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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48-56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8화

독식 (3)

브랜던 라우스.

 SS+급의 각성자이자 개벽연합의 보스.

 그가 책상에 앉아 치킨을 먹고 있었다.

 다만 먹는다기엔 표현이 조금 부드러울지도 몰랐다.

 "음, 역시 이거야."

 콰득, 콰드득-.

 제 손가락만한 닭다리를 뼈째로 씹어 삼키는 브랜던.

 그 모습이 괴물과 같은 외형과 어우러져 섬뜩한 광경을 자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프라이드 치킨은 한국이 최고야. 미국은 너무 짜고 느끼해서 오래 먹기가 힘들거든. 반면 한국 놈들이 만든 프라이드 치킨은 그렇게 느끼하지도 않고 오히려 기름이 깔끔해서 먹기가 좋아."

 와작-.

 브랜던이 이번에는 가슴부위를 집어삼켰다.

 뼈 부서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보, 보스.

 그때.

 누군가 그를 불렀다.

 "잠깐 기다려봐."

 브랜던은 성가시다는 양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러곤 개걸스레 치킨을 먹어 치웠다.

 이윽고 텅 비어버린 접시.

 브랜던이 물티슈로 기름 가득한 손을 닦았다.

 원체 큰 덩치 덕분일까.

 뮬티슈조차 자그만 조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뒤이어 콜라를 들이킨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지, 우리?"

 ━······협회가 유독 조용하다는 보고를 드린 참이었어요.

 모니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브랜던이 눈앞의 화면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한 소년의 얼굴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동양인이면서 이국적인 눈동자를 가진 소년.

 A- 아니, 한여름.

 그가 바로 협회를 해킹한 장본인이었으며, 또한 개벽연합의 브레인 아닌 브레인이었다.

 "협회가 유독 조용하다···. 그거라면 다음 달 기습작전 때문이라고 결론내리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요.

 어리숙한 외모와 얇은 목소리.

 한여름은 떨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겁이라도 먹은 듯.

 ━협회 전용 네트워크에 침투해 빼낸 정보도 전부 애매하게 알맹이가 비어있고···.

 "그래서."

 툭-.

 브랜던이 손에 든 캔을 내려놨다.

 그러자 한여름이 움찔 떨었다.

 그가 지닌 두려움의 원인은 다름 아닌 브랜던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협회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목적이라면?"

 한여름이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떨렸다.

 브랜던이 매섭게 노려보자.

 ━······모르겠어요.

 한여름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는 무책임한 말 덕분일까.

 브랜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름아. 우리 여름아."

 ━······

 "네가 능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겠어. 협회 전용 네트워크도 우습게 털어버릴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이제와서 모르겠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응?"

 명백하기 그지없는 협박.

 한여름은 그의 기세에 주눅 든 듯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것처럼 변명했다.

 ━그, 그래도 얻은 정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그게 뭔데?"

 ━협회가, 서울시 전역에 대규모의 인식왜곡 마법을 펼·····친 것 같아요.

 한여름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과연 연합의 두뇌(브레인)라 해야 될까.

 그는 협회의 수단을 손쉽게 파헤쳤다.

 서울전역에 대규모 인식왜곡 마법을 펼쳤다는 것.

 문제는 그 목적을 여전히 모른다는 거지만···.

 "그러니까, 그 대규모 인식왜곡 마법을 펼쳐서 놈들이 뭘 하려고 묻고 있잖나."

 브랜던은 그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두 눈을 매섭게 뜨며 한여름을 노려본다.

 괴물과 같은 외형에 살벌한 눈빛이 더해져 한여름을 더욱 몰아 새웠다.

 이내 한여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건······.

 그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치직-.

 갑자기 전원이 나가버린 모니터.

 뜬금없이 블루 스크린이 뜨더니 화면이 꺼지고 말았다.

 브랜던은 힐끗 본체를 살펴봤다.

 그러나 컴퓨터는 여전히 부팅상태였고, 딱히 모니터가 고장난 것 같지도 않았다.

 한여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의문을 길게 이어갈 틈도 없었다.

 "······!"

 돌연.

 검 한 자루가 목을 노리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브랜던의 반응은 신속하고 재빨랐다.

 갑작스런 기습.

 목에 마나를 두른다.

 카각-!

 불꽃이 튀며 검이 비껴나갔다.

 희미하게 마나가 베여나갔지만, 브랜던은 날이 목에 닿기 전에 몸을 빼 공격을 피했다.

 직후.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거 같은데요?"

 앙칼맞은 여성의 음성.

 그것이 귓가를 맴도는 것과 동시에, 브랜던은 발밑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이건······."

 순식간에 방바닥에 형성되는 마법진.

 그것으로부터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차마 대처할 수도 없는 찰나였다.

 촤락-!

 마치 살기가 형태를 맺듯, 마법진에서 여러 개의 쇠사슬이 솟구쳐 나와 브랜던을 옭아맸다.

 팔과 다리.

 팔뚝과 허벅지.

 심지어는 목과 머리 위의 뿔마저.

 "크윽···!"

 브랜던의 전신이 쇠사슬에 뒤덮였다.

 하지만.

 과연 최상급 각성자라 해야 될까.

 콰앙-!

 브랜던은 오직 괴력만으로 쇠사슬을 깨부쉈다.

 그러곤 쇠사슬 대신 마나를 전신에 두른 채 정면을 응시했다.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소파.

 그곳에 두 남녀가 서 있었다.

 브랜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빌런 사냥꾼, 김백동.

 재의 마법사, 에밀리 마르티네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S급 헌터들. 

 "봤어요?"

 "봤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직 미숙하지만 저희 기습에 완벽히 대처하더군요."

 김백동, 그는 꽤 놀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연하다.

 무려 SS급 두 명의 기습이었다.

 브랜던은 그걸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대처했다.

 이는 S급이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것은 즉 브랜던이 두 번째 탈각을 겪어 SS급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인식왜곡을 사용하고 뭘 하나 했더니,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군."

 브랜던이 차게 식은 어조로 말했다.

 그에 에밀리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요. 이런 짓이지요."

 이어 오른손을 허공으로 내민다.

 그 손아귀에 지팡이가 쥐어졌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황금색의 지팡이.

 툭-.

 에밀리는 그것으로 바닥을 두들겼다.

 그러자 마나의 파동이 물결치듯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뤼미노지테, 에투알, 몽드."

 세 음절.

 주문을 읊었다.

 변화는 바로 나타났다.

 ━일단 제 '고유세계'를 불러올게요.

 허물어지는 천장.

 깨져나가는 벽.

 무너지는 바닥.

 산산이 부서지는 방을 뒤로한 채, 은하수의 빛으로 아로새겨진 밤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없이 펼처진 녹색 초원.

 세 개의 달이 은하수를 덧입은 채 어둠을 아스라이 비춘다.

 고유세계.

 모든 마법사들이 갈망하며 꿈꾸는, 존재하는 모든 마법의 정점.

 그것이 에밀리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아래.

 ━그럼 김백동 감독관께서 그를 죽이세요.

 김백동이 푸른 초원을 가로질렀다.

 에밀리와 같이 그의 양손엔 어느새 기다란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당초의 계획대로, 브랜던을 죽이고자 김백동이 검을 치켜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검의 궤적이 브랜던에게 채 닿기도 전.

 김백동은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전석 헌터님?"

 뜬금없이 허공에 나타난 갈색 게이트.

 그곳에서 이전석이 튀어나온 것이다.

 당황한 건 김백동 뿐만이 아니었다.

 계획에 없던 상황에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긴급 상황입니다."

 그들을 향해 이전석이 말했다.

 ※ ※ ※

 ·········.

 ······.

 ···.

 시간은 잠시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백동과 에밀리와 마찬가지로, 이전석 또한 이종근이 숨어 있는 빌딩을 급습했다.

 우선 아야미네의 분신으로 빌런들의 위치를 파악.

 그 후.

 아야미네가 빌런 A- 한여름을 제압했고, 이상을 눈치 챈 이종근을 상대로 아냐와 이전석이 대응에 나섰다.

 "크윽······!"

 이를 악 문 채 물러나는 이종근.

 그의 온몸이 상처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

 일반인이었다면 진즉에 과다출혈로 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단지 S급이라는 초월적인 강함이 이종근의 목숨을 동아줄 마냥 붙들고 있었다.

 "감히-!!"

 버럭 소리치며 분노하는 이종근.

 이전석이 그에게 적단도를 투척했다.

 마치 비수던지듯 날아가는 적단도.

 그러나.

 이종근의 주변으로 푸른 막이 쳐졌다.

 돔 형태의 결계.

 일반적인 보호막과는 다르다.

 이종근이 펼친 막에는 룬 문양과도 같은 기이한 것들이 새겨져 있었고, 수십 개의 마법진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회전하고 있었다.

 흔히 결계라고도 불리는 마법의 일종.

 챙-!

 적단도가 그것에 막혀 튕겨져 나갔다.

 이전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마나의 실을 잡아당겨 적단도를 바로잡는다.

 그러곤 반대 손으로 재빠르게 결계를 분석- 해체했다.

 쨍그랑-!

 마치 유리조각처럼 깨져나가는 결계.

 "대체······."

 이종근이 당혹 어린 눈빛을 띄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상황이다.

 이종근이 결계를 사용할 때마다, 이전석은 그 결계를 파훼하며 모든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몰린 건 홀로 다수를 상대했기 때문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흉은 다름 아닌 이전석의 '결계파훼'였다.

 공격도 방어도, 모든 게 소용없었다.

 이종근이 결계를 형성할 때마다, 이전석은 보란 듯이 그 결계를 깨트려버렸으니.

 파훼.

 결계에 대한 지식과 컨트롤이 상대보다 훨씬 격이 높을 때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내가 결계를 연구한지만 10년이 넘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일까.

 도무지 이전석의 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결계의 구축능력과 시간, 그리고 컨트롤.

 모든 게 뒤떨어진다.

 어떻게? 왜?

 이해할 수 없고, 납득도 가지 않았다. 

 이전석의 회귀를 모르는 그로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작 10년?

 우습지도 않지.

 이전석은 전생에 이미 '세계의 권좌'를 죽였다.

 모든 결계의 정점에 선 남자를 말이다.

 하물며, 이전석은 그를 죽이면서 학습하고 답습했다.

 결계란 무엇인가.

 그 본질과 근원.

 세계라는 단어의 의미까지.

 감히 이종근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이전석에겐 마나조율까지 존재했으니.

 '지식'과 '컨트롤'이라는 범주 하에 결정되는 결계의 싸움은, 당연히 그 둘을 모두 지닌 이전석의 승리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계 자체는 내가 만들어봤자 그리 효율이 좋지 못하지만······.'

 오직 파훼만큼은 S급과 견주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뛰어넘어 압도하는 수준이다.

 이종근은 공격도,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이전석이 결계를 파훼해 없애버렸으니.

 그리고 그런 그를 아냐가 몰아넣었다.

 "커흑······!"

 팔과 다리와 복부.

 얼음으로 이루어진 창이 전신을 꿰뚫는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냉기의 연격.

 애써 그것을 막고자 결계를 펼쳐보지만, 이번에도 이전석에 의해 파훼당하고 말았다.

 극상성.

 하드카운터.

 안타깝지만 이전석은 이종근에게 있어 존재 자체가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개자식들이······!!"

 이종근이 피와 함께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뒤에서 살기가 몰아쳤다.

 사냥감이 지치기만을 기다린 맹수처럼, 멀리서 견제와 결계의 파훼만을 반복하던 이전석이 처음으로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광폭화를 사용합니다.]

 [짐승화를 사용합니다.]

 두 가지 특성을 뒤섞어 사용했다.

 S급조차 뛰어넘는 순간적인 화력.

 "이런······!"

 이종근이 방심했다는 양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뒤늦게나마 결계를 형성하지만.

 쩡-!

 그조차 허무하리만치 쉽게 깨어지고 말았다.

 아냐의 압박으로 남은 마나도, S급으로 오르면서 얻을 수 있는 별개의 힘마저 남아 있지 않은 상황.

 그 가운데.

 "결계 말고 평범한 보호막 같은 것도 연습해두지 그랬어."

 이전석이 적단도를 휘둘렀다.

 서걱-.

 그대로 목이 잘려나가는 이종근.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믈든다.

 그러나, 그 뿐이다.

 경악이란 감정은 그 어떤 형태조차 맺지 못한 채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툭-.

 핏물을 흩뿌리며 바닥을 뒹구는 머리.

 한때 결계술사라 불리었던 S급의 빌런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결계특화(S)를 습득합니다!]

 [악인을 죽였습니다.]

 [격이 높은 악인입니다.]

 [선업이 '40,000'만큼 상승합니다.]

 이전석의 눈앞에 떠오른 창.

 윤진보다 1만 더 높은 선업이 들어왔다.

 단순 등급의 차이 때문일까?

 아무래도 죄의 양이나 질과는 달리, 악인의 급이 높을수록 업도 더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긴, 무려 S급이나 되는 놈을 잡았다.

 '그럼 그만큼 보상을 받아야 수지가 맞지.'

 이전석이 상태창을 뒤로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헌터님."

 아냐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도 하기 전이었다.

 [포탈 게이트가 형성됩니다.]

 이전석의 등 뒤로 형성된 갈색의 게이트.

 "······포탈 게이트?"

 아나갸 당혹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협회에서 지원이 왔나···?'

 순간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니야. 지원은 없어.'

 아냐는 곧 이상함을 느꼈다.

 지원?

 그런 보고도 없고, 전해들은 사실조차 없다.

 애당초 지원은 요청하지도 않은 상황.

 협회에서 갑자기 사람을 보냈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뿐.

 ━만약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합니까?

 ━개벽연합 외의 다른 위험단체의 개입이 있을 경우.

 아냐는 이전석의 말을 떠올렸다.

 명백했다.

 갑자기 포탈 게이트가 나타날만한 이유라면 그것밖엔 없었다.

 "헌터님!"

 아냐가 이전석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빨아들여······?'

 포탈 게이트가 이전석을 제 품으로 끌어들이고 있던 것이다. 

 생애 처음 보는 광경.

 당황이 그녀를 집어 삼킨다.

 하지만.

 "안······!"

 그 당황을 입으로 채 담기도 전이었다.

 이전석이 포탈 게이트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며칠 전.

 이전석은 토요토로부터 특성을 하나 구매했다.

 ━

 포탈 게이트

 등급 : A

 효과 : 포탈 게이트를 형성한다. 마나를 추가로 소모하여 지정한 대상을 흡수하거나 배출할 수 있다.

 [사용 횟수 4/5]

 *24시간이 지날 때마다 소모된 사용 횟수가 1회씩 충전됩니다.

 ━

 효과를 보면 알 수 있듯, 인위적으로 포탈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특성이다.

 자그만치 7만이나 하던 가격.

 물론 그것도 90%나 할인된 가격임을 고려하면 지랄 맞게 비싼 특성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고작해야 A급 주제에 말이다.

 솔직히, 여태껏 모은 선업이 아깝긴 했다.

 그래도 충분히 감안할 만한 손해였다.

 그만큼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포탈 게이트의 형성.

 그것은 이전석이 이번 계획을 꾸며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포탈 게이트는 이 시기엔 아직 대중화가 되어 있지 않아.'

 즉- 가진 사람이 극단적으로 드물다.

 비단 사람뿐이랴.

 웬만한 대형 길드나 협회가 아니라면 포탈 게이트를 가진 단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헌데 그게 갑자기 형성되어 팀원들을 전국 각지로 흩어버린다면?

 김백동은 틀림없이 다른 '위험단체의 개입'을 의심할 게 분명했다.

 그게 이전석이 노리는 바였다.

 그리고···.

 [좌표 5469.6545.112로 이동합니다.]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원의 낙인이 가진 효과 덕분일까.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잠깐 흘겨본 것에 불과하지만, 이전석은 팀원들이 정확히 어느 좌표로 이동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입력한 좌표- 아니, 장소는 세종이었다.

 유하나와 유한설이 있는 곳.

 그 한복판에 포탈 게이트가 열린다.

 "이전석 헌터님?"

 "당신이 어떻게 여길······?"

 당황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유하나와 유한설.

 게이트에서 구르듯 뛰쳐나온 이전석의 모습에 두 사람이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반면.

 이전석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엉망진창이 된 도로.

 유하나와 유한설이 한 빌런과 대치하고 있다.

 S급 빌런 김지운.

 마나를 이용한 전투술로 유명한 녀석이었는데.

 '죽기 일보 직전이로군.'

 바닥에 널브러져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아무래도 유하나와 유한설의 작품인 듯했다.

 물론 그만큼 두 사람의 상처도 꽤 짙은 편이었고, 이전석은 그것을 기회라 판단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이루어진 판단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행동으로 이어졌으니.

 "갑자기 포탈 게이트가 나타나더니 저를 빨아들였습니다!"

 이전석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그와 동시에.

 [포탈 게이트가 형성됩니다.]

 유하나의 발밑에 갈색 게이트가 나타났다.

 본래라면 가뿐히 피했을 상황.

 다만 유독 심한 부상 덕분일까.

