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삐비빅.삐비빅.
[6월 19일 오전 6시]
조난 41일 차 아침이 됐다.
"읏차!"
잠에서 일어난 세준이 연못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연못 옆에는 예전에는 없던 작은 연못이 하나 더 있었다.
물고기의 공격을 피하고자 연못 옆에 작은 물줄기를 연결해 만든 수돗가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세수를 하고 물을 떴다.
어푸!어푸!
세준이 세수를 하고 밭으로 갔다. 밭에는 세준의 지정석인 바위를 중심으로 앞에는 파가, 왼쪽에는 세준의 무릎 정도 높이까지 자란 방울토마토가 그리고 오른쪽에는 고구마의 싹이 보였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구마의 싹이 났다. 세준이 조난 첫날 심은 모든 농작물이 드디어 탑에서 안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뿌듯하구나."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조난 32일 차에 다시 한번 블루문이 나타났다. 그걸로 세준은 자신이 있는 층의 블루문 주기가 30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며칠 전 경사가 있었다. 부인 토끼가 6마리의 새끼를 낳으며 식구가 늘어났다.
뺘아!
뺘!
굴속에서 아기 토끼들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빠 토끼가 열심히 파 이파리를 날랐다.
"아침 준비해야지."
바쁜 토끼 부부를 보니 그들을 돕고 싶었다.
뿌드득.뿌드득.
파 이파리를 꺾어 10개는 불에 넣고 나머지는 땅에 깔아 말렸다.
그리고 연못으로 다가가 물 위에서 횃불을 좌우로 흔들었다.
첨벙!첨벙!
횃불을 사냥하기 위해 날아오른 물고기. 세준이 그런 물고기들을 향해 횃불을 휘둘렀다.
퍼벅!
오늘은 운이 좋게도 일타이피였다.
파닥파닥.
물고기 두 마리를 파 이파리로 덮어 줄기로 묶고 불에 넣었다.
그리고 그사이 잘 구워진 파를 꺼내 먹었다.
"따듯한 게 들어오니 속이 풀어지네."
그렇게 구운 파를 먹고 세준은 농작물에 물을 주고 잠깐 멍을 때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킁킁.
다 익었는지 맛있는 냄새가 퍼져오기 시작했다.
툭.툭.
세준이 불 속에서 물고기를 꺼내 이파리를 묶었던 줄을 끊기 시작했다. 때마침 남편 토끼가 터덜터덜 굴에서 걸어 나왔다.
"토끼야!"
세준이 아빠 토끼를 불렀다.
삐이...
남편 토끼는 육아가 힘들었는지 대답에 힘이 없었다.
"이거 부인이랑 같이 먹어."
삐이.
감동하는 남편 토끼. 남편 토끼가 서둘러 생선을 가지고 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뺘!
뺘!
간신히 재운 새끼들이 깨어나면서 토끼 부부는 한참 뒤에야 물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
삐비빅.삐비빅.
[6월 19일 오전 5시]
조난 50일 차. 스마트폰이 알림을 울리고 사망했다.
다행이라면 토끼들은 정확히 오전 5시에 일어나고 오후 7시에 잔다는 것. 토끼들의 생활 리듬을 따르면 계속 떠 있는 해로 인해 시차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수고했다."
세준이 사망한 스마트폰을 이미 사망한 노트북과 함께 가방에 넣었다.
그때
삐익!!
삑!
이제 어느 정도 육아가 익숙해졌는지 토끼 부부가 굴에서 나와 인사를 했다.
"응. 좋은 아침."
쏴아아.
싹둑.싹둑.
남편 토끼가 물조리개로 농작물에 물을 주고 아내 토끼가 파 이파리를 자르는 동안
퍽!
퍽!
세준은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잡은 물고기를 들고 불가로 가서 이파리로 감싸고 불에 넣자 부인 토끼가 구운 파를 꺼내 파 이파리에 이쁘게 담아 세준에게 주고 남편 토끼와 함께 굴로 들어갔다.
물고기가 익는 동안 새끼들의 아침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냠냠.
그렇게 파를 먹으며 허기를 채우고 있을 때
"어?!"
세준의 눈에 방울토마토의 끝에 핀 노란 꽃 한 송이가 보였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벌이나 바람이 없으면 수분이 안 된다고 했다.
여기 동굴은 바람은 불지만, 약했다. 세준은 확실하게 수분을 시키기 위해 생선을 먹고 나온 가시로 조심스럽게 꽃을 문질러줬다.
'돼라. 돼라.'
세준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꽃을 인공수분 시켰다.
***
"읏차!"
세준이 일어나자마자 동굴의 바위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슥.
물고기의 가시를 이용해서 바위벽에 획을 하나 그었다.
옆에는 2개의 바를 정(正)이 새겨져 있었고 윗줄에는 10개가 새겨져 있었다.
조난 61일 차가 됐다. 스마트폰이 사라진 이후로 이렇게 날짜를 기록하고 있었다.
'벌써 61일째라나...'
세준의 기분이 가라앉으려 할 때 동굴이 요란스러워졌다.
삐야!
삐야!
뺘!
아침이 되자 부모 토끼를 따라서 굴에서 새끼 토끼들이 줄지어 나왔다.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세준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 간다."
요즘 세준이 중간중간 새끼 토끼들을 봐줬다. 대단한 건 아니고 위험한 데로 가지 못하게 하는 정도.
세준이 새끼 토끼들을 감시하는 동안 남편 토끼는 밭에 물을 주고 아내 토끼는 이파리를 잘라 아침을 준비했다.
새끼 토끼들은 주면 주는 대로 잘 먹었기에 식사는 평화로웠다. 식사가 끝나자 토끼 부부는 새끼들을 데리고 다시 굴로 들어갔다.
세준은 세수를 하고 방울토마토밭으로 갔다. 방울토마토밭은 꽃이 하나둘 피어나더니 이제는 꽃밭이 됐다.
그리고 세준은 방울토마토꽃이 달린 가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돼라. 돼라."
이제는 너무 꽃이 많아졌기에 하나씩 수분시키지 않고 가지를 가볍게 흔들면서 수분의 주문을 외웠다.
그때
"어?"
떨어진 꽃잎 사이로 아주 조그맣게 맺힌, 콩알보다 작은 녹색 방울토마토가 보였다.
조난 61일 차, 드디어 열매가 열렸다.
블루문 하루 전날이었다.
6화. 각성하다.
6화. 각성하다.
이제 막 자리를 잡은 방울토마토를 보며 세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방울토마토 나무들도 살펴봤다.
"흐흐흐. 있다."
총 5개의 열매가 자리를 잡았다. 앞으로 더 많이 열릴 열매를 생각하니 세준은 흐뭇해졌다.
앞으로 밭을 가득 채울 방울토마토들을 상상하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그 쬐그만 게 뭐라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오후가 되자 동굴 안은 분주해졌다.
삐익!
삐이!
토끼 부부들은 자신의 굴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세준은 토끼 부부의 행동을 보면서 곧 블루문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세준도 서둘러 움직였다. 몬스터들이 올 것을 대비해 불을 끄고 냄새가 나는 것들은 땅에 묻거나 동굴 구석으로 옮겨 최대한 냄새를 지웠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햇빛이 푸른색으로 변하며 세준이 3번째 블루문을 맞이했다.
크아아아!
키아아!
몬스터들의 포효가 들려왔다.
'아무리 들어도 익숙하지가 않아.'
포효를 들을 때마다 심장은 요동쳤고 온몸에는 쭈뼛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이번 블루문도 잘 넘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쿵.쿵.
몬스터 하나가 세준이 있는 동굴 위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킁킁!
킁킁!
바닥에 난 구멍을 향해 붉은 털을 가진 몬스터가 코를 박고 본격적으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맙소사! 뭔가 알아차린 건가?'
세준이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고 몬스터가 떠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킁킁!킁킁!
몬스터는 계속해서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그렇게 얼마나 냄새를 맡았을까.
키아아악!
멀리서 몬스터의 포효가 들리자
쿠어어엉!
쿵!쿵!
붉은 털 몬스터는 포효를 지르고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
찰싹!찰싹!
세준은 남편 토끼의 찰진 싸대기에 깨어났다.
삐익!
남편 토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준을 쳐다봤다.
"으음... 내가 언제 잤지?"
설마 기절한 건가?
그러고 보니 강한 몬스터의 포효를 듣고 기절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오들오들.
"으...왜 이렇게 춥지?"
몸이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기절까지 했다. 거기다 동굴의 끝은 온도가 많이 낮다. 그런 곳에서 잤으니 몸이 좋을 리 없었다. 몸살에 걸린 것 같았다.
슥.
세준은 힘겹게 날짜를 기록하는 벽에 다가가 한 줄을 그었다.
그리고
'불이 필요해.'
세준은 몸을 떨며 불가로 갔다. 일단 다시 불을 피워야 했다.
오들오들.
세준이 떨리는 손으로 생수병을 들고 마른 이파리가 모인 곳에 햇빛을 비추며 불씨를 만들었다.
30분 후.
"후우. 후우."
화르륵.
세준은 간신히 만들어낸 불씨로 불을 지피고 불가에 쪼그리고 앉아 파를 구웠다.
그리고
우적우적.
구운 파를 열심히 먹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잘 먹는거 밖에 없어.'
세준은 파를 먹고 기운이 좀 돌아오자 연못으로 가서 물고기 5마리를 잡아 요리했다.
그렇게 세준이 먹는 것으로 몸살을 이겨내고 있을 때
삐익!
남편 토끼가 세준을 불렀다.
"왜...?"
삐익!
남편 토끼가 가리키는 곳에는 어제까지는 콩보다 작았던 방울토마토가 골프공만 하게 자라 있었다.
"근데 이거 색이 왜 이렇지?"
방울토마토의 색은 푸르스름했다.
"익었나?"
하룻밤 사이에 익을 리는 없지만, 크기가 너무 컸기에 세준은 방울토마토를 만져봤다.
툭.
"어?!"
방울토마토가 완전히 영글었는지 조금의 힘에도 쉽게 떨어졌다.
"와."
거대한 푸른색 방울토마토를 보면서 세준이 신기해하고 있을 때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열매를 수확하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눈앞에 투명한 푸른창에 글자가 나타났다.
"어? 이건?!"
메시지창이다.
[탑의 관리인이 놀라운 업적을 달성한 당신을 바라봅니다.]
[탑의 관리인이 당신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탑의 관리인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갑자기 눈살은 왜 찌푸리는데?'
[탑의 관리인은 당신이 정식으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탑의 관리인은 자신의 실책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뭐?! 실책?"
실책이라니?! 내가 여기 온 게 실책이라고?
"그럼 나 내보내 줘!"
[탑의 관리인이 당신을 죽여서 증거를 인멸할지 고민에빠집니다.]
"저기요...저 안 나가도 되는데..."
무슨 업적도 세웠다면서요? 살려주세요.
[탑의 관리인이 당신을 각성시킵니다.]
[각성하셨습니다.]
"오!"
드디어 각성했다.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은 잊어주기로 했다. 지금까지 생존이 먼저였기에 깜빡하고 있었지만, 세준이 탑에 온 목적은 각성을 위해서였다.
"티켓값 1억 5천만 원 굳었다. 흐흐흐."
이제 탑만 오르면....
[탑의 관리인이 당신의 직업을 정해줍니다.]
[탑농부(F)가 되셨습니다.]
"엥? 농부?"
[직업 특성으로 잔병치레하지 않습니다.]
[직업 특성으로 자연과 친해집니다.]
[직업 특성으로 농작물을 수확하면 경험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상태창."
아닐 거야. 뭔가 있을 거야. 세준은 제발 믿고 싶었다. 세준이 간절한 마음으로 상태창을 불렀다.
하지만
[박세준 Lv. 1]
재능 : 무난한 범재
스탯 : 힘(1) 체력(1) 민첩(1) 마력(1)
직업 : 탑농부(F)
스킬 : 없음.
"이게...내 상태창..."
재능에 따라 기본 스탯과 레벨업 때 스탯 상승치가 달라진다. 하지만 세준의 재능은 무난한 범재. 그냥 어중이떠중이라는 말이었다.
상태창 어디 하나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복권은 긁지 않았을 때가 더 좋다. 그땐 망상이라도 하지···
"하아···내가 범재라니...직업이 농부라니..."
직업이 뭐예요?
탑농부입니다.
자신의 직업을 누군가에게 대답할 생각만 해도 쪽팔렸다.
"그냥 귀농할까?"
어차피 여기서 살아나가도 탑에서 큰돈 벌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잘 있어. 세라야. 운명은 우리에게 스타와 팬 이상의 관계는 허락하지 않나 봐.'
세준은 눈물을 머금고 세라의 팬으로 남기로 했다.
그리고 손에 든 푸른색 방울토마토를 살펴봤다.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마력의 방울토마토]
탑 안에서 자란 방울토마토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 맛있습니다.
거기에 블루문의 기운을 담아 맛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섭취 시 마력이 영구적으로 0.05 상승합니다.
재배자 : 탑농부 박세준
유통기한 : 30일
등급 : E
"어?!"
미약하지만, 스탯을 올려주는 아이템이었다.
'이건 나중에 팔면 돈 좀 되겠는데?'
그렇게 세준이 새로운 희망을 품기 시작할 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
[퀘스트 :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열매를 탑의 관리자에게 바쳐라.]
보상 : 직업 스킬 1개
거절 시 : 죽음
"뭐...?"
그냥 달라고 해! 괜히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 말고!
말이 퀘스트지 협박이었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 했냐?!
내 꿈도, 내 방울토마토도.
억울했지만, 세준이 선택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여기요."
세준의 말과 함께 세준의 손 위에 있던 푸른색 방울토마토가 사라졌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직업 스킬 - 씨뿌리기 Lv. 1를 획득하셨습니다.]
"장난하냐!"
무슨 씨뿌리기에 스킬까지 필요해?!
세준이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이후로 탑의 관리자는 말이 없었다.
"에휴."
세준은 한숨을 쉬며 받은 스킬을 살펴봤다.
[직업스킬 - 씨뿌리기 Lv. 1]
-씨앗을 심었을 때 발아할 확률이 미세하게 상승한다.
"..."
그래도 잔병치레하지 않는다는 직업 특성 덕분인지 몸살은 사라졌다.
조난 61일 차, 각성을 하고 탑농부라는 직업을 얻었다.
***
번쩍.
눈이 떠진 세준은 일어나자마자 동굴 벽으로 다가갔다.
슥.
생선 가시로 벽에 15번째 正를 완성했다.
동굴에 온 지 75일이 됐다.
어푸!어푸!
세준이 작은 연못에서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휙휙.
큰 연못에서 왼손으로 횃불을 잡고 좌우로 흔들자.
첨벙!
횃불을 발견한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각성을 하자 물고기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머리 위에 쓰여 있는 이름.
[피라니아]
퍽!
오른손에 쥔 몽둥이로 피라니아를 후려 갈렸다. 몽둥이는 잘 말려 딱딱해진 파 이파리를 여러 겹 포개 줄로 묶어서 만들었다.
퍽!
퍽!
몽둥이에 맞은 피라니아들이 땅에서 힘차게 퍼덕거렸다. 세준은 그렇게 5마리의 피라니아를 잡았다. 새끼 토끼들 때문에 입이 늘어나면서 잡아야 하는 피라니아 숫자가 늘어났다.
잠시 후.
[피라니아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2를 획득했습니다.]
...
..
.
피라니아들이 호흡을 못해 죽자 경험치를 획득했다. 각성하면서 경험치를 얻을 수 있게 된 세준이였다. 덕분에 ㄹ 한 번 해서 2레벨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피라니아를 사냥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경험치보다 생존이 훨씬 더 중요하다.
혹시라도 피라니아의 씨가 마르면 곤란해지는 건 세준과 토끼들이다. 그래서 딱 필요한 만큼만 잡았다.
세준이 피라니아를 잡으며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토끼 부부들도 아침 농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달라진 게 있었다.
삐야!
삐야!
새끼 토끼들이 부모를 따라 농사를 돕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은 파 이파리를 나르는 정도였지만, 제법 도움이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각성을 하면서 토끼들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토끼들의 머리 위 이름.
[농부 백토끼]
이게 토끼들의 정체였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농장을 잃고 떠돌다가 세준이 만든 밭을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 같았다.
