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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 - 63-70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3화

혼백룡의 알 (2)

[천계가 당신의 행적을 깨닫습니다.]

 [명계가 당신의 운명을 눈치 챕니다.]

 [하계가 당신의 위업을 알게 됩니다.]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오직 당신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띠링-!

 [특별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뜬금없이 눈앞에 나타난 창.

 이전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천계나 명계.

 이러한 것들은 전생에서도 드물지 않게 보이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거나, 그 못지않은 업을 쌓았을 때.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나타나곤 했다.

 물론 딱히 특별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라 크게 신경 쓰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는 그저 단순한 지표로 여겼다.

 이만한 격과 업을 쌓았다는 것에 대한 잣대.

 하물며 몇몇 권좌들도 이런 시스템을 본 적이 있다고 하니, 그래서 더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도 있었다.

 다만.

 '삼계육도나 삼라만상이니 하는 건 처음 보는군.'

 저토록 장황하게 시스템이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이어 시스템 하나가 더 눈앞에 떠올랐다.

 [행운 스탯이 1회에 한 하여 확정적으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특별한 보상.

 그게 떠오른 것.

 행운이 확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니.

 '음······.'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행운이라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거지?

 확정적이라는 단어가 몹시 신경 쓰였다.

 "······오빠, 왜 그래?"

 문득, 이지혜가 조심스레 물었다.

 갑자기 이전석이 조용해지니 혹시라도 뭔가 잘못됐을까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이전석은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협회에서의 일이 생각났다고 말하며 잠시 병실을 나왔다.

 계단과 이어진 복도의 끝.

 그곳에 등을 기댄 채 상태창을 펼친다.

 ━

 Lv. 62

 [근력 - 20] [민첩 - 50]

 [체력 - 36] [마나 - 41]

 [행운 - 10]

 스탯 포인트 - 0

 선업 - 90,050

 악업 - @%^@#$D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업상점

 └마나조율(S), 결계특화(S), 절대자의 기백(S), 백귀야행(SS), 짐승화(A), 은신(A), 발화(B). 망자들의 왕(B), 광폭화(B), 대기만성(SS+), 마도술(SSS)

 └천보, 절개(格)

 (더보기) 

 ━

 기다란 상태창.

 그 한 가운데, 행운이라는 별개의 스탯이 생겨나 있었다.

 10의 수치.

 스탯은 각성하면 기본적으로 10이 주어지니 그리 이상할 건 아니다.

 다만 의문이 하나 생겼다.

 다름 아닌 특별 보상.

 행운이 확정적으로 발동한다는 것.

 혹시, 행운이라는 게 드래곤의 알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섭취 시 더 높은 효과로 적용된다던가.

 다만.

 '운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 애매한 영역이라 뭐라 확신하기가 어렵하군.'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이전석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봤자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얻은 건 행운이라는 스탯만이 아니었다.

 ━

 대기만성

 등급 : SS+

 효과 : 100일 뒤, 랜덤한 특성 한 가지를 획득한다. 획득하는 특성은 동급의 다른 특성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효과를 가지게 된다. 또한 아주 적당한 확률로 SSS+급의 특성을 획득한다.

 ━

 등급이 SS에서 +가 추가로 붙었다.

 이전석은 효과를 자세히 읽어봤다.

 바뀐 점이 두 가지나 보였다.

 ━획득하는 특성은 동급의 다른 특성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효과를 가지게 된다.

 ━또한 아주 '적당한' 확률로 'SSS+'급의 특성을 획득한다.

 보다였던 것이 월등히로 바뀌고, 아주 낮은 확률이 적당한 확률이 되었으며, 심지어 SSS였던 것 또한 SSS+로 변했다.

 '괜찮네.'

 시스템이 월등히처럼 높은 수준의 단어를 사용하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적당히 또한 마찬가지.

 이전석은 대기만성이 단순 SS급이 아닌, 사실상 준 SSS급의 특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만약에라도 SSS+급 특성이 나온다면?

 대기만성으로 획득하는 특성은 동급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고 하니 기대해봐도 좋을 터였다.

 운이 좋으면 EX급에 필적하는 특성이 나올 지도 모른다.

 운이라는 애매모호한 요소 덕분일까, 이전석은 이 부분이 훨씬 더 특별한 보상으로 느껴졌다.

 물론 100일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으니.

 '이제 보름이 조금 지났나?'

 며칠이 남았는지 알려주지 않는 게 대기만성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슥-.

 이전석은 뒤늦게 상태창을 지우고 병실로 돌아갔다.

 그러자 한유리를 진찰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보였다.

 이한석과 이지혜가 부른 걸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시계를 보자 때마침 검진 시간이었던 것.

 "······세상에."

 담당 의사가 당황 어린 소리를 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표정을 보니 어지간히도 놀란 눈치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완치 불가능한 불치병.

 그게 하루 사이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

 심지어 심장박동이나 혈압 등을 재보더니, 마나 중독증이 발병하기 전보다 몸의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다만.

 "왜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시는지 의문입니다."

 의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분명 병은 사라졌다.

 건강 상태도 좋아졌다.

 그런데 정작 환자의 의식은 오리무중이니, 의사 입장에선 다른 문제가 있는 게 아닐지 우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그때.

 이한석이 제 아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말은 없었지만 의도는 알 수 있었다.

 엘릭서에 대해 말하는 게 좋을지 묻는 것이다.

 당연히 이전석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굳이 엘릭서에 대해 알려줄 필요는 없었으므로.

 경매장에서 신분까지 숨겨가면서 구매한 물건이다.

 엘릭서로 치료했다고 하면 뉴스가 날 게 뻔했으니, 괜히 신분이 들통나거나 추적될 만한 요소를 만들어서 좋을 건 없을 터였다.

 하물며 오라리오에서 화산의 헌터인 조경헌과 엮였던 걸 생각하면 신분은 더욱더 숨기는 편이 좋았다.

 다행히 아버지와 여동생은 이전석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일까.

 10분가량 검진을 이어가던 의사는 한유리를 일반실로 옮긴 뒤 당분간 상태를 지켜보자 제안했다.

 이전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한 달이면 무사히 깨어날 테고,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선 병원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할 테니까.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이내 의료진들이 병실을 나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전석아, 고맙다."

 문득 이한석이 그런 말을 해왔다.

 이지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의료진들이 방을 나간 뒤 곧바로 잠에 들었기 때문이다.

 어지간히도 졸렸던 모양.

 그녀는 마치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스윽-.

 이한석은 이지혜를 작은 침대에 눕혀주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반면 이전석은 탁상 위 알을 집어 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공교롭게도 아버님의 부인분이 저희 어머님이시기도 해서요."

 어딘가 장난스런 아들의 말 덕분일까.

 이한석은 왠지 모르게 꽉 막혔던 속이 내려가는 듯한 개운함이 들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그러네. 내가 그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어."

 그런 와중에도 깨어날 기미가 없는 이지혜를 보고 있자니 어지간히도 마음 고생이 심했구나 싶었다.

 뭐, 이중에 마음 고생을 하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냐만···.

 이전석은 동생을 슬쩍 흘겨보곤,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일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마음 같아선 가족들과 함께 어머니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네 동생이랑 엄마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라."

 이럴 땐 아버지의 존재가 참 든든했다.

 전생에선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

 "다녀올게요."

 그렇게 이전석은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 ※ ※

 차락-!

 집에 도착한 이전석.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커튼을 쳤다.

 어둠이 드리운 방.

 느껴지는 기척이나 시선은 없다.

 그 가운데.

 [포탈 게이트를 형성합니다.]

 갈색의 게이트가 나타났다.

 좌표는······.

 '창고로.'

 영풍산에 만들었던 창고 내부로 좌표를 입력했다.

 곧 게이트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지러이 일그러지는 시야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며칠 전 만들어 뒀던 창고가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텅 빈 공간.

 발을 내딛자 그 소리가 동굴처럼 메아리친다.

 그리고.

 ━귀인이시여······.

 목소리가 들렸다.

 산사였다.

 이전석의 기운을 눈치 채고 말을 걸어온 듯싶었다.

 당연히 도술인 까닭에 뇌리에 직접 소리가 들렸다.

 ━금방 나갈 거니까 할 일 해.

 ━알겠나이다.

 이전석은 산사의 관심을 꺼트리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드래곤의 알을 바닥에 내려놨다.

 울퉁불퉁한 돌덩이.

 겉으로 보기엔 특별한 점은 없다.

 상태창 또한 마찬가지다.

 ━

 오래된 운석

 등급 : E

 효과 : 소지 시 근력이 아주 약간 증가하는 것 같다

 ━

 어딜 어떻게 봐도 드래곤의 알이라곤 생각할 수조차 없다.

 "후우······."

 이전석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칠성의 결계로 인한 부담.

 그것을 강제로 억누른다.

 스텔라 덕분에 어느 정도 회복이 됐다지만 아직 만전의 상태는 아니었기에.

 포션으로 부족한 마나를 다시 채우고···.

 ━행운 스탯이 1회에 한 하여 확정적으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병원에서 봤던 시스템을 떠올렸다.

 행운.

 더욱이 '확정'이라는 그 단어.

 '그게 여기에도 영향을 미칠지 보자고.'

 되면 좋고, 안 돼도 딱히 상관은 없다.

 드래곤의 알은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영약이었으니.

 이윽고.

 이전석이 양손에 마나를 현상화 했다.

 양팔을 타고 흐르는 푸른색의 마나.

 그것이 연기처럼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슥-.

 뒤이어 양손을 알 위에 얹었다.

 그러자 양팔을 맴돌던 마나가 그대로 손을 타고 흘러가, 알의 표면을 감싸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알의 외관을 뒤덮는 마나.

 흡사 호신강기를 보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 상태로.

 '주입.'

 마나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두근-.

 소리가 들렸다.

 심장박동.

 이전석의 것은 아니다.

 알 위로 얹은 손바닥.

 그곳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미 생명을 다했을 드래곤의 알이 이전석의 마나에 영향을 받아 다시 호흡을 시작한 것이다.

 '드래곤은 죽어도 죽은 게 아니지.'

 그들의 몸에 깃든 드래곤 하트.

 흔히 심장이라 불리는 기관만 멀쩡하다면, 용족은 언제라도 다시 상처 입은 몸을 재생하여 되살아날 수 있다.

 비록 희석되어 돌과 같이 변했다지만, 알에는 여전히 드래곤 하트가 존재했으니.

 이전석은 그것을 자극시켜 알을 되살리고, 그 안의 내용물을 섭취할 생각이었다.

 품어서 부화시킨다?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드래곤이라면 하트만 존재해도 부활이 가능하지만, 알 상태의 드래곤은 그게 불가능했다.

 유정란과 무정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생명이 꺼진 알은 두 번 다시 태동하는 일이 없었다.

 물론 이전석도 정확한 논리나 이유까진 알지 못한다.

 그저 그렇다는 것을 전생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뿐.

 애당초-.

 '드래곤은 종족 자체가 거만하고 오만해서 키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설령 부화가 가능해도 의미가 없었다.

 놈들은 그저 지성을 지닌 고위급 몬스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둘 수 없고, 또한 다룰 수 없다. 

 통제가 불가능하여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다면 그게 괴물이지 뭐겠는가.

 "음······."

 이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웬만한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그가 드물게 신음을 흘렸다.

 '더럽게도 많이 먹는군.'

 마나.

 그게 쉴 새 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던 탓.

 회복한 마나의 절반 이상을 사용했거늘.

 '아직인가?'

 드래곤의 알은 여전히 변할 기미가 없었다.

 두근, 두근-.

 그저 희미한 심장박동만이 들려올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전석이 양손을 떨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한유리의 피부에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푸른색의 핏줄.

 마나를 억지로, 또 과도하게 사용하면 종종 이런 현상이 나타나곤 했다.

 이전석은 슬쩍 상태창을 흘겨봤다.

 예상대로 마나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가진 포션을 전부 다 마셨음에도 드래곤의 알은 아직까지 변화가 없었다.

 이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이 끝나려는 건가 싶은 순간.

 투둑-.

 다행히 알이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외각을 뒤덮고 있던 돌덩이.

 그것이 마치 껍질마냥 떨어져 내린 것이다.

 곧 부화하려는 알처럼, 외부의 딱딱한 껍질이 마나를 주입할수록 서서히 떨어져 나간다.

 이윽고 돌덩이가 모두 떨어지며, 새하얀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점 하나조차 찾아볼 수 없는 순백.

 마치 깨끗한 도화지를 보는 것만 같다.

 희미하게 빛을 머금고 있는 게 신비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이전석은 살며시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옅은 심장박동과 함께 온기가 느껴진다.

 곧 부화할 것만 같은 감각.

 그러나 드래곤의 알은 한 번 죽은 이상 결코 부화하는 일이 없다.

 '행운은··· 바뀐 게 없군.'

 확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더니, 아직까지도 반응이 없었다.

 이전석은 어쩔 수 없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운이라는 것 자체가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했으니.

 그저 드래곤의 알을 섭취하고자 했다.

 먹는 방법?

 그냥 깨 먹으면 된다.

 달걀처럼.

 다만 드래곤의 알은 깬다고 노른자가 흘러내리는 게 아니라, 보석 형태의 드래곤 하트가 액체가 되어 녹아내린다.

 그걸 입으로 삼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을 깨려던 순간이었다.

 [막대한 량의 행운이 당신에게 찾아옵니다.]

 돌연, 시스템 하나가 툭 떠올랐다.

 드디어 기다리던 행운이 발동한 것.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의 알이 당신의 영혼에 반응합니다.]

 [━━━의 알이 진명을 드러냅니다.]

 [순백룡의 알.]

 [순백룡의 알과 적단도가 공명합니다.]

 정말 뜬금없이, 적단도와 드래곤의 알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이전석이 무심코 표정을 찌푸렸다.

 갑자기 드래곤의 알과 적단도가 공명한다고?

 그때.

 지잉-.

 이전석은 가슴팍에서 옅은 진동을 느꼈다.

 근원지는 다름 아닌 적단도였다.

 코트 안에서 적단도를 꺼내 들자.

 우웅-.

 그것이 마치 기쁘다는 듯 격한 감정을 내비쳤다.

 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의문도 잠시뿐.

 [적단도가 순백룡의 알과 '합일(合一)'합니다.]

 또 다른 창이 떠오르며, 곧이어 적단도의 형태가 허물어졌다.

 '······뭐야?'

 기체.

 검붉은 연기로 변해 사라진 적단도.

 그것이 바람처럼 휘몰아치며 드래곤의 알에 스며든다.

 직후.

 그저 하얗기만 하던 알의 표면이 변화했다.

 적단도와 비슷한 색감.

 검붉은색으로 변한 것이다.

 뒤이어 떠오르는 시스템.

 [순백룡의 알이 '혼백룡(魂白龒)의 알'로 변화합니다.]

 [혼백룡의 알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혼백룡?'

 이전석이 그 이름에 의문을 띠었다.

 혼백이라는 이름을 가진 드래곤은 전생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은 보통 속성에 따라 전혀 다른 색을 가진다.

 예를 들어 적룡이나 청룡, 황룡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혼백은 그중 어느 것에서 속하지 않은 색이었다.

 드래곤 로드조차 순백이라는 이름과 색을 가지고 있었을 뿐, 이토록이나 불길한 색을 띠지는 못했다.

 '이게 로드의 알이었다는 것부터가 놀랄 지경이다만······.'

 심지어 '태동을 시작했다'는 건 다시 말해 알이 생명을 가지게 됐다는 소리이지 않은가.

 쉽게 설명하자면?

 부화한다는 소리다.

 드래곤으로.

 '이걸 어쩐다···.'

 뜬금없이 합쳐진 적단도와 알.

