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2화
보물고 (2)
화산의 보물고에는 정말 다양한 아이템이 보관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보물이라 여겨도 될 만한 것들이지만, 그 어떤 아이템도 5층에 존재하는 '그것'에 비하면 그저 길가의 돌멩이와 다름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네 개의 SSS급 아이템 중 하나.
비록 마이너스가 붙었다곤 하나, 화산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그것은 작금에 이르러선 전설로조차 취급되는 갑옷이었다.
'솔직히, 이걸 갑옷이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지.'
어느새 5층에 도착한 이전석은 텅 빈 공간 한 가운데 놓여 있던 석상을 보았다.
5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상.
마치 동양의 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전신이 값비싼 황금으로 둘러싸여 있다.
'황룡(黃龍).'
한때 사방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던 전설 속 존재.
'화산의 개파조사가 황룡을 죽였고, 그 시체가 그대로 황금석상으로 굳어졌다고 하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구전으로만 전해질 뿐인 옛이야기.
그러나 단지 소문에 불과한 것을 화산이 보물고 가장 높은 곳에 보관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이놈에게는 에고가 있어.'
에고- 정확히는 의지라 불리는 것.
황룡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혼은 저승으로 올라갔으되, 잔류 사념은 여전히 그 시체에 남아 마땅한 계약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최씨 가문의 첫 번째 가주가 황룡의 계약자였다지?'
최연자.
화산을 문파가 아닌 가문으로 바꾼 위인.
화산에 존재하는 기록에 의하면, 그녀가 오랜 옛날 석상의 선택을 받았다고 한다.
다른 누군가라면 단순 전설이나 신화로 취급할지 모른다.
그러나 직접 겪은 적이 있는 이전석에게 그것은 옛이야기 같은 게 아니었다.
'전생에선 화산이 멸문하고 절영이 황룡상(黃龍像)을 취했지.'
여명회의 수장, 절영.
그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갑옷과 저 자신의 특성으로 인해 모든 권좌 중 가장 성가신 적이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젠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슬슬 뭐라고 말해보지 그래?"
이전석이 황룡상에 대고 말했다.
황룡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누가 보면 미쳤다 할지도 모른다.
석상에 말을 걸고 있다니.
물론 이것의 진가를 아는 이라면 달랐다.
그리고 이전석은 황금석상- 아니, 황룡상의 진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끝까지 입 다물고 있으면 석상을 깨부수는 수가 있어."
마치 협박하듯 흘러나오는 말.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전석은 어쩔 수 없이 살의를 흘렸다.
그리고 주먹에 신격과 마나를 불어 넣어···.
━하, 어이가 없구나.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울리는 남성의 음성.
마치 전음과도 같은 게 뇌리를 맴돈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50은 되었을 것 같다.
그만큼 굵직한 톤의 목소리였다.
━네놈, 방금 짐을 진정 부술 생각이었군.
"그럼 진짜로 부수지 가짜로 부수겠어?"
━······미친놈이로고.
뒤늦게 격과 마나를 거둬들이는 이전석.
그 모습에 황룡상으로부터 당혹 어린 음성이 날아왔다.
━만일 짐이 그대로 부서졌다면 어떡했을 테지? 그대가 나를 얻고자 하는 계획은 그대로 황금조각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니라.
"네가 자살 희망자가 아니라면 뭐라도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
황룡.
녀석은 이미 죽어 사라졌다.
그러나 잔류사념이 남아 있다는 건 그만한 미련이 존재한다는 소리다.
지상에 묶여 있을 정도의 강한 미련.
그게 남아 있는 이상 놈이 죽음을 택할 리 없었다.
"실재로 반응했잖아? 그럼 된 거지."
━역시 미친놈이로다.
이전석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황룡상은 여전히 어이가 없었다.
살아생전 이렇게 대담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안다는 것.
그건 즉, '가치'도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 보통은 어떻게든 황룡의 마음에 들어 그를 깨우려 하지,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 같은 행동을 취하진 않을 것이다.
아니, 하라고 해도 못 할 거다.
무려 SSS-급의 에고 아이템이다.
그게 혹시라도 정말 부서진다면?
아쉽다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모자랄 터.
헌데, 이전석은 부서져도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주먹을 날렸다.
그래서 더 어이가 없는 것이다.
━그 대담함하며, 영혼에 깃들 살업까지···.
이전석은 마치 무언가가 자신을 관찰하는 느낌을 받았다.
조각되어 움직이지도 않는 시선이 그를 연신 훑어보았다.
━게다가 신격을 지니고 있군. 이런 거대한 살업을 가졌으면서 신격을 지닌 이는 저승의 존재뿐이지. 하나 천계는 아니군···. 네놈, 명계의 신이더냐?
황룡은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물음을 던졌다.
물론 그의 착각도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수억에 달하는 사람을 죽이고,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이전석이다.
이런 흉악한 살인자가 과연 인간 역사에 존재하던가?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아돌프 히틀러조차 이전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오롯이 홀로 세계와 대립했으며, 그렇기에 누구보다 강하고 또한 악하였다.
하물며 거기에 신격마저 지니고 있다면···.
황룡이 착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 셈이다.
그러나.
"명계의 신은 무슨. 나는 인간이야."
이전석은 굳이 그 말을 정정해 줬다.
그에 황룡은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인간? 인간이라고? 네놈이 말이냐? 그럴 리가······ 이런 막대한 업을 가지고도 인간이라는 것이냐? 아니, 설령 인간이라 한들 천계가 문을 닫았을진대··· 설마?
그러다 무언가 깨달은 듯 경악이 어린 어투로 말을 잇는 황룡상.
━문을 억지로 열고 신격을 얻었다는 말인가?
이전석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만을 으쓱일 뿐.
다만 황룡의 말을 아주 흘려들은 건 아니었다.
'문이라···. 천계에서 하계에 건 방어기제가 아무래도 문의 형태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
이건 이전석조차 알지 못하던 정보다.
아마 저승에서 그 문을 도로 열면 하계의 피조물들도 신격을 얻어 초월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전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 짓거리를 하면서 문을 열 매리트가 그에게는 전혀 없었다.
이미 이전석 자신은 신격을 얻은 상황이니까.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반면 황룡상은 조금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스스로 문을 연 자가 찾아올 걸세.'
한때 절친했던 친우가 했던 말.
살아생전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지금 그의 앞에는 버젓이 문을 열고 초월자의 반열에 들어선 인간이 있었다.
'이 자라면······.'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황룡상이 근엄한 어투로 말했다.
━그대, 이름을 말하라.
"이전석."
━이전석, 인간이면서 왕 된 자여. 그대는 무엇을 위해 나를 찾았는가?
"쓸 만하니까."
━쓸 만하다?
"네가 다른 갑옷보다 조금 더 쓸 만하거든."
━그것참 무례한 말이로군.
황룡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쩌적-.
석상의 꼬리 부분에 금이 갔다.
금은 점차 상체로 퍼져가며,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허나, 마음에 들었다.
황금이 유리 조각처럼 갈라져선 떨어져 내린다.
━지황금룡(地皇金龍).
붉은 눈동자가 번쩍 뜨여 이전석을 내려봤다.
━짐의 신명(神名)이니라.
바스러지는 금가루들 사이로, 녀석의 거체가 마치 구속구를 벗어던지듯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석상이었을 때보다 크기가 3미터는 더 비대해졌다.
5층을 전부 뒤덮은 황금의 용.
━그대. 인간의 왕이 된 자여. 그 소망대로 짐의 옥체를 취하도록 하여라.
이전석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씩 미소를 지었다.
"기꺼이."
바로 그 직후였다.
거대한 황금룡이 이전석을 휘감기 시작했다.
━━━.
기이한 공명음이 들리고, 용의 거체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윽고 이전석과 비슷해진 녀석이 빛을 발하더니 검정색 코트에 스며들었다.
시스템은 없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진 대충 짐작이 갔다.
적단도와 순백룡의 알과 비슷한 원리다.
황룡이 검은 까마귀의 깃털을 흡수해, 그것을 토대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흡사 용포를 연상케 하는 검은색의 코트.
'효과를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상태창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다시 시스템이 부활할까.
최원율을 죽이고 얻은 보상도 확인하지 못해 참 불편할 따름이었다.
━나름 그대가 입고 있던 것에 맞춰 변화해 봤다만, 마음에 드는가?
"썩 괜찮군."
여전히 뇌리에 울리는 음성.
이전석은 바뀐 코트를 확인했다.
기존 모양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코트는 조금 더 웅장하고 고풍스런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썩 괜찮다라···. 짐의 계약자가 되었음에도 감상이 그뿐인 인간은 그대뿐일 것이니라.
황룡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해왔다.
