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네번째 연구 - 가뭄(3)
"선생님. 아버지가 이상해졌어요."
"?"
"저를 억죄던 외출규칙을 완전히 없애주셨어요. 오늘부턴 성내든 성밖이든 시간에 신경쓰지 않고 돌아다녀도 되는 거예요!"
철퇴백작은 벨라디아를 매우 엄격히 통제해왔다. 목줄이라도 걸어둬야 벨라디아의 광기를 그나마 억누를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철퇴백작에겐 대안이 없었겠지만 최고의 판단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딸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맞춤형 교육을 제공해야했어. 그랬다면 희생자는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책없는 통제와 잘못된 치료는 상황을 악화시켰을 뿐이다. 이제라도 상황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다행이었다.
"언제나 반지를 끼고 다니도록."
"네!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너희 아버지는?"
"아버지는 실망시켜도 괜찮아요!"
"·········"
부녀관계는 여전히 복잡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호전되고 있었다. 서로간의 신뢰가 쌓이면 미래엔 유의미한 변화가 있을지도.
'요즘 철퇴백작은 매일 트롤족장과 만나서 딸의 훈육에 대한 조언을 받고 있다.'
[교육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5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9점]
훈육에 대한 방법론을 통역해주며 나도 지적인 자극을 받았다. 결혼과 육아는 로어마스터로서도 전혀 알지 못하던 영역들이었으니까.
'결혼과 육아를 통해서만 얻는 지혜가 있는 모양이야. 내가 습득하진 못하겠지만······'
전생은 게임에 바쳤고 현생은 연구에 바칠 것이다. 누군가와 특별한 유대를 맺고 강화해가는 작업은 나의 강점도 관심사도 아니다.
"강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굶주림의 돌이 나타났어요!"
"으아아! 우린 모두 죽을 거야!"
기록적인 가뭄이 영지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져나갈 쯔음.
"각지의 영주와 촌주들은 모두 헤링턴 거성으로 집결하라! 백작 각하의 교시가 있다!"
재무관 우르반이 영지의 책임자들을 소집했다. 알현실이 수많은 봉신들로 발을 딛을 틈도 없이 가득 차자, 브리핑이 시작된다.
"자비로운 소백작께서 그대들을 구하실 방책을 준비하셨다. 트롤 산맥의 지하수를 끌어와 마을마다 공급할 것이다. 각지의 책임자들은 송수로 건설에 적극 협조하도록!"
벨라디아는 백작령의 공식적인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 이번 공사의 업적은 그녀의 몫이 되리라.
"텔로리안. 자네의 공적을 모두 남들에게 넘겨줘도 되는 것인가? 자네의 공적을 넘겨받은 나로서는 진실로 고맙네만······"
우르반은 난처한 얼굴로 갈색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내가 작성한 각본에서 공사의 기획자는 벨라디아고, 실행자는 우르반이었다.
"넘겨주지 않을 이유가 있나?"
"자네는 명성과 업적을 원하지 않은가?"
"얼마나 솔직한 대답을 바라는가?"
"음······"
우르반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텔로리안의 속마음은 때때로 빵맛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천재의 교만함과 마법사의 오만함이 합쳐지면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진실 농도는 절반으로 부탁하네."
"마법사는 대중적인 명성이 필요한 직업이 아닐세. 마법의 진가는 겉모습을 중시하는 이들에겐 결코 드러나지 않거든."
대중에게 마법사란 미래를 내다보고 손에서 불길을 쏘아내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혜를 갖춘 사람들은 알고 있다. 마법사의 진정한 힘은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능력임을.
"대중은 가르치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네."
"·········그건 그렇지."
"게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힘을 대단히 두려워하지. 그러니 대중은 마법사를 좋아할 까닭이 없고, 마법사도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네. 어차피 불가능하니까."
마법사는 남들보다 많이 알고 멀리 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것을 인정하진 않는다. 특히 신실한 사람일수록 인간의 지성에 뚜렷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겐 대중적인 인지도보단 자네나 철퇴백작처럼 깨어있는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네. 그래서 공적을 넘겨준 거라네."
전생이라면 주문쟁이가 손도끼 맞을 소리를 한다고 자평했겠지. 하지만 중세랜드의 밑바닥에서 굴러보며 확신했다.
'염소박이들은 계몽이 불가능하다!'
차라리 귀족들을 설득하는 방향이 훨씬 효율적이고 마음도 편하다.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서, 적어도 가르치면 알아듣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네. 텔로리안."
"나도 속내를 털어놓으니 기분이 풀리는군."
"자네의 말벗이 되어줄 수 있어서 다행일세!"
이윽고 건설현장에 바위트롤들이 모습을 나타나자 영지민들은 공포에 빠졌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들이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한다고?!
'이건 설득할 문제가 아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촌장들을 모아서 강의했을 것이다. 지금 찾아온 트롤들이 다른 트롤들과 어떤 면에서 다른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마법으로 그들을 교화했는지······
'그리고 현실의 장벽에 부딪쳤겠지.'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지식인들의 특권인 세상이다. 궁중마법사처럼 수상쩍은 사람이 나타나 설득해도 백성들은 결코 믿지 않으리.
"모두 주목!"
"······배, 백작 각하!"
완전무장한 철퇴백작을 향해서 영지민들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봉역의 존경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는 모범적인 군주였다.
"오늘부터 트롤들은 너희의 동료다.""·········?!"
"내가 손수 트롤들의 족장을 때려잡고 복속시켰다. 이들은 너희와 똑같은 봉신이니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라! 알겠나!"
예.
예에!
영지민들은 처음엔 철퇴백작의 명령에 반신반의했다. 철퇴백작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이 트롤을 복속시킨다는 소리는 이상했으니까.
"나른다! 돌덩이!"
"비켜라! 인간!"
"쌓는다! 돌무더기!"
"따른다! 대족장!"
"·········???"
하지만 바위트롤들이 얌전히 건설공사를 진행하자, 영민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서 자신들끼리 속삭였다.
'트롤들이 정말 우리와 함께 일한다고?'
'사흘째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트롤을 길들이는 게 가능했다고?'
'우리 영주님께서 그만큼 대단하신 게지!'
몬스터와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은 불편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당장 송수로가 필요하다는 현실이 불편함과 두려움을 잊게 만들었다.
"어이! 트롤 형씨!"
"부른다? 나를?"
"그래! 자네! 같이 새참이나 들지!"
하지만 그들은 함께 땀을 흘리며 서로의 존재에 적응해갔다. 인간들은 트롤을 자극하지 않는 방법을, 트롤은 인간의 문명에 뒤섞여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가져왔다! 오늘은! 선물!"
"호, 호랑이 고기?!"
"잘한다. 사냥! 나는!"
[연구단서 획득!]
[야수를 사람으로 4/5]
[경험치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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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포인트 20점]
덕분에 바위트롤들은 백작령의 영민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백성들은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불편하겠지만, 철퇴백작의 엄명과 현실적인 필요 앞에서 불만을 표하지 못하리라.
'실험은 성공적이군.'
트롤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몬스터와 사람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모든 지성체는 동등한 사람임을. 또한 사람 간에는 존중해야할 규범이 있음을 모두에게 인식시킬 것이다.
"그건 지나치게 독선적인 시선 같은데."
"반론을 들어보겠네. 우르반."
"인간은 동족 간에도 외모와 신분으로 차별하는 생물이야. 한데 엘프나 드워프처럼 외모가 유사한 아인종이라면 모를까, 트롤처럼 흉측한 괴물을 사람으로 여기게 하겠다고?"
우르반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단언하건데 자네가 목표를 이루려면 마법사왕들의 전례를 따르게 될 걸세. 거대한 마탑을 세워 인간의 정신을 헤집고 이종을 강제로 교배해 혼종들을 만들어야 할 테지. 또한 폭정에 대한 작은 반항도 허용해서는 아니 될 걸세. 모든 인류가 자넬 증오하게 될 테니."
우르반의 비판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 마법사들은 [사람]의 기준을 [지성]에 기반해 평가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이 그러한 기준에 동의하진 않을 것이다.
'정복의 시대에 인간들이 서부 대륙에 도착하면서, 이종족들의 흥망성쇄가 교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엘프와 고블린들이지.'
엘프와 고블린은 생물학적으로 중대한 공통점이 있다. 인간과 공통선조를 두어 이종교배가 성립하며, 선천적인 지성도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대하는 정복자들의 태도는 극히 달랐다. 엘프들은 인간 왕공들의 배우자가 되었지만 고블린들은 절멸되었으니까.'
본질적인 차이?
고블린은 흉하다.
엘프는 아름답다.
[지식(종족)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6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21점]
"텔로리안. 자네는 마법사인가? 인간인가?"
"인간 출신의 마법사야. 둘은 불가분이지."
"둘 중에 하나만 골라야한다면?"
"그건 난감한 질문이군."
텔로리안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에서 한명을 골라야한다는 뜻이잖나. 그걸 누가 택할 수 있겠나?"
우르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편이라네."
"·········그래?"
"어머니께선 술을 드실 때마다 나를 때리셨거든. 그때마다 너만 아니었으면 이따위 가정생활은 진즉에 포기하셨을 거라고 푸념하셨지."
의외의 사실.
유복한 집안 출신일텐데.
"나는 자네가 마법사 이전에 인간이 되어주길 바라네. 이종족이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갖추었어도 그들은 이종족이야. 인간보다는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일세.'
우르반은 전형적인 인본주의자였다. 인본주의를 국시로 삼는 제국에서 수학한 까닭일까? 아니면 원래 이종족에게 품었던 반감이 동조 집단을 만나며 강화된 것일까?
'하지만 우르반의 이념은 우르반이 결정한 문제다. 반면에 나는 우르반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고.'
자신은 이종족보다 인간에게 친근감을 느꼈지만, 비열한 인간보단 명예로운 오크를 좋아했다. 지성과 양심을 갖춘 자라면, 누구나 종족에 관계없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조만간 결정할 시간이 오겠군.'
가뭄이 끝나면 대홍수가 하트랜드를 덮쳐오리라. 하지만 이번 대홍수는 진흙으로 뒤섞인 강물이 덮쳐오는 홍수가 아닐 것이다.
'일단은 눈앞의 과제에 집중하자.'
잡념을 떨치고 수정구로 건설현장을 확인해보았다. 현장감독들을 지도하는 우르반이 손을 흔들면서 대답해왔다.
"텔로리안! 석재가 모자라네!"
"그토록 많은 석재를 준비했는데도?"
"그래! 트롤들의 건설속도가 자네의 예상보다 빨라서 공급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네."
건설현장에 나가보니 올골두골로 여족장의 맹활약이 눈부셨다. 지능이 20까지 올라간 덕분인지, 복잡한 건축도면도 손쉽게 이해하고 거기에 최적화된 지시를 내리고 있었으니까.
"반갑소. 올골두골로 여족장."
"어서 오소서. 잿빛현자시여."
트롤족장은 머리를 숙이며 양손을 펼쳐서 허공을 쥐었다. 레이디들의 예법을 따라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이젠 여남작이시지.
"······잿빛현자?"
"언제나 잿빛로브만 입으셔서 잿빛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다른 색채를 더욱 선호하시면 새로운 이명을······"
아니.
색깔은 문제가 아니고.
"나를 어째서 현자라고 부르시오?"
현자(Sage)로 불리기 위해선 현자 회의의 승인이 필요하다. 독립군주가 왕을 칭하려면 또다른 왕들의 승인이 필요한 것처럼.
"농민들이 나를 현자로 부르는 상황은 이해하오. 하지만 그대는 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이고 영지의 누구보다 지성이 탁월하잖소."
따라서 공식칭호가 현자로 굳어지는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취객들이 특정인을 왕으로 부르는건 문제가 되지 않아도, 귀족들이 특정인을 왕으로 부르면 분란거리가 되는 것처럼.
"아. 죄송합니다."
꾸벅.
서슴없이 고개를 숙이는 올골두골로.
"제가 학식이 미흡해 회색현자님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현자님을 그룬다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룬다크?
깊은바위라?
"예. 현자라는 관용어로 사용할 겁니다."
"·········나는 현자가 아니라니까."
현자 회의에 입성하는 조건은 2가지다. 50레벨 이상의 마법사일것. 4개 이상의 로어를 습득했을 것. 최소한 당대 제일의 마법사로 불릴만한 수준은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갸웃.
올골두골로가 의아해한다.
"당신께선 몬스터와 다름없던 저희 트롤들을 지성체로 진화시키셨습니다. 덕분에 서로를 잡아먹던 이들이 공존하는 방법을 익히고 있습니다. 이런 위업을 이루신 분께서 현자가 아니시라면, 대체 누가 현자입니까?"
[연구단서 획득!]
[야수를 사람으로 5/5]
[연구가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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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번째 연구 - 가뭄(4)
올골두골로의 대답에선 문명탄생의 징조가 엿보였다. 사회화 이전과 이후를 야수와 지성체로 나누었고, 내가 가르친대로 서로 다른 지성체간의 공존을 긍정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성에 대한 연구에 진척이 생겼다.'
[기본보상: 정신의 로어]
[선택보상: 정신조작 향상]
────
◆정신조작 (마법, 고유)
: 당신은 여족장 올골두골로의 정신을 조작해 지성을 일깨웠습니다. 특이표본을 통해 주문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1번째 심화연구 : 집중화
- 올골두골로같은 특이표본을 만드는 방향으로 정신조작을 심화시킵니다. 소수의 초인들을 양성하는데 유효한 연구전략입니다.
■2번째 심화연구 : 분산화
- 다수의 평균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정신조작을 심화시킵니다. 종족 단위의 진화나 각성을 촉진하는데 효과적입니다.
────
2번.
분산화를 선택한다.
'이제 평범한 개체에게도 정신조작을 가할 수 있다. 올골두골로를 따르는 바위트롤들의 평균적인 지능을 올릴 수 있겠군.'
[마법(정신)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16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22점]
나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바위트롤들에게 정신조작을 사용했다. 그러자 녀석들의 우둔한 화법이 눈에 띄게 변모했다.
"반갑소. 인간들."
"우린 그룬다크에게 깨우침을 받은 이들."
"말하자면 텔로리안님의 제자이지."
······
나는 너희를 제자로 거둔 적이 없는데?
"인간 여러분도 지성체들의 공존을 꿈꾸고 계신, 그룬다크의 바램을 아셨으면 좋겠소!"
────
◆계몽된 바위트롤(질서 중립)
Lv15 몬스터(정예)
힘: 25
민첩: 10
체력: 25
지능: 12
직감: 16
마력: -
◆특성
[초재생]
[바위피부]
[화염취약]
[정신조작(지성화)]
────
6에 불과하던 지능이 12까지 오르며 가치관이 부여되었다. 야생동물에겐 [가치관]이 없음을 감안해보면······
'몬스터가 사람이 되었다.'
이걸로 바위트롤들은 지성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이 생겼다. 역시 [정신]은 가치관을 형성하는 [지성]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정신의 로어를 깨우치면서 정신계열 주문을 익히게 되었다. 1위계 가성비로 꼽히는 [슬립]을 비롯해 3위계 주문인 [기어스]까지 배웠군. 이제 마법으로 생명체의 정신에 간섭할 수단이 생겼다.'
"헛둘! 헛둘!"
"모두 열심히 노동하세!"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회색현자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트롤들은 가르쳐주지도 않은 명언을 내뱉으며 공사를 서둘렀다. 트롤들이 열심히 일하는데 자신이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리.
[신규로어 획득 : 대지의 로어]
[당신은 대지의 기운을 주문으로 엮어내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대지(Earth) 마법은 자연물을 이용하는데 특화된 형태입니다.]
15레벨.
4위계 주문이 개방되는 레벨이다.
마법진의 보조를 받지 않더라도.
"솟아올라라!"
[4위계, 대지 주문]
[스톤 쉐이퍼(Stone Shaper)]
[대지를 조각하라!]
[대지의 로어]에 속한 [스톤쉐이퍼]로 바위를 깎아서 석재로 변환하고서 [비전의 로어]를 개방해 [염동력]으로 자재를 운반했다. 쉬는 시간에는 수정구로 건설현장을 꼼곰히 점검했다. 덕분에 2주도 되지 않아 영지 전체를 연결하는 송수로가 형태를 드러냈다.
"텔로리안. 질문이 있다네."
"?"
"도면의 설계자가 누구인가?"
우르반은 송수로의 정교함과 튼튼함에 놀라워했다. 50만이 거주하는 영지에 송수로를 설치하는 대공사. 제국의 공병장교들을 데려와도 도면작성에만 3개월은 걸릴 것이다.
"공사를 기획하면서 그렸다네."
"?"
