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79화
저승사자 (1)
[특성을 '일부' 갈취합니다.]
'음?'
눈앞에 떠오른 창에 이전석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설마 직접 죽이지도 않았는데 특성을 빼앗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환수로 살행문을 도륙했을 때조차 이렇지는 않았다.
'특이 효과···. 소환수가 아니라 내가 간접적으로 간섭해야 발동하는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일부라······.'
이전석은 그 말을 되뇌며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을 바라봤다.
[특성 '강화(B)'를 획득하셨습니다.]
S에서 B로 낮아진 등급.
이름도 절대강화에서 평범한 강화로 바뀌었다.
생각보다 많이 바뀌었으나, 애당초 시스템은 특성의 일부를 획득한다 했으니 따지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효과는······.
━
강화
등급 : B
효과 : 모든 육체능력을 소폭 강화하나, 5분 뒤 24시간 동안 의식을 잃게 된다.
━
'이건 뭐······.'
상태창을 본 이전석은 내심 어이가 없어졌다.
모든 스탯을 올려주는 것도 아니고 육체를 소폭 강화할 뿐임에도, 그 대가로 무려 하루 동안이나 의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실로 지뢰나 다름없는 특성이었다.
'아니지······.'
그러나.
'양도로 넘겨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천살성의 새로운 능력 중 하나, 양도.
그걸 굳이 소환수에게만 쓸 필요가 없다.
굳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특성을 넘겨줄 필요가 있나 싶어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만약, 전투 중 적에게 이걸 넘겨버리면 어떻게 될까.
'특성 강제발동'이라는 해괴한 특성이 있다.
이전석이 알기로 여명회의 어떤 S급 빌런이 가진 특성이었다.
그것과 조화하면 꽤 괜찮은 시너지가 발휘될 것 같았다.
아니면······.
'전생의 나는 천살성의 영향으로 의식을 잃으면 심상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번 생에는 잠을 자는 게 불가능해 그게 불가능했지.'
한 번 들어갔던 적이 있으나, 고독에 의해 강제로 의식을 잃었을 때가 전부였다.
무엇보다 심상세계에선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의식이 고스란히 살아 있으니···.
'이 특성으로 강제로 심상세계에 들어가 놈들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것도 괜찮겠어.'
굳이 현실에서 정보를 얻자고 고문이나 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다.
물론.
'한 번 들어간 이상 24시간 동안 계속 의식을 잃고 있어야 하는 게 문제로군.'
물론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특성 강제발동처럼 세상에는 별 이상한 특성이나 아이템이 널려 있었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업상점만 해도 '존재하는 모든 것'을 취급한다지 않은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최승철의 절대강화로부터 얻게 된 강화.
처음에는 꽝이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활용도가 많았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테냐?"
문득.
주리천이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레 나타났기 때문일까.
최은하는 내심 놀란 듯했으나, 주리천이 그녀의 머리를 작게 토닥였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위로만 해주는 것처럼.
최은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꾹 참았다.
그러곤 슬쩍 이전석을 바라봤다.
방금 주리천의 물음 덕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이전석은 그 말에 조용히, 미리 준비해 뒀던 자루에 최승철의 머리를 담았다.
"현재 화산에는 은하 씨와 최신을 제외하면 단 한 명도 후계자가 남아 있지 않죠."
이전석은 자루를 갈색 끈으로 묶으며 뒤늦게 입을 열었다.
"최아린이 남아 있긴 하지만 타르타로스에 수감된 사람이 제대로 후계혈전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최원율이나 최신이 폐관에서 나오려면 아직 시간도 좀 걸릴 겁니다."
뚜벅-.
이전석이 최은하에게 다가갔다.
그는 대뜸 최승철의 머리가 든 자루를 내밀었다.
"이걸 들고 화산으로 찾아가세요."
"······네?"
최은하가 두 눈을 껌벅였다.
최승철의 잘린 머리를 들고 화산으로 찾아가라니.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장로들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여전히 망설임이 가득한 어투에 이전석은 날카로운 눈빛을 띠었다.
마치 그녀를 몰아붙이듯.
"화산을 바꾸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럼 지금만큼 적절한 시기도 없을 겁니다. 화산의 늙은 장로들은 최신이 옥좌에 앉는 걸 꺼려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무력도 좋고 정치에 관한 능력도 있지만, 원체 성격이 제멋대로라 장로들은 그가 자신의 제어를 벗어날까 우려하고 있지요."
"그걸 전석 씨께서 어떻게······."
"제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전석은 최은하의 말을 자른 채 묵묵히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장로들은 최신이 옥좌에 앉는 걸 꺼려한다는 사실이죠."
최신은 모든 후계자 중 첫 번째 난 자식으로, 그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을 의심하는 장로는 없었다.
단지 그 이상으로 제멋대로라는 게 문제였다.
막 나간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화산의 중심이 되는 장로들 입장에서 최신은 최원율보다 더 말을 듣지 않는 철부지 아이라는 것이다.
평소 태반의 장로를 적대시하던 그가 옥좌에 앉는다면 자신들의 밥그릇도 빼앗기고 말 테니.
"그러니 장로들도 최신보다 최승철이 옥좌에 앉길 원했을 겁니다. 그래서 최원율도 없이 협회와 정면으로 부딪친다는 말도 안 되는 전쟁을 허락해 줬을 테죠."
최원율이 화산의 모든 결정권을 후계자들에게 넘겼다지만, 전쟁이라는 크나큰 결정을 장로들의 의견이나 허락없이 진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화산이 전쟁을 결심했다는 건 장로들이 최승철의 손을 들어줬음을 의미했다.
"그런 최승철이 지금 죽었으니······."
거기까지 말한 이전석은 다시 최은하를 돌아보았다.
"마땅한 후계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매화라는 정통성을 가진 은하 씨께서 갑자기 화산에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건······."
최은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이전석의 의도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전석은 그녀의 뒷말을 대신 이었다.
"아마 난리가 나겠죠."
단지 난리만 날까?
설마.
장로들은 최승철 대신 최은하를 앞세워 옥좌에 앉히려 할 것이다.
보기 좋게 굴러들어 온 순한 양.
그걸 옥좌에 앉혀두면 추후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화산을 지배하는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리고 화산을 지배한다는 건 대한민국을 지배한다는 것과 같다.
화산이 협회를 무너트린다면 곧 그리될 테니 말이다.
"결국, 은하 씨가 선택해야 하는 건 하나 뿐입니다."
누구의 허수아비가 될 것인가.
화산의 장로들, 마탑의 후손.
그리고 이전석.
슥-.
이전석이 조용히 자루를 내밀었다.
피가 자루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그 아래 바닥마저 흥건하게 적셨다.
비릿한 혈향에 머리가 아파 오는 것만 같다.
"······."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는······ 화산 때문에 돌아가신 희생자분들과 유족분들께 사과하고 싶어요."
어딘가 울적한 어조로 말하는 그녀.
"화산은 과거에 도가였다고 해요. 저는 과거 그런 화산을 되찾고 싶어요."
그에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부탁할 사람이 전석 씨밖엔 없어요."
최은하는 잠시 심호흡을 다졌다.
그러곤 무언가 결심한 듯 굳은 눈빛과 표정으로 입 을 열었다.
"제가 화산의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얼마든지."
생각보다 무게감이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게 도리어 믿음직스러웠다.
이전석에겐 화산의 왕을 만드는 것 따윈 장난감 조립하듯 손쉬운 일이라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결국 최은하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최승철의 머리가 든 자루를 받아든다.
이전석은 말했다.
이걸 가지고 화산으로 찾아가라고.
아마 그때부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다.
왕이 되기 위한 끝없는 사투.
최원율-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자면 지금도 절로 손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그것이 최은하 자신이 결정한 길이고, 유가족들에게 사과할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석으로서도 그런 그녀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
'화산을 집어삼키고 그걸 토대로 고와 여명회를 대비한다.'
당장 그뿐만이 아니라 마탑도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이 정말 수두룩 빽빽했다.
"그럼······."
이전석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최은하에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
이전석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를 향하는 시선.
"······왜 그러세요?"
갑작스런 이전석의 변화에 최은하가 의문을 표했다.
이전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을 뿐.
"어르신."
그때, 그가 주리천에게 물었다.
"그 호리병에 술 남아 있습니까?"
허리춤의 작은 호리병을 향한 시선.
주리천은 텅 빈 호리병을 흔들며 답했다.
"술 말이냐? 그거라면 다 먹었다만······."
"그럼 호리병 좀 잠시 빌리죠."
"뭐?"
"금방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걸까.
주리천은 선뜻 호리병을 건네줬다.
"뭐, 호리병이야 집에 많으니 상관은 없지."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그걸 받아 든 채 축지를 사용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의 모습.
"흠?"
주리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최은하도 갑작스런 상황에 난감한 듯 손에 든 자루를 든 채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주리천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다 근처 그루터기를 가리켰다.
"일단······ 저 위에 올려놔라. 녀석이 돌아오면 알아서 설명해 주겠지."
"아, 네."
그에 조심스레 자루를 그루터기에 내려놓는 최은하.
그녀는 왠지 모르게 주리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죄송해요, 스승님."
"뭐가 말이냐?"
"검······ 스승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건데···."
"아, 그거."
주리천은 최은하가 들고 있던 장검을 바라봤다.
피로 얼룩진 그것엔 최은하의 살의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사과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신경 쓰지 마라. 동네 대장간에서 산 싸구려 검이야."
"하지만 처음으로 주신 검인 걸요."
"······."
주리천은 최은하를 빤히 쳐다봤다.
확실히 착한 아이였다.
단지, 여리고 어리숙하기만 하던 것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조금 더 단단해졌다.
마냥 착하기만 하던 아이가 선하고 강한 검수로 성장한 것이다.
길 가던 승려가 들으면 그 또한 살생이니 죽어 마땅하다 외치겠으나, 이미 파계승이 된 마당에 주리천은 그딴 하찮은 설교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제자의 성장은 스승으로서 경사나 다름없었으니.
'겉보기엔 과격해도···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전석은 최은하를 허수아비 삼으려는 듯 악의적이게 웃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행동은 모든 것이 최은하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를 이곳에 보낸 것부터 그렇다.
최은하는 주리천을 만나지 못했다면 화산 내부의 후계혈전에 휘말려 쥐도 새도 모르게 객사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전석 자신의 의도가 어떻든 분명 감사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다.
주리천으로서도 가계가 끊길 뻔한 도술을 후대에 전할 수 있을 됐으니 말이다.
━리천.
그때.
누군가 주리천을 불렀다.
뇌리를 울리는 그 음성은 다름 아닌 산사의 것이었다.
줄곧 주변에서 지켜보던 그녀가 주리천에게 다가왔다.
최은하가 눈치채질 못한 걸 보니 땅의 영기로 주변을 감싸 기척을 죽인 모양이다.
━그자··· 아니, 그분은 대체 누구시지?
"그분? 갑자기 무슨 소리냐, 산사?"
━이전석.
산사가 그 이름을 읊었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나는 과거에 한 번- 신을 본 적이 있다.
목소리 또한 떨리며, 앞발이 불안에 젖어 지속적으로 땅을 파헤쳤다.
━토지신이나 사방신 같은 신이 아니야. 애당초 우리들은 인간들이 멋대로 신이라 이름 지은 것뿐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라고 할 수도 없지. 허나 내가 막 영풍산의 토지신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저승에서 내려온 어느 한 '신격'을 보았다.
신격.
그 단어를 내뱉은 직후였다.
산사의 하얀 털이 쭈뼛 섰다.
그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떨려오는 것 같았다.
━그건··· 격이 달랐다.
"격?"
의문 어린 주리천의 모습에 산사는 약간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존재로서 가지는 격이 우리와 같은 필멸자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어. 잠깐 눈이 마주친 게 전부였음에도, 나는 그 정체 모를 신격에게 압도되고 말았지. 내가 지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평범한 호랑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산사는 말했다.
그것의 시선은 자신을 생명으로조차 인식하지 않았으며, 길가의 개미보다 못한 하등한 존재를 바라보는 듯했다고.
━허나 그것이 기분이 나쁘긴커녕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그건··· 그야말로 신 그 자체였어. 경외하고 경배해야만 할 존재. 비록 그때 느꼈던 신격보단 작지만······.
산사가 이전석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틀림없이 그분이 지닌 기운은 그때 느꼈던 것과 같은 신격이었다.
신격?
신격이라고?
주리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은 놈이 신이라는 거냐?"
━몰라. 모른다. 아무것도.
단지.
━그럴 확률이 한없이 높을 뿐이지······.
※ ※ ※
산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풍산 구석.
검은 소복에 삿갓을 쓴 사내가 수풀 사이로 어딘가를 지켜보고 있다.
그는 명계에서 내려온 차사였다.
이름은 령(嶺).
흔히 저승사자라 불리는 존재였으며···.
최근, 상부로부터 하나의 명령을 전달 받았다.
━최근 하계에 새로운 초월자가 탄생했다고 한다.
━초, 초월자 말입니까···?
━그래. 우리의 주인과 같이 신격을 지닌 존재.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초월자의 탄생은 5백 년 전 이후로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놈을 감시하고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거 아니겠나. 아직은 그 수준이 극히 미약하나, 법도(法度)를 벗어난 신격은 충분한 위험이자 제재 대상이다. 새로운 초월자가 삼계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일지 감시해라.
감시.
그리고.
━만약의 경우엔 명계에 지원을 요청해 제압하도록.
제압.
령은 그런 명을 받고 하계로 내려와 새로운 초월자가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이전석, 남, 24세. 명부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72세에 교통사고로 사망 예정. ······음? 교통사고?'
명부의 필사본을 살펴보던 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초월자가 교통사고로 죽는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거대하고 단단한 트럭이 덮쳐 온다고 해도 초월자쯤 되는 강자라면 오히려 그 트럭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72세라는 것도 이상했다.
신격을 얻어 초월자가 된 이상 수명은 아무리 못해도 천을 넘길 텐데······.
'그러고 보니···.'
