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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화

지옥에서 돌아온 빌런

복수였다.

부모님을 죽인 빌런에 대한 복수.

하지만 그게 시발점이 되었다.

[천살성을 각성하셨습니다.]

빌런- 사람을 죽이면서 영혼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게 정말 천살성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석은 자신의 내면이 점점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피에 대한 욕망, 살인에 대한 갈등,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충동.

참기 힘들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의식을 잃어버리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의 손에는 늘 새빨간 피가 묻어 있었다.

그렇게 수년.

아니, 십수년은 지났을까.

이전석은 피와 살육에 미친 살인귀가 되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갈취했다.

이성과 이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

죽이고 죽이며, 그저 한결같이 죽이기만 했다.

모든 헌터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고, 밤이 찾아올 때면 늘 불안에 떨며 지내야 했다.

그러나 수천에 달하는 헌터들의 공멸로 이전석은 끝끝내 목숨을 잃고야 말았으니······.

━죄인 이전석. 형을 받들라.

그렇게 그는 지옥에 떨어졌다.

무간(無間).

영원토록 불에 타들어가는 세계.

아이러니하게도, 이전석은 그때가 되어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온몸에 들러붙은 불꽃은 꺼질 기미가 없고, 고통은 매분 매초마다 계속된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흘러나온 한 방울의 눈물조차 불꽃에 그을려 재가 된다.

영혼은 기절하지 않고 죽지도 않으니, 강제로라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흘렀다.

불에 타들어가는 고통마저 익숙해졌을 무렵.

"······!"

목소리가 들렸다.

※ ※ ※

"······아들!"

시야가 암전하고 고통이 사라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변화.

이전석은 두 눈을 껌뻑였다.

'······뭐지?'

머리가 이해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곧 어둠을 가르고 빛이 드리웠다.

"엄마 말 듣고 있니, 아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

익숙한 음성이다.

오래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뇌리에 또렷이 새겨져 떠오르는 모습.

"어머니······?"

이전석이 눈앞에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어머니다.

이름 석자 한유리.

45세. 이전석을 낳고 길러준, 세상에 단둘 뿐인 부모님.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 눈앞 식탁에 앉아 있었다.

이전석이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집.

20평 정도의 거실.

TV나 식탁, 소파 같은 가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베란다 창문에선 햇살이 쏟아져 거실을 밝혔다.

불꽃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광경.

지옥이란 단어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왜 그래, 아들."

말도 없이 가만있었기 때문일까.

어머니- 한유리가 재차 물어왔다.

걱정이 가득 담긴 부모님의 어투.

그토록이나 다시 한 번 들어보길 원했던 목소리였으나, 이전석은 표정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망할. 이젠 환상까지 보여주는 거냐?"

환상.

이전석은 눈앞의 광경이 가짜라고 생각했다.

저승의 사자들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낸 환각 말이다.

이유야 별거 없었다.

저승사자라고 모두 선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들 중 몇몇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의도적으로 죄인을 고문하기도 했다.

가늠할 수 없이 긴 세월.

그들의 농간에 놀아났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때문에 이전석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들이 저승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풍경이라 생각했다.

'개자식들.'

이전석이 내심 욕설을 지껄였다.

하필이면 이 시절의 기억이라니.

질이 나빠도 너무 나쁘다.

아무리 자신이 죄인이라지만 이렇게 권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말인가.

그가 분에 못 이겨 벌떡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환각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놈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그토록 꿈꾸던 이상과도 같았으나, 헛된 망상에서 헤실 거릴 바엔 차라리 지옥불에 지져지는 게 훨 나았다.

그런데.

퍼억-!

"······?"

느닷없이 뒤통수에 통증이 느껴졌다.

불에 지져지는 것과는 다르다.

마치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 같은-··.

"아침 댓바람부터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이어 목소리가 들렸다.

터벅, 터벅-.

유난히도 묵직한 발걸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라."

큰 덩치의 남자가 식탁에 앉는다.

그 또한 이전석에겐 무척이나 그리운 얼굴이었다.

흐릿하던 기억이 점차 또렷해진다.

"아버지······?"

이한석.

항상 가정을 책임지려 부단히 노력하시던 아버지.

"아들,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한유리가 이전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걱정이 담긴 눈빛과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감기 한 번 안 걸리던 사람이 아프기는. 자다가 바닥에 대가리라도 찍혔나 보지."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교적 젊은 소녀의 음성.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니다.

맞은편에 앉은 소녀는 이전석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이지혜.

싸가지 없는 말투와 상판대기.

이전석이 기억하는 여동생이 맞았다.

환상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한 광경.

뒤통수에 느껴지는 통증마저 또렷하기 그지없다.

단순 환상이었다면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감각.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뒤늦게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식탁, 숟가락, 거실바닥, 그리고 음식에서 올라오는 따뜻한 열기까지 모든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대체 뭐지?'

틀림없이 저승사자들이 보여주는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지옥불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모든 게 생생하고 실감적이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온 것만 같이.

'설마.'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회귀라니···.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밥 안 먹냐?"

이한석이 이전석을 향해 물었다.

이전석은 다시 식탁에 앉았다.

여전히 머릿속이 난잡하기만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저 조용히, 식탁에 차려진 밥을 먹었다.

흰 쌀밥, 매콤한 김치, 짭짤한 김···.

'······맛있어.'

맛있다.

환각이라고 볼 수 없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전석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나, 진즉에 메말라버린 눈물샘은 그 어떤 감정도 토해내지 못했다.

※ ※ ※

그 뒤로 사흘이 더 지났다.

바뀌지 않는 풍경.

여전히 또렷한 감각.

이전석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온 거야.'

어떻게? 왜? 무슨 이유로?

모른다.

알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금 보고 느끼는 것들이 결코 거짓 따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 또한.

'천살성은······.'

이전석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머리가 더없이 평온하고 맑았다.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 따윈 들지도 않는다.

피에 대한 충동 같은 것도 없다.

아직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그 복수로 빌런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글쎄. 아마 그건 아닐 거다.

상태창.

각성자들의 전유물.

그곳에 천살성이 지금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Lv. 1

[근력 - 10] [민첩 - 10]

[체력 - 10] [마나 - 10]

스탯 포인트 - 0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생전의 레벨이나 스탯 같은 것들은 전부 초기화됐다.

그러나 각성했단 사실만은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천살성 또한 마찬가지다.

천살성

등급 : EX

효과 : 자신이 죽인 존재의 특성을 랜덤으로 갈취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서 피를 볼 때마다 강한 살인충동을 느끼게 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충동은 더욱 강해지며, 종국에는 이성을 잃고 피와 살육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다.

이전석을 지옥 밑바닥까지 끌어내린 주범.

특성을 갈취한다는 효과는 과연 대단했으나, 천살성은 그 대가로 이전석을 피와 살육에 미친 사이코패스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피에 대한 충동.

살육에 대한 갈등.

그런 것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전석은 책상에 올려져 있던 커터칼로 손가락을 베었다.

그러자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전에는 이런 작은 핏방울만 봐도 금세 이성을 잃고 날뛰었건만, 지금은 이성도 의식도 멀쩡한 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이것 때문이겠지.'

이전석이 시선을 옮겨 다른 특성을 확인했다.

영원의 낙인.

등급 : 불명

효과 : 오직 무간에 투옥된 죄인에게만 주어지는 낙인. 이것이 존재하는 영혼은 결코 소멸되거나 마모되지 않는다.

영원의 낙인.

그것은 일종의 족쇄였다.

무간에 떨어진 죄인이 영원토록 의식을 잃지 않고, 그저 오롯이 고통만을 받게 만드는 장치.

그러나 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효과 덕분일까.

이전석은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스스로 천살성을 억누르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과거로 되돌아온 상황.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쳤는가.

누군가의 농간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알 수 있는 건 무엇하나 없다.

하지만 이전석은 생각했다.

'······되돌릴 수 있어.'

이 시간대라면 그가 죽였던 사람들도 전부 살아 있을 거다.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린다면?

이전석을 지옥 밑창까지 끌어내렸던 악업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악업만큼 선업도 쌓는 거지.'

그럼 다음 사후엔 지옥이 아닌 천국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유치하다고?

비웃어도 상관없었다.

'이번엔 천살성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사는 거야.'

천국은 그 결과를 보여주는 지표에 불과했다.

오롯이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다는 증거.

'그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전석이 침대에 앉아 거듭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온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으니.

똑똑-.

문득.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겨왔다.

이전석이 채 대답하기도 전.

"아들."

정겨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들어온 건 한유리였다.

"정말 아픈 거 아니지?"

사흘 동안 방안에만 있었기 때문일까.

한유리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이전석은 옅게 웃으며 고갤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요."

"그럼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주렴. 니 아빠 알지? 저래 보여도 일단 의사잖아."

맞다.

그랬다.

'아버지··· 의사였지.'

동네의 작은 병원이었지만, 나름 인망이 좋은 내과 의사였다.

"참."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잇는 한유리.

"오늘은 니 아빠랑 간만에 데이트할 거니까 저녁은 지혜랑 같이 치킨이라도 시켜먹으렴."

그리고 다시 방문을 닫고 나간다.

어째서일까.

'···뭘 한다고?'

이전석은 순간 벙 찌고 말았다.

아주 잠깐 머리가 굳어버렸다.

하지만 이내 뇌리에 단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데이트.

'설마!'

그러자 뒤늦게 떠오르는 기억들.

이전석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달력을 확인했다.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진 날짜가 있었다.

7월 15일.

그 날은 기일이었다.

부모님이 빌런의 테러로 돌아가시던 날.

모든 비극의 시발점.

그 기억이 떠오른 순간.

'막아야 해.'

이전석은 덜컥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천살성의 인생이 아니다.

이번에는 '내' 인생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그건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이 아니게 된다.

또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야 말 터.

이전석은 이를 악문 채 한유리한테 다가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화

백화점 테러

방을 나온 이전석.

한유리를 붙잡으려던 그가,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고?

그 말을 믿기나 할까?

헛소리로 여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한다.

그때.

"왜 그러니, 아들?"

한유리가 이전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전석은 침묵했으나 잠시 뿐이었다.

곧 그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곤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한다.

"약속이 있어서요. 잠시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웬 약속?"

"친구가 불러서요."

거짓말이다.

그러나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아마 금방 올 거예요."

이전석이 그리 말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직후, 때마침 집에 돌아온 여동생과 마주쳤다.

아주 표독한 얼굴. 미간에 짜증이 엿보인다.

아침에 소개팅이 있다며 나가더니, 아무래도 잘 안 된 모양이다.

"뭐야?"

너무 빤히 쳐다본 것일까.

이지혜가 짜증 가득 한 어조로 말했다.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뭐가?"

"눈··· 어휴, 아니다."

이지혜는 뭐라 말하려다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비키기나 해."

이어 피곤 가득한 어조로 말한다.

예의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모습.

아이러니하게도, 이전석은 그런 여동생에게서 짙은 그리움을 느꼈다.

저 싸가지 없는 꼬락서니를 보라.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모습이란 말인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이지혜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뿐이랴. 짜증 한 번을 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늘 우울을 품에 안고 살았다.

약과 술에 절여져 웃음을 잃었고, 종국에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고야 말았다.

52층 옥상에서의 투신자살.

그것이 이전석이 기억하는 이지혜의 마지막이었다.

지옥에 떨어지고서도 그런 여동생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았어."

이전석이 그리움이 묻어난, 어딘가 아련한 미소를 지은 채 비켜섰다.

그러자.

"······?"

이지혜가 벙 찐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일까.

"······미친."

몹시 놀란 듯한 표정.

"엄마! 오빠 진짜 어디 아픈가 봐!"

그녀는 허겁지겁 거실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쾅-!

현관문이 큰 소리로 닫힌다.

안에서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가 웃은 게 그리도 충격일까.

옛날이었다면 어이없어했을 거다.

잘해줘도 지랄이냐면서.

하지만 지금은 그런 지랄 맞은 여동생조차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띡-.

이전석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을 눌렀다.

'······반드시 지켜야 해.'

그립고도 반가운 광경들.

다시 잃어버릴 순 없다.

그러기 위해선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도록 막아야만 했으니.

터벅-.

굳게 결심한 이전석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내버스 뒷좌석.

이전석은 그곳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분명 여명회라는 이름이었지.'

부모님을 앗아간 빌런 단체.

억겁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생김새와 위치.

그리고 각성자로서 가진 힘.

모든 게 또렷이 떠오른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의 테러로 이전석은 부모님을 잃었고, 무엇보다 천살성을 각성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마나 폭탄을 설치해뒀었지.'

기억을 하나 둘 씩 되짚는다.

부모님이 들르게 될 백화점.

여명회는 그곳에 수십 개가 넘는 마나 폭탄을 터트린다.

그리하여 발생한 사상자만 무려 720여 명.

삼풍백화점을 잇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많은 이들이 가족과 친구, 연인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개중에는 이전석의 부모님도 있었으니.