그때 고소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피라니아 요리가 완성됐다.
"아침 먹자!"
우다다다.
먹성이 좋은 새끼 토끼들이 들고 있던 파 이파리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아침을 배불리 먹은 새끼 토끼들은 굴로 들어가서 낮잠을 잤다. 아직 클 시기라서 그런지 잠이 많았다.
"좋아. 그럼 수확을 해볼까."
삐익!
삐이!
세준의 말에 토끼 부부가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었다.
"어디 보자"
세준이 방울토마토밭으로 가서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살펴봤다.
'좋아 잘 익었어.'
톡.
세준이 잘 익은 방울토마토 하나를 땄다.
[잘 익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획득했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마력의 방울토마토?"
[마력의 방울토마토]
탑 안에서 자란 방울토마토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 맛있습니다.
섭취 시 몸 안의 지방 10g을 분해해 10분간 마력을 0.1 상승시킵니다.
한 시간 안에 최대 10개까지 효과가 중복 적용됩니다.
비각성자가 섭취 시 지방 10g을 분해해 몸에 활력을 줍니다.
재배자 : 탑농부 박세준
유통기한 : 30일
등급 : E
"오!"
이번에도 아이템이었다. 거기다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먹는 것만으로 마력을 최대 1까지 올려 줄 수 있다.
툭.툭.
세준이 열심히 방울토마토 수확을 시작했다.
중간에 실수로 익지 않은 방울토마토를 따자
[익지 않은 방울토마토를 획득하셨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상승하지 않습니다.]
[경험치 7을 획득했습니다.]
경험치도 줄어들었고 직업 경험치도 상승하지 않았다.
거기다 방울토마토가 아이템이 아닌 일반 방울토마토가 됐다.
이후로 세준은 신중하게 방울토마토를 수확했다.
그리고
[잘 익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획득했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
..
.
[레벨업 하셨습니다.]
[보너스 스탯 1을 획득했습니다.]
마력의 방울토마토 53개를 수확하며 두 번의 레벨업은 덤이었다.
덕분에 세준은 4레벨이 됐다.
7화. 반항하다.
7화. 반항하다.
세준이 수확한 방울토마토를 씻지도 않고 입에 넣었다. 이곳은 미세먼지도, 공해도 없기에 굳이 씻을 필요가 없었다.
뽀득.
붉게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씹자
촤악!
방울토마토의 껍질이 갈라지며 안의 즙이 스프레이처럼 입안을 적셨다.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완벽한 맛의 조화.
팡!팡!
새콤 폭탄과 달콤 폭탄이 축제의 불꽃놀이처럼 교대로 폭발하며 입안을 어지럽혔다.
"와아."
세준의 입에서는 그저 탄성만이 나왔다.
오물오물.
세준은 그저 말없이 방울토마토를 씹으며 그 맛이 사라질 때까지 음미했다.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섭취하셨습니다.]
[지방 10g을 분해해 10분간 마력을 0.1 상승시킵니다.]
마력이 증가했다는 메시지가 나왔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뽀득.
세준은 다시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축제를 이어갔다.
삐익?
정신없이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는 세준의 반응을 본 남편 토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울토마토 하나를 들었다.
'이게 그렇게 맛있나?'
토끼에게는 방울토마토가 상당히 컸기에 세준처럼 한입에 넣을 수 없었다.
뽁.
그래서 방울토마토에 이를 박아 넣었다. 그러자 구멍이 난 방울토마토의 껍질을 통해서 즙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아까운 음식이!'
쭈우웁.
남편 토끼가 당황하며 방울토마토즙을 흘리지 않게 빨아 먹었다. 음식을 흘리는 건 죄악이었다.
"...!"
'이 맛은?!'
쭙쭙쭙.
남편 토끼가 홀린 듯이 방울토마토를 빨기 시작했다.
그리고
삐야?
뺘?
아빠의 모습을 보고는 새끼 토끼들이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안아 들고 빨아대기 시작했다.
쭙쭙쭙.
쭙쭙쭙.
동굴 안은 한동안 쭙쭙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
아내 토끼를 빼고 단체로 방울토마토를 먹은 죄는 컸다. 그리고 그 죄는 남편 토끼에게 집중됐다.
삐이~삐이~
남편 토끼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삐진 아내 토끼에게 다가가 몸을 비비며 애교를 피웠다. 하지만 아내 토끼는 고개를 쌩하니 돌리며 남편 토끼의 애교를 철저히 무시했다.
삐이...
남편 토끼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세준을 바라봤다. 도와달라는 사인이었다.
'힘내라.'
커플 사이에 껴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 세준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파이팅 자세로 남편 토끼를 응원하는 것으로 거절했다.
즐거운 식사 시간.
점심은 피라니아와 방울토마토 그리고 파 구이. 메뉴 하나가 늘었을 뿐인데 식사가 훨씬 풍요로워진 느낌이었다.
아내 토끼가 이파리 접시 위에 음식들을 골고루 올려 각자의 자리에 놓았다.
삐?
남편 토끼가 자신의 접시 위에는 구운 파만 올려져 있자 아내 토끼에게 조용히 항의했다.
삑!!!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대충 '그냥 처먹어!!!'라고 말한 거 같다. 남편 토끼는 결국 아내 토끼의 화를 푸는 데 실패했다.
삐...
'불쌍한 녀석.'
상심하는 남편 토끼에게 세준이 아내 토끼 몰래 자신의 것을 덜어줬다.
삐익.
남편 토끼가 세준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내고는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동굴 구석에서 피라니아 가시에 묻은 살점을 뜯고 있을 때
삐익?
남편 토끼가 우는 줄 알고 다가온 아내 토끼와 눈이 딱 마주쳤다.
"...!"
"...!"
부부답게 눈으로 대화가 오갔다.
너 그거 어디서 났어?
조기.
남편 토끼가 눈으로 세준을 가리켰다.
'배신자!'
그걸 바로 일러바치다니!
잠시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둘은 서로 부비부비를 하고 난리가 났다.
역시 커플 싸움에는 조금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얻은 세준이였다.
***
점심을 먹은 세준은 다시 방울토마토를 따기 시작했다. 몇 시간 사이 완전히 익은 방울토마토들이 생겼다.
[잘 익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획득했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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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딴 방울토마토는 67개. 오전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을 수확했다. 레벨업도 한 번 더 해서 5레벨이 됐다.
보너스 스탯으로는 힘과 체력을 2개씩 올렸다. 농사에는 힘과 체력이 가장 중요하니까.
수확한 방울토마토는 동굴 구석의 서늘한 곳에 저장고를 만들어 보관했다. 저장고는 동굴 구석의 서늘한 곳에 구덩이를 파고 흙이 들어가지 않게 파 이파리를 촘촘히 깔아 만들었다.
세준이 방울토마토를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옮기고
삐익!
아빠 토끼가 방울토마토 2개를 옆구리에 끼고 옮겼다.
그리고
삐야!
삐야!
그런 아빠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새끼 토끼들이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안아 들고 저장고로 옮겼다.
"하나, 둘, 셋...백다섯 개."
총 수확한 방울토마토는 120개지만 15개는 먹고 남은 건 105개였다.
수북이 쌓여있는 방울토마토를 보니 또 뿌듯함이 밀려왔다.
"흐흐흐."
세준이 실실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니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잘 준비를 위해 놀려는 새끼 토끼들을 붙잡아 굴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오늘도 끝나가네."
토끼들을 보면서 세준도 잘 준비를 했다.
툭툭.
흙을 모아 베개를 만들고
퍽! 퍽!
흙을 두드려 누울 자리를 만들고 흙이 올라오지 않게 햇빛에 말려둔 파 이파리를 바닥에 깔았다. 나름 75일간의 노하우가 쌓인 인체공학적인 흙침대였다.
"아 좋다."
파 이파리 위에 눕자 햇빛에 데워진 파 이파리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오늘 하루도 잘 살았다. 박세준."
스스로를 칭찬하며 세준이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할 때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 : 탑의 관리자에게 수확한 마력의 방울토마토 100개를 바쳐라.]
보상 : 직업 스킬 1개
거절 시 : 죽음
발딱.
세준이 분노하며 상체를 세워 앉았다.
"아니 뭐 나한테 먹을 거 맡겨놨어?!"
그리고 보상이라도 좋은 거 주든가!
직업 스킬로 씨뿌리기를 받은 이후로 세준은 보상이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죽을 수는 없지.'
"여기요."
세준이 울며 겨자먹기로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바쳤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탑의 관리자가 흡족해합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직업 스킬 - 수확하기 Lv. 1를 획득하셨습니다.]
"아! 진짜!"
수확하기에 무슨 스킬씩이나 필요하냐고!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굳이 스킬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미세하게 뭐가 상승했다고 나올 텐데 화만 더 날 테니까.
"화내봐야 나만 손해지..."
세준이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 누웠다. 잠을 자겠다고 눈을 감은지 1초.
커어어.
세준이 잠에 들었다.
"안돼...내...토마토야..."
꿈에서라도 방울토마토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세준이였다.
***
"읏차!"
슥.
잠에서 깨어난 세준이 동굴 벽에 또 하나의 작대기를 그었다.
T
그 앞에는 16개의 正가 있었다.
조난 82일 차 아침이 시작됐다.
오늘 오전에는 할 일이 많았다. 나중에 심었던 8그루의 방울토마토 나무에서 방울토마토를 수확해야 하고 먼저 수확했던 방울토마토 나무에 핀 꽃들을 수분시켜줘야 했다.
특히 경험치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방울토마토 수확은 오로지 세준의 몫이었다.
똑.
세준이 약간 초록기가 남은 방울토마토를 땄다.
[약간 덜 익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수확했습니다.]
[수확하기 Lv. 1의 효과로 열매가 최적의 상태가 됩니다.]
[수확하기 Lv. 1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직업 경험치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생각보다 수확하기 스킬은 쓸모가 있었다. 수확하기 스킬에는 약간 덜 익거나 더 익은 열매를 수확할 때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수확을 할 때마다 숙련도가 상승했다.
덕분에 최적의 상태의 작물을 수확하게 되면서 덜 익은 방울토마토를 수확해도 직업 경험치를 정상적으로 올릴 수 있었다.
수확은 나무가 8그루 뿐이라 금방 끝났다. 나무에서 50개의 방울토마토를 수확했다.
"얘들아, 방토먹자."
삐야!
뺘!
세준의 말에 방울토마토 나무를 타며 꽃들을 수분시키고 있던 새끼 토끼들이 우다다 달려왔다.
벌써 태어난 지 한 달 반 정도가 된 새끼 토끼들은 잘 먹은 덕분에 무럭무럭 자라 이제 키가 남편 토끼의 어깨까지 자랐다.
뽁.
쭙쭙쭙.
새끼 토끼들이 방울토마토에 입을 박고 즙을 빨아 먹기 시작했다.
"자 여기."
세준이 일하고 있는 토끼 부부에게도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건넸다.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뽀드득.
세준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깨물었다.
촤악!
"크으. 맛있다."
입안 가득 새콤달콤함이 춤을 추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때
[탑의 관리자가 어서 퀘스트를 완료하라고 재촉합니다.]
"싫은데요. 나중에 할 건데요."
방울토마토를 수확하기 시작한 이후로 탑의 관리자가 주는 퀘스트는 정도를 모르고 점점 탐욕스러워졌다. 시시때때로 탑의 관리자가 바치라는 방울토마토의 수가 늘어났다.
그렇다고 보상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수확하기 스킬을 준 이후로는 보상도 없었다.
그렇게 방울토마토를 바친 지 5일째.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 : 탑의 관리자에게 수확한 마력의 방울토마토 500개를 바쳐라.]
보상 : 없음
거절 시 : 죽음
탑의 관리자가 방울토마토를 500개나 요구하자 세준의 분노 게이지가 MAX를 찍었다.
'이건 선 넘었다!'
500개라니! 이렇게 매일 당할 수는 없어!
"싫어!"
세준이 시원하게 가슴에 담아 두었던 화를 쏟아냈다.
가슴은 시원해졌지만, 머리는 새하얘졌다.
그리고 서둘러 살 방법을 생각했다.
'아! 생각해 보니 퀘스트를 거절만 안 하면 되잖아!'
"나중에 바칠 건데요!"
[탑의 관리자가 당황합니다.]
그렇게 세준은 퀘스트 완료를 보류하는 것으로 탑의 관리자에게 반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탑의 관리자가 혼자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먹는 것에 분노합니다.]
"그럼 5개만 바칠게요."
가끔 탑의 관리자가 분노하면 방울토마토를 조금 바쳐 달랬다. 그래도 탑의 관리자인데 너무 미움받으면 안 되니까.
[탑의 관리자가 이번만 참겠다고 합니다.]
세준은 그렇게 탑의 관리자와 밀당을 하고 있었다.
***
조난 91일 차.
4번째 블루문이 다가왔다.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새끼들을 굴에 밀어 넣고 입구를 흙으로 덮으며 블루문을 준비했다.
세준도 불을 끄고 냄새나는 것들을 치우며 블루문을 대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파 이파리를 잘 말아 만든 귀마개와 방울토마토도 준비했다.
예전에 마력이 높으면 몬스터의 포효를 견딜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혹시 저번과 같은 상황이 생기면 방울토마토로 마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였다.
'저번 같은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긴 하지.'
세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햇빛이 푸른색으로 변했다.
블루문이 시작된 것이다.
잠시 후
크아아아!
캬야아아!
멀리서 블루문에 흥분한 몬스터들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오지 마라! 오지 마라!'
그렇게 세준이 마음속으로 빌며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어?!"
세준의 눈에 신비한 현상이 보였다.
방울토마토 나무 한 그루에 푸른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블루문의 기운이었다.
블루문의 기운은 천천히 줄기를 따라 방울토마토로 이동하더니 방울토마토에 흡수됐다.
그리고
"와아."
방울토마토가 푸른색으로 변해갔다. 블루문의 기운이 방울토마토에 담기는 광경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세준이 처음으로 블루문의 기운이 방울토마토에 담기는 전 과정을 목격했다.
'빨리 수확하고 싶다.'
블루문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세준.
그때
"어?!"
고구마 넝쿨에서도 푸른 기운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8화. 좋은 승부였다.
8화. 좋은 승부였다.
스스스.
고구마 줄기에 맺힌 블루문의 기운은 줄기를 따라 땅속으로 들어갔다.
'저기 고구마가 있었어?!'
이번에 심은 고구마는 전부 모종용이었다. 고구마순이 어느 정도 자라면 그 순들을 잘라 옮겨 심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고구마를 무한으로 증식시킬 수 있다. 인터넷으로 배운 농사지만, 지금까지는 나름 실패가 없었다.
'그래서 고구마는 기대도 안 했는데...'
"쓰읍..."
세준은 고구마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흘렸다.
"날로 먹을까? 구워 먹을까? 찌는 건 안 되나?"
세준은 고구마를 어떻게 먹을지 생각하며 조난 92일 차 새벽을 뜬 눈으로 맞이했다.
슥.
하루 루틴대로 먼저 벽에 선 하나를 긋고 고구마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삭삭.
세준이 조심스럽게 블루문의 기운이 흘러 들어간 땅 주변을 조심스럽게 파기 시작했다.
"오-!"
손으로 살살 흙을 얼마 파지도 않았는데 벌써 파란색 고구마의 머리가 보였다.
사삭.사삭.
세준이 빨라지는 손을 진정시키며 더욱 신중하게 고고학 유물을 탐구하듯이 고구마 주변의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잠시 후 세준이 조심스럽게 주먹 크기 정도의 파란색 고구마를 땅에서 들어 올렸다.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힘의 호박고구마를 수확하셨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크게 상승합니다.]
[수확하기 Lv. 1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합니다.]
[수확하기 Lv. 1의 숙련도가 채워져 레벨이 상승합니다.]
[경험치 50을 획득했습니다.]
미세하게밖에 오르지 않던 직업 경험치와 스킬 숙련도가 크게 올랐다. 거기다 스킬은 레벨까지 올랐다.
하지만 지금 세준에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세준이 자신의 손에 들린 고구마를 바라봤다.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힘의 호박고구마]
탑 안에서 자란 고구마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 맛있습니다.
거기에 블루문의 기운을 담아 맛이 더욱 좋아졌습니다.