령은 하계에 내려오기 전 상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전석, 놈에 관한 게 전부 불분명해. 정보가 있지만 하나같이 맞지 않아. 모든 게 어그러져 있어. 그 점을 주의해라.
아무래도 불분명하다는 건 명부 또한 포함된 사실인 것 같았다.
'확실히 이상한 녀석이야.'
절대적일 터인 명부의 정보조차 잘못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얻을 수 없는 신격을 손에 넣어 새로운 초월자가 되었다.
'이건 기회야.'
령이 두 눈을 번뜩였다.
법도를 어긋난 새로운 초월자의 탄생.
이만한 존재와 관련돼 새로운 정보를 알아낸다면 필시 막대한 량의 업이 쌓일 테고, 그렇게 된다면 혹 상급의 차사가 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최상급 차사가 되면 명계의 시왕을 옆에서 보필하는 저승군관(監齋軍官)이 될 수도 있었다.
저승군관은 시왕 다음으로 명계에서 제일가는 권력자다.
비록 지금은 일개 중급 차사에 불과하지만, 저승군관이 되면 승천하여 천계에 올라가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그래서 령은 두 눈을 번쩍 뜬 채 이전석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 뭐야? 어디갔지?'
갑자기 이전석의 모습이 사라 졌다.
눈 깜짝할 새에 없어졌다.
명색이 중급 차사로서 하계에선 뛰어난 강자로 취급되는 자신인데도, 이전석의 신형을 도무지 뒤쫒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갔지?'
령이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뭘 그렇게 찾아?"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바로 등 뒤에서.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0화
저승사자 (2)
"······."
순간 적막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꿀꺽-.
령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절로 떨린다.
'이게 초월자······.'
압도적인 격의 차이였다.
얼굴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두려움이 전신을 잠식하는 것만 같다.
다름 아닌 줄곧 하등하고 열등하다고만 여겼던 인간에게 말이다.
"뭘 찾냐니까?"
재차 물음소리가 들려왔다.
장난기가 섞인 음성.
령은 도무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초월자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야.'
치욕이긴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초월자.
종으로서의 벽을 넘어선 그들은 제각기 격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일개 피조물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존재였다.
당연히 그 피조물에는 저승사자인 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싸우는 건 무의미.
애당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전석을 감시하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특이 사항을 발견한다면?
지원을 요청해 '함께' 제압할 것.
홀로 싸워서 제압하라는 건 임무 내용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럼 굳이 싸울 필요도 없었다.
하물며 그는 중급에 오른 차사였다.
싸우는 건 불가능하지만.
'도망치는 것 정도라면······.'
슉-!
령이 삿갓에 손을 얹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빠른 속도로 영풍산을 벗어난다.
그런데.
"······?!"
갑자기 몸이 뒤로 당겨졌다.
바람이 팔과 다리를 잡고 끌어당기듯 휩쓸린다.
쏴아아-!
몸이 수풀을 통과해 그대로 어디론가 빨려갔다.
영체인 그가 바람 따위에 영향을 받을 리도 없건만, 손과 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흡(吸)."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령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한 손에 호리병을 든 이전석이 서 있었다.
수인은 없이 주문만이 존재하지만, 틀림없었다.
'도술!'
그것도 상대방을 호리병 속으로 빨아들여 가둬두는 속박 계열의 도술이다.
'무슨 힘이······!!'
령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호리병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도무지 몸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육(肉)이 존재하지 않는 영(靈)이기 때문일까.
흡의 술법이 더욱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흠··· 설마 고귀하신 저승의 차사분께서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는데······."
"크윽······."
태평하게 뭐라 중얼거리는 이전석.
"차사가 보이는 걸 보니 신격을 얻으면서 영안(靈眼)이 트였나 보군. 간섭력도 전생에서 특성으로 얻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해."
분석당하고 있다.
령이 두려움에 젖은 채 이를 악물었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이전석을 보았을 때 마주한 거대한 살업.
'잡히면 안 돼···.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 보고해야 돼! 저런 게 초월자라니······ 저런 악신(惡神)이 하계에 탄생했다니······!'
삼계의 경각을 달리는 일이다.
적어도 령은 이전석의 존재를 그리 판단했다.
'저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니···!!'
망자를 이끌고 명계의 지옥을 관리하는 차사인 만큼 수없이 많은 죄인을 마주해 왔다.
그러나 저만큼 악과 살로 가득 찬 존재는 차사가 된 4천 년의 세월 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렇기에 더 발악했지만.
"강(姜)."
이전석이 또 주문을 읊었다.
흡과 달리 발동 중인 도술을 강화해 주는 술법이었다.
직후.
"아, 안돼···!"
가까스로 호리병의 흐름을 버티고 있던 령이 순식간에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슈우욱-!
탁-.
삿갓을 쓴 존재가 호리병 속으로 들어오자 이전석은 재빨리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봉(封)."
안에서 뚜껑을 열 수 없도록 도술을 새겨 넣었다.
회색의 술식이 마치 끈처럼 호리병 뚜껑을 휘감는다.
"일단 멀쩡히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잡긴 했지만···."
이전석이 호리병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귀찮은 것들이 꼬였군.'
설마 명계에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간섭해 올 거라곤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그였다.
'명계에서 실종된 차사를 가만 내버려둘 리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호리병에서 꺼내랴?
만약 놈이 이전석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명계에 보고라도 하면 일이 단단히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지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강렬한 확신.
신격을 얻은 이후 아주 가끔 이런 감각이 들 때가 있었다.
신이 된 만큼 미래에 관한 육감(六感)이라도 생겨난 걸까.
"······."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명계와 엮여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이전선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더욱이 아직 화산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 명계의 간섭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그는 아스트로에서 테이밍한 데스 나이트 로드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데스가 가지고 있던 특성을 되새긴다.
영혼지배.
말 그대로 영혼을 지배하는 효과를 가진 특성이다.
저승사자도 따지고 보면 영적 존재니까···.
'되려나?'
의문도 잠시뿐.
'어차피 시간은 없어. 이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고···. 뭐가 됐든 해볼 수밖에.'
곧 결정을 내린 그가 데스를 소환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스켈레톤 한 마리가 어둠을 덧입고 나타난다.
기존의 스켈레톤보다 훨씬 크며, 단순히 데스 나이트라고 하기에도 엄청난 위압감을 지닌 엔데드.
"······."
그가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줄곧 침묵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소환수로서 충성심이 낮아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정작 상태창에 표시된 충성도는 100%였다.
즉 저 과묵한 모습은 데스 본인의 성격이라는 의미다.
'충성도가 높아서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다만······.'
거기까지 생각한 이전석은 이윽고 데스의 상태창을 불러왔다.
(처음 그를 테이밍하며, 데스 나이트 로드를 줄여 데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
데스
등급 : S+
[근력 - 130] [민첩 - 95]
[체력 - 110] [마나 - 184]
특성 : 영혼지배(S+)
충성도 - 100%
━
S+급답게 어마무시한 스탯을 가지고 있다.
근력과 체력은 기존 S급을 한참 뛰어넘었고, 마나는 사실상 SS급이라 봐도 좋은 수준이었다.
순수한 스탯은 이전석보다 월등히 높다.
그렇다면 특성은 어떨까.
'영혼지배.'
이전석은 데스가 가진 단 하나의 특성을 살펴봤다.
━
영혼지배
등급 : S+
효과 : 영혼을 지배하거나 되살려 언데드로 만든다. 그 숫자에 제한은 없지만, 되살아난 언데드가 많을수록 마나가 대폭 소모되며 언데드의 수준이 급격히 떨어진다. 또한 언데드는 마나를 모두 소모하면 다시 영혼으로 돌아간다.
지배한 영혼의 경우, 자신보다 한참 격이 낮다면 영구적으로 자신에게 복속시킬 수 있다.
━
데스가 아스토라에서 그만한 언데드 군단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스트로는 도전자에게 가장 필요한 보상을 준다더니······.
'정확히 지금 내 상황에 필요한 특성이로군.'
아스트로는 정말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걸까?
심지어.
'망자들의 왕보다 한참 상위호환이야.'
다만 영혼지배의 언데드는 어디까지나 소모품에 불과했고, 그 본질은 영혼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언데드 자체를 테이밍하는 망자들의 왕과는 성질이 조금 다른 것이다.
그리고.
'영혼을 지배한다면, 저승사자도 영향을 받겠지.'
확신은 없다.
그렇기에 시험 해보려는 것이다.
"데스."
"······."
"이 안에 든 저승사자를 지배할 수 있겠어?"
이전석이 호리병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황금빛 안광이 호리병을 꿰뚫을 것처럼 지긋이 응시한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데스였으나 곧 입을 열었다.
"······상급이라면 불가합니다. 중급일 경우에도 확률이 낮아 반드시 그럴 것이라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
이전에 비해 훨씬 정중해진 어투.
이전석은 재차 물었다.
"내가 도와주면?"
"······."
고민하듯 고개를 숙인 데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들며 답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능.
그렇다면 됐다.
이전석은 허공에 결계를 새기곤, 천천히 호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직후.
"우왁···?!"
저승사자.
혹은 차사라고도 불리는 존재가 호리병 밖으로 뛰쳐나왔다.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구는 사내.
삿갓이 머리에서 떨어지고, 끈만이 목에 걸려 달랑거린다.
"여, 여긴······."
당황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이내 이전석을 바라봤다.
"당신······."
꿀꺽-.
희미하게 들려오는 침 넘어가는 소리.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사내- 령은 긴장 어린 어투로 말했다.
"저, 저는 저승의 사자입니다. 결코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새로운 초월자가 탄생했다기에 잠시 하계에 내려온 것뿐으로······."
"말이 많군."
"······."
"저승 놈들이 그렇게 생각 없이 사자를 보낼 리가 없지."
"그, 그건······."
정곡일까.
령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과연 그의 말 대로였다.
령이 지금 상황을 명계에 보고한다면, 상급의 차사는 물론 모든 시왕들은 그 시로 이전석을 죽이고자 할 것이다.
하물며 영혼에 깊이 새겨진 살업은 어떠한가.
죽어 영혼이 되어 명계로 흘러간다면 그 막대한 살업을 들먹이며 지옥에 처박으려 할 터.
이전석은 그걸 모르지 않았고, 그리고 그건 눈앞의 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쾅-!
전력을 다해 현장에서 도망쳤다.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는 그였기에 어떤 장애물에도 걸리지 않고 순식간에 영풍산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주리천의 집을 나와 하늘 높은 곳으로 오른다.
그런데.
'······뭐지?'
뭔가 이상했다.
'뒤따라오는 기척이 없어.'
너무나도 쉽게 탈출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지만 여전하다.
초월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당초 그가 이렇게 쉽게 자신을 보내줄 것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기분 탓인가?'
령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기분 탓이지, 그럼 뭐겠어."
키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헉!"
령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안개처럼 사라지는 풍경.
맑은 하늘과 주택가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어느새 그는 다시 영풍산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내가 아무런 대처도 없이 너를 꺼냈을 것 같아?"
"······!"
령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살폈다.
이전석의 말 대로였다.
사방에 결계가 쳐져 있었다.
'이걸 내가 몰랐다고···?'
중급의 차사.
상급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그래도 인간 기준에선 상당한 강자였다.
그런 그가 결계의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은 이전석과 령의 차이가 압도적임을 의미했다.
꿀꺽-.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에 절로 식은땀이 흐른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봤어. 그런데 이대로 멀쩡히 보내 줘도, 그렇다고 마냥 봉인해 두고 있어도 성가신 일이 생길 것 같더라고."
"절대······."
"절대 나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
령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생각을 읽었냐는 듯.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아, 악마······.'
많은 사람이 지옥을 지배하는 자가 악마일 것이라 하지만, 실상 그곳은 죄인을 가두기 위한 감옥에 불과했다.
악마는 저승의 차사들도 두려워하는 신적 존재였고, 령은 이전석에게서부터 그런 악마와 비슷한 위압감을 느꼈다.
"겁에 질린 사람의 생각은 대게 비슷한 법이지."
도무지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혹시 마개조라고 들어봤나?"
"마, 마개조······?"
"지금부터 네 정신을 뜯어고칠 거거든."
령이 의문 어린 눈빛을 띠었다.
그 사이 데스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데스가 영혼지배를 사용합니다.]
"······크억?!"
시스템이 떠오름과 동시에, 데스의 황금색 안광이 마나와 뒤섞인 채 채찍처럼 뻗어나가 령을 옭아맸다.
치직-.
금을 칠한 듯한 정전기가 령의 전신을 내달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광으로부터 비롯된 속박이 점차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역시 데스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군.'
영혼지배는 자신보다 훨씬 약한 상대를 지배하는 특성이다.
그냥 약한 게 아니다. '한참' 약해야만 제 성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중급의 차사는 하계에서 S급 헌터들과 맞먹었다.
그들이 가진 특성을 따지고 보면 사실상 대부분의 S급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라 봐도 좋다.
아무리 데스가 S+급의 강자라도 그리 쉽게 지배할 순 없는 것이다.
그때.
"······주인님."
데스가 이전석을 불렀다.
이전석이 손을 내밀었다.
[신격개방을 사용합니다.]
동시에 손끝으로부터 퍼져나가는 검붉은 기운.
그것이 황금색 빛과 아우러졌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이질감.
그 한 가운데.
"그, 그만···! 제발 그만둬주십시오! 머리가······! 머리가 깨질 것 같······ 끄아아악!!"
령이 마치 고문을 받는 것과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이전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맛있는 먹잇감을 보듯 고통에 울부짖는 령을 바라보았다.
'······차사도 죽이면 업이 오르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뿐.
지금 령을 죽이는 건 악수다.
차사를 죽였다가 수백, 수천의 차사들이 더 몰려오면 본말전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은 놈을 지배하고······.
'철저히 이용하다 죽여주지.'
뒤탈 같은 건 생기지 않도록.
살의가 이전석의 동공에 깃들었다.
그것을 령은 똑바로 보았다.
망자들을 상대하는 차사는 상대방의 업을 보다 더 면밀하게 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전석의 압도적인 살업을 하나도 빠짐없이 령의 뇌리에 쑤셔 넣었다.