그때. 얼마나 울고 분노했던가.

━오빠··· 우리 이제 어떡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소맷자락을 붙잡던 여동생의 얼굴이 수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화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 같다.

"후우······."

이전석이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제했다.

그저 난잡하게 떠오르는 계획들을 정리하며 시내버스가 백화점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창문 속 실루엣과 시선이 마주쳤다.

희미하게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

방금 전 들었던 여동생의 말이 떠오른다.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눈이라······.'

그렇게까지 이상한가?

이전석이 다시 웃어 보였다.

'딱히 이상한 것 같진 않은데.'

창문이 불투명해서 그런가?

여동생의 말이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가 정차하고, 이전석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후.

곧 바로 큼지막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명회가 노리는 백화점.

이곳에서 이전석이 기억하는 모든 지옥이 시작됐다.

'···많기도 하군.'

이전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구부터 안쪽 홀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곧 있으면 피로 점칠 될 광경.

폭탄은?

'홀에만 여섯 개인가.'

이전석은 금세 폭탄의 위치와 개수를 파악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경비조차 알지 못하는 눈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마나폭탄은 크기가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을뿐더러, 특수한 파동으로 인식을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폭탄이 존재한다. 그런 인식이 없다면 눈치채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일단 해체는 불가능해.'

이전석이 기둥에 붙어있는 폭탄을 흘겨봤다.

새끼손가락 크기의 폭탄.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 위력은 무시할 바가 못 된다.

어림잡아 세열수류탄의 열 배.

그게 건물 전체에 셀 수 없이 깔려 있다.

이중 하나라도 이상이 생기면 여명회측에서 알아차릴 테고.

'그럼 당장 폭탄을 터트리겠지.'

그렇다고 동시에 해체한다?

그것도 위험요소가 크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늦으면 모든 폭탄이 일제히 터지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나 폭탄의 해결법은 한 가지.

다름 아닌 주체자의 사망이었다.

폭탄을 설치한 주범을 죽이는 것.

마나폭탄은 그 위력이나 까다로움만큼 단점도 명확했으니, 폭탄을 기폭 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주체자가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정범위를 벗어나면?

폭탄 자체가 작동하질 않는다.

주체자가 스스로 마나를 공급하며 기폭 시키는 것.

그게 마나 폭탄의 기본적인 구조였다.

'지하 주차장이었나?'

이전석이 기억을 되짚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띡-.

B2 버튼을 눌러 지하로 내려간다.

곧 어두컴컴한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딱히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스윽-.

이전석이 품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노란색의 작은 과도다.

버스를 타기 전 마트에 들러 구매했던 칼.

그걸 들고 지하 주차장 안쪽으로 향한다.

휘릭- 휘리릭-.

과도가 유연하게 손가락 사이를 회전했다.

검을 다루는 게 매우 익숙해 보였다.

지옥에서 억겁의 세월을 보냈음에도, 전생에 무구를 다루던 실력은 여전히 영혼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군.'

이내 그의 발걸음이 어느 벽 앞에 멈춰 섰다.

그 벽에 왼손을 얹는다.

지잉-.

뒤이어 퍼져 나가는 마나의 파동.

'레벨이 초기화되면서 마나도 적어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나로 이루어진 술식.

그것들이 벽면 위로 떠오른다.

푸른 글자와 점, 그리고 선으로 이어진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슥-.

이전석이 한차례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진의 모양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자물쇠가 풀리듯 형태가 일그러진다.

이윽고.

파캉-!

진이 유리창처럼 깨져나가고,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위적으로 푹 파인 공동(空洞).

건물의 균형은 생각하지 않고, 벽 하나를 그대로 동굴처럼 개조해 놨다.

"······뭐야?"

공동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뒤이어 실루엣 하나가 나타난다.

쾌쾌한 인상을 가진 남자다.

그가 회색 망토를 두른 채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건물 내 모든 폭탄을 조율하고 있었을 터.

"누구냐? 어떻게 여길······."

남자가 당황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

"틀렸어."

착-.

이전석이 과도의 손잡이 끝을 잡았다.

최대한 리치를 늘린 듯한 파지법.

그리고.

"내가 누군지 물을 게 아니라, 보자마자 죽였어야지."

순간,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불시의 기습.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다.

각성자라고한들 1레벨이니까.

일반인과 보다 조금 더 뛰어난 수준.

눈으로도 보고 좇을 수 있을 정도다.

다만 방심이 원인이 되었다.

설마 이렇게 바로 공격할 줄은 몰랐던 것일까.

서걱-.

과도가 남자의 오른 눈을 베고 지나갔다.

"······크악!"

비명과 함께 핏물이 허공을 새겼다.

"이 자식······!"

남자가 비틀거리며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이전석은 과도에 묻은 피를 엄지손가락으로 훑은 채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 들리는군.'

안 들린다.

예전이었다면 피를 보자마자 머리가 깨지도록 울렸어야 할 목소리.

━죽여.

━죽여라.

━뼈와 근육을 찢고 그 피를 마셔!

천살성의 본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여길 알아낸 건지 모르겠다만, 절대 곱게 죽이진 않겠다!"

남자가 그런 이전석을 향해 소리쳤다.

동시에 양팔에서 화염이 발화했다.

아무래도 남자가 가진 특성인 것 같았다.

그러나.

불꽃이 채 형태를 맺기도 전이었다.

"······?!"

과도가 남자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건 정말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식조차 하지 못한 찰나.

과도가 남자의 목을 물어 뜯고자 아가리를 벌렸다.

"······크윽!"

남자는 당황했으나 잠시뿐.

곧 그가 양팔의 불을 전신으로 퍼트렸다.

타인의 접근을 거부하는 불의 방벽.

이전석은 어쩔 수 없이 팔을 거둬들였다.

"···아깝네."

그리고 이어진 나지막한 한 마디.

말과 얼굴, 눈빛이 어우러지지 않는다.

전혀 아깝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겁다는 양 웃는 모습이 소름마저 끼친다.

더욱이, 살짝 그을린 과도의 날 끝.

뚝-.

피 한방울이 떨어졌다.

"······미친."

그걸 본 남자가 제 목을 쓰다듬었다.

아주 조금- 피부가 찢어져 있다.

미미하지만 이전석의 공격이 닿은 것.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

그대로 목이 꿰뚫렸을 거다.

식겁한 감정이 목덜미를 훑는다.

남자가 이전석을 쳐다봤다.

속도는 빠르지 않고, 힘도 별반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순간 그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경이로운 수준의 기술.

"······협회에서 보낸 자객이냐?"

남자가 긴장 어린 어조로 물었다.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태도다.

그의 몸짓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글쎄?"

이전석이 과도에 묻은 피를 훑어내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되물었다.

순간.

남자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팔을 보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소름이 돋은 것이다.

저 눈.

메말라버린 동공.

즐거움이 묻어난 입꼬리.

······일그러져 있다.

마치 시체가 일어나 웃어대는 것처럼.

이전석이 입가를 매만졌다.

남자의 반응 덕분일까.

여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그렇게 이상한가?'

모르겠다.

뭐, 딱히 신경쓸 바도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

그런 건 이미 익숙했으니까.

전생에 수도 없이 겪어본 것들.

누가 뭐라고 하고, 어떻게 바라본들 이제와선 하등 상관 없는 일이었다.

화륵-.

그때.

퍼엉-!

남자가 불꽃을 포탄처럼 쏘아냈다.

이전석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였다.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불덩어리.

이전석은 그것을 가뿐히 피했다.

발걸음이 마치 바람과도 같다.

남자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그리고 전신에 재차 불을 발화시켰지만.

"미안하지만 불은 이제 지긋지긋해서 말야."

어느새 이전석이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불꽃을 가르며 들어오는 과도.

오른팔이 새까맣게 그을린다.

끔찍할 정도의 작열통이 변개처럼 내리쳤다.

그러나 이전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열을 밀어내며 남자의 목을 그어버렸다.

아까는 반사적으로 피해버렸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끝내버리려는 심산.

"컥······!"

짧은 비명과 함께 핏물이 솟구쳤다.

거세게 타오르던 불꽃이 꺼지고.

털석-.

남자가 목을 부여잡은 채 쓰러졌다.

피를 토하며 움찔거리기도 잠시.

"괴, 괴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가 숨을 멎었다.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발화(B)를 습득합니다!]

천살성이 가진 효과에 의해, 남자가 가지고 있던 특성을 빼앗았다.

그렇게나 지긋지긋한 불이거늘···.

과거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불과 관련된 특성을 얻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효과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고······.'

이전석이 시스템을 눈앞에서 치웠다.

스마트폰 화면을 밀듯 손을 움직인다.

순간.

지끈-.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불에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

이전석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사라진 불꽃을 대신하듯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발화의 영향인 모양.

통각이 뇌리를 찌르고 들어온다.

그러나 충분히 참을 만했다.

지옥불도 견뎠는데 이것도 못 참으랴.

짧게 심호흡을 하며 고통을 가라앉힌 이전석.

'슬슬 돌아갈까.'

목적을 마친 그가 뒤늦게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던 때였다.

[악인을 죽였습니다.]

[선업이 증가합니다.]

"······?"

갑자기 이상한 창이 나타났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화

북한산 (1)

'뭐야, 이건.'

이전석이 눈앞에 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선업이 증가했다고?

물론 절반쯤은 그걸 노리고 죽인 건 맞지만···. 그래도 직접 시스템이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이전석으로서도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Lv. 1

[근력 - 10] [민첩 - 10]

[체력 - 10] [마나 - 10]

스탯 포인트 - 0

선업 - 5000

악업 - @#%^@#TF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상태창의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

보유 특성 바로 위, 새로운 스탯이 생겨나 있던 것.

선업, 악업.

'선업 5천은 방금 오른 걸 거고.'

악업은 글씨가 깨져 읽을 수조차 없다.

이전석이 쌓아온 죄가 그리도 크다는 걸까?

"흠···."

이전석이 상태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스탯이 생겼는가.

"······."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마땅한 추측이 떠오르지 않는다.

애당초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5세기 전.

돌연 세상에 나타난 존재.

그것은 몬스터와 함께 인류의 가치관을 통째로 바꿔버렸다.

'몬스터라······.'

이전석은 지옥에서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러고 보니 무간지옥의 고문관이 몬스터랑 비슷하게 생겼었지.'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죄인을 고문할 뿐인 괴물.

그 생김새가 몬스터와 비슷했던 것.

물론 착각일지도 모른다.

이전석의 기억은 너무나 오래된 것이었으니까.

'일단 돌아갈까.'

이전석은 상태창을 지우며 공동을 나왔다.

다행이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CCTV가 있긴 하지만 작동하지 않고 있다.

여명회측에서 수를 써둔 것이리라.

'괜히 의심받을 일은 없겠어.'

백화점 테러는 협회도 눈치채지 못한 대사건이다.

그걸 고작 일반인이 처리했다?

협회에서는 당연히 이전석을 여명회와 관련된 인물로 의심할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로든 말이다.

이전석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오른손의 화상은 적당히 약국에 들러 연고를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전석은 방금 얻은 특성을 확인했다.

발화

등급 : B

효과 : 전신에 불을 발화시킨다. 발화한 불은 마나를 지니고 있으며, 다양한 계통의 저주 및 낙인을 지워버린다. 또한, 공격이 적중한 대상에게 지워지지 않는 화상을 남긴다.

'과연.'

남자에게서 봤던 그대로의 효과다.

'어쩐지 잠깐 데인 것치곤 화상이 짙더라니.'

이전석이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붕대 아래로 통증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저주계통의 특성인 것 같았다.

사용자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 저주.

이전석이 시험 삼아 발화를 사용해보았다.

화륵-.

오른 손아귀 위로 불길이 타오른다.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화상.

저주나 낙인을 지워버린다더니, 정작 발화로 인한 저주는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기 자신에겐 적용되지 않는 종류의 특성일까?

물론 이 정도의 저주는 시중에 판매되는 포션으로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가격이 더럽게 비싸서 문제지.

그런데.

'왜 이렇게 까맣지?'

남자가 쓸 때와 생김새가 달랐다.

묘하게 검붉은 색감의 불.

이유라면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옥에서의 생활.

아마 그게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특성은 정신이나 육체상태에 따라 종종 변화하곤 했으니.

[마나가 소진되었습니다.]

이내 마나가 동나며 불꽃 또한 사라졌다.

'뭐, 잘 작동하니 상관은 없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괜찮은 특성을 얻었다.

저주계통의 공격스킬.

이는 전투에 있어 큰 이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이전석.

그가 20층 높이의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일단 급한 불은 껐어.'

백화점의 테러와 붕괴.

가장 큰 사건을 막았다.

이걸로 부모님이 테러로 죽는 일은 없을 터.

마나폭탄도 곧 사라질 거다.

푹 파인 공동과 시체.

그걸 단순 살인사건으로 묻어버릴 만큼 협회는 무능하지 않았으니.