"기왕이면 전문건축가를 초빙하는 방향이 좋았겠지만 가뭄이 닥쳐왔으니, 우선 내가 건축 서적을 읽고서 졸속으로 작성했다네."
[건축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레벨이 올랐습니다!]
[16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8점]
"······자네의 지성은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하는군. 대부분의 드래곤들도 범접하기 어려울 테고, 그나마 고대의 마법사왕들이나 자네에게 비견해볼만 하겠군."
어쨌든 트롤산맥의 지하호수와 헤링턴 영지를 연결하는 대공사는 한달만에 끝났다. 텔로리안의 마법과 트롤들의 괴력. 우르반의 현장감독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마나의 빛이여."
[3위계, 비전 주문]
[아케인 블라스트(Arcane Blast)]
[마나여, 몰아쳐라!]
콰앙!
텔로리안의 마법지팡이에서 뿜어진 충격파가 수로를 폐쇄하던 지지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거센 물길이 지하터널로 콸콸 쏟아지다가 송수로를 지나쳐 각지의 마을로 공급된다.
"오오오오!"
말라버린 우물이 차오르고 생기를 잃었던 들판이 생명을 되찾는다. 기력을 잃었던 아이들이 물폭탄을 맞으면서 까르르 웃는다.
"벨라디아 소백작님의 자비에 감사하라!"
"위대한 철퇴백작님의 위엄을 찬미하라!"
"""만세! 만세! 만만세!"""
영민들은 헤링턴 백작가의 지도력을 찬양했다. 성직자들은 천상의 신들에게 감사기도를 올렸고 영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정보에 민감한 이들은 철퇴백작이 새롭게 영입한 궁정마법사를 눈여겨보았다.
"이번에 보니 벨라디아 영애가 의젓한 소백작이 되었더군. 소문대로 궁정마법사가 영애의 불치병을 깨끗이 치유해준 모양이다."
벨라디아가 앓던 불치병의 정체는 불명이었다. 그렇지만 마지스터들도 해결하지 못했던 질병을 텔로리안이 해결했다는 소식만큼은 왕국을 넘어서 하트랜드 전역에 퍼져나간다.
"한데 이제는 가뭄까지 해결했다고?"
"그뿐만이 아닐세. 텔로리안은 가뭄을 해결한 공로를 후원자에게 돌렸다더군. 주문쟁이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충직함과 겸손함이지!"
가뭄을 해결하는 수완을 지닌 마법사는 간혹은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의 공로를 주군에게 돌리는 마법사는 처음 보았다!
"우리 가문에도 저런 마법사가 필요한데!"
"자네는 마도대학의 수석졸업자라고 큰소리를 떵떵 치더니, 어째서 텔로리안처럼 훌륭히 가뭄을 처리하지 못한단 말인가······?!"
덕분에 헤링턴 백작령과 똑같이 기근에 시달리는 인근 영지의 자문마법사들은 [나는 텔로리안이 아니오!]를 연발해야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분수가 샘솟는 연회장에서 철퇴백작의 호탕한 웃음이 울려퍼졌다. 한껏 멋을 부린 벨라디아는 포도알만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착용하고 참석해, 연회를 한층 아름답게 빛내주었다.
"선생은 우리 헤링턴 가문의 보배요!"
"실로 완벽합니다. 궁중마법사님!"
"어떻게 2주 만에 이런 대공사를!"
백작은 텔로리안의 술잔에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그렇지만 회색로브를 입은 텔로리안은 딱딱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남았는가? 선생?"
"이번 가뭄은 하트랜드를 상징하는 아스테르 강가가 메마를 정도로 극심했습니다. 과연 가뭄이 하트랜드에만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이에 철퇴백작의 경각심이 깨어났다. 비옥한 하트랜드가 이러한 가뭄을 겪을 정도였다면, 변경지대 건너편의 대황야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당장 대비해야합니다."
굶주린 오크들의 침공을.
뒤이어 벌어질 대재앙들을.
* * *
대황야는 명칭만 들어선 아무도 살지 못할 황무지로 들린다. 실제로 이곳은 지도를 작성하러왔던 드워프 탐험가들에겐 죽음의 불모지였다. 태양은 뜨겁고 강줄기는 메말랐으니.
하지만 그것은 대자연을 착취할 욕심만 가득한 드워프들의 편견이다. 대자연에서 나고 자란 현명한 오크들은 이곳의 숨겨진 풍요로움을 알고 있다. 때문에 오크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일컬어 풍요의 골짜기라고 부른다.
"대족장 벨칸."
"정찰 결과를 보고하라. 전사장 블랙터스크."
"독전갈 오아시스까지 말라버렸소."
하지만.
이젠 죽음의 골짜기가 되었다.
"이걸로 확인이 되었겠지. 대족장."
"·········"
"대자연은 우리 종족을 저버렸고 조상들은 후손들을 보호할 능력이 없소! 그러므로 우리가 대가뭄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뿐이오."
쿠웅!
검은 송곳니가 돋아난 거구의 오크가 발을 구르자 막사 전체가 흔들렸다. 가장 용맹한 전사조차 움찔할 투지가 사방을 뒤덮는다.
"하트랜드를 정복하는 것이오!"
"침략전쟁은 잘못된 일이다."
"대족장! 애초에 비옥한 하트랜드는 우리 오크들의 것이오! 인간들이 비겁한 술수를 사용해 우리를 황야로 내쫓았을 뿐이지! 이제 인간들이 저지른 죗값을 돌려줄 시간이오!"
대족장 벨칸은 지혜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의 오크였다. 많은 오크들은 대족장이 무르다고 여겼으나 벨칸은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흠."
다만 신중할 뿐이었다.
블랙터스크도 그걸 알고 있었고.
"인간들의 방어선이 두텁다."
"흥! 그래서 앉아서 굶어죽을 것이오?"
"그러니 기만책을 사용해야지."
"그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오!"
"자네는 전쟁을 주장했다. 결투가 아니라."
"·········!"
벨칸은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중후한 목소리엔 거역하기 힘든 권위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자네는 전사가 아닌 군인이 되어야한다. 전사는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싸우는 사람이지만, 군인은 의무를 지키고자 싸우는 사람이다. 차이를 알아듣겠나?"
······복잡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블랙터스크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조상들의 속삭임조차 귀담아듣지 않는 사내였다.
"그래서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이오?"
"개전에 앞서 준비할게 있다는 뜻이지."
대족장은 3개의 손가락을 펴보였다.
"첫째. 명분."
"명분은 얼어 죽을!"
"둘째. 내부 협력자."
"비겁한 이간책은 필요 없소!"
"셋째. 외부의 동맹군."
"우리 오크들은 혼자서도 강력하오!"
"·········"
대족장 벨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돌대가리들이 주도권을 잡았으니, 자신들이 하트랜드를 내주고 황야로 쫓겨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세대에는 다를 것이다.'
사막오크들을 통치하는 대족장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남몰래 하트랜드를 수복할 준비를 해왔다. 이제 핍박받던 자들이 들고 일어나 억압하던 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을 것이다!
'오만한 인간들은 목도하리라!'
공포의 그린타이드를!
대지를 뒤덮는 녹색물결을!
'그렇지만.'
인간들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만만한 놈들이었다면 풍요로운 하트랜드를 뺏기지도 않았겠지. 그러니 최대한 놈들은 분열하고 자신들은 집결할 계기가 필요했다.
'······좋은 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겠어.'
대족장 벨칸은 평소에 고깝게 굴던 장로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어차피 다가올 대전쟁에서 늙은이들은 많이 필요하지 않을테니까.
* * *
2주 뒤.
에스실의 왕궁.
"······그래서 저희 사막오크들은 가뭄으로 멸종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부디 과거의 악연을 너그러이 잊어주시고 대왕다운 자비를 보여주시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에스실 왕국의 주인이자 하트랜드의 동쪽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통치자, 관대한 다일렌 3세이시여."
거동조차 힘들어 보이는 늙은 오크들이 백조왕좌의 소년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절을 바쳤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너희 말이야."
오크족에 대한 소년왕의 사무친 원한과.
"우리 아버지를 국밥으로 만들어먹었지?"
"그건 저희가 아니라 산악오크들──"
"여봐라! 주방장!"
골수까지 감염시킨 증오를.
"저놈들을 국거리로 만들어 빈민가의 백성들에게 나눠주어라! 참! 창자는 소세지로 만들어서 짐의 식탁에 진상하도록!"
사절단은 최후의 만찬이었다.
평화의 시대에게 주어진.
5. 다섯번째 연구 – 로드릭 헤링턴(1)
소년왕이 오크사절단에게 베풀었던 특별한 환대는 하트랜드 전역을 뒤집어두었다. 사절단을 잡아먹는 행위는 야만인들도 고개를 뒤흔들 행위였지만, 대부분의 왕국인들은 소년왕의 환대를 통쾌히 여겼다.
"으하하하! 우리 국왕께서 깡이 대단하시군!"
"어린 소년이신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복수를 행하실 정도로 성장하셨군! 에스실 왕국 만세! 다일렌 국왕 폐하 만세!"
중부인들은 수백년에 걸쳐서 오크들과 투쟁하면서, 오크에 대한 원한이 골수까지 스며들었다. 산악오크든 사막오크든 좋은 오크는 죽은 오크뿐이란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죽어라! 괴물!"
"너희 오크놈들에겐 이게 답이에요!"
"시체는 똥간에 던져버려라!"
"푸하하하하하하하! 꼴좋구만!"
사절단을 마주한 변경령의 영주들도 국왕과 똑같은 선택을 내렸다. 용맹한 알랑송은 사절단의 목을 손수 베어 광장에 효수했고 우아한 바르켄은 사절단을 거세해 광대로 만들었다.
"············"
"대족장의 사절단이 자비로운 헤링턴 백작 각하를 뵙나이다. 저희는······"
그래서 알현실에 입장한 사막오크 사절단은 공포에 떨었다. 다른 영주들에게 향했던 동포들의 운명을 전해들었으니까.
"우선."
철퇴백작은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팔걸이에 턱을 괴었다. 가증스런 돼지들이 자신의 궁정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짜증났다.
"물과 소금부터 들이키도록."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감은 영주로서의 의무에 앞서지 못한다. 사절을 해쳐서 대대손손 내려온 헤링턴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만 너희들과 식사를 하진 않겠다."
"············"
"너희도 나의 궁정에서 환대를 기대하진 않았을테지. 본래 너희의 알현도 거부하고 황무지로 내쫓을 생각이었지만······딸아이와 텔로리안 선생의 의견은 제법 다르거든."
철퇴백작은 변경령에서 명성을 떨치는 강대한 영주. 국경을 범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사막오크들과는 젊은 시절부터 악연이 많았다.
"·········"
"늙은이들의 원한으로 젊은이들의 미래가 막혀서는 아니되겠지. 네놈들에게 기회를 주어볼테니 어디 한번 잡아보아라. 그럼."
머리가 새하얀 거구의 기사가 알현실을 떠났고, 흑발을 단정하게 묶은 젊은 여기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름답고 강했다.
"아름다운 소백작님을 뵙습니다."
"의전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예."
젊은 오크들은 소백작의 외모에 눈을 빼앗겼지만 장로들은 소백작을 뒤따라오는 청년 마법사를 눈여겨봤다. 진정 결정권을 지닌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으니까.
"너희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영지도 가뭄을 겪어서 사정이 넉넉하진 못하다. 하지만 미운정도 고운정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그대들을 위해서 식량을 내어주겠다. 다만 우리도 제시할 조건이 있는데······"
벨라디아는 평화조약과 공물을 대가로 식량을 약속했고, 사막오크들은 관대한 조건에 고개를 조아렸다. 장로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평화조약을 준수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럼 평화를 기념하는 만찬에 너희를 초청하겠다. 이번 일을 계기로 사막오크들과 헤링턴 가문이 평화를 누리길 기원하마."
이어진 만찬에서 오크들은 융성한 환대를 받았다. 향신료가 잔뜩 버무려진 고기를 대접받았고 소백작과 나란히 앉아 정세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만찬이 끝나자 사냥제가 열렸으며, 벨라디아는 남다른 무위를 선보였다.
"오오! 단칼에 쌍두오우거의 목을 치다니!"
"허어! 인간 여자들은 나약한 울보들인줄 알았는데, 저러한 걸물도 있었단 말인가?"
오크 사절단은 소백작의 뛰어난 무예에 감명을 받았다. 아버지를 닮은 칼솜씨는 일품이었고 남다른 맹렬함은 전사다웠다.
"보이시오?"
"철퇴백작이 훌륭한 후계자를 두었구려."
"그대들의 존중을 받기에 충분한 분이지."
"인정하오."
사막오크들은 강자만을 존중한다. 혹독한 대황야에서 생존투쟁을 거치면서 생겨난 전통.
"그대들이 죽을 자리를 찾아온걸 알고 있소."
"───!"
"구호사절단의 비참한 죽음은 가장 온건한 전사들도 격노하게 만들거요. 그럼 대족장의 깃발 아래로 모든 부족들이 집결할테지."
그뿐만이 아니다. 사막오크들의 침공을 틈타서 또다른 그린스킨들도 궐기할 것이다. 식인을 즐기는 산악오크들, 야생으로 쫓겨나 퇴화된 숲고블린, 언제나 굶주린 트롤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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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대한 녹색물결이 왕국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면, 다음에는 인간들에게 터전을 잃었던 수많은 아인종들이 함께 궐기할테지. 하트랜드 전역이 전쟁터로 변모하는 것이오."
그린스킨들의 대대적인 침공과 이종족들의 대대적인 궐기. 이것이 중부를 덮쳐올 [삼두룡의 강림]의 첫번째 머리인 [그린타이드]다.
"그게 대족장의 계산이잖소. 그렇지?"
"·········"
오크장로는 무뚝뚝한 기색으로 침묵을 지켰다. 역시 인간들의 역량은 만만치 않았다.
"앞으로 2년."
"·········2년?"
"앞으로 2년은 대족장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을테니, 대족장도 나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시오."
대족장 벨칸은 이종족 플레이에선 든든한 도움을 제공하는 거물급 후견인. 그렇지만 이번 회차에선 [인간]을 택했으니 적이다.
"그리 전하리라. 인간의 현자여."
"그럼 만찬을 편히 즐기시오. 돌아갈 때는 우리측 기사들이 국경까지 호위해줄테니."
펄럭.
회색망토를 휘날리며 돌아선다.
"참."
"?"
"전쟁을 수행하면서 발생하는 잔인함은 최소화하길 권하겠소. 흥분한 전사들을 통제하는 일이 쉽진 않겠지만, 북부와 제국의 참전을 막으려면 그게 유일한 방법이오."
······텔로리안의 냉철한 눈빛을 바라본 장로는 직감했다. 눈앞의 젊은 마법사야말로 고향을 수복하는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되리라고.
"장로 카트리그."
"!"
자신의 이름을 어찌 알았지?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았는데?
"나는 인간이지만 당신들의 입장도 이해하는 편이오. 어차피 우리 필멸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흑과 백보단 회색으로 이뤄져있지."
대부분의 다툼은 입장의 차이로 벌어진다. 이번 전쟁도 다르지 않다.
"길고 잔인한 전쟁이 다가오고 있소."
"············"
"맹렬한 모래폭풍 속에서도 그대들의 길잡이별을 잊지 않기를."
* * *
2주 뒤.
대족장의 막사.
"······라고 전하더구나."
"수고하셨습니다. 카트리그 어르신."
"내가 더이상 도와줄 일은 없느냐?"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족장 벨칸은 직접 카트리그를 집으로 모셔다주었다. 이후엔 으리으리한 대족장의 막사로 돌아와 텔로리안의 전언을 곱씹어본다.
'잔인함을 최소화하라?'
불가능하다. 지금 다가오는 전쟁은 이권투쟁이 아니라 생존투쟁이다. 심지어 종족과 종교가 다른데 상호간의 원한도 가득하니까.
'하지만 철퇴백작은 우리를 유일하게 도와준 영주다. 인간들이 철퇴백작의 절반만 해주었어도 전쟁은 막을 수 있었어.'
벨칸은 사막오크들의 대족장으로 추대된 이후로 전쟁만큼 평화도 준비해왔다. 인간들이 귀히 여기는 물품들을 모아서 교역도 시도해봤고 요술쟁이들을 초빙해 식수공급을 안정시킬 방안도 마련해봤다. 허나 번번이 실패했다.
'인간 군주들의 방해 때문이었지.'
인간들은 항상 자신들을 비웃고 무시하고 기만했다. 심지어 간절한 마음으로 보냈던 사절단을 처참히 죽였어? 이건 끝장을 봐야한다.
놈들이 전부 죽든가.
우리가 전부 죽든가.
'중간은 없다.'
그래서 중부의 모든 아인종들과 거사를 획책했다. 우리가 앞장설테니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우리들의 정당한 고향을 되찾자고.
