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막간(3) - 새로운 시대
"나쁘지 않은데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벨라디아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이 결혼하는게 아니므로 상관이 없다는 태도.
"저도 아니고 제 아들이잖아요?"
"이건 받아들이면 안되는 제안이다."
하지만.
텔로리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왕가에 오크의 핏줄이 섞이면 권위가 추락할 것이다. 헤링턴 왕조는 끝까지 인간 왕조로 남아야한다. 하프오크 왕조가 아니라."
자신은 모든 형태의 사랑을 존중했다. 사랑에 제약이 있어서는 아니되었다. 특히 기존의 한계를 벗어나서 재생의 시대를 개막하려면 더더욱.
하지만.
왕실결혼은 이야기가 다르다.
"개인의 사랑과 왕족의 결혼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전자는 개인의 자유가 달린 문제이지만, 후자는 국가와 왕조의 명운이 달린 문제다. 보수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왕족의 삶은 개인적인 인생보단 사회적인 이상향에 가깝다. 옳고 그름이 무엇이고 어떠한 가치를 지향해야하는지 정리해주는······
"그러니 더욱 이번 결혼을 밀어붙여야죠."
"어떤 계산인지 들어보고싶구나."
"제가 하이엘프 왕자와 결혼한다고 발표한다면, 그때도 사람들이 반발심을 느낄까요?"
적잖은 귀족들은 군주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백성들은 엘프족의 아름다운 외양을 보면서 환호하는 이들이 더욱 많으리라.
"경우가 다르지 않느냐."
"엘프든 오크든 이종족일뿐이에요."
벨라디아도 단호하게 말했다.
"어차피 이종족을 왕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계획이라면,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어선 안되죠. 아니면 제국처럼 모두 노예로 삼거나."
············
"너무 극단적인 방안이 아니냐?"
"이번 제안을 거절하면 오크들은 왕국과의 협력에 회의감을 품을겁니다. 지금처럼 한결같은 태도로 우리를 도와주진 않을 거예요."
에스실과 사막오크들의 관계는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선대의 원한은 여전했지만, 양측의 지도자들은 원한을 세월에 묻으라고 강요했다. 그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지만······새로운 세대는 입장을 달리했다.
"사막오크들은 훌륭한 전사들이자 영리한 상인들이에요. 반면에 우리는 그들에게 안정적인 수입과 앞선 문명을 제공할 수 있죠."
하지만.
여기서 결혼제안을 거부한다면?
"오크들은 진정한 동맹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고 느낄 겁니다. 사막오크들은 누군가의 신하로 만족하는 이들은 아니니까······자신들을 보다 존중해줄 파트너를 찾겠죠."
벨라디아가 왕실결혼을 거부하면, 사막오크들은 이종족만의 세력을 결집하는 미래를 구상할 것이다. 벨칸의 시대에는 그래도 괜찮겠지만, 미래에는 반드시 충돌이 벌어지겠지.
그런 계산이었다.
적어도 벨라디아는.
"그러니 지금 그들을 붙들어두는게 나아요."
"귀족도 백성들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오크들도 저와의 결혼이 아니라 후계자와의 결혼을 제안한거죠. 제가 지금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시간을 주려고요."
이미 벨라디아의 권력은 절대왕권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귀족들은 성채를 빼앗겼고 교회도 특권을 잃었다. 왕가에 대적할 세력이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
"제가 지닌 왕권은 반쪽짜리입니다."
그러나 벨라디아에겐.
그것도 부족했다.
"여론의 눈치를 보아야하니까요."
벨라디아는 여론이나 관습을 무시하는 힘을 원했다. 절대왕권을 넘어서, 고대의 신왕들처럼 신적인 권력을 휘두르길 원한 것이다.
"백성은 군주가 내린 결정에 찬성조차 표해서는 안됩니다. 그저 명령이 내려오면 복종하면 됩니다. 그게 제가 정한 왕도입니다."
벨라디아의 선언이 끝나자 텔로리안의 눈동자에 미래가 보였다. 타오르는 황좌에서 철저히 복종하는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강대한 폭군. 신민들은 그녀를 사랑하는만큼 두려워할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되리라."
"말리지 않으시나요?"
"나는 네게 지식과 지혜를 전수했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순전히 네게 달린 일이다."
폭군이든 성군이든, 백성들을 지키고 배불릴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당면한 과제는 악마들의 침공과 그로 인한 멸망의 시작이니.
"제가 악마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잖아요?"
피식.
"너는 누군가의 밑에서 일할 사람이 못된다."
"············"
"동시에 악마들이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여겨주리라고 생각할만큼 어리석지도 않지. 그러므로 네가 어떠한 선택을 내리든, 멸망을 막는다는 나의 목적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벨라디아는 사막오크들에게 계승자와의 약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다. 혈통을 섞을 만큼 빼어난 자질을 지닌 상대를 데려와야한다는.
"짐은 헤링턴 왕조에 뒤섞일 핏줄이 어떠한 종족인지는 신경쓰지 않소. 중요한 사실은 충분히 강인하고 영리한가에 불과하오."
오크공주는 답변에 만족해 무릎을 꿇었고 벨라디아도 막대한 선물로 보답했다. 둘은 나이가 비슷한데다, 성정도 비슷해서 금방 친구가 되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철퇴공이 불만을 표했다.
"형님이 불만을 표하시는건 말이 됩니까?"
"············"
"또한 놀라실건 그뿐만이 아닙니다."
벨라디아는 후계자를 장남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후계자 선정에 성별도 태어난 순서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오직 자신의 기호와 강인함만 고려할 것이다.
"갈수록 법도가 땅에 떨어지는군······"
"법도란 시간이 지나며 변하는 것입니다."
한때는 인간 사이에도 피부색이 다르거나 계급이 다르면 혼인을 맺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경계는 허물어졌다. 다른 경계들도 마찬가지가 되겠지.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
철퇴공이 투덜거렸다.
"수세기를 이어온 위대한 가문들이 본거지에서 쫓겨나고, 광명정대한 태양신을 모시던 사제들이 세금을 내려고 장사를 해야하네. 정말로 이게 옳은 변화가 맞는가······?"
텔로리안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철퇴공이 살았던 세상은 끝나가는 중이었다. 그것을 굳이 지적해서, 철퇴공을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변명을 해보게. 아우님."
"저길 보시죠."
"·········"
봄을 맞이한 젊은이들은 한껏 축제를 즐기는 중이었다. 여인들은 과감하게 속살을 드러냈고 사내들도 화장을 했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서로에게 진하게 입을 맞추었고, 때때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몸을 섞었다.
"말세로군."
"하지만 모두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태양신 신앙이 국교의 지위를 박탈당하자, 사람들의 일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더이상 혼전성관계는 불법이 아니었고, 돈놀이도 합법화되었다. 학자들은 연구주제를 자유롭게 선정하고 발표할 수 있었다.
"벨라디아 여왕 폐하의 치세를 찬양하라!"
"폐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노라!"
바드들은 마음껏 반항적인 노래를 불렀고, 화가와 조각가들은 인간의 나신을 그려내고 있었다. 늙은이들은 하나같이 불만을 표하고 있었지만······젊은이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저는 이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이 모두 눈을 찌푸리고 있는데?"
로드릭이 불만을 표했다.
"우리는 자네들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본 사람들이야. 우리가 싫어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네. 이렇게 모든 기준이 급격히 무너지면 머잖아 무질서가 찾아올걸세."
텔로리안은 로드릭을 설득하길 포기했다. 하지만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젊은이와 늙은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사회는 없다. 언제나 한쪽은 불만이야.'
또한 하나를 택해야한다면 젊은이를 만족시키는 방향이 맞았다. 노인들이 만족하는 사회는 더이상의 발전을 기대하지 못하는 사회다.
"발전의 속도를 늦추면 안되겠나?"
"그래도 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
로드릭은 텔로리안의 논리를 이해하진 못함에도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아우님이 말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때때론 권위에 대한 추종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방안이다.
'그럼에도 슬퍼지는군.'
왕도를 상징하던 대성당이 철거되고 있었고, 대성당의 지하실에 잠들었던 전대국왕들의 묘소들도 외진 장소로 이장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잊게 만들고자.
'나는 어째서 기뻐하지 못하는 거지?'
자신의 삶은 투쟁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형제들과 싸우고 동료들과 경쟁했으며, 교회와 대립하고 아르실 왕가와 사투를 벌였다.
'모든 싸움을 승리로 끝냈다면.'
형제들은 죽었고 동료들은 딸아이에게 복종한다. 서슬퍼런 교회조차 대결을 포기했고 아르실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통쾌해야할 시점이 아니던가?'
그때, 왕궁에서 흩날리는 헤링턴 왕조의 깃발이 보였다. 막강한 철퇴를 쥐고 있는 무쇠건틀릿. 그것은 벨라디아의 철권을 상징한다.
'·········'
아.
깨달았다.
기뻐하지 못하는 까닭을.
'우리 가문도 저물겠구나.'
자신의 살아생전은 아닐 것이다. 딸아이의 생전에도 아니겠지. 딸아이가 직접 가르칠 손자의 시대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손자의 손자가 제위에 오를 쯤에는, 헤링턴의 후손들도 야성적인 강인함을 잃어버릴 것이다.
'선조들이 잊혀질만큼 시간이 흐르면 소년왕처럼 모자란 후손이 왕위에 오를테지.'
그때는 자신도 벨라디아도 후손들을 지켜주지 못하리라. 흩날리는 먼지가 되었을테니.
"참으로 허망하지 않은가?"
"필멸의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허허······"
철퇴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사후세계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죽으면 끝일까?
'인세는 지나가는 것이었으면 좋겠군.'
다시 만나고 싶었다.
먼저 떠났던 에일라를.
* * *
왕도의 야지에 웅장한 원형경기장이 마련되었다. 그건 트롤건축가가 감독한 최초의 건축물이자, 에스실 문화의 걸작으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모두 고생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여왕 폐하."
"이번 공로를 인정해 너희에게 세금을 납부할 권리를 인정해주마."
이에 감격한 계몽트롤들은 벨라디아에게 무릎을 꿇었고, 벨라디아는 계몽트롤들의 충성맹세를 수용해서 그들을 신민으로 받아들였다.
"·········"
"·········"
하지만 어떤 신하도 감히 의문을 제시하지 못했고, 단지 고개를 조아리며 왕궁에 나타난 트롤근위병들의 모습에 익숙해져야했다.
"구혼자들이 놀라겠구나."
"그정도 배짱도 없으면 돌아가야죠."
스무살 생일을 맞이한 벨라디아는 아름다움의 정점에 이르렀고, 황금색의 티아라와 검은색 가운이 위엄을 더했다. 화장은 강인함을 드러내면서, 욕망을 자극할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오늘의 여왕 폐하는 분명히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저를 차지할 기회를 주는데 말이죠."
끼이익!
근위병이 알현실의 대문을 열어보이자, 벨라디아는 전장에 나서는 심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된 시녀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전사여왕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꼈다.
'············'
64명.
대륙에서 제일 뛰어난 무예를 갖춘 64명의 영주들이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들은 욕망에 불타는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핥고 있었다. 누군가는 소름이 끼칠 상황이었지만······
'좋군.'
벨라디아는 타고난 정복자였다.
'모두 내가 지닐만한 자격을 지녔어.'
저들을 모조리 손에 넣으리라.
당장은 한명만 잡아먹을 것이지만.
18. 열여덟 번째연구 : 운명의 마상시합(1)
왕궁에는 대륙전역에서 몰려든 구혼자들로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가장 신분이 낮은 구혼자도 백작은 됐던 까닭에, 수행원들을 줄줄이 데리고 찾아온 까닭이었다.
"우린 스베리예 대공님을 모시는 이들이다!"
"대공? 정말 비천한 신분이로군!"
덕분에 구혼자들이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듯이, 수행원들도 주인들의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대표적인 방법은 작위와 혈통이었다.
"우린 에르보니아의 왕세자 전하를 섬긴다!"
"에르보니아? 악마들이랑 교접한 잡종들?"
"!!!"
키득키득!
스베리예 대공의 수행원들이 맘껏 비웃었다.
"왜? 우리가 틀린 말을 했나?"
"느그 공주는 지옥에 팔려갔잖아?"
"공주는 무슨 공주야. 지옥제왕의 창녀지."
츠릉!
"감히 공주님을 모독하다니!"
"죽여라! 놈들에게 본떼를 보여라!"
"우와아아아아아아──!"
"태양신의 이름으로!"
영주들은 오만하고 거친 사내들이었다. 그들을 모시는 수행원들도 그만큼 흉포한 전사들이 많았기에, 그들의 자존심 대결은 순식간에 유혈투쟁으로 번졌다. 덕분에 첫날부터 열둘이 사망하고 스물이 쓰러지는 결과가 나왔다.
"호오."
"면목 없습니다. 여왕 폐하."
"무례를 사죄드리오. 벨라디아 여왕."
덕분에 피로연을 즐기던 스베리예 대공과 에르보니아의 왕세자는 벨라디아에게 소환되었다. 그들은 모두 여왕의 손님들이었다. 여왕의 손님을 해함은, 여왕에 대한 모독이었고.
"내가 앞으로 수행원들을 단단히 교육시키겠소. 북부 야만인들이 뭐라고 도발하든 말도 섞지 말았어야하는데······본인의 불찰이오."
구혼자들은 고향에선 왕처럼 생활하던 사람들이거나, 실제로 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들이었다. 심지어 왕세자나 일국의 국왕이 직접 참가한 경우도 있었다.
"괜찮습니다. 짐은 그대들을 이해해요."
벨라디아는 애석한 표정을 연기했지만 입가에서는 도저히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칼부림소리와 끊임없는 단말마······죽어가는 이들의 비명······그것이 벨라디아를 기분좋게 만들었다.
"공들께선 비길데가 없는 역전의 전사들이시죠. 그러니 공들께서 부리는 수행원들도 만만한 이들이겠어요? 둘을 붙여놨으니 싸움이 벌어지는건 피치 못하는 일이지요."
벨라디아는 잘려나간 머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바닥에 번져가는 붉은색과 꿈틀거리는 혈관······최후의 순간에 지어보이던 무력한 표정······하나하나가 너무나 달콤했다.
"그런 의미에서."
씨익.
"두분의 대전을 앞당기는건 어떨까요?"
""!!!""
"어차피 두분께선 64강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어있는데······오늘 여기서 끝장을 보시죠?"
낼름.
벨라디아가 입가를 핥았다.
"어떠십니까?"
"·········"
"에르보니아인들과 스베리예인들 가운데 누가 옳은지 판단할 기회라고 생각하는데요······"
벨라디아의 눈동자에 피에 대한 갈망이 서렸고, 덕분에 대공과 왕세자는 여왕의 진정한 면모를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들이 상상하던 가녀리고 현명한 처녀여왕이 아니었다.
"그러지."
덕분에.
왕세자는 더욱 벨라디아를 갈망하게 되었고.
"알겠습니다."
스베리예 대공은 벨라디아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떠나고 싶었지만,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결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투장이 준비되었다는군요."
"잘게 토막내주마. 북부촌놈."
"·········"
완전무장을 장비한 대공과 왕세자가 결투장에 들어섰다. 스베리예 공작은 커다란 체구의 험상궃은 북부인이었고, 에르보니아의 왕세자는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운 동부인이었다.
"리안칼을 닮았군."
"이제서야 여왕의 결혼식답구나."
텔로리안은 결투장에 입장하는 사내들을 보면서 측은함을 느꼈다. 그들 가운데 한명은 떠오르는 해를 보지 못할게 분명했으니까.
"결혼식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고하는 행사다. 그렇다면 당연히 죽음을 통해서 축복해야지. 그것이 삶과 죽음의 순환에 걸맞다."
아엘타나르는 오랜만에 인간의 모습으로 결혼식에 참가했다. 그녀의 공식적인 신분은 뱀신교의 수석사제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길거리의 점쟁이로 알고 있었다.
"누가 이길거라고 전망하시오?"
"북부대공이 힘과 체력에선 압도한다."
결투의 초반은 북부대공이 우세했다.
"하지만 기교와 기민함에선 잡종데빌이 앞선다. 무엇보다 잡종데빌에겐 악마의 폭력성이 내재되었지. 그걸 터뜨리면······"
[5위계, 지옥의 로어]
[헬브링거 어썰트(Hellbringer Assault)]
[지옥의 분노를 보아라! 하찮은 미물아!]
그러나 지옥마력으로 빚어진 참격이 뒤따르자, 북부대공은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고깃덩이로 변했다. 에르보니아의 왕세자는 패자를 비웃으면서 북부대공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에 분노한 북부인들이 잇달아서 결투를 신청했지만, 에르보니아의 왕세자는 연전을 치름에도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자비······자비를······"
"자비?"
푹찍!
항복한 상대의 정수리를 도끼로 찍는다.
"자비란 약자의 덕목이다!"
"워어."
불필요한 잔인함에 왕공들이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렇기에 더이상의 도전은 없었다. 그들은 에르보니아의 위상을 재평가했다. 여전히 그들은 사악했다. 그만큼 두려운 상대였고.
"한데······이걸 대놓고 드러내도 되느냐?"
아엘타나르가 반문했다.
"요즘 인간들은 이를 야만적으로 볼텐데."
