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5화
고독(蠱毒) (3)
"끄아악···!"
CCTV조차 존재하지 않는 음습한 골목길.
그곳에 남성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이전석이 바닥에 내친 자객.
그의 전신이 검붉게 타들어가고 있던 것.
맹렬한 격통 속에서 녀석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경련하듯 날뛰던 몸은 금세 얌전해졌다.
숨을 거둔 것이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을 하나 획득합니다.]
[신속한 발(D)을 획득하셨습니다!]
선업은 오르지 않았다.
대신 악업도 변화가 없었다.
'악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인죄가 적용될 만한 놈도 아니라는 건가.'
이전석이 손을 털며 발화를 꺼트렸다.
'생각보다 별 건 없었군.'
그러곤 자객과 나눈 대화를 되새긴다.
━최승철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말해.
━하···! 내가 그런 걸 말할 거라고 생각······ 끄아악!!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녀석은 아주 약간의 고문만으로도 손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나,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냥 최은하를 미행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이라고!
뭐, 대충 예상하고 있긴 했다.
자객의 등급은 고작해야 D.
최승철이 미친놈도 아니고, 그런 놈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줄 리 없잖은가.
━그래? 아쉽네.
━자, 잠깐···! 살려······!!
이전석은 자객을 불태워 죽였다.
매정하리만치 냉정한 손속.
굳이 살려둘 필요가 없었다.
괜히 살려서 보낸다면?
자신에 대한 정보만 넘어갈 거다.
그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래.
바라는 바가 아니다.
"명색이 동료가 죽었는데 계속 지켜만 볼 건가?"
문득.
이전석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그의 메마른 동공이 무언가를 직시한다.
"슬슬 나오지 그래."
"······."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이전석은 느꼈다.
골목길 너머.
기척이 순식간에 멀어지기 시작했음을.
"도망이라··· 그것도 좋지. 마침 새로 얻은 특성을 시험해보고 싶었거든."
이전석이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방금 자객을 죽이며 얻은 특성 덕분이었다.
━
신속한 발
등급 : D
효과 : 달리는 속도가 소폭 증가한다.
━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 패시브 특성.
마치 작금의 상황을 예건이라도 한 것 같은 효과다.
등급은 낮지만, 누군가를 미행하거나 추격할 때 이만큼 좋은 특성은 달리 없을 터였다.
쿠웅-!
이윽고.
이전석이 굉음과 흙먼지를 터트리며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 ※ ※
김종수는 최승철 휘하의 헌터다.
최근 그는 최승철로부터 하나의 명령을 내려 받았다.
━이전석. 놈을 감시하고 일거수일투족을 내게 보고해라.
헌터 한 명을 미행 및 감시하라는 것.
━알겠습니다.
김종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번 일을 기회라 생각했다.
다름 아닌 출세의 기회 말이다.
그래서 동료가 죽어갈 때도 나서지 않았다.
고작 이름과 얼굴만 알 뿐인 남자.
친우도 아니고, 대화도 나눠본 적 없다.
그런 그의 목숨보단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는 게 더 중요했다.
최승철의 신뢰를 얻고 그의 측근으로 들어가면, 추후 화산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 테니까.
실로 허황된 꿈이지만, 출세욕에 눈이 멀어버린 이가 그 사실을 알아챌 리 만무했다.
그렇게 이전석을 미행하던 차.
'들켰다······!'
그렇다.
들켜버렸다.
이전석이 김종수의 존재를 눈치 챈 것.
어떻게?
'기척은 최대한 죽였어.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고, 은신 아이템도 착용하고 있었다고!'
그럼에도 들키고 말았다.
김종수는 주택가의 지붕 사이를 내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심상치 않은 놈이야···. 도련님께 알려드려야 해.'
최승철에 대한 충성과 승진욕이 뒤얽혀 김종수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때.
빠각-!
"커흑······?!"
무언가가 그의 허리를 후려쳤다.
허리가 활처럼 접힌 채 날아가는 김종수.
그가 담벼락을 부수며 땅에 쳐 박힌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탓-.
그 사이로 한 인형(人形)이 내려섰다.
다름 아닌 이전석이다.
그가 붕대로 휘감긴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방어계 특성인가? 어지간히도 단단하네."
나름 근력과 체력을 올리고 광폭화까지 사용했는데도 통증이 몰려왔다.
즉.
이 정도로는 아직 죽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예상대로.
화악-!
흙먼지를 파헤치며 실루엣 하나가 솟아올랐다.
"진부한 전개로군."
이전석이 하품을 내쉬었다.
전생에서 수도 없이 겪어봤던 상황이다.
승산을 잃고 도망치던 적이 어디 한 둘이던가.
이전석은 그들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화륵-.
왼손에 꽃처럼 피어오른 불꽃.
'이미지는··· 그래, 이게 좋겠어.'
이전석이 검붉은 활을 상상했다.
그대로 불꽃의 형상이 굳어졌다.
발화로 인해 피어난 불꽃이 활의 형태를 취한 채 왼손에 쥐어진 것이다.
이전석은 그 위로 적단도를 올렸다.
불꽃은 적단도마저 집어삼킨 채 맹렬하게 타올랐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미지, 그리고 폭발.'
마치 그림 그리듯 생각을 이어나간다.
특성을 사용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 즉, 이미지다.
특히 발화처럼 마법에 가까운 특성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다.
이미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특성의 다양성과 위력도 더러 높아진다.
이윽고.
콰앙-!
불꽃의 활이 이전석이 생각한 대로 폭발을 일으켰다.
마치 화살처럼 쏘아지는 적단도.
아니.
그것은 화살보다 미사일에 가까웠다.
불꽃을 힘입어 나아가는 포탄.
이윽고.
"······!!"
그것이 김종수의 복부를 꿰뚫었다.
즉사만 하지 않도록 노린 일격.
날이 살을 파고들며 장기를 파헤친다.
그 너머로 불꽃이 재차 폭발을 일으켰고.
"······!!"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에 검붉은 궤적이 새겨졌다.
이내.
김종수가 재차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폐건물 천장을 부수며 떨어지는 김종수.
"커흑······!"
적단도가 여전히 복부에 틀어박힌 채 불꽃을 토해내고 있다.
김종수가 고통 어린 표정으로 숨을 헐떡였다.
뚜벅-.
신속한 발 덕분일까.
빠르게 김종수를 쫓아온 이전석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어두컴컴한 폐공장.
멈춰 가동하지 않는 레일.
그 사이.
김종수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대체··· 무슨 일이······?'
김종수가 흔들리는 의식을 바로잡았다.
세상이 회전하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어져 있다.
복부에선 피와 함께 통증이 솟구쳤다.
"끅···!"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하지만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그때.
"일단 질문을 세 가지 할 거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 피어난 새빨간 동공이 김종수를 직시했다.
마치 거대한 뱀- 이무기를 마주한 것과 같은 압박감.
'이, 이전석······!'
김종수가 그 괴물의 이름을 읊었다.
직후.
"크아악!"
괴물이 오른발을 들어 적단도의 손잡이를 내리밟았다.
그러자 날이 더욱 깊숙이 내장을 파고들었다.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피.
불꽃이 계속해서 내장을 지져댄다.
끝나지 않는 고통의 연속.
"그, 그만··· 제발 그만······!!"
결국 인내심이 다 한 김종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애원하는 듯한 모습에 괴물- 이전석은 입꼬리를 치켜 새운 채 말했다.
"안심해. 내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면 고통 없이 바로 죽여줄 테니까."
김종수는 뭐라 답할 수조차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의한 괴로움.
살고 싶은 욕망과 죽고 싶은 생각이 실타래처럼 뒤얽혔다.
"첫 째."
그 사이.
이전석이 차디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최승철이 계획 중인 걸 모조리 털어놔."
"끄윽······."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던 김종수.
이전석이 적단도로부터 발을 땐다.
그러자 김종수는 한 결 편해진 듯 숨을 골랐다.
"도, 도련님은··· 그년··· 최은하를 죽이실 생각이시다······."
"어떻게?"
"나도 자세한 건······ 후우, 몰라···."
"모르면 안 될 텐데?"
이전석의 협박 섞인 말.
김종수가 당황한 듯 말했다.
"그래도 들은 건 있어······!"
"말해봐."
"쿨럭···!"
피를 토해낸 그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내 계획을 망쳤으니 벌을 줘야겠지'라고······ 하셨다."
김종수- 정확히는 최승철의 말.
'벌이라.'
이전석은 생각했다.
'하긴, 그놈은 자기 계획이 무너지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지.'
아마 지금쯤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전석과 최은하를 죽일지.
다만.
'바로 죽이기보다 최대한 고통을 주며 비참하게 죽이려 할 거야.'
그러니 굳이 자객에게 살인이 아닌 감시를 명했을 터.
최은하를 가능한 벼랑 끝까지 내몬 채 비참함 속에서 죽이기 위해.
일종의 화풀이인 셈이다.
"두 번째."
이전석이 뒤이어 물었다.
"최승철은 지금 어디에 있지?"
"······."
김종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명색이 주인이라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침묵을 고수하는 걸 대단하다고 과연 해야 할까.
물론 하등 의미없는 짓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이전석이 적단도를 빼들었다.
울컥-.
"끄윽···."
쏟아지는 핏물에 고통을 삼키는 김종수.
이내.
화륵-.
"끄아아악!!"
이전석이 발화로 상처를 지졌다.
꺼져가는 불꽃이 다시 맹렬하게 타올랐다.
"마, 말할게! 말할 테니까 그만···!"
결국 고통을 못 이긴 김종수가 소리쳤다.
"도, 도련님은 지금 제주도에 계신다······!"
제주도.
이전석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놈의 별장이 그곳에 있었지.
'이때부터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군.'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최은하를 죽이려 한 만큼 다른 후계들에게도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였으니까.
그래서 별장의 정확힌 위치도 최측근밖에 알지 못했다.
단지 제주도라는 사실만이 공공연연하게 퍼져 있을 뿐.
이전석도 전생에 그 위치를 알지 못해 최승철을 상대할 땐 꽤나 고생했더라지.
물론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다.
별장의 위치쯤이야 전생에 이미 알아냈으니까.
중요한 건.
'최승철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자객을 잃었다.
그것도 두 명이나.
거듭되는 실패.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연스레 그의 입지도 흔들릴 것이다.
물론 그리 큰 타격은 아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지금은 한참 화산 내에서도 서열싸움이 격화되고 있을 때니까.
길드장을 원하는 다른 후계들은 어떻게든 최승철을 물어뜯으려 하겠지.
그러니 최승철로서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을 터.
아마 당분간은 제주도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하지 않을 거다.
'최은하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어,'
본래라면 보름은 더 걸렸을 일.
생각보다 쉽게 최승철의 발을 묶었다.
나중에 감사인사라도 해야 될까?
"그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질문이다만······."
이전석이 적단도를 역수로 쥐었다.
언제라도 김종수의 목에 날을 내리찍어 죽일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컥······?!"
돌연, 김종수가 발작하듯 피를 토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눈과 코, 그리고 귀.
존재하는 온갖 구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이전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전신에서 피를 뿜어내는 김종수.
이전석은 그로부터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진하디 진한, 죽음의 냄새.
