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4화
고문 (2)
운명록은 7년 전 화산에 입문한 이대제자였다.
화산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자하신공과 매화검법을 완숙을 넘어 절정 수준까지 익혔으며, 뛰어난 재능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특성으로 체화시키기까지 했다.
각성자라면 심법과 검법을 두루 익힐 수 있지만, 그게 특성으로 진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
덕분일까.
운명록은 이대제자 중에서도 나름 촉망받는 인재가 되었다.
훗날에는 일대제자는 물론, 장로의 길마저 약속받은 검수.
애당초 자하신공과 매화검법을 익힌 시점부터 그가 장로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라 봐도 좋았다.
화산은 그만큼 운명록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단순히 헌터로서의 등급을 따지면 S.
30명밖에 되지 않는 일대제자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이었다.
헌데.
'이, 이게 대체······.'
그는 이전석의 눈을 보자마자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격이 달라.'
S급이기에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전석과 자신 사이에는 압도적인 격차가 있음을.
하지만.
'······나도 S급이야. 일대제자들도 어찌하지 못한다고. 이제와 겁먹을 필요는 없어.'
운명록이 애써 긴장을 다스렸다.
화산에서 일대제자라는 이름값은 하늘을 꿰뚫을 정도였고, 이대제자이면서 그런 일대제자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자신감을 보다 높여주었다.
"네가 누군지나 말해라."
척-.
운명록이 이전석의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을 새웠다.
분명 날과 목이 맞닿았는데도 피가 흐르지 않았다.
운명록은 그 사실에서부터 이상함을 깨달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이전석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박감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S급이라는 오만과도 같은 자존심 덕분일까.
"어서 말하라!"
갈(喝).
흔히 사자후라고도 불리는 기술.
마나와 격으로 뒤섞인 외침이 주변 일대를 뒤흔들었다.
나무와 풀이 흔들리며, 그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재밌네."
이전석은 사자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 오히려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이···?"
이번에는 운명록 역시도 꽤 놀란 듯싶었다.
S급의 격을 실어 날린 사자후였는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니?
"다른 놈들은 필요 없어."
문득.
이전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있은 직후였다.
촤악-!
삼대제자 다섯의 목이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운명록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정말 한 순간에 벌어진 일.
S급인 그조차 이전석의 일격을 보지 못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보긴 했다.
어느새 이전석의 오른손에 쥐어진 단도 한 자루.
그것이 순간적으로 허공을 가른 것이다.
검붉은 궤적이 희미하게나마 비추어졌다.
그래.
그게 전부였다.
그 궤적이 눈에 들어온 직후, 자신을 제외한 삼대제자가 전부 죽어버렸다.
'어떻게, 이런······.'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뚝, 뚝-.
단도의 날을 타고 떨어지며 발치를 붉게 물들이는 핏물.
털썩-.
사방에서 시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자식···!"
운명록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의 동공에 당황스러움 이상으로 분노가 깃들었다.
"감히 화산의 검수를!"
여전히 자존심이 오만하게 드높이 치솟아 있다.
운명록이 손에 쥔 검을 휘둘러 왔다.
매화검법의 묘리가 담긴 휘두름.
검 끝으로 푸른 꽃잎이 피어난다.
그러나.
파삭-.
순간적으로 사방을 뒤덮은 검붉은 궤적이 꽃잎을 베어 갈랐다.
이전석의 단도로부터 비롯된 검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운명록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끄악!"
비명과 함께 피를 흩뿌리는 운명록.
팔과 다리를 스쳤을 뿐이건만, 불에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이 그를 잠식했다.
반면, 한순간에 S급 헌터를 압도한 이전석은 심드렁하게 단도를 내려 봤다.
'쓸 만하군.'
최은하의 매화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만들어낸 그만의 검술.
진혈도법 제 1초식 - 진혈노방.
기존의 매화노방에 이전석 자신만의 신격을 뒤섞고, 도술의 묘리로 검격을 수십 갈래로 분열시켰다.
그 결과, 이전석은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사방에서 수십의 검수가 공격하는 듯한 위엄을 자아낼 수 있었다.
매화와 닮았지만 검붉은 꽃잎이 뺨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걸 본 운명록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색과 형태, 기운조차 다르지만 틀림없었다.
"매화노방······."
이전석의 자세와 현상이 그것과 쏙 빼닮아 있었다.
"외부인이 어찌 화산의 매화를······!"
경악 어린 그의 외침.
이전석은 허공에 흩날리는 검붉은 꽃잎을 손으로 쥐었다.
"네 눈엔 이게 매화로 보이나 보지?"
꽉-.
주먹을 쥔 그의 손아귀로 검붉은 꽃잎이 바스러졌다.
구겨지고 찢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그것은 단순 착각이나 환상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이전석은 틀림없이 단도로부터 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매화가 아니라 할지언정, 화산이 여태껏 줄곧 이상으로 품어왔던 검법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덕분일까.
운명록은 저 자신의 처지로 생각하지 못하고 입을 놀렸다.
"그 도법을, 누구에게 배운 거지?"
아무래도 이전석이 진혈도법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수받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하나의 무술을 창안할 정도의 대종사는 권좌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연선화조차 특성에 의해 검술을 익혔을 뿐, 직접 천매보를 만들어낸 건 아니다.
반면, 원본이 존재한다고 한들 그것을 토대로 자신만의 검법을 창안한 이전석의 위업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라 해도 좋았다.
때문에 운명록은 차마 진혈도법을 이전석이 만들었다곤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왜 그걸 알려줘야 하지?"
"그건···."
이전석이 오히려 되묻자 운명록은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것들은 늘 이런 식이다.
저 자신밖엔 생각하지 못하고, 금세 남의 것을 탐닉하려 든다.
오만하고 교만하며, 탐욕에 물든 버러지.
"그건 화산의 검법이다!"
운명록이 까득 이를 갈며 소리쳤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습.
실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무도(武道)를 모르는 건가?"
무도.
무에 대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선.
이전석은 내심 어이가 없어졌다.
"내가 쓰는 도법이 너희의 검법과 닮았으니 내 도법을 너희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
"미친 소리도 이쯤 되면 대단할 지경이야."
애당초.
"너희 화산이 무도를 논할 처지가 되기는 하나?"
이전석이 운명록을 비웃었다.
화산이 지금까지 저질러온 마도(魔道)는 백도(白道)는커녕 무도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굳이 따지면 내가 만들긴 했지."
"마, 만들었다고?"
"매화검법을 참고했거든."
"말도 안 돼!"
이전석은 운명록을 빤히 쳐다봤다.
경악과 당혹이 어린 표정.
그래.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습기 그지없는 얼굴.
"미안하다만, 말이 되냐 안 되냐는 네가 따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쿵-.
이전석이 발을 굴렀다.
순간 대지가 진동하며 흔들렸다.
운명록 또한 중심이 무너지고-.
서걱-.
이전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도를 휘둘렀다.
"끅······!"
가슴팍이 갈라지며 피가 쏟아졌다.
운명록은 옅게 신음을 토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가까스로 치명상은 면했지만.
'조금만 날이 깊게 들어왔으면······.'
그대로 상체가 절단나며 죽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어째서일까.
운명록이 이전석의 공격을 피했기에?
아니었다.
오히려.
'봐주고 있어······!'
이전석은 일부러 운명록을 죽이지 않았다.
일격에 끝장낼 수도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 사실에 운명록은 치욕스런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전석은 내심, 옅게 즐거움을 느꼈다.
천살성을 얻기 이전부터 그랬다.
버릇없는 놈들을 교육하는 건 늘 재밌고 즐거운 일이었다.
"일부러 기세를 드러내 미끼를 날렸지. 화산의 본관인 만큼 꽤 큰 놈이 걸려들 거라곤 생각 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선이군."
그 말에 운명록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자신을 유도했다는 건가?
"너에겐 물어볼 게 많아."
이어 그가 살벌한 미소를 띠운 채 재차 단도를 휘둘러왔다.
도법의 묘리가 섞이지 않은 단순한 검격.
이전만큼 빠르진 않아서 가까스로 비껴낼 순 있었다.
하지만.
"크윽······."
팔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날과 날이 맞부딪칠 때마다 근육이 일그러지며 고통을 비명처럼 토해냈다.
격의 차이.
그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같은 S급임에도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벽이 코앞에 드리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S급이라도 이전석은 이미 EX급 너머를 바라봤던 존재다.
하물며 그에게는 신격마저 존재했으니, 아직 완숙에도 이르지 못한 S급이 그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매개이도(梅開利導)!'
운명록.
그의 검이 다시 푸른 꽃잎을 피워냈다.
마치 검기처럼 날을 휘감는 수십의 꽃.
그것이 검을 이끌며 일직선으로 이전석을 노리고 쏘아졌다.
그리고.
'진혈노방.'
이전석이 그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미리 보았던 초식이자 공격이었으나, 패도적인 기세에 운명록은 차마 반응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압도당해 움직이지 못했다 보는 게 옳으리라.
S급의 강자 수십 명이 일제히 검을 내찌르는 듯한 위압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가슴이, 목이, 숨이 막힌다.
촤악-!
그 사이로 이전석의 단도가 정확히 운명록의 왼팔을 베어 갈랐다.
"끄아아악!!"
비명과 함께 핏물이 흩뿌려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팔.
운명록이 고통에 무릎 꿇는다.
"헉··· 허억······."
그는 어떻게든 고통을 참아내려는 듯 숨을 헐떡였다.
'도망쳐야 해···!'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런 괴물이 화산의 지척까지 접근해 있다니···!!'
어떻게든 상부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결정은 금세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
화산의 검수들이 배운다는 보법.
마치 꽃잎을 밟고 움직이듯 부드럽다.
그러나 한편으론 재빠르기도 한 모습이 연선화의 천매보와 쏙 빼닮아 있었다.
뭐, 그녀의 천매보나 오행매화보나 결국은 같은 매화이니 따지고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툭-.
이전석이 작게 발돋움했다.
천보의 첫 번째 형식 파형.
그리고 두 번째, 구형(具形)
그것은 첫 번째 발걸음인 파형의 연장선으로, 파형을 더욱 완벽하고 뛰어난 상태로 강화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당연히 그만큼 패도적이며, 또한 빠르다.
이전석은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운명록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쿠구궁-!
수풀이 갈라지며 대기가 진동한다.
조용하면서도 파괴적인 발걸음이 숲 전체를 진동시켰다.
이윽고, 이전석이 운명록을 따라잡았다.
"어떻게······?!"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던 운명록은 깜짝 놀란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더욱 속도를 높여 이전석을 떨쳐내려 하지만···.
"도망치면 쓰나."
이전석은 단도를 한차례 빙글 돌려 잡곤,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검붉은 궤적이 꽃잎과 함께 오른팔을 절단한다.
"크아악!"
운명록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말했지? 너에겐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고. 알려줬으면 하는 게 또 있거든."
이전석이 단도에 들러붙은 핏물을 떨쳐냈다.
그리고.
푸욱-!
"끄윽······!"
바닥에 쓰러진 운명록의 양 허벅지와 어깨를 무언가가 꿰뚫었다.
이전석의 오른손.
검지, 중지, 약지, 엄지.
총 네 손가락에서 발아한 손톱이 날카롭게 늘어나 못처럼 운명록을 관통해 있다.
"이, 이건···."
떨리는 동공.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당황이 그를 집어삼킨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삼대제자 중 한 명인 하승민의 특성 '손톱증강.'
그것이 이전석에 의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손톱이 늘어나 상대방을 꿰뚫거나 구속하는 건 하승민이 가진 전매특허였다.
그걸 다른 사람이 사용하다니?
"네놈이 어떻게······!"
운명록은 고통 속에서도 의문과 분노에 찬 어조로 외쳤지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야."
퍼억-!
"끅!"
이전석이 운명록의 턱을 걷어찼다.
피를 토하며 초점이 크게 흔들린다.
"끄아악!"
이전석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톱에 꿰여 고정된 운명록이 그대로 이전석의 손톱에 매달린 채 들어 올려졌다.
"커흑······."
고통에 신음하는 운명록.
그를 바라보며 이전석이 말했다.
"자하신공."
"······?!"
"알고 있지?"
"······."
운명록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전석이 굳이 자하신공을 입에 담은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내 도법에는 아직 심법이 없어서 말야."
그가 단도를 빙글 돌려대며 말했다.
물론 심법이 없어도 딱히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진혈검법의 원본은 매화검법이었다.
그것이 자하신공과 엮여 뛰어난 시너지를 발휘하곤 했는데, 진혈도법에도 그와 같은 심법- 아니, 신공이 있다면 더욱 완벽해질 게 분명했다.
하물며 시스템도 말하지 않았던가.
심법이 없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이십사수매화검법이 자하신공과 엮여 펼쳐지는 걸 고려하면, 이전석에게도 그에 걸 맞는 심법이 필요했다.
'은하는 자하신공을 알고 있지만 일부밖에 몰랐으니.'
자세히 배우기도 전에 기본 구결만을 외운 채로 본관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눈앞의 검수- 운명록이라면 달랐다.
S급.
'복장을 보니 이대제자 같지만······ 매화검법을 익힌 시점에서 자하신공도 함께 익혔을 확률이 높아.'
화산은 장로가 될 이에게 매화검법과 함께 자하신공을 알려준다.
물론 장문인이 익히게 될 것만큼 완벽한 것들은 아니다.
구결이 여럿이나 빠진 불완전한 검법이자 신공이었지만,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직접적인 고문은 오랜만이군."
꿀꺽-.
이전석의 말에 운명록이 침을 삼켰다.
긴장과 두려움이 식은땀이라는 형태가 되어 온몸을 적셨다.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보자고."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5화
화산의 종말 (1)
자하신공은 오직 화산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다.
역사에 다시 없을 절세의 심법.
마나가 없는 일반인조차 자하신공을 제대로 익힌다면 B급 헌터와 동등한 검수로 만들어주곤 했다.
하물며 마나가 있는 각성자라면?
그 위력은 가히 말로 표현 못할 정도다.
아름다운 자색 빛의 신공은 익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세의 고수가 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오랜 옛날부터 자하신공은 장문인과 장로들의 철저한 관리 아래 구전되었다.
누구도 쉽사리 그 구결을 넘볼 수 없도록 하며, 그러면서 장문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할 경우까지 대비했다.