 유하나의 반응이 조금 늦었다.

 "윽······?!"

 말도 채 잇지 못한 찰나.

 이전석은 유하나를 강원도의 어느 한 좌표로 날려버렸다.

 그녀는 중력과 포탈의 힘에 이끌려 그 너머로 사라졌고-.

 "하나야!"

 갑작스런 상황에 의문을 떨칠 새도 없이, 유한설은 다급히 손녀를 따라 포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발걸음.

 과연 손녀를 생각하는 조부의 마음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헌터님! 놈의 뒤처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가 뒤늦게 남긴 말.

 "이건, 대체······?"

 갑작스런 상황.

 당황한 건 두 헌터만이 아니다.

 그들을 상대하던 김지운이 의문을 내뱉었다.

 하지만.

 서걱-.

 이전석은 다 죽어가는 김지운의 머리를 베었다.

 툭-.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

 피가 흩뿌려지며 몸통이 쓰러진다.

 그걸 바라보며 이전석은 생각했다.

 '운이 좋군.'

 정말로 운이 좋다.

 S급 빌런인 김지운은 이미 모든 기력을 소모한 채 죽어가고 있었으니.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의 특성을 갈취할 수 있게 되었다.

 밥상은 물론, 숟가락까지 차려둔 유하나와 윤한설에게 고맙다해야 할까.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지배자의 기백(S)을 습득합니다!]

 [악인을 죽였습니다.]

 [격이 높은 악인입니다.]

 [선업이 '50,000'만큼 상승합니다.]

 S급의 특성.

 거기에 더불어 5만의 선업까지.

 이번에 얻은 것만으로 벌써 일전 소모한 선업을 모두 복구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아직이야.'

 아직 그는 굶주림을 채우지 못했다.

 [포탈 게이트를 형성합니다.]

 재차 눈앞에 형성하는 포탈 게이트.

 주변에 보는 사람은 없다.

 CCTV도 격한 전투로 인해 파괴된지 오래.

 이전석은 거리낄 거 없이 좌표를 입력했다.

 [좌표 9982.4421.11579로 이동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창.

 뒤이어 게이트로 들어간다.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이제 곧 부산에 도착할 것이다.

 브랜던.

 SS급의 빌런이 있는 장소.

 놈을 죽이고, 특성을 갈취한다.

 과유불급?

 분명 쓸데없이 많은 특성은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걸 굳이 과유불급이란 이유로 안 얻을 이유가 없었다.

 이전에 언급했던 바와 똑같다.

 이번이 아니면 어차피 전부 사라질 허상들이다.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얻을 수 없는 보화.

 그렇다면 '내'가 먹어 잘 소화하는 게 올바르리라.

 그래.

 '모조리 독식해주마.'

 이전석의 눈이 불꽃과 같이 이글거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49화

독식 (4)

마법사란 마나를 다루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들은 마나로 육체를 강화하거나 보호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현상을 창조하여 현실 속 법칙을 일그러트리곤 했다. 

 그중 고유세계는 마법사들이 생애를 거쳐 쌓아온 모든 지식과 경험을 고스란히 재현한 결계 마법이었다. 

 공간과 공간을 분리해, 영혼에 새겨진 경험을 세계라는 형태로 빚어낸다.

 다만 공간 그 자체를 분리한 영향일까.

 고유세계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극단적으로 느리게 흐른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전석이 제때 도착할 수 있던 것도 바로 그 덕분이었다.

 다른 지역에선 이미 한참 전에 전투가 끝났지만, 김백동과 에밀리가 있는 송도는 여전히 전투가 제대로 시작되지도 못한 상태였다.

 "헌터님께서 여긴 어떻게······."

 갑자기 포탈 속에서 등장한 이전석.

 김백동이 의문 섞인 어조로 물었다.

 이전석으로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포탈 게이트가 나타나더니 저를 빨아들이더군요. 대처할 틈도 없었습니다."

 "빨아들였다? 그건······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김백동이 재차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걸.

 포탈 게이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그중 인위적인 포탈은 이전석이 말한 대로 발동하기엔 아직 기술이 한참 모자랐다.

 포탈에 대한 연구가 가장 앞선 미국에서도 그에 대해선 죽을 쓴지 오래였으니.

 적어도 현대 기술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세종으로 이동됐다가··· 바로 다시 이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도중 유하나 씨도 포탈 게이트에 휘말리시는 걸 봤죠."

 이전석의 말을 들어보면 자연적인 현상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그렇기에 더 당황스러운 것이다.

 "으음···."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김백동.

 반면.

 "······."

 브랜던이 그들을 가만 응시했다.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다.

 현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런 기습과 포탈 게이트의 등장.

 모든 게 그저 어지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겠군.'

 브랜던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갑자기 왜 포탈 게이트가 열렸는지, 그곳에서 나온 게 뭐하는 놈인진 모르겠지만···.

 '저놈을 인질로 삼는다.'

 브랜던은 작금의 위기를 그렇게 파훼하고자 했다.

 결정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도깨비의 혼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동시에 전신에 활력이 깃든다.

 외뿔이 한층 더 길어지고-.

 [육체가 강화됩니다.]

 안 그래도 커다랬던 몸이 더욱 부피를 늘려 증대했다.

 그리고.

 콰앙-!

 이전석을 향해 돌진했다.

 빠른 속도.

 눈으로 쫒기도 힘들다.

 "흐음."

 그때.

 촤락-!

 땅바닥을 부수고 쇠사슬이 솟구쳤다.

 아니, 과연 이걸 쇠라고 해도 될까.

 새까만 사슬 위로 은하수의 빛이 물결치듯 흐르고 있다.

 그것이 촉수처럼 여러갈래로 나뉘어 브랜던을 구속했다.

 "크윽······!"

 브랜던이 이를 악물었다.

 도깨비의 힘을 이용해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고작 3미터 앞으로 나아갔을 뿐.

 사슬은 여전히 그를 휘감은 채였다.

 부술 수도, 떨쳐낼 수도 없다.

 같은 SS급임에도 이만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고작 고유세계 하나를 발동했을 뿐이건만, 에밀리의 마법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져 있었다.

 "그래서."

 에밀리가 그런 브랜던을 무시한 채 김백동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까요? 예상외의 상황인 건 맞지만, 이대로 후퇴하면 협회의 계획은 싸그리 물 건너 갈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 대로다.

 이전석이 갑작스레 나타난 것.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대로 후퇴하면 브랜던을 놓치고 말 거다.

 그를 다시 잡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화산이 과연 그때까지 가만히 있을까? 여명회는?

 "······."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김백동.

 그는 곧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요격하겠습니다."

 그는 포탈 게이트란 미지의 위험보다, 당장 브랜던을 놓치는 게 더 큰 위험이라 판단했다.

 다만, 그는 이전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헌터님께서 협회장님께 현 상황을 보고해주셨으면 합니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극히 한정적인 상황에선, 그녀와 연락이 가능한 이전석을 보내는 게 맞으리라.

 "예."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김백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려던 차.

 "크아악!!"

 돌연, 브랜던이 괴성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그를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 산산조각 났다.

 굉음과 함께 푹 파이는 땅바닥.

 "······이걸 부숴?"

 에밀리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곧 그녀가 다시 마법을 사용했다.

 "셰네, 에투알."

 은하수를 담은 사슬이 땅을 꿰뚫고 솟구친다.

 이전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한 사슬.

 사슬에는 장미처럼 뾰족한 가시 같은 것들마저 돋아나 있었고, 그게 브랜던의 몸을 휘감아 더욱 단단하게 고정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브랜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태연하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입에서 파란 불덩이가 튀어나온다.

 '뭐지?'

 에밀리가 의문을 내비쳤다.

 직후, 브랜던이 고개를 떨구었다.

 흡사 죽은 것만 같은 모습.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심장박동도 마찬가지.

 피부에서 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이라는 듯, 브랜던으로부터 튀어나온 불꽃이 돌연 사람의 형태를 취했다.

 기다란 외뿔.

 옥색의 피부.

 3미터는 될법한 신장.

 틀림없다.

 브랜던이었다.

 분신일까?

 아니.

 '오히려 반대로군.'

 이전석은 브랜던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금세 파악했다.

 사슬에 구속된 브랜던의 몸이 진흙처럼 허물어진 것이다.

 반면 점점 더 또렷이 사람의 형태를 갖춰가는 불꽃.

 원리는 모르지만, 브랜던은 불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뒤바꾼 것 같았다.

 '도깨비의 술법을 사용했나?'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콰앙-!

 이내 브랜던이 도약했다.

 어마무시한 점프력.

 하늘 높이 뛰어오른 그를 사슬이 뒤쫓는다.

 뚜득-.

 브랜던이 공중에서 몸을 뒤틀었다.

 팔과 다리, 허리와 목.

 전신의 뼈와 관절이 어그러진다.

 그리고 그 사이로 사슬이 비껴나갔다.

 에밀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바뀌었어.'

 무언가.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 그는 이전의 브랜던이 아니었다.

 그래도 명색이 SS급 각성자라는 걸까?

 에밀리는 침착하게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 끝, 새까만 구체가 형성된다.

 구체는 곧 폭발을 일으키며, 일직선으로 브랜던을 향해 쏘아졌다.

 헌데, 이번에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비껴나갔어?'

 마법이 미세하게 구부러진 것이다.

 에밀리의 마법을 피해 허공에서 궤도를 꺾은 브랜던.

 그가 반쯤 돌아간 목으로 이전석을 쳐다봤다.

 '고유세계를 부수는 것도, SS급 두 놈을 상대하는 것도 불가능.'

 그러니.

 '지금은 저놈을 인질로 잡고 이곳에서 탈출한다.'

 자신에게 접신한 도깨비.

 그 영혼을 소멸시켜 육체를 강화했다.

 에밀리의 공격을 비껴낸 것도 그 일환이다.

 요괴의 영혼을 대가로 현실을 비튼 것이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전투력이 상승했으나, 그것도 잠깐일 뿐.

 곧 반발이 찾아올 터였다.

 그 전에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

 아무리 요괴를 재물로 사용한다 해도, SS급 두 명을 상대한다는 건 브랜던으로선 요원한 일이었음으로.

 그렇기에 브랜던이 노린 건 이전석이었다.

 '누구 짓인지 모르겠지만, 저 애송이는 고맙게 사용하도록 하지.'

 브랜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가 뒤틀린 몸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쾅-!

 마나를 발판 삼아 이전석을 향해 재차 도약했다.

 금세 가까워진 이전석과 브랜던의 거리.

 "어리석군."

 물론, 그걸 가만 지켜볼 김백동이 아니었다.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는 김백동의 신형.

 동시에 그가 이전석 앞에 나타난다.

 순간이동?

 아니다.

 다만 그와 비견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바람이 뒤늦게 찾아와 주변을 휘몰아친다.

 김백동이 가진 두 가지의 특성 중 하나.

 '최속(SS).'

 오직 속도 하나만을 세상조차 농락할 만큼 빠르게 만들어주는 특성.

 그러나, 어째서일까.

 "어리석은 건 네놈이겠지!"

 브랜던의 외침이 있은 직후.

 김백동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석을 지키듯 그 앞으로 향했던 그가, 뜬금없이 한참 떨어진 장소로 이동해 있던 것이다.

 정확히 300미터 가까이 떨어졌다.

 밀린 것도, 날려간 것도 아니다.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만 같은 광경.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두억시니의 영혼이 소멸합니다.]

 두억시니.

 이름 높은 악귀의 소멸.

 [격을 상실합니다.]

 흔히 신격이라고도 불리는 것마저 한 꺼풀 벗겨져 나갔다.

 [몽달귀신의 영혼이 소멸합니다.]

 [격을 상실합니다.]

 브랜던은 자신이 소유한 요괴와 신격을 대가로 받쳐, 현실을 어그러트렸다.

 김백동의 위치를 점점 더 멀리 떨어트린다.

 그때마다 보유한 요괴와 신격이 점차 줄어들었만, 브랜던은 아낄 게 없었다.

 가진 모든 걸 잃는 게, 이곳에서 죽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의 요괴.

 두 번의 탈각을 겪으며 얻은 신격.

 그것들을 모두 제물로 삼아 김백동을 최속으로도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떨어트린다.

 "미친놈이네요."

 에밀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 또한 이전석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신격을 희생하다니.'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

 탈각이 신으로 진화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듯, 신격이란 S급 이상의 헌터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힘이었다.

 헌데 브랜던은 그것을 이토록이나 쉽게 소모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떨어지면 손쓸 수 없어.'

 에밀리가 쯧- 혀를 찼다. 

 그녀의 고유세계는 어디까지나 특정 마법의 발동을 위한 것.

 때문에 고유세계로서 가질 수 있는 많은 이점을 포기했다.

 다른 마법사들처럼 고유세계 내에서의 자유로운 전이가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부유나 텔레포트를 사용해 최대한 거리를 좁히고 있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멀어지는 속도가 빨라.'

 물론 이것도 언젠가는 끝날 거다.

 요괴의 수와 브랜던이 가진 신격.

 그건 무한한 자원이 아니었으니까.

 끝이 나면?

 브랜던으로선 두 SS급을 감당할 수단이 없다.

 문제는, 브랜던이 이전석을 노리고 있다는 것.

 그래.

 그게 문제다.

 '감히.'

 에밀리는 드물게 화를 냈다.

 보석을 이다지도 좋아하던 그녀다.

 그녀는 사람의 재능을 좋아했다.

 그 아름다움과 찬란함에 열광했고, 그렇기에 더욱 그것들이 망가져 버리는 것에 분노했다.

 보석이 스스로 무너진다면, 괜찮다.

 그게 그 보석의 한계라는 거니까.

 참을 수 없는 건 그 보석이 타인에 의해 짓밟혀 망가졌을 때였다.

 휘릭-.

 에밀리가 지팡이를 돌려 잡았다.

 역수, 로 잡았다고 해야 될까.

 지팡이의 위와 아래가 반전됐다.

 그 상태로 주문을 읊었다.

 "라테르."

 지팡이 끝.

 그곳에 별 모양의 보석이 형성된다.

 분명 협회는 다양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에밀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마법사야말로 불가사의의 덩어리였으니까.

 예외에 대처할 수 있는 예외.

 법칙의 굴레에서 벗어난 유일한 존재들.

 그중에서도 권좌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밤하늘에 다다른 에밀리가 현실을 일그러트렸다.

 "아스투아."

 두음절의 주문.

 공간이 종이 접히듯 사라진다. 

 김백동과 브랜던.

 브랜던과 에밀리.

 그들의 거리가 재차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포탈 게이트가 형성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포탈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것도 이전석과 브랜던을 둘러싸듯이.

 '······지금 이 타이밍에?'

 에밀리가 의아한 눈빛을 띄었다.

 설마 브랜던을 도우려는 제 삼자가 개입한 걸까?

 의심을 더 이어갈 틈도 없었다.

 김백동과 에밀리.

 두 사람이 채 손을 뻗기도 전.

 쿠구구구-.

 이전석이 브랜던과 함께 게이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헌터님!!"

 김백동의 처절한 부르짖음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 ※ ※

 어지럽게 일그러지는 시야.

 곧 밝은 빛이 그 사이를 꿰뚫고 들어온다.

 이전석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

 모래사장 위로 파도가 친다.

 뒤를 돌아보자 숲이 보였다.

 '잘 도착한 모양이군.'

 전생의 기억을 되살려 사람이 없는 무인도로 좌표를 잡았는데, 다행히 포탈 게이트가 잘 작동한 듯했다.

 물론.

 "후우······."

 그렇다면 당연히 브랜던도 있겠지.

 "하필이면 거기서 포탈 게이트가 형성되다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뚜둑-.

 목을 풀며 말하는 브랜던.

 그가 이전석을 바라봤다.

 두 배는 더 차이 나는 신장 덕분일까.

 시선이 허공에서 사선으로 마주쳤다.

 "네 입장에선 지지리도 운 없는 일이겠어, 애송이."

 브랜던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방금 그 포탈 게이트는 자신을 도와주려 한 것이 분명했음으로.

 그러나.

 "브랜던."

 이전석이 무감각한 어조로 말했다.

 사냥감일 터인 그는 떨지 않았다.

 어째서지?

 이 상황이 두렵지도 않은 걸까?

 의문도 잠시뿐.

 곧, 이전석이 의미모를 말을 내뱉어왔다.

 "방금 몇 마리의 요괴를 사용했지?"

 "······뭐?"

 "SS급인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느라 꽤 많은 요괴를 소멸시켰겠지."

 "······."

 브랜던이 입을 다물었다.

 여유와 비웃음이 가득하던 표정에 어느새 차디찬 살기가 깃들었다.

 "대충 70··· 아니 80%는 소모했겠어. 주로 사용하던 거물급 요괴는 당연히 전부 잃었을 거고."

 무엇보다.

 "신격은 얼마나 남았지?"

 그 말에 브랜던의 얼굴이 종이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꼴을 보니 대부분 잃었나보군."

 이번엔 이전석이 그를 비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본디 A급과 S급을 구분 짓던 건 압도적인 스탯 차이가 아닌 신격으로 인한 간격이었다.

