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막간(2) - 유물제작
마법부여는 사물에 마법을 영속화시키는 전문기술이다. 풍부한 배경지식과 다양한 경험이 필요해서,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쉽게 해내지 못하는 전문분야다.
'아예 마법부여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마법사들도 있지. 경지에 올라서면 [마도장인]이란 칭호를 얻으면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하지만 마부사에게 제일 중요한 자질은 배경지식과 경험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자질은 바로 풍부한 자금력과 행운이다.
'왜냐면 마법아이템을 강화하다보면 무작위적으로 아이템이 파손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거든. 때문에 마부사들의 사망원인 1위는 가보가 파괴당한 귀족들의 분노다.'
하지만.
새로운 특성과 함께라면 그것도 괜찮다.
내게는 6개의 특성이 남아있는 상태니까!
['운좋은 사람'를 얻었습니다!]
['강력한 행운아'로 향상됩니다!]
['천부적 도박사'로 향상됩니다!]
['도박장의 파멸'로 향상됩니다!]
[다음 단계는 전설 특성입니다!]
흠.
전설특성을 찍으려면.
3개의 특성점수를 필요하다.
하지만 남은 점수는 2점뿐인 상황.
[로어마스터의 지혜를 사용합니다!]
[새로운 특성점수를 획득합니다! 5P 소모!]
[잔여 특성점수 : 3개]
[잔여 전승점수 : 23점]
그럼.
최초로 전설특성을 찍어보자.
[새로운 [전설] 특성을 획득합니다!]
['운이 좋군'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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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군 (전설, 개인특성)
당신은 운이 좋습니다. 확률적 우위가 개입하는 모든 종류의 판정에서 당신은 언제나 성공을 거둡니다. 다만 이러한 [행운]의 범위는 개인적인 문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단, 도박장에서는 상대방이 있어도 발동됩니다.
◆효과
- 행운을 시험할때 주사위를 다시 굴립니다.
- 하나의 행위에 5번의 기회가 제공됩니다.
- 도박장에서 격렬한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주의
- 효과가 발동할 때마다 [운이 좋군]을 육성으로 말해야합니다. 이를 잊어버리면 다음부턴 [운이 나쁘군]을 외치게 될겁니다.
─────
"······아우님. 정말로 괜찮은건가?"
"괜찮습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그래도 이건 시조님의 가보인데······"
[운이 좋군]은 시네어RPG에서 손꼽히게 강력한 특성! 서술 그대로 운이 좋아지서 기연을 얻을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그렇지만 자신에겐 기연의 획득보다 불운의 방지가 중요하다.
'아무리 철저한 계획도 운이 없으면 어그러지거든. 하지만 [운이 좋군] 특성을 획득함으로서, 이러한 변수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
다만 내가 운이 좋아질 뿐이지, 남을 불운하게 만드는 특성은 아니다. 따라서 명백한 경쟁자를 지닌 [대결]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투나 협상에선 발동하지 않는 특성이다. 이런 판정에선 내가 운이 좋아지면 다른 사람이 운이 나빠지는 일과 똑같으니까.'
반면 마법연구나 마법부여같은 분야에선 대단히 좋다. 반복시도로 확률을 돌파해야하는 판정들이 모두 운으로 해결이 되니까.
"정말 시조님의 갑옷을 강화해야겠나?"
"형님."
"드워프들이 만들어준 갑옷이란 말일세."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런건 아니네만······"
이해는 된다.
가보란 단순한 마법아이템이 아니다.
가문의 업적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지.
"내키지 않으시면 보통 갑옷에 걸겠습니다."
"·········"
"대신 성능이 미지근해질겁니다."
재료는 1회분.
선택은 형님의 몫입니다.
"으음······"
철퇴공 로드릭은 마도사의 작업대에 올라간 [무쇠공의 검은갑주(희귀)]를 쳐다보며 고민했다. 솔직히 지금의 검은갑주도 충분히 강력했다. 평범한 인간이 평범한 무기를 사용해선 검은갑주를 돌파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전장에서 마주할 적들은 똑같은 귀족들이다. 그들도 가보로 내려온 마법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어.'
즉.
보다 좋은 갑옷이 필요하다.
홀로 적들을 압도하려면.
"성공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99%입니다."
"············"
좋네.
시도해보게.
'원래는 마법 부여를 걸때는 물건이 뽀각당해도 책임을 물지 않겠단 서약서를 받지만, 철퇴공은 약속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니 괜찮을테지.
[마법부여 : 무쇠공의 검은갑주(희귀)]
[4개의 마법부여를 시도합니다.]
[최상급 경량화]
[최상급 능력치(힘)]
[최상급 마법저항]
[운명적 수호]
[성공확률 : 25%]
[실패확률 : 25%]
[파괴확률 : 50%]
[정말로 시도하시겠습니까?]
25%의 성공가능성.
본래는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로어마스터 텔로리안!
"운이 좋군!"
무적의 주문을 외우며 오른손에서 마력을 내뿜었다. 그러자 갑주에 그려놓은 다양한 룬문자들이 번득이며, 마법진에 배치해둔 촉매들이 하나씩 공중으로 떠올랐다.
"바람이여!"
촉매는 하피여왕의 날개.
공기를 영속화시키는 성질.
[5위계, 공기의 로어]
[영구적 경량화(Permenent Reduction)]
[깃털처럼 가벼워져라!]
쏴아아!
드워프장인들이 블랙아이언으로 주조한 명품갑옷에 마력이 스며들었다. 블랙아이언의 장점은 단단함과 화염저항이다. 대신 통상적인 갑옷보다 두배는 무겁다는 문제가 있었다만.
[마법부여(경량화)가 성공합니다!]
"대지여!"
다음.
촉매는 구름거인의 힘줄.
대지를 영속화시키는 성질.
[5위계, 대지의 로어]
[거인의 힘, 영구적(Giant's Strength)]
[거산같은 무거운 힘을 부여해다오!]
쿠웅!
구름거인의 힘줄이 낱낱이 분해되어 검은갑주에 스며든다. 그러나 갑주에 부여된 앞선 주문과 대립하며 마력이 튀긴다!
끼긱!
끼기긱!
[마법부여(힘)가 성공합니다.]
하지만 격렬히 부딪치던 주문들은 결국에 조화를 이루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블랙아이언은 복수의 주문을 견디기에 충분한 내구성을 갖춘 재질이므로.
"비전(Arcane)이여!"
다음.
촉매는 마공학코어.
비전을 영속화시킨다.
[5위계, 비전의 로어]
[영구적 주문방패(Spell Shield, Permenant)]
[우주의 신비여! 나를 그대에게서 보호하라!]
콰앙!
마공학 코어가 파괴되면서 방대한 비전에너지가 방출되었다. 강렬한 마력이 기존의 마법과 충돌하면서 거센 충격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기존의 주문들은 파훼되었고, 무쇠갑옷에는 영구적인 손상이 발생······
[마법부여에 실패합니다!]
['운이 좋군!'이 발동합니다!]
[주사위를 다시 굴립니다!]
[마법부여에 실패합니다!]
[주사위를 다시 굴립니다!]
······했을 운명이었지만 텔로리안은 대단히 운이 좋았다. 그렇기에 비전 격류는 기존의 마법들과 충돌했지만, 우연하게 갑옷의 내부에 무사히 자리잡는 행운을 누렸다.
갑옷은 무사했다.
주문은 안착했고.
[마법부여(주문방패)에 성공합니다!]
"아우님!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마지막 주문이 제일 중요합니다!"
운명적 수호.
치명타 판정을 막아주는 옵션.
불운에 의한 사망률을 극감시킨다.
"전장은 행운이 지배하는 영역입니다!"
"그건 내가 아우님보다 많이 알고 있지!"
"대륙 최강의 마스터나이트도 투구눈틈에 볼트가 박히면 바로 죽지요. 제가 지금부터 부여할 마법은 그러한 사고를 예방해줍니다!"
흠!
대단히 훌륭한 마법이군!
그러나 너무 욕심을 부리는게 아닌가?
"괜찮습니다."
저는 운이 좋거든요.
마나흐름도 안정화시킬줄 알고요.
[새로운 전승 : 마나흐름 안정화]
[전승점수 5점을 소모합니다]
[잔여 전승점수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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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흐름 안정화 (클래스 능력, 로어마스터)
: 당신은 전승지식을 활용해 마나의 흐름을 안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활용한다면, 하등한 요술쟁이들처럼 불의의 마법사고를 당하지 않게 될겁니다.
■능력
: [마나]를 활용하는 [모든 행동]의 판정에 대해서, 주사위를 다시 굴릴 수 있습니다. 대신 2점의 전승포인트가 소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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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주사위 리롤이다.
전승포인트 2점으로.
"수호의 룬이여!"
촉매의 중심에 놓여있던 [수호의 룬]이 허공에 떠오른다. 저것은 [룬드워프]들이 독점생산하는 [영웅] 등급의 룬이다.
'수호의 룬을 구입할때는 검증된 용병 1만명을 1년간 운용할 자금이 들어가지. 하지만 충분히 그만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강력한 필멸자도 전장에선 결코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 전투에선 때때로 행운의 여신이 모든 요소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는 농노가 대충 쏘아낸 화살이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를 쓰러뜨리는 장소가 전장이다. 전장엔 결코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장의 불확실성을 이해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7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9점]
하필.
마나가 떨어져 방호주문을 해제했을때.
하필.
긴장이 풀려서 패링에 실패했을때.
그런 순간에 급소에 화살을 맞으면.
아무리 레벨이 높은 인간도 죽는다.
'매순간 쉬지않고 긴장하며 싸우는 사람은 없다. 대마법사든 소드마스터든 인간일뿐이니.'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필멸자의 한계니까.
'때문에 전장은 개인이 아니라 다수가 지배하는 장소다. 50레벨 소드마스터도 5레벨 궁병 1천명이 일제사격을 가하면, 확률적으로 반드시 럭키샷이 터져서 중상을 입거나 죽거든.'
이는.
게임 시절에 [치명타]로 구현됐던 개념이다.
또한 [부위 공격]의 규칙으로도 구현되었고.
'심장이나 두뇌에 치명타?'
죽는다.
무조건.
'하지만 드워프 룬마스터들이 룬포지에서 주조한, [수호의 룬]은 운명을 비틀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운명적 수호.
[최초의 룬마스터께선 들으소서! 당신의 후손들이 제게 우정의 증표로 수여해준 선물이 있사오니 그대의 숨결을 갑옷에 불어넣어주소서! 드워프 만세! 룬마스터 만세!]
로어마스터가 드워프들의 언어로 주문을 내뱉자, 천둥이 내리치고 땅이 뒤흔들리는 굉음이 발생했다. 굉음이 만들어낸 마력이 검은갑옷을 향해서 내달렸지만, 기존에 부여된 3개의 마법은 자신들의 장소를 내주길 거부한다!
지이잉!
콰아앙!
[무쇠공의 검은갑주]가 과도한 마력량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 4개의 주문이 뒤섞인 비전격류가 발생해서,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은 폭사하고 철퇴공 로드릭은 중상을······
['운이 좋군!'이 발동합니다!]
[마법부여에 실패합니다!]
['운이 좋군!'이 발동합니다!]
[마법부여에 실패합니다!]
[마나흐름 안정화를 시도합니다!]
[마법부여에 실패합니다!]
[마나흐름 안정화를 시도합니다!]
[마법부여에 실패합니다!]
[마나흐름 안정화를 시도합니다!]
[잔여 전승점수 : 12]
"흡!"
하지만 눈을 감고 의지를 발산하자 마나의 흐름이 안정화되었다. 그는 현대마법의 한계를 벗어나 고대의 전승에 따라 마력의 흐름을 조작했다.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은 잊혀진 요정왕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였고, 신들에게 맞서던 마법사왕들의 주문을 계승하는 자였다.
"마나여!"
쿵!
마법지팡이를 내리쳐.
흐름을 안정화시킨다.
"나의 의지에 복종하라!"
쿠구구구궁!
무쇠갑옷에서 역류하던 마나의 흐름을 완벽히 제어한다. 산산이 찢어진 주문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엮어내어 차례로 배열한다.
"············"
철퇴공 로드릭은 숨죽이며 로어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마법부여에 몰두한 텔로리안은 정교한 재단사처럼 보였다. 마력으로 이뤄진 선들을 꿰매고 조합해 새로운 의복을 만드는.
쿵.
마침내.
갑옷이 떨리지 않는다.
"됐습니다."
"······끝난건가?"
"네."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무쇠공 헤링턴께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신 갑주는 황가의 재보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마법유물이 되었습니다. 착용해보시죠."
겉보기엔.
차이가 없어보였다.
"·········"
그렇지만.
로드릭 헤링턴은.
느끼게 되었다.
"오오오······"
갑옷을 착용한 순간.
전신에 흐르는 힘을!
[영웅급 유물을 창조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레벨이 올랐습니다!]
[28레벨까지 10/100]
[전승점수 : 14]
"아버지.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벨라디아?"
"반란군이 왕도로 진격해온다는 소식이네요."
피식.
로드릭은 웃어보였다.
"오게 두어라."
공성철퇴가 굶주렸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
10. 열번째 연구 - 신성한 왕권(4)
소년왕 다일렌이 벨라디아를 모욕하면서 왕국내전이 발생했다. 나는 내전의 경과에 대해선 일일이 서술하지 않을 것이다.
'지면을 할애할 가치가 없다.'
다만 소년왕의 어머니인 플로린 왕대비는 기록할 가치가 있다. 그녀는 라이랜더 대공국의 여식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에스실 왕국으로 시집왔던 사람이었다. 영애나 아내의 역할은 훌륭히 수행했지만, 왕비나 어머니로선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변했다.'
아들을 잃을 위기에 처한 왕대비는 충성파 영주들을 집결시키고, 친정인 라이랜더 대공국에서 구원군을 불렀으며, 자신과 공주들을 결혼시장에 올려서 동맹군을 확보했다.
'반면에.'
철퇴공 로드릭은 군사적 능력은 발군이었지만, 정치적 수완은 호평해서 평범한 수준이었다. 귀족들은 로드릭의 결단력은 매우 좋아했지만, 거만함과 고집스러움은 싫어했다.
'게다가 정통성도 저쪽에 있지.'
자신이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조작해도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중세랜드의 마초귀족들은, 눈물로 호소하는 젊은 왕대비의 간청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다.
[왕국정세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20/100]
[전승점수 : 15]
따라서.
양군의 양적차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진짜 개미떼처럼 많군."
"어림잡아도 4만은 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합쳐도 9천인데 말이지."
하지만 아군은 국왕군보다 상당한 이점이 있었다. 지휘권이 철퇴공으로 일원화된 상태였고, 병사들의 훈련수준과 결속도가 훨씬 높았으며, 무엇보다 보급이 든든했다.
"오오!"
"마법사님의 빵을 먹으니 용기가 솟아난다!"
"대체 이것은······?!"
[마법을 통한 보급혁신을 이룸!]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30/100]
[전승점수 : 16]
"선생님. 만나빵 제조에 마나를 전부 소모해도 괜찮아요?"
"음?"
완전무장을 끝마친 벨라디아가 질문을 던져왔다. 그녀의 허리춤엔 자신이 제작해준 마법검이 걸려있었다.
"매일마다 9천명에게 보급해줄 마법빵을 만드느니 화염마법이 낫지 않나요?"
음.
맞는 말이다.
"그럴거면 아예 트롤을 부르면 되겠군."
"그러게요. 못생긴 트롤들은 어디 있나요?"
적진에 던져두면.
알아서 쓸어버릴텐데.
"그럼 오크들도 불러오지 그러나?"
"·········음."
