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겜의 설정충 대마법사
1. 첫번째 연구 - 벨라디아 헤링턴(1)
"똥망겜답게 컨텐츠가 없네."
[플레이시간 : 21,199]
[업적달성률 : 99%]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게임 하나를 오래했나? 1만 시간도 아니고 2만 시간을 플레이했으니, 이건 게임이 아니라 삶이다.
'근데 재밌는데?'
시네어RPG는 중세판타지 배경의 어드벤쳐 게임이다. 용과 마법이 살아있는 세계를 탐험하는 재미를 즐기는 게임이지.
'영웅도 악당도 가능한 자유도가 특징이지. [고대의 두루마리]나 [발두란의 문]같은 서양RPG의 계보를 이어가는 근본판타지!'
아무튼.
새로운 게임을 시작해야겠다.
'이번엔 무슨 컨셉을 잡을까······'
플레이 타임 2만 시간.
엔딩을 보았던 캐릭만 28개.
일반적인 플레이는 시시해져버렸다······
[용언 쓰는 야만전사]
[약 먹는 괴물사냥꾼]
[성역의 네크로맨서]
[아빠 죽인 데스나이트]
[엘디스트의 왕]
[·········]
정말,
다해봤어.
'진짜 뭐하지?'
·········
방금 떠올랐다.
아직 안 해본 컨셉이.
'설정충 대마법사!'
2만 시간 썩은물이 대마법사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설정충 대마법사]는 [주인공 대마법사]와는 역할이 제법 많이 다르다.
'설정충은 본래 뒤에서 흉계를 꾸미는 NPC 대마법사들이 해먹는 자리거든.'
잊을법하면 등장해서 설정을 주절대며 음모를 꾸미는 대마법사는 클리쉐로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흔하다. 하지만 어느 개발사도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써먹지는 않는다.
'지루하잖아?'
인게임 텍스트를 꼼꼼히 읽으며 세계관을 알아가던 20세기의 게이머들과 달리, 요즘 게이머들은 문장이 3줄만 넘어가면 스킵이다.
'또한 주인공도 최대한 쉽고 단순히 만드는 추세지. 진입 장벽을 낮추고 싶으니까.'
그러나 본좌는 2만 시간 썩은물. 스토리 작가보다 세계관 설정에 정통한 썩은물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해주십시오.]
[인간 남성]
[마법사]
[상위직을 선택해주십시오.]
고인물 특전.
상위직을 가지고 시작한다.
[로어마스터를 선택하셨습니다!]
로어마스터는 이번 DLC에서 추가된 신규 상위직. 현질로 구입하는 클래스답게 남다른 성능을 지녔다. 운용법이 까다로우나 고점이 무한대라서 숙련자가 잡으면 사기다.
────
◆로어마스터 (고유 클래스, 상위)
: 로어마스터들은 고대전승을 연구하는 현자들입니다. 그들은 잊혀진 지식을 되살리고 숨겨진 비밀을 파헤쳐 강해집니다.
◆특징
- [로어 습득]에 제약이 없습니다.
- [연구 주제] 시스템을 사용합니다.
- [지식] 판정에 막대한 보너스를 받습니다.
────
가장 남다른 부분은 [로어습득]에 제약이 없다는 점이다. 이곳의 마법사들은 [단일로어]만 사용하는게 기본이니까.
'불의 마법사는 화염술만, 죽음의 마법사는 강령술만 사용하는 식이지.'
하지만 로어마스터들은 [연구주제]를 진전시켜서 새로운 로어를 해금한다. 또한 후반에는 모든 종류의 로어를 획득해서, 모든 종류의 마법을 난사하는 만능마법사로 거듭난다.
'나 혼자만 모든 마법 다 배움!'
그러나 왕귀형 클래스답게 초반이 취약하단 단점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대안도 있다.
[특성을 선택해주십시오.]
[마법재능 5단계]
고인물 특전.
개사기 특성 선택!
────
◆마법재능 5단계(특성, 신화)
: 당신은 만년에 한 번 나올 마법재능을 지녔습니다. 순탄히 성장한다면 역사적인 마법사들의 영역을 초월해, 신들의 영역까지 침범할 겁니다. 그러나 재능이 지나치게 뛰어나서 언제나 질투와 경계를 사게 될 겁니다······
────
외모와 장단점 같은 세세한 설정도 셋팅을 마친다. 이제 게임만 시작하면 된다.
[이름을 입력해주십시오.]
[멀린]
구려.
할배 같잖아.
[메데이아]
이건 여캐잖아.
나는 남캐라고.
[무작위 생성]
[텔로리안]
엔터.
[배경 스토리]
[텔로리안은 도시의 노무자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굉장한 지성과 초월적인 마법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당신을······]
[1. 비밀을 숨기라고 신신당부했다.]
[2. 먹고 살기 바빠서 신경 쓰지 않았다.]
[3. 태양신 교단에 고발했다.]
[4. 저주받은 아이라며 내쫓았다.]
부모님이 살아있으면 귀찮으니 4번. 주인공은 게임 클리어에 전념해야지, 괜히 주변인물 챙기다보면 귀찮아진다.
[······저주받은 아이로 부르면서 도시의 뒷골목에 버렸습니다. 덕분에 당신은 6살부터 타고난 자질에 의존해서 홀로 간신히 살아남았습니다. 이를테면······]
[1. 마녀의 몸종이 되었다.]
[2. 흉악한 마법강도가 되었다.]
[3. 길거리에서 몸을 팔았다.]
[4. 악마 대공과 계약했다.]
악마와 계약하면 막강한 보너스를 얻지만 나중에 귀찮아지므로 제외한다. 그럼 남은 선택지 중에서는 몸종이 제일 낫다.
[······마녀의 몸종으로 들어가 밥벌이를 하는 것이었죠. 당신은 주인에게 지혜롭게 봉사했고, 이에 마녀는 당신을 제자로 거두어줬습니다. 그녀가 가르쳐준 마법은······]
[1. 원소 마법]
[2. 비전 마법]
[3. 야생 마법]
[4. 암흑 마법]
이건 [마녀의 제자] 배경에서 제일 중요한 선택이다. 최초의 마법은 초반 난이도를 결정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니까.
'고점은 비전 마법이 높지만 초반에는 원소 마법이 최고다. 마나 소모는 적은데 위력은 강하거든.'
[······원소 마법이었습니다. 마녀는 처음엔 총명한 제자를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초월적인 마법재능은 스승까지도 질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마녀는 당신을 먼저 죽이려들었고, 이에 당신은······]
[1. 질투를 피해서 도망쳤다.]
[2. 죽이고 공방을 차지했다.]
[3. 악마 대공과 계약했다.]
[4. 힘을 빼앗고 노예로 삼았다.]
1번.
무난하게 가자고.
[······스승의 질투를 피해 머나먼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스승을 죽이고 마법을 탈취하거나 노예의 쇠사슬을 채워 승리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한 이득을 버려두고, 빈손으로 떠나는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당신이 그랬던 이유는······]
[1. 종놈 근성이 남아있어서.]
[2. 혹시라도 패배할까봐.]
[3. 스승의 자매들이 무서워서.]
[4. 현대인의 양심을 지키고자.]
······현대인의 양심? 중세판타지 게임에 무슨 현대인? 이게 웹소설도 아니고.
'아무튼 새로운 선택지네?'
눌러보자.
모르던 컨텐츠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폭력이 당연한 세상에 살지만, 위선을 부릴만한 여유를 누리던 시절의 가치관을 지키고 싶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승의 공방을 떠나서 도착한 장소는······]
[1. 마법대학입니다.]
[2. 모험가 길드입니다.]
[3. 영주의 알현실입니다]
[4. 악마 대공과 계약했다.]
정배는 3번이다. 궁정마법사는 연구비도 쏠쏠하고 인맥도 형성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가문이 걸리는지는 완전히 복불복인데······
'일단 들어가자. 나와도 그만이니까.'
[당신을 궁정마법사로 초빙한 헤링턴 백작령입니다. 변경의 강자로 명성을 누리는 철퇴백작이 무명의 마법사를 궁정마법사로 초빙한 이유가 뭘까요? 당신은 호기심을 품고 헤링턴 거성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고, 날이 밝으면서 새로운 모험도 시작되었습니다!]
* * *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
"······텔로리안 마법사님?"
"······음?"
"미천한 종놈이 감히 마법사님의 수면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백작 각하께서 다급히 찾고 계셔서······"
하인의 정중한 채근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다. 전생에 대한 꿈은 오랜만이었다.
"알겠네. 15분 내로 가겠네."
"죄송합니다만 15분이 언제입니까?"
······이곳의 일반인들은 시간을 정밀하게 나누지 못한다. 정시에 기도를 바쳐야하는 성직자나 정밀한 연구를 진행하는 마법사들만 시간을 숫자로 나눠서 이해할 능력을 갖추었다.
"조만간 가겠다는 뜻일세."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끼이익.
쿵.
방문이 닫히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묵은 귀빈실은 매우 호화로웠다. 넓이도 40평은 넘었고 벽난로도 있었다. 값비싼 양탄자와 테피스트리,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고급가구들. 현대의 단칸방보다도 훨씬 낫다.
'이곳 기준으로는······왕궁이나 다름없지.'
이곳 사람들은 화장실과 부엌이 분리되지 않는 초가집에서 살면서 밤에는 가축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어떻게 알고 있냐면, 내가 그런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농노집 막내아들이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구타했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폭행했다. 누나들은 중늙은이나 포주들에게 팔려갔고 형들은 염소를 강간했다. 내가 자란 동네의 평균이었다.
'나는 그래도 잘해보고 싶었는데.'
어쨌든 가족이었으니까.
낳아주고 길러주신 분들이니까.
'어머니. 이걸 보세요!'
'······방금 마법을 쓴 거니?'
'맞아요! 저도 이제 가족 살림에 보탬이······!'
'저주받은 놈아!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천부적인 마법재능을 타고났다는 죄목으로 뒷골목에 버려졌다. 스승님께서 몸종으로 거둬주시지 않았다면 굶어죽었으리라.
'운이 따라줘서 스승님의 제자로 승급하긴 했다만······마녀의 도제 생활은 힘들더군.'
마법사들은 좋은 교육자가 되기 힘들며, 나의 스승님은 성질까지 괴팍했다. 하지만 그분께서 거둬주고 가르쳐주신 은혜가 있으니, 나를 죽이려다 실패하신 이후에도 복수하지 않았다. 단지 연을 끊고서 떠났을 뿐.
'·········파란만장한 20년이었다.'
나는 그런 과거를 거쳐서 진짜 마법사로 거듭났다. 여전히 손수 만든 게임 캐릭터에 환생한 까닭은 모르겠다만, 그것도 레벨을 올리고 시나리오를 깨다보면 해답을 얻겠지.
'철퇴백작의 궁정마법사는 미래를 대비하는데 굉장히 좋은 자리다. 연구 자료와 자금도 축적하고 메인 시나리오도 대비할 수 있거든.'
아공간에서 거울을 소환한다.
영주를 알현하려면 복장부터 갖춰야지.
'젊어졌군.'
싱싱한 스물.
언제나 그립던 나이였다.
'외모도 전생보다 낫고.'
일반인치곤 상당한 미남.
주인공답게 준수한 외모다.
'의복도 나쁘지 않군.'
멋진 잿빛로브와 회색망토. 고깔모자와 가죽부츠. 금화 몇 닢은 줘야하는 고급품들.
'사회적 지위는 말할 필요도 없지.'
마법사는 마나의 축복을 누리는 선택받은 자들이자 굉장한 지적 역량을 갖춘 조언자들이다. 나는 덕분에 왕공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이따금 무지렁이들이 몰려와 마법사를 태워버리려는 돌발이벤트가 발생하지만······솔직히 알바는 아니지. 내가 먼저 태우면 되니까.'
종합해보면 환생 직후에는 삶이 파란만장했지만, 지금은 팔자가 풀렸다. 그러니 구태여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까닭은 없다.
이곳의 삶에 집중하면 된다.
만물에 통달한 마법사의 삶에.
"방랑자 텔로리안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영주의 알현실에 도착하자 의전관이 나의 도착을 알린다. 좌우로 도열한 가신들이 일제히 시선을 집중시킨다. 내게 무언가를 간절히 기대하는 사람들의 눈빛.
"자네가 방랑자 텔로리안이군."
권좌에 앉은 중년인이 미심쩍은 시선을 비추었다. 반세기를 군주로 살아온 사내의 눈동자엔 무게감이 있었지만, 젊은 마법사가 겪어온 세월도 결코 가볍거나 짧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자네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고 떠들어 대더군. 어떤 문제를 가져가도 반드시 해결책을 내어준다고 하던가?"
영주의 말투에선 냉소와 불신이 짙게 묻어나왔다. 그럴만한 까닭은 있다. 철퇴백작은 가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인근의 저명한 마법사들을 초빙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으니까.
"하지만 소문은 드러나지 않을수록 덩치가 커지는 놈이지. 북부에 도룡뇽이 나타나면 이곳에선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거든."
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소문은 대체로 사실보다 부풀려지는 놈이지요. 하지만 어떤 괴물들은 소문을 통해 본체의 크기를 감추기도 합니다."
마법사가 미소를 짓는다.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제겐 영애님을 치료할 방도가 있습니다."
"·········?!"
"문제는 지불하실 대가가 되겠습니다만."
나는 철퇴백작에겐 어떤 대가를 요구해도 된다. 어차피 영애가 겪는 [병마]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헤링턴 백작가는 끝장날 테니까.
[지식(귀족)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1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1점]
1. 첫번째 연구 - 벨라디아 헤링턴(2)
도열한 가신들이 동요했다. 영애가 병마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대외적인 기밀이었다. 그녀는 겉보기엔 활동적이고 활기가 넘쳤으니까.
"······병을 치료하라고 불렀던 주문쟁이놈들이 동네방네 비밀을 떠들고 다닌 모양이군."
하지만 의심 많은 영주는 콧방귀를 끼어보였다. 이전에 초빙한 마법사들이 영애의 기밀을 노출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여간 주문쟁이들의 맹세는 믿을게 못돼."
"저는 다른 마법사들과 교류가 없습니다."
"하! 그렇다면 일개 방랑자가 어떻게 딸아이의 병마가 무엇인지 알았나? 왕실과 제국에서도 병마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실은 텔로리안도 궁금했다. 자신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고 있는지. 이러한 전지는 권능(權能)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헤링턴 백작님. 저는 마법사입니다."
"맞아. 나는 백작이고."
"제가 무명의 마법사이니 불신을 품으시는 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해결이 가능한 일과 해결이 불가능한 일을 분별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며, 지금 영애님께서 시달리시는 병마는 제가 해결이 가능한 사안입니다."
영주의 표정에 가득하던 불신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담백한 설득이 먹힌 것이다.
"그래서 자네의 해결책은 무언가?"
"영애님의 병마는 공개된 자리에서 논하기에 부적절한 사안입니다. 비밀을 지키기에 적합한 장소로 옮겨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영주의 표정이 풀렸다. 적어도 이번에 초청한 마법사는 딸아이가 겪는 병마의 정체와, 그러한 병마가 헤링턴 백작가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명백한 분별력이 있었다.
"자네는 적어도 돌팔이는 아니군."
"앞서온 돌팔이들은 어찌 하셨습니까?"
"혀를 뽑고 두들겨 패서 쫓겨났지."
"제가 영애님의 병마를 해결하지 못하면 똑같은 처벌을 감수하겠습니다. 맡겨주십시오."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번엔 진짜를 뽑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성공했을 경우엔 어떤 보상을 바라나?"
"궁정마법사로 임명해주십시오."
"그건 당연한 일이니 보상이 아니지."
"제가 시키는 대로 따라주십시오."
"·········뭐든 시키는 대로?"
백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은 부친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았고 국왕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한데 근본도 모르는 마법사에게?
"그게 영애님의 병을 치료하는 조건입니다."
"······내가 약속해놓고 어기면?"
"영주님을 죽일 겁니다."
"하!"
백작은 헛웃음을 흘렸고 알현실은 얼어붙었다. 철퇴백작은 결코 위협을 용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친이 후계자 자격 박탈을 운운하자 정변을 일으켰고, 국왕이 영지 박탈을 운운하자 반란을 일으켰던 사내다.
"좋다!"
한데 승낙했다. 부친도 주군도 들이받은 거친 사내가, 떠돌이 마법사가 지껄이는 위협을 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네가 정말 딸아이의 병마를 치료한다면 세 가지만 빼고 뭐든지 내어주겠다."
백작은 세 개의 손가락을 펼쳐보인다.
"첫째. 마누라는 못 내준다."
"당연합니다."
"둘째. 딸아이도 못 내준다."
"인정합니다."
"셋째. 나의 후장도 못 내준다."
"·········"
현지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중세랜드 감수성은 따라가기 힘들다. 현대인 출신에게 주어진 태생적인 한계가 아닐까 싶었다.
"이것 외에는 네놈이 시키는 뭐든지 따라주겠다. 사람을 죽이라면 죽이고 악마를 섬기라면 섬겨주마. 이정도면 만족하겠느냐?"
철퇴백작은 나를 음흉한 주문쟁이로 착각한 모양이다. 금단의 지식과 비밀을 활용해서 세상을 뒤집어놓을 음모를 꾸미는 흑막처럼.
"만족합니다."
"네놈이 어떤 흉계에 우리 가문을 끌어들이든 기꺼이 따라주마. 네가 정말로 딸아이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흑막을 꿈꾸는 일은 맞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금단의 지식을 지닌 것도 사실이고······
'역시 영주들은 감이 좋아.'
사람을 다뤄본 경험이 많다니까.
* * *
똑똑.
굳게 닫힌 방문을 두드리는 늙은 하녀.
"영애님. 새로운 치료사님이 오셨습니다."
"·········이번엔 누구인가요?"
소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리자 늙은 하녀는 몸을 떨었다. 대단히 두려운 표정이다.
"······그, 그게."
"돌아가보시오."
"예······!"
늙은 하녀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허겁지겁 자리를 떠나자, 텔로리안은 방문을 무단으로 열고 들어갔다. 무례한 행동이었고 마법사가 사내임을 고려하면 대단히 부적절했다.
쿵!
"············"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보였다. 코르셋만 입던 반라가 노출되었지만 그녀는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텔로리안도 그녀보다는 그녀의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흐음."
방의 내부엔 영애들이 지닐만한 물건이 가득했다. 구두 진열장과 내부가 가득 채워진 고급옷장, 교양이 느껴지는 서적들.
벽에 걸어둔 레이피어를 비롯한 사냥용 도구들은 레이디에 대한 통념과 달랐으나, 이곳이 변경임을 고려하면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럴듯한 위장이구나. 벨라디아."
"떠돌이 마법사가 감히 나의 이름을 허락도 없이 부르느냐? 내가 종을 울리면 기사들이 몰려와 네놈의 눈과 혀를 파낼 것이다."
벨라디아 영애는 오른손을 책상에 있는 경보구슬에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서렸다. 명백한 살의였다.
"옷을 입고 앉아라. 내릴 지시가 있으니."
"기회를 줬는데 알아듣지를 못하는군."
영애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올가미에 걸려든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네 반반한 얼굴 가죽을 벗겨서──"
"백작부인을 죽인 진범이 밝혀지길 바라나?"
"·········!!"
영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놀람이 자리 잡았다. 어머니의 살해는 분명한 완전범죄였다. 아버지도 알지 못할.
"네가 경보를 울려서 내가 고문실로 잡혀간다면, 네가 채석장에 숨겨둔 범행 도구들의 위치를 밝힐 것이다. 정말로 그걸 원하나?"
마법사의 협박에 벨라디아는 몸을 떨었다. 상대는 범행 도구들의 은닉 장소를 정확히 말했다. 태양신 교단의 저명한 신관들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앉아라."
"·········"
벨라디아는 벽장에 걸어둔 레이피어를 바라보면서 왼손으론 코르셋에 숨겨둔 비수를 매만졌다. 상대는 호리호리한 마법사. 단숨에 숨통을 끊어볼만하다.
"해보겠나?"
"·········"
"원한다면 해봐라. 뒷감당을 해야겠지만."
마법사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대단히 불편했다. 자신의 속내를 남김없이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정체가 뭐지?"
"존칭을 쓰도록."
"······정체가 뭐죠?"
"너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어떻게?"
"나는 마법사니까."
"·········"
"이걸로 나에 대해서 네가 알아야할 정보는 끝이다. 이제 나에 대해 묻지 말도록."