'설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김종수의 상태, 마나의 흐름.
본능으로부터 울리는 경종.
모든 경험과 기억이 하나의 현상으로 이어진다.
'······고독(蠱毒)이로군.'
틀림없다.
미리 체내에 심어놓은 '고독'을 기폭제 삼아 폭발을 일으키는 특성.
그게 지금 김종수를 통해 발동하려 하고 있었다.
'화산이 벌써 그놈을 영입했을 줄은 몰랐는데.'
이전석은 쯧-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예상밖의 상황.
그러나 당황할 만한 것도 아니다.
애당초 이전석은 모든 일이 자신의 기억과 예상대로 흘러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이 그렇게 쉬웠으면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일도 없었겠지.
때문일까.
그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관찰하고 판단했다.
'남은 시간은··· 대충 10초 안팍.'
심각하게 뒤틀리기 시작하는 김종수의 몸.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저 상태론 아마 살아나지 못할 터.
버틴다 해도 의미 없다.
고독은 수육체의 몸을 기폭제 삼아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종수의 등급이 낮은 만큼 고독이 일으킬 수 있는 폭발의 위력과 범위도 한계가 있겠지만···.
'지금 내 상태론 그것도 위험해.'
한순간에 판단을 내린 이전석.
그가 전신에 발화를 사용했다.
검붉은 불꽃이 그를 지키듯 둘러싼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스켈!"
이전석의 부름에 스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주인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챘다.
"왕, 이시여···!"
위기, 위험.
지켜야 한다.
[스켈이 거대화를 사용합니다.]
불쑥 커지기 시작하는 스켈의 덩치.
그가 김종수를 제 몸으로 덮었다.
무식하기 그지없는 수법.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걸로 폭발위력이 한층 줄어들 터.
반면.
탓-!
이전석은 전력으로 폐공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조금 아슬아슬 한가?'
힐끗 뒤를 돌아보자 스켈의 몸 사이로 빛이 점멸하고 있다.
이제 곧 폭발한다.
더 도망칠 시간이 없었다.
'남은 마나는··· 7.'
슬쩍 상태창을 훑어본 이전석.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
그러나.
부족하면 채우면 그만.
이전석은 품에서 마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그러곤 슬쩍 폐공장 내부를 쳐다봤다.
빛의 점멸 주기가 이전보다 훨씬 짧아졌다.
그것은 폭발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이전석은 더 지체하지 않았다.
마나를 죄다 몸 밖으로 끄집어낸다..
피부를 타고 허공에 스며드는 마나.
푸른 입자가 불꽃과 함께 이전석을 둘러싼다.
흔히 '형상화'라 불리는 고도의 기술이다.
이내 마나가 불꽃과 함께 막처럼 굳어지고-.
'온다······!'
한 차례 크게 점멸한 빛과 함께.
━━━━!!
폐공장 내부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6화
인형사 (1)
흙과 먼지가 바람에 뒤섞인다.
전신이 부러질 것 같이 아프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흐렸다.
한순간의 충격.
고작 그것만으로 의식이 날아갈 뻔했다.
"······죽겠군."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뒤.
이전석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흙먼지로 시야가 탁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멸망하면 마치 이와 같을까.
[스켈이 사망하였습니다.]
[24시간 동안 소환불가 상태가 됩니다.]
문득 눈앞에 떠오른 창 하나.
거대화 상태의 스켈조차 폭발의 충격은 버티지 못한 듯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24시간 뒤 재소환할 수 있다는 걸까.
"···쿨럭!"
이전석이 탁한 공기에 기침을 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바람이 불어오며 흙먼지가 걷혔다.
동시에 무너진 폐공장이 드러났다.
아니.
이걸 과연 공장이라 해도 좋을까.
건물의 형태는 이미 찾아볼 수도 없다.
그곳에 있는 건 그저 부서진 잔해뿐이었다.
안 그래도 관리가 되지 않아 부실하던 건물.
거기에 폭발이 일어나니 천장과 기둥은 물론 토대까지 모조리 붕괴하고 만 것이다.
'일단······.'
이전석이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그만한 충격과 소음이 울렸다.
곧 사람들이 몰려올 터.
그럼 상황이 꽤 골치 아파진다.
정확히는 귀찮아 질 것 같다고 해야 될까.
무죄를 증명하는 건 어느 시대나 귀찮고 지루하기 마련이니까.
숨을 참고 기척을 지운 이전석.
그는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이내 CCTV가 없는 음습한 골목에 몸을 숨겼다.
조용한 주변.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달리 쫒아오는 기척도 없었다.
"후우···."
이전석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그리고.
'판단을 그르쳤어.'
폐공장에서 있던 일을 되새겼다.
'그놈이 개입할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그놈.
알렉산드로 퍼거슨.
시체를 다루는 걸로 유명한 빌런이다.
이 시기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
전생에선 2년이나 더 뒤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덕분에 그가 개입해올 거라곤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전적으로 미래의 기억에만 의지했던 폐해.
'앞으론 좀 더 생각을 유연하게 해야겠어.'
이전석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피가 뒤섞인 땀방울이 떨어진다.
폭발의 충격일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옷.
상의는 물론 하의까지.
곳곳이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다.
이미 옷이라기에도 민망한 상태.
찢어지고 해진 모습은 넝마나 마찬가지였다.
'음···.'
이전석이 뒤늦게 제 모습을 살폈다.
상처투성이.
치명상이 없다는 게 다행이지만···.
'이대로 집에 돌아갔다간 한소리 듣겠어.'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나 여동생까지 놀랄 게 분명했다.
그냥 놀라기만 하면 다행이다.
한유리 같은 경우는 아예 쓰러질 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음 만큼이나 몸도 유약했으니까.
그렇다고 은신을 사용해 몰래 들어가자니 마나가 부족하고···.
포션?
이미 다 사용했다.
시체폭발을 막고자 먹은 게 마지막이었던 것.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잠시 뿐이었다.
이내 이전석은 업상점을 사용해 토끼 한 마리를 불러냈다.
"자주 뵙는 군요, 고객님."
찢어진 게이트.
그 너머로 토요토가 뛰어나온다.
깡총-.
앙증맞은 발소리.
토요토는 이전석의 몰골을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야, 상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꽤 격전이었나 봅니다."
땅딸막한 손으로 눈가를 훔치는 토요토.
"그래도 크게 다치신 것 같진 않아 다행이네요. 제 유일한 고객님이 벌써부터 타계하신다면 저는 정말로 슬플 겁니다. 흑흑."
우는 걸까?
설마.
"일단 그 웃는 낯짝부터 치우고 말하지?"
"하하, 들켰나요?"
토요토가 웃으며 고갤 돌렸다.
이전석은 어이없다는 양 그를 쳐다봤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저 작은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도무지 알 겨를이 없었다.
"일단 대출금부터 상환하지."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호, 벌써 선업을 이렇게나."
외눈 안경을 치켜 쓴 토요토는 내심 놀란 눈치로 이전석을 바라봤다.
며칠 사이에 불쑥로 불어난 선업.
그로서도 꽤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거대화에 대한 대출은 상환시켜드리도록 하지요."
직후.
[토요토에게 선업 3천을 지불합니다.]
[축하드립니다!]
[대출금을 모두 갚으셨습니다!]
상태창에서 3천의 선업이 사라졌다.
남은 건 대략 4만하고 1천의 선업뿐.
이전석은 그것들로 옷을 구매했다.
없는 게 없다고 하더니···.
토요토는 아이템이 아닌 일반적인 의류도 다양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흰색 스웨터를 구매하셨습니다.]
[깨끗한 청바지를 구매하셨습니다.]
스웨터와 청바지.
각각 300씩 하는 가격이다.
총합 600의 선업.
고작 이런 것에 선업을 지불한다는 게 아깝긴 했지만, 가족들을 걱정시키는 것보다야 훨 나을 터였다.
이 정도 선업은 금방 모으기도 했고.
[체력 포션(D)를 구매하셨습니다.]
[청결 포션(F)을 구매하셨습니다.]
뒤이어 포션 두 개를 구매한다.
각각 상처와 몸의 얼룩을 지워주는 포션.
생김새는 시중에 판매되는 것과 똑같다.
효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포션을 마시자.
치이익-.
온몸의 잔상처와 핏자국들이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이제 됐어."
고작 옷 두 벌과 포션 둘.
이제 볼 일은 끝났다.
이전석은 토요토를 돌려보내고자 했다.
그런데.
"고객님, 혹시 이런 상품은 어떠신지요?"
토요토가 그리 말하며 이전석을 붙잡았다.
흡사 백화점 점원을 연상케 하는 모습.
동시에 눈앞에 상태창 하나가 나타난다.
━
클린
등급 : C
효과 : 소량의 마나를 소모해 육체의 청결을 되살린다.
━
"지금 고객님께서 가지고 계신 선업으로도 충분히 구매 가능한 특성입니다.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전투 후 찝찝한 몸을 씻겨주는덴 이만한 게 없지요."
"······."
이전석이 토요토를 빤히 쳐다봤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상인이라지만.
'이건 뭐 장난 치는 것도 아니고···.'
다만.
'확실히 끌리긴 하는군.'
클린.
청결 포션의 상위호환 격 되는 특성.
"가격은 얼만데?"
이전석은 혹시 모른 마음에 물었다.
그런데.
"3만 선업이랍니다."
"지랄."
마치 대가리를 후려치는 듯한 가격에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안 사."
단호히 거절.
'누굴 등신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저건 사는 게 호구다.
차라리 조금 돈을 쓴다고 해도 청결 포션을 항시 소지하고 다니는 게 낫지.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토요토는 여전히 의미모를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도 이용해주시길."
단호한 거절에도 아무런 불만 없이 사라진다.
오히려 눈빛에선 즐거움마저 엿보였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토끼다.
그래서 더 꺼림칙하기도 했고.
"후우."
피곤한듯 한숨을 내쉰 이전석.
그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일단 돌아가자.'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 ※ ※
협회 지하 10층.
흡사 돔을 연상케 하는 둥근 공간.
그 한 가운데.
김백동이 서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여럿.
마치 울타리처럼 둘러싸인 모니터 너머로 매서운 눈빛이 쏘아진다.
━그래서, 작전을 바꾸자는 건가?
"전부 바꾸자는 게 아닙니다."
━허면?
"연합 놈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금만 변화를 주면 됩니다. 그럼 나머지는 현장에서 제가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흐음······.
김백동은 모니터 너머의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협회의 고위 간부들이었다.
회장과 더불어 협회를 떠받치는 기둥.
모니터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해할 수가 없군.
━그래, 통 이해가 안 돼.
━김백동 감독관. 자네는 당초 이 작전에 찬성하는 쪽이었을 텐데?
━이제와 마음이 바뀌었다니, 자네답지 않아.
벌처럼 쏘아지는 말.
흡사 죄인을 취조하는 듯한 분위기다.
그러나 김백동은 기죽지 않았다.
"저 답지 않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저입니다. 학습된 AI가 아니죠. 당연히 최고 감독관으로서 작전에 문제가 있다 판단되면 이의를 제기할 권한이 있습니다."
━문제라······ 자네는 우리가 계획한 작전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김백동은 "다만"이라며 말을 이었다.