 신격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 둘 사이에는 큰 절벽이 있었다.

 신격이 없다면?

 공격은 제대로 먹히지 않고, 애써 펼친 방어조차 손쉽게 뚫리고 만다.

 이종근과 김지운을 죽인 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신격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상황에서의 정면대결이라면 제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그들을 상대로 승리하기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물며 그게 SS급이라면?

 두말 할 필요도 없겠지.

 허나 지금 브랜던은 어떤가.

 가진 신격을 모조리 잃었다.

 대부분의 요괴를 잃고 특성도 자유로이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단단하기 그지없는 육체에는 강제강화로 인한 반동마저 찾아와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팔다리가 그 증거.

 따라서 현재 브랜던이 지닌 실질적인 힘은 S급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에 불과했다.

 이전석이라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와 정면대결 상황을 만든 게 아닌 셈.

 무엇보다.

 '만약의 경우엔 포탈 게이트를 사용하면 돼.'

 그걸 사용해 도망칠 생각이었다.

 물론 포탈 게이트도 만능이 아니다.

 5회 제안.

 24시간이라는 충전 시간.

 마구잡이로 난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사용 횟수가 한 번 남아 있었다.

 이걸 위해 차은수와 유안빈이 맡은 대전 서구를 포기하고 곧장 브랜던이 있는 송도로 향했다.

 ━다음부턴 다치지마.

 ━또 오늘처럼 다치면 그땐 정말 헌터 그만두게 할 거니까.

 어머니의 말.

 가족의 걱정.

 그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짐승화를 사용합니다.]

 [광폭화를 사용합니다.]

 이전석이 두 가지의 특성을 사용했다.

 동공이 붉게 물들며 일자로 찢어진다.

 손톱이 길어지며 송곳니가 생기고-.

 "누가 운이 없는지는···."

 이내 그가 적단도를 빼들었다.

 그러곤 씨익 웃으며 자세를 잡는다.

 "두고 봐야 할 일이지."

 이제.

 메인디쉬를 맛 볼 차례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0화

독식 (5)

브랜던의 전투방식은 기본적으로 특성에 의지한 원거리전이다.

 기기괴괴(奇奇怪怪)한 온갖 현상을 일으키며 상대의 허를 찌르는데 능했고, 그렇기에 그는 전사가 아닌 마법계 각성자라 보는 게 옳았다.

 즉, 초근접전에서의 육탄전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콰앙-!

 마나의 갑옷과 적단도.

 두 힘이 맞부딪치며 괴음을 터트린다.

 "이 자식!"

 브랜던이 이를 악문 채 발길질을 했다.

 특성의 연료를 대부분 잃어버린 상황.

 육체강화로 인한 반동 덕분일까.

 SS급의 스탯을 제대로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대량의 마나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길질은 허공만을 때릴 뿐, 정작 이전석에겐 털끝 하나 닿지 못했다.

 분명 위력적인 힘이다.

 속도 또한 어마무시하다.

 모래사장만 해도, 보라.

 발길질 한 번에 모래의 태반이 날아가 그 사이로 바닷물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어왔다.

 물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힘이 쌔고 속도만 빠를 뿐.

 브랜던의 공격엔 실속이 없었다.

 그로서도 쌓아올린 경험이 있겠지만, 전생에 이전석이 겪은 것만큼은 아니었다.

 하물며 무간에서의 기나긴 고통 덕분일까. 이전석의 눈은 권좌들조차 쉬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머리, 왼쪽.'

 이전석이 다음 공격을 예측했다.

 왼쪽에서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주먹.

 예측했다면 피하는 건 어렵지 않다.

 광폭화와 짐승화로 높아진 스탯.

 그것을 십분 활용해 몸을 움직인다.

 부웅-!

 이전석이 자세를 낮췄다.

 정수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공격.

 그 상태로 발을 올려 찼다.

 "큭······!"

 정확히 브랜던의 턱을 가격한 오른발.

 마나로 막은 듯하지만, 의미 없다.

 보호막- 호신강기를 두른 건 이전석도 마찬가지였기에.

 마나조율로 절대적인 마나량을 커버했다.

 컨트롤이라면 애당초 꿇릴 게 없다.

 하물며 브랜던을 보호해줄 신격은 지금은 아주 조금조차 남지 않았으니.

 "이, 망할······!"

 브랜던이 이를 악 문 채 주먹을 내리쳤다.

 흡사 번개가 다가오는 것 같은 위압감이다.

 그러나 이전석은 여전히 침착하기만 했다.

 주먹이 자신과 닿기 바로 직전.

 콰앙-!

 이전석은 코앞에서 발화를 터트렸다.

 그 충격으로 몸이 뒤로 날아갔다.

 바람에 나부끼는 몸.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착지한다.

 팔을 보니 짙은 화상이 새겨져 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아랑곳 않았다.

 이런 건 나중에 해주하면 그만이다.

 포션?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fuck!!"

 브랜던이 자국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잘 보니 그의 가슴팍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나로 폭발을 막은 듯하지만, 열로 인한 고통까지 덮지는 못한 듯했다.

 이전석은 발화가 그렇게까지 고통스러운건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게 의미 없는 의문임을 깨달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브랜던 라우스의 죽음뿐이었음으로.

 탁-.

 브랜던과 거리가 벌어진 사이, 흐트러진 모래사장 위로 손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사이로 파도치며 들어오는 모래와 바닷물.

 [특성 '결계특화'가 당신을 보조합니다.]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지금 이전석은 결계를 펼치려 하고 있었다.

 마나에 술식을 새겨 넣어 발동하는 기술.

 가장 기초적인 마법의 하나.

 본래라면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파훼와는 달리 결계를 형성하기 위해선 마법에 대한 조예가 적잖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흔히 서클이라고 불린다지.

 마법- 특히 결계는 그 서클이 없으면 위력이나 범위, 효과 등이 대폭 줄어들곤 했다.

 하지만 이종근의 결계특화 덕분일까.

 굳이 서클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런 게 없이도 온전한 결계를 만들 수 있게 된 것.

 물론, 평소였다면 그런 이점이 있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바로 사용하는 건 꺼렸겠지만······.

 '결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전석이 가진 그 지식은 이미 권좌와 필적할 정도였으니.

 [흑관(黑棺)이 발동합니다.]

 이전석의 손바닥.

 그 아래.

 흡사 마법진과도 같은 새까만 술식이 펼쳐진다.

 "무슨 짓을······!"

 브랜던이 당황하며 경계했다.

 술식은 넓게 퍼져 그의 발아래까지 번졌다.

 이윽고.

 차라락-!

 술식을 토대로, 사방에서 새까만 벽이 솟구쳤다.

 이내 하늘마저 가려버린 그것은 말 그대로 '관'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을 자아냈다.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전석은 조용히 적단도를 다잡았다.

 '빠르게 끝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곧 특성의 지속시간이 끝날 터.

 그럼 이전석이라도 힘들어진다.

 그러니 이 흑관을 이용해.

 '녀석을 죽인다.'

 탓-!

 이전석이 땅을 박찼다.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

 소리는 물론 후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한때 세계의 권좌가 사용했던 흑관은 철저하게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결계였다.

 [대상 '브랜던'에게 약화 저주가 부여됩니다.]

 ['브랜던'의 모든 스탯이 하락합니다.]

 약화저주.

 흑관의 효과.

 그러나 이전석이 흑관을 사용한 건 단지 그걸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스켈을 소환합니다.]

 언데드를 불러내는 이전석.

 스켈이 이전석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리고 즉시 브랜던에게 향했다.

 달려들진 않고, 정확히 그 주변에 멈춰 선다.

 소리와 청각, 후각마저 사라져버린 공간.

 거기에 다른 기척이 나타난다면, 그게 별 거 아닐지라도 브랜던으로선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당황 어린 어조로 소리치는 브랜던.

 그 사이.

 이전석이 브랜던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는 굳이 기척을 지우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옅게 기척을 유지함으로서 스켈과 섞여들었고, 그것은 브랜던을 더욱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damn it!"

 브랜던이 재차 욕설을 지껄였다.

 이전석이 그의 목을 노리고 적단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카앙-!

 그래도 SS급이라는 걸까.

 악조건에 악조건이 겹친 상황.

 브랜던은 가까스로 이전석의 공격을 쳐냈다.

 그러곤 한손에 불꽃을 피워냈다.

 푸른색의 도깨비불.

 다만 이전에 비해 그 크기나 밝기가 현저히 작았다.

 어둠을 밝히려는 것 같지만···.

 '소용없어.'

 흑관의 어둠을 지우려면 그 술식부터 파괴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실을 브랜던이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시간대에서 흑관은 아직 세간에 드러나지 않았고, 세계의 권좌조차 연구를 거듭하고 있을 때니까.

 "쥐새끼 같은 놈!"

 자신의 불꽃이 소용없음을 깨달은 브랜던은 오직 감각에 의지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주먹은 빈 허공만을 때리고 지나갈 뿐, 이전석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대신이라는 듯.

 서걱-.

 적단도가 그를 베고 지나갔다.

 "큭······!"

 브랜던의 등에 검상이 새겨진다.

 두 개의 똑같은 기척.

 그것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감각을 교란시키고, 그 사이에서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공격이 튀어나온다.

 고작 두 개의 기척일 뿐이건만, 이전석은 그 두 개를 절묘하게 활용해 브랜던을 교란시켰다.

 '망할!'

 브랜던이 이를 악 물었다.

 굴욕이었다.

 치욕이었고, 모욕이었다.

 SS급인 자신이 S급조차 되지 못한 애송이에게 밀리다니.

 근접전에 취약한 것도 원인이지만.

 '쓸만한 요괴가 하나도 없어!'

 덕분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하물며 지금은 신격도 없었으니.

 "큭!"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도.

 "빌어먹을!"

 브랜던이 분노와 함께 발을 굴렀다.

 그러자 대기가 진동하며 흔들렸다.

 어둠은 여전히 사라질 기미가 없다.

 '아마도 결계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물리력이 통하지 않을 거다.

 결계라는 것 자체가 마나로 이루어진 술식이니까.

 '그렇다면, 강제로 부술 수밖에.'

 브랜던이 전신에 마나를 퍼트렸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두 개의 기척.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놈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마나를 가시처럼 곤두 새웠다.

 그리고.

 ━━!

 폭발.

 마나를 사방으로 분출하며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신격을 잃었다곤 해도 마나까지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 결과.

 흑관이 산산이 부서졌다.

 마나의 폭발이 결계를 술식째로 날려버린 것이다.

 깨져나가는 검은 조각들.

 하늘에서 빛이 스며든다.

 그제야 브랜던은 돌연 난입한 기척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스켈레톤 워리어.

 언데드 몬스터.

 들어본 적 있는 정보다.

 최근 협회의 용병으로 들어간 햇병아리.

 놈이 언데드를 사역한다고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몬스터를 테이밍한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발광?'

 그렇다.

 스켈레톤의 몸이 붉게 점멸하고 있던 것이다.

 그 사실에 의아함을 느낀 순간.

 키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조롱, 그리고 비웃음이 뒤섞인 음성.

 [스켈이 자폭을 사용합니다.]

 "······?!"

 브랜던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열기, 불꽃, 폭음. 충격.

 폭발의 현상이 코앞에서 발아하고 있다.

 마나를 다시 몸에 두를 틈조차 없었다.

 애써 마나를 끌어 모아도 육체강화의 반동 덕분인지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

 "이런······!"

 결국 말조차 채 이어지지 못한 찰나.

 ━━━!!

 흑관이 부서질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폭발이 일대를 집어 삼켰다.

 ※ ※ ※

 모래가 고열에 타들어간다.

 바닷물이 증발하고, 숲은 재가 되어 바스라진다.

 무인도는 어느새 불꽃에 잠식되었다.

 하늘 높이 치솟는 희뿌연 재의 연기.

 그 가운데.

 브랜던이 서있었다.

 전신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채, 오른팔은 마른수건 쥐어짜듯 뒤틀려 있다.

 "고작 이 정도로···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쿨럭-!

 브랜던이 피를 토해내며 소리쳤다.

 "아니."

 이전석이 대꾸했다.

 그가 적단도를 치켜들었다.

 과연 그의 말 대로였다.

 자폭은 리스크만큼이나 위력도 커다랬지만, 고작 그 정도에 죽을 브랜던이 아니었다.

 아무리 약화되었다 해도 SS급의 초월자였으니까.

 "미안하지만······."

 이전석이 일보를 내딛었다.

 한 발자국.

 밀려 들여오던 바닷물이 그의 일보에 폭발하듯 비상한다.

 수없이 갈라지는 1초의 연속.

 쨍그랑-.

 이전석을 둘러싸고 있던 마나가 깨져나갔다.

 자폭.

 그 영향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호신강기와 다수의 방어용 결계.

 그것들은 이미 역할을 다 했다.

 브랜던과 달리 이전석은 사지가 멀쩡했고, 이러한 상황 자체가 바로 이전석이 노리던 바였으니.

 "방금 건 그냥 시간벌기였어."

 그래.

 시간벌기일 뿐이다.

 단 하나의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천매보를 사용합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동시에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이보(二步).

 일보에서 더 나아간 한 걸음.

 이전석이 땅을 짓밟듯 도약했다.

 직후.

 쩌엉-!

 대기가 폭발했다.

 소닉붐이 퍼져나가며 바닥이 푹 파였다.

 그것은 더 이상 천매보가 아니었다.

 이전석의 발걸음은 조용하고 은밀하며 더없이 아름답던 연선화의 그것과는 현저히 동 떨어져 있었다.

 오히려 이전석은 파괴적인 일보를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서 체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이보였다.

 연선화의 움직임을 따라할 뿐인 일보와는 다르다,

 천매보 - 이보.

 그것은 일보의 파괴력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오직 이전석만의 보법이었다.

 [천매보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천매보의 이름이 '천보(千步)'로 변화합니다.]

 [천 가지의 발걸음은 당신을 더욱 높은 영역으로 이끌 것입니다.]

 천보.

 천매보의 이름이 바뀌었다.

 아무렴 알 바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적단도를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리긋는다.

 그리고.

 "크아악-!!"

 브랜던의 절망 섞인 비명 속.

 [절개를 사용합니다.]

 새빨간 피의 꽃이 만개했다.

 ※ ※ ※

 "어서!"

 이전석이 사라진 직후.

 김백동은 바로 협회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다른 팀원들도 있었다.

 "팀장님! 이, 이전석 헌터님이···!"

 "알고 있다."

 그중 유독이나 당황한 아냐를 김백동이 진정시켰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눈물.

 그녀의 이런 모습은 김수현이 죽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주의했어야 하는데."

 아야미네가 고개를 푹 숙인다.

 김백동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그를 다독였다.

 빌런 A.

 놈을 확실하게 제압하기 위해 본신이 직접 나섰지만, 설령 아야미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들 이전석이 포탈 게이트로 흡수되는 건 막진 못했을 터였다.

 정작 김백동 본인도 그를 놓치고야 말았지 않은가.

 "일단 가능한 많은 인력을 동원해 헌터님을 찾고 있으니 모두 진정하고 기다리도록."

 진정해라.

 우스울 따름이다.

 정작 가장 진정을 못하는 건 김백동 자신이었으면서.

 "후우······."

 김백동이 숨을 짙게 내쉬었다.

 도저히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었다.

 바로 코앞이었다.

 그런데 절묘한 타이밍에 포탈 게이트가 나타나 이전석을 구할 수 없었다.

 죄책감.

 ━저희 아들 잘 부탁드릴게요.

 그의 어머니가 직접 찾아와 고개를 숙이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김백동은 학교 선생님도, 누군가의 보모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도 한때 부모였던 입장으로서 마냥 한유리의 부탁을 내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초월자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SS급.

 초인마저 넘어선 초월자.

 사람들은 김백동을 절대적인 강자로서 칭송하지만, 정작 자신은 사람 한 명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머저리였다.

 "······부디 살아계셔 주십시오, 헌터님."

 김백동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살아 있어요."

 대뜸 에밀리가 그리 말해왔다.

 김백동이 그녀를 돌아봤다.

 왠지 모르게 웃는 듯한 표정.

 뭐가 그리도 즐거운 것일까.

 김백동으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조금은 딱딱해진 어조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리가 포탈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제 마나를 붙여놨거든요."

 손은 닿지 못했다.

 그러나 마나를 부착하는덴 성공했다.

 그 마나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그러니 아직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 에밀리는 설명했다.

 반면.

 "브랜던에게 붙여둔 마나가 사라졌어요."

 이전석과 동시에 브랜던에게 붙여놨던 마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브랜던 라우스의 죽음.

 설마 이전석이 죽인 걸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약화되었다지만 명색이 SS급이다.

 그런 거물이 A급에게 당한다고?

 도무지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에밀리는 그 믿기 어려운 사실을 태연하게 입에 담았다.

 "포탈 게이트로 두 사람이 사라진 직후, 두 마나가 서로 엉겨 붙었어요. 즉, 리와 브랜던이 교전 했다는 소리죠. 그리고 이젠 브랜던의 마나가 사라졌으니······."

 "···브랜던이 죽었다는 겁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에밀리.

