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2화
대련 (2)
예리함을 머금은 채 빛나는 한 자루의 도.
그것이 허공을 가르듯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평범한 철검에 불과 할텐데도, 연선화가 그것을 들고 있노라면 마치 세기의 명검처럼 보였다.
"그리 원한다면······ 어디 한 번 가져가보려무나."
이내 연선화가 흥미와 즐거움이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본래는 천천히 가르침을 줄 생각이었다만.'
시간을 들여 천천히 키워내고자 했다.
여느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전석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이전석이 가진 처절함.
강함에 대한 끝 모를 욕망.
그러한 것들이 과연 압도적인 벽을 마주하고서도 꺾이지 않을 것인가.
한 번.
시험이 해보고 싶어졌다.
"오너라."
연선화가 손을 까딱였다.
"······."
이전석은 말없이 그녀를 지켜봤다.
정적과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서걱-.
품에서 꺼낸 적단도로 손을 그었다.
그로서도 편하게 연선화의 기술을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어디 한 번 가져가보라고?
우스운 도발이었지만 바라는 바였다.
제자와 스승.
이전석과 연선화.
그들은 사제 관계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한 기세를 뿜어냈다.
서로를 죽이겠단 의지.
살기와 살의.
피로 물든 기운이 병원 옥상을 뒤덮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탓-!
먼저 움직인 건 이전석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
바람이 등을 떠민다.
동공은 뱀처럼 찢어진 채 붉게 물들었다.
신속한 발과 광폭화의 영향이었다.
'좋구나.'
연선화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사이.
적단도가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예리함을 대신해 날을 휘감은 건 다름 아닌 살기였다.
반드시 상대방을 죽이겠단 의지.
그것이 연선화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그러나.
카앙-.
연선화의 도가 이전석의 단도를 비껴냈다.
분명 온힘을 다한 일격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나 쉽게 막혀버렸다.
순간 발화를 사용할까 싶었지만.
'···아니, 그럼 의미가 없어.'
이전석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죽고 죽이는 싸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수련이자 대련이기도 했다.
연선화로부터 가르침을 얻어가는 전투.
특성을 사용하면 훨씬 쉽기야 하겠지만, 그래선 얻어갈 수 있는 게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오직 육체강화에 해당하는 특성만을 사용했다.
'예리하구나.'
그런 이전석의 생각을 읽은 걸까.
연선화가 훌륭하다는 듯 웃었다.
과연 이전석이 생각한 대로였다.
그가 이 싸움에서 불필요한 다른 특성을 사용했다면 하등 의미 없는 대련이 되고 말았을 거다.
그러나.
이전석은 그러지 않았다.
좌절도 절망도 없이.
오히려 연선화에게 밀리면 밀릴수록 더욱 거세게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폭풍과도 같은 난격의 연속.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옥상을 가득 매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닿지 못한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새하얀 도.
그것이 이전석의 적단도를 몇 번이고 막아낸 것이다.
'······괴물이로군.'
이전석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검의 권좌라 불릴 만한 실력이다.
단순 검술의 경지만 놓고 보면 연선화는 이전석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 서있었다.
그렇기에 느껴지는 벽.
넘을 수 있을까?
아니.
'상관없어.'
넘을 수 있던 없던.
그런 건 하등 중요치 않다.
넘지 못할 정도로 드높다면 부숴버리면 그만이다.
안 되면 되게 해라.
채앵-!
다시금 휘둘러진 적단도.
여태껏 비껴내기만 하던 연선화가 드물게 이전석의 공격을 바깥으로 쳐냈다.
"허."
그녀는 무심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전석은 그녀보다 한참 낮은 경지에 있었다.
헌데.
방금 일순간.
이전석은 그 경지에 드리운 벽을 넘어섰다.
아니.
'넘어섰다기보다······ 아예 때려 부쉈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구나.'
무식하기 그지없는 성장.
만약 쳐내는 게 아니라 비껴내는 것에 그쳤다면···.
'작은 생채기 정도는 났을지도 모르겠구나.'
어이없는 사실이다.
그녀는 권자였으니.
그런 연선화에게 상처라고?
누가 들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코웃음이나 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코앞에서 불꽃처럼 맹렬히 타올랐으니.
이전석은 방금, 틀림없이 성장했다.
그리고 일순간 연선화에게 닿았다.
물론 그녀는 제대로 된 검술은커녕 보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특성이나 마나도 매한가지.
그저 무턱대고 검을 들어 방어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의 저력은 충분히 놀랄만한 것이었다.
'좋구나, 좋아.'
연선화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이토록이나 즐거움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투귀(鬪鬼).
협회장의 자리에 오르기 전,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던 이름이다.
지금보다도 몬스터와 빌런이 넘쳐나던 시대.
그녀는 오직 싸움을 즐겼다.
빌런도 몬스터도 상관없었다.
즐길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찾아가 싸움을 걸었고, 승패에 상관없이 그저 즐거움만을 추구했다.
언제부턴가. 나이를 먹고선 싸움보다도 불우한 인생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됐지만, 근본적으로 그녀는 싸우고 싶다는 일념 하에 헌터가 된 투귀였다.
그때의 오래된 기억이 뒤늦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연선화는 그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종심(從心)에 생긴 제자가 좋은 선물을 주었으니, 스승으로서도 마땅히 보답을 해줘야겠지.'
지금은 잊어버린 찰나의 기억.
그것을 떠올리게 해준 제자에 대한 선물.
터벅-.
연선화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에 이전석이 공격을 멈췄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뭘 하려는 거지?'
의문이 뇌리를 뒤덮는다.
연선화는 이다지도 편안한 자세였다.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할뿐.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전석은 자세를 낮게 잡았다.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그때.
"보고, 느끼고, 훔치거라."
툭-.
연선화가 발끝으로 땅을 쳤다.
순간.
그녀의 신형이 일그러졌다.
희미해지며 사라지는 모습.
그 사이를 분홍빛 꽃잎이 매우고···.
"이게 내 제자에게 주는 첫 가르침이란다."
찰나.
1초를 잘게 쪼갠 듯한 연속.
연선화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무음.
무향.
무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허무와 허무의 연속.
그 사이.
스릉-.
매화 한 잎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카롭게 내리치는 통각.
이전석은 제 뺨을 훑어보았다.
손가락 끝에 피가 묻어났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연선화가 옥상 난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위엄을 더해주듯.
'하늘이······.'
갈라졌다.
먹먹하던 구름이 두 갈래로 쪼개지며, 그 사이로 어둡게 물든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이로 별들의 무리가 반짝이고, 달빛이 어스름하게 옥상을 밝혔다.
실로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광경.
이전석은 생각했다.
과연 해가 졌기 때문에 밤이 찾아온 걸까. 아니면 그녀의 일격으로 세상의 규칙이 뒤틀리고 만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건.
'미쳤군.'
연선화.
그녀의 일격은 전생에서 이전석이 본 어떤 권좌의 공격보다도 아름다우면서 또한 뛰어났다.
'단순히 스탯만으로 하늘을 가른 게 아니야.'
그렇다고 특성도 아니다.
그 정도도 못 알아 볼 이전석이 아니었다.
순수한 검술의 결정체.
그게 바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의 결과였다.
그래서 더 의문이 어렸다.
━참으로 불쌍한 아해로구나.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노인과, 미(美)를 고스란히 빚어낸 듯한 눈앞의 여인.
도무지 매치되지 않는 두 모습.
연선화.
그녀는 도대체 어쩌다 젊음을 잃어버리고 만 것일까.
물론 연선화의 나이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20년.
그녀가 협회장으로 재임한 시간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나이는 72세.
때문에 처음 그녀를 봤을 땐 적잖이 당황했지만, 모종의 마법이나 특성으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겠거니 싶었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이 깊어졌다.
그녀가 전생에서 삐쩍 마른 노인이었던 이유.
'이럴 줄 알았으면 TV도 좀 봐둘 걸 그랬군.'
원체 매스컴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당시 협회장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어느 시점부터 노화가 진행되었는 등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한 가지.
추측이 가는 게 있기는 했지만.
"보았느냐?"
문득.
연선화가 이전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전석은 뒤늦게 적단도를 거둬들였다.
예리하던 날이 도로 뭉툭하게 변하고.
"······봤습니다."
이내 나지막이 대답했다.
연선화가 왜 그리 되었는가.
궁금하긴 했다.
다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전석은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무엇을 보았는지 알려줄 수 있겠느냐?"
뒤이어진 연선화의 물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 방금 전 보았던 연선화의 움직임을 상기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전석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떤 특이한 발걸음과 검술이 조화되어 있더군요."
"허."
연선화가 무심코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만은 그녀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내가 평생에 걸쳐 다듬어낸 필살(必殺)을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파악했다는 것이냐.'
놀라움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단순히 재능으로 따질 수준이 아니다.
눈이 뛰어나고 관찰을 잘 한다고?
관찰에 자신 있는 그 어떤 사람을 데려와 앉혀둬도 지금 이전석과 같은 답을 내지는 못할 터였다.
그럼에도 굳이 표현하자면.
'천고의 재능이로고.'
세상 역사를 통틀어 한 번 나올 법한 재능.
중국, 혹은 오래된 무협소설에선 이러한 사람을 흔히 천무지체(天武肢體)라 부른다지.
무에 있어 절대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
연선화는 이전석이 그런 종류의 몸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정답이란다."
연선화가 뒤늦게 난간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깃털 같은 가벼운 발걸음.
바람이 그녀를 훑고 지나가는 듯하다.
"천매보(天梅步)와 창천검(昌天劍). 방금 건 그 두 가지의 무학을 합친 기술이지."
하늘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우며, 그 너머로 밤이 감춰졌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두컴컴해진 하늘.
곧 비가 내릴 듯 번개가 내리친다.
"나는 이걸 '절개(絶開)'라고 부른단다."
연선화의 나지막한 말과 함께.
쏴아아-.
거센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그 후.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연선화는 이전석과 검을 맞댔다.
당연히 실전 형식의 대련이었다.
굳이 자세한 가르침은 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는 게 더 즐거웠고.
무엇보다.
'습득이 빨라.'
채앵-.
연선화가 적단도를 미끄러트리듯 쳐냈다.
그러곤 물속을 유영하듯 뒤로 물러난다.
쏟아지는 빗물이 그녀와 이전석의 사이를 매웠고, 그 속에서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이전석은 빠르게 연선화의 기술을 터득해 갔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키는 이전석.
적단도를 바로 잡고 어깨를 핀다.
팔과 다리에 힘이 풀린 듯한 모습.
짐승처럼 움직이던 이전과 다르다.
이를테면, 그래.
그것은 연선화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후웅-.
이전석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일순간.
빗물이 갈라지며 공기가 터져나간다.
그러나.
챙-.
그런 그의 공격을 가볍게 쳐내는 연선화.
이전석이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방금 그 모습, 발걸음.
연선화와 꽤나 요란했지만, 틀림없었다.
'······천매보.'
이전석이 보인 발놀림은 틀림없는 천매보였다.
'놀랄 노자로구나.'
고작해야 한 시간.
하루도 채 안 되는 기간.
이전석은 미숙하게나마 연선화의 기술을 빼앗았다.
'매화도 가지고 있지 않을 터인데···.'
연선화가 익힌 기술의 단초는 모두 '매화'라는 특성에 있었다.
그녀는 매화를 통해 기술을 익혔고, 현재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전석은 그런 매화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재능만으로 천매보를 익혔으니.
'진정 괴물이로다.'
제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
이전석의 재능은 그만큼 뛰어났다.
물론 굳이 따지면 아직 익혔다고 말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공기를 찢어 발기는 듯한 충격과 괴음.
그것은 천매보의 특징과 아주 거리가 멀었으니까.
중요한 건, 그게 겨우 '한 번 보고 따라한 것'의 결과라는 사실이었다.
제대로 된 가르침도 없이, 그저 홀로 연선화의 기술을 빼앗았다.
기술의 완성도?
의미없다.
한 번 보고 따라할 정도다.
그 정도의 재능과 실력.
이전석은 머지않아 천매보를 완전히 숙달할 것이다.
그렇기에 연선화는 생각했다.
괴물이라고.
"후우···."
숨을 몰아쉬며 다시 자세를 잡는 이전석.
좀 전의 기억을 되새기듯 떠올린다.
탁한 동공엔 여전히 살의가 남아 있다.
사라지지 않은 전의.
그 모습에 연선화가 물었다.
"더 할 수 있겠느냐."
"예."
이전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걱거렸지만 이 정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 할 수 있다.
의식이 있고, 몸이 움직인다.
그럼 멈출 이유가 없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한참을이나 더 검을 맞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새 소나기가 멈추고.
"슬슬 시간이로구나."
연선화가 검를 납도했다.
"아쉽게도 일을 내팽개치고 날아와서 말이다. 나는 이만 다시 가봐야겠구나."
"······일이라면, 언제 다시 오십니까?"
"아쉬우냐?"
"······."
"걱정하지 말거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후후-.
연선화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다시 만날 때를 고대하마."
이내 그녀의 신형이 흩날리는 매화와 함께 사라졌다.
옥상에 홀로 남겨진 이전석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힘들군.'
단순 가르침이 아닌 실전 방식의 대련.
연선화가 사용한 것뿐이라곤 처음에 보여준 절개와 천매보 뿐.
그조차 이전석이 보기 쉽게 한 걸음 한 걸음이 온통 큰 동작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육체적 피로감이 어마무시 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다.
비인지 땀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히 할만 해.'
천매보.
어려운 기술인 건 맞다.
다만 무간에서 단련해온 눈은 연선화의 발걸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머릿속에 담았다.
더욱이 그걸 실행케 한 건 전생에서의 경험과 이전석 본인이 가진 뛰어난 재능 덕분이었다.
상태창에는 표시되지 않아 이전석 자신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천살성은 그의 육체를 보다 뛰어나고 세련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천매보의 기초를 익혔습니다.]
[현재 천매보의 숙련도는 5%입니다.]
[숙련도를 100%까지 채울 시, 특성 '천매보'를 획득합니다.]
뒤이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역시.'
이전석은 예상했다는 양 그것을 바라봤다.
전생에는 천살성 덕분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지만, 몇몇 헌터들로부터 이런 시스템이 있다는 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뛰어난 기술은 특성으로 승화된다지.'
그 말은 즉, 연선화의 천매보가 그만큼 격 높은 기술임을 의미했다.
당연히 창천검이나 절개 또한 마찬가지일 터.
━보고, 느끼고, 훔치거라.
━이게 내 제자에게 주는 첫 가르침이란다.
연선화의 말이 떠올랐다.
본인이 직접 그렇게 말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전석은 그녀의 모든 걸 갈취할 생각이었다.
※ ※ ※
이전석은 뒤늦게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때.
때마침 담당 간호사와 마주쳤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오신 거예요?!"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 환자.
그 환자가 비를 홀딱 맞은 채로 돌아왔다.
담당 간호사로선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몸에 이상이 없으시다면 다행이지만······."
간호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내 그녀는 감기에 걸리겠다며 청결 포션을 건네줬다.
향도, 맛도 없는 불투명한 액체.
