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기 사람있어요!
1화. 여기 사람있어요!
"하아...지친다...지쳐."
200만 원도 되지 않는 월급. 거기서 월세와 학자금대출금을 내고 생활비를 아껴 써 한 달에 100만 원을 적금에 넣어 모은 1200만 원. 큰 금액이었지만, 세준의 목표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휴우. 이래서 티켓은 언제 사지? 살 수는 있으려나?"
세준이 막막한 목표에 한숨을 쉬었다.
10년 전 서울 강남 한복판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99층의 검은 탑. 탑은 기하학적인 문양과 물리 법칙을 무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탑이 세계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100개나 생겨났다. 각 국가는 자신의 영토에 나타난 탑을 조사했지만,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
그들이 알아낸 정보는 탑의 높이가 990m에 핵폭탄으로도 구멍을 내지 못할 정도로 강도 높은 소재로 만들어졌고 탑 어디에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없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탑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탑의 벽을 통과해 나왔다.
조사관들은 서둘러 그들의 신원을 파악했고 탑에서 나온 사람들이 최근에 갑자기 실종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어떻게 탑에 들어갔습니까?"
조사관들의 질문에 그들은 들어간 것이 아니라 검은 구멍에 빨려들어 갔고 정신을 차리니 그곳이 탑의 1층이라고 했다.
그렇게 탑에서 나온 사람들에 의해 탑에 대한 정보가 풀리기 시작했다.
-100개의 탑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탑에 들어가면 각성을 하며 마법사와 전사 중 하나의 직업을 갖게 된다.
-탑의 2층부터는 몬스터가 있고 층이 오를수록 몬스터는 강해진다.
-한 층을 클리어할 때마다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층이 높아질수록 보상은 더 좋아진다. 단, 클리어한 층을 다시 클리어해도 보상은 없다.
탑이 생긴 목적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탑을 오르는 것이 돈이 된다는 것. 탑 안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지구에서 비싼 금액으로 팔렸다.
그 아이템 중에는 티켓이라는 것도 있었다. 티켓은 각성자들의 중요 돈벌이 중 하나로 층을 클리어하면 높은 확률로 티켓이 하나 이상 나왔다.
이미 각성한 사람들은 탑을 드나들 때 티켓이 필요 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티켓을 소지하고 있으면 탑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탑에 들어가면 각성을 하고 탑을 오를 자격이 생긴다. 그렇기에 티켓값은 싸지 않았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 같은 경우 한국 각성자 협회에서 헌터들의 티켓을 일괄 구매해 판매하고 있었다.
가격은 장당 1억5000만 원. 그것도 찾는 사람이 많아 일주일 후부터는 2억 원으로 오른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티켓을 사려고 미리 돈을 내고 기다리는 사람만 수백 명이란다.
'포기할 수 없어!'
그리고 요즘 금파, 파테크라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보이기 시작하자 세준은 큰 결심을 했다.
집에서 농작물을 키우자!
허리띠를 더욱 졸라맬 수 있는 방법. 뭐 대단한 것들을 키우겠다는 건 아니고 생활비도 아끼기 위해 물만 주면 알아서 잘 자라는 것들을 몇 가지 사서 키워볼 생각이었다.
'오늘부터 바로 해야지.'
그렇게 마트에서 대파와 다른 몇 가지를 사고 집으로 가는 길.
"흥흥흥···"
세준이 콧노래를 불렀다.
앞으로 집에서 과일과 채소를 기르게 된다면 식비를 많이 아끼고 채소와 과일을 맘껏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돈을 아껴서 티켓을 사고 탑에 들어가는 거야. 그리고 탑에서 돈을 왕창 벌어서 우리 세라랑···'
"흐흐흐···"
세라는 한국 최정상 걸그룹 달빛요정의 멤버. 한마디로 세준 만의 망상이었다.
그렇게 세준이 망상에 빠져 헤벌쭉 웃으며 걷고 있을 때 세준의 앞 허공에 검은 구멍이 입을 벌리며 나타났다.
그리고
후우웅.
주변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어?! 이건...!"
반대편이 전혀 보이지 않은 검은 구멍을 발견한 세준이 크게 놀랐다.
'배니싱(Vanishing)이다!'
배니싱은 탑으로 초대되는 현상으로 최초의 각성자들은 모두 배니싱을 통해···
아무튼 이건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려운 행운이다!
다다다다.
세준이 서둘러 가족들에게 톡을 날렸다. 혹시라도 말없이 사라졌을 때 가족들이 자신을 찾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게 톡을 다 보냈을 때
'왜 아직도 내가 여기 있는 거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어도 이미 한참 전에 빨 려들어갔어야 하는데···
세준은 자신을 데려가기를 기다리며 검은 구멍을 계속 노려봤다. 하지만 구멍의 흡입력은 강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서 나를 모셔가라고. 어! 뭐야? 왜 작아져?!"
심지어 구멍이 닫히고 있었다.
'안돼! 내 미래! 세라야!!!'
세준은 결심했다. 미래는 개척하는 것.
"그래! 내가 가 준다!"
세준이 구멍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그렇게 새카만 어둠 속으로 세준이 사라졌다.
***
"여기가 어디야?"
세준은 구멍을 나오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들은 탑의 1층 정보와 너무 달랐다.
탑 1층에는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이 주변을 밝히고 바닥에는 백색 대리석이 깔려 있으며 넓은 광장에는 장비와 포션 등을 파는 상점들과 전사와 마법사의 스킬을 배울 수 있는 훈련소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여기는 상점과 훈련소는커녕 바위로 만들어진 동굴이었다.
탑의 1층과 비슷한 게 있다면 넓다는 것 정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은 없지만, 동굴 천장에 난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한줄기 햇빛 조명이 있다는 것.
'일단 출구를 찾자.'
세준이 주변을 둘러보며 나갈 곳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갈 곳으로 점찍어 둔 곳은 동굴 천장에 난 구멍. 하지만 아치형으로 된 동굴의 천장 구멍까지 벽을 타고 간다는 것은 거미맨이 아니라면 불가능해 보였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세준이 가방을 바위 위에 내려놓고 동굴을 탐색했다.
잠시 후.
"뭐가 이렇게 넓어..."
동굴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넓었다. 동굴 끝 쪽은 해가 닿지 않아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껴야 하는데..."
세준은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약하게 켜고 동굴 탐색을 이어갔다.
3시간 후.
동굴 탐색이 끝났다. 동굴은 사방이 완전히 막혀 있는 공동이었다. 바위들 사이에 빠져나갈 틈이나 약한 부분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 봤지만, 빠져나갈 만한 곳은 없었다.
"출구가 없어...설마 나 조난당한 거야?"
세준이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동굴의 천장 구멍 아래 해가 비추는 곳으로 돌아왔다.