그만큼 이전석의 태도가 너무나도 태연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전석이 발치에 포탈 게이트를 형성하며 말했다.
"계약자라는 건 뭐지?"
줄곧 궁금하긴 했다.
계약이라고 해봤자 정식으로 무언가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에 황룡이 나지막한 어투로 답했다.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말일 뿐이니라.
"형식?"
━그대의 영혼에 짐의 사념을 이었으나, 그것에 강제성 따윈 존재하지 않느니라. 그저 서로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손을 잡은 것뿐이지.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지.
"강제성이 없다는 건 마음에 드는군."
다만.
"일단 계약이라고 하니 네 목적을 듣고 싶다만."
황룡은 인간을 선택한다.
그리고 계약자가 되어 모종의 도움을 준다.
다만 그 이유를 여지껏 듣지 못했다.
황룡이나 되는 영물을 지상에 묶어 승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미련이란 대체 무엇일까.
━멸(滅).
"멸?"
━천계의 멸망이 짐의 목적이니라.
"거 참···."
이번에는 이전석이 어이가 빠진 듯 헛웃음을 흘렸다.
천계의 멸망이라니.
령이 옆에 있어 그 말을 들었다면 아마 기겁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나는 딱히 천계와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말했지 않느냐. 계약에 강제성 따윈 없노라고.
"그럼 너로선 손해만 보는 계약이지 않나?"
━손해는 아니지. 짐은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느니라. 계약자에 합당한 존재는 찾아오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대와 함께하는 것은 목적을 이루지 못할지언정 잠깐의 여흥은 되어줄 것이니라.
과연.
황룡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이전석도 이런 곳에서 수백 년 동안 갇혀 있었다면 목적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함께 지내는 동안에는 계약자, 그대의 심상을 잠시 거처로 빌리도록 하지.
문득, 황룡이 그런 말을 해왔다.
자신의 심상이라니.
"거긴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닐 텐데."
━사념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딱히 상관은 없느니라.
"뭐, 그렇다면 나도 별 상관은 없다만······."
이전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황룡의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현실에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체가 어둠과 불꽃의 세계에 드리웠다.
수십 미터는 될 법한 황금룡이 무너진 태양을 대신해 지상을 비춘다.
━좋은 황경이 아니라는 건 이런 의미였나.
황룡은 불에 타들어 가는 폐도시와 그 사이에서 절규하는 영혼들을 보았다.
확실히 일반적인 심상이 아니다.
지옥을 그대로 본 떠 놓은 듯한 광경.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그때.
━음?
황룡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폐도심 사이로 깊숙이 파인 싱크홀이 하나 있었다.
자신조차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크기.
황룡은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건······.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심연, 인가.
깊고 깊은 어둠.
끝도 없이 내리 깎인 절벽.
그건 틀림없이 심연이었다.
명계의 무간보다 더욱 깊은 곳에 존재하는 장소.
━비록 심상이라곤 하나 인간의 영혼이 심연을 담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심연의 한가운데.
새빨간 사슬에 사지가 묶인 존재가 있었다.
이전석과 쏙 빼닮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검은 동공과 치아.
살의가 한데 뭉쳐 이를 드러내고 있다.
━형제의 손님인가.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황룡은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사슬에 의해 구속된 저 존재의 기운은 사방신의 일각인 황룡조차 쉬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감당이 될지도 의문이다.
지금은 꽤 억제되어 있는 모양이지만···.
'심상에 심연을 가진 것도 모자라 이런 존재까지 품고 있는가.'
자신의 계약자가 정말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들 따름이었다.
아니, 애초에 인간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신들조차 이런 기이함을 품지는 못했다.
그래서 더 의아했고, 흥미가 동했다.
━그대는 누구지?
━나는 형제의 반쪽이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텐데.
━그럼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까?
키득-.
이전석의 다른 인격- 살성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어 황룡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문지기다.
━문지기?
━형제의 근원을 지키고 있지.
━근원이라···.
살성의 말에 황룡이 더욱 큰 흥미를 가졌다.
덕분일까.
심연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싶어졌다.
━아서라. 네 격으론 저걸 볼 수 없을 거다.
살성이 말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황룡은 더욱 밑으로 내려갔다.
황금의 빛조차 바래질 정도로 짙은 어둠이 그를 둘러싸고···.
'문인가?'
심연- 나락의 끝.
그곳에 거대한 문이 존재했다.
10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문.
아무런 장식도 없지만, 이질적인 기운이 문틈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게다가.
'이미 열려있군.'
문짝이 희미하게 열려 있었다.
황룡은 그사이를 훔쳐보고자 가까이 다가갔지만.
━?!
마치 무언가가 밀어내듯 튕겨나고 말았다.
그는 어느새 살성의 근처로 되돌아와 있었다.
마치 시공간이 뒤틀린 듯한 현상.
━그러게 말했잖아. 네 격으론 저걸 볼 수조차 없을 거라고.
살성이 키득이며 비웃었다.
그러나.
━······아니, 봤다.
━흐음.
━문이 조금 열려 있더군. 그 안의 것을 조금 흘겨본 것에 지나지 않다만······.
어째서일까.
황룡은 어딘가 겁에 질려 있었다.
비록 잔류 사념이라 할지언정 사방신 중 하나일 터인 그가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저런 게, 어찌 인간의 심상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저런 거.
황룡은 자신이 본 것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굳이 살성에게 물었지만.
━글쎄.
그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럼에도 황룡은 여전히 살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싫어.
살성이 단칼에 황룡의 말을 거절했다.
직후.
━음? 몸이······,
황룡이 점차 심연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문에서 튕겨나갔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문제는 심연뿐만이 아니라 심상 속에 존재하는 것마저 버거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네놈이······?
━자격 없는 자에게 이곳은 과분한 장소지.
━······크윽.
━나가면 형제에게 안부 부탁하마.
큭큭-.
살성은 점차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황룡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3화
집
장소영은 토지신이다.
이제는 스스로 창고신을 자처하게 됐지만, 그의 혼은 여전히 토지신으로서 영풍산에 자리해 있었다.
그런 만큼 당연히 숙면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더욱이 활동 범위마저 100미터 반경에 국한되어 있으니, 장소영의 하루일과는 실로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아침이 되면 있는지도 모를 아침 공기를 마시며 스트레칭을 한다.
가진 게 비록 영체일 뿐이라 해도 기분이라는 게 있었다.
생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 온 스트레칭은 장소영에게 마치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을 안겨줬다.
스트레칭을 마치면 창고를 정리하는 시간이다.
흐트러지거나 빠진 물건이 없는지 잘 살펴보고, 그런 게 있다면 급히 제 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쌓여가는 먼지와 나날이 사투를 벌인다.
청소가 끝나면 대체로 점심이 되어 있다.
물론 장소영은 밥이나 물을 먹지 못하기에, 그 대신 영풍고에 보관된 물건들을 관찰하곤 한다.
급이 높은 아이템은 토지신의 눈으로도 제대로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이어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분석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아이템을 살피고 있노라면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러 밤이 된다.
그 후로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장소영이 하는 일은 다름 아닌 경계였다.
적의 침입은 대체로 한밤이나 새벽에 이루어졌으니, 이 시간만은 그도 온 신경을 곤두 세운 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곤 했다.
그리고 무사히 아무런 일도 없이 아침 해가 뜨면 다시 똑같은 루틴의 반복이다.
오늘도 장소영은 스트레칭을 마치고 영풍고를 청소한 뒤, 그중 하나의 아이템을 손에 들고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음?
돌연 영풍고 천장에 열린 포탈 게이트.
주인이 돌아오려는가 싶지만··· 아니다.
━으음?
그곳에서 아이템이 떨어졌다.
검 모양의 무구.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도끼를 비롯한 창과 단검, 그리고 각종 갑옷과 장신구 형태의 아이템까지.
━어어······.
점점 개수가 늘어나, 이윽고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하는 아이템에 장소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아이템의 등급도 하나같이 최소 A급 이상에, 가장 높은 것 중에는 SS+급까지 섞여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천장에서 갑자기 금 덩어리가 무더기로 쏟아진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
장소영은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
비처럼 쏟아지던 아이템이 그치고-.
탓-.
그 사이로 이전석이 뛰어 내려왔다.
그런데 그의 복장이 조금 달랐다.
평범한 검정색 코트가 아니다.
이전보다 조금 더 길고 커졌으며, 그 형상은 마치 용포(龍袍)를 연상케 했다.
단지 아무런 장식도 없이 새까맣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영체인 장소영의 눈에는 이전석의 등 뒤로 어떤 한 존재의 실루엣이 보였다.
━화, 황룡!!
그것은 다름 아닌 사방신 중 세계의 중앙을 수호한다 알려진 황룡이었다.
※ ※ ※
━화, 황룡!!
