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열두번째 연구 - 영광을 향한 승천(1)
심연이 장기말을 움직이자 에스실 왕국은 환난에 처했다. 외부에선 산악오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내부에선 데몬숭배자들이 하층민들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켰다.
"진격하라! 산악오크부족의 용맹한 전사들이여! 인간국밥이 우리를 기다린다! 놈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고 우리의 고토를 수복하자!"
대산맥에서 시작된 산악오크들의 공세는 무시무시했고.
"일어나라! 핍박받는 농노들이여! 우리가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오! 얻을 것은 영애들이다! 귀족들만 미녀들을 독점하는 불평등한 현실을 타도하고 평등한 세상을 건설하자!"
데몬숭배자들의 달콤한 속삭임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영애수집가 울프강이 반란을 이끌었는데, 그는 귀족들에겐 불구대천의 원수였지만 농노들에겐 정의의 구원자였다.
"귀족의 재산을 균등히 나눠갖는다!"
"와!"
"귀족의 토지는 공동경작한다!"
"와!"
"귀족의 여인들도 공유한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심연의 인도를 따르자 거만한 상전들이 제일 비천한 처지로 전락했다. 이는 순명을 강조하는 태양신 교회에선 절대 얻지 못하는 즐거움이다!
"여왕 폐하!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으음."
"못된 귀족들의 학정에 시달리다 살고자 봉기를 일으킨 폐하의 자녀들을 정녕 버리시렵니까?!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그러나 전사여왕 벨라디아가 단숨에 대군을 거느리고 도착했다. 예언을 통해서 반란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파악했으니까.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마."
"!"
"사교도들을 처단하고 무장을 해제한다면."
"네놈들 때문에 우리가 선동당했잖아!"
"맞아! 우린 선량한데 네놈들이 문제였어!"
"같이 즐겨놓고 무슨, 아아아아아아악──!"
농민반군은 벨라디아의 사면령에 응해서 스스로 사교도들을 척결했다. 또한 무기를 내려놓고 여왕의 발치에 엎드렸다.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여왕 폐하!"
"자비? 짐이 언제 자비를 약속했지?"
"예? 분명히 공개적으로 사면령을──"
여왕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드리웠다.
"짐은 그러한 기억이 없는데."
"·········폐하?"
"짐의 군대에게 명한다! 반란에 가담한 마을은 모조리 불태워라! 그리고 주민들은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꼬챙이에 꿰어버리도록!"
만백성에게 본보기를 보여라!
하극상을 벌인 자들의 최후를!
"세, 세상에······"
"저런 강단을 지니신 분이실줄이야······"
"너무 잔혹해서 눈을 뜨지 못하겠군······"
덕분에 백성들은 깨달았다. 그들의 여왕은 평소엔 엘프처럼 아름다우나 내면에는 흉악한 데몬이 잠들어있음을.
그러니.
여왕 폐하의 진노를 두려워하라!
[텔로리안의 가르침이 성과를 거둠!]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2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32]
"악마숭배자들을 마을에서 내쫓아라!"
"쫓아내? 죽여라! 전부 죽여버려!"
"저희 마을에는 여왕 폐하의 은덕에 하해와 같은 감사를 느끼는 선량하고 충직한 백성들만 있습니다! 충성충성충성!"
벨라디아의 초토화작전은 의도한 성과를 거두었다. 반란의 기세가 단숨에 가라앉았고, 사교도들을 방치하던 촌장들은 민병대를 결성해서 그들을 사냥했다.
"산악오크들의 침공은?"
"호국경께서 훌륭히 방어하고 계십니다."
"좋다. 문제는 강림해올 상급데몬들인데······"
상급데몬들의 침공은 여왕의 역량을 벗어나는 문제였다. 북부나 제국이라면 정면대응도 가능하겠지만, 에스실의 국력으론 무리였다.
"그건 스승님께서 대처하시겠지."
때마침.
엘렌스트라가 새로운 예언을 전달했다.
"폐하. 지상에 강림했던 상급데몬들이 다급하게 심연으로 귀환하고 있습니다. 악마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역시.
스승님은 언제나 승리하신다.
"여왕 폐하 만세!"
"국가의 수호자 호국경 만세!"
"헤링턴 왕조여! 영원할 지어다!"
벨라디아는 왕도로 귀환해서 성대한 개선식을 치렀다. 이로서 여왕은 만백성의 경외를 받게 되었으므로, 어떠한 영주나 마을도 그녀의 명령을 어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오랜만입니다. 여왕 폐하."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스승과 제자는 간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또한 잿빛현자의 곁에는 전사여왕이 예상하지 못하던 동행인이 있었다.
"그사이 굉장히 달라지셨군요. 여왕 폐하."
"그대도 몰라보게 달라졌군. 게헨나의 대공."
"·········"
"아참! 더이상 대공이 아니었구려!"
빙긋.
여왕이 순수한 악의를 담아서 조롱했다.
"게다가 대악마도 아니시구려."
"·········"
"하지만 짐은 그대가 선물해준 마력은 잊지 않겠소. 이는 그대가 전성기에 누리던 힘의 일부이므로, 조만간 짐이 그대보다 강해지겠군!"
몰락한 캄비온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대악마의 권능을 포기한 선택은 잘못된 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승님. 제가 그대를 어찌 도우면 좋을지 분부해주십시오. 오늘날 제가 누리는 모든 권세와 지위는 당신께서 만들어주신 것이니까요."
벨라디아는 발언을 마치며 텔로리안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스스로 제대로 말했는지 점검해달라는 눈치였다.
짝짝!
박수로 화답해준다.
"방금 전의 말씀은 개국공신을 대하는 태도로 훌륭하셨습니다. 누구도 폐하의 연기를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해나가시면 됩니다."
그러자.
여왕의 입가가 씰룩였다.
"반란을 진압하며 많은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것도 괜찮은 일이었겠습니까?"
끄덕.
텔로리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악마 숭배를 막았잖습니까?"
"그랬지요."
"앞으로 백성들은 자기 고향에 악마숭배가 만연하지 못하도록 애쓸 겁니다. 그리고 아무리 사회에 불만이 있어도 악마를 숭배하지는 않을 겁니다. 폐하가 더욱 무서울테니까요."
공포든 자비든.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결과다.
"폐하께선 반란을 진압하고 외적들을 막아내셨습니다. 세상은 폐하의 잔인함보단 잔인함이 이뤄낸 성과에 주목할 겁니다."
그러니.
"기뻐하소서. 이제 폐하의 본성을 애써 숨기지 않으셔됩니다. 오히려 폐하의 본성은 훌륭한 통치의 근간이 될 것입니다."
이에 벨라디아는 해방감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참아왔던가!
[연구진전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연구단서 5/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33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33]
"전에 스승님이 말씀해주셨죠."
여왕은.
흥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 명을 죽이면 학살자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정복자라고요. 오늘부터 정복자가 되어보이겠습니다. 제겐 그럴 자질이 있으니까요."
뿌듯했다.
1년만에 이토록 대견하게 자라준 제자가.
"훌륭하십니다. 폐하."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잿빛현자."
벨라디아는 텔로리안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기에 무뚝뚝한 표정에서도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지금의 텔로리안은 대단히 중대한 결전을 앞두고 있으리라.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조만간 지옥의 선봉대와 싸워야합니다."
"!"
자신은 보았다.
파괴의 대악마가 강림하는 미래를.
지옥의 선봉대를 이끌고.
"물론 에스실 왕국을 전장으로 삼지는 않을 겁니다. 그랬다간 승패와 관계없이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테니까요."
벨라디아의 눈동자엔 흥미가 번득였다.
대악마와의 싸움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지만 지옥의 선봉대에 맞설 영웅들을 모집할때는 폐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가장 뛰어난 기사들과 성직자들을 모집하고,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모험가들을 고용해야합니다."
묻는다.
"하지만 폐하께서 이번 싸움에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싸움이 승리로 끝나도 에스실이 지불할 대가는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저를 도우실 겁니까?"
지옥제왕의 분노는 두려워해 마땅한 위험이었다. 제국이나 북부조차도 긴장할 위험. 중견국에 불과한 에스실은 휘청할지도 모른다.
"이보게. 아우님."
"호국경 각하."
"자네의 이야기를 듣자니 너무 섭섭해."
읏샤!
공성철퇴를 짊어지는 로드릭.
"우리 관계에 돕고 말고가 어딨나?"
"·········"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조건 함께 가는 것이지. 상대가 일곱지옥의 제왕이든 천상의 태양신이든 나의 대답은 변하지 않아."
·········
이건 의외였다.
신앙도 저버릴 정도라니.
"모든 헤링턴들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우리 헤링턴 왕조가 사멸하는 날까지 자네와 자네의 직계 후손들은 영원한 우정으로 묶여있을 거라네. 반드시 명심해두게나."
······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호의는 호의로 받아야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대악마에 맞서기 위한 영웅들을 모집해주십시오. 대신 폐하께선 왕도를 지키셔야합니다. 귀하신 몸이니까요."
이에 벨라디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와 스승님께서 데빌들과 싸우시는 와중에, 저는 왕도에 앉아서 칭얼대는 백성들이나 달래야합니까? 이게 여왕다운 일입니까?"
노골적인 불만.
재미있는 싸움에 자신은 어째서 빼놓냐는.
"불만이면 하루빨리 후계자를 낳으십시오."
"············"
"후계자가 없다면 왕조는 결코 완성되지 못합니다. 빨리 많은 자손들을 낳으시고, 자손들이 더욱 많은 자손을 낳게 하십시오."
여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우 아쉬운 표정으로.
"좋습니다. 이번엔 넘어가죠."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호국경 로드릭은 악마들에 맞서서 명성을 떨칠 국내외의 영웅들을 모집하십시오. 짐은 왕국을 지키는데 주력하고 있겠습니다."
이로서 에스실 왕국을 등에 업고 지옥의 원정군에 맞설 준비를 시작했다. 파괴의 대악마는 지금까지의 적수들과 비교도 불허하는 초강적이었다.
'파괴의 대악마는 지옥에서도 한손에 꼽히는 진짜배기 초월자다. 전투에 특화된 대악마여서 어중간한 하급신들은 간단히 찢어발기지.'
그나마 대비할 시간이 제법 남은게 다행이었다. 대악마의 진신을 지상에 불러내는 절차는 까다롭고, 불러낸 이후에도 지옥제왕을 도청한 장소를 찾아내는데 시간이 걸릴테니까.
'하지만 지옥제왕이 작정하고 수색을 시작한 이상 도청한 위치를 들키는건 시간문제다. 배후가 필멸자 마법사라는 단서까지 좁혔으니까.'
주어진 시간은 3개월.
그전에 맞설 준비를 마쳐야한다.
'우선 적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이 우선이다. 파괴의 대악마가 얼마나 강하냐면······'
85레벨 아크데빌.
에인션트 드래곤만큼 강하다.
디바인 랭크는 5단계.
하급신에 준하는 권능을 지녔다.
'이런 괴물을 상대할 때엔 50레벨 이하는 아무리 많아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만큼은 클래스와 스탯이 사기라서 예외다만.'
따라서.
대악마에 맞설 초월자들을 모아야한다.
[아엘타나르.]
전언을 보낸다.
[상황은 이해했다.]
[상처는 얼마나 수복했지?]
[육신은 절반쯤. 신성은 전무.]
절반이면 예상보다 빠른 속도다. 하지만 바실리스크의 특수능력은 대악마에게 통하지 않으므로, 둘이서 대악마를 상대하는건 불가능하다.
또다른 원군이 필요하다.
대악마에 맞설만큼 강력한.
[오랜만입니다. 벨칸.]
[간만에 자네의 목소리를 듣는군.]
[종족을 구해준 보은을 받고 싶습니다.]
·········
깊은 침묵이 뒤따랐다.
[알겠네.]
하지만.
벨칸은 도와준만큼 보은하는 사람이다.
[어떤 도움을 제공하면 되겠나?]
[선조들의 성산을 전장으로 쓰겠습니다.]
[·········]
벨칸도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자.
게획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겠지.
[또한 당신이 참전해줬으면 합니다.]
[솔직히 매우 부담되는 요구라네.]
이해한다. 종족의 성지로 대악마를 끌어들여서 결전을 벌이자는 요구니까.
[하지만 종족을 구해준 보은으론 적절하군.]
[·········]
[성산에서 만나세.]
[감사합니다. 성산에서 뵙겠습니다.]
메인탱커. 은빛뱀.
하이브리드. 주술사왕 벨칸.
원거리딜러. 로어마스터 텔로리안.
'메인힐러와 근거리딜러가 없군.'
[신규로어 습득 : 생명의 로어]
[전승포인트: 18]
자.
힐러는 내가 대신하면 되고.
'문제는 근거리 딜러다.'
올골두골로를 채용하면 좋겠지만 그녀의 레벨은 30에 불과하다. 계몽트롤의 능력치가 아무리 좋아도 아크데빌에 맞설 정도는 아니다.
"필멸자여! 무슨 고민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지?"
그래.
이놈을 메인딜러로 써먹자.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
[심화표본 : 게헨나의 루시펠레스]
[신화적 연구 해금 : 회개하는 캄비온]
────
■영광을 위한 승천 (연구주제, 신화)
: 가장 지독한 악을 겪어본 영혼만이 가장 고결한 영혼으로 승천할 수 있는 법입니다.
◆연구내용
: 표본이 고결함을 획득할 때마다 연구단서가 쌓입니다. 반대로 악마적인 본성에 가까워질수록 연구단서를 잃습니다.
■연구보상
: 데빌에 의한 종말트리거 제거
: 천상의 로어를 습득합니다
────
"한데 말이다. 텔로리안."
다만.
전직부터 시켜야지.
"네놈의 표정을 보니까 또다시 흉악한 음모를 꾸미는 모양인데······"
캄비온은 폐급클래스다.
성기사는 사기클래스지만.
12.열두번째 연구 - 영광을 향한 승천(2)
"나보고 성기사가 되라고?!"
"그렇다."
"어림 없는 소리!"
그르릉!
루시펠레스는 날카로운 이빨로 적개심을 표출했다. 캄비온 왕자는 아버지의 계획을 망치고자 아크데빌의 권능을 포기했을 뿐이지, 여전히 게헨나의 폭군에 걸맞는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천상을 숭배하는 역겨운 쓰레기가 되느니 차라리 소멸하고 말겠다! 천상의 찌꺼기들이 내뱉는 구절에는 위선이 스며들어있으니!"
루시펠레스는 많은 악인들처럼 위선보단 순수악을 선호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흠.
설득은 의미가 없고.
사기를 치면 되겠지.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순순히 납득한다고?"
"대신 당분간은 마법사로 위장해 나의 연구를 도와라. 대외적인 신분은 조수로 하겠다."
루시펠레스가 눈쌀을 찌푸렸다.
"조수는 너무 비천한 신분이잖나?"
"그것도 싫으면 혼자 살든가······"
"싫다는 말은 아니었다만······"
루시펠레스는 데빌제왕의 진노를 피해 쫓겨다니는 처지였다. 텔로리안의 도움이 없다면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소재가 들통날 것이다.
"······그래도 내가 대공인데 조수는 신분이 너무 낮다는 말이지. 객원교수나 연구원같은 훌륭한 직위들도 있을건데······"
그러니까.
대학원생말고.
포닥을 시켜달란 소리군.
"포닥이 뭐냐?"
"고급노예다."
"??"
"대학원생은 하급노예지."
"·········"
"연구원 루시펠레스! 자네가 일곱지옥과 데빌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정리해서 제출하게. 기한은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지!"
·········?!
내일 아침?!
"오늘이 세시간 남았다만?"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자정까지······"
"내일 일과 시작전에 마무리 해두겠네!"
"좋네. 자네만 믿어!"
루시펠레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연구실을 나왔다. 엘렌스트라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껌뻑였다.