"어쩌지···"
인정해야했다. 여길 혼자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기-! 사람 있어요-!!!"
세준이 최후의 발악으로 동굴 천장에 난 구멍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여~기~사람 있어요~!"
세준의 처절한 외침은 구멍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동굴 안에서만 맴돌았다.
"여-기-! 사람있어요-!!!"
세준은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사람은커녕 아무것도 구멍 근처로 지나가지 않았다.
"제길. 여기 사람 있다고!!!"
퍽!
세준이 화를 참지 못하고 괜히 땅을 찼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조난 2일 차.
[5월 11일 오전 6시]
삐비빅.삐비빅.
출근을 위해 맞춰두었던 알람이 울렸다.
"으음..."
불편한 잠자리에 세준이 힘겹게 눈을 뜨고 일어나 스마트폰의 알람을 껐다.
"······"
잠에서 깬 세준은 온종일 동굴 천장의 구멍만 바라봤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여기 사람있어요!"
세준의 외침만 축축한 바위에 반사되어 음울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
꼬르르륵.
세준의 배가 요동쳤다. 걱정이 태산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먹고는 살아야 했다.
"으윽... 진짜 배고프다."
생각해 보니 퇴근한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뭐 좀 먹을까?'
세준이 평평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부스럭.
내려놨던 가방 안에서 봉지에 담긴 사과 하나를 꺼냈다. 사무실의 동기가 준 세척 사과였다.
'고맙다. 민준아.'
세준은 만약 이곳에서 나간다면 동기인 민준에게 탕수육으로 보답하기로 했다. 민준이가 탕수육을 좋아하는 건 아니고 지금 짜장면에 탕수육이 먹고 싶었다.
그렇게 세준이 민준에게 탕수육을 쏘기로 결심하고 사과의 비닐포장을 뜯어 사과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
사과의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 안을 점령했다.
'너무 맛있다!'
입맛이 돌자 허기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아삭.아삭.
세준이 걸신들린 듯이 정신없이 사과를 먹어 치웠다.
"아."
야무지게 발라 먹고 남은 사과 꼭지와 씨를 허망한 얼굴로 쳐다봤다. 양이 많이 모자랐다.
퍽.퍽.
세준이 발로 대충 땅을 파 사과 씨와 꼭지를 함께 묻었다.
그리고 가방 안의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노트북과 사무실에서 먹다가 남아서 들고 온 500ml 생수.
집에서 키우기 위해 산 대파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호박고구마.
"하나, 둘, 셋..."
세준이 플라스틱 포장 용기에 담긴 방울토마토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가진 식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방울토마토 27개, 파 10줄기, 호박고구마 7개.
일단 파는 전부 심고 방울토마토 3개와 호박 고구마 2개를 심고 나머지는 식량으로 남겨뒀다.
방울토마토는 안에 씨가 많아 3개만 있어도 많이 심을 수 있다. 그리고 고구마는··· 가지고 있는 식량 중에 그나마 탄수화물을 책임져 줄 수 있기에 많이 심을 수 없었다.
'먼저 배를 더 채우고.'
뽀드득.뽀드득.
세준이 연못에서 고구마 하나와 방울토마토 5개를 깨끗이 씻었다.
그나마 동굴 한쪽 구석에 작은 연못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식수는 해결할 수 있으니까.
'물고기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연못에는 작은 송사리 크기의 생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동굴에는 벌레나 쥐 같은 작은 동물도 전혀 없었다.
벌레나 쥐를 보면 기겁할 세준이기에 없는 것을 좋아해야 했지만 막상 없으니 뭔가 아쉬웠다. 영화에서는 먹을 게 없을 때 벌레나 쥐를 먹는 장면을 많이 봤다.
'정말 식량이 떨어지면 그런 거라도 먹어야 되는데.'
물론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최선이다.
아그작.
고구마를 씹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잡생각들이 다 사라졌다. 지금은 고구마에 집중할 때였다.
우적우적.
맛있다!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배어 나오는 게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항상 찌거나 구워 먹지만 가끔은 생으로 먹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일을 해볼까."
고구마 하나와 방울토마토 5개를 다 먹은 세준이 먼저 파를 들었다.
그리고
뿌드득.
파를 뿌리에서부터 3분의 1정도 지점에서 꺾어 녹색 이파리 부분을 뜯어내 따로 바닥에 두었다.
'나중에 먹어야지.'
맛은 없겠지만,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할 수도 있었다.
세준이 해가 들어오고 바닥의 흙이 부드러운 곳에 파의 뿌리가 있는 흰색 부분을 땅에 묻었다.
그리고 이어서 파의 왼쪽에는 호박고구마 2개를 오른쪽에는 방울 토마토를 심었다.
호박고구마는 그냥 땅에 하나씩 묻었고 방울토마토는 으깨 안에서 흘러나오는 씨앗을 심었다.
쫍쫍.
세준이 손에 묻은 토마토즙을 손으로 쪽쪽 빨아 먹으며 연못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500mL 생수병에 연못물을 담아 농작물을 심은 땅에 물을 충분히 적셔줬다.
작업이 끝나자 세준은 바위에 누워 천장을 보며 누가 지나가는지 기다렸다. 식량도 없기에 최대한 에너지 소모를 줄이며 가끔씩 '여기 사람있어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삐비빅.삐비빅.
[5월 12일 오전 6시]
조난 3일 차가 되었다.
2화. 여기 몇 층이야?
2화. 여기 몇 층이야?
우드득.
바닥에서 잤더니 몸이 너무 뻐근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곳은 밤이 없다는 것. 그래서 해가 적당히 내리는 곳에서 자면 쾌적한 온도에서 잘 수 있다.
어푸!어푸!
세준이 연못에서 간단히 세수를 했다.
그리고
뽀득.뽀드득.
오늘 먹을 고구마와 방울토마토를 씻었다.
"뭔가 얼굴 닦은 물로 씻으니까 이상한데?"
아그작.
세준이 찝찝함을 뒤로하고 고구마를 베어 물었다.
우적우적.
씹으면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단맛.
'행복하다.'
출근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단물이 다 나올 때까지 씹는 여유를 가져본 적이 있었나?
아그작.
우적우적.
해가 내리는 마른 흙 위에 가방을 깔고 앉아 하염없이 고구마를 씹었다. 씹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 심장이 천천히 뛰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자신은 분명 조난을 당했고 며칠이면 먹을 게 떨어진다.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이상하네.'
세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이 신기했다. 그래도 초조한 것보다는 나았다.
"고 대리님이 '세준 씨 잠깐 볼까'라고 할 때마다 정말 심장이 쫄깃했었지. 아. 평화롭다."
세준은 예전에는 쉽게 느낄 수 없던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고구마를 먹었다.
