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70화
초월자 (2)
"스승님, 위에서 귀국 명령이 내려왔어요."
에밀리가 소파에 앉아 명상을 하던 스텔라에게 말했다.
"최근 대한민국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요. 내전이 터질 것 같은데······. 마스터께서 할 거 전부 끝냈으면 바로 돌아오라 하셨어요."
그에 스텔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뚜둑- 목을 풀며 말했다.
"확실히, 최근 화산 동향이 좀 이상하긴 해."
뒤이어 정면의 TV를 바라본다.
그곳에는 뉴스가 틀어져 있었다.
화산의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뉴스였는데······.
"음?"
문득.
스텔라가 무언가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헛소리도 그 정도면 풍년이야, 안 그래?
TV 속.
정확히는 기자회견 현장.
━갑자기 정체불명의 남자가 단상에 나타났습니다! ······어어, 해당 남자는 비교적 최근까지 협회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던 이전석 헌터라고 합니다!
기자가 흥분한 듯한 어조로 외쳤다.
그 말대로 단상에 이전석이 서 있었다.
한 달 전과 똑같은 모습.
겉보기에 달라진 건 없다.
그러나.
"에밀리."
"네?"
"저거 보이냐?"
"음··· 보이죠?"
에밀리는 스텔라의 말에 대꾸하며 TV를 쳐다봤다.
갑자기 기자회견 단상 위에 나타난 이전석.
그 모습이 꽤 반가웠는지 에밀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오랜만에 보는데 리는 머리도 그렇고 예전 그대로네요. 앞머리를 조금만 다듬으면 더 멋있어 보일 것 같은데······."
"아니, 그거 말고."
"······?"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말고라니···.
그 외에 달리 뭐가 있나?
에밀리는 제 스승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
스텔라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SSS급인 그녀는 에밀리로선 보지 못하는 것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직접 보지 못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대체 한 달 동안 어디서 뭘 하다 온 거야?'
이전석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물이 되어 있었다.
※ ※ ※
"당신은······."
최강오가 이전석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의 눈빛에 의문이 띠었으나 잠시뿐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쯧.'
화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그는 짜증이 가득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곳은 현재 화산이 기자회견을 위해 임대한 장소입니다. 언제 위로 올라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연수, 저자를 당장 끌어내리도록 하십시오."
하연수.
최강오 휘하의 A+급 헌터.
"알겠습니다."
그가 검을 빼 들며 이전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굵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한다.
"이봐, 애송이. 영웅이라 불리게 돼서 어깨가 올라간 건 알겠지만 여긴 네까짓 게 올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내려가는 게 좋을 거다."
이전석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검.
정확히 목을 노리고 있다.
조금이라도 허튼 짓을 하면 그대로 베어버리겠다는 듯.
그러나.
"내 말 못 들었나? 어서 이 자리에서······."
쿵-!
하연수가 말을 채 잇기도 전.
그의 머리가 돌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컥?!"
짧은 신음과 함께 눈을 부릅뜨는 하연수.
머리 왼쪽에 둔탁한 통증이 몰려온다.
시야는 어느새 땅바닥과 맞닿아 있고, 코끝에선 피가 새어 나와 입가를 적셨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
하연수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조차 인식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내쳐져 있었다.
'이 내가··· 일격, 에······?'
그것도 어떻게 당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질 못했으니 어찌 기억한다는 말인가.
"크윽······!"
하연수는 흐려지고 일그러지는 시야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일어나려 해도 머리를 쌔게 부닥친 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고통 어린 신음만을 흘려댈 뿐.
뚜벅-.
이전석이 그를 지나쳐 최강오에게 다가갔다.
"네놈······."
최강오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A+급인 최강오가 이렇게 순식간에 당할 줄은 몰랐다는 눈치.
그에게 이전석이 비릿함이 묻어난 어조로 말했다.
"입발린 소리는 집어치우자고. 고의 토벌을 위해, 협회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겠다? 헛소리도 이 정도면 대단할 지경이야."
"······뭐가 헛소리라는 거죠?"
"너희는 마치 자신들이 정의의 편인 것처럼 얘기했다만··· 협회의 지배를 벗어난다는 건 결국 너희 화산이 협회를 대신해 대한민국을 지배하겠다는 소리 아닌가?"
"······."
최강오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곧 가면을 쓰듯 웃는 얼굴로 이전석의 말을 정정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희는 단지 협회가 독식하는 핵으로 고를 토벌하기 위해······."
"일단, 그 말에는 세 가지 어폐가 있어."
"······어폐?"
자신의 말을 끊고 이어진 부정에 최강오가 표정을 찌푸렸다.
이전석은 그의 반응에도 전혀 아랑곳 않고 손가락을 세웠다.
"첫째는 내가 착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둘째는 협회가 칠대 재앙을 상대로 핵을 숨길 정도로 머저리가 아니라는 것이고··· 셋째는 애시당초 그 고가 너희 화산의 자극으로 남하 속도가 빨라졌다는 사실이지."
"······."
"정곡인가?"
이전석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째서일까.
그 웃음에 소름이 끼쳤다.
마치 사람을 내리 깔보고 짓밟는 듯한 시선.
기분이 나쁘고 닭살이 돋는다.
가학심.
그렇게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는 표정이었다.
"화산이 고를 자극 했다는 말씀 정말입니까!"
"그 말 증거가 있는 건가요, 이전석 헌터님!"
사방에서 질문이 밀려들어 왔다.
그에 이전석이 기회라는 듯, 기자들을 향해 어느 아이템 하나를 언급했다.
"적환검(赤幻劍)이라는 물건이 있습니다."
"적환검?"
"들어본 적 없는 무구인데······."
"환이라는 이름답게 그 검에는 한 가지 특이한 능력이 있죠. 바로 검으로 찔러 넣은 대상에게 어떠한 환상- 정확히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협회 지하에 존재하는 거대한 핵과 칠대 재앙 고가 마나를 양분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화산이 무슨 짓을 했을지는 대충 예상이 가리라.
이전석은 최강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고에게 검을 찔러 협회 지하에 잠든 핵을 보여줬을 테고, 한동안 동면에 취하느라 마나를 먹지 못했던 고는 그것에 반응했겠지. 놈은 지능이 그렇게 높지 않으니, 그저 '배가 고프니 먹는다'는 일념 하에 한반도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을 거야."
그리고 화산은 그것을 통해 전쟁의 명분을 취하려 했을 터.
합당하게 협회를 치고 그 밑의 핵을 먹으면서, 동시에 그 핵을 이용해 고를 토벌한다.
그게 바로 화산의 계획이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국민들의 지지율은 하늘을 뚫을 테고, 화산이 파밀리아처럼 협회를 대신해 서서히 영향력을 뻗쳐간다고 해도 반감은 적어지겠지. 안 그래?"
"대체 그걸 어떻게······."
이전석의 말에 최강오는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렇기에 무심코 튀어나온 말 한마디.
그는 급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기자들이 마이크를 타고 흘러든 말을 전부 주워들은 뒤였다.
"최강오의 반응을 보니 진짜 같은데···?"
"화산이 의도적으로 고를 이쪽으로 불러들인 거라고?"
"아무리 화신이 미친놈들이라도 그런 짓을······."
"최강오님, 말씀해 주시죠! 이전석 헌터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그들 역시 증거가 없으니 확신하지는 못하는 듯하지만, 의심은 마치 전염되는 바이러스처럼 끊임없이 피어올라 퍼져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전석이 쐐기를 박아 넣듯 말했다.
"아마 드론이나 위성으로 고를 찍어보면, 옆구리나 어깨 쪽에 적색 장검 한 자루가 꽂혀 있을 겁니다."
명백하기 그지없는 증거.
화산으로서도 고의 위험성 덕분에 적환검을 회수하지는 못했을 테니···.
쯧-.
정답이라는 양 최강오가 혀를 찼다.
이제 와 변명한들 의미가 없었다.
이전석의 말대로 고에서 적환검이 발견된다면 그게 화산의 짓임을 만인이 깨닫게 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변명을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 시점에서 화산의 신뢰도는 이미 바닥을 기고 있을 터.
무엇보다, 최강오는 작금의 상황을 이전석이 유도했음을 깨닫고 이를 갈았다.
마치 화산을 깔보는 듯한 저 태도.
"네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최강오가 대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에 이전석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입발린 소리는 집어치우자고. 전쟁을 치르겠다고? 그것도 좋지. 하려면 해봐. 대신 화산은 멸문(滅門)을 각오해야 할 거다."
멸문.
그 단어에 최강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산에 자부심을 가지고, 화산만이 모든 것의 위에 서 있다 생각하던 그다.
그런 그에게 멸문이라는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자 도발로 다가왔다.
"······평화적 지배는 가져오면 좋은 것이지, 반드시 챙겨야만 하는 건 아니었어."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최강오.
"평화든 공포든, 화산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얼씨구, 이젠 세계까지 넘봐?"
"이곳에 나타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거기까지 말이 이어진 순간.
콰앙-!
최강오로부터 기운이 폭발했다.
마나와 격이 뒤섞인 바람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돔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부순다.
"꺄아악!"
"으악?!"
기자들이 당황하며 머리를 감쌌다.
그 가운데.
"놈을 죽여!!"
최강오가 외쳤다.
그러자 사방에 진을 치고 있던 화산 소속 헌터들이 일제히 이전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바깥을 지키고 있던 화산의 검수들마저 뛰어들자 현장은 곧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도, 도망쳐!"
"화산이 드디어 미쳤어!"
"으아악!"
"시발, 비켜! 내가 먼저 나갈 거야!"
혼란과 환란, 그리고 비명.
줄곧 바닥에 쓰러져 있던 하연수조차 기회를 노리고 있던 듯 뒤늦게 이전석을 노리고 검을 내찌른다.
그때.
쿵-!
천장을 부수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김백동이었다.
"크악······!"
그는 하연수의 손목을 자르며 발로 목을 내리찍었다.
낙하의 충격 덕분일까.
하연수는 그대로 목이 꺾여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뒤이어 김백동을 따라 돔 안으로 뛰어내린 아냐.
그녀가 절대영도를 사용해 화산 소속 헌터들을 모조리 얼려버린다.
"이 쓰레기 새끼들, 뒤져!!"
그 뒤를 이어 박일우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얼음이 된 이들을 깨부쉈다.
혼란과 비명을 대신해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얼음조각과 냉기.
그 가운데.
"헌터님."
김백동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냐와 박일우 또한 뒤늦게 합류한다.
그들을 바라본 이전석이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한 어투.
'뭐지?'
김백동이 기이한 낯빛을 띠었다.
이전석.
A급 헌터.
한 달 전 자신의 부서에서 용병으로 활동했던 헌터.
맞다.
장본인이다.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르군.'
한 달 전과 비교해 이전석의 기세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짐승과도 같이 흉포했던 전과 달리, 지금은 마치 잔잔한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없이 투명하고 맑은 호수.
그럼에도 좀처럼 숨길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고작 한 달 사이에······.'
비상 전시상태를 선포한 이후로 보지 못했지만, 이전석은 그새 S급으로 올라 진정한 강자의 반열에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
김백동이 제 손을 쳐다봤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기분 탓인가?
설마.
단순 착각으로 SS급인 그가 손을 떤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S급으로 오른 이전석의 기운이 다른 평범한 S급과 비교해 무척이나 상이하다는 사실이었다.
질- 아니, 결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TV를 통해 이전석을 본 에밀리와 달리, 그와 직접 마주한 김백동은 틀림없는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도움도 안 되는 머저리 새끼들!"
최강오가 버럭 화를 내며 넥타이를 풀어 재꼈다.
그리곤 아공간에서 긴 장창 한 자루를 꺼내 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살행문(殺行門)!"
직후.
검은 복면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석과 김백동 일행을 둘러싸는 이들.
그 숫자만 족히 50은 넘어간다.
사람들이 도망가고 남은 자리.
새까만 살수들이 그 빈 공간을 채웠다.
"살행문··· 들어본 적 있어요."
박일우가 긴장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화산의 숨겨진 조직. 협회 특무관처럼 온갖 더러운 일들을 도맡으며, 그중에서 특히 살인을 주로 다룬다고 하는 놈들······. 살인을 위해 감정마저 버린 인형들이라고 들었어요."
박일우의 말 대로였다.
저들은 감정이 거세된 인형이었고,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살인머신이었다.
무엇보다.
"최소 B급 이상의 강자들입니다."
아냐가 얼음으로 형성된 검을 손아귀에 쥐며 말했다.
A급도 적잖이 있었으며, 개중에는 한 명도 보기 힘든 S급이 두 명은 보였다.
그때.
"이전석 헌터님."
김백동이 오른손의 장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박일우 사원과 아냐 과장을 도와 살행문 놈들을 잠시 붙잡아 주십시오."
고풍스런 느낌의 검이었다.
푸른색이 감도는 날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 위압이 될 정도로 예리했다.
듀랑달.
세상에 몇 없는 SSS급 무구 중 하나.
"그 사이 제가 최강오를 처리하고 빠르게 합류하겠습니다."
우웅-.
듀랑달이 검명을 터트렸다.
파동이 형태가 되어 돔 전체로 흩뿌려진다.
그에 살수들이 미세하게 비틀거렸다.
감정이 없는 그들도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듀량달- 그것을 든 김백동은 위험하다고.
그러나.
"괜찮습니다."
이전석이 돌연 의미모를 말을 해왔다.
"···헌터님?"
그는 김백동의 의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허공에서 회색의 단도를 빼 들었다.
아공간.
S급에 이르렀을 때 얻는 특이한 능력.
"데스, 스켈."
동시에 뭐라 작게 중얼거린다.
직후.
이전석의 좌측과 우측에 스켈레톤 두 마리가 나타났다.
'언데드?'
한 마리는 데스 나이트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데스 나이트보다 덩치가 훨씬 큰 것이 아무래도 로드 개체인 것 같았다.
그리고.
'저건······ 저번의 그 스켈레톤 워리어인가?'
가진 기운이나 형태가 꽤 달라졌지만, 윤진과 싸울 때 이전석이 소환했던 개체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왕이시여, 부르셨나이까."
"······."
스켈과 데스가 동시에 무릎을 꿇는다.
이전석은 단도를 빙글 돌리며 말했다.
"검은 복면을 쓴 놈들, 모조리 죽여."
"존명."
"···충."
데스와 스켈.
두 언데드가 각기 다른 대답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소환수가 '절대자의 기백'의 영향을 받습니다.]
[데스와 스켈이 압도적인 기세를 머금습니다.]
[적들이 움츠러듭니다!]
이전석의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그와 동시에 두 마리의 언데드가 어마무시한 기세를 폭발시켰다.
시왕 오도전륜대왕의 편린을 머금은 기운.
그것이 일순간 돔 전체를 가득 채웠다.
"미, 미친······!"
그에 박일우가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살면서 한 번도 마주해보지 못한 이질적인 기운에 A급 헌터인 그가 무심코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건 비단 박일우만이 아니었다.
"······."
조용히 긴장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침을 삼키는 아냐.
김백동조차 내심 헛웃음을 흘리며 이전석을 바라봤다.
물론.
'언데드··· 소환수의 기세는 확실히 위협적이지만······.'
그를 놀라게 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기세가 이전석과 이어져 있고, 이전석으로부터 발아한 힘이라는 것.
'대체 한 달 동안 어디서 무얼 하다 오신 겁니까.'
고작 한 달이라고 하기에 이전석은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마리의 언데드가 살행문을 향해 다가갔다.
쉭-!
살수 한 명이 뒤에서 그런 데스를 노렸다.
순간적으로 목을 그어 끝내버릴 심산.
언데드라 해도 목이 떨어지면 죽거나, 그러지 않아도 재생 속도가 한참 느려질 테니.
하지만.
"······."
데스가 방패를 앞세워 살수의 공격을 막았다.
오른손에 검이 들려 있었지만, 데스는 그것조차 쓸 가치가 없다는 양 그대로 방패에 힘을 가해 살수를 내리찍었다.
쿵-!
결국 방패의 힘에 못 이겨 바닥에 짓눌려버린 살수.
방패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온다.
"워······."
압도적인 패기와 싸움법 덕분일까.
박일우가 데스의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그때.
팟-!
스켈이 살수의 무리로 뛰어들었다.
살수들은 침착하게 단검을 휘두르거나 찔러 넣었다.
부서지는 어깨뼈와 갈비뼈.
전신을 단검이 꿰뚫고, 뼛조각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스켈이 뼈검을 사용합니다.]
파파박-!
스켈의 전신에서 가시처럼 돋아난 뼈들이 살수들을 꿰뚫었다.
"쿨럭!"
A급 살수는 어렵지 않게 뼈검을 피했지만, B급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팔과 다리, 몇몇은 명치가 꿰뚫린 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돋아난 뼈검 중 하나를 빼어 든 스켈이 그대로 살아남은 B급을 무참히 도륙하기 시작했다.
뼈검의 효과일까.
부서진 신체는 이미 재생된지 오래다.
다른 살수가 스켈에게 달려들었으나.
쿵-!
데스가 방패를 치켜든 채 스켈을 보호했다.
그리고 오른손의 새까만 검을 휘두른다.
서걱-.
그대로 상하체가 분리되는 살수.
분명 A급 헌터였다.
김백동이 느끼기엔 그랬다.
헌데 그런 A급 살수가 일격에 몸이 두 동강 나고 말았으니.
'스켈레톤 워리어는 A급 언저리, 데스 나이트 로드는 S급······.'
이전석은 저런 것들을 사역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개인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두 언데드에 의해 대부분의 살수가 죽음을 맞이했다.
독과 비수를 주로 사용하는 살수와 달리, 언데드는 독이 전혀 통하지 않고 상처를 입어도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했다. 특히 두 언데드가 발산하는 기운은 살수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었으니···.
덕분일까. 그런 여러 요소가 맞물려 S급 살수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실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광경.
"저건······ 뭐지?"
최강오조차 경악스러움에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전석을 노리던 장창이 갈곳을 잃어버린 채 땅을 향하고 있다.
살행문이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때.
"어차피 곧 죽을 텐데 알아서 뭐하게."
이전석이 비웃음을 흘려왔다.
"네놈······."
까득, 이를 갈며 다시 장창을 다잡는 최강오.
그에게 이전석이 말했다.
"부디 가능한 오래 살아남아 줬으면 좋겠군."