"눈치가 빠른 구혼자들은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겠지. 벨라디아의 묵인이 없다면 이렇게 유혈낭자한 결투가 벌어지진 못할테니까."
하지만 지금와서는 구혼을 철회할 방도가 없었다. 대륙의 모든 왕공이 모여서 용맹을 겨루는 자리인데, 여기서 구혼을 철회하는건 죽음이 두려워서 달아난다는 말과 같았다.
"또한 대부분은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할거요. 어차피 실력에 자신이 없는 이들은 아예 출전하지도 않았을테니까."
벨라디아의 혼인은 단순히 대륙최고의 미녀를 둘러싼 다툼이 아니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에스실의 통치권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이는 달리 말해서 중부를 지배할 패권을 뜻했다.
"북부의 극장이나 제국의 노예시장을 뒤져보면, 벨라디아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몇명은 나올거요. 하지만 그녀들에겐 왕관이 없지."
오랜 관습에 따르면 여성군주와 혼인한 남성은 통치권을 이양받는다. 중세랜드는 남자가 바깥일을 전담한다고 믿어지는 땅이었으니까.
즉.
이들은 권력을 쫓아왔다.
미녀는 승리에 뒤따르는 부산물이었고.
"네 제자가 그런 관습을 따를리가?"
"하지만 욕망에 눈이 멀면 판단력을 상실해버리오. 그러므로 벨라디아의 아름다움은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무기인 셈이지."
텔로리안은 벨라디아가 설계해둔 함정이 뻔히보였다. 그녀는 특별히 눈여겨둔 먹잇감들을 소굴로 끌어들였고, 그들이 서로를 경쟁자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완벽한 매복이었다.
"이번 토너먼트의 결과로 대륙의 운명이 변할 것이오. 거물들이 많이 걸려들었으니까."
[신규연구: 운명의 토너먼트]
[연구주제: 거물들을 포섭하십시오!]
[연구단서 0/4]
[연구보상: 메인시나리오의 변화]
[부가보상: 거물들과의 인연]
'이번 토너먼트는 원작의 세계선을 통째로 비트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메인시나리오가 시작되는 세계관부터 변해버리니까.'
지금까지 저지해온 [삼두룡의 강림]은 메인시나리오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메인시나리오의 세계관을 설정하는 [세계관]이었을 뿐이다.
'이종족의 침공과 언데드역병의 창궐, 사교도들의 궐기로 초토화된 중부에 제국까지 침공해오지. 그게 메인시나리오의 시작이다.'
일말의 희망도 찾아보지 못하는 절망적인 중부에서, 주인공은 악당들을 무찌르고 영웅들을 규합해서 다가오는 멸망에 맞선다······까지가 메인 시나리오에서 강조되던 시간선이다.
'하지만 전제가 바뀌었다.'
본래의 세계선에서 죽었을 인물들이 살아남아서 아군이 되었다.
'로드릭 헤링턴을 비롯한 에스실의 강력한 귀족들은, 본래 벨칸에게 모두 살해당했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를 위해서 일하지.'
또한 멸망했을 에스실 왕국이 멀쩡히 살아남아서, 오히려 중부를 지키면서 번영하는 중이다. 멸망의 전제부터 막아낸 것이다.
'원작의 벨라디아는 B급 성능의 악성향 동료에 불과했지. 한데 악성향치고도 너무 잔인하고 충동적이라서, 악성향 플레이에도 어지간하면 기용하지않는 애물단지.'
하지만 작금의 벨라디아는 훌륭히(?) 사회화되었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칭송받는 방식으로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강함만 따져봐도 원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원작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아군들도 생겨났다. 수도승 올골두골로, 드림시어 엘렌스트라, 금빛왕자 테사리안, 알다네스 골드시커, 미르칼 그림하트······'
세계지도에 자신이 제작한 장기말들을 올려두었다. 인물들을 정교히 묘사해둔 미니어쳐.
'하지만 제일 커다란 성과들은 여기 있지.'
성검을 휘두르는 리안칼.
산성숨결을 내뿜는 아엘타나르.
번개를 불러내는 벨칸.
'원작의 세계선에선 주요한 악역으로 등장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세계선에선 제일 강력한 동료들로 활약해주는 중이지.'
셋.
필멸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자들.
자신이 보유한 제일 강력한 카드들.
'앞으로의 대전략은 이들을 중심으로 수립해야한다. 시나리오 후반부에 벌어질 초월자들과의 싸움까지 따라올 수 있는 자들이니까.'
일반적인 동료들은 무대가 대륙으로 확장되는 중반(레벨 50이상)부턴 효율이 떨어지다, 초월자들과 정면대결하는 후반부(레벨 75)부턴 응원단에 가까워졌다. 드래곤X에서 지구인 동료들이 맞이하는 운명이랄까······
'올골두골로와 테사리안, 벨라디아까진 초월자의 경지에 이를 잠재력이 있다. 그러니 이들을 가르칠때는 각별히 신경을 써줘야겠군.'
장기말마다 장점과 잠재력을 확실히 체크해둔다. 후반까지 유용할 장기말, 중반부턴 벤치멤버로 돌려야할 장기말을 구분해서.
'평범한 멤버들도 후반까지 활용할 방법도 생각해봐야겠군. 있으면 써먹어야하니까······'
어쨌든.
운명의 마상시합은 종말을 막아내는 대전략을 설정할 기점이다. 머잖아 시작될 메인시나리오의 배경 자체를 형성하게 되니까.
'주인공이 불리한 역경에 도전해 멸망에 맞설 이유는 없지. 처음부터 역경에 처하지 않는 구도를 만들면 그만이니까.'
원작의 주인공은 수많은 악의 세력에 맞서는 영웅의 일대기를 그린다. 그렇기에 선의 세력은 항상 열세에 놓이고, 악마들은 유리한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약자들을 유린한다.
"주군!"
"······또다시 그대인가?"
차분히 장기판을 정리하는데, 검은폭군이 금빛왕자와 함께 찾아왔다. 그들은 이국적인 미를 뽐내는 늠름하고 아름다운 왕족들이었다.
"어째서 나의 장기말은 없는가?!"
"그대는 봉신이지 장기말이 아니잖나."
어깨를 으쓱인다.
"장기말이 되어봐야 조종당할 뿐이다만."
"그렇다면 나도 조종해다오!"
넙죽!
검은폭군이 고개를 숙였다.
"평범한 인간도 주군의 조종을 받아서 강력한 흑마법사가 되었는데, 내가 주군의 조종을 받으면 얼마나 강해질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놈의 드래곤은 자립심도 없다는 말인가? 용이면 알아서 살아갈 것이지!
"그래서 진짜 용건이?"
"아참."
덜컹.
문이 열리며 소년기사가 들어왔다.
"알현을 청하는 녀석이 있어서 데려왔다."
"네가 소문의 잿빛현자로군."
소년기사는 벨라디아의 구혼자였는데, 작위가 백작에 불과하고 나이도 연소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진 못했다.
"너희는 본인을 한미한 시골백작으로 알고 있겠지. 하지만 본인의 진정한 정체는 백작따위가 아니다."
씨익.
15살의 소년기사가 자신만만히 웃어보였다.
"짐의 정체는 칼마르 왕국을 다스리는 로다카르 4세! 부계론 거인왕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모계론 엘프여왕의 혈통을 이어받았지!"
소년은 오만한 콧대를 치켜세우며 좌중의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뱀신을 섬긴다는 무명의 여사제, 궁정마법사로 일하는 무명의 소서리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인간 성기사. 모두 왕족은 커녕 귀족조차 아닌 평민들!
"본래 너희는 짐과 시선도 마주볼 수 없는 천민들이지만, 특별히 무릎을 꿇고 짐의 고귀함을 찬양할 영광을 기꺼운 마음으로 허락하겠다!"
자!
경배하라!
미천한 존재들아!
18. 열여덟번째 연구 - 운명의 마상시합(2)
각자간의 대화에 몰두하던 텔로리안의 동료들은, 소년기사의 용감무쌍한 외침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저마다 시선을 교환하면서, 무언의 질문을 던졌다.
'칼마르가 어디냐?'
'북부에서 힘 좀 쓰는 나라요.'
'얼마나 되었지?'
'건국은 오백년, 강대국은 백년.'
'근본없는 벼락부자로군.'
은빛뱀은 소년기사의 자신감을 갸륵히 봐주었다. 모름지기 왕이면 저정도 포부는 갖춰야한다는 입장이었으니까.
"다들 무엄하구나."
그럼에도 소년기사는 대단히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평민들이 예의범절이 없거니와, 왕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다니?
"국왕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대만은 예법을 아는구나."
하지만 텔로리안이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굽히자, 소년기사는 그제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훗날에 북부연합의 맹주로 성장할 인물이므로, 불필요한 모욕감을 주는 것보단 자존심을 접어주는게 나을 것이다.
"그대의 정중함을 보아서, 아랫것들의 교육에 미흡한 점은 넘어가주겠다."
소년기사는 그걸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스스로 어떤 입장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다. 폐급은 아니다.
'아직 어린 시절이라 실수를 저질러도 이상하진 않은데······소년왕 다일렌과는 다르군.'
원작의 로다카르는 북부 연합의 맹주로 등장하는 장군왕이었다. 이종족 연맹을 이끄는 벨칸, 제국을 이끄는 대원수 트로잔과 함께 3대 열강을 대표하는 지도자인 것이다.
"저를 찾아오신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랫것들을 물러주는게 어떤가?"
"방 안의 사람들은 제가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입니다. 기탄 없이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흐음.
소년기사는 찬찬히 일원들을 둘러봤다. 그들이 범상치않은 사람들임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지만······그럼에도 진정한 정체에 관해선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네가 신뢰한다면."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왕의 첫날밤을 네가 가져갔나?"
로다카르는 돌직구를 던졌다. 사춘기 소년의 말을 정제된 형태의 질문으로 바꾸보면, 여왕의 정절을 신뢰하는게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신하로서 언급할 사안이 아닙니다."
"현명한 자로다."
에스실에선 태양신 교회가 국교의 지위를 잃으며 성적인 엄숙함을 강조하는 문화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대륙에서 여성, 특히 고위층 여성들에겐 남편에 대한 정절과 헌신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정절에 대한 악소문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은 알고 있겠지. 너는 일부러 바드들을 고용해서 스스로에 대한 소문을 부풀릴만큼, 평판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니까.
로다카르가 잿빛현자에게 거만한 태도를 유지하는 까닭은, 잿빛현자에 관련된 풍문이 너무나 허황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옥제왕의 계략을 파훼하고 드래곤의 복종을 받아? 그건 현자의회의 대마법사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헛소문이라고 봐야지.'
즉.
로다카르가 바라보는 잿빛현자는 적당히 유능한 마법사였다. 일신의 마법보단 뛰어난 계략을 주무기로 삼는 위험한 계략가.
"제게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여왕의 정절에 대한 헛소문을 가라앉힐 방안을 찾아라. 이건 명령이다."
명령?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폐하의 신하가 아닙니다."
"토너먼트가 끝날 때까진 그렇겠지."
소년기사는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있게 웃어보였다. 그는 수염조차 자라지 않은 연소한 나이에도, 풍채가 곰처럼 육중했다.
"하지만 토너먼트가 끝나면 짐은 여왕의 초야를 차지할 것이고, 그때부턴 에스실의 왕권도 짐에게 넘어올테지."
꿈도 야무지군······
"짐은 네게 왕실의 수석조언가라는 입지를 유지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대도 짐의 은혜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야지."
소년이 위엄을 차리려는 가상한 노력에 미소가 지어졌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왕들은 웃음을 종종 멸시로 이해했으니까.
"우선 미천한 주문쟁이의 부족한 재주를 높게 평가해주신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폐하께서 간파하신대로, 저는 말재주와 잔머리로 살아가는 이류마법사에 불과합니다."
······동료들이 일제히 자신을 노려보았다. 못되먹은 어른이, 사악한 의도로 어린이를 기만하려는 의도를 질타하듯이.
"제가 정말로 뛰어난 마법사였다면, 하루종일마탑에 박혀서 연구에만 전념하거나 마도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것입니다."
통념과 다르게 궁중마법사는 최고의 재능아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진정한 천재들은 세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단.
그건 일반적인 천재들의 이야기다.
"그러니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책을 마련하는데 집중하겠습니다. 헌데······미천한 주문쟁이가 위대한 왕께 청원을 올려도 될련지요?"
텔로리안의 극진한 태도에 소년기사는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엔 마법사임에도 훌륭히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태도는 정중하다 못해서 비굴하게 보일 정도.
'이상하군.'
텔로리안이 마법사로서 도달한 경지는 미상이지만, 어쨌든 개국공신에 버금가는 공적을 세웠음이 분명한 상황.
'이러한 지위의 신하는 다른 군주의 앞에서도 당당함을 지킨다. 그게 스스로 섬기는 군주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니까.'
한데.
이상할 정도로 몸을 낮춘다.
'함정에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켄타우로스들이 거짓퇴각으로 패배를 가장하듯이.'
로다카르는 군략에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소년. 10년만 지나도 벨칸과 맞수를 겨룰만한 명장으로 성장한다.
즉.
천부적인 직감이 있다.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
"······청원을 허락하겠다."
수상함을 감지한 순간부터 소년기사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상대가 복병을 숨겼을지도 모른다면, 이쪽도 공세를 늦춰야한다.
"토너먼트에서 기권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대단히 주제넘은 말이다.
왕족과 마법사로 본다면.
"만일 에스실과 칼마르가 결혼동맹으로 합쳐진다면, 그건 북부가 중부를 완전히 장악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메인시나리오의 발동트리거는 제국의 중부침공. 그건 주요국가들이 모조리 말려드는 대륙전쟁으로 변하고, 덕분에 간신히 억제되던 멸망트리거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그렇다면 제국이 전쟁을 선포할테지요."
"짐이 전쟁을 두려워해야한다고?!"
소년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짐은 북부의 왕이다! 위대한 칼마르를 대표하며, 북부 전체를 대표한다. 감히 제국이 짐에게 도전한다면, 놈들을 모두 죽을 것이다."
으드득!
소년이 이를 갈았다.
"폐하께서 제국을 두려워하실 까닭은 없습니다."
·········
분노가 조금은 누그러든다.
사춘기 소년은 단순하니까.
"그렇지만 터전이 전쟁터로 변모할 에스실인들의 입장은 다르겠지요. 그들은 두 분의 혼인으로 제국과의 전쟁에 말려드는 상황을 우려하는 중입니다. 그걸 아시기에 정체를 숨기고 오신것 아닙니까?"
·········
소년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식견에 대한 소문은 참이었군."
"또한 저는 특정한 왕가나 세력를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만의 목표가 있지요."
소년은 텔로리안의 차분한 태도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상대는 국왕을 대함에도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어쩌면 판세를 근본적으로 잘못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럼 헤링턴 왕조와는 어떤 관계지?"
"납득이 가능하실 전승과 납득이 불가능하실 전승이 있습니다. 어느 전승을 원하십니까?"
······로다카르의 천부적인 직감이 위험을 경고했다. 자신의 눈앞에는 위험천만한 상자가 있었고, 그것을 일단 개방하면 이전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왕이었다.
진실을 두려워해서는 안되는.
"진실에 근접한 전승을 원한다."
"좋습니다. 진실은 담백합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촤르르륵!
다르막세스의 환영거울이 펼쳐졌다.
"이건······"
지도는 서부대륙을 형상화했고 배치된 장기말들은 인물들을 형상화했다. 별빛에 둘러싸인 은빛뱀과 포효하는 골드드래곤, 성검을 휘두르는 날개 달린 악마······
"······뭐지?"
잿빛현자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장기말이 움직였다. 은빛뱀은 잿빛현자가 위치한 본진을 지켰고, 대악마는 악마들의 거점을 무너뜨렸으며, 골드드래곤은 수련에 집중했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분쟁에는 일치를! 다툼에는 화합을!]
잿빛현자의 장기말은 사방에 있었다. 트롤수도승이 각지의 괴물을 퇴치했고, 번개를 내뿜는 오크제왕은 악마들을 제거해간다.
"·········"
이따금 벨라디아를 형상화한 장기말도 움직였다. 하지만 장기말의 생김새는 로다카르가 기억하는 우아한 미녀와는 대단히 달랐다.
살인귀.
피에 굶주린.
"·········"
딱!
환상이 끝났다.
"············"
야심만만한 소년기사는 자신이 보았던 환상을 꼼꼼히 돌이켜봤다. 그리고 각각의 의미를 차분하게 곱씹고나서,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여왕은 당신이 육성한 장기말이군."
"············"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잿빛현자의 대답.
"왕이란 족속들은 좀처럼 남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지. 하물며 꼭두각시가 되라는 명령에 따르는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비참한 꼭두각시로 전락한 왕조차, 언젠가 지위에 걸맞는 권력을 되찾을 날을 꿈꾼다. 꼭두각시로 만족한다면 애초에 왕이 아니며, 꼭두각시로 부릴만한 가치도 없다.
"하지만 당신은 장기말로 부릴만한 왕이 필요했고······그래서 당신이 후보자를 선발해 처음부터 육성하기로 결정한거야."
벨라디아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대단히 극적이었다. 전투와는 관련없는 삶을 살아온 귀족영애가 검을 쥐자마자 연전연승을 거듭했으며, 회합을 앞두고 인간 역사에서 제일 성공적이던 정복자의 혈통을 계승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만장일치로 왕위에 추대되었다.