섭취 시 힘이 영구적으로 0.05 상승합니다.
재배자 : 탑농부 박세준
유통기한 : 30일
등급 : E
원래도 맛있는데 더 맛있어졌다는 내용.
세준은 방울토마토밭으로 가서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푸른색 방울토마토도 수확했다.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수확하셨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크게 상승합니다.]
[수확하기 Lv. 2의 숙련도가 조금 많이 상승합니다.]
[경험치 50을 획득했습니다.]
수확하기 스킬은 방금 레벨업을 해서인지 이번에는 스킬 숙련도 상승이 전보다 작았다.
"흐흐흐."
오른손에는 푸른색 고구마, 왼손에는 푸른색 방울토마토를 쥐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추가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세준의 기분을 망치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럴 줄 알았다.'
항상 세준의 농작물을 호시탐탐 노리는 퀘스트를 빙자한 약탈자의 협박이 시작됐다.
[퀘스트 :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힘의 호박고구마를 탑의 관리자에게 바쳐라.]
보상 : 없음
거절 시 : 죽음!!!!!
[퀘스트 :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탑의 관리자에게 바쳐라.]
보상 : 없음
거절 시 : 죽음!!!!!
두 개의 퀘스트가 동시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좀 센데?'
느낌표를 보니 탑의 관리자가 얼마나 애가 닳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거절했다가 탑의 관리자의 기분이 너무 상하면 큰일이다. 그럼 진짜 죽는다.
하지만 이번만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완료하지 않은 퀘스트를 먼저 완료해 탑의 관리자의 기분을 풀어주기로 했다.
"남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바칩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세준이 마력의 방울토마토 500개를 바치는 퀘스트가 완료됐다.
[탑의 관리자가 바구니를 가득 담은 마력의 방울토마토에 기뻐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다급히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투덜거립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억지로 숨기려 했지만, 메시지를 통해서 다 티가 났다. 생각보다 탑의 관리자는 성격이 단순했다.
그리고 지금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 그래서 오늘은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이건 다음에 드릴게요."
세준이 퀘스트 2개를 받고 모두 보류시켰다. 저번에는 뭘 모르고 뺏겼지만, 이 맛있는 걸 뺏길 수는 없지.
'나도 먹어보자!'
[탑의 관리자가 다음에는 꼭 주어야 한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세준은 빚 받는 것처럼 당연하게 달라고 하는 탑 관리자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오늘은 참기로 했다.
그런 걸로 자신의 즐거움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근데 이걸 어떡하지?"
고구마는 토끼들과 나누어 먹을 크기가 됐지만, 방울토마토는 너무 작았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빨리 먹고 증거 인멸!
토끼들에게는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많이 주기로 했다.
세준이 푸른색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뽀드득.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방울토마토의 껍질이 젤리처럼 탱글탱글하게 씹혔다.
그리고
촤악!
방울토마토즙이 세준의 입 안을 적시며 새콤달콤함이 튕기듯이 돌아다녔다.
마력의 방울토마토가 소박한 지방 축제라면 블루문의 기운을 담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는 화려한 도시의 축제였다.
꿀꺽.
[블루문의 기운이 담긴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섭취하셨습니다.]
[마력이 영구적으로 0.05 상승합니다.]
"으음..."
삼키고도 입안 가득한 새콤달콤함의 여운에 메시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푸른색 방울토마토를 먹은 세준이 불가로 갔다.
"은박지가 없는 게 아쉽지만..."
세준에게는 만능 파 이파리가 있었다.
뿌드득.
파를 꺾어 이파리로 고구마를 돌돌 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흥흥흥."
군고구마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중간 남는 시간에 피라니아를 잡거나 방울토마토 수확을 할 수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이곳에서 처음 군고구마를 영접하는 날이다. 혹시나 고구마가 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건하게 불가를 지켰다.
'역시 맛있는 걸 기다리는 게 제일 행복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따닥.따닥.
이파리 장작들이 튀면서 나는 소리를 기분 좋게 듣고 있을 때
삐익!
삐이.
삐야!
뺘!
토끼 가족이 우르르 굴에서 나왔다.
킁킁.
킁킁.
굴에서 나온 토끼들은 눈을 감고 자연스럽게 고구마가 구워지며 내는 단내에 이끌려 불가로 다가왔다.
"조그만 기다려 맛있는 거 먹게 해줄게."
뺘아!
세준의 말에 새끼 토끼들이 환호했다. 토끼 부부도 뒤에서 팔짱을 끼고 기분 좋게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자 군고구마의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삐야!
뺘!
새끼 토끼들은 고구마가 타는 게 아닌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준은 조바심 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성급하게 꺼내면 겉만 익게 되고, 너무 늦게 꺼내면 겉이 완전히 타버린다.
세준이 신중하게 지켜보며 냄새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이다!'
세준이 빠르게 고구마를 감싼 파 이파리를 불가에서 꺼냈다.
슥.슥.
까맣게 탄 파 이파리를 벗겨냈다.
그러자 바닥의 껍질이 조금 눌어붙은 고구마가 보였다.
꿀꺽.
세준이 조심스럽게 생선 가시로 고구마를 찔렀다.
푹.
스르륵.
부드럽게 고구마의 중심까지 들어가는 생선 가시.
'됐다! 완벽해!'
세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군고구마를 생선 가시를 이용해 젓가락처럼 들어 깨끗한 파 이파리 위로 옮겼다.
그리고 파 이파리를 작게 잘라 군고구마를 끝을 잡고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앗 뜨거워!"
껍질을 벗기는 손이 델 정도로 군고구마는 뜨거웠지만, 곧 먹을 고구마를 생각하며 참았다.
스륵.
껍질을 깔 때마다 껍질에 붙어 함께 떨어지는 아까운 고구마.
'이따 혼자 먹어야지.'
세준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고구마 껍질들을 한곳에 모아뒀다.
하지만
삐야!
뺭!
새끼 토끼들이 이미 냄새를 맡고는 고구마 껍질을 하나씩 붙잡고 열심히 껍질에 달라붙은 고구마를 핥아먹고 있었다.
'똑똑한 녀석들.'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치는 토끼들의 행동이 기특했다. 알고 봤더니 가르쳐주지 않아도 열을 아는 영재 토끼들이었다.
그렇게 껍질을 새끼 토끼들에게 뺏기며 세준은 고구마의 껍질을 끝부분만 빼고 다 깠다.
모락모락.
"흐흐흐."
노란 속삭을 드러낸 군고구마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을 보고 있으니 절로 미소가 났다.
삐야!
뺩!
어느새 껍질이 깨끗해질 정도로 먹은 새끼 토끼들이 고구마를 달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알았어."
세준이 각자의 이파리 접시에 군고구마를 조금씩 잘라줬다. 고구마를 나누어 먹었기에 힘이 오르는 효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I don't care.
처음 수확한 농작물인 만큼 가족들과 함께 먹고 싶었다. 식구가 많아 고구마를 나누니 각자에게 돌아가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
"안돼!"
뺘?
자신의 앞에 놓인 군고구마를 먹으려는 새끼 토끼들을 세준이 말리자 새끼들이 당황했다.
"함께 먹어야지. 부모님 모셔와."
뺘!
세준의 말에 새끼 토끼들이 우다다 달려가 토끼 부부를 들고 오듯이 모셔왔다.
그리고 드디어 모두가 자신의 이파리 접시 앞에 앉았다.
"자 먹자!"
삐익! 퉷!
삐이! 퉷!
뺘압! 퉷!
토끼들이 군고구마를 입에 넣었다가 다급히 뱉었다. 연기가 나지 않아 다 식은 줄 안 모양이다.
"크크크. 식혀서 먹어야지. 호오.호오."
세준이 군고구마를 향해 바람을 충분히 불어 식히는 것을 보여줬다.
후우우.
후우우.
뿌우우.
토끼들도 세준을 따라 바람을 불어 고구마를 식혔다.
"이제 먹어볼까?"
와압.
세준이 군고구마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단내를 품은 뜨거운 김이 입안에서 퍼졌다. 역시 고구마의 속은 아직도 뜨거웠다.
하지만 세준에게는 고급 스킬이 있었다.
"허업.허업."
세준이 입안에서 고구마를 굴리며 입안의 공기로 식혔다. 물론 좀 없어 보인다는 건 단점.
그렇게 비주얼을 포기하고 식힌 고구마를 세준이 조심스럽게 씹었다.
물컹.
부드럽게 으깨지는 호박고구마. 세준이 이를 대기 전에 이미 갈라지며 길을 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단맛이 폭발했다. 온 세상이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꿀맛이다.'
물론 우유와 김치 등과의 콜라보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건 아니었다.
돌아가신 사과폰의 사장님도 말했다.
simple is best.
오히려 다른 부수적인 게 없기에 호박고구마의 순수한 단맛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호박고구마는 정정당당하게 단맛 하나로 승부했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싫증나지 않았다.
"좋은 승부였다."
세준은 어느새 껍질까지 깨끗이 발라 먹었다.
'앞으로 누가 고구마가 구황작물이라고 무시한다면 한 마디 해줘야지. 고구마는 좋은 승부사라고.'
세준이 잡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꼬르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왜지?"
굉장히 많이 먹은 느낌인데 배는 비었다고 난리였다.
"아."
생각해 보니 아침에 먹은 거라고는 방울토마토 하나와 군고구마 조금.
배가 고픈 게 당연했다.
삐야!
뺘아!
새끼 토끼들이 배고픔에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뿌드득.뿌드득.
토끼 부부가 서둘러 파를 꺾어 불에 구우며 아침 준비를 했다.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세준도 저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가져와 새끼들에게 하나씩 쥐여주고 피라니아를 잡기 위해 연못으로 달려갔다.
쭙쭙줍.
쭙쭙줍.
방울토마토 덕분에 새끼 토끼들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4번째 블루문도 큰 사고 없이 넘어갔다.
9화. 보상을 받아내다.
9화. 보상을 받아내다.
조난 95일 차 아침.
"모두 잘 들어."
삐익?
뺘뺘?
뺘?
"오늘부터 고구마순을 심을 거야."
아침을 먹는 토끼들에게 세준이 중대 발표를 했다.
뺘아...
뺘...
세준의 중대 발표에 크게 실망하는 새끼 토끼들. 고구마순은 요즘 새끼 토끼들의 최애 간식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세준이 서둘러 고구마순을 심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가만히 놔뒀다가는 고구마순이 다 사라질 것 같았다.
뭐 고구마순이야 워낙 빨리 자라 걱정은 없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어야 빨리 고구마를 수확할 수 있으니 오늘 심어버리기로 했다.
"대신 오늘 저녁은 군고마야."
삐익!
뺘아!
뺘이!
군고마라는 말에 모든 토끼들이 흥분했다.
"쓰읍..."
세준도.
고구마를 심은 주변의 흙을 살짝 들춰보니 고구마들이 드문드문 열려 있었다. 물론 바로 수확하지는 않았다.
고구마를 노리는 약탈자가 예의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4번째 블루문이 있던 날 점심. 세준은 방울토마토를 평소와는 다르게 먹고 싶어졌다.
그때 TV에서 귤이나 파인애플을 구워 먹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방울토마토를 구워보기로 했다.
'방울토마토도 되겠지?'
뭐 아니라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닐 거다.
세준이 말린 파 이파리로 꼬치를 만들어 방울토마토를 3개씩 꽂아 굽기 시작했다.
[탑의 관리자가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하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봅니다.]
갑자기 나타난 메시지.
"응?!"
[...]
실수였는지 이후로는 말이 없었지만, 그것으로 세준은 탑의 관리자가 가끔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구운 방울토마토는 TV에서 말 한대로 불에 단맛이 강화되며 굉장히 맛있었다.
"자! 무브!무브!"
아침 식사를 끝낸 세준과 토끼들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전에 매일 하고 있는 파 자르기, 농작물 물 주기, 방울토마토꽃 수분하기, 수확하기를 먼저 끝내야 오후에 고구마순을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끼들이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쏴아아.
남편 토끼는 물이 무한으로 나오는 물조리개로 농작물에 물을 주었고
싹뚝.싹뚝.
아내 토끼는 가위로 파를 자르기 시작했다.
"파 하나는 그냥 놔둬. 계속 키울 거야."
세준이 아내 토끼에게 말했다. 대파꽃을 피워 씨앗을 받을 생각이었다.
삐이!
아내 토끼가 세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대파가 잘 자랐기에 굳이 채종할 필요가 없었지만, 대파는 뿌리째 수확해도 아이템이 되지 않았다.
이유가 씨앗부터 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세준은 대파를 씨앗에서부터 키워볼 생각이었다.
삐야!
새끼 토끼들은 방울토마토 나무에 매달려 열심히 나무를 타며 놀았다. 노는 것 같지만, 나름 일이었다.
새끼 토끼들이 나무를 타면 방울토마토꽃들이 흔들리고, 꽃에서 꽃가루가 날려 자연스럽게 수분이 된다.
토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는 동안 세준도 방울토마토를 수확했다.
툭.툭.
[잘 익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수확했습니다.]
[수확하기 Lv. 2의 숙련도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직업 경험치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
..
.
[레벨업 했습니다.]
[보너스 스탯 1을 획득했습니다.]
어느덧 8레벨이 됐다. 경험치가 오르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데 레벨까지 올라줬다.
"흐흐흐. 보람차네."
세준이 보너스 스탯으로 체력을 올리고 다시 방울토마토 수확에 열을 올렸다.
툭.
툭.
툭.
그때
[직업 경험치가 가득 찼습니다.]
[탑농부(F)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탑농부(E)가 되었습니다.]
[직업 등급이 상승하며 직업 특성이 강화됩니다.]
"오!"
역시 농사는 보람차다. 노력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뭐가 계속 나온다.
방울토마토를 수확하는 세준의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졌다.
***
"자! 이제 시작하자."
아침 일과를 끝내고 간단히 점심을 먹은 세준과 토끼들은 고구마순 심기를 시작했다.
"각자 위치로!"
이번에도 작업을 분담했다.
삐야!
뺘아!
새끼 토끼들이 우다다다 아내 토끼 옆으로 줄지어 섰다.
싹뚝.싹뚝.
아내 토끼가 고구마 순을 자르면 새끼 토끼들이 고구마순을 새로 만든 밭으로 옮겼다.
그리고 세준이 일정 간격으로 만든 좁고 길게 파 놓은 구멍에 새끼 토끼들이 고구마순을 하나씩 심었다.
팡!팡!
구멍에 고구마순을 넣고 발로 주변의 흙을 밟아 심으면 끝.
그리고
쏴아아.
남편 토끼가 물을 뿌리며 마무리했다.
인력이 많음에도 생각보다 심을 고구마순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300개나 심었는데 아직도 고구마 순이 3분의 1이나 남았다.
"잠깐 휴식!"
세준의 말에 토끼들이 작은 연못에 담가 차가워진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쭙쭙 빨며 즙을 마시기 시작했다.
"부럽다."
뽀득.뽀득.
세준이 차가운 방울토마토를 씹으며 음료수처럼 방울토마토를 마실 수 있는 토끼들을 부럽게 바라봤다.
"읏차."
토끼들을 부럽게 바라보며 쉬던 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구마순이 잘려 나가 횅해진 고구마밭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퍽퍽.
손으로 흙을 치우며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다.
"호미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농기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아쉬웠다.
[힘의 호박고구마를 수확하셨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수확하기 Lv. 2의 숙련도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
..
.
"우와. 많다."
세준이 수확한 고구마를 뿌듯하게 바라봤다. 수확한 고구마는 총 15개. 심은 고구마 하나당 5개 정도의 고구마를 수확했다. 수는 적었지만, 씨알은 굵었다.
세준이 고구마 하나를 들어 살펴봤다.
[힘의 호박고구마]
탑 안에서 자란 호박고구마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 맛있습니다.
섭취 시 몸 안에 지방 10g을 분해해 10분간 힘을 0.1 상승시킵니다.
한 시간 안에 최대 10개까지 효과가 중복 적용됩니다.
비각성자가 섭취 시 지방 10g을 분해하고 장운동이 활발해집니다.
재배자 : 탑농부 박세준
유통기한 : 30일
등급 : E
"이거 가지고 밖에 나가면 엄마가 좋아할 텐데..."