그걸 마시자 홀딱 젖은 몸이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뺨에는 적당히 반찬고를 붙였다.
근데.
"포션을 이렇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환자분들을 위해 구비해둔 물건인데요, 뭐."
간호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별 거 아니라는 듯한 어투.
하긴 항시 청결을 요하는 병원이다.
환자는 물론 의료진들의 깨끗함마저 챙겨주는 청결 포션은 이곳에서 필수품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어느 병원을 가도 꼭 볼 수 있는 물건.
그래도.
'쉽게 줄 수 있는 가격은 아닐 텐데···.'
나중에 병원비로 청구하려는 걸까?
그러나.
예상 외로 간호사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혹시 싸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 까요?"
과연.
'이게 본론이었나.'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다.
"그 정도야 괜찮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이전석의 말에 간호사가 크게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 기뻐 보이는 눈빛.
아까부터 시선이 이상하더라니···.
이전석은 김백동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상부에선··· 헌터님을 영웅으로 내세워 이번 사건을 무마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공개된 이전석의 행적.
더불어 반반한 그의 외모 덕분일까.
"크흠. 그럼 저도 한 장만······."
다른 간호사들도 은근슬쩍 다가왔다.
병원 곳곳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나쁜 의미의 시선은 아니다.
간호사들이 바라보는 것과 똑같았다.
선망과 동경이 뒤섞인 시선.
영상이 공개된지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거늘, 이전석은 불쑥 튀어 오른 자신의 유명세를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간호사들에게 싸인을 해준 뒤.
이전석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녁을 훌쩍 넘긴 시각.
연선화와 대련을 나누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전석은 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응급실에 부모님을 뵈러 간다고 하니 간호사들은 쉽게 길을 터줬다.
띡-.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 이전석.
복도를 가로질러 뒤늦게 응급실로 향한다.
그리고.
"왔냐?"
응급실.
여전히 커튼이 쳐진 한 자리.
"여기 앉아봐라."
이한석이 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3화
추가보상
걱정을 끼쳤다.
실망도 드렸다.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이한석은 의외로 담담한 눈치였다.
"네가 뭘 하든 나는 신경 안 쓴다. 그래도 거짓말은 하지 마라."
뒤이어진 나지막한 한 마디.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이미 한 번 부모님의 믿음을 배신했다.
과오였고 실수였다.
같은 잘못을 반복할 만큼 이전석은 멍청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더 이상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비단 부모님만이 아니다.
━그 돈, 오빠 목숨값이란 거 알았으면 안 받았어.
애써 울음을 참던 이지혜의 얼굴.
그런 모습을 보는 건 전생만으로 충분했다.
"이런···."
문득.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한석이 곤란한 듯 표정을 찌푸렸다.
이내 그가 이전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석아, 편의점에 가서 담배 좀 사와라."
담배?
"여기 병원인데요?"
"내가 미쳤다고 여기서 피겠냐?"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잇는 이한석.
"병원에서 조금 내려가면 흡연부스 있어. 거기서 피고 올 거다."
"그럼 가는 길에 직접 사시면 되지 않아요?"
"편의점이랑 흡연부스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동선이 비효율적이야."
"그냥 귀찮다는 소리죠?"
"어."
이한석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수긍했다.
과연 그 아들에 그 아비라고 해야 될까.
이전석은 무언가에 자세히 설명하거나 대답하는 걸 귀찮아했고, 이한석은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걸 극도로 귀찮아하는 성격이었다.
이전석의 조부도 무언가를 할 때마다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였으니···.
어쩌면 이전석이 가진 귀찮음은 집안 대대로 내려져온 유전일지도 몰랐다.
참 우스운 유전이 아닐 수 없다.
"됐고. 빨리 갔다 오기나 해, 임마."
"알겠어요. 갔다올게요."
이한석의 재촉.
이전석은 마지못해 응급실을 나섰다.
그리고 주변에 정적이 내리깔렸다.
바깥에선 의료진들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지만, 커튼 내부는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조용했다.
그러다 문득.
"······아까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더니."
곤히 잠들어 있던 한유리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일까.
"엄마!"
이지혜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그러곤 다급히 커튼을 젖히고 나간다.
이한석은 한유리를 가만 쳐다봤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주었다.
"언제 일어났어?"
"당신이 전석이 찾을 때부터요."
"······정신 차렸으면 진즉 일어날 것이지."
"미안해요."
옅게 웃으며 사과하는 한유리.
"아깐 절대 못하게 할 거라 하지 않았어요?"
그녀의 말에 이한석이 입을 다물었다.
분명 그 말대로였다.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들의 상태를 보고, 헌터 같은 일은 당장이라도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정작 아들의 얼굴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조차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만 대답하던 아들이다.
비단 어렸을 때만이 아니다.
그건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석.
그는 이상할 정도로 물욕이 없었다.
삶에 대한 꿈이 없다고 해야 될까.
가지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늘 그런 걸 물으면 적당히, 아무거나만 되뇌이던 아들이었다.
그런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선뜻 나서 헌터가 됐다.
제 가족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덕분일까.
이한석은 그 꿈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한숨이 뒤섞인 나지막한 한 마디.
분명 걱정이 되는 건 맞다.
당연하다.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건 부모가 아니리라.
하지만.
"방구석에서 뒹굴거리던 때보다 훨씬 활력 넘치고 좋잖아."
과거의 이전석보다, 지금의 그가 더 보기 좋았다.
부모로선 그게 너무나 좋았고.
그래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부모가 자식의 꿈을 망가트려서야 되겠나.
적어도 이한석의 생각은 그러했다.
하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두자.
그게 나쁜 일이 아닌 한은.
"당신은 어떤데?"
"······."
이한석의 물음.
한유리가 입을 다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유리는 이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으면 해야죠."
※ ※ ※
밖에서 담배를 사고 돌아오는 길.
언덕을 올라 병원 입구로 향한다.
그런데 그곳에 웬 무리가 보였다.
대략 열 명은 될 법한 사람들.
하는 말이나 복장을 보니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인 듯했다.
'아까는 없었던 것 같은데.'
딱 봐도 귀찮아질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은신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은 모습과 기척을 숨긴 채 몰래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응급실로 돌아가 이한석에게 담배를 건넸다.
이한석은 한참 기다린 모양인지, 담배를 받자마자 병원을 나갔다.
끊으면 좋으련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한석이 다시 돌아오고.
"퇴원신청 좀 하고 올게요."
이전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한석은 한유리의 손등으로 흘러들어가던 수액을 확인하며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냐?"
"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검사는 해봐라."
한유리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는 이한석.
표정은 무뚝뚝해 보여도 정은 많은 아버지였다.
"알겠어요."
이전석이 뒤늦게 응급실을 나왔다.
그 길로 바로 퇴원절차를 밟았다.
헌터를 주로 취급하는 병원이었기 때문일까.
한밤 중에도 면담과 검사가 가능했다.
의사는 이전석의 회복속도에 의심을 가지면서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곤 퇴원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입원하자마자 퇴원이라니.
그 정도 부상에선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진료실을 나와 다시 응급실로 돌아가는 길.
"아냐 과장님?"
우연히 아냐와 마주쳤다.
이전석을 발견한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일어나도 괜찮으신 건가요?"
"포션 효과가 직빵이더군요."
"그래도 바로 나을 만한 부상이 아닐 텐데···."
아냐는 당혹스럽다는 듯, 한편으로는 신기함이 묻어난 눈빛으로 이전석을 흘겨봤다.
확실히···.
방금 의사도 그렇게 말하긴 했다.
회복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고.
전생에서도 종종 듣던 소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육체는 상처를 회복하는데 있어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근데 과장님이 병원엔 무슨 일이십니까?"
"헌터님 병문안 왔죠. 감사인사도 할 겸."
"감사인사?"
이전석이 의문을 내비쳤다.
하지만 아냐가 채 대답하기 전이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 저 사람···."
"맞지?"
"맞는 것 같은데······."
"와, 살아 있다더니 여기 있었구나."
"실물로 보니까 더 잘생겼다."
"가서 사인이라도 부탁해 볼까···?"
저녁이라 비교적 한적해진 병원 홀.
로비에 앉아 쉬고 있던 환자 두 명이 이전석을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냐가 말을 돌렸다.
"······여기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장소를 옮기죠."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향했다.
가장 사람의 발걸음이 드문 장소.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뚜벅-.
아냐가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이전석도 그녀를 따라 난간에 섰다.
밑을 내려다 보자, 아까 전 담배를 사고 돌아오며 봤던 사람들이 보였다.
"전부 헌터님 보겠다고 몰려든 기자들이더군요."
아냐가 그들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병원에 들어오면서 저들에게 시달리기라도 한 걸까.
그녀의 표정에서 옅은 짜증이 엿보였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 시간까지 부지런들 하네요."
"그런 직업이니까요."
"근데 병원 앞에서 저래도 된답니까?"
"안 됩니다."
이전석의 물음.
아냐는 단호하게 답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이 시간에 병원 앞에서 인파를 이루는 건 환자분들께 좋지 않은 행동이죠."
거기까지 말한 아냐가 "그리고"라며 말을 이었다.
"병원에 들어오기 전에 경찰에 신고해뒀으니 조만간 해산할 겁니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곧 병원으로 경찰차 몇 대가 들어섰다.
그제야 기자들은 병원에서 해산했다.
한산해진 병원.
아냐가 이전석을 돌아봤다.
절대영도라는 특성의 영항일까.
머리는 물론 피부와 눈, 그리고 안색까지 새하얀 게 말로 표현 못할 신비함을 자아냈다.
아주 잠시 잠깐 정적이 맴돌고-.
"감사합니다."
아냐가 고개를 숙여왔다.
"헌터님이 어떻게 윤진에 대해 알아냈는지, 그런 눈치 없는 질문은 하지 않겠습니다."
"······."
"수현이의 한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번째인지 모를 감사인사.
이전석은 나지막이 물었다.
"알고 계셨나요? 김수현 헌터의 죽음이 이상하다는 걸."
"저도 눈이 있으니까요."
아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헌터님 만큼은 아니더라도, 수현이도 나름 미래가 창창한 인재였습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그만큼이나 열정도 있었죠."
그렇기에 그녀가 마나를 다루지 못해 죽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아냐는 말했다.
분명 치명적인 상처였다.
하지만.
"마나로 상처를 제대로 지혈만 했더라도 치유계 헌터가 올 때까진 버틸 수 있었을 겁니다."
즉 충분히 살 수 있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의심했고, 조사했다.
그런데도 알아내지 못했다.
누가 어떻게 김수현을 죽였는가.
헌데 오늘 이전석에게 의미심장한 문자를 받고 그 내용에 따라 현장에 와보니.
━예. 제가 맞습니다. 김수현의 죽음, 제가 꾸민 짓이지요.
정작 범인은 항상 곁에서 자신을 위해 일 해주던 윤진이었다.
그 사실에 배신감이 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후회스러웠노라고 아냐는 말했다.
"결국 수현이를 죽게 만든 건 접니다. 제가 약해서 그 아이가 대신 희생했죠. 뒤에서 어떤 술수가 존재했던, 제가 강했더라면 수현이가 대신 희생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입술을 앙- 깨무는 아냐.
분함이 역력해 보이는 얼굴이다.
물론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계속 후회만 하면서 살 수는 없겠죠."
━언제까지 애처럼 떼만 쓸 순 없다는 거, 잘 알잖나.
김백동의 조언.
그 말 대로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제가 이렇게 사는 건 수현이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한을 풀었으니 이제 그만 놓아주려는 걸까.
"일단은 제가 해야 할 일들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감독관으로서.
그리고 헌터로서.
아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자 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띠링-.
아냐가 각오를 다진 순간.
[아냐 이바노프의 운명을 더욱 크게 비트셨습니다.]
['후회의 운명'이 사라집니다.]
[추가보상으로 '업상점 무료 이용권(S)'이 '업상점 무료 VIP 이용권(SS)'으로 상승합니다.]
느닷없이 시스템이 나타났다.
비단 시스템만이 아니다.
허공에 나타난 네모난 종이- 아니, 티켓 한 장.
'······?'
이전석이 그걸 손으로 잡았다.
[업상점 무료 VIP 이용권(SS)]
틀림없었다.
방금 시스템을 통해 주어진 보상이었다.
"왜 그러시죠?"
아냐가 의아한 어조로 물어왔다.
그 모습에 이전석은 도리어 의문이 생겼다.
황급색으로 빛나는 티켓.
아냐에겐 보이지 않는 걸까?
시험 삼아 티켓을 손에 들고 흔들어봤지만 아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 듯했다.
"날파리가 있어서 잠시······."
이전석은 애써 말을 꾸며내며 티켓을 남몰래 품에 집어넣었다.
겉으로는 멋쩍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추가보상이라니.
전혀 생각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분명 의도적으로 그녀를 부른 건 맞다.
휴대폰으로 위치좌표를 전송했고, 윤진의 계획을 파탄 냄으로서 아냐에게 주어진 운명을 비틀고자 했다.
근데.
'두 가지 운명을 한 번에 비틀었다는 건가?'
자책과 후회.
퀘스트의 동시달성.
추가보상이라는 건 그 영향일까.
의문도 잠시뿐.
"어쨌든 오늘은 그에 대한 감사인사를 하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아냐가 그리 말하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건 병문안 겸 사온 꽃입니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어 왔다.
'음······.'
이전석은 시스템을 옆으로 치우곤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이걸 솔직히 말해야 할까?
추가보상이 나타난 것 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상황.
이유라면 간단했다.
아냐가 건넨 꽃다발 때문이다.
"과장님."
"왜 그러시죠?"
"국화는 죽은 사람한테 주는 겁니다만."
"······."
아냐가 입을 다물었다.
무서우리만치 서늘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네요. 나중에 다른 걸로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꼭, 다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예."
아냐는 꼭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기어코 국화를 도로 가져갔다.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모양인지 하얀 피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석은 뒤늦게 러시아의 정례관습을 떠올렸다.
그곳에선 죽은 사람에게 붉은 장미를 주거나, 죽은 사람이 좋아했던 꽃을 짝수로 준다고 하였다.
아냐가 국화에 대해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인 셈.
물론 그렇게 따지면 김수현의 장례식 때는 어땠나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알 바인가.'
그렇다.
알 바가 아니다.
굳이 그런 걸 알아서 뭐하겠는가.
"그럼 다음에 협회에서 뵙겠습니다."
이내 아냐가 호다닥 옥상을 내려갔다.
부끄러운듯 잽싸게 자리를 벗어난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인상에 비해, 꽤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였다.
의외로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인 걸까.
이 또한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기에.
"상태창."
이전석이 자신의 정보를 눈앞에 띄웠다.
응급실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확인해볼 것들이 있었다.
연선화를 통해 배운 천매보나 윤진을 죽이고 갈취한 마나조율, 그리고 방금 추가보상으로 얻은 업상점 무료 VIP 이용권까지······.
드디어 맛있게 무르익은 과실을 수확할 때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4화
철야공 (1)
일자로 길게 이어진 식탁.
그 앞에 앉아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남자가 있다.