'괴, 괴물······! 이런··· 하계에 이런 괴물이······!!'
핏줄이 흰자를 새겼다.
입가로 타액이 흘렀다.
지배에 의한 영향이 아니었다.
이전석이 가진 살업을 그의 뇌가 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채 정신을 잃기도 전.
[당신의 데스가 저승차사 '령'을 성공적으로 지배하였습니다.]
[당신의 소환수가 지배한 영혼은 당신도 자유로이 지배하실 수 있습니다.]
[역사에 다시 없을 위업입니다.]
[차사를 굴복시켰습니다.]
[차사를 지배하였습니다.]
[당신의 뛰어난 명성을 혼백룡의 알이 섭취합니다.]
[혼백룡의 알의 최소 부하등급이 SSS-로 상승합니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우르르 떠올랐다.
동시에,
우웅-.
아공간 내부에서 느껴지는 진동.
'이제 얼마 안 남았군.'
SSS-.
성장도는 이미 아스트로에서 99를 찍었다.
이전석은 최소 부화등급을 최대한 올린 뒤 혼백룡을 세상에 부화시킬 생각이었다.
"자, 그럼······."
이내 그의 시선이 다시 령에게로 향했다.
은은한 황금색 광체로 물든 사내.
광체가 희미하게 데스와 이어져 있다.
동공의 초점이 사라진 걸 보니 지배는 성공한 모양.
"그럼 이제······.'
이전석이 곧장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승사자라는 입장을 생각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이밍이긴 하지만, 화산을 상대하는데 있어 꽤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듯싶었다.
그러나.
띠링-.
말을 채 끝맺기도 전이었다.
[gE#RVGBE@#R@━━━.]
돌연, 악업처럼 짓뭉개진 시스템이 눈앞에 나타났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1화
저승사자 (3)
[시스템이 저승차사를 지배한 것에 대한 특별한 보상을 지급합니다!]
이전석이 눈앞의 창을 쳐다봤다.
차사를 지배한 것까진 좋은데······.
'특별한 보상?'
왜 갑자기 이런 게 나타난 거지?
고작 차사 한 명을 잡았을 뿐이다.
지배?
겨우 그걸로 특별한 보상을 준다고?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하지만 굳이 그런 보상을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기대하지 않을 이유조차 없었다.
시스템은 저런 표현을 마구잡이로 하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말 그대로 특별한 보상일 게 분명했다.
이전처럼 행운으로 인해 혼백룡의 알이 만들어진 것처럼.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바로 오류가 난 듯한 시스템 메시지.
막대하게 쌓인 악업이 그렇고, 일전 신격을 얻을 때도 그랬던 것이 이번에도 눈앞에 나타났다.
이전석은 이게 무엇일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바로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 덕분이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그런데.
[보상이 지급━ 지급━━ 지━ ㅈ@#━━━.]
"······?"
시스템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글자가 짓뭉개지고 흐려지더니, 아예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바뀐다.
[34GT#$GT@RT123r━━━.]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발생한 오류.
[······역시······ 은······ 무···가······.]
역시?
여전히 짓뭉개진 글자는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것은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상이 다른 것으로 대체됩니다.]
[시스템이 현재 가장 당신에게 적절한 보상을 제공합니다.]
[막대한 행운이 찾아옵니다!]
[행운의 영향으로 혼백룡의 알과 드래드노트의 코어가 공명하기 시작합니다.]
"갑지기······?"
너무나도 갑작스런 변화였다.
이어, 이전석은 아공간에서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아공간에서 두 물건을 꺼내 들었다.
하나는 혼백룡의 알이다.
익숙하디 익숙한 것.
또 다른 하나는 수정과 같은 모습의 구였다.
━
드래드노트의 코어
등급 : SS+
SS급 던전 드래곤이 멸망하는 세계의 핵. 드래곤 로드 '드래드노트'의 하트로 구성된 물질이다. 마르지 않는 막대한 마나는 마기조차 뛰어넘는 순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 힘을 취한 자는 오랜 구전에 의하면 로드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알려진다.
━
드래곤 하트.
순백룡 드래드노트의 심장.
상태창의 설명에서 보면 알 수 있듯, 협회장이 취하라 했던 그것이다.
SS급 던전의 핵 말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모양새가 특별하지 않았고, 크기 또한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정말 이게 핵입니까?
━생각보다 작다 여겼느냐?
━예.
━나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단다. S급 던전만 해도 핵의 크기는 20층 빌딩과 비슷한 높이와 면적을 가지고 있으니.
협회에서 나오기 전.
잠시 지하 깊은 곳에 들러 핵을 마주한 이전석은 연선화와 그런 대화를 나눴다.
━허나 제자 너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작은 핵에 담긴 힘은 S급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란다. 괴팍하고 기이하며, 또한 파멸적이지. 각성하지 못한 사람은 이 장소에 발을 들이기만 해도 압도적인 마나에 중독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야.
연선화의 말대로 고작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핵은 그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전석은 곧장 그걸 취하긴 했지만······.
그 힘이 생각보다 막대하여 제대로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물론 당장에 흡수하려면 할 수는 있었다.
다만.
'그랬다간 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데 며칠은 계속 운기만 해야 했을 거야.'
화산과의 싸움에 직면한 작금의 상황엔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밑에 형성된 영맥만 그대로 내버려둔 채, 핵을 아공간에 챙겨두고 나왔는데······.
두근-.
왼손에 들린 알이 맥박 쳤다.
심장박동이 피부를 타고 전해져 온다.
적단도와 공명했을 때와 똑같다.
때문일까.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알의 표면에서 연기와도 같은 검붉은 기운이 새어 나온 것이다.
이내 그것이 오른손에 들린 작은 수정구- 드래드노트의 코어를 집어삼켰다.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뿐만이 아니다.
이전석은 오른손바닥에 느껴지던 감촉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검붉은 기운이 코어를 집어삼킨 채 그대로 흡수한 것이다.
[혼백룡의 알이 드래드노트의 코어를 흡수하였습니다.]
[혼백룡의 알의 최소 부화등급이 EX로 격상합니다!]
[혼백룡의 알이 막대한 마나 에너지에 과부화를 느낍니다.]
[혼백룡의 알이 힘을 완전히 체화하기 위해 잠에 듭니다.]
"······."
이전석이 작게 헛웃음을 흘리며 혼백룡의 알을 쳐다봤다.
아무리 시스템의 영향이 있었다곤 하지만.
'별걸 다 먹는군.'
특성까지 먹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던전의 핵까지 먹다니.
부화했을 때 대체 뭐가 되려나 싶었다.
다만.
'핵의 힘이 너무 커서 당장에 나도 흡수하기가 까다로웠는데··· 오히려 잘된 걸지도 모르겠어.'
어차피 혼백룡의 알은 이전석 자신의 무기와도 같다.
혼백룡의 알이 더 높은 등급과 힘을 가진 채 부화한다면 이전석으로서도 나쁠 게 없는 셈이었다.
두근, 두근-.
기감을 집중하자 알 안쪽에서 이전보다 조금 희미해진 심장박동이 들려온다.
확실히 잠에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상태창은?
'······딱히 변한 건 없군.'
이전에 시스템이 떠오른 대로 최소 부화등급이 EX로 오른 걸 제외하면 별 다를 건 없었다.
'이쯤 되면 정말 뭐가 태어날지 궁금하긴 하군.'
혼백룡이란 생애 처음 들어보는 이름.
특성은 물론 던전의 핵마저 섭취했으니···.
'절대 평범한 드래곤이 나오진 않을 거야.'
이미 혼백룡이 무병생물이란 건 알고 있다.
무기이면서 동시에 드래곤이기도 한 것.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전석은 직감적- 혹은 육감적으로 혼백룡의 알이 드래곤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진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신격을 얻은 이후로 가지게 된 미래예지와도 같은 확신.
그런 감각이 또다시 가슴 한편에 자리한 것.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아직 부화할 기미가 없으니···.
슥-.
이전석은 곤히 잠든 혼백룡의 알을 다시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아직 부화등급은 최고치에 오르지 못했고-.
무엇보다 지금은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름이 뭐지?"
영혼이 데스에게 지배되어 초점이 사라진 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차사에게 이전석이 물었다.
그러자 차사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령이라고 합니다, 대주인님."
대주인.
아마 이전석이 데스의 주인이기에 그리 부르는 것이리라.
소환수의 피지배인은 이런 식으로 취급 되는구나 싶었다.
'같은 지배물로서 공유할 수 있다는 거로군.'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
비록 데스를 통해야 한다지만 영혼지배라는 특성이 하나 더 이전석에게 생긴 것과 같으니.
"왜 나를 찾아왔지? 네가 아는 모든 걸 말해라."
이전석의 명령에 차사- 령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천계에선 아주 오래전 하계에 어떠한 장치를 가했습니다."
장치?
"그 장치는 하계의 인간이 초월자로 거듭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그들이 결코 벽을 넘어 신격을 얻지 못하게 만드는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그런 게 있었군."
이전석은 령이 말한 벽- 방어기제가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한계점'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생에서도 레벨업을 할 때마다 강해지긴 했지만, 무언가가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
그게 천계에서 해놓은 장치라는 말인가.
"왜 천계에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건 모릅니다. 차사는 물론 천군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기밀인지라······. 아마 천신(天神)분들이라면 무언가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신이라면 천계의 신들인가?"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시왕분들과 같이 천계를 관리하는 신격이십니다. 옥황상제님 직속으로 삼계육도를 수호하는 명을 받고 계신 분들이죠."
"과연."
고개를 끄덕인 이전석이 재차 물었다.
"천계에서 초월자가 탄생하는 걸 막는 이유는 그렇다 쳐도······ 너는 왜 나를 찾아온 거지? 봐도 좋은 의도로 찾은 건 아닌 것 같다만."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명령?"
"법도를 벗어난 신격은 충분한 위험이자 제재대상이기에···. 그래서 대주인님을 감시하고 특이점이 보이면 즉시 보고하라는 명이었습니다." "법도라···. 아마 그 법도라는 건 천계에서 만든 방어기제를 뜻하는 걸 테고."
거기까지 말한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다시금 령을 바라봤다.
"너 혼자 거짓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할 수 있겠나?"
"가능합니다."
령은 곧장 대답했다.
입을 여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다.
다만.
"명백히 법도를 어긋난 초월자임에도 아무런 특이점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명계에서 대주인님을 더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군."
"허나 제게 계책이 있습니다."
"음? 계책?"
뜬금없는 령의 제안에 이전석이 의문을 표했다.
'하긴, 최면이 아니라 지배니까.'
이성과 지성은 남아 있고, 기억과 경험도 있으니 그 나름대로 이전석을 위해 짜낼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것이다.
"그럼 말해봐."
이전석의 말에 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명계에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지원이라.
이전석은 잠깐 그에게 신격을 흘려보냈다.
지배가 풀렸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데스에게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즉 령은 이전석에게 해가 될 만한 제안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계속 말해봐."
"알겠습니다."
령이 재차 말을 이어갔다.
"애매모호한 보고로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주인님께서 지원차 도착한 차사들마저 지배하신 다음, 지금 제가 하는 것과 똑같은 애매모호한 보고를 하게 만들면 됩니다. 한 명의 지속적인 애매모호한 보고는 상부에서도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다수가 똑같이 진실 된 보고를 한다면 상부에서도 이상을 알아차리기까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됩니다."
"······오호."
령의 말에 이전석은 내심 감탄했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은데?"
"인간 시절이었을 때 하버드를 수석으로 졸업했었습니다."
인간?
그 말에 의외로 이전석은 놀람을 내비쳤다.
저승사자가 한때 인간이었다니.
그건 그조차 예상치 못하던 사실이었다.
수천 년.
무간에 갇혀 있으면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헌데 어째서일까.
마치 인간을 경멸하는 듯한 그들의 태도가 떠올랐다.
━하등한 놈들이야.
━우리와는 다르지.
━그놈들은 그저 사육당하는 가축일 뿐이고, 우리는 선택 받았어.
'인간은 사나 죽으나 똑같군.'
저승의 사자가 되었다고 자신이 무언가 특별한 존재가 생각해 산 사람을 깔보고 업신 여기는 모습.
참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우습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이상으로 가증스럽다.
"그럼 차사는 모두 인간인 건가?"
이전석의 나지막한 물음에 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명계의 주민이나 망자로 이루어진 중하급 차사와 달리, 최상급의 몇몇 차사는 '아담의 열매'로부터 태어나 시왕의 보좌관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들이 줄줄이 새어 나오는군."
아담의 열매.
이전석으로서도 들어본 적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 아담의 열매라는 건 뭐지?"
"아담의 열매란······."
령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치직-.
그의 몸에 전류가 흘렀다.
"쿨럭···!"
그러다 돌연 그가 피를 토했다.
영체인데도 피가 흐르는 걸까?
그보다.
'거부반응······!'
이전석은 령의 상태를 금세 파악했다.
전신에 따가운 전류가 흐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입에서는 피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경련하는 모습.
어떻게 봐도 금제로 인한 경련이었다.
차사에게 금제라니.
게다가 평범한 금제도 아니다.
'저주······.'
한때 천계와 명계를 뒤흔들어놨던 '악마왕'의 힘이라 알려진 이질적인 권능.
그게 왜 저승의 차사에게서 느껴지는가.
악마왕과는 앙숙과도 같은 그들에게서.
의문과 흥미과 동시에 올라왔으나 아쉽게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쯧-.
혀를 차며 표정을 찌푸린 이전석.
"데스!"
그가 다급히 데스를 불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2화
계획
령이 영풍산을 나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그는 명계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방법은 모르지만 우주를 통해 저승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전석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했어.'
금제(禁制).
그것이 발동하며 령의 영체가 소멸하려 했던 것.
다행히 데스의 도움으로 금제를 멈출 수 있었다.
없앤 건 아니다. 단지 영혼지배의 특성을 이용해 금제의 발동을 강제적으로 멈췄을 뿐.
다시 이전과 같이 트리거가 걸린다면?