"다음 메뉴를 먹어볼까."
고구마를 다 먹은 세준이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씹었다.
톡.
방울토마토의 껍질이 세준의 어금니가 위아래로 누르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졌다. 방울토마토의 즙이 터져 나오자 새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다..."
평소 자신이 먹는 방울토마토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맛있었다. 어쩌면 허기로 자신의 미각 세포가 극도로 예민해졌는지도 모른다.
오물오물.
세준은 방울토마토의 맛에 오롯이 집중하며 열심히 씹었다. 하지만 방울토마토는 오래 씹는다고 맛이 더 좋아지지는 않았기에 방울토마토 5개는 금방 세준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식사를 다 먹은 세준이 오늘의 일과를 시작했다.
천장의 구멍 바라보기.
"······"
세준은 멍하니 천장에 난 구멍만 바라봤다.
"아···심심하다."
물론 중간에 한 번씩 '여기 사람 있어요!'라고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천장을 보면서 하는 일. 몇 시간 동안 천장만 보고 있으니 좀이 쑤셔서 미칠 것 같았다.
"뭐 할 거 없나?"
세준이 두리번거리며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농작물에 물 좀 줄까.'
세준이 생수병에 물을 담아 파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고구마에 물을 주었다.
졸졸졸.
"빨리 자라라. 거대하게 자라라. 아빠 배고프다."
연못까지 세 번을 왔다 갔다 하며 농작물이 심어진 땅을 흠뻑 적셨다.
그때
꼬르르륵.
배에서 연료 부족을 알려왔다. 그거 조금 움직였다고 금세 배가 고파졌다. 세준은 농작물에게 주고 남은 생수병의 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벌컥.벌컥.
배가 조금은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준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천장의 구멍을 바라봤다.
그렇게 몇 시간.
"..."
세준이 멍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삐비빅.삐비빅.
알람이 울렸다.
[5월 12일 오후 10시]
이곳은 해가 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야 할 시간을 맞춰뒀다.
"잘 시간이네."
세준이 일어나 취침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별건 없다.
탁탁.
누울 곳의 흙바닥을 고르게 만들고 해가 보이지 않게 가방을 머리에 쓰면 취침 준비 끝.
생각보다 잠은 잘 왔다.
***
세준의 기준으로 한밤중.
쿠우우웅...
쿠우웅...
쿠웅...!
세준이 땅을 흔드는 진동에 잠에서 깼다.
"으음...뭐지?"
그때
쿠웅!
다시 한번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가까운 거리였다.
"...!"
세준이 서둘러 얼굴에 쓴 가방을 벗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목격한 기묘한 광경.
"이...이게?!"
동굴의 천장으로 내려오는 빛이 푸른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키이이익!
카아악!
서로가 서로를 위협하는 기괴한 표효가 들려왔다.
그때
쿠아앙!
거대한 검은 용이 하늘에서 나타나 포효를 질렀다. 홀로 고고히 푸른빛을 가르며 하늘을 나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검은 용은 포효를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용의 포효에 겁을 먹은 건지 지상은 고요해졌다.
하지만 세준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몬스터라니...이럴 리가 없는데..."
세준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세준은 내심 이곳이 탑의 1층의 어딘가일 거라고 생각했다. 온종일 동굴을 비추는 빛도 탑 1층의 샹들리에 조명이 아닐까 믿고 싶었다. 그러나 탑의 1층에는 몬스터가 없다.
즉, 세준이 있는 곳이 탑의 1층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거기다 해가 푸른색으로 변하는 블루문.
모든 층은 온종일 해가 떠 있다. 하지만 층마다 주기적으로 해가 푸른색으로 변하는 시간이 있다. 헌터들은 이 현상을 블루문이라고 불렀다.
블루문 때는 몬스터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변하고 강해지기 때문에 헌터들도 블루문이 발생하는 층에는 가지 않는다.
'블루문은 10층 이상의 탑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인데...'
세준이 있는 곳이 10층 이상이라는 의미. 그래도 구조될 가망성은 있었다.
하지만
'걸리는 게 있어.'
그건 바로 용.
10년 전 탑이 생긴 이후 지구에서 가장 세력이 큰 피닉스 길드가 최근에 37층을 클리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31층에서 37층까지는 길드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중이라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지만, 30층 아래로는 돈이나 홍보를 위해 꽤 많은 클리어 영상이 너튜브에 올라와 있었다.
그렇게 알려진 정보로는 2~10층은 스켈레톤, 11~20층은 고블린, 20~30층은 오크가 출몰한다. 그리고 31층부터는 영상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거미 몬스터들이 나온다고 했다.
이건 여러 헌터들이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한 얘기이기에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말에 용은 없었다. 심지어 탑에서 용 비슷한 도마뱀 몬스터가 나왔다는 말도 못 들어봤다.
'여기 몇 층이야?!'
세준이 머리를 잡고 절규했다. 자신은 어쩌면 최상위 헌터들도 도달하지 못한 층에 조난된 상태일 수도 있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세준이 복잡한 마음으로 푸른빛이 내리는 천장의 구멍을 바라봤다.
하지만 전과는 목적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누군가가 지나가길 바라며 바라봤다면 지금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용을 본 이후로 세준은 이곳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삐비빅.삐비빅.
[5월 13일 오전 6시]
알람이 울렸다.
세준은 밤새 경계를 서느라 조난 4일 차를 뜬 눈으로 맞이했다. 다행히 블루문은 새벽 4시 정도가 됐을 때 다시 기존의 노란색 빛으로 변했다.
5시간 후.
"..."
경계를 서던 세준의 고개가 점점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제 일어난 이후로 줄곧 천장을 보며 경계를 서고 있었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으으...물..."
세준은 일어나자마자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더듬더듬 옆에 놓아두었던 생수병을 집었다.
그리고
꿀꺽.꿀꺽.
물을 원샷했다.
"캬아! 이제 좀 살 거 같다."
꼬르르륵.
갈증이 채워지자 허기가 올라왔다.
뽀드득.뽀드득.
연못에 간 김에 간단히 세수를 하고 고구마와 방울토마토 5개를 씻었다.
우적우적.
세준이 고구마를 씹어 먹으며 천장의 구멍을 바라봤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41층 이상이라면 사람이 올 확률은 거의 0%.'
그렇다면 혼자서 살아남아야 했다.
세준이 농작물을 심어둔 밭을 바라봤다.
'물이나 줄까.'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농작물이 더욱 각별해 보였다.
졸졸졸.
"너희들이 힘을 내줘야 해."
"고구마야 거대하게 자라라."
"방토야 주렁주렁 열매를 맺어라."
"파야...음...너는...그냥 무럭무럭 자라라."
물을 주며 농작물들에게 좋은 말을 해줬다. 뉴스에서 식물들에게 음악도 들려준다는데 이정도 덕담은 못해줄 것도 없었다.