40세는 족히 넘어 보일 듯한 외모.
근육이 아닌 지방으로 이루어진 풍채.
알렉산드로 퍼거슨.
S급 각성자이자 '처리반'으로 익히 알려진 빌런이었다.
"더 주시오!"
퍼거슨이 식탁을 쿵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러자 메이드복을 차려입은 하녀들이 빈 접시를 치우곤, 대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요리들을 식탁에 올려놨다.
퍼거슨은 그것들을 우걱우걱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 게걸스러운 모습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최승철은 쯧- 혀를 찼다.
'더럽군.'
더럽다.
그리고 불쾌하다.
만약 놈이 그 처리반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승철은 한참 스테이크를 양손에 쥐고 뜯고 있던 퍼거슨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를 고용하는데 더 많은 돈을 원한단 말인가?"
그 말에 스테이크를 어거지로 쑤셔넣은 퍼거슨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왜지?"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오."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냅킨으로 입가를 닫는 퍼거슨.
"당신의 뜻대로 윤진을 죽였지만, 그 모습이 CCTV를 통해 전국으로 중계되었잖소. 아마 꽤 적지 않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보고 내 짓이라 결론을 내렸을 것이오. 세간에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를 고용했던 사람들 사이에선 이미 내 특성은 유명한 것이니."
"물론"이라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것뿐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소. 다만 협회나 경찰, 혹은 정부에서 나에 대한 정보가 차츰 퍼져나가는 건 위함 부담이 너무 크오."
"그러니 돈을 더 달라?"
"그러지 않고선 수지타산이 맞지 않소."
하.
최승철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음식만이 아니라 돈에도 욕심이 그득한 돼지로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알겠다. 지금 자네가 받는 고용금의 네 배를 더 주도록 하지."
"오오···!"
"대신, 받은 값만큼 확실히 일해야 할 거다."
"돈만 제대로 준다면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 힘을 사용할 것이오."
퍼거슨은 눈앞에서 모욕을 당했음에도 전혀 아랑곳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돈, 그리고 먹을 것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
보고 또 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알렉산드로 퍼거슨.
그의 고독은 분명 위협적이다.
그 강력함은 이로 말할 수 없을 수준이었고, 단발적인 파괴력만 따지면 SS급과도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최승철이 듣기로, 고독은 수명을 대가로 사용 한다 들었다.
SS급과 비견되는 고독이 S급인 이유.
다름 아닌 수명이라는 리스크 때문인 것이다.
헌데.
지금 퍼거슨의 모습을 보라.
그는 제 목숨을 희생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돈과 먹을 것만을 밝히는 모습.
탐욕에 눈이 멀어 미래를 희생하는 돼지는 이토록이나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위험부담이니 뭐니 떠들어댄 것도 돈을 더 많이 받기 위함에 지나지 않을 터.
그렇기에 최승철은 퍼거슨이 더 우습게만 느껴졌다.
"다 먹었으면 나가라."
"음!"
이내 냅킨으로 재차 입가를 닦은 퍼거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홀로 남은 최승철은 윤진에 대해 떠올렸다.
화산에서 협회에 심어놓은 세작.
나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거늘.
'머저리 같으니라고.'
고작 F급 헌터 한 명 감당하지 못해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고독으로 인해 화산에 대한 정보는 새어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이전석.'
최승철은 그에 대해 생각했다.
'우연이 아니야.'
최은하를 구해준 것.
미행을 끊어버린 것.
그리고 윤진을 죽인 것까지.
'놈은 화산에 대해 알고 있어.'
즉 의도적으로 최은하에게 접근해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다.
하지만 정작 최승철은 다른 형제들의 견제로 쉽게 움직일 수도 없으니.
"유모,"
"예, 도련님."
"동생이 어디 있는진 알아냈나?"
"그게···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도중에 흔적이 끊어지고 맙니다. 마치 누군가 제 시야를 방해라도 하는 것 처럼요."
"쯧."
최승철이 혀를 찼다.
짜증이 머리를 긁어내는 것 같았다.
제대로 굴러가는 게 하나도 없다.
문제는.
'이게 모두 그놈의 작품이라는 거지.'
이전석.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계획을 모조리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사내.
대체 뭐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절대 곱게 죽진 못할 거다.'
최승철이 두 눈을 번뜩였다.
마치 살모사와 같은 분노가 주변에 내리앉는다.
피부가 베일 듯 살벌한 분위기.
독이 든 과실은 그렇게 차츰 무르익어 갔다.
그리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무르익은 과실을 수확할 때가 올 것이다.
※ ※ ※
━
Lv. 38
[근력 - 20] [민첩 - 42]
[체력 - 20] [마나 - 20]
스탯 포인트 - 0
선업 - 70050
악업 - @#%$#^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C), 업상점, 은신(A), 광폭화(B), 힘의 권위(D), 자폭(A), 신속한 발(D), 마나조율(S), 천매보(?)
━
이전석이 상태창을 눈앞에 펼쳤다.
이전에 비해 꽤 바뀐 것들이 많았다.
어느새 7만을 넘긴 선업.
그중 3만은 다름 아닌 윤진을 죽인 결과였다.
놈이 그만한 악인이라는 것일까.
그만큼 악업도 어딘가 바뀌어 있었다.
줄었는지 늘었는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깨진 글자가 희미하게 바뀌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건 다름 아닌 특성이었다.
12개나 되는 특성.
천살성과 영원의 낙인을 제외하면 총 10개.
전부 회귀하고 나서 얻은 것들이었다.
개중에서도, 이전석은 이번에 얻은 두 개의 특성을 확인했다.
우선 마나조율.
━
마나조율
등급 : S
효과 : 마나를 보다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다.
━
심플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효과는 정반대였다.
이전석은 시험 삼아 마나를 형상화 시켰다.
물방울처럼 손끝에서 맺혀 떨어지는 마나.
곧 땅바닥에 부딪혀 바스라진다.
그 자리를 부서진 마나조각이 입자처럼 남아 맴돌았다.
"······미친."
그걸 본 이전석이 작게 감탄했다.
마나의 형상화.
결코 쉬운 기술이 아니다.
그걸 사용하기 위해선 체내에 흐르는 마나를 전부 파악해야 하고 있어야만 했다.
마치 혈류를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이치.
그건 각성자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고, 더욱이 형상화에 성공하고 나서도 형태가 일그러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조율해줄 필요가 있었다.
마치 장인이 도자기를 빚듯이 말이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그 형태는 금방 일그러지고 파탄 나고 만다.
하지만 방금 마나의 물방울은 어땠는가.
이전석은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이다.
빚는다?
아니다.
그저 빚으려는 의지만 품었다.
그런데도 마나는 제 스스로 길을 찾아 형태를 만들어냈다.
비단 그뿐만이랴.
마나의 물방울은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고 나서도,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사라지지 않고 제 자리를 맴돌았다.
이는 마나의 지속성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통은 부서지자마자 사라지는데···.'
그러나 이전석의 마나는 지금도 발치를 밝게 물들이고 있었으니.
마치 반딧불이를 보는 것만 같다.
이전석은 몇 차례나 더 마나를 형상화했다.
윤진이 사용하던 마나의 건틀렛도 만들어 보고, 아예 마나 보호막- 아니, 호신강기까지 사용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상태창을 확인하자.
"···4?"
줄어든 마나는 고작해야 그뿐.
이번에는 발화에 은신까지 사용했다.
여러 특성의 동시사용.
본래라면 마나소모가 극심해야 하거늘.
한참이 지나고서야 겨우 1의 마나가 소모됐다.
"미쳤군."
재차 감탄을 내뱉은 이전석.
미쳤다 뿐이랴.
이 정도면 당장 A급 던전에 들어가도 클리어가 가능할 정도였다.
애당초 그에게 부족했던 건 마나의 총량뿐이었으니까.
그게 해결된 것도 모자라, 기존에 존재하던 컨트롤까지 극단적으로 상승했다.
과연 S급 특성이라고 할 만한 효과다.
물론 윤진이 고통에 유독 민감해 하던 걸 생각하면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훨씬 뛰어난 편이야.'
마나조율.
전생에는 김백동이 윤진을 죽여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마나조율을 얻어 보니, 그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마나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전석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던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된 셈.
'다음은······.'
이전석은 마나조율을 뒤로한 채 또 다른 창을 눈앞에 띠웠다.
━
천매보
숙련도 - 5%
등급 : ?
효과 : 매화를 밟듯이 유려하게 움직이는 보법. 완숙에 이르면 천하의 고수조차 쫒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해당 특성은 미완성 상태입니다.
*숙련도를 높여 특성을 완성하십시오.
*당신이 만들어낸 결과에 따라 천매보의 등급이 정해집니다.
━
천매보.
생각했던 그대로의 효과다.
연선화가 움직이는 걸 봤을 때, 정말 매화를 밟는 것처럼 은밀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면서도 쉬이 쫒아갈 수 없는 속도가 있었다.
아직은 사용할 때마다 시간이 걸리고, 굉음과 돌풍마저 일으키지만···.
이전석은 생각했다.
만일 연선화처럼 천매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은신과 사용했을 때.
발화를 덧대었을 때.
천매보는 과연 어떤 형태를 띄게 될까.
물론 그때는 매화라고 부를 수조차 없겠지만.
'기대되는군.'
이전석은 흥미와 기대를 뒤로한 채 마지막으로 업상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음?'
토요토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이라는 듯 시스템이 하나 나타난다.
[한 달 정도 출장으로 자리를 비웁니다 ^o^]
'···뭐야, 이건?'
이전석이 적잖이 당혹스런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무슨 쪽지 남겨두는 것도 아니고···.
'이모티콘은 또 왜 저래?'
보고 있노라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보다 출장이라니.
대체 무슨 출장일까 싶었지만.
'상점은 제대로 나오는군.'
물건을 살 수 있으면 딱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전석은 바로 상점창을 확인했다.
━
성역강림(SSS) - 500만 업
낙뢰(A) - 0 업
드래곤 피어(S) - 0 업
망령된 검집(B) - 0 업
━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격이 0으로 책정돼 있다.
아마 업상점 무료 VIP 이용권 때문이겠지.
아냐의 운명을 비틀며 받은 보상.
━
업상점 무료 VIP 이용권
등급 : SS
효과 : 업상점에 존재하는 SS급 아이템 중 한 가지를 무료로 구매한다.
━
황금색의 티켓.
이걸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이전석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솔직히 SS급이라면 뭘 사도 제 값은 할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섣불리 결정할 순 없었다.
이게 어디 쉽게 오는 기회던가.
SS는 천살성으로도 쉬이 얻을 수 있는 등급이 아니었다.
업상점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겠지.
몇십, 몇백은 가뿐히 넘어가는 가격.
티켓이 아니었다면 이전석은 업상점에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뭐든지 심하면 과유불급이라 하였다.
아직 천매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황.
마나조율에도 적응기간이 필요하다.
그런 마당에 SS급 특성이나 아이템이 생겨버리면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하물며 지금 당장 그런 것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이전석은 일단 티켓의 사용을 보류하려 했지만······.
문득.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심하면 과유불급.
맞는 말이다.
다만 뇌리에 떠오르는 특성이 하나 있었다.
전생.
어떤 한 권좌가 가지고 있던 특성.
'아마··· 있을 것 같은데.'
이전석이 상점창의 스크롤을 내렸다.
그렇게 특성을 살펴보길 한참
'······있군.'
이전석은 찾던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대기만성(SS) - 0 업]
━
대기만성
등급 : SS
효과 : 100일 뒤, 랜덤한 특성 한 가지를 획득한다. 획득하는 특성은 동급의 다른 특성에 비해 보다 뛰어난 효과를 가지게 된다. 또한 아주 낮은 확률로 SSS급의 특성을 획득한다.
━
SS급의 특성.
'만뢰(萬雷)의 권좌'가 가지고 있던 특성이다.
전생에서 그는 대기만성을 통해 어떤 한 특성을 획득했고, 그것이 SSS급으로 오르면서 만뢰가 되었다고 말했다.
'처음에 놈을 죽이고 특성을 얻었을 땐 SS급이어서 당황했지.'
하지만 이전석은 추후 SS- 아니, 대기만성이란 특성의 진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100일이라는 숙성기간.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대기만성을 통해 획득하는 특성은 다른 특성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전생에는 SS급을 얻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번 생에는 SSS급이 생겨날지도.
'충분히 걸어볼만한 도박이야.'
SSS급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설령 SS급이 나온다고 해도 대기만성으로 획득하는 특성은 평범한 특성보다 많은 부분에서 우월했으니 나쁠 것도 없었다.
그만큼 100일이라는 디메리트가 존재했으나.
'지금 나한텐 오히려 이게 좋아.'
과유불급.
뭐든 심하면 넘치기 마련.
아직 가진 것들도 채 터득하지 못한 이전석에겐, 오히려 대기만성 만큼 적합한 특성이 달리 없었다.
[대기만성을 구입하셨습니다.]
[대기만성이 태동합니다.]
[100일 후 랜덤한 특성이 개화합니다.]
이전석은 바로 티켓을 사용해 대기만성을 구입했다.
※ ※ ※
그 후.
이전석은 뒤늦게 응급실로 돌아갔다.
때마침 한유리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이전석을 보자마자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픈 곳은 없지?"
"관절이 조금 쑤시는 것만 빼면 괜찮아요."
"그 정도면 양반이네."
팍-!
한유리가 이전석의 등을 후려쳤다.
아프지 않았지만, 아팠다.
마음이 쓰라리다고 해야 될까.
'앞으론 걱정 끼치지 말자.'
이전석은 한유리에게 혼이 나며, 몇 번째인지 모를 결심을 다졌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한유리는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을 나왔다.
이지혜는 한유리가 좀 더 병원에 있길 원했지만, 한유리는 해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라며 애써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계는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밤.
한유리를 대신해 온 가족이 저녁을 차렸다.
하지만 영 마땅히 않은 실력 덕분에 신랄하게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중 가장 크게 혼난 건 역시 이한석이었다
그는 절망적일 정도로 요리에 재능이 없었다.
"이거 만두 여보가 찐 거예요?"
"음, 그런데."
멋쩍은 듯한 이한석의 대답.
한유리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여기 봐요, 여기. 만두가 안 익었잖아요. 양은 많고, 제대로 익지도 않았고. 게다가··· 소금? 설마 만두 찌는데 소금 넣었어요?"
"크흠······."
애써 시선을 피하는 이전석.
한유리는 속이 터진다는 듯 소리쳤다.
"이 양반이 진짜! 누가 만두 찌는데 소금을 넣어요!"
"계란 삶을 때는 넣지 않나······?"
"내가 못 살아."
한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두 하나도 제대로 못 쪄서야.
"내가 다시 해줄 테니까 앉아 있어요."
"아니야, 엄마. 아프니까 쉬어야지!"
이지혜가 다급히 그녀를 말렸다.
그러나.
"지혜야."
"응?"
"너는 이걸 보고도 쉬고 싶니?"
"어······."
한유리가 새까만 국을 가리켰다.
그러자 이지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다름 아닌 김치찌개 때문이었다.
···그렇다.