주저 없이 금제가 발동해 령을 소멸의 길로 인도하고야 말 것이다.
'평범한 금제가 아니었어.'
령의 머리를 신격으로 뒤져보며 알게 된 사실이다.
마치 자물쇠처럼 머릿속에 걸려 있던 금제.
그것은 이전석도 얼핏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무간에서 끝없는 고통을 받으며 차사들에게 들었던 어떤 존재의 힘 말이다.
'···저주.'
한때 천계의 군단장으로서 만의 군사를 이끌던 존재였으나, 어째서인지 지옥에 떨어져 그곳의 시왕들마저 무릎 꿇리곤, 이제는 심연 깊은 곳에 투옥되었다 알려지는 악마왕의 권능.
정확히는 그런 악마왕의 사도가 주로 사용하는 게 바로 저주라는 이질적인 기술이었다.
이전석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르는 것 또한 아니었다.
무간에서 차사들을 통해 들은 정보가 있었고, 전생에서도 악마왕의 사도라 주장하는 것들이 활개 친 적이 잠깐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그때는 활동을 시작한지 석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놈들이 전부 사라졌지만······.'
당시 악마왕의 사도들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전 세계에서 사라졌다.
문제는.
'차사에게 저주를 걸었다고?'
도대체 누가? 왜?
저주라면 명계의 시왕들이 몰라볼 리 없다.
한때 그들에게 치욕과 모욕을 준 존재의 권능이다.
어떻게든 뿌리를 뽑아 없애버리려 했을 터.
그렇다면-.
'알고서도 저주를 방치한 게 되는데······.'
이전석은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명계라는 곳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곪아 있는 세계인 듯싶었다.
뭐.
'령이 다른 차사를 데려오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명계가 정말 악마왕의 힘을 악용할 정도로 타락했는지.
"일단 돌아가야겠군."
이전석은 그리 말하며 데스를 역소환했다.
그리고 주리천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음?'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했다.
━······.
산사가 이전석을 발견한 직후.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배를 땅에 댄 게 완전히 굴복한 듯한 모습이었다.
반면 주리천은 어떠한가.
눈빛이 이전과 다른 기묘한 감정을 띠고 있다.
악감정인 것은 아니다.
그건 얼핏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좋은 감정도 아니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시면 똑바로 하시죠."
결국 이전석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주리천은 잠시 주저하는 듯했으나 곧 어쩔 수 없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그래, 똑바로 물으마. ······너, 혹시 신이냐?"
"신?"
주리천은 작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했지. 저승의 왕이 품을 만한 기운을 가지고 있질 않나, 영혼을 본다고 하는 영물들이 너를 보곤 겁을 먹질 않나···. 그런데 이제는 산사조차 너를 보더니 신을 느꼈다고 하더구나."
신.
신이라.
이전석은 잠시 산사를 쳐다봤다.
어쩐지 아까부터 유달리 저자세더니······.
이전석이 신격을 얻은 걸 눈치 챈 듯했다.
따지고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니다.
영물은 격과 같은 영적인 힘에 보다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토지신급 영물인 산사라면 두 말 할 필요도 없겠지.
그래서.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까?"
"네가 신인지 묻는 거다. 빌어먹을 명계 놈들처럼."
"제가 아니라고 하시면 믿으시겠습니까?"
이전석이 도리어 되물었다.
주리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못 믿는다."
그렇겠지.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대답.
믿을 수 있을 리가.
"그냥 리천님 마음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리천님이 보기에 제가 신이면 신인 거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그런 거겠죠. 굳이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신이라고 해서 화산을 무너트리는 사실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신인들 인간인들 바뀌는 건 없다.
주리천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
화산에게 복수하고 유일한 손녀와 제자를 지키는 거였다.
"리천님은 그저 제가 신호를 드리면 전에 말씀드렸던 결계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신호라면?"
"때가 되면 아실 겁니다."
"때라······ 후우- 그래, 알았다."
주리천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이전석의 말대로 변하는 건 없었다.
이전석이 사전에 말했던 결계를 사용해 그가 화산의 장을 죽일 수 있도록 도우면 된다.
'어쩌면 악마와 계약을 해버린 걸지도 모르겠어.'
이전석의 무기질적인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무심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당분간 은하 씨 좀 빌리겠습니다."
그때, 이전석이 재차 말해왔다.
"은하 말이냐?"
"예. 최승철을 죽였으니 이제 화산으로 돌아가야죠."
"마음대로 해라."
"흠?"
이전석이 주리천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쉽게 허락해 주시네요?"
"허락하고 하고 말 게 있을까. 애초부터 화산을 무너트리기 위해선 은하가 화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전제조건이지 않았느냐."
"그랬죠."
"허면 마음대로 하거라. 은하가 가겠다면 내가 말릴 생각은 없다."
그 말에 이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던 최은하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거리인 덕분일까.
방금 대화는 못 들은 것 같았다.
대신 그녀는 최승철의 시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늘한 주검이 된 오라비의 모습에 이제와 동정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표정을 보니 딱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걸로 오라버니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을까요?"
나지막한 어투로 이전석에게 묻는 최은하.
이전석은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씁쓸함이 찰나의 바람이 되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충분히 되었을 겁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그림자가 드리웠을 때쯤 이전석이 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이 세상에 귀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을 한을 품었든 말든 죽은 즉시 저승으로 향해 그곳에서 법의 심판을 받는다.
지옥에 가든 천국에 떨어지든, 그게 아니면 환생을 하든지.
아마도, 그들의 한이 위로를 받는 일은 영영토록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고스란히 말하랴?
적어도 이전석은 그렇게까지 쓰레기가 아니었다.
거짓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그건 분명 진실이다.
하다못해 최은하에게는.
"감사해요. 전부··· 전석 씨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최은하가 미소를 지은 채 이전석을 돌아봤다.
당연히, 이전석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딱히 그녀를 위해 했던 일은 아니었던고로.
"이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죠?"
최은하의 불안 섞인 물음.
이전석이 발걸음을 옮겼다.
다름 아닌 피 묻은 자루가 올려져 있던 그루터기로.
"화산을 먹어야죠."
이전석은 그 자루를 다시 최은하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걸 가지고 화산으로 찾아가시면 됩니다. 길은 제가 따로 열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화산 본관에서 장로들을 모으도록 하세요. 그리고 최승철의 머리를 내보이며 지금부터 제가 해드리는 말을 똑같이 하십시오."
"······."
최은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침 삼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지진이 인 듯 떨리는 눈동자.
그녀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제가 말씀하신 대로만 하면 괜찮을 겁니다. 추후에는 따로 연락책을 드릴 테니, 그걸 통해 제가 말하는 대로 화산의 병력을 조종하세요."
"협회측과 최대한 전투를 피하려는 거군요."
"아뇨."
"네?"
최은하가 의문 어린 낯빛을 띠었다.
이전석이 그녀의 말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단호한 거절이었던 덕분일까.
도리어 당황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곧 이어진 이전석의 말에 눈 녹듯 사라졌다.
"대놓고 화산과의 전투를 피하면 장로들이 의심할 겁니다."
"아···. 죄, 죄송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뭐 이런 것까지 죄송할 필요야 있습니까."
이전석은 최은하를 바라봤다.
확실히 검이나 도술에 대한 재능은 남다르지만, 지혜라고 해야 할까? 생각하고 고민하는 지성적인 부분이 그만큼 뒤떨어져 보였다.
바보라는 건 아니다.
다만.
'순수하군.'
그만큼 선하고 착하다.
마치 작은 연선화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경험과 지식이 모자라기에 타인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다.
마치 이전석이 그러하듯이.
'화산의 장로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겠지.'
단지 그들과 이전석이 다른 점은, 이전석은 최소한 최은하가 바라는 바를 이루어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화산을 악한 곳에 이용할 생각은 없다.
지배?
그딴 귀찮은 것을 뭣하러 한단 말인가.
화산은 어디까지나 여명회, 더 나아가 다른 거대 빌런들을 잡기 위한 초석일 뿐이다.
그래.
그저 지나가기 위한 길이자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그러니 오래 끌 생각은 없어.'
어차피 곧 최원율도 폐관에서 나올 거다.
놈을 대비해 서울 전체에 진법도 펼쳐놨고, 신호만 보내면 주리천이 미리 약속해 뒀던 도술을 사용할 터.
그럼 모든 게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차근차근 작금의 상황을 모래성이 아닌 콘크리트 건물처럼 쌓아 올려갈 필요가 있었다.
"화산의 병력이 협회와 부딪히도록 유도할 겁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세작을 골라낼 거고요."
"······세작이요?"
"예. 장로들 중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세작 신분으로 화산에 들어와 장로가 된 놈이죠. 그 녀석을 잡고 모든 걸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최원율과 최신을 죽인다.
"그 다음에는 은하 씨께서 옥좌에 앉으시면 됩니다."
"······."
최은하가 한껏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옥좌라는 단어에 표정이 굳어지는 듯 보였다.
하긴 화산의 직계 혈통으로서 그 옥좌가 어떤 의미와 무게를 가지는지 최은하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긴장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소리다.
그것도 잠시.
"그럼 저희 둘이 같은 배를 탄 신세인데 말이나 틀까요?"
이전석은 긴장을 풀라는 의미로 손을 내밀었다.
"마, 말이요?"
"계속 함께 갈 사이인데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도 귀찮잖습니까."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다.
순도 100%의 진실이었다.
굳이 존칭을 사용하며 대하는 것.
실로 귀찮기 짝이 없다.
그녀가 화산의 장이 된다면 앞으로 친구처럼 자주 마주하게 될 텐데, 그때마다 불편하게 서로를 대하는 건 이전석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계속 함께 갈 사이······."
최은하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푹 숙이는 얼굴.
이전석에겐 보이지 않는 각도이지만, 양 뺨이 희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아니, 아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니야···.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도 그런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는 건 어째서일까.
최은하는 애써 잡생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이전석의 손을 맞잡았다.
"···네! ······아, 아니, 응! 잘 부탁해."
"나야말로."
작게 어깨를 으쓱인 이전석.
그는 갑자기 당황하는 듯한 최은하의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금세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한여름 좀 불러줘. 나는 잠깐 들를 곳이 있거든."
한여름.
아직 가족들과 만나게 해주진 않았지만, 감옥에서 탈출 시켜준 값을 치를 때였다.
"네··· 아니, 응."
최은하는 여전히 어색함이 깃든 어투로 답했다.
이전석은 그녀를 뒤로했다.
뒤늦게 산사를 바라보지만.
"너는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
그녀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개 피조물 따위가 어찌 신과 대등이 고개를 마주할 수 있겠나이까.
참 고지식한 성격을 가진 영물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전석의 신격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낀 걸지도 모른다.
산사가 저 모양이었던 건 신격을 얻기 이전에도 매한가지였으니.
그러다 문득.
이전석은 잊고 있던 걸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참, 너한테도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제게 말입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이전석.
그가 곧 말을 이었다.
"사람, 죽일 수 있겠어?"
산사는 침묵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녀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소신은 이미 수없이 많은 인간을 도륙하였나이다. 헌데 이제와 사람을 죽일 수 있겠냐는 질문에 무슨 의미가 있더이까.
"할 수 있다는 소리지?"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산사는 생각보다 쉽게 이전석의 부탁을 받았다.
영물인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어떤 신에 의해 탄생한 그들은, 신이라면 반드시 믿고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 존재였으니.
"그럼······."
이전석이 산사에게 작게 귀띔했다.
※
포탈 게이트를 형성한 이전석은 바로 땅 밑으로 좌표를 입력했다.
어지러이 일그러진 시야 너머로 고풍스런 창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풍고.
한 달 전 이전석이 만들었던 곳.
━음? 당신은··· 오오, 드디어 오셨구려.
영풍고에 들어선 직후, 선반과 선반 사이에서 장소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한 달이나 얼굴을 비추지 않아 혹여나 길에서 객사하지는 않았을지 걱정했······.
돌연 그의 얼굴이 굳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산사와 같은 토지신이며, 령과 같은 영체이기에 비로소 최은하나 주리천보다 더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이전석 내부에 꿈틀거리는 거대한 신격을.
━그대는··· 누구십니까?
말투가 이전보다 훨씬 더 정중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소영이 보기에 이전석은 한 달 전 그와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눈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조차 실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격의 차이가 느껴진다.
"누구긴 누구겠어. 당신 후손 보여주기로 한 그 사람이지."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답했다.
주리천도 그렇고 산사도 그랬지만··· 한 명 한 명 놀란 모습을 진정시켜 주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아질 것 같았다.
"그보다 저번에 줬던 목함 있나?"
━그거라면··· 여기, 가장 안쪽에 보관해 두고 있었습니다.
장소영이 긴장 어린 표정과 손길로 창고 가장 안쪽에 있던 선반에서 목함을 가져왔다.
이전석이 영풍고에 들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한 달 전에는 격이 부족해 열 수 없었으니, 이제는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신격을 얻은 지금이라면 열 수 있겠지.
그래서 굳이 잠깐 시간을 내 영풍고를 찾았다.
이윽고 그는 목함의 뚜껑을 열려고 하는데······.
'······뭐야?'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3화
고문 (1)
[격이 부족합니다.]
목함을 열려고 하자 눈앞에 떠오른 창.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목함이 열리지 않는다.
'격이 부족하다고?'
S급이 되며 신격을 얻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격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목함도 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목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격으론 부족하다는 걸까.
아니면 아직 이전석의 신격이 이 목함을 열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일까.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적합자가 찾아올 때까지 그 땅을 지키라는 것뿐이었어.
한 달 전 장소영이 했던 말.
그는 정체 모를 누군가가 장소영을 토지신으로 만들고, 최승철의 별택이 있던 땅- 정확히는 그곳의 목함을 지키라 하였다.
'그리고 적합자가 찾아오면 그것을 넘겨주라 했지.'
아마 그건 이전석 자신이었을 확률이 높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살업이 짙은 자는 달리 없을 테니까.
하물며 신격을 얻고서도 여전히 열지 못하는 목함까지···.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가리킨 건 이전석이 분명했다.