그렇게 물을 주고 세준이 자리에 앉아 다시 천장의 구멍을 바라봤다.
하지만 금세 지루함이 밀려왔다.
"저거나 먹을까?"
세준이 첫날 파의 뿌리를 심으며 뜯어냈던 파의 이파리가 보였다.
"으...맵네."
파를 입에 넣고 씹자 세준의 입에 금세 파 향과 함께 알싸한 매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이틀 정도 볕에 말려 뒀기에 수분이 날아가며 맛이 더욱 집약됐다.
우물우물.
세준은 삼키지 않고 계속 씹었다.
'파에도 단맛이 있어.'
세준이 계속 씹자 매운맛이 지나가고 파에 숨어있던 단맛이 조금씩 올라왔다.
'좋아!'
우물우물.
세준이 파를 먹으며 오후의 나른한 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삐비빅.삐비빅.
[5월 13일 오후 10시]
조난 4일 차 밤이 됐다.
"오늘은 괜찮을까?"
세준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새벽에 몬스터들이 날뛴 것은 블루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블루문이 아닐 때는 몬스터들이 친절해지는 게 아니었다.
세준은 빛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잠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춥겠지만,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해 아래서 자지 않아도 되기에 가방을 접어 베개로 썼다.
그리고
커어어.
세준은 가방에 머리를 대자마자 코를 골며 잠들었다.
세준이 잠든 사이.
뿌드득.
땅에 뿌리를 내린 파가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
삐비빅.삐비빅.
알람이 울렸다.
[5월 14일 오전 6시]
조난 5일 차의 생존이 시작됐다.
세준의 눈이 번쩍 떠졌다.
"흐아악! 왜 이렇게 가뿐하지?"
세진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항상 일어날 때 몸이 무거웠는데 오늘은 몸이 너무 가벼웠다. 거기다 해가 없는 곳에서 자서 추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춥지도 않았다.
"회사 다니면서 쌓였던 피로가 풀려서 그런가?"
세준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연못으로 갔다.
어푸!어푸!
세수를 하고 오늘 먹을 고구마와 방울토마토를 집었다.
"으음..."
오늘 먹을 고구마와 방울토마토를 집자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있던 식량의 절반이 사라졌다. 식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부터는 절반만 먹어야 하나.'
세준이 고민하며 집은 고구마와 방울토마토를 씻었다.
뽀드득.뽀드득.
그리고
뽀각.
고구마를 반으로 잘라 고구마 반쪽과 방울토마토 3개는 다시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다. 지금도 먹는 게 없는데 더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쭉 빠졌다.
"하아."
세준은 한숨을 쉬며 해가 잘 들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 자신의 자리로 이동해 앉았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응? 뭐야?"
항상 비춰야 할 해를 어느새 세준의 키만큼 자란 파가 가리고 있었다.
분명 어제 물을 주며 살펴봤을 때는 심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는데... 자기 전에도 변한 점은 없었다. 파가 새벽 사이에 엄청나게 자라버렸다.
"언제 이렇게 자랐지?"
세준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파의 뿌리가 있는 흰 부분도 손목 굵기 정도로 굵어져 있었다. 세준이 새로 자라난 파의 이파리 하나를 잡고 뜯었다.
"어?!"
파의 이파리는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릴 정도로 약했지만, 엄청나게 질겼다.
"흐압!"
뿌드득.
세준이 힘을 줘 이파리를 뜯어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기후나 서식지에 따라서 식물의 모습이 다르게 변한다고 하더니 그런 모양이었다.
"맛은 어떠려나?"
모양이 변한 만큼 맛도 변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준이 파의 이파리를 입에 넣고 씹었다.
3화. 싹이 나다
3화. 싹이 나다
아삭.
파의 이파리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생각보다 쉽게 잘려 나갔다. 식감도 좋았다.
화아.
파를 씹자마자 알싸한 매운맛이 입안 가듯 퍼졌다. 매운맛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모공이 열리고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우물우물.
세준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파를 계속 씹었다. 하지만 기대한 단맛은 우러나오지 않았다.
'매운맛이 강해져서 단맛도 강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맛이 매운맛으로 몰빵된 것 같았다.
꿀꺽.
파를 삼키자 매운맛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다행히 속이 쓰리지도 않았다.
'파는 매운 거 당길 때 먹으면 되겠다.'
아삭.
세준은 매운맛뿐인 파를 계속 먹었다. 일단은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렇게 세준은 땀을 줄줄 흘리며 파를 한 뼘은 먹은 것 같다. 왠지 땀을 흘릴수록 몸이 가뿐해졌다.
뿌드득.뿌드득.
파로 배를 채운 세준이 자신의 자리에 그늘을 만드는 파들을 무참하게 꺾었다. 절대 단맛이 안 나서 화풀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절대는 아닌 거로 하자. 좀 기대했으니까.'
꺾어버린 파는 일단 볕이 잘 드는 곳에 깔아놨다. 오늘은 파 덕분에 일과를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상관없었다. 일과라고 해봐야...
졸졸졸.
농작물에 잠깐 물 주고
"..."
멍하니 천장의 구멍 쳐다보기였으니까.
그래도 조금 심심함을 달래줄 것이 생겼다.
잠깐 천장을 보며 멍을 때리다 파를 보면 파가 어느새 훌쩍 자라나 있었다.
"파가 원래 이렇게 빨리 자라나?"
기분 탓은 아닌가 해서 스마트폰으로 시간까지 재봤다. 파는 시간당 10cm 정도가 자랐다. 경악스러운 성장 속도. 농사 경험이 없는 세준이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탑에서 키워서 그런가?"
의심할 거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마트에서 사 온 파다. 종자가 원래 시간당 10cm씩 자라는 파였다면 금파, 파테크라는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근데 얘들은 소식이 없네."
세준은 파의 양옆에 심은 방울토마토와 고구마가 심어진 자리를 봤다. 땅의 지력이 좋은 거라면 다른 것들도 잘 자랄 테니까.
하지만 땅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파만 자라기 좋은 땅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 더 유심히 봤다.
"어?!"
유심히 보니 고구마를 심은 땅은 그대로였지만, 방울토마토를 심은 땅의 흙은 조금 볼록한 것 같았다. 세준이 바닥에 엎드려 볼록하게 솟아오른 땅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오!"
있었다!
(...i...)
흙 사이 녹색빛을 띠는 줄기가 광택이 나는 푸른색 머리를 이고 수줍게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둘, 셋..."
총 52개의 싹이 나 있었다. 세준은 한참 동안 방울토마토 새싹을 바라봤다.
"흐흐흐. 귀여워."
자신이 씨앗에서부터 키워낸 식물들. 이게 뭐라고 보고만 있어도 뿌듯하고 든든했다.
