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열여섯번째 연구 - 광기의 산맥(4)
성력의 파도에 휩쓸린 데빌들은 처참히 타올랐다. 태양신의 광채는 지옥의 족속들에게 대단히 치명적이었으니까.
"으아아아악!"
"열을 센다고 하지 않았는가!"
"응? 그랬나?"
긁적.
"그럼 다시 세겠다. 넷······다섯······"
리안칼은 숫자를 세면서도 쉼없이 성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황금빛 줄기가 번득이며 데빌들이 불타올랐다.
"그만! 그만하라!"
"아홉······열! 항복할 기회는 충분히 주었다!"
"항복! 항복! 항복!"
"게헨나의 루시펠레스 대공께 항복합니다!"
푸샥!
게헨나의 대공에게 항복한 데빌이 죽었다.
"나는 에르보니아의 리안칼이다!"
"에르보니아의 리안칼에게 항복합니다!"
푸샥!
"평민이 존칭을 붙이지 않다니! 무엄하다!"
"에르보니아의 리안칼 대공 전하께 엎드려 간청합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소서!"
판데모니엄의 영주들은 발치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악의 전파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진정한 투사들은 먼저 죽였으니까.
"그래."
이에.
리안칼은 샌들을 신은 오른발을 내민다.
"이걸 핣으면 살려주마."
"······예?"
푸샥!
반문한 데빌도 죽었다.
"악마 주제에 어디서 말대꾸냐!"
"하, 하겠습니다!"
판데모니엄의 영주들은 뱀처럼 갈라진 혓바닥을 내밀어서 목숨을 부지했다. 데빌병사들은 눈앞의 광경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고.
"너희에게 참회할 기회를 주마."
리안칼은 흉악한 미소를 지었다.
순수히 재밌어서 지은 미소였다.
"이건 천상에서 떠온 성수다."
"············"
"내가 떠온건 아니고 영감이 숨겨둔 성배에 담긴건데······어쨌든 경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 이걸 마시고 살아남으면 살려주겠다."
툭툭.
어깨에 칼을 얹는 리안칼.
"싫다면 나와 싸우면 되고."
"·········"
이에 데빌들은 신중히 비교했다. 성배를 들이키고 살아남을 확률과, 모두가 힘을 합쳐서 싸웠을때 살아남을 확률을.
'루시펠레스가 압도적으로 강하진 않다.'
50레벨 인간 성기사는 분명히 강력한 적수겠지만, 자신들이 힘을 합쳐서 상대하지 못할 적은 아니다. 하지만······문제는 놈의 오른손에 들린 귀신들린 검이었다.
'저걸 상대론 승산이 없어.'
고위악마들은 루시펠레스가 발로르를 쓰러뜨렸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누구였을까? 루시펠레스를 꼬드겨 귀신들린 검을 들려주고, 주군을 소멸에 이르게 만든 음흉한 책략가가?
"잿빛현자 텔로리안!"
"놈이었구나!"
고위악마들은 텔로리안이 모든 상황을 조율했음을 깨닫고 극한의 무력감을 느꼈다. 텔로리안에게 자신들을 살려둘 의향이 없다는 사실까지도 통찰하게 되었으니까.
"그럴 바에는 명예롭게──"
[9위계, 천상의 로어]
[스톰 오브 저스티스(Storm Of Justice)]
[천상의 정의가 당도했노라!]
콰직!
천상의 힘을 머금은 황금색 빛줄기들이 놈들을 내리쳤다. 고위악마들은 단숨에 영혼이 녹아내려 완전한 무로 환원되었다.
"악마가 명예는 무슨 얼어죽을 명예야."
"············"
"다들 봤지? 성수를 마시거나 죽어라."
지휘관들을 잃은 병사들은 각자의 판단을 내렸다. 혹자는 지옥제왕 만세를 외치며 할복했고 혹자는 최후의 발악을 택했다. 도망치는 자들도 있었지만 봉쇄결계에 가로막혀서 떠나지 못했다. 건너편에선 텔로리안이 유유히 담배파이프를 물고 있었고.
"우릴 해치지 않기로 계약했잖아!!"
"가두지 않겠다고 계약한 적은 없다만."
그렇게 지옥불선봉대는 무력한 최후를 맞이했다. 천상과의 결전을 위해 준비된 종말의 투사들에겐 대단히 허망한 결말이었다.
"어떻게 호의를 받아들이는 녀석이 한놈도 없냐? 데빌들은 이래서 문제야."
리안칼은 아쉬운 표정으로 성배를 거두어들였다. 성배를 들이키는 사람은 악에서 해방되어서 신성한 힘을 얻는다. 만일 악에서 해방되지 못할 영혼이라면 죽음을 맞이하고.
"그래서 네놈은 마셨나?"
텔로리안이 물었다.
"나는 성배 없이도 강하다!"
"그러시군."
"네놈이 마셔보는건 어떠냐?"
"마법사에게 성력이 무슨 소용인가?"
"쫄았군?"
텔로리안은 리안칼의 도발을 무시하고 고대사원을 수색했다. 광기의 군주는 파괴했지만 놈이 퍼뜨린 광기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것을 막아내야 외신들이 다시 개입할 우려가 없겠지.
'이쪽 부근일텐데······'
사교도들의 집회장에서 특정한 벽돌을 강하게 짓밟자, 바닥이 꺼지며 방대한 비밀창고가 나타났다. 내부엔 다양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모험가들의 장비.
사도들의 소지품.
난잡한 두루마리.
"흠······"
제일 값비싼 물건은 모험가들의 장비들이었다. 하지만 텔로리안은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난잡한 두루마리들을 긁어모았다.
[광기의 복음 1장]
[광기의 복음 2장]
[광기의 복음 3장]
[광기의 복음 4장]
[광기의 복음 5장]
겉보기에 각각의 두루마리들은 의미불명의 낙서처럼 보였으나, 분명히 일정한 형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문자로 불러주기엔 지나치게 난잡했지만.
[해독시도 : 광기의 복음(전설)]
[1장 : 외우주에 대하여]
[2장 : 외신들의 본질에 대하여]
[3장 : 그분들을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
[4장 : 케팔! 차르남! 피낙! 알케르타!]
[5장 : 멸망! 멸망이다! 이히히히히히힛!]
[성공확률 계산 중······]
광기의 복음서는 게임에서 손꼽히는 위험한 저서다. 해독난이도도 굉장히 높은데, 해독에 실패하면 영혼이 변질되어 게임오버다.
[지능에 기반해 판정합니다.]
[로어마스터의 지혜로 가산점!]
[불가사의 연구자로 가산점!]
[최종적인 확률이 계산됩니다······]
하지만.
이쪽은 지능이 35다.
그것도 로어마스터지.
[성공확률 : 99%]
[시도하시겠습니까?]
YES.
[광기의 복음을 해독합니다!]
[해독한 내용을 공용어로 재작성합니다!]
[광기의 복음서(마도서, 전설)이 탄생합니다!]
외신들은 분명히 초월적인 공포를 담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지옥제왕조차 함정에 빠뜨려본 로어마스터는 확신했다. 아무리 강대한 신격조차, 물질계에선 필멸자들의 인지와 믿음을 벗어나지 못함을.
[연구진전: 광기의 산맥]
[연구주제: 광기의 복음을 해독함!]
[연구단서 2/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25]
텔로리안은 광기의 복음을 공용어로 옮겨적었다. 미지의 공포는 명확한 언어로 규정되는 순간부터 미지가 아니므로.
[외우주의 존재들은 물리적인 실체를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선대의 기록자들은 그것을 형언하지 못하는 공포라고 부른 것이다.]
서문.
[따라서 외신이란 물리적인 실체를 지니지 못하는 악령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들도 우리 세계에 간섭하지 못한다.]
1장.
[따라서 외신들은 숭배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흠숭할 미덕도 없고, 두려워할 실체도 없기 때문이다.]
2장.
[외신들은 전통적으로 두족류의 형상을 선택한 심해의 괴물로 묘사되었다. 지상에서 살아온 포유류들에게 미지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3장.
[하지만 외신에겐 특정한 물리적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외신들의 형상을 새롭게 정의하겠다.]
4장.
[외신들은 대체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유한 앙증맞은 생물의 형태를 취한다. 귀여움으로 광기를 숨기려는 교활한 수작이다.]
삽화를 그려넣었다.
붉은눈의 만렙토끼.
배불뚝이 펠리컨.
버둥대는 거대펭귄.
[이것이 우리 세계를 호시탐탐 광기로 물들이려는 외신들의 형상이다. 오오! 모든 필멸자들은 그분들의 강림을 두려워할 지어다!]
깃털펜을 들어서 복음서의 최종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외신들은 의도적으로 왜곡된 서술에 불쾌감을 느끼며 텔로리안을 노려봤다.
[쉬이익!]
이에 은빛뱀도 외우주의 신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그녀는 미지의 공포에 맞서려는 인간의 마음이 모여서 신성을 획득한 신수.
즉.
상성상 대단히 유리했다.
적어도 이쪽 세상에서는.
[놈들이 물러나는군.]
[어차피 개입할 수단도 없을 것이오.]
이에 외신들은 텔로리안에게 시선을 거두었다. 당장은 텔로리안을 어찌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적어도 당장은·········
[연구진전: 광기의 산맥]
[연구주제: 광기의 권능을 제약함]
[연구단서 3/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6]
남다른 지식이 생겨났다.
필멸자의 한계를 뛰어넘는.
─────
■광기의 로어 (영웅, 로어)
: 당신은 외우주 연구를 통해 광기의 본질을 습득했습니다. 광기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탄생하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사물의 근본을 명백하게 인지하는 사람은, 광기에 휘둘리지 않고서 그것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효과
- [광기] 속성의 주문사용.
- 의지내성에 [유리점]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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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로어에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주문도 많았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은 지식도 알고 있어야, 대항할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어여."
"투항자는 얼마나 되는가?"
"모두 천사가 되느니 죽겠다던데?"
리안칼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모조리 죽여줬지."
"과연 헬나이트들이군."
"목숨을 구하고자 발을 핣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천사가 될수는 없다는 모양인가봐."
판데모니엄의 헬나이트들은 지옥에서도 손꼽히는 최정예들이었다. 일신의 안위를 개의치않고, 오직 악의 전파에만 충실했던 자들.
"아쉽겠군."
"?"
리안칼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 죽여서 통쾌했다만?"
"·········"
"나는 데빌이 싫어."
놈이 이를 갈았다.
"마음같아선 투항도 받지 않고 모두 죽여버리고 싶단 말이야. 그래도 네놈의 책략이 유용해보이니 따르고 있을 뿐이지······"
언젠가 리안칼은 여섯지옥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결전을 벌여야한다. 하지만 지옥제왕이 무수한 하수인들을 거느렸으니, 리안칼에게도 녀석을 뒤따를 부하들이 필요하다.
"그럼 데몬은 어떤가?"
"악마는 모두 싫다만."
리안칼이 눈쌀을 찌푸렸다.
"데몬이라면 차라리 낫겟지."
"그럼 네게 소개해줄 데몬이 있다."
품에서 오래된 반지를 꺼내어 건네줬다. 심연에서 만들어진 공예품. 마법적인 능력은 없지만 대단히 정교하고 미적으로 탁월하다.
"서부의 황금평야에 살고 있는 호박의 성녀를 찾아가라. 반지를 보여주고 너의 과거를 밝히면, 호박의 성녀가 너를 도와줄 것이다."
리안칼이 눈쌀을 찌푸렸다.
"나의 과거를 성녀에게 밝히라고?"
"그녀도 악마였으니까 괜찮다."
"·········정말인가?"
빛으로 오염된 악마가 또다시 있었다는 말인가? 그런 믿기 힘든 일이······
"너처럼 자의로 회개를 선택한 경우는 아니었다. 단지 선행을 하지 않으면 사망하는 저주에 걸렸던 탓인데······개인사를 내가 말하면 실례지.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라."
리안칼은 호기심을 느끼면서 반지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번번이 텔로리안에게 당해온 리안칼은 불신도 함께 드러냈다.
"이번엔 저의가 뭐냐?"
"이번엔 너에겐 없다."
"············"
자신에겐 없다.
"너는 호박성녀의 도움을 받아 지상으로 추방된 악마들의 소재지를 알아내고, 그들을 규합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뿐이다."
달리 말해.
호박의 성녀에게 있다.
"내가 그녀를 찾아가면 무슨 일이 생기나?"
"흠······알고 가면 재미 없잖나?"
씨익.
"가서 살펴봐라. 부조리극의 극치니까."
"그럼 기대해보지."
리안칼은 전리품을 남김없이 챙겨서 사원을 떠나갔다. 자신에겐 동전 한닢도 남겨주지 않는 점을 미뤄볼때, 유감이 많은 모양이었다.
'괜찮다. 알짜는 내가 이미 빼먹었으니까.'
그럼.
보상을 받으러 떠날 시간이다.
'주군을 부려먹었으면 대가를 치러야겠지?'
만일 가진게 없다면?
몸으로 때워야하리라!
16. 막간(1) - 서열다툼
"지하의 광기는 깔끔히 해결되었다."
"오오! 역시 주군이군!"
"그럼 보상에 대해서 논할 차례군."
"음······"
검은폭군 카르베날로어는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이에 금빛왕자 테사리안이 앞으로 나왔다.
"어떤 보상을 원하십니까? 스승님."
"원래 보물을 받아가야하는데 없잖나?"
"그렇습니다."
모두 털렸다.
목숨의 대가로.
"그러니 에스실의 왕실마법사로 20년간 복무해줘야겠다."
이에 테사리온은 눈쌀을 크게 찌푸렸다. 지체높은 용족이 인간왕을 섬기며 고개를 조아리라고?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승님은 예외더라도 다른 이들은······
"정말 그것이면 되는가?!"
"그래."
한데.
검은폭군은 기뻐했다.
"급여는 얼마나 되는가?!"
"매년 20만골드가 지급되고 공적에 따라 추가포상이 주어진다. 전공을 세우면 영지를 받을수도 있지. 무엇보다 여왕의 곁에서 봉사한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기회일테지."
에스실은 이제 절대왕정이다.
왕의 총애가 권력과 직결되는.
"오오! 정말 좋은 기회로군! 고맙다! 주군!"
넙죽!
검은폭군은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주군은 충성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해주는군! 앞으로도 성심성의껏 모시겠다!"
······테사리안은 검은폭군의 비굴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텔로리안이 떠나고 저자세로 나간 이유를 물어봤다.
"쯧쯧. 서투른 녀석."
검은폭군이 혀를 찼다.
"레어관리에서 제일 까다로운 부분은 보물수집이 아닌 정기수입의 확보다. 해츨링들을 배불리고 하수인들에게 봉급도 줘야하니까."
이에.
테사리온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수인들에게 봉급을 줍니까······?"
"그럼 협박해서 붙들어두는줄 알았느냐?"
"어······"
"그런 방식으론 싸구려 고블린밖에 구하지 못한다. 생물을 제대로 부리려면 언제나 제값을 줘야지. 그래야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생겨나고, 자기계발도 계속하지."
흠······
"······드래곤을 섬기는 영광은요?"
"?"
"원래 하수인들은 드래곤을 섬긴다는 사실 자체에 긍지를 느끼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푸핫!
푸하하하하핫!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핫!
"머리가 완전히 꽃밭이구나!"
"·········"
"요즘엔 해츨링들도 그런 몽상은 하지 않는다! 용족의 긍지? 다른 종족이 그런것을 신경이나 쓰겠느냐? 푸하하하하핫──!"
금빛왕자는 후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지만, 검은폭군은 금빛왕자의 양뺨을 붙잡고 만족스레 웃어보였다.
"귀여운 녀석."
"·········"
"너는 어리고 귀여우니까 아무 것도 몰라도 된다. 내가 뭐든지 붙들고 가르쳐줄테니······"
검은폭군은 금빛왕자와 나란히 상공을 비행했다. 일순간 태양이 가려질만한 커다란 흑체와, 그것보다는 작아도 드래곤다운 위엄을 뽐내는 금빛물체가 뒤따른다.
"요, 용이다!"
"용들이 나타났드아아아아아──!"
그들이 에스실의 왕도에서 선회비행을 선보이자, 백성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심지어 초병들마저 무기를 떨어뜨리고 도망쳤다.
"놈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상대가 드래곤이었지 않습니까?"
"승산이 없으면 싸우다 죽어야한다. 그것이 짐의 칙령이다."
길길이 날뛰는 벨라디아는 군대개편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왕국군은 전반적으로 허약했다. 이래서는 땅따먹기를 못할 것이다.
"반갑다. 에스실의 여왕이여."
"흠."
이윽고 왕궁안마당에 착지한 드래곤들은 인간의 형태로 변했다.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완숙한 흑발미녀와, 앳된 얼굴이 남아있는 10대 중후반의 금발미소년이었다.
"어서 오시오. 대산맥의 폭군이여."
"호오!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은가?"
"짐은 그대가 스승님께 충성을 서약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소. 한데 놀랄게 있나?"
·········엣.
그거 비밀이었을텐데.
"세상에 완전한 비밀이 어딨나?"
