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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56-63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6화

도술 (4)

산사는 영풍산의 토지신이다.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역사의 산증인이자, 오래도록 수많은 영물을 보호해 온 신수 중 하나였다.

 언젠가 탈각을 겪어 사방신의 일각이 될지도 모르는 백호.

 그러나 그는 갑작스런 세계의 변화와 함께 탈각에 이르지 못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제는 500년이나 흐른 과거의 일.

 각성자라고 하였던가.

 도사만이 가질 수 있던 힘을 만인이 가지게 되면서, 세계의 구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한때는 신적 존재로서 숭배받던 영물이 인간에게 사냥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한때 창을 만들어 짐승을 사냥했듯, 영물의 생명을 취해 내단을 손에 넣었고, 그 가죽과 뼈로 아이템이란 것을 벼려냈다.

 가증스러웠다.

 분노했고, 또한 증오했다.

 기어코 하나 뿐인 딸을 인간에게 잃었을 때. 산사는 사방신이 되는 것마저 포기하며 닥치는 대로 인간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결국 사흉수의 일각이 되려고 하던 차.

 ━나와 같이 가겠느냐?

 도화선을 만났다.

 주리천.

 그는 산사가 토지신으로 거주하던 영풍산을 이차원으로 옮겨주고, 인간에게 사냥당하던 영물들조차 손수 보호해 주었다.

 상처 입은 호랑이는 그렇게 늙은 도사에 의해 평온을 얻었다.

 처음엔 주리천조차 물어 죽일 듯 흉포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그 흉포함은 차츰 가라앉았고 해탈(解脫)과 가까운 경지에 이르렸다.

 진정한 의미로 다시 사방신이 될지도 모르는 영물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평온이 지금, 재차 깨지려 하고 있었다.

 ━이게 정녕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산사가 영풍산의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하늘 위로 펼쳐진 돔 모양의 결계.

 도술로 만들어져 별다른 문양도 없이, 그저 구름만이 적적하게 흘러갈 뿐인 반투명한 결계 위로 온갖 복잡기괴한 술식이 새겨지고 있었다.

 중앙에서부터 비롯되어 마치 무언가에 감염이라도 되듯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술식.

 산사는 그게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마법은 도술에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도술과 마법은 비슷한 술법이다.

 하지만 수백 년이 흐르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연구되고 발달 된 두 술법은 이미 서로 뒤섞일 수 없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려 하면?

 이치가 어긋나고 만다.

 쉽게 말해 반발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도술과 마법의 상관관계였다.

 헌데 지금 영풍산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한 남자의 손에서부터 비롯된 마나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가더니 실시간으로 도술의 구조를 뒤바꾸고 있다.

 도술을 아예 파괴하는 것도 아니고, 기존의 도술 위에 마법을 새겨 넣다니?

 ━······.

 산사는 조용히 이전석을 돌아봤다.

 그는 결계를 펼치는데 전념이었다.

 이마에선 땀 한 방울이 맺히고, 양팔은 짙푸르게 물들어 있다.

 ━이 자는 정녕 신이란 말인가···.

 산사는 토지신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천 년 묵은 영물일 뿐.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탈각을 겪어 사방신이 된다고 한들, 명계나 천계의 신들처럼 존귀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사는 이 세상에서 사방신이나 사흉수 같은 영물을 제외하면 가장 신에 가까운 백호이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이전석의 모습은 마치 천계- 아니, 명계 깊은 곳에서 올라온 신과 같았으니.

 ━위대한 분이시여······.

 영물로서의 본능이 산사를 무릎 꿇렸다.

 이전석에게 흥미를 느껴 그를 구경하고 지켜보러 온 영물들마저 산사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영물들에게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신이란 절대자, 혹은 조물주와도 같은 존재였으니···.

 덕분일까.

 모든 영물이 이전석을 경외하며 울기 시작했다.

 신묘한 울음소리가 영풍산 전체로 울려 퍼졌다.

 지금 이 순간, 영풍산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전석이었다.

 ※ ※ ※

 영풍산의 결계를 보강했다.

 도술의 잔가지를 덜어내고, 사이사이 마법의 술식을 덧붙였다.

 결계특화의 효과 덕분일까.

 아니, 비단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송장의 증표를 만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상할 정도로 도술이 손에 잘 익었다.

 '음······.'

 당연히 그 이유를 알 리 없는 이전석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마나를 거둬들였다.

 그런데 그 순간.

 띠링-!

 [찬란한 재능의 역광입니다.]

 갑자기 시스템이 떠올랐다.

 '뭐야?'

 의문도 잠시뿐.

 이전석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바로 뒤이어 떠오른 창 덕분이었다.

 [당신은 마법과 도술을 한 갈레로 엮어 '마도술(魔道術)'을 창안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마도술의 대종사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또한 이는 삼계육도에도 널리 퍼져 당신의 명성을 드높일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특성 '마도술(SSS)'을 획득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난생 처음보는 시스템에 이전석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마도술.

 전생에서 스텔라가 만들게될 마법과 도술의 합(合).

 그걸 창안했다고?

 '내가?'

 물론 과거 시점에선 이전석이 처음 사용한 것이니 만들었다 표현해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전석은 잡생각을 뒤로한 채 상태창을 확인해 봤다.

 ━

 마도술

 등급 : SSS

 효과 : 마법과 도술을 접목시킨 술법.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비를 자아낸다.

 사용 가능 마도술

 └결계

 ━

 SSS.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최상위 등급.

 효과는··· 대충 예상한 대로다.

 사용 가능 마도술에 결계밖에 없는 건 이전석이 그것 외에는 달리 만들거나 사용한 게 없기 때문이겠지.

 즉,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 늘어날 거란 의미다.

 '절대자의 기백도 그렇고 생각보다 많은 걸 얻는군.'

 특성은 똑같은 게 중복되어 존재할 수 없다.

 때문일까. 

 전생에서 마도술을 얻은 건 스텔라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그 특성을 가져간 건 다름 아닌 이전석 본인이었다.

 심지어 특성의 급 또한 더 높았다.

 스텔라가 얻은 마도술은 SS.

 반면 이전석의 마도술은 SSS였으니.

 그야말로 뜻밖의 행운이라 할 수 있으리라.

 스윽-.

 상태창을 눈앞에서 치워버린 이전석.

 그가 뒤늦게 뒤를 돌아보았다.

 산사에게 결계의 보강이 끝났다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

 돌연 종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종소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만큼이나 청아하고 아름다운 울음소리였다.

 흔히 영물들이 공명할 때 내는 소리.

 그 음성이 한둘이 아닌 것이, 마치 영엄한 합창이라도 듣는 것 같았다.

 ━위대한 분이시여······.

 그 가운데 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석이 바라보는 정면, 바로 그 밑.

 바닥에 배를 댄 채 복종의 의사를 표하듯 고개를 숙인 백호 한 마리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숲의 다른 영물들도 산사와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들이 뜬금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명성이 삼계육도에 널리 떨쳐진다는, 그런 시스템과 연관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문득.

 이전석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과거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 시기엔 도술과 마법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였지.'

 미래에선 혁신적이게도 그게 가능했다.

 마법사들의 끝없는 연구 덕분.

 그것은 훗날 마도술이라 불리게 되며, 마법을 기반으로 짜여진 만큼 이전석도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이전석이 사용한 마도술은 그것과는 조금 결이 다르긴 했다.

 일반적인 마도술이 마법을 토대로 발동하는가 하는 반면, 방금 이전석은 사용한 건 다름 아닌 도술이 중심이 되는 마도술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대종사라며 시스템이 나타난 걸지도 모르겠군.'

 마법의 종주라 불린 스텔라.

 그녀조차 도술을 중심으로 술식을 구축하진 못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과거로 돌아온 이전석은 그게 가능했다.

 이유? 모른다.

 엘릭서라도 섭취했으면 또 모를까, 갑자기 하늘도 칭찬할 만큼의 재능이 생겨버린 마당에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뭐, 좋은 거야 좋은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부분이 과거 시점에서 보기엔 퍽이나 위엄 높은 권능으로 여겨진 듯했다.

 시스템이나, 산사에게조차 말이다.

 하물며 산사에겐 처음 만났을 때 이전석이 보여준 절대자의 기백도 영향을 미쳤을 테니.

 작금과 같은 반응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도 좀 과하군.'

 고개를 숙이고 입을 꾹 다문 모습.

 흡사 황제를 대접하는 것만 같다.

 보고 있는 이전석이 다 부담스러워질 지경.

 결국 그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

 ━······예.

 이전석의 명령과도 같은 말.

 산사가 뒤늦게 고개를 든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영물들은 배를 바닥에 대고 있었다.

 "다른 놈들도."

 이전석의 말이 있고서야 그들도 고개를 올렸다.

 그러고서도 편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지만.

 뭐, 아무렴 알 바인가.

 이전석은 산사에게 본론을 꺼냈다.

 "대가도 치렀으니, 이제 영풍산의 지하 좀 빌려도 될까?"

 ━뜻대로 하옵소서.

 "······."

 이전석이 산사를 빤히 쳐다봤다.

 아주 말투까지 신하처럼 변해버렸다.

 이전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영풍산의 한구석으로 향할 뿐.

 '영맥이 흐르는 곳이 어딘진 파악했어.'

 결계를 고칠 때 산 전체를 감지했다.

 다만 영맥을 직통으로 건들면 산 자체가 메말라 버릴 위험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 창고를 만들기로 했다.

 근데.

 "계속 따라올 거냐?"

 ━하오나······.

 "신경 쓰이니까 너희는 너희 볼 일이나 봐."

 ━······예.

 산사가 나지막이 답했다.

 처음 마주쳤을 때와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마치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것처럼 충성적이다.

 '······쓸만하겠는데?'

 문득. 이전석이 재미난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저들을 화산과의 전투에 사용할 수 있다면?

 '세상은 영물의 존재를 잊어버린 지 오래야.'

 그런 마당에 수십 마리의 영물이 돌연 모습을 드러낸다?

 꽤 재미난 기습이 되지 않겠는가.

 산사의 충성적인 모습.

 이용하려면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물론 지금은 달리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전석은 잡생각을 털어버린 채 마저 영풍산을 올랐다.

 그리고 중턱에 다다랐을 때 쯤.

 유독 텅 빈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풍나무로 둘러싸인 원형 공간.

 바로 근처엔 최은하가 수행하던 폭포수도 보인다.

 '이곳이 좋겠어.'

 이전석이 슬쩍 상태창을 확인했다.

 포탈 게이트.

 업상점에서 구매한 특성.

 ━

 포탈 게이트

 등급 : S

 효과 : 포탈 게이트를 만들어낸다. 포탈 게이트는 총 5회의 사용횟수를 가지며, 24시간이 지날 때마다 한 번의 사용횟수가 채워진다.

 [사용 횟수 - 1/5]

 ━

 브랜던을 잡고 꽤 시간이 흐른 덕분일까.

 어느새 사용횟수가 하나 채워져 있었다.

 이전석은 이걸 이용해 아공간과 비슷한, 그러나 그보다 조금 더 특별한 자신만의 창고를 만들 계획이었다.

 '영풍산이라면 위치가 발각될 일도 없고.'

 창고를 만들기엔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물론,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딱히 창고를 만들겠단 생각은 없었다.

 한여름만 맡기고 바로 떠날 계획이었다.

 다만 포탈 게이트라는 특성과 영풍산이라는 지리적 특징 덕분일까.

 이참에 창고 같은 걸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화산을 무너트린 뒤, 그곳의 보물고를 털 걸 생각하면 이전석에게도 나름대로 물건을 보관해둘 공간이 필요했으니.

 툭-.

 이전석이 딱딱한 흙바닥 손을 짚었다.

 단풍잎이 바람에 흩날리며 날아간다.

 자연지기가 가득한 영풍산은 바람마저도 신묘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고, 이전석은 마치 이곳의 땅과 자신이 연결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지하 깊은 곳.

 손끝으로 흘려보낸 마나로 정사각형의 결계를 형성한다.

 그 직후.

 [결계특화가 마도술의 영향을 받아 강화됩니다.]

 예상 외의 창이 떠올랐다.

 마도술과 결계특화.

 두 가지 특성이 서로 공명한 것.

 특성을 여럿 모으다 보면 종종 생기는 현상이었기에, 이전석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마법과 도술이 뒤섞인 결계를 펼쳐나갔다.

 '크기는······ 100평 정도면 되겠군.'

 창고라고 했지만 너무 커서 좋을 건 없다.

 영맥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

 그게 정확히 100평이었다.

 더 이상 커봤자 유지관리만 힘들 뿐이다.

 이윽고 이전석이 땅에서 손을 땠다.

 지하 50미터.

 그곳에 100평 넓이의 결계를 형성했다.

 발밑으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이내 좌표를 계산해 포탈 게이트를 사용.

 ━━!

 갈색 게이트 너머로 흙과 자갈, 돌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아주 작은 돌멩이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밖으로 끄집어낸다.

 이전석은 그것들을 마나로 들어 산 전체에 흩뿌렸다.

 영풍산의 크기는 생각보다 커다랬고, 100평 정도 넓이와 높이의 흙더미 정도는 잘게 흩뿌리면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터벅-.

 흙더미의 배출이 멈췄을 무렵.

 직접 포탈 게이트 너머로 들어갔다.

 빛 하나 없는 어둠이 그를 반긴다.

 화륵-.

 이전석은 발화의 불빛으로 어둠을 지워버렸다.

 그러자 꽤 넓찍한 크기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100평에 해당하는 지하 공터.

 천장과 바닥, 사방의 벽에는 불투명한 결계가 있어 외부의 흙이 안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전석은 한쪽 벽에 손을 올렸다.

 직후.

 차라락-.

 손에서부터 시작된 마나의 파동이 공간 전체로 퍼져나가며.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을 대리석으로 바꿔버렸다.

 어디까지나 결계의 효과다.

 환술의 일종.

 정말 외벽이 대리석으로 바뀐 건 아니고, 천장에 생긴 샹들리에 또한 뇌의 인식을 어그러트렸을 뿐인 환상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오히려 실재보다 이게 더 낫지.'

 실재 대리석이나 샹들리에는 지속적으로 관리해 주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며 썩기 마련이다.

 거미줄이 생기고 먼지가 쌓이며 이끼가 필 것이다.

 다만 그게 환상이 된다면?

 굳이 관리가 필요치 않았다.

 '좋은 특성이군.'

 결계특화.

 그게 마나조율과 어우러지니 이런 고난이도의 결계도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었다.

 물론 마도술의 영향도 결코 적진 않으리라.

 '이제 중요한 물건들은 전부 여기에 보관하면 되겠어.'

 S급이 되면 아공간과 비슷한 권능이 생긴다.

 다만 그 크기가 한없이 작고 미약했는데, 덕분에 대부분의 S급들은 가장 필요한 물건만을 그곳에 보관하곤 했다.

 아야미네의 대검이나, 에밀리의 지팡이처럼 말이다.

 반면 이 창고는 공간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컸으니.

 이전석은 앞으로도 이 공간을 자주 애용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럼 슬슬 나갈까.'

 이전석이 뒤늦게 포탈 게이트를 나왔다.

 할 일도 끝냈고, 할 말도 전부 다 했다.

 심지어 얻을 것들도 얻었다.

 절대자의 기백, 도마술, 절대 노출되지 않을 창고, 그리고 주리천의 도움이나 영풍산 영물들의 복종까지···.

 생각해보면 잠깐 한여름을 맡기려고 온 것치고 얻은 게 꽤 많기는 했다.

 이런 걸 보통 기연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한여름이야 주리천에게 맡겨두면 알아서 잘 굴려 먹겠지.

 최은하 대신 헛간 청소를 시키든, 뭘 하든.