***
삐비빅.삐비빅.
[5월 15일 오전 6시]
세준이 6일 차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는 온종일 방울토마토 새싹만 바라보다 하루를 다 보냈다. 파처럼 급성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읏차!"
세준이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몸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로로 인한 피로가 풀려서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 우리 새싹이들 많이 컸나?"
세준은 일어나자마자 세수와 식사도 뒤로하고 방울토마토 새싹을 보러 갔다. 자신이 자는 사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너무 궁금했다.
"오!"
(..."...)
새싹들의 끝, 푸른색 머리가 조금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새싹들을 막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파들이 어느새 다시 세준의 키만큼 자라 방울토마토 새싹들에게 가야 할 빛을 막고 있었다.
뿌드득.뿌드득.
세준이 파의 이파리들을 사정없이 꺾어냈다.
"휴우."
세준은 파를 다 꺾어내고 서둘러 연못으로 달려갔다.
어푸!어푸!
간단히 세수를 끝내고
꼴.꼴.꼴.
생수병과 플라스틱 용기에 물을 채워 방울토마토의 새싹 주변과 파와 고구마밭의 흙을 축여줬다.
"형이 너 미워하는 거 아니다."
파에게는 특히 물을 많이 줬다.
그렇게 물 주기가 끝냈을 때
꼬르르륵.
배가 무임금 노동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대가를 요구했다.
"아침 먹어야지."
세준이 방금 꺾은 파 하나를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
어제 고구마와 방울토마토 대신 파의 이파리만 먹어본 결과 충분히 허기를 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 허하거나 기운이 빠지는 일도 없었다. 왠지 탄수화물이 흡수된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이 많았다. 하루에 대략 180cm까지 자라나니 오히려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었다.
'일단은 잘 말려서 보관해야지.'
지금 상황을 보면 이렇게 잘 자라는 파가 갑자기 자라지 않을 일은 없겠지만, 만약을 대비하기로 했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자신만 해도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에서 조난당할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남은 방울토마토와 고구마는 미래의 더 많은 식량을 위해 심기로 했다
퍽.퍽.
세준이 흙을 파고 방울토마토와 고구마를 심었다.
그리고
졸졸졸.
"무럭무럭 자라라."
덕담과 함께 물을 충분히 부어주고 자신의 지정석인 해가 잘 드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생산적인 일을 했더니 가슴에 뿌듯함이 가득 찼다.
"하늘 좋네."
푸른 하늘은 높고 깨끗했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답답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몇 날 며칠 하늘멍만 하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때는 며칠간 하늘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데...호강하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깐이었다.
"근데 뭔가 아쉬워. 여기서 커피만 있었으면..."
샷 추가를 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 마시고 싶었다. 문명 생활이 너무 그리웠다.
세준이 하늘을 보며 도시 생활을 떠올릴 때
삑.삑.
스마트폰 배터리가 20% 이하로 떨어졌다는 알림이 떴다. 저전력 모드로 설정하고 필요할 때만 화면을 봤지만, 배터리 소모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일단 이걸로 충전하자."
세준이 노트북을 열고 전원을 눌렀다. 노트북보다는 전력 소모도 적고 일어날 시간과 잘 시간을 알려주는 스마트폰이 더 쓸모가 있었다.
뜨등.
노트북 화면이 들어오며 작업을 하고 있던 엑셀창이 떴다. 거래처에 보내는 견적서로 회사에서 다 못 끝내 집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작업이었다.
딸깍.
세준이 쿨하게 엑셀창을 닫았다. 물론 저장 따위는 안 했다. 며칠 동안 매달려 작성한 견적서이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다.
"나 대신 누군가 하겠지."
대신 할 사람한테는 조금 미안했지만,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세준은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연결하고 폰을 충전했다. 노트북도 배터리 소모를 줄이기 저전력 모드를 켰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충전되는 동안 방울토마토 새싹을 바라봤다.
보고 또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한참 방울토마토 새싹을 보고 있을 때
뚝.뚝.뚝.
위에서 물이 떨어졌다.
"뭐야? 비 오나?"
세준은 자신이 말하고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몇몇 층을 제외하고는 탑은 항상 맑은 날씨다.
'설마 몬스터?!'
자신을 내려다보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을 몬스터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세준이 다급히 위를 쳐다봤다.
하지만
"응?!"
천장의 구멍에는 작은 흰색 토끼 한 마리가 구멍을 내려다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저것도 몬스터야?'
세준이 앞에 보이는 토끼가 포악한 몬스터는 아닐지 고민하고 있을 때
삐익!
토끼가 세준과 눈이 마주치자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며 구멍 아래로 뛰어내렸다.
폴짝.
"어?!"
위험해!
세준은 당황하며 떨어지는 몬스터인지도 모르는 토끼를 향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토끼는 긴 귀로 떨어지는 방향을 조절해 세준의 손을 피하며 양발로 세준의 어깨를 한 번 밟고는 바닥에 무사히 착지했다.
"..."
허공에 손을 뻗고 있으니 굉장히 무안했다.
그때
삐익.
토끼가 이족보행을 하며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떨리는 손가락으로 파를 가리켰다. 이족보행을 하는 걸 보면 그냥 토끼는 아니었다.
"먹어도 되냐고?"
삑!
토끼가 대답하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눈빛에는 제발 승낙해달라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자."
뿌드득.
세준이 파의 이파리를 통째로 꺾어 토끼에게 줬다.
삐!
아사삭.아사삭.
토끼는 세준이 건넨 파를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뿌드득.뿌드득.
토끼가 파를 먹는 동안 세준은 파의 이파리를 꺾었다. 꺾는 김에 다 꺾기로 했다.
세준은 앞으로 아침 6시에 한 번, 오후 2시에 한 번 파를 잘라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방울토마토 새싹이 해를 볼 수 있다.
아사삭.아사삭.
토끼는 아직도 열심히 파를 먹었다. 그래봤자 이제 손가락 두 마디 길이 정도를 먹었을 뿐이었다.
세준은 그런 토끼를 보다가 다시 방울토마토를 바라봤다.
"어?!"
(...' '...)
어느새 방울토마토 새싹의 끝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좀 있으면 잎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로롱.
옆에서 토끼의 자는 소리가 들렸다. 배가 부르자 졸린 모양이었다. 쌔근쌔근 자는 게 나름 귀여웠다.
그때
삐?
세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토끼가 화들짝 깼다.
푸드득.
토끼가 고개를 흔들며 잠을 털어냈다
그리고
삐익!
힘찬 울음과 함께 점프했다.
척.
토끼는 한 손에 파를 들고 가볍게 구멍 위로 올라갔다.
삐익.
토끼가 떠나기 전 세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먹기만 하고 도망치냐.'