 덕분에 본래의 계획대로 알을 깨 먹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먹으려 해도 먹을 순 이었다.

 그러나 적단도가 신경 쓰였다.

 마치 소중한 애병을 인질로 붙잡힌 기분.

 그렇다고 부화라도 시키랴?

 아쉽게도 이전석은 드래곤을 길들일 자신이 없었다.

 안녕이라고 인사하면 침부터 뱉고보는 놈들이다.

 잘 지내보자며 손을 내밀면?

 그 위에 오물을 흩뿌리는 게 바로 드래곤이라는 족속이었다.

 지랄맞게 성격이 나쁘고, 자기중심적인 것들.

 단순히 목을 써는 거라고 하면 전생에서도 수없이 해본 일이니 자신이 있긴 하지만······.

 "으음."

 이전석은 한참 고민을 거듭했다.

 이 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로 그때.

 띠링-.

 마치 놀랄 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또 다시 시스템이 나타났다.

 [혼백룡의 알은 당신의 경험과 업, 그리고 특성을 먹이로 삼아 성장하여 부화합니다.]

 [혼백룡의 알이 '발화'를 섭취합니다.]

 '이런 미친?'

 이전석이 깜짝 놀라 제 상태창을 펼쳤다.

 보유 특성.

 그곳에서 발화가 사라져 있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의 연속에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특성을 먹는다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다.

 그뿐이랴.

 황당하기까지 했다.

 알이 부화한다는 것까진 이해한다.

 적단도와 합일한 거?

 애시당초 드래곤은 마나로 이루어진 생명체다.

 적단도 또한 별도의 재료 없이 이전석의 피와 마나로만 만들어진 것이니, 그것들이 합쳐진다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부분에서 말이다.

 다만 특성을 먹는다는 건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것도 다른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의 특성을 말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괜히 행운이라고 표현하진 않았을 거야.'

 특성을 잃었다.

 전생에서 평생을 함께했던 애병과 드래곤의 알이라는 귀중한 영약마저 사라졌다.

 그런데도 시스템은 굳이 막대한 량의 행운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이전석은 알이 도대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고자, 그것의 상태창을 눈앞에 가져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4화

혼백룡의 알 (3)

혼백룡의 알

등급 : F ~ EX+

충성도 : 100%

성장도 : 15%

순백룡의 알과 적단도과 합일하여 탄생한 혼백룡의 알. 육체만을 남기고 의지가 사라졌던 심장에 적단도의 영혼이 깃들며 그것은 전혀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했다.

무기이되 무기가 아니며, 드래곤이되 드래곤이 아닌 것.

*혼백룡의 알은 당신을 주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당신의 경험과 업에 따라 곧 태어날 혼백룡의 등급이 정해집니다.

*혼백룡이 섭취한 특성은 혼백룡이 부화했을 때 당신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석은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바라봤다.

그러자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최대 EX+급?"

바로 혼백룡의 알이 가진 등급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 EX+급은 저 자신이 가졌던 천살성밖엔 없었다.

천살성이 얼마나 대단한 특성이던가.

가히 이전석의 모든 것이라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다른 특성을 마구잡이로 갈취하고, 또한 양도마저 가능한 절대적 권능.

혼백룡의 알이 잘만 하면 그것과 동급으로 부화할 수도 있다고 하니 당연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강함이나 레벨로만 따져 봐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좌를 능히 압도하는 것이었기에.

본래라면 그만한 급의 드래곤이 태어난다고 하면 바로 알을 깨부쉈을 것이다.

SSS급이라 불리는 '칠대 재앙'조차 어쩌지 못해 방치하는 마당에 EX+?

그건 그저 재앙이었다.

멸망의 또 다른 이름.

하지만.

[*혼백룡의 알은 당신을 주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전석은 그 문구를 보았다.

주인이라는 단어 덕분일까.

마냥 깨부수기가 고민됐다.

섭취하려고 한들 드래곤의 알은 산 것을 먹으면 독밖에 되지 않았으니···.

우웅-.

그때, 알이 희미하게 진동했다.

그러면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공포, 두려움, 불안.

"너 설마··· 내가 너를 죽일까 무서워하고 있는 거냐?"

우웅-.

알은 마치 긍정하듯이 진동했다.

"허."

이전석은 본능적으로 혼백룡의 알과 자신이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적단도와 합쳐졌기 때문일까.

그것의 에고를 아무래도 고스란히 물려받은 듯했다.

그리고 정말 당연하게도.

'나를 주인으로 여기는 건가?'

상태창에 표시된 대로였다.

혼백룡의 알로부터 적단도에게서 느낄 수 있던 충성심이 전해져왔다.

우웅-.

이전석의 생각에 화답하듯 즐거움이 뒤섞인 감정을 보내오는 혼백룡의 알.

이전석은 옅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드래곤에게 주인이라니.'

독고다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제 자식조차 거리낌 없이 버리는 놈들이 바로 드래곤이다.

그런 드래곤에게 주인이라는 단어가 붙으니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충성도는?

무려 100%에 육박하고 있다.

스켈의 경우를 고려하면 그 수치가 얼마나 높은 건지는 쉬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성장도 15%는 발화를 먹어 오른 것 같고.'

그리고.

[*혼백룡의 알이 섭취한 특성은 혼백룡이 부화했을 때 당신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석은 그 문구를 유심히 바라봤다.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겠지만, 혼백룡이 부화하면 발화를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당장 쓸 무기가 없어졌군.'

이전석의 애병, 적단도.

그게 순백룡과 합일해 혼백룡이 되어버렸다.

무기이되 무기가 아닌 것.

'괜히 적단도가 기쁘답시고 순백룡의 알과 합일하진 않았을 거야.'

양일하는 말 했다.

적단도는 준비하고 있다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말이다.

그때가 바로 지금인 걸까?

"······."

우웅-.

이전석의 생각에 반응하듯 혼백룡의 알이 진동했다.

그것은 여전히 즐거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완전히 이전석을 주인으로 여기는 모습이다.

그 사실이 못내 어이가 없었다.

"뭐라 말이라도 해봐라."

이전석은 답답함 마음에 알을 툭 두들겼다.

그러나 딱히 변화는 없었다.

알은 그저 기쁜 감정만을 내보낼 뿐이었다.

"후우······."

이전석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적단도가 사라졌긴 하지만, 양인하라면 그와 비슷한 무구를 다시 만들 수 있긴 할 거다.

특별한 재료가 달리 필요해서 완전히 똑같이는 재현하지 못하겠지만···.

웅-!

"······뭐야? 새 무기를 장만하는 건 또 싫냐?"

부정이 묻어난 진동이 전해졌다.

이전석이 새 무기를 만들려 하자 돌아온 감정이었다.

"흠."

이전석은 알의 상태창을 다시 흘겨봤다.

무기이되 무기가 아니며, 드래곤이되 드래곤이 아닌 것.

그것은 다시 말해 혼백룡의 알이 드래곤이면서 또한 무기이기도 하단 소리였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우웅-.

'정답인가 보군.'

이전석의 생각에 맞춰 전해지는 감정.

이번에는 즐거움이었다.

이전석은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한때 적단도였을 혼백룡의 알은 이전석에게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기쁨 어린 감정을 전해왔다.

아무래도 이걸 부화시키면 적단도처럼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시스템이 괜히 행운이라 표현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렇다면 부화라는 도박을 한 번 해봐도 될 듯싶었다.

물론.

'당장 쓸 무기가 필요해.'

최승철이 제주도로 돌아가기 전에 퍼거슨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

적진에 무기 한 자루 없이 침투할 정도로 이전석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추후 태어날 혼백룡을 무기로 쓸 수 있다고 해도 당장 사용할 무기가 필요했다.

애당초 알이 언제 부화할지도 알 수 없고.

'상담도 해볼 겸 찾아가 볼까.'

무기를 보는데 가장 뛰어난 사람.

혼백룡도 어찌 보면 무기였으니.

양인하가 이걸 보면 뭔가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이전석은 바로 양인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던 일을 일부 축약해 설명하자···.

━바로 가져와! 지금 당장!!

그는 잔뜩 흥분한 어투로 소리쳤다.

※ ※ ※

"허, 참."

탁상 위에 올려진 혼백룡의 알.

양인하가 어이없다는 듯 그것을 빤히 쳐다봤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손으로 쳐보기도 하고···.

"망치로 후려 봐도 되냐?"

"되겠습니까?"

이전석이 황당하다는 양 되물었다.

잘 보면 이 양반도 적잖이 막 나가는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후려치겠다니.

우웅-.

혼백룡의 알이 진동했다.

두려움 섞인 감정이 전해진다.

반응을 보니 망치로 치면 재련이 되는 게 아니라 깨질 게 분명해 보였다.

"정말 적단도와 합쳐진 모양이로군···."

진동하는 알을 본 양인하가 중얼거렸다.

그는 알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양인하가 또다시 황당한 말을 꺼내 왔다.

"품어는 봤냐?"

"예?"

"알이니까 품어는 봤냐고."

"······안 품어봤습니다."

확실히 품어본 적이 없기는 했다.

근데.

"그럼 지금 품어봐라."

"······예?"

이전석이 당혹스런 시선으로 양인하를 바라봤다.

품으라고?

지금?

이걸?

"어서."

"아, 예···."

양인하의 재촉에 이전석은 어쩔 수 없이 알을 손에 들었다.

품어서 성장도가 오를까 싶은 의문은 그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품는데?'

다리 밑에 두고 앉아?

애초에 그게 품는 건가?

그냥 깔고 앉는 게 아닐까.

'음.'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이전석이 이내 알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품는다고 하니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웅···.

옅은 진동이 느껴졌다.

따스함, 그리움, 편안함.

그런 감정이 밀려온다.

그리고.

[혼백룡의 알을 품고 있습니다.]

[성장도가 1% 증가합니다.]

"······."

성장도가 올랐다.

이전석은 다시 어이가 없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진짜 품는다고 성장도가 오를 줄은 몰랐기에.

"어떠냐? 변화가 있디?"

"······성장도가 올랐습니다."

"알은 진짜 알이라는 거구만."

양인하가 신기하다는 듯 알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자신의 모루를 가리켰다.

"여기 내려놔 봐라."

이전석이 알을 모루 위에 올려놨다.

철야공씩이나 되는 양반이 다짜고짜 알을 깨트리진 않을 것이니···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반대로 알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우웅-!

알이 격하게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흔들-.

심지어 깨어날 것처럼 요동치기까지 한다.

"깨부술 거 아니니 안심하고."

양인하는 혼백룡의 알을 툭 쳤다.

그제야 진동이 줄어들었다.

이내 양인하가 대장간 구석을 뒤적거렸다.

"어디 보자, 이쯤에 있었을 건데······ 음, 여깄구만."

한참 무구와 도구의 산을 파헤치던 그는 이윽고 기묘한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다름 아닌 큼지막한 돋보기 하나였다.

(물론 양인하의 신장과 비교해서 큰 편일뿐, 이전석과 비교하면 그저 적당한 크기의 돋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돋보기의 렌즈가 검정색이라는 것이다.

과연 저게 보일까 싶었지만, 이전석은 검은 렌즈의 돋보기가 뭔지 금세 알아챘다.

'진실의 눈이로군.'

무려 S급의 아이템.

여러 복잡한 제한이 있긴 하지만, 쳐다본 대상의 본질- 혹은 근원을 보여주는 물건이었다.

양인하가 그것을 통해 혼백룡의 알을 다시 지긋이 쳐다봤다.

그렇게 관찰을 반복하길 한참.

쿵-!

양인하가 돋보기를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아무리 그래도 S급의 초고가 아이템인데···.

참 물건 다루는데 가차없구나 싶었다.

"먹어 치웠구나."

이내 양인하가 의미심장한 말을 해왔다.

"먹어 치웠다?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이놈······ 그러니까, 네 검이 죽은 드래곤의 알을 흡수했다는 소리다."

이전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벅였다.

적단도가 드래곤의 알을 흡수했다고?

"합일이라고 했냐? 내가 보기엔 조금 달라. 오히려 포식이라고 보는 게 옳겠구나."

포식.

말 그대로 먹어 치우는 것.

"적단도는 드래곤의 알을 먹어 치우고 자신의 양분으로 삼아 진화한 게다. 말 그대로 무기이면서 무기가 아닌, 드래곤이면서도 드래곤도 아닌··· 에고? 아니, 그것도 아니로군. 이걸 뭐라고 해야 될지 모르겠다. 여태껏 존재하지 않던 형식의 무기이면서 동시에 생물이야. 그래, '무병생물(武兵生物)'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만."

"무병생물······."

이전석이 그 단어를 되짚었다.

무기이자 병기이며, 또한 생물이기도 한 것.

"여튼, 존재 자체가 무기와 생물의 경계에 서 있는 기상천외한 놈이다."

양일하는 황당함이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혼백룡이라고 했던가? 아마 이 알을 깨고 나오는 놈은 네게 더없이 충성적이면서도 무기로서, 그리고 평생을 함께할 반려로서 가장 독특하고 뛰어난 존재가 될 거다."

거기까지 말한 양인하가 알을 이전석에게 내던졌다.

과격하기 그지없는 취급에 알이 옅게 진동하고, 이전석은 최대한 안전하게 알을 품에 받아들었다.

우웅-···.

주인의 품에 돌아와 기쁘다는 것처럼 울어대는 알.

"기뻐해라. 세상에 다시없을 최고의 무기를 손에 넣었구나."

양인하가 소파에 털석 앉으며 말했다.

그의 눈빛엔 여전히 황당함이 깃들어 있었다.

제 입으로 무병생물이라고 하긴 했지만···.

'내 생애 저런 걸 보게 될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애시당초 적단도라는 것부터가 규격을 벗어난 명도였거늘, 그게 죽은 드래곤의 알을 흡수해 진화하다니.

이런 경우는 난생 듣도 보도 못했다.

'그 단도를 누가 벼려냈는지 얼굴 한 번 보고 싶구만.'

양인하는 그리 생각하며 맥주캔을 땄다.

반면.

'세상에 다시없을 최고의 무기라······.'

이전석은 알을 빤히 쳐다봤다.

물론 적단도도 나름 세상에서 으뜸가는 무기이긴 했다.

SSS급의 명도.

하지만.

'만약 이 녀석이 EX+급으로 부화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천살성도 비록 살의에 먹힌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그 자체의 능력 덕분에 전생의 이전석을 누구보다 강하고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줬다.

그럼 혼백룡의 알이 EX+라는 등급을 덧입고 부화한다면.

'······기대되는군.'

이전석이 내심 미소를 지었다.

병원에서 봤던 특별한 보상을 떠올렸다.

━행운 스탯이 1회에 한 하여 확정적으로 당신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확실히.

이건 행운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단도와 순백룡의 알의 합일.

그리고 탄생한 무병생물.

안에 잠들어 있을 드래곤이 껍질을 깨고 세상에 나올 때가 정말 기대가 되었다.

그러자.

우웅-.

마치 이전석의 마음에 동조하듯 진동하는 알.

[성장도가 1% 상승합니다.]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일까.

또다시 성장도가 올랐다.

이로서 17의 성장도를 달성했다.

다만···.

'한동안 데리고 다녀야 하나?'

그런 고민이 뇌리에 떠올랐다.

빠르게 부화시키려면 그게 가장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다만 경험과 업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고도 하니, 무작정 데리고 다닌다고 해서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S급 각성자면 충분히 괜찮은 업이 되겠지.'

알렉산드로 퍼거슨.

이전석은 그의 죽음을 업과 경험으로 쌓아 혼백룡의 알에게 먹이로 줄 생각이었다.

'그럼 무기가 필요한데······.'

이전석이 양인하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장인님."

"왜 그러냐?"

