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막간(3) - 특별한 인연들(1)
"멸망을 막기 위해서지."
"멸망이요?"
"그래. 세계의 완전한 멸망을."
잿빛현자는 마침내 자신이 보았던 미래를 증언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예언을 공개하기엔 이른 시기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이들에겐 적절한 때겠지.
"본래 에스실 왕국은 오크들에게 초토화되고, 언데드 역병이 창궐해서 황폐화되며, 사교도들의 득세로 끝장날 운명이었다."
그렇게 삼두룡의 강림이 개시되고 10년 뒤에 메인시나리오가 개시된다. 지금의 세계선에서는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지만.
"중부가 초토화된 이후로 더욱 흉악한 위협들이 대륙에 횡행하고, 그것을 막아내지 못할 때마다 종말계수가 쌓이지. 그리고 종말계수가 임계점을 돌파하면 행성전체가 물리적으로 파멸해버린다."
종말계수가 크게 상승하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천사나 악마의 강림. 역병과 자연재해, 대륙에 걸친 대전쟁······
"나는 어린 시절부터 종말계수가 임계점을 넘어 세상이 파멸하는 환시를 목격해왔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경고해도 아무도 믿어주질 않더군."
중세랜드에는 마을마다 정신나간 사람이 한둘은 있는데, 그들은 종말이 다가왔다고 울부짖으며 사람들을 꾸짖는다. 그러한 기행 외에는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므로.
"그래서 나는 종말의 예언을 진지하게 귀담아들어줄 권력자를 찾아서 대륙을 방랑했다. 하지만 방문하는 영지마다 미치광이로 낙인찍혀서 내쫓겨다닐 쯔음······변경의 강자로 소문난 헤링턴 백작가에서 사신이 도착했지."
딸아이의 광증을 치료해달라.
치료만 성공하면 뭐든지 내어주겠다.
그러한 조건이었다.
"나는 광증을 치료할 자신이 있기에 초청에 응했고, 너를 치료하면서 네게 위대한 군주의 자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
이후의 이야기는.
벨라디아도 알고 있었다.
"즉······"
벨라디아가 생각을 정리했다.
"저를 강대한 흑마법사이자 위대한 군주로 길러내어, 멸망에 맞서는 선봉장으로 길러내고 싶으신 것이로군요."
끄덕.
그러자 벨라디아가 의아하게 되묻는다.
"제가 멸망을 막는데 관심이 없다면요?"
"너는 멸망을 막는데 관심이 많을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시죠?"
"너는 어떤 인간보다 삶을 사랑하니까."
벨라디아는 자신을 이단심판부에 고발하려던 어머니를 찔렀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목숨이 중요해도 그정도로 독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세상이 멸망하면 네가 좋아하는 살인도 미소년납치도 못한다. 타오르는 사람의 절규를 감상하면서 건배를 외치지도 못하지."
······그건 타당한 말이었다. 자신은 누구보다 살아남는데 진심이었다. 생존을 위해선 어떤 대가든 치를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세계의 멸망을 막아내는게 목적이셨다면, 저보단 의로운 사람들을 육성하시는 방안이 낫지 않을까요? 어째서 저였죠?'
또다른 질문.
"의로운 사람들은 타인의 말보다 스스로의 양심에 충성한다. 그러니 내가 조언을 해줘도 따르지 않거나 일부분만 수용하겠지."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의 [조언]을 [명령]으로 바꾸어들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숨겨진 속내를 읽어내는 법을 배웠으니까.
"·········"
"또한 의로운 이들은 언제나 고민하고 번민한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
벨라디아는 생존을 위해선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단칼에 해치웠고 지금도 그걸 후회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제가 스승님을 죽이고 싶다면요?"
"언제는 살려두고 싶었더냐?"
"·········헤헤. 알고 계셨네요."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언제나 너보다 강할테니까 네가 나를 죽이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약속하마."
벨라디아는 스승의 답변에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받았으니까.
"토너먼트 좋아하세요?"
"마상창시합을 말하나?"
"맞아요."
벨라디아는 성문 앞에서 지옥전투마를 멈춰세웠다. 이젠 스승님과 다시 떨어질 시간이었다. 그분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길 원치 않으시니까.
"조만간 굉장히 성대한 마상창시합을 주최할 거예요. 바드들이 천년을 노래할 정도로 호화롭고 장대한 마상창시합이 되겠죠."
지금의 벨라디아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검은폭군이 보유했던 보물의 절반과 황금은행 보유금의 3할을 홀로 차지했으므로.
"구혼자를 공개물색할 셈이구나."
"구혼자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모든 미혼 영주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어요. 공개적인 경쟁에서 패하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테죠."
이번 토너먼트의 우승상품은 모든 사내들이 탐낼만한 것이다. 산더미같은 금은보화와 제일 화려하게 빛날 시기의 절세미녀, 무엇보다 달콤한 왕의 칭호까지······
"대륙에서 제일 뛰어난 왕공들이 토너먼트에 참가하겠죠. 저는 그들 가운데서 유달리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밀어주면 되는 것이고요."
이런 조건이면 확실히 무예에 자신있는 귀족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토너먼트에 참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벨라디아의 성에 들어찰 후보들도 등장할테지.
"위험한 전략으로 보인다만."
"왜요?"
"최후의 승자를 제외한 왕공들은 굉장한 상실감을 안고 돌아갈 것이다. 그들은 너를 미워하거나 심지어 증오하게 되겠지."
키득.
"동시에 그리워하겠죠."
"흐음."
"언젠가 제가 그들을 유리하게 써먹을 밑그림이 되어줄 거예요. 누구나 눈앞에 보였던 기회는 잡을 수 있었다고 착각하는 법이니까."
······타당성을 따지고자 미래시를 사용하진 않았다. 아름다움을 무기로 활용하는 방법엔 그녀가 훨씬 정통할테니.
"멸망을 막는다고 하셨죠?"
끼리리리리릭!
톱니바퀴를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왕도로 향하는 도개교가 내려왔다. 승전여왕을 반기는 백성들의 환호성이 들렸고, 인형같은 소녀는 티없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전투마를 몰아서 왕궁으로 향했다.
"저도 있는 힘껏 도와보겠습니다."
"기대해보마."
* * *
"모든 일이 훌륭히 풀렸는데도 찝찝하군······"
"찝찝할땐 드워븐 에일이 최고입니다. 형님."
"크하! 이젠 자네도 술꾼이 되었구만!"
벌컥벌컥!
콰악!
"·········"
철퇴공 로드릭은 구석진 발코니에서 시내를 바라봤다. 만인의 환호를 받으면서 개선하는 전사여왕은 백성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더이상 악마들린 학살마는 없었다.
어미를 찔러죽인 저주받은 패륜아도.
"모두가 자네 덕이야."
"같은 이야기만 백 번하고 계십니다."
"은혜를 뭘로 갚아야될지 모르겠군."
"형님도 제게 은인이시니 넘어갑시다."
갸웃.
"내가 자네의 은인이라고?"
"저를 신뢰하고 밀어주셨잖습니까."
"자네를 신뢰하지 못하면 그게 바보지."
이에 텔로리안은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이젠 형님께도 말씀드릴 때가 됐군요."
"무얼?"
"제가 형님을 찾아온 진짜 이유말입니다."
전달한다.
종말의 예언을.
"······원래의 세계선에서 나는 어찌 되었나?"
"블랙터스크에게 전사하고 술잔이 되십니다."
"딸아이는?"
"벨라디아의 미래는 여럿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미래도 지금처럼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태여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멸망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세력을 결집시키고 영웅들을 모아야합니다."
"자네가 지금까지 해온 일과 다르지 않군."
"이제는 한층 본격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철퇴공은 여왕의 개선행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자신은 텔로리안이 무어라 말하건 잠자코 따를 것이다. 꿈꿔보지 못했던 광경을 현실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니······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만 말해주게."
"딱히 부탁드릴건 없습니다."
"흠?"
"지금처럼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무게감을 유지해주시며 전시엔 부사령관 역할을 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많은 자손들을 낳아주시면 최고겠지요."
의아한 표정이 된다.
"많은 자손을?"
"그렇습니다. 지금 헤링턴 왕조는 반석 위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취약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죠."
왕국이 안정되려면 왕조가 안정이 되어야하고, 왕조가 안정되려면 적절한 수의 구성원들이 필요하다. 너무 적거나 많지 않은 숫자의.
"마침 형님과 혼맥을 맺으려는 가문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다들 제일 뛰어난 딸들을 내놓으려고 안달이지요."
건네준다.
초상화가 포함된 영애들의 명단을.
"다들 너무 어려."
"그렇다면 2안은 어떠십니까."
건네준다.
초상화가 포함된 과부들의 명단을.
"절반은 내가 과부로 만든 아낙들이네만?"
"귀부인들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남편의 원수에게 안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중세랜드인들은 독하고 그들을 통치하는 귀족들은 더욱 독하다.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다.
"흠·········"
철퇴공은 과부들의 명단에서 인적사항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간혹 유난히 아름다운 초상화 앞에선 보다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흐음. 신경써줘서 고맙네."
그러나 철퇴공은 미망인 카탈로그를 돌려주었다. 아직 20대의 젊음이 사라지지 않은 미녀과부도, 금광이 딸린 영지를 보유한 부자과부도 철퇴공의 시선을 붙잡지는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있으시군요."
"아우님이 나의 사생활을 어찌 알고 있나?"
"그러나 현실적으론 이뤄지기 힘들테지요."
"·········자네 앞에선 비밀이란게 없구만."
[마법부여 : 무한한 가능성의 반지]
[1개의 마법부여를 시도합니다]
[최상급 주문부여]
가져온 반지에.
주문을 부여한다.
[7위계, 야수의 로어]
[트랜스폼 몬스터(Transfrom Monster)]
세공된 보석반지에 로어마스터의 주문이 깃들었다. 이것을 착용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몬스터로 변신할 수 있었다.
"받으십시오."
"!"
"상대방에게도 적합한 반지를 제공해두었습니다. 서로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실겁니다."
이에 철퇴공은 난처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다, 결국엔 텔로리안의 반지를 받아들었다.
"큼큼."
"부끄러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부끄러워하는게 맞다네."
철퇴공은 고리타분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중세랜드의 군주로 적합한 걸테지만.
"그럼 자네는?"
"?"
"자네도 나한테 손자손녀를 안겨줘야지."
"일 없습니다."
"그럼 벨라디아가 아니라도 좋으니 자네도 결혼을 하고 정착을 하게나. 남자는 가정을 꾸려야만 비로소 어른이······"
······텔로리안은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의형의 잔소리를 술잔으로 막았다. 자신이 헤링턴들을 마주하고 흘러온 시간들이 떠올랐다.
'오늘만큼은 취해도 되겠지.'
적지 않은 성취들을 이뤘다.
이번 주는 쉬어갈 자격이 있겠지.
* * *
"일어나라. 화상아."
"······음?"
"얼마나 술을 처먹었길래 몇 번을 깨워도 일어나질 못하는 것이냐?"
은빛뱀의 목소리와 함께 염소스프의 향기가 코끝을 찔러왔다. 아엘타나르가 끓여주는 해장국은 언제나 맛이 좋았다.
"그만 깨우시오. 이번 주는 휴가니까."
지난 4년은 깊은 수면을 취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 주엔 밀린 수면을 몰아서 취한 다음,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해봐야겠다.
"친구가 찾아와서 항의 중이다."
"?"
"훔쳐간 전리품을 내놓으라던데?"
저런.
이미 입찰기한 지났는데.
15. 열다섯번째 연구 - 재생의 시대(1)
"빌어먹을 사기꾼놈아!"
"내가 무슨 사기를 쳤다는 말이냐?"
"이놈이 끝까지!"
전리품을 강탈당한 성기사는 마법사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텔로리안은 능청스런 표정을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발로르의 장비를 나눠가졌다면서! 당연히 파괴하리라 생각하고 떠나줬더니 이것들이──!"
수 년만에 마주한 리안칼의 인상은 꽤나 달라져있었다. 귀공자처럼 꽃다운 조각미남에서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마주한······
'그래도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잘생겼군.'
······늠름한 조각미남이 되었다. 이전과 달리 강인한 남성미까지 겸비한 것이다.
"어렵게 획득한 전리품을 뭐하러 부수나?"
"지옥마력에는 언제나 타락의 위험이 있다."
리안칼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나처럼 고도의 수행을 거친 성기사는 괜찮지만, 너희처럼 나약한 정신력을 지닌 필멸자들은 버텨낼 수 없단 말이지······"
제일 달라진 모습은 녀석이 성력을 뿜어낸다는 사실이었다. 이전엔 성검에 의존해서 성력을 사용했는데, 이젠 미약하나마 리안칼 본인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졌다. 속죄활동을 거치면서 못된 마음씨를 고쳐먹은 모양이었다.
[연구갱신 : 영광을 향한 승천]
[표본이 신성력을 획득했습니다.]
[연구단서 3/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9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22]
"타락의 위험이야 알아서들 하겠지."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텐데?"
"불멸자보다 강인할 때도 있지."
우웅.
우웅.
리안칼의 성검이 울렸다.
"영감이 이르길 네가 교만하다는데."
"무신론자는 언제나 교만한 법이오."
"그러다 언젠가 크게 실수할 거라는군."
그러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실수를 저지를만한 미래선은 모조리 선견해 충분한 대비를 해두었다. 따라서, 예견치 못한 돌발변수가 발생해도 파급력은 최소화되겠지.
"그나저나 무슨 용건이냐?"
"반드시 용건이 있어야 되나?"
"설마 놀러오지는 않았을테고."
풍요의뿔에 시원한 얼음물을 채워서 건네주었다. 이에 한여름에 먼길을 여행해온 리안칼은 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하군!"
탁.
잔을 내려두고.
"놀러온게 맞다만."
"성기사가 논다고?"