"뭐?"
"오랜만에 바깥에 나오는 거라 실험해볼 게 많거든."
의미 모를 말에 표정을 찌푸리는 최강오.
이전석은 마치 이제는 네 차례라고 말하듯 단도를 치켜들었다.
초월자 (3)
"헉!"
변하늘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
그리고 곳곳에 널린 시체와 피를 보곤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그런데.
물컹-.
무언가 부드럽고 따스한 게 손에 만져졌다.
변하늘이 슬쩍 그것을 바라봤다.
새빨간 피에 뒤덮인 기다란 줄.
그것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우욱!"
변하늘이 구역질을 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새빨간 줄을 따라 이어진 곳에 하반신이 잘려 나간 시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손으로 만진 건 그 시체의 창자라는 소리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분명 방금 전까지 도망치고 있었는데, 어느 새부터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파에 치이고 깔려서······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비록 각성자라고 한들 그는 레벨을 전혀 올리지 않은 민간인이었으니까.
그만한 인파에 휩쓸리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 도망··· 도망쳐야······."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달아나라고.
하지만.
"이, 이전석 헌터님······?"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그가 이전석을 발견했다.
최강오와 대치 중인 그.
두근, 두근-.
심장이 벌렁거렸다.
머리가 뜨거웠다.
이전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도무지 눈을 땔 수 없도록 만들었다.
덕분일까.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없어······ 내 카메라!'
빚까지 내가며 샀던 카메라가 없었다.
아무래도 인파에 휩쓸리며 도중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변하늘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건 찍어야 돼······!'
기자로서의 집념이 두려움을 앞섰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중심이 될지도 모르는 이곳.
초신성이자 영웅이라 불리는 헌터가 나타나 화산의 S급 헌터- 후계자와 싸우려 하고 있다.
이는 틀림없이 역사의 한 장면이었고, 그것은 변하늘을 더욱 흥분시켰다.
하지만 카메라가 없었다.
휴대폰도 넘어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밟힌 건지 망가져 전원이 안 켜졌다.
그렇게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다-.
'방송국 카메라!'
바닥에 나뒹구는 큰 카메라를 발견했다.
변하늘은 허겁지겁 그것을 주워들었다.
카메라는 의외로 멀쩡했다.
곳곳이 상해 있었지만, 작동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심지어 아직까지 돌아가고 있기까지 하다.
변하늘은 그것을 들어 단상을 바라보았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전석과 최강오.
두 사람을 찍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찍힌 영상은 실시간으로 전국- 아니,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 ※ ※
다른 이들에겐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일이지만, 이전석에게 있어선 무려 일 년이나 더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용기의 방'에 입장합니다.]
아스트로.
그 중 가장 첫 번째 시험인 용기의 방에 입장한 직후.
무수한 숫자의 함정이 그를 맞이했다.
머리, 목, 다리, 팔, 옆구리.
심지어는 사타구니마저 노리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바닥에서 창이 솟구치고, 천장에선 독이 뿜어진다.
용기의 방은 말 그대로 함정을 통해 도전자의 용기를 시험하는 곳이었다.
["용기 없는 자, 되돌아가라."]
시스템이 떠올랐으나 이전석은 무시했다.
이미 전생에 한 번 돌파해 본 영역이다.
이제 와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전석은 침착하게 긴 복도로 이어진 용기의 방을 돌파했다.
그 과정에서 사용한 건 다름 아닌 마도술이었다.
도술은 주리천처럼 경지가 높지 않은 이상 전투에 별 쓸모가 없지만, 반대로 함정 같은 것들을 돌파하기에 이만큼 유용한 기술은 달리 없었다.
바닥과 천장, 그리고 양쪽의 벽을 점토처럼 잡아당겨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낸다.
싱크홀처럼 푹 꺼진 함정은 축지로 넘어가고, 자연지기 중 하나인 바람을 이용해 독을 저 멀리 날려버렸다.
그렇게 함정으로 이루어진 긴 복도의 끝에 도달했다.
그곳에 달린 검정색 문을 열고 넘어가자, 다시 새하얀 방이 나타나며 보상이 주어졌다.
[용기의 방을 통과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소환수 강화석(B+)'을 획득하셨습니다.]
허공에 나타난 파란색의 보석.
효과 또한 이름 그대로다.
B+급 소환수의 등급을 올려주는 아이템.
누가 봐도 스켈을 고려하고 주어진 듯한 보상이었다.
'아스트로는 각 층을 클리어할 때마다 도전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보상으로 준다고 하지.'
이전석이 아스트로에 들어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원하는 걸 보상으로 주면서 시간의 흐름도 다르다면, 이곳만큼 수련에 적합한 장소도 달리 없을 테니.
그렇게 스켈을 B+에서 A로 성급 시켰다.
덕분일까.
스켈은 굳이 자폭을 사용하지 않고도 뒤를 맡겨도 될 정도로 쓸 만해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데스 나이트 로드와 함께 살행문을 무참히 도륙해 버린 스켈.
"감히!"
최강오가 버럭 소리치며 격을 발산했다.
마나와 뒤섞인 채 파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격.
흔히 적을 위압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는데···.
[절대자의 기백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은 절대자와 기백과 함께, 아스트로에서 S급을 찍으며 얻은 격으로 그것을 맞받아쳤다.
기이할 정도로 검붉은 빛을 띤 격이 최강오가 발산한 무형의 힘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무슨······!"
그에 최강오가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격이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격은 S급 이상의 헌터들에겐 강함의 척도와도 같았는데, 그게 이리도쉽게 밀렸다는 건 그만큼 최강오와 이전석의 차이가 극심하다는 걸 의미했다.
'말도 안 돼···!'
당연히 최강오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A급이었던 애송이다.
각성한지는?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어갈 뿐.
어찌 운이 좋아 S급이 되었다고 한들, 꾸준한 수련과 노력으로 S급 완숙에 이른 자신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왜? 뭐가 잘 안되나 봐?"
이전석이 비아냥거리며 다가왔다.
그가 단도를 역수로 쥐고 날렸다.
비수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단도.
챙-!
최강오가 창대로 그것을 쳐냈다.
아니, 분명 쳐냈을 텐데.
"큭······?!"
단도가 허공에서 스스로 회전하며 다시 최강오를 향해 달려들었다.
최강오는 끊임없이 자신을 노리는 단도를 쳐내며 이전석을 노려봤다.
'이건 설마··· 이기어검? ······아니, 아니야. 이기어검은 SS급을 목전에 둔 신 형님도 아직 익히지 못한 무예야. 그걸 저런 애송이가 익혔을 리가 없어.'
허면.
'이건 대체······!'
최강오가 이를 갈며 재차 단도를 쳐냈다.
그렇다.
이건 이기어검 따위가 아니었다.
'잘 되는군.'
미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이전석.
그를 따라 손가락에 연결된 마나가 단도를 움직였다.
이전보다 더 희미한 마나의 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리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이전석의 의도를 읽고 허공에서 수없이 방향을 꺾어댔다.
마치 이기어검을 사용하는 것처럼.
아스트로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해 얻은 능력이었다.
['인내의 방'에 입장합니다.]
용기의 방을 클리어한 직후.
다시 하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막대한 량의 마나- 흔히 마기라고도 불리는 것이 숨이 막힐 정도로 이전석을 압박해 왔다.
["도전자여, 인내할 수 없다면 되돌아가라."]
[제한 시간 : 30일]
두 번째 시험은 바로 인내였다.
마기의 압박에서 30일을 견뎌내는 것.
'퍼거슨은 여기서 포기했겠지.'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마기.
자칫 잘못하면 마나 중독증은 물론 전신의 마나가 역류하여 죽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방법을 모를 때나 있는 경우였다.
이전석은 바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마나 호흡법, 혹은 운기조식이라고도 불리는 행위.
그것을 통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기를 부드럽게 순환시켰고, 또한 호흡을 통해 다시 외부로 배출했다.
[마나조율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마나조율의 숙련도가 증가합니다.]
[마나조율의 숙련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전석은 마나조율을 온전히 제 특성으로 체화할 수가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나가 '50'만큼 상승합니다.]
2층에 존재하던 모든 마기가 마나라는 스탯이 되어 체내에 스며들었다.
그것이 2층을 클리어하면서 주어진 보상이었다.
시스템은 지금 이전석에게 필요한 것을 다름 아닌 마나의 총량과 제어 능력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전석은 그렇게 얻은 마나를 십분 활용했다.
육안으론 보이지도 않는 마나의 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현상화를 통해 현실에 물리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
차라락-!
이전석이 사방에 떨어진 살수들의 단검을 주워들었다.
총 아홉 자루.
손가락마다 이어진 아홉 갈래의 실이 단검을 주워들어 최강오를 향해 날려 보냈다.
"대체······!"
카가강-!
최강오가 창을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단검을 무더기로 쳐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기어검이되 이기어검이 아닌 기술.
마나보다 육체와 무술을 주로 단련해 온 최강오로선 이전석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마나에 조예가 깊은 아냐나 김백동은 달랐다.
'미쳤군.'
'헌터님, 대체······.'
두 사람이 똑같이 놀람을 내비쳤다.
"와, 미친. 저거 이기어검술 아니에요?"
박일우 또한 놀란 건 매한가지였지만.
"아니다."
"네? 아니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봐도······."
"어떻게 보면 그것보다 조금 더 고차원의 기술이지."
"······예?"
박일우는 김백동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김백동은 이전석의 양 손가락을 자세히 쳐다봤다.
열 손가락에서 이어진 마나의 실이 각기 다른 단검을 조종하며 최강오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기어검술은 단순히 격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허나 저건······ 그냥 뛰어난 마나 제어 능력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만들어낸 기술이야.'
설령 SSS급의 강자라 할지라도 마법에 조예가 부족하다면 지금 이전석이 하는 것과 같은 짓은 못한다.
적어도.
'나는 못해.'
에밀리쯤 되는 마법사가 되어야만 그나마 가능할 거다.
그렇기에 놀라운 것이었다.
고작 한 달.
도대체 이전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끄악!"
순간, 최강오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전석이 양손으로 주먹을 쥔 찰나, 단검과 함께 사방으로 펼쳐진 마나의 실이 최강오를 옭아맨 것이다.
"고작······! 이런 것 따위로······!!"
최강오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이 부풀며 근육 곳곳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직후.
콰앙-!
괴음과 함께 마나의 실이 찢겨나갔다.
'괴력으로 속박을 풀었나.'
실이 찢겨나가기 전, 회색의 단도만을 잡아당겨 손에 쥔 이전석이 침착하게 최강오를 바라봤다.
최강오가 창을 바로잡은 채 그런 이전석을 노려본다.
"잡것이······ 우쭐대지 마라!"
비록 검은 아니지만 그의 자세가 이전석으로하여금 어떤 검술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그것은 화산의 핏줄들이 사용하는 검술이었다.
한때 던전의 영향으로 높디높은 산에 피어난 매화.
그것은 화산의 무인들에게 동경심을 불어넣었다.
매화검법(梅花劍法).
그들은 자신들의 검에 매화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으며, 꾸준히 수련을 거듭하여 경지를 올린다면 언젠가 저들의 검에도 매화가 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피지 않았지.'
필 리가.
화산이라는 산에 매화가 피어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일 뿐이다.
폭주형 던전에서 새어 나온 특이한 마기가 산에 영향을 미쳤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루어낼 수 없는 꿈을 줄곧 꾸고 있으니.
"이게 바로 화산의 저력이다."
최강오가 창을 낮게 내렸다.
창날에 마나가 맺혔다.
희미하게 꽃향이 풍겼다.
화산의 무인들은 매화를 피우진 못했지만, 동경에 한 걸음 다가가 마나의 꽃을 피우는덴 성공했다.
푸른색의 꽃잎이 흩날린다.
"매화낙섬(梅花落暹)!"
최강오의 창날이 매섭게 이전석을 노리고 솟구쳐 왔다.
그러나.
['신격개방'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이 세 번째 층에서 얻은 보상을 사용했다.
S급도 SS급도, 심지어 권좌들에게조차 '격'이라고만 표현하던 시스템이 처음으로 '신격'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런 명칭에 걸맞게.
콰과광-!
푸른색의 꽃잎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갔다.
그 자리를 검붉은 기운이 대신한다.
돔 전체를 물들이는 이전석의 신격.
아까 전보다 더 짙고 무거우며, 경외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정도의 위압감을 지니고 있다.
덕분일까.
"······!!"
최강오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물렸다.
창도 거둬들인 채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건 본능에서부터 기인한 움직임이었다.
'이건 대체······.'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아니, 손뿐만이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최강오는 정면을 쳐다봤다.
당혹, 황당, 두려움, 불안.
온갖 감정이 담긴 시선이 이전석을 향했다.
검붉은 기운이 사방에 내리깔려 있다.
어깨가 무겁다.
팔과 다리에 추를 단 듯 버겁게만 느껴진다.
하늘 아래 태어나서 이런 것을 본 건 생애 처음이었다.
아버지- 최원율조차 이러진 않았다.
그의 기운엔 공포가 있을지언정 눈앞의 이전석처럼 기이한 감각마저 자아내진 못했다.
어느새 살수들을 모두 정리한 두 언데드가 이전석의 좌우에 무릎 꿇었다.
최강오는 그런 이전석의 모습에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인 최원율은 늘 황제라 자칭하며 그런 존재가 되길 꿈꾸고 바라왔지만, 최강오는 이전석으로부터 그런 최원율의 꿈을 편린이나마 엿보았다.
왕.
그렇다.
저것은 왕이다.
도저히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진정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와 같을까.
"네놈은, 누구냐······."
최강오가 떨리는 어투로 물었다.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하늘 위 옥좌에 앉아 세상 모든 걸 오시하는 황제를 보는 것만 같아 기분이 나빴다.
초월자 (4)
[세 번째 시험 - 만용]
["그대의 용기와 인내가 만용은 아니었는지 생각하라."]
세 번째 방의 주제는 만용이었다.
아스트로가 내는 시험은 여기서부터 난이도가 대폭 증가하곤 했다.
S급- 정확히는 격을 지니지 못한 이는 층을 클리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번째 방에선 반드시 S급을 달성할 필요가 있었다.
"증명하라."
시체가 널브러진 새빨간 들판.
피가 계곡이 되어 흐르며, 하늘에서는 먹운이 드리워 번개를 내리친다.
그 가운데.
"증명하라, 그대의 가치를."
데스 나이트 로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스켈과는 달리 갸름한 턱선을 가진 해골.
그 위로 투구가 씌워져 있으며, 전신에는 역전의 기사가 입을 법한 갑옷을 걸치고 있다.
새까만 어깨 견장으로부터 시작된 망토는 마치 연기처럼 발치에 내려앉았다.
녀석의 우측에는 새까맣고 거대한 방패가 바위에 걸쳐 있었고, 바로 좌측에는 방패와 같이 날이 온통 어둠으로 뒤덮인 대검이 어느 시체 위에 꽂혀 있었다.
모든 것이 새까만 가운데, 텅 빈 두개골에서 황금색 안광이 번뜩였다.
[데스 나이트 로드 Lv. 130]
S+급.
S급의 최대 레벨이 100인 반면, 녀석은 그조차 한참 뛰어넘은 130레벨을 자랑했다.
"먼저, 그대의 용기를 증명하라."
녀석이 쿵- 발을 굴렀다.
대지가 진동하며 하늘이 떨었다.
단순 기분 탓은 아니었다.
데스 나이트 로드로부터 발산한 기세가 사방을 뒤덮은 채, 마치 세상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과연.'
이전석은 녀석의 의도를 깨달았다.
마치 아스트로의 첫 번째 시험과 같았다.
놈은 이전석의 용기를 시험하고 있었다.
마치 이 기세를 받고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냐고 묻는 것처럼.
'좋아, 어울려주지.'
이전석이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내디뎠다
직후.
화악-!
이전석을 둘러싼 기세가 칼날처럼 변했다.
전신을 찌르고 들어오는 무형의 격.
무거우면서 날카롭고, 또한 두렵다.
그렇다.
데스 나이트 로드.
그가 발산하는 격은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이란 본능을 자극시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전석은 금세 두려움이란 감정을 먼지 털듯 떨쳐내 버렸다.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해 본 그에게 이러한 감정은 걸림돌조차 되지 못했다.
"······."
데스 나이트 로드가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녀석의 격은 발을 내딛을수록 더욱 강해지고 무거워졌으며, 마치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처럼 예리해졌다.
'어지간한 놈들이면 이 수준에서 쓰러지겠군.'
눈앞의 데스 나이트 로드는 S급을 초월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설령 S급의 격을 지니고 있는 헌터라 한들 쉽게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전석은 작게 심호흡하며 정면을 바라봤다.
약간 경사진 언덕 위.
데스 나이트 로드가 이전석을 내려 보고 있다.
"우선··· 그 시선부터 내리자."
쿵-.
이전석이 데스 나이트 로드와 같이 발을 굴렀다.
다만 그는 발걸음에 아무런 힘도 싣지 않았다.
그 대신 마도술의 묘리를 사용해 시체와 피로 이루어진 삭막한 대지를 일그러트렸다.
바닷물처럼 크게 요동치는 대지.
언덕이 아래로 내려가며, 반대로 그 주변의 땅이 위로 솟아오른다.
그러자 데스 나이트 로드와 이전석의 위치가 반전되었다.
이전석이 놈을 내려다보는 구도가 된 것이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군."
"······."
데스 나이트 로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피가 흘러내리며 녀석의 발꿈치를 붉게 물들였다.
그때.
[죽음의 기사가 내린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시스템이 떠오르며 주변을 둘러쌌던 기세가 사라졌다.
"그대여, 인내하라."
동시에 데스 나이트 기사가 쩍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인내.
아스트로의 두 번째 시험과 똑같은 이름.
직후 이전석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놈이 다시 격을 퍼트린 걸까?
아니다.
이건 그런 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사기(死氣).'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한 번 죽어 지옥에 떨어져 본 이전석이기에 그것이 죽은 자들의 냄새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크어어···."
"우으······."
"아, 아아."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하나 둘 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비틀린 팔과 다리로 피와 살점을 쏟아내며 되살아났다.
흔히 구울이라고도 불리는 것들.
개중에는 스켈레톤도 있었다.
불투명한 것은··· 밴시.