김치찌개다.
하지만 그것은 도무지 김치찌개라곤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탄내를 뽐내고 있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걸까.
"어휴."
한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현기증이 왔는지 살짝 비틀거렸지만 이전석이 그녀의 어깨를 부축해줬다.
"아직 후유증이 좀 있으신 거 아녜요?"
이전석의 걱정에 한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라 하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픈 곳이 있다면 바로 말해 달라고 했다.
이후.
"아들, 이것 좀 잘라줘."
"네."
뛰어난 칼질 솜씨 덕분일까.
한유리는 이전석에게 재료손질을 도맡겼다.
이전석은 열심히 도마 위 음식을 잘랐다.
그렇게 한참 대파를 잘게 썰고 있을 때.
"전석아."
문득, 한유리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다 필요 없어."
걱정과 불안이 뒤섞인 말.
"너랑 지혜만 건강하게 자라주면 돼."
탁-.
한유리는 찌개를 젓던 손을 멈추고 재차 물어왔다.
"무슨 뜻인지 알지?"
이전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잘게 자른 파를 팔팔 끓는 찌개에 넣었다.
그 뒤에서야 나지막이 한유리의 말에 대답했다.
"절대 걱정 안 끼칠게요."
"걱정은 이미 충분히 끼쳤고."
불을 줄이고 뚜껑을 닫은 한유리.
그녀가 드물게 이전석을 노려봤다.
"다음부턴 다치지마."
나지막하지만, 한편으론 묵직하게 다가오는 한 마디였다.
"또 오늘처럼 다치면 그땐 정말 헌터 그만두게 할 거니까."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한유리는 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이한석과 이지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모두가 이전석이 헌터를 하는 것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저녁식사가 끝난 뒤.
"······."
이전석은 방으로 들아가 어두컴컴한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먹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달이 비치고 있었다.
밤하늘을 어스름히 밝히는 달빛.
그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이전석은 다시 명상에 잠겼다.
늘 머릿속으로 되뇌이는 생각.
전생과는 다르다.
가족 모두가 살아 있다.
두 번 다시 그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다짐.
그래.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웅-.
한참 그런 생각을 하며 명상에 잠겨있을 때.
문득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이전석은 잠시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이 어느새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
모두가 잠들었을 터인 늦은 시각.
━다치지만 마.
이지혜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이전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직접 말하지 않고 이 늦은 시각에 문자를 보낸 게 왠지 모르게 귀엽게만 느껴졌기에.
말은 이렇게 해도, 그녀 나름대로 많이 고민하다 보냈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데.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그새 문자가 지워졌다.
그리고 다시 도착한 한 마디.
━한 번만 더 엄마 쓰러지면 그땐 진짜 뒤질 줄 알아.
알람으로 삭제된 메시지의 내용을 봤다고 하면 화내려나?
이전석은 'ㅇㅋ'라고 단 한 마디만 보냈다.
사실 한 마디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단답.
이후 더 이상 연락은 없었다.
하긴 새벽 2시니까.
슬슬 잘 시간이긴 했다.
잠들지 못하는 이전석만이 홀로 두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해가 뜨고 아침이 되었다.
※ ※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세안을 막 끝냈을 무렵이었다.
우웅-.
방에 들어오자, 휴대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문자가 아닌 전화.
발신인은 다름 아닌 김백동이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일까.
이전석은 곧장 전화를 받아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헌터님.
"팀장님이야말로 좋은 아침이십니다. 그런데······."
이전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그러자 돌아온 대답.
━양인하 장인과 미팅약속을 잡았습니다.
그 말에는 이전석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철야공 양인하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뛰어난 대장장이.
비단 대한민국 뿐이랴.
그의 유명세는 전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것이었고, 당연히 양인하와 대하 한 마디 나누기 위해선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벌서 약속을 잡아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일을 잘한다고 해야 될까.
"미팅일은 언제죠?"
━시간이 오늘밖에 없어서···. 아직 피로가 다 풀리진 않으셨겠지만, 오늘 오후 3시에 가능하시겠습니까?
오늘 오후 3시.
딱히 상관은 없었다.
오히려 빠르면 빠를수록 이전석에겐 좋은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잠시 후 뵙도록 하죠.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이윽고 전화가 끊겼다.
이전석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상 위 적단도를 바라봤다.
뭉툭한 날붙이.
A급밖에 되지 않는 무기지만.
'슬슬 고치긴 해야지.'
본래 적단도의 등급은 SSS.
그에 미치진 못할지라도, 전생에서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5화
철야공 (2)
오후 3시.
강남의 어느 거리.
인파가 어지러이 뒤얽히는 도로.
그 사이를 걸으며, 김백동이 말했다.
"조만간 헌터님 명의로 집 한 채가 주어질 겁니다."
집.
어제 병원에서 요구했던 것이다.
"다만 복잡한 절차가 남아 있는지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더군요."
이해는 한다.
협회가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집.
그런 걸 어디 쉬이 구할 수 있으랴.
협회의 머리가 나서도 시간이 걸릴 터.
"물론 경호원 같은 경우는 수일 내로 배치될 예정입니다. 믿을 수 있는 인물이고, 은신능력도 뛰어나 가족 분들께 피해가 가지도 않을 겁니다."
"생각보다 배려를 많이 해주네요?"
이전석이 나름 놀란 듯한 어조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게, 윤진이라는 스파이가 적출된 상황이다.
또 누가 스파이로 있을 지 모르는 상황.
대부분의 헌터와 직원이 의심받을 거다.
그런 마당에 믿을 수 있는 인물?
많지 않겠지.
어쩌면 손으로 꼽을지도 모른다.
그 소수의 인원을 고작 이전석과 그의 가족을 경호하는데 투입한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헌터님께서 제공해주신 정보 덕분입니다. 화산이 엮였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꽤 중대한 사안인지라···."
김백동은 "무엇보다"라며 말을 이었다.
"상부에선 헌터님을 본격적으로 영웅으로 만들려는 것 같더군요."
"···영웅 말입니까?"
"어느 시대든 얼굴마담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얼굴마담이라···. 저는 용병입니다만."
언젠가 떠날 사람.
그런 사람을 영웅으로 밀어줘봤자 죽 써서 개주는 꼴이 되고 말 거다.
"그래서 상부에서 어떻게든 헌터님을 영입하라고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거 그대로 말해도 되는 겁니까?"
실로 솔직하기 그지없는 대답에 이전석이 내심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안 될 게 있습니까?"
김백동이 도리어 되물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긴 했다.
기밀 같은 걸 유출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김백동의 말은 그만큼 협회가 이전석에게 진심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김백동이 이전석에게 줄줄이 제안을 늘어놨다.
"협회에서 헌터님께 드릴 수 있는 조건은 최소 S급에 해당하는 수준의 계약금과 아이템입니다. 원하시는 무기와 장신구, 포션과 같은 다양한 지원이 가능하며, 범죄- 혹은 그에 준하는 잘못을 범하셨을 때도 협회의 이름을 사용해 덮어드릴 수도 있죠. 물론 헌터님께서 그런 일을 하시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김백동이 이전석을 돌아봤다.
"그 외에도 협회에선 세계연맹의 이름 하에 헌터님께 다양한 혜택을 드릴 수 있습니다."
세계연맹.
국제 길드 연합.
흔히 UGN이라고 부른다.
140여국의 헌터협회가 가입해 있으며, 연선화를 포함한 총 다섯의 권좌가 존재하는 단체.
"어떠십니까?"
김백동은 그 이름을 앞세워 제안했다.
그러나.
"죄송합니다."
이전석은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야 특별할 건 없었다.
협회에 들어가면 많은 게 제한되기 때문이다.
세계연맹의 이름.
협회라는 뒷배.
S급 수준의 지원.
누구라도 혹 할 만 한 조건이었으나, 발이 묶이는 걸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상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독자적인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는다?
글쎄.
과연 그들이 정말 이전석에게 자유를 보장해줄까?
처음에는 그리 보이게 행동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이전석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발악할 것이다.
전생의 김백동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외에도 집단에 소속되면 많은 부분을 감내해야만 했으니···.
"그거 아쉽군요."
하하-.
옅은 웃음을 흘리는 김백동.
딱히 포기한 듯한 눈치는 아니다.
그는 "그래도"라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신다면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그 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사람의 인적이 뜸한 길목.
강남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장소에, 반세기는 더 지난 듯 오래된 건물이 있었다.
대장간.
별 다른 이름도 없이, 그저 그런 간판만이 세워진 건물.
"이곳입니다."
김백동은 그곳이 양인하 장인의 작업장이라 설명했다.
물론 이전석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양인하.
그가 바로 적단도를 벼려낸 장본인이었으니까.
이전석이 그를 찾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적단도의 수리를 맡기기 위해.
"미리 말은 해뒀으니 안에 들어가시면 바로 양인하 장인과 만나 뵐 수 있으실 겁니다."
김백동이 거기까지 말한 뒤 한발 물러섰다.
그대로 돌아가려니 싶었지만.
"그리고······."
돌연 김백동이 사방에 마나를 흩뿌렸다.
그의 손으로부터 시작된 마나.
그것이 주변을 돔처럼 둘러싼다.
흔히 기막이라 불리는 기술이다.
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눌 때 사용하곤 했는데···.
왜 갑자기 이걸 사용한 걸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개벽연합의 소탕 작전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김백동이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말한 것이다.
"작전 실행일은 보름 뒤 오전 5시. 그 내용 또한 소탕이 아닌 암살을 중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암살?"
"예. 저희 부서를 포함한 몇몇의 소수인원만이 연합 본거지로 침투해 주요인물들을 처리할 계획입니다. 연합처럼 여러 빌런이 뒤섞인 단체라면 조율자가 되는 머리만 잘라내도 쉽게 움직일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과연.
아무래도 협회는 화산의 움직임에 대비해, 개벽연합부터 빠르게 처리하려는 것 같았다.
화산의 정보를 김백동에게 건네줬을 때부터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화산이 돌발행동을 해올지 모르는 상황.
연합의 소탕작전은 취소할 수 없고, 그렇다고 화산을 방치할 수만도 없다.
그렇기에 빠르게 연합을 처리하려는 것.
협회의 노림수는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그럼 자세한 브리핑은 나중에 협회에서 하기로 하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김백동은 기막을 해제했다.
그러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평한 얼굴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어느새 멀어져 사라진 그의 등.
홀로 남은 이전석은 생각에 잠겼다.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빠르다.
보름 뒤 오전 5시.
'그 전까지 승급시험을 봐둬야겠군.'
아직 그는 F급이었으니까.
감독관의 신분이 있다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다.
2달 뒤면 사라질 권력이자 명예.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작전을 실행할 때도 F라는 낮은 등급은 걸림돌이 되고야 말 거다.
아무리 협회에서 밀어준다지만, F급에서부터 생겨나는 인식과 차별점이 존재했으니.
그러니 조만간 승급시험을 봐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까지 새운 실적을 생각하면···.
'C··· 잘하면 B까지도 올라갈 수 있겠어.'
그 외에도 준비할 것들은 많았다.
가령 특성 진화의 룬.
곧 그 아이템이 어느 던전에 등장한다.
절대 놓쳐선 안 되는 피스.
하지만 오늘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계십니까?"
이전석은 뒤늦게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 ※ ※
깡-!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직후.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철을 망치로 내려치는 괴음.
뜨거운 열이 피부로 전해진다.
대장간 안에는 무기를 제조 및 단조하기 위한 각종 도구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 곳곳에 장식된 검과 창 및 채찍 등 다양한 무구들.
그 사이.
까앙-!
열심히 철덩이를 두드리는 노인이 있었다.
드워프처럼 땅딸막한 신장.
길쭉한 수염이 유독 돋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진짜 드워프인 건 아니다.
흔히 왜소증이라 불리는 병이다.
키가 크지 않는 현상.
덕분일까.
노인은 130cm쯤 될 것처럼 작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신장과 어울리지 않는 큼지막한 망치를 한 손에 들고 연신 철덩이를 두들겨댔다.
깡, 깡, 깡-.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솟아오른 핏줄과 근육이 유난히 돋보인다.
이전석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누구냐."
노인이 뒤늦게 이전석을 알아챘다.
눈에 끼고 있던 고글을 벗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이전석을 노려본다.
"김백동 팀장님께 소개 받은 이전석이라고 합니다."
"아··· 네가 그 번지르르한 놈이냐?"
"번지르르?"
정말 뜬금없는 별명에 이전석이 의문을 표했다.
"생긴 것도 번지르르 하고, 하는 짓거리도 번지르르 하고."
노인- 양인하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오래된 TV 한 대가 있었는데.
━이모씨는 당시 임시 감독관으로서 협회와 용병계약을 맺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때마침 이전석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윤진과 모종의 대화를 나누던 이모씨는 윤진에 의한 기습으로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뒤이어 비추어진 CCTV 영상.
윤진과 싸우던 때의 모습이다.
그곳에서 이전석은 윤진을 들쳐 업고 멀리 달아났고, 곧 거대한 불꽃에 휩싸였다.
과연.
'그래서 번지르르인가.'
하여간 이 양반은 예나 지금이나 표현이 특이했다.
"됐고. 원하는 게 뭐냐."
양인하가 재차 모루를 두들기며 물었다.
고글 사이로 땀이 주륵 흘러내린다.
이전석이 품에서 적단도를 꺼내며 말했다.
"망가진 무기의 수리를 의뢰하고 싶습니다."
"그런 거라면 나 말고도 할 수 있는 놈들은 많잖냐. 그놈들한테 부탁해."
"양인하 장인이 아니면 안 됩니다."
깡-!
유난히 큰 소리로 울리는 망치소리.
"가끔 그렇게 말하는 놈들이 있지. 자기 무기는 최고의 대장장이가 아니고선 감히 건들일 수 있는 명물이라고. 너도······."
순간.
양인하가 망치질을 멈췄다.
아주 잠깐, 이전석을 흘겨본 찰나.
그의 시선이 적단도에 고정됐다.
"이봐."
이내 양인하가 손에서 망치를 놓았다.
망치는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허공에 고정됐다.
마치 망치라는 물건만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
"그거 더 자세히 보여 봐라."
양인하는 그런 건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이전석에게 다가왔다.
고글을 벗어 던지곤 호박색 눈을 번뜩인다.
"여기 있습니다."
이전석은 순순히 적단도를 내어줬다.
마치 돌덩이와 같은 적단도.
양인하는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이내 손가락으로 뭉툭한 날을 몇 번 두들기더니···.
"반에고소드로군."
단숨에 적단도의 본질을 파악했다.
하긴 적단도는 그가 직접 만든 무기였으니.
못 알아보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당연한 상황이라는 의미다.
"너, 무기가 망가졌다고 했냐?"
뒤늦게 양인하가 이전석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적단도의 날을 툭, 치며 말했다.
"이건 망가진 게 아니야."
"······?"
이전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망가지지 않았다니.
어딜 어떻게 봐도 날이 상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양인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이전석이 묻자.
"준비하고 있는 거다."
양인하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다시 알을 깨고 세상에 날아오를 준비를."
솔직히 말하면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데미안.