"그럼 성기사는 쉬지도 않고 왠종일 수련만 해야하나? 그렇게 기계처럼 무료한 삶을 인간이 무슨 수로 견디겠나?"
흠.
"돌팔이 성기사로군."
"하! 그렇다면 네놈도 돌팔이 마법사겠어! 하라는 연구는 안하고 아침부터 술냄새나 풍기고 있으니!"
·········아량을 베풀어 전리품을 나눠줄까했지만 취소했다. 4년간 하루도 쉬지않고 연구만 이어가다, 고작 일주일을 쉬어가는 것인데!
"그건 그렇고······왕도를 지나치면서 천것들을 만나보았는데, 모두 네놈과 네놈의 서큐버스 제자를 칭송하더군. 수완만큼은 인정하마."
피식.
"서큐버스? 고작?"
"·········응?"
"벨라디아가 서큐버스같은 어중간한 악당이었다면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벨라디아는 악마들의 세계에 떨어져도 대성할 극악인이었다. 중급데몬에 불과한 서큐버스와 비교하면 그녀가 슬퍼할 것이다.
"······흐음."
그때.
리안칼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말이 나온 김에 묻는 것이다만······"
"벨라디아를 통제할 수 있냐고?"
"·········"
"나는 벨라디아를 통제할 의향이 없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을텐데."
"네가 언제부터 사람들을 신경썼다고?"
"하기야······내가 논할 자격은 없는 문제군."
요리사 차림의 은빛뱀이 풍부한 만찬을 준비해왔다. 올리브기름에 절여진 양고기는 육즙이 탐스러웠고, 부풀어오른 밀빵은 사막의 모래처럼 부드러웠다. 특히 달달하게 코끝을 찔러오는 벌꿀차가 특별한 별미였다.
[멸망한 고대 문명의 만찬을 맛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9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23]
"이건 만찬이 아니다."
은빛뱀이 진지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찬에 앞서서 제공되는 아마즈디스지."
간만에 요리실력을 마음껏 발휘해서 기분이 좋아진 은빛뱀은, 카람샨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중세랜드의 퇴보를 비난했다.
"카람샨이 모래사막에 파묻히고 벌써 반만년이 흘렀다. 한데 인간들의 문명은 당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 통탄할 일이로다."
다양하고 깊은 맛을 중시하는 카람샨의 요리들과 달리 중부의 요리는 단촐했다. 왕실 요리사들도 질보다는 양에 초점을 맞췄으니까.
"음."
한데.
텔로리안이 초를 쳤다.
"중부의 문명수준이 처참하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아무리 중세랜드가 열악해도 고대랜드에 비할 바는 아니라오
이에.
은빛뱀이 뱀눈을 치켜떴다.
"그럼 요리의 격차는 어떻게 설명할텐가?"
"그건 카람샨의 경제적 불평등이 오늘날보다 극심했다는 증거요. 카람샨의 신왕들은 마음대로 신민들의 재산을 뺏을 수 있었으니까, 호화요리들이 발달했지."
은빛뱀이 표정을 찌푸렸다.
"주문쟁이가 헛소리를 하는군!"
"진정하고 들어보시오. 카람샨은 강제노동을 통해 유지되는 노예제 사회였소. 하지만 중부의 봉건사회는 그보단 훨씬 평등한 경제적 구조를 갖추었소. 나의 주장은 다음같은 논문들에서 검증되었는데······"
이에 은빛뱀은 만찬상을 압수하고 차가운 돌빵과 꿀꿀이죽을 가져왔다.
"그럼 중세랜드의 식사를 즐기면 되겠군!"
"맛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소만······"
"아니지! 고매하신 마탑주께서 어떻게 노예착취의 산물을 즐기시겠나? 선진농노들에게 어울리는 식사를 즐기도록!"
만찬을 압수당한 리안칼은 날선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놈 때문에 돌빵이나 처먹게 생겼잖아!"
"하여간 불멸자들은 논리적인 대화가 안된다니까······"
사내들은 저택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향했다. 왕도의 시가지는 번영하고 있었다. 소매치기조차 없을 정도로 치안이 뛰어났고, 관리들은 합리적으로 작성된 법률을 엄격히 준수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정도면 벨라디아의 악행들도 눈감아줄만하지 않나? 모두가 만족하고 있잖나?"
벨라디아의 철권통치는 왕국에 안정을 가져왔고, 안정은 번영을 불러왔다. 왕명은 공정히 집행되었고 여왕의 끊임없는 승리들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이게 진실로 옳은 일인가?"
"네가 옳음을 논한다니 믿기지 않는군."
"·········"
성검이 리안칼에게 신성한 분노를 속삭였다. 그러나 리안칼은 성검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건 불가능해. 영감."
"············"
"안 된다니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리안칼은 한동안 성검과 입씨름을 벌였다.
"성왕이 벨라디아를 죽이라고 말하나?"
"그래."
"어째서 성왕을 따르지 않았나?"
"내게는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으니까."
리안칼은 죄악의 무게를 직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악마가 되고자 행했던 악행들에 비하면, 벨라디아가 저지른 악행들은 귀여운 수준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나는 복수를 원할 뿐이다."
"깔끔해서 좋군."
"속죄든 정의구현이든 복수의 수단일 뿐이지."
이에 성검은 리안칼을 꾸짖었다. 악행에 눈을 감으면 스스로 악이 되기를 선택한 것과도 같다는 강론이었다.
"그럼 영감이 잿빛현자를 설득해보쇼."
이에 리안칼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성검을 텔로리안에게 건넸고, 텔로리안은 성검을 2층 카페의 테라스에 모셔두고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이네. 젊은 마법사여."
"오랜만이오. 잊혀진 성왕이여."
"오늘은 불편한 이야기를 하겠군."
테이블의 건너편에 반투명한 노인이 나타났다 잊혀진 성왕은 나이가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장한 무인으로, 불독같은 턱선에서 무쇠같은 고집과 고집보다 끈질긴 신심이 연상됐다.
"학살자 여왕이 자네의 제자라더군."
"그렇소."
"자네가 학살을 명령했었나?"
"어떤 학살을 말씀하시오?"
"·········"
"여왕이 벌인 학살이 한두건이 아니잖소."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이어갈 말이 없었으니까.
"······왕국 내부에서 벌어진 학살을 뜻하네."
"그럼 데몬숭배자들의 부추김을 따랐던 농민들에 대한 학살을 뜻하는군. 맞소?"
끄덕.
"내가 학살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진 않았소."
"허면?"
"대신 가장 신속한 방법으로 반란을 진압하라 권했소. 이에 벨라디아는 신속한 대학살을 통해 반란을 멈추었소. 그것뿐이오."
침묵이 이어졌다.
이전보다 길고 무거운.
"자네는."
오랜 침묵이 흐르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양심도 없는가?"
"성왕께선 흑마법사들을 학살하시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셨소?"
이에.
성왕이 눈쌀을 찌푸렸다.
"이것과 그것은 다르네."
"내가 보기엔 같아보이오."
"나는 흑마법을 직접 사용했던 이들만 죽였지만, 자네의 제자는 데몬숭배자가 출몰한 마을을 통째로 불태우지 않았는가."
텔로리안은 대화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덕적 논쟁은 언제나 장황한 말싸움으로만 끝났으니까.
"나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는 각자 원하는 일을 행했을 뿐입니다."
·········
"나는 내가 세계의 멸망을 막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행했고, 당신은 당신이 의롭다고 믿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거기에 우열이 있겠습니까? 각자의 선택이 있을 뿐이죠. "
·········
"자네는 정의를 믿지 않는군."
"정의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정의란 언제나 보편적인 것일세."
"성기사들의 관점에선 그럴테지요."
"·········"
"이번 논쟁의 본질은 간단합니다. 성왕."
흥분한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지루한 논쟁을 끝낼 시점이므로.
"나는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아무래도 좋다고 믿을 뿐입니다. 반면에 당신은 과정까지 좋아야 용납할 수 있다고 믿지요."
툭툭.
책상을 두드렸다.
"누가 정의로운 사람일까요? 지금까진 당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효과적인 성과를 거두었을까요? 지금까진 저였습니다."
의로운 이들은 인과관계를 추론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다만 양심의 소리에 의존해서 어두운 세상을 밝혀나갈 뿐이지.
때문에.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입니다."
"·········"
"당신이 마지막 여정에서 타락할 수도 있고, 제가 중대한 사안에서 실패할지도 모르죠. 그러니 도덕적인 판단은 보류하시고 끝까지 함께 가는데 집중합시다."
일어섰다.
더이상 전해줄 말이 없었으니까.
"······자네의 방법은."
"?"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미루는 방안에 불과하네. 닥쳐온 종말에 집중한다고 악인들을 용인하면, 다음에는 자네가 길러낸 악인들이 또다른 종말을 불러낼거란 말일세."
맞았다. 자신의 제자들이 언제나 자신의 통제를 따르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들이 또다른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어쨌든 시간은 벌잖습니까?"
"장기적인 관점에선 차이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린 죽습니다."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인간은 멸종되고 신들은 잊혀질 겁니다. 우주조차도 언젠가 먼지로 돌아가겠지요. 그게 섭리입니다."
성직자란 영원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오늘에 충실히 살아간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저는 멸망을 영구적으로 막아낼 계책은 알지도 못하고 연구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 멸망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죠. 그게 제가 싸워가는 원동력입니다."
영원.
그것은 헛된 말이다.
적어도 사실을 추구하는 자들에겐.
"리안칼. 칼을 가져가도록."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나?"
"종교인을 만나면 언제나 그렇지."
유한한 세상을 탐구하는 마법사.
무한한 세상을 갈망하는 성직자.
대립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잿빛현자님 되시지요?"
"?"
카페를 나서자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이 다가왔다. 노출이 심한 옷을 차려입은 반라의 젊은이. 거리의 여자였다.
"그렇소."
하지만 평범한 거리의 여자들과 분위기가 달랐다. 눈빛은 맑았고 태도도 당당했으니.
"홍등가를 대표해 현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꾸벅.
"감사는 고맙소. 한데 사유가?'
"올해부턴 홍등가 사람들도 여왕 폐하께 세금을 바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드디어 법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죠."
홍등가의 양지화는 고지식한 호국경이나 도덕관념이 엄격한 우르반이 추진할 정책은 아니다. 벨라디아의 정책이겠지. 순전히 재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역대의 국왕들과는 굉장히 이색적인 정책이시죠. 그러한 정책의 근간에는 잿빛현자님의 가르침이 있지 않았을까요?"
상대는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잿빛현자는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다. 저들도 저들대로 사정이 있겠지만······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왕국인들의 시선은 충분히 논쟁적이었다. 추가적인 논쟁을 얹을 이유는 없으리라.
"그래서 용건이?"
"저희가 국왕 폐하께 세금을 상납했듯 현자님께도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중히 거절하고 헤어지면 된다.
받기에 부적절한 선물일테니.
"?"
한데.
상대가 자신의 예상을 깨버렸다.
"이걸 어떻게 입수한거요?'
홍등가의 선물은 고대의 경전이었다.
밤하늘을 누비는 은빛뱀이 그려진.
[신규연구: 재생의 시대]
[연구주제: 암흑기를 끝내십시오.]
[연구단서: 0/5]
[연구보상: 고전마법의 재해석]
[연구보상2: 뱀신교의 재탄생]
[연구보상3: 새로운 생각의 전파]
[연구보상4: 교회의 영향력 약화]
15. 열다섯번째 연구 - 재생의 시대(2)
"단골손님의 유품입니다."
"그렇군."
경전은 파피루스를 엮은 두루마리였다. 손을 얹어보니 다양한 잔류사념이 감지됐는데, 여기에 마력을 주입해서 형상화시켰다.
[3위계, 영혼의 로어]
[메모리 리스토레이션]
[영혼의 흔적을 보여다오.]
"·········"
평생을 고대사 연구에 헌신했던 노학자의 삶이 스쳐갔다. 그는 학술적인 재능은 걸출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능력은 모자랐었다.
"대학사 에이머스가 당신의 단골이었군."
"······그분을 아시는군요."
"요즘에 책을 읽었다는 사람치고 그분의 저서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대학사 에이머스는 마력을 깨우치지 못한 일반인이었지만, 그가 일궈낸 학문적 업적은 마법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강단에서 쫓겨서 망명지에서 고독사했지만.
"또한 당신이 대학사의 전인이군."
"인정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악수를 건넸다.
"살라시엔의 제자 텔로리안이오."
"에이머스의 제자 피오나입니다."
대학사가 거리의 여인을 전인으로 삼았던 경위에 대해선 언급을 아끼겠다. 단지 대학사의 임종을 지켜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피오나였다는 사실을 기록해두면 되리라.
'또한 피오나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든, 지금은 학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종족도 직업도 중요하지 않다.
학문을 대하는 자세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대들은 태양신을 숭배하지 않는군."
"!"
"괜찮소. 나도 숭배하지 않으니까."
태양신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호신으로 명시된 신격이었다. 그래서 태양신 교회는 왕권과 더불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으로 꼽힌다.
에스실도 그러했다.
벨라디아의 치세 이전에는.
"당신들의 종교 의식을 참관하고 싶소."
"·········"
"관심을 지닐만한 사람을 알고 있거든."
이에 피오나는 잿빛현자를 홍등가로 이끌었다. 하루살이처럼 욕망에 몰두하는 이들이 가득한 거리를 지나서 위험하고 어두운 건물로 진입한다. 하지만 잿빛현자의 차분한 기운이 장소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현자님을 뵙습니다."
홍등가의 사람들은 극도로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존경보단 두려움에서 비롯된 존중이었다.
"평소처럼 행동해주시오."
"·········"
"당신들을 관찰하러 찾아온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이에 홍등가 사람들은 피오나의 눈치를 보았지만, 피오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려운 표정으로 제의를 이어갔다.
"············"
홍등가의 제의는 원초적인 형태의 종교집회였다. 신도들은 조악하게 빚어낸 뱀신의 조각상에 절한 다음, 배신자의 심장을 뽑고 폭력적인 난교를 벌였다. 난교가 끝나자 풍부한 만찬을 즐기면서 의식을 마친다.