'누구지?'
주리천조차 우습게 보일 정도로 노련한 솜씨의 도술.
'육선인 중 한 명인가?'
과거에 존재했고 주리천보다 급 높은 도사라면 그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었다.
"······."
이전석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러십니까?
심상치 않은 이전석의 눈빛 덕분일까.
장소영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에 이전석은 근처 선반에 다시 목함을 올려뒀다.
"장소영."
━예, 말씀하시지요.
어느새 말투는 물론 표정과 몸짓까지 공손해진 장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기억이 흐릿하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제가 토지신이 될 무렵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밖에는 안 떠오릅니다.
"다른 건 기억하나?"
━다른 거라고 하시면······?
"유년시절이나 청소년기, 혹은 결혼 후 얻은 가족에 관한 것."
━음, 그것들은 전부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잊어버릴 리가요! 어찌 이 세상에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한 여자의 지아비가 된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럼 죽었을 때는? 언제 어떻게, 누구- 아니, 무엇에 의해 죽었지?"
━그건······ 흠?
장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죽었더라···.
이전석은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에게 마나를 흘려보냈다.
신격이 뒤섞였기 때문일까.
━헉!
장소영이 깜짝 놀랐다.
자신을 파고드는 이질적인 감각은 어째서인지 이미 한 번 죽었음에도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몸이 있었다면 아마 식은땀을 흥건하게 흘리고 있으리라.
이내 이전석이 마나와 신격을 거둬들였다.
━허억······!
참았던 숨을 터트리는 장소영.
그에게 이전석이 말했다.
"지워졌군."
━······예?
"기억의 한 부분이 도려내져 있어."
━그게 무슨······.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이전석은 전능하지 않다.
아무리 그만한 기술과 경험이 있다고 해도, 상대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영혼에 새겨진 도술의 잔재로부터 그 흔적을 느낄 수는 있었다.
"너를 토지신으로 만든 놈이 네 기억도 함께 지워버렸을 확률이 높아."
━확실히···. 그자와 만난 전후로 기억이 온통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옇습니다. 토지신이 된지라 기억을 잊어버릴 리 없을 텐데······. 이렇게 들어보니 이상하군요. 허나 대체 왜 제 기억을······.
"그거야 모르지."
물론 목함을 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지금 당장 못 연다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여기서의 볼일은 끝났다.
목함을 확인하러 왔는데, 오히려 의문만 더 늘어난 꼴이라 답답했지만 어쩌겠는가.
이전석은 자신이 들어왔던 포탈 게이트로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 장소영을 향해 말했다.
"참, 존칭 쓸 때마다 어색하게 톤이 삑사리나니까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해."
━크, 크흠. 그럼 그러도록 하겠소.
※ ※ ※
화산의 본관은 거대한 저택이었다.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로비에는 역대 길드장- 장문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때는 그저 문파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는 가문이 되어 대대손손 그 핏줄이 이어져왔다.
그중 가장 왼쪽에 걸린 그림은 처음 화산이라는 문파를 만든 개파조사 학대통(郝大通)이었다.
그리고 일곱의 초상화 다음으로, 오래된 흑백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흑색의 긴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
최연자(最然子)
단지 문파에 불과했던 화산을 최씨 가문으로 있게 만든 장본인.
그리고 최은하의 조상이 되는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은하는 여섯의 남매 중 가장 그녀와 닮아 있었다.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최연자 본인이 될 것처럼.
혹은 최연자가 환생이라도 한 것 같은 외모.
때문에 어릴 적에는 뛰어난 검술 재능과 아울러, 최원율은 물론 많은 장로들에게 미래를 기대 받곤 했다.
'정작 각성을 하지 못해서 밀려났지만······.'
최은하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이전석이 열어준 게이트로 화산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아가씨······?"
메이드 한 명이 그녀를 발견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으며, 양손에는 빨래 바구니를 들고 있다.
"신지. 오랜만이야."
민신지.
과거 최은하의 전속 메이드였던 소녀.
"아가씨······."
그녀가 측은한 표정으로 최은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절친했고, 신분 차이를 넘어 늘 함께 다니곤 했다.
하지만 최은하가 별채로 쫓겨나고서부턴 거의 만나지 못했다.
천대를 받은 건 최은하도 마찬가지였지만, 굳은 손가락 하며 얼굴 곳곳에 새겨진 흉터를 보면 민신지도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한 것 같았다.
"빨래가 왜 그렇게 많아?"
"이, 이건······."
"얼굴은 또 왜 그렇고. 손도 옛날에는 고왔는데···."
애써 시선을 피하는 민신지.
최은하가 답답한 마음에 숨을 옅게 내쉬었다.
'내가 쫓겨나면서 신지도 모진 취급을 받고 거라곤 에상했지만······.'
그래도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손도 가까이 보니 젊은 여인의 것이라곤 할 수 없을 만큼 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택의 거의 모든 빨래를 홀로 도맡는 것 같았다.
그건 바구니에 있는 빨래의 양만 봐도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랬다.
화산은 늘 이런 식이다.
누군가를 괴롭히지 못하면 금방 숨이 막혀 죽을 것처럼 살고는 했다.
━비단 화산만이 아니지.
문득, 뇌리에 목소리가 울렸다.
다름 아닌 이전석의 것이었다.
그는 도술을 사용해 최은하에게 직접적으로 전음을 날리고 있었다.
━사람은 모두 중의적이야. 어떤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착할 순 없어. 선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막상 까고 보면 어딘가 작은 흠이 있기 마련이지.
그래, 누구나가 그렇다.
화산의 본관- 그 근처 산속에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던 이전석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스승님조차 과거에는 싸움에 미쳐 온갖 말썽을 피우고 다녔더랬지.'
사람은 누구나 악이라는 흠집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마음 독하게 먹어. 지금 네가 들어간 곳은 화산이 아니라, 그 흠을 대놓고 외부에 드러낸 악귀들의 소굴이니까.
━응······.
최은하가 전음으로 작게 대답했다.
그녀는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전석의 말 대로였다.
지금 자신이 들어온 건 집이 아니라 적지다.
악해져라.
독해져라.
그렇게.
'바꾸는 거야.'
화산을.
━그리고······.
문득 이전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구마가 있으면 사이다도 있어야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마침 오는군.
이전석의 그 말이 있은 직후였다.
최은하는 뒤에서 다가오는 다른 기척을 느꼈다.
저택에서 일하는 메이드들이었다.
"어머."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메이드가 놀란 듯 두 눈을 껌벅였다.
"아가씨가 어떻게 여길······."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네까짓 게 어떻게 이 저택에 있냐는 소리였다.
실로 건방지기 그지없다.
일개 일꾼 따위가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다니.
"게다가 그건······."
그녀가 최은하의 손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왼손에 들린 자루.
피가 뚝뚝 떨어져 비린내가 진동을 했으니.
"윽···."
앞서 나왔던 메이드는 물론 다른 이들조차 비릿한 혈향에 표정을 찌푸렸다.
"신지, 네가 데려온 거니?"
"지, 지하야······."
민신지.
그녀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김지하.
가장 앞서 나온 메이드의 이름이었다.
최신의 전속 메이드인 소녀.
덕분일까. 그녀는 현재 화산에서 후계자나 장로들 다음으로 높은 서열과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민신지를 노려보며 재차 물었다.
"말해. 네가 데려온 거냐고."
"······."
마치 겁먹은 듯 입을 열지 못하고 몸만을 떠는 민신지.
그에 최은하가 그녀를 지켜주듯 말했다.
"내가 직접 온 거야."
"그럼 왜 오신 거죠? 아가씨께서는 본관의 출입이 금지됐을 텐데. 그리고 그 자루는······."
━하.
예의는커녕 양심조차 멀리 던져놓고 온 듯한 태도에 오히려 이전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빨리 저택을 나가시지 않으면 오장로님께 말씀드리겠어요."
뒤이어진 협박.
이전석은 차게 식은 어조로 전음을 흘렸다.
━지하라고 했나? 저 메이드, 팔을 잘라버려.
그에 도리어 최은하가 당황했다.
갑자기 팔을 자르라니?
"제 말 못 들으셨나요?"
김지하는 그런 최은하의 당황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 착각하고 더욱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반면 최은하는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내가 알아낸 사실을 하나 알려줄까?
그녀에게 이전석이 꽤나 놀라우면서, 한 편으론 흥미로운 사실을 꺼냈다.
━김지하. 25세. 최신의 전속 메이드로, 그 권력을 등에 업어 메이드장이나 집사장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지. 최신의 눈치를 보는 장로들도 김지하는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눈치더군.
그야 당연하다.
만약 최신이 정식 후계자가 되어 옥좌에 앉는다면?
추후 김지하는 화산에서 장로들보다 더 한, 최신 다음 가는 권력자가 될 것이다.
그런 그녀를 쉽게 건들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당연히 김지하는 그 사실을 이용해 여러 괴팍한 짓들을 저질렀지. 자기 마음에 든 남자를 멋대로 저택에 들여 주지육림을 즐기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메이드나 집사는 멋대로 체벌을 가하기도 하고, 심지어 최신을 정식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독단적으로 다른 후계자의 음식에 미독을 탄 적도 있지.
━미, 미독이라니···?
━한여름이 알아낸 사실이야. 화산 네트워크를 훑어보니 그런 정보가 나오더군. 최신이 지켜준 덕분에 미독을 타고서도 큰 체벌은 받지 않고, 그에 대한 정보도 비밀로 붙여진 모양이야. 뭐, 미독을 탄 대상이 최태윤이었던 탓에 유야무야 넘어간 것도 없진 않지만······.
최태윤은 겁이 많았다.
옥좌에 욕심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최신에게 대들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어렸을 적이라면 어떡했겠는가.
당연히 겁을 먹고 입을 다물었겠지.
그렇게 미독사건은 은밀하게 묻혀버렸다.
━민신지가 그 모양이 된 것도 김지하 탓이라는군.
━······.
━옛날엔 너와 최신이 가장 유력한 후계 후보였다지? 그 사실 때문에 네가 저택에서 쫒겨나고 유독 심하게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야. 해킹한 CCTV 영상을 보니 별 짓거리를 다 한 것 같더라고.
이전석이 영상의 내용을 말해줬다.
그건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괴롭힘이었다.
최은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친구가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눈물마저 맺혔다.
━이제 알겠나? 저 녀석은 그런 년이야. 그러니 본보기를 보여라. 네가 돌아왔다고. 화산에 어설프게 발을 들인 게 아닌, 적합한 후계로서 돌아왔노라고.
"······."
최은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말을 무시하시는 건가요?"
김지하가 몇 번째인지 모를 물음을 던져왔다.
최은하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감았다 다시 뜬 그녀의 눈동자에 살의가 깃들었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도, 이유조차 없었다.
바꾸려먼, 나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
"뭐, 뭐야? 지금 그 눈은······."
김지하는 순간 놀랐는지 무심코 반말을 내뱉었다.
최은하는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들더니-.
서걱-.
그대로 김지하의 오른팔을 절단내버렸다.
"······어?"
당황 어린 김지하의 목소리.
그녀는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 입을 벌리고만 있다.
그리고 툭, 바닥으로 떨어지는 팔.
김지하는 그것을 빤히 쳐다보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파, 팔···? 내 팔···?! 아아아아악!!"
"지, 지하야!"
"꺄아악!"
옆에 있던 메이드들이 깜짝 놀라 소리친다.
최은하는 떨리는 손을 억지로 억눌렀다.
이전석의 말 대로였다.
'나부터 바뀌어야 해.'
잠시 심호흡을 내쉰 그녀는 이내 오른손의 자루를 풀어, 안에 든 최승철의 머리를 로비 한가운데에 집어 던졌다.
"헉!"
"저, 저건··· 승철 도련님이잖아!"
"이게 대체 무슨······."
김지하와 함께 있던 메이드들은 물론,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다른 이들조차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그 사이.
최은하는 충격 어린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민신지를 돌아보았다.
"신지, 현재 본관에 있는 모든 장로들을 알현실로 모아줘."
그리고 이전석이 자신에게 전해준 것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화산의 적합한 후계자가 돌아왔다고."
※ ※ ※
화산 본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산.
이전석은 미리 최은하에게 부착해 둔 마나에 천리안의 묘리를 이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화산을 바꾸려면 우선 너 자신부터 바뀌어야지.'
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고 화산을 바꾸겠다?
그건 그저 오만일 뿐이다.
교만이며 자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전석은 김지하의 팔을 자르라 말했다.
최은하가 재차 각오를 다질 수 있도록.
그리고 화산의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말이다.
여전히 겁만 먹은 채 답답하게 굴면 그녀에게 붙여뒀던 마나를 강제로 풀어 김지하를 죽여버릴 셈이었는데··· 다행히 최은하는 이전석의 말대로 움직여줬다.
그녀로서도 이대로는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한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다.
'장로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대충 전해줬고······.'
나머지는 기다리는 것뿐이다.
최은하가 스스로 화산을 장악하기를.
정확히는.
'미끼를 물어야겠지만.'
그러나 안 물 수는 없을 것이다.
최승철이 사라진 마당에 최은하만큼 먹음직스런 먹이는 장로들에게 있어 달리 없을 테니 말이다.
최은하가 적절한 타이밍에 매화를 보여준다면?
태반의 장로가 그녀에게 빠져들 터.
일부는 아예 진심으로 섬기려 할지도 모른다.
이전석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미끼로 물고기들이 모여들면, 자연히 그사이에 유독 덩치가 커다란 상어가 돋보이기 마련이다.
세작 골라내기.
'마탑···은 아닐 테고. 아마 여명회일 확률이 높겠지.'
협회에 드래드노트의 코어가 있다는 사실도 그로부터 새어 나왔을 것이다.
'그보다······.'
이전석은 휴대폰을 쳐다봤다.
이한석이나 이지혜로부터 별도의 연락은 없었다.
아직 한유리가 깨어나지 않았다는 소리.
'일이 끝나면 한 번 병원에 들러야겠어.'