구결을 일부 제외한 반쪽짜리 자하신공을 대대로 장로(혹은 장로가 될 이)들에게 익히도록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하신공의 구결을 퍼즐처럼 나눠, 장문인의 각 후계자들이 익히도록 만들었으니···.
덕분에 자하신공은 수백 년이 흐르면서 조금도 유실되지 않고 그대로 현 화산에까지 전해졌다.
운명록이 익힌 자하신공도 바로 그것이었다.
장로가 된다면 반드시 하사받는 것.
비록 원본에 비해 한참 미치지 못한다지만, 그것은 화산의 정수인 만큼 결코 외부인의 손에 넘어가선 안 됐다.
그래서 그는 이전석의 고문에도 악착같이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끄으으윽······!"
이전석으로부터 시작된 마나가 전신을 헤집으며 오장육부를 뒤튼다.
근육 위로 돋아난 핏줄이 파열되고 피부가 찢어지며 혈액이 솟구쳤다.
엄청난 격통이 운명록을 집어삼켰다.
맨정신으로 버티는 게 어려울 지경이다.
그 가운데, 한때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2장로의 말이 떠올랐다.
━매화검법과 자하신공. 이 두 가지만은 무슨 수를 써도 사수해라. 만일 적의 손에 넘어갈 상황이 생긴다면······ 자결해라.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다.
두렵고, 그 이상으로 떨렸다.
자결이 어디 쉬운 일이랴.
당시에는 자신감에 차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그만한 상황에 당면하자 고통과 두려움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망설임이 뇌리를 잠식한다.
"어금니에 숨겨둔 독은 안 쓸 건가?"
그때.
이전석이 입을 열었다.
운명록은 깜짝 놀랐다.
"어, 어떻게 그걸······!"
"계속 입을 오물거리고 있으면 안 그래도 신경 쓰이지."
"······끄읍!"
이전석이 강제로 운명록의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어금니 사이로 작은 독단을 빼냈다.
"아, 아 대······!"
어설픈 발음으로 발악하는 운명록.
이전석이 그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커흑?!"
그러자 손쉽게 입이 벌려지며 독단을 빼낼 수 있었다.
자결을 위해 줄곧 숨겨두고 있던 비수.
그걸 빼앗기자 운명록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반면.
"흠."
이전석은 보랏빛의 작은 구슬을 바라봤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올라 있는 창.
아까 삼대제자 다섯 명을 죽이면서 얻었던 특성 중 하나인데······.
━
독 흡수
등급 : B
효과 : 독을 흡수하여 피의 성질을 변화시킨다.
━
이전석은 상태창을 잠깐 흘깃 바라봤다.
그리고 "흡수"라 말하며 특성을 사용했다.
직후, 독단이 파삭 부서졌다.
조각을 넘어 아예 가루가 된 구슬.
그것이 손가락으로 스며든다.
피부가 보랏빛으로 변했으나.
[독을 중화합니다.]
[당신의 피에 열독(裂毒)의 성질이 깃듭니다.]
금세 피부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대신이라는 듯 체내에 흐르는 피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느껴졌다.
'과연···.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건가.'
이전석은 자신의 피가 말 그대로 열독이라 불리는 독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섭취하면 그 즉시 내장기관을 갈기갈기 찢어놓으면서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독이로군.'
아마 육체에 깃든 자하신공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심어놓은 독단이리라.
'괜찮은 특성이야.'
삼대제자를 죽이며 얻은 다섯 개의 특성.
솔직히 말해 그중 세 개는 이전석에게 별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손톱증강.
'시험 삼아 써봤지만······.'
이전석이 운명록을 바라봤다.
여전히 자신의 손톱에 꿰뚫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
'이 정도는 마나로 대체할 수 있어.'
즉, 아무런 쓸모가 없다.
오히려 보기에 흉해, 더 사용하기가 꺼려졌다.
그래서 독 흡수도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정작 직접 사용해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특성이었다.
독을 계속 흡수하면 그만큼 많은 독을 피가 머금게 되는 걸까?
"누구··· 네놈은 대체, 뭐하는······."
의문도 잠시.
쿨럭-.
운명록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은 만나는 놈들마다 죄다 그런 소릴 하는군."
물론 그딴 건 하등 알 바가 아니었다.
"네가 알고 있는 자하신공의 모든 걸 알려줘야겠어."
그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고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빼낼 정보도 많이 있었다.
※ ※ ※
화산의 제 2장로 최한설.
그는 과거 최원율의 형제였으나, 후계혈전에서 밀려 옥좌를 차지하지 못했다.
때문에 한쪽 팔을 잃고 지금은 외팔이로서 화산의 장로직을 맡고 있었다.
━너의 패배가 나의 승리를 드높일 것이다.
한때 최원율은 그리 말하며 최한설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그 말대로 최한설은 줄곧 패배자로서 치욕과 모욕을 당했으며, 반면 최원율은 원수를 살려준 대인배이자 승리자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최원율이 화산의 장문인- 정확히는 가주가 되고 42년.
그 긴 시간을 오직 깊은 인내심만으로 버텼다.
같은 장로들에게도 모욕당하고, 일대제자들이 자신을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것조차 칼을 삼키는 심정으로 참았다.
물론 그라고 아무런 생각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저 패배자로서 화산에 남은 건 아닌 것이다.
옥좌를 향한 탐닉은 여전히 시들지 않았고, 그렇기에 42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를 갈며 칼을 닦았다.
외팔로도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대제자는 물론 이대와 삼대- 그리고 화산의 제자가 되길 원하는 견습생까지 서서히 자신의 영향 아래 물들였다.
그렇게 최승철을 이용해 실질적인 화산의 지배자로서 거듭나고자 했으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아가씨."
지금 그의 눈앞에는 최승철의 머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메이드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오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더니.
'도련님이 죽었다고? 저년은 팔이 잘리고?'
1층 로비의 상황을 순식간에 파악한 최한설은 이내 최은하를 바라보았다.
"이건 아가씨께서 하신 짓입니까?"
폐부를 찌르듯 차가운 음성.
최승철의 죽음으로 계획이 망가진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반면 최은하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뒤에서 그녀를 대신하듯 메이드 하나가 떨고 있을 뿐.
"네. 제가 죽였어요."
"······."
뒤이어진 단호한 대답.
최한설이 얼굴을 찌푸렸다.
죽였다고? 최은하가?
'그새 각성했나? 아니야. 각성자 특유의 기척과 마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여전히 무각성자다.'
그런데 어떻게 죽였다는 거지?
말이 안 된다.
말이 될 리가 없다.
아무리 신체를 단련하고 검술을 갈고 닦았다고 한들 일반인이 S급 헌터를 죽이는 건 하늘이 무너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빛은 아니야.'
적어도 최은하의 얼굴은 그러했다.
그래서 더 당혹스러운 것이다.
'승철 도련님의 별택이 협회놈들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설마 최은하가 협회와 손을 잡은 걸까?
따지고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최은하가 홀로 최승철을 죽였다는 것보다야 훨씬 현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승철 도련님을 죽였다는 건······.'
대단한 성과다.
설령 그녀가 주도하지 않았고 협회와 협력했다 가정해도, 최승철은 무려 S급 헌터이자 화산의 세 번째 후계서열을 가진 이였으니까.
'···어차피 승철 도련님은 돌아가셨다.'
이유가 어찌 됐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머리가 가짜일 가능성?
"이보게."
최한선이 함께 있던 집사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그가 바닥을 뒹굴던 머리를 확인했다.
그러곤 최한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짜는 아니라는 거군.'
진짜 최승철이다.
"도련님!!"
그때.
늙은 여성의 쇠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최승철의 전속 메이드이자 유모인 박민순이었다.
"이, 이게··· 대체 이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털석-!
평소 감정은 물론 표정의 변화 한번 없어 냉철하기로 유명하던 그녀였으나 이번만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리곤 바닥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최승철의 머리를 주워 든다.
그리고 잠시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아··· 아아······"
애처로울 정도로 서글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아기 때부터 친자식처럼 애지중지 돌보고 키워온 도련님이었다.
그런 도련님의 죽음은 박민순에게 이로 말 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대체······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최승철의 머리를 품에 안고 흐느끼는 박민순.
'시험해 볼까.'
그녀를 보며 최한설이 생각했다.
유모라 해도 일단은 C급 헌터다.
최은하가 손에 들고 있는 검이 장식용인지 아닌지는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은하 아가씨께서 하셨다는군."
나지막한 최한설의 말에 박민순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참말입니까?"
"그래. 그리 들었다."
"······."
그녀가 고개를 돌려 최은하를 바라봤다.
오른손에 든 검,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피.
그건 최승철의 피가 아니었으나, 친자식과도 같은 도련님을 잃은 슬픔은 박민순에게서 분별력을 앗아갔다.
"배은망덕한 것."
착-.
어느새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낡은 메이드복 사이에서 여러자루의 비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죽음으로 갚아라."
더 긴 말은 없었다.
박민순이 비수를 내던지며 최은하에게 달려들었다.
"아, 아가씨!"
민신지가 소리쳤다.
최은하가 혹 잘못되진 않을까 싶어.
그런데.
"괜찮아."
최은하는 의외로 멀쩡했다.
조금의 흥분도, 불안도 없다.
그저 천천히 검결지를 새운 채 검을 휘두를 뿐.
그리고.
화아악-!
마치 파도치듯, 혹은 물결이 흐르는 것처럼.
최은하의 검으로부터 비롯된 분홍 꽃잎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주변에서 밀려드는 비수를 쳐내고, 검과 함께 일제히 박민순의 가슴을 꿰뚫는 검.
"매화만개(梅花滿開)."
매화가 한가득 피어 흩날린다.
매화의 파도가 박민순을 꿰뚫고, 꽃이 피듯 솟구쳐 만개했다.
아름답게 로비를 메꾸는 꽃잎.
매화가 눈처럼 살랑 떨어져 발치를 맴돈다.
최한설이 두 눈을 부릅뜨며 그것을 보았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최은하의 검에 꿰뚫려 피를 토하는 박민순도, 팔을 잃었던 메이드와 그 친우들, 그리고 뒤에서 몸을 떨고 있던 민신지까지.
"매화······!!"
최은하가 발현시킨 현상을 보곤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매화.
그것은 매화검법과 자하신공 이상으로 화산의 정수이자 근원, 그리고 모든 것이라 표현할 만한 것이었기에.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본관에 있는 모든 장로들을 소집하세요."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우뚝 선 채, 매화라는 열매를 흩뿌리는 최은하.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화산의 적합한 후계자가 돌아왔다고."
지금 이 순간, 최은하의 가치는 화산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이전석이 노리던 바이기도 했다.
※
'생각보다 잘하는군.'
천리안으로 최은하를 지켜보던 이전석이 작게 미소 지었다.
워낙 성격이 착했던 탓에 걱정도 했지만, 최은하는 의외로 강단 있게 상황을 밀고 나갔다.
한 번 결정한 것이라면 쉬이 물리지 않는다.
덕분에 이전석이 계획했던 대로 화산 내부의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곧이어 장로들이 모여들며 이전석이 말한 대로 그들을 압박하는 최은하.
'당분간은 가만 내버려두면 되겠어.'
그럼 장로들끼리 알아서 지지고 볶으며 최은하를 서로 가지려 할 것이다.
"그, 그마······ 제아 그마······."
문득 일그러지고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운명록이었다.
발톱은 물론 치아와 한쪽 눈까지 빼어진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애원하고 있었다.
"그냐, 주겨저······!"
"죽고 싶어?"
"······!!"
운명록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문이 어찌나 심했는지, 그의 몸에는 어느 한 곳에도 성한 부분이 없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 죽음을 원할 정도로.
"그래, 얻을 건 얻었으니 죽여주지."
"아······."
이전석이 단도를 휘둘렀다.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화산 내부의 상황···. 가령 2장로 최한설이 제자들을 휘하로 모으고 있으며, 운명록 또한 그중 한 명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자하신공의 구결이나 묘리도 전해 들었다.
몇 개의 퍼즐이 빠진 불완전한 신공이지만, 그건 추후 장로들을 통해 얻어내면 될 뿐인 일이었다.
서걱-.
이어 목이 잘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운명록.
손톱이 원래대로 돌아오며, 머리와 함께 그의 몸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예상대로.
[악인을 죽였습니다.]
[선업이 '100,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소폭 하락합니다.]
선업이 오르고 악업이 떨어졌다.
화산 본관에 속해 있는 헌터인 만큼 제대로 된 놈일 리 없으니······.
삼대제자들을 죽일 때도 악업이 떨어졌었다.
아마 화산에 있는 대부분의 헌터가 그러할 것이다.
그런 것쯤은 얼핏 눈으로 봐도 알 수 있었다.
신격을 얻고 나서부턴, 영혼에 깃든 업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이들을 죽였던 것이기도 했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바람의 길(S+)을 습득합니다!]
[바람의 길의 영향으로 당신의 움직임이 조금 더 민첩해집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이전석은 그것을 뒤로한 채 화산의 본관을 바라봤다.
'해줄 수 있는 건 모두 해줬다.'
나머진 최은하 스스로가 화산을 장악하길 기다리면 될 뿐.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 ※
일주일.
최은하가 본격적으로 화산에서 활동하고, 이전석이 운명록을 죽인 이후 흐른 시간이었다.
그동안 화산에선 총 열여섯 차례의 공격이 있었다.
모두 최은하의 주도 아래 벌어진 전투였다.
정확히는 한여름이 화산의 전력을 해킹 및 분석하면, 그걸 토대로 이전석이 작전을 구성해 최은하에게 전달했다.
[한국, 이대로 무너지나?]
[대한민국에서 내전 발발···. 세계 길드 연맹은 어째서 가만히 있는가.]
[칠대 재앙 고가 빠른 속도로 남하 중.]
[한국 정부 "만마의 권자"에게 지원 요청.]
포탈 사이트에 올라오는 기사들.
당초 계획했던 대로다.
전국 각지에서 울려 퍼지는 전쟁의 봉화.
대한민국이 점차 혼란 속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환란의 한가운데.
이전석은 돌연 하늘의 흐름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흔히 천기라고도 불리는 것.
격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느낄 수 있는데, 신격을 가진 이전석은 보다 또렷하게 천기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천기가 소란스런 경우는 한 가지뿐이었다.
SSS급 강자의 탄생.
혹은 그에 준하는 재앙.