[종교의 변화를 목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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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뱀신을 숭배하게 되었소?"
홍등가에서 뱀신을 기리는 방식은 변질된 형태였다. 카람샨인들이 뱀신을 기리던 의식을 따랐지만, 극도로 열화된 형태였으니까.
"저는 대학사께서 남겨주신 문헌에서 고대신들에 대한 전승을 읽었습니다. 특히 카람샨의 신들에 대한 언급이 대단히 흥미로웠죠."
고대신들은 오늘날의 태양신처럼 광명정대한 신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필멸자들처럼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존재들이었다.
"제가 해석한 문헌에 따르면 은빛뱀의 사제들은, 매춘 행위을 통해 생명의 풍요를 기렸다고 합니다. 그게 저희의 시선을 끌게 되었죠."
때문에 고대신들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최고신의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매춘을 행했던 풍습이 이러한 단면을 반영했다.
"태양신은 저희를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은빛뱀께선 저희를 가장 존귀한 자리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어떻게 은빛뱀을 숭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피오나는 강렬한 의지를 담아서 말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태양신의 사제들은 대낮에는 인간의 욕망이 죄악이라고 질타해놓고서, 해가 저물면 욕망에 탐닉하는 거짓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욕망을 긍정하는 신을 섬기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텔로리안은 피오나의 배움이 얄팍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움이 얄팍하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사실은 중세랜드의 일반인들이 듣기에는 그럴듯하다는 점이다.
"훌륭하오!"
"·········예?"
텔로리안이 흡족해하자 칭찬받은 피오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스스로의 배움이 깊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여왕에게 갑시다."
"???"
"방금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면 된다오."
* * *
창녀가 들려주는 이교신의 교리에 왕실자문관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용은 둘째 치고 시선을 섞는 것조차 불쾌한 천민이, 감히 자신들에게 강의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지만.
여왕만큼은 생각이 달랐다.
"그대는 짐의 충실한 신민들인가?"
"예?"
"짐에게 충성맹세를 바치겠냐는 말이다."
태양신의 사제들은 세속군주들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천상을 다스리는 태양신과 태양신을 대리하는 교황에게만 충성을 바쳤다.
"물론입니다!"
"그럼 오늘부터 뱀신교가 국교다."
?
??
???
"때문에 자네는 국교를 대변하는 대사제로서 자문회에 참석할 의무와 권리가 생겼다. 경비병! 당장 새로운 권좌를 가져오도록!"
상식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선언에 모든 자문관들이 극렬히 반대했다. 그러자 여왕은 그들을 모조리 해임했다. 호국경을 포함해서.
"폐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의 치세를 시작하는 거예요."
"···············"
"저는 즉위한 이후에도 언제나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죠. 아버지가 옹립해주신 자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잖아요?"
지금의 벨라디아는 군대와 민중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여왕에겐 그들을 매료할만한 업적이 있었고, 무엇보다 실질적인 생활의 개선이 뒤따르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아버지는 왕도를 좋아하지 않으셨잖아요? 호국경의 명칭만큼은 유지해드릴 테니 고향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세요."
이에 철퇴공은 딸아이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언젠가 모든 권력을 딸에게 이양해줄 생각이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해산을 거부하겠다면?"
"그럼 전장에서 뵈어야겠죠."
여왕의 부드럽던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변했다. 그녀는 별도의 실권자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권력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너의 행동은 왕국의 법과 전통에 어긋난다."
"제가 왕국이고 법이며 전통입니다."
"이번 조치로 네게 불만을 품을 사람이 대단히 많을 게다. 겉으론 고개를 조아려도 속으로는 결코 납득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아."
끄덕.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제가 신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복종입니다. 제게 분노하고 저를 미워해도 좋습니다. 명령에만 따른다면 말입니다."
·········벨라디아의 거침없는 대답에 철퇴공은 만족스레 웃었다. 드디어 딸아이는 홀로 왕국을 다스릴 준비를 마쳤다.
[벨라디아를 각성시켰습니다!]
[Lv25여왕 -> Lv35 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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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포인트: 25]
"훌륭히 컸구나."
"···············"
"텔로리안의 조언만은 귀담아들어라."
"누구의 조언을 들을지도 제가 결정할 사안입니다. 아버지께서 결정하실 사안이 아니죠."
이에 철퇴공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퇴장했다. 반면에 강직한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서 반대했지만 좋은 꼴을 보지는 못했다.
"이번 조치는 다소 성급하다만······"
"그래도 이번엔 제가 옳아요. 선생님."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의 조언도 과감히 무시했다. 그녀의 스승은 매끄러운 진행을 중시하느라 일을 질질 끄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어차피 반대파가 결집할 사안은 한꺼번에 밀어붙여야 해요. 그래야 적과 아군이 명백해지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거든요."
벨라디아의 칙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존의 권력공식을 깨뜨리는 칙령들이 기습공격처럼 퍼부어졌다.
"수녀원에 세금을 매기다니 무슨 짓입니까!"
"장사를 했으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일이 장사입니까?!"
"민심을 얻어내는 장사가 맞잖아?"
교회는 오랜 권리들을 모조리 상실했고.
"이번 칙령은 귀족특권에 어긋나는──"
"그래서 귀공은 짐의 칙령에 반대하는가?"
"저는 단지 국가를 위한 충언을──"
"짐은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간신배를 원하므로, 짐과 전쟁을 벌일 배짱이 없다면 입을 다물어라! 오늘부터 귀족 의회도 해산이다!"
귀족들도 전통적인 특권들을 대부분 박탈당했다. 이러한 칙령들이 겨냥하는 목표는 명확했다. 국가의 대대적인 개편을 통한 왕권강화.
"교회에 세금을 내라니! 불경합니다!"
"우리 귀족들도 대대로 거주하던 성채를 빼앗기게 생겼소! 어린 계집이 우리가 당하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에.
반대파들이 모여서 음모를 작당했다.
"당하고만 있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오?"
하지만.
반대파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당연히 군대를 모아야지요! 알랑송 백작!"
"산악오크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잊으셨소?"
·········일동이 숙연해졌다.
"여왕에겐 드래곤을 신하로 부리는 마법사가 있소. 만일 잿빛현자를 제하더라도 무술을 사용하는 트롤들은 어쩔 생각이오? 공성철퇴를 휘두르는 철퇴공은? 하다못해 여왕 본인과 결투를 벌여 승리할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소? 한데 그거 아시오? 우리가 이끄는 군대와 민중은 여왕을 지지하고 있다오."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력으론 권력을 돌려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왕국의 귀족들은 완전히 노선을 바꾸었다.
"제가 폐하의 신발을 닦아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영광은 내게 돌아가야지!"
"비켜라! 나는 폐하의 요강을 비울 테니까!"
얼마 전까지 공작이니 백작이니 위세를 떨어대던 어르신들이, 여왕의 앞에서는 가장 비천한 직무를 맡은 농노처럼 비굴해졌다.
"알랑송 백작."
"하명하소서!"
"그대는 눈치가 빠르니 오늘부터 공작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제야 왕국의 실력자들은 권력을 획득하는 규칙이 변모했음을 깨달았다. 이제 군사적 능력이나 영지의 규모는 권력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오직 여왕을 얼마나 기쁘게 만들 수 있느냐가 권력을 획득하는 척도가 되리라.
"스승님. 이번 성과가 마음에 드세요?"
"우수한 체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만······"
······벨라디아가 형성한 체제는 대단히 엉성했다. 왕권강화는 이루었지만 국왕의 전횡을 방지할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파괴했으니까.
"어쨌든 결과는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랴.
마탑이 아니라 대학을 통째로 지어줬는데.
[연구진전 : 재생의 시대]
[새로운 마도대학을 설립함!]
[연구단서 1/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9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6]
* * *
같은 시각.
서부의 교황청.
"서큐버스 여왕이 마도대학을 설립했다고?"
"그렇습니다. 교황 성하."
"그건 침묵협약에 어긋나는 행위잖나?"
침묵 협약.
교회와 군주들이 체결한 암묵적인 협약.
"세속군주들은 마법사를 고용해도 좋다. 그러나 마법사를 육성하거나 스스로 마법을 습득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그게 불문율이었지."
침묵협약은 교회가 세속군주들에게 최대한 양보해준 선이었다. 하지만 서큐버스 여왕은 양보에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전을 선포할까요?"
"흠."
교황은 차분히 고민했다.
"그건 서큐버스 여왕이 원하는 움직임이야."
"그렇군요."
"성국의 전력을 움직인다면 에스실을 멸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그사이 악마들이 움직이겠지. 죽음의 현자도 준동을 시작할 테고."
강대한 세력은 강대한 적이 많다.
그래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번엔 문명인답게 법으로 해결하세."
"그렇다면 어떤 변호사를 부를까요?"
"무적의 빌헬름을 부르게."
이윽고.
무지막지한 성기사가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광채로 번득이는.
"안녕! 홀리 파파!"
"성스러운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교황 성하!"
"어서 오시게. 빌헬름 경."
교황은 빌헬름의 늠름한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빌헬름은 교회에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준 무적의 성투사였다. 이번에도 그러하겠지.
"우리는 빌헬름이 아니다!"
"저희는 빌헬름이 아닙니다!"
그는.
쌍두오우거였으니까.
"나는 빌!"
"저는 헬름입니다!"
15. 열다섯번째 연구 - 재생의 시대(3)
"교회의 결전병기가 오겠군."
텔로리안은 수정구에서 미래를 엿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성전이 선포되진 않겠지만 결투재판은 피하지 못할 것이다.
"무적의 빌헬름이 오우거라고요?"
"아니. 쌍두오우거다."
"·········"
스스로 결투재판에 나서려던 벨라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쌍두오우거는 손쉬운 상대이나 쌍두오우거 성기사는 이야기 다르니까.
"빌헬름은 단순한 성기사가 아니다."
"또다른 힘을 숨기고 있나요?"
"빌은 성기사고 헬름은 사제다."
"·········그게 대체 뭐죠?"
"빌헬름은 성기사와 사제의 힘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론 오우거 성기사와 오우거 사제를 동시에 상대하는 셈이지."
빌헬름은 40레벨에 이르는 초강자다. 용사 알베릭과 똑같은 레벨. 그러나 실제론 알베릭보다 서너배는 강하겠지. 빌과 헬름을 합친다면 실질적으론 60레벨 급수는 되니까.
"······차라리 전쟁을 하지요?"
벨라디아는 장고 끝에 전쟁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었다. 평범한 필멸자들 가운데 빌헬름과 홀로 맞설 전사는 없을 테니까.
"그건 무조건 패배하는 길이다."
"성국은 네크로폴리스와 에르보니아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잖아요? 중부까지 대규모 원정군을 파병할 여력은 많지 않을텐데요."
고개를 젓는다.
"절대다수의 에스실 사람들은 여전히 태양신을 숭배한다. 만일 교황이 너를 파문하면, 백성과 신하들이 너를 저버릴 것이다."
아무리 국왕의 철권이 두려워도 영원한 지옥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곳은 신성이 실재하는 세상이니까 더더욱.
"그럼 태양신교로 다시 개종하죠."
"············"
"침묵협약을 개정하는 거예요. 마법사 양성을 허용받되 태양신 숭배를 유지하겠다는 조건으로 교황청과 새롭게 협상을······"
······종교적 신념을 겉옷처럼 바꿔입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신성이 실존하는 중세랜드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으니까
"반대파는 단숨에 제압해야한다더니?"
"상황이 여의치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고개를 으쓱이는 벨라디아.
"제가 스승님을 죽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태양신 교단도 부수고 싶지만 부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해야할 때가 아닐까요?"
······이래야 첫번째 제자답지. 요즘에 절대군주 행세를 하느라 제법 권위 있는 모습을 보였다만, 그녀의 본성은 하이에나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생각이 있다."
"정말이요?"
"네가 계속해서 절대왕권을 휘두르게끔 해주마. 대학교를 받았으니 나도 도와줘야지."
교황은 쌍두오우거를 1명이라고 우겨서 결투재판에서 전승했다. 그렇다면 이쪽도 2명을 1명이라고 우길 방안을 만들면 되지 않겠나?
* * *
교황의 사절단이 행진하는 모습은 성스럽고 근엄했다. 황금의 성기사들이 앞장섰고 백색의 사제들이 뒤따랐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시선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인솔자가 모든 시선을 끌어갔으니까.
"싸, 쌍두 오우거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으아아!"
성스러운 사절단을 환영하고자 기쁘게 모여 들었던 백성들은 빌헬름을 보자마자 허겁지겁 달아났다. 빌헬름이 착용한 붉은색의 수단(Soutane, 추기경을 상징하는 로브)도 그들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이에 젊은 오우거는 실연당한 청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헬름. 사람들이 우리를 두려워해······"
"빌. 서운해 말아라. 사람이 겪게 되는 모든 시련은, 태양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영혼을 단련코자 내려주신 것이니까."
"응······"
허나 빌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반면에 헬름은 단단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주어진 임무를 상기할 따름이었다.
"어서 오시오. 기사단장 빌."
"오오! 인간! 예쁘다! 엄청!"
"헬름 추기경도 어서 오시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왕 폐하."
이후에는 공식적인 의전행사와 만찬이 뒤따랐다. 어찌 되었든 교회와 국가의 대표들이 만나는 자리인데, 번거로운 격식은 생략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소고기 맛없어······악마고기 먹고 싶어······"
"쉿! 기사단장다운 모습을 보여야지!"
"맛이 없단 말이야! 맛이 없다구!"
"여왕 폐하. 송구하오나 동생을 달래고 돌아오겠습니다. 전장에만 익숙한 삶을 살아온 녀석이어서······"
빌은 어린애처럼 칭얼댔고 헬름은 빌을 달래느라 애먹었다. 그렇게 많은 소란이 벌어지고야, 본론에 이를 수 있었다.