"혹시 이 녀석이 태어날 때까지 적당히 쓸 만한 무기 하나만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뭐, 그 정도면 별로 상관은 없다."

다행히 양인하는 손쉽게 수락해 줬다.

"그래서, 돈은 있고?"

"19억 정도라면 있습니다."

"음··· 애매하구만."

"애매합니까?"

"내가 만드는 무기들은 보통 30억이 기본가격이다, 임마."

"19억에 맞는 수준의 무기면 됩니다."

그 정도면 적당히 사용할 만할 테니.

다만.

"적단도 같은 걸 쓰다 그보다 한참 못한 걸 쓰면 만족할 자신은 있고?"

"······."

이전석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없었다.

적단도의 혈격이 없다면 절개도 쓸 수 없고 이전석만의 강력한 공격도 사라지는 셈이니.

때문일까. 양인하가 그런 이전석을 배려하듯 제안을 건네 왔다.

"좀 부족해도 적단도를 대체할 수 있는 기깔난 단도를 하나 만들어주마. 대신······ 그 뭐냐······ 크흠."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십니까."

이전석이 답답하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이전과 같은 양인하의 모습 덕분이었다.

대체 이 양반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뜸을 들이는 건 아니고······."

"그걸 보통은 뜸 들인다고 합니다."

"이놈이,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결국 참다못한 양인하가 소리쳤다.

사실 나이로 따지면 이전석이 더 위긴 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잠시 호흡을 고른 양인하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5화

알렉산드로 퍼거슨 (1)

"내 밑에서 야금술 한 번 배워볼 생각 없냐?"

뒤늦게 이어진 양인하의 말에 이전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금술 말입니까?"

"그래, 야금술. 너도 어느 정도는 할 줄 아는 것 같던데, 내 밑에서 배워봄이 어떠냐? 너 정도의 눈에 내 기술이 합쳐지면 아주 걸작이 될 거다."

양인하가 두 눈을 번뜩였다.

야장이나 도사··· 그리고 마법사.

연선화 같은 무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을 후대에 물려주는 행위에서 영혼이 명예와 명성이라는 형태로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다 믿었다.

하물며, 뛰어난 명장의 기술이 제자가 없어 유실되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이란 말인가.

적어도 양인하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놈뿐이야.'

이전석.

보면 볼수록 확신이 들었다.

자신의 기술을 이어받을 수 있는 건 눈앞의 청년뿐이라고.

'손을 보면 아직 제대로 야금술을 단련한 것 같진 않지만, 무구를 보는 저 눈만은 이미 나를 아득히 뛰어넘었어.'

만약 그런 상태에서 손까지 받쳐주게 된다면?

어쩌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야장이 탄생하게 될지도 몰랐다.

양인하는 그 사실이 못내 기대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래서 그거 가지고 수줍은 소녀처럼 우물쭈물 거리셨던 겁니까?"

정작 이전석 본인은 전혀 진지함이 없었다.

"소, 소녀라니!"

양인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반응을 보니 소녀가 맞았다.

지금도 부끄러워하는 저 모습을 보라.

'오래··· 아니, 회귀하고 볼 일이군.'

이 사람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다만 드워프 같은 노인이 수줍어하는 건 그리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기에 이전석은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거, 나중으로 미뤄도 됩니까?"

"허."

양인하가 황당하다는 양 대꾸했다.

"누군 내 망치질 한 번 보겠다고 억 단위의 돈도 서슴지 않고 내는데, 너는 그걸 미루겠다?"

"제가 시간이 좀 없어서 말이죠."

이전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 화산과의 격돌을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야금술 같은 부가적인 기술을 배울 시간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런 이유로 적당한 수준에서 배움을 그치기도 했고.

"건방진 놈이로고."

양인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 눈치를 보니 못 배워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고··· 쯧.'

아쉬운 놈이 굽혀야지 어쩌겠나.

"그래, 네 말 대로 해라. 대신 나중에 내 마음이 바뀌어도 그때 가서 후회한들 안 바꿔준다."

후회라··· 글쎄.

양인하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전석이 후회할 일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무언가에 한 번 꽂히면 절대 눈을 때지 않았으니까.

애당초 야금술이야 이전석으로선 배우면 좋고 아니면 마는 기술에 불과했다.

전사가 검을 휘두를 줄만 알면 되지, 검 만드는 법을 알아 무얼 하겠는가.

심지어 이미 이전석이 가진 야금술은 웬만한 장인들 못지않았다.

양인하 만큼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무구를 제작하거나 수리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양인하 만큼은 하지 못해 이렇게 굳이 그를 찾아온 거기도 하지만······.

'확실히 내가 철야공 수준의 야금술을 펼칠 수 있으면 수월해지긴 하겠어.'

굳이 시간을 내 양인하와 만날 필요도 없을 거다.

스스로 으뜸가는 무구나 장비를 만들어 때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을 터.

'한 번 고민해봐야겠군.'

다만 연선화나 스텔라와는 달리 굳이 급하게 기술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그러고 보니······.'

이전석은 어느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스승님께서 말씀드리긴 해야겠네.'

스텔라와 양인하로부터 제자를 제안 받았고, 둘 다 조건만 맞으면 언제라도 제자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

연선화가 그런 부분에서 조금 자유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곤 해도 이대로 연락조차 하지 않는 건 예의라고 할 수 없었다.

"일단 이틀 뒤에 다시 찾아와라. 적단도를 대신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둘 테니."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고개를 끄덕인 뒤 대장간을 나왔다.

이틀.

생각보다 긴 시간인 것도 같지만, 그 사이에 최승철이 제주도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지금쯤이면 조경헌에게 건 결계도 발동했을 테고···.'

곧 화산측에서 꽤나 충격적인 소식이 온갖 포털 사이트나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할 거다.

서로 죽고 죽이는 후계혈전.

그중 한 명도 사망자가 없겠는가?

좋든 나쁘든.

'최승철도 엮일 수밖에 없지.'

이전석으로선 그 사이를 노려 퍼거슨을 죽이면 될 뿐인 일이다.

그리고.

'그것도 얻어야겠지.'

퍼거슨이 가지고 있을 어느 던전의 열쇠.

A급에 불과한 지금의 이전석이 화산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그게 필요했다.

"후우······."

짙게 숨을 내쉬는 이전석.

칠성의 결계.

스텔라 덕분에 그 반동은 태반 회복되었지만, 아직 몸이 최상의 상태라 보기 어려웠다.

다행이 새로운 단도를 받기까지 이틀이라는 시간도 있었으니, 그 사이에 충분히 몸을 회복시키면 될 터였다.

※ ※ ※

이틀이 지날 동안 편히 몸을 쉬면서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 한유리를 간호하며, 아버지나 여동생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유리가 무사하다는 사실 덕분일까.

두 사람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틀 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도중 레벨업을 위해 던전도 몇 번 들어갔지만, 9나 오른 레벨을 제외하면 딱히 얻은 건 별 게 없었다.

그리고 이틀째가 되던 날 새벽.

연선화에게도 짤막하게 전화를 남겼다.

스텔라와 양인하.

두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걸 허락받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하거라.

연선화는 생각보다 쉽게 허락을 내줬다.

어째서일까.

━너의 인생이고 너만의 선택이다. 스승이라는 이유로 제자의 자유를 핍박해서야 되겠느냐.

웃는 어조로 말하는 연선화.

보통 제자가 다른 스승을 들인다고 하면 노발대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연선화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전석의 선택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무엇을 하든 존중해주는 눈치였다.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솔직히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옅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감사까지 받을 일인가 싶구나. 애초에 너와 나의 관계 또한 엄밀히 표현하면 사제지간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우니.

"그건··· 뭐, 그렇긴 하죠."

━후후,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단다.

연선화는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이전석의 성장이 그녀로서도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전석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연선화로부턴 배우지 못한 것들이 많았고, 훔치지 못한 기술도 수없이 있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이라.'

아마 그때가 되면 이전석은 천보와 절개를 충분히 몸에 익힌 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 있을 터였다.

'그럼 슬슬 가볼까.'

이전석이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이틀이 흐른 시간.

그는 은신자의 코트를 걸친 뒤 다시 양인하의 대장간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회색의 단도를 받았다.

"최대한 적단도와 비슷하게 만들었으니 바로 사용해도 어색함은 없을 거다."

대장간을 나온 이전석은 양인하의 말을 되새기며 오른손에 든 단도를 바라봤다.

참격의 단도

등급 : S

공격력 : 1000

효과 : 거대한 참격의 파도를 일으킨다.

심플하기 그지없는 효과.

등급이나 기본 공격력만 놓고 보면 적단도보다 훨씬 뛰어나 보인다.

'뭐, 적단도야 강화하면 공격력이 3배는 넘어가긴 하지만······.'

어찌됐든 기본 성능만 보자면 그랬다.

게다가 거대한 참격의 파도를 일으킨다는 효과.

━네가 사용하던 혈격이라는 것과 꽤 비슷한 효과일 거다.

양인하는 단도를 건네주며 그리 말했다.

"흠······."

이전석은 적당히 아무 F급 던전에 들어가 단도의 효과를 실험해 보았다.

쿠구궁-!

단도를 휘두르자, 회색의 참격이 보름달을 그리며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미친."

그 모습을 본 이전석이 적잖이 놀랐다.

혈격과 비슷하다고?

이건 그 수준을 한참 뛰어넘었다.

단순 범위로만 따지면 방금 펼친 참격이 혈격보다 훨씬 커다랬다.

대략 1.4배에 해당하는 크기.

"이런 물건을 이틀 만에 만들어냈다는 건가?"

이전석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단도를 내려다봤다.

전생에서도 여러 번 느낀 감정이지만, 확실히 양인하 그 양반이 대단하긴 했다.

과거로 돌아왔음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

우웅-.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우웅-!

왼손에 든 혼백룡의 알이 격하게 진동했다.

이전석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질투까지 하는 거냐?"

적단도의 희미하던 에고. 아무래도 그게 순백룡의 알과 합쳐지면서 더 또렷한 에고로 변한 것 같았다.

전에는 단순히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것들밖에 느끼지 못했는데, 최근에는 그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감정들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좋은 변화일 거라 이전석은 생각했다.

그만큼 무기로서의 효능도 올라갔다는 의미일 테니.

우웅-.

또 다시 진동하는 알.

마치 이전석의 생각에 긍정하는 것만 같다.

이렇게 보니 정말 뭐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드래곤이 나올 거라는 건 안다.

다만 무병생물이라는 사실이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이러한 형태의 무기나 드래곤은 이전석으로서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기에.

[혼백룡의 알의 성장도가 1% 증가합니다.]

문득, 알의 성장도가 올라갔다.

상태창을 보니 어느새 30%가 되어 있다.

'이대로면 부화도 금방이겠군.'

아무래도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이전석은 알을 품기보다, 단손히 손에 올려놓는 방식으로 알을 다잡았다.

그렇게 던전을 나오던 길이었다.

"······그거 들었어? 화산이 소유한 경기도 생수 공장에서 후계자들끼리 치고 박고 싸웠대."

이전석은 우연히 던전 입구에서 나누던 헌터 두 명의 대화를 엿들었다.

"뭐? 누가 싸웠는데?"

"최태윤이랑 최아린."

"······미친, 그 최아린이?"

"잠깐 공장 시찰을 나왔는데 시비가 붙었다고 하더라고. 게다가 이건 나도 그냥 주워들은 소문인데··· 최아린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빠르게 던전을 나온 이전석이 내심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칠성계가 잘 작동한 모양이군.'

저런 급 낮은 헌터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도는 걸 보면 최아린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도 이젠 금방이었다.

그리고 그걸 다른 후계자와 최승철도 노리고 있을 터.

'······슬슬 시작해볼까.'

이전석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정확히 제주도가 있을 남쪽.

지금까진 간만 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화산에게 간섭할 때였다.

'포탈 게이트를 사용해도 되지만.'

그래선 혹시 눈에 띌 우려가 있다.

배나 비행기를 타기엔 조금 느리고.

'몸도 거의 다 회복됐으니.'

뚜둑, 뚝-.

가볍게 몸을 푼 이전석이 잠깐 심호홉을 했다.

그리고.

툭-.

발을 내딛었다.

[축지를 사용합니다.]

마도술을 얻으며 사용할 수 있게 된 도술.

공간을 종이처럼 접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실로 경쾌하고 가벼운 발걸음이었으나, 한 번 발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산과 산을 넘어 대지를 접어 달린다.

'슬슬 익숙해지는군.'

처음 축지를 사용했을 때보다 술식의 컨트롤이 훨씬 쉬워졌다.

물론 아직 전투에 사용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애당초 도술이라는 것자체가 싸움과는 적합하지 않은 술법이었으니······.

적어도 주리천급의 도사가 아니고선 축지를 실전에서 활용하긴 어려울 거다.

그래도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부웅-.

바람이 밀려나가며 풍경이 다시 바뀐다.

툭-.

발과 맞닿은 바닥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그러다 문득.

'······천보랑 섞을 수 있으려나?'

축지를 사용해 산맥을 이동하던 이전석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저번에는 워낙 상황이 급박해 생각하지 못했지만.

'축지도 보법의 하나야.'

그렇다면 천보랑 엮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전석은 한 번 실험해보기로 했다.

천보 - 일보.

쿵-!

발을 한 번 내딛은 것만으로 땅이 움푹 파이며 주변 수풀이 지진이라도 인 것처럼 진동했다.

천보 - 이보.

그대로 도약.

어마무시한 파괴력을 추진력 삼아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구름과 바람을 덧입은 채 비행하는 이전석.

그 상태로 발치에 마나의 발판을 현상화 하고, 마도술의 묘리를 섞어 축지를 사용했다.

직후.

어인일일까.

정전기가 온몸을 내달렸다.

짜릿한 감각.

전신의 피부가 따갑다.

변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축지라면 공간을 접어 순식간에 앞으로 나아갔어야 했거늘.

'···뭐지?'

이전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구름이 멈췄다.

발치의 마나도 돌처럼 굳었다.

바람도 없이 그저 정적만이 가득하다.

이전석이 살짝 옆을 돌아봤다.

새 한 마라가 날개 짓을 하려다 멈춰 있었다.

'시간이··· 멈췄어?'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전석은 곧 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주 미세하게나마 새의 날개가 움직이고 있던 것.

시간이 멈춘 게 아니다.

'멈춘 것처럼 보일 정도로 느려졌어.'

그리고.

쩍-.

소리가 들렸다.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고 깨지는 소리.

쩌저적-.

공간이 일그러진다.

마치 물감을 뿌린 것처럼 차츰 번져나가는 구름.

스윽-.

이전석이 손을 내밀었다.

왜일까.

모르겠다.

그저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손아귀로 무언가가 쥐어졌다.

허공, 대기, 하늘.

물리력이 존재하지 않는, 그저 개념으로만 존재할 뿐인 그것이 마치 종잇장마냥 손에 잡혔다.

그리고, 당긴다.

"······!"

순간 이전석이 이를 악물었다.

하늘을 손에 쥐고 당긴 직후.

느려졌던 시간이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게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지 않고, 마치 페달을 밟아 가속하는 차량처럼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제자리에서 말이다.

새의 날개 짓이 마치 벌새처럼 변한다.

구름과 태양, 그 위에 옅게 보이는 별빛마저 흐려지듯 스쳐지나간다.

그럼에도 밤은 찾아오지 않고, 지나갔던 태양이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시간이 고정된 상태로 시간이 흐른다는 기이한 현상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속도가 어느 임계점에 다다랐을 무렵.

콰앙-!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괴음과 함께 주변 배경이 바뀌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느려지기 시작하는 시간.

미적지근한 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이전석은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

자갈.

모래.

"제주도······."

그렇다.

