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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0화

역제안

━명계의 삼도천 가장 밑바닥에서 주운 단도입니다. 시간이 꽤 오래 흘렀는지, 날이 전부 빠지고 색도 잃어버려 단지 도의 형태만을 지닌 철덩어리가 되어버렸죠.

━개인적으론 연금술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오크의 썩은 피를 더 추천 드리는 바입니다만······.

망가진 적단도.

그것을 구매하자 토요토가 내뱉은 말이다.

그러나 이전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이거면 돼.

━음···. 고객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토요토는 딱히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전석이 이걸 선택했는가.

그저 신사 모자를 한 손으로 잡은 채 고개를 숙일 뿐.

━그럼 다음에 또 이용해주시길.

이후 그는 찢어진 차원 너머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이전석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는 집안.

방으로 들어간 이전석이 단도를 꺼내들었다.

30cm정도의 작은 도.

색이 바랜 듯 어색한 외관.

뭉툭한 날을 보고 있자니 무기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토요토의 말 대로다.

이건 단순 철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걱-.

이전석이 단도로 손바닥을 그었다.

그러자 날을 따라 베어지는 피부.

뭉툭한 외관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새빨간 핏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피가 물처럼 흘러 단도의 날을 적신다.

상처는 어느새 깨끗하게 아물어 있다.

변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단도가 피를 흡수하듯 새빨갛게 물들고, 뭉툭했던 날이 예리하게 변했다.

[적단도가 주인의 피를 흡수합니다.]

[적단도가 본래 모습을 드러냅니다.]

실로 기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으나.

"······오랜만이네."

이전석은 도리어 반갑다는 양 날을 쓸어내렸다.

[적단도(A)]

상태창을 보자 이름이 바뀌어 있다.

적단도

등급 : A

공격력 : 500

효과 : 흡수한 피만큼 강화되는 단도. 사용자의 피를 흡수할 시 본모습을 드러낸다. 현재는 시간의 풍화로 능력을 대다수 잃어버린 상태다.

'등급이 낮아졌군.'

A.

절대 낮은 등급은 아니다.

그러나 적단도의 본래 등급을 기억하는 이전석으로선 그조차 낮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SSS에서 A로 떨어질 줄이야.'

그렇다.

적단도의 본래 등급은 SSS.

세계에 몇 자루 존재하지 않는 명도다.

그리고 살아생전.

지옥에 떨어지기 전.

이전석이 무엇보다 애용하던 무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지금, 다시 이전에게 되돌아왔다.

이유는 모른다.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토요토는 말했다.

삼도천 가장 밑바닥에서 주운 단도라고.

"···이해할 수가 없군."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적단도는 앞서 말했듯 이전석의 애검이다.

살아생전 사용했던 무기 중 하나.

당연히 저승- 그것도 삼도천에 있을 물건이 아니다.

이전석은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몰려오는 헌터들.

전신을 관통하는 칼날.

쏟아져 내리는 핏물.

목숨이 미약한 촛불처럼 끊어져가는 와중에도 오른손에 꽉 쥐고 있던 적단도.

그게 삼도천에 떨어진 채 방치되고 있었다고?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이해는커녕 납득도 되지 않는다.

누군가 옮겨놓기라도 한 걸까?

옮겨놨다면 대체 누가?

저승사자?

염라대왕?

천계의 사자들?

그들이 적단도를 굳이 삼도천에 빠트려놓을 이유가 있나?

의문점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적단도는 미래의 물건이다.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명도.

이전석은 생각했다.

'그게 왜···.'

이 시간대에 존재하는 걸까.

그가 회귀하면서 같이 과거로 되돌아온 걸까?

적단도는 사용자를 기억하는 무기다.

영혼에 각인된 사용자만을 따른다.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반 에고소드.

그게 바로 적단도였다.

그러니.

'나를 따라 저승까지 흘러들어가고··· 과거로 돌아왔다고 하면 이상할 것도 없어.'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그조차 확신은 없었다.

스윽-.

이전석은 적단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익숙한 감각.

묵직하고 서늘한 감촉.

마치 잃어버린 걸 되찾은 느낌이다.

'이유야 어떻든······.'

전생에 사용하던 애검을 되찾았다.

중요한 건 다름 아닌 그것이었다.

등급이 낮아지고 대다수의 능력도 사라졌지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를 흡수하여 강화하는 효과.

서걱-.

이전석이 다시 손바닥을 베었다.

핏물이 날에 들러붙듯 흡수됐다.

[적단도가 피를 흡수합니다.]

[적단도의 공격력이 '100'만큼 증가합니다.]