무엇보다.

'나쁜 놈을 죽이면 선업이 오르는 것도 확인했어.'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나쁜 놈- 즉 빌런을 죽인다.

'당장 생각나는 건 여명회.'

빌런은 세상에 수없이 많지만, 이전석이 가장 잘 기억하는 건 다름 아닌 여명회였다.

언제 어디서 그들이 나타나는가.

무엇을 계획하고 누구를 죽이는가.

심지어 여명회의 소속인원까지.

이전석은 그들에 대해 샅샅이 꿰뚫고 있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전생.

여명회를 멸망시킨 건 다름 아닌 이전석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분노에 미쳐 악착같이 놈들의 흔적을 모았었다.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전석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여명회.

그 외에도 여러 빌런들이 떠올랐다.

'우선 놈들부터 처리한다.'

비단 천국에 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세상은 힘없는 사람이 살아가기에 너무나 위험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라도 빌런은 제거해놓는 게 옳을 터.

물론.

'괜한 의심을 안 받고 활동하려면 일단은 헌터부터 돼야겠지.'

헌터란 국가공인의 폭력이다.

법이 용서하는 살인.

헌터 자격증이 있어야만 정부의 제지 없이 빌런을 사냥할 수 있었다.

'헌터시험이 언제였더라······.'

이전석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 헌터시험부터 접수하기로 했다.

※ ※ ※

김백동.

헌터협회 빌런 대응부서 팀장.

"여깁니까?"

그가 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주차장에 시체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다.

"네. 아직 현장은 발견 당시 그대로이니 천천히 살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백동이 고개를 숙인 뒤 안전줄을 넘어 사건 현장으로 들어갔다.

인위적으로 깊게 파인 공간.

어두컴컴한 바닥에 시체 한 구가 널브러져 있다.

'······여명회로군.'

김백동은 금세 시체의 정체를 파악했다.

딱히 증거가 있던 건 아니다.

다만 시체가 된 남자의 얼굴이 그가 아는 사람과 똑같았다.

여명회 제 4 행동팀 대장, 유운성.

'워낙 신출귀몰해서 협회에서도 상당히 애를 먹던 녀석이었는데······.'

돌연 시신이 되어 발견됐다.

게다가 목의 상처.

'일격인가?'

거의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나름 B급 헌터로 유명한 빌런이 한순간에 죽임당한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상당한 실력자로군.'

그것도 B급 헌터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꾀할 수 있을 정도의 강자.

'대체 누구지?'

김백동은 한참이나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국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CCTV는 먹통, 딱히 흔적이랄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팀장님!"

뒤에서 누군가 김백동을 불렀다.

최근 인턴으로 들어온 신입이다.

"예상하신 대로 백화점 전체에 마나 폭탄이 깔렸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예. 하지만 수가 너무 많습니다. 다 처리할 수 있을지 없을지······."

한참 시체를 살펴보던 김백동.

그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그거라면 괜찮을 거다."

"네?"

"마나 폭탄은 기폭자가 없으면 작동하지 않거든."

"그, 그런가요?"

인턴이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등에는 땀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꽤나 긴장하고 있던 모양이다.

수백 개의 폭탄이 금방이라도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

그의 초조함도 당연할 노릇이었다.

"뭐, 너는 최근 부서에 들어왔으니 몰라도 이상하지 않지. 마나 폭탄에 대한 정보는 여명회와 관련돼 있어서 꽤 정보가 제한돼 있거든."

미리 말해줄 걸 그랬나?

김백동이 작게 중얼거리며 인턴을 돌아봤다.

"그보다 CCTV는?"

"아, 말씀하신 대로 살펴봤습니다만······."

인턴이 무언가 생각난 듯 뒤늦게 손에 든 태블릿을 조작했다.

"백화점 내 CCTV가 전부 전원이 꺼져 있었다고 합니다. CCTV와 연결된 모니터엔 정확히 24시간 전 영상이 재생되고 있어서 경비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그럼 정보는 기대할 수 없겠군."

김백동이 그리 말하며 현장을 빠져나왔다.

지하 주차장을 나오자 저녁노을이 비쳤다.

주변에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폭탄이 모두 제거될 때까지 피난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네요."

저녁노을을 받으며, 인턴이 말했다.

"만약 폭탄이 전부 터진다고 생각하면···."

"사상자는 백을 가뿐히 넘기겠지."

"어후!"

소름이 끼친다는 양 몸을 떠는 인턴.

반면 김백동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뒤가 구리군······.'

백화점이 안 무너진 건 다행이다.

다만 유운성- 여명회를 누가 죽였는지가 문제였다.

'빌런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의 실력자가 빌런이라면 상당히 성가셔진다.

반면.

'아군이 된다면 꽤나 든든해지겠지.'

물론 가능성은 한없이 낮은 이야기지만···.

탁탁-.

김백동이 담배에 라이터를 붙였다.

후-.

희뿌연 연기가 재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아버지- 이한석과 마주쳤다.

아무래도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인 듯했다.

"손이 왜 그러냐?"

그가 이전석의 손을 보더니 물었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으니···.

이전석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실수로 불에 데어서···."

"크게 다친 건 아니지?"

"네."

"그럼 됐다."

띵-.

엘리베이터가 상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이한석은 엘리베이터를 나서며 작게 혀를 찼다.

"사내놈이 불장난이나 하고 다니고, 쯧쯧."

말은 저렇지만, 어투나 눈빛에선 걱정이 묻어나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전석은 잊고 있던 추억이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쌀쌀맞은 것 같아도 내심 따뜻한 분이셨지.'

그랬지. 그랬다.

비단 이한석만이 아니다.

한유리도 이지혜도, 틱틱대고 화를 내며 싸워도 진심으로 서로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결국은 가족이다.

없어선 안 될 존재.

이전석은 생각했다.

그걸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기에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

여명회를 지워버린다고?

그럴 리가.

다른 빌런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설령 빌런이 사라져도 몬스터가 있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던전이 나타나 이전석과 그의 가족들을 집어삼킬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그것들을 없애버리면 괜찮을까?

글쎄.

적어도 이전석은 확신하지 못했다.

세상은 언제나 불명확한 것들 투성이였으니까.

확정적이지 않다.

불투명하다.

미래란 놈은 늘 그랬다.

하지만 적어도 눈에 띄는 빌런과 던전을 죄다 없애버리면 가족들이 안전하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될 거다.

'숙제가 많군.'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다.

'일단은··· 헌터가 되고 여명회를 없앤다.'

이전석은 그걸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다녀왔습니다."

"여보, 나왔어."

이전석과 이한석이 함께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한유리는 이전석의 상처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별거 아니라는 말에 안도하며 조심하라 타일렀다.

이후 이전석은 방으로 돌아갔다.

적막한 방 안에서 컴퓨터를 켰다.

헌터시험.

협회에서 달마다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이벤트.

'다음 시험은 일주일 뒤인가.'

그렇다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우선 체력.'

이전석이 노트를 펴고 펜을 끄적였다.

'몸이 너무 약해.'

과거로 되돌아온 영향일까.

신체능력이 너무 처참했다.

단순 체력적으로만 봐도 그렇다.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허덕이는 몸.

백화점에서 여명회를 죽였을 때도···.

'조금 더 시간을 끌었다면 죽는 건 내가 됐을 거야.'

그래서 이전석은 헌터시험이 시작되기까지의 우선적인 목표를 체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운동만으로 스탯을 올리기엔 무리가 있다.

거기서 이전석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화

북한산 (2)

'분명······.'

이전석이 키보드를 연신 두들겼다.

곧 모니터에 이미지가 떠올랐다.

북한산.

외국에서도 꽤나 유명한 관광지다.

이전석이 기억하기로 앞으로 3일 뒤 이곳에서 던전 폭주가 발생한다.

본래 자격증 없이 던전을 공략하면 불법이 된다.

'하지만 그게 폭주형 던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우연히 던전 폭주에 휘말린 일반인.

그곳에서 각성을 하고, 던전 공략.

그 누가 탓할 수 있으랴.

오히려 표창장을 줘도 모자랄 상황.

'일단 사흘 뒤에 북한산에 가는 걸로.'

이전석이 달력을 보며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사흘 뒤.

자정이 조금 지난 야심한 새벽.

이전석은 조용히 집을 나왔다.

거실 식탁에는 쪽지를 남겨뒀다.

전날 북한산에 갔다 오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이전석은 심야버스를 타고 북한산으로 향했다.

※ ※ ※

산을 오르는 건 힘들다.

하지만 그만큼 쾌감도 있다.

산을 올랐을 때의 정복감.

도시에선 느껴볼 수 없는 맑은 공기와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

결코 적지 않은 이들이 그것에 중독되어 전국 곳곳의 산을 오르기도 한다.

잠깐이지만 이전석은 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새 색이 바래듯 밝아진 하늘. 능선 너머에서 올라오는 일출. 그리고 구름 사이로 듬성듬성 솟아올라 있는 산맥들까지.

그야말로 절경이라 부르기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후우······."

이전석은 거친 호흡을 고르며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었기 때문일까.

정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르겠다.

비록 각성했다고 한들 아직 1레벨이었으니.

10밖에 되지 않는 스탯.

신체능력만 따지면 막 각성한 헌터는 일반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군.'

이전석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느긋하게 올라왔기 때문일까.

8시까지 30분 정도가 남았다.

그는 조금 쉬고자 바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은 등산객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이 좁은 곳에 수십 명이 모여 일출을 보고 있으니, 이전석으로선 갑갑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능선 너머에서 올라오는 일출은 아름다웠다.

"······."

이전석은 말없이 그것을 지켜봤다.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곧 이곳에는 재앙이 도래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알 리가 없다.

이 시간대의 과학은 아직 그 정도로 발전하지 않았으니.

'도망치라고 해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할 게 뻔해.'

그래서 이전석은 말없이 손목시계만 확인했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침과 분침.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어느새 8시가 됐다.

이전석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품에서 과도를 꺼내 손에 쥔다.

그 사이 2분이 지나고···.

[던전 게이트가 발생합니다!]

백악대 중앙.

사람들 사이에서 빛이 폭발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갑자기 빛이···."

"으윽, 잘 안 보여."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당황한다.

이내 한 점으로 모여드는 빛.

빛의 덩어리가 곧 거대한 균열을 형성한다.

흔히 게이트라 불리는 던전의 입구.

하지만 일반적인 게이트가 아니다.

그것은 점차 범위를 넓혀가며 백운대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던전이 폭주합니다!]

"더, 던전 폭주?"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

곧 사방에 혼란이 퍼져 나갔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다들 도망쳐!"

"꺄악······?!"

사람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높디높은 산 정상.

길은 한정돼 있고 달릴 수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절벽으로 떨어질 터.

실재로 몇몇은 그렇게 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상황.

결국 피난은 지체되었고.

['검게 물든 옥'에 입장합니다.]

사람들은 그대로 던전 폭주에 휘말리고 말았다.

오직 이전석만이 평온을 유지한 채, 자신을 덮쳐오는 어둠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 ※ ※

검게 물든 옥

등급 : C

내용 : 구울들이 갇힌 지하 감옥. 모든 게 얼어버린 그곳에는 오직 생기 없는 피만이 흐른다. 필멸자들이여, 미쳐버린 구울의 왕을 마주하라.

*해당 던전은 폭주 상태입니다. 보스 몬스터를 토벌할 때까지 탈출할 수 없습니다.

'옥(獄)이라······.'

이전석이 시스템 메시지를 쳐다봤다.

내용 자체는 회귀 전과 똑같다.

이는 던전의 배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두컴컴한 지하.

사방이 철창으로 가득하다.

감옥을 연상케 하는 광경.

잘 보니 곳곳이 얼어 있다.

음습하고 서늘한 기운이 안개처럼 내리깔려 있고, 천장에서 형성된 고드름이 바닥으로 떨어져 부서졌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귀신 대신 모습을 드러낸 건 전신이 썩어 문드러진 좀비였다.

흔히 구울이라고도 불리는 괴물.

"그에에······."

썩은 살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마른 피가 찢어진 가죽을 메운다.

흉측하기 그지없는 외형.

[구울 Lv. 32]

머리 위,

시스템이 떠올랐다.

32 레벨.

이전석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레벨이 전부는 아니지.'

이전석이 과도를 역수로 쥐었다.

구울은 언데드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

때문에 여타 언데드와 달리 유독 내구성이 취약한 편이었다. 평범한 과도로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다만 한 번 물리면 그대로 치명상으로 이어진다는 게 문제지만······.

'안 물리면 그만.'

이전석이 땅을 박찼다.

구울이 삐걱삐걱 고갤 돌렸다.

뒤늦게 이전석을 알아챈 눈치.

하지만, 늦다.

반응만큼이나 움직임도 굼떴다.

푸욱-.

놈의 머리를 과도가 파고 들어갔다.

정확히 왼쪽 눈을 노린 일격.

"그에···!"

시체인 만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구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벌렸다.