"모두 당신이 깔아둔 판이었군."
"············"
"무술을 배우는 바위트롤이 있다는 해괴한 소문도 벨라디아 여왕이 즉위할 무렵부터 퍼졌지. 오크들의 성산에 악마들이 침공하는 예외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시기도 그때고······"
부서진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정보들이 모여들었다. 모든 정보들의 출처가 동시에 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년의 감각은.
진실에 근접한다.
"당신은 책략가가 아니라 지배자군."
"·········"
"단지 그림자에 숨어지내기에 외면만 보아서는 정보를 알지 못할 뿐이야. 사람들을 장기말로 삼아서 막후에서 암투를 벌이는······"
플레이어(Player).
"그게 당신의 정체군."
"훌륭히 맞추셨습니다."
소년에겐 잿빛현자의 공손한 말투조차 비아냥으로 들렸다. 인세의 바깥에서 찾아온 존재가 인세의 존재를 향해 공손함을 가장하니까.
"과연 사자왕다우시군요."
"사자왕?"
소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에겐 그러한 별명이 없었으니까.
"다음엔 나를 장기말로 삼을건가?"
"제가 아닙니다."
텔로리안은 짧게 대단했다.
"운명이 그렇게 인도하겠지요."
"운명?!"
소년이 역정을 냈다.
"그러한 운명도 누군가의 수작이겠지!"
"············"
"벨라디아 여왕이 당신이 빚어낸 장기말에 불과하면, 사자왕으로 불리게될 나의 운명도 누군가가 빚어낸 장기말에 불과할테지!"
어린 사자의 눈동자는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내면서.
"말해라! 누가 나를 장기말로 삼고 있지?"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당장 말해라! 답하지 않으면 베겠다!"
츠릉!
소년은 검을 뽑아서 격정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누구도 소년을 무례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소년이 느끼는 비참함을 분노로 표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폐하는 제국과의 결전을 원하시지요."
"당연히 제국놈들도 모조리 쓸어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누가 심어주었습니까?"
·········
"누가 폐하의 선조들이 칼마르 왕국을 세우는데 도와주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번영하도록 도와줬습니까?"
·········
"누가 북부가 결집되서 제국에 맞서길 원하겠습니까? 제국에 가장 많은 원한을 지니고, 가장 커다란 위협을 느끼는 이들이 누굴까요?"
소년은 떠올렸다.
왕가의 모계선조를.
[연구진전: 운명의 마상시합]
[연구성취: 엘프혈통의 진실]
[연구단서 1/4]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 80/100]
[전승포인트 : 37]
18. 열여덟번째 연구 - 운명의 마상시합(3)
"내가 하이엘프들의 사냥개라고?"
"어떠한 관점에선 그렇습니다. 폐하."
칼마르 왕조는 거인의 혈통을 물려받은 야만전사 칼마르와, 칼마르와 결투하면서 눈이 맞았다는 엘프전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용살자 칼마르는 스스로의 용맹을 증명하고자 방랑에 나섰고, 결국엔 드래곤까지 베어죽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지요."
그것이 칼마르 왕국.
"엘프전사는 용살자 칼마르의 마지막 날까지 친구이자 동료로서 최선을 다해줬습니다. 또한 유산을 이어갈 후손들까지 낳아줬지요."
덕분에 칼마르의 왕족들은 평범한 인간들과 종적으로 달라졌다. 그들은 거인처럼 장사였고, 엘프처럼 아름다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도, 엘프 전사는 다방면에서 그녀의 후손들을 지원해 북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녀의 정체는 엘프들의 여왕이었으니까요."
여기까진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용살자 칼마르와 타누바엘 여왕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바드들이 제일 즐겨부르는 노래니까.
"······거기까진 문제가 없지."
로다카르가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연정을 느끼고 후손을 낳으며, 그렇게 태어난 후손들을 보살피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일일테니까."
끄덕.
"폐하께서 말씀하신대로입니다."
"·········"
"하지만 타누바엘 여왕의 접근이 의도된 것이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처음부터 칼마르를 키워서 드래곤을 제거하고, 엘프들의 입맛대로 움직일 왕조를 만들어낼 생각이었다면요?"
············
"그건 화가 나는군."
소년이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순수하게 감탄하겠다."
"감탄입니까?"
"이를 인간과 엘프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나의 모계선조들은 출산의 고통만을 대가로 적들을 완전히 분열시킨 것이다."
북부와 제국.
대륙을 양분하는 양대세력.
북부를 주도하는 세력은 칼마르.
"칼마르엔 다양한 종족들이 살지만 결국 주류는 인간이지. 즉, 하이엘프들은 혈통을 섞어서 인간의 시대에서 생존한다는 전략적인 목표를 이뤄낸 것이다. 존경스럽군."
평범한 사람들은 모멸감에 격분할지도 모르겠지만, 왕족들은 전략적인 사고를 우선하도록 교육받았다. 특히 로다카르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갖춘 이들은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타누바엘 여왕도 플레이어로군."
"맞습니다. 인세를 하나의 게임판에 비유한다면, 저도 타누바엘 여왕도 한명의 플레이어지요. 폐하와 폐하의 신민들은 장기말이고요."
어린 사자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깨어지는 상황에 분노보단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젊은이들만이 가지는 특권이었다.
"나도 게임판에 입장하고 싶은데."
"그럼 타누바엘 여왕과 만나보십시오."
"그래?"
"그녀는 자신의 후손들을 장기말로 키워냈지만,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소년이 냉소를 지었다.
"짐도 짐의 사냥개들을 대단히 아끼네만."
"폐하의 사냥개들은 목줄에 매였다고 굴욕감을 느끼진 않잖습니까? 폐하의 선조들도 타누바엘 여왕에게 같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이엘프들은 인간후손들을 사냥개처럼 부린다. 하지만 장수하는 선조들은 후손들에게 애정과 지원을 필요한만큼 베풀기에, 후손들은 기꺼이 선조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영원하진 않을테지."
"맞습니다. 제국이 성장하고 있으니까요."
제국에겐 엘프들의 생존전략이 먹히지 않는다. 그들은 이종족들에게 노예 이상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으니까.
"북부의 왕공들은 엘프를 선조의 종족으로 여기지만, 북부의 평민들에겐 낯선 이방인일 뿐이지. 만일 이런 괴리가 해소되지 못하면, 갈수록 제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제국은 모든 측면에서 발전된 국가다.
오직 인간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짐의 독자적인 입지가 거기서 나오겠군.'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인간과 엘프의 중재자.
그것이 북부왕공들의 역할이다.
"훌륭한 가르침이었다. 잿빛현자."
"폐하께서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가르침에 대한 대가로 토너먼트 출전을 포기해주마. 바보들은 짐이 겁이 나서 도망쳤다고 비웃겠지만······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아직 자존심에 예민할 나이다.
성숙한 어른이 이해해줘야겠지.
"그럼 살펴가십시오. 로다카르 폐하."
"·········"
방을 나서려던 로다카르는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텔로리안의 밑사람으로 업신여기던 사람들의 면면을.
"별들의 여신께 기도를 올리소서. 폐하."
"재밌는 희극이었다! 인간!"
"겸손을 배워라. 꼬맹아."
······하나하나가 홀로 국가를 전복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들. 그렇다면 이들이 잿빛현자를 추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지혜롭고 똑똑해서?'
그럴리가.
'······저들조차 압도할, 적어도 저들에게 밀리지 않을 힘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어린 사자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세를 초월하는 존재들이 뒤따르는 마법사가······평범한 사람처럼 행세한다.
"·········"
덕분에 로다카르는 외우주의 신들에 대한 전승을 떠올렸다. 미지의 세계에서 찾아온 존재에 의해 자신이 알던 세계가 완전히 침식당하는 느낌······
"당신은 외신인가?"
"외신들에게 맞서는 사람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멸망의 저지."
"············"
어린 사자는 텔로리안의 잔잔한 표정에서 거짓을 읽어내지 못했지만, 보이는대로 믿진 않았다. 그것이 이번 수업의 교훈이었으니까.
"빠르게 배우시는군요."
"·········"
"오늘날 듣고 보고 겪으셨던 일들을 의심하셨듯이, 앞으로 벌어질 일에도 자세를 견지하십시오. 그러면 폐하의 왕조는 백년하고도 천년을 추가로 이어갈 것입니다."
꾸벅.
"살펴가시길."
"···············"
쿵!
방문이 닫혔다.
"너무 세차게 몰아붙인게 아니더냐?"
"명검은 뜨거운 불에서 제련되는 법이오."
벨칸의 각성이 세계선의 커다란 변화로 이어진 것처럼, 로다카르의 변화도 동일한 잠재력을 품고 있다.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겠지.
"그럼 토너먼트엔 62명이 남았군."
한명 사망.
한명 기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나 지켜보지."
자리를 파하려는데.
"주군!"
"······뭐냐?"
"어째서 나를 표현하는 장기말은 없는가?!"
"너는 나의 장기말이 아니니까······"
"그건 우리가 맺었던 봉신계약에 어긋나는 말이다! 주군은 충성엔 보호로, 신의에는 믿음으로 답해야한다! 나는 주군에게 언제나 충성과 신의를 지키고 있으므로·····"
[연구진전 : 최후의 드래곤로드]
[검은폭군을 하수인으로 영입했습니다!]
[연구단서 7/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 90/100]
[전승포인트: 38]
* * *
토너먼트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들풀이 가지런히 정돈된 원형경기장에서, 군마들이 내달리며 흙먼지가 솟구친다.
"브라반트 대공국을 위하여!"
"제국과 원로원 만세!"
"무적의 갈라하드가 나가신다!"
콰지끈!
길다란 랜스들이 부딪치고!
"컥!"
랜스에 흉갑을 강타당한 기사들이 차례로 낙마했다. 몇몇은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때때로 사망했지만, 대수롭잖게 넘어갔다. 마상창시합은 대단히 위험한 시험이었고, 기사들은 죽음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에르보니아놈이 우리 형님을 죽였다."
"오늘밤에 찾아가서 원수를 갚는다!"
하지만 자존심 싸움에서 비롯된 원한도 존재했다. 구혼자들은 눈치를 보지 않고 살아온 권력자들이었기에, 이들은 주최자가 설정해둔 규약을 지키는데 관심이 없었다.
"놔둘 셈이냐?"
"재밌잖아요?"
벨라디아는 푹신한 깃털침대에 옆으로 드러누워서, 핏빛와인을 들이마시며 수정구로 싸움들을 관람했다. 곳곳에서 강철이 번득이고 피가 솟구쳤다. 자신을 차지하려고 남자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이 짜릿했다.
"수많은 훌륭한 사내들이 서로를 부모의 원수를 대하듯이 싸우고 있어요. 다들 제가 그렇게 좋은 모양이죠. 하하하하하하하──!"
콰지끈!
벨라디아는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에 눈을 빛냈고, 피가 튀기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평생 아쉬운 소리를 해보지 않은 왕공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단말마를 지르며 피를 토해낸다. 잘려나간 내장을 붙잡고 절규한다.
재밌다!
황홀하다!
흥분된다!
"············"
하지만 텔로리안은 각각의 사건이 정세에 미칠 영향을 하나씩 고려했고, 이대로면 에스실에 부정적인 결과가 초래될거란 결론을 얻었다. 때문에 철퇴공을 찾아갔다.
"내가 봐도 지금은 선을 넘었네."
"맞습니다. 사건을 정리하셔야합니다."
"딸아이는 만류할 생각이 없겠지."
'벨라디아는 지금 제일 행복할 겁니다."
벨라디아에게 왕권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권력을 쥐고 사람들을 조종해서, 마음대로 짓밟을 수 있는 하나의 도구······
"내가 참석자들에게 단단히 경고를 전하지."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에 철퇴공이 공개적으로 구혼자들에게 경고했다. 사고를 가장해 다른 구혼자를 죽이는 행위가 발각된다면, 구혼자의 자격을 잃고 헤링턴 왕조의 적이 되리란 선언이었다.
"또한 수행원들의 무장은 토너먼트가 끝나는 날까지 압수하겠소. 그대들의 안전을 위해 취해진 조치이니 따라주시길 바라오."
이로서 최소한의 구색은 갖추게 되었다. 적어도 토너먼트에서 벌어질 <불운한 사고>의 책임은, 벨라디아보단 불운한 사고를 벌인 당사자들에게 돌아갈 상황이 되었다.
"아쉽네요. 저토록 고귀한 사내들이 이토록 하찮게 죽어갈 기회는 대단히 드물텐데······"
벨라디아는 낙마로 인한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 참가자의 모습에 입맛을 다셨다. 해골이라도 수집해버리고 싶은데······유가족들이 시신을 가져갈테니 어려울테지.
"그나저나 이젠 후보자가 좁혀졌군요?"
토너먼트가 시작되고 사흘만에, 64명에 달하던 참가자들이 8명으로 줄어들었다. 탈락자들 가운데 12명은 죽었고, 같은 숫자가 영구적인 장애를 얻었다. 다행히 텔로리안이 장애를 얻었던 이들을 치료해주면서, 참가자의 1/3이 죽거나 장애가 되었다는 오명은 빗겨갔다.
"최후의 8인은 대단히 강력한 기사나 대륙에서 손꼽히는 권세가들이다. 우선 저들 가운데서 네가 원하는 후보자를 골라보자."
남성 우승자에게 여성과의 결혼이 약속된 토너먼트에서는, 여성에게도 승패에 개입할 수단이 약속됐다. 참가자들에게 무기나 물약을 건네줄 권리가 있었으니까.
'일종의 합법도핑이지.'
텔로리안은 이런 전통을 여성에게 더욱 유리하게 재편했다. 8강 시합을 앞두고 조찬을 베풀고, 대진표를 주최측에서 작성하는 것이다.
'조찬의 끝에서 모두 우정의 잔을 나눌 것이다. 그때 잔마다 다른 효과를 부여하는 포션을 섞으면 우승자를 우리가 정할 수 있지.'
계획에 따라서.
벨라디아가 남편선정을 시작했다.
"공작 이하는 탈락시키죠."
"그렇다면 6명이 남는군."
"운으로 올라온 후보자도 탈락시켜주세요."
4명.
최종 후보자는 4명이었다.
"악마기사 제노팩스. 에르보니아의 왕세자."
"그놈은 절대로 안되죠. 비천한 악마핏줄을 고귀한 혈통에 들일 수는 없잖아요?"
놈은 신체가 느려지는 포션을 마시고 토너먼트에 출전할 것이다. 형편 없이 패배할테지.
"서부대공 파벨로프. 모자람이 없는 육각형의 사내다. 외모도 준수하고 용맹하며 권세도 괜찮지. 인성도 대공치고 훌륭하다."
이에.
벨라디아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대머리잖아요."
"그래도 늠름한 미남이잖느냐······"
"대머리와 동침하느니 차라리 고블린들과 동침하겠어요. 나머지 둘을 알려주세요."
바랑기아를 다스리는 아르슬란 국왕.
브라반트를 다스리는 티볼트 대공.
'이건 아르슬란의 압승이지.'
직위부터 왕과 대공으로 상당한 차이가 나는데, 실질적인 국력을 감안해도 바링기아가 압승이다.
'무예는 티볼트가 근소하게 우위지만, 나이와 성품, 외모를 고려해보면······'
아르슬란은 젊은 숫사자를 연상시키는 쾌남아였다. 체구는 당당했고 수염은 사자처럼 풍성했다. 거기에 유머감각도 뛰어나고, 패션감각도 훌륭하다. 무엇보다 나이가 젊다.
'스물넷의 청년이라서 벨라디아와 나이차가 크지 않다. 그렇지만 티볼트는 로드릭보다 나이가 많은 이혼남이다.'
평범한 이혼남도 아니다
'벨라디아에게 구혼하려고 아내를 암살해버렸어. 이후에는 아내의 애도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전처의 자식들을 데리고 토너먼트에 참가했지.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야수다.'
무엇보다 티볼트의 외모는······잔혹한 내면만큼 흉했다. 일세를 풍미한 기사답게 강인한 남성미는 있었지만, 미소년에 환장하는 벨라디아가 좋아할 유형은 아니었다.
"그러니 아르슬란으로 우승후보를 밀겠다."
한데.
"저는 티볼트에게 안기고 싶은데요."
"미쳤느냐?"
"첫날밤에 쓱싹하고 영지만 꿀꺽하게요."
음·········
그렇다면 셈법이 달라진다.
18. 열여덟번째 연구 - 운명의 마상시합(4)
"이것이 결혼계약서입니다. 티볼트 대공."
"자네가 여왕의 첫번째 남자로군."
티볼트는 음흉한 노인이었다. 피부는 갈라졌고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하지만 어깨는 절벽처럼 견고하고 팔다리는 참나무처럼 단단해, 사람을 벌레처럼 짓뭉갤수 있어보인다.
"여왕과의 첫날밤은 어땠나? 그녀는 어떻게 다뤄지는걸 제일 좋아하지? 숨김없이 말해보게. 그녀를 만족시키고자 최선을 다할테니."