그 명언이 왜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오는 걸까.
무엇보다.
'망가지지 않았다라···.'
이전석은 그 말이 꽤 신경 쓰였다.
그가 보기에 적단도는 망가져 있었으니까.
뭉툭한 날.
갈라진 등.
녹슨 코등이.
하물며 A로 낮아진 등급까지.
피에 의한 강화가 없었다면, 적단도는 이미 무기로서 생명을 다하고 말았을 거다.
그래서 더 의아하단 것이다.
양인하가 도대체 적단도의 무엇을 보고 망가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인지.
미래라곤 해도 적단도를 벼려낸 장본인이라 그런 걸까?
"확실히··· 이건 웬만하면 손도 못 대겠어."
한참 적단도를 살펴보던 양인하.
그가 감탄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전석이 재차, 그에게 물었다.
"그럼 맡겨도 되겠습니까?"
"되겠냐고? 하! 이 정도의 명도라면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을 정도야."
양인하가 크게 웃으며 답했다.
이전석은 그가 흥미를 느꼈을 때만 웃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
이윽고 양인하가 이전석을 올려다봤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 묻고 싶은데."
"얼마든지."
"이걸 대체 어디서 얻은 거냐? 아니, 누가 만든 거지?"
꽤 진지해 보이는 양인하의 얼굴.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미래의 당신?
'음.'
잠시 고민하던 이전석은 곧 답을 내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뛰어난 장인이셨습니다."
"그렇군. 이런 명도를 빚어낼 정도의 장인이라··· 나중에 한 번 만나보고 싶구만."
글쎄.
만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새끈빠끈한 놈으로 재탄생시켜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양인하가 그리 말하며 모루로 되돌아갔다.
호박색 눈동자에 기대감이 시린다.
모루 위에는 이미 철덩이가 있었지만.
쾅-!
양인하는 그것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대신이라는 듯 적단도를 올려놓는다.
이어 허공에 고정돼 있던 망치를 다시 손에 쥐었다.
직후.
망치로 푸른 빛이 스며들었다.
반딧불이처럼 흩날리는 마나의 입자.
이윽고 그것이 새빨갛게 물들더니-.
까앙!
적단도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신묘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양인하가 가진 특성의 효과였다.
무기강화.
무기를 재련하고 단조 하는데 있어 효율을 2배로 끌어 올려주는 버프형 특성.
그것이 모루를 매개로 적단도에 스며들었다.
까앙-!
또 다시 울려 퍼지는 괴음.
청명한 소리가 귓가를 메운다.
그때.
쾅-!
돌연 가게 문이 열렸다.
"양인하님!"
냅다 들이닥친 사내.
"이번엔 제 차례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약속을 취소하신 겁니까!"
그가 무언가 따지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장인님이시라도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시끄러워."
이전석이 그를 가로막았다.
"넌 또 뭐······."
사내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듯 이전석을 노려봤지만.
"미안하지만 중요한 순간이라서 말야. 조용히 좀 해주겠어?"
그 한 마디에 무심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전석은 여전히 모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위의 적단도.
망치과 맞닿아 튀는 불꽃.
시선이 닿은 것도 아니고 딱히 마나를 풀어 압박한 것도 아니거늘.
"······?!"
그런데도 사내는 순간 이전석으로부터 무기질적인 어둠을 느꼈다.
패기, 기백, 기세, 기운.
이전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압박감.
그렇다.
이전석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생애 처음 겪어보는 감각.
'에고소드라 해도 적단도에게 감정이나 의지 같은 건 없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은 적단도가 점차 변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기쁨.
환희.
즐거움.
그러한 감정들이 거센 물살처럼 흘러들어온다.
반쪽자리라곤 하나 일단은 에고소드였으니···.
영혼으로 이어진 주인에게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까앙-.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은 망치질이 계속될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즐거움.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인가.
이유도, 의미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양인하의 망치질이 멈춘다면.
적단도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파앗-!
돌연.
적단도로부터 섬광과도 같은 빛이 터져 나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6화
철야공 (3)
적단도가 빛을 터트렸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새하얀 빛.
"···으악!"
갑작스런 섬광에 놀라는 사내.
카앙-!
그 사이에도 망치질은 이어졌다.
양인하는 재련을 멈출 기미가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적단도의 변화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이전석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부셨지만 상관없었다.
동공에 집중된 푸른색의 마나.
그것이 섬광으로부터 눈을 지켜줬으니까.
캉-!
망치가 적단도를 내리친다.
새하얀 빛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직후. 신비한 광경이 펼쳐졌다.
불꽃이 허공에 녹아 사라지는 것이 아닌, 그대로 적단도에 스며들어 열을 끓어 올린 것이다.
양인하는 한껏 달아오른 적단도에 다시 망치를 내리쳤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길 몇 번.
이전석은 적단도가 변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다음엔 제대로 설명해주셔야 할 겁니다!"
사내는 기다리다 지쳤는지 그리 말하며 대장간을 나갔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전석에게 중요한 건 양인하의 손에서 다시 벼려지고 있는 적단도였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노을녘이 지며 해가 넘어갔다.
어느새 대장간 밖은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고-.
"······."
"······."
양인하, 이전석.
두 사람이 모두 침묵했다.
망치질이 멈추고, 대장간을 물들였던 섬광도 잦아들었다.
잠시 후.
"후우···."
양인하가 뒤늦게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그는 살며시, 적단도를 손에 들었다.
'날이······.'
그 모습을 본 이전석은 작게 놀랐다.
다름 아닌 적단도의 상태 때문이었다.
콧등이나 손잡이는 아직 녹이 슨 상태지만, 날만은 마치 옛것의 모습을 되찾은 듯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공기마저 베어버릴 듯한 날카로움.
헌데.
"우직한 놈이로군."
돌연, 양인하가 의미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고집이 어지간히도 쌔다는 소리다."
그러곤 적단도를 이전석에게 내민다.
"이 녀석, 아직 완전히 밖으로 나오길 거부하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죠?"
이전석은 적단도를 돌려받으며 물었다.
그러나.
"낸들 알겠냐."
한숨을 푹 내쉬는 양인하.
그가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냈다.
"처음에는 반에고소드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더군. 이놈에겐 에고소드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의지가 존재해."
의지.
그 단어에 이전석이 적단도를 내려 봤다.
지금까지.
전생을 포함해.
적단도는 단 한 번도 의지를 표출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분명 적단도에는 에고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해진 시스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과도 같은 의지.
AI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은커녕 감정도 느낄 수 없는 것.
헌데 지금 적단도는 어떠한가.
기쁨, 혹은 즐거움.
그런 종류의 감정이 전해져 온다.
에고소드는 영혼으로 이어진 주인과 동화되어 이처럼 감정을 전하곤 했는데······.
'그렇다면 비교적 최근 에고소드로 거듭났다는 건가?'
그렇게밖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양인하의 재련으로, 애매하던 에고가 온전한 에고로 빚어진 걸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 에고가 말하고 있다는 거다. '지금'은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지금.
여전히 그 뜻을 알기가 어려웠다.
이전석은 적단도를 바라봤다.
이 녀석은 대체 뭘 원하는 걸까.
우웅-.
날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감정을 전해왔다.
기쁨.
환희.
즐거움.
재련되기 전과 똑같은 감정.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감정과 감정, 그 사이.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최대한 놈과 타협해서 날만은 되살려냈으니 무기로서 제 역할은 할 수 있을 거다."
양인하가 낡고 뜯어진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무기로서의 제 역할.
아무래도 토요토처럼 그도 적단도의 본래 효과에 대해선 눈치 채지 못한 듯하다.
물론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적단도의 제조를 의뢰했을 때.
그것이 이전석이 양인하에게 요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적단도의 가치를 알아볼 수 없을 것.
그것이 설령 적단도를 직접 벼려낸 양인하라고 해도 말이다.
아무래도 그 효과는 미래에서 돌아온 지금까지도 잘 유지되고 있는 모양.
이전석은 뒤늦게 적단도의 상태를 확인했다.
━
적단도
등급 : A+
공격력 : 800
효과 : 흡수한 피만큼 강화되는 단도. 사용자의 피를 흡수할 시 본모습을 드러낸다. 현재는 시간의 풍화로 능력을 대다수 잃어버린 상태지만, 뛰어난 명장의 솜씨로 조금이나마 능력을 되찾았다.
흡수한 피를 매개로 '혈격(血擊)'을 발동한다.
━
A에서 A+로 오른 등급.
공격력도 800으로 상승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격.
본래 적단도가 가지고 있던 능력 중 하나.
그것이 생겨난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내 대장간에 찾아와라."
한참 적단도를 살펴보던 차.
양인하가 맥주캔을 따며 말했다.
"주기적으로 녀석의 상태를 봐주마."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것도 없지."
적단도를 코트에 납도한 이전석.
양인하.
그가 봐준다는 거야 좋기는 한데.
"돈은 안 받으십니까?"
"낼 수는 있고?"
"아뇨."
"뻔뻔한 놈."
양인하가 코웃음을 치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명장이다.
단순 실력뿐만이 아니다.
이름값만 쳐도 수천의 돈은 우습게 깨질 것이다.
그래서 물어본 건데.
"어차피 돈은 백동이가 다 냈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
다행이 돈은 김백동이 미리 지불한 모양이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신뢰로 먹고 사는 양인하가 미리 잡아놨던 약속을 파토 낼 리 없겠지.
그만큼 많은 돈을 준 것이리라.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뒤 대장간을 나왔다.
우웅-.
코트 안에서 적단도가 진동한다.
마치 어린와이와 같은 감정.
한없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느껴졌다.
대체 언제부터 에고가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이전석은 생각했다.
완전한 에고소드가 되면 말도 할 수 있을까?
미국의 어떤 성검은 언어를 구사한다고 하니까.
물론 모든 에고소드가 말을 하며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건 아니기에, 반드시 그러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검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했고.
그보다.
'이참에 승급시험에서 적단도를 시험해보는 것도 좋겠어.'
이전석은 강화된 적단도가 얼마나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 되었다.
※ ※ ※
이전석이 떠난 대장간.
텅 빈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 양인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임마."
━왜 그러십니까?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을 데려온 거냐?
━괴물이라뇨. 일단은 저희 팀원입니다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양인하는 우습다는 듯 코웃음 쳤다.
"괴물을 괴물이라 하지, 그럼 뭐라고 하디?"
━······무언가 보셨습니까?
"봤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후우.
양인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전석을 떠올리고 있었다.
━확실히, 그분이 외형적으로 조금 쇼크이긴 하지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 김백동이 옅게 웃었다.
그러나.
"뭔 개소리냐."
━음?
"눈이 조금 정신 나간 것 같긴 하지만, 내가 괴물이라고 표현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야."
━허면······.
"이전석이라고 했나?"
양인하가 이전석의 모습을 되새겼다.
정확히는 그의 시선.
"그놈, 내 망치질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어."
섬광 속에서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던 모습.
물론 그것만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양인하의 망치질은 조금 특이한 편이니까.
망막에 마나를 둘러가면서까지 망치질을 구경하려는 건 비단 이전석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인하는 이전석의 시선에서 꺼림칙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신기해서 쳐다본 게 아니야. 마치 내 망치질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어."
━장인님의 기술을 말입니까?
"믿지 못하겠지? 나도 못 믿겠다."
하지만.
"그건 틀림없이 이해한 사람의 눈이야. 야금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고선 그런 눈은 못해. 게다가 내 기술을 제대로 보고 이해할 정도면···."
양인하는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전석 헌터님이 상당한 수준의 야장이라는 의미로군요.
"그래."
그래서 더 황당한 것이다.
그만한 기술과 지식을 가진 놈이다.
경험도 결코 적지는 않을 터.
"적어도 웬만한 떨거지들보단 야금술 실력이 월등히 높을 거다."
그런데도 이전석은 굳이 양인하를 찾아왔다.
자신의 기술로는 아직 적단도를 수리할 수 없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옳으리라.
━그건··· 저로서도 꽤 흥미로운 사실이군요.
김백동이 수화기 너머에서 흥미를 표햇다.
헌터로서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가진 것도 모자라 야금술 실력까지 높다니.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이전석의 가치는 끝도 모르고 치솟을 게 분명했다.
누구나 탐을 낼 게 분명하다.
"그놈, 내가 키워봐도 되냐?"
양인하 본인조차.
'그런 눈을 가지고서도 나한테 단도의 수리를 맡겼다는 건 지식은 충분하지만 경험과 기술이 부족하다는 의미지.'
양인하는 그 사실이 못내 탐이 났다.
그 부족한 경험과 기술만 받쳐준다면, 이전석은 틀림없이 자신 못지않은 장인이 될 게 분명했음으로.
━헌터로서 이전석 헌터님을 영입하는 게 아니라면 상관은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김백동이 말했다.
양인하가 그를 떠보듯이 대꾸했다.
"말하는 걸 보니 협회에서도 그놈을 노리고 있나 보구만?"
━하하.
김백동이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정답이라는 의미였다.
이내, 김백동은 "그보다"라며 말을 돌렸다.
━제가 의뢰 드린 물건은 어떻게 됐는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 뭐더라. 듀라?"
━듀랑달입니다.
"그래, 듀랑달. 그거라면 이미 작업은 다 끝냈으니 나중에 시간 날 때 찾으러 와라."
━감사합니다. 그럼 조만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양인하는 곧 전화를 끊고 작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더 꺼내 마셨다.
이전석을 어떻게 제자로 구슬릴까 고민하면서.
※ ※ ※
"와···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대요?"
변하늘.
한때 이전석의 인터뷰를 땄던 남자가 협회에 들어서며 말했다.
같은 언론사 동료이자 선배이던 이명수는 사탕을 아그작 깨물어 먹으며 답했다.
"요즘 화제이신 영웅이 승급시험을 본다는데 사람이 안 몰리는 게 이상하지."
"하긴 저희도 그거 때문에 왔으니까요."
"이거, 인터뷰 한 번 딸 수 있을지 모르겠네."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 제가 있으니까요."
변하늘이 자랑스레 가슴을 펴며 말했다.
이명수는 그런 변하늘의 모습에 내심 혀를 찼다.
'한 번 대박 터트리더니 요즘 아주 기고만장해졌어.'
물론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그가 한 일도 언론사에 이익이 되는 일이었으니 위에서도 활짝 웃으며 칭찬해줬고.
다만 저러다 한 번 고꾸라지면 한동안 우울증 걸린 것 마냥 지낸다는 게 변하늘의 성격이었던 지라 이명수로선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명수의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 벌써 시작하려나 보네요!"
변하늘이 1층 홀에 배치된 스크린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지하 1층의 대련장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승급시험이 치러지는 장소.
━이전석 헌터님. 곧 승급시험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간단한 스트레칭과 함께 준비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디선가 안내음이 흘러나온다.
곧 이전석이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대련장에서 유리벽 하나를 사이로 그런 그를 지켜보던 이들이 있었으니.
"벌써 폭발 후유증은 이겨낸 건가?"
"그 정도 위력이면 최소 일주일은 요양할 줄 알았는데."
