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7

14. 막간 - 라이트브링거(1)

발로르는 성검의 광채에 맞서 흑염의 날개를 펼쳐보였다. 하지만 리안칼의 성검에는 최초의 성기사가 깃들어있었다. 그는 악마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던 태양신의 망치였다.

[어째서 사자가 생자들의 세계에 남아있는 것이냐! 너희들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일텐데!]

발로르가 당황해서 주춤거리자 리안칼은 짜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 힘을 얻고자 영혼을 포기한 보람이 있었다.

"성왕께서 가라사되 네놈같은 놈들이 너무 많아서, 천국으로 은퇴도 못하고 물질계에 남아서 고생 중이라고 하신다."

촤악!

광채가 발로르의 가슴을 찢어냈다.

[크아아아아아아악──!]

발로르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지금의 싸움조차 유흥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무리 성기사가 강력한 클래스여도 리안칼은 50레벨짜리 인간에 불과하다. 성검으로 대악마와도 싸움을 벌일 순 있지만, 승리를 얻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내가 광대라고 지껄여보시지!"

하지만 대악마를 옭아맨 로어마스터의 함정은 철저했다. 권능은 오크선조들에게 봉쇄당했고 마력은 용사에게 소진됐으며, 육체의 강대함마저 격전으로 쇠해버린 상태.

"방심하지말고 바로 끝내라. 루시펠레스."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놈이군."

[5위계, 공기의 로어]

[그레이터 헤이스트(Greater Haste)

[신중하되 서두르라!]

공기 마법이 리안칼을 휘감아 신체를 가볍게 만들었다. 덕분에 한 번의 검격을 내리칠 시간에 두 번을 내리칠 수 있게 되었다.

[5위계, 정령의 로어]

[토템 오브 게일(Totem of the Gale)

[질풍이여! 피바람을 불러일으켜라!]

때마침 잔해물을 치우고 전장에 복귀한 벨칸이 질풍의 토템을 땅에 박았다. 리안칼의 성검에 질풍같은 속력이 부여된다.

[5위계, 신성의 로어]

[디바인 가디언(Divine Favor)]

[성기사여! 본신이 그대와 함께 한다!]

피투성이 은빛뱀도 성력을 쥐어짜내서 축복을 내려주었다. 이로서 리안칼은 총알같은 속도로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은빛뱀의 맹독에 중독된 발로르는 제때에 반응하지 못했다.

[고위기적, 성전사의 길]

[홀리 스마이트(Holy Smite)]

[분노가 심판을 이끌 지어니!]

신성한 강타는 부정한 존재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기적이었다. 삶을 바쳐서 악을 심판하겠다고 맹세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힘이니까.

또한.

리안칼에겐 전설적인 성검이 있었다.

────────

■라이트브링거 (전설, 무기)

: 잊혀진 성왕의 영혼이 깃들어있는 에고웨폰입니다. 유성 파편으로 제련된 롱소드로서 천상의 정화수로 축성되었습니다.

■효과

: 공격력 +200%

: 악인에 대한 공격력 +200%

: 부정한 존재에 대한 공격력 +200%

: 신성력 +200%

: 경험치 +200%

■주의

: 성기사만 적용됨.

: 귀신이 깃들었습니다.

────────

성검이 리안칼의 신성력을 대폭 강화시켜주었다. 덕분에 라이트브링거는 리안칼의 정당한 분노를 극대화시켰고.

"하아!"

콰직!

리안칼이 힘차게 내지른 라이트브링거가 발로르의 심장을 관통했다. 격전을 거치며 약화된 발로르의 심장은 파열되었고, 방대한 성력이 악마의 혈관을 타고서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건······이건 불가능하다! 일곱지옥과 함께 태어난 내가······일개 필멸자에게······!]

발로르는 절규를 내지르며 영혼채로 폭발해버렸다. 불멸자의 영속성도 발로르를 죽음에서 구해주지 못했다. 발로르는 신성을 제약받은 상태였고, 스스로의 본질에 정확히 반대되는 힘에 의해서 영혼의 코어를 강타당했다.

[불멸자를 살해하는 방법을 알아냄!]

[경험치 +30]

[전승포인트 +3]

[36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10]

붕괴하는 발로르의 육신에서 검은 불길이 뿜어졌다. 그것은 지옥의 대악마가 소멸하며 지옥의 권능이 산산이 흩어지는 현상이었다.

"해냈군!"

잿빛현자는 세상이 떠나갈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마나쉴드를 발동시켰다. 흑염폭풍은 성산의 내부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맹위를 떨쳤지만, 결국에는 기세를 잃고서 대기로 흩어졌다.

"이겼다!"

이로서 발로르가 품고 있던 권능이 물질계로 환원된다. 덕분에 파괴의 대군주가 다스리던 4층 지옥, 판데모니엄이 우주의 규칙에 따라 지상으로 강제로 끌어올려졌다. 이를 지켜보던 태양신이 오른팔을 내리치자, 발로르를 따르던 수많은 데빌들이 영문도 모르고 녹아내렸다.

[판데모니엄의 파멸을 완성함!]

[경험치 +30]

[전승포인트 +3]

[36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3]

이로써 일곱지옥이 여섯지옥으로 격하되었다. 지금의 상실은 반영구적인 피해였다. 발로르처럼 강대한 신격이 지옥에서 소멸해줘야만 복구가 가능한 피해였으니까.

[발로르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지옥왕좌의 지옥제왕이 영토상실을 깨닫고 절규했다. 전멸한 군단은 복구하면 되고 계획이 틀어지면 새롭게 수립하면 된다. 하지만 대악마가 물질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유출된 권능은 돌려받을 방법이 없었다.

[나의 판데모니엄을 돌려다오오오오──!]

지옥제왕의 절규를 엿들은 심연의 여왕은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그녀의 아들들에게 지옥을 침공하라고 명했다. 순전히 지옥제왕이 분개하는 광경을 보고 싶었으니까.

[삼두룡의 강림을 완전히 저지함!]

[경험치 +30]

[전승포인트 +3]

[36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6]

사후세계를 다스리는 위대한 신격들이 어떠한 음모를 꾸미든, 힘겨운 승리를 얻어낸 필멸자들의 업무는 똑같았다. 그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수습하고 휴식을 취했다. 패잔병들은 도망가게 내버려두었다. 쫓을 힘도 없었으니까.

또한.

급한 논의가 오갔다.

"나를 부르셨다고 들었소. 현자여."

"그대가 대단한 활약을 해주었더군. 용사여."

"덕담을 즐기시는 분이 아닐텐데."

"알고 있다면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오늘의 승리는 자네와 벨칸에게 절반씩 나눠줄 생각이네. 승낙하겠나?"

승리를 나눠준다.

명성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대악마를 쓰러뜨린게 되는 것이오?"

"그렇지. 세부계획은 벨칸이 세운 것이고."

벨칸과 용사는 자신의 위업을 연기하기에 적합한 배우들이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엘더샤먼과 반신의 가능성을 품은 용사. 대악마를 쓰러뜨렸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

"거짓말로 내가 얻을 이득은?"

"대륙의 존경을 한몸에 받겠지."

존경을 받게된다.

몸값이 높아진다.

"또한 여자들에게 인기가 폭발할테지."

"오호!"

"아내에겐 비밀로 해주겠네."

"그대는 진정한 현자요! 텔로리안!"

용사는 존경스런 눈빛으로 엄지를 추켜세우고 제안을 승낙했다. 한편 벨칸은 텔로리안을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언제까지 세상에 몸을 숨길 생각인가?"

"아크메이지에 도달할 때까진 그래야합니다."

51레벨은 넘어가야 초월자들과 대등한 싸움이 가능해진다. 필멸자임에도 타고난 한계를 초월해서 초인의 경지에 이르는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로군."

이미 55레벨에 도달한 벨칸은 텔로리안의 말을 이해했다. 50레벨 이전과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필멸자다운 고민들이 삶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으니까.

"자네가 이루려는 목표에 비하면 아크메이지도 최소의 자격이겠지. 자네는 오늘 파괴의 대악마를 파멸시켜서 지옥제왕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었네만, 여전히 악마들의 힘은 강대하니까."

맞는 말이었다. 이번엔 지옥제왕이 자신의 정체를 몰랐기에 정보의 우위를 활용해서 승리했다. 하지만 언젠가 놈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면, 그때부터 진정한 맞대결이 시작되리라.

'그렇다고 오늘의 승리가 의미가 없는건 아니지. 지옥과 심연이 준동할 시간을 적어도 10년은 늦추었다. 아크메이지로 성장하기에 충분하다.'

그때.

은빛뱀이 화신체로 나타났다.

둥근 술통을 잔뜩 짊어지고서.

"어쨌든 오늘은 승리했잖느냐?"

은빛뱀은 뿔을 닮은 술잔을 들어올렸다. 발굴현장에서 방금 캐내온 유물처럼 고풍스럽다.

"마시고 축하하자! 전사들이여!"

"그락-토르!"

"영원여왕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헤링턴 왕조에 영광 있으라!"

승리를 이끌었던 주요인원들이 발로르의 사체가 남은 자리에서 잔치를 벌였다. 취기가 오른 은빛뱀은 아름다운 검무를 추었고 글로린마르는 장엄한 승전가를 불렀다. 벨칸은 점잔을 떨었지만, 하이엘프와 고대신에게 핀잔을 들었다.

"어딜 감히 어린 놈의 쉐끼가!"

"지도자에겐 과음이 미덕인 법이오!"

로드릭과 블랙터스크는 나란히 앉아서 대작했다. 그들은 이번 싸움을 통해 해묵은 원한을 털어버렸다. 피로 쌓인 원한도 피로 맺어진 유대를 통해선 해소되는 법이었다.

"·········"

"·········"

텔로리안은 축하연을 바라보며 관찰일지를 기록하다, 엘렌스트라의 손짓에 외진 장소로 빠져나왔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을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떠날 생각이냐?"

"·········용케 찾아냈군."

엘렌스트라를 잠재운 텔로리안은 성산의 외곽에 도착했다. 가벼운 행낭을 꾸린 리안칼이 있었다. 그는 인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굉장한 미남이었다. 어머니를 닮은 덕이리라.

"성왕이 복수를 이루려면 수행을 떠나라는군."

"·········"

"내가 저질렀던 과거의 악행들을 모조리 바로잡은 뒤에야, 비로소 천상의 힘을 온전하게 사용할 자격을 갖출 거라고 하더군."

루시펠레스는 500살에 불과했지만 발로르와 동격의 존재였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악행들을 저질렀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웃기는 이야기지."

"·········"

"내가 데몬들처럼 계약을 어겼나? 그저 거래를 했을 뿐인데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겠더군······"

녀석은 툴툴대었다.

도저히 제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하지만 태양신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왠일로 태양신의 종복이 되길 자처했지?"

"어머니를 구해드릴 힘을 약속받았으니까."

·········

"또한 복수까지 행할 힘까지도."

"그렇군."

"나는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선 뭐든지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지옥이든 천상이든 탁월한 존재는 반드시 맹세를 지키는 법이다."

······루시펠레스의 변하지 않은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녀석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단지 선천적인 악성을 벗어던져서 악마에서 인간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태양신이 훨씬 강력한 존재더군."

"그런가?"

"그래. 심연의 여왕과 지옥제왕이 합세해도 태양신에게 맞서기엔 부족할거야. 그래서 여태껏 세상이 멸망하지 않은 것일테지."

알고 있던 내용.

하지만 현지인에게 들으니 색다르다.

"다시 만날땐 어떤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나?'

"그건 네가 정할 일이다."

녀석은 침착히 대답했다.

사전에 생각을 정리해둔 것처럼.

"나를 악마로 만난 사람은 루시펠레스라고 부를테고, 성기사로 만난 사람은 리안칼로 부르겠지. 양측을 모두 만나봤을 사람은 적어도 지금은 네가 유일하다. 그러니 나의 어떤 모습을 주목할지는 네게 달린 일이겠지."

젊은 성기사는 과거를 후회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았다. 단지 과거를 과거로 받아들이고 나아갈 따름이었다.

"그럼 나중에 보지."

"태양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관용적인 인삿말에 리안칼은 대단히 정색하며 떠났다. 젊은 성기사의 늠름한 뒷모습에선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던 성녀의 모습이 엿보였다.

'이걸로 떠날 이들은 떠났고.'

격전이 끝났다.

신나는 전리품 획득 시간이었다.

* * *

데빌군세를 무찌른 연합군은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한데 전리품의 분배방식을 두고 이견이 발생했다.

"공적대로 나눠가지는게 좋겠소."

"그러지말고 주사위를 굴립시다."

용사의 제안이었다.

"그게 제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

이에.

현자는 슬그머니 웃어보였다.

'운이 좋군.'

전리품을 독식할 기회가 생겼다.

14. 막간 - 전리품 분배(2)

"이건 불가능하다!"

"그럼 주사위가 조작이라도 됐단 말인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소만·········"

용사는 대단히 당혹스런 눈길로 텔로리안의 주사위값을 바라봤다. 20면체 주사위를 다섯 개를 굴렸는데, 모든 주사위가 15가 넘었다.

"저기 실례지만······"

"당신의 주사위를 줘보시오."

"············"

텔로리안은 스스로가 가져온 주사위를 내려두고, 용사가 건네준 주사위들을 던졌다. 모험가 마법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했다.

"운이 좋군."

[20, 19, 18, 17, 16]

"············"

"다시 굴려드리지."

두 번.

세 번.

네 번.

몇번을 반복해도 결과값이 터무니없이 높았다. 마법은 당연히 사용하지 않았고 기적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냥 결과값이 좋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나는 원래 운이 좋소."

"·····················"

"내가 우리 일행을 대표해서 입찰했으니 동료들의 몫까지 가져가겠소."

[전리품을 획득합니다]

[발로르의 심장(신화)]

[대악마의 정수(신화)]

[발로르의 부서진 대검(영웅)]

[발로르의 꺼진 채찍(영웅)]

[발로르의 육체 조각(전설)]

"여기까진 본인과 은빛뱀과 리안칼의 몫."

데구르르!

또다시 주사위를 굴린다.

[지옥조련사의 목줄(영웅)]

[판데모니엄의 마도서(영웅)]

[지옥기사단장의 마구(영웅)]

[지옥불길의 인장반지(영웅)]

"이건 올골두골로와 트롤들의 몫이오."

"············"

"그럼 나머지 전리품은 각자 나눠가지시오."

용사 일행은 처음엔 대단히 미씸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수긍했다. 영웅급 모험가정도 되면, 세상엔 상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많다는 사실에는 익숙해졌다.

"조상신들이여! 주사위를 보우하소서!"

"헤링턴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어어어──!"

"하이엘프는 행운까지 우월하다!"

종족의 지도자들은 지옥의 장비에 눈이 벌개져서 주사위를 던졌다. 양질의 마법장비가 지상에선 매우 희귀했으니까.

"용사여."

"·········?"

용사를 찾아가자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는 주사위 분배를 제안해 파티에 재앙을 가져왔다고 동료들에게 구박을 당하고 있었다. 이대로면 파티장의 자리에서 탄핵을 당할지도 몰랐다······

"이걸 가져가시오."

[소유권을 이전합니다.]

[발로르의 부러진 대검(영웅)]

[발로르의 꺼진 채찍(영웅)

이에 용사가 대단히 놀랐다. 대악마의 무구들은 물질계에서 구해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같은 [영웅] 등급이라도 대악마가 사용했던 장비는 격이 다르다. 복원절차를 거치면 [전설]급 장비로 돌아갈 수도 있고.

"어째서······?"

"또한 그대와 그대의 오랜 동료들에 한정해서, 재료를 가져온다면 마법부여를 무료료 진행해주겠다."

·········

"거기에 자문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대가 없이 진행해주지. 마법이 필요할 때는 소정의 인건비만 받고서 해결해줄테고."

······모든 조항들이 굉장한 혜택이었다. 하지만 용사는 타인의 호의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신출내기 모험가가 아니었다. 호의에는 언제나 대가가 뒤따랐다. 가족이 아니라면.

"대가는?"

"의뢰비 면제."

"너무 약소한 대가인데."

"내가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거든."

그럼에도 용사는 날카로운 턱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텔로리안이 진정으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거절할 생각인가?"

"그전에 묻고 싶은게 있소."

질문을 던지는 용사의 눈빛은 대단히 진지했는데, 전리품을 탐내던 소시민성은 사라지고 아수라장을 헤치오며 쌓인 노련함이 보인다.

"무얼 얼마나 숨기고 있소?"

"?"

"당신은 드러난 사실만 살펴봐도 굉장한 사람이지.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샌드웜의 머리에 불과할 뿐이고, 본체는 모래밑에 꽁꽁 숨겨져있잖소. 은빛뱀의 진정한 정체처럼."

이에 텔로리안은 말없이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은근한 미소로 자신감을 드러냈을 뿐.

"대륙에 알려진 퀸메이커 텔로리안은 다음 같은 사람이오. 에스실의 왕가를 전복시킨 위험한 모략가이자, 불과 54살의 나이에 마지스터로 승급한 천재적인 마법사······"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대륙에서 주목받는 마법사였다. 온갖 모습을 가장해 주변을 맴도는 첩보원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아내가 이르길 당신이 이대로 순탄히 성장한다면, 대륙의 판도를 바꿔놓을 마법사가 되리라고 예상하더군."

장래를 촉망받는 신진강자. 그것이 남들이 바라보는 퀸메이커 텔로리안이었다.

"나도 처음엔 그정도로 생각했지. 재능 있는 젊은 마법사가 변방영주와 제휴해, 중견국을 장악하는건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니까."