 "그럼 위치도 알 수 있으십니까?"

 김백동이 물었다.

 아냐와 아야미네도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에밀리의 대답을 기다리듯이.

 그러나.

 "몰라요."

 에밀리가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아요. 마나를 붙였다고. 그게 위치추적 마법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단순히 마나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추려낼 수 없어요."

 "물론"이라며 에밀리는 의미모를 웃음을 흘렸다.

 "뭐, 그것도 곧 알 수 있지 않을까요?"

 SS급과의 격전.

 하물며 그 SS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까지 했다.

 결코 여파가 적지 않을 터.

 예상대로.

 "팀장님!"

 협회 직원 중 하나가 김백동을 불렀다.

 "인도양에 위치한 호주의 이름 없는 섬에서 거대한 폭발과, 이전석 헌터님의 공격으로 예상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직후였다.

 "당장!"

 김백동은 협회 직원들에게 즉시 명령을 내렸다.

 "당장 포탈 게이트로 좌표 연결해!"

 직원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곧 포탈 게이트 하나가 열리고, 그것을 통해 팀원들이 전부 무인도로 이동했다.

 어지러이 일렁거리는 시야.

 곧 빛이 스며들며 드러난 광경은, 그야말로 거대한 지옥도였다.

 "이게 대체······."

 아냐가 깜짝 놀란 듯 중얼거린다.

 놀란 건 비단 그녀만이 아니다.

 모두가 적잖이 놀람, 혹은 당혹스런 표정을 내비쳤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증발하듯 사라진 모래사장.

 지옥의 일부분을 때어다 놓은 것처럼 불타오르는 숲.

 그리고 그 전체를 가로지른 거대한 검상.

 "허······."

 김백동조차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주 일부에 불과했지만.

 "무인도가······."

 갈라져 있었다.

 검상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생긴 절벽.

 그곳으로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 폭포수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 바로 앞.

 절반으로 갈라진 거대한 바위.

 "좀 늦으셨습니다."

 이전석이 그 위에 걸터앉아 김백동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꽃과 연기, 재가 등받이가 되고.

 흘러내리는 폭포수와 절벽이 의자가 되며.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한 구의 시체는 마치 발등상처럼 놓여져 이 모든 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옥좌로 변모했으니.

 '······.'

 김백동은 그에게서 마치 권좌와 비슷한 기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1화

한여름 (1)

세 명의 간부와 지도자.

핵심 인물들의 몰살.

그로인해 개벽연합은 완전히 붕괴했다.

정확히는 와해되고 말았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잔당.

협회는 각 길드와 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로 했다.

본래라면 그 반대가 되었어야 할 상황.

"모두 헌터님 덕분입니다."

김백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에 이전석이 어깨만 으쓱였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김백동은 이전석을 바라봤다.

브랜던을 죽이고 협회로 돌아온 그는 링겔(포션)을 맞으며 지친 몸을 쉬이고 있었다.

광폭화에 짐승화.

도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과격한 특성을 두 가지나 동시에 사용했고, 그것도 모자라 파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보법에 절개까지 펼쳤다.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지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물었다.

'······안 아프세요?'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 탓이다.

몸을 진찰해 보니 오히려 쓰러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라고 하니, 그가 지금 느끼고 있을 고통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버티고 있냐는 의사의 물음에 이전석은 "적당히"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지금 눈앞의 모습과 같이 말이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헌터님다운 대답이시군요."

김백동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김백동이 지켜봐온 이전석은 항상 그랬다.

그는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남자였다.

유하나? 그녀에겐 먼저 도발을 받은데다 정작 계약서를 작성할 땐 상식적인 선에서 조건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던가.

무슨 말이든 들을 것- 이라고 하긴 했지만, 이전석이 그것을 쓸데없는 사리사욕에 이용할 리 없었다.

적어도 김백동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름 아닌 지금까지 이전석이 보여준 행적이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그보다."

이전석이 나지막한 어조로 김백동에게 물었다.

"포탈 게이트의 원인··· 아니, 범인은 찾으셨습니까?"

그 말에 김백동은 아쉽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가능한 모든 인력을 사용해 범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작은 단서 하나조차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전석은 내심 안도했다.

혹시라도 증거가 남아있을까 걱정한 것이다.

물론 괜한 걱정이긴 했다.

이전석이 만들어낸 포탈 게이트는 특성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인위적인 포탈 게이트와는 다르다.

특성으로 만들어진 포탈 게이트는 자연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형성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마나의 찌꺼기.

인위적으로 포탈 게이트를 일으키면 반드시 남을 수밖에 없는 흔적이자 증거.

김백동은 그게 없어 꽤나 당황스런 듯했다.

그저 우연에 우연히 겹쳐 그곳에 포탈 게이트가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미국조차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진보한 기술을 가진 단체가 있는 건지······.

당연히 그 중 가능성 높은 걸 고르라면 후자였다.

그리고 후자일 경우, 상황이 꽤 골치 아파질 수 있었다.

흔적도, 전조도 없는 포탈 게이트.

그게 언제 어디서 나타나 헌터들을 집어 삼킬지 모른다.

하물며 그런 진보된 과학기술을 가진 단체가 개벽연합을 돕기까지 했으니.

때문일까.

"협회는 당분간 비상 전시상태를 발령할 예정입니다."

김백동이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말했다.

비상 전시사태.

작금의 상황을 전쟁과 동일시하겠다는 의미다.

하긴 여명회나 화산의 존재를 고려하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현재 한국은 내전이 발발하기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니까.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 거겠지.

다만.

"비상 전시상태라면 외부인력은 철저하게 배제되는 걸로 압니다만."

이전석이 김백동에게 넌지시 물었다.

과연 그의 말 대로였다.

협회에서 발령한 비상 전시상태는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반대로 협회내부에 한해선 지대한 영향을 미치곤 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외부인력의 감축이었다.

특히 용병.

협회가 비상 전시상태에 돌입할 시, 용병과 같은 외부인력은 즉시 계약이 종료된다.

이는 계약서에도 명시된 사항이다.

당연히 용병으로 임시 감독관이 된 이전석조차 감축대상에선 예외가 아닐 터.

즉, 이전석이 용병으로서 활동하는 건 여기까지라는 의미다.

"정말 죄송합니다."

김백동이 몇 번째인지 모를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는 곧 "물론"이라며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에서의 공로를 포함해 헌터님께는 나중에 추가적인 포상금 및 아이템이 주어질 예정입니다. 아야미네 특무관 또한 그대로 가족분들의 경호원으로 남겨둘 예정이고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약속은 지켜야죠. 조만간 외국업체에 요구한 집도 완공될 예정이니, 그때가 되면 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이전석이 고개를 숙였다.

그도 적잖이 놀란 것 같은 눈치였다.

'틀림없이 경호원은 빼 갈 줄 알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뒀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아야미네 특무관의 본체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협회에 상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점만은 저희도 어쩔 수 없었는지라··· 거듭 죄송합니다."

즉 가족의 경호는 그대로 두되, 이전석의 경호만 빠진다는 소리.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전석은 별 거 아니라는 양 대답했다.

오히려 이 편이 더 낫기도 했다.

경호와 수발 때문이라곤 해도 상시 누군가에게 감시 당한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뭐··· 이런 것들이야 차치하고서라도, 헌터님께서 정식으로 협회에 들어오신다면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시긴 합니다."

김백동이 옅은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협회는 아직 이전석을 포기하지 않은 걸까.

아니.

오히려 브랜던을 죽인 걸 보고 더 탐이 났을지도 모른다.

브랜던 라우스.

분명 이전석과 교전할 때의 그는 철저히 약화된 상태였다.

특성을 제대로 사용하긴 커녕, 신격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던은 SS급이었다.

그런 강자를 고작 A급이 이겼다?

이전석이라도 그런 인재가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휘하로 들였을 터였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이번에도 이전석의 답은 똑같았다.

협회에 발이 묶이는 게 싫었다.

하물며 지금은 비상 전시상태였고, 협회에서 자체적으로 자유를 보장해줄 수도 없었다.

여러가지 사건사고와 임무에 휘말릴 테지.

당연히, 이전석으로선 원하지 않는 바였다.

"아쉽군요."

하하- 웃으며 대꾸하는 김백동,

이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의무실에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예상대로.

"그럼 편히 쉬시지요. 다음에 또 헌터님과 함께하는 날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드륵-.

김백동이 의무실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이전석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미풍이 스며들어 커튼을 들척인다.

'다음이라······.'

문득 김백동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당분간 만나지 못할 것처럼 말 했지만, 이전석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마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다시 만나게 되리라.

적어도 화산이 봉기를 꿈꾸고, 협회가 그걸 막고자 하는 이상은 말이다.

뚜둑-.

이전석이 어깨를 풀었다.

그리고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링겔을 맞고 있었기 때문일까.

처음에는 몸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는데, 어느새 침대에서 일어설 정도까진 회복했다.

고맙게도 발화의 저주는 에밀리가 치료해줬고.

'이제 하나 처리했군.'

이전석은 개벽연합을 떠올렸다.

그렇다.

이제야 하나다.

겨우 개벽연합 하나만 처리했을 뿐이다.

아직 세상에는 화산이나 여명회, 심지어는 놈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빌런들이 쥐때처럼 널려 있었다.

전국 곳곳에 흩어진 연합의 잔당은 또 어떻고?

'마침 협회에서도 나오게 됐으니······.'

이젠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였다.

여명회는 아직 움직일 낌새가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백화점 지하에 설치되 있던 결계는 권좌급이 아니고선 쉬이 알아볼 수도, 파훼할 수조차 없는 고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깨진 이상 놈들로서는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얼마나 겁쟁이 같은지는 이전석이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

'빠르면 2달··· 늦어도 4달 안에는 움직이겠군.'

적어도 지금 당장 놈들에게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을 터.

그렇다면 남은 건 화산이었다.

'전생에선 개벽연합이 화산의 선봉장이었지.'

정확히는 브랜던 라우스- 그가 화산에서 파견된 앞잡이였다.

전생.

브랜던은 전국의 빌런을 하나로 엮어 개벽연합을 만들었고, 화산은 그런 연합을 이용해 협회가 가진 이미지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협회가 대중에게 신뢰와 민심을 잃었던 것.

그건 다름 아닌 연합을 통한 화산의 공작(工作)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연합은 제대로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말이던 브랜던마저 죽고 말았다.

이는 협회가 아닌 화산에게 있어 심대한 타격이었고, 당연히 화산에서도 작게나마 반응이 나타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전석은 잠시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만 할까.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요리사에게 상급의 재료를 요리하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전석은 재료라는 이름의 정보를 퍼즐 맞추듯 짜맞추며 거대한 계획의 탑을 새워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전석이 상태창을 바라봤다.

시야 한 구석에 떠올라 있는 시스템.

연합을 처리하며 얻은 보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무시했다.

아직 얻을 걸 다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은 놈부터.'

아마 지금쯤 협회 지하에 갇혀 있을 빌런 A- 아니, 한여름.

그를 데리고 협회를 빠져나온다.

물론, 협회는 한여름을 회유시키려 할 거다.

당연하다.

협회의 보안조차 뚫는 능력이다.

그걸 그저 범죄자라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썩힌다?

협회도 그렇게까지 머저리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한여름을 회유시키려 하겠지만, 이전석은 그걸 가만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모든 걸 독식하여 강해지겠다.

그렇게 결심하고, 또한 각오했다.

그렇다면-.

한여름.

그의 능력 또한 독식함이 마땅할 터였다.

※ ※ ※

최승철은 기다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서울 송파구에 존재하는 화산의 본관.

흡사 중세시대 황실을 연상케 하는 저택을 커다란 정원이 둘러싸고 있다.

그 내부 또한 귀풍스런 장식으로 가득했으니.

별처럼 천장을 아로새긴 샹들리에.

바닥 위를 일자로 가로지르는 레드카펫.

양옆에선 촛불이 은은하게 타오르며 온갖 미술품을 밝힌다.

최승철은 그 가운데를 지나 거대한 문 앞에 다다랐다.

알현실.

다른 이들은 길드장이니 마스터니 하는 모양이지만, 적어도 화산에서 이곳은 오직 '황제'만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왕의 위엄이 돋보이는 곳.

그 앞에 다가가자.

쿠구구-.

문이 저 스스로 열리기 시작했다.

최승철은 알현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꽤 넓직한 공간이었다.

탁 트인 곳에 계단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존재했고, 그 언덕의 가장 정상에는 온갖 귀금품으로 장식된 옥좌가 새워져 있었다.

지금은 한낱 관광지이자 역사로 전락했으나, 그럼에도 문화가 깃들어 있는 근정전을 욕보이는 듯한 광경.

그 옥좌에 2미터는 될법한 거구의 사내가 앉아 있다.

온몸이 흉터로 가득하며, 관리되지 않은 산발이 마치 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한다.

그가 바로 화산의 장(將)이자, 5년 내에 열 번째 권좌가 될 것이라 점쳐지는 '화룡검(華龍劍)' 최원율이었다.

그리고 그런 최원율을 중심으로 네 명의 사람이 무릎 꿇고 있었으니.

"늦었구나, 동생아."

최 신.

화산의 첫째 난 아들이자, '작은 용'이라고도 불리는 그가 최승철을 돌아봤다.

"아버님께서 부르셨는데 이리 늦어서야 되겠니?"

다음으로 말을 이은 건 최아린이었다.

차녀.

연금술사라는,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화산의 후계자.

그리고.

"얼굴이 수척해 보이십니다, 형님."

"······."

최강오가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최태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만을 고수했다.

둘 다 최원율의 피를 이어받은 화산의 후계이자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는 헌터였다.

최강오가 사남이고, 최태윤이 오남이다.

최승철은 그중 차남으로, 최신과 최아린 다음으로 화산에서 세 번째 가는 후계서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최은하를 제외한 모든 후계자가 모인 이곳.

"시끄럽구나."

최원율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엄숙하기 그지없는 어투.

"···죄, 죄송합니다!"

최강오가 급히 고개를 숙인다.

최승철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뒤늦게 고개를 숙여 최원율의 위엄을 돋보였다.

가족이 아닌 신하와 왕의 모습을 보는 듯한 광경.

실로 이질적이며 기괴하기 그지없다.

"내가 너희를 모음은 다름이 아니다."

그 가운데.

오직 최원율만이 묵묵히 말을 이었다.

"폐관에 들 것이다."

그 말에 후계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폐관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버님, 송구하오나 지금 화산에선 연합의 실패로 우려 어린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아버님께서 폐관에 들어가신다면······."

장남, 최신의 말.

최원율이 굵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들겼다.

그러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마나의 파동.

"음······."

"큭······."

고작 그것만으로 후계들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렸다.

최원율.

그의 무력은 이미 하늘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신아."

"······예, 아버님."

최신이 숨을 다듬으며 대답한다.

그에게 최원율이 나지막이 물었다.

"내 너의 말을 허락한 적이 있더냐?"

분명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최신은 제 아버지로부터 도무지 숨길 수 없는 기백을 느꼈다.

목이 바짝 타 들어가는 것만 같다.

변명조차 할 수 없었던 최신은 뒤늦게 메마른 목을 짜내었다.

"······없습니다."

"한심한 것. 네가 가장 이곳에 가깝다 하여 무어라도 된 줄 알았느냐? 네 자리는 언제든 형제들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쓸데없는 말은 삼가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최신이 고개를 숙였다.

고통 어린 그의 모습은 마치 이 모든 게 익숙한 일상인 것처럼 보였다.

최원율이 잠시 후계자들을 돌아봤다.

"연합의 실패는 분명 뼈아픈 것이다.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허나 연합은 어디까지나 수단의 하나일 뿐임을 잊지 말아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아버님."

"······."

수긍하는 후계자들.

최원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내가 폐관에 들어가면 화산의 업무를 너희가 분할하여 맡도록 하여라. 나는 자리를 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저 너희끼리 경쟁하고 앞 다투어 화산의 권한을 쟁취하여 위로 올라서라. 그리하면 내가 폐관에서 나오는 날-."

쿠웅-.

최원율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알현신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윽······."

"흡······!"

곳곳에서 새어나오는 신음.

최원율의 기세가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가 후계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화산의 미래가 정해질 것이다."

화산의 미래.

그 말에 후계자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말은 즉슨, 자신들 중에서 최원율의 뒤를 이을 한 명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였으니.

'슬슬 시작되겠군.'

최승철이 짙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화산의 역사상- 한 세대에 한 번씩밖에 진행되지 않았던 '후계혈전(後繼血戰).'

후계자들이 옥좌의 자리를 두고 서로를 죽이는 싸움.

뒤에서 암약하며 작은 검만을 휘두르던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최원율이 후계혈전을 선언한 이상, 최승철을 비롯한 모든 후계자들은 본격적으로 서로를 향해 피를 흩뿌리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 중 가장 강하고 뛰어난 한 명을 최원율은 정식 후계자로 선택하겠지.

"정식 후계가 정해지고 나면 할 일은 하나뿐이다."

긴장감이 내려앉은 알현실.

최원율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쳐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뒤이어진 충격적인 한 마디.

"나는- 협회를 무너트릴 것이다."