"연합측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증거는?
"이미 제출했습니다."
김백동의 말에 일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니터 너머의 간부진들은 김백동이 보낸 무언가를 살피는 듯했고, 이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당초 우리가 생각한 것과 다른 움직임이군.
━김백동 감독관은 이 정보를 어떻게 입수한 거지?
"제가 잘 아는 정보원에게 의뢰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연합의 움직임이 저희가 생각하던 것과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죠."
━그래도 작전을 바꿀 정도는 아니야. 충분히 예상한 내다.
"말씀드렸듯이 작전을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김백동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팀 단위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합니다."
━······.
━김백동 감독관.
"예."
━자네가 최고 감독관이 아니었다면 즉시 반려했을 제안일세.
그만큼 말도 안 되는 부탁이란 소리다.
어디까지나 본래라면 말이다.
━20년 간 협회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려온 과거의 자신을 고마워하게나.
━부디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나 무슨 의미인진 알 수 있었다
김백동이 속한 빌런 대응부서의 독단활동.
그것을 승인한다는 말이다.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백동이 고개를 숙였다.
결과적으로 작전의 수정은 불가능했지만,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은 얻어냈다.
이 정도면 당일 어떠한 변고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터.
━그럼 김백동 감독관에 의한 긴급회의는 이만 마무리하도록 하지.
그렇게 모니터의 불빛이 하나 둘 씩 꺼지기 시작했다.
※ ※ ※
이전석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왔니?"
그러자 한유리가 그를 반겼다.
때마침 저녁시간.
거실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온다.
"첫 출근이라 힘들지? 밥 다 되면 부를 테니 들어가서 쉬고 있으렴."
"네."
한유리의 말.
이전석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온몸이 쑤시는군.'
아직도 폭발의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스켈과 발화, 거기에 마나까지 펼치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엄청난 위력의 폭파였다.
이윽고.
철푸덕-.
이전석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대자로 편하게 몸을 뉘인다.
조금이라도 쉬기 위해서였다.
정신은 피로하지 않는다고 해도 육체까지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우웅-.
잠깐의 쉼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휴대폰이 알람을 울렸다.
이전석은 표정을 찌푸렸다.
귀찮다.
움직이기 싫다.
혹시 업상점에 멀리 있는 휴대폰을 가져오는 특성은 없을까?
지금이라면 한 5백 정도에 살 의향이 있었다.
물론 하등 의미없는 가정일 뿐이다.
그런게 있다고 해도 5백밖에 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쓸데없이 가격만 후려친단 말이지.'
비싼 게 가장 큰 단점인 업상점이었다.
"끄응······"
이전석은 뒤늦게 귀찮음을 밀어내곤 책상에 올려뒀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잠시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웬 문자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윤진이었다.
그에 이전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벌서부터 입질이 올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나 자신이 싫었던 걸까?
어지간히도 미움을 산 건가 싶었다.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우웅-.
문자가 한 통 더 도착했다.
━아냐 선배님과 관련된 일로 전석 씨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냐 과장?"
이전석이 의문을 표했다.
왜 여기서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순간 이전석은 흥미가 동했다.
재미있는 생각과 추측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전 협회에서도 했던 추론.
'설마 아니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전석은 알겠다며 답신을 보내곤, 며칠 후에 윤진과 약속을 잡았다.
그래도 몸을 회복시킬 시간은 필요했으니까.
지금은 그냥 누워서 쉬고 싶다.
잠은 잘 수 없지만 에어컨을 틀고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노라면 그것만큼 편한 게 또 없었다.
그래.
이게 천국이지.
※ ※ ※
나흘 뒤.
이전석은 약속장소를 카페로 잡았다.
주변에서 꽤 평가가 괜찮은 곳이다.
그곳에서 치즈케잌과 망고라떼를 주문했다.
이전석이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었다.
그는 의외로 단것을 즐겨 먹는 편이었는데, 특히 치즈케잌과 망고라떼는 소울푸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먹고는 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
"전석 씨는 아냐 과장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진이 정말 뜬금없이 그리 물어왔다.
어떻게고 뭐고···.
"예쁘고 잘난 직장 상사."
이전석은 치즈케잌을 한 입 베어물며 답했다.
이전석에게 아냐 이바노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보다.
"의도가 뭡니까."
"예?"
"굳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냐고 묻는 겁니다. 설마 같은 남자직원끼리 여자 상사 뒷담이나 까자고 모인 건 아닐 거고."
어딘가 비웃는 듯한 이전석의 어투.
"제가 쓸데없이 빙 돌아가는 걸 싫어해서 말이죠."
이전석이 포크를 내려놓는다.
"우리 솔직하게 갑시다."
그에 잠시 입을 다무는 윤진.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래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7화
인형사 (2)
"전석 씨도 듣기는 하셨을 테죠. 아냐 과장님이 과거에 부사수를 잃었다는 거."
"얼핏 듣기는 했습니다."
윤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전석.
윤진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아냐 과장님은 부사수가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자기 자신을 몰아넣었죠."
과연.
'그래서 자책이라 포현한 거로군.'
이전석은 얼마 전 받은 퀘스트, 정확히는 시스템의 내용을 떠올렸다.
[아냐 이바노프에게 주어진 '자책의 운명'을 비트십시오]
윤진의 말대로라면, 아냐는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부사수의 죽음이 제 잘못이라면서.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전석 씨."
윤진이 냉수를 한 모금 들이 킨 뒤 말했다.
"그만둬주십시오."
"뭘 말입니까?"
"감독관 말입니다."
하.
이전석은 헛웃음을 흘렸다.
다짜고짜 감독관을 그만두라니.
애당초.
"제가 용병으로 계약된 건 알고나 하시는 말씀이신지?"
"위약금은 제가 대신 물어드리겠습니다."
위약금.
그게 얼마인지는 알고나 하는 말일까.
아니, 모를 리가 없지.
그도 명색이 감독관이니까.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뭐죠?"
이전석의 물음.
윤진이 눈을 내리깔았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표정.
그것은 과연 연기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적어도 겉보기엔 연기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의 윤진을 아는 이전석으로선 그조차 가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윤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석 씨는 임시 감독관이라고 해도 아직 등급이 낮으시죠. 각성한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그만큼 경험도 적고, 경험이 적으니 실수도 하시겠죠. 저는 그 사실이 우려됩니다."
우려?
대체 뭘 우려한다는 거지?
설마 이전석이 죽을 까봐?
우습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이전석은 일단 윤진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뒤이어진 건 실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저는 더 이상 과장님이 동료의 죽음으로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전석은 몇 번째인지 모를 헛웃음을 삼켰다.
당혹스러움을 넘어 놀랍기까지 하다.
설마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윤진이 이전석을 부사수로 추천한 사실.
━2개월 뿐이라고 해도 일단은 팀이니까요.
아냐가 그렇게 말하며 알려줬다.
하지만.
정작 지금 눈앞에 있는 윤진은, 당시 아냐에게 이전석을 추천해주던 때와는 완전히 모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만두라고?
아냐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혐오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 마치 자신이 죽을 거라 확신하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협회가 아니더라도 전석 씨라면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감독관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전석 씨도 이른 나이에 죽는 건 원하지 않으실 거 아닙니까?"
말투나 단어는 나름 순화한 모양이지만, 윤진의 말은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죽기 싫으면 협회를 나가라고.
정말, 우습지도 않지.
"그냥 솔직하게 말하시죠."
이전석이 비웃음 뒤섞인 어조로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 옆에 다른 남정네가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니 그만두라고."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윤진은 끝까지 변명을 거듭했다.
그 모습에 이전석이 코웃음을 쳤다.
너무나 하찮고, 그리고 가당찮아서.
"아마 저를 추천한 것도 아냐 과장님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였겠죠."
내가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너를 생각해주고 있다.
일종의 자기어필인 셈이다.
하지만.
"당신도 예상하진 못했을 겁니다. 제가 빌런 대응부서에 들어와 정말 아냐 과장과 팀을 맺게 될 거라곤."
그래서 질투가 났을 것이다.
어떻게든 치우고 싶었겠지.
굳이 이전석을 불러내서 이딴 같잖은 말들을 쏟아내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테고.
"내가 생각한 게 하나 있어."
이전석이 포크로 식탁을 찍었다.
그는 더 이상 윤진에게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미래의 지식, 경험.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알게 된 것들.
단순 추론일 뿐이다.
증거라곤 없다.
그럼에도, 윤진의 행적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예상이라고 한들 하나의 결과가 나오고야 만다.
"죽였지?"
순간.
윤진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아주 잠깐 뿐이었지만 이전석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확신을 가졌다.
틀림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전석 씨가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여전히 가면을 쓰고 뻔뻔하게 거짓을 내뱉는 윤진.
이전석은 아랑곳 않고 재차 말했다.
"네가 죽였잖아."
"······."
"아냐 과장의 전 부사수."
"······."
"정곡인가?"
윤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애써 쓰려던 가면조차 녹아내린 듯 살기가 흘러나온다.
이쯤되면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이전석의 눈.
확신이 깃든 시선.
더 이상 그에게 거짓말은 의미가 없었다.
덕분일까.
"······어떻게 아셨죠?"
윤진이 나지막이 물어왔다.
"그냥 내 추론일 뿐이야. 증거는 없어. 그래도 한 가지 굳이 꼽자면··· 네 눈이 시궁창처럼 더러웠거든."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살인자의 눈.
그건 이전석이 누구보다 잘 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그 눈을 가장 짙게 타고 난 건 다름 아닌 이전석 본인이었으니까.
"저는 전석 씨가 이해되질 않는군요."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윤진으로선 의문만이 뇌리에 떠오를 뿐이다.
"증거도 없고 추론일 뿐이다···. 그럼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가 뭐죠? 제게 경계심을 살 뿐이라는 걸 당신이 모를 리는 없을 텐데요."
"증거가 없다··· 뭐, 원래라면 그랬겠지."
의미모를 이전석의 말.
그가 돌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내.
툭-.
무언가를 재생하기 시작한다.
━네가 죽였잖아.
목소리.
이전석 자신의 음성.
━아냐 이바노프의 전 부사수.
━정곡인가?
뒤이어지는 말에 윤진의 표정이 점차 싸늘하게 굳어갔다.
━어떻게 아셨죠?
그리고 그 말이 재생된 직후였다.
콰앙-!
윤진이 대뜸 주먹을 휘둘러왔다.
어마무시한 충격.
바람이 용솟음치듯 비산한다.
이전석은 그것을 적단도로 막았다.
정확히는 비껴냈다고 해야 될까.
잦아드는 바람 사이로 윤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주먹에 마나를 휘감고 이전석을 노려봤다.
"잔꾀를 부리셨군요."
"훌륭한 잔꾀지."
키득-.
이전석이 웃음을 흘리며 적단도를 바로잡았다.
잘 보니 오른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기습이야 진작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윤진의 힘이 파괴적이었던 것.
물론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 뭐야?"
"싸움이야! 각성자들끼리 싸움 났다고!"
"다들 도망쳐!"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카페 직원과 사람들이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부에 남은 건 이전석과 윤진, 단 둘 뿐.
"미리 말해두지만······."
서걱-.
이전석이 적단도로 제 손을 그었다.
