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3

6. 여섯번째 연구 : 대족장 벨칸(6)

대족장 벨칸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도저히 믿지 못했다. 진홍빛의 귀공자는 게헨나를 다스리는 루시펠레스 대공. 일곱지옥의 4왕자이자 데빌들을 통틀어 손꼽히는 강자였다.

'그런 존재를 제약도 없이 소환했다고?'

물론 진신이 아니라 분신이겠지. 그것도 말재주로 필멸자를 유혹해서 악의 길에 빠지게 만드는 분신이므로 전투력은 대악마치고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리라.

'그래도 우리들보다는 훨씬 강할 것이다. 대악마들은 반신과 동격의 존재들이니까.'

당장 울려퍼지는 불경한 합창곡이 굉장한 중압감을 전달했다. 공부가 깊은 벨칸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데빌들은 합당한 사유가 있어야만 필멸자들을 죽일 수 있음을.

'하지만 거인이 준법정신을 지녔다고 벌레가 안심할 수 있던가?'

벨칸은 수많은 정령들을 만나왔지만 루시펠레스만큼 강력한 정령은 만나지 못했다. 한데 텔로리안은 무심한 태도로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을 뿐이었다. 기이했다.

"루시펠레스."

말한다.

잿빛현자가.

"말해라. 친우여."

강대한.

대악마를 향해서.

"브금 꺼라."

응?

"브금?"

"눈치껏 알아들어라."

"너무하군! 수년을 공들여서 작곡한······"

"꺼라."

"·········쯧,"

합창곡이 멈추며 벨칸을 짓누르던 지옥마력이 사라진다. 동시에 루시펠레스도 인간의 형태로 변모했다. 위압적인 악마 대공에서 매력적인 인간 귀공자의 형상으로.

"자네는 예술이 뭔지 몰라!"

"예술을 원하면 바드들이나 찾아가도록."

"인생을 정말 재미없게 사는군······"

하지만 진정 충격적인 광경은 둘이 나누는 대화였다. 잿빛현자는 게헨나의 폭군을 소꿉친구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지?'

자신은 적잖은 세월을 살았고 대륙 전역을 돌아본 노련한 여행자였다. 그럼에도 지금같은 상황은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다.

"역시 세상은 넓군······"

"데려왔습니다."

후우.

텔로리안이 연기를 내뿜는다.

"정령군주와 맞먹는 위격의 불멸자를"

"믿어도 되겠나?"

"저를 믿으신다면요."

"그렇다면 계약을 맺겠네."

데빌은 계약의 악마. 합당한 대가만 주어진다면 정령군주들을 대신해 하르가쉬를 불러오는 이적도 가능할테지.

"후후."

루시펠레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가로 무엇을 지불할테냐? 노예장아."

"그전에 묻고 싶은 질문이 있소."

루시펠레스의 거만한 태도에도 대족장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으로 눈을 번득이면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을 비롯한 악마들은 항상 우리 오크들을 노예라 부르더군. 오늘날 많은 동족들이 노예로 전락한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장구한 세월을 알고 있는 불멸자들이잖소?"

태양의 축복을 받은.

벨칸의 황금색 눈동자가 명료히 빛난다.

"우리 종족이 전성기에 이뤘던 찬란한 문명도 기억하고 있겠지. 그럼에도 어째서 우리 종족을 노예라고 부르는지 알고 싶소."

피식!

대악마가 비웃음을 지었다.

"진실로 알고 싶은가?"

"그렇소."

"네놈이 동의한 일이다."

킬킬!

그렇다면 알려주마!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우선. 너희 종족의 황금기는 거짓이다."

"그렇소?"

"그래. 너희 종족은 엘프들의 황금기를 끝냈지만, 너희들의 황금기는 없었다."

벨칸은 놀라지 않았다.

자신도 의심해온 부분이니까.

역사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또한 오크들은 엘프들을 증오하지."

"오랜 악연이 있으니까."

오늘날의 엘프들과 달리 고대의 엘프들은 굉장한 세력을 자랑했다. 그들은 영생에 가까운 수명과 타고난 마력재능에 힘입어 드래곤들마저 패퇴시키고 세상을 제패했다. 상고사는 전한다. 당시의 인간들은 엘프들의 막강한 군주들을 그들의 주신으로 섬겼었다고.

"우리가 그들의 전성기를 끝장냈지."

하지만.

동시에 말한다.

그들의 전성기는 오크들에게 끝장났다고.

"놈들이 우리를 노예로 삼았으니까."

때문에 여전히 상고사는 오크들에게 자랑스런 역사였다. 조상들께서 쇠사슬을 끊고 일어나 압제자들을 무너뜨린 해방의 역사였으니까.

"노예종답지않게 학식이 깊군!"

짝! 짝! 짝!

과장된 말투로 대답하는 루시펠레스.

"하지만 진실의 무게는 훨씬 가혹하다네."

입꼬리가 올라간다.

대악마의 미소는 언제나 불길하다.

"귀쟁이들이 너희들의 창조주들이다."

"!"

"귀쟁이들은 영리하고 아름다우나 강인한 종족은 아니었지. 그래서 녀석들은 육체노동을 대신해줄 노예종이 필요했다."

최초의 노예후보는 거인족이었지만 지능이 낮아서 반려되었다. 차선책은 엘프족을 섬기던 인간들이었지만 지능이 높아 반려되었다. 엘프들의 기예를 훔칠지도 몰랐으니까. 

"그때 달의 요정왕이 재밌는 제안을 했어."

"·········"

"인간과 거인을 섞어보자고."

"!"

요정왕들은 인간과 거인종의 교배를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고 성공한 사례도 별도의 종족을 만들어내기엔 충분치 않았다.

"그러자 태양의 요정왕이 제안했지."

인간과 거인은 별개의 종속군에 속해 이종교배가 어렵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수만 뽑아내서 아예 새로운 종족을 창조한다면?

"요정왕들은 실험에 성공했다."

"·········"

"마법을 사용해서 완전히 새로운 종족을 빚어내다니! 엘븐 하이 매직의 고유한 위업이었지. 드래곤들조차 기존의 생물을 진화시키는 마법에서 나아가지 못했는데! 하하하!"

벨칸의 두뇌가 멈춘다. 만일 루시펠레스의 언급이 사실이라면······자신들은 처음부터 노예로 창조되었던 존재들이었다. 오크들의 탄생에 관한 오래된 노래들은, 의도적인 은폐이거나 무지에서 탄생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들은 거인종과의 혼혈과 인간종과의 혼혈이 동시에 성립하지. 정작 인간종과 거인종은 이종교배가 성립하지 않음에도.'

정황이 맞는다.

'무엇보다.'

고개를 돌려서 텔로리안을 쳐다본다.

현자는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을뿐.

악마의 거짓말이라면 분명 반박했겠지.

[오크의 기원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레벨이 올랐습니다!]

[19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26점]

"그러니 너희는 태생부터 노예종이고 지금도 노예종인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정당한 주인인 루시펠레스 대공을 향해서 절을 바쳐라!"

껄껄껄!

루시펠레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벨칸의 멘탈이 터지길 기대하며.

"·········"

실제로 대족장의 표정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이 알던 자랑스런 역사의 근간이 부정되고, 추악한 흑역사를 마주했으니까.

"고맙소. 루시펠레스."

하지만.

결국에 벨칸은 지혜를 찾았다.

때문에 고개를 들면서 웃어보인다.

"덕분에 미지의 역사가 명백해졌소."

"·········그게 무슨 헛소리냐?"

"이제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면 되겠어."

벨칸은 학문에 전념하던 젊은 시절, 오크족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왔다. 자신들은 다른 종족들의 평가대로 충동적이고 무자비한 괴물인 것일까? 아니면 조상님들의 말씀대로 기이할 정도로 찬란한 과거를 지녔지만, 사악하고 비겁한 이종족들에게 몰락한 자들일까?

"우리가 나아가야할 길이 뭔지 알겠소."

아니었다.

오크들은 투사였다.

"최초의 선조들께서 일으키신 위대한 해방전쟁은 우리가 탄생한 의미를 찾고자 벌인 숭고한 투쟁이었던 것이오. 우리는 노예로 창조되었지만 투사로 거듭난 자유인들이오!"

늙은 주술사들이 지어냈던 찬란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 그것은 종족적 자부심을 만들고자 만들어낸 거짓 기억이었다.

하지만.

기만은 아니었다.

자손들을 위한 가르침이었다.

"우리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오."

"그래서 너희는 나와 반드시 계약을 해야──"

"우리는 파괴의 본능을 타고난 흉폭한 괴물들이 아니오! 우리의 창조자들은 그런 의도로 만들었겠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소!"

출생의 비천함.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이 스스로를 정의하게 두지만 않는다면.

"우리 오크들은 자유롭고 명예로운 투사들이 되리라! 자랑스런 긍지를 품고 영광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되리니!"

마침내.

오래된 한이 풀렸다.

"······들리는군."

동시에.

주술사로서,

새로운 경지에 오른다.

"속박된 정령군주들의 아우성이."

덕분에.

보인다.

"심연의 여왕이 정령군주를 가두어 우리와 인간의 혈투를 획책했구나. 하지만 우리는 심연의 음험한 계략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쿵!

쿵!

쿵!

벨칸은 대족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붉은 망치를 짊어지고 천막을 나섰다. 그곳엔 수십만에 이르는 사막오크들이 진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지치고 굶주리고 목말랐다.

목을 축이리라!

인간들의 피로서!

배를 채우리라!

인간들의 살점으로!

"동포들이여."

대족장의 목소리가 대기를 때린다.

"보아라."

쿠구구구구궁!

"우리가 누구인지."

대족장 벨칸이 뜨거운 하늘을 향해 왼손을 뻗어내자, 붉은색의 망치에 거대한 힘이 몰려들었다. 세찬 바람에서, 단단한 대지에서, 뜨거운 불꽃에서, 또한 바닥을 드러낸 강가가 모두의 기운을 보냈다. 그건 태초세계의 부름.

"또한 무엇에 맞서야하는지!"

쿠르릉!

콰아앙!

천지가 사방으로 찢어지며 폭풍우가 들이닥쳤다. 뜨겁던 하늘에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세찬 장마를 쏟아낸다.

"태초세계의 정령군주들이시여!"

콰아아앙!

번개가 내리친다.

"네르갈의 아들 벨칸이 정령군주들의 사자가 되길 청하나이다! 부디 제게 태초의 불꽃을 내리시어 당신들의 대행자로 임명하시거나 영혼까지 잿더미로 만드소서!"

쩍!

거대한 섬광이 내리쳤다.

분노한 주신의 투창처럼.

"우와아아아아아아앗?!"

"대족장님?!"

"하, 하늘께서 노하셨다!"

쾅!

콰콰쾅!

콰아아아아아아앙──!

"·········"

모두 말문이 멎는다.

정령들의 분노가 내리치는 광경에.

푸시시시──!

초토화된 대지에서 시커먼 연기가 천천히 걷혔다. 그곳에서 숯덩이처럼 그을린 인영이 있었다. 온몸에는 흉측한 화상이 가득했고 대족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망치는 부러졌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일어나서 똑바로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군."

오크 모양 숯덩이의 눈가에선 핏덩이가 섞인 진액이 흘러내렸는데, 한때는 안구로 불렸을 물질이었으리라.

"하지만 덕분에 더욱 많은걸 보게 되었어."

보인다.

사람들의 마음이.

정령들의 감옥이.

"폭풍이여! 번개여! 천둥이여!"

콰아앙!

하늘이 찢어지면서 타오르는 벼락이 생성되었다. 하늘의 불꽃을 쥐는 벨칸의 양손이 타오르지만, 이미 온몸이 타들어간 대족장의 육신은 하늘의 열기를 충분히 견뎌낸다.

"정령계의 적들을!"

[7위계 주문, 정령의 로어]

[천둥의 분노(Wrath of Thunder)]

"꿰뚫으라아아아아─────!"

벨칸이 내던진 벼락이 포물선을 그리며 창공을 꿰뚫는다. 돌진하는 벼락은 대기의 기운을 흡수하며 거대해지더니, 또다른 벼락으로 분리되면서 수십개의 하나의 군집을 이룬다!

"?!"

더이상 벨칸은 단순한 오크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벨칸은 정령계를 다스리는 정령군주들의 사자였고, 그렇기에 태초에 만들어진 가장 강력한 원소들을 다루고 있었다.

[당신은 벨칸을 각성시켰습니다!]

[Lv45 주술사 -> Lv55 엘더샤먼]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19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8점]

쩌적!

콰콰쾅!

덕분에 벨칸의 벼락은 정령군주들을 가두었던 심연의 결계를 부수었고, 감금에서 탈출한 정령군주들은 벨칸의 청을 들어주았다.

덕분에.

굉장한 폭우가 내린다.

태초의 생명이 담긴.

"하르가쉬! 하르가쉬가 시작되었다!"

"살았어! 우린 드디어 살았다고!"

"벨칸! 벨칸! 벨칸! 벨칸! 벨칸! 벨칸!"

사막오크들은 차오르는 오아시스를 목격하자 무기를 내던지고 옷가지를 벗어던졌다. 그들은 알몸으로 춤을 추면서 전신에 비를 뒤집어썼다. 처절한 투쟁심과 전쟁에 대한 갈증은 잊혀진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좋아.'

[연구완료 : 대족장 벨칸]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19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30점]

[연구보상을 선택하십시오!]

'계획대로.'

이제.

이번 배후를 공격할 시간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노리는 적수.

7. 일곱번째 연구 - 새로운 운명(1)

대가뭄을 해결한 벨칸은 굉장한 정치적 권위를 획득했고, 덕분에 벨칸은 정령군주들의 대행자로서 [로쉬란]에 등극했다.

"로쉬란은 뭐하는 직위지?"

"모든 오크를 이끄는 선택받은 인도자."

"대족장과는 무엇이 다르지?"

"족장들은 대족장을 존중하지만 복종할 의무는 없다. 모든 중대사안은 부족장들의 회합을 통해서 결정되니까."

예컨데.

조별과제 조장에서.

"반면 로쉬란은 회의를 열지 않는다."

"호오라."

"단지 조언을 듣고서 참고할 뿐이지."

최고경영자로 승급한 것이다.

"로쉬란을 공용어로 직역하자면 [주술사왕]이 되겠지. 그렇게 부르면 될거다."

빗줄기가 내리치는 대평원에 모여든 수십만의 오크들은, 평원의 중심에 위치한 정령의 언덕을 향해서 절을 바쳤다. 언덕의 꼭대기엔 번개를 쥐고 있는 눈먼 오크가 있었으니까.

[너는 우리를 풀어주었다.]

[간악한 심연의 여왕에게서!]

[이제 간악한 데몬들을 벌할 지어다!]

[우리들의 분노가 너와 함께할테니!]

또한 하늘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열려있었는데, 그곳엔 4대 원소를 대표하는 정령군주들의 진체(True Form)의 일부가 엿보였다. 그들이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아무리 강력한 필멸자라도 공포에 질려서 엎드릴만했다.

"흐음."

[정령군주들을 목격!]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19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32점]

단.

로어마스터에겐 아니었다.

이것조차 관찰의 대상일뿐.

[그대에게 태초의 원소를 허락한다.]

하늘에서 번개와 불꽃, 냉기와 산사태가 쏟아졌고, 4대 원소가 벨칸을 감싸며 한층 강대한 주술사로 만들었다. 

"심연을 벌하겠습니다. 정령군주들이시여!"

[[[[행동으로 보이라!]]]]

콰쾅!

정령 군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소용돌이가 사라졌다. 끝없던 장마도 그치고 절을 바치던 오크들도 주섬주섬 일어난다.

"태초 세계의 정령군주들이라······"

진홍빛 귀공자는 매끈한 턱을 만지며 닫혀가는 소용돌이를 바라봤다. 정령군주들은 부왕과 동격의 존재들. 권능의 크기로 비교하면 부왕이 압도하겠지만 고위차원(High Plane)을 다스리는 최고주권자(Supreme Sovereign)임은 똑같다. 부왕이 일곱지옥의 제왕이듯이, 정령군주들은 태초세계의 제왕들인 것이다.

"다른 최고주권자를 만나본 느낌은 어떤가?"

시네어 행성엔 물질계를 둘러싼 다양한 고위차원들이 존재한다. 고위차원은 선신과 악신, 천사와 악마, 정령들이 살아가는 고향.

"신선한 자극이었어."

이를 물질계에 비유해보면.

고위차원은 불멸자들의 국가다.

[차원학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9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33점]

"부왕만큼 드높은 존재들을 만난건."

그렇기에 최고주권자란 불멸자 국가의 수장들을 뜻한다. 필멸자들의 국가에 국력차가 존재하듯, 불멸자들의 국가도 그러한 것이다.

"그렇지만 힘의 크기는 실망스럽더군."

"그럴테지. 정령들은 이제 물질계에서 중요한 존재들로 여겨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불멸자들의 힘도 결국 필멸자들의 삶에 영향을 받는다. 고위차원의 위격은 물질계의 상태에 중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정령들이 제일 막강하던 시기는 행성에 어떠한 생명도 존재하지 않던 태고의 시대지."

하지만 지금은 수많은 생명이 번성하고, 문명이 융성하는 시대다. 작금의 물질계를 움직이는 화두는 선과 악, 질서와 혼돈을 둘러싼 투쟁이다. 4대 원소만 대표하는 정령 군주들은 병상에 누워 위대한 과거를 추억하는 늙은 제왕들과도 같다.

[불멸자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9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34점]

"이해하네. 그렇지만."

쯧.

혀를 차는 루시펠레스.