상상해본다. 스승님께서 전력으로 화염마법을 쏟아부으면 적진은 생지옥으로 변하겠지. 뒤이어 무장트롤들이 도약해서 기사들을 다진 고기로 만들고, 오크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한다. 전투는 단숨에 끝날 것이다.
문제는.
사후수습이다.
"마왕군이네요?"
"대륙공적이 되는 지름길이지."
이건.
인간간의 싸움.
그것도 내전이다.
"지켜야할 전쟁 관습들이 있다."
첫째. 귀족 보호.
둘째. 학살 금지.
셋째. 마법 금지.
[전쟁법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40/100]
[전승점수 : 17]
"관습을 깨기에는 우리가 힘이 모자라죠?"
"그렇다. 아직은 때가 아니지."
"그래서 선생님께선 이번 전쟁에서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셔야하는군요."
맞다.
서포터의 역할까진 괜찮다.
그건 자문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하는 것이지."
"·········"
"원하는 성과를 얻고 싶다면 말이다."
[연구진전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인내'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연구단서 3/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18]
적보다 일찍 전장에 도착한 철퇴공의 군세가 먼저 전열을 갖추었다. 철퇴공의 군사들은 마법의 만나빵을 먹은 덕분에 원기가 왕성했으며, 마음 속에선 근거모를 용기마저 솟아났다. [감정 조작] 주문을 만나빵에 추가한 덕분이었다.
"무운을 빌겠다. 벨라디아."
"다녀오겠습니다."
"우리가 방금 인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오늘 네게 필요한 덕목은 분노다."
세상에 보이거라.
네게 여왕의 자질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스승님."
모두에게 보여줄게요.
스승님의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윽고.
벨라디아는 막사를 떠났다.
마법의 검은갑주를 입고서.
"전군!"
부우우웅!
뿔나팔이 울리고!
"돌격하라!"
다만 오늘의 선봉장은 철퇴공 로드릭이 아닌.
지옥의 전투마에 올라탄 소백작 벨라디아였다.
"나를 따르면 승리의 영광을 얻으리라!"
소백작이 선두에서 돌격하는 모습에 헤링턴 가문의 기사들이 기겁했다. 마초들에게 영애님을 선봉에 세우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네놈들이 그러고도 남자냐!"
"당장 앞질러가서 호위하도록!"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사들은 [영애님]보다 겁이 많은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친듯이 전투마를 닥달하면서 앞질러가고자 노력했지만.
"히히히히히히히힝!"
지옥의 전투마는 지상의 전투마들을 압도적으로 따돌렸다. 벨라디아에게 수백발의 화살과 다양한 주문이 쏟아졌지만, 어떠한 공격도 벨라디아와 그녀의 패밀리어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저, 저거 뭐야?!"
"철퇴공이다! 검은 갑주를 입은 철퇴공이다!"
"확실히 헤링턴 가문의 가보로군!"
"그럼 저놈만 쓰러뜨리면 전쟁은 끝이오?"
왕국군을 대표하는 3인의 기사가.
공적을 쌓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켰다.
"상속녀는 내 것이오!"
"영지는 내가 지니지!"
"나는 갑옷을 지니겠소!"
왕국을 대표하는 3인의 저명한 기사들이 맞돌격해왔다. 무쇠공은 강력한 무장이지만, 3인방을 동시에 상대할만큼 강력한 적수는 아니니까.
"어?"
한데.
양측이 가까워질수록 깨닫는다.
상대는 무쇠공 헤링턴이 아니었다.
'······덩치가 묘하게 작은데?'
'눈매가 사내의 것이 아닌데······?'
우지끈!
양측의 무기가 격돌하는 순간.
벨라디아의 마법검에 불길이 일어났다.
"간만에 정말 즐겁겠군!"
[3위계, 지옥의 로어]
[헬리쉬 스트라이크(Hellish Strike)]
[지옥의 유황불이여! 나의 검에 깃들라!]
────
■헬리쉬 스트라이크(3위계, 지옥의 로어)
: 지옥의 불꽃을 무기에 불러내 적을 내리칩니다. 시전자의 마력이 20이 넘으면 비마법적인 장비를 일격에 파괴할 수 있습니다.
■효과
- 다음 물리공격의 [명중굴림]과 [피해굴림]에 [마력] 보정치를 더합니다.
- 해당 [물리공격]에 적중된 [비마법적인 장비]는 파괴됩니다. 가연성 물질이면 지옥의 불꽃이 발화되어 화염 피해를 입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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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벨라디아는 왕실기사 3인방을 동시에 상대할만큼 뛰어난 전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벨라디아는 불침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방어를 도외시하고 공격에 전념할 수 있었다.
텔로리안의 마법검.
검은갑옷에 깃든 힘마법.
지옥마력을 머금은 칼날.
방어를 도외시한 전력공격.
"하!"
모든 변수가 조합되자.
"?!"
뎅겅!
단칼에 선봉의 목이 날아갔다.
콰지끈!
우지끈!
동시에 적들의 공격도 벨라디아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랜스가 목울대를 찔렀고 철퇴가 투구를 내리쳤다. 또한 갑옷조차 관통하는 날카로운 마법도끼가 흉갑을 내리쳤다.
콰직!
빠직!
파악!
"······뭐, 뭐야?"
"우리들의 무기로도······?"
하지만.
벨라디아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갑옷이 모든 피해를 방어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써걱!
두번째 기사의 목도 날아갔다.
게헨나의 마력을 머금은 칼날에.
"빌어먹을 마녀가!"
"푸히히히힝!"
"?!"
다음엔 벨라디아의 지옥전투마가 기사의 전투마를 물어뜯었다. 상대의 전투마도 뛰어난 명마였지만, 상대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였다. 말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이지.
"히히히히히힝!"
"워! 워! 진정──! 으앗!"
철푸덕!
셋째기사가 낙마해서 전투마에 깔려버렸다. 뒤이어 지옥전투마가 지옥불을 머금은 발굽을 내리친다!
콰직!
머리가 터진다!
"모두 보아라."
동시에.
벨라디아는 투구를 벗어보였다.
"내가 누구인지!"
찬란한 금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소녀의 피묻은 얼굴이 드러난다.
"·········"
적도.
"·········"
아군도.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연구진전 : 약속된 여왕]
[강하고 거친 전사임을 입증함!]
[연구단서 1/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9]
"저게······?"
"뭐지······?"
"아우님. 저게······"
모두가.
이어질 말을 잃어버렸다.
상식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으니까.
"진정 나의 딸이 맞는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형님."
하지만 자신은 놀라지 않았다.
오늘을 위해서 준비한 과거들이 있었으니까.
"이제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벨라디아는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잔인하고 사납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품성을 드러낼 시기와 아닌 시기를 구분할 줄 압니다.
"지금의 벨라디아는."
능히.
검으로 나라를 세울만한 사람입니다.
"······으핫!"
철퇴공 로드릭은.
눈가를 비벼보였다.
"아까 먹은 향신료가 눈가에 들어갔군······"
"축하드립니다. 형님."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어."
파지직!
철퇴공의 철퇴에 푸른빛이 번득인다.
공성추의 위력을 지닌 마법철퇴였다.
"내가 늙었지만 증명해보이겠네!"
두두두두두두!
철퇴공이 뒤따라서 전투마를 몰고 나갔다.
"아직은 뒷방늙은이가 아님을──!"
으랴아아아아!
콰아아아아앙!
철퇴공이 마법철퇴를 휘두르면 천둥소리가 울리며 십수명의 병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판금갑옷을 입었어도 단숨에 전신이 조각났다.
"으하하하하! 이거 최고군!"
덤벼라!
용병들아!
이곳에 철퇴공 로드릭이 있다!
"돌격! 돌격하라!"
"주군들을 앞세울 셈이냐!"
"전군 돌격! 목숨을 아끼지마라!"
주인들의 용맹에 고무받은 헤링턴 가문의 기사들은 미친듯이 돌격했고, 병사들은 철퇴공이 약속한 보상을 떠올리며 뒤를 따랐다. 이로서 철퇴공의 군세는 하나의 랜스로 거듭나서, 국왕군의 중심을 완전히 돌파했다. 벨라디아는 손수 국왕군의 중심에 위치한 왕기(Royal Flag)를 꺾었으며, 철퇴공은 마법철퇴에 힘입어 도전해오는 모든 기사들을 쳐죽였다.
"으하하하하!"
"꺄하하하하하하!"
""모두 죽어라아아아아──!""
그날의 참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전한다.
평시의 헤링턴들은 위엄 있는 영주들처럼 보이지만.
"모두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어엇──!"
"선조들께 영광을 바치나이다아아아──!"
전장에 나서면 피에 굶주린 데몬과도 같다고.
"망치맛을 봐라!"
콰앙!
철퇴공이 공성철퇴를 땅바닥에 내리치자 앞을 가로막던 이들이 모조리 쓰러졌다. 그러면 벨라디아가 지옥전투마로 휩쓸고 지나가며 학살했다. 혈겁에 휩싸인 부녀는 마침내 오랜 앙금을 잊고서 서로가 핏줄로 이어진 가족임을 확인했다.
"사랑해요! 아버지!"
"나도 사랑한다! 벨라디아!"
"아버지께 알버트 백작의 목을 바치겠어요!"
"네게는 그룬베르크 자작의 목을 주겠다!"
""으하하하하하하하!""
압도적인 숫자는.
압도적인 공포 앞에 힘을 잃는다.
'튀자.'
이기지 못한다!
승리가 문제가 아니다!
목숨이 없어질 거라고!
"모두 침착하도록!"
어느 용감한 기사 나리가 말했다.
"저들도 인간일 뿐──"
"흐아!"
콰직!
철퇴공의 망치에 기사가 육편조각으로 변했다.
"크하하하하! 아우님의 마법이 좋긴 좋구만!"
저게.
인간이냐?
"등을 보이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
"반면 지금부터 다섯을 세고, 이후에 눈에 띄는 놈들은 모조리 쳐죽이겠다!"
하나.
둘.
셋······
""으아아아아아! 태양신이여! 살려주소서!""
악마!
악마가 나타났다!
모두 도망쳐서 목숨을 구해라아아아──!
* * *
전투는 단숨에 끝났다.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그대로군."
"반갑습니다. 왕대비 전하."
"우리 가족에 파멸을 가져온 책략가가."
그리고.
포로를 잡았다.
내전을 끝낼 권한을 지닌 사람을.
"부디 항복조건에 동의해주십시오."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다른 방안이 없으실 겁니다."
공주님들께서.
무사히 외가로 떠나시려면요.
10. 열번째 연구 - 신성한 왕권(5)
플로린 왕대비는 꽃다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대공국의 고명딸로 태어나 아버지와 오라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왕국으로 시집을 와서는 아름다운 외모와 친절한 성품에 힘입어, 남편과 시댁식구들의 사랑을 받았다.
"······공주들로 나를 협박하겠다고?"
그러니.
포로로 잡히고도.
저토록 당당하겠지.
"그대는 명예가 무엇인지 모르나?"
"저는 기사도 아니고 귀족도 아닙니다."
그리고 태양신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왕대비 전하께서 살아오신 세상의 법칙이 통하리라고 기대하진 말아주십시오."
······왕대비는 낭패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적어도 눈앞의 마법사가 자신이 겪어온 사람들과 다른 부류의 인물임은 이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항복문서에 서명하시면 왕비님과 공주님들을 대공국으로 무사히 보내드리겠습니다. 또한 몸값도 받지 않겠습니다."
아니면.
저를 대신해서.
"철퇴공과 만나셔도 됩니다."
"·········"
"알버타운의 학살을 기억하실 겁니다."
침묵.
"철퇴공께선 왕대비님을 원하고 계십니다."
"뭐라고! 나와의 결혼을 원한다고?!"
감히!
감히 이따위 조건을 제시해놓고?!
"그런 웃기지도 않은 제안은 당연히 거절이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잿빛현자는.
차분히 왕대비를 노려봤다.
"결혼을 원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
"곱게 자라신 분이니 원색적인 표현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셨으니 사멸한 왕조의 왕비들이 맞이한 운명은 알고 계실겁니다. 최악의 사례들만 떠올리십시오."
뿌득!
뿌드득!
왕대비가 이를 갈았다.
"왕대비께선 여전히 젊고 아름다우시죠."
"······네놈이 감히!"
"게다가 건강한 아이들을 낳을 능력이 검증되셨습니다. 탐내는 사람이 많겠지요."
······평소의 왕대비라면 분노와 모멸감에 미쳐서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왕대비는 어린 딸들을 지켜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대들은 인간의 수치심도 없는가!"
"그러니까 이런 협상조건을 내밀겠지요?"
돌려준다.
왕실의 인장반지를.
"항복문서에 도장을 찍으십시오."
"·········"
"또한 청문회에서 항복문서에 적힌대로 증인하시면 됩니다. 그럼 왕대비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누구도 다치지 않고 끝날 것입니다."
왕대비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항복문서에 적힌 내용은 도저히 왕비로서나, 여자로서나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로선 받아들이셔야죠."
"······그대에겐 사람의 마음이 없군."
왕대비는 인장반지에 잉크를 묻혀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어찌나 분한지 눈가에선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대도 언젠가 피눈물을 흘리길 바라마."
"수고하셨습니다. 왕대비 전하."
항복문서를 받은 텔로리안은 왕대비에게 예를 갖추고 빠져나왔다. 또한 왕대비와 공주들의 경호는 올골두골로에게 맡겼다.
"이번에는 자네가 너무 했네."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형님."
"아녀자들인데 그냥 풀어주면 되는걸······"
"그럼 내전이 또다시 발발했을 겁니다."
"·········"
협상과정을 전달받은 철퇴공은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은 왕대비와 공주들은 대공가로 조건 없이 보내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녀는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네."
"아들을 잘못 교육시키지 않았습니까?"
"홀어미가 어떻게 아들을 가르치겠나? 평범한 여인에겐 불가능한 일일세."
글쎄.
나의 생각은 달랐다.
굳이 말하진 않겠지만.
"왕대비의 잘못은 일찍 과부가 되었다는 사실밖에 없네. 단지 그녀의 아들이 멍청한 짓을 저질렀을 뿐이고, 어머니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건 당연한 일이지."
철퇴공의 온정적인 태도에 텔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철퇴공은 고귀한 태생의 여인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러워지는 경향이 있었다.
"성인은 누구나 자기결정에 책임을 집니다."
"그녀는 곱게 자란 여인이잖나."
"여인은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은 맞지만 선천적으로 판단력이 떨어지지. 모두가 벨라디아는 아니잖나?"
"·········"
"아우님! 태양신께서 괜히 여성과 남성을 나눠서 창조하신 것이 아닐세. 싸우고 다스리는 영역은 남자의 일이고, 돌보고 가꾸는 영역은 여자의 일이야. 그런데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서, 남자의 몫까지 해내야했던 불쌍한 여인에게 어째서 그토록 매정한가?"
[성역할 인식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20]
"제가 함께 자랐던 여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녀들은 저처럼 훌륭하게 마법을 익혔으며, 형님처럼 맹렬히 싸울 줄 알았습니다. 또한 그녀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일으킨 결과에 책임을 졌습니다."
이에.
철퇴공이 의문스레 물어온다.
"······혹시 마녀들인가?"
"세간에선 그렇게 부릅니다만."
"예끼! 마녀는 인간이 아니야!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정숙한 여인을 염소와 교접하는 이교도들과 비교하다니! 이번만큼은 자네에게 실망이야! 텔로리안 아우님!"
황당한 표정의 텔로리안.
"······그럼 약탈을 허용하는 이유는 뭡니까?"
"병사들도 힘들고 지쳤으니 보상을 줘야지."