'·········그런데.'
승산이 얼마나 되지?
'이건 패배해도 되는 전쟁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만 달린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가족만 달린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부족만 달린 문제도 아니다.
종의 존속.
오크 문명의 생존.
그것이 달려있는 문제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애매하다.'
에스실 왕국에는 실전을 경험해본 귀족들이 드물다. 그러니 변경의 영주들만 끝장내면 나머지는 문제가 아니다. 중부의 다른 인간국가들은 다른 아인종들이 처리해줄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북부와 제국이다.
'북부와 제국은 강대하다. 놈들이 힘을 합쳐서 중부로 진격해온다면, 용족을 포함한 모든 비인간들이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없어.'
북부와 제국이 힘을 합칠 확률은 절반..
'동전 던지기에 종족의 존속을 걸어야 하는가?'
만약 걸지 않는다면 어떠한 대안이 있는가? 이미 비축해둔 물자는 바닥을 드러냈고 전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제 3안이 필요하다.'
완전한 절멸전도.
완전한 화평책도 아닌.
'텔로리안이라고 했었지.'
조언을 전해준 마법사는 진즉에 계산이 끝났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북부와 제국의 개입을 늦추려면 잔혹 행위를 줄이라고 했던 것이고.
'······녀석은 무엇을 바라고 조언해줬지?'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녔더라면, 처음부터 동족들과 힘을 합쳐서 자신들의 침공을 막는 쪽이 합리적일텐데?
'혹은 동족이 어찌되든 자신의 뱃속만 채우면 되는 파렴치한인가? 그럼 우리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알아봐야지.
"카트리그 장로님."
"무슨 일인가? 대족장."
"수고해주실 일이 생겼습니다.
서신과 함께 정령석을 건넨다.
바람의 기운이 일렁이고 있는.
"이걸 헤링턴 백작령의 궁정마법사 텔로리안에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사막오크들의 명운이 걸린 안건일지도 모릅니다."
[대족장을 설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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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포인트 6점]
* * *
같은 시각.
헤링턴 거성의 회의장.
"국왕의 소집령을 거역하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막오크들과의 일전은 헤링턴 영지의 발전에 도움이 안됩니다. 소집령을 거부하고 내실을 다지는데 집중해야합니다."
텔로리안의 파격적인 조언에 자문회원들의 말문이 막혔다. 헤링턴 백작은 에스실 국왕의 봉신이었다. 그것도 외적에 맞서 변경을 수호할 의무를 지고 있는 변경백.
"그건 반역 행위네만."
"젊은 시절에 이미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땐 반역이 아니라 신성한 권리를 지키려는 정의로운 투쟁이었지. 국왕이 홀로 제정한 법률을 제후들에게 강요하려고 했으니까.'
서방대륙에서 국왕과 제후는 쌍무적인 계약관계였다. 국왕은 제후들의 충성을 받지만 고유한 권리를 존중할 의무가 있었다.
[전통에 대한 전승을 획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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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레벨까지 40/100]
[전승포인트 7점]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
철퇴백작이 단단한 눈빛으로 말했다.
"명분을 따져보면 변경백은 외적의 침공에 맞서기 위한 국왕의 소집령을 거절할 권리가 없네. 실리를 따져보면 모든 귀족들이 오크들과의 일전을 원하고 있네. 우리만 전쟁에 불참하면 전후에 돌아올 보복이 무시무시할거야."
오랜 평화는 에스실 귀족들의 군사적 역량을 감퇴시켰으나 군사적 영광에 대한 열망은 증대되었다. 진짜 전쟁을 겪어본 세대가 사라지고 승전을 확신하는 철부지만 늘어난 것이다.
"전후 보복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노골적인 반역 행위를 해두고?"
"제가 보았던 미래를 말씀드리지요."
전한다.
자신이 보았던 미래를.
눈앞에 닥쳐온 파멸을.
5. 다섯번째 연구 - 로드릭 헤링턴(2)
왕국군은 대패한다.
영주들은 전멸한다.
소년왕은 전사한다.
"이것이 제가 보았던 미래입니다."
"············"
텔로리안의 발언에 회의장의 참석자들이 일제히 눈쌀을 찌푸렸다.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예언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니.
"근거가 있는 이야기요?"
콧수염을 기른 젊은 기사가 대단히 불만스럽게 말했다. 관문수비대장 랑트뢰유. 부친이 사막오크들의 노략질을 막다 전사했다.
"왕국의 병력은 양과 질에서 오크들을 압도하오. 거기다 우린 엄연한 방어자의 입장이오."
랑트뢰유가 대놓고 비웃음을 드러냈다.
"혹은 군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책상머리 샌님이라서 방어자의 이점을 모르실수도 있겠군. 이해하오! 회색탑의 현자께서도 병법을 배운 적은 없을테니 말이오! 하하하하!"
랑트뢰유는 동료들의 호응을 기대하며 텔로리안을 비웃었다. 하지만 다른 가신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절반은 텔로리안의 진실성을 믿었기에. 절반은 철퇴백작이 무서웠기에.
"·········"
적막.
텔로리안은 랑트뢰유의 도발을 완전히 무시했고, 나머지 가신들은 랑트뢰유에게 눈총을 주었다.
"착석하게. 젊은이."
"·········"
철퇴백작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백작의 성격을 고려하면 매우 유한 태도였다. 그들이 알던 백작이라면 랑트뢰유의 안면에 묵직한 물체를 던졌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랑트뢰유가 착석했지만 좌중은 여전히 침묵했다. 끔찍한 예언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텔로리안 선생."
철퇴백작이 침묵을 깼다.
"젊은 랑트뢰유는 입으로 똥을 쌌네만 때때로 똥에도 황금이 숨겨진 법이지. 나는 자네의 예언을 믿네. 적잖은 가신들도 그럴거야."
그들은 목도했다.
텔로리안의 마법을.
"자네는 딸아이의 불치병을 치료하고 트롤들을 길들였으며 가뭄까지 몰아냈지. 각각의 과업은 분명히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어."
그렇기에 믿는다.
텔로리안의 예언도.
"하지만 그건 우리만 아는 이야기야."
하지만.
다른 영주들도 믿지는 않을 것이다.
"걸핏하면 철퇴부터 휘두르던 변경백 로드릭이, 궁정마법사가 패전을 예언했다는 이유로 국왕의 소집령을 거부했다."
평판이 훼손되겠지.
영주에겐 치명적이다.
"봉신들은 나의 결정에 불만을 품을 것이고 다른 대가문들은 우리 헤링턴 가문에 분노할걸세. 또한 왕실도 배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야."
국왕부터 농노에 이르는 왕국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하리라. 그건 오만한 영주가 견딜 수 있는 미래가 아니었다.
"나는 참전할걸세."
"그렇습니까."
"대신."
철퇴백작은 힘차게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벨라디아를 닮은 청녹색 눈동자로.
"이번 결정이 영주로서 내리는 마지막 결정일세. 나는 국왕 폐하의 부름에 응해서 다시는 영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일세."
헤링턴 백작가의 로드릭.
소년왕 다일렌의 부름에 응하다.
* * *
얼마 뒤.
영주의 집무실.
"아버지. 이건 바보짓이에요."
무장한 벨라디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부친을 노려봤다. 패배가 예정된 전투에 참전을 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바보짓이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럴리가? 너를 고쳐준 은인인데."
"그럼 뭐가 문제에요?"
벨라디아는 책상을 양손으로 내리치며 시선을 마주봤다. 성별과 외모를 빼면 여러모로 닮은 얼굴이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부녀같다.
"벨라디아. 사내들에겐 예정된 패배를 알고도 맞서야하는 싸움이 있다. 사랑과 의무, 무엇보다 명예가 걸린 순간들이 그러하다."
아버지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정한 사내라면 그런 싸움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한다. 앞으로 네가 만날 구혼자들도 그러한 사람이면 좋겠고."
······벨라디아의 냉담한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도저히 로드릭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을 위해서 어째서 죽으러 가는가?
"벨라디아. 너는 여자로 태어났지만 영지를 통치할 제후이며, 기사 작위는 없지만 어느 기사보다 훌륭한 무예를 지녔다."
로드릭은 손을 떨고 있는 벨라디아를 바라보았다. 딸아이는 참전결정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 하지만 딸아이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명예가 없으면 영주는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지도자에게 제일 중요한 덕목은 명예와 용기다. 용기란 실패가 뻔해보여도 뜻한 바를 꺾지 않는 의지이며, 명예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신의다."
로드릭은 영주의 덕목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전장에선 언제나 선두에 서야하고 모두가 꺼리는 일도 필요하다면 행할 지어다. 참모는 정직하고 용맹한 자들만······
한데.
벨라디아가 말을 끊는다.
"잠깐만요."
"지금 가주가 말하고 있잖──"
"그래서 병력은 얼마나 데려가실 거예요?"
"·········그게 무슨 의미냐?"
"가급적 적게 데려가셨으면 좋겠어요?"
······헛웃음이 나왔다. 딸아이의 싸늘한 얼굴은 아버지가 죽으러 간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스스로의 안위에 끼칠 영향에 불만을 품은 것이지.
"길고 잔인한 전쟁이 다가온데요."
"············"
"전쟁에서 저를 보호하려면 강력한 군대가 필요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군대를 전부 데려가면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
화가 났다.
"지금 아비가 죽으러 가는데──!"
"아빠가 죽는다고 저도 죽어야하나요?"
"하."
하하하.
하하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병력이 사라지면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들겠죠. 그들은 우리의 영토와 재산을 뺏어갈 것이고, 종국에는 저까지 원할 겁니다."
벨라디아는 날선 눈빛으로 로드릭을 바라보았다. 이빨을 드러낸 살쾡이처럼.
"아버지는 제가 영지를 노리는 불한당과 강제로 결혼하길 바라세요? 그것도 아니면 오크들이 돌려쓰는 노리개가 되길 바라시나요?"
왕국 좆까.
명예 좆까.
"경고를 해줘도 알아먹지 못하는 멍청이들은 알아서 뒈지라고 하세요. 저는 트롤보다 멍청한 꼬맹이를 왕으로 따르진 않을 거니까요."
서릿발 같은 분노를 토해낸 벨라디아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동시에 자신을 돌봐준 아버지에게 품었던 일말의 애착도 내려놓았다.
"있잖아요. 아버지."
"············"
"저도 좋은 딸이 되고 싶었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무언가 마음이 움직인 걸까?
"아직도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동화가 기억나요. 특히 공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죠."
백작부인은 벨라디아의 돌 같은 심장도 따뜻하게 데울 온정을 베풀었다. 그래서 벨라디아도 나름대로 어머니에게 보답코자 노력했다.
"······하지만 어머니께선 제가 보낸 선물들을 소름끼쳐하셨어요.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께서는 저를 두려워하게 되셨지요."
거부당했다.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어요. 아시죠?"
"······원래 태양신의 신부가 되길 원하던 여자였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끔찍하게 여기던 여자였으니까."
철퇴백작 로드릭의 삶은 피와 강철만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분이 저를 어떻게 보셨겠어요?"
"·········"
"처음엔 어머니도 저를 정성껏 지도해보셨지만, 그분도 결국엔 오랜 시간이 흐르자 지쳐버리셨죠. 어머니께선 저를 교단의 이단심판부에 고발하려고 하셨어요. 악마가 씌였다면서요."
작고 연약한 짐승들을 죽이면서 깔깔 웃는 소녀라면 악마가 깃들었다고 판단할 근거는 충분하다. 그런 혐의로 이단심판부에 끌려가면 황녀여도 제정신으로 풀려나기 힘들다.
"그래서 제가 먼저 쳤어요."
"·········"
"아버지께서도 저녁 식사마다 강조하셨잖아요? 세상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 장소라고."
그러니까 가족끼린 무슨 일이 있어도 도우라고 가르쳤잖느냐! 험난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라고!
"저도 그렇게 되길 원했어요."
"그런데 감히 어머니를 찔러!"
"하지만 어머니는 저보다 저로 인해 영지민들이 받을 고통을 우려하셨어요. 가족을 먼저 배신한건 제가 아니에요. 어머니죠."
노려본다.
아버지를.
"이젠 아버지께서 저보다 가문의 명예를 중하게 여기고 계시네요."
거짓말쟁이들.
위선자들.
"이제 가족같은 것에 신경쓰지 않을래요."
돌아선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동안 감사했어요. 아버지."
"·········"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울린다.
"안녕히 가세요."
끼이익──
쿠우웅!
문이 닫혔다.
[연구단서 획득 : 벨라디아 헤링턴]
[표본이 '서운함'을 느꼈습니다.]
[연구단서 1/10]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6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9점]
"·········"
로드릭은 딸아이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자신의 일생은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 것일까.
"·········"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물러가도록."
"텔로리안입니다."
"······들어오시오. 선생."
덜컹.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잿빛로브에 마법지팡이. 이지적이고 냉철한 눈빛. 언제나와 똑같은 생김새.
"한 잔 하시겠습니까?"
"내일이 출정날이오."
"저도 내일 실험이 있습니다."
콸콸콸!
번쩍이는 투명잔에 적포도주를 따른다. 북방의 끝에 위치한 크리스탈 홀드(Crystal Hold)의 드워프 장인들이 주조한 그릇에 남부의 끝에 위치한 서머 아일랜드(Summer Island)의 엘프 양조사들이 빚어낸 포도주를 담는다. 이것은 국제 교역망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평화의 상징이다. 중부에서 대전쟁이 벌어지면 교역이 멈추고 교역이 멈추면 더욱 많은 전쟁이 벌어지리라.
[교역에 대한 전승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6레벨까지 60/100]
[전승포인트 10점]
"드시지요."
"·········"
"그동안의 회포는 풀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벨라디아가 살인을 참지 못하는 것처럼 로드릭은 술을 참지 못했다. 그러한 결점만 아니었다면, 로드릭 변경백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존경을 받고 있을 사람이었다.
"······선생이 생각 외로 술이 강하시군."
"마법사의 도제들은 남들이 보기보다 거친 삶을 살아갑니다. 마법사라는 족속들 중에서는 제정신인 인간이 없거든요."
벌컥! 벌컥!
단번에 잔을 비운다.
"하! 그래봐야 기사의 종자만 하겠소?"
"?"
"기사들은 훈련이란 명목으로 종자들을 구타한다오. 심지어 신분도 가리지 않소. 주군의 아들도 종자 생활 중에는 똑같은 종자일 뿐이오. 나의 동기는 알랑송 백작가의 차남이었는데 오죽하면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술에 취한 기사와 마법사는 각각의 어린 시절이 더욱 힘들었다고 우겼다. 처음에는 토론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토에 가까워졌다.
"마법사의 산하에선 사람이 죽지는 않잖아!"
"그건 망언입니다! 제가 모시던 선배 중에서는 도제 생활이 힘들어 자살했던 스켈레톤도 있었어요! 마녀의 공방에선 죽음으로도 탈출하지 못합니다!"
어?
저건 대응할 말이 없는데?
"음·········"
"아시겠습니까?!"
"에라이. 그냥 마시겠소."
이걸로 마법사의 도제는 기사의 종자보다 힘들게 산다는 명제가 증명되었다. 현명한 텔로리안의 학문적 업적을 찬양할 지어다!
[문화(부조리)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
[16레벨까지 65/100]
[전승포인트 10점]
"그나저나 말이오."
우리는 얼큰히 취해서 얼굴이 붉어졌으며, 살아온 세월을 하소연했다. 진중한 이야기를 나눌만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우리와 가족이 되어볼 생각은 없소?"
"?"
"헤링턴 백작가의 데릴사위가 되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오. 텔로리안 선생."
[새로운 표본 : 로드릭 헤링턴]
[연구단서 0/3]
[연구보상 : 감정조작 1단계]
5. 다섯번째 연구 - 로드릭 헤링턴(3)
"글쎄요."
"애매한 대답이군."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텔로리안의 완곡한 거절에 로드릭은 쓰게 웃었다. 이해하는 바였다. 누가 머리를 수집하는 여자와 같은 침대를 쓰고 싶겠는가. 잠들면 깨어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데.
"부부 간에는 비밀이 없어야합니다."
"그래서 자네를 데릴사위로 고른거야."
벌컥벌컥!
술잔을 들이키는 로드릭.
"자네가 아니라면 딸아이가 누구와 비밀을 공유하겠나? 만에 하나 그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네와의 관계가 분명히 문제가 될 걸세."
벨라디아는 텔로리안의 마탑을 안방처럼 드나들었고 공개 활동에선 언제나 텔로리안을 대동했다. 남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친밀하다.
"그리고 딸아이도 자네를 좋아하고."
"결코 아닙니다."