"그들은 아무리 쇠락해도 고위차원을 대표하는 최고주권자들이잖나. 한데 심연의 여왕에게 속아서 감금될 정도로 쇠락할 줄이야······"

부당한 평가였다. 심연의 여왕은 [모든 데몬들의 어머니]로서 데빌을 대표하는 [지옥의 제왕]과 맞먹는 존재. 그녀의 음모는 중견급 신격들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다. 이미 퇴물이 되어버린 정령군주들로선 버거운 상대.

"덕분에 물질계에 대혼란이 도래할 뻔잖나."

정령군주들이 태초세계에 부재하면 지금처럼 기상이변이 발생한다. 또한 지속된 기상이변은 문명을 무너뜨려 혼돈과 피의 시대를 초래했겠지. 심연의 여왕이 제일 사랑하는.

"하지만 자네가 그걸 막아냈군."

"내가 막아낸게 아닐세."

담뱃대에 불을 붙인다.

스승님이 떠오른다.

무사히 지내시려나.

"벨칸이 해낸 것이지."

"············"

루시펠레스는 고개를 돌려서 벨칸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맹안의 오크는 동포들을 향해 열정적인 연설을 토하고 있었다. 

"······종족의 비밀을 밝힐 셈이군."

오크족.

엘프족이 노예로서 만들어낸 종족.

"비천한 출생을 숨기지 않을 셈이야."

"············"

"자네는 이걸 보여주려고 나를 데려왔군."

눈치는 빠르다.

막내아들이라 그런가?

"······나는 벨칸과의 협상에서 유리함을 점하고자 오크족이 탄생한 비밀을 폭로했던 것일세. 그런데 제정신을 유지하더군! 자신의 종족이 태생적인 노예로 창조되었다는데."

게헨나의 폭군은 무거운 눈빛으로 벨칸을 바라봤다. 데빌의 오만함이 깨어진다. 필멸자에 대한 근거 없는 경멸도 흐려진다.

"자네가 해주려던 조언이 뭔지 알겠네."

동시에 깨닫는다.

인간의 혈통이 저주가 아님을.

"······나의 어머니께선 카를 대왕의 적통을 이어받은 에르보니아의 왕녀이시자 태양신을 섬기던 성녀이셨네. 당시엔 모든 인간들이 어머님의 자비로움과 신실함을 찬양하였지."

하지만 정복욕에 불타던 외조부와 외조부의 궁정마법사는 교만의 대죄를 범했다. 최후의 엘프왕국을 무너뜨리고자 일곱지옥의 제왕을 소환한 것이다. 자신들이 법조문을 통해서 제왕을 구속할 수 있다고 믿으며.

"실로 멍청한 일이었어."

지상에 강림한 지옥의 제왕은 엘프들을 간단히 학살했다. 그리고 봉사에 대한 대가를 요구했다.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인간들이 데빌들의 제왕을 상대로 기망을 시도하다니······차라리 에인션트 드래곤에게 덤볐어야지. 그건 가능성이 0은 아닌데."

루시펠레스가 서글픈 목소리로 읆조렸다.

"정말 바보같은 짓이었어······"

에르보니아인들은 일곱지옥의 제왕이 감당불가능한 대가를 요구하리라 예상했다. 왕국의 주권이나 모든 백성들의 영혼······혹은 인간의 상상력이 미치지 못하는 끔찍한 무언가.

"하지만 아버지는 의외로 소박한 요구를 하셨지."

지옥의 제왕은 대가가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스럽고 아름다운 왕녀를 향해 오른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진실된 사랑을 고백하면서 유황불의 반지를 내밀었다.

[역사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20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35점]

"······어머니에겐 선택지가 없었어."

청혼을 거절하면 지옥의 제왕은 대가를 집행할 터였다. 무엇을 대가로 요구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것이 왕녀의 마음을 자극했다.

"신앙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왕도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데빌 군주들과 사교도들이 하객으로 참석한 결혼식에서, 태양신의 수녀가 되려던 공주는 지옥의 제왕에게 스스로 입을 맞추었다. 그걸로 탄생했다. 지옥과 사돈을 맺은 필멸자 왕국이.

"그래서 데빌들은 나를 전리품의 부산물이라고 부르네."

하지만.

그것은 위장.

극한의 조롱.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캄비온의 상처받은 눈동자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일곱지옥의 데빌들은 겉으론 어머니는 지옥의 왕비로, 자신은 막내왕자로 극진히 예우했다. 그렇지만 속으론.

"······우리 모자가 얼마나 우스운 광대처럼 보였겠나? 전리품과 전리품에게서 태어난 노예가 왕비와 왕자처럼 행세하고 있으니."

데빌들은.

부조리극을 사랑한다.

"······그러한 사실에 평생 고통받아왔군."

하지만.

오크따위도 과거를 벗어던졌다.

그렇다면 게헨나를 다스리는 자신은?

"아버지는 나를 모두의 광대로 쓰고자 만드셨겠지! 하지만 나는 위대한 아버지를 쓰러뜨리고 그분의 왕좌를 계승──"

말을 끊는다.

진실을 전할 때가 됐으니.

"아니야."

"네겐 조력에 대한 넉넉한 보상을 반드시 제공하겠다! 그러니 일곱지옥을 파괴하겠단 망상은 집어치우고 찬탈을 도우라! 필멸자!"

고개를 젓는다.

"너는 광대도 노예도 아니다. 루시펠레스."

"·········해명하지 못하면 죽일 것이다."

"너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너를 진정한 후계자로 점찍었다. 다른 왕자들에겐 자신을 능가하리란 어떤 기대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

??

"······그게 무슨 궤변이냐?"

"정해진 운명을 말해주지."

본래의 세계선.

게헨나의 대공은 아버지를 쓰러뜨린다.

"······뭐?"

캄비온의 동공이 흔들린다.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그리고 모후를 만나게 되겠지."

"·········"

"하지만 모후는 너를 비난할 것이다."

어째서요?

어머니?

당신을 위해서 제가 얼마나──!

"지옥의 왕비는 지옥의 제왕을 사랑한다."

"·········뭐?"

"인간의 정신은 유한하고 데빌의 악의는 무한하지."

성인이든.

왕족이든.

인간일뿐.

"덕분에 너는 돌아버린다."

"·········"

"그래서 아버지의 시체 위에서 어머니를 강제로 범하지. 그리고 절규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될 것이다."

그것은.

지옥제왕의 정수.

"············그만!"

그만해!

제발!

더이상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탄생한 너의 아들이자 동생은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나와서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를 범하겠지."

그곳에서.

눈을 뜬다.

궁극의 악이.

"그렇게 마침내 지옥의 제왕이 인간의 육신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의를 꺾어내는 방법에 통달한 궁극의 악으로서."

그것은 필멸자가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악. 만물의 파멸을 불러올 존재다.

"완벽한 게임오버지."

"···············"

부들부들.

캄비온의 전신이 떨린다.

"말도······안 돼."

아버지잖아.

아버지잖아.

아버지란 사람이 그런걸 계획하면 안되잖아!

"상상도 해서는 안되는 짓이다!"

"그래서 지옥의 제왕인 것이지."

어떠한 악마들도 자식을 부하 이상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자식들도 부모를 상급자 이상으로 존중하지 않고.

하지만.

루시펠레스는 애정을 바란다.

그것이 사람다운 것이니까.

"그래서 네게 기회가 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너의 형제들은 말이다."

아버지의 계획을 들으면.

미친듯이 기립박수를 치겠지.

"·········"

"하지만 너는 끔찍함을 느끼잖나."

그것이.

네게 주어진 실낱같은 희망이자.

일곱지옥을 파괴할 유일한 열쇠.

"예정된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파멸을 선고받은 저주받은 운명의 왕자여. 삼라만상을 통찰하는 로어마스터로서 이르니 나의 인도를 따르거라! 그리하면 새로운 운명을 얻을 것이오, 이를 거역하면 네겐 정해진 파멸을 향해서 나아가는 미래밖에 없으리라.

[연구표본 갱신 : 게헨나의 루시펠레스]

[연구주제 : 새로운 운명을 만드십시오.]

[연구보상 : 데빌에 의한 종말트리거 제거]

* * *

얼마 뒤.

벨칸의 천막.

"고맙네. 잿빛의 선견자여."

"저야말로 조언에 따라줘서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린 서로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벨칸은 양눈이 멀었고 전신에 화상이 가득했다. 특히 번개를 쥐었던 양손은 새까맣게 타버렸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힘찼고 내뿜는 기운은 강인했다.

"정령군주들께선 내게 물질을 바라보는 눈을 가져가셨네만, 대신 영혼을 바라보는 눈을 트여주셨네. 덕분에 보이게 되었군."

또한 강해졌다.

진짜 엄청나게.

───

◆로쉬란 벨칸 (완전한 중립)

Lv55 엘더샤먼(상위직)

- 정령계의 힘

- 천리안과 미래시

- 늑대들의 축복

- 조상들의 가호

■능력치

힘 : 26

민첩 : 20

체력 : 22

지능 : 22

직감 : 30

마력 : -

■특성

- 맹인

- 황야의 군주

- 절대적 카리스마

- 불세출의 전략가

───

"자네가 어떤 미래를 보고 나를 찾아왔는지."

"그렇습니까?"

"우리 종족의 예정된 파멸을 피하게 해주었으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겠지. 그렇지만 우선은 우리가 보았던 미래를 공유해보세나."

그래야.

합당한 계획을 짤테니.

다가오는 종말에 맞설.

[연구일지 갱신!]

[새로운 연구 : 종말에 맞서는 자들]

8. 여덟번째 연구 - 바실리스크(1)

자신과 벨칸은 시네어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공유했다. 엘더샤먼에 도달한 벨칸의 통찰은 놀랍도록 정확했으나, 때때로 자신이 알던 미래선과는 다른 부분도 존재했다.

"······이걸로 나의 예언은 끝일세."

"저의 예언도 대체로 일치합니다."

"그럼 어떻게 막을지를 논해야겠군."

벨칸은 떨어진 안대를 줏어서 눈가에 둘러썼다. 이제 오크의 눈동자는 물질을 바라보지 못하나, 영혼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벨칸이.

나를 쳐다본다.

"나를 각성시키고 동족들을 구해준 공적을 논해야겠지. 자넨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맞아.

정산은 확실해야지.

"바실리스크의 서판을 주십시오."

"소유권까지 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

벨칸이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바실리스크의 서판은 야수의 로어를 익힐때 사용하는 성물로서, 신규 주술사를 교육하는데 요긴하다.

"그건 단순한 유물이 아닌 성물일세.""알고 있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흠."

벨칸은 양손을 모아 깍지를 껴보였다. 바실리스크는 대황야를 다스리는 신수로, 오랜 세월에 걸쳐서 사막오크들과 연을 맺어왔다.

다만.

불평등한 관계였다.

때때로는 사람도 바쳐야했던.

"이제 당신은 정령군주들의 사자로서 주술사왕이 되셨습니다. 이제 바실리스크에게 사람을 바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바실리스크의 서판에는 양측의 오래된 약속이 담겨있다. 사막오크들은 바실리스크에게 주기적으로 사람을 바치고, 바실리스크는 사막오크들에게 오아시스를 내어준다는 약속.

"자네가 서판을 무슨 용도로 원하는지 들려줄 수 있겠나? 자네도 알겠지만 신수와의 계약은 함부로 저버릴만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정말로 필요하면 내어줄 것이다.

종족을 파멸에서 구해준 은인이니.

"제가 바실리스크의 서판을 읽으면."

텔로리안이 차분히 답했다.

"야수의 로어를 얻겠지요?"

"그렇지."

"그럼 희귀짐승들도 길들이는게 가능해집니다. 마침 저도 패밀리어가 필요하고요."

패밀리어(Familiar)는 마법사의 정신과 연결된 짐승을 뜻하는데, 보통은 까마귀나 고양이를 길들여 애완동물이나 조수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최고의 늑대를 내어줄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성의만 받겠습니다."

"날짐승을 원하면 와이번이나 만티코어도 있다네. 혹시 지하의 짐승이 취향이라면······"

벨칸은.

추천해줬다.

다양한 생물들을

"호의는 감사하나 괜찮습니다."

허나.

텔로리안을 고개를 젓고.

"그냥 서판만 내어주시면 됩니다."

"서판과 패밀리어가 무슨 상관인가?"

"짐승을 패밀리어로 길들일때는 패밀리어의 본질과 관련된 촉매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바실리스크의 서판이 무슨······?

"어?"

자네?

설마?

"그게 맞습니다."

"자네 미쳤나?"

"제정신입니다."

"·········"

벨칸은 자각했다.

상대가 미쳤음을.

* * *

현명한 벨칸은 미친 마법사를 설득하길 신속히 포기하고 철저한 준비를 제안했다. 바실리스크는 굉장히 강력한 생물이니까.

"좋습니다."

덕분에 벨로리안은 오크족 주술사들에게만 허락된 서판들을 남김없이 탐독했다. 특히 바실리스크의 서판을 해독해 야수와 소통하는 마법을 익혔으며, 벨칸에겐 대황야의 생태계와 전설에 대한 전승까지 전수받았다.

[자연에 대한 전승 획득!]

[신화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0]

[전승포인트 +5]

[20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40점]

"받아가십시오."

"이건?"

"텔로리안의 서판입니다."

탐구를 끝낸 텔로리안은 새로운 서판을 건네주었다. 자신이 받아간 바실리스크의 서판보다 2배는 거대한 점토판.

────

◆텔로리안의 서판

: 사막오크들이 습득한 모든 전승을 집대성한 서판. 기존의 전승에서 불필요한 지식을 덜어내고, 중요한 지식은 심화연구를 시행했다.

■효과

: [야수의 로어] 습득 가능

: [사막의 지식] 습득 가능

: [오크의 전통] 습득 가능

: [유목의 전통] 습득 가능

────

[사막오크의 전승을 집대성함!]

[신규주문 : 시로코 폭풍]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20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41점]

"그나저나 도와주실게 있습니다."

"무엇이든 정성껏 돕겠네."

훙훙.

허공에 마법지팡이를 휘두른다.

[15점의 전승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신규 로어 : 바람의 로어]

[15점의 전승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신규 로어 : 냉기의 로어]

[전승포인트: 11점]

4개의 오브가 생성되어 텔로리안의 주변을 부유했다. 오브들은 각각 화염과 냉기, 공기와 대지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주술사왕께선 정령군주들의 대행자로서 4대 원소에 통달하셨지요. 이에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 가르침을 청하는 바입니다."

레벨업을 해야지.

신수를 길들이려면.

"알려주십시오."

[새로운 연구 : 원소의 결합]

[연구주제 : 4대 원소를 결합하십시오.]

[연구보상 : [원소술사] 특성을 얻습니다.]

"4대 원소를 합치는 방법을."

콰아아!

주술사왕의 발밑에서 원형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가장 단단한 암벽도 단숨에 녹일만큼 뜨거운 화염마법. 텔로리안의 것이다.

"그게 아닐세. 젊은이."

하지만 냉기의 갑옷을 두른 벨칸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걸어나왔다. 그는 정령군주들의 대행자로서 [엘더샤먼] 클래스로 전직했으니까.

"화염은 이렇게 다루는 것일세"

벨칸은 거세게 타오르는 워해머를 대지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텔로리안의 발밑에서 태고의 화산이 분출되듯 용암이 치솟았다. 

[5위계 주문, 화염의 로어]

[마그마 에럽션(Magma Eruption)]

[용암이여! 적들을 뒤덮어라!]

"!"

텔로리안은 제비같은 몸놀림(민첩 20)으로 공중에 뛰어오르며, 더블캐스팅을 사용해 남들보다 2배의 속도로 주문을 외웠다.

[3위계 주문, 비전의 로어]

[블링크(Blink)]

용암이 텔로리안의 육신을 덮치기 직전, 주문의 마지막 구절을 끝맺어 육신을 순간이동시킨다. 장소는 수십미터가 떨어진 공터.

"·········"

거리를 벌리며 벨칸의 주술을 견식해봤다. 주술은 정령들의 힘을 빌려서 사용하는 이적이고, 마법은 마나를 사용해 세계를 뒤트는 힘이므로 언뜻 보기에는 상이한 힘이다.

'하지만 그건 일반 클래스들의 이야기다.'

로어마스터와 엘더샤먼은 일반클래스가 2번 전직한 그랜드클래스(Grand Class)다. 각각 마법과 주술에 통달한 자들이 마지막에 이르는 최종전직.

'따라서 만류귀종이 성립하지.'

모든 물줄기는 결국엔 바다로 향한다는 무도가들의 격언이, 마법과 주술의 관계에서도 성립하는 것이다. 특별한 힘을 사용해 신비를 부린다는 본질은 똑같으니까.

[주술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0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12점]

"과연. 알겠습니다."

덕분에 깨달았다.

화염술을 다루는 방법을.

[화염마법 전문화가 상승합니다!]

[화염마법 전문화가 상승합니다!]

[화염마법 전문화가 한계에 도달합니다!]

[한계 돌파를 시도합니다······]

주술사왕 벨칸이 소환한 불꽃의 열기를 떠올려보았다. 굉장히 뜨거워 스쳤을뿐인데 로브의 끝자락이 그을릴 정도의 뜨거움.

'그건 태고의 용암이었다.'

어떤 생명체도 살아가지 못하던 원시의 시네어를 떠올린다. 우주를 누비던 태초룡들조차 너무나 뜨거워 정착하지 못하던 행성의 초창기에, 격렬한 지각변동이 만들어낸 틈새로 내핵의 용암들이 솟구쳤을 것이다.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생생히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지식이군.'

주문의 효과는 사용자의 경험과 지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마법사에겐 언제나 새로운 경험이 중요한 것이고.

'나는 원시 행성의 모습을 알지 못하니까.'