"·········"
"그러니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은 짐이 아니라 당신이오. 짐은 잿빛현자의 수제자니까."
이에 검은폭군은 물끄러미 금빛왕자를 쳐다봤다. 너도 잿빛현자의 제자이니 힘을 써보라는 압력이었다.
"엄······"
그러나 금빛왕자는 멍청해보이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벨라디아 선배는 건드리면 곤란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여기선 져주죠?'
'······흠.'
검은폭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상대의 레어였으니까.
"알겠소. 주의하지."
"그럼 외형부터 바꿔주시오."
"???"
"에스실의 왕궁에선 짐에게 견줄 여지가 있는 미모가 허용되지 않소. 그것이 짐의 법도요."
아하!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
"이정도면 되는가?"
"아니······그건 쳐다보기 힘든 수준이고·····"
펑!
다시 연기가 솟구친다.
"이건?"
"그건 같이 다니기 부끄러운데······"
"이정도는?"
"그건 짐을 향한 시선을 분산시키잖소!"
벨라디아가 여성수행원에게 요구하는 미적 수준은 복잡했다. 일단은 많이 예뻐야했다. 하지만 벨라디아에 비해선 많이 쳐져야했다.
"에잇!"
펑!
"귀찮으니 이걸로 합의를 봅시다."
"흠······정체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소?"
검은폭군은 암컷 리자드맨이 되었다. 아름다운 형상이지만······취향이 편협한 보통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엔 종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다.
"번거로우니 그냥 갑시다."
"그러지."
"그럼 저도······"
이에.
금빛왕자도 리자드맨으로 변하려는데.
"아니! 너는 인간 형상을 유지하도록!"
"············"
"너는 짐이 혼례를 위해 처녀성을 유지해야한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게다. 관례에 따르면 너의 동정은 짐의 차지였으니까."
오랜 전통에 따르면, 마탑주들은 제자들의 첫경험을 받아갈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스승이 권리를 택하지 않는다면, 스승을 제일 오랫동안 모셨던 제자에게 권리가 이전됐다.
"·········"
"표정관리 안하나?"
"······아닙니다."
"좆같으면 도제생활 끝나나?"
"아닙니다."
"목소리 크기 봐라?"
"아닙다아아아아아아아아악──!"
"대가리 박아라!"
가혹행위에 시달리는 테사리온은 검은폭군에게 살려달란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놀랄만큼 무관심했다. 다른 사람의 레어에선 그쪽의 법도에 따라야한다는 생각이었으니까..
"스승님······"
"무슨 일이냐? 테사리안?"
"너무 힘듭니다······"
테사리안은 벨라디아에게 당한 가혹행위를 털어놓았다. 들이받고 싶었지만, 마탑의 서열을 지키고자 그러지 못했다는 말을 더해서.
"불만이면 들이받아라."
"예?"
"나는 제자들 간의 서열다툼을 부정하지 않는다. 서로를 죽이거나 영구적인 장애에 이를만한 부상만 입히지 않으면 된다. 제자로 입문한 순서는 상관없다. 강자가 선배다."
이에.
텔로리안이 당황했다.
"······스승님이 중재해주시면 안됩니까?"
"?"
"사제지간에 싸우면서 지낼 이유는 없잖습니까? 게다가 저희에겐 가족같은 사이가 되라고 말씀해주셨고요."
끄덕.
"가족끼린 원래 싸우면서 자란다."
"·········"
"너는 외동이니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겠다만, 나의 생물학적인 가족들의 경우엔······"
아니.
이건 됐고.
"······아무튼 나도 엘렌스트라와 처음부터 사이가 좋던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지."
이후로도 자신은 말레피카들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전하는데 집중했다. 그것을 들을수록 테사리온의 표정은 괴기해졌지만·········
"그게 정말 최선입니까?"
"?"
"보다 합리적인 마탑문화도 있지 않을까요?"
"나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느냐?"
갸웃.
"나때는 말이다. 스승님의 말씀은 절대적이었다. 맞으라면 맞는 것이고 까라면 까는 것이었다. 거기엔 어떠한 예외도 없었다."
텔로리안은 금빛왕자를 너무 편안히 키우는게 아닌가 걱정되었다. 저렇게 유순하게 자라서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마법사로 대성하기 힘들텐데······
오늘은.
한소리 해야겠다.
"내가 너한테 마을에서 식량을 훔쳐오라고 시켰느냐? 몬스터를 처치하고 실험재료를 구해오라고 시켰느냐? 혹은 수업태도가 건방지거나 배움이 느리다고 생살을 지졌느냐?"
이것은 제자를 위한 잔소리다.
책임감 있는 스승은 반드시 해줘야하는.
"·········"
"그렇다고 장기를 갈취하거나 성상납을 받은 것도 아니잖느냐? 나는 너희들이 언제나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신경써주고 있다. 네가 은혜를 안다면 버릇 없게 굴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금빛왕자는 텔로리안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선배의 횡포를 막아달라고 청하러 왔을 뿐인데, 어째서 스승님께서 대스승님께 받았던 부조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나는 언제나 스승님을 공손히 모셨다. 그분이 나를 구해주셨고, 키워주셨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한데 네놈은 선배가 몇마디했다고 나한테 뿔이 나서는······"
그만 듣고 싶다······
정말 알고 싶지 않다고······
"알겠느냐?"
"예."
"가보도록!"
"예이."
테사리온은 불만스레 스승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늙은 스승(실은 테사리온이 나이가 몇배는 많았다)이 길게 잔소리를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벨라디아를 꺾으면 되는 일이다.
'흥!'
벨라디아가 선배라지만 그래봐야 마법을 몇년정도 일찍 배운 인간에 불과하다. 마법사로서는 자신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을 터!
"벨라디아!"
"저놈이 미쳤나?"
"나와라! 결투다!"
"오냐! 이번 기회에 기강을 잡아주마!"
왕궁의 앞마당에서 테사리온과 벨라디아의 결투가 벌어졌다. 벨라디아가 흑마법사임을 숨기고자, 결투는 비공개로 이뤄졌다.
"이기면 내가 선배다."
"이긴다면."
벨라디아는 장검을 뽑아들고 질풍처럼 돌격했다. 검날에 지옥의 유황불이 피어올랐고, 그녀의 신체도 지옥의 마력으로 강화되었다.
"무슨──"
원거리 전투를 상정하고 마력을 모으던 테사리온의 정수리에, 롱소드의 크로스가드가 내리꽂혔다. 이에 테사리온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벨라디아는 목덜미를 짓밟아 캐스팅을 막았다.
"꺽! 꺽!"
"누가 실전에서 대놓고 캐스팅을 하나?"
"꺽! 꺽!"
"마법사가 뱃살이 이렇게 물렁해서 쓰겠어?"
"꺽! 꺽!"
"마법사는 언제나 유연하고 날렵한 몸을 유지해야한다. 그래야 불시의 기습에 대비하지."
벨라디아는 테사리온은 무자비하게 구타하면서, 마법사의 전투법을 교습해주었다. 먼저 포착하고 먼저 움직일 것, 우선 낮은 위계의 주문을 시전해서 견제할 것, 높은 위계의 주문은 반드시 방어책을 확보하고 시전할 것······
"크르르릉!"
이에.
분노한 테사리온이 황금빛을 발하자.
"용으로 변신하면 죽여버리겠다!"
벨라디아가 싸늘히 노려봤다.
"인간에서 드래곤으로 돌아갈때에 2초정도 지연시간이 있지 않나? 그때 목을 치면 죽는 걸로 알고 있다만?"
······테사리온은 무의식적으로 폴리모프를 유지했다. 생존본능의 발현이었다.
"컥! 컥! 컥!"
"넌 아주 오늘 뒈졌어!"
자신은 후배를 돌봐주는 수제자의 모습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벨라디아가 인성엔 문제가 있어도, 성과를 가져오는 인재임은 분명했다.
[······그냥 못살게 구는걸로 보인다만?]
참다못한 은빛뱀이 따지듯 물었다.
[내가 처음부터 엘렌스트라와 사이가 좋았다고 생각하시오?]
·········
[훌륭한 양육자라면 처세술과 싸움법에 대해서도 가르쳐야하오. 그래야 바깥 세상에서 제대로 생존할 수 있는 법이지.]
테사리온은 패자의 비참함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맛볼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패배의 굴욕을 겪지 않고자 수련에 매진하겠지.
[그러다 정말로 원수가 되어버리면?]
[그건 테사리안의 배포에 달린 일이지.]
덤덤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테사리안도 나이를 먹으면 알게 될거요. 스승의 슬하에선 패배해도 재도전할 기회가 있었지만, 세상에선 그렇지 않다는걸.]
패배와 좌절.
학생 시절에 많이 겪을수록 좋은 것이다.
[훈련에서의 패배는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주지. 하지만 실전에서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오.]
이곳은 거친 세상이었다.
패배는 항상 불가역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텔로리안."
"어쩐 일인가? 우르반."
"자네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흠.
제국에서 접촉해올 시기는 되었다.
문제는 보내올 사람이다.
'집정관이 직접 방문한다면, 제국의 정보력이 예상한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자신이 예상한 사람을 보낸다면, 솔직히 실망스러울 것이다. 제국 원로원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의미니까.
"자네의 동문이라고 하던데."
"············"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생각이 뻔해서.
"만나보겠나?"
"손님이 와줬는데 기꺼이 만나야지."
비전사 콜카르.
오랜 악연이다.
16. 막간(2) - 비전술사 콜카르
누구나 특별한 이유 없이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런 관계는 누군가 결정적인 잘못을 했던 경우보다는······
'그냥 엇갈리는 경우가 많지.'
나와 콜카르도 그러했다. 우린 스승님의 밑에서 함께 자랐으며, 함께 배웠으며, 함께 싸웠다.
그럼에도.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냉랭했다.
'항상 상황이 따라주질 않았지.'
함께 했던 시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위한 형제가 되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그러지 못했고······
"·········"
"·········"
오늘날에도 서로를 마땅찮은 눈빛으로 쏘아보는 중이다.
"제국은 살만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항상 대화를 주도했으니까.
"대단히."
"그렇군."
콜카르는 30레벨 비전술사로 자신과 동갑내기임을 고려하면 굉장했다. 일반인들에게 천재로 불리기엔 충분한 수준.
"제국이 얼마나 멋진 곳이냐면──"
"우선 본론부터 이야기하는게 어떤가?"
"·········"
자신의 직설적인 대답에 콜카르가 눈쌀을 찌푸렸다. 그는 오색빛깔의 화려한 로브를 비롯해서, 온몸에 화려한 마도구들을 치장하고 있었다. 쳐다만 보아도 지체높은 마법사임을 단숨에 알아볼만한 차림.
"서로 격식을 지키는게 어떠냐? 텔로리안."
반면에 텔로리안은 수수한 잿빛로브가 전부였다. 지위를 고려하면 검소함을 넘어서 허름한 수준의 옷차림.
"우리는 굉장히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사이였잖아. 그리고 우리는 물장구치는 소년들이 아니라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이번엔 텔로리안이 눈쌀을 찌푸렸다. 녀석은 쓸데없는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항상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았으니까.
"나의 화법이 불만이면 나가라."
"···············"
이에.
콜카르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너를 위해 찾아온 동문을 이렇게 쫓아낼 생각이냐? 내가 기억하는 텔로리안은 자유로운 사람이지,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
나는 이놈이 싫다.
언제나 형식만 따져대니까.
'저놈도 내가 싫겠지.'
더욱 싫은건 저놈이 싫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무진장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함께 자라며 함께 연구하고 함께 싸웠던 사이다. 그럼 서로에게 허물을 드러내야 정상이다. 한데 놈은 밑바닥을 보이길 거부한다.
"알겠다. 친구."
"·········"
놈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친구란 단어가 신경쓰이는 걸테지.
"너의 가르침에 힘입어 나도 제국이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국가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제국을 통치하는 대집정관 아발루스님의 비밀전언을 내게 알려주지 않겠나?"
대집정관 아발루스는 제국을 지배하는 삼두(Triumvirate)의 일원이자, 지옥제왕과 계약을 맺었던 입지전적인 흑마법사
'50레벨 워록이므로 전투력만큼은 내게 견줄만하다. 주문다양성의 측면에선 내가 아발루스를 압도하겠지만.'
또한 아발루스는 대귀족답게 수많은 클리엔테스(피후견인)을 거느린 파트로네스(후견인)이었다. 콜카르도 아발루스의 후견을 받아서 제국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나를 누가 보냈는지 알고 있었군."
"대집정관이 파견한 첩자들은 모두 알고 있으므로, 구태여 숨기지 않아도 된다."
녀석을 압도하도록.
상황을 단단히 굳히자.
"어디 보자······너는 아발루스의 조카딸 아풀리아와 결혼해서 아들딸을 하나씩 낳았군. 아들의 이름은 발라루스고 딸의 이름은 아피아. 각각 4살과 2살이고, 생일은 8월 12일과 7월 2일, 발라루스는 어머니의 미모를, 아피아는 너의 영특함을 물려받았다. 틀림이 있는가?"
텔로리안의 예지에 콜카르는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래서 녀석과 만나길 원치는 않았건만, 장인어른께선 동문끼리는 말이 통할 거라며 자신에게 설득을 지시하셨다.
"······넌 여전하구나."
"?"
"홀로 모든걸 내다보고 혼자 결정하는게."
대단히 기분이 나쁘다.
녀석과 이야기하다보면.
"그럼 내가 가져온 제안도 알지?"
"제국에 귀순하라는 말이겠지."
"구체적인 조건도?"
"원로원 의석과 법무관 자리겠지."
끄덕.
"원한다면 벨라디아 여왕도 합류할 수 있다."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한건 아닐테고."
"맞아. 하지만 장인어른께선 기대하시더군."
콜카르는 텔로리안이 제국같은 거대국가에 소속될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사람에게 사회질서란 족쇄에 불과하니까.
"그럼 장인어른께는 거절당했다고 전하마."
"잠깐만."
콜카르가 자리를 뜨려는데 텔로리안이 풍요의 뿔을 꺼내들었다. 유리잔에 시원한 생맥주가 차올랐다. 콜카르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다.
"갈등은 풀고 가는게 어떠냐."
"·········"
"네가 내가 싫듯이 나도 네가 싫다."
"·········"
"그래도 나는 우리가 형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가족.
스승과 동문들.
"그러니 화해를 하고 싶다."
"·········"
"내가 없다면 네가 누렸을 기회들을 내가 모조리 앗아갔지. 사과하마."
자신이 아니었다면 콜카르는 스승님의 총애를 독차지했을 것이다. 또한 엘렌스트라와도 각별한 유대를 이어갔겠지. 자신이 콜카르의 입장이어도 자신을 좋아하지 못했을 것이다.
"·········"
콜카르도 과거를 떠올리며 멋지게 정돈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반면, 텔로리안은 정리가 귀찮아서 언제나 말끔히 면도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맞아. 그리고 우린 동문일 뿐이다."
놈이 선을 그었다.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너는 언제나 확실히 말하는걸 좋아했지."
끄덕.
"나는 너를 형제로 생각하지 않아."
"·········"
"친구로도 여기지 않는다."
이해한다.
그럴만한 입장이니까.
"하지만 너의 행동이 서운해서는 아니다."
"·········"
"우리의 불화는 성장기 소년들의 싸움이었을 뿐이다. 나는 더이상 과거에 지배받지 않아."
콜카르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싫어했던 까닭은 엘렌스트라의 관심을 뺏어가거나 스승님의 총애를 독차지해서가 아니야. 그건 승복할 만했다."
압도적인 재능.
마법사의 세계에선 절대적인 면죄부다.
"내가 싫었던건 너의 태도였다."
"·········"
"너는 언제나 다른 세상에서 찾아온 사람처럼 굴었어. 하늘에서 필멸자들을 내려다보는 전능한 신들처럼 말이지."
콜카르가 바라보았던 텔로리안은 타인을 조종할 생각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내가 솔직한 심내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싫어했다. 하지만 우리한테 솔직하지 않았던건 항상 너였다. 네가 원하는 결과를 정해두고 그걸 얻고자 말과 행동을 연기했으니까."
콜카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고통스러웠지만 해방된 과거였으니까.
"그러니 내겐 풀어야할 갈등이 없다."
"·········"
"우리의 유년기는 끝났어."
녀석은 단언했다.
"너도 이제는 스승님이나 동문들에게 얽매이지 않고서 살아가면 좋겠다."
콜카르는 가슴에 늘어뜨린 펜던트를 열어서 내부를 보여주었다. 그곳엔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묘사된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다.
"내 행복이다."
"············"
"덕분에 너에 대한 열등감을 잊었지."
콜카르도 재능에 확신을 지니던 어린 시절에는 대마법사를 꿈꾸었다.
"나는 이제 대마법사를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텔로리안을 만나고 깨달았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고, 대마법사에 도달하지도 못할 거라고.
"대신 훌륭한 아버지를 꿈꾸지."
"············"
"나는 훌륭한 아버지가 대마법사보다 떨어지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은 훌륭한 아버지가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하지."
콜카르는 팬던트를 접어서 목에 찼다.
"그럼 행복하게 지내라. 텔로리안."