벨라디아는 살의가 들끓는 눈빛으로 텔로리안을 노려봤지만 결국엔 겁먹은 살쾡이처럼 몸을 움츠렸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고 영리하다는 사실이 직감적으로 느껴졌으니까.
"너의 비밀은 과거에 묻어주마."
"·········대신 조건이 있죠?"
"맞다. 앞으로 나의 지도를 따라야한다."
"·········당신의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나의 지도를 따르지 않으면 비밀을 백작에게 폭로하겠다는 약속만큼은 내어주마."
텔로리안의 노골적인 협박에 벨라디아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떨었다. 그녀는 평생 약자의 자리에 놓여보지 못한 사람이니까.
"대신 네가 반길만한 소식도 있다."
"············"
"나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병을 치료하거나, 걸리지도 않은 저주를 해주하러 오지 않았다. 단지 너를 이용하러 왔다."
백작의 최측근들은 말한다. 백작의 유일한 혈육이 겪고 있는 광증은 병마의 결과이므로 치료에 성공하면 일반인으로 돌아오리라고.
하지만.
그런 견해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단지 희망 섞인 기대가 있을 뿐이다.
"······이용하겠다고요?"
"나는 헤링턴 백작령의 궁정마법사가 되길 원하고, 백작은 너의 광증이 치료되었다는 위안을 얻길 원한다. 그러니 나는 너의 광증이 치료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다."
그제야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상상하겠는가.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아름다운 백작영애가 사람을 죽이며 흥분하는 쾌락살인마라는 사실을.
"······저는 변할 생각이 없어요."
"알고 있다. 너의 천성은 바뀔 수도 없지."
벨라디아는 훗날 피의 여백작으로 불리는 중견급 빌런. 악성향 주인공에 한해 동료영입이 가능하다. 고유스킬인 [살육본능]의 효과가 탁월해서 광전사로 키워도 B급, 어쌔신이나 혈법사로 키우면 A급 동료가 된다.
"하지만 너의 재능을 개발할 순 있겠지."
"·········재능이요?"
"너는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일에 굉장한 재능이 있다. 남몰래 농노들을 사냥하는 행위로 낭비하기엔 대단히 아깝지."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의 답변에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깨우친 이후 그것을 언제나 숨겨야할 천성으로만 여겨왔다.
한데 재능이라고?
저주받은 천성이?
"평시에 사람을 죽이면 살인마지만 전시에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다. 남다른 능력은 뭐든지 능력이다. 중요한건 언제 어디에 쓰느냐다."
벨라디아의 청녹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드디어 그녀에게 자신의 수업을 따라올 흥미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수업은 여기서 끝낸다. 벨라디아도 아쉬움을 느껴야 만 수업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을 테니까.
"내일도 같은 시각에 찾아오마."
"저는 당장 수업을 원하는데요."
"참아라. 그리고 영지민 살해는 금한다."
"그럼 저는 무엇으로 허기를 달래죠?"
"동물. 그래도 배고프면 도적."
이에 벨라디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굶주린 야수처럼 악에 받쳤다. 기름진 만찬을 앞에 두고 채소만 골라먹으란 이야기였으니까.
"따르기 싫다면요?"
"그럼 명령을 어겨봐라."
"············"
"너는 똑똑한 아이지."
벨라디아는 다방면의 능력치가 드높은 캐릭터다. 지능은 마법사가 되기에 충분하고 직감은 인간보다 짐승에 가까운 수준.
"그러니 몸으로 체벌을 겪어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내일 수업 시간에 보자꾸나."
첫번째 교습을 마치고 벨라디아의 방을 떠났다. 성의 계단을 내려가자 완전무장한 철퇴백작이 기사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치료는 어찌 되었나? 마법사."
"시작이 좋았습니다."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한데."
"감옥에서 설명해드리죠."
"·········감옥으로?"
"남들이 듣지 않을 장소니까요."
이에 철퇴백작은 수행원들을 무르고 지하실로 향했다. 또한 백작을 발견한 간수들은 고개를 숙이더니, 알아서 자리를 비워줬다.
끼이익.
육중한 감옥문이 닫히며 영주와 마법사만 남았다. 어둠을 밝히던 등불조차 꺼진 상태.
"······나를 어째서 이곳에 불렀나?"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딱!
텔로리안의 손바닥에서 솟아난 불꽃이 어둠을 몰아내면서, 철퇴백작이 기필코 숨기고 싶어하던 딸아이의 치부가 드러난다.
"·········이게 자네가 보려던 광경인가?"
"어디 보죠."
감옥의 죄수들은 모두 죽어있었다.
"워어."
"············"
"생각보다······상태가 심각하군요."
처참하게.
끔찍하게.
[새로운 표본 : 벨라디아 헤링턴]
[연구일지가 갱신됩니다.]
1. 첫번째 연구 - 벨라디아 헤링턴(3)
"예상보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무슨 뜻인가?"
"제가 관측했던 미래보다 영애님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앞으로 두어 달이 영애님을 치료할 마지막 기회가 되겠습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미래엔 항상 오차가 있었다. 크게는 시나리오 주인공이 바뀌었고 작게는 빵집주인이 변했다. 벨라디아 헤링턴의 상태도 자신이 보았던 미래보다 나빴다.
"그래서."
철퇴백작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춤에 걸어둔 철퇴손잡이를 붙잡으면서.
"딸아이가 무슨 병을 겪고 있는 것인가?"
"영애님은 건강하십니다."
"그럼 누구의 저주를 받았나?"
"저주도 아닙니다. 타고난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천상의 신들에게 천성을 고쳐달라고 청원해야겠군. 어떤 신에게 얼마나 공물을 바쳐야 딸아이의 본성을 고쳐주겠나?"
철퇴백작은 절박했기에 당면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법사들을 계속 부른 것이다. 아무런 성과가 없더라도.
"백작령을 신전에 봉헌하셔도 부족합니다."
"·········"
먼저 찾아온 마법사들도 광증을 고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겠지.그럼에도 없던 희망을 지어내 말해줬을 것이다. 백작에겐 희망이 필요했으니까. 그것이 가짜더라도.
"살육본능은 영애님의 영혼에 새겨진 천성입니다. 영혼을 바꾸는 기적은 신들에게도 쉽지 않은 과업. 평범한 필멸자가 제물을 바친다고 누릴만한 축복이 아닙니다."
백작의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좌절이 서렸고 텔로리안은 아공간에서 담배파이프를 소환했다. 자신을 죽이려들던 스승님을 제압하고 뺏어온 전리품이다. 그게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탈이었다. 현대인으로서.
"······자네는 고칠 수 있다고 했잖나?"
"고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영주님이 바라시는 형태의 완치는 불가능합니다."
철퇴백작은 딸아이의 [살육본능]이 사라지길 원한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럼 다른 형태의 치료는 가능한가?"
"영애님은 남들과 다른 본능을 지니고 살아가실 겁니다. 하지만 본능을 숨기는 방법을 익히실 수는 있겠죠. 소위 사회화 과정입니다."
뱀파이어들은 피에 굶주린 몬스터들이다. 그러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사회에 섞여서 살아간다. 벨라디아 헤링턴도 그럴 수 있다.
"······딸아이가 평생 저런 짓을 할 거라고?"
"············"
철퇴백작은 죄수들의 사체를 바라보며 흐느꼈다. 두개골이 열리고 심장이 뽑혔다. 특히 남성 죄수들은 한층 가학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내가 이런 괴물을 낳았다는 말인가?!"
"·········"
"나도 죄인인건 알고 있네! 직접 죽인 사람만 수백이고, 내가 일으킨 전쟁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못해도 수십만에 이를 테니까······"
철퇴영주는 평범한 사람이 떠올릴 악행을 빠짐없이 저질러봤다. 대부분의 귀족들처럼.
"하지만······하지만 이건 다르잖나!"
즐겼다.
사람을 죽이는걸.
순수하게 재밌어서 행했다.
"나는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딸아이에겐 상냥한 세상만 보여주었네! 그럼에도 어째서 전쟁터의 고아들보다 흉악하게 자랐단 말인가?! 그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야!"
백작의 비탄 섞은 절규에 텔로리안은 담뱃대에서 연기를 내뱉었다. 실은 자신도 어린 시절부터 비슷한 질문을 품어왔다. 새로운 세상에 환생하고도 어째서 현대인의 영혼이 남아있는가? 그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데 방해가 되는 고통스러운 기억일 뿐인데.
"우선 백작님께서 겪으시는 고통에 진심 어린 위로를 보냅니다. 하지만 백작님께선 제게 위로보다는 해법을 원하시겠지요."
후우우.
자욱한 담배연기가 감옥을 메운다.
"영주님께서 속내를 보여주셨으니 저도 직설적인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저도 사실은 영애님과 비슷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영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작이 바라본 텔로리안은 이지적이고 냉철한 마법사. 한데 잔혹한 본능으로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다만 문제의 방향은 반대였습니다."
"······계속해주게."
"저는 살인을 기피하는 천성이 있습니다."
심각한 결점이다.
적어도 이곳에선.
"게다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일도 기피합니다. 하트랜드 화법으론 사내답지 못한 천성을 타고 났던 것이지요."
현대의 교육시스템은 야성을 거세하도록 세뇌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원초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행동은 옳지 않다고 영혼까지 새겨져 있으니.
"하지만 이젠 살인이 어렵지 않으며, 반드시 필요하면 저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할 수도 있습니다. 천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행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지요."
현대인의 영혼을 지닌 사람도 중세랜드에 적응했다. 그렇다면 몬스터의 영혼을 지닌 사람이 중세랜드에 적응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제가 해보았으니 영애님께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영주님."
* * *
나는 태생부터 유별났다. 우선 태어남과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살던 게이머의 기억을 자각했다. 덕분에 미래가 보인다.
또다른 유별남은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안이다. 사물의 본질은 다양한 형태로 표기할 수 있을 것이나, 내가 애용하는 방식은 전생의 글자가 눈앞에 떠오르는 형태다.
'나는 이걸 상태창 표기법이라고 명명했지.'
[상태창 표기법]은 마법사들의 전통적인 만연체에 비교해 정보의 정확성이 떨어진다. 사물의 본질은, 전문용어들을 동원해서 여러 페이지에 나누어 서술해도 매우 난해한 주제니까.
'그렇지만 직관성이 대단히 뛰어나지.'
직관성.
간편함.
대체가 불가능하다.
────
◆방랑자 텔로리안
Lv10 로어마스터, 인간 남성
- 화염의 로어
■능력치
■특성
■클래스 능력
■주문 목록
■연구주제
-화염술사의 길 [완료]
- 인챈터의 길 [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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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인챈터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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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챈터(Enchanter)의 길
: 지성체의 정신은 언제나 흥미로운 연구주제입니다. 새로운 표본을 발견하고 연구하십시오. 정신을 지배할 힘을 얻게 되리니!
◆연구 주제
1. 인간의 본성에 관해
1-1. 표본1. 방랑자 텔로리안 [진행 중]
1-2. 표본2. 헬렌과 아들러 [완료]
1-3. 표본2. 마녀 살라시엔 [완료]
1-4. 표본4. 벨라디아 헤링턴 [신규]
■보상
- 연구 진행시 경험치 습득.
- 연구 완료시 고유주문 습득.
- 표본점수를 획득할 때마다 특별보상이 주어집니다. 다음 보상은 [정신조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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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디아 헤링턴은 몬스터의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다. 그녀의 본성에 대한 비밀을 알아낸다면 새로운 마법을 획득하리라.
"얍! 얍!"
"깩! 깩! 깨객!"
"비명이 작네. 이곳이 아닌가······"
"끼에에에에엑!"
"옳지. 여기구나!"
인형처럼 아름다운 10대 소녀가 깔깔대며 살아있는 토끼를 분해했다. 마치 개구장이 소년들이 레고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끽!"
"어라. 일찍 고장 났다."
"·········"
"유모. 새로운 거."
"여기 있습니다······"
1주차는 관찰주간이었다. 표본은 동물들을 장난감처럼 다루며 천성을 드러냈다. 심기는 불편하나 나는 마법사다. 관찰자의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추구하도록 훈련받았다.
"일주일간 즐거웠나?""네! 선생님!"
표본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이 재밌는지는 모르겠지만, 표본의 심리를 반드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관찰하고 해석하면 되니까.
"삶이 행복하겠군."
"맞아요!"
벨라디아가 피투성이입가를 핥으며 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호시탐탐 우리의 서열을 재확인했다. 때문에 나는 강대한 마력을 분출해서 힘의 차이를 재확인시켜주었다.
"·········"
이에 표본은 위화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은근슬쩍 웃옷의 단추를 풀어내는 모습에서 나의 판단력을 흐려보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표본의 육신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자 아쉬운 표정으로 옷깃을 여맸다. 덫에 올려둔 먹이를 지나치는 사냥감을 목도한 사냥꾼의 표정이 저러할까.
[연구 단서를 획득합니다!]
[1/5]
[경험치 +10]
[11레벨까지 20/100]
"앉아라. 벨라디아."
"·········네."
표본은 세면과 환복을 마치고 다소곳이 자리에 앉았다. 2주차의 첫번째 교습시간이었다.
"벨라디아. 오래 살고 싶으냐?"
"당연하죠."
"지금처럼 살면 반드시 단명한다."
"·········선생님을 거역하지 않을게요."
"내가 너를 죽이지 않아도 너는 반드시 단명한다. 오래 살고 싶으면 영리해져야한다."
나는 표본에게 평범한 삶을 강요할 의향이 없었다. 내가 약탈의 즐거움에 취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도 일상의 평온함을 즐기지 못할 테니까.
"저를 고칠 생각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너의 본능을 바꾸거나 완전히 숨길 필요도 없다. 대신 어떠한 상황에서 본능을 드러내도 되는지는 익혀야한다. 너를 위해서."
표본은 영리한 학생이었다. 수업내용을 한 번에 이해해서 설명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네요?"
"너는 타고난 모습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행동에 잘잘못을 따져 무엇이 달라지겠나? 나는 의미 없는 행위를 싫어한다."
벨라디아는 명백한 악인이다. 그것도 천성적으로 선을 배울 수 없는 극악인. 이토록 극단적인 악성향은 인간에겐 지극히 드물다.
"인간은 대부분 [회색]의 영혼을 지니고 태어난다. 때문에 악을 경험하면 악을 행하고 선을 배우면 선을 행하지. 무예를 익히면 호전적이 되고, 학문을 익히면 이지적이 된다."
그것이 [적응력]이라 불리는 인간종의 특징이다. 극선이나 극악. 철저한 질서나 완전한 혼돈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상황에 맞추어서 빠르게 변모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하지만 너는 진홍빛의 영혼을 타고 태어났다. 그래서 공격성, 살육욕, 색욕이 항상 극대화된 상태로 살아가지. 남들과 다를 수밖에."
표준적인 인간들도 진홍색 욕망을 드러낼 때가 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만 자극을 받을 뿐이다. 반면에 표본은 언제나 진홍색 욕망에 시달리는 상태로 명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간 중에도 너처럼 영혼 전체가 진홍색으로 물든 이들이 있어왔다. 전쟁광, 학살자, 색마들이지. 그게 네가 가야할 길이다."
[영혼에 대한 전승을 습득!]
[전승포인트 2점을 획득합니다!]
[경험치 +20]
[다음 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2]
남을 교습하는 과정에선 스스로 배움을 되새기게 된다. 특히 [설정]을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부분이 많다.
"······모두 광인이나 악인들이잖아요?"
"하지만 뛰어난 군주들이었지."
"·········"
"네가 백작가의 후계자로 태어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군주는 진홍색 영혼을 지녀도 자신의 무리만 지켜내면 명군으로 칭송을 받으니까."
대륙에서 가장 전설적인 업적을 이룬 군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자식의 생일마다 전쟁을 벌이던 정복자 자헤리온. 이종족을 학살해 인간의 시대를 개막한 카를 대왕. 유부녀가 없으면 잠들지 못하던 전사왕 할프단.
"그들은 남자들이었잖아요."
"성별은 상관없다. 베루시엘 여왕은 못생긴 신하들을 남김없이 고양이 사료로 만들었지만, 백성들을 배불리니 일세의 현군이 되었다. 다시 말해, 너는 좋은 사람으로 살긴 글렀지만 훌륭한 군주로 살아갈 수는 있다."
[역사에 대한 전승을 습득!]
[전승포인트 2점 획득]
[경험치 +20]
[11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 4점]
"그걸 위해선 네가 지켜야할 [무리]와 잡아먹을 [적]을 구분해야한다. 필요할 때 허기를 자제하는 연습도 필요하겠지."
2주차까진 살육본능을 억제할 필요성에 대해서 가르쳤다. 살아있는 동물도 계속 공급해주었다. 수업에 대한 집중도를 유지하고자.
"이번 주부턴 식사량을 제한할 것이다."
"·········"
"참아낼 수 있는지 보자꾸나."
"······노력해볼게요."
3주차부턴 지급되는 살아있는 동물의 숫자를 제한했다. 그러자 표본은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고, 수업태도는 반항적이 되었다.
"하지만 최후의 선을 넘진 않았구나."
"·········힘들었어요."
"축하한다. 오늘은 마음껏 포식해라."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구 단서를 획득합니다!]
[연구 완료까지 2/5]
[경험치 +20]
[11레벨까지 80/100]
4주차부턴 사람을 앞에 두고 허기를 참는 연습을 했다. 교보재 수급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적은 황무지에 널려있었으니까.
"죽어! 죽어! 죽어!"
"제발 이러지 마십──아아악!"
"······오늘도 실패군."
실험 6주차. 표본은 이제 작고 연약한 동물을 눈앞에 두어도 살육본능을 성공적으로 억제한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을 상대론 어려워한다. 난관을 돌파하려면 심층연구가 필요하다.
"사람과 동물이 어떻게 다르지?"
"사람이 훨씬 먹음직스러워요."
"먹음직스럽다?"
"고통을 느끼면서 지르는 비명은 사람이 훨씬 생생해요. 특히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짜릿한데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연구 단서를 획득합니다!]
[연구 완료까지 3/5]
[경험치 +20!]
[레벨이 올랐습니다!]
[12레벨까지 0/100]
중간 결산이 필요하다.
이런 표본을 연구하려니 미치겠거든.
[레벨업 능력을 선택하십시오.]
그래.
일단 레벨부터 올리자.
1. 첫번째 연구 - 벨라디아 헤링턴(4)
시네어RPG에선 레벨이 오르면 3가지 보상이 주어졌다. 기초역량을 의미하는 [능력치], 전문역량이 향상되는 [클래스능력]. 개인의 발달과정을 드러내는 [개인특성].
'이런 성장방식은 게임이 현실로 구현된 지금도 똑같다.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은 있다. 원래 인간의 성장은 이렇게 빠르지 못하니까.'
마법은 학습에 굉장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기예다. 최초로 마법을 쓰는데 10년, 독립하는데 30년, 명성을 떨치기 위해선 100년은 걸린다. 그것도 재능아들의 기준이다.
'하지만 나의 성장속도는 재능을 감안해도 부자연스럽다. 정말 기막힌 우연이거나······알지 못하는 환생의 비밀이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환생의 비밀보다 시급한 연구과제가 많다. 벨라디아를 가르치고 궁정마법사로서 실적을 쌓으며, 궁극적으론 멸망을 막아야한다. 시나리오의 개막이 다가오고 있다.
"상태창!"
레벨업 능력치는 [마력]에 올인한다. 한계치에 도달해 [지능]을 찍고, 그러고도 남는건 [민첩]을 상당히 올려준다. 전투에 도움이 된다.
[클래스 능력을 선택하십시오.]
[화염마법 전문화]
[냉기마법 전문화]
[대지마법 전문화]
[대기마법 전문화]
[······]
전문화는 후순위로 미룬다.
당장은 주문의 갯수가 더욱 중요하니까.
───
◆주문수집가(클래스 능력, 일반)
: 당신은 주문을 수집하는 취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1개의 주문을 공용주문 목록에서 선택해 습득합니다. 당신이 시전할 수 있는 위계의 주문만 습득이 가능합니다.
───
다음은 개인특성.
클래스와 구분되는 개성을 표현한다.
────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개인 특성, 일반)
: 당신은 학습활동이 재밌습니다. 학습 및 연구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 수치가 50% 감소됩니다. 다음 단계는 [공부성애자]입니다.