장소영의 외침에 이전석이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황룡을 바라봤다.
그의 본체는 갑옷- 검은 코트가 되었지만, 사념은 여전히 황룡의 모습을 취한 채 현실에 머물러 있었다.
정확히는 이전석의 심상 속에 들어갔다가 정체 모를 것에 의해 다시 바깥으로 튕겨져 나오고 말았다.
"심상 속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지?"
━······.
이전석의 물음에도 황룡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그대 말대로 그리 좋은 장소는 아니더군.
곧 그가 나지막이 답했다.
무언가 걸리는 듯한, 찝찝한 말투.
'뭔가 봤군.'
황룡의 눈빛이나 어투가 그러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이상하다.
하지만 그가 무얼 봤는지 이전석으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살성?
그걸 봤다고 이러는 걸까?
글쎄. 이전석은 생각했다.
적어도 그건 아닐 거라고.
그랬다면 황룡이 진즉에 말했을 거다.
그건 대체 뭐냐고.
하지만 지금 황룡은 자신이 본 것에 대해 마치 숨기는 듯한 눈치였다.
정확히는 확신이 없어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이전석이 본 황룡의 눈빛은 그러했다.
그것은 무언가 볼 걸 안 될 것을 보고 망설이는 자들의 시선이었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다, 당신은 볼 때마다 굉장한 것··· 아, 아니, 분들을 얻어 오시는구려.
문득, 장소영이 그리 말해왔다.
영체이기 때문일까.
그도 황룡이 보이는 듯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화산에서 가져온 물건들이다. 정리 부탁하지."
정확히는 화산의 보물고에 있던 물건 중 절반을 가져왔다.
전부 다 가져온다 해도 쓸 곳이 마땅히 없었고, 그곳이 텅 비게 된다면 곤란한 건 최은하였으니까.
이전석으로서도 나름 자제한 것이다.
물론 절반 뿐이라 해도 영풍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알겠소.
장소영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선하다.
하긴 토지신이라고 한들 일개 망자에 불과한 그로서 황룡은 절대적 신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전석은 차차 선반에 정리되어 가는 아이템들을 뒤로한 채 영풍고의 벽 한쪽에 손을 얹었다.
'매번 포탈 게이트로 나가는 것도 성가시고··· 이참에 입구를 만들어 놔야겠군.'
결계를 조작해 구멍을 뚫고, 흙더미를 밀어내며 계단과 같은 입구를 형성한다.
━······영맥이 풍성하군.
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황룡이 말했다.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마나를 흘렸다.
━현세에 몇 없는 영물들의 거처거든.
그 말과 함께 주변에 대리석이 둘러진다.
결계의 효과를 이용한 환상이었다.
계단의 양쪽 벽에 횃불이 타오르고, 어스름하게 어둠을 밝히기 시작한다.
이전석은 그 사이를 지나 뻥 뚫린 구멍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갔다.
'문은······ 적당히 결계로 덮어두면 되겠지.'
어차피 자신 이외엔 딱히 들를 사람도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철제문의 형태를 취한 결계에 각종 방어 장치를 마련했다.
협회장실과 지하 감옥에 설치된 것과 비슷한 묘리를 마도술로 펼친다.
아마 이전석을 제외한 제 삼의 인물이 이곳에 들어서면 미로와도 같은 계단이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경보.
이전석에게 침입자가 있음을 알려주는 함정을 설치한다.
단지 마나를 실처럼 벽과 벽 사이에 이은 게 전부다.
다만 누군가 저것을 끊고 지나가면 즉시 이전석이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이젠 아주 살림을 차리는구나."
영풍고의 입구를 결계로 꾸미고 있자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주리천이었다.
"복잡스럽다면 최대한 자연에 묻어나는 디자인으로 바꿀까요?"
"아예 없애겠다고 하진 않는구먼?"
"이러는 게 더 편하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창고에 관한 허락은 이미 맡았고, 문만 더 추가로 설치하는 게 전부잖습니까."
"하여간···."
쯧쯧-.
주리천이 혀를 찼다.
그가 보기에도 이전석의 뻔뻔함이 꽤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주리천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석장을 냅다 이전석에게 집어 던졌다.
"······이건 갑자기 왜?"
짤랑-.
이전석이 석장을 잡아들며 물었다.
석장에서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태창을 볼 수 없어 정확한 효과는 모르지만, 아마 도술의 사용을 보다 매끄럽게 해주는 법구일 테지.
무엇보다.
━뛰어난 법구로군.
줄곧 생각에 잠겨 있던 황룡조차 석장에 시선이 끌려 한 마디를 내뱉을 정도였다.
"이래 뵈도 도화선이라 불리는 놈이다. 백 번 고개 숙여 감사해도 모자랄 은혜를 받고서 모른 체할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아."
주리천이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하게 말했다.
딱히 은혜를 입히겠단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서 이걸 주시겠다는 겁니까? 법구는 도사에게 심장보다 중요한 무구일 텐데요."
"괜한 걱정이다. 어차피 나는 은퇴한 몸이야."
"은하한테 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도사이기도 하지만 본질은 검수에 더 가깝지. 석장 같은 불필요한 무기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할 게야. 내 손녀에겐 딱히 도술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애물단지밖에 안 되는 물건이라는 소리다. 그럴 바엔 은인에게 주는 게 낫지."
"그렇다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전석이 석장을 등 뒤로 집어 던졌다.
무심한 듯 했지만 그의 손을 따라 흘러간 마나가 결계를 조작해 영풍고의 입구를 열었다.
석장이 마치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듯 수납된다.
"이제 어떻게 할 테냐?"
그때.
주리천이 나지막한 어조로 물어왔다.
이전석은 영풍산의 출구로 발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개인적인 용무 좀 볼 생각입니다."
스텔라가 다시 연락을 줄 때까지 할 일이 있었다.
뭐, 할 일이래 봤자 집 구경을 하는 게 전부지만.
"그러냐."
주리천은 거기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한여름에 대해선 딱히 뭐라 토를 달지 않았고, 그는 의외로 한여름을 손주 돌보듯 대해주고 있었다.
최은하에게도 그러했지만 주리천은 의외로 정에 약한 듯 보였다.
이윽고 주리천의 초가집을 나온 이전석이 축지를 사용해 서울로 되돌아갔다.
그는 곧장 김백동에게 연락을 남겼다.
완공된 집을 보고 싶다는 문자 메시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이 도착했지만.
━최근 협회 내부에서 일이 많아 당장 안내를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보안이 중요시 되는 만큼 다른 헌터를 보내드릴 수도 없고···.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에는 협회 안쪽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뭐, 그거야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긴 했다.
그래서 그는 담담히 김백동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럼 간단한 주소만 주시죠. 저 혼자 보겠습니다.
이전석은 굳이 안내인이 필요할 정도로 길치도 아닐뿐더러, 인력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 드는 부자들처럼 고상스런 성격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고작 집하나 보는데 굳이 안내인까지 필요하겠는가.
━알겠습니다.
이윽고 김백동이 주소를 포함해 간단한 약도가 포함된 문자를 보내왔다.
주소를 보니 협회에서 마련해준 집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 있었다.
그렇게 주소와 약도를 따라 길을 걷던 도중.
우웅-.
휴대폰이 진동을 울리며 또 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
━참, 그리고 조만간 헌터님의 헌터증이 재발급 될 예정입니다. 내부에서 헌터님에 대한 등급 측정을 다시 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더군요. 다만 A급 이상은 오직 실적을 통해서만 성급이 결정되는 만큼, 따로 시험을 보러 나오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아직 헌터시험이나 승급시험도 재개되지 않은 마당에 이전석의 헌터증만 재발급이라니···.
아무래도 파벌이 나뉘어 갈등이 빚어지는 협회에서도 이전석에 대해선 여전히 중요한 논제로 다뤄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최강오를 일격에 죽이고, 이제는 SSS급에 오른 최원율을 죽였단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후자는 단순 소문이라 치부할지언정, 전자는 이미 영상이라는 명백한 증거까지 있었다.
최소 S급의 강자.
그런 그가 여전히 A급에 머물러 있다면 등급 간의 차이나 구분이 어그러질 지도 몰랐다.
"여긴가?"
이전석이 휴대폰 속 약도와 주변 지형을 대조해 보며 한 건물을 바라봤다.
서울 강서구에 자리한 3층 주택.
흡사 저택을 연상케 하는 외형과 꽤 큰 크기의 정원이 딸려 있다.
그리고 그 저택을 주변으로-.
'······5중 결계가 쳐져 있군.'