"회복계열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그럼 최소 듀얼··· 아니, 트리플 각성자인가?"
"미쳤군. 트리플은 세계에서도 열 명도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용병계약이 끝나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겠어."
"내가 듣기로 몇몇 해외길드에서도 이미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하더라고."
"뭐? 참나, 경쟁률이 미쳐 돌아가는구만."
"우리 길드에서 줄 수 있는 계약금이··· 아, 젠장! 이것밖에 안 돼?"
길드와 사무소의 스카우트들이 눈에 불을 켠 채 이전석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기자나 다른 일반인들과 다르게, 직접 대련장에서 승급 신청자의 대련을 지켜보는 게 가능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승급 신청자와 협회에서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깐깐하기 그지없는 협회가 관람을 허락했다는 건 이곳에 모인 이들이 하나같이 거물급 헌터이자 스카우트임을 의미했다.
━5분 뒤 승급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슬슬 시작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에 맞춰 누군가 대련장으로 들어왔다.
직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비단 스카우트들만이 아니다.
1층 홀에서 지켜보던 일반인이나 기자들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보통이라면 A급의 승급관이 들어와야 할 터인데···.
정적 들어온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왜 여기 계십니까?"
이전석 본인에게조차 말이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7화
승급시험 (1)
"······협회장님이 왜 여기 계십니까?"
이전석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다.
승급관으로서 대련장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협회장인 연선화였다.
그리고.
"제자를 보고 싶은 스승의 마음이라고 해두마."
그녀의 웃음기 섞인 한 마디에,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친."
누군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자라고? 누가?"
"이전석··· 헌터를 보고 한 말 아니야?"
"그 검선이?"
기자들이 스크린을 보며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 가운데.
'특종이다!!'
변하늘이 두 눈을 번쩍였다.
특종.
그렇다.
이건 틀림없이 특종이었다.
여태껏 그 누구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던 연선화가 최근 가장 유명한 헌터를 보고 제자라고 하다니.
탁-.
변하늘은 망설임 없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즉시 기사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빨리 올리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다른 기자들도 급하게 방금 들은 소식을 기사로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무수하게 인터넷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급보들.
반면.
대련장은 여전히 조용했다.
정적과 침묵만이 가득하다.
놀란 건 마찬가지지만···.
누구도 연선화의 말을 쉽사리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했다.
거대 길드장이나 그 자제.
수십 년에 한 번 나올 법한 천재.
어떤 대단한 인재도 눈에 차지 않는 것처럼 냉정하게 처내던 그녀가 아니던가.
쉽게 믿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제자··· 제자라고 했지?"
"들었어. 분명히 제자였어."
연선화 본인의 말이다.
어디 기사로 들려온 찌라시나 소식도 아니다.
본인이 저렇게 대놓고 말해버리면, 누구라도 결국엔 믿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당장 위에 연락해서 계약금 더 당겨올 수 있냐고 확인해!"
"하, 하지만 길드예산이···."
"예산이 문제냐, 등신아! 없으면 빚이라도 져야지!"
대련장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누구 할 것 없이 이전석을 제 쪽으로 영입하려 안달인 모습.
연선화의 제자라 한들 이전석은 아직 용병이다.
정식으로 협회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것은 그들을 더욱 불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곧 승급시험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수험자분을 위해 관람자분들께선 부디 정숙을 유지해주시길 바랍니다.
곧 들려온 안내음 덕분일까.
혼란은 금세 잦아들었다.
잠시 흥분하긴 했지만 그들은 이내 곧 시작될 대련에 집중했다.
연선화와 이전석의 대결.
그건 이전석이 그녀의 제자라는 사실 만큼이나 흥미로운 요소였으니.
꿀꺽-.
누군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대련장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가운데.
이전석이 연선화를 바라봤다.
※ ※ ※
뜬금없이 대련장에 나타난 연선화.
평소와 같이 한복을 입고 있다.
실로 아름다운 모습.
누가 보더라도 연심을 품을만한 외모는 마치 옛 신화 속 여신을 연상케 한다.
"바쁜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전석은 황당함이 뒤섞인 어조로 물었다.
"금방 끝내고 돌아왔단다."
"하루 만에 참 빨리도 끝내셨네요."
"제자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지."
후후-.
연선화의 능글맞은 웃음.
그 모습이 얄밉게 느껴지는 건 어째서일까.
━상부에서 헌터님의 승급시험을 공개적으로 진행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련을 시작하기 전.
김백동이 한 말이다.
덕분일까.
사람들이 모일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다.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만큼 협회에서 보상을 준다고 하니까.
알겠다며 승낙하자마자 통장에 꽂힌 돈은 타인의 시선 같은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환상적인 것이었다.
얼굴이야 이미 충분히 팔렸으니 감춘들 의미가 없기도 했고.
하지만.
'이건 예상 못했는데······.'
연선화가 직접 찾아오다니.
슬쩍 유리창 너머를 바라본다.
꽤나 흥분한 것 같은 헌터들의 모습.
아마 1층에는 기자들도 있을 테니···.
'난리 나겠군.'
난리가 안 나는 게 이상하다.
무려 연선화의 제자니까.
그 이름값이 얼마나 높은지는 이전석도 잘 알고 있었다.
설마 그걸 노리고 일부러 제자라 말한 걸까?
순간 그런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제와선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었다.
타인의 시선.
그런 것에 일희일비할 만큼 그는 어리숙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마침 잘 됐어.'
이전석이 연선화를 바라봤다.
극한의 집중력이 그의 시야를 사로잡는다.
다시 되찾은 적단도의 능력, 혈격.
그걸 시험해보기에 연선화만큼 좋은 상대도 달리 없을 터.
슥-.
이전석이 적단도를 빼들었다.
손을 그어 그것을 활성화 시킨다.
회색 날이 붉게 물들며, 그 속에 살의가 깃들었다.
이전과는 다르다.
끊임없이 살기를 흩뿌리는 날붙이.
이게 바로 적단도의 본 모습이었다.
마검을 연상케 하는 반에고소드.
그 모습을 본 연선화가 꽤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뒤이어 이전석의 의도를 깨닫는다.
"스승으로 무기를 시험해보려는 것이냐?"
"그럼 안 됩니까?"
"버릇없는 제자로고."
"이런 놈인 거 모르고 제자로 삼으신 건 아니잖습니까."
그 말에 연선화가 즐겁다는 양 웃었다.
그것도 잠시.
"허면···."
연선화 또한 이전석과 마찬가지로 검- 도를 빼들었다.
"나도 우리 제자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시험해보도록 하마."
"그래봤자 고작 며칠입니다만."
"천재에게 며칠은 수백 년과도 같은 법이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봤다.
그에 따라 관중들도 긴장을 삼켰다.
제자라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지만.
그 이상으로 연선화의 싸움을 직접 볼 수 있는 건 그리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무거운 침묵과 정적이 감돌았다.
그것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까.
문득.
이전석이 팔을 움직였다.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그가 먼저 선공을 취한 것이다.
쉭-!
적단도를 있는 힘껏 내던지는 이전석.
쓸데없이 정직하기만 한 공격이다.
연선화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적단도를 피했다.
그런데.
적단도가 허공에서 궤도를 꺾었다.
그대로 다시 연선화에게 날아든다.
카앙-.
이번에는 검으로 적단도를 쳐냈다.
'실?'
그 사이.
연선화가 푸른 실을 발견했다.
적단도의 손잡이.
그곳에 묶인 불투명한 실이 길게 이어져, 이전석의 손과 연결되어 있던 것이다.
그 실을 끌어당기며 적단도를 다시 손에 쥐는 이전석.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전석은 몇 차례나 실을 이용해 적단도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유려하고 화려한 공격의 연속.
그것들을 쳐내며.
"훌륭하구나."
연선화는 감탄 섞인 어조로 말했다.
마나의 실을 이용한 연격.
언뜻 보기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상화로 단도에 물리적인 간섭을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눈치 챌 수 없도록 마나를 조절하고 있어.'
불투명한 마나의 실.
현상화와 비현상화의 간격.
이전석은 그 사이를 절묘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조금이라도 컨트롤이 어나가면 실은 금세 폭주를 일으켜 사방으로 뻗어나가거나, 반대로 아예 사라져버린 채 단도를 바닥으로 내리꽂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전석이 보여주는 건 일종의 묘기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쉬이 흉내 낼 수 없는 서커스.
그리고 그걸 눈치 챈 건 비단 연선화만이 아니었다.
나름 급이 높은 헌터들도 이전석의 묘기를 알아채고 감탄했다.
"무슨 마나 응용력이······."
"정말 막 각성한 거 맞아?"
"······미쳤네, 진짜."
"마나와 관련된 특성을 가진 건가?"
과연 연선화의 제자라는 것일까.
헌터- 각 길드와 사무소의 스카우트들은 황당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이전석의 전투를 지켜봤다.
반면.
'확실히 괜찮군.'
이전석이 적단도를 돌려 잡으며 생각했다.
이전에는 꽤 많은 집중을 요했던 기술.
그게 지금은 손가락 움직이듯 펼쳐진다.
생각이 즉각 반응으로 이어졌다.
마치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듯한 감각.
게다가 마나소모도 극단적으로 적었다.
방금 그걸로 소모된 마나는 겨우 1.
효율과 컨트롤적인 부분이 이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물론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윤진이 왜 이런 특성을 가지고서도 이전석에게 패배했겠는가.
근본적으로 그가 방심한 탓도 있지만.
'···예민해.'
그렇다.
예민하다.
마나조율이라는 특성 자체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외부에서의 접촉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특성의 효과와 모순되는 단점.
언뜻 득보다 실이 더 많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
마나조율을 사용하면 할수록 예민함 또한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특성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근육의 변화와도 같다.
근육은 혹사하면 근섬유가 찢어지며 망가지지만, 반대로 회복되는 과정에서 더욱 견고하게 변하곤 했으니.
마나조율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거듭 사용하여 단련할수록 그 위력이나 효과가 증대한다.
그렇다면 해결법은 간단했으니.
'더욱 더 마나를 사용하면 돼.'
그럼 점점 마나조율의 예민함은 줄어들고, 반대로 마나에 대한 효율은 극단적으로 치솟을 것이다.
휘릭, 착-.
이내 적단도를 바로잡는 이전석.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연선화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
특성을 점검하는 사이,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연선화는 제자가 무언가를 답습하고 있음을 눈치 챘고, 곧 움직임을 멈췄다.
이전석은 솔직히 그것에 감사를 표했다.
제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그런 간단한 예절조차 모를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하물며 상대가 스승이라면 더더욱.
"······."
연선화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 사이.
이전석이 마나를 포탄처럼 쏘아냈다.
마치 파이어볼을 연상케 하는 공격.
마나로 밀집된 푸른 구가 빠른 속도로 날아간다.
연선화는 검을 휘둘러, 그것을 절반으로 갈랐다.
순간.
펑-.
실없이 터져나가는 마나의 구.
푸른 입자가 시야를 어지러이 메운다.
그리고.
파앗-!
이전석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연선화의 지척까지 접근해 적단도를 내찌른 것.
그러나.
카가각-!
도 형태의 검이 적단도를 비껴냈다.
연선화는 이다지도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쉽게 이전석의 공격을 막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한결 같이,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간다.
그 과정에서 연선화가 반격을 해왔다.
몇 차례나 이어진 공방은 이전석의 몸에 샐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얼굴.
팔과 다리.
복부에 이어 가슴까지.
갈수록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만 간다.
모두 치명상은 아니지만···.
"피를 꽤 많이 흘렸는데?"
"역시 검선에겐 안 되나보군."
"제대로 싸우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쉽구만."
관중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석은 그것을 귓가에서 지웠다.
마나가 소리를 덮어 없애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연선화는 이전석이 여전히 무언가를 꾸미고 있음을 눈치 챘다.
그렇다.
여전히, 다.
이전부터 계속 생각 없이 공격을 감행해오던 모습.
그는 통하지 않는 공격을 날리며 계속 상처를 입었다.
물론.
'무턱대고 그럴 아이가 아니지.'
아직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눈 적은 많지 않지만, 연선화는 이전석이 그렇게까지 생각 없는 타입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고.
"호오."
그 계획이 지금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새빨갛게 빛나는 단도.
[적단도가 주인의 피를 흡수합니다.]
[공격력이 '100'만큼 상승합니다.]
이전석이 적단도의 날을 훑었다.
분명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갛지만 손가락엔 무엇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이미 피를 전부 흡수했다는 의미다.
상태창에 표시된 공격력은 1천 8백.
그 이상은 더 오르지 않는다.
비록 이전석 본인의 피인 탓에 최대치까지 강화는 못했지만···.
'충분해.'
이전석이 적단도를 역수로 쥐었다.
1천 8백의 공격력.
'혈격'의 사용조건은 달성했다.
"슬슬 끝냅시다."
"필살(必殺)이로구나."
연선화가 이전석의 각오를 읽었다.
드물게 검을 치켜 새우는 그녀.
"오너라."
그 말이 신호가 되었다.
이전석이 땅을 박차고 달려든 것.
적단도를 아래로 내린다.
양 다리에 마나를 실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그러나 너무 붕 뜨지는 않도록.
한때 연선화가 그에게 보여줬던 일보(一步).
천매보의 편린을 이곳에서 다시금 재현한다.
쾅-!
뒤이어 유리창처럼 터져나가는 대기.
1초가 수십, 수백으로 쪼개져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 찰나의 한 순간.
[혈격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이 적단도를 올려 벴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8화
승급시험 (2)
그것은 거대한 피의 참격이었다.
새빨간 초승달이 허공을 새긴다.
거기에 천매보의 속도와 기세가 더해지면서, 혈격은 이로 말 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자아냈다.
"이, 무슨······."
누군가 경악 어린 어조로 중얼거렸다.
대련장.
연선화의 등 뒤.
"저게··· 무슨 평범한 돌처럼······."
벽이 산산조각 난 채 깨어져 있다.
문제는, 그것이 평범한 벽이 아니라는 것이다.
A급 던전에서 발굴되는 '아다만타디움.'
그게 평범한 돌처럼 깨어졌다.
고작 단 한 번의 일격만으로.
덕분일까.
작금의 상황을 보고 누구 하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
"허억···."
숨을 크게 몰아쉬는 이전석.
팔이 경련하듯 떨린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연선화가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검- 아니, 도.
그것의 날이 미세하게 잘려나가 있다.
분명 방어했고, 흘렸다.
그런데도 그 틈을 꿰뚫고 이전석의 공격이 파고들었다.
물론, 연선화는 마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검 자체도 그리 좋은 검은 아니다.
평범한 대장간에서 적당히 골라 집어든 무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선화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절개를 따라한 것이냐?"
그렇다.
절개.
불과 하루 전, 병원 옥상에서 보여줬던 연선화의 오의.
이전석의 공격이 그것과 쏙 빼닮아 있던 것이다.
비록 창천검 대신 다른 무언가를 섞어낸 듯하지만···.
'진정 천무지체란 말이냐.'
그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미친놈이로구나.'
여전히 숨을 헐떡이는 이전석.
보면 볼수록 헛웃음이 나온다.