 이전석은 뒤늦게 주리천의 집을 나왔다.

 "벌써 가시는 건가요?"

 아쉽다는 듯 배웅을 나온 최은하.

 그녀의 모습에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들른 것뿐이니까요."

 어디까지나 한여름을 맡기기 위해 들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그건 그것대로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슬슬 돌아가려는데.

 "여보야."

 "······?"

 "기다리께요."

 돌연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는 주린.

 구미호는 역시 구미호라는 걸까?

 이전석이 당황스레 주린을 쳐다보자.

 "린아!"

 주리천이 황급히 집안에서 달려 나와 주린을 데려갔다.

 '······대체 뭐 하자는 건지.'

 이전석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 의미로 참 한결 같은 양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등을 돌리려던 찰나.

 우웅-.

 이번엔 휴대폰의 진동이 그를 멈추었다.

 이전석이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멈추지 않고 울리는 착신음.

 발신인을 보니···.

 '아버지?'

 무슨 일일까 싶어 발걸음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이한석으로부터 전해들은 나지막한 한 마디에, 이전석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7화

뜻밖의 보상

"···전석 씨? 왜 그러세요?"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진 탓일까.

 최은하가 조금 겁먹은 듯 물었다.

 그녀조차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이전석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콰앙-!

 "꺄악······?!"

 갑자기 굉음과 함께 폭풍이 일었다.

 최은하가 자세를 다잡으며 코앞을 바라봤다.

 그곳에 더 이상 이전석은 없었다.

 그저 푹 파인 바닥만이 남아 있을 뿐.

 "대체······."

 최은하는 이전석이 떠난 한참이 지나고서도 그가 왜 그리도 초조한 눈빛을 띠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

 [광폭화를 사용합니다.]

 [짐승화를 사용합니다.]

 두 가지의 특성을 동시에 사용해 육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하늘과 공기가 일그러지며 호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딴 건 하등 알 바가 아니었다.

 쾅-!

 이전석은 발치로 형성한 마나를 발판 삼아 더욱 높이 날아올랐다.

 푸확-.

 구름을 꿰뚫으며 치솟은 신형.

 바람과 구름이 날개처럼 주변을 휘감는다.

 그러나.

 이전석은 그조차 떨쳐내며 속도를 더했다.

 마치 마법사들이 허공을 부유하듯, 발치의 마나를 날개 삼아 하늘을 질주한다.

 동시에 뇌리에선 수없이 많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경기도 안양시부터 서울까지는 대략 20킬로. 지금 내 속도와 비슷한 KTX를 기준으로 50분 정도 소모되지만, 중간에 광폭화와 짐승화가 끊길 걸 생각하면······.'

 쯧-.

 이전석이 혀를 찼다.

 부족하다.

 '이대론 안 돼.'

 포탈 게이트는?

 불가(不可).

 이미 사용 횟수를 전부 소모했다.

 다시 충전되기까지 기다리는 건?

 이 또한 무리.

 차라리 KTX를 타고 가는 게 더 빠르다.

 ━병원으로 와야 할 것 같다.

 이한석.

 아버지의 말.

 ━네 엄마가 갑자기 쓰러져서······. 저번에 쓰러진 영향인가 싶더만, 의사가 좀 더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하더구나.

 이전석이 까득 이를 갈았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이전석도 이리 흥분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신의 핏줄이 파랗게 물들어서 혈액검사를 해보니······ 후우, 높은 확률로 마나 중독증인 것 같다고 하더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한숨.

 이한석도 마나 중독증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리라.

 현대의 의학으론 완치가 불가능한 난치병.

 그런데···.

 '어머니가 마나 중독증이라고?'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순한 현실 부정 따위가 아니다.

 보통 마나 중독증이라고 하면 각성자가 걸리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던전에 오래 머무르고, 마나에 내성이 적은 하급 헌터들이나 걸리는 불치병.

 그런데 헌터도, 각성자조차 아닌 한유리가 마나 중독증이라니.

 '최근에 유독 병원을 많이 들르시긴 했지만······.'

 이전석이 까득 이를 갈았다.

 생각해보면 한유리의 상태가 이상했던 적은 한 두 번이 아니다.

 빈혈로 몇 번이나 어지러움을 느끼고, 그 일로 병원도 수 차례나 찾았다.

 물론 정작 병원에선 문제가 없다고 했다.

 하루이틀 입원을 한 적도 있으나 빈혈로 인한 영향이라며 의사소견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이전석 자신이 상처 입은 걸 본 충격, 그 영향이라고만 생각했다.

 헌데, 그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마나 중독증은 던전에 들어가는 각성자들이나 걸리는 병이야. 일반인이 걸리는 경우는···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확률이 거의 제로에 수렴했다.

 이전석이 알기로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마나 중독증에 걸린 일반인은 고작해야 여섯 뿐이다.

 그들 중 사망한 사람은?

 다섯.

 여섯 중 다섯이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한 명도 엘릭서를 사용해 강제로 마나에 대한 내성을 지니게 됐을 뿐.

 사실상 완치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연히 이전석으로선 초조할 수박에.

 100%에 수렴하는 치사율.

 각성자야 마나 중독증에 걸린다고 해도 관리만 잘하면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일반인은 다르다.

 그들은 마나에 대한 내성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만분의 일의 확률로 마나 중독증에 걸리기라도 하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서히 오장육부가 썩어가며 고통스러운 죽음을 맛보게 된다.

 덕분일까.

 "빌어먹을."

 이전석이 드물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빨리, 조금만 더 빠르게.

 '광폭화와 짐승화의 효과는 곧 사라질 거야.'

 그럼 속도 또한 현격히 느려질 터.

 천보를 사용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축지(縮地).'

 도술의 이동법 중 하나.

 이전석은 마도술을 떠올렸다.

 그리고 갑자기 생겨난 재능.

 전생에선 불가능했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탓-.

 이전석이 어느 산 중턱에 내려섰다.

 그리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새 한 마리가 그의 주변에 내려앉는다.

 미풍이 발치를 맴돌고-.

 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공간이 접혔다.

 순식간에 뒤바뀌는 배경.

 말 그대로의 의미다.

 공간과 공간이 마치 종이가 접히듯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배경이 사진 넘기듯 바뀌었다.

 산에서 숲으로, 숲에서 개울로.

 그리고 개울에서 작은 마을로.

 이전석은 순식간에 먼 거리를 나아가 있었다.

 [마법이 결합된 축지법(縮地法)입니다.]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술이 당신의 격을 한층 더 끌어올립니다.]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그러나 무시했다.

 축지의 부담으로 속과 머리가 어질거렸지만 이 또한 무시했다.

 그저 가능한 빠른 속도로 세상을 접어 달렸다.

※ ※ ※

 진료실.

 이한석과 이지혜가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있었다.

 헌터 전문의이자, 한유리의 담당 의사.

 "5세기 전, 세상에 갑자기 던전이 나타났죠."

 그가 송구하단 표정으로, 최대한 두 보호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의 혼란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보호자들께서도 아시다시피, 500년 전이면 총과 화약이 아닌 칼과 활로 전쟁을 치르던 시기였으니까요."

 이한석과 이지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학창시절 역사 교과서로 수없이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류는 F급 몬스터조차 어쩌지 못해 많은 곤혹을 겪었다.

 "당연히 C급 몬스터만 나타나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죽음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참담하던 시기였다.

 세상이 피와 비명으로 물들었고, 길거리에는 온통 사람의 시신으로 가득했다.

 그것도 짐승에게 먹다 남겨진 듯한 육편.

 "처음 세상에 나타난 던전은 대다수가 폭주형이었습니다."

 여러 몬스터가 밖으로 뛰쳐나와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가는 곳마다 피와 비명이 산재했고, 재앙을 겪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그것들은 '육선인(六仙人)'과 '칠영웅(七英雄)'에 의해 금방 제압되었다.

 과거의 도사들과 최초의 헌터들.

 덕분일까.

 세상은 빠르게 평화를 되찾았고, 사람들은 무너졌던 규칙과 법을 바로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의사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폭주형 던전에서 몬스터와 함께 세상 밖으로 흘러나온 마기는, 500년이나 흐른 지금까지도 대기 중에 섞여 저희가 사는 곳곳에 잔류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흐른만큼 마기는 마나로 희석되고 그 수준도 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만······."

 의사가 입을 다물었다.

 진료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으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의사는 곧,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환자분께선··· 아무래도 그 미미한 마나에 영향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

 이한석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암담하고 참담한 심정에 얼굴을 쓸어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지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가··· 그, 그러니까······ 정말 마나 중독증이라는 거예요······?"

 마나 중독증.

 일반인에 한 해 치명률이 100%가 되는 불치병.

 의사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바로 옆의 모니터를 바라봤다.

 진단상의 결과가 말하고 있었다.

 틀림없는 마나 중독증이라고.

 환자의 병명을 말하는 것.

 특히 시한부를 선고하는 건 아무리 많은 경험과 경력을 가진 의사라도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의사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지혜가 따지듯 되물었다.

 "저, 저번에 건감검진을 받았을 땐 아무 이상도 없다고······!"

 그랬다.

 이전석의 제안으로 받게된 건강검진.

 당시만 해도 별 이상은 없었다.

 빈혈도 어디까지나 유독 약한 몸 덕분에 생긴 현상이지, 평소 몸관리만 잘 하면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 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았다.

 모두가 다행이라며 다시 집에 돌아와 평소와 같이 밥을 먹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마나 중독증이라니.

 그런 걸,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

 의사가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보호자 만큼은 아니지만 그로서도 꽤나 고통스러운 입장임이 분명했다.

 "아쉽게도 마나 중독증은 발병하기 전까지는 MRI로도 증상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지라······."

 그래서 미리 알아 채지 못했다고···.

 이지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낯빛을 띠었다.

 대기 중의 마나라면 먼지만도 못한 수준이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고, 그 정도로는 신체가 영향을 받을 일도 없다고 했다.

 그 믿지 못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니 그저 정신이 멍하기만 했다.

 "치료할 방법은······ 아예 없는 겁니까?"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이한석이 나지막이 물었다.

 의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아쉽게도"라며 고개를 저을 뿐.

 "······."

 이전석은 진료실 밖에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에서 희미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혜의 목소리였다.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한 걸까.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게 이런 식으로 귓가에 들려오자 그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암담하고, 참담하다.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전석은 조용히 자리를 옮겨 옥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난간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암운이 드리운 하늘.

 먹구름에서 번개가 내리친다.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헌터님."

 돌연 누군가가 이전석을 불렀다.

 다름 아닌 아야미네였다.

 분신일까?

 "죄송합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한유리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신경쓰지 마십시오."

 이전석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마나 중독증.

 그걸 일개 호위가 어찌 막는다는 말인가.

 아마 아야미네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일반인이 마나 중독증이라니.

 누가 들으면 말이나 되냐며 헛웃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특무관님께서 어머니를 병원으로 이송해주셨죠?"

 "······."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이한석에게 듣기로 한유리는 집에 혼자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쓰러진 걸 이한석과 이지혜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유리는 제때 응급실에 도착해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니, 그렇다면 생각나는 사람이야 아야미네 한 명밖엔 없었다.

 "······."

 아야미네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전석의 서글퍼 보이는 시선 덕분일까.

 이내 작게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이전석을 위해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이전석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방울 섞인 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갔다.

 "후우···."

 옅게 새어나오는 한숨.

 왜일까.

 전생에 몇 번 피지 않았던 담배가 생각났다.

 세상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지랄맞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전생에서부터 그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천살성을 각성한 것, 여동생이 자살한 것.

 모든 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과거로 되돌아와 무언가 바뀌려나 싶었거늘, 정작 지금도 불행은 이전석을 좀 먹어 가고 있었다.

 "지랄."

 까득, 이를 갈았다.

 손에 잡고 있던 난간이 구부려졌다.

 화가 났지만 금세 가라앉았다.

 영원의 낙인이 그를 억눌렀다.

 그럼에도 날 선 기운만은 멈출 기미가 없이 옥상 전체를 가득 채웠다.

 불행이라고?

 헛소리다.

 그야말로 개소리가 아닐 수 없다.

 이딴 게 불행이라면 자신이 부모를 잃는 건 과거로 돌아와서도 바꿀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이전석은 부정했다.

 인정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라는 것 자체가 그에겐 결코 성립할 수 없는 난제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단지 불행이라고, 어쩔 수 없다며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전석은 이미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겪었기에.

 불행이 운명이라고?

 상관없다.

 예나 지금이나 그딴 것에 의지하며 살아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노해 이성을 잃을지언정 이전석이 믿은 건 언제나 자신뿐이었다.

 만일, 그럼에도 이것을 운명이라 우기는 놈이 있다면 이전석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이리 말해줄 것이다.

 '엿이나 쳐 먹어' 라고.

 그때.

 [시스템이 당신에게 동조합니다.]

 문득.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당신은 첫 번째 운명의 기로에 섰습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불행의 운명'을 비트십시오.]

 [보상 - 행운 스탯 개방, 대기만성 강화]

 '이건······.'

 이전석이 내심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냐와 최은하를 구할 때 봤던 것과 똑같다.

 최근에는 비교적 나타나지 않았던 퀘스트.

 '이게 나한테도 적용될 줄은 몰랐는데···.'

 하물며 불행의 운명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엿이라도 먹여달라는 걸까?

 생각을 읽고 이런 것들이 나타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일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내 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 조금 특이한 보상을 발견했다.

 '행운 스탯?'

 검은 동공에 의문과 흥미가 내비친다.

 난생처음 보는 스탯의 종류.

 선업이나 악업과 마찬가지다.

 행운.

 말 그대로 스탯 수치가 오를수록 행운이 증가하는 걸까?

 정말 만약에라도 그런 거라면···.

 '······어처구니가 없군.'

 이전석이 작게 헛웃었다.

 세상에 운의 요소를 받는 게 얼마나 많던가.

 단순 게임 속 뽑기만 봐도 그렇다.

 배달 음식에서 머리카락이 나오거나, 갑자기 마른하늘에 소나기가 내리거나, 혹은 건강하던 가족에게 안 좋은 소식이 생기거나.

 행운 스탯이 오른다면?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아무리 시스템이라도 그렇게 형평성 없는 보상을 주진 않을 거야.'

 시스템은 의외로 그런 부분에선 한없이 공평했다.

 세상의 규칙, 혹은 밸런스라고 해야 할까.

 그것들을 뭉개버릴 정도로 뛰어난 보상을 냅다 쥐어주진 않는 것이다.

 EX급인 천살성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고, 덕분에 어느 권좌보다 강하던 이전석조차 끝끝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운이라는 단어는 이전석의 흥미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저게 있다면 이번처럼 가족에게 급작스레 안 좋은 일이 생길 확률이 줄어들 테니까.

 '게다가······.'

 시스템이 내건 보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기만성의 강화까지.

 '퀘스트의 달성 조건은··· 아마도 어머니의 마나 중독증을 완치하는 걸 테지.'

 지금 이전석에게 닥친 불행이라면 그것뿐이 없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한유리.

 어머니의 완치.

 슥-.

 이전석이 시스템을 눈앞에서 치웠다.

 그리고 옅게 숨을 골랐다.

 흥분했던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다.

 영원의 낙인 덕분일까.

 두근거림은 금세 가라앉았다.

 이내 그가 침착하게 생각을 거듭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앞서 언급했듯 미래에서 마나 중독증을 치료한 일반인이 한 명 있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그걸 치료라 보기엔 어려웠다.

 엘릭서를 먹여 억지로 신체 구조를 뒤바꾼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엘릭서.

 체력 포션 중 가장 으뜸가는 아이템이자, 천혜의 보화라고도 불리는 물건.

 '업상점은······.'

 이전석이 잠시 토요토를 떠올렸다.