콜카르는 집정관의 친필서한을 내려두고 떠났다. 녀석이 떠나고 서한을 읽어봤으나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제국에 귀순한다면 이런저런 혜택을 누릴 거란 내용이 전부.
"·········"
서신을 접어두고 콜카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이 기억하던 콜카르는 언제나 열등감에 시달리던 2인자였다.
'그래서 언제나 나의 발밑에 있다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지.'
여전히 자신이 마법사로서는 녀석을 압도한다. 오히려 수습생 시절보다 격차가 훨씬 커졌다. 녀석은 비전술사지만 자신은 로어마스터니까.
'그럼에도 열패감이 드는군.'
수정구를 꺼냈다.
감정을 나눌 사람이 필요해서.
[엘렌스트라.]
[급하냐?]
[방금 콜카르를 만났는데──]
[시덥잖은 이야기는 나중에.]
뚝.
수정구가 암전됐다.
"·········"
서운하진 않았다.
연구가 바쁘면 그럴 수 있지.
'나도 연구나 해야겠군.'
살짝 외로운 느낌이 들었지만, 마법사는 고독을 벗삼는 직업이었다. 우선 진행중인 연구들을 검토하자면······
쾅!
서재문이 부서졌다.
"동생──!"
"·········형님?"
몇번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나?!"
뒤를 돌아보니 검은색 더블릿을 차려입은 철퇴공이 있었다. 반백살이 넘어가는 나이에도 몸이 탄탄한 근육질이다.
"입다물고 따라오게!"
"실험을 해야합니다만······"
"에잇! 오늘은 실험같은거 잊어버리게!"
철퇴공 로드릭은 텔로리안을 붙잡고 실험실에서 끌어냈다. 그래서 마탑의 응접실에 도착해보니 조그마한 연회가 열려있었다.
사람이 꽤나 많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생일 축하한다. 텔로리안."
"·········생일?"
자신의 생일은 자신도 몰랐다. 생물학적 어머니는 알테지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이후에는 생일을 모르니 생일잔치도 없었다.
"나의 생일을 당신이 어찌 알았소?"
"별자리에는 인간의 명운이 적혀있으니까."
연회장에는 카람샨의 호화로운 만찬이 차려져있었다. 테이블이 부러질만큼 다양한 음식들이 수북히 그릇에 쌓인 상태.
"본신이 힘을 썼느니라."
"현명한 아버지시여.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처음 보는 중년인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그녀는 놀랍도록 고요해보이는 표정을 갖춘 여성으로, 푸근한 인상이었다.
"올골두골로구나."
"예. 저희가 인간들에게 수용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되어서······적절한 시기까진 인간의 모습으로 활동할 생각입니다."
올골두골로가 손짓하자 트롤석공이 조각상을 가져왔다. 대리석이 아니라 화강암을 사용해서 조각했다. 인간 석공들에겐 불가능한 기예.
"저희 계몽트롤일족을 대표해 아버지께 생신선물을 바치나이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조각상은 연구에 몰두하는 텔로리안을 묘사했는데, 세밀함이 드워프들의 공예품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계몽트롤이 그들의 손재주를 부지런히 단련했음을 의미한다.
즉.
문명을 이룰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연구주제: 수도승 올골두골로]
[계몽트롤들이 석공으로 거듭남!]
[연구단서 4/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1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7]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다마다."
"마음에 드신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올골두골로만이 아니었다. 벨라디아를 비롯한 제자들도 선물을 가져왔고, 자신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던 이들이 모두 선물을 지니고 참가했다.
[마음에 드느냐?]
[나쁘지 않군.]
잿빛현자 텔로리안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에도 언제나처럼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진 못했지만.
16. 막간(3) - 생일 잔치
"어이. 사기꾼."
"왔냐. 호구."
"옛다. 선물."
"귀한 분에게 이런 누추한 선물을······"
리안칼은 성스러운 칼집을 선물로 건네주었다.
"할배가 사용하던 수호의 검집이다. 이것에 수납한 칼날은 쇠하지 않고, 사용자가 어떠한 중상을 입어도 고스란히 치유해주지."
킬킬!
"하지만 선인에게만 적용된다!"
"선인에게만?"
"그래! 네놈은 쓰지 못한다는 뜻이지!"
리안칼이 비웃음을 흘렸다.
"분해해서 재료로 써먹어야겠군. 고맙다."
"생일선물을 분해하는 놈이 어딨어!"
리안칼은 허겁지겁 검집을 돌려달라고 소리쳤으나, 텔로리안은 검집에 마력을 주입해 분해했다. 역사적인 성유물이 마법부여 재료로 쪼개지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생신 축하드려요!"
"고맙다. 벨라디아."
"선생님께 무엇을 드릴지 오랫동안 고민해봤는데······영지나 황금에는 특별함이 없더라구요. 제가 선생님의 수제자인데 돋보이는 선물을 준비해드려야하지 않겠어요?"
아니.
특별한 선물보단 그냥 황금이 좋다만.
"그래서 저만의 선물을 준비해왔어요!"
"끄아아악! 빌어먹을 인간들! 아아아악!"
──────
◆다그렌의 해골(희귀, 장신구)
: 한때 골드드워프들을 이끌던 금융왕 다그렌의 해골입니다. 원한을 잊지 않는 벨라디아 여왕이 영혼을 감금해두었습니다.
■효과
: [금융왕] 특성 획득.
: [경제왕] 특성 획득.
: [금융왕의 보물창고] 위치파악 가능.
■주의
: 해골에 주기적인 고통을 주어야합니다.
: 장비를 분실하면 비밀이 새어나갑니다.
──────
"······이게 뭐냐?"
"레이디들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내에게 자수를 선물하는 관습이 있다죠. 저도 그래서 마법으로 자수를 엮어보았답니다!"
이거······
받기 싫은데?
"받아주실거죠?"
······선물을 거절하거나 함부로 뽀각했다간 살인이 벌어질지도 몰라서 받아두었다. 보물창고의 가장 깊숙한 장소에 처박아둬야지······
"저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승님."
"축하 고맙다. 테사리온."
테사리온이 가져온 선물은 골드드래곤의 역린이었다. 역린은 목의 부근에 위치한 거꾸로 뒤집어진 비늘로, 드래곤의 목숨을 위협하는 급소이자 특별한 힘을 담은 유물이었다.
"아시다시피 골드드래곤의 역린엔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자를 살리는 것조차 가능하지요."
텔로리안은 테사리온이 양손으로 공손히 내미는 역린을 살펴보다가, 테사리온의 목덜미에 다시 붙여주었다.
"고맙다. 하지만 성의만 받으마."
"선생님?"
"스승이란 작자가 제자의 약점을 지켜주는 비늘을 선물로 받으란 말이냐? 내가 좋은 스승은 아니다만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구나."
그렇지만.
말로만 보답해선 안되지.
"대신 앞으로 더욱 혹독히 가르쳐주마."
"·········예?"
"솔직히 지금까진 언젠가 떠날 제자로 여겨져서 소홀히 가르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네가 진심을 보여주었으니······나도 네게 진심으로 보답하는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빡세게 가르쳐주마! 4호 제자!
2호 제자와 3호 제자만큼이나!
"아, 아,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
창백해진 테사리온의 뒤편에셔 2호제자 알다네스와와 3호제자 미르칼이 나타났다. 아직은 어린이에 불과한 10살 남짓의 소년소녀들.
"헤헤! 이거 받으세요! 스승님!"
알다네스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두상을 건네주었다. 한데 황금을 조각한 두상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황금으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사람을 금으로 만든 것이냐?"
"사람은 아니고 시체를 금으로 만들었어요!"
금발의 소녀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말했다.
"저도 선생님께 벨라디아 선배님처럼 비싼 선물을 드리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고민하던 때에 선배님이 조언을 해주시더라구요."
알다네스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있는 사람을 황금으로 바꾸면 노동력의 낭비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어차피 썩어문드러질텐데 황금으로 만드는게 경제적이다."
크으!
"진짜 명답이지 않나요?!"
"·········"
벨라디아가 후배들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녀의 영향력을 차단할 방법을 강구할 필요성이 있겠다.
"저는 벨라디아 선배와 견해가 달라요."
그때.
음울한 미르칼이 끼어들었다.
"황금은 빛나는 광석에 불과할 뿐이에요. 하지만 시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자원입니다."
짝짝!
미르칼이 박수치자 움직이는 시체가 걸어나왔다. 다양한 사체를 누더기처럼 기워낸 시체골렘이었다. 그럼에도 외형이 혐오스럽진 않았다. 단지 섬뜩했을 뿐이지.
"슈타인!"
"네! 주인님!"
"이제부터 스승님이 너의 주인이다!"
"알겠습니다! 옛 주인님!"
슈타인이라고 불린 시체골렘은 성큼성큼 다가와, 예의범절에 몸이 베인 노집사처럼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을 보좌할 슈타인이라고 합니다."
"·········흐음."
"무엇이 언짢으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텔로리안은 슈타인을 통해 미르칼의 두가지 가능성을 엿봤다. 하나는 번득이는 창의력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시체골렘을 제작했다. 그것도 겉보기에는 인간처럼 보이는 형태로.
'크게 될 녀석이군.'
미르칼의 마법재능 3단계, 당대최강을 노려볼만한 범부에 불과하다. 엘렌스트라나 콜카르와 동격의 재능.
'하지만 창의력은 남다르다. 떨어지는 재능을 보완하고도 남을만큼.'
다른 하나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비밀을 파헤쳐 사령술의 극의에 이르겠다는······차갑게 타오르는 열정.
"지금처럼 마법에 정진해라. 미르칼."
"!"
"지금처럼 수행한다면 아크리치가 되어서 불사에 획득하는 것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미르칼은 광기어린 집념으로 눈빛을 번득이면서, 고개를 숙여서 감사를 표했다. 이에 텔로리안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정녕 옳은 가르침이냐?]
은빛뱀이 따지듯이 물었다.
[진정 미르칼을 생각한다면 어차피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말고, 살아있는 시간을 가치있게 보내라고 가르쳐야하지 않겠느냐?]
리치화도 죽음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되지는 못했다. 육신의 죽음은 방지해도 정신의 죽음은 방지하지 못하는 방안이므로.
[녀석이 원한다잖소.]
[아이가 바란다고 어른이 들어주는게 합당한가?]
진지한 목소리였다.
[당신은 신이 되고 너무 오래 지났소.]
[그게 논점과 무슨 상관이지?]
[당신은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망각했단 말이오. 죽음이란 스스로 일구고 사랑했던 모든 것을 빼앗긴채 무로 내쫓기는 것이오.]
전생엔 죽음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죽음은 오직 노인들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현생에선 도처에 죽음이 가득했다. 약하게 태어난 유아들은 버려졌고, 성장기의 아이들도 너무나 허망하게 죽었다. 어른까지 살아남아도 파리목숨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삶의 소중함을 알고 있소.]
[·········]
[그러니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미르칼의 욕망을 존중하오. 나는 내가 결정한 시기에 세상을 떠날 생각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선택을 제자들에게 강요하진 않겠소. 나는 좋은 스승이고 싶기 때문이오.]
냉랭한 태도에 은빛뱀도 더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미르칼이 미래에 초래할 수많은 죽음과 재앙을 엿보았지만······그것은 자신의 소관을 떠난 일이었다. 자신은 텔로리안에게 존재를 빚졌고, 미르칼은 텔로리안의 보호를 받는 인간이므로.
'내가 태양신 샤마쉬라면 결코 납득하지 않았겠지. 녀석은 인간들에게 본능의 추구를 제약해야한다고 설파해왔으니까.'
하지만 별빛의 아엘타나르는 원초적인 생명력을 찬미하는 신이었다. 인간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다.
'나의 사제들은 전쟁과 난교를 통해 나를 찬미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내게 삶을 거두고 탄생시킬 권한이 있다고 믿었지.'
그것은.
최고신에게 어울리는 권한이었다.
'······우스운 일이군.'
욕망의 절제를 주문해 인간들에게 외면받던 태양신은, 오랜 세월을 지나서 인간들이 제일 사랑하는 신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강대하고 무시무시한 신격으로 숭배받던 자신은, 사막의 유목민들만 숭배하는 이름없는 토착신이 되었고.
'이것이 시대정신의 차이인가.'
[연구진전 : 별빛을 향한 용오름]
[연구주제 : 시대정신을 파악함!]
[연구단서 2/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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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포인트 : 28]
'그렇다면 본신의 가르침이 요즘의 인간들에게 와닿으려면······변화가 필요하겠어.'
자신은 강하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총애해왔다. 또한 그러한 이들만 사제로 선발해서 본보기로 삼았다.
'태양신이 본신의 시대에서 소외받던 인간들을 위주로 교세를 확장한 것처럼, 본신도 태양신에게 소외된 인간들부터 포섭해야겠군.'
태양신은 언제나 흑백을 명확히 가르는 존재다. 그러니 흑에 속한 사람들은 명백히 반대되는 지옥이나 심연을 섬기면 되겠지만, 회색분자들은 마땅히 섬길만한 신이 없다.
'우선은 마법사와 상인들에게 전도를 해봐야겠군. 태양신이 반기지 않는 이들이니.'
아엘타나르는 새롭게 교세를 확장할 방법에 골몰했고, 잿빛현자는 또다른 방문객들을 맞이하면서 생일선물을 수령했다.
"주군! 생일 축하한다!"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가······"
"남편이 은빛뱀이 주군의 생일잔치를 연다고 전해주었다! 한데 봉신이 주군의 생일을 빼먹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준비해왔다!"
쿠웅!
보물상자를 열어젖힌다.
"드래곤의 힘줄!"
"·········"
"드래곤의 이빨!"
"·········"
"드래곤의 가죽까지!"
두둥!
드래곤 3종세트!
"드래곤의 심장도 있는데 이건 유료다."
"·········"
"보물을 돌려주면 심장을 주겠다."
"·········입수경위가 어떻게 되지?"
"부모님의 유품이다!"
위풍!
당당!
"만약 드래곤의 심장으로 부족하다면 드래곤의 알까지 팔겠다. 골드드래곤과 블랙드래곤의 혈통이 뒤섞인 알이니까······"
아니.
제발 그러지마······
"·········테사리온?"
"·········예. 스승님."
"끌고 나가라."
"예······"
상등품의 드래곤 세트라니까!
으아아! 진짜로 최고인데!
"·········"
텔로리안은 금빛왕자에게 붙들려나가는 검은폭군을 바라보며 망측한 감정을 느꼈다. 녀석을 만날 때면 드래곤에 대한 환상이 산산이 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왁자지껄하니 좋구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리안칼이 어깨를 툭툭 쳤다. 멋진 의복을 차려입은 조각미남이 술잔을 들고서 연회장을 내려다보았다.
"짜식. 외톨이가 친구가 많아졌구만."
"무슨 헛소리를."
"고향에선 언제나 혼자였잖아?"
텔로리안은 리안칼이 건네는 유리잔을 건네받았다. 이쪽 세상에 태어나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
그리고.
비로소 이쪽 세상에 소속되게 되었다.
"맛이 좋군."
"오늘만은 네놈에게 동감이다."
"리안칼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텔로리안의 새로운 식구들을 위해서."
짠!
잔을 부딪쳤고.
단번에 들이켰다.
* * *
같은 시각.
제국 황도.
"돌아왔습니다. 장인어른."
"어서 오게. 콜카르 의원."
콜카르는 새하얀 토가(Toga, 겉옷의 일종) 차림의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제국의 실권자로 불리는 고위집정관 아발레스였다.
"잿빛현자의 반응은?"
"장인어른의 예측대로였습니다."
"흠."
노인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
"게헨나의 루시펠레스를 변절시키고 판데모니엄의 발로르를 파멸시켜······일곱지옥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장본인이 잿빛현자일까?"
콜카르는 고민을 시작했다.
처자식을 지키기 적합한 대답을 찾아서.
17. 열일곱번째 연구 - 생명의 무게(1)
"저도 모릅니다."
"자네가 모른다고?"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콜카르는 노인에게 모른다고 답해서는 안되는 입장이었다. 지금까진 입장에 맞는 처신을 해왔고.
"장인어른도 모르시는게 낫습니다."
"일단 들어보겠네."
"제가 잿빛현자와 함께 자라면서 깨달은 사실은, 놈은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강박적으로 통제한다는 점입니다. 녀석은 자신이 알리고 싶은 정보만 알립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흑막의 기본소양이니까.
정보전이 중요한 이유고.
"누구나 실력의 3할은 숨기지."
"녀석은 실력의 7할을 숨깁니다."
"·········"
노인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그렇다고 내가 얌전히 속아줘야하나?"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
"적어도 잿빛현자와 사생결단을 내실 결단을 하기전까진 그렇습니다."
노인은 고민했다.
정보가 조합된다.
"자네가 올해로 스물일곱이지?"
"그렇습니다."
"잿빛현자와 동기라고 했고."
"그렇습니다."
"마법사들이 일반인들과 생애주기가 다르다지만, 그래도 스물일곱과 쉰일곱이 치고 받으면서 자라난 기억이 있다는게 말이 되는가?"
최대한 양보해도 선배다.