이전석이 기억하기로 후자는 이 시간대에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자.
세상 어딘가에서 압도적 강자- 즉, 권좌가 탄생했다.
'최원율······ 벌써 폐관을 끝낸 건가?'
이 시기에 권좌가 될 인물이라면 그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족히 2달은 더 빠른 시기.
'역시 여명회가 개입했나?'
화산에 숨어든 여명회의 세작.
놈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이전석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이미 준비는 끝냈다.
진법도 완벽하고, 주리천도 언제든 도술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화산에 완전한 종말을 가져다 줄 때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6화
화산의 종말 (2)
협회장실에는 두 명의 권좌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검의 권좌와 만마의 권좌.
두 사람은 소파에 앉은 채 녹차의 향을 음미했다.
그것도 잠시.
스텔라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의 체류 기간을 조금 늘렸어."
"그러니?"
"···그거 알아? 할멈의 눈빛은 뭔가 기분이 나빠."
"그러는 별이 너는 언제나 귀엽구나."
"흥."
스텔라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연선화가 자신을 상대할 땐 늘 이랬다.
같은 권좌인데도 나이 차가 있다는 것만으로 항상 그녀를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체류 기간을 늘렸다는 건 아마 고 때문이겠지?"
뒤이어진 연선화의 물음.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연선화가 미안함이 깃든 어투로 말했다.
"원래는 내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걸 아직 어린아이에게 떠맡기게 만들었다.
비록 권좌급의 강자라고 한들, 연선화에게 그건 꽤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쉽사리 부탁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 정부측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고의 토벌을 도와달라고.
"고맙구나."
연선화가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말뿐이라는 게 씁쓸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스텔라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도 연선화의 변화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명색이 같은 권좌급의 강자였으니.
'5년 전부터였나?'
그때부터 연선화의 기운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빠르게 그녀로부터 세월을 앗아갔다.
때문일까.
연선화는 세간에 얼굴도 잘 드러내지 않고, 지난 5년간 뒷방 늙은이처럼 지내야만 했다.
'그래도 저번에 봤을 땐 아직 정정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슬슬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할멈?"
"사람은 늘 위험 속에서 산단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흡사 말을 돌리는 듯한 연선화의 모습에 스텔라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엘릭서, 정말 마실 생각 없어?"
"그 귀한 물건을 어찌 구한다는 말이냐. 애초에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나라면 구할 수 있어."
구할 수 있다.
그 말에 연선화가 스텔라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삶을 연명하고 싶진 않구나."
"고집불통."
"원래 늙은이는 고집이 많은 법이지."
연선화는 거기까지 말한 뒤 애써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안드레는 괜찮다고 하더냐?"
안드레.
파밀리아의 길드장이자 또 다른 권좌 중 한 명이다.
굳이 그 이름을 꺼냈다는 건··· 자신이 한국에 체류하는 걸 그가 허락했냐 묻는 거겠지.
당연히도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를 죽이고 마석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렇게 하래."
"할 수 있겠느냐?"
"해야지. 할 수 있으니까 하겠다고 한 거고."
그녀가 괜히 정부의 부탁을 받았겠는가.
칠대 재앙 고.
놈에게 대적할 만한 마법이 있었다.
'저번이랑은 달라.'
저번.
그렇다.
그녀는 막 권좌가 되었을 때 고에게 도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젊음이라는 미숙함과 오만으로 인해 패배했었다.
안드레···.
그녀에게 있어 아버지와도 같은 길드장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지만, 지금도 그녀의 등에는 당시에 입은 상처가 버젓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 이야기일 뿐이다.
그녀에게 젊음의 미숙함과 오만은 없었다.
그것들은 노련함과 신중함이 되었고, 이번에야 말로 고를 죽이고야 말 터였다.
그 생각을 눈치 챈 걸까.
"때로 복수는 화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단다."
연선화가 씁쓸함이 깃든 어투로 말했다.
스텔라는 그 말에 잠시 입을 다물다,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복수가 아니라 리벤지 매치야. 당한 건 되갚아 줘야지. 비록 젊은 치기로 당한 상처라고 해도··· 이런 말 하기 좀 부끄러운데, 놈을 죽이지 않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는 스텔라에게 있어 또 다른 벽이었다.
그걸 넘지 않고서는 자신에게 드리운 거대한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나라를 싫어하지 않거든. 무엇보다···."
스텔라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아."
고는 한반도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
그 영향권에는 당연히 북한도 있었고, 남한보다 더 먼저 고를 맞닥뜨리게 되는 게 바로 그들이었다.
그래서 북한은 고를 향해 핵폭탄 두어 발을 투하했으나···.
"그딴 걸로 칠대 재앙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오히려 화를 키우게 될 뿐이야."
스텔라는 작게 혀를 찼다.
이유라면 다름이 아니다.
핵의 폭발이 고의 심경을 건드렸고, 남하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한 달은커녕 보름이 조금 지났을 무렵 한반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다만 스텔라가 논하고자 하는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다름 아닌 북한 지도자의 사망.
고로 인해 혼란스럽던 상황을 틈 타 최측근이던 방정후가 김정은을 암살했다.
"거기에 러시아가 개입했어."
그뿐이랴?
고를 토벌하겠다며 러시아의 최고 헌터를 투입시키겠다는 말이 나왔다.
당연 미국이 그걸 가만 지켜볼 리가 없었다.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에서도 북한에 군대를 투입시켰다.
한국의 정부도 군과 헌터를 보냈고, 결과- 북한에선 세 개 국가의 눈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작디작은 국지전의 연속.
위에선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래에선 길드 대 길드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고가 북한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 더 많은 나라가 한반도에 뒤얽히기 시작할 거고, 그럼 3차 세계대전도 더 이상 몽상 속 이야기가 아니게 돼."
스텔라에게는 고를 토벌해야만 하는 대의도 존재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안드레도 스텔라의 체류에 별말 하지 않고 승낙한 거겠지.
3차 세계대전이 벌어져서 좋을 건 빌런들 밖엔 달리 없을 테니까.
"뭐, 그거 때문에 한국에 남은 건 아니지만······."
스텔라가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그러곤 연선화에게 물었다.
"할멈도 정말 이전석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렇다.
스텔라가 굳이 한국에 남아 있는 이유.
그건 고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전석의 영향이 더욱 다분했다.
벽을 넘어 그 너머에 도달한 유일한 존재.
그것은 스텔라로 하여금 마음속 불을 지피도록 만들었다.
한때 고에게 패배하며 벽의 높이에 절망했던 그녀다.
어떻게 해도 벽을 넘을 수가 없었고, 그렇기에 더욱 벽의 너머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벽을 뛰어넘은 존재가 나타났다.
스텔라가 이전석에게 집착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에밀리의 연락도 제대로 받질 않고, 뒷조사를 해봐도 행적이 어디선가 뚝 끊어져 찾을 수가 없었으니···.
━음··· 전화도 안 받는 걸 보니 리도 바쁜 것 같은데, 기다리면 알아서 연락해 주지 않을까요?
━급한 일이라고, 에밀리.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요.
━아오!
에밀리는 스텔라와 달리 너무나도 태연했다.
애당초 벽이란 걸 느껴본 적도 없을 테니 당연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성격 자체가 그러기도 했다.
에밀리는 느긋하고 태연하며, 항상 능글맞은 면이 있었다.
결국 하루하루 초조함만을 달래던 스텔라였으나.
━안 되겠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오늘 아침, 결국 참다못해 협회장을 찾았다.
명색이 스승인 그녀라면 제자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모른단다."
"···정말?"
"스승이라고 제자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 제자도 제자만의 사생활이 있는 법 아니겠느냐."
그에 스텔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뭐냐고."
제발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신비주의 같은 놈."
이전석은 한 달 전 모습을 감추고서부터 행적이 계속 드문드문했다.
마치 한국의 역사에 등장하는 홍길동이란 인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여기 나타났다 저기 나타나고, 또 언제는 갑자기 행적이 뚝 끊겨 버리고.
"어쨌든, 할멈도 모른다는 거지?"
재차 물음을 던져오는 스텔라.
그에 연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스텔라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알겠어. 그럼 이만 가볼게. 시간을 너무 잡았······."
정확히는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
"······"
연선화와 스텔라.
두 사람이 동시에 한 곳을 쳐다봤다.
창밖 너머.
구름의 저편.
"할멈."
"그래, 별아."
"방금 느꼈어?"
"······느꼈지."
모를 리가 없다.
비록 기운이 쇠약해졌다고 해도 연선화는 여전히 검선이었다.
검의 신이자 검의 종주.
모든 무의 정점에 선 자.
그렇기에 더욱 확신했다.
"천기가 바뀌었구나."
천기.
하늘의 흐름.
이게 변화를 일으켰을 때는, 스텔라가 알기로 세상에 오직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SSS급.
권좌와 동등한 강자가 탄생했을 때.
그리고 이 타이밍에 SSS급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그가 폐관에서 나왔나 보구나."
그.
최원율.
화룡검이라고도 불리는 화산의 정점.
그리고······.
"우리 제자도 온 모양이고."
"뭐?"
뒤이어진 연선화의 말에 스텔라가 의문을 표했다.
직후, 누군가 협회장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너······."
다름 아닌 이전석이었다.
"너 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스텔라님."
이전석이 스텔라의 말을 끊었다.
자신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아공간에서 단도를 꺼내 들며 말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일단 준비하시죠."
의미모를 이전석의 말.
"이건······."
스텔라도 이상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창밖을 쳐다본다.
바로 그 직후.
"옵니다."
무언가- 아니, 검을 든 누군가가 포탄처럼 창문을 부수며 들어왔다.
콰앙-!!
유리가 깨지며 폭발을 일으킨다.
이전석은 급히 주변에 결계를 펼쳤다.
폭발의 여파로부터 연선화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곧 충격이 잦아들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2미터는 족히 넘는 장신의 사내.
검정색의 매화가 핀 무복을 입고 있으며, 한 손에는 제 팔보다 한참 더 긴 장검을 쥐고 있다.
현명한 듯 보이면서도 패도적인 기세가 만연한 황갈색 눈동자.
교만과 오만이 엿보이는 표정.
짐승들조차 가까이하길 꺼릴 법한 근육.
터벅-.
그가 발을 내딛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밟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화룡검."
연선화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 그가 바로 화산의 가주이자 장문인이며, 또한 이제는 권좌의 일각이기도 한 헌터였다.
"저자가 왜 여길······."
반면 스텔라는 현 상황이 곤혹스러운 듯 보였다.
폐관에서 나오자마자 적진으로 향하다니.
최원율이 연선화에게 가진 악감정을 모르는 그녀로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전쟁 때문이라고 하면 납득이야 할 수 있겠지만.
"늙었군, 검성."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던 최원율.
그가 연선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연선화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한 것 같았다.
"그러는 그대는 더욱 더 강해졌어."
연선화는 조심스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도를 집어 든다.
이내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섰다.
정적과 침묵만이 감도는 한 가운데.
"저게 미친 건가? 아니면 권좌가 됐다고 자만하는 거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스텔라가 격분하며 마나를 퍼트리려 했다.
그때.
"잠시만 기다리시죠."
이전석이 그녀를 막았다.
"너······."
스텔라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최원율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그건 틀림없이 살기였다.
그는 연선화를 죽이고자 하고 있었다.
반면 연선화는 어떠한가.
싸우고자 하는 의지도 느껴지지 않고, 싸운다 한들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을 리도 없다.
"너 미쳤어? 네 스승은 이미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저대로 죽게 내버려둘 셈이야?"
"설마요."
이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라도 그렇게 생각이 없진 않았다.
그저 지금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다.
'특성의 효과를 빼앗는 수단······.'
전생에선 본 적이 없다.
천살성 외에 그런 것은 존재치 않았다.
적어도 이전석이 알기로 말이다.
만약 그게 최원율 자신의 특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이전석에겐 그걸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특성을 빼앗는 게 얼마나 위험한 효과인지는 이전석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특별한 수단으로 특성을 빼앗을 수 있는 수단이 있고, 그로인해 천살성이나 영원의 낙인을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그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될 거다.
그러니.
"일단 지켜봅시다."
이전석이 애써 스텔라는 진정시키듯 말했다.
물론, 고작 그 한마디로 물러설 스텔라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는 거지만, 할멈은 지금 제대로 싸울 만한 상태가 아니야.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
전음과는 별개의- 텔레파시라 불리는 마법이다.
5서클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중위 마법.
━압니다.
이전석은 전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태연하기까지 한 짧은 한마디.
스텔라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알면서도 내버려둬? 네 스승이 죽을 거라고!
━아뇨, 괜찮을 겁니다.
이전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에 스텔라는 도리어 당혹스러워졌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분명 스승님은 쇠약해지셨습니다. 하지만 연로했다고 한들 그걸 더러 약하다곤 할 수 없죠.
━미안하지만 그건 궤변이야. 상황을 봐. 상대는 SSS급에 오른 괴물이야. 아직 초입에 불과하지만, 지금 할멈의 상태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놈이 아니라고.
━스텔라님은 스승님께서 노쇠한 모습으로 검을 쥔 걸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없지.
━그럼 보면 아실 겁니다. 무(武)를 갈고 닦은 검수들에게 외면의 강함은 단순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이전석은 거기까지 말하곤 조용히 연선화와 최원율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가만히 선 채 서로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연선화의 팔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7화
화산의 종말 (3)
연선화 뿐만이 아니다.
최원율의 시선 또한 미세하게 움직였다.
손가락, 발끝, 팔과 다리, 그리고 목.
몸의 각 부위가 조금씩 움직인다.
그것은 일종의 수싸움이었다.
논검보다 더욱 상위의 심상대련.
평범한 사람에겐 그저 서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걸로 보이지만, 두 사람은 간단한 시선 교환만으로 이미 서로의 검을 수없이 부딪치고 있었다.
스텔라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두 사람의 시선을 읽어 내려갔다.
마법사로서 무언가를 보고 관찰하는덴 도가 튼 그녀다.
때문일까.
그들의 의도를 몰라보진 않았다.
상상 속의 세계.
협회장실은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다.
그 가운데 두 신형이 춤추듯 뒤얽혔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시선이 손잡이가 되어 검을 휘두르고, 소리도- 형체조차 없는 날붙이가 서로 교차하며 부닥쳤다.
언뜻 비등한 듯 보이던 싸움이었으나.