강시 같은 것들도 드물게 보인다.
언데드 군단.
'수천···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어.'
끝도 없이 펼쳐진 피의 대지를 되살아난 시체들이 꽉 채웠다.
'이것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라는 거냐?'
이전석이 데스 나이트 로드를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전석 허공에 마나의 발판을 만들어 그 위에 혼백룡의 알을 올려놓고 단도를 치켜들었다.
우웅-.
걱정 어린 감정이 전해져 오지만.
"걱정하지 마.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이전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그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여기서 끝낼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탓-!
이전석이 언데드 무리로 돌진했다.
※ ※ ※
[구울을 사냥하셨습니다.]
[구울의 왕을 사냥하셨습니다.]
[스켈레톤 아쳐를 사냥하셨습니다.]
[스켈레톤을 사냥하셨습니다.]
[레이스를 사냥하셨습니다.]
[강시를 사냥하셨습니다.]
[스켈레톤 워리어를 사냥하셨습니다.]
[밴시를 사냥하셨습니다.]
[데스 나이트를 사냥하셨습니다.]
[막대한 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축하드립니다!]
[10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당신이 쌓아 올린 업이 격으로 변화합니다.]
[업 계산 중······ 오류.]
[오류, 오류, 오류오류오류Error━━.]
[당신은 이미 아득히 높은 업과 격을 쌓으셨습니다.]
[온전한 깨달음을 체득한 상태입니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완전한 신성(神性)을 획득합니다.]
[미약한 격이 온전한 신격(神格)으로 진화합니다.]
[당신의 육체가 재구성됩니다.]
[권능 '━━━'을 획득합니다.]
[하계(下界)에 새로운 초월자가 탄생하였습니다.]
[데스 나이트 로드의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데스 나이트 로드가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만용의 방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 ※
사람들은 S급 헌터를 더러 '신이 되는 과정'이라 하여 그들이 얻는 힘을 '신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SS급을 넘어 SSS급이 되면 비로소 신이 된다고 믿었으나.
'헛소리지.'
스텔라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신?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벽에 막혀 허우적거리고, 마나가 없으면 마법 하나 사용하지 못하며, 제 뜻대로 사람들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게 어찌 신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그녀를 마신이라며 추앙하곤 했지만, 그녀도 보통 사람과 비교해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똑같이 게임을 좋아하고, 단 사탕을 즐겨 먹는다.
공부를 지겹도록 싫어하는 데다 에밀리의 엄마 같은 잔소리에는 늘 싫증만 낸다.
신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게 바로 그녀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제 앞에 가로막힌 벽에 머리를 싸맸다.
300레벨을 달성하면 눈앞에 드리우는 거대한 벽.
권좌라면 누구나 겪어본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한계'였다.
━하늘과 같이 강해졌다 해서 우리가 하늘 그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니지.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구름과 같은가? 트램펄린으로 높이 점프한다 해서 하늘의 일부가 될 수 있는가? 물질은 개념이 되지 못하고, 생물은 결국 생물로서만 존재할 뿐이야. 요지는 결국, 우리는 어디까지나 미약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권좌가 했던 말이다.
그는 거대한 벽에 좌절하여 결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강해질 유일한 수단이라 생각했으므로.
이는 검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세계의 권좌와 달리 벽 앞에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벽을 받아들였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 살고, 또한 인간으로서 그 삶을 마무리 짓는 것이지.
그녀는 신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이길 받아들였다.
연선화는 더 강해지는 것을 포기했다.
이미 권좌 중 가장 강하기 때문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스텔라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그래야 한단 이유만으로 눈앞에 놓인 벽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좌절하는 건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벽을 넘으려 해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한계.
그것을 어떻게 탈피한단 말인가.
환골탈태를 거쳐도 근본은 결국 인간이다.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
TV.
모니터 속.
기자회견에 난입한 이전석.
그는··· 그의 모습은······.
'벽을, 넘었어······?'
스텔라가 그토록이나 바라고 꿈꾸던 이상(理想)을 품고 있었다.
※ ※ ※
"누구냐······ 네놈은 대체 누구냔 말이다······!!"
최강오가 이를 부닥치며 말했다.
꽤나 당황한 것 같은 모습이다.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동자.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상태창을 슬쩍 흘겨봤다.
━
Lv. 100
[근력 - 50] [민첩 - 129]
[체력 - 36] [마나 - 91]
[행운 - 19] [신격 - 10]
스탯 포인트 - 0
선업 - 190,050
악업 - @@#T#f@#
권능
└━━━
보유특성
└(더보기)
━
100레벨을 달성하면서 새로 얻은 신격이라는 스탯과 권능.
권능은 어째서인지 이름조차 제대로 표기되지 않고 사용할 수도 없었지만, 신격은 고작 10밖에 되지 않는 수준으로도 S급 헌터인 최강오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것은 신격이 지닌 힘의 수준이나 결이 기존의 격과는 상위 호환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전히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새까만 격.
'······신기한 기분이군.'
전능, 혹은 만능감.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신격을 얻은 이래로 줄곧 이렇다.
이건 전생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그도 그럴 게 당연했다.
전생에서 그는 누구보다 강해졌지만, 격이 신격으로 변화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조건을 충족했다고 했지.'
100레벨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격을 얻었다.
다만 오류가 발생했고, 어째서인지 조건을 충족했다는 시스템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얻은 게 바로 신격이었다.
가능성은 여럿 있었다.
회귀 자체가 조건이거나···. SSS급 이상의 격을 한 번 포기하여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거나.
아니면 이미 전생에 이전석이 쌓았던 격이 신격을 코앞에 두고 있었던 상태였거나.
"대답해라! 너는 누구냐!"
최강오.
그가 질리지도 않고 외쳤다.
이전석은 최강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최강오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오, 오지마!"
그는 이미 굴복한 맹수였다.
겁을 먹었고, 두려움에 잠식되었다.
이전석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척-.
회색의 단도를 치켜들었다.
"으윽······!"
최강오가 식은땀을 흘렸다.
떨리는 손으로 창을 다잡았다.
그래도 S급 헌터라는 것일까.
"네 역할은 끝났어."
"역, 할······?"
의미심장한 이전석의 말에 최강오가 숨을 헐떡였다.
최강오의 그런 반응 자체가 이전석을 만족시켰다.
'신격이 S급 헌터를 상대로 얼마나 먹힐지 실험해 보려고 했는데······ 예상외야.'
SS급, 혹은 SSS급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최강오와의 싸움으로 확신한 게 있었다.
'적어도 S급은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한다.'
말 그대로 격의 차이라는 게 있었다.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신격을 얻으면서 재구성된 이전석의 육체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기존의 S급을 훨씬 뛰어넘어 있었다.
하물며 100을 훌쩍 뛰어넘은 민첩은 또 어떠한가.
그로인해 찾아온 변화는 이전석의 신체를 보다 더 높은 영역으로 발돋움 시켜 주었다.
비단 그뿐이랴.
강화석에 의해 강화된 스켈과 S급을 달성하자마자 스스로 고개를 숙인 데스.
두 언데드는 살행문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무위를 자랑했다.
이걸로 실험은 전부 마쳤다.
그러니.
"그만 끝내자."
탓-.
이전석이 땅을 박찼다.
그것은 평범한 발걸음이 아니었다.
천보 - 파형(波形).
일보가 새로운 이름을 덧입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를 자아냈다.
민첩이 100을 넘으며 새로운 경지로 들어선 이전석.
신격이 그 위를 뒤덮으며 속도를 더한다.
그러나 예전의 일보처럼 귀를 울리는 소음과 충격은 없었다.
그것은 조용히 이전석의 발끝에서부터 시작되어 다리를 타고 복부와 가슴으로 흘러 들어가, 팔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윽고 손에 쥔 단도의 날 끝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서걱-.
"······!"
일도양단(一刀兩斷).
점에서 선으로 이어진 궤적이 그대로 최강오를 가르고 지나갔다.
머리에서부터 시작되어 사타구니까지 이어진 선.
촤악-!
그 사이로 균열이 일며 새빨간 핏물이 솟구쳤다.
초월자 (5)
변하늘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지금 찍는 게 제대로 송출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슈에 미쳐 환장하는 방송국이라면 이 영상을 가만 방치할 리가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방송국 채널에는 변하늘이 찍고 있는 화면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중이었다.
잔인한 장면은 되도록 잘라서 송출되고 있긴 해도 기자회견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은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었다.
└저거 데스 나이트 로드 아니야? S급 몬스터를 테이밍한 거임?
└다른 언데드도 있어. 쟤도 A급은 되는 것 같아.
└저만한 전력을 개인이 다룬다고?
└대체 무슨 특성이길래······.
└무릎 꿇은 거 봐. ㅈㄴ 멋지다.
이전석의 양옆에 무릎 꿇은 언데드를 보며 시청자들이 SNS, 혹은 방송국 채널에 댓글을 달았다.
변하늘은 조금씩 기자회견장을 훑듯이 보여줬다.
시체와 피로 얼룩진 돔.
반응은 더 격렬해졌다.
└그 많던 암살자들이 그냥 다 죽었네 ㅁㅊ
└살행문이면 어지간히도 센 각성자일 텐데 저걸 혼자서 다 해치웠다고?
└정확히는 언데드들이 한 것 같아. 아까 잠깐 화면 전환됐을 때 언데드 두 마리가 암살자들 죽이고 있었음.
└근데 그 언데드가 이전석 소환수 아님?
└그럼 사실상 혼자 다 한 거잖아.
└혼자서 저만한 헌터 상대할 정도면 사실상 일단 최소 SS급으로 봐야하는 건가?
└들갑 ㄴ 그 정도는 아님.
└아니긴 뭘 아니야. 웬만한 S급 헌터도 저만한 인원은 혼자 상대 못해.
└아무리 그래도 SS급은 아니지;
시청자들 사이에서 토론이 오가는 가운데, 변하늘이 다시 이전석과 강하늘을 비추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본 채 무어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거리가 멀고 마이크도 망가져 그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 화산이 꾸민 자작극이었다는 걸 제외하면 시청자들은 저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화산이 존나 개 씹새끼라는 거임.
└반응 보니까 화산에서 고를 유도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칠대 재앙을 끌어들일 생각을 하냐.
└ㄹㅇ 제대로 미친 새끼들이라니까.
└한 달 뒤면 도착한다는 데 어떡하냐;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해외로 튀거나 뒤져야지.
└ㅅㅂ
└그래도 우리나라에 권좌도 있는데 어떻게든 해주지 않을까?
└그러길 바라야지···.
방송국에 여러 의견이 뒤섞인 댓글이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 뭐야.
└갑자기 왜 저럼?
└최강오가 물러났는데?
└점마 왜 갑자기 겁먹었음?
시청자들이 일제히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최강오가 뒤로 물러나더니 방어 자세를 취한 채 겁먹은 강아지 마냥 덜덜 떨기 시작한 것이다.
마나는커녕 격도 알아보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물음표만 띄울 뿐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마나를 보거나, 격이라는 미지의 힘을 경험해 본 적 있는 각성자라면 달랐다.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런 미친.
└말이 안 되는데, 이건;
└뭐임? 왜 니들만 아는데. 우리도 알려줘 ㅅㅂ
└이전석 헌터가 격으로 최강오를 압도했음.
└최강오 S급아님? 걔를 압도했다고?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거지.
└격이 저렇게 검붉은 건 처음 보는데······ 뭐지?
격이란 보통 형태를 띠지 않는다.
색마저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힘이다.
살기나 기백, 혹은 패기.
그런 것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저 감각으로만 느낄 수 있는 힘.
마나를 사용하면 격의 모양새가 불투명한 회색으로나마 보이긴 하지만, 이전석처럼 아예 짙게 내리깔리는 연기처럼- 그것도 검붉은 색을 띄우는 경우는 그 어떤 노련한 헌터라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때.
└?
└뭐야.
└시발 미친!
└와.
└방금 뭘 본 거지, 내가?
└아니, 시발 방송국 뭐해! 화면을 왜 돌려 그걸!
└빨리 현장 보여줘!
SNS는 물론 방송국 홈페이지의 댓글이 갑자기 폭발하듯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조용히, 바람처럼 움직이는 이전석.
그가 단도를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은색의 참격이 돔 전체를 가로질렀다.
그 결과가 화면에 고스란히 비춰졌다.
절반으로 갈라진 최강오.
창대가 부러지고, 단상을 비롯한 돔의 한쪽에 검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촤악-!
피가 터져 나오는 시점에서 방송국은 재빨리 화면을 돌렸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S급 헌터를 일격에···.
└그보다 빨리 현장 보여줘, 좀!
└궁금해 죽겠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뉴스 앵커는 당황하며 애써 말을 에둘렀다.
그러다 갑자기 화면이 다시 돌아왔다.
변하늘이 카메라를 조금 높게 든 것.
쓰러진 최강오의 시신은 화면에 담기지 않고, 돔을 일부 잘라낸 검상과 그 앞에 서 있는 이전석만을 담아냈다.
신격- 검붉은 연기의 형상이 마치 망토처럼 흘러내려 이전석과 주변 일대를 휘감고 있다.
그런 압도적인 모습 덕분일까.
SNS와 댓글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잠시뿐.
곧 방송국 홈페이지에 댓글 하나가 올라왔다.
└검은 영웅!!
※ ※ ※
김백동과 아냐, 그리고 박일우가 멍하니 이전석을 쳐다봤다.
그들은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아냐와 박일우는 그렇다 쳐도, 김백동조차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마치 다른 존재 같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
격 높은 존재를 마주한 듯한 느낌.
과거 서울에 나타났던 SS급 던전.
그것의 뒤처리를 맡으며 드래곤 시체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에 무심코 소름이 돋았다.
아니, 아니다.
그때보다 더 압도적이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다 못해 난도질당하는 듯한 감각.
'허, 참······.'
그 사실이 김백동으로선 못내 어이가 없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반인이던 사람이 아니던가.
'싸우면 이길 순 있을 것 같지만······.'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압도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악! 배, 배터리! 배터리가 다 됐어!"
문득.
누군가가 큰 소리로 당황하는 게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기자가 한 명 보였다.
'그 상황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찍고 있었던 건가?'
여러모로 당황스런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때.
뚜벅-.
이전석이 가까이 다가왔다.
박일우가 헉, 하고 놀랐다.
이전석의 압도적인 기백 때문이었다.
검붉은 격이 숨을 틀어막는 듯하다.
이내.
슥-.
이전석이 손을 내밀었다.
박일우는 눈을 감았다.
본능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혹시 저 손이 최강오와 같이 자신의 목숨을 취하진 않을까.
그러나 이전석의 손아귀에 쥐어진 건 박일우의 머리나 심장도 아닌 구(球) 형태의 마나 덩어리였다.
그리고 마나의 구에는 새빨간 눈동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화산의 눈?"
김백동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걸 쳐다봤다.
화산의 눈은 화산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마법- 일종의 마나드론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던 건가?
물론 시선이야 계속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 정체나 위치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김백동은, 그것을 단번에 꿰뚫고 찾아낸 이전석에게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괴물이 됐군.'
그것도 잠시.
콰득-.
이전석이 손아귀에 힘을 줘 마나의 구를 깨트렸다.
마나가 유리 조각처럼 깨져 흩날린다.
이전석은 손을 털어 마나의 입자를 흘려버리며 뒤늦게 격을 거둬들였다.
회색의 단도 또한 다시 아공간에 수납한다.
우웅-.
이전석은 질투심과도 같은 진동을 느꼈으나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인사를 제대로 못 했는데, 다들 오랜만입니다."
"오···랜 만입니다."
긴장 어린 어투로 고개를 숙이는 박일우.
아냐도 그와 같이 긴장한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시더군요."
그럴 만도 했다.
단순히 격만 해도 사람의 존재감을 월등히 올려주는데, 그게 신격이라면 오죽하겠는가.
아마 저들에게 이전석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느껴질 터였다.
"그러는 아냐 과장님도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박일우 인턴님은 사원이 되셨고. 기자님도 오셨군요."
"어, 어어······."
변하늘은 이전석이 자신에게조차 말 걸어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차마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사이 이전석이 김백동을 쳐다봤다.
"팀장님은······ 여전하시네요."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칭찬 맞습니다."
뒤이어진 이전석의 말.
김백동이 옅게 웃었다.
이내 그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시선의 정체가 마나 드론일 줄은······."
"드론에 은밀과 관련된 술식을 입힌 것 같더군요. 그것도 꽤나 고위 마법사가 새긴 술식인 것 같습니다."
"그 말은··· 화산에 수준 높은 마법사가 있다는 소리입니까?"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높겠죠."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들이 김백동조차 속일 정도로 정밀한 은밀 술식을 새겨 넣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럼에도 완전히 기척을 숨기진 못한 듯했다.
이전석이야 원체 눈이 좋으니 금방 꿰뚫어 봤지만, 김백동도 조금 더 있었으면 시선의 진위를 금세 파악했을 것이다.
"그보다······."
시선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눈치챈 김백동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까 헌터님께서 말씀하신 건 정말입니까?"
"아까?"
"화산에 대한 것 말입니다."
"아···."
이전석은 김백동이 무얼 말하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고를 직접 유인한 거라면 맞습니다."
그에 김백동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이 봉기를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만, 설마 고를 유인한다는 정신 나간 계획까지 꾸미고 있었을 줄은······."
"아마 최강오나 최승철, 둘 중 한 명이 꾸민 짓일 겁니다. 어쩌면 둘이서 손을 잡았거나."
"후계구도를 확실히 하려는 의도였겠군요."
김백동이 이전석의 말에 수긍했다.
화룡검, 최원율.
그는 아직 폐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가 폐관에 들어간 뒤로 최신 또한 어째서인지 폐관에 들어갔다.
최강오와 최승철은 이를 기회로 여겼겠지.
최아린마저 협회에 구금돼 실각된 상황.
최태윤은 최아린에 의해 죽임당했고, 그나마 화산의 핏줄이라 할 수 있는 최은하는 행방불명이다.
당연히 최강오나 최승철로선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겼을 터.
'아마 최승철이 최강오를 꼬드겨 직접 나서게 했겠지.'
적어도 이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석으로 인해 그들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으니.
"전쟁까지 선포한 마당이니 앞으로는 대놓고 수작질을 해올 겁니다."
기자회견- 정확히는 이전석 때무네 화산의 본심을 들통났다.