······일반적으로 세월은 사람에게 분별력을 더해주나, 어떤 이들은 오히려 분별력을 상실한다. 티볼트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나는 여자들을 짐승처럼 다루길 좋아한다네. 특히 팔려온 순진한 소녀들을 좋아하지. 부모들이 자신을 금화 몇닢에 팔았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짓는 표정이 무척 탐스럽거든······"
후.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티볼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상대의 과거와 미래를 살폈다.
저명한 기사.
고집센 가장.
오만한 영주.
'상대하기 곤란한 속성만 모아놨군.'
티볼트는 철퇴공 로드릭을 연상시키는 사내였다. 자신이 벨라디아를 교정하지 않았다면 철퇴공도 저렇게 되었을지도.
"대공."
"응?"
"헛소리는 그만하고 계약에 집중합시다."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음담패설을 위해서 찾아온게 아니니까.
"서명하시면 에스실의 왕이 되십니다."
"이후에는 살아있는 시체가 되겠지?"
"············"
"나의 시체 위에서 너희 놈년들이 희희낙락하면서 나의 영지를 나눠가지겠지. 내가 쓰러지면 여왕은 너를 닮은 아들을 낳을 것이고, 녀석에게 브라반트 가문의 이름을 붙여줄테지."
티볼트는 고약한 심보를 드러냈다.
"하지만 괜찮아. 그러려고 온거니까."
"·········"
"내가 애송이들처럼 여왕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생각치 말게나. 나는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 여자는 벗겨놓으면 똑같다는 진실을 알고 있거든.
·········
말을 섞기 싫은 부류다.
"아들을 원하나?"
"?!"
곁에서 벨라디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화로 상황을 지켜보던 것이다.
"원하면 낳아주지."
"·········"
"대신에 목숨과 영지를 내놔라."
벨라디아는 티볼트에게 두루마리를 내주며 깃털펜도 반강제로 쥐어주었다.
"여기에 가주의 인장반지로 서명하면 배은망덕한 딸들에겐 한푼의 유산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진드기처럼 빌붙어온 친척들도 상속에서 배제되겠지."
티볼트는 삶을 회상했다. 젊은 시절에는 삶이 좋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자 모든게 무너졌다. 가문도, 우정도, 가족도······
'서명해도 괜찮을까?'
어차피 시집간 딸들은 계승자가 아니다. 이제 브라반트 가문의 이름은 사라질 것이며, 외손자들은 자신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서명하면 당신과 자볼 수 있는거요?"
"한번은."
"그럼 충분하지."
쓱싹.
서명했다.
[연구주제 : 운명의 마상시합]
[브라반트 대공국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연구단서 2/4]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43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39]
턱.
벨라디아가 포션을 내려놨다.
붉은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걸 마셔라. 티볼트."
"·········"
"너는 앞으로 24시간동안 남은 생명을 단번에 불태울 것이다.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짐의 침실에 이르기에 충분한 힘일테지."
티볼트는 허탈히 웃으며 포션을 들이켰다. 어차피 죽이며 살아온 삶이다. 죽음이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내 이름을 역사서에 남기러 가야겠군."
"그럼 속옷만 입고 기다려주마."
그날, 티볼트는 초인적인 활약을 선보였다.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는 청년들을 체력으로 압도하는데, 숙련된 기예가 합쳐지니 누구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우승! 브라반트의 티볼트!"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단장한 처녀들이 꽃을 뿌리고 바드들이 노래를 불렀다. 학사들은 마상시합의 전개를 상세히 기록했는데, 특히 티볼트가 젊고 예쁜 아내를 맞이하고자 얼마나 투혼을 발휘했는지에 집중했다.
"신부. 입장하십시오."
아엘타나르의 주례(다른 이름을 썼지만)을 받으면서 벨라디아의 결혼식이 진행됐다. 하지만 여왕의 결혼식은 전통적인 결혼식과 행사 순서가 달랐는데, 이는 벨라디아가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의전이 훌륭하군."
"국혼인데 신경을 써야지."
결혼식의 모든 절차는 재상 우르반(승진했다)이 조율했는데, 전통적인 예식과 헤링턴 왕조의 가풍을 반영했다. 자세한 예법은 생략하겠다.
"언니! 즐거운 신혼 생활 되세요!"
"고맙구나. 알다네스."
피로연에선 돈벌레 알다네스가 유난히 기뻐했다. 둘은 공방생활을 통해서 친자매처럼 친해졌던 까닭이었다.
"득남을 기원합니다!"
"그건 불필요한 기원이다."
피식.
벨라디아는 미소로 우월감을 드러냈다.
"연약한 귀부인들이나 아들을 낳으라고 시달리는 것이지. 나는 벨라디아다. 전사여왕 벨라디아."
어느덧 밤이 깊자 신혼부부는 하객들에게 인사하고 신방으로 향했다. 정직하다고 평가받는 귀족 남녀들이 부부를 따라가서, 알몸으로 동침해서 교접하는 모습까지 확인한다.
"벨라디아 여왕은 처녀가 맞았습니다!"
"!"
이로서.
정절에 대한 의심은 사라졌다.
"·········"
또한 신방에서 터져나오는 격렬한 교성은 결혼이 완성되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패배한 구혼자들은 격분해서 떠나거나, 음울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예외적인 사람도 있었다.
"반갑소. 잿빛현자 텔로리안."
"안녕하십니까. 파벨로프 대공."
"공이 괜찮다면 합석하고 싶은데."
서부대공 파벨로프는 명성을 떨치는 젊은 통치자였다. 강인하고 늠름한 외모, 발군의 무예, 부유한 영지, 폭넓은 교양과 독실한 신심······중세랜드의 모든 여인들이 남편으로 선망할만한 남자.
다만.
대머리였다.
"나는 여왕께서 본인을 배우자로 원치 않으신걸 이해하오. 나는 신심이 깊지만 여왕께선 현실적인 분이니······아무래도 지향이 맞지 않았겠지."
·········
진실을 말해줘야하는가?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국가간의 우호관계를 논할 순 있겠지. 교역을 비롯해 양국에 이득이 될만한 방안들을 논의해봅시다."
[연구주제: 운명의 마상시합]
[서부 대공가와 우호관계를 맺었습니다!]
[연구단서 3/4]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3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40]
서부대공은 제국이 중부를 침공해오면 원군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제국의 성장을 경계하는건 북부만은 아니었으니까.
"대신 저희는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태양신 교도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시오."
권리보장.
특권보장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태양신 교도들도 칙령을 어기지 않는다면, 다른 백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로서 교회와 에스실의 대치는 일단락되었다. 제국에 공투하기 위해서였고, 갈등을 완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날이 밝았다.
"꺄아아아아아악!"
여왕의 비명에 수많은 기사들이 달려갔다. 그곳에는 알몸을 가릴 여유도 없이 티볼트의 시체를 끌어안은 벨라디아가 있었다.
"낭군님! 낭군님! 나의 낭군님! 서둘러 일어나세요! 당신은 축제가 끝나기도전에 당신의 신부를 과부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벨라디아는 부친을 잃은 소녀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마침 각국의 주요인물들이 모여든 자리였기에 신속히 국제적인 조사단이 발족되었다. 저명한 성직자들이 시신을 부검해보아도 무기에 의한 외상이나 독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등에 가득한 손톱자국과 목에 선명한 이빨자국, 온몸에 가득한 멍자국 그리고 과도한 자양강장제를 복용했던 흔적이 발견됩니다."
·········
"암살은 아닌것 같지?"
"호상이네······호상이야······"
사람들은 늙은 신랑이 어린 신부를 만족시키려고 무리했다가 죽었다고 수군댔다.
"회임하셨습니다."
탈락한 구혼자들이 저마다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주겠다고 수작질을 부리는 와중, 텔로리안이 깔끔하게 당사자의 서명과 공증까지 받아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벨라디아 여왕과의 결혼이 성립되는 시점부터, 브라반트 가문의 모든 영지와 재산은 결혼을 통해 탄생한 자식에게 상속되며, 상속의 집행인으로 벨라디아 여왕을 임명한다.]
"······한데 벨라디아 여왕이 회임했지?"
"벌써부터 회임을 확인할 수 있나?"
"4대 교단의 특사들이 신성력으로 확인한 것이라······오해가 있다고 판단하긴 어렵다."
이에 티볼트의 딸들을 비롯한 브라반트 가문원들은 똘똘 뭉쳐서 유언장의 수용을 거부했다. 워낙 급하게 벌어진 사건이기에, 저마다 유언장을 거부하는 논리가 달랐다.
"유언장이 조작되었다!"
"녀석은 브라반트의 씨앗이 아니다!"
"유언장은 상속법보다 앞서지 못한다!"
반면에 텔로리안은 대륙의 요인들을 불러모아서, 벨라디아의 상속권이 정당함을 입증했다.
"해당 유언장은 성기사단장 빌과 추기경 헬름에 의해서 공증된 문서요. 따라서 유언장의 진위를 의심함은 신에 대한 불경이오."
여기까진 모두 납득했다.
적어도 속으로는 말이다.
"다음으론 브라반트의 씨앗이 아니라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혼인의 완성을 목격했던 증인들은 무엇이고, 밤에 끊이지 않았던 교성의 정체는 무엇이었단 말이오?"
대부분이 납득한다.
그럴듯한 상황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군주의 유언이 국가의 법률에 앞서지 못한다는 주장을 검토해보겠소. 이것은 신성한 군주권에 반하는 이단적인 주장이오."
유달리 힘을 주었다.
군주권에 손을 얹어서.
"모든 군주는 국가를 통치할 신성할 주권을 신격들에게 부여받았소. 따라서 군주의 칙령이 법을 만드는 것이지, 법이 칙령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오. 한데 이러한 선례를 허용한다면, 앞으로 이곳에 계신 군주 여러분의 주권은 지속적인 위협을 받을 것이오."
텔로리안은 이번 사건을 통치자 가문들의 영역다툼에서, 군주권에 대한 논쟁으로 바꿔버렸다. 이에 헤링턴 왕조의 급격한 성장을 견제하려던 군주들은 중립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무난히 계승분쟁이 끝나려는 시점에.
"잠깐."
"?"
온몸에 붕대를 칭칭 두른 젊은 남성이 걸어나왔다. 구혼자로 토너먼트에 참가했다가 참패를 맛봤던 제국귀족, 퀸투스 의원이었다.
'퀸투스는 헤링턴 왕조의 성장을 막아야하는 입장이다. 개인적으론 벨라디아에게 이용당했다는 모멸감이 있으며, 공적으로는 원로원에게 에스실을 견제하라고 명을 받았으니까.'
즉.
제국은 상속분쟁에 개입할 것이다.
"제국 시민들은 브라반트 가문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하오. 따라서 브라반트 대공국은 벨라디아 1세의 유복자가 아니라, 티볼트의 장성한 친족들에게 상속되는것이 합당하오."
하지만.
자신이 깔아둔 함정을 밟으면서.
"어째서 그렇소?"
"군주의 주권은 신에게 부여받은 권리가 아니라, 시민들의 합의로 위임된 것이기 때문이오. 따라서 군주도 법과 전통을 지켜야하오."
토론을 지켜보던 왕공들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그들은 제국이 어떤 불온한 사상으로 운영되는 국가인지 똑똑히 보았고, 이제 놈들이 자신들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마수를 끼치려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렇군."
텔로리안이 웃어보였다.
"그럼 당신이 말하는 시민들······그러니까 평민들은 부당한 왕명에 거역할 권리가 있겠구려. 상황에 따라서는 왕을 폐위할 권리도 있을 것이고······그렇지 않소이까?"
[연구주제: 운명의 마상시합]
[제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킴!]
[연구단서 4/4]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3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41]
[연구보상: 세계선이 변화합니다!]
마침내 시작이다.
메인 시나리오가.
[세계선의 발전방향을 선택하십시오······]
단.
자신의 입맛대로 재구성된.
18. 막간(1) - 브라반트 계승전쟁
세계관은 게임의 흐름을 결정한다. 같은 중세판타지도 살인과 강간이 밥먹듯이 벌어지는 중세랜드와, 겉모습만 중세고 현대인들도 손쉽게 공감하는 편안한 세계는 분위기부터 다르니까.
'시네어RPG는 중세랜드의 극한으로 부를만한 세계였다. 명백한 다크판타지였지.'
사람들은 무지와 빈곤에 시달리고 악당들은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악마와 언데드가 횡행하는 종말의 상황이기에 선인들도 정말로 신뢰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시네어RPG의 주인공은 언제나 선택해야했다.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정의의 영웅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남들처럼 적당히 악마들과 타협해서 생존할 것인지.'
극단적인 세계에서 태어난 이들은 생각도 극단적으로 변한다. 자신의 유소년기가 뒤틀린 성격을 만들어냈듯이.
'나는 그런 구도가 싫었다.'
주인공은 세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한다. 하지만 다크판타지에선 주도권을 지니지 못하고 이곳저곳 끌려다닐 뿐이다.
'그래서 이번 삶에선 동료들을 모으고 세력을 형성했지. 그러면 세계관을 바꾸어, 세계선에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
◆세계선의 분기 (고유연구)
: 당신이 걸어온 행적에 힘입어 세계관이 개변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부턴 당신이 내딛는 발걸음이 새로운 시나리오입니다. 이제 세계선의 분기를 선택해주십시오······
■첫번째 분기 : 제국의 평화
제국의 산하로 합류해서 대륙을 신속히 통일합니다. 대부분의 멸망트리거가 신속히 제거되며, 악마들도 수백년간 지상에 얼씬하지 못할 것입니다.
■두번째 분기 : 투쟁의 시대
제국의 인본주의를 부정하고 전면적인 투쟁에 돌입합니다. 제국은 매우 강력하고 방대한 세력입니다. 전면적인 투쟁은 수많은 멸망 트리거를 자극할 것입니다.
─────
자신이 게이머였다면 제국의 평화를 선택했겠지. 어차피 이종족은 상대적인 소수에 불과할뿐더러, 이쪽이 빠르고 손쉬운 클리어를 달성해줄테니까.
'하지만 삶의 관점에선······'
더이상 시네어 행성은 폴리곤텍스처가 아니었다. 자신은 하프엘프의 살결을 선명하게 기억했으며, 오크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익숙해졌으며, 트롤들과 문답을 주고 받으면서 가르침을 내렸다.
'인간은 스스로의 경험으로 정의되는 존재다.'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어떤 종족도 특별히 우월하거나 미천하지 않았다. 어느 종족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었으며, 욕망과 고결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제국은."
자신이 시작할 선동으로 대륙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리라. 그리고 적잖은 동족들은 자신을 인간의 배신자로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자신은 행할 것이다. 최악의 배신자는 스스로의 기억을 배신하는 사람이니까.
"제국은 단지 이종족만 탄압하는 세력이 아니오! 그들은 백성들에게 주권이 있다는 불온한 사상을 전파해서, 모든 왕족들을 단두대로 보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소이다!"
잿빛현자의 음해에 퀸투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제국엔 황제도 있었고 귀족도 있었다. 단지 법에 의한 지배를 강조할 뿐, 신분제도를 부정하려는 음모는 없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선동이오!"
"허면 내가 정말로 선동을 하고 있는지 짚어봅시다! 그대는 국가의 주권이 신들이 아니라 시민의 합의에 의해 주어진다고 주장했소!"
────
◆백금의 혓바닥(개인 특성, 영웅)
: 당신의 말재주는 백금처럼 탁월해 말재주만으로 국가간의 협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며, 학자들의 토론장에선 백전무패를 장담할 수 있습니다.
■효과
- 말재주가 개입하는 모든 판정에 유리점.
- 말재주가 성공하면 우호도가 올라감.
- 판정에 실패해도 파멸적인 결과를 회피함.
────
"그건 국가의 주권자는 평민이라는 주장이지! 또한 하나의 가정에 가장이 둘이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하나의 국가에도 주권자가 둘일 수는 없소! 그렇다면 평민이 주권자라면 왕족은 처형되거나 쫓겨나야하오! 이것이 제국의 논리요!"
텔로리안이 논리를 비약해서 청중들을 선동하자, 퀸투스는 당황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제, 제국법에서는 군주들의 주권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내부에서는 시민들의 합의를 중시하지만, 외국인들을 대할때는······"
잠깐!
고함치며 끼어든다.
"외국인이 아니라 야만인이겠지."
"?!"
"외국어를 제국어 원문으로 표기하면 바르바로이, 이것은 단순한 외국인이 아니라 야만인을 뜻하는 단어요!"
제국은 외국인을 모조리 멸시했다.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았으니까.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하플링같이 생긴 놈이 고귀한 우리들에게?!"
"수세식 화장실도 없는 놈들이 뭐란거냐?!"
"날조다! 조작이다!"
"자자. 흥분하지말고 정리해봅시다."
언성이 높아지자 서부대공 파벨로프가 끼어들었다. 합리성과 온화함(대공치고는)을 겸비한 군주.
"잿빛현자 텔로리안께선 제국이 대륙의 평민들을 선동해서 왕족들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셨소. 맞소?"
끄덕.
"그렇소."
"그렇다면 증거가 있으시오?"
"물질적인 증거는 없지만······"
자.
그동안 쌓았던 명성을 사용할 시간이다.
"그러한 미래를 보았소."
"!!!"
"제국군이 진군하는 국가마다 왕궁이 불타오르고, 귀족들이 교수대에 매달리며, 농노들이 자유를 얻었다며 환호성을 지르더군."