······반박할 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 나의 군령을 어기고 귀족 여인들에게 수작질하는 쓰레기들이 나타났나?! 당장 공성철퇴를 들고가서 그놈들의 머리통을──!"
아니.
그런건 아닙니다······
'뭐지?'
철퇴공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머리를 박살낸 영주들의 아내와 딸들은 극진히 보호했지만, 평범한 여인들은 어떤 꼴을 당하든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의 약탈 행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었다.
"그게 뭐가 이상한가?"
"·········"
"귀족 여인들은 정조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지만, 평민 여인들은 아무나랑 붙어먹는 년들이잖나? 그년들의 정조는 보호받을 자격이 없지."
머리가 얼얼해지는 발언이지만 간섭할 일은 아니었다. 이곳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있다.'
현지인들이라고 이러한 모순에 잠자코 수긍하고 살진 않는다. 목소리를 표출할 방법이 없기에 당장은 인내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삼두룡의 강림은 밑바닥에서 곪아온 하층민들의 분노를 분출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악마들의 강림과 역병의 창궐은 귀족이라고 피해가는 재앙이 아니니까."
[신분제 사회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1]
그러니.
서둘러 왕국을 장악하고.
체제모순을 해결해야한다.
'체제모순을 해결해야 언데드컬트와 악마숭배자들을 막아낸다. 놈들은 중부에서 곪고 있던 사회적 취약점들을 파고들테니까.'
그것을 위해서.
왕대비를 협박했다.
하루빨리 내전을 종결짓고자.
'그럼.'
정국의 수습은 철퇴공에게 맡기자.
노련한 영주니까 알아서 해결하겠지.
'나는 벨칸에게 보낼 선물을 준비해야겠군.'
약속한 보상이 있었다.
전쟁을 멈추는 조건으로.
* * *
사흘 뒤.
지하감옥.
"안녕."
"······어읍?"
"걸레가 찾아왔어요~"
벨라디아가 손짓하자 지하감옥의 횃불이 일제히 녹색불꽃으로 타올랐다.
"오랜만이야. 다일렌."
"읍! 읍! 읍!"
그녀는 쇠사슬에 묶인 소년왕을 바라보며 웃어보였다. 몇 달을 지하감옥에 감금당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모습이었으니까.
"그거 알아?"
싱글벙글.
"더이상. 너는 왕이 아니야."
"!"
"너희 어머니가 인정했거든."
"어읍! 어읍!"
"선왕 시절에 외도를 했다고."
텔로리안이 왕대비에게 강요했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플로린 왕대비는 선왕 시절에 왕실기사들과 사통했으며, 따라서 그녀의 자식들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사생아들이다.
"그러니 너는 더이상 적법한 왕이 아니야."
"읍! 읍!"
"아버지도 모르는 사생아일 뿐이지. 깔깔!"
[연구진전 : 약속된 여왕]
[찬탈을 정당화할 명분 획득!]
[연구 단서 3/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8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2]
"네가 나보고 걸레라고 했다며?'
"·········"
"정확히 봤어."
히죽.
"나는 점잖떠는 레이디들처럼 살아갈 생각은 없거든. 지금은 처녀성을 지켜야 배우자의 작위가 높아지니까 얌전히 사는 것이고······"
결혼 이후엔.
이남자 저남자 침대로 부르지 싶네?
"그런데."
펄럭!
로브를 벗어보이자.
찬란한 나신이 드러난다.
"너는 먹어보지도 못하고 죽겠네?"
깔깔!
원래는 네거였는데.
아쉽게 됐어?
"게다가 내가 조만간 왕좌에 앉을거야."
"·········"
"네가 지녔던 모든 것을 빼앗기는 기분이 어때?"
자.
"그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보자."
약혼자였으니까 잘해줄게!
"아으으으으으으읍!"
벨라디아가 즐겁게 웃으며 장난감 상자를 꺼내자 소년왕은 오줌을 지렸다. 그녀는 짜릿한 환희를 느끼며 공업용 톱을 꺼내서──
"벨라디아."
"·········선생님?"
"깔끔히 끝내라."
"···············"
·········
네.
츠릉!
써걱!
발도와 동시에 목이 떨어진다.
"상자에 담도록."
"오크들에게 보낼 선물이죠?"
"그래."
"왕대비도 함께 동봉해주는건 어때요?"
키득키득.
벨라디아가 웃어보였다.
"깔려서 비명을 지르는걸 보고 싶은데."
"·········"
"농담이에요."
벨라디아는.
해맑게 웃어보였다.
"질나쁜 농담이군."
"그래도 보내주면 오크들이 좋아할걸요."
"·········"
벨라디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소년왕의 머리를 들어올렸다. 오크들은 사절단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술잔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벨칸을 만나면 부탁해야겠네요."
"·········"
"다일렌으로 만든 술잔을 빌려달라고."
벨라디아는 평소의 다일렌에게 조금도 설레지 않았지만, 오늘만은 가슴을 콩콩 뛰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정하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사랑하는 다일렌! 다음에 만날때까지 무사하렴!"
"그럼 나가자꾸나. 영주들이 기다린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요?"
"간수들이 수습할게다."
"으음······"
휙.
텔로리안이 돌아선다.
"옷을 입고 따라오너라."
"선생님."
그때.
벨라디아가 손목을 잡아세웠다.
"진지하게 제안할 게 있어요."
"들어보마."
"저의 부군이 되어주시면 어때요?"
"흠?"
"저도 왕좌에 오르면 혼인해서 아이들을 낳아야할테죠. 왕조가 번영하려면 많은 공주와 왕자들이 필요할테니까요."
자손들의 숫자.
왕조의 위상을 결정짓는다.
"저는 왕가의 후계자들이 대단히 똑똑하게 태어나길 바래요. 선생님처럼요."
아름다운 청녹색 눈동자를 직시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선 거짓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연기나 장난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저를 있는 힘껏 안아주세요. 사멸한 왕조의 시체 위에서 새로운 왕조의 후계자가 탄생하는 거죠! 멋지지 않아요?!"
자.
이곳에 모두가 열망하는 육신이 있어요.
마음대로 다뤄도 좋다는 허락도 받으셨죠.
"어서 원하는대로 행동해주세요."
여기선.
누구도 알지 못할테니까요.
10. 열번째 연구 - 신성한 왕권(6)
"글쎄."
"애매한 대답이시네요."
벨라디아의 제안은 진심이었다.
스스로마저 속이는 거짓말이거나.
그러니 진심으로서 답해줘야겠지.
"나는 자손을 원치 않는다."
"왜요?"
"내가 해야할 일을 흐릴 테니까."
잿빛은 특정한 색채로 물들지 않을때 가치를 지닌다. 오직 흑백에 구애받지 않는 색깔만이 상황에 맞추어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니.
"나의 자손이 생긴다면 그들을 보살필 의무에 구속된다. 잿빛을 버리고 보다 뚜렷한 색채를 취해야하겠지."
자손에 대한 편애는 아버지로서 당연한 의무다. 자신의 아들과 다른 사람의 아들을 동등히 대하는 사람에겐 아버지의 자격이 없다.
"편애는 언제나 판단력을 흐린다."
"헤에."
"반면에 내가 향하는 목적은 언제나 판단력이 뚜렷해야하는 길이다."
자신은 무한에 가까운 잠재력을 지닌 마법사였다. 따라서 판단력을 상실한다면, 스스로 최고의 멸망트리거가 되리라.
"충분한 대답이 되었길 바란다."
"어떤 말씀이신지 이해했어요."
벨라디아는 후련한 표정으로 로브를 주섬주섬 차려입었다. 내면에 품었던 어떠한 강박에서 해방된 표정이었다.
"그래도 완전히 포기하진 않을게요."
"너는 많은 자손들을 낳아야할게다."
끄덕.
그녀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조만간 선생님이 아닌 남자와 결혼하겠죠. 방대한 영토와 막강한 군대를 거느린 사람. 무엇보다 최고의 왕위계승자를 만들어낼만큼 우수한 씨앗을 지닌 사람이요."
그건.
피할 수 없는 미래다.
가문의 계승자인 이상.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왕실의 아버지가 되기에 적합한 조건에 부합한다고 생각하고, 한 명의 남자만 거느릴 생각도 전혀 없어요. 그러니. 마음이 바뀌시거든 말씀해주세요."
[연구진전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연구단서 4/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29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23]
"너의 의사는 인지해두겠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대관식을 준비하자꾸나."
새로운 왕조의 탄생.
그것이 목전에 이르렀다.
* * *
전통적인 대관식(Coronation)은 다음같은 절차로 진행된다. 전국의 귀족들이 모여든 자리에서 국왕은 위엄을 과시하고, 귀족들은 새로운 주군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한다.
기사들이 검을 뽑아서 서약하면, 백성들의 대표로 뽑혀온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만세삼창을 외친다. 이후에 국왕은 대주교에게 무릎을 꿇고 태양신의 가르침에 따라 왕국을 다스리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 대주교는 태양신을 대신해 관을 씌워주면서 치세가 시작된다.
한데.
여기서 변수가 생겼다.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나의 통치엔 태양신의 축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
"대신 잿빛현자에게 대관을 받겠습니다."
대관식절차를 논의하는 와중에 벨라디아가 완강한 의사를 드러냈다. 자신은 대주교가 아니라 잿빛현자에게 대관을 받고 싶다고.
"저는 성정이 사납고 포악해서 박애를 강조하는 태양신의 가르침이 맞지 않습니다."
실은 에스실의 많은 귀족들이 지녔을 속내였다. 그들은 무예를 익히며 자라난 호전적인 사내들. 박애와 자비를 강조하는 태양신의 가르침과는 이질적인 성품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
"태양신 교단은 내전에서 사생아왕의 편에 가담했지요. 그런데 어째서 내가 태양신 교단의 축복을 받으며 즉위해야합니까?"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내뱉은 군주는 없었다. 그것도 대주교와 전국의 영주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
잿빛현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벨라디아를 훑어봤다. 충동성을 억제하는 [사회화의 반지]는 제자리에 있었다. 또한 명료한 눈동자는 살육본능을 참아내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다.'
자신은 여왕의 조언자일 뿐이다.
그녀의 판단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에스실의 통치에 관해서는.
"당신은 아직 왕이 아닌걸 알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토모리 대주교."
"정통성이 모자라단 사실도 알고 있소?"
토모리 대주교는 미간을 좁히며 왕좌에 앉은 벨라디아를 노려보았다. 그는 건장한 중년인으로, 흉터투성이의 얼굴과 오른눈에 차고 있는 안대가 많은 위험을 헤쳐왔음을 보여줬다.
"대신 군대의 지지가 있음도 알고 있지요."
"병력이라면 교회도 충분히 거느리고 있소."
"그렇다면 협상을 제안하겠습니다. 대주교."
태양신 교회가 구왕조 시절에 누리던 모든 특권을 유지해주겠습니다. 교회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성직자는 범죄에 대한 면책을 지니며, 자체적인 무장조직도 갖추십시오.
"다만 더이상 국교는 아닙니다."
"!"
"하나의 교단일 뿐이지요."
"어디서 그따위 불경한 선언을──"
"잿빛현자와 연인관계를 청산하겠습니다."
"""!"""
벨라디아의 선언에 영주들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끓어올랐다. 그들은 잿빛현자 텔로리안이 새로운 여왕의 부군이 되어서, 실질적인 통치자로 거듭나리라 믿고 있었으니까.
"또한 정복자 자헤리온의 이름에 걸고 맹세컨데, 저의 처녀성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신들 앞에서 맹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시 정복자 자헤리온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컨데, 왕국을 통치할 부군은 공개적인 방식으로 선발될 것입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선발에 참가할 자격이 있으며, 보유한 세력과 일신의 무예를 모두 반영할 것입니다."
벨라디아의 선언에 영주들의 몸이 달아올랐다. 영주다운 냉철한 사고는 왕좌와 절세미녀를 동시에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는 기대감 앞에 녹아내렸다. 수컷들은 단순한 동물이었다.
"·········!"
토모리 대주교는 정치적 기류의 변화를 바로 알아차렸다. 방금까지 함께 헤링턴 가문을 견제하던 영주들은, 이젠 철퇴공 로드릭을 장인어른으로 모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영악한 년이!'
토모리 대주교는 수양이 깊은 성자였기에 외모에 미혹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력한 세속영주들은 벨라디아의 총애를 얻고자, 그녀가 꺼내는 모든 제안에 찬성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말려들었군!'
교회의 권력은 도덕적 우위에서 비롯되는 발언권이므로, 단순히 군사력과 재력만 따져본다면 세속영주들에겐 밀린다. 따라서 귀족들의 여론이 기울어버리면 대응할 방법이 없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제.
주도권은 벨라디아가 쥐었다.
"우리 에스실 왕국의 건국자, 용맹왕 마차시에게 백조왕관을 씌워준 사람도 백색현자 올로가스트였습니다. 분열을 극복하려면 왕국의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으며······"
[벨라디아를 각성시켰습니다!]
[Lv15 궁중귀족 -> Lv20 여왕으로 전직!]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29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25]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에게 가르침받은 지식을 톡톡히 써먹었다. 왕권의 정당성을 태양신 교회의 축복에서, 귀족들의 지지로 옮길만한 논거들을 나열한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왕위의 정통성은 성직자들의 인정보다는, 고결한 혈통과 뛰어난 덕망을 갖춘 기사들의 지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에 귀족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동의했다. 벨라디아가 해가 서쪽에서 떠오른다고 말해도 고개를 끄덕일 이들에게, 교회의 권위를 격하해서 자신들에게 주겠다니 싫어할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것이다.
[연구진전 : 약속된 여왕]
[교단의 인정을 대체할 명분 획득!]
[연구 단서 3/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9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6]
때마침 엘프대사 글로린마르가 돌아와서 영원여왕의 서신을 낭독했다. 서신에는 벨라디아를 자헤리온과 영원여왕의 후손으로 인정한다는 선언이 적혀있었고, 이걸로 혈통적인 문제도 완전히 해결이 되었다.
[연구진전 : 약속된 여왕]
[왕실의 혈통을 인정받음!]
[연구 단서 4/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9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27]
"이의 있습니까? 대주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장일치로 결의되었군요."
땅땅!
대회합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태양력 1526년 12월 1일, 에스실 왕국의 모든 영주들이 참석했던 대회합은 정복자 자헤리온의 혈통을 계승받은 헤링턴 가문의 벨라디아를 왕국의 수호자이자 왕국인들의 적법한 주군으로 추대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해당 선언은 대관식이 거행된 이후부터 효력을 지닐 것이다. 여왕 폐하 만세!]
"·········놀라운 일이군."
"이건 저도 놀랐습니다."
경과를 지켜본 로드릭은 벨라디아의 수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루종일 젊은 영주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 있기에, 레이디가 조신하지 못하게 행동한다고 타박했었는데·········
"······미리 내다본 것은 아니겠지?"
"구체적인 설계까지 마치진 않았겠지만, 유력영주들과 애매하지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두면,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란 계산은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현명한 포석이었다.
그녀의 장점을 활용한.
"······별로 당당한 행보는 아니로군."
그래도 철퇴공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딸아이를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딸이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는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도 능력이지 않겠습니까?"
"············"
"알비온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리즈베타 여왕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총신들을 경쟁시켰습니다. 또한 미스르를 다스리던 현왕 베루시엘도 다양한 남편들을 거느리고······"
[역사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9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28]
됐네.
됐어.
늙은이의 불만일 뿐이야.
"그나저나 자네는 괜찮나?"
"무엇이 말입니까?"