 업상점을 통해 엘릭서를 구매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선업이 부족해.'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SSS급의 물건이 고작 50만 수준의 선업으로 살 수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S급이 40만이니 SSS급은 그 몇 배는 갈 터.

 지금 가진 선업으론 택도 없는 수준이었다.

 혹시 엘릭서 외에 다른 게 있진 않을까 싶어 토요토를 불러내 살펴봤지만, 아쉽게도 그런 것들은 엘릭서 만큼 가격이 비싸거나 하나씩 나사가 빠져 있었다.

 나사가 빠진 거라도 사야 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전석은 다시 토요토를 돌려보냈다.

 그보다 더 좋은 수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암시장.

 '내 기억이 맞다면··· 조만간 암시장이 주최하는 경매에 엘릭서가 출품될 거야.'

 정확히는 엘릭서 한 방울이 든 작은 병.

 그게 상품으로 등장할 거다.

 때마침- 정말 좋은 시기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암시장이 주최하는 경매에선 주기적으로 엘릭서 한 방울이 출품되곤 했다.

 이유? 모른다.

 알 리가 없다.

 이전석이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오직 하나뿐.

 그 경매에 엘릭서가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엘릭서는 그 이름 만큼이나 치유에도 엄청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잘린 사지를 재생하는 건 물론, 엘릭서를 조금이라도 마시면 백 년의 수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육체의 구조를 환골탈태처럼 바꿔준다고 한다.

 과연 그것들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이전석으로서도 의아할 따름이지만······.

 '한 방울이라도 있으면 마나 중독증을 치료할 수 있어.'

 그것만은 확실했다.

 실제로 전생에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까.

 직접 보고 겪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암시장에 들어가냐는 건데······.'

 이전석이 옥상 밑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암시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곳은 온갖 범죄와 음기가 꿈틀거리는 현세의 이면이었다.

 당연히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리 없다.

 암시장에서 열리는 경매는 또 어떻고?

 "······."

 한참 생각을 반복하길 잠시.

 문득, 이전석이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에밀리.

 그녀로부터 건네받은 명함.

 ━저희 스승님이 리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에밀리의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마침 잘 됐어.'

 이전석도 그녀의 스승에게 볼일이 생겼다.

 만마의 권좌, 스텔라 스텔레인.

 마신이라고도 불리는 마법의 종주.

 슬럼가에서 자라 인간 세상의 어두운 이면을 빠삭하게 꿰뚫고 있는 그녀라면, 암시장의 입장권 한두 장쯤은 충분히 가지고 있겠지.

 결정을 내린 이전석은 곧 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리? 리가 먼저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는데··· 무슨 일인가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에밀리의 목소리.

 "혹시 조만간··· 아니, 가능한 빠른 시일 내로 스텔라님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이전석은 바로 본론을 내뱉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8화

경매장은 기연을 싣고 (1)

온통 흰색으로 도배된 거실.

 식탁은 물론 의자나 냉장고, 그리고 소파와 같은 가구부터 바닥에 장식된 러그까지 모든 게 그저 하얗기만 하다.

 때 하나 타지 않은 거실.

 순백이라는 단어를 집으로 표현하면 이런 광경이 될까.

 "편히 앉으세요."

 에밀리가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소파의 방석이나 쿠션마저 새하얀 게, 보고 있노라면 거부감이 들 지경이었다.

 "리는 어떤 차를 좋아해요?"

 소파에 앉을 때쯤 에밀리가 물어왔다.

 "녹차로는 벽라춘, 엽차, 죽로가 있고, 홍차는 리제, 일월담 얼그레이······."

 "그냥 아무거나 부탁드립니다."

 뭔가 복잡해지는 설명에 이전석이 적당히 대꾸했다.

 그러자 에밀리가 옅게 웃으며 허공에 손짓했다.

 "어려운 요구네요."

 탁-.

 그녀의 손짓에 따라 열리는 싱크대 서랍장.

 그 안에서 작은 찻잔과 접시, 그리고 티백이 빠져나와 허공에서 저절로 차가 우려되기 시작했다.

 이내 에밀리는 다 우려진 찻잔을 가지고 거실로 돌아왔다.

 "얼그레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차죠."

 이전석이 차를 받아들었다.

 짙은 적색의 홍차였다.

 뒤이어 자신의 차도 한 잔 더 우린 에밀리.

 그녀가 이전석 옆에 앉았다.

 정말 거리감이 조금도 없었다.

 보통은 이렇게 옆자리에 앉나?

 의아하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전석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차를 한 번에 전부 들이킨 이전석.

 그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스텔라님은 언제 오시죠?"

 "아마 조금만 기다리면 되실 거예요. ······음, 아니다. 어쩌면 약간 많이 기다려야 될 수도?"

 대체 무슨 소리일까.

 통 이해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지금 일어나셨네요."

 뒤이어진 에밀리의 말과 함께 새하얀 안방 문이 열렸다.

 "하암······."

 그리고 누군가가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남색의 별무늬 잠옷을 입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여인.

 이전석은 그녀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봤다.

 스텔라 스텔레인.

 "······집에 계셨습니까?"

 이전석의 물음.

 대답한 건 에밀리였다.

 "어제 하루 종일 게임하다 밤을 새겼거든요."

 게임?

 게임이라고?

 이전석이 스텔라를 쳐다봤다.

 그는 스텔라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마신.

 만마의 권좌.

 마법에 미친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그녀는 오직 마법을 탐구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그뿐이랴.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고아로 자라 온갖 더러운 일에 손을 대고, SSS급으로 각성하여 천부적인 재능과 센스로 10년이 채 안 되어 권좌의 자리에까지 오른 여인.

 그게 바로 스텔라 스텔레인이었다.

 헌데 그런 그녀가 밤을 샐 정도로 게임을 좋아하고, 그것도 모자라선.

 "에밀리··· 밥······."

 평소 모습이 이리도 칠칠찮다는 건 현생에 와서 처음 안 사실이었다.

 "스승님, 손님이에요."

 에밀리가 뒤늦게 이전석을 가리켰다.

 스텔라가 두 눈을 껌뻑였다.

 아직 졸림이 가시지 않은 듯한 동공.

 "이전석······?"

 스텔라가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어조로 말했다.

 그것도 잠시.

 "흠흠."

 이내 머리를 왼손으로 가볍게 털었다.

 마법일까. 부스스한 머리가 순식간에 비단처럼 변한다.

 그녀가 입고 있던 옷 또한 마찬가지였다.

 툭, 어깨를 두들기자 남색의 별무늬 잠옷이 화려한 마법사들의 복장으로 변했다.

 단순 별무늬가 아닌 정말 은하수가 새겨진 듯한 망토.

 머리에는 그 망토와 비슷한 디자인의 고깔모자가 쓰여 진다.

 스텔라는 옆머리를 넘기며 말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에밀리? 손님 앞에서 품격을 잃잖나."

 "이미 품격이라는 건 물 건너간 거 같으니 평소대로 하시는 게 어떨까요?"

 "······."

 에밀리가 웃는 얼굴로 뼈를 때렸다.

 스텔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제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후줄근한 청바지와 흰 티셔츠로 변하는 복장.

 "너는 대체 누구 편이냐, 에밀리···."

 "그야 당연히 스승님 편이죠."

 묘하게 박박 긁는 듯한 에밀리의 말투였다.

 스텔라는 눈을 찌푸리며 이전석을 노려봤다.

 "너도 그래. 올 거면 미리 말을 하는 게 예의 아니야?"

 "했습니다만······."

 "···응? 했다고?"

 두 눈을 껌뻑이는 스텔라.

 그 물음에 대답한 건 에밀리였다.

 "제가 전화를 바꿔드렸는데 한참 게임하시느라 대충 대답하셨죠."

 이내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이전석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리. 아무래도 저희 스승님께서 조금······."

 "내가 뭐 어때서."

 흥-.

 스텔라는 살짝 짜증 섞인 어조로 대꾸했다.

 뭔가···.

 '내 생각보다 훨씬 아이 같은 권좌로군.'

 사실 이 시기의 스텔라라면 나이가 아직 20대 후반일 테니 아이 같다는 건 그리 이상한 표현이 아닐지도 몰랐다.

 에밀리와 친구처럼 서슴없이 지내는 것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나이 차 덕분이겠지.

 "이래서 제자를 잘 둬야 돼."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는 스텔라.

 그녀가 에밀리처럼 허공에 손짓했다.

 그러자 TV와 그 밑 받침대가 하얀 소파로 변했다.

 이전석이 앉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스텔라는 그곳에 털석 앉으며 이전석을 바라봤다.

 "협회의 영웅께선 왜 나를 찾으셨을까?"

 ※ ※ ※

 "암시장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VIP 입장권이 필요합니다."

 그는 곧장 목적을 꺼내 들었다.

 굳이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암시장 경매? 흠,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스텔라가 흥미 어린 눈빛을 띠었다.

 "암시장의 존재를 알 정도면 너도 알겠지? VIP 입장권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지."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알기에 스텔라에게 부탁한 것이다.

 지금 당장 VIP 입장권을 줄 수 있는 사람.

 그건 오직 스텔라가 유일했으니.

 이유야 다름이 아니었다.

 스텔라.

 그녀는 만마의 권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암시장의 일각을 담당하는 관리자이기도 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고 상반되는 두 가지의 신분.

 "너는 운이 좋아."

 스텔라가 말했다.

 까득- 그녀가 사탕을 깨물었다.

 언제 사탕을 까먹은 거지?

 간단한 일상 속의 행동조차 제대로 인식하는 게 어려웠다.

 아니.

 '집 전체에 마법이 부여돼 있군.'

 이전석은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공간 자체가 마법에 의해 비틀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눈치도 좋은 모양이고."

 키득-.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흘리는 스텔라.

 "그거 알아? 검선 그 양반이라도 제자가 원한다 해서 이런 걸 바로 주지는 못했을 거야."

 그녀가 검지와 중지를 새웠다.

 그 사이로 티켓 한 장이 나타났다.

 아무런 문자도, 문양도 없는 티켓.

 그저 새까맣기만 할 뿐인 저것이 바로 암시장의 VIP 입장권이었다.

 "하지만."

 스텔라가 마치 꼬리를 살랑이듯 티켓을 흔들어 보였다.

 "세상에 대가 없는 친절은 없는 법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우리 사랑스러운 제자한테 너에 대한 얘기를 듣고 관심이 생겼어. 그래서 잠깐 얼굴을 보자고 한 거고. 영상으로 볼 땐 긴가민가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신이 섰어."

 탁-.

 스텔라가 티켓을 탁상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이전석을 가리켰다.

 "너, SSS급 각성자지?"

 "······."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스텔라만이 흥미롭다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검선한테 부탁해서 승급 시험을 조금 훔쳐봤어. 마나를 다루는 실력이 꽤 뛰어나더라고? 특히 그 마나실은 예술적이야."

 마나실.

 적단도에 휘감아 채찍처럼 휘둘렀던 그 기술을 말하는 걸까.

 "그만한 제어능력은 S급들 중에서도 찾아 보기 어렵지."

 무엇보다.

 "내가 만들어낸 마법도 금세 파악하고 꿰뚫어 보는 그 눈. 마나에 대한 제어능력은 그렇다 쳐도, 그 눈만은 SS급조차 쉽게 따라올 수 없어. 더 놀라운 건··· 권좌들 중에서도 네 눈을 따라올 놈이 몇이나 될 지가 의문이라는 거야."

 말이 안 되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스텔라가 직접 바라본 이전석의 시선은 무척이나 이질적이고 기이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슥-.

 이내 스텔라가 허공에 검지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끝으로부터 마나가 피어나 꽃처럼 허공을 장식했다.

 마치 별빛과도 같이 이질적인 마나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이 이거야. 네가 SSS급 각성자에, 남들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정도로 우월한 마법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스텔라의 마나가 이전석을 바람처럼 훑고 지나갔다.

 "어때, 정답이야?"

 "······."

 이전석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유야 다름이 아니었다.

 사실은 EX급이라고 어찌 말하겠는가.

 SSS보다 낮게 말하기도 좀 그랬다.

 마치 저 기대감 어린 시선을 배신하는 것만 같아서.

 "얌마, 정답이냐고."

 스텔라가 재촉하듯 물었다.

 탁상을 두들기는 그녀의 손.

 그러나.

 "스승님, 보통은 그런 걸 면전에서 물으시면 대답 못 해요."

 에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마치 못 말리는 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스텔라를 대했다. 

 "예의가 아니라는 소리예요."

 "아니, 뭐··· 내가 권좌인데 예의 조금 없을 수도 있지."

 뾰로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스텔라였지만, 에밀리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했다.

 "권좌이기 이전에 같은 사람이잖아요?"

 "알았어, 알았다고."

 스텔라가 한숨을 옅게 쉬었다.

 누가 스승이고 제자인지······.

 아마 에밀리랑 결혼하는 사람은 평생 잔소리에 시달리며 살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스텔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스텔라가 이전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합격이야."

 "그럼······?"

 이전석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에 스텔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티켓은 줄게. 너 정도 되는 인재면 그만한 가치는 있으니까."

 하지만 앞서 언급했 그것은 대가 없는 친절이 아니었다.

 "대신, 나중에 파밀리아에서 길드원 체험을 한 번 해볼 것." 

 "···체험 말입니까?"

 "그냥 협회에서 용병으로 활동한 거랑 비슷한 거야. 한 일주일 정도? 우리 파밀리아에 들어와서 나랑 같이 길드 활동을 해보는 거지. 그 뭐냐······ 요즘 애들이 한다는 키즈체험 비슷한 거라고나 할까?"

 키즈체험.

 그 말에 이전석이 스텔라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녀는 이전석을 한국에서 자국의 길드로 빼 올 샘인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굳이 키즈체험이란 비유를 들었을까.

 물론 파밀리아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일주일 동안 체험하는 게 전부였으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러도록 하죠."

 끝내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스켈라가 티켓을 내밀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티켓을 받아 든 직후, 이전석은 몸이 붕 뜨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건··· 텔레포트?'

 9서클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고위급 마법.

 그게 자신과 에밀리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마법의 발신인은 다름 아닌 스텔라였다.

 이전석은 그녀를 바라보며 혹여나 싶은 마음에 물었다.

 "지금 바로 갑니까?"

 그러자 하품을 내쉬며 되묻는 스텔라.

 "그럼 언제 가려고? 조금 있으면 경매 시작하니까 후딱 끝내고 와."

 이내 그녀의 시선이 에밀리에게로 향했다.

 "길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에밀리가 잠깐 같이 가주고."

 "네."

 에밀리는 마치 작금의 상황을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걱정하지 마세요, 리. 텔레포트라고 해도 포탈 게이트를 타는 감각이랑 비슷할 테니까요."

 나지막한 에밀리의 말과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 ※ ※

 에밀리의 말대로였다.

 텔레포트의 감각은 포탈 게이트와 엇비슷했다.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포탈 게이트보다 이동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는 것일까.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는 감각만이 또렷이 느껴진다.

 주변에는 마나가 물결치듯 위로 흐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전석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기에 위로 흐른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파도치는 마나의 물결 사이.

 마법을 구성하는 술식들이 엿보였다.

 본래라면 그걸 알아보기는커녕 해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지만······.

 '술식을 미로처럼 짜놨군.'

 이전석은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꿰뚫어 봤다.

 '결계식? 텔레포트에 결계를 섞어놨나? 확실히··· 이런 식이면 텔레포트 도중 다른 누군가에게 방해받을 일은 없겠어.'

 그 외에도 다양한 술식들이 보였다.

 '역시 만마의 권좌로군. 하나도 어려운 '마법 연금'을 수십 개나 엮어놨어.'

 그녀가 발동한 텔레포트는 이미 평범한 전이 마법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설령 방해가 들어온다고 한들 요격이 가능한 순간이동 요새나 다름없었다.