거짓말이다.
그러한 미래는 보지 못했다.
"이상의 예언을 낳아주신 어머니와 길러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소! 천상의 신격들에게 청하오니! 내가 거짓을 전한다면 나의 생물학적인 형제들에게 천벌을 내려주시오!"
맹세!
그것도 가족을 걸고 하는!
"""!!!!"""
상식을 벗어난 예언이었지만 텔로리안의 발언에는 권위가 있었다. 그는 진실만을 말하는 예언자로 유명했으니까!
"잿빛현자의 예언은 신뢰할 수 있다."
"불리한 사실도 꾸준히 말해온 사람이잖나?"
"그렇다면 제국놈들이 정말로?!"
논리에는 헛점이 많았고 근거도 미비했다. 하지만 웅변은 이미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진실만을 말해왔다. 덕분에 결정적인 순간에 기만을 행할 수 있는 것이지.'
함부로 거짓을 입에 담지 말라.
결정적인 순간에 속이지 못하니.
'당신의 가르침이 옳았습니다. 스승님.'
자신이 스승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되새기는 동안, 왕공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황을 차분히 검토했다.
'중요한 사실은 진실의 여부가 아니다.'
제국이 반박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언이 진실이라면 정말로 자신들을 몰살시킬 생각이고, 거짓이면 텔로리안의 기만에 대응할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하거나 약한 것일테지.
"또한 존귀한 여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선언하건데, 브라반트 대공국은 여왕 폐하께서 회임하신 왕세자 전하께서 누릴 유산입니다. 이를 부정하는 자들에겐 전쟁의 참화가 닥칠 겁니다."
이에 퀸투스 의원은 바닥에 침을 뱉고 퇴장했고, 왕공들은 제국의 무도함을 똑똑히 기억하고서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제 여왕과 침실을 공유하는 문제는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제국과 에스실이 충돌하겠군."
"에스실의 국력으론 무릴텐데?"
"우리가 조금씩 거들어줘야지."
"그래도 굉장한 열세일텐데."
"하지만 잿빛현자가 있잖소."
서부대공의 말이었다.
"잿빛현자가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드래곤의 꼬리에 불과할거요. 드러난 사실도 굉장하지만 수면 밑에는 더욱 무시무시한 진실들을 숨기고 있겠지."
모든 사건을 원점부터 재검토해본 서부대공은 그러한 결론을 내렸다.
"이제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겠군."
"·········!"
"나는 허명은 그만 쫓고 영지와 백성들을 보호하는데 전념하겠소. 공들께서도 무익한 전쟁놀음은 그만두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토지를 지키는데 집중하길 권하는 바요."
이로서.
경고는 적시에 전해졌다.
[대륙에 난세를 경고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3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42]
* * *
전쟁은 브라반트 대공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불길은 얽힌과 이해관계를 연료로 삼아서 세차게 불타올랐다.
"몬테규 가문놈들을 모조리 죽여라!"
"이번 기회에 중부를 통일하자!"
"짐이 동부의 진정한 왕이다!"
"임페리움 임빅타!"
"여왕 폐하를 위하여──!"
하지만 전쟁의 양상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진 않겠다. 전쟁과 정략은 헤링턴 왕조가 다룰 사안이었고, 벨라디아는 그러한 문제들을 처리하는데 매우 유능하도록 훈련되었다.
'곁에 검은 폭군을 남겨뒀으니 최악의 상황이 발생해도 대처가 되겠지. 어차피 제국의 주력은 다른 대륙에 묶여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그보다 중요한 사안을 다룰 것이다.
"네놈이 어째서 따라오는거냐!"
"호박의 성녀에게 볼 일이 있으니까."
자신은 리안칼과 함께 서부로 향하는 중이었다. 하늘을 비행하는 양탄자에 올라타서.
"짜증나는 자식······"
"시끄럽고 카드를 고르도록."
"·········한 수만 물러주지?"
둘은 탁자를 펼쳐두고 거울전쟁을 즐기는 중이었다. 리안칼도 게임의 귀재였지만, 텔로리안은 미래를 내다보고 수를 두었다.
"낙장불입."
"에라이!"
와장창!
리안칼이 테이블을 엎어버렸다!
"안한다! 비겁한 놈아!"
"오늘 식사당번은 너로구나."
"식사당번도 안──으아아악!"
리안칼이 약속을 어기자 성검이 찌릿찌릿한 고통을 주었다. 성기사는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했다. 그것이 성기사니까.
"끄아아아악! 미친 할배! 아아아악!"
리안칼은 성스러운 전류에 의해 바삭하게 구워졌다. 하지만 성검은 바삭해진 리안칼을 말끔히 치유하고서 다시 고통을 주었다.
"할게! 할게! 한다고!"
"진즉에 그럴 것이지."
"그런데 네놈이 주문을 쓰면 되잖나!"
리안칼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녀석이 손가락만 튕겨도 만나빵이 제조되는데, 어째서 사람이 번거롭게 식사를 준비해야할까?
"그래서 약속을 어길건가?"
"·········그건 아니고."
해가 저물자 양탄자는 지상에 착륙했다. 리안칼은 먹거리를 찾아서 사냥을 다녀오고, 텔로리안은 야영을 준비했다.
"음."
양탄자가 착륙한 장소는 나무가 울창한 숲속이었다. 오른손을 휘두르자 비전칼날들이 거추장스런 나무들을 벌목했고 왼손을 내밀자 근사한 저택이 소환되었다.
"저기."
"흠?"
"잿빛현자님 되십니까?"
그때.
낯선 방랑자가 다가왔다.
"흐음······"
방랑자의 생김새를 차분히 살펴봤다. 뱃살이 두둑한 중년의 사내. 두꺼운 튜닉과 튼튼한 바지. 낡고 헤진 망토와 짐이 가득한 배낭, 손떼가 가득한 장검이 눈에 띈다.
"행상인이시오?"
단.
평범한 행상인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길가에만 머무르니까.
[저는 골동품 상인입니다. 진귀한 물건을 원하시는 부유하고 지적인 고객들께 봉사하고 있지요. 혹시 제가 잿빛현자님께도 카탈로그를 선보일 영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지옥의 언어로 흘러나온 자기소개였다.
19. 열아홉번째 연구 - 저주받은 혈통(1)
골동품상인은 보따리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이세계인의 영혼이 담긴 항아리, 타락천사의 양심을 보관한 성물함, 변태살인귀의 영혼이 봉인된 보석·········
"마음에 드십니까?"
"다른 물건은 없는가?"
"어떤 물건을 원하시는지요?"
"배움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원하네."
이에 골동품상인은 지옥의 마도서를 자신있게 내밀었다. 지옥의 로어를 습득할 수 있는 마도서였으니까.
"이건 어떠십니까?"
"이보다 희귀한게 필요하네."
"그렇군요."
뒤적뒤적.
"이건 어떠십니까?"
이에 골동품상인은 내용이 비어있는 노트를 내밀었다. 능력치 상승을 이뤄주는 책이었다.
"제가 보유한 제일 귀한 물건입니다."
"대금은 이걸로 치르지."
[거래제안]
[다그렌의 해골(희귀)]
[지옥조련사의 목줄(영웅)]
"어떤가?"
"성사되셨습니다."
[획득]
[능력치 향상의 마도서]
공책을 펼치자 머리에 수많은 잡념이 떠올랐다. 의지를 집중해서 잡념을 걷어내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러자 대기의 마나가 모여들어서 육신에 깃들었다.
'마나 능력치가 올라갔군.'
자신의 마력은 인간의 종적인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수치여서, 레벨이 상승했어도 추가로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스킬북을 사용한 능력치 상승에는 종적인 제약이 없다.
"다른 노트는 없는가?"
"죄송합니다. 물량이 한정된지라."
"추가물량이 확보되면 내게 판매하게."
[소유권 상실!]
[지옥불길의 인장반지(영웅)]
"대가는 얼마든 지불할테니."
"다른 필요한 물건은 없으십니까?"
절레절레.
"알겠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생기시면 황혼이 내린 숲의 가장자리에서, 행복한 수집가를 불러주십시오. 언제나 신속하게 최고의 행복만을 제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번쩍!
상인이 사라졌다.
"네놈도 정직히 거래할 때가 있군."
"데빌상인들은 언제나 정직하니까."
데빌은 상종못할 사기꾼들이다. 그러나 상인들은 정직하다. 그들은 저울을 속이지 않으며, 거래자를 기만하지도 않는다.
"할배가 그러는데······그래봐야 취급하면 안되는 물건을 다루는건 똑같지 않느냐는데?"
단지.
일반적이지 않은 상품을 거래할 뿐이지.
"노인들은 항상 쓸데없는 걱정이 많지."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그들은 마법으로 지어진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동이 터오르자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졌으니 지금부턴 불필요한 시선을 피하고자 도보로 이동했다.
"멈춰라!"
한데.
도로에 나서자 노상강도들이 나타났다.
"호주머니를 털어줘라!"
"팬티까지 벗도록!"
"등짝! 등짝을 보여다오!"
······자신과 리안칼이 겉보기에 우스워보이긴 했다. 자신은 철퇴공을 처음 만났을 당시의 방랑자 차림이었고, 리안칼은 추레한 차림으로 샌들을 끌고 다니는 백수로 보였으니까.
"음·········"
"성왕께선 뭐라고 하시나?"
"남김없이 괴멸시키라는데?"
"그건 지나치게 잔인한 처사고······"
위잉!
자신의 오른손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5위계, 야수의 로어]
[레서 폴리모프(Lesser Polymorph)]
[사람을 야수로!]
펑!
하얀 연기가 솟아나고.
"음머?"
"매에에에에에──"
"꿀! 꿀! 꿀꿀꿀꿀!"
무기와 양물을 들이대던 도적들이 가축이 되었다. 덕분에 자신들은 도적들의 소굴에 잡혔던 양민들을 풀어주고, 목줄을 건네주었다.
"당신들의 고초에 대한 배상금이오."
"갑자기 가축들이 어디서······?!"
"정말로 알고 싶소?"
"············"
양민들은 더이상 가축의 출처에 대해서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도적에게 빈털터리가 되었고, 가축은 비싸고 유용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하하하! 후장을 내어주면 살려주마!"
정오의 도로.
마적이 습격해왔다.
"가진 것을 모두 내주면 노예로 삼아주마!"
오후의 산길.
산적들이 위협해왔다.
"석궁병대! 마법사부터 집중사격하라!"
저녁의 강가.
탈영병들이 기습해왔다.
"서부엔 무슨 놈의 강도들이 이렇게 많나?"
"전쟁이 멈추질않으니 몬스터가 들끓고, 몬스터가 들끓으니 생활기반이 붕괴하고, 생활기반이 붕괴하니 농민이 도적으로 전직하지."
손짓으로 역장결계를 설치해 양떼들을 보호했다. 그들은 몬스터의 습격을 두려워하지 않은채로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이군.'
서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땅이었다. 물론 실제로 살아본 땅은 얼마 되지 않지만, 적어도 서부의 감성은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활동해온 중부는 반쯤 야생이었다. 하지만 서부는 중부보다는 문명수준이 높은 편이다.'
대신.
이곳 사람들은 광신적이다.
그래서 전쟁이 멈추질않지.
"정지!"
강가를 건너려는데 석조다리를 무장농민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어깨에 주황색 완장을 차고 있는, 회색의 수도사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전능한 태양신을 받드는 가난한 형제단이다.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고 이교도들을 회개시키는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수도사는 일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선 선두에 위치한 조각같은 미청년은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만만한 태도와 남다른 체격을 보아선 명백한 귀족.
'보검을 차고 있으니 귀공자 출신의 방랑기사일 확률이 높겠다. 하지만 군마도 갑옷도 수행원도 없는데······'
이상하다.
여러모로.
'반면에 다른 녀석은······'
미청년을 따르는 로브청년은 날카롭고 이지적인 인상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섞어두면 상당한 미남으로 보일테지만, 주인에 비해서는 고블린처럼 보였다. 강해보이지 못하는 호리호리한 몸이 어마어마한 감점요인.
'······마력이 느껴지는군.'
로브청년이 목도리처럼 걸친 은빛살모사가 혀를 낼름거렸다. 이에 농민들은 경계심을 느끼고 쟁기를 손에 쥐었다.
"당신은 마법사군."
수도사의 선언에 농민들이 쟁기를 겨누었다. 그들의 눈빛은 평범한 농민처럼 보이지 않았다. 결의에 가득차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당장 증명하시오."
착!
합장하는 수도사에게 성력이 깃들었다.
"당신들이 악마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이나 금지된 흑마술을 익히는 말레피카가 아님을!"
동시에 수도사의 기도가 농민들에게 힘을 부여했다. 그들은 평범한 농민이 아니라 가난한 형제단, 스스로 신체와 신앙을 단련해 마을과 신앙을 지키려는 광신도들이었다.
"이거면 되나?"
츠릉!
리안칼이 장검을 뽑았고.
"!"
번쩍!
그러자 칼끝에서 눈이 멀어버릴만듯한 섬광이 번득였다. 그것이 천상의 광채임을 알아본 수도사는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천상의 사자이시여!"
"의심하지말라."
"알겠습니다! 천상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농민들도 쟁기를 내려두고 무릎을 꿇었다. 이제 죽음도 불사하던 전투적인 광신도들은 없었다. 그들은 순박하고 유순한 양들이 되어서, 리안칼에게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되겠나이까?"
"천상의 제왕께서 가라사대 검을 녹여 쟁기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쟁기를 검처럼 사용하고 있는가?"
농민들을 꾸짖는 리안칼은 고대의 선지자처럼 보였다. 목소리는 깊고 선명했으며 외모는 신언을 전달할만큼 아름답고 강인했다.
무엇보다 성력을 사용할 때마다 머리에 돋아나는 황금색 헤일로가, 리안칼이 천상의 힘을 휘두르는 존재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다.
"저희를 지켜줄 대전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이끄는 목회자들이 있고, 너희는 목회자들에게 수확의 십분지 일을 바쳤거늘, 어찌하여 너희를 지켜주는 대전사가 없는가?"
번역.
교단도 있다.
십일조도 받아간다.
어째서 지켜주질 않는가?
"싸우는 자들은 저희처럼 비천한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고, 기도하는 분들과 통치하는 분들께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번역.
기사들은 바쁘다.
성직자랑 영주들을 지켜야하잖아.
"그건 이상한 말이군."
리안칼이 눈쌀을 찌푸렸다.
"태양신께서 사람의 육신으로 강림해서 종말을 막아내신 날부터, 모든 사람은 동등한 아버지를 섬기는 형제자매가 되었다. 한데 어째서 너희가 차별을 받아야한다는 말이냐?"
번역.
태양신 앞에선 만민이 평등하다.
신분으로 차별하는건 말이 안되지.
"·········"
"가족을 재산으로 차별하는 파락호가 있군."
쯧쯧쯧.
"안내해라. 천상의 가르침을 내릴테니."
"예이."
리안칼은 양떼를 이끄는 자애로운 목자처럼(실제로 양떼도 있었다), 군중들을 데리고 성채로 향했다. 성채에 도착하자 무장한 경비병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의심하지 말라."
"""오오! 천상의 빛이다!"""
그들도 리안칼의 광채에 감화되어 뒤를 따랐다. 텔로리안도 묵묵히 리안칼을 따라갔고 군중들은 자연스레 텔로리안도 경외했다.
"저분은 누구지?"
"마법사라고 하던데?"
"마법사가 천사님과?"
"천국의 학사님이겠지요!"
"오오! 그렇구나!"
순박한 농민들의 상상력에 힘입어 리안칼과 텔로리안은 천상의 제왕께서 보내주신 천사님들이 됐다. 무리를 이끄는 수도사는 신심은 깊어도 지혜와 학식에선 모자란 부분이 있어서, 민중들의 착각은 갈수록 깊어졌다.
"앞서가는 분께선 풍채가 늠름하고 아름다우시지요? 이는 천국의 제왕께서 보내주신 천상의 영주님이심을 뜻합니다."
오오!
영주님!
평천사도 아니었어!
"뒤따르는 분께선 말수가 없고 항상 무언가를 기록하시지요? 저분은 천상의 영주님을 보좌하고자 파견된 지혜의 천사이십니다!"
그때.
소작농 한스가 손을 들었다.
"그럼 뱀은 뭡니까요?"
"?"
"신부님들께서 언제나 뱀은 사악한 동물이라고 말씀하셨는디유. 수사님도 그러셨구······"
긁적.
긁적.
"음······"
완장을 착용한 수도사는 곰곰히 가르침을 돌이켜봤다. 하지만 그의 부족한 학식으론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저분은 선한 뱀이십니다."
"뱀이 선하다굽쇼?"
"형제님! 천상의 제왕께선 전지전능하심을 잊으셨습니까? 의심하시면 아니됩니다!"
헉!
한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제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요!"
"회개하십시오! 형제님! 함께 기도합시다!"
소작농과 수도사가 함께 울면서 통성기도를 올릴 무렵, 리안칼과 텔로리안은 영주의 알현실에 도착했다. 영주는 젊은 나이에 탈모가 시작된 청년이었다. 눈밑까지 내려온 진한 다크서클과 서슬퍼런 분위기가 그의 상태를 드러냈다.
"그대들은 누군가?"