따라서 현재 외부에 남은 유일한 후계자인 최승철로선 어떻게든 실패를 만회하려 할 것이다.
다름 아닌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김백동이 이전석의 말에 수긍하며 대꾸하려던 차였다.
우웅-.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죄송합니다."
김백동은 잠시 고개를 숙이곤 전화를 받아들었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발신인이 다름 아닌 연선화였던 것.
이윽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던 그는, 뒤늦게 이전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협회장님께서 헌터님을 만나 뵈고 싶다고 하십니다."
※ ※ ※
기자회견이 있기 보름 전의 이야기다.
화산의 장남이자 후계서열 1위로 잘 알려진 최신이 어째서인지 최원율을 따라 똑같이 폐관에 들어간 뒤.
최승철은 은밀히 제 동생인 최강오와 접촉했다.
━강오야.
━네, 형님.
━신 형님은 이미 우리의 무위를 뛰어넘었다.
그러고선 다짜고짜 꺼내든 이야기.
━······
━믿고 싶지 않은 거냐?
━그건···.
━너도 명색이 S급이라면 알 텐데. 신 형님이 SS급을 목전에 두고 있고, 이를 위해 당장 우리와 경쟁하기보다 수련동(修鍊洞)에 들어가 깨달음을 얻는 걸 선택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형님이 SS급이 되어 나온다면 우리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제멋대로인 탓에 많은 간부들이 꺼려하던 최신이지만, 그것도 SS급이 되면 이야기가 다르다.
많은 간부들이 최신에게로 관심을 돌릴 터였다.
정확히는, 최신이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지.
━결국 정식 후계자를 결정하는 건 아버님이지만, 아무리 아버님이 폭군 같으신 분이시라도 간부들의 의견을 무시하긴 어렵지.
━그래서 형님은 무얼 말하고 싶은 겁니까? 옥좌는 이미 신 형님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끼리 같이 손이나 잡고 도망치자고?
━그럴 리가.
최승철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나는 작금을 기회라고 생각한다.
━기회?
━아린 누님이 곧 있으면 타르타로스로 이송될 거란 얘기를 들었다. 태윤이는 아린 누님 덕에 죽었고, 은하는··· 뭐,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다면 남은 건 너와 나, 그리고 신 형님뿐이다. 허나 신 형님은 수련동(修鍊洞)에 들어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지.
즉, 현재 화산에 남은 후계자는 최강오와 최승철 두 사람뿐.
━너와 내가 화산을 집어삼키는 거다.
서로 싸워 심력을 소모하기보다, 힘을 합쳐 텅 빈 집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화산을 확실하게 손에 쥐는 것.
그게 최승철이 최강오에게 내민 제안이었다.
━그렇다면 신 형님··· 아니, 설령 아버님께서 폐관에서 나오신다 하신들 쉽게 우리를 내치실 수 없으실 거다. 아버님은 무위만큼이나 정치에 관한 능력도 중요시 여기시는 분이시니.
물론 결국 최승철과 최강오도 하나의 옥좌를 두고 싸워야하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었으나.
━신 형님을 두고서 우리가 서로 싸우는 건 서로에게 손해가 너무 심하지 않겠어?
최승철은 그런 말로 최강오를 꼬드겼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긴 했다.
최원율은 단순히 무위만 보고 정식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화산의 장이 되기 위해선 무위만큼이나 정치적 능력도 뛰어나야 했다.
하지만 최신은 화산의 관리를 완전히 저버린 채 폐관에 들어가 버렸으니.
━승철 형님 말대로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저희에게도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강오는 두 눈을 번뜩이며 그리 말했다.
최승철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최강오와 함께 작금의 상황을 계획하게 되었다.
고를 움직여 합당한 방식으로 협회를 치는 것.
그러나.
쨍그랑-!
마치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최승철이 감았던 눈을 떴다.
"도련님, 괜찮으신가요?"
뒤에 서 있던 유모가 그를 걱정해 물어왔다.
최승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눈이······.'
부서졌다.
마나 드론을 통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술식이 깨져버렸다.
대신이라는 듯 최승철이 정면의 TV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방금 전 기자회견장에 있었던 일들이 그대로 틀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단상으로 난입한 이전석.
살행문의 등장과, 최강오의 죽음.
"쓸모없는 놈 같으니."
최승철은 최강오의 실책과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쓸려나간 살행문을 보며 혀를 찼다.
협회의 약점과 그들이 숨긴 비밀을 알려줬다.
고를 움직일 수 있도록 적환검을 빌려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밑에 있는 살행문 중 삼분지 일의 병력을 건네줬다.
화산의 명예를 드높이며 협회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최강오는 실패했다.
화산의 명예는 도리어 실추되었고, 그 자신마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실로 무능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신 형님이 수련동에서 깨달음이라도 얻고 나온다면······.'
화산의 간부들은 일을 그르친 자신보다 최신의 손을 들어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최원율 또한 마찬가지겠지.
최원율은 폐관에 들기 전에 후계자들에게 모든 화산의 권한을 건네줬으나, 그 권한을 고작해야 화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데 사용했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성가시게 됐군.'
최승철이 TV 화면에 떠오른 얼굴을 흘겨봤다.
'···또 이놈인가.'
이전석.
갑자기 기자회견에 난입해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트린 놈.
한 달간 소식을 찾아볼 수 없었던 데다, 최근에는 후계혈전에 집중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재밌는 짓거릴 해줬어.'
최강오는 이전석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화산의 계획을 꿰뚫고 있었다.
적환검은 어렸을 적 최원율에게 직접 하사받은 검으로 화산 내부- 그것도 꽤나 고위층이 아니면 누구도 알지 못하던 정보였다.
'최은하?'
그녀가 이전석에게 알려준 걸까?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최강오는 전쟁을 선포했고, 그것은 TV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화산의 위신이 무너질 터.
그 대가로 최승철은 간부- 장로들의 질타를 감내해야만 할 거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협회와의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는 것.
━······평화적 지배는 가져오면 좋은 것이지, 반드시 챙겨야만 하는 건 아니었어.
최강오의 말 대로다.
평화적 지배는 어디까지나 있으면 좋은 것에 불과했다.
공포든 평화든.
결국 지배라는 한 글자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이전석, 네놈만은 절대 편하게 죽이지 않으마.'
까득-.
최승철이 작게 이를 갈았다.
예전에도 했던 결심을 이번에도 가슴 깊이 독기와 함께 품었다.
이내 유모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최승철.
"유모, 그자를 불러와."
"그자라 하면······."
유모가 작게 물음을 던졌다.
직후.
"마탑의 손(孫)."
최승철은 왼손 검지에 낀 금색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마탑의 손.
과거 존재했던 마법의 '탑'의 잔재이자 후손이라 불리는 자들.
'······예상은 했지만 이 시기부터 마탑의 잔재가 개입하고 있었군.'
부서진 화산의 눈을 역추적해 몰래 최승철을 지켜보고 있던 이전석은 새로이 얻은 정보에 미소를 지었다.
매화 (1)
헌터가 그러하듯 도사에도 급이 있다.
이제 막 도를 닦기 시작하여 번뇌를 없애기 위해 정신 수양에 매진하는 천하(天下).
어느 정도 도에 대한 깨달음과 법술을 익혀 비로소 도사라 불리게 되는 천중(天中).
스스로 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자연지기마저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상(天上).
그리고 현세에 있어 사실상 부처와 같은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지는 천천(天天).
500년 전.
최초의 일곱 헌터와 함께 세상의 혼란을 잠재운 육선인이 천천에 해당하였고, 주리천이 천상에서도 중상급에 해당하는 도사였으며, 한 달 전 최은하가 천하의 극(極)에서 천중의 하(下)를 바라보던 경지였다.
그리고 도의 경지가 천상에 이르면 어느 한 특이한 도술을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천리 너머의 거리조차 볼 수 있다는 천리안(千里眼).
이전석이 사용한 건 그 천리안의 묘리가 뒤섞인 마도술이었다.
'마나 드론이라면 필수적으로 술사와 정신이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
그렇게 연결된 고리를 역추적하여, 천리안의 묘리를 사용해 도리어 술사의 뇌로 파고든다.
이전석은 그렇게 불완전하게나마 천리안을 재현했다.
본래라면 금방 들통날만한 짓이다.
다만.
'마나 드론에 새겨진 은밀 술식을 이용하니 저쪽에서도 눈치를 못 채는군.'
마나에 대한 감지 능력과 제어 능력이 뛰어난 이전석이기에 비로소 가능한 기행이었다.
보통이라면 이런 짓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하려고 생각조차 못 할 거다.
마나 드론을 감지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그 술식을 역추적하여 도술의 묘릴 섞어 천리안을 재현한다고?
주리천이 들었으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거라며 비웃었을 지도 모른다.
"왜 그러십니까, 헌터님?"
문득.
바로 옆에서 김백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리안을 사용하느라 계속 한쪽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전석은 감았던 눈을 때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탑의 손.
어차피 얻을 정보는 전부 얻었다.
무엇보다.
'이 이상 술식을 유지했다간 들킬 우려가 있어.'
이전석은 자신의 눈과 이어진 천리안을 완전히 해제했다.
그때.
"협회장님께선 최상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김백동이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말했다.
문이 열리고 그가 옆으로 비켜섰다.
"같이 안 가십니까?"
"협회장님께서 헌터님만 뵙기 원하십니다."
이전석의 물음에 김백동이 나지막이 답했다.
'나만?'
그에 의아한 표정을 띄운 이전석이었으나 최상층으로 가면 답을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바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이전에 예기해드렸던 집은 완공 직전에 있으니 보름 내로 다시 연락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백동이 그런 말을 해왔다.
마석으로 인해 집짓는 기술이 한없이 발달한 요즘 시대에 쓸데없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싶더니··· 그만큼 공을 들이고 있는 걸까?
뭐, 조만간 완공된다고 하니 아무렴 상관없었다.
보름이면 이미 화산과의 일도 끝났을 테니 시기도 괜찮았다.
"그럼."
이내 김백동이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이전석은 최상층 버튼을 눌렀다.
직후.
몸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전석은 그동안 눈앞에 떠오른 푸른 창을 확인했다.
최강오를 죽이며 얻은 보상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창술 강화(S)를 습득합니다!]
[악인을 죽였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크게 뒤바꾼 악인입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선업이 '300,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대폭 하락합니다.]
브랜던보다 20만 부족한 선업을 얻었다.
특성은······.
━
창술 강화
등급 : S
효과 : 창을 다루는데 있어 매우 뛰어난 숙련도를 가지게 된다.
━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창을 활용하는데 특화된 효과였다.
당연 단도를 주로 사용하는 이전석에겐 필요 없는 것이다.
다만 나중에 테이밍할 언데드가 창을 사용할 수도 있으니 아주 쓸모 없는 특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 소환수가 죽인 건 카운트 되지 않는군.'
살행문에 대한 보상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천살성이나 선업이나,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죽여야 들어오는 방식인 것 같았다.
그때.
띵-.
이내 문이 다시 문이 열리며 기다란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석은 상태창을 눈앞에서 치웠다.
창은 물론 아무런 장식도 없는 복도.
다만 그 끝이 안개로 감싸인 것처럼 희미하니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주변에서 느껴지난 마나의 술식들까지.
이전석은 그 정체를 단번에 간파했다.
'지하 감옥에 걸린 것과 비슷한 환술이로군.'
협회장이 거주하는 공간인 만큼 보안 또한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모양.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헌터님."
문득, 이전석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유한설.
연선화의 비서이자 경호를 맡고 있는 S급 헌터.
"협회장실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혹 미로에 갇힐 수도 있으니 결코 제 등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이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뒤따랐다.
복도로 발을 내딛은 직후.
일자로 이어져 있던 복도가 마치 나무의 가지처럼 사방으로 뻣어 나갔다.
족히 스무 갈래는 되어 보이는 갈림길.
유한설은 그중 가장 오른쪽 복도로 들어섰다.
그를 따라 이전석 또한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발소리만이 울릴 뿐인 조용한 복도.
이전석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봤다.
언뜻 보기엔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석은 동공에 마나를 둘렀다.
그러자 복도에 새겨진 술식들이 폭풍과도 같이 뇌리로 휘몰아쳤다.
보통이라면 그 방대한 정보량에 의식을 잃을지도 모르겠지만.
'지하 감옥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결계군.'
이전석은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장치를 분해하듯, 술식들을 하나하나 뜯어본 다음 분석하기 시작했다.
신격을 얻은 이후부터일까.
그의 연산 능력은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이윽고.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미로와도 같은 술식을 전부 파악한 이전석이 나지막한 어조로 앞서가던 유한설에게 물었다.
"굳이 빙글 돌아가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 말이 있은 직후.
유한설은 내심 놀란 듯 이전석을 돌아봤다.
"······안목이 굉장히 뛰어나시군요."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며 말을 이었다.
"최상층은 길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어, 한 번도 그 길을 틀리지 않고 나아가야만 협회장님이 계신 사무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로 속을 헤매게 되죠."
"꽤나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헌터님께선 가능한 제게서 눈을 때지 마시고······."
유한설이 말을 잇기도 전이었다.
뚜벅-.
갑자기 이전석이 길을 틀었다.
독단적인 행동에 유한설은 깜짝 놀랐다.
"헌터님?!"
그는 바로 이전석을 붙잡고자 했다.
헌데 마치 환상처럼 일그러지는 그의 신형을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걷고 있을 뿐인데 마치 뛰어가는 것처럼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이전석을 잡고자 유한설 또한 길을 튼 찰나.
"······?!"
거대한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협회장실]
좌측을 보니 그런 문패가 달려 있다.
가짜인가? 아니다.
유한설이 보기엔 진짜였다.
본래라면 10분은 더 미로 같은 복도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협회장실을, 이전석은 단 몇 걸음만으로 도착한 것이다.
"어떻게······."
수십 년 동안 최상층을 드나들던 유한설은 그 사실이 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런데 이전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 예상외의 것이었다.
"잘 보니 길이 꼭 한 갈래인 것만도 아니더군요."
"예?"
유한설은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이전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황당함이 표정에 깃들었다.
'무슨 미친···.'
자신조차 그저 정해진 길을 외우는데 그친 결계다.
더욱이 이 결계는 단 하나의 길을 제외하면 결코 끝에 도달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그 말은 즉.
'결계를 형성한 술사조차 모르던 길을 찾아냈다는 건가?'
어이가 없음을 넘어 경탄스러울 지경이다.
이게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재능이란 말인가.
단순히 특성의 급이나 레벨이 높다고 해서 이루어낼 수 없는 경지임에도, 이전석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마치 그게 대수라는 아니라는 듯 서 있었다.
꿀꺽-.
'숫제 괴물이로군.'
TV를 통해 봤을 때도 그랬지만, S급임에도 자신과는 격을 달리하는 이질적인 기운은 유한설로 하여금 절로 식은땀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랜만입니다."
이전석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협회장실.
그 앞의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
유한설의 손녀인 유하나였다.
"오랜만이에, 요······."
그녀가 긴장 섞인 어투로 답했다.
억지로 존칭을 섞는 걸 보니 아직도 이전석을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런데.
"제가 내드린 숙제는 다 하셨는지?"
돌연 이전석이 의미모를 말을 해왔다.
'숙제?'
아직 계약이 끝나지 않았을 때 무언가 시키기라도 한 걸까.
"······네."
유하나는 고분고분해진 양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네요."
"······."
유하나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시선을 피했다.
'참······.'
유한설로선 이 또한 어이가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워낙 주변에서 치켜세워져 자존심이 강해진 손녀다.
덕분에 이전석이 노예계약을 들먹였을 땐 마침 잘됐다 싶기도 했다.
그 계약을 통해 유하나가 이참에 세상의 쓴맛을 느껴보고, 조금이라도 철이 들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물론 선을 넘을 법한 명령은 할 수 없도록 조건을 달긴 했지만······.
"스승님은 이 안에 계십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헌터님을 기다리고 계시니 지금 들어가시면 됩니다."
뒤늦은 이전석의 물음에 유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전석이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직후, 유하나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언가 불만족스럽다는 양 중얼거린다.
"씨··· 자기가 무슨 선생님도 아니고······."
뾰로통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자존심 강한 손녀가 맞는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되기도 하는 유한설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만한 일을 겪고서도 이리 기세가 꺾이지 않는 걸 보면 언제쯤 제대로 철이 들려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 ※ ※
문 안쪽은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문이 있는 벽을 제외한 사방의 벽이 전부 통유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서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왔구나."
그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던 연선화가 눈웃음을 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
한복을 가지런히 입고 있으며, 소파의 안쪽 팔걸이에는 기다란 도가 새워져 있다.
"앉으려무나."
연선화가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이전석은 그곳에 앉은 채 연선화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어딘가 서근서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뭐지?'
이전석은 연선화로부터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한 달 전과 비교해 그녀의 기세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이전석으로선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권좌급의 강자가 고작 한 달 사이에 이렇게 약해질 수가 있나?'
기분 탓은 아니다.
연선화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은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런 이전석의 반응에 연선화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마치 이전석의 생각이 정답이라는 양.
"기감이 좋구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나지막한 이전석의 물음.
연선화는 고개를 저었다.
"없었단다."
"그럼 왜···."
이전석이 말을 채 잇기도 전이었다.
연선화가 소파 앞 탁상에 올려져 있던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녹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저 여태껏 무시하고 있던 대가가 찾아왔을 뿐이지."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가?
그 말에 이전석이 의아해 하자 연선화는 다시 찻잔을 탁상에 내려놨다.
그리고 왼손에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을 벗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 저런 장갑을 끼고 있었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윽고 장갑이 벗겨지며 반대쪽 손과는 전혀 다른, 마치 수십 년의 나이를 먹은 듯한 주름진 손이 드러났다.
"이건······."
이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주름진 손을 보자 전생에서 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때때로 우리에게 상식을 벗어난 힘을 안겨주지만, 그릇에 맞지 않는 힘을 취하였을 땐 가차 없이 대가를 가져간단다."
연선화가 그리 말하며 주름진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 매화 한 송이가 피어났다.
아름다운 꽃.
그것이 나무가 되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내가 각성한 특성이 바로 이것이었지."
매화.