'···물러섰어.'
최원율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거기서부터 점차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피투성이가 된 최원율이 무릎꿇었다.
실로 압도적이기 그지없는 싸움.
수읽기를 통한 심상 대련의 승자는 연선화였다.
최원율은 만신창이였고, 연선화만이 오롯이 바닥을 딛고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가슴이 찔렸어.'
손과 팔을 동시에 움찔거린 연선화.
그에 반해 최원율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같은 SSS급임에도 여전히 이만 한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심상 속에서 완전히 패배한 자신을 바라보며 최원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자신이 인정한 강적다웠다.
그녀는 고작해야 검 한 자루만으로 자신에게 피를 묻혔다.
겨우 심상 대련이라고 치부할 만한 게 아니다.
하늘에 닿은 고수들의 심상은 마치 현실과도 같아서,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최원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미소 짓는다.
"여전히 압도적인 무위로군. SSS급에 이른 지금의 나조차 탐이 날 정도야."
뱀.
살모사를 연상케 하는 욕망.
연선화가 그것을 비난하듯 말했다.
"뭐든 과하면 역류하기 마련이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여전히 자신감이 과하군."
"여장부에게 자신감이 없으면 무엇이 남겠느냐."
"말도 많고······."
뚜벅-.
최원율이 검을 바로 잡으며 유리 조각을 짓밟았다.
그 위를 걸어 연선화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검선, 네년은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 건방 대는 모습은 투귀라 불리던 시절부터 늘 한결같지. 나이를 먹고서도 변하질 않고, 여전히 쓸데없는 자신감으로 화(禍)를 불러오고 말아. 헌데······."
살기가 이전보다 더 짙어졌다.
회색.
한없이 어둠에 가까운 격이 마나와 뒤섞인 채 주변을 맴돌았다.
"나이를 먹더니 그 자신감도 이제는 빈껍데기가 되었나 보군."
척-.
최원율이 검을 치켜들었다.
갈무리한 격과 살기를 오롯이 검에 쏟아부었다.
회색의 힘이 날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이내 그것은 검보다도 더 날카로운 예리를 형성했다.
흔히 검기라 불리는 기술이다.
다만 평범한 검기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일반적으로 검기는 마나에 의해 발현되지만, 최원율의 검기는 감히 그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패도적인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SSS급의 막대한 격.
그것이 검을 둘러싼 채 극도로 압축되어 있다.
검기와 검강, 그것들조차 넘어선 무언가.
신검합일(身劍合一).
오랜 구전에 의해 전해지길, 검의 경지가 하늘에 닿았을 때 발현되는 기술이라 전해진다.
현대에선 적어도 연선화밖엔 사용자가 없었는데······.
"보아라. 나는 하늘에 닿았다. 검기도, 검강도- 검환조차 뛰어넘어 검을 나 자신과 동화시켰다."
최원율은 오만했다.
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렇기에 교만하며 탐욕스러웠다.
"한데 검선, 네년은 어떻지? 변하지 않는 정신을 육체가 따라가질 못하고 있어. 네년의 정신은 여전히 올곧으나 몸은 노쇠하고 연로하여 땅을 기고 있지. 수읽기에서 이겼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망상의 연장선일 뿐이야. 몸이 머리를 따라오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연선화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옅게 웃음을 흘렸다.
"허울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구나."
"······뭐라?"
"몸과 정신은 물아일체(物我一體)니라."
슥-.
연선화가 그리 말하며 검지 손가락을 새웠다.
그것이 최원율의 검을 밀어냈다.
"무슨······."
최원율은 무심코 당황하고 말았다.
신검합일이다.
강기와 강환마저 넘어선 절대적 경지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맨손- 아니 손가락 하나로 밀어내다니?
심지어 상처 하나 없다.
최원율은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연선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권좌가 되면 마주하는 벽이 있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그 벽은 그대에게도 여지없이 나타나 존재감을 드리웠을 테야."
최원율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정곡이었다.
그에게 연선화가 재차 말했다.
마치 쐐기를 박듯이.
"절망하였느냐?"
"······."
"그만한 강자가 되고서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같은 벽 앞에 서 있음에도 수읽기에서 나를 이기지 못해 좌절했느냐?"
"······."
"말이 없어졌구나."
키득-.
연선화의 웃음이 메아리쳤다.
정곡이었다.
겉으론 오만하고 예상했다는 듯 굴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선 여전히 절망과 좌절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내게 여러 말들을 해댔지만, 정작 그대는 자신의 흠을 타인의 흠으로 감추고 있구나. 그것이야말로 화룡검, 그대에 약점이니라."
연선화가 거기까지 말을 이은 순간이었다.
채앵-!
불꽃이 튀었다.
"네년······."
최원율은 이를 갈았다.
연선화의 검에도 자신과 같은 신검합일의 과실이 맺혀 있었다.
그녀가 기습하듯 휘두른 도.
최원율은 재빨리 그걸 막아낸 것이다.
분명 위력적이다.
평범한 SS급은 작금의 공격에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약해졌군."
이전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다.
최원율은 다시 검을 새우며 자세를 잡았다.
오직 화산의 검수에게만 전해지는 검법.
매화를 꽃 피우는 그것이 연선화를 노린다.
"그래, 내 말은 나 자신의 흠을 감추기 위함이지. 하나, 그 흠을 알아볼 사람이 없다면 흠이 없는 것과 같이 되지 않겠나?"
"궤변이지만··· 한편으론 좋은 논리로구나."
연선화 또한 미소를 지은 채 도를 치켜든다.
일순간, 두 사람이 격돌했다.
검과 도가 교차하며 서로의 목을 노렸다.
바람조차 눈치채지 못할 초음속.
적막 속에서 살기가 피처럼 솟구친다.
파란 꽃잎, 분홍 꽃잎.
서로 다른 두 색의 꽃잎이 만연했다.
매화검법 제 9초식 매향성류(梅香成流).
창천검 제 7초식 유목화(流木和).
최원율의 청화가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고, 연선화의 매화가 그녀를 거목 삼아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쌍방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콰과과과-!
폭풍이 일었다.
두 색의 꽃잎이 교차하며 교합하고, 이내 일그러져 파탄 났다.
콰광-!
협회장의 천장이 잘려 나가며 무너진다.
그 사이를 또 다른 검격이 꿰뚫으며 무너지는 천장 잔해를 멀리 날려버렸다.
"······말이 검사지 마법이랑 다를 게 없네."
스텔라는 그 모습에 내심 감탄하며 주변에 방어막을 펼쳤다.
이전석도 그녀의 의견에는 나름 동의했다.
만류귀종이라 하였던가.
검이든 마법이든 도술이든.
극한까지 단련한 기술은 결국 한 '점(點)'에 도달하기 마련이었다.
그게 전생의 이전석이 수없이 많은 특성을 획득하고, 그리고 늙어 죽어가던 연선화를 보고 얻은 깨달음이었다.
결국은 하나로 이어진다.
검은 마법이고, 마법은 검이며, 도술 또한 그것들과 태반 다르지 않다.
세상의 단 하나뿐인 진리.
그 깨달음을 온전히 체화했을 때, 이전석은 SSS급을 넘어 EX급의 강자가 되었다.
'그보다······.'
이전석은 전생이 아닌 현생의 상황에 집중했다.
꽃잎이 만연하는 한 가운데.
"이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곳에 찾아왔으리라 생각하나?"
돌연.
최원율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반대편.
연선화가 서 있다.
그것도 폭삭 늙은 상태로.
헌데, 뭔가 이상했다.
연선화의 주변을 떠돌던 매화.
그것들이 마치 계절이 지나 저물어가는 단풍잎처럼 바삭 말라비틀어진 것이다.
투둑, 툭-.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져 바스러지는 꽃잎.
반면 최원율을 주변으로 회전하던 푸른 꽃잎은 어느새 분홍색으로 변질되며, 짙디짙은 매화향을 내기 시작한다.
"이건······."
스텔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할멈의 매화가 저물고··· 놈의 청화가 매화로 바뀌었어.'
과정과 결과.
'설마······.'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할멈의 특성을 빼앗은 거야?'
아니,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스텔라는 거기서 더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가능할 리가 없다.
차마 그렇게 단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특성이 존재했으니.
특성을 강탈하는 특성이 있다고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예상대로.
"역성(易成)."
최원율이 손 위로 매화를 꽃 피우며 말했다.
"하늘의 뜻을 거슬러 타인의 힘을 빼앗는 특성이지."
물론.
"만능은 아니다. 제한된 조건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재사용을 위해선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지. 뿐이랴? 한 번 역성을 사용하면 천기를 거스른 대가로 사용자는 사후 지옥에 떨어진다. ······뭐, 지옥이라는 게 정녕 실존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 걸까.
최원율은 자신의 특성을 줄줄이도 늘어놓았다.
"하나, 보거라. 그 대가를 감내하고 나는 비로소 네년의 매화를 얻었다. 화산의 징수를 말이다. 검선, 이제 네년을 칭하는 건 뭐지? 늙어 노쇠하여 젊음과 힘을 잃었고, 이제는 유일하게 가진 특성마저 사라졌지."
최원율.
그는 명백히 연선화를 비웃고 있었다.
까득-.
스텔라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그는 이전석을 향해 물었다.
"지켜보자고 한 결과가 고작 이거야?"
"······."
이전석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연선화를 쳐다만 볼 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직접 나섰다.
아니.
그러려던 차였다.
"할멈은 물러나 있어. 이제부턴 내가······."
"괜찮단다, 별아."
연선화가 서근서근 웃는 어투로 말했다.
뭐지?
기묘한 감각이다.
이해할 수 없는 느낌.
가슴이 간질거린다.
스텔라는 연선화가 평소처럼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촤악-!
최원율의 가슴이 갈라졌다.
근육이 파열되며 피를 흩뿌린다.
"······?!"
놀란 건 스텔라만이 아니었다.
"쿨럭···! 이건······?"
최원율이 갑작스런 고통에 피를 토하며 의문을 내비쳤다.
홱-!
스텔라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전석을 바라봤다.
그 또한 연선화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의문도 잠시뿐이었다.
줄곧 침묵만을 고수하던 연선화가 뒤늦게 입을 연 것이다.
"힘을 가져 강건해진들 무엇할꼬. 세월을 얻어 젊어진들 어찌할꼬. 전부 찰나의 한순간일 뿐, 잠깐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 명예거늘."
"······무슨 소리냐, 검선."
"외면과 내면은 이어져 있느니라. 그걸 모르는 이상, 그대의 심상은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지."
뚜벅, 뚜벅-.
세월의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난 발걸음으로 최원율에게 다가가는 연선화.
"크윽······!"
최원율이 마나로 상처를 지열하며 땅을 박찼다.
신검합일의 묘리가 깃든 검이 뱀처럼 영악하게 연선화의 목을 노렸다.
헌데 연선화는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흘려냈다.
휘두른 것도 아니다.
내찌르지도 않았다.
그저 살짝 도를 움직인 게 전부다.
그런데도 연선화는 최원율의 공격을 마치 아이 다루듯 부드럽게 맞받아치고 있었다.
"······!"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직 이때만을 위해 수련을 거듭하며 연선화가 가진 특성마저 빼앗았다.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매화에 어떤 검수의 기억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연선화가 그것을 통해 강해졌으니, 특성을 빼앗긴 지금은 그저 다 죽어가는 노인네일 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연선화는 다 늙어 죽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검선 그 자체였다.
"나는 왕이다···."
까득-.
"왕··· 높은 산에 군림한 황제!"
크아아아-!
최원율이 기합과도 같은 사자후를 내질렀다.
유리와 벽, 그리고 천장이 완전히 날아갔다.
챙, 채앵-!
몇 번의 부닥침이 있었다.
검과 도가 서로 뒤얽혔다.
그럼에도 여전히, 최원율의 검은 연선화에게 닿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검이 연선화의 도에 휘말려 들어가는 듯하다.
이게 격의 차이란 말인가?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후우······."
돌연, 연선화가 숨이 차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에 최원율이 두 눈을 번뜩였다.
'······그래, 아무리 네년이 괴물이라도 몸이 그렇게 된 이상 결국에는 지치겠지.'
그 틈을 노리자.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그것만이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열하다 해도 상관없다.
추하다고?
맞다.
자신은 추하다.
애초부터 그렇게 강해졌고, 그런 식으로 화산의 옥좌를 꿰찼다.
"크아아아악!"
최원율이 포효했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절망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인정했을 뿐이다.
자신의 비열함을.
"그새 성장했구나."
이곳에 있는 세 사람은 최원율의 격이 한층 비대해졌음을 느꼈다.
확실히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하다니.
"어디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지 보지!"
최원율이 검을 휘둘러 왔다.
매화낙섬.
태양마저 떨궈버릴 듯한 찌르기가 연선화를 노린다.
그때.
슥-.
연선화가 천천히 검을 들었다.
"제자야, 이렇게라도 가르침을 줄 수 있어 기쁘구나."
그리고 그녀가 이번에는 최원율이 아닌 이전석을 향해 말했다.
절개··· 아니, 그보다 더 큰 무언가를 사용하려는 듯한 자세.
이전에 주지 못했던 가르침을 이 순간을 통해 주려는 것일까.
"내 마지막이란다."
연선화가 선언했다.
마지막.
"아뇨."
툭-.
작게 발을 구른 이전석.
축지를 사용한 그가 연선화를 등진 채 나타난다.
"마지막이 아닐 겁니다."
"제자야?"
갑작스런 이전석의 돌발행동.
연선화가 내리긋던 도를 멈췄다.
━지금.
이전석은 주리천에게 미리 입력해 뒀던 문자를 보냈다.
그러곤 아무렇게나 휴대폰을 내던지며 최원율을 바라봤다.
"스승을 위해 만용을 부리는구나!"
그는 이전석을 비웃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기자회견의 소식을 들었고, 이전석을 보면서 확실히 특출 난 녀석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아직 권좌급 싸움에 뛰어들 수준은 아니었다.
덕분일까.
최원율은 이전석이 만용을 부린다 여겼다.
물론.
"마음대로 생각해."
[육망천성원진(六望天星願陣)이 발동합니다.]
"만용이든 아니든."
[인과(因果)를 비틉니다.]
"중요한 건 네가 오늘 죽는다는 거니까."
쿠웅-!
이전석을 주변으로 바람이 폭발했다.