"천상의 사자다."
"증거는?"
번쩍!
성검이 광채를 발한다!
"의심하지말라."
"믿겠나이다! 천상의 사자이시여!"
경계심을 내보이던 탈모영주는 무릎을 꿇었다. 하나의 무릎이 아니라 양쪽의 무릎을 꿇는다. 이는 신성한 존재를 대하는 자세.
"너는 싸우는 자로서 노동하는 자들을 지켜야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이 쟁기를 들고 스스로를 지키게 만들었느뇨?"
귀족이 되어서 말이야! 농민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그들이 자경대를 결성하게 만들다니!
"그것이······"
이에 탈모영주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개를 숙이면서,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인이 심연 숭배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흠?"
"그래서 놈들을 소탕하는데 모든 전력을 투입한 상황인지라······"
이에 상황을 지켜보던 텔로리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 목격할 상황이 결코 유쾌하지 않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신규연구: 저주받은 혈통]
[데몬스폰들의 운명을 결정하십시오······]
[연구단서 0/3]
[연구보상A: 혈통억제(고유주문)]
[연구보상B: 혈통정화(고유주문)]
19. 열아홉번째 연구 - 저주받은 혈통(2)
연구의 진행에 앞서 악마에 대한 정의를 되새겨보겠다. 악마의 저주를 해결하려면 악마가 무엇인지 알아야하므로.
'악마는 물질계와 별도의 차원에서 살아가는 이계체들이다. 그들은 필멸자의 부정적인 감정을 연료로 살아가다, 평소에는 지옥과 심연에 영혼의 형태로 거주하다, 필멸자의 부름에 응해서 물질계에 육신을 갖추고 나타난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커질수록 악마들은 강해지고 숫자도 많아진다.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약해진다.
'악마는 어떻게 연명하는가?'
악마는 악행을 통해서 연명하고 성장한다. 최고의 악행은 인간을 타락시켜서 스스로 악행을 저지르게 만드는 행위로, 때문에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는 교단들을 만드는 것이다.
[악마의 생리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그렇지만 악마들은 인간에게 악을 가르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사악한 인간도 가족만큼은 사랑하기에, 악의 화신으로 거듭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벨라디아였다면 악마들은 참으로 편했겠지만, 애석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퇴공처럼 애매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악마들은 손수 육신을 선택해 지상에 강림해, 인간들에게 혈통을 퍼뜨리는 전략을 채택했다. 악마의 혈통을 이어받은 인간들은 자연스레 악행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여기부터 데빌과 데몬들의 방법론이 크게 갈린다. 데빌들은 결혼이나 계약을 통해 필멸자들과의 자손을 얻지만······
'데몬들은 그보다 원초적인 방법을 좋아한다.'
리안칼은 사교도들에게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러 떠났다. 그동안 아엘타나르는 약초를 수집했고, 자신은 물약을 제조하고 의학적인 조치가 가능한 수술실을 만들어두었다.
"흉한 꼴을 보겠구나."
"············"
리안칼은 사교도들에게 잡혀갔던 백성들을 구출해왔다. 그들은 오랜 학대로 인해서 몸도 마음도 초췌해진 상태였는데·········여성 포로들의 경우에는 상태가 더욱 좋지 않았다.
"제발 어머님을 살려주세요!"
수술실에 만삭의 노부인이 실려왔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와 이마에 가득한 주름은, 그녀가 정상적인 임신이 가능한 나이가 아님을 드러냈다. 하지만 상대는 데몬들이었다.
"환자를 살릴 방도는 있소만."
"그럼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뭐든 드릴테니!"
"하지만 대가가 따를 것이오."
꿀꺽.
보호자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침을 삼켰다.
"그, 그게 뭐죠?"
"산모가 노령이어서 수술을 최대한 짧게 끝내야하오. 그래서 아이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래도 상관하지 않겠소?"
이에 보호자들은 황당한, 동시에 분노한 눈빛으로 텔로리안을 노려봤다. 만일 높으신 분이 아니었다면 면전에 주먹을 날렸으리라.
"누가 신경이나 쓴답니까?!"
"어머님만 구해주시면 됩니다! 해주세요!"
"업보는 당신들도 함께 나눠지게 될거요."
텔로리안이 경고했다.
"그래도 받아들이겠소?"
"업보?"
젊은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괴물을 죽이는게 업보라면 짊어지겠습니다!"
"그럼."
노부인의 이마에 손을 얹어서 그녀를 잠재웠다. 정신의 로어를 이용한 주문이었다.
"·········"
"·········"
숨막히는 침묵이 수술실을 채웠지만 텔로리안의 행동에는 멈춤이 없었다. 단도의 형태를 취한 마력칼날을 소환하여 노부인의 복부를 적절히 개복했다. 비전의 로어를 사용한 주문인지라 감염이나 부작용의 우려가 없었다.
"끼엑?"
노부인의 뱃속에선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건 폐경기 여성에게 생겨날 리가 없는, 생겨나선 안되는 태반에서, 탯줄을 통해 모체의 생명을 빨아먹고 있었다. 기생충처럼.
"············"
멈칫.
자문해본다.
'옳은 일인가?'
모른다.
'필요한 일인가?'
그렇다.
'해야겠군.'
탯줄을 끊으려 시도하자, 그것이 완성되지 않은 눈동자를 번득이면서 위압적인 시선을 내보였다. 또한 손톱도 칼날처럼 날카로워진다.
"·········"
그것을 재우고.
탯줄을 끊어서.
세상에 꺼낸다.
"뒷수습은 부탁하지."
"오냐."
은빛의 여사제가 손에서 치유의 빛을 뿜어내자 환자의 상처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또한 기운도 돌아와서 호흡도 안정되었기에, 겉보기엔 자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끝났소."
"우웨에엑!"
무표정한 텔로리안과 다르게 보호자들은 졸도하거나 구토했다. 경비병들을 불러서 그들을 내보내고, 냉기의 로어를 이용한 청결 마법으로 수술실을 집도가능한 환경으로 되돌린다.
"다음 환자."
절규하는 여인들이 끊임없이 수술실로 밀려왔다. 그들은 대부분 정신이 나가있었고, 보호자도 분개해서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윤리적 판단은 동일했다.
[연구진전 : 저주받은 혈통]
[데몬스폰 제거시술을 수행함!]
[연구단서 1/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3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44]
모든 집도는 성공적으로 끝났으며, 어떠한 환자도 목숨을 잃거나 영구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기분이 더러웠다.
"·········"
간만에 스승님의 파이프담배를 소환해서 입에 물었고, 얼굴도 찡그려 언제나 무감정하던 표정도 탈피했다.
"고생이 많구나."
"당신이야말로."
"신이야 원래 온갖 일을 들어주는 사람이고."
은빛뱀이 관장하던 영역은 전쟁과 지혜, 그리고 별빛이었다. 의술은 지혜에 속하는 영역이므로, 은빛뱀도 굉장한 조예가 있었다.
"그것들은?"
"공동묘지에 매장할 계획이었지만 교단측에서 거부하더군. 그래서 수장(獸葬, 야수에 의한 장례식)을 택했다. 카람샨의 방식이지."
·········
"그것들이 나를 저주하겠군."
"저주받는 입장엔 익숙하지 않더냐?"
"당신도 위로와는 동떨어진 사람이군."
"위로는 치유의 여신에게 찾아보거라."
신은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하긴 그래서 신이겠지만.
"다만 이렇게 말해줄순 있겠지."
"·········"
"본신은 우유부단하게 행동해 일을 그르치는 인간보단, 필요한 일을 행하는 인간을 총애한다. 그게 진정으로 용기 있는 일이니까."
신실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오늘날의 사람들과 다르게, 고대의 사람들은 용기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다. 야생적인 세계에선 용감한 자들만이 공동체를 구해냈기 때문이리라.
"용기 있는 자들은 언제나 타인에게 저주받는다. 그러니 타인의 저주에 개의치 말아라. 본신은 네가 제대로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
"너무 지나친 방식은 아니겠소?"
"카람샨의 대사원에는 본신을 조각해둔 대문이 있었다. 앞면에는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뒷면에는 본신의 진체를 조각했지."
전면엔 숭배하고 싶어지는 미인을.
뒷면엔 숭배하지 않으면 안되는 마수를.
"본신만이 아니었다. 카람샨의 신들은 인간의 모습과 야수의 형상을 모두 지녔다. 그렇기에 평시에 신들을 흠숭하러 찾아오던 이들은, 신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목도하고 숭배했지."
하지만 전쟁과 재난이 닥쳐오면 전면과 뒷면이 바뀌었다. 동시에 왕좌에 앉아있던 신들도 무시무시한 야성을 드러냈다.
"난세의 법도와 치세의 법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너도 이런 사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방법에 거리낌이 없는 거겠지."
종말이 다가오는 세계에선 그에 걸맞는 해법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은 그러한 해법을 내어놓기에 적절한 인물이었고.
"충분한 위로가 되었길 바란다."
"·········"
"그럼 쉬어라."
아엘타나르는 자리를 떠났고 텔로리안은 휴식했다. 어찌되었든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었고, 살아있는 사람은 앞으로 전진해야했다.
"여어."
리안칼이었다.
"혼자 있고 싶다만."
"알아. 아는데······"
리안칼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부부가 너를 불러."
"·········제일 중요한 수술이 남았군."
얼굴에서 피로감을 지워내고 영주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개인실이 아니라 으슥한 장소에 마련된 비밀방이었다.
"텔로리안 선생님."
"코트네이 백작 각하."
"·········"
코트네이 백작은 매우 음울한 표정이었다. 리안칼의 도움을 받아서 부인을 제때 구출하는 일에는 성공했다. 어쩌면 제때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구출이 지연됐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부정적으로 변했을 것이다.
"아내가 악마의 씨앗으로 잉태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거해드리죠."
의술(醫術)은 전통적으로 성직자들의 영역이었다. 특히 마법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서부에선, 마법사에게 치료를 맡기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태양신의 성직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태아를 제거하지 못한다. 영아살해는 태양신에게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는 대죄니까.'
평신도가 대죄를 범하면 참회의 기회라도 있지만, 태양신은 사제에겐 더욱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애초에 삶의 전부를 태양신에게 바치기로 맹세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한데.
사제가 아님에도.
이러한 결정을 내린 자들이 있었다.
"경위가 어쨌든 아이를 죽일 순 없습니다."
"부인께서도 동의하신 결정입니까?"
끄덕.
"맞습니다."
"그렇다면 출산준비를 해야겠군요."
"예. 출산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출산은 본래도 고된 일이지만, 악마의 아이들을 출산하는 절차는 그보다 훨씬 고되고 위험했다. 그것들은 모체의 생명력을 충분히 흡수하면, 배를 찢고 나와서 모체를 잡아먹으니.
"내가 아는 과정과는 대단히 다른데."
리안칼이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악마의 자식도 급이 있다."
"·········"
"너도 알겠지만 데빌과 인간의 결합에서 탄생한 혼혈은 캄비온(Cambion)처럼 근사한 이름으로 불리지. 지옥혈통에서 비롯되는 힘과 불멸성도 함께 물려받고."
캄비온은 주로 결혼과 계약을 통해서 탄생한다. 때문에 양육과정에서도 데빌들이 부모흉내는 내어준다.
'솔직히 리안칼은 헬수저다.'
리안칼은 동의하지 못할테지만 녀석의 부모운은 중세랜드 기준으론 상당히 괜찮았다.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그야말로 그림에 박아둔듯한 모범적인 가정이다.
"하지만 데몬스폰들은 다르다."
데몬스폰은 데몬들의 자손을 뜻하는 멸칭이었다. 하다못해 명확한 학술용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학자들조차 데몬이 남긴 찌꺼기들을 존중해줄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몬스폰들은 대체로 강압적인 성관계나 위험천만한 유혹을 통해 탄생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필멸자 부모를 잃어버린다."
이후로 데몬측 부모는 아이들을 잔혹하게 혹사하며 노예로 부려먹는다. 아무래도 데빌들에 비해선 책임감이 떨어지는 것이다.
"·········"
리안칼은 텔로리안의 설명에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우주에서 제일 불운한 존재라고 생각하던 귀공자가, 지하실 밑에는 심연이 있단 사실을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렇게까지 악독해질 이유가 뭐지?"
그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비록 필멸자와의 자식이라도 일단 자식이잖나? 훌륭히 키워내면 충직하고 유능한 하수인이 생기는 것인데······도대체 어째서?"
충직하고 유능한 하수인.
데빌들이 자식을 바라보는 시선.
"너희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던 존재는?"
"천상의 제왕과 놈을 따르는 위선자들."
"이유는?"
"우주 정복의 최대 걸림돌이니까."
"심연의 여왕이 제일 미워하는 존재는?"
"············"
"행복한 일반인이다."
19. 열아홉번째 연구 - 저주받은 혈통(3)
"반갑습니다. 아델레이드 백작부인."
"당신이 잿빛현자시군요."
침상에 누워있는 백작부인은 기품있는 사람이었다. 명문가의 여식이란 단어를 현실에 그대로 옮겨둔 사람.
"손님을 대접해야하는데, 보시다시피 제가 몸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끄덕.
"출산을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데몬스폰의 출산을 원하는 산모는 아무도 없다. 때문에 대부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배를 뚫고 나온 데몬스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데몬스폰도 자식이라 부를 수 있다면, 어미를 잡아먹으며 탄생하는 자식인 셈이다.
"무결한 생명은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까요."
"············"
데몬스폰은 사악한 의도를 통해 탄생한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데몬스폰들은 존재 자체로 악인가? 아니면 아이는 아이일 뿐인가?
'태양신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지. 선을 모르는 존재는 갸륵히 여겨되 악을 알고도 행한 자는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라.'
코트네이 백작부부는 신앙으로 삶을 지탱해온 자들이기에, 지금같은 시련에서도 태양신의 가르침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럼 출산준비는 끝났습니다."
"오늘 벌어질 일은 비밀에 붙여주십시오."
"귀공들께서 저의 정체를 비밀에 붙여주시면 저도 수술내용을 비밀에 붙이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통이 시작되었고, 텔로리안은 마도구를 사용해 데몬스폰의 출산을 집도했다. 사람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에 사산되었던 데몬스폰들과 다르게 녀석은 사람같은 형상을 띄고 있었다.
"캬아아악!"
"자라."
"·········"
이빨을 드러낸 아이를 재우고 탯줄을 끊어내 요람에 담았다. 겉보기엔 방금전에 태어난 사내아이처럼 보인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
'운이 좋았군.'
생명의 로어를 사용해서 산모의 상처를 치료하고 수술을 마무리한다. 이걸로 산모와 아이도 모두 목숨을 구했다. 알레바흐센의 저술이 없었다면 한쪽은 위험했을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사내아인가요?"
힘겨운 과정을 끝마친 산모는 두려운 표정으로 물었다. 백작부인도 결국에는 평범한 사람이다. 남들보다 의지가 굳셀 뿐이지.
"그렇습니다."
"·········그것이 성장하면 무엇이 될까요?"
"불확실합니다."
······분위기가 빙하처럼 차가워졌다. 여기 모인 사람은 오직 다섯뿐이었다. 자신과 리안칼, 백작부부와 늙은 집사.
"녀석의 아비처럼 되어버릴 확률은?"
"절반은 됩니다."
"나머지 절반은?"
"그보단 사람다운 악당이 되겠지요."
데몬스폰들은 대체로 성년을 맞이하지 못하지만, 성년을 맞이한 경우에도 끔찍한 악인으로 살아간다. 물려받은 천성도 악한데, 세상에서 배척과 학대도 받으니까.
"여기서 끝내야겠군."
백작이 독한 눈빛으로 단검을 꺼내들었다. 경건한 신앙심을 내보이던 젊은 영주는, 직접 데몬스폰을 목도하자 분노와 모멸감으로 떨고 있었다. 머리는 아이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은 그걸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여보! 그건 태양신께서 금지하신──"
"빌어먹을 태양신! 태양신! 태양신!"
영주가 화를 냈다.
"당신에게 벌어진 불행은 모두 태양신 탓이야! 당신은 태양신이 우릴 지켜줄 거라고 말했지만, 그놈은 아무것도 안했다고!"
젊은 영주는 격노해서 부인에게 삿대질했다. 이에 백작부인은 두려움과 슬픔을 함께 느꼈다. 백작은 결코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애초에 당신이 내말대로 얌전히 성에 있었으면 놈들에게 잡혀갈 일도 없었잖아! 한데 괜히 벌레같은 빈민놈들을 돕겠다고 외진 마을까지 갔다가, 이렇게 되어버린거 아니냐고!"
·········
"빌어먹을 빈민새끼들! 우리가 얼마나 제놈들한테 잘해줬는데, 제들이 살겠다고 상전을 버리고 도망쳐?! 앞으로 기강을 똑바로 잡아야겠어!"
·········
"코트네이."
"당신도 잘한거 없어! 조용히 있어!"
"·········"
"하긴! 나도 잘한건 하나도 없지! 가주로서 단호하게 당신의 외출을 금지해야했는데······애초에 영지의 안주인이 빈민따위를 돕고자 성밖으로 나가면 안되는 것이었어. 이번에 당신을 구하려고 기사들이 얼마나 죽은지 알아?"