순간.

화륵-.

이전석이 특성 발화를 발동했다.

손에서부터 피어오른 검붉은 불꽃.

그것이 과도를 타고 흘러들어 가, 그대로 구울의 뇌를 맹렬하게 불태웠다.

언데드의 약점 중 하나.

불.

"그어어어······!"

눈, 귀, 입, 코.

온갖 구멍에서 불꽃이 터져 나온다.

불꽃이 머리 전체로 옮겨붙어 그대로 녀석을 불살랐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과도를 빼내자 구울이 힘없이 쓰러졌다.

머리가 새까맣게 그을린 채 움직이지 않는다.

콰직-.

이전석은 발로 녀석의 머리를 짓밟아 터트렸다.

직후.

[구울을 사냥하셨습니다!]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이상할 정도로 무수하게 올라오는 시스템.

상태창을 보니 8레벨이 되어 있었다.

총 7의 레벨이 한 번에 오른 샘이다.

하긴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고작 1레벨로 32레벨 몬스터를 잡았으니까.

'나쁘지 않은데?'

경험치가 꽤나 짭짤하다.

헌터시험을 보기 전. 이곳에서 최대한 레벨을 올리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실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이 던전에서 사람들을 구한다.

그럼 과연 선행은 오를 것인가.

빌런을 죽였을 땐 올랐다.

그렇다면 목스터를 죽이거나 사람을 구할 때.

그 외 다양한 상황에서도 선행이 오르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일단 구울을 잡았지만 안 올랐어.'

그것만으론 업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럼, 던전을 완전히 공략한다면?

'크든 작든 변화가 생기겠지.'

이전석이 상태창을 조작했다.

[스탯포인트 '7'을 사용하셨습니다.]

[민첩이 '5'만큼 상승합니다.]

[체력이 '2'만큼 상승합니다.]

스탯 포인트로 각각 민첩과 체력을 올린다.

이전석의 전투 스타일에 가장 필요한 스탯.

마음 같아선 근력도 올리고 싶었지만, 스탯포인트를 너무 마구잡이로 분배하면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망캐가 될 수도 있었다.

'일단은 민첩과 체력 위주로.'

이전석이 상태창을 치워버렸다.

그때였다.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 젊은 여성의 음성.

소리를 들어보니 바로 근처다.

이전석이 바로 땅을 박찼다.

어둡고 습한 지하 감옥을 내달린다.

그리고 미로처럼 얽힌 길 너머.

"저, 저리가!"

"그어어!"

구울 한 마리와 대치 중인 여성이 보였다.

이전석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

생머리가 피에 젖은 채 엉켜 있다.

복장을 보아 등산객 중 한 명인 듯했다.

구울이 그녀를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여성이 겁에 질려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통증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어······?"

여성이 얼떨떨한 채 눈을 떴다.

구울의 옆머리.

작은 칼 한 자루가 틀어박혀 있다.

"고개 숙여요."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

누군가 빠르게 다가와 칼- 과도를 손에 잡았다.

이전석.

그가 발화로 구울의 머리를 지져버렸다.

갑작스레 타오른 불꽃 덕분일까.

"꺄악···?!"

여성이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 사이.

서걱-.

과도를 빼낸 이전석이 불에 타 약해진 목을 잘라내며 완전히 놈의 숨통을 끊었다.

[구울을 사냥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이번에는 총 3의 레벨이 올랐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업이 '10'만큼 증가합니다.]

선업이 오른 것이다.

고작 10밖에 되지 않는 적은 수치.

처음 백화점 테러를 막았을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낮다.

사고의 규모가 그만큰 차이나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을 구하면 선업이 오른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전석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이 던전에 갇힌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구한다.

"괜찮으세요?"

이전석이 여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닥에 넘어져 있던 여성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전석의 손을 잡고 허겁지겁 일어난다.

"아, 네! 가, 감사합니다···!"

많이 놀란 것일까?

그녀는 좀처럼 이전석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전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야 이미 익숙했다.

피에 미친 괴물이 되었을 때부터.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귀신이라도 보는 것 같았으니까.

"호, 혹시··· 헌터이신가요······?"

여성이 나지막이 물어왔다.

이전석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는 아니었지만···.

'설명하기 귀찮아.'

이전석은 의외로 설명을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귀찮음을 많이 탄다고 해야 될까?

대신이라는 듯 여성에게 물음을 던졌다.

"다른 사람은 못 보셨나요?"

"아··· 봐, 봤습니다! 도망치다 서로 엇갈렸는데······."

이전석이 여성의 말을 끊고 재차 물었다.

"어디에 있었죠?"

※ ※ ※

왕은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였다.

그는 처음부터 지배자로 났기에.

모든 것을 아래로 두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건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왕은 두려움을 느꼈다.

권속의 수가 하나 둘 씩 없어지고 있었던 것.

사람 한 명쯤이야 우습게 죽이는 괴물들이다.

지성과 이성이 없더라도 그 힘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됐다.

그런 권속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그으······."

말은 못하지만 알 수 있었다.

오고 있다.

무언가.

몹시 두려운 무언가가.

따닥···.

왕이 이를 부닥쳤다.

마른 핏물이 땀처럼 흘러내렸다.

"그어어억!!"

왕은 두려움에 포효를 내질렀다.

모든 권속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신이 있는 처소. 이곳을 지키라고.

철저하게 침입자를 배제하라고.

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곧 처소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참 더럽게도 지내는군."

무미건조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음성.

메마르고 건조한 동공.

마치 죽음을 보는 듯한 눈동자.

생기 따윈 없이, 그저 한없이 이질적이다.

"그아······."

왕이 움츠러들었다.

분명 죽음을 굴복시키며 태어난 자신이거늘.

남자의 눈을 보는 순간, 왕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것은 본능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뭐야?"

죽음보다 더한 죽음이, 그곳에 있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화

북한산 (3)

미로처럼 얽힌 감옥의 끝.

낡고 녹슨 철문이 보였다.

[보스 에어리어]

가까이 다가가자 시스템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여기가 보스방인 모양.

이전석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이 모여 있다.

던전 폭주에 휘말린 등산객들이다.

"호, 혹시 몬스터가 나타나면······."

누군가 불안한 듯 말하지만, 이전석은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버티셔야죠."

"네?"

"아니, 저희가 어떻게······."

"아니면 뭐, 저랑 같이 보스방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이전석이 녹슨 철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보스방에 들어간다는 것.

그건 즉 죽겠다는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전석은 조용해진 사람들을 뒤로했다.

현재 그의 레벨은 23.

스탯은 민첩 25에 체력 17까지 올랐다.

그쯤 되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확실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선업은 6250까지 올랐으나, 딱히 육체적인 변화가 있진 않았다.

'뭔가 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지.'

선업과 악업.

그 두 스탯이 괜히 추가됐으랴.

단순 표시용은 아닐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변화가 있을지 없을지는 선업을 올리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였다.

끼익-.

이전석이 보스방의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스산한 바람과 소리가 밀려왔다.

[보스 에어리어에 입장하셨습니다.]

뒤이어 올라오는 푸른색의 창.

문 안쪽은 제법 큼지막했다.

마치 돔 같은 형태의 원형 공간.

사방에 철창이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중앙.

'옥좌인가?'

뼈와 살가죽으로 덕지덕지 이어 붙여진 옥좌가 하나 있었다.

"그어······."

그리고 옥좌에서 내려와 갑자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는 구울 한 마리.

"······뭐야?"

이전석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전투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찰나.

뜬금없이 보스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구울의 왕 Lv. 42]

머리 위에 떡하니 떠오른 붉은 글자.

'페이크인가?'

아니, 그런 기미는 없다.

틀림없이 녀석이 보스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전석은 천천히 보스에게 다가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뚜벅, 뚜벅-.

이전석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어어······."

보스는 마치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떨어댔으니.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페이크도, 기믹도 아니다.

기습을 하려는 것 같지도 않다.

'대체 뭐지?'

생전 처음 겪어보는 현상.

헌터가 보스를 마주하고 절망하는 경우는 봤어도, 반대로 보스가 각성자를 보고 두려워하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때문일까. 이전석으로선 하나의 가능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발화가 검붉게 변한 것처럼, 이 또한 지옥에서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구울은 살아 움직이는 시체다.

가장 죽음을 예민하게 느끼는 존재.

무엇보다.

'영혼에 새겨진 경험··· 격이었나? 그런 게 가끔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곤 했지.'

지옥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저승사자들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굳이 무간지옥까지 찾아왔을 때.

이전석은 고문을 받으며 그들이 나누던 잡담을 어렴풋이 주워들었다.

그 격이란 것의 영향일까.

"부디······ 요서···를······."

보스가 뭐라 말을 했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퍽-!

이전석이 보스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아···!"

보스가 마른 피를 흘리며 뒤로 넘어간다.

옥좌 앞에 널브러진 한 마리의 구울.

그런 구울의 명치를 이전석이 짓밟았다.

"미안하지만 너를 죽여야만 여기서 나갈 수 있어서 말이지."

대체 누가 보스고 사람이란 말인가.

보스일 터인 구울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요서··· 요서를······."

썩어 문드러진 얼굴이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이전석이라도 일말의 죄책감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흉측하기 그지없는 괴물이었고.

푹-.

이전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보스의 목을 내리찍었다.

그리고.

화륵-.

손에서 과도로, 검붉은 불꽃이 타오른다.

"그어어······!"

뒤이어 들려오는 괴음.

보스는 아무런 대항도 못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

이윽고 불꽃이 썩어 문드러진 살점조차 불태워 재로 만들었다.

[보스 몬스터 '구울의 왕'을 토벌하셨습니다.]

[던전을 공략하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망자들의 왕(C)'을 습득하셨습니다!]

모니터의 스크롤을 내리듯 우르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2의 레벨, 그리고 특성을 얻었다.

망자들의 왕.

C등급.

[게이트가 열립니다!]

촤악-!

이내 시스템 너머로 게이트가 생겼다.

허공이 갈라지듯 생긴 푸른색의 균열.

'허무한 보스전이었구만.'

이전석이 어깨를 풀며 과도를 집어넣었다.

보스전이 생각보다 더 쉽게 끝났다.

그래도 결과만 놓고 보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25레벨.

스탯은 물론 특성도 얻었다.

거기에 선업은 또 어떠랴.

특성은 효과를 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면 썩 괜찮은 보상이었다.

"여기로 나가시면 됩니다."

이전석이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을 데려와 게이트로 안내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사람들이 인사하며 게이트를 나간다.

그때.

"저기···!"

여성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 구해줬던 그 사람이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크게 고개를 숙이더니.

"여기, 제 전화번호예요."

대뜸 종이쪼가리를 건네 왔다.

잘 보니 명함인 것 같다.

최은하.

화산길드 소속 매니저.

'화산길드라······.'

화산.

꽤나 유명한 길드다.

국내랭킹 7위.

S급 헌터를 3명이나 보유하고 있으며, 외국에서도 나름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길드.

이전석이 알기로, 화산의 상위 간부진은 전부 길드장의 직계 핏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 직계의 성은 다름 아닌 최 씨였으니.

여성- 최은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인 걸까.

'뭐, 성만 같은 걸 수도 있지.'

최가 보기 드문 성씨인 것도 아니고.

"나중에 식사라도 대접하게 해주세요."

최은하가 게이트를 나서기에 앞서 그리 말했다.

"아, 네···."

이전석은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딱히 그런 걸 노리고 구해준 건 아니지만, 선의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이전석이 뒤늦게 명함을 받아들자.

"그럼···."

최은하는 재차 고개를 숙인 뒤 게이트를 나갔다.

"음."

홀로 남은 이전석.

그는 명함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화륵-.

발화를 사용해 불태워버렸다.

선의를 거절할 순 없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식사니 뭐니 그런 소개팅 같은 귀찮은 짓거릴 할 생각은 없었다.

고맙다면 그 마음만 고이 간직하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최은하도 예의상 한 말일 터.

[곧 던전이 붕괴합니다.]

이내 시스템이 재촉하듯 떠오르고, 이전석은 그제야 던전을 나갔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선업이 '3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소폭 하락합니다!]

※ ※ ※

백운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비단 등산객들만이 아니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백운대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경찰- 아니, 협회의 직원인 걸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모양이다.

"혹시 선생님께서 던전을 클리어하신 걸까요?"

그들 중 한 명이 이전석에게 다가왔다.

먼저 던전을 나온 생존자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협회 직원이 제안 아닌 제안을 건네 왔다.

"혹시 잠깐 대화가 가능하실는지?"

거진 협박과도 같은 말.

아마 거절하면 빌런으로 의심받겠지.

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이전석은 그 제안을 승낙했다.

이후 직원을 따라 북한산을 내려갔다.

북한산, 등산로 입구.

새까만 승용차가 세워져 있다.

조사라는 이름의 대화는 그 안에서 이루어졌다.

왜 백운대에 있었는지.

헌터 자격증은 있는지.