대기가 일그러지며, 허공이 찢어졌다.
기기괴괴한 현상의 한가운데.
[당신의 소망이 하늘에 상달되었습니다.]
콰득-.
몸이 뒤틀렸다.
뼈가 일그러졌다.
근육과 혈관, 몸 전체를 잇는 척수의 신경이 끊어졌다.
그러나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망가졌던 것들이 재조립되기 시작한다.
머리칼이 길어지고 손톱이 자라난다.
육체의 형태가 점차 '변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색한 변화가 아니다.
익숙하디익숙한-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변화였다.
[억눌러져 있던 살성이 깨어납니다.]
[살성이 막대한 살의를 드러냅니다.]
마음이 요동친다.
하아···.
옅게 새어 나오는 숨.
[레벨이 640으로 조정됩니다.]
[스탯이 대폭 상승합니다.]
[특성들이 대량 형성됩니다.]
한때 적귀라 불리며 누군가에게는 악마라 추앙받고, 또 세상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갔던 최악최흉의 재앙.
[과거를 재현합니다.]
'빌런'이 다시 눈을 떴다.
※ ※ ※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의 소망입니다.]
[하늘이 당신에게 막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g#$G#@Q#R━━.]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오류, 오류, 오━ 오ㄹ━━······.]
[시스템이 하늘의 분노를 대신 감당합니다.]
[일시적으로 시스템이 소멸합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8화
화산의 종말 (4)
이전석의 심상은 오직 어둠과 불만이 존재하는 세계다.
━으아아아악!
━살려줘! 누가 제발······!
━끄으윽···! 아파! 너무 아파!
━물···! 무울!!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모두 한 번씩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이전석이 직접 죽였던 악인들이다.
신기한 것은 죄가 경한 이들은 비교적 불길이 작은 곳에서 옅은 고통을 받고 있었고, 죄가 중한 이들은 한때 이전석이 겪었던 것과 비슷한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물조차 재가 되어 바스러지고 말았으니.
쿠구구구-.
그 가운데 지진이 일었다.
불꽃이 일렁이며 어둠 속 바닥이 갈라졌다.
절벽이 높디높은 빌딩처럼 솟구친다.
죄인들이 그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끝나지 않는 무간 속으로 추락하듯.
'도시······.'
떨어지는 사람을 대비하듯 올라온 무너진 건물들.
망가진 폐허가 불타는 어둠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이전석은 그 광경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살성에 지배되어 심상에 빠져들 때면 늘 저런 폐도시가 나타나 이전석을 압박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제여.]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형제여.]
여러 명의 남성이 뒤얽히고 메마른 사막처럼 쩍 갈라진 음성.
매섭게 타오르는 불길 사이로 희미하게 형체가 보인다.
이전석과 똑같은 신장.
이목구비마저 쏙 빼닮았다.
그러나 얼굴은 어둠에 뒤덮여 잘 보이지 않고, 유독 긴 머리칼만이 시선에 들어올 뿐이다.
[그간의 평화는 즐거웠는가?]
녀석이 말했다.
이전석은 그가 누군지 잘 알았다.
자신의 또 다른 인격.
특성에 깃든 살의이자, 시스템을 각성한 순간부터 계속 함께해온 존재.
살성.
"즐거웠지."
이전석이 그에게 답했다.
그랬다.
즐거웠다.
분노하고 슬퍼하고 초조했던 적도 많지만, 회귀하고서부터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은 그에게 너무나도 행복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젠 다시 파국을 드리울 때다.]
살성- 녀석이 새까만 팔을 내밀었다.
마치 불에 탄 재처럼 떨어지는 살점.
그럼에도 고통은 엿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는 저 자신의 마음을 전생에서처럼 고스란히 내보였다.
[우리 함께 손을 잡고 다시금 세상을 유린하자꾸나.]
[죽이고.]
[탐하고.]
[범하고.]
[세상을 피와 비명으로 가득하게 만들자.]
어느새 살성의 얼굴에 형태가 드리웠다.
눈과 코가 나타나고, 쉴 새 없이 떠벌리는 입이 또렷하게 비추어졌다.
[느껴지지 않는가?]
[네 안에서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살의가.]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본질이다.]
이윽고 녀석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죽이자!]
새까만 치아.
동공이 존재하지 않는 눈동자가 이질적이기 그지없다.
[죽이고 죽이며!]
[그저 한없이 죽여 피를 만끽하자!]
거대한 압박감이 이전석을 짓눌렀다.
어둠이 불을 덧입은 채 이전석의 발치를 뒤덮었다.
팔과 다리를 옥죄어 오는 불꽃의 사슬.
[자, 우리 다시 하나가 되자꾸나.]
살성이 극독을 머금은 뱀처럼 이전석을 끌어안았다.
외형은 같았지만 성격이나 언행은 전혀 달랐다.
슥-.
이전석이 살성의 왼팔을 잡았다.
[그래, 그렇게···.]
살성이 키득였다.
기분 나쁜 웃음.
그러나.
"미안하지만······."
이전석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리고 녀석의 팔을 강제로 떨쳐냈다.
"나랑 똑같이 생긴 놈이랑 부둥켜안는 취미는 없어서 말야."
동시에 파동이 일었다.
충격파.
사자후, 혹은 갈.
그와 비슷한 종류의 힘이 폭발했다.
살성이 파동에 의해 밀려난다.
"형제, 형제······.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역겨운 말투는 여전해."
실로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살성은 늘 저런 식이었다.
내부에서 이전석을 유혹하며 끊임없는 살의를 보냈다.
전생에선 그걸 버티지 못해 망가져 버렸다.
하지만 이제와서 다시 보니···.
"같잖군."
하찮고, 우습다.
"형제라고? 웃기지마. 나는 네놈과 피를 나눈 적 따윈 없어. 그저 내 안에 기생할 뿐인 버러지가 감히 나를 더러 가족이라 칭하지 마라."
그에게 있어 가족은 오직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뿐이다.
그들 이외의 존재가 가족이라 말하는 모습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함께? 아니지. 너는 영원히 이곳에 파묻히게 될 거다."
이전석이 왼팔을 들었다.
슉-.
쫙 핀 손아귀로 설상이 빨려 들어왔다.
이곳은 이전석의 서계다.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이전석의 반쪽이기도 한 살성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째서···? 벗어날 수가······]
그는 이전석의 손아귀에서 발버둥만 칠뿐, 조금도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사춘기는 이미 한참 전에 극복했거든."
[무간인가······.]
콰득-.
이전석이 살성의 목을 꺾었다.
그의 형체가 마치 진흙처럼 허물어졌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크흐···.]
살성이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살의를 계속해서 흘려내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그딴 저주도 이젠 지긋지긋해."
[크흐흐······.]
이전석은 불꽃 속으로 녀석을 내던졌다.
검은 진흙이 불꽃에 타 녹아내렸다.
살성은 특성의 영향인고로, 고작 이 정도로 죽거나 하진 않을 거다.
목 한 번 비틀었다고 사라졌으면 전생에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겠지.
쩍-.
문득, 하늘에 금이 갔다.
심상 세계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울리는 비명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
이윽고.
[전생을 재현합니다.]
이전석은 '빌런'의 모습으로 다시 눈을 떴다.
※ ※ ※
'저건······ 뭐지?'
최원율.
방금까지만 해도 이전석을 향해 검을 내찌르던 그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에 황급히 뒤로 물러나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건 정말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닥(정확히는 서울 전체)에 거대한 진법이 펼쳐지더니, 이전석의 외형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뀐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사라졌어.'
상태창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동시에 천기가 크게 뒤틀렸다.
단순히 크다는 수준이 아니다.
여러 갈래의 천기가 실처럼 뒤얽혀 도로 풀 수 없을 것처럼 변모했다.
그리고 이전석.
'이 힘은······.'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
'내가······ 이 내가, 지금 겁을 먹었다고······?'
최원율은 떨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초입이라 할지언정 그는 SSS급에 오른 강자였다.
그런데··· 그런데도······.
"진정, 괴물인가."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감이 최원율을 집어삼켰다.
그 가운데.
이전석- 아니, 빌런이 눈을 떴다.
순간.
"······!!"
최원율이 숨을 삼켰다.
그는 급하게 제 목을 매만졌다.
'······붙어있어.'
피가 흐르지 않는다.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 죽음을 느꼈다고?'
그 정도의 격차가 있다는 말인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등이 식은땀에 축축이 젖어간다.
반면.
"할멈, 이거 알고 있었어?"
"······."
"완전, 괴물이잖아···."
스텔라 또한 큰 충격을 받은 듯 중얼거렸다.
옅은 두려움이 떨림으로 변해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여태껏 많은 강자를 만나온 그녀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SSS+급이자, 권좌 중에서도 천외천이라 알려진 '멸망'의 권좌.
그조차 이런 위압감을 자아내진 못했다.
이건, 그야말로 규격 외였다.
천외천의 강자조차 압도하는 무언가.
'괴물이라···.'
연선화는 차마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작금의 이전석은 이전석이라 부를 수조차 없는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괴물.
그래, 그 말이 옳다.
그보다 적절한 단어는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저건 그야말로 괴물의 형상 그 자체였다.
어느새 주변일대를 잠식하고 있는 살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할 그것이 또렷하게 형체를 띄운 채 세상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다.
하늘이 붉다.
바닥이 검다.
세상이 어둡다.
마치 멸망하는 세계를 보는 것만 같다.
"별아······."
어느새 자신을 부축하며 뒤로 물러나는 스텔라에게 연선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상태창을 불러보겠느냐."
"상태창? 그건 갑자기 왜······."
"사라졌어."
"뭐?"
"상태창이 나오지 않는구나."
"······"
스텔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특성을 빼앗겨서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정말이야. 상태창이 안 나와.'
스텔라 본인조차 상태창을 띄울 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시스템 자체가 반응하지 않는다.
특성이나 마나는 여전히 그대로지만.
'설마··· 저놈의 변화랑 관련이 있는 건가?'
스텔라는 이전석을 쳐다봤다.
과연 이전석인가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그것은 덥수룩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스템 자체가 사라지다니······.
"오랜만이군."
이전석도, 하물며 살성조차 아닌- 이제는 그저 한 명의 빌런일 뿐인 그가 말했다.
"누구··· 네놈은 대체 누구냐······."
최원율이 빌런에게 물었다.
"진부한 질문이로군."
키득-.
빌런이 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새빨간 단도를 손에 쥔다.
과거- 전생을 그대로 재현했기 때문일까.
다행히 살성에 집어 삼켜지진 않았지만, 당시의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빌런을 더욱 호전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콰앙-!
도약.
굉음과 함께 바닥에 크리에이터가 일며 대기가 찢어져 나간다.
단순 표현 따위가 아니다.
말 그대로 허공에 금이 가며 게이트라도 생긴 것처럼 균열이 인 것이다.
그저 한 번 발을 구른 것뿐임에도 이런 위력.
"크윽······!"
최원율은 자신을 향하는 압도적인 기운에 애써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빌런의 기운과 그의 형상이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정적과 침묵이 내려앉은 한 가운데.
"여긴 너무 좁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원율이 황급히 몸을 돌리며 검을 등 뒤로 내찔렀다.
그런데 그곳에 빌런은 이미 없었다.
대신이라는 듯.
"······!"
등 뒤에서 무언가가 최원율의 목을 움켜쥐었다.
다름 아닌 빌런이었다.
"사람도 몰려오고 있고···."
빌런이 최원율의 목을 쥔 채 고개를 돌렸다.
엉망진창이 된 협회장실의 입구.
그곳에서 여러 기척이 느껴진다.
건물 바깥에서도 수많은 헌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긴 이만한 소란이 벌어졌다.
하물며 그 위치가 협회장실이니.
헌터들로선 가만있을 수 없었을 거다.
"놓, 아라······!"
문득.
최원율이 마나와 격을 터트렸다.
근육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러나 빌런은 아랑곳 않았다.
전생의 강함을 그대로 재현한 그의 힘은, 고작 SSS급에 막 들어선 애송이가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슨 힘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이를 악무는 최원율.
"일단 장소를 옮기지."
콰앙-!
빌런이 재차 발을 굴렀다.
과거를 재현해 현재의 힘이 사라진 만큼 축지는 사용할 수 없지만, 단순 괴력이나 민첩만 따지고 봐도 그것은 이미 축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빨랐다.
이윽고-.
"커헉······!"
최원율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가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옥좌···.'
그렇다.
그곳은 옥좌의 방이었다.
달리는 알현실이라고도 불리는 곳.
부서진 천장으로 햇빛이 들어 황금빛 옥좌를 비춘다.
고작 발 한 번 구른 게 전부임에도, 빌런은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마냥 화산의 본관으로 이동한 것이다.
"대체 누구냐···. 네놈은······ 그 괴물 같은 힘은 뭐냔 말이다!"
이해는커녕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상황에 최원율은 몇 번째인지 모를 물음을 내던졌다.
옥좌를 등지고 서 있던 빌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냐, 뭐냐, 어떻게.
그런 질문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대신이라는 듯.
"혈격."
새빨간 단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초승달과도 같은 붉은 참격이 최원율의 왼팔을 가르고 지나갔다.
"끕······!"
잘려 나가는 팔.
솟구치는 혈액.
최원율이 이를 악물며 고통을 집어삼킨다.
아무런 기술이나 묘리도 없이- 무(武)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일격이었으나, 최원율은 그 움직임을 전혀 보지 못하고 피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멀쩡한 팔까지 잘리며 옥좌의 방 한 편에 거대한 검상이 새겨졌다.
"크아아아악!"
최원율은 분노에 찬 울분을 내질렀다.
인정할 수 없었다.
SSS급에 오르고 매화마저 빼앗은 자신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이런 괴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최원율이 성대가 찢어지는 듯한 괴음과 함께 장검을 휘둘렀다.
연선화로부터 빼앗은 매화가 아름답게 그를 휘감았다.
패도 그 자체라 표현할 만큼 압도적인 일격이었으나, 빌런이 보기에 그것은 그저 한낱 미물의 발버둥에 불과했다.
"에너지 돔."
빌런이 왼손을 내밀며 마나를 분출했다.
직후.
유리와도 같은 결계가 최원율을 둘러쌌다.
8서클에 해당하는 구속 마법이다.
"곱하기 50."
그리고, 그는 스텔라의 특성을 사용했다.