 반면.

 '스승님의 마법을······.'

 에밀리가 그런 이전석이 바라봤다.

 그는 스텔라의 마법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다.

 그저 바라만 봤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이전석은 스텔라의 마법을 대부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역시······ 눈만 따지고 보면 스승님 이상이야.'

 권좌보다 뛰어난 인식능력.

 이는 단순히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식선의 수준이 아니었다.

 '마안(魔眼).'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러했다.

 기이하고 이질적이며 불길한 눈동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의 편린을 꿰뚫어 보니, 과연 마안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그게 진짜 마안이 아니며 단순히 이전석의 실력- 혹은 재능이라는 것이었다.

 에밀리는 그 사실이 못내 어이가 없으면서도 감탄스러웠다.

 '······알고 있긴 했지만 새삼, 괴물이시네요.'

 마치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는 것만 같다.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

 '역시 가지고 싶어.'

 에밀리가 눈을 번뜩였다.

 단순한 소유욕이 아니다.

 그녀는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제 스승보다 더 많은 제자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반드시 파밀리아로 데려와야 해.'

 당연히 한국 정부와 협회의 반발이 있을 거다.

 그들도 이전석의 재능을 몰라보진 않았을 터.

 하지만 이전석의 가치는 고작 그런 것들론 막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것이었다.

 천재, 영재, 수백 년에 한 번 나올 인재.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에밀리가 바라보는 이전석은 이미 사람의 격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었다.

 누구라도 보면 탐이 날만 한 보석.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지이잉-.

 문득,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마나의 물결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진 마나의 빛을 대신해, 눈이 멀어버린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도착했네요."

 뒤늦게 에밀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암시장.

 '오라리오'라고도 불리는 지하 세계.

 그곳에 도착한 것이다.

 다만.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르군.'

 이전석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온통 어둠으로 가득하다.

 한 줌의 빛도 찾아볼 수 없는 공간.

 그 가운데.

 오직 다섯 개의 가면만이 빛을 내고 있다.

 토끼, 거북이, 호랑이, 여우, 곰.

 다양한 모양새의 가면.

 "암시장에선 기본적으로 신분을 숨겨야 해요."

 그중 에밀리가 여우 가면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티켓으로 암시장에 이동하면 얼굴을 가릴 수 있는 가면이 제공되죠."

 에밀리는 가면을 얼굴에 썼다.

 순간, 그녀의 곱고 작은 얼굴이 한 마리의 여우로 변했다.

 털이 돋아나고 귀가 생겨나며 눈동자가 시뻘겋게 바뀐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목 아래는 제대로 인식 되지 않았다.

 얼핏 보면 머리만 떠다니는 듯하다.

 저게 바로 저 가면의 효과였다.

 '과연.'

 이전석은 그제야 왜 자신의 기억과 작금의 광경가 다른지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 그도 오라리오에 온 적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들어오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오라리오가 위치하던 곳의 지반을 깨부수고 억지로 들어왔었지.'

 그러다 보니 가면도 쓸 수 없었고,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참 무식하기 그지없던 시절인 것이다.

 슥-.

 이전석이 거북이 가면을 집어 들었다.

 ━

 거북이 가면

 등급 : S

 효과 : 착용 시 머리가 거북이 모양으로 변한다. 또한 타인의 인식을 크게 왜곡시킨다.

 ━

 무려 S급의 아이템.

 이런 것에 S라는 등급이 붙었다는 건, 그만큼 막강한 인식왜곡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겠지.

 "귀여우세요."

 거북이 가면을 쓴 직후.

 에밀리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귀엽다라···.'

 그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진 대충 예상이 갔다.

 여우로 변한 에밀리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흡사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귀여운 얼굴.

 실사가 아닌 카툰풍의 여우가 귀를 쫑긋거리며 귀엽게 이전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이전석 본인도 비슷하게 바뀌어 있으리라.

 아무렴 상관없었다.

 "우선 경매장부터 가고 싶습니다만."

 "안내해 드릴 테니 유의해서 따라와 주세요."

 에밀리가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직후.

 그녀의 손아귀에 웬 문고리가 잡혔다.

 뒤이어 나타나는 투박한 철문 하나.

 그것을 열며, 에밀리가 말을 이었다.

 "암시장은 길을 잃어버리기 쉬우니 절대 저를 놓치시면 안 돼요."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문을 넘어 암시장으로 들어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59화

경매장은 기연을 싣고 (2)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이었다.

 사람의 무리가 파도처럼 이전석과 에밀리를 휩쓸었다.

 한 줌의 햇빛조차 없는 비좁은 지하 골목.

 어스름함이 안개처럼 내리깔려 있으며, 각양각색의 가면을 쓴 사람이 서로 어깨를 밀치며 돌아다니고 있다.

 흡사 저녁의 시장통을 연상케 하는 광경.

 골목의 좌우에는 각각 돗자리를 편 노점상이 있었는데, 당연히 그들 또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이쪽이에요."

 에밀리가 여우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이전석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을 지나 중앙으로 향하자, 천장과 이어진 거대한 기둥이 나타났다.

 100미터는 족히 넘는 크기.

 마냥 평범한 기둥은 아니다.

 곳곳에 창과 문이 나 있으며, 이불이 널린 베란다마저 존재했다.

 그리고 그 베란다에서 마침 빨래를 너는 사람이 한 명 보였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평범한 여인.

 "오라리오의 주민이에요."

 에밀리가 그녀에 대해 설명해 줬다.

 비단 그 여인 뿐만이 아니었다.

 가면을 쓰지 않은 몇몇 사람이 거리 곳곳에도 드물게 보였다.

 "범죄를 저질렀거나, 가문에서 쫓겨났거나, 세상에 회한을 느껴 도망쳤거나··· 아니면 그냥 이곳이 좋아서 여기 정착했거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죠."

 에밀리는 "그래도"라며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 체계가 잡혀 있고 규칙과 룰이 있는 세계랍니다?"

 옅은 웃음을 흘리는 그녀.

 "바깥사람들이 보기엔 더러운 시궁창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곳 사람들에겐 그리운 고향이죠."

 이전석은 기둥을 향해 걸어가던 에밀리를 지긋이 응시했다.

 '말이 많아졌군.'

 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오라리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었기에.

 지하 세계에 불과한 오라리오에도 사람이 태어나며, 그리고 버려진다.

 책임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사창가에 버려진 에밀리. 

 그녀는 이름 없는 창녀에게 거두워져 자랐고, 7살이 되었을 무렵엔 수도원에서 창이나 바닥을 닦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스스로 자립해 마법을 배우다가 우연히 스텔라를 만났다고 했지.'

 얼핏 들은 이야기이기에 이전석도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다만 에밀리가 오라리오에 들어온 이후부터 유독 말이 많아졌으며, 그것이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는 것임을 모르진 않았다.

 물론 그것도 결국은 끝이 오기 마련이었으니.

 "경매장은 여기 최상층에 있어요."

 기둥 한 쪽에 새겨진 거대한 입구.

 에밀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돌과 진흙, 그리고 석청으로 만들어진 듯한 외관과 달리, 기둥의 내부는 현대라는 단어가 물씬 풍겨올 만큼 세련돼 있었다.

 각종 소파와 장신물, 그리고 TV 스크린마저 존재한다.

 한쪽 구석에는 쉴 새 없이 물을 뿜어내는 분수와 여러 종류의 식물들도 있었다.

 이전석은 에밀리를 따라 바로 그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띡-.

 버튼을 누르자 빠르게 최상층을 향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마법일까. 분명 바깥에선 유리가 보이지 않았음에도, 엘리베이터 내부에선 오라리오의 전경이 한 눈에 비추어졌다.

 '생각보다 볼만하군.'

 아래에서 볼 땐 단지 칙칙하고 어둡기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위에서 보니 드문드문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 나름 운치가 있었다.

 띵-.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며 곧 일직선의 고풍스런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뚜벅-.

 에밀리와 이전석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 순간.

 화륵-.

 양쪽 벽을 장식하던 촛불이 타올랐다.

 동시에 등 뒤의 엘리베이터가 사라지며, 그 대신이라는 듯 복도의 끝에 문 하나가 나타났다.

 3미터는 될 법한 여닫이문이다.

 화악-!

 그것이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착각 따위가 아니다.

 마치 축지를 사용한 것처럼 복도의 길이가 좁혀진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문에는 '얼굴'이 있었다.

 문고리 대신 불쑥 튀어나와 있는 얼굴 형태의 기이한 조각.

 "━━님이시군요. 오랜만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에밀리는 익숙하다는 듯 웃는 표정으로 물었다.

 "경매장에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다름 아닌 ━━님이신데 제가 무어라고 막겠습니다."

 정확히 이름을 부를 때만 묵음처리 되는 목소리.

 이내 조각된 얼굴이 이전석을 쳐다봤다.

 "헌데, 옆에 계신 분은······."

 "VIP 티켓 소유자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흠흠, 확실히. 티켓을 가지고 있군요."

 조각면(面).

 그것의 눈동자가 땡글 굴러갔다.

 실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스텔라에게 받은 VIP 티켓을 제대로 인식한 모양.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조각면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전석은 그것을 뒤로한 채 경매장에 들어갔다.

 ※ ※ ※

 경매장은 거대하기 그지없는 관(館)이었다.

 원형의 무대를 중심으로 수천은 될 법한 좌석이 빙글 둘러싸고 있다.

 좌석에는 하나 같이 동물 머리를 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반갑습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그들이 무대 위 한 남자를 바라봤다.

 평범한 동물의 머리를 한 이들과 달리, 마치 도깨비와 같은 얼굴을 가진 남자다.

 신장도 100cm쯤밖에 안 되는 게, 정말 도깨비라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굳이 따지면 도깨비도 틀린 표현은 아니지.'

 암시장의 중개인으로서 활동하던 그는 던전 너머에서 찾아온 이방인으로, 흔히 '흑요족(黑妖族)'이라 불리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흑요.

 타락한 요정.

 덕분일까. 도깨비 같은 외모와 달리, 등에는 길쭉하고 반투명한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한때 흑요왕 바로살레나님을 섬기던 파이몬이라고 합니다."

 파이몬이 우아한 몸짓과 함께 자신을 소개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이라면 모두 한 가지 목적으로 오라리오를 찾으셨겠지요. 뭐,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잔말 말고, 서두 없이 바로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던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딱-.

 파이몬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와 같은 생김새의 흑요정 한 명이 무대로 올라왔다.

 제 상체만한 크기의 책 한 권을 든 채로.

 파이몬은 흑요정으로부터 그 책을 건네 받으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물품은 바로 이것, 엘레노아의 마법서입니다."

 "엘레노아?"

 "엘이라면 엘프들의 이름 아닌가?"

 "엘프의 마법서라······."

 파이몬이 책의 이름을 말하자 주변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프라면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에 빠삭한 종족이었으니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다만 에밀리와 이전석은 달랐다.

 "하급이네요."

 책을 평가하듯 말하는 에밀리.

 "겉보기엔 꽤 화려해 보이지만, 엘레노아라면 엘프 중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가문의 이름이에요. 게다가 책에서 느껴지는 술식이나 마나도 별 대단치 않고···. 저 정도면 돈값에 비해 얻을 수 있는 마법적 지식이 형편없을 것 같네요."

 과연 스텔라의 제자라는 것일까.

 에밀리는 엘프에 관해서도 적지않게 지식을 가진 듯햇다.

 물론 이전석은 다른 이유로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오직 엘릭서뿐이었음으로.

 "1천!"

 "1천 오백!"

 "2천!"

 "3천!"

 "3천 백!"

 동물 머리의 사람들이 제각각 책을 얻고자 가격을 높여갔다.

 그러다 결국 엘레노아의 마법서는 어느 뱀 머리 노인에게 돌아갔다.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물건의 가격은 무려 6천 2백이었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더 경매가 이어졌고······.

 "아실 분들은 모두 아시리라 생각하십니다."

 이내 파이몬이 작은 병을 양손에 들었다.

 무색무취의 액체가 담긴 병.

 "이번에 여러분들께 소개해 드릴 건 바로 엘릭서 한 방울입니다."

 드디어, 원하던 게 나왔다.

 "비록 한 방울일 뿐이지만 엘릭서라는 이름값은 톡톡히 하는 물건이죠. 마시면 백 년의 수명을 더 얻을 수 있을뿐더러, 웬만한 상처에도 멀쩡한 재생력과 각종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 면역력을 가지게 되지요. 물건이 물건인 만큼 처음은 5천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원하시는 분들께선 손을 드시고 금액을 말씀해 주시면······."

 "1000억."

 "······음?"

 파이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거북이 머리를 한 사내, 이전석.

 "저··· 방금 얼마라고······?"

 "천억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손을 번쩍 든 채 당당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

 ※ ※ ※

 일전에 언급했던 적이 있을 것이다.

 토요토의 상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취급한다고.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현금조차 판매하고 있었으니.

 그래서 스텔라와 만나기 전, 이전석은 시험 삼아 천만 원을 구매해 봤다.

 업상점에서 최소로 판매되는 현금의 단위가 무려 천만이었는데, 황당하게도 그 가격은 고작해야 100 선업밖에 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특성이나 다른 여타 아이템에 비해 현금은 이상할 정도로 가치가 낮았다.

 물론 그런 건 당장에 이전석에게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현금을 들고 은행을 찾았다.

 뒤이어 ATM 기계에 지폐를 넣어봤는데, 돈은 무사히 통장에 저금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딱히, 별다른 문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ATM 기계는 업상점의 현금을 제대로 된 돈이라 인식했다는 의미다.

 즉, 위조지폐가 아니라는 소리.

 그럼 의문이 몇 가지 생겨난다.

 업상점에 판매되는 현금에는 제한이 없었다.

 천만이라는 최소 구매 단위가 존재했지만, 토요토에게 물어보니 조든 경이든 선업만 된다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대체 어디서 만들어지는 거지?

 혹시라도 그것들을 전부 풀어버리면 경제가 붕괴하진 않을까?

 의문은 곧 질문으로 이어져 토요토에게 물어보게 되었으나.

 ━그에 대해 대답해 드리기 위해선 정보료로 200만의 선업이 필요합니다만··· 괜찮으실는지?

 ━······지랄도 풍년이로군.

 토요토의 대답에 이전석은 황당하다는 양 한숨을 푹 내쉬었다.

 200만 원도 아니고 200만 선업?

 아예 사지 말라고 못을 박아놓은 것과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니면 그만큼 가치가 있는 정보라는 걸까.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전석에게 중요한 건 어머니의 건강뿐이었음으로.

 그래서 그는 닥치는 대로 현금을 구매했고, 50만의 선업으로 총 오백억에 해당하는 현금을 마련했다.

 50만이면 S급 특성이나 아이템을 하나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특성은 더 얻기엔 당장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아.'

 아이템의 경우엔 그렇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착용 제한까지 있어 더 필요가 없었다.

 그럴 바엔 어머니를 구하는데 사용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협회에서 준 돈이 천 하고도 20억이 더 있었으니.

 승급 시험을 치루기 전에 20억, 그리고 브랜던을 잡은 이후에 천억을 추가로 더 받은 것이다.

 당연히 SS급을 죽인 것에 대한 수당이었다.

 용병은 처리한 사건의 규모와 위험에 따라 수당을 받았으니까.

 물론 전체적으로 받게 될 금액에 비해선 한참 부족했지만, 아쉽게도 이보다 더 많은 돈을 바로 주기엔 여러 절차나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선금으로 우선 천억만 지급받았다.

 그리하여 모인 돈이 대략 천오백억.

 "천억이라고 했습니다."

 그중, 천억을 아낌없이 때려 박았다.

 꽤 놀란 듯한 파이몬의 표정.