없다면 언제 각성했는지.

이전석은 대충 일출을 보려고 북한산을 올랐다가 우연히 던전 폭주에 휘말렸다고 설명했다.

각성?

"때마침 운 좋게 각성을 해서··· 하하."

그가 멋쩍게 웃으며 발화를 선보였다.

손을 타고 피어오르는 검붉은 불꽃.

아마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됐으리라.

B등급 스킬.

구울이라는 몬스터.

막 각성했다고 한들 이런 조건이라면 재능이 있다는 가정하에 충분히 던전을 공략할 수도 있을 테니까.

또 명백히 기존 발화랑 차별점도 있어서, 백화점에서 죽인 여명회와과 쉬이 엮이지도 않을 것이다.

"음, 그렇군요."

협회 직원이 태블릿에 뭐라 끄적였다.

그렇게 20분가량이 더 지나고.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차량에서 내렸다.

뭐가 그리도 묻게 싶은 게 많은지···.

정말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보다.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고···.'

이전석이 돌아가는 버스의 시간대를 확인했다.

그리곤 눈앞에 상태창을 띄웠다.

'새로 얻은 특성인 확인해 볼까.'

망자들의 왕.

그 효과를 확인할 차례였다.

※ ※ ※

승용차 내부.

"팀장님, 그 사람 그냥 보내도 괜찮은 겁니까?"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물었다.

그가 액셀을 밟자 차량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팀장이라 불린 남자- 김백동이 되물었다.

"뭐가?"

"딱 봐도 꺼림칙하잖아요. 그 눈."

인턴의 말.

김백동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뭐, 소름 끼치는 눈이긴 했다만···."

그러나.

"인상으로 사람 가리는 거 아니다."

그리 말하며 담배를 꼬나무는 김백동.

"특성에 따라 외형이 변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허다해. 뿔이 나거나 송곳니가 생기거나 피부의 색이 변하거나···."

김백동은 "애초에"라며 말을 이었다.

"고작 그런 걸로 의심할 거였으면 우리 협회장부터 빌런으로 의심했어야지."

"···아, 제가 실언했습니다."

"실언은 무슨."

후-.

김백동이 희뿌연 연기를 창밖으로 뱉어냈다.

"그나저나 운도 지지리 없네요."

운전수- 최근 부서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출장 가는 길에 바로 근처라고 출동요청이 들어오다니···."

"직장인이란 게 원래 다 그런 법이지."

"그렇겠죠?"

에휴.

인턴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며 엑셀을 더 세게 밟았다.

※ ※ ※

망자들의 왕

등급 : C

효과 : 죽은 자들에게 경외를 얻는다.

숙련도 - 0%

"······?"

새로 얻은 특성, 망자들의 왕.

그 효과를 본 이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이게 뭔 소리야?'

죽은 자들에게 경외를 얻는다니.

너무나도 추상적이기 그지없다.

죽은 자.

그러니까 즉, 망자.

그들을 부릴 수 있게 되는 건가?

아니면 그저 말 그대로 경외를 받는 것뿐인가.

'음······.'

애매하다.

지금 당장 시험해볼 수 있는 종류의 특성도 아니라 더 애매했다.

이걸 좋다고 해야 될지 말아야 할지···.

'뭐, 던전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

때마침 곧 헌터시험이 있다.

헌터시험은 감독관의 보호 아래 F급 던전을 공략하게 된다.

던전의 종류는 수험자가 고를 수 있었고, 개중에는 언데드 계열 던전도 있을 터.

'F급이면 스켈레톤이 나오던가.'

스켈레톤.

구울과는 달리 꽤나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몬스터.

놈들이라면 실험에도 충분히 어울려줄 수 있지 않을까.

끼익-.

그때,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이전석은 곧 다가올 헌터시험을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화

헌터 시험 (1)

Lv. 25

[근력 - 10] [민첩 - 25]

[체력 - 19] [마나 - 10]

스탯 포인트 - 0

선업 - 9250

악업 - @#%^@#TF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C)

협회에 들어가기 전 펼쳐본 상태창.

민첩은 물론 체력도 많이 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업도 금세 9250을 달성했다.

어제 북한산에서 사람들을 구한 영향이었다.

"헌터시험을 보러 왔는데요."

협회건물 1층 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전석입니다."

안내원을 맞고 있던 여성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시험을 등록했는지 확인하는 모양.

곧 안내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확인되셨습니다. 지하 2층 수험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감독관께서 가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전석이 안내원의 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띡-.

B2.

지하 2층 버튼을 누른다.

이어 내려가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그쪽도 이번에 시험을 보시나 봐요?"

때마침 같이 타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왼쪽 머리에 뿔이 돋아난 남자다.

당연히 몬스터나 그런 건 아니다.

특성 중에는 이따금 외형에 변화를 주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남자도 뿔과 관련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모양.

"예."

이전석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잘해봅시다."

그리 말하며 손을 내미는 남자.

이전석이 그의 손을 맞잡는다.

띵-.

직후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그럼."

남자는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실실 웃어대는 기분 나쁜 표정.

이전석은 홀로 남아 남자와 맞잡은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화륵-.

그러다 발화를 사용했다.

검붉게 타오르는 오른손.

여전히 붕대가 감겨 있는 손등에 이상한 문양- 낙인이 떠오른다.

그것은 이내 불꽃에 재가 되듯 타들어 갔다.

"······."

이전석이 뒤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앞서 가는 남자의 등을 응시했다.

분명 인자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다.

그러나 눈이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감각이 말한다.

경종, 위험, 위기.

저 남자는 꺼림칙하다고.

그래서 발화를 사용했다.

발화는 저주나 그와 관련된 낙인을 지워버릴 수 있었으니까.

정작 화상은 지워지지 않아서 자신에겐 적용되지 않는건가 싶었지만··· 남자의 낙인이 지워진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오른손의 화상이 지워지지 않는 건, 아무래도 발화로 입은 저주이기 때문이리라.

'불쾌한 짓거릴 하는군.'

이전석이 손을 먼지 털 듯 흔들었다.

그러자 불꽃이 촛불마냥 꺼져버렸다.

어느새 복도를 지나 수험실로 들어간 남자.

이전석도 그를 따라 수험실로 들어갔다.

흡사 교실을 연상케 하는 광경.

책상이 나란히 줄지어 새워져 있다.

다만 모든 게 하얗고 색채가 없다.

그리고 남자는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양옆에는 이미 수험자들이 앉아 있다.

거리감이 없는 건지 뻔뻔한 건지.

굳이 저 가운데에 앉았다는 건······.

"서로 잘해봅시다."

예상대로.

남자가 수험자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얼떨떨하게 손을 맞잡는 수험자들.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들에게도 저주가 새겨졌을 터.

이전석은 가장 뒷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

시험을 망치려는 건지, 자신만 이득을 보려는 건지.

남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저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니라는 것.

악행임이 분명한 의도다.

그걸 막고 도리어 되돌려준다면··· 그건 과연 선업이 될까, 악업이 될까.

'기대되네.'

이전석은 남자를 사냥감 바라보듯 응시했다.

마치 뱀처럼 찢어져 번뜩이는 동공.

"슬슬 다 모인 것 같군요."

그때.

누군가 수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검은 양복에 흰색 머릿결을 가진 여성.

왼쪽 가슴에는 금색 배지가 달려 있다.

아무래도 그녀가 감독관인 것 같았다.

"저는 이번 헌터시험을 감독할 아냐 이바노프라고 합니다."

하얀 머리로 알 수 있듯이 외국인인 모양.

이름을 보면 러시아쪽 사람일까?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조각 같이 아름다운 얼굴.

게다가 감독관급 헌터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도 하건만, 이전석은 아냐 이바노프에 대해 무엇하나 알지 못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내가 활동하기 전에 죽었거나, 어떤 이유로 은퇴해 시골에 틀어박혔거나.'

어찌됐든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우선 필기부터 시작하도록 하죠. 시험시간은 총 60분으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헌터와 관련된 기본적인 지식을 채점하게 될 겁니다."

뒤이어 시험에 관해 설명하는 그녀- 아냐.

천천히 시험지를 나눠주며 말을 잇는다.

"통상 점수가 높게 나와도 도덕적인 부분에서 점수가 낮다면 탈락처리가 될 수도 있으니 이점 유의 부탁드립니다."

당연한 일이다.

양심- 즉, 도덕심이 부족한 사람이 헌터증을 가지고 마구잡이로 힘을 휘두르게 되면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까.

"그럼 지금부터 헌터 자격시험 필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시험지 배부가 끝나고 시험이 시작됐다.

아냐는 의자에 앉아 주변을 훑어봤다.

푸른 눈동자가 냉혈하기 그지없어, 시험을 보는 입장에선 자연스레 긴장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전석에겐 해당 없는 이야기다.

이미 전생에 한 번 헌터시험을 봤다.

당연히 정답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이른바 오픈북 시험인 샘.

결국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답안을 작성했다.

남은 시간은 정확히 40분.

'한가하군.'

이전석은 연신 하품을 해대며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분.

필기시험이 종료되며 아냐가 시험지를 걷어갔다.

※ ※ ※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공개됐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정확히 10분 뒤.

수험실 앞쪽, 천장에서 큼지막한 스크린 하나가 내려온다.

아냐가 리모콘을 조작하자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비추어진 화면.

[1등 이전석 - 100점(합격)]

[2등 김만진 - 85점(합격)]

[3등 민 석 - 84점(합격)]

[4등 빈효석 - 76점(합격)]

점수와 등수가 줄지어 공개됐다.

직후 수험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1등의 점수 덕분이었다.

"미친, 만점을 받았다고?"

"도덕문제는 그렇다 쳐도 어려운 게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저 정도면 컨닝이라도 한 거 아니야?"

곳곳에서 의심 어린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때.

"컨닝은 없었으니 안심하시길."

아냐의 말에 수험생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름 아닌 협회 감독관의 말이다.

감히 따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권력은 높디높은 산과 같았기에.

하물며 감독관이 일개 수험생의 컨닝을 못 알아챌 리도 없었으니 볼멘소리는 더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용해진 시험장.

아냐 "또한"이라고 운을 뗐다.

"보시면 아시다시피 50점 이하는 전부 탈락입니다."

50점.

꽤나 낮은 합격선이다.

그러나 합격점수가 낮다는 건 그만큼 문제가 어려웠음을 의미했다.

[17등 만덕진 - 47점(불합격)]

[18등 손서윤 - 42점(불합격)]

[19등 유한빈 - 40점(불합격)]

스크린에 비추어진 불합격자들.

수험생의 절반가량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채 절반조차 되지 않는 합격률.

"말도 안 돼!"

"내가 불합격이라니?"

"열심히 준비했는데···."

곳곳에서 아쉬움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개중에는 짜증을 내는 이도 보였다.

이전석은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런 놈들은 어딜 가나 한 명씩은 꼭 있기 마련이지.'

이내 아냐 에게 시선을 옮긴다.

그녀가 저들을 어떻게 진정시킬지 궁금했다.

마치 관찰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

소름이 끼치며 거북하기 그지없다.

이는 이전석의 질 나쁜 습관이었다.

일종의 버릇이라고 해야 될까.

하염없이 고통만 받을 뿐인 세계, 무간. 그곳에 떨어진 이전석은 조금이라도 고통과 지루함을 덜어내기 위해 생각을 계속해야만 했다.

저자는 왜 죽었는가.

무슨 죄로 지옥에 왔는가.

고문관에게 과연 이지는 있는가.

또한 저승사자는 어떤 존재인가.

그저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만 했다.

그렇게 생겨난 습관이 바로 관찰이었다.

지옥에 떠돌아다니는 영혼이나 고문관, 혹은 이따금 찾아오는 저승사자들을 관찰하며 고통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것.

"탈락하신 분들은 뒤쪽 문으로 나가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내 아냐가 눈을 번뜩였다.

기세, 혹은 기운이라고도 불리는 것.

무형의 힘이 수험장을 가득 채운다.

그러자 탈락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푹 숙인 고개.

짜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과연 상위급 헌터라는 것일까.

눈빛만으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망할···."

이에 분한 표정을 지으며 시험장을 나가는 탈락자들.

"그럼 이제부터 실기시험이 있겠습니다."

아냐는 그들이 마치 처음부터 없던 사람인 듯 무미건조하게 말을 이어갔다.

※ ※ ※

실기는 협회의 지하 4층에서 진행됐다.

텅 빈 공터처럼 확 트인 공간.

아무것도 없이 그저 게이트만 존재한다.

그렇다.

게이트.

지하 4층엔 수종류의 던전이 있었다.

다만 전부 F급 하위던전에 불과했다.

아냐는 그것들이 협회에서 시험을 위해 자체적으로 제작된 인공던전이라 설명했다.

"가장 낮은 순위의 수험생부터 원하시는 던전을 선택해 입장하시면 됩니다. 공략에 실패한다고 해도 무조건 불합격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공략을 성공하시면 그만큼 가산점이 붙습니다."