"자네가 틀렸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
텔로리안의 단호한 대답에 로드릭이 고통스레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 못할 딸아이가 너무 안타까웠다.
"영애님께서 저를 남들보다 친밀히 여기긴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친밀함을 이성적인 호감으로 표현하긴 어렵습니다."
이성적인 호감에는 [특별함]이 동반된다. 하지만 벨라디아의 자신을 향한 호감에는 애착조차 없다. 그저 강력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기괴하게 뒤틀린 성욕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자네에게 계속 애정표현을······"
"그건 애정표현이 아닙니다. 도전이지요."
"·········도전?"
"저와 벨라디아 영애님과의 관계에는 항상 경계선이 존재합니다. 스승과 제자라는."
사제관계란 스승은 가르치고 제자는 배우는 사이다. 때문에 제자는 권위를 존중해야하며, 스승은 사심 없이 지도해야한다.
"따라서 제가 사심을 드러낸다면."
벨라디아는 대단히 특출난 성적 매력을 지닌 표본. 본인도 특징을 강점으로 인지하고 무기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습성을 지녔다.
"경계선도 사라질테니 영애님은 저의 지도를 따르지 않을 근거가 생깁니다."
스승과 제자는 언제나 적절한 경계선을 유지해야한다. 그게 자헤리온의 매듭처럼 복잡하던 스승님과의 관계에서 얻어낸 결론이다.
"연인이라면 그렇겠군."
철퇴백작이 반박했다.
"하지만 부부가 된다면 자네는 가장으로서 벨라디아를 지도할 권한이 생기네. 지금보다 한층 엄격한 가르침을 내릴 수 있게 되겠지."
[연구단서 획득!]
[경험치 +5]
[로드릭 헤링턴 1/3]
[16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10점]
로드릭은 고루한 사람이다. 귀족으로 태어나서 기사로 자라면서, 진정한 사내임을 증명하고자 분투해온 자이니까.
"일반적인 레이디라면 그리 생각하겠지요."
그렇지만 괴물이 들끓는 중세랜드에서 고루함이란 강직함이며, 마초다움이란 용기의 증거이다. 아내를 때려도 괜찮고 자식과의 소통에 서툴어도 괜찮다. 안전만 확보해준다면.
"하지만 영애님께선 사회의 규칙이나 타인의 생각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남편의 가부장권도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로드릭은 분명히 좋은 가장이 되었을 사내다. 외동딸이 야수의 심장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럼 딸아인 앞으로 누굴 믿어야하지?"
"·········"
"내가 떠나면 딸아이가 믿을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또한 벨라디아도 성년이 되었으니 반드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야하네."
의무.
그것이 로드릭을 지탱해온 가치다.
"이미 수많은 군주들이 나의 사위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주었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 헤링턴 백작가보다 격이 높은 가문의 계승자들이야. 그만큼 딸아이를 욕심내는 사내들이 많다는 의미지."
벨라디아 헤링턴은 권력과 아름다움이란 보물을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보물은 지킬 수 있을 때나 보물. 지키지 못하면 저주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믿지 않아."
"·········"
"자네도 낯선 미녀를 마주한 사내들이 얼마나 멍청하게 굴어대는지 알 테지. 놈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고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짐승처럼 날뛴다네. 그러면서 자신이 상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지. 멍청한 놈들!"
이번 삶에는 여인에게 그토록 빠져보진 못했다. 마나의 신비로움과 우주의 방대함에 비하면 사랑은 정말 지엽적인 연구주제였다.
하지만.
이해는 한다.
전생을 기억하니까.
"하지만 자네는 다르더군."
"·········"
"젊고 건강한 청년임에도 딸아이에게 욕망을 품지 않았어. 자네가 공언한대로 스승으로서 준수해야할 경계선을 철저히 지켰고."
털썩.
무릎을 꿇는다.
백작이 마법사에게.
"······그러니 제발 딸아이와 결혼해주게."
"·········"
"내가 떠나고 벨라디아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네. 그러려면 혈연이 되어야하고."
아버지가 믿음직한 친구에게.
"혈연이 되어야만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네에게 고리타분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오래 살아보니 알겠더군. 가족만이 진짜일세."
혈연.
가문의 모든 것이자.
생명이 살아가는 의미.
"제발. 부탁하네."
"············"
텔로리안은 물끄러미 로드릭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는 뛰어난 무예로 오크들의 존중을 받고 정예군으로 왕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철퇴백작이다. 하지만 지금은 철없는 딸아이를 걱정하는 늙고 병든 아버지일 뿐이다.
"일어나십시오. 친구여."
"자네가 승낙하기 전엔 일어날 수 없네."
"그럼 영원히 승낙하지 말아야겠군요."
콸콸콸.
드워프에일을 따른다.
무지막지하게 독하다.
"그럼 출전을 하지 못할 테니까요."
꿀꺽! 꿀꺽!
깊이 들이키고.
"자꾸 맹세에 집착하는 이유가 뭡니까?"
쾅!
책상에 내리친다.
"그냥 스스로 딸을 지키면 되잖습니까?"
"·········"
"귀족의 자존심까지 버릴 정도로 딸아이가 걱정된다면, 무모한 소집령을 거부하고 당신의 영지와 가문을 지키는데 전념하십시오."
로드릭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로 일어나지 않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텔로리안은 고조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번에는 당신보다 벨라디아의 판단이 정확합니다. 영지민을 위해서도 가문을 위해서도 소집령을 거절하는 방안이 최선입니다."
로드릭은 알고 있다.
소년왕의 어리석음을.
오크들의 대행진이 가져올 재앙을.
그렇지만.
그럼에도.
"유감스럽게도 가문을 위해선 출전이 맞네."
"······어떻게 셈법이 그렇게 되지요?"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로드릭 헤링턴은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고 공언한 바가 있는데, 그것을 어기고 출전을 결정했으니까.
"묻겠네. 잿빛의 현자여."
·········반백의 노인이 뚜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주시한다. 지혜를 구해오는 것이다.
"귀족이란 무엇인가?"
"최강의 칼잡이들을 선조로 두고 있는 금수저들입니다. 백 명을 쓰러뜨리면 영주가 되고 만 명을 베어 넘기면 왕이 되니까요."
서방대륙에서 귀족(Nobility)이란 전사를 의미했다. 권력은 언제나 칼잡이들이 좌우하는 법이며, 가장 뛰어난 칼잡이는 자연스레 칼잡이들의 우두머리로 인정받는 법이다.
"맞는 말이지."
로드릭은 텔로리안의 냉소적인 견해를 부정하지 않았다. 순진해지기엔 너무 오래 살았다.
"그렇다면 칼잡이를 통치자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무엇인가? 무엇이 도적과 영주의 차이를 가르는지 말해볼 수 있겠나?"
텔로리안은 로드릭과의 문답에서 지적 호기심을 느꼈다. 자신은 합리주의의 세례를 받고 자란 현대인 마법사. 신분제는 낙후성의 징표이며 명예란 허명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명예를 위해서 살았고 명예를 위해서 죽었다. 특히 무기를 다루는 이들과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들이 그랬다.
"영주가 훨씬 강합니다."
"그렇지."
"부하들도 훨씬 많지요."
"그것도 맞아."
"그럼 전부 나왔군요."
"아니야."
로드릭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나 텔로리안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선생은 삼라만상을 꿰뚫어보는 식견을 지녔으나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알지 못한다.
"도적들은 명예가 없어."
"······명예라고 했습니까?"
텔로리안의 눈썹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평소라면 결코 털어놓지 않을 진심을 털어놓게 된다. 이래서 자신이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네 귀족들이 말하는 명예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불량배들이 말하는 의리만큼이나 허황된 개념이 아닙니까?"
건달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기에 의리를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영주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까 명예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부터 명예롭지 않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로드릭 헤링턴."
로드릭은 반백년을 살면서 20번의 전쟁에 참전했는데, 10번은 로드릭이 먼저 일으킨 전쟁이었다. 또한 전쟁에는 언제나 악행이 뒤따른다. 평시엔 금지되는 것들이 허용되니까.
"나는 조상들 앞에 떳떳한 삶을 살아왔네."
"······당신의 첫 번째 전쟁을 기억합니까?"
"기억하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전쟁인데!"
푸하핫!
철퇴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정변을 일으켰지요. 헤링턴 가문의 봉신들이 당신의 패륜을 좋게 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봉신들의 반란은 상당히 손쉽게 진압되었다. 로드릭은 예나 지금이나 위험한 사내였으니까.
"반란을 진압하고 당신은 무얼 했습니까?"
"아버지는 감옥에 가두고 반란자들에겐 자비를 베풀었네. 심지어 반란의 주동자도 용서해줬지. 대단히 관대한 처사였어."
이곳은 중세랜드. 함락된 성채의 모든 재화는 전리품이며, 재화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그랬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성주의 아내를 겁탈했잖습니까."
텔로리안의 예상치 못한 지적에 로드릭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부분으로 비난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보진 못했는데?
"그건 정당한 거래였네."
"······거래요?"
"본래 반란의 주동자는 머리를 베어서 효수하고 영지를 몰수하네. 그렇지만 나는 반역자의 아내가 침실을 찾아오기에 품어줬다네."
······텔로리안은 자비를 베풀었다며 우쭐대는 로드릭을 바라보며 가슴이 죄여오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로는 어떤 상황인지 해석이 되는데 가슴이 뒤따르질 못했다.
"·········좋습니다. 어쨌든 합의가 있었으니 화간이라고 칩시다. 하지만 그날 함락된 성채의 민간인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귀족들이야 스스로 참전을 결정한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자업자득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영주의 명령에 응했을 뿐인 영지민들은?
"관습적인 일이 벌어졌지."
"·········"
"나는 분명히 수비병들에게 공성탑이 닿기 전에 항복하라고 요구했네. 하지만 놈들은 끝까지 저항했고 선택의 대가를 치렀지."
[관습(전쟁)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
[16레벨까지 75/100]
[전승포인트 10점]
"·········좋습니다. 관습이라고 칩시다."
로드릭은 텔로리안의 흥분한 목소리를 경청했다. 한참 어린 상대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굴욕을 참고서 느껴본다. 선생의 남다른 감정선과 교단의 수녀들처럼 예민한 감수성을.
"하지만 알버타운의 학살만큼은 변명거리가 없을 겁니다. 교회당이 불타고 주민들이 몰살당했습니다. 이건 관습에도 어긋납니다."
그는.
남들과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뿐입니까? 당신은 에스벨 남작부인을 고문하고 병사들에게 넘겼습니다. 물론 거짓항복으로 당신을 독살하려고 시도했던 사람은 맞지요. 하지만·········!"
선생은 당연한 사건에 분노하고 실망한다. 죽음에 예민하며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지 못한다. 적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즐거움도 즐길 줄 모른다. 너무 이질적인 사람이다.
"인정하겠네."
담담이 고개를 끄덕인다.
선생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적들의 머리를 깨부수고 배신자들의 여인을 겁탈했네. 또한 비겁자들의 재산을 빼앗아서 용감한 자들에게 주었지."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명예를 지켰을 뿐인데."
"·········?"
뭐지?
분명히 공용어인데 왜 소통이 되지 않지?
"나는 배신자들에겐 끔찍한 죽음을 약속했으며 합당한 적수들에겐 깨끗한 죽음을 약속했네. 약속을 했다면 지켜야하지 않는가?"
로드릭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했다. 마치 경영자는 기업을 운영하고 직원들의 인사고과를 평가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가 유약한 부친을 쫓아내고 백작위를 물려받았을 당시에, 봉신들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이웃들은 언제나 우리의 영토를 노렸지."
로드릭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가 살아온 방식에.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봉신들은 철저히 명령에 복종하고 호전적인 이웃들은 알아서 고개를 수그리네.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로드릭은 텔로리안을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삼라만상을 꿰뚫어보는 현자가 사람의 마음에는 저토록 무심하다니.
"내가 언제나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야."
[연구단서 획득!]
[경험치 +5]
[로드릭 헤링턴 2/3]
[16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10점]
텔로리안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멀어 보이는 착시가 들었다.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로드릭이 뿜어내는 사고를 모두 거부한다.
"자네는 악행을 논했으니 나는 선행을 논해보겠네. 내가 아버지를 내쫓고 백작으로 즉위한 이후 우리 영지는 대단히 안전해졌다네."
도적들은 철퇴백작의 위명을 듣자마자 달아났고 몬스터들도 지상에 얼씬대지 못한다. 왕실조차도 백작령에선 물자를 수탈하지 못한다.
덕분에.
백성들은 생계에만 전념할 수 있다.
"남들이 우리 가문이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지민들이 평화를 누리는 걸세. 영지민들이야 언제나 높은 조세와 기사들의 횡포에 투덜대긴 하지만, 몬스터의 식사거리나 침략의 희생양이 되는 것보단 훨씬 낫지."
······그건.
사실이다.
"나는 불충한 신하들에게 약속을 지켰듯 충직한 신하들에게도 약속을 지켰네. 그들이 열심히 섬기면 나는 정성껏 보호해줬지."
이곳은 다른 세상이다.
현대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그러니 왕에게 했던 약속도 지켜야하네."
선함과 악함.
가능과 불가능.
그러한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그것이 명예로운 일이니까."
약속을 지켜야한다.
명문가가 살아남고 싶다면.
[연구단서 획득!]
[경험치 +5]
[16레벨까지 85/100]
[로드릭 헤링턴 3/3]
[연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제야 알겠군.'
이곳 사람들이 어째서 병적으로 명예에 집착하는지 알겠다. 또한 그들의 <명예>가 자신이 알던 [명예]와 어떻게 다른지도 이해한다.
'덕분에 나도 깨달았다.'
감정을 조작할 방법을.
인챈터로서 발을 딛을 시간이다.
[새로운 마법을 습득합니다!]
[3위계, 정신의 로어]
[감정조작]
6. 여섯번째 연구 - 대족장 벨칸(1)
정신을 되찾으니 마탑의 침상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로드릭과 하릴없이 술잔을 들이키던 모습. 서로 살아온 세월을 하소연하면서 무작정 술잔을 들이켰는데·········
'후원자와 나누기엔 부적절한 대화였다.'
사람에겐 누구나 밑바닥이 있다. 전생의 사람들은 밑바닥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사람을 교양이 없다고 불렀다. 그렇지만 철퇴백작은 밑바닥을 공유한 사람만을 친구라고 부르더라.
'친구라.'
나이와 신분.
살아온 세계마저 달랐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할 수 있었다.
'전생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겠지.'
내가 목격한 로드릭 헤링턴은 성공적인 군벌이나 마피아 보스같은 인물이었다. 강단이 있고 직관이 뛰어나며, 자신이 지키는 울타리 안쪽에 들어온 사람에겐 아낌없이 베푼다.
'하지만 울타리 바깥의 사람들에겐 일말의 자비도 보이지 않지. 특히 배신자로 간주된 이들에겐 대단히 가혹하다.'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던 과부의 두개골을 맨손으로 부순 일화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게 로드릭 헤링턴이다.
'벨라디아의 타고난 잔인함도 아버지의 성정과 무관하진 않겠지. 그렇지만 로드릭은 피아를 철저히 구분해서 대우하는 사람이다.'
악인이다.
현대인 게이머의 기준에선.
'하지만 농노 출신으로 판단하자면······'
철퇴백작 정도면 훌륭한 영주님이다. 로드릭은 엄격한 통치로 봉역을 안정시키며, 상벌에 명확한 기준이 있기에 공정하다고 불릴만하다.
'적의 두개골을 부수고 자랑하는 영주?'
듬직하다.
믿을만하다.
'템니그라드의 영주들이 로드릭정도만 되었어도 유년기는 훨씬 순탄했겠지. 혹은 아버지가 로드릭 정도만 되어줬어도······'
나의 아버지는 누님들을 예쁘장하게 키워서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를 하셨다. 16살 생일날엔 노예상인과 지역 유지에게 각각 경매를 붙였지.
'······지나간 일이다.'
고개를 흔들어 누님들의 모습을 털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세면을 마치고 아공간 옷장에서 깔끔한 잿빛로브를 차려입는다.
"텔로리안!"
때마침 문밖에서 젊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무대신 우르반이다. 나의 또래친구이자 자문회에 존재하는 유이한 인텔리.
"출정식 준비는 마쳤나?!"
"그래. 나가지."
벌컥!
마법지팡이를 챙겨서 문밖으로 나선다. 우르반과 백작과의 술자리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해있었다.
"백작 각하. 늦어서 죄송합니다."
"껄껄. 젊은 친구가 나보다 체력이 약하군."
······그건 50살이 넘었는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도 멀쩡히 일어나는 당신이 괴물인거 아닐까?
"운동하게! 운동!"
"·········으음."