나이차 많이나는 대선배.
"그렇습니다."
"············"
"충심을 담아 말씀드리건데 녀석에 대해선 말하는대로 믿어주는게 좋습니다."
콜카르의 눈빛이 차분해졌다.
"아니면 작정하고 암살자들을 보내시죠."
"너무 극단적인 방안으로 보이네만."
"놈과 대립하려면 극단적인 대응만이 방법입니다. 자잘한 수싸움은 모조리 읽히고 대응당합니다. 제가 알기로 예외는 없었습니다."
·········아발루스는 사위가 동기를 감싸려는 것인지, 아니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압도되어 겁을 먹은 것인지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사위놈이 진실을 말하는 중이라면?'
생각해보자. 만일 잿빛현자를 콜카르와 비슷한 연배로 가정한다면, 30대가 되기전에 마지스터에 도달하고 드래곤조차 복종시킨 마법사다.
'그렇다면 텔로리안은 위대한 아르카디안에 견줄만한 자질을 갖추었다. 하늘에 이르는 탑을 만들고 신들에게 도전하다 파멸했다는 고대의 대마법사······'
노인을 제국의 실권자로 만들어준 생존본능이 발동했다. 아발레스는 버티고 살아남아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이건 지뢰다.'
촉이 쌔했다.
건드리면 터지겠지.
'모르는 척을 해야겠군······'
문제는 처갓집에서 들어오는 지속적인 압력이었다. 하루빨리 장인어른에게 패배를 안겨준 흑막이 누군지 밝혀내야하니까.
'그거 이놈 같은데?'
직감은 추측으로.
추측은 확신으로.
'한데 정체를 밀고하는게 옳은 판단인가?'
상대는 지옥대원수를 파멸시킨 책략가이자 고금최강의 재능을 보유한 마법사. 이런 청년과 적대하면 늙고 병든 정치가는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흐흐으으으으으으음······"
"··················"
"흐으으으으으으으으으음······"
그렇다고 모른척 한다고?
처가와의 의리가 있는데?
'무엇보다 수색성과가 미진하면 장인어른이 격노하시겠지. 원래도 인간이 고명딸을 데려가서 못마땅하게 여기시는데······'
콜카르도 침묵으로 장인어른의 숙고에 동참했다. 그들도 인간들의 세계에선 충분한 강자들이지만, 상대들이 너무 좋지 않았다.
"자네가 말한 정보를 누가 알고 있나?"
"같이 자라난 동문들은 모두 알겁니다."
그놈은.
어린 시절부터 이상했으니까.
"그외에는?"
"동문들이 정보를 유출하지 않았다면 없을 겁니다. 텔로리안은 타인에게 만들어낸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매우 능숙하니까요."
흐음.
"그럼 자네의 동문들이 정보를 유출했을까?"
"그럴 확률은 적다고 생각합니다."
말레피카 공동체의 일원들은 공동체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가족에 준하는 유대감을 유지한다. 애초에 친가족에게 버려진 이들로만 구성된 집단이므로 평생을 함께 가는 것이다.
"하지만 자네는 나한테 유출하고 있잖나."
"저야 장인어른이 새로운 가족이니까요."
"자네의 동문들도 새로운 가족이 있겠지?"
"말레피카 마법사들은 좀처럼 결혼하지 않습니다. 연구에 방해가 되니까요."
인리에서 벗어난 마법사들.
말레피카란 그런 자들이다.
"듣기엔 대단히 뒤틀린 군상들이군."
"대신에 마법은 기막히게 잘씁니다."
"대단히 위험해보이는군."
"서로간의 단결력도 철통같지요."
서방대륙의 마법사들은 두가지 분류로 나뉘었다. 인세와 그럭저럭 타협하고 살아가는 마법협회. 자신들만의 마도를 추구하는 말레피카.
"즉, 적어도 텔로리안의 동문들은 텔로리안이 숨기려는 정보를 외부인들에게 밝히진 않을 겁니다. 그건 배신행위니까요."
이에 집정관은 생각했다. 자신이 정보를 제보하지 않는다면, 지옥제왕도 한동안 텔로리안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그럼······책임을 질만한 일을 없애야겠군."
고위집정관 아발루스는 악마들의 문자로 두루마리를 작성했다. 지옥제왕을 함정에 빠뜨렸을지도 모르는 마법사들의 명단이었다.
'텔로리안을 포함하되 다른 후보자들도 넣자.'
그럼.
지옥제왕에겐 의무를 다하면서.
텔로리안에게 원한을 사지도 않겠지.
'인생은 언제나 줄타기가 중요한 법이니까!'
* * *
달이 환하게 빛나는 밤, 잿빛마탑의 창가에 까마귀가 내려앉았다. 내부에서는 여전히 왁자지껄한 생일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텔로리안.]
까마귀가 전언을 보냈다.
[엘렌스트라?]
[서재로 나와.]
텔로리안은 둘러대고 연회장을 빠져나왔고, 엘렌스트라는 서재로 들어가 변신을 해제했다.
"무슨 일입니까?"
텔로리안이 의아하게 물었다.
"실험으로 한창 바쁜 와중에 생일을 축하해주러 날아온 상황은 아닐테고요."
엘렌스트라는 가까운 이들에겐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법사였다.
"콜카르가 우리를 배신했어."
"어느정도 수위입니까?"
"너에 대한 정보를 타인에게 누설했지."
뭐.
그건 예상했던 일이다.
"보복이 필요해."
"엘렌스트라가 꿈에서 보았던 것이죠?"
"맞아."
"그럼 콜카르도 짐작은 했을테고······"
스승님께서 이끄시던 공동체가 해산되고 제자들은 각자의 살 길을 찾아야했다. 그리고 콜카르는 새로운 터전에 새로운 가족을 꾸렸다.
"일단은 놔둡시다."
"·········"
"어차피 콜카르가 정보를 누설했을 제국집정관 아발레스는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침묵이 없다면 비밀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제가 집정관의 이해관계를 침해하거나, 제국과 충돌하기 전까진 비밀이 지켜질 겁니다. 저의 나이같은 핵심정보들은 말이죠."
또한 콜카르도 알고 있다. 함부로 자신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면, 자신이 대단히 위험한 적수로 돌변하리란 사실을.
"그나저나 엘렌스트라는 괜찮습니까?"
"?"
"저에 대해 거짓말을 했잖습니까."
엘렌스트라는 자신을 감시하러 왔지만 보고서엔 자신의 거짓말을 그대로 적어냈다. 마법협회의 지도자들은 엘렌스트라의 보고서를 수용했지만, 그들의 속내는 알지 못하는 일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야 거짓말인걸 알겠지?"
"그럼 불이익이 있을텐데요."
"감수할만한 불이익이야."
엘렌스트라가 찻잔을 들이켰다.
"오히려 너와 비밀을 공유할만큼 친밀한 사이임을 드러냄으로서 가져오는 이득이 훨씬 많아. 이제 잿빛현자 텔로리안과 친해지고 싶어하는 마법사들은 대단히 많거든."
텔로리안은 젊은 나이에 막대한 권력과 지식을 틀어쥔 마법사였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나 힘과 돈을 향해서 모여드는 법이었다.
"명단이 있습니까?"
"?"
"엘렌스트라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들의."
"작성은 해뒀지."
엘렌스트라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고위마법사들의 명단을 건넸고, 텔로리안은 벨라디아를 불러서 건네주었다.
"이들을 후원해주거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이로서 엘렌스트라가 마법협회 내에서 누리는 입지가 높아졌다.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마법사들은 에스실 왕국의 후원을 받았으니까.
"어쨌든 콜카르는 우리를 배신했어."
"그정도는 봐줍시다."
텔로리안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콜카르가 우릴 배신했다면 우리를 가족으로 느끼지 못했던 거겠죠."
비즈니스든.
가족관계든.
본질은 같다.
원하는 요구를 교환한다.
"그러니 우리는 콜카르에게 서운함이 아니라 미안함을 느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텔로리안의 대답에 엘렌스트라는 미소를 지었다. 콜카르의 배신은 용납하지 못할 안건이었지만, 피해를 보았던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넘어가도 되겠지.
"많이 너그러워진 느낌인데."
"구태여 모질어질 필요는 없으니까요."
···
······
·········
묘한 기류가 흐를때.
"어이!"
꽝!
리안칼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물어볼게 있었······으잉?"
"반가워. 루시펠레스 대공."
"댁이 뉘셨드라?"
"친구 누나."
흠.
"그보단 연인같은데?"
"누이이자 연인일수도 있겠지."
"헛소리!"
리안칼이 눈쌀을 찌푸렸다.
"네가 말해봐라. 텔로리안."
"?"
"정말로 너희가 오누이같은 관계라고 생각하나? 세상에 어떤 오누이가 침대를 공유하는가? 말같은 소리를······"
갸웃.
"그게 이상한가?"
"············응?"
"누이와 애인이 공존할 수 없는 관계라는 주장은, 너무 편협한 사고가 아닐까 싶다만."
어······
음······
흠······
'정신병자 새끼들.'
이러니 말레피카들이 탄압을 받지!
마녀사냥만은 태양신 교회가 옳았다!
"너희는 보다 편협해질 필요가 있어."
"?"
"세상에는 모두가 지키며 살아가는 상식이 있단 말이다. 상식이 언제나 합리적이지는 않겠지만, 다수가 상식을 따르며 살아가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상식이 깨지면 질서가 깨지고, 그러면 불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진지한 목소리다.
장난기가 사라진.
"하지만 그걸 너희가 남들보다 똑똑하고 잘났다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무시하면 싸움이 필연이다. 이해가 되나?"
리안칼은 지난시간 성기사로서 수양을 쌓아왔었다.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무늬만), 피해자에게 사죄하며(성력을 얻으려고), 악인들을 벌하고(재밌어서), 선인들을 구해왔다.
"남매라고 주장할거면 진짜 오누이답게 행동하던가, 아니면 깔끔히 연인이라고 인정하던가······애초에 피가 섞이질 않았는데 그걸 오누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군."
에휴.
깊은 한숨을 내쉰다.
"들어먹을 놈년들이 아닌걸 알고 있으니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하여간 나는 경고를 전했으니 이후는 너희들이 선택할 몫이다."
피식.
이야기를 들은 텔로리안이 웃어보였다.
"이제야 제법 성기사답군."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
"원래 마법사들은 성기사들과 대단히 사이가 나쁘다. 네가 우리의 관행을 역겨워한다면 비로소 성기사로 거듭나고 있다는 뜻이지."
마법이란 본질적으로 세계를 개변하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마법사란 언제나 상식과 싸워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상식을 창조하려면 기존의 상식을 파괴해야한다. 그렇기에 뒤틀림이 없는 마법사는 결코 위대함에 이르지 못하는 법이다."
한때는 신들이 전지전능한 존재들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아르카디안은 신들이 믿음에 의존하는 존재일뿐임을 증명했다. 만일 아르카디안이 남들처럼 신들을 숭배했다면, 그러한 발견은 이뤄지지 못했겠지.
"또한 인간과 엘프의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백색현자가 평화를 중재했기에, 불가능이 가능해졌지."
[위대한 마법사들에 대한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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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포인트 : 29]
"그러니 마법사는 광인으로 불림을 두려워하지 않아야하며, 세상이 정해둔 경계선에 안주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마법사들의 가르침이다."
상식적인 마법사란 게으르고 겁많은 마법사를 뜻할 뿐이었다. 남들이 정해놓은 법칙에 안주하는 아무런 쓰잘데기 없는 놈들.
"흠······"
리안칼은 주장을 검토해봤다.
"·········결국 맘대로 하겠다는거 아니냐?"
"그래야 제일 위대한 발견이 가능하니까."
"미친 새끼······"
"극찬이군. 고맙다."
그래서.
"내게 물어보려던건 뭐지?"
"음·········"
볼을 긁적이는 루시펠레스.
"네가 호박의 성녀를 소개해줬잖나?"
"그랬지."
"한데 호박의 성녀를 만나러가는 도중에 명성높은 성자를 만났다. 어떠한 대가도 없이 만인에게 기적을 베풀어주는 의사더군."
올해가 태양력 1530년.
그리고 중부의 명의라면.
"한데 알고보니 사령술사였다?"
"그래. 사람을 죽여서 사람을 구하더군."
리안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배는 사령술사는 무조건 참해야한다고 포효를 내질렀지만······그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네게 의견을 물으러왔다."
[신규연구: 삶의 무게]
[연구주제: 목숨의 가치를 판단하십시오.]
[연구단서: 0/3]
[연구보상: 고유주문(생명의 저울)]
[부가보상: 죽음의 현자와의 만남]
17. 열일곱번째 연구 - 생명의 무게(2)
모든 생명은 동등히 존귀하다. 그건 전생에도 현생에도 통용되는 논리다. 사람의 목숨에 가격표를 붙이는 일은 언제나 악으로 분류된다.
단.
원칙적으로만.
'실제론 모두가 목숨에 가격표를 붙이지.'
사랑스런 젊은이의 목숨과 세월에 짓눌린 노인의 목숨은 결코 동등한 방식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어떠한 관점에선 그러한 판단이 공정하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왕과 거지의 목숨이 동등하게 여겨지는 시대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죽음은 평등하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불평등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말로 내뱉으면 모두 대단히 불쾌하게 여긴다. 모두가 알지만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현실이니까.
"알레바흐센 선생."
하지만 이곳에 불쾌한 현실을 직시하고 판단하려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알레바흐센. 명성 높은 의사이자 강령술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대가 잿빛현자군."
알레바흐센은 새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는데, 챙넓은 중절모에 검은코트를 입고 있어서 장의사처럼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고 죽음은 언제나 가깝소. 그러니 번거로운 인사와 자기소개는 생략합시다. 용건을 말해주시오."
또한 인상에 걸맞게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한 줄로 요약한다면 미치광이 성자.
"당신이 무슨 죄목으로 잡혀온지는 아시오?"
"살인죄."
"당신은 극형에 처해질수도 있소."
"삶과 죽음의 순환은 자연스러운 것이오."
알레바흐센은 음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나는 의사로서 생명을 구제하는 직업을 지녔고, 당신은 국왕의 조언가로서 생명을 지키는 직업을 지녔소. 역할에 충실합시다."
그는 완전한 관찰자의 시점에서 인간을 바라보았는데, 그러한 태도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일관되었다.
"하지만 나를 처형하기 전에 당신이 고려할 문제가 있소. 나를 죽이면 나로 인해 살아날 사람들이 이르게 죽소. 반대로 나의 의료행위가 유발한 혼란으로 이르게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도 있겠지. 어느쪽이 무거운지 재어볼 필요가 있소."
알레바흐센은 생명의 무게를 측정하라고 요구해왔다. 서로 다른 생명들을 저울에 올려두고 경중을 판별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대는 왕법을 어겼다."
텔로리안의 심문을 지켜보던 벨라디아가 말했다. 이것은 왕궁의 밀실에서 이뤄지는 비공개재판. 참석자는 왕실자문의원들과 텔로리안의 제자들.
"짐의 칙령은 흑마법의 공개적인 사용을 금하며, 정당방위와 처형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살인도 금한다. 하지만 자네는 모두 행했군."
따라서.
"합당한 처벌은 화형이다."
"············"
"하지만 그대의 재주는 유용하지."
사령술이란 죽음을 다루는 마법. 죽음을 제대로 다루려면 삶도 배워야하므로, 자연히 생명을 다루는 방법도 익히게 된다.
"짐에게 충성한다면 목숨을 살려주마."
"나는 죽음에게만 충성하오."
"·········"
벨라디아는 알레바흐센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본디 죽음을 불사하는 결의를 말하는 자들도 내면에 공포를 품었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드래곤조차 죽음이 임박하면 목숨을 구걸한다. 자신도 죽음이 임박하면 똑같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놈은······대체 정체가 뭐지?'
한데 눈앞의 노인은 죽음의 위협이 통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온 이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대는 어째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폐하는 태어남이 두려웠소?"
"·········"
"태어남이 두렵지 않았듯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것이오. 우리가 모두 겪었고 겪을 일이니."
[연구진전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결의'를 느꼈습니다.]
[연구단서 8/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 30]
"허면 그대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나는 생명을 존귀하게 만들고자 살아가는 사람이오. 생명이 존귀해야 죽음이 비로소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오."
······벨라디아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결의를 위해 목숨을 저버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네같은 이들은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우리의 신념을 존중하고 인정해주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신념을 위해 살아감으로서, 사회에서 튀어나온 돌부리가 된다.
"폐하에겐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언제나 불편하겠지. 하지만 그러한 불편함을 받아들임으로서, 폐하는 진심으로 통치에 조력하는 이들을 얻을 수 있소."
······벨라디아는 알레바흐센의 말을 곱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덕분에 심문의 주도권은 텔로리안에게 돌아왔다.
"선생은 무얼 근거로 생명의 무게를 쟀소?"
"나는 언제나 수명을 기준으로 삼았소."
알레바흐센은 악당을 죽여서 선인을 구했고, 소수를 죽여서 다수를 구했다. 또한 노인을 죽여서 아이를 구했다. 그것이 평균적인 생명의 연장에 도움이 되므로.