────
······드디어 연구스트레스가 버틸 만하다. 마녀의 도제로 생활하며 마법사로서 필요한 소양을 쌓았지만, 쾌락살인마를 사회화시키는 과정은 험난했다. 게임 시절에는 선택지만 딸깍하면 됐지만, 지금은 광기를 직접 마주해야하므로.
"버틸만한가?"
"······백작 각하."
"아니. 앉아있게."
나는 교습의 진척을 매주의 마지막 날마다 백작에게 보고했다. 자녀훈육을 담당할 가문의 안주인은 죽었으니까.
"열심히 해주더군. 정말 고맙네."
"전문가는 결과로 말해야겠지요."
"크하하하! 우선 한 잔 받게!"
졸졸졸.
철퇴백작이 얼음이 가득한 술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이곳이 지구의 중세와 유사해보이나 같지는 않음을 실감한다. 시네어는 신과 마법, 괴물과 영웅이 실존하는 세상이다.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
"약속을 했으니 지킬 것입니다."
"······솔직히 자네가 딸아이를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아. 위대한 마지스터들도 포기한 아이를 방랑마법사가 무슨 수로 구하겠나?"
꿀꺽꿀꺽!
철퇴백작은 거침없이 잔을 들이킨다.
"······그래도 진심을 다해주어 고맙네."
"아직 감사를 받기엔 이릅니다."
"아니야. 자네는 나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어. 딸아이의 본성을 알고도 괴물로 대하지 않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니까······"
철퇴백작은 끊임없이 포도주를 따라주며 많은 덕담을 해줬다. 요즘 놈들답잖게 열정이 대단하다느니, 주문쟁이들과 달리 책임감을 갖추어서 좋다느니······결론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기대를 접은 모양이다.
"치료의 결과와 무관하게 약속된 보수는 지불하겠네. 궁정마법사 자리도 내줄테고."
모든 세계선을 통틀어 처음 봤다.
철퇴백작이 이렇게 유순한 모습은.
"벨라디아는 아내의 마지막 유산이야."
"·········"
"비록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라도 나는 포기할 수 없어. 아내의 마지막 조각이니까."
알고 있었군.
누가 아내를 죽였는지.
"저주받아 마땅한 아이인걸 아네."
"·········"
"그래도 어쩌겠나? 나의 전부인데."
다음날, 술에서 깨어난 철퇴백작은 벨라디아를 계승에서 배제하고 유폐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심복들은 새로운 안주인을 들여서 새로운 후계자를 얻으라고 제안했지만, 철퇴백작은 재혼을 거부하고 머나먼 친척을 후계자로 들이겠다고 답했다. 계보학자들이 바빠졌다.
"······저는 버려지는 건가요?"
"가능성은 충분하지."
실험 8주차. 여전히 표본은 사람을 앞에 두고 있으면 충동을 참지 못한다. 이젠 잡아올 도적도 모자란다. 머잖아 표본의 공격성이 영지민들에게 향할 것이다. 연구실패를 인정하고 표본을 폐기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아버지를 먼저 죽이면 어떤가요?"
"철퇴백작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다."
"············"
그녀는 나를 뇌쇄적인 눈길로 쳐다봤다. 아버지를 죽이는 작업을 도와달란 뜻이지만, 나는 그런 일에 동참할 의사도 이해관계도 없다.
'벨라디아 헤링턴은 일찍부터 죽이거나 사회화시켜야한다. 그래야 중반이 편해져.'
이쯤에서 되새겨볼 사항이 있다. 벨라디아 헤링턴에게 [개심] 루트는 없다. 단지 [사회화] 루트만 존재할 뿐이다. 드물게 악마도 회개하는 세상임에도 그녀만큼은 끝까지 악인이다.
'내가 야만전사나 성기사로 자랐다면 무조건 죽였겠지. 하지만 이번 회차는 마법사. 희귀표본을 발견하면 연구를 해야지, 다짜고짜 파괴하는 행위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9주차. 표본에게 [평온화] 물약을 투여해보았다. 덕분에 표본은 인간을 상대로도 본능을 억제하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남성을 만나면 살인을 참지 못했다. 철퇴백작은 딸을 유폐할 탑을 짓는 중이고, 나는 모험가를 고용해 와이번의 독주머니를 마련해뒀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
"이번에도 실패하면 나는 떠나겠다."
10주차의 마지막 실험. 벨라디아는 쇠사슬에 묶인 미청년을 바라보면서 짜릿한 표정이 되었다. 수려한 외모를 미끼로 부녀자들을 유인해내던 연쇄살인마. 내가 설정한 연구 윤리에 따르면 실험체로 사용해도 무방한 자다.
"여, 영애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놈이 목숨을 애원할수록 벨라디아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타올랐다. 그녀는 허리춤의 레이피어를 뽑아들더니, 유괴범을 향해──
푹!
"허억!"
"······풀어줘요."
"호오?"
"어서요. 빨리······"
레이피어는 도적의 심장이 아닌 나무를 관통했다. 그녀는 흥분된 표정으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간신히 참고 있던 것이다.
[연구 단서를 획득합니다!]
[연구 완료까지 4/5]
[12레벨까지 20/100]
"축하한다."
"······연습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불가능하다. 이제 내어줄 먹이가 없구나."
"············"
이에 벨라디아는 일상을 영위하는 영지민들을 탐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마법사의 시선이 두려워서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네. 선생님."
"이제 최종 관문이다."
"·········"
"너도 한 달이 지나면 16살 생일이지."
귀족가의 후계자에게 성인식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행사다. 선대 영주가 봉신들과 이웃영주들의 앞에서 후계자를 공인하는 날이니까.
"철퇴백작은 그날에 너를 유폐하고 머나먼 친척을 후계자로 선포할 계획이다. 하지만 철퇴백작을 설득해 너를 후계자로 소개하는 행사로 바꾸겠다. 너는 이제 백작가의 후계자다운 인내심을 보여야한다. 모두의 앞에서."
귀족가의 공식행사는 길고 지루하며 종종 불쾌한 사건도 벌어진다. 야수의 본능만 가지곤 쉽게 견딜만한 자리가 아니므로, 그런 행사를 통과한다면 사회화를 성공했단 증거겠지.
"행사가 끝나고 최종 평가를 내리겠다."
"·········어떤 평가를 말씀하시죠?"
"너를 진정 제자로 받아들일 것인지."
벨라디아의 성인식은 본래 세계선에 없던 이벤트. 나의 변덕으로 만들어낸 변곡점이다.
"!"
"벨라디아 헤링턴은 수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몬스터의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단 이유만으로 사라지기엔 아쉬운 가능성들이지."
벨라디아는 강하고 똑똑하며 아름답고 어리다. 각각의 수식어들이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다. 한정된 예산으로 만들어진 게임에서는 모두 담아내지 못하던 가능성들.
"그럼 도박꾼 여신의 가호를 비마."
"잠깐만요. 텔로리안 선생님."
"?"
"제게 어째서 기회를 주신 거죠?"
"일전에 말한대로 너를 이용하기 위해서지."
나는 대륙을 재편할 거대한 계획을 꾸리는 중이다. 헤링턴 백작령은 첫번째 스케치를 그리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헤링턴 백작령의 궁정마법사가 되고 싶으실 뿐이면, 아버지가 저를 유폐하도록 내버려두시는 방향이 훨씬 안전하실 텐데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훈련이 되었군. 그래도 9주간의 훈련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다. 사회화가 제법 진행됐으니.
"······진짜 목적이 뭐죠?"
"너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동기다."
"그래도 들어보고 싶어요."
"연민이다."
돌아섰다.
철퇴백작이 있을 연무장을 향해서.
"같은 돌연변이에 대한."
* * *
"교정결과가 마음에 드십니까? 백작 각하."
"······도저히 믿기질 않는군."
발코니에 정좌한 철퇴백작은 놀라운 눈빛으로 알현실을 바라봤다. 벨라디아 영애가 권좌에 앉아서 봉신들의 문안인사를 받고 있었다. 미소에는 미소로, 웃음에는 웃음으로 답하면서.
"저게 정녕 나의 딸아이란 말인가?"
백작은 3달 전에도 똑같이 말했다.
그때는 경악해서. 지금은 환호하면서.
"아직 마음을 놓진 마십시오."
"·········좋은 날이 아닌가?"
"지금은 영애님이 괜찮아보이셔도 언제 돌발행동을 보일지 모릅니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버티실 수 있을지 지켜보셔야합니다."
권좌에 앉은 벨라디아는 갑옷을 입고 칼을 찼다. 이는 귀족 여성에게 권장되는 차림이 아니었으나, 성인식은 벨라디아가 철퇴백작의 후계자로 소개되는 자리다. 예법에 맞지 않아도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저것도 선생이 권유한 차림이오?"
"아닙니다. 영애님께서 판단하신 겁니다."
"······현명하군. 군주의 자질은 있어."
오전의 알현식이 종료되고 오찬 행사가 시작됐다. 방문객들은 신분과 나이에 맞게 의자를 배정받았다.
"선생님."
"?"
오찬을 진행하던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을 찾아왔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지독한 살심으로 들끓고 있었다.
"죽이고 싶은 년이 생겼어요."
"누구지?"
"가슴만 커다란 못생긴 년이요."
바르켄 여백작. 헤링턴 백작가의 오랜 경쟁자이자 정치적 수완과 우아함으로 유명하다. 늙은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는 중. 굉장히 부유하고 용모도 준수해 찾아오는 구혼자가 아주 많다. 나이는 스물일곱.
"무엇이 너를 그렇게 화나게 하는가?"
"늙고 돼지처럼 생긴 년이 감히 나의 알랑송에게 꼬리를 치잖아요?! 저런 년은 얼굴에 염산을 뿌린 다음에 심장을 뽑아버려야 해요!"
알랑송 백작. 헤링턴 가문의 오랜 동맹자이자 용맹한 기사로 유명하다. 젊고 강인하며 잘생겼으며 미혼이다. 사생아가 조금 많지만 사랑에 빠진 소녀가 신경쓸만한 단점은 아니다.
"············"
"과한가요?"
"많이 과하다."
"그럼 사지 힘줄을 끊고 죄수 소굴에 던져버릴게요. 죽이진 않으니까 괜찮죠?"
많이 발전했다.
진짜 행하기 전에 나한테 물으러 왔으니까.
"음료를 실수로 여백작의 드레스에 쏟아라."
"······고작 그건가요?"
"다음에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여백작에게 사과해라. 중요한 포인트는 [부인]이라는 칭호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녀는 똑똑한 학생.
숨겨진 저의를 알아차린다.
"·········!"
"공손함을 연기하며 가까운 언니동생으로 지내자고 말해라. 마침 부인께서 이모님과 같은 연배이시니 큰언니처럼 모시겠다고."
이런 무례를 저지르면 사교계에선 후폭풍이 상당하겠지. 손님을 초대해놓고 모욕을 줬다는 추문을 얻게 되겠지만······
'엽기살인마보다는 사납고 무례한 영애가 훨씬 낫다. 벨라디아가 변경령의 후계자임을 고려하면 적당한 악명도 도움이 되겠지.'
게다가 하트랜드는 여성영주들을 만만하게 바라보는 지역. 적당한 미친년으로 소문이 난다면 자기 보호에 도움이 되겠지.
"······그보다 좋은 생각이 났어요."
"?"
"저는 다치지 않고 그년만 작살낼 방법이."
"······무슨 기행을 계획하는지 실토하도록."
차분히 그녀의 계획을 들었다.
대화가 끝나고 나는 확신했다.
'표본이 사회화에 성공했다.'
실험은 성공했다.
나의 기대보다 완벽하게.
[연구 단서를 획득합니다!]
[연구 완료까지 5/5]
[경험치 +20]
[12레벨까지 40/100]
[연구완료 : "벨라디아 헤링턴"]
[고유주문 '정신조작'을 습득합니다.]
[연구발전방향을 선택하십시오!]
1. 첫번째 연구 - 벨라디아 헤링턴(5)
시네어RPG의 공용주문들은 [로어]와 [위계]에 근거해서 분류된다. 예를 들어 [파이어볼]은 [불의 로어]에 속한 [3위계] 주문이다. 그렇기에 [물의 로어]에 속한 [아이스볼트]와 비슷한 위력을 지녔다. 똑같은 [3위계] 주문이니까.
'반면 고유주문은 위계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래서 마나소모와 위력이 제멋대로지.'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공용주문을 선호하고, 필멸자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마법사들은 고유주문을 선호한다.
'뉴비에겐 정석빌드가 효율적이지만 고인물들은 맞춤형 변태빌드가 효율적인 법이니까.'
따라서 [로어마스터]는 고인물을 위한 클래스다. 저레벨부터 고유주문을 개발하는 클래스니까.
───
◆정신조작 (고유 주문)
: 당신은 [벨라디아 헤링턴]을 연구해 정신에 대한 가설을 세웠습니다. 정신에는 야성과 사회성이 공존하며 서로를 견제해 균형을 이룹니다. 이러한 균형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생명체를 [지성체]로 명명할 수 있습니다.
■1번째 심화연구 : 사회화
- 야성을 억제하고 사회성을 증진되는 마법을 개발합니다. 야수를 지성체로 만들거나 규율을 세우는데 제격입니다.
■2번째 심화연구 : 야수화
- 야성을 증진하나 사회성이 감소되는 마법을 개발합니다. 지성체를 야수로 만들거나 열정을 깨우는데 제격입니다.
* 상호 배타적인 연구입니다.
* 하나를 고르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
나의 목적은 대륙의 안정이다. 그렇다면 사회화를 올려야한다. 이곳 사람들은 배움이 부족하지, 열정이 부족하진 않기 때문이다.
'사람도 배우지 않으면 짐승과 같더군.'
학력이 아니라 사람다운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도리를 배우지 못한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잔학하다.
'······대체 형님들은 염소에게 왜 그랬을까?'
아무튼 사회화 연구를 택하자 새로운 주문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이제 [정신조작] 마법을 통해서 사회화를 강요할 수 있다.
"선생님! 그래서 제 계획이 어떤가요?"
"장족의 발전이구나. 직접 해보아라."
"네!"
표본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살쾡이처럼 서늘하던 눈빛을 완전히 숨기고 생글생글한 웃음으로 모든 이들을 대했다. 심지어 정적을 겸하는 연적에게도.
'과연 표본이 테스트를 성공할 수 있을까?'
느낌은 좋다. 하지만 연구는 결과가 나올 때까진 끝나지 않는다. 이제 표본은 나의 도움 없이 성인식을 성공적으로 마쳐야한다.
'벨라디아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야겠군.'
내가 첫번째 제자를 위해 준비할 선물은 둘이다. 하나는 와이번의 독주머니로 만들어진 음료. 다른 하나는 그녀를 도와줄 도구다.
'오늘 밤에 나는 무엇을 주게 될지 궁금하군.'
두고 보면 알겠지.
실험의 성공을 기원한다.
* * *
벨라디아는 오전엔 손님들을 접견하며 품위 있는 후계자의 모습을 보였고, 오후에는 숲에서 열린 사냥시합에 손수 참가해 피투성이 차림으로 돌아왔다. 하객들은 대단히 놀랐다.
"······헤링턴 영애가 쌍두오우거를 죽였다고?"
"제압된 녀석의 숨통만 끊은 것 아니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죽였소."
"무자비하게 난도질을 해버리더군."
"놀랍군! 우리집 딸내미들은 셋이 모여도 바퀴벌레 한 마리를 당해내지 못하던데······"
쌍두오우거는 노련한 기사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괴물이었다. 오죽하면 쌍두오우거들의 별명이 기사수확자일까.
"과연 철퇴백작의 후계자야."
"헤링턴 가문에 암사자가 나타났구려."
"그럼 뭐해요? 숙녀답질 못한데."
바르켄 여백작의 빈정거림에 중앙 귀족들이 동조했다. 훌륭한 레이디라면 힘들고 거친 일을 직접 해야할 까닭이 없었다. 강력한 사내들을 의도대로 조종할 힘을 지녔을 테니.
"저렇게 품격이 떨어지는 영애를 어느 명문가에서 며느리로 받아주겠어요? 설마 헤링턴 가문처럼 뼈대 있는 집안이 봉신들과 결혼할 생각은 아닐테고요······?"
뒤에서 들리는 비웃음에도 벨라디아는 남성들의 테이블에 섞여서 아버지처럼 행동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독한 술병을 단번에 들이켰고 대련을 벌이며 무예를 뽐냈다. 쌍두오우거의 머리통을 전투도끼로 베어버리는 난폭함도 선보였다.
"으하하! 헤링턴 백작가에 아들이 있었군!"
"아우로서 한 잔 올리겠습니다! 형님!"
"형님이라고 했나?! 푸하하하하핫!"
변경의 영주들은 벨라디아의 거친 모습을 대단히 좋아했다. 그들은 헤링턴 백작가와 함께 황무지의 몬스터들에게 맞서는 협업관계. 헤링턴 백작이 교양이 넘치는 숙녀보단 난폭한 마초이길 바란다.
"·········"
하지만.
피로연에서 반전이 벌어졌다.
"안녕하세요. 알랑송 백작님."
"어······어?"
"제가 교양이 부족한 변경의 여자인지라 무도회는 처음이랍니다. 그러니 제게 아량을 베풀어서 춤을 가르쳐주지 않으시겠어요?"
저녁의 벨라디아는 오후의 벨라디아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머리를 풀었고 피투성이 흉갑은 가슴골이 드러나는 드레스로 대체했다.
"기,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잘 부탁드려요. 오라버니."
"푸, 푸훕!"
벨라디아는 수줍게 웃으면서 코피를 흘리는 알랑송 백작을 가지고 놀았다. 알랑송 백작만이 아니었다. 오후에 괄괄한 여동생이 생겼다면서 껄껄 웃던 변경의 사내들이 잔뜩 안달이 나서 벨라디아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심지어 결혼한 영주들조차 온갖 핑계로 말을 붙이고자 애썼고, 그릇을 나르던 하인들은 불경한 시선을 보내다 채찍질을 당했다.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자, 벨라디아는 알랑송 백작과 선정적인 춤을 추면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
쨍그랑!
바르켄 여백작은 잔을 던지고 연회장을 떠났다. 그러나 찰나의 정적도 흐르지 않았다. 모두 벨라디아만 욕망하고 있었으니까.
아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선생님! 봤어요? 봤어요?!"
"·········피로연에 참석하지 않았다만."
"선생님도 늙은 계집의 얼굴이 뭉개지는 모습을 봤어야 해요! 처음엔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같은 편을 찾았거든요. 그런데 연회장의 누구도 그년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니 죽음의 신을 만난 것처럼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이번 행동이 옳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족 사회에서 용납이 가능한 범주에 있다. 무도회장은 레이디들이 나서는 토너먼트장. 빛나는 승자가 출현하려면 누군가는 망신을 당해야한다.
"받아라."
"······선생님?"
황금 반지를 내밀었다.
강한 마법이 걸려있는.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나의 제자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
"이전까진 너를 마법연구를 위한 표본으로 여겼다. 야수로 태어난 인간을 교육하면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거든."
벨라디아는 대답을 내놓았다.
짐승도 가르치면 사람이 된다.
"반지를 장기간 착용하면 너의 사고가 깊어질 것이다. 너의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검토해볼 수 있게 되겠지."
벨라디아는 여전히 쾌락살인마다. 살인은 짜릿하겠고 고문은 즐거울 것이다. 그건 대마법사가 되어도 바꾸지 못할 그녀의 본능이다.
"······저를 바꾸는 마법인가요?"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젠 천성을 참아내는 훈련을 받았다. 적어도 본능을 드러내서 문제가 될법한 상황과 아닌 상황을 분간하려고 들겠지.
"반지에 걸려있는 마법은 너에 대한 주변인의 의견을 파악하게끔 도와줄 것이다. 판단이 끝난 이후의 선택은 네게 달려있는 문제고."
돌아선다.
전해줄 이야긴 끝났으니까.
"······선생님."
"?"
"감사합니다."
"·········"
글쎄.
진짜로 감사를 느낄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면 예의바르게 보이죠?"
"은혜를 아는 것처럼 보이지."
"그래야 다음에도 사람들이 호의를 주고요?"
끄덕.
"질문이 있어요."
"질문은 언제나 환영이다."
"제가 고문과 살인을 그만두면."
기사다운 강인함과 레이디다운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놀라운 재능의 소녀가 말한다.
"선생님께서 계속 호의를 베풀어주시나요?"
