어지고 있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수하들의 눈빛에서도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듯 확고한 기세를 보였다.
"일단, 앉지."
"...."
투르가의 말에 디르센은 꾸벅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퀸도 그 옆에 살짝 거리를 벌리며 착석했고 다리를 꼬은 채 투르가를 바라보았다.
"그쪽이, 녹스의 보스인가?"
"대리입니다. 보스께서는 바쁘신 탓에."
"하핫. 이것보다 더 바쁜 일이 있다고?"
투르가는 웃음을 터트렸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는 수염을 쓰다듬다가 그윽한 눈빛으로 퀸을 바라보았다.
"줄곧 궁금했단 말이다. 녹스는 어째서 디르센을 선택한 것이지? 애초부터 내가 압도적으로 우세했을 텐데."
"그쪽의 말대로예요.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니까 불리한 쪽을 선택한 거죠."
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이 보일 리는 없겠지만.
"이미 우세한 쪽에 붙어서 뭘 하겠어요? 지분은 다 쪼개져 있을 텐데. 차라리 불리한 쪽에 붙어서 콩고물을 받아먹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 부분에 관련해서는 여러 판단이 섞여 있었다.
특히 자신의 주위를 철저하게 대비해 놓은 투르가에 반해 디르센 쪽은 제법 허술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용병을 과신한 탓에 카를에게 제압당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이용 가치가 높고 조금 더 손쉬운 상대였기에 디르센이 선택된 것이었다.
"흠."
수염을 쓰다듬던 투르가는 미간을 슬쩍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다시금 퀸과 시선을 맞췄다.
"어떤가. 이 정도면 서로 능력은 충분히 증명했다고 보는데. 자네들 몸값도 대충 견적이 나온 것 같고."
"그 말씀은?"
"나와 손을 잡지. 그러면 서부 3상업 지구는 넘겨주겠다. 애초에 우리 목적은 다른 곳에 있으니까."
"투르가!!!"
디르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일갈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양측의 조직원들 사이에 긴장감이 치솟아 올랐다.
반면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던 투르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조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성을 낮춰라, 디르센. 한 세력을 이끄는 보스라면 묵직한 맛이 있어야지. 품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아직도 모르나?"
"닥쳐라. 자격이 없는 주제에 남의 자리를 탐내는 무뢰한이 할 소리는 아니니까."
"자격이 없다? 감히 네가? 이 나에게?"
쿵.
이번에는 투르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로 신장 차이가 머리 하나만큼은 더 났다.
투르가는 디르센을 찍어 누를 듯 압박하며 삿대질을 퍼부었다.
"라한이 지금의 이 자리까지 우뚝 서는 데 내 지분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형님의 옆에서, 그리고 조직의 가장 앞에서 조직원들을 이끌며 가장 많은 피땀을 흘린 것이 누구지? 보스인 네 아버지? 아니, 틀렸다. 그건 바로 나다! 수많은 정적을, 라이벌을 쓰러뜨린 것도 바로 나! 라한의 세력을 지금처럼 키워 낸 것도 바로 나! 네 아비를, 내 형님을 라한의 세운 것도 바로 나란 말이다!!!"
투르가는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디르센 역시 입술을 꽉 깨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을지는 몰라도 투르가의 공적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건 라한이 품은 역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고작해야 보스의 아들로 태어난 네놈이 무엇을 알지? 라한은 내 전부다. 자격도, 능력도 증명하지 못한 풋내기 애송이에게 넘길 수 있을까!"
"...."
반면 퀸은 여전히 소파에 앉은 채로 다리를 꼰 채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았다.
'재밌네.'
마치 솜씨 좋은 극단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랄까.
이쪽은 여차하면 검을 뽑아 들어 상대의 가슴에 박아 넣는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지만.
* * *
녹스와 라한이 회담을 가지는 사이 주말을 앞둔 카를은 바이에른을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대역을 놓을 여유도 없어 공식적으로 외부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녹스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파고 들기에는 지금이 적기지.'
텅 비어버린 라한의 본진.
정확히 말하자면 투르가의 거점 쪽이었다.
투르가 본인을 비롯해 정예들이 떠난 지금이라면 안쪽을 조사하기 쉽지 않을까.
"과연, 무엇이 있을까."
카를은 흥미 넘치는 표정으로 어둠을 뛰어넘어 투르가의 거점으로 스며들었다.
119화 집결 (2)
카를이 투르가가 아니라 디르센을 선택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건 주변 호위에 깐깐할 정도로 신경을 쓰는 편집증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한 조직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만큼 투르가에 관한 정보는 어렵지 않게 손을 넣을 수 있었던바.
남을 절대로 믿지 않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에 편집증까지 띠고 있는 까다로운 인간이었다.
그런 가운데 녹스같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데다가 뒤까지 구린 이들을 믿을 수 있을까?
설령 손을 잡더라도 고기 방패로 쓰이거나 세력 중심에 끼어들지 못한 채 외곽만 전전하겠지.