"누가 그대에게 그런 권한을 줬는가?"
"나의 양심."
알레바흐센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대와 여왕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
"나의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수명이 유의미하게 연장되었소. 덕분에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죽음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떠나갈 기회를 얻게 된거요."
······알레바흐센의 진술은 생명에 대한 딜레마를 제기했다. 인간에게 생명의 경중을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
'일반적으론 그러한 권리가 없다는 대답을 받겠지. 전생이든 현생이든 마찬가지다.'
전생의 사람들은 말했다. 만민은 보편적인 인권을 누리기에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고. 현생의 사람들도 말했다. 만민은 태양신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에 생명에는 존귀가 없다고.
'하지만 행동은 어떠했는가?'
전생의 사람들은 자본을 근거로 생명의 무게를 재었다. 현생의 사람들은 혈통을 근거로 경중을 따질 뿐이다.
'요약하면.'
원칙적으론 생명의 무게는 모두에게 동등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론 생명에도 가격표가 붙어있다. 알레바흐센은 그러한 현실을 묵묵히 인정하고 의술을 펼치는 성인.
[연구진전 : 생명의 무게]
[알레바흐센의 저울에 대한 전승!]
[연구단서 1/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 31]
'알레바흐센의 저울은 모든 회차에서 딜레마를 주었던 문제다. 내가 과거에 딜레마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겠군.'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어본다. 우선 야만전사로 플레이하던 회차에선 알레바흐센의 운명에 관여하지 않았다. 골치아픈 문제는 언제나 피했으니까.
'·········'
성기사로 플레이했던 회차에선 이단자로 간주해서 태워죽였다. 인간이 생명의 무게를 재단하는 행위는 태양신에 대한 모독이므로.
'반면에.'
바드로 플레이하던 회차엔 알레바흐센을 도와주고 영웅으로 만들어줬다. 권선징악은 민중들이 제일 좋아할만한 이야기였으니까.
'마지막으로.'
군주로 플레이하던 회차엔 알레바흐센을 참수했다. 알레바흐센의 사상이 퍼져나가면 사회적인 대혼란이 초래되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역할은?'
로어마스터.
'역할에 맞는 판단을 내려야지.'
로어마스터로서 판단하자면 알레바흐센은 존경받을만한 용기를 갖춘 동료였다. 생명의 무게를 저울에 올려서 비교하는 연구는 대단히 흥미로우나 그만큼 위험한 연구다.
'목숨을 포기할 사람만 가능하지.'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엄격히 금지될만한 연구였다. 하물며 종교와 미신이 지배하는 중세랜드에선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리라.
마음 같아선 지켜주고 싶었다.
실험의 결말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왕실의 조언자다.'
즉.
균형을 맞춰야한다.
"리안칼."
"말해라."
"석방을 판결하면 받아들일 수 있나?"
·········
리안칼이 숙고했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가?"
"······라고 할배는 말하는군."
성검을 내려다보는 리안칼.
"할배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신성모독죄를 빼고 봐도······저러한 행위를 허용해준다면 장기적으로 더욱 많은 죽음이 초래될지도 모르지."
리안칼은 성검에 깃든 성왕에게 많은걸 빚졌다. 성기사로서 가르침을 받았고, 부성애가 무엇인지 느껴보았다. 고마웠다.
"하지만 나의 결정은 나의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타인에게 지배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다. 리안칼은 태양신의 성기사로서 선행을 행할 생각이었지만, 선행의 기준은 율법이나 타인의 모범이 아니었다.
"나의 양심은 나만의 것이니까."
스스로의 양심.
마음의 목소리였지.
[연구진전 : 에르보니아의 리안칼]
[표본이 가치판단을 시작했습니다.]
[연구단서 4/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 32]
"그렇다면 최종판결은 네가 내리도록."
"믿어줘서 고맙다."
리안칼은 알레바흐센과 얼마간 문답을 나누었다. 조곤조곤한 토의와 격렬한 논쟁을 오가던 대화 끝에, 리안칼은 마침내 답을 얻어냈다.
"조건부로 석방하겠다."
"어떤 조건이오?"
"하나. 당사자의 동의없는 희생은 금지한다."
"음."
"둘. 갱생불가능한 악인에 대해선 허용한다."
"갱생불가능의 기준은?"
"셋. 갱생불가능과 악의 기준은 알레바흐센의 양심에 의거한다. 이상이 나의 판결이다."
츠릉!
성검이 번득이고.
수갑이 잘려나갔다.
"알겠소."
"고맙소가 아니라?"
"?"
"?"
"그대는 그대의 의무를 행했을 뿐이다."
"·········"
"내가 감사를 느껴야할 이유는 없지."
수갑에서 풀려난 알레바흐센은 심문석의 텔로리안에게 걸어오더니, 품에서 누더기처럼 기워붙어진 노트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나의 평생이오."
"어째서 이걸 내게 주시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을테니까."
알레바흐센은 노트를 건네주고 조용히 떠나갔다. 왕궁을 나서자 수많은 민중들이 환호성으로 맞이해줬으나, 알레바흐센은 그들도 무시하고 자신만의 순례를 떠났다.
"·········"
노트를 살펴보니 죽음의 로어에 기반하는 치유주문들이 있었다. 생명의 로어로 구해내지 못하는 이들도 구할 수 있는.
"미르칼."
"네. 스승님."
"나는 오늘부터 알레바흐센의 연구를 계승할 것이다. 또한 언젠가는 네게 승계하겠지."
─────
◆알레바흐센의 저울 (죽음의 로어, 고유주문)
: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는 저울을 소환합니다. 저울에 올라간 제물은 목숨을 잃으며, 목숨의 가치에 걸맞는 치유력이 발동됩니다.
■효과
: 제물을 희생시켜 치유 주문을 시전합니다.
: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도 치유해냅니다.
: 사용자의 마력에 근간해 효과적입니다.
: 희생자의 가치가 클수록 효과적입니다.
: 충분한 위력이 모이면 부활도 가능합니다.
■주의
: 제물은 반드시 죽습니다.
: 목숨의 가치는 알레바흐센의 기준입니다.
: 명백한 사령술입니다.
─────
알레바흐센의 노트에는 이러한 종류의 주문들이 빼곡했다. 현재까지 완성된 주문은 생명의 저울이 전부였으나, 연구를 거듭해 노트를 완성한다면 이보다 위력적일 주문도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연구다."
"·········"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시전자도 대단히 위험해진다. 생명의 경중을 자신이 판단한다는 전능감을 느끼게 되니까."
고대의 마법사왕들은 신들에 준하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자신들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파멸을 맞이했었다.
"그러니 연구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어라."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요?"
"분별력."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분별할 능력.
"마법사에게 제일 중요한건 분별력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미르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보다 맑고 선명한 눈동자로.
* * *
알레바흐센은 왕국을 순례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사산아를 되살리고 불치병에 시달리는 소년소녀들을 구해주었다.
'그는 어떤 성자들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천상을 섬기는 성자들은 신성력이 떨어지면 사람을 구할 수 없었지만, 알레바흐센은 그러한 제약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알레바흐센의 순례에는 언제나 죽음이 뒤따랐다. 강제로 끌려나온 사형수들, 자식을 구하고 싶어하는 부모들, 어차피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 다양한 이유로 삶에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그를 죽음의 성자로 일컬었다.
"멈춰라! 나쁜 사람!"
"사악한 이단행위를 중단하십시오!"
그러나 죽음의 순례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스실의 국경에서 성스러운 쌍두오우거가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말을 들어주마!"
"종부성사를 하십시오! 죄인이여!"
·········
"무(無)."
쿵!
끝이었다.
17. 열일곱번째 연구 - 생명의 무게(3)
이단심판부는 알레바흐센의 유해를 불태워 잿가루로 만들었다. 또한 잿가루는 바다에 흩뿌려 부활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흐음."
덕분에 왕도에서 거행되는 알레바흐센의 장례식에는 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광장을 가득메운 추모인파와, 궁전에서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흑의의 벨라디아가 있었다.
"신기하네요."
알레바흐센의 장례식엔 굉장한 인파가 모여들었다. 생업에 바쁜 왕도시민들이 모두 모인 일도 신기한데, 궁핍한 농민들마저 장례식에 참석코자 왕도로 상경해올 정도였으니까.
"저들은 어째서 알레바흐센을 저토록 추모할까요?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을텐데·········"
알레바흐센은 치료행위에 존귀를 고려하지 않았다. 귀족도 평민도 똑같은 기준으로 치료해주었다. 덕분에 죽음의 성자는 에스실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알레바흐센을 만나보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조차.
"백성들이 태양신 신앙을 저버리고 있어요."
헤링턴 왕조는 태양신 교회와 긴장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신자들을 창칼로 위협도 해보고 황금으로 달래도 보았다. 그럼에도 평민들의 태양신에 대한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단.
이번에는 달랐다.
"태양신을 저버리는 신자들이 속출하고 있어요. 며칠 전엔 빈민가 소년에게 사제가 살해당했고, 수녀원에 불을 지른 사람도 있었죠."
당연히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왕으로 용납이 불가능한 일이니.
"평범한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했어요."
"·········
"무엇이 백성들의 변화를 만든 건가요?"
벨라디아는 백성들을 양떼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겁이 많았고 군중심리가 지배했다. 하지만 오늘 광장에 모여든 대중들은 달랐다.
"제가 백성들에게 알레바흐센같은 존경을 받는다면, 그때부턴 성국도 제국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겁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저를 위해 목숨을 던질테니까요."
지금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은 드물었다. 연서를 고백하는 대부분은 성적 충동에 지배받고 있을 뿐이고, 아버지나 알랑송 정도만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지.
하지만 알레바흐센을 위해 죽어줄 사람은 수십만이 넘겠지. 광장에 모인 이들이 복수를 원하는 시선만 보아도 그러했다.
"알레바흐센이 베풀었던 사랑이다."
"제가 알레바흐센보다 훨씬 사랑스러운데요."
"분명히 그렇지."
어리고 아름다운 여왕.
누구나 사랑할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너는 백성에게 베풀지 않잖느냐."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들을 소중히 여겨주진 않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느낌을 받길 원했다. 특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일수록 그러한 느낌에 대단히 굶주렸다.
"민중은 이름이 없다."
"············"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이니까."
강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이름을 지녔다. 하지만 지나가는 농부와 빌어먹는 거지에겐 이름이 없다. 집단이 있을 뿐이지.
"백성에겐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대단히 드물다. 때문에 조금의 사랑만 베풀어도 흠뻑 넘어가서, 얼마든지 목숨을 바친다."
에스실의 백성들은 통곡하며 알레바흐센의 죽음을 기리고 있었다. 마치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것처럼, 어쩌면 그때보다 훨씬.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풀거라."
"·········"
"곱절로 돌려받을 테니까."
의전관들이 광장에 왕실을 상징하는 백조깃발을 설치했다. 벨라디아가 추도연설을 시작할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선생님."
고민에 빠진 벨라디아가 의아하게 물었다.
"사랑이 뭐죠?"
그녀의 얼굴엔 불쾌감이 가득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면 사랑은 매우 막강한 감정이에요. 창칼로 위협해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수단이니까요."
벨라디아는 갈망의 대상이었고 그녀도 세상을 갈망했다. 그래서 벨라디아는 욕망하고 욕망받는 감정에는 대단히 익숙해졌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지는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그렇다면 사랑은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무기고, 저는 당연히 그것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군왕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지녀야한다.
"하지만 도대체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너희 아버지가 네게 베풀었던 것."
"그건 혈육에 대한 정이잖아요?"
벨라디아가 눈쌀을 찌푸린다.
"죽음을 속이기 위한 생물의 본능."
"정론이지."
부모자식의 관계는 언제나 애뜻하고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미화가 들어가는 까닭은 일반적으로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자식은 다시 살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며, 때때로 성욕의 부산물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텔로리안은 벨라디아를 바라봤다.
이번만큼은 강한 질투를 담아서.
"너희 부녀의 경우에는 결코 아니다."
"·········"
"로드릭은 너를 위해서 인생을 통째로 희생했다. 사랑하던 여인도 포기했고,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가문의 존속마저 저버렸었지.."
본래 벨라디아의 광증은 치료가 불가능한 사안이었다. 가문을 생각한다면 그녀를 제거하고, 새로운 자손을 낳는게 맞는 판단이었다.
"나는 2가지 차원에 걸쳐 존재하는 마흔두가지의 언어에 통달했지만,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단어는 사랑밖에 알지 못한다."
텔로리안은 생각했다. 로드릭과 자신은 굉장히 결이 다르지만, 자신이 로드릭을 존중하는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단언하건데."
강한 어조로 말한다.
"너희 아버지가 네게 베풀었던 사랑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이라도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다면, 백성들은 너를 위해서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을 것이다."
조상신을 섬기는 극동의 율법학자들이 일컫기를, 임금은 어버이와 같아 백성들을 자식처럼 다스린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왕권에 대한 모든 신화들처럼.
임금들은 백성을 가축처럼 대한다.
가장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조차도.
"위선도 상관없다."
"·········"
"백성들은 많은걸 바라지 않으니까."
이에 벨라디아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모르겠어요."
"·········"
"이번 수업은 너무 어려워요."
처음이다.
그녀가 어렵다고 말한건.
"이번 숙제는 쉽지 않을거다."
눈길을 내려서 벨라디아와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녀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에선 살의가 번득인다. 언제나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피에 굶주린 모습.
"하지만 너는 많은 일을 해왔지."
"·········"
"이번에도 훌륭히 해내리라 믿는다."
텔로리안이 떠나가자 벨라디아를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자신을 이렇게 골치아프게 만드는가?
'사랑이란 다른 존재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라고 백색현자의 만물사전에 적혀있었다.
'나는 나한테 언제나 애정을 지닌다.'
자신은 자신의 안위와 욕망에 언제나 세심하게 신경썼다. 성적인 접촉은 짜릿했고 사람을 지배하는 순간은 황홀하고 살인은 최고였다.
'······아버지는 무엇을 좋아하지?'
싸움과 영광.
가족과 영지.
'스승님은?'
마법과 지식.
고서와 실험.
'대단히 유용한 정보들이지.'
유용하다.
남을 조종할 때에.
'이런 접근이 아닌것 같은데······'
난제에 부딪친 벨라디아는 고개를 흔들어보였다. 슬픔에 잠긴 백성들이 자신의 연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저놈들은 알레바흐센의 죽음에 어째서 격렬한 감정을 내보이고 있는걸까? 왜지? 그냥 남이잖아? 그냥 목숨을 빚졌을뿐인······'
자신도 스승님에게 여러번 목숨을 빚졌다. 그래도 남일 뿐이다. 그러니 스승님이 돌아가셔도 저렇게 식음을 전폐하진 않을 것이다.
'신기하군······'
어쨌든.
배역이 주어졌으니 연기할 시간이었다.
[짐의 사랑하는 신민들이여!]
여왕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로 힘차게 퍼져나갔다.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진 목소리였다.
[짐은 비통한 소식을 전하고자 이곳에 여러분을 불러모았다. 짐과 그대들이 아끼고 사랑하던 알레바흐센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사인은 이단심판관들에 의한 분살.]
실제론 망치에 가루가 되었다.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었겠지.
[알레바흐센 선생께선 장작불의 고통 속에서도 나지막히 탄식을 내지르실 뿐이었다. 그분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스스로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직 고통받는 약자들을 위해 헌신할 방도만을 강구하신 것이다.]
자신이 말하면 진실.
자신이 정하면 정의.
[짐은 하늘에 계신 태양신을 언제나 온마음을 다해 흠숭해왔다! 그러나 그분을 섬긴다고 자처하는 사제들의 극악무도한 행실들을 보아라! 그들은 색욕을 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소년들을 강간하고,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빈자들을 갈취한다!]
허면.
[태양신의 사제들이 알레바흐센 선생을 태워죽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의 위선적인 행실이 드러나는게 두려웠기 때문······]
벨라디아는 훌륭한 웅변을 이어가며 백성들을 선동했다. 덕분에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복수를 천명하는 국왕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로 변모했다. 이에 벨라디아는 알레바흐센을 에스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짐이 알레바흐센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그대들을 보살피겠다! 성스러운 알레바흐센의 육신은 사라졌으나, 그분의 뜻은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럴듯했나요?"
"최고였다."
"후후! 덕분에 눈엣가시처럼 굴어대던 교회를 통치에서 완전히 치워버릴 수 있겠군요."
여왕의 보복조치가 번개처럼 뒤따랐다. 태양신 교회는 특권을 모두 빼앗겼고 수도원은 자산을 몰수당했다. 이로서 태양신 교회는 에스실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다.
"여왕 폐하 만세!"
"태양신 교회놈들! 너희나 지옥에 떨어져라!"
비난을 각오하고 단행한 조치였는데, 백성들은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기왕에 이렇게 되었다면, 수도원이 담당하던 빈민복지를 왕실이 시행해서 백성들을 속여야겠다.
"재무관 우르반."
"말씀하소서. 여왕 폐하."
"몰수한 자산으로 전국에 구휼기관을 건립해라. 반드시 수도회가 운영하던 구휼기관보다 훌륭해야한다."
그리고.