"우리들은 많은 이견이 있소."
"그렇습니다. 여왕 폐하."
"깔끔히 결투로 정리합시다."
교회가 이기면 마도대학 철폐.
왕국이 이기면 마도대학 승인.
"그게 전부입니까?"
"일을 키우지 말자는 뜻이오."
벨라디아는 피처럼 붉은 와인잔을 흔들어보였다.
"어차피 사태가 극단적으로 향하면 짐이나 교회나 피해가 막심하오. 헬름 추기경도 알고 있는 안건이잖소?"
이에 지금껏 차분하던 헬름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무시무시한 주먹을 쥐어보였다.
"폐하께선 천상의 법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태양신을 경배함은 단순히 취향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구원이 걸린 문제이며, 세상의 운명이 걸린 사안입니다. 한데 어째서······"
이에.
벨라디아는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어머니 뱀신을 따른다네."
"·········!"
"교황청이 편의를 봐준다면 아버지 태양신께 돌아갈지도 모르지. 하지만 교황청이 짐을 적대한다면 지옥제왕이나 심연여왕을 섬길 수도 있다네. 그게 짐이란 인간이야."
······헬름은 왕좌에 앉은 야수의 정체를 직시했다. 괜히 교황성하께서 [서큐버스 여왕]이라는 멸칭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대륙이 용납할 것 같습니까?"
"용납하지 못할 이유는?"
피식.
벨라디아는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만백성이 교회의 지도를 따르니까요."
"양떼들의 견해가 무슨 상관인가? 짐은 양떼들을 잡아먹는 맹수들의 여왕이건만."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드러내면서.
"자네들이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해하지 못하나본데······인간들은 교황 성하처럼 새하얀 수염을 기른 잔소리꾼보단 짐처럼 아름답고 어린 여인을 좋아하네. 사후의 구원이 무슨 소용인가? 당장의 즐거움이 눈앞에 있는데."
헬름은 이러한 극악인에게 왕권을 맡겨선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희생을 무릅쓰고 개전을 선언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알겠다! 맞짱으로 끝내자!"
"기사단장 빌! 자네는 무인답게 호쾌하군!"
"패자는 승자를 따라야한다!"
"기꺼이."
······빌이 개입해서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불만은 많았으나 교회계급 상으론 빌이 헬름의 감독자였고, 사제에겐 순명의 의무가 있었다.
"빌! 여왕은 악마나 다름없는 여자다!"
"알고 있다. 그래서 정리했다."
"성기사라면 악마를 모조리 처단해야지!"
"악마가 양들을 데리고 있잖아."
"············"
빌은 백치의 순진함과 현자의 지혜를 동시에 갖춘 사람이었다. 아이들처럼.
"우리는 양떼를 지키는 목자야. 헬름."
"·········"
"양들에겐 언제나 평화가 필요해."
······헬름은 동생(빌은 헬름이 동생이라고 주장한다)의 탁견을 인정했다. 정의로운 전쟁보단 부당한 평화가 낫다. 적어도 약자들에겐.
"반갑소."
""?""
심야기도를 바치고 잠에 들기 위해서 침대에 눕자, 창가에 잿빛로브를 차려입은 청년이 있었다. 잿빛현자인 모양이었다.
"반갑다! 친구!"
"우리가 만남을 이어가기에는 때와 장소가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바이오."
형제의 상반된 반응에 텔로리안은 웃음을 지었다. 빌헬름 형제는 매우 흥미로운 표본이었다. 허락만 해준다면 정식으로 연구할 텐데.
"공적인 사안으로 찾아온 게 아니오. 헬름."
"말레피카 따위와 나눌 대화는 없──"
"살아있는 흑마법사! 만나보고 싶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엄청엄청 많았다! 반갑다!"
······헬름은 주문쟁이의 속삭임을 경계해서 대화를 거부하고 잠에 들었다. 그러나 빌은 열린 태도로 새로운 친구를 맞이했다.
"자네는 많은 흑마법사들을 만나봤잖나?"
"하지만 그들은 모두 뭉개지거나 튀겨진 상태였다! 너처럼 멀쩡하지 않았다!"
······텔로리안은 밤을 새어가면서 빌과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눠갈수록 상이한 관점이 명백해졌지만.
"그대들은 어째서 마법사를 그리 싫어하나?"
"마법사들. 똑똑하다. 유능하다. 훌륭하다."
빌은 처음엔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러나 배려하지 않는다. 보통사람들."
"·········"
"그래서 보통사람들. 두려워한다. 마법사들이 만들어가는 세상. 약자는 살지 못하니까."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자 엄지를 반대로 뒤집었다. 쌍두오우거는 마법적인 실험을 통해서 탄생한 생물체. 마법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누구보다 깊게 고민해봤겠지.
"너희는 어째서 보통사람들을 신경 쓰지?"
"그것이 옳은 일이니까."
"보통사람은 너희를 괴물이라고 부른다만?"
"·········"
이에 빌은 자신을 보자마자 도망치던 환영인파들을 떠올리며 풀이 죽었다. 하지만 꼿꼿한 눈동자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옳은 일을 한다."
"왜?"
"나는 성기사니까."
[특이표본과 특별한 교류를 나눔!]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9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7]
대화를 끝마친 텔로리안은 내일의 결투를 염려했다. 본래는 올골두골로에게 빙의해서 마법과 체술을 동시에 사용하면 간단히 이길 거라고 예상했었지만······
'빌헬름 형제의 품성이 나의 예상보다 훨씬 고결하다. 이래서야······마법을 사용해선 제대로 상처도 입히지 못할 것이다.'
태양신을 섬기는 성직자들은 [불의]를 상대할수록 강해진다. 그리고 이쪽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관은 명백히 [불의]에 속하는 것이다.
'아니지. 지금의 내가 지닌 가치관은 지구에서도 환영을 받을만한 태도는 아니겠군.'
하지만 자신의 가치관을 후회하거나 돌이킬 생각은 없었다. 이쪽 세상의 사람들은 흑마법사와 마법사를 구분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적잖은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흑마법사들과 다름을 보여주려고 애쓰지.'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비굴하지 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주는게 맞다.
"아엘타나르."
"오밤중에 무슨 일이냐?
돌담에 잠들어있던 은빛뱀이 스르르 기어 나왔지만 인간의 형상을 취하진 않았다. 대단히 번거롭고 피곤한 모습이었으니까.
"내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가?"
"흠."
하지만 텔로리안의 진지한 태도에 인간의 형상을 취했다. 뱀의 형태로 인간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의사소통에 오해가 생기니까.
"태양신의 관점에선 악인이겠지."
"그렇다면 당신의 관점에선 어떤가?"
"글쎄······"
밤하늘의 여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영리할 뿐이다."
"악인이 아니란 뜻인가?"
"아니. 멸망을 막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나, 연구성과를 위해선 보편적인 윤리도 저버리는 행위는 분명히 사악하다."
여신은 단호했지만.
"하지만 멸망을 막아내려고 삶을 바치는 헌신이나, 스승이 제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관행을 단절시키려는 절제는 선한 것이지."
동시에 관대했다.
"가장 이기적인 인간도 고결함의 조각이 있으며, 제일 선량한 인간도 이기적인 품성이 있다. 그러니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니까."
그것이.
고대의 신들.
"너희들은 고민하거나 망설이지 말지어다. 단지 가슴의 열정을 따라서 살다가 떠나면 족하다. 그것이 너희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이며, 가장 고결한 행위이니라."
·········고대신의 설득에 마법사는 미소를 지었다. 하나는 스스로가 선택한 길에 확신을 지니게 되었던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마침내 승리의 열쇠를 찾아낸 까닭이다.
"그럼 당신은 선하오?"
"본신은 선하고 정의롭지."
여신은 당당하게 말했다.
"본신은 선하고 정의로운 신을 원하는 기도를 통해서 빚어졌기에, 영혼에 어두운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카람샨 시대의 정의이기에 요즘 가치관과 맞지 않을 뿐이지."
성기사는 사악한 의도를 품은 존재를 상대할수록 강해진다. 그렇다면 상대가 선한 의도를 품고 있을수록······그만큼 성력이 약해지겠지.
"동이 트면 당신이 결투에 나서주시오."
"·········인간의 형상으론 완전히 무리다만?"
"육신은 걱정하지 마시오."
빙의하면 되니까.
올골두골로에게.
15. 열다섯번째 연구 - 재생의 시대(4)
결투시간은 동터오는 새벽이었다. 태양이 밝을수록 강해지는 빌헬름의 특성을 고려하여, 공정한 시간을 선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가 우리랑 싸워?!"
"성스러운 판결을 준비하십시오!"
완전무장한 빌헬름은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키가 3미터에 이르는 근육질의 거인이 황금갑옷을 장비하고 성스런 오라를 내뿜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태양빛을 머금은 전쟁망치를, 왼손에는 오우거의 손으로도 힘껏 쥐는게 가능할만한 경전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반갑다."
······결투장에 도착한 참관인들은 또다른 기이를 보았다. 오우거와 맞먹는 체격의 바위트롤이 양손에 차크람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쌍두오우거와 바위트롤?!"
"태양신 맙소사·········"
"어느쪽이 더욱 강력한 몬스터지?"
"근력과 지능은 오우거가 한층 뛰어나지만 바위트롤은 단단하고 목이 잘려도 살아나는 재생력을 갖추었지. 야생에서 마주하면 서로를 피해가는게 일반적인 대처다."
빌헬름은 올골두골로가 평범한 바위트롤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특히 영계를 내다보는 빌헬름에겐 바위트롤에 깃들어있는 은빛뱀이 보였다. 사멸해버린 고대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신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소."
"신이 직접 나서는 모습이 대단히 품위가 떨어지는 상황임은 인정한다만······"
올골두골로의 성대에서 겹쳐진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덕분에 참관인들은 바위트롤에게 강대한 존재가 빙의했음을 알게 되었다.
"일대일 결투에 영혼이 두개인 생명체를 데려오는 너희들도 그다지 당당하진 않구나."
이에 빌헬름들은 호기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들은 전쟁병기로 제조된 생명체였기에 선천적으로 투쟁심이 대단했다. 태양신의 축복은 투쟁심을 발휘하는 대상을 바꿔주었을 뿐이다.
"우리도 떳떳해서 좋다!"
"더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겠군."
"행동은 말보다 강하다!"
전투는 빌의 돌진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전쟁망치를 우에서 좌로 가볍게 휘둘렀는데,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힘은 좋구나!"
하지만 신령이 빙의한 바위트롤은 대단히 기민하게 움직였다. 전성기의 은빛뱀은 3가지의 위격을 지니었는데, 필멸자들에게 제일 사랑받던 위격은 [전쟁신]으로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교는 보완해야겠구나."
[마셜 아츠, 더비쉬 전승]
[데저트 템페스트(Desert Tempest)]
[바람에 난도질을 당해라!]
바위트롤은 공중으로 뛰어오르면서 고대의 검무를 추었다. 그것은 바위트롤의 육신으론 상상도 해내지 못하던 유연하고 정교한 움직이었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인해서 관절이 뒤틀리고 힘줄이 끊어진다. 그럼에도 올골두골로는 우격다짐으로 카람샨의 검무를 완성했다.
[4위계, 신성의 로어]
[홀리 워드 : 쉴드 (Holy Word : Shield)]
[전능한 아버지시여! 저희를 보우하소서!]
이에 위협을 감지한 헬름이 기도문을 외워서 보호막을 형성했다. 수십 차례의 참격이 날아들어서 보호막을 깨뜨렸지만 위력은 감쇄되었다. 충분히 갑옷으로 견딜만한 수준으로.
팅!
팅!
티티팅!
"너! 엄청 빠르다!"
빌이 오른발로 올골두골로의 복부를 올려찼다. 공성추에 준하는 물리력에 올골두골로가 하늘로 떠올랐다. 덕분에 내장이 산산이 파열됐으나, 그다지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다.
[7위계, 별빛의 로어]
[스타플레임 레인보우(Starflame Rainbow)]
[별빛으로 강타하리라!]
하늘에서 무지개빛 섬광이 쏟아져내렸다. 하지만 빌은 섬광을 무시하고 망치를 방방 돌렸다. 섬광이 적중할 때마다 전신이 불길에 타올랐지만, 오우거 성기사의 육신은 모든 공격들을 견뎌낼만큼 강인했다.
[성기사 특전, 심판의 권능]
[마크 오브 저스티스(Mark of Justice)]
[모조리 짓뭉갠다! 정의의 이름으로!]
올골두골로의 이마에 신성한 성흔이 새겨졌다. 그것은 성력으로 입는 피해를 극대화하는 표식으로, 악인에겐 배로 치명적이었다.
""이걸로 끝!""
[3위계, 신성의 로어]
[홀리 가이던스(Holy Guidance)]
[태양신이시여! 저희의 공격을 인도하소서!]
빌은 전력을 다해서 전쟁망치를 하늘에 내던졌다. 여기에 헬름의 기도문이 더해지자 그것은 괴력과 정확도를 겸비한 치명적인 공격이 되었다.
"!"
신성한 망치가 적중하면서 육중한 폭음이 뒤따랐다. 응축된 성력이 폭탄처럼 터지며 올골두골로의 사지가 사방으로 찢겼다. 덕분에 올골두골로였던 고깃덩이가 힘없이 추락했다.
"뭐, 뭐야?"
"서, 성력이 어떻게 저렇게 강하지······?"
대부분의 참관인들은 결투가 끝났다고 여겼으나,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빌헬름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너, 나쁜 놈은 아니구나?"
"의외로군요. 흉악한 악신일줄 알았건만!"
만일 올골두골로나 은빛뱀이 사악한 존재였다면, 성력의 폭발은 단순한 폭발에서 끝나지 않고 신성한 불길이 되어서 올골두골로를 새까맣게 태웠버렸으리라. 그럼 절단당한 신경다발이 꿈틀거리면서 재생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음······"
"흠······"
빌헬름은 머쓱한 표정으로 재생된 올골두골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앞으로 왠종일도 싸울 수 있었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터.