엄마가 변비 때문에 화장실에 가려고 고생하는 걸 자주 봤었다. 세준이 잠깐 집 생각을 하고는 고구마들을 옮겼다
약탈자가 보기 전에 숨겨야 했다. 서늘한 동굴 구석에 파 이파리를 바닥에 깔고 고구마 8개를 나란히 놓고 다시 파 이파리로 덮었다.
'이러면 못 보겠지.'
나머지 고구마 7개는 불가로 옮겨 파 이파리로 돌돌 말아 불에 넣었다. 이제 작업이 끝날 때쯤이면 호박 군고구마가 완성될 거다.
그때
툭.
세준의 옷에 붙어있던 뭔가가 떨어졌다.
"고구마순이네."
고구마를 옮기면서 함께 딸려온 모양이었다. 세준이 고구마순을 주워 밭에 구멍을 내고 정성스럽게 밭에 심었다. 이 고구마순 하나가 고구마 몇십 개를 만들어 낼지도 몰랐다.
"무럭무럭 자라거라."
그렇게 정성을 다해 심고 물을 주었을 때
[호박고구마순을 심었습니다.]
[씨뿌리기 Lv. 1의 효과로 호박고구마순이 활착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씨뿌리기 Lv. 1의 숙련도가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이것도 씨뿌리기로 인정해주네?"
세준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씨부리기의 레벨을 올리려면 직접 심어야 한다.
"하아...그럼...내가 다 해야 되잖아..."
휴식 후의 작업은 세준이 고구마순을 심는 전 과정을 혼자 하게 되면서 새끼 토끼들은 세준이 뚫어둔 구멍에 고구마순을 갖다 놓는 것으로 작업이 아주 편해졌다.
킁킁.
대신 새끼 토끼들에게 틈틈이 불가에서 군고구마가 타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렇게 세준 혼자 남은 고구마 순을 다 심었을 때
삐야!
뺘아!
새끼 토끼들이 탄내가 난다고 울어대기 시작했다.
***
"이렇게 하는 건가?"
거대한 덩치의 검은 용이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거의 이쑤시개처럼 보이는 레이피어에 줄줄이 꽂은, 새카맣게 탄 방울토마토 30개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이 만든 것과는 색이 너무 달랐다.
'일단 먹어보자. 죽지는 않겠지."
어떤 독도 전능한 자신을 죽일 수 없다. 용이 자신의 이빨에 레이피어를 걸고 쭉 잡아당겼다.
주루루룩.
껍질이 거의 겉이 숯처럼 변한 방울토마토가 용의 입 안으로 데굴데굴 굴어 들어갔다.
오물오물.
"...윽!"
기대와 다르게 엄청나게 쓴맛이 올라왔다.
"퉷!"
용이 서둘러 씹던 것을 뱉어냈다. 이딴 맛 없는 거로 자신의 입맛을 버릴 수 없었다.
"으...써! 뭐가 잘못된 거지? 인간은 맛있게 먹었는데..."
용이 자신이 지켜본 인간과 뭐가 달랐는지 생각하고 있을 때
"어?!"
쓴맛이 가시자 기존의 방울토마토와는 다른 진한 풍미가 입안에 느껴졌다. 불로 가열하니 새로운 맛이 나타났다.
"오! 이 맛이군. 껍질을 벗겨 먹어야 되는구나!"
큰 깨달음을 얻은 용이 다시 방울토마토를 까맣게 태우고는 발톱을 이용해 낑낑거리며 간신히 방울토마토의 껍질을 깠다. 아니 그냥 방울토마토를 뭉개고 즙만 먹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쪽. 으음. 맛있군. 맛있어."
용이 발톱에 묻은 방울토마토즙을 먹고는 크게 감탄했다.
그렇게 새로운 요리를 터득한 용이 뿌듯해하며 거대한 수정구 앞에 앉아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이 인간이 뭐 하나 볼까?"
원래는 탑의 관리자가 탑이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지금은 취미를 위해 작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정구에 나오기 시작한 동굴. 그곳에는 세준과 토끼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어?! 이놈들!!! 위대한 검은 용인 나 에일린 프리타니 님을 빼고 군고구마를 먹다니!"
검은 용 에일린 프리타니가 흥분했다.
***
후우우.
뿌우우.
토끼들이 열심히 바람을 불어 군고구마를 식히고는 맛있게 먹었다.
와앙.
세준도 식힌 군고마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역시 노동 후에 먹으니 더욱 꿀맛이야.'
세준이 입안 가득한 달콤함을 느끼며 고구마를 먹었다.
그때
[추가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어쩐지... 왜 조용하나 했다."
[퀘스트 : 탑의 관리자에게 힘의 호박 군고구마 1개를 바쳐라!]
보상 : 없음
거절 시 : 죽음!
확실히 탑의 관리자가 지켜보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다.
'지금 앞에 군고구마가 딱 하나 남았거든.'
이번에도 보상은 없었다.
'내가 주나 봐라!'
세준은 퀘스트를 보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군고구마를 먹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
[탑의 관리자가 어서 군고구마를 바치라고 재촉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오늘도 군고구마를 주지 않으면 참지 않겠다고 합니다.]
탑의 관리자의 강력한 집착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넘기기 힘들겠어.'
세준은 군고구마를 주기로 했다.
"보상으로 줄 거 없어요?"
대신 방향을 바꿔 이왕 줘야 한다면 정당하게 보상을 요구했다.
[탑의 관리자가 당황합니다.]
"당황?"
뭐지? 보상 달라는 게 당황할 일인가?
그때
[탑의 관리자가 퀘스트를 정정합니다.]
[퀘스트 : 탑의 관리자에게 힘의 호박 군고구마 1개를 바쳐라!]
보상 : 직업 스킬 1개
거절 시 : 죽음!!!!!!!
또 직업 스킬?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보상을 받아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군고구마를 바칠게요."
보상은 하나도 기대가 되지 않았다.
'풀 베기, 물 주기, 뭐 이런 스킬 주겠지...'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직업 스킬 - 씨앗 상점 Lv. 1을 획득했습니다.]
10화. 씨앗을 사다.
10화. 씨앗을 사다.
"씨앗 상점?"
상점은 물건을 파는 곳.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온 세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곳이다. 마음속에서 설렘이 일어났다.
세준이 서둘러 스킬을 살펴봤다.
[직업 스킬 - 씨앗 상점 Lv. 1]
-사용하면 스킬이 활성화되며 씨앗 상점에서 30일에 한 번 상품을 구매할 수 있다.
뭔가를 구매한다.
30일에 한 번이지만, 세준에게는 그저 쇼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조난 95일 차 드디어 쇼핑을 할 수 있게 됐다.
"씨앗 상점."
세준이 씨앗 상점 스킬을 사용했다.
[씨앗 상점 Lv. 1이 활성화됩니다.]
[박세준 고객님의 씨앗 상점 거래 내역을 조회합니다.]
"거래 내역?"
[박세준 고객님의 씨앗 상점에서 거래 내역이 없습니다.]
"당연히 없지."
거래한 적이 없는데.
[박세준 고객님께 신입 등급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최초 신입 등급이 되신 것을 축하드리며 씨앗 상점에서 1탑코인을 지원합니다.]
"오! 탑코인?!"
탑코인은 탑 안에서 사용되는 화폐. 1탑코인당 밖에서 시세가 대략 100만 원 정도 된다.
그런 탑코인을 그냥 준다니! 세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씨앗 은행 박세준 님의 계좌에 1탑코인이 입금됩니다.]
씨앗 은행도 있는 모양이었다.
[씨앗 상점이 열립니다.]
[신입 등급에서는 3종류의 씨앗이 랜덤으로 보여집니다.]
"엥?"
일반 상점과는 뭔가 달랐다.
[오늘 판매할 씨앗 3종이 랜덤으로 보여집니다.]
[현재 등급에서는 씨앗을 한 번만 구매 가능합니다.]
그리고 나타난 씨앗들.
[배추 씨앗 1000개 - 0.1탑코인]
[고추 씨앗 1000개 - 0.1탑코인]
[당근 씨앗 1000개 - 0.1탑코인]
바깥 시세로 따지면 씨앗 1000개에 대략 10만 원. 가격이 완전 바가지였다.
하지만 여기 아니면 구할 수도 없으니 방법이 없다.
"억울하면 내가 나가야지."
세준이 중얼거리며 어떤 씨앗을 살지 살펴봤다. 이번에 구매하면 30일간은 구매를 할 수 없기에 세준의 눈빛은 신중했다.
"배추는 패스."
배추 하나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흐음...고추도 애매하네."
매운 게 먹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고추 하나로는 맛이 안 나올 거 같았다.
"그럼 당근인가?"
그나마 당근은 단맛이 있어 생으로 먹거나 구워 먹을 수 있다.
그때
삐익?!
삐이?!
뺘아?!
뺭?!
당근이라는 말에 토끼들의 시선이 세준에게 집중됐다.
"응? 왜? 당근 먹고 싶어?"
삐익!
삐이!
뺘악!
뺙!
세준의 말에 토끼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재미있다.'
눈을 똥그랗게 뜨며 쳐다보는 것이 귀여웠다.
"당..."
토끼들의 눈이 커지며 세준의 입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근."
삐익!
삐이!
뺘악!
뺘!
다시 흥분하는 토끼들.
'뭐지? 이 마법의 단어는?'
밖에서 당근 알람 울리는 거 들었으면 토끼들은 흥분으로 죽을지도 몰랐다.
"당근."
"당근."
퍽!
세준은 몇 번 더 하다가 결국 분노한 남편 토끼에게 이단옆차기를 맞고 그만뒀다. 그리고 토끼들의 화를 빨리 풀기 위해 서둘러 당근 씨앗을 구매했다.
[당근 씨앗 1000개를 구매했습니다.]
[씨앗 은행 박세준 님의 계좌에서 0.1탑코인이 빠져나갑니다.]
[씨앗 상점 마일리지 1점이 적립됩니다.]
[씨앗 상점 마일리지는 박세준 고객님의 등급을 상승시킬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음 등급 상승까지 필요한 마일리지는 100점입니다.]
[씨앗 상점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0일 후에 다시 씨앗 상점 Lv. 1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탑의 관리자가 당신의 구매에 만족스러워합니다.]
"왜 네가 만족스러워하는데?!"
역시 괜찮은 스킬을 준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발끈하는 세준의 앞에 당근 씨앗이 담긴 가죽으로 만든 조그만 주머니가 나타났다. 주머니가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뭐지?"
씨앗보다 주머니가 더 비쌀 거 같았다.
저녁이 늦었지만, 항상 잘 시간을 철저히 지키던 토끼들이 철야까지 일하며 당근을 심었다. 토끼들의 당근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
덩달아 세준도 철야를 해야했다. 당근을 심는 건 세준의 몫이니까. 그래도 당근 씨앗 1000개를 심는 덕분에 씨뿌리기 스킬의 레벨이 올라 보람있는 하루가 됐다.
***
조난 102일 차. 오늘도 하루가 평화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뺘아?
뺘...
새끼 토끼들은 할 일이 끝나면 넓은 당근밭에 가서 당근 싹이 나는지 수시로 지켜보며 한껏 기대하다 아직 싹이 안 난 것을 확인하고는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귀여운 녀석들."
세준은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 그런 새끼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윙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벌?!"
동굴 천장 구멍에 주변에서 주먹 정도 크기의 벌 한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토실토실한 벌의 외모는 귀여웠다.
하지만
[독꿀벌]
몬스터였다. 이름도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벌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새끼들을 굴 안으로 들여보내고 입구를 막았다.
"...얘들아 나는?"
자기들만 살겠다고 입구를 닫다니. 자신은 굴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세준은 굉장히 섭섭했다.
토끼들과 다르게 숨을 곳이 없는 세준.
살금살금.
세준이 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며 연못가에 있는 횃불을 들었다.
잠시 후
윙윙.
주변을 살펴보던 벌은 자신을 위협할 것이 없자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방울토마토꽃에 주둥이를 박고 꿀을 빨기 시작했다.
'휴우. 다행이다.'
벌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것에 세준이 안도했다.
'제발 꿀만 먹고 가라!'
세준은 벌이 그냥 돌아가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수백 송이의 꽃에서 꿀을 빤 독꿀벌이 갑자기 세준을 향해 날아왔다.
윙윙.
'왜 오는데?!"
세준이 다가오는 벌을 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곳은 사방이 막힌 동굴.
퍽.
등이 곧 벽에 닿았다.
윙윙.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세준에게 벌이 다가왔다. 세준과 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제 거의 2m 정도의 거리. 세준은 긴장감에 숨도 제대로 쉬지 없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세준이 횃불을 휘두를 타이밍을 쟀다.
그때
위잉.위잉.위잉.
벌은 세준 앞에서 위아래로 3번 움직이고는 천장의 구멍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어?! 휴우."
털썩.
긴장이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진 세준이 주저앉았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삑?
남편 토끼가 슬며시 구멍을 열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삐익!!
눈을 감고 쓰러진 세준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달려왔다.
그때
"으앙!"
세준이 눈을 뜨며 소리를 질러 남편 토끼를 놀라게 했다.
삐익!!!
남편 토끼가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흐흐흐. 날 버린 벌이다."
삐이이...
세준의 말에 남편 토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 인마. 가장이라면 가족을 지켜야지."
세준이 남편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퍽!
남편 토끼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삐악!
남편 토끼가 뒤통수를 만지며 어리둥절해했다.
방금 용서한 거 아냐?
"하지만 괘씸한 건 괘씸한 거야."
그냥 용서하기에는 속이 좁은 세준이었다.
그렇게 독꿀벌 사건은 끝났다.
***
독꿀벌은 요즘 아주 행복했다.
얼마 전까지 독꿀벌에게 식사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독꿀벌들은 평소에 동료들과 사냥을 나가 독침으로 몬스터를 사냥하고 살점을 뜯어 먹는다.
다른 독꿀벌들은 정말 맛있게 살점을 뜯어먹었지만, 독꿀벌에게는 이 식사가 정말 고역이었다.
'맛없어.'
식욕은 없었지만, 정말 죽지 않기 위해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동료들과 사냥을 하고 맛없는 몬스터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을 때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날아왔다.
'이 냄새는 뭐지?'
'먹고 싶다.'
냄새를 맡자 생전 처음 입맛이 돌았다.
윙윙.
독꿀벌이 향기를 따라 날아간 곳은 바닥에 난 구멍. 구멍 아래에는 노란 꽃이 있었는데 거기서 달콤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하지만 그곳을 지키는 존재들이 있었다. 독꿀벌은 주인이 있다는 것에 상심하고 돌아가려 할 때 동굴의 주인이 자리를 비켜줬다.
'고마워요.'
독꿀벌은 동굴 주인의 배려로 처음으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그리고 맛있는 식사를 준 주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윙윙.
'저 또 왔어요!'
독꿀벌이 꿀을 먹기 위해 다시 찾아왔다.
조난 102일 차, 가족이 하나 늘었다.
***
조난 113일 차. 어제부터 당근 싹이 하나둘 나기 시작했다.
삐익!!!
뺘앙!!!
어제는 토끼들이 흥분해서 계속 당근 싹을 보느라 세준 혼자 일을 했다.
점심쯤이 되자
윙윙.
독꿀벌이 동굴 안에 도착했다.
척.
"어서 와."
부비부비.
독꿀벌이 세준의 어깨에 앉아 자신의 몸을 세준의 볼에 비비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독꿀벌의 출근 도장이었다.
처음에는 세준도 독꿀벌이 좀 무서웠지만, 독꿀벌은 보면 볼수록 귀엽고 은근히 애교가 많았다.
윙윙.
독꿀벌은 세준에게 출근 도장을 찍고는 방울토마토꽃으로 날아가 꿀을 빨기 시작했다.
독꿀벌이 동굴에 드나들면서 좋은 점이 생겼다. 그건 바로 방울토마토꽃을 따로 수분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
즉, 그 말은
뺘뺘!
뺘아!
방울토마토꽃의 수정을 맡은 새끼 토끼들만 신났다는 말이었다. 요즘 새끼 토끼들은 동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세준이 그런 새끼 토끼들을 부럽게 바라봤다.
"내 일 대신해줄 애는 어디 없나?"