전생에서 빌런은 만마의 권좌를 죽였다.
그녀의 특성과 마법을 모조리 빼앗았고, 당연히 그녀보다 더 큰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려 50배의 위력에 도달한 마법은 손쉽게 최원율의 공격을 막아냈다.
'마법까지···!'
유리의 돔에 갇힌 최원율은 뿌득 이를 갈았다.
매화만리향.
최원율은 가능한 모든 힘을 짜내 그것을 전력으로 펼쳤다.
그러나 그의 매화는 빌런의 마법은 흠집하나 내지 못했다.
'이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분노와 치욕마저 넘어 허탈함마저 느껴진다.
최원율은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을 쥔 오른손이 떨려왔다.
"치졸하고 비열하게···."
그런 그에게 빌런이 말했다.
"그 따위로 얻은 힘이 고작해야 그 정도라니, 인생 헛살았군."
하.
헛웃음이 나왔다.
인생을 헛살았다고?
처음이었다.
이런 식의 굴욕은.
허탈하던 감정은 다시 분노로 바뀌었다.
"그럼 보여주마. 이 내가 진정으로 갈고 닦아온 검의 절정을."
그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한 팔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매화검법의 오의.
검을 매화 그 자체로 바꾸어 상대방을 압살하는 검술.
매화절경(梅花絶景).
"보아라. 이것이······."
그러나.
그가 검을 채 휘두르기도 전이었다.
파삭-.
돌연, 매화가 사라졌다.
매화로 변했던 검이 다시 회색 날로 돌아온다.
최원율이 두 눈을 떨었다.
그때.
"미안하지만, 그건 안 보여줘도 돼."
"뭐?"
"이미 봤거든."
빌런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푸욱-.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 이건······."
울컥-.
폐에 들어찬 피가 기도를 타고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최원율은 분노가 아닌 당황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른 무언가를 바라봤다.
"심, 검······."
날의 끝부터 손잡이까지.
빛으로 형성된 듯한 장검이 심장을 꿰뚫고 들어온다.
심검(心劍).
달리는 무형검(無形劍)이라고도 불리는 검의 극의.
'생각만으로··· 나를 찌른 것인가······.'
빌런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단순히 움직임을 눈이 따라가지 못한 게 아니다.
SSS급의 경지에 올랐기에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치명상을 입혔노라고.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이 심검의 경지였다.
"몽상 속의 경지라 여겼거늘······."
옛 이야기의 전설에나 등장하는 기술이자 경지라 여겼다.
헌데, 아니었다.
심검은 실존하고 있었다.
그것이 실재하여 자신을 꿰뚫었다.
"괴물, 이로다···."
그저 한없이 압도적인 강함 앞에 최원율은 힘없이 무릎 꿇었다.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 그가 보인 표정은 분노도 허탈도, 굴욕이나 치욕조차 아닌 오직 절망뿐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89화
화산의 종말 (5)
빌런이 최원율을 내려다봤다.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피가 웅덩이를 맺히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질긴 생명력이었다.
'심검이라···.'
빌런은 그의 말을 떠올렸다.
━심, 검···.
━몽상 속의 경지라 여겼거늘······.
최원율의 가슴을 관통한 빛의 검.
그의 말대로다.
그건 몽상 속에 존재하는 경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적을 죽인다?
아무리 신이라도 그건 불가능했다.
단지 빌런은 자신이 가진 특성을 십분 활용했을 뿐이다.
물론 그걸 더러 심검이라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만류귀종이라 하였다.
과정은 달라도 결과가 같다면 그것은 피차일반인 것이다.
━들어와라.
이윽고, 빌런이 옥좌에 앉은 채 알현실 문 너머에 있는 자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 ※ ※
화산의 본관.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정글과도 같이 수풀이 밀집된 한 가운데, 공동, 혹은 싱크홀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깊게 파인 동굴이 있었다.
흔히 수련동이라고도 불리는 장소이며, 화산의 검수들이 벽에 막혔을 때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최원율은 어딘지 모를 곳에서 폐관에 든 모양이지만, 최신은 수련동 가장 깊은 곳에 가부좌를 튼 채 옅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옆에는 벽곡단이라 불리는 음식이 수북이 쌓여 있으며, 바로 뒤에는 허름한 침낭이 놓여 있다.
그저 그뿐인 장소.
잘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해 수척해진 몰골은 도무지 한 가문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최신의 시선은 마치 대해에 비추어진 태양처럼 찬란했다.
그리고 최신은 직감했다.
"드디어······."
자신이 SS급에 올랐음을.
레벨을 올리는 방법은 비단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저레벨일 땐 효율이 그리 좋지 않지만, 100을 넘어선 수준에선 오히려 던전을 공략하는 것보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게 더 많은 레벨이 오르곤 했다.
이윽고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조금 더 지난 시점.
레벨이 200을 달성했다.
체내에 흐르는 마나와 영혼에 새겨진 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자기 자신을.
'헌데······.'
최신이 정면을 지긋이 응시했다.
'이상하군.'
본래 레벨이 상승한다면 그에 합당한 시스템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스템은커녕 상태창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뭐지?'
최신은 의아함을 느끼며 수련동을 나섰다.
수련동에선 외부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
그 주변일대에 형성된 거대한 결계 덕분이다.
그것은 수련동과 외부와 공간을 완전히 단절시켜, 화산의 검수들이 온전히 수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다만 그만큼 외부의 상황은 알 수 없는 게 단점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겠어.'
최신은 한 달 하고도 보름 만에 수련동을 나섰다.
그리고 동굴의 입구를 나간 직후였다.
"······!!"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봤다.
하늘을 뒤덮은 검붉은 기운.
마치 비가 쏟아지듯 거대한 압박감이 어깨를 짓눌러 온다.
'이게 무슨······.'
최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살기.
살의라는 감정이 형체를 지닌 채 거대한 암운(暗雲)처럼 화산의 본관을 뒤덮고 있었다.
'아버님이 아니다.'
최원율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기운.
탓-!
최신은 급히 발을 박차며 본관으로 향했다.
혹 화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지.
그리고 본관으로 향하는 도중. 본래라면 화산의 근처를 지키고 있어야 할 검수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살기를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군.'
하나같이 입에 거품을 물고, 눈알마저 뒤집은 채 의식을 잃었다.
심지어 본관 근처에는 그 수가 더욱 많았다.
화산이 자랑하는 일대제자들마저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있던 것.
"······."
화산의 본관.
저택입구에 선 최신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귓가로 심장박동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손끝이 떨려오고 있었다.
'······대체 무슨 괴물이 화산에 자리한 것이냐.'
이러한 압박감은 생애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조차 이러지는 않았을진대···.
최신이 식은땀을 흘리며 저택의 문을 열었다.
1층 로비로 들어서자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농밀한 기운.
뚜벅, 뚜벅-.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집사와 메이드 몇몇이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다.
알현실과 가까워질수록 압박감은 더욱 강해져 갔다.
최신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알현실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대들은······."
그리고 알현실의 거대한 문 앞, 수준 높은 검수와 장로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도 이상을 느끼고 달려온 모양.
그러나 차마 안으론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가?
'한심하긴.'
분명 이 살기는 최신조차 폐부를 찌르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어마무시 한 것이다.
하지만 화산의 장로라는 것들이 고작 겁을 먹어 알현실에 들어온 적과 마주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니.
"다들 뭘 하는 거지?"
최신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장로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도련님?"
"···수련동에서 나오셨군요."
"SS급······. 무사히 달성하신 것 같아 감축드리옵니다."
"축하는 감사하네. 허나."
최신은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들을 몰아붙였다.
"문 너머의 존재가 무서워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다니, 그러고도 자네들이 화산의 중추라 할 수 있는가?"
그도 무섭고 두려웠다.
저 안의 존재가.
하지만 이러고 있어선 안 됐다.
이 기운이 거짓이 아닌 진짜라고 한다면, 자신의 아버지조차 감당못할 괴물이었다.
"힘을 합쳐야한다. 우리가."
뚜벅-.
최신이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한 걸음.
그러자 알현실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거인의 손이 전신을 옥죄어 오는 것만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하다.
그런데.
"제가 기다리라고 했어요, 오라버니."
"은하······?"
장로들 사이에서 익숙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은하.
자신의 여동생.
"지금은 아직···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그녀가 문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최은하가 이곳에 있고, 장로들이 그녀의 말을 듣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이거늘.
"들어가면 안 된다? 그게 무슨 소리지?"
최신이 최은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장로 하나가 그를 막아섰다.
"도련님, 물러나시죠. 너무 가깝습니다."
흡사 최은하를 지키는 듯한 언행이다.
최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제 7장로 유은성.
그가 자신을 고깝게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막아선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당혹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분노가 올라왔다.
문제는 7장로만이 아니라 1장로와 2장로, 다른 여러 장로 및 검수들까지 최은하를 지키듯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먹었군, 화산을."
최신의 시선이 최은하를 향했다.
그렇게밖엔 여길 수 없는 광경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난장판인 상황에도 최은하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직 최은하만이 유일한 후계자로서 장로들의 보호를 받고 있을 뿐.
'대체 내가 수련동에 들어가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의문이 올라왔으나 그것도 잠시에 지나지 않았다.
━들어와라.
뇌리에 어떠한 존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음성을 들었다.
※ ※ ※
끼이익-.
알현실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
최은하를 필두로 일곱 장로와 다섯의 검수, 그리고 최신이 어둠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직후.
"흡······!"
"커흑···!"
"이, 무슨······."
최은하를 제외한 모두가 동시에 침음을 삼켰다.
그들이 모두, 한순간에 목이 썰리는 상상을 본 것이다.
개중 두 명의 검수는 실제 목이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겁을 하며 무릎 꿇었다.
비명조차 없이 눈을 까뒤집은 채 정신을 잃는다.
두 검수가 쓰러지고, 나머지 인원이 긴장 어린 시선으로 옥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찌 저런 존재가···."
"정녕 사람인가?"
"종말··· 종말이로다······."
옥좌에 턱을 괸 채 앉아 있는 절대적 존재의 모습에 누구 하나 경악을 금치 못했다.
패도.
그러한 단어가 형상화된 듯한 모습.
흑백에 흑안. 빛이 비치지 않는 동공은 마치 심연을 그려낸 듯 꺼림칙하다.
또한 격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살기와 함께 주변에 내리깔려 있다.
그리고.
옥좌의 바로 아래.
"가주님께서······."
최원율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죽은 건 아닌 듯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 모습은 이미 모든 기력을 다한 듯했다.
바닥에 흘러내린 피의 양만 봐도 최원율이 패배했음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신···."
누군가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최신은 조용히 옥좌에 앉은 남자를 바라봤다.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와 같을까.
'대체 누구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난 절대자.
권좌조차 무릎 꿇릴 정도의 압도적인 무력은 상상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신.
정말 신이라는 말인가.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처음에는 적당히 구경만 하려고 했지."
옥좌에 앉은 존재- 빌런이 입을 열었다.
의미 모를 말이었다.
구경이라니.
무슨 소리일까.
그러나 빌런은 그들의 의문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히 자신의 말을 이었다.
"뒤에서 약간의 개입만 하면서 화산을 장악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더군."
"그게 지금 무슨······."
최신이 표정을 찌푸렸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다 문득.
"꿇어라."
"······!"
빌런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살기가 최신을 비롯한 장로들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컥······!"
"크윽······."
그중 가장 수준이 낮은 검수와 6, 그리고 7 장로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다른 이들도 얼마 버티지 못해 쓰러지고, 그나마 가장 수준이 높았던 1, 2장로와 최신만이 가까스로 살기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던 최은하까지도.
'설마······.'
살기의 영향에서 혼자만 벗어 나 있던 그녀를 본 최신은, 순간 빌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뒤에서 약간의 개입만 하면서 화산을 장악할 생각이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여동생인 최은하는 무각성자였기 때문이다.
헌데 폐관을 끝내고 나와 보니, 그런 그녀가 다른 후계자들을 제치고 장로들의 신임을 받고 있던 게 아닌가.
결국, 최신은 한 가지의 결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화산을 배신한 것이냐······!'
최은하.
그녀가 옥좌에 앉은 존재를 끌어들였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말을 채 입에 담기도 전.
"아직··· 아직이다, 괴물이여······."'
최원율이 검은 피를 울컥 토해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가주님···!"
"아아!"
그 모습에 장로들은 희망을 느꼈다.
SSS급에 오른 최원율.
그와 합공하면 옥좌 위의 괴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러나.
"나는 아직······!"
촤악-!
애써 검을 집고 발을 내딛는 최원율을, 무형의 참격이 베어 갈랐다.
툭-.
검과 함께 떨어지는 오른팔.
피가 솟구치며 균형을 잃어버린 최원율이 이번에는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날아갔다.
천장, 벽, 바닥.
마치 투명한 거인이 손으로 잡고 흔드는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며 온갖 곳에 부닥친다.
알현실 곳곳에 최원율의 핏물이 흩뿌려졌다.
그리고 힘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최원율.
"······."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숨이 턱 막힌 듯 목이 멨다.
SSS급.
절대적 강자.
권좌의 일각.
화산에선 황제라고도 불리던 그가 꼴사납게, 흡사 조롱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무참히 짓밟혔다.
그러나 최원율의 굴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힘없이 쓰러진 그의 몸이, 돌연 허공에 떠오른 것이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옥좌로 향하는 최원율.
쿨럭-.
그가 피를 토하며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나는, 화산의······."
푸욱-.
"사람 말을 두 번 하게 만드는군."
빌런이 최원율의 말을 끊었다.
손이 가슴을 관통하고, 그 사이에서 심장을 빼 들었다.
최원율은 경악 어린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살아서 자신의 심장을 생으로 보게 될 이들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최원율은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리도 허무한 최후라니.
휙-.
털석-.
빌런이 오른손에 심장을 든 채 최원율을 쓰레기 버리듯 내던졌다.
심장이 뽑힌 그는 점차 희미해지는 시야로 옥좌를 바라보았다.
줄곧 자신이 앉아 있던 저곳을 이제는 전혀 다른 존재가 앉아 화산의 멸망을 가져오고 있다.
그런데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권좌가 되었음에도 저 괴물과는 일 합조차 제대로 나누는 게 불가능했다.
"···원, 통······."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최원율은 숨이 멎었다.
화산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적 지배자.