반면 주술사왕 벨칸은 정령군주들의 대행자로 임명받으며 태고의 시네어를 보았겠지. 먼지와 암석이 모여 기초적인 행성의 모습을 취하고, 내핵이 세차게 불길을 내뿜던 시기를!

'나는 어떻지?'

태고의 불꽃은 모른다.

내핵의 뜨거움도 모른다.

'하지만 버섯구름을 알지.'

그것은 쳐다만 보아도 눈을 멀게 만드는 파멸의 불꽃이다. 강철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숲마저 초토화시키는 권능과도 같은 힘.

'하지만 시네어의 물질은 원자가 아닌 4대 원소로 이뤄져있다. 그러므로 핵분열에 의존하지 않은 불꽃을 떠올려야한다.'

다음.

제철소의 용광로를 떠올려본다.

'충분치 않아.'

대장간보단 훨씬 뜨거울 테지만.

내핵만큼 뜨겁진 않을 것이다.

'떠올려라.'

전생과 현생의 모든 기억을 남김없이 헤집어서 최고의 불꽃을 찾아낸다. 자신의 손바닥을 지지던 스승님의 불꽃? 미지근하다.

'······찾았다.'

전생에.

있었다.

'이것이라면.'

자신은 보았다. 성채보다 무거운 쇳덩이를 머나먼 별까지 날려보내는 강력한 추진체를. 기억한다. 추진체의 동력도 열에너지였지.

'시네어에서도 재현이 가능하다.'

운반로켓의 동력은 액체산소. 액체산소는 고도의 첨단기술이 집약된 냉각시설이 요구되는 물질. 원래는 개인이 만들어낼만한 종류의 물질이 아니다만.

'나는 마법사다.'

의지를 내뿜어 대기에 흩어진 마나를 흡수한다. [바람의 로어]를 영혼을 연결해서 순수한 공기를 오른손에 불러모으고, [냉기의 로어]에 해서 공기를 극한까지 얼려버린다.

"고유주문."

촤아아아아!

오른손의 공기가 얼어붙으며 푸른색의 결정이 생겨났다. 시네어의 마법사들이 [냉기의 정수]라고 명명하는 희귀재료.

"스타라이트 파이어!"

[로어마스터의 지혜 : 주문창조]

[전승포인트가 5점 소모됩니다.]

[전승포인트: 7점]

────────

◆스타라이트 파이어(고유주문, 원소의 로어)

: 바람의 정수를 산화제로 사용한 무시무시한 불꽃입니다. 강철로 만들어진 성채를 별로 날려보내기에 충분한 힘을 지녔으며, 너무나 뜨거워 불빛의 색채가 자주색으로 보입니다.

■효과 (토글형)

해당 주문을 발동한 상태에서 시전하는 화염 주문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지닙니다.

- 마나 소모 +500%

- 시전 시간 +200%

- 주문 피해 +500%

- 화염저항 무시

- 화염면역 감쇄 (절반 피해)

────────

전생과 현생은 별개가 아님을 자각한다. 이로서 인식의 한계를 돌파한 텔로리안은 화염에 대한 본질을 새로이 마주본다. 

[한계를 돌파합니다!]

[화염술 전문화 특성이 향상됩니다!]

────

◆위력적인 원소술사

: 당신은 4대 원소를 모두 다루는 쾌거를 이루었고, 상이한 원소들을 자유자재로 융합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효과 (패시브)

원소 마법을 사용할때 다음 효과를 누립니다.

- 마나소모 –50%

- 시전시간 –50%

- 주문피해 +50%

- 주문돌파 –50%

- 전승포인트를 소모해 속성변환 가능.

────

"!"

텔로리안이 생성한 자주색 불꽃에 벨칸은 일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그건 자연에서 생성되지 못하는 인공적인 화염이었으니까.

"해냈군!"

하지만.

아직 멀었다.

"대지여. 나를 보호하라"

바람이여.

"벼락을 부르라!"

쿠르릉!

콰아아아아앙!

대지의 기운을 받아들인 벨칸의 육신은 화강암처럼 단단해졌다. 동시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쳐 전투망치에 전격을 부여한다.

"정령계를 다스리는 군주들이여!"

콰르릉!

콰아아아아──!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정령군주들이 힘을 빌려준다. 엘더샤먼은 정령들을 섬기는 대제사장이자, 정령계의 대행자이니!

"그대들의 위엄을 보여주소어어어어어──!"

[9위계, 정령의 로어]

[엘리멘탈 스트라이크(Elemental Strike)]

[정령계의 분노를 보아라!]

벨칸이 망치를 내리치자 대지가 좌우로 갈라지며 새빨간 용암이 해일처럼 솟구쳤다. 먹구름에서 벼락세례가 쏟아지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돌풍은 소용돌이를 이룬다.

"!"

텔로리안은 대자연의 분노에 위압됨을 느꼈다. 벨칸이 쏟아내는 거대한 힘은 단순한 주술이 아닌 권능이다. 정령군주들의 빌려준.

'내가 두려움을 느꼈다고?'

루시펠레스를 보면서도.

호기심을 느꼈을 뿐인데?

[초월자에 대한 공포를 배움!]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0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8점]

'이것이 벽인가?'

자신은 정령군주가 아니라 정령군주들의 대리인을 상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압도되는 기분을 느낄 정도라면······

'필멸자와 불멸자의 압도적인 격차라.'

정령군주들은 최고주권자들 사이에선 최약체들이다. 심연을 다스리는 [데몬들의 어머니]에게 속아서 모두 함정에 갇혔을 정도니까.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어쩐지.

재미가 있었다.

'동시에 흥미롭군!'

이는 컨텐츠가 한창이나 남아있다는 썩은물의 만족감이자, 신적인 존재들에게 도전하고 싶어하는 마법사의 교만함이었다.

"이쪽도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오라! 마법사여!"

콰콰콰!

마력을 발하면서!

주문을 영창한다!

[고유주문, 화염의 로어]

[스타라이트 파이어(Starlight Fire)]

[역경을 넘어 별을 향해!]

불러낸다.

별에 이르는 힘을.

[4위계, 화염의 로어]

[그레이트 파이어볼(Great Fireball)]

[만물을 잿더미로!]

그리고.

불꽃을 쏘아낸다.

[1위계, 비전의 로어]

[마나 실드(Mana Shield)]

[마나여! 나를 보호하라!]

또한 잔여마력은 보호막 생성에 전부 투입한다. 굵고 투명한 막이 자신을 둘러싼다.

"정령들의 분노를 보여주마!"

솟구치는 용암!

내리치는 벼락!

포효하는 소용돌이!

이에 맞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자주색 불꽃의 화염구는, 소용돌이를 사정없이 찢어내면서 벨칸에게 돌격한다!

"!"

벨칸은 다시금 워해머를 휘둘러 두꺼운 빙벽을 세웠다. 화염구의 열기를 잠재우고 미리 폭발을 시키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쾅!

별에 닿는 불꽃은.

역경을 관통해버린다.

"?!"

모든 것을 녹이는 열기.

별에 닿는 불꽃이 다가온다.

"정령들이시여! 저를 보호하──!"

콰아아아아앙──!

황급히 수호토템을 박으려던 벨칸의 코앞에서 자주색 화염구가 폭발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굉음이 들리고, 자주색 불길이 확산되면서 스치는 물질들을 모조리 녹여버린다.

"············"

푸쉬이이이······

불길이 만들어낸 연기가 걷히며, 반쯤 녹아버린 벨칸이 나타났다. 전신을 화강암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즉사했겠지.

"커흑······"

벨칸은 신음을 내뱉으며 텔로리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녀석의 주문에 반쯤 녹았듯이 녀석도 무사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

그런데.

잿빛현자는 무사했다.

마나쉴드만 깨졌을뿐.

"뭐냐."

경악한다.

"너의 정체는 대체 뭐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도 궁금했다. 대체 무슨 조화가 있었기에 자신이 만들었던 게임 주인공의 육신에 환생했는지. 혹은 어떻게 현대인 게이머의 기억을 지닌 로어마스터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

"그러니 찾아가야겠지요."

"·········나는 분명 자네가 지옥의 제왕에 견줄 정도로 강해지는 미래를 보았네."

복원토템의 힘으로 벨칸의 화상이 빠르게 치유되었다. 새까맣게 타버렸던 오크가 바삭함을 잃으며 천천히 치유되어간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었네. 당장 정령군주들의 대행자와 겨뤄서, 맞수를 이룰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단 말이네."

이번 싸움의 목적은 벨칸이 원소운용의 묘리를 가르쳐주는 지도대련이었다. 지금처럼 서로 생사를 넘나들면서 암벽을 부수는게 아니라.

"내가 늙은 주술사라 망정이지, 자네같은 젊은이였거나 마법사였다면 결코 인정하지 못했을거야. 평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니."

실은 벨칸도 내심 질투와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다. 주술사로서의 수양이 미래를 내다보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뿐.

"승패를 따지자면 당신이 이겼습니다."

"내가 이겼다고?"

"움직일 수 있으시지요?"

끄덕.

"저는 아닙니다."

풀썩!

제자리에 쓰러지듯 눕는다.

"남은 마나도 체력도 없습니다."

"흠?"

"여기서 육탄전을 벌이면 제가 반드시 패배합니다. 실전이었다면 그렇게 됐겠지요."

피식.

늙은이의 기분까지 고려해주는군.

역시 마음에 드는 친구야.

"괜한 말은 필요 없다네. 애초에 우리가 생사결을 해야할 사이였다면, 내가 엘더샤먼에 이르게 도와주지도 않았겠지."

이에.

텔로리안은 기분 좋게 웃어보였다.

"원래는 그럴 사이였습니다."

"그런가?"

"운명이 변한 것이지요."

본래 대족장 벨칸은 인간 주인공과 함께 하지는 못한다. 기본적인 입장이 상이해 어떤 루트를 택해도 결국엔 싸워야하니까.

하지만.

이번 세계선의 벨칸은 달라졌다.

자신의 조언을 온전히 따라줬으니.

"그건 온전히 당신의 공로입니다. 벨칸."

"·········"

"저는 지금껏 수백명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었지만, 그걸 고스란히 따르고 스스로의 것으로 소화한 사람은 당신이 유일합니다."

덕분에.

자신도 강해졌다.

벨칸의 가르침을 받아서.

[극한까지 마력을 사용해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21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9점]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벨칸이 잡아온 사막괴조를 함께 구워먹으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고, 미래에 대한 통찰을 공유한다.

"그럼 가볼까요."

"어디로?"

"본래의 목적."

나는 충분히 강해졌다.

"패밀리어를 구해야죠."

신수를 길들일만큼.

[새로운 표본 : 바실리스크]

[연구과제 : 바실리스크를 길들이십시오!]

[연구보상 : 패밀리어를 획득합니다.]

[연구 단서 0/3]

* * *

8. 여덟번째 연구 - 바실리스크(2)

나는 벨칸을 주술사왕으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식을 배웠다. 벨칸이 주술사에서 엘더샤먼으로 전직했듯, 나도 레벨이 올랐다.

'17레벨에서 20레벨이 되었지. 능력치와 클래스 능력, 개인특성을 올릴 시간이다.'

[능력치]

[체력13 -> 16]

[클래스 능력]

[화염술 전문화 8단계-> 전설의 원소술사]

마지막.

개인특성.

[아인종 친화를 얻습니다!]

[이종족 전문가로 향상됩니다!]

───

◆이종족 전문가 (특성, 희귀)

: 당신은 아인종만이 아니라 외형이 상이한 이종들과도 편안히 교류하는 친화력을 갖췄습니다. 외형의 차이로 인한 패널티가 면제됩니다. 다음 단계는 [가능충]입니다.

───

······이종족과 친해지는 특성은 더이상 발달시키면 곤란하겠다. 어쨌든 이쯤에서 나의 능력을 상태창 표기법으로 나타내보면.

──────

◆잿빛현자 텔로리안 (완전한 중립)

Lv20 로어마스터 (5위계 주문까지)

- 화염의 로어

- 냉기의 로어

- 바람의 로어

- 대지의 로어

- 비전의 로어

- 정신의 로어

- 야수의 로어

◆능력치

힘 : 10

민첩 : 20

체력 : 16

마력 : 40+++

지능 : 35++

직감 : 20

◆클래스 능력

- 주문수집가 4단계 [영웅]

- 전설적인 원소술사 [전설]

◆개인 특성

- 마법재능 5단계 [신화]

- 공부성애자 [영웅]

- 백금의 혓바닥 [영웅]

- 이종족 전문가 [희귀]

◆고유 주문

- 스타라이트 파이어

- 정신조작 (사회화, 집단화)

- 감정조작 1단계

◆연구 일지(생략)

◆퀘스트 로그(생략)

───

능력치와 로어의 개수만 따져본다면 당장 현자회의에 가입해도 되겠지. 현자 회의에 가입한 대마법사중에서도 상위권 그룹에 들테니.

'하지만 실제로 휘두르는 힘은 현자 회의의 대마법사들에 비해서 훨씬 모자라다. 알고 있는 로어만 많을 뿐이지, 깊이는 부족하니까.'

지금까진 많은 로어를 배워서 주문의 다양성을 확보했으니, 이젠 심화연구를 통해서 깊이를 확보하리라. 주요로어는 모두 배웠고.

'실은 4대 원소와 비전의 로어가 S급 로어거든. 정신의 로어와 야수의 로어는 B급 로어다. 특정한 상황에서만 유용하니까.'

우선 로어의 티어를 나누기전에 마도학 개론을 복습해봐도 좋으리라. 로어(Lore)란 마나의 근원을 지칭하는 단어로, 다원우주의 중심에 위치한 불가사의한 마나덩어리를 뜻한다.

'로어의 탄생과정에 대한 학설은 아직도 분분하다. 정설은 우주의 탄생과 함께 로어가 생겨났다는 것이지만, 그것조차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지. 게임 시절엔 고대의 마법사왕들도 밝혀내지 못했단 설정이었지.'

그럼에도 신대의 요정왕들이나 위대한 아르카디안정도는 비밀을 알았을 테지만, 지금에 와서는 나조차 알아볼 방법도 필요도 없다.

[마도학전승 습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1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9점]

어쨌든 시네어의 마법체계를 이해할때 중요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우주의 중심에는 무한한 마나로 만들어진 구체가 있으며.

'이것이 로어(Lore).'

마나 감응력이 뛰어난 지성체들은 영혼을 로어에 연결해서, 스스로의 의지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이 마법(Magic).'

하지만 인간은 타고난 지성과 마나감응력의 한계로 인해서, 마법의 잠재력을 모두 활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로어를 분야별로 쪼개어 서 이해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은 물리학 전문가나 화학 전문가는 존재해도, 모든 과학에 능통한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건 인간의 지성과 수명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과제니까.'

그럼에도.

복수의 로어를 습득하는 인간도 나온다.

'지구지성사에서 복수의 분과에서 업적을 이루는 괴수들이 나오는 경우와 비슷하지.'

[마법학전승 습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1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10점]

그런 배경에 근거해서 나의 현황을 평가하자면, 7개 분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저명한 교수와 같다. 다만 어느 분야에서도 노벨상을 수상할만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진 못했고.

'이제.'

거기서 탈피할 시간이다.

애매한 만능 캐릭터에서.

확실한 만능 캐릭터로서!

"화염과 냉기여!"

화륵!

쩌적!

오른손에 불꽃이 솟아나고 왼손에 얼음이 생겨난다. 이는 용암보다 뜨거운 구체와 서리보다 차가운 얼음창의 조합.

"공기와 대지여!"

지반을 흔들고.

공기도 모은다.

"너희는 여럿이나 본질은 하나!"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안구에서 마나광이 번득인다. 흔들림없이 주문을 완성해 각기 속성의 원소들을 하나로 뭉친다.

"이제 그대들에게 다시 결합을 명하노니!"

화염. 냉기. 공기. 대지.

만물을 구성하는 4대 원소가 허공에 함께 모여서 빛나는 구체를 빚어낸다. 대단히 불안정한 형태.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겠지.

"나의 의지에 복종하라!"

마법은.

우주를 침범하는 행위다.

마법사의 의지를 세계에 강요하는 것이니.

끼기기기깅!

결합된 4대 원소를 분리하려는 우주의 질서와 결합을 완성하려는 텔로리안의 의지가 맞선다. 본래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상황. 그러나 텔로리안은 벨칸의 주술을 통해서 보았다.

'4대 원소의 본질은 결국 하나다!'

이를 악물고 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텔로리안의 남다른 의지에 반응한 마나가 쪼개지려는 4대 원소를 강제로 붙들고.

[서로 다른 로어를 통합합니다.]

[화염, 냉기, 공기, 대지 -> 원소]

[원소의 로어를 획득합니다!]

구체는 광채를 잃고서 바닥에 서서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합을 위협하던 불안정성이 사라졌다는 증거다.

"원소 구체화."

텔로리안은 오른손을 뻗어 새로운 주문을 시전했다. 그러자 구체가 조그마한 오브(Orb)로 쪼개져 주변을 선회했다. 각각 불꽃과 냉기, 바람과 대지의 힘을 담은 구체들.

합치고.

쪼개고.

합치고.

쪼개고.

반복해본다.

"좋아! 이제 원소를 능숙히 다루게 됐군!"

"당신의 도움덕분입니다. 주술사왕 벨칸."

"원어대로 로쉬란이라고 불러주면 어떤가?"

흠.

너무 엄밀한 단어만 사용하면 

연구일지의 편의성이 떨어진다.

"필요할 때만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하하! 그거 아쉽군!"

이번에 새롭게 습득한 [원소의 로어]는 4원소의 로어를 통합해 완성한 [상위로어]다. 상위로어는 하위로어의 주문을 모두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주문에 복수의 로어를 섞어서 시전하는 특권을 누린다.

'예를 들자면.'

파이어볼!

아이스볼트!