겹겹이 쌓인 결계의 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중결계조차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기술임을 고려한다면, 협회측에서 해당 주택을 짓는데 적잖이 많은 투자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아직 가구나 살림살이는 무엇 하나 들어와 있지 않지만, 그와 비견해 방어시설만은 돈을 돈대로 들이부은 것 같아 내심 어이가 없어졌다.
심지어 지하에는 던전 폭주가 발생해도 몬스터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방공호마저 존재했으니···.
식량은 대량 반년 치가 존재하며, 방공호의 외벽은 S급 몬스터조차 쉬이 뚫을 수 없는 강도로 만들어져 있다.
"이 정도로 신경 써줄 줄은 몰랐는데."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어이가 없어질 지경.
물론.
━궁(宮)이라 부르기엔 초라하지만 임시로 거할 장소로선 안성맞춤이로구나.
황룡이 보기엔 그저 그런 수준인 모양이다.
이전석은 밖으로 나와 집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궁이 아니라 집이야."
━왕에겐 궁이 곧 집이니라.
뭐, 굳이 따지면 맞는 말이긴 했다.
다만.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건데, 왜 계속 나를 보고 왕이라 하는 거지?"
━왕을 왕이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칭하겠는고. 신격을 지닌 자는 모두가 왕이며, 황제가 될 자격이 존재 하니라.
"황제?"
━흠···. 그러고 보니 계약자, 그대는 인간이니 모르겠구나.
반투명한 황룡의 형상이 마치 승천이라도 하듯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말했다.
━삼도육계의 유일한 지배자. 그 이름은 황제이며, 상제이고, 또한 절대신격이라 부르는 존재이니라. 모든 신은 황제가 될 자격이 있으니 왕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지.
황제.
이전석은 그 단어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신격을 지닌 자들은 모두 왕으로서 황제··· 아니, 옥황상제가 될 자격이 주어지는 모양이지?"
━그러하다, 인간의 왕이여.
황룡이 다시 이전석의 곁으로 돌아와 수긍했다.
덕분일까.
이전석은 천계가 왜 문을 닫고 인간이 초월자로 진화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경쟁자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을 테니까.
'인간이나 신이나 다를 게 없군.'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가 악한 것은 아니고, 신이라고 해서 누구나 고결한 것은 아니다.
깨달음.
세상의 진리와도 같은 이치.
그것을 눈치챈 순간, 이전석은 자신의 내부에서 신격이 배 이상으로 부풀어 올랐음을 느꼈다.
아마 레벨도 같이 올랐을 것이다.
S급부터는 단순 깨달음만으로도 레벨이나 스탯이 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며 황룡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작 몇 마디 나눈 것으로 깨달음을 얻는가?'
진실을 아는 것과 그 아는 것에서 깨달음을 얻는 건 명백히 다른 영역이다.
방금 황룡이 한 말을 다른 이가 듣는다면 어떨가.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영역으로 이르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아마 대부분은 그렇구나, 하고 대충 넘기고 말 것이다.
감탄하거나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그뿐이다.
지식을 깨달음으로 체화하는 건 명확한 재능의 영역이었고, 이전석은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내고 있었다.
'이 자라면··· '천명(天命)'에도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군.'
황룡은 조용히 깨달음을 정리하는 이전석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4화
파밀리아 (1)
"헌터가 되면 그 뭐냐··· 마나? 그것만 사용하면 CT나 MRI같은 걸 찍지 않고도 몸속의 장기들이 어떤지 다 알 수 있는 거냐?"
병원 휴게실.
이한석이 텅 빈 콜라캔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말했다.
이전석은 지금 어머니의 병문안을 와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어머니- 한유리의 상태를 보고 이현석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방금 이전석은 아직도 깨어날 기미가 없는 한유리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상 없음'이었다.
뿐이랴.
한유리의 몸에선 여전히 환골탈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작해야 엘릭서 한 방울일 뿐이다.
그 효과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유리의 몸은 크게 변해 있었다.
고작 한 방울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 그녀의 육체는 D급 헌터와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육체는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으니.
가끔 포션이 잘 듣는 체질이 있다고 하던데···. 한유리도 그런 걸까?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애당초 그게 아니고선 말이 안 됐다.
예상외의 상황이긴 하지만 나쁠 건 없다고 이전석은 생각했다.
안 그대로 몸이 허약해 자주 병에 들어 고생하던 어머니였으니까.
"헌터라고 전부 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녜요."
이전석은 뒤늦게 음료 캔을 악력으로 찌그러트린 뒤 쓰레기통에 버리며 답했다.
흔히 신체감지라고도 불리는 그 기술은 기척감지와 같은 0서클 마법이다.
다만 서클의 유무와는 별개로, 그것은 마법에 관한 것과 더불어 의학에 대한 지식도 적잖이 지니고 있어야만 사용가능한 고난이도 마법이었다.
의학술이 없이 신체감지를 사용하면?
마나가 체내 장기나 신경을 건드려 쓸데없는 질병이나 부상을 유발할 수 있다.
하물며 심장 같은 주요장기를 건드리면?
'죽는 거지, 뭐.'
이전석이야 전생에 특성으로 의학지식을 얻어 무리 없이 사용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네가 뛰어나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뭐, 대충 그렇죠?"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한 게 참 누굴 닮았는지······."
"아버지 아들이 아버지를 닮죠, 누굴 닮겠어요."
"한 마디도 안 지는구만."
"이것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그건 네 엄마 닮은 거야, 임마."
"음······ 잘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말싸움으로 이긴 적이 없긴 하네요."
"쯧쯧-."
이한석이 혀를 찼다.
이 빌어먹을 놈의 아들은 부모를 너무 쏙 빼닮아서 문제였다.
하필이면 저 입놀림까지 지 엄마를 닮을 건 또 뭐람?
"근데 아버지 병원은 괜찮으세요?"
문득, 이전석이 그리 물어왔다.
병원.
이한석이 원장으로 있는 작은 내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도 명색이 의사이긴 했으니까.
"모아놓은 돈은 많으니까 괜찮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쉬면······."
"그렇게 걱정되면 다치지 말고 돈이나 잘 벌어 와라."
"안 다치고 잘 벌고 있어요."
이전석이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이한석은 제 아들을 빤히 훑어보았다.
확실히 다친 곳은 하나도 없었다.
기자회견장에 끼어들어 싸우는 모습을 봤을 땐 이지혜랑 같이 아주 기겁을 했는데, 이렇게 무사한 걸 직접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걱정이라···. 나도 부모 다 됐네.'
이한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언제 철이 들 거냐는 잔소리를 듣던 그였다.
그런 자신이 이제는 자식을 낳아 걱정하고 있으니 감상이 새로웠다.
"그러고 보니 첫 월급 받고 용돈을 드린 적이 없네요."
"그랬나?"
"그랬죠."
원래 첫 월급은 부모님께 페이백 해드리는 거라 했다.
"조금 드릴게요."
"얼마 줄 건데?"
이한석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의외로 그는 금전욕이나 물욕이 강한 편이었다.
애당초 그것 때문에 의사가 되지 않았던가.
능력이 부족해 큰 대학병원에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식이 A급 헌터인 자식이 돈을 준다고 하니 기대가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1억 드릴게요."
이전석이 터무니없는 금액을 불렀다.
이한석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 여긴 거다.
"이놈이, 그런 큰돈이 어디 있다고···."
"여기 있죠?"
이전석이 제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화면에 비추어진 금액을 본 이한석은 무심코 놀라고 말았다.
45억.
얼마 전 시간이 조금 있을 때 최승철의 창고에서 턴 아이템을 몇 개 가져다 판 결과였다.
"······TV에서 보긴 했다만, 우리 아들이 돈을 많이 벌긴 하는구나?"
"그걸 보셨어요?"
"허구한 날 TV뉴스에 나오는데 안 보는 게 더 힘들지."
하긴, 그것도 그렇다.
애초에 더 숨겨봤자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가족이 안심해 주면 그걸로 됐다.
타닥-.
이전석은 휴대폰 화면을 두들겼다.
직후.
이한석의 휴대폰이 알람을 울렸다.
이한석은 자신의 통장으로 이체된 1억을 보곤 입을 떡 벌렸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
1억.
1억이라니.
"앞으로는 우리 집에서 네가 왕이다."
이한석이 제 아들의 어깨를 두들겼다.
마치 가장의 무게를 전달하듯이.
그때.
"그럼 왕명으로 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전석이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양 입을 열었다.
"저희 이사 가요."
이사?
"이러려고 준 뇌물이구만?"
이한석은 아들의 의도를 이해한 듯 보였다.
그들의 집은 평소 이한석이 애지중지 아끼던 것이었으니까.
집만은 한유리의 잔소리에도 포기하지 않던 이한석이다.
그런 그에게 이전석이 나지막이 말했다.