하지만.

직접 만나보고 생각이 변했다.

"당신은 이미 대륙의 판도를 바꿔둔게 분명하오. 세간에선 에스실에서 벌어진 왕조교체에 주목하지만, 실제로 당신이 일으킨 변화는 고작 왕조교체에 그쳤을 리가 없으니까."

잠룡.

일부러 몸을 낮춘 드래곤.

"당신은 지옥제왕을 함정에 빠뜨리고 지옥대원수를 살해했소. 이건 태양신이나 현자 의회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지."

용사의 빛나는 통찰안이 마법사의 의뭉스런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는 수많은 마법사들을 만나보았고 그들 중에는 아크메이지로 승천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깊이를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마법사는 텔로리안이 처음이었다.

"한데 세간이 아는 모습은 고작 퀸메이커?"

"············"

"거기에 대악마를 처치한 공적을 일부러 축소한다? 개미눈꼽만한 업적도 부풀려서 명성을 얻어야 되는 것이 마법사들의 세계인데?"

지금껏 만난 필멸자들은 텔로리안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의도적으로 연막을 쳤던 까닭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일반인의 상식으론 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당신의 태도는 이렇소."

"·········"

"당신은 상식에 구애받지 않을 경지에 이르렀소. 하지만 벌써 잠재력을 드러내면 피곤해지므로 평범함을 가장한 것이오."

하지만 전설적인 알베릭은 상식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일생은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들과 긴밀하게 얽혀있었으니.

"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한 드래곤이나 인세를 초월해서 마법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아크메이지들에게 보이는 특징이지."

따라서.

당신이 건네온 제안의 진의는.

"당신의 장기말이 되어라."

"·········"

"그것이 당신의 호의에 담긴 진의요."

용사는 담담한 눈길로 로어마스터를 바라보았고, 로어마스터는 조용히 반문했다.

"그래서 나의 호의를 거절하겠나?"

"그건 당신의 의도에 달린 문제지."

용사도 팔짱을 껴보였다.

"타인을 장기말로 부리려는 태도를 타박하진 않겠소. 그것도 당신의 특징일테니."

······텔로리안에겐 남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사람을 장기말로 부려 원하는 구도를 완성하는 쾌감은, 낡은 책방에서 희귀한 고문서를 발견할 때의 희열만큼 대단하다.

"그럼 장기말이 되어도 상관 없단 뜻인가?"

그래서 자신은 어느 집단에서든 배후조종자가 된다. 처음엔 주변인 모두가 자신의 지혜를 칭송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인형이 되어버린듯한 위화감에 거리를 벌린다.

"내가 원하는 배역만 주어진다면."

하지만.

용사는 그러한 위화감에 개의치 않았다.

"당신이 인형사가 되고 싶은 것처럼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소. 언제 어디서든 제일 밝게 빛나며 최고의 것만을 누려야지."

모험가는 돋보이고 싶어하는 이들이고 용사는 모험가의 왕이었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길 원하는건 당연한 일이다.

"당신의 인형극에 나를 위한 배역이 남아있다면 기꺼이 장기말이 되어드리지."

·········

로어마스터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화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모험을 계속하고 싶은가?"

"!"

"16살의 농노 알베릭은 홀로 고향을 떠나서 모험가가 되었다. 이후에는 황금의 시간을 거쳐서 전설적인 알베릭이 되었고."

알베릭은 고블린의 짱돌에 맞아죽거나 잘못된 파티원에게 배신을 당했을수도 있었다. 혹은 석관에서 깨어난 리치가 예상보다 강했을수도 있다. 실은 그랬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알베릭은 황금의 시간을 누렸기에 모든 불운의 가능성을 제하고 원하던 정상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전설적인 알베릭이 되었다.

"그대가 누린 황금의 시간은 길었다."

"·········"

"그렇지만 이제는 끝나가는 중이지."

하지만.

전설에 도달한 영웅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보통 그대와 같은 행운아들은 남부의 해변가로 은퇴해 편안한 여생을 누리지."

하지만 그것은 황금의 시간이 아니었다.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는 호화저택에서 여생을 보내며 뱃살만 늘어가는 삶은.

"가장 깊숙한 지옥까지 내려가보고 가장 드높 은 천상까지 올라가보고 싶다면 나의 인도를 따르라. 그리하면 그대가 누리던 황금의 시간이 연장되리라. 로어마스터로서 약속한다."

피식.

용사가 웃어보였다.

"소문대로 달변가로군. 잿빛현자."

"·········"

"애둘러 말했지만 미녀들과의 별장파티를 포기하고 당신의 장기말로 개고생하라는 소리잖소. 본질적으로 그런 이야기지."

피식.

잿빛현자도 웃어보였다.

"그래서 거절할텐가?"

"하지만 지옥을 약탈하고 심연을 파헤칠 기회를 포기한다면······그건 진정한 모험가가 아니지. 당신의 장기말이 되어주겠소."

용사는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힘써주시길 바라지. 잿빛현자."

"사안이 시급하니 인사는 미뤄두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장소를 알려주겠다. 우선은 내가 작성한 서신을 룬홀드를 다스리는 룬마스터 카인하자드에게 전달하도록."

텔로리안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어 용사에게 건넸다. 대화의 경과를 예측하고 미리 작성해둔 것처럼.

"서신에는 파괴의 대악마가 쓰러졌으니 카즈마헤임을 수복할 기회가 생겼단 내용이 담겨있다. 그럼에도 룬마스터는 카즈마헤임 수복전쟁에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할텐데······"

[드워프들의 수복전쟁을 유발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18]

"하지만 당신이 말해준 일들을 수행하면 룬마스터가 드워프장로들이 모이는 대회합을 개최해줄테지. 그때 고향을 되찾을 시간이라고 드워프들을 선동하면······"

[용사 일행의 여정을 연장시킴!]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19]

"그렇게 또다른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모험이 되겠구려."

더이상 지상에 맞설 적수가 없다면 지하로 향하면 되는 것이었다. 용사는 새로운 여정이 생겨났음에 기뻐하면서 행낭을 꾸렸다.

"당장 출발하겠소."

"무운을 빌겠네."

용사는 잠자던 동료들을 깨워 연설을 시작했다. 그동안 겪어온 모험도 재밌었지만 앞으로의 모험은 훨씬 흥미진진하리라는 약속이었다. 동료들은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은퇴나 하자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결국 용사의 호소를 이기지 못하고 뒤를 따라갔다.

"자."

용사 일행은 길을 떠났고 나머지 전리품도 적절히 분배되었다. 주요인원들은 저마다 강력한 마법장비를 하나씩 얻었고, 병사들도 인생을 바꿀만한 황금을 받았다.

"마침내 우리끼리 보상을 나눌 시간이군."

올골두골로!

"말씀하소서. 현명한 아버지시여."

"너희 일족은 분배제외다."

"·········예?"

"내가 제작해준 화염저항 로브와 포션값을 생각하면 내가 돈을 받아야할 상황이다. 그러니 분배제외로 끝내줌에 감사하도록."

·········올골두골로는 뾰로통한 시선으로 텔로리안을 노려봤다. 용돈을 압수당한 사춘기 소녀같은 표정이었다.

"몽크가 재물을 밝히는 이유가 뭐냐?'

"정당한 노동에 대한 성과는······"

"수행자면 수행자답게 세속인의 욕망에서 벗어나도록! 정말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화합여신의 교리를 배워와서 나의 주장을 논파하라!"

다음!

게헨나의 루시펠레스!

"다섯을 셀테니 입찰하라."

"···············"

"하나. 둘. 셋. 넷. 다섯······자동으로 입찰제외다. 동료들을 위해 순순히 전리품을 포기하다니! 역시 진정한 성기사의 귀감이로다."

마지막!

별빛의 아엘타나르!

[본신은 무조건 입찰이다!]

은빛뱀은 신성한 권능을 담아서 소리쳤다. 분배에서 제외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아서.

[본신은 메인탱커로서 발로르의 공격을 대부분 받아냈고 육체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므로 이번 싸움의 최고의 공적자니까······]

쯧쯧.

혀를 차보이는 텔로리안.

"어째서 위대한 신격이 미천한 악마들의 무기를 탐내는가? 발로르의 심장만 가져가시오."

[나는 다른 보물들도 함께 주장할만한 공적을 세웠다고 생각한다만······]

"아니면 나도 발로르의 심장을 입찰하겠소."

······신성을 되찾으려면 발로르의 심장은 반드시 필요한 전리품이었다. 덕분에 은빛뱀은 다른 전리품들에 대한 입찰을 포기했다.

[뭔가 불공평하군······]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장소이니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오. 빨리 심장을 먹어치우고 떠납시다. 돌아가서 진행할 연구가 많으니까."

낼름!

이에 은빛뱀이 발로르의 심장을 단입에 먹어치웠다. 덕분에 그녀는 영락한 반신에서 벗어나 신격으로 돌아왔다. 말단이었지만.

[디바인 랭크가 생겨납니다!]

[새로운 권능을 선택하십시오!]

14. 열네번째 연구 - 최후의 로드(1)

신이란 기도를 들어주는 존재다. 인간이 청원하면 그것을 이뤄주는 존재라는 점에선, 우리동네 9급 공무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신과 9급 공무원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건 청원할 수 있는 탄원의 종류에 달려있는 것이다.'

동사무소 직원을 아무리 윽박질러도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거나 이상형이 배우자로 나타나진 않는다. 하지만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바치면 그런 기적이 실제로 벌어진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시네어 행성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공무원에 급이 있듯이 신에게도 격이 있다. 때문에 시네어의 종교학자들은 신들을 4개의 단위로 분류한다.'

토착신. 지방에서 숭배받는다.

권역신. 국가에게 숭배받는다.

주요신. 대륙에서 숭배받는다.

최고신. 행성에서 숭배받는다.

[신격에 대한 전승을 습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0]

'높은 신격일수록 광범위한 기도를 다양하게 들어줄 수 있다. 최고신에겐 세상을 멸하거나 재창조하는 작업도 불가능하지 않지.'

하지만 신들도 우주의 법칙에 따라 다양한 제약을 받게 되는데, 상세한 제약은 추후에 서술하겠다. 지금은 신들은 전지전능한 존재들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필멸자들의 신앙에 종속된 존재들임을 이해하면 된다.

'은빛뱀의 사례가 극적인 경우다.'

은빛뱀은 카람샨 문명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엔, 최고신으로서 인간들의 보편적인 숭배를 받았다. 하지만 마법사왕들이 일으킨 재앙으로 카람샨 문명이 송두리째 멸망하자, 대부분의 권능을 잃고서 반신으로 전락했다.

"으적! 으적!"

오랫동안 굶주렸던 은빛뱀은 발로르의 심장을 게걸스레 씹어먹었다. 파괴신의 신성을 흡수한 아엘타나르는 마침내 반신에서 온전한 토착신으로 격상되었고, 인간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응답해줄 힘을 되찾게 되었다.

"시원하군!"

[희귀표본 : 별빛의 아엘타나르]

[신규연구 : 별들을 향한 용오름]

──────

■별들을 향한 용오름 (연구주제, 신화)

: 한때 밤하늘을 다스리던 별빛의 여왕은 카람샨의 멸망으로 별자리에서 추락했습니다. 과연 지상으로 떨어진 은빛뱀이 다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날이 돌아올까요?

■연구보상

: 디바인 랭크가 오를 때마다 신규권능 획득.

: (권역신 도달시) 별빛의 로어 습득.

: (주요신 도달시) 초즌으로 임명됨.

: (최고신 도달시) ???

──────

신위를 되찾은 아엘타나르는 [권능]을 획득했다. 이는 [신성 마법]과 다르게 오직 신들에게만 허락된 힘이었다.

──────

◆사제 계급 (권능)

: 단명하는 인간은 불멸하는 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효과

- [교리]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 [교리]를 준수하는 필멸자를 [사제]로 삼아서 [신성 마법]을 내려줄 수 있습니다.

──────

"이제 본신의 교단을 만들 수 있겠군!"

"이전에 사용하던 교리를 적용하려면 제법 많이 손질이 필요할 것이오."

은빛뱀이 교단을 복원할 생각에 들뜨자, 텔로리안은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카람샨이 멸망한지 벌써 반만년이 흘렀소. 고대의 인간들과 현재의 인간들은 사유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자신이 한때 중세랜드인들의 사고방식에 기겁했듯이, 중세랜드인들도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기겁할 것이다. 적어도 중세랜드에선 인신공양과 노예제를 긍정하지는 않으므로······

"인신공양이 어째서 나쁘단 말이냐?"

"필멸자에게 목숨은 제일 귀한 것이니까."

"그렇지! 따라서 제일 귀중한 것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은 가장 성스러운 행위!"

······불멸자를 설득하는건 결코 현명한 행위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게 늙은 신이라면 논할 가치도 없다. 알아서 깨져가면서 배우겠지.

"······본신이 늙었다고?"

고대신.

늙은신.

"당신의 가르침은 낡았소."

"·········"

"그리고 드래곤을 사냥하겠다는 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어째서 바실리스크가 경외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최고신이 다스리는 영역은 당대인의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아엘타나르가 다스리던 영역은 별빛과 밤하늘, 그리고 야수다.

"모두 카람샨인들이 제일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지. 그들은 점성술에 의존해 삶을 꾸렸기에 별빛이 제일 중요했고, 언제나 몬스터들의 위협에 시달렸기에 그들이 알던 가장 강대한 야수를 신으로 섬겼던 것이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이제 점성술은 잡기고 몬스터는 퇴치대상이 되었소. 지금의 시대정신은 공평무사한 정의와 조건없는 박애지. 그래서 태양신이 최고신으로 등극한 것이고."

잿빛현자의 대답에 은빛뱀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확실히 자신을 숭배하던 인간들과 태양신을 숭배하는 오늘날의 인간들은 심성이 달랐다. 그녀가 새로운 시대의 신으로 자리 잡으려면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현명한 조언이었다. 마법사."

"별 말씀을."

"한데 다른 장비들은 어찌 사용할 것이냐?"

"대악마의 정수까지 먹고 싶어서 그러시오?"

"·········"

"꿈깨시오. 그건 내가 사용할 재료니까."

심장은 훗날 갓슬레이어 제작에 사용할 재료다. 하지만 갓슬레이어는 구상하는 것조차 위험한 유물이므로, 구태여 말로 언급해서 신들의 시선을 끌거나 별도의 도면을 남기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파괴신을 죽였다.

원리만 기억해두면 된다.

'이제 복귀할 시간이군.'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지옥제왕은 지상에 개입할 여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심연여왕은 지상에 흥미를 잃었다. 이걸로 10년정도는 악마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10년간 연구에 매진해야겠군.'

또한 [삼두룡의 강림]이 세계선에서 삭제되면서, 대륙은 메인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에도 충분한 여력을 지니고 멸망에 맞설 터였다.

"고생했어. 텔로리안."

"떠나는 겁니까? 엘렌스트라."

"협회에서 복귀명령이 떨어졌어."

"이곳에 남아도 됩니다."

"고마워. 하지만 사양할게."

엘렌스트라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했으나 곁에 남기는 거부했다. 각자 독립적인 삶을 꾸려야했으니까.

"증언은 말을 맞춰둔대로 진행할게."

"마도대학의 학파장들 앞에선 사실대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그들은 발로르가 쓰러졌단 사실에서 수상함을 느낄 테니까요."

발로르를 쓰러뜨린 공적은 용사와 벨칸에게 돌렸다. 하지만 우매한 자들은 속아도 지성을 지닌 자들은 진실을 간파할 것이다.

"거짓말로 시간이라도 벌어야지."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건 해주고 싶어."

"·········"

"다음에 만날 때에는 멋진 여자친구도 사귀어두렴. 가급적 결혼까지 논의할만한 사이면 좋겠어. 네가 정착하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

엘렌스트라는 쾌활하게 손을 흔들면서 떠나갔고, 자신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떠올렸다. 동기들과 유소년기를 함께 보냈던 안개늪지의 풍경들과, 모닥불에 모여앉아 스승님의 지도 아래 마도서를 낭독하던 순간들을.

"·········"

그립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

'처음엔 분명히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든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되야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지나치게 뛰어난 마법재능? 말레피카 공동체의 극단적인 폐쇄성? 사제지간을 복잡하게 만들던 스승님의 정신적 취약함?

정답은 모르겠다.

"스승님! 돌아오셨군요!"

"달라붙지마라. 벨라디아."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나는 결코 제자들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라난 공동체를 와해시킨 파국을 재현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 * *

데빌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텔로리안은 어마어마한 포상금을 받았다. 로드릭이 왕국군의 몫으로 할당된 전리품을 나눠준 까닭이었다. 덕분에 잿빛마탑은 확장공사를 거쳐서 규모가 수배로 커졌다. 이제는 연구시설이 너무 커져서, 혼자 관리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원래는 벨라디아가 관리할 문제이지만············여왕 폐하를 노예로 부릴순 없지.'

[도제 모집]

[숙식 제공]

[고아 우대]

그래서 노예모집공고를 왕국 전역에 흩뿌렸다. 배움을 위해서 생사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기는 조건임에도 지원자가 무수히 몰려든다.

"자넨 장점이 뭔가?"

"마법천재입니다!"

그리하여.

1번 후보자.

금발의 미소년.

"마력량을 보아하니 엘프혈통인가?"

"조모님께서 하이엘프셨습니다."

"흠·········"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지만 넘어가줄만한 일이다. 노예가 주인에게 반드시 정직할 이유는 없다. 때때로 적당히 요령도 부리는 것이지.

그래도.

이놈은 아니다.