 주변에서도 당황스런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천억이라고?"

 "엘릭서라는 걸 생각하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작해야 한 방울에 천억을 부르다니······."

 "화끈한 녀석이로군."

 그들의 반응이야 당연했다.

 아무리 엘릭서가 비싸다고 해도 겨우 한 방울에 불과했으니까.

 수명이 백 년이나 늘어난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그 말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 마시면 수명이 늘어나긴 하겠지.

 하루나 이틀쯤?

 일반인이 섭취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각성을 거치면서 이미 한차례 육체 구조가 바뀐 헌터에게 엘릭서 한 방울은 최상급 포션보다 조금 더 좋은 물건에 불과했다.

 굳이 비싼 값을 치르면서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덕분일까.

 대뜸 천이라는 거액을 부를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셋을 부를 때까지 더 높은 가격을 부르시는 분이 없으시다면 엘릭서 한 방울은 거북이 머리 신사분께 돌아갑니다!"

 이윽고 파이몬이 묘하게 신이 난 어조로 말했다.

 "하나!"

 정적.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둘!"

 아직까지도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세······!"

 파이몬이 셋을 외치려 할 때였다.

 "처, 천 백!"

 반대편 좌석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다급함과 떨림이 동시에 묻어난 어투.

 그에 파이몬이 잔뜩 신이 난 어조로 말했다.

 "네, 천 백억! 양 머리 신사분께서 천 백억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직후.

 "천 이백."

 이전석이 바로 금액을 올렸다.

 ※ ※ ※

 화산 길드 후계서열 2위 최아린.

 그 휘하의 A+급 헌터인 조경헌.

 그는 최근 최아린으로부터 한 가지의 명령을 받았다.

 ━오라리오에서 주기적으로 출품되는 엘릭서가 있어요. 한 방울이긴 한데··· 제가 그걸 연구해 보고 싶어서 말예요. 부디 나를 위해 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사실 명령이라기보다 부탁에 가까웠지만··· 연심에 눈이 먼 조경헌은 그것을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그는 최아린의 부탁을 수락했고 바로 2시간 전 오라리오에 도착했다.

 VIP 티켓을 구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비를 들였는지······.

 최아린이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환불하고 싶을 정도로 적금이 많이 깨졌다.

 그렇게 경매장에 입성한 이후.

 그는 엘릭서가 나오기까지 기다렸다.

 VIP 입장권을 구매했기 때문일까.

 통장에 남은 잔금이 얼마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듣자 하니 엘릭서 한 방울 정도는 칠백억에서 팔백억 사이로 낙찰된다고 하니까.

 그래서 조경헌은 충분히 엘릭서를 살 수 있을 것이라 안심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천억."

 처, 천억?

 누군지 모를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자! 셋을 부를 때까지 더 높은 가격을 부르시는 분이 없으시다면 엘릭서 한 방울은 거북이 머리 신사분께 돌아갑니다!"

 중개인인 파이몬이 말했다.

 그에 조경헌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안 돼!'

 이대로 엘릭서를 빼앗길 순 없었다.

 그는 떨리는 어조로, 셋이 이어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처, 천 백!"

 순간 주위의 시선이 조경헌에게로 쏠렸다.

 마치 호구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다.

 엘릭서가 귀중하다곤 하지만 기껏해야 한 방울이고, 그것은 매 경매마다 꾸준히 출품되는 물건이었으니까.

 금액이 높아졌다면?

 손을 때고 다음을 노리면 그만이다.

 보통은 조경헌처럼 무리하게 판돈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통이라면 그럴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면 아린님께서 실망하실 게 분명해. 기껏 아린님 눈에 들어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이제와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드릴 순 없어.'

 호구라 불릴지언정 상관없었다.

 그게 뭐 대수란 말인가.

 '아린님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지출쯤은······.'

 사랑에 눈이 먼 남자는 이토록이나 무지하고 멍청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천 이백."

 "······무슨!"

 재차 이어진 거북이 머리의 말에 조경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하니 여기서 더 판돈을 올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조경헌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으나, 이내 거북이 머리의 공격을 맞받아치듯 외쳤다.

 "천 삼백!"

 어딘가 불안이 뒤섞인 목소리.

 가진 대부분의 돈을 입에 담았다.

 덕분일까.

 '제발······.'

 조경헌은 마치 신에게 기도하듯 간절히 빌었다.

 이 이상은 아무리 그라도 힘들었다.

 만약 상대가 이전과 똑같이 낙찰가를 올린다면 더 대응할 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사백."

 또다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개자식이···!'

 조경헌이 내심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아직 조금은······.'

 조경헌이 제 통장을 펼쳤다.

 천사백이 전 재산이긴 했지만, 아주 남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고민도 잠시뿐.

 ━부디 나를 위해 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뇌리에 최아린의 말이 떠올랐다.

 순간, 조경헌의 눈이 돌아갔다.

 "천 사백 오십!"

 1450억.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영혼까지 탈탈 끌어모은 돈.

 1450억은 그가 F급이었을 적부터 모아온 적금이었다.

 그걸 모조리 털어 경매의 판돈으로 사용했다.

 '아무리 네가 가진 돈이 많아도 이 이상은 부담스러울 거다.'

 조경헌이 거북이 머리의 사내를 쳐다봤다.

 엘릭서 한 방울의 본래 가격은 칠백억.

 높아 봤자 팔백밖에 되지 않는 물건이다.

 그게 무려 두 배 가까이 올라갔다.

 고작 엘릭서 한 방울에 그만한 가격을 사용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엘릭서 한 방울은 매 경매마다 출품되는 물건이기도 했으니.

 '이쯤 되면 물러나겠지.'

 당연하게도 조경헌으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비켜 나갔다.

 "천 오백."

 거북이 머리- 이전석이 끝을 보자는 양 또다시 판돈을 올린 것이다.

 그에 조경헌의 꼭지가 돌아버렸다.

 "이런 개새끼가! 너 그 돈 있는 거 맞아?! 지금 되는대로 막 부르는 거 아니냐고!"

 화가 났다.

 어이가 없었고, 황당했다.

 다만.

 "양 머리 신사분? 오라리오의 정숙한 경매장입니다. 부디 격식을 지켜주시길."

 "크윽···."

 뒤이어진 파이몬의 협박 아닌 협박으로 인해 조경헌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경매장은 물론 오라리오의 출입이 영구적으로 통제될 수도 있었으니. 

 "그럼 다시 셋을 샐 때까지 추가입찰이 없다면 경매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파이몬이 카운트다운을 했다.

 그때까지도 손을 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이어진 뒤.

 딱-.

 파이몬이 손가락을 팅겼다.

 직후 엘릭서 한 방울이 이전석에게로 이동했다.

 낙찰이 완료된 것이다.

 '망할······!'

 조경헌은 분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그것도 잠시.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이전석을 노려봤다.

 ━부디 나를 위해 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오직 당신밖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부탁해요.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목소리.

 그리하여 형성된 포기를 모르는 집념.

 '어떻게든 엘릭서를 손에 넣어야 해.'

 그러나 알고는 있을까.

 그런 집념이나 적의를 꿰뚫어 보는 건, 이전석에게 있어 무엇보다 손쉬운 일 중 하나라는 걸.

 ※ ※ ※

 '아슬아슬했군.'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유리병.

 이전석은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엘릭서 한 방울.

 투명하면서도 영롱한 빛이 안쪽에서 흘러나온다.

 대뜸 판돈을 올리는 이가 있길래 걱정했는데, 다행히 가진 돈으로 엘릭서를 낙찰 받을 수 있었다.

 '뭐, 정 안 되면 특성으로 대출을 받거나 에밀리한테라도 빌릴 생각이었지만······.'

 그 외에도 당장 돈을 끌어올 수단은 많았다.

 단지 대가가 필요해 석연치 않을 뿐이지.

 애시당초 이전석이 이길 수밖에 없던 싸움인 셈이다.

 그걸 모르고 여전히 집념을 불태우고 있는 건 과연 대단하다고 해야 될까,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까.

 이전석이 생가하기엔 당연히 후자였다.

 다만.

 'B··· 아니, A급인가.'

 이전석은 순식간에 조경헌의 수준을 파악했다.

 그의 눈은 에밀리가 생각한 대로 이미 상식이라 부를 만한 선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마안이되 마안이 아닌 것.

 그것은 가면의 인식저해 효과마저 무시한 채 조경헌이 가진 본질을 꿰뚫어 봤다.

 '신격은 느껴지지 않는군.'

 아무리 높아 봤자 A+.

 '저 정도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어.'

 이전석은 코웃음을 치며 조경헌의 시선을 무시했다.

 "······!"

 그러자 조경훈이 굴욕이라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걸까.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전석은 뒤늦게 엘릭서의 효과를 확인했다.

 ━

 엘릭서(한 방울)

 등급 : S-

 효과 : 천고의 영약 엘릭서의 희석된 한 방울. 섭취 시 육체의 모든 치명적인 부상이 제거되며 수명이 늘어난다. 단, 섭취 대상이 각성자일 경우 효과가 극단적으로 낮아진다.

 ━

 S에 마이너스가 붙은 등급.

 효과 또한 각성자에 한 해선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고작해야 한 방울의 효과는 이러했다.

 하물며 희석되었다는 점 덕분일까. 이전석의 손에 쥐어진 물건은 엘릭서라는 상징성을 제외하면 제대로 돈값을 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라면 제대로 효과를 받으실 수 있으실 거야.'

 육체과 바뀌어 수명이 늘어나는 건 물론 마나 중독증이라는 불치병마저 치료될 터.

 그거면 충분했다.

 애당초 그걸 위해 엘릭서를 구한 게 아니던가.

 "가시죠."

 이전석은 얻을 걸 다 얻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리가 그를 따라 경매장을 나왔다.

 아니.

 그러려던 순간이었다.

 "응? 왜 그래요, 리?"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이전석에 에밀리가 의문을 표했다.

 이전석은 말없이 발걸음을 다시 뒤로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경매가 한참 진행 중인 무대를 바라봤다.

 "이 돌은 특이하게도 우주공간에 형성된 폭주형 던전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이라고 합니다! 사실 던전에서 떨어진 마당에 운석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아이템의 이름 자체가 운석이니까요! 하하, 아무튼 이 '오래된 운석'의 최소 경매가는 100만 원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파이몬이 제 몸통만 한 돌덩이를 소개하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회색의 운석.

 '미친, 저게 왜······?'

 이전석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물건의 등장에 작게 눈을 떨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0화

경매장은 기연을 싣고 (3)

"1억."

 이전석이 냅다 손을 들었다.

 "1억? 무슨 미친······."

 그를 본 개 머리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최소가 100만 원인 물건이다.

 아이템의 등급은?

 E.

 고작해야 그 정도다.

 효과 또한 '소지 시 근력이 아주 약간 증가하는 것 같다'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것이었고, 그조차 쓸데없이 손에 들고 다녀야 한다는 점 때문에 과연 사려는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헌데 1억이라니.

 "어··· 거북이 머리 신사분? 혹시 금액을 잘못 부르신 게······?"

 파이몬조차 얼떨떨한 듯 물었다.

 "1억 맞습니다."

 이전석은 더욱 또렷이 말했다.

 1억.

 일반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저딴 돌멩이에 1억을 태우겠다고?

 실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전석이라도 평소라면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저게 '드래곤의 알'이라는 걸 몰랐다면 말이다.

 그렇다.

 드래곤의 알.

 겉보기엔 평범한 돌덩이와 같다.

 알 형태와 같이 곡선을 그리지만, 그 외에 알과 연관 지을 만한 요소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은 확신했다.

 '확실해. 드래곤의 알이야.'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죽은 드래곤의 알에는 보통 '운석'이라는 이름이 붙기 때문이다.

 이유? 모른다.

 시스템의 작명 센스를 어찌 알겠는가.

 단지 이전석이 아는 거라곤, 전생에서 운석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템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드래곤의 알이었다는 것뿐이었다.

 어떤 마법사에 의해 우연히 알려지게 될,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지식.

 하물며 돌덩이 외관에 새겨진 문양.

 뱀이 기어가듯 푹 파인 자국.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틀림없다.

 드래곤의 알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알은 마나로 재련해서 섭취하면 엘릭서 못지않은 영약이 되지.'

 비단 그뿐이랴.

 어떤 방면에서 보면 엘릭서보다 더 뛰어나기도 했다.

 드래곤의 알은 엘릭서처럼 수명을 늘려준다거나 상처나 질병을 없애주지 못하지만, 그 이상으로 거대한 힘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석은 냅다 1억을 불렀다.

 다른 사람은 감히 엄두도 못 내도록.

 엘릭서에 천 오백을 소모하긴 했지만, 그에겐 아직 20억이나 되는 거금이 남아 있었으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작해야 E급밖에 되지 않는 쓰레기에 판돈을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이전석은 안전하게 운석을 낙찰받을 수 있었다.

 "리도 수집 같은 취미가 있으신가 봐요?"

 에밀리가 흥미 어린 어조로 물었다.

 이전석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차곡차곡 모아두는 습관이 있었거든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유년시절부터 용돈이나 값나가는 것들을 꼬박 모아두곤 했으니까.

 '설마 여기서 이걸 얻을 줄은 몰랐는데···.'

 이전석이 손에 든 돌덩이를 내려 봤다.

 어머니를 치료할 엘릭서를 구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위한 보약마저 얻게 된 상황.

 운이 좋다고 밖엔 할 수 없었다.

 불행으로부터 비롯된 행운, 혹은 기연.

 이 또한 시스템의 퀘스트가 영향을 미친 걸까?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전석과 에밀리는 뒤늦게 경매장을 나왔다.

 "좋은 물건을 건지셨는지?"

 "충분히."

 문에 조각된 얼굴.

 조각면의 말에 이전석이 답했다.

 "그럼 다시 방문해 주시길 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각면의 인사가 있은 직후였다.

 눈앞에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뒤를 돌아보자 조각면과 문은 사라지고, 복도가 끝도 없이 길어져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똑같은 광경.

 잠깐의 기억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단순 기분 탓은 아닐 터였다.

 이곳에 펼쳐진 결계가 협회의 지하 감옥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을 크게 어그러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렴 이전석이 알 바는 아니었다.

 "가시죠."

 그는 에밀리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뒤이어 로비를 지나 입구로 나온 찰나였다.

 "이봐!"

 누군가 그들을 불러 새웠다.

 ※ ※ ※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양 머리의 남자.

 이전석은 그가 누군지 단번에 꿰뚫어 봤다.

 잊을려야 잊을 수가 없다.

 엘릭서의 판돈을 높이던 경쟁자.

 "왜 그러시죠?"

 이전석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양 머리 남자가 표정을 찌푸렸다.

 무언가 몹시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다만 머리가 귀엽게 생겼던 탓일까.

 그 모습이 꽤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후우······."

 앙 머리는 화를 꾹 눌러 담는 것처럼 심호흡했다.

 그러다 이전석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엘릭서 한 방울을 낙찰받은 게 네놈이 맞나?"

 내심 예상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엘릭서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다.

 그보다 다짜고짜 반말이라니···.

 양 머리의 성격이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그 엘릭서, 내가 더 높은 값에 사지."

 더 높은 값.

 이전석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뭐죠?"

 "내가 필요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나에겐··· 그 엘릭서가 반드시 필요해."

 매우 절실해 보이는 얼굴.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그렇다면 그 쪽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더 높은 값에 사겠다고 했는데··· 애당초 돈을 내실 순 있으십니까?"

 "······."

 양 머리가 침묵했다.

 뭐라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전석은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었다.

 "엘릭서는 이미 제 소유의 물건입니다. 경매는 끝났고 낙찰까지 받았죠. 그런데 이제 와서 구매하겠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더 높은 값을 치르겠다? 경매에서 낙찰받지도 못한 신세에 대체 어떻게 값을 치르겠다는 겁니까."