"정말로 벨라디아를 포기할 수 있냔 말이야. 데릴사위가 되고 싶다면 아직 기회는 남아있어. 자네만 뜻이 있다면 정치적 난관은 자네가 만들어준 공성철퇴로 모조리 부숴주겠네."
도리도리.
"말씀은 감사합니다."
"············"
로드릭은 텔로리안을 뻔히 바라보았다. 의제의 사지는 멀쩡하고 남자구실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절세미녀를 품을 기회를 떠나보냄에 마음 한켠의 아쉬움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이성으로 억눌러도 말이다.
한데.
의제의 눈빛엔 정말로 아쉬움이 없었다.
"혹시 남자 좋아하나?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그토록 속시원한 표정인가?"
"·········"
"나는 자네에게 아버님 소리를 듣고 싶네. 가족만큼은 반드시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거든. 이해타산을 넘어서."
이에.
잿빛현자는 묵묵히 대답했다.
"이제 벨라디아에게는 우리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언이면 충분하지요."
"그건 맞군. 이제 여왕 폐하시니까."
그나저나.
"이제는 나도 재혼을 해도 되겠구만······"
"재혼에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내가 언제까지 홀아비로 지내야겠나?"
껄껄.
"나도 부드러운 살결이 그립다고."
"그동안 재혼하지 않으셨던 까닭은?"
"내가 재혼해서 자식을 낳았으면 딸아이가 어찌 됐겠나? 하물며 사내아이를 낳았다면?"
중부의 계승원칙.
딸보단 아들먼저.
동생보단 딸먼저.
"벨라디아는 바로 계승자의 지위를 잃었을걸세. 그렇다고 다른 가문의 안주인이 될만한 성질도 아니고······"
하지만 이젠 남동생이 괜찮을 것이다.
벨라디아의 입지가 확고해졌으니까.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네. 아우님."
"괜찮습니다."
"정말로 벨라디아에게 연심이 없나?"
"정말로 없습니다."
"자네가 그렇다면 다시 묻지 않겠네."
우리는.
말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대신에 과음만은 피했다.
"고마워."
하지만.
철퇴공은 취한 것처럼 말했다.
"정말 고맙네. 아우님······"
"·········"
"죽어서도 자네의 은혜에 보은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그래도 이것만은 전하고 싶네."
은혜를 입었어.
진실로 고맙네.
* * *
날이 밝았고.
대관식이 시행되었다.
"헤링턴 가문의 벨라디아에게 묻는다."
"말씀하소서. 잿빛의 현자이시여."
"그대는 스스로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는가?"
적에게 국토를 지키며.
고난에서 백성들을 구하며.
악에 맞서 고귀함을 수호할 것을.
[새로운 칭호를 획득합니다!]
────
■대관자 텔로리안
: 당신은 유서 깊은 에스실의 왕관을 대관하는 의식을 주제함으로서 정치적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이제 왕국의 신민들은 당신의 뛰어난 지혜와 수완을 인정하며, 대륙에서 [퀸메이커]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효과
: 인지도가 [지역명사]에서 [국가대표]로 거듭납니다.
: 사회적 대우가 [하급귀족] 수준에서 [대영주] 수준으로 격상됩니다.
────
10. 열번째 연구 - 신성한 왕권(7)
왕궁에 집결한 만백성이 태양처럼 빛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릇 여인들 가운데 제일 아름다웠고, 가장 뛰어난 사내들을 쓰러뜨릴만큼 강인했다. 또한 위대한 정복자의 후손이자 고귀한 귀족들에 의해서 추대되신 분이니, 어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으랴?
"예."
맹세합니다.
"나, 헤링턴 가문의 벨라디아는 무쇠공 헤링턴과 정복자 자헤리온의 후손으로서 맹세합니다. 본인은 적에 맞서 국토를 지키고 고난에서 백성들을 구할 것이며, 악에 맞서 고귀함을 지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그대는 백조왕관의 주인이다."
여왕 폐하 만세!
그분의 치세는 길고 장엄할 지어니!
잿빛의 마법사가 무릎 꿇은 소녀에게 왕관을 씌워주었고, 마침내 소녀는 왕이 되었다. 소백작 벨라디아의 삶이 끝나고 벨라디아 1세의 치세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만세! 만세!"
"여왕 폐하 만세!"
사전에 포섭해둔 바람잡이들이 힘껏 환호성을 내질렀다. 예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꽃잎을 뿌렸고, 영원궁정에서 파견된 하이엘프 악사들이 진짜 음악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모두가 위화감을 애써 감추는 광경이군······"
"권력이란 이렇게 만들어지는거 아니겠나."
잿빛현자는 벨라디아를 대관해주고 무대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오늘의 주인공은 전사여왕 벨라디아였다. 여왕과 수상쩍은 관계를 맺고 있는 마법사는 존재감을 감춰야한다.
"자네 덕분에 헤링턴 가문을 섬기던 가신들의 위상도 올라갈거야. 변경백의 자문단에서, 여왕을 섬기는 자문단으로 격상되는 것이지."
엄밀히 말하면 훨씬 복잡한 권력관계가 작용하겠지만, 결론적으로 우르반같은 헤링턴 가문의 충복들에겐 더욱 많은 기회가 주어질 점은 분명했다. 외부의 세력가들도 석연치 않은 즉위과정에 침묵하도록 작위를 나눠받겠지만.
"자네도 두둑히 포상을 받지 않겠나?"
"에스실의 모든 금광을 소유하게 되었네."
"오오! 과연 공적에 어울리는 보상이군."
"명의는 자네에게 돌려두고 싶네만."
"얼마든지!"
"그리고 재산관리도 맡기고 싶네."
"훌륭한 기회를 주어서 고맙네!"
재무관 우르반은 임페리얼 아카데미의 인문학부 수석졸업자다. 재산을 관리하고 불리는 방법에 대해선 빠삭하겠지.
"그럼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당분간은 은거하며 연구에 전념해야지."
여전히 대다수의 왕국민들은 잿빛현자 텔로리안에게 의문을 품었다. 헤링턴 가문에 텔로리안이 등용되고, 1년도 되지 않아서 벌어진 변화들이 지나치게 극적이었으니까.
"적잖은 이들은 내가 마법으로 헤링턴들의 정신을 조종한다고 믿는다네. 합리적인 사람들도 나와 여왕의 관계를 매우 미심쩍게 본다네. 여왕이 처녀성 검사를 마쳤어도 그러지."
이럴땐 존재감을 감춰야한다.
어차피 연락할 방법이 있으니까.
[신규 로어습득 : 예지의 로어]
[잔여 전승포인트 : 13점]
예지의 로어를 습득해 새로운 마도구를 만들었다. 내전에서 몰락한 귀족 가문들의 가보를 녹여서 만들어낸 영웅급 아이템.
"이걸 받아두게. 우르반."
"!"
"마력을 사용해 원하는 곳을 관찰할 수 있는 천리안의 돌이라네. 또한 다른 사용자와 화상 통신을 연결하는 것도 가능해."
제작한 돌은 4개.
주인은 다음과 같다.
잿빛현자 텔로리안.
전사여왕 벨라디아.
호국경 로드릭.
재무관 우르반.
"하지만 나는 마력이 없는데."
"그래서 자네와 호국경의 돌은 마력이 없어도 사용이 가능하게 만들어두었네. 대신 탐지 범위가 왕국 내부에 한정됨을 유의하게."
그외에도 천리안의 돌을 다룰때 필요한 주의사항들을 설명해줬다. 마탑이나 성소처럼 신비가 존재하는 장소는 탐지하지 않을 것. 초월자의 존재감이 느껴지면 즉시 사용을 종료할 것. 적정 사용시간을 준수할 것이었다.
[천리안의 돌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9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4]
"명심하겠네."
"그럼 수고하게."
우르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왕궁에서 빠져나간다. 왕국의 통치는 헤링턴들과 가신단들이 해결할 문제이므로, 자신은 당분간 존재감을 감추고 마법연구에만 전념할 것이다.
"이보게."
그때.
우르반이 물어왔다.
"이토록 나를 신뢰하는 이유가 뭔가?"
"자네가 나의 사람이 되길 바라니까."
"·········"
"자네와 나의 지향이 맞지 않다는건 알아."
우르반은 인본주의자다.
뼛속 깊숙하게.
"내게 필요한 사람은 뜻을 함께하는 동지이므로, 자네의 사상을 바꾸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주게."
나는 자네가 섬기는 [어르신]보다 자네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네. [어르신]의 밑에서 자네는 유능한 수족에 불과하겠지만, 나와 함께 한다면 대영주가 될 수도 있겠지.
"!"
"그러니 이념보다 이득을 따지길 권하겠네. 그럼 나중에 보세나."
[제국집정관의 밀정을 폭로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9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15]
* * *
텔로리안은 비밀리에 헤링턴 거성으로 돌아왔다. 벨라디아는 앞으로 왕도에서 나라를 통치할테고, 로드릭과 가신단은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는 새로운 여왕의 곁에 남을 것이다.
'덕분에 헤링턴 영지는 공백이 되었다.'
로드릭은 텔로리안에게 변경령의 통치를 부탁했으며, 텔로리안은 은빛뱀에게 통치권을 위임했다. 하청이 하청을 맡긴 셈이었다.
"본신이 인간들을 다스리라고?"
"고민을 해결해주기 좋잖소."
"맞는 말이군!"
은빛뱀은 신왕 시절의 재주를 이용해 변경을 통치했다. 처음에 영지민들은 젊은 여자가 무슨 놈의 섭정이냐고 툴툴대었지만, 그녀가 훌륭한 통치를 선보이자 침묵을 지켰다.
[새로운 시대의 고민을 들어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9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16]
"인간들의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같구나."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그러시오?"
"언제나 삶과 죽음을 고뇌하고 있더군."
뭐.
초월자다운 시선이다.
"백성들은 새로운 여왕을 어찌 생각하오?"
"아직까진 별다른 기대가 보이지 않는다."
벨라디아는 귀족들에겐 확실하게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그녀는 정복자 자헤리온의 후손이었고 왕국을 보호할만큼 강인했다. 또한 귀족들의 만장일치로서 왕위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평민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여전히 그들은 벨라디아가 무슨 근거로 왕이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여자가 국가를 다스리는 가장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어색해한다.
"그들은 여전히 태양신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고, 헤링턴 왕조의 소녀여왕보단 아르실 왕조의 소년왕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다."
흠.
계기가 필요하다.
벨라디아를 지도자로 각인시킬.
'결국 군주가 보유한 최강의 성채는 신민들의 애정이다. 백성의 애정이 없다면 아무리 막강한 군왕도 기반이 위태로운 것이다.'
엄격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중세랜드. 언뜻 보기엔 [민심]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체제가 엉성하기에 군주의 인기는 통치력과 직결되는 요소다.
'중세랜드에선 중앙에서 지방에 명령이 하달되어도, 지방에선 전달받지 못한 것처럼 행동해도 그만이거든. 에스실 왕국처럼 봉건제를 채택한 국가에선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벨라디아의 인기를 높여야한다.
왕으로서의 권위를 완성하려면.
"반갑소. 바드마스터 게릭."
"당신이 잿빛현자 텔로리안이군요."
마탑으로 초청했다.
바드길드의 수장을.
"왕국을 전복시킨 위험한 책략가께서 미천한 딴따라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경청하겠습니다. 다만 저희 바드들은 특정한 세력의 선전꾼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바드마스터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드는 단순한 딴따라가 아니라고 성토하듯이.
"그대들의 사명은 무엇이오?"
"민중들에게 진실과 즐거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럼 즐거움에 대해 논해봅시다."
"·········음?"
"벨라디아 여왕의 염문설을 퍼뜨려주시오."
?
??
???
"대본도 만들어두었소. 잿빛현자 텔로리안과는 각별한 연인관계였지만,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연인관계를 청산했다."
이에.
바드마스터가 눈쌀을 찌푸렸다.
"그건 영주들에게 정치적 제휴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잖습니까? 그렇게 재미 없는 이야기에 민초들은 동전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피식.
그게 아닌데.
바드양반이 상상력이 모자라군.
"실은 우리가 남매였다고 선전하시오."
"·········예에?!?!?!"
"철퇴공 로드릭은 젊은 시절에 다양한 여인들을 취했잖소? 실은 잿빛현자 텔로리안은 당시에 탄생한 사생아로서······
[드라마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29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7]
"그, 그게 뭡니까?!"
"민중들이 돈을 지불할 이야깃거리지."
"너, 너무 상스럽지 않습니까?!"
"상스럽소? 고대신화들은 이보다 더한데?"
"이건 설화가 아니라 여왕 폐하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잘못하면 교수대다.
운나쁘면 고문실행이고.
"처벌이 없으리라고 맹세하지."
"·········!"
"이야기꾼다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려주시오. 심지어 음란한 이야기라도 좋소. 뭐든지 화제에 올려주시오."
그날부터 여왕에 대한 발칙한 이야기가 퍼졌다. 민중들은 가장 존귀한 사람이 비천해지는 이야기에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그럴수록 많은 바드들이 왕국으로 찾아와서 비슷한 주제의 노래를 불렀다.
"여왕 폐하께선 사실 애인이 열둘······!"
"매일 밤마다 마굿간에 가셔서······!"
"머리 잘린 귀공자들에게 입맞춤을······!"
듣기만해도 목이 잘릴 불경한 노래들이 민간에 퍼져나갔다. 심지어 여왕의 외모를 실감나게 모사한 에로틱한 판화들이 불티나게 제작되었다. 덕분에 여왕의 위신이 제법 떨어졌지만, 어쨌든 이름은 모두가 알게 되었다.
'명성을 떨치려면 인지도가 우선이지.'
이러한 상황에서 벨라디아가 왕국순시에 나서자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들은 정말로 여왕이 판화와 노래에서 묘사된 것처럼 대단한 미인인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아······"
이로 인해 수많은 평민 청년들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루어질 가망이 전무한 사랑에 절망해 목숨을 끊거나, 무작정 여왕의 처소에 침입하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너희들의 고충을 들으러왔다."
"·········폐하?"
"너희의 의복은 남루하고 신체는 왜소해서 가슴이 아프다. 짐은 국가의 어머니로서 너희들을 보호하고 양육할 책임이 있다. 그러니 기탄 없이 어려움을 털어놓거라. 너희의 미천한 삶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잖느냐?"
이렇게 관심이 몰린 상황에서 아름답고 젊은 여왕이 민생에 관심을 표하자, 백성들은 봇물이 터지듯이 자신들의 고충을 늘어놓았다.
"몬스터가 너무 많습니다!"
쫘아악!
쓸어버렸다!
몬스터를 죽이면 재밌으니까!
"영주가 학정을 벌입니다!"
쫘아악!
쓸어버렸다!
왕실 직할령을 확대하고자!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왕의 만나빵을 나눠주겠다."
오옷!
한 입만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솟구치는군요!
"""여왕 폐하 만세! 만만세!"""
그래서 벨라디아 1세의 왕국순시가 끝날 쯔음에는, 모든 왕국민들이 벨라디아 여왕을 경배했다. 누구도 소년왕을 기억하지 않았기에 아르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제야 왕대비와 그녀의 사생아들은 대공국으로 보내졌으며, 대공은 감사를 표하며 우호관계를 약속했다.
이걸로.
헤링턴 왕조가 반석에 올랐다.
[연구 진전 : 약속된 여왕]
[연구 단서 5/5]
[연구가 완료됐습니다!]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레벨이 올랐습니다!]
[30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19]
[연구보상을 선택하십시오!]
[선택보상A: 대규모 인지조작]
[선택보상B: 정교한 인지조작]
[선택보상B를 채택합니다!]
[고유주문 : 정교한 인지조작] 획득!