"네가 이용할 가치가 있는 동안에는 그렇다."
"그럼 고문과 살인은 그만둘게요. 앞으로 당분간 선생님께 내어드릴 것들이 있으니까요."
갸웃.
"내 호의가 네게 본능을 참을 가치가 있나?"
"네. 저는 감이 좋은 편이거든요."
직감 18.
고위 성직자나 가질법한 촉.
"선생님께서 품고 계신 힘을 제대로 보여주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요. 그러므로 선생님보다 강하고 유능한 후견인이 생길 때까지는 호의를 받고 싶어요."
그래.
이게 그녀다운 감사표시지.
"참고해두마."
"······화내지 않으시나요?"
"어째서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
"선생님보다 유용한 후견인이 생기면 옮겨 타겠다고 말했잖아요. 이건 배신이잖아요?"
피식.
이번엔 웃음이 나온다.
"너도 순진한 구석이 있구나. 벨라디아."
"·········네?"
"보다 좋은 부모, 보다 좋은 배우자, 보다 좋은 친구······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욕망이다. 말로 내뱉지 않을 뿐."
나는 생각한다. 누구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어하는 내밀한 욕망이 있다고.
"·········그래요?
갸웃.
소녀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한데 어째서 사람들은 배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낼까요? 똑같이 생각하면서."
글쎄.
"하나는 남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겠지. 혹은 자신의 속마음을 남에게 들키는 상황 자체가 불편할지도 모르고."
에게?
고작 그런 이유인가요?
"다른 하나는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다."
"·········?"
"벨라디아. 모든 사람은 가슴에 각자의 야수를 품고서 살아간다. 그리고 매일매일······야수와 싸워서 승리하고자 애쓰지."
돌아선다.
"그러니 가슴에 야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너만이 아님을 명심해둬라. 단지 네가 품은 야수는 다른 사람들의 야수보다 훨씬 사납고 거대할 뿐이야. 본질적으론 다르지 않다."
양심이란.
야수를 길들이는 채찍.
채찍이 없으면 야수가 인간을 잡아먹는다.
"이것이 양심에 대한 나의 결론이다."
"······그럼 저는 양심을 어떻게 얻어야하죠?"
"그건 네가 스스로 찾아야할 문제다."
[신규 연구주제 발견······]
[심화 연구 : 벨라디아 헤링턴]
[양심을 찾아서]
"다만 너만의 대답을 찾아낸다면 내게 알려다오. 그때는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졸업선물로 내어줄테니."
* * *
"교정결과는 마음에 드십니까? 백작님."
"정말 고맙소! 텔로리안 선생!"
철퇴백작은 텔로리안의 양손을 와락 붙잡았다. 이름난 무인답게 악력이 막강했다.
"선생께는 실례되는 말이지만 방금 태양신 교단의 성직자들에게, 딸이 정신을 통제하는 마법에 걸렸는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소."
이해한다. 사람의 행동이 3달 만에 급변하면 그게 마법이지 교육인가? 나라도 정신 마법에 걸렸는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한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더군."
부르르!
철퇴백작의 양손이 기쁨으로 떨렸다.
"딸아이가 진실로 변했단 말이오! 매일 근심만 안겨주던 아이가 나의 의젓한 후계자가 되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
오늘의 벨라디아에겐 나도 놀랐다. 오전에는 변경백의 후계자다운 강인한 모습을 선보였고 오후에는 미모와 젊음으로 정적의 가슴을 찌르는 교활함을 보였다. 훌륭한 싸움꾼이다.
"그래서 나도 보답을 준비했소."
"이곳은······영애님을 유폐하려던 탑이군요."
탑은 크고 안락했다. 갇혀 지내는 조건이 아니라면, 공주가 머무르기에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백작 본인의 거처보다 훌륭하니까.
"이것도 보시오!"
백작이 가장 깊숙한 장소에 위치한 철문을 열어젖혔다. 등불이 환하게 빛나는 거대한 방에는 도서관만큼이나 많은 책장이 있었다.
또한 방의 중앙엔 커다란 원형책상이 있었는데, 다양한 유리병과 금속성의 도구들이 놓여있었다. 구석에는 커다란 철제 가마솥과 짐승을 가둘 철장들이 있었고.
"선생을 위해서 준비한 실험실이오!"
"·········대단하군요."
"마음에 드시오? 선생?"
"대단히 마음에 듭니다."
나는 흡족히 웃으며 박수로 대답했다. 이에 철퇴백작은 실험실의 마도구들을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어떻소! 텔로리안 선생!"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굳이 따져보면 공로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받았을 뿐이나, 상대가 웃으니 나도 웃어주는 쪽이 좋다.
'궁정마법사도 결국 후원을 받는 입장이니까.'
철퇴백작에게 고개를 숙인다. 나의 정중한 태도에 철퇴백작도 대단히 기뻐보였다.
"앞으로 같이 잘해봅시다! 텔로리안 선생!"
"과찬이십니다."
"선생처럼 정직하고 뛰어난 마법사를 맞이하게 되어서 기쁘오. 갑시다! 연회장에 선생을 맞이하는 축하연을 준비해뒀으니······"
벌컥!
연구실문이 거칠게 열린다.
"백작 각하!"
"무슨 소란이냐! 선생의 연구실에서 감히!"
"바위트롤 무리가 뒷산에 출몰했습니다!"
바위트롤은 바위처럼 단단한 피부를 지닌 막강한 몬스터들. 강력한 재생력도 지녀서 물리력으론 제압이 어렵다.
"백작 각하."
그렇지만.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텔로리안 선생! 이건 내가 직접 토벌을──"
"이름도 없는 방랑자에게 탑을 지어주셨으니 가신들에게 뒷말이 나올 겁니다. 그걸 잠재우려면 제가 실력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불길에 대단히 취약하다.
"스프가 식기 전에 돌아오지요."
2. 두번째 연구 - 여족장 올골두골로(1)
헤링턴 거성의 뒤편에 위치한 바위산. 수십의 무장한 사내들이 바위산의 중턱에 위치한 어두운 동굴을 쳐다보고 있다.
"저곳이 트롤의 소굴이오?"
"······그건 맞소만."
텔로리안을 안내해온 기사장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백작에게 궁정마법사를 무사히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니까.
"정말 혼자서 트롤 소굴에 들어가실 거요?"
"그렇소."
"·········"
기사장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중년의 무인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들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도 뚜렷히 인식하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소?"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주문을 시전하는 와중에 스스로를 보호할 방도가 있는가. 주문을 몇 차례 사용하면 마나가 고갈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렇소."
"선생의 판단이 그러하시다면."
하지만 기사장은 주군의 내밀한 비밀도 공유 받는 심복. 텔로리안이 마탑주들도 포기한 벨라디아 영애를 치료한 실력자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기다리겠소."
"아니. 성으로 돌아가 대기하시오."
"그건 내가 받은 지시가 아니오."
"나의 지시였다고 전하면 백작님도 이해해주실거요. 그럼 이제 방해하지 마시오."
마법지팡이를 앞세우고 회색빛 동굴에 진입한다.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송곳니처럼 돋아있었고 벽면은 매끈하게 닳아있다.
'바닥이 미끌미끌하군. 이곳은 지하수가 퇴적물을 뚫으면서 형성된 석회암 동굴. 바위트롤들이 선호하는 거주 환경이지.'
[자연에 대한 전승을 습득!]
[전승포인트 1점 획득]
[경험치 +10]
[12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 6점]
전승포인트를 소모하면 [로어마스터의 깨달음]을 얻는데, 초반엔 새로운 로어를 획득하는 작업에 집중할 것이다. 우선 사용이 가능한 주문의 가짓수가 많아져야하므로.
'4대 원소의 로어를 모두 습득하면 또다른 상위직인 원소술사가 열리지. 로어마스터와 겹치는 능력이 없으니 병행도 가능하고.'
새로운 빌드를 구상하며 굽이치는 복도를 따라간다. 지하에 도달하자 어둠 속에서 야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의 원주민들이다.
"짹짹!"
"크르르릉······"
나는 어둠을 꿰뚫어보는 시야는 없지만, 전생의 경험을 통해서 놈들의 정체를 추정해볼 수 있었다. 천장엔 핏빛피부를 띄고 있는 흡혈박쥐들이 있을 것이고, 땅에는 곰처럼 커다란 덩치의 타란튤라들이 있겠지.
"이그니스!"
번쩍!
마법지팡이의 상단에 달아둔 루비가 화염을 내뿜자 야수들이 움츠려든다. 놈들은 어둠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 화염이 만들어내는 광원과 열기를 태생적으로 꺼린다.
그리고 화염의 로어는 나의 전문분야지.'
스승님께선 화염마법에 특화된 파이로맨서(Pyromancer)였다. 덕분에 나도 화염마법은 [전문화] 특성이 3단계나 달릴 만큼 빡세게 익히는데 성공했다.
'······그립진 않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제자들이 주문 시전에 실패할 때마다 불로 맨살을 지지셨다. 성인이 되어서 돌이켜봐도 양육인지 학대인지 헷갈린다.
'······어쨌든 은인은 은인이다.'
하여간 마법의 불꽃이 용광로의 불씨처럼 거세게 솟아올랐다. 자연 상태에선 발생하지 못하는 강대한 열기를 목도한 야수들은 몸을 움츠리면서 후방으로 물러났다.
"비켜라. 미물들."
지팡이를 땅바닥에 내리찍자 전면에 충격파가 뿜어져나간다. 1위계 주문인 [쇼크웨이브]. 데미지는 약소하나 [넘어짐]과 [스턴] 판정이 달려있다. 오브젝트 파괴에도 유용하고.
"키에에엑!"
"캬아아악!"
적들이 도주한다. 야수들이 열기를 피해서 좁은 통로에 모여든다. 저런 장소에 파이어볼을 던지면 경험치가 얼마나 될까?
'······미소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벨라디아가 이런 기분이겠군. 녀석이 살육을 참기 힘들어하는 까닭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파이어볼을 사용해서 마나를 낭비하진 않을 것이다. 마법사는 살육과 파괴를 통해서 경험치가 오르는 클래스가 아니니까.
'마법사는 다원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연구자들. 따라서 경험치를 올리려면 지적인 깨달음이 필요하다. 마법으로 태우고 터뜨린다고 배움이 깊어진다면, 마법사들은 모두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바바리안들이 되었겠지.'
······시네어RPG에 최초로 만들었던 캐릭터는 야만전사였다. 만렙에 도달해선 드래곤을 죽이고 용언을 탈취했지. 종말룡을 죽이고 자체엔딩을 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가끔은 야만전사다운 호쾌함이 그립군.'
현대인.
마법사.
'어느 쪽이든 호쾌함과는 관련이 없는 속성이지.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합리적이고 이지적인 사고에는 훨씬 능숙하다만······'
······골방에 틀어박혀 이것저것 따지는 삶을 살다보면, 간혹 원초적인 본능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멈춰라. 인간."
예를 들자면 바로 지금이 그렇다. 내가 야만전사였다면, 트롤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손도끼를 던졌겠지.
"너. 들어왔다. 우리. 소굴."
"공용어를 할 줄 아는군."
"줘야한다. 공물."
"공물을 바라는가?"
트롤우두머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허리는 굽었으며, 얼굴은 조물주가 빚어내다 포기한 조각상처럼 추하다. 하지만 피부는 바위처럼 단단하며, 울퉁불퉁한 근육질은 무시무시한 괴력을 드러낸다. 가벼운 잽만 날려도 인간의 육신은 산산이 조각나리라.
"원한다면 내주겠다."
"인간! 똑똑하다!"
"하지만 확인할 사항이 있다."
"·········"
텔로리안의 마법지팡이에선 강렬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위트롤들이 자신을 향해서 곧장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너흰 우리 인간의 영역을 침범했다."
"·········없다. 그런 적."
거짓말이다.
미약한 지성을 지녔다는 증거.
"그래?"
화르르르!
마법의 불꽃이 훨씬 강렬히 타오르며 점점 커져갔다. 3미터가 넘어가는 거인들이 겁에 질려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친다.
"다시 생각해보도록."
"······침범했다. 미안하다."
[불을 이용해 협박에 성공!]
[경험치 +10!]
[12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 6점]
"그때 무엇을 훔쳐갔지?"
"돌려주겠다. 따라와라."
트롤우두머리는 위축된 태도로 지하로 내려갔다. 사주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녀석을 따라간다. 트롤들이 뒤통수를 노려보며 졸졸 따라오는 상황이 위협적이지만, 나는 민첩이 제법 높아서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대처가 가능하다.
"저기 있다."
동굴의 최하층엔 각양각색의 뼛조각들이 쌓여있었다. 뼛조각에는 먹다 남은 살점들과 들끓고 있는 구더기들이 보였다.
"확인해보지."
불꽃을 비춰서 뼛조각들을 하나씩 확인해본다. 골격의 형태로 추정해본 결과, 영장류는 없었다. 사람을 잡아먹진 않은 것이다.
[지식(인체)에 대한 전승을 획득합니다!]
[전승포인트 1점 획득]
[경험치 +10]
[12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 7점]
"사람을 해치지 않았군."
"·········"
"덕분에 너희를 연구할 가치가 생겼다."
"······연구?"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질문이 있었다. 사람과 야수의 차이는 무언가? 지구에선 쉬웠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람이고 나머지는 야수다.
'하지만 판타지랜드에선 이야기가 다르지.'
시네어에서 사람은 인간과 아인종을 포괄하는 단어다. 아인종들은 인간과 대등한 문명을 갖춘데다 몇몇은 인간과의 혼혈도 가능하다.
'하지만 근래에는 사람은 외형적 유사성보다 지성을 통해 판단해야한다는 담론이 대세다. 우리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나도 근래의 담론에 동의한다. 지혜로운 골드드래곤은 멍청한 오크들보다 교류상대로서 훨씬 유익하다. 한데 사람이 아닐 리는 없잖나.
'그럼 여기서 또다른 질문.'
기존에 몬스터로 규정되었던 생명체가 지성을 보유하게 된다면, 그들은 사람이 되는가?
"나는 네게 지성을 부여할 것이다."
"·········지성?"
"지성은 트롤의 지능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다. 하지만 실험이 성공한다면 너는 지성을 이해할 지성을 지니게 되리라."
우두머리트롤은 학문적 열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법지팡이에서 타오르는 화염구는 두렵다.
"지금부터 네게 마법을 걸겠다."
"······싫다. 주술."
"주술과 불꽃. 골라라."
노골적인 위협에 우두머리트롤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건 녀석의 입장일 뿐이고, 내게는 해결해야할 질문이 있었다.
야수와 사람.
무엇이 그것을 구분하는가?
"············"
"셋을 세겠다."
우두머리트롤이 본능적으로 상호간의 우열을 가늠했다. 상대는 삐쩍 마른 인간에 불과하지만 무시무시한 불꽃을 만들어내는 주술사. 놈이 불꽃을 터뜨린다면 무리 전체가 불타죽으리라. 자신도 포함해서.
"하나."
"·········"
"둘."
그렇다고.
받아들일 것인가?
정체도 모를 주술을?
"세에──"
"주술! 주술!"
우두머리트롤이 다급히 외치며 발라당 쓰러졌다. 항복을 표현하는 트롤들의 제스쳐.
"불꽃! 무섭다! 낫다! 주술이!"
"현명한 선택이다. 주문에 저항하지 말도록."
"·········알았다."
"네게 도움이 되는 주문이다."
오른손에 [파이어볼] 주문을 유지한채로 왼손만을 사용해 새로운 주문을 엮어냈다. 이건 [마법재능 5단계]에게 부여되는 [더블 캐스팅] 특전. 2개의 주문을 동시에 시전하게 해준다.
[고유주문, 정신의 로어]
[정신 조작 : 사회화 (Mind Manipulation)]
[괴수에게 지성을(Intelligence to Beast)]
"!"
"이제 대화가 가능하겠지."
사회화에는 전두엽 기능을 발달시키는 효과가 있다. 지성체에게 사용하면 잠재된 부분의 활성화에 그치지만, 야수에게 사용하는 경우엔 전두엽이 확대되는 결과가 관찰되었다.
'그래서 야수들은 사회화를 강요하면 지능이 상승하더군. 그래도 평범한 몬스터들은 기본적인 지능이 너무 낮아서 의미가 없지만······'
트롤은 원본부터 무리생활이 가능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준지성체. 지능이 상승했을때, 어떠한 의사소통이 가능할지 추이가 주목된다.
"·········"
정신조작에 걸린 우두머리트롤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근육의 급격한 움직임으로 추정해보면, 감정이 요동치는 중이다.
"나는······"
우두머리트롤의 공용어 발음이 대단히 또렷해졌다. 가래가 들끓는 특유의 악센트는 남았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나무뿌리 부족을 이끄는 올골두골로 여족장이다. 내게 지성을 선사해준 위대한 주술사의 이름은 무엇인가?"
[연구일지가 갱신됩니다.]
[새로운 표본: 올골두골로 여족장]
'······지능이 20으로 올랐어?'
지능 20은 지구의 역사적인 석학들과 맞먹는 수치다. 중세랜드인들의 평균적인 지능이 10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거.'
예상보다.
대단한 연구를 발견한 걸지도.
[연구일지 갱신!]
[새로운 연구 : 야수를 사람으로]
[연구단서 0/5]
[보상 : 정신의 로어]
2. 두번째 연구 - 여족장 올골두골로(2)
"나는 헤링턴 백작의 궁정마법사 텔로리안이다. 일단은 족장을 보좌하는 장로라고 이해하면 편리할 것이다."
나를 소개하며 왼손을 내밀자 올골두골로 여족장도 악수를 받아줬다. 손을 맞잡을 때 힘을 조절하는 모습에서 세심함이 느껴졌다.
"우린 대화를 나눌게 많다. 여족장."
"동의한다. 위대한 주술사여."
"우선 그대들의 언어에 대해 배우고 싶다. 그대가 공용어로 스스로를 [여족장]으로 지칭한 점을 미뤄보면, 트롤어는 명사에 성별이 존재하는 모양인데······"
[트롤어(익숙)를 습득합니다!]
[경험치 +10!]
[지식(트롤)에 대한 전승을 습득합니다!]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점 획득]
[12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 9점]
* * *
헤링턴 거성.
만찬이 식어가는 연회장.
"그래서."
연회를 위해서 멋진 더블릿을 차려입은 헤링턴 백작이 싸늘한 시선을 쏘아냈다.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장을 향해서.
"자네는 텔로리안 선생이 홀로 바위트롤들의 소굴에 들어가도록 놔뒀단 말이지. 덕분에 자정이 넘도록 선생이 돌아오지 않는 중이고."
연회장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철퇴백작이 격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문책할 시간도 아까우니 연병장에 기사들을 집합시키게. 인간만 죽여본 애송이들은 제외하고 진짜 정예들만 모으도록."
기사장을 비롯한 주요가신들이 5분 만에 연병장에 집합했다. 연회복에서 전신갑옷으로 환복하는데 3분. 마구간에서 전투마를 몰고 오는데 2분. 굉장한 집합 속도였다.
"빌어먹을! 텔로리안 선생이 아무리 지혜로워도 스무 살짜리 애송이라는 걸 깜빡했어! 무턱대고 드래곤 레어에도 쳐들어갈 나이의 청년을 홀로 보내면 안됐는데!"
철퇴백작은 소년종자가 건네주는 뾰족한 마상창(Lance)을 받아들면서, 회색빛 갈기를 뽐내는 카멜로니아산 전투마에 올라탔다.
"다녀오마. 벨라디아."
"·········"
"너의 은인을 반드시 구해오겠다."
하지만 철퇴백작의 결연한 눈빛과 달리 벨라디아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얼굴에 드러난 졸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
딸의 무정한 모습에 철퇴백작은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텔로리안 선생이 광증은 가라앉혀줬다지만, 여전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다녀오마."
"가봐야 헛걸음하시는 거예요."
"늦었다고 말하는 것이냐?"
"글쎄요."
벨라디아 소백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다들 호들갑을 떨어대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어차피 조용히 기다리면 무사히 돌아오실 텐데······그냥 들어가서 잘래요."
소백작은 하품을 가리며 퇴장했고 철퇴백작은 딸아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에선 선생을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줘야 아랫사람들이 충성을 바치는 법인데······
"백작 각하!"
"무슨 일이냐?"
"궁정마법사님께서 동굴에서 나오셨습니다!"
"무사하신가?!"