그의 메마른 동공에서 괴물이 엿보였다.
금방이라도 알을 깨고 나올 듯 꿈틀거리는 재능의 괴물.
'아직은 한참 미숙하지만···.'
연선화는 방금 전 일격을 되새겼다.
당장은 쉽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만 해도, 보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이전석.
겨우 한 번의 공격만으로 모든 체력을 소진했다.
아마 그는 더 싸울 수 없을 거다.
하지만.
'한 번 사용한 기술은 곧 육체에 스며들며 체득된다.'
미숙하게나마 기술을 구현했다면, 다시 그것을 따라하는 건 이전석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황당하면서도 무서운 게 바로 그 점이었다.
이전석은 처음 말했을 때와 같이 정말 연선화의 모든 걸 빼앗고 있었다.
'좋구나.'
연선화는 그 사실이 마냥 즐겁게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그건 아마도 그녀의 본질이 협회장이 아닌 투귀이기 때문이리라.
"이 정도면··· 승급시험은 통과 입니까?"
문득.
이전석이 비틀거리며 물었다.
연선화는 검을 거둬들이며 답했다.
"통과란다."
직후.
삐이이-.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이전석 헌터의 승급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결과는 합격입니다. 승급하게 될 등급에 관해선 추후 내부에서 심사 후 발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털석-.
이전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를 원체 많이 흘린 탓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웠다.
'후유증이 크군.'
혈격을 사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선화의 공격을 유도해 더 많은 상처를 입었다.
지금 이전석의 실력으론 그녀에겐 유효타를 입힐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신의 피로 적단도를 강화했다.
하지만 그렇게 흐른 피가 점차 의식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천매보의 숙련도가 5% 증가합니다.]
[절개를 미숙하게나마 구현했습니다.]
[당신만의 방식으로 절개를 완벽하게 구현했을 때, 위대한 무학으로 다시 피어날 것입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하나.
"혹시 체력 포션 좀 있으십니까?"
이전석은 그것을 뒤로한 채 연선화에게 물었다.
※ ※ ※
꿀꺽, 꿀꺽-.
포션을 물마시듯 들이키는 이전석.
전신의 상처가 하나 둘 씩 사라진다.
변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흘러나간 혈액이 다시 채워지고, 어지러움과 매스꺼움도 줄어들었다.
확실히 포션 등급도 B가 되니 효과도 그만큼 좋아졌다.
"후우···."
병에서 입을 때고 숨을 고르는 이전석.
그에게 연선화가 다가온다.
"좋은 무기더구나."
좋은 무기.
적단도를 말하는 걸까.
이내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헌터증이었다.
[이전석. A급.]
헌데.
"A급?"
헌터증에 표시된 등급을 본 이전석이 무심코 놀라고 말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낮다고 생각하느냐?"
"아뇨···. 오히려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등급이 이전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던 것.
"실로 예외적인 결정이었단다."
연선화는 심사위원들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내놓은 결과라 하였다.
F에서 A.
아무리 협회에서 밀어주는 헌터라 해도, 이렇게 등급이 폭 높게 오르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헌터들 사이에서도 적잖이 반발이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너를 A급으로 상정한 이유는 그만한 무위를 보여줬기 때문이란다."
물론.
"내 제자라는 점도 한몫했겠지만."
연선화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내 그녀가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대련장에 남은 헌터들.
차마 밖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바로 이전석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를 자신이 속한 단체로 영입하려 대련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라며 연선화는 생각했다.
기사나 뉴스로 소식을 접한 이들과 달리, 저들은 결코 협회의 결정에 반박하지 못할 거라고.
아니.
정확히는 안할 거다.
그들도 보았으니까.
천매보와 혈격을 뒤섞은 필살을.
그것은 S급에게도 닿을 만한 초월적인 무위였으니.
'단 한 번의 대련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구나.'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연선화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시험도 끝났으니 나는 슬슬 가보도록 하마."
그녀가 발끝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직후, 발치에 피어나는 매화 꽃잎.
그 모습을 본 이전석이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수련은 더 안 시켜주십니까?"
"배탈이 나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시켜줄 의향은 있단다."
꽤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이 이상은 과유불급이란 의미였다.
이전석으로서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천매보와 절개.
적어도 이것들을 자유롭게 다루지 못하고야, 연선화의 다른 기술을 익히는 건 독밖에 되지 않으리라.
"제자야. 네가 가진 것들을 모두 소화하면 다시 찾아오거라."
연선화는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굳이 다른 가르침은 주지 않았다.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스스로도 제 길을 찾아가는 제자다.
그런 그에게 쓸데없는 조언이나 가르침은 평탄한 길에 가시를 흩뿌리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전석도 그 사실을 아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연선화가 흩날리는 매화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 또한 천매보의 일환인 걸까.
뒤늦게 이전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문제인데······.'
그러고선 슬쩍 주변을 둘러본다.
그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맹수들.
하나같이 한 길드나 사무소의 축을 맡고 있는 거물들이 이전석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뚜벅-.
한 걸음 앞으로 다가 갈 때마다.
'매섭군.'
어마무시 한 기세가 쏟아져 왔다.
대부분이 A급.
S급도 적잖이 보인다.
SS급은··· 한 명.
이만한 거물들이 모두 이전석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윽고.
덜컥-.
이전석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전석 씨!"
"A급으로 승급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혹시 한 번 얘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사방에서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마치 하이에나 때와 같은 모습.
실로 난잡하지만, 예상했던 상황이다.
이전석은 목소리를 키웠다.
마나를 실어, 의도적으로.
"일단 다들 제 말에 집중해주시죠."
그러자 헌터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다.
마나에 실린 음성이 그들을 멈췄다.
이는 단순히 성대를 강화해 성량을 키운 것에 불과하지만, 잔잔하게 귓속에 내리꽂히는 이전석의 음성은 일순간이나마 그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을 이어가는 이전석.
"솔직히 이렇게 서로 들이 밀어봤자 의미 없다는 거, 다들 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헌터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밀고가 봤자 이전석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긴 어려울뿐더러,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이전석이 그들에게 관심을 줄 리도 없었으니.
그때.
"일단 명함만 한 장씩 주시죠."
이전석이 말했다.
"제가 나중에 차례대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물론 진심은 아니다.
연락이야 하겠지만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 듣진 않을 것이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애당초 협회의 제안조차 거절한 이전석이다.
그런데 이제와 길드나 사무소에 들어간다?
손해도 그만한 손해가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협회에 들어가고 말지.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기도 애매했다.
이 자리에 있는 건 나름 유명한 헌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나가면?
괜히 긁어 부스럼만 만들게 될 터.
쓸데없이 적을 늘리는 건 이전석으로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도 어떻게든 인재를 영입해오는 것이 스카우트들의 역할이었으니.
"저는 유광의 A급 헌터인 차호민이라고 합니다. 저희 길드는 헌터님께 전적으로 S급과 동일한 대우를 해드리겠다고 약속을···."
"헌터 사무소 BB의 마스터 민하철입니다! 비록 아직 저희가 사무소이긴 하지만···!"
하나 둘 씩 명함을 내밀어 오는 헌터들.
길드보다 조금 더 규모가 작은 단체를 사무소라고 부르곤 했는데, 특히 그런 이들은 다른 길드에 밀리지 않기 위해 목소리를 더 키웠다.
당연히 이전석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파밀리아의 에밀리에요."
유독 작은 신장의 여인이 명함을 건네 왔다.
파밀리아.
이전석도 잘 알고 있는 곳이다.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하다.
파밀리아는 세계랭킹 1위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 대형길드였으니까.
SSS급 권좌가 두 명이나 속해 있는 곳으로, 자국인 미국에선 협회를 대신해 각 길드와 사무소를 관리한다고 한다.
화산이 원하는 이상향의 정점.
완벽한 협회의 대체재.
"······에밀리? 그 에밀리라고?"
"세상에··· 파밀리아라니."
"대체 어디에 있다 나타난 거지? 기척도 못 느꼈어."
곳곳에서 놀람과 당혹이 흘러나온다.
반면.
'에밀리라면······.'
이전석은 여인의 눈을 마주보았다.
자수정을 박아 넣은 듯한 동공.
신장이 160은 될까.
꽤 작다.
다만 그에 반해 보라색 머리칼이 종아리 아래까지 내려와 망토처럼 그녀의 등을 덮고 있었다.
파밀리아 길드의 3인자이자, '재의 마법사'라고도 불리는 SS급 헌터.
"꼭 연락 부탁드릴게요."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전석은 고개만 끄덕인 채 명함을 받았다.
에밀리 마르티네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이름.
에밀리.
재의 마법사.
그녀는 미래- 아니 전생에서.
이전석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다른 감독관이나 헌터들, 김백동조차 빌런에 의해 죽었지만··· 에밀리만은 달랐다.
그녀는 이전석이 현생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전생의 죄였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에밀리의 모습.
그것이 눈앞의 에밀리와 겹쳐진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생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전석은 굳이 그녀가 자신을 적대하지 않고선 죽일 생각이 없었다.
"오른손은 다치신 건가요?"
문득.
에밀리가 이전석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붕대가 감겨 있는 팔.
"불에 데여서 말이죠."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곧 있으면 사라질 상처다.
협회에서 받은 돈도 있었으니까.
이전석은 협회에서 나가면 바로 해주 포션을 구매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칠칠치 못 하신가 봐요."
에밀리가 돌연 붕대 위를 살며시 쓸어내렸다.
직후.
그녀의 손가락으로부터 시작된 푸른빛이 붕대 너머로 스면들었다.
'······해주 마법인가?'
이전석이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발화로 인한 작열통.
평소에는 24시간 내내 그를 괴롭히던 것이 지금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예상대로.
붕대를 풀자 말끔한 피부가 드러났다.
화상 자국이라곤 보이지도 않는다.
발화의 저주가 사라진 것이다.
"선물이에요. 마음에 드실는지 모르겠지만."
에밀리가 싱긋 웃었다.
어딘가 여우같지만,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인상.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 혹시 머리 가꿔보는 건 어떠세요? 짧게 자르면 지금보다 훨씬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에밀리는 "물론"이라며 말을 이었다.
"괜한 참견이라 느껴지신다면 무시하셔도 된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에밀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척.
그것이 인파 사이로 숨어든다.
곧 주변이 정적으로 물들고-.
'머리라······.'
이전석이 기다란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회귀하고나서 한 번도 안 잘랐지.'
미용실을 찾을 시간이 없기도 했다.
덕분일까.
조만간 한 번 짧게 잘라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안 그래도 긴 머리 때문에 귀찮던 때가 많이 있었으니까.
이내 명함을 전부 받은 이전석은, 헌터들 사이를 빠져나와 1층으로 올라갔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린다.
"이전석 헌터님! 협회장님과는 어떻게 사제관계가 된 건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최초로 F에서 한 번에 A급을 받은 감상은 어떠신가요!"
"마지막에 보여준 공격은 무엇인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대련장에서보다 더 난잡한 광경이 그를 맞이했다.
※ ※ ※
에밀리는 협회 건물을 빠져나왔다.
"오셨습니까?"
"응, 왔어."
보디가드가 직각으로 인사하고, 그녀를 대신해 리무진의 뒷문을 열어줬다.
에밀리는 리무진에 올라타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좋은 걸 봤네.'
일이 있어 잠시 협회에 들렀을 뿐이다.
F급의 승급심사?
관심이 있을 리가.
다만 원체 소문이 무성하니 호기심에 동했다.
그래서 잠깐 구경만 해보기로 했다.
협회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녀의 관람을 수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F급 헌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웬걸.
'검선의 제자였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놀랄만한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전석은 단 한 마디로 대중을 압도했다.
그것도 평범한 대중이 아니다.
A급 내지 S급으로 이루어진 이들.
그런 그들을 고작 말 몇 마디로 오케스트라 지휘자 마냥 조율하는 모습은 에밀리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인식왜곡 마법을 썼는데 눈치 챘지.'
다름 아닌 SS급 헌터의 마법.
이전석은 그것을 꿰뚫어봤다.
잘 못본 걸까?
설마.
아주 잠깐이었지만 틀림없었다.
이전석의 탁한 동공은 모습이 사라진 에멜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그가 마나를 컨트롤하는데 있어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마나에 재능이 있다는 건 다시 말 해 마법에도 어느 정도 자질이 있다는 소리이기도 했으니.
'스승님이 보시면 좋아하실지도.'
에밀리가 아주 옅게 웃었다.
이전석.
생각하면 할수록 탐이 난다.
'우리 쪽으로 데려오고 싶단 말이지.'
뛰어난 인재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했으니까.
오히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한국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도 곤란한데······.'
한참 고민을 거듭하던 에밀리.
'일단은 지켜볼까.'
이내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은 지켜보기로.
보석은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니.
물론 가질 수 있다면 더 좋고.
'언제쯤 연락해주시려나.'
에밀리는 명함을 받아가던 이전석의 모습을 떠올리며 즐겁다는 양 미소 지었다.
이윽고 리무진이 어느 빌딩 앞에 멈춰 섰다.
에밀리는 리무진에서 내리며 보디가드에게 말했다.
"고마워. 이제 그만 퇴근해도 좋아."
작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는 보디가드.
둥실-.
에밀리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50층쯤 되는 높이.
그곳까지 올라가 베란다에 내려선다.
촤륵-.
귀신이 들린 듯 저절로 열리는 창문.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간다.
그러자.
"에밀리, 한국에선 집에 들어올 때 신발을 벗어야 하는 거 몰라?"
소파에 앉아 게임패드를 조작하던 여성이 아그작 사탕을 깨물어 먹으며 말했다.
피융-.
콰과광-.
소파 맞은편.
TV에서 들리는 소리.
아무래도 게임을 하고 있던 모양.
"스승님이야 말로 그런 차림으로 있다간 감기 걸리시겠어요."
에밀리가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안방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와이셔츠 한 벌이 날아왔다.
그것이 속옷차림으로 앉아 있던 여성에게 절로 입혀졌다.
그러나.
"SSS급이 감기 걸려서 앓아눕는 거 봤니?"
여성은 아랑곳 않고 패드를 조작하며 되물었다.
SSS급.
그렇다.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아홉 명의 최강자 중 하나, '만마(萬魔)의 권좌' 스텔라 스텔레인이었다.
별의 권능을 마법으로 재현하는 존재.
"그나저나···."
그녀가 에밀리를 바라봤다.
"뭔가 재밌어 보이는 표정이다?"
물처럼 흘러내리는 금색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에밀리는 슬쩍 스텔라 옆에 앉으며 답했다.
"재밌는 걸 봤거든요."
"길바닥에 다이아몬드라도 떨어져 있디?"
"음··· 비슷할지도?"
"적어도"라며 에밀리가 말했다.
"다이아 같은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사람이었어요."
"사람이라······."
의미심장한 제자의 말 덕분일까.
스텔라가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에 흥미가 동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게임 오버!]
"아, fuck!"
잠시 한 눈을 판 대가로 게임 캐릭터가 죽음을 맞이하자, 아리따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스승님은 게임을 더럽게 못하시네요."