'각기 장점이 다른 주문들이지.'

파이어볼은 높은 데미지를 입히는 광역 파괴술이고, 아이스볼트는 일인을 상대로 [얼어붙음] 디버프를 걸어주는 메즈기다.

'원소의 로어를 사용해 두 주문을 합치면.'

[3위계, 원소의 로어]

[블레이징 프로스트 (Blazing Frost)]

[태우고 얼려라!]

콰앙!

높은 화염피해를 입히면서 [얼어붙음] 디버프도 걸어버리는 광역기가 탄생한다. 물론 파이어볼보단 데미지가 낮고 아이스볼트보다 [얼어붙음]의 기간은 짧으나 다수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메즈를 걸 수 있는 주문이 된다.

'다른 4대 원소 주문들도 [위계]가 같다면, 이런 방식으로 섞어서 시전할 수 있다. 따라서 [원소의 로어]는 상위의 로어에 해당한다.'

그런고로.

현재의 자신은 무적이다.

20레벨 수준의 적들에겐.

"이곳일세."

문제는 자신이 마주할 상대는 상식을 초월하는 짐승이란 점이다. 야수가 신비를 머금어 탄생하는 존재는 환수(幻獸). 메두사나 세이렌같은 몬스터들이 환수의 카테고리에 있다.

'대단히 무섭고 위협적이지.'

이곳은 중세랜드. 길가던 불곰도 10레벨은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마나를 머금은 환수라면 평균 20레벨은 넘는다.

'20레벨이면 백작령을 대표하는 수준의 강자다. 그리고 변경에서 이름을 떨치는 철퇴백작이 25레벨이니까······

즉.

환수만 되어도 인간에겐 버거운 상대.

'하지만.'

환수는.

그래봐야 짐승일 뿐이다.

'내가 앞으로 상대할 동물은 그게 아니지.'

시네어엔 다양한 근원의 힘이 존재한다. 순수한 물리력을 뜻하는 무력, 마나의 힘을 끌어내는 마력. 그리고 신성에서 비롯된 성력.

'뒤로 갈수록 희귀한 힘이다.'

기사는 흔하고 마법사는 드물며 성인은 진귀하다. 이게 인간이 주도하는 시네어에서 나타나는 희소성이다. 

'쉽게 말해서.'

전사는 평민.

법사는 귀족.

힐러는 황족.

'덕분에 신성력 사용자는 10레벨만 되어도 성인으로 추존받지만, 무력에 의존하는 무예직들은 30레벨은 되어야 제대로 인정을 받지.'

10레벨 성직자는 20레벨 기사보다 전투력은 한참 약하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대우는 10레벨 성직자가 훨씬 좋다. 그만큼 희소하니까.

[힘에 대한 전승 습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1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11점]

'짐승의 세계도 똑같다.'

야수.

환수.

그리고.

"저곳입니까?"

"그래."

고지에 올라선 벨칸은 뜨거운 사막의 중앙을 가리켰다. 두터운 모래언덕들의 사이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문이 보인다. 바위문에는 은빛뱀이 그려져있었다.

"저곳이 대황야의 존재들에게 숭배받는 강력한 신수(神獸), 바실리스크의 신전일세."

텔로리안은 고깔모자를 눌러써 햇빛에서 얼굴을 보호하면서, 만물을 꿰뚫는 통찰안으로 바위문을 꿰뚫고 너머를 살펴보았다.

"카람샨 시대에 세워진 고대 사원이군요."

신성한 결계로 보호받는 바위문의 너머엔 고대에 지어졌을 찬란한 백색사원이 있었다. 사원의 곳곳엔 신비한 과일나무가 가득한 정원과, 마법적인 선율에 따라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모래폭포들이 있었다. 또한 폭포들은 사원의 중심에 위치한 신성한 오아시스로 흘러가 모래빛깔의 호수를 만들어냈다. 다만, 신전의 내부에는 데몬들이 득실거리는 까닭에 심연의 기운이 들끓고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신전을 목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1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12점]

하지만 백색사원의 아름다움은 마법사의 눈길을 붙잡아두지 못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부조와 낙원같은 정원의 아름다움조차도 호수의 밑바닥에 잠들어있는 신수(神獸)의 눈부심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흠······"

[신수의 아름다움에 매혹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1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13점]

"신수라면 패밀리어로 길들일 가치가 충분하겠죠."

자신은 야수의 로어를 획득하면서 괴수들과 동등히 소통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덕분에 가능해졌다. 어떠한 짐승도 자신의 패밀리어로 길들이는 일이.

"그러니 고대의 바실리스크를 구하러 갑시다."

콰앙!

자주색 불길이 발사된다.

강력한 결계를 향해서.

"사악한 데몬들로부터."

[데몬에게 봉인된 바실리스크를 발견!]

[연구 단서 획득 1/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1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4점]

8. 여덟번째 연구 - 바실리스크(3)

신성한 호수에 잠들었던 웅크린 은빛뱀이 깨어났다. 실로 오랜만이다. 필멸의 존재가 그녀를 향해 염원을 보내는 상황은.

'기도인가?'

아니었다.

경외심이 없었으므로.

'도굴꾼인가?'

아니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느껴지지 않으니.

'대신에 나를 길들이고 싶어하는군.'

자신이 길들이고 싶어하는 인간을 만난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다. 인간들의 숭배로 신성(Divine)을 얻은 이후로는 어떤 필멸자도 감히 자신에게 소유욕을 품지 못했다.

'그런데 건방진 필멸자가 감히?'

은빛뱀은 어림잡아 반만년을 살아온 바실리스크였다. 그녀의 형상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모래뱀 같았지만, 살아온 세월에 걸맞는 엄청난 덩치를 자랑했다. 길이를 머리에서 꼬리까지 재면 100미터를 훌쩍 넘었고 몸통의 굵기도 10미터가 넘었다. 

게다가 바실리스크의 눈빛에는 생물을 돌로 만드는 힘이 있었고, 위장에선 태고의 맹독을 생산해 산성 브레스를 뿜어낼 수 있었다.

즉.

고대의 은빛뱀은.

어중간한 드래곤보다 재앙적인 생물이었다.

'하지만 본신(本神)의 고귀함은 단순한 육체의 강력함만이 아니다! 신성을 획득하며 생겨난 권능도 존재하니까!'

은빛뱀은 수천년간 필멸자들의 숭배를 받아서 한때 신좌로 불리던 생물이었다. 지금은 신도가 사멸해 신성이 옅어졌지만, 그럼에도 반신으로 숭배받기엔 충분한 권능을 지니고 있다.

사막을 다스리는 신왕.

그것이 은빛뱀의 정체였다.

'한데 감히 본신을 소유하겠다고?!'

불경하다!

죽어마땅하다!

고대의 존재가 격정적인 분노에 휩싸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찬란한 은빛거체를 일으켜 놈을 일거에 집어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자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그녀는 포로였으니.

심연의 봉인에 갇힌.

"탈출 계획을 꾸미는건 아니지?"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은빛뱀의 귓전을 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심연의 여왕을 섬기는 서큐버스 여군주, 디아볼레타였다.

"자기의 추종자들이 구하러 왔나봐. 얼마나 감동적인 일이야. 신도가 신을 보호하러 온다니, 정말로 우스운 상황 아니야?"

서큐버스 여군주.

심연의 여왕을 섬기는 직속시녀들이다.

다방면에 강력한 막강한 상급데몬들.

"상관이 부상만 입어도 죽여버리는 우리들의 고향, 무한의 심연에선 상상도 못하는 감동적인 일이지. 그렇지? 노예들아?"

그르르릉······

사원에 어지러이 흩어진 인간들의 시신을 잡아먹던 악마들이, 일제히 여주인의 부름에 응해서 그녀의 품으로 몰려들었다. 그녀의 관심을 두고 다투던 제일 강력한 수컷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더니, 결국 혈전으로 이어진다.

"캬아아악!"

"키에에에엑!"

사마귀를 닮은 데몬이 멧돼지를 닮은 데몬에게 들이받힌다. 멧돼지를 닮은 데몬은 사마귀데몬을 게걸스레 찢어먹고 더욱 강해진다.

"옳지. 잘했다. 나의 멧돼지야."

"꾸익! 꾸익! 꾸이이익!"

발정난 멧돼지가 서큐버스 여군주를 무자비하게 덮쳤다. 디아볼레타는 처음엔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저항했지만, 제압을 당하자 결국엔 멧돼지의 머리를 가슴에 품어주었다.

"꾸익!"

교미가 끝나고.

"고마워. 나의 멧돼지야."

펑!

멧돼지가 풍선처럼 터진다.

"맛있게 먹을게."

디아볼레타는 멧돼지의 영혼과 정수를 꼼꼼히 포식했다. 덕분에 그녀는 멧돼지의 저돌성과 사마귀의 교활함을 동시에 획득했다.

"흐음."

디아볼레타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의 노예들을 둘러봤다. 그녀를 욕망하던 노예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의 슬하에서 떠나지도 못했다. 노예들은 그녀를 범하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으니까.

"은빛뱀아. 너도 우리 데몬 일족이 되는거야."

"·········"

"심연의 여왕께서 친히 세례를 내려주시는건 최고의 은총이니 순순히 받아들이렴."

은빛뱀은 둥지가 데몬들에게 점령된 경위를 떠올렸다. 자신의 둥지를 지키는 임무를 하달받은 최고사제가, 사막에 쓰러진 절세미녀를 발견하고 그녀를 사원에 들였다. 외부인을 사원에 들여서는 안된다는 계율을 잊고.

'필멸자 수컷들은 언제 봐도 실로 멍청한 놈들이군. 짝짓기가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동시에.

은빛뱀은 생각했다.

'상황이 이상하다.'

자신은 대황야에서 정령군주들의 의사를 대리하는 신왕(God King)이다. 데몬이 나타났다면 정령군주들이 적시에 경고해줬어야 정상이다. 그랬더라면 동면중에 심연의 봉인에 갇히는 황당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무언가 잘못된게 분명하다!'

······하지만 심연의 여왕이 손수 준비한 봉인에 갇혔으니 자력탈출은 불가능하다.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풀려날 방도가 없는데······

'나에 대한 소유욕을 품은 필멸자가 시선을 끌어주길 바래야겠군. 적어도 결계를 약화만 시켜주어도 좋으련만······'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리며 신전의 방호결계가 박살났다. 또한 드래곤의 불꽃으로 담금질된 신전대문에도 굵직한 금이 갔다.

"뭐, 뭐냐?"

대문에 금이 가자 디아볼레타가 당황했다. 백색사원의 대문은 고대엘프들이 은빛뱀에게 우정의 증표로 제작해준 아티팩트. 자신조차 순수한 힘으로 파괴할 엄두는 내지 못했는데?

"제법 단단하군."

한데.

문밖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기껏해야 인간남성의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를 써야지."

[더블캐스팅]

[5위계, 냉기의 로어]

[프로스트 노바(Frost Nova)]

오른손엔 냉기주문을.

[5위계, 비전 주문]

[아케인 익스플로전(Arcane Explosion)]

왼손에는 비전주문을.

"사막을 다스리는 은빛뱀이여!"

외침에 맞추어 오른손의 주문이 완성된다. 극한의 냉기가 분사되어서 드래곤스틸로 만들어진 대문을 얼려버렸다.

"로어마스터가 그대를 찾아왔노라!"

연달아 왼손에서 막대한 비전에너지가 작렬했다. [얼어붙음] 상태에서 파손당한 대문이 추가피해를 입는다. 부서지기 직전이다.

"여주인님!"

"위험한 상대입니다!"

디아볼레타의 호위병들이 안달난 표정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여군주의 미소를 위해선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고기인형들이었다.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

디아볼레타는 미간을 좁히면서 파괴되기 직전의 대문을 바라봤다. 은빛뱀의 포섭은 심연의 여왕께서 관심을 두고 계신 사안. 실패한다면 죽음보다 끔찍한 질책을 당하리라.

'정면전에는 자신이 없는데······'

서큐버스들은 천부적인 외교관이자 밀정이었다. 또한 유능한 암살자나 박식한 마법사 행세도 가능하지만······전사로선 자질이 없다.

'고대엘프 관문을 파괴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화력은 나보다 훨씬 강하겠지.'

전투론 무리.

어쩔수 없다.

도박을 건다.

"모두 심연으로 돌아가."

"······여주인이시여?'

"깨끗히 청소해두고. 어서."

수하들은 연약한(?) 여주인을 혼자 두고 떠날 생각에 크게 망설였으나, 디아볼레타가 눈을 부릅뜨며 재촉하자 명령에 응했다.

"어서 오세요."

때문에.

대문을 부수고 진입한 텔로리안은 보았다.

"······그대는 누구지?"

"저는······"

자신이 열망하던.

이상적인 이성을.

"오랜만이구나. 제자야."

"······스승님?"

사원에 진입한 잿빛의 마법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꿈에 그리던 여인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텔로리안."

스승님은 언제나처럼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처럼 진한 적발. 육신의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열정적인 눈빛.

"평안히 지냈느냐?"

"···············"

그리운 여인을 마주한 로어마스터는 길거리의 소년으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일주일을 굶었던 자신에게 빵조각을 내밀어줬다. 그리고 자신을 데려가 씻기고 먹이고 재워주었다. 

"·········스승님."

뿐만이 아니다. 눈앞의 여인은 간절히 원하던 애정과 가르침까지 주었다. 불꽃의 마녀가 가엾은 소년을 돌봐주고 가르쳤기에, 오늘날의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 탄생한 것이다.

"······평안하셨습니까."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이에 불꽃의 마녀는 인자한 어머니처럼 웃으면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모두 괜찮다."

"·········"

"이젠 모두 괜찮아."

불꽃의 마녀는 텔로리안의 정신에 스며든 한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다오."

"알겠습니다. 스승님."

스승과 제자는 늪지의 오두막에 도란도란 앉아서 달콤한 대화를 나눴다. 이곳은 한때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오직 둘만의.

"······힘들었겠구나."

"·········네."

대화가 깊어지고.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성적인 긴장감이 흐른다.

"어느사이 늠름한 사내가 됐구나."

"스승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고요."

스승님의 교육은 엄격했다.

엄격함을 지나쳐 가혹했다.

"텔로리안."

"·········"

"항상 신변의 위협에 노출되며 살다보니, 너한테 많은 불안을 전가했었다. 너의 양육자로서 미흡함이 많았지. 그렇지만 너를 아끼던 마음은 언제나 진심이었어. 미안하다."

달콤한 말이었다.

자신이 듣고 싶어하던 말.

하지만 스승님이 결코 해주시지 않았을 말.

"그러니 모자란 스승을 용서해주겠니?"

스승님께선 레이디들처럼 고운 손가락으로 자신의 양손을 붙잡았다. 우습다. 그분은 치장에 이렇게 많은 시간을 쓰지 않으신다.

"나의 텔로리안."

"물론입니다. 스승님."

이건 거짓이다.

만들어진 환상.

'그래도 좋아.'

환상.

꿈이 이뤄지는 가짜 세상.

'······하지만 우리의 진짜 세상은 어떤가?'

고통받고.

부족하고.

비참하다.

'누구나 간절히 원하지만 끝끝내 얻지 못하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소원이다.'

이곳은.

자신의 소원이 구현된 장소.

지금도 꿈에서는 원하는 곳.

"텔로리안."

스승님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소년 시절의 자신이 간절히 원했지만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들어오너라."

꿈이 진전될수록 데몬의 환상은 싸구려로 변하고 있었다. 이제 스승님께선 로브마저 집어던지고, 미술품 같은 육체미를 드러내셨다.

"·········"

저것은 사춘기의 자신이 강렬히 열망하던 것이다. 제자로 엄청난 성과를 거두자 스승님이 보상으로 내어주셨지만,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것은.

스승님의 뼈와 살점이 아니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즐겼군."

자신이 바라던 것은.

그분의 불같은 마음이었다.

"연기는 그만두어도 된다. 서큐버스."

"?!"

[서큐버스 여군주의 매혹을 즐겨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1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15점]

"더이상은 조잡해서 즐길 수 없으니까."

한때는 간절히 품고 싶었다. 

스승님의 육체와 마음을.

"나는 기회가 있었다."

과거에 도취되어본다.

찰나의 유흥일테니까.

"스승님을 나만을 위한 인형으로 만들어버릴 기회가."

하지만.

거부했다.

"깨달았으니까."

흡!

심호흡을 마치고.

강대한 마력을 발산한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길때 아름다운 것인걸."

와장창!

환상이 깨져나갔다.

과거가 지나갔듯이. 

[서큐버스의 주문을 의지만으로 파훼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21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7점]

8. 여덟번째 연구 - 바실리스크(4)

혈향과 시취가 진동하는 백색사원의 복도. 무릎까지 피가 차오르는 참상의 한복판에서 서큐버스 여군주가 잿빛의 마법사를 마주한다.

"어떻게 환상을 깨뜨렸지?"

디아볼레타는 매혹적인 얼굴을 찌푸리며 텔로리안을 노려봤다. 그녀의 생김새는 인간족의 절세미녀를 닮았다. 하지만 역관절의 염소발굽과 검은 날개가 진정한 근원을 드러낸다.

"네가 원하던 환상일텐데."

"너무 거짓이 많더군."

"환상에 거짓이 섞이는게 무슨 상관이야?"

디아볼레타는 [심연의 여왕]을 직접 모시는 시녀로 [여군주] 계급에 속한다. 이름난 성자들도 타락시켜본 강력한 서큐버스.

"너의 욕망을 그대로 구현해줬는데."

"흠."

고민해본다.

화염구를 쏠까?

강의를 해볼까?

'실험을 해봐야겠군.'

데몬이 배울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새로운 연구!]