어째서일까.

최원율은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은 눈치는 아니다.

다만 짜증나다, 성가시다···. 그런 종류의 감정이 마나를 타고 물신 퍼져나왔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 화산에 없는 매화가 협회의 정상에 피어 있는 것이. 그 아름다움이 심히 역겨웠다."

화산은 본디 중국에서 시작된 길드다.

중국이 칠대 재앙으로 인해 살 수 없는 땅이 되자, 과거 화산의 조상들은 다름 아닌 한반도에 터전을 잡았다.

이윽고 시간이 흐르며 이름이나 문화 등 다양한 부분에서 화산은 변화 했지만, 최원율이 생각하는 화산의 근원은 여전히 중국 높은 산에 핀 매화에 있었다.

━괴이가 화산에 매화를 꽃피웠으나, 또 다른 괴이가 화산의 매화를 짓밟았네.

대대로 장문인(이제는 길드장이지만)에게만 전해지는 한줄기의 시(詩).

던전과 몬스터의 출현으로 화산엔 어째서인지 매화가 꽃피었지만, 칠대 재앙의 영향으로 그 매화는 금세 다시 시들고야 말았다.

덕분일까. 화산의 이름을 물려받은 뒤로 최원율이 품은 목표는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폐관에서 나오는 날, 내 친히 그년의 매화를 빼앗아 화산의 매화로서 대한(大韓)을 드높일 것이다."

그가 꾹 눌러 담았던 한을 토해내듯 선언했다.

"······."

후계자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

이전석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글쎄······.

미래를 아는 그로선 어쩌면 '참 병신 같은 꿈을 꾸는군'이라며 비웃었을지도 몰랐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2화

한여름 (2)

이전석이 링겔을 막 때었을 무렵, 아냐가 의무실에 찾아왔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어딘가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전석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아마 그렇겠지.

이미 한 번 팀원을 잃어버린 그녀다.

또다시 자신의 무력함으로 팀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여전히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위로나 조언은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를 위로해 줘 봤자 그게 하등 쓸모없는 위선임을 이전석은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운명을 비틀라는 퀘스트가 안 떴어.'

시스템이 조용한 이유.

이전석은 아냐가 스스로도 충분히 현 상황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결정 내렸다.

실제로 아냐의 눈빛에선 굳은 각오가 엿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전과 같은 자책이나 슬픔 같은 건 아닐 터였다.

"여기, 제 번호입니다."

아냐가 자신의 번호를 알려줬다.

"헌터님껜 도움을 받기도 했고··· 다음에 곤란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아냐는 거기까지 말하곤 작게 고개를 숙인 뒤 의료실을 나갔다.

'곤란한 일이라······.'

든든한 우군을 얻은 느낌이었다.

이전석은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간단한 검사를 받은 뒤 협회를 나왔다.

그렇게 집으로 귀가하려던 찰나.

[은신을 사용합니다.]

CCTV의 사각지대에서 모습을 감췄다.

마나조율은 물론, 은신자의 코트까지 사용해 기척을 지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밀의 결계'가 발동합니다.]

이전석은 제 몸을 도화지 삼아 전신에 결계의 술식을 새겨넣었다.

물리력을 가지지 않는, 그저 술사의 기척을 한없이 지워줄 뿐인 결계.

그것이 이전석의 주변을 둘러쌌다.

'이 정도면 협회 보안장치에도 걸리지 않겠지.'

S··· 아니, 설령 SS급이라도 이걸 알아차리긴 쉽지 않을 거다.

하물며 이전석의 기척 죽이기는 전생에서의 경험도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으니.

예상대로.

뚜벅, 뚜벅-.

계단을 내려가면서 마주친 누구도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마 CCTV조차 이전석을 찍어내진 못할 터.

정말 세상에서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전석은 유유히 협회 계단을 내려가 지하 20층에 도착했다.

그곳은 층 전체가 거대한 감옥이었다.

경찰이나 군부대에서 감당하기 어렵거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빌런이 국제 감옥 '타르타로스'에 이송되기 전 투옥되는 장소.

이전석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겉보기엔 평범한 감옥이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열악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중세 시대의 감옥과 비슷하다.

단지 이곳이 철통같은 보안으로 유명한 이유는 지하 20층이라는 깊이와 더불어 층 전체에 새겨진 복잡한 결계 덕분이었다.

감옥 입구에 들어서자.

쿠웅-!

무언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과 함께 주변 철창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저 끝도 없이 이어진 복도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

이게 바로 협회 지하감옥에 새겨진 결계였다.

정확히는, 인식왜곡과 환술을 합친 이중 결계.

안내인도 없이 이곳에 발을 들인다면 그자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로를 헤매게 될 것이다.

그 때문일까. 몇몇 탈옥수가 철창 밖에서 미쳐버린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었다.

'반대로 감옥에 침투한 빌런이 출구를 찾지 못해 객사하는 상황도 있지.'

그 정도로 철두철미한 결계였다.

하지만.

차락-.

이전석의 손짓 한 번에 일자로 이어진 복도에 갈림길이 생겨났다.

천장이 솟구치고, 바닥이 올라온다.

마치 큐브처럼 재조립되는 감옥.

미로의 복잡한 길이 한 갈래로 맞추어진다.

결계의 파훼라면 권좌조차 쉬이 뒤따라올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이전석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결계쯤이야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뚜벅-.

이전석이 재조립된 지하감옥을 걸었다.

일자로 이루어진 길의 끝.

오래된 철창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내부.

중학생쯤 됐을까.

꽤나 어려 보이는 소년이 양팔과 다리가 구속된 채 온몸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눈에는 안대를, 입에는 재갈마저 물려 있다.

아주 조금의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모습.

인권 단체가 보면 너무 심한 게 아니냐며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착각해선 안 된다.

눈앞의 소년은 비록 나이는 어릴지언정 전생에서 협회를 무너트리고 대한민국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뛰어난 해킹 실력.

고작 그거 하나만으로 말이다.

철컥-.

이전석이 철창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자물쇠가 절로 풀렸다.

이 또한 마나의 응용이다.

마법으로 잠긴 자물쇠를, 마나라는 열쇠를 사용해 인위적으로 풀어낸 것.

쿵-.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족히 30킬로는 나갈 터인 자물쇠가 땅바닥에 쳐박혔다.

그러자 소년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으··· 으읍······."

사시나무처럼 격하게 떨리는 몸.

두려움이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한여름."

이전석이 그 이름을 읊었다.

그러자 소년- 한여름이 다시금 움찔거렸다.

뚜벅.

이전석은 굳이 발소리를 내며 철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주변에는 기막을 펼친 채, 오직 한여름에게만 말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야, 안 그래?"

"······."

"네 부모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너를 찾느라 전국을 방방곡곡 돌아다니고 있을 텐데, 너는 이런 곳에서 빌런 취급이나 받고 있으니."

"······."

한여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안대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전석은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일단, 한여름을 죽이는 건 불가하다.

정확히는 죽여서 좋을 게 없다고 해야 할까.

'죽여서 특성을 빼앗는 게 편할 수도 있지만···.'

아쉽게도 한여름의 특성은 다른 사람이 사용하기엔 너무나도 특이한 것이었다.

전자 게임(SSS).

육체를 데이터화 해 네트워크 속으로 들어가는 특성.

그 외에도 다양한 부가 효과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은 특성의 이름에 맞게 게임과 같은 형식으로 발동된다.

문제는, 애석할 정도로 이전석이 게임에 재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보단 한여름 본인이 사용하는 게 더 나아.'

그렇다면 한여름을 어떻게 제 수족처럼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한여름의 유약한 마음과, 그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전석로선 말이다.

"처음에는 장난이었겠지."

뒤이어진 나지막한 한마디.

한여름이 몸을 떨었다.

정곡이라는 듯 이를 부닥치며 두려움을 내비친다.

예상대로의 광경에 이전석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각성한 너는 신이 나고 철 없는 마음에 방송국을 해킹했어."

당시 매스컴은 난리가 났다.

뜬금없이 방송국이 해킹되어 잘만 나오던 TV 뉴스에 야한 동영상이 틀어졌으니까.

당시 뉴스 앵커를 맡고 있던 아나운서는 물론 전국의 시청자들까지 놀라고 말았다.

때문에 수많은 경찰과 헌터들이 조사에 착수했지만, 범인이 중학생이라는 걸 제외하면 무엇 하나 알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 중학생이라는 것마저 멍청한 해킹범이 자기 입으로 떠벌린 거였지, 아마?"

이전석에겐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현재로선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사건.

"그때의 일로 자신감이 생겼고, 오만해졌지. 길드, 사무소, 은행, 심지어 게임 포털 사이트까지. 닥치는대로 여기저기 털고 다니다 기어고 화산까지 건드렸을 거야. 그리고······."

이전석이 말끝을 흐리며 한여름을 내려봤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미래의 지식을 고스란히 입에 담았다.

"그대로 화산의 눈에 찍혔을 테지."

"······!"

한여름이 깜짝 놀란 듯 몸을 떨었다.

이전보다 그 떨림이 유독 격했다.

뭐,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다름 아닌 그 화산을 건드린 탓에 한여름은 지금 이곳에 있는 거니까.

툭, 철컥-.

이전석은 한여름의 재갈과 안대를 풀었다.

그러자 호수와도 같은 청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떨리는 동공.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중학생이 이런 상황을 견디긴 어렵겠지.

하지만 본인이 벌인 일이다.

감당해야 했고, 책임져야만 했다.

그것에 나이 따윈 상관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들키지 않았을 거야. 들킬 자신도 없었을 거다. 아무리 화산이라도 네 해킹을 알아내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그런 능력이다.

특성의 효과 자체가 그랬다.

한여름이 조금만 더 노련하고 지혜가 있었다면 화산은 영원토록 그의 해킹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생에서 연합의 도움을 받은 그의 해킹은 협회조차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으니.

하지만.

"지속적으로 화산을 포함해 여러 길드의 네트워크를 해킹하다 결국 꼬리가 밟히고 말았지."

운이 없었고, 그 이상으로 눈치와 실력이 부족했다.

"전적으로 특성에만 의지하는 해킹은 결국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지만, 그걸 간과한 너는 그대로 화산에 납치되고 말아."

그리고.

"네 능력을 눈여겨본 누군가에 의해 목숨을 대가로 협회 네트워크를 해킹하라는 명령을 받았겠지."

그러다 실패했고, 결국엔 협회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결과.

"그거 아나?"

이전석이 철창 밖을 바라봤다.

아직 주변에 기척이 없었다.

결계의 술식을 건드려 안내인이라도 쉽게 이곳까지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대화를 나눠도 될 듯싶었다.

"협회 지하감옥에 투옥된 빌런의 결말은 세 가지다."

이전석은 다시 한여름을 내려다봤다.

"첫째는 사형."

"······."

그 말에 한여름이 몸을 떨었다.

이전보다도 더 떨림이 심했다.

숨까지 격해진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사형을 들먹이면 당연히 무서워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이건 정말 극악무도한 빌런에게나 해당하는 사항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문제는 다른 두 가지 가능성이지."

이대로 국제 감옥 타르타로스에 투옥되어 평생을 그곳에서 썩거나, 아니면 회산에게 이용된 것처럼 협회에게 죄를 감면해 준다는 명목으로 이용당하거나.

"후자는 그나마 나아 보이지?"

이전석은 한여름이 가지고 있을 아주 희미한 희망마저 짓밟았다.

"착각하지 마. 그들은 널 놓아주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한 번 빌런은 영원한 빌런이다.

어떤 감형 사유가 있다고 한들 협회는 빌런을 두 번 다시 민간인으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협회에게 있어 빌런은 쓰다 버리는 도구일 뿐이지."

물론 일부는 틀린 말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 때, 협회는 빌런이라는 이름의 빨간 줄을 지워주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적어도 한여름에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협회의 네트워크도 쉬이 털어버릴 만큼 유능한 인재다.

이런 각성자를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명목이 있다.

협회가 그걸 그냥 포기할까?

설마.

전생에서도 한여름은 협회에게 이용당하다 화산의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전석이 개입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똑같이 흘러가겠지.

"그, 그냥······ 장난이었어요······."

이전석의 말에 겁을 먹은 걸까.

한여름이 울먹이는 어조로 말했다.

"중요한 정보를··· 그런 걸 빼내서··· 다, 다른 곳에 넘긴다던가······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랬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미 협회나 화산이 한여름의 중요성을 깨달아버렸다는 것.

그 누구도 한여름을 포기하지 않을 거다.

이전석 본인조차.

"내가 너를 도와주마."

"······?"

한여름이 이전석을 쳐다봤다.

두려움과 불안, 그 사이에 실날 같은 희망이 뒤섞인 듯한 시선.

"다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게 해주지."

"그, 그게 되나요······?"

"안 될 게 또 있나?"

신분 세탁은 이 세상에서 정말 쉬운 일이다.

물론.

"바로는 못해. 사람을 여럿 거쳐야 하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네가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도 화를 입을 테니."

협회든 화산이든-.

누구나가 탈옥한 그를 잡으려 할 것이다.

혹은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이런 재능과 능력은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제거해 없애버리는 편이 이득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전석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너에 대한 관심이 식고, 신분을 세탁할 때까지 숨어 기다릴 수 있는 장소로 보내주마."

이내 그는 "대신"이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를 위해 일하게 될 거다."

협회나 화산이 아니다.

오직 이전석만을 위해 그 능력을 활용하게 될 거다.

그 두 단체에 이용당할 때와 뭐가 다르냐고?

적어도 이전석은 그를 사람답게 대해줄 것이고, 가족과도 만나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줄 터였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지금 한여름 입장에선 무엇보다 굉장한 호사이자 자비였다.

그 사실을 본인도 깨달은 걸까.

한여름은 곧, 나지막이 물었다.

"그럼··· 다시 엄마랑 아빠를 볼 수 있는 거예요?"

"물론."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희미하게 발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

"사람이 오는군. 일단 이곳을 벗어나지."

이전석이 포탈 게이트를 형성했다.

외부에서 CCTV로 관측할 수 없도록 특별한 결계도 함께 형성한다.

결계 특화.

사용하면 할수록 유용한 특성을 얻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포탈 게이트의 사용횟수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사용횟수는 24시간에 한 번씩 충전됩니다.]

게이트를 형성함과 동시에 떠오른 창.

이전석은 그걸 손으로 밀어 시야에서 치워버렸다.

그러곤.

'마침 최은하 얼굴도 보려고 했으니.'

포탈 게이트에 좌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몇 주 전 최은하에게 알려줬던 주소.

경기도 안양시의 어느 외진 시골 마을.

그것을 좌표로 변경해 그대로 입력한다.

이윽고.

"···으악?!"

한여름을 짐덩이 마냥 들쳐 업었다.

그 상태로 포탈 게이트에 발을 내디뎠다.

'문제는 그 영감한테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냐는 건데······.'

뚜벅-.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단 가고 나서 생각하자.'

일렁거리는 시야.

이전석은 완전히 포탈 게이트로 들어갔고, 곧 주변 시야가 바뀌며 협회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으아아아악!!"

한여름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포탈 게이트의 출구가 하늘에 열려 있던 것.

구름이 아득히 보일 정도로 높은 경치.

바로 위에는 우주의 별빛이 드리워 있다.

'예쁘네.'

이전석은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회귀하고 북한산을 올랐을 때도 그렇지만 높은 곳의 경치는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게이트에서 나온 두 사람을 중력이 아래로 잡아끌었고······.

"사, 살려······!"

한여름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그들의 신형이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콰앙-!!

흡사 지진이 인 것만 같은 충격.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비상한다.

바람이 깨져나간 유리 조각처럼 흩날리며, 나무가 힘없이 쓰러지고 새들이 도망치듯 무더기로 날아올랐다.

그런 상황.

이전석은 의외로 사지 멀쩡했다.

결계와 마나의 보호막 덕분일까.

한여름도 토사물을 쏟아내고 있긴 하지만, 가까스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숲이었던 곳이 거대한 충격으로 움푹 파이고, 절벽 밑의 폭포수마저 그 여파로 산산조각 나듯 갈라져 있었다.

여러줄기로 흘러내리는 물.

숲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음··· Z축 좌표를 조금 높게 잡았나?'

좌표란 게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보니 무심코 실수한 모양.

그래도 너무 낮게 잡아서 흙더미 속에서 압사하는 것보단 나았기에 이전석은 작게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저, 전석 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전석은 고개를 돌려 갈라진 폭포수 사이를 쳐다봤다.

정신 수양이라도 하고 있던 걸까.

물줄기가 여러 방향으로 갈라진 폭포수 밑.

최은하가 흠뻑 젖은 차림으로 입을 떡 벌린 채 이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3화

도술 (1)

폭포가 떨어지는 낮은 절벽.

최은하는 그곳에 앉아 폭포수를 맞고 있었다.

머리가 젖어 옷에 달라붙는다.

손가락 끝은 주름져 쭈글쭈글해졌다.

얼마나 폭포를 맞았는지 모르겠다.

문득.

참새 한 마리가 그녀의 앞에 내려앉았다.

'하늘은 하늘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산이고··· 참새는 참새······.'