"겉모습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궁정마법사님께선 성으로 돌아오기 곤란한 상황이니 백작님께서 방문해주시길 청하셨습니다."
철퇴백작은 전령의 압존법 실수가 거슬렸으나 이례적으로 지적하지 않았다. 텔로리안이 살아있다는 소식은 그만큼 기뻤으니까.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두두두!
열댓 명의 기사들이 한밤중에 전투마를 내달렸다. 달빛조차 희미한 야밤이었으나 철퇴백작과 가신들은 눈을 감고도 말을 몰만큼 뛰어난 기수들이었기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 각하."
"텔로리안 선생! 어찌하여 본인을 이토록 걱정시킨 것이오! 분명히 스프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장담을 했을 터인데!"
그들은 바위산에 인접한 드넓은 공터에서 조우했다. 어두운 밤이었다. 엘프들조차 맨눈으로는 표적을 겨냥하기 힘들만큼.
"만찬에 참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백작령의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손님을 모셔왔으니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짝짝!
텔로리안이 손뼉을 두드리자 어둠 속에서 묵직한 거체가 움직였다. 철퇴백작과 가신들은 위협감을 느끼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누구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간의 군주시여."
"·········음?"
철퇴백작은 어둠 속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의아함을 느꼈다. 무지막지한 괴물이 나타날 기세였는데 유창한 공용어가 들려왔으니.
"모습을 밝히시오."
"송구하게도 지금은 어렵습니다."
"나는 정체를 모르는 자와 대화하지 않소."
이에 어둠 속의 거인은 텔로리안을 바라보았고, 텔로리안은 철퇴백작을 설득했다.
"제가 신원을 보증하면 어떻습니까?"
"아무리 선생이라도 이건······"
"제가 모셔온 귀부인도 백작님처럼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이십니다. 다만 인간과 상이한 생김새 때문에 모습을 감추고 계실 뿐이지요."
가신단은 긴장된 눈빛으로 반대를 표했다. 아무리 텔로리안이 영애의 광증을 치료해줬어도 영지에 방문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다.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이르다.
"모습을 드러내고 대화해도 되잖소?"
"모습을 드러내면 백작께선 분명히 무기부터 들이미실 겁니다. 그럼 교섭이 깨지겠지요."
인간은 이종족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동물이다. 그러한 조심성이 없는 인간들은 후세에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다.
"·········"
"이종 간의 교류에서 서로의 차이점은 나중에 맞춰가셔도 됩니다. 최초에는 서로의 공통점을 파악하면서 친분을 쌓으시길 권합니다."
텔로리안은 담배 파이프를 소환해 불을 붙였다. 자신의 역할은 새로운 기회를 주선해주는 것이고, 기회를 잡는 건 당사자들의 몫이다.
"이번 교류가 영지에 도움이 되겠소?"
"굉장한 도움이 될 겁니다."
"······이를테면?"
"우선 백작 각하께선 특별한 투사들을 부리게 되실 겁니다. 이들은 몬스터와 싸우는데 두려움이 없으며 쉽사리 죽거나 다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황금을 주지 않아도 됩니다."
군사력은 중세랜드의 영주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안전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으니.
"······그것뿐인가?"
"특별한 노동력도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불할 대가는 무엇인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험준한 바위산을 내어주시고 주기적으로 가축들을 공급해주시면 됩니다. 전략적으론 굉장한 성과입니다."
후욱.
담배연기가 퍼져나갔다.
"············"
무거운 침묵이 철퇴백작과 가신들을 내리눌렀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침묵하는 거인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우리 영민들이 잡아먹히면?"
"우린 인간은 잡아먹지 않습니다. 백작."
이에.
거인이 입을 열었다.
"이쪽 영지만이 아니라 다른 영지에서도 그랬습니다. 당신들을 공격하면 충돌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올골두골로 여족장은 인간은 탐나는 먹이가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상대의 경계심을 가중시킬 대답이니까.
"저는 평화를 원합니다."
"·········"
"또한 저를 따르는 이들을 배불리길 원합니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싸워줄 테니, 우리 무리의 번영과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철퇴백작은 허리춤의 철퇴를 매만지며 상대의 제안을 곱씹어보았다. 내용만 따져보면 평범한 주종관계다. 국왕과 백작. 백작과 남작. 기사와 농노가 모두 저러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주종관계는 인간과 인간이 맺는 관계이며, 최대한 양보해도 인간과 아인종이 맺는 관계다. 적어도 서로를 먹잇감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신뢰를 가질 수 있어야한다.
"그러니 신중을 기하고 싶군."
"그대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일단은 교역부터 시작하지."
허리춤에서 손을 떼었다.
철퇴를 뽑으려는 충동을 이겨내며.
"우리가 가축을 제공하면 너희가 대가로 돌려줄 상품이 있나? 무력은 제외한다. 너희의 무력이 어디로 향할지 아직 알지 못하니까."
철퇴백작은 텔로리안의 지혜를 높게 평가했으나, 자신의 결정에 수십만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었다. 젊은 마법사의 발상에 전적으로 응해주진 못하는 입장.
"돌은 어떻습니까?"
"······돌?"
"텔로리안 선생이 이르길 당신네 인간들은 항상 돌이 많이 필요하지만, 육체가 연약해 돌을 캐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석재는 중세랜드에서 제일 중요한 건축자재였다. 성벽과 교회, 영주의 관저, 부자들의 저택이 모두 돌로 지어졌다. 돌이 없다면 인간들은 야생동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거주하는 산에는 다양한 석재가 많습니다. 특히 당신들이 건축자재로 애용하는 석회암이 많지요. 우리는 참나무도 맨손으로 뜯어내는 힘을 지녀서 석회암을 캐내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가신들이 놀랐다. 자신들은 브로드소드와 아밍소드의 차이밖에 알지 못하는데, 무식한 괴물이 석공들처럼 돌을 구분한다고?
"이만하면 교역이 성립되지 않겠습니까?"
"······좋다. 너희들이 채석장의 인부로 성실히 일하는 동안에는 바위산에 기거하도록 허락하겠다. 대신 허락 없이 바위산을 벗어나는 행동과 인간에 대한 해악을 금한다. 이를 어긴다면 네놈들을 모조리 태워버릴 것이다."
철퇴백작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여족장은 공손한 어조로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답하고,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바위산으로 돌아갔다.
"·········갔군."
"휴우."
가신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들도 사람이라서 괴물이 두려웠다. 기사된 자로서 두려움을 표출하지 못할 뿐이다.
"텔로리안 선생."
"말씀하소서. 백작 각하."
"······이색적인 교역 상대를 데려오신 노고에는 감사드리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중대 안건은 논의부터 해주시면 좋겠소."
······어려운 요구였다. 창의적인 연구에 대한 영감은 언제나 떠오르지 않으니까.
"······선생?"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당신이 고용한 궁정마법사다.
[연구단서 획득 : 야수를 사람으로]
[경험치 +10]
[연구단서 1/5]
[레벨이 올랐습니다!]
[13레벨까지 0/100]
능력치 분배. 지능과 마력.
클래스 능력. 속독.
개인 특성. 공부성애자.
────
◆공부성애자
: 당신은 전라의 절세미녀보다 먼지가 가득한 희귀고서에 흥분합니다. 학습 활동을 수행할 때마다 스트레스가 감소되며, 도서관과 서재에서 언제나 최고의 편안함을 느낍니다.
────
* * *
"선생님. 뭐하세요?"
"·········"
"선생니임?"
"수업 시작까진 15분 남았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내가 책을 읽고 있잖나."
"·········넵."
텔로리안의 짜증 섞인 반응에 시원한 차림의 벨라디아가 표정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매력이 없는가? 그건 아닐 터였다. 대륙 전역에서 젊은 왕공들의 편지가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저기요. 선생님."
"나가라."
"어젯밤에 선생님 친구 분이 찾아왔어요."
"?"
나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스승은 있었지만 절연했고.
"이름이?"
"펠레리누스요."
"너를 비밀리에 찾아왔나?"
"네."
"남들은 보아도 인식하지 못했고."
"네."
"어디에 있지?"
"제 침실에······어라. 지금 오셨네요."
벨라디아는 연구실의 입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유독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진홍빛 귀공자가 있었다.
"오랜만일세! 친구여!"
코끝을 찔러온다.
지독한 유황냄새가.
"정말 보고 싶었네. 자네는 그렇지 않나?"
성명. 루시펠레스.
직업. 지옥의 보험사기꾼.
신분. 데빌집 막내아들.
취미. 게헨나 대공.
3. 세번째 연구 - 대악마 루시펠레스(1)
내가 루시펠레스를 만난 것은 여섯 살 무렵이었다. 초승달 유랑극단의 삼류마술사가 공연에서 선보인 캔트립(Cantrip)을 따라했단 죄목으로 가정에서 추방되었던 시기.
"형님들!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꺼져! 악마의 종자야! 우린 너를 몰라!"
"어머니············제발!"
"히이익! 뭣들 하느냐! 당장 악마를 내쳐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신실한 템니그라드의 주민들은 마법사 영주들을 증오했으며, 때문에 마법을 악마들의 술수라고 불렀다. 이토록 신실한 도시에서 마력을 각성한 꼬마가 살아갈 방도는 없었다.
"어르신! 한 푼만 주십시오!"
'·········"
"선행을 베풀고 천국에 가까워지십시오! 제가 주님의 재판장에 서는 날, 자비를 베푸신 어르신들의 성함을 천사들께 증언하겠습니다!"
나는 거지도 도둑도 되지 못했다. 어떤 부자도 저주받은 아이의 중보기도를 원치 않았으며, 어떤 도둑길드도 주문쟁이를 받아서 교회당국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아했다.
"아이야."
"······어르신."
"배가 고프니?"
근육질의 사내가 탐스런 소세지를 눈앞에 흔들었다. 심지어 후추까지 뿌려서 코끝이 시큼했다. 저번 삶에서나 맡아봤던 달콤한 냄새.
"소세지를 먹고 싶으면 소세지를 빨아라."
"·········"
"등짝까지 보여주면 금화를 주마."
한순간 혹했지만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삶의 존엄을 포기하는 것보단 굶어죽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떤 거지도 나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러한 선택을 내렸다.
짝.
짝
짝.
박수갈채가 들렸다.
"훌륭하다! 훌륭해!"
"············?"
"어린 인간이여! 네겐 죽음으로 지켜야할 존엄이 있구나! 그렇다면 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잔을 들이켜라! 소년!"
루시펠레스는 부유한 왕자 같은 차림으로 등장했는데, 녀석은 실제로 어떠한 왕자보다 강대하고 부유했다. 놈의 아버지는 영광스러운 천상과 자웅을 겨루는 일곱지옥의 제왕이니까.
"캄비온 주제에 뭐래?"
"······방금 뭐라고 했나?"
"사생아 주제에 뭐래? 라고 했다."
"·········?!"
"지옥에선 반인반마라고 무시 받으니까 지상에 올라와 필멸자를 상대로 약관사기나 치고 다니면서 대단한 악마처럼 행세하기는······"
초월자들은 대체로 초월자들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물질계에 기웃거리는 초월자들은 약점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놈처럼.
"당장 꺼져! 유황 냄새 나니까!"
"·········네놈, 정체가 뭐냐?"
"캬악! 퉤!"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루시펠레스는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녔다. 쉽게 속이지 못하는 상대이기에 더욱 속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시의 나는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떠올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악마와의 계약이 좋은 꼴로 끝나지 않는단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루시펠레스는 끈질기게 유혹했다. 자신과 계약을 맺는다면, 나를 무시하고 내다버린 모두에게 처절하게 복수할 수 있다고.
"가족에게 복수할 힘을 주마!"
"나는 가족이 없어."
"태양신에게 복수할 힘을 주마!"
니가?
무슨 수로?
"······태양신 교단에 복수할 힘을 주마!"
"잔챙이들에게 복수해서 뭐하나?"
"······네놈. 6살이 맞는 게냐?"
당시에는 맞았다. 정신이 늙은 게이머의 기억이더라도, 결국 사람의 정신은 육신의 상태를 따라가더라. 이것도 차후에 연구할 주제다.
"아무튼 너랑 계약 안하니까 꺼져."
"어째서 악마를 그렇게 싫어하지?"
나름대로 진지한 질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세상이 불타오르길 소망하던 처지였기에, 악마들을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
"네놈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실은 지금도.
그것 이상의 대답은 내놓지 못하겠다.
* * *
"꺼져라. 루시펠레스."
"오랜만인데 참으로 매정하군. 벗이여."
노골적인 냉대에도 루시펠레스는 능청스레 대답하면서 손뼉을 쳤다. 그러자 세상이 멈추었다. 손을 흔드는 벨라디아. 펄럭이는 커튼. 플라스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모든게 멈춘다.
"너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루시펠레스는 책상의 깃펜을 들어 벨라디아의 오른쪽 안구에 꽂았다. 이대로 시간을 흐르게 한다면 벨라디아는 무조건 죽겠지.
"이걸 너한테 할 수도 있다만."
"못하잖나."
"············"
필멸자가 시련 없이 초월자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초월자들도 대가없이 물질계에 개입하지 못한다. 그런 행위가 가능했다면 물질계는 초월자들의 전쟁으로 소멸했을 것이다.
"네가 원초적인 악을 추구하는 데몬(Demon) 이었다면 나의 근처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만들었을 테지. 하지만 너의 아버지는 정제된 악을 추구하는 데빌(Devil)들의 제왕이잖나."
모든 악마는 악을 실현하고자 탄생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 악마들이 악을 실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나는 내 아버지가 아니다. 인간."
"너는 네 아버지를 거역할 배짱이 없지."
모든 악마들은 악행에 대한 각자만의 철학을 지녔다. 그럼에도 굵직하게 분류를 해보자면, 절제된 악을 추구하는 [데빌]과 원초적인 악을 추구하는 [데몬]으로 나뉠 것이다.
'굴복을 강요하는 폭군과 살육을 즐기는 연쇄살인마의 차이지. 결국 악행을 즐긴다는 점에선 똑같은 순수악에 불과하다만.'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즐겁다! 하지만 어떻게 죽여야 더욱 악하겠는가? 지금도 수많은 악마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지점이다.
"무질서한 폭력은 네가 추구하는 악의 미학과도 맞지 않잖나. 게헨나의 루시펠레스."
루시펠레스가 데몬이었다면 벨라디아의 생살을 찢고 심장을 뽑아먹었겠지. 그러나 데빌들은 그보다 세련된 방식의 악행을 추구한다.
"사람을 죽일 때는 누명을 씌워서 교수대로 보내거나, 선인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어 살인자로 만들거나······그게 너희가 사랑하는 살인이지. 맥락도 없는 살육이 아니라."
[악마에 대한 전승을 획득합니다!]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점 획득]
[13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 11점]
"·········"
설명이 이어질수록 루시펠레스의 표정이 흥미롭게 변했다. 텔로리안이 어떻게 자신과 악마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히 아는가? 재능 있는 마법사는 맞지만 결국 필멸자에 불과한데.
"크크. 보아하니 자네는 불의 마법이 아니라 지옥의 마법을 습득한 모양이군. 우리 악마들에 대해 성직자들보다 깊이 알고 있으니."
지옥마법을 전공한 워록(Warlock)들조차 자신에게 이토록 방자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한다. 게헨나 대공의 기분을 거슬렀다간 죽음보다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니까.
"자네의 말이 옳아."
진홍빛 귀공자가 웃음을 지으며 벨라디아의 눈동자에 꽂아둔 깃털펜을 빼냈다. 맥락도 없이 살인에는 품격이 없다. 품격을 잃은 데빌은 부왕의 엄격한 분노를 맞이하게 되리라.
"자네의 말대로 나는 필멸자를 함부로 죽일 수 없다네! 그러니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가야겠군. 하지만 명심하게! 언젠가는 자네의 오만이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날이 올걸세!"
루시펠레스는 손뼉을 두드리자 시간이 흘러갔다. 그는 아쉬운 눈빛으로 뒤로 돌아서 실험실의 출구로 향했다.
"그럼 나중에 보세. 친구여."
"잠깐만."
"······무슨 일이지?"
"친구가 멀리서 찾아왔는데 식사는 대접해야하지 않겠나? 저녁만찬에 자네를 초청하지."
친구가 방문하면 밥은 줘야지.
나는 노르드 야만인이 아니니까.
* * *
"반갑소. 펠레리우스 선생."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링턴 백작 각하."
루시펠레스는 철퇴백작의 만찬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악마의 모습을 감추고 이국의 귀공자로 변장한 덕분이었다.
"극동의 대공이시라고 들었소."
"작은 영지의 주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철퇴백작께서 홀로 17마리의 오크 전사들을 쓰러뜨리셨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루시펠레스는 귀족의 만찬장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교양과 지성을 넘치도록 뽐내는 동방인 귀공자에게서, 누구도 수백만의 영혼을 착취하는 게헨나의 폭군을 연상하지 못하리라.
"대공님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과찬이십니다. 벨라디아 영애님."
특히 벨라디아는 만찬장에서 루시펠레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는데, 인간의 모습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마성적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나는 훈련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소."
"환대에 모쪼록 감사드립니다. 영주님."
"즐거운 시간되시오. 동방의 귀공자여."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회장에는 오직 셋만 남았다. 벨라디아 소백작. 궁정마법사 텔로리안. 동방공자 펠레리우스······
"훌륭한 식사였습니다. 벨라디아 영애."
"저희 헤링턴 가문의 조촐한 식탁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루시펠레스님."
벨라디아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 드레스의 양끝을 잡아 올렸다. 하위 계급이 상위 계급에게 취하는 예법이었다.
"방금 이름을 잘못 부르신 것 같습니다."
"게헨나 대공 루시펠레스님. 맞으시잖아요?"
"·········?"
자신을 바라보는 영애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진짜 이름과 작위도 정확히 말했다. 자신의 정체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
"······텔로리안?"
"내가 가르쳐주었네."
"그건 우리 데빌족의 관습을 어긴 것이네만."
루시펠레스는 미간을 좁히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는 규칙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데빌족의 대공. 타인에게 우발적으로 정체가 노출되는 상황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주인에게 손님이 정체를 숨기는 일도 관습을 어기는 행위잖나. 그렇지?"
[접대에 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13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 11점]
"자네는 손님으로 방문했고 벨라디아는 집주인으로 환대했네. 지금은 그것만 기억하게."
접대의 관습은 물질계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었다. 또한 자신은 물질계에 있으니까. 물질계의 규칙을 따르는 일이 옳겠지.
[악마와의 논쟁에서 승리!]
[경험치 +10]
[13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 11점]
"······이런이런."
이에 루시펠레스는 곤란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하트랜드 귀족들의 예법에 맞추어 라디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게헨나의 루시펠레스가 헤링턴 가문의 벨라디아 영애님을 뵙습니다. 소문대로 영애님의 아름다움이 심연까지 닿을 정도군요."
데빌족의 귀공자는 필멸자 수컷들처럼 벨라디아 영애의 뇌쇄적인 외모에 빠져들진 않았다. 언제나 데빌들은 육신보다 영혼에 훨씬 관심이 많았다.
"찬사에 감사드려요. 루시펠레스 대공님."
반면에 벨라디아는 전신을 떨며 루시펠레스의 인사를 받았다. 지옥의 귀공자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본능을 참기 힘들만큼······
"당신에게 여쭙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아요."
"·········제게 말씀이십니까?"
"제가 원래 악마들에게 관심이 많았거든요."
루시펠레스는 처음엔 의심스레 벨라디아를 쳐다봤으나 거짓말의 징후를 찾지 못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환대하고 있었다.
"데빌들은 거래를 좋아한다면서요?"
"·········"
인간에게 깨끗한 공기와 풍부한 영양소가 필요하듯 악마에겐 순수한 악의와 신선한 영혼이 필요하다. 때문에 악마와의 거래는 인간을 언제나 파멸로 안내한다. 텔로리안도 그것을 알기에 자신과의 거래를 한사코 거절했겠지.
[무슨 생각이냐?]
루시펠레스가 텔레파시를 보내온다.
[무슨 음모를 꾸미기에 자네의 제자에게 지옥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었지? 내가 보았던 자네는 그보단 책임감 있는 사내였는데.]
"······글쎄."
텔로리안은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으로 미뤄보자면 꿍꿍이를 숨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제자가 악마와의 만남을 원하기에 자리를 주선해주었을 뿐일세. 그럼 둘이서 대화를 나누게나. 나는 연구가 바빠서."