─────
◆정교한 인지조작(고유주문, 정신의 로어)
: 당신은 특정한 [개인]의 인지를 깊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해당 주문을 사용하면 대상자의 [의지]와 당신의 [마력]이 대결합니다.
■주의사항
- 현실감 있는 조작은 보너스를 받습니다.
- 현실감 없는 조작은 패널티를 받습니다.
- 멀리서 사용할수록 패널티가 큽니다.
- 조작에 실패하면 적대행위로 간주합니다.
- 다수를 상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
하지만.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잿빛현자가 전면에 나서야만 하는.
'심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또한.
낯익은 마녀가 도착했다.
그리모어에 대한 심사결과를 지니고.
11. 열한번째 연구 - 운명의 변곡점(1)
태양력 1527년 3월 1일. 새해가 밝고 봄이 찾아왔다. 이는 텔로리안이 헤링턴 가문에 도착하고 13개월이 지난 시점이자, 벨라디아 1세가 첫번째 순시를 마친 시점이었다.
"오랜만이야. 텔로리안."
"오랜만입니다. 엘렌스트라."
"그동안 얼굴이 훤해졌네."
또한 잿빛현자는 마탑에서 오랜 인연을 맞이했다. 상대는 마녀의 오두막에서 동문수학하던 선배로,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를 서로에게 의존했던 각별한 사이였다.
"여왕의 애인이란 소문이 있던데?"
"일부러 흘린 풍문입니다."
"그럼 둘이 사귄다는건 거짓말인거야?"
"저는 공과 사를 구분하길 원합니다."
"공적인 용무부터 이야기하잔 뜻이지?"
말없이 찻잔을 들이키자 엘렌스트라는 긍정임을 알아들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알아온 오누이같은 사이였으니까.
"네가 제출한 그리모어가 통과됐어."
"그렇군요."
"또한 통과되자마자 마도대학의 학파장들만 열람이 가능한 [드래곤] 등급의 마도서로 처리됐지. 그들도 덮고 싶은 안건인거야."
호기심의 한계를 모르는 마지스터들도 [계몽의 그리모어]를 위험한 연구로 판단했다는 의미다. 또다른 [드래곤] 등급의 그리모어는 [불멸을 위한 안내서]와 [외신학개론]이 있다.
"사람보다 똑똑한 트롤이라니."
"·········"
"데미리치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어쩌면 그보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잠시.
적막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위험성을 알고도 제출한 이유가?"
"지금 학파장들 사이에 파문이 일고 있죠?"
"·········"
텔로리안의 정신 조작은 바위트롤을 인간보다 똑똑하고 고결한 생명체로 만들었다. 이는 신대의 요정왕들이 잊혀진 이후엔 어떠한 마법사도 도달하지 못한 위업으로, 마도사회에 심대한 철학적 논쟁을 야기시킬 문제였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
"마지스터에 도달한 마법사들은 자연스레 고찰하게 되는 질문이죠. 저희는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방법을 익히니까요."
마지스터들은 못해도 수백년의 수명을 살아간다. 때문에 적지 않은 이들이 타고난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육신을 취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마지스터들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20]
"간단한 질문이 마도 사회를 뿌리채 분열시켰죠. 인간의 육신을 지녀야만 사람이라는 마법사들은 마법협회를 결성했고, 정신이 인간성을 유지한다면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마법사들은 말레피카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태양신 교단이 말레피카들을 박해하는 [주문사냥]을 실행하자, 마법협회는 같은 말레피카들을 향한 박해에 가담했다.
"동료 마법사들의 재산과 연구물이 탐났을테니까요."
[주문사냥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1]
"주문사냥으로 말레피카 공동체들이 멸절당하자, 마도사회의 주류는 마법협회로 기울었습니다. 그들로선 영리한 선택이었던 것이죠."
엘렌스트라는.
"네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알고 있어. 스승님께서 잊을만하면 반복해서 들려주셨잖아. 교회에서 우리의 대선배들에게 행했던 끔찍한 탄압과 마법협회의 배신."
차분히 텔로리안을 바라봤다.
"그렇지만 너도 마법협회에 가입하려고 그리모어를 제출한 거잖아? 대외적인 활동이 가능한 신분을 갖추고 싶어서."
끄덕.
"한데 이토록 위험한 주제를 택한 이유가?"
"마법협회의 마지스터들도 속마음으로는 저희 말레피카들과 동조하고 있음을 아니까요. 언제까지 태양신 교단의 눈치만 볼겁니까?"
·········
"저는 잔잔한 수면에 조약돌을 던졌을 뿐입니다. 학파장들은 파문의 확산을 막으려고 계몽의 그리모어를 비밀에 붙였겠지만······그들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동요까지 막진 못하겠지요. 마법의 도움이 있다면 트롤도 사람이 된다는 결과를 목격했으니까요."
엘렌스트라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위험한 길을 간다고 생각해."
"언제나 새로운 탐구엔 위험이 따릅니다."
"탐구가 잘못되면 우리 마법사들만 위험해지는게 아니잖아. 세상 전체가 대가를 치러."
"결과가 좋으면 모두 용인되지 않겠습니까?"
"끝없는 야심은 여전하네."
"엘렌스트라의 조심성도 여전하군요."
"·········"
엘렌스트라는 오래된 기억이 떠올라 웃어보였다. 스승님께서 소환 마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주셨을 시기에, 자신은 온순한 물의 정령을 소환하는 일도 두려워했다.
한데.
녀석은.
"사역마로 서큐버스를 소환한 녀석답네."
"·········옛날 이야기는 뭐하러 꺼냅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이야."
덜컹.
찻잔을 내려둔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너답다고 생각해."
"·········"
"아무튼 너는 오늘부터 마법협회의 일원이 되었어. 또한 마지스터로서 마탑을 보유하고 제자들을 거느릴 권한도 인정받았지."
성공했다. 이로서 태양신 교회에서도 자신의 신변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윗분들이 내세운 조건이 있어."
"뭡니까?"
"당분간 나한테 감시를 받아야해."
"어려운 조건은 아니군요."
"·········괜찮겠어?"
"손님방은 저쪽입니다."
"·········"
자신을 대하는 텔로리안의 행동엔 거리낌이 없었다. 오랜 시간을 지나서 다시 만났음에도.
"연구실이나 촉매보관실도 원하는대로 쓰십시오. 저를 감시한다고 엘렌스트라가 연구를 소홀해해서는 안될테니까요."
다행이었다.
여전히 살갑게 대해줘서.
"그나저나 말입니다. 엘렌스트라."
"뭔데?"
"지금 영지에서 봄맞이 축제가 한창인데 간만에 함께 구경해보지 않겠습니까?"
이에 엘렌스트라는 멋지게 차려입고 텔로리안과 외출했다. 그들은 함께 유랑극단의 연극을 보았고, 노점상에서 싸구려 음식을 나눠먹으며 추억을 되새겼다. 또한 선술집에 걸터앉아서 지나온 이야기들을 교환했다.
"제가 떠나고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나도 대단히 어려운 시기들을 겪었어."
"·········"
자신이 대륙을 방랑하며 다양한 고비를 겪었던 것처럼, 엘렌스트라도 힘겨운 시련을 마주했다가 마침내 마법협회에 정착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우린 모두 이겨냈네."
"잘했어요. 누나."
"너도 잘했다. 꼬맹이 녀석."
"이제 꼬맹이 아니거든요?"
"웃기시네. 너는 영원히 꼬맹이야."
너는 멀지 않은 시점에 아크메이지로 승천해 현자들의 의회에 입성하겠지. 그래도 너는 우리에겐 영원히 응큼한 꼬맹이일 뿐이야.
"엘렌스트라만의 생각은 아니고요?"
"다른 동기들도 너를 좋게 기억해."
"·········"
"먼저 연락해온 사람은 없겠지만······그건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네가 이해해야지."
엘렌스트라는 생각했다.
텔로리안과 함께 있으면 어떠한 마법사도 자괴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고독하지?"
"············"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볼테니까."
"············"
"재능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렴."
킥킥.
취해서 돌아오자 함께 즐기던 소꿉놀이가 떠올랐다.
"엘렌스트라."
"왜?"
"옛날 생각나지 않아요?"
오랜만에 재회한 사저와 사제는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엘렌스트라는 악기였고 텔로리안은 연주자였다.
[인체의 신비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22]
그들은 즐거운 소꿉놀이에 힘입어 어색함을 완전히 벗어던졌다. 스승님의 슬하에서 함께 수학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일주가 흐르고.
한달이 지날무렵.
"······일어나봐. 텔로리안."
"······?"
엘렌스트라가 한밤중에 자신을 깨웠다.
"꿈을 꿨어."
!
그녀는 드림시어.
예지몽을 꾼다.
"무슨 꿈이죠?"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마을이 파묻혀. 이를 주민들이 수습하고 있는데 못생긴 노총각과 늙은 마법사가 붉은 지하수를 터뜨려."
이후엔.
홍수가 마을의 모든걸 쓸어버린다.
"각자 해몽해보고 결과를 대조해보죠."
"예지술의 최대 주의사항은?"
"너무 많이 보려고 하지 마라."
"기억하네."
"그럼 마법진을 준비하겠습니다."
[6위계, 예지의 로어]
[포어사이트(Foresight)]
[로어여! 다가오는 위험을 선견해다오!]
"······!"
황급히 예지마법을 중단한다.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했으니.
"······데몬들의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군."
심연이 요원들을 움직였다.
덕분에 세계선이 변동했고.
[예지술로 위험을 사전에 포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23]
"예지 결과는?"
"저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나의 해석은 이러해."
""·········""
일치한다.
놀라울 정도로.
"나는 마법협회에 지원을 요청할게."
"저는 왕실자문회를 소집하겠습니다."
위기였다.
굉장한 규모의.
* * *
산악오크들의 대침공.
반란분자들의 대반란.
상급데몬들의 강림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질 겁니다."
"실행 시기는?"
"2주 안쪽입니다."
"한시가 급해졌군."
천리안의 구슬에 힘입어 여왕과 호국경은 제때에 위기를 전달받았다. 사전에 위험을 탐지한 공로는 엘렌스트라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대가 위기를 알아낸 예지술사군."
"스콜라 엘렌스트라가 인사드립니다."
"예지몽을 꾼다고 명성이 자자하던데."
"인사는 그쯤이면 충분합니다. 호국경."
여왕이 대화를 차단했다.
그녀는 완전무장한 상태.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하프엘프."
"폐하."
텔로리안이 끼어들었다.
"예지술은 매우 위험한 마법입니다. 특히 지금처럼 초월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예지술로 미래를 엿보다 필멸자의 정신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존재를 목격하면, 정신에 회복불가능한 상처를 입는다. 예지술사들이 광인이나 백치가 되어서 은퇴하는 이유다.
"심연에 맞설땐 누구나 위험을 감수해야지."
"·········"
"스콜라 엘렌스트라는 왕국을 도울 것인지 아닌지만 결정하시오. 왕국을 도울 거라면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오고, 위험을 감수할 의사가 없다면 통신을 종료하고 왕국을 떠나시오."
엘렌스트라는 자신을 감시하러 파견된 마법협회의 대리인일 뿐이다. 굳이 데몬들에 맞서서 에스실을 방어해줄 의무는 없다.
한데.
그녀는 망설임이 없었다.
"돕겠습니다. 여왕 폐하."
"좋소. 짐은 헌신과 공적엔 항상 보답하오."
"헤링턴 왕조에는 그러한 명망이 있지요."
"주동자들을 알아내는데 필요한 시간은?"
"24시간 이내에 보고드리겠습니다."
"훌륭하군.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뚝!
수정구 통신이 끊기자.
엘렌스트라를 질타한다.
"너무 무모합니다."
"알아. 데몬들의 어머니가 움직였잖아."
"한데 어째서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합니까?"
"그래도 우린 서로를 도와야해. 텔로리안."
우린 가족들에게 버려졌으니까.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줘야 하는거야.
* * *
엘렌스트라는 꿈차를 복용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텔로리안은 보호마법진을 설치하고 최상급포션들도 준비했다. 그럼에도 위험은 여전했다. 상대는 데몬들의 어머니, 주신에 맞먹는 위격의 불멸자였으니까.
"본신이 나설 차례군."
은빛뱀이었다.
아바타 형태의.
"하루종일 사료만 축내고 살아서 마음이 개운치 않았는데, 드디어 역할이 생겼구나."
화신체로 현현한 은빛뱀은 엘렌스트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성흔(Stigma)가 새겨지며 뱀신의 권능이 발동했다.
[5위계, 신성의 로어]
[스피릿 가디언(Spirit Guardian)]
[필멸자여! 그대의 영혼을 보우하노라!]
촤릉!
신성한 광채가 번득이고.
[2위계, 신성의 로어]
[영혼 결속(Spirit link)]
[필멸자여! 그대의 고통을 나눠지리라!]
뒤이어.
영적인 가호가 뒤따른다.
"지금부터 그대의 누이를 해치려는 이들은 본신부터 상대해야한다. 또한 그녀가 입는 정신적 피해도 본신이 함께 나눠받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말아라.
본신이 적들을 두렵게 만들테니까.
[신규연구 : 운명의 변곡점]
[연구주제 : 세계선을 새롭게 예측하십시오!]
[연구단서 : 0/5]
[연구보상 : 미래시[진](신화)]
됐다.
이걸로 엘렌스트라는 안전해졌고.
'심연의 여왕이 세계선을 뒤틀 생각이군.'
그렇다면.
자신은 초월자들보다 앞서 보리라.
새롭게 조정될 세계선을!
11. 열한번째 연구 - 운명의 변곡점(2)
꿈은 불멸자들이 독점해온 영역이었다. 하지만 필멸자 중에도 꿈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을 드림시어(Dreamseer)라고 일컬었다.
"끄으으윽······"
"···············"
드림시어들은 꿈에서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 현재의 사건들. 그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보인다고 전해지나, 드림시어들이 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다.
[드림시어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24]
"인큐버스들이 엘렌스트라를 공격중인가?"
"제대로 보았다. 유달리 사나운 놈들이군."
예지몽을 꾸는 엘린스트라는 몽마들에게 정신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엘렌스트라는 스승님께 혹독한 수련을 거쳤기에 몽마들정도는 충분히 감당한다. 상위 개체가 개입한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상위 개체가 개입하면 본신이 직접 상대할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진정한 문제는 별자리가 어지러워졌다는 점이다. 심연의 종자들이 소환되고 있다는 뜻이니, 끔찍한 학살의 전조로다."
텔로리안도 대기의 흐름에서 데몬들의 냄새를 맡았다. 암약하던 데몬숭배자들이 제물을 바쳐서 데몬들을 소환하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충동적인 데몬들의 일사불란한 강림.
이러한 경우는 하나밖에 없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최상위 개체의 명령.
심연의 여왕이 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럼 나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겠소."
"훌륭한 선택이다. 초월자들의 행동과 운명의 흐름은 모두 밤하늘에 쓰여있으니까."
[천문학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25]
마공학스코프를 소환해 밤하늘의 움직임을 관측한다. 별들의 궤도가 자신이 알고 있던 모습과 달라졌으므로, 변화한 궤도를 연산해 하늘의 움직임을 새롭게 그려본다.
"!"
세계선이.
뒤틀렸다
'내가 전생의 경험으로 관측한 미래선은 [질서]의 성질을 보유했다. 사전작성된 시나리오라는 특징을 지녔으므로.'
그러나 시네어RPG엔 매판마다 달라지는 랜덤요소도 있었다. 지금 심연의 여왕은 세계선에 변수를 만들어서, [혼돈]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예상대로군.'