엘릭서가 한유리에게 어떤 변화를 미치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고, 일 년이나 얼굴을 보지 못하니 사뭇 그리움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슥-.
이전석이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
샤삭-.
풀숲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있던 그의 주위를, 어느새 대여섯의 사람이 둘러싸고 있었다.
검은 무복을 입은 장정(壯丁)들이다.
무복의 옷깃이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가슴팍에는 매화를 상징하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화산의 삼대제자가 주로 입는다고 하는 무복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다른 이들과 반대되는 하얀 바탕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이대제자의 상징이기도 한 무복.
현대에 이르러 문파가 아닌 가문이 된 화산이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수많은 제자를 들이며 가르침을 내리고 있었다.
그중 이대제자일 터인 긴 머리의 사내가 이전석의 목에 검을 드리웠다.
"네놈은 누구냐."
"······."
"방금 저택의 상황··· 네놈이 뒤에서 은하 아가씨에게 손을 썼나?"
이전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서 말해라. 입을 열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
"뭐?"
"오는 길에 차라도 막혔나? 일부러 기척까지 드러내줬더니···."
뭐, 그래도.
"적절하게 찾아오긴 했어. 마침 흑막 노릇도 질리고 있던 참이었거든."
키득.
이전석이 살벌한 웃음을 흘렸다.
안개처럼 흘러나오는 살의.
그 모습에 이대제자는 물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삼대제자들까지 소름이 끼친 듯 식은땀을 흘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4화
고문 (2)
운명록은 7년 전 화산에 입문한 이대제자였다.
화산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하신공과 매화검법을 완숙을 넘어 절정 수준까지 익혔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특성으로 체화시키기까지 했다.
각성자라면 심법과 검법을 두루 익힐 수 있지만, 그게 특성으로 진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
덕분일까.
운명록은 이대제자 중에서도 나름 촉망받는 인재가 되었다.
훗날에는 일대제자는 물론, 장로의 길마저 약속받은 검수.
애당초 자하신공과 매화검법을 익힌 시점부터 그가 장로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라 봐도 좋았다.
화산은 그만큼 운명록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단순히 헌터로서의 등급을 따지면 S.
30명밖에 되지 않는 일대제자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이었다.
헌데.
'이, 이게 대체······.'
그는 이전석의 눈을 보자마자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격이 달라.'
S급이기에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전석과 자신 사이에는 압도적인 격차가 있음을.
하지만.
'······나도 S급이야. 일대제자들도 어찌하지 못한다고. 이제와 겁먹을 필요는 없어.'
운명록이 애써 긴장을 다스렸다.
화산에서 일대제자라는 이름값은 하늘을 꿰뚫을 정도였고, 이대제자이면서 그런 일대제자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자신감을 보다 높여주었다.
"네가 누군지나 말해라."
척-.
운명록이 이전석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을 새웠다.
분명 날과 목이 맞닿았는데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운명록은 그 사실에서부터 이상함을 깨달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전석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박감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S급이라는 오만과도 같은 자존심 덕분일까.
"어서 말하라!"
갈(喝).
흔히 사자후라고도 불리는 기술.
마나와 격으로 뒤섞인 외침이 주변 일대를 뒤흔들었다.
나무와 풀이 흔들리며, 그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재밌네."
이전석은 사자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 오히려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이···?"
이번에는 운명록 역시도 꽤 놀란 듯싶었다.
S급의 격을 실어 날린 사자후였는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니?
"다른 놈들은 필요 없어."
문득.
이전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있은 직후였다.
촤악-!
삼대제자 다섯의 목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운명록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정말 한 순간에 벌어진 일.
S급인 그조차 이전석의 일격을 보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보긴 했다.
어느새 이전석의 오른손에 쥐어진 단도 한 자루.
그것이 순간적으로 허공을 가른 것이다.
검붉은 궤적이 희미하게나마 비추어졌다.
그래.
그게 전부였다.
그 궤적이 눈에 들어온 직후, 자신을 제외한 삼대제자가 전부 죽어버렸다.
'어떻게, 이런······.'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뚝, 뚝-.
단도의 날을 타고 떨어지며 발치를 붉게 물들이는 핏물.
털썩-.
사방에서 시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
운명록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의 동공에 당황스러움 이상으로 분노가 깃들었다.
"감히 화산의 검수를!"
여전히 자존심이 오만하게 드높이 치솟아 있다.
운명록이 손에 쥔 검을 휘둘러 왔다.
매화검법의 묘리가 담긴 휘두름.
검 끝으로 푸른 꽃잎이 피어난다.
그러나.
파삭-.
순간적으로 사방을 뒤덮은 검붉은 궤적이 꽃잎을 베어 갈랐다.
이전석의 단도로부터 비롯된 검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운명록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끄악!"
비명과 함께 피를 흩뿌리는 운명록.
팔과 다리를 스쳤을 뿐이건만, 불에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그를 잠식했다.
반면, 한순간에 S급 헌터를 압도한 이전석은 심드렁하게 단도를 내려 봤다.
'쓸 만하군.'
최은하의 매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만들어낸 그만의 검술.
진혈도법 제 1초식 - 진혈노방.
기존의 매화노방에 이전석 자신만의 신격을 뒤섞고, 도술의 묘리로 검격을 수십 갈래로 분열시켰다.
그 결과, 이전석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사방에서 수십의 검수가 공격하는 듯한 위엄을 자아낼 수 있었다.
매화와 닮았지만 검붉은 꽃잎이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걸 본 운명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색과 형태, 기운조차 다르지만 틀림없었다.
"매화노방······."
이전석의 자세와 현상이 그것과 쏙 빼닮아 있었다.
"외부인이 어찌 화산의 매화를······!"
경악 어린 그의 외침.
이전석은 허공에 흩날리는 검붉은 꽃잎을 손으로 쥐었다.
"네 눈엔 이게 매화로 보이나 보지?"
꽉-.
주먹을 쥔 그의 손아귀로 검붉은 꽃잎이 바스러졌다.
구겨지고 찢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그것은 단순 착각이나 환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이전석은 틀림없이 단도로부터 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매화가 아니라 할지언정, 화산이 여태껏 줄곧 이상으로 품어왔던 검법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덕분일까.
운명록은 저 자신의 처지로 생각하지 못하고 입을 놀렸다.
"그 도법을, 누구에게 배운 거지?"
아무래도 이전석이 진혈도법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수받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무술을 창안할 정도의 대종사는 권좌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연선화조차 특성에 의해 검술을 익혔을 뿐, 직접 천매보를 만들어낸 건 아니다.
반면, 원본이 존재한다고 한들 그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검법을 창안한 이전석의 위업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라 해도 좋았다.
때문에 운명록은 차마 진혈도법을 이전석이 만들었다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지?"
"그건···."
이전석이 오히려 되묻자 운명록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것들은 늘 이런 식이다.
저 자신밖엔 생각하지 못하고, 금세 남의 것을 탐닉하려 든다.
오만하고 교만하며, 탐욕에 물든 버러지.
"그건 화산의 검법이다!"
운명록이 까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습.
실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무도(武道)를 모르는 건가?"
무도.
무에 대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선.
이전석은 내심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쓰는 도법이 너희의 검법과 닮았으니 내 도법을 너희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
"미친 소리도 이쯤 되면 대단할 지경이야."
애당초.
"너희 화산이 무도를 논할 처지가 되기는 하나?"
이전석이 운명록을 비웃었다.
화산이 지금까지 저질러온 마도(魔道)는 백도(白道)는커녕 무도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굳이 따지면 내가 만들긴 했지."
"마, 만들었다고?"
"매화검법을 참고했거든."
"말도 안 돼!"
이전석은 운명록을 빤히 쳐다봤다.
경악과 당혹이 어린 표정.
그래.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습기 그지없는 얼굴.
"미안하다만, 말이 되냐 안 되냐는 네가 따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쿵-.
이전석이 발을 굴렀다.
순간 대지가 진동하며 흔들렸다.
운명록 또한 중심이 무너지고-.
서걱-.
이전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도를 휘둘렀다.
"끅······!"
가슴팍이 갈라지며 피가 쏟아졌다.
운명록은 옅게 신음을 토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가까스로 치명상은 면했지만.
'조금만 날이 깊게 들어왔으면······.'
그대로 상체가 절단나며 죽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어째서일까.
운명록이 이전석의 공격을 피했기에?
아니었다.
오히려.
'봐주고 있어······!'
이전석은 일부러 운명록을 죽이지 않았다.
일격에 끝장낼 수도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 사실에 운명록은 치욕스런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전석은 내심, 옅게 즐거움을 느꼈다.
천살성을 얻기 이전부터 그랬다.
버릇없는 놈들을 교육하는 건 늘 재밌고 즐거운 일이었다.
"일부러 기세를 드러내 미끼를 날렸지. 화산의 본관인 만큼 꽤 큰 놈이 걸려들 거라곤 생각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선이군."
그 말에 운명록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자신을 유도했다는 건가?
"너에겐 물어볼 게 많아."
이어 그가 살벌한 미소를 띠운 채 재차 단도를 휘둘러왔다.
도법의 묘리가 섞이지 않은 단순한 검격.
이전만큼 빠르진 않아서 가까스로 비껴낼 순 있었다.
하지만.
"크윽······."
팔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날과 날이 맞부딪칠 때마다 근육이 일그러지며 고통을 비명처럼 토해냈다.
격의 차이.
그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같은 S급임에도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벽이 코앞에 드리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S급이라도 이전석은 이미 EX급 너머를 바라봤던 존재다.
하물며 그에게는 신격마저 존재했으니, 아직 완숙에도 이르지 못한 S급이 그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매개이도(梅開利導)!'
운명록.
그의 검이 다시 푸른 꽃잎을 피워냈다.
마치 검기처럼 날을 휘감는 수십의 꽃.
그것이 검을 이끌며 일직선으로 이전석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리고.
'진혈노방.'
이전석이 그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미리 보았던 초식이자 공격이었으나, 패도적인 기세에 운명록은 차마 반응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압도당해 움직이지 못했다 보는 게 옳으리라.
S급의 강자 수십 명이 일제히 검을 내찌르는 듯한 위압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가슴이, 목이, 숨이 막힌다.
촤악-!
그 사이로 이전석의 단도가 정확히 운명록의 왼팔을 베어 갈랐다.
"끄아아악!!"
비명과 함께 핏물이 흩뿌려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팔.
운명록이 고통에 무릎 꿇는다.
"헉··· 허억······."
그는 어떻게든 고통을 참아내려는 듯 숨을 헐떡였다.
'도망쳐야 해···!'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런 괴물이 화산의 지척까지 접근해 있다니···!!'
어떻게든 상부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결정은 금세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
화산의 검수들이 배운다는 보법.
마치 꽃잎을 밟고 움직이듯 부드럽다.
그러나 한편으론 재빠르기도 한 모습이 연선화의 천매보와 쏙 빼닮아 있었다.
뭐, 그녀의 천매보나 오행매화보나 결국은 같은 매화이니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툭-.
이전석이 작게 발돋움했다.
천보의 첫 번째 형식 파형.
그리고 두 번째, 구형(具形)
그것은 첫 번째 발걸음인 파형의 연장선으로, 파형을 더욱 완벽하고 뛰어난 상태로 강화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당연히 그만큼 패도적이며, 또한 빠르다.
이전석은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운명록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쿠구궁-!
수풀이 갈라지며 대기가 진동한다.
조용하면서도 파괴적인 발걸음이 숲 전체를 진동시켰다.
이윽고, 이전석이 운명록을 따라잡았다.
"어떻게······?!"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던 운명록은 깜짝 놀란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욱 속도를 높여 이전석을 떨쳐내려 하지만···.
"도망치면 쓰나."
이전석은 단도를 한차례 빙글 돌려 잡곤,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검붉은 궤적이 꽃잎과 함께 오른팔을 절단한다.
"크아악!"
운명록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말했지? 너에겐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고. 알려줬으면 하는 게 또 있거든."
이전석이 단도에 들러붙은 핏물을 떨쳐냈다.
그리고.
푸욱-!
"끄윽······!"
바닥에 쓰러진 운명록의 양 허벅지와 어깨를 무언가가 꿰뚫었다.
이전석의 오른손.
검지, 중지, 약지, 엄지.
총 네 손가락에서 발아한 손톱이 날카롭게 늘어나 못처럼 운명록을 관통해 있다.
"이, 이건···."
떨리는 동공.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당황이 그를 집어삼킨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삼대제자 중 한 명인 하승민의 특성 '손톱증강.'
그것이 이전석에 의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손톱이 늘어나 상대방을 꿰뚫거나 구속하는 건 하승민이 가진 전매특허였다.
그걸 다른 사람이 사용하다니?
"네놈이 어떻게······!"
운명록은 고통 속에서도 의문과 분노에 찬 어조로 외쳤지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야."
퍼억-!
"끅!"
이전석이 운명록의 턱을 걷어찼다.
피를 토하며 초점이 크게 흔들린다.
"끄아악!"
이전석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톱에 꿰여 고정된 운명록이 그대로 이전석의 손톱에 매달린 채 들어 올려졌다.
"커흑······."
고통에 신음하는 운명록.
그를 바라보며 이전석이 말했다.
"자하신공."
"······?!"
"알고 있지?"
"······."
운명록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전석이 굳이 자하신공을 입에 담은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내 도법에는 아직 심법이 없어서 말야."
그가 단도를 빙글 돌려대며 말했다.
물론 심법이 없어도 딱히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진혈검법의 원본은 매화검법이었다.
그것이 자하신공과 엮여 뛰어난 시너지를 발휘하곤 했는데, 진혈도법에도 그와 같은 심법- 아니, 신공이 있다면 더욱 완벽해질 게 분명했다.
하물며 시스템도 말하지 않았던가.
심법이 없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자하신공과 엮여 펼쳐지는 걸 고려하면, 이전석에게도 그에 걸 맞는 심법이 필요했다.
'은하는 자하신공을 알고 있지만 일부밖에 몰랐으니.'
자세히 배우기도 전에 기본 구결만을 외운 채로 본관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눈앞의 검수- 운명록이라면 달랐다.