"······전직 아크데빌이 마탑에 있는 이유가?"
"설명하자면 깁니다."
"또다시 무언가 위험한 일을 꾸미는구나······"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러려니 해야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지금처럼 은빛뱀의 도움을 받으면서 미래예지에 전념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마탑을 나서며.
은빛뱀을 부른다.
"무슨 일이냐? 마법사."
"루시펠레스의 멘탈을 잡아주시오."
"흐음."
패밀리어에겐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 의도만으로 알아들으니까.
"겉으로 의연하게 행세하고 있지만 속으론 흔들리고 있을 것이오.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크데빌로 복귀하고 싶겠지."
녀석은 초월자로서 누리던 전능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어떠한 돌발변수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다.
"그걸 본신에게 맡기는 이유는?"
"당신도 이러한 상황을 겪어봤잖소?"
"·········"
한때.
그녀는 최고신으로 찬미받던 존재였다.
지금은 마법사의 패밀리어가 되었지만.
"당신이라면 녀석을 이해할 수 있겠지."
"본신이? 어떻게?"
갸웃.
"똑같이 권능을 잃어봤잖소."
"놈은 캄비온 찌꺼기에 불과하잖나?"
"·········"
"전성기에도 데빌따위에 불과했을 뿐이고."
"·········"
"대악마 따위를 본신과 비교하는 행위 자체가 신성모독이다. 놈들은 필멸자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토사물! 반면에 본신은 필멸자들의 경배로 빚어진 숭고한 최고신!"
하여간 불멸자들이란······
다루기 피곤한 존재들이다.
"향후의 계획에 필요한 일이오."
"그렇다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다."
"그럼 뭐라고 위로할지 연습해보시겠소?"
"음······"
은빛뱀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데빌제왕의 사생아야. 대악마의 권능을 잃었음에 너무 상심하게 말거라. 데빌제왕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느니 하루살이같은 필멸자의 삶이 훨씬 행복하다. 필멸자의 삶은 비루해도 자유가 있으니······"
······불멸자들은 타자를 헤아리는 능력이 심각히 결여된 모양이었다. 무례해도 될만큼 강력한 존재들이어서 그렇겠지.
"흠? 무엇이 문제냐?"
"그건······"
[불멸자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3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34]
······
설득은 포기한다.
남을 가르치는건 어렵다.
"알아서 깨달으시오. 그럼."
"알겠다! 조심히 다녀오도록!"
* * *
최종점검이 26레벨.
현재레벨이 32레벨.
능력치부터 분배한다.
[민첩 23-> 25]
능력치가 워낙 높아 상승폭이 낮아졌다. 또한 이걸로 민첩 수치는 [인간의 한계치]에 도달했다.
'이정도면 총탄도 보고 피하겠군. 민첩을 사용하는 무기를 제작해둬도 유용하겠어.'
[클래스 능력]
[잔여클래스 능력 : 6개]
하지만 파티원들에게 쥐어줄 무기를 제작하는게 우선이다. 대악마를 상대하려면 반드시 특별한 아이템들이 필요하니까.
'아이템의 등급은 6개로 나뉜다.'
일반. 숙련공이 찍어낸 물건.
고급. 거기에 마력을 부여한 물건.
희귀. 대가가 만들어낸 물건.
영웅. 거기에 마법을 부여한 물건.
'흔한 아이템들이지.'
영웅급 아이템은 북부와 제국에선 과장을 보태어서 굴러다닌다. 황궁의 무기고나 드워프들의 보물창고를 뒤져면 수십 개는 나오니.
'영웅급 장비란 영웅에게 어울리는 장비를 뜻하지. 그런데 어디 영웅이 한둘인가?'
어느 나라에나 자국을 대표하는 영웅이 한둘은 있다. 대체로 건국왕이나 외적을 막아낸 전쟁영웅인데, 그런 사람이 없다면 애초에 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건국왕을 상징하는 국보.
그것이 [영웅]급 아이템의 위상.
'하지만 국보란 국경을 넘어서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보물은 아니다. 자국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물건들.'
반면에 어떤 보물들은 [국가]나 [문화권]을 넘어서, 보편적인 경외를 일으킬만한 신비를 담아낸다. 그게 [전설] 등급의 장비들이다.
[클래스특성 6개를 소모합니다!]
[새로운 전설특성을 획득합니다!]
─────
■전설적인 마법부여사(전설, 클래스 특성)
: 당신은 사물에 신비를 담아내는 기예를 익혔습니다. 당신이 손끝에서 자아낸 마법부여엔 단순한 마력의 배열이 아니라 필멸자들에게 경외감을 일으킬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효과
: [전설] 등급의 마법부여 가능.
: [영웅] 등급의 마법부여 실패확률 절반.
: [희귀] 등급의 마법부여 즉석시전 가능.
─────
전설을 담아낼 물질은 결코 평범해선 아니된다. 동네대장간에서 두드리는 식칼을 축복한다고 엑스칼리버가 되지는 못하니까.
즉.
전설적인 재료들도 필요하다.
그런 재료들은 비싸단 공통점이 있고.
[개인특성을 선택합니다!]
[장사꾼(견습)을 습득합니다!]
[장사꾼(기초)을 습득합니다!]
[장사꾼(중급)을 습득합니다!]
[장사꾼(상급)을 습득합니다!]
남은 개인특성은 2개.
달인을 찍으려면 3개가 필요.
[로어마스터의 지혜 : 특성 획득]
[개인 특성을 획득합니다! -5P]
[잔여 전승포인트: 29]
[거상(영웅)을 습득합니다!]
──────
■거상 (개인특성, 영웅)
: 당신은 돈으로 돈을 버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무지몽매한 자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당신의 창고를 불리십시오·········
◆효과
: [상거래] 판정에 3개의 유리점.
: [시장예측] 판정에 3개의 유리점.
──────
"우르반. 나의 모든 재산을 현금화해주게."
"모든 재산을?"
"마탑을 제외한 모든 영지와 광산을 매각해주게. 팔리지 않으면 염가판매라도 하게나."
막대한 금괴를 아공간에 수납하고 북부로 향한다. 목적지는 황금드워프들이 거주하는 골든홀드. 황금만 충분하다면 뭐든지 구입이 가능한 도시답게 대단히 화려하다.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도시를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3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30]
관광은 미뤄둔다.
경매장으로 직행.
"루시펠레스."
"말해라. 필멸자."
"내가 알려준 판매 전략에 의거해 제작해온 힐링포션들을 팔아라. 나는 황금은행의 은행장을 만나서 대출을 상의하겠다."
다음날.
경매장에 힐링포션이 동났다.
"포션 내놔! 포션!"
"우리 어머니가 죽어가신다고!"
"어째서 포션이 매물이 없다는 거야?!"
이튿날.
연금술 길드의 매물들도 동났다.
"이젠 구멍가게에도 포션이 없다고?!"
"웃돈을 주고서 구입해가신 분이 계셔서······"
"아니! 연금술사들은 상도의도 없는가?!"
"맞아! 양심적으로 힐링포션은 남겨줘야지!"
"아! 상도의와 양심도 구매해가셨습니다."
셋째날.
힐링포션이 10배 가격에 판매되었다.
그보다 싸게 올리는 매물은 바로 사라진다.
"10, 10배?!"
"제기랄! 시세가 내려가길 기다리자!"
"그렇지만 당장 던전에 들어가야한다고!"
"에잇! 아버지를 구해야한다! 하나 주시오!"
넷째날.
모든 연금술사들이 경고장을 받았다.
[앞으로 2주간 힐링포션을 정상가의 10배 이하로 팔지마라. 이를 어기는 연금술사는 바위트롤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실제로 포고를 무시했던 연금술사들은, 으슥한 골목길에서 나타난 바위트롤들에게 잡혀갔다. 경비대가 뒤늦게 도착했지만, 그들은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바위트롤에 대한 목격담을 듣고 웃어넘겼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생물체가 어딨나.
2주차.
힐링포션 시세를 조작한 장본인은 굉장한 이윤을 벌어들였고, 골든포지의 주민들은 익명의 거상이 벌인 솜씨에 감탄했다.
[시세조작으로 거금을 손에 쥐었음!]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3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31]
"이걸로 상환능력은 증명이 됐지요? 은행장."
"명성이 허언은 아니었군. 잿빛현자."
배불뚝이 드워프가 길거리에 가득한 시위대를 바라보며 흐뭇히 웃었다. 서민들이 포션값 폭등에 항의하러 몰려나왔다. 올바른 투자를 했다는 지표여서 대단히 기분이 좋았다.
"그나저나 자네는 양심에 걸리지 않는──"
"대출규모를 3배로 늘려주십시오."
"3배는 불가하네."
"철퇴공 로드릭이 보증을 서줬습니다."
"2배는 가능하겠군."
"은빛뱀을 담보로 걸겠습니다."
[개자식이?!]
무시한다.
마법사와 패밀리어는 한 몸!
자신이 망하면 은빛뱀도 망하는 것이다!
"3배를 허락하겠네."
"좋습니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1달 이율이 3할인데 어찌 상환할 셈인가?"
"따서 갚으면 되지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어차피 실패하면 죽을텐데.
"하긴."
피식.
상대도 자신의 생각을 알아보고 웃는다.
"자네라면 저승으로 도망쳐도 상관없지. 자네에게 은혜를 입은 이들에게 받아내면 되니."
흠.
궁금해졌다.
"제일 비싸게 산정한 담보가 뭡니까?"
"자네의 제자지."
은행장은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전사여왕의 처녀성과 에스실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거금을 지불할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네. 대륙엔 음습한 취향의 대부호가 많단 사실을 명심하게······"
저런.
벨라디아는 부도채권인데.
'내가 죽으면 벨라디아가 통제가 될까?'
에스실은 하루만에 흑마법사들의 집결지로 변모할 것이다. 빚을 받으러온 채권단은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처지가 될테고.
[금융왕에게 부도채권을 판매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3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32]
'속은 놈이 바보지.'
그럼.
은행을 떠나 경매장으로 향한다.
[잊혀진 성왕의 언약궤(전설, 퀘스트 시작템)]
[즉시 구매가 : 1,000,000골드]
[현행 입찰가 : 500.000골드]
즉시구입!
따릉따릉!
종소리가 낙찰을 알린다!
"뭐, 뭐야?!"
"100만골드 물품을 즉시구입?!"
"우리 태양신 교단이 입찰한 물건인데?!"
[대천사의 정수(전설, 재료)]
[즉시 구매가 : 1,000,000골드]
[현행 입찰가 : 250.000골드]
즉시구입!
따릉따릉!
"?!"
"내가 눈독 들이던 재룐데?!"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저걸 100만에 사?!"
[아스테리움 주괴 *10 (영웅, 재료)]
[빛의 결정 * 5 (영웅, 재료)]
[천상의 축복받은 정화수 * 10 (영웅, 재료)]
모조리!
즉시구입!
[5분만에 300만 골드를 소진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3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33]
이로서.
전설장비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모았다.
'이제 전설을 담아낼 시간이다.'
툭툭.
언약궤를 두드린다.
"깨어나시오. 최초의 성기사여."
"·········"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여 선량한 양들이 길을 잃었소. 태양신의 가장 신실한 파수꾼이 깨어나 천상의 정의를 바로세울 시간이오."
대답이 없다.
깨어나기 싫은 모양이다.
'설득의 방법을 바꿔볼까.'
언약궤에 잠들어있는 영혼은 [멸악의 성왕]이다. 일생을 악에 대한 투쟁에 바쳤던 최초의 성기사이자 어떠한 시련을 겪고도 광명정대한 정의를 포기하지 않았던 태양신의 총아.
고결한 성기사.
실패한 건국왕.
최악의 아버지.
"데빌제왕이 부모와 자식을 상잔시킬 음모를 꾸몄소. 당신의 도움이 없다면 당신이 겪은 불운이 똑같이 재현될 것이오."
그것도.
더욱 처절하고 사악한 방식으로.
[·········놈들의 수법은 여전하군.]
그러자.
언약궤에서 목소리가 울려왔다.
지쳐버린 노인의 것으로 들리는.
[짐이 어떤 도움을 제공하면 되겠나? 마법사?]
12. 열두번째 연구 - 영광을 향한 승천(3)
"검이 되어주시오."
[검이 되어달라고?]
"당신이 생전에 했듯이 악인들을 징벌하고 선인들을 구하며, 방황하는 영혼을 올바른 길로 안내해주는 일이오."
[·········]
잊혀진 성왕은 대답을 보류하고 상황을 판단했다. 제안 자체는 내키지 않는다. 세상사에는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도움을 청하는 마법사도 잿빛의 영혼을 지녔으니까.
[그대는 선인이 아니군.]
"그렇다고 악인도 아니오."
[한데 어째서 짐이 그대를 도와야하는가?]
"악의 창궐로 인한 멸망을 저지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녔기 때문이오."
[반대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도 없을테지. 그대가 선인이라면 부정하게 취득한 재물로 언약궤를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성기사.
그것도 최초의 성기사.
윤리적 기준이 대단히 까다롭다.
"골든홀드에선 독점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이 없고, 문화적으로도 황금을 위해선 무엇이든 허용되는 관습을 지녔소. 따라서 나의 행동은 골든홀드의 기준으론 정당한 상행위였소."
[하지만 약자들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너로 인해 빈자들이 겪은 극심한 고통을 알고나 있느냐? 너는 그들의 고통에 책임이 있다!]
성기사는 호통을 치나.
마법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골든홀드의 지도자들이 해결할 문제일 뿐이오. 나는 외부인으로서 현지의 법률과 관습을 존중했을 뿐이니."
[·········]
"나한테 힘을 빌려달라고 청하는게 아니오."
[그렇다면?]
"데빌제왕의 막내아들을 종자로 받아주시오."
[뭣이?]
"태양신의 성녀에게 태어난."
[!]
"녀석은 아버지의 마수에서 어머니를 구하고 싶어하는데, 방도를 알지 못해 절망하고 있소. 데빌군주의 삶밖에 알지 못하니까."
[·········]
"놈에게 아버지를 무찌를 방법을 알려줄 사람은 당신뿐이오. 그건 미래를 선견하는 나조차 해내지 못하는 일이지."
오직.
가장 순수한 정의만이.
가장 지독한 악의를 무찌를 수 있다.
"당신의 말대로 나는 선인이 아니오. 필요에 따라서 악행도 긍정하거나 묵인하지. 그래서 살인마를 여왕으로 추대했고 아크데빌을 친구로 인정했소.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오."
전략적 유용함.
철저한 합리성.
그것이 자신의 무기다.
"하지만 나의 무기만으론 결코 악마들을 무너뜨리지 못하오. 합리성만으로는 극한의 악의를 꺾어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오."
그래서.
변수를 섞어야한다.
상대도 자신도 모르는.
"때문에 내가 준비한 무기가 데빌제왕의 막내아들이오. 적의 무기를 빼앗을 생각인거지."
[·········]
대답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있겠지.
"하지만 무기도 장인에게 담금질이 되어야 무기로 기능하잖소? 그러니 당신이 데빌제왕의 막내아들을 담금질해주시오. 내가 데빌제왕의 심장을 찌르고 지옥을 멸할 수 있도록."
이윽고.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의 현명함은 인정하겠다.]
성왕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또한 우리가 길은 다르지만 목적이 같음도 인정한다. 그러니 자네의 제안을 수락함에 더이상의 거리낌은 없네만······]
쉽게 풀렸군.
어렵지 않겠다.
[그렇지만 저곳에 있는 캄비온이 자네가 준비한 무기가 맞나? 혹여 자네가 실수하지 않았나 싶어서 조금 우려가 되네만······]
······고개를 돌려보니 노점상을 차린 루시펠레스가 보였다. 녀석은 싸구려 물건을 마법으로 둔갑시켜 비싼 값에 팔아치우고 있었다.