 정곡이었을까.

 양 머리가 다시 표정을 찌푸렸다.

 그는 몹시 분한 듯 이를 갈았다.

 "애당초···."

 이전석이 그를 쳐다보며 당찮다는 양 말했다.

 "엘릭서를 팔 생각 따윈 없습니다."

 당연하다.

 어머니를 살릴 유일한 수단.

 그걸 판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금을 가져다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고 한들, 이전석은 손아귀에 쥔 작은 병을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줄 생각이 추어도 없었다.

 그런데도 양 머리는 질척이듯 말을 이어왔으니.

 "이래 뵈도 A+급의 헌터다. 조금 있으면 S급이 될 거고, 돈을 벌어들일 수단은 많이 있지. 그쪽도 급이 높은 헌터라면 잘 알 텐데?"

 "알죠. 알고말고요. 저도 명성이나 힘을 이용해서 돈을 꽤 많이 벌어들인 입장이니."

 "그렇다면······."

 "그래서."

 이전석이 양 머리의 말을 끊었다.

 자그맣게 새어 나오는 한숨.

 더 이상 들어줄 가치가 없었다.

 이전석은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윤진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는 망종에게 굳이 존댓말까지 사용하며 그를 높여줄 이유가 없었다.

 때문일까.

 이전석은 한껏 살의가 드러난 어조로 말했다.

 "어쩌라고."

 "······!"

 순간, 양 머리가 몸을 떨었다.

 당혹, 놀람, 공포.

 다양한 감정의 동요가 피부 위로 떠오른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닭살과 함께 소름이 돋았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엘릭서는 팔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허억···!"

 점차 거칠어지는 숨.

 마치 목이 조여오는 것만 같다.

 돌연 이전석으로부터 해방된 기세가 살의를 덧입은 채 마치 무수한 칼날처럼 전신을 찌르고 들어왔다.

 흔들리는 동공.

 심장박동이 혈류를 타고 가속하듯이 전신을 두드려 댄다.

 '이건, 아린님과 비슷한······.'

 착각일까?

 아니다.

 자신보다 한참 격 높은 강자에게서나 느껴지는 위압감.

 그게 이전석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양 머리가 무심코 눈을 떨었다.

 애써 부정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기세, 기백, 패기.

 틀림없이 상위 헌터의 그것이었음으로.

 오히려 그보다 더 높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끝없이 펼쳐져 주변을 장악하는 살의.

 [절대자의 기백이 눈을 뜹니다.]

 이전석에게만 보이는 시스템이 양 머리의 목을 아주 천천히, 느릿한 손길로 조여 오고 있었다.

 "끄윽······."

 마치 공기가 사라진 듯 숨을 헐떡이는 그.

 "리."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여우 머리의 여자였다.

 에밀리.

 그녀가 이전석을 말린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까지 이전석의 기세에 휩쓸릴까 우려한 것 같았다.

 이전석은 뒤늦게 특성을 거둬들였다.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양 머리 남자.

 그가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하다.

 다만 이번에 억누르는 감정은 짜증이나 화가 아닌 두려움이었다.

 양 머리는 이전석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이 정도면 S··· 아니, SS·····?'

 거기까지 생각하자 심장박동이 더 거세졌다.

 혹시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게 아닐까.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절대자의 기백은 레벨이나 등급에 상관하지 않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죽음에 대한 본능을 자극시켰다.

 오도전륜대왕.

 무간을 담당하는 시왕 중 하나.

 그 기운이 감쪽같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미세하게 남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죄, 죄송·····."

 나지막히 새어나온, 떨림 섞인 말.

 지금 그에게 더 이상 엘릭서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연심도 죽음의 공포 앞에선 한낱 미몽에 불과했으니.

 양 머리의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밖엔 없었다.

 그러나.

 ━부디 나를 위해 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돌연 뇌리를 파고드는 최아린의 음성.

 희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아른거린다.

 어째서일까.

 신기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불안도, 정체모를 위압감도 사라졌다.

 양 머리는 숨을 헐떡였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

 떨림은 이전보다 더 격해졌지만, 더 이상 양 머리에게 거리낄 것은 없었다.

 "나는··· 화산의 헌터다!"

 그는 대뜸 자신의 소속을 만천하에 떠벌렸다.

 "허."

 그에 이전석이 황당하다는 듯 헛웃었다.

 암시장에서 가면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다.

 지하 세계 오라리오는 온갖 기괴한 물건이 거래되고,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며 엮이곤 했으니까.

 특히 경매에 참석하는 이들은 후에 낙찰품을 두고 목숨을 노려질 우려가 있었으니···.

 얼굴을 숨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헌데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도 쉽게 제 신분을 털어놨다.

 어째서일까.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 수 있었다.

 "내 뒤에 누가 계신지 아나? 최아린님이시다. 감히 아린님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있나?"

 최아린.

 양 머리의 남자는 그 이름을 더러 이전석을 협박하고 있었다.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있냐고?

 '괜히 화산에 미운털 박히기 싫으면 순순히 엘릭서를 내놓으라는 거로군.'

 물론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최아린의 수하인가?"

 이전석은 오히려 그 이름에 집중했다.

 "감히! 그분의 이름은 네까짓 게 함부로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치 미친놈처럼 발광하는 양 머리.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는 어딜 바라보는 지 알 수조차 없고, 발음이 뭉개진 입가에선 타액이 줄줄 흘러 내렸다.

 흡사 마약이라도 한 것만 같은 모습.

 "맞나보군."

 이전석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최아린.

 그녀가 뒤에 있다면 양 머리가 갑자기 미친 듯 굴어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아린은 포션의 스페셜리스트였고, 당연히 최음제 같은 걸 제조하는 것도 가능했으니.

 당연히 포션인 만큼 평범한 최음제는 아니었다.

 "화산의 검에 죽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엘릭서를 내놓아라!"

 대뜸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드는 양 머리.

 보이는 것처럼 최아린이 만든 최음제 포션은, 이성과 관련된 것들을 기이할 정도로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A+급이나 되는 헌터를 사리 분별도 하지 못하고 단순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최아린이 엘릭서의 실험을 시작할 때면 정확히 최원율이 폐관에 들어갔을 때니까······.'

 이전석은 생각했다.

 '최승철도 서울에 와있겠군.'

 틀림 없었다.

 최원율은 폐관에 들어가며 후계자들에게 '후계혈전'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전석은 그 시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아린이 엘릭서의 실험을 시작하던 때.

 그 무렵이 최원율이 폐관에 들어가던 시기이며, 또한 그로 인해 최승철이 본가로 불려 온 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에 퍼거슨만 남았다는 소리로군.'

 씨익-.

 이전석은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전혀 예상지도 못 한 상대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워들었다.

 기연.

 말 그대로 기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 여기서 대놓고 난동을 부리는 모지리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문득, 에밀리가 작은 목소리로 어조로 중얼거렸다.

 "넌 또 뭐야!"

 버럭 소리치며 에밀리를 바라보는 양 머리.

 그에 에밀리가 멋쩍게 웃었다.

 양 머리 남자 때문에?

 아니다. 이전석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리. 이런 걸 보여드리고 싶진 않았는데."

 이전석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는 에밀리.

 당연히 그로선 어깨만 으쓱일 뿐이다.

 "살인사건이 어디 일어나지 말라고 해서 안 일어난답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죠."

 에밀리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다.

 그만큼 훗날 같은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이전석에겐 오라리오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S급 헌터라고 한들 그녀도 사람이었고 소녀였으니까.

 자신의 고향이 나쁘게 비치면 기분이 좋지 않겠지.

 그래.

 바로 지금처럼.

 "그래도 평소에는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겁박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오히려 오라리오의 관리자들 덕분에 치안 자체만 따지고 보면 지상보다 더 안전하죠."

 에밀리는 자신의 고향이 나쁘게 보이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았다.

 실재로 그녀의 말은 대부분 들어 맞았다.

 범죄자들이 도망쳐 모인 곳이라고 하나, 오라리오의 치안은 그곳의 관리자나 경비들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과 별개로, 양 머리는 눈을 시뻘겋게 뜨며 외쳤다.

 "누구냐고 물었잖나!"

 이성을 잃은 듯 짐승처럼 짐을 질질 흘리는 양 머리.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상태다.

 그에 주변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절레 고개를 젓거나 쯧쯧 혀를 차댔다.

 "화산도 격이 꽤 떨어졌구먼."

 "저런 미친놈을 사자로 보내다니···."

 "그나저나 최아린이면 그나마 화산의 양심이라 불리던 여인이 아닌가? 그런 사람 밑에서도 저런 놈이 나오기 마련이군."

 "여색은 국가마저도 멸망시킨다잖아."

 사람들이 양 머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들이 최아린의 본질을 알았더라면 결코 저런 소리는 하지 못할 터였다.

 "누구냐, 라······."

 에밀리가 작은 어조로 말했다.

 "예의도 없고, 품격도 없어."

 드물게 말을 내리깐 그녀는 몹시 화가 난 눈치였다.

 "돌멩이보다 못한 암 덩어리 같으니."

 툭-.

 에밀리가 검지 손가락으로 양머리를 밀쳤다.

 그저 살짝 이마를 건든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쿨럭-?!"

 양 머리가 끈적한 피를 토했다.

 전신의 마나를 역류시킨 결과였다.

 "쯧쯧, 제 분수도 모르다 죽겠군."

 "오라리오에서 검을 꺼냈다는 건 죽여 달라는 소리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이내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미 양 머리의 결말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 말 대로였다. 에밀리는 양 머리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게 바로 오라리오의 규칙이었음으로.

 하지만.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리?"

 이전석이 돌연 에밀리를 막아섰다.

 그는 양 머리를 바라보며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눈빛이었다.

 "······."

 단순히 용서해 주려는 게 아님을 깨달은 에밀리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그리 말하며 양 머리에게 다가갔다.

 양 머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연신 피와 타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눈빛을 보니 어지간히도 괴로워 보인다.

 물론 A급 헌터인 만큼 겨우 이 정도로 죽거나 하진 않을 거다.

 슥-.

 이전석이 녀석의 가면을 벗겼다.

 뒤이어 드러나는 민머리와 흉악스런 얼굴.

 왼쪽 눈에 짙은 검상이 새겨져 있다.

 '조경헌.'

 이전석은 그 이름을 떠올렸다.

 예상대로 양 머리의 남자는 최아린의 수하로 활동하던 S급 헌터 조경헌이었다.

 지금 이 시기엔 아직 A+급인 모양이지만.

 '마침 잘됐어. 이놈을 이용해서··· 화산을 칠 토대를 만든다.'

 예상치 못한 상황의 연속.

 이전석은 실시간으로 계획을 뜯어 고쳤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결계를 펼쳤다.

 조경헌은 연신 피만 토해댈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저 왼손에 모인 마나가 조경헌에게 흘러갔다.

 이내 전신에 새겨지는 수많은 술식들.

 '······결계?'

 에밀리가 그 모습을 의아한 듯 바라봤다.

 '한두 개가 아니야···.'

 이전석이 조경헌에게 새겨 넣고 있는 것들.

 결계가 이중삼중을 넘어 칠중으로 새겨졌다.

 얇고 푸른 막이 일곱 겹으로 피부를 덮는다.

 "잠시만요, 리. 아무리 리라도 이만한 결계를 동시에 사용하면······."

 에밀리가 급히 이전석을 막고자 했다.

 아무리 눈이 좋고 재능이 있다고 한들, 결계를 이렇게 다중으로 사용하면 자칫 마나가 역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리될 것이다.

 그게 에밀리가 생각하는 마법의 상식이자 법칙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어?"

 에밀리가 당황 섞인 소리를 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칠중의 결계가 돌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하더니, 결계 특유의 술식마저 희미해지며 일반적인 호신강기와 다를 바 없이 변한 것이다.

 심지어 잘 의식하지 않으면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기척이 옅다.

 그 모습에.

 '······미친.'

 에밀리가 드물게 욕설을 지껄였다.

 결계를 동시에 칠중으로 발동한 것도 모자라, 그것들을 하나로 합쳐 전혀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내다니.

 ━결계는 창조해내는 것이지.

 언젠가, 세계의 권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를 본 이후로 결계에 관해서는 더 놀라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이전석이 보여준 권능은 한때 세계의 권좌를 마주한 이후로 처음 겪는 충격이었다.

 '무슨 결계지?'

 하나로 합쳐진 칠중의 결계.

 동공에 마나의 렌즈를 만들어 살펴보지만 술식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보이는데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에밀리조차 해석이 난해한 고도의 술식과 결계.

 이쯤되면 이전석이 과연 평범한 A급 헌터가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애초부터 평범하다고 하기엔 괴리감이 있긴 했지만···.'

 에밀리는 내심 놀람과 당혹을 집어삼킨 채 이전석에게 결계에 관해 물었다.

 그녀도 마법사인고로 미지의 것을 보면 당연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뉴스를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이전석은 의미심장한 대답만을 남길 뿐이었다.

 조경헌을 살려주려는 걸까.

 이전석이 그러길 원한다면 에밀리 자신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그저.

 이전석이 말한, 뉴스에 나오게 될 어떤 소식이 몹시 궁금해졌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1화

그 이상

조경헌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생기가 사라진 시선.

 그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이전석이 가면을 내밀자.

 슥-.

 조경헌은 다시 가면을 쓰더니 검을 납도한 채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전석은 내심 웃음을 머금었다.

 '좋은 선물이 될 거다, 최아린.'

 이전석이 조경헌에게 각인한 일곱의 결계.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었지만, 서로 엮이고 뒤섞이며 하나의 거대한 결계로 재형성되었다.

 '칠성계(七星界).'

 전생에서 세계의 권좌가 주로 사용하던 것.

 그것은 결계에 갇힌 대상을 현혹하며, 술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환술의 일종··· 아니, 정확히는 최면술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진정한 의미의 최면은 아니다.

 신격을 가진 S급이라면 잘 통하지 않을뿐더러, 최면으로 인해 내릴 수 있는 명령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살하라느니, 누군가를 죽이라느니.

 그런 직접적인 명령은 불가능하다.

 단지.

 '너는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다.'

 이전석은 조경헌에게 그런 최면- 아니, 착각을 새겼다.

 조경헌이 조용히 물러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엘릭서를 얻었으니 더 실랑이할 필요가 없는 셈.

 그의 머릿속엔 한시라도 빨리 최아린에게 돌아가, 있지도 않은 엘릭서 한 방울을 상납하고 싶은 생각만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경헌이 최아린과 마주하는 순간.

 '포션의 최음 효과가 반사될 거다.'

 칠성계는 그 이름답게 최면을 중심으로 여섯의 부가 효과들이 존재했다.

 강화와 증폭.

 축소와 은밀.

 반사와 시간.

 그중 반사는 최면과 같이 칠성계의 주가 되는 효과였다.

 여러 종류의 공격과 저주를 말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

 이는 포션의 효과 또한 마찬가지였고, 타인에 의해 섭취하게 된 것이라면 여지없이 반사가 적용되곤 했다.

 그리고 시간은 앞서 존재하는 모든 효과의 발동 시기를 의도적으로 정할 수 있는 타이머였으니.

 이전석이 정한 시기는 다름 아닌 '최아린을 만났을 때.'

 즉-.

 '조경헌이 최아린을 만나면 최음 포션의 효과가 증폭된 상태로 반사된다.' 

 그럼 꽤 재미난 일이 벌어질 거다.

 안 그래도 사람의 이성을 멀어버리게 만들 정도의 최음이다.

 그게 강화와 증폭을 거친 상태라면?

 '화산의 고귀하신 성녀가 망가지는 것도 한순간이지.'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될 거다.