"물론 그저 평범하게 매화를 피울 뿐인 특성은 아니란다. 매화는 그 꽃잎에 깃든 기억을 읽고, 기억 속 경험을 내 몸으로 체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꽃잎에는 어느 한 검수의 기억과 경험이 담겨 있었어. 막 특성을 각성하였을 때 나는 그 검수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검술과 보법을 몸에 익혔단다."
수려하게 흩날리는 분홍 꽃잎 속에서 그림자가 비추어졌다.
이전석은 그 그림자가 연선화가 말하던 검수의 기억과 경험임을 알 수 있었다.
"피가 끓던 시기였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그리고 하고 싶었지.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더 강한 빌런과 싸우기 위해··· 그렇게 꽃잎에 깃든 수없이 많은 기억과 경험을 억지로 내 몸에 새겨 넣었지. 허나."
투둑-.
문득, 사무실 가득 채우고 있던 매화가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꺾이고, 매화가 바스러지며, 나무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분에 맞지 않는 힘은 결국 노화라는 대가가 되어 찾아왔더라지."
매화나무가 사라진 사무실.
그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연선화의 얼굴은 어느새 100세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처럼 늙어 있었다.
비단 같던 머릿결도 푸석해지고, 새치가 돋아나 새하얗게 바랬다.
그리고 그건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 나를 부축해 줄 수 있겠느냐?"
"······예."
이전석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소파에서 일어나 연선화를 부축해 주며 천천히 일으켰다.
앙상한 팔목에서 사시나무 같은 떨림이 전해진다.
툭-.
그녀는 소파 옆에 세워져 있던 검을 지팡이처럼 짚으며 창가로 다가갔다.
이전석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몸을 떨던 연선화를 품에서 놓치 않았다.
권좌라고 하기에 그녀는 너무나도 허약해 보였고, 잠시라도 손을 때었다간 그대로 바닥에 넘어질 것만 같았기에.
"고맙구나."
"······."
후우-.
연선화는 잠시 몇 걸음 움직인 것에도 숨이 차는 듯했다.
이내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매화는 칠순이 넘어서도 내게 젊음을 안겨주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릇에 맞지 않는 힘을 취한 탓에 그 아름다움은 빠르게 저물고 말았지."
"······."
이전석은 입을 다물었다.
슥-.
연선화가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자글자글했던 주름이 사라졌다.
이전석은 뒤늦게 그녀로부터 손을 땠다.
다시 비단처럼 부드러워진 머릿결.
피부의 주름이 사라지고 젊음이 되돌아온다.
연선화는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도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억지로 마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몸이 되고 말았어."
슥-.
도로 젊음을 찾은 얼굴과 달리, 여전히 주름진 오른손이 창을 훑었다.
"시간이 없다는 건 알았지. 하루가 지날수록 노화가 빨라지고, 내 몸이 점차 허약해지고 있음을 걸 느꼈어. 허나 최근 들어 그 속도가 유달리 빨라졌더구나."
연선화는 한숨이 뒤섞인 말을 내뱉었다.
"문제는 그 속도가 내 예상을 한참 웃돌고 있다는 것이야."
이어 그녀의 시선이 이전석에게로 향했다.
"너를 이곳으로 부른 건 다름이 아니란다."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
"벽을 넘었더구나."
벽.
그녀도 기자회견을 보고 있던 것일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더 확실해졌어."
거기까지 말한 연선화가 두 눈을 번뜩였다.
"제자야, 나를 대신해 주지 않겠느냐."
매화 (2)
나를 대신해 주지 않겠느냐.
그 말에 이전석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 말씀은··· 저더러 협회장이 되어달라는 겁니까?"
그러나 연선화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럴 필요는 없단다. 물론 제자가 협회장이 되고 싶다면야 힘을 더해주긴 하겠다만······ 아쉽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는구나."
후후-.
연선화가 옅게 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본래라면 화산의 봉기를 막는 건 내가 해야만 할 일이었어. 허나 급격한 노화로 그게 불가능해졌지. 내가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하루에 고작해야 3시간뿐···. 조금이라도 힘이 풀린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노인네가 되고 말 것이야."
확실히.
그런 모습이 되면 싸움은 고사하고 아군의 사기마저 떨어트리고 말 것이다.
"처음에는 백동이에게 부탁하려고 했었지. 하지만 기자회견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
재차 이전석을 바라보는 연선화.
서근하고 부드러운 시선이 그를 응시한다.
"제자야, 화산을 막아주지 않겠느냐."
"······."
"가련한 민생(民生)들이야. 화산이 본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면 대한민국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 테고, 그리되면 아무런 죄 없는 시민들까지 그 화마에 휩쓸리고 말 테지."
이전석은 솔직한 심경으로 물었다.
"제가 그걸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얼마든지."
너무나도 단호한 대답이었다.
덕분일까.
이전석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게 화산의 길드장인 최원율은 SS+급의 헌터다.
폐관에서 나오면?
틀림없이 SSS급의 강자가 될 거다.
아무리 이전석이 신격을 각성하고 동급의 헌터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해도 아직까진 권좌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화산을 막는다 해도 고는 어떡합니까."
"고는 별이에게 부탁할 생각이란다."
"별이라면··· 스텔라님?"
이전석의 나지막한 물음에 연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마법적 내성이 떨어지는 고라면 스텔라의 공격이 직격타로 먹어들 지도 몰랐다.
그래도.
'불안요소가 없는 건 아니야.'
세계가 고를 왜 내버려두고 있겠는가.
마법이라는 명백한 약점이 있는데도.
그만큼 성가시고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산도 마찬가지였다.
성가시고, 강하다.
적어도 지금의 이전석에겐 말이다.
그런데.
"지하의 핵을 취하려무나."
연선화가 돌연 그런 말을 해왔다.
지하의 핵.
━협회 지하 깊은 곳에 어떤 핵이 있습니다.
최강오가 언급했던 바로 그것이다.
SS급 던전을 공략하고 나타난 보상의 일종.
"본래 그것은 드래드노트를 공략했던 헌터들이 나눠 가지기로 했던 것이었지."
드래드노트.
이전석도 얼핏 들어 알고 있다.
당시 그것을 공략했던 세 명의 헌터.
검의 권좌.
세계의 권좌.
절명의 권좌.
'······그중 절명은 여명회의 수장이지.'
물론 드레드노트를 공략할 때만 해도 절명은 빌런이 아니었다.
여명회라는 단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
당시 그는 다른 두 권좌와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재앙에 맞서 싸웠다.
그렇게 드래드노트는 공략되고 핵이라는 부산물을 남겼지만.
"그것이 지닌 막대한 량의 에너지는 우리로서도 쉬이 건들 수가 없었어.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지. 그건 그야말로 힘의 덩어리였단다. 절명이 어떻게든 그 힘을 취해보고자 했으나, 도리어 오른팔이 괴사하면서 신체를 잃고 말았어."
연선화의 말에 이전석은 전생에서 보았던 절명을 떠올렸다.
'······놈의 오른팔이 없는 건 욕심 때문이었나.'
그 후로 어떤 심경적 변화가 있었기에 빌런이 된 걸까.
"취할 수도 없고, 마냥 방치할 수도 없었지. 그만한 힘이 악한 자들에게 넘어가면 초래할 수 없는 재앙이 도래할 테니. 하여 우리는 핵이 폭주하거나 빌런에 의해 탈취당할 것을 우려해 협회 지하에 봉인하기에 이르렀단다. 물론 봉인이라고 해봤자 그저 그것의 힘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는 게 전부였지만······."
그러나 가장 안전할 것이라 여겼던 협회가 핵을 이용해 다양한 이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에서 최강오가 말했던 대로였다.
핵 자체를 취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로 인해 형성된 영맥에서 핵이 가진 힘의 잔재를 이용하는 건 가능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
빌런과 다를 게 없는 행보였다.
그 모습에 한탄한 연선화는 스스로 협회장이 되었고, 핵에 대한 정보가 더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그 정보를 어떻게 화산에서 알고 있었는지는 나로서도 의문이다만······."
연선화는 그 사실이 의아스러운 듯했지만, 이전석으로선 내심 예상이 가긴 했다.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가.
'탐욕으로 오른팔을 잃고 지금은 빌런이 된 절명.'
외부에 정보를 흘릴 만한 사람이라면 그밖에 없었다.
즉.
'여명회가 화산에 간섭했다.'
이전석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였군.'
전생과는 명백히 다른 상황.
화산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기존보다 빠르다.
이전석으로선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연선화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제자가 그 핵을 영약으로 취하거라."
"스승님도 취하지 못한 영약이지 않습니까."
"제자라면 다를지도 모르지."
"······."
"스스로도 느끼고 있지 않으냐. 벽을 넘었다는 게 단순히 강해졌다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연선화는 얼마 남지 않는 녹차를 홀짝였다.
"그저 감각일 뿐이지. 추측일 뿐이고, 예상일뿐이란다. 그래도 지금의 제자라면··· 그 핵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서 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더구나."
확실히.
지금 이전석이 가진 신격은 기존의 격과는 현저히 달랐다.
말 그대로 격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300레벨을 찍으면 눈앞에 나타나는 벽이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한계'라고 한다면, 이전석은 신격을 얻으면서 그것을 뛰어넘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지하의 핵을 본 적이 없으니 그걸 취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그 핵을 가지고 협회를 막아달라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제자의 선택이란다."
"그럼 그 전에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전석이 소파에 앉으며 연선화를 쳐다봤다.
"차라리 제게서 벽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듣고, 스승님 스스로가 벽을 넘어 핵을 취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연선화가 잠시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분명 그런 방법도 있겠구나. 허나 과유불급이란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지."
생각보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어째서일까.
연선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내 한계를 보았어. 그리고 그 한계는 벽을 넘는다고 해서 사라질 무언가가 아니지. 애시당초 그렇게 사라질 한계였다면 벽쯤은 진즉에 넘었을 거란다."
"······."
"그러니 제자 너에게 부탁하는 거란다."
이전석은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에 정적과 침묵이 감돌았다.
'거짓말은 아니군.'
연선화는 정말 벽을 넘는 것이나 핵을 취하는 것에 별다른 욕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선했고, 또한 부드러웠다.
그저 순수하게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고 싶다는 마음의 일념.
한때 투귀라 불렸던 여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해줄 수 있겠느냐?"
연선화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이전석은 잠시 침묵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도 화산은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 땅에는 제 가족이 있으니까요."
"가족이라··· 좋은 대답이구나."
연선화는 그 대답이 퍽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가 아공간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세 권의 책.
'매화의 서'라고 적힌 것들.
"이건······."
"내가 매화의 기억 속에서 읽은 모든 경험을 기록해 둔 책이란다. 절개는 오롯이 내 스스로 만들어낸 기술이기에 적혀 있지 않지만, 일전 제자에게 보여줬던 천매보나 창천검의 묘리가 이 책들에 적혀 있지."
이전석이 책들을 받아들었다.
그중 1권의 책을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연선화가 직접 작성한 듯한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본래는 천천히 알려줄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없어 이런 식으로밖에 전해줄 수가 없게 되었구나."
이전석이 책을 내려놓고 연선화를 쳐다보았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마치,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해탈(解脫).
흡사 그러한 경지에 이른 듯이.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전석은 세 권의 책을 조심스레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손과 책들.
우웅-.
좁은 공간에 몇 개의 물건이 더 들어오자 혼백룡의 알이 불만인 듯 진동했다.
이전석은 그것을 무시한 채 손을 빼냈다.
그리고 조용히 연선화를 바라보았다.
어째서일까.
곱디고운 그 모습이 전생에 병상에 누워있던 그녀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전석은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에서 병상에 누운 그녀를 죽였을 때 이전석이 얻은 건 똑같이 '매화'라는 SSS급 특성이었으나, 그 효과는 어째서인지 '매화를 꽃 피운다'가 전부였다.
연선화가 말했던 꽃잎으로부터 어떤 검수의 기억과 경험을 읽는 효과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화라면 어떤 단체와의 연결점이 생겨버린다.
화산.
지금은 꽃피우지 못한 매화를, 전생에서 화산은 그 무엇보다 아름답게 피워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빼앗겼나?'
방법은 모른다.
다만 그들이 매화의 효과를 일부 강탈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물며 더없이 약해진 연선화의 상태.
그걸 이용했다면-.
'불가능한 추론은 아니야.'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애당초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SSS급 특성이던 매화는 전생에서 이전석의 손에 들어왔을 땐 F급만도 못한 것이 되어 있었으니까.
'마탑의 잔재······ 그리고 여명회.'
화산에 간섭하고 있는 두 단체.
얼핏 퍼즐이 맞추어지는 느낌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직까지 스승님의 특성이 멀쩡하다는 건, 최소한 직접적으로 접촉해야 빼앗을 수 있다는 소리야.'
하지만 곧 그리 될 것이다.
능력도 힘도 모두 잃어버린 채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연선화가 죽는다고 한들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시체를 본다고 해도 눈물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마냥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타인에게 무정하다면 그때와 다른 건 무얼까.
딱히 친절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도, 이타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그저 피와 살육만을 갈구하던 전생과 달리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지금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이전석은 이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연선화의 죽음.
그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일일 뿐이다.
그러니.
"스승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부탁 말이냐?"
"예."
고개를 끄덕인 이전석은 이내 줄곧 머릿속에 품고 있던 계획을 입에 담았다.
"졸(卒)이 민생(民生)을 해친다는 게 걱정이시라면······ 그 졸이 제대로 움직이기 전에 왕(王)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죠."
※ ※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긴 꼬챙이 모자를 쓰고, 새까만 망토를 두른 사내가 말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동생분께서 살해당하시다니······."
최승철은 흥-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하지."
"허허."
사내가 웃음을 흘렸다.
모자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탑의 혈족은 모두 저런 피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였다.
'꺼림칙하군.'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끼치는 듯하다.
"하여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그의 물음에 최승철은 차를 마시며 답했다.
"이제 곧 병력을 움직일 거다."
"호오."
흥미로운 듯한 사내의 반응.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의미로군요."
"그 전쟁에 앞서 너희 마탑의 도움을 빌리고 싶다."
"도움이라 하시면?"
"마병기(魔兵器)."
최승철의 말에 사내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마병기는 아직 저희 마탑에서도 몇 없는 고가형 마도구입니다. 도련님께서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으실 테고······."
"대가는 지불하마."
"대가?"
"화산은 너희 마탑의 재건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아직 도련님은 정식 후계자가 아닌 걸로 압니다만······."
"허나 곧 그리되겠지."
자신감 가득한 어투.
사내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화끈하시군요."
그러나 최승철은 여전히 냉정하기만 했다.
"애당초 너희도 신 형님보단 내가 더 가능성이 높다 여겨 접촉해 온 게 아닌가?"
"······."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미소만 짓고 있을 뿐.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던가.
적어도 그들은 최신보다 최승철이 정식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지.'
사내가 최승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존심이 높으면 높을수록 꼭두각시는 다루기 쉬워지는 편이니.'
그가 굳이 최신이 아닌 최승철에게 접촉해 그를 돕고 있는 이유.
훗날 화산의 장이 될 최승철을 꼭두각시처럼 부리기 위함이었다.
물론 최승철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는 자존심이 높은 만큼 영악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탑의 잔재들을 이용하고자 했고, 그리고 그건 눈앞에 있는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악의를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이용하고자 한다.
그 끝이 파국임을 두 사람은 모르지 않았다.
단지 파국의 승자가 자신임을 끝없이 확신할 뿐.
"알겠습니다. 도련님께 마병기 스무 척을 빌려드리죠."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한 채 한 채가 A급에 필적하는 병기입니다. 이걸 잘 이용하시면 협회와의 전쟁도 한결 수월······."
그런데, 그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쾅-!
누군가가 큰 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승철이 툭- 찻잔을 내려놨다.
"무슨 일이지?"
불쾌감이 가득한 어조로 묻는다.
그것도 잠시.
뒤이어진 말에 최승철이 눈을 찌푸렸다.
"혀, 협회가 쳐들어왔습니다!"
"뭐?"
"갑자기 별택의 옥상과 지하에서 녀석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화산- 아니, 최승철을 향한 이전석의 대국(對局)이었다.
최은하 (1)
━좌표를 구했습니다. 화산··· 정확히는 최승철이 거하는 별택의 좌표입니다.
━그건······.
이전석의 말에 연선화는 꽤나 놀란 듯했다.
협회는 물론 화산의 다른 후계들도 여태껏 찾아 헤맸던 게 바로 최승철의 별택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이전석이 알아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굳이 나한테 그걸 말하는 이유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로구나.
생각보다 날카로운 연선화의 말에 이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보를 그대로 협회에 가져가면?
필시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김백동에게 부탁해도 되지만, 그래도 말이 나오는 건 여전할 거다.
미래예지?
그 말을 순순히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 이상 가는 권력자.
협회장이 직접 좌표를 알리고 작전을 내리면 누구도 쉽사리 의심하진 못할 터였다.
그래서 이전석은 굳이 연선화에게 부탁했다.
━스승님께서 직접 작전명령을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최승철을 잡기 위해.
━······내가 제자를 의심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느냐?
━의심하십니까?
━안 한단다.
후후-.
연선화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의심할 만한 사람이라면 애당초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았겠지. 매화의 기억과 경험을 넘겨주지도, 핵을 취하라 하지도 않았을 것이야. 나는 제자를 신뢰하고 있고, 그렇기에 온전히 내 모든 걸 건네준 거란다.
애초에.
━화산의 머리를 친다고 하니 발 뻗고 도와줘야지 않겠느냐.
그렇게 연선화는 이전석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작전은 빠르게 전달되었고, 그 시로 급 높은 헌터들이 모두 협회로 모여들었다.
화산에서 눈치채기 전에 이루어져야 할 작전이었다.
이전석이 전달한 좌표는 그대로 포탈 게이트에 입력되었고-.
"제압할 필요는 없다! 최승철을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도록!"
그리하여 상황은 현재에 이른다.
감독관과 특무관, 그 외 여러 급 높은 헌터들이 최승철의 저택을 급습한 것이다.
※ ※ ※
최승철이 마나를 별택 전체로 퍼트렸다.
지하와 옥상.
양방향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몰려들고 있었다.
다름 아닌 협회 소속 헌터들이었다.
'외부의 방범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어.'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찾아온 급습.
'포탈 게이트로군.'
최승철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다만.
'좌표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슥-.