············
"됐어! 이건 당신의 응석을 받아준 나의 책임이야! 데몬스폰은 장작불에 산채로 태워버리고 똥통에 묻어버릴거야. 그리고 영지 전체를 샅샅이 수색해 사교도들을 모조리 태워버릴거야! 알고도 묵인하던 놈들까지 싸그리!"
섬뜩한 표정의 코트네이가 데몬스폰에게 다가섰다. 이런 행위로 지옥에 떨어져야한다면 지옥에 떨어지리라. 차라리 그게 좋아보인다. 무능한 천상보다는 무자비한 지옥이 가문을 지키기에 적합한 후원자일지도.
"지옥에 투항하겠다고?'
그때.
리안칼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결코 현명한 생각이 아니야. 친구."
"당신네 천상의 위선에는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울분에 차오른 코트네이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들은 언제나 의롭게 살아야한다고 가르치고 뒤따르는 고통은 모른척하지! 그게 정말로 의로움이 맞는가?!"
발언이 이어진다.
"이제 알겠군! 약자들을 보살피라는 태양신은 위선적이거나 순진한 것이다! 오로지 무자비하고 철두철미한 지옥제왕만이 평화를───"
그때.
백작부인이 창가로 몸을 던졌다.
"아델───?!?!?!"
성에서 추락한 백작부인은 목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됐다. 그녀는 사지가 기괴하게 뒤틀린 시체가 되었다.
"·········어?"
본래는.
그래야할 미래선이었다.
"안심하시오. 완전히 무사하니까."
"·········"
백작부인은 사지가 온전히 붙어서 은빛여사제의 품에 안겨있었다. 아엘타나르는 백작부인이 무사하단 텔레파시를 보내주었다.
"아이는 우리가 데려가겠소."
"저건 아이가 아니야!"
백작이 울부짖었다.
"정화해 마땅한 흉물일 뿐이지!"
"············"
"악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공격해오는데 우린 항상 정의를 따져가며 싸워야하지! 빌어먹을! 이게 말이 되는가!"
일행은 특별한 답변을 내어놓지 않았다. 그건 스스로 풀어야할 숙제라고 생각했으니까.
"대답해!"
백작이 소리쳤다.
"당신들은 천상의 사자잖아!"
"그렇다면 정의를 무시해도 좋아."
"······뭐라고?'
리안칼의 차분한 대답에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기사, 그것도 천상에서 파견된 강대한 성기사가 저러한 대답을?
"하지만 악마는 되지 말자고."
"·········"
"악하게 살아도 좋고 선하게 살아도 좋아. 하지만 인간으로 남아."
터벅.
터벅.
"참."
리안칼이 뒤를 돌아봤다.
"조만간 또다른 악마들이 찾아올거야."
"·········"
"놈들은 영혼을 바치면 복수를 이뤄낼 힘을 주겠다고 제안할거야. 하지만 무조건 거절해야해. 놈들은 당신에서 끝내지 않거든."
그건.
데빌들의 수법.
"당신이 영혼을 내어주면 놈들은 당신의 아내와 부모를 찾아갈거야. 당신이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 됐는데, 그런 운명을 피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테지."
·········
"이제 정신이 번쩍들지?"
"·········"
"악마는 악마일 뿐이야. 명심해."
성을 빠져나온 리안칼은 과거의 행실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그건 계약이나 거래로 포장할 수 없는······명백한 악행이었다.
[리안칼을 각성시켰습니다!]
[Lv50크루세이더 ->Lv51 세크리드 디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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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너의 잘못을 알겠느냐?'
'그렇다고 참회하겠다는건 아니요. 할배.'
리안칼은 잊혀진 성왕과 대화했다.
'단지 악행임을 인정했을 뿐이오.'
'네가 했던 악행들은 데몬들의 악행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찌 보면 훨씬 악질이고 위험하지.'
데몬은 한눈에 보아도 위험한 존재임이 보인다. 하지만 데빌은 겉보기에는 근사하기에 위험이 경시된다.
'그것이 태양신께서 심연보다 지옥을 치명적인 위협으로 선언하신 이유다. 데몬들의 악행은 잔인하지만 치명적이지 못하다.'
이에.
리안칼이 냉소를 머금었다.
'그건 텔로리안이나 지껄일 소리잖소.'
그리고 냉소는.
분노로 바뀐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실은 무고한 사람들이 악마들에게 고통받았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영영 고통에서 회복되지 못하리라는 점이오. 징벌이 필요하오.'
이에.
성왕이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웃어보였다.
'드디어 성기사다워졌구나.'
'·········'
'약자에 대한 공감이야말로 진정한 고결함이다. 그게 천상의 제왕과 지옥의 제왕을 구분하는 차이지.'
천상제왕도 지옥제왕처럼 엄격한 율법을 강조한다. 하지만 율법의 목적은 다르다.
'너도 천상의 미덕을 받아들이는 중이구나. 아이야.'
이에 리안칼은 기분이 나빠져서 할배와의 대화를 종료했다. 지옥제왕의 아들이 천상으로 승천하려면, 아직도 많은 수양이 필요할 것이다.
"너는 그걸 일일이 적고 있냐?"
"기록은 로어마스터의 의무니까."
"음침한 새끼."
기록을 마치고 저택의 응접실로 향했다. 저녁당번 리안칼이 준비해둔 감자탕이 자신을 맞이했다.
"오늘도 감자인가?"
"꼬우면 처먹질 말든가······"
"감자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악마가 분명하군. 역시 지옥의 식성은 속이질 못해."
그들은 일부러 실없는 대화를 나누어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해가 저물고 새빨간 포도주로 목구멍을 적시자······본심이 흘러나왔다.
"카타콤에 공장이 있었어."
그게.
리안칼이 보았던 것.
"데몬스폰들을 만드는 공장이."
"············"
"게헨나를 통치하던 나조차 그렇게 혐오스러운 공장은 구상한 적도 없었다."
리안칼이 무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구해낸 인원은 잡혀간 인원의 절반에 불과해. 카타콤은 지하통로를 통해서 또다른 카타콤으로 이어져있더군. 그곳에 또다른 공장이 있겠지."
······
"카타콤에 살던 데몬과 사교도들은 싸우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약했다. 하지만 인질을 잡고서 싸우더군."
덕분에 리안칼과 함께 갔던 기사들이 많이 죽었다. 고결한 이들은 여성이나 아이가 잡혀있으면 칼끝이 느려졌으니까.
"그리고 데몬들은 궁지에 몰리면 도망치는 대신에 인질들을 고통스럽게 죽였다. 악행이 놈들이 태어난 의미라도 되는 것처럼······"
데몬들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행복한 사람들을 증오한다.
"네가 함께 갔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
"어째서 함께 데몬들을 소탕하러 가지 않았지? 네가 있었다면 희생이 줄었을텐데."
리안칼이 물기가 가득한 눈망울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이에 녀석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내가 갔다면 오히려 희생이 늘었을 것이다."
"?"
"나는 인질극에는 광역마법으로 답하니까."
"미친 놈."
"마법에 휩쓸려죽으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던 것이고, 살아남으면 운이 좋은 것이지."
벌컥벌컥!
리안칼이 황당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봤다.
"그게 뭐하는 짓이냐?"
"그럼 전투원이 인질을 보호하면서 싸우다가 살해당하면, 인질범이 정성을 가륵히 여겨서 인질이라도 살려줄까?"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놈은 언제나 그랬지만.
"그건 아니지."
"알고 있구만."
"하지만 인질의 입장도 생각해봐야한다."
리안칼의 눈빛은 진지했다.
녀석도 성기사다워진 것이다.
"아델레이드 백작부인도 자신이 인질이 되라라고 생각치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다. 그걸 망각하면 안된다."
즐거운 기분으로 논쟁을 이어갔다. 악마대공에게 인질의 가치를 강의받는 경험은 이색적이었으니까.
* * *
다음날 아침.
사교도가 마법저택을 찾아왔다.
"하하하! 멍청한 놈들!"
"?"
"마법사여! 네놈의 동료는 납치되었다!"
두리번.
두리번.
리안칼은 서재에서 경전을 읽고 있었다.
"할배는 어디 갔나?"
"검집에서 주무신다."
씨익.
사교도가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를 졸졸 따라다니는 은발의 예쁜이가 있지 않더냐? 오늘 새벽에 병자들을 돌보러 나올때 최면마법을 시전했더니, 자신이 처할 운명도 모르고 순순히 따라오더군!"
클클클!
"이미 그년은 카타콤의 가장 깊숙한 감옥에 수감되었다! 아직까진 신사적으로 대해줬다만, 네가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저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구만.
19. 열아홉번째 연구 - 저주받은 혈통(4)
서부는 빛과 어둠이 명백하게 나뉘는 땅이었다. 양지에선 교황청을 중심으로 태양신 교단이 위세를 떨치나, 음지에선 금지된 마법을 사용하는 말레피카들과 심연을 숭배하는 사교도들이 들끓었으니까.
'카타콤이 놀랍도록 정교하군.'
때문에 사교도들은 저주받은 지하생물들을 동원해서, 태양빛이 닿지 못하는 지하에 도시를 구축했다. 이걸 카타콤이라고 불렀다.
'보통 데몬들은 정교한 도시를 설계할 지적역량이 없지만, 염소군주는 금단의 흑마술을 습득해서 카타콤의 설계와 축성에 성공했지.'
덕분에 사교도들은 교황청의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미로같은 카타콤에 힘입어 세력을 확장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카타콤으로 납치해가면 구출할 방법이 전무했으니까.
'단순히 카타콤을 공격해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워낙에 미로처럼 얽힌 곳이거든.'
카타콤 공략의 핵심은 전투 난이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카타콤의 데몬들은 전투력은 약한 편이지만, 전투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지하미로를 통해 달아나는게 문제였다.
'카타콤에는 무엇보다 염소군주의 권능이 걸려있어서, 침입자들은 자연스레 미로에 빠져버린다. 겹겹이 설치된 함정과 가디언을 상대하다보면 자연스레 시간이 지체되지.'
결론.
카타콤을 무너뜨리려면 염소군주를 제거해야한다. 그렇지만 염소군주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성격인지라, 전투 자체를 회피해버린다.
'그래서 은빛뱀을 보냈지.'
패밀리어를 통해서 지켜보자.
결과가 예상대로 흘러갈건지.
* * *
카타콤에선 상세한 내용을 서술하기에 부적절한 제의들이 반복적으로 수행지고 있었다. 다만 제의의 성격은 크게 보아서 셋으로 나뉘었다. 관능적. 폭력적. 기괴함.
'모두 삶을 모욕하려는 의도다.'
카타콤의 사교도와 데몬들은 존중받아 마땅한 가치들과 용납되지 못하는 생각을 하나로 뒤섞어서 뒤틀린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카타콤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4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 46]
때문에 사교도들은 아엘타나르에게 카타콤의 상층부를 샅샅이 보여주었다. 심연의 광기를 보여주어 그녀를 위압하려는 심산이었다.
"크크크! 어떠냐? 예쁜아?"
"음."
하지만 공유되는 시야를 통해서 카타콤을 엿보고 얼굴을 찌푸린 텔로리안과 다르게, 아엘타나르는 밋밋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이게 끝이냐?"
"············?"
지구인의 시각에서 오늘날의 시네어인들은 미개한 야만인들이다. 그렇다면 고대의 시네어인들은······인간보다 짐승에 가까웠으라.
"보다 자극적인걸 보여다오."
"·········?"
"검투경기를 치른다면 이보다 훨씬 크고 웅장해야지! 또한 검투장의 볼거리도 지금보다 다채롭고 신선해야한다!"
사교도들은 여사제의 반응에 당황했다. 태양신의 수녀들에게 검투장을 보여주면 두려움에 떨면서 도덕적인 질타를 하는게 일반적인데?
"또한 너희들의 노예관리법도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힘 좋은 노예들은 휴식을 주어야 재활용이 가능하고, 가임기 노예들은 소중히 다뤄줘야 재산이 불어날텐데. 쯧쯧쯧."
뭔가,
뭔가가 이상했다······
"기본도 못하는 모질이들을 신도라고 데리고 있는 년이 불쌍하구나. 그러니 천상에서 쫓겨나서 심연에서 궁상이나 떠는 걸테지만······"
사교도들은 아엘타나르의 당당함에 눈을 깜빡였다. 상대의 눈빛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었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년 뭐야?'
'상황파악이 안되는 모양인데?'
'우리가 제대로 손봐줄까?'
'그러다 죽으면 우리도 죽어.'
'그러면 감독관님께 데려가자.'
이에 사교도들은 아엘타나르를 감독관에게 데려갔다. 감독관은 데몬처럼 피부가 붉은 중년여성으로, 잡혀온 여성포로들을 용도에 맞추어 분류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노예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감히 심연의 여왕님을 조롱했습니다."
"오호."
조그마한 반항도 엄중히 처벌하는 지옥제왕과 달리, 심연여왕은 노골적인 반역도 유흥으로 여겼다. 반역자를 제압해서 절대적인 복종을 받아내는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으니까.
"예쁜이가 특등품이었군."
"특등품이요?"
"똑똑히 들어라. 상급 데몬들께서 좋아하시는 제물은 제일 아름다운 포로가 아니다. 저항정신이 가득한 반항아들이지."
감독관은 아엘타나르를 벗겨놓고 가치를 처음부터 재평가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육체와 영혼의 순결함. 강력한 성력. 무엇보다 잡혀와서도 데몬들을 경멸하는 배짱과 용기.
"이런 제물을 용케 손대지 않고 데려왔군."
"헤헤.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요."
"심연을 모시는 너희들의 신앙심이 가륵하구나. 포상으로 너희도 위대한 존재로 거듭날 기회를 주겠다! 이것을 마시도록."
감독관은 자주색 핏물이 일렁이는 포션을 내밀었다. 신도들은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버렸지만, 그들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으어어어어억!"
"캬아아아아아악!"
"쯧쯧. 부적격자였군."
데몬혈청을 들이킨 신도들은 괴물로 변이되었다. 혓바닥은 사타구니에 닿을만큼 길어졌으며 머리카락은 촉수가 되었다. 몸은 풍선처럼 커졌고, 민감한 부위들은 여성적 특징과 남성적 특징을 동시에 띄게 되었다.
"이것들은 데몬스폰 공장으로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감독관이시여."
변이된 신자들은 인간도 악마도 아닌 혐오체였다. 그들은 데몬스폰을 낳는 종마이자 씨받이로 사용되다가 삶을 마감하리라.
"따라와라. 제물아."
"알았다."
"알았다?"
킥킥.
감독관은 냉소를 지었다.
"죽여달라고 사정하게 될거다."
"기대해보마."
감독관은 아엘타나르를 카타콤의 하층으로 데려갔다. 본래는 복잡한 미로를 돌파하고 끊임없이 몰려오는 악마들을 상대하는 구간이지만, 그러한 절차는 모조리 생략되었다.
'카타콤의 하층에는 볼거리가 있을까?'
뱀신은 신도들에게 화신체를 선물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100년간의 기도를 통해서 빚어졌던 강력하고 신성한 육신이었다.
'본신이 화신체에 깃들었던 날에는 역사상 최고의 검투시합이 열렸지. 서쪽끝과 동쪽끝의 야수들이 투기장에 풀려났고, 이름난 제왕들이 신들의 총애를 얻고자 싸웠다.'
카람샨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최고의 폭력과 관능을 보여주었다. 그건 인간의 모습으로 강림해준 최고신에게 어울리는 예우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더이상 보지 못하는 광경이었다. 때문에 카타콤에 찾아올 때까지는 느긋히 열락을 즐겨볼 생각도 있었지만······
"끄아아악!"
"꺄아아악!"
하지만 깊숙한 장소로 내려갈수록 기분이 불쾌해졌다. 데몬들은 폭력과 관능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불협화음만 발할 뿐이지.
"보다 다채로운 볼거리는 없는가?"
"볼거리를 원한다고?"
이에 감독관이 빈정거렸다.
"조만간 잔뜩 보게 될거다."
감독관이 마력석을 내밀자 아다만티움 대문이 열리며 끝없는 계단이 나타났다. 카타콤의 최하층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기대해보마."
무한해보이던 계단의 끝자락에 이르자 대단히 넓은 지하공동이 나타났다. 카타콤을 다스리는 데몬귀족들의 거주구역이었다.
"이곳에서 너를 두고 경매가 열릴 것이다."
"그래?"
"영광으로 알도록. 카타콤을 다스리는 4명의 귀족들께서 모두 관심을 보이셨으니."
감독관은 비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미래를 차례로 말해주었다. 공공화장실처럼 쓰이는 성노예, 감각과 의식은 선명하나 움직이진 못하는 살아있는 조각상, 데몬으로 변이되어 주인을 따라다니는 시종, 아침마다 산채로 잡아먹히고 저녁엔 재생이 되어버리는 식재료······
"어떤 운명을 선택하겠나?"
"데몬들은 정말로 예술성이 부족하군."
"그렇다면 풀코스로 건의해주마. 노예."
감독관은 아엘타나르의 양손을 등뒤로 모아서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의복을 갈갈이 찢어서 알몸으로 만들어, 광장의 무대로 떠밀었다.
"우와! 존나 따먹고 싶다!"
"나도 저런걸 가지고 싶은데!"
"귀족들께 바치기에 모자람이 없다!"