"먼저 공격한 건 너다."
윤진.
그를 처음 보고 생각했다.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화산 때와 마찬가지다.
살려둘 필요가 없는 악인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얼굴을 보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전석은 의외로 행동력이 강한 편이었다.
윤진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녹음을 켰고, 그것으로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놈은 손쉽게 도발에 걸려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녹음이라고 한들 그것은 윤진의 입지를 흔들기에 충분했으니까.
대대적인 전수조사가 이루어질 거다.
녹음의 진위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의심, 의혹, 불안.
아냐는 분명 그를 경계할 거다.
그건 윤진으로서도 바라는 바가 아닐 터.
거기에 만일 녹음의 진위여부가 진실이라 판명된다면?
모든 게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윤진으로선 당장 혼란을 일으키더라도 이전석의 휴대폰을 빼앗을 수밖에 없는 셈.
반면 이전석은 윤진을 처리함과 동시에 아냐의 트라우마도 해결할 실마리를 얻게 되었으니······.
띡-.
문득.
이전석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디론가 문자를 보낸다.
"또 무슨 짓을······."
"네가 싫어할만한 짓."
이전석이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 모습이 왠지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하나부터 열 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후회하실 겁니다."
화가 난 듯 이를 가는 윤진.
그러나.
"네가 날 후회시킬 방법은 하나야."
이전석은 아랑곳 않고 적단도를 치켜들었다.
"나를 죽여."
※ ※ ※
빌런 대응부서의 사무실.
그곳에는 김백동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방금 전 이사들과 나눈 회의.
그 내용을 자세히 기록해둔다.
그리고 연합소탕작전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면 좋을지 차차 계획을 세워나갔다.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대충 이렇게 하자, 혹은 이러면 됐다면서 넘어갈 순 없다.
최대한 신중하게 작전을 수정하고, 적절한 위치에 팀원들을 배치해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우웅-.
책상에 올려놨던 휴대폰.
그것이 갑자기 진동했다.
잘 보니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이건··· 위치좌표?'
문자를 보낸 사람은 이전석.
그 내용은 숫자로 이루어진 좌표였다.
다른 내용은 딱히 없었다.
그 사실에 의아해 하고 있을 무렵.
"팀장님!"
돌연 사무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인턴 박일우.
그가 다급히 사무실로 들어온 것.
김백동이 그를 쳐다봤다.
매섭기 그지없는 눈빛.
말은 없었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굳이 난리법석을 피우며 돌아온 이유를 말하라는 것이다.
"새로 들어온 용병분과 윤대리님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사람 사이에 싸움이야 흔한 것이잖나."
"그게··· 그런 의미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럼?"
박일우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보여줬다.
그곳에는 어느 한 카페의 CCTV 영상이 틀어지고 있었다.
윤진과 이전석이 서로 싸우는 모습.
말 그대로 그런 의미의 싸움이 아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죽이고자 주변조차 신경 쓰지 않은 채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허."
그 모습에 도리어 당황한 건 김백동이었다.
갑자기 왜?
두 사람 사이에 앙숙이 있었나?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박인턴."
"예, 팀장님."
"CCTV 속 카페의 좌표 좀 따와봐."
"알겠습니다."
박일우는 즉시 김백동의 말에 따랐다.
그리고 정확히 3분 뒤.
박일우가 좌표정보를 가져왔다.
11554.5221.445
이전석이 보낸 좌표와 일치한다.
설마 했더니.
'···도움 요청인가?'
아니면 다른 신호일까.
이유야 어찌됐든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박인턴. 출동준비 해라."
"예, 알겠습니다."
김백동이 의자에 걸쳐놨던 정장 외투를 도로 입었다.
현재도 이전석과 윤진은 피가 터져라 싸우고 있다.
무려 감독관급의 전투다.
주변 피해도 이로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다행이 아직 다친 사람이나 사망자는 없는 모양이지만···.
"가자."
"예."
김백동은 뒤늦게 박일우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 ※ ※
쾅-!
이전석이 복부에 주먹을 얻어맞았다.
그 충격으로 카페 외벽을 뚫고 날아갔다.
거칠게 바닥을 나뒹구는 이전석.
입가로 토혈이 작게 새어나온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과연 감독관.
A급의 실력자답다.
게다가 이 시기의 윤진이라면 S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이니···.
그가 강한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대단하시군요. 그 사이에 두 번이나 유효타를 먹이다니."
윤진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얼굴과 팔뚝.
두 곳에 검상이 새겨져 있다.
바로 이전석에 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죽이려고 한 게 저 정도인가.'
이전석으로선 아쉬운 결과였다.
분명 죽이려고 내찌른 일격이다.
하지만 윤진은 치명타였을 공격을 고작 생체기 따위로 흘려버렸다.
단순히 실력차이가 나기 때문에?
설마.
비록 전생에 비해 특성이 부족하다고 한들, 고작 A급 따위에 고전할 이전석이 아니었다.
준 S급이라 불리며 일전 상대했던 A급과는 격을 달리했지만, 그뿐이다.
결국은 인간의 범주.
완전히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S급과는 다르다.
다만.
'마나가 압도적으로 뒤처지는군.'
가진 마나의 총량이 너무나도 차이난다.
윤진.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푸른 안개.
흔히 호신강기라 불리는 기술이다.
다르게는 마나 방어술이라고도 한다.
마나를 이용한 응용법 중 하나였는데, 이전석도 폐공장에서 시체폭발로부터 제 몸을 지키고자 저 기술을 사용했다.
다만 마나의 전체적인 총량 덕분일까.
이전석이 사용하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단순 크기부터 단단함까지.
'지금 내 수준으론 못 뚫겠어.'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적단도를 깃털처럼 가볍게 쥐는 이전석.
그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으랴.
이전석은 지는 싸움을 싫어했다.
그래서 늘 이기는 싸움만을 고집했고, 그건 천살성에 집어 삼켜지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버릇이라 해도 좋다.
중요한 건 오직 그뿐이다.
이전석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래서 윤진에게 도발을 걸었다.
몇몇 지인에게 보낸 위치좌표?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을 위한 또 다른 대비일 뿐이다.
이전석은 그들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도, 하물며 윤진에게 패배해 죽을 생각도 없었다.
애당초 이 싸움의 목적 중 하나는 그의 약점이기도 한 마나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윤진의 특성 '마나조율'을 갈취하는 것.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은 없다.
윤진.
놈은 어디까지나 '내' 사냥감이었다.
"그럼······."
이내 짐승처럼 자세를 낮추는 이전석.
'조금 템포를 올려볼까.'
돌연.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8화
인형사 (3)
윤진은 이전석을 빤히 쳐다봤다.
분명 실력은 자신이 앞서고 있다.
레벨이나 스탯, 그리고 특성까지.
무엇하나 꿇릴 게 없는 그였다.
하지만.
'······뭐지?'
윤진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이질감.
이를테면, 위화감.
무언가가 어그러져 있다.
퍼즐이 맞물리지 못한다.
마치 삐걱이는 톱니바퀴를 보는 듯한 기분.
'······.'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상대는 이제 막 각성한 애송이다.
레벨은 50도 채 넘기지 못했을 터.
그 증거로 방금 전 일격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지 않은가.
비록 빠른 순발력으로 반격을 해왔지만, 그뿐이다.
이전석은 윤진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 나가 떨어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째서일까.
소름이 끼쳤다.
피를 토하며 몸을 일으키는 이전석.
그의 눈이 윤진을 직시한다.
'대체 무슨 특성이길래······.'
저토록이나 사람의 외형을 이질적으로 바꿔놓는 특성은 윤진으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애송이군.'
윤진은 생각했다.
어리숙하다고.
'녹음만 지워버리면 변명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파악-!
윤진이 전신에 두른 마나를 양손에 집중시켰다.
푸른 마나가 고체로 굳어지며, 이내 건틀릿과 같은 형태를 자아낸다.
마나조율.
윤진이 가진 S급 특성.
마나를 보다 더 잘 다루게 되는 능력.
심플한 효과만큼, 그 위력 또한 심플하게 강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현재 이전석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기도 했으니.
"음?"
돌연 윤진이 의문을 표했다.
'사라졌어?'
이전석의 모습이 사라져버렸기 것.
비단 모습만이 아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서 증발해버린 것만 같다.
윤진은 다급히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디에서도 이전석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도망쳤나?'
충분히 납득할 만한 추측이다.
그러나 그 추측을 부정하듯.
새빨간 단도 하나가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 자식!"
윤진이 왼손을 휘둘러 그것을 쳐냈다.
적단도가 마나에 의해 튕겨져 나간다.
"잘 막네."
한 순간.
목소리가 들리며 이전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불투명한 연기 속에 아른거리는 검은 동공.
기분 나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 건지 통 이해가 가질 않는다.
'······또 사라졌군.'
이내 연기 속으로 다시 모습을 감춰버린 이전석.
기척 또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은신계? ···특성을 또 가지고 있다고?'
분명 언데드와 관련된 특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헌터시험을 볼 때.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그런데 은신이라니.
게다가 꽤나 높은 수준의 특성이었다.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눈치 채지 못했어.'
A급인 윤진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효과.
다만.
'그만한 특성을 오래 유지할 순 없겠지.'
마나가 금세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각성한지 얼마 안 된 헌터의 한계.
특성의 급이 높고 낮음과는 관계 없다.
제 아무리 재능있는 천재라도 전장에선 낮은 레벨과 스탯이 걸림돌이 되어 죽고는 했으니까.
천재가 결코 노장을 이길 수 없는 이유.
"우습군요. 시간 끌기라도 하실 셈입니까?"
윤진이 도발 섞인 어조로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정적, 침묵.
그 대신이라는 듯.
또 다시 적단도가 휘둘러져 왔다.
윤진은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막았다.
뒤이어 곧 바로 반격을 했지만.
다시금 사라지는 기척.
주먹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쯧."
윤진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정말 시간이라도 끌려는 건가?'
도망치려고 했다면 은신을 사용한 즉시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다는 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군.'
윤진은 방금 전 기억을 되새겼다.
휴대폰.
'위치좌표를 보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빨리 끝내야겠어.'
녹음이 협회에 넘어가면 이 싸움은 윤진의 패배나 다름없다.
'마나소모가 조금 크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윤진이 양손에 모인 마나를 전신으로 흘려보냈다.
직후.
부웅-.
공기가 들썩이는 듯한 소음과 함께 윤진을 둘러싸고 있던 마나가 사방팔방 퍼져나갔다.
땅, 벽, 건물, 무너진 잔해.
마나가 마치 파도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훑고 지나간다.
그리고.
'거기로군.'
마나의 파도 한 가운데.
거대한 기척이 걸렸다.
차락-.
윤진이 재차 마나를 양손에 휘감았다.
그러고선 어느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기척이 느껴지는 장소.
그곳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한다.
하지만.
"스켈레톤 워리어···?"
정작 그곳에 있던 건 이전석이 아닌 웬 몬스터 한 마리였다.
그것도 매우 거대한 몸집의 스켈레톤.
"이 무슨······."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때.
"왕이시여···."
스켈레톤 워리어가 말했다.
고작해야 스켈레톤.
저급의 몬스터.