"알레바흐센의 이름을 따서 곳곳에 병원을 짓고, 마을마다 학교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짐의 업적을 알리고 알레바흐센 선생의 뜻을 전하라. 이것이 짐의 칙령이다!"
멍청한 백성놈들!
지금은 좋아할테지!
'하지만 두고 봐라!'
헐벗고 굶주린 놈들을 배불리 먹이고 글자를 가르쳐서, 모두 쓸만한 군인으로 징병해버릴 것이다. 놈들은 그제야 자신이 베풀었던 혜택이 정복전쟁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겠지만, 그때는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
'그나저나 개돼지들을 조련하려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해야겠군. 백성들은 무식하고 멍청해 엘프문자를 읽고 쓰지 못할테니까······'
벨라디아는 음흉한 생각을 품으며 흉악히 웃어보였다. 군주의 속마음도 알지 못하는 바보들을 비웃으면서······
* * *
회의가 끝나자 텔로리안은 비밀통로를 통해서 왕궁을 빠져나왔다. 알레바흐센의 죽음은 에스실의 백성들을 격앙시켰고, 이는 벨라디아가 교회를 탄압할 수 있는 국면을 만들어주었다. 이는 서부에 있는 교황청의 분노를 유발해, 국제적인 긴장을 유발하고 있었고.
'하지만 침공은 없을 것이다.'
이미 벨라디아는 대륙에서 충분한 지지세력을 얻어두었다. 조만간 여왕의 부군을 선발할 성대한 토너먼트가 열릴 것이고, 그것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왕국을 넘보지 못하겠지.
"?"
한데 적막에 휩싸인 비밀통로에서 음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팡이의 끝자락으로 바닥을 내리치자 지팡이의 머리에서 푸른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어둠이 부분적으로 사라지면서, 어둠속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맙네."
인영이 내뱉은 목소리는 잡초처럼 시들어있었는데, 그것의 외견은 임종을 앞둔 노인처럼 메마르고 볼폼이 없었다.
"제자의 장례식을 치러주어서."
"자격에 합당한 경의를 표했을 뿐이오."
텔로리안은 차분하고 절도 있는 자세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주 정중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이례적인 일임은 분명했다.
"처음 뵙겠소. 죽음의 현자여."
"나도 여덟번째를 만나게 되어서 기쁘군."
노인이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주변이 변화했다. 지하통로는 사라지고 행성의 전도가 나타난다. 다섯 대륙을 모두 담고 있는.
"그럼 멸망을 막을 방안에 대해 심도있는 토론을 진행해보세. 젊은이."
[연구진전 : 생명의 무게]
[죽음의 현자를 대면함!]
[연구단서 2/3]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 33]
17. 열일곱번째 연구 - 생명의 무게(4)
죽음의 현자는 7인의 대마법사로 구성된 현자 회의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본신의 강력함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영역을 다루기에 독보적인 영향이 있었으니.
'무시무시할정도로 강력하군.'
일반인들은 높은 위계의 주문을 사용하는 마법사를, 대마법사라고 부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이가 대마법사의 상징이니까.
'하지만 진짜 대마법사는 다르다.'
결국 9위계 주문도 남들이 정해둔 규격의 주문일 뿐이다. 진정한 대마법사들은 자신만의 주문체계를 지녔으며, 그것을 근간으로 새로운 마법을 세계에 소개하는 자들이다.
'게임 시절의 기준으론 51레벨 이상의 괴물들이지. 평범한 필멸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전설의 영역에 접어드는 수준.'
따라서 51레벨을 넘어선 마법사들은 필멸자이되 필멸자라고 부르지 못할만한 초인들이다. 홀로 십만대군을 괴멸시키고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고, 고위급 불멸자들과 대등히 싸우는 업적이 가능한 존재들이므로.
"왜 알레바흐센이 죽게 내버려뒀습니까?"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는 법."
딸그락.
죽음의 현자의 앙상한 손가락이 움직였다.
"오직 죽음만이 진리에 이르는 진정한 길이라네. 하지만 알레바흐센은 그것을 거부하고 산자로 남기를 선택했지."
그러자 죽음의 현자가 취하던 노인의 외피가 사라지고, 백골만 남은 진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와 살이 있어야할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다.
"느껴지는가?"
그럼에도 죽음의 현자는 생전에 사용하던 장비들은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다. 자주빛의 로브와 강대한 마력이 깃들어있는 막강한 마법지팡이·········강대한 마력을 머금고 현자의 주변을 배회하는 불길한 색채의 오브들까지.
[대마법사의 힘을 목도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 34]
"이것이 진정한 진리다."
아크리치 레반켈은 만물의 죽음을 희망하는 대마법사였다. 그는 최초의 사령술사였고, 모든 지성체는 죽음으로서 영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미치광이 철학자였다.
단.
그럼에도 텔로리안은 위압되지 않았다.
"그대의 저술들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대단한 영감을 주었소.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한 명료한 해답을 주었으니까."
하지만 레반켈의 저작에서 보이는 지성은 대단히 날카로웠고, 때때로 평범한 마법사들이 생각도 하지못할 창의적인 방안들이 있었다.
"특히 모든 지성체를 언데드로 바꾸면 악마도 없어지고 종족갈등도 해결된다는 방안이 대단히 창의적이었지. 이론상으론 멸망을 막기 위해선 그것보다 효율적인 방안이 없을거요."
죽음에서 되돌아온 생명체들, 언데드로 불리는 존재들은 감정이 대단히 희박하다. 영혼을 자아내는 그릇인 육체가 비었으므로, 감정도 그만큼 덜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방안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오. 모든 생명체를 언데드로 바꾸기 이전에, 생명체들의 반발로 인해서 세상이 멸망에 이를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오."
게임 시절, 주인공이 일정한 명성을 얻으면 죽음의 현자가 찾아와 함께 세계를 구하자고 제안했었다. 특히 주인공이 마법사인 경우에는 굉장히 풍부한 혜택을 제공했었지.
"따라서 당신의 방안은 이론적으론 훌륭하지만, 실무에선 적용이 불가능한 방안이란 논박을 내어놓을 수 밖에 없겠소."
이에 죽음의 현자는 턱뼈를 딸깍이며 기괴한 웃음을 내었다. 그건 또다른 현자들이 자신을 설득할때 사용하던 논리였으니까.
"그대는 항상 상황을 앞서 보는군."
죽음의 현자는 언제나 젊은 마법사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늙은 마법사들은 자신의 합리적인 해결책을 몽상이나 광기로 비하하나, 젊은이들은 사고가 깨어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젊은이다운 참신한 생각이 없어."
죽음의 현자는 생각만으로 환영 마법을 거두었다. 그들이 밟고 있던 행성 전도가 사라지고, 어두운 지하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망스럽군. 돌아가보겠네."
"언데드 역병은 언제 일으키실 것이오?"
"흠?"
텔레포트를 시전하려던 죽음의 현자가 사고를 멈추었다. 언데드 역병은 현자 회의에서도 존재를 알고 있는 동료들이 많지 않았는데.
"백색현자가 자네에게 귀띰해줬나?"
"스스로 조사해서 알아낸 것이오."
시네어RPG를 다크판타지로 만드는 [삼두룡의 강림]은 다음같은 3요소로 이루어졌다. 전쟁을 불러오는 녹색용. 악행을 불러오는 붉은용. 죽음을 불러오는 검은용······
각각은 상징한다.
오크들의 그린타이드.
데몬들의 대규모소환.
언데드의 끝없는창궐.
"당신은 나의 동향을 샅샅이 조사했으니 알고 있을테지. 내가 벨칸과 친분을 쌓고 하이엘프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그린타이드는 에스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려던 벨칸을 회유해서 막았고, 데몬들을 소환해 세상을 불태우려던 하이엘프들의 계획은 제국과 공투하겠다고 약속함으로서 막아냈다.
"한데 양측을 불러와서 경위를 조사하던 도중에, 둘에게 공통된 협력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그게 바로 당신이었고."
전쟁이 벌어지면 죽음이 만연한다. 악마들이 강림하면 인간들은 삶보다 죽음을 갈구하리라. 그때야말로 죽음의 가치에 대해서 가르치기에 적합한 시간이었다.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삶을 이어갈 의지를 잃게 만든다. 그때 죽음만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가르치고······충분한 가르침이 퍼지면 언데드 역병을 뿌린다."
당연히.
어마어마한 언데드가 창궐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계획이었잖소."
"············"
이에 죽음의 현자가 뼈만 남은 팔짱을 끼어보이자, 지하통로가 극지대의 공기처럼 차가워졌다. 불쾌함의 표현이었다.
"역시 의도적인 방해가 맞았군."
죽음의 현자는 저승을 다스리는 제왕처럼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대였다면 신으로 숭배를 받았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니까.
"더이상 그대가 자유의지를 지니도록 허용하지 않겠다. 그대는 오늘부터 나의 조수가 되어, 멸망에 맞서는 과업에 봉사하게 되리라."
죽음의 현자를 푸르고 새하얀 냉기가 휘감쌌고, 주변에는 수족처럼 사용하는 쇠사슬들이 나타났다. 허나 텔로리안은 앞날을 예지하는 미래시와, 인간의 한계에 도달한 기민함(민첩 25)에 힘입어서 먼저 움직였다.
"나도 싸움이라면 제법 자신 있는 편이지!"
상대는 65레벨 아크리치고 자신은 41레벨 로어마스터다. 유리한 싸움으로 보기에는 어려우나, 감당이 불가능한 싸움도 아니었다.
'죽음의 현자는 오직 4개의 로어밖에 다루지 못한다. 죽음과 냉기, 영혼과 정신이지.'
모든 로어는 각자의 성질을 카운터하는 로어가 있었다. 이를 현명히 활용한다면, 레벨이 떨어져도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다.
'원래 죽음의 현자는 파티를 꾸려서 공략해야하는 보스몹이었다. 덕분에 현자가 보여주는 전투패턴에 대해선 명백히 꿰고 있지.'
[5위계, 원소의 로어]
[엘리멘탈 쉴드(Elemental Shield)]
[마력이여! 원소로부터 나를 보호하라!]
텔로리안의 주변에 알록달록한 마력결정들이 떠올랐다. 대지와 냉기, 불꽃과 바람으로 이뤄진 구체들이 각각의 기운을 뿜으며 보호막을 형성했다. 죽음의 현자는 동시에 3개의 주문을 시전했는데, 하나는 생각으로, 하나는 손으로, 하나는 입으로 시전한 주문이었다.
[5위계, 냉기의 로어]
[프로스트 노바(Frost Nova)]
[냉기로 강타하리라!]
텔로리안의 발밑에서 부정한 냉기가 솟구쳤지만, 텔로리안은 뒤로 굴러서 피해를 감쇄했고 스치는 냉기는 보호막에 의존해서 완전히 튕겨냈다. 그러나 쏟아지는 우박과 정면으로 날아오는 얼음창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
이에 텔로리안은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러 정면에 충격파를 내뿜었다. 얼음창의 궤도가 미묘하게 뒤틀리자, 하늘에서 쏟아지는 우박을 향해서 보호막을 전개했다.
화르르르!
원소보호막이 타오르는 원형방패처럼 변모했고, 하늘에서 쏟아지던 우박들은 방패에 닿자마자 녹아버렸다. 덕분에 수증기가 수북히 피어오르면서 일대의 시야가 가려졌다.
"제법이구나! 어린 자여!"
죽음의 현자는 주문을 영창하는 속도를 가속했다. 많은 시전시간이 요구되는 높은 위계의 강력한 주문들을 대신해, 즉시시전이 가능한 저위계의 주문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붓는다.
이에 텔로리안도 수많은 화염주문들을 쏟아내서 대응했다. 곳곳에서 냉기화살과 화염구들이 격돌하고, 천장에서 쏟아지는 우박에 맞서서 바닥에서 불기둥이 피어올랐다.
"육신은 거추장스런 짐에 불과하다!"
죽음의 현자는 중간에 저주를 섞어서 시전했다. 그건 눈에 보이는 형태의 주문이 아니었지만, 텔로리안은 로어마스터로서 주문의 마력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역으로 돌려쳤다.
"이런 선물은 필요하지 않소!"
텔로리안이 마법지팡이를 휘두르자 저주가 되돌아갔다. 그건 육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저주였기에, 죽음의 현자에겐 소용이 없었지만.
'해볼만하군!'
주문을 다루는 능숙도는 죽음의 현자가 훨씬 뛰어났지만, 양측의 마력은 동등했고, 마법을 전투에 운용하는 감각은 텔로리안이 월등했다. 아무리 강대한 대마법사도 동급의 강자들과 싸워본 경험이 많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쪽은 플레이타임 2만시간의 고인물이다. 전생의 경험을 활용하면 고레벨 전투도 능숙히 수행할 수 있지!'
냉기의 로어는 불꽃의 로어로 되받아친다. 저주 계열의 주문들은 비전의 로어로 무효화시킨다. 이에 죽음의 현자는 처음부터 준비해온 주문을 기습적으로 시전했다.
[죽음의 로어, 고유 주문]
[데쓰 엠브레스(Death's Embrace)]
[삶은 고통이고 죽음은 구원이다!]
새까만 마력이 뿜어져나와 단숨에 텔로리안을 감쌌다. 그것은 마나보호막을 관통하진 못했지만, 목격만으로도 생명체의 정신을 파고들면서 달콤한 속삭임을 반복했다. 이건 죽음의 현자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즉사기였다.
"············!"
텔로리안의 정신에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뚜렷히 되살아났다. 자신을 낳자마자 군식구가 늘어났다며 한숨을 내쉬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또다시 아들을 낳으라고 강요하던 아버지······아버지에겐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자식들에게 스트레스를 전가하던 어머니.
'생명은 가치없다.'
가족들은 자신이 마력을 각성하자 길거리로 내쳤다. 템니그라드의 시민들은 자신을 빈민가로 내쫓았고, 빈민가의 사내들은 보호자를 잃은 아이를 쫓아다니며 범할 기회를 노렸다.
'생명은 추악하다.'
스승님이 자신을 구해주면서 불행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진실로······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희망은 거짓이다.'
······그러나 스승님께서 평생에 걸쳐서 완성했던 연구를, 자신이 바라보자마자 깨우친 순간부터 스승님의 애정은 분노로 변했다.
'너처럼 은혜도 모르는 도둑놈은 결코 살아있어선 안돼! 죽어! 죽어! 죽어!'
그제야 깨달았다. 인간은 자신의 자식마저 증오할 수 있으며, 그것은 특정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구조적인 문제.
인간종의 한계였다.
생명체의 한계였고.
"바로 그것이다."
죽음의 현자가 말했다.
"생명체는 만들어진 구조상 스스로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여길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이고 감정적이다. 하지만 죽음의 선물을 선사받은 언데드들은 다르지."
자.
어떤가?
"젊은 마법사여! 그대도 이제는 죽음의 가치를 온전히 인식하게 되었을테지. 그러니 나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마법사로 거듭나거라······그대에게 내가 쌓아올린 모든 것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전해줄 터이니·········"
17. 열일곱번째 연구 – 생명의 무게(5)
자신도 죽음의 현자에게 강하게 동의했다. 사람의 밑바닥을 봤던 사람들이라면, 인간도 짐승에 불과하다는 명제에 누구나 동감할 수 있을테니까.
'악은 삶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고, 삶에 대한 집착은 생명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생명이 존재하지 않으면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모든 발언은 발화자의 의도를 살펴야한다.
"선생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옳소."
"그대는 역시나 명석하군!"
광인과 언쟁할 때에는 진지한 설득을 시도해서는 아니된다. 광인은 애초에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데 선생은 어째서 이승에 남아계시오?"
"············"
대신.
스스로의 논리를 깨야한다.
"생명이 없다면 삶에 대한 집착이 없을 것이고, 삶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구태여 멸망을 막을 이유도 없을 것이오."
멸망은 두가지 현상을 일컫는다. 하나는 악마들에 의한 지성체들의 멸절과 노예화를 의미하며, 다른 한가지는 시네어 행성의 물리적인 파괴를 뜻한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가?
"어차피 모든 생명이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하듯이, 모든 생명체도 언젠가는 멸종할 것이오. 또한 무에서 우주가 탄생했으니 언젠가 무로 돌아가는 것도 섭리일거요."
악의 창궐?
종의 멸절?
"그것이 뭐가 문제요?"
"·········"
"그러한 만행도 생명의 본능에서 비롯된 발악에 불과할 뿐이오. 따라서 비난할 이유도 없고, 구태여 막아야할 이유도 없소."
현자들은 수백년, 길게는 천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다른 문제가 생겨나는 모습을 끊임없이 목격해온 이들.
덕분에 회의주의가 만연한다.
멸망을 막아도 의미가 없다는.
"그럼에도 선생께선 적극적으로 멸망을 막고자 하시지. 그건 선생께서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셨다는 증거요."
언데드란.
생명체의 굴레에서 벗어난 존재가 아니다.
"단지 죽음을 유예하고 있으실 뿐이지."
"·········"
"선생께서 태어나 살아가던 세계는 오래전에 끝났소. 따라서 선생이 진정으로 논리적인 완벽함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두가지 방안중에 하나를 택해야한다고 생각하오."