그는 이미 제주도에 도착해 있었다.

'축지처럼 공간을 접은 게 아니야.'

빠르게 날아간 것도, 그렇다고 전이나 텔레포트처럼 순간이동을 한 것도 아니다.

이전석은 자신이 무슨 괴이한 짓거릴 저질렀는지 금세 깨달았다.

'한반도 본토에서 서울까지 이동한다는 과정 자체를··· 생략했다.'

마치 축지가 공간을 접듯이.

방금 이전석의 발걸음은 과정이라는 것 자체를 접어버렸다.

'허, 참······.'

저 스스로도 놀랄 만한 상황.

그저 조금 더 멀리 나아갈 뿐이라고 생각했던 이전석으로서도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 황당하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놀람은 고스란히 시스템으로도 이어졌다.

[천보에 축지를 결합해 새로운 보법을 창안했습니다.]

[천보의 세 번째 발걸음은 공간과 시간의 법칙마저 무시하며 당신을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인도해줄 것입니다.]

[단, 이동하는 장소와 거리에 따라 쿨타임이 대폭 증가합니다.]

아마 이것을 연선화가 봤다면 어땠을까. 주리천이라면?

아마 그 둘 다 미친 짓이라며 놀랄 터였고, 곧 이게 가능한 일이냐며 의문을 품을 게 분명했다.

이전석이 사용한 축지- 아니, 천보의 세 번째 발걸음은 그만큼 기이하고 괴랄한 것이었다.

[삼계육도에 당신의 이름이 널리 떨쳐집니다.]

[보법에 합당한 이름을 정할 시 당신의 명예와 명성은 더욱 드높아질 것입니다.]

[혼백룡의 알이 '천보 - 삼보'의 업을 삼킵니다.]

[혼백룡의 알의 최소 부화등급이 A로 상승합니다.]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

'······이름이라.'

이전석은 그것을 흘겨봤다.

확실히.

'일보나 이보에도 딱히 이름이 없었지.'

혼백룡의 알이 명성이나 명예, 업과 같은 것들을 먹고 성장한다는 걸 고려하면 나중에라도 이름을 지어두는 편이 좋을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이전석이 상태창을 지웠다.

이어 정면의 절벽을 쳐다봤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바닷물이 파도치는 절벽 위.

50층은 될 법한 빌딩이 새워져 있다.

저게 바로 최승철의 피난처다.

본래라면 다양한 결계나 아이템에 의해 숨겨져 보이지 않아야 할 테지만, 아무래도 축지 아닌 축지로 그것들마저 꿰뚫은 채 내부로 들어온 듯했다.

[은신을 사용합니다.]

이전석은 특성을 사용해 모습을 숨겼다.

결계와 코트의 효과까지 덧입혀 기척을 완전히 지운다.

그리고 날쌘 몸놀림으로 절벽을 올라갔다.

마나의 발판을 사용해 빌딩 외벽을 올라 옥상에 내려선다.

이내.

지잉-.

마나를 빌딩 전체로 흩뿌렸다.

보안장치가 있는 듯하지만···.

'의미 없어.'

오직 그것들만을 피하며 재주 좋게 건물 전체를 훑었다.

이전석이기에 가능한 기행.

'허, 창고까지 있어?'

그중 지하를 보니 거대한 공간이 느껴졌다.

공간만이 아니다.

다양한 마석과···.

'아이템이로군.'

꽤 급 높은 것들이 많이 느껴졌다.

'아예 보물고를 차려놨네.'

SSS급이나 SS급은 없는 것 같지만, 이 정도면 웬만한 길드의 창고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외면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닐 터.

마침 이런 때를 위해 만들어둔 창고도 있었으니.

'어디, 한 번 제대로 털어보자고.'

이윽고 퍼거슨의 위치를 파악한 이전석은 마도술로 코트에 모자를 만들어내며 푹 눌러썼다.

정말 코트를 변화시킨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환술의 연장선일 뿐이지만, 지금은 이걸로 충분했다.

이전석은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퍼거슨이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숨어들었다.

'집이 털린 걸 알았을 때 놈의 표정이 기대되는군.'

입가에 절로 미소가 새겨졌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6화

알렉산드로 퍼거슨 (2)

"누님."

최승철이 제 검을 쓸어내렸다.

엄지가 날을 쓰다듬듯 훑는다.

물감처럼 손가락을 붉게 물들이는 핏물.

"누님."

이윽고, 그의 시선이 최아린을 향했다.

최아린은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몸 곳곳엔 상처가 나 있었고, 입가에선 타액마저 줄줄 흘러내렸다.

결코 정상이라곤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막내가 죽었습니다."

뒤이어 최승철의 시선이 향한 건 바로 근처에 널브러진 시신이었다.

최태윤.

최은하보다 더 나중에 태어난 화산의 마지막 핏줄.

그는 전신이 난도질당한 채 피칠갑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눈물과 피로 젖은 얼굴.

최승철은 여전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던 막냇동생의 눈을 살며시 감겨주었다.

"착한 아이였지요."

헌데.

"누님의 광증 덕분에 저희 중 가장 먼저 눈을 감게 되었군요."

그는 마치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눈빛에서 희미한 기쁨이 엿보였다.

그에겐 작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즐거운 듯 보였다.

반면.

"광, 증···! 나는······ 미친 게······!"

최아린이 숨을 헐떡이며 쓰러지려던 몸을 바로잡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감정.

속에서 욕망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 목숨마저 받치라는 목소리가 뇌리를 맴돌았다.

연향(戀香).

그녀가 조경헌에게 사용한 표션.

그것을 마신 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위해 목숨마저 받치게 된다.

이성에 관한 욕망을 주체할 수 없게 되고, 그리하여 미친 자처럼 행동하곤 했다.

바로 작금의 최아린처럼 말이다.

문제는 연향의 효과가 단순히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그만 목표나 관심, 혹은 흥미마저 애정으로 뒤바꿔버린다.

최아린이 목표로 삼고 화산의 거대한 옥좌.

그것이 애정으로 탈바꿈 되어 막냇동생을 죽이고, 결국에는 미친 듯이 날뛰는 지경에까지 이르고야 만 것이다.

주변에 널린 시체의 무더기.

전부 최아린 본인의 부하다.

공장에서 일하던 민간인도 적잖게 보인다.

전부 최아린에 의해 죽고 말았다.

'어째서······.'

왜 이렇게 되었더라.

처음엔 그저 후계혈전에 대비해 엘릭서를 연구하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자로 보낸 조경헌이 갑자기 이상한 술법을 사용했다.

연향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것도 모자라 대뜸 그걸 최아린에게 반사시킨 것.

포션의 효과를 되돌려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최아린이 아는 바로는 그랬다.

그래서 대처하지 못했고, 그대로 강화된 연향의 효과를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녀도 명색이 S급 헌터였으니까.

전투계는 아니라 할지언정, 100이라는 레벨을 허투로 올린 게 아니다.

버티고 버티며, 흘러내리려던 가면을 애써 붙잡았다.

그러나 일이 터진 건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던전 폭주로 인해 난장판이 된 화산 소유의 공장.

후계혈전이 시작된 마당에 마냥 몸을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어 '보여주기식'이라는 명목 하에 잠시 공장의 시찰을 나왔는데······.

한 순간.

최아린은 이성을 잃어버렸다.

참고 또 참아내던 욕망이 터져 나온 것처럼.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보이는 대로.

수많은 헌터와 민간인이 죽었다.

막냇동생마저 제 손에 죽임 당했다.

이성을 잃었지만 의식은 어렴풋이 있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했는진 기억이 났다.

━여기서 너희를 죽이면······ 나는 옥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될 거야!

돌연 그런 말을 하며 최태윤의 목을 긋던 자신.

하지만 그 일이 있기 전.

분명, 최승철의 마나가 움직였다.

이성을 잃은 건 그 직후였다.

틀림없었다.

최승철이 자신의 이상을 깨닫고 괴상한 짓거릴 한 게 분명했다.

그것도 민간인들이 잔뜩 몰려 있고, CCTV라는 멀쩡한 증거마저 있는 곳에서.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최아린이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미치셨습니다."

최승철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대체 어쩌다 그리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증, 스러운 것······!"

역겹다.

추하고, 혐오스럽다.

저런 게 내 동생이라니.

진즉에 죽였어야 했다.

어렸을 때.

아직은 검조차 제대로 쥐지 못할 시기.

그때 목을 비틀어버렸어야 했다.

"저희가 서로 죽고 죽이는 험악한 관계라 한들, 그로인한 영향을 민간인에게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한 걸 잊으셨습니까?"

최승철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연기였다.

CCTV에 등을 진 채, 최대한 최아린의 추악한 모습이 잘 보이도록 연기하고 있었다.

슥-.

이내 최아린의 목에 검을 겨누는 최승철.

"규칙을 어긴 후계는 왕이 될 수 없고, 세상에선 그런 이들을 흔히 빌런이라고 부르지요."

빌런.

그 말에 최아린이 두 눈을 떨었다.

그것도 잠시.

피로 점칠 된 공장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두 사람.

협회 소속 감독관.

김백동과 그 파트너인 박일우였다.

"······미친."

박일우가 공장 내부의 참상을 보더니 눈을 떨었다.

감독관인 그로서도 꽤나 놀랄만한 광경이었던 것.

토막 난 시체가 여기저기 난자해 있고, 그 가운데 최아린과 최승철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있다.

"이런 또라이 새끼들을 봤나."

박일우가 잔뜩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진정해라."

김백동이 애써 그를 억눌렀지만 소용없었다.

A급 헌터의 기운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이건··· 이건 아무리 화산이라도······!!"

"박일우."

그보다 더 큰 기세가 박일우를 억눌렀다.

"크윽······."

잠시 신음하던 박일우였으나, 그는 뒤늦게나마 제정신을 되찾았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흥분했던 감정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숙인다.

그 사이.

"오셨군요."

최승철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최아린 또한 뒤늦게 김백동과 박일우를 발견한 듯 눈을 떨었다.

"설마··· 협회······?"

"맞습니다, 누님. 협회, 그것도 감독관 분들이시죠."

"너, 너어···! 협회를 끌어들인 거야?!"

최아린이 황당함,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어조로 외쳤다.

"학살과도 맞먹는 대형 살인사건이니까요. 협회에 신고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비열한······!"

비열하다.

맞는 말이다.

후계혈전에서 다른 집단- 특히 협회를 끌어들이는 건 대대로 금기시 되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승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협회는 삼대의 원수이니 도움을 빌리지 마라? 그딴 구시대적 생각은 누가 한 것인지.'

오히려 그는 현 화산의 규칙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때.

"체포해."

김백동의 명령에 박일우가 나섰다.

그는 어렵지 않게 최아린을 제압했다.

"이거 놔! 놓으란 말야! 나는···! 나는 미치지 않았어······!!"

"가만히 계십시오. 그래야 안 아픕니다."

어떻게든 잡히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박일우에 의해 금세 제압된 채 수갑이 채워지고 만다.

마법과 결계가 새겨진 아다만타디움 수갑이다.

S급이라도 이걸 자력으로 풀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미 최승철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고작해야 A급에게 대항할 힘조차 남지 않았으니.

반면.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김백동이 최승철에게 물었다.

"만족하셨습니까?"

"······만족이라. 무슨 말씀이신지."

최승철이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김백동 또한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최아린을 차량에 태운 채 협회로 이송할 뿐.

이윽고 뒤처리를 경찰들에게 맡기고 떠나려던 차.

"그 검이 바로 듀량달입니까?"

최승철이 웃는 얼굴로 물어왔다.

김백동이 허리춤에 달고 있는 푸른 색감의 장검.

"한 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아쉽군요."

짧게 오고 가는 대화.

김백동이 눈을 찌푸렸지만 잠시 뿐이었다.

"어울려드리는 건 이번뿐입니다."

아무래도 그는 작금의 상황이 최승철의 음모임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다음에도 이번과 같은 기적을 바라지 마십시오."

매서운 눈길이 최승철을 향해 쏟아진다.

김백동의 살기는 어깨를 짓누르고 오장육부를 뒤틀었으나, 최승철은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대답했다.

"명심하지요."

실로 뱀과 같은 인상.

김백동은 차에 올라탄 채 사이드미러로 비추어지던 최승철을 흘겨봤다.

'최아린은 우리로서도 구속해두고 싶은 사람이기에 협력했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화산의 장이 폐관에 들었다는 소문.

하물며 후계 간의 전투까지.

'다음에 만날 땐 전장이겠어.'

하늘에 악운이 드리웠다.

번개가 치고, 곧 비가 쏟아져 내렸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마치 그와 같았다.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가지."

"예."

김백동의 명령에 박일우가 차를 몰았다.

그렇게 협회는 자리를 떠났다.

뒤처리를 하는 경찰만이 남았을 뿐.

그 가운데, 최승철이 생각했다.

'일이 잘 진행된 건 좋지만······ 그 누님이 이리 쉽게 무너지신 건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로서도 이번 사건에는 의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김백동은 최승철이 모든 걸 꾸몄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최아린이 무너지게 만든 건 순전히 그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아슬아슬한 최아린의 상태.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후계를 무너트리기에 이만큼 좋은 기회는 달리 없어 바로 손을 쓰긴 했지만···.

'뒤가 있어.'

정체모를 누군가가 뒤에 숨어 화산, 그리고 협회까지 농락하고 있었다.

'신 형님은 이런 사술을 쓸 사람이 아니고. 태윤이는 애초부터 은하처럼 착한 기질이 있었어. 그래도 옥좌라는 욕심은 못 버려 화산에 남아 있었지만··· 설마 강오 짓인가?

최강오.

그는 유독이나 비열한 수를 쓰는 경향이 강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았다.

그까짓 게 어떻게 최아린을 저토록 흔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조사 좀 해봐야겠어.'

이내 최승철이 발걸음을 돌렸다.

방금 있었던 일을 뉴스를 통해 전국에 퍼트릴 심산.

그로 하여금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도련님!"

유모가 다급히 달려왔다.

꽤 흥분한 듯한 모습.

"왜 그러지?"

그녀에게서 보기 드문 감정에 최승철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도, 도련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별택이······!"

"진정하고 말해라. 별택이 뭐 어쨌다는 거지?"

최승철의 말에 유모가 뒤늦게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뒤늦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것이······ 퍼거슨님께서 침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셨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줄곧 평온한 듯 보이던 최승철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새겨졌다.

※ ※ ※

몇 분 전.

'사람은······ 의외로 별로 없군.'

이전석이 빌딩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전생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광경이다.

별택을 관리하는 집사와 메이드들.

그리고 몇 명의 경비원까지.

모두 최승철 휘하에 속한 이들이었다.

방범장치 또한 위치가 똑같아서, 그것들을 피해 퍼거슨이 있는 24층까지 내려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24층 가장 안쪽.

이전석은 현란한 손놀림으로 잠금을 해제한 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15평쯤 되는 크기의 방.

중앙에는 고풍스런 장식의 침대가 놓여 있다.

이전석이 그곳에 드러누워 자는 사내를 바라봤다.

알렉산드로 퍼거슨.

그가 언덕처럼 치솟은 배를 긁적이며 코를 골고 있었다.

이전석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경계심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보통 S급이라면 작은 위기에도 금세 정신을 차리기 마련이건만.

푸욱-.

"······컥?! 크허억···!!"

이전석이 퍼거슨의 오른손에 단도를 내리찍었다.

피가 솟구침과 동시에 퍼거슨이 번쩍 눈을 떴다.

"끄아아악!"

그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침대가 흔들리도록 발버둥 쳤다.

"퍼거슨."

이전석이 그를 불렀다.

퍼거슨은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떨리는 시선으로 이전석을 쳐다봤다.