요즘 세준은 새끼 토끼들과 다르게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스킬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서 수확하기, 씨뿌리기를 세준이 직접 해야 하기 때문.
어제는 마력의 방울토마토 50개에서 씨앗을 골라내 다시 땅에 심었다. 그렇게 심은 방울토마토 씨앗이 대략 1200개.
푸념하듯이 말했지만, 사실 세준의 마음은 뿌듯했다. 밭은 점점 넓어지고 먹을거리는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거기다 먹을거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
윙윙.
꽃에서 한참 꿀을 빤 독꿀벌이 세준의 어깨 위에 다시 앉았다.
"자."
세준이 독꿀벌의 앞에 생수통을 놓자
꿀렁꿀렁.
조금이지만, 꿀을 뱉어냈다.
독꿀벌이 꿀을 뱉기 시작한 건 이틀 전. 세준이 먹고 있던 구운 대파 위에 독꿀벌이 진득한 액체를 뱉었는데 그때는 독인 줄 알고 세준이 기겁했다.
하지만
킁킁.
토끼들이 세준의 파에서 떨어진 액체에 코를 박고 열심히 냄새를 맡는 것을 보고는 세준도 호기심에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찍어 먹었다.
"...!"
꿀 특유의 진한 풍미와 입안을 가득 채우는 달콤함. 세준은 그것이 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신메뉴가 탄생했다. 꿀파.
지켜보고 있던 탑의 관리자가 바로 꿀파를 바치라고 했지만, 퀘스트는 당연히 보류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의가 아니었다. 정말 꿀이 없었다. 독꿀벌이 하루 열심히 꿀을 빨아도 자신이 먹고 뱉어내는 양은 10ml 정도.
꽃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어제 부랴부랴 방울토마토를 1200개나 심은 거다. 꿀을 얻기 위해서.
"흐흐흐. 몇 개월만 있으면 곰돌이 포우 부럽지 않게 꿀을 먹을 수 있는 거지."
세준이 앞으로 자라날 꽃밭을 상상하는 동안
윙윙.
꿀을 뱉어낸 독꿀벌이 다시 꿀을 빨러 갔다.
부지런한 녀석. 아주 기특해.
조난 113일 차, 꿀이 차오르는 달달한 하루다.
11화. 어른이 되다.
11화. 어른이 되다.
검은 용 에일린 프리타니는 세준이 동굴 구석에 숨겨둔 고구마를 찾아냈다. 그리고 끈질긴 설득(?) 끝에 인간에게서 고구마 세 개와 이파리를 퀘스트로 받아 화로에 굽기 시작했다.
군고마를 만드는 것은 그냥 이파리로 싸서 불에 넣으면 됐기에 수정구로 봤을 때는 엄청 쉬워 보였다.
"인간도 하는 걸 위대한 검은 용인 이몸이 못할 리 없지."
성공을 장담한 에일린.
하지만 처음 군고구마는 완전히 태워 고구마 숯이 돼 먹지도 못하고 버렸다. 두 번째는 너무 빨리 빼서 속이 완전히 안 익었다. 군고구마는 인내를 시험하는 심오한 요리였다.
"히히히. 잘 됐나?"
에일린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화로에서 달콤한 탄내를 풍기는 마지막 남은 군고구마를 꺼냈다. 이미 두 번의 실패로 노하우가 쌓였기에 이번에는 성공을 확신했다.
두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군고마를 잡아 반으로 꺾었다.
"응?"
인간이 줬던 군고구마를 반으로 꺾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뭐지?
하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며 노랗게 익은 군고구마의 속살이 드러나자 금방 잊어버렸다.
"됐다! 됐어!"
에일린이 완성된 군고구마를 보며 기뻐했다.
"히히히. 인간, 봤느냐? 나 검은 용 에일린 프리타니 님이 만든 군고마를!"
에일린 뿌듯한 표정으로 군고구마를 바라봤다.
그리고
"앙."
군고구마의 껍질을 까서 군고구마 반쪽을 입에 넣었다.
인간처럼 베어 물어야 더 맛있을 거 같지만, 자신은 검은 용이다. 품위 떨어지게 인간의 모습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아작.
"어?!"
이 식감이 아니다. 이빨이 아무런 저항 없이 들어가야 하는데 미묘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인간이 바친 물컹하고 쫀득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이 아니다.
거기다 달기는 했지만, 자신이 처음 먹었던 군고구마의 더 농축된 단맛도 안 났다.
"이럴 수가 내 불이 더 센데...왜 내 것이 더 맛이 없는 거야..."
위대한 검은 용인 자신이 인간보다 군고구마를 못 굽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용인 내가 인간보다 불조절을 못 하다니! 에일린이 좌절했다.
"에잇! 자존심 상해!"
에일린은 오늘도 혼자 분해했다.
"열받는데 인간이 뭐 하는지나 볼까?"
에일린이 수정구로 세준이 있는 동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
삐익!
삐이!
일어나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토끼 부부의 소리에 세준이 잠에서 깼다.
"읏차!"
세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날짜를 기록하는 벽으로 갔다.
그리고
슥슥.
생선 가시로 벽에 선을 하나 그어 正을 완성시켰다.
벽에는 正이 10개씩 그려진 줄이 두 개에 그 아래에 3번째 줄에는 正이 4개 완성돼 있었다.
[조난 120일 차]
'거의 4달이 지났네...'
세준이 벽을 한 번 보고는 연못으로 가서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오전 농사를 시작했다.
톡.톡.
[잘 익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수확했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수확하기 Lv. 2의 숙련도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
..
.
우다다다.
뺘아.
뺘이.
방울토마토를 수확하고 있는 세준의 곁으로 달려온 새끼 토끼들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훗. 그렇게 불쌍한 표정 짓는다고 삼촌이 방울토마토를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경기도 오산이다."
뺘아?
뺘?
삼촌 미쳤어? 세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새끼 토끼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립된 세준의 개그는 세상과 함께 발전하지 못하고 갈라파고스처럼 독립적인 진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퇴화가 맞을지도.
"삼촌 볼에 부비부비해주면 줄게."
새끼 토끼들이 도망가려 하자 세준이 서둘러 본론을 말했다.
뺘이...
뺘...
새끼 토끼들이 인상을 쓰며 한숨을 쉬었다. 새끼 토끼들의 호감도 떨어지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미안하다. 이게 그 정도 부탁인지 몰랐다.
"삼촌이 장난친 거지. 자 여기..."
세준이 서둘러 수확한 방울토마토를 건네려 할 때
폴짝. 폴짝.
새끼 토끼 한 마리가 땅에서 한 번, 세준의 무릎 한 번을 밟고 점프하며 세준의 어깨로 올라왔다. 유독 세준을 따르는 토끼였다.
그리고
부비부비.
세준의 볼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부들부들해 기분이 좋았다.
"오-! 넌 두 개!"
세준이 자신의 말을 들어준 토끼에게 방울토마토 두 개를 줬다. 나머지 새끼 토끼들에게는 한 개씩.
뺘아!
뺘이!
방울토마토를 한 개만 받은 새끼 토끼들이 항의했지만, 방울토마토를 더 주지는 않았다.
"흐흐흐. 삼촌을 섭섭하게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세준의 말에 새끼 토끼들이 흥칫뿡을 외치고 동굴의 시원한 곳으로 가서 방울토마토를 쭙줍 마시기 시작했다.
세준은 방울토마토 수확이 끝나자 잠깐 쉬다가 점심으로 먹을 피라니아를 잡아 생선구이를 준비했다.
그때
[탑의 관리자가 당신에게 분노합니다.]
"또 왜?"
세준은 아무 이유 없이 혼자 분노하는 탑의 관리자의 메시지를 심드렁하게 넘겼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큰 일인 줄 알고 긴장했지만, 아까부터 몇 번씩 분노하니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분노조절 장애 그런 건가?"
점심 먹을 때가 되자
윙윙.
독꿀벌이 오늘도 꿀을 빨러 출근했다.
"어서 와."
부비부비.
독꿀벌이 당근밭에 물을 주고 있던 세준의 어깨에 내려앉아 세준의 얼굴에 자신의 몸을 비비며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윙윙.
꿀을 빨기 위해 꽃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방울토마토밭이 아닌 대파밭으로 갔다.
대파꽃을 피우기 위해 이파리를 자르지 않고 놔뒀던 대파가 드디어 꽃을 피웠다. 독꿀벌은 대파꽃의 꿀을 먼저 먹고 방울토마토꽃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대파꽃을 따야지."
슬슬 대파 씨앗을 받을 때가 됐다. 세준은 점심을 다 먹고 독꿀벌이 꿀을 다 빨고 떠난 대파꽃이 핀 대파를 뿌리째 뽑았다.
꽃을 피운 대파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죽어버리기에 빨리 수확해 먹어야 했다. 오늘 점심에 통대파 구이가 추가됐다.
대파꽃은 따로 떼어내 해에 말렸다. 대파꽃이 바짝 마르면 툭툭 털기만 해도 씨앗이 쉽게 빠져나오기 때문이다.
세준은 대파꽃을 해에 잘 말려놓고 오후 농사를 시작했다.
윙윙.
저녁이 가까워지자 독꿀벌이 와서 꿀을 뱉어내고 집으로 돌아갔고 오후 농사도 순조롭게 끝났다.
"이틀 후가 블루문이네."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키기 위해 왔다 갔다 하던 세준이 벽 달력을 보며 말했다.
탑에 조난된 후 겪는 5번째 블루문.
4번째 블루문은 평화롭게 지나갔지만, 3번째 블루문처럼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가야 할 텐데..."
세준이 걱정하며 자신의 지정석으로 와서 앉았다. 해를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농작물을 보니 세준의 마음에 밝은 기운이 부풀어 오르며 조금 전까지의 걱정을 밀어냈다.
"행복하다."
세준이 앉은 지정석을 원점으로 1사분면에는 파밭이, 2사분면에는 방울토마토밭이, 3사분면에는 당근밭이, 4사분면에는 고구마밭이 세준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줬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조난 121일 차가 됐다.
오늘 하루도 평소와 비슷했다. 다만 오늘 점심에는 독꿀벌이 오지 않았다. 독꿀벌도 블루문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저녁이 되자 세준이 불을 끄고 파 이파리로 만든 귀마개와 방울토마토를 챙기며 블루문을 준비했다.
동굴 구석에 자리를 잡고 블루문을 준비하는 세준의 눈에 평소와 다른 광경이 보였다.
"너희 왜 아직도 안 들어가고 있어?"
토끼 부부가 새끼 토끼들을 세준의 지정석에 올려두고 여섯 마리 새끼들의 다리를 파 이파리로 꽁꽁 묶어 서로 연결했다.
그리고
삐익...
삐이...
토끼 부부가 자신들만 굴로 돌아가 한참 새끼들을 바라보며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다가 굴의 입구를 닫았다.
"뭐야?! 너희 왜 그래?"
뺘야!
뺘!
뺙!
세준이 서둘러 새끼 토끼들을 데리고 오려 일어나자 새끼 토끼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랑한 발바닥을 들어 올리며 다가오지 말라고 외쳤다.
그리고 잠시 후 블루문이 시작됐다.
***
농부 백토끼들에게는 한 가지 전통이 있다. 태어나고 5번째 블루문이 뜨는 날, 블루문의 빛을 받아야만 진정한 어른 농부 백토끼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은 새끼 토끼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새끼 토끼들이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며 블루문이 뜨길 기다렸다.
그리고 하늘의 해가 푸른빛으로 바뀌며 동굴 구멍을 통해서 새끼 토끼들에게 블루문의 기운이 내려앉았다.
뺘악!
뺘아!
토끼라고 좀 무시했는데 몬스터는 몬스터였다. 블루문의 빛을 보자 새끼 토끼들이 괴성을 지르며 흥분했다.
우드득.우드득.
새끼 토끼들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손바닥보다 작았던 토끼가 30cm 크기의 근육질 토끼로 변했다. 배에 王자도 있었다.
블루문 때 토끼가 저정도면...다른 몬스터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뺘아!
뺘!
새끼 토끼들은 계속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바라봤다. 다행히 새끼 토끼들의 소리를 듣고 오는 몬스터는 없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블루문이 끝났다.
뺘아...
뺘...
블루문이 끝나자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근육이 줄어들며 새끼 토끼들이 다시 귀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크기는 이제 토끼 부부와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어른이 된 것이다.
그때
파앗.
새끼 토끼들의 몸에서 푸른빛이 폭발했다.
"어?!"
새끼 토끼들을 지켜보고 있던 세준은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푸른빛이 새끼 토끼들의 손끝으로 이동하며 뭉치면서 아이템으로 변해갔다.
'이래서 남편 토끼의 물조리개를 내가 쓸 수 없었구나.'
세준은 자신이 들면 물조리개에서 왜 물이 안 나왔는지 깨달았다. 농부 백토끼들은 자신만의 귀속 아이템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템은 점점 형상을 만들더니 삽, 낫, 삽, 물조리개, 지게로 변했다.
그리고
"떡메?"
쇠로 됐으니 해머인가? 갑자기 장르가 다른 아이템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해머를 든 녀석만 색이 검게 변했다. 그리고 머리 위에 써진 이름도.
[전사 흑토끼]
"전사 흑토끼?"
뺙!
깡총!
부비부비.
전사 흑토끼가 세준이 부른 줄 알고 어깨에 올라와 애교를 떨었다. 세준을 따르는 방울토마토 2개를 받은 녀석이었다.
아침이 되자 어른이 된 토끼들은 더 이상 놀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농기구를 사용해 농사를 도왔다.
물조리개를 가진 토끼는 남편 토끼를 도와 농작물에 물을 줬고 낫을 든 토끼는 아내 토끼를 도와 파 이파리를 잘랐다.
아이템으로 지게를 얻은 토끼는 잘린 파 이파리를 나르고 세준이 수확한 농장물을 저장고로 옮겼고 삽을 가진 토끼 둘은 추가로 씨앗을 심을 수 있게 밭을 확장했다.
아직 미숙한 실력이지만, 농기구가 아이템이었기에 농사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농기구가 없는 흑토끼는 세준의 사냥을 도왔다.
첨벙.
세준이 연못 가까이에서 횃불을 흔들자 피라니아가 뛰어올랐다.
"지금!"
삐야!
세준의 신호에 대기하고 있던 흑토끼가 피라니아를 해머로 후려치기 위해 뛰어올랐다.
하지만
뺘?!
타이밍이 안 맞았다. 해머를 휘두르기 전 흑토끼의 몸이 이미 피라니아와 부딪혔다.
퍽!
그래도 운이 좋게 몸통 박치기가 통해 흑토끼가 피라니아와 함께 물 밖으로 떨어졌다.
발딱.
땅에 떨어지자마자 흑토끼가 서둘러 일어났다.
그리고
삐야!
파닥거리는 피라니아에게 달려가 해머로 내리쳤다.
뾱!뾱!뾱!
왜 해머에서 뾱망치 소리가 나는지는 모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피라니아가 죽었으니까. 대신 먹지 못할 정도로 곤죽이 됐다.
삐야!
흑토끼가 승리자의 표정을 지으며 해머를 어깨에 올리며 거만하게 세준을 봤다. 나 어떰?
하지만
'날 보지 말고 저기를 봐.'
흑토끼를 노려보는 눈빛이 있었다.
삐익!
식사로 먹어야 할 피라니아가 곤죽이 된 것을 보며 엄마 토끼가 다가오고 있었다.
삐익!
뺘...
흑토끼는 엄마 토끼에게 한 시간 정도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새로 어른이 된 토끼들이 각자의 장비에 익숙해져갈 때쯤
[씨앗 상점에서 구매하고 30일이 지났습니다.]
[씨앗 상점 Lv. 1이 다시 활성화됩니다.]
조난 125일 차, 씨앗 상점이 다시 열렸다.
12화. 동업을 제안하다.
12화. 동업을 제안하다.
[씨앗 상점이 열립니다.]
[오늘 판매할 씨앗 3종이 랜덤으로 보여집니다.]
[현재 등급에서는 씨앗을 한 번만 구매 가능합니다.]
씨앗들이 나타났다.
[수박 씨앗 10개 - 5탑코인]
[단호박 씨앗 50개 - 1탑코인]
[찰옥수수 씨앗 200개 - 0.5탑코인]
이번 씨앗들은 저번에 나왔던 씨앗들과는 가격이 너무 달랐다.