"잿빛현자가 직접 제조한 마법검을 1000골드에 팝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싸다! 싸! 매진이 코앞이다!"
······뭐하는 짓이냐.
은인의 명성에 먹칠을 하다니.
"정말 이런 물건을 1000골드에 판다고요?"
"맞습니다! 다시 찾아올 기회가 아닙니다!"
"뭔가 수상한데······나중에 다시 올게요."
"손님. 맞을래요?"
"아, 아닙니다! 사, 사가겠습니다!"
"크흐흐!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기왕에 방패랑 갑옷까지 마련하시면······"
그때.
중무장한 세금징수원들이 나타났다.
"잡아라! 세금을 내지 않는 노점상이다!"
"각박한 놈들! 사기꾼도 먹고 살아야지!"
"너는 사기보다 중대한 탈세를 저질렀다!"
영락한 아크데빌은 화승총을 쏘아대는 세금징수원들과 추격전을 벌였고, 이에 로어마스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젊은이.]
쯧쯧.
[자네의 요청대로 저놈을 짐의 종자로 받아들여서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뜯어고쳐주겠네.]
아주 탈탈 털어서.
근본부터 고쳐놔야겠어.,
* * *
텔로리안은 드워프들의 홀드를 연결하는 레일로드를 이용해, 사흘만에 룬스미스들이 다스리는 룬홀드에 도착했다. 그곳은 세계 최고의 대가들이 모여든 장인의 도시다.
"룬마스터께선 외부자를 만나지 않으십니다."
"외부자가 아닌 룬마스터의 은인이다. 이것을 룬마스터께 전달하면 확인해줄 것이다."
잿빛현자는 장인에게 성스러운 언약궤를 내밀었다. 그러자 장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언약궤를 받아서 룬포지로 들어갔다.
'언제 봐도 굉장한 장소군.'
룬홀드(Runehold)는 연기와 굉음으로 가득한 지하도시였다. 규모는 드워프들의 홀드치고는 작았지만, 인간들의 도시에 비해선 훨씬 거대하고 웅장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드워프들에 한정되지 않았는데, 장인이 되려는 자들이라면 누구든 대가 없이 받아주는 까닭이었다.
[룬홀드를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3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34]
또한 룬홀드의 중심에는 산업단지를 연상케하는 거대한 대장간이 있었는데, 그곳을 [룬포지]라고 불렀다. 다만 룬포지의 내부생김새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외부인에겐 결코 출입이 허가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들어오시오."
한데.
예외가 생겼다.
백년만의 일이었다.
"안대는 착용하지 않아도 되겠나?"
"감히 은인께 요청드릴 일이 아니오."
하지만 장인들은 망치질을 멈추고 작업물을 천막으로 가렸다. 그들이 나를 배려해줬으니 나도 시선을 피해주었고, 일지에도 내가 보았던 광경을 수록하지 않을 것이다.
"자네로군."
다만.
룬마스터와의 대화는 기록해두겠다.
후대에 전해질 가치가 있을 터이니.
"처음 뵙겠습니다. 룬마스터 카인하자드."
"시간은 금보다 귀하니 격식은 생략하세. 자네의 요청대로 가장 고결한 영혼을 담아낼 검을 제작해주겠네. 성왕께서 원하신다니 미천한 대장장이는 그렇게 해드릴 수밖에."
눈썹이 올라간다.
고집스런 장인의.
"하지만 기분은 불쾌하군."
"어째서입니까?"
"모든 생명은 때가 되면 안식을 취해야하는 법일세. 한데 성왕께선 죽어서도 안식에 들지 못하시고 병기로 지내셔야한다니······"
말해주었다.
나의 계획을.
"·········"
잠시나마 룬마스터도 할말을 잃고 침묵을 지켰다. 데빌제왕을 죽이겠다는 목표가 워낙 광오해보인 까닭이겠지.
"그렇다면 안식은 미루셔도 되겠군."
하지만.
필요성은 납득한다.
"종자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성왕의 아쉬움도 해소될겁니다. 그러니 이번 일이 훌륭히 끝난다면······성왕께서도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고 이승을 떠나실 수 있겠지요."
·········
룬마스터는 침묵을 지켰다.
성왕의 불행한 가정사를 알았으니까.
"자네의 의도대로 되길 바라네."
"그럼 제작을 시작합시다."
"나의 인생에서 손꼽힐 걸작이 되겠군."
그리하여.
룬마스터는 희망을 빚어냈고.
"이름마저 잊혀진 성왕이여."
로어마스터는 전설을 부여했다.
"그대의 세상에 대한 봉사는 끝났으나 그대의 행적은 여전히 정의의 등대로서 세상을 밝히고 있으니, 부디 사악한 의도에서 탄생했지만 빛으로 나아가려는 불쌍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고 영광으로 인도해주시오."
깨어나라.
가장 고결한 성기사여.
어둠을 몰아내는 신성한 파괴자여!
[로어마스터의 지혜 : 전설 빚어내기]
[전승포인트 15점 소모]
[잔여 전승포인트 : 19점]
운석으로 제련된 장검에 대천사의 정수가 깃들었다. 천상의 성수로 축성받은 칼날에 언약궤의 힘이 깃듬으로서, 전설이 빚어진다.
[전설급 유물을 제작!]
[경험치 +30]
[전승포인트 +3]
[33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2]
완성된 성유물은.
튼튼한 장검에 불과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완성되었군."
"수고하셨습니다. 룬마스터."
"자네도 대가로 불릴 솜씨와 인격을 갖추었군. 마스터 아티피서."
[룬마스터에게 대가로 인정받음!]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34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23]
"대가는 룬포지에서 언제든 환영일세."
"감사합니다."
"우리가 함께 빚은 장검이 데빌제왕의 심장을 찌르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겠네. 그럼 성왕께도 안부를 전해드리게. 그럼······"
만남은 끝났고.
자신은 퇴장했다.
"받아라."
"아무 마법도 없는 막칼인데?"
"겉으론 막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에게 너를 숨겨줄 유물이다. 그러니 언제나 지참하고 다니도록."
루시펠레스는 툴툴대면서 칼을 허리춤에 찼다. 고맙다는 말조차 없는 꼬라지를 보아할때, 역시 데빌은 감사함을 모른다.
'어차피 함정인데 상관없지.'
요술쟁이가 건네주는 물건을 함부로 받아서는 안된다. 귀신 들린 칼을 뽑았다가 신세를 망친 왕자들이 한둘이던가?
'축하한다. 친구야.'
네놈도 조만간.
검으로 신세 망친 대열에 합류하게 될거야.
그럼.
미래의 복안도 깔아두었고.
이제는 결전을 준비할 시간이다.
[형님. 영웅들의 모집은 어찌 되어갑니까?]
[최선을 다해서 유명한 모험가들을 모집했네.]
수정구로 확인해본다.
나쁘지않은 로스터였다.
솔직히 말하면 훌륭하다.
[벨칸?]
[우리도 준비되었네.]
선조들의 성산엔 벨칸이 빚어낸 강력한 결계가 있었다. 또한 오크 선조들이 영면에서 깨어나서 싸움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예상보다 훌륭히 준비됐군요.]
[자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니 조상들께서 기꺼이 응해주셨네.]
오크선조들이 합세한다면 성산에선 대악마의 위격이 격하되겠지. 필멸자들의 공격이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게 되리라.
[하지만 아무리 위격을 깎아내도 상대는 대악마야. 누가 정면에서 일곱지옥의 파괴자를 감당할 것인가? 우리로는 어림도 없네.]
맞다.
상대는 85레벨 아크데빌.
'55레벨 엘더샤먼이나 33레벨 로어마스터는 스쳐도 사망이지. 맞으면 확실하게 사망이고.'
하지만.
이쪽도 불멸자는 있다.
[아엘타나르.]
[맡겨둬라. 육신은 회복됐으니까.]
이젠.
마침내 결전이다.
* * *
한달 뒤.
조상들의 성산에 각양각색의 필멸자들이 모여들었다. 주술사왕 벨칸은 오크들을 데리고 방어전을 준비했고 철퇴공 로드릭은 에스실 왕국군을 데리고 도착했다. 무엇보다 전설적인 모험가 알베릭이 동료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만나서 반갑소. 의뢰주 선생."
"제때에 도착해서 다행이오. 알베릭."
"우리들이 바빠서 정시에만 도착하거든."
알베릭은 한눈에 보아도 위험해보이는 전사였다. 그는 모험가 길드의 수장이자 [화합의 여신]의 선택받은자, 통칭 [용사]였다.
"의뢰비는 후불로 지불하시겠다고?'
"포션이랑 장비제작에 돈이 필요하거든."
"그건 안타깝지만 의뢰주님의 사정이고······"
뚜둑!
뚜둑!
용사는 몸을 풀어보였다.
"후불이면 의뢰비는 3배로 받겠소."
"용사가 지나치게 돈을 밝히는데?"
"모험과 낭만에는 모두 돈이 들어가거든. 그것도 아주 많이."
피식.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알겠소. 싸움이 끝나면 3배로 지불하지."
"군말이 없어서 좋구려. 의뢰주 선생."
"대신에 3년에 걸쳐서 분납하겠소."
"분납이라면 4배로 올려주시오."
끄덕.
흔쾌히 동의했다.
"그대들은 자격이 있지."
"전력이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알베릭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합군을 바라보았다. 왕국군과 오크군은 숫자가 많고 용맹했다. 하지만 용사의 눈에는 쓸모가 없는 민간인들로 보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하늘에는 엘프들이.
숲에는 바위트롤들이.
후방에는 마법사들이 있소.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자원과 인맥을 동원했지.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투자한 것은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소."
피식.
용사 알베릭이 웃어보였다.
"이번 의뢰주는 함께 일할 맛이 나는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데빌마법사들이 지옥마력을 사용해서 현실을 침식할때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놈이 오고 있소. 고용주."
"당신도 존재감이 느껴지나보군. 용사여."
"그래. 정말로 강력한 녀석이로군······"
용사는 몸을 떨면서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칠흑같은 데빌군세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기계같은 규율.
"그래서 흥분이 되는구려."
이번에 처치할 악당놈은.
얼마나 훌륭한 보물들을 가지고 있을지.
[신규연구: 갓슬레이어]
[연구내용: 불멸자를 영구적으로 죽이십시오.]
[연구단서: 0/5]
[연구보상: 갓슬레이어 도면]
[부가보상: 발로르의 심장]
[부가보상: 발로르의 대검]
[부가보상: 발로르의 채찍]
[부가보상: 발로르의 갑옷]
[부가보상: 발로르의 조각]
[부가보상: 대악마의 정수]
13. 열세번째 연구 - 갓슬레이어(1)
발로르는 민간에 전승이 널리 알려진 대악마다. 화염채찍을 휘두르는 불꽃거인. 지나간 자리에 잿더미만을 남기는 파멸의 사자.
"흠."
하지만 발로르에겐 민간에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면모도 있었다. 그는 천상과 심연에 맞서 영원한 투쟁을 벌여온 지옥의 대원수. 판세를 읽어내는 전략적인 사고를 갖추었단 뜻이다.
"참으로 지독한 함정을 준비해뒀구나."
"·········"
"상대는 게헨나의 대공을 배신하게 만들어 지옥제왕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동시에 지옥제왕을 도청해서 흥분하게 만들었지."
이에 격분한 지옥제왕은 즉흥적으로 원정군을 파병했다. 신하된 입장으로 제왕의 명령을 받들긴했다만, 대단히 어리석고 무모한 선택이었다.
"좋은 기회로다."
"·········"
"덕분에 반란을 일으킬 명분이 생겼으니까."
일곱지옥에서 주군의 실수는 정당한 반역명분이다. 실수를 저질렀다면 무능한 존재이며 무능한 존재는 군림할 자격이 없다. 상식이다.
"하지만 찬탈자는 기존의 군주보다 탁월하다는 점을 증명해야지. 그래서 나는 함정을 훌륭히 파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하노라."
인간의 육신을 취한 발로르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전장에 나선 대장군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니 상황을 종합해보라. 부관."
"상대는 게헨나의 대공을 배신시켜 지옥과 심연을 상멸시켰습니다. 또한 지옥제왕의 회의를 도청해서 성급한 공격을 유도했지요."
끄덕.
"지금부터 상대를 [황혼의 흑막]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저희 데빌들을 능가하는 계책을 짜낸 필멸자이니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지요."
끄덕.
"흑막이면 충분하다."
"흑막이 도청마법을 사용했던 장소가 오크들의 성산입니다. 하지만 우린 여기서 의문을 지녀야합니다. 지옥제왕을 도청할만큼 철두철미한 흑막이 어째서 흔적을 남겼는지."
툭툭.
발로르가 책상을 두드렸다.
"결론으로 들어가지."
"이번 전투는 저희를 끌어들인 함정입니다."
"흠."
"오크들의 성산에는 주군께 방해가 될만한 영혼들이 존재합니다. 또한 인근에는 몰락한 뱀신의 사원이 있지요. 저희에게 불리한 전장입니다."
끄덕.
"그래서?"
"군사적으로 옳은 결론은 회군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옳은 결론은 아니지."
"맞습니다. 주군께선 지옥제왕에 대한 충성맹세에 구속되신 상태니까요. 회군을 위해선 왕좌를 찬탈할 명분이 필요합니다."
찬탈명분.
유능함의 입증이 필요하다.
유능함을 입증하려면 함정을 돌파해야한다.
"이런 상황을 인간들이 일컫는 단어가 있지."
"무엇입니까? 현명하신 주군이시여."
"가불기."
"무슨 의미입니까?"
"방어가 불가능한 기술."
발로르는 흑막이 병법에 통달한 존재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전술적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왔으니까.
"하지만 놈도 방어가 불가능한 사실이 있다."
"·········"
"나의 강력함은 필멸자의 전술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흑막이 만들어낸 모든 함정은 나의 힘을 빼두려는 의도다."
즉.
이번 싸움의 본질은 간단하다.
"내가 온전한 힘을 유지한 상태로 성산에 도달한다면 우리의 승리다. 오크선조들과 뱀신을 찢어발기고 흑막까지 색출할 수 있을테니까."
툭툭.
책상을 두드린다.
"그럼 너희가 해야할 역할은 무엇일까?"
"주군께서 나설 일이 없게 하는 겁니다."
"나를 실망시키지 말도록. 부관."
툭툭.
다시 책상을 두드린다.
"정변이 성공하면 게헨나는 네놈의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주군이시여!"
부관이 데빌병정들을 사열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한편 [천리안의 돌]로 전장을 확인한 텔로리안은 테이블에 [다르막세스의 거울전쟁]을 시전했다. 완전정보가 있다면, 데빌과의 전쟁도 완벽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이번 전투는 나와 발로르의 거울전쟁이다. 환영이 아니라 실전으로 치러질 뿐이지.'
[7위계, 예지의 로어]
[프로젝션 퓨처(Projection Future)]
[주문이여! 미래를 투사할 지어니!]
예지술을 시전하자 건너편에 발로르가 착석했다. 환영으로 만들어낸 존재임에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거울전쟁이 한없이 현실에 가깝게 모사가 되었다는 증거.
[대악마를 완전히 모사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4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24]
"전장을 훌륭히 구현했구나. 필멸자야."
발로르의 환영은 텔로리안의 마법에 흥미로움을 드러냈다. 사고방식이 실제의 자기자신과 놀랍도록 닮아있었으니까.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지?"
"나의 모의전 상대가 되어주면 된다."
환영은 실제에 한없이 가깝게 재현된 발로르다. 따라서 놈과의 대국에서 승리하고, 승리한 방법을 사용하면 현실에서도 승리하겠지.
"좋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니까."
데빌은 규칙을 따르는 존재. 따라서 데빌의 환영도 창조물이 창조주에게 복종한다는 규칙을 따른다.