"탈락."

"예? 어째서·········!?"

"자네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잖나. 다음."

딸깍!

손가락을 튕기자 2번 후보자가 소환된다.

"자네의 장점은?"

"죽어도 아무도 찾지 않을 거랍니다!"

"훌륭한 장점이군. 또다른 장점이 있나?"

"생존을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요!"

2번 후보자.

악에 받친 거지 소녀.

"너는 이제부터 2호 제자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3번 후보자.

병약한 약골소년.

"저는 귀신을 봅니다."

"강령술 적성이 있군. 다른 장점은?"

"태양신 교회에서 파문당했습니다."

"어쩌다?"

"아버지와 함께 공동묘지를 도굴하다······"

"너는 이제부터 3호 제자다."

이후에도 수백 명을 심사했지만 모조리 탈락했다. 자신이 내세우는 요구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조건이 너무 까다롭지 않느냐?"

"어차피 범재는 나의 가르침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오.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지."

끄덕.

은빛뱀도 그건 수긍했다.

"하지만 고아만 받잖느냐."

"그래야 로지에만 충성할 테니까."

[로지]는 말레피카, 태양신 교회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비공인마법사들이 육성되는 공동체를 뜻한다. 말레피카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사회와 격리되어, 로지의 구성원들을 진짜 가족으로 여기도록 교육받으며 자란다.

로지를 이끄는 [스승]은 부모가 되고, 함께 입회한 [동기]들은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신들에 대한 경외심도 없어야하고."

"마법사란 우주의 규칙을 깨뜨리고 새롭게 규정하는 존재요. 한데 인간의 불합리한 믿음에 의존하는 자가 어찌 마법사로 대성하겠소?"

······은빛뱀은 텔로리안이 종교를 바라보는 태도가 뒤틀려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과거사에서 비롯된 태도일 것이다. 그는 신들보다 멀리보는 현자였지만 그럼에도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더이상 언급하진 않겠다."

그리하여.

2호와 3호를 데리고 마탑으로 돌아가는데.

"잿빛현자님!"

"?"

아침에 보았던 후보자가 앞을 가로막으며 무릎을 꿇었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금발의 천재미소년. 어차피 제자로 받아줄 생각이 없어서 대충 심사했던 상대.

"제발 저를 도제로 받아주십시오!"

"내가 자네를 도제로 받아줘야할 까닭이?"

"현자님의 가르침을 따라갈만한 재능과 스승의 은혜에 보은할 양심을 지녔으니까요."

재능은 역대급이다.

종족이 종족이니까.

"흠."

"저를 제자로 받아주시면──"

"나의 앞길에 방해가 되겠지."

"·········예?"

"2호와 3호의 재능은 나의 가르침을 따라오기엔 충분하지만, 나의 구상을 능가하는 마법을 내놓기엔 모자라다."

2호와 3호는 [3단계 마법재능]을 지녔다. 일반적인 시대엔 당대제일을 노려볼만한 수준이나. 고금제일을 논하기엔 모자란 재능.

"그러니 2호와 3호는 평생을 나의 충실한 제자로 지낼 것이다. 하지만 자네는 10년이면 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고 독립하게 되겠지."

반면 소년은 [마법재능 4단계]을 지녔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천년에 한번 나올법한 초천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만한 기재.

"대신 대단히 우호적인 동료 마법사가 생기시는거 아닙니까?"

"우리의 지향이 일치한다면 독립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 되겠지. 나의 보호를 받던 꼬맹이가 진정한 동지로 거듭나는 것이니까."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스승님을 제압하고 가져왔던 전리품.

"하지만 자네도 느꼈을테지만 우리의 지향은 다르네. 그럼 공들여키운 제자가 나를 방해하는 상황이 벌어질텐데······어째서 자네를 가르쳐줘야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겠군."

자신은 제자들이 [로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지니길 바랬다. 하지만 눈앞의 소년은 [공동체]에 충성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정확히는 소속감이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

"온세상이 나를 비난해도 엘렌스트라는 나를 지지할테고, 나는 엘렌스트라가 영원히 저주받을 행위를 저질러도 그녀를 지지할걸세. 자네는 2호와 3호에게 그럴 수 있는가?"

·········

"지금의 침묵이 자네가 떨어진 원인일세."

"·········"

"자네에게 마법스승이 필요한지는 의문이네만, 정녕 마법스승이 필요하면 나보다 도덕적인 마법사를 찾아보게. 지향이 맞을테니까."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다면 거래는 어떻습니까? 현자여."

"거래?"

"저를 당신의 슬하로 거두어 10년만 보호하고 가르쳐주십시오. 그럼 로드로 복위하고 3개의 소원을 들어드리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금발소년의 동공이 좁아지면서 눈동자가 세로같은 형태로 변했다. 파충류종 특유의 뱀눈이었다.

[신규표본: 금빛왕자 테사리안]

[신규연구: 최후의 드래곤로드]

[연구내용: 금빛왕자를 양육하십시오.]

[연구단서 0/10]

[연구보상: 드래곤의 로어]

[연구보상2: 금빛왕자의 소원 3회]

14. 열네번째 연구 - 최후의 로드(2)

"7개."

"7개는 너무 많습──"

"7개."

"소문대로 협상에 능하──"

"7개."

"············"

텔로리안의 무뚝뚝한 대답에 금빛왕자는 할 말을 잃었다. 눈앞의 사내가 현자인지 날강도인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보호해줄 후견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좋습니다! 7개의 소원을 이뤄드리겠습니다!"

"좋네! 오늘부터 자네는 잡역부일세."

"·········예? 마법을 가르쳐주시겠다고──!"

쯧쯧.

"원래 공방생활이 모두 그런거지."

"············"

"또한 자네는 나갈 사람이지 직속제자가 아니지. 해가 떠오른 시간에는 잡역부로 일하고 해가 저물었을때만 공부하도록. 그럼 적절한 시기를 보아서 가르침을 내리겠네."

그날부터 집중적인 도제교육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도제교육에 앞서 레벨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번 성장의 목표는 [최고의 스승]이다.

'32레벨에서 36레벨에 도달했군.'

[능력치 분배]

[직감 20 -> 22]

이미 모든 능력치가 탈인간급이라서 성장이 대단히 느렸다. 이젠 [클래스 능력]의 차례다.

'나는 소환 마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자들에겐 가르쳐야지.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 소환수처럼 든든한건 없으니까.'

[기초 소환술을 습득합니다!]

[기본 소환술을 습득합니다!]

[중급 소환술을 습득합니다!]

[상급 소환술을 습득합니다!]

다음은 개인특성이다.

'벨라디아를 가르치면서 [전문교사] 특성을 얻었다. 지금은 레벨업으로 4개의 특성치가 생겼으므로 [전문교사]를 향상시켜볼만하다.'

[뛰어난 스승(희귀)을 습득합니다!]

[교육의 대가(영웅)을 습득합니다!]

────

◆교육의 대가 (개인특성, 영웅)

: 당신은 타인에게 전문지식을 전수하는데 통달했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든 짧고 간결하게 핵심만 가르칠 수 있습니다.

■효과 (상대에게)

: 교육경험치 +300%

: 교육시간단축 -50%

: [맞춤형 특수교육] 사용가능.

: [집단교육] 시에도 효율이 떨어지지 않음.

────

다음엔 제자들에게 1달간 권력과 재력을 쥐어주었다. 그들의 지향점을 파악해야 맞춤형 지도가 가능할테니까.

"저희가 원하는건 뭐든지 해도 된다고요?"

"어뎁트 수련을 시작하면 오랫동안 힘든 세월을 보내야한다. 그전에 마음껏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해라.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사람의 본성은 충분한 힘을 손에 쥐었을때 드러난다. 자신은 제자들의 본성을 고려해서 지도방식을 채택할 것이고.

"으적으적으적으적으적으적!"

거지로 살았던 2호는 식도락에 자금의 절반을 소비했다. 한 달동안 대영주들이나 즐길법한 만찬들을 매끼마다 즐긴 것이다.

"버려지는 음식이 아깝지 않느냐?"

"죄송합니다! 남기지 않고 먹겠습니다!"

"순수한 질문일 뿐이다."

"······저도 낭비를 해보고 싶었어요."

앙상하던 2호는 그제야 사람다운 몸을 갖추었다. 그녀는 새로운 모습에 만족하며 값비싼 옷가지와 장신구를 갖췄다. 귀족영애들처럼.

"너는 물질적인 결핍이 많구나."

"저도 귀족처럼 살고 싶은걸요!"

"그러면 너는 금속의 로어를 익히는게 좋겠다. 경제적 풍요를 누리기에 제일 적합하니까."

반면 도굴꾼 출신의 3호는 황금에는 손조차 대지않았다. 대신 교회를 두려워해도 되지 않음에 기뻐하며 공동묘지를 도굴했다.

[사자의 안식을 방해하다니! 불경하다!]

"한 달은 자유롭게 놔둘 것이다."

3호는 관에 딸린 부장품은 버려두고 시신만 가져왔다. 녀석은 싸늘히 식어버린 주검들을 뜯어보며 정교한 해부도를 그렸다.

"이번 시신은 예상보다 앙상한데·········"

3호는 시신의 상태에 따라 해부도를 분류했다. 사후경과시간을 비롯해서 생전의 성별과 연령, 신분과 재산까지 도표화한다.

"글자를 알고 있나?"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어요."

"도표를 그리는 방법도?"

"아니요. 이건 제가 생각했어요."

똑똑하다.

8살이면 물장구나 치고다닐 나인데.

"너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지?"

"저희 집안은 대대로 장의사를 해왔던 집안이었어요. 때문에 아버지께서 신부님한테 글을 배우셨죠. 사망기록을 관리하셔야하니까요."

3호의 과거를 보아하니 제법 기구한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과거를 물어봐두는게 나을테지. 그래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테니까.

"아버지는 어쩌다 돌아가셨느냐?"

"아시잖아요?"

빙긋.

창백한 소년이 차갑게 웃어보였다.

믿기진 않지만 나름의 호의표시다.

"그래도 물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서 저도 대답하자면 도굴죄로 화형을 당하셨어요.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지셨을 테지요. 죽기 직전에 파문을 당하셨으니까."

8살 소년이 아버지의 죽음을 담담히 말하며 오수가 흘러나오는 시체를 해부하는 모습은 괴이했다. 고향사람들이 자신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저는 그래서 죽지 않을 거예요."

"·········"

"지옥에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죽음에 대한 공포.

3호의 가장 본질적인 결핍.

"너는 죽음의 마법을 배울 것이다."

"그러면 뭐가 좋나요?"

"육신의 죽음을 피할 수 있겠지."

사령술에는 죽음을 회피할 수단이 대단히 많았다. 그것들은 남김없이 생명체의 혐오를 받아야 마땅한 수단들이나, 필멸자가 불멸을 흉내내려면 그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신의 죽음은 피할 수 없나요?"

"정신의 죽음은 신성을 얻어야만 피할 수 있단다. 엘프와 드래곤들도 세월을 버텨내지 못하듯, 고위언데드들도 똑같은 문제에 처한다."

하지만.

그건 머나먼 일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리치부터 되자꾸나."

"뱀파이어는 어떤가요?"

"네게는 리치가 훨씬 편리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이후로는 5개월에 걸쳐 마법의 기초를 잡아주었다. 일반인이 마력을 각성하고 로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알고 싶다면, 본인의 연구일지보다는 백색현자가 저술한 [마법학개론]을 참조하라.

"시작해라. 2호."

"저는 부우우자가 될겁니다아아아아──!"

[2위계, 금속의 로어]

[메탈 컨버전, 레서(Metal Conversion)]

[납을 금으로!]

2호가 주문을 완성하자 개미손톱만한 납조각이 금으로 변했다. 마법에 입문한지 5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것치곤 대단한 성과였다.

"가르침을 훌륭히 소화했구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덕분이에요!"

"너는 오늘부터 알다네스 골드시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절대로 거둬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이름을 지어줌으로 알다네스는 자신의 슬하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을 아버지처럼 여길 것이며, 자신은 그녀를 딸처럼 여길 것이다.

"3호. 네 차례다."

"일어나세요······술먹고 얼어죽은 아저씨······"

[2위계, 죽음의 로어]

[라이즈 데드(Raise Dead)]

[돌아와요! 당신은 여전히 쓸모가 있습니다!]

"·········이곳이 어디요?"

"마법사의 실험실입니다.빌헬름 아저씨."

"·········마, 마법사? 시, 실험실?"

"빌헬름 아저씨는 한겨울에 술에 취해서 야외에서 잠들었다 워킹데드로 되살아나셨답니다. 워킹데드는 민간에 전승되는 좀비들이랑은 많이 다른데요. 좀비는 이성을 잃고 육신이 강화되지만 워킹데드는 이성이 남은 대신 육체는 오히려 약화되서······"

동사한 주정뱅이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냐며 3호의 멱살을 잡았지만, 3호는 주정뱅이를 관짝에 집어넣고 못을 박아서 감금했다. 실습실에 괴성이 울린다.

"시험은 통과인가요?"

"어째서 사람이 동사하게 내버려뒀느냐?"

"죽어도 아쉬워할 사람이 없어보여서요."

3호는 맑은 눈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아저씨는 일도 안하고 하루종일 처자식들만 두들겨패던데······죽는 쪽이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까요? 저는 실험용 표본을 얻고 가족들은 가정폭력에서 해방되고, 아저씨는 개과천선할 기회를 얻고·········모두에게 좋은 결과잖아요?"

합격.

네크로맨서답다.

"너는 미르칼 그림하트다."

"음울한 심장이라······마음에 드네요."

씨익.

미르칼이 처음으로 밝게 웃어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스승님이라고 부르거라."

"네. 스승님."

제자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금빛왕자를 바라봤다. 그는 지난 5달간 개인교습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잡역부로만 일했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군."

"··············"

초췌한 금빛왕자는 울분을 담아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드래곤로드의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인간들의 화장실 청소나 해줘야하는 신세. 그럼에도 묵묵히 버티고 있다.

"불만이라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

"·········"

"떠난다면 소원도 들어주지 않아도 되고."

"·········"

"그럼에도 남겠다면 허드렛일 신세는 감내해야지. 너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지 않느냐."

[연구진전 : 최후의 드래곤로드]

[표본에게 인내심을 가르쳤습니다!]

[연구단서 1/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6]

"그래도 지금껏 참아온 인내심이 가상하므로 특별히 5분간 가르침을 내리마."

"·········감사합니다.."

"어째서 허리를 숙이지 않는가?"

"·········감사합니다!"

"주인님이라고 불러야지."

"감사합니다! 주인님·········"

금빛왕자는 이를 아득바득 갈면서 허리를 숙였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손톱이 날카롭게 변하며 피부에 비늘이 돋아날 정도였다.

"실습실의 중앙에 놓인 푸른 돌이 보이느냐?"

"·········보입니다."

"가장 깊은 갱도에서만 채굴되는 무결한 마정석이다. 마정석이 뿜어내는 마력광을 눈여겨보도록. 그곳에 우주의 신비가 담겨있으니."

금빛왕자의 인간눈이 세모난 뱀눈으로 변모했다. 골드드래곤의 통찰안은 무결한 마정석에 담긴 순수한 마나를 목격했고, 덕분에 비전에너지가 순환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연구진전 : 최후의 드래곤로드]

[표본이 마법을 깨우쳤습니다!]

[연구단서 2/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7]

"훌륭하다."

"············"

"내면의 분노를 나를 향해서 토해내도록."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도룡뇽 주제에 뭐라고 지껄이는게냐?"

텔로리안의 비웃음에 금빛왕자가 미간을 좁히며 마력을 뿜어냈다. 단숨에 돌풍이 퍼져나가며 실습실의 실험기구들이 파손되었다.

[3위계, 비전의 로어]

[그레이터 아케인볼트(Greater ArcaneBolt)]

[마나여! 적들을 산산이 조각내라!]

금빛왕자의 손끝에서 강대한 마력줄기들이 생겨났다. 마력줄기들은 처음엔 화살의 형상을 취했지만, 사용자의 마력이 너무나 강대해서 투창처럼 보였다.

"조심하십시오!"

"주제 넘는 말이로군."

하지만 텔로리안은 새끼손가락만으로 주문을 튕겨냈고 모멸감을 느낀 금빛왕자는 한층 강력한 공격주문들을 쏟아냈다. 위력만 놓고보면 엘렌스트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 이에 금빛왕자가 가르침에 만족하고 주문을 거두려는데.

"위대하다는 용족의 마력도 형편없구나."

"·········!"

"괜히 엘프들에게 사냥감으로 전락한 바보들이 아니구나. 그나저나 이쯤되면 너를 낳은 어미의 혈통이 대단히 의심스러운데······"

거듭된 도발에 금빛왕자는 이성을 잃고 찬란한 본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기운이 퍼져나가며, 완벽한 아름다움을 보유한 골드드래곤이 위용을 드러냈다.

"캬오오오오오!"

[순혈 골드드래곤을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8]

금빛왕자의 형상은 드래곤들의 군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크기는 집채만한 수준에 불과했으며, 여물지 못한 날개는 부드러웠다.

[3위계, 드래곤의 로어]

[드라코닉 볼트(Draconic Bolt)]

[하찮은 벌레야! 드래곤의 분노를 맛보아라!]

뒤이어 금빛왕자가 시전한 마법은 용족에게만 허용된 마법이었다. 본래 백년 단위의 수련이 필요한 로어이나, 골드드래곤에겐 혈통에 흐르는 잠재력을 일깨우는 것으로 충분했다.