"협회에서 준비해 준 안전한 집이 있어요. 던전이 폭주해도 등급에 따라 반년까지도 버틸 수 있고··· S급이라도 일주일은 안전하게 구조를 기다릴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외부에서 빌런들이 침입할 수 없게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고요."
"······."
이한석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으나, 곧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마치 체념한 듯한 모습.
생각보다 너무 쉽게 허락해 줬기 때문일까.
도리어 이전석이 되묻고 말았다.
"그래도 되나요?"
이한석은 본능적으로 호주머니에 넣어뒀던 담뱃갑에 손이 갔지만,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걸 깨닫고 재빨리 손을 털어버렸다.
"나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최근 화산에서 일으킨 전쟁.
중국에선 고가 내려오고 있다.
하물며 각지에서 이런 혼란을 방자해 일어나는 사건들까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이야. 이런 마당에 고집만 피운다고 상황이 해결되진 않지. 이사··· 그래, 가야지, 이사."
근데.
"이사보다 피난을 가는 게 낫지 않겠냐?"
이한석이 이전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은 너무 번잡스러워서 네 엄마가 일어나는 대로 캐나다로 떠날 생각이었거든."
"캐나다면··· 작은 아버지가 사시는 곳이네요?"
"그래. 걔 집에서 잠시 머물다 상황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지."
확실히.
S급 몬스터를 상대로도 버티는 집이라곤 하나, 중국에선 무려 칠대 재앙급의 몬스터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한석이 걱정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조만간- 아니, 아마 며칠 내로 토벌될 거예요."
이전석이 돌연 그런 말을 해왔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마치 이전석 자신이 고를 토벌하겠다는 말로도 들렸기 때문이다.
※ ※ ※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병실에 돌아가던 차였다.
이전석은 문득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보고, 이한석과 길을 달리해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우리 길드장이 너 좀 만나고 싶대.
"벌써 이야기가 끝나셨나 보네요?"
━우리 길드 회의가 빠르게 진행되는 편이거든. 쓸데없는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해야 하나? 하나 같이 실속적인 것들만 좋아하는 양반들이라···.
스텔라가 수화기 너머로 그리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시간 나면 미국에 한 번 들러. 가능하면 이번 주 내로 오면 더 좋고. 출국날짜를 정해주면 우리 쪽에서 전용 비행기 보내줄 테니까······.
"오늘 바로 갈게요."
이전석은 곧장 그녀와 약속을 잡았다.
할 일이 따로 더 없는 건 아니지만, 고가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마당에 더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음···. 뭐, 빠르면 나야 좋지. 그럼 지금 바로 전용기 보내줄 테니까 인천공항에서 그거 타고 와.
그렇게 이전석의 미국행이 빠르게 결정되고, 그는 주체하지 않고 병원을 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고라면 조만간 토벌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이전석 자신의 손으로 말이다.
※ ※ ※
인천공항.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들이 이전석을 맞이하고 있다.
왼쪽 가슴에 산맥과도 같은 모양의 배지를 찬 이들.
그것은 파밀리아를 의미하는 증표였는데, 아무래도 이들이 스텔라가 보낸 안내인인 듯싶었다.
"이전석 헌터님 되십니까?"
"예."
"모시겠습니다."
그들은 마치 경호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전석을 둘러싼 채 공항으로 들어갔다.
직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모였다.
안 그래도 피난민으로 꽉 들어찬 공항이다.
거기에 보호를 받는 것처럼 검은 정장의 사내 여럿을 대동하고 들어오는 이가 있다면 당연히 이목이 쏠릴 것이다.
하물며 보호를 받는 이가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어? 저 사람 혹시······."
"······흑영(黑英)이다!"
"검은 영웅!"
곳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와, 실제로 보니 포스 장난 아닌데?"
"S급 헌터는 원래 다 저런 건가?"
"게다가 주변에 있는 경호원들은 파밀리아 헌터들이야!"
"파밀리아면 만마의 권좌가 있는 곳이잖아? 흑영도 고 때문에 미국에 가는 건가?"
중얼거림, 수군거림, 흥미와 의문이 묻어난 외침들.
반면.
'시끄럽네.'
이전석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결계를 펼쳤다.
은밀- 정확히는 외부에서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소리만을 지워버리는 결계.
그러자 순식간에 안식이 찾아왔다.
사람들이 연신 입을 놀려댔지만 이전석은 그들이 무어라 말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대신이라는 듯 내부에서 옅은 소리가 들려왔다.
꿀꺽-.
긴장감에 침을 삼키는 소음.
이전석을 경호 및 안내하던 파밀리아 소속 헌터들은 하나같이 긴장을 머금고 있었다.
이유라면 다름이 아니다.
'결계의 수준이 무슨······.'
'S급도 흉내 내지 못할 수준이야.'
'이게 준 SS급이라 평가되는 흑영···.'
'우습게 볼 게 못 되는군.'
이전석은 그들의 시선을 느꼈으나 무시했다.
이윽고 그는 파밀리아 덕분에 여권도 없이 프리패스로 출국장을 지나갈 수 있었다.
활주로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한 파밀리아의 전용기.
그 앞으로 다가가자, 금발의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흑영."
검은 정장에 새까만 선글라스.
"저는 파밀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헌터님의 안내를 맡게 된 제임스 론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제임스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가 인사차 손을 내밀어 왔다.
이전석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겁니다만, 그 흑영이라는 건 뭐죠?"
제임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공항에 막 들어왔을 때 일반 시민들도 이전석을 더러 흑영이라고 불렀다.
"혹시 모르십니까? 요즘 사람들이 헌터님을 부르는 이명입니다. 검은 영웅- 줄여서 흑영."
"······오글거리는 걸 잘도 붙여대네요."
"그런 시대가 아닙니까."
이전석은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적귀든, 흑영이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일단 출발부터 하시죠."
"알겠습니다."
곧 그가 파밀리아 전용기에 올라탔다.
가장 호화롭게 장식된 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자 비행기가 천천히 이륙하기 시작했다.
'뭐든 한다고 했지.'
그걸 보며, 이전석은 스텔라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벽에 대한 것을 듣기 위해 내건 조건.
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가 버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말은 쉽게 말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이전석은 과연 뭘 부탁하며 좋을지 생각하며 점점 높아지는 비행기의 고도를 음미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완전히 이륙했을 무렵.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이전석이 앉아 있던 좌석으로 다가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5화
파밀리아 (2)
제임스 론은 파밀리아 소속의 S급 헌터다.
길드장인 안드레의 보좌관을 맡고 있으며, 그에게는 유독 특별한 취미가 하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안드레를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헌터들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시험이 아니라 관찰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흑영에 대한 소식은 먼 나라인 이국에서도 적지 않게 들리는 편이죠."
제임스가 앞좌석을 돌려, 이전석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이전석은 딱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 짧은 한마디만을 내뱉을 뿐.
보통 이런 말을 하면 자신을 더 과시하거나, 아니면 부끄러워하며 겸손을 부리거나 어떤 반응을 보이기 마련인데···.
'명성에 별 관심이 없는 타입이군.'
그렇다면 명예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류의 헌터들은 대게 자유로운 성향이 강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한다는 의미다.
설령 사람들이 자신을 더러 손가락질 한 대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제 갈 길만 가는 타입.
물론.
'명성이나 명예가 아니라 돈이라면 어떨까?'
사람이라면 반드시 검은 욕망이라는 게 존재하기 마련이다.
돈이 아니라도 힘을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힘이 아닐지언정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었다.
제임스는 타인의 그런 감정들을 들춰내는 걸 좋아했고, 은연히 자신이 아는 정보를 흘려 상대방을 유도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기자회견 영상은 저도 봤습니다. 대단하시더군요. S급 헌터를 일격에 죽일 정도의 실력···.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 호주와 러시아측 길드에서 헌터님과 관련된 발언을 했더라죠."
제임스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각종 기사를 읊었다.
비단 호주와 러시아만이 아니다.
다양한 길드가 이전석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고 있으며, 개중에는 수천억 단위의 계약금을 주고서라도 데려오겠다 표명한 이들도 있었다.
그뿐이랴. SS급 아이템을 주겠다는 길드도 보였다.
한국 정부나 헌터협회, 그리고 북한에서 벌어지는 상황으로 아직은 눈치만 보는 모양이지만.
"아마 곧 그들도 헌터님께 접촉을 해오지 않을까 싶군요."
거기까지 말한 제임스가 다시 이전석을 바라봤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눈빛도 떨리지 않고, 시선도 줄곧 창밖을 응시하고만 있을 뿐이다.
'돈이나 아이템··· 이런 것도 별 관심이 없다는 건가?'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돈이 많아서 싫어하는 사람은 없고, 들어오는 돈을 마다할 사람은 더욱 없었다.
하물며 그게 아이템이라면 어떨까?