"너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네가 나를 죽일 함정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것이다. 때문에 선봉에 나서는 대신에 군대를 앞세워 전략싸움에 들어갔겠지."
발로르는 지옥의 대원수. [군략]의 등급이 [영웅]을 넘어 [전설]에 이르므로 지능수치만 이용해서 상대하긴 버겁다.
[로어마스터의 지혜 : 특성획득]
[전승점수를 소모합니다! -5P]
[전승점수를 소모합니다! -5P]
[전승점수를 소모합니다! -5P]
[전승점수를 소모합니다! -5P]
[전승포인트: 3]
[군략(고급)을 습득합니다!]
[군략(희귀)을 습득합니다!]
[군략(영웅)를 습득합니다!]
────
◆군략 (개인특성, 영웅)
: 당신은 전쟁의 이치에 통달했습니다. 역사적인 명장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겠군요.
◆효과
: [전술] 판정에 3개의 유리점.
: [전략] 판정에 3개의 유리점.
: [특수 커맨드] 발동 가능.
────────
"고작 영웅 등급으로 되겠느냐?"
"미래를 선견한다면 충분하지."
"그건 굉장히 걸리적거리는 재주로군······"
군략만 따져보면 발로르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 그렇지만 자신은 [미래시] 특성을 지닌데다, 수비자라는 이점까지 누렸다.
"내가 미래를 보는걸 네가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만 일반적인 아크메이지 수준으로 예상하겠지. 하지만 신들보다 멀리 본다는 사실은 모른다. 납득이 불가능한 일이니까."
따라서 발로르는 자신의 정체와 능력에 대해서는 모른다. 반면 전장에 숨겨놓은 카드들에 대해선 꿰뚫어보고 있겠지.
"나의 병력배치에 얼마나 알고 있나?"
"엘프 기사들을 하늘에 숨겼을테지."
끄덕.
"사막의 야수들은 모래언덕에 숨기고 바위트롤들은 숲에 숨겼을테지. 뻔한 수법이다."
발로르는 시야를 제약하는 [전장의 안개]에 걸린 상태다. 그렇지만 군략에 힘입어 전장의 지형만 살펴보고도 상황을 추론해냈다.
"또한 네가 용사와 모험가들을 고용해 대규모 공격대를 꾸렸단 사실도 알고 있다. 나의 첩자들은 지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니까."
예상대로다.
"반대로 네가 알지 못하는 정보는?"
"너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한다."
발로르는 지옥제왕을 도청한 흑막이 젊은 마법사라는 사실은 확신했다. 또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지혜와 강함을 갖추었다는 사실까지.
"그래서 누구를 상대한다고 추정 중이지?"
"파괴의 현자나 비전술사 아잔탈로 범위를 좁힌 상태다. 하지만 아잔탈은 지옥제왕의 원한을 살만큼 어리석지 않으므로······파괴의 현자가 흑막의 정체라고 생각하는 중이지."
파괴의 현자는 홀로 십만대군을 쓸어버린 초인이다. 또한 [현자 의회]의 일원이므로 발로르의 입장에선 대단히 우려스런 적수다.
"때문에 나는 병력을 매우 신중히 운용할 것이다. 언제 어디서 또다른 아크메이지들이 급습을 가해올지 모른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발로르는 50레벨이 넘는 사천왕들을 후방에 배치했다. 불의의 기습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내가 투입할 선봉대는 중하급 데빌들에 지나지 않는다. 필멸자들도 충분한 훈련과 용기를 갖추면 대적이 가능한 상대들이지."
덕분에.
전장이 성립하는 것이다.
악마와 필멸자가 대결하는.
"그럼 대국을 시작해보지."
딱!
손가락을 튕기자 성산을 비롯한 전장이 완벽히 구현되었다. 성산의 지하에는 은빛뱀과 자신이 위치했으며, 반면에 오크 주술사들은 발로르를 약화시킬 제의를 진행 중이었다.
"이곳이 우리의 본진."
"흠?"
"제의가 끝나기전에 성산이 공격당하면 패배다. 네놈을 쓰러뜨릴 방도가 없으니까."
흐음.
턱수염을 쓰다듬는 발로르의 환영.
"나는 모르는 정보군."
"정보의 우위지."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을 지켜야할테지."
끄덕.
"나는 전투가 시작되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도 아크메이지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때부턴 상황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상급데빌들을 투입할 것이다. 그때가 너희의 고비가 되겠지."
따라서.
이쪽도 주요전력은 빼둔다.
[용사여.]
[말하라. 현자여.]
[동료들과 함께 후방으로 물러나도록.]
[흠?]
용사 알베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간인들은 악마를 당해내지 못할텐데?]
[민간인이 아니다. 전사와 군인들이지.]
단언한다.
[그대들보단 약해도 중하급 데빌들을 전담하기엔 충분하다. 그대들은 후방으로 물러나서 힘을 아끼고 있도록.]
이에 알베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격대를 철수시켰다. 상급데빌들이 단번에 공격해온다면 방어선이 붕괴할 것이란 위험을 감수하고서 잿빛현자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이번엔 잠자코 명령을 따르는군?]
[아내가 당신의 말을 따르라더군.]
용사일행이 후방으로 철수하면서 방어진이 재배치되었다. 1진은 철퇴공 로드릭이 이끄는 왕국군. 2진은 주술사왕 벨칸이 이끄는 오크군. 3진이 용사가 이끄는 모험가들. 3진까지 밀린다면 최후의 방어선이 성산이 되리라.
'또한 위급상황에서 언제든지 긴급투입이 가능한 4종류의 특수카드를 갖춰뒀다.'
올골두골로의 [계몽트롤 몽크단].
글로린마르의 [하이엘프 기사단].
스콜피온킹의 [뱀신의 추종자들].
이들은 독자적인 진영을 형성하기엔 숫자가 부족하나, 전장의 판세를 바꿀만한 위력을 지닌 특수병과들이다.
[엘렌스트라. 상황은 어떻습니까?]
[방금 마법진의 최종조율을 끝마쳤어.]
제일 중요한 카드는 자신이 전장에 개입할 수단인 [엘렌스트라와 비전술사들]이다. 이들이 준비해둔 초대형 마법진을 사용하면, 훨씬 강력한 위력의 주문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생각나지 않아?]
[교단의 템플러들이 쳐들어왔을 때였죠?]
[적이 너무 많아서 잡혀갈 거라고 두려워했는데······스승님이 대형마법진을 펼치셨지.]
스승님의 불마법은 언제나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제자들의 도움으로 대형 마법진을 사용하실 때는······끔찍한 위력을 행사했었다.
[이젠 응큼한 꼬맹이가 스승님보다 커다란 마법진을 사용하네. 마법진에 동참할 비전술사들까지 고용할 재력도 갖추었고·········]
전언 너머로 엘렌스트라의 흐뭇한 표정이 전달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누이이자 소꿉친구였다.
[내가 뿌듯하네.]
[·········]
[그럼 시전할 주문들을 말해줘. 준비해둘게.]
[매스텔레포트입니다.]
[그리고?]
[매스텔레포트입니다.]
[·········그것만 준비할까?]
[어차피 시간벌이가 목적이니까요.]
[알겠어.]
어쨌든 초대형 마법진을 통해서 시전할 마법은 [대군마법]이다. 개인이 아니라 군대를 대상으로 시전하는 주문.
[아우님.]
때마침.
로드릭의 전언이 도착한다.
[왕국군은 준비를 마쳤네.]
[충분히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말이지! 얼마든지 버티고말고!]
탕탕!
철퇴공은 무쇠갑옷을 두드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또한 철퇴공의 허리춤엔 자신이 제작해준 다양한 포션들이 즐비했다.
[악마들도 골통에 공성철퇴를 맞으면 꼼짝하지 못할걸세. 게다가 나는 아우님이 예상하지 못한 원군도 데려왔다고.]
?
수정구를 꺼내어 왕국군을 비춰봤다.
············
확실히 예상치 못한 원군이다.
아니. 예상은 했지만 기대하진 않았던 원군.
[어떻게 데려오신 겁니까?]
왕국군의 진영에선 태양신을 상징하는 깃발이 흩날리는 중이었다. 토모리 대주교가 막강한 교회군을 거느리고 참전한 것이다.
[내가 데려온게 아닐세.]
[·········]
[대주교가 먼저 합류를 제안하더군.]
아무래도.
사람들은 다양한 면모를 보유한 모양이었다.
[자네를 용납하는게 아니라고 강조하더군.]
[저도 대주교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이군요.]
인간과 오크가, 성직자와 마법사가 힘을 합쳤다. 상호간의 원한이 잊힌 것은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적수가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연함이 필멸자들의 강점이었다.
원리원칙만 따지는 데빌들이 지니지 못한.
[그럼 무운을 빕니다. 형님.]
[살아서 다시 만나세. 아우님.]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고 지상은 지옥마력으로 물든다. 천둥같은 북소리가 뒤따르며 데빌군세가 진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서 토모리 대주교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지옥에 맞서는 대전투가.
13. 열세번째 연구 - 갓슬레이어(2)
[조상의 성산]은 [사막]과 [산악]의 속성을 지닌 전장이다. 양측은 모두 방어측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특성들.
'또한 이곳에선 [성지]라는 특수효과도 발동한다. 언데드나 악마처럼 부정한 생물들은 강력한 디버프에 걸리는 효과를 지녔지.'
하지만 발로르가 뿜어내는 [대악마의 존재감]이 성지의 효과를 무효화시킨다. 그렇지만 오크들은 성산에서 [조상들의 가호]라는 효과를 받아서, 대악마의 존재감에 영향받지 않는다.
"저, 저거 뭐야······?"
"우, 우린 모두 죽을거야!"
하지만 1진을 형성한 왕국군은 버티지 못했다. 그들은 30미터에 이르는 육중한 화염거인 발로르와 정밀기계처럼 움직이는 데빌군세를 목격하자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다들 뭣들하는 짓이냐!"
이에 철퇴공이 사기진작을 시도하지만.
"우리는 에스실의 사나이들이다! 어떠한 적을 만나도 결코 등을 보이지 않는다! 계집애처럼 징징거릴 생각이면 당장 꺼져버려라!"
······철퇴공의 시도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평생 무술을 단련해온 마초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를 다졌으나, 평범한 삶을 영위하던 병사들은 뒷걸음질을 시작했으니까.
"그, 그냥 계집애 할게요······"
"악마들은 기사나리들만 상대할 수 있다고!"
"애초에 그러라고 귀족들을 모셔온 거잖아?!"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군대가 와해되려는 시점. 토모리 대주교가 기도를 마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한줄기 햇살이 악마들의 잿빛구름을 뚫고 내려와 대주교를 비추었다.
"오, 오오오!"
"병사들이여! 하늘에 계신 태양신께서 너희와 함께 하신다! 이번 싸움은 성전이다! 성전에서 쓰러진 이들은 천상에서 환영을 받을 것이다! 헛된 인세의 목숨에 집착하지말라!"
대주교의 외침에 왕국군이 전의를 빠르게 되찾았다. 전능하신 태양신께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계심이 분명해졌으니까!
"우리들의 구주께 영광스러운 승리를!"
"순교자에겐 영원한 생명이 있으리라!"
이에 왕국군은 [절망] 상태에서 벗어나 [투지]상태로 들어갔다. 사기가 회복되자 다른 수치들도 함께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우스운 짓이로군.]
발로르도 전장을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끼어보인다. 자신이 지휘하는 [지옥불원정대]의 전력은 여섯으로 나눠진다.
유난히 흉폭한 정예들인 [지옥기사단].
철혈의 규율을 자랑하는 [지옥보병대].
지옥의 마수들을 부리는 [지옥마수대].
지옥의 불길을 일으키는 [지옥마법사단].
"주인님! 병력 배치가 끝났습니다!"
"적들에게 파괴를! 죽음을!"
"크르르르르릉······"
"필멸자들의 군대는 정말 원시적이군요."
50레벨 이상의 고위데빌로 구성된 [사천왕].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그리고.
파괴의 대악마가 있었다.
[우리의 막강한 군대가 양떼같은 필멸자 군대를 단숨에 쓸어버리면, 현자 의회의 요술쟁이들이 허겁지겁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꽈악!
발로르가 주먹을 쥐어보이자 무시무시한 불꽃이 피어난다. 대악마의 사악한 투지가 전군으로 퍼져나가며 병사들을 자극한다.
[그때가 너희의 시간이다. 부관들이여.]
이에 사천왕들은 고개를 숙여서 복종을 표했다. 철저한 상명하복이 그들의 계율이니까.
"전투를 개시하라!"
"피와 학살을!"
"파괴와 죽음을!"
뿔나팔이 울리고 지옥기사단이 왕국군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그들은 지옥전투마에 올라탄 무시무시한 전사들이었다.
"석궁병대! 쏴라!"
"공병대! 목책을 세워라!"
이에 왕국군은 볼트를 쏟아붓고 목책을 일으켜세웠다. 기병을 상대하는 보병에겐 최고의 전략이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겠지만.
"히히히히힝!"
지옥전투마들은 고스란히 돌격해 목책을 무너뜨렸다. 지옥기사들이 곧바로 왕국군의 진영으로 돌입해서 불타는 화염검을 내리쳤다.
"창병대! 창병대는 무얼 하는가!"
"우리의 무기가 통하질 않는다!""
"멍청한 놈들! 기사를 상대할 때에는 우선 말에서 끌어내려서──아아아아아악!"
지옥전투마들이 뿜어내는 화염이 창병대를 구워버렸다. 또한 지옥기사들이 검으로 호선을 그리면, 인간병졸들이 양떼처럼 쓰러졌다.
"에스실의 기사들이여!"
철퇴공이 왕국기사대를 이끌고 전장에 돌입했다. 군마들이 지옥의 기운을 견뎌내지 못했기에, 말에서 내린 상태였다.
"후대에 가문의 명성을 떨칠 시간이다!"
"악에 맞서 세상을 수호라리라!"
기사들간의 맹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개인의 강력함은 지옥기사들이 압도적이나 왕국기사들의 숫자가 세 배는 되었다.
"적장은 어디 있느냐!"
"네놈이 철퇴공 로드릭이군!"
혼전의 한복판에서 지옥기사단장과 철퇴공이 결투를 벌였다. 레벨만 따져보면 지옥기사단장이 철퇴공의 두 배였다. 하지만 로드릭에겐 텔로리안의 마법갑주와 공성철퇴가 있었다.
"죽어라! 지옥의 종자야!"
"갑옷에 의존하다니! 비겁하구나!"
"마력에 의존하는 것보단 낫지! 으랴!"
지옥불길을 머금은 칼날과 천둥번개를 머금은 철퇴가 부딪치면서 결투는 백중세를 이룬다. 철퇴공이 인간의 뒤떨어지는 신체와 기량을 무쇠갑옷으로 보완한 덕분이었다.
"태양신이여! 그대의 투사에게 힘을 주소서!"
[3위계, 신성의 로어]
[세크리드 웨폰(Sacred Weapon)]
이에 대주교가 로드릭의 공성철퇴에 태양신의 축복을 부여했다. 덕분에 지옥기사단장의 검이 산산이 조각났고, 기사단장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서 본진을 향해서 달아났다.
"적장이 도망친다!"
"!"
이에 지옥의 기사들이 다함께 말머리를 돌렸다. 열세에 놓였던 왕국 기사들은 전멸을 피했지만, 이미 피해가 심각한 상태였다.
"알랑송 백작! 자네 괜찮나?!"
"장인 어른······벨라디아에게 안부를······"
"헛소리는 멈추고 일어나게! 자네는 살아남아 알랑송 가문을 이어야한다고!"