"아무튼 자네가 새벽에 제시해준 책략을 되새겨봤어. 그리고 잠도 자지 않고 고민해봤지."
·········숙취가 심해서 내가 어떤 책략을 제안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실로 현명한 묘안이더군! 가문의 명예는 지키되 나의 죽음을 피하고 군대도 보존하는 책략이라니! 사내답지 못한 부분은 분명히 있다만······딸아이를 지켜주려면 그정도 비겁함은 감내해야지."
아.
떠오른다.
"그럼 다녀오겠네."
"알겠습니다."
"딸아이와 영지를 부탁하네."
로드릭은 나의 양손을 붙잡고 듬직한 시선을 보냈다. 부담감이 느껴졌지만, 달라진 친분을 고려하면 충분히 감내할만한 부담이었다.
"모두 들어라!"
"예! 주군!"
"내가 부재 중일때는 텔로리안 선생이 그대들의 주군이다. 또한 내가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는 소백작이 작위를 계승하되, 스무 살까지는 선생이 섭정으로서 통치하도록 하라!"
······섭정으로 임명한다고? 나는 통치처럼 번거로운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럴 시간에 마도서를 읽는게 훨씬 유익하고 재밌는데.
"고맙네. 텔로리안."
"저도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어허! 형님으로 부르기로 하지 않았나?"
통치자의 이너서클에 편입되는건 대단히 훌륭한 기회다. 기존엔 불가능하던 관계를 통해서 더욱 많은 자원을 조달하게 될테니까.
"그럼 다녀오겠네. 동생."
"다녀오십시오. 형님."
푸히히힝!
로드릭이 등자를 딛고서 전투마에 오르자 녀석이 투레질을 내뱉었다. 완전무장한 기사들도 함께 전투마에 오르고, 잡담을 나누던 병사들도 절도 있는 자세로 대열을 이룬다.
"전군!"
펄럭!
깃발을 지키는 배너맨(Bannerman)이 주군의 호응에 맞추어 군기를 흔들었다. 철퇴가 그려진 헤링턴 가문의 상징이 펄럭인다.
"행군 대형으로!"
""하!""
연무장에 집결한 병력이 일사분란한 행군을 시작했다. 선두에선 마갑을 씌운 위압적인 전투마들이 행진하고 기사들의 갑옷이 번쩍였다. 말발굽 소리와 철컹대는 갑옷소리가 울리며, 기사의 자부심만큼이나 날카로운 랜스들을 하늘로 치켜세운다.
"보병대! 전진하라!"
""전진하라!""
둥! 둥! 둥!
다음엔 군악대의 북소리에 맞춰서 보병들이 행군을 시작했다. 그들은 평범한 영지에서 흔히 보이는 농민병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뛰어난 강병들이다.'
체격 조건도 우수하고 훈련 상태도 매우 좋았다. 특히 모든 병사가 판금흉갑을 착용한 모습이 눈에 띈다. 이는 백작이 강병을 육성하는데 재정과 관심을 아끼지 않는단 증거.
'전력을 종합해볼까.'
기사 50명.
기병 400명.
보병 800명.
'헤링턴 백작군의 규모를 고려하면 적당한 규모다. 이보다 많으면 영지의 수비가 불가능해지고, 적으면 소년왕이 모욕으로 느낄테지.'
하지만 좋은 상황도 결코 아니다. 전쟁을 앞두고 백작령이 보유한 군대의 1/3. 질적으로 따지면 1/2에 달하는 전력이 빠진 것이니까.
[군사학에 대한 전승획득!]
[경험치 +5]
[16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10점]
'삼두룡의 강림이 다가온다.'
[삼두룡의 강림]은 하트랜드를 덮칠 3개의 대재앙을 뜻한다. 강대국조차 멸망에 이르게 만들 재앙들이, 연속해서 닥쳐오는 것이다.
'그린타이드는 삼두룡의 첫번째 머리일 뿐이다. 이후의 재난을 대비하려면 헤링턴 백작가는 최대한 전력을 보존해야한다.'
또한 삼두룡의 강림이 끝나면 메인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대혼란에 빠져든 중부를 배경으로 영웅과 악당들이 출현한다. 그때를 대비하고자 헤링턴 가문을 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충분한 도움을 제공했다.
이제는 그들이 해결할 문제이다.
'정략과 통치는 헤링턴들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다. 나는 궁정마법사로서 충분한 조언과 대안을 제시했다. 이후는 그들의 몫이야.'
[역사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획득!]
[레벨이 올랐습니다!]
[17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11점]
나는.
연구에 신경을 써야한다.
새로운 마법을 익혀야하므로.
* * *
'그동안 방치해둔 능력이 많군.'
마지막으로 성장에 신경을 썼던 레벨이 12레벨이고 방금전에 17레벨이 되었다. 분배할 능력치와 재주가 많다.
──────
◆궁정마법사 텔로리안 (완전한 중립)
Lv17 로어마스터 (4위계 주문까지)
- 화염의 로어
- 대지의 로어
- 비전의 로어
- 정신의 로어
◆능력치
힘 : 10
민첩 : 17
체력 : 13
마력 : 40+++
지능 : 35++
직감 : 15
◆클래스 능력
- 주문수집가 4단계
- 화염마법전문화 4단계
◆개인 특성
- 마법재능 5단계
- 공부성애자
◆주문 목록(생략)
◆연구 일지(생략)
◆퀘스트 로그(생략)
──────
능력치 분배.
지능과 마력은 제한다.
'마력과 지능은 이미 종적인 한계에 도달해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인간의 육신으론 더이상의 마나와 지능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이건 필멸자의 한계치로 보아도 무방한 수치다. 나보다 지능이 높은 존재는 세계관 전체를 통털어도 손에 꼽을 것이다.
[직감이 18로 상승합니다. ]
[민첩이 20로 상승합니다.]
몸은 한층 가벼워지고 사고는 대단히 맑아진다. 악명 높은 대도나 수양이 깊은 고승에게 어울릴 수치다. 다음은 클래스 능력.
[화염마법 전문화가 상승합니다!]
[화염마법 전문화가 상승합니다!]
[화염마법 전문화가 상승합니다!]
[화염마법 전문화가 상승합니다!]
────
◆화염마법 전문화 8단계
: 당신은 화염의 이치에 통달한 전설적인 파이로맨서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던지는 파이어볼은 작은 메테오와 같은 위력을 냅니다.
■효과
화염마법 피해량 +80%
화염마법 돌파력 -80%
────
심플하고 강하다.
다음은 개인특성.
'공부성애자를 향상할까?'
직감 18로 추론컨데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다. 지금도 하루에 18시간은 장서관과 실험실에서 보낸다. 한데 지금보다 연구가 좋아지면 시나리오 클리어라는 목적마저 무시하겠지.
['뛰어난 말솜씨'를 얻었습니다!]
['능숙한 외교관'으로 향상됩니다!]
['우아한 존재감'으로 향상됩니다!]
['백금의 혓바닥'으로 향상됩니다!]
────
◆백금의 혓바닥(개인 특성, 영웅)
: 당신의 말재주는 백금처럼 탁월해 말재주만으로 국가간의 협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또한 학자들의 토론장에선 백전무패를 장담할 수 있습니다.
■효과
- 말재주가 개입하는 모든 판정에 유리점.
- 말재주가 성공하면 우호도가 올라감.
- 판정에 실패해도 파멸적인 결과를 회피함.
────
불마법과 혓바닥.
전란기를 헤쳐나가는데 필요한 무기들.
'설득이 가능한 상대는 설득하고 불가능한 상대는 불태운다. 간단한 원칙이다.'
푸드득!
그때, 창가에 갈색깃털의 송골매가 내려앉았다. 하트랜드에서는 찾아보지 못하는 종류의 생물체. 대황야에서 찾아온게 분명하다.
[짐승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
[17레벨까지 5/100]
"어서 오시오. 장로 카트리그."
"·········역시 알아보는군."
갈색의 송골매는 연기를 뿜으며 사람으로 변모했다. 녹색피부의 거한. 노년임에도 숨기지 못하는 근육질의 체구와 뻐드렁니.
"돌아올 줄 알고 있었소."
"흠······"
"벨칸의 전언을 가져오셨겠지?"
"괜히 현자라 불리는 사내가 아니로군······"
카트리그는 품에서 바람의 정령석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손에 쥐어보자 마법적인 목소리가 머리에 울려퍼진다.
"어떤 내용이 있소?"
에스실 왕국과 사막오크들의 대전쟁이 임박했다. 왕국군은 참패할 것이고 방어선은 돌파당할 것이다. 왕국군의 대패를 기점으로 모든 그린스킨들이 왕국을 침공해오고, 이는 중부 전역에 걸친 이종족들의 봉기로 이어진다.
'분명히 그랬지.'
지금껏 생각했다.
미래를 바꿀 수 없다고.
적어도 초반엔.
'아무리 미래를 예지해줘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 특히 미래를 바꿔놓을 힘을 지닌 권력자들일수록 그랬다.'
실은 이번 사건 이전에 남몰래 소년왕에게 서신을 보냈었다. 왕실의 내부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정보를 담아 종친으로 위장해서 소년왕의 무모함을 훈계하는 내용이었다.
'너의 원수는 산악오크이지 사막오크가 아니다. 그러니 사막오크 사절단은 최대한 환대하라. 환대할 수 없다면 그냥 쫓아내라.'
아무리 싫어도 사절을 죽이진 마라.
죽일 것이라면 적어도 깔끔히 죽여라.
'하지만 전혀 듣지 않더군.'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아버지가 오크에게 산채로 잡아먹힌 14살 소년이, 오크를 분류할 구별할 지성을 갖추기는 힘들테니까.
'하지만 다일렌은 왕이다.'
소년왕도 왕이다.
하지만 그는 소년처럼 행동했다.
'섭정들이 말려야했어.'
하지만 섭정들은 소년왕의 흉포함이 두려워서 움츠리거나, 오크들에 대한 복수를 통쾌히 여겼다. 나의 조언이 무시당한 것이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지.'
플로린 왕대비는 아들에게 약점을 잡혀 반대하지 못한다. 레지날드 대장군은 전공을 세워 귀족이 되어야한다. 토모리 대주교는 콘클라베에 출마하려면 공적이 필요하다.
[궁정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
[17레벨까지 10/100]
'오늘을 살아가는데 벅찬 이들은 미래에 대한 충고를 들을 여력이 없다. 그래서 나의 예언을 귀담아듣는 사람들이 없던 것이지.'
하지만.
찾아냈다.
"안내하시오. 장로 카트리그."
"그대를? 어디로?"
"그대들의 대족장이 나를 초청했소."
예언을 들어줄 사람을.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파국을 막을 지혜를 청하더군."
막을 수 있을지도.
삼두룡의 첫번째 머리를.
[새로운 표본 : 대족장 벨칸]
[연구일지가 갱신됩니다······]
[사막오크족을 파멸에서 구하십시오!]
[보상1: 야수의 로어]
[보상2: 사막오크의 전승]
6. 여섯번째 연구 - 대족장 벨칸(2)
색다른 일행이 황량한 대황야를 건너고 있었다. 선두엔 다이어울프에 올라탄 오크전사들이 있었는데, 대황야가 그들의 고향임을 고려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날씨가 덥군요."
"·········그렇소?"
"하트랜드와는 기후가 많이 다르군요."
진정 놀라운 모습은 오크들과 함께 걷는 트롤들이었다. 여족장 올골두골로를 필두로 뛰어난 트롤 전사들이 일행을 호위했다.
"······이건 우리가 호위를 받는 느낌이로군."
장로 카트리그는 산악트롤 전사들을 살펴보며 감탄했다. 그들은 자신이 마주하던 괴물이 아니었다. 문명인들처럼 의복을 갖춰입었고 공용어도 대단히 유창했다.
"실은 우리 전부가 호위를 받고 있답니다."
"그건 무슨 뜻이오?"
카트리그의 반문에 올골두골로는 행렬의 중앙을 가리켰다. 극동의 귀공자와 잿빛의 마법사가 보인다.
"저분들이 저희를 호위해주고 계신 겁니다."
"·········흐음."
카트리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관찰했다. 잿빛현자 텔로리안은 겉보기엔 수수해보여도, 마력을 느낄 수 있다면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미래를 예지하는 현자라면 당연히 막강하겠지. 하지만 곁에 있는 계집애처럼 생긴 남자놈은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꾼.'
귀공자는 마성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종족을 막론하고 여성들과 남색가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을 것이다. 노예상에게 판매한다면 금괴로 가득한 궤짝을 받겠지.
'한데 어째서 아름다움을 여기서 뽐내지?'
녀석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잔뜩 멋을 부리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얼굴에는 기름을 발랐고, 곳곳에 비취장신구를 착용하고 검은색 더블릿을 입었다. 제국의 무도회장을 휩쓸고 다닌다는 밤의 황제가 저런 모습일까?
'때와 장소를 모르는 자로군.'
덕분에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화장은 번졌고 더블릿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장신구들은 불편해졌고.
"나는 분명 편히 입고 오라고 했네만."
"이 정도면 격식을 포기하고 온 거지!"
?
데빌들은 사치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다.
[데빌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
[17레벨까지 15/100]
"자네가 뭐라고 말했나 똑똑히 확인시켜주겠네. 중요한 계약이 있으니까 적당한 차림으로 따라와라. 큰 몫을 가지게 해주겠다!"
루시펠레스를 화를 냈다.
데려와줬는데 배은망덕하긴.
"이건 사기야! 의도적인 기만이라고!"
이어지는 칭얼댐은 무시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놈인줄 알았다면, 결코 동료로 들여주는 은혜를 베풀지는 않았을텐데.
'이상하군.'
녀석은 후원자나 적으로 등장할 때는 항상 위엄이 넘쳐났다. 설전을 벌일땐 음율에 맞춰서 시적인 대사를 뱉었고, 전투 시에는 발라드를 부르면서 대악마다운 위용을 드러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냥 허당같은데······'
계약사기에 속절없이 털리는 데빌이라니, 겉멋든 호구 그자체다. 1회 차에선 분명히 제일 멋있는 악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의 형제들을 동료로 들일걸 그랬나?'
루시펠레스의 이복형들은 지옥의 대공다운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계획을 세워서 한치의 실수도 없이 수행해낸다.
'그래도 후반을 본다면 루시펠레스가 낫다.'
루시펠레스의 어설픔은 인간과의 혼혈이라서 나오는 단점. 지금은 최약체 대공이어도 열심히 키워주면 잠재력을 살려 최강이 되겠지.
'힘내라! 데빌집 막내아들!'
같은 막내아들로서 동질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자신보다 유능한 이복형들에 대한 질투나 아버지의 총애를 얻고자 경쟁을 벌이는 모습이 모두 익숙했으니까.
'나는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났지만······'
위대한 아버지를 마주한 아들에겐 두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를 벗어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뛰어넘는 것이다.
'녀석에겐 쉽지 않은 일이겠지.'
어느 쪽도 해내지 못하면 아버지의 부속품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아버지의 그림자가 거대할수록, 아들들의 삶이 망가질 때가 많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가?"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네."
씨익.
녀석이 웃는다.
"자네도 가족관계가 복잡했었지?"
"·········"
"소식을 알아봐줄까?"
글쎄.
알아보고 싶은 유혹은 있다만······
"됐네."
뿌리쳤다.
불필요하니까.
"누님들이나 구해드리게."
"호오."
부모님과 형님들에겐 일말의 우애도 남지 않았다. 미약한 애증은 남았지만 굳이 불쾌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그분들은 나를 아껴주셨으니까."
"자네의 소원을 접수했네."
"대가는?"
"이번 거래의 중개료로 대신하지."
"나쁘지 않군."
번거롭게 계약서를 작성하진 않았다. 루시펠레스는 내게 허튼 수작을 벌였다간 어떤 꼴이 날지 명확히 알고 있는 놈이었으니까.
"그럼 진행경과의 보고는······"
"그건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그래도 되겠나?"
"그래. 결과도 알려주지 말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된다. 지금 와서 간신히 치료된 흉터를 후벼팔 이유가 없다. 누님들도 그러시겠지.
"그럼 계약을 수행하고 돌아오겠네."
평안히 지내시길.
부디 행복하시길.
"돌아간 김에 옷도 갈아입어야지."
번쩍!
빛과 함께 루시펠레스가 사라졌다.
[대악마와의 구두계약을 맺음!]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다음 레벨까지 25/100]
[전승포인트 12점]
"당신이 부리는 정령이오?"
"음?"
말을 걸어온 사내는 카트리그 장로였다. 아까부터 루시펠레스를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지. 대족장에게 안내할 사람이니 당연한 일.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볼수록 우리와 다른 존재인게 느껴졌소. 그것도 격이 굉장히 높더군."