 물론 명색이 S급 헌터인 만큼 다짜고짜 창녀처럼 행동하진 않을 거다.

 애당초 최아린이 만든 포션 자체가 성욕보단 이성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이었으니.

 그럼에도 칠성계를 통해 증폭된 최음을 쉽게 떨쳐내지는 못할 터.

 조경헌이 그랬듯 감정이 예민하며 격해질 것이고, 어렸을 적부터 쓰고 지내온 가면은 녹처럼 벗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이면 다른 후계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지.'

 공격하고, 물어뜯을 거다.

 어떻게든 최아린을 실각시키기 위해.

 최승철이라고 가만있을까?

 설마.

 그도 화산의 옥좌에 대해서라면 욕심이 그득한 뱀이었다.

 이무기가 되길 원하는 살모사 새끼.

 그런 그가 최아린의 약점을 가만 지켜만 보고 있으랴?

 조금이라도 그녀를 더 깎아내리려 부단히 애를 쓰겠지.

 서울에서 체류시간을 늘리면서까지 말이다.

 '그 사이 나는 퍼거슨을 죽인다.'

 모든 시선이 최아린에게 집중된 순간.

 이전석은 최승철의 별장을 찾아 퍼거슨을 죽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높은 격의 결계를 사용했습니다.]

 [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나를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반동이 찾아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마나와 결계의 사용이 불가능해집니다.]

 "음······."

 눈앞에 떠오르는 여러 개의 창.

 이전석이 잠시 비틀거렸다.

 입가로 피 한줄기가 새어 나온다.

 과연 세계의 권좌가 주로 사용할 법한 결계다웠다.

 신격이 없이 사용하니 모든 마나가 동나는 것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심대한 반동이 찾아왔다.

 숨을 쉬기가 어렵다.

 입안에 점점 핏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불에 지져지듯 화끈한 가슴.

 이전석은 평소 품에 넣고 다니던 포션 한 병을 꺼내 마셨다.

 그제야 고통이 좀 줄어들었다.

 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낸다.

 그 모습을 본 에밀리가 걱정이 섞인 어조로 물었다.

 "리···?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전혀 그런 낯빛이 아니었다.

 에밀리가 보기에 이전석의 얼굴은 금방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포션을 마셨다곤 해도, 지금 이전석이 느끼고 있을 고통은 보통 사람이라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포션을 마시긴 했지만 전부 회복된 게 아니다.

 전신의 근육은 여전히 뒤틀려 있고, 마나가 모조리 사라지며 찾아온 탈력증이 온몸의 힘을 빼앗았다.

 슥-.

 이전석이 엘릭서를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혹시라도 손에서 떨어트릴 것 같아서였다.

 고작 한 번의 결계.

 그걸 사용한 것만으로 물건 하나 제대로 쥐기가 어려워졌다.

 사실상 재기불능 상태가 되고 만 것.

 "일단은 돌아가죠."

 에밀리는 다급히 이전석을 부축했다.

 그때.

 타다닷-!

 경비병들이 몰려왔다.

 오라리오의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들.

 영국의 옛 병정을 연상케 하는 복장을 입고 있으며, 제각기 검이나 창 같은 무구를 들고 있다.

 세간에선 흔히 워커라 불리는 이들이다.

 헌터도 빌런도 아닌, 오라리오의 병정.

 '빨리도 찾아오는군.'

 이전석이 내심 혀를 찼다.

 참 기가 막힌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록 사건을 일으킨 용의자는 아니지만, 저들과 엮였다간 조사라는 명목으로 꽤 많은 시간을 빼앗길 게 분명했다.

 예상대로.

 "워커부대 제 2소속 대장 이안 도라고 합니다. 지주(地柱) 앞에서 사건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두 분 모두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스스로를 대장이라 소개한 이안이 앞서 나오며 물었다.

 이전석은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이대로 여기서 발이 묶이면?

 고작 한두 시간만으론 풀려나지 않을 거다.

 일이 잘못 흘러가면 최대 이틀 까지도 워커부대에 구금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무력으로 돌파하자니 남은 힘도 없고, 무엇보다-.

 '오라리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거야.'

 즉 무력사용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전석이 에밀리를 쳐다봤다.

 과연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싱긋 웃으며 가면을 벗었다.

 보랏빛 머리칼을 흩날리며 정체를 드러낸 에밀리.

 "에, 에밀리님?"

 그러자 대장뿐만이 아닌 다른 워커들도 당혹스런 낯빛을 띠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밀리는 관리자 중 하나인 스텔라의 제자였다.

 오라리오에선 절대 권력자와도 같은 지위였고, 그들이 당황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높은 지위의 권력자는 병사들에게 있어 재해와도 같은 존재였으니.

 당연 에밀리라면 워커들을 물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터.

 "이래도 조사가 필요한가요?"

 "아, 아닙니다! 저희가 어찌 에밀리님을 조사하겠습니까!"

 이안이 정자세를 취하며 소리쳤다.

 워커부대의 대장이라면 최소 A급의 각성자겠지만, 그런 그도 에밀리 앞에서는 일개 병사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가시죠, 리."

 에밀리가 다시 이전석을 부축했다.

 그런데.

 "잠시만요."

 이전석이 갑자기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에밀리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다름 아닌 조경헌과 관련된 부탁이었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에밀리가 이내 이안을 돌아봤다.

 "스스로 화산의 헌터임을 밝힌 헌터는 쫒지 말고 내버려두세요. 오라리오에서 무사히 나가도록."

 "······그래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런 이안의 물음.

 에밀리는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안 될 게 있나요?"

 그러자.

 "에밀리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이안이 긴장 가득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관리자는 오라리오의 지배자이며, 그런 지배자의 제자란 이토록이나 막강한 권력이었다.

 아마 그들은 에밀리가 사람을 죽인대도 아무런 잘못도 묻지 않을 거다.

 적어도 관리자 선에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권력이 확실히 좋긴 하군.'

 그런 모습을 보며 이전석이 생각했다.

 이걸로 조경헌이 쓸데없이 오라리오에 구금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솔직히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에밀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야 별 거 아닌데요, 뭘. 그리고 리가 하려는 건 저도 궁금하기도 했고요."

 에밀리는 그리 말하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이후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다시 스텔라에게 연락했다.

 에밀리도 텔레포트를 사용할 순 있지만, 스텔라와 달리 혼자서밖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가르쳐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솔로니?

 ━스승님도 솔로시지 않나요?

 ━뭐 임마?

 스텔라가 수화기 너머로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전석과 에밀리를 별빛과도 같은 마나가 둘러쌌다.

 스텔라가 텔레포트를 발동한 것이다.

 곧 시야가 변하며 두 사람은 다시 새하얀 집으로 돌아왔다.

 직후.

 "······얘 왜 이러냐?"

 스텔라가 이전석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게임기를 옆에 내려놨다.

 그러곤 소파에서 일어나 이전석의 상태를 잠시 살피더니 황당하다는 양 말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시체가 돼서 왔네?"

 그녀가 보기에도 이전석의 상태가 꽤 안 좋아 보였던 걸까.

 "······일이 좀 있었던 지라."

 "일? 설마 워커들이랑 싸웠냐?"

 "그건 아니고······."

 이전석이 뭐라 말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던 사이였다.

 "그게······."

 에밀리가 스탈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허."

 제자로부터 사실을 전해 들은 스텔라는 헛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싸웠다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하겠다, 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에밀리도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이전석이 사용한 결계는 상식을 한참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미친놈일새, 이거."

 스텔라가 이전석을 빤히 쳐다봤다.

 사파이어와도 같은 동공이 메마른 눈동자를 지긋이 응시했다.

 눈에서부터 시작된 시선이 전신을 훑는다.

 이어 시선을 거둔 스텔라가 뒤늦게 물었다.

 "안 아프냐?"

 "참을 만합니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이전석.

 스탈레는 기가 막혔다.

 참을 만하다고?

 이게 그런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이전석의 부상은 고작해야 괜찮다, 참을 만하다로 끝날 정도가 아니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고통은 만만치 않을 텐데.'

 스텔라가 해괴하다는 양 이전석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고문이라도 받은 적 있나?'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당장 아프다며 울부짖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말이지.'

 아니, 애당초.

 '아무리 고통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이 정도 되는 부상이라면 작은 비명이나 신음이라도 나오기 마련이야.'

 헌데 이전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신음은커녕 표정의 일그러짐조차 없다.

 '참을 만하다고 표현한 걸 보면 고통을 아예 못 느끼는 체질도 아닌 것 같고.'

 그는 틀림없이 고통을 느끼고 있었지만,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실로 미친놈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은데?'

 스텔라가 눈을 번뜩였다.

 마법사란 본디 냉정을 토대로 끝없는 지식과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다.

 헌데 이전석은 어떠한가?

 마나에 대한 재능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결계를 다루는데도 몹시 뛰어나다.

 칠중 결계.

 그건 스텔라조차 쉬이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었다.

 물론 굳이 따지면 가능하긴 했다. 

 다만 서로 다른 결계를 하나로 엮어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의 전문 분야는 결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괴이한 짓거리는 그 아저씨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세계의 권좌. 그와 똑같이 미친 짓을 저지르는 놈이 또 있었다.

 그것도 권좌는커녕 SS급도 아니고, 신격 하나 제대로 가지지 못한 A급의 헌터가 말이다.

 "이전석이라고 했지?"

 스텔라가 그를 불렀다.

 "예."

 이전석의 느그막한 대답.

 그에 스텔라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너 내 제자해라."

 ※ ※ ※

 원래는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침상에 누워계신 어머니가 걱정 돼서.

 마나 중독증은 걸리자마자 극심한 통증이 찾아오는 질병은 아니지만, 아버지나 여동생을 생각해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께 엘릭서를 드리고자 했다.

 그런데.

 "너 내 제자해라."

 갑작스런 스텔라의 제안에 이전석이 두 눈을 껌벅였다.

 제자라니.

 그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힐 곱하기 50."

 그때.

 스텔라가 돌연 마법을 사용했다.

 그녀의 특성 중 하나인 '곱셈.'

 어떤 현상에 곱하기를 더해 증폭시키는 효과로, 그것은 3서클에 불과한 힐을 7서클 못지않은 대마법으로 빚어냈다.

 마나가 몸에 닿자 통증이 묵은 때처럼 씻겨 내려간다.

 탈력증도 조금이나마 사라지고 운석을 쥔 손에 힘이 들어왔다.

 꾸욱-.

 손에 주먹을 쥐어본다.

 떨림이 사라졌다.

 이 정도면 그래도 평범하게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뇌물입니까?"

 이전석이 자그맣게 물었다.

 스텔라는 코웃음을 쳤다.

 "진짜 뇌물을 줄 거였으면 SS급 아이템이라도 하나 줬겠지."

 물론 스텔라는 고작 뇌물 따위로 이전석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돈이나 물건으로 움직일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가벼운 놈이었다면 애당초 협회에 용병이 아니라 정직원으로 들어갔을 거다.

 지금 그가 지닌 가치라면, 협회에 존재하는 누구보다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전석은 그러지 않았다.

 적어도 뇌물 따위에 구애될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다.

 "근데, 검선님의 제자를 이렇게 빼 와도 되는 건가요?"

 문득.

 에밀리가 의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스텔라는 아빠다리로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언제 가져왔는지 모를 사탕을 혀로 굴려대며 대답했다.

 "할멈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할멈.

 이전에도 그렇지만 스텔라는 검선과도 꽤나 친분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빼 오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거야. 내가 가르치는 건 마법이고, 할멈이 가르치는 건 검이니까. 서로 분야도 안 겹치니 괜찮잖아? 좋은 건 서로 나눠 써야지."

 "그치만 리는 도구가 아닌 걸요?"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스텔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잘만 보면 에밀리는 어딘가 엄마 같은 부분이 있었다.

 쓸데없이 잔소리가 많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스텔라는 비단과도 같은 옆머리를 손가락을 배배 꼬며 말을 이었다.

 "스승도 제자를 여러 명이나 두는 마당에, 제자가 스승 두세 명 더 둔다고 이상한 일은 아니지."

 "······음, 그런 건가?"

 에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텔라의 논리는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근데 잘 또 생각해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스승은 제자를 여러 명이나 두면서, 왜 제자는 스승을 한 명만 둬야 하는 걸까?

 학교의 선생도 여러 명이고, 대학의 교수도 한 명이 아니다.

 그런데 유독 검술이나 마법 같은 학문은 제자가 다른 스승을 두는 걸 꺼리곤 했다.

 질투심?

 아니면 자존심이나 아집?

 스텔라나 에밀리는 비교적 제자에 대해 자유분방한 타입이지만, 조금 나이를 먹은 마법사만 살펴봐도 그런 부분에선 꽤나 고집불통인 경우가 많았다.

 배움은 끝도 없이 무한한데, 정작 스승을 가지는 건 제한적인 것이다.

 실로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스텔라가 사탕을 아작 깨물어 먹으며 이전석을 바라봤다.

 "어때? 내 제자가 되면 만마의 마법을 배울 수 있어. 당연히 나는 네 성장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고,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수년 내로 10서클을 달성할 수도 있겠지."

 만마의 마법.

 그 말에 이전석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혹할 만한 조건이긴 했다.

 그녀가 조건으로 내건 만마의 마법이란 말 그대로 '만 가지의 마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검술의 정점에 '만검'이 존재하듯, 마법의 정점에는 '만마'가 존재한다.

 그것을 모두 배워 체득하게 된다면 대마법사의 영역마저 아득히 뛰어넘을 터였다.

 실제로 스텔라가 그렇게 권좌가 되어 마법의 종주나 마신이라 불리고 있었으니.

 "······."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텔라의 제안을 확실히 마무리 짓고 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일방적인 걸 싫어합니다."

 이내 그가 보란 듯이 거절 의사를 내보였다.

 물론 완강한 거절은 아니었다.

 "저도 제 가치는 잘 압니다. 스텔라님 입장에선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저 혼자서도 10서클을 달성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만한 경지는 전생에서도 도달했다.

 한 번 올라본 산을 두 번 오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10서클의 상징인 만마라는 것도 이미 한 번 올라온 길이자 계단이었다.

 스텔라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더 빠르게 만마를 달성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녀의 제자가 될 만큼 매혹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아직도 서클을 만들지 않은 이유?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가 온다면 이전석은 빠르게 서클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뭐, 그렇겠지."

 스텔라도 이전석의 말을 인정했다.

 딱히 굴욕이라곤 생각하진 않는 듯하다.

 오히려 그의 말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오만이 강자의 권리이듯, 건방은 천재가 가진 권리나 마찬가지였으니.

 스텔라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가 본 이전석의 재능은 그만큼 찬란한 것이었다.

 굳이 자신이 가르치지 않아도 자신이나 에밀리 만큼 성장할 인재.

 그러니 권좌를 상대로 건방을 떨어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납득이 가고 이해가 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석에게 제자가 되지 않겠냐고 제안한 건 다름이 아니었다.

 스승이란 본디 가르침을 줄 뿐인 존재가 아니다.

 제자의 성장과 고난을 보며 가르침을 받고, 도리어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영역으로 오르기도 하는 게 스승이었다.

 스텔라가 이전석의 재능에서 느낀 게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 자신의 성장 가능성.

 그래서 제자가 되지 않겠냐 제안한 것이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벽에 막혀 있었으니.

 이전석이란 재능의 돌을 빚다보면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당연히 이전석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고···.

 "스텔라님께서 얻는 게 있으시다면, 저도 그 이상으로 얻는 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는 역으로 스텔라에게 제안을 건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2화

혼백룡의 알 (1)

━스텔라님께서 얻는 게 있으시다면, 저도 그 이상으로 얻는 게 있기를 원합니다.

 이전석이 떠난 거실.