지옥의 기사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강자들이었다. 왕국기사 열명이 쓰러질 때에, 지옥기사 한명을 쓰러질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빌어먹을······"
평범한 전장이라면 아군의 버팀목이 되어주었을 철퇴공이나 대주교같은 강자들도 제목숨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악마들은 강해도 너무나 강했다. 신체. 장비. 기량. 모든 면에서.
"지옥의 기사들이 돌아옵니다!"
"이번엔 지옥의 보병대와 함께입니다!"
데빌본대가 진격해오자 인간들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은 악마들이 얼마나 강력한 존재들인지 겪어보고 말았으니까.
"도망쳐라! 도망쳐서 목숨을 구해라!"
"이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이번 전투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평민들로 이뤄진 왕국보병대가 단숨에 와해되었다. 그들에겐 목숨으로 지켜야할 가문의 명예나 목숨보다 귀중한 신앙심이 없었으니까.
"불알도 없는 놈들! 고자나 되어버려라!"
"············"
"대주교! 마지막 싸움을 준비합시다!"
패색이 짙었지만 도주는 불가능했다. 도주는 선조들을 모욕하는 불명예이자 딸아이의 앞길을 가로막을 무책임한 행동이다. 차라리 최후까지 싸우다가 산화하는 편이 기사다운 최후였다.
"아우님은 우리가 반나절은 버티라고 주문했소.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낸 시간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목숨이라도 바쳐야겠지."
뿌득!
이를 갈면서 공성철퇴를 들어올린다.
"흠······"
하지만.
대주교가 손을 내저었다.
"당신까지 죽을 필요는 없소. 호국경."
"·········나보고 겁쟁이가 되라고?"
"왕국엔 책임 있는 어른이 필요하오."
대주교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과 잿빛현자는 똑똑하고 패기 있는 젊은이들이오. 하지만 책임감은 부족하지."
······
"왕국을 그들에게만 맡겨둔다면, 왕국은 평범한 백성들을 저버리고, 그들의 이상세계를 실현할 도구로 전락해버릴 것이오."
······로드릭도 속마음으론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이었다. 딸아이에겐 백성들에 대한 책임감이 전무했으며, 아우님께선 때때로 두려울 정도로 급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늙은 성직자의 잔소리는 귀담아듣지 않았지만, 당신의 충고라면 반응이 다를 것이오."
반백의 성직자는 진군하는 지옥군세를 무심히 바라봤다. 자신은 충분히 오래 살았고 지금까지 쌓아올린 선행도 천국에 들기에 충분했다.
즉.
신을 만나러 떠나기 적합한 때였다.
"30세 미만의 성기사들은 지금부터 호국경 로드릭의 지휘를 따르라. 그대들은 태양신을 뵙기에 이르니 최선을 다해 살아가도록."
토모리 대주교는 성호를 그으며 중년의 성기사들과 최후의 돌격을 준비했다. 군마에 올라탄 로드릭은 대주교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대주교. 우리가 사이가 좋진 않았잖소?"
"그랬지."
"하지만 오늘만은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겠소이다. 또한 마지막 날까지 태양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맹세하겠소."
신앙을 위해 왕국의 정책이나 가문의 이해관계를 포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지만, 철퇴공이 정적에게 표하는 경의로선 충분했다.
"호국경."
"말씀하시오."
"당신은 폭군이지만 좋은 아버지요."
"·········"
"나는 성자였지만 나쁜 아버지였지."
토모리는 쓴웃음을 지어보이며 보검을 들어올렸다. 신성한 보호막이 전투사제를 감싸면서 상처가 치유되고 힘이 끓어올랐다.
"각자의 선택을 후회하지 맙시다."
"최후까지 뜻한 바를 지켜야지."
대주교는 전투성가를 부르면서 악마군세를 향해서 돌진했고 성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고통에 개의치 않았고, 심장이 꿰뚫려도 죽지 않았다. 오직 악을 멸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끊임없이 무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이런 미친 놈들을 보았나!"
"빌어먹을 바퀴벌레 자식들!"
성기사들의 투혼에 힘입어 데빌군세의 전진이 가로막혔다. 덕분에 데빌군세가 1차 방어선을 무너뜨린 시점은, 발로르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체된 뒤였다.
[미친 광신도 놈들! 제정신이 아니로군!]
패배가 뻔하지만 싸운다. 이는 데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싸움이란 승리를 위한 행위였으니까.
[하지만 시간벌이였을 뿐이지! 지옥의 원정대여! 서둘러 재정비를 시행하고 다음 방어선으로 진군하라!]
지옥의 기사들은 인간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지만, 그들도 성기사들을 쓰러뜨리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상처를 치유하고 대열을 재정비하고 있는데······
"침략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우리의 용맹을 증명할 시간이다! 돌격──!"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늘을 찌를듯한 전투함성이 울리며 산등성이에서 오크들이 쏟아져내렸다. 산만히 흩어졌던 지옥보병대는 순식간에 녹색물결에 휩쓸렸다. 오크 전사들은 인간들처럼 죽음을 꺼려하지 않았기에 수적인 우세를 활용할 수 있었고.
"으랴아아아아아──!"
"선조들이여! 저희의 용맹을 지켜보소서!"
"데빌의 해골을 가져가서 청혼할거야!"
"그런 불길한 소리는 집어치워라!"
[악마들에게 그린타이드를 선사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34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5]
발로르는 지옥의 군세가 고전하는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지금의 난전은 가증스런 성기사들이 일으킨 연쇄작용이었다.
"오크들이 예상보다 많군."
"인근의 부족전사들이 모두 방어전에 참가한 모양입니다. 잿빛현자라는 요술쟁이가 데빌의 해골을 가져오면 무기에 마법을 걸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하더군요."
발칙한 놈이군.
전투가 끝나고 손봐줘야겠어.
"하지만 당장은 불필요한 정보였다."
"죄송합니다."
"잿빛현자라면 최근에 마지스터로 승급했다는 요술쟁이겠지. 트롤이나 연구하는 멍청이가 우리 지옥에 맞서서 무얼 하겠나? 기껏해야 현자들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고 있을테지."
[파괴의 대악마를 기만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34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7]
"지옥조련사 데브론!"
"말씀하십시오. 파괴의 대악마시여!"
지옥조련사 데브론.
55레벨의 고위악마.
악명 높은 레이드보스다.
"마수들을 내어줄테니 녹색덩어리들을 눈앞에서 치워라. 1시간 주겠다."
이로서 지옥조련사 데브론이 길러낸 지옥마수들이 전장에 풀려났다. 지상의 마수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치명적인 악의를 품은 괴물들.
그리고.
같은 시각.
[올골두골로.]
[말씀하십시오. 현명한 아버지시여.]
[세상에 너희의 존재를 알릴 시간이 왔다.]
전장으로 나아가서 증명해라!
너희들이 지성체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음을!
13. 열세번째 연구 - 갓슬레이어(3)
텔로리안은 테이블에 구현된 거울전쟁과 실제의 전장을 번갈아보았다. 환영거울에서 예견했던 상황들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재현되고 있었다.
[전쟁의 진행을 완벽히 예지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4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8]
현실의 발로르가 인간의 모습으로 군대를 지휘하고 있듯이, 발로르의 환영도 인간의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실제의 발로르와 다르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
"어째서 대주교와 성기사들이 몰살당하게 놔두었나? 진즉에 오크들을 투입하거나 마법카드를 사용했다면 구해낼 수 있었을텐데."
이에.
어깨를 으쓱이는 잿빛현자.
"정적을 구하고자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큭큭! 너희들도 우리 데빌들 못지 않구나."
"너희들은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탄생했지. 그러므로 너희가 해낼 수 있는 생각이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겠지."
토모리 대주교는 항상 대하기 거북한 상대였다. 언제나 성직자의 본분에 충실했기에 회유하거나 위협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다음에 임명될 대주교는 한층 세속적인 사람이길 바래야지. 율법에 맞지 않는 현실도 적당히 눈을 감아줄만한 유연한 사람."
[차도살인의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4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9]
"어쨌든 나는 오크들을 돌격시켰다."
"덕분에 나의 본대가 위기에 처했군."
데빌 군대의 강점은 [완벽한 규율]이다. 하지만 [규율]은 대열이 유지될 때만 힘을 발휘한다. 지금처럼 대열이 무너진 [난전] 상태의 지옥보병대는 오크전사에 비해 근소한 우위를 점할 뿐이다. 그정도론 오크들의 숫적우위를 당해내기엔 모자라다.
"이에 나는 지옥마수들을 보낼 것이고."
착.
발로르의 환영이 장기말을 움직인다.
"지옥조련사 데브론도 함께 파견할 것이다."
"정확히 그렇게 되는 중이군."
텔로리안은 거울전쟁을 통해 지옥군세를 먼저 읽어내고 대처했다. 특히 발로르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이 유리했다.
"지옥의 마수들은 난전에서 정말로 강력한 적수들이지. 성스러운 무기가 아니면 죽일 방도도 없을테니, 오크 전사들로는 무리다."
지옥마수들이 데빌 본대를 난타하던 오크들을 뒤에서 덮쳤다. 오크전사들은 용맹히 맞섰지만, 지옥의 마수들은 오크들의 도끼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설령 상처를 입더라도 유의미한 타격은 아니었다.
"이쪽은 바위트롤들을 투입하겠다."
"지옥마수들이 바위트롤을 압도할텐데?"
지옥마수들은 레벨과 스탯만 따져보면 [바위트롤]을 월등하게 상회했다. 애초에 지옥의 몬스터는 지상의 몬스터보다 훨씬 강하다.
"같은 몬스터라면 그렇겠지."
"·········?"
"하지만 나의 아이들은 타고난 강함에만 의존하는 몬스터가 아니다. 지성체 종족으로서 훈련과 경험을 무기로 삼지."
잿빛현자는 덤덤히 대답하며 계몽트롤들을 점검했다. 지금 전장에 투입된 100명의 트롤들은 전원 [몽크] 클래스를 달고 있는 정예들.
"몽크란 체술을 연마해서 신을 섬기는 수행자들이다. 따라서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신체 자체가 신성한 무기로 변하지."
콰앙!
올골두골로의 신성한 정권이 오크들을 잡아먹던 지옥사냥개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뒤이어 돌려차기로 목뼈까지 부숴버리자, 지옥사냥개가 복날에 끌려나온 똥개처럼 쓰러졌다.
"·········"
이에 발로르의 환영은 흥미롭게 웃어보일 뿐이었지만, 현실의 발로르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바위트롤따위가 몬스터를 넘어서 수행자가 되었다고? 그것도 주먹에 신성력을 담아낼만한 수준의?
"""화합의 어머니께 청하나이다!"""
100마리.
아니.
100명의 트롤몽크들이 날렵하게 움직이면서 기도문을 외웠다. 그것은 세상에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성가였다.
"""상처에는 치유를!"""
악마란 필멸자들의 정신이 쇠약해져서 탄생한 질병. 그렇다면 상처를 치유하려면 우선 질병을 제거해야하는 법이다!
"""분열에는 일치를 내려주소서!"""
콰앙!
트롤몽크들의 합동공격이 지옥마수들을 차례대로 죽음과 일치시켰다. 하지만 지옥마수들의 반격도 강렬해서, 놈들의 발톱에 적잖은 트롤몽크들이 치명상을 입었다.
"형제여! 자네는 머리가 잘렸구만!"
"자네의 찢어진 사지가 생생하구만!"
"모두 작은 상처로 엄살 부리지말도록!"
하지만 동료들이 머리만 챙겨서 후방으로 던져놓으면,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완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전장에 복귀했다.
자.
이제 누가 마수지?
"·········"
발로르의 환영은 미간을 좁혀서 불쾌함을 드러냈다. 변수는 전장에서 언제나 존재한다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쳤다.
"이건 내가 한방 먹었군."
하지만 발로르의 환영은 호쾌하게 웃어보였다. 상대가 [신들보다 멀리보는 현자]임을 알고 있기에, 수싸움에서 밀리는 상황을 하나의 흥밋거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납득이 어렵겠지."
"어떤 면에서 그렇지?"
"일개 마법사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테니까······지금은 인내하고 있어도 내면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쌓이고 있겠지."
영원자들은 유한자들을 낮추어본다. 그래서 자신들이 언제나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오만한 일이다.
"이것도 자네의 의도인가?"
"그렇다."
"현실의 내가 평정심을 잃게 만들 생각이군."
"그래야 실수를 할테니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전장은 악마들에게 불리해보였다. 지옥보병대는 오크전사들에게 포위당해서 두들겨맞는 중이고, 이들을 구하려고 파견한 지옥의 마수들은 트롤몽크들에게 사냥당한다. 지옥기사단이 나름대로 활약을 펼쳐보지만 중과부적이다.
"이쪽도 남은 카드가 많거든."
발로르의 환영은 [지옥마법사단]에게 명령해서 전장 전체를 휩쓰는 지옥의 불꽃을 퍼부었다. 데빌들은 선천적으로 드높은 화염내성을 지녀서 피해가 크지 않겠지만······
"네놈의 트롤들은 어떨까?"
"흐음."
"제아무리 몽크라도 이번 주문을 피해낼 방도가 없을 것이다. 폭심지가 정확히 트롤 여족장에게 꽂혔으니까······다들 살아남긴 어렵겠지?"
실제의 발로르도 같은 전술을 지시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화염폭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예상대로 행동하는군."
"예상한다고 대응이 가능하진 않을텐데."
"예상이 가능하면 뭐든지 대비할 수 있다."
[올골두골로.]
전언을 보낸다.
[전원! 미리 나눠준 포션을 복용하라!]
[알겠습니다. 현명한 아버지시여!]
지옥마수들을 때려잡던 트롤수도승들이 일제히 안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들었다. [골든홀드]의 경매장을 약탈해서 만들어낸 비약들.
꿀꺽꿀꺽!
붉은 액체가 트롤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젠 화염이 두렵지 않구나!"
"마치 무적이 되어버린 기분입니다!"
"역시 우리들의 아버지는 현명하시다!"
트롤몽크들이 복용한 포션은 [최상급 화염보호 물약]. 1회에 한해서라면 드래곤의 숨결조차 방어해준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주술사! 주술사들은 무얼 하는가!"
"물의 정령들이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유황불 폭풍이 수많은 오크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폭풍이 지나간 이후에도 트롤몽크들은 건재했다.
"·········"
이에 발로르의 환영은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악마보다 앞서 내다보고 대응하는 필멸자가 있다니! 평생 이레귤러를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자신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역시! 그대는 신들보다 멀리 내다보는 현자로구나! 하지만 나의 화염폭풍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오크들은 와해됐고 지옥의 군세는 숨을 돌리게 되었지! 재집결을 마치고 트롤들을 침착하게 집중공격하면──"
허나.
현실의 발로르는 달랐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악마의 괴성에 공기가 찢어지고 대지가 흔들렸다. 현실의 발로르가 평범한 인간의 형상을 집어던지고 진신을 드러낸 것이다.
[벌레같은 필멸자놈들──!]
발로르는 지옥의 불꽃에 휩싸인 무시무시한 거인이었다. 황소를 닮은 얼굴은 새까만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파괴신으로 숭배받기에 충분한 위엄을 지닌 존재. 그것이 발로르였다.
[모조리 짓밟아주겠다──!]
파괴의 대악마가 전장에 난입하자 필멸자들은 졸도하거나 무기를 던지고 달아났다. 파멸의 화신 앞에선 오크와 인간의 차이가 없었다.
"으, 으, 하, 하! 제, 제, 제, 법이구나──!"
그럼에도 용맹무쌍한 블랙터스크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굳건히 도끼를 쥐고 용기를 쥐어짜내어 대악마를 바라보았다.
다만.
다리는 후들거린다.
"네, 네, 네, 네놈의 해골에 발효주를 담아마시면 근사한 맛이 나겠군······그, 그, 그때는, 베, 베, 벨칸도 왕위를 내놓아야만·········"
하지만 쥐어짜낸 용기도 거기까지였다.