투르가의 성격은 그 자체로 견고한 성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카를이라도, 녹스라도 내부로 쉽사리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신원이 확실한 이가 아니라면 수하로 고용하지도 않았으니 사람을 심어 놓는 것도 불가능했고.
납치 후 자리를 교체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투르가의 눈썰미라면 금방 간파당할 것 같았기에 그를 향한 모든 작전을 덮어 두었다.
평생을 함께한 수하, 가족까지 의심하는 녀석인데 섣불리 건드렸다간 벌집을 쑤신 것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 능력만은 진짜였다.
투르가는 완벽주의 성격으로 악착같이 라한을 밑바닥에서부터 일으켜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다.
이건 카를도 투르가를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한 조직의 기틀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임을 알고 있기에.
'만일 녀석이 라한의 보스가 되었다면 서부 3상업 지구를 통합하고 다른 지구까지 진출했겠지.'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물론 카를이, 녹스가 개입한 시점에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을 테지만.
'회담 쪽은 괜찮다.'
퀸도, 세컨드도 있다.
블랙 라벨의 간부들을 비롯해 그간 준비한 전력이 대거 몰려 있었다.
뒷 세계 거물들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도 라한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밀어 버릴 수 있을 터.
피해를 얼마까지 줄일 수 있느냐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그렇기에 카를은 홀로 움직였다.
가장 깊고 어두운 비밀을 품고 있을 터인 복마전을 향해.
툭.
건물과 건물의 위를 밟으며 도시를 가로지르던 그가 땅에 내려섰다.
투르가의 본진은 디르센 쪽보다 족히 4, 5배는 큰 규모였다.
라한의 본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보스의 핏줄이라는 정통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에서 디르센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면."
카를은 가면 뒤에서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녹스를 만들고 살수와 달리 좋은 점이 있다면 앞뒤 잴 것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치밀한 설계, 타겟의 유인, 상황의 분석....
자잘하고 귀찮은 과정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박살 내면 녹스가 그대로 집어삼키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꽈아악.
주먹을 움켜쥐고 허리를 가볍게 비틀었다.
천마신공의 시커먼 마기가 그 위로 치솟으며 흉흉한 형태로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응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절대로 막을 수 없는 일권의 힘이 라한의 본진을 향해 발산되었다.
콰아아앙!
라한도 제법 규모가 있던 조직인 만큼 건물에 여러 장치나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한바.
건물 앞쪽이 무너져 내리며 입구가 폭삭 주저앉았다.
카를은 손을 툭툭 털며 잔해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도 사람인 만큼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스트레스가 쌓였다.
특히 자신의 본모습을 속이고 위장이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더욱 가중되었다.
살수들도 마찬가지였기에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자신의 욕구나 감각을 통제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카를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거슬리면 부수고, 막히면 뚫는다.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댕댕댕댕!
적습을 알리는 타종 소리가 맹렬하게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라한의 조직원들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카를은 그들을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재밌군.'
그는 피식 웃었다.
구태여 이렇게 화려하게 일을 벌인 건 쌓인 스트레스 탓도 있었지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껴지던 살벌한 기운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은 은밀하게 이곳에 잠입해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싸울 생각이 가득해 보이는 저쪽의 태도에 기꺼이 응해 주었다.
"누구냐!"
"검은 가면?"
"녹스! 녹스다!"
서걱.
카를은 발걸음을 옮기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볍게 그었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닥쳐온 이들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나갔다.
"어엇!"
"뒤로! 물러나!"
"컥...!"
보이지 않는 칼날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간 이들이 십수 명은 족히 넘어갔을 때 라한의 조직원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카를에게서 멀어졌다.
피로 얼룩진 저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이 공간에 세워졌다.
저벅.
카를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 오는 곳이었음에도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쪽에서 자신을 자극하며 안내해 주고 있었으니까.
끼익.
건물의 심처로 들어간 카를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투르가의 집무실인 듯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외모와 달리 제법 정갈한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안쪽 소파에 앉아 홀로 차를 마시고 있던 한 남성의 모습까지도.
달그락.
흑발흑안의 남자였다.
이곳 아르테니아에서 찾아보기 힘든 색의 조합.
순간 카를의 가슴 한구석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남자의 이국적인 외모를 보는 순간 속으로 혀를 차며 그 맞은 편에 앉았다.
'잠시나마 기대했군.'
중원에서 온 영웅이나 누군가의 핏줄이 아닐까.
하지만 그건 자신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머리카락과 눈동자에 맴돌고 있는 건 진흙을 씹는 듯한 기분 나쁜 기운이었으니까.
아마 갤런이 말한 악마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손님 대접이 아쉽군."
"...."
카를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찻잔을 꺼내 오더니 그 위에 홍차를 따라 주었다.
카를은 손을 뻗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을 마셨다.
라한의 차기 보스였던 자가 마시는 차답게 혀끝에 감도는 감촉이 제법 즐거웠다.
그런 카를의 모습을 보는 남자의 눈에는 이채가 감돌았다.
쾅!
그때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난입했다.
뒤늦게 닥쳐온 라한의 정예들.
남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가로저었다.