[연구표본 : 서큐버스 여군주 디아볼레타]

[연구주제 : 사랑에 대해 강의하십시오!]

[연구단서 : 0/3]

[연구보상 : (정신조작 : 역타락)]

"나의 욕망은 그런게 아니다."

"그럼 네가 바라는 마법은 뭔데?"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마법사란 마법을 통해 우주의 비밀을 연구하는 탐구자들이다. 또한 탐구자에게 제일 중요한 자세는 객관적 실체에 대한 추구.

"그러니 환상도 진짜를 닮아야지."

"진짜를 닮으면 그건 환상이 아니잖아?"

디아볼레타가 반문했다.

"내게 잡아먹힌 성자들이라고 환상이 거짓임을 몰랐던게 아니야. 단지 불편한 진실을 구태여 캐묻지 않았을 뿐이지."

텔로리안은 어깨를 으쓱인다.

"글쎄."

놈들은 모자란 종교인들이잖나.

사실이 아니라 믿음을 쫓는.

"우리 마법사들은 다르다."

"샌님들의 욕망은 더욱 음침하던데?"

"음침한게 아니라 현명한 것이지,"

텔로리안이 정색했다.

역시 금발은 멍청해.

"다시 말하니 똑똑히 들어라. 우린 객관적인 사실만을 추구해야한다. 그러니 환상도 현실에 근거할때야 비로소 가치를 지니는 법."

그것은 인식의 충돌이었다.

충동적 쾌락을 쫒는 데몬과.

합리적 이성을 쫓는 마법사의.

"까고 있네. 샌님."

혀를 찬다.

비웃으면서.

"환상은 환상일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니는 법이야. 그러니 인간을 매혹하고 싶다면 가장 아름답고 달콤한 환상을 보여줘야지. 성경험이 없는 고고한 절세미녀처럼 꼴리는거."

?

그게 뭐지?

그게 말이 되나?

'존재는 가능한 표본이다.'

성적으로 극도로 보수적인 사회이거나, 귀족들처럼 혈통의 순수성이 대단히 중요해 정절을 중시하는 계급이라면.

'하지만 그건 벨라디아처럼 지극히 희귀한 사례일뿐이다. 모든 절세미녀들의 아버지가 철퇴백작인 것은 아니니까.'

성적으로 매력적인 개체는 이성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원하는 성적 파트너를 만날 가능성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처녀성을 지킬 까닭이 없다. 

"그거 말이 안 되잖나?"

"현실에서 이룰 수 없으니 환상이지!"

서큐버스는 화를 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게 어찌 환상인가?"

"더럽게 답답하네! 환상으로 사람을 꼬드기고 싶다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보여줘야한다고! 빌어먹을 샌님아!"

음······

상대의 의견을 되새겨보자.

"이를테면 숫기 없는 지극히 평범한 농노 소년이, 실은 인근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많은 영애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던가?"

그래!

그거야!

감이 잡히니?

"통계적으로 대단히 멍청한 상상이군."

"······환상에 어째서 숫자를 들이대는건데?"

"근거가 없는 환상은 몰입이 불가능하다만."

눈을 찌푸리며.

강의를 이어간다.

"서큐버스, 제대로 들어라."

"······기가 차서 들어는 봐야겠네."

"너의 환상에서 헛점이던 부분을 짚어주마."

가르쳐보자.

서큐버스에게.

진정한 사랑을.

"우선 스승님은 그렇게 달달하지 않으셨다."

"·········"

"그분은 불같이 변덕스럽고 암사자처럼 사나우셨다. 내가 심기를 거스르면 지팡이로 구타하셨고, 실수를 저지르면 불꽃으로 맨살을 지지셨지. 그리고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신 경우에도 결코, 결코, 결코 사과하지 않으셨다."

대신.

물질적 보상을 주셨지만.

"뭣보다 그렇게 예쁜 분이 아니었다."

"·········너의 기억에선 최고의 미인이던데?"

"나의 주관적인 기억에선 그렇겠지."

뜨악!

싫어!

이놈 뭐야?!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스승님은 벨라디아처럼 비현실적인 미녀는 아니란 점이다. 그분은 현실적인 미인이셨다. 어느 마을을 찾아가도 한둘은 보일법한 수준의 아름다움이랄까."

대체 뭐냐?

이런 놈을 어떻게 꼬시지?

"게다가 나와 헤어지실 무렵엔 주름살이 생겨서 스트레스를 받고 계셨다. 살아온 세월이 제법 쌓이셔서 노화를 늦추는 마법도 슬슬 한계에 이르고 계셨으니까."

피부엔 잡티가.

머리는 윤기를 잃고.

가슴은 탄력을 잃었다.

"그런 세밀한 부분도 구현했어야지."

"·········"

포기.

포기다.

이런 놈은 꼬시지 못한다······

"나는 그분의 새치까지 흠모했다."

"·········"

"이것이 사랑이란 것이다. 서큐버스."

아니.

그냥 이상한 놈같은데······

[연구 실패!]

[서큐버스는 수업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서큐버스를 황당하게 만듦!]

[경험치 +10]

[레벨이 올랐습니다!]

[22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17점]

"로어마스터는 사람의 마음을 모르네."

"악마가 어찌 사람의 마음을 논하는가?"

"너보다는 내가 훨씬 많이 알지!"

촤륵!

서큐버스의 채찍이 날아들었다!

"너같은 놈은 두들겨패서 가르쳐야해!"

"역시 데몬은 멍청하군!"

텔로리안도 혀를 차면서 지팡이에 마력을 불러모았다. 데몬에게 진실된 사랑을 가르치려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꿰뚫어라!"

[3위계, 냉기의 로어]

[아이스 랜스(Ice lance)]

허공에서 생성된 얼음창이 디아볼레타의 몸통으로 쇄도했지만, 그녀는 재빨리 허공으로 날아서 공격을 피했다. 서큐버스는 강하진 않아도 대단히 민첩하니까.

"더블 캐스팅."

아이스 랜스!

연달아 두번!

"!"

2발의 얼음창이 강철드워프들의 포탄처럼 신속히 날아들었다. 저런 치명적인 일격에 당하면 악마의 육신조차 치명상을 입으리라.

'하지만 이쪽도 전투 경험은 적지 않다고!'

어차피 눈앞의 마법사에게 싸워서 승리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시간을 끌면서 원군이 도착하길 기다리면 된다.

'조만간 여왕님의 직속투사가 심연의 정수를 지니고 도착한다! 그때까지 바실리스크를 가둬둔 결계를 지켜야해!'

그러니.

회피에 전념한다!

"!"

샥!

첫번째 얼음창을 피하고!

슝!

두번째 얼음창도 피한다!

'됐다!'

상대는 [무영창]과 [더블캐스팅]을 동시에 지닌 괴물. 그래서 주문을 우드엘프들이 화살을 쏘듯이 난사하고 있다만.

'그래도 주문 사이에 지연이 생기지.'

그때를 틈타서.

자신도 외운다.

도망칠 주문을.

"심연의 힘이──커흑?!"

디아볼레타가 공갼도약 주문을 외우려던 순간, 그녀는 등에서 길고 날카로운 물질이 연약한 육신을 파고 드는 고통을 느꼈다.

"──어떻게?"

방금 피했던 얼음창이 반대로 돌아와 그녀의 등을 꿰뚫고 있었다. 이는 [바람의 로어]를 사용해 빗나간 창을 비틀었던 결과다.

'얼음의 로어와 공기의 로어를 동시에 썼다!'

복수의 로어를 동시에 다루는 마법사라면 애초에 평범한 필멸자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강적! 아공간에서 은장도를 소환해 자결을 준비한다. 스스로를 파괴해 심연으로 귀환하고자.

여왕께 전해야한다.

치명적인 방해꾼이 나타났다고.

"어딜!"

[5위계, 냉기의 로어]

[아이시 프리즌(Icey prison)]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어라!]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냉각되어서 얼음감옥을 형성했다. 데몬은 강력한 마법저항을 지니지만, 텔로리안의 상식을 벗어난 마력(마력 40+++)이 마법저항을 통째로 무력화시킨다.

"읍! 읍! 읍!"

서큐버스는 갇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은채.

필멸자라면 여기서 즉사했겠지.

하지만 데몬의 육신은 견뎌낸다.

"너의 육신을 파괴해도 힘의 일부를 상실할 뿐, 영혼은 무사히 심연으로 귀환해서 네가 겪은 것을 심연의 여왕에게 보고하겠지."

불멸자.

육신의 파괴가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정수가 남아있다면 얼마든 부활이 가능하다.

[불멸자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18점]

"하지만 은빛뱀이라면 어떨까?"

"!!!!!"

하지만.

정수가 삼켜진다면?

"들리시오? 은빛뱀이여."

텔로리안이 호수에 봉인된 은빛뱀을 향해 다가서자, 허공에서 칠흑빛이 번득이며 다양한 데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디아볼레타를 따르는 중급 데몬들로, 각각이 수십의 인간병사들과 맞먹는 강력한 괴물들이었다.

"천둥이여!"

푸슝!

그리고 쓸려나갔다.

벨칸이 던진 번개에게.

"놈들이 부활해서 보고하면 곤란합니다."

"으하하! 걱정하지 말게나. 젊은이."

벨칸이 호탕히 웃어보였다.

"나의 주술엔 정령군주들이 거주하는 태초세계의 힘이 담겨있네. 중급 데몬들따위는 영혼을 통째로 파괴할 수 있지."

편리하군.

디바인 클래스가 있으니.

'역시 영혼을 다루거나 부상을 치료하는 분야에선, 신성한 존재들의 힘을 내려받는 디바인 클래스가 마나를 사용하는 아케인 클래스보다 낫다. 마법으로 악마들의 영혼을 통째로 파괴하려면 절차가 번거로운데 말이야.'

역시.

동료와 동맹이 중요하다.

협력이 필멸자의 강점이니까.

"그럼."

쿵!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자 강대한 파동이 뻗어간다. 먼지가 들썩이고 푸른 마나가 바닥을 가로지르며 정교한 마법진을 그린다.

"결계의 해제를 시작하겠습니다."

"호위는 내게 맡기게. 텔로리안."

풀각성 벨칸은 드래곤도 혼자서 때려죽이는 괴물. 중급데몬같은 조무래기들이 얼마나 몰려오든 간단히 처리하겠지.

'그럼 결계 해석에 전념해볼까.'

은빛뱀.

고대의 바실리스크.

사막을 다스리는 신왕.

'하지만 지금은 심연의 봉인에 속박된 포로일 뿐이다. 우선 구해주고 패밀리어가 되라고 해야겠군.'

좋은 기회.

놓치지 않겠다.

[허튼 소리!]

?

누구의 텔레파시지?

[본신(本神)을 향해서 절을 바쳐라!]

신들은 언제나 오만하다.

그래야 신격인 것이니까.

[장엄한 아름다움에 절을 바치란 말이다!]

[그렇게 장엄한 분이 어쩌다 포로신세요.]

·········

적막이 흘렀다.

[그건······]

텔레파시로 연결된 정신에서 당황과 분노가 느껴진다. 은빛뱀은 반만년을 살아온 바실리스크였고 지금도 반신의 신위를 유지하는 불멸자. 이렇게 무력한 상황에 놓여본 경험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지몽매한 사제들이 본신을 잘못 보좌했던 탓이다! 본신의 잘못은 아니다!]

아하.

남탓.

'남탓은 인간성의 상징이지.'

나는 일찍이 [신격은 위격이 낮을수록 인간적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니 [토착신] 등급에 불과한 은빛뱀은 저런 반응이 당연하겠지.

[연구진전 : 바실리스크]

[연구단서 2/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19점]

"내가 구속결계를 깨어주길 바라시오?"

·········

은빛뱀은 침묵했다.

"그렇다면 조건이 있소."

[질문을 윤허한다. 방랑자.]

은빛뱀은 포로신세임에도 신격다운 기품을 잃지 않았다. 덕분에 텔로리안은 더욱 은빛뱀을 길들여서 연구하고 싶어졌다.

[첫째. 부탁은 정중히.]

[·········]

[둘째. 도움에는 감사를.]

[············]

[셋째. 감사에 더불어 보상도.]

"동의하시오?"

[············]

텔로리안의 불경한 제안에 주술사왕 벨칸은 탄식을 내뱉었다. 오만한 마법사가 신격을 모독하는 교만의 대죄를 범하고 있었다.

[불경하다!]

[싫으면 마시고.]

[정령군주들의 사자여!]

이번엔.

벨칸에게 텔레파시가 울린다.

[정령군주들의 지상대리자로서 명하노니 나를 둘러싼 봉인을 해제하라! 봉인이 해제되면 건방진 마법사를 단숨에 집어삼킬 것이다!]

"그게······"

벨칸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저는 심연의 봉인을 풀 줄 모릅니다."

[······뭣?]

"안타깝지만 정령군주들의 힘은 심연의 여왕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오직 로어마스터의 지혜만이 심연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에.

로어마스터는 팔짱을 껴보였다.

"나의 패밀리어가 되시오. 은빛뱀이여."

8. 여덟번째 연구 - 바실리스크(5)

은빛뱀은 텔로리안의 눈동자에서 불경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것은 신성을 낱낱이 해부하고 싶어하는 탐구자의 욕망이었다.

[신이 필멸자에게 종속되긴 어렵다.]

대신.

[소원을 들어주지,]

은빛뱀으로 불리는 고대의 바실리스크는 강력한 신수. 오랜 세월동안 영락했지만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토착신은 된다.

[사람을 살려달라면 살려주고 죽여달라면 죽여주겠다. 필멸자의 힘으론 도모하지 못하는 상대라도 마찬가지다.]

"일곱제옥의 제왕이나 무한심연의 여왕을 쓰러뜨릴 수 있소?"

[그건 태양신도 해내지 못하는 일이다만.]

그렇다면 곤란하오.

내가 원하는건 그들이니까.

[어째서 필멸자가 태고의 악들과 맞서길 바라느냐? 지옥의 최고주권자들은 너희가 섬기는 최고신들만큼 강력하다.]

사실이었다. 악마와 천사들은 필멸자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신격(Deity)들과 달리 필멸자들의 감정에서 탄생한 존재들. 그래서 악마와 천사의 수장들은 만신전(Pantheon)을 대표하는 주신들과 맞먹는 권능을 지닌다.

"할 수 있으니까."

[············]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은.

맑은 눈과 또렷한 목소리로.

"죽일 수 있으니 맞서는 것이오."

[반신을 놀래킴!]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0점]

"평범한 필멸자는 아니로군."

마침내.

눈을 떴다.

호수에 잠든 신수가.

"결의만큼은 높이 사주마."

은빛뱀의 목소리는 젊은 여성의 것을 연상시켰다. 이것은 구강으로 내뱉는 언어가 아닌 권능을 통해서 전달되는 의사.

"나를 풀어다오."

"당신이 나의 패밀리어가 되겠다면."

"일단 풀어주고 힘으로 꺾어라."

쉿쉿!

은빛의 모래뱀이 혀를 낼름거린다.

"네놈이 진정 지옥과 심연의 최고주권자들을 꺾으려는 마법사라면, 나처럼 영락한 반신은 혼자서도 능히 쓰러뜨려야지."

좋소.

일단 풀어드리지.

차후에 이야기합시다.

"하압!"

지팡이로 신전바닥을 내리치자 마력이 뻗어나가 심연의 봉인을 강타한다. 텔로리안은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봉인을 고스란히 부숴버렸다. 특별한 테크닉은 사용하지 않았다.

[심연의 봉인을 파괴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21점]

"······저건 무슨 술식이더냐? 대행자여."

"······무식하게 마나량으로 때려부쉈군요."

반신과 주술사왕은 로어마스터가 뿜어낸 화력에 경악했다. 굉장한 힘이었으니까.

"······피곤하군."

잔여마력을 소진한 텔로리안은 이마를 짚으며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물병을 소환해 마력이 깃든 탄산수를 흡입한다.

"찾아올 데몬들은 당신들에게 맡기겠습니다."

"············"

"저는 마력이 고갈되서 쉬겠습니다."

경위야 어쨌든.

사막의 반신이 풀려났다.

가장 오래된 바실리스크가.

"캬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모래뱀은 얼음에 갇힌 서큐버스를 집어삼켰다. 으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서큐버스가 영혼째로 조각났다. 춤꾼 디아볼레타는 다시는 쾌락의 하렘에서 춤추지 못할 것이다.

"시원하군!"

은빛뱀은 얼어붙은 서큐버스의 다리뼈를 오도독 씹어먹으며 백색사원을 나섰다. 사원의 바깥에선 심연의 기운이 가득했으니까.

"캬아아아아아아아──!"

"바, 바, 바, 바실리스크다아아아──!"

은빛뱀의 출현에 수백의 데몬 병사들이 혼비백산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신성한 황금눈을 번득이자, 그들은 남김없이 돌로 변했다.

"·········"

오직 하나.

데몬 검투사를 제외하고.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는.

"디아볼레타가 실패한 모양이군."

무적의 마르데로는 초콜릿 복근을 지닌 인큐버스였다. 외형은 인간족의 절세미남과 전설적인 검투사를 섞어둔 모습. 그렇지만 염소발굽과 검은색 날개가 본질을 드러낸다.

"하렘으로 돌아가면 아주 혼내줘야겠어."

무적의 마르데로!

하룻밤에 1000명의 서큐버스를 쓰러뜨린 자!

전장에선 1000명의 천사들을 쓰러뜨린 자!

심연의 검투사는 밤에도 낮에도 무적이라네!

"은빛뱀! 네놈도 암컷이로군!"

"쉬이이이이잇!"

"쓰러뜨리고 원없이 따먹어주마!"