파괴의 대악마가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하찮은 미물아.]
파괴의 대악마가 무릎을 굽혀서 블랙터스크를 바라봤다.
[다시금 지껄여보아라.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뭐라고 지껄이는지 전혀 들리질 않더구나. 응?]
촤륵!
화염채찍을 휘두르자 수백의 오크가 불탄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쾅!
발을 구르자 또다시 수백이 쓰러진다.
[응? 다시금 지껄여보라는 말이다?]
"···············"
[지금 네놈의 부하들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있지않느냐? 네놈에게 정말로 용기가 있다면 참람한 소리를 지껄여보아──]
훙훙훙훙!
그때. 묵직한 생물이 인근의 언덕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인간에 비해선 훨씬 컸지만 발로르에 비해선 똑같이 조그마한 생물이었다.
[몽크의 전통, 화합의 길]
[피스트 오브 하모니(Fist Of Harmony)]
[분쟁에는 화합을!]
바위트롤의 괴물같은 근력에 막강한 위치에너지가 더해진다. 또한 수만번을 연습해온 정권에 화합을 원하는 여신의 신성한 분노가 더해진다.
"악마여! 자중하십시오!"
낙하하는 올골두골로가 발로르의 얼굴을 향해서 정권을 내질렀다. 화합의 기운이 지옥의 권능으로 이뤄진 보호막을 파쇄했다.
[날파리따위가──!]
트롤수도승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고 발로르의 높은 콧대에 적중했다. 빠각!하는 소리와 함께 대악마의 검은 피가 솟구쳐올랐다.
[·········?]
이를 지켜보던 모두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권을 내지른 바위트롤조차도.
"·········?"
쿵.
올골두골로가 착지한다.
[············]
파괴의 대악마는 오른손을 들어서 콧등을 매만졌다. 드높던 콧대가 부러지고 코피가 쏟아진다.
[·········]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가 몸을 휘감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미개한 트롤 따위가!
[감히 내게 상처를 입혔다고?!]
촤악!
화염채찍에 파괴의 권능이 담긴다.
[영혼까지 소멸시켜주마──!]
분노한 발로르는 필멸자들은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대악마라고 불리는 것이고, 파멸의 신으로 숭배받는 것이다.
"음."
하지만 몬스터로 태어났던 구도자는 담담하게 파멸의 신을 마주보았다. 괴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람으로 살아보았다. 그러니 가치 있는 싸움에서 삶을 마감하는 상황은 아쉽지 않았다.
"수행을 끝내지 못해서 아쉽군요."
그것이.
최후의 순간에 느끼는 유일한 아쉬움.
[올골두골로가 각성했습니다!]
[Lv25바위트롤-> Lv30 바위트롤]
[Lv5 힘몽크 -> Lv15 힘몽크]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34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1]
동시에.
연구도 진전되었다.
[올골두골로의 수행을 확인!]
[연구단서 3/5]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35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12]
"로어여!"
[9위계, 비전의 로어]
[매스 텔레포트(Mass Teleport)]
[공간을 찢고 떼어내서 접붙여라!]
발로르의 화염채찍이 올골두골로를 덮치기 직전.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 초대형 마법진을 사용해 9위계 마법을 시전했다.
"엘렌스트라! 당신의 차례입니다!"
"또한 떼어낸 공간을 우리의 의지대로 풀어놓을 지어다! 생명체는 누구도 다치지 않게끔 주의깊게 공간을 접합할 지어니!"
로어마스터 텔로리안이 시작한 주문을 드림시어 엘렌스트라가 완성했다. 뒤이어 보조캐스터들이 함께 주문을 외웠다.
"""공간을 찢고 떼어내서 접붙여라! 또한 떼어낸 공간을 우리의 의지대로 풀어놓을 지어다! 생명체는 누구도 다치지 않게끔 주의깊게 공간을 접합할 지어니!"""
[초대형 마법진]을 통해 비전술사들의 마력을 공유받는다. 덕분에 텔로리안은 혼자선 이해하지도, 시전하지도 못하는 주문을 완성했다.
[9위계 주문을 사용해봄!]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13]
──────
◆매스 텔레포트(9위계, 비전의 로어)
: 지정된 공간을 통째로 절단해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시킵니다. 시전자가 원하지 않는 생물체는 이동에서 배제할 수 있습니다.
■효과
- 주문의 범위는 마력에 기반합니다.
- 주문의 이동거리는 마력에 비례합니다.
- 공간을 통째로 잘라내어 이동하는 개념이므로 일반적으론 저항이 불가능합니다.
──────
9위계 주문.
그것은 마법보다 권능에 가까운 힘이다.
"······아버지?"
"수고했다. 올골두골로."
덕분에 악마들에 맞서던 모든 이들이 성산으로 소환되었다. 이에 발로르는 완전히 평정심을 잃고서 애꿎은 부하들을 쳐죽였다.
[연구진전: 갓슬레이어]
[연구내용: 발로르를 흥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연구단서: 1/5]
[연구이득: 지옥대원수 발로르의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덕분에 군략이 [전설]에서 [영웅] 등급으로 내려갑니다. 이제 발로르는 실수나 방심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제.
2페이즈로 이행할 시간이다.
[용사여. 당신들의 준비는?]
[풀버프. 풀도핑. 공략숙지 완료.]
대륙에서 집결한 영웅급 모험가들이 전투준비를 끝마쳤다. 명성과 전리품, 의뢰비에 대한 욕심으로 모두 눈이 들끓고 있었다.
[현자께선 낮잠이나 주무시고 계시오.]
전설적인 용사가.
전장으로 향한다.
[용사일행이 몸값이 비싼 이유를 보여드릴테니.]
13. 열세번째 연구 - 갓슬레이어(4)
모험가의 본질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무장집단이다. 용병과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을 죽인다는 차이가 있을 뿐.
'하지만 휴먼헌팅은 비숙련노동이고 몬스터헌팅은 숙련노동이지. 그래서 모험가가 용병보다 대우가 훨씬 좋은 것이다.'
전문기술을 배울때는 일정한 인내심과 지능이 요구된다. 덕분에 모험가는 용병보다 인적자원이 우수해서, 대민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훨씬 적다.
'여기에 영웅을 갈구하는 대중심리와 이야기를 지어내야하는 바드들의 이해관계가 더해지면, 유랑하는 무장집단을 모험가라고 떠받들어주는 풍조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모험가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14]
하지만 자신도 지금만큼은 모험가들을 영웅으로 추켜세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날 봐라───!"
용사의 도발적인 함성이 데빌보병들의 시선을 끌어갔다. 한 명의 인간을 향해서 향해서 수백 명의 악마들이 공격을 퍼붓는다.
"하아아──!"
하지만 용사는 검과 방패를 신들린 것처럼 휘둘렀다. 성검이 번개를 뿜어내서 공격을 방해하고 용비늘방패가 마법을 무마한다.
"대장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공격 개시!"
"블리자드!"
"플레임 스트라이크!"
"아케인 익스플로전!"
모험가 마법사들이 용사를 원점으로 광역마법을 시전해 데빌보병대를 쓸어버렸다. 용사는 힐샤워와 장비에 의존해 마법피해를 견뎌냈다.
"대장! 2파가 몰려옵니다!"
"방금처럼만 하자고. 전사진 앞으로!"
이번엔 무시무시한 지옥마수들이 유황불을 뿜으며 몰려왔다. 하지만 모험가들은 단숨에 산개했고 [전사] 클래스들은 전방에 나서 마수들의 시선을 끌어냈다. 그리고 용사는 마수들을 무시하고 [지옥조련사 데브론]에게 돌진했다!
"시건방진 필멸자가 상대도 몰라보고 까부는구나! 채찍질로 정신이 번쩍들게 해주마!"
지옥조련사 데브론은 마수들을 부리며 채찍을 휘두르는 근육질의 데빌이었다. 발로르의 부관답게 50레벨이 넘는 강력한 초월자.
"어디 겨뤄보자고! 데빌!"
[마셜 아츠, 방어의 달인]
[월 오브 쉴드(Wall of Shield)]
기세좋게 돌진한 용사는 몸을 낮추고 방어에 전념했다. 용사 알베릭은 검을 다루는 솜씨도 굉장했지만 방패를 다루는 솜씨는 신들린 수준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여럿의 방패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
"번거로운 놈! 너는 나중에 상대해주마!"
"나를 봐라아아아아아아──!"
방어에 지친 지옥조련사가 원거리 공격수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용사는 공격태세로 전환해서 위협적인 일격을 가했다. 덕분에 지옥조련사는 용사와 일대일 교전을 강요받았다.
"저것이 네가 말한 [탱킹]이냐?"
"그렇소."
"본신이 저걸 해내야한다는 말이지."
동면에서 깨어난 아름다운 은빛뱀이 전장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굉장히 숙달된 감각이 필요하겠는데."
"그래서 숙련된 탱커들은 몸값이 대단히 높소. 던전 공략에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일을 해내야하는 사람들이니까."
아무리 대단한 인간도 고위데빌에게 정통으로 맞으면 즉사다. 하지만 용사는 기민하게 움직여서 공격을 흘려내거나 방패로 쳐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곡예사처럼 피하거나,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로 공격을 맞이했다.
"저게 전사인지 곡예사인지 모르겠군······"
"괴물과 초월자들을 상대하는 무예는 인간을 상대하는 무예와 달라야지."
덧붙인다.
"이게 오늘날의 인간들이 괴물에게 사람을 바치지 않는 이유요. 인신공양을 바치느니 재산을 털어서 모험가들을 고용하면 되니까."
은빛뱀이 요즘에 태어났다면 괴물로 퇴치되었으리라. 혹은 인간들이 살지 않는 오지로 도망쳐야했을테지.
"본신이 운이 좋았다고 말하려는 것이군."
"그렇소."
"부정하진 않으마."
[신격의 한계를 깨달음!]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15]
"당신네 신들도 결국 필멸자의 숭배로 빚어진 존재지. 그러니 필멸자들이 변하면 당신들도 함께 변해야하오. 생존을 위해서는."
카람샨 문명이 몰락하면서 카람샨의 신들도 함께 신위를 잃었다. 덕분에 카람샨 만신전의 신들은 오늘날 현세에 남아있지 않다.
"그건 알겠다만······"
은빛뱀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고 어째서 태양신이 최고신이냐?"
"태양은 모두에게 공평하니까."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는 신은 숭배할 이유가 없을텐데? 필멸자들이 종교를 지니는 까닭은 신들의 편애를 받기 위해서잖나."
은빛뱀을 비롯한 고대신들은 인간적인 신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을 거닐면서 인간처럼 사고하고 느꼈다. 가까운 이들에게 총애를 베풀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내쳤다. 당시에는 그것이 신다운 행동이었다.
"고대에는 그랬겠지."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신에게 인간을 초월하는 모습을 기대하오. 자신들도 인간을 초월한 신을 모방함으로 영원에 닿길 바라니까."
그래서 고대엔 비주류이던 태양신이 오늘날에는 최고신이 되었다. 태양신은 언제나 하늘에서 공명정대한 햇빛을 비추었으니까.
"············"
은빛뱀도 초월자와 대등한 사투를 벌이는 용사의 모습에서, 스스로 초월자가 되려는 인간의 욕망을 읽어냈다.
"과거의 인간들이라면 악마를 상대할때 반드시 우리를 찾았겠지. 아니면 우리들의 핏줄을 이어받은 반신에게 의존하거나······"
하지만 용사는 악마를 상대할때도 신들의 은총을 갈구하지 않았다. 여신의 축복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숭배보다 동맹에 가까운 관계였다. 결국 전설적인 알베릭은 스스로의 힘과 용맹에 의존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하아!"
용사의 성검이 지옥조련사의 방어구를 갈라버렸다. 거듭된 도발에 분노한 지옥조련사 데브론이 광폭화 상태에 들어갔다.
"이제 정말로 죽여주마! 하찮은 미물!"
"최종국면이다! 전원 화력 극대화!"
용사의 지시에 모험가들이 총공세를 시작했다. 탄환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화려한 마법이 사방에서 번득였다. 지옥조련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지만 빠져나가기엔 늦었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악──!"
[모험가 전술에 대한 전승!]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16]
용사는 지옥조련사의 목을 참수해 깃대에 내걸자 지옥마수들이 달아났다. 심지어 철혈의 규율을 자랑하던 데빌 군세조차 진격을 멈추어 동요를 드러냈다.
[잿빛현자여! 보셨소?!]
[확실히 몸값만큼은 해내는군.]
[이제부턴 몸값 이상을 한다는걸 보여드리지!]
용사의 호승심이 과하다고 생각됐지만 거북하진 않았다. 원래 선봉장에겐 과도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제정신으로 할만한 일이 아니니까.
"대장! 데빌들이 다시 공격해옵니다!"
"그래봐야 졸개들이잖나! 쓸어버리자!"
이후로도 데빌들의 맹공이 지속됐지만 효과는 없었다. 모험가들은 용사의 지휘하에 데빌군세를 저지하고 고위악마들을 처치했다. 그리하여 데빌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일 무렵.
[용사여. 군대를 투입할테니 재정비하시오.]
[시의적절한 도움이군. 고맙소. 현자여.]
모험가들은 재정비하고 재집결한 왕국군과 오크전사들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데빌군세를 상대로 승리하진 못했지만, 시간은 벌어주었다.
"버텨라! 용사님께서 물리쳐주실 것이다!"
"인간보다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가!"
이에 지옥마법사단이 또다른 공격주문을 준비했다. 오크들을 와해시켰던 불꽃폭풍을 또다시 시전하려는 것이다.
[글로린마르 대사. 당신들의 차례요.]
[엘프들의 우월성을 입증할 시간이군요.]
이윽고 구름에 숨어있던 엘프기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양날개를 합치면 10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독수리에 탑승해있었는데, 지옥마법사들은 콧방귀를 끼면서 결계를 펼쳤다.
"네놈들의 존재는 진즉에 알고 있었다!"
"지옥의 우월한 마법으로 요격해주지!"
그렇지만 독수리기사들은 데빌들의 예상과 달리 강하하지 않았다. 대신 발톱으로 쥐고 있던 묵직한 물체를 떨어뜨렸다.
"이건 몰랐을거다! 멍청한 악마놈들!"
바위?
고작?
"고작 그딴걸로 우리를──!"
콰직!
글로린마르가 투하한 돌덩이는 엄청난 속도로 낙하해서 결계를 단숨에 깨뜨리고, 지옥마법사단장을 피떡으로 만들었다.
"뭐······?"
"뭐야······?"
"바위가 어째서 저렇게 빨라······?"
핏빛으로 물든 돌덩이가 팔과 다리를 꺼내어 본모습을 드러냈다.
"바, 바위 트롤이다!"
"바위트롤 놈들이 돌아왔어!"
"트롤이다아아아아──!"
돌덩이의 정체는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트롤들이었다. 특히 글로린마르가 투하한 올골두골로는, 자유낙하의 물리력을 온몸에 실어내 지옥마법사단장을 깔아뭉개버린 것이었다.
"악마들이여! 소인 올골두골로가 아버지의 지혜에 힘입어 더욱 강하게 돌아왔습니다! 다시 화합에 대해 가르침받을 시간입니다!"
대악마를 마주해본 올골두골로는 더욱 높은 경지에 올랐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몽크의 전신엔 신성한 기운이 일렁인다.
"올골두골로류!"
쿵!
오른발을 내딛어 전신을 단단히 굳히고!
"회전각!"
왼발을 폭풍처럼 회전시켜 일대를 휩쓸어버린다. 이로서 엘프들의 공습을 방지하던 결계진이 초토화된다.
"하등종들에게 우리의 우월함을 입증할 시간이다! 여왕 폐하를 위하여!"