"누, 누구······! 누구시오! 대체 누구시길래 갑자기······!"

"내가 누군진 네가 알 바 아니야."

이전석은 그의 말을 일축했다.

"그냥 죽이기 전에 얻을 게 있어 잠시 깨운 거지. 너는 묻는 말에만 잘 대답하면 돼."

"주, 죽인다니······! 소인이 누군지 알고서나 하는 말이오? 소인은 화산의 손님이외다!"

"알아."

모를 리가.

외국인임에도 독특하기 그지없는 저 말투.

목과 손, 귀, 심지어는 입술과 코까지 장식하고 있는 각종 보석들.

이런 놈은 세상에 한 명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로 퍼거슨.

처리반이라고도 불리는 빌런.

"안다면 다행이구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시오?"

퍼거슨이 애써 고통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도 나름 S급 각성자라는 걸까.

'뭐, 그래봤자 레벨은 50도 안 됐겠지만.'

이전석이 퍼거슨을 상대로 기습을 성공하고 그를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퍼거슨은 외형만큼이나 움직이는 걸 싫어했고, 그것은 당연히도 레벨을 올리는 행위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지 고독이라는 특성 덕분에 여태껏 죽지 않고 다양한 이들에게 이용당하며 살아왔을 뿐.

정작 퍼거슨 자신의 무력은 별로 대단치 않았다.

"크어억···!"

이전석이 단도를 통해 마나를 흘려보냈다.

발화 만큼은 아니지만, 피부와 근육을 지나 그대로 신경을 관통한 마나는 주로 누군가를 고문할 때 이용되는 방식이었다.

"묻는 말에 잘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가능한 고통 없이 편하게 죽고 싶다면 말야."

"······."

퍼거슨이 이를 갈았다.

그의 눈빛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꾸미는 눈치.

이내 그가 몸을 비틀어 머리맡 침대 탁상에 왼손을 내밀었다.

"크윽······!"

오른손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그러나 퍼거슨은 애써 고통을 참아내며 탁상 위 버튼을 눌렀다.

정확히는 은색의 호출용 벨.

대앵-.

청명한 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울린다.

"멍청하긴······! 이걸로 이 별택의 경호들이 이상을 깨닫고 전부 소인을 지키고자 달려올 것이오. 편하고 죽고 싶다면? 하! 그건 소인인 할 말이오. 어떻게 죽을지 걱정해야할 건 바로 당신이외다!"

자신만만한 어조로 이를 갈아대는 퍼거슨.

"미안한데······."

이전석은 그 모습이 우습지도 않았다.

"누구도 널 도와주지 못할 거다."

그러고선 허공에 펼쳐진 결계를 퍼거슨에게도 보이도록 드러냈다.

단도를 내찌름과 동시에 형성했던 결계.

"네 목소리나 종소리를 다른 놈들이 알아채기나 할 것 같아?"

순간 퍼거슨이 눈을 떨었다.

"이, 이 종은 마도구이외다! 고작 결계 따위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소!"

마도구.

아이템의 또 다른 명칭.

정확히는 던전에서 드롭된 게 아닌, 장인들에 손에 의해 빚어진 아이템을 흔히 마도구라 부르곤 했다.

"고작 마도구 따위를 너무 신뢰하는군."

이전석은 퍼거슨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내 결계가 단순히 소리만을 차단한다고 생각하나?"

아이템, 혹은 마도구로 인한 마나의 파동조차 막는다.

이전석이 펼친 결계는 그런 종류였다.

어지간한 실력으론 사용할 수 없는 결계였기에 퍼거슨은 쉽사리 믿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없는데······.

'어째서 아무도 오지 않지?'

벨이 올리고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등신 같으니."

이전석이 드물게 욕설을 지껄였다.

그가 보기에 퍼거슨은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돼지나 마찬가지였기에.

그 증거로 수명을 희생한다는 고독을 이리저리 사용해대며, 화산 같은 곳에 빌붙어 하루하루 그들이 주는 사료나 먹으며 배를 채우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가축과도 다름없는 신세였다.

이전석이 그를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

그건 다름이 아니었다.

퍼거슨에게서 얻어내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아직 A급에 불과한 그가 화산을 상대려면 반드시 그게 필요했다.

"아스트로."

이전석은 그것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

퍼거슨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떨었다.

"표정을 보니 알고 있나 보군."

"그, 그걸······ 그걸 당신이 어찌······."

콰득-.

"끄아악!"

이전석이 단도를 뒤틀었다.

퍼거슨이 비명을 내질렀다.

피가 솟구쳤으나 이전석은 아랑곳 않았다.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마. 네가 결정할 건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답을 일찍 털어놓고 편하게 죽느냐, 그것도 아니면 아주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어갈 것이냐 뿐이니까."

"크으윽······!"

여전히 고통에 신음하는 퍼거슨.

그에게 이전석이 말을 이었다.

"졸부. 운이 좋아 특성을 얻고 각성자가 된 케이스. 그게 바로 너지, 퍼거슨."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한낱 시정잡배에 불과했던 퍼거슨은 우연히 LA 슬럼가에서 던전 하나를 발견한다.

아스트로.

의지를 지닌 던전으로, 흔히 칠대 재앙이라고도 불리는 존재.

그것은 의지를 지닌 만큼 수시로 위치를 옮겨댔고, 원체 신출귀몰한 탓에 이전석으로서도 찾아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반면 하늘의 도움으로 우연히 아스트로를 발견한 퍼거슨은 그곳에서 고독을 얻어 각성자가 되지만······.

'능력이 없어 더 깊은 곳까지 공략하지 못했지.'

단지 첫 발견자로서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열쇠만을 가진 채, 고독이란 특성을 이용해 이토록이나 호의호식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전석이 등신이라고 한 것이다.

그만한 던전을 홀로 독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제 수명이나 깎아먹으며 잠이나 자고 있으니.

전생에선 그 사실이 화산에 의해 밝혀지고, 대부분의 보상을 화산에서 독차지 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르다.

이전석은 그것마저 홀로 독식할 생각이었다.

"아스트로의 열쇠. 네가 가지고 있지?"

"나, 나는······ 모르오······ 그런 던전은······."

"정말?"

애써 시선을 피하는 퍼거슨.

이전석이 단도를 툭 두들긴다.

그러자 퍼거슨이 눈 떨었다.

그리고 다시 단도를 잡고 비틀려 하자.

"······아, 알겠소! 말하겠소! 말하면 되지 않소?!"

퍼거슨은 당황하며 말을 바꿨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주겠다.

그 말에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다만 그로서도 아예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대, 대신 내 목숨은 보장해주시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걸 모두 드리겠소이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열쇠를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약속하지."

"후우······."

퍼거슨이 숨을 짙게 내쉬며 허공에 왼손을 내밀었다.

치지직-.

그러자 두툼한 손가락 사이로 노란 전류가 흐르더니 손바닥 위로 금색의 열쇠가 나타났다.

"이게······ 그 던전의 열쇠요."

이전석은 잽싸게 열쇠를 낚아챘다.

시스템이 떠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아스트로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아스트로의 열쇠가 당신에게 귀속됩니다.]

동시에 열쇠가 손안으로 스며든다.

상태창을 보자 '아스트로 열쇠'라는 별도의 특성이 생겨나 있었다.

등급은 없이 그저 '아스트로에 입장한다'는 효과만을 가진 특성.

"확실히 맞는 것 같군."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이제······."

퍼거슨이 입을 열었다.

마치 살려달라고 애원하듯이.

그러나.

서걱-.

이전석은 오른손을 구속하고 있던 단도를 빼들며, 그대로 퍼거슨의 목을 그었다.

"어, 어째··· 서······?"

퍼거슨이 울컥- 피를 토하며 당황 어린 눈빛으로 이전석을 바라봤다.

이전석은 냉혈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그를 마주봤다.

"가축이면 가축답게 죽어야지."

살아 있어서 좋을 게 없는 놈이었다.

이미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빌런.

그래서 이전석은 망설임 없니 녀석을 베었다.

털석-.

이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퍼거슨.

그의 동공에는 마지막까지 경악 어린 감정이 서려 있었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고독(S)을 습득합니다!]

[악인을 죽였습니다.]

[당신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악인입니다.]

[수많은 민간인을 죽인 빌런입니다.]

[선업이 '100,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일부 하락합니다.]

'10만?'

이전석은 생각보다 많이 오른 선업에 내심 놀람을 내비쳤다.

'하긴··· 퍼거슨이면 고독의 폭발을 일으킬 때마다 수십 명은 거뜬히 죽여 댔을 테니······.'

그럼 10만이란 선업도 그가 가진 무력이나 급에 비해 나름 납득이 갔다.

'이걸로 19만이 됐군.'

업상점에서 특성 진화의 룬을 하나 살 수 있는 수치.

그걸로 망자들의 왕을 승급시키면 괜찮을 듯싶었다.

'특성은······.'

고독

등급 : S

효과 : 아스트로가 만들어낸 고독을 특정 대상에게 심는다. 또한 사전에 지정한 시기와 상황에 따라 의도적으로 폭발을 일으킨다. 단, 폭발의 위력은 기폭제가 되는 대상의 강함에 따라 달라진다.

*고독을 한 번 심을 때마다 수명이 일부 소모된다.

*고독을 심는 대상의 동의가 없을 경우 소모되는 수명이 더욱 늘어난다. 대상이 격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수명의 소모가 증가한다.

'쓰레기로군.'

고독의 효과를 본 이전석은 그리 판단했다.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

그 자체가 고독이라는 특성 자체를 거대화 같은 것들보다 못한 쓰레기로 만들었다.

'잘도 이런 걸 쓰고 다녔어.'

이전석은 퍼거슨의 시신을 흘겨봤다.

그는 당장 던전을 공략하는 게 무서워 도망친 주제에,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미래를 희생한 머저리였다.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우습기만 할 따름이다.

다만.

'스켈에게 주면 쓸 만할지도 모르겠군.'

죽어도 부활하는 언데드에게 수명 따윈 의미가 없었으니.

'그렇게 되면 스켈은 폭발병이 되는 건가?'

스켈 자신에게 고독을 심은 채로 포탈 게이트를 사용, 그대로 자폭을 사용하며 적진에 투하 시키면 어떻게 될까.

'말 그대로 핵폭탄이로군···.'

이런 면에서 보면 고독도 그리 나쁜 특성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이전석이기에 활용 가능한 특성.

[혼백룡의 알이 S급 살해의 업을 먹어치웁니다.]

그때.

계속 왼손에 들고 있던 알이 진동했다.

아직 부족하다는 듯한 감정이 몰려온다.

하긴 S급이라곤 해도 퍼거슨은 어디까지나 장식뿐인 S급이었으니.

"기다려."

이전석이 그리 말하자 곧 진동이 줄어들었다.

그를 주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일까.

드래곤임에도 확실히 말을 잘 들었다.

촤악-.

이내 단도를 휘둘려 피를 털어낸 이전석.

그것을 다시 코트 속에 납도하며 기척을 감추었다.

누군가 퍼거슨을 발견하기 전에 자리를 떠야 했고···.

무엇보다 아직 가장 맛있는 것이 남아 있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7화

창고지기

퍼거슨의 식사는 제때 정각에 맞춰 진행된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버럭 화를 내고, 손님 한 명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며 혼이 나는 건 관리인들이다.

뛰어난 실력과 실적으로 최승철의 비밀부대가 된 만큼 그들의 행동양식도 철두철미했다.

그렇게 6시 정각에 맞춰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퍼거슨의 방으로 향하는 수명의 관리인들.

말이 관리인이지 입은 복장으로 보면 집사나 메이드와 다름이 없다.

가장 앞서 복도를 걷고 있던 집사.

그가 방문 앞에 선 채 노크를 두들겼다.

"퍼거슨님 식사시간이십니다."

"······."

대답이 없다.

퍼거슨은 식사시간이 아니면 대다수의 시간을 잠이나 자며 보내니 이상할 건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집사가 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문고리에 넣었다.

그런데.

'음? 열려있다?'

사생활을 침해받는 걸 무척이나 싫어해 문을 꼭 걸어 잠그는 퍼거슨이 문을 열어두다니.

의문도 잠시 뿐이었다.

곧 그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피 냄새.'

코끝을 찌르고 들어오는 비릿한 혈향.

아니나 다를까.

"망할."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니 퍼거슨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다급히 목에 손을 대보지만 심장은 이미 멎은 상태.

다만 온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이 건물 어딘가에 아직 범인이 있다는 소리였다.

"당장 도련님께 연락드리고 별택 전체의 방범장치를 가동해라!"

집사가 메이드들에게 명령했다.

메이드 네 명이 급히 방을 뛰쳐나가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빌딩 전체에 울리기 시작하는 경보음.

이전석도 지하에서 그것을 듣고 있었다.

※ ※ ※

위이잉-!

고막을 찌르고 들어오는 경보음.

'벌써 들켰나? 빠르기도 하군.'

이전석이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50평이나 되는 거대한 크기의 공간.

고급진 선반 위에 다양한 아이템이 놓여 있으며, 한쪽에는 갑옷과 검, 그리고 창 같은 무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많이도 모아놨네.'

개중에는 억소리가 나오는 아이템도 꽤나 많이 있었다.

특히 특성 진화의 룬.

A급이 4개, S급이 한 개가 있다.

원래는 던전이 등장하면 그때가서 얻으려고 했거늘,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전석은 주변에 있는 모든 걸 훔치고자 했다.

어떻게?

이 모든 걸 바리바리 싸들고 도망치랴?

설마.

그랬다간 아무리 이전석이라도 도중에 잡힌다.

오히려 그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포탈 게이트를 형성합니다.]

영풍산 지하와 이어진 포탈 게이트.

다름 아닌 그것을 사용한 것.

그리고 포탈 게이트의 또 다른 효과.

"흡수."

갈색의 게이트는 창고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을 선반 째로 집어삼켰다.

쿠구구구-!

이전석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 한 자루를 가볍게 피했다.

그것이 포탈 게이트의 힘에 이끌려 그대로 안쪽으로 빨려들어갔다.

다른 무구와 아이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아이템을 태반 빨아들였을 무렵.

━드디어 적합자가 찾아왔는가.

갑자기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남성 여럿의 목소리가 합쳐진 듯한 음성.

'뭐야?'

창고 중앙, 발이 없고 온몸이 불투명한 한복차림의 사내가 서있었다.

옛날 조선시대에서나 볼법한 옷차림과 길쭉하게 늘어진 수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오랜 시절부터 이 땅을 지키도록 명받은 토지신, 장소······여어어엉?!

유령과도 같은 형태의 기괴한 무언가가 아이템과 함께 바람에 휩쓸려 포탈 게이트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토지신?'

이전석은 방금 들은 말을 되새겼다.

'갑자기 토지신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데······.'

영물이 사라지며 토지신 또한 태반이 모습을 감춘 요즘 시대, 그들은 살면서 한 번 만날까 싶을 정도로 희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토지신을 최승철의 별택에서 보다니.

"음."

위이잉-!!

이전석은 일단 창고부터 탈출하기로 했다.

이전부터 더 격하 게 울리는 경보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아이템도 전부 다 흡수한 것 같고.'

텅 빈 창고.

남은 건 없었다.

이전석은 포탈 게이트로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의 마나를 현상화해, 바닥에 무언가 글씨를 새겼다.

'좋은 선물이 될 거다.'

씨익-.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는 이전석.

가학심이 또 다시 올라오는 듯하지만 애써 그것을 가라앉히며 게이트 너머로 모습을 감춘다.

'놈의 반응을 볼 수 없는 게 아쉽군.'

그리고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포탈 게이트마저 사라졌을 무렵.

쾅-!

집사와 메이드들이 창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 이건······!"