아냐가 줄지어 새워진 게이트 앞에서 실기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그리 중요한 설명은 아니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

필기시험에도 있던 내용이었다.

"그럼···."

이내 그녀가 시험을 시작했다.

처음 던전에 들어간 건 앞서 말한 대로 필기에서 가장 낮은 순위를 받은 수험생이었다.

그가 긴장한 얼굴로 던전에 들어갔다.

손에는 길쭉한 철제 검을 들고 있다.

협회에서 시험용으로 임대해준 무기.

이전석도 과도보다 조금 더 긴 단도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제 던전을 공략해주시면 됩니다."

던전 내부로 진입한 수험생.

천장에서 내려온 스크린이 그를 비춘다.

이쪽에서의 말이 전해진 걸까.

━네···!

수험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이 한 명.

유독 기분 나쁜 눈빛을 가진 이가 있었다.

'김만진.'

필기시험 2등.

이전석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악수하는 척 기묘한 낙인을 새긴 그 남자.

놈이 노리는 건 과연 무엇일까.

그를 따라 이전석도 스크린을 쳐다봤다.

때마침 수험생이 몬스터를 마주했다.

[고블린 Lv. 5]

흔하디흔한 녹색 아귀.

아무래도 화면 속 수험생은, 공략할 던전을 '기본형'으로 선택한 것 같았다.

'기본형이 가장 쉽고 무난하긴 하지.'

고블린은 약하다.

체형이 짧고 가늘기 때문이다.

무기도 녹이 슨 단검이 전부.

각성자 입장에선 꽤나 상대하기 편한 몬스터였다.

그러나.

━으아악?!

바로 다음에 이어진 장면.

그 편하고 쉬운 몬스터에게 수험생이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둔탁하니 잘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

그걸 본 이전석이 내심 웃고 말았다.

'꽤 재밌는 짓을 꾸미고 있었잖아?'

마치 즐거운 걸 발견한 듯한, 어린아이 같은 미소.

그것이 소름 끼치는 게 느껴지는 건 탁한 동공 덕분일까.

이전석이 아냐를 흘겨봤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스크린을 응시할 뿐.

'···이상을 알고서도 방치한단 말이지?'

모를 리가 없다.

명색이 감독관이니까.

그들쯤 되는 강자라면 마나의 흐름으로 특성이 발동되고 있는지, 그게 어떤 종류의 특성인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가 급이 높아 마나로 혼란을 일으킨다면 또 모르겠지만··· 김만진 기껏해야 수험생 수준.

그런데도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군.'

그렇다면.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이전석이 김만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천살성으로서 새겨진 버릇 덕분일까.

이전석은 의외로 말보다 몸으로 상황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돌연 김만진에게 다가가는 이전석.

"뭐, 뭡니까?"

갑작스런 상황. 당황하는 김만진.

그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쿠웅-!

이전석이 김만진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곤 손에 든 과도로 목을 겨눈 것이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7화

헌터 시험 (2)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행동했다.

이전석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김만진에게 다가가는 이전석.

그가 슬쩍 아냐 이바노프를 흘겨봤다.

딱히 제지하는 눈치는 아니다.

갑작스런 돌발행동에도 침묵할 뿐.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전석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눈앞에 있는 건 빌런과도 같은 놈이었고, 그런 놈을 막으면 선업이 오를 게 분명했으니까.

이전석은 단검을 역수로 쥐며 김만진 앞에 섰다.

"뭐, 뭡니까?"

갑작스런 상황.

그가 꽤나 당황한 듯 말을 절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여유라곤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시험 도중에 갑자기 칼을 들고 다가오면 그럴 만도 했다.

이전석은 아무런 대답도 안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소름끼치는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지금 뭘 하려는······."

김만진이 당황해 주춤거리는 사이.

"크억······?!"

이전석이 그의 다리를 걸어 중심을 무너트린 뒤, 한손으로 머리를 잡고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리고 목 바로 옆에 단검을 꽂는다.

조금이라도 손을 움직이면 단검이 목을 파고들어 그대로 동맥을 끊어버릴 위치.

"가, 감독관님! 이거 제지하는 게······!"

수험생 중 하나가 불안함에 소리쳤다.

그러나 여전히 아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수험생들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감독관이 가만히 있다.

수험생들이 나설 수 있을 리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 상황이 감독관이 의도한 시험의 일부분이라 생각했다.

이전석으로선 딱 좋은 상황.

이유라곤 하나도 알 수 없지만.

'그거야 나중에 캐물으면 그만.'

이전석이 김만진을 내려다봤다.

"당신······!"

"말하지마."

"······!"

"말하면 바로 동맥을 벨 거야."

이전석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미소를 지은 채, 죽어버린 동공으로 그런 말을 속삭이는 이전석의 모습은 실로 악귀와도 같았다.

"너는 내 질문에만 대답하면 돼. 물론 어거지로 능력을 써서 벗어나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어. 그럼 즉시 목을 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오히려 나로선 그쪽을 더 원하긴 한다만······."

이전석이 말끝을 흐리며 김만진을 쳐다봤다.

겁이라도 먹은 걸까.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동공.

호흡곤란이라도 온 것처럼 헐떡이는 숨.

'뭐야··· 뭐냐고 이거······!'

김만진은 당장이라도 혼절해버릴 듯 몸을 떨었다.

이전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묘한 압박감이 마치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김만진을 억눌렀다.

"이렇게 겁쟁이일 줄은 몰랐는데."

참 아쉬울 따름이다.

날뛰기라도 하면 더 쉽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일단 첫 번째 질문."

이전석이 살벌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네 특성은 뭐지?"

"······."

김만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말하면 목을 그어버리겠다는 협박 덕분일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그가 겁에 질린 어조로 답했다.

"······구, 구더기의 낙인."

"더러운 이름이로군. 효과는?"

"접촉한 대상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제한.

'과연.'

아무래도 그 제한 덕분에 스크린 너머의 수험생이 꽤나 굼뜬 것처럼 보인 것이리라.

하지만.

"더 숨기는 게 있잖아? 설마 이 뿔이 구더기의 낙인 때문에 생긴 거라고 하진 않겠지?"

스윽-.

이전석이 단검을 살짝 기울였다.

목덜미로 피 한 방울이 흘렀다.

"······!"

김만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떨었다.

"말 해."

압박감.

위압감.

보고 있노라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흑색 눈동자.

빛이 바라고 색이 혼탁한 동공은 마치 귀신의 그것을 보는 것만 같다.

악귀.

그렇다.

이것은 악귀다.

피로 물든 귀신.

"······!"

결국 김만진이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했다.

"허."

이전석은 어이없다는 양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냅다 기절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쯤 하셨으면 됩니다, 이전석 수험생."

아냐가 뒤늦게 이전석을 제지해왔다.

이전석은 단검과 함께 손을 거두며 그녀를 바라봤다.

"딱히 그만둘 필요는 못 느끼겠습니다만···."

어딘가 투덜거리는 듯한 어조.

아냐는 설명하듯 말했다.

"김만진 수험생은 저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상 심문을 계속했다간 고문이 될 뿐, 수험생께서 굳이 손을 더럽히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왜 막지 않으셨죠?"

이중적인 질문이었다.

김만진이 다른 수험생을 방해한 것.

그런 김만진을 이전석이 압박한 것.

둘 다, 왜 막지 않았는가.

"필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다?"

"예. 수험생들이 갑자기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두고 어떻게 대응할지 보고 싶었습니다. 헌터가 되면 빌런에 의한 돌발 상황쯤은 샐 수 없이 마주하게 되니까요."

즉, 아냐는 김만진을 이미 빌런으로 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하긴 던전을 공략하는데 있어 움직임을 방해했다.

이는 충분히 테러행위라 봐도 좋았다.

'특성의 효과를 생각하면··· 경쟁자들을 방해하고 자신이 1등으로 시험을 통과할 생각이었겠지.'

수석으로 시험을 통과하면 그만큼 헌터가 됐을 때 얻는 이득이 생기니까.

하지만.

'멍청하긴.'

그 얄팍한 생각이 김만진 스스로를 빌런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빌런이 되면 헌터가 되지 못한다.

죄값을 치르더라도 마찬가지다.

협회는 빨간 줄이 그인 사람에겐 결코 헌터증을 건네주지 않았다.

"당연히 계획에 없던 시험인 만큼 감점은 없고······."

아냐 이바노프.

그녀가 바로 뒤 스크린을 바라봤다.

"대응만 침착하게 하셔도 합격을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고블린 시체 세구.

수험생은 숨을 헐떡이며 서있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이곳에서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던 모양이다.

━그, 그럼···?

"합격이십니다, 이용준 수험생님. 상처는 안전요원에게 치료받으시고, 1층 대기실로 이동해 계시면 추후 시험이 종료된 뒤 헌터증을 발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냐의 말에 수험생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안전요원 한 명이 다가갔다.

던전 내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걸까.

반면.

"추가 시험이 아니었던 거야?"

"그럼 저 사람은 어떻게 알고······."

"나 아까 저 뿔 달린 사람이랑 악수했었는데···."

"분명 합격이겠지? ···부럽다."

그걸 지켜보던 다른 수험생들이 제각각의 반응을 토해냈다.

그리고.

"확실히."

그들 중 한 명의 말을 주워들은 아냐가 이전석을 쳐다봤다.

"이전석 수험생껜 당장이라도 헌터증을 드려도 이상할 게 없는 수준입니다."

빌런 김만진의 테러행위를 다른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 점.

빌런을 상대로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한 점.

더욱이 그 과정에서 일체의 피해도 발생시키지 않은 점까지.

"다만."

아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형식상 합격을 드리기 위해선 던전공략을 한차례 진행하실 필요가 있습니다만··· 괜찮으실까요?"

그녀가 이전석에게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다.

이전석으로선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안 괜찮다면.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여기선 감독관이 절대적 갑이었는데.

무엇보다 이전석으로서도 던전에 들어가 실험해볼 게 있었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

이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안전요원들이 기절한 김만진을 끌고 가고, 아냐의 지시 아래 다시 시험이 재개되었다.

합격자와 불합격자가 뒤섞여 나오는 가운데.

이전석은 아냐를 관찰하고 있었다.

'꽤 유능한 사람이야.'

단순 직위적으로만 봐도 그렇다.

감독관이라면 최소 A급일 테니.

상황에 대한 판단이나 대응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문점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전석이 활동할 때는 보이지 않았는가.

'······이 시기에 협회에서 대대적으로 유명한 빌런집단을 소탕하는 사건이 있었지.'

여명회는 아니다.

다만 그 못지않은 빌런단체였다.

납치와 감금.

그리고 인체실험을 일삼던 놈들.

그때 꽤 많은 헌터가 사망했다.

민간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서 아냐가 사망했을 가능성.

혹은 불구가 되어 은퇴했을지도 모르는 미래.

이전석은 생각했다.

만약 거기서 그녀를 살린다면.

그때도 선업이 증가할까?

[악의적인 방해공작을 제지하셨습니다.]

[선업이 '800'만큼 증가합니다.]

'오.'

돌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

예상대로 선업이 증가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800.

대략 사람 80명을 구한 것과 동등한 수치.

김만진을 제압한 것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까.

변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선업의 수치가 '10,000'을 돌파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업상점(業商店)'이 열립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 ※ ※

1시간가량이 흘렀다.

대부분의 수험생이 시험을 끝냈다.

합격자는 총 8명.

나머지는 전부 불합격했다.

헌터시험의 총 응시자가 34명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실로 극악의 합격 확률이었다.

채 절반조차 되지 않는 합격률.

물론 아직 한 명을 남겨둔 상태이긴 했다.

필기시험 1등 이전석.

아냐로서도 꽤나 눈여겨보고 있던 수험생.

'냉정함, 그리고 분석력과 판단력. 모든 게 뛰어나. 행동이나 인상은 빌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도덕과 관련된 서술형 문제에선 오히려 선인에 가까웠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순박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전투력이 뒤떨어지느냐?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김만진을 제압할 때 그 움직임.

'노련한 투사(鬪士).'

전사도, 군인도 아니다.

이전석의 움직임은 굳이 말하자면 싸움에 미친 투사에 가까웠다.

'아마 저 인상은 특성에 의한 것.'

아냐는 차례가 되어 던전에 들어가는 이전석을 바라보았다.

그가 선택한 던전은 언데드형이었다.

스켈레톤이 주로 등장하는 F급 던전.

스켈레톤이 가진 방어력 때문에 수험생들 사이에서 선택률이 극도로 낮은 던전이었는데.

'망설임이 없어.'

마치 미리 정해두고 있었던 것 마냥.

그의 특성이 언데드 특화형인 걸까?

확실히 그 불길한 눈은 언데드와 관련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시험내용이 공개되면 스카우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군요."

문득.

아냐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왔다.

김만진을 끌고 나갔던 그 안전요원이다.

아냐와 같은 부서의 팀원이기도 한 남자.