장로는 늙은 시절까지 생존할 수 있던 사람이다. 그것도 오크들의 부족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
오크들은 초월자들을 정령(Elemental)으로 정의한다. 그들의 관점에선 하늘을 다스리는 태양신조차 가장 막강한 정령일 뿐이다.
"정령이란 무엇이오?"
설정집을 통해서 오크들의 관점을 익히긴 했다. 그렇지만 현지인들의 입장에서 듣고 싶다. 외부인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야기 대신.
"호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현자께서 정령들에게 관심이 있으시구려?"
그럼에도 장로는 기꺼운 얼굴로 대답을 내어놓았다. 자신들의 신앙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 대한 호의일까?
"그렇소."
"정령이란 대자연에서 탄생한 모든 영혼들을 뜻하오. 그들은 필멸자의 육신에서 태어난 영혼들보다 훨씬 강력하고 신성한 존재들이지."
즉. 오크들의 관점에 따르면 타고나길 영적인 존재가 정령이다. 신격. 악마. 천사처럼.
"그렇지만 우리가 주로 교류하는 정령은 4대원소의 정령들이오. 우리의 세계는 4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니······"
[필멸자]의 정의를 밝힐 필요가 있겠다. 천년을 살아가는 엘프도 필멸자다. 대천사에 준하는 힘을 지닌 오래된 고룡도 필멸자다.
신성이 없으니까.
그래서 수명이 제약되니까.
[필멸자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다음 레벨까지 35/100]
[전승포인트 13점]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대자연에서 태어난 영혼이 정령이다."
"그렇소. 우리가 발을 딛은 대지와 숨을 쉬는 공기에도 정령이 있지. 속삭이는 물과 타오르는 불꽃에도······"
4대 원소.
고전적인 정령의 이미지.
"······하지만 대자연이 있는 장소라면 어디에나 정령이 있소. 당신들이 몬스터라고 부르는 야수들에게도, 또한 지옥이나 천상이라고 부르는 특이한 세계에도 말이오."
그래서 사막오크들의 세계에선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어떠한 정령을 숭배하느냐에 의해서 그때그때 성질이 변한다고 믿는다.
"우리 필멸자들의 내면은 거대한 생태계와도 같지. 황량한 사막도 있고 풍요로운 오아시스도 있소. 그러니 야수도 초식동물도 가슴에 품은것이오. 그러니 성향을 선과 악, 혼돈과 질서로 나누는 당신들의 관점이 낯설지."
[철학(사막오크)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다음 레벨까지 45/100]
[전승포인트 15점]
종교와 문화는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규정한다. 이런 관점을 세계관이라고 부르며, 세계관이 다른 이들이 함께 살면 충돌이 불가피하다.
"거기에 타고난 종적인 차이도 있잖소?"
"그렇소. 우리는 당신들보다 강하니까."
장로 카트리그는 자부심이 넘치는 태도로 말했는데, 장로의 자부심에는 확실한 근거가 존재한다. 오크들은 인간보다 근육량이 월등하고 골밀도도 높다. 또한 신진대사가 빨라서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탁월하다. 오크 사내는 홀로 인간 사내 셋을, 오크 여인은 홀로 인간 사내 둘을 상대한다.
"대신 우리보다 단명하지."
"상관 없소.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니까."
"평균수명이 짧으면 고등문명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소. 그것이 당신들이 부족 사회에서 발전하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요."
수명이 짧다.
지식의 축적이 어렵다.
"또한 당신들은 인간보다 대뇌의 크기가 작아서, 수리적인 사고를 행하거나 정밀한 수작업을 행하는 능력이 떨어지오. 부족 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두번째 이유지."
만일 오크들이 인간과 동일한 문명 수준을 이루었다면, 여전히 대륙을 호령하는건 오크족이었을 것이다.
[생물(오크)에 대한 전승을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다음 레벨까지 55/100]
[전승포인트 16점]
"하지만 그러한 마법적 사실이 오크의 열등성과 인간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오."
분위기를 환기한다.
처음부터 이걸 노렸으니까.
"우월성이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오."
"·········"
"모든 생물은 각자의 환경에 맞춰서 진화했을 뿐이오. 거기에 우열을 가리는 것은······"
······진화는 중세랜드 오크들에겐 너무 생소한 개념이다. 또한 이곳에선 신격들이 종족의 창조에 관여하는 경우도 흔해서, 마법적인 논리만으로 종족을 설명하면 허점이 생기고.
"······엘프가 인간보다 우월하지 않듯이 인간도 오크보다 우월하지 않소."
그제야 카트리그는 논지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의 두뇌로도 이해가 어렵지 않은 명료한 논리다.
"당신의 뜻을 이해했소."
"이해했다니 기쁘군."
"그래서 무슨 주장을 하려는 것이오?"
씨익.
미소를 지어보인다.
"우리는 공존이 가능하오."
"!"
"서로의 차이점만 인식한다면 말이오."
기나긴 문답의 결론.
오크와 인간은 공존이 가능하다.
단지 중개인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그것을 보여주겠소."
[오크 장로를 설득함!]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다음 레벨까지 65/100]
[전승포인트 17점]
* * *
사흘 뒤.
대초원, 사막오크들의 집결지.
"대족장!"
"현명한 벨칸이여!"
"큰형님!"
중책을 맡고 있는 3명의 오크들이 대족장의 막사로 몰려왔다. 각각 전사장, 대주술사, 최고길잡이로 불리는 책임자들이다.
"""당장 출전을 명해주십시오!"""
때를 맞추어 대초원에 정렬한 10만의 전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전사들이 데려온 가축떼가 함께 아우성을 내지르는 광경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마귀떼처럼 보였다.
"자네의 수완에 감탄했네!"
"이제야 모든 부족들이 분노했습니다!"
"간악한 인간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사절단의 비참한 죽음은 반목하던 사막오크들을 집결시켰다. 본래 사막오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제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오아시스를 두고서 다퉈야 했으니까.
"놈들이 우리를 두렵게 합시다!"
"정령들의 분노가 임하리니!"
"녹색물결이 중부를 휩쓸 것입니다!"
덕분에 300년만에 모든 부족들이 집결한 사막오크들은 목도했다. 자신들이 뭉치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강력한 존재가 되는지!
"·········"
그렇지만.
대족장은 고뇌하고 있었다.
"군영으로 돌아가서 대기하라."
"대족장! 더이상 출전을 미루면──!"
"대기하라."
대족장 벨칸의 묵직한 대답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에 전사장 블랙터스크는 일순간 위압됐지만, 뒤이어 콧방귀를 껴보이며 답했다.
"흥분한 전사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오!"
"그렇다고 전사장까지 흥분하면 안되지."
"어째서 흥분하면 아니되오?! 놈들은 도움을 청하러보낸 사절단을 거세하고 참수하고 잡아먹었소! 이제 우리가 당한 치욕을 남김없이 돌려줄 시간이오!"
이에 대족장 벨칸은 조용히 팔걸이에 얹어둔 붉은 망치에 손을 얹었다. 이에 블랙터스크도 등에 걸어둔 양손도끼의 자루를 쥐었고.
"······뭣들 하는 짓인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장로의 목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손님께서 오셨는데."
6. 여섯번째 연구 - 대족장 벨칸(3)
사막오크들의 천막은 대부분 간소하고 실용적인 형태다. 오아시스와 초원을 오가며 목축을 해야하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대족장의 천막은 궁전처럼 크고 화려했다. 크기도 어지간한 저택 못지 않았으며 내부에도 수많은 장식품들이 있었다. 천막을 지탱하는 골조는 정령들의 축복을 받은 드라크마 나무였고, 지붕은 대황야를 지배하는 샌드웜의 가죽이었다.
'권위를 과시하려는 의도군.'
나는 정령들의 축복을 받은 자다.
나는 샌드웜을 사냥해 무위를 증명했다.
'장식품들은 스스로 수집한 전리품.'
각종 야수들의 사체로 만들어진 공예품이 돋보였으며, 정면에는 대족장 벨칸이 쓰러뜨린 전사들의 장비들이 나열된 상태.
'합격이다.'
모든 오크문명은 무를 숭상하고 전리품을 자랑하는 문화를 지녔다. 그렇지만 어떠한 전리품을 자랑하느냐의 차이로 성향이 달라진다.
'사막오크들은 전리품으로 신체부위나 포로가 아니라 장비를 전시했다. 그렇다면 사자에 대한 예우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에스실 왕국인들과 공유하는 감성이 있다는 뜻이지.'
공유하는 감성이 있다면?
교류와 공존이 가능해진다.
[사막오크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점]
[다음 레벨까지 75/100]
[전승포인트 18점]
"넌 뭐냐?"
대족장과 대치하던 검은 송곳니의 오크전사가 매서운 시선을 보낸다. 오우거만큼 거대한 체격과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근육이 인상적이다.
"인간 주문쟁이가 어디서 감히──!"
"그분은 우리의 손님이다. 블랙터스크."
대족장이 느즈막히 말했다.
집어들던 워해머를 내리며.
"어서 오시오."
대족장은 모래권좌에서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왔다. 어느 문화에도 군주가 권좌에서 내려와 손님을 맞이하는 관습은 없다. 그만큼 벨칸이 자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뜻이리라.
"잿빛현자 텔로리안."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족장 벨칸."
악수를 청하자 벨칸은 흔쾌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이것도 또다른 존중의 표시다. 지위든 연배든 벨칸이 한창 앞서니까.
"대화를 나누기 전에."
"·········"
텔로리안을 자신을 싸늘하게 노려보는 오크부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사절단이 모두 처참한 꼴이 됐으니.
"그대들의 갈등부터 해결하는게 좋겠소."
"허허. 손님에게 못난 꼴을 보이는군."
대족장 벨칸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부관들을 노려봤다. 그러나 부관들도 물러나지 않고서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올 뿐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우리끼리는 반목해도 외부인을 만날 때에는 지도자에게 힘을 실어줘야지! 그래야 종족의 위신이 사는 것인데!'
분열은 오크족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만약 그들이 하나의 지도력 아래에 뭉칠 수만 있었다면, 대황야로 쫓겨나거나, 인간들에게 모멸을 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흥!"
벨칸의 속내를 알아차린 블랙터스크가 콧방귀를 껴보였다.
"네녀석의 판단에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은 있지만······어쨌든 분열된 부족들을 결집시켜 대군세를 형성해준 공로는 인정해줘야겠지."
쿵!
육중한 발을 내딛으며 돌아선다.
"우리의 대족장이 무슨 음험한 책략을 꾸미든 지금은 따라주자고. 형제자매들."
블랙터스크가 돌아서자 나머지 부관들도 뒤따라서 막사를 떠났다. 팽팽한 긴장감이 풀어지고 대족장 벨칸도 표정을 풀었다.
"의전은 생략하세나."
"그러시다면 저희는 자리를 비워드리겠습니다. 위대한 사막오크들의 왕이시여."
루시펠레스는 정중히 인사하고 다른 사절들을 데리고 막사를 떠났다. 그들은 대족장 벨칸을 지지하는 부족장들을 설득할 것이다.
"그럼."
대족장 벨칸은 손수 모래빛깔의 차를 끓여왔다. 대족장이 왕에 버금가는 지위임을 고려하면, 최고의 예우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눠봅시다. 현자여."
"침공을 늦추십시오. 대족장."
"침공을 늦추라."
말은 쉬우나 행동은 어렵다. 이미 수십만의 부족민들이 집결해 매일 막대한 물자를 소모중이다. 전염병이 퍼지고 물과 식량이 고갈되기 전에 공세를 시작하는 쪽이 옳다.
"상황을 설명해주겠소?"
그럼에도 대족장 벨칸은 깍지를 끼면서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요구했다. 무조건 전쟁을 벌일 생각이라면 현자를 부르지 않았을테니.
"조만간 에스실에서 왕조 교체가 벌어질겁니다. 그렇다면 이종족 정책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고······"
지도를 펼쳐보인다.
"전쟁은 절제된 형태로 벌어질 겁니다."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는 뜻이로군."
툭툭.
책상을 두드리는 대족장 벨칸.
"한데도 우리가 기다려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크들의 멸종을 막을 유일한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오크만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당신네 종족 전체를 일컫는 것이지요."
······대족장 벨칸은 차분한 눈동자로 텔로리안을 마주했다. 수많은 의혹들이 머리를 스쳐가지만 그것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좋아. 협박은 아니라고 믿겠네."
그렇지만.
이전과 태도는 달라진다.
"그렇지만 자네의 주장을 아무리 선해해도 납득이 어려운 부분이 많군. 자네가 현인이 맞다면 나의 의혹을 지당하다고 인정할테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오크족의 유명한 주술사가 회담장을 찾아와, 자신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인간이 멸종한다고 주장했다면?
순순히 믿었을 리가 없지.
상대의 입장도 자신과 같다.
"몇 가지 질문을 있네."
"얼마든지요."
"자네가 옹립할 신왕조의 이름은?"
"헤링턴-아르실 혹은 헤링턴-나르본입니다."
대족장은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의미를 점검했고, 텔로리안은 찻잔을 들이켜며 다도를 즐겼다. 대황야에서 살아가는 오크들에겐 모래뿌리차가 필수품이다. 탈수를 방지하고 사막에 없는 다양한 영양소를 공급하므로.
[문화(오크)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5]
[다음 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18점]
"헤링턴 가문은 변경백 가문이잖나."
"맞습니다."
"한데 어떻게 왕가가 된다는 말인가?"
복잡하다.
간추린다.
"영원한 왕조는 없는 법이죠."
"동의하네."
"마찬가지로 영원히 봉사하는 가문도 없는 법입니다. 변경이 중심이 되고, 중심은 변경으로 밀려나는 것이 역사의 흐름입니다."
수많은 세력들이 장구한 세월 속에서 흥망성쇄를 거듭해왔다. 태초에 드래곤들이 세상을 형성했지만 엘프들에게 쓰러졌고, 이후엔 오크들이 세상을 정복했다. 그리고 [피의 세기]를 지나서 인간들의 시대가 열렸다.
"그래서."
대족장 벨칸은 다소 특이한 배경의 인물이었다. 어려선 사막오크들의 전통을 익히는데 열중했고, 젊은 시절엔 인간들의 세상에 소속되어서 다양한 지혜와 기예를 습득했다. 제국과 북부를 남김없이 구석구석 살펴볼만큼.
덕분에 배웠다.
인간들의 방식을.
인간족의 강대함을.
"인간의 시대가 영원하겠나?"
"그건 결코 아닙니다."
단언했다.
텔로리안이.
"다만 우리의 생전엔 영원할 겁니다."
"하! 이번 전쟁은 우리가 유리하다!"
단언했다.
대족장 벨칸도.
"그대는 내가 인간의 시대를 끝내고자 어떠한 준비를 해왔는지 알테지! 그러니 개전을 늦추길 원한다면 근거를 제시해라! 마법사!"
대족장은 격앙된 목소리로 분노를 토했다. 그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평생토록 준비해왔다. 인간의 시대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를!
"·········"
텔로리안은 태양빛이 감도는 대족장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령들의 총애받는 대전사이자 대륙에서 손꼽히는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플레이어가 도와주는 루트에선 제국의 황도까지 함락시킨다.
'그렇지만.'
······또한 대족장 벨칸은 동포들의 안위를 우선하는 참된 지도자이자 젊은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중년인이다. 무엇보다 다정한 아버지다. 자식들에게 또다른 [피의 세기]를 물려주기를 원치 않는.
'설득할 여지는 있어.'
납득시켜야한다.
승산이 없다는걸.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이걸 납득시키려면'
냉철한 논리만으론 부족하다.
우선은 감성을 공유해야한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 [마법사]임을 강조해서.
"당신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대족장."
"그대가 우리를 이해한다고?"
하!
콧방귀를 껴보이는 텔칸.
"탑에서 편히 자랐을 자네는 결코 오크의 삶이 어떤지 모르네! 우리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비옥한 평야에서 쫓겨나 험준한 산맥과 황량한 사막에 숨어살아야했네!"
대족장은 떠올렸다. 이마에 숨겨진 깊은 흉터를. 오크족을 향한 조롱과 모욕을. 호의가 언제나 배신당하던 젊은 시절을!
"우린 강간마가 아니야!"
어느정도는 맞다.
인간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자비한 약탈만 벌이지도 않아!"
이따금 약탈도 하지만.
모든 유목민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이유도 없는 살육을 즐기는 괴물들도 아니란 말일세! 우리도 평화로운 삶과 이웃과의 친교를 알고 있는 종족이야. 한데 자네 인간들은 어떤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지!"
대족장 벨칸은 젊은 시절의 수치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제국에선 경비병에게 체포당해서 검투장에 팔려갔으며, 마도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온갖 종류의 고초를 겪었다.
"한데 자네가 우리의 설움을 아나?"