배은망덕했지만, 세준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잠깐이었지만, 반가웠다.
세준이 손을 흔드는 동안 토끼는 떠났다.
"..."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정말 잠깐이었는데도 허전했다.
세준은 허전함을 뒤로 하고 다시 방울토마토 새싹을 바라봤다.
그 사이 새싹들은 힘을 내 이파리를 더 활짝 피워냈다.
"힘내. 얘들아."
잠시 후
(...Y...)
세준의 기다림을 알기라도 하듯이 방울토마토 새싹들이 하나둘 초록빛 이파리 두 장을 활짝 펴내기 시작했다. 여리지만, 생명력이 충만한 이파리가 꼬물꼬물 피어나는 모습은 나름 경이로웠다.
삐비빅.삐비빅.
[5월 15일 오후 10시]
저녁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하지만 오늘은 자고 싶지 않았다. 새싹들이 자라는 걸 계속 지켜보다 잠들고 싶었다.
"...!"
찰싹.찰싹.
세준은 뭔가가 자신의 볼을 가볍게 때리는 느낌에 일어났다.
"응? 뭐야?"
눈을 뜨니 어제 도망쳤던 토끼가 손으로 세준의 볼을 때리며 깨우고 있었다.
"으음. 몇 시지?"
세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5월 16일 오전 5시]
원래 일어나던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이었다.
"근데 너 그 복장은 뭐야?"
토끼는 귀가 빠져나올 수 있게 구멍이 난 밀짚모자를 쓰고 손에는 물조리개를 들고 있었다.
그때
삐이.
토끼 울음 소리가 하나 더 들려왔다.
"응?"
세준이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앞치마를 한 가녀린 토끼 하나가 더 있었다.
그리고
꾸벅.
세준과 눈이 마주친 토끼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조난 7일 차. 조금 일찍 일어났고 토끼 부부가 동굴에 합류했다.
4화. 불을 피우다.
4화. 불을 피우다.
세준은 빠르게 둘 사이에 흐르는 핑크빛 분위기를 파악했다.
"설마 너희 부부?"
삐익!
삐익!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하다 하다 이제 토끼 부부 사이에 끼다니...
대학교에서 공강 시간이 맞는 친구가 없어 커플 사이에 껴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정말 뻘쭘했지만 한 학기 동안 밥을 혼자 먹을 수는 없어서 함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밥을 먹는데 둘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싸운 것이다. 세준은 그날 밥을 먹다가 체했다.
'그리고 밥을 혼자 먹을 수 있는 능력을 얻었지.'
그 이후 다시는 커플 사이에 껴서 밥은 안 먹겠다고 결심했는데...
삐비비.
세준의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남편 토끼가 세준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폈다. 이곳에서 지내는 것을 허락받기 위한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가정을 지키려고 이렇게 애쓰는데...'
세준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리고 아직도 과거에 매여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걔네는 커플이었고 얘네는 부부잖아.'
세준은 부부의 심오한 세계를 몰랐다.
"그래. 여기서 지내. 대신 공짜는 아니야."
뭘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삐익!
삐익!
세준의 승낙에 부부 토끼가 당연하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굴 구석으로 달려가 굴을 파며 자신의 거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굴?"
세준은 토끼가 굴을 파는 것을 보면서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굴을 파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이! 위에 나갈 구멍이 있어서 저쪽만 생각했어!'
"토끼!"
삐이?
열심히 땅을 파고 있던 남편 토끼가 세준의 부름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땅굴을 파서 이곳에서 나갈 수 있어?"
삐이...
토끼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돼?"
슥슥.
토끼가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준이 있는 동굴을 그리고 그 밑을 깊게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쏴아아.
들고 있던 물조리개로 파인 곳에 물을 부었다. 세준의 동굴 밑이 물로 채워졌다.
"아. 밑이 다 물이구나."
삐익!
토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던 거 계속해."
삐익!
토끼가 다시 굴을 파러 갔다.
그때
삐비빅.삐비빅.
알람이 울렸다.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100%. 노트북의 방전되는 속도를 생각했을 때 한 번 정도는 더 완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5월 16일 오전 6시]
세준의 일과가 시작됐다.
먼저 방울토마토 새싹을 확인했다.
"얘들아, 수고했어."
(...T...)
이제는 초록 이파리들이 완전히 활짝 피어났다. 고구마밭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세준은 연못으로 가 세수를 하고 밭에 물을 줬다.
그리고
뿌드득.뿌드득.
방울토마토 새싹들이 해를 볼 수 있도록 파를 꺾어줬다. 파는 꺾으면 꺾을수록 줄기가 두꺼워지고 갈라지며 더많은 이파리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파 하나당 이파리가 3개 정도였는데 이제는 8개가 올라왔다.
"나중에는 얘네 꺾는 것도 일이겠는데?"
세준이 뜯어낸 이파리를 햇볕에 말렸다. 먼저 햇볕에 있던 이파리들은 이제 거의 수분이 없는 상태로 딱딱하게 굳었다.
아삭.
세준은 방금 꺾은 이파리를 먹으며 아침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제 8시간 후에 한 번 더 파를 꺾고 물을 주면 하루 작업은 끝이다.
일이 끝난 세준은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봤다.
그렇게 얼마나 하늘을 보고 있었을까.
우욱!우욱!
부우!부우!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세준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 토끼들이 판 굴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는 금세 끊어졌다.
"뭐야?"
세준이 다시 하늘을 보며 멍한 상태에 빠지려 할 때
우욱!우욱!
부우!부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숨이 헐떡거리는 소리였다.
'설마?!'
"이것들이!"
토끼 부부는 거처를 만들자마자 번식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후로 번식 활동은 몇 번 더 계속됐다.
몇 시간 후.
오후 2시가 되자 세준이 일어나 오후 작업을 하기 위해 일어났다.
그때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사이좋게 굴에서 나왔다.
그리고 후다닥 움직이며 세준이 하려는 농사일을 시작했다.
삐비비.
쏴아아.
남편 토끼가 흥얼거리며 물조리개로 농작물에 물을 줬고
뺘뱌뱌.
싹둑.싹둑.
부인 토끼가 남편 토끼의 노래에 화음을 넣으며 가위로 파를 잘랐다.
남편이 노래하고 아내가 따라 부른다. 부창부수(夫唱婦隨). 딱 그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세준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뭐냐 저것들..."
알고 보니 남편 토끼가 들고 있는 물조리개와 부인 토끼가 입고 있던 앞치마는 아이템이었다.
물조리개에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 물이 나왔다. 그리고 앞치마는 공간 마법이 걸려있는지 아내 토끼가 가위나 삽 같은 농기구들이 필요할 때마다 앞치마에서 꺼냈다.