무적의 마르데로는 정오의 하늘로 멋지게 날아올랐고, 은빛뱀은 모래사막으로 파고들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지루한 탐색전이 이어지다가 은빛뱀이 모래둔덕에서 솟구쳐 마르데로를 삼켰다. 그대로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될 쯔음, 은빛뱀의 턱에 사각형의 구멍이 뚫리면서 데몬 검투사가 뛰쳐나왔다.

"하!"

"캬아아아아악!"

이후의 싸움은 마르데로의 일방적인 농락이었다. 은빛뱀이 약하거나 경험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상성이 좋지 않았다.

"캬아아악!"

석화는 통하지 않고.

"크롸롸롸롸롸롸롸───!"

성채조차 한번에 녹여버릴 산성숨결은 날렵하게 비행해서 피했다. 은빛뱀이 육중한 거체를 이용해 육탄전을 걸어오면 마르데로는 바람처럼 빠르게 달아나 약점만 찌르고 빠진다. 흉포한 야수를 처치하는 검투장의 챔피언처럼!

"하하! 이거 재밌군!"

검투사와 괴수.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

"슬슬 범해볼까!"

[6위계, 심연의 로어]

[데몬의 거대화(Demonic Giantification)]

심연의 마력에 힘입어 인큐버스 검투사는 20미터에 이르는 거인으로 변했다. 그사이 은빛뱀은 권능을 사용해 상처를 치료했지만, 최상급 데몬이 만들어낸 상처엔 반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았다. 이미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 승산은 전혀 없다.

"천둥이여!"

"음──?!"

그때.

폭풍우가 몰려들었다.

"무슨──"

흥분한 마르데로는 잊고 있었다.

남몰래 토템을 박고 있던 주술사왕을.

"폭풍이여! 번개여! 천둥이여!"

[7위계 주문, 정령의 로어]

[천둥의 분노(Wrath of Thunder)]

꽈아아아앙!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매서운 벼락이 내리쳤다. 평소의 마르데로라면 날렵히 피해냈겠지만, 그는 거대화를 사용한 상태!

"끄아아아아아악!"

"정령들의 분노를 보아라!"

사막의 신왕과 심연의 검투사가 격전을 벌이는 사이, 주술사왕 벨칸은 사방에 토템을 박아두었다. 덕분에 위력이 몇 배로 증폭된 천둥벼락이 무적의 마르데로를 바삭바삭하게 튀겨버렸다.

"감히 오크따위가──"

그럼에도 마르데로는 살아남아 벨칸에게 칼날을 돌렸다. 하지만 배후에서 솟구친 바실리스크가 마르데로의 상체를 휘감았다.

"?!"

으드득!

놈의 상체가 으스러지고.

"캬아아아아아악!"

코앞에서 뿜어낸 산성 브레스에 얼굴이 녹아버린다. 더이상 무적이 아니게된 마르데로는 육신을 잃고 쾌락의 하렘으로 돌아갔다. 소멸하진 않았지만. 정수의 절반을 잃었다.

"건방진 놈! 감히 데몬 따위가!"

은빛뱀은 분노를 토하며 데몬의 바삭해진 육체를 집어삼켰다. 불경한 육신을 집어삼키자 상처가 치료된다. 불멸자의 정수를 획득함으로서 신성의 일부도 되찾는다.

"힘만 온전했어도 나의 상대가 아니거늘!"

[불멸자들의 신적인 싸움을 목격!]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22점]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신왕이시여."

"너의 도움 덕분에 괜찮다. 대행자야."

"그리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투가 끝난 사막엔 데몬이었던 석조상들만 남았다. 모든 조각상이 드워프 석공들이 만든 것처럼 실감났다.

"동면중에 깨셔서 육신이 약해지셨습니다."

"·········"

"신도들도 없어서 신위도 낮아지셨고요."

은빛뱀은 갈라진 혓바닥을 내밀어 상처를 핥았다. 녀석의 말대로 오랜 동면기를 거치며 육체는 약해졌고 자신의 교단은 쇠락했다.

"심연의 여왕이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

"이번엔 제가 운좋게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족을 이끄는 입장인지라 더이상의 조력은 어렵습니다."

그러자.

사막의 신왕이 제안했다.

너희들과 함께 지내는건 어떠냐고.

"그것도 나쁘진 않습니다만······"

"나쁘지 않다면 그렇게 하자꾸나."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가 있습니다."

벨칸은.

다짐을 굳히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저희의 선조들은 당신을 숭배함으로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만, 이제는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대황야.

군식구는 짐이다.

"알겠다."

끄덕.

은빛뱀이 고개를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사막의 신왕이시여."

"이걸로 우리의 오랜 계약도 끝이군."

더이상 오크들은 대황야에서 살아가는데 바실리스크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았다. 벨칸은 자신보다 강하다. 부하들도 포함하면 차이가 훨씬 커진다. 이제 허락이 필요한건 자신이다.

"그래도 마법사의 곁은 내키지 않는다."

"무엇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시선이 불편해."

단언했다.

은빛뱀이.

"솔직히 말하면 대단히 불쾌하다."

"············"

"본신이 아무리 영락했어도 필멸자들의 숭배를 받던 존재란 말이다. 그런데 진귀한 실험체처럼 바라보는 꼬락서니하고는······"

그에 관해선.

주술사왕도 해줄 말이 없었다.

마법사란게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하지만 대안이 없으실 겁니다."

"·········내가 실험용 애완동물이 되라고?"

"음······"

벨칸은 고뇌한다.

그리고 대답한다.

"패밀리어 계약은 면하게 힘써보겠습니다."

"그럼 무슨 자격으로 동행하게 되지?"

"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은 아니실겁니다.

"············"

뜨겁게 타오르는 사막의 한복판. 은빛의 바실리스크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태양은 하염없이 저물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처럼.

"······일단 생각은 해보겠다."

영락한 반신은 한숨을 쉬었다.

심연의 여왕의 시선을 느끼며.

[연구진전 : 바실리스크]

[연구단서 : 3/3]

[연구가 완료되었습니다!]

[연구보상을 선택하십시오!]

[연구보상1 : 바실리스크와의 강제계약]

[연구보상2 : 바실리스크와의 임의동행]

* * *

벨칸이 주술사왕으로 즉위하고 한 달이 지났다. 그사이 자신은 많은 일을 해냈다. 루시펠레스에게 일어날 운명을 전해주었고 사막오크들의 전승을 흡수했다. 또한 벨칸과의 지도대련을 통해서 별에 이르는 불꽃을 마법의 주문으로 만들어냈고, 4대 원소의 로어를 조합해 원소의 로어를 생성하는 성과도 이루었다.

"······눈을 둘 곳이 없군."

하지만.

뭣보다 중요한 성과는.

은빛뱀을 길들였단 사실이다.

"의복을 입고 다니시오. 은빛뱀이여."

"거추장스럽다. 발이 생긴 것도 귀찮은데."

"·········남들이 보기에 남사스럽소."

"본신이 어째서 필멸자의 목소리에 신경쓰리라고 생각하는가? 한때는 별들과 함께 하늘에서 춤추던 존재였거늘."

이에 은빛뱀은 고개를 갸웃했다. 본신(本神)은 사막의 지배자이자 신대부터 존재해온 신수. 필멸자의 의견이 어째서 중요한가?

"그런 고집을 부리니 신성이 옅어진 것이오."

"허튼 소리."

"결국 당신네 신들은 전지전능한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은 우리 필멸자들의 믿음에 의존하는 존재일 뿐이잖소. 사막의 유목민들이 그대를 숭배하지 않았다면, 그대도 불멸성을 얻지 못하고 오래전에 죽었을테지."

[신들의 본질에 대한 전승!]

[경험치 +5]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55/100]

[전승포인트 23점]

필멸자들이 신들의 권능에 의존한다면, 신들도 필멸자들의 신앙에 의존한다. 이것은 극소수의 현자들만 알고 있는 금지된 지식.

"······네놈. 정체가 뭐냐?"

"로어마스터."

"로어마스터?"

"현자들에게 조언해주는 대현자요."

"어린 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글쎄.

환생한 덕분이지만.

구태여 밝힐 이유는 없지.

"그럴만한 사연이 있소."

"본신에게 정체를 숨기겠다고?'

"그대도 모든 걸 밝히진 않았잖소."

실은 게임 시절의 [은빛뱀]에 대한 배경설정은 숨겨진 부분이 많았다. 미래의 DLC를 위한 떡밥이었는지, 미완이었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구구절절한 사연.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나를 따라오면 전성기의 신성을 되찾게 해드리겠소. 사막을 다스리는 은빛뱀이여."

은빛뱀은 사막여제를 비롯한 수십 개의 칭호와 이름을 지녔다. 그만큼 강력했던 고대의 존재이나, 지금은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또한 심연의 여왕에게 보복할 기회도 제공하지. 그것이 싫다면 이곳에 정착해서 사막오크들의 수호신으로 살아갈 기회를 드리겠소."

흠·········?

그건 벨칸이 거부했는데?

"내가 설득해드리지."

"그게 가능한 것이냐?"

"벨칸은 내게 많은걸 빚졌고 그걸 인정하오."

벨칸은 다르다.

은혜를 망각하는 자들과는.

"그러니 내가 당신을 오크족의 수호신으로 편입해달라고 요청하면 내키지 않아도 들어줄 것이오. 종족을 구해준 은혜를 청산하고자."

·········

은빛뱀은 고민했다.

"어째서 나를 돕지?"

"복잡한 동기요."

"그대는 마법사잖나."

"글쎄. 그건······"

마법사는 자신이 은빛뱀에게 품은 욕망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건 성욕이나 지식욕과는 달랐다. 필멸의 한계에 도전하는 유한자가 무한자에게 품는 욕망이니까.

"불멸자를 능가하고 싶은 욕망이오."

"그렇다면 불경함을 찬송하는 것인가?"

"그것과는 비슷하지만 다르오."

불경함.

신성을 모독하고 싶은 욕망이다.

"하지만 나의 욕망은 성스러움도 사악함도 모두 부정하고 싶은 것이오. 마법사니까."

시네어 대륙의 마법사들은 신성도 불경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선과 악, 세속과 성속이란 단순한 가치판단의 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가치는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진리는 반드시 마법적인 계측이 가능해야한다.

"우리 마법사들에게 태양과 달이란 행성을 선회하는 천체에 불과하오. 또한 인간들이 주신으로 섬기는 강력한 존재들조차, 한때 위대한 업적을 세워서 승천한 필멸자일 뿐이지."

이곳은 판타지세계.

신성한 존재들은 실존한다.

하지만 경외를 표하느냐는 별개의 문제.

"신격들이 권능을 행사해서 세상에 개입하듯이, 우리 마법사들도 마법을 행사해 필멸자의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거든."

[마법사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5]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23점]

"필멸자들이 어째서 기도하는지 아시오?"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는 일의 해결을 위해서지. 필멸자란 정해진 생로병사에 맞서지 못하는 가엾은 존재들이니·········"

은빛뱀은 깨닫는다.

마법사들은 다름을.

"하지만 너흰 노화를 늦출 수 있었지."

"맞소. 심지어 영생에도 이를 수 있지."

지구에선 과학혁명이 전파된 이후에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았다. 고등과학도 인간의 종적인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지는 못하니까.

하지만.

고등마법은 다르다.

'만일.'

인간이.

원하는 만큼 살아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어째서 신들을 향해서 무릎을 꿇겠는가?

[마법무신론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24점]

"때문에 나에게 그대는 기도를 바쳐야할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특별한 권능을 보유한 바실리스크로 인식할 뿐이오. 그렇다면 패밀리어로 길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잖소?"

신성을.

길들인다.

매혹적이다.

"대단히 달콤한 유혹인 것이오."

"그리고 대단히 참람된 말이구나."

"그대의 관점에선 분명히 그럴 것이오."

"너의 동족들도 좋게 보지 않을텐데."

은빛여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렬한 살의까지 느껴질 정도다.

"신성은 숭배해 마땅한 것이니까."

"분명히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할테지."

이곳은 폭력이 횡행하는 중세랜드.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아가며 연명을 버거워한다. 자연스레 행복한 내세와 권선징악을 약속하는 종교에 대한 갈망이 끓어오른다.

"하지만 우린 마법사요."

"············실로 불경한 말이군."

은빛여인이 팔짱을 꼈다.

황금눈을 번득이면서.

"평범한 인간들은 늙으면 약해지고 병들면 죽소. 가뭄이 들면 굶어죽고 홍수가 닥쳐도 죽소. 대중이란 너무나 쉽게 죽어가는 것이오."

그러나.

마법사들은 다르다.

강해질수록 필멸의 제약에서 해방된다.

"우리는 대중을 경멸하고 대중은 우리를 질투하지. 그들은 신들에게 기도를 바쳐야만 연명할 수 있는데, 우리 마법사들은 신들을 객관적으로 관조할 여유를 가지니까."

부러움.

이질감.

두려움.

인간들이 마법사에게 느끼는 감정.

"그래서 우리와 대중은 서로를 증오하오."

밝힌다.

솔직한 심정을.

"실은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는 나조차 그러한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소. 나의 생물학적 모친이 태양신의 독실한 신도였으니까."

모친은 평생을 가정폭력과 마법사들의 만행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삶의 유일한 낙이, 교회가 베푸는 자비와 경전이 약속하는 내세의 구원뿐임은 놀랍지 않다.

"그래서 나의 모친은 마법을 깨우친 아들을 저주받은 아이라며 유기했소. 하지만 길거리 사람들도 나를 상종해주지 않았지. 마력을 깨우쳤다는 이유만으로."

거지도 불가.

잡일도 불가.

어떻게 먹고 살란 말인가?

"어쩌면 행운이었을지도 모르지. 덕분에 폭력이 난무하던 템니그라드의 뒷골목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걸지도 모르니까."

템니그라드에선 가장 악독한 살인자들도 마법사를 죽이길 꺼려했다. 괜히 얽혔다가 이상한 저주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으니.

"그래서 나는 대중이 싫어졌소."

"·········"

"그래서 모두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오."

필멸자도.

신성을 범접할 수 있음을!

"너의 동기는 이해하겠다."

하지만.

"본신이 패밀리어가 된다면 마지막 자부심마저 산산이 조각나겠지. 그건 우리 불멸자들에게 죽음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필멸자들이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것처럼, 우리 불멸자들도 영원한 삶을 버티기 위한 방식이 존재한단다.

[불멸자의 삶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5점]

"너희에게 자부심이란 사치품이지."

"···············"

"하지만 우리에겐 필수품이란다."

잠시.

텔로리안은 고뇌했다.

강제로 길들이는 일도 가능했으니까.

"그대의 뜻을 존중하겠소. 반신이여."

[내면의 야수를 이겨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2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6점]

"원치 않으면 그만두리라."

양심은.

야수를 길들이는 채찍.

"내가 그대보다 강하다는 이유로 계약을 강제해서는 안되겠지."

언제나 제자에게 말했다.

내면의 야수를 이겨내라고.

"스승된 자로서 부끄러운 일을 할 순 없지."

잘못된 선례를 보여줘선 안된다.

본보기를 보여주지는 못할 망정.

"그대가 오크들에게 내어준 서판이 있소."

내려둔다.

바실리스크의 서판을.

"사막오크들의 조상들과 당신이 맺었던 계약의 증표요. 이제 당신과 사막오크들의 계약은 끝났으니, 주인에게 돌려주리다."

돌아선다.

"나는 이틀 뒤에 왕국으로 돌아가오."

"·········"

"갈 곳이 없다면 자유인으로 합류해도 좋소."

마법사는 떠났고.

반신은 고뇌했다.

* * *

주술사왕 벨칸은 부족장들에게 집결지에 전사들만 잔류시키고 부족민들은 오아시스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라고 명령했다. 이제 대대적인 그린타이드는 없을 터였다. 구호사절들의 죽음에 대해선 결산을 치러야겠지만.

[그린타이드를 저지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23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27점]

"말도 안되는 일이오!"

이에.

블랙터스크와 서약전사단이 항의했다.

"우리의 고토를 포기하겠다니!"

"우린 고토보다 중요한 미래를 얻었다."

반면.

주술사왕 벨칸은 담담히 대답했다.

"또한 나는 더이상 대족장이 아니다."

"·········"

"너희들의 왕이지. 무릎을 꿇어라."

주술사왕이 기운을 내뿜자 천둥으로 만들어진 왕관과 번개로 만들어진 창이 나타났다. 이에 대부분의 강경파들이 공포에 질려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블랙터스크만큼은 씩씩대면서 반항했다.

'음.'

쉽고 빠른 해결책.

겉바속촉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강경파에 반감이 남겠지.'

그래서 준비한다.

주술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무력의 대결을.

"하! 덤벼라! 벨칸!"

결투장이 준비되고.

블랙터스크가 나선다.

"내가 진정한 오크들의 왕이다!"

"안녕하십니까. 명예로운 전사장이시여."

"·········뭐냐? 너는?"

한데.

결투에 나선건 벨칸이 아니었다.

그래선 원한을 벨칸이 뒤집어쓴다.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못하고.

"저는 헤링턴 변경백 각하를 모시는 봉신 올골두골로입니다. 이번엔 주술사왕 벨칸 폐하를 대신해 결투에 나섰습니다."

?

??

???

"트롤 따위가 감히 나와 결투를?"

"저는 평범한 트롤이 아닙니다."

바위트롤이 육중한 앞발을 내딛자 바닥이 흔들렸다. 한데 오늘의 올골두골로는 갑옷도 무기도 없었다. 수도복을 걸치고 있을 뿐.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트롤이.

양손을 모아서 합장한다.

"저는 화합의 여신을 섬기는 즈샨수도원의 견습수도승, 올골두골로라고 하옵니다."

그녀는.

힘몽크로 전직했다.

3대 사기클래스에 속하는.