놈이 어떻게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놈이 언어를 구사한 순간.
바로 뒤에서 살기가 휘몰아쳤다.
윤진은 급히 몸을 뒤로 돌리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새빨간 칼날이 복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크윽···?!"
핏물과 신음을 토해내는 윤진.
직후.
화륵-.
칼끝으로 불꽃이 타올랐다.
그대로 혈액과 함께 내장이 지져지고,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격통이 내리쳤다.
"······!!"
윤진이 애써 고통을 참아내고자 이를 악물었다.
그때.
"━━━!!"
스켈레톤 워리어가 포효했다.
피부가 전율하는 듯한 피어.
녀석이 거대한 곡도를 휘둘러온다.
"크윽!"
위기를 느낀 윤진이 급히 몸을 피했다.
억지로 칼날을 빼내며 옆으로 구른다.
근력을 포함한 전체적인 스탯은 이전석을 훨씬 앞섰기에 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쿠웅-!
윤진이 있던 자리에 곡도가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푹 파이는 바닥.
윤진은 가까스로 곡도를 피했다.
처량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그.
숨을 헐떡이며 마나로 급히 상처를 지혈하지만.
'느려···.'
고통이 정신을 흐트러트리며 지혈도 느리게 만들었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윤진은 이전석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봤다.
그런데.
"특성은 만능이 아니야."
돌연, 이전석이 믿지 못할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건 마나조율도 마찬가지지."
"당신···? 어떻게······."
윤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경악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나조율.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특성.
그걸 이전석이 알고 있다니.
당혹스러움이 머리를 집어삼켰다.
"······어떻게 제 특성을 알아낸 겁니까."
윤진이 애써 고통을 집어삼킨 채 물었다.
의문과 경악이 뒤섞인 시선.
촤악-.
이전석이 적단도를 허공에 휘둘렀다.
그러자 핏물이 그대로 벽면을 적셨다.
이전석은 묵묵히 제 말만을 이어갔다.
"다량의 마나에 네 감각을 이어서 사방으로 퍼트렸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흩어진 마나.
감각을 이어 활용하는 그 기술을 세간에선 흔히 '기척감지'라 불렀다.
다만 보통은 마나소모가 커서 잘 사용하진 않았는데···.
"거기에 기척이 하나 걸렸을 테고, 너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을 거야. 이 지역의 시민들은 이미 전부 대피했으니까."
"······."
하지만 틀렸다.
정확히는 반만 맞았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윤진이 마나를 퍼트린 직후.
이전석은 일부러 존재감을 크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마나를 거둬들였을 때.
은신자의 코트를 사용해 기척을 죽이고, 그 자리를 스켈로 대신했다.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다.
그러나.
쉽게 풀어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몬스터와 자신의 기척을 맞바꿨다고···?'
그대로 자신은 건물 어딘가에 숨은 채 윤진을 기습.
이전석은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로 이전석은 그걸 노리고 윤진이 기척감지를 사용하도록 유도했다.
까득-.
"말도 안 되는······ 그걸 제가 몰랐을 거라고?"
황당과 분노가 뒤섞인 윤진의 말.
이전석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를 리가 없지."
어디까지나 보통이라면, 말이다.
윤진.
그는 준S급의 강자다.
더욱이 마나조율이란 특성 덕분일까. 다른 헌터에 비해 마나를 다루는 실력이 유독 뛰어났다.
그렇기에 생겨난 오점.
"너는 네 특성을 너무 믿었어."
마나에 대한 응용력과 컨트롤이 너무나 뛰어난 탓에, 그틈을 파고 들어올 거라곤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바로 윤진의 패인이었다.
물론 그건 다시 말하면···.
"결국, 당신이 저보다 뛰어나다는 소리 아닙니까?"
"맞는데?"
"······."
이전석의 말에 윤진이 할 말을 일었다.
너무나도 뻔뻔한 낯짝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틀린 말인 것도 아니었다.
분명 윤진에겐 틈이 있었지만, 보통이라면 그 틈을 발견하긴커녕 파고들 생각도 하지 못할 테니까.
어디까지나 이전석이었기에 가능했던 행위.
물론 상대가 S급만 되도 이런 잔꾀는 불가능해진다.
이유야 특별한 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순수하게 강하기에.
100의 스탯.
그때부터 헌터는 인간이 아닌 초인의 범주에 들어서게 된다.
흔히 탈각(脫却)이라 불리는 영역에 들어서는 것.
누군가는 이를 환골탈태라고 하며, 신이 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진은 아직 탈각에 이르지 못했다.
아무리 강해도 A급.
진정으로 괴물이라 불리는 S급과는 다르다.
이전석이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그가 방심까지 하고 있다면?
그 결과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윤진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 우습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인정하지 못하면?
그래서 뭐가 바뀌랴?
현실을 부정하는 윤진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만 나왔다.
가학(加虐).
절로 입꼬리에 새겨지는 미소.
낙인에 짓눌린 천살성이 어둠 깊은 곳에서 이전석과 함께 윤진을 비웃어댄다.
이윽고.
뚜벅-.
이전석이 윤진에게 다가갔다.
윤진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윽···!"
복부에 새겨진 화상이 그걸 막았다.
지혈은 전부 끝났지만 발화로 인한 저주는 여전히 내부에서 윤진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로인해 생긴 격통과 잠깐의 틈.
이전석은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윤진을 걷어찼다.
퍽-!
종잇장처럼 날아가는 윤진.
마나로 보호하려는 것 같았지만 소용없었다.
고통 때문일까.
마나의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제대로 엮여지지 않는 마나.
정신의 흐트러짐은 윤진을 A급보다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푸욱-.
이전석이 바닥에 넘어진 그에게 적단도를 내리찍었다.
마치 못처럼 박히는 날.
왼손이 바닥에 고정된 채 피를 뿜어낸다.
반면 오른손은 발로 짓밟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끄으윽······!"
이를 악문 채 비명을 집어 삼키는 윤진.
"감히 나를···! 이러고도 무사하실 거라고 생각 하십니까······!"
"얼마든지."
발버둥치는 윤진을 이전석이 비웃었다.
그때.
윤진이 힘으로 적단도를 밀어냈다.
하등 소용없는 짓이었다.
화륵-.
"끄악!!"
그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얌전히 있어야지?"
이전석이 발화를 사용한 것이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작열통.
마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격통이 전신을 휘몰아친다.
이전석 본인이야 이미 고통에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타인이 느끼기에 발화가 주는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발화의 원주인은 이를 고문용으로 사용했을 정도니.
그 수준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쉽게 알 수 있으리라.
"그보다······."
이전석이 발로 윤진의 상처를 짓밟았다.
"크억···!!"
그러자 윤진이 피를 토하며 몸부림쳤다.
천살성으로 인해 생겨난 잔혹한 본성.
그것은 여전히 무의식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이전석을 악귀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그런 이전석을 보며 윤진은 생각했다.
'이··· 괴물 놈······!'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이전석이 살벌한 미소를 짓는다.
고통, 슬픔, 우울, 분노.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한데 모아놓은 듯한 눈동자.
"본론이라고 해야 되나?"
이전석이 스켈레톤 워리어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윤진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남자직원 둘이서 진솔 된 이야기나 해보자고."
이제, 보상이란 이름의 달콤한 과실을 먹을 때였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9화
인형사 (4)
인형들이 춤을 추고 있다.
생전의 피부를 그대로 간직한 채.
아름다운 머릿결을 살랑이며.
들리지 않는 리듬에 맞춰 팔과 다리를 움직인다.
그러나 그곳에 영혼은 없고 생기마저 없었으니.
"당신만은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군요."
윤진이 한 인형을 바라봤다.
모두가 춤추는 그곳에서 유독 한 인형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냐 씨."
"······."
"춤춰주세요."
"······."
인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만이 인형의 하얀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역시···."
예상했다는 듯한 윤진의 반응.
"죽은 뒤에도 고집이 많으시군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랍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윤진은 몸을 일으켜 다시 길을 되돌아갔다.
인형들이 끊임없이 춤출 뿐인 공간.
새하얀 인형은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러,
일주일이 지나서도.
새하얀 인형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김백동에 의해 윤진이 토벌당하고, 수십 구의 시신이 인형이라는 형태로 발견되지만.
"······."
그때까지도 여전히.
그것은 춤추기를 거부했다.
※ ※ ※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까···."
윤진이 숨을 헐떡이며 대꾸했다.
동공에 비추어진 빛이 흐리다.
언제 의식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에게 이전석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김수현."
순간 크게 흔들리는 윤진의 시선.
당혹과 당황이 눈동자에 깃든다.
"그 이름을 어떻게······."
"일단 아냐 과장님의 부사수니까. 내가 알아낼 수 있는 범위에 한 해서 조사했지."
사실 조사라고 해봤자 별 거 없었다.
김백동에게 물어본 게 전부니까.
그는 의외로 쉽게 정보를 알려줬다.
"아냐 감독관의 전 부사수, 김수현. 2년 전 기사를 보니 S급 빌런과의 교전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고 하더군."
━어차피 기사에 전부 실린 내용이니까요.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던 김백동.
하지만.
그가 건네 준 사진은 어느 기사에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이었다.
"이거."
이전석이 그 사진을 품에서 꺼내 윤진에게 보였다.
사건 당일, 김수현의 시신이 찍힌 사진.
"분명 출혈양은 많이 보이지만, 절대 과다출혈로 죽을 만한 부상은 아니야. 애당초 A급 헌터가 과다출혈로 죽는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그 전에 마나로 상처를 지혈하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이전석이 사진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김백동이 왜 저걸 줬는진 모르겠지만 이전석으로선 이미 쓸모를 다한 물건이었다.
"그래도 다들 제대로 된 사인을 알지 못하니 그냥저냥 묻어간 모양이지만······."
이전석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미래에서 그것은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독이었기 때문이다.
"렐라나의 잎사귀."
"······!"
"어떻게 알았냐는 눈치로군."
피식-.
이전석이 비웃음을 흘렸다.
"어느 S급 던전에서 드물게 피는 꽃이 있어. 렐라나의 잎사귀라고 하지. 중요한 건 이거야. 렐라나의 잎사귀를 복용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마나장애를 일으켜."
"······."
"정말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
윤진이 피를 머금은 채 이전석을 노려봤다.
이전석은 다시 그의 복부를 짓밟았다.
"크윽···."
마치 사나운 강아지를 압박하는 것처럼, 부릅뜬 윤진의 눈빛을 재차 고통으로 짓눌러 놓는다.
"네가 어떻게 김수현에게 렐라나의 잎사귀를 먹였는지는 몰라. 다만 그 독으로 인해 김수현은 상처를 지혈할 수 없었고, 아주 천천히 과다출혈로 죽어갔겠지. 그것도 아냐 과장이 보는 앞에서."
그게 이 사건의 전말이다.
아냐가 트라우마를 껴안게 된 이유.
"다시 정리해보자면···."
건물 바깥에서 느껴지는 기척.
그에 이전석은 굳이,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정리해 나열하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아나 과장을 대신해 상처를 입었다. 빌런의 공격은 지속적인 출혈을 일으켰지만, 마나만 제대로 움직였으면 충분히 살 수 있는 부상이었어. 하지만 어째서인지 당시 김수현은 마나를 움직이지 못했고, 그대로 과다출혈로 사망했지."