그들은 텅 비어있는 창고를 보곤 입을 떡 벌렸다.

설마하니 그 많은 물건이 전부 다 사라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 ※ ※

"무슨 일이 있었지?"

최승철이 물었다.

그의 앞에는 퍼거슨의 시신이 있었다.

침대 위에 파묻힌 붉디붉은 돼지.

이미 온기도 사라지고 시체 특유의 썩은 내가 나는 것이 역겨울 따름이었다.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

메이드 한 명이 다가와 입을 열었으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는 일이 없었다.

돌연 그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힉···!"

그 모습을 본 다른 메이드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방금 죽은 메이드는 어젯밤까지만 서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떠들어대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죽음에 놀랄 새도 없이 최승철이 언제 뽑았는지도 모를 검을 다잡으며 말했다.

"모른다···. 내가 그딴 하찮은 대답을 원해 물었다고 생각하나?"

"그, 그게······ 그런······."

메이드가 털썩 주저앉았다.

공포가 그녀를 휘감았다.

최승철의 이런 모습은 평생 본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비하고 자상하며 자신의 우상과도 같은 도련님이었는데, 지금만은 완전히 다른사람 같았다.

"유모."

"예, 도련님."

오직 최승철의 유모만이 익숙한 일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숙일 뿐.

"내 듣기로 창고에도 괴한의 손이 뻗쳤다고 들었다만."

"보안장치나 관리인들의 눈을 숙이고 퍼거슨님을 죽인 뒤, 지하 창고로 향해 모든 아이템과 장비들을 도둑질한 듯싶습니다."

"범인은?"

"최대한 알아보고 있사오나······."

쯧-.

최승철이 혀를 찼다.

기분이 나빴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

'설마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렸나?'

도저히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하 창고에 특별한 방식의 마나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마나?"

"제가 보기론 문자 같은데 통 읽을 수가 없는지라······."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문자라는 기이한 보고에 최승철은 곧장 유모를 앞세워 지하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크흐."

최승철이 의미모를 웃음을 흘렸다.

"도련님?"

유모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최승철의 시선은 텅 빈 창고 바닥의 마나로 향해 있엇다.

오직 그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새겨진 문자.

화산의 후계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일종의 암호.

그리고 그 암호로 적힌 네 글자의 사자성어.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득을 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였는데··· 지금 이 상황에 그 두 가지가 의미하는 바는 간결하고도 간결했다.

퍼거슨의 죽음과 그리고 최승철이 '보화고(寶華庫)'라 부르는 창고를 턴 것.

'협회에 구속된 누님이 이런 짓을 할 린 없고, 태윤이는 이미 죽었지. 남은 건 은하와 강호, 그리고 형님뿐이지만······. 방범장치는커녕 관리인에게조차 들키지 않고 이런 짓거릴 할 수 있는 건 한 명 뿐.'

최승철은 곧 한 명의 이름을 떠올렸다.

'최신, 우리 형님.'

뿌득-.

'동생 상대로 재밌는 짓거리를 해주시는군요.'

최승철이 이를 갈았다.

그것이 이전석의 짓이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이미 후계혈전이 시작된 상황에, 후계들만이 아는 암호가 등장했다.

그의 관심은 당연히 이전석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지금쯤 아주 이가 부서져라 갈고 있겠군.'

영풍산의 창고로 돌아온 이전석이 최승철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심 웃음을 흘렸다.

그는 교만하고 오만하며, 또한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을 짓밟는 걸 좋아했다.

가학적인 성격이었고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지만······.

━이, 이게 대체 무슨!

이전석은 그보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더 신경 쓰였다.

토지신.

━여긴 어디지? 나를 어떻게 한 거냐!

자신을 장소영이라 소개했던 남자가 이전석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전석은 장소영을 유심히 관찰했다.

토지신이 모두 영물인 것은 아니다.

가끔 죽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그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도깨비나 어둑시니 같은 요괴들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토지신을 자처하는 일도 드물게나마 있었다.

이전석이 보기에 장소영의 경우엔 어떻게 봐도 전자였다.

죽어 귀신이 되었으나 모종의 깨달음을 통해 토지신이 된 존재.

"나야말로 오히려 묻고 싶은데."

이전석이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옆으로 밀었다.

원체 빨아들인 게 많아서 그런지 창고가 어지러이 여러 물건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사이로 장소영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토지신으로서 그 땅을 지키라고 명령받았다는 게 무슨 소리지? 나를 더러 적합자라고 한 이유도 궁금하군."

장소영이 이전석을 빤히 쳐다봤다.

━흠. 좋아. 그렇게 물으니 가르쳐 주도록 하지.

장소영이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을 하는데 저리 뜸을 들이는지.

곧 이어 그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모른다!

"······?"

이전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품에서 단도를 빼들었다.

"혹시 죽고 싶은 거라면 말해라. 지금이라도 베어줄 테니. 걱정하지마라. 귀신을 벨 수 있는 방법쯤은 알고 있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진짜 모른단 말이다!

장소영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꿀꺽-.

유령인데도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이전석이 단도를 거둬들이자 장소영이 뒤늦게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이 희석됐다.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정체모를 누군가에게 적합자가 찾아올 때까지 그 땅을 지키라는 것뿐이었어.

"적합자라면?"

━기이할 정도로 거대한 살(殺)을 지닌 존재.

"······나로군."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생각하도 이전석 자신밖엔 없었다.

지금 이 세상에 그만한 살의와 살업을 지닌 존재는 달리 없을 테니.

━이 정도로 거대한 살을 지닌 존재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 때문에 너를 보자마자 확신했지. 이 자야말로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적합자로구나!

"그래서, 적합자를 찾아 뭘 하려는 거지?"

━물건을··· 어떤 물건을 건네주라고 했다.

물건?

━음, 어디 보자······ 이런 젠장, 어디 간 거야? 찾기 힘들잖아!

장소영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짜증 어린 어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가 양팔을 벌리더니,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던 물건들이 선반과 함께 정리되기 시작했다.

벽에 맞춰 일자로 새워지는 선반과 구석구석 선반 위에 정리되는 아이템과 무구들.

그 모습을 보며 이전석은 생각했다.

'······쓸 만 한데?'

창고를 자동으로 정리해주는 토지신.

어쩌면, 혹시 이용해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문도 잠시.

━여깄군!

장소영이 웬 목함 하나를 들고 이전석에게 다가왔다.

━이거다. 이게 내가 그 땅에서 지키고 있던 것이다.

이전석이 목함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살며시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아직은 격이 부족합니다.]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마치 접착제가 붙은 것처럼.

게다가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까지.

'격?'

아마 S급이 되면 얻을 수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음······.'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이전석은 목함을 근처 선반에 올려놨다.

지금 당장 열지 못하는 걸 가지고 고민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다만.

"이 목함에 대해선 그 별택의 사람들도 알고 있나?"

━모른다.

이전석의 물음에 장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수년 전, 괴한들이 내가 지키던 땅에 찾아왔다.

괴한. 아마 화산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정확히는 최승철과 그의 수하들.

━놈들은 내가 거하던 사당을 부수고 그 위에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 아마도 그 땅에 흐르는 영맥을 노린 것이겠지. 그 증거로 놈들은 영맥의 기운을 사용해 저 자신들의 건물을 외부와 단절 시켰다. 허나 그들이나 그들의 주인은 내가 기다리는 적합자가 아니었어. 그렇기에 목함을 내 기운으로 감싸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숨겼다.

그리고.

━나 장소영은 이제 맡은 바 모든 일을 끝냈다.

그 말이 있은 직후였다.

장소영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하는 영체.

반투명하던 것이 더욱 더 흐려진다.

이전석은 그 현상이 무엇인지 직감했다.

"성불하는 건가?"

그렇다.

성불.

죽어 미련을 가지고 세상에 묵였던 혼이 한과 미련을 풀고 저세상으로 향하는 것.

━나는 본디 죽은 사람이다. 단지 특별한 힘으로 잠시나마 토지신이 되었을 뿐, 그 정체모를 남자의 힘도 이젠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시간이 흐르며 희석됐고, 또 흐려졌지. 그리고 마침내 목함을 건네주며 내게 주어진 힘은 불씨가 꺼졌다.

장소영은 마치 이때가 되면 자연스레 힘이 사라져 성불하도록 설계된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마 그리 틀린 추리는 아닐 터였다.

목함을 건네주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장소영의 혼에 새겨져 있던 어떠한 술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술식은 이전석에게 있어서도 무척 익숙한 것이었다.

도술.

그것도 꽤 수준이 높은 술법.

'······도사였군.'

장소영을 토지신으로 만든 이는 도사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어째서 이전석에게 목함을 주고자 했는가.

정확히는 이전석이 아니라 거대한 살을 지닌 존재지만······.

'뭐, 그건 나중에 목함을 열어보면 알겠지.'

오히려 이전석은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장소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희미하게 남은 술식이 여전히 영혼 곳곳에 잔류해 있다.

━다만······ 아쉽군. 나는 내 자식이 어떻게 크는지도 못했고, 후손들의 삶도 지켜볼 수가 없었으니···.

말을 들어보니 아직 미련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다.

이전석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창고지기를 해볼 생각 없나?"

━창고지기?

"이곳을 지키는 거지."

━나쁘지 않군. 하지만 말했지 않나. 나는 이미 토지신으로서 가진 힘을 다했다고. 이제 내게 남은 건 성불뿐이다.

"그럼 다시 그 힘을 채워주면 그만이겠군."

━뭐?

장소영이 의문을 채 내뱉기도 전이었다.

파앗-!

이전석의 손아귀로부터 발아한 도술이 마나를 덧입은 채 장소영을 휘감았다.

━이, 이건······!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8화

일 년

━어떻게?!

장소영이 경악 어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사라졌던 힘이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만능감 과도 같은 토지신으로서의 권능.

그것들이 다시금 정소영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더욱이, 희미해지던 몸도 또렷해졌으니.

"영혼에 새겨져 있던 도술의 파편을 작은 실로 이었다. 이걸로 2년 정도는 더 현세에 남아 있을 수 있겠지."

━너··· 아니, 그대는 누구시오. 대체 누구시길래 이런 권능을······.

"그런 건 됐고."

이전석이 마나를 거둬들였다.

그가 떨리는 손을 억눌렀다.

단순 찌꺼기와도 같은 술식을 억지로 이어 붙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소영에게 새겨진 도술은 아직 그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장소영을 토지신으로 만든 건 주리천보다 훨씬 격 높은 도사야.'

적어도 그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이전석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강자.

'대체 누구지?'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전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장소영 본인도 모르는 사실이다.

정체불명의 사내라고만 인식하고 있을 뿐, 장소영은 그가 도사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전석은 잡생각을 떨쳐낸 채 장소영에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곳의 창고지기기 되어준다면 후손을 찾아볼 수 있게 도와주지. 어때?"

━······정말이오?

"약속은 지키는 편이야."

이전석이 싱긋 웃었다.

장소영은 그 웃음이 꺼림칙했지만, 아직 어렸던 아들의 후손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미가 끌렸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자신의 피가 어떤 식으로 이어졌는가.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장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지금부터 내가 이곳의 토지신이 되어주지!

"아, 토지신은 됐고, 그냥 창고지기면 돼."

━······?

"토지신은 이미 따로 있거든."

━그, 그럼 어쩔 수 없지.

장소영이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

그보다.

━이 창고의 이름은 뭐라 하오? 내가 지킬 곳의 장소 정도는 알고 싶소만.

"창고가 그냥 창고지, 달리 이름이 필요한가?"

━어허, 그걸 말이라고!

이전석의 나지막한 대답에 장소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땅은 이름을 가질 때 비로소 영기를 지니고, 사람은 이름이 있어야만 제대로 생명을 얻어 잉태한다오. 이름은 생명이나 사물을 넘어 개념에게도 중요한 것이외다. 그러니 이 창고에도 어엿한 이름이 필요한 법! 그대가 주인이라면 창고에 어울릴 법한 이름을 지어주시오.

"으음······."

격하기 그지없는 장소영의 반응에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무시하기도 좀 그렇고···.

'포탈 게이트로 들어오는 곳이니까 게이트방···은 좀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좀- 아니, 꽤 많이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게이트, 창고, 지하, 영풍산, 영맥, 영기, 영물······.'

다양한 이름을 되뇌던 이전석.

'귀찮군.'

이내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냥 영풍고(靈楓庫)로 하지."

━영풍고, 영풍고라···. 좋은 이름이구려.

장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나는 영풍고를 지키는 토지···는 아니고 창고신이외다.

창고신.

생각보다 굉장히 촌스러웠지만 이전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 네가 정리한 물건들 중에 특성 진화의 룬이 있을 텐데, 그것들 좀 찾아줄 수 있나?"

━얼마든지!

"그리고 이왕이면 물건들을 각 종류와 형태에 따라 분류해 줬으면 좋겠군."

━그 정도야 내 쉬운 일이오.

"선반의 형태는 일자가 아니라 창고를 둘러싸는 형태로."

━음!

"장비 아이템 중에 지금 내가 입은 것과 비슷하면서, 은신 효과를 가진 것도 찾아줘."

━······생각보다 요구가 많구려.

"왜? 못 하겠나? 그럼 나야 상관없지. 술식을 다시 해체하고 다른 창고지기를 구하면 그만이니까."

━으음, 아니오. 당신의 뜻대로 하겠소.

장소영이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장신구 중에 마나를 30이상 올려주는 게 있다면 그것도 찾아주고."

어째서일까.

앞길이 더없이 깜깜해 보였다.

물론, 기분 탓일 터였다.

※ ※ ※

"편하군."

이전석이 포탈 게이트를 통해 창고- 아니, 영풍고를 나왔다.

그는 잠시 제 방을 둘러보더니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에 든 것들을 바라봤다.

특성 진화의 룬 A급 세 개와 S급 한 개.

그리고 검정색의 코트 한 벌.

그 외 다양한 종류의 포션들.

아쉽게도 뇌령옥보다 좋은 장신구는 없었다.

그곳에서 건진 건 기껏해야 이것들이 전부였다.

무기가 없던 건 아니지만.

'내 스타일과도 맞지 않고, 당장은 참격의 단도만으로 충분해.'

그때.

우웅-.

책상에 올려놓은 혼백룡의 알이 진동했다.

생각보다 꽤 격한 진동.

마치 이전석의 생각에 그렇다고 긍정하는 것 같았다.

"일단······."

이전석은 새로운 장비를 확인했다.

검은 까마귀의 깃털

등급 : S-

효과 : 착용 시 근력과 민첩이 +20 씩 상승하며, 은밀과 관련된 특성의 효과를 대폭 증폭시킨다.

"나쁘지 않군."

마이너스 등급 덕분일까.

일반적인 S급과 비교해 스탯이 조금 낮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지금 입고 있는 은신자의 코트보다 훨씬 나았다.

이전석은 바로 코트를 갈아입었다.

외형은 비슷했지만, 효과는 전혀 달랐다.

각각 20씩 상승한 근력과 민첩.

전신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다.

시험 삼아 은신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자 이전석의 모습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사라지는 속도가 빨라졌군.'

그 외에는···.

슥-.

'허.'

슬쩍 손을 움직인 이전석이 내심 감탄을 내비쳤다.

손이 대기- 정확히는 공기의 흐름을 받지 않은 것이다.

부채처럼 손바닥을 펼쳐 휘둘러봐도.

···.

아무런 변화가 없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기척이 지워진 건 아니지만, 아이템으로 인해 강화된 은신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다만 침대나 바닥은 그대로 손이 닿았다.

어디까지나 대기와 같은 것에만 연관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전석은 은신을 해제했다.

그리고 나머지 물건들을 살폈다.

특성 진화의 룬.

A급 세 개와 S급 한 개.