[올골두골로를 각성시켰습니다!]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23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29점]

9. 아홉번째 연구 - 신성한 언약(1)

올골두골로가 몽크로 전직한 경위를 알아보려면, 시간을 뒤로 돌려볼 필요가 있다. 가뭄에 대비하는 송수로 공사가 끝나고, 트롤 군단을 육성하는 계획이 한창 진행중일 시기.

"그룬다크시여."

"무슨 일인가? 올골두골로."

"질문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철퇴백작의 맹렬한 지도로 [투핸디드 파이터] 레벨을 올리던 올골두골로는 내게 심오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녀의 입지전적인 지성(지능 20)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저희가 검사가 된다면."

그녀는 이미 최강이었다.

트롤 가운데 최강이었다.

왕국제일검? 상대도 안된다.

"모든 종족들의 경계를 받게 될겁니다."

"그렇겠지."

트롤은 맨손으로 바위를 쪼개는 보스급 몬스터. 외딴 마을에선 트롤 한마리를 감당하지 못해서 몰살당하는 경우도 많다.

"저희는 그자체로 강합니다."

하물며 [바위트롤]은 트롤 중에도 유별나게 강한 종이다. 피부가 화강암만큼 단단해 평범한 날붙이는 아예 통하지 않는데, 바위라서 마법저항력도 상당하다. 또한 불길이나 산성만 아니면 어떠한 상처도 5분 안에 재생된다.

[트롤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

[23레벨까지 25/100]

[전승포인트 29점]

"한데 저희가 무예를 배워서 병장기를 휘두르면 당연히 다른 종족들을 압도하겠지요."

그렇겠지.

오만한 드래곤들조차도 경계할 것이다.

"너무 많은 이목을 끌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이야기다."

"분명히 그룬다크님과 철퇴백작님께 불필요한 주목이 쏠릴 겁니다. 저희는 물론이고요."

불필요한 주목.

순화해서 말해줬다.

'벼르고 있던 태양신 교단에서 나를 흑마법사로 몰아서 쳐들어오겠지. 헤링턴 백작은 원래부터 교회와 사이가 험악한 편이니까.'

철퇴백작은 반란을 진압할 때 교회의 중재를 거절하고 잔인한 처우를 행했다, 심지어 반란에 연루됐으면 수녀들도 머리를 깨부쉈다.

'여러모로 화끈한 양반이지.'

귀족인가?

어쨌든 의미는 통한다.

"그럼 내가 준비한 방안을 평가해보도록."

올골두골로는 참모 역할에 대단히 적합한 인재다. 역사적인 대학자에 맞먹는 지성(지능 20)과 몬스터 무리의 수장다운 통찰(직감18)을 겸비했으니까.

"제가 듣기에도 괜찮은 구상입니다."

내가 준비한 방안의 핵심은 [트롤 군대]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다, 결정적인 시점에 드러내어서 공포로 위압하자는 방안이었다.

"이제 저의 방안도 들어보시겠습니까?"

"말해보라."

"제가 즈샨 수도원에 입회하는 겁니다."

"즈샨 수도원에?"

"예. 물론 속가수도승이 되는 겁니다만."

즈샨 수도원은 [화합의 여신]을 섬기는 무예승 집단이다. 필멸자들을 화합시키고 이계체들의 개입을 막는다는 계율을 내세우는.

[종교집단에 대한 전승!

[경험치 +5]

[23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9점]

"화합의 수도사들이라면 저희 일족을 편견없이 대해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제가 즈샨 수도원에 입단한다면 종족의 문제로 공격당할 일은 없어집니다. 다만 저희 종족의 탄생에 대한 비밀이 새어나갈 겁니다만······"

그건.

감수를 해야겠지요.

"흐음."

"비밀을 지키자는 현자님의 방안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낮아도, 일단 문제가 생겼을 경우엔 뒷수습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올골두골로의 통찰이 옳다. 내가 구상한 방안은 내가 언제나 현지에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수립된 계획.

'그렇지만 계획을 진행해보니 알겠다.'

계획에 100%는 없다.

안정성도 챙겨야한다.

"현자님께서도 언제나 모든 장소에 존재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선 저의 방책이 보다 안정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구상해온 해결책입니다."

따르겠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언뜻 듣기엔 올골두골로가 맞아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일부러 누락한 부분이 있다.

'올골두골로와 그녀의 백성들이 [화합의 어머니] 교단에 입교한다면, 그들은 나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다. 공식적인 신분이 생기니까.'

내게서 독립하고 싶은 것이다.

엄밀힌 전적인 의존에서 벗어나고 싶다.

자유를 얻어서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

[일지갱신 : 수도승 올골두골로]

[연구주제 : 계몽된 트롤들에게 독자적인 삶을 살아갈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면 이번 기회에 완전한 노예로 만들어도 좋겠군요.]

[연구단서 0/5]

[연구보상A: 정신조작[영속화]

[연구보상B: 정신조작[노예화]

선택의 시간이다. 사회화 주문을 영속화시켜 계몽트롤을 진정 새로운 종으로 탄생시키거나, 아니면 지성만 부여하고 자유의지는 박탈해서 인형으로 사용하거나.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군."

"거부하지 않으신 겁니까?"

올골두골로가 크게 놀랐다. 그녀는 내가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너희는 나의 아이들이다."

내가.

마법으로 탄생시킨 아이들이지.

준지성체를 지성체로 만들었으니.

"하지만 너희는 아직 어리다."

"·········그렇습니까."

일순간 올골두골로는 아버지의 훈계에 질색하는 사춘기 소녀같은 표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조차 자신에겐 흥미로운 연구재료다.

[계몽된 종족의 독립심을 확인!]

[연구단서 1/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3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30점]

"이렇게 하자."

경청한다.

모여든 계몽트롤들이.

"즈샨 수도원에서 너희들의 지도자인 올골두골로를 정식단원으로 받아들인다면."

즈샨 수도회는 [화합의 어머니]를 제일 열렬히 숭배하는 무예승 집단. 그토록 엄격한 종교 집단의 일원이 되는 절차는 매우 까다롭다. 계몽트롤들은 책으로만 보아 알지 못하겠지만.

"그때 너희에게 부여된 사회화 주문을 영속화시켜주마. 그때부터 너희는 디스펠 주문에 맞아도 지성이 유지되고, 자손을 낳아도 사회화된 두뇌가 똑같이 유전될 것이다."

그것은 신종족의 탄생.

간단히 허락해줄 일은 아니다.

"그러니 증명해다오."

너희가 창조주의 감시가 없어도 다른 종들과 아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지성체임을! 내가 극도로 위험한 괴물을 만들어낸 미치광이 요술쟁이가 아니라, 세상을 밝힐 새로운 수호자 종족을 만들어낸 창조주임을!

이에.

계몽된 바위트롤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현명한 아버지시여!

저희들을 증명을 지켜봐주소서!

* * *

그런 사연을 거쳐 올골두골로는 즈샨수도회의 견습수도승이 되었다. 정식 수도승이 될만한 자격을 선보이면, 그녀의 일족과 함께 화합교단의 입교식에 참가할 영광을 얻으리라.

'물론 견습수도승의 자격도 쉽게 얻지는 못했다. 올골두골로는 매우 어려운 시험들을 겪어야했지만, 모두 훌륭히 통과했다.'

그녀가 마주한 시험에 대해선 차후에 기술할 기회가 있으리라. 여하튼 화합의 여신을 섬기는 견습수도승 올골두골로는 [힘몽크] 빌드를 타고 오크들의 결투장에 나섰다. 

"동족 간의 다툼에 외부인을 끼우겠다고?!"

분노한 블랙터스크.

권좌의 벨칸을 노려본다.

"이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겁쟁아!"

"이제부턴 짐이 관례다. 블랙터스크."

하지만.

벨칸은 이전처럼 유화적이지 않았다.

조별과제장에서 왕으로 전직했으므로.

"짐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가락으로 황무지를 가리킨다.

"언제든 떠나도 좋다."

"·········"

"신하 블랙터스크는 명심해라. 그대의 하찮은 목숨이 붙어있는 유일한 까닭은, 짐이 그대가 전사로서 바쳐온 헌신을 인정하기 때문임을."

쿠르릉!

콰아아!

오른손에 번개창이 생겨난다.

"·········"

맹렬한 번개를 마주한 블랙터스크는 실감했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해온 자신의 오랜 친구는, 더이상 다른 오크들을 설득해야하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

"하!"

쿵!

그럼에도.

앞으로 나선다.

"덤벼라! 멍청한 트롤아!"

오우거처럼 거대한 오크.

무시무시한 블랙터스크!

변경의 공포를 상징한다!

"네놈을 일격에──"

"올골두골로류."

쿵쿵쿵!

트롤이.

'아니.'

신체를 단련한.

족장급 바위트롤이.

"정권지르기!"

"?!"

회색거인이 질풍처럼 쇄도해 오크에게 정권을 내질렀다. 그것은 평범한 정권이었다. 아무런 기예도 섞이지 않은 단순한 주먹지르기.

"그런 단순한 일격으──"

빠아앙!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우거처럼 육중한 오크가 트럭에 치인 것처럼 하늘로 떠올랐다. 올골두골로는 바위보다 단단한 하체(체력 25)를 수그렸다 무지막지한 각력(힘 32)으로 하늘을 향해 도약했다. 마치 격투게임의 히든캐릭터처럼.

'······저게 뭐지?'

2만 시간을 플레이했지만 챕터1 중간보스를 초살하는 26레벨 캐릭터는 처음 보았다. 애초에 [바위트롤]같은 괴물은 선택 종족이 아니다. 애초에 괴물은 사람보다 강하기에 괴물이니까.

'한데 괴물이 [클래스]를 지닌다면?'

지금의 올골두골로는 [25레벨 바위트롤]에 [1레벨 몽크]을 합쳐서 [26레벨 캐릭터]다. 무예승으로선 초심자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1레벨이 생겼다는게 중요해.'

[1레벨]은 해당 클래스의 기본기를 탄탄히 습득했음을 뜻한다. 전사라면 각종 무기를 다루는 방법과 그에 걸맞는 기초체력을. 마법사라면 읽고 쓰고 주문을 시전하는 능력을.

'1레벨 몽크라면 체술로 번뇌를 다스리는 방법을 익힌 이다.'

지긋한 고승들에겐 세속인과 다를바 없겠지만, 자신같은 세속인의 시선에서는 이미 욕망에 초탈한 수행자와도 같다.

게으르다.

난폭하다.

욕심많다.

'그것이 바위트롤의 천성.'

하지만.

올골두골로는 초월했다.

종적으로 타고난 한계를.

[올골두골로의 극기를 확인!]

[연구단서 2/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3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31점]

"올골두골로류!"

그녀는.

괴물의 육신으로 행한다.

"올려차기!"

괴물의 막싸움이 아닌.

고도로 훈련된 무술을.

"?!"

트롤무예승이 암석같은 오른발을 힘껏 휘두르자 공기가 찢어지며 블랙터스크의 등에 엄청난 충격이 작렬한다. 낙하하던 오크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놈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

"············"

모두.

말을 잃었다.

"엄······"

전쟁을 부르짖던.

호전광 오크들도.

"·········잿빛현자여."

대전사로 내보냈던.

주술사왕 벨칸조차.

"대체 무슨 괴물을 길러낸 것이오······?"

"저도······"

심지어.

저것을 길러낸 잿빛현자도.

"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모르겠다.

내가 몽크를 키워도 저것보단 약했다······

[사막오크 전체가 공포에 질림!]

[주술사왕의 현명함을 모두가 칭송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23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33점]

* * *

올골두골로의 활약으로 벨칸의 정치적 권위는 완전한 반석에 올랐다. 이제 인간에 대한 전면전을 주장하는 오크는 없어졌다. 오히려 벨칸의 현명함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지.

"고맙네. 잿빛현자여."

"감사드립니다. 로쉬란 벨칸."

"조상들의 명예를 걸고 맹세컨데 향후의 정국이 자네의 계책대로 흘러가도록 돕겠네. 그외의 도움이라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연락해주게. 자네는 우리들의 형제이니."

오크형제라.

친형제들보단 훨씬 낫겟지.

"그럼 작별할 시간이군요."

"같이 왔던 대악마는 어디갔나?"

아.

멘탈이 터졌다.

개인극장에 칩거중이겠지.

"악마들이 원체 바쁘지 않습니까?"

"하기야······자네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인사를 마치고.

진짜로 작별을 고했다.

"?"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다.

"쉿쉿!"

그녀가 찾아왔다.

조그만 은색뱀의 형상으로.

"제안이 있다. 필멸자여."

결연한 목소리로.

무엇을 결심한 사람처럼.

"너의 패밀리어가 되어주마."

"조건은?"

"나의 초즌이 되어준다면."

9. 아홉번째 연구 - 신성한 언약(2)

초즌(Chosen)이란 신격의 대리인으로 선택받은 필멸자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신격의 직계후손이나 교단의 최고지도자가 맡는다.

한데.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그대의 교단은 몰락하지 않았소?"

"그것을 일으켜 세우는게 초즌의 의무지."

"흠."

계산한다.

실과 득을.

"그럼 그대의 진체를 연구할 수 있소?"

"내키진 않지만 허락하마."

"고대에 대한 전승도 들을 수 있고?"

"그건 얼마든지."

현대인 게이머 시절에 습득한 지식은 어디까지나 설정집. 때문에 게임에 직접 구현되지 않은 과거사에 대해선 지식의 깊이가 제한된다. 주요 설정은 알고 있지만.

"합당한 거래군."

"거래인가."

"거래요."

[연구일지갱신 : 은빛뱀]

[숨겨진 보상을 발견합니다!]

[연구보상1. 바실리스크와의 강제계약]

[연구보상2. 바실리스크와의 임의동행]

[연구보상3. 고대신과의 상호계약]

3번.

고대신과의 상호계약을 택한다.

"초즌의 임명은 뒤로 미루마."

쉬잇······

은빛뱀의 울음.

아쉽다는 소리.

"아직 그대에게 내어줄 정수가 없으니까."

"이해하오. 서두르지 않아도 되오."

초즌으로 선택받은 필멸자는 신격의 정수를 일부분 나눠받는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전문경영인이 회사에 취임하면서 지분을 일부분 나눠받는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지금의 은빛뱀이 지닌 정수는 존재를 유지하기도 벅찬 상태. 따라서 초즌의 힘을 부여하는건 미뤄질 것이다.

'모든 신성은 추종자가 많아질수록 강력해진다. 따라서 신격의 정수를 나눠받은 초즌도, 교세가 커질수록 신성력이 강해진다.'

[신학에 대한 전승 습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3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34점]

어쨌든.

의식용 마법진을 준비한다.

그녀를 패밀리어로 길들일.

"·········"

한편 은빛뱀은 자신을 길들일 마법진이 준비되자,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과연 눈앞의 필멸자에게 자신을 길들일 자격이 있을까?

'본신은 가장 오래된 바실리스크이자 고대인들의 흠숭을 받던 존재였다. 녀석이 알고 있는 지식보다 훨씬 오래된 존재지.'

은빛뱀은 길고 장구했던 삶을 처음부터 회상했다. 까마득한 옛날에, 유난히 새하얀 비늘을 타고난 모래뱀이 알을 부수고 나왔다. 의식을 차려보니 소금바위 밑이었지.

'알에서 함께 깨어난 형제자매들이 제법 많았지만 부모는 없었다. 우리 바실리스크들은 알에서 태어나 홀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알에서 함께 태어난 자매가 허기를 느끼고 자신을 공격할 기미를 보였다. 먼저 공격하고 시체를 포식했다. 그러자 형제자매들이 먹이를 나눠달라며 다가왔다. 주제를 모르는 놈년들도 모조리 물어죽이고 먹어치웠다.

'감히 나의 먹이에 이빨을 들이밀어!'

은빛뱀은 태생적으로 강하고 포악한 바실리스크였다. 사막의 수많은 동식물들을 잡아먹어 빠르게 진화한 결과, 인간들의 언어를 알아듣고 미리 대처하는 지능까지 갖추었다.

평범한 바실리스크는 산성브레스를 내뿜고 눈을 마주치면 돌로 굳어버리는 거대한 몬스터일뿐이다. 그렇지만 은빛뱀은 영수(靈獸)로 불릴만큼 아름답고 영리한 생물이었다.

'으, 은빛뱀이다······'

'우, 우린 모두 죽었어······'

그래서.

인간들은 저항을 포기했다.

'노, 노예들을 바치고 도망쳐!'

'으아아아아아아──!'

대신.

공물을 바치기로 결정했다.

'사막의 폭군이시여!'

'저희의 제물을 받으소서!'

'이것을 받고 제발 진노를 멈춰주소서!'

캬아아악!

끄아아아아악!

쓸데없는 짓이었다. 당시의 자신은 지능은 높았지만 지성은 없었다. 다만 인간들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이용했을 뿐이지.

'폭군께서 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댄다!'

'처녀! 순결하고 아름다운 처녀들을 바쳐라!'

'그래! 처녀들의 살이 유들유들하니까!'

하지만 겁에 질린 고대인들은 자신의 진노를 달랜다고 어린 암컷들을 바쳤다. 몸집이 작아서 별로 먹을 것도 없는데······

'캬아아아악!'

'부, 부족하시댄다! 더욱 많이 바쳐라!'

'캬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소녀들이 씨가 마르고.

인간들이 고향을 버리기 직전.

'제가 가볼게요.'

'피티아시여?'

별의 선택을 받은 신녀가.

스스로 제물이 되길 자처했다.

'지금 범람원을 버리고 떠난다면 이곳에 정착하고자 희생했던 수많은 분들의 죽음이 헛되게 되어버려요. 저의 목숨을 바쳐서 그분들의 의지를 이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나를 먹어치우렴.

가장 강력한 뱀아.