특히 등급에 따라 강함의 한계가 정해지는 헌터들에게 아이템은 돈보다 더 탐욕스런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전석은 그조차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으니.
'이상하군.'
사람이 이렇게까지 욕심이랄 게 없을 수가 있나?
순간 그런 생각을 한 제임스지만, 그는 곧 이야기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최근 한반도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는 칠대 재앙 고.
"그나저나, 헌터님의 가족분들은 괜찮으십니까? 이미 피난을 마치셨는지 모르겠군요. 고가 한반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 민간인은 잠시도 버티기가 어려우니···. 혹시라도 걱정이시라면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이봐."
이전석이 드물게 입을 열었다.
제임스가 채 말을 잇기도 전이었다.
드디어 반응이 있는 건가 싶었는데.
"······!"
제임스는 무심코 소름이 돋고 말았다.
계속 창밖을 응시하던 이전석의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자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바라만 봤다면 이렇게까지 움츠러들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무슨 살기가······.'
눈동자로부터 발아한 살의가 전신을 옥죄어 오는 것처럼 제임스를 압박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비행기가 살기에 영향을 받아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난기류를 만난 것처럼 흔들리는 기체.
"무슨 일이십니까?!"
"제임스님!"
때문일까.
살기에 반응한 파밀리아 소속 헌터들이 기겁을 하며 제임스와 이전석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살기의 주인이 이전석이란 사실을 깨닫고···.
착-!
차락-.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런 멍청이들이.'
이만한 살기를 받고 겁을 먹은 건 알겠지만, 선뜻 무기를 꺼낸 그들의 반응에 제임스가 급히 소리쳤다.
"괜찮다!"
"하, 하지만······."
"괜찮으니 너희들이 있어야 할 자리로 가 있어."
"······알겠습니다."
헌터들이 뒤늦게 무기를 추스르며 물러났다.
어느새 주변에는 다시 이전석과 제임스만이 남았다.
"제가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제임스가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자 했다.
무엇이 이전석을 이리도 화가 나게 만들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일단은 저 살기를 가라앉히는 게 먼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말을 채 잇기도 전이었다.
"다른 건 다 좋아."
이전석이 턱을 괸 채 말했다.
"나를 시험하든 말든 상관없어. 그쪽이 어떤 지랄 맞은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니까. 조금 귀찮긴 하지만 스텔라님의 얼굴을 생각해서 들어줄 순 있어.
"윽······."
제임스가 침음을 흘렸다.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심장이 살기에 의해 쥐여 짜이는 것만 같았다.
'미친······.'
제임스는 내심 욕설을 지껄였다.
간과했다.
우습게 보고 말았다.
아무리 강해도 고작해야 SS급 초입 수준이라 여겼다.
그 정도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라도 바보가 아니다.
정도를 벗어난 강자에게 자신의 못돼먹은 취미를 들먹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정도를 벗어난 수준이 아니야. 이건 마치··· 마스터와 비슷한······.'
그런, 절대적 강자와 같은 기백.
"하지만 무엇이든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너는 방금 그 선을 넘을 뻔했고."
선.
그렇다.
이전석에게 있어 선이란 가족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런 가족을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이 이전석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건······ 죄송합니다···."
제임스가 애써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의 미숙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을 얕잡아봤고, 그의 마음을 떠보다 결국 화를 불러오고야 말았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일단 한 번은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존칭으로 되돌아온 이전석의 말투.
그러나 그 살기는 여전히 제임스를 압박하고 있다.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제가 이 비행기를 추락시키지 않기를 기도하십시오."
이전석이 섬뜩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경고했다.
그에 제임스는 무심코 침을 삼키고 말았다.
긴장감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만일 이전석이 비행기를 떨구고자 한다면 막을 수 있을까?
"······."
모르겠다.
귀인을 모시는 비행기인 만큼 내구도는 꽤 높은 편이지만, SS급 수준의 헌터가 날뛴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었다.
즉 비행기의 추락을 막기 위해선 제임스가 압도적인 힘으로 이전석을 제압할 수밖에 없는데···.
'불가능.'
제임스는 순식간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동급 수준의 헌터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발생하면 주변피해가 막심한 마당에 SS급 수준과의 싸움을 압도한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결국 이전석이 하고자 한다면 이 비행기에 있는 모두가 죽게 될 거란 소리다.
'끄응···.'
제임스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안드레는 '감당할 수 있으면'이라는 조건으로 하에 그의 취미를 인정해 줬다.
하지만 지금은 명백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분명,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다시 말 해 인과응보라는 소리였다.
※ ※ ※
미국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제임스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살기에 겁을 먹은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제임스는 이전석의 맞은편 좌석에 앉은 채 떠날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비행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래도 일은 해야지 않겠는가.
"길드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임스가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길드전용 차량에 이전석을 태우곤 운전대를 잡았다.
비행기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어색한 기류가 둘 사이에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을까.
차량이 어느 큰 빌딩 앞에 멈춰 섰다.
아니, 이걸 그냥 빌딩이라 표현해도 될까?
수백 층은 족히 넘을 법한 높이의 마천루.
마치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처럼 우뚝 솟아나 미국의 랜드마크로서 빛을 발하고 있다.
파밀리아의 길드는 미국에서도 자랑하는 곳으로, 이 빌딩을 보기 위해 들르는 관광객만 매년 수십만에 달할 정도였다.
하긴 이 정도의 높이라면 누구나 궁금해서 보러오고 싶어질 것이다.
"왔구나?"
그런 거대한 빌딩 앞으로 다가가자 스텔라가 마중 나왔다.
그런데 이전석과 제임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본 그녀가 표정을 찌푸렸다.
이내 제임스를 노려보는 스텔라.
"너 또 그 짓거리 했어?"
확신에 찬 물음이 제임스를 향한다.
제임스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면목 없습니다."
"하아."
스텔라가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름 중요한 손님이라고 일러뒀는데도 평소 버릇을 못 버려 결국 일을 내고 말았으니.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스텔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과했다.
그 직후.
"스텔라님?!"
"아무리 제임스님께서 잘못하셨다고 해도 외인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뇨!"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기겁하며 반응했다.
파밀리아의 부 길드 마스터인 스텔라.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임으로.
그러나.
"너희는 닥치고 있어."
"아, 알겠습니다···."
"······."
스텔라는 도리어 이전석에게 이를 드러내려는 헌터들을 마나까지 흘려내며 짓눌렀다.
"다들 극성이시군요."
"···극성이지."
이전석의 말에 스텔라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수긍했다.
"최근에 시스템이 사라졌잖아? 그것 때문에 모두 더 예민해졌어. 이대로 자기들이 가진 힘까지 사라지는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누구는 과하게 화를 내고, 또 누구는 그 불안함을 다른 쪽에서 달래려고 하지."
스텔라가 제임스를 노려봤다.
이전석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희미한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상태창의 소실로 인한 불안감은 많은 헌터와 일반인들 사이에 존재했다.
스텔라의 말대로 시스템의 부재가 힘의 상실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헌터들이 힘을 상실하면?
칠대 재앙과 갖은 던전 사고에 대응할 수 없게 되겠지.
"내가 볼 땐 정말 의미 없는 걱정인데 말이야."
스텔라가 옅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이다.
비록 시작은 시스템이라고 한들 각성자가 가진 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에 새겨지는 일종의 낙인과도 같다.
이전석도 죽은 뒤 저승에 떨어졌을 때도 힘만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명계에서 난리치다 죄도 더 많이 쌓였지.'
결국에는 시왕의 압도적인 격으로 짓눌러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당시 이전석은 인간 세계는 물론 차사들 중에서도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그를 손쉽게 제압한 걸 보면 격과 신격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은 나도 신격을 가졌지.'
아마 이 상태로 전생과 같이 힘을 기르면 어떻게 될까.
'전생에서도 시왕보다 크게 힘이 뒤떨어지는 느낌은 아니었어.'
그저 격의 차이가 너무나도 커다래 대항할 수 없었을 뿐.
그렇다면 신격을 얻은 지금은 어떨까.
이전석은 그 사실이 못내 궁금했다.
"그래도 제임스한테도 일단 너에 대해 말해두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 말을 가볍게 받아들인 모양이야."
한참 생각을 반복하고 있을 무렵, 스텔라가 그리 말해왔다.
글쎄.
딱히 그건 아닐 거다.
제임스에겐 이전석을 화나게 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말은 이전석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 전부였다.
탐욕을 드러내 보고 싶다는 의도가 있긴 했지만, 제임스로선 나름 자제하고 이전석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푸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단지 그러다 우연히 이전석의 역린을 건드렸을 뿐이다.
그냥, 운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쟤는 길드 본사에서 지방으로 좌천될 거야.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짓을 했으니 당연하지."