마법사마저 떠났다. 이제는 악의로 가득한 게헨나의 대공과 대공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만 남아있었다.
'······무슨 수작이지?'
이건 굶주린 드래곤과 가냘픈 아기사슴을 같은 동굴에 놔두고 떠난 셈이다. 어떻게 허기를 참으란 말인가? 순수한 영혼이 눈앞에 있는데?
'옳거니.'
알겠다.
놈의 수작을.
'이건 놈이 바치는 공물이군!'
교활한 수작이다. 스스로는 악마와의 상종조차 피해서 안전을 확보하되, 제자를 희생시켜 악마의 지식만 넘겨받으려는 수작!
'제법이군! 하긴 이정도 수완은 있어야 사냥개로 길들일 가치가 있지!'
루시펠레스는 벨라디아의 영혼을 빼앗을 책략을 구상했다. 이후엔 벨라디아의 영혼을 담보로 삼아서 텔로리안의 영혼까지 빼앗으리라!
'좋군.'
악마는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도 웃고 있었고.
[악마 대공을 기만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점 추가!]
[13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 13점]
3. 세번째 연구 - 대악마 루시펠레스(2)
"이곳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소백작님."
"정말로 여기 서명하면 마력을 얻나요?"
"맞습니다. 서명만 마치시면 소백작께서도 마력을 각성하실 겁니다. 그것도 필멸자들이 결코 지니지 못하는 지옥의 마력을!"
루시펠레스는 교묘한 언변으로 벨라디아와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어찌나 언변이 달콤했는지, 벨라디아는 스승에게 악마에 대해서 받았던 경고조차 금방 잊어버릴 정도였다.
'손쉬운 일이었다.'
벨라디아는 명석한 소녀지만 루시펠레스는 가장 신실한 성기사조차 타락시키는 악마 대공. 작정하고 속임수를 시도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후후. 이제 철없는 소녀가 감정을 돌려달라고 울부짖는 모습을 감상하면 되겠군.'
계약은 간단했다. 루시펠레스는 벨라디아에게 게헨나의 마력을 선사한다. 벨라디아는 루시펠레스에게 사랑, 보다 정확히는 사랑을 느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지불한다.
'사랑을 포기할 테니까 힘을 부여해달란 계약은 초보마법사들이 매우 흔하게 저지르는 실수지. 주문쟁이들은 지성을 갖추었으니 사랑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인간은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한다. 타인과 솔직한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당해보면 불가능한 이야기임을 알게 되지!'
사랑은 중독적인 감정이다. 부모 없이 자라난 빈민가의 고아들조차 평생에 걸쳐 애정을 갈구한다. 한데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난 백작영애가,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어떠한 절망을 느낄까?
'순진한 소녀여! 너는 심장이 돌처럼 차가워진 뒤에나 깨달으리라!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근간이었음을!'
·········한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 자신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텔로리안이 함정을 깔았다]였다. 순수혈통의 데빌 왕자들이라면 분명히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방심했구나! 텔로리안!'
하지만 루시펠레스는 인간과 악마의 결합으로 탄생한 캄비온. 이복형제들보다 기회를 포획하는 결단력은 뛰어나도 스스로를 통제하는 의지력은 부족하다. 원하던 상황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착각에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다.
'너는 제자의 영혼이 어찌되든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고 믿겠지. 하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설프게 양심이 있으니까!'
양심은 인간의 선천적인 약점이다. 연쇄살인마도 자식은 귀하게 여기고 살육을 즐기는 도적왕조차 병든 노부모를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네놈은 자신을 죽이려던 스승도 용서했던 호구지. 그런데 제자가 끔찍하게 고통 받는 운명을 알고도 내버려둔다?'
흐흐흐!
절대로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의지를 쥐어짜내서 모른 척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놈은 데빌에게 붙잡힌 인간들이 어떠한 고통을 겪는지 알고 있단 말이지. 결국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덕분에 루시펠레스는 계획이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졌고, 핏빛잉크로 계약서에 서명하는 벨라디아를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서명했어요."
"저만 서명하면 거래가 끝나겠군요."
루시펠레스는 영아의 살가죽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에 지장을 찍었다. 양측의 자발적인 동의를 확인한 일곱지옥의 힘이 계약을 이행시켰다. 루시펠레스가 지녔던 마력의 일부가 벨라디아에게 전해졌고 벨라디아의 심장에선 새하얀 빛줄기가 흘러나왔다.
'후후.'
악마는 웃음을 지었다.
'많은 영웅들을 타락시켜봤다만, 귀족 영애의 사랑을 빼앗는 결정은 처음이로군. 과연 소녀의 풋풋한 사랑은 얼마나 황홀한 색깔을 하고 있을까? 정말 궁금해 미치겠어!'
루시펠레스가 소환한 플라스크에 빛줄기가 들어갔다. 그것은 벨라디아의 사랑이다.
"·········?"
뭐지?
플라스크가 어째서 비었지?
"우와! 이거 정말 압도적인 힘이군요!"
반면 벨라디아는 전신에서 끓어 넘치는 마력을 만끽했다. 생애 처음으로 마력을 각성하는 순간은 대단히 황홀했으니까.
"뭐든지 불태워버리고 싶어지는걸요?"
······무언가 이상했다.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결코 웃지 못한다. 부모님의 사랑도 친구들과의 우정도 모조리 잿빛으로 변하니까.
"아. 맞다."
그럼에도.
웃고 있었다.
눈앞의 인간은.
"실은 대공님께 고백할게 있어요!"
빙긋.
그것도 해맑게.
"·········말씀하십시오. 벨라디아 영애님."
"제가 대공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
"대공님을 바라보면 긴장이 되거든요."
게헨나 대공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등한 인간이 자신을 욕정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하지만 그보다 불쾌한 사실이 있었다. 대상은 모든 종류의 사랑을 박탈당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에게 성애를 느끼고 있다는 말인가?
"너무 솔직했나요?"
"············"
미간을 좁히면서 벨라디아를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본 악마는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네겐 사랑이 처음부터 없었군."
"헤헤. 스승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제 견해는 달라요. 저도 잘생긴 남자들을 만나면 언제나 긴장이 되거든요. 그래서 옛날엔 머리를 박제해서 진열대에 수집해놨는데······요즘엔 그러지는 못하고 있어요."
단지 야수일 뿐이다.
사람의 육신을 지닌.
"예법에 어긋나게 본심을 말씀드렸네요. 그래도 대공님께는 마음을 터놔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게헨나 출신이시잖아요?"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면서, 오른손 검지의 황금반지를 서서히 빼냈다. 영혼의 색깔이 변해갔다. 회색에서 붉은색으로, 붉은색에서 진홍색으로······
진홍색의 영혼.
공격성. 살육욕. 색욕의 극한.
"·····애초에 인간도 아니었군!"
코끝을 찔러오는 방종의 악취에 얼굴을 찌푸렸다. 악행이란 저토록 무절제한 욕망의 분출이 아니다. 미개한 야수 같으니!
"어머나. 방금 전의 말씀은 실례였어요."
"정말이지 역겹군! 심연에서 올라온 탕녀 주제에 정숙한 레이디 행세를 하다니──!"
히죽.
소녀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정말 무례하시네요. 저는 당신처럼 유황냄새를 풍기는 캄비온 따위가 아니라 고귀한 순혈인간인걸요. 헤링턴 백작가의 후계자고요."
······순수한 인간이 저렇게 악의만 가득한 영혼을 지녔다고? 그건 불가능하다! 우주의 규칙에서 결코 허용되지 않는 현상이니까!
"벗이여."
텔로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리석 바닥을 힘차게 두드리는 구둣발소리도 뒤따른다.
"다원우주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있네만 무작위성도 만만치 않다네. 결국 우주란 안정과 변화, 질서와 혼돈을 구성하는 힘이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빚어진 공간인 것이지."
[우주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5]
[전승포인트 1점 추가!]
[13레벨까지 65/100]
[전승포인트 : 14점]
"때문에 우리가 진리로 정의한 규칙들도 깨어지는 경우들이 생기네. 인간의 영혼은 회색으로 태어난다가 진리지만, 매우 드물게 황금색이나 진홍색을 띄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네. 그런 희귀표본들에 [돌연변이]라는 명칭을 붙이지."
텔로리안의 점잖은 설명에도 루시펠레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피부가 붉게 변하고 있었다.
"이제 돌연변이가 무엇인지 알겠나?"
"고맙네. 정말 수준 높은 명강의였군!"
"실은 말이야. 나는 자네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이번 수업을 준비해왔다네."
곰방대에서 연기를 내뿜었다.
자욱한 담배연기로 비웃음을 가리고자.
"캄비온이여. 세상사가 자네의 계획대로만 흘러가진 못하네. 이건 모든 사건이 질서정연하게 벌어지는 게헨나에선 얻지 못하는 교훈이니까, 반드시 이번 수업을 귀중히 여기게."
[악마 대공을 열 받게 만드는데 성공!]
[경험치 +5]
[13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 14점]
"그리고 자네가 지불할 청구서도 있다네."
"수업료라도 내라는 소린가?"
"자네는 나의 중개를 받아서 인간과 계약을 체결했잖나. 그럼 지옥의 법도에 따라 거래중개료를 지불해야지. 법전에 나와있잖나."
촤르륵!
마법사는 불경한 법전을 펼쳐보였다.
"디아볼릭 코덱스 7항 12조. 데빌은 거래의 주선자에게 합당한 보상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 합당함을 책정하는 기준은 다음과도 같다. 첫번째······"
마법사가 법전을 읽을수록 악마대공이 뿜어내는 유황냄새가 짙어졌다. 여차하면 힘으로 엎어버리겠다는 협박이었지만 텔로리안은 눈도 깜짝하지 않으면서, 법전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조항을 남김없이 읊어보였다.
"······이상의 조항에 의거해 자네는 내게 100에테리아의 마력을 지불할 의무가 있네. 혹은 인간 제왕의 1년 수입에 해당하는 재화나."
[법학(지옥)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13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 14점]
"·········이런이런."
분노를 내뿜던 루시펠레스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침착함을 가장했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오늘은 내가 반성해야겠군. 나의 오랜 친구가 이토록 지옥의 법률에 해박한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지옥의 법전으로 데빌을 기망하려는 마법사들은 많았으나 그런 목표에 성공한 인간들은 대단히 드물었다. 우연히 지상에 유출된 지옥의 법전들은 불행히도 잘못된 조항이 오기되거나 특정한 조항이 누락된 불완전 판본들이었으니까.
"어떻게 완전한 판본을 손에 넣었나?"
"질문에 대답해주면 무엇을 얻는가?"
"하긴! 자네는 나의 질문에 대답해줄 의무는 없지! 역시 지옥법을 훌륭히 아는군!"
루시펠레스는 이젠 흥미로운 표정으로 텔로리안을 바라봤다. 처음엔 기분이 나빴지만 이제는 기가 막혀서 화도 나지 않았다.
'인간이 지옥법전의 완전판을 입수했다고?'
불가능하다.
'그걸 공용어로 번역했다고?'
그것도 불가능하다.
'설령 번역을 했어도 인간의 지성으로 지옥의 법리를 이해했다고? 인간은 본질을 엿보려는 시도만으로 광기에 빠지는게 지옥의 법인데?'
분명히 텔로리안은 굉장한 재능을 보유한 마법사였다. 100년정도 수련에만 매진하면 초월자의 경지에 올라설테지. 그렇지만 지금은 스무 살짜리 애송이에 불과할 터인데······!
"중개료는 언제 지불할 셈인가?"
"············"
"디아볼릭 코덱스를 어길 생각은 아니라고 믿겠네. 지옥의 왕자가 칙령을 위반한다면 제왕의 체면이 도저히 서지 않을테니까."
그래.
네놈이 이겼다.
건방진 필멸자야.
"물론!"
빙그레.
상냥한 미소를 연기한다.
"자네는 지옥의 칙령에 따라 거래중개료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네. 나는 게헨나의 대공으로서 자네의 요구에 응해야하는 의무가 있고."
펄럭!
"하지만."
귀공자가 계약서를 꺼내보였다.
"자네도 디아볼릭 코덱스를 정독했으니 알고 있겠지? 일곱지옥의 대공들은 코덱스를 이행할 때에, 합리적인 한도에서 특약을 삽입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계약서에 새로운 특약들이 불꽃으로 기록되었다. 새롭게 기입된 조항들도 루시펠레스가 텔로리안에게 거래중개료를 지불할 의무를 인정했다. 단지.
"내가 의무를 이행할 책임이 300년 뒤부터 발생한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네. 머나먼 기간도 아니니 충분히 합리적인 조정이지."
300년! 인간들에겐 하나의 왕조가 흥하고 멸할 시간이지만, 악마들의 감각으론 찰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옥의 법리에선 300년은 합리적인 조정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가 아닌가? 오랜 우정을 고려해 특약조항을 조정해줄 수도 있네. 대신······"
악마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자네가 만찬을 베풀어줬으니 나도 자네를 게헨나로 초대해 만찬을 베풀고 싶네. 게헨나로의 초대를 받아들이면 즉시 중개료를 지불해주겠네. 약속된 금액의 3배로 말이야."
3. 세번째 연구 - 대악마 루시펠레스(3)
대악마는 마법사가 자신의 초청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데빌은 언약에 종속된 존재. 스스로의 맹세를 어긴다면 존재 자체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손님]으로 초청한 대상을 결코 절대 해하지 못한다. 접대의 관습은 일곱지옥에서도 통용되는 전통이니까.'
그렇지만.
지옥은 지옥이다.
인간을 절망에 빠뜨리고자 존재하는 공간!
'하지만 내가 준비한 [환대]를 받고도 네놈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물론 네놈이야 그럴 수 있다고 분명히 자만할 테지만!'
오만은 마법사와 천재의 고질병이다. 그래서 수많은 천재 마법사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파멸을 맞이해왔다.
"자네의 초청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역시나.
녀석도 마찬가지군!
"좋아! 그럼 게헨나로 향하는 포탈을 열도록 하겠네. 자네를 위한 오페라를 직접 작곡해두었으니 기대해도 좋다네! 친구여!"
루시펠레스가 들뜬 목소리로 오페라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만 텔로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해에는 방문 계획이 없네."
"자네는 답방을 약속했잖나?"
"언제라고 대답하진 않았지."
빙긋.
마법사가 묘하게 웃어보였다.
"300년은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잖나? 그러니까 3분 뒤에 방문하든 30년 뒤에 방문하든 똑같을 테지. 나는 지옥의 환대를 견디기에 충분한 수련을 마치고 게헨나를 방문하겠네."
[데빌과의 말장난에서 승리!]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1점]
[레벨이 올랐습니다!]
[14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 15점]
"어·········?"
"내놓게. 3배의 거래중개료."
"그게·········"
"자네는 초청을 받아들이면 즉시 보상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네. 어길 생각인가?"
악마의 표정이 구겨진다.
가장된 기만이 무너지는 것이다.
"역시 잡종이라서 속이기 쉽군."
"감히 필멸자 따위가──!"
필멸자에게 농락당해 자존심이 무너져버린 상황. 여기에 콤플렉스를 자극받은 루시펠레스가 강대한 마력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연회장의 공기가 진동하며 식기가 산산이 깨어진다.
"필멸자여!"
루시펠레스의 피부는 붉게 변하며 신장이 두 배로 커진다. 어깨에선 날개가 솟아나고 이마에 뿔이 돋아나면서 마력이 진동한다.
"진정한 힘을 목도하고 경배하라! 게헨나를 다스리는 위대한 루시펠레스 대공을!"
루시펠레스의 진신에는 인간을 압도할만한 존재감이 있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진신을 보자마자 졸도하거나 절을 바쳤겠지.
"······호오."
그렇지만 로어마스터는 만물에 통달한 필멸의 현자들. 초월적인 힘에 도달한 인외의 존재를 바라보아도 호기심을 불태울 뿐이다.
"초월자의 진신은 이런 존재감을 내뿜는군."
[초월자에 대한 전승을 습득!]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점]
[14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 17점]
"나를 위압하려는 계산이라면 착각이다."
"·········"
"로어마스터들은 모든 종류의 전승을 습득한다. 오래된 전승. 새로운 전승, 불경한 전승, 성스러운 전승, 잊혀진 전승까지."
방대한 전승은 새로운 깨달음의 재료가 되어주고, 깨달음이 쌓이면 현명함에 이른다.
"덕분에 우리는 알게 되지. 너희 초월자들은 탄생과 동시에 영혼의 색채가 고정되며, 그로 인해 실제론 매우 제한된 가능성을 지님을."
천사와 악마들은 태생적으로 필멸자들보다 훨씬 강력하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타고난 강함은 있지만 경험치를 쌓아서 레벨을 올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너희는 천사로 태어났기에 선하고 악마로 태어났기에 악할 뿐이다. 그렇다면 너희 악마들은 어떤 존재인가? 악한 감정으로 탄생해 끝없는 악의만 보고자란 존재들일 뿐이다."
또한.
악의 실체는 덧없는 비참함이다.
"······악은 무지와 굶주림 속에서 탄생한 부산물이자 공포를 먹으며 자라나는 찌꺼기일 뿐이지. 그러니 악밖에 행하지 못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평생을 무지와 굶주림에 고통 받으며 항상 공포에 시달리는 가엾은 존재다."
텔로리안이 보기에 악마들은 전혀 강하지 않았다. 다만 우스꽝스럽고 가여운 존재들이었다. 강하고 두렵게 보이고자 안간힘을 쓰는.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를──
"그대의 어머니는 살아있다. 루시펠레스."
루시펠레스는 텔로리안에게 내뻗던 손톱을 멈췄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감정에 의해서.
"내가 제시하는 길을 따르면 어머니를 구할 방도를 알려주마. 쉬운 길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걸어볼 가치는 있는 길이다."
·········반인반마의 캄비온은 손톱을 멈춘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놈을 죽이고 싶었다. 스스로의 존재가 소멸하더라도.
"수락하는 즉시 어머니의 소재를 알려주마."
"············"
또다른 기만이 분명했다. 자신이 계약으로 인간의 영혼을 낚아채듯이, 놈은 계약으로 악마들의 힘을 갈취하는 모양이었으니까.
"·········내게 조언을 해주는 목적이 뭐지?"
그럼에도.
믿고 싶어졌다.
반쪽짜리 데빌답게.
"일곱지옥의 완벽한 멸망."
"·········방금 뭐라고 했나?"
"나는 일곱지옥의 완벽한 멸망을 원한다."
처음엔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으나 녀석의 눈빛은 지나치게 진지했다. 다음엔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녀석의 눈빛은 지나치게 투명했다.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냐?"
"일곱지옥을 파괴하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만······제일 까다로운 조건은 일곱지옥의 통제권을 완전히 손에 넣어야한다는 것이다."
마법사가.
캄비온을 가리킨다.
"하지만 네가 생겨서 일이 편해졌다."
"내가 생겨서?"
"너를 앞세워 일곱지옥의 통제권을 손에 넣는 일이 가능해졌거든. 나머지 조건들을 완결하는 절차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루시펠레스는 형언키 어려운 표정이 되었다. 수많은 감정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면서 게헨나의 대공을 혼란에 몰아넣는다.
"나는 네게 협력하지 않을거다. 마법사."
"이유는?"
"나는 반드시 형제들을 제치고 일곱지옥을 물려받을 것이다! 일곱지옥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캄비온의 사고를 관찰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4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 18점]
"그래서 너의 아버지가 죽기는 하는가?"
"·········?!"
"영원히 살아가는 지옥의 제왕에게 후계자는 필요하지 않다. 그는 은퇴도 죽음도 겪지 못하므로, 아들들의 후계자 경쟁은 아버지를 즐겁게 해주려는 놀이일 뿐이다."
순혈데빌이라면 탄생과 동시에 이해할 문제였다. 하지만 루시펠레스는 유한한 인간의 피가 뒤섞인 캄비온이기에, 때때로 필멸자들이 저지를 착오를 범하고 있었다.
"·········"
"첫번째 조언을 내어주지."
"······좋아."
루시펠레스는 마력을 거두고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일대를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지고 동방적인 귀공자가 나타났다.
"캄비온의 가능성을 인식해라."
"·········캄비온의 가능성이라."
"너의 절반은 악마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인간이다. 순혈악마들은 그것을 약점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가능성이라고 부르겠다."