좀 부러웠다. 저런 장비들이 있다니. 자신은 손으로 파고 뜯고 물도 퍼다 날랐는데.
토끼들이 일하는 것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은 잘 갔다.
하지만 금세 심심해졌다. 그때 옆에 놓아둔 페트병을 통과한 빛이 굴절되며 강한 빛으로 모이는 게 보였다.
그걸 보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예전에 TV에서 생존 전문가들이 나와서 하는 방송이었는데 거기서 페트병에 물을 담아서 불을 피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불이나 피워볼까?'
잘 말려진 파 이파리에 불을 붙이면 잘 탈 것 같았다.
"좋아."
세준이 일어나 잘 마른 파 이파리들을 모았다.
그리고
부욱.부욱.
불이 잘 붙을 수 있도록 이파리를 가늘게 찢어 가운데 잘 모아줬다.
그리고 세준이 물이 담긴 페트병을 이용해 돋보기처럼 빛을 한 점에 모아 파 이파리에 쏘이기 시작했다.
삐이?
삐?
세준이 같은 자세로 20분 이상 움지이지 않자 토끼 부부가 다가왔다. 농장 주인이 뭘 하는 건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꾸벅꾸벅
10분 정도 지나자 토끼들은 지루했는지 졸기 시작했다.
그때
모락모락.
잘게 찢은 파 이파리 더미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불씨가 만들어졌다.
'된다!'
세준이 더욱더 집중해 페트병으로 빛을 불씨에 비췄다. 불씨가 강해지며 연기가 더 굵어졌다.
"후우! 후우!"
세준이 불씨를 품은 잘게 찢은 이파리를 들어 조심스럽게 바람을 불어 넣었다.
토끼 부부가 바람을 불어 넣는 소리에 잠에서 깨 세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삐이!
삐익!
연기가 나는 파 이라피를 보면서 경악했다.
그렇게 얼마나 바람을 불어넣었을까.
활활.
불이 일어나며 불길을 토해냈다.
"흐흐흐! 됐다!"
삐익.
삐이.
토끼가 부부가 세준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토끼들의 아이템 중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아이템은 없었다.
불이 생기자 세준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파를 구워 먹는 거였다. 그냥 아무거나 따듯한 거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말린 파는 장작으로 쓸 정도로 딱딱해져서 먹기 어려웠고 오늘 뜯어낸 파를 구웠다.
파의 겉이 까맣게 타자 세준이 끝부분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앗! 뜨거! 호오."
손가락을 호호 불며 다른 이파리 위에 올려 까맣게 탄 파의 껍질을 벗겨냈다.
구워진 파를 위로 들어 올려 껍질을 깐 부분을 입에 넣었다.
우적.
'...달다!'
엄청난 맛에 세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입안에서 설탕이 날뛰었다. 엄청난 단맛이 폭발했다.
세준이 자신이 먹을 파 몇 개를 불길에 던져놓고 허겁지겁 파를 먹기 시작했다.
삐익?
세준의 반응에 남편 토끼가 용기 있게 파를 불 속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감동한 표정으로 파를 까서 먹었다. 셋 다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열심히 먹었다.
조난 7일 차.
세준은 처음으로 따뜻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잠들었다.
***
삐비빅.삐비빅.
[5월 19일 오전 6시]
조난 10일 차.
"읏차."
세준이 오늘도 활기차게 일어났다.
삐익!
삐익!
먼저 일어난 토끼 부부가 세준에게 인사했다.
"그래. 좋은 아침."
어푸!어푸!
세준은 연못가로 가서 세수를 하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삐이.
아내 토끼가 구워진 파를 가져왔다.
"고마워."
세준이 음식을 받으며 말했다.
우적우적.
구운 파를 먹으면서 농작물이 심어진 밭을 봤다. 이미 파는 다 베여 있고 땅도 축축이 적셔져 있었다. 일찍 일어난 토끼들이 이미 일을 끝내 놨다.
거기다 아내 토끼가 식사까지 만들어줬다. 알아서 해주니까 너무 좋다.
하지만
"..."
가뜩이나 할 일이 없던 곳에서 할 일이 더 없어졌다.
"좀 움직여야지."
오늘은 미뤄뒀던 방울토마토를 옮겨심기를 하기로 했다. 너무 붙어서 자라면 영양분을 제대로 흡수할 수 없기에 슬슬 옮겨심기를 할 때가 됐다.
퍽.퍽.
세준이 손으로 흙을 파고 방울토마토를 옮겨 심을 자리를 만들고
푹.
남편 토끼가 숟가락 크기의 한 삽으로 하나씩 조심스럽게 퍼서 옮겼다. 옮기는 김에 나중에 심은 새싹 6개도 함께 옮겼다.
총 58개의 싹을 한 줄에 10개씩 6줄을 만들었다.
"후우."
줄을 맞춰 가지런히 잘 심어진 싹을 보니 또 뿌듯함이 밀려왔다. 요즘 별거 아닌 거에 쉽게 뿌듯해지는 세준이었다.
세준은 방울토마토를 옮겨 심는 일이 끝나자 바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횃불 만들기.
오늘 자른 이파리를 여러 장 엮어 손잡이를 만들고 끝부분에 마른 이파리를 잘게 찢어 수백 번 감았다.
말린 파 이파리는 꽤 오랫동안 불을 유지해서 횃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불 관리도 따로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파 이파리는 오랫동안 탔다.
평소라면 바로 때려치울 정도로 지루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몸을 사용해,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만든다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투자해 횃불을 하나 만드니 잘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삐비빅.삐비빅.
[5월 20일 오전 6시]
조난 11일 차 아침이 밝았다.
"읏차!"
삐익!
삐익!
"그래. 좋은 아침."
일어나자마자 토끼 부부와 아침 인사를 하고 세수를 하러 연못으로 갔다.
연못은 어제와는 다르게 환해져 있었다. 항상 세수할 때 어두운 것이 불편했던 세준이 가장 먼저 연못에 횃불을 설치했다.
"좋다. 흐흐흐."
세준이 잘 타는 횃불을 보면서 세수를 하기 위해 연못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그때
첨벙!
연못에서 갑자기 물고기 하나가 튀어나와 세준의 얼굴을 물려고 했다.
"억?!"
세준이 서둘러 몸을 뒤로 젖혔다. 물고기의 몸에서 나는 비릿한 물 냄새가 코끝을 스쳐 갔다. 정말 간신히 피했다.
파닥파닥.
땅으로 떨어진 물고기가 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뭐...뭐야?!"
당황했던 세준이 파닥거리는 물고기에게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다.
몸에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빛을 띠는 줄무늬가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코가 잘릴 뻔했다.
퍽!
세준이 물고기가 도망치지 못하게 일단 연못 반대쪽으로 차서 밀어냈다.
그리고 연못 안을 살펴봤다.