"윤 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냐가 윤 진에게 물었다.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가능하면 저희 부서로 데려오고 싶을 만큼."

"인정합니다."

아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도 그를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전석의 재능은 그만큼 찬란한 것이었기에.

그래서 아냐는 이전석이 무엇을 더 보여줄지 기대하며 스크린을 응시했다.

하지만.

'저건······.'

아냐가 목격한 건 실로 기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화

헌터 시험 (3)

이전석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던전에 입장한 직후.

[망자들의 왕이 스켈레톤을 굴복시킵니다.]

본래라면 자신을 공격하며 달려들었어야 할 몬스터.

놈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은 것이다.

[스켈레톤이 당신을 두려워합니다.]

뼈로 이루어진 몬스터가 덜덜 떨고 있다.

고개조차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허.'

이전석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망자들의 왕.

죽은 자들에게 경외를 받는다는 효과.

내심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지성도, 이성조차 없는 몬스터가 경외라는 감정을 느끼며 저 스스로 사람에게 무릎을 꿇다니.

콰득-!

이전석이 근처에 있던 스켈레톤의 머리통을 으깨듯이 짓밟았다.

[스켈레톤을 처치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그러자 오르는 레벨.

상태창을 보자 26레벨이 되었다.

더불어 스탯 포인트도 있었으니.

[스탯 포인트를 사용합니다.]

[체력이 '20'으로 상승합니다.]

이전석은 바로 19였던 체력을 20으로 올렸다.

이걸로 민첩과 체력 모두 20을 넘었다.

민첩이 그러했듯, 스탯이 20을 넘어가자 또렷한 변화가 느껴졌다,

육체가 강화되는 것 같은 느낌.

'이건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그보다.

이전석이 정면을 쳐다보았다.

스켈레톤을 한 마리 죽였다.

그런데도 다른 스켈레톤들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마치 죽여 달라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을 뿐.

━이전석 수험생. 이건··· 수험생의 특성입니까?

실로 기괴한 장면이었기 때문일까.

예외적으로 아냐가 말을 걸어왔다.

"······예."

이전석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험을 속행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이 있은 뒤.

[스켈레톤을 처치하셨습니다.]

[스켈레톤을 처치하셨습니다.]

[스켈레톤을 처치하셨습니다.]

이전석은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는 해골들을 천천히 짓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레벨이 하나도 오르지 않았다.

F급 던전의 저렙 몬스터.

들어오는 경험치가 너무나도 적다.

극히 미미하기 그지없는 수준.

방금 레벨이 올랐던 건 북한산에서 쌓은 경험치가 이미 거의 꽉 차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스켈레톤을 하나 둘 씩 처치하며 나아가는 이전석.

[보스 에어리어.]

이윽고 그가 보스방 앞에 도달했다.

문 같은 건 없었다.

일직선으로 이어진 동굴의 끝.

조금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있던 유독 커다란 덩치의 스켈레톤 한 마리.

[스켈레톤 워리어 Lv. 12]

12레벨.

한자리 수에 불과했던 여타 스켈레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또한 워리어라는 이름답게 녀석은 길쭉한 곡도를 들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떨고 있군.'

새하얀 뼈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

[스켈레톤 워리어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경계.

다른 스켈레톤들과는 다른 반응.

무릎을 꿇지 않는다.

나름대로 보스 몬스터라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달그락-.

"왕······."

움직이는 턱뼈.

희미하게 음성이 새어나온다.

"왕, 이시여······."

색채가 깃들지 않은 듯 메마른 목소리.

쿵-.

들고 있던 곡도가 땅에 곤두박질치고.

털석-.

스켈레톤 워리어가 무릎을 꿇었다.

양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숙인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당신에게 굴복합니다!]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F급 몬스터가 말을 할 수 있던가?'

이전석이 당환스런 눈빛을 띠었다.

C급.

그 정도쯤 되면 몬스터에게도 지능이 생기고, 언어라는 걸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구울의 왕이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F급은 낮은 힘과 더불어 지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언어를 구사하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했다.

적어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은 그렇다.

허나 눈앞의 스켈레톤 워리어를 보라.

녀석은 분명 이지를 지니고 언어를 형성했다.

왕.

그 단어를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이 몬스터가 특별한 걸까?

설마.

오히려.

'······특별한 건 내 특성이로군.'

망자들의 왕.

그게 작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놀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당신을 경외합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충성을 원합니다.]

[스켈레톤 워리어를 복종시키겠습니까?]

갑자기 받은 업상점이란 특성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 ※ ※

"합격입니다, 이전석 수험생. 1층 대기실에 계시면 잠시 후 헌터증을 발급해드리겠습니다."

아냐 이바노프의 말.

이전석이 고개를 숙인 뒤 시험장을 나갔다.

그에겐 이제 곧 헌터증이 발급될 것이다.

딱히 감흥 같은 건 없어보였다.

다른 수험생들과 달리 기뻐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더욱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내 모든 수험생이 떠나고 조용해진 시험장.

"어떤 특성인지 모르겠지만 언데드에 대해 절대적 우위에 설 수 있는 걸로 보입니다."

윤 진이 까매진 스크린을 보며 말했다.

방금 전 비추어졌던 그 광경.

몬스터가 절로 무릎을 꿇었다.

이런 경우는 윤 진은커녕 헌터로서 10년 경력을 자랑하는 아냐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보스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더군요···."

애매하고 작은 음성 덕분일까.

아무래도 스켈레톤 워리어의 말은 듣지 못한 모양.

그저 보스가 사라지는 모습만을 봤을 뿐이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 진이 아냐를 흘겨봤다.

아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대신이라는 듯 윤 진이 말을 이었다.

"냉정한 성격, 침착한 판단, 뛰어난 분석력과 특이성이 엿보이는 특성.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김만진을 제압하면서 보여준 전투적 재능."

이전석에 대해 나열하던 윤 진.

그가 아냐를 돌아보며 물었다.

"부사수로 딱 아닙니까?"

부사수.

말 그대로의 의미다.

협회의 감독관은 보통 사수와 부사수 2인조로 움직이곤 했다.

그들이 소속된 곳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빌런 대응부서.

오직 빌런만을 위해 만들어진 협회 내 최고위 조직.

빌런이란 특유의 위험성 때문일까.

감독관은 일반적으로 둘 이상의 팀으로만 활동하는 게 기본원칙이었다.

가령 얼마 전 이전석을 조사했던 김백동과 인턴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년 전.

아냐는 자신의 부사수를 잃었다.

빌런에 의한 기습이었다.

그 후.

아냐는 어째서인지 부사수를 구하지 않았다.

기본원칙을 충족하지 못했으니 작전에 참여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덕분에 그녀는 매번 인턴이나 할법한 시험 감독을 주로 맡고는 했다.

"10년차 베테랑이 이런 곳에서 썩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

침묵을 고수하는 아냐.

윤 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턴은 팀장님이랑 띵가띵가 놀러 다니고···."

"이것도 충분히 중요한 일이다, 윤대리."

아냐 가 뒤늦게 윤 진의 말을 잘라내며 입을 열었다.

중요한 일.

맞는 말이다.

시험에 빌런이 섞여 들어오는 건 드물게 있는 일이고, 그들을 상대하기에 감독관만큼 적합한 인재는 달리 없었으니까.

다만.

"그건 인턴에게 맡겨도 되는 일어고요."

인턴이라 해도 엄연히 감독관.

A급의 유능한 헌터다.

반면 아냐는 S급의 상위헌터.

경력으로만 보면 거기에 S가 하나 더 달려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런 고위급 인재가 고작 이런 곳에서 썩고 있다는 사실이 윤 진으로선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번쯤 고려는 해주세요. 저 정도면 충분히 부사수로 괜찮을 것 같으니까요, 과장님."

과장.

윤 진은 굳이 아냐의 직급에 힘을 주어 말하며 시험장을 나갔다.

이윽고 홀로 남은 아냐 이바노프.

"······."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확실히···.'

아냐가 윤 진의 말을 되새겼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전석은 뛰어난 인재다.

그 기운.

널리고 널린 떨거지들에게서나 볼법한 게 아니다.

수없이 많은 전장을 넘어온, 투사와도 같은 기백.

달리 꺼림칙한 과거도 없었으니···.

'저 정도면 1년도 안 돼서 A급까진 올라오겠지.'

실로 감독관에 걸 맞는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진 아냐도 인정한다.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인재.

다만 부사수로 적합하냐고 하면···.

'······.'

모르겠다.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애시당초 그가 협회에 들어올지 부터가 불명이다.

사람의 생각과 목표는 제각각이었으니까.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길드나 사무소로 빠져나가는 헌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도.

'일단 팀장님께 연락은 드려야겠지.'

아냐가 휴대폰을 꺼냈다.

이내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기 시작한다.

수신인은 다름 아닌 김백동.

빌런 대응부서의 팀장이다.

그녀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인재가 있다면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건 기본적인 상식일 터였다.

※ ※ ※

[F급 헌터 이전석]

이전석이 헌터증을 바라봤다.

증명사진이 걸린 카드 한 장.

언뜻 주민등록증과 비슷해 보인다.

'일단 얻을 건 얻었어.'

마음 같아선 바로 A나 S급을 받고 싶었지만, 실적에 의해 등급을 올려가는 게 협회의 규칙이니 어쩔 수 없었다.

등급은 어차피 활동하다보면 알아서 올라갈 터.

'지금은 그것보다······.'

이전석은 상태창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망자들의 왕.

그곳에 새로이 생긴 것.

망자들의 왕.

등급 : C

효과 : 죽은 자들에게서 경외를 얻는다.

보유 망자

└스켈레톤 워리어(F)

효과 바로 아래.

보유 망자라는 것이 추가됐다.

그제야 이전석은 망자들의 왕이 어떤 종류의 특성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테이밍 계열의 특성이로군.'

이따금 들어본 적이 있다.

던전 내부에 존재하는 정령이나 신수를 길들여 함께 싸우는 헌터의 존재를.

하지만.

'몬스터, 그것도 언데드를 테이밍하다니······.'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게다가 가능한 건 테이밍만이 아니었다.

수납과 소환.

테이밍한 몬스터를 아공간에 들여놓고, 원할 때 다시 불러내는 것이 가능했다.

"소환."

아무도 없는 골목길.

허공에 스켈레톤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난다.

헌터시험 던전에서 봤던 그 스켈레톤이다.

붉게 타오르는 동공이 이전석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척-.

녀석이 돌연 무릎을 꿇었다.

아예 몸을 엎드리고 머리를 땅과 맞대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자세다.

마치 기사가 왕에게 복종하는 듯한 모습.

[스켈레톤 워리어 Lv. F]

레벨도 숫자에서 등급으로 바뀌었다.

"왕, 이시여. 명령을."

녀석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몇 번 실험해본 결과.

스켈레톤 워리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세가지 뿐이었다.

왕.

명령.

존명.

물론 지능은 생각보다 높은지 알아듣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제 자리에서 개 자세로 세 바퀴 돌아."

"존명···."

이전석이 명령하자 스켈레톤 워리어는 손에 든 곡도를 내려놓은 채 네 발로 땅에 엎드려 빙글 돌기 시작했다.

지능은 존재하지만, 감정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이런 부끄러운 명령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따를 수 있는 거겠지.

물론 감정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충성심.

스켈레톤 워리어와 계약한 직후.

이전석은 녀석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심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일어서."

명령이 내려진 후.

척-.

스켈레톤 워리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꼿꼿이 선 채 대기.

녀석을 빤히 쳐다보던 이전석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상태창도 볼 수 있나?'

정령을 테이밍한 헌터들은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스켈레톤 워리어도 가능하지 않을까.

종류만 다를 분이지 테이밍을 하고 길들인다는 건 언데드나 정령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상태창."

이전석은 혹여나 싶은 마음에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화

업상점(業商店)

스켈레톤 워리어

등급 : F

[근력 - 20] [민첩 - 8]

[체력 - 11] [마나 - 8]

특성 : 돌격(F).

충성도 - 100%

"······처참하군."

F라는 등급 덕분일까.

스탯의 수치가 처참하기 그지없다.

근력을 제외하면 볼 것도 없는 수준.

그나마 돌격이라는 특성이 있긴 했지만.

돌격

등급 : F

효과 : 적에게 돌진할 시 근력과 민첩 스탯이 각각 +10만큼 증가한다.

아쉽게도 기대할 만큼의 효과는 아니었다.

물론, 10이라는 스탯이 낮은 건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군.'

그렇다.

애매하다.

근력이야 돌격을 쓰면 30이 될 테니 꽤 효과를 보겠지만, 민첩은 20도 넘지 못해 변화가 극히 미미할 터였다.

그래서 더 애매하다는 것이다.

'레벨이나 스탯 포인트도 없고.'

즉.

스탯을 올릴 수단이 없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특성 진화의 룬.

던전에는 이따금 그런 아이템이 나왔으니.