[연구진전 : 최후의 드래곤로드]

[표본이 드래곤의 로어를 깨우쳤습니다!]

[연구단서 3/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9]

"빠르게 배워서 좋군!"

"""맙소사······"""

제자들은 넋을 잃고 금빛왕자를 바라봤다. 자신들은 반년동안 밤잠을 줄여가며 익힌 마법인데, 똥이나 나르던 청소부가 분노했다는 이유만으로 익혀버렸다.

"제자들아. 이것이 타고난 차이다."

""·········""

"그렇다고 재능의 차이에 낙담해서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아니된다. 마법에 정진하면 이런 일도 가능해지거든."

[7위계, 야수의 로어]

[도미네이트 비스트(Dominate Beast)]

[야수의 본성을 완전히 길들이노라.]

텔로리안은 정신을 가다듬고 마나를 끌어모았다. 초인적인 속도(민첩 25)으로 수인을 맺으며 고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

보이지 않는 마력의 쇠사슬들이 생성되었다. 용족의 타고난 마법저항력은 강인했지만, 마법사가 세심하게 자아낸 주문의 날카로움을 견뎌내진 못했다. 이윽고 금빛왕자의 동공이 흐리멍텅해지며 완전히 텔로리안의 지배에 들어갔다.

"브레스를 멈춰라."

"············"

숨결이 멎는다.

"앞발을 들어라."

"············"

"이번에는 뒷발."

"············"

"꼬리도 흔들어보도록."

"············"

제자들은 애완견처럼 행동하는 골드드래곤을 바라보면서 깨달았다. 드래곤은 대단한 생물이었지만, 마법은 드래곤보다도 대단한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확실한 동기부여를 해줌!]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10]

* * *

자신의 집중적인 가르침에 힘입어 알다네스와 미르칼은 마법을 익힌지 1년만에 10레벨에 이르렀다. 어디서도 어엿한 [마법사]라고 불릴만한 수준으로, 홀로 3위계 주문을 시전할 수 있다.

"이제 집중교육기간은 끝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

"헤헤······사령술······재밌다······언데드······아름답다······"

기초를 쌓아줬으니 이후의 발전은 제자들에게 달린 일. 조수로 일하면서 공부를 병행하는 일상이 쉽지는 않을테지만······다른 공방에 비해선 굉장히 양호한 처우를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잿빛현자여.]

첫번째 제자의 전언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진중한 목소리.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여왕 폐하.]

[오늘 아침에 불청객들이 도착했습니다.]

통신구에 보이는 벨라디아의 얼굴은 대단히 언짢아보였다. 그녀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음에도 죽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러한 표정을 짓는다.

"첫번째 불청객은 전투골렘들을 이끌고 도착한 난쟁이 금융왕입니다. 스승님께서 연체하신 이자료가 원금을 초과했으니, 제게 대출금과 이자를 한꺼번에 상환받고 싶다고 하더군요."

빚쟁이들이 왔군.

정확히 예상했던 시기에.

"두번째 불청객은 대산맥의 폭군을 자처하는 검은용 카르베날로어의 사신입니다. 짐의 왕국에 금빛왕자라는 도룡뇽이 숨어들었는데, 놈을 내놓지 않으면 짐을 잡아먹고 왕국은 모조리 불태우겠다는군요."

벨라디아의 눈빛이 유황불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짐이 참아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폐하의 힘으로 상대하긴 무리일 겁니다."

"왕도를 심연에 바치고 힘을 얻는다면 차고도 넘칠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마법사는 마법사다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첫번째 제자의 사고방식은 때때로 내게도 두통을 불러일으킨다.

"그보다 재밌는 계획이 있는데 들어보시죠."

"들어보겠습니다."

"불청객들을 서로 상잔시키십시오."

드워프는 황금을 원하고.

드래곤은 황금이 많다.

14. 열네번째 연구 - 최후의 로드(3)

시네어 행성에는 적게 잡아도 1500가지의 종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부류는 100여종뿐이다.

'세력권을 형성할만한 주요종족으로 줄이면 12종족으로 줄어들지. 이러한 12종족은 태고 시대 이후로 협력과 투쟁을 반복해봤다.'

드워프와 드래곤은 [12종족]의 일원으로서 수천 년에 걸쳐서 원한을 쌓아왔다. 그들은 모두 값진 보물을 탐냈고, 주거지역이 겹쳤으니까.

"······스승님의 부채를 대신 지불하지 못하겠단 의미가 아닙니다. 중대한 원정을 준비하는 중이어서 상환을 미뤄야한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역사를 배웠던 벨라디아는 금융왕 다그렌을 공손하게 맞이했다. 금융왕 다그렌은 혼자서는 걸음조차 힘겨워보이는 뚱보드워프였지만, 내면엔 수많은 인생들을 파멸시킬 계책과 그걸로 부를 쌓아올릴 수완들이 있었다.

"중대한 원정이라고 하셨소이까?"

"그렇습니다. 대산맥 원정을 준비 중입니다."

"흠·········"

중부와 동부의 경계엔 유난히 높고 험준한 산맥이 있었다. 인간들은 그러한 장소를 [대산맥]이라고 불렀지만, 드워프들은 대산맥을 [광기의 산맥]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산맥의 지하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았으니까.

"인간의 기예로는 불가능할 일이오."

"그렇지만 산악오크들이 저희 영토를 침공했었습니다. 저희도 응당 보복을 취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벨라디아는 일부러 반지를 벗어서 살의를 드러냈다. 금융왕 다그렌은 여왕의 보석같은 눈동자에서 번득이는 살기가 오크들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착각했다. 산악오크들은 대단히 잔인한 방식으로 전쟁을 치렀으니까.

"또한 저희 왕국은 놈들에게 갚아줘야할 원한도 있습니다. 선대왕인 마차시 3세께서 놈들의 손아귀에 붙잡혀 국밥이 되셨으니······"

이로서 금융왕은 벨라디아가 산악오크들에게 사무친 복수심을 지녔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찮은 농노들의 고충까지 들어주는 여왕이 저토록 맹렬한 살의를 비추는 까닭이 설명되지 않는다.

'벨라디아 여왕은 암사자같군.'

외부의 적들에겐 대단히 맹렬하고 사나우나 자신을 따르는 무리에겐 자비롭고 관대하다. 여기에 뛰어난 군사적 재능까지 갖췄으므로, 벨라디아 여왕은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던 정복자들과 특징을 공유한다.

'이러한 채무자는 미래의 기대가치가 높은 자산이다. 그러니 매각해서 일회성 수익을 얻기보단 목줄을 걸어놓고 정기적인 수익을 수령하는 방안이 현명하다.'

금융왕은 벨라디아가 품고 있는 경제적가치를 인식했다. 그녀가 강력한 워록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번 원정에 제가 투자할 수 있겠습니까?"

벨라디아의 자산가치를 인식한 금융왕은 여왕을 공손하게 대했다. 곰가면을 뒤집어쓰고 싸운다는 야만전사같은 태세변환!

"어떤 종류의 투자를 말씀하니까?"

"외람된 말이지만 에스실의 군세만으론 산악오크들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그들의 요새는 험준한 산봉우리에 위치한데다, 인간들이 활동하기 힘든 지하까지 뻗어있으니까요."

이에 벨라디아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하는 근심이 드러났다. 본래 그녀도 고려하던 문제이지만 외국의 군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애써서 감추고 있던 본심······이라고 금융왕 다그렌은 생각했다.

"무엇보다 대산맥은 검은폭군 카르베날로어가 다스리는 영역입니다. 산악오크들도 녀석에게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외부의 위협에 대해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을 타개하시려면 전문가들의 도움이 필요하실 겁니다."

그리하여.

금융왕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여기에 서명해주시면 해결됩니다."

"계약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습니까? 저는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만 전념해서 엘프어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엘프어를 모른다는 벨라디아의 발언은 전형적인 중부기사처럼 보였다. 외골수로 유명한 철퇴공 헤링턴의 후계자다운 모습이랄까.

'역시 뇌근육이군.'

그렇게 무식해보이는(?) 모습에 금융왕은 신뢰감을 얻었다. 암사자에게 목줄을 채워서 애완견처럼 부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고려해보겠습니다."

"영토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다는 점이 꺼림칙하게 느껴지신다는 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늙은이의 진심에서 나온 충고임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우선 폐하께서 승전하셔야 왕국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벨라디아가 강화됩니다!]

[Lv20 여왕 -> Lv25 여왕]

[벨라디아가 '교활한 조종자' 특성을 획득!!]

─────

◆교활한 조종자 (특성, 영웅)

: 당신은 타인을 조종하는 계책에 통달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인 장점은······당신이 치명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당신의 적들은 당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줄 것입니다. 당신이 보여준 그림자를 당신이라고 믿으며······

■효과

: 계책력 +300%

: 계책의 [즉시발동]이 가능합니다.

: 계책에 대한 [직감적 파악]이 가능합니다.

─────

금융왕은 순진한 처녀여왕을 함정에 옭아맨다고 믿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벨라디아가 짜놓은 복잡한 거미줄에 얽혀들어갔다.

"옳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여왕 폐하!"

"군자금은 충분히 지급되길 바랍니다."

"경력 많은 용사냥꾼들도 보내드리지요."

오크도 죽이고!

여왕도 옭아매고!

용까지 죽이겠다!

이것이 전설적인 금융왕의 계책!

"나, 무쇠공 헤링턴과 정복자 자헤리온의 후예, 벨라디아 1세는 조상들의 명예를 걸고 황금은행의 도움에 다음과 같이 보답할 것을 맹세한다. 첫째. 이번 원정에서 발생하는 전리품의 절반을 넘긴다. 둘째. 세입의 절반은 부채를 갚기 위해서 우선지불된다. 셋째, 부채가 완전히 청산되는 날까지 에스실 왕국의 조폐권을 황금은행에 넘긴다. 넷째······"

다만.

이번엔 욕심이 너무 많았다.

수많은 투자자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흠······"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선생님?"

황금의 알다네스가 수정구를 들여다보는 스승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돈이 될만한 안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녀다.

"골든리버의 수온을 알아보고 있었다. 황금은행의 투자자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들이라지만, 조상들의 곁으로 돌아가는 길만큼은 따뜻했으면 좋겠구나."

에휴.

안됐다.

안됐어······

* * *

군자금이 도착하자 벨라디아는 산악오크 정벌군을 신속히 편성했다. 자금이 충분해지니 병력을 모집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여왕 폐하께서 우릴 지켜보신다!"

"이교도들을 정벌하는 성전을 떠나자!"

"이번 원정에선 잡역부도 주급이 은화 2닢!"

"더러운 오크놈들을 모두 국밥으로 만들자!"

모병관들은 다양한 구호로 시골청년들을 유혹했는데, 청년들의 가슴을 제일 끓게 만들었던 구호는 오크들에 대한 증오심이었다. 여왕의 관심이나 충분한 봉급조차도 차순위였다.

"이건 놀라운데요."

완전무장한 벨라디아는 모병소에 구름처럼 모여든 청년들에게 놀라움을 표했다. 근육질의 미남들에겐 시선이 보다 오래 머물렀다.

"저의 관심이나 돈보다 복수라고요?"

"상식적인 사람들에게 너는 숭배의 대상일뿐이지, 현실적으로 연모할 상대는 아니지."

탑스타를 좋아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탑스타와 결혼하길 기대하는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 지금 왕국민들이 벨라디아를 바라보는 심리는 그것과 비슷했다.

"흐음. 그건 이해가 되네요."

중세랜드의 국왕이란 대통령과 탑스타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했다. 적어도 기사도 문화가 지배하는 중부에선 그러했다.

"한데 봉급보다도 복수가 중요하다구요?"

"사람의 복수에 대한 갈망은 원초적이다. 너는 반드시 이를 가슴에 새기고 함부로 적을 만들지 말아라. 혹여나 적을 만들었다면 신속하게 화해해라. 화해할 수 없다면 반드시 몰살시켜라."

중세랜드엔 현대인의 감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관습들이 있는데, 이러한 관습들이 생겨난 맥락은 결국에 하나로 귀결된다.

적이 되지 말자.

적이 되었다면 화해하자.

"때문에 전시에도 왕공들은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성채가 함락되고도 사흘간의 약탈이 끝나면 주민들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따금 관습을 깡그리 무시하는 이들이 있다.

"힘이 전부라고 믿는 바보들이 그렇지. 언제나 오만한 용족들. 식인을 전통이라고 주장하는 산악오크들. 노예경매장을 운영하는 골드드워프들까지."

벨라디아는 그들의 공통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선은 대단히 강성한 세력들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남들의 의견을 무시해도 될만큼.

"겉보기엔 괜찮아보이는군요."

"하지만 본능적으로 꺼림칙함을 느낄테지."

"맞아요. 이유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직감에 따르면 저들의 최후가 그다지 아름답지는 못하리란 생각이 드네요."

벨라디아의 대답에 다른 제자들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금빛왕자는 드래곤에 대한 언급을 주의깊게 들었다.

"정확히 보았다."

"흐음."

"저들은 불행한 처지에 놓여도 남들의 동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조롱을 받겠지."

최강의 생물체는 드래곤들이다. 그들은 무적의 육신을 지니고 창공을 날아다닌다. 또한 고도의 지성에 강대한 마력까지 갖추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사회성이 전무하다.

애초에 홀로 살아가는 종족이니까.

[드래곤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7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1]

"그래서 드래곤들은 엘프들에게 패권을 내주었고, 오늘날엔 세력을 대부분 잃고서 오지로 쫓겨난 상태다. 그들은 부모자식간에도 좀처럼 힘을 합치지 않으며, 용족이 사냥을 당해도 어떠한 종족도 동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족들은 다른 종족들을 벌레로 부르며 짓밟는다. 그래서 다른 종족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복종하거나 모든 것을 걸고서 맞서싸워야한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복종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맞서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지."

그때.

금빛왕자가 질문을 던져왔다.

"절대강자에게도 동정이 필요합니까?"

"절대강자가 처음부터 절대강자인가?"

"···············"

"태어나 늙어죽는 순간까지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면, 남들의 동정이 필요하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시간 앞에서는 신들조차 절대성을 상실하는 장소다."

쉬잇!

앙증맞은 크기의 은빛뱀이 수업이 진행중인 막사로 들어왔다. 벨라디아는 야수의 언어로 반겨주었으나 다른 제자들은 본능적으로 은빛뱀의 강대함을 느끼고 움츠려들었다. 심지어 금빛왕자조차도.

"태양신의 사제들은 천상의 제왕이 그러한 절대자라고 주장한다만······역사와 철학을 공부해본 지성인이라면 단호히 거부해야하는 궤변이다."

아무튼.

"오늘 수업의 요지는 관습을 무시했던 강자들은 그들이 약자가 되었을때, 어떠한 동정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정을 받지 못하는 약자의 운명은 처참하지.

[연구진전 : 최후의 드래곤로드]

[표본이 정신적인 알을 깼습니다!]

[연구단서 4/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38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12]

수업을 끝내고 은빛뱀을 팔에 걸치고 막사를 나섰다. 제자들끼리 서로 얼굴을 익힐만한 시간이 필요할테니까.

"·········스승님."

자신을 불러세운 이는 금빛왕자였다. 언제나 오만함이 몸에 베였던 평소와는 색다른 태도.

"방금 나를 스승이라고 부른 것이냐?"

"·········"

"놀라운 일이군.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자신이 금빛왕자의 후견을 맡은지 1년이 넘었다. 하지만 녀석과의 관계는 언제나 냉랭했다. 금빛왕자가 계속해서 동기들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기에 그때마다 녀석을 가차없이 찍어누른 탓이었다. 잡역부로만 부리거나 정신지배해서 망신을 주는 식으로.

"이제야 스승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용족의 오만함을 탈피하게 도와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에 텔로리안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이 의도한 방식대로 수업을 따라와준 제자가 대견할 뿐이었다.

"역시 용족은 배움이 빠르군."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나의 수업만으론 이렇게 빠르게 깨우치진 못했을텐데·········계기가 있었나?"

이에 금빛왕자는 텔로리안의 어깨에 머무르는 은빛뱀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대견한 눈빛을 내비추는 점을 보아할때, 가르침을 내려주었던 모양이다.

"그랬군."

"·········"

"네가 나이를 먹기 전에 깨우쳐서 다행이다."

"그렇습니까."

"너희 용족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지나 고집도 같이 단단해지거든. 그렇게 세상에서 홀로 고립되어서······서서히 사라져는 것이지."

돌아선다.

"내일부턴 정규수업시간에도 참가해라."

"감사합니다!"

"너의 이름은 부모님께서 붙여주신대로 부르겠다. 그렇지만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도 나의 슬하에 머무를 때에는 동등한 제자이다. 그럼."

* * *

이틀뒤.

원정을 준비하는 왕국군 집결지.

"아름다우신 여왕 폐하를 뵙나이다."

"먼 길을 찾아오느라 고생하셨소."

왕실기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중무장한 군단병(Legion)들이 입장했다. 군단병들은 엘프들처럼 엄정한 규율로 제국의 위세를 드러냈다.

"데키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가문의 퀸투스여, 짐은 그대가 가져온 제국 시민들과 원로원의 전언을 경청하겠소."

하지만 정말로 압도당한건 제국의 사절단이었다. 루키우스 가문의 불쌍한 퀸투스는 야만인 여왕의 미소를 보자마자 함락되었으니까.

14. 열네번째 연구 - 최후의 로드(4)

티레니아인들의 장엄한 인류제국.

통칭 [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강대국이었다. 그들은 효율적인 체제와 엄격한 상무정신에 힘입어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펼쳤고, 오늘날에는 3개의 대륙에 걸친 방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다.