"오!"
안에는 방금 세준을 공격한 물고기와 같은 종이 몇 마리 더 헤엄치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세준이 이유를 생각하는 사이
파닥파닥.
물고기가 몸을 움직이며 연못으로 도망가려 애쓰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세준이 서둘러 땅에 떨어진 물고기를 잡았다.
조난 11일 차. 드디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5화. 열매가 열리다.
5화. 열매가 열리다.
세준의 손에 꽉 잡힌 물고기가 몸부림치며 세준을 공격하기 위해 입을 쩌억 벌렸다 강하게 다물었다.
딱!딱!
날카로운 이빨이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럴 때마다 세준은 더욱더 강하게 붙잡았다. 잘못해서 물리기라도 하면 손가락 하나는 그냥 뎅강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세준이 물고기를 꽉 붙잡고 천장 구멍의 아래, 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강렬히 저항하던 물고기는 점점 호흡이 가빠지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불가에 도착한 세준은 신중한 움직임으로 바닥에 파 이파리를 한 장 깔았다. 깔아둔 이파리 위에 물고기를 조심스럽게 놓고 다시 파 이파리 한 장을 덮었다.
그리고
부욱.
파 이파리를 손가락 굵기 정도로 찢어 생선을 포갠 파 이파리 두 장을 십자 모양으로 감싸고 묶었다.
"맛있어져라."
세준이 정성스럽게 파 이파리로 싼 물고기를 불구덩이 한가운데에 넣었다.
그리고
"······"
기다렸다.
한참을 지켜봤다.
킁킁.
"아 향기롭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증기에 녹아든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주변으로 퍼지며 냄새가 동굴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엄마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으면 주방에서부터 퍼진 음식 냄새가 집 전체를 점령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들어 왔을 때 집 안 가득한 냄새가 내가 좋아하는 반찬일 때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때는 먹기 전에 기다리는 시간도 행복했던 것 같다.
꼬르르륵.
세준의 생각을 방해하는 소리가 났다. 배가 고팠지만, 참았다. 자신의 빈 속을 맛있는 것으로 채우고 싶다는 일념.
꼬르르륵.
"조금만 참아. 진짜 맛있는 거 넣어줄게."
세준이 자신의 배를 달래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최고의 맛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냄새가 한층 짙어지고 진득해졌을 때
"됐어! 이제 못 참아!"
세준이 파 이파리에 싸서 구운 물고기를 말라서 딱딱해진 파 이파리를 이용해 불 밖으로 꺼냈다.
조심스럽게 파 이파리를 묶었던 줄을 풀었다.
화악.
줄을 풀고 파 이파리를 걷어내자 파 향과 섞인 생선의 농밀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와아!"
촉촉한 윤기가 흐르는 생선의 자태에 세준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왕.
세준이 생선을 반으로 접어 삐져나온 살점을 뜯어 입에 넣었다.
"으음...!"
잘 구워졌다. 비린맛은 전혀 없고 씹자마자 느껴지는 탱글탱글함과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으로 퍼지는 담백함까지.
'미쳤다!!!'
우걱우걱.
세준이 정신없이 생선을 먹어 치웠다.
"헉! 언제 다 먹은 거지?"
세준이 어느새 뼈만 남은 생선을 보며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그때
삐이...
삐...
옆에서 절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절망하는 건 세준만이 아니었다.
"응?"
세준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자 토끼 부부가 뼈만 남은 생선을 보며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무슨 토끼가 생선을 먹어!
하지만 생각해보면 토끼 부부는 세준처럼 파를 구워 먹는 화식을 더 선호했다.
"너희 육식도 해?
세준이 묻자
삐이!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이 토끼 부부가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세준 혼자 다 먹은 것에 삐진 것 같았다.
"미안. 너희가 고기도 먹는지 몰랐지..."
세준이 머리를 긁적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연못으로 갔다. 물고기를 잡아볼 생각이었다. 연못 안에는 아까보다 물고기 숫자가 더 늘어나 있었다.
"근데 얘네들 어디서 오는 거지?"
세준이 횃불을 들고 연못을 살펴보니 연못의 구석에 손 한 뼘 정도 되는 크기의 구멍 하나가 보였다.
"응?"
그때 구멍으로 들어오는 물고기 하나.
"아 저 구멍으로 들어오는구나."
횃불의 빛에 이끌려 오는 것 같았다. 세준이 드디어 물고기가 어디서 오는 건지 알게 됐다.
연못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횃불을 연못에 가까이 가져간 세준.
첨벙!
물고기가 횃불을 향해 날아올라 입을 벌렸다.
"어?!"
휙.
세준이 급하게 횃불을 들어 올려 물고기를 피하자
딱!
물고기가 허공을 씹었다.
첨벙
사냥에 실패한 물고기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뭐지?"
세준이 조심스럽게 횃불을 다시 물 가까이 가져가자
첨벙!첨벙!
물고기들이 횃불을 사냥하기 위해 뛰어올랐다.
휙.
세준이 횃불을 들어 올려 피하자
딱!딱!
첨벙.첨벙.
이번에도 사냥에 실패한 물고기들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하."
세준이 물고기들이 뭐에 반응하는지 깨달았다. 물고기들은 수면 가까이에서 뭔가가 움직이면 먹이인 줄 알고 뛰어오른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들이 튀어 오르는지 알았으니 잡는 건 쉬웠다.
세준이 횃불을 연못 가까이에서 흔들었다.
첨벙!
물고기 한 마리가 입을 벌리며 횃불을 향해 날아올랐다.
'온다!'
세준이 물고기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리고 물고기가 최고 높이에 도달하고 다시 추락하려 할 때
'지금이다!'
퍽!
세준이 떠오른 물고기를 향해 횃불을 휘둘러 연못 바깥 방향으로 쳐냈다. 땅으로 추락한 물고기가 숨을 쉬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사이
퍽!퍽!
세준은 물고기 두 마리를 더 땅으로 보내버렸다.
호흡이 멈춘 물고기 3마리를 가지고 불가로 다가가자
삐이익!
삐삑!
토끼 부부가 언제 삐졌다는 듯이 세준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환호성을 질렀다.
"엣헴."
세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 순간만큼은 영웅이 된 느낌이었다.
삐익!
삐!
남편 토끼가 파 이파리를 가져오며 요리 보조를 자처했다.
부욱.부욱.
옆에서는 부인 토끼가 파 이파리를 잘게 찢어 줄을 만들었다.
"됐다."
세준이 3번째 물고기를 불에 넣으면서 말했다. 물고기를 파 이파리로 포개고 묶기만 하면 끝나기에 요리는 금방이었다.
그리고 다시 행복한 기다림.
조난 11일 차. 세준과 토끼 부부는 생선으로 배를 채우고 잠에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