거기까지 말한 이전석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고선 바로 어제, 빌런 대응부서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그 원흉이 바로 렐라나의 잎사귀. 네가 장식인 것처럼 책상 위에 올려둔 그 꽃이다."
이전석이 보여준 휴대폰 속 사진.
그곳에는 남색의 꽃이 피어 있었다.
꽃병에 고스란히 장식된 독.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단 말이지."
어이가 없다 뿐이랴.
황당함을 넘어 놀라울 지경이다.
"어떻게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독을 자기 책상에 장식해놓을 수가 있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전생의 이전석도 꽤 미친놈 취급을 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살성의 영향일 뿐이었다.
윤진처럼 순수하게 미친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크흐흐···."
윤진이 웃음을 흘렸다.
"실수, 로군요······."
자책 섞인 말소리.
"설마··· 그 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몰랐겠지.
이 시기에 그걸 아는 건 던전에서 직접 발견한 헌터들과 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거물 몇몇이 전부니까.
"후우···."
고통을 잊으려는 듯 숨을 깊게 내쉬는 윤진.
"예. 제가 맞습니다. 김수현의 죽음, 제가 꾸민 짓이지요."
더 이상 숨길 생각도 없는지, 그는 자신이 계획한 살인을 낱낱이 풀어놓기 시작했다.
"당시 김수현이 상대했던 빌런도 제가 섭외했습니다. 일부러 아냐 선배님을 노려 김수현의 자기희생적인 성격을 이용하도록 지시했죠. 정말 머저리 같은 여자였습니다. 자기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고서도 작전을 감행, 그것도 모자라 타인을 위해 희생까지 하다니······ 쿨럭!"
윤진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이전석이 다리에 힘을 가한 것이다.
도저히 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역겹고 혐오스러워, 소름이 끼친다.
이전석은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도리어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친놈이로군."
"예. 저는 미쳤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어느새 윤진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기.
허.
이전석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전생에서도 그를 직접 본 적이 있어 어느 정도 미친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모조리 인형으로 개조해 자신만의 정원을 세운 S급 빌런 인형사.
이전석은 생각했다.
실재로 눈앞에서 겪은 인형사의 악의는, 그 악명에 한참 못 미친다고.
"그렇다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이전석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건물 입구.
이전석과 윤진이 들어온 곳.
그곳에, 백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냐 이바노프.
"······제가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그녀가 뭐라 표현하지 못할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그에 이전석이 작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렇게 살기를 흩뿌려대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죠. 뭐, 이놈은 고통에 신경 쓰느라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어 윤진을 내려다본다.
그 또한 아냐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배님···."
사랑, 그리고 우수에 젖은 눈빛.
죄책감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윤진.
그는 그저 한결 같이 미쳐 있었다.
"···정말입니까?"
아냐가 따지듯이,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방금 당신이 하신 말이 정말이냔 말입니다."
아주 잠깐 정적이 감돌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예."
이윽고 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죠? 대체 왜 당신이 수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아냐 씨.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하얀 머리, 오똑한 콧날과 사슴 같은 눈망울, 그리고 옛 궁전의 도자기 같은 목소리까지···.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습니다."
"······."
"하지만 안타깝군요. 당신과 맺어지겠단 제 꿈은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으니···."
"윤대리··· 당신은, 미쳤어요."
아냐가 경악 어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눈치.
하긴 그럴 만 했다.
지금 이 상황.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몇 년을 믿고 등을 내줬던 동료가 이런 흑심을 품고 있었다니.
물론 이전석으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안타깝고 하고 할 게 있나. 이미 연인은 5명은 더 넘게 두고 있을 거면서."
아니, 아마 이 시기라면 못해도 10명은 더 있지 않을까?
당연히 윤진은 인정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무슨 소리를······ 제간 아냐 씨밖에 없습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낯짝.
"거짓말도 가관이야."
이전석은 코웃음을 쳤다.
"뭐, 시체가 연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
시체.
그 말에 윤진이 입을 다물었다.
도리어 아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시체? 그게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입니다. 이놈은 제 마음에 든 여성이 있다면 목을 졸라 죽이고, 그 시체를 밀랍처럼 굳혀서 보관해놓죠."
"대체······."
이전석의 말을 들은 아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표정.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미친 짓을 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하긴 그건 이전석도 마찬가지였다.
미래.
직접 보고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도 좀처럼 믿지 못했으니까.
"···아까도 그랬지만, 당신."
그러다 문득.
윤진이 이전석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제 비밀을 알아낸 거죠?"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이전석이 비웃음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
굳이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미래에서 직접 겪어봤다고?
말해준들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대신이라는 듯, 이전석은 윤진을 도발했다.
"걱정하지마. 네가 죽어도, 그 사람들은 제대로 경찰에 신고해서 유족들에게 돌려주고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도와줄 테니까."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감히! 나의 그녀들을!!"
역린.
굳이 표현하자면 그럴 것이다.
인형으로 만들어진 수십 구의 시체.
그것은 윤진의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착각도 유분수로군. 너의 그녀들이 아니라, 불쌍한 희생자들이겠지."
"이전석!!"
화륵-.
윤진이 길길이 날뛰려던 찰나.
이전석이 재차 발화를 사용했다.
"크아아악!"
윤진은 전신이 불꽃에 지져지며, 차마 귀로 못 들어줄 만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
"전석 헌터님."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김백동이었다.
그도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던 모양.
뭐, 이전석 본인이 부른 거니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만하면 되셨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맡을 테니 헌터님께선······."
김백동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커, 커억···!"
돌연.
윤 진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입에서만이 아니다.
눈, 코, 귀.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핏물.
'설마······.'
일전에도 한 번 본적이 있는 광경에 이전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고독.
틀림없다.
알렉산드로 퍼거슨.
그놈의 짓이었다.
하지만.
'이놈이 화산과 엮여 있었다고?'
윤진.
인형사.
그는 미래에서 화산과 대립점에 서있는 빌런이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가 없었다.
고독이 발동하려 한다는 건 윤진이 화산과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의미였으니까.
렐라나의 잎사귀도 화산에서 받은 걸까?
"이건······."
문득.
김백동이 눈살을 일그러트렸다.
적잖이 당황한 눈치.
아냐도 꽤 놀란 듯 했지만 그뿐이다.
고독에 대해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윤진이 그저 스스로 자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가운데.
"······."
이전석이 한차례 숨을 골랐다.
분명 예상하지 못한 건 맞다.
그러나 딱히 당황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애당초 이런 때를 대비해 김백동을 부른 게 아니던가.
예상은 못했지만, 예측은 했다.
고독.
화산에 그게 존재하는 한, 어디서 언제 또 발동할지 모르니까.
다만.
'이대로 마나조율을 뺏길 순 없어.'
반쯤은 그것 때문에 시작한 싸움이다.
이전석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
그걸 이리 허무하게 날려버릴 순 없었다.
본래라면 곧장 김백동을 설득해 마나로 이루어진 방벽을 펼쳐달라 했겠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전석이 혀를 차며 적단도를 빼들었다.
천살성이 특성을 갈취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살인.
즉- 고독으로 윤진이 죽기 전에 먼저 숨통을 끊을 것.
"팀장님, 뒤처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전석은 그리 말하며 윤진을 들쳐 업었다.
"뒤처리라니··· 헌터님?"
김백동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광폭화를 사용합니다.]
이전석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고독은 기폭제가 되는 수육체에 따라 위력도 달라진다.
일전에는 C, 높아봤자 B밖에 안 됐다.
덕분에 위력도 한참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A.
그중에서도 최상위급 강자.
그쯤 되면 폭발의 위력은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물론.
'죽진 않을 거야.'
바로 근처엔 김백동이 있으니까.
그라면 치명상을 입어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거다.
SS급 헌터를 믿기에 가능한 일.
휘릭-.
이전석이 적단도를 역수로 쥐었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각오 따윈 진즉에 다진지 오래.
"커흑···!"
전신에서 피를 토해내는 윤진.
그의 목덜미에 적단도를 찔러 넣었다.
피가 솟구치며 윤진이 경련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마나조율(S)을 획득하셨습니다!]
뒤이어 떠오른 시스템.
이걸로 목표는 이뤘다.
이전석은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전신에 둘렀다.
최대한 폭발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
문득.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부르는 듯한 음성.
그러나 말이 채 형태가 되어 닿기도 전이었다.
번쩍-.
윤진이 눈이 부실 정도의 섬광을 토해냈다.
그리고.
━━━!!
거대한 굉음.
충격과 폭발.
피 섞인 화염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 ※ ※
[악인을 죽였습니다.]
[세계의 흐름을 크게 뒤바꾼 악인입니다.]
[선업이 '30,000'만큼 증가합니다.]
[악업이 대폭 하락합니다.]
[아냐 이브노프에게 주어진 '자책의 운명'을 비트셨습니다.]
[보상으로 '업상점 무료 이용권(S)'이 주어집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0화
영웅, 그리고 제안
특성에는 개성(個性)이 깃든다고 한다.
영혼- 아니, 정신이라고 해야 될까.
그 사람이 가진 성격이나 가치관, 그리고 사상.
흔히 인격이라고도 부르는 것.
당연히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단순 미신, 혹은 소문의 연장선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였더라.
전생.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잠에 들었을 무렵.
이전석은 자신이 죽인 영혼이 꿈속에서 울부짖는 모습을 발견했다.
바로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처럼 말이다.
━살려줘!
━나를 어떻게 한 거야!
━제발 꺼내줘!!
━으아악-!!
비명이 아우성친다.
불꽃 속에서 울려퍼지는 신음.
이전석은 그걸 가만히 내려다 봤다.
하나같이 익숙한 얼굴들.
처음 회귀하고 죽인 여명회.
영등포에서 죽인 빌런.
은행을 점거했던 놈들과 윤진.
모두 이전석이 죽인 악인들이다.
그들은 새까만 불꽃에 전신이 타들어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도(地獄道).
무간을 보는 듯한 광경.
하지만 이곳은 지옥이 아니다.
심상세계(心狀世界).
적어도 이전석은 그렇게 불렀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쌓아온 경험이 현상화 된 정신적 공간.
수천 년을 무간에서 보낸 이전석의 심상세계는 그곳의 풍경을 고스란히 빼닮아 있었다.
━이전석! 이전서어어억!!
누군가 이전석을 부르짖었다.
불의 바다를 헤치고 달려든다.
다름 아닌 윤진이었다.
그는 전신이 새까맣게 그을린 채, 좀비처럼 메마른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아아아악!!
불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이전석을 지키려는 것처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이전석의 심상세계니까.
그가 왕으로서 군림하는 공간.
고작 특성에 깃들었을 뿐인 개성 따위가 감히 왕을 침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이전석은 윤진을 가만 쳐다보았다.
불꽃에 지져지며 괴로워하는 윤진.
아마 지금쯤 그의 본체도 명계에서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졌겠지.
그래봤자 여기만큼 고통스러운 지옥은 아니겠지만.
쩌적-.
문득 허공에 균열이 갔다.
마치 유릿잔이 깨어지는 듯한 광경.
균열은 점차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쨍그랑-.