인간은 악마도 천사도 뛰어넘는 가능성을 품었다. 그렇다면 캄비온은 악마도 인간도 뛰어넘는 가능성을 품고 있을 것이다.
"알겠다. 곱씹어보지."
"악행만으로 경쟁한다면 너는 형제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지, 하지만 어머니의 고결함도 깨우친다면 또다른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루시펠레스는 오른손을 휘둘러 파손된 식기들을 복구시켰다. 난장판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값진 조언이었다. 로어마스터 텔로리안."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게헨나의 대공."
"자네의 조언을 깨우친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네. 그동안 건강히 지내게나. 벗이여."
루시펠레스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꼴 보기 싫은 형제들을 압도할 구상이 떠올랐으니까.
"잠깐."
"또다른 조언이 있다면 경청하지."
"자문을 받았으면 자문료를 내야지."
"·········어?"
텔로리안은 주머니에서 두루마리 영수증을 꺼내주었다. 기본 상담료가 2달치 수입. 시간 초과로 6달치 수입. 비밀전승을 동원한 맞춤형 조언이었으니 2배······새로운 항목이 추가될 때마다 비용이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종합해서 10년 치 수입이 되겠네."
"·········불과 몇 마디 해놓고 10년 치를?!"
"자네의 입장에서 과도한 비용이라고 느껴짐을 이해하고 있네. 그래서 자네를 위해서 법적인 근거들을 가져왔네. 우선 에스실 왕국의 상업에 대한 관습법에 따르면······"
텔로리안은 아공간에서 둔기로 사용가능한 법전들을 소환해서 압박했다. 이에 루시펠레스는 허겁지겁 반론을 내어 놓는다.
"데빌은 지상법에 종속되지 않아!"
"글쎄. 우린 지상에서 거래를 맺었네만?"
"나는 그러한 거래에 동의한 적이 없네!"
"하지만 에스실 왕국의 관습법에 따르면 자네는 나의 조언을 듣기 시작한 순간부터 묵시적인 동의를 나타낸 것으로 간주되어서······"
[법학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4레벨까지 40/100]
[전승 포인트 : 19점]
······루시펠레스는 지상의 법률을 알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했다. 그저 텔로리안이 길고 전문적인 문구를 주장하면 이권을 순순히 내놔야했다. 이를 논파하려는 시도들은 자문료를 급격히 증대시킬 따름이었다.
"그만! 10년의 수입을 자문료로 지불하겠네!"
"무슨 소리인가? 사실 자네가 지불해야할 자문료는 20년의 수입이었네. 자문료가 증대된 근거는 다음과 같은데······"
자.
이제 누가 데빌이지?
[악마대공에게 약관사기를 성공!]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점]
[14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 21점]
3. 세번째 연구 - 대악마 루시펠레스(4)
텔로리안은 루시펠레스를 농락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초월자가 마나를 사용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마나를 입자단위로 쪼개어 조정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신규로어 획득 : 비전의 로어]
[당신은 순수한 마나를 엮어서 주문으로 만드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비전(Arcane) 마법은 시전시간이 길고 마력 소모량이 높으나 그만큼 강합니다.]
이걸로 [화염의 로어]에 이어 두 번째 로어를 습득했다. [비전의 로어]에 속한 유명한 주문들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 아머], [매직 미사일], [염동력], [점멸], [역장 전개], [신비한 폭발], [텔레포트], [윌 오브 포스].
'주로 전투에 써먹는 주문들이 먼저 떠오르긴 한다만, 비전 마법은 연구에서도 대단히 유용하다. 모든 마법의 근간이 되어주니까.'
하지만 비전 마법은 가성비가 대단히 떨어져서 저레벨에 애용되는 로어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번 회차엔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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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마법사 텔로리안 (완전한 중립)
Lv13 로어마스터
- 화염의 로어
- 비전의 로어
◆능력치
힘 : 10
민첩 : 17
체력 : 13
마력 : 40+++
지능 : 35++
직감 : 15
◆클래스 능력
◆개인 특성
◆주문 목록
◆연구 일지
◆퀘스트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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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객관적인 강함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 우선 13레벨은 작은 영지에서 이름을 떨치는 강자를 뜻한다. 남작령을 대표하는 기사가 13레벨이다.
'남작령을 현대로 치환하면 [구]라고 부를만하다. 그러니 13레벨이면 도봉구 최강자에 명함을 내밀만한 수준이지.'
그렇지만 나는 평범한 13레벨 마법사가 아니라 13레벨 로어마스터다. 학구열이 드높은 강남구의 최강자인 셈이다.
'그래도 백작가의 궁정마법사론 많이 부족하지. 철퇴백작처럼 강력한 백작이면 더더욱.'
비유하면 나는 강남구청장 보좌관에 어울리는 경력을 지녔지만, 외동딸의 정신병을 치료해주고 경기도지사의 보좌관에 임명된 셈이다.
하지만
누구도 내가 13레벨인지 모른다.
'······능력치가 너무 높거든.'
시네어RPG에선 인간이 아무리 강해도 괴물이나 초월자들처럼 능력치를 지니진 못한다. 대신 클래스 레벨을 높이고 동료들을 모아야한다. 다시 말해 필멸자들은 태생적으론 약하지만 전문성을 갈고 닦은 팀을 결성해, 괴물과 초월자들에게 맞서는 구도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 불과한 모험가들이 드래곤도 악마도 무찌를 수 있는 것이지. 개개인은 약해도 파티를 결성하면 시너지가 발생하니까.'
그런데.
나는 파티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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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 40+++
지능 :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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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능력치는 현역 대마법사들도 기겁할 수치고, 천사장이나 하급신은 되어야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덕분에 나는 레벨에 비해 훨씬 강하게 보인다. 대략 2배정도?
'26레벨 마법사면 왕궁에서 초빙할만한 수치지. 그래서 철퇴백작이나 가신들이 나를 공손히 대하는 부분도 있고.'
전생에 캐릭터를 생성할 때 [마법재능 5단계]를 찍어서 다행이었다. 아무튼 능력치 파악은 이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점검하지 않은 부분들은 필요할 때 되새겨보면 되겠지.
콰앙!
트롤들이 거주하는 바위산. 오른손에서 뿜어진 마력의 파동이 단단한 암벽을 완전히 조각냈다. 이를 지켜보던 루시펠레스는 휘파람을 불면서, 또다시 손뼉을 쳐댄다.
"정말 대단하군! 겨우 스무 살에 두 번째 로어를 익히다니, 천재적인 성장이야!"
으쓱.
"늦진 않았지만 빠른 성취도 아니라네."
"······그게 무슨 개소리인가?"
"그림자왕 에퓌세일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3개의 로어를 익혔고, 위대한 아르카디안은 스무 살에 공중도시를 만들어냈다네. 그에 비하면 나는 범부일 뿐이지."
[역사(마법)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획득!]
[14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 7점]
"······기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재능에 걸맞은 기준을 적용했을 뿐일세. 거인이 팔씨름을 해야한다면 같은 거인과 해야지. 그게 공정한 승부가 아니겠나."
······루시펠레스는 텔로리안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녀석은 공정이란 단어를 바보 같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진정한 공정이란 내가 유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공정한 규칙이 내가 승리하는 규칙을 의미하듯이.
"그래서 약속한 자문료는 가져왔나?"
"당연하지! 그렇지만 자문료를 수령하기 전에 서면계약을 해주길 바라네. 이것으로 지난번 자문에 대한 요금은 전부 지불했다고······"
루시펠레스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텔로리안을 지옥법으로 농락하려다 듣도 보도 못한 법률로 두들겨 맞았다. 자연법, 만민법, 관습법, 제국법, 왕국법, 영지법, 교회법······하찮은 인간들이 무슨 법률이 그렇게 많은가?
"그건 자네가 앞으로 하는걸 봐서 정하지."
"········나를 끝까지 등쳐먹을 셈인가?"
"자네도 내게 그럴 생각이었잖나."
루시펠레스가 아무리 정중해보여도 악마일 뿐이다. 단지 손톱보단 말장난을 좋아하는 악마. 그게 놈이 타고난 절반의 천성이다.
"동해보복의 원칙은 지옥법에서도 보장되는 권리잖나? 그러니 너무 억울하게 여기지 말게나. 자네 사정을 많이 봐주고 있으니."
친구의 등짝을 두드려주고 녀석이 가져온 보물을 살펴본다. 투명한 플라스크. 표지가 수상쩍은 고서. 동양룡이 그려진 도자기.
"우선은 이걸로 만족하지."
"······우선은?"
"남은 배상금은 차후에 청구하겠네."
"······지금 당장 지불하고 싶네만."
"원칙상으로는 힘든 이야기지만."
마법사는 팔짱을 껴보였다.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친구로서 성의를 베풀 수는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성의를 보여야하나?"
"앞으로 30년간 한 달에 이틀씩 헤링턴 거성을 방문해주게. 300년도 찰나에 불과한 자네에겐 굉장히 가벼운 성의에 불과하겠지!"
빌어먹을 주문쟁이!
끝까지 뒤끝을 부리는구나!
"자네는 헤링턴 거성에서 언제나 손님으로 환영받을 걸세. 대신 거성에 체류할 때는 다음 같은 업무를 수행해야하네. 교습, 경호, 접대, 정보수집, 정기보고, 선물······"
······요약하면 한 달에 이틀을 텔로리안의 하인으로 봉사하란 소리였다. 게헨나를 다스리는 무시무시한 루시펠레스 대공에게 감히!
"싫으면 그만두게."
"아, 아닐세! 절대 아닐세!"
"무언가 못마땅하다는 어투인데."
"아니! 절대 아니야! 기꺼이 자네의 호의를 받아들이겠네!"
도저히 법리해석으로 텔로리안을 당해낼 방법이 없었다. 이놈은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인가? 20살 먹은 인간이 500살 먹은 대악마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다른 차원에서 날아온 존재가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나도 어지간히 미쳤나보군.'
녀석이 이계인이라면 보자마자 알아보았을 테지. 이계인들은 영혼의 색채가 평범한 인간들보다 훨씬 강렬하니까.
"이걸로 자문료는 청산됐네."
"정말 고맙네! 결코 은혜는 잊지 않겠네!"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말이군."
"그런 것이 아니라······"
피식.
악마의 진심이란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오늘 밤에는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랑하던 상대를, 내일 아침에는 부모의 원수보다 증오할 수도 있는 것이 악마의 마음이다.
'딱히 악마만 그렇지는 않군.'
결국 악마도 천사도 인간들의 감정에서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들의 가치관도 인간의 특정한 감정이 극대화되었을 뿐이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감정을 지니진 않았다.
[천사와 악마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4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 8점]
때문에 텔로리안은 믿었다.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요소는 심성이 아닌 상황이라고. 인간은 악한 상황에선 악해지고 선한 상황에선 선해지는 동물이라고.
"벨라디아!"
그렇기에.
벨라디아는 가치 있는 표본이다.
"선물이 도착했다."
"와! 정말요?!"
악마의 심성을 타고난 인간도 교화될 수 있는가? 남들과 다른 욕망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방식으로 해소하는 방법을 익히며, 충분한 애정이 주어진다면, 벨라디아는 변할까?
"우선 인사해라."
"앗! 다시 뵙네요! 루시펠레스 대공님!"
"네게 지옥 마법을 가르쳐줄 강사님이시다."
인간 형태로 돌아온 루시펠레스는 동방의 귀공자처럼 행세했다. 벨라디아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면서 우아하게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인사는 그쯤이면 됐고."
"네!"
"네가 마력을 얻었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또한 지옥마법을 배운다는 사실도 비밀이다. 이유는 스스로 말해보도록."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의 정세수업을 찬찬히 떠올렸다. 이후엔 백작가의 후계자로 배웠던 역사학과 신학을 결합해서 해석해보면······
"침묵 협약 때문이군요."
"맞다. 태양신 교단은 여전히 막강하니까."
태양신 교단은 마법을 죄악으로 여긴다. 고대의 마법사왕들이 신들에게 도전했던 역사적 원죄도 있었고, 오늘날의 마법사들이 보이는 반사회적인 행태도 지탄을 받기 좋았으니까.
"태양신 교단은 마법을 완전히 금하기를 원하지만, 권력자들은 항상 마법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하죠. 그래서 침묵 협약이 생겼죠."
태양신 교단은 묵인한다.
군주들은 선을 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선인지 이해할 수 있느냐?"
"마법사를 고용하거나 동맹을 맺는 것은 묵인하겠죠. 하지만 스스로 마법을 배우거나 마법사와 혼인하는 건 용납되지 않을 테고요."
[역사(교회)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4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9점]
"정확히 이해했구나."
"헤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유의할 일은?"
"목격자가 생기면 살인멸구요."
"······그보다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처음부터 들키지 않아야죠."
"어째서?"
"살인멸구도 증거가 남으니까요."
"증거를 없애면?"
"증거를 없앤 증거가 남겠죠."
끄덕.
영리한 아이다.
"그럼 이제 언박싱을 해보자."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너를 위한 선물이라고 말하진 않았다."
"·········선생님 나빠요."
벨라디아가 샐쭉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완벽한 연기에 소름이 돋았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벨라디아의 사회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살펴보아라."
건네준다.
비어있는 플라스크를.
"텅텅 비어있네요?"
"너의 사랑이다."
"오호! 그래서 이렇게 비어있었네요!"
벨라디아는 눈빛을 번득이며 꼼꼼히 플라스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떠한 내용물도 찾아내지 못했다. 하다못해 조그마한 점조차도.
"······역시나."
벨라디아의 목소리가 굳어진다.
"저는 태생부터 이질적인 존재였네요."
"거시 세계만 관찰한다면 그렇겠지."
건네준다.
마공학스코프를.
"하지만 마법사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본질을 탐구할 수 있어야한다. 관찰해보아라."
끼릭.
플라스크를 투시해본다.
"······작은 애벌레가 꿈틀거리네요?"
벨라디아의 눈빛에 일말의 희망이 담겼다. 무언가 있긴 있다. 어쩌면 자신도 남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자기애다."
"······자기애."
"너는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즐기나, 남에게 고통을 받으면 분노하지. 자기애를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기애가 품을 수 있는 범위는 대단히 좁다. 자신밖에 알지 못하는 사랑이니.
"지금은 자기애도 사라진 건가요?"
"그렇다. 그렇지만 생존본능은 남아있지."
지금의 벨라디아는 완벽히 몬스터같은 상태였다. 굶주리면 잡아먹고 목마르면 마신다. 이런 행위에 감정이나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네게 감정을 배양하는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너도 새로운 경험을 겪으면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
[연구일지 갱신!]
[심화표본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감정을 느끼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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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서 저는 어떤 이득을 얻나요?"
"연구기간에 나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수락하겠습니다."
벨라디아는 생각했다. 텔로리안의 인도를 따라서 소백작의 지위를 얻어냈지만, 여전히 치명적인 약점이 많다고. 자신은 텔로리안의 인도가 필요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루시펠레스. 두번째 선물을 열어보게."
루시펠레스는 대단히 아쉬운 표정으로 고서를 건네줬다. 염소가 그려진 표지가 대단히 수상쩍다. 그것은 흑마법사들의 개론으로 불리는 [핀디쉬 그리모어]의 원본이다. 게임 시절에는 [영웅] 등급의 아이템으로 간주되었던.
4. 네번째 연구 - 가뭄(1)
"네가 사용할 교과서다."
"와! 소유권을 넘겨주시는 건가요?"
"빌려주는 것이다. 일단은."
"그래도 감사합니다! 헤헤!"
핀디쉬 그리모어는 지옥의 광기를 담고 있는 마도서. 평범한 마법사는 서장을 읽자마자 광기에 빠져들 것이고, 자신조차 정신오염을 방지하려면 하루에 2페이지가 한계다.
"이거 엄청 재밌네요?"
그러나 벨라디아는 입가를 핥으면서 페이지를 쓱쓱 넘겼다. 원색적인 로맨스 소설을 읽는 영애들도 저토록 눈을 빛내진 못하리라.
────
◆벨라디아 헤링턴 (혼돈 악)
Lv15 전사
- 기사검술
- 기마전투
Lv11 궁중귀족
- 궁중예법[레이디]
- 영지경영
- 정세파악
Lv1 워록
- 악마스승
────
벨라디아에게 [워록] 클래스가 생겼다. 타고난 특성인 [살육본능]을 제일 효과적으로 써먹을 클래스가 개방된 것이다.
'이제 A급 동료로 써먹을 수 있겠군.'
[시네어RPG]에 등장하는 동료 캐릭터들은 암묵적인 등급이 있다. 헌터마냥 공식적인 기준은 아니어도 고인물들은 대체로 동의하던.
'A급은 홀로 중간보스를 처치할 능력을 갖추었거나, 주인공이 챕터보스와 싸울 때 의미 있는 조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벨라디아는 원래에도 [살육본능]의 성능이 워낙 탁월해서 [어쌔신]이나 [혈법사]로 육성하면 A급으로 분류되는 강캐였다. 하지만 [워록]으로 육성한다면 S급도 가능하리라.
'워록이 사용하는 지옥마법은 위력이 대단하지만, 레벨이 오를수록 [정신오염]이 누적되어서 광기에 빠져드는 단점을 지녔다.'
하지만 벨라디아는 평소에도 살육본능에 시달린다. 지옥마법을 사용해서 생겨나는 정신오염이 얼마나 쌓이든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무런 패널티도 받지 않고 지옥마법을 습득하는 셈이지. 그럼 워록은 사기캐가 된다.'
단.
주의는 해야겠지.
내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으니
"벨라디아."
그러니까.
서열은 언제나 확실해야한다.
들짐승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니.
"네. 스승님."
"내가 어째서 흑마법을 배우도록 허락했는지 생각하고 말해보아라."
벨라디아는 생각에 잠겼다. 뛰어난 지성(지능 14)으로 스승의 생각을 추론하고 이후에는 동물적인 감(직감 18)으로 결론을 내린다.
"새로운 연구 과제인가요?"
"제대로 보았구나. 네가 흑마법을 배우고도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다."
벨라디아는 스승의 무뚝뚝한 목소리를 간접적인 경고로 이해했다. 실제로 그런 의도였다.
"그럼 마지막 언박싱이군."
루시펠레스의 마지막 선물은 동양룡이 그려진 극동산 도자기였다. 대단히 귀해보였다.
"예쁘네요?"
"도자기? 내부에 담긴 영혼?"
"양측 모두요."
도자기의 내부엔 격조가 높은 영혼이 갇혀있었다. 강인하고 늠름한 사내이지만 쇠사슬에 포박된 상태.
"너희 가문을 창건한 무쇠공 헤롤드다."
"시조님의 하체는 무쇠처럼 단단했구나······"
"나중에 무쇠공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기겠다만, 당장은 지옥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정신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겠지."
짝짝.
박수를 루시펠레스를 부른다.
심부름하는 하인을 부르듯이.
"도자기를 창고에 가져다두게."
"······내가 말인가?"
"그럼 내가 해야겠나?
"······그래. 알겠네."
루시펠레스는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는 굴욕을 되새기며 도자기를 운반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 두고 보자······
······그런데 두고 본다고 원한을 갚을 기회가 생길까? 괜히 놈의 뒤통수를 치려다가 오히려 놈의 속임수에 당하지 않을까?
'그냥 조용히 말을 따르자.'
녀석을 순순히 따르면 결국엔 협력자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협력을 통해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생기겠지.
'······그리고 녀석도 언젠가는 실패할 거다.'
녀석이 아무리 대단해도 일곱지옥을 파괴하겠다는 광오한 계획은 반드시 실패한다. 인간이 악마들의 제왕보다 강해질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놈도 부왕과 겨룰만한 강함에는 도달할 것이다. 녀석은 분명히 데빌 군단을 격파하고 지옥의 왕좌에 도전하게 될 거야.'
루시펠레스는 상상해보았다. 모든 로어에 통달한 궁극의 대마법사가 일곱지옥을 다스리는 데빌들의 제왕과 격돌하는 모습을!
'처음에는 텔로리안이 유리할 것이다.'
궁극의 대마법사는 무시무시한 운석들을 쏟아 붓고 혹한의 눈보라로 지옥을 뒤덮어 일곱지옥의 제왕을 궁지에 몰아넣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하지.'
인간의 마력은 유한하나 악마의 마력은 무한하므로, 결국 텔로리안은 필멸자의 한계를 저주하며 지옥의 권능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하지만 텔로리안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지옥의 제왕도 적잖은 피해를 입겠지. 그때 난입해서 양측을 모두 죽이고 힘을 흡수한다!'