"우린 비겼다!"
"무승부로 끝냅시다!"
이에 올골두골로는 참관석의 텔로리안을 바라보았고, 싸움을 지켜보던 텔로리안은 고개를 끄덕여서 무승부를 받아들였다.
* * *
이에.
여왕은 화를 냈다.
"어째서 끝까지 싸우지 않았죠?"
"끝까지 싸워야했을 이유는?"
"당장은 비슷해보여도 장기적으론 못생긴 트롤이 유리하잖아요. 성기사의 파괴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대니까요."
올골두골로는 화합의 어머니를 섬기는 수도승이고 은빛뱀은 신령이었다. 태양신의 신성력은 그들에게 특별히 치명적이지 않다.
"끝까지 싸우면 이기기야 했겠지."
"한데 어째서 싸우지 않았나요?"
"참관인들이 지루해서 잠들었을테니까."
쌍두오우거든 트롤이든 무지막지한 맷집을 보유한 몬스터들이다. 한데 몬스터들이 무술을 익혀서 성력을 사용하면 제때에 싸움이 끝날 리가 없었다. 아마 사흘밤낮을 싸워도 결투가 끝나지 않았을테지.
"그리고 무승부면 필요한 결과는 얻어냈다."
"우리가 이기지 못했잖아요?"
"어쨌든 교회의 양보를 얻어냈잖느냐."
태양신 교단은 제국만큼이나 강성한 세력이다. 보이는 힘은 그렇게 대단치 않아보여도, 보이지 않는 힘은 굉장한 집단.
"이건 제국과 전쟁을 벌여서 무승부를 얻은 것만큼 의미있다. 우리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중견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증거니까."
에스실은 교황의 결전병기에 맞설만한 수단이 있음을 증명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 왕국들에겐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리하여.
잿빛현자와 헬름이 최종협상을 벌였다.
"마도대학은 예정대로 건립하겠소."
"허면 우리 교회는 무엇을 얻습니까?"
"대신 대학에서 흑마법을 가르치진 않겠소."
빌헬름은 침묵을 지켰다.
"또한 지옥이나 심연과도 손잡지 않으리다."
"흠······"
헬름은 고위성직자답게 텔로리안이 처음부터 악마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여왕은 흑마법을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날카롭게 찔러왔다.
"그대의 제자 중에선 강령술사도 있던데요."
"역시 교회의 정보력은 굉장하군."
충분히 대비해둔 상황이다.
교회의 정보력은 대륙을 넘어 세계최고니까.
"또한 당신에게도 지옥의 힘이 느껴집니다."
"·········"
"그렇다면 실질적으로 흑마법까지 공인한 셈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잿빛현자는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니 저희의 요구조건은──"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안건은 협상 테이블에 올리지 않는게 좋겠소. 추기경."
말을 끊었다.
허세임을 알고 있으니.
"그대들은 각국 왕실의 비밀을 쥐고 있겠지."
"············"
"하지만 함부로 터뜨리지 않는 이유들이 있잖소? 이번에도 똑같이 적용해주시길 바라오."
권력자들은 누구나 알리기 싫은 비밀을 지녔다. 언제나 진실된 태도만을 고수하는 권력자는 반드시 파멸한다.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도덕적 무결함을 기대하지 않으므로. 그리고 교회는 이것을 누구보다 명백히 알고 있다.
"나는 교황이 젊은 시절에 어떻게 놀았는지 알고 있으며, 주교들이 추기경이 되고자 어떠한 거래를 진행하는지도 알고 있소.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일반인들이 알게 되길 바라시오?"
······텔로리안의 반박에 헬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실은 교회 내부의 부패도 너무 심각해서, 세속 군주들을 타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흑마법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그럼 백성들을 생각하고 서명하시오."
"·········"
깃털펜을 소환했다. 그것은 소년왕의 어머니에게 건네줬던 물건이었다. 소년왕이 외도로 탄생한 사생아라고 거짓자백을 시켰던.
"거인들이 싸움을 벌이면 짓밟히는건 민초들이오. 본인이나 교황은 눈도 꿈쩍하지 않겠지만, 추기경 예하께선 다르시잖소?"
······헬름은 마법사의 협박에 굴복하는게 현명한 일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빌은 깃털펜을 들어서 조약문에 서명했다. 힘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그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되었어."
다만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약자들만큼은 반드시 지켜줘야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신명이라고, 기사단장 빌은 굳건하게 믿었다.
"수고하셨소."
"조언을 해주고 싶어. 마법사."
지능8이 지능35에게 건네는 조언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듣겠소. 기사단장 빌."
"언제 떠날지도 미리 생각해둬."
"흠?"
"평범한 사람들은 때가 되면 신의 부름을 받아서 떠나지. 하지만 아저씨는 신의 부름을 받을 일이 없잖아. 그러니 스스로 떠날 때를 생각해둬야, 아름답게 끝낼 수 있을거야."
한때 위대한 이상을 꿈꾸었지만, 망집만 남아버린 대마법사들에 대한 전승은 대단히 많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지.
"당신은 지혜롭구려."
"헤헤. 칭찬 고마워."
"만일 그대들이 독립적으로 살고 싶은 날이 온다면 나를 찾아오시오. 쌍두오우거를 분리하는 시술도 해보고 싶으니까."
[연구진전 : 재생의 시대]
[대학교 설립의 장애물을 배제함!]
[연구단서 2/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40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28]
이로서 헤링턴 왕조와 교황청 사이에 새로운 조약이 맺어졌다. 그건 일시적인 평화였으나 어쨌든 평화였다. 때문에 민초들은 오늘도 숨을 쉬어갈 공간이 열리게 되었다.
"이제 대학은 세웠는데, 교수진은 어디서 구할까요?"
법적인 문제도 해결됐고 재정과 학생은 충분했다. 하지만 믿을만한 교수진을 구하는게 문제였다. 실력과 인성이 겸비가 되어야하니까.
'음······'
게다가 왕실대학은 단순히 마법사를 양성하고자 세워진 기관이 아니었다. 이곳은 잊혀진 고전들을 새롭게 해석해서,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낼 시대정신의 요람이 되어야했다.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참교육자가 필요하다.'
수정구를 꺼냈다.
[오랜만입니다. 엘렌스트라.]
[오랜만이야. 사랑하는 동생.]
신변잡기적인 대화가 오갔다.
대충 성의없게 대답해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삐진 모양이다.
나중에 만나면 달래줘야지.
[스승님에게 연락할 방법을 아십니까?]
15. 열다섯번째 연구 - 재생의 시대(5)
"스승님은 갑자기 무슨 일로?"
"대학을 운영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
엘렌스트라는 이마를 짚었다.
"저기."
"?"
"스승님을 교육자로 모시는건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스승님을 어머니처럼 여기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아닌건 아니지······"
그건 모든 제자들이 그랬다. 스승님께선 우리를 정성껏 돌봐주시고 온힘을 다하여 가르쳐주셨다. 스승의 은혜가 부모님의 은혜보다 훌륭하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저도 스승님을 어머니처럼 생각합니다."
"·········"
자신의 대답에 엘렌스트라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움과 경악이 뒤섞인·········
"정말?"
"네."
"진짜로?"
"예."
"라일란?"
"아엔."
엘프어까지 사용해 진지한 태도로 되물었음에도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엘렌스트라는 속으로 깊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족보가 꼬일대로 꼬였네······'
이런 까닭에 평범한 인간들이 가족과 사문의 경계를 엄격히 구분하겠지. 보다 엄밀히 말하면, 역할을 구분하지 않아서 제자들에게 혼동을 일으킨 스승님의 무책임한 행동이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그분에게 거둬져서 노예신세를 면했으니 흉을 볼 수는 없는데······'
엘렌스트라는 고개를 흔들어 감정을 비워냈다. 어느 집안에나 복잡한 가정사가 있으니까.
"전달은 해볼게."
"스승님께선 무사히 지내십니까?"
"너한테 패배하신 충격으로 한동안 폐인으로 지내시다, 최근에 대스승님을 찾아가셨어. 그래서 동문들도 모조리 뿔뿔이 흩어졌고."
그랬다.
저번에 들었지.
"얼마 전엔 네 근황을 먼저 물으시더라?"
"그렇습니까?"
"복잡한 일들이 많았지만 네가 언제나 제일 총애받았잖아. 다양한 의미에서."
그랬다.
스승님은 결과를 중시하셨으니까.
"그럼 끊는다."
"네."
"너무 기대하진 마."
"?"
"얼마전에 맥켈런 경이랑 재결합하셨거든."
·········
·········
"그렇습니까."
길었던 침묵끝에.
대답을 내놓는다.
"훌륭한 일이네요. 외롭지 않으실테니."
스승님께서 나를 길러주고 가르쳐주신 어머니시라면, 맥켈런 경께선 의붓아버지같은 분이었다. 술만 먹으면 사람을 때리던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훨씬 본받을만하던 사내.
"그래도 만나볼 생각이야?"
"괜찮습니다. 제가 아무리 욕심이 많아도 아버지같은 분을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통신을 마치고 초빙할 학파장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논문을 눈여겨보았던 신진마법사들에게 괜찮은 조건으로 채용제안을 보낸다.
"우리가 교수직을 맡아달란 말씀이시오?"
"우리는 기껏해야 스콜라밖에 되지 않는데?"
"마지스터에 도달한 마법사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기 어려워하오. 혹은 지나치게 재능이 뛰어나서 일반적인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적합치 않거나."
이에 초빙된 신진마법사들이 기분나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50대의 나이에 마지스터에 도달한 천재가 그렇게 말하니 짜증났다.
"그럼 잿빛현자께선 렉토르가 되는 것이오?"
"나는 교육자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오."
"흠······"
이에 텔로리안과의 마법적교류를 기대하고 찾아왔던 마법사들은 김이 새었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젊고 재능있는 마법사들은 항상 우수한 조건의 일자리가 있었기에, 에스실 왕실대학의 교수직은 그렇게 매력적인 자리는 아니었다. 북부의 마도대학이라면 모를까······
"모두 반갑습니다. 선생님들."
""여왕 폐하.""
그때.
젊고 아름다운 여왕이 들어왔다.
"마력을······"
"익히셨군요?"
마법사들은 벨라디아의 껍데기에 흥분한게 아니었다. 그들은 군주가 마력을 내뿜는 광경에 흥분했다. 그건 태양신 교회가 득세한 천년동안 누구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으니까.
"짐의 왕국에서 모든 마법사들은 평등한 동료들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흑마법으로 분류되는 4종의 금지된 로어를 제외하고, 어떤 마법이든 자유롭게 연구할 권리를 누릴 겁니다."
여왕은 교수내정자들을 앉혀두고 청사진을 설명했다. 에스실은 대가문들이 이합집산을 벌이던 봉건왕정에서, 국왕이 모든 권한을 보유하는 절대왕정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왕이 신뢰가능한 친위세력은 필요했고.
"여러분이 변화의 주역이 될겁니다."
"············"
꿀꺽.
권력에 접근할 기회.
사회적 존경을 받을 기회.
재능있는 마법사들이 바라는 욕구.
"오늘날의 마법사들은 어느 국가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존중해주는 국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국가들은 마법의 배움과 활동을 엄격히 규제했다. 성국에선 마법을 배우면 이단이고, 제국에선 마력을 각성하면 군대에 징집당했다. 북부는 사정이 나았지만 사회지도층으로의 편입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누구도 주문쟁이의 충성심을 신뢰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짐의 왕국에선 다를 것입니다."
화륵!
벨라디아의 오른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짐의 치세에선 마법사들이 연구에 전념하고 각자의 연구성과에 걸맞는 보상을 받을 겁니다. 이러한 포상에는 작위나 관직도 포함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공작이나 백작이 나올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여왕 스스로가 마법사이기에 가능한.
"정복자 자헤리온의 이름에 걸고서 맹세하건데, 짐의 영토에선 어떠한 마력각성자도 강제로 징집되거나 처형되지 않을 겁니다. 대신 풍족한 후견을 누리며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짐의 과업에 동참해주십시오!"
이에 신진마법사들은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마법을 박해하는 세상에 적응해서 살아가기엔 지나치게 젊고 자신만만했다.
[연구진전 : 재생의 시대]
[마법의 중흥기를 시작함!]
[연구단서 3/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29]
'이걸로 제일 어려운 부분은 해결됐다.'
다음엔 일반과목들을 책임질 교수진을 구해야했다. 마법사들이 교양수업까지 담당한다면 학생들의 상식이 파탄나버릴테니까.
"안녕하시오. 바드마스터 게릭선생."
"안녕하십니까. 잿빛현자 텔로리안님."
바드마스터를 마주한건 벨라디아를 옹립한 직후. 당시에는 바드마스터가 불손한 태도를 보였으나 오늘은 대단히 공손했다.
"바드가 남에게 허리를 숙여도 되오?"
"잿빛현자님께는 그래도 됩니다."
바드들은 누구보다 풍문에 발빠른 사람들. 그들의 대표자를 자처하는 인물이라면, 풍문만으로 진실을 파악할 능력을 갖춘다.
"공께선 지옥군단을 이끄는 판데모니엄의 대원수를 소멸시키고, 태양신에게 맞서는 지옥제왕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는 오만한 불멸자들에게 우리 필멸자들의 가능성을 증명해주신 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바드마스터는 텔로리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기뻤다. 본래 바드마스터는 황제와 교황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자니까.
"게릭 공의 경의는 감사히 받겠소."
"저는 공이 아닙니다."
게릭이 정색했다.
"유랑하는 광대일 뿐이지요."
"어쨌든 당신이 바드의 명예에 충실한 삶을 살아온 것을 알고 있소. 때문에 인재들을 추천받기 위해서 당신을 불러왔던 것이고."