순간 그의 시선이 마탑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설마하니 자네가 나를 밀고했을 린 없고."
"···그럴 리가요. 지금 상황은 저로서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급습이라니··· 오히려 저를 도련님께서 협회에 밀고한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로 기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군요."
"하, 내가 내 별택마저 드러내면서 너를 밀고할 거라 생각하나?"
"도련님으로서도 마병기를 받지 못한 지금 저를 배신할 이유도 없고···."
"적어도 우리 둘은 범인이 아니라는 소리군."
두 사람은 순식간에 서로 알리바이를 확인했다.
이후 사내가 아공간에서 목제 지팡이를 꺼내 손에 쥐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빨리 도망치는 게 좋겠습니다. S급이 넷··· SS급도 있군요. 아무리 저라도 이런 공세에선 도련님을 지켜드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준비했어."
쯧-.
혀를 차는 최승철.
어떻게 좌표를 알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병력을 준비했다는 건 제대로 된 전면전이 시작되기 전에 최승철을 죽이려는 게 분명했다.
"알폰스 자네.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나?"
알폰스.
붉은 눈의 사내에게 최승철이 물었다.
알폰스는 주변에 결계를 치며 말했다.
"사용할 순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동시에 두 명을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진 못합니다. 저는 전이로 빠져나갈 수 있으니, 우선 도련님부터 가능한 먼 곳으로 이동시켜드리겠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최승철.
순간.
지잉-.
그의 주변으로 마나가 현상화 됐다.
푸른색의 입자가 줄처럼 이어지며 허공에 마법진처럼 술식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콰과광-!
그때, 건물 전체에 진동이 일었다.
동시에 귓가로 들어오는 폭음.
아무래도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빨리 해야겠군요."
툭-.
알폰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들겼다.
그러자 마법의 형성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결계가 휘감는 마나.
텔레포트의 발동도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고-.
"그럼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지."
알폰스의 말에 최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폰스가 사용한 마법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마나가 그를 휘감으려던 차였다.
"미안하지만, 이대로 보낼 순 없어서 말야."
목소리가 들렸다.
최승철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
천장에 갈색의 게이트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건······ 포탈 게이트······?'
최승철이 순간 당황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황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네가 도망치는 건 내 계획이 아니거든."
포탈 게이트에서 나온 사람.
'이전석······!!'
이전석을 본 그가 까득- 이를 갈았다.
설마 자신의 계획을 모조리 물거품으로 만든 놈이 직접 이 자리에 나타날 거라곤 예상 하지 못했기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
최승철은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다.
고개를 아래로 내려 보자, 천장과 마찬가지로 갈색의 게이트가 발치에 펼쳐져 있었다.
최승철은 재빨리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딜 가려고."
이전석이 최승철의 어깨와 머리를 내리찍듯이 포탈 게이트로 밀어 넣었다.
"큭······ 이 자식···!"
힘이 어지간히 센 게 아니었다.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악력이 S급인 그조차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아래에서 무언가가 잡아당기고 있어······!'
포탈 게이트가 마치 발목을 잡아끌 듯 최승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위에서 내리 찍히는 힘과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힘.
두 가지의 힘이 뒤섞여 최승철은 찰나의 기습에 대처하지 못하고 천천히 포탈 게이트 속으로 휩쓸렸다.
그때.
챙-!
최승철이 재빨리 아공간에서 장검을 꺼내 이전석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장검이 회색의 단도에 가로막혔다.
그에 최승철이 눈을 찌푸렸다.
나름 온 힘을 다한 일격이었거늘, 그게 너무나도 쉽게 막혔기 때문이다.
"알폰스!"
최승철의 외침.
직후, 알폰스가 한 손을 내밀었다.
그곳으로부터 밧줄과도 같은 마나가 솟구치더니 최승철을 잡아챘다.
"기자회견에 난입했던 그놈이로군!"
알폰스는 이전석의 얼굴을 알아챘다.
그는 마나의 밧줄을 잡아 당겼다.
바로 그 순간.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이전석이 그를 바라봤다.
알폰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무심코 떨려오는 양 손.
'이 무슨······?'
그도 TV에서 보긴 했지만, 기세가 생각 이상으로 더 강했다.
본능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
덕분에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 직후.
파캉-.
알폰스의 마법이 사라졌다.
부서진 게 아니다.
마나의 술식이 분해되며 마나의 밧줄이 끈 형태로 풀리듯 사라진 것이다.
덕분일까.
"디스펠?!"
알폰스가 경악 어린 어투로 소리쳤다.
디스펠.
마법의 술식을 거꾸로 연산해 그대로 파훼시키는 마법의 일종.
서클이 존재하지 않는 기본 마법 중 하나지만···.
마법에 대한 이해력과 제어능력이 상대보다 더 뛰어나지 않고선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기에 그 난이도가 여타 서클 마법과는 궤를 달리했다.
하물며 알폰스는 명색이 7서클 마법사로, 마탑의 후예라 불렸다.
50년 전 사라진 마탑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자.
그런 자신의 마법을 파훼했다는 사실을 알폰스로선 도무지 믿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사이.
"망할···!"
최승철이 발밑의 게이트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이전석은 연선화에게 최승철이 거주하는 별택의 좌표를 알려줬다.
연선화는 그것을 토대로 작전을 구성했다.
화산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빠르게 헌터들을 소집하고, 포탈 게이트를 통해 최승철을 급습한 것이다.
그러나.
이전석은 작전에 참여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다름 아닌 최승철을 빼내기 위해서.
━은하 씨가 직접 화산에 복수할 수 있도록 해드리죠.
한 달 전, 최은하에게 직접 했던 말.
이전석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마탑은 최승철을 허수아비 삼아 화산을 움직이려는 것 같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이전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최은하를 앞세워 화산을 집어삼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최승철을 빼돌릴 필요가 있었으니.
연선화에게 좌표를 알려주고 다수의 헌터를 별택에 투입시킨 건, 그런 최승철의 주의를 돌리고 방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전석은 최승철을 포탈 게이트라는 함정에 빠트리는데 성공했다.
대어를 낚은 것이다.
"크윽······!"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이를 악무는 최승철.
재빠르게 영풍산으로 좌표를 입력한 이전석은 씨익 최승철을 비웃었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나 봐?"
그 말이 있은 뒤, 시야가 일그러졌다.
최승철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했음을 깨달았다.
하늘.
구름마저 내려다보일 정도로 아득히 높은 상공.
우주와 하늘이 맞닿은 경계선, 그 한 가운데.
바람이 두 사람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부할 수 없는 중력의 힘이 그들을 내리 끌었다.
순식간에 구름을 파고들며 지상으로 떨어지는 몸.
아무리 S급 헌터라도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치명상을 면하기가 어려웠다.
"···네놈! 죽을 생각이냐!"
최승철은 여전히 자신을 잡은 채 놓을 생각이 없는 이전석을 노려봤다.
바람이 그 소리를 훔치고 달아났으나, 이전석은 희미하게 남은 소리의 잔재를 들었는지 소름이 끼치도록 호쾌한 웃음을 흘렸다.
"설마!"
죽어?
내가 왜!
"이 자식······!"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까득 이를 간 최승철이 이내 호신강기를 사용했다.
푸른색의 마나가 얇은 막처럼 전신을 휘감는다.
그때.
파앗-!
이전석도 전신에서 마나를 퍼트렸다.
그러나 그건 호신강기 따위가 아니었다.
팔과 다리를 타고 뻗어 나오는 수 갈레의 줄기.
흡사 촉수와도 같은 마나가 최승철을 옭아맸다.
"크윽···!"
비명이 절로 나올 정도로 전신을 옥죄이는 마나.
푸확-!
두 사내의 신형이 구름을 뚫고 떨어지고-.
"하하!"
이전석이 가학심이 깃든 웃음을 터트렸다.
저 일그러진 얼굴을 보라.
분노와 당황이 깃든 눈동자를 보라.
즐겁지 아니한가.
공든 탑이 무너지는 과정은 이리도 짜릿했다.
"최은하가 너를 죽여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이 안 떠오르더라고?!"
문득, 이전석의 음성이 바람을 꿰뚫고 귓가로 들어왔다.
최은하가 자신을 죽일 방법.
그 말에 최승철이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무슨 소리냐니! 말 그대로지! 최은하한테 복수할 기회를 준다고 했거든!"
하지만 작금의 최은하로선 무슨 수를 써도 최승철을 죽일 수 없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그걸 바탕으로 수행을 거듭한다고 해도 격을 가진 S급 헌터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전석은 생각보다 쉽게 해답을 찾았다.
"그렇다면, 애초에 잘 요리된 스테이크를 내놓는 것처럼 너를 빈사 상태로 만들어 최은하 앞에 대령하면 그만이지!!"
이 정도 높이라면 마나는 물론 격까지 사용해 몸을 보호해야만 할 거다.
물론 그러고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긴 어려울 거다.
아래에서 내려 당기는 중력의 힘과 더불어, 바로 위에서는 이전석이 최승철을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일단 한 번 죽자고!"
어느새 땅과 부쩍 가까워진 거리.
이전석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째서일까.
최승철이나 유하나나.
자존심 높은 것들의 콧대를 꺾는 건 마음을 좀처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즐거웠다.
"이 미친 자식이···!"
최승철이 마나와 격으로 전신을 보호했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사지를 옥죄이는 이전석의 마나가 그걸 방해했다.
검도 제대로 휘두를 수 없고, 마나를 방어가 아닌 공격에 사용했다간 낙하의 충격에 대비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땅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강해지는 중력.
머리와 어깨를 짓누르는 손아귀의 힘 또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승철은 이를 악물며 곧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그리고-.
콰아앙-!!
영풍산 중턱에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충격.
땅이 움푹 파이며 나무가 쓰러진다.
산 전체가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격하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흙먼지가 폭풍에 휩쓸러 비상하는 가운데.
"끄윽······!"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려지는 초점,
팔과 다리, 오장육부가 뒤틀린다.
진탕.
말 그대로 전신이 흔들렸다.
지진이라는 현상을 마치 체내에 그대로 때려 박은 듯한 감각.
고통과 충격이 파도처럼 휩쓸려 들어온다.
'망, 할···!'
상공 수천 미터에서 내리꽂힌 충격은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져 최승철의 몸을 아작 냈다.
"오라버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최은하 (2)
주리천은 미리 영풍산 정상에 대기하고 있었다.
사전에 이전석에게 들은 말 때문이다.
기자회견을 통해 한 달간의 부재를 끝낸 그는 갑자기 영풍산에 실례를 할지도 모른다며 양해를 구한 것이다.
동시에 영물들을 중턱에서 멀리 떨어트려 달라지 않은가.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콰아앙-!!
정상 꼭대기 바위에 앉아 술을 마시던 주리천은 곧 이전석의 말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 구름을 꿰뚫고 영풍산 중턱에 내리꽂힌 무언가.
마치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다.
주리천은 경악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친놈이로고."
높디높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내 둘.
그중 하나는 이전석이었고, 또 한 명은 최승철이었다.
'설마하니 놈을 영풍산으로 데려올 줄이야···.'
심지어 그냥 데려온 것도 아니다.
상공 수천 미터에서 산 중턱에 직통으로 내리꽂아 버렸다.
덕분에 영풍산 일부가 깎여나가듯 부서졌다.
산사태가 일어나며 그 아래 단풍나무들이 허물어진다.
'왜 영물들을 대피시키라 했는지 알겠군.'
이 정도면 힘이 별로 대단치 않은 하위 영물들은 그대로 토사(土砂)에 휩쓸려 버릴지도 몰랐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느새 바로 옆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이전석이었다.
자신의 위치는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아무래도 몸이 바닥과 충돌하기 직전, 축지를 사용해 현장을 벗어난 것 같았다.
제정신이 아닌 반사신경과 마나 제어능력이었다.
"양해는 개뿔."
주리천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이렇게 개판이 될 줄 알았다면 양해 따윈 하지 않았을 거다.
산사도 그리 쉽게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겠지.
토지신으로서 자신의 지키는 땅이 파괴되는 건 인간에게 있어 명예가 실추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뭐, 그놈이 명예 따윌 신경 쓸까 싶다만.'
꿀꺽-.
주리천이 호리병을 입에 대고 마셨다.
도술로 창고에 저장해둔 술을 가져오는 건데, 프랑스에서 직접 구한 이 술은 언제 먹어도 맛이 좋았다.
'한데······.'
주리천이 이전석을 슬쩍 흘겨봤다.
TV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조금 더 심했다.
'이질적이군.'
전에도 이상한 놈이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놈이 가진 기운이 기기괴괴했다.
주리천은 그게 신격으로 인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단지 사람으로서 무릎이 꿇릴 것만 같은 위압감에 무심코 손끝을 떨 뿐이었다.
바뀌었다.
무언가가.
단지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지 못해 꺼림칙한 감각만이 뇌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것도 잠시.
주리천은 점차 흙먼지가 걷히며 드러나는 사내의 모습을 바라봤다.
최승철.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 곧 죽을 것처럼 팔다리를 떨고 있다.
심지어 왼팔은 아예 반대로 꺾여 피부 위로 뼈가 튀어나왔다.
━은하 씨가 놈을 죽일 수 있도록, 일단 빈사 상태로 만들 생각입니다.
문득 이전석의 말이 떠올랐다.
그 빈사 상태가 저런 방식이었다니.
보면 볼수록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내 생에 너처럼 미친놈은 본 적이 없어."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하하-.
이전석이 옅게 웃었다.
주리천은 조용히 최승철을 바라봤다.
중턱에서부터 정상까지 거리가 꽤 멀었으나, 그의 눈은 공간을 접은 것처럼 최승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천리안 묘리를 이용한 주리천만의 독자적인 도술이었다.
반대로 이전석은 100을 넘은 민첩 스탯 덕분에 동체시력을 포함한 모든 신체능력이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으니.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최승철을 볼 수가 있었다.
그뿐이랴. 흙먼지 사이로 최은하마저 보였다.
천천히 제 오라비에게 다가가는 최은하.
그녀의 손에는 기다란 장검이 들려 있다.
최은하에게는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들게 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그녀의 복수를 돕기 위한 이전석의 안배였다.
'복수라···.'
주리천이 흙먼지에 기침하는 최은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본래 도사는 불살 주의로, 도를 닦는 이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부처와 같이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기 위해 결코 생명을 해하는 일이 없다.
하지만.
'저 아이가 원하는 건 등선(登仙)같이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야.'
그런 것쯤은 몇 마디 나눠보면 알 수 있다.
성격이 착하고 말투도 부드럽지만, 최은하에게 서린 한은 북해의 얼음보다 차가웠다.
하물며.
'술에 미쳐 파계승이 된 땡중 따위가 살인이니 뭐니 따지는 것도 우습지.'
주리천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애당초 복수라면 그도 최은하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등선이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그딴 것들은 이미 옛적에 집어치운지 오래였다.
"그나저나, 지금 은하 씨의 급은 어느 정도 됩니까?"
돌연 이전석이 물음을 던져왔다.
급.
그가 무엇을 묻는지 금세 깨달은 주리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천중이다. 그것도 중상위급이지."
"······천중의 중상위란 말입니까?"
"그래."
"허."
주리천의 대답에 이전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번에 놀란 건 다름 아닌 그였다.
천중의 중상.
그 정도면 사실상 A급 헌터와 비등한 수준이라 봐도 좋았다.
물론 대다수의 도술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고, 최은하 본인도 실전경험이 적다는 걸 고려하면 실질적인 등급은 그보다 약간 더 낮을 터였다.
다만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A급 수준의 도술을 익혔다는 건······.
"어지간히도 재능이 좋긴 한가 보군요."
이전석이 감탄 섞인 어조로 말했다.
그에 주리천은 헛웃음이 나오려던 걸 억지로 참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제 막 약관을 넘긴 나이에 육선인급의 결계를 뜯어고치는 놈이다.
그런 녀석이 재능을 운운하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따름이었다.
"슬슬 붙으려나 봅니다."
이내 최은하가 제 오라비를 발견한 듯 오른손에 들린 장검을 다잡았다.
※ ※ ※
━선물입니다.
거대한 폭음과 충격.
흙먼지에 단풍잎이 흩날리는 한 가운데.
돌연 이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음.
도술의 하나.
그 기술을 최은하도 모르진 않았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이전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기도 했지만, 곧 그의 말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선물이라니?
영풍산의 일부가 부서져 내리는 게 선물이라는 걸까?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흙먼지가 걷히고, 충격의 진원지에 다가간 최은하는 곧 이전석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최승철.
그가 거대한 크리에이터 가운데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것이다.
"쿨럭!"
피를 토해내며 억지로 비틀린 몸을 일으키는 최승철.
마나와 격으로 몸을 보호했건만.
'그 자식···! 땅과 맞닿기 바로 직전에 호신강기에 디스펠을 사용했어······!'
호신강기.
마나를 현상화해 얇은 갑옷을 만들어내는 기술.
흔히 마나 방어막이라고도 하는 마법이다.
그렇기에 디스펠이 통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만 하다는 수준이었다.
S급을 상대로 그만한 짓이 가능한 건 기껏해야 SSS급밖엔 없었다.
어지간히도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라는 의미다.
한데 이전석은 권좌도 아니면서 최승철의 호신강기를 너무나도 쉽게 흩어버렸다.
그것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그 사실이 못내 어이가 없으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최승철은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타인에게 비웃음당하는 것이나 짓밟는 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이내 욕설을 지껄이며 전신에 마나를 흘려보내는 최승철.
상처 부위에 푸른 마나가 흐르며 찢어진 피부를 붕대마냥 휘감는다.
어디까지나 응급처치.
제대로 된 치료라도 받지 않는 한,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덧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녀석··· 충격 직후 바로 사라졌어. 놈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벗어나야 해.'
사방에서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선.
살의가 깃든 눈동자들.
'···사람의 것이 아니군.'
영풍산의 영물이 최승철을 경계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확실히··· 선물이네요."
목소리가 들렸다.
희열이 뒤섞인 음성.
최승철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모를려야 모를 수가 없다.
"너······."
급히 고개를 돌리자, 깊게 파인 구덩이 위로 최은하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흰 소복을 입고 한손에 긴 장검을 든 여동생.
화산의 차녀이자, 다섯 째 난 자식.
"······이런 곳에 숨어 있었나?"
최승철이 피를 가래처럼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뚜둑-.