특성등급을 올리면 크던작던 스켈레톤 워리어에게도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다만.

'S급에 사용해도 아쉬운 걸 C급에?'

이전석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얻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일생에 한 번 볼까 싶은 보물.

물론 이전석은 미래를 겪은 만큼 룬의 등장 시기나 위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작 C급 특성에 그만한 보물을 사용한다는 건 과유불급이나 마찬가지였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해야 될까.

후우-.

이전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망자들의 왕.

실로 계륵 같은 특성이다.

나쁜 건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닌.

애매하기 그지없는 능력.

몬스터를 더 테이밍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게 모두 이런 수준이라면 의미가 없었다.

애당초 특성의 급 C인 이상 그렇게 많은 수의 몬스터를 테이밍 할 수도 없을 터.

이전석은 스켈레톤 워리어를 다시 수납했다.

정확히는 아공간 속에 집어넣었다.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쉬이익-.

허공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녀석.

이전석은 홀로 남아 생각했다.

망자들의 왕.

분명 애매한 능력인 것은 맞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었다.

이전석에겐 천살성이 있었으니까.

특성은 이게 끝이 아니다.

빌런을 죽이고 몬스터를 죽일수록.

그에겐 더 많고 뛰어난 것들이 손에 쥐어질 것이다.

그저 거쳐 가는 단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

'그래도······.'

이전석은 스켈레톤 워리어의 외형을 떠올렸다.

'미끼로 쓰기엔 충분하겠어.'

몬스터를 테이밍해 사용한다.

그런 헌터는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다.

미지의 특성과 능력.

이는 잠깐이나마 적을 혼란시키기에 충분할 테고, 그 잠깐이면 이전석은 충분히 적을 도륙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C), 업상점.

이전석은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업상점.

선업이 1만을 넘기며 생겨난 특성.

영원의 낙인처럼 등급이 존재하지 않는다.

효과를 보니······.

업상점

효과 : 업상인을 소환한다.

그런 짤막한 내용이 전부였다.

업상인이라는 게 뭐지?

업과 관련된 상인.

업으로 무언가를 사고 팔 수 있게 되는 걸까?

'뭐, 일단 써보면 알 수 있겠지.'

이전석은 바로 업상점을 사용했다.

직후.

쩌적-.

허공이 게이트마냥 찢어졌다.

생각보다 작은 크기.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균열이다.

그 사이로,

"안녕하십니까."

웬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것도 정장을 입고 이족보행을 하며 사람 말을 하는 토끼가.

※ ※ ※

"크악···!"

회색 망토를 두른 남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몸에는 피와 검상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

모두 한 사람이 자행한 일이었다.

김백동,

대한민국 헌터협회 빌런 대응부서의 팀장.

SS급 헌터이자 최강의 감독관이라 불리는 사내.

일명, 빌런 사냥꾼.

"여명회 본부는 어디지?"

그가 쓰러진 남자를 짓밟은 채 물었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이 남자를 겨눈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이라는 듯.

콰득-.

입 속에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깨물었다.

이내 울컥 피를 토하며 경련하는 남자.

붉은 혈액 사이로 보라색 액체가 뒤섞여 있다.

아무래도 잇몸 사이에 독을 숨기고 있던 모양.

김백동이 급히 녀석을 살폈지만.

"······죽었군."

이미 숨을 멎은 뒤였다.

"쯧."

김백동은 혀를 차며 검에 묻은 혈흔을 털어냈다.

"티, 팀장님!"

그때 뒤늦게 달려오는 인턴.

"벌써 끝난 건가요?"

"애매하게 끝났지."

"그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다.

자결.

여명회는 늘 이런 식이다.

꼬리라도 잡았다 싶으면 항상 도마뱀처럼 주저 없이 잡힌 꼬리를 잘라내 버린다.

놈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데 조금의 두려움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일개 말단조차 정보발설을 막기 위해 자결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덕분에 여명회에 대해선 생각보다 조사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었다.

'후···.'

김백동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조금 있으면 협회에서 대대적으로 빌런단체를 토벌하기 위한 작전을 실행할 예정이다.

여명회가 아니다.

다른 빌런 단체.

그 작전이 시작되면 여명회에 대한 건 차순위가 될 테고, 그럼 놈들은 더욱 어둠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 터였다.

그래서 가능한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뭐라도 하나 알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이는 대로.

'이번에도 허탕이로군.'

김백동은 그 사실에 못내 짜증이 났다.

띠링-.

문득.

휴대폰이 알람을 울렸다.

"너는 먼저 협회로 돌아가 있어라."

김백동은 인턴을 먼저 돌려보냈다.

그 뒤.

휴대폰에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아냐 이브노프로부터 도착한 메시지.

헌터시험에서 꽤 괜찮은 인재를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문자엔 수험생의 인적사항도 함께 첨부돼 있었다.

'이전석?'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바로 며칠 전.

북한산 던전 폭주에서 만난 각성자.

'헌터시험을 봤었나보군.'

재능이 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

홀로 던전 폭주를 막아낼 정도니까.

다만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아냐가 추천할 줄은 몰랐기에 김백동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나중에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해보는 게 좋겠어.'

인재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물론 그 인재가 여명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황금알이라는 건, 지금의 김백동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 ※ ※

갑작스레 허공에 나타난 흰색 토끼.

착-!

녀석이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한다.

토끼는 탑햇- 검정색의 신사 모자를 쓰고, 제 몸에 걸 맞는 작고 검은 정장과 외눈 안경을 끼고 있었다.

붉은 넥타이와 눈동자가 유독 돋보인다.

"처음 뵙겠습니다."

토끼가 유난히 굵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실로 예의가 돋보이는 움직임.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꿈의 토끼, 토요토라고 합니다."

토요토.

토기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 말했다.

"명계, 천계, 삼계.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업을 대가로 각종 상품을 파는 상인이죠."

"허."

이전석이 무심코 헛웃음을 흘렸다.

업을 대가로 각종 상품을 판다고?

이런 건 지옥에서 저승사자들이 떠들어대는 헛소리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뭘 파는 거지?"

그가 당혹스러움을 뒤로한 채 물었다.

한편으론 호기심이 묻어난 어조.

"존재하는 모든 걸 취급합니다."

그러자 토요토가 앙증맞게 웃었다.

(목소리는 전혀 앙증맞지 않았지만.)

"다른 상인과 달리 저는 오직 선업만을 화폐로 취급합니다. 그 선업을 대가로 금이나 보석, 던전 내에서 구할 수 있는 특별한 아이템, 그 외에도 갖은 귀중품들을 팔고 있지요. 물론 오직 저만이 추구하는 특별품도 있답니다."

"하지만"이라며 토요토가 말을 잇는다.

"고객님께선 선업이 많이 부족해 보이시는군요."

외눈 안경이 빛을 번뜩인다.

"동시에 악업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많고."

처음 나타날 때부터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있던 토요토도 지금만은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신기하군요. 저도 이렇게 악업을 많이 쌓은 인간은 처음 봅니다. 사람을 죽이더라도 고작 1만의 악업이 쌓이는 게 고작일 텐데, 상태창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기로 쌓였다는 건······."

하하-.

옅게 흘러나오는 웃음.

"고객님께선 필히 지옥에 떨어지겠군요."

······보통 그걸 그대로 말하나?

이전석은 어이가 없었다.

작금의 상황 자체가 그랬다.

업상인이라며 튀어나온 토끼도 황당할 지경인데. 대뜸 그 토끼한테 지옥에 떨어질 거란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허나 상인은 모두에게 공평해야하는 법."

토요토가 외눈 안경을 치켜 올렸다.

직후.

허공에 무수히 나타나는 상태창.

네모난 창들이 토요토를 주변으로 회전하다가, 이윽고 이전석의 눈앞에 촤라락 펼쳐졌다.

"얼마든지 골라보시지요."

토요토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만약 선업이 부족하시다면 특성이나 악업, 혹은 고객님의 신체를 담보로 대출도 가능하답니다? 아, 고객님의 경우 악업은 수치가 너무 높아서 담보로 사용하실 수 없겠군요."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한 말이었다.

대출이라니. 은행도 아니고.

"만약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이전석은 확인 차 물었다.

그러자 토요토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시스템에 의한 강제 몰수절차가 진행될 겁니다."

강제몰수.

'그렇다는 건 대출기간이 끝나기 전까진 담보라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다는 건가?'

토요토에게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특성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담보라고 해서 무작정 가져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이전석은 호기심을 충족하려는 것처럼 더 많은 물음을 던졌다.

대출금은 마음대로 쓸 수 있는가.

사는 게 아닌 파는 것도 가능한가.

토요토는 생각보다 쉽게 답해줬다.

"대출로 받으신 선업은 기존 선업과는 따로 취급됩니다. 때문에 고객님의 사후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오직 제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하시는 데만 이용할 수 있으십니다."

즉 특성을 마구잡이로 모아다 팔고 자결해 천국에 가는 꼼수는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 구매는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과연."

이전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점이라면서 살 수만 있고 팔 수는 없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긴 하지만, 주인장이 그렇다고 하니 뭐 어쩌겠는가.

이전석은 뒤늦게 눈앞에 떠오른 창들을 살폈다.

드레이크의 심장(C) - 3만 업

특성 진화의 룬(A+) - 22만 업

뒤틀린 자의 선의(B) - 9만 업

엑스칼리버(SS) - 220만 업

하나같이 어마무시 한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가장 싼 드레이크의 심장조차 3만.

당연히 전부 선업 기준이다.

반면 이전석이 가진 선업은 1만뿐.

"C급 특성을 담보로 쓰면 대출은 얼마나 받을 수 있지?"

이전석은 혹여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러자 토요토가 후후 웃으며 답했다.

"대략 3천의 선업을 받을 수 있으시겠군요."

3천.

결코 낮은 수치는 아니다.

지금까지 100 단위로 찔끔찔끔 올리던 것에 비하면 훨씬 높다.

다만 그걸 대가로 C급 특성을 희생할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논외로군.'

특성이 넘쳐흐르던 전생과는 다르다.

지금은 계륵이나 다름없는 망자들의 왕조차 절실히 필요할 때였다.

그렇다고 신체를 담보로 사용하랴?

그거야말로 더 미친 짓이다.

물론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담보.

갚기만 하면 전부 해결되는 일이지만, 이전석은 그런 불확실한 것에 미래를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사야만 하는 게 있다면 또 모를까.

"선업 1만으로 살만한 건 없어?"

"흠··· 없는 건 아닙니다만······."

토요토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창들이 옆으로 빠지며, 단 하나의 창만이 눈앞에 떠올랐다.

오크의 썩은 피 - 5000 업

스켈레톤의 뼛조각 - 1000 업

찢어진 5천원 지폐 - 500 업

누군가가 씹던 껌 - 10 업

그 내용을 본 이전석이 몇 번째인지 모를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씹다 뱉은 껌까지 주워다 파는 거냐?"

"나름 수요가 있으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다만······."

"사람은 사람마다 제각각인 법이죠."

하하-.

토요토가 옅은 웃음을 흘린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겨를이 없다.

"하나만 물어보지."

"얼마든지요."

이전석이 상태창의 스크롤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나 외에 너를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선업과 악업.

그리고 업상점.

자신 외에 이러한 현상을 겪고 있는 자가 달리 있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업스탯을 얻었지?

자신처럼 회귀라도 한 건가?

알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이전석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납득하고 싶었다.

그러나.

"없습니다. 손님을 맞는 건 5백년 이후로 고객님이 처음이랍니다."

아쉽게도 토요토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과거에는 있었다는 소리군.'

그렇다면 방법은 충분히 있다.

귀신을 보는 특성.

죽은 자를 불러내는 특성.

과거의 기억을 읽는 특성.

그러한 것들을 활용하면 토요토가 말한 5백년 전 손님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정보와 관련된 것들도 취급하나?"

"합니다만··· 아마 현재 고객님이 가지고 계신 선업으론 가장 낮은 수준의 정보조차 구매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렇군."

그럼 어쩔 수 없는 일.

이전석이 묵묵히 스크롤을 내렸다.

'쓰레기투성이로군.'

아이돌이 코 푼 휴지.

길가에 버려져 있던 돌멩이.

고블린의 타액.

심지어 고양이 똥까지.

이게 맞나 싶은 것들만 주르륵 올라온다.

그러다 결국 멈춰버린 스크롤.

이전석은 한숨을 쉬며 창을 닫았다.

아니.

그러려고 하던 때였다.

"이건······."

돌연, 그의 눈에 띈 물건이 있었다.

웬만하면 선업은 아껴두려고 했다.

이게 없으면 천국에 가지 못하니까.

상점을 살펴본 것도 어디까지나 흥미의 연장성일 뿐.

정말 물건을 구매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엑스칼리버니 용의 심장이니···.

그런 것들은 전혀 이전석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망가진 적단도(赤短刀) - 1000업]

그걸 본 순간.

"이걸로 하지."

이전석은 아끼고 아끼던 선업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