바드는 중세랜드의 언론인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그만큼 양심을 포기하면 이득을 얻을 기회가 많지만, 게릭은 한번도 그러지 않았다.
[바드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30]
"제가 광대인지라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대부분 딴따라입니다. 그런데 저한테 인재들을 추천받으시겠다고요? 진심이십니까?"
끄덕.
"왕립대학에 필요한 교수는 단순히 박식한 사람이 아니오. 지식의 총량만 따졌다면 전부 마법사로 채워넣었을테지."
하지만 똑똑함과 현명함이 별개이듯,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고 그것을 훌륭히 전달한다는 보장은 없다. 대표적으로, 자신은 그다지 좋은 스승이 아니고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당신들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야기를 만들어온 사람이오. 적당한 학식과 뛰어난 전달력. 그게 교양학부에 필요한 자질이오."
게릭은 텔로리안의 지침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각종 분과에 어울리는 인재들을 추천해주었다. 덕분에 왕립대학에는 노련한 바드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럼 이제 입학생을 받자꾸나."
"마력각성자들은 전대륙에서 수집해볼게요."
최초의 입학생들은 귀족집 자제들이나 마력각성자들이었다. 귀족들은 여왕의 총애를 받기 위함이었고, 마력각성자들은 잠재력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미래의 궁정마법사와 영주로 거듭날 젊은이들이다.
'이제 대학을 총괄할 렉토르(Rector)만 선임하면, 나의 연구로 돌아가도 되겠군.'
렉토르(Rector)는 대학을 총괄하는 최고책임자를 뜻했다. 현대의 대학총장들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권위있는 자리였다.
[스승님께서 제안을 고사하셨어.]
[그렇습니까?]
[대신 더욱 훌륭한 분이 가실거야.]
스승님보다 탁월한 교육자?
그러한 마법사는 당대에 존재하지 않는데······
"반갑네. 젊은이."
"마지스터 다르막세스?"
"자네가 나의 환영거울로 이뤄낸 성과들을 전해들었네. 무척이나 관심이 가더군."
환영술사 다르막세스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었다. 동화책의 늙고 현명한 마법사가 현실로 고스란히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한데 마법거울은 어떻게 반출한건가?"
"·········"
"분명히 마도대학의 환영술학파에서만 사용을 허락해준 것으로 기억하네만······"
이에 텔로리안은 침묵을 지켰다. 게임 시절에 읽었던 도면을 기억해뒀다가. 술식을 따라서 구현했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으니까.
"반출 과정을 들키지 않았으니 깊게 추궁하진 않겠네. 하지만 내가 알게 됐으니 마법거울의 사용료를 지불해주면 좋겠는데······"
마도 사회의 불문율.
무슨 악행도 허용된다.
대신 걸리면 안된다.
"물론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사용료를 받으시려면 거울전쟁에서 승리하셔야합니다. 대신 승리하시면 제가 지닌 보물의 절반을 넘겨드리겠습니다."
피식.
늙은 마법사가 미소지었다.
"애송이가 주제를 모르는군. 바로 시작하지."
·········
"클클. 자네도 만만치 않구만."
·········
"험험. 간만에 해서 예전같지 않군······"
·········
"한 수만 물러주면 안되겠나?"
·········
"이건 조작이야!"
"마지스터께서 시전하신 대국이잖습니까?"
"그렇다면 마법적 오류가 분명하네! 나이를 먹어서 주문시전에서 실수가 있던 것이지!"
[거울전쟁 챔피언에 등극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31]
"············"
다르막세스는 두번째 대국의 결과를 망연히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잿빛현자는 정말 못되먹은 자식이었다······노인공경도 모르는······
"마지스터 다르막세스."
"······뭔가?"
"챔피언 배지도 주셔야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스스로 고안해낸 게임에서 패배한 환영술사는 꺼이꺼이 울었다. 텔로리안은 배지를 로브에 차면서 웃어보였지만.
"크흠!"
"·········"
"어쨌든 어르신께서 왕실대학의 렉토르가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준비한 계약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휘휘.
노인은 손을 내저었다.
"주는대로 받겠네. 죽을 날만 앞둔 늙은이인데 부와 권력이 무슨 소용인가? 후학들에게 배움을 전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번득!
노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대신 하루에 한 번씩 거울전쟁을 둬주게."
"·········예?"
"눈에 흙이 들어가기전에 자네가 훔쳐간 챔피언 배지는 돌려받고 싶네. 대국을 통해서."
이로서 헤링턴 왕조가 후원하고 다르막세스가 운영하는 에스실 왕실대학이 완성되었다. 마침내 교회의 가르침에만 의존하던 암흑기를 벗어날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에스실 왕립대학은 임페리얼 아카데미나 마법협회가 운영하는 마도대학에 준하는 교육기관으로 성장하겠지.'
다만.
그건 머나먼 미래의 일이다.
[주군!]
지금은.
눈앞의 문제에 집중해야한다.
[나의 레어가 심연의 짐승들에게 공격받고 있다! 나는 그대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그대는 내게 보호를 제공해야한다!]
검은폭군이 보호를 요구해왔다.
봉신이 지니는 합당한 권리다.
"아엘타나르."
"무슨 일이냐?"
"진신을 깨우도록."
"간만에 포식할 기회가 생긴 모양이구나."
심연이 짐승을 풀었다면.
이쪽도 짐승을 풀어야지.
16. 열여섯번째 연구 - 광기의 산맥(1)
대산맥은 방대한 영역이다. 만물도감에도 나오지 않는 다양한 식생들이 살아가는 땅. 당연히 드래곤이라고 언제나 안전하지는 못하다.
"그러니 지원을 요청한건 이해가 된다만······"
"으음······"
"이건 다급한 상황이 아니잖나."
검은폭군의 레어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놈들에겐 심연의 기운이 느껴지긴 했다만·····평범한 몬스터에 불과했다.
"위험한 상황인줄 알았다."
"············"
검은폭군은 신중한 성격이 아니라 겁이 많은 걸지도.
"스승님. 제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금빛왕자가 늠름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영롱한 금빛비늘을 번득이면서.
"흠······"
"아시다시피 대산맥의 지하에는 [광기의 심장부]가 있습니다. 그곳에선 매일마다 형언하지 못할 끔찍한 실험이 자행되고,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괴물들이 탄생하지요."
······텔로리안은 동거룡의 체면을 챙겨주는 제자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짧은 시간 사이에 많은 것을 배웠던 모양이다.
"광기의 사도들은 언제나 저희 용족들을 노려왔습니다. 그들의 저주받은 실험에선 저희가 제일 적합한 생물이니까요."
광기의 교단은 광기의 군주를 섬기는 사교도들이다. 본래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광인들이, 강대한 데몬로드인 [광기의 군주]를 섬기며 완벽히 돌아버린 것이다.
[데몬로드는 뭐냐?]
[심연여왕의 아들들을 뜻한다.]
악마는 규율에 기반해 악을 행하는 데빌과 원초적인 본능으로 악을 행하는 데몬으로 나뉜다. 권력을 위해서 체계적인 학살을 행하는 폭군과 살인을 즐거워하는 엽기살인마의 차이다.
[그럼 권력을 위해 체계적인 학살을 수행하면서, 살인을 즐거워하는 살인마는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궁극의 악이라도 되느냐?]
뭐긴.
인간이다.
어쨌든 데빌은 여섯지옥에 거주하고 데몬은 무한의 심연에 거주한다. 또한 무한의 심연에서 유난히 강력한 데몬을 데몬로드라고 부르는데, 실질적으론 심연여왕의 아들들을 뜻한다. 참고로 딸은 하나도 없다.
[데몬로드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32]
즉.
요약하면.
"······대산맥의 지하엔 광기의 군주가 잠들어있으며, 녀석을 신으로 섬기는 사교도들이 곁에서 금지된 실험을 행하고 있다."
또한.
놈들은 용족을 실험체로 삼길 원한다.
"그게 제가 드리려던 말씀입니다. 스승님."
"그런데 방어는 너희만으로도 충분하잖나?"
"흠······"
아무리 약해도 용은 용이다. 금빛왕자는 40레벨에 준하는 강자고, 검은폭군은 60레벨이 넘어가는 초월자다. 광기의 군주가 힘을 되찾아서 깨어난다면 모를까, 부하들은 문제가 아닌데?
"느낌의 문제랄까요?"
"·········"
"그렇다! 주군!"
검은폭군이 부끄러움도 없이 말했다.
"주군도 살고 있는 저택의 지하실에 괴물이 산다면, 주군이 얼마나 강하든 잠들기 찝찝하지 않겠는가? 나도 그런 기분이다."
······친애하는 비만도마뱀께선 주군을 일종의 만능해결사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체면이란 단어를 모르는가?"
"체면을 지키면 생존에 도움이 되는가?"
"············"
"생명에게 주어진 의무는 오로지 생존과 번식뿐이다. 나머지 요소들은 불필요한 겉치레에 불과하므로 우선순위를 명백히 해야한다."
어쩐지 봉신관계를 맺고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녀석의 부러진 뿔을 봐서 참아주었다. 어차피 광기의 심장부는 해결해야하는 던전도 맞았고.
"알겠다. 처리해주지."
"알겠다! 우리도 출전을 준비하지!"
"아니."
고개를 젓는다.
"너희는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아무리 주군이라도 혼자서는 힘들텐데?"
[광기의 심장부]는 본래 50레벨 5인으로 공략하도록 설계된 던전이다. 아니면 25레벨 25인을 데려와서 숫자로 밀어붙이거나.
"반대로 생각해야지."
"·········?"
"광기의 군주가 아무리 강해도 혼자서는 무리다. 형제들을 줄줄이 데려온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쪽도 70레벨 보스몹이 있다.
* * *
대산맥의 심층부는 지상의 생물체들에게 적대적인 공간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동굴엔 지하의 괴물들이 가득하고, 동식물에는 독성이 가득해 식량 수급조차 어렵다.
'수많은 모험가들이 광기의 심장부에 도전하다 죽음을 맞이하거나, 그보다 참혹한 운명을 맞이했다. 그만큼 까다로운 던전이니까.'
우선 광기의 심장부에 도달하는 여정 자체가 위험천만했다. 대산맥의 지하에는 지상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교활하고 강력한 괴물들이 도사렸고, 이들은 지상의 연약한 생물체들이 부드러운 속살을 지녔음을 알고 있었다.
"············"
그럼에도 텔로리안은 혼자서 어둠을 헤쳐갔다. 푸른빛을 내뿜는 마법지팡이를 앞세우자, 어둠 속에 도사린 수많은 괴물들이 시선을 주목했다. 괴물들은 마력을 감지하지 못하므로, 텔로리안의 위험성을 알지 못한다.
"쉬이이잇·········"
"킥, 킥, 킥키킥!"
"케륵! 케르케!"
그럼에도 괴물들은 멀찍이 달아났다. 지하생물의 마법에 준하는 직감이 압도적인 포식자가 뒤따름을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전투도 없이 심층부를 통과하는건 처음이군.'
드루이드 플레이를 할때도, 지하생물들이 이렇게 유순한 태도를 보이진 않았다. 우두머리 개체들은 도전해왔고, 적당한 강자들도 호기심을 드러내며 접근해왔지.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침묵하면서 거리를 벌렸다.
"·········"
덕분에 하루도 되지 않아서 지하의 고대사원에 도착했다. 그건 대단히 장엄한 건축물이었다. 굉장히 오랜 세월을 존재해왔음에도 창조 당시의 광채를 간직한······
[창조주 타이탄들의 숨결이 남아있구나.]
텔로리안은 고대사원의 내부에서 숙면을 취했다. 방호결계를 쳐뒀지만 불침번은 걱정하지 않았다. 타이탄들의 기운이 남아서 부정한 생물들이 본능적으로 접근을 꺼리는 장소였으니.
"안녕하시오."
"?"
"혼자 오신 것이오? 마법사 양반."
방호결계 너머에서 굵고 남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눈 안대를 차고 있는 오크전사였다. 등에 짊어진 도끼가 제법 좋아보였다.
"나는 이악츠 쯔베인이라고 하오."
"쯔베인 가문의 장남이시군. 반갑소."
텔로리안은 방호결계의 내부에서 손인사만 건넸고 이악츠도 경계를 유지한채 적절한 거리를 벌렸다. 이곳은 던전이었다.
"우리 파티가 이곳에 머물러도 되겠소?"
"그건 나보단 타이탄들에게 문의해봐야지."
"오호! 그대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기도로 일대일 허락을 받았소."
"으하하! 그렇다면 우리도 기도로 해결하지!"
이악츠와 동료들은 적절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한걸음에 달려와 찌르기엔 멀었지만, 불의의 습격이 있을때 지원을 오기엔 가까웠다. 이는 던전에서 마주한 낯선 모험가들의 관습을 지킨 것이었다.
"그대들은 무슨 용무로 찾아왔소?"
상식을 지키는 이들이기에.
나름대로 관심을 보여줬다.
"광기의 교단에 잡혀간 동료들이 있소."
이악츠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우리는 그들을 구하기로 결정했소."
"·········"
텔로리안은 잡혀간 동료들의 운명을 살펴보지 않았다. 결과는 뻔했지만 설득이 가능한 안건이 아님을 알았으니까.
무엇보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귀하는?"
"광기의 군주를 죽이러 가는 길이오."
"허."
그걸로 목적에 대한 대화는 끝이었다. 이악츠 일행은 낙천주의자들이었기에, 텔로리안은 그들의 긍정적인 전망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저들이 죽게 내버려둘 셈이냐?]
[저들도 충분히 알고 선택했소.]
덧붙였다.
[어차피 우리는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지 못하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살아가느냐보단 어떤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집중하는게 좋겠지.]
이에 은빛뱀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를 인정하는 신이었으니까.
"이걸 받아두시오."
"긴급 텔레포트 완드?"
이악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단히 값비싼 물건이었으니까.