트롤몽크들이 난장판을 벌여둔 장소에 거대독수리들이 급강하했다. 영광에 굶주린 엘프기사들이 지옥마법사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넘긴다.
"대사님! 이젠 후퇴해야합니다!"
"아쉽군! 허나 그대의 말이 옳소!"
엘프와 트롤들은 마법사들만 제거하고 빠르게 이탈했다. 공중을 요격할 수단을 잃어버린 데빌군세는 그들을 무력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
흥분을 가라앉히고 전세를 관망하던 발로르는 차분히 전장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군세는 모든 전선에서 고전하거나 패퇴하는 중이었다.
[흑막은 참으로 정말 대단한 놈이군.]
지금 와서 사천왕들을 내보낸다고 해결될 상황은 아니었다. 이정도로 패색이 짙어진 전투를 뒤집을 수단은 하나뿐이다.
[내가 선봉에 서도록 만들다니!]
파괴의 대악마가 출정한다. 그가 발을 내딛으면 대지가 흔들리고 숨을 내쉬면 공기가 탁해진다. 발로르의 출정에 데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필멸자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연구진전: 갓슬레이어]
[연구내용: 발로르가 선봉에 나섰습니다.]
[연구단서: 2/5]
[연구이득: 지금부터의 모든 교전은 발로르의 마나를 소모시킵니다. 많은 마나를 소모시킬수록 최종국면에서 유리해질겁니다.]
철퇴공은 왕국군을 독려했으나 이번엔 기사들조차 독려에 응하지 않았다. 로드릭조차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형님. 물러나십시오.]
[후퇴는 불명예스런 일이야!]
[대악마와 싸우지 않는건 현명함입니다.]
"이봐. 인간."
그러자.
순순히 후퇴하던 블랙터스크가 입을 열었다.
"승리가 불가능함을 납득할 때에도 용기가 필요하더군. 그러니 현자의 지시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도록."
·········
"대악마를 쓰러뜨리는 과업은 우리보다 강력한 이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부하들을 챙기지. 그것이 지도자의 책무가 아니겠나?"
이에 로드릭도 고개를 끄덕이고 후퇴를 명령했다. 인간과 오크들은 남김없이 철수했고 용사가 이끄는 모험단과 하이엘프들만 남았다.
"어르신의 검을 받아라! 비천한 악마야!"
"가증스러운 귀쟁이 놈들이!"
글로린마르와 엘프기사들은 발로르의 주변을 선회하면서 귀찮게 굴었다. 이따금 화염채찍을 피하지 못한 동료들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엘프기사들은 대담한 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글로린마르는 발로르의 이마에 십자흉터를 새기는 위업에 성공했다.
"하아!"
"크아아아아──!"
발로르는 상당한 시간을 글로린마르를 상대하면서 허비했고, 덕분에 텔로리안은 거대마법진을 이용한 두번째 마법을 시전했다.
[9위계, 영혼의 로어]
[어포지어시스(Apotheosis)]
[로어여! 신성을 흉내낼 지어다!]
─────
◆어포지어시스(9위계, 영혼의 로어)
: 대상자의 영혼을 극도로 고양시켜 신격화시킵니다. 방대한 잠재력을 품은 영혼일수록 강력한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효과
: 대상의 모든 잠재력을 개방합니다.
: 대상에게 [반신] 특성을 부여합니다.
■주의
: 지속시간이 대단히 짧습니다. (마력 비례)
: 지속시간이 끝나면 장시간 기절합니다.
: 대상이 신위에 도달할 잠재력이 없다면 영혼이 폭발합니다. 이로 인한 죽음은 필멸자의 힘으로는 되돌리지 못합니다.
─────
시전을 마치자 용사의 육신이 신성한 화염에 휩싸였다. 인간의 필멸성이 씻겨나가고 신격의 불멸성이 스며들었다.
"후······"
신격화된 용사는 모두를 경외감에 빠뜨렸다. 눈빛에선 황금빛 안광이 번득였고 머리에는 후광이 생겨났다. 그건 용사의 영혼이 언젠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이었다.
"······불멸성이란 좋은 것이군."
텔로리안이 자아낸 마법은 가능성의 맛뵈기를 보여줬을 뿐이나, 대악마를 목도한 필멸자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다.
"단칼에 죽여주마. 소대가리."
이윽고 용사가 발로르에 필적할만큼 거대해졌다. 비상시에 쓰고자 지참했던 [티탄의 영약]을 복용한 덕분이었다.
"지금은 지옥제왕도 나의 상대가 아닐테니까!"
"벌레가 하찮은 요술을 믿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네놈은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거신화된 용사는 동료들의 지원을 받아서 발로르와 대등히 싸웠다. 검격이 부딪치면 산이 갈라지고 땅이 쪼개졌다. 신화적인 싸움에 성산에 모여든 모든 생명체들이 두려움을 품었다.
"흐음·········"
다만.
은빛의 여신만 제외하고서.
"저런 힘으로 파괴신을 자처했단 말이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안심해도 좋다. 친애하는 마법사여."
그대의 여신이.
승리를 물어다줄테니.
13. 열세번째 연구 - 갓슬레이어(5)
텔로리안이 성산방어를 계획한 근본목적은 발로르의 처치였다. 때문에 발로르를 직접 상대할 인원들은 별도의 브리핑을 거쳤는데, 이들은 끝까지 전력을 보존하다 약화된 발로르와 최종결전을 치를 이들이었다.
로어마스터 텔로리안.
주술사왕 벨칸.
캄비온 루시펠레스.
'그리고 본신이었지.'
해당 계획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은 아엘타나르였다. 지금 용사가 보여주듯, 모험가 전술에서 제일 중요한 포지션은 탱커니까.
'그래서 본신도 고민을 해야했다.'
비록 육체는 회복이 됐지만, 심연의 검투사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할정도로 약해졌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훨씬 강력한 파괴의 대악마를 상대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카람샨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듯이 본신도 더이상 최고신이 아니다.'
하지만.
용사가 길을 보여줬다.
탱커는 상대보다 강해야할 이유가 없다. 용사는 인간전사치고는 강하지만 지옥조련사 데브론보다 확실히 약하고, 파괴의 대악마 발로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약하다.
'하지만 지옥조련사는 손쉽게 처치하고 발로르와는 좋은 승부를 펼치고 있다. 어떻게?'
동료들과 함께 싸운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격의 오만함을 버림!]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17]
'필멸자에 불과한 용사도 성공했다면 본신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이번에 증명해보겠다.'
거신화된 용사는 발로르와 대등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싸움을 주의깊게 눈여겨본다면, 용사는 방어에 전념하고 동료들이 공격을 전담하는 상태에 가까웠다.
'저것이 내가 해내야할 모습이다.'
또한.
변화한 세상에서 살아가야할 태도다.
[날 봐라아아아아아───!]
[바퀴벌레처럼 끈질기구나!]
도발당한 발로르가 화염채찍을 휘두르자 용사는 용비늘방패로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거듭해서 발로르의 공격을 막아낸 방패에는 금이 갔고, 거신화도 끝나가고 있었다.
[모두 퇴거하라!]
용사의 전언에 모험가들은 일사불란히 퇴각했다. 불안정한 워프에 의존하지 않고 도보로 퇴각하는 모습에서 노련미가 엿보였다.
[네놈의 동료들이 줄행랑을 치는구나!]
[내가 후퇴하라고 지시했는데?]
[눈물겨운 모습이군! 네놈부터 죽어라!]
발로르가 화염검에 파괴의 권능을 불러일으켰다. 한데 용사는 방패를 발로르의 얼굴에 던져 시야를 흐려놓고 도망쳤다.
[크아아아아아아──!]
[재밌게 놀았다! 소대가리!]
발로르는 길길이 날뛰면서 추격했으나 용사는 소인화의 물약을 복용해 개미보다 작아졌다. 이제 발로르의 거대한 덩치는 용사를 타격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소인화된 용사는 발로르에게 V자를 펼쳐보이면서 나무의 밑둥에 몸을 던졌다. 소인화된 용사는 미끄럼틀을 타듯이 지하터널을 타고서 은신처로 내려갔다. 신격화가 해제되면서 기절에 빠진다.
[연구진전: 갓슬레이어]
[연구내용: 발로르의 마력을 소진시켰습니다!]
[연구단서: 3/5]
[연구이득: 발로르는 이제부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격의 진정한 힘, 권능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분노한 발로르의 발걸음엔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검을 휘두르면 방어선이 무너지고 채찍을 번뜩이면 필멸자들이 파리떼처럼 죽어나갔다. 그는 종말의 사자이자 파괴의 권능!
[누가 감히 나를 막겠느냐!]
격노한 발로르가 성산내부로 진입했다. 침입자에 대항하는 수호토템들이 설치된 상태였지만, 발로르의 채찍질에 일거에 파괴되었다.
마침내.
최종국면이 시작되었다.
"마침내 우리의 차례로군."
"의식을 진행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벨칸."
"조상들께서도 놈을 상대할 준비를 끝마치셨네. 하지만······이걸로 정말 괜찮겠는가?"
벨칸의 예지력에 의하면 여전히 승리는 불명확했다. 냉정해지자면 패배할 확률이 훨씬 높은 상태였다. 자신의 예지력은 텔로리안처럼 완벽하진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떤 점을 우려하십니까?"
"놈을 쓰러뜨릴 한방이 부족해."
벨칸이 덧붙였다.
"은빛뱀께선 놈의 공격을 버티시겠지만 반대로 놈을 쓰러뜨릴 수단은 없으시지. 내가 대행하는 정령군주들의 힘은 다재다능하지만 대악마에게 치명상을 가할 정도는 아니라네."
이에.
벨칸이 물끄러미 텔로리안을 쳐다봤다.
"그럼 남은 승부수는 자네뿐인데."
"저도 당신 이상의 화력은 없습니다."
"그래?"
"대신 캄비온을 데려왔지요."
"흠······"
······벨칸은 미덥지못한 눈빛으로 루시펠레스를 쳐다봤다. 대악마 루시펠레스라면 혼자서도 발로르를 상대하고 남을만한 강함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은총을 포기한 루시펠레스는 어줍잖게 강력한 캄비온에 불과했다.
"겉보기엔 우리가 훨씬 강해보이네만."
"지금은 용사랑 싸워도 질겁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안배가 있겠군."
끄덕.
"알겠네. 이번에도 기대하지."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벨칸."
다음.
루시펠레스와 면담한다.
"·········내가 정말 이걸 해낼 수 있을까?"
루시펠레스는 엄지를 깨물면서 대단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지금도 충분히 강력했다. 신적인 존재에 맞설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분명히 방해만 될거야."
"나를 믿나?"
"············"
신뢰란 데빌에게 낯선 개념이다. 악마는 사랑을 모르듯 신뢰도 알지 못한다. 단지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있기에 흉내를 내고 있을뿐.
하지만.
루시펠레스는 캄비온이다.
"·········너를 믿어보마."
[연구일지갱신 : 영광을 향한 승천]
[루시펠레스가 '신뢰'를 익혔습니다!]
[연구단서 1/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8]
"나를 믿고 따라와라."
"·········"
"건네준 검은 패용하고 있겠지?"
"그래."
"그것이면 충분하다."
발로르가 다가오자 은빛뱀이 지하호수에서 거체를 일으켰다. 체급만 따지면 발로르보다 거대했지만 강함이나 권능에선 비교가 불가능했다. 지금의 자신은 토착신으로 숭배받는 고대의 바실리스크에 불과했으니까.
[온다.]
하지만 자신만 역할에 충실한다면 동료들이 놈을 무찌르겠지. 다짐을 굳히면서 검은 불꽃에 휩싸인 대악마를 노려본다.
[쥐새끼들이 이곳에 모여있었군!]
권능을 발하는 발로르는 지옥을 형상화한 존재였다. 이글거리는 눈빛은 불경한 광기로 타올랐으며, 전신에서 솟아나는 검은 불길은 인근의 빛을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네놈이로군.]
발로르는 마법진에 자리잡은 잿빛마법사를 바라보며 직감했다. 놈이 지옥제왕을 도청했던 마법사이자 자신을 농락한 전술의 신이라고.
[······네놈은 태양신의 종복도 아크메이지도 아니군. 애초에 우리에게 대적할 격을 갖추지도 못했으니······심연의 탕녀가 맞았던 것인가.]
파괴의 대악마는 화를 내야할지 흥미를 느껴야할지 헷갈렸다. 일개 마지스터가 자신을 능멸했다는 사실에는 화가 났다. 하지만 미약한 존재가 자신이 권능을 사용하게 할만큼 뛰어난 지략을 지녔다는 사실에는 흥미가 돋았다.
[거래를 제안하마.]
그리하여.
데빌다운 태도가 나왔다.
[나를 섬긴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이에 잿빛현자도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숙고할때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도 똑같이 제안하지."
[············]
"나는 그대의 힘과 지략을 높이 평가한다. 때문에, 그대가 지금까지 일으킨 파괴와 죄악을 사면하고 수하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핫──!]
발로르의 웃음소리는 지옥에서 울려퍼지는 천둥과도 같았다. 벨칸은 긴장했고 루시펠레스는 떨었다. 오직 텔로리안과 그의 패밀리어만이 발로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재밌는 필멸자군. 반드시 살려둬야겠어.]
발로르는 텔로리안을 사용할 구상을 끝마쳤다. 사지를 찢어발기고 해골만 남겨서 책사로 사용하면 딱이겠지.
[그럼 지옥의 진정한 힘을 목도──]
발로르가 흑염의 날개를 펼치며 권능을 발하려는 순간 벨칸이 갈색의 토템을 지상에 내리꽂았다. 동시에 잠들었던 오크선조들이 깨어나서 발로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감히 악마따위가 어딜 발을 붙이느냐!]]
[[당장 신성한 산을 떠나거라! 어서!]]
성산은 수백년간 수많은 영혼이 영면을 취했던 땅이다. 또한 사막오크들은 주말마다 성산을 찾아와서 제사를 지내고 가족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덕분에 성산에는 수백년에 걸쳐서 쌓여온 신성력이 있었다.
[기껏해야 노예종으로 태어난 놈들이──!]
오크선조들은 그러한 신성력을 휘둘러 권능을 행사했다. 격이 높지는 않았지만 지상에 강림한 발로르의 권능을 제약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어었다. 이곳은 일곱지옥이 아니었으니까!
[연구진전: 갓슬레이어]
[연구내용: 발로르의 신성을 제약했습니다!]
[연구단서: 4/5]
[연구이득: 발로르의 신성을 억제해서 권능을 제약했습니다. 파괴의 대악마다운 강력함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전투를 개시하자마자 몰살당하는 상황을 면했음에 감사하십시오.]
오크선조들이 발로르의 신성을 억누르자, 은빛뱀이 광채를 번득이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토착신의 위상을 지녔기에 미약한 권능이나마 행사할 수 있었다.
[7위계, 신성의 로어]
[스타라이트 블레싱(Starlight Blessing)]
[동료들이여! 별빛이 그대들과 함께한다!]
은빛뱀이 전신에서 내뿜은 별빛이 발로르가 불러온 어둠을 몰아냈다. 덕분에 동료들은 가슴을 내리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나, 온전히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되었다.
[몰락한 신이 주제를 모르는구나!]
[네놈의 말대로 나는 몰락했지!]
은빛뱀의 거체가 발로르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동시에 은빛뿔이 발로르의 흉갑을 부수고 가슴을 깊숙이 관통했다. 심장을 찌르지는 못했지만 상처를 입히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네놈을 묶어두기엔 충분하겠군!]
격노한 발로르는 은빛뱀의 몸통을 향해 화염검을 내리쳤다. 일격에 은빛뱀의 육신을 반으로 토막쳐버릴 생각이었다.
[9위계, 냉기의 로어]
[클록 오브 씨(Clock of Sea)]
[심해의 물결이여! 우리를 보호하라!]