에밀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요놈의 제자가 성인이 되더니 스승 위에 서려고 하네?"
"게임에서라면 저는 언제나 스승님 위에 있었는 걸요?"
"Damn······."
제자의 말에 스텔라가 똥 씹은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보다."
스텔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졌다는 듯 게임패드를 손에서 내려놨다.
그러곤 나지막이 물음을 던졌다.
"그 재밌다는 사람이 누군지나 말해봐라."
에밀리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9화
특성 진화의 룬 (1)
기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서로 어깨를 밀치며, 인파를 비집고 들어온다.
어떻게든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열심인 모습.
그것이 마치 발악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개중에는 드물게 존경과 선망의 시선도 뒤섞여 있었다.
영웅.
악인도 빌런도 아니다.
선인을 바라보는 시선.
이전석으로선 그게 꽤나 신박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저 그뿐이다.
더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남들이 자신을 뭐라 생각하든 그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으니.
[은신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이 모습을 감췄다.
마나로 심장박동과 발소리, 숨까지 줄이자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코트- 아이템을 사용하던 것과는 그 수준과 효과가 차원이 달랐다.
마나조율 덕분일까.
이전석은 마치 세상에서 지워진 것처럼 증발했다.
그러자 기자들이 당황을 내비쳤다.
"어? 뭐야? 사, 사라졌어?"
"CCTV에 녹화된 특성이야!"
"젠장,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잖아?!"
이내 그들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어떻게든 이전석을 찾아내 한 마디라도 얻어내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A급 특성을 일반인이 알아볼 리 만무했으니.
이전석은 유유히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협회를 나가려던 찰나.
"자, 잠깐! 밀지 마세요! 이봐요! 누가 제 발 밟은 겁니까! 거 같은 기자들끼리 매너 좀 지킵시다!"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사람들 사이에 치이고 있었다.
변하늘.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각성자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작은 신장에 비해 유독 탄탄한 맷집.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아픈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근육도 꽤나 탄탄이 잡혀 있었다.
다만.
'단련된 근육이 아니야.'
각성자가 되면서 생겨나는, 특유의 이질적인 근육.
마나가 없어 알아보기 어렵지만···.
틀림없다.
각성자다.
그를 보고, 이전석이 옅게 기척을 드러냈다.
"이봐요."
"예? 누, 누구?"
갑자기 등 뒤에서 밀려온 기척 덕분일까.
변하늘이 소름이 돋은 듯 몸을 떨었다.
이내 이전석의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어? 허, 헌터님?!"
"조용히."
이전석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다행이 들은 사람은 없는 모양.
"일단 따라오시죠."
이전석이 자리를 옮겼다.
변하늘은 고개만 끄덕인 채 그를 따라갔다.
인적이 드문 장소.
먼저 입을 연건 다름 아닌 이전석이었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아, 어, 얼마든지 여쭤보세요···!"
변하늘이 긴장한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영웅이라는 이름값.
전에 보았을 때와는 다르다.
더욱이 협회장의 제자라는 사실이 그를 더욱 긴장케 만들었다.
"기자님, 각성자이십니까?"
"아, 네. 그런데··· 그건 어떻게······?"
"각성자만이 가지는 특유의 몸이 있으니까요. 자세히 보면 각성자와 비각성자는 근육의 형태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아하···."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변하늘.
"그런 게 있었구나"라며 작게 중얼거린다.
이전석이 "그보다"라며 말을 이었다.
"특성은 어떻게 되십니까?"
본디 특성을 묻는 건 예의가 아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헌터일 경우에나 해당되는 경우였다.
때문일까.
변하늘은 쉽사리 특성을 알려줬다.
"음··· 그건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몸이 조금 튼튼해지는 정도? 육체강화라는 특성이에요. 등급은 C고요."
C.
육체강화.
나쁘지 않은 특성이다.
그 정도면 헌터를 하는데도 무리는 없을 텐데···.
기자가 된 건 본인의 취향 때문일까.
아프거나 잔인한 게 싫어 헌터가 되지 않는 각성자는 많았기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특성도 나쁘지 않고··· 괜찮겠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전석.
그가 이내 본론을 꺼냈다.
"기자님께 독점 인터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에 변하늘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어? 정말요?!"
"예. 대신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아뇨, 꼭 하게 해주세요!"
변하늘은 당황하면서도, 크게 소리치며 두 눈을 빛냈다.
인터뷰를 딸 수 있다는 사실에 어지간히도 흥분한 모양.
하물며 독점 인터뷰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이걸 놓치면 기자가 아니다.
아니,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변하늘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딘가 맛탱이가 간 것 같은 눈빛.
'다른 의미로 미쳤군.'
이전석은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근데 부탁이라는 게······."
변하늘의 나지막한 물음에, 이전석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짐꾼 노릇 한 번만 해주시면 됩니다."
※ ※ ※
변하늘은 다행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심 고민하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던전에 대한 두려움보다 기자로서의 직업정신이 더 앞섰는지,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후 변하늘과 헤어진 이전석.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마침 짐꾼이 필요했는데 잘 됐어.'
바로 내일.
A급 던전에 들어가려던 차였다.
특성 진화의 룬.
그걸 얻어야만 했으니까.
다만 A급부턴 일반 몬스터도 마석을 떨구는데, 때문에 많은 헌터들이 반필수적으로 짐꾼을 동행하곤 했다.
문제는, 등급이 A인 만큼 위험부담도 높다는 것.
당연히 짐꾼에게 돌아가는 위험수당도 상당했다.
이번에 협회에서 돈을 꽤 주긴 했지만.
'아낄 수 있으면 아끼는 게 제일이니까.'
게다가 짐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몇몇 헌터들이 던전에서 나오기 직전에 짐꾼을 죽이고 마석만을 챙겨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니까.
때문에 짐꾼을 업으로 삼는 헌터들은 친한 지인이나 팀이 아니고선 대부분이 고용되는 걸 꺼려하곤 했다.
그렇다고 마석을 포기하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거 하나에 얼마나 하는데.'
어렸을 적부터 저금정신이 투철하던 이전석이다.
비교적 널널한 가정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돈이 있다면 잘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던 그였다.
그런 이전석에게 바닥에 떨어진 오만원권을 보고 그냥 지나치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래서 이전석은 인터뷰를 미끼로 변하늘에게 짐꾼을 요구했다.
다행이 변하늘은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로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을 터.
다른 기자들은 얻을 수 없는 독점 인터뷰의 기회.
그걸 짐꾼 노릇 한 번하는 걸로 얻을 수 있었으니.
뚜둑-.
이전석이 꽉 뭉친 어깨를 풀었다.
관절이 맞물리며 뼛소리를 낸다.
연선화의 대련.
생각보다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마지막에 사용한 그 일격 때문이었다.
상태창에 표시된 이름은 절개.
━
절개(格)
숙련도 - 1%
등급 : ?
효과 : 천매보와 혈격을 조화한 필살의 일격. 그것이 완숙을 넘어 극에 이른다면 하늘과 땅마저 피로 물들일 것이다.
본래는 창천검을 이용한 기술이나, 혈격을 섞어 전혀 다른 형태로 빚어냈다.
*해당 특성은 미완성 상태입니다.
*숙련도를 높여 특성을 완성하십시오.
*당신이 만들어낸 결과에 따라 절개의 등급이 정해집니다.
━
절개.
그 뒤에 격(格)이라는 단어가 추가됐다.
바로 잡다는 의미의 한자.
'쉽게 쓰지는 못하겠어.'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체력이랑 마나소모가 너무 커.'
마나야 그렇다 쳐도 체력이 문제였다.
고작 한 번의 휘두름.
그것만으로 체력이 모두 고갈됐다.
절개의 위력을 몸이 버티지 못한 것.
만약 강화된 적단도의 공격력이 조금이라도 더 높았다면···.
'쓰는 도중에 팔이 부러졌을지도 몰라.'
그 정도로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어마무시 했다.
더욱이 싸우는 도중에 그렇게 지쳐버리면 반격 당했을 때 대처할 수단이 없었다.
'일단은 숙련도를 올리는데만 집중해야겠군.'
천매보 때와는 다르다.
절개는 아직 실전에서 써먹을 게 못 됐다.
과유불급.
과연 그 말 대로가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기술을 얻은 건 좋지만, 제대로 써먹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충분히 유의미한 공격수단이야.'
연선화가 말한 대로 필살이라 칭하기에 어울리는 기술이었다.
최대치의 혈격.
완숙에 이른 천매보.
그와 뒤섞인 절개.
그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S급은 물론, SS급과도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애당초 그쯤되면 이전석의 육체도 탈각을 겪은 뒤일 테니,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좀 쉬자.'
후우-.
숨을 푹 내쉰 이전석.
그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체력 포션으로 피는 회복했다.
마나도 어느 정도 되돌아왔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지친 채 고장난 인형처럼 삐걱거렸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충분히 휴식을 취해줄 필요가 있을 터.
이전석은 다시 은신을 사용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는 길.
우웅-.
김백동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헌터님께 물건을 하나 보냈으니 확인 후 연락 부탁드립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아들, 네 앞으로 도착한 택배가 있던데?"
한유리가 내밀어온 작은 상자 하나.
집에 도착하자, 뜻밖의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그걸 채 확인하기도 전.
"엄마는 잠깐 병원에 다녀올게."
한유리가 현관문을 나서며 말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세요?"
"기운이 좀 없어서 영양제만 맞으러 가는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후 한유리가 잠시 집을 비웠다.
'조만간 건강검진 좀 한 번 받아보시라고 해봐야겠어.'
저번부터 유독 병원에 가는 횟수나 빈혈 증상을 보일 때가 많았다.
이전석은 그 사실이 못내 걱정이 되었다.
원래부터 한유리가 몸이 허악하긴 했지만, 최근 들어 유난히 그런 경향이 강해 보였으니.
최근 이전석이 병원에 입원한 모습을 보고 충격이 컸던 걸까?
괜찮은 보약을 하나 사드리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다.
'빈혈에 좋은 게 뭐가 있더라.'
이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방에 들어갔다.
이후 보약에 대해 잠시 검색하다, 뒤늦게 한유리가 준 택배가 떠올라 그 내용물을 뜯어봤다.
그리고.
"이건······."
내용물을 확인한 이전석이 놀람을 내비쳤다.
※ ※ ※
다음 날.
충청북도 영동.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 마을.
이전석은 그 근처의 산을 올랐다.
그리 크지 않은 높이.
이전보다 체력도 훨씬 높아진 탓일까.
등산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무와 나무 사이를 깃털처럼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1분조차 채 걸리지 않은 시간.
정상에 도착해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이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
대신이라는 듯 거대한 게이트가 이전석을 마주했다.
이곳이 오늘 들어가게 될 던전이다.
특성 진화의 룬이 나오는 장소.
'기자님은··· 아직 안 오신 것 같네.'
바로 어제 문자로 주소를 보냈다.
정말 인터뷰를 원한다면 나올 터.
짐꾼이라는 게 위험하긴 하지만, 단독으로 취재할 수 있는 기회니까.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지.'
무언가에 깊이 매몰된 듯한.
미친- 아니, 또라이 같은 눈빛.
아마 변하늘은 나올 거다.
적어도 이전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슥-.
변하늘을 기다리는 사이.
이전석이 품에서 장신구를 꺼냈다.
황금색 보석이 장식된 목걸이다.
어제 집에 귀가한 뒤, 김백동으로부터 전달 받은 아이템.
━
뇌령옥(雷靈玉)
등급 : S
효과 : 여섯 꼬리 구미호 뇌령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목걸이. 장착 시 마나가 +30만큼 증가하며 번개내성과 친화력이 대폭 상승한다.
━
무려 S등급의 상위 아이템이었다.
효과나 등급 덕분일까.
이런 건 쉬이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백억까지도 우습게 넘어갔다.
특히 등급에 따라 올릴 수 있는 레벨이 정해지는 헌터들에게, 이만큼이나 스탯이 증가하는 아이템은 귀물(貴物)과도 같았으니.
그 가격은 감히 입으로 내뱉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때문일까.
'내가 요구한 거긴 하지만, 정말 이런 걸 줄줄은 몰랐는데.'
얼마 전 병원에서 했던 말.
━이왕이면 고가의 마나증가형 아이템이면 좋겠네요.
포상이란 말에 분명 그런 요구를 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 S급 아이템을 선물해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이전석으로서도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물론 협회 입장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이전석을 붙잡고 싶을 테니···.
이 정도의 지출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뇌령옥을 장착하셨습니다.]
[마나가 +30만큼 증가합니다.]
[번개내성이 대폭 상승합니다.]
[번개 친화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뇌령옥을 목에 걸자 시스템이 떠올랐다.
현재 그의 마나는 41.
본래는 기존 아이템과 합쳐 50이 되어야 했으나, S급부턴 아이템의 착용도 제한되기에 기존 것들은 모두 빼놓고 왔다.
급이 높을수록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의 개수도 적어지곤 했으니.
B급까지의 경우 3개, A급은 2개, 그리고 S급부턴 오직 한 개의 아이템만이 착용 가능하다.
장신구와 방어구는 또 다르게 적용되는 게 의아하긴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늦는군.'
이전석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눈앞의 던전은 이제 막 생성된 까닭에 입장을 막는 문지기가 없다.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던전.
하지만 그것도 곧이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전국각지의 길드와 사무소가 새로운 던전의 출현을 눈치챌 거다.
그렇게 되면 경매를 통해 서로가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겠지.
당연히 던전 자체를 공락하면서 획득할 수 있는 '최초 보상'도 물 건너갈 터.
'어쩔 수 없나.'
결국 이전석은 혼자 던전을 들어가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제가··· 후욱, 많이 늦었나요?"
변하늘이 숨을 헐떡이며 산길을 뛰어 올라오고 있던 것이다.
등에는 커다란 백팩까지 맨 채로.
이전석은 피식 웃으며 그를 돌아봤다.
"몇 초만 더 늦었으면 헛걸음 하실 뻔 하셨습니다."
"그,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생각보다 많이 막혀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변하늘.
지금은 그것보다 던전을 공략하는 게 더 중요했다.
"괜찮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아, 네!"
그렇게 두 사람은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성우가 내리는 지옥'에 입장하셨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창.
"으, 으억?!"
변하늘이 당황한다.
카앙-!
돌연 눈앞에서 울려퍼진 마찰음.
불꽃이 시야를 어지럽게 메웠다.
곧 작은 단검 하나가 바닥에 틀어박혔다.
방금 이전석이 튕겨낸 단검이었다.
"그아아아악!!"
코앞에서 들려오는 괴성.
이전석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적단도를 바로잡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몬스터 한 마리가 포효하고 있었다.
마치 늑대인간을 연상케 하는 외관.
한쪽 손에는 작은 단검을 들고 있다.
"손님 맞는 예절이 영 아니네."
쯧쯧 혀를 차는 이전석.
바닥에 꽂힌 단검을 주워든다.
직후.
[해당 던전은 폭주형입니다.]
[던전이 폭주하기 전에 공략하십시오.]
[제한시간 - 1:00:00]
눈앞에 또 다른 창이 나타났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0화
특성 진화의 룬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