"그대들은 죽음보다 처참한 운명도 각오하고 이곳에 찾아왔겠지. 하지만 최후에 어떠한 선택을 하고 싶을지는 모르는 일이오. 그러니 괘념치말고 받아두시오."
모험가들은 텔로리안이 범상치않은 마법사임을 알아차렸다. 수수한 요술쟁이와 걸인처럼 보이는 성직자는 언제나 주의해야하는 자들이니까.
"······우리와 함께 가줄 수는 없겠소?"
"나는 싸울때 화력을 제약하지 않소."
이악츠의 동료들은 사교도들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을 구하려면 화력을 자제하고 생포해서 세뇌부터 풀어야하는데, 자신은 결코 그렇게 불리한 방식으로 싸우지 않았다.
"만일 당신들이 동료들의 안식을 원한다면 동행합시다. 하지만 동료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구출하고 싶다면 나와 함께 가선 아니되오."
이악츠의 오랜 모험가생활에서 비롯된 직감이 말했다. 눈앞의 사내와 함께 광기의 심장부에 도전한다면 자신들은 살아남으리라고.
하지만.
잡혀간 동료들은 분명히 죽겠지.
"당신이 혹시······"
꿀꺽.
침을 삼키며 묻는다.
"······잿빛현자 텔로리안이오?"
끄덕.
"우리의 미래는 어찌 되겠소?"
"나는 당신들의 미래를 살피지 않았소."
"·········"
"내가 당신들의 미래를 살펴보면 강제로 돌려보낼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하지만 나는 당신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싶지 않소."
누군가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가기로 결정했을때, 지켜보는 사람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가? 태양신은 강제로라도 막아야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내가 배웠던 바는 다르다.'
개인이 충분한 숙고를 거쳐서 내린 결정은 반드시 합당한 존중을 받아야한다. 개인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는 온전히 본인에게 달린 것이니까.
"우리의 미래를 봐주실 수 있겠소?"
도리도리.
"그대들은 예언을 듣지 않고도 불운한 결과를 예측할 지성을 지녔소. 그러니 당신들이 운명의 흐름에 따르겠다면 예언이 필요 없소."
또한.
"반면 당신들이 운명의 흐름에 도전하길 원하더라도 예언은 필요하지 않소. 운명을 거스를 행운을 지녔다면 예언도 무의미할테니."
자신의 예측조차도 100%가 들어맞지는 못한다. 단지 100%에 수렴하는 적중률을 지녀서 예언이라고 불릴뿐.
"······고맙소."
그들은 황급히 떠났다. 텔로리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좋은 운명이든 나쁜 운명이든 함께 하기로 결정한 마음가짐이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자신은 모험가들의 이름과 생애를 일지에 적어두고, 하루를 기다렸다.
"돌아왔구려."
"············"
돌아온 이악츠는 더이상 오크전사가 아니었다. 머리는 사마귀의 것으로 대체됐으며 뜯겨나간 사지에는 촉수가 돋아났다.
"······그대는 어째서 우리를 저버렸지?"
그럼에도.
목소리만은 이악츠의 것이었다.
"그대는 우리를 구제할 수 있었잖나!"
나머지 파티원들도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그들은 교전에서 패배해 포로로 잡힐 때까지도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광기의 사도들이 실험을 시작하자, 모험가들은 자신들의 정신이 기대처럼 강인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구원자가 아니니까."
지팡이를 쥐었다.
씁쓸한 표정으로.
"선견자일 뿐이지."
16. 열여섯번째 연구 - 광기의 산맥(2)
이악츠의 괴기한 외침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군을 북돋고 적군을 위압하던 우렁찬 전투함성이, 이젠 광기의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4위계, 심연의 로어]
[에코 오브 매드니스(Echo of Madness)]
[Ph'nglui mglw'nafh wgah'nagl fhtagn!]
형언하지 못하는 광기가 고대사원에 메아리쳤다. 이에 이악츠가 데려온 사교도들도 광기의 노래를 합창했다.
[5위계, 심연의 로어]
[파멸의 장송곡(Dirge of Ruin)]
[R'lyehm aet'ghra ruinae!]
사교도들은 목도한 파멸을 경고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텔로리안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건 살려달라는 애원이나 자신들과 똑같이 되자는 저주가 아니었다.
'도망쳐! 도망쳐라!'
'너무 늦기 전에 도망쳐라! 빨리 도망쳐!'
'우리의 광기가 너를 삼키기 전에!'
광기의 사도들은 평신도들에게 완전한 광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전한 정신으로 광기를 목도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완전히 미쳐버리면 수술을 거쳐 제정신으로 돌아갔다.
"·········"
때문에 내면의 바램과 다르게 사교도들의 입에선 광기의 단어만이 새어나왔다. 신체는 기괴했고 영혼마저 침식된 모습이었다.
[신규연구: 광기의 산맥]
[연구주제: 산맥의 광기를 걷어내십시오.]
[연구단서: 0/3]
[연구보상: 광기의 로어]
하지만 로어마스터는 새로운 연구주제를 찾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내가 줄 수 있는건 안식 뿐이오."
[7위계, 지옥의 로어]
[소울 인시네레이션(Soul Incineration)]
[지옥의 불길로 영혼을 잿더미로 만들리!]
마법지팡이에서 유황불로 이뤄진 줄기가 뻗어갔다. 처음에는 한줄에 불과하던 유황불이 갈라지며 두줄이 되었고, 두줄의 불줄기는 또다시 좌우로 갈라져서 네줄이 되었다,
"끼에에에에에에엑──!"
지옥불에 휩싸인 사교도들은 영혼채로 타오르면서 괴기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그들의 영혼은 오염되어 정상적인 사후세계로 떠나지 못한다. 이것이 그들을 위한 최선이다.
"그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러나 이악츠 일행은 역할을 분담해서 주문을 견뎌냈다. 마법사는 방호주문을 시전하고 전사는 몸으로 받아내며 성직자는 치유한다.
[더블 캐스팅]
[7위계, 지옥의 로어]
[소울 인시네레이션(Soul Incineration)]
[지옥의 불길로 영혼을 잿더미로 만들리!]
하지만 같은 주문이 연속해서 날아들자 당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지옥불에 휩싸여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 한때나마 오크였던 이악츠만이 버티고 있을뿐.
"·········어째서 영혼까지 태워버린 것이오?"
"그대들을 위한 최선이니까."
이악츠의 원망스런 목소리에도 텔로리안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외우주의 광기에 잠식된 영혼은 어떤 사후세계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오. 그래서 원혼이 되어서 세상을 정처없이 떠돌다, 외우주의 존재들에게 잡혀가 그들의 일원으로 거듭나지. 당신도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잖소"
텔로리안의 단호한 대답에 이악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자신을 구하려는 시도라도 해주었으면 이토록 섭섭하진 않았을텐데······
"당신들을 구해낼 방도는 없소."
"·········"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화륵!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악츠의 혼백은 끔찍한 절규를 지르며 연소되었고, 텔로리안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텔레포트 완드를 챙겼다. 이것이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서두르지."
[그래.]
고대사원을 떠나 광기의 심장부로 향했다. 지하통로는 미로처럼 복잡했고 곳곳에는 위험천만한 괴물과 함정이 도사렸다.
하지만 무엇도 텔로리안의 전진을 방해하지 못했다. 로어마스터는 미로의 구성을 완전히 읽어냈고, 괴물들은 마법사를 뒤따르는 포식자를 느끼고 달아났으며, 함정은 마법과 지혜에 의해 간단히 파훼되었다.
'그럼에도 경험치가 오르질 않는군.'
자신은 40레벨 로어마스터였다. 마도대학의 학장들과 비슷한 레벨로, 8위계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일반인들의 시선에서는 대마법사로 불리기 충분하다.
'진정한 대마법사는 51레벨 이상의 초월자들이다. 더이상 주문의 위계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를 뜻하지.'
레벨이 높아지면서 학식이 깊어진만큼, 어중간한 지식으론 마법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10레벨은 내가 접하는 모든 지식이 새롭고 신선했지. 그래서 책만 읽어도 경험치가 쑥쑥 올랐지만, 이젠 정말로 특별한 경험이나 장기간의 연구를 통해서만 경험치가 오른다.'
어쨌든.
입던에 앞서서 레벨을 점검하자.
최종점검이 36레벨.
현재레벨이 40레벨.
4레벨을 올려야한다.
'레벨업 속도가 많이 둔화됐군.'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직감 22 -> 직감 24]
[클래스 능력을 선택합니다!]
[소환사(초급) 획득!]
[소환사(중급) 획득!]
[소환사(상급) 획득!]
[소환사(달인) 획득!]
──────
■달인급 소환사(영웅, 클래스 특성)
: 당신은 물질계 바깥의 상위존재들을 불러오는 마법에 통달했습니다. 유명한 악마와 대등한 조약을 맺거나, 소환수군단을 소환해서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효과
: 소환마법 마나소요 –50%
: 소환마법 지속시간 +100%
: 소환마법 수요돌파 +100%
■특수
: 차원이동 패널티 없음
: 대규모 소환의식 가능.
──────
[로어마스터의 지혜 : 능력 증진]
[특성포인트를 획득합니다! -5P]
[특성포인트를 획득합니다! -5P]
[잔여 전승포인트: 22P]
[잔여 개인특성 : 6개]
전승포인트를 사용하고.
[개인특성을 선택합니다!]
[견습연구자를 획득!]
[정식연구자를 획득!]
[숙련연구자를 획득!]
[불가사의 연구자를 획득!]
──────
■불가사의 연구자(영웅, 클래스 특성)
: 당신은 실로 오랜 세월을 학문에 정진해왔습니다. 덕분에 배움에는 끝이 없으며 연구엔 성역이 없다는 가르침을 체화했습니다.
◆효과
: 학습속도 +500%
: 연구속도 +500%
: 배움에서 비롯되는 모든 패널티 면제.
──────
이로서 자신은 금단의 지식을 접할때 생겨나는 [정신오염]에서 면제되었다. 접해서는 안되는 지식들을 배우는데 지장이 없는 것이다.
'이제부턴 벨라디아도 제대로 가르칠 수 있겠군. 이젠 지옥마법을 감각적으로 사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이론도 익히게 되었으니까.'
레벨업을 마치고 광기의 심장부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한때 창조주들이 머무르며 지하종족들을 빚어내던 신성한 공방이었으나, 오늘날엔 광기로 가득한 불경한 실험실이 되었다.
'태고의 타이탄들은 스스로의 생명과 영혼을 바쳐서 원시종족들을 빚어냈다. 심연의 여왕은 타이탄들을 질투해서, 자신도 창조자가 되고자 다양한 실험을 시행했지.'
그렇지만 악마는 희생을 알지 못하므로 새로운 것을 창조할 능력도 없다. 때문에 심연여왕이 제일 정성을 들여서 빚어냈던 아이는, 데몬들조차도 눈쌀을 찌푸릴 흉물이 되었다.
'그래서 어미마저 외면한 아이는 물질계로 던져졌고, 스스로 살아남고 성장해서 광기의 군주가 되었다.'
광기의 군주는 어머니의 가장 완벽한 창조물이 되고자, 끊임없이 필멸자들의 신체를 조합해보고 있다.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시도를 거듭할수록 더욱 끔찍한 흉물이 되어간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광기의 군주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23]
그래서.
[어떻게 공략할 생각이냐?]
광기의 심장부엔 전투원만 수천에 달하는 광기의 교단과 수십체의 끔찍한 키메라들이 있다. 이들을 지휘하는 [다섯 사도]들은 평균레벨이 45에 이르는 강자들.
[제일 까다로운 적수는 광기의 군주가 될게다. 심장부 내부에서 녀석과 놈의 추종자들은 훨씬 강력해지니까.]
광기의 심장부가 평범한 던전이었다면 통째로 무너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곳은 타이탄들이 사용하던 공방. 대마법사들이 몰려와도 파괴하지 못할만큼 외벽이 단단하다.
"그대의 말이 옳소."
던전은 악당이나 괴물의 요새화된 거처를 뜻하는 단어. 그렇기에 공성측이 불리한 교전비를 강요받듯이, 던전을 공략하는 사람도 언제나 위험을 감수하며 싸워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저곳을 공략하지 않을 것이오."
모험가들은 부와 명예를 쫓아서 던전에 진입한다. 고귀하고 용맹한 행동이다. 하지만 지혜롭다고 불러줄 수는 없으리라.
[이번에는 그대가 무슨 흉악함을 내보일지 기대해보겠다.]
이에 텔로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내리쳤다. 불꽃이 바닥을 가로지르며 육망성 모양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동시에 아공간에서 각양각색의 촉매들이 소환되었다.
"이정도면 훌륭하군."
텔로리안이 그린 마법진도 매우 사악한 기운을 뿜었다. 다만 광기의 심장부에서 뿜어져나오는 사악함과 방향이 달랐다.
"나, 발로르를 파멸시킨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 판데모니엄의 영주들에게 전한다!"
텔로리안의 방대한 마력이 마법진으로 빨려들어가면서 마법진에서 검붉은 번개들이 솟구쳤다. 먼지가 흩날리고 통로가 흔들렸다.
"나는 디아볼릭 코덱스 1조 3항에 기입된 승자의 권리에 의거해, 발로르의 권력을 승계하겠다. 따라서 판데모니엄의 영주들은 지금부터 본인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발로르가 물질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놈이 다스리던 판데모니엄도 통째로 파멸을 맞이했었다. 하지만 발로르를 따라서 지상에 올라왔던 선봉대만큼은 살아남은 상태.
"이에 판데모니엄의 지배자로서 휘하의 영주들을 소집하니, 그대들은 대군주의 명령을 받들어 이곳에 강림하라!"
주문시전이 끝나자 마법진에서 유황불이 치솟으며 고위악마들이 강림했다. 그들은 대악마들처럼 신적인 존재들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필멸자를 아득히 초월하는 강자들이다,
"의외로군."