이전석의 심상세계를 완전히 깨트렸다.
※ ※ ※
삐- 삐-.
이명 같은 얇은 소음이 들린다.
이전석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침대 옆.
웬 모니터가 한 대 세워져 있다.
바이탈 사인 모니터.
심장박동을 기록하는 장치.
그곳에서 얇은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코끝에선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느껴진다.
병원.
그렇다.
이전석이 누워있는 곳은 병실 침대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보아 일인실 인 것 같다.
'······살았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처음 심상세계를 보고.
이전석은 자신이 또 죽어 무간에 떨어진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이 그건 아닌 듯했다.
'···아직 전생의 버릇을 못 버렸군.'
내심 한숨을 푹 내쉬는 이전석.
그는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을 떠올렸다.
고독의 폭발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
급박한 상황이 되자 전생의 버릇이 튀어나와 버렸다.
어떻게든 특성을 얻어내고자 하는 고집.
아무리 특성을 위해서라지만···.
'꽤 위험한 짓거릴 했어.'
자칫 잘못하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전생에는 머리가 터져도 재생하는 특성이 있었기에 막무가내로 돌진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에게는 뒤가 없었다.
무작정 목숨을 저울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근처엔 김백동과 아냐가 있었고, 때문에 정말 죽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야겠어.'
사람 일이란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이전석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음······."
관절 곳곳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손가락 한 마디.
그조차 움직이는데 고통이 느껴진다.
겉으로 보기에 달리 상처는 없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문득.
누군가 병실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름 아닌 김백동이었다.
그가 손에 든 과일바구니를 침대 옆 탁상에 올려놨다.
여러가지 과일이 든 바구니.
포장을 보니 꽤 비싸 보인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묻는 김백동.
"그럭저럭, 괜찮네요."
이전석이 살짝 위로 솟은 침대에 등을 기대며 답했다.
그러자 김백동이 다행이라는 듯 말을 이었다.
"헌터님께서 갑자기 윤대리··· 아니, 윤진을 들쳐 업고 뛰쳐나갔을 땐 놀랐습니다."
그건 뭐··· 딱 봐도 그런 것 같긴 했다.
고독이 폭발을 일으키기 직전.
김백동의 얼굴은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으니까.
헌데 놀란 건 그만이 아닌 모양이다.
"의사가 놀라더군요."
문득 김백동이 그런 말을 해온 것.
"포션을 혈관에 직통으로 꽃아 넣었습니다만, 그걸 감안해도 회복속도가 비정상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어 링겔을 쳐다보는 김백동.
이전석 또한 그것을 바라봤다.
손등으로부터 시작된 줄이 붉은 액체가 담긴 팩까지 이어져 있다.
의료용 체력 포션.
병원에서 주로 사용하는 아이템이다.
몸에 상처가 없는 건 아무래도 저것 때문인 듯했다.
그래도 여전히 오른손의 저주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살아남으셔서 다행입니다."
그 말에 이전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살려주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김백동의 특성이라면 어느 정도 응급처치가 가능할 테니까.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는 버티리라 생각했다.
실재로 그렇게 됐고.
"그래도 스스로 목숨을 건다는 건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이죠. 이 건에 대해선 협회 전체를 대표해 헌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협회에서도 추후 대대적인 포상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포상.
그 단어에 이전석이 두 눈을 빛냈다.
"이왕이면 고가의 마나증가형 아이템이면 좋겠네요."
윤진을 죽이고 마나조율을 얻었다.
그래도 근본적으로 마나의 총량이 부족하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마나를 늘릴 수 있다면 최대한 늘리는 게 좋을 터.
"가능한 고려해보겠습니다."
김백동이 옅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다만"이라며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그가 뒷말을 이었다.
"헌터님께 죄송하단 말씀도 드리고 싶군요."
어딘가 미안해 보이는 표정.
이전석으로선 의아할 따름이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한단 말인가.
"윤진의 집을 조사 한 결과, 지하에서 성인 여성 12명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헌터님의 말대로더군요. 시신은 모두 피가 빠진 채 인형처럼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김백동이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뒤이어진 한 마디.
"그 사실이 세간에 공개되었습니다."
이전석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 충격적인 사실은 아니었다.
정보의 공개.
그건 당연한 수순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아무래도 김백동도 같은 생각인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물론 숨긴다고 숨겨질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A급 감독관이 시민들을 살해한 사건이니까요. 다만··· 해당 사건이 공개된 후 협회에 수많은 질타가 쏟아졌습니다. 특히 유가족 분들의 항의가 거셌죠."
유가족의 항의.
그야 당연하다.
민중의 방패가 되어야할 감독관이 실은 사람을 죽이고 전시해놓는 사이코패스였다니.
믿음이 흔들릴 거다.
신뢰야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이제껏 협회가 해온 게 있으니 완전히 무너지진 않겠지만.
"길드··· 특히 화산 쪽에서 반응이 좋겠군요."
이전석의 말에 김백동이 수긍했다.
"정확합니다. 사실, 이미 화산측에서 협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한 언론공격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그는 화산이 진실과 거짓 따윈 구분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엉터리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걸 믿는 대중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전부가 그러지는 않을 테지.
협회에 반감이 있는 사람.
이번 일로 가족을 잃은 사람.
그저 멍청할 뿐인 사람까지.
모두가 거짓에 파묻혀 협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시작할 것이다.
"상부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협회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걸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헌터님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상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걸 보시죠."
이어, 제 휴대폰을 내밀어 보이는 김백동.
"헌터님께서 윤진과 싸우던 모습이 온갖 기사나 뉴스, 영상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상황입니다."
그가 보여준 영상의 내용은 실로 간단했다.
이전석이 윤진을 들쳐 업고 달려나가고, 거대한 폭발에 휩싸이는 CCTV 장면.
당연히 그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
└미친; 조금도 안 망설이고 바로 달려가는 것 봐.
└저 정도면 죽은 거 아냐?
└ㄴㄴ 뉴스 보니까 살아 있다고 함. 바로 병원에 이송돼서 치료받았다고 하더라.
└그럼 다행인데··· 대단하다 진짜. 어떻게 저렇게 바로 반응하냐. 나는 절대 저렇게 하라고 하면 못할 듯.
└당신이.이.시대.진정한.영웅입니다.
└아재요. 점찍었다고 띄어쓰기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근데 윤진 저 새끼도 대단하긴 함. 예전에 TV로 봤을 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는데, 뒤에서 그런 짓들을 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ㄹㅇ 소름끼침
└그냥 죽인 게 아니라 방부처리해서 인형으로 만든 다음 전시해놨다며?
└어우 시발. 잘 뒤졌네 개새끼.
━
이전석에 대한 칭찬.
그리고 윤진에 대한 욕설이 댓글에 무수히 달려 있었다.
"저는 이게 협회 상층부에 의한 공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협회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려는 화산이 이런 걸 올릴 리는 없을 테니 말이죠."
당연하다.
그들이 미치면 미쳤지, 협회에 득이 될 영상을 올리겠는가.
반면 협회는 의외로 이미지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또 다른 얼굴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미지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무래도 상부에선···."
그리고.
김백동이 이전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헌터님을 영웅으로 내세워 이번 사건을 무마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영웅.
'확실히······.'
지금 당장 무너진 협회의 이미지를 바로잡기엔 그보다 좋은 수단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
이전석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내 침대 옆 탁상을 쳐다본다.
그곳에 휴대폰이 올려져 있었다.
적단도와 은신자의 코트도 보인다.
아무래도 김백동이 챙겨준 모양.
그 폭발 속에서도 멀쩡할 수 있던 건 아마 김백동의 특성 덕분일 것이다.
스윽-.
이전석이 휴대폰을 들어, 몇 시간 전에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미친놈.
단 한 마디.
발신인은 이지혜였다.
시간으로 보건대,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문자를 보낸 것 같다.
'망했네.'
이전석이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였다면 그저 사건에 휘말렸다며 변명할 생각이었다.
부모님이나 여동생이나.
세간 뉴스엔 그렇게 관심이 없었으니.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보가 퍼지니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이지혜가 보낸 문자를 보면···.
이미 전부 눈치 챘겠지.
당연히 부모님도.
그래서 더 걱정이 됐다.
"······혹시 제가 누워있는 사이에 무슨 일 없었습니까?"
나지막한 어조로 묻는 이전석.
이렇게나 소식이 전해졌고 시간이 흘렀다.
만 하루.
게다가 이지혜의 문자.
아무런 일도 없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김백동이 조심스레 답했다.
"헌터님의 부친과 모친께서 찾아오셨습니다만······. 모친분께서 헌터님의 상태를 보시고 충격이 있으셨는지 쓰러지시는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순간.
이전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쓰러졌다는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김백동이 그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말했다.
"지금은 응급실에 계십니다. 다행이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하니 걱정하진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생명에 지장은 없다.
그거면 됐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일은 헌터님께 면목이······."
"고개 드세요. 제 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이전석이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는 의외로 담백한 눈치였다.
애당초 잘잘못을 따지자면 먼저 윤진을 도발한 이전석의 잘못도 없진 않았다.
때문일까.
그는 굳이 협회나 김백동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작금의 상황을 이용하고자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팀장님께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말입니까?"
"예."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윤진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걸 이용하면 협회의 이미지는 물론, 놈에게 독을 준 배후도 알아낼 수 있겠죠."
"그건······."
김백동이 두 눈을 번뜩였다.
윤진과 관련된 정보.
그에게 독을 넘겨준 배후.
이는 협회에서도 악을 쓰며 찾는 정보였으니.
이번에도 예지특성을 사용한 걸까?
"대신 제가 바라는 건 세 가지입니다."
첫째.
"협회에서 마련해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집."
둘째.
"제 가족을 지켜줄 수 있는 경호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이전석은 적단도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 최고 야장(冶匠)이라 불리는 양인하 장인과 만나뵐 수 있는 기회를 원합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1화
대련 (1)
━양인하 장인과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원합니다.
양인하.
철야공(鐵冶工)이라고도 불리는 대장장이.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를 두고 봐도 그 손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하는, 유명세와 실력을 두루 지닌 최고의 야장이다.
그런 그와 만나게 해달라.
솔직히 그리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다.
김백동은 양인하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으니.
금전적인 부분이 문제긴 하지만···.
SS급인 그가 돈이 부족하겠는가.
앞서 요구한 다른 두 가지?
이 또한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안전한 집과 경호원.
아마 협회 상부에 말하면 큰 반발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협회는 이미지를 가꾸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지만, 그렇다고 양심까지 내버린 귀축집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전석이 건네준 정보.
김백동은 방금 전 병실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며칠 전, 꿈을 꿨습니다.
이전석의 말.
━꿈 말씀이십니까?
━제 예지는 꿈이라는 형태를 통해 발동되거든요. 그 꿈에서 저는 윤진이 화산과 접촉해 모종의 거래를 나누고, 더 나아가 아냐 과장님에게 렐라나의 잎사귀를 먹이는 걸 봤습니다.
━······그럼 헌터님께서 갑자기 윤진과 전투를 벌이신 것도?
이전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윤진이 시민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시간이 없었고, 그렇기에 간단한 위치좌표만을 남겼다.