'캬아아악!'

'············'

마지막 먹잇감은.

조금은 이상했다.

'캬악?'

포효를 내질렀음에도.

공포를 보이지않았다. 

'빛나는 별들이시여.'

단지.

무릎을 꿇고서.

별들을 향해서 기도할뿐.

'저는 그대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나이다.'

와그작!

소녀의 상체가 뜯겨져나갔다.

우걱우걱!

사람이 고깃조각으로 변한다.

꿀꺽!

고깃조각을 삼키고.

낼름!

하반신도 먹어치웠다.

'맛있었지.'

정말로 맛있었다.

무언가 별미랄까.

'······한데 그날부터 뭔가 이상해졌어.'

마음이,

생겨버렸다.

'으, 은빛뱀이 나타났다!'

'사막의 대폭군이다! 우린 모두 죽었어!'

'별들이시여! 어째서 저희를 저버리셨습니까!'

'············'

어째선지 절규하는 인간을 사냥할 욕구가 들지 않았다. 눈앞의 인간들을 먹어치우면 놈들의 처자식들이 울부짖으며 고통스러워할 모습이 떠올랐다. 본래라면 그것도 새로운 먹잇감들이며 좋아해야하는데.

'바쳐라.'

'·········어?'

'·········사람의 말을?'

'바실리스크가······?'

바쳐라.

너희보다 맛좋은 고기들을 바쳐라.

그리하면 목숨을 부지할 지어다.

'············네!'

그때부턴 인간들이 바치는 제물을 받으며 살았다. 인간은 맛이 없기에 가져와도 제물로 받지 않았다. 사막괴조나 낙타무리, 하이에나같은 짐승이 식감도 좋고 육즙도 풍부했다.

'이번 달엔 제물이 없구나.'

'사막의 지배자시여. 그것이······'

'네놈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헌데 외적들이 공물을······'

공물에 손댄 도둑들을 쫓아서 대사막의 외부로 향했다. 놈들은 공물에 더해서 공물을 바치는 먹이수집꾼들도 잡아갔다. 이래서야 직접 사냥을 해야하니 귀찮아져버린다.

'소문의 은빛뱀이다!'

'저것이 사막의 폭군인가!'

'걱정마라! 우리에겐 최강의 요새가──'

콰아아아!

인간들의 하찮은 돌집이 녹아내렸다.

'어······?'

'도, 도망쳐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도둑들은 모조리 잡아먹고 쇠사슬에 묶인 먹이수집꾼들을 풀어줬다. 그러자 먹이수집꾼들은 자신을 사막의 제왕이라고 칭송하면서, 더욱 열성적으로 먹이를 가져다바쳤다.

그러던 어느날.

'여신이시여.'

칭호가 달라졌고.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나이다.'

스스로를 공양하는 이들까지 나왓다.

'너의 정성을 보아서 영광을 허락해주마.'

꿀꺽!

공양제물들을 먹어치우고 그들의 영혼까지 흡수했다. 그들의 육신이 아닌 기억과 감정, 생각까지도 모조리 흡수해 자신의 일부로 삼는다.

'······맛있군.'

그때부터 방침을 바꾸어 인신공양을 권장했다. 허나 검증은 대단히 까다로웠다. 가장 고귀하고 빛나는 영혼들만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자격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영혼은 더욱 크고 밝아졌다.

"은빛뱀이시여! 지혜를 청하나이다!"

"무슨 지혜를 청하는가?"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를 내려주마."

언젠가부터 인간들의 청원을 해결해주는 신기한 권능이 생겨났다. 인간들은 지혜로운 해결책을 구했고, 본신은 적합한 공물만 바친다면 공물에 걸맞는 답을 내려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생겼다.

'저희들의 수호신인 아름다운 은빛뱀이시여!'

'지상으로 강림하사 저희들을 다스려주소서!'

사람의 인격이.

'너희들의 간절함이 느껴지는구나.'

또한.

들리게 되었다.

인간들의 기도가.

'이에 본신이 기꺼우니 너희 미물들을 긍휼히 여기어주마. 하지만 미물들로선 신성한 진체의 광휘를 감당하지 못할 터이니······'

간절한 기도를 백년간 바치어 신성을 담을 거룩한 그릇을 빚어라. 그릇의 형상은 너희에게 낯섬이 없도록 만들되, 본신의 신성함을 발하고 만인이 숭배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여라. 이러한 준비가 이루어지면, 본신은 그릇에 거하여 너희를 다스리는 은총을 내려주리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막의 지배자시여!'

'찬미받으소서! 찬미받으소서! 찬미받으소서!'

'신성께서 저희 미물들을 긍휼히 여기심에 만인이 감격해 아흔아홉번 바닥에 머리를 찧을 것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찬미받으소서!'

당대의 모든 현자와 장인들이 모여서 지혜를 쥐어짜냈다. 필멸자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신성을 담을 그릇을 상상해야했다. 

"모두가 숭배할 최고의 미인을 조각합시다!"

"""불경하다!"""

신성께선 우리의 보호자이시지 보호를 받으실 분이 아니다. 따라서 그릇은 경외를 받아 마땅한 외형을 갖추어야 하리라!

최고의 미인.

최고의 전사.

최고의 군주.

현자들은 어떠한 관념이 은빛뱀을 표현하기에 적합한지 오십년간 토론을 벌였다. 그럼에도 현자들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장인들은 모든 관념을 하나의 조각상에 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릇이 빚어지고.

신성이 강림하자.

"·········"

만인이.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신성한 위엄에 전율하며.

'신성이시여.'

그들이.

존경과 두려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며 말했다.

'당신을 무어라 찬양하면 되겠나이까?'

은빛뱀이란 이름만으론 부족했다.

가엾은 인간들을 보살피려면.

[아엘타나르.]

신언이 전한다.

신왕의 이름을.

[별빛의 아엘타나르라고 찬미하여라.]

그것은.

소녀의 이름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했던.

[역사에 대한 전승 획득!]

[신화에 대한 전승 획득!]

[신성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레벨이 올랐습니다!]

[24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36점]

마법진을 발동한 텔로리안의 의식이 물밀듯이 쏟아지는 기억에 휩쓸렸다. 너무나 방대해 그의 두뇌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은빛뱀이 별빛의 아엘타나르였다고?!'

이건 자신조차 알지 못하던 지식이었다. 설정집에 기입되지도 않았고, 은빛뱀 레이드에서도 별다른 단서가 제시되지 않았으니까.

'이래서였군!'

타락한 은빛뱀이 종언의 전쟁에서 태양신에게 맞서는 종말의 짐승으로 진화하던 이유가!

'별빛의 아엘타나르는 카람샨 만신전을 통치하는 주신(主神)이었다!'

[신화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4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37점]

카람샨 문명이 섬기던 신들을 카람샨 만신전이라고 부른다. 또한 카람샨 문명이 오늘날의 제국에 비견될만큼 강대한 인간 문명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은빛뱀은 지금은 반신으로 영락했어도 전성기엔 오늘날의 태양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존재였던 것이군!'

[카람샨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4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38점]

"별빛의 아엘타나르!"

"신성한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아라."

"정체를 숨기고 있었군!"

"본신을 길들이겠다고 했느냐?"

패밀리어.

번역하면 사역마.

마법사가 부리는 마수다.

"그럼 실력을 증명해보도록."

푸스스스스!

은빛뱀의 육신이 찬란한 별빛을 뿜으며 커져갔다. 아나콘다가 거대한 바실리스크로 변모하며 신성한 진체를 드러낸다.

[신화적인 괴수의 출몰을 목도함!]

[잊혀진 고대신의 분노를 마주함!]

[경험치 +30]

[전승포인트 +3]

[24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41점]

스스로의 이름을 자각한 은빛뱀은 강력한 존재로 거듭났다. 머리엔 성스러운 헤일로가 생겨났고 이마에 달린 뿔에선 별빛이 번득였다. 

'흥미롭군.'

덕분에.

간만에 흥미가 돋았다.

'저토록 강대한 존재를 길들인다면 그건 장구한 마도사에서 손꼽힐 위업이 되겠지.'

[연구일지 갱신!]

[신규표본 : 별빛의 아엘타나르]

[연구주제 : 사막을 길들이십시오.]

[연구보상 : 별빛의 아엘타나르]

사막을 뒤덮는 모래폭풍이 나타나서 사막오크들의 튼튼한 천막마저 종잇장처럼 부숴버렸다.

"대기의 정령들이여! 저희를 지키소서!"

주술사왕 벨칸이 전력을 다해서 폭풍우 방벽을 전개하지 않았다면, 집결한 사막오크들은 굉장한 인명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모두 물러나도록. 신왕께서 노하셨다."

이번 모래폭풍은 너무 거세어 올골두골로까지 공포를 느꼈다. 저것은 신의 진노다. 유한한 삶의 존재들은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아름답군."

신성을 목도했다.

"대신전의 주춧돌마저 사라지고 성스런 이름마저 망각되었음에도, 여전히 신으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품위를 지녔군!"

"그렇지만 상태가 좋진 않구나."

만물을 꿰뚫어보는 통찰안(洞察眼)으로 은빛뱀의 상태를 낱낱이 관찰한다. 별빛의 여신은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강력하다. 순수한 육신만 따져도 70레벨이 넘어가는데, 자신의 마법재능에 비견될 [신화] 특성도 존재한다.

──────

◆잊혀진 고대신(특성, 신화)

: 해당 존재는 몰락한 고대문명이 숭배하던 주신입니다. 이름은 잊히고 권세는 시들어 전성기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것 없는 존재로 영락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권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효과

: [권능] 행사가 조건부로 가능.

: [영웅] 미만의 모든 공격에 면역.

: [불멸] 특성 부여.

: [신위] 상승 시엔 기존 특성 복원.

──────

제일 까다로운 부분은 [권능]의 행사다. 신격의 [권능]은 로어마스터도 20레벨 수준에서 대처가 가능한 힘이 아니다.

'필멸자가 권능에 맞서려면 50레벨은 넘어야한다. 9위계 주문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거나 신적인 존재의 힘을 빌려야 하니까.'

권능은 0레벨 인간이 사용해도 골치가 아파지는 힘이다. 이걸 상대하면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봐야한다. 그게 인간과 신의 격차다.

단.

상대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내가 레벨이 낮듯 저쪽의 한계도 명확하다.'

모든 능력치가 절반으로 깎이는 [동면후유증].

권능의 효과를 절반으로 감소시키는 [망각됨].

'모래폭풍만 걷어내면 이쪽이 이긴다!'

지금처럼 새까만 모래폭풍이 몰아치고 대지가 흔들리면, 집중을 요하는 고위계 주문의 사용이 어렵다.

'그럼 집중력부터 확보해볼까.'

우선.

모래폭풍부터 걷어내자.

'나의 로어마스터 레벨은 23.'

마법사는 1레벨에 1위계 주문을 습득하고, 5레벨부턴 시전이 가능한 위계가 1단계씩 올라간다. 따라서 23레벨 로어마스터인 자신이 홀로 시전이 가능한 주문은 5위계까지.

"바람이여!"

[4위계, 공기의 로어]

[스피어 오브 윈드(Sphere of Wind)]

[대기여! 나를 둘러싸서 보호하라!]

정신을 로어(Lore)에 접속시키며 자신을 감싸는 구체를 상상한다. 마법지팡이가 하늘빛을 발하면서 상상을 현실에 구현한다.

촤아악!

강고한 바람의 장막이 형성되어 모래폭풍의 접근을 막아냈다. 이제 주문을 사용할때 모래폭풍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더블 캐스팅]

[4위계, 대지의 로어]

[스톤 쉐이퍼(Stone Shaper)]

[대지여! 나를 싣고 움직일 지어니!]

밟고 있던 바위가 뿌리채 나무가 뽑혀나오듯 대지에서 뽑혀나왔다. 이젠 지상이 아무리 흔들려도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3위계, 비전의 로어]

[염동력(Telekinesis)]

[비전의 힘이여! 명을 따르라!]

뒤이어 염동력을 시전해 바위를 움직였다. 이제 자신은 바람의 구체로 보호받으며, 바위를 발판삼아 날아다닌다. 더이상 모래폭풍도 지진도 주문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필멸의 현자여!]

모래폭풍 속에서 잊혀진 여신의 선고가 들려왔다. 권능이 깃들어있는 선언, 신성한 언령(Holy word)의 반포였다.

[모래에 파묻혀죽으라!]

[9위계, 신성의 로어]

[홀리 워드(Holy word)]

[말한대로 이루어질 지어니!]

"!"

저것은 권능.

신성한 힘이다.

콰르르르르르르르──!

일대를 뒤덮은 모래폭풍이 일점을 향해서 쏟아진다. 심지어 잠잠하던 모래둔덕들까지 텔로리안을 노리고 하늘로 솟구쳤다. 세계가 신언을 현실로 만들고자 변화하는 것이다.

[권능의 행사를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4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42점]

'일반적인 마법으론 대항하기 어렵다!

분노한 사막이 자신을 파묻으려는 상황. 자신의 방대한 마력량으로도 저토록 압도적인 질량에는 대처가 불가능하다. 

'전승지식을 꺼내야겠군.'

────

■로어마스터의 지혜 [클래스 능력, 전설]

: 로어마스터들은 다양한 전승을 익혀 다재다능한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들은 복수의 로어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적들을 공포에 빠뜨리고, 잊혀진 주문과 기예를 완벽히 복원함으로서 세상을 경악에 빠뜨립니다.

■효과

: 전승포인트를 활용해 다양한 효과를 구현합니다. 희소성이 적고 일시적인 효과일수록 포인트가 적게 들어가고, 희소성이 크고 영구적인 효과일수록 포인트가 많이 들어갑니다.

■목록

마나회복(소) : 1P

마나회복(중) : 2P

마나회복(대) : 5P

능력치상승 : 5P

특성치습득 : 5P

클래스능력 : 5P

로어개방 : 15P

추가지혜 : 10P

────

[추가지혜 : 간이마법진 소환]

[클래스능력 : 메타매직[강화]]

[클래스능력 : 메타매직[초강화]]

[전승포인트 20점 소모!]

[전승포인트 : 22]

간이마법진은 즉석에서 소환되는 마법진을 뜻한다. [전승포인트 2점]을 소모함으로서 시전가능한 주문을 [1위계]만큼 올려준다.

[간이마법진을 소환합니다!]

[전승포인트 : 20]

푸른 마력광이 자신의 발밑을 가로지르며 오망성을 형성한다. 덕분에 영혼과 로어와의 연결이 더욱 강화됨을 느낀다.

'다음은 메타매직.'

메타매직.

직역하면 마법강화.

마법사의 꽃이다.

────

◆메타매직 (마법사 능력)

: 통상적인 주문에 시전자가 지정한 효과를 추가합니다. 강력한 효과를 추가할수록 마나소모량도 커지고 시전시간도 길어집니다.

■사용 가능한 메타매직

: 강화 (위력 2배, 마력 2배, 시전시간 2배)

: 초강화 (위력 3배, 마력 3배, 시전시간 3배)

────

초보자들에겐 양날의검.

고인물들에겐 날먹특성.

'메타매직은 마법사들이 고점이 가장 높은 클래스로 불리는 3대 이유다. 한가지 주문을 굉장히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거든.'

본래 23레벨 로어마스터가 시전가능한 마법은 5위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간이마법진을 사용하면 6위계까지 시전이 가능하고.

"로어여! 마법을 강화하라!"

새로운 전승으로 로어와의 연결을 강화해서, 기존의 주문을 훨씬 강력한 형태로 수정한다.

[메타매직, 초강화]

[주문위력 +200%]

[마나소모 +200%]

[시전시간 +200%]

[전승포인트 : 18]

사막의 한복판에서 끝없는 모래폭풍이 몰아친다. 그렇지만 이쪽도 자연현상을 이용하는 형태로 마법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대기여. 로어마스터가 그대를 부른다."

[6위계, 공기의 로어]

[컨트롤 웨더(Control Weather)]

[바람이여! 그대의 숨결을 지상에 토하라!]

주문을 외우고 지팡이를 땅끝에 내리찍자, 땅끝에서 푸른색 기둥이 모래폭풍을 뚫고서 창공으로 솟구쳤다. 그러자 푸른 하늘이 마력에 잠식되면서 먹구름을 형성한다. 

[모래 속에 파묻혀죽어라!]

그때, 모래폭풍의 질량이 바람의 구체를 깨뜨렸다. 마법사는 신속하게 [점멸]을 외워서 창공으로 도주한다.

[잔재주로 사막의 분노를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작된다.

"바람이여!"

쿠르릉!

콰아앙!

"너의 숨결을 쏟아붓거라!"

번개가 내리치고.

강풍이 불어온다.

우수수수수수!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굵고 묵직한 빗방울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거칠게 몰아치던 모래폭풍의 기세가 주춤했다. 그럼에도 몰려오는 모래폭풍은 몇번이고 블링크를 시전해 피해낸다. 그러자 시간이 지날수록 모래폭풍이 점차 힘을 잃고서 흩어져갔다. 아무리 모래가 많아도······폭우를 당해내지는 못하니까.

[필멸자가 신격의 권능에 맞섬!]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24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0점]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서 소환한 폭풍우는, 모래폭풍을 잠재우고 대사막의 열기까지 가라앉혔다. 

[그대는 사막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여신의 뿔은 여전히 강대한 별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는 여전히 모래폭풍을 불러일으키는 권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이나,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래폭풍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폭우가 사막을 적시고 있을 뿐이지.

[그대에겐 자격이 있군.]

[신격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음!]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레벨이 올랐습니다!]

[25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22점]

"카람샨을 다스렸던 신왕에게, 우리의 영혼을 결속시킬 언약을 청한다."

9. 아홉번째 연구 - 신성한 언약(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