끄응-.

최은하가 어딘가 불편한 듯 표정을 찌푸렸다.

이내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푸닥-!

참새가 화들짝 놀라 날아갔다.

"······어렵네."

얼마 전 이곳에 도착하고 '도술'이라는 걸 배우기 시작했지만, 영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정신을 맑게 비우는 게 중요하다곤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눈을 감고 폭포까지 맞아가며 정신 수양을 했음에도 여전히 머릿속에는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일단은 씻자."

온몸이 축축하고 찝찝하다.

최은하가 폭포를 벗어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콰앙-!!

"······?!"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충격과 함께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일고, 정수리로 떨어져 내리던 폭포수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최은하는 뒤로 넘어가려던 몸을 다잡으며 정면을 쳐다봤다.

짙은 흙먼지 사이.

"······저, 전석 씨?"

익숙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바람이 흙먼지를 싣고 날랐다.

그러자 얼굴이 더 또렷이 보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전석.

그가 맞았다.

이전석은 연신 토사물을 쏟아내는 어린 소년을 들쳐 업고 있었다.

이윽고 그 또한 최은하를 발견하더니.

"오랜만입니다."

반가움이 묻어난 어조로 말했다.

※ ※ ※

━영감- 주리천님이 어디 계신지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돌연 눈앞에 나타난 이전석.

그는 주리천을 찾는 듯했다.

현재 최은하가 신세 지고 있는 주인이었다.

이전석이 말한 어르신이자, 듣기로는 중국에서 도술을 연마해 '도화선(道話仙)'으로 유명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정확히는 도사(導師)라고 하던가.

"스승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요."

숲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근처에 있던 흰색 도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최은하가 젖은 머리를 짧게 묶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야 가릴 건 가렸다지만 소복이 물에 젖어 팔과 다리가 뻔히 비치고 있었으니.

평범한 20대 여인이라면 충분히 부끄러워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최은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양반한테 스승이라······.'

이전석은 주리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선 슬쩍 최은하를 흘겨본다.

"왜,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을 더듬는 최은하.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벌써 제자로 입문한 걸까?

원체 고집이 세고 눈이 높은 사람이라 사제관계가 되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도술에 관한 최은하의 재능이 생각보다 뛰어난 모양이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아십니까?"

"음··· 아마 곧 오실 거예요."

최은하가 그렇게 말한 사이였다.

쉭-!

나무 사이를 사슴 한 마리가 지나쳤다.

외뿔이 달린, 이상한 모습의 사슴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그 외에도 멧돼지나 참새도 보였다.

발치를 뱀 한 마리가 훑고 지나간다.

그리고, 심지어는 호랑이까지.

다만 평범한 호랑이는 아니다.

하얀 털.

그렇다. 백호였다.

"헉!"

구속구를 풀고 이전석의 뒤를 졸래 따라오던 한여름이 녀석을 보곤 깜짝 놀랐다.

하긴 뜬금없이 호랑이를 눈앞에서 마주치면 기겁할 만도 했다.

그에 최은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렴. 저 애들은 생각보다 얌전해서 사람을 잘 공격하지 않거든. 그냥 갑자기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잠시 둘러보러 온 것뿐이야. 게다가 산사··· 호랑이는 토지신이라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거나 하지 않아."

"토, 토지신이요?"

"응. 이 산을 지키는 산신령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신···인 건가요?"

"그거랑은 조금 달라. 신이라기보다 그냥 영물이라고 하더라고. 나도 스승님께 들은 이야기지만."

한여름과 최은하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여름이 화산의 피해자이며 당분간 이곳에서 몸을 숨기게 될 것이라 설명하자 최은하는 금세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 듯했다.

그렇게 다시 길을 나아가려던 순간.

쿵-!

백호.

최은하가 산사라고 부르는 토지신이 앞을 가로막았다.

"으악···!"

한여름이 깜짝 놀라 주저앉는다.

"어? 왜 그래, 산사?"

최은하의 물음에도 산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주변을 맴돌며 이전석을 노려볼 뿐.

━그대는 누구인가.

문득.

뇌리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녀린 여성의 음성.

최은하와 한여름을 돌아본다.

그들에겐 산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전석은 뇌리에 울리는 목소리에 답했다.

━이전석.

그러자 산사가 적잖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도술을 사용할 줄 아는가···?

━조금은.

━리천을 제외하곤 도의 가계가 태반 끊긴 줄 알았거늘······.

그렇다.

뇌리에 전해진 음성은 도술의 일종이었고, 이전석도 똑같이 도술로 맞받아쳐 대답한 것이다.

물론 도술에 일가견이 있다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기본만 할 줄 아는 게 전부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눈이나, 기척 및 전투에 관한 센스나···. 다른 여타 부분에선 재능이 이다지도 뛰어난 이전석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도술에는 재능이 없었다.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과연 그 말 대로가 아닐 수 없었다.

터벅-.

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한여름은 기겁하며 물러나고, 최은하는 여전히 산사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가운데, 산사는 오직 이전석에게만 말했다.

━악귀로구나. 아니, 악귀라는 말조차 부족하도다. 수백 년을 이 산의 토지신으로 살며 수많은 아이를 지켰음에도 그대와 같은 영혼은 본 적이 없음이니···.

쿵-!

산사가 앞발을 굴렀다.

대지가 진동하며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사, 산사야! 왜 그래?!"

최은하가 당황하며 산사를 붙잡았다.

산사는 그녀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사방에 몰려든 짐승 무리.

참새, 까마귀, 부엉이, 사슴부터 고라니와 멧돼지, 그리고 사마귀 같은 작은 벌레와 뱀 같은 파충류까지.

숲의 모든 동물이 주변을 감쌌다.

최은하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저 동물은 모두 산사와 같은 영물이었다.

흔히 신수라고도 불리는 존재.

일개 사람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이 쏟아진다.

수십 마리의 영물이 일제히 한 사람을 노려봤다.

그중 단연 기세가 가장 강한 건 호랑이의 형태를 한 산사였다.

━말해 보거라. 어찌하여 이곳에 왔느냐. 나는 아이들의 지킴이이자 수호신. 그대가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주저 없이 물어뜯을 것이노라.

산사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매서운 기세가 이전석을 압박했다.

그러나.

이전석은 도리어 그 기세를 맞받아쳤다.

[지배자의 기백이 발동합니다.]

빌런을 죽이고 얻은 특성.

그것을 시험해 보려 한 것.

그런데.

'음?'

뭔가 이상했다.

[지배자의 기백이 당신의 영혼에 반응합니다.]

[지배자의 기백과 당신의 영혼이 뒤섞입니다.]

[지배자의 기백이 변화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절대자의 기백(SS)을 획득하셨습니다!]

'뭐야?'

뜬금없이 등급이 올라갔다.

이름도 지배자에서 절대자로 바뀌었고···.

변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특성을 사용하면서 생겨난 기운.

그것이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또한 커다랗게 변질되었다.

덕분일까.

━······이건!

산사가 깜짝 놀란 듯 뒤로 물러났다.

하얀 털이 쭈뼛 선다.

금방이라도 이전석을 향해 달려들 것 같던 영물들도 두려움에 젖은 눈빛을 띠며 주춤거렸다.

개중에는 아예 놀라 도망치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헉!"

"저, 전석 씨?"

한여름과 최여름도 적잖이 놀란 눈치.

그리고.

━귀, 귀인을······ 비천한 토지신 따위가 귀인을 몰라 뵙나이다······!

산사가 돌연 고개를 숙였다.

배를 바닥에 대고, 몸을 납작 엎드린다.

이전석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영물들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산사와 같이 고개를 숙였다.

지배자에서 절대자로 바뀐 이름.

그것이 영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까?

이전석은 잠시 효과를 확인해 보려 했다.

하지만.

"또 이상한 놈이 왔구만."

그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에 있는 익숙한 음성.

수풀 사이로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낸다.

짤랑-.

석장을 지팡이처럼 짚고 나타난 노인.

"여긴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살벌한 기세부터 거둬라. 영물들이 놀랐지 않았냐."

그의 말에 이전석이 뒤늦게 특성을 취소했다.

동시에 숲 전체를 둘러쌌던 기운도 사라진다.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산사.

노인이 산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왕(十王)'이 보낸 사자냐?"

노인이 이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왕?

시왕이라면 명계의 신들에게 붙는 이름이 아니던가.

"이토록 악업이 짙은 영혼에 방금과 같은 격을 가진 놈은 시왕이거나 그 아랫것들밖에 더 없지."

아무래도 그는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일단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흐음."

이전석이 정정하자 노인이 의심쩍은 눈빛을 띠었다.

그것도 잠시.

최은하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스, 스승님! 이분이 저를 여기로 보내신 은인분이세요!"

"이놈이 말이냐?"

"네!"

"······."

날카롭게 변하는 노인의 눈.

그가 바로 길 잃은 영물을 거둬들이고 최은하의 스승이 되어준 주리천이었다.

몇 안 남은 도술의 계승자이자, 도화선이라고도 불리는 노인.

"우선······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는가?"

그가 이전석을 바라보며 늦으막이 물었다.

※ ※ ※

숲 한 가운데 펼쳐진 일자형의 거대한 도화지.

그곳에 작은 방이 그려져 있다.

먹을 붓으로 삼은, 서체와 같은 그림.

주리천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들어간 것이다.

"여기로 들어가시면 돼요!"

최은하도 그리 말하며 도화지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뻥 뚫린 문처럼 통과하는 두 사람.

텅 비어 있던 방 그림에 어느새 주리천과 최은하로 추측되는 사람이 그려졌다.

"어, 어어?"

그걸 보곤 한여름이 두 눈을 껌벅였다.

마법으로도 볼 수 없는 신비가 눈앞에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가자."

이전석은 그의 옷깃을 잡고 두 사람을 따라 도화지를 문 삼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도화지를 넘어가자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오래된 느낌의 방이다.

가구 또한 옛 할머니 집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것들.

꽃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옷장, 그 위에 두꺼운 솜이불이 가지런히 정리된 채 올려져 있다.

고작 그림 하나로 연결된 숲의 바깥은 이다지도 평범한 한옥집이었다.

이전석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벽 한 면을 고스란히 장식하고 있는 도화지.

방이 아닌 숲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자그맣게 백호 한 마리가 보이는 것이 산사일까.

끼익-.

주리천이 창호지로 만들어진 방문을 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그러곤 최은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방에 남은 건 이전석과 한여름뿐.

한여름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는 듯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다.

'정신 사납군.'

이전석이 내심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적당히 아무 곳에나 앉아 있어라. 당분간 네가 발 뻗고 자야 할 집이니까."

끄덕.

한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구석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길 수 없는 불안한 기색.

이전석은 그에 대해선 잠시 신경을 끄기로 하였다.

대신.

'잠시 보상 좀 살펴볼까.'

눈앞에 상태창을 펼쳤다.

협회에서 잠시 미뤄두고, 방금 뜬금없이 SS급으로 오른 특성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우선 브랜던을 죽이면서 떠오른 시스템.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백귀야행(SS)을 습득합니다!]

[악인을 죽였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크게 뒤바꾼 악인입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입니다.]

[선업이 '500,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대폭 하락합니다.]

상태창을 보니 선업이 총 59만으로 뻥튀기되어 있다.

두 명의 S급.

그리고 브랜던을 죽인 결과.

확실히 SS급을 죽이니 얻는 선업도 남달랐다.

'그래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얻을 줄은 몰랐는데···.'

이전석은 생각보다 큰 수치에 놀랐다.

물론 전생에 브랜던이 했던 짓을 되돌아보면 50만이라는 선업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선업을 투자한 만큼의 가치가 있었군.'

고작 7만의 투자로 59만의 선업을 얻었다.

실로 놀라운 재테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전석은 시스템 메시지를 지우곤 뒤이어 상태창의 표시된 특성을 확인했다.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B), 업상점, 은신(A), 광폭화(B), 힘의 권위(D), 신속한 발(D), 마나조율(S), 천보, 절개(格), 대기만성(SS), 짐승화(A), 활력(A), 튼튼한 육체(C), 견골(B), 물리내성(D), 결계특화(S), 절대자의 기백(SS), 백귀야행(SS)

결계특화.

절대자의 기백.

백귀야행.

이번에 얻은 세 가지의 특성.

다만.

'더럽네.'

특성의 수가 많아지니 제대로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다.

이전석은 간단하게 상태창을 조작했다.

보통 특성이라면 많아 봤자 2개에서 3개밖에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의외로 상태창은 스마트폰처럼 정리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렇게 빚어진 결과.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업상점

└백귀야행(SS), 마나조율(S), 결계특화(S), 절대자의 기백(SS), 짐승화(A), 은신(A), 발화(B). 망자들의 왕(B), 광폭화(B), 대기만성(SS)

└천보, 절개(格)

(더 보기)

특성의 종류와 급에 따라 줄을 나누고, 그 외 급이 낮고 패시브에 해당하는 특성은 더 보기란에 밀어 넣었다.

이렇게 보니 상태창이 훨 깔끔해졌다.

이전석은 뒤늦게 이번에 얻은 특성들의 효과를 확인했다.

우선 결계특화.

결계특화

등급 : S

효과 : 결계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가지게 된다.

서클이 없이 서클을 가진 것보다 더 능숙하게 결계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특성.

그 효과는 흑관을 사용하며 이미 충분히 겪어봤다.

완벽하다 싶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SS, 혹은 권좌급이 아니고서야 결계술로 이전석을 뛰어넘긴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백귀야행.

백귀야행

등급 : SS

효과 : 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요괴를 길들여 영혼에 보관한다. 마나를 소모하여 포박 및 보관한 요괴의 능력을 꺼내 활용할 수 있다.

*신격이 없는 상태에서 요괴를 거둬들이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요괴에겐 특성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언뜻 망자들의 왕의 상위 호환처럼 보이는 특성이다.

그러나 특성을 양도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었고, 무엇보다 부작용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일단 S급이 될 때까진 보류해 둬야겠군.'

부작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SS급인 이상 단순히 육체에 부하가 걸리는 정도론 끝나지 않을 거다.

지금 당장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는 특성일 터.

마지막은···.

절대자의 기백

등급 : SS

효과 : 무간에서의 경험과 고통은 곧 격이 되어 당신의 영혼에 스며들었습니다. 일정량의 마나를 소모하여 무간지옥의 관리자이자, 명계의 신격 중 하나인 '오도전륜대왕(五道轉輪大王)'의 기운을 흉내 냅니다.

'······과연.'

절대자의 기백.

그 효과를 본 이전석이 내심 수긍했다.

주리천이 시왕이라 불렀던 이유, 그리고 토지신 산사가 기겁을 하며 놀란 원인.

발화가 그러했듯, 지배자의 기백 또한 영혼의 영향을 받아 효과와 등급이 변한 것 같았다.

이거라면 산사가 그렇게 까무러치듯 놀라고 고개를 숙인 게 충분히 이해가 갔다.

영물들은 특히 신적이거나 영적인 존재에게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끼익-.

한참 특성을 살피고 있을 때.

주리천이 문을 열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이전석은 그제야 상태창을 눈앞에서 치웠다.

짤랑-.

석장을 방구석에 내려놓은 주리천.

"우선······ 네놈이 누구고 여긴 왜 또 찾아왔고, 무엇보다 그분을 어찌 알고 있는지 이야기나 해보자구나."

그가 눈을 매섭게 뜨며 말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4화

도술 (2)

얼마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주리천.

"너는 나가 있어라."

그가 한여름을 향해 말했다.

동시에 오른손을 까딱인다.

직후.

"으억?!"

방문이 절로 열리며, 한여름이 무언가에 끌려가듯 밖으로 나갔다.

주리천과 이전석, 오직 둘만이 남은 방 안.

어색한 공기도 잠시, 주리천이 입을 열었다.

"그래, 네놈이 화산의 핏줄을 보낸 장본인이라고."

살벌하기 그지없는 어투.

눈빛만으로도 사람 한 명쯤은 우습게 베어 죽일 듯하다.

그러나 이전석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은하 씨라면 제가 여기로 보낸 건 맞습니다."

그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주리천이 이전석을 노려봤다.

유독 날카로운 눈매 덕분일까.

그 기세가 유난히도 매서웠다.

"나를 알 정도면 내가 화산에 얼마나 한(恨)이 깊은지도 알 텐데."

살기.

무형의 기운이 이전석의 목을 조인다.

여전히, 이전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런 것쯤이야 익숙하다는 듯이.

그런 이전석의 모습이 주리천으로선 기이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할 따름이었다.

"한이 깊기에 차마 은하 씨를 죽이지 못하셨겠죠."

얼마 지나지 않이 이전석이 대답했다.

그에 주리천이 눈쌀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

"어르신이 가진 한 만큼 은하 씨가 가진 슬픔이나 한도 느끼셨을 테니까요. 설마하니 도화선이라시는 분이 일반인 한 명의 감정도 못 읽어낼까요."

"······."

주리천은 말이 없었다.

정답이었다.

그는 명색이 도사였으니까.

평범한 사람 한 명의 감정을 못 읽을 리 없었다.

뿐이랴. 생각마저 알았다.