"모릅니다."
"그런데 감히 우릴 이해한다고?!"
"하지만 차별 받는 설움은 압니다."
공략집.
잊어버린다.
퀘스트로그.
잊어버린다.
세계선분기.
잊어버린다.
"세간에선 저를 잿빛현자 텔로리안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뤄낸 마법같은 성과들에 감탄해서 붙여준 칭호이지요. 고마운 일입니다."
대신.
동등한 인물로서 마주한다.
전지한 플레이어의 입장을 버리고.
"모든 이들이 저를 만날 때마다 묻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젊은 나이에 현자같은 지혜와 강력한 마법을 갖추었느냐. 정말 타고난 천재다. 굉장한 행운아다. 편히 자랐겠다."
인정한다. 모든 이들이 나처럼 공부한다고 내가 되지는 못한다. 또한 좋은 스승을 만나는 행운이 없었다면 나는 이곳에 있지 못했다.
"하지만 저는 고기 냄새를 기억합니다."
"·········?"
"대족장님께선 젊은 시절에 오크들의 촌락이 불타는 모습에 분노하셨겠지요. 하지만 같은 상황에 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템니그라드에서는 매해 신년을 맞이해 불꽃축제가 열린다. 이러한 불꽃축제의 클라이막스는 장작불에 마법사를 태우는 행사로 끝난다.
"사람이 장작불에 휩싸이면 처음엔 비명을 지릅니다. 하지만 자욱한 연기가 치솟으면서 비명이 잦아들고······시간이 지나면 불길 속에서 삼겹살 냄새가 풍겨오죠."
지독한 자기혐오.
굶주린 사람이 마주하는 장벽.
"저도 마력을 각성했고 그런 사실을 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도 스승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장작불에 올라갔을게 뻔하지요."
자신은 마법사.
평범한 인간과 구분된다.
인간이 그렇게 결정했다.
"맛있겠다."
그러니.
자신의 동족은 마법사들이다.
길가에 널린 농부들이 아니라.
"맛있겠다."
"············"
"저는 동족들의 화형장에서도 그런 생각밖에 못해봤습니다. 불길이 가라앉으면 시커먼 숯덩이들을 파먹는 돌연변이 쥐떼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습니다. 저도 먹고 싶었으니까요."
굶주린 인간은 흉포한 야수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 그것을 알기에 벨라디아를 용인했고 악마들의 술수를 보면서 웃어넘겼다.
"저는 대족장님께 사막오크족을 광명정대한 미래로 인도하라고 조언하진 않겠습니다. 그러한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능해도 희생이 너무 큽니다."
숭고한 개인은 있겠지.
숭고한 집단은 없지만.
"대신."
"·········"
"죄악의 구렁텅이만큼은 피하라고 조언해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최악을 회피할 방도만큼은 준비해보겠습니다."
악(惡)을 행하지 않음이 선(善)은 아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지 않으면 선한 세상을 만드는데 분명한 도움이 된다. 그것이 우리같은 범인들이 행할 수 있는 최선(最善)이리라.
[가치관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1]
[레벨이 올랐습니다!]
[18레벨까지 0/100]
[전승포인트 19점]
공감은 이뤄졌다.
논리를 들이댈 차례다.
6. 여섯번째 연구 - 대족장 벨칸(4)
남을 설득하는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대마법사의 [도미네이트 퍼슨]이나 [메테오 스트라이크]보다 강력한 무기가 되어준다.
'설득의 상대가 이종족 연맹을 결성할 메인 빌런이라면 더욱 그렇지. 여기서 벨칸을 설득해야 메인 시나리오의 흐름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
시네어RPG는 대단히 암울한 다크판타지 게임이었다. 주인공이 모험을 시작한 시점에서 세상이 대충 망한 상태였으니까.
'세상이 대충 망해버린 원인이 그린타이드로 시작되는 [삼두룡의 강림]이다. 만일 [삼두룡의 강림]을 사전에 저지한다면, 훨씬 괜찮은 상태에서 메인 시나리오를 맞이할 수 있어.'
그러니.
해내야한다.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을 수 있지?"
"그건 대족장님께 달려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설득은 결코 녹록한 과정이 아니다.
상대가 많은 경험을 쌓아온 사람일수록.
"저는 대족장님을 설득하고자 많은 시간을 소모했습니다. 기회비용을 따지면 적잖은 대가를 치른 것이나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도 위험을 감수한 것이죠."
나는 위험을 감수했다.
너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감동적인 말이군."
대족장 벨칸은 뻐드렁니가 돋아난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텔로리안의 이야기는 구태여 비꼬아 해석할 이유가 없었다.
"속내를 털어놓자면, 인간의 지도자들 가운데 우리와 공존을 꿈꾸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네. 설령 있더라도 스스로의 뜻을 펼칠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인간의 지도자.
벨칸이 바라보는 텔로리안.
"나는 자네가 공존을 위해서 찾아와줘서 진심으로 고맙네. 하지만 자네도 인간들을 이끄는 입장이니 알고 있을테지."
모른다.
나는 이끄는 사람이 아니니까.
단지 조언을 전하는 사람이지.
"무리의 지도자는 가슴만 따라서 움직일 수 없는 자리야. 냉철한 계산이 있어야지."
툭툭.
대족장 벨칸은 손가락으로 머리의 측면을 찔렀다. 그는 똑똑하다. 오크치고는 똑똑한 수준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손꼽히는 전략가.
"텔로리안. 자넨 나의 심장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네. 이제는 나의 두뇌를 설득해보게. 그렇다면 자네의 인도를 따르도록 하겠네."
합당한 요구다. 대족장 벨칸이 감동적인 웅변만으로 종족의 운명을 결정할 충동적인 지도자였다면, 애초에 사막오크들을 하나로 결집시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좋습니다. 무엇을 설득하면 됩니까?"
"나는 여전히 침공에 승산이 있다고 보네."
단지.
도박일 뿐이다.
동전던지기 수준의.
"우리가 그린타이드를 일으켜서 앞면이 나오면 인간의 시대를 끝내고 전성기를 되찾는 것이고 뒷면이 나오면 종족이 끝나는 것이지."
블랙터스크나 좋아할 바보같이 무모한 결정이다. 하지만 실체도 불명확한 조언을 따르는 방향보다는 안전하다.
"자네의 조언에 근거가 필요하네."
"흠."
"쉽지 않은 일인건 아네."
대족장 벨칸이 찬찬히 텔로리안을 훏어보았다. 진의를 꿰뚫어보기 위해서.
"그래도 제시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준비해왔지요."
탓!
손가락을 튕겨 직사각형 형태의 큼직한 책상을 소환했다. 책상 위에는 지형이 세밀히 묘사된 대륙 전도와 원형거울이 있었다.
"다르막세스의 거울전쟁······!"
"마도대학에서 공부하셨으니 아실테지요."
"알다마다! 내가 우리 학번의 챔피언이었네!"
환영술사 다르막세스는 너무 오래 살아온 마법사답게 너무나 심심했다. 인간에게 허락된 모든 쾌락을 즐겨본 환영술사는 진짜보다 진짜같은 전쟁놀이를 구현해버렸다,
[거울전쟁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8레벨까지 10/100]
[전승포인트 20점]
"교수의 장비들을 대체 어떻게 반출했나?"
"자금과 인맥이 있으면 어떻게든 됩니다."
"예상보다 수완이 좋군. 잿빛현자."
거울에 마력을 불어넣자 천막이 극장처럼 깜깜해지며 마법지도에 입체감이 부여됐다. 뒤이어 마법거울이 빛을 내뿜으면서 지도에 전장과 장기말들을 빚어냈다.
"······맙소사."
대족장 벨칸은 경악했다. 마법거울이 대륙 전역의 전장과 군대를 구현하고 있었다. 다르막세스 본인이 아니면 구현이 불가능할 규모.
"자네의 정체가 뭔가?"
"마법사입니다."
"······"
대족장은 팔짱을 끼고서 텔로리안에게 집중했다. 지금껏 상대가 드러낸 힘과 지혜는 일부에 불과하단 확신이 들었으니까,
"·········전력을 아주 정확하게 기입했군."
지도에 구현된 사막오크들을 살펴본 대족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모든 정보가 너무나 정밀히 기록된 상태였다. 병력의 숫자. 보급 상태. 훈련도. 장비 수준. 사기 수준까지.
"심지어 비전투 요소까지도."
게다가 생산을 담당하는 비전투요소까지 완벽한 정보를 기입해둔 상태였다. 자신조차도 사막오크들에 대해 이토록 세밀히 알진 못한다.
"어떻게 알아냈나?"
"어떻게가 중요한 시점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에게 차를 내주면 안되었는데······"
적군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마법사.
이보다 위험한 적수가 과연 존재할까?
'차라리 드래곤을 상대하는게 낫겟군!'
접대의 관습만 아니었다면 즉각 마법사의 골통을 부쉈을 것이다. 놈의 지식은 자신의 모든 계획을 모조리 비틀고도 남을테니까!
"이정도면 공평한 구현입니까?"
"············"
공평함을 넘어서 지나쳤다. 일개 마법사에게 허락되지 않는 온갖 정보들이 곳곳에 기입된 상태. 심지어 자신이 인간들의 심장을 찌르고자 오랫동안 준비해온 비수들도 드러났다.
"전력에 이의가 없으시면 시작하겠습니다."
대족장 벨칸은 고개를 끄덕이고 장기말로 구현된 사막오크들을 내려다보았다. 전사만 15만에 이르고, 부족민들까지 포함하면 50만이 넘어가는 전투인원들이 이동한다.
"언제 봐도 무시무시한 숫자로군요."
"푸흐흐. 왕국 놈들이 잊어버린 점이지."
오크들은 태생적으로 강건하다. 또한 사막오크들은 대황야에서 살아가는 유목민들. 두가지 특성이 합쳐지면 모든 인구를 전투원으로 가용하는 정책이 가능해진다.
"우린 인구는 적지만 전사는 많다네."
[문화(오크)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18레벨까지 20/100]
[전승포인트 20점]
"하지만."
그렇지만.
뭐든지 좋은 특성은 드물다.
"그것이 당신들의 전부이지 않습니까?"
모든 인구가 전투원이라면 자연스레 생산활동이 취약해진다. 기예를 갈고 닦은 전문가 집단도 나타나지 못한다. 애초에 오크들의 절대적인 인구수가 적은게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왕국을 멸하긴 충분한 전력이다."
"그건 두고볼 일입니다."
"하! 어디 해보자고!"
잿빛현자와 대족장이 각각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았다. 그들이 시행할 거울전쟁은 놀이가 아니다. 이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다.
'거울전쟁은 원래 카드놀이로 구현된 미니게임이었지. RPG 게임에서 구현이 어려운 대규모 전투나 전쟁을 표현할때 사용되는.'
하지만 더이상 거울전쟁은 카드놀이가 아니었다. 전지한 지식과 아티팩트를 통해서 만들어진 재현도가 완벽한 워게임(Wargame)이다.
[문화(거울전쟁)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18레벨까지 30/100]
[전승포인트 20점]
"거울 전쟁을 시작합니다."
딸랑딸랑!
타종을 울리자 지도에 전장의 안개가 펼쳐진다. 자신은 진행자이므로 안개의 내부가 모두 보이지만, 대족장 벨칸은 [참가자]이므로 [아바타]가 위치한 장소의 인근밖에 확인하지 못한다. 휘하의 군대여도 마찬가지다. 최고지휘관이 동시에 여러곳에 존재하지는 못하니까.
태양력 1526년 6월 1일.
그린타이드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차례입니다. 대족장 벨칸."
"막사를 나서서 모든 동포들을 향해서 연설하겠네. 인간들이 우리 동포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샅샅이 밝히고, 조상들의 것이었던 고토를 되찾을 시간이 찾아왔다고 외치지."
대족장 벨칸은 [웅변가] 특기를 지닌 S급 지도자. 오크들의 전의가 불타오르고 사기수치가 급증한다. 일부는 [분노] 상태에 걸려서 전투력이 상승하지만 통제력을 잃는다.
"오우거 부족들이 합류를 요청합니다."
"받아들이지."
"알테르 유목민들도 합류를 요청합니다."
"받아들이지."
"잿빛산의 코볼트들이 합류를 요청합니다."
"받아들이지."
"영애수집가 울프강도 합류를 요청합니다."
"·········왕국놈이 우리에게 합류하겠다고?"
설명해준다.
어떤 인물인지.
"하! 그게 무슨 미친 종자인가?!"
"인간은 다양성을 지닌 종족입니다."
"내가 수많은 악당들을 보았네만 그들 가운데 손꼽히는 쓰레기로군. 상종도 못할 자야!"
대족장 벨칸의 얼굴에 혐오감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왕국을 분열시키기엔 대단히 유용하겠어. 투항을 받아들이되 별동대를 이끌고 내부에서 암약하라고 지시하겠네."
쓸모가 다하면 팽할 생각이겠지. 하지만 울프강은 대족장의 속내를 알고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평생의 비원을 이룰 수 있다면!
"그럼 진군을 명하겠네."
끝없는 녹색물결이 대황야를 지나쳐 변경령을 침범한다. 이에 미남공 알랑송이 국경의 영주들을 결집해서 요격에 나선다.
"블랙터스크와 서약투사단을 내보내지."
레이디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미남공 알랑송이 백마에 올라타 돌격한다. 그는 오크슬레이어로 불리던 선조들의 명성을 이어받아서!
[피값을 받아내러왔다! 인간의 영주여!]
······반으로 쪼개졌다. 도약공격으로 적장을 일격에 쓰러뜨린 블랙터스크는 칼날폭풍을 일으킨다. 모두가 단숨에 쓰러진다.
"에스실 변경군. 지휘부 몰살."
"좋아. 역시 블랙터스크로군,"
국경의 성채들이 차례로 함락되고 수많은 귀족들이 포로로 잡힌다. 대족장 벨칸은 보호조치를 명하나, 블랙터스크는 명령을 무시하고 귀족 포로들을 끔찍하게 대우한다.
"······판정의 근거가 뭐지?"
벨칸의 미간이 좁혀졌다. 블랙터스크는 분명히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사장으로서 대족장의 명령을 거역할 정도는 아니다.
"당신이 했던 연설의 효과입니다."
"·········전사장이란 놈이 흥분해서는."
복수심에 불타는 블랙터스크는 포로들을 학대하고 승리에 도취된 투사단은 대규모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다. 오크 사절단이 맞이했던 끔찍한 운명이 역으로 재현된다.
"·········"
벨칸은 판정에 항의하지 않았다. 자신도 이곳까진 어느정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텔로리안의 예지가 겹치니 더욱 착잡해졌다.
"뒤늦게 왕실의 구원군이 도착합니다."
"늑대기병들을 보내서 규모를 파악해보지."
"요먼기수들과 교전이 벌어집니다. 판정결과는······늑대기수의 대승."
정찰전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하자 전장의 안개가 사라졌다. 또한 국왕군의 정확한 규모와 병종까지도 완벽한 파악을 마친다.
"호오."
소년왕의 군세를 살펴본 대족장 벨칸은 턱을 쓰다듬었다. 열넷짜리 꼬마가 분에 넘치는 대군을 이끌고 도착했던 것이다.
"정예병으로 4만을 결집시켰다고?"
"에스실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결집한 병력입니다. 기사만 수천에 이르지요."
하지만 벨칸이 이끌고 도착한 군세도 만만치 않았다. 노략질과 공성을 위해서 흩어진 병력을 제하고도, 여전히 8만의 전력이 남는다.
"그래도 우리가 2배가 넘는군."
"양군은 하슬룸 평원에서 조우합니다."
태양력 1526년 8월 29일.
하슬룸 평원에서 대회전이 벌어진다.
"정령들에게 청해서 폭우를 내리겠네."
"궁중마법사들이 주문방해를 시도합니다."
"내가 직접 나서서 제사를 주관하겠네."
대족장 벨칸.
40레벨대의 초강자.
왕국마법사들로는 어림도 없다.
"좋습니다. 엄청난 폭우가 내립니다."
"하하! 돌격을 준비하던 기사들의 대열이 완전히 흐트러졌군! 오우거 투사들을 돌격시키겠네. 돌격 목표는 창병진!"
피에 굶주린 오우거 투사들이 왕국군 창병진을 완전히 박살낸다. 왕국군 석궁수들이 비오듯 볼트를 퍼부어도 놈들을 저지하지 못한다.
"대주교가 지휘하는 교단군이 증원됩니다."
"블랙터스크와 서약투사단을 투입하지."
"전투는 막상막하의 접전으로 이어집니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전사장 블랙터스크와 토모리 대주교가 서로를 마주합니다."
토모리 대주교.
35레벨 전투성직자.
전사장 블랙터스크.