S급.
'복장을 보니 이대제자 같지만······ 매화검법을 익힌 시점에서 자하신공도 함께 익혔을 확률이 높아.'
화산은 장로가 될 이에게 매화검법과 함께 자하신공을 알려준다.
물론 장문인이 익히게 될 것만큼 완벽한 것들은 아니다.
구결이 여럿이나 빠진 불완전한 검법이자 신공이었지만,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직접적인 고문은 오랜만이군."
꿀꺽-.
이전석의 말에 운명록이 침을 삼켰다.
긴장과 두려움이 식은땀이라는 형태가 되어 온몸을 적셨다.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자고."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5화
화산의 종말 (1)
자하신공은 오직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다.
역사에 다시 없을 절세의 심법.
마나가 없는 일반인조차 자하신공을 제대로 익힌다면 B급 헌터와 동등한 검수로 만들어주곤 했다.
하물며 마나가 있는 각성자라면?
그 위력은 가히 말로 표현 못할 정도다.
아름다운 자색 빛의 신공은 익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세의 고수가 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자하신공은 장문인과 장로들의 철저한 관리 아래 구전되었다.
누구도 쉽사리 그 구결을 넘볼 수 없도록 하며, 그러면서 장문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할 경우까지 대비했다.
구결을 일부 제외한 반쪽짜리 자하신공을 대대로 장로(혹은 장로가 될 이)들에게 익히도록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하신공의 구결을 퍼즐처럼 나눠, 장문인의 각 후계자들이 익히도록 만들었으니···.
덕분에 자하신공은 수백 년이 흐르면서 조금도 유실되지 않고 그대로 현 화산에까지 전해졌다.
운명록이 익힌 자하신공도 바로 그것이었다.
장로가 된다면 반드시 하사받는 것.
비록 원본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한다지만, 그것은 화산의 정수인 만큼 결코 외부인의 손에 넘어가선 안 됐다.
그래서 그는 이전석의 고문에도 악착같이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끄으으윽······!"
이전석으로부터 시작된 마나가 전신을 헤집으며 오장육부를 뒤튼다.
근육 위로 돋아난 핏줄이 파열되고 피부가 찢어지며 혈액이 솟구쳤다.
엄청난 격통이 운명록을 집어삼켰다.
맨정신으로 버티는 게 어려울 지경이다.
그 가운데, 한때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2장로의 말이 떠올랐다.
━매화검법과 자하신공. 이 두 가지만은 무슨 수를 써도 사수해라. 만일 적의 손에 넘어갈 상황이 생긴다면······ 자결해라.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두렵고, 그 이상으로 떨렸다.
자결이 어디 쉬운 일이랴.
당시에는 자신감에 차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그만한 상황에 당면하자 고통과 두려움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망설임이 뇌리를 잠식한다.
"어금니에 숨겨둔 독은 안 쓸 건가?"
그때.
이전석이 입을 열었다.
운명록은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그걸······!"
"계속 입을 오물거리고 있으면 안 그래도 신경 쓰이지."
"······끄읍!"
이전석이 강제로 운명록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어금니 사이로 작은 독단을 빼냈다.
"아, 아 대······!"
어설픈 발음으로 발악하는 운명록.
이전석이 그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커흑?!"
그러자 손쉽게 입이 벌려지며 독단을 빼낼 수 있었다.
자결을 위해 줄곧 숨겨두고 있던 비수.
그걸 빼앗기자 운명록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반면.
"흠."
이전석은 보랏빛의 작은 구슬을 바라봤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올라 있는 창.
아까 삼대제자 다섯 명을 죽이면서 얻었던 특성 중 하나인데······.
━
독 흡수
등급 : B
효과 : 독을 흡수하여 피의 성질을 변화시킨다.
━
이전석은 상태창을 잠깐 흘깃 바라봤다.
그리고 "흡수"라 말하며 특성을 사용했다.
직후, 독단이 파삭 부서졌다.
조각을 넘어 아예 가루가 된 구슬.
그것이 손가락으로 스며든다.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했으나.
[독을 중화합니다.]
[당신의 피에 열독(裂毒)의 성질이 깃듭니다.]
금세 피부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신이라는 듯 체내에 흐르는 피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과연···.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건가.'
이전석은 자신의 피가 말 그대로 열독이라 불리는 독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섭취하면 그 즉시 내장기관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면서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독이로군.'
아마 육체에 깃든 자하신공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심어놓은 독단이리라.
'괜찮은 특성이야.'
삼대제자를 죽이며 얻은 다섯 개의 특성.
솔직히 말해 그중 세 개는 이전석에게 별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손톱증강.
'시험 삼아 써봤지만······.'
이전석이 운명록을 바라봤다.
여전히 자신의 손톱에 꿰뚫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
'이 정도는 마나로 대체할 수 있어.'
즉,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히려 보기에 흉해, 더 사용하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독 흡수도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정작 직접 사용해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특성이었다.
독을 계속 흡수하면 그만큼 많은 독을 피가 머금게 되는 걸까?
"누구··· 네놈은 대체, 뭐하는······."
의문도 잠시.
쿨럭-.
운명록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은 만나는 놈들마다 죄다 그런 소릴 하는군."
물론 그딴 건 하등 알 바가 아니었다.
"네가 알고 있는 자하신공의 모든 걸 알려줘야겠어."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고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빼낼 정보도 많이 있었다.
※ ※ ※
화산의 제 2장로 최한설.
그는 과거 최원율의 형제였으나, 후계혈전에서 밀려 옥좌를 차지하지 못했다.
때문에 한쪽 팔을 잃고 지금은 외팔이로서 화산의 장로직을 맡고 있었다.
━너의 패배가 나의 승리를 드높일 것이다.
한때 최원율은 그리 말하며 최한설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그 말대로 최한설은 줄곧 패배자로서 치욕과 모욕을 당했으며, 반면 최원율은 원수를 살려준 대인배이자 승리자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최원율이 화산의 장문인- 정확히는 가주가 되고 42년.
그 긴 시간을 오직 깊은 인내심만으로 버텼다.
같은 장로들에게도 모욕당하고, 일대제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것조차 칼을 삼키는 심정으로 참았다.
물론 그라고 아무런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저 패배자로서 화산에 남은 건 아닌 것이다.
옥좌를 향한 탐닉은 여전히 시들지 않았고, 그렇기에 42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를 갈며 칼을 닦았다.
외팔로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대제자는 물론 이대와 삼대- 그리고 화산의 제자가 되길 원하는 견습생까지 서서히 자신의 영향 아래 물들였다.
그렇게 최승철을 이용해 실질적인 화산의 지배자로서 거듭나고자 했으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가씨."
지금 그의 눈앞에는 최승철의 머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메이드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오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더니.
'도련님이 죽었다고? 저년은 팔이 잘리고?'
1층 로비의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한 최한설은 이내 최은하를 바라보았다.
"이건 아가씨께서 하신 짓입니까?"
폐부를 찌르듯 차가운 음성.
최승철의 죽음으로 계획이 망가진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반면 최은하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뒤에서 그녀를 대신하듯 메이드 하나가 떨고 있을 뿐.
"네. 제가 죽였어요."
"······."
뒤이어진 단호한 대답.
최한설이 얼굴을 찌푸렸다.
죽였다고? 최은하가?
'그새 각성했나? 아니야. 각성자 특유의 기척과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여전히 무각성자다.'
그런데 어떻게 죽였다는 거지?
말이 안 된다.
말이 될 리가 없다.
아무리 신체를 단련하고 검술을 갈고 닦았다고 한들 일반인이 S급 헌터를 죽이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빛은 아니야.'
적어도 최은하의 얼굴은 그러했다.
그래서 더 당혹스러운 것이다.
'승철 도련님의 별택이 협회놈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최은하가 협회와 손을 잡은 걸까?
따지고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최은하가 홀로 최승철을 죽였다는 것보다야 훨씬 현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승철 도련님을 죽였다는 건······.'
대단한 성과다.
설령 그녀가 주도하지 않았고 협회와 협력했다 가정해도, 최승철은 무려 S급 헌터이자 화산의 세 번째 후계서열을 가진 이였으니까.
'···어차피 승철 도련님은 돌아가셨다.'
이유가 어찌 됐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머리가 가짜일 가능성?
"이보게."
최한선이 함께 있던 집사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그가 바닥을 뒹굴던 머리를 확인했다.
그러곤 최한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짜는 아니라는 거군.'
진짜 최승철이다.
"도련님!!"
그때.
늙은 여성의 쇠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최승철의 전속 메이드이자 유모인 박민순이었다.
"이, 이게··· 대체 이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털석-!
평소 감정은 물론 표정의 변화 한번 없어 냉철하기로 유명하던 그녀였으나 이번만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리곤 바닥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최승철의 머리를 주워 든다.
그리고 잠시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아··· 아아······"
애처로울 정도로 서글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아기 때부터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돌보고 키워온 도련님이었다.
그런 도련님의 죽음은 박민순에게 이로 말 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대체······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최승철의 머리를 품에 안고 흐느끼는 박민순.
'시험해 볼까.'
그녀를 보며 최한설이 생각했다.
유모라 해도 일단은 C급 헌터다.
최은하가 손에 들고 있는 검이 장식용인지 아닌지는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은하 아가씨께서 하셨다는군."
나지막한 최한설의 말에 박민순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참말입니까?"
"그래. 그리 들었다."
"······."
그녀가 고개를 돌려 최은하를 바라봤다.
오른손에 든 검,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피.
그건 최승철의 피가 아니었으나, 친자식과도 같은 도련님을 잃은 슬픔은 박민순에게서 분별력을 앗아갔다.
"배은망덕한 것."
착-.
어느새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낡은 메이드복 사이에서 여러자루의 비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죽음으로 갚아라."
더 긴 말은 없었다.
박민순이 비수를 내던지며 최은하에게 달려들었다.
"아, 아가씨!"
민신지가 소리쳤다.
최은하가 혹 잘못되진 않을까 싶어.
그런데.
"괜찮아."
최은하는 의외로 멀쩡했다.
조금의 흥분도, 불안도 없다.
그저 천천히 검결지를 새운 채 검을 휘두를 뿐.
그리고.
화아악-!
마치 파도치듯, 혹은 물결이 흐르는 것처럼.
최은하의 검으로부터 비롯된 분홍 꽃잎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주변에서 밀려드는 비수를 쳐내고, 검과 함께 일제히 박민순의 가슴을 꿰뚫는 검.
"매화만개(梅花滿開)."
매화가 한가득 피어 흩날린다.
매화의 파도가 박민순을 꿰뚫고, 꽃이 피듯 솟구쳐 만개했다.
아름답게 로비를 메꾸는 꽃잎.
매화가 눈처럼 살랑 떨어져 발치를 맴돈다.
최한설이 두 눈을 부릅뜨며 그것을 보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최은하의 검에 꿰뚫려 피를 토하는 박민순도, 팔을 잃었던 메이드와 그 친우들, 그리고 뒤에서 몸을 떨고 있던 민신지까지.
"매화······!!"
최은하가 발현시킨 현상을 보곤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매화.
그것은 매화검법과 자하신공 이상으로 화산의 정수이자 근원, 그리고 모든 것이라 표현할 만한 것이었기에.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본관에 있는 모든 장로들을 소집하세요."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우뚝 선 채, 매화라는 열매를 흩뿌리는 최은하.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화산의 적합한 후계자가 돌아왔다고."
지금 이 순간, 최은하의 가치는 화산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이전석이 노리던 바이기도 했다.
※
'생각보다 잘하는군.'
천리안으로 최은하를 지켜보던 이전석이 작게 미소 지었다.
워낙 성격이 착했던 탓에 걱정도 했지만, 최은하는 의외로 강단 있게 상황을 밀고 나갔다.
한 번 결정한 것이라면 쉬이 물리지 않는다.
덕분에 이전석이 계획했던 대로 화산 내부의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곧이어 장로들이 모여들며 이전석이 말한 대로 그들을 압박하는 최은하.
'당분간은 가만 내버려두면 되겠어.'
그럼 장로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며 최은하를 서로 가지려 할 것이다.
"그, 그마······ 제아 그마······."
문득 일그러지고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운명록이었다.
발톱은 물론 치아와 한쪽 눈까지 빼어진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냐, 주겨저······!"
"죽고 싶어?"
"······!!"
운명록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문이 어찌나 심했는지, 그의 몸에는 어느 한 곳에도 성한 부분이 없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 죽음을 원할 정도로.
"그래, 얻을 건 얻었으니 죽여주지."
"아······."
이전석이 단도를 휘둘렀다.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화산 내부의 상황···. 가령 2장로 최한설이 제자들을 휘하로 모으고 있으며, 운명록 또한 그중 한 명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자하신공의 구결이나 묘리도 전해 들었다.
몇 개의 퍼즐이 빠진 불완전한 신공이지만, 그건 추후 장로들을 통해 얻어내면 될 뿐인 일이었다.
서걱-.
이어 목이 잘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운명록.
손톱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머리와 함께 그의 몸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예상대로.
[악인을 죽였습니다.]
[선업이 '100,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소폭 하락합니다.]
선업이 오르고 악업이 떨어졌다.
화산 본관에 속해 있는 헌터인 만큼 제대로 된 놈일 리 없으니······.
삼대제자들을 죽일 때도 악업이 떨어졌었다.
아마 화산에 있는 대부분의 헌터가 그러할 것이다.
그런 것쯤은 얼핏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었다.
신격을 얻고 나서부턴, 영혼에 깃든 업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이들을 죽였던 것이기도 했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바람의 길(S+)을 습득합니다!]
[바람의 길의 영향으로 당신의 움직임이 조금 더 민첩해집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이전석은 그것을 뒤로한 채 화산의 본관을 바라봤다.
'해줄 수 있는 건 모두 해줬다.'
나머진 최은하 스스로가 화산을 장악하길 기다리면 될 뿐.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일주일.
최은하가 본격적으로 화산에서 활동하고, 이전석이 운명록을 죽인 이후 흐른 시간이었다.