하지만 텔로리안이 앞서 주문을 시전하자 아엘타나르가 푸른빛 장막에 휩싸였다. 장막은 파도처럼 물결치면서 아엘타나르의 피부를 보호했고, 발로르의 화염검이 도달하자 폭발적인 기운을 방출해서 파괴의 불꽃을 꺼뜨렸다.
팅!
파괴의 불꽃이 꺼져버린 대검은 아엘타나르의 비늘을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왼손의 화염채찍이 뒤따랐지만 직전과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발로르는 고개를 돌려 마법사들에게 무시무시한 눈길을 쏘아냈다.
[7위계, 지옥의 로어]
[엘드리치 게이즈(Eldritch Gaze)]
[지옥의 공포 앞에 굴복하여라!]
대악마의 시선에 피격당한 마법사들은 지옥의 밑바닥을 마주했다. 캐스팅을 돕던 보조마법사들은 즉사하거나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나마 엘렌스트라는 간신히 의식을 붙잡았지만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텔로리안은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가장 처참한 지옥을 목격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19]
[네놈의 정체가 슬슬 궁금해지는데.]
천사조차 질겁할 지옥의 풍경을 목도했다면 필멸자라면 정신줄을 놓거나 적어도 두려움을 느끼는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마법사는······악마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로어마스터다."
[!]
"우리는 특이한 것이라면 뭐든지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한데 지옥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겁을 먹으면, 지옥을 어떻게 연구하겠나?"
그러니 지옥의 풍경을 보여준 일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덕분에 필멸자의 지식만으론 상상도 못하던 마법까지 배우게 되었으니까.
[신규로어습득 : 지옥의 로어]
[잔여 전승포인트 : 4]
"그럼 길었던 승부에 결판을 내보자."
로어마스터는 오른손에 지옥의 불길이 생성해냈다. 지옥불은 뾰족한 광선의 형태를 취해갔는데, 발로르가 화염이 통하지 않는 상대임을 고려하면 무익한 행동이었다.
"별빛에 이르는 불꽃이여!"
[고유 주문, 화염의 로어]
[스타라이트 파이어(Starlight Fire)]
[역경을 넘어 별을 향해!]
하지만 텔로리안은 지옥의 불길을 새롭게 빚어냈다. 인간이 스스로 별로 향하고자 피워낸 불꽃은, 기존의 화염마법을 이쪽 세상의 사람들이 떠올리지 못할정도로 뜨겁게 만들었다.
"나의 적들을 불태우라!"
[7위계, 지옥의 로어]
[헬파이어 레이(Hellfire Lay)]
[꿰뚫어라! 지옥의 화살이여!]
푸슝!
로어마스터의 손끝에서 지옥의 권능을 머금은 자주색 광선이 쏘아졌다. 광선은 은빛뱀이 내어둔 상처를 파고 들어가 발로르의 심장마저 꿰뚫었다. 일순간 검은 피가 솟구치며 발로르의 거체가 휘청거린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벨칸은 발을 맞추어서 발로르의 머리를 향해 도약공격을 가했다. 전투망치에 4대 원소가 모여들면서 막강한 한방을 준비한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은빛뱀도 깊은 숨을 들이쉬어 산성숨결을 뿜어냈다. 마지막으로는 루시펠레스까지 합세해서 강력한 암흑의 구체를 내던졌다.
마침내.
승부가 결정될 시간이었다.
13. 열세번째 연구 - 갓슬레이어(6)
발로르에게 강력한 공격이 쏟아졌다. 정령군주들의 워해머가 정수리를 강타했으며, 거성을 파괴할만한 산성브레스가 흉부를 녹였다. 또한 자주색으로 번득이는 지옥불 광선들이 그의 목덜미를 꿰뚫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발로르는 쓰러지지 않았다.
[이 정도인가.]
발로르는 담담히 말했다. 적들을 내려다보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굉장히 훌륭하게 싸웠다. 발로르의 상태는 인간으로 비유하면 갈비뼈가 부러지고 전신에서 피를 흘리는 중이다. 결코 가벼운 상처는 아니다. 단지 소멸에 이를만한 치명상도 아니었을 뿐이다.
[훌륭한 싸움이었다. 필멸자들이여,]
반면에 적들은 지금보다 위력적인 공세를 행하지 못한다. 그럴만한 힘이 남아있지도 않고, 적들이 누리던 선제공격의 이점이 사라졌으므로 일방적으로 당해주지도 않을테니까.
[대악마의 진정한 힘을 목도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4]
[지금이라도 투항할 생각은 없나?]
"나의 대답은 언제나같다."
[유감이군. 훌륭한 재주인데.]
발로르가 파괴의 함성을 지르며 흑염의 날개를 펼쳤다. 날개에서 뿜어진 화염폭풍이 벨칸을 날려버렸고 아엘타나르를 보호하던 바다의 망토를 불태웠다. 발로르가 뒤이어 휘두른 화염채찍에 휘감긴 은빛뱀은 고통스런 괴성을 지르며 땅바닥에 엎어졌고, 발로르가 연계기로 내지른 발차기가 그녀의 머리에 적중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악──!"
이에 은빛뱀은 거칠게 날아가서 벽면에 고스란히 처박혔다. 잔해더미가 떨어져 그녀를 뒤덮었다. 발로르는 화염채찍을 잡아당겨서 그녀를 폐허 속에서 끌어냈다. 텔로리안이 또다른 공격마법들을 퍼부었지만, 발로르는 그것을 몸으로 견뎌내며 은빛뱀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지략에 비해서 마법은 보잘것 없구나.]
텔로리안의 공격주문들은 분명히 위력적이었다. 발로르의 부관들이 맞았다면 중상을 입거나 소멸했겠지. 하지만 파괴의 대악마에겐 몸으로 견딜만한 공격에 불과했다.
[네놈의 애완용 뱀부터 처리해주마.]
발로르는 은빛뱀의 목덜미를 잡아올려서 얼굴을 주먹으로 연달아 후려쳤다. 그녀가 손목을 물던가 산성숨결을 뿜던가 개의치 않았다. 대천사들이 휘두르는 신성한 불길에 비하면 간지럽게 느껴질 뿐이었으니까.
[어린 로어마스터야. 네놈의 계책은 불멸자들의 기준으로도 완벽했다. 하지만 계책은 힘이 담보될 때에만 의미를 지니는 법이다.]
퍽!
퍽!
퍽!
타오르는 주먹이 은빛뱀의 얼굴을 연속해 강타했다. 은빛뱀의 어금니가 부러지고 눈알이 뭉개졌다. 발로르는 타격감을 즐기면서 상대를 내동댕이치고 발길질로 척추를 짓밟아부수었다.
[슬슬 끝내볼까.]
츠릉!
발로르가 화염검을 소환해서 양손으로 쥐었다. 한때 최고신이었던 존재를 파괴한다면 지금보다 높은 위격을 얻을테지. 비록 최고신의 신성은 고갈됐어도 영혼의 격은 그대로니까.
"정령군주들이시여어어어어──!"
그때.
재정비한 벨칸이 강력한 주술을──
촤륵!
그러나 발로르의 화염채찍이 한발자국 빠르게 날아갔다. 벨칸은 주술을 멈추고 몸을 날려서 채찍을 회피했지만 그걸로 목적은 달성됐다.
"!"
화염채찍이 벨칸이 서 있던 곳의 천장을 후려쳤다. 그러자 천장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벨칸이 전장에서 격리되었다.
[너와의 면담은 미루겠다. 노예장아.]
아엘타나르는 벨칸이 벌어준 시간을 이용해 상처를 치유했다. 그러나 발로르의 채찍으로 생긴 화상은 미약한 토착신의 힘으로 치유되지 않았다. 오히려 치유를 시도할수록 상처가 악화되어 고통이 더해졌다.
[한없이 영락했구나. 별빛의 여신이여.]
발로르가 대검을 들어올렸다.
포로를 베어내는 처형자처럼.
[너의 비참함을 끝내주겠다.]
"잠깐!"
중무장한 루시펠레스가 발로르의 길을 막아섰다.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아크데빌의 권능을 잃었지만, 스스로 발달시킨 캄비온의 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걸로도 충분히 강했다.
단.
필멸자들의 기준에서만.
"아까부터 부르는데 어째서 대답이 없지?"
[?]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인근에서 왱왱대던 파리가 있었다.
"게헨나를 다스리는 루시펠레스 대공이 지옥의 4왕자로서 지옥대원수 발로르에게 명하노라! 나의 결투신청을 받아들여서──"
파괴의 대악마는 육중한 거체를 숙여서 광대를 바라봤다. 녀석이 지껄이는 말은 무시했다. 들을 가치가 전혀 없으니까.
[광대야.]
그리고.
왼손을 내려서 중지를 튕겼다.
"?!"
루시펠레스는 사람의 손가락에 튕겨나간 벌레처럼 하늘로 떠올라 이곳저곳에 부딪치다 지면깊숙이 처박혔다.
"컥, 컥, 커허허어억······"
[광대가 전사들의 대화에 끼어들면 안된다.]
"나도······나도 전사야······"
[네놈이?]
으하핫!
으하핫!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네놈 말이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만.
[설마 네놈이 누리던 것들이 진정으로 네놈의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형제들과 암투를 벌여서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은 포상이라고? ]
············
[크큭, 크큭, 크큭, 크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루시펠레스의 암담한 표정을 목격한 발로르는, 싸움조차 미뤄두고 한없는 조소를 터뜨렸다. 덕분에 적들이 상처를 추스르겠지만 상관 없었다. 승리는 언제든 거머쥘 수 있지만, 극상의 부조리극을 즐길 수 있는 순간은 지금뿐이니까.
[이래서 아자라노스가 지옥의 제왕이군.]
발로르가 웃음을 멈췄다.
[나는 필멸자에게 공포와 파괴밖에 전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자라노스는 필멸자들의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구나. 같은 대악마로서 존경하지 않을수가 없다.]
이번 전투를 승리로 끝내고 지옥을 전복하려던 마음가짐을 고쳐먹는다. 역시 일곱지옥의 제왕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자라노스였다!
[제왕이 대공의 인장을 내려줬다고 진짜로 대공이 됐다고 믿은 광대라! 크하하하하하하핫!]
이윽고.
대악마가 로어마스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유희도 의도한 것이냐?]
"그렇다면?"
[감사를 표하지 않을수가 없구나! 으하하!]
발로르는 보면 볼수록 텔로리안이 마음에 들었다. 녀석은 신들을 속여넘길 지혜에 더해서, 신들을 웃길만한 예술감각까지 있었다.
[그대에겐 우리와 동등해질 자격이 있군.]
화륵!
텔로리안의 눈앞에 유황불이 솟구치며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바친다. 라고 말하면 된다.]
이것은 일곱지옥을 다스리는 지옥대공들이 스스로의 권능을 소모해서 만들어내는 계약서였다. 필멸자를 악마로 변이시켜주니까.
[로어마스터여! 바친다고 말하며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떠올려라. 그대의 그릇이라면 분명히 우리와 동격의 존재로 승천할 것이다.]
그것은 대악마가 표해오는 진정한 경의였다.
[로어마스터여! 우리와 함께 일곱지옥를 섬기면서 다원우주에 진정한 악을 전파하자! 그대라면 능히 지옥제왕의 구상을 현실에 구현시킬 계책이 있지 않겠는가!]
······텔로리안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해봤다. 자신이 보아온 모든 마법사들은 이러한 기회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거부할 것이다.
그보다 근사한 계획이 있으므로.
"·········바친다."
[좋다! 바로 그것······?!]
방금 대답했던 인물은 로어마스터가 아니었다. 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가던 광대지.
"야망을 바치고 마력도 바치겠다. 평생에 걸쳐서 습득했던 지식과 마법을 바치고 잡아먹었던 영혼들까지 바치겠다.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모든 것들도······"
죽어가는 캄비온이 부서진 천장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게는 더이상 잃을 것이 없었으므로, 거리낄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힘을 다오."
잊혀진 성왕은 루시펠레스의 맹세를 천상에 전달했다. 천상의 제왕은 캄비온의 말을 신뢰하진 않았지만, 선을 배우지 못한 자에겐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계율도 잊지 않았다.
[언약은 이루어지리라.]
그리하여.
전능한 존재가 강림했다.
[캄비온 -> 인간]
[질서 악 -> 질서 중립]
[Lv50 캄비온 -> Lv50 크루세이더]
루시펠레스가 눈부신 태양빛에 휩싸였다. 발로르는 허겁지겁 화염채찍을 쥐었으나 그것을 휘두르진 못했다. 전능한 존재가 너무나 강대해 대악마조차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니까.
[너는 이제부터 사악을 심판하는 검이고 암흑을 꿰뚫는 빛이로다. 그것이 너와 내가 맺은 계약이니 이를 단단히 기억하고 행하여라.]
그리하면.
너의 영혼에 구원이 있을 지어니.
번쩍!
광채가 사라지고.
"············"
방황하던 캄비온은 인간으로서 되살아났다. 그는 여전히 선을 알지 못했지만 악에 대해선 뿌리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으며, 태양신은 그러한 분노의 정당함을 인정하고 힘을 빌려주었다.
[연구진전 : 영광을 위한 승천]
[연구내용 : 선천적인 악성을 제거]
[연구단서 2/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35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5]
청원을 들어준 태양신은 아무런 개입도 없이 떠났다. 천상의 제왕은 아직까진 필멸자들의 자유를 존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필멸자들이 불러낸 악마들은 필멸자들이 치우는게 지당하리라.
[하! 최후의 희망마저 좌절된 모양이군!]
하지만 발로르는 천상의 제왕이 지옥과의 결전을 꺼려서 떠났다고 착각했다. 악마들은 결코 책임과 의무를 균등히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니.
[멍청한 놈들! 천상의 제왕은 세상의 파괴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다! 그래서 이곳까지 행차해놓고 성기사 한명을 만들었을 뿐이지.]
광대가 성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전세엔 차이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성기사도 나의 상대가 되진 못한다. 가족조차 모조리 베어죽인 미치광이 왕이 돌아오지 않고서야······]
그때 성기사의 허리춤에 걸린 장검이 성스러운 빛을 발했다. 이에 발로르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분명히 죽었던 녀석이건만?!
[────?!]
동시에.
검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게. 젊은이."
"············"
"이제부터 자네는 수많은 사악을 물리쳐야한다네. 우선 자네가 행했던 악행들을 되돌이켜 보는 일부터 시작하지."
이에.
성기사는 눈쌀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자식."
한때 대악마의 권능을 사용하던 성기사는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들었다. 튼튼할 뿐이던 강철검이, 강대한 성검으로 변모해있었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데려왔지?"
"글쎄······"
"말로는 우정이니 자유의지니 지껄였지만, 실은 지옥제왕을 무너뜨릴 장기말이 필요했을 뿐이겠지!"
이에 로어마스터는 곤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옥제왕같은 자식!"
"·········"
"속으론 웃음을 터뜨리고 있겠지! 빌어먹을 로어마스터! 빌어먹을 지옥제왕! 빌어먹을 성왕! 전부 천국에나 가버려라! 썩을 놈들아!"
[연구진전: 갓슬레이어]
[연구내용: 파괴신을 죽일 무기가 완성됨.]
[연구단서: 5/5]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2]
[레벨이 올랐습니다!]
[36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7]
[보상: 갓슬레이어 도면]
"지금은 네놈의 간계에 놀아나주마!"
성기사는 경악하는 대악마를 향해서 대담히 걸어갔다. 성왕의 영혼이 담긴 성검이 무시무시한 빛을 발하면서 대악마의 기운을 몰아냈다.
"나는 에르보니아의 리안칼이다."
성검을 휘두르자,
광채가 쏘아졌다.
"너희 악종놈들의 파멸이지."
14. 막간 - 라이트브링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