처음으로 대답한 고위악마는 완전무장한 지옥기사단장이었다. 성산전투에서 철퇴공과 무기를 맞대던 지옥군대의 선봉장.
"그대가 우리를 소환할 줄은 몰랐다만."
텔로리안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마법사였으며, 그렇기에 소환마법의 결과도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흠? 한데 자네는 어째서 이곳에 있나?"
"소환에 응해서 도착했을 뿐이네만?"
"자네도?"
판데모니엄의 영주들은 서로를 마주한 순간부터, 소환사가 규격을 뛰어넘는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인간에 불과한 자가 악마영주들을 동시에 불러냈으니까.
"다들 살만한가?"
"·········"
"그렇지 않았겠지."
발로르의 부관들은 오갈데없는 망명객에 불과했다. 분노한 지옥제왕은 판데모니엄의 패잔병들을 지상으로 추방했으니.
"그럼에도 나를 고깝게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쉬이익!"
텔로리안이 악마영주들을 소환하며 모든 마력을 소진했다. 그럼에도 악마영주들은 적의를 드러내지 못했다. 어둠 속에 도사린 신성한 존재를 의식해야했으니까.
"좋은 제안을 하고자 데려온 것이니까."
지팡이를 들어서.
광기의 심장부를 가리켰다.
"창조주 타이탄들의 신비가 깃들어있는 사원을 너희의 영지로 삼는다면, 힘의 누수를 방지하고 회복할 여유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수상쩍은 제안이었지만 혹하지 않을 방안이 없었다. 그들은 거점이 절실했으니까.
"또한 로어에 맹세컨데 너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결코 외부인에게 발설하지 않겠다. 어떤가? 나와의 계약을 받아들여 심연의 족속들을 쓸어버리고 힘을 회복할 영지를 획득하지 않겠는가?"
16. 열여섯번째 연구 – 광기의 산맥(3)
"공격! 공격을 개시하라!"
"제물들이 제발로 찾아왔군! 너희도 이제 우리와 함께 섬기리·········응?"
사원정문을 지켜내던 거대사마귀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주제도 모르는 모험가 나부랭이들이나, 태양신의 의지를 들먹이는 성기사들이 쳐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악마?!"
"진정한 악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대오를 갖춘 지옥의 군대가 진격해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유황불길 화염검을 휘두르는 지옥기사들이 있었고, 기계보다 정밀한 규율을 갖춘 무수한 지옥창병들이 뒤를 따른다.
"하나!"
데빌들이 파이크를 내질렀다.
사교도들이 모조리 꿰뚫렸다.
"둘!"
데빌들이 파이크를 내질렀다.
실험체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셋!"
데빌들이 파이크를 내질렀다.
1사도가 죽음을 맞이했다.
"진격하라! 판데모니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들의 군홧발 아래에 우주가 짓밟히리라! 판데모니엄 만세! 지옥제왕 만세! 일곱지옥에 영원한 승리를 가져올 지어다!"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명예를 되찾으려는 지옥군단의 맹공은 매서웠다. 그들은 사교도들을 학살하고 실험실을 불태웠으며 불경한 제단을 파괴했다.
"흉측하다!"
"무절제하다!"
"이것은 진정한 악이 아니다!"
전부!
전부 죽이고 불태워라!
이들은 악마의 수치다!
"파괴!"
"학살!"
"죽음!"
"""전쟁의 참화야말로 진정한 악!"""
광기의 사도들은 추종자들이 무력히 쓸려나가자 대단히 당황했다. 광기의 심장부는 심연의 광기가 농축된 장소, 성기사들이 찾아와도 제정신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곳인데?
[[[판데모니엄 만세! 지옥제왕 만세!]]]
하지만 발로르가 육성한 최정예 데빌군단은 세상을 파괴하고자 훈련된 전사들. 어설픈 광기로는 그들을 물들이지 못한다.
'판데모니엄은 80레벨 던전이었다. 반면에 광기의 심장부는 50레벨 던전에 불과했고.'
다시 말해, 80레벨 던전의 중간보스들과 하수인들이 50레벨 던전으로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수효가 줄고 약해져도 수준차를 좁히는게 불가능한 수준.
'50레벨은 필멸자의 한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광기의 심장부는 물질계의 던전들에선 굉장히 위험한 장소다.'
하지만 악마들의 세계에선 50레벨은 되어야 강자로 인정해준다. 필멸자의 한계에 도달한 초인들도 [조금 치네?]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발로르는 지옥에서 손꼽히는 초강자였다. 놈의 부하들도 당연히 악마들의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정예들이고.'
즉.
애초에 격이 다르다.
"크하하하하하! 진정한 광기를 목도하라!"
"소꿉장난하나?"
"·········어?"
촤악!
2사도가 목이 잘렸다.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아! 식사할 시간──"
"레인 오브 인페르노!"
콰아앙!
3사도는 불타서 죽었다.
"크크크! 사도들을 쓰러뜨리다니 필멸자가 제법이구나! 하지만 나는 광기의 군주께서 총애하시는 최강의 사도로──"
푸샥!
4사도는 말이 길어서 죽었다.
[·········이게 뭐냐?]
후방에서 싸움을 관람중인 은빛뱀은 허탈하게 말했다. 간만에 제대로 싸워보나 싶었는데, 이래선 자신의 차례는 없을 것이다.
[싸워서 이기는건 하수요.]
[·········]
[이겨놓고 싸워야 중수지.]
전투는 판데모니엄의 패잔병들에게 일임해두고, 물빵을 섭취해서 마나를 회복했다.
[분명히 우린 필설로 형용하지 못하는 끔찍한 공포를 상대하던 느낌이었다만······]
끄덕.
그녀의 말이 옳았다.
[광기의 군주는 정말로 끔찍한 놈이지.]
[·········]
[하지만 여섯지옥의 선봉대만큼 끔찍할까?]
광기의 군주가 지상에서 으스대봐야 심연여왕이 내버린 자식일 뿐이다. 필멸자들에겐 형언 못할 공포겠지만, 판데모니엄의 노련한 영주들에겐 힘만 강한 애새끼일뿐.
"나와라! 심연의 사생아야!"
"지옥의 심판이 당도했노라!"
"악마들의 명예를 더럽힌 죄값을 묻겠다!"
[아무리 그래도 저게 맞는가?]
[무엇이 문제요?]
[이건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는 모양새잖나?]
지옥군단의 전투함성이 광기의 군주를 잠에서 깨웠다. 상황을 파악한 광기의 군주는 공포에 질렸다.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했으니까.
[우린 그걸 전략적 우위라고 부르오.]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싸움은 어딨나?]
그녀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은빛뱀은 전사들의 신이었으니까.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
피식.
[그건 전략의 부재를 뜻할 뿐이오.]
[비겁하게 싸우자는 소리같다만 ·····]
[제대로 전략을 수립했다면 싸우면 이기는 구도가 만들어져야지.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다면 싸움을 걸어선 안되는 것이고.]
바드들은 극적인 승리를 낭만적으로 노래하지만, 잿빛현자를 비롯한 마법사들은 그러한 악전고투를 실패로 간주했다. 뭣하러 질지도 모르는 전투에 나서는가? 이겨놓고 싸우는게 맞지.
[내가 대천사만큼 강해서 발로르를 소멸시킨게 아니고, 태양신만큼 강해서 당신을 길들인게 아니오, 전략을 활용했을 뿐이지.]
즉.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서 싸운다.
그것이 마법사가 싸우는 방식.
[하여간 우리도 슬슬 준비하지.]
[우리한테도 싸울 기회가 있겠나?]
[광기의 군주는 전투에 승산이 없음을 인지했소. 그렇다면 전력으로 달아날테지.]
판데니엄의 군단장들을 마주한 광기의 군주는살려달라며 때를 썼다. 그러나 지옥에서 올라온 시커먼 아저씨들은, 어머니에게 버려진 불우한 소년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았다.
[엄마아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광기의 군주는 끔찍한 울음을 터뜨리면서 달아났다. 필멸자는 듣자마자 넋을 놓아버릴 정신공격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누구도 필멸자가 아니었다.
[보기 흉하군······]
광기의 군주는 요람에 담긴 사산아였다. 정수리를 기점으로 정확히 좌우의 형상이 나뉘었는데, 좌측은 잘생긴 인큐버스였지만 우측은 촉수가 돋아난 문어였다.
"저것은 심연의 여왕이 외우주의 씨앗을 받아서 태어난 존재요. 그래서 심연의 여왕은 아이가 이상적인 남편으로 성장하길 기대했지."
하지만 심연과 외우주의 결합은 처참한 실패만을 가져왔다. 광기에 광기를 더해봐야 흉물밖에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흉물로 태어나자, 경악하면서 지상으로 자식을 던져버렸지."
그러나 우주의 흉물조차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기에, 광기의 군주는 완벽한 존재가 되고자 몸에 괴기한 실험들을 자행했다.
독수리의 날개.
사마귀의 눈알.
멧돼지의 어금니.
사자의 머리카락.
"녀석의 고통을 끝내주시오."
광기의 군주는 끔찍한 울음을 터뜨리면서 사원을 빠져나왔다. 덕분에 녀석을 감싸던 보호막이 한층 약화되었고······
[응에?]
그순간.
바닥이 무너지며 거체가 솟구쳤다.
콰지끈!
우지직!
순식간이었다. 은빛뱀이 요람과 아이를 한 입에 삼키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그녀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려내렸다.
[연구진전: 광기의 산맥]
[연구주제: 광기의 군주를 파괴함]
[연구단서 1/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24]
은빛뱀은 광기의 군주에게 사로잡힌 영혼들도 모조리 집어삼켰다. 어차피 정상적인 사후세계로 떠나지 못한다면,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주는게 낫겟지.
[이렇게 맛없는 영혼은 처음이다.]
별빛의 여신은 피티아(Pythia,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의 희생을 통해서 탄생했고, 이후에도 고결하고 숭고한 영혼들만 공양받은 존재였다.
한데.
최근에 집어삼킨 영혼들은······
"반찬투정을 할만한 처지가 아닐텐데?"
[············]
이에 은빛뱀은 침묵을 지키면서 희생자들을 먹어치웠다. 어차피 외우주나 심연에 떨어질 자들이면, 자신의 양식이 되는게 나을테니.
"이겼다!"
"마침내 우리의 영지를 되찾았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편 판데모니엄의 데빌군단은 함성을 내질러 승리를 만끽했다. 비록 승리를 거두었지만 쉬운 전투는 아니었다. 희생자도 적지 않았고 고위악마들은 힘을 상실했다.
"그래도 영지가 생겼으니 재기할 수 있소."
"지옥제왕께서도 이를 들으시면 기뻐하시리!"
"에르보니아가 지상의 전초기지였다면 광기의 산맥은 지하의 전초기지가 되리라!"
발로르가 사망하면서 판데모니엄은 멸망했다. 하지만 광기의 산맥를 손에 넣는다면 판데모니엄의 재건조차 헛된 꿈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잿빛현자가 우릴 놔두겠나?"
"계약서는 꼼꼼히 확인했잖나."
"흠······"
그들은 판데모니엄의 영주들이자 지옥군대를 지휘하던 군단장들. 고위데빌답게 계약에는 빠삭했으며, 텔로리안이 편법을 동원해서 계약을 빠져나갈 수단은 모조리 막았다.
"우리에 대한 공격도 금지했고."
"우리의 위치에 대한 발설도 금지했고."
"우리의 적대자들을 돕는 행위도 금지했지."
다만.
한가지 조항이 문제였다.
[외부자에게 위치에 대한 발설을 금지한다.]
"흠······"
"내부자에 대한 발설도 금지하면, 전투중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을 받아 그럭저럭 납득은 했다만······"
······잿빛현자는 이번 싸움에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았다. 뒷짐을 지고 상황을 관망하면서 마력을 회복했을 뿐이다.
"놈이 지금 공격해오면 우린 전멸이잖나?"
"은빛뱀을 당해낼 방도가 없으니······"
"하지만 계약서엔 문제가 없네."
오직 외부자에게 발설을 금지한다.
라는 조항만이 불길할 따름이었다.
"·········"
"·········"
"·········"
계약서를 반복해서 정독했지만 어떠한 문제도 존재하지 않았다. 텔로리안이 위치를 알리는게 가능한 상대는 오로지 일곱지옥 출신의 [내부자]뿐이니까.
"일곱지옥의 출신자는 데빌뿐이지."
"동포들에겐 우리의 소재가 알려지면 오히려 좋다. 물질계 진출에 뜻을 품은 야심가들이 우리를 찾아올 수 있을 테니까."
판데모니엄의 영주들은 계약서를 검토하고 안심했다. 직감은 대단히 싸늘했지만 데빌은 직감보다 논리를 따르는 무리였으니까.
그때였다.
불청객이 사원에 진입한건.
"모두 느꼈나?!"
"이토록 강대한 성력이라니!"
"천사라도 강림한건가?!"
그들은 단숨에 집결해서 불청객에 맞설 준비를 마쳤다. 비록 격전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었지만, 판데모니엄의 전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오랜만이다. 동포들이여."
한데.
불청객은 의외의 사람이었다.
"······네놈은?"
리안칼은 수수한 양모튜닉을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나타났다. 사열식에 동원된 병사마냥 귀찮아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서로 알지?"
"·········4왕자 루시펠레스?"
"맞아."
조각미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천상으로 전향했지만 어쨌든 여섯지옥의 외부자는 아니지. 그러므로 내가 너희의 소재를 알려줘도 계약위반이 아니다······"
촤악!
성검이 찬란한 황금빛을 발했다.
"······라고 잿빛현자가 전하라던데."
"빌어먹을 성녀의 자식이!"
"천사보다 악독한 놈들같으니!"
피식.
리안칼이 웃어보였다.
"10초 준다."
"뭐?"
"지옥제왕 욕하면 살려준다. 하나······둘······"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셋!"
콰아아아아아아!
성력의 파도가 몰려들었다.
16. 열여섯번째 연구 - 광기의 산맥(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