그는 그렇게 허무함 속에서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빌런이 남은 이들을 바라봤다.
"꿇으라고 했을 텐데."
이전보다 더욱 큰 압박감이 서 있던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1장로와 2장로가 흔들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천천히 무릎 꿇는다.
그들조차 어찌할 수 없던 최원율을 손쉽게 압도하고, 개미 짓밟듯 죽이던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이란 공포를 낳게 만들었다.
하물며 심장을 뽑아 죽이다니.
너무나도 잔혹한 손속이었다.
빌런은 이젠 움직이지 않는 심장을 터트렸다.
그리고 최신을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마주한 순간.
"······."
장로들을 이어 그까지 무릎을 꿇었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마주할 수 없다.
대적할 수 없다.
'저건 재앙이다···.'
괴물?
우습다.
괴물이라는 건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나 붙여지는 명칭이다.
저것은 괴물조차 넘어선 무언가였다.
흡사 재앙이라는 현상이 인간의 몸을 덧입고 나타난 듯-.
'일단은 목숨을 연명하는 게 최선이다···. 화산의 핏줄은 살아 있어. 그렇다면 언제라도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거야.'
최신이 이를 악문 채 생각을 거듭했다.
분하고 치욕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건 화산만으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그렇기에 일단은 억지로 무릎을 꿇고 작금의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다.
물론.
'일단 놈에게서 벗어나 세계 길드 연맹에 도움을······.'
빌런이 그 생각을 모를 리 없었다.
"여전히 머리를 굴리는군."
우습다는 듯 최신을 내려 보는 빌런.
"너는 살려줄 수가 없겠어."
"그게 무슨······."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빌런이 한쪽 손에 쥐고 있던 적단도가 최신의 목을 베었다.
이기어검술.
단도가 스스로 하늘을 날아 최신을 먹어 치운다.
그의 눈빛에는 경악과 의문이 서려 있었다.
몸통이 피를 뿜어내고, 머리가 바닥을 구르는 순간까지도 최신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과 두려움,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알현실을 잠식했다.
최원율과 더불어 최신까지 죽음을 맞이했다.
화산의 주인과 후계자의 죽음은 너무나도 허탈하고 허무해서, 오히려 장로들에겐 더욱 큰 공포로 다가왔다.
검붉은 살의가 알현실 내부를 안개처럼 감돌며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가운데.
"최은하를 대리로 새울 것이다."
오직 이전석만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녀에게 복종하라."
"지금 배신자를 따르라는······."
서걱-.
툭-···.
검수 한 명이 입을 열었으나 그조차 최신과 같이 목이 떨어졌다.
"배신이 아니라 전략이지."
궤변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애당초-.
"진짜 배신자라면 너희 옆에 있지 않나?"
빌런이 마치 비웃음을 흘리듯 말했다.
직후.
그의 새빨간 단도가 어느 한 사람을 가리켰다.
장로들은 그를 보곤 믿을 수 없다는 양 눈을 떨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0화
봉문(封門)
"여명회 제 13 행동팀 부대장 이완성."
이전석이 1장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 다른 이들, 최은하조차 깜짝 놀라 1장로를 쳐다봤다.
갑자기 여명회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흰 수염을 기다랗게 늘어트리고 있던 이완성은 식은땀을 흘려대며 말했다.
"여명회라니······ 소신은 당신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소이다···."
애써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흐르는 식은땀이 멈추지 않았다.
알현실에 내리깔린 살기가 어느새 그의 주변에 밀집되어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빌런은 의외로 쉽게 물러났다.
최원율이나 최신처럼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손속은 실로 무자비했으니까.
정보가 빠져나갈 바엔 여기서 죽는 게 차라리 더 낫다고 여기기도 했는데······.
"망멸(亡滅)."
빌런이 무언가를 읊었다.
바로 그 직후엿다.
그의 손아귀로부터 채찍과도 같은 붉은 실이 뻗어 나와 이완성의 이마를 관통했다.
죽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붉은 실은 이마를 관통함과 동시에 사라졌고, 일말의 통증은 물론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죽이는 특성이다."
이전석이 의미 모를 말을 해왔다.
죽음을 죽인다고?
"정확히는 이 특성에 적용된 대상은 자결이 불가능하게 되지."
즉, 스스로 죽을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자결을 막는 특성이라니.
세상에 별 해괴한 특성이 많다곤 하지만···.
"이제 네게 남은 길은 도주뿐이겠군."
빌런이 얄밉게도 키득거리며 이완성을 바라봤다.
이완성은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죽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다.
'시선을··· 돌렸다.'
최은하에게 기울었던 관심을, 자신이라는 배신자를 통해 분산시켰다.
하물며 빌런의 말이 진짜라면 죽는 건 불가능.
도망치려 한들 화산이 그걸 가만 지켜볼까?
"······."
이완성이 침묵하는 가운데.
"화산의 중추는 무너졌다."
이전석이 등을 돌려 다시 옥좌로 향했다.
그는 손에 묻은 핏물을 털어버리며 옥좌에 등을 기댄 채 앉았다.
실로 오만한 그 모습은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신을 연상케 했다.
황금빛 옥좌와 지옥 밑 구덩이에서 올라온 듯한 기백이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황제.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손에 쥔 지배자였다.
그리고 새로운 화산의 왕은 말했다.
"전쟁을 끝내고 봉문(封門)해라."
봉문.
그 말에 장로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한때 문파로 이름을 드높였던 화산에게 봉문이라는 것은 이로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따르지 않으려면 그래도 좋다. 얼마든지 거역하고 반역해라. 허나, 내게 검을 들이댄 자들은 몸소 그 대가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빌런의 말에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말로는 거역하고 반역해도 좋다고 하지만, 권좌조차 개미처럼 가지고 노는 그에게 감히 그 누가 검을 들이댈 수 있겠는가.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래.
누구 하나.
"최은하."
"······네."
"앞으로는 네가 화산의 장이다."
오직 최은하만이 두 발을 딛고 선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장로들과 검수가 알현실을 나갔다.
그들은 이제 빌런- 아니, 이전석이 명한 대로 화산을 봉문할 것이다.
외부와의 교류를 완전히 끊으며, 패배자로서 고개를 숙이며 살겠지.
물론 내부에선 여전히 알력 다툼이 있겠지만 그것까지 이전석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몸이 되돌아왔군.'
이전석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길었던 머리가 되돌아오고, 손톱이 짧아지며, 푸석하던 피부가 도로 부드러워졌다.
하물며 손에 쥔 적단도까지 사라졌다.
육망천성원진.
하늘- 천기를 강제로 뒤틀어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진법.
그 효과가 방금 막 끝이 난 것이다.
실로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이전석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늦었다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뻔 했다.
그래서 급히 봉문을 명하고 내보낸 거긴 하지만···.
'반동이 오지 않는군.'
이전석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본래라면 막대한 대가가 이전석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무려 천기를 강제로 뒤틀어 '소망'을 이루는 진법이다.
그중 이전석은 전생(정확히는 기억이지만)을 현생에 고스란히 재현했고, 그렇게 끌어온 힘의 덩어리는 필시 막대한 부담을 안겨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막대한 부담은커녕 아주 약간의 대가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몸의 상태는 여전히 최상이다.
오히려 진법을 사용하기 전보다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단순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시스템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마치 레벨이라도 오른 것처럼 몸에 활력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원율이나 최신을 죽이며 얻은 특성도 있을 테니······.
"상태창."
이전석은 아주 작게 그 단어를 읊었다.
당연히 상태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종류의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역시.'
그는 육망천성원진을 사용하며 떠올랐던 시스템을 되새겼다.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의 소망입니다.]
[하늘이 당신에게 막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하늘은 이전석이 전생의 기억을 재현한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했다.
미리 알고 있었고, 대비도 했다.
이전석은 대가를 신격의 일부로 지불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스템이 하늘의 분노를 대신 감당합니다.]
[일시적으로 시스템이 소멸합니다.]
어째서인지 시스템이 이전석을 대신해 하늘이 내린 대가를 대신 감당했다.
일시적이라는 문구로 보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듯하지만······.
'이해할 수 없군.'
왜 시스템은 이전석을 대신해 소멸했는가.
이전석이 잃는 건 고작해야 신격일 뿐이다.
그것도 전부 다 사라지는 게 아니다.
겨우 일부의 신격만 대가로 받치면 되는 일이었다.
'전생을 재현했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기억일 뿐이고, 진짜 전생의 나와는 가진 힘의 농도나 양도 완전히 달랐어.'
최원율을 압도했던 빌런은, 그조차 전혀 완벽하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 전생의 자신을 재현한다면 그건 단순히 압도적이라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다.
이전석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겠지.
애당초 당시의 힘을 고작 진법 하나로 재현한다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육망천성원진은 과거 육선인이 자신들의 지식을 하나로 모아 만들어낸 진법이지만, 전생에서 이전석이 도달한 경지는 그보다 한참 더 위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석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전생의 힘을 재현했다.
당연히 하늘이 요구하는 대가도 적당한 선에서 끝났을 게 분명했다.
그저 약간의 신격.
(물론 이것도 뼈 아픈 손실이지만.)
그것만 지불하면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시스템은 이전석을 대신했다.
혹, 대가가 단순 신격만으로는 끝나지 않기 때문일까?
'······모르겠군.'
애당초 시스템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이유부터가 불명이었다.
'뭐, 신격을 잃지 않았으니 이득이긴 하다만.'
이득일 뿐이랴.
아무런 대가 없이 화산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살성을 다시 마주한 건 기분 나쁜 일이지만, 이전석에게 있어선 전혀 나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
문득.
이전석과 같이 알현실에 남은 최은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빌런이었을 적 이전석의 모습에 겁을 먹은 걸까.
그녀의 말이 다시 존칭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그에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평소대로 말 해."
"네. ···아니, 응."
애써 존칭을 때며 고개를 끄덕이는 최은하.
평소대로 하라곤 했지만 방금 전 이전석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물론 전음으로 그가 도착한다는 걸 미리 알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직접 이전석의 모습을 보니, 전음으로 미리 주의를 받았던 최은하조차 압도당하고 말았다.
아니.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물며 그 잔혹한 손속까지.
처음에는 마냥 무섭기만 했지만···.
'본을, 보여준 거겠지.'
어떻게 화산을 지배해야 하는가.
한 가문의 장이 되기 위해선 얼마나 독해져야만 하는가.
과거의 최원율이 그러했고, 그녀의 형제들이 그러했듯이.
적어도 최은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잔혹함조차 자신을 위해 보여준 광경이라고.
이전석의 전생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봉문의 기간은 네가 정하도록 해."
이전석이 최은하에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 말은······."
"화산을 완전히 장악하면 봉문을 끝내라는 의미야. 네가 생각하던 대대적인 사과도 그때 하면 되겠지."
물론 당장 이전석이 모든 걸 해결해도 되긴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또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전생의 힘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채면 장로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다.
거기에 휘말리면?
그건 그것대로 성가셔질 테지.
'최선은, 이대로 놈들이 착각하게 내버려두고 최은하를 통해 화산을 지배하는 것.'
그렇기에 이전석은 굳이 최은하에게 말했다.
"당초의 계획에서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장로들은 널 따를 거야. 뭐, 진짜 충성심을 가지고 따르진 않겠지만··· 애초에 이전에도 충성심이 있던 건 아니잖아?"
그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최은하를 이용하려고 했을 뿐.
결국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똑같았다.
"화산을 지배해라."
명령과도 같은 말.
최은하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전석은 옥좌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한여름의 능력을 이용하도록 해. 가능하면 여명회의 첩자에게서 정보를 빼내 주면 좋겠지만······ 못할 것 같으면 말해도 되고."
"내가 할 게. 아니, 하게 해줘."
의외로 최은하는 여명회라는 이름에도 겁먹지 않고 나섰다.
세계에서도 유명한 빌런 단체가 여명회라는 걸 고려하면 겁을 먹을 법도 하건만···.
화산을 옛적처럼 도가로 되돌리기 위한 결의 때문일까?
이유야 아무렴 좋았다.
최은하가 알아서 화산을 지배해준다면 이전석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으니.
"그럼 나는 남겨둔 일이 있어서···. 따로 용무가 있다면 문자 보내."
이전석은 손을 흔들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툭, 한 차례 발을 구른다.
직후.
그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졌다.
축지를 사용해 알현실을 나간 것이다.
일상에서 평범하게 헤어지는 듯한 모습.
문자 보내라는 말에 긴장이 풀린 최은하는, 마치 그에게 배려를 받은 것 같아 옅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이전석은 늘 자신에게 있어 은인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은혜를 갚을 때였다.
"해보자."
이전석이 마련해준 무대.
그 위에서, 화산을 완전히 지배한다.
※ ※ ※
이전석은 다시 협회장실로 되돌아왔다.
엉망진창이 된 협회장실에는 김백동을 포함한 감독관 몇 명과 협회장 전속 경호원이 남아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근처 공원에 계십니다."
그들에게 연선화의 위치를 물어보니, 협회 바로 옆 공원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윽고 이전석이 그 공원으로 향하려던 차.
"헌터님."
김백동이 말을 걸어왔다.
"집이 생각보다 빠르게 완공된 모양입니다. 조만간 연락을 주시면 가족분들을 모시러 찾아뵙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말을 위해 부른 모양.
이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가족을 위한 집이 필요하긴 했다.
아야미네가 있다곤 하나 그녀는 본체가 아니고 단순 경호원만으론 버거울 상황이 올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모습과 더불어 최원율을 죽였다.
후자야 어떻게 숨긴다고 한들, 전자는 그러기 힘들다.
이미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이전석의 이름이 떠돌고 있었고, 그가 유명해질수록 가족의 안전에도 서서히 금이 갈 것이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집이 완공되었다는 사실은 이전석에게 있어 희소식이었다.
'조만간 바로 병원에 가봐야겠어.'
어머니의 상태도 봐야 하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설득해야만 했다.
고집불통인 아버지를 어떻게 설득할지가 문제지만.
"참."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이전석이 김백동에게 물었다.
"팀장님도 혹시 이전 작전에 참여하셨습니까?"
이전 작전.
다름 아닌 최승철의 별택을 급습했던 작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걸 알아들었는지 김백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만······ 아쉽게도 그곳에 최승철 본인이 없더군요."
그야 당연하다.
이전석이 중간에 빼돌렸으니까.