세준이 가진 돈은 0.9탑코인이 전부. 살 수 있는 건 찰옥수수 씨앗뿐이었다.
'이렇게 비싸면 다음에는 아무것도 못 사겠는데...'
하지만 여기서 돈을 더 늘릴 수단이 없었다.
헌터들이 탑에서 탑코인을 버는 방법은 3가지다.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지만, 세준은 알지 못했다.
탑코인을 버는 첫 번째 방법은 층을 클리어하고 받는 클리어 보상. 한 번에 벌어들이는 액수가 크지만 각 층에서 클리어 보상은 한 번만 받을 수 있기에 실제 헌터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다.
두 번째 방법은 몬스터 사냥. 몬스터의 사체를 탑을 돌아다니는 유랑 상인이나 1층 상점에서 팔아서 탑코인을 벌 수 있다. 지속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헌터들의 가장 큰 수입원이다.
세 번째 방법은 퀘스트를 완료하고 받는 보상. 퀘스트 보상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세준에게 층을 클리어하는 건 동굴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나가도 흉악한 몬스터들 사이에서 생존할 확률이 낮으니 패스.
몬스터 사냥은 식삿거리로 먹는 피라니아 빼고는 전부 가족이다. 그리고 피라니아의 사체인 생선 뼈는 팔 곳도 없지만, 팔 수도 없을 거 같았다.
오도독.오도독.
요즘 토끼들이 피라니아 생선 뼈를 햇볓에 바짝 말려 간식으로 애용하고 있었다. 세준도 먹어봤는데 오도독거리는 식감도 좋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는 게 자꾸 손이 가는 맛이었다.
그렇게 세준에게 남은, 탑코인을 벌 수 있는 마지막 방법.
'탑의 관리자가 주는 거의 강탈 수준의 퀘스트...'
그래서 씨앗 상점 거래 후 탑의 관리자에게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탑코인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탑의 관리자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크면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상한 소리를 했다. 탑의 관리자가 탑코인을 모른다니? 그게 말이 돼?! 그리고 크면 주겠다니...
"너 몇 살인데?"
세준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탑의 관리자가 그건 비밀이라고 합니다.]
"그럼 몇 년 지나면 크는데?"
[탑의 관리자가 300년 정도라고 말합니다.]
"...장난하냐?! 그럼 지금부터 받을 탑코인을 다 기록해서 가문 대대로 물려주다 내 7대손이 받으라고?! 그리고 내가 지금 후손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
[...]
세준이 씩씩거리며 화를 내자 또 도망갔다. 이렇게 대답하기 곤란하면 사라진다. 그렇게 세준은 이곳에서 탑코인 버는 것을 단념했다.
"휴우. 그때 생각하니 또 열받네."
세준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씨앗 상점의 씨앗들을 바라봤다.
구매할 수 있는 건 옥수수 하나.
"옥수수도 나쁘지는 않으니까."
쪄먹어도 구워 먹어도 맛있다. 거기다 가루를 빻아서 빵 비슷하게도 만들 수 있다.
"쓰읍..."
찐옥수수를 먹을 상상만 했는데 세준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역시 아는 맛이 더 무섭다.
"좋아! 찰옥수수다!"
세준이 찰옥수수를 구매했다.
[찰옥수수 씨앗 200개를 구매했습니다.]
[씨앗 은행 박세준 님의 계좌에서 0.5탑코인이 빠져나갑니다.]
[씨앗 상점 마일리지 5점이 적립됩니다.]
[씨앗 상점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0일 후에 다시 씨앗 상점 Lv. 1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세준의 손에 찰옥수수 알갱이 200개가 담긴 가죽 주머니가 나타났다. 역시 주머니가 가장 고급스럽다.
세준이 고급 가죽 주머니를 열어 손에 붓자
촤르륵.
실해 보이는 찰옥수수 알갱이들이 우수수 흘러나왔다.
삐익!
삐이!
뺘악!
토끼들이 영롱한 찰옥수수 알갱이들을 보더니 우다다 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오전에 대파꽃에서 채종한 대파 씨앗을 심은 밭 위에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빨리 심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탑의 관리자가 흥분합니다.]
[탑의 관리자가 빨리 심으라고 재촉합니다.]
"말 안 해도 심을 거야."
보상도 안 주면서 시키는 건 많다. 탑의 관리자가 밉긴 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세준이 토끼들이 만드는 밭으로 가서 옥수수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찰옥수수 씨앗을 심었습니다.]
[씨뿌리기 Lv. 2의 효과로 찰옥수수 씨앗이 활착할 확률이 증가합니다.]
[씨뿌리기 Lv. 2의 숙련도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
..
.
이미 수천 번 해본 작업이었고, 찰옥수수 씨앗의 개수가 적었기에 심는 일은 금방 끝났다.
쏴아아.
물조리개를 가진 아빠 토끼와 자식 토끼가 한 줄씩 맡아 정성껏 물을 주는 것으로 찰옥수수 심기가 자는 시간 전에 마무리됐다.
덕분에 철야 없이 제시간에 잠들 수 있었다.
***
조난 128일 차.
아침을 먹고 세준과 백토끼들이 오전 일을 하는 사이
뾱!뾱!뾱!
흑토끼는 해머로 동굴 벽을 때리며 수련을 했다. 해머로 아무리 때려도 벽은 멀쩡했다.
저게 소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쓰는 흑토끼의 노력이 어여뻤다.
그렇게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윙윙.
독꿀벌이 출근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요즘 독꿀벌이 여기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부비부비.
"어서 와."
독꿀벌은 방울토마토를 수확하는 세준의 얼굴에 자신의 몸을 비비며 출근 도장을 찍고 꽃에 앉아 꿀을 빨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삐익.
아내 토끼가 마른 파 이파리를 불에 넣어 불을 키우며 점심 준비를 시작했다.
"흑토끼!"
뺙!
세준의 부름에 흑토끼가 우다다다 달려왔다.
"사냥이다!"
뺙!
흑토끼가 호기롭게 외치며 자신의 해머를 들고 연못으로 우다다 달려갔다.
뺙!뺙!
연못 앞에서 사냥 자세를 잡고는 흑토끼가 빨리 오라고 세준을 재촉했다. 그동안의 수련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알았어."
흑토끼의 성화에 세준도 발걸음을 빨리해 연못으로 가서 횃불을 들고 연못 위에서 흔들었다.
첨벙!
피라니아가 움직임을 감지하고 바로 뛰어올랐다.
폴짝.
뾱!
그동안 수련을 거듭한 흑토끼의 해머는 깔끔하게 피라니아의 몸통을 쳐 물 밖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척.
반동을 이용해 연못 밖으로 착지하는 마무리까지 완벽히 해냈다.
처음에는 물에 빠질 뻔할 걸 몇 번은 구해줬는데...아주 대견했다.
짝짝짝.
세준이 박수를 치며 흑토끼를 칭찬했다.
뺙!
세준의 칭찬에 우쭐해진 토끼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흑토끼의 열정이 불타올랐다.
점심에는 흑토끼의 불타는 열정 덕분에 생선구이를 아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모두가 평소보다 많이 먹었는데도 아직 생선구이가 5마리나 남았다.
삐익...
삐이...
삐...
토끼들은 더 이상 못 먹겠는지 모두 배가 뽈록 나온 상태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아. 배불러."
세준도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먹고 있던 생선구이를 내려놨다.
그때
뚝.뚝.뚝.
세준의 손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뭐야?!"
설마 몬스터?!
세준이 서둘러 위를 바라봤다.
"응? 고양이?!"
동굴 천장의 구멍에는 노란색 치즈냥이 침을 흘리며 생선구이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삐익!
삐이!
토끼들은 서둘러 굴로 도망갔고
폴짝.폴짝.
뺙!
전사인 흑토끼는 세준의 어깨로 올라와 고양이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윙윙.
독꿀벌도 꼬리에서 날카로운 침을 꺼내며 전투 준비를 했다.
"앗!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음식을 훔치러 온 파렴치한 고양이가 아닙니다!"
생선구이에 정신이 팔려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고양이가 서둘러 자신의 앞발을 흔들며 외쳤다.
"그럼 여긴 왜 왔어?"
"혹시 박세준 고객님이신가요?"
"어. 내가 박세준인데. 그건 왜?"
펄쩍.
빙글.빙글.빙글.
척.
고양이가 구멍에서 뛰어내려 공중 3회전을 하며 사뿐하게 착지했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유랑 상인 테오라고 합니다."
테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가슴에 한쪽을 올리며 멋지게 자신을 소개했다.
"유랑 상인?"
세준이 테오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가끔 탑을 오르다 보면 만난다는 말은 들었지만, 고양이 유랑 상인은 못 들어봤다.
"네. 이번에 씨앗 상점에 신입 회원이 들어오셨다고 해서 인사도 드리고 거래도 할 겸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테오는 세준에게 얘기하면서 계속 생선구이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생선구이와 가까워지자 진한 생선 냄새가 테오의 정신을 흐트러트렸다.
'테오야! 안돼! 이성을 잃지 마!'
테오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꼬르르륵.
몸은 솔직했다.
"헉! 죄송합니다."
테오가 서둘러 세준에게 사과했다. 앞으로 거래를 틀 수 있는 고객님 앞에서 이런 실례를 범하다니!
"괜찮아. 식사 안 했으면 이 생선구이라도 먹을래?"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거 남은 거야. 먹어도 돼."
"그...그럼 한 개만 먹을까요?"
테오가 조심스럽게 생선구이 하나를 잡아 입에 넣었다.
사르르륵.
입에 넣자마자 생선구이가 녹듯이 사라졌다.
"너무 맛있어!"
그 말을 외친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 테오는 열심히 생선 가시를 핥고 있었다. 주변에는 생선 가시만 돌아다녔다. 생선구이 5개를 전부 다 먹어 버린 것이다.
토끼와 벌이 그런 테오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리고 세준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 이제 거래를 시작해볼까? 우선 생선구이부터 계산하자."
테오가 거래를 얘기할 때부터 세준은 느낌이 왔다. 이놈 호구다.
"네?"
테오가 세준의 말에 당황했다.
"공짜로 준 게 아니었어요?"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거래하러 왔다며?"
'당했다.'
테오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렇게 테오는 생선구이 5마리 값으로 0.5탑코인을 세준에게 지불하기로 하고 거래가 시작됐다.
고객의 돈을 뺏어야 하는데 오히려 돈을 줬다. 이미 손해를 보고 시작하는 장사.
'기필코 판다!'
테오가 각오를 다지며 봇짐에서 물건들을 깔아놨다.
"짜잔! 어떻습니까? 다른 층에서 넘어온 따끈따끈한 물건들입니다."
세준이 테오가 자신하며 꺼낸 물건들을 살펴봤다.
[텀블러 - 5탑코인]
[미니 선풍기 - 3탑코인]
[휴대용 손난로 - 5탑코인]
"이거 설마 탑 밖의 물건이야?"
"오! 바로 알아보시네요! 이 텀블러는 보존 마법이 걸려있어요. 여기다 뜨겁거나 차가운 것을 넣으면 온도가 유지되는 엄청난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 미니 선풍기는 윈드 마법이 인챈트 되어 있어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스위치를..."
'흐음...'
세준이 열심히 상품을 설명하는 테오를 자세히 바라봤다.
'알고 속이는 거야?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야?'
알고 속이는 거면 진짜 엄청난 연기력이었다.
하지만 텀블러에 보존 마법이, 미니 선풍기에는 윈드 마법이, 휴대용 손난로에는 웜 마법이 걸려있다고 말하는 테오의 눈빛에는 한줌의 거짓도 없었다.
'얜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야.'
호구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엄청난 대형 호구였다.
정말 운이 좋았다. 이런 녀석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이 호구를 이용하면 탑코인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호구야...아니 테오야. 우리 같이 일해보지 않을래?"
세준이 테오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13화. 계약서를 쓰다.
13화. 계약서를 쓰다.
테오는 탑의 중립 지대 중 하나인 75층 출신이다.
오랫동안 그래니어 마을 최고의 미인 마릴을 사모하고 있던 테오.
"테오, 고백해! 너라면 충분해."
"그래.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 거야."
"고백해! 고백해!"
마을 최고 부잣집 아들인 오렌과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테오는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마릴, 나 사실 너를 좋아했어! 나와 사귀어줘!"
하지만
"흥! 분수를 알아야지. 감히 날 넘봐!"
"그래. 테오, 네 주제를 알아야지. 미안하다. 사실 마릴은 나랑 사귀고 있어. 크흐흐흐."
오렌이 마릴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테오를 비웃으며 말했다.
"크하하하. 테오, 저 얼빠진 얼굴 좀 봐."
"푸하하하. 쟤 이제 그래니어 마을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냐?!"
며칠 전부터 자신을 향해 웃어준 마릴의 미소도,
친구들의, 아니 친구인 척했던 놈의 응원도 모두 순진한 테오를 골탕 먹이기 위한 연극이었다.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자며 마을 광장에서 고백하라는 놈들의 부추김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아주 처참하게 차인 테오는 마을에서 더 이상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충격을 받고 며칠간 두문불출하던 테오는 '부자가 돼서 복수해주마!'라는 생각으로 야반도주해 유랑 상인이 됐다.
평생 열심히 일해 모아둔 50탑코인으로 유랑 상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과 장비를 사고, 남은 5탑코인으로 상행에서 팔 물건을 매입하려고 할 때
"테오, 이거 정말 좋은 건데 너한테만 팔게."
테오에게 유랑 상인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 고블린 유랑 상인 스카람이 은밀히 말을 걸어왔다.
"뭔데?"
지금껏 친절하게 조언을 해준 스카람이기에 테오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카람이 꺼낸 물건은 텀블러, 미니 선풍기, 휴대용 손난로였다.
"이건 탑 밖의 물건이야.
"탑 밖의 물건?"
"그래. 이걸 위층으로 가져가면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어. 저 위층에 사는 존재들은 이런 물건을 취미로 모으거든."
"정말?! 내가 살게!"
"이거 씨앗 상점 신입 회원의 위치가 적힌 지도야. 신입 회원이니까 운이 좋으면 가격을 후려칠 수 있을 거야."
테오는 스카람의 말만 믿고 지도를 따라 탑을 올랐다.
하지만 물건값으로 스카람에게 거의 모든 돈을 줬기에 식량을 충분하게 사지 못했다. 그래서 테오는 쫄쫄 굶어가며 세준이 있는 곳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
"엥?! 같이 일하자고요?"
"그래. 그리고 네가 가져온 물건들 다 쓰레기야."
세준은 일단 팩폭으로 테오의 멘탈을 흔들었다.
"네?! 쓰레기라뇨? 그럴 리가 없어요!"
세준의 말에 테오가 흥분했다. 믿었던 스카람에게 전 재산을 들여 산 물건이 쓰레기라고 말하니 그럴 만도 했다.
"여기에 마법 같은 건 전혀 걸려있지 않아. 이 텀블러는 외부랑 접촉을 차단해 열의 이동을 막는 거고 미니 선풍기랑 휴대용 손난로는 켜놓고 몇 시간만 지나면 배터리가 다 돼서 멈출 거야. 자 봐봐."
세준이 설명하며 미니 선풍기를 켜 바닥에 세워놨다.
"아니에요! 박세준 님이 어떻게 알아요?! 스카람이 여기 마법이 걸려있다고 했어요!"
"나 탑 밖에서 왔어."
"네?!"
그 말로 모든 게 설명됐다.
"아마 그 스카람이라는 놈이 널 속인 거 같아."
"그...그럴 수가. 나한테 그렇게 친절했는데..."
큰 충격을 받은 테오가 혼자 중얼거리며 현실 부정을 하는 동안
삐익!
삐이!
뺘앙!
백토끼들은 농사를 시작하고
첨벙!
퍽!
뺙!
세준과 흑토끼는 피라니아를 잡아 생선구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사이 미니 선풍기는 켠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멈췄다.
"흐엉엉! 스카람 나쁜 고블린 새끼다냥!"
"왜 나는 항상 속는 것이다냥?!"
"이제 어떡하냥!"
테오가 대성통곡하며 울기 시작했다. 흥분으로 오랫동안 연습해 고친 그래니어의 사투리까지 터져 나왔다.