그동안 화산에선 총 열여섯 차례의 공격이 있었다.
모두 최은하의 주도 아래 벌어진 전투였다.
정확히는 한여름이 화산의 전력을 해킹 및 분석하면, 그걸 토대로 이전석이 작전을 구성해 최은하에게 전달했다.
[한국, 이대로 무너지나?]
[대한민국에서 내전 발발···. 세계 길드 연맹은 어째서 가만히 있는가.]
[칠대 재앙 고가 빠른 속도로 남하 중.]
[한국 정부 "만마의 권자"에게 지원 요청.]
포탈 사이트에 올라오는 기사들.
당초 계획했던 대로다.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지는 전쟁의 봉화.
대한민국이 점차 혼란 속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환란의 한가운데.
이전석은 돌연 하늘의 흐름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흔히 천기라고도 불리는 것.
격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느낄 수 있는데, 신격을 가진 이전석은 보다 또렷하게 천기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천기가 소란스런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SSS급 강자의 탄생.
혹은 그에 준하는 재앙.
이전석이 기억하기로 후자는 이 시간대에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자.
세상 어딘가에서 압도적 강자- 즉, 권좌가 탄생했다.
'최원율······ 벌써 폐관을 끝낸 건가?'
이 시기에 권좌가 될 인물이라면 그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족히 2달은 더 빠른 시기.
'역시 여명회가 개입했나?'
화산에 숨어든 여명회의 세작.
놈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이전석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이미 준비는 끝냈다.
진법도 완벽하고, 주리천도 언제든 도술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화산에 완전한 종말을 가져다 줄 때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6화
화산의 종말 (2)
협회장실에는 두 명의 권좌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검의 권좌와 만마의 권좌.
두 사람은 소파에 앉은 채 녹차의 향을 음미했다.
그것도 잠시.
스텔라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의 체류 기간을 조금 늘렸어."
"그러니?"
"···그거 알아? 할멈의 눈빛은 뭔가 기분이 나빠."
"그러는 별이 너는 언제나 귀엽구나."
"흥."
스텔라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연선화가 자신을 상대할 땐 늘 이랬다.
같은 권좌인데도 나이 차가 있다는 것만으로 항상 그녀를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체류 기간을 늘렸다는 건 아마 고 때문이겠지?"
뒤이어진 연선화의 물음.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연선화가 미안함이 깃든 어투로 말했다.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걸 아직 어린아이에게 떠맡기게 만들었다.
비록 권좌급의 강자라고 한들, 연선화에게 그건 꽤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쉽사리 부탁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정부측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고의 토벌을 도와달라고.
"고맙구나."
연선화가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말뿐이라는 게 씁쓸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스텔라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도 연선화의 변화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명색이 같은 권좌급의 강자였으니.
'5년 전부터였나?'
그때부터 연선화의 기운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빠르게 그녀로부터 세월을 앗아갔다.
때문일까.
연선화는 세간에 얼굴도 잘 드러내지 않고, 지난 5년간 뒷방 늙은이처럼 지내야만 했다.
'그래도 저번에 봤을 땐 아직 정정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슬슬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할멈?"
"사람은 늘 위험 속에서 산단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흡사 말을 돌리는 듯한 연선화의 모습에 스텔라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엘릭서, 정말 마실 생각 없어?"
"그 귀한 물건을 어찌 구한다는 말이냐. 애초에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나라면 구할 수 있어."
구할 수 있다.
그 말에 연선화가 스텔라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삶을 연명하고 싶진 않구나."
"고집불통."
"원래 늙은이는 고집이 많은 법이지."
연선화는 거기까지 말한 뒤 애써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안드레는 괜찮다고 하더냐?"
안드레.
파밀리아의 길드장이자 또 다른 권좌 중 한 명이다.
굳이 그 이름을 꺼냈다는 건··· 자신이 한국에 체류하는 걸 그가 허락했냐 묻는 거겠지.
당연히도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를 죽이고 마석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하래."
"할 수 있겠느냐?"
"해야지. 할 수 있으니까 하겠다고 한 거고."
그녀가 괜히 정부의 부탁을 받았겠는가.
칠대 재앙 고.
놈에게 대적할 만한 마법이 있었다.
'저번이랑은 달라.'
저번.
그렇다.
그녀는 막 권좌가 되었을 때 고에게 도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젊음이라는 미숙함과 오만으로 인해 패배했었다.
안드레···.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와도 같은 길드장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지만, 지금도 그녀의 등에는 당시에 입은 상처가 버젓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 이야기일 뿐이다.
그녀에게 젊음의 미숙함과 오만은 없었다.
그것들은 노련함과 신중함이 되었고, 이번에야 말로 고를 죽이고야 말 터였다.
그 생각을 눈치 챈 걸까.
"때로 복수는 화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단다."
연선화가 씁쓸함이 깃든 어투로 말했다.
스텔라는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복수가 아니라 리벤지 매치야. 당한 건 되갚아 줘야지. 비록 젊은 치기로 당한 상처라고 해도··· 이런 말 하기 좀 부끄러운데, 놈을 죽이지 않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는 스텔라에게 있어 또 다른 벽이었다.
그걸 넘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드리운 거대한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나라를 싫어하지 않거든. 무엇보다···."
스텔라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고는 한반도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
그 영향권에는 당연히 북한도 있었고, 남한보다 더 먼저 고를 맞닥뜨리게 되는 게 바로 그들이었다.
그래서 북한은 고를 향해 핵폭탄 두어 발을 투하했으나···.
"그딴 걸로 칠대 재앙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오히려 화를 키우게 될 뿐이야."
스텔라는 작게 혀를 찼다.
이유라면 다름이 아니다.
핵의 폭발이 고의 심경을 건드렸고, 남하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한 달은커녕 보름이 조금 지났을 무렵 한반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만 스텔라가 논하고자 하는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다름 아닌 북한 지도자의 사망.
고로 인해 혼란스럽던 상황을 틈 타 최측근이던 방정후가 김정은을 암살했다.
"거기에 러시아가 개입했어."
그뿐이랴?
고를 토벌하겠다며 러시아의 최고 헌터를 투입시키겠다는 말이 나왔다.
당연 미국이 그걸 가만 지켜볼 리가 없었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에서도 북한에 군대를 투입시켰다.
한국의 정부도 군과 헌터를 보냈고, 결과- 북한에선 세 개 국가의 눈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작디작은 국지전의 연속.
위에선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래에선 길드 대 길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고가 북한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 더 많은 나라가 한반도에 뒤얽히기 시작할 거고, 그럼 3차 세계대전도 더 이상 몽상 속 이야기가 아니게 돼."
스텔라에게는 고를 토벌해야만 하는 대의도 존재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안드레도 스텔라의 체류에 별말 하지 않고 승낙한 거겠지.
3차 세계대전이 벌어져서 좋을 건 빌런들 밖엔 달리 없을 테니까.
"뭐, 그거 때문에 한국에 남은 건 아니지만······."
스텔라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그러곤 연선화에게 물었다.
"할멈도 정말 이전석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렇다.
스텔라가 굳이 한국에 남아 있는 이유.
그건 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전석의 영향이 더욱 다분했다.
벽을 넘어 그 너머에 도달한 유일한 존재.
그것은 스텔라로 하여금 마음속 불을 지피도록 만들었다.
한때 고에게 패배하며 벽의 높이에 절망했던 그녀다.
어떻게 해도 벽을 넘을 수가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벽의 너머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벽을 뛰어넘은 존재가 나타났다.
스텔라가 이전석에게 집착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에밀리의 연락도 제대로 받질 않고, 뒷조사를 해봐도 행적이 어디선가 뚝 끊어져 찾을 수가 없었으니···.
━음··· 전화도 안 받는 걸 보니 리도 바쁜 것 같은데, 기다리면 알아서 연락해 주지 않을까요?
━급한 일이라고, 에밀리.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오!
에밀리는 스텔라와 달리 너무나도 태연했다.
애당초 벽이란 걸 느껴본 적도 없을 테니 당연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성격 자체가 그러기도 했다.
에밀리는 느긋하고 태연하며, 항상 능글맞은 면이 있었다.
결국 하루하루 초조함만을 달래던 스텔라였으나.
━안 되겠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오늘 아침, 결국 참다못해 협회장을 찾았다.
명색이 스승인 그녀라면 제자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모른단다."
"···정말?"
"스승이라고 제자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 제자도 제자만의 사생활이 있는 법 아니겠느냐."
그에 스텔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뭐냐고."
제발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신비주의 같은 놈."
이전석은 한 달 전 모습을 감추고서부터 행적이 계속 드문드문했다.
마치 한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홍길동이란 인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기 나타났다 저기 나타나고, 또 언제는 갑자기 행적이 뚝 끊겨 버리고.
"어쨌든, 할멈도 모른다는 거지?"
재차 물음을 던져오는 스텔라.
그에 연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스텔라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알겠어. 그럼 이만 가볼게. 시간을 너무 잡았······."
정확히는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
"······"
연선화와 스텔라.
두 사람이 동시에 한 곳을 쳐다봤다.
창밖 너머.
구름의 저편.
"할멈."
"그래, 별아."
"방금 느꼈어?"
"······느꼈지."
모를 리가 없다.
비록 기운이 쇠약해졌다고 해도 연선화는 여전히 검선이었다.
검의 신이자 검의 종주.
모든 무의 정점에 선 자.
그렇기에 더욱 확신했다.
"천기가 바뀌었구나."
천기.
하늘의 흐름.
이게 변화를 일으켰을 때는, 스텔라가 알기로 세상에 오직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SSS급.
권좌와 동등한 강자가 탄생했을 때.
그리고 이 타이밍에 SSS급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그가 폐관에서 나왔나 보구나."
그.
최원율.
화룡검이라고도 불리는 화산의 정점.
그리고······.
"우리 제자도 온 모양이고."
"뭐?"
뒤이어진 연선화의 말에 스텔라가 의문을 표했다.
직후, 누군가 협회장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너······."
다름 아닌 이전석이었다.
"너 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스텔라님."
이전석이 스텔라의 말을 끊었다.
자신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아공간에서 단도를 꺼내 들며 말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일단 준비하시죠."
의미모를 이전석의 말.
"이건······."
스텔라도 이상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창밖을 쳐다본다.
바로 그 직후.
"옵니다."
무언가- 아니, 검을 든 누군가가 포탄처럼 창문을 부수며 들어왔다.
콰앙-!!
유리가 깨지며 폭발을 일으킨다.
이전석은 급히 주변에 결계를 펼쳤다.
폭발의 여파로부터 연선화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곧 충격이 잦아들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2미터는 족히 넘는 장신의 사내.
검정색의 매화가 핀 무복을 입고 있으며, 한 손에는 제 팔보다 한참 더 긴 장검을 쥐고 있다.
현명한 듯 보이면서도 패도적인 기세가 만연한 황갈색 눈동자.
교만과 오만이 엿보이는 표정.
짐승들조차 가까이하길 꺼릴 법한 근육.
터벅-.
그가 발을 내딛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밟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화룡검."
연선화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 그가 바로 화산의 가주이자 장문인이며, 또한 이제는 권좌의 일각이기도 한 헌터였다.
"저자가 왜 여길······."
반면 스텔라는 현 상황이 곤혹스러운 듯 보였다.
폐관에서 나오자마자 적진으로 향하다니.
최원율이 연선화에게 가진 악감정을 모르는 그녀로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전쟁 때문이라고 하면 납득이야 할 수 있겠지만.
"늙었군, 검성."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최원율.
그가 연선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연선화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러는 그대는 더욱 더 강해졌어."
연선화는 조심스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도를 집어 든다.
이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섰다.
정적과 침묵만이 감도는 한 가운데.
"저게 미친 건가? 아니면 권좌가 됐다고 자만하는 거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스텔라가 격분하며 마나를 퍼트리려 했다.
그때.
"잠시만 기다리시죠."
이전석이 그녀를 막았다.
"너······."
스텔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최원율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그건 틀림없이 살기였다.
그는 연선화를 죽이고자 하고 있었다.
반면 연선화는 어떠한가.
싸우고자 하는 의지도 느껴지지 않고, 싸운다 한들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을 리도 없다.
"너 미쳤어? 네 스승은 이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저대로 죽게 내버려둘 셈이야?"
"설마요."
이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라도 그렇게 생각이 없진 않았다.
그저 지금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특성의 효과를 빼앗는 수단······.'
전생에선 본 적이 없다.
천살성 외에 그런 것은 존재치 않았다.
적어도 이전석이 알기로 말이다.
만약 그게 최원율 자신의 특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이전석에겐 그걸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특성을 빼앗는 게 얼마나 위험한 효과인지는 이전석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특별한 수단으로 특성을 빼앗을 수 있는 수단이 있고, 그로인해 천살성이나 영원의 낙인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그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거다.
그러니.
"일단 지켜봅시다."
이전석이 애써 스텔라는 진정시키듯 말했다.
물론, 고작 그 한마디로 물러설 스텔라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는 거지만, 할멈은 지금 제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야.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
전음과는 별개의- 텔레파시라 불리는 마법이다.
5서클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중위 마법.
━압니다.
이전석은 전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태연하기까지 한 짧은 한마디.
스텔라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알면서도 내버려둬? 네 스승이 죽을 거라고!
━아뇨, 괜찮을 겁니다.
이전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에 스텔라는 도리어 당혹스러워졌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분명 스승님은 쇠약해지셨습니다. 하지만 연로했다고 한들 그걸 더러 약하다곤 할 수 없죠.
━미안하지만 그건 궤변이야. 상황을 봐. 상대는 SSS급에 오른 괴물이야. 아직 초입에 불과하지만, 지금 할멈의 상태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놈이 아니라고.
━스텔라님은 스승님께서 노쇠한 모습으로 검을 쥔 걸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없지.
━그럼 보면 아실 겁니다. 무(武)를 갈고 닦은 검수들에게 외면의 강함은 단순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이전석은 거기까지 말하곤 조용히 연선화와 최원율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가만히 선 채 서로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연선화의 팔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7화
화산의 종말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