오히려 이전석이 묻고 싶은 건 그 이후였다.
"그럼 최승철의 사무실에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았던가요?"
"······다른 누군가 말입니까?"
"가령 최소 8서클 이상의 마법사나 그에 준하는 흔적이 발견 되었다든지."
이전석의 흑색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김백동은 순간 묘한 기분을 받았다.
왜 그는 이런 걸 묻는 걸까.
물론 어느 정도 예측이 가긴 했다.
이전석이 협회장과 만나고 작전이 진행된 만큼, 둘 사이에 모종의 대화가 오고갔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최승철의 실종도 아마 그와 관련된 문제겠지.
이전석이 화산에게 있어 좋은 행동을 할 리 만무했으니, 김백동은 굳이 거기서 더 복잡하게 파고들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최승철 개인 사무실은 물론 별택 전체나 그 주변을 수색해 봤습니다만, 마법흔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더군요."
"과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전석.
'마탑 놈들은 이미 전부 빠져나갔나 보군.'
흔적조차 없다고 하니 최승철이 납치당한 시점에서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화산에서 철수한 모양이다.
'놈들은 마탑을 재건하기 위해 선악을 구별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니 주의해둬서 나쁠 건 없어.'
선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떠나서, 그들의 행위는 범국가적일 경우가 많았다.
가족이 있는 이 나라에서 개판을 친다면 화산이 그러했듯 마탑 또한 가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윽고 이전석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협회장실을 떠나려는 그에게 김백동이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이랄 것도 있겠습니까."
그 대답에서 적지 않은 호의가 느껴졌다.
"집에 대해선 조만간 바로 연락드리죠."
거기까지 말한 이전석은, 이내 뻥 뚫린 천장과 벽을 넘어 협회장실을 벗어났다.
그가 향한 곳은 연선화가 있다고 하는 공원이었다.
※ ※ ※
공원 입구 옆 벤치.
분수가 보이는 그곳에 노인 한 명이 앉아 있다.
이전과 달리 마나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아마도 특성을 빼앗겼기 때문이겠지.
안 그래도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마당에 권좌급 강자와 싸우기마저 했으니 더욱 몸에 무리가 더해졌으리라.
'또 정세가 크게 변하겠군.'
최원율과의 싸움으로 줄곧 숨기고 있던 연선화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협회는 물론 대한민국의 기둥으로 자리하던 연선화의 노쇠는 많은 국민과 헌터들에게 동요를 안겨줄 터다.
하물며 화산만큼은 아니라도 호시탐탐 제 욕망을 드러내는 협회 간부진들이라면 어떻겠는가.
이전석은 이미 그 결과를 전생에서 체험해 본 적이 있었다.
협회도 더 이상 우군이 아닐 수 있다.
물론 바로 협회의 구조가 뒤바뀌진 않을 테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변하고야 말 것이었다.
"왔구나."
연선화가 이전석을 발견했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제자의 모습 덕분일까.
연선화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잘 해결했나 보구나."
"잘 해결했죠."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히 대답하는 이전석.
툭-.
연선화가 도를 지팡이 삼아 짚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이 망가진 협회 최상층을 향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곧 연선화가 이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산의 헌터들이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았단다. 화룡검이 죽고 화산이 봉문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더구나."
화산에서 나온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
벌써부터 그런 소문이 전국곳곳에 퍼지고 있다.
아마 최은하가 의도적으로 화산의 봉문과 최원율의 죽음을 흘려보낸 것이리라.
생각보다 일 처리가 확실하고 빠르다.
'머리가 제법 굴러가는 편이야.'
최은하는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또렷이 인지하고 있었다.
"고맙구나."
그때.
연선화가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이전석은 잠시 입을 다물다, 뒤늦게 물었다.
"아까 보인 모습이 뭔지는 안 궁금하십니까?"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지."
"······."
"그러는 나도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냐."
연륜이 묻어나는 대답에 이전석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의 스승이라고.
하지만 뒤늦게 찾아온 스텔라는 아직 그의 스승이 아니었다.
편의점에 다녀온 걸까.
샌드위치와 우유를 손에 든 그녀가 이전석을 발견하더니, 이내 눈을 날카롭게 뜨며 물었다.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1화
보물고 (1)
"너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스텔라가 경계심이 어린 어투로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마치 곧 물어뜯을 짐승처럼 사나웠다.
이전에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다.
하긴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비록 일부에 불과했다곤 하나, 이전석이 보여준 모습은 그야말로 살의의 집합체였으니까.
최원율과 함께 사라진 이전석.
곧이어 들려온 최원율의 죽음과 화산의 봉문 소식.
이전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대강 예측이 가리라.
'그때 그 모습은······ 인간조차 아닌 무언가였어.'
스텔라가 눈을 치켜떴다.
그것은 그저 재앙이었다.
마치 살기라는 단어가 인간의 형상을 덧입은 듯-.
권좌조차 미약한 피조물로 느껴질 정도의 압박감.
'신.'
그렇다.
악의 신.
스텔라가 바라본 이전석이 그러했다.
그러나.
"저는 저입니다."
이전석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스텔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애매모호 한 대답을 원한 게 아냐."
"그럼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까?"
"그건······."
"제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냥 그뿐인 이야기입니다."
비장의 무기.
육망천성원진.
500년도 더 전, 여섯 명의 선인이 서로의 지식을 하나로 모아 만들어낸 절세의 진법.
그것은 천기를 거슬러 자신의 '소망'을 강제로 이루는, 그야말로 꿈의 도술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고, 꿈이 몽상을 넘어 현실이 되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만들어낸 꿈의 도술에는 여러 가지 한계점이 있었다.
육망천성원진을 사용해 하늘에 소망을 이룬다고 해도 죽음 사람을 살릴 순 없고, 존재하지 않는 걸 만들어낼 수도 없다.
하물며 법칙을 벗어난 소망은 막대한 대가를 요구하기도 했으니.
한때 그 대가로 인해 발생한 것이 '세컨드 임펙트.'
도사의 태반이 세상에서 지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다.
근본적으로 도술이 배우기 어렵다지만, 도사라는 이들이 대부분 죽어 사라진 건 육망천성원진의 영향이 다분했던 것이다.
육망천성원진은 그만큼 막대한 대가를 사용자- 혹은 세계에 요구하며, 그조차 부족하다 판단했을 땐 아예 발동 자체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 번 사용하면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지.'
생애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한 일회성의 필살.
이전석이 굳이 그걸 최원율과의 싸움에서 사용한 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때까지 마냥 기다린다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피해가 생겼겠지.
협회는 물론이고 대한민국도 멀쩡하진 못할 테고, 그 과정에서 이전석의 가족 또한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아스트로?
그것도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긴 하지만, 아예 멈추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결국 최원율이 연선화를 죽이며 세상의 흐름을 크게 바꿨을 것이다.
'뭐, 그 자리에는 스텔라도 있었으니 어떻게 됐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은 육망천성원진을 사용해 자신에게 닥칠 위기를 원천봉쇄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스텔라.
"그래, 더 묻진 않을게. 내가 진짜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돌렸다.
그때.
멀리서 헌터 한 명이 다가왔다.
입고 있는 복장이나 가슴의 단 배지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협회 소속의 헌터인 듯싶었다.
그가 스텔라와 이전석에게 양해를 구하듯 고개를 작게 숙였다.
그러곤 연선화의 귓가에 작게 무어라 속삭였다.
꽤 심각해 보이는 표정.
연선화의 눈빛도 사뭇 진지해진다.
"···화진이가?"
작게 새어 나오는 그녀의 말.
화진.
아마도 부협회장인 고화진을 뜻하는 말이리라.
'벌써 움직였나?'
연선화의 반응으로 보아 그녀의 변화를 전해 들은 고화진이 아마 모종의 움직임을 취한 것 같았다.
하여간 뱀 같은 놈이다.
'놈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타이밍 하나는 잘 노려댔지.'
빌런이나 악인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바로 고화진이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구나."
이내 연선화가 헌터의 부축을 받으며 협회로 돌아갔다.
아마 협회는 이전보다 더 바빠질 거다.
협회장과 부협회장.
두 파벌로 나뉘어 싸워대겠지.
물론 작금의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어느새 공원에는 둘만이 남고-.
"진짜 궁금한 거라는 건, 아마 벽에 관한 것이겠군요."
"맞아."
"제가 단순히 그런 걸 말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스텔라님이라면 잘 알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싱긋.
이전석이 부드러우면서도, 한 편으론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 앉았다.
스텔라는 샌드위치와 우유를 아공간에 넣었다.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그녀였으나,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파밀리아 길드를 체험한다는 조건을 제외하고 네게 내 오리지날 마법을 알려줄게."
스텔라가 손가락을 하나둘씩 새우며 말을 이었다.
"추가로 암시장 VIP 영구 입장권, 파밀리아 길드와의 우호관계 형성, 그리고 내가 가능한 것에 한 해 네 부탁을 무조건적으로 한 번 들어주지."
"확실히 괜찮은 조건이네요."
암시장 VIP 영구 입장권만 봐도 그렇다.
일회용 입장권 한 장만 해도 지금 이전석으로선 다른 이들의 도움이 없고선 구하기가 난해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일회용이 아닌 영구적인 것으로 준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 더불어 파밀리아 길드와의 우호관계 형성은 어떤가.
세계랭킹 1위의 초대형 길드 파밀리아.
사실상 미국을 지배하는 그들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건 단순히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파밀리아는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가족이나 친우를 유독 소중히 여기곤 했다.
그들에게 우호적 관계는 단순 표현을 넘어 결코 배신하지 않고 위험할 때 반드시 도와주겠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이는 추후 이전석에게 엄청난 이점이 될 게 분명했다.
다만.
"파밀리아와의 우호 관계는 스텔라님이라도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전석이 그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자 스텔라가 흥, 코웃음을 쳤다.
"너 내 권력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거 아냐?"
"그럼 아닙니까?"
"미안한데, 이래 봬도 내가 파밀리아의 부길드장이거든?"
"부길드장이라도 길드장과 같은 권한이 있는 건 아니죠."
"그래도 길드 회의에 이름을 올리고 지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소리야."
"결국 확정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셈이네요?"
"······그렇게 따지면 할 말은 없는데."
스텔라가 볼을 부풀리더니 잠시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저라도 스텔라님이 저를 등쳐먹으려고 하셨다면 조금 섭섭할 겁니다."
"야!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양심 없는 놈은 아니야!"
이전석의 말에 스텔라가 황당하다는 양 소리쳤다.
뭐, 스텔라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건 이전석도 진즉에 알고 있기는 했다.
전생에서도 그녀는 신뢰를 아주 중요시 여겼으니까.
단지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선 확실히 하길 원해서였기 때문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제 비밀을 털어놓고 싶지 않군요."
"확실해지면?"
"그때는 조금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죠?"
"······."
잠시 입을 다문 스텔라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알겠어. 우선 파밀리아에 가서 회의에 네 이름을 올려보도록 할게. 최근 네 실적이나 평가, 그리고 화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마스터도 마냥 무시하긴 어려울 거야."
물론.
"회의에서 긍정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해도, 마스터와 한 번쯤은 대면해야 할 거야."
"대면이라면······."
"네게 정말 우리 등을 맡겨도 되는 존재인지 확인하는 거지. 할배··· 마스터는 그런 부분에 관해 특화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렇군요."
이전석은 적당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파밀리아의 길드 마스터.
한때 마피아의 보스였던 그가 어떤 특성을 각성했는지는 이전석도 잘 알고 있었다.
"하아······ 이렇게 휘둘려보긴 오랜만이야."
옅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 흔드는 스텔라.
하긴, 그렇긴 할 거다.
그녀는 명색이 권좌였으니까.
연예인보다 더 높은 인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위엄은 일국의 왕보다 더 견고했다.
이전석처럼 태연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꿀꺽-.
스텔라가 아공간에서 우유를 꺼내 벌컥 들이마셨다.
마치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이윽고 그녀의 주변을 별무리와도 같은 마나가 둘러쌌다.
"그럼 딱 기다려. 며칠 안에 바로 돌아올 테니까."
아무래도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한 모양.
"기다리죠."
이전석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곧이어 스텔라의 신형이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이전석은 생각에 잠겼다.
'파밀리아와의 우호관계··· 되면 좋지만 안 되도 상관은 없어.'
어차피 이전석이 가진 정보는 반쪽짜리다.
이전석 자신도 어떻게 벽을 넘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물론 그조차 스텔라에겐 상당히 유용한 정보겠지만.
'생각보다 얻은 게 많군.'
벽의 너머를 절실하게 바라보는 스텔라이기에 이만한 것들을 받아낼 수 있었으리라.
하물며.
'본인이 가능한 것에 한 해 부탁을 들어준다 했지.'
이전석은 그 말에 내심 웃음을 흘렸다.
스텔라는 과연 알고나 있을까.
벽을 위해 무엇도 서슴지 않고 내건 조건이 훗날 그녀 자신을 후회케 하게 될 것이라고.
아쉽게도 이전석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자제하여 내려놓는 법을 알지 못했다.
쉽게 말해 먹을 수 있으면 등골까지 빨아먹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건 비단 스텔라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슬슬 보물고나 털어먹으러 가볼까.'
홀로 공원에 남은 이전석.
그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더니, 주변에 결계를 치곤 포탈 게이트를 형성했다.
그곳에 입력한 좌표는 다름 아닌 화산이었다.
정확히는 화산의 지하 보물고.
'영풍고가 더 풍성해지겠어.'
이전석은 혹 누가 볼세라 잽싸게 게이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 ※ ※
화산의 보물고는 영풍고에 비해 정확히 두 배에 해당하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건 단지 넓이일 뿐이지, 충고까지 따지면 그보다 한참 더 커다랬다.
24미터 높이의 천장.
두꺼운 기둥과 그것을 둘러싼 계단이 이어져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는 마치 도서관의 책처럼 여러 아이템이 놓여 있다.
하나 같이 높은 등급과 효과를 자랑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런 보물고의 1층, 한 가운데.
갈색의 포탈 게이트가 열렸다.
뚜벅-.
이전석이 게이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보물고는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은 장신구들이 줄지어 전시되어 있고, 2층과 3층에는 각종 갑옷과 무구, 4층에는 포션을 포함한 다양한 효과의 아이템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5층.
이전석이 굳이 화산의 보물고에 들어온 이유가 그곳에 있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9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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