잠깐 대화를 나눠본 것만으로 충분했다.

최은하.

그녀는 화산에 대해 결코 적지않은 거부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주리천이 가부좌를 틀 듯 방바닥에 앉았다.

그러고선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호리병의 뚜껑을 따 그 안에 있던 술을 벌컥 들이마셨다.

꿀꺽- 꿀꺽-.

"후우···."

입을 때며 짙게 숨을 내쉬는 주리천.

"도화선···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로구먼."

그가 호리병을 옆에 내려놨다.

그것도 잠시.

이내 호리병의 입구를 손가락으로 툭- 치며 말을 이었다.

"네놈 말 대로다. 처음에 은하가 화산의 핏줄이라는 걸 알았을 땐 어떻게 구워삶아 죽여야 할지 생각했지."

하지만.

"잠깐 대화를 나눠보니 사정이 퍽이나 딱한 아이더구나. 내게 거짓말을 하는 눈치도 아니었어. 하물며 그분의 말까지 함께 딸려서 보내졌으니··· 나로선 은하를 제자로 받아들여 도술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지."

주리천은 그리 말하며 다시 호리병을 손에 들었다.

한때 승려로서 부처와 같이 열반에 들길 바라던 그는 이상할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내 대에서 끊길 줄 알았던 가계는 은하 덕분에 한 세대나 더 이어갈 수 있게 되었지."

처음에는 형식상의 사제관계였다.

진정으로 최은하를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도술은 평범한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녀에겐 재능이 있었고, 그렇기에 주리천은 참 스승으로서 도술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재능이 있었습니까?"

그의 말에는 이전석도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도술만이 가지는 특유의 난해함 덕분일까. 스승은 제자를 만들지 못하고, 자신의 도를 후계에 잇지도 못한 채 죽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어지간히도 재능이 있지 않은 이상 제대로 도술을 배울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 재능이 없어 대부분의 도술은 가계가 끊겼고, 주리천 또한 후계를 구하지 못해 자신의 기술이 유실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돌연 찾아온 최은하.

주리천은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물론 기본만 익혀도 상관은 없기에 최은하를 보낸 거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주리천.

한때 도술의 정점까지 올랐던 그가 다음 세대를 이어갈 수 있다고 표현했다.

그 정도면 최은하의 재능은 적어도 지금까지 주리천이 봐온 사람들 중 거의 으뜸간다고 봐도 좋았다.

"재능뿐이랴. 열정도 있고 바르기도 바르지. 무엇이든 곧잘 고개를 끄덕이는데다, 내가 시키는 거라면 헛간 치우기도 표정 한 번 안 찌푸리고 한다."

즉 성격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도라는 개념을 너무 생소하게 받아들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 같지만, 천재들에게 그런 고민은 찰나에 불과하지. 은하는 곧 다음 경지로 발을 뻗을 것이야. 그래··· 너희 각성자들의 잣대로 표현하자면 B급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좋겠구나."

B급.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전석이 최은하를 이곳에 보내고 얼마나 지났던가.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각성자도 아니면서 B급 각성자와 맞먹는 강함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은 최은하가 얼마나 도술에 관하여 재능이 있는지 알려주었다.

"······뭐, 지금은 시답잖은 이야기다만."

꿀꺽, 꿀꺽-.

주리천이 다시 호리병을 들이켰다.

그는 어느새 텅 빈 호리병을 도로 바닥에 내려놓으며 이전석을 쳐다봤다.

그러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종이.

정확히는, 메모지.

이전석이 최은하게에 적어 보내줬던 그 쪽지였다.

━은(恩)을 갚을 시간이오, 노괴. 이 아이를 제자로 삼아 보호해 주시오.

"네놈은 내게 은을 갚으라 했다. 허나 내가 은을 입은 사람은 오직 한 분밖에 없어."

주리천이 주먹을 쥐었다.

주먹 사이로 손톱이 파고들며 피가 뱄다.

분노, 증오, 원망, 고통.

그러한 감정들이 꽉 차서 채 담아내지 못한 물처럼 흘러내렸다.

"일찍이··· 내 아들과 며느리는 화산에게 죽임당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뿐인 손녀마저 죽을 뻔했지만,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선인(仙人)분 덕에 손녀만은 살아남았지."

"······."

"송장(送葬). 그분의 이름이다. 정확히는 내게 알려주신 별호였지. 은인께선 송장이란 별호로 전 세계를 떠돌며 도를 닦고 계셨다. 나는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었고, 그러자 송장께선 훗날 내 도움이 필요해지면 '노괴'라는 암호와 함께 쪽지 한 장을 보낸다고 하셨어."

그렇다.

이전석이 보낸 쪽지와 똑같은 내용.

"허나"라며 주리천이 눈을 부릅떴다.

"네놈은 송장, 그분이 아니야."

휘릭, 착-.

방구석에 있던 석장이 빙글 회전하며 주리천의 손에 쥐어졌다.

쿵-!

주리천이 석장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말해라. 네놈은 누구냐. 어찌 나와 그분의 암호를 알고 있는 게지?"

협박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분신이라도 쓰듯 여러 개로 늘어난 석장.

그 끝의 날카로운 침이 이전석을 노렸다.

360도.

전 방향에서 이전석을 노리는 석장.

조금이라도 말을 그르치면 주리천은 즉시 모든 석장을 내찌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전석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왜 그러느냐? 설마하니 겁을 먹은 건······."

주리천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덜컹-.

방문이 흔들거렸다.

휘잉-.

문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바람이 창호지로 만들어진 방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불어닥쳤다.

"이건······."

주리천이 눈을 찌푸렸다.

마치 소용돌이치듯 방안을 맴도는 바람.

자연적인 폭풍이 아니다.

그렇다고 마법인 것도 아니다.

'도술?'

그랬다.

방안을 휘몰아치는 바람은 도술의 일종이었다.

그것도 꽤나 수준 높은.

그렇다면 누가?

최은하는 아직 이 정도의 도술을 다루지 못한다.

애당초 바람은 자연지기 중 하나.

도술에서도 자연은 다루기가 가장 난해한 것이었고, 기초만 익히더라도 둔재라면 족히 10년은 걸릴 기술이었다.

아직 최은하가 다룰만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범인은 한 명뿐.

"네놈······ 도사의 가르침을 받은 게냐?"

주리천이 이전석을 쳐다봤다.

예상대로.

그의 손아귀로 바람이 모여들었다.

바람이 회색이라는 형태를 띄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선으로 회전하던 바람은 곧 상자와 같은 모양새를 취했다.

아니.

그것은 상자라기보다 '관'의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건 송장의······."

주리천이 깜짝 놀란 듯 중얼거렸다.

도사들에겐 제각각 자신만이 가지는 별호와 증표가 존재했는데, 이전석이 만들어낸 관은 다름 아닌 송장의 증표였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각 도사마다 전혀 다른 기법과 비법이 숨겨져 있어 쉽사리 따라 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따라하더라도 모양새만 같을 뿐.

그러나.

'······술식이 그분과 완전히 똑같다.'

몇 년 전 보았던 송장의 증표와 완전히 일치하는 술식.

주리천이 이전석을 바라보았다.

혹 이자가 송장 본인인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도사는 분명 기이하고 괴괴한 술법을 사용하지만, 몸을 바꾸거나 어려지는 사이한 술법까지 사용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단순히 변장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즉,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데도 증표가 이리도 똑같다는 건···.

"네놈, 송장과 무슨 관계지?"

"···어르신처럼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증표는?"

"송장께 배웠습니다."

"허면 제자라는 것이냐?"

"제자는 아닙니다. 단지 작은 가르침을 받았을 뿐."

"······."

주리천이 이전석을 빤히 쳐다봤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애당초 송장의 증표가 버젓이 있다.

저건 죽여서 빼앗을 수 있는 종류의 도술도 아니었다.

제자, 혹은 그 이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는 도사만의 증표.

그걸 제자도 아닌 이전석이 가지고 있다는 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오?'

주리천은 이 자리에 없는 송장에게 질문했다.

당연히 대답 같은 게 돌아올 리 없었다.

그저 조용한 정적 속에서 이전석이 펼친 증표만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을 뿐.

그걸 보고 있자니 무심코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도술을 다루는 게 꽤 능숙하군."

증표는 배우기도 어렵고, 형성해 내는 것도 난해한 편이다.

그걸 이리도 쉬이 만들다니.

'아직 어린 나이에···. 은하 같은 재능은 또 안 나올 줄 알았거늘.'

그만큼 이전석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다만.

'······왜 이렇게 잘 되지?'

당혹스러운 건 이전석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본래 도술에 재능이 없었다.

전생에 우연히 송장과 만나 가르침을 청하긴 했지만, 부족한 재능 탓에 제대로 도술을 익히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자.

엄밀히 말하면 맞기는 했다.

송장의 증표를 그가 왜 가지고 있겠는가.

한때는 송장의 제자이기도 했으니까.

그의 증표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으로 도술에 재능이 없던 이전석은 스스로 제자이기를 거부했다.

애당초, 이전석은 송장과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송장은 그 별호답게 죽기 위해 사는 사람이었고, 당시 이전석은 어떻게든 사람을 죽이기 위해 힘을 기르려던 시기였으니.

그래서 제자의 자리에서 내려왔고, 더 도술을 배우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은 도술을 펼치는 게 너무나도 능숙했다.

증표 하나 만들어내는 것만 해도 전생이라면 10분은 족히 걸렸을 거다.

그런데.

'30초도 안 걸렸어.'

순식간에 형성된 증표.

유지 자체도 잘 된다.

이대로 한 시간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지?'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없던 재능이 생겨버렸으니.

아니면 재능이 뒤늦게 발아한 걸까?

'······.'

자신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건지 통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이전석을 겨누고 있던 석장이 사라졌다.

주리천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송장께서 너를 믿으시는 모양이니, 나도 너를 믿으마."

사실 믿는 것밖엔 길이 없기도 했다.

이제와서 최은하와 함께 이전석을 내치랴?

증표까지 있는 마당에 그런 행동은 송장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이라며 주리천이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있구나. 너는 은하로도 모자라 아직 약관도 못 넘긴 놈까지 이곳으로 데려왔다. 필히 또 나에게 맡기려는 것일 터."

주리천은 다시 호리병을 손에 들었다.

그러다 뒤늦게 내용물이 텅 비었다는 걸 깨닫고 혀를 찼다.

그가 호리병을 툭- 두들겼다.

직후, 신묘한 빛과 함께 찰랑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술이 채워진 것이다.

이 또한 도술의 일종이었다.

주리천은 수없이 많은 도술 중에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술을 솟아나게 만드는 도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때는 승려였던 주제에 말이다.

꿀꺽-.

이윽고 호리병 속 술을 한 모금 들이킨 주리천이 다시 이전석을 쳐다봤다.

"너는 무얼 하고 싶은 게냐."

뒤늦은 한마디.

이전석은 잠시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면서 손 위로 형성된 관을 빤히 쳐다보다, 석장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다시 바람으로 변화시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데리고 온 아이··· 한여름도 화산의 피해자입니다. 본질적으로 한여름 본인이 잘못한 점도 없진 않지만, 화산 때문에 빌런으로 몰려 가족과 생이별할 처지에 놓였죠."

그뿐만이 아니라며, 이전석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은하 씨는 또 어떻습니까? 화산에 한이 있고 미련이 있으며 그 화산을 바꿔놓고자 합니다. 저도 화산에는 좋은 감정이 없고요."

모두 화산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살의가 있고 살기가 있으며 한과 미련이 있다.

그렇다면 주리천은 어떤가.

"어르신은 화산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전석의 물음에 주리천이 까득 이를 갈았다.

"쳐 죽일 놈들."

그래.

그럴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다.

송장이라는 도사 덕분에 손녀만은 구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부모였다.

가족을 잃은 슬픔.

이전석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오히려 잘 알기에 주리천에게 동감했고, 전생에선 그와 함께 화산을 멸망시켰다.

"이 집에 있는 모두가 화산을 원망합니다. 증오하고, 분노하고, 그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죠. 그러니 제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전석이 주리천을 마주 보았다.

"저는 화산을 무너트릴 생각입니다."

단순 무너트리는 걸로 끝나리?

아니다.

그는 화산이라는 길드의 구조 자체를 뒤바꿀 생각이었다.

다름 아닌 최은하를 통해서 말이다.

"도와주십시오."

나지막한 이전석의 부탁.

주리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딘가 곤혹스러운 듯한 표정.

이를 갈던 방금 전과는 다르다.

"나는······."

그는 망설이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뒤늦게나마 말을 이으려던 찰나.

쾅-!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전석과 주리천이 호기차게 창호지 문을 열어젖힌 그 누군가를 바라봤다.

"할부지!"

생각보다 더 여리고 어리숙한 목소리.

거기에 땅딸막하니 쪼끄만 신장.

갈색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있다.

이제 막 유치원은 들어갔을까.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여자아이가 대뜸 방으로 들어와 주리천에게 매달렸다.

"할부지, 할부지!"

주 린.

주리천의 하나뿐인 손녀딸.

"으음."

갑작스런 난입에도 주리천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제 손녀를 품에 안았다.

"우리 린이가 여기까진 왜 왔을까?"

"린이 아스크림 먹고싶어요!"

아이스크림이라.

주리천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집에 있던 건 다 어디가고?"

헉.

주린이 깜짝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어쩌지 싶은 눈치로 양손을 꼼지락 거린다.

그러다 작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 언니야가 머겄어요."

"우리 린이가 다 먹은 건 아니고?"

나지막한 주리천의 물음.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려대던 주린은 이내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외쳤다.

"때, 땡구도 머겄어요!"

땡구.

집에서 키우던 반려 강아지였다.

하얀색의 전통 진돗개.

-멍!

바깥에서 그 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우리 린이가 먹고 싶다는데 이 할애비가 안 사줄 수도 없고······."

말끝을 흐린 주리천은 곧 주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치카치카 열심히 하기로 약속하면 린이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 맛으로 사주마."

"정말요?"

"그럼. 우리 린이가 약속하면 아이스크림 정도야 백개고 천개고 얼마든지 사주고 말고."

"와아-! 치카치카 열심히 하게요! 내일도요!"

"아이고, 그렇게까지 말 하니 안 사줄 수가 없구나."

허허.

주리천이 손녀의 애교에 이전엔 볼 수 없던 웃음을 흘렸다.

방금 전은 물론 전생과도 사뭇 다른 모습.

손녀- 주린을 대하는 주리천은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를 보는 듯했다.

물론 굳이 따지고 들면 할아버지가 맞긴 했지만, 그 무뚝뚝하던 양반도 저렇게 부드러워질 수 있는구나 싶었다.

"미안하구먼. 이야기는 일단 나중에 해도 되겠는가?"

뒤늦게 이전석이 있다는 걸 깨달은 주리천이 머쓱하다는 양 말을 이었다.

"우리 린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잠깐 근처 슈퍼 좀 다녀오겠네."

"그러십시오."

마음 같아선 바로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만, 가족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할 정도로 이전석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

주린이 이전석을 빤히 쳐다보다 주리천의 손에 이끌리듯 방을 나갔다.

어딘가 피부가 가려운 듯한, 기묘한 시선.

눈앞에 푸른 창이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당신은 삼미호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삼미호···?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5화

도술 (3)

구미호라 불리는 영물이 있다.

 백호와 같이 영물들 중에서도 특히나 격이 높은 신수.

 그들은 태어나고 자란 년도에 따라 꼬리의 갯수가 늘어나곤 했는데, 천년이 지나 열 개의 꼬리를 가지게 되면 하늘로 승천하여 신선이 된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리고 삼미호는 그중에서도 아직 꼬리가 세 개밖에 되지 않은 어린 구미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저 애가 구미호라고?'

 이전석이 조부의 품에 안겨 마당문을 나가는 주린을 바라봤다.

 겉보기엔 딱히 이상한 점이 없었다.

 기운도 평범한 인간의 아이와 같다.

 하지만 시스템의 말을 빌리자면 주린의 본모습은 다름 아닌 삼미호였다.

 꼬리 세 개 달린 여우 말이다.

 "영감의 손녀가 영물일 줄은 몰랐는데······."

 이전석이 예상 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의외의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주린이 영물이라는 것.

 그건 전생에서도 몰랐던 사실이니까.

 물론 따지고 보면 그렇게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인간과 영물 간의 교류가 활발하던 시기.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교접해 아이를 낳는 건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리천의 손녀가 그런 존재라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이전석이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만큼 주리천이 주린의 기운을 철저하게 감춰뒀기 때문이겠지.

 "······."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삼미호- 주린에게 관심을 받았다는 시스템.

 구미호의 관심을 받은 인간이 맞게 되는 결말은 보통 두 가지다. 

 간악한 사기로 간을 빼임 당하거나.

 '아니면 순수한 애정으로 대단한 보물을 선물 받거나.'

 주린은 과연 어느 쪽일까.

 '뭐, 아직 꼬리가 세 개인 걸 생각하면 어느 쪽도 아닐 것 같다만······.'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소리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이다.

 ※ ※ ※

 그로부터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주리천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된 철문을 열고 마당으로 돌아오는 그.