"제국에서 우리에게 접촉해올 시기가 되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끄덕.

"우리는 인본주의를 제창하는 제국에서 탐낼만한 인재들이다. 젊은 나이부터 걸출한 두각을 드러낸 인재들인데, 이종족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순혈인간이니까."

퀸메이커 텔로리안은 2년만에 변방의 백작가를 왕가로 옹립하고, 50살을 조금 넘긴 나이에 마지스터에 도달한 마법사. 전사여왕 벨라디아도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귀순을 제안하겠군요?"

"장기적으로는 그렇겠지."

하지만.

"당장은 우호국으로 지내자는 의사를 밝혀올 것이다. 충분한 우호를 쌓으면 동맹을 맺자고 제안할테고, 몇번의 전쟁을 함께 치른 다음에는 시민권과 원로원 의석을 제안하겠지."

벨라디아는 대륙전도를 펴두고 정세를 계산했다. 그녀는 타고나길 영리했으나, 텔로리안의 교습으로 고도의 지성까지 갖추었다.

"제국은 서방대륙의 완전한 정복을 원하죠?"

"맞다."

"성공가능성은 얼마나 되나요?"

"절반정도."

제국은 중세랜드에 불과한 중부국가들과 문명수준이 달랐다. 그들은 화약무기를 사용했고,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대로 인재를 등용했으며, 무엇보다 국민적 정체성이 있었다.

[티레니아 제국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8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13]

"국민이 뭐죠?"

고귀하신 여왕 폐하께선 낯선 외국어에 고개를 갸웃하셨다. 중부의 사전에는 백성이란 단어밖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국가를 이루는 민중이 국민이다."

"민중이 어떻게 국가를 이루죠? 국가는 신이 점지해준 왕이 세우는 것이잖아요?"

인간은 신을 만들어내고 신은 왕을 점지해준다.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 왕은 인간임에도 신을 닮은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을 거부함으로서 국민이 생겨난다.

"네가 신들의 축복으로 왕위에 올랐느냐?"

"아니오. 귀족들의 추대로 올랐지요."

"그러면 평민들이 추대하지 못할 이유는?"

"············"

벨라디아는 국민이란 역겨운 상상에 침을 뱉고 싶었다. 헐벗고 굶주린 벌레들이 국가를 이룬다고? 그렇다면 국가가 개미집이나 꿀벌집이라는 뜻인가?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다.

"그래도 어떤 논리인지는 이해가 가네요."

"제국은 민중이 국가를 이룬다는 사고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국가이므로,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보장한다. 덕분에 귀족들로만 나라를 꾸려야하는 중부보다 나라가 훨씬 발전했지."

앞선 발전도를 통해서 더욱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정복지의 백성들도 동화시켜서 국민으로 합류시킨다. 그것이 제국이 500년만에 3대륙에 걸친 최강대국으로 성장한 비결.

"어떻게 양떼같은 민중이 하나로 뭉쳤죠?"

"공동의 적을 만들어준다면 가능하지."

"············흐음."

제국의 선동가들은 말한다. 당신들이 헐벗고 굶주린 까닭은 이종족들의 음모 때문이라고.

"대중은 속성상 이질적인 존재들에게 배타적이다. 그래서 제국의 선전은 언제나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가지."

귀쟁이들은 왕공들과 통혼해 권력을 장악하고 드워프들은 앞선 손재주로 경제권을 장악한다. 오크들은 시시때때로 쳐들어와서 약탈과 학살을 벌이니······원래부터 민중들이 이종족을 대하는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그때, 민중을 제몸처럼 보살펴온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의 왕공들은 이종족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므로 그들을 쓸어버리고 진정한 인간의 나라에 합류하자고."

그렇게 내부봉기로 사회질서가 혼란스러워지면 제국군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사악한 이종족들을 벌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동료 시민]으로서 환대해줬다.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인본주의라고 부른다."

"싫어할 사람이 대단히 많겠는데요."

"맞다. 제국은 순혈인간만을 [국민]으로 받아주고 다른 지성체들은 몰살시키거나 가축화시킨다. 그래서 이종족의 영향력이 강력한 북부에선 제국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

[인본주의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8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14]

"선생님."

"말하거라."

"저희도 제국에 귀순하면 어떨까요?"

벨라디아는 드워프 은행가들의 창고를 약탈하고 엘프 미소년들을 성노예로 부리는 상상을 해보았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괜찮은 사상 같아보이는데요?"

"내가 싫다."

"어째서죠?"

"악마들을 싫어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제국을 싫어하는데도 이유가 없다. 그냥 싫다."

텔로리안은 표정을 찡그리며 생리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이쪽 세상의 인본주의는 자신이 알던 인본주의와 너무 달랐으니까.

"제국의 인본주의가 지금은 달콤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선 바보같은 짓이다. 인간 외의 존재들과 제휴할 가능성을 없애고, 인간만을 친구로 삼는 것이니까."

이곳은 1000여종의 종족들이 살아가는 세상. 그럼에도 하나의 종족과만 교류한다면,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서 999가지의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너도 제국에 귀순해봐야 황제는 못한다. 운이 좋아봐야 황후일테고, 황후가 되어봐야 황제의 수발이나 들어줘야하는 처지지."

쳇.

벨라디아가 아쉬움을 내보인다.

"그렇다고 당장 제국과 멀어질 이유도 없으니,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서 잠재적인 동맹자로 보여라. 대산맥 원정에 대한 지원군까지 받아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다만.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제국 사절단도 만만치 않으니까.

* * *

·········벨라디아는 기대보다 훌륭히 역할을 수행했다. 퀸투스 의원을 마주한 벨라디아는 처음에는 근엄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공식행사가 끝나자 의원을 별실로 초청해서 공식 만찬에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짐의 왕국은 유래없는 환난에 처했소."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황실첩보국의 첩보역량은 교회의 이단심판부에 버금간다고 들었소만······"

여왕이 실망스런 표정을 지어보이자 사절단장 퀸투스는 스스로가 영향력 있는 사내임을 증명하고자 다양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 물론 알고 있습니다!"

"·········흐음."

"지금 왕국의 내부에선 사교도들이 들끓고 외부에선 산악오크들이 침공해왔잖습니까? 폐하께선 반격을 위해 황금은행에서 대출을 받으셨지만 다양한 권리를 내주셔야했기에······"

퀸투스 의원도 만만한 사내는 아니었다. 적어도 허세를 부리는 와중에도 기밀을 지켜낼 분별력은 있는.

'제국의 서방대륙 정벌이 임박했군.'

하지만 벨라디아는 파편적인 정보들을 종합해서, 그러한 정보들이 궁극적으로 암시하는 상황을 추론해낼만한 능력을 갖추었다.

'제국이 서방대륙을 정복하려는 목적은 3가지다. 첫째는 중부의 비옥한 평야. 둘째는 동부의 풍부한 자원. 셋째는 언제나 제국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북부 연합]의 해체.'

공교롭게도 자신이 다스리는 [에스실 왕국]은 중부의 핵심국가. 제국이 중부를 평정하길 위해서든 북부를 침공하기 위해서든, 반드시 협력을 얻거나 멸망을 시켜야할 대상이다.

정리.

제국은 세계정복을 꿈꾸는 최강대국.

세계정복의 최대걸림돌은 북부연합.

북부연합을 멸하려면 왕국을 지나가야.

'하지만 우리는 제국과 함께하지 못한다.'

스승님은 제국을 혐오해서.

자신은 황제가 되지 못할테니까.

'황제가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라면 황후도 괜찮은 자리겠지만, 어차피 제국의 실권은 원로원 의원들과 군단장들에게 달려있다.'

추론.

자신은 제국과 함께하지 못한다.

제국은 자신에게 우호적이다.

결론

제국의 호의를 이용해먹고 버리면 된다.

"제국은 폐하의 원정에 기꺼이 도움을 제공할 것입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들에게 동포끼리 힘을 합침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퀸투스 의원은 가슴을 치면서 지원군을 약속했다. 정식으로 동맹을 맺지 않은 국가에 대한 원군파병. 과거의 전례들을 미뤄볼때 불가능한 사안은 아니지만 드문 사례다. 퀸투스 의원이 제법 무리를 해야할 것이다.

"그렇소?"

하지만 여왕이 환히 웃어보이자 의원도 행복해졌다. 덕분에 자기합리화가 가능해진다.

"사절단장만 믿겠소."

"믿고 맡겨주십시오! 여왕 폐하!"

"그럼 지루한 회의도 끝났는데 사냥이나 나갑시다! 루키우스 가문의 사내들이 훌륭한 무인들로 유명하던데, 어디 실력을 봅시다!"

우리 가문을 알고 있어?!

나한테도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제가 실력을 선보이지요!"

벨라디아는 퀸투스와 사냥내기를 벌이며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아슬아슬하게 져주는 것도 힘들었지만, 퀸투스가 판단력을 잃어가는 모습이 뿌듯했다.

동시에.

불쌍한 퀸투스는 생각했다.

'에스실 왕국과의 동맹을 성사시킨다면 나는 원로원에서 남다른 정치적 위상을 얻게 되겠지! 차기 황제 선거에도 나설 수 있다!'

일개 의원은 동맹국의 수장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한다. 하지만 황제가 된다면 동맹국의 여왕과 지금보다 친밀한 관계를 지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 * *

덕분에 전사여왕 벨라디아는 강력한 지원군들을 거느리고 산악오크들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다. 1만의 정예 왕국군이 소집되었고 산악전에 특화된 드워프 레인저들도 합류했다. 용사냥꾼이란 별명으로도 불리는 드워프 영웅들.

"비켜라! 난쟁이 똥자루들아!"

"건방진 제국놈들도 왔군······"

또한 제국군도 합류했는데 숫자는 3천에 불과했지만 엄격한 규율과 위력적인 화약무기를 갖춘 최정예들이었다. 벨라디아는 제국군 장교들에게 넉넉한 선물을 내려서 부유함을 과시했다. 물론 대출받은 자금이었지만······

"흐음."

하지만 벨라디아가 진정으로 의지하는건 군대가 아니었다. 이번 원정의 진정한 목표는 산악오크들이 아닌 놈들을 보호해주는 블랙드래곤 카르베날로어. 드래곤을 상대론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텔로리안이 있었다.

"이번엔 전면에 나서실 생각이시군요?"

"존재감을 너무 감추면 수상하잖느냐."

이미 텔로리안은 중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때문에 많은 이들은 텔로리안의 진정한 힘을 알고 싶어했다.

"그들이 바라는대로 힘을 보여줄 생각이다."

"그렇다면 대악마건은 어째서 숨기셨나요?"

"대악마를 함정에 빠뜨린 마법사는 너무 비현실적이지. 하지만 젊은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마법사는 충분히 상식적인 존재다."

한때는 용족들이 절대자로 불리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엘프들이 장엄함을 잃고 노예종족의 대명사가 되어가듯, 드래곤들도 절대성을 잃고서 보물창고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증언해줄 손님들도 많군."

재밌는 원정이 되겠어.

힘을 숨기지 않아도 될테니.

14. 열네번째 연구 – 최후의 로드(5)

대산맥은 수많은 신비를 머금은 장소였다. 한때 대산맥의 지하에선 창조주 타이탄들이 토석인들을 빚어냈고 산봉우리에선 고대룡들이 포효했다. 그러나 창조주들의 모루는 빚을 잃었고 용들의 포효는 과거의 메아리가 되었다.

"이런 씨발······존나······존나 힘들어······"

"구웨에에에에에에에엑!"

또한 대산맥에 진입한 원정군은 보다 실존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고산지대에 익숙치 않은 인간 병사들이 탈진해버린 것이다.

"만티코어다!"

"이쪽엔 그리폰이야!"

"으아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어──!"

"어머니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또한 몬스터들은 자신들의 소굴에 제발로 들어온 도시락들을 맛나게 섭취했다. 간혹 역으로 도시락이 되는 몬스터들도 있었지만.

"빌어먹을! 여긴 도무지 인간이 살만한 땅이 아니잖아!"

해가 저물자 살을 에는 추위가 그들을 닥쳐왔다. 모닥불에 모여든 병사들은 밤마다 대산맥의 험준함과 몬스터들에 대한 두려움을 성토했는데, 그들은 밤중에도 안전하지 못했다.

"읍! 읍! 읍!"

"으아아아아악! 적습! 적습이다!"

산악오크 유격대는 밤마다 은밀하게 사냥을 행했다. 그들은 경계에 나선 초병들이나 방비가 약해진 지점을 타격해 병사들을 잡아갔다. 그들은 단지 산악오크들에게 잡혀간 동료들이 빠른 죽음을 맞이하기를 기도할 따름이었다.

"폐하. 회군해야합니다."

"알랑송 백작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

철퇴공 로드릭이 수도에 잔류했기에 원정군의 최고지휘관은 벨라디아였다. 하지만 장병들은 전황이 여의치 않자, 여왕의 나이가 연소해서 원정군을 지휘할 적임자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제가 폐하를 오랫동안 알아온 연장자로서 감히 충고를 올리건데, 퇴각은 결코 패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열을 재정비하고 이번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알랑송의 훈계에도 벨라디아는 단호하게 진군을 명령했다. 이에 알랑송은 원정대의 파멸을 예견하고도 용맹하게 전진했다. 그는 여왕을 곁에서 모시는 호위기사였으니까.

"지금 우리가 뭘하고 있는 중이지?"

"소녀의 병정놀이에 목숨을 걸고 있지."

"퀸투스 의원을 홀렸다는게 사실인가봐."

이에 동요한 병사들은 다양한 의혹을 드러냈으며, 일부 병사들은 탈영을 감행했다. 하지만 탈영병들은 몬스터와 오크유격대에 의해서 동료들보다 빠르게, 더욱 처참히 죽었다.

"·········이게 맞나?"

"아무리 봐도 죽으러 가는 길인데······"

그럼에도 제국병사들은 가급적 침묵했다. 반면에 왕국병사들은 여왕에 대한 음담패설과 조롱으로 위험수위에 이른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회군을 명해주소서."

"경은 짐을 위해 죽기로 맹세하지 않았나?"

"기사로서 주군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의무이며, 사내로서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보다는 가치 있는 싸움에서 바치고 싶습니다.'

알랑송 백작이 원정을 철회하자고 거듭 요청하자 벨라디아는 격한 분노를 드러냈다. 무지한 평민들은 몰라도 알랑송은 자신을 지지했어야했다.

"즉. 짐이 그대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경의 머리통이 붙어있는 유일한 까닭은 반반한 얼굴 덕분이다! 당장 나가라! 목을 잘라서 술잔으로 만들어버리기전에!"

격노한 여왕은 알랑송에게 대한 총애를 거두었다. 이로서 벨라디아는 국내영주들을 배우자 후보에서 배제했고, 외국의 왕공들 가운데 배우자를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연구진전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실망'을 느꼈습니다.]

[연구단서 6/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8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15]

간만의 연구진전.

별도로 취조한다.

"알랑송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점에서 다를거라고 믿었느냐?"

"저는 알랑송과 어린 시절부터 왕래해온 사이입니다. 게다가 전장에서 거듭해서 등을 맞대었던 전우지요. 그러니 제가 군주로서 판단을 내렸다면 반드시 신뢰하고 따라줬어야합니다."

하지만 알랑송이 자신에게 보인 태도는, 군주에게 복종하는 신하가 아니라 레이디를 지키려는 기사의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충분한 용맹과 군사적 식견을 거듭해 증명했음에도······

"많이 성장했구나."

"제가 말인가요?"

"타인에게 기대라는걸 했잖느냐."

"············"

"오늘의 성장은 기념할만한 일이다."

이에 벨라디아는 아공간에서 감정이 담긴 플라스크를 꺼냈다. 텅텅 비어있던 플라스크가 절반 넘게 차오른 상태였다.

"······이게 저한테 이로운 일일까요?"

"그건 복잡한 질문이로구나."

가끔은 헷갈린다.

사람으로 사는게 좋은지.

짐승으로 사는게 좋은지.

"복잡한 질문은 미뤄두고 다가올 전투에 집중하자. 오늘 새벽에 산악오크들의 대대적인 야습이 있을테니까."

벨라디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법롱소드를 갈고 닦았다.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직감과 탐지마법이 그렇게 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야심한 새벽.

쿵!

쿵!

쿵!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름끼치는 북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검은색 오크들이 진격해왔다. 그러자 기습을 대비하던 왕국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웠다.

[4위계, 빛의 로어]

[샤이닝 스피어(Shining Sphere)]

[어둠을 몰아내리라!]

주문이 시전되자 한없이 축소된 태양이 창공에 생성됐다. 진짜 태양에 비해선 빛의 세기도 광채의 강도도 한없이 약했지만, 적어도 적들의 규모를 알리기엔 충분한 광원이었다.

"뭐, 뭐야······?"

"허, 허어어억······?!"

하지만 왕국군은 오크들을 목격하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전면에서 검은색 오크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나체로.

"으, 으어어어어어어어어?!"

"미, 미친 몬스터 새끼들──!"

2미터에 달하는 근육돼지들이 양날도끼만 쥐고서 나체로 돌격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광경을 제정신으로 바라볼만한 담력을 보유한 전사는 드물었다. 적어도 왕국군에는.

"포병대! 사격하라!"

콰아아아앙──!

그때, 제국군에서 들려온 육중한 포성이 왕국군을 또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오크들의 함성소리를 또다른 소음으로 몰아낸 것이다.

"사격 개시!"

타타타탕!

타타타탕!

타타타탕!