심연의 여왕은 계획성이 떨어지나 임기응변에는 능하다. 그래서 상황이 불리해지면 기존의 계획을 완전히 폐기하고, 기획에 없던 변수를 던져서 세계선을 예측불가능하게 바꿔버린다.
'나의 존재도 눈치챘겠지.'
심연의 어머니는 미래예지에 가까운 직감을 지녔으므로, 미래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개입해 그녀의 계획을 훼방놓았음을 느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정체까진 아직 모르겠지만·········
'사막오크들은 스스로 가뭄을 이겨냈고 하이엘프들은 더이상 심연을 돕지 않는다. 그럼 삼두룡의 강림은 가망성이 없는 계획이지.'
그러니.
불시에 내던진 것이다.
삼두룡의 강림을 위해 준비해둔 하수인들을.
'만일 기습이 성공해서 중부를 전복하면?'
계획대로 악이 창궐하겠지.
'실패해서 적당한 소란에서 끝나면?'
그래도 세계선에 존재하지 않던 사건들이 발생하고, 그것들이 눈덩이처럼 세차게 굴러 내가 알던 세계선을 통째로 무너뜨릴 것이다.
'그럼 이쪽의 대응방안은?'
간단하다.
기존의 세계선을 지키지 않으면 된다.
요약.
심연의 여왕은 계획이 무너졌음을 파악했다.
그래서 세계선을 엉망으로 만들 셈이다.
따라서 이쪽도 세계선을 지키지 않으면 된다.
[연구진전 : 운명의 변곡점]
[세계선의 뒤틀림을 인정함!]
[연구단서 1/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6]
'나도 게임 시절의 시나리오에 의존할 까닭이 없거든. 이미 원작에선 불가능했던 성취들을 이뤄낸 상태니까.'
벨라디아를 여왕으로 추대해 왕국을 파멸에서 구했으며, 은빛뱀에게 이름을 찾아줘 타락을 피하게 만들었다. 또한 벨칸을 초반에 각성시켜서 종족전쟁까지 회피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대한 성과가 있다.
원작에선 결코 불가능하던.
"오랜만이군. 친구여."
"············"
"상태가 말이 아니군."
간만에 소환된 지옥의 귀공자는 폐인의 몰골이었다. 항상 장중한 차림을 고집하던 게헨나의 대공이 거지처럼 추레한 꼴이라니.
"······돌려보내라."
악마가 무기력하나 위협적으로 말했다.
"나는 누구도 만나거나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 너의 영혼을 산산이 찢어놓기전에 돌려보내라."
루시펠레스의 비어버린 눈동자엔 절망만이 가득했다. 저주받은 왕자는 예정된 파멸을 앞두었음을 깨달았고, 아버지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돌려보내주지."
"·········좋아."
"대신 나도 데려가도록."
"·········"
"이전에 자네가 나를 초청했잖나?"
"·········더이상 나를 귀찮게 굴지 않는다면."
"약속하지."
츠릉!
포탈이 열렸다.
게헨나로 향하는.
'루시펠레스에겐 세상의 종말을 초래할 잠재력이 있듯이, 세상의 종말을 막아낼 잠재력도 있다.'
지옥제왕의 종말계획은 루시펠레스에게 죽음을 맞이해서, 루시펠레스의 아들을 통해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찔러주지.'
게헨나의 루시펠레스를.
지옥제왕을 파멸시킬 비수로 만들겠다.
'지옥제왕이 파멸한다면 일곱지옥이 무너질테고, 일곱지옥이 무너지면 심연은 혼자서 천상의 군세를 상대해야한다.'
이후엔.
자신이 천상에 가담해 심연도 끝장낸다.
이것이 자신이 제시할 새로운 세계선이다.
[연구진전 : 운명의 변곡점]
[새로운 세계선을 제시함!]
[연구단서 2/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0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7]
'그러니 루시펠레스를 반드시 나의 편으로 끌어들여야해.'
포탈로 발을 내딛는다.
악마대공의 궁전을 향해서.
* * *
게헨나는 화산재가 흩날리고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황무지였다. 훈련에 전념하는 데빌군단의 전투함성과 갱도에 파묻히고도 죽지 못하는 광부들의 절규만이 들려오는 지옥.
[게헨나를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31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28]
"아름다운 장소군."
"·········더이상 귀찮게 굴지마라."
루시펠레스는 불꽃을 뿜으며 개인실로 워프했다. 대신 단정한 외모와 품격 있는 차림을 갖춘 여성형 데빌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잿빛현자이시여."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헬메이든."
"물론입니다. 주인님께서 식사를 즐기실 때마다, 잿빛현자님의 위대한 지성과 박식한 지식에 대해 끊임없이 예찬하셨습니다."
이자식.
입만 열면 욕했구만.
"방에만 칩거한지 얼마나 됐나?"
"반년째 저러고 계십니다."
반년.
진실을 깨달은 직후다.
"연극은 보고 있고?"
"개인극장엔 종종 들리십니다."
아직.
멘탈이 지옥 끝까지 처박히진 않았다.
아직은 회복이 가능한 단계란 뜻이다.
"별채로 안내해다오."
"알겠습니다."
"2관말고 1관으로."
"1관은 주인님께서 출입을 엄금하신──"
펄럭!
지옥의 법전을 펴보인다.
"디아볼릭 코덱스 4장 12조. 귀족의 저택에 초대받은 손님은 다음과 같은 수준의 환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집주인이 직접 현관까지 나와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데빌을 겁에 질리게 만듬!]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29]
"요, 용서해주십시오! 현자시여!"
"흐음."
"제발 저를 노예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건 네가 하는걸 봐서 정하겠다."
잿빛현자는 사악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네는 디아볼릭 코덱스 12장에 수록된 사용인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조항들을 위반했다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하진 않겠네. 자네가 나를 성의껏 환대하는 동안은 말이지."
히이익!
"따, 따르겠습니다!"
[데빌을 속여넘김!]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30]
'사실 그런 조항은 없다.'
하지만 지옥에서도 [디아볼릭 코덱스]의 완전판을 보유한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헬메이든같은 중급데빌은 얌전히 자신의 요구에 따르는 방안이 제일 후환이 적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헬메이든이 덜덜덜 떨었다.
"제가 1관에 무단으로 손님을 들여보냈단 사실을 주인님이 아시게 되면······저는 상상을 초월하게 끔찍한 처벌을 받게 될겁니다."
음.
합리적인 의심이다.
분명히 녀석은 그럴테지.
"그럼 나에게 당장 고문을 받겠나?"
"죄, 죄송합니다! 열어드리겠습니다!"
끼이익!
헬메이든은 1관으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어주고 신속히 사라졌다. 내부를 살펴보는 것조차 금지된 장소였으니까.
"·········"
포탈에 발을 딛자 게헨나와는 대단히 이색적인 풍경이 드러났다.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장엄한 대성당이 있었다. 루시펠레스의 어머니가 기억하던 고향의 모습.
"·········"
대성당으로 발을 딛으며 상상해본다. 평생을 태양신의 초즌으로 살아온 고귀한 왕녀가 지옥의 풍경을 보았을때 느꼈을 절망을.
'어린 루시펠레스는 모후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법으로 어머니가 추억하던 고향을 빼닮은 공간을 만들어줬지.'
[신규로어습득 : 영혼의 로어]
[잔여 전승포인트 : 15]
"마나여."
지옥은 영혼으로 이루어진 영계다. 따라서 강렬한 기억일수록 잔류사념이 선명하게 남아서 기억을 복원하기 쉽다.
[3위계, 영혼의 로어]
[기억 복원(Memory Restoration)]
[영혼의 흔적을 보여다오!]
분수를 배경으로 환상이 나타난다. 아직 뿔이 자라지 않은 연소한 캄비온 왕자가 들뜬 표정으로 고결한 인간 왕비를 올려다본다.
"어머마마! 마음에 드시옵니까?"
"······나를 위해 준비해준거니?"
"예! 소자가 직접 어머마마의 고향을 답사하고 만들었사옵니다! 격무 중에 고향이 그리우시거든 별관에 방문해 향수를 달래소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아들을 안아주었다. 그러자 아들은 더욱 당차게 외친다.
"어마마마! 제가 아바마마의 진정한 계승자로 인정받을 날을 기다리소서! 그때가 된다면 아바마마께서도 어마마마께 자유를······!"
하지만 아들이 대견하게 느껴질수록 어머니는 구슬프게 흐느꼈다. 그녀는 아들의 비원이 이뤄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
잔상을 뒤로하고 대성당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대성당의 내부에선 단순한 잔류사념이 아닌, 성스러운 영혼이 감지되었다.
다만.
온전한 상태의 영혼이 아니었다.
"·········"
번쩍이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래에 무릎 꿇은 왕녀가 보였다. 그녀는 태양신을 향해서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응답받지 못함을 알고 있음에도.
"오랜만의 방문객이군요."
천사처럼 우아한 목소리.
태양신의 영광을 찬미하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제가 기다리던 사람은 아니네요."
"그대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루시펠레스의 어머니는 에르보니아의 왕녀이자 태양신의 초즌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죄악을 짊어지고자 지옥제왕의 청혼을 받아들였기에, 후대는 그녀를 에르보니아의 대속자라고 부른다.
찬란한 황금색의 영혼.
그러나 빛이 쇠해가는.
"아니오."
대단히 지쳐보였다.
눈가엔 생기가 없었고.
"저는 리안칼이 저를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래요. 만나봐야 서로의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만 되새길 따름이니까요······"
·········
상대는 온전한 대속자가 아니다.
그녀가 품었던 영혼의 일부였지.
"소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구려."
"맞습니다. [나]는 리안칼이 만들어준 대성당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면서·········다시는 태양신과 리안칼을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지옥의 왕비로 거듭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되려면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나]는 평생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았어요."
"············"
"오히려 평생 베푸는 삶만을 살았죠. 그럼에도 [나]에게 주어진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지요."
그녀는 더이상.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영혼을 반으로 잘라서 이곳에 버리고 떠났습니다. [나]는 스스로의 고귀함을 포기하고 지옥의 왕비로 거듭난 것이죠."
·········
"그리하여 저는 환상 속에서 고통만 받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불쌍히 여겨지신다면 영혼을 파괴해주십시오. 제발 쉬고 싶습니다."
[분리된 영혼을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16]
"원한다면 안식을 줄 수도 있소."
"그럼 망설이지말고 자비를 베푸소서."
"하지만 먼저 나의 계획을 들어보시오."
내게.
리안칼을 구해낼 계획이 있으니까.
거기에 당신의 협력이 필요하고.
11. 열한번째 연구 - 운명의 변곡점(3)
아들을 구해내겠단 텔로리안의 제안에도 대속자는 쓴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기나긴 고통이 성녀의 선의마저 꺾어낸 것이다.
"저는 헛된 희망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요. 단지 쉬고 싶을 뿐입니다."
이에.
대속자와 눈높이를 맞춘다.
"태양신은 당신을 저버렸지."
"·········"
"당신이 백성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태양신의 명령을 어겼던 까닭이오. 태양신은 자신의 품에 있을 때는 한없이 자비롭지만 품을 떠나면 한없이 냉정해지는 존재이지."
태양신을 숭배하던 에르보니아인들은 엘프들에 대한 침략이 실패하자 다급히 기도를 올렸다. 이에 침략을 사죄하고 평화를 구하라는 신탁이 돌아왔으나 에르보니아인들은 불복하고 지옥제왕을 소환했다.
"에르보니아인들은 선을 버리고 악을 택했소. 천상의 정의에 입각하자면 그들의 영혼은 모조리 악마의 손아귀에 떨어지는게 합당한 결말이었소."
태양신은 선을 알지 못하는 악인에겐 한없이 관대하지만, 선을 알고도 스스로 악인이 되기를 선택한 이들에겐 자비를 알지 못한다.
[태양신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17]
"그때부터 무적의 태양은 에르보니아인들을 모조리 지옥에 내던지기로 단단히 결심했소."
그래서 자신의 초즌에게 의인들과 아이들만 데리고 저주받은 땅을 떠나라고 일렀다. 그것은 분명히 공명정대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옥제왕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당신은 지옥제왕의 청혼을 거절하고 에르보니아를 떠나야했소. 그랬다면 태양신이 손수 에르보니아를 일곱지옥으로 내던져서, 지옥제왕은 지상에 전초기지를 세우겠단 사악한 의도를 달성하지 못했을테니까."
태양신은.
지엄한 정의다.
지엄한 정의란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선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
그것이.
태양신의 원칙.
"하지만 당신은 정에 얽매여서 지옥제왕의 청혼을 받아들였고······덕분에 에르보니아는 오늘날까지 데빌들의 전초기지로 남아있소."
대속이란.
오직 신에게 허락된 권한.
"하지만 당신은 인간에 불과함에도 가족과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고 싶었지. 그것이 오늘날의 고통을 자초했던 아둔한 선택이오."
이에 대속자는 슬프게 웃어보였다. 스스로도 쉼없이 후회했던 결정이었다. 태양신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오늘날의 고통은 없었을텐데.
[에르보니아의 대속자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18]
"하지만 나는 그걸 고결함이라고 부르겠소."
"·········"
"당신은 영혼과 신앙을 포기해 에르보니아인들에게 두번째 기회를 주었소. 하지만 끝까지 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은 에르보니아인들의 선택일 뿐이지, 당신의 죄악이 아니지."
이것이.
자신이 태양신에게 반대하는 근거.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오."
"············"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이들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오."
진정한 성인들은 그러한 판결조차 죄업에 대한 대가로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보니아의 대속자는 진정한 성인이 아니었을 뿐이다.
"당신은 그저 인간이었을 뿐이오."
"·········"
"그리고 나는 인간을 대표하려는 사람이오."
천상과 지옥.
낙원과 심연.
"그들 우리에게 선과 악. 규율과 무질서를 강요하오."
하지만.
인간들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의 영혼엔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이 병존하고, 원칙을 지키려는 마음과 본능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지."
그러니.
"당신은 가족과 백성들을 위해서 한순간 원칙을 포기했을 뿐이오. 당신은 천상의 정의는 저버렸을지 모르나 스스로의 고결함을 저버린 적은 없었소."
그렇기에.
"당신의 아들에겐 당신처럼 고결한 면모가 있소."
비록 아주 조금이지만.
아예 없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녀석은 상종못할 사기꾼이자 잔인무도한 폭군이지만······그럼에도 아버지를 돕고 어머니에게 자유를 선사하려는 효자요."
녀석이 어떻게 그렇게 자랐을까?
악행을 권장하는 일곱지옥에서?
"당신이 베풀었던 사랑 때문이었지."
"·········"
"당신은 원치 않았던 자식이라며 증오하거나, 악마의 혈통이 흐르는 아이라고 저주하지 않았소. 단지 어머니로서 아껴주었을 뿐이지."
덕분에.
루시펠레스는 악마임에도 부모님의 인정을 갈구하는 별종으로 자라났다.
"그게 지옥제왕을 심판할 무기가 될거요."
"·········"
"또한 아들을 저주받은 운명에서 해방시킬 열쇠도 되겠지."
[대속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9]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녀석이 당신을 떠올릴만한 물건이 있겠소?"
"·········"
"가장 소중히 여길 기억에 근거하면 좋겠군."
대속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떠올린다.
"리안칼이 고향을 빼닮은 아공간을 만들어줬을 때에, 저도 친정에서 가져온 성물들을 녹여서 목걸이를 만들어줬어요."
스르르······
허공에 황금빛이 모여들며 은빛목걸이가 나타났다. 정교한 세공이 이뤄진 목걸이에는 별과 달이 조각되어있었다.