첫째.
"선생께서도 삶에 대한 집착을 보유하고 계심을 인정하고, 다른 지성체들이 지닌 삶에 대한 집착도 인정한다. 이것이 1안."
2안.
"멸망을 막으려는 욕구도 삶에 대한 집착임을 인정하고, 그것마저도 내려둔다."
멸망은 아무 일도 아니다.
삶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이것이 후학으로서 위대한 선생에게 보내는 최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오. 부디 고깝게 듣지않고 충언으로 받아주시길 바라오."
죽음의 현자는 텔로리안의 반박을 조용히 경청했다. 마법사들은 본질적으로 지성을 추구하는 학자들이다. 마법은 지성의 산물일뿐.
"·········"
죽음의 현자는 텔로리안의 논리를 하나씩 되짚어보았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해보고자.
첫째. 자신은 멸망을 막고 싶어한다.
둘째. 멸망은 삶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셋째. 모두 언데드가 되어서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멸망도 자연스레 막아진다.
'이것이 내가 걸어온 구세의 길이다.'
여기에.
젊은 후학이 반박을 제기했다.
'삶에 대한 집착이 없다면 멸망을 막아낼 이유도 없다라······'
이번에 찾아온 멸망은 심연과 지옥에 의한 것이다. 심연과 지옥은 필멸자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초래된 차원, 필멸자가 모조리 언데드가 된다면 악마들도 대단히 취약해진다.
'이것이 나의 계산이었지.'
하지만 악마들에 의한 멸망을 막아낸 다음은 어떤가? 여전히 악마들이 아니어도 세계를 멸망시킬만한 위협은 얼마든지 있다.
'외신들도 호시탐탐 우리의 세계를 노리고 있고, 50년 뒤엔 소행성이 낙하할 것이다. 100년 뒤엔 고대의 요정왕들이 봉인에서 풀려나 제2의 대멸종을 시작할테지.'
하나의 멸망을 막아내면 또다른 멸망이 시작된다. 이것이 현자들이 인세에 손을 놓아버린 이유다. 일이 도저히 끝나지 않으니까.
"허면 그대의 해결책은 무언가?"
죽음의 현자는 되물었다.
"그대가 논한대로 모든 생명체를 언데드로 바꾸는 해결책은 논리적 허점을 지녔다. 하지만 적어도 당면한 멸망을 해결할 수 있겠지."
딸그락.
딸그락.
현자가 마력을 거두며 턱에 손을 얹었다. 텔로리안의 논박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는 뜻.
"생태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이오."
"흠?"
"선생께선 생명체들의 갈등이 멸망을 불러오는 근본으로 보셨소. 그럼 생명체들의 갈등은 어디서 증폭되는가? 그건 다름이오."
생명은 싸운다.
서로가 다르기에.
"선생의 방안대로 모든 지성체를 언데드로 변환시키면, 더이상 종족이나 계급에 의거한 갈등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악마들의 침공을 막는데엔 최고의 방법이겠지."
죽음의 현자와 협력해서 언데드 역병을 전파하는 경우, 지옥제왕과 심연여왕은 대단히 약해진다. 삶에 대한 갈망이 미약해진 지성체들은, 악행에 대한 유혹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딩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하지만 삶에 대한 갈망이 있어서 용이하게 막을 멸망들도 있소. 그러니 우리가 후대에게 물려줘야하는건 잿빛의 세상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채가 번득이는 무지개빛 세상이오."
·········
"그대는 마법사가 아닌 바드처럼 말하는군."
"그렇소. 나는 삶을 예찬하는 사람이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인간의 사악하고 추악한 면모들을 보았지만, 그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면모들도 보았소. 그러므로 생명체는 추악하다고 단정짓고 희망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텔로리안은 스스로의 사고를 잠식해가던 음울함을 몰아냈다. 삶은 즐겁게 살아볼만한 것이었다. 즐기는 방식이 모두 다를 뿐이지.
"그대의 말에도 논리적 허점들이 있어."
"맞소. 선생의 말에도 논리적 허점이 있듯."
덜그럭.
리치의 턱뼈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마도 웃음을 드러낸 것이리라.
"그대는 나보다 훨씬 적은 세월을 살았다."
그러나.
"한데 지혜는 나와 견줘도 모자람이 없군."
리치가 손가락을 튕기자 텔로리안의 손아귀에 낡고 헤진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알레바흐센의 노트를 해독하는데 필요한 교본이었다
[연구완료: 생명의 무게]
[연구보상: 알레바흐센의 저울]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 35]
"오래전에 문하를 떠났던 수제자가 남겨준 자료다. 수련을 거듭하면 나와 같은 경지에 오를 가능성을 품었던 녀석인데······리치가 되기를 거부하고 산자로 죽기를 선택했지."
·········
"녀석은 죽음의 마법을 연구하는 와중에도 언제나 생명의 가능성을 엿보았지. 전통적인 사령술의 한계를 뛰어넘길 염원했던 것이다."
엇갈린 사제관계가 있었음을 추측하긴 어렵지 않았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때문에 나의 그림자에 머무르는 제자들은 수제자의 연구를 이어가지 못할테지만, 그대라면 알레바흐센의 연구를 완성할 수 있겠지."
텔로리안은 두루마리를 꺼내어 슬쩍 훏어보았다. 알레바흐센의 교본을 해독할때 도움이 되리라. 사실 해독은 이미 끝내놨지만······
"·········?"
현자가 사라졌다.
인사도 남기지않고.
'역시 사령술사들은 인사성이 없군.'
미르칼에겐.
예의범절을 제대로 가르쳐야겠다.
* * *
"······죽음의 현자가 찾아왔었다고?"
"죽음을 예찬하고 삶을 경멸하던데."
텔로리안은 엘렌스트라의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었다. 생명엔 언제나 살아갈 가치가 있었다. 그건 논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증명된다.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네······"
"대마법사치고 제정신이 얼마나 있겠어?"
평범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마법사로 부적합하다. 설령 마법사가 되어도 그저그런 마법사로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친다.
"우리 마법사들의 정점인데."
"············"
엘렌스트라는 나른한 표정으로 극동무림에 대한 전승을 떠올려보았다. 무림인들은 처음에는 평범한 무술가로 시작하나, 초월적인 경지에 도달하면 신성을 얻는다고 전해진다.
'우화등선이라고 하던가.'
무림인들이 수련을 통해서 승천에 이르는 것처럼, 마법사들도 배움을 통해서 초월적인 경지에 이른다. 그것이 대마법사다.
"텔로리안."
"?"
"대마법사에 도달하지 못하는 마법사에게도 가치가 있을까?"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텔로리안이 내밀한 속내를 내비추는 시간은 많지 않았으니까.
"아니."
"·········역시 그렇지?"
"하지만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지."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엘렌스트라가 성난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 놀리냐? 재능 없는 것도 서러운데?"
"정말로 모르겠어서 하는 소리야."
텔로리안은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의복을 염력으로 착용했다. 알몸에 새로운 외피를 덮을 때마다, 마음에도 예의가 장착된다.
"지금까진 마법에선 재능이 전부라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별종들을 만나니 제가 틀렸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의복을 차려입은 텔로리안은 완벽히 정돈된 모습이었다. 이에 엘렌스트라는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잿빛현자의 또다른 모습을, 자신만은 알고 있었으니까.
"콜카르는 평생 저의 상대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겁니다. 알레바흐센도 헛된 공상을 위해 뛰어난 재능을 낭비했던 바보일 뿐이죠."
텔로리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제가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진심이야?"
"그렇습니다."
텔로리안은 혁대에 벨트를 채워서 바지를 고정했고, 그걸로 마음의 밑바닥도 잠구었다.
"다소 재주가 부족한 마법사도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시골마을에선 밤에 조명만 켜주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훨씬 안전해질테니까요."
피식.
엘렌스트라는 웃어보였다.
"방금은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어."
"어른은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야겠죠."
유년기엔 모두 진솔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뭉특한 진심을 둥글게 깎아내어 전달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모두 진심만 말하면 모두가 다치니까요."
왕궁을 나서자 광장이 보였다. 그리고 왕도의 광장엔 거대한 알레바흐센이 놓여있었다. 대단히 고집스러운 인상의 늙은 의사. 오른손에는 환자들의 연명부를, 왼손에는 저울을.
"············"
조각상이 배치되고서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석상의 발치에는 수많은 꽃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저마다 믿는 신에게(그들은 더이상 태양신만을 숭배하진 않았으므로), 알레바흐센의 명복을 빌었다.
어떠한 군왕도.
이러한 추모를 받지는 못했으리라.
'나는 알레바흐센보다 위대한 마법사인가?'
아마도.
'내가 알레바흐센보다 가치있는 사람인가?'
글쎄.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저만큼 애도해줄까?'
아마도 아니겠지.
'············'
텔로리안은 마법으로 인공적인 동백꽃을 창조해서 알레바흐센을 향해서 다가갔다. 그리고 수북이 쌓인 꽂더미에 꽃을 내려두려는데.
"············"
광장의 구석에서 생화를 판매하는 노파가 보였다. 시들어버린 볼폼 없는 장미였다. 노파의 주름진 손바닥에는 가시에 찔린 상처가 가득했지만, 누구도 알레바흐센 선생에게 시들어버린 꽃을 바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전부 주시오."
"예?"
"잔돈은 필요없소."
말라비틀어진 장미들을 알레바흐센의 발치에 내려둔다. 생명의 로어를 사용해 생기를 되살릴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하겠지.'
조의를 표했다.
최고의 마법사에게.
* * *
알레바흐센의 죽음으로 왕국은 한동안 침울해졌다. 마을마다 조기가 걸렸고 백성들은 회색 옷을 고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자들은 잊혀지고, 생자들은 살아가는 법이다.
"드디어 봄이로군."
"열기는 벌써부터 여름같은데······"
백성들은 봄맞이 축제를 맞이해 새로운 의복을 맞추었다. 대륙 전역에서 강인한 왕공들이 토너먼트에 참가하고자 모여들었고, 그들 중에서 여왕의 부군이 선발될 예정이었으니까.
17. 막간(1) - 봄바람
태양력 1551년은 특별한 사건이 즐비한 해로 기억될 예정이었다. 아직 눈이 내리기 전부터, 에스실의 파발마들이 대륙 곳곳에 퍼져나가 여왕이 구혼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벨라디아 여왕께서 용맹하고 강인한 구혼자를 찾고 계시오! 에스실의 통치권과 대륙 제일의 미녀를 차지할 배짱이 있는 고귀한 혈통의 사내라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하오!"
온갖 국가에서 다양한 가문의 사내들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가장 외진 시골마을까지 외부인들이 나타났고 백성들은 몸을 단장하고 곳간을 열어서 성대한 축제를 벌여서 손님들을 환영했다. 그건 알레바흐센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리려는 노력이었다.
"이게 민중이 죽음의 성자를 추모하는 방식이죠. 낙천적인 웃음과 끊임없는 흥겨움······"
그리고 왕국이 봄을 맞이한 것처럼, 텔로리안의 인생에도 색다른 경험이 찾아왔다. 하루종일 마탑에서만 틀어박혀지내던 마법사가, 또래의 여인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으니까.
"그렇군."
텔로리안이 희망해서 시작된 만남은 아니었다. 엘렌스트라는 젊은 시절에 연애를 해봐야 배우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반강제로 만남을 주선했다. 그것이 지금의 만남이었다.
"공께선 사람들을 좋아하시는 모양이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사람들에 대한 노래를 부른답니다."
바이올렛은 곡조를 흥얼거리면서, 봄을 맞이해 춤추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서, 그들을 어떻게 즐겁게 해줄지 여러모로 고민했다.
'바이올렛 라크윈드를 벌써 만날 줄이야.'
바이올렛은 메인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주요인물이었다. 지금은 스무살의 젊은 바드에 불과하지만, 훗날 바드마스터 게릭의 입지를 이어받을 걸물.
'게임 내에서 손꼽히는 미형캐릭터인데다, 성우의 목소리가 훌륭해서 게이머 커뮤니티에서 인기가 굉장했지.'
······자신도 바이올렛이 예쁘게 뽑혀나온 스크린샷을 올려두고, 괴상한 소리를 읆는 게시글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한데 지금은 바이올렛을 실제로 만나서 함께 산책을 하고 있으니 신기하군······역시 삶은 무조건 여러번 살아보고 생각할 일이야.'
바이올렛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대해서 재잘거렸다. 그녀의 지칠줄 모르는 호기심은 끊임없는 잡담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어졌는데, 자신에게는 수많은 질문을 던져왔다.
"여왕 폐하와의 첫만남은 어떠셨나요?"
"그건 비밀이오."
"두분의 염문설이 왕국에 파다하던데, 두분의 연배차이를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높진 않다고 보거든요. 하지만 마법사들의 관례를 생각해본다면······"
바이올렛은 질문의 폭풍을 몰아쳤고 텔로리안은 그걸 방어했다. 둘은 모두 달변가로 유명했으며, 남을 설득하는 작업을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 바이올렛과 텔로리안은 일치하는 지향이 있었다.
"이젠 이쪽에서 공께 여쭙겠소."
"네!"
"오늘 나오신 이유가?"
다만.
상대는 자신에게 명백히 관심이 없었다.
자신이 상대에게 명백히 관심이 없듯이.
"엘렌스트라님한테 빚진게 있어서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소?"
"저는 임페리얼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에 엘렌스트라님을 만났어요. 저희 학교에 연구협력차 방문을 하셨는데······그때 만나서 많은 충고를 받았죠. 특히 평민여성이 중부에서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는 대가에 대해서요."
시네어는 지구와 다른 세상이었고, 다른 법칙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도 달랐는데, 여성의 역할을 정의하는 시각이 대표적인 차이였다.
"엘프들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북부나,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제국은 제약이 적은 편이죠. 허나 대륙의 나머지 지역들은 여전히 대우가 거칠잖아요?"
중세랜드는 원초적인 물리력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그것은 신체적인 약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쳐서, 여자는 아이들처럼 보호를 받아야할 존재로 여겨졌다.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군."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쨌든 주선자의 체면이 있으니까.
"귀공은 대부분의 기사들보다 막강할텐데."
"호오? 현자님은 알고 계시는군요?"
"모든 바드들은 한몸을 지키기에 충분한 무술을 배우지. 유랑해야하는 직업이니까."
하지만.
"특별한 재주를 갖춘 바드들은 호신술의 수준을 넘어선, 검술과 마법을 조합해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들었소."
그녀는.
검바드다.
"정확히 보셨답니다."
바이올렛은 그제야 텔로리안에게 흥미를 드러냈다. 그녀는 잿빛현자가 재미없는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으며, 실제로 재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박식한 점은 마음에 들었다.
"막시무스!"
이윽고 술을 걸쭉히 들이켜던 거대한 오크가 다가왔다. 겉보기엔 대단히 험상궃어, 드래곤과도 대적할만한 야만전사로 보였다.
"인사드려. 잿빛현자 텔로리안님이야."
"반갑군! 인간! 나는 막시무스다!"
하지만 실제로 막시무스는 성격이 온순해 백병전에 능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면, 전위를 맡는건 바이올렛의 일이었다. 대신 막시무스는 후방에서 지원했고.
"반갑소. 막시무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게!"
막시무스가 떠나가고.
바이올렛은 텔로리안을 바라봤다.
"어떻게 느끼셨나요?"
"박식하고 온유할 것처럼 생겼군."
"계속 추측해주세요."
"최근에 마법을 배우고 있을 것이오. 아직 마도대학의 문호가 오크들에게 개방되지 않았지만, 시대가 지나면 그것도 변화가 오겠지."
한때는 여성이 마법을 배우기에도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소서리스들의 출현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뒤집어버렸고, 덕분에 오늘날의 여성들은 마법계에서만큼은 차별을 받지 않았다.
"막시무스와 벨칸을 만나게 해줄수 있나요?"
"어려운 일은 아니오. 연락해드리지."
자신과 왕국에 많은 변화가 있던 것처럼, 벨칸과 사막오크족도 많은 변화를 시도하는 중이었다. 오크왕국의 재건을 위해서.
"고마워요. 막시무스가 기뻐할 거예요."
"이름을 보니 제국인들에게 자란 모양이군."
"·········맞아요. 어두운 과거죠."
바이올렛은 임페리얼 아카데미의 촉망받는 학생이었고, 인재를 우대하는 제국의 정책에 따라서 시민권과 기사작위를 제안받았다. 만일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대중예술가로서 굉장한 인기를 얻어서 자리를 잡았으리라.
"지금도 동기들은 제국을 놔두고 어째서 중부로 돌아갔냐고 연락해와요. 지금도 저의 노래를 기대하는 후원자들이 많다면서요."
제국은 이미 중세랜드를 탈피한 선진문명이었다. 제국인들은 강인함을 숭상했지만 약자를 차별하진 않았고, 대중공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자리잡은 상태였다. 예술가들도 독립적인 활동으로서 생계를 유지하고, 부와 명성을 쌓아올리는게 가능하다.
"반면에 중부에선 모든게 어렵죠."