튀어나온 뼈를 억지로 꿰맞춘다.
격통에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잠시뿐이었다.
이런 고통에 울부짖을 만큼 최승철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 사이.
"오라버니······."
최은하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눈동자.
이내 굳은 결심이 서린 시선이 최승철을 향했다.
"기억하시나요? 저번에 오라버니께 찾아갔을 때 저한테 하셨던 말."
그리고 나지막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은하는 아직도 그때를 잊지 않았다.
━기껏 벌레 몇 마리의 목숨이다. 헌데 뭘 그리 슬퍼하지? 벌레를 동정하고 벌레와 같이 되고자 하니 네가 벌레처럼 여겨지는 거다, 동생아.
최승철이 제 여동생을 비웃으며 했던 말.
최승철은 뺨에 얼룩진 피를 닦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바뀌기로 했어요."
"······."
"그리고 바꾸기로 했죠."
최은하가 자세를 잡았다.
오른손의 장검을 다잡은 채, 왼손으론 검결지와 같은 모양을 취했다.
검지와 중지를 붙여 바로 세운 모습.
수인(手印).
주로 도사들이 도술을 사용할 때 쓰는 자세였다.
급 높은 이들은 굳이 수인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아직 실력이 낮거나 검술과 조화하여 사용할 땐 수인을 덧붙이곤 했다.
지금 최은하의 경우엔 후자였다.
화산의 장이 되기로 한 그녀다.
그렇기에 화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검을 포기할 순 없었다.
다행히 검술이라면 어렸을 적 배워뒀다.
사람마다 각성의 시기는 늦기도 한 편이니, 가문에서 붙여진 선생이 화산의 검술을 알려준 것이다.
최은하는 그로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감을 갈고 닦았다.
그렇게 쌓은 검술에 도술을 합치며 만들어낸 게 바로 작금과 같은 자세였다.
한 손에는 검을, 또 다른 한 손에는 도를.
물론 최승철은 그것이 퍽이나 우스운 모양이었다.
"나를 죽이겠다고? 네까짓 게?"
"지금이라면 못 할 것도 없겠죠."
"못 본 사이에 많이 건방져졌구나, 동생아."
"바꾸기로 했으니까요. 화산을."
"하!"
헛웃음과 비웃음.
두 가지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네가 아버님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
최은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망설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람을 죽인다.
나고 자란 화산을 위해서라고 해도 그건 여전히 최은하에겐 망설임이 생기는 일이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
최승철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리 겁이 많아서야 오라비를 죽일 수 있겠느냐?"
그는 그리 말하며 거친 숨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상처를 회복하려는 게 보였다.
체내를 순환하는 마나가 상처들을 하나하나 덧붙여 나간다.
"······그거 아시나요?"
그때.
최은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땐 저희 모두 한곳에 모여 검술수업을 받았죠."
이십사수매화검.
화산의 후계자들은 모두가 그 검술을 가르침 받았다.
어릴 적의 이야기지만 최은하는 또렷이 기억했다.
"그때 항상 칭찬을 받는 건 저와 신 오라버니였죠. 선생님은 저희 두 사람이 각성만 한다면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신 오라버니와 누가 가장 뛰어난지 겨루기 위해 대련을 했는데, 세 번째 합으로 신 오라버니의 목을 치면서 제가 이겼었죠."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뭐 어쨌냐고요?"
최은하가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손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래, 그랬다.
당시에 그녀는 최신보다도 유력한 후계 후보였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그녀는 누구보다 재능이 뛰어난 후계자 중 한 명이었다.
"가장 검술실력이 좋다고 칭찬받은 건 늘 저였죠."
"옛날이야기에 몽상을 품는구나."
최승철이 비웃었다.
최은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탓-.
그녀는 땅을 박차며 최승철에게 뛰어들었다.
"저는 그때 이후로 단 하루도 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어요."
생각보다 더 느린 속도였다.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아공간에서 꺼낸 검은 낙하의 충격으로 부서졌고 몸도 정상이 아니지만, 고작해야 비각성자 따위에게 밀릴 그가 아니었다.
최승철은 가소롭다는 듯 최은하를 후려쳐 날려버리고자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인(人), 지(地)."
최은하가 주문을 외웠다.
검결지를 앞세워 도술을 사용한 것이다.
직후.
"무슨······?!"
최승철이 딛고 있던 땅이 점토처럼 부풀어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어느새 최은하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최은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오른손에 든 검을 휘두른다.
"매화접무(梅花蝶舞)."
나비와 같이 춤추는 매화.
화려하게, 연검(軟劍)처럼 휘둘러져 오는 날붙이.
그 사이로 도술의 묘리가 깃들며 향(香)이 흘러나왔다.
향긋한 꽃내음.
"이건······ 매화?"
최승철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꽃잎에 두 눈을 번쩍 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하- 그녀의 검으로부터 만개하는 수십, 수백의 매화.
그것들이 수리검처럼 날을 새운 채 최승철을 향해 쇄도했다.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나로 호신강기를 펼치기엔 무리가 있었고, 그렇기에 최승철은 목과 팔목 같은 중요부위만을 보호했다.
그리고.
파바박-!
폭풍처럼 몰아치는 매화의 난무.
"크윽···!"
분홍 꽃잎이 바람을 덧입고 전신을 베어 가른다.
그 사이로 최은하가 검을 내찔러 왔다.
"······!"
정확히 목을 찌른 일격.
최승철이 피를 토했다.
아슬아슬하게 마나로 근육은 방어했지만, 피와 혈관이 찢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네년, 이······!"
그는 피를 머금은 채 최은하를 노려봤다.
"말했잖아요. 검 실력이라면 제가 가장 뛰어났다고."
촤악-.
최은하가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리고······.
[깨달음의 단초를 얻었습니다.]
그걸 지켜보던 이전석은 흡사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말로 설명 못할 격렬한 감각에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최은하 (3)
"매화?"
최은하의 검으로부터 발아한 분홍빛 꽃잎에 이전석이 의아함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게 연선화와 달리 최은하에게는 매화 특성이 없었다.
도술을 사용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만······.
"도술이 천중 수준에 이르자 갑자기 은하의 검에 매화가 피기 시작하더구나."
이전석이 주리천을 흘겨봤다.
딱히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갑자기 검에 매화가 피기 시작했다니.
즉,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이전석이 아공간에서 연선화가 건네준 매화의 서 한 권을 꺼내 들었다.
1권. 창천검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적혀 있는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곳에는 정확히 지금 최은하가 취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자세가 그려져 있었다.
사락-.
이전석은 다음 페이지를 살펴봤다.
하지만 정작 책 어디에도 검에서 매화가 핀다는 문구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전석은 2권과 3권도 살펴봤다.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화와 관련된 항목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연선화의 매화는 어디까지나 특성의 효과일 뿐이다.
그녀는 검을 통해 매화를 피워 내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책에 적힌 내용을 보면, 스승님은 특성 속 검수에게서 분명 매화를 봤어.'
그럼 어째서 정작 매화의 서에는 매화를 피워낼 묘리가 적혀 있지 않은가.
'······특성이라고 생각하셨던 거로군.'
이전석은 곧 정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연선화는 특성의 기억과 경험에서 본 검수의 매화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특성으로 인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그 검수는 특성으로 매화를 만들어낸 게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최은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 그자는 최은하처럼 똑같이 검으로 매화를 피워냈을 거야.'
그렇다면 그 조건은 무엇인가.
'도사로서의 경지가 천중에 이르렀을 때부터 매화가 피기 시작했다고 했지.'
그럼 가능성은 한 가지뿐.
'······애당초 매화검법이라는 것 자체가 도술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검술인 거였어.'
잘 생각해 보면 화산의 검수들은 도사들과 같이 도를 닦는 도가였다.
일반적인 승려나 도사들과 다른 점은 그들이 검이라는 수단을 통해 마음을 수양하고 도를 닦는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화산이 과연 도가라 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더라도······.
'아마 매화검법 자체에 도술의 묘리가 깃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검사뿐만이 아니라 도사로서의 경지가 높아야 제대로 된 검법이 되는 방식···.'
하지만.
화산이 매화검법을 만들 게 된 이유는 애당초 던전에 의해 우연히 발생한 매화를 동경해서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전석이 전생에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랬다.
'······기록된 역사가 달라.'
화산은 매화를 피워낼 수 있었다.
단지 언제부턴인가 그런 사실이 왜곡되고 말았다.
이유는 모른다.
솔직히 알 바도 아니었다.
그저 이전석은 검과 도술을 조합한 최은하의 검술- 정확히는 과거 화산의 검수들이 닦았을 도검술(道劍術)에 집중했다.
'스승님이 알려주신 창천검··· 기존 매화검법에 비해 여러 가지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최은하의 매화검법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럼 당연히 창천검에도 도술로서의 묘리가 있을 거야. 여기에 검을 단도로 바꾸고, 평범한 도술이 아니라 마도술의 묘리를 섞으면······.'
이전석은 깊이 생각에 빠졌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눈치.
[새로운 '도법(刀法)'을 창안 중입니다.]
[대종사로서의 업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신격이 한층 더 성장합니다.]
이전석은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무아지경(無我之境).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무의식'이 보다 더 높은 경지를 엿보고자 찾아오는 행운- 아니, 기연.
'이 녀석······.'
이전석이 그런 무아지경에 들어갔다는 걸 알아챈 주리천은 내심 어이가 없어졌다.
방금 그가 한 행동이 무엇이 있었는가.
없다.
아무것도.
그저 최은하와 최승철의 일 합을 지켜본 게 전부일 뿐.
주리천에게 매화에 대해 한 마디 물어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무아의 경지에 들어서다니.'
천재라 불리는 이들도 평생에 한 번 겪을까 싶은 것이 바로 무아였다.
헌데 그걸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이전석은 빛 한줌 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새빨간 그림자가 이전석의 생각대로 움직이며 하나의 궤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니야.'
그림자와 함께 궤적이 사라졌다.
이전석은 다시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것이 재차 단도를 휘둘렀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움직임이었다.
사선으로 단도를 휘둘러 벤다.
'이것도 아니야.'
이전석은 그조차 만족하지 못한 듯 또 다시 그림자를 지웠다.
계속, 또 계속해서 그 과정을 반복했다.
어느 순간 한손의 수인이 사라졌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그림자는 최은화와 같이 검결지를 취하지 않았다.
매화검법이나 창천검은 검을 중심으로 활용되는 기술이지만, 이전석은 도를 사용하니 그에 걸맞은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덕분일까.
그림자가 단도를 휘두르는 움직임이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그러면서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무아지경에 든 이전석은 찰나를 영원과도 같이 느끼며, 자신에게 주어진 깨달음을 지식으로 체화해 차차 자신만의 도법을 다듬어 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검붉은 꽃잎이 만개했다.
이전석의 어두운 심상을 가득 채운 꽃잎이 매화처럼 흩날리며 발치를 장식했다.
어느새 우뚝 솟아난 나무 한 그루.
새빨갛게 점칠 된 나뭇가지에 검붉은 꽃잎이 맺혀 떨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도법의 단초를 새웠습니다.]
시스템이 나타났다.
[창천검의 이름이 지워집니다.]
[매화의 이름이 지워집니다.]
[이름 없는 도법에 마법과 도술을 더합니다.]
[검(劍), 마(魔), 도(道).]
[세 가지의 묘리를 뒤섞었습니다.]
[무아 속에서 새로운 도법의 초식이 창안됩니다.]
[━━도법]
[1초식 - ━━노방(━━路傍)]
[이제부터 당신이 휘두르는 단도에는 검붉은 꽃잎이 피어날 것입니다.]
[아직 해당 도법에는 이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법이 존재하지 않는 도법입니다.]
[완성도가 일부 하락합니다.]
[이름을 부여할 시 그에 걸맞은 업과 명성이 삼계육도에 떨쳐집니다.]
'이름······ 이름이라.'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가 좋을까.
창천검, 그리고 매화검법으로부터 그가 직접 생각하고 다듬어낸 도법.
아직은 1초식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매화와는 전혀 다른- 붉디붉은 도법이었다.
'진홍··· 아니, 진혈도법(眞血刀法)이 좋겠군.'
그는 시스템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진혈도법.'
[당신이 스스로 창안한 도법에 이름을 부여하였습니다.]
[진혈도법.]
[1초식 - 진혈노방.]
[모든 역사를 통틀어 다시없을 만큼 독특하고 뛰어난 도법입니다.]
[대종사로서 당신의 업이 삼계육도에 널리 떨쳐집니다.]
우웅-.
[혼백룡의 알이 업과 명성을 먹어 치웁니다.]
[혼백룡의 알의 최소 부화등급이 SS+로 격상합니다.]
[신격이 더욱 크게 성장합니다.]
※ ※ ※
"후욱··· 후우······."
최승철이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핏물이 용암처럼 뜨거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려진다.
S급이 되고 이만한 부상을 입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네년 따위가······."
크윽.
최승철이 쓰러지려던 몸을 억지로 붙들었다.
상태가 정말 최악이었다.
낙하로 인한 충격이 여전히 뇌를 흔들고 놔주질 않았다.
마나도 격도, 모든 게 부족하다.
그나마 마나는 디스펠로 인해 일부가 사라지지 않고 돌아왔지만, 정작 자신을 지켜줄 격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엄밀히 말하면 '과부화'가 와버렸다.
S급이 되며 얻는 격은 마나와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그러나 아예 다른 것은 아니다.
격 또한 마나처럼 공격과 방어에 사용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 소모량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마치 기계에 부하가 온 것처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 최승철이 바로 그런 상태였다.
과부화.
영혼이 고장 난 것처럼 격을 뿜어내지 못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매화를······!"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을 난도질한 분홍 꽃잎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최원율을 포함한 모든 매화검수가 수백 년간 찾아 헤맸던 화산의 근원이자 징수였기에.
"이까짓 게 그렇게 신기하신가요?"
최은하가 왼손을 펼쳤다.
그 위로 매화가 만개했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한 송이의 매화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몰라요."
"뭐?"
"그냥 검을 휘둘렀더니 언제부턴가 매화가 피었을 뿐예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지만."
최은하는 제 오라비의 말을 끊고 눈을 날카롭게 떴다.
순한 양과도 같은 인상의 그녀였으나, 드물게 살의가 깃든 시선은 최승철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본래 착한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서운 법이라 했던가.
"이 꽃이 당신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잘 알아요."
"······."
"화산은 도가(道家)지만 아주 오래전 그 뜻을 잃었죠. 도를 알지 못하는 화산이 화산인가요? 타인을 비웃고 짓밟으며 고개를 숙이는 방법도 모르는 오만한 치들은 화산을 칭할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바꿀 거예요. 고개를 숙일 줄 아는 화산. 그게 제가 꿈꾸는 방향성이에요, 오라버니."
"······네가 정녕 미쳤구나."
"저를 미치게 만든 건 화산이에요."
"······."
최승철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자존심에 몇 번이나 금이 갔는가.
이미 부서져 가루가 된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분노를 자아냈다.
"멀쩡히 죽는 건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이제부터 너를 화산의 가계(家系)라 여기지 않을 테니."
"언제는 여동생이라고 생각해 주셨나요?"
최은하가 말했다.
그 말 대로였다.
한 핏줄로 여기지 않겠다고?
늘 화산 구석에 몰아넣고 노예보다 못한 취급을 해왔으면서 이제 와 같은 가족이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다니.
가증스러웠다.
'그러니 바뀌어야 해.'
나도, 화산도.
탓-!
최은하가 다시 검결지와 검을 새우며 제 오라비에게 달려들었다.
※ ※ ※
"일방적이군."
주리천이 최승철과 최은하의 전투를 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그의 말 대로였다.
생각보다 최승철은 S급으로서의 힘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최은하에게 시종일관 밀리고 있었다.
그에 이전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전신의 근육을 아작 냈으니까요."
"······."
"무엇보다 떨어지기 직전에 놈의 마나를 디스펠 했거든요. 그 상태에서 한쪽 팔을 꺾어뒀죠. 제 마나도 일부 흘려보냈으니 몸도 잘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
주리천은 황당하다는 듯 이전석을 흘겨봤다.
그 짧은 찰나에 최승철에게 그만한 짓을 하다니.
천상에 속한 도사인 그가 봐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구나. 저놈, 특성을 아예 사용하고 있지 않잖나."
"그야······."
이전석은 거기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굳이 떠벌려 봐야 좋을 게 없었기에.
오직 미래를 경험한 그만이 아는 사실.
'최승철의 특성은 꽝이니까.'
S급으로 각성하긴 했다.
다만 그 S급의 특성이 거대화처럼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게 문제였다.
단순히 리스크가 크다 뿐이랴.
아예 써먹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절대강화.'
네 가지의 모든 스탯을 순간적으로 강화해주는 심플한 특성이었으나······.
'강화의 폭이 큰 만큼 한 번 사용하면 일주일을 내리 잠들어 있어야 하지.'
게다가 몸이 정상일 때만 사용할 수 있다.
마나와 격이 온전해야 하며, 아주 작은 컨디션마저 따진다.
즉- 조금이라도 몸이 피곤하면 사용할 수 없는 능력.
그게 바로 최승철이 각성한 S급 특성, 절대강화였다.
광폭화나 거대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각성을 하며 얻게 되는 특성은 정도 이상으로 복불복이 심했다.
단순히 등급이 높다고 마냥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
물론.
'놈처럼 써먹지도 못할 수준의 특성은 특히나 보기 드문 수준이긴 하지.'
최승철 본인은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오직 S급으로서 가질 수 있는 신체능력과 격으로만 후계자 자리를 지켜왔다.
'조심성이 많아 별택을 새운 것도 그래서지.'
다른 이들에 비해 약하니까.
특성은 헌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무기인데, 그걸 사용할 수가 없으니 뒤에서 얌생이 짓만 하던 것이다.
하물며 지금 최승철은 어떤가.
몸이 망가지고 마나는 태반 거덜 났으며 격도 사용할 수 없다.
아무리 그가 S급의 강자라도 이만한 악조건이 겹친다면 최은하를 상대로도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분.
얼마 지나지 않아 결착이 났다.
"오라버니."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최승철.
무기가 없어 양손이 너덜너덜해진 그는 숨을 헐떡이며 한때는 자기보다 더 열등하다 여겼던 여동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끄윽······."