35레벨 챔피언.
"결투 결과는."
"이건 쉽지 않겠는데."
쿵.
토모리 대주교가 사라진다.
"대주교가 일격에 전사합니다."
"·········일격에?"
"대주교와 블랙터스크가 무기를 맞대기 직전에, 대주교를 보호하던 신성한 오라가 사라졌습니다. 누군가의 개입이 있던것 같습니다."
·········끔찍할정도로 불길한 통찰이 대족장 벨칸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일단 사자의 등 위에 올라탔다면 절대로 내리지 못한다.
"최강의 무장인 토모리 대주교가 쓰러지자 왕국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합니다. 모두가 뒤로 돌아서서 도망치기 직전이군요."
그때.
왕기(Royal Flag)가 중심에 나타난다.
"소년왕의 존재감은 전군에 퍼져나가던 공포감을 가라앉힙니다. 때마침 귀족들로 구성된 기사단이 마침내 돌격대형을 갖춥니다."
호오.
제법인데.
"기사들의 돌격이 시작됩니다."
왕권을 상징하는 백조깃발을 중심으로 수많은 명문가들의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것은 단순한 창기병들의 돌격이 아니라, 왕국의 모든 역사와 전통이 담겨있는 일격이었다.
"오우거 투사대. 전멸."
"·········"
"서약투사단. 전멸."
"·········"
그것은 근거다.
귀족이 존재할.
"블랙터스크는?"
"홀로 기사단을 상대하며 버티고 있지만 길지는 못할 겁니다. 이제 소년왕은 선두에 올라서, 오크들의 본대를 향해서 돌진합니다."
하지만 폭우가 내리는 하슬룸 평원은 완전한 뻘밭이 되었다. 전투마들의 돌격력은 제한되며, 기사들의 피로도는 금방 쌓인다.
"지금 몰아치겠네. 직접 맞돌격을 이끌지."
퍽!
대족장의 붉은 망치가 소년왕의 머리를 터뜨린다. 소년왕의 박살난 두개골에 경악할 틈도 없이 녹색 물결이 기사대를 휩쓸어버린다.
"왕국 기사단."
전멸.
"왕과 대영주들이 모조리 전사했습니다. 명령을 내릴 지휘관이 없기에 나머지 병력들은 자연히 도주합니다. 이것으로 에스실 왕국의 모든 귀족 가문들이 몰락했습니다."
본래.
이곳에서 철퇴백작도 죽는다.
블랙터스크의 술잔이 되어서.
"추격해서 끝장을 내겠네."
하지만.
지금은 달라진 세계선.
"······그때 철퇴백작 로드릭이 뒤늦게 전장에 도착합니다. 인근에 존재하는 모든 용병대와 농민들을 징발했기에 규모는 제법 많습니다."
그래봐야 잡병들이다.
정예병이 궤멸한 직후의.
"전투 대형으로!"
"예. 양군의 교전이 벌어집니다."
압도적인 승리겠지.
애초에 전력이 비교가 되지 않으니.
"······당신이 이끄는 군대는 오랜 전투로 지치고 힘이 빠졌군요. 게다가 소모도 심합니다."
괜찮다. 상대는 백작의 직할군을 제외하면 잡병에 불과하다. 숫자가 얼마나 되든지 오크 전사들의 돌격을 맞이하기엔 어림도 없다.
"오크 선봉대. 전멸합니다."
"?"
어떻게?
"그제야 백작군의 선봉에 위치한 거인병들이 보입니다. 그들은 판갑을 착용하고 참마도를 이쑤시개처럼 휘두르는······트롤 전사단입니다."
?
??
???
"트롤?"
"네. 그것도 바위트롤입니다."
힘을 주어 강조한다.
"오크조차 벌레처럼 짓이기는 괴력을 지녔는데 사지가 잘려도 5분이면 재생되는 괴물말입니다. 그런 괴물 500마리가 철퇴백작의 지휘 아래 대열을 이루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인간이 트롤을 어떻게 부린단──"
"안녕하십니까. 지혜로운 선견자시여."
"·········이게 무슨?"
대족장의 황금눈이 휘둥그레진다.
"나무뿌리부족의 여족장이자 트롤마운틴의 여남작으로서 헤링턴 백작께 봉사하는 미천한 올골두골로가 문안인사를 올립니다."
바위트롤이다.
판갑을 입었고.
참마도를 매고있는.
[대족장 벨칸을 압도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1]
[18레벨까지 50/100]
[전승포인트 21점]
6. 여섯번째 연구 : 대족장 벨칸(5)
"이건 말도 안돼!"
꽈앙!
대족장 벨칸이 무쇠처럼 단단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괴력에 의해서 마나스틸로 만들어진 책상이 형편없이 찌그러진다.
"어떤 인간이 트롤을 충직한 군인으로 훈련시키고, 홀로 원로주술사들이 준비한 화염폭풍을 맞받아칠 수 있다는 말인가?!"
대족장의 공세는 모두 실패했다. 무슨 병력을 보내든 바위트롤 쯔바이핸더들에게 간단히 격퇴된다. 이에 주술사들을 동원해 화염 폭풍을 일으켜보니.
────
◆원소술사 텔로리안 (마법 카드, 전설)
: 4대 원소를 모두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원소술사입니다. 파괴적인 에너지를 단번에 분출해서 전장을 초토화합니다!
■효과
: 전장에 존재하는 10레벨 이하의 모든 적군을 파괴하고 [전투마법사 텔로리안]을 소환합니다. 전투마법사 텔로리안은 40레벨 마법사로 간주됩니다.
────
철퇴백작과 함께 등장한 텔로리안이 무시무시한 주문들을 먼저 쏟아냈다. 오크족 주술사들은 공격을 방어하기에 급급해진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 됩니다."
텔로리안은 차분히 답했다.
"당신의 군세는 오랜 전투로 지치고 소모되었습니다. 주술사들도 왕국 마법사들을 상대하느라 마나를 대부분 소비했죠."
반면 철퇴백작의 군대는 신선했고 텔로리안은 마나가 한창이나 남아있었다. 하루 종일도 싸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네가 트롤들을 길들인 판정은 인정하네!"
대족장 벨칸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얼굴을 향해서 삿대질을 했다. 거울전쟁을 시행할 때에는 반드시 이런 순간들이 있다. 당사자들이 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격분하는.
"하지만 자네가 홀로 전장을 뒤바꿀 화력을 지녔다는 부분은 납득이 가지 않아! 그래봐야 스물을 방금 넘은 애송이일 뿐인데!"
텔로리안은 대족장을 납득시킬 방안을 궁리해봤다. 벨칸은 판단력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므로 알고는 있을 것이다.
'나의 판정은 잘못되지 않는다.'
자신이 시전한 거울전쟁은 전지(全知)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미래예지. 그러니 판정을 의심한다면 능력이 아닌 조작을 의심하는 것.
'하지만 신뢰성도 충분히 입증했다.'
자신은 대족장 벨칸에게 충분한 호의와 신뢰를 보여주었다. 24에 이르는 직감수치로 그러한 사항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감정의 문제군.'
작게는.
게임에서 패배했단 분노.
크게는.
수십 년의 준비가 물거품이 됐단 허탈감.
"지금 왕국군을 전멸시키지 못하면 다신 기회가 없단 말이다! 반드시 여기서 에스실의 야전군을 끝장내야하는데! 빌어먹을!"
똑같은 공세를 계속하지만 결과는 같다. 대족장 벨칸은 하슬렌 평원에서 에스실 왕국군을 대패시킨다. 그러나 전멸시키진 못한다. 철퇴백작이 패잔병들을 추스려서 퇴각하므로.
"당신이 승리했습니다."
"당장은 그렇겠지. 하지만 너무 늦었네."
"전쟁은 여전히 당신들이 우세합니다."
국왕의 전사.
귀족의 전멸.
"산악오크들의 회색물결이 대산맥에서 쏟아져 호응합니다. 동시에 대산림의 우드엘프들은 간만의 와일드헌트를 선언하겠군요."
야생종족들의 기습적인 공세에 수많은 인간 정착지가 함락된다. 인간이 가축을 도살할 때와 같은 끔찍한 학살이 뒤따른다.
"또한 고블린과 트롤과 같은 그린스킨들이 당신의 군세에 합류할 겁니다. 뒤이어 다크엘프와 뱀파이어, 악마교단들이 날뛰면서 하트랜드의 인간 국가들이 처참히 무너져갑니다."
질서가 무너지자 농민들이 굶주렸다. 이에 굶주린 농노들은 도적이나 사교도가 되어 모시던 상전을 죽이러간다. 영주들은 개밥이 되고 영주부인들은 장난감으로 전락한다. 영애와 영식들은 악마들을 위한 산제물로 바쳐진다.
"······그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인간들이 내부적으로 무너진 것이죠."
이미 중부의 국가들은 내부모순이 한계에 달한 상태. 덕분에 적잖은 하층민들은 벨칸이 이끄는 이종족들의 침공을 해방의 기회로 여긴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내부적으로 취약해진 인간 왕국들이 볼링공에 맞은 볼링핀처럼 우수수 무너진다. 대족장 벨칸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고, 이에 인간을 증오하던 이종족들이 대족장의 깃발 아래로 모여든다.
"[외교] 판정을 통해서 이들을 하나로 결집시켜서 연맹을 형성하겠네. 연맹의 이름은 오크어로 화합을 뜻하는 알레우린으로 정하지."
참여하는 세력이 많으니 문화도 다양하고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하지만 대족장 벨칸은 S급 지도자. 모든 이해관계를 조율해서 각기 다른 세력을 결집하는데 성공한다.
"중부의 절반을 장악했군요."
"·········그래도 좋지 않아. 내가 상정한 계획보다 훨씬 느리네."
"그렇지만 알레우린 연맹의 군세는 많고 강력합니다. 인간 왕국들도 저항을 포기하고 하나둘 항복합니다. 헤링턴 가문은 아니겠지만요."
대족장 벨칸은 웃지 못했다.
"장기전이 되어도 5년 정도는 해볼 만하겠지."
벨칸이 지휘하는 이종족 연맹은 제국군조차 모조리 격퇴한다. 오크들의 맹위에 북부군도 참전을 미룰 것이고, 처음엔 보복이 두려워 망설이던 온건한 이종족들도 하나둘 연맹에 가세하겠지.
"하지만 기습이 실패했으니 뒤가 없다네."
"맞습니다. 제국은 제국이니까요."
1개 군단을 궤멸시키니 2개 군단이 북상해왔다. 2개 군단을 전멸시키니 4개 군단이 진격해온다. 그리고 4개 군단마저 몰살시키니······
"황제가 친정(親征)을 선언합니다."
황제의 친정.
이를 대비하려면 조속히 중부를 장악하고 제국을 쳐야했다.
"······자네와 트롤들만 아니었어도 나의 계획은 성공했을거야. 에스실을 단번에 멸망시키고 황도를 기습적으로 치려고 했거늘."
하지만.
시간이 너무 끌려버렸다.
제국의 주력군이 복귀할 것이다.
"제국은 동방전선에서 휴전을 맺고 주력군을 동원해오고, 간만 보던 북부도 대규모 원정군을 구성합니다. 중부를 제국에게 완전히 내주면 다음은 자신들이 될 테니까요."
이후에 펼쳐질 결과는 재앙적이다. 중부의 참상을 목도한 황제는 오크몰살령을 반포하고 이종족에게 유화적이던 북부인들의 정서도 이종족 혐오로 돌변한다.
"그렇게 우리 오크족은 몰살인가."
"소수가 살아남긴 할 겁니다."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못하는 오지로 도망치는 오크들은 생존할 것이다. 대신 문화와 전통을 포기해야겠지. 생존도 버거울테니.
"그건 오크가 아닐세."
대족장 벨칸이 단언했다.
"괴물일 뿐이지."
"적어도 오크 문명은 끝나겠지요."
마침내.
오랜 토의가 결론에 이른다.
"종족 대전의 발발을 막아야겠군."
"옳은 판단을 하셨습니다."
"잿빛현자 텔로리안."
우리는 준비가 되었네.
자네의 인도를 따라갈.
[대족장 벨칸을 설득함!]
[경험치 +20]
[전승포인트 +1]
[18레벨까지 70/100]
[전승포인트 22점]
"그럼 식수 문제부터 해결합시다."
"나도 같은 문제를 질문하려던 참이었네."
대황야에 흩어져 살던 수십개의 부족들이 한곳에 집결한 상황. 당장 식수와 식량을 해결하지 못하면 질병과 굶주림으로 괴멸한다.
"마법으로 비를 내릴 겁니다."
"마법으로?"
대황야의 가뭄은 마법으로 비를 내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황폐해진 생태계를 복원하려면 바닥을 드러낸 오아시스들이 범람할 정도로 많은 비를 내려야한다. 사막오크들이 [하르가쉬]라고 칭하는 엄청난 폭우를.
"자네도 알겠지만 우리 주술사들이라고 비를 내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세. 기우제를 올리면 며칠간은 비를 내릴 수 있네."
하지만 올해에는 하르가쉬가 전혀 오지 않았다. 사막오크들이 대황야에 정착한 이래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대사건.
"하지만 우리 필멸자들의 재주론 결코 하르가쉬를 모방하지 못한다네. 하르가쉬가 내릴 때에는 정령군주들의 숨결이 필요하거든."
[지식(자연)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8레벨까지 80/100]
[전승포인트 23점]
"맞는 말씀이십니다."
텔로리안은 아공간에서 소환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서.
"허나 불멸자의 재주라면 어떻겠습니까?"
"만약 불멸자의 도움을 받으면 시도해볼 가치는 있겠지. 하지만 정령군주들과 맞먹는 위격의 고위 불멸자와 접촉할 방법이 있는가?"
필멸자(Mortal)과 불멸자(Immortal)의 차이는 간단하다. 시간의 흐름에 쇠한다면 필멸자고 영원이 흘러가도 똑같이 존재하면 불멸자다. 따라서 에인션트 드래곤과 아크리치는 필멸자에 속한다. 그들의 육신은 영원을 견뎌낼테지만 정신은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불멸자들은?'
신들은 100만년을 살아도 삶에 지치지 않는다. 천사와 악마는 선행과 악행에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으며, 정령은 태초부터 현재까지 타고난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불멸자들은 인격체보다는 자연현상에 가깝다. 혹은 특정한 절차를 제일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장치에 가깝지.'
즉.
인격체가 아니란 뜻이다.
'애초에 물질계에 거주하지도 않지.'
불멸자들은 개별적인 차원에 거주하는데, 천상이나 지옥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러한 차원은 [영속성]의 특징을 지녀서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다.
[차원학에 대한 전승 획득!]
[경험치 +10]
[전승포인트 +1]
[18레벨까지 90/100]
[전승포인트 24점]
'여기서 불멸자의 도움을 받기 위한 첫번째 난관이 발생한다. 우선 다른 차원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문이 요구되니까.'
이것이 전달성.
'다음으론 불멸자의 도움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하지만 불멸자들은 보통 필멸자들의 보물에 관심이 없지.'
이것이 대가성.
'마지막. 불멸자를 물질계로 불러내려면 희귀한 촉매들을 사용해 복잡한 소환 절차를 거쳐야한다. 이를 감독할 전문적인 스펠캐스터도 반드시 필요하지.'
이것이 소환성.
'이를 합쳐서 소환의 3요소라고 부른다.'
원하는 도움을 정확히 알리는 전달성.
도움에 걸맞는 대가를 제공하는 대가성.
제대로 의식을 치러서 불러내는 소환성.
'때문에 불멸자를 소환할 당시에는 3요소가 완벽해야한다. 매우 조그마한 실수도 파멸적인 결과로 이어지기에 충분하니까.'
때문에 정령군주와 맞먹는 힘의 불멸자를 소환할때 필요한 절차와 대가는 엄청나다는 말로도 설명이 불가하다.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힘들겠지?"
대족장이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루시펠레스."
딸깍!
허공에서 지옥불이 치솟으며 붉은 피부의 귀공자가 나타났다. 강대한 대악마가 날개를 펼치자 제국풍의 장중한 합창곡이 울려퍼진다.
"나를-불렀-는가?"
대악마가 말한다.
무대 위의 배우처럼.
"친애-하는-벗이여?"
게헨나의 폭군이 눈동자에서 지옥불을 번득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족장 벨칸은 온몸이 얼어붙는 공포를 느낀다.
"오호."
대악마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네놈이 나의 거래상대군."
게헨나의 루시펠레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새하얀 이빨이 시커먼 속내와 대비되어서 더욱 위화감이 느껴졌다.
"청해라. 노예들의 대장아."
데빌집 막내아들.
게헨나의 백수놈.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리라."
강림.
6. 여섯번째 연구 : 대족장 벨칸(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