머스킷으로 무장한 제국군이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말라깽이들이 방아쇠를 당기니 강인한 오크들이 쓰러지는 광경이었다.

"집결하라! 기사들이여!"

그때, 울분에 가득찬 알랑송 백작이 전투마에 올라타서 돌격했다. 왕국군의 졸전에 수치심을 느낀 기사들이 뒤따라서 돌격했다. 그들은 왕국보병대와는 달리 제국군조차 능가하는 맹렬한 투지로 전투에 임했다.

"크아아아아아아──!"

"비겁한 평민놈들!"

"놈들은 머릿수나 채우려고 데려온 거잖나!"

기사들은 왕국군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고자 더욱 맹렬히 싸웠다. 고귀한 귀족나리들께선 게으른 평민들의 짐까지 기꺼이 짊어지신 것이다.

"""여왕 폐하 만세───!"""

콰지끈!

왕국기사들의 랜스가 산악오크들을 줄줄이 꿰어버렸다. 그들은 지옥에서 올라온 기사들과 무예를 겨루고 파괴신을 목도했던 자들이었다. 지상의 존재들을 두려워하기에는 너무나 대담해졌다.

"죽어! 죽어! 죽어라아아아──!"

특히 여왕의 총애를 잃어버린 알랑송은 들끓는 분노와 좌절감을 오크들에게 토했다. 그는 북부의 광전사들처럼 싸우며 적장을 베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알랑송 백작이 각성합니다!]

[Lv20 기사 -> Lv30 버서커]

[분노로 사람이 각성하는 순간을 목격!]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8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16]

도움을 줘야겠다.

살짝이면 되겠지.

[3위계, 바람의 로어]

[헤이스트(Haste)]

[신속하게 서두르라!]

"크오오오오오오오──!"

가속에 걸린 알랑송과 왕국기사들은 오크들을 간단히 쓸어버렸다. 오크들의 육신이 강인해봐야 데빌보단 나약했고, 야생에서 길러진 투쟁심이 강렬해봐야 지옥의 악의보단 미약했다.

"후퇴! 후퇴하라!"

"인간들이 생각보다 강하군!"

"빌어먹을! 인간 국밥이 땡겼는데!"

산악오크들은 패배를 인정하고 재빨리 철수했다. 그들은 이번에 찾아온 인간들이 만만찮은 적수들임을 인정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승리다───!"

"임페리움 인빅타!"

"태양신께 감사를!"

원정군은 각자의 방식으로 승리를 기렸다. 오크들이 신속히 물러나 승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몇주간 괴롭힘만 당하다가 승리를 거뒀음에 의의가 있었다. 사기를 회복한 원정군은 용맹무쌍하게 전진했다.

"·········"

"·········허, 허억."

하지만 산악오크들의 본거지에 도달한 원정군은 끔찍한 광경을 목도했다. 드래곤이 들어갈만큼 거대한 가마솥에서 끔찍한 절규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또한 가마솥의 곁에는 주걱을 들고 있는 거인오크가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심연의 기운에 잠식된 거인오크는 피부가 붉게 물든 상태였다. 뿔과 꼬리도 있었고.

"우리의 고향까지 방문해준 손님들은 실로 오랜만이군! 그래서 내가 직접 그대들을 위한 식사를 공들여 준비하고 있었다네."

흑마법사 바르준은 산악오크들의 대장로이자 데몬컬트의 교주였다. 메인시나리오에선 강력한 중간보스로 등장하던 인물.

"조만간 맛좋은 스프를 곁들인 풍성한 만찬이 준비될테니 기대하게! 하지만 만찬이 준비되는 도중에도 손님들을 적적치 않게 달래줄 하인들이 필요하겠지! 모두 나와서 손님들을 마중하거라!"

그러자 골짜기에 매복해있던 검은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사방의 골짜기를 가득 매울만큼 숫자가 많았는데, 쳐들어온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너희도 우리 식구인데 나와야지!"

다음엔 계곡에서 몬스터의 군세가 나타났다. 대산맥의 지하에서 살아가는 용암거미들과 우둔하지만 강력한 바위트롤들······그외에도 식인을 즐기는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모두 바르준이 흑마술로 지배하는 자들이었다.

"자! 그럼 잔치를 시작──"

"다들 예쁘게 모였군."

1호제자 살육여왕이 게헨나의 술식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2호제자 돈벌레와 3호제자 시체광은 시전을 도왔고 4호제자 골드드래곤은 자신의 마력을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이로서 지옥의 지식과 드래곤의 마력이 합작한 가공할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손맛이 좋겠어."

무엇보다.

텔로리안이 마법진을 사용했다.

[메타매직 : 초강화]

[메타매직 : 범위증가]

[전승포인트 4점을 소모합니다]

[잔여전승포인트 : 12]

고대의 전승을 떠올려 차후에 시전하는 주문의 위력과 범위를 배가시킨다. 상식적으로 하나의 주문에 담아내지 못할 마력이 모여든다.

[9위계, 지옥의 로어]

[레인 오브 인페르노(Rain of Inferno)]

[종말을 목도하라.]

그리고.

산악오크들은 멸망했다.

14. 열네번째 연구 - 최후의 로드(6)

하나의 주문이 얼마나 강력한 효과를 지닐 수 있는가? 텔로리안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보여주었다.

"종말을 목도하라!"

하늘에서 빗발치는 유황불이 전면에 보이던 괴물들을 모조리 쓸어내렸다. 협곡을 가득 매울 정도로 많던 오크족 전사들도, 전사의 처자식들이 살아가던 수많은 움막들도, 놈들이 부리던 식인괴물과 끔찍한 조형물들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끔찍한 절규와 함께 모조리 허물어졌다. 피부에 옮겨붙은 유황불은 전신으로 퍼져가며 끔찍한 고통을 주었다. 오크와 괴물,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고 모든 요소들이 남김없이 녹아내렸다.

"허, 허억······"

"저건 대체······"

병사들은 산악오크들의 잔학성에 분노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일족이 통째로 녹아내리는 광경에는 전율할 수 밖에 없었다. 폭력성을 타고난 소수의 일원, 예컨데 벨라디아 여왕같은 이들만 시원하게 박수를 쳤다.

"포도주를 대령하고 잔치를 열어라!"

"·········예?"

"놈들은 짐의 영토를 침범하고 짐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족속들이다. 그러니 짐은 놈들의 파멸을 즐길 것이다! 건배하라"

[하나의 주문으로 광범위한 파괴를 유발!]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8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13]

"어······"

흑마법사 바르굴은 거인화를 해제하고 땅굴에 몸을 던져 살아남았다. 상대가 시전했던 [레인 오브 인페르노]는 철저히 양민학살을 위해서 고안된 지옥의 주문이었다. 같은 위계에 속하는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시전해도, 이토록 광범위한 파괴를 불러일으키진 못한다.

'그런데 일개 인간이 어떻게 지옥의 주문을 사용했지? 이건 불가능하다!'

본래 [심연의 로어]나 [지옥의 로어]를 사용하려면, 자신처럼 혼과 육을 악마들에게 팔아야한다.

'그런데 텔로리안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고도 흑마법을 사용했지? 말이 안된다!'

뿌득!

늙은 오크는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현실로 벌어진 일에 불가능하다고 따져봐야 소용 없는 일이다.

'······반드시 오늘의 치욕을 복수해주마.'

놈의 주문으로 자신이 평생을 쌓아온 것들이 단번에 사라졌다. 다양한 종족에서 납치했던 열두명의 아내들, 심연에 제물로 바치고자 애지중지 키워낸 자손들, 세계정복을 위해 육성하던 제자와 부족원들까지······

'반드시 복수하겠다!'

네가 나의 소중한 것을 빼앗았으니 나도 네놈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주마! 내가 반드시 힘을 기르고 돌아와······

"들어주기 딱하군."

"······?!"

어느새 바르굴의 코앞에 은빛의 여전사가 나타났다. 그녀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황불이나 바르굴이 내뿜는 심연의 기운에도 영향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걸어가는 자리를 별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지.

"언제나 빼앗는 입장인 존재는 없느니라."

"너는 정체가 뭐──"

여전사가 양손을 휘둘러 무엇인가를 내던졌다. 바르굴은 공격에 대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세상이 뱅그르르 돌더니 시야가 낮아졌다. 그리고 눈앞에선 목이 잘려서 스러지는 늙은 오크의 몸뚱이가 보였다.

'어······?'

바르굴은 당황해서 눈꺼풀을 깜빡이려고 했으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뒤이어 자신을 비웃는 심연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만 쉬어라. 가엾은 자야."

여전사는 부메랑처럼 회전하며 돌아온 차크람들을 양손으로 간단히 잡아냈다. 필멸자 최고 수준의 전사들이나 선보일법한 기예였다.

"·········"

여전사는 지옥불에 타죽은 수만명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어떠한 사후세계로도 떠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조상신들은 영묘를 파헤친 후레자식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태양신은 사교도들을 모조리 심연에 던져버리길 원했다.

"본신이 너희를 거둬주마."

여전사는 의복을 벗어던지고 양손을 펼쳐보였다. 이에 길잃은 원혼들이 그녀의 육신에 깃들었고, 은빛뱀은 그들을 먹어치워서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오크들의 영혼을 흡수한건가?"

"그래."

"영혼을 흡수하는건 어떤 느낌이지?"

"그들의 삶과 기억을 본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보다 고등하고 신성한 존재로 바꾸어나가는 작업이지."

이제 아엘타나르는 산악오크들의 삶을 이해했다. 그들의 삶은 오늘날의 세계에선 용납되지 못할 방식이었지만, 자신은 그러한 결함까지 관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너]는 바실리스크 시절의 [너]와는 다르군."

끄덕.

"나는 수천 년에 걸쳐 카람샨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의 영혼을 공양받았다. 때문에 카람샨인들이 살아가던 방식은 나의 정체성 그자체이지."

[신격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해!]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8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4]

"그럼 산악오크들의 정체성도 섞였겠군?"

"그래봐야 대양에 조그만 강줄기를 끌어온 정도다. 나는 산악오크들이 살아간 방식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러한 방식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카람샨에서는 금지되었던 행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결국 신격의 모습은 숭배자들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한다. 신은 기도를 통해서 탄생하는 존재이며, 기도란 필멸자의 결핍에서 시작되는 행위였으니까.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소."

"뭐지?"

"벨라디아가 에스실에 새로운 종교들을 들여올 계획이더군. 어차피 국교도 없어졌으니 다양한 종교들을 경쟁시켜서, 통치에 제일 협조적인 종교를 지지해줄 생각인 모양이오."

텔로리안은 바르굴의 잘려나간 머리통을 챙겼다. 벨라디아에게 건네줄 선물이었다.

"당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되겠지."

"관심 있는 소식이군. 알아두겠다."

아엘타나르는 은빛뱀으로 돌아갔고 텔로리안은 자신의 막사로 워프했다. 막사의 외부에선 지옥의 풍경처럼 변해버린 계곡이 보였고, 그러한 참상이 한번의 마법으로 이뤄졌음을 알고 있는 인간들의 탄식이 이어졌다.

"맙소사······이게 뭐야?"

"이게 잿빛현자가 시전한 마법이라고?"

"애초에 군대는 의미도 없었잖아······"

"·········우리를 정말 많이 봐주고 있었군."

특히 내전기에 헤링턴 가문과 대립했던 귀족들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들의 영지가 지옥처럼 변할 수도 있었음을 깨달았으니까.

[병사들을 데려온 이유가 저것이냐?]

[그렇소. 공포를 전달할 이들이 필요하니까.]

이제.

자신도 벨라디아도 대륙적인 주목을 받는다.

[그러니 힘을 숨기는 일보단 만만히 보이지 않는 일이 우선이오. 산악오크들을 멸하고 대산맥의 블랙드래곤을 사냥하면 충분하겠지.]

다만 겉보기와 달리 무리를 했었다. 37레벨에 불과한 자신이 9위계 주문을, 지옥의 로어로 시전했으니까.

[그러니 이번에 보여준 강함은 상당히 과장된 편이지만······허세도 필요한 일이 아니겠소?]

바닥에 고급양탄자를 소환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해서 신체에 부담이 가버린 상황. 이럴 때에는 포션에 의존하지 않고 명상을 통해서 회복해야한다. 포션은 태생적인 회복력을 앞당겨쓰는 마도구니까.

[그럼 나는 한동안 쉬겠소.]

[뒷수습은 맡겨두어라.]

명상을 시작하고 세상의 문제를 잊어버렸다. 스스로의 내면에만 집중해 정신적으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다.

'쉽지 않군.'

녹아내리던 유아들이 떠올랐지만 잡념으로 간주했다. 이번 조치는 필요한 일이었다.

* * *

며칠간 철야명상을 행하자 마나순환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전신이 땀으로 젖었기에 세신을 마치고 환복했다. 상쾌한 기분으로 막사를 나서자.

"·········?"

눈앞에 믿지 못할 모습이 펼쳐져있었다. 신들보다 멀리 내다보는 권능을 깨우치고 이정도 당혹감을 느낀건 상황은 처음이었다. 한없이 0에 가까운 확률이 현실로 벌어진 상황이었으니까.

[아엘타나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너를 대신해 임시로 항복을 받아줬다.]

아니.

그러니까.

[어째서 적들이 항복을 했다는 말이오?]

[그건 당사자에게 물어보는게 좋겠지.]

자신의 막사를 둘러싼 원정군의 막사들은 모조리 비어있었다. 오직 잿빛현자가 홀로 항복을 받아준다. 그것이 적의 항복조건이었다.

"·········"

반면에 항복을 위해 찾아온 행렬은 장엄했다. 드래곤의 뼈로 만들어진 대검을 짊어진 드래곤본(Dragonborn) 근위병들이 양옆으로 사열해있었다. 그들은 드래곤의 피를 나눠받음으로서 태어나는 유사용종들로서, 한층 대중적인 이름으로는 리자드맨이라고 불린다.

"흐음·········"

"마음에 드는가?"

"·········글쎄······이건 염두해둔 경우가 아니라서 무어라 답해야할지 모르겠군······"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모습은 무릎 꿇은 흑발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루한 차림으로 쇠사슬에 꽁꽁 묶여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정수리에 돋아난 큰뿔과 파충류특유의 뱀눈이 진정한 정체를 드러냈다.

"살려다오."

쿵!

여인이 이마를 땋에 찧었다.

"살려다오."

쿵!

"레어도 보물도 모두 주겠다. 살려만다오."

쿵!

그녀는 뿔이 부러질 때까지 이마를 땅에 부딪치며 절했다. 심지어 뿔이 부러지고 이마에서 피가 흘러도 고두를 멈추지 않았다.

"살려다오."

쿵!

"살려다오."

쿵!

"살려만 주면 뭐든지 내어주겠다."

"············"

고두란 이마에 땅을 찧으면서 절하는 행위, 사람이 사람에게 취할 수 있는 제일 굴욕적인 행위다.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였으니까.

"살려다오."

"············"

"살려만다오."

쿵!

쿵!

"살려다오."

"·····················"

굉장히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불멸자란 자들이 필멸자를 언제나 내려다보듯이, 용족들은 언제나 다른 하등종들을 깔아보지 않았던가?

"그만하도록."

"살려줄 것인가?"

"······그건 생각해봐야겠군."

"살려주겠다고 할때까지 절을 바치겠다."

쿵!

"살려다오."

쿵!

"살려다오."

"············"

몇번을 확인해봐도 눈앞의 여인은 검은폭군이 맞았다. 그녀의 외형적 특징은 용종임을 드러냈으며, 폴리모프로 인간을 위장하면 생기는 마나배열이 관찰되었으며, 용족의 마력도 느껴졌으니까.

"제발 살려다오."

"·········"

"제발 살려만다오."

검은폭군의 생존을 위한 집념에 모두가 경악했다. 은빛뱀은 동질감에서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고, 벨라디아는 상황을 믿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금빛왕자는 고개를 숙여서 비탄과 분노를 감춘다. 얼마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에서 용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살려주마."

"정말이냐?"

"대신 3가지 조건이 있다."

[드래곤을 위압해서 투항을 받음!]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38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16]

14. 열네번째 연구 - 최후의 로드(7)

"첫째. 레어의 보물을 모두 양도해라."

"알겠다."

"둘째. 신종선서를 바쳐라."

"알겠다."

2호제자 돈벌레가 주문으로 인장반지를 주조해왔다. 인장반지의 문양은 잿빛까마귀. 대부분의 지역에선 교활하고 불길한 짐승으로 통하나, 일부 지역에서는 지혜의 상징이다.

"나, 검은폭군 카르베날로어는 잿빛현자 텔로리안에게 맹세한다. 나는 당신의 충성스런 봉신으로, 당신의 칙령을 따르고 당신의 적들에게 맞설 것이다. 이는 드래곤의 언약이다."

이에.

주군이 화답한다.

"잿빛현자 텔로리안은 로어를 증인으로 삼아서, 그대의 봉사에 다음같이 보답하리라 맹세한다. 충성에는 보호. 신의에는 믿음. 배신에는 죽음. 이로서 우리의 계약이 성사되었다."

별도의 마법적인 조치가 행해지진 않았다. 하지만 계약의 당사자들은 약속의 신성함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걸로 안심이 되는가?"

"살려줘서 고맙다. 주군."

"이제부터 나의 질문에 답하라."

"알겠다. 주군."

묻는다.

"어째서 항복했나?"

"살고 싶었으니까."

"나와 싸우면 죽었으리라 생각하는가?"

"분명하다. 그냥 죽지도 못하고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서 경매장에 올라갔을 것이다."