"테오, 진정해. 생선구이 좀 먹으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얘기할까?"
"훌쩍...꿀걱. 먹여 놓고 또 돈 내라고 그럴 거잖아요? 훌쩍...저 바보 아니거든요."
테오가 생선구이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넘어가지는 않았다. 순진했지만, 같은 수법에 당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세준도 여기서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아니야. 전에 먹은 것도 무료로 해줄게."
멘탈을 흔들었으니 이제 다독여 줄 때. 세준은 더 큰 걸 노리고 있었다.
"정말요?!"
"그래."
"자. 먹으면서 내 얘길 잘 들어봐."
세준이 테오의 앞발에 생선구이를 들려주며 동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냠냠.
세준의 말을 들으며 정신없이 생선구이를 먹은 테오. 마지막 생선구이를 다 먹었을 때
꾸욱.
"어?!"
어느새 자신의 왼발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쩌억.
계약서에서 발을 떼자 선명하게 찍혀있는 자신의 발바닥 자국.
계약서에는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자신의 봇짐에 들어있어야 할 계약서가 왜 앞에 있지?
테오가 서둘러 계약서를 읽어봤다.
[계약의 목적 및 내용]
1. 본 계약은 갑과 을, 쌍방이 상호협력하고 갑의 농작물 판매를 촉진해 쌍방의 이득을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앞으로 을은 평생 갑이 제공하는 농작물을 팔고 그 판매 금액을 가져온다.
[보수]
1. 갑은 을에게 매주 생선구이 25마리나 그에 상응하는 금액을 주급으로 준다.
2. 갑은 을이 가져온 판매 금액의 3~5%를 을에게 인센티브로 준다.
[특약]
1. 을은 최초 거래로 갑의 농작물을 받아 한 달 안에 총판매 금액이 5탑코인 이하로 발생하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2. 을은 반드시 갑이 말하는 금액 이상으로 농작물을 팔아야 한다.
3. 을은 갑의 허락 없이 추가 거래처를 만들 수 없다.
4. 거래할 때는 반드시 그래니어 사투리를 사용한다.
[갑 : 박세준]
[을 : 테오]
계약서 아래에는 세준의 지장과 테오의 발바닥이 사이좋게 찍혀 있었다.
특약 1번은 테오에게 도망갈 구멍을 줘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특약 2번과 3번은 대형 호구인 테오가 호구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넣은 것이고 특약 4번은 분명 지구인이라면 테오의 사투리를 더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이게...뭐야?"
"앞으로 잘해보자. 테 대표."
세준이 테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아니죠. 특약 1번이 있잖아요."
테오가 세준의 손을 밀어내며 새침하게 말했다.
"알았어. 그래도 일단 거래는 하는 거잖아. 테 대표."
"흥! 그건 그렇죠."
테오는 대답하며 넌지시 세준의 손을 바라봤다.
슥슥.
세준이 다시 테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후
고로롱.고로롱.
테오는 피곤했는지 세준의 쓰다듬을 받으며 까무룩 잠에 빠졌다.
"잘 자라. 테대표."
세준이 곤히 자는 테오를 불가에 눕혀놓고 일어났다.
'계획대로야.'
그렇게 세준은 탑코인을 벌 수단을 마련했다.
"으하함. 좋은 냄새다냥. 아니! 좋은 냄새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사투리를 정정하며 테오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일어났다.
"일어났어?"
세준이 아침으로 생선과 대파를 구우면서 물었다. 옆에는 방금 구워놓은 생선구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침부터 세준과 흑토끼가 열심히 잡은 피라니아였다.
"네. 제가 얼마나 잔 거죠?"
"어제 점심부터 자서 지금 일어난 거야."
오늘은 조난 129일 차, 테오는 하루를 내리자고 아침에 일어난 것이다.
"근데 그건 뭔가요?"
테오가 코를 실룩거리며 수북이 쌓인 생선구이를 물었다.
"이번 주 주급. 생선구이 식는다. 빨리 담아."
"네. 감사합니다."
테오는 '왜 동업인데 자신이 주급을 받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서둘러 자신의 봇짐에 생선구이를 담기 시작했다.
봇짐 아이템은 여러 층을 다녀야 하는 유랑 상인의 필수 아이템으로 봇짐에는 보존 마법과 공간확장 마법 그리고 경량화 마법이 걸려있어 많은 물건을 장기간 처음 상태로 보관할 수 있다.
"아침 먹자!"
삐익!
뺘악!
세준의 외침에 토끼들이 우다다 달려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저...박세준 님."
테오가 세준을 불렀다.
"그냥 세준 님이라고 불러."
"네. 세준 님, 근데 뭘 파실 생각이신가요?"
"방울토마토."
"네?"
툭.
"이거."
세준이 방울토마토 나무에서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를 따서 보여줬다.
"이걸요?"
테오가 방울토마토를 탐탁치않게 바라봤다.
"한 번 봐봐."
세준이 테오에게 방울토마토를 건넸다.
"응? 마력의 방울토마토? 이거 아이템이에요?!"
"어. 괜찮지?"
"얼마에 파실 건데요?"
10분간 마력은 0.1 상승에 지방 10g 분해.
테오는 아이템의 옵션을 봤을 때 탑의 각성자들에게 좋게 받으면 개당 0.01탑코인 정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방울토마토 하나에 1만 원. 충분히 높은 가격이다.
하지만
"개당 0.05탑코인."
세준은 테오의 예상보다 5배나 높은 금액을 불렀다.
"네?!"
세준의 말에 테오는 '이게 팔리겠어?"라는 눈빛으로 앞발에 쥔 방울토마토를 바라봤다.
장담하건대 세준은 자신의 방울토마토가 비싸게 팔릴 것을 확신했다. 이 방울토마토는 각성자들을 위한 물건이 아니다.
마력의 방울토마토가 각성자들에게 지방 분해와 마력 상승을 가져다주지만, 큰 효과는 아니었다. 그들의 몸은 이미 각성으로 어느 정도 최적화 되어 있어 큰 효과가 없다.
하지만 탑 밖의 비각성자들에게는 부작용 없이 먹자마자 즉시 10g의 지방 분해와 더불어 몸에 활력이 돋는, 거기다 맛도 최상급인 방울토마토는 분명 팔릴 상품이었다.
특히 초반 희소성까지 생각하면 세준은 0.1탑코인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준은 지구의 다이어터들을 믿었다. 그들이라면 호응해줄 것이다.
"알았어요. 일단 계약이니까."
테오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 거래로 총판매 금액이 5탑코인이 안 나오면 생선구이만 받고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몇 개나 가져가요?"
"1000개 정도?"
세준이 동굴 구석에 만든 저장고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방울토마토가 가득 쌓여 있었다.
세준과 토끼들이 테오가 봇짐에 방울토마토 담는 것을 도왔다.
"그럼 다녀올게요."
테오가 봇짐을 메고 동굴을 떠났다.
***
5일 후, 탑의 38층.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피닉스 길드의 정예 헌터 10명이 38층을 클리어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클리어할 가능성은 아직 요원했다.
그렇게 동굴을 수색하고 있을 때
키이이익!
거미 몬스터들이 다가왔다.
"거미 15마리! 다이아몬드 포메이션!"
리더의 말에 헌터들이 서둘러 진형을 만들었다.
키이익!
진형을 만듦과 동시에 거미 몬스터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포위당하지 않게 후방 계속 살펴!"
"네!"
지구 최고 길드의 정예 헌터들인 만큼 그들은 빈틈이 없었다.
잠시 후 전투가 끝났다.
"후우. 수고했어. 거미 사체 챙기고 여기서 잠시 쉰다."
"네."
헌터들이 그렇게 거미 몬스터의 사체를 챙기고 앉아서 쉬려할 때
"인간, 여기 좋은 물건 보고 가라냥."
치즈냥 한 마리가 그들을 불렀다.
14화. 완판이다냥.
14화. 완판이다냥.
"어?! 유랑 상인이다."
"어머! 고양이야!"
"고양이 유랑 상인이라니!"
"뭐 파는지 가보자."
헌터들이 테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엥? 방울토마토?"
다가갔던 헌터들이 테오가 돗자리 위에 수북이 쌓아둔 방울토마토를 보고는 실망했다. 유랑 상인이 파는 무기나 신비한 물약을 기대했는데 밖에서도 먹을 수 있는 방울토마토였으니 그럴 만했다.
"어리석은 인간들, 너희들이 그럴 줄 알았다냥. 이건 너희들이 알던 그 방울토마토와 다르다."
세준은 테오가 시키는 건 곧잘 한다는 걸 텀블러 등의 물건을 팔 때 확인했기에 아주 디테일하게 지시를 내렸다.
"다르다고?"
"그렇다냥. 한 번 옵션을 확인해 보라냥."
테오는 세준의 지시대로 방울토마토가 아이템임을 어필했다.
"옵션?!"
"이거 아이템이었어?"
헌터들이 방울토마토를 들어 옵션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마력의 방울토마토?"
"10분 동안 마력 0.1 상승?"
"너무 낮은데."
역시 남성 헌터들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그들의 레벨은 45~48. 그들의 레벨에서 장비의 옵션까지 합하면 마력 0.1은 있으나 마나 한 스탯이었다.
하지만
"이걸 먹기만 하면 지방 10g 분해?"
"진짜 이게 가능해?"
여성 헌터들의 반응은 달랐다. 그들은 바로 상품의 진가를 알아봤다. 밖에 나가면 맛있는 걸 먹으면서 몸매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무수한 여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템에 적힌 옵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거 얼마야?!"
여성 헌터 중 하나인 제시카가 흥분하며 방울토마토의 가격을 물었다. 그녀는 이걸 보자마자 자신의 여동생 애나를 떠올렸다.
애나는 초고도비만으로 위 절제 수술까지 받았지만, 작년부터 우울증으로 폭식을 시작하며 다시 몸무게가 120kg까지 올라갔다.
요즘 애나의 건강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제시카에게는 마력의 방울토마토가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마력의 방울토마토 1개당 0.05탑코인이다냥."
"뭐?!"
테오의 말에 다른 헌터들이 놀랐다. 방울토마토 하나의 가격으로는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절반을 살게."
"엥?! 정말 이냥?! 절반이면 500개다냥!"
제시카의 말에 이번에는 테오가 화들짝 놀랐다. 500개면 25탑코인이다. 단숨에 계약서의 판매 금액 5탑코인을 훌쩍 넘어섰다. 그 말은 세준의 농작물을 영원히 팔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응. 500개 살게. 여기 25탑코인."
제시카가 돈을 건넸다. 이미 애나의 치료를 위해 쓴 비용에 비하면 큰 돈도 아니었다.
"다...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냥? 인간, 너는 충동구매를 하고 있다냥."
테오가 종신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제시카의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구매를 말렸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를 냈다.
'500개나 산다는데 오히려 말려?'
'이거 뭔가 있는 거 아냐?'
'몇 개 사서 여자친구한테 줄까?'
헌터들은 팔기 싫어하는 테오의 태도를 보며 오히려 궁금증이 생겼다.
"나도 100개 줘."
"난 50개."
"나도 50개!"
헌터들이 경쟁적으로 방울토마토를 사기 시작했다. 방울토마토 하나의 가격이 비싸긴 했지만, 그들 같은 정예 헌터에게는 큰 돈이 아니었다.
그 정도 탑코인은 며칠 사냥만으로 충분히 벌 수 있는 돈. 그들은 궁금증을 충족시키기 위해 충분히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헌터들은 휴식이 끝나자 다시 거미 몬스터를 사냥하러 갔다.
"이...이럴 수가..."
테오가 텅 빈 돗자리를 보며 울먹였다.
"와...완판이다냥."
냥생 최초의 완판. 고양이 유랑 상인 테오의 전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
조난 134일 차.
"읏차"
세준은 오늘도 힘차게 일어났다.
레벨업을 할 때마다 보너스 스탯으로 힘과 체력을 올렸더니 원래도 몸의 컨디션이 좋았는데 이제는 아침마다 기운이 넘쳐났다. 거기다 탑농부의 직업 특성인 잔병치레하지 않는 것도 은근히 좋은 거 같았다.
슥슥.
세준이 벽으로 가서 습관이 된 벽에 획 하나를 긋고 하루를 시작했다.
삐익!
삐이!
뺘아!
뺙!
백토끼들과 흑토끼가 일어나 세준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그래. 좋은 아침."
인사를 한 토끼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세준도 작은 연못에서 세수를 하고 방울토마토 수확을 시작했다.
톡.톡.
[잘 익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수확했습니다.]
[직업 경험치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수확하기 Lv. 2의 숙련도가 아주 미세하게 상승합니다.]
[경험치 10을 획득했습니다.]
...
..
.
그렇게 방울토마토를 수확하고 있을 때
[레벨업 했습니다.]
[보너스 스탯 1을 획득했습니다.]
레벨 10이 된 이후로 오랜만의 레벨업이었다. 세준은 보너스 스탯으로 힘을 올렸다.
"잘하고 있겠지?"
세준은 테오를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헌터들을 만났을 것이다.
"몇 개나 팔고 오려나?"
완판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워낙 어리숙한 녀석이라 제대로 팔 수는 있는지 걱정이 컸다.
"그래도 필살기도 알려줬으니까. 절반은 팔겠지?"
세준이 알려준 필살기인 무료 시식과 꾹꾹이 서비스. 하지만 세준은 테오가 필살기를 쓰기도 전에 방울토마토가 몇 분 만에 완판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방울토마토가 팔리기 시작하면 내 이름도 알려지겠지? 흐흐흐."
세준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농작물이 팔린다니 괜히 뿌듯했다.
그때
윙윙.
독꿀벌이 동굴 천장의 구멍으로 들어왔다.
"왔어?"
부비부비
오늘도 독꿀벌은 세준의 얼굴에 몸을 비비며 애교를 떨면서 출석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윙윙.
방울토마토밭으로 꿀을 빨러 갔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삐익!
아내 토끼가 마른 파 이파리를 불에 넣기 시작했다. 어느새 점심이었다. 방울토마토를 수확하고 토끼들을 도와 밭에 물을 주다보니 시간이 금세 갔다.
뺙!뺙!
해머로 벽치기를 하며 수련을 하고 있던 흑토끼가 세준을 불렀다. 하루 중 자신이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흑토끼는 항상 피라니아 사냥 시간을 기다렸다.
"그래. 간다."
세준이 서둘러 연못으로 이동해 횃불을 좌우로 휘둘렀다.
첨벙!
뾱!
깔끔한 해머질. 이제 흑토끼는 아주 능숙하게 피라니아를 사냥했다.
그렇게 피라니아를 5마리 사냥했을 때 흑토끼의 몸이 잠깐 빛났다.
"어?! 레벨업 했어?
끄덕끄덕.
흑토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토끼들이 농사 일을 하다가 레벨업을 하는 건 몇 번 봤지만, 흑토끼가 레벨업 하는 건 처음 봤다.
"레벨업 축하해."
뺘악!
흑토끼가 의기양양하게 세준을 바라봤다. 나 어떰?
흑토끼는 조금 걱정스러울 정도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조만간 물에 들어가서 피라니아를 잡겠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사이 흑토끼는 다른 백토끼에게 우다다 달려가 자신의 레벨업 소식을 요란스럽게 알렸다.
삐익!
삐이!
뺘아!
백토끼들이 흑토끼를 축하해줬다.
점심은 덕분에 조금 요란했다. 토끼들이 떠드는 동안 생선구이와 구운 대파로 점심을 끝낸 세준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세준에게는 점심 식사 후의 낙이 생겼다.
"흐흐흐. 커피 마셔야지."
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의 지정석에 올려둔 텀블러를 들었다.
테오가 떠나고 컵으로 쓰려고 텀블러를 열었을 때
"커피다!"
텀블러 안에는 가누 10봉지가 들어 있었다. 테오에게 판 상인도, 테오도 텁블러는 열어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엄청난 득템. 아마 테오가 텀블러 대신 커피를 팔았다면 세준은 돈을 냈을 것이다.
세준이 텀블러를 작은 연못으로 가져가 물을 4분의 1 정도 채우고
탁.탁.