광장에 자리잡은 사교도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환호했다. 그들의 모욕적인 조롱에도 아엘타나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쯧쯧. 가엾은 자들이구나."
"크크. 제물이 뭐라는 거냐?"
사교도들은 삶에 희망이 없기에 자기파괴적으로 살았다. 대부분은 다른 즐거움이 있었다면, 저렇게 살지는 않았을 이들이었다.
"귀족들께서 입장하십니다!"
"기립하라!"
사교도들은 불협화음으로 구성된 소음에 가까운 노래로 데몬들을 맞이했다. 첫째로 입장한 데몬은 강력한 인큐버스였다. 그는 관능적인 몸매를 뽐내며 들어왔다.
"100만 소울코인."
"오오! 경매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200만."
둘째로 입장한 데몬은 음침한 인상의 꾀죄죄한 난쟁이였다. 하지만 눈빛에 번득이는 광기와, 살아있는 사람들을 합쳐서 만들어낸 기괴한 호위키메라들이 그것의 정체를 드러냈다.
"아무리 구멍이 예뻐도 200만은 심한데?"
인큐버스가 혀를 찼다.
"어차피 박아보면 다들 비슷한데."
"무식한 놈."
기괴한 조각가가 혀를 찼다.
"저것은 완벽한 황금의 비율을 갖춘 육신이다. 자연 상태에서 발생할 확률은 0%에 가깝지. 그리 희귀한 가능성을 뚫고서 탄생한 희귀품인데,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냐?"
셋째 데몬이 입장했다. 그녀는 귀부인 행세를 즐기는 서큐버스로, 미남미녀들을 수입해 데몬으로 양성하는 사업가였다.
"300만을 내겠어요."
촥!
귀부인이 부채를 펼쳐서 입가를 가렸다.
"저런 아이라면 서큐버스로 변이시키면 1년 안에 본전을 뽑겠어요. 인큐버스로 개조해서 개인시종으로 삼아도 한동안 즐거울테고······"
마지막 데몬귀족이 경매장에 입장할 때에는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일 강력한 데몬이었으니까.
"흠."
마지막 데몬은 걸어다니는 황소였는데 새까만 도끼를 쥐고 있었다. 치열에 덕지덕지 끼어있는 정체불명의 살점이 혐오스러웠다.
"400만."
"?!"
"간만의 별미로군! 저건 내거야!"
이에 데몬귀족들은 황소데몬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간만의 특등품인데, 그걸 먹어서 한번에 소모하는건 이기적이란 비난이었다.
먹어치워서 소모하냐는 불만이었다.
"돼지!"
"소대가리!"
"욕심쟁이!"
이에 황소데몬들이 마력을 뿜어서 위압해왔지만, 나머지 데몬귀족들도 함께 마력을 뿜어내자 황소데몬도 한발자국 물러섰다.
"이대로는 논쟁이 끝이 나지 않겠구나."
"그럼 주군께 중재를 청해는게 어떤가?'
"주군께선 미궁에서 나오지 않으실텐데?"
"사정을 설명드리면 밖으로 나오실 것이다."
"그럼 희생제의를 준비하겠다."
데몬귀족들은 각자 아껴두던 성기사들을 꺼내와서 갖은 방법으로 능욕했다. 창의적인 고문들 이어지자 성기사들은 배교와 타락을 선택했고, 이에 심연의 마법진이 활성화되었다.
"""심연여왕의 천번째 아들이자 금기를 관장하는 아크데몬! 염소군주 카르제낙트께 당신의 노예들이 강림을 청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어찌하여 불렀는가?]
마법진에 아크데몬이 강림했다. 놈의 얼굴과 다리는 염소였지만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사방을 짓누르는 무시무시한 마력이 놈의 진정한 정체를 암시했다.
"제물의 소유권을 정해주십시오."
"저희끼리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흐음.]
이에 염소군주는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50레벨에 육박하는 부관들이 소유권을 다툴 제물이라면, 특별한 제물일테지.
'내가 가져야겠군.'
염소군주는 부관들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동복형제들처럼 특별한 제물을 어머니께 공양하고 싶었지만, 불미스러운 상황을 우려해 지상에 강림하지 못하던 입장이었으니까.
'하지만 카타콤의 최심부만큼은 안전한 장소다. 이곳은 나의 허락 없이는 결코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니까······'
염소군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물을 바라봤다. 하지만 금기의 데몬로드는 제물을 보자마자 깨달아버렸다. 모든게 함정이었다고.
[겁쟁이 아크데몬을 물질계로 꾀어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4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 47]
19. 열아홉번째 연구 - 저주받은 혈통(5)
아엘타나르는 손목을 구속해둔 수갑을 간단히 뜯어냈다. 또한 그녀의 전신은 밤하늘의 별빛을 뿜어냈는데, 신성한 광채는 심연에서 올라온 존재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캬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원형광장에 모여든 관객들에게 재앙이 닥쳤다. 데몬들은 저항도 못하고 불타죽었고 사교도들은 눈이 멀었다. 이것이 여신의 아름다움을 훔쳐봤던 자들의 최후였다.
"즐거운 시간이었길 바라마."
별빛이 잦아들자 아엘타나르는 여전사로 변했다. 그녀의 전신은 가죽경갑으로 보호받고 있었고, 양손에는 푸른 차크람이 나타났다.
"그럼 대가를 받아가마."
동면에서 깨어나고 제법 시간이 흘러서, 아엘타나르는 스스로의 육신을 완벽히 다루게 되었다. 또한 에스실의 국교로 지정되면서 신도도 늘어나서, 신성도 약간이나마 회복한 상태였다. 하나의 문명을 대표하던 최고신의 시절에 비해서는 여전히 미약하지만······
'데몬들을 상대하기엔 충분하지.'
아엘타나르는 카람샨을 대표하는 영웅들을 잡아먹어 신성을 획득했다 덕분에 그녀는 위엄있는 군왕이자, 용맹한 전사였으며, 지혜로운 마법사였다. 그리고 지금은 전사의 면모를 선보일 시간이었다. 진정한 폭력의 미학을!
[마셜 아츠, 더비쉬 검무]
[댄스 오브 팔콘(Dance of Falcon)
[맹금의 발톱은 하늘을 가른다!]
은빛의 여전사는 광장을 무대로 검무를 시작했다. 아엘타나르는 관객과 무대를 자유자재로 오갔으며, 아름다운 혈선이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의 몸짓은 바람을 뚫고 내리치는 비수였고, 순간의 속도로 그려지는 예리한 곡선이었다.
아엘타나르의 움직임은 신속하지만 부드러웠다. 은빛의 머리칼이 휘날릴 때마다 아름답지만 강인한 손목이 미끄러지듯이 차크람을 휘둘렀다. 그녀의 춤사위는 겉보기에 위태로워보였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하아──!"
그녀의 육신은 대단히 날렵해서, 한번의 검무를 끝마친 뒤에도 여전히 적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덕분에 검무는 쉼없이 이어졌다.
"!"
아엘타나르는 비상하는 제비처럼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지상에 착지하기전에 다섯번을 회전했다. 첫번째 회전에서 인큐버스의 목이 날아갔고, 두번째 회전에서 난쟁이 공학자가 횡으로 쪼개졌으며, 세번째 회전에서 서큐버스가 죽었다. 네번째 회전에선 소대가리의 목을 그었고, 다섯번째 회전에서 소대가리의 미간에 차크람을 박았다.
"케흑!"
"커허헉!"
"꺄아악!"
"크아아아악!"
[카타콤 4인방을 일격에 처리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4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48]
카타콤의 통치를 담당하던 4인방이 소멸해버리자, 카타콤을 보호하던 결계도 일순간 취약해졌다. 아엘타나르는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진체를 내부로 진입시켰다.
"크롸롸롸롸롸롸롸롸롸──!"
"뭐, 뭐냐?! 으아아아악!"
몸통의 길이만 수백미터에 달하는 바실리스크가 밀폐된 지하도시에 난입했다. 이제 카타콤은 지하도시가 아니었다. 공동묘지였지.
"집결하라! 집결해서 침착히 상대하라!"
"우리의 무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너무 거대합──"
번쩍!
은빛뱀이 눈동자를 빛내자 앞을 가로막던 사교도와 하급데몬들이 모조리 돌덩이가 되었다. 중급데몬들은 석화는 저항했지만 뒤이어 날아든 산성숨결에 모조리 녹아버렸다.
"재앙! 재앙이다!"
"도망쳐! 도망쳐야한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금기의 군주시여! 저흴 보호해주소서!"
하지만 염소군주는 사교도들의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위험을 느끼자마자 텔레포트를 사용해 비밀방으로 달아났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염소군주는 비밀방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는 금기된 지식을 총망라한 흑마법사이자 심연여왕의 총애받는 천번째 아들. 사고의 속도와 깊이가 텔로리안의 절반이나 되었다.
'부관들이 카타콤의 가장 깊숙한 지하에서 알현을 청하기에 요청에 응답했다. 나를 소환한 까닭은 제물의 공평한 분배를 위해서.'
그런데 잡혀온 제물이 함정이었다. 멍청한 부관들이 제물의 정체가 검증하지 않고 자신을 부른 것이다.
'······그런데 저게 뭐지?'
상대의 정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진체와 화신체를 동시에 거느린단 점에서 신격이란 유추가 가능하나, 현세의 주요신 중에선 저러한 신격이 없었다.
'잊혀진 고대신 중에서 하나로 추정이 되는데, 고대신들은 원래 저렇게 생명력이 넘치지 못한단 말이지······'
고대신들은 오히려 악마들에게 사냥당하는 신세였다. 신도가 사라진 신격은 영락하지만, 위격 자체는 드높아 뜯어먹기에는 좋은 먹이니까.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상식을 뛰어넘은 존재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 그렇다면 상대는 상식을 뛰어넘기 충분한 통찰과 지성을 보유한 존재일터······
'그렇다면 내가 향후에 벌일법한 행동도 예측하고 선제조치를 했겠군.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행동을 택하면, 놈이 만들어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상대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반갑군. 염소군주."
"네놈이었구나! 잿빛현자!"
불경한 제사도구들과 끔찍한 용도의 포로들이 가득한 비밀방의 중심에, 잿빛망토를 휘날리는 장신의 미남자가 있었다.
"네놈이 지옥제왕을 함정에 빠뜨렸고, 이제는 데몬들에게도 선량한 계략을 획책할 생각이구나! 이런 천사같은 놈!"
분노한 염소군주가 지팡이를 들어올려서 마력을 방출했다. 놈은 65레벨에 이르는 아크데몬이었지만, 텔로리안은 염소군주보다 훨씬 강력한 아크데빌들도 상대해봤다.
"대악마치곤 너무 약하군."
때문에.
텔로리안의 얼굴에 비웃음이 묻어나왔다.
"하기야 지옥제왕의 자손들은 리안칼을 포함해도 다섯에 불과하나, 너희 어머니는 아들만 따져도 6천명이 넘어가지 않더냐?"
신격의 자손은 탄생과 동시에 부모의 힘을 나눠받지만, 자손이 많으면 상속분이 감소되듯이 자식이 많으면 나눠받는 힘도 줄어든다.
"때문에 너희 아크데몬들은 언제나 모친의 애정과 관심에 굶주려있고·········그런 총애를 얻고자 경쟁하는 입장이지. 딱하군."
손짓으로 4대 원소로 이뤄진 구체들을 만들어냈다. 이는 4대 로어를 통합한 [원소의 로어]를 사용하는 원소술사만의 기예였다.
"그럼 간만의 화력전이로군!"
"잠깐! 인질이──"
콰아아!
텔로리안의 손바닥에서 매서운 불길이 뿜어져나왔다. 염소군주는 지팡이를 휘둘러서 불길을 상단으로 휘어버렸지만, 텔로리안이 대지를 연상하자 불길은 무거운 돌덩이로 변환되어 염소군주에게 낙하했다.
"!"
콰쾅!
염소군주는 주어진 순간을 방어주문에 할당했다. 덕분에 쉴드를 펼쳐 낙석을 방어하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공격의 순간은 또다시 텔로리안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5위계, 냉기의 로어]
[프로스트 노바(Frost Nova)]
[냉기의 회오리여! 적들을 감쌀지어니!]
동시에.
또다른 주문을 캐스팅한다.
[5위계, 화염의 로어]
[플레임 스트라이크(Flame Strike)]
[불길이여! 적들의 발밑에서 솟구쳐라!]
또한 주문에 고대전승을 뒤섞어 위력을 강화했다. 상대는 아무리 약해도 대악마로 분류되는 데몬로드. 태생적인 마법저항력과 보호 주문을 뚫으려면 소모가 필요하다.
[전승을 통해서 주문을 강화합니다!]
[잔여 전승포인트: 46]
"뭣?!"
꽈앙!
냉기가 회오리치며 염소군주를 보호하던 주문을 파쇄했다. 덕분에 염소군주는 반응이 느려졌고, 발밑에서 솟구치는 화염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커흑!"
불길에 직격당한 염소군주는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무시무시한 흑마법을 준비했다. 제물들의 생명을 매개체로 사용하는 흑마술──
"파이어볼!"
이에 텔로리안은 화염구를 던져서 제물들을 몰살시켰다. 3위계의 주문에 불과해 염소군주에게 피해를 주기엔 모자랐지만, 평범한 인간들을 죽이기엔 넘쳐나는 위력!
"네놈! 뭐하는 짓이냐!"
이에.
주문시전이 끊긴 염소군주가 씩씩거렸다.
"같은 인간을 죽이다니!"
"어차피 죽을 목숨을 거둬줬을 뿐이다."
덕분에 텔로리안은 다시 공격할 순간을 얻어서 폭격기처럼 화염을 쏟아냈다. 이에 염소군주도 흑마법으로 받아쳤지만, 전투가 지속될수록 전황은 염소군주에게 불리해졌다.
"비겁한 놈! 무방비한 제물들을 죽이다니!"
불길이 솟구칠 때마다 제물들이 타올랐고, 그때마다 염소군주의 보호 주문은 취약해졌다. 흑마법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대가로 바쳐야 제대로 위력이 나오는 까닭이었다.
"너는 잡혀간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느냐?!"
"잡아간 놈들이 따질 말은 아니라고 본다만."
위잉!
전격의 구체들을 염소군주에게 쏟아냈다. 텔로리안은 원소마법의 달인이었고, 때문에 위력적인 주문들을 신속히 쏟아낼 수 있었다. 염소군주는 제물들과 자신을 보호하느라 급급했지만, 상대가 마나가 떨어지리라는 희망으로 견뎌냈다.
'인간이 어떻게 마력이 끊이질 않지?!'
······하지만 아무리 버텨봐도 텔로리안의 주문공세가 끝나지 않았다. 육중한 돌덩이가 실드를 파쇄하고, 천장에서 불길이 쏟아지고 얼음창이 쇄도했으며, 바람으로 이뤄진 칼날이 들이닥쳤다. 이러한 주문들을 막아내면 다시 같은 조합의 주문들이 날아들었다.
'제길! 인간 마법사들은 아무리 학식이 깊어도, 마력의 한계에 한계가 뚜렷하거늘!'
그래서 인간 마법사들은 하나의 주문조차 신중히 사용해야하는데, 놈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주문을 폭풍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이대로면 막다가 끝난다!'
결단을 내린다.
공세로 전환한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자신은 데몬로드이므로 마법 몇대는 맞아줄 맷집이 된다. 반면 나약한 필멸자는 주문에 적중한다면 절명하리라!
"아득히 깊은 무한의 심연이여!"
염소군주는 공격주문을 영창하고자 쉴드를 해제했다. 그것은 특정한 공간을 통째로 심연으로 날려버리는 흑마법!
"심연여왕의 천번째 아들, 데몬로드 카르제낙트가 무한의 심연에 고한다! 이곳에 너의 절망을 알지 못하는 순수한 영혼이 있으니,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보여주너라!"
[9위계, 심연의 로어]
[어비설 어드밴트(Abyssal Advent)]
[목도하라! 그리고 절망하라!]
텔로리안이 딛고 있던 바닥이 움푹 꺼지면서 심연이 나타났다. 그것은 아가리를 벌린 어둠이자 끝없는 층계로 이뤄진 동굴이었다. 각각의 층계엔 송곳니를 드러낸 데몬들이 가득했는데, 놈들은 군침을 흘리면서 희생자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심연에서 반복적으로 메아리치는 정체불명의 비명은 희생자의 운명을 예고했다.
"건방진 필멸의 마법사야!"
염소군주가 웃음을 터뜨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제일 사랑해주시는 부위다.
"이제 네가 무엇을 거역했는지 이제야 깨닫겠느냐! 끝없는 절망을 목도하고 진리를 깨달아라! 심연의 무한한 공포 앞에서 너희의 존재는 벌레의 발톱만도 못할 뿐이다!"
이것은 희생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주문이었다. 만일 희생자가 심연의 광경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심연은 희생자를 끌어당겨서 가장 깊은 층계에 던져버린다. 심연여왕의 먹이로 배달되는 운명을 맞이하는 것이다.
"·········"
그러나.
로어마스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심연은 이런 장소였구나."
[신규로어습득 : 심연의 로어]
[잔여 전승포인트 : 31]
"깨달음을 얻게 해주어 고맙다."
19. 열아홉번째 연구 - 저주받은 혈통(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