최승철은 그 사실이 더없이 치욕스러웠다.
그에게 최은하가 말했다.
"오라버니를 죽일 거예요. 그래야만 화산을 바꿀 수 있으니까."
"네가······ 크흐, 네년을 화산이 받아줄 것 같나?"
비웃음이 뒤섞인 물음.
최은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녀의 처지는 화산에서 없는 것만 못한 상태였다.
다시 돌아간들 장로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매화를 보여주면 무언가 달라질까?
"받아줄 수밖에 없을걸."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이전석이었다.
어느새 최은하 곁으로 다가온 그.
"전석 씨······."
"잘하셨습니다."
툭-.
이전석은 최은하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최승철을 내려다봤다.
"네놈······!"
최승철은 이를 갈았다.
따지고 보면 전부 이전석의 짓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최은하에게 접근하고, 그녀를 숨기고, 시종일관 자신의 계획을 망가트리고.
"외부인 따위가 왜 화산의 일에 개입하는 거냐!"
최승철은 참았던 울분을 터트리듯 외쳤다.
이전석은 그를 비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마탑은 왜 화산에 개입했을까?"
그 말에 최승철이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마탑- 그 후손이 화산에 있다는 건 최승철과 일부 장로들만이 아는 극비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최승철을 허수아비 삼아 화산을 지배하려는 건 최승철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석의 말은 마치 그런 마탑과 똑같이 최은하를 허수아비 삼아 화산을 지배하려는 것처럼 들렸기에.
"너······ 커윽?!"
최승철이 말을 채 잇기도 전.
이전석이 그의 턱을 걷어찼다.
그대로 턱이 빠져 피를 토하는 최승철.
그는 놈의 머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목을 베세요."
이전석이 최은하에게 말했다.
머리칼을 뒤로 잡아당겨, 목이 더 잘 보이도록 만든다.
마치 이곳을 베라는 것처럼 유도한다.
그에 최은하는 조용히 검을 들었다.
"네가, 나를 죽인다고······ 쿨럭, 화산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나······?"
최승철은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이놈은······ 너를 이용해서 화산을···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뿐이다. 너는 이놈의 허수아비고······!"
허수아비.
그 말에 이전석이 최은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부정할 생각은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약속하죠. 적어도 지금의 화산처럼 만들지는 않겠다고."
최은하는 그에 피식 웃었다.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하건만, 오히려 이전석의 솔직한 말에 더 믿음이 생겼다.
애당초 그는 자신의 은인이다.
의도가 어떻다고 한들 이전석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거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좌절하고 있다, 후계혈전이란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디선가 죽고 말았겠지.
하물며 최은하는 스스로가 지도자의 자리에 관심도 없었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을 자신도 없었다.
그럴 바엔 이전석 같은 사람에게 순전히 맡기는 게 더 나았다.
덕분일까.
"그거면 충분해요."
"잠깐······!!"
최승철이 말을 채 잇기도 전.
서걱-.
최은하는 제 오라비의 목을 베었다.
그런데······.
[악인을 죽였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크게 뒤바꾼 악인입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간접적인 죽음입니다.]
[선업이 '200,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하락합니다.]
의외로 놈을 죽이지 않은 이전석에게도 보상이 들어왔다.
심지어 보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악인의 죽음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천살성의 특이효과가 발동합니다.]
[특성을 '일부' 갈취합니다.]
저승사자 (1)
[특성을 '일부' 갈취합니다.]
'음?'
눈앞에 떠오른 창에 이전석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설마 직접 죽이지도 않았는데 특성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환수로 살행문을 도륙했을 때조차 이렇지는 않았다.
'특이 효과···. 소환수가 아니라 내가 간접적으로 간섭해야 발동하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일부라······.'
이전석은 그 말을 되뇌며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을 바라봤다.
[특성 '강화(B)'를 획득하셨습니다.]
S에서 B로 낮아진 등급.
이름도 절대강화에서 평범한 강화로 바뀌었다.
생각보다 많이 바뀌었으나, 애당초 시스템은 특성의 일부를 획득한다 했으니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효과는······.
━
강화
등급 : B
효과 : 모든 육체능력을 소폭 강화하나, 5분 뒤 24시간 동안 의식을 잃게 된다.
━
'이건 뭐······.'
상태창을 본 이전석은 내심 어이가 없어졌다.
모든 스탯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육체를 소폭 강화할 뿐임에도, 그 대가로 무려 하루 동안이나 의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실로 지뢰나 다름없는 특성이었다.
'아니지······.'
그러나.
'양도로 넘겨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천살성의 새로운 능력 중 하나, 양도.
그걸 굳이 소환수에게만 쓸 필요가 없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특성을 넘겨줄 필요가 있나 싶어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만약, 전투 중 적에게 이걸 넘겨버리면 어떻게 될까.
'특성 강제발동'이라는 해괴한 특성이 있다.
이전석이 알기로 여명회의 어떤 S급 빌런이 가진 특성이었다.
그것과 조화하면 꽤 괜찮은 시너지가 발휘될 것 같았다.
아니면······.
'전생의 나는 천살성의 영향으로 의식을 잃으면 심상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 생에는 잠을 자는 게 불가능해 그게 불가능했지.'
한 번 들어갔던 적이 있으나, 고독에 의해 강제로 의식을 잃었을 때가 전부였다.
무엇보다 심상세계에선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의식이 고스란히 살아 있으니···.
'이 특성으로 강제로 심상세계에 들어가 놈들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것도 괜찮겠어.'
굳이 현실에서 정보를 얻자고 고문이나 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다.
물론.
'한 번 들어간 이상 24시간 동안 계속 의식을 잃고 있어야 하는 게 문제로군.'
물론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특성 강제발동처럼 세상에는 별 이상한 특성이나 아이템이 널려 있었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업상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취급한다지 않은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최승철의 절대강화로부터 얻게 된 강화.
처음에는 꽝이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활용도가 많았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테냐?"
문득.
주리천이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레 나타났기 때문일까.
최은하는 내심 놀란 듯했으나, 주리천이 그녀의 머리를 작게 토닥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위로만 해주는 것처럼.
최은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꾹 참았다.
그러곤 슬쩍 이전석을 바라봤다.
방금 주리천의 물음 덕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이전석은 그 말에 조용히, 미리 준비해 뒀던 자루에 최승철의 머리를 담았다.
"현재 화산에는 은하 씨와 최신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후계자가 남아 있지 않죠."
이전석은 자루를 갈색 끈으로 묶으며 뒤늦게 입을 열었다.
"최아린이 남아 있긴 하지만 타르타로스에 수감된 사람이 제대로 후계혈전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최원율이나 최신이 폐관에서 나오려면 아직 시간도 좀 걸릴 겁니다."
뚜벅-.
이전석이 최은하에게 다가갔다.
그는 대뜸 최승철의 머리가 든 자루를 내밀었다.
"이걸 들고 화산으로 찾아가세요."
"······네?"
최은하가 두 눈을 껌벅였다.
최승철의 잘린 머리를 들고 화산으로 찾아가라니.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장로들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망설임이 가득한 어투에 이전석은 날카로운 눈빛을 띠었다.
마치 그녀를 몰아붙이듯.
"화산을 바꾸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럼 지금만큼 적절한 시기도 없을 겁니다. 화산의 늙은 장로들은 최신이 옥좌에 앉는 걸 꺼려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무력도 좋고 정치에 관한 능력도 있지만, 원체 성격이 제멋대로라 장로들은 그가 자신의 제어를 벗어날까 우려하고 있지요."
"그걸 전석 씨께서 어떻게······."
"제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전석은 최은하의 말을 자른 채 묵묵히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최신이 옥좌에 앉는 걸 꺼려한다는 사실이죠."
최신은 모든 후계자 중 첫 번째 난 자식으로, 그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을 의심하는 장로는 없었다.
단지 그 이상으로 제멋대로라는 게 문제였다.
막 나간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화산의 중심이 되는 장로들 입장에서 최신은 최원율보다 더 말을 듣지 않는 철부지 아이라는 것이다.
평소 태반의 장로를 적대시하던 그가 옥좌에 앉는다면 자신들의 밥그릇도 빼앗기고 말 테니.
"그러니 장로들도 최신보다 최승철이 옥좌에 앉길 원했을 겁니다. 그래서 최원율도 없이 협회와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말도 안 되는 전쟁을 허락해 줬을 테죠."
최원율이 화산의 모든 결정권을 후계자들에게 넘겼다지만, 전쟁이라는 크나큰 결정을 장로들의 의견이나 허락없이 진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화산이 전쟁을 결심했다는 건 장로들이 최승철의 손을 들어줬음을 의미했다.
"그런 최승철이 지금 죽었으니······."
거기까지 말한 이전석은 다시 최은하를 돌아보았다.
"마땅한 후계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매화라는 정통성을 가진 은하 씨께서 갑자기 화산에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최은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이전석의 의도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전석은 그녀의 뒷말을 대신 이었다.
"아마 난리가 나겠죠."
단지 난리만 날까?
설마.
장로들은 최승철 대신 최은하를 앞세워 옥좌에 앉히려 할 것이다.
보기 좋게 굴러들어 온 순한 양.
그걸 옥좌에 앉혀두면 추후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화산을 지배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화산을 지배한다는 건 대한민국을 지배한다는 것과 같다.
화산이 협회를 무너트린다면 곧 그리될 테니 말이다.
"결국, 은하 씨가 선택해야 하는 건 하나 뿐입니다."
누구의 허수아비가 될 것인가.
화산의 장로들, 마탑의 후손.
그리고 이전석.
슥-.
이전석이 조용히 자루를 내밀었다.
피가 자루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그 아래 바닥마저 흥건하게 적셨다.
비릿한 혈향에 머리가 아파 오는 것만 같다.
"······."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는······ 화산 때문에 돌아가신 희생자분들과 유족분들께 사과하고 싶어요."
어딘가 울적한 어조로 말하는 그녀.
"화산은 과거에 도가였다고 해요. 저는 과거 그런 화산을 되찾고 싶어요."
그에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부탁할 사람이 전석 씨밖엔 없어요."
최은하는 잠시 심호흡을 다졌다.
그러곤 무언가 결심한 듯 굳은 눈빛과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화산의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얼마든지."
생각보다 무게감이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게 도리어 믿음직스러웠다.
이전석에겐 화산의 왕을 만드는 것 따윈 장난감 조립하듯 손쉬운 일이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결국 최은하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최승철의 머리가 든 자루를 받아든다.
이전석은 말했다.
이걸 가지고 화산으로 찾아가라고.
아마 그때부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다.
왕이 되기 위한 끝없는 사투.
최원율-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자면 지금도 절로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최은하 자신이 결정한 길이고, 유가족들에게 사과할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석으로서도 그런 그녀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화산을 집어삼키고 그걸 토대로 고와 여명회를 대비한다.'
당장 그뿐만이 아니라 마탑도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정말 수두룩 빽빽했다.
"그럼······."
이전석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최은하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
이전석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를 향하는 시선.
"······왜 그러세요?"
갑작스런 이전석의 변화에 최은하가 의문을 표했다.
이전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을 뿐.
"어르신."
그때, 그가 주리천에게 물었다.
"그 호리병에 술 남아 있습니까?"
허리춤의 작은 호리병을 향한 시선.
주리천은 텅 빈 호리병을 흔들며 답했다.
"술 말이냐? 그거라면 다 먹었다만······."
"그럼 호리병 좀 잠시 빌리죠."
"뭐?"
"금방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걸까.
주리천은 선뜻 호리병을 건네줬다.
"뭐, 호리병이야 집에 많으니 상관은 없지."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그걸 받아 든 채 축지를 사용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
"흠?"
주리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최은하도 갑작스런 상황에 난감한 듯 손에 든 자루를 든 채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주리천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근처 그루터기를 가리켰다.
"일단······ 저 위에 올려놔라. 녀석이 돌아오면 알아서 설명해 주겠지."
"아, 네."
그에 조심스레 자루를 그루터기에 내려놓는 최은하.
그녀는 왠지 모르게 주리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죄송해요, 스승님."
"뭐가 말이냐?"
"검······ 스승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건데···."
"아, 그거."
주리천은 최은하가 들고 있던 장검을 바라봤다.
피로 얼룩진 그것엔 최은하의 살의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사과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신경 쓰지 마라. 동네 대장간에서 산 싸구려 검이야."
"하지만 처음으로 주신 검인 걸요."
"······."
주리천은 최은하를 빤히 쳐다봤다.
확실히 착한 아이였다.
단지, 여리고 어리숙하기만 하던 것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금 더 단단해졌다.
마냥 착하기만 하던 아이가 선하고 강한 검수로 성장한 것이다.
길 가던 승려가 들으면 그 또한 살생이니 죽어 마땅하다 외치겠으나, 이미 파계승이 된 마당에 주리천은 그딴 하찮은 설교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제자의 성장은 스승으로서 경사나 다름없었으니.
'겉보기엔 과격해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전석은 최은하를 허수아비 삼으려는 듯 악의적이게 웃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행동은 모든 것이 최은하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를 이곳에 보낸 것부터 그렇다.
최은하는 주리천을 만나지 못했다면 화산 내부의 후계혈전에 휘말려 쥐도 새도 모르게 객사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전석 자신의 의도가 어떻든 분명 감사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다.
주리천으로서도 가계가 끊길 뻔한 도술을 후대에 전할 수 있을 됐으니 말이다.
━리천.
그때.
누군가 주리천을 불렀다.
뇌리를 울리는 그 음성은 다름 아닌 산사의 것이었다.
줄곧 주변에서 지켜보던 그녀가 주리천에게 다가왔다.
최은하가 눈치채질 못한 걸 보니 땅의 영기로 주변을 감싸 기척을 죽인 모양이다.
━그자··· 아니, 그분은 대체 누구시지?
"그분? 갑자기 무슨 소리냐, 산사?"
━이전석.
산사가 그 이름을 읊었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나는 과거에 한 번- 신을 본 적이 있다.
목소리 또한 떨리며, 앞발이 불안에 젖어 지속적으로 땅을 파헤쳤다.
━토지신이나 사방신 같은 신이 아니야. 애당초 우리들은 인간들이 멋대로 신이라 이름 지은 것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라고 할 수도 없지. 허나 내가 막 영풍산의 토지신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저승에서 내려온 어느 한 '신격'을 보았다.
신격.
그 단어를 내뱉은 직후였다.
산사의 하얀 털이 쭈뼛 섰다.
그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그건··· 격이 달랐다.
"격?"
의문 어린 주리천의 모습에 산사는 약간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존재로서 가지는 격이 우리와 같은 필멸자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어. 잠깐 눈이 마주친 게 전부였음에도, 나는 그 정체 모를 신격에게 압도되고 말았지. 내가 지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평범한 호랑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산사는 말했다.
그것의 시선은 자신을 생명으로조차 인식하지 않았으며, 길가의 개미보다 못한 하등한 존재를 바라보는 듯했다고.
━허나 그것이 기분이 나쁘긴커녕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그건··· 그야말로 신 그 자체였어. 경외하고 경배해야만 할 존재. 비록 그때 느꼈던 신격보단 작지만······.
산사가 이전석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틀림없이 그분이 지닌 기운은 그때 느꼈던 것과 같은 신격이었다.
신격?
신격이라고?
주리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은 놈이 신이라는 거냐?"
━몰라. 모른다. 아무것도.
단지.
━그럴 확률이 한없이 높을 뿐이지······.
※ ※ ※
산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풍산 구석.
검은 소복에 삿갓을 쓴 사내가 수풀 사이로 어딘가를 지켜보고 있다.
그는 명계에서 내려온 차사였다.
이름은 령(嶺).
흔히 저승사자라 불리는 존재였으며···.
최근, 상부로부터 하나의 명령을 전달 받았다.
━최근 하계에 새로운 초월자가 탄생했다고 한다.
━초, 초월자 말입니까···?
━그래. 우리의 주인과 같이 신격을 지닌 존재.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초월자의 탄생은 5백 년 전 이후로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놈을 감시하고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거 아니겠나. 아직은 그 수준이 극히 미약하나, 법도(法度)를 벗어난 신격은 충분한 위험이자 제재 대상이다. 새로운 초월자가 삼계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일지 감시해라.
감시.
그리고.
━만약의 경우엔 명계에 지원을 요청해 제압하도록.
제압.
령은 그런 명을 받고 하계로 내려와 새로운 초월자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이전석, 남, 24세. 명부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72세에 교통사고로 사망 예정. ······음? 교통사고?'
명부의 필사본을 살펴보던 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초월자가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거대하고 단단한 트럭이 덮쳐 온다고 해도 초월자쯤 되는 강자라면 오히려 그 트럭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72세라는 것도 이상했다.
신격을 얻어 초월자가 된 이상 수명은 아무리 못해도 천을 넘길 텐데······.
'그러고 보니···.'
령은 하계에 내려오기 전 상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전석, 놈에 관한 게 전부 불분명해. 정보가 있지만 하나같이 맞지 않아. 모든 게 어그러져 있어. 그 점을 주의해라.
아무래도 불분명하다는 건 명부 또한 포함된 사실인 것 같았다.
'확실히 이상한 녀석이야.'
절대적일 터인 명부의 정보조차 잘못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얻을 수 없는 신격을 손에 넣어 새로운 초월자가 되었다.
'이건 기회야.'
령이 두 눈을 번뜩였다.
법도를 어긋난 새로운 초월자의 탄생.
이만한 존재와 관련돼 새로운 정보를 알아낸다면 필시 막대한 량의 업이 쌓일 테고, 그렇게 된다면 혹 상급의 차사가 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최상급 차사가 되면 명계의 시왕을 옆에서 보필하는 저승군관(監齋軍官)이 될 수도 있었다.
저승군관은 시왕 다음으로 명계에서 제일가는 권력자다.
비록 지금은 일개 중급 차사에 불과하지만, 저승군관이 되면 승천하여 천계에 올라가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래서 령은 두 눈을 번쩍 뜬 채 이전석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 뭐야? 어디갔지?'
갑자기 이전석의 모습이 사라 졌다.
눈 깜짝할 새에 없어졌다.
명색이 중급 차사로서 하계에선 뛰어난 강자로 취급되는 자신인데도, 이전석의 신형을 도무지 뒤쫒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갔지?'
령이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뭘 그렇게 찾아?"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바로 등 뒤에서.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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