그 사용처는 이미 정해놨다.

'A급은 일단 망자들의 룬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전석은 바로 룬을 사용했다.

그러나.

[특성 진화의 룬이 파괴됩니다.]

'······음.'

손에 들고 있던 룬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됐다.

특성의 성급이 실패했다는 의미.

물론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룬의 성공확률도 대폭 낮아지곤 했으니까.

다행히 아직 그에겐 두 개의 A급 룬이 더 남아 있었다.

"사용."

[특성 진화의 룬이 파괴됩니다.]

"······."

또다시 실패.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룬.

이전석이 눈을 찌푸렸다.

두 개나 연속으로 실패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

남은 건 하나.

S급이 있긴 하지만······.

'이걸 B급에 사용하는 건 미친 짓이야.'

즉 남은 하나로 반드시 망자들의 왕을 A급으로 올려야 한다.

그리고 A급이 되면 S급의 룬을 사용하는 게 그의 계획.

"후우······."

옅게 심호흡을 다진 이전석.

이내 그가 상태창을 펼쳤다.

그리고.

[스탯포인트를 사용합니다.]

[행운이 '9'만큼 상승합니다.]

저번에 레벨을 올리고 얻은 스탯 포인트로 행운을 올렸다.

'······원래는 민첩과 나눠서 올리려고 했지만.'

어차피 올려야 할 거 일단 비교적 수치가 낮은 행운부터 올리기로 했다.

혹시라도 그게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싶어서.

[특성 진화의 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특성을 선택해주십시오.]

"망자들의 왕."

[망자들의 왕을 선택하셨습니다.]

[특성 진화의 룬이 발동합니다.]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이전석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망자들의 왕이 A등급으로 상승하였습니다!]

[보유 가능한 소환수가 2 > 3으로 증가합니다.]

[스켈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다행이 룬이 성공적으로 작용했다.

망자들의 왕이 A급으로 오른 것.

그러나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행운이 아주 낮은 확률로 기적을 일으킵니다.]

19로 오른 행운이 때마침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른 푸른 창.

[망자들의 왕이 A등급에서 S+등급으로 격상합니다!]

[보유 가능한 소환수가 3 > 5로 증가합니다.]

[스켈의 등급이 대폭 상승합니다.]

"······뭐?"

이전석이 벙찐 표정으로 눈을 껌벅였다.

S?

심지어 평범한 S도 아니다.

S+.

SS급에 준하는 수준의 등급.

'······대박이 터졌군.'

이렇게 바로 행운이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기에 이전석으로서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전석은 S+급이 된 망자들의 왕의 효과를 확인해 보았다.

망자들의 왕

등급 : S+

효과 : 죽은 자들에게 경외를 얻는다. 얻은 경외를 바탕으로 죽은 자들을 사역한다. 5마리의 언데드를 모두 사역했을 때 '죽음의 영역'을 시전할 수 있다.

보유 소환수(1/5)

└스켈(B+)

숙련도 - 58%

등급이 오르며 간결하던 효과가 많이 늘어났다.

'여기서 말하는 죽은 자라는 건 당연히 언데드일 테고.'

사역 가능한 언데드의 수도 5까지 늘어남은 물론, '죽음의 영역'이라는 부가효과까지 생겨났다.

죽음의 영역

시전자가 서있는 곳을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이내를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바꾼다. 죽음의 영역에선 온갖 생명이 서서히 생기를 잃어가며, 언데드 소환수의 모든 스탯 수치가 대폭 상승한다.

'한 마디로 버프로군.'

심지어 상대방의 생기를 서서히 줄인다는 디버프도 있었다.

생기는 다시 말해 생명력이고, 이는 단지 적을 영역에 가둬놓는 것만으로 서서히 말려 죽일 수 있음을 의미했다.

'결계랑 같이 사용하면 괜찮겠는데?'

가령 죽음의 영역에 흑관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몸은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고, 흑관 특유의 디버프로 인하여 힘도 제대로 낼 수 없다.

상당한 시너지가 생겨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확실히 등급이 S+나 되니 쓸 만해지는군.'

처음에는 계륵과도 같던 망자들의 왕이었으나, 등급을 올릴수록 점점 그 형태를 제대로 갖추어가고 있었다.

하물며 테이밍한 5마리의 언데드에게 모두 적절한 특성을 넘겨주면 어떻게 될까.

오직 이전석만의 정예부대가 완성될지도 몰랐다.

'첫 소환수를 스켈레톤 워리어로 테이밍해버린 게 아쉽군.'

망자들의 왕이 성장할수록 소환수의 급도 오른다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테에밍을 취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이전석은 스켈을 소환했다.

허공에 나타난 새까만 뼈다귀.

헌데 이전과는 형태가 달랐다.

신장은 그대로지만 팔뚝과 허벅지에 뿔 같은 것들이 돋아나 있던 것.

어깨에는 길쭉한 해골이 견갑처럼 놓여 있으며, 갈비뼈 또한 굵기와 개수가 많아져 마치 근육질과도 같은 상체를 자아냈다.

그 외의 변화점이라면 평소 오른손에 들고 있던 곡도가 사라졌다는 것일까.

"왕의 부름에 응하였나이다."

스켈이 쿵-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B+로 등급이 오른 덕분일까.

언어능력이 생각보다 더 유창해졌다.

그렇다면 그만큼 스탯 또한 변화가 생겼을 터.

스켈

등급 : B+

[근력 - 50] [민첩 - 42]

[체력 - 45] [마나 - 23]

특성 : 돌격(F) / 거대화(C) / 자폭(A) / 뼈검(B+)

충성도 - 200%

D에서 B+로 급격하게 올라간 녀석의 등급.

스탯도 그에 걸맞게 상승했다.

그리고 뼈검이라는 새로운 특성이 생겨나 있었는데.

뼈검

등급 : B+

효과 : 전신에 돋아난 뿔을 무기로 사용한다.

아무래도 허벅지와 팔뚝에 돋아난 것들은 단순 뿔이 아닌 무기의 일종인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섭하지.'

이전석은 스켈을 단순 검사, 혹은 전사로서만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

[스켈이 고독을 양도받습니다.]

[스켈이 고독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전석은 퍼거슨을 죽이며 갈취한 고독을 그대로 스켈에게 넘겼다.

'이걸로 완벽한 자폭병의 탄생이로군.'

죽어도 끝없이 되살아나며,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자폭병.

그뿐이랴. 자신만이 아닌 상대에게도 폭탄을 심을 수가 있고, 뼈검을 활용한 근접전에도 용이했으니.

'토대가 데스 나이트 같은 고위급 언데드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충분히 쓸 만한 수준이야.'

이전석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내 스켈을 역소환한 뒤, 이번에는 S급의 특성 진화의 룬을 손에 들었다.

'원래는 망자들의 왕에 사용해서 S급으로 올릴 생각이었지만······.'

기적과도 같은 행운으로 망자들의 왕은 S+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이전석은 다른 특성에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특성 진화의 룬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사용."

[특성을 선택해주십시오.]

"은신."

[은신을 선택하셨습니다.]

[특성 진화의 룬이 발동합니다.]

이전석이 선택한 건 바로 은신이었다.

동급의 특성을 올리기엔 확률이 심각할 정도로 낮았으니···.

[축하드립니다!]

[은신이 S등급으로 상승하였습니다!]

다행히 룬은 잘 적용됐다.

은신의 급의 A에서 S로 오른 것.

그리고.

[은신의 효과에 '기척 죽이기'가 추가됩니다.]

[은신의 은밀 효과가 대폭 상승하며, 이제부터 은신을 사용할 때 기척이 지워집니다.]

S급으로 오르자 기존 효과가 강화됨은 물론, 기척 죽이기란 부가효과까지 추가되었다.

'여기에 마나로 기척을 더 억누르고 은밀의 결계까지 사용하면······.'

SS급을 상대로도 잠시나마 인식을 비틀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괜찮은 조합이 된 듯했다.

이윽고, 이전석이 은신을 풀었다.

마나가 A급일 때보다 훨씬 많이 소모됐지만 이 정도면 마나조율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 이제······."

이전석이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금색 열쇠가 나타났다.

아스트로.

그곳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

[입장 가능횟수 5/5]

상태창을 보자 입장 횟수가 있었다.

이걸 모두 소모하면 더 이상 아스트로엔 들어갈 수 없다.

열쇠를 획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총 5번의 기회.

'언데드는 이곳에도 있을 거야.'

그러니 열쇠를 통해 아스트로에서 새로운 언데드를 테이밍 한다.

그리고.

"아스트로에서 S급을 찍은 뒤 바로 화산을 친다."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

하지만 오라리오에서 조경헌과 만나고 포탈 게이트 특성을 얻은 덕분일까.

화산을 무너트릴 시기를 생각보다 훨씬 더 앞당길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해야 할 준비도 맞췄고, 토대도 마련해 뒀으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문자부터 보내놓고······.'

그는 당분간 연락이 안 될 수도 있다며, 그가 아는 대부분의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특히 이한석과 이지혜에겐 걱정하지 말라며 몇 차례나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유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에겐 마침 해줘야 할 일이 있었다.

본래라면 이전석 본인이 했어야 할 일이지만, 대신해 줄 사람이 떡하니 있는데 굳이 귀찮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미쳤어요?!

정작 그 일을 말하자 유하나가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말이 조금 거치시네요?"

━그, 그건··· 그게 아니라······!

잠시 당황하던 유하나였으나, 금세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서울 전체에 보이지 않는 진(陣)을 그리라니···. 할 수 있냐 없냐를 따지면 할 수는 있지만, 협회가 서울 전체에 그려진 진법을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요.

"못할 것 같으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대신 신용 불량자가 되시겠지만."

━으으······.

유하나가 목소리를 떨었다.

그에 이전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뭐, 적어도 협회에서 진을 알아차리진 못할 겁니다. 그런 종류의 진법이거든요."

일전- 주리천에게 말했던 어떠한 도술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

이전석이 말한 대로 진을 그린다면 SSS급 헌터가 와도 그 존재를 알아차리긴 어려울 거다.

물론 주리천급의 도사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전석이 알기로 대한민국에 그런 존재는 달리 없었다.

"그래서 하실 겁니까, 말 겁니까?"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이전석의 제안.

유하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할게요······. 하면 되잖아, 요.

굳이 존칭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거지로 요를 붙이는 걸 보니 왠지 웃기기도 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전석은 거기까지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걸로 준비는 전부 끝났다.

그는 조용히 아스트로의 열쇠를 사용했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열쇠를 손에 쥐고 깨트리면 끝.

[아스트로로 이동합니다.]

직후.

이전석의 시야가 완전히 뒤틀렸다.

※ ※ ※

이전석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온통 새하얀 공간.

벽도 바닥도 보이지 않는다.

슥-.

그 가운데 단도를 뽑아 들었다.

오른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혼백룡의 알을 든다.

우웅-.

알이 옅게 진동하며 긴장감을 토했다.

새로운 환경, 이질적인 배경.

겁이라도 먹은 걸까?

'······매번 들고 다녀야 하는 게 불편하긴 하군.'

물론 그것도 S급이 되면 해결될 문제이긴 했다.

S급이 되면 아공간이 생겨날 테니.

[아스트로가 당신을 환영합니다.]

문득.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스트로.

칠대 재앙 중 '던전'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인류에게 있어 유일하게 '악'이 아닌 '중립'과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존재.

[아스트로가 당신을 시험합니다.]

[총 열 가지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아스트로는 당신에게 하늘의 축복을 선사할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 - 용기]

["도전자여, 당신의 용기를 증명하라."]

시스템이 나타난 직후였다.

온통 하얗기만 하던 공간.

그 한 가운데, 검정색 문이 나타났다.

아스트로는 이런 식으로 던전 내 던전을 공략하며, 총 열 개의 던전- 즉 시험을 통과해야만 핵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중 첫 번째.

['용기의 방'에 입장합니다.]

이전석이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문지방 하나의 차이.

그것을 기점으로 바깥과 내부의 시간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바깥세상과 비교해 비교적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하는 시간.

바깥에서의 하루가 던전에서 나흘이 되고.

던전에서의 나흘이 바깥에선 열흘이 되며.

그리고 일 년이라는 시간은 기묘하게 뒤틀려 바깥에선 한 달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을 자아냈다.

그렇다.

이전석에게 있어선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바깥사람들에겐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흘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69화

초월자 (1)

시간은 발 빠르게 흘러갔다.

협회가 비상 전시상태를 선포한 이후, 한 달.

━화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네.

이사부터 상무와 전무, 그리고 부회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간부들이 모인 회의가 열렸다.

본래는 그곳에 회장인 연선화도 있어야 했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몇 주 전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비서나 부회장이 협회장실을 찾아도 들어오지 말라는 대답만 반복해서 돌아올 뿐. 연선화가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산에 대한 움직임을 좌시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부회장, 고화진.

그가 정숙한 어조로 말했다.

━최아린을 구금한 뒤, 유독 조용했던 놈들의 병력이 최근 일주일간 전국 곳곳에서 서울로 모여들고 있어.

비록 각성자는 아닐지언정 뛰어난 수완가로서 이름을 드높인 그다.

협회장이 부재중인 상황에선 사실상 모든 결정권이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화산이 무언가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건 예상했지만, 병력을 이 정도로 수도권이나 그 근처로 끌어모으고 있다는 건 봉기가 분명하다.

고화진의 말에 다른 임원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봉기···. 확실히 김백동 감독관도 그걸 우려하긴 했죠.

━언제 칼을 빼 들어도 이상할 게 없는 놈들이었습니다. 특히 최원율은 저희 협회에 지독한 독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봉기라니······. 너무 현실성 없는 이야기가 아닐는지······.

━하! 적의 병력이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쳤는데 자네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가 보군?

━으음······.

원형 바닥을 기준으로 둘러싸인 모니터.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성들.

━물론 화산에서도 입장 표명이 있기는 합니다.

━중국에서 남하하기 시작하는 칠대 재앙 '고(苦)'에 맞서기 위해 병력을 모으는 거라고 하더라지.

━확실히······. 미국에서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고가 한반도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족히 10년은 더 걸릴 것이라 예측하고 있지 않습니까?

━고의 남하는 확실히 타국에 지원을 요청할 정도로 두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벌써부터 화산의 병력이 수도권에 모여들 필요도 없죠.

결국 내려진 결론은 간단했다.

화산의 움직임이 꽤나 심상치 않다는 것.

━이유야 어찌 됐든 이만한 병력이 수도로 합당한 이유가 없이 모이고 있음은 충분한 제재 대상이다. 현 상황을 사실상의 봉기로 확정하고, 정부 및 군부대와 협력하여 화산의 움직임에 철저히 대응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네만······.

고화진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자네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딱히 불만이나 반대는 없었다.

화산의 움직임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마냥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협회 임원인 그들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임원들은 하나 같이 고화진의 물음에 수긍했다.

그러자 고화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언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말은 부회장의 권한으로, 협회장님을 대신하는 말임을 명심하고 새겨듣도록.

━예.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부회장의 권한.

그것은 협회장이 없을 때 가장 높은 직권으로서 절대적인 명령권을 가진다.

그렇기에 고화진은 모니터를 통해 모인 임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포탈 게이트를 가동하여 협회 소속 헌터들을 화산의 병력이 모이는 각지로 파견하고, 친 협회 길드와 사무소에게도 지원을 요청하도록. 마땅히 손을 보태주는 이들에겐 그만한 보상을 약조할 것이며, 화산에 가담하거나 혼란을 틈타 민간인에게 손을 대는 이들에겐 잔혹하고 잔인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임을 공표하라. 또한 비상 전시산태를 비단 협회만이 아닌 대통령과의 협의 아래 대한민국 전체로 그 영역을 확장······.