이전석은 그렇게 설명을 덧붙였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애당초 미래예지다.
한 번 그 특성의 존재를 믿은 이상, 김백동으로선 이전석이 무선 말을 하든 철석같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이 진짜라고 묻느냐면, 의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그만한 폭발을 홀로 감당해내는 사람이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혹시 윤진이 화산과 했다는 거래가 뭔지 아십니까?
이어진 김백동의 물음.
이전석은 미안하다는 듯 멋쩍게 웃었다.
━······으음, 죄송합니다. 이 이상은 잘 기억나지 안 나네요. 아무래도 제 특성도 만능이 아니다 보니.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유용한 정보입니다.
이후.
━감사드립니다, 헌터님.
김백동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대화는 거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윤진이 무슨 거래를 나눴는지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화산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화산이 배후에 있었다니······.'
윤진과 화산과의 거래.
하물며 렐라나의 잎사귀라는 독까지.
'상부가 알면 아주 발작을 하겠군.'
협회와 화산.
그들은 예로부터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으니.
라이벌.
그런 가벼운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원수지간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처음 협회가 창립되었을 당시.
그때만 해도 화산과는 칼부림을 벌이는 일이 적잖게 있었을 정도니까.
물론 연선화가 협회장이 되고선 그것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무리 협회장님이라도 이 사실을 가만 두고 보진 않으시겠지.'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다.
화산에 모종의 제재를 가할 터.
다만.
그렇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화산과 협회 간의 분쟁이 격화될 게 분명했다.
'연합을 처리하기 전까진 섣불리 화산을 자극하진 않으실 것 같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다.
협회와 화산 간의 전쟁.
크던 작든 많은 사람이 죽겠지.
사상자는 헌터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이전석의 말을 들어보면 화산은 진심으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니까.
화산과 뜻을 같이한 길드까지 합하면?
'······내전.'
그래.
이건 이미 내전이나 마찬가지였다.
"후우······."
김백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벽연합보다 더 큰 혼란이 뒤에서 암약하고 있었다니.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것 같다.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꼬리가 밟혀 최대한 몸을 숨기는 것 같지만, 여명회도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말 그대로 폭풍전야와도 같은 상황.
자칫 잘못했다간 대한민국 전체가 폭풍의 눈 한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나마 헌터님이 있어서 다행인가.'
김백동이 병원 입구에 선 채 4층을 올려다봤다.
아직 이전석이 입원해 있는 병실.
그가 아니었다면 협회는 화산의 쿠데타는 물론, 개벽연합의 꾀도 눈치 채지 못한 채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천만다행이로군.'
한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팀장님!"
멀리서 박일우가 다가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김백동을 발견하자마자 달려온 모양.
"이전석 헌터님은 좀 괜찮으시답니까?"
그 말에 김백동이 어깨를 으쓱였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시다."
"후, 다행이네요. 갑자기 헌터님께서 윤대리님을 들쳐 업으셨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박일우가 말끝을 흐렸다.
순간.
"박인턴."
김백동이 그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그를 대리라 칭하지 마라."
"아, 죄송합니다···."
김백동은 꽤 화가 난 눈치였다.
따지고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같은 감독관 사이에서 빌런이 나왔다.
그 빌런이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지닌 살인마였고, 그로인해 협회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고 말았다.
이는 팀장인 김백동으로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굴욕이자 치욕이었다.
더불어 여지껏 쌓인 피로 덕분일까.
"오늘은 좀 피곤하군."
SS급인 그가 드물게 피로를 느꼈다.
"그럼 집으로 모실까요?"
"아니, 협회로."
김백동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당장 이전석의 요구도 들어줘야 하는데다, 화산과 관련된 일들도 처리해야만 했으니.
"손철빈 이사님? 예, 다름이 아니오라 화산과 관련된 일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
김백동이 박일우의 차량에 탑승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지막한 시동음과 함께 출발하는 승용차.
병원 뒤.
저물어가는 해가 그들을 배웅했다.
※ ※ ※
김백동이 병실을 나간 뒤.
이전석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잘 넘겼어.'
상황과 정보.
두 가지 모두 큰 의심 없이 넘기는데 성공했다.
김백동이라면 나머지는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그나저나 화산이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
설마 그들이 윤진과 얽혀 있을 줄이야.
이전석도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다.
그야 따지고 보면 당연한다.
이전석이 미래에서 되돌아왔다곤 하나,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던 건 아니니까.
김백동과 주고 받았던 정보?
그런 게 있을 리가.
애당초 그와는 여명회에 한해서만 잠시 협력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박일우가 죽었다는 등 쓸데없는 담소를 나누긴 했지만, 결국 이전석은 협회에 섞일 수 없는 외부인이었다.
용병조차 아닌 완전한 타인.
김백동으로선 협회의 실점을 굳이 이전석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전석 본인조차 그때는 여명회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현재 이전석이 당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미친놈.
이지혜로부터 도착한 문자 한 통.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전석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곳곳이 삐걱이고 아팠지만 움직이는데 문제는 없었다.
수액걸이를 끌며 엘리베이터를 탄다.
1층 응급실.
환자들 사이를 지나쳐 그곳으로 향했다.
살짝 커튼이 쳐진 자리.
가까이 다가가자 한유리가 보였다.
손등에 링겔을 꽂은 채 잠들어 있다.
안색이 파란 게 많이 놀란 모양.
그리고 바로 옆에는 이지혜도 있었다.
"······오빠?"
뒤늦게 이전석을 발견한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이전석은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는?"
"···잠깐 바람 쐬러."
"그래."
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이전석은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과라도 해야 할까?
······그래야겠지.
이번 건은 명백히 제 잘못이다.
숨기려면 확실히 숨겼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적당한 시기, 적당한 때.
헌터가 되었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털어놓으려고 했던 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오히려 걱정만 끼치고 말았으니.
"오빠."
문득.
이지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조금 관절이 쑤시는 것만 빼면."
"···그래? 그럼 다행이네."
다시 침묵이 주변을 맴돌았다.
이윽고.
한유리를 힐끗 흘겨본 이지혜가 돌연 커튼을 젖히며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해."
자리를 벗어나 어디론가 향하는 이지혜.
그녀를 따라 이전석도 걸음을 옮긴다.
비교적 사람이 드문 복도.
"협회에 감독관으로 들어간 거야?"
"임시로. 2달 뒤에 나올 예정이야."
"왜 말 안했어?"
"······."
"오빠 다친 거 보고 엄마가 쓰러지셨어."
흡사 따지듯이 말하는 이지혜.
그녀는 몹시 화가 난 듯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슬퍼도 보였다.
"그리고··· 이거."
이지혜가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냈다.
"필요 없어."
그러곤 대뜸 이전석에게 떠민다.
"이건······."
이전석이 봉투를 받아 펼쳐보았다.
안에는 오만 원권이 잔뜩 들어 있었다.
며칠 전.
그가 이지혜에게 준 용돈.
전부는 아니지만, 쓰고 남은 걸 도로 가져온 것 같았다.
"엄마가 쓰러지고, 응급실로 옮겨지고···."
한껏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 이지혜.
"오빠도 봤어. 몸이 새까맣게 타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김백동이 응급처치를 했다고 들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라고 안심 시켜줬다.
새까맣던 몸도 금세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런데도 무서웠다고.
이지혜는 그렇게 말했다.
"그 돈, 오빠 목숨값이란 거 알았으면 안 받았어."
이지혜가 입술을 앙 깨물었다.
눈가에 눈물이 글썽였다.
이전석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머지 돈은······ 나중에 알바비 들어오면 다시 돌려줄게."
이윽고 이지혜는 그런 말만을 남긴 채 응급실로 돌아갔다.
이전석은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메마른 웃음만을 흘릴 뿐.
'······업보로군.'
가족을 위한다면서 정작 가족의 마음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이전석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손등의 링겔을 뽑았다.
피가 흘렀으나 곧 아물었다.
포션의 효과다.
이젠 더 맞아봤자 의미가 없었다.
그 길로 병실로 돌아가 코트와 적단도를 챙겼다.
그리고 다시 응급실로 향했다.
"···왜?"
이지혜가 눈가를 닦으며 이전석을 쳐다봤다.
어딘가 뾰루퉁한 얼굴이 왠지 모르게 미안했다.
이전석은 돈봉투를 재차 이지혜에게 내밀었다.
"······필요 없다니까."
애써 거절하는 여동생의 모습.
이전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걱정하지마. 목숨값 아니니까."
"······."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인 이지혜.
그녀에게 손수 돈봉투를 쥐어준다.
그러곤 옆에 살며시 앉았다.
잠시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지혜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헌터··· 그만두면 안 돼?"
"언제는 각성했다고 부러워하더니."
"그렇게 위험할지 몰랐으니까······."
이전석이 이지혜를 힐끗 쳐다봤다.
이내 곤히 잠든 어머니를 바라봤다.
'위험할지 몰랐다라···.'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가진 생각이다.
TV를 통해 보여지는 헌터는 연예인처럼 떠받들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덕분일까.
헌터에 대한 실상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루에 몇 명이 던전에서 죽어나가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빌런과 싸우다 전사하는지.
"괜찮아."
이전석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안 죽어. 약속할게."
"······."
이지혜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훌쩍이는 콧소리가 들린다.
이전석은 조용히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이럴 때 어떻게 위로해줘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죽지 않는 것.
고독?
S급 헌터?
아니.
그런 것들은커녕 권좌들조차 쉬이 손댈 수 없는 강함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버릇부터 고쳐야겠지.'
그는 전생의 살인귀가 아니다.
그때와는 가진 특성도 다르다.
막무가내로 몸을 내던지는 방식은 불가능했다.
김백동이나 아냐를 부르는 등.
그런 식의 보험도 언젠가는 한계에 부닥칠 터.
그렇다고 헌터를 포기할 수도 없다.
"······."
잠시 생각을 거듭하던 이전석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삐걱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이지혜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오빠는?"
"누구랑 얘기할 게 좀 있어서."
이지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녀에게 들려주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내 응급실을 나와 옥상으로 향한 이전석.
그가 아주 옅게 심호흡을 한 뒤.
"이제 그만 지켜보고 나오시죠."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말했다.
정적이 맴돌았으나 그것도 잠깐 뿐이었다.
곧 옥상 한 가운데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사이로 피어난 분홍색의 꽃잎.
매화가 소용돌이 치고.
연선화.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협회장님의 취미가 관음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우연히 본 것뿐이란다."
"뭐, 대충 그런 걸로 치죠."
이전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보다······."
이내 그가 연선화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바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헌데 제자가 부르니 안 달려올 수 있겠느냐."
"벌써부터 저를 제자로 보시는 겁니까?"
"제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시정하겠느니라."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전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제게 당신이 가진 모든 걸 알려주십시오."
허.
연선화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실로 뻔뻔한 제자로구나."
모든 걸 알려달라.
그건 연선화의 모든 걸 빼앗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녀가 여지껏 쌓아올린 경지.
검술과 기술과 열정.
그 모든 걸 갈취하겠다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연선화는 어딘가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거운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 원한다면······ 어디 한 번 가져가보려무나."
스릉-.
허리춤을 빠져나온 도 한 자루가 이전석을 가리켰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32화
대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