······자신은 미래를 내다보는 권능, [미래시]를 지녔다. 덕분에 이런 상황도 예상하긴 했었다. 다만 확률이 대단히 낮다고 봤을뿐.

"드래곤의 긍지는 어디로 갔는가?"

"긍지를 지키면 살아남는가?"

"············"

"모든 생명체들에겐 삶을 이어나갈 사명이 있다. 그리고 삶을 이어가려면 때와 장소에 맞추어 행동하는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검은폭군의 발언에 금빛왕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활동하는 드래곤 가운데서는 손꼽히는 강자였다. 당연히 용족의 긍지를 지키면서 활동한다고 믿어왔는데······

[연구진전 : 최후의 드래곤로드]

[표본이 새로운 생존전략을 배웠습니다!]

[연구단서 5/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8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7]

"좋은 문답이었다. 덕분에 지식이 늘었군."

자신은 은연중에 모든 드래곤들이 오만하다고 가정했다. 또한 과거의 지식으로 미루어본다면, 그러한 가정은 진리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진리도 변하는 법이군. 엘프들도 인간과 섞이기를 선택한 부류는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듯, 오만함을 내려놓은 드래곤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이로서 대산맥 원정은 처음에 계획한 목표를 이루었다. 산악오크들은 더이상 왕국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고, 자신은 [드래곤을 복종시킨 마법사]로서 악명을 얻게 되리라.

"그럼 세번째 요구는 무엇인가? 주군."

"나의 4호 제자를 도맡아서 양육해라."

"?!"

이에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던 금빛왕자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을 내놓지 않으면 왕국을 초토화시키겠다는 드래곤에게 저런 부탁을?!

"알겠다. 하지만 나도 질문이 있다."

"묻도록."

"주군은 용족들의 관습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

"한데 어째서 내게 양육을 맡기는가?"

드래곤은 레어에 결코 다른 드래곤을 들이지 않는다. 예외는 둘뿐인데 하나는 성룡(Adult Dragon)에 이르지 못한 자녀들이고. 다른 하나는······

"너의 아들처럼 기르란 뜻이다."

"금빛왕자는 나의 아들이 아니다."

"그러니 아들처럼이라고 했지."

검은폭군은 대단히 당혹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불복이나 항명이 아니라, 생각치도 못한 개념을 들어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아들이 아닌데 어떻게 아들처럼 대하는가?"

"본래 드래곤은 누구에게도 충성맹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는 내게 충성맹세를 바쳤군. 어째서지?"

·········

생존을 위해서였다.

"지금도 똑같이 받아들이면 된다."

"명령이라면 따르겠지만······내가 금빛왕자의 양육을 잘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해츨링이라면 모르겠지만, 금빛왕자는 이미 드레이크잖나?"

드레이크는 드래곤의 생애주기를 뜻하는 단어로, 인간의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시기다.

"그래서 그대에게 맡긴 것이다."

"설명을 부탁하고 싶군."

"금빛왕자는 유년기를 인간들과 함께 보내서 드래곤의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범적인 성룡의 곁에서 용족의 생애에 대해서 습득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드래곤이 보물창고와 동의어로 변하고 있는 시대다. 이러한 시기에 안정적으로 레어를 꾸려서, [검은폭군]이란 이명까지 얻었다면 성공적인 용생을 살고 있는 것이겠지.

"체벌이 허용되는가?"

"물론이다. 죽음에 이르거나 영구적인 장애를 입을법한 상해만 배제하고."

이에 검은폭군은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고 텔로리안은 금빛 왕자를 뒤돌아봤다. 의문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금빛왕자가 보였다.

"질문을 허락하마. 테사리안."

"·········"

인간에게 길러지고 자라난 금빛왕자에게 동종을 마주해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인간 부모님들께선, 성룡에 이르기 전에는 동족을 만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바가 있었다.

"당신은 나의 친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린 황금용이 물었다.

"전대 로드를 뜻하는가?"

"그렇습니다."

테사리안의 아버지는 드래곤로드였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면 [망국의 개혁군주]에 가까울 것이다. 몰락해가는 동족들에게 지금처럼 살아선 아니된다고 처절히 부르짖다가, 자신이 구하려던 동포들에 의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셨던 분······이라고 테사리안은 생각하고 있었다.

"저의 친부께선 언제나 우리 용족들이 다른 종족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동족들의 증오를 받아서 제명을 누리지 못하셨죠."

드래곤은 여전히 최강의 필멸자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파괴의 대악마조차 모험가들을 당해내지 못하는 시대다.

"그래서 저는 부친께서 친구라고 부르던 인간들의 손에서 자라났습니다. 하지만······그들과 오랜 시간을 지낼수록 느끼게 되더군요."

그럼에도.

드래곤들은 차이를 느낄 수 밖에 없다.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

"인간은 몸이든 정신이든 너무 연약한 생물들입니다. 마차에만 치여도 죽어버리고 자식을 잃으면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금빛왕자는 또래의 인간들과 물장구를 치면서 자라났다. 모두가 강인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좋아해줬다. 아주 어린 시절엔 등에 친구들을 태우고 비행했던 기억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약했으며.

빠르게 늙어갔다.

"과연 아버지께서 정말 옳으셨던 걸까요?"

"·········"

"실은 우리가 다른 종족들보다 우월한 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 종족의 위대한 영광을 되찾으려면 아버지의 말씀과는 반대로 가야할지도 모르죠."

테사리안의 뱀눈이 번득였다.

"검은 폭군이여.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까부터 너의 말을 들어주곤 있다만······"

검은폭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어떤 말씀이신지?"

"네가 전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겠단 말이다. 죽은 로드가 뭐라 주장했든 너와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로드의 삶은 로드의 삶일 뿐이다. 너와 나와는 관련이 없다."

파충류들은.

특히 드래곤들은 고독한 생물들이다.

"마찬가지로 용족이 쇠하든 아니든 그것도 나와 관계가 없는 일이다. 나는 약한 동족을 잡아먹는데 거리낌이 없고, 다른 동족들도 내가 어린 시절에 나를 노렸었다. 한데 내가 어째서 다른 드래곤들의 삶에 관심을 지녀야하느냐?"

금빛왕자는 머리를 꼬리로 두들겨맞은 기분을 받았다. 자신의 동족들에겐 [동족]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거나, 대단히 희미해보였으니까.

"하지만 전대 로드는 특이하게도 동족들에게 각별한 유대감을 느꼈다. 그리고 똑같은 유대감을 다른 용들에게도 강요했다. 그래서 살해당했다."

동포에 대한 무관심함에서 금빛왕자는 깨달았다. 드래곤들은 종적인 전성기를 맞이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종적인 쇠퇴기를 맞이한 적도 없었다. 단지 개별적인 드래곤들의 삶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의 부친께서는 드래곤로드였지 않습니까? 모든 드래곤들을 다스릴 권한을 보유한 드래곤들의 제왕."

이에.

검은폭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아버지는 제일 강력한 드래곤이었지."

"·········"

"그래서 영역다툼에서 언제나 우위를 인정받았고 번식철에도 제일 뛰어난 암컷을 선택했다. 게다가 분쟁이 벌어지면 중재자 역할도 수행했었지. 그래서 로드로 불렸던 것이지만, 다른 드래곤들에게 명령할 권한은 없었다."

······인간들과 함께 자란 금빛왕자는 [로드]라는 단어에서 지도자나 군주를 연상했지만, 홀로 살아가는 생물들의 로드는 무리 짓는 생물들의 로드와 같지 않았다.

"당시대에서 제일 강력한 드래곤."

그때.

지켜보던 텔로리안이 끼어들었다.

"용병왕이 왕이 아니듯 드래곤로드도 로드가 아니다. 단지 로드라고 불릴만큼 강력한 드래곤을 의미하는 단어일 뿐."

이에 금빛왕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런 취약한 지도력으론 쇠퇴하는 동족을 구해낼 방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카르베날로어.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냐. 내가 너를 맡아서 길러주마."

"아니. 단순한 양육으론 부족합니다."

금빛왕자가 총명한 금안으로 물었다.

"저는 동족들을 설득해서 용족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싶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희가 더이상 쇠락해가는 종족이 아님을······"

절레절레.

검은폭군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무리 짓는다면 그것은 용이 아니다."

"·········예?"

"나는 레어를 넓히고 확장시키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리고 레어는 온전히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예외는 번식철에 찾아온 수컷들과 내가 직접 낳은 해츨링들뿐이지."

그녀는.

표정을 찡그렸다.

"한데 내가 어째서 레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다른 드래곤들에게 관심을 지녀야하는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군······"

금빛왕자 테사리안은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자신이 꿈꿔왔던 동족이 아니었다.

"검은폭군이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세상의 모든 용들이 집결한다면 드높은 태양신조차 경계할 것이고, 심연과 지옥의 주권자들은 질겁할 겁니다. 저희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힘이 있습니다."

음.

끄덕.

"그래서 나의 레어엔 어떤 도움이 되느냐?"

"세상의 지배권을 회복한다면──"

"그러다 태양신이 번개를 내리치면?"

"·········"

"신들조차도 하나로 합쳐진 용족의 힘을 당해내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처럼 어중간한 드래곤은 간단히 죽이겠지."

용족은.

개인의 자아가 너무나 강했다.

"그러니 내겐 신들의 힘이 닿지 않는 대산맥에 둥지를 꾸리고 이곳을 지키는게 제일 현명한 선택이지. 뭣하러 네 호출에 응하겠나?"

······테사리안은 검은폭군의 대답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진정으로 실망스런 사실은 다른 용들의 대답도 똑같으리란 점이었다.

"또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잡소리가 길군."

"마지막 질문입니다."

"마지막이라면 허락하마."

꿀꺽.

침을 삼키며 질문을 던진다.

"그럼 어째서 저를 요구하셨습니까?"

"?"

"당신은 저를 내놓지 않으면 왕국을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저희 아버지에게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그랬던게 아닙니까?"

이에 검은폭군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본모습을 드러냈다. 완전히 자라난 블랙드래곤이 강림한다. 홀로 국가를 파괴할만한 괴물.

[엉뚱한 망상에 소질이 있구나. 귀염둥이.]

······

귀염?

둥이?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운명을 지녔지.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후손을 낳아서 죽음을 속여야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콱!

검은폭군의 육중한 발톱이 금빛왕자를 낚아챘다. 소년도 뒤늦게 황금빛을 발하며 본신을 드러냈지만, 드레이크에 불과한 금빛왕자가 고룡(Wyrm)에 가까운 검은폭군을 당해낼 방도는 없었다. 덩치차만 대여섯 배는 되었으니.

[나는 언제나 자식들이 예쁜 비늘을 가지길 바랬다! 그럼 가자꾸나!]

금빛왕자가 피어를 지르며 항의했지만 검은폭군은 아랑곳않고 날아올랐다. 텔로리안은 뿌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스승님! 이게 뭡니까아아아아──!"

"마법사에게 유소년기에 연상의 이성에게 봉사해보는 경험은 중요한 관례다. 어린 나이에 육신의 쾌락이 덧없음을 알아야 성인이 되고서 지성을 쌓는 즐거움에 집중할 수······"

[연구진전 : 최후의 드래곤로드]

[표본에게 최고의 양육자를 구해줬습니다]

[연구단서 6/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39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18]

자.

4호제자는 위탁교육을 보냈고.

이젠 평화를 즐길 시간이었다.

* * *

대산맥 원정군은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개선했다. 백성들은 식인오크들을 일망타진한 영웅들을 진심으로 환대했고, 장병들은 들뜬 마음으로 허세가 섞인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한데 우리가 했던 일은 별로 없지 않나?'

'잿빛현자님을 우리가 호위해드렸잖아.'

'점령지에 깃발도 꽂아놨고!'

'그렇군! 우리는 날로 먹은게 아니었어!'

병사들은 양심의 가책을 내려놓고서 자신들의 공적을 부풀렸다. 덕분에 텔로리안의 파괴적인 주문에 대한 이야기는 생각처럼 널리 퍼지진 않았지만······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은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다.

"한 번의 마법에 산악오크들이 전멸했다고?"

"그렇습니다. 은행장님."

"드래곤이 고두하며 충성을 맹세했고?"

"그렇습니다. 은행장님."

······텔로리안은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강자였다. 그렇다면 대하는 방식도 달라져야한다.

'원금만이라도 돌려받아야겠군.'

그래.

본전이라도 챙겨야한다.

괜히 무리수를 두지말고.

15. 막간(1) - 황금은행

금융(金融)은 자본의 흐름을 관장하는 산업을 뜻한다. 하지만 중세랜드에선 금융이 산업이 아니다. 그냥 사악한 돈놀이지.

다시 말해서.

천대직종이다.

이종족이나 종사하는.

"부디 원금만 돌려주시오."

"원금?"

"여왕이 검은폭군에게 압류해온 전리품의 가치가 원금과 정확히 일치하더군. 그것만 넘겨주시면 이번 거래를 끝내드리겠소."

중세랜드에서 국왕과 대영주들의 파산은 빈번하며, 채권자들의 권리는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황금은행은 전투골렘과 용병대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리고 영토와 이권을, 때로는 사람을 추심해갔다.

하지만.

드래곤을 봉신으로 부리는 마법사에겐 의미가 없는 수단들.

"알다네스와 미르칼."

""네. 스승님.""

"나가 있어라."

제자들부터 물렀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일. 자라나는 새싹들에겐 보여주지 말아아야하는 것이다.

"원금을 상환하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

"·········?!"

"벨라디아가 파산을 선언해도 당신들은 대응할 수단이 없다. 이전처럼 전투골렘들을 데려와서 위협해볼 생각인가?"

······금융왕은 잿빛현자가 자금을 융통한 순간부터 갚을 생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대단한 낭패였다.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을 염두해두고 판을 짜놨던 것일테니까······

"젊은 마법사여."

하지만.

자신은 200년 관록의 은행장.

무력이 통하지 않는 강자들도 상대해봤다.

"나는 그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그건 위협인가?"

"충고라고 해두지."

위협이 맞았다.

한번은 참아준다.

대출을 톡톡히 써먹었으니까.

"하지만 자네는 지혜로운 마법사니까 알고 있을거야. 세상에는 자네보다 현명하고 강력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두번은 참아준다.

상대가 화날만하니까.

"자네는 내게 빚을 갚아야할 근거를 물었지."

양복쟁이 드워프가 다부진 눈길로 자신을 노려봤다. 금융왕 다그렌은 골든홀드를 다스리는 드워프족의 대장로. 인간 국왕이 파산을 선언하면 일부라도 돌려달라고 빌빌 기어야하는 평범한 은행장과는 입장이 대단히 다르다.

"하나. 드워프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그것은 위협인가?"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손가락을 펴보인다.

"둘째. 헤링턴 왕조는 명예를 걸고 자금을 융통했다. 채무를 상환하지 않으면 앞으로 누구도 헤링턴 왕조의 약속을 믿지 않겠지."

중지가 올라간다.

"셋째. 내게 자네를 쓰러뜨릴 무력은 없지만, 자네를 싫어하는 이들을 만들어낼 재력은 있지. 이것이 자네가 빌려간 원금을 한푼도 빼먹지 않고 갚아야할 근거다."

금융왕은 답변을 끝마쳤다.

"그럼 이쪽이 대답할 차례군."

"얼마나 현명한 답을 내놓을지 기대하겠다."

텔로리안도 손가락을 펴보였다.

"하나. 당분간은 누구도 나를 적대하길 원치 않을 것이오. 내가 어느정도의 힘을 지녔는지 누구도 가늠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백작가를 왕가로 옹립한 퀸메이커.

발로르를 살해한 공격대의 마법사장.

블랙드래곤을 봉신으로 삼은 마법사.

두각을 드러내고 4년만에 이룬 성과.

"둘. 황금은행은 언제나 이윤만을 쫓아왔기에 친구가 없소. 그러니 당신들의 불행을 동정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소. 당신들의 몰락에 환호할 사람은 대단히 많겠지만."

각국의 문명 종족들은 산악오크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에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전사여왕과 잿빛현자의 이름에 열광하고 있었다. 만일 자신들이 증오받는 사채업자들의 돈을 떼먹는다면?

모두가 환호할 것이다.

정의가 구현되었다면서.

"셋. 모두 죽이면 원한도 남지 않는다."

"·········뭐?"

"당신과 당신의 일족들은 수많은 채무자들의 증오를 사게 됐지만 그들을 끝장내진 않았다. 이것은 중대한 실수다."

툭툭.

책상을 두드린다.

"나는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두고 보──"

다그렌은 황급히 텔레포트 주문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림자에서 번개처럼 튀쳐나온 인영이 검광으로 초승달을 그렸고 다그렌은 주문서와 함께 수십갈래로 쪼개졌다.

"흥."

착!

글로린마르가 엘프식 곡도를 허리춤에 꽂았다. 검속이 워낙에 빨라서 칼날에 핏방울조차 묻지 않은 모습.

"드디어 죽었군! 쓰레기 자식! 퉷!"

글로린마르는 나자빠진 다그렌에게 침을 뱉고서, 시체를 완전히 조각내어 독수리들에게 던져줬다. 시체가 없으니 부활도 불가능하겠지.

"기다리느라 고생하셨소. 글로린마르 대사."

"복수의 기회를 주어서 진심으로 감사드릴 따름이오. 이걸로 동족들이 한층 안전해졌군."

다그렌은 영원궁정이 작성한 살생부의 1페이지에 자리잡은 표적이었다. 엘프노예 공급망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인물이므로.

"잿빛현자님께선 처음부터 놈을 만난 적이 없던 것이오. 마탑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가 노상에서 습격해서 죽였으니까."

끄덕.