가누의 끝부분을 잡고 검지를 가볍게 튕겨 끝부분을 털어냈다. 커피 알갱이 하나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준비가 끝난 가누 커피 1봉지의 입구를 뜯어 텀블러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쉐킷쉐킷.
커피 알갱이를 녹이기 위해 뚜껑을 닫고 흔들어 줬다.
딸깍.
후루룩.
입구를 열고 세준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쏴아.
쓴맛이 나며 커피의 검은 파도에 생선의 비린내와 파의 단맛이 깨끗하게 쓸려나갔다.
"크으. 역시 식후에는 커피지."
물을 끓일 도구가 없어 뜨아도, 얼음이 없어 아아도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냥 시원한 연못 물로 타서 마시는 커피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꿀렁.
세준이 생수통에 모아두었던 꿀을 조금 부었다.
"아 좋다."
쓴맛과 단맛이 조화되면서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
토끼들이 커피를 마시며 미소 짓는 세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커피를 탄 첫날에 토끼들이 궁금해하기에 조금 줘봤는데 한 번 찍어 먹어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꿀을 탄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토끼의 혀는 커피의 쓴맛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제대로 먹은 세준이 오후 농사를 시작했다.
"흥흥흥."
세준이 콧노래를 부르며 방울토마토를 수확하고 밭에 물을 줬다. 점심에 커피 한 잔 먹었을 뿐인데 오후 내내 즐거웠다.
그렇게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삐익!
삐이!
토끼들이 세준에게 인사를 하고 굴로 들어가 잘 준비를 했다.
"잘자!"
세준도 토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잠자리에 가서 흙을 두드리며 잘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
윙윙.
독꿀벌이 동굴 천장을 분주하게 날아다녔다.
"너 아직 안 갔어?"
요즘 일찍 오고 늦게 가긴 했지만, 이 시간까지 독꿀벌이 돌아가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얼릉 가서 자."
윙윙.
독꿀벌은 세준의 말도 무시하고 열심히 날아다녔다.
"알았다. 난 잘게. 내일 보자."
커어어.
세준은 흙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었다.
윙윙.
독꿀벌이 열심히 동굴 천장에 뭔가를 만들었다.
***
"왜 안 오지?"
테오를 상대로 사기를 친 고블린 유랑 상인 스카람이 테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분명 자신이 넘긴 물건을 팔지 못했을 테니 실망하면서 돌아올 때가 됐다.
'그리고 실망한 놈을 위로해주며 더 큰 기회가 있다며 돈을 빌려주는 거지.'
그러면 그때부터 놈은 고리대로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원금은커녕 평생 불어나는 이자를 갚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일하게 될 것이다.
"클클클. 정말 오랜만에 호구하나 제대로 물었어."
스카람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테오를 기다리던 스카림은 유랑 상인들의 판매 금액 랭킹이 표시되는 게시판으로 갔다. 하루에 한 번씩 자신의 랭킹을 확인하면서 뿌듯함을 느끼는 게 인생의 낙 중 하나였다.
[유랑 상인 판매 금액 랭킹]
...
..
.
999위 - 스카람[45.2탑코인] 1UP
"클클클. 드디어 1000위 안에 들었군."
1000위에서 한 단계 올라 999위가 됐다. 여러 초짜 유랑 상인들을 등쳐서 간신히 만든 순위였다.
그렇게 자신의 순위를 확인한 스카람이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상인들의 이름을 아래서부터 쓱 살펴봤다. 언젠가 자신이 밟고 올라가야 할 대상들이었다.
그때 스카람의 고개가 조금 올라가다 멈췄다.
"응?!"
도저히 그곳에 있는 것이 불가능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982위 - 테오[50탑코인] NEW!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못 팔았을 텐데..."
스카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윙윙.
독꿀벌의 날개 소리에 눈을 뜬 세준. 아침까지 독꿀벌은 천장을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응? 벌집?"
세준의 눈에 작은 벌집이 보였다. 어제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걸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사 온 거야?
윙윙.
부비부비
세준의 물음에 독꿀벌이 위아래 3번 움직이고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듯이 세준의 얼굴에 몸을 비볐다.
조난 135일 차, 독꿀벌이 독립해 세준의 동굴로 이사 왔다.
15화. 이름이 안 알려지다.
15화. 이름이 안 알려지다.
세준의 동굴에서 꿀을 먹은 첫날 독꿀벌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시작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 매일 꿀을 먹을 때마다 몸에서 좀 더 짙은 향이 나기 시작했고 몸도 조금씩 통통해졌다.
처음에는 어떤 변화인지 몰랐지만, 얼마 전 벌집에 있던 여왕벌이 자신을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신도 알을 낳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독꿀벌은 독립을 결심했다.
독립할 장소는 당연히 먹이와 가까운 세준의 동굴. 좀 있으면 엄청난 양의 방울토마토꽃이 피어날 것이기에 식구를 늘려도 먹이는 충분해 보였다.
윙윙.
그것을 위해서 매일 동굴 주인에게 몸을 비벼 친근감을 표시하며 자신이 적이 아님을 알리고 동굴에 사는 것을 허락(?)받았다. 물론 세준은 자신이 언제 허락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부비부비.
오늘도 동굴 주인에게 몸을 비비며 하루를 시작하는 독꿀벌이었다.
그리고
"일하자."
삐익!
삐이!
뺘아!
뺙!
세준과 토끼들도 각자 자신의 일을 하는 것으로 아침이 시작됐다.
"흐음...대략 70%인가?"
세준이 발목 정도까지 자라난 당근싹을 보며 말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을 주며 싹이 나길 기다렸지만, 씨앗 상점에서 구매해 심었던 당근 씨앗은 1000개 중 700개만 싹이 났다.
그리고 마력의 방울토마토에서 채종해 심은 방울토마토 씨앗 1200개, 여기는 당근 씨앗보다 확률이 10% 정도 낮았다. 발아율 61%. 1200개 중 732개가 싹이 나서 자라고 있었다.
씨앗 상점에서 구매해 심은 옥수수 씨앗과 직접 심은 고구마순의 발아율도 70%, 60% 정도로 당근과 방울토마토의 발아율과 비슷했다.
"흐흐흐. 자라나 줘서 고맙다."
심은 것 중 대략 1000개는 죽어버리면서 자신의 노력이 쓸모 없어졌지만, 죽지 않고 살아나 준 새싹들을 보니 그런 불만은 금세 사라지고 입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세준의 눈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추가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 : 탑의 관리자에게 마력의 방울토마토 10개를 줘라!]
보상 : 없음
거절 시 : 서운함
탑의 관리자는 세준에게 계속 퀘스트를 보류 당하고 세준과 테오의 거래를 지켜보며 깨달은 게 있는지 과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쳐라라는 말이나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협박도 사라졌다.
대신 저렇게 서운함을 표시한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저렇게 불쌍하게 구니 또 안 줄 수가 없었다.
"가져가."
세준의 저장고에 있던 방울토마토 10개가 사라졌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탑의 관리자가 당신의 친절함에 고마워합니다.]
이제 고마워하기 까지. 상대가 고마워하니 마음이 흐뭇했다.
"응?!"
흐뭇한 미소를 짓던 세준이 황급히 미소를 지웠다.
'나 방금 살짝 호구 같았어.'
조심해야지. 세준이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농사에 집중했다.
하지만 밭에 싱그러운 녹색 물결을 보니 금세 입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호구가 아니라 마음이 넓어진 것이지만, 세준은 깨닫지 못했다.
***
조난 143일 차.
"내가 왔다냥!"
테오가 천장 구멍에서 뛰어내리며 자신의 복귀를 알렸다. 완판을 하고 온 만큼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하지만
"너?! 뭐야?!"
생각보다 이른 복귀에 세준의 언성이 올라갔다. 세준은 왜 다 팔지도 않고 왔냐는 책망의 의미였지만, 테오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잘못했다냥. 다음부터는 완판해도 다른 층에서 놀지 않고 바로 오겠다냥."
테오가 바로 자신의 잘못을 실토했다.
"뭐?! 놀다 왔어? 며칠이나?"
"4일 놀았다냥. 잘못했다냥..."
세준의 언성이 내려가자 눈치를 보던 테오는 재빨리 세준의 다리를 잡고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세준의 심각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테오의 말을 듣고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었다.
테오의 말로는 헌터들이 있는 30층 대까지 왕복하려면 10일 정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완판을 하고도 4일이나 놀 시간이 있었다고?'
테오가 떠난 지 14일 만에 돌아온 걸 생각하면 내려가자마자 완판을 했다는 말이었다.
"자세히 말해봐. 아니면 갑의 무서움을 보여주지."
세준이 으름장을 놓으며 테오를 겁줬다. 뭐 이미 세준의 눈치를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이 겁줄 필요도 없어 보였지만.
"알겠다냥..."
잔뜩 움츠러든 테오가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된 것이다냥...그냥 몇 마디 하자마자 인간들이 다 사버렸다냥."
테오는 그래도 최후의 눈치는 있었는지 자신이 구매를 말렸다는 말은 쏙 뺐다.
"그래? 필살기도 안 쓰고?"
"그렇다냥."
세준은 테오의 말을 듣고는 자신의 생각보다 방울토마토의 반응이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50탑코인이다냥."
"수고했어. 테 사원. 자 여기 인센티브."
세준이 테오에게 판매 금액의 4%인 2탑코인을 건넸다.
"엉? 나 테 대표아니냥?"
"방금 강등됐어. 4일이나 놀고 오는 대표가 어디 있어? 앞으로 열심히 하면 다시 대표시켜 줄게. 그리고 대표가 되면 인센티브도 5%로 올려줄게."
"알겠다냥! 열심히 해서 대표가 되겠다냥!"
세준의 말에 테오가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근데 너 말투가?"
"그냥 이렇게 살기로 했다냥."
그래니어 사투리가 인간들에게 호감을 준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사투리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졌다.
"흐흐흐. 이제 나의 이름이 알려지겠군."
"그건 무슨 말이냥?"
"방울토마토 옵션에 재배자가 표시되잖아. 그러니 사람들이 그 방울토마토를 내가 만든 걸 알게 될 거 아냐."
"...!"
세준의 말에 테오가 안절부절 못했다.
유랑 상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매출이 적은 초보 유랑 상인이 파는 물건의 제작자, 재배자 등 물건의 출처를 강제적으로 가려주는 기능이다.
말로도 알려줄 수 없다. 삑-처리가 된다. 정말 알려주고 싶으면 그 장소로 데려가는 방법뿐.
초보 유랑 상인의 거래처가 공개되는 것을 막아 돈이 많은 유랑 상인이 초보 유랑 상인의 거래처를 뺏지 못하게 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즉, 테오가 파는 마력의 방울토마토에는 세준이 키웠다는 재배자 표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 제한을 푸는 방법은 판매 금액 1000탑코인을 달성해 중견 유랑 상인이 되는 방법뿐.
'큰일이다냥.'
테오는 여기서 이 사실을 세준에게 발설하면 왠지 사원에서 한 단계 더 강등당하고 인센티브도 3%로 깎일 것 같았다.
그렇다고 숨기고 있기에는 자신의 간덩이가 너무 작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달라냥. 바로 출발하겠다냥."
"벌써? 며칠 쉬다 가. 주급도 받아야지."
"아니다냥! 나중에 받겠다냥. 빨리 돈 벌고 싶다냥!"
테오가 서둘러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봇짐에 가득 담고 떠났다.
"애가 돈독이 올랐어."
세준은 테오의 마음도 모르고 오해했다.
***
세준이 자신의 이름을 단 방울토마토가 퍼져나갔을 거라고 단단히 믿고 있을 때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사 간 헌터들은 방울토마토의 효과를 실감하고 있었다.
"아빠! 아빠! 다음에 이거 더 사와야 해. 알았지? 꼭! 이거 너무 좋아!"
피닉스 길드의 리더 김동식이 궁금증도 해소하고 매일 다이어트 한다고 밥을 굶는 딸을 위해 사 온 마력의 방울토마토 20개.
딸은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먹고는 더 이상 다이어트로 인한 짜증을 부리지 않았고 집안에 평온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하루에 3개씩 먹더니 요즘은 아껴먹는다며 아침에 하나만 먹는다.
지방 10g 분해와 함께 따라오는 몸에 활력을 주는 옵션.
그 활력 효과가 장시간 유지되며 적게 먹어도 몸에 힘이 넘쳤고 힘들지 않으니 더 움직이게 되면서 추가적인 칼로리 소모를 만들며 다이어트를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때 양보하지 말 걸.'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다른 팀원들이 산다기에 양보하고 20개만 샀는데 딸의 반응을 보니 적게 사 온 것이 후회됐다.
"알았어. 나만 믿어라. 반드시 구해주마."
딸이 이렇게 뭔가를 요구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김동식은 꼭 딸에게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구해주고 싶었다.
-3일 후 탑에 들어간다.
김동식이 예정보다 일찍 탑으로 들어가기 위해 팀원들을 소집하는 문자를 보냈다.
팀원들의 불만이 예상됐지만, 이번에는 리더의 권력을 이용해 고양이 유랑 상인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38층의 유랑 상인을 만났던 장소 주변에서 거미 몬스터를 사냥하며 대기할 생각이었다.
'이번에 유랑 상인을 만나면 고정 거래를 요청해야지.'
그때
두웅.두웅.
팀원들의 답장이 왔다.
-네.
-준비됐습니다.
-오늘 가요! 지금 당장!
김동식은 팀원들이 투덜거릴 것을 예상했지만, 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탑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오히려 더 빨리 들어가고 싶다고 재촉했다.
그들도 동식과 비슷한 처지였다.
***
제시카는 사냥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동생인 애나에게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건넸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 이 방울토마토 어디서 났어?!"
방울토마토를 20개 정도 먹은 애나가 흥분하며 제시카에게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가리키며 물었다.
"왜? 어디가 이상해?!"
"아니. 너무 좋아. 더 이상 우울하지가 않아. 힘이 넘쳐! 막 움직이고 싶어!"
"뭐?!"
애나의 대답에 제시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애나를 운동시키려면 몇 시간은 윽박지르고 애원해야 10분 정도 움직이는 시늉을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스스로 움직이고 싶다니.
"언니, 나 걷고 싶어."
"그래. 나가자."
제시카는 그날 애나와 세 시간 동안 동네 한 바퀴를 완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애나의 몸무게는 빠르게 줄어들어 80kg가 됐다.
이제 애나는 시키지 않아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다이어트 식단과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먹으며 혼자 하루 3번씩 동네를 돌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20개씩은 먹어야 기운이 나던 마력의 방울토마토의 개수도 몸이 가벼워지자 13개로 줄어들었다.
한두 달만 있으면 애나가 평범한 일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력의 방울토마토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다시 탑에 들어가서 유랑 상인을 만나야 해.'
그때
-3일 후 탑에 들어간다.
리더에게 탑에 들어가자는 문자가 왔다.
-오늘 가요! 지금 당장!
제시카가 서둘러 답장을 하고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
"일단 나오기는 했는데 어떡하냥?"
테오가 탑의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고민에 빠졌다.
"언제 판매 금액 1000탑코인을 달성한다냥?"
이번에는 봇짐에 마력의 방울토마토를 가득 담아 1500개를 담았다.
하지만 이렇게 1500개씩 팔아도 10번 이상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최대한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냥."
빨리 판매 금액 1000탑코인을 달성해 중견 상인이 될 방법이 필요했다.
이러다 세준에게 재배자 표시가 지워진다는 것을 들켜 사원 밑으로 강등되고 싶지 않았다.
"빨리 대표가 되고 싶다냥."
한 번 가졌던 걸 뺏기니 더 갖고 싶었다.
그렇게 테오가 마력의 방울토마토가 가득 든 봇짐을 메고 터덜터덜 걸으며 며칠 전 인간들과 거래했던 38층으로 갔다.
처음 거래를 한 곳이니만큼 한 번 들렸다 아무도 없으면 아래층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때
"어! 유랑 상인이 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계속 기다렸잖아."
며칠 전 거래를 했던 인간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인간, 나를 기다린 것이냥?"
테오가 물끄러미 인간들을 보며 물었다.
"그래. 3일이나 기다렸다고."
"그런 것이다냥?"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을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력의 방울토마토 있지?"
"후훗. 있지만, 가격이 올랐다냥."
다시 대표 자리에 앉고 싶은 테오의 상술이 개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