"...하지만."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새카만 눈동자로 그들을 바라볼 뿐.
라한의 조직원들은 입을 꾹 닫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시선 한 번으로 축객령을 내린 남자는 다시 카를을 바라보았다.
"투르가보다 더 보스답군. 아니, 이미 투르가를 집어삼킨 것인가?"
"녹스에서 왔나?"
"이 가면이 꽤 유명해졌나 보군."
카를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가면 테두리를 툭툭 쳤다.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자네들은 이곳에서 근래 가장 주목을 모은 이들이니까."
"그래. 그런 줄 알았지. 하지만 우리보다 더 시커먼 놈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가. 궁금하군. 밤이라는 이름을 쓰는 조직보다 더 시커먼 이들이 존재할 줄은."
"그쪽은 어디에서 왔지?"
"말해도 알까 싶군."
"그건 내가 판단한다."
남자와 카를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가면을 벗으면 알려 주도록 하지."
"그리 비싼 얼굴은 아닌데."
"제법 궁금해져서 말이야. 라이프치히 쪽에서 올라왔다는 것 말고는 정보가 아예 없던데. 대체 지방 어느 조직이 이 정도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
찻잔을 비운 남자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네. 투르가와의 회담을 더 중요시 여길 줄 알았는데."
"...날 기다린 것이 아니었나?"
"딱히."
"또 누군가 있군."
카를의 말에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쪽도 만나지 않았을까 싶은데?"
"...."
카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를 말하는 거지?
잠시간 생각을 곱씹던 와중 그의 두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녀석들을 알고 있군."
"역시."
남자는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그 배교자들이 자네에게도 접촉했군."
"배교자? 교단이었나?"
카를은 즉시 되물었다.
남자가 말하는 건 일전 식스를 습격하고 자신을 감시했던 정체불명의 조직에 관해서였다.
그리고, 어쩌면 에렌달 숲에 테러를 일으킨 녀석들도 같은 부류일 터.
'마인 무리가 아니었나?'
카를은 마인들의 정체가 밝혀진 순간부터 자신들과 충돌한 조직의 정체가 마인의 끄나풀이지 않을까 의심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 정도 힘을 지닌 이들이 툭 튀어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이런, 너무 많이 말해 주었군. 이 이후부터는 유료 서비스네."
"...."
카를의 눈이 깊어졌다.
블러핑 같지는 않았다.
그런 어설픈 짓을 할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제 날 찾아온 목적을 알려 주었으면 하는데."
"...목적이라."
카를은 피식 웃었다.
"원래는 그저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쩌억.
남자의 얼굴을 중심으로 가로지르는 기다란 궤적이 그어졌다.
"방금 용건이 생겨 버렸다."
집무실의 벽이 갈라졌고 순식간에 파편이 튀며 건물이 뒤틀어지는바.
천장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에도 남자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인사가 너무 살벌하군."
"그만큼 반갑다는 소리다."
"그럼 이쪽도 보답해 주어야지."
짝.
남자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동시에 카를의 밑바닥에서부터 치솟은 시커먼 마기가 그를 집어삼키는바.
반원 형태로 기둥을 만들어 머리끝까지 뒤덮어 버렸다.
"내 쪽도 반갑네. 자네에게서는 어째서인지 동질감이 느껴져서 말이야. 마치 잃어버렸던 형제를 만나는 그런 듯한...."
파각.
돌연 검은 기둥 위에 균열이 생겨나며 뒤틀렸다.
남자는 말을 멈춘 채 가늘게 뜬 눈으로 그 모습을 살폈다.
챙!
마치 유리가 깨어지듯 카를을 감싸고 있던 기둥이 깨어져 나가며 해방되었다.
"그건 다르군. 난 네놈에게서 구역질밖에 느껴지지 않는데."
"원래 그렇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하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면 무시하든가, 혐오하든가 둘 중 하나이지."
남자는 재차 손을 뻗어 왔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새카만 마기가 이 주변 전체를 집어삼켜 버린바.
그 가운데 덜렁 남겨지게 된 카를은 신기하단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법? 아니, 공간 자체를 새로 구성한 건가?'
신기한 기술을 사용할 줄 알았다.
악마의 마기와 천마신공의 마기.
같은 마기로 불렸으니 어쩌면 자신도 이와 같은 기예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하고."
쿠우우웅.
카를은 억눌러 놓았던 천마신공의 힘을 해방했다.
그의 머리카락과 옷이 펄럭이며 신공의 기운이 발산되기 시작한바.
칠흑 같은 어둠이 요동치며 그를 구속한 공간을 뒤틀어 버렸다.
콰아아앙!!
기둥을 부쉈던 것처럼.
격렬하게 치솟은 천마신공의 힘이 그를 가둔 공간 자체를 찢어발기며 무너뜨렸다.
그 여파로 인해 라한의 건물은 윗부분이 날아가 버렸고.
저벅.
어느새 수북이 쌓인 잔햇더미를 짓밟으며 올라선 카를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남자에게 말했다.
"다른 건 더 없나? 방금 건 제법 재미있었는데."
120화 집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