탁월한 음모였다. 미흡한 부분은 지금부터 서서히 가다듬으면 된다. 하나의 음모에 수십 년을 공들이는 철두철미함은, 필멸자들이 생각치도 못하는 데빌만의 우월함이니!
"어이. 캄비온."
"······다른 호칭으로 불러주면 안되겠나?"
"망상은 그만하고 도자기나 나르도록."
"·········알겠네."
두고 보자!
빌어먹을 마법사!
빌어먹을 아버지!
'언젠가 너희를 모두 죽이고 내가 지옥의 제왕으로 군림할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를 풀어드리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드리리라!'
·········
··················
피식.
왕좌에 앉은 사내가 웃었다.
"아자라엘."
"말씀하십시오. 주군."
"우리 막내가 귀여운 반항을 준비하는 모양인데······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겠나?"
아자라엘은 전신갑옷을 착용한 여성형 데빌이었다. 데빌족을 대표하는 챔피언이자 천상을 대표하는 전투천사 트리스타엘의 호적수.
"명을 내리시면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어린 치기에 대한 처벌론 과하지 않나?"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영주는 왕에게 복종합니다. 이것이 일곱지옥의 절대규칙입니다. 한데 4왕자 루시펠레스는 절대규칙을 둘이나 어겼으니 즉각 참해야합니다."
쯧쯧.
두 갈래의 혀를 차보이는 지옥의 제왕.
"자네는 좋은 어머니가 되긴 글렀군."
"좋은 부모는 반드시 자녀에게 복종부터 가르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무질서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갓난아기도 똑같습니다."
악마제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나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말에 따르면 나는 아들의 방종을 방임해주는 무책임한 아버지잖나? 디아볼릭 코덱스는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거늘."
이곳은 데빌들의 일곱지옥.
악행은 미덕이고 법률은 절대적이다.
"그것은 제가 판단할 영역이 아닙니다."
"자네가 판단할 영역이 아니다?"
이색적인 대답이었다. 자신이 말꼬리를 잡으면, 절대다수의 신하들은 오해라며 급히 해명하거나 실언을 뱉었다며 용서를 청하는데?
"저는 폐하의 칼입니다."
"그래서?"
"칼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흠."
그래.
데빌은 이래야지.
"자네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두렵습니다."
"한데 어떻게 이토록 당당하지?"
"규칙이 더욱 두렵기 때문입니다."
데빌의 제왕은 더욱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아자라엘은 키워볼 가치가 있는 인재였다. 모자란 아들들보다 훨씬 낫다.
."지옥의 왕권법에 따라서 근위대장 아자라엘에게 명한다. 지상으로 올라가 4왕자 루시펠레스의 [친구]를 찾아내서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조치의 세부사항은 스스로 판단하되 인간의 모습을 잃지는 말도록해라."
존명!
불꽃과 함께 아자라엘이 사라졌다.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라······"
인과율의 두루마리에서 읽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그렇다면 절대다수의 필멸자들처럼 기억할 가치도 없는 존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희박하지만 인과율을 흔들고자 소환된 이계체일수도 있지. 그랬다면 귀염둥이 막내가 알아봤을 테니 가능성은 매우 희소하다만······"
하지만 0%와 0%에 한없이 가깝다는 완전히 다른 확률이다. 그래서 언제나 최악을 대비한다는 [원칙]에 따라 아자라엘을 파견했다.
'내가 더이상 관심을 지닐만한 가치가 없는 사안이다. 아자라엘이 해결하겠지.'
일곱지옥의 통치자에겐 중요한 안건들이 많았다. 무명의 인간 마법사보다는 드높은 천상이나 현자 회의가 훨씬 위협적인 상대니까.
'드높은 천상에서 대규모 원정군을 준비 중이군. 역겨운 위선자들을 함정에 빠뜨리기에 좋은 차원은······'
잊어버린다.
막내아들의 [친구]에 관해서.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텔로리안은 연구에 전념했다. 철퇴백작은 마법연구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텅텅 비어있던 서고에 양장본 서적들이 채워지고, 실험실에는 이국에서 잡아온 희귀생물과 고급광석들이 쌓여간다. 덕분에 텔로리안의 연구는 빠르게 진척되었다.
[원소에 대한 전승을 획득!]
[비전에 대한 전승을 획득!]
[괴물에 대한 전승을 획득!]
[신화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40]
[전승포인트 4점]
[레벨이 올랐습니다!]
[15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13점]
"이번엔 새로운 건물을 지어봤네."
"······이게 뭡니까?"
"자네가 얼마 전에 말했잖나. 순수하게 연금술에만 사용할 공방이 있으면 좋겠다고."
······백작의 생일만찬에서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였다. 마탑에 부족한 부분이 없느냐고 끈덕지게 물어오기에 대답해주었던.
"자네는 내 삶을 구해주었네."
"·········"
"게다가 300년 역사의 헤링턴 가문과 50만 영지민도 구해주었지. 그러니 자네는 최고의 대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
연금술 공방은 굉장히 비싸다. 크기는 호화저택만한 크기인데 건설비용은 중형성채에 맞먹는다. 다시 말해, 철퇴백작은 국경요새를 축조할 예산을 각출해서 후원해준 것이다.
"······솔직히 부담스런 선물입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말씀드리기엔 지나치게 늦었군요."
철퇴백작이 벌써부터 이정도 후원을 해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알던 철퇴백작은 금고를 쉽게 열어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심경에 변화가 생겼군.'
원래 철퇴백작은 대단히 곤란한 처지에 있었다. 자신은 노년을 앞두었는데 영지를 물려받을 외동딸은 미남의 머리를 수집하는데 전념하고, 광기에 빠진 딸아이의 후견을 부탁할 가까운 친척이나 방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군을 육성하고 금고를 넉넉히 채우는데 집착했지. 자신이 떠나면 딸아이를 지켜줄 힘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딸아이가 극적으로 달라졌다.
·········깃펜을 들어서 해당 문장을 지운다.
[그런데 딸아이가 극적으로 달라져보였다.]
연구일지는 정밀성이 생명이다.
단순무식한 기사들은 차이를 모르겠지만.
'어쨌든······이제 벨라디아는 남들이 보기엔 정상인이다. 그것도 기사와 레이디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보기 드문 여걸이지.'
시네어RPG에선 클래스마다 적합한 [성격]이 존재한다. 호전적인 사람은 전사를 올리기 수월하고 감수성이 섬세한 사람은 레이디를 올리기 수월하다. 반면 기질에 반대되는 클래스를 올리기는 훨씬 어렵다.
'나처럼 학구적인 성격이면 마법사를 올릴 때는 보너스를 얻지만, 야만전사나 무림인처럼 무식한 클래스를 올릴 때는 패널티가 있지.'
하지만 벨라디아는 어떤 종류의 클래스를 올릴 때에도 보너스를 얻는다. 다른 사람을 다치게 만드는 수단이 있는 클래스라면 뭐든지.
'기존의 벨라디아는 [전사]를 올릴 필요성은 이해했으나, 내가 가르치기 전엔 [궁중귀족]을 올려야할 필요성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레이디의 혓바닥은 기사의 랜스만큼 치명적인 무기다. 때문에 벨라디아는 혓바닥으로 [살육본능]을 채우고자 레이디의 소양을 열심히 익힌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귀족 사회에서 허용되는 [교양 있는 싸움법]을 익힌 셈이다.
"하하하!"
덕분에 항상 수심이 가득하던 철퇴백작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나의 행동으로 얼굴이 밝아진 사람을 보니까 기분이 좋다.
"선물을 받아줘서 고맙소. 텔로리안 선생."
"저야말로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텁.
철퇴백작이 나의 양손을 붙잡았다.
"······백작 각하?"
"······진심으로 고맙소."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나도 백작의 의무에 대해선 충분히 알고 있소. 헤링턴 백작은 에스실의 국왕에게만 고개를 숙여야하는 고위 영주지."
내가 알던 철퇴백작은 왕에게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사내다. 하지만 세계선이 변화하면서 철퇴백작도 달라진 모양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딸의 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진심으로 고맙소. 텔로리안 선생. 죽어서도 결코 당신이 베풀어주었던 은혜를 잊지 않겠소."
······울먹이는 백작의 모습에 나도 자극을 받았다. 달라진 사람은 철퇴백작만이 아닌 모양이다. 현대인의 도덕으론 용납하지 못할 사람에게도 측은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걸로 헤링턴 가문의 궁정마법사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군. 이제부턴 백작을 움직여 하트랜드의 정세를 재편할 수 있겠어.'
문제는 닥쳐오는 여름이었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을 테니까.
4. 네번째 연구 - 가뭄(2)
백작(Count)은 드높은 지위다. 대륙을 움직이기엔 부족해도 일국을 움직이기엔 충분하므로 권세가로 불리기엔 부족함이 없다.
'권세가의 주변에는 온갖 군상이 모여서 총애를 얻고자 경쟁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철퇴백작의 가신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수십 년을 봉사해도 얻지 못한 백작의 절대적인 총애를, 영지에 도착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외지인이 얻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백작이 주최하는 자문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가신들과 굳이 알력다툼을 벌여야할 필요성이 없으니까.'
권력은 연구자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는 자원일 뿐이다. 어차피 마법사는 레벨이 오르면 홀로 군단을 상대할 수 있으니, 군단을 부리는 권력에 집착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궁중마법사님!"
"텔로리안 선생!"
"회색탑의 현자시여!"
"""부디 가뭄에 대한 해결책을 주십시오!"""
한데 백작의 자문단이 먼저 마탑으로 찾아와서 빳빳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영지를 부강하게 만들 방법은 알아도 자연재해에 대처할 방법은 몰랐으니까.
"그래서 선생에겐 방법이 있는 것이오?"
"있습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듭니다."
"가뭄이 비용을 따질만한 사건은 아니지."
덕분에 나도 백작의 자문회에 입성했다. 정략싸움을 벌였다면 진즉에 참석했겠으나, 필요하지도 않은 원한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전권을 맡기겠네. 텔로리안 선생."
"알겠습니다."
반대는 없었다. 마법을 싫어하는 태양신의 성직자들이 반대했으나 다른 자문회원들이 적절히 포섭했다. 얼마간의 향응이 오갔을 테지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마법으로 비를 내리실 겁니까?"
"그건 효율적인 예산 배분이 아니오."
기후를 통제하는 [컨트롤 웨더]는 6위계 주문이다. 14레벨에 시전하려면 다층적인 마법진과 희귀한 촉매들을 사용해야한다.
만일 엄청난 비용을 들여 주문을 시전해도 지속시간이 하루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마법으로 비를 내려도 응급처치에 불과할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물을 팔 것이오."
"·········?"
고작?
그런 걸로 해결되면 마법사를 부르지 않았지.
"저곳에."
"·········흠?"
텔로리안은 헤링턴 거성의 뒤편에 위치한 바위산을 가리켰다. 트롤들만 살아가고 있는 척박하고 험준한 바위산.
"[조사] 주문을 시전해보니 바위산의 지하에 넓은 대수층이 발견되었소. 첸차크 고블린들이 신성한 호수로 숭배했을만큼 수질이 청정하오. 게다가 지반이 석회암으로 구성되어서 투수성도 높더군. 송수로를 짓기에 적합하오."
·········
뭐라는 거지?
"바위산에서 지하호수를 발견했소. 송수로를 지을 것이오."
[지식(자연)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5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14점]
"아하! 이해가 되는구려!"
"오오! 정말 현명한 방안이오!"
그제야 가신들은 박수를 치면서 나의 지혜를 칭송했다. 여전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보이지만······
"질문이 있습니다."
그때.
재무관이 손을 들었다.
"궁정마법사님의 말씀대로면 지하터널과 각지의 마을을 송수로로 연결하는 대공사가 필요한데, 우리 영지에는 그런 공사를 수행할만한 자원이나 인력도 없지 않습니까?"
상식적인 조언이었다. 현대 기술로도 쉽지 않을 공사를 중세랜드의 기술 수준으로 해결하려면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마법사가 있지."
[5위계, 비전 주문]
[아케인 익스플로전(Arcane Explosion)]
[파괴의 빛이여!]
콰아앙!
텔로리안의 마법지팡이가 푸른빛을 발할 때마다 새하얀 섬광이 발생했다. 마법사의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에선 푸른 불꽃이 용솟음친다.
"세, 세상에······"
"절벽이 뚫리고 있어?!"
"태양신 맙소사. 주문의 화력이 무슨······"
5위계 주문. 백작령의 표준적인 궁정마법사라면 마법진의 보조를 받아도 2,3번이 한계인 고위 주문이다. 하지만 텔로리안은 10번을 연속으로 시전해도 전신이 땀에 젖을 뿐이었다.
"벨라디아."
"네. 스승님."
"마력의 운용을 유심히 봐두도록."
"네!"
10번의 시전이 끝나면 마나포션을 물처럼 들이켜고 발파 작업을 이어갔다. 텔로리안의 밤낮을 가리지 않은 마법주문으로, 사흘도 되지 않아서 지하호수가 외부에 개방되었다.
[건방진 필멸자들이 감히 성스러운 호수를 침범했군!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외부인들의 침입에 지하호수에 잠들었던 물의 정령이 깨어났다. 격노한 고대정령은 히드라의 형상을 취해서······
"이그니스!"
[3위계, 화염 주문]
[파이어볼(Fireball)]
[만물을 잿더미로!]
······불타죽었다. 텔로리안이 전력으로 생성해낸 화염구는 지옥의 업화만큼 뜨거웠으니까.
[고대호수의 정령(20레벨, 우두머리) 처치!]
[경험치 +30]
[전승포인트 3점]
[15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17점]
"힘들었군."
"우와············"
"고, 고생하셨소. 텔로리안 선생······"
벨라디아는 남몰래 만지던 레이피어를 허리춤에 수납했다. 스승님이 정령과 싸우는 순간을 틈타서 죽이고 싶었는데, 역시 무리였다.
'텔로리안 선생이 어째서 우리 헤링턴 가문을 찾아왔지? 이런 실력이면 제국 황실에도 지원해볼만한 수준인데······'
철퇴백작은 텔로리안의 진의를 의심했으며.
'······다들 보았나?'
'······봤네. 마법을 쉬지도 않고 쓰더군.'
'······심지어 영창도 생략하던데?'
무한한 마나.
무영창 주문.
전지한 지식.
'······정체를 숨긴 대마법사인가?'
'아니면 드래곤의 변신일지도?'
'······그것도 말이 되는군.'
백작의 가신단은 더이상 텔로리안을 질투하지 않았다. 대신 거리감은 이전보다 더욱 뚜렷해졌다. 이제 백작의 가신단에게 텔로리안은 인외의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저······"
텔로리안이 발파 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데, 재무관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궁정마법사님께서 이렇게 대단하신 분인지는 몰랐습니다. 위대한 마법사를 알아보지 못한 부족한 식견을 사죄드리며······"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면 관대하게 봐달란 이야기였다. 하지만 재무관이 기분을 상하게 만든 기억은 없었다. 급부상한 신참에 대한 견제? 그건 어느 조직에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소백작이 아니오."
"·········예?"
"기분이 나쁘다고 사람을 죽이는 기벽은 없다는 말이오. 그러니 너무 긴장하진 마시오."
나는 재무관 우르반과 말문을 트면서 많은 사담을 나누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같은 서부 출신이고 지적인 능력으로 등용됐으며, 같은 20대였다.
"자넨 공부를 어디서 했나?"
"임페리얼 아카데미를 나왔네."
"대륙 최고의 명문이로군."
"나는 그보다 자네의 스승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군. 이토록 강력하고 박식한 마법사를 길러낸 분이니 분명 이름이 높으실 텐데······"
······적당히 얼버무렸다. 13개 국가에서 반역혐의로 수배중인 분의 이름을 말해 좋을 일은 없겠지. 누명도 아닐 것이다. 스승님은 어디에서나 적을 만들어내는 말재주가 있으시니까.
"앞으로 공사는 어떻게 진행하겠나?"
"?"
"사흘 만에 산악터널을 뚫어낸 업적은 경이롭지만 영지를 뒤덮는 송수로 공사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잖나."
송수로 건설은 대단히 복잡한 공사다. 우선 공학자들이 도면을 설계하고 석공들이 바위를 깎아 석재를 만들어야한다. 완성된 석재를 공사현장까지 자재를 옮기는 작업도 일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
수많은 벽돌과 통나무, 회반죽을 조합해 완벽한 건축물로 완성하는 공사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수천의 인부들이 필요하고 인부을 지도할 현장감독들도 필요하다.
"결국 전문가 집단이 문제란 소리잖나?"
"바로 그걸세. 농사꾼과 기사들을 모집해둔다고 건설자와 공학자들이 되진 못해. 제국 공병대처럼 전문적인 건설자 집단이 필요하지."
끄덕.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인간의 노동력에 의존한다면 그럴걸세."
"·········?"
"자네도 알다시피 인간의 육신은 작고 연약하네. 그래서 석재를 다루는데 전문적인 교육이 필요한 것이지."
하지만 시네어 행성엔 석재를 진흙처럼 다룰 수 있는 종족이 많다. 굳이 연약한 인간을 건설자로 부려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들 안녕하십니까."
때마침 동굴의 어둠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동굴에 발걸음 소리가 퍼지면서, 허리가 구부정한 거인들이 나타난다.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인간의 군주이시여."
"·········간만이로군."
새로이 나타난 불청객들은 분명히 몬스터라고 지칭되는 존재들이었다. 얼굴은 흉측하고 피부는 단단한 거인들. 바위트롤들은 인간과 여러 방식으로······충돌을 겪어온 종족들이다.
"자네의 이름이······"
"올골두골로라고 하옵니다. 백작 각하."
"······그래. 여족장 올골두골로."
철퇴백작은 더이상 트롤과의 협력을 거부하지 않았다. 종적인 편견에 갇혀있을 상황이 아님을 인지한 것이다.
"흐음. 너희에게 궁금한 부분이 있어."
"뭐든 말씀하십시오. 소백작."
그때.
벨라디아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너희처럼 추하게 생긴 생물들이 명줄을 이어가는 이유가 뭐냐? 내가 너희처럼 생겼다면 당장 불길에 몸을 던져 자살했을 텐데······"
외교적 대참사였다.
모두가 말문을 잊을만큼.
"딸아이의 무례를 대신 사죄하리다."
"사죄요? 추한거 맞잖──"
"닥치지 않으면 발가벗겨 채찍을 때리겠다!"
"죄송해요."
벨라디아의 청녹색 눈동자에서 불꽃이 번득였다. 하지만 스승이 싸늘히 노려보자 벨라디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외교적 결례인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트롤들은 너무 추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흐음."
모두가.
올골두골로를 바라봤다.
"군주님께서 해주신 사과는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군주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도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철퇴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백작이 여족장을 모욕했다. 전쟁이 발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쓴소리로 넘어가주면 대단히 고마운 일이다.
"저도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제안하건데 자녀분에게 지금보다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쪽이 어떨까합니다."
······어?
"엄격한 훈육도 훈육에 필요한 부분이지만, 엄격한 가르침만 고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자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다양하니까요."
신랄한 모욕이 돌아와도 감내할 생각이었는데, 이토록 따스한 대답이?
"······고맙소. 여족장 올골두골로."
"훈육법에 대한 의견교환은 다음 기회에 이어가지요. 지금은 송수로 공사를 논하자면······"
여족장 올골두골로는 협상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그녀는 벨라디아의 모욕에도 조금의 앙심도 품지 않았다. 어린 생명이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보았느냐? 벨라디아."
"·········"
"트롤조차 사람처럼 변할 수 있다."
최종협상이 체결되었다. 내용은 여족장 올골두골로는 공사인력을 제공하고 철퇴백작은 바위산을 영지로 내준다. 텔로리안은 중간에서 통역만 해주면 되었다. 놀랍도록 수월했다.
[연구단서 획득!]
[야수를 사람으로(2/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5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18점]
"저기. 텔로리안 선생."
"말씀하십시오. 백작 각하."
"내게 트롤어를 가르쳐주시오."
흠?
"트롤 족장이 공용어에 능숙합니다."
"올골두골로의 공용어 솜씨는 대단히 훌륭하지! 하지만 동맹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지도자들이 서로의 언어를 알아야하지 않겠소? 허허허."
······뭐지?
나도 처음 보는 이벤트인데?
4. 네번째 연구 - 가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