쾅-!

"긴급 전달 사항입니다!"

문득.

누군가가 회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화진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이었다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검은 정장의 사내.

━······무슨 일인가?

고화진의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말에는 어딘가 긴장감이 묻어나 있었다.

긴급 전달 사항이라는 말 덕분이다.

임원들의 회의를 방해하고 그런 말까지 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큰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으니.

이내 협회 직원이던 사내가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고화진의 물음에 답했다.

"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고.

칠대 재앙의 하나.

중국에 위치한 몬스터.

그러나.

━그 정도는 이미 우리도 들어 알고 있다. 고작 그런 이유로 회의를 방해한 건가?

"그게 아닙니다···. 다만, 고의 남하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방금 세계연맹에서 발표된 정보에 의하면 아마 한 달 내로 한반도에 고의 영향이 끼치기 시작할 거라고······."

━뭐?

고화진이 뭘 잘못 들었나 싶은 듯 얼굴을 찌푸렸다.

미국의 협회가 조사하길, 고의 움직임은 몹시 느리다고 하였다.

10년.

아무리 빨라봤자 그 이후에나 한반도에 도달할 것이라 예측했다.

비단 미국의 협회만이 아닌 한국의 협회나 정부까지도 말이다.

각국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아직은 괜찮다'라며 충분한 대비 시간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달이라니?

뭘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를 놀라게 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방금 화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합니다."

※ ※ ※

"화산에서 왜 기자회견을 연 걸까요?"

변하늘이 선배이던 이명수에게 물었다.

이명수의 눈가에는 암운이 가득했다.

짙게 새겨진 다크서클. 며칠 자지도 못해 피부가 축 처졌고, 옅은 한숨만이 멈출 줄 모르고 새어 나왔다.

그가 피곤 가득한 어투로 답했다.

"글쎄다."

그 자신도 모른다는 의미.

다만.

"적어도 고따위를 토벌하겠다고 우리를 모은 건 아닐 거다."

우리.

변하늘과 이명수, 두 사람을 포함한 기자들의 무리.

축구장과 엇비슷한 크기의 돔에 기자들이 빼곡하게 모여들어 있고, 가장 앞 단상에는 화산 소속의 협회들이 진을 치고 있다.

화려한 갑옷과 무구를 차고, 살기를 뿜어내는 B급 이상의 정예들.

저런 이들을 모아놓고 고를 토벌하겠다?

웃기는 이야기다.

오히려 화산의 깃발마저 내걸린 것이···.

'······전쟁.'

이명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지만 화산의 행보를 보면 마치 정부와 협회를 상대로 내전을 일으키려는 것만 같았다.

"이거, 특종의 냄새가 나네요···!"

그런데도 이놈의 후배는 조금의 긴장감도 없이 특보라며 눈을 빛내고나 있으니.

'아니, 오히려 이런 때엔 저런 놈이 하나라도 있는 게 나아.'

그러지 않으면 이 침울한 분위기에 우울증이라도 걸려버릴지 몰랐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나왔다!"

"최강오야!"

단상에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최강오.

화산의 후계자 중 한 명.

그가 자신만만한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라섰다.

그리고 넥타이를 고쳐 매곤 마이크를 툭 쳤다.

우웅-.

돔 전체를 울리는 뭉툭한 소음.

"마이크는 잘 작동하는 것 같군요."

옅은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에, 앞줄에 있던 기자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최강오님! 화산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유가 무엇이죠?!"

"화산에선 최근 고의 토벌을 계획하고 있고, 수도권으로 병력을 모은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게 정말입니까!"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전쟁을 위해서 모으는 게 아니냐며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해 불안에 떨고 있는 시민분들께 한 마디라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곳곳에서 몰아치는 질문의 향연.

최강오가 손을 슬쩍 올렸다.

그러자 기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S급 헌터 특유의 기세가 그들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현재 가지고 계신 의문에 대해선 하나씩 대답해 드릴 테니 너무 조급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변하늘이 그런 최강오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 소름 끼치네요."

이명수는 그 말에 내심 수긍했다.

'무언가 꾸미고 있어.'

결코 선의로 이 자리에 올라선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이명수는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해온 만큼 별별 사람들을 만나봤고, 그만큼 그들이 가진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선 표정만으로도 얼핏 알 수가 있었다.

그저 단순히 그럴 것 같다고 직감적으로 느끼는 게 전부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확신했다.

최강오가 내뱉을 말이 결코 자신들에게 있어 듣기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라고.

"우선."

최강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 갈색 머리 기자 분?"

"어··· 아, 네!"

"화산에서 고의 토벌을 계획하고 있냐고 물으셨죠?"

"아,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말씀해 줄 수 있는 부분이라······."

최강오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내 그가 자신감으로 가득 들어찬 어조로 말했다.

"저희 화산은 조만간 고를 토벌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수단 또한 마련되어 있죠."

"수단?"

"고를 토벌할 수단이 있다고?"

기자들의 수군거렸다.

그들도 고가 조금씩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자국의 힘만으론 그게 불가능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나 협회에서 타국에 지원을 요청하리라 생각했다.

한데 화산에서 그 수단이 있다고 하니 당연히 흥미가 생길 수밖에.

"고는 여러분도 익히 아시다시피 칠대 재앙이라 불리는 몬스터로, 그 강함은 SSS급 권좌와 동일하거나 더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지요."

이어진 최강오의 말.

갈색 머리의 여성 기자가 재차 물었다.

"그럼 오히려 고를 토벌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요? 아직 고가 한반도에 도달하기까지 10년이 남았다는 예측도 있으니, 그동안 섣불리 고를 자극하기보다 철저하게 타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대비하는 편이······."

"문제는."

최강오가 기자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말했다.

"방금 세계연맹에 의해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고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 그 영향력이 한반도에 미치기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

"그게 무슨······."

"처음 듣는 정보인데?"

"아직 여러분이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희도 별도의 정보망으로 비교적 빠르게 접해 들었을 뿐, 해당 정보는 세계연맹에서도 발표된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에 기자들이 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세계연맹의 사이트에 들어가, 최강오가 말한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미친···?!"

"뭐야? 진짜 한 달밖에 안 남았다고?"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여보! 지금 당장 미국행 티켓 끊어! 왜? 그냥 일단 끊어!"

"시발, 한 달이라니······."

곳곳에서 혼란과 당혹이 뒤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몇몇은 눈이 돌아가 노트북으로 재빨리 기사를 적어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미친······.'

기자로서 온갖 소식을 다 접해본 이명수조차 지금만은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서, 선배님, 이러면 저희······ 지금이라도 피난을 가야 하는 게···?"

변하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명수는 이만 까득 갈 뿐이었다.

"피난? 어디로? 고의 영향은 중국 전체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라고. 제주도나 독도, 일본으로 가도 무사하진 못할 거야. 그렇다고 미국으로 가도 피난민이 한두 명이 아닐 텐데 그 많은 사람들을 마냥 받아 줄 리도 없고······."

이명수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도 다른 기자들과 마찬가지였다.

마치 혼이 나간 듯한 모습.

다름 아닌 세계연맹에서 발표된 자료이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한 달.

그 한 달이면 대한민국은 멸망한다.

하지만.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최강오의 한 마디에 일순간 돔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그 가운데, 오직 최강오만이 묵묵히 말을 이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저희에겐 고를 토벌할 수단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앞으로의 전쟁으로 그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옳겠군요."

"전쟁? 지금 전쟁이라고······?"

"아니, 그 이전에 그 수단이라는 게 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툭-.

최강오가 마이크를 두들겼다.

직후 뭉특한 소음과 함께 그의 마나가 사방팔방 흩어지며 기자들을 압박했다.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헉 입을 다무는 기자들.

그들에게 최강오가 말했다.

"협회 지하 깊은 곳에 어떤 핵이 있습니다."

핵?

"핵이라 하면······ 던전의 코어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맞습니다."

최강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한때 SS급 던전으로 유명했으며, 서울 도심 한복판에 나타나 대한민국을 멸망시킬 뻔했던 폭주형 던전, 드래드노트."

드래드노트.

다른 이름으로는 '드래곤이 멸망하는 세계'라 불리는 던전.

최강오의 말대로 그것은 과거 대한민국을 멸망시킬 뻔했던 거대한 재앙이었다.

"해당 던전은 세 명의 권좌가 힘을 합쳐 가까스로 공략했으나, 어째서인지 던전이 사라진 직후에도 핵만은 그 자리에 남아 주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죠."

"그런 사실이······."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건만 남아 있었다는 건가?"

"그런 게 있다면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주변에서 다시금 의문이 기어 올라왔으나 최승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말만을 묵묵히 이어갈 뿐.

"던전의 핵은 거대한 마나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이용하기에 따라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하고, 삭막한 모래의 땅을 풀이 무성한 초원으로 바꿔주기도 하죠. 하물며 그 수준이 SS급이 된다면 핵에 내장된 힘은 단순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부턴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비밀입니다만······."

기자들이 귀를 기울였다.

이전처럼 흥분하거나 당황하진 않았다.

최강오가 고를 막을 수단이 있다고 하니, 최대한 그 사실에 집중한 채 기사를 써 내리고자 했다.

"과거 협회는 그 핵 위에 건물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의 정보를 통제하고 입을 막았으며, 그것을 대중에 공개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이 독점하면서 수십 년간 계속 이득을 취해왔습니다."

"설마···."

"협회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만한 것을 감춘다는 건······."

기자들 사이에서 의문이 올라오자, 최강오가 그것들을 짓누르듯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협회의 감독관이나 특무관이 동급의 헌터들보다 강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 치들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에게만 핵의 힘을 나눠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힘을 길러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군림하였지요. 반대로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적대하려던 이들에겐 핵으로 인해 형성된 지하 영맥의 흐름을 끊어, 그쪽으로 향하는 모든 기운을 차단하였습니다. 영기가 흐르지 않는 땅은 메마르고, 풀이 나지 않으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많은 농민들이 배를 배를 곯아야만 했죠. 그렇게 서서히 협회를 적대하는 이들은 한둘씩 사라져 갔습니다. 진실을 아는 자들이 전부 죽었는데 어찌 현대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최강오- 아니, 화산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의문을 채 내뱉을 틈도 없었다.

오히려 기자들은 이전의 의문도 잊어버릴 만큼 놀라고 말았다.

바로 뒤이어진 최강오의 선언 덕분이었다.

"저희 화산은 고의 토벌을 위해, 그리고 협회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쾅-!

오른손으로 단상을 내리치며 큰 소리로 말을 잇는 최강오.

"협회에 전쟁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일순간 돔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전쟁.

전쟁이라고?

고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는 지금 이 타이밍에?

믿기도 어렵고 믿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지랄도 풍년이로군."

한 남성의 목소리가 돔 전체를 파고들었다.

※ ※ ※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쯧쯧."

주리천이 TV를 보며 혀를 찼다.

화산 후계자 최강오의 기자회견.

그것은 다름 아닌 TV에서도 방영되고 있었으니.

협회가 어쨌니, 그래서 누가 어떻게 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었다.

과거의 협회가 그랬던 것은 맞지만, 화산이라고 그러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협회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 하지 않은 것이 화산이었다.

놈들은 자신에게 적대하는 자들을 당사자와 가족, 그리고 친척 및 지인들까지 죄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소름이 끼치는구나.'

뻔뻔하게 자신들이 정의의 편인 것 마냥 떠들어대는 게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주리천은 이전석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TV에서 방영되는 화산의 기자회견.

그것이 이전석이 말해줬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지하기라도 한 것이냐?'

도무지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고의 갑작스런 남하부터 화산의 기자회견, 그리고 뒤이어진 같잖은 변명들까지.

모든 게 이전석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리천은 그 사실이 못내 소름이 끼쳤다.

최강오에게 느낀 거보다 더 큰 소름을.

게다가 기이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달간 이전석의 소식이 뚝 끊겨버린 것이다.

물론 최은하에게 '당분간 연락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문자가 정확히 한 달 전에 왔었다고는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리천이 알아본 이전석의 행적은 누군가에 의해 가위처럼 잘라내 버린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가만 보면 실로 이상한 놈이었지.'

꿀꺽-.

호리병의 술을 들이켠 주리천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그랬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녔다.

송장과의 인연을 가진 것은 물론.

'도술에 대한 재능은 은하보다 한 수 위였어.'

산사의 말에 따르면 영풍산의 결계를 보강해 줬다고 하는데, 그 결계를 잠시 살펴보니 주리천으로선 차마 이해할 수 없는 묘리가 뒤섞여 있었다.

영풍산의 결계는 아주 오래전 육선인 중 하나인 요화령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주리천은 단지 그 결계째로 영풍산을 이차원 속으로 옮겼을 뿐. 영풍산의 결계는 육선인이 형성한 것인 만큼 주리천조차 쉬이 건들 수 없었다.

헌데 이전석은 그 결계를 고친 것뿐만 아니라, 마법까지 덧대어 전혀 다른 무언가로 재탄생 시켰다.

뿐만이랴. 시왕에게서나 느낄 법한 기운이나, 산사를 포함한 영풍산의 영물들이 겁을 먹은 것까지.

'창고라는 공간에는 또 토지신급의 귀령(鬼令)을 데려오질 않나······.'

보면 볼수록 이전석의 행적과 능력은 이상하면서 기이하고, 한편으로는 신기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기기괴괴(奇奇怪怪).

'괜한 놈과 엮인 것은 아닐는지.'

이전석이 송장의 믿음을 샀다곤 하나 그 특이한 행적 덕분인지 도무지 불안이 가시질 않았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며 TV를 보고 있을 무렵.

━저희 화산은 고의 토벌을 위해, 그리고 협회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협회에 전쟁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주리천이 무언가 잘못 들은 듯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갈 데까지 가는구먼."

이내 최강오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대한민국 전체가 거대한 전란에 휩싸일 터.

고를 막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그게 단지 변명임을 주리천은 모르지 않았다.

화산은 협회가 가진 핵을 취하고 고를 토벌함과 동시에, 협회보다 더 한 권력을 앞세워 대한민국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혹시 모르니 은하에게 짐을 싸두라 해야겠어.'

탈출 루트는 이미 생각해 뒀다.

한국인으로서 이 땅에 정착한지 오래지만, 그는 가족과 제자를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부랑자 신세가 될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은하를 부르려던 순간.

━지랄도 풍년이로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리천은 재빨리 TV를 확인했다.

━뭐, 뭐야? 방금 누가 말한 거야?

━마이크···는 최강오한테 있고. 마나로 목소리를 증폭시킨 건가?

━어? 저, 저기! 단상에!

당황하던 기자들 중 한 명이 단상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새까만 머리와 이질적으로 메마른 동공.

비교적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을 가졌으며, 짙은 회색 정장에 새까만 코트를 걸치고 있다.

주리천은 물론 기자들 또한 그가 누군지 모르지 않았다.

━이, 이전석 헌터입니다!

━단상에 갑자기 이전석 헌터가 나타났습니다!

TV로 중계를 하던 뉴스 기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주리천은 놀람을 지울 수 없다는 듯 TV 속 이전석을 쳐다봤다.

"저놈······."

알고는 있었다.

이유?

이전석이 미리 알려줬으니까.

'그 도술'을 사용해달라고 했을 때, 그가 가진 계획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나타날 거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헛소리도 그 정도면 풍년이야, 안 그래?

최강오를 향해 비아냥거리는 이전석.

그의 모습은 주리천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정확히는 그가 풍기는 기세.

"헌터놈들 기준으로 따지면 S급···이다만······."

무언가.

말로 설명 못 할 이질감이 느껴진다.

여태껏 S급을 몇 명 본 적이 있지만, 그들이 가졌던 기운과 지금 이전석의 기세는 차원이 달랐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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