─────
■대속자의 목걸이 (장신구, 영웅)
: 에르보니아의 대속자가 저주받은 왕자를 위해 만들어준 목걸이입니다. 표면에 조각된 달과 별은 어미가 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언제나 안심하라는 당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효과
: 모든능력치 +4
: 신성력 +100%
: 악에 대한 보호(최상급)
: 태양신의 축복(소멸함)
─────
"리안칼이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목걸이였지만 나이가 들자 거북하게 느꼈죠. 그래서 녀석은 게헨나의 대공으로 즉위하면서, 이곳에 목걸이를 두고 떠났지요."
받아든다.
목걸이를.
"이제 내게도 안식을 줄 수 있나요?"
"············"
"당신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줬으니까요."
대속자는 존재를 이어나갈 의지가 남지 않았다. 하지만 영혼을 파괴해버리면 다신 원래대로 접붙이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녀의 영혼은 반 쪽짜리일 뿐이다. 지금 파괴해도 온전한 안식이 아닌 것이다.
"안식에 들기 전에 아들은 만나셔야지."
"·········"
목걸이를 내민다.
"이곳에 잠들어계시오."
"·········"
"리안칼은 반드시 당신의 절반도 구해낼 것이오. 그때 온전한 모습으로 아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영원한 안식에 드시오."
그녀는 홀로 왕국의 죄업을 뒤집어쓴 대속자다. 적어도 하나뿐인 혈육의 작별인사를 받으면서 고향에서 눈을 감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 아니길 바래요."
"결코 그리 만들지 않겠소. 레제니스."
"·········간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그래요.
한때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죠.
"그럼······마지막으로 당신을 믿어보겠어요."
"쉬고 계시오."
스릉!
선한 레제니스가 목걸이에 스며들었다. 악한 레지니스도 목걸이에 집어넣으면 영혼이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지.
'그럼 녀석을 만나러가볼까.'
목걸이를 품에 넣고서 발걸음을 옮긴다. 오랜 친구가 처박혀있는 방구석으로.
* * *
게헨나의 원형극장은 수만 명의 관객을 동시에 수용 할만큼 거대했다. 극장에 올라간 배우들은 완벽한 명연기를 펼쳤다.
[운명이여! 너는 어째서 이토록 잔혹한가!]
[아아! 저주받을 지어다! 저주받을 지어다!]
하지만 객석에는 음울한 표정의 악마 대공만이 앉아있었다.
"전사왕 할프단이군."
대공의 옆자리에.
마법사가 나타났다.
"전리품으로 학대하던 여인이 생이별한 어머니임을 깨닫고 자진하는 결말이었지?"
·········악마 대공은 아무런 대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단지 자신을 낳아준 여성을 유린했음을 깨닫고 죽음을 택하는 배우의 모습에서, 자신에게도 닥쳐올 비참함을 미리 맛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래에 압도되었군."
"·········"
"그럼 과거도 되새겨보는건 어떠냐?"
툭.
녀석의 팔걸이에 내려둔다.
어머니가 전해준 목걸이를.
"·········이건 무슨 수작이냐."
마침내.
놈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무슨 사기극을 위해 찾아온거냐?"
"오늘은 너를 속이고자 찾아오지 않았다."
"·········?"
아공간에서 두툼한 봉지를 꺼내들었다. 봉지에는 누르스름한 알갱이들이 수북했는데,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먹어봐라."
"·········
"고향음식인데 맛있다."
······루시펠레스는 주인의 입장에서 손님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이 텔로리안이 내미는 과자를 먹어보았다.
"!"
맛있다!
달달하다!
"통째로 먹어라."
"············"
"나도 있으니까."
루시펠레스는 건네준 과자봉지를 단숨에 흡입했다. 과자봉지들이 빠르게 게헨나 대공의 곁에서 쌓여갔다······
"······이건 무슨 음식이냐?"
"튀긴 옥수수알갱이."
"?"
"지옥불에 튀겨본건 처음인데 별미더군. 게헨나의 튀김옥수수라고 명명할까봐."
울적한 기분을 달래는데 최고다.
고향 생각도 나고.
"용건이?"
"없다."
"없다고?"
"네가 초청했기에 놀러왔을 뿐이야."
"············"
뭔가.
뭔가 불길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진의가 뭐냐? 필멸자."
"문자 그대로 놀러왔다."
"말장난은 그만두고──"
빠득!
텔로리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힘들어보이길래 위로해주려고 찾아왔다는 이야기다! 이걸 일일이 설명해야 알아듣는 사회성이 처참하구나! 무지한 캄비온 자식아!"
······뭐?
위로?
[우정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20]
"사람의 관계엔 사기꾼과 피해자만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들은 남에게 특별한 악의를 품고 살지 않으며, 인연이 닿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한다!"
·········!
세상에! 말도 안된다!
"그것이 네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인간성이다! 그러니 폐인생활은 집어치우고 방구석에서 나와라! 벌어지지도 않은 사건에 절망해 오늘을 내다버리는게 뭐하는 행동이냐!"
멍청한 놈!
모자란 자식!
"남의 인생으로 장난질하던 놈이 자기 삶이 장난질을 당하니 징징대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구나! 남이면 실컷 비웃어주겠다만 위로해야하는 입장인게 짜증난다!"
너!
거래를 하자!
게헨나의 루시펠레스는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처럼 초월적인 힘을 지닌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의 친구가 되어라!"
"············"
"그럼 아버지에게 복수하게 해주마!"
"!"
"그리고······"
목걸이를 들어서.
녀석에게 내민다.
"어머니를 구해드려야지."
"·········"
"거짓희망을 말하진 않겠다. 어머님께선 삶을 이어가실 의지도 동기도 남지 않으셨다. 하지만 적어도 안식은 드릴 수 있다."
이걸로.
자신이 먼저 우정을 입증했다.
"······어떤 보답을 바라지?"
"게헨나의 군대를 출진시켜라."
"드높은 천상을 침공하라는 말인가? 그건 불가능하다."
고개를 젓는다.
"심연을 침공해라."
"?"
"지금 데몬들이 자리를 비웠거든."
[연구진전 : 운명의 변곡점]
[악마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킴!]
[연구단서 3/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1]
"그리고 말이야."
"·········"
"너희 가족의 회의실에 이걸 좀 두고 와라."
"이게 뭐냐?"
"때가 되면 알게 될거다."
이번에 준비한 계획의 핵심이다.
언제나 침착한 데빌제왕을 흥분하게 만들.
11. 일곱번째 연구 - 운명의 변곡점(4)
지옥의 데빌들과 심연의 데몬들은 서로를 천사만큼 싫어한다. 그들이 보유한 [악]에 대한 미학이 현저히 다른 까닭이다. 때문에 그들은 영원에 걸쳐 살육전을 벌여왔다.
하지만 태양신의 교세가 강성해지면서 데빌의 제왕과 데몬의 어머니는 휴전을 체결했다. [악]에 대한 견해차이는 미뤄두고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데 집중하자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를 일컬어.
불경한 동맹이라고 부른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징조.
[불경한 동맹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1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2]
"불경한 동맹을 깨뜨릴 생각이군."
"정확히 보았다."
"그건 부왕께서 천년을 준비해 성사시킨 조약이었지. 맹세를 깨뜨리길 즐기는 데몬의 어머니를 감화시켜야했으니까."
데몬은 천성이 굉장히 충동적이라 [동맹]같은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데몬들은 눈앞의 쾌락만을 쫓아다니는 존재들이니까.
그래서.
데빌들이 많은 양보를 해줬다.
그래야만 데몬들을 달랠 수 있었으니.
한데.
그렇게 어렵게 성사시킨 휴전을.
자신의 독단으로 깨버린다?
"이건 데빌족에 대한 배신이야."
"그렇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을 넘어선다고."
루시펠레스는 음울한 눈빛으로 심연을 내려다보았다. 강력한 전사형 데몬들이 물질계로 소환된 까닭에 수비가 대단히 취약해졌다.
"우리 데빌들은 법리에 의거한 악행을 수행함으로서 힘을 쌓지만, 반대로 맹세를 어길 때마다 힘을 잃는다."
[불경한 동맹]의 조약문엔 루시펠레스의 이름도 기입된 상태. 따라서 심연을 침공한다면 루시펠레스는 힘을 잃게 되리라.
"게다가──"
"어머니를 구할 생각이 있나?"
"············"
"어머니를 구해낼 생각이라면, 너는 아버지에게 받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한다."
권능.
권력.
심지어 야망까지도.
"선택해라."
"·········"
"지금의 선택은 되돌이키지 못한다."
"·········"
"부채와 권리는 함께 상속받는 유산임을 명심해라. 아버지의 권력을 누리면서 어머니를 구해드릴 방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시펠레스는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보았다. 게헨나의 야전군이 자신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군세가 지상에 강림한다면 제국조차 사흘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
게다가 게헨나는 일곱지옥에서도 제일 강대하고 부유한 영지였다. 괜히 이복형제들이 자신을 질시하는게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면──"
"네가 품은 모든 욕망과 바램은 지옥제왕이 유도한 것이다."
녀석도 이미 알고 있다.
외면해왔을 뿐이지.
"지옥의 방식으론 절대로 지옥제왕을 무찌르지 못한다. 인정해야할 시간이다."
시간이 없다.
결정을 내려라.
"·········"
인간에게 태어난 대악마는 고개를 내려서 잿빛강물에 보이는 자기자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완전무장한 지옥대공이 있었다. 고대의 악신들을 연상시킬만큼 무시무시하고 멋진.
"············"
허리춤의 마검에 손을 얹자 초월적인 힘이 느껴졌다. 한번만 휘둘러도 필멸자 만명을 멸하는 종말의 화염검. 이는 아버지의 총애를 상징하는 유물.
"······전군."
하지만.
그것마저 아버지의 노림수였을테지.
자식들을 경쟁시키고 반목시키려는.
"심연을 침공하라!"
콰아아아──!
종말의 화염검이 차원의 경계를 찢어놓자 데빌들이 심연으로 진격했다. 이변을 감지한 지옥제왕이 전군에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하달했으나, 게헨나의 야전군은 [군법]에 따라 직속상관에게만 복종했다. 사병들은 장교들의 명령에, 장교들은 장군들의 명령에, 그리고 장군들은 루시펠레스의 명령만을 따랐다.
[게헨나의 대공이여!]
루시펠레스에게.
지옥제왕의 전언이 전달된다.
[일곱지옥을 다스리는 최고주권자의 이름으로서 명하노니! 당장 진격을 중단하고 게헨나로 복귀하라! 이는 디아볼릭 코덱스의 1조 1항에 의거한 군통수권자의 지시다!]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지옥의 권능이 담긴 언령이었다. 원본 세계선의 루시펠레스에겐 저항할 방법도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하지만.
오늘의 루시펠레스는 저항에 성공했다.
찬란한 별빛을 발하는 목걸이 덕분이었다.
[나는 더이상 당신을 따르지 않습니다.]
[스스로 서명한 휴전을 파기함.]
[신하가 주군을 거역함.]
[Lv90 아크데빌-> Lv80 아크데빌]
[Lv80 아크데빌-> Lv70 아크데빌]
[나는 당신의 아들이 되길 원했습니다.]
[너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막내아들이다!]
[아니오.]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가 뭔지도 모릅니다.
[저는 간절히 당신의 인정과 사랑을 바래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걸 이제야 알겠군요.]
저는 아버지께서 지옥의 제왕이셔도 괜찮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에 종말을 일으키고자 하심을 알아도 좋았습니다.
[저희 가족이 다시 뭉칠 수 있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헛소리냐?]
[어린 시절처럼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서 식사할 수 있다면, 세상 따위는 어찌 되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젠 인정하겠습니다.
제겐 그런 미래가 허락되지 않을 것임을요.
[당장 일탈을 멈추고 귀환해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줄테니까!]
부왕의 당황한 목소리에 만족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한방 먹였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싫습니다.]
궁전에서 잠자코 지켜보시죠!
아버지의 대계가 박살나는 모습을!
[아들로서 아버지를 거역함.]
[Lv70 아크데빌-> Lv60 아크데빌]
종말의 화염검을 휘두르자 차원의 경계를 지키던 전사형 데몬들이 쓸려나간다. 한차례 휘두르면 백명이 죽고 두차례 휘두르면 이백명이 죽는다. 루시펠레스를 뒤따르는 지옥의 선봉대가 기계적으로 장창을 내지른다.
으랴!
으랴!
으랴!
게헨나의 야전군은 전사형 데몬들을 제압하고 심연의 시가지로 진입했다. 데빌 병정들은 완벽한 규율과, 규율보다 지독한 악의에 힘입어서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도살했다.
"모두 죽여라!"
"가장 효율적으로 죽이도록!"
"최대한 많은 숫자를 죽여야한다!"
지옥의 병정들은 유혹하는 서큐버스도 사정없이 난도질했고, 필멸자들의 영혼을 넘겨주겠단 인큐버스들의 제안도 무시했다.
"이쪽 골목은 청소가 끝났습니다!"
"이쪽 골목도 청소가 끝났습니다!"
"좋다! 모조리 학살하도록!"
그들은 살육만을 위해서 준비된 기계처럼 데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를 수행하는 데빌 병사들에겐 어떤 사심도 없었지만, 진정한 악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만큼은 명백했다.
"규율이!"
"승리를!"
"영광을!"
"""부른다!"""
[데빌들의 전쟁방식을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32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23]
"쓰레기같은 데빌놈들이──!"
지상에 강림했던 전사형 데몬들이 황급히 고향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소환지점에 대기하던 게헨나의 야전군이 그들을 도살했다. 고향차원에서의 죽음이기에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진정한 악이다!"
"너희는 가짜악이지!"
"이런 천사같은 놈들!"
데몬들은 황급히 [데몬의 어머니]가 거주하는 영원한 쾌락의 하렘으로 달려가서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하렘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재밌군! 재밌어!]
심연의 여왕은 성기사들의 영혼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그녀의 후손들이 도살당하는 모습을 즐겁게 관람했다.
[데빌들이 스스로 제시했던 휴전을 파기하다니! 얼마나 흥미롭고 기쁜 날이냐! 마침내 우매한 데빌들도 진정한 악을 깨닫고 있구나!]
구해주소서! 여왕이시여!
구해주소서! 어머니시여!
보호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아!
[응? 그랬나?]
참.
그랬었지.
[한데 지금은 너희가 죽어가는 모습을 관람하는게 훨씬 즐겁겠군. 너희가 신뢰하던 어머니에게 배신당하는 날이잖느냐? 내가 여기서 모성애를 발휘하면 재미가 없겠지.]
키득키득!
깔깔깔깔!
[지옥의 졸개들아! 나의 아들딸들을 도살해라! 그들이 울부짖고 고통받게 만들어라! 제일 고통스럽고 치욕스런 방법으로 죽여라!]
그것이!
심연의 여왕이 내리는 칙령이다!
[자! 하렘의 신사숙녀들이여! 다들 무엇을 하느냐! 너희 형제자매들의 비명을 음미하면서 춤을 추고 사랑을 나누어라! 오늘 죽어간 이들만큼 새로운 아이들을 낳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와하하하하하하핫!]
[심연의 광기를 목도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32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25]
"그오오오오오오!"
"전부 죽이고 빼앗아라!"
"규율! 규율을 지켜라!"
"배신! 혼돈! 학살! 크하하하!"
심연의 칙령은 게헨나의 야전군마저 광기에 빠뜨렸다. 정밀기계처럼 살육을 수행하던 병정들이 상관을 죽이고 대열에서 이탈하더니, 고문과 약탈을 즐겼다.
"·········!"
더이상 게헨나의 야전군은 루시펠레스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았다. 최정예 데빌군단이 광기에 미쳐날뛰는 데몬들처럼 변모한 것이다.