하지만 중부는 달랐다. 여성이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을 받으려면 특별함을 증명해야했다. 고귀한 혈통이나 압도적인 폭력, 종교적인 권위·········하지만 그러한 특별함을 지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웃음을 파는 사람들."
바이올렛이 분개한 태도로 말했다.
"그게 중부의 귀족들이 바드들을 보는 시선이에요. 그들에게 대중은 멸시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니, 대중에게 봉사하는 저희가 얼마나 하찮게 보이겠어요?"
귀족들은 바드들을 일종의 고급정부로 바라봤으며, 적잖은 바드들은 그러한 요구에 타협해서 안락한 삶을 누리거나 현실에 분개해 제국이나 북부로 떠났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끝까지 중부에 남기를 고집했다.
"그건 우리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라오."
북부에서 마법사는 권력을 지닌 특권계층이었다. 우수한 마법사는 다방면의 후원을 받았고 민간의 인식도 좋았다. 여기에 요직의 진출도 쉬웠으며, 마력만 각성해도 일반인들은 지니지 못하는 권리들도 누렸다.
"북부에선 애초에 왕가를 보좌하는 특권계층이고, 제국은 북부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마법사대우가 나쁘지 않소. 엄격한 규제를 가하지만, 그래도 전문가로서 대우를 해주니까."
하지만.
나머지 지역은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교회의 사냥개들에게 붙잡혀 장작불에 타오르거나, 분노한 농민들에게 장난감으로 전락하거나······설령 귀족을 섬겨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하지. 그게 마법사들의 삶이라오."
왠종일 겉도는 대화만 나누던 화제가 마침내 일치했다. 텔로리안과 바이올렛은 대륙의 처참한 문명 수준, 특히나 중부의 낙후된 관습을 질타하며 공감대를 찾았다.
낙후된 지역은 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있다.
발전된 지역엔 존재하지 않는.
"이제는 많은게 달라질테죠?"
바이올렛이 물었다.
희망적인 표정으로.
"여왕 폐하께서 즉위하셨으니까요."
"글쎄."
반면.
텔로리안은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어른들은 지금껏 살아온 방식을 바꾸기 어려워하오. 특히 농민들은 새로운 문물에 언제나 보수적이지. 그러니 나랏님이 무어라 가르침을 내리든지, 에스실의 백성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갈 것이오."
또한 벨라디아의 정책은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마법사는 그러한 방향에 굉장한 도움이 되기에 우대를 받겠지만······
'바드들은 이야기가 다르지.'
그러나 바이올렛은 이런 진술을 불쾌하게 받아들일 터였다. 날카로운 논리를 뭉특하게 깎아내어 전달할 방법을 궁리하는데.
"하지만 곳간이 가득 들어찼잖아요?"
바이올렛이 희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중은 많은 것을 탐내지 않는 겸허한 이들이에요. 굶주리면 빵을 원하고 추우면 옷을 원하죠. 그렇기에 배가 부르고 몸이 따스해지면 생각을 발전시켜볼 수도 있어요."
원초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인간은 가능성을 제약받는다. 모든 열정과 노력이 본능을 충족하는데 투입되기 때문이다.
"배부른 사람들은 자식들이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게 되겠죠. 그럼 더욱 성실하게 일해서 곳간을 풍족히 채우고, 자녀들의 배움을 장려할테죠. 그렇게 전쟁과 기아의 공포에서 해방된 세대가 성장하면, 기존의 어른들보다 풍부한 사고를 갖추고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바이올렛은 문명의 발전을 굳게 믿었다. 벨라디아가 뿌린 씨앗들이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리라 의심치 않는 확신하는 모습이, 잿빛현자에겐 대단히 신선한 모습으로 느껴졌다.
"공께서 정세에 이렇게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소. 예술과는 별개의 영역이라고 봤는데."
바이올렛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선보이는 기예고, 아름다움은 미학에 의해서 결정되어요. 또한 미학은 수용자가 처한 물리적 현실에 근거해서 정해지죠. 그러니, 정치는 미학을 결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요. 당연히 관심을 지녀야죠."
대화가 훌륭히 이어진 덕분에, 그들은 일찍 파하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근사한 저녁식사를 나누었다. 왕도의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음식점에서 향신료가 칠해진 소고기를······
'······한데 도저히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군.'
왕도의 강물은 생활오수가 뒤섞여 대단히 혼탁했다. 게다가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불쾌한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했고······
"무슨 다른 생각을 그리 골똘히하세요?"
"왕도 재건축."
모조리 갈아엎어야겠다.
손님들이 도착하기전에.
17. 막간(2) - 하수도 청소
대도시의 재건축은 복잡한 문제였다. 차라리 허허벌판에 새로운 도시를 쌓아올리는 작업이 쉽다.
'하지만 왕도를 새롭게 건설할 시간은 없으니······우선은 수질정화에 만족해야지.'
왕실마상시합이 열리려면 6주가 남았다. 그사이 중세랜드 평균도시에 불과한 왕도를, 현대까진 아니어도 제국이나 북부에 비견할만한 수준까지는 끌어올려야한다.
'그래야 제국인과 북부인들이 벨라디아를 야만인으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대륙의 운명을 좌우하는 세력은 여전히 그들이니까.'
[3위계, 지옥의 로어]
[아이 오브 다르켄(Eye of Dar'khan)]
[지옥의 시선을 누구도 피해내지 못하리라!]
주문을 외치자 허공에 새빨간 눈알이 떠올랐다. 여기에 미세한 변형을 가해서, 눈알이 이동하는 경로를 지도에 기입하는 기능을 추가했다.
'이러면 하수도에 들어가지 않고도 내부구조를 파악할 수 있지. 이후에는 하수도를 청소할만한 대책만 내놓으면 해결된다.'
도시도 숲이나 정글처럼 독자적인 생태계다. 기후에 따라서 숲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처럼, 도시도 생성환경에 따라서 성질이 달라진다.
'왕도는 계획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대대로 왕들이 거주하던 장소에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고, 사람이 모이니 경제적 중심지로 변하고, 또다시 사람들이 경제적 중심지를 찾아와서 대도시로 변했지.'
이렇듯 자연히 형성된 대도시는 도로와 건물의 배열이 불규칙하다. 길거리는 혼잡하며 행정구역도 중구난방이다.
'이래선 행정효율이 떨어지지.'
그리고 행정효율이 떨어지면 모든 설비에서 미비한 지점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왕도의 하수도가 이토록 처참한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흠·········'
심각했다.
너무도 심각하다.
'그냥 왕도를 다시 짓고 싶어지는군······'
왕도의 하수도는 수세기동안 중구난방으로 확장되었고, 무책임한 행정처리와 부족한 공학적 지식으로 인해서 관리되지 못했다. 그러한 결과로 말미암아······
'하수도가 던전이 되었다.'
미로처럼 이어진 하수도에선 범죄자와 몬스터들이 들끓었다. 그들은 오물의 악취를 견뎌가면서, 사악한 구상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우선 이놈들부터 치워버려야겠군.'
하수도 전체를 불꽃으로 태워버리면 해결은 간단하나, 도시의 거주민들도 위험해진다. 따라서 이러한 방안은 사용하기 어렵고······
'이건 물청소가 필요하겠군.'
물의 효과적인 제어를 위해서 벨칸에게 연락했다. 이에 벨칸은 자신의 막내딸을 인솔자로 삼아서 실력있는 주술사들을 파견해줬고.
"저희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습니까?"
오크공주 랄베르는 건강미가 넘치는 여인이었다. 나이는 벨라디아와 비슷했고(따져보면 텔로리안과도 비슷한 나이였다), 빛나는 눈동자에선 똑부러진 모습이 엿보였다.
"내가 하수도에 홍수를 일으킬걸세."
"그건 현자님 혼자서도 가능하실테죠."
"하수도에서 수세기간 쌓여온 퇴적물들이 분출되겠지? 어마어마한 양일걸세."
어마어마.
제대로 강조한다.
"그럼 하수도에서 오수가 분출되겠군요."
"노후된 하수관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는 경우도 빈번하겠지. 그런 경우엔······공중보건의 관점에서 끔찍한 일이 발생하겠지."
다시 강조한다.
위생이 끔찍한.
"그럼 하수관부터 수리하는게 우선이겠군요."
"그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번거롭네. 애초에 왕도의 하수도는 처음부터 잘못 지어져서, 모조리 부수고 다시 짓는게 빨라."
그리고 하수도를 새롭게 처음부터 다시 짓느니, 도시를 새롭게 건축하는게 빠르다. 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없으니······미봉책이다.
"그럼 저희를 불러오신 까닭이?"
"오수도 물이지."
"···············"
"내가 하수도를 휩쓸어버리는 홍수를 일으킬 테니까, 자네들은 물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오수가 시내로 범람하지 못하게 조절해주게."
랄베르는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텔로리안의 요청을 들어주라고 엄명을 내리신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이게 정말 최선이겠습니까?"
"정령들께서 노하실지도 모릅니다!"
"으음·········"
텔로리안은 제자들을 데려와서 마법진을 작성시켰다. 주문의 시전시간을 연장시키되, 위력은 배가시키는 마법진이었다.
"모두 상황은 숙지받았을 것이다."
2호제자. 황금을 뒤쫓는 알다네스.
3호제자. 음울한 심장의 미르칼.
4호제자. 금빛왕자 테사리온.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300년동안 정비되지 않은 하수도를 정화해야한다. 주어진 기간은 6주."
정답은 없었다.
사고력을 길러주는 수업일뿐.
"너희라면 어떻게 해결하겠나?"
"""음·········"""
모두가 고민하고.
각자가 대답한다.
"손님들에게 황금을 선물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지?"
"어차피 6주내에 하수도의 악취를 없애진 못할겁니다. 하지만 번득이는 금괴를 받아든 손님들은 악취를 잊어버릴 겁니다!"
괜찮은 방법이다.
문제의 근본에 다가갔으니.
"후각을 일시마비시키는 주문을 시전할게요."
"후각만? 내가 알기로 그런 주문은 없는데?"
그러자 미르칼은 주문을 시전해 가스를 살포했다. 가스 자체는 손짓으로 몰아냈지만 성질을 파악하는건 어렵지 않다. 감각의 마비.
"네가 직접 만들었느냐?"
"네."
대단히 고무적인 성과였다. 열살도 이르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고유주문을 만들어 그것을 시전하다니?
"다만 한번에 살포하면 너무 눈에 띄어버리니까······미량을 장기간에 걸쳐서 살포하는 겁니다. 음식과 음료에도 묻어나오게 만들고······"
창의적이다.
어디까지나 거기까지만.
"문제점도 스스로 알겠지?"
"분명 들킬 테죠. 독살음모로 오인받을테고."
"혹은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 발생하면?"
"음······"
손님들을 초청함은 우호관계를 위해서다. 영구적인 후유증이 남으면 오히려 적을 만드는 행위가 되겠지.
"너무 위험한 해결책이었네요."
"너는 영리하지만 지혜롭진 못하다."
"그렇네요······"
"지혜를 쌓는데 집중하여라."
마지막.
테사리온의 차례였다.
"저는 정공법으로 가겠습니다."
"정공법으로?"
"모험가들을 투입해 하수도에 서식하는 괴물들을 해치우고, 다음에는 인부들을 고용해 퇴적물을 걷어낸다음, 공학자들에게 새롭게 하수도를 설계하라고 시키는 겁니다."
바른생활 사나이.
그게 금빛왕자다.
"6주 이내애 완성하지 못할텐데?"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죠."
노력하는 모습.
낭만적인 단어.
"제가 제시한 방안이 틀렸을까요?"
"음."
고개를 저었다.
"틀리지 않았다. 다를 뿐이지."
"다르다는 말씀은?"
"문제의 해결방안은 언제나 우선순위에 따라서 달라진다. 악취를 제거한다를 맨앞에 둔다면, 너의 방안이 제일 정확한 대답이겠지."
이에.
금빛왕자가 반박했다.
"손님들을 초청해서 우호관계를 맺는다는 관점에서도, 제가 선택한 방안이 제일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부족한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 노력하는 모습을 좋아할 겁니다."
재밌는 답변이다.
용족만 가능한 전략이니까.
"네게는 그것이 제일 훌륭한 방안이다."
"제게만 말입니까?"
"네가 결점을 드러내면 손님들은 안도하겠지만, 알다네스와 미르칼이 결점을 드러내면 손님들은 그것을 멸시할 것이다."
테사리온에게는 왕관도 궁전도 필요하지 않다. 타고난 외형이 왕권을 증명하니까.
그러나 벨라디아는 다양한 레갈리아(Regalia, 왕권을 상징하는 기물)와 장중한 궁중예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벨라디아도 한 명의 미녀일 뿐이다.
"정도(正道)를 걷고 싶다면 항상 강자가 되어라. 강자가 정도를 걸으면 정의롭다고 칭송받는 법이니까."
요약.
정도는 강자의 전유물.
따라서 드래곤은 정도를 걸어도 된다.
"그럼 나의 해결책을 제시하마."
탁!
마법진에 지팡이를 얹고 해변에 몰아치는 파도를 상상했다. 푸른 전격이 솟구친다.
[6위계, 냉기의 로어]
[크러싱 타이드(Crashing Tide)]
[파도의 힘이여! 모조리 쓸어버려라!]
하수도의 말단에서 부서지는 물결이 시작되었다. 물결은 성난 파도처럼 뿜어져나가서, 하수도를 구석구석 씻어내고 퇴적물들을 남김없이 담아냈다.
"뭐, 뭐야?!"
"찍? 찍찍찍?!"
"케엑?!"
구조물 전체가 던전으로 변모했던 하수도는 오물의 파도에 휩쓸렸다. 가난에 기생하던 탐욕스런 범죄자들, 지하세계에서 올라와 인간을 잡아먹던 거대쥐들, 마법사들의 실험실에서 방사된 각양각색의 괴물들······
"심연을 다스리는 쾌락의 여왕이시여! 저희가 불경한 예배로 그대를 섬기오니! 그대의 시녀를 파견하시어 즐거움을 나눠주······어?"
무엇보다 절망을 먹고 자라던 사교도들이 휩쓸렸다. 놈들은 오염된 물결 속에서 살아남고자 헤엄쳤다. 그러나 대부분은 숨이 막혀서 죽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도 똥독이 올라서 사망했다. 어울리는 최후였다.
[한번의 주문으로 던전을 클리어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42레벨 70/100]
[전승포인트 : 36]
"온다!"
왕도는 수백년을 묵혔던 변비를 해결하듯, 하수시설에서 오수를 시원하게 쏟아냈다. 그러자 오크공주 랄베르는 냉기의 토템을 지상에 박으면서 정령에게 청원했다.
"물의 정령들이시여!"
그녀의 청원이 정령계에 닿는다.
"불결함은 씻어내고 부정함은 정화해주십시오! 또한 마구잡이로 날뛰는 물길을 길들여 생명이 시작된 장소로 돌려보내소서!"
그러자 시내로 역류하려던 녹색물결은 강으로 물길을 바꾸었고, 물결이 점점 맑게 변해갔다.
[누가 감히 청결을 강요하느냐!]
그때.
혼탁한 강물에서 강대한 존재가 나타났다.
수백년간 방치된 퇴적물에서 생긴 오수의 정령!
"스, 스승님?"
"얼른 치워라! 당장!"
"저, 저희도 그런건 못합니다!"
오수의 정령은 형언하지 못하는 공포를 형상화했다. 차라리 광기의 외신들을 직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
하지만 오크공주 랄베르는 철퇴를 휘두르며 오수의 정령에게 맞섰다. 지옥대원수 발로르와 대결하던 아버지만큼이나, 어쩌면 부친보다 대담하고 영웅적인 모습이었으리라.
[이건 불가능하다! 물이 맑아지면 물고기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단──으아아아아악!]
기나긴 전투 끝에 오수의 정령을 파괴한 랄베르는 불결함을 무릎쓰고 오수의 심장을 정화했다.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겠다.
[힘세고 좋은 아침! 나는 정화의 정령!]
정화의 정령은 상어처럼 커다란 잉어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오수의 정령보다 훨씬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 상쾌했다. 이로서 왕도의 수질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해결했습니다."
"고생했네. 랄베르."
잿빛현자는 대견한 눈빛으로 랄베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속내로는 꺼림칙했지만 적어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단한 일을 해주었네. 자네의 행동은 에스실 인간들과 오크들의 오랜 갈등을 끝마치고, 밝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중대한 주춧돌을 놓게 되었다네."
이제 왕도의 강가는 모두를 위한 유원지가 되어 낮에는 죄수처형식을 관람하고 밤에는 불량배들의 패싸움을 관람하는 문화공간으로 변했다. 덕분에 왕도의 시민들만큼은 강가에서 여흥을 즐길 때마다 오크들을 우호적으로 떠올릴 것이다.
"그대는 어떤 보상을 원하는가?"
이에.
랄베르는 기다리던 대답을 내놓았다.
"저희는 동맹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진정한 동맹은 피로 완성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곤란한 요구를 해오겠는데.
"여왕 폐하께서 미래에 잉태하실 첫 번째 아들과, 저희 오크왕가에서 제일 고귀한 신분의 딸을 혼인시키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17. 막간(3) - 새로운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