 멍멍-!

 땡구라 불리는 진돗개가 주인을 반겼다.

 휙휙 돌아가는 꼬리가 꽤 귀엽다.

 그것에서 시선을 때기가 어려웠다.

 반면.

 "아이고, 무거워라. 우리 린이 안으랴 아이스크림 들으랴 할애비 팔이 남아나질 않네."

 주리천이 애써 무겁다는 듯 연기톤이 가득 섞인 어투로 말했다.

 품에는 어린 손녀를 안고, 한 손에는 제 상체만 한 봉투를 들고 있다.

 명색이 도사이면서 무거울 리도 없건만.

 "린아, 할애비가 힘든 사람한텐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었지?"

 "호야한다고 했어요! 호오!"

 "허허허."

 주리천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웃음을 흘려댔다.

 전생에서도 보기 드물었던 그의 모습에 이전석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이때도 어지간한 손녀 바보였군.'

 방금 그 모습만이 아니다.

 봉투에 담긴 아이스크림.

 그 양만 산더미만 하다.

 과자도 수두룩빽빽 했다.

 아이스크림 하나 사러 갔다가 손녀의 애교에 못 이겨 돈을 잔뜩 사용하고 만 전형적인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할부지!"

 "왜 그러니?"

 "내려조세요!"

 주린이 어리숙한 말투로 부탁했다.

 이내 제 조부의 품에서 내려서더니, 봉투를 뒤적거려 아이스크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방문 너머로 보이던 이전석에게 쪼끄만 발걸음으로 종종 뛰어온다.

 "주께요."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방으로 돌아온 주린.

 대뜸 이전석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더니.

 "대신 린이가 크면 린이랑 결혼하는 거에요."

 "······?"

 귀가 먹었나 싶은 요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할부지가 신랑감은 린이가 직접 정하는 거랬어요!"

 "······??"

 이전석은 당혹스러운 듯 눈을 깜박였다.

 20살이나 더 차이 나는 꼬맹이에게 결혼하자는 소리를 듣다니.

 이게 대체 뭔 상황이란 말인가.

 아니면 과연 구미호라 해야 될까?

 잠깐의 침묵이 있은 후.

 "안 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주리천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아까 보던 인자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치 몸에 불똥이라도 튄 것처럼 주린을 품에 안았다.

 이전석으로부터 최대한 주린을 멀리 떨어트려 놓는 그.

 "이놈은 안 돼!"

 주리천이 드물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답지 않게 꽤나 당황한 눈치였다.

 "왜 안 되는 곤데요?"

 "그건······."

 잠시 말을 더듬던 주리천이었으나, 이내 그가 주린을 조곤조곤 타이르듯 이전석의 눈을 가리켰다.

 "이 놈 눈을 좀 보거라. 딱 봐도 무섭지 않니?"

 "······멋진데."

 "뭐?"

 "예?"

 이전석과 주리천이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멋져?

 어디가?

 이전석 본인이 들어도 이해되지 않는 한마디였다.

 자신의 눈이 얼마나 이질적인지는, 이제는 이전석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멋지다고?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손녀님 취향이 좀, 그로테스크 하시네요."

 "이놈!"

 주리천이 버럭 화를 냈다.

 "그로테스크 한 게 아니라 특별한 게다!"

 "아니······."

 이전석이 황당한 낯빛을 띠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전석의 눈도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한 게 될 텐데.

 손녀 바보도 정도를 넘어서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절레···.

 이전석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언니야들도 오빠야 조아해요."

 주린이 이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야들?

 그게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마치 칼을 갈듯 이를 갈아대는 주리천 덕분이었다.

 "이 망할 것들이······ 유치원 교사가 됐으면 애나 돌볼 것이지 쓸데없는 걸 가르쳐?"

 언니야는 아무래도 유치원 선생을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아니에요! 언니야들 안 나빠요! 린이한테 꽈자도 주는데······."

 애써 유치원 선생님들을 변호하는 주린.

 울먹이듯 흐려진 말투 덕분일까.

 주리천은 화들짝 놀라 말을 바꿨다.

 "어··· 그, 그럼! 그렇지, 언니들은 하나도 나쁘지 않지!"

 마치 아내에게 변명하는 것 같은 남편의 모습이다.

 단지 그 대상이 아내가 아닌 어린 손녀가 되었을 뿐.

 주리천도 제 핏줄에겐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반면.

 이전석은 주린을 보며 생각했다.

 '선생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나?'

 이전석의 사진을 보여준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주린이 몰래 훔쳐본 걸 수도 있고.

 어찌 됐든 당혹스런 상황임은 분명했다.

 이 눈을 보고 멋지다니.

 주리천에겐 말할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취향이 이상하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일단 오빠랑 할애비는 중요한 얘기를 나눠야 하니 우리 린이는 은하 언니랑 놀고 있을까?"

 "오빠야한테 아직 아스크림 못 줬는데···."

 주린이 양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조부의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주리천이 말했다.

 "그럼 그것만 주고 가자꾸나."

 어떻게든 손녀의 기분에 맞춰주려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지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이거 받으면 린이랑 결혼하는 고에요."

 주린이 수즙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어왔다.

 "······."

 이전석은 생각했다.

 ······받아야 되나?

 ━받지말거라.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주리천.

 머릿속으로 전음이 들려온다.

 목소리나 말투는 이전과 같았으나, 전해지는 기세만은 전혀 달랐다.

 받기라도 하면 죽일 기세.

 "린이는 싫어요······?"

 한참 아이스크림을 받지 않고 있자 울먹이는 어조로 말하는 주린.

 그러자.

 ━받아라. 

 이번엔 정반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한 마디였으나, 주린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전해져오는 살기가 피부를 따끔거리도록 만들었다.

 '어쩌라는 건지.'

 이전석은 고개를 저으며 어쩔 수 없이 주린의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헤헤!"

 그러자 주린이 헤벌쭉 웃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까득-.

 까드득-.

 어디선가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은하 언니랑 놀러 갈까···?"

 "넹!"

 주리천은 애써 떨리는 손을 감추며 주린을 최은하에게 맡겼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주리천.

 "······피곤하구먼."

 "동감입니다."

 "이놈이? 감히 우리 린이가 피곤하다는 것이냐!"

 "······미치셨습니까?"

 이전석이 어이없다는 양 되물었다.

 그러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주리천은 자기 자신조차 그럴 줄은 몰랐다는 양 고개를 돌렸다. 

 "크흠······. 내가 조금 흥분한 것 같구나."

 머쓱한 듯 사과하는 주리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희미하게 열린 방문 너머.

 최은하와 놀고 있는 주린의 모습이 보인다.

 주리천은 그 모습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 ※

 "그래서, 화산을 무너트리겠다고?"

 주리천이 그 말을 내뱉은 직후엿다.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무거워졌다.

 도사들의 말에는 기이한 힘이 실린다고들 하는데, 과연 그 말대로가 아닐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바뀐 분위기는 그가 손녀를 곁에 두고 있을 때와는 차원히 달랐다.

 질투 어린 살의보다 더 낮게 가라앉는 공기.

 "그렇습니다."

 그 가운데,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리천은 황당하다는 양 재차 물었다.

 "네놈은 그게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안 될 건 또 어딨습니까."

 하-.

 주리천이 엿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놈아, 화산의 장문인인 최원율은 SS+급의 헌터다. 이미 세간에선 그를 SSS급으로 보는 사람이 많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곧 SSS급이 될 거라 예측하는 이들이 태반이지."

 보통 플러스는 바로 윗등급 헌터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강자일 때 붙여지는 추가 등급이었다.

 그만큼 현재 최원율의 무력이 하늘과 맞닿아 있음을 의미했다.

 "그걸 네놈도 모르진 않을 터."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그 아랫것들은 어떻냐? 다섯의 후계들은 모두 S급 헌터인데다 가장 먼저 난 놈은 SS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들었다. 그뿐이랴? 전 세계 곳곳에 화산의 지부와 놈들이 양성하는 암살자 단체도 있지."

 듣기만 해도 위압될 것만 같은 압도적인 전력 차.

 심지어 화산에는 수없이 많은 산하 길드와 수천에 달하는 길드원이 존재했다.

 그걸 홀로 상대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협회조차 그들을 어쩌지 못해 과거에도 몇 번 칼을 부닥치는 걸로 그쳤지 않은가.

 화산이 가진 덩치와 무력은 정부와 협회의 힘으로도 쉬이 제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네놈은 이것들을 전부 홀로 감당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냐?"

 주리천의 협박과도 같은 물음.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 저 혼자 감당하겠다 했습니까."

 그가 두 손가락을 피며 천천히 말했다.

 "한여름도 있고, 은하 씨도 있죠."

 "고작 세 명이다."

 "어르신까지 함께하면 네 명입니다."

 "헛소리."

 주리천은 이전석의 제안을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다.

 "네가 송장의 증표를 가지고 있으니 믿을만한 사람인 건 알겠다. 다만 너를 믿는 것이랑 화산과 대적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야."

 별개.

 주리천이 그 단어를 강조했다.

 "나에겐 아직 어린 손녀딸이 있어. 그 어린아이를 두고 승리할 가능성도 희박한 놈들을 상대로 목숨을 던지라는 말이냐?"

 맞는 말이다.

 주리천은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으나, 아직 어린 손녀딸이 있었다.

 그 여아를 버려두고 화산과 싸우라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애당초 은하를 맡아주는 것 자체가 이미 그로선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도술로 화산이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긴 하지만, 은하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언제 어떻게 괴인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단지 송장과의 은을 갚기 위해 은하를 맡아줬을 뿐.

 본래라면 그는 철저히 은하를 무시했을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딱히 목숨을 던져달라는 것까진 아닙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저도 어르신의 처지는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지켜야 할 손녀와 영물들이 있으시죠. 그들을 모두 내치고 도와달라고 할 만큼 저는 그리 몰상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이 이렇게 주리천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

 그건 실로 간단했다.

 "그저 적당한 시기가 왔을 때, 도술을 하나 사용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도술이라면?"

 나지막한 주리천의 물음.

 이전석이 그에게 속닥이며 말했다.

 직후.

 그 말을 들은 주리천이 깜짝 놀란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걸 사용하란 말이냐?"

 "예."

 "······이런 미친놈을 봤나."

 주리천의 욕설에도 이전석은 희미하게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화산을 고꾸라트릴 생각은 하지 않죠."

 허.

 "미친놈이 아니라 상또라이였구나."

 주리천은 황당하다는 듯,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전석이 부탁한 도술은 그만큼이나 위험하면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놈의 계획대로라면 충분히 해볼만 한 도박이다.'

 아니, 도박조차 아니다.

 이전석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돼버린 것처럼 기괴한 계획을 떠들어 댔으나, 오히려 그 기괴함이 화산에게 있어선 허를 찌르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일까.

 주리천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작금의 평화와 과거의 평화.

 그 사이에서 피어난 행복과 분노라는 별개의 서로 다른 감정.

 고민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

 무엇을 더 우선시 할 것인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주리천이 결론을 내렸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 도와는주마."

 전쟁에 참여하는 게 아니다.

 그저 도술을 한 번 써주는 게 전부다.

 그게 주리천의 흥미를 끌었다.

 이전석이 말했듯 그로서도 화산에 원한이 없는 건 아니었음으로.

 단 한 번의 도술.

 그 정도면 주리천으로서도 충분히 도와줘도 괜찮겠다 판단한 것이다.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만약의 경우, 나는 즉시 내 손녀딸과 은하를 데리고 해외로 달아난 것이다. 알겠느냐?"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해외로 도피할 일은 없을 거다.

 이유야 그리 특별하지 않다.

 성공할 테니까.

 이미 짓밟혀 사라진 잔불이다.

 그게 과거로 돌아와 되살아났다고 한들, 살모사에 불과했던 뱀이 이무기가 되겠는가?

 이전석이 바라보는 화산은 기껏해야 그 정도였다.

 용은 커녕 이무기조차 되지 못한 살모사.

 연기만 짙게 토해낼 뿐인 작디작은 불꽃.

 "그럼 이제 가라."

 주리천이 질린다는 양 손을 휙휙 저었다.

 아주 꼴도 보기 싫어하는 눈치다.

 하긴 갑자기 찾아와 화산에 대해 떠들어 댐은 물론, 손녀의 관심까지 가져가 버렸으니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내 주리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석장을 손에 쥐었다.

 그대로 방에서 나가려던 때였다.

 "그 전에 부탁 하나만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전석이 주리천을 붙잡았다.

 "부탁? 무슨 부탁 말이냐?"

 "엄밀히 말하면 부탁이라기보다 허락에 가깝습니다만······."

 이전석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풍산(靈楓山)의 지하 좀 파도 되겠습니까?"

※ ※ ※

 영풍산.

 영물들이 사는 산.

 방금 이전석이 최은하와 만났던 곳.

 백호 산사가 있던 그 장소였다.

 그런 곳의 지하를 파겠다는 말에.

 "이 미친놈이?"

 주리천은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정말 땅을 파겠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영풍산 지하에 제 전용 창고를 만든다는 게 전부니까요."

 "그게 땅을 파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이놈아!"

 "결계술로 외부는 건드리지 않고 영맥 근처의 지반만 파헤칠 생각입니다."

 "영맥? 영맥까지 건드려?"

 "건드린다기보다 그 옆에 작은 공간을···."

 "이런 미친놈을 봤나······."

 주리천은 골이 당긴다는 듯 머리를 붙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맥은 모든 영물의 원천이다.

 토지신인 산사는 물론 다른 숲속의 영물조차 그곳에서 태어나 영맥의 영기를 받으며 자란다.

 영맥이 사라지면?

 새로운 영물은 태어나지 않고, 어린 영물은 메말라 죽고 말 것이다.

 헌데 그런 영맥 옆에 창고를 만든다고?

 당연히 골이 당길 수밖에.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이내 주리천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곳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산사다. 정 창고를 만들고 싶으면 그놈한테 허락을 받도록 해라."

 자신이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소리다.

 과연 그 말 대로였다.

 산사가 이미 겁을 먹고 꼬리를 말았다 한들, 영풍산은 주리천이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주리천의 허락 아닌 허락을 받은 뒤.

 이전석은 다시 영풍산으로 돌아왔다.

 그의 기척에 놀란 걸까.

 근처에 있던 영물들이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몇몇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한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람.

 나무가 흔들리며 단풍잎이 발치로 떨어진다.

 그때.

 ━무슨···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귀인이시여.

 백색 호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의 위풍당당하던 모습과는 꽤 다르다.

 다른 영물들과 비슷한 낌새.

 어지간히도 겁을 먹은 눈치다.

 토지신이나 영물들에게 명계의 신은 이토록이나 두려운 존재인 걸까.

 아무렴 상관없었다.

 산사 본인이 저렇게 자신을 낮춰주면 일이야 편해질 테니.

 "영풍산 지하에 내 창고를 만들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나?"

 ━귀인의 부탁이시니···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생각보다 쉽게 허락을 얻었다.

 다만.

 ━영맥을 해하는 건 부디, 자비를······.

 산사가 떨리는 어조로 말했다.

 이전석으로선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영맥까지 건드리진 않아. 그냥 이 산의 땅을 조금 빌릴 뿐이니까. 그리고 나라고 무작정 부탁을 들어달라는 것도 아니야."

 ━허면······?

 "영풍산의 결계를 보강해 주마."

 ━심히 송구스러운 말씀이나, 이곳의 결계는 귀인이시라도 쉽게 건드릴 수는······.

 산사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이전석이 양손에 마나를 집중 시켰다.

 '영풍산의 결계는 도술로 만들어낸 거지만, 결계 구조가 내 기억과 똑같다면 아마 마법을 살짝 덮는 식으로 보강이 가능할 거야.'

 물론 그럼에도 도술과 마법을 결합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굳이 따지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이전석이 굳이 이런 짓을 하고자 나선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회귀하고나서 유독 손에 잘 익는 도술.

 그게 단순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확인이 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이전석은 자신의 마나를 숲 곳곳으로 흘려보냈다.

 나무와 풀.

 영물들과 흙.

 그리고 호수와 폭포수.

 다양한 것들을 마나가 훑으며 영풍산의 전체 구조를 파악했다.

 한때 윤진이 사용했던 기척 감지의 상위 격 되는 기술.

 그러나 이전석의 마나는 윤진보다 더 넓은 범위을 훑음은 물론이고, 단순 사물이나 생명의 기척을 넘어 결계의 존재까지 파악해 냈다.

 그리고.

 '과연, 이런 식의 결계인가.'

 그는 단숨에 결계의 구조와 술식을 꿰뚫어 봤다.

 도술에 대해선 그리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째서일까.

 생각보다 결계가 눈에 더 잘 들어왔다.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

 도술의 술식이 자그만 것 하나조차 빠짐없이 뇌리에 새겨진다.

 이 정도면······.

 '보강이 아니라 아예 뜯어고치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생각은 곧 실행으로 이어졌다.

 이전석이 영풍산 전체로 퍼트린 마나를 세밀하게 조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 이건 대체······!

 산사가 깜짝 놀란 듯 온몸의 털을 삐쭉 새웠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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