이것이.
심연을 다스리는 여왕의 권능이었다.
[루시펠레스.]
그때 로어마스터의 메시지가 루시펠레스에게 도달했다. 텔로리안은 스스로의 존재를 숨기고자, 심연의 외부에 대기하고 있던 상태였다.
[포탈이 준비됐다. 빠져나오도록.]
"·········"
루시펠레스는 부친에게 물려받은 날개를 펼치고 심연에서 빠져나왔다. 아버지의 또다른 칙령이 내려왔다. 당장 지옥으로 복귀해서 심판을 받으라는 명령이었지만, 그것도 무시했다.
[반역자로서 정당한 심판을 거역함!]
[Lv60 아크데빌 ->Lv51 아크데빌]
착!
심연을 빠져나온 루시펠레스는 텔로리안의 근처에 착지했다. 끝없는 잿빛황무지에 물질계로 향하는 포탈이 열려있었다.
"·········나보고 물질계로 도망치라고?"
"도망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질계는 인간들의 고향.
녀석의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의 고향은 네게도 고향이 되어줄 수 있다."
"·········"
"대신 지옥에서 획득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한다. 보물, 작위, 의복, 심지어 마력까지."
내가 가져갈 수 있는건?
"어머니의 목걸이."
"·········"
"그것만이 네가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이다."
루시펠레스는 허리춤에 매어둔 종말의 화염검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봤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
힘껏.
던져버린다.
끝없는 심연을 향해서.
[Lv51 아크데빌 ->Lv50 캄비온]
······루시펠레스는 육신에서 영속성이 사라져감을 느꼈다. 이제 자신은 필멸자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못한다. 그들과 같은 시선에서 초월자들을 경배해야할테지.
"······상쾌하군."
그렇지만.
덕분에 떠올랐다.
어머님께서 불러주시던 동요가.
"텔로리안."
힘을 잃은 악마는.
친구를 바라본다.
"나는 네가 요구한 것을 모두 수행했다. 부왕의 명령을 거역해 지옥과 심연에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아크데빌의 권능을 포기해서 내가 아버지를 죽이고 지옥의 권좌를 탈취할 기회도 사라졌다."
[연구진전 : 운명의 변곡점]
[데빌에 대한 종말트리거를 약화시킴!]
[연구단서 4/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2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6]
"이제 어떤 운명이 나를 기다리는가?"
"나도 더이상 자네의 미래는 알지 못하네."
포탈을 향해서 발걸음을 내딛으며.
고민하는 캄비온에게 손을 내민다.
"대신 함께 만들어갈 수는 있겠지."
"·········"
"돌아가자. 친구여."
새로운 고향이 기다린다.
그대가 진정으로 속해야할.
* * *
마탑으로 복귀하자.
예지몽에서 깨어난 엘렌스트라가 맞이해줬다.
"······텔로리안."
"무사하시군요. 엘렌스트라."
"너의 행동이 지옥제왕의 분노를 돋구었어."
[강력한 초월자를 열받게 만듬!]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32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28]
피식.
웃음이 나왔다.
"벌써 열받으면 곤란할텐데."
이제 시작일 뿐이다.
자신이 준비한 함정은.
11. 열한번째 연구 - 운명의 변곡점(5)
불멸자들의 장대한 계획에서 필멸자들은 장기판의 졸병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은 색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졸병들이 판을 스스로 판을 뒤집는.
"······대단히 이색적인 상황이군."
왕좌에 앉은 지옥제왕이 미간을 좁혔다. 심혈을 기울여 양성했던 최정예들이 모조리 전멸했다. 또한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던 [불경한 동맹]까지 깨졌다. 한데 이런 짓을 저지른 막내아들은 힘조차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데몬들의 피해가 심대한 모양입니다."
신중한 첫째 왕자가 말했다.
"이제 데몬들의 보복이 시작될 겁니다."
"우리 악마들끼리 싸우는 꼴을 보고서 천상만 웃고 있겠군!"
사나운 둘째 왕자는 격분해서 책상을 내리쳤다. 그러나 음흉한 셋째 왕자는 팔짱을 끼고서 거미줄같은 사고를 뻗어나갔다.
"막내에게 조력자가 생겼습니다."
"그럴테지. 혼자 이럴 배짱은 없는 놈이니."
"최근에 수상한 동향은 없었습니까?"
"글쎄."
루시펠레스는 항상 지상을 쏘다니며 악착같이 영혼을 수집했다. 주로 권력을 갈구하는 폭군들과 광기에 빠진 마법사들을 노렸는데.
·········
하지만 루시펠레스가 교류하던 필멸자들 가운데 초월자의 반열에 접어든 존재는 없다. 설령 초월자의 반열에 이른 필멸자가 있어도 악마 대공을 부추겨 지옥제왕에게 대항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게 상식이다.
"흠······"
필멸자는 불멸자를 조종하지 못한다.
불멸자가 필멸자를 조종할 따름이다.
반대되는 상황은 지극히 드문 예외다.
'예외는 마지막에 검토하고 제일 그럴듯한 가능성부터 검토한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천상을 다스리는 태양신이다.'
루시펠레스의 모친은 태양신의 선택을 받았던 초즌이었다. 스스로 믿음을 저버렸기에 태양신조차 구제해줄 수 없겠지만······
'그녀의 아들은 이야기가 다르지.'
버림받은 성녀의 아들을 구해내는 동시에 지옥대공을 배신시켜서 천상에 합류시킨다면?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기는 수로군.'
성녀의 아들을 구해냈단 상징성.
지옥의 대공을 변절시키는 실리.
자신이면 필시 그렇게 했으리라.
"이번 공격의 배후를 파악했다."
"!"
"이제 응당한 보복을 돌려줄 시간이다."
회의장에 모여든 대악마들이 일제히 지옥제왕을 바라보았다. 특히 후계자 경쟁을 벌이는 아들들이 그랬다.
"첫째는 인간의 육신으로 지상에 현신해서 데빌교단의 지휘권을 인수해라. 그리고 악의 대군세를 결집시켜서 교황청을 공격하도록!"
명을 받들겠나이다!
위대한 군주이시여!
"둘째는 직속병력을 이끌고 게헨나에서 데몬들의 침공을 막아내라. 지금부터 일곱지옥의 관문을 수호할 의무는 네게 맡겨졌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위대한 전사이시여!
"셋째는 필멸자들에게 지옥의 위대함을 전파하라. 데빌교단의 교세가 강성해질수록 우리가 지상에 강림할 기회도 많아진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위대한 스승이시여!
"친애하는 딸아."
"분부만 내리소서. 다정한 아버지시여."
"가문이 위기에 처했다. 너의 하찮은 필멸자 남편도 무언가 기여를 해야하지 않겠느냐?"
당연히 그렇습니다.
무엇을 해내면 되겠습니까?
"제국에서 태양신 교회를 탄압해라."
"······그건 쉽지 않은 과업일겁니다."
"지옥의 데릴사위면 그정도는 해내야지."
"·········알겠습니다. 아버지."
"회의는 끝이다. 해산."
화륵!
유황불을 뿜으며 아크데빌들이 사라졌다. 대신 회의실의 그림자 속에서 또다른 악마가 나타났다. 매우 이질적인 기운을 풍기는.
"오랜만이야. 전남편."
"짐은 너를 초대하지 않았다. 심연의 탕녀."
새로운 참석자는 일곱쌍의 날개를 펼친 여성형 타락천사였다. 그녀의 외형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품었으나, 추악한 내면이 분출되는 눈빛은 붉고 어두웠다.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래도 부부였는데."
"용건을 말해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타락천사는 부드럽게 다가와 지옥제왕의 머리를 품고자 했지만, 지옥제왕이 권능을 행사해서 그녀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불청객."
"왜? 묶어놓고 범하게?"
"정말 천박해서 상종이 어렵군······"
"아직 인간 장난감에게 미련이 많구나?"
타락천사는 천천히 지옥제왕에게 물러났다. 그제야 지옥제왕도 권능을 거둔다.
"길게 말하지 않을게. 자기."
"들어는 보겠다. 심연의 주권자여."
"일단 좋은 소식부터 들려줄게."
타락천사가.
장난기로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맹은 계속 연장해줄게."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그게 재밌어보여서."
?
??
???
"짐의 막내아들이 휴전협정을 위반해 그대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지상에 소환됐던 데몬들이 황급히 심연으로 복귀했잖나."
당연히.
동맹을 끊어내는게 맞다.
배신으로 인한 피해가 굉장할테니.
"그래서?"
"?"
"어차피 자식들은 어미의 즐거움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야. 녀석들이 죽어가며 내게 즐거움을 주었으니 그걸로 본분은 다했지."
후훗.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우려나?
"그럼 이제 나쁜 소식."
"경청하겠다. 그대의 직감은 인정하니."
"이번 일의 배후는 천상이 아니야."
"그렇다면 낙원을 의심하는가?"
"아니. 분명히 필멸자 가운데 있을거야."
"현자 의회라면 능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지."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다.
"다시 추정해봐."
"하이엘프들의 영원궁정."
"아닐거야."
"골드드래곤 액시밀리온."
"아닐거야."
"제국 원로원."
"·········정말 재미없는 후보들만 내놓네."
타락천사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이렇게 고리타분한 남자와 결혼을 했었다니. 그래서 자신의 결혼생활이 실패로 끝났던 것일까?
"자기가 말한 용의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지옥을 방해할 동기와 역량을 지녔다."
"아니. 전부 그럴듯한 후보들이란 점이야."
"흠·········"
현자의회.
영원궁정.
골드드래곤.
제국원로원,
초월자의 영역에 접어든 필멸자들.
"하지만 놈들은 한계가 명확해. 놈들이 우리를 알듯이 우리도 놈들을 알고 있거든. 그런데 자기는 적을 알고 있다는 전제에선 결코 패배하지 않잖아?"
강박에 가까운 의심에서 비롯된 철두철미한 계획성이 데빌제왕의 장기였다. 합리적으로 계산이 가능한 사안에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자기가 떠올린 용의자들은 이렇게 획기적으로 판을 바꾸지 못해. 그걸 알아야해."
즉.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운명을 개변하고 있어."
"·········"
"어느 발칙한 필멸자가 우리같은 초월자들을 훤히 꿰뚫어보면서 음모를 차례로 저지하고 있는 것이지! 정말 흥분되지 않아?!"
심연의 여왕이.
짜릿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그게 누굴까?!"
"·········"
"굉장히 용의주도한 녀석일거야. 아직 중요성에 비해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필멸자일테지."
키득키득.
"그러니 태양신에 대한 강박은 접어두고, 자기가 볼때에 가능성이 제일 낮은 용의자들부터 차례로 점검해봐. 그래야 자기의 막내아들을 변절시킨 진짜 배후를 알아낼 수 있을거야.
지옥제왕은 고민했고.
찰나에 모든 계산을 마친다.
"일리가 있군."
데빌은 예측이 불가능한 변수에 대단히 취약하다. 그건 데빌들의 제왕인 자신도 마찬가지. 따라서 지금처럼 [예외적인 상황]에선 데몬의 견해를 따르는게 맞다.
"더욱 깊게 숙고해보니 주문쟁이들의 사고가 엿보인다. 장기말 주제에 감히 장기판을 흔들고 싶어하는 건방진 생각이······"
따라서.
"현자 의회로 타겟을 옮기겠다. 놈들이 주문쟁이들의 수장들이니까."
하아아.
심연의 여왕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자기야. 지옥제왕의 막내아들을 회유해 악마들의 의표를 찌르는 전술은 대단히 신선하고 창의적이야.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다리들은 해내지 못하는 구상이라고."
이에.
데빌들의 제왕이 반론했다.
"현자 의회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주문쟁이의 발상이겠지. 그게 합리적인 추론이다."
필멸자가 대악마와 대등히 교류하려면 굉장한 정신력과 지성이 요구된다. 필멸자의 한계를 초월한 아크메이지들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루시펠레스가 필멸자의 조력을 받아서 배신했다는 전제가 맞다면, 조력자는 분명히 아크메이지일거다. 그리고 모든 아크메이지는 현자 의회에 가입했으니 거기서 용의자를 찾아야지."
······데몬의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없다.
정말정말.
"갈래."
"짐의 조치도 불만이면 그대도 수색해라."
"귀찮아."
수색은 재미없잖아.
모욕하고 고문하고 죽이는게 재밌지.
"어차피 당분간은 하렘에 틀어박혀야돼. 이번에 아이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보충을 해야하거든. 그러니 자기네에서도 괜찮은 종마들이 있으면 보내줘."
으함.
기지개를 펴보이는 타락천사.
"그럼 안녕! 병정놀이만 좋아하는 전남편!"
휘리릭!
연기와 함께 사라진다.
"············"
지옥제왕은 데몬들의 어머니가 떠난 뒤에도 계속 숙고했다. 자신이 빼놓은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검토하고·········다시 검토한다.
'짐의 판단은 완벽히 합리적이다.'
1%의 가능성보단 50%의 가능성을 먼저 택해야한다. 설령 당장은 결과가 반대로 드러나도,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고수하다보면 결국에는 승리한다. 그것이 우주적인 진리다.
'다만 심연의 충고에 주목할 필요도 있겠지.'
그래서.
뒤에서도 확률을 따져본다.
[아자라엘.]
[말씀하소서. 주군.]
[막내의 친구는 찾아냈나?]
[잿빛현자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막내의 반역을 놈이 사주했을 확률은?]
[없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1% 미만입니다.
[근거는?]
[역량 부족입니다.]
[흠?]
[놈은 아크메이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귀하도록.]
[하지만 밝혀지지 않은 세부사항들이 있습니다. 시간을 충분히 주시면 공식적인 신분을 획득해 세부사항도 파악해보겠습니다.]
흠.
흐음······
1% 미만의 가능성에.
근위대장을 투입해도 되는 것일까?
'합리적인 조치가 아니로군.'
하지만.
비합리적인 조치도 하나쯤은 해둬도 되겠지.
[자네의 계획을 승인하겠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주군.]
모든 조치를 끝나고 회의장을 떠나려는데 막내아들에게 배정됐던 의자가 눈에 띄었다. 눈쌀을 찌푸리며 마력을 내뿜어 의자를 소멸시켰다.
"!"
그런데.
의자가 소멸하자.
내부의 마정석이 드러났다.
"이런 발칙한──!"
통신구였다.
연결된 장소는 필멸자들이 살아가는 물질계!
[연구진전 : 운명의 변곡점]
[초월자들보다 시선을 앞서봄!]
[연구단서 5/5]
[경험치 +30]
[전승포인트 +3]
[32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31]
[연구보상 : 미래시(신화)]
──────
■미래시 (개인특성, 신화)
당신은 미래를 선견하는 통찰을 지니고 있습니다. 해당 능력은 단순한 예지를 넘어 특정한 행동이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지에 대한 이해까지 포함합니다.
◆효과
- [선택지]를 고를때 결과를 [선견]함.
- 모든 주사위 굴림에서 [유리점]을 취득.
──────
"이런 건방진 놈! 감히 하찮은 필멸자 주제에 초월자들의 대화를 엿듣고 조종하려고 들었다는 말이냐?! 일곱지옥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네놈의 오만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콰직!
지옥제왕의 분노로 회의장이 파괴되었다!
"파괴의 대악마 발로르여!"
"부르셨습니까! 주군!"
"당장 지옥의 선봉대를 이끌고 물질계에 진신으로 강림하라! 짐을 능멸한 요술쟁이를 찾아내어 연관된 모든 존재를 파괴하고 놈은 산채로 끌고 와라! 이것이 지옥제왕의 칙령이다!"
12. 열두번째 연구 - 영광을 향한 승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