"그래도 길드장의 보좌관인데 그렇게 쉽게 좌천시켜도 됩니까?"
"안 될 건 또 뭐있어?"
스텔라가 빌딩으로 들어가며 되물었다.
이전석 또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주변 헌터들이 스텔라를 보곤 물러서며 마치 왕을 대하듯 고개를 숙였다.
한때 마피아였던 그들이었기에 위계질서가 더욱 또렷이 드러나는 듯했다.
"원래 우리 길드 보좌관이 자주 바뀌는 편이거든."
스텔라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녀는 752라 적힌 버튼을 눌렀고, 그 즉시 엘리베이터가 옥상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할배··· 마스터 기조야. 정확히는 우리 길드 가훈이지. 자유를 주되 스스로가 그것을 방목이라 착각하지 말라."
다시 말 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목이라 생각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면 바로 좌천시키는 구조인 것이다.
"마스터는 정말 가족 같은 사람이 보좌관으로 있길 원하거든. 그래서 보좌관에게 방목과도 같은 자유를 주는 거야. 그러고선 기조에 반하는 잘못을 저지르면 지방으로 좌천시킨 다음,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는 거지."
방목- 혹은 자유 속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보좌해줄 가족과도 같은 존재.
스텔라는 안드레가 그런 이를 찾기 위해 이런 식으로 수없이 보좌관을 갈아치우고 있다 설명했다.
"제임스도 우리 가족이긴 하지만, 그 질 나쁜 취미가 문제였지. 그래서 언젠가는 사고를 칠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그 대상이 하필이면 이전석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마스터도 그냥 확실하게 규칙을 세우는 게 좋을 텐데."
연신 한숨을 쉬는 스텔라.
그와 동시에 푸념을 들먹인다.
"뭐, 그래도 은원은 확실한 사람이니까 이번 일을 들먹이면 뭔가 좋은 거라도 주지 않을까?"
흡사 언질이라도 해주는 듯한 어투에 이전석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뭐라도 뜯어내라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할배는 아픈 맛 좀 봐야 돼. 그놈의 고집 때문에 손님한테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해버렸잖아."
이해하지 못할 소리는 아니다.
마스터의 기조로 인해 정작 중요한 손님에게 피해를 끼쳐버렸으니.
스텔라로선 답답하기만 할 것이다.
물론 안드레 본인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긴 하겠지만.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고, 스텔라가 어느 거대한 문을 가리켰다.
이전석은 파밀리아 소속 헌터들이 열어주는 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헌터협회보다 배 이상 넓은 사무실.
그 중앙.
"반갑네, 흑영."
하얗게 센 머리와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노장이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이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는 길에 작은 사달이 있었다지?"
벌써 소식이 전해진 걸까.
그가 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6화
파밀리아 (3)
"만나서 반갑네, 흑영. 오는 길에 작은 사달이 있었다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큰 풍채에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노인이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석은 그가 바로 파밀리아의 길드장이자 한때 뒷세계를 주름 잡았던 거대 마피아의 보스 '안드레 위즈덤'임을 눈치 챘다.
세간에선 흔히 '화염의 권좌'라고도 불리는 노인.
불이라는 현상을 제 몸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안드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파괴의 화신이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그의 불꽃과도 같은 눈매에 겁을 먹기 마련이건만.
"사달이 있긴 했죠."
이전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로 어깨를 으쓱이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안드레의 옆을 지키던 여성이 눈썰미를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안드레의 비서인 모양.
파밀리아에선 마스터를 지키는 두 헌터가 존재했는데, 그중 보좌관과 달리 비서는 각종 잡다한 업무와 더불어 경호를 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전석의 가벼운 태도가 고깝게 여겨지진 않는 듯했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쓸 이전석이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비서의 시선을 무시하곤 안드레를 바라봤다.
"그 녀석이 자네의 신경을 꽤 크게 건드린 모양이야."
그 녀석.
제임스 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제임스를 대신해 사과하겠네. 혹 원하는 거라고 있는가? 부하의 잘못은 마땅히 상관의 잘못이기도 한 법이니, 내가 대신 보상하겠네."
"생각보다 너그러우시군요."
"제임스가 자유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휘둘렀다지만, 그걸 손에 쥐어준 건 정작 나 자신이지. 잘못을 했으면 마땅히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게 마땅한 도리 아니겠는가."
너그럽다.
과연 그 말 대로였다.
보통 그와 같은 위치에 있으면 인종이나 나이를 막론하고 오만과 거만을 덧입기 마련인데, 안드레에게선 그러한 것들이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폭발하는 화산처럼 패도적인 기운을 지니고 있으나, 그곳에서 흘러내린 용암은 마치 잔잔히 흐르는 물살처럼 부드럽다.
전생에서도 느꼈던 거긴 하지만······.
'하여간 신기한 양반이야.'
이토록이나 상반되는 기운을 동시에 지닌 인간은 전생이나 현생을 통틀어 이전석으로서도 그다지 보지 못한 경우였다.
"뭐, 보상을 해주신다면야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고···."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다문 이전석.
이내 그는 마침 잘 됐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정 미안하시면 제 통장에 돈이나 조금 꽂아주시죠."
그에 안드레는 내심 놀란 눈치였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보통은 보상이나 선물을 준다고 하면 급 높은 아이템을 부르기 마련인데, 이전석은 그런 것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템 같은 건 원하지 않는 겐가?"
"그런 건 이미 충분해서."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화산의 보물고를 절반이나 털었다.
SS급 아이템은 물론, SSS급인 황룡상마저 취한 마당에 달리 아이템이 필요할 리 없었다.
물론 안드레가 성검을 준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그건 미국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실질적으로 미국을 지배하는 안드레라 해도 그만한 물건을 쉬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우호 관계를 확실히 해달라는 것도 무리한 부탁이죠. 안 그런가요?"
"허허, 눈치가 좋은 청년이로구먼."
안드레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아무리 제임스가 자네에게 잘못을 범했다고 한들 우호적 관계라는 것은 쉽게 결정지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오히려 이런 걸 빌미로 우호 관계를 다지고자 했다면 안드레는 이전석과의 대화를 바로 끝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 일은 파밀리아의 마스터로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겠네."
"돈만 제대로 챙겨주시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전석은 일부러 거만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줄곧 옆에 서있던 비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가 누굴 더러······."
"라나."
그때, 안드레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이다.
순간 안드레로부터 퍼져 나온 기운이 그녀의 말문을 틀어막은 것이다.
"또 내 얼굴에 먹칠을 할 샘이냐?"
"하지만, 보스···."
"라나, 자네도 제임스와 같은 곳으로 이사 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말하게. 나는 너희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이 내 권한을 앞서도 된다는 것은 아닐세."
"······죄송합니다."
라나라 불린 비서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안드레가 다시 이전석을 바라봤다.
"자네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또 생겼군."
이전석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비서가 눈치 없이 굴고, 주인이 그에 대해 사과하고···.
'의도했나?'
틀림없었다.
이 상황은 안드레가 미리 라나라는 여성과 말을 맞춰둔 게 분명했다.
'내 성향을 보려고 했군.'
제임스와 같았다.
아마 제임스도 안드레가 이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과연 이전석이 부하의 무례에 어떻게 반응하고, 상사의 사과로부터 탐욕을 얼마나 드러낼 것인가.
그러한 것들을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일 테지.
단지 안드레나 제임스가 간과한 한 가지는, 이전석이 그들의 의도를 몰라볼 정도로 머저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그들의 의도를 샅샅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거만을 덧입은 채 비서를 도발한 게 아니던가.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전석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직후 안드레의 눈이 빛을 발했다.
'머리가 좋구나.'
자신들이 말을 맞춰뒀다는 걸 예상하고 그에 대해 떠보는 판단을 했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깡이 좋으며, 거만하다 느껴질 정도로 시원하다.
꽤 마음에 드는 청년이었다.
적어도 안드레가 느끼기엔 그랬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허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 하네만······."
이내 그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스텔라가 이번 길드 회의에서 자네를 언급했지. 파밀리아와 '친우'를 맺기에 합당한 사람이라면서 말일세."
안드레는 회의에 있던 내용을 일부 늘어놓았다.
"언행은 차가워도 선뜻 타인을 도와주는 친절함. 손속에 자비가 없을지언정 그런 악랄함이 죄 없는 자들을 향하는 경우는 없다지."
그의 말 대로였다.
이전석에게는 명백한 선이 존재했다.
자기 자신만의 신념이라고 해야 할까.
하물며.
"스텔라 그 아이는 자네의 뛰어난 무력을 손에 꼽더군. 자네와 우호 관계를 맺어서 절대 나쁠 게 없을 거라고 말일세. 그 말에 개인적으로 자네에 대해 조금 알아봤네만······."