정치와 암살은 하이엘프들의 특기다.

오래 살면서 배우는게 그것뿐이니까.

"정치적 후폭풍은 괜찮겠소?"

"똥자루놈들도 이번 사건을 키우길 원치는 않을 것이오. 우리 엘프들만 제국을 경계해야하는 입장이 아니니까."

현재 하이엘프와 드워프들은 제국을 견제한다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북부연합]에 가입한 상태. 젊은 종족들에게 맞서서 늙은 종족들이 힘을 합친 것이다.

"그럼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의 정치적 여파는 영원궁정에서 해결해주시리라 기대하겠소."

끄덕.

"맡겨만주시오."

다그렌의 죽음은 대륙 외교가에 커다란 파문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하이엘프들이 덮어버릴 것이다. 그들이 물밑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니까.

'무엇보다 골드드워프들은 동족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대단히 나쁘지. 일반적인 드워프들은 동족의 일이라면 덮어놓고 도와주는데, 골드드워프들은 주판부터 튕겨보거든.'

그래서 다른 드워프들은 대장로가 백주대낮에 살해당한 사건에도 정략적 이득부터 따져볼 것이다. 그것이 골드드워프들이 했던 일이니까.

"벨라디아. 작성해둔 격문을 뿌려라."

"·········정말로 이걸 포고해도 될까요?"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이 작성해둔 포고문을 읽고서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쁜 모습이었다. 벨라디아의 입장에선 이성을 잃어도 이해될 상황임에도 상황판단을 우선하고 있었으니까.

[연구진전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냉정함'을 배웠습니다.']

[연구단서 7/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9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19]

"사건이 저희 통제를 벗어날텐데요."

"이번에 드워프들도 배울건 배워야지."

내밀한 비밀을 실토하자면 나는 이종족들이 좋다. 만약에 시네어 행성이 인간만의 행성이 된다면 대단히 슬프겠지.

"남의 땅에서 장사하고 싶다면 겸손과 눈치를 갖춰야지. 그게 인간이든 드워프든."

하지만 특별대우를 해줄 생각은 없다. 상황파악도 못하고 오만하게 굴어대는 자들에겐 더욱이.

[나, 고귀한 가문들의 추대에 힘입어 에스실 왕국을 통치하는 벨라디아 1세가 충성스런 신민들에게 중대한 소식을 알린다. 금융왕 다그렌은 잿빛현자 텔로리안에게 다음같은 협박을 가했다. 전사여왕의 처녀성을 차지하고자 거금을 지불할 음습한 취향의 대부호들은 얼마든지 있으니·········(중략) 따라서 짐은 왕권의 신성함과 왕국의 존엄을 되찾고자 골든홀드에 대한 개전을 선포하는 바이다.]

여긴 중세랜드다.

모욕은 개전사유.

"감히 장사치들따위가!"

"감히 난쟁이똥자루들이!"

"""모두 죽여라!"""

분노한 군중들이 무리를 지어서 드워프 거주구역으로 몰려갔다. 영민한 드워프들은 자신들은 골드드워프가 아니며, 물건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고 해명해서 목숨을 구했으나······

"닥쳐!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지!"

"당장 꺼지지 않으면 죽이겠다!"

완강한 드워프들은 고집을 부리다 모조리 학살당했다. 수많은 대장간이 파괴되고 창고들이 약탈되었다. 특히 골드드워프들은 산채로 사지가 찢어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이건 횡재로군!"

각지의 영주들은 드워프들을 구해주는 대가로 공방과 재산을 압류했다. 또한 벨라디아가 골든홀드 원정군을 소집하자 명분과 이득이 확실하다고 판단해 모든 영주들이 모여들었다.

"오오! 눈엣가시같은 황금은행을 친다고?!"

"골든홀드를 멸망시키면 빚도 사라지겠군!"

"누이를 팔아먹은 원수놈들! 모두 죽여주마!"

"싸움이야?! 나도 끼어야지!"

에스실만이 아니었다. 골드드워프들을 파멸시킬 동기를 보유한 사람들은 모조리 벨라디아의 군세에 가담했다. 출정 당시에 2만이던 군세는 단숨에 4만이 되었고 머잖아 10만까지 불어났다. 대군은 모든 방해물을 처부수며 골든홀드로 진군했다.

"어서들 오시게."

"············"

하지만 대군은 행렬을 멈추었다.

다리를 가로막은 한명의 사내에 의하여.

"나는 드워프 12지파를 대표하는 산맥왕, 나엘람-다르라카드일세."

드워프왕은 어마무시한 장신(드워프치고는)의 사내였다. 그는 신들조차 탐낼 병장기로 무장했으며, 그러한 병장기로 마법같은 무예를 선보일 수 있는 전사였다. 수백년을 단련한끝에 필멸자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초인.

"넬람이라고 불러도 좋네."

"·········"

"자네들 가운데 내게 도전할 배짱을 지닌 진정한 전사가 있다면 말이지만! 핫하!"

드워프들도 수많은 고대종들처럼 쇠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종적인 단위의 이야기일뿐이다. 여전히 드워프들의 도시는 대단히 부유하고 전사들은 굉장히 강맹하다.

"아무도 없는가?"

"············"

때문에 드워프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내는 직위에 합당한 강력함을 갖추고 있다. 100년도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들로선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만한.

"반갑습니다. 산맥의 왕이여."

"흠?"

전사여왕이 걸어나오자 산맥왕의 천둥같은 눈빛이 누그러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꼬맹이나 다름없는 나이의 인간이었다.

"에스실의 여왕이 산맥의 왕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한데 어째서 당신은 본인의 정당한 복수를 가로막습니까?"

벨라디아는 갑옷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서둘러 앞장서느라 갑옷을 챙겨입을 시간이 없던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비무장 상태로 나선 것이었다. 산맥왕이 자신에게 다짜고짜 망치부터 내리치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

'이것 보게? 대단히 영악한 꼬맹이군.'

산맥왕 넬람은 굉장히 오랜 세월을 군림해온 통치자였다. 덕분에 사람을 쳐다만 보아도 본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생겼다.

'······그정도가 아니라 아예 야수가 사람행세를 하고 있었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잔혹한 야수가 훌륭한 군주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바위트롤이 몽크가 되었다는 괴소문만큼이나 기이한 일이다.

"대화에 앞서 묻고 싶은 사안이 있군."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스승이 누구인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야수에게 삶을 가르친 기적의 조련사와.

15. 막간(2) - 산맥왕 넬람

"우리는 왕들의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

"그러니 조언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미뤄두고 주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시다. 우선 당신은 나보다 훨씬 강대한 군주임은 분명합니다."

드워프들은 돌에서 빚어졌기에 인간보다 훨씬 굳세고 강인했다. 또한 손재주가 뛰어나고 광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어, 드워프들의 제왕은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군주였다.

"당신은 강을 메우고도 남을만한 황금을 지녔고 악마들조차 두려워할만한 군대를 지녔습니다. 황제에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권세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왕이듯 나도 왕입니다. 또한 진정한 왕이라면 결코 모욕을 참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국의 왕이나 대국의 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도 왕권의 신성함을 이해하는 분이라면 충분히 이해하는 문제겠지요."

드워프들의 체면에 대한 고집은 엘프들의 우아하지만 위선적인 언행만큼 유명했다. 벨라디아도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이번 전쟁을 시작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진정으로 공평무사한 왕이라면, 나의 복수를 가로막을게 아니라 도와줘야합니다. 우리는 같은 왕이니까요."

·········이에 산맥왕은 탄식을 내뱉었다. 전대륙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스스로를 무결한 피해자로 만드는 벨라디아의 언변이 대단히 교활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저렇게 간교한 수완을 가르쳤다는 말인가?

'지금은 바야흐로 인간의 시대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해야하는 문장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외교란, 얼마나 많은 인간들에게 지지를 받느냐로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드워프들의 이권을 지켜내기 위해선, 인간들에게 왕다운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한다.'

드워프들의 사고방식으로 잘잘못을 따져보면 함부로 입을 놀린 다그렌이나 갚을 생각도 없이 돈을 빌려갔던 벨라디아나 똑같이 잘못했다.

'하지만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적용해본다면.'

정확히는.

인간왕들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보면.

'자국의 상인이 타국의 왕을 찾아가서 협박했다. 그것도 노예시장에 팔려가는 전리품에게나 사용할 말투로.'

상업이 발달한 드워프들의 사회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는 갚아야한다고 믿어야할 사람이 다수겠지. .

'하지만 인간 왕족들은 전사들이다.'

전사들에게 금전문제는 사소한 문제이나 자존심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문제다.

'장사치따위가 고작 금전문제로 국왕을 모욕해버린 상황이로군······'

따라서 벨라디아의 전쟁명분은 대단히 정의로우며, 자신이 벨라디아를 가로막으면 힘으로 패악질을 부리는 무도한 군주가 되어버린다.

'······빌어먹을! 완전히 당했군!'

엘프들과 세계를 양분하던 위대한 선조들의 시대라면 몰라도, 오늘날의 드워프들은 무도한 종족으로 보여선 미래가 없다.

자신들은.

저물어가는 종족이니까.

"허허! 그대의 발언에 틀림이 없구려!"

그리하여.

드워프왕은 호쾌한 웃음을 선택했다.

"내가 드워프족을 대신해 에스실의 여왕께 사죄하고 배상하겠소. 또한 신성한 왕권을 능멸한 역도놈들에겐 가장 엄중한 형벌이 내려질 것이외다! 감히 장사치들따위가 국왕에게 협박질이나 하다니! 찢어죽여도 모자랄 놈들!"

드워프왕은 격분한 모습을 보여주어 인간들을 달랬다. 덕분에 벨라디아를 따라온 인간왕공들은 초인과의 전투를 피했다는 안도감을 느꼈고, 동시에 드워프들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이 가능한 상대라는 인식도 지니게 되었다.

"말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언약은 바위보다 무겁소."

"그렇다면 당장 이행하면 되겠군요."

영악한 꼬맹이가 대충 넘어가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룬마스터에게 사태수습을 맡겨야겠어.'

자신은 싸움과 용인술에나 능하지, 언변에 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자신의 조언자인 룬마스터 카인하자드는 다르다.

"큼큼!"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국가간의 사안이 그리 간단히 결정될 사안은 아니잖소? 그러니 복잡한 문제는 실무자들에게 맡겨두고 우린 친목을 다집시다······"

씨익.

벨라디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께 맡기면 문제는 해결되니까.

* * *

잠시 뒤.

만찬장의 뒤편에 위치한 밀실.

"오랜만입니다. 룬마스터 카인하자드."

"자네가 흉참한 음모의 주모자였구만."

대단히 고집스런 인상의 늙은 드워프가 텔로리안을 노려봤다. 하지만 잿빛현자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유지했다.

"그럼 저희측의 요구사항을──"

"자네가 알아서 적어서 내게나."

"흐음?"

"어차피 말싸움은 자네가 이기겠지."

룬마스터는 인상을 구기며 백지장을 내밀었다. 알아서 써내라는 의미였다.

"정말 마음대로 써도 됩니까?"

"정도껏이란 말을 자네도 알테지."

5분만에 드워프들과 에스실 왕국간의 평화협정이 작성되었다. 혼란의 책임은 모두 드워프들이 떠맡았고, 그들은 사죄의 의미로 배상금을 물기로 결정됐다.

"······이건 너무 많지 않나?"

"황금은행의 전재산입니다."

"·········"

룬마스터는 표정만 찡그리고 산맥왕에게 협정서를 가져갔으며, 산맥왕은 허탈한 웃음만을 내보이며 도장을 찍어보였다.

"자네가 모든 일을 계획한 음모가로군."

단.

텔로리안과 면담해보는 조건으로.

"모든 일까지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7할 정도입니다."

"나머지 3할은 꼬맹이의 기지란 이야기군."

"맞습니다."

"꼬맹이를 길러낸건 자네고?"

"절반만 그렇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벨라디아의 부모님들이지요."

이에 산맥왕은 씨익 웃으며 텔로리안을 위아래로 훏어보았다. 그러더니 뿔모양의 술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떠났다.

─────

■풍요의 뿔 (영웅, 보조 아이템)

: 어떤 음료든 상상만하면 충전되는 술잔입니다. 산맥왕이 우정을 맺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건네주는 선물입니다.

■효과 (휴식시 적용)

: 맛이 굉장히 좋습니다

: 체력회복율 +200%

: 마나회복율 +200%

: 자식탄생율 +200%

: 신체발육율 +200%

: (원하면) 광분 부여

: (원하면) 환각 부여

: (원하면) 환희 부여

: (원하면) 용맹 부여

■주의

: 보유자는 드워프왕의 친구로 간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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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조약이 체결되자 다양한 조치들과 후폭풍이 뒤따랐다. 황금은행은 모든 재산을 원정군에게 양도하면서 파산했고, 이에 분노한 예금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골든홀드의 정권이 뒤집히고 체제가 바뀌었다.

"오늘부터 우리는 레드홀드다! 금융같은 사악한 악신을 저버리고 노동만을 섬기리라!"

골든홀드를 지배하던 거상들은 반동분자로 처형되거나 속옷만 입고서 달아났다. 하지만 그들의 말로는 처참했는데, 텔로리안과 글로린마르가 손을 써두었던 덕이었다.

"산맥왕이 그걸 내버려뒀나요?"

"산맥왕도 골든홀드의 거상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드워프 도시가 불타는 꼴을 볼 수는 없어서 지원을 왔던 것이지."

[황금은행을 파멸시킴!]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39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1]

그외에도 평화조약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조항들을 간추리면, 드워프들은 장사할 권리를 보장받지만, 현지법을 존중하고 적잖은 경제적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는 조약이었다.

"드워프들이 원한을 기억하지 않을까요?"

벨라디아가 우려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은 동족이 상해를 입으면 반드시 보복한다고 들었거든요. 한데 이번에 벌어진 폭동으로 많은 드워프들이 죽거나 다쳤잖아요?"

피식.

"원론적으론 그렇겠지."

드워프들의 율법에 따르면 자신도 벨라디아도 살생부에 올랐을 거였다. 그렇지만 드워프들이 오늘날까지 위세를 그럭저럭 유지하는 비결엔, 세태에 발맞춘 유연함(드워프치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걸 받았잖느냐."

풍요의 뿔을 들어보인다.

산맥왕의 친구에게만 하사되는 보물.

"의외네요. 고집쟁이들이."

"지금은 엘프든 드워프든 드래곤이든 변화에 발맞추어 살아남고자 애쓰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도와주는 입장에 있을 뿐이고."

자신은 다양한 종족들이 아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좋았다. 그것이 이쪽 세상의 매력이므로, 앞으로도 유지되길 바란다.

"이종족들을 도와주면 어떤 이득이 있죠?"

"그들도 너를 도와줄 것이다."

이윽고.

에스실의 왕도가 보였다.

"이종족들도 인간협력자를 원하는 중이니까."

"···········"

벨라디아는 고삐를 잡아당겨 지옥전투마를 멈추었다. 왕도에선 수십만의 백성들이 모여들어, 기대 어린 눈길로 여왕의 개선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은 제게 어째서 환호하는 걸까요?"

"흠?"

"어린 시절에는 제가 사람을 죽이면 언제나 저주와 두려움을 받았거든요. 때로는 증오까지 마주해야했죠."

벨라디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본성에 차이가 없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을 죽일 때마다 환호를 받는군요. 무엇이 달라진 걸까요?"

자신은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모조리 꼬챙이에 꿰어버렸다. 또한 산악오크일족 전체를 유황불에 내던졌으며, 골드드워프들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또한.

모든 과정을 재밌게 즐겼다.

그런 감정을 숨기지도 않았고.

"너의 백성들은 죽이지 않잖나?"

"저의 백성들은 유용하잖아요?"

"그게 달라진 점이지."

[소유권을 이전합니다]

[지옥기사단장의 마구(영웅)]

[판데모니엄의 마도서(영웅)]

[바르굴의 해골(영웅)]

"······이걸 전부 저한테 주신다고요?"

"네가 흑마법사로서 마주한 한계를 돌파하게 도와줄 유물들이다. 사용법은 스스로 알아내길 바란다. 너는 나의 수제자니까."

······벨라디아는 선물을 받아들면서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흑마법사로 성장할 때마다 스승님이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니 슬슬 자신의 성장에 제약을 둘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한계를 뛰어넘고 폭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준다고? 대체 무슨 생각이지?'

벨라디아는 스승과의 만남을 처음부터 되짚어봤다. 그는 무엇을 원하고 찾아왔을 것이며,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엔 헤링턴 백작가의 후광을 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본성도 긍정해주는 모습엔 나의 육신을 원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무성애자(혹은 동성애자)임을 깨달은 이후에는, 스승이 자신을 세계정복에 동원할 수하로 길러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스승님은 트롤에게 지성을 부여하고 오크들을 집결시켰다. 게다가 바실리스크를 길들이고 수상한 마법들을 연구하지······'

이것은 세계정복을 원한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한데 선물을 받으면서 의혹이 들었다. 어쩌면 스승님이 원하시는 것이 세계정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스승님."

그래서 결심했다.

묵혀온 질문을 던지기로.

"말해라. 벨라디아."

"저를 제자로 거두신 진의가 뭐죠?"

"너를 장기말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아니오. 어떤 사람도 단순한 장기말에게 지옥의 마력이 담긴 아티팩트들을 대가도 없이 넘겨주진 않아요."

벨라디아는 고개를 들어서.

텔로리안을 바라보았다.

"말씀해주세요. 저를 가르치신 진의가 뭐죠?"

15. 막간(3) - 특별한 인연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