 스텔라는 이전석의 말을 떠올렸다.

 '그 이상의 것이라.'

 스탈레에게 있어 만마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뿐이었다.

 "스승님의 모든 것··· 저조차 아직 가르침 받지 못한 '오리지날'을 알려달라는 의미겠죠."

 에밀리의 말에 스텔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지날 마법.

 사실 에밀리야 아직 10서클을 달성하지 못해 배우지 못했을 뿐이고, 조금만 더 경지를 높이면 언젠가는 알려줄 생각이었다.

 다만 그걸 수제자가 아닌 이전석에게 가르친다는 게 문제였다.

 ━이놈이 지랄 맞게 어려운 문제를 제공하네. ······일단 생각 좀 해보고 다시 연락해 주마.

 스텔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을 미뤘다.

 이전석을 제자로 삼고 싶긴 하지만, 오리지날을 알려달라는 건 별개의 문제였으므로.

 "그래도 리라면 오리지날을 알려줄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요."

 에밀리의 말.

 스텔라는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너는 괜찮냐?"

 "뭐가요?"

 "오리지날 말야."

 스텔라는 거실에서 냉수를 들이켠 뒤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마법사의 오리지날은 오직 정식 수제자에게만 전해지는 '혈계(血繼)' 마법이야. 어느 마법사든, 어떤 시대든 그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여겨진 적이 없어. 스승의 오리지날을 전수받는 제자는 늘 한 명뿐이었고, 피를 이은 계약이기에 비로소 그 정통성이 꾸준히 유지되어 왔지."

 정통성을 어기려 한들 의미 없다.

 혈계라 함은 도사들의 도술로부터 비롯된 절대적인 계약이었고, 그것은 오리지날을 전수받는 순간부터 결코 깨트릴 수 없는 약속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스승님이라면 혈계 정도는 무시할 수 있지 않으신가요?"

 에밀리의 물음에 스텔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할 수 있지, 할 수는. 근데······."

 그녀가 에밀리를 빤히 쳐다봤다.

 "네가 괜챦겠냐는 소리야."

 "······."

 "오리지날은 한 세대에 한 명에게만 존재할 수 있기에 의미가 있는 마법이야. 스승의 연구를 가장 뛰어난 수제자가 이어받아 후세에 넘겨주고, 그리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진리에 다다르는 것. 그게 바로 오리지날이 가진 존재의의이자 정통성이라고."

 애당초 그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바로 오리지날 마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이전석에게 전해주면 너는 전통성을 상실한 반쪽짜리 오리지날을 전수받게 돼."

 반쪽짜리.

 마법으로서의 기능을 제외하면, 정통성으로선 완전히 의미를 상실한 마법이 된다는 소리다.

 그건 이미 오리지날이라 부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조금 더 특별하고 뛰어난 마법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에밀리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리는 화끈해서 마음에 들어요."

 "단순히 마음에 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멍청아."

 "그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에밀리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 말을 이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오리지날의 정통성? 그야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거니 중요하긴 하겠죠. 저는 그걸 부정하려는 게 아니에요, 스텔라."

 그녀가 드물게 스텔라를 이름으로 불렀다.

 두 사람은 사제관계이기 이전에 친구였다.

 말이 스승이나 제자지, 그들이 평소 서로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 평범한 룸메이트나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죽고 못사는 자매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에밀리는 그런 스텔라에게 줄곧 품고 있던 의제를 건넸다.

 "마법사가 진리를 탐구하는 존재라면서, 왜 진리를 탐구하려 하지 않는 거지?"

 "·····.·"

 스텔라가 입을 다물었다.

 에밀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진리를 탐구하는 존재다.

 '도(道)'에서 마법이라는 학문이 첫 발걸음을 때엇듯, 마법사들이 수백 년 동안 품어온 의문은 늘 한결 같았다. 

 진리.

 세상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하지만 가끔, 마법사라는 족속은 아주 답답할 만큼 그 진리에 대해 무신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에밀리가 지적하고 있는 게 바로 그점이었다.

 "정통성을 버리고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옳아. 리에게는 지켜보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깨닫게 하는 신묘함이 있으니까. 하지만 정통성 때문에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린다니, 그런 건 그냥······ 어중간하잖아."

 어중간하다.

 뼈를 때리는 말에 스텔라가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내 그녀가 졌다는듯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나보다 낫다."

 마법적 재능으로는 스텔라 본인이 훨씬 뛰어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법사로서 진리를 탐구하는 유연성은 에밀리가 한발 앞서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배움을 얻고 가르침을 주는 존재인 것이다.

 "저는 언제나 스승님보다 나았는걸요? 특히 게임 쪽에서."

 에밀리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특히라며 게임을 강조하는 모습이 실로 얄밉기 그지없었다.

 스텔라는 허공에 마나를 형성해 에밀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어쭈? 방어막을 썼어? 한 번 해보자는 거야?"

 "방금 건 스승님께서 먼저 공격하신 거잖아요. 그대로 맞았으면 혹이 났을 거예요."

 에밀리가 키득 웃으며 대꾸했다.

 막을 줄 알고서 한 행동이긴 하지만, 정작 막고서 싱긋 웃는 모습을 보니 뭔가 더 약이 올랐다.

 "제자라는 놈이······."

 잠시 약이 올랐던 스텔라였으나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냐."

 더 실랑이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 화를 내며 게임대결을 신청해 봤자 탈탈 털리는 건 어차피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대신이라는 듯 스텔라는 이전석을 떠올렸다.

 확실히 에밀리의 말 대로였다.

 '그놈에겐 무언가가 있어.'

 지켜보고 있노라면 신기한 기분이 든다.

 무언가 깨달을 것만 같은 신묘함.

 그래서 제자를 제안한 것이기도 했으니.

 "그보다 그건 뭐냐?"

 "뭐가요?"

 "그놈이 가져온 돌덩이 말야."

 "음, 우주 쓰레기?"

 "······뭔 개소리야?"

 ※ ※ ※

 스텔라의 집을 나온 뒤.

 이전석은 가장 먼저 병원으로 향했다.

 한유리는 중환자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의가 필요한 격리실에 입원해 있었다.

 새하얀 병상 위.

 한유리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다.

 마나 중독증의 충격으로 쓰러진 채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것.

 삐- 삐-.

 바이탈 사인 모니터의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시끄럽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때.

 "···왔냐?"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한석.

 이전석의 아버지.

 그의 얼굴은 꽤 수척해 보였다.

 그야 당연하다.

 사랑하는 아내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다.

 고통이란 고통은 다 느끼면서 천천히 죽게 될 것이다.

 마나 중독증이란 그런 병이었다.

 다만 그 고통의 수치가 워낙 크기 때문일까.

 ━·차라리 안락사를 선택하시는 편이 환자분을 편하게 보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전날, 의사에게 직접 그런 말을 들었다.

 당연히 이한석이나 이지혜도 그 말을 들었고.

 ━안 돼요··· 안 된단 말예요······. 제발 부탁해요, 선생님. 저희 엄마 좀 살려주세요, 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낼 테니까, 제발······.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애걸복걸하던 여동생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안락사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은 고작 그렇구나 같은 한 마디로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누구라도 부정하고, 거부할 터.

 "지혜는요?"

 이전석의 물음에 이한석이 진이 다 빠진 어투로 답했다.

 "탕비실에서 커피 마시고 있다."

 "커피요?"

 "네 엄마가 걱정돼서 잠도 자기 싫은 모양이야."

 "······."

 그 말에 이전석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곧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 지혜 좀 데려와 주실래요?"

 "지혜는 왜?"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요."

 "······?"

 이한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여줄 거라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 쓸데없는 말을 하는 아들이 아니었기에 이한석은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잠깐만 기다려라."

 이내 문을 열고 병실을 나가는 이한석.

 이전석은 굳게 닫힌 창문을 열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운석- 드래곤의 알을 침상 옆 탁상에 올려놨다.

 그리고 한유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40을 조금 넘겼을 뿐인 나이.

 그럼에도 한유리는 주름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부가 고왔다.

 마나 중독증으로 인한 푸른 핏줄이 아니었다면 정말 젊은 여인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옛날에는 인기도 많았다고 했지.'

 이전석은 아버지가 술에 취할 때마다 해주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니들 엄마가 누구였냐? 한때는 서울대 퀸카였다 이 말이지! 이 새끼 저 새끼 다 눈이 돌아가서 아주 그냥 매일 번호 물어보고 헌팅하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근데 뭐냐? 니들 아빠가 그런 엄마를 낚아챈 거 아니겠냐!

 물론 그런 이한석도 서울대에선 나름 훈남으로 인기가 많았고, 둘이 사귀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은 선남선녀가 이어졌다며 축하해줬다.

 당연히 시기나 질투도 많았고, 이한석은 양아치 열 명과 패싸움을 한 적도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그게 진실인지는 아직까지도 불분명한 이야기였다.

 "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곧 이한석이 이지혜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녀는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울어댄 건지 양쪽 눈이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무슨 일이야?" 

 목소리까지 코가 막힌 듯 맹맹했다.

 "이리 와."

 이전석은 여동생을 옆으로 불렀다.

 이지혜가 힘없는 걸음으로 제 오빠한테 다가갔다.

 왜 갑자기 자신을 부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이니까 엄마 얼굴 잘 봐두라고?

 '······싫어.'

 싫었다.

 이대로 어머니를 보내는 게, 이지혜는 죽을 만큼 싫었다.

 고통스러울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속 옆에만 있어 줬으면 했다.

 "흐윽······."

 얼굴을 보자 또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이지혜가 애써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이전석은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 조용히 코트 주머니에서 작고 투명한 병을 꺼내들었다.

 다름 아닌 엘릭서였다.

 "괜찮아."

 그리고 뒤이어진 나지막한 한마디.

 "이제 다 괜찮을 거야."

 이지혜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니.

 지금 상황의 어딜 봐서 괜찮다는 걸까.

 그때.

 이한석이 뒤늦게 의문을 내비쳤다.

 "그러고 보니··· 그 돌이랑 병은 뭐냐?"

 "돌이요? 돌은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제 엄지손가락만 한 병을 바라봤다.

 마치 거울처럼 희미하게 비치는 얼굴.

 이전석이 병 뚜껑을 따며 말을 이었다.

 "이건 엘릭서에요."

 "······에, 엘릭서? 뭐?"

 "······?"

 이한석과 이지혜가 동시에 의문을 내비쳤다.

 엘릭서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들도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다만 이전석이 손에 들고 있는 게 엘릭서라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다짜고짜 엘릭서라고 하니 믿을 수 있을 리가.

 "······."

 그 가운데, 이전석이 엘릭서를 빤히 쳐다봤다.

 어째서일까.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긴 하지만, 정작 심장은 멈출 줄도 모르고 격하게 뛰어댔다.

 이전석은 그것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그리고.

 슥-.

 천천히 한유리의 산소마스크를 벗겼다.

 "······?!"

 이지혜가 깜짝 놀라 팔을 뻗었다.

 하지만 이한석이 그녀를 말렸다.

 그는 제 아들을 믿었다.

 20년 간 손수 키우고 밥을 먹이며 기저귀를 갈아준 아들이었다.

 그런 그를 믿지 않으면 대체 누굴 믿는다는 말인가.

 저 작은 병이 진짜 엘릭서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한석은 자신의 아들이 마냥 생각 없이 움직이는 성격이 아님을 잘 알았다.

 우웅-.

 이전석이 침상 옆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머리맡이 올라가 등받이가 되었다.

 그에 맞춰 천천히 한유리의 목을 받치고.

 주륵-.

 입가로 작은 물방울을 흘려보냈다.

 혹시나 흘릴까 조심스러운 손길.

 투명한 엘릭서 한 방울이 한유리에게 흘러 들어가고···.

 지잉-.

 기묘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반짝였다.

 은은한 흰색 빛을 띄우는 피부.

 변화는 곧장 찾아왔다.

 푸석하던 머리카락이 비단처럼 결을 되찾고, 피부가 이전보다 더 뽀얘진 것이다.

 "어?"

 "뭐, 뭐야?"

 그에 이한석과 이지혜가 동시에 당황을 내비쳤다.

 그러나 변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핏줄이······."

 마나 중독증으로 인해 전신에 새겨진 푸른 핏줄.

 그것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다.

 발가락에서부터 종아리를 이어 허벅지와 복부, 팔과 어깨와 가슴, 그리고 목을 넘어 뺨까지.

 문신처럼 도드라져 있던 푸른색의 핏줄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있었다.

 창백하던 피부색에도 혈기가 돌고, 버겁게 들리던 숨소리마저 한결 편안해졌다.

 툭-.

 이전석은 텅 빈 병을 탁상에 올려놨다.

 '엘릭서는 제대로 적용됐어.'

 푸른 핏줄이 사라진 게 그 증거.

 아마 마나 중독증 또한 완전히 없어졌을 거다.

 다만.

 "······전석아, 어떻게 된 거냐?"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없는 한유리의 모습에 이한석은 불안이 뒤섞인 어조로 물었다.

 이전석은 천천히- 이한석은 물론, 혹시라도 한유리가 잘못됐을지 안절부절못하는 이지혜에게 설명해 주듯 대답했다.

 "엘릭서를 먹으면 수명이 늘어나고 모든 상처와 질병이 낫는다는 건 아시죠?"

 이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이한석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이전석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건 단순히 엘릭서가 몸을 치유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엘릭서는 포션의 한 종류지만, 엄밀히 말하면 '치유' 포션은 아니었다.

 "그냥 몸의 구조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바꿔주는 영약이죠. 중국무협 아세요? 거기에 나오는 환골탈태(換骨奪胎)랑 비슷해요."

 이전석은 다시 한유리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곤히 잠든 그녀에게서 산소마스크를 완전히 땠다.

 한유리는 기계의 도움 없이도 조금의 막힘 없이 편안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마나 중독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몸 자체의 구조가 바뀌면서 마나에도 내성이 생겨 중독증도 사라졌지만, 아직 그 과정이 끝나지 않아서 일어나지 않으시는 거예요. 엘릭서의 효과로 인한 환골탈태는 보통 한 달을 걸쳐 진행되거든요."

 겉으로 보이는 외형적인 변화는 끝났다.

 다만 지금도 엘릭서는 내부에서 한유리의 몸을 이곳저곳 뜯어 고치고 있었다.

 뼈, 인대, 근육, 오장육부와 뇌까지.

 스스로 흐름을 조율할 수 있는 각성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일반인이 환골탈태를 겪는다면 그 시간은 보통 한 달이 걸리곤 했다.

 "그러니까, 그럼······."

 확신을 구하는 듯한 이한석의 말.

 그에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지나면 자연히 깨어나실 거예요."

 "······하."

 털썩-.

 이한석이 그 말을 듣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빠!"

 깜짝 놀라 그를 부축하는 이지혜.

 그녀가 이한석을 병상 옆 작은 침대에 앉혔다.

 이한석은 어딘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이라는 걸까.

 대신이라는 듯 이지혜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오빠··· 우리 엄마, 정말 괜찮은 거야?"

 불안, 두려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지혜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그녀는 몇 번이나 계속해서 물었고, 이전석은 몇 번이라도 그런 여동생을 안심시켜 주었다.

 이젠 괜찮다고.

 그러자.

 "······."

 조용히, 울음소리조차 없는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직후.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비틀었습니다.]

 [보상으로 행운 스탯이 개방되며 대기만성 특성이 강화됩니다.]

 눈앞에 시스템이 나타났다.

 퀘스트를 클리어한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보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천계가 당신의 행적을 깨닫습니다.]

 [명계가 당신의 운명을 눈치챕니다.]

 [하계가 당신의 위업을 알게 됩니다.]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오직 당신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띠링-!

 [특별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3화

혼백룡의 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