안드레가 비서에게서 종이 뭉텅이를 받아 들었다.
이전석과 관련된 정보가 적힌 서류들이었다.
그것을 하나둘씩 넘기며 살펴보던 안드레는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스텔라가 말한 대로더군. 이제껏 자네의 행보는 조건과 제약이 있을지언정 사람을 돕고 구하는 영웅의 길이었어. 악인을 죽여도 민간인은 죽이지 않는 명백한 선이 존재함은 물론, 그 신념을 뒷받침할 강한 힘도 지니고 있지. 한국의 헌터협회에서는 이미 자네를 준 SS급으로 보고 있다는 소문마저 돌더군."
툭-.
안드레가 서류를 소파 앞 탁상에 내려놓았다.
"회의에서 대부분의 간부들이 자네에게 흥미를 보였네. 이 정도 인재라면 친우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가까운 사이로 지내도 나쁠 게 없다는 의견이 분분했지. 우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말일세."
안드레의 말.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말에는 격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친우라는 존재로 똘똘 뭉친 파밀리아는 정말 성가시기 짝이 없는 존재였고, 이전석 또한 사흘 밤낮으로 그들을 상대하며 꽤나 고전했었기 때문이다.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라는 것은 그만큼이나 든든한 존재였다.
물론 그 믿음을 과연 서로가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흥미가 동했고, 그렇기에 자네와 대면하길 원했지. 그러니 우선 물어보겠네. 자네는 우리 파밀리아와 친우가 되길 원하는가?"
뒤이어진 안드레의 물음에 이전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무실에 침묵이 내려앉았으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파밀리아와 등을 맞대는 관계과 된다면 좋지만······ 솔직히 친우가 되지 못한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이전석이 솔직한 심경을 입에 담았다.
파밀리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분명 그만한 이점이 존재했다.
세계랭킹 1위의 길드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반대도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파밀리아가 위험에 처한다면 이전석으로서도 그걸 마냥 무시하기가 어렵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와줘야만 한다.
사실 그걸 생각하면 파밀리아와의 관계는 친우보단 적절한 동맹과도 같은 관계가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럼 왜 이전석은 굳이 이 자리에 왔는가.
안드레와 대면하지 않고 미국에 오지 않고서도 그들과 동맹관계를 구축하는 건 스텔라를 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그건 다름 아닌 칠대 재앙 고 때문이었다.
현재도 계속해서 한반도로 내려오고 있는 거대 몬스터.
이전석은 파밀리아를 이용해 놈을 죽일 셈이었다.
물론 그걸 곧이 곧대로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
"애당초 말이 우호적이고 친우지, 그와 같은 신뢰가 어디 한날한시에 생긴답니까?"
이전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에 안드레가 즐거움이 묻어난 어조로 되물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온갖 신비가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가?"
거기까지 말한 안드레가 비서에게 손짓했다.
직후, 비서가 사무실 한쪽 벽면에 장식되어 있던 한 쌍의 건틀릿을 가져왔다.
전생에서 본 적이 있기에 이전석은 그게 무엇인지 바로 직감했다.
"······론과 아즐리."
건틀릿이라는 형태를 취한 쌍둥이 에고 무기.
"이것을 아는가?"
안드레가 비서로부터 건틀릿을 받아 들며 물었다.
그의 시선에 의외라는 눈치가 다분해 보였다.
"유명하니까요."
"맞는 말일세."
안드레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젊을 적부터 함께 해온 그의 쌍둥이 무구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내 특성은 성화일세. 강렬한 불꽃을 일으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
그가 건틀릿을 양손에 착용하며 말했다.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파괴적인 특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성화에는 한 가지 효과가 더 숨어있다네."
순간.
안드레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창과 문, 벽에 걸린 장식이 흔들린다.
이전석은 본능적으로 아공간에서 참격의 단도를 꺼내 들었다.
"불꽃을 지정한 상대에게 붙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효과지."
이전석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안드레는 마음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감정에 가까웠다.
생각을 읽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감정의 변화를 통해 진실과 거짓을 분별해 낼 순 있다.
그렇기에 안드레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종종 성화를 사용해 강제로 신뢰를 얻어내곤 했다.
다만.
"근데 그걸 굳이 이런 방식으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폭발적으로 솟구쳐 잦아들 기미가 없는 기세에 이전석이 단도를 바로잡으며 물었다.
안드레는 어깨를 으쓱이며 허허 웃었다.
"뭘, 개인적으로 궁금했을 뿐일세."
이윽고 그가 두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자세를 잡았다.
"세간에 나도는 '화룡검의 죽음'이 정말 자네의 짓인지 말이지."
콰앙-!
굉음이 터져 나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안드레는 사무실 바닥을 깨부수며 이전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수수한 디자인의 철 건틀릿이 바위처럼 날아든다.
이전석은 그것에서부터 피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막 SSS급에 올랐던 최원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미 SSS급이라는 경지에 무르익어 완전히 제힘으로 다듬어낸 안드레는 이전석이 보기에도 강하다고 표현할 만큼의 괴물이었다.
쿵-!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진다.
안드레가 휘두른 주먹에 사무실 벽이 무너진 것이다.
이전석은 광폭화와 짐승화를 사용해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였는지, 옆머리 몇 가닥이 흩날렸다.
"하."
이전석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길드 건물을 그렇게 막 부셔도 됩니까?"
"내 집을 내가 부수는데 문제라도 있겠는가."
맞는 말이긴 했지만.
"명색이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휘말리면 어쩌시려 그러십니까."
"그들이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이미 사전에 피난시켜뒀으니. 스텔라, 그 아이에게 결계를 쳐달라 했으니 싸움의 여파가 외부로 새어 나갈 걱정도 없을 걸세."
"철저하게 준비했군요."
"자네 같은 사람을 보면 못 참는 성격이라서 말이네."
"과연 스승님과 친하게 지내는 이유가 있었군요."
"검선 말인가? 허허, 그녀와는 한때 라이벌이라고도 불렸지."
"알만 하군요."
검선의 과거 이명은 투귀.
그만큼 싸움을 즐겨 했으며, 그건 안드레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성격이 가장 잘 맞는 이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주 뭉치거나 싸웠으며, 그때마다 세간에선 두 사람을 숙적- 혹은 라이벌이라 부르곤 했다.
"그러니 얼마든지 덤비게나. 사양할 필요 따윈 없다네."
안드레가 건틀릿을 낀 손을 까딱였다.
그 위로 주홍빛 불꽃이 화륵 타올랐다.
성화.
모든 것을 정화하고 불태우는 빛.
그것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위압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얼마든지라···.'
본래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화룡검의 죽음을 알고 싶다?
이전석이 알 바가 아니다.
그의 즐거움도 아무렴 상관 없었고, 이전석으로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SSS급과 싸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
그것도 목숨을 걸지 않은 대련이라면 더더욱.
하물며 같은 무투파라면···.
'시험해볼 수 있겠군.'
지금, 자신의 무위는 어느 수준인가.
한 달 전과는 다르다.
연선화를 상대할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작은 생채기를 낸 게 전부.
그 또한 연선화는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신격을 얻은 지금이라면 어떨까.
잔재주를 사용하지 않은 자신의 순수한 무력이 SSS급에게 얼마나 통할지 궁금했다.
"그럼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지요."
이전석이 자세를 잡았다.
진혈도법.
그가 직접 창시한 무학.
그에 안드레가 즐겁다는 듯 마주 웃었다.
"그거야 당연······."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음?"
안드레가 돌연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이놈, 갑자기 기운이······.'
굶주린 늑대를 마주한 듯 흉포하게 터져 나오는 기백.
격이라고조차 할 수 없는 기운이 마나와 뒤섞여 검붉은색으로 사무실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SSS급인 자신조차 소름이 돋는 감각에 안드레게 뭐라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전석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소름이 끼치도록 기기괴괴한 웃음.
살의가 마치 수백, 수천의 칼처럼 사방에서 피부를 찌르고 들어온다.
특별한 진법으로 과거를 재현한 영향일까.
그의 살의는 이전보다 더욱 짙고 날카롭게 벼려져 권좌인 안드레마저 심상치 않다고 느낄 정도로 패도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탓-!
이전석이 발을 박찼다.
안드레는 이전석과의 대련을 잠깐의 여흥으로 치부하는 모양이지만, 이전석은 이 싸움을 그렇게 단순하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의 감정에 어울려줄 이유가 없다고 해야 할까.
단순 자신의 무위를 시험하고자 위함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이전석은 파밀리아를 통해 칠대 재앙에 속한 고를 죽여 그 핵을 취할 생각이었으니.
'죄송하지만, 이 상황··· 이용 좀 하겠습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7화
파밀리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