날 끝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전생에 보던 효과 그대로다.

살짝만 스쳐도 피부가 베여나간다.

하지만 금세 아물어버리는 상처.

적단도만이 가진 특징이다.

이전석의 피로 재련된 적단도는 결코 그를 상처 입히는 일이 없었다.

"···강화는 이 이상 불가능한가."

더 피를 먹여도 공격력이 상승하지 않았다.

아마 이전석이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몬스터의 피를 흡수해야 추가적인 강화가 가능할 터였다.

물론 등급이 낮아진 만큼 그것도 한계가 존재하겠지.

치이익-.

돌연.

적단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어 다시 뭉툭하게 변하는 날붙이.

공격력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색 또한 바래져 회색으로 변했다.

굳이 검집이 필요하지 않은 모습.

이전석은 적단도를 책상에 올려놨다.

'업상인에 적단도···.'

무엇하나 예상하지 못한 것들 투성이다.

'그래도 해야 할 건 변하지 않아.'

빌런을 죽이고 던전 폭주를 막는다.

그로인해 선업을 쌓고.

악업을 줄여 천국에 가는 것.

그게 이전석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우선 헌터증은 발급받았다.

아직 F에 불과하지만 B까지는 금방 올릴 수 있다.

그에겐 미래의 지식이 있었으니까.

영원의 낙인 덕분에 전부 기억하고 있다.

어디서 어떤 빌런이 날뛰고.

언제 던전 폭주가 일어날지.

'그중 가장 신경 써야 할 건 여명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빌런집단.

하지만.

'놈들은 당분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이전석이 노트를 펼치고 펜을 끄적였다.

하얀 노트 위로 심볼이 그려진다.

뱀과 검이 서로 얽힌 듯한 문양.

여명회를 의미하는 심볼이었다.

'백화점 테러를 실패한 시점에서 놈들은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하겠지.'

당연한 일이다.

백화점 테러.

그 계획은 여명회에서도 상위 간부진과 실행인원만이 알고 있던 극히 제한된 정보였으니까.

자연히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터.

'놈들은 치밀한 만큼 극도로 조심스러워.'

그러니 당분간은 배신자를 속출해내는데 온 힘을 쏟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그들보다 그들을 더 잘 아는 존재.

그게 바로 이전석이었기 때문이다.

'여명회는 일단 보류.'

슥-.

이전석이 여명회 심볼에 엑스자를 그었다.

최소 반 년.

놈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전석이 노트에 글을 적어 내렸다.

자잘한 빌런과 던전 폭주.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자신이 죽였던 사람과, 살려야할 사람.

그리고 곧 협회에서 대대적으로 진행하게 될 빌런 소탕작전.

'아마 2개월 뒤였던가?'

그 작전으로 인해 수많은 헌터와 민간인이 목숨을 잃는다.

'협회의 안일함으로 일어난 참극이었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걸 막을 수만 있다면···.

거기서 죽을 사람들을 살린다면.

꽤 많은 선업이 오르지 않을까?

다만 그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선 헌터등급을 최소 C까지 올려둘 필요가 있었다.

'마침 이틀 뒤 영등포에서 미쳐 날뛰는 빌런이 한 명 있군.'

이전석이 되짚은 기억을 그대로 노트에 끄적였다.

빌런의 외형.

인상착의.

사용하는 특성과 기술.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는 시간대.

'당장 할 일은 정해졌어.'

이전석이 노트를 닫았다.

이틀 뒤.

영등포로 가서 빌런을 사냥한다.

빌런은 정도에 따라 살상도 허용됐다.

아마 새로운 특성도 얻을 수 있을 터.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일까?

이전석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머니- 한유리를 마중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그때.

띠링-.

방에 남겨진 그의 휴대폰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전석 헌터님. 저는 헌터협회 빌런 대응 부서의 팀장 김백동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헌터님께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어 연락드렸습니다.

※ ※ ※

김백동.

그는 자신의 부사수인 인턴과 함께 영등포를 찾았다.

이곳에서 이전석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차량을 운전하던 인턴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이전석 헌터···. 거주지역이 은평구였죠, 아마."

"서류에 적힌대로라면."

김백동은 담뱃불을 붙이며 답했다.

창문을 열고 연기를 후, 뱉어낸다.

"왜 굳이 영등포에서 만나자는 건지 모르겠네요."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인턴이 의문을 표했다.

김백동으로선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뭐, 영등포에 볼일이라도 있나 보지."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별 다른 대화는 없었다.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곧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는 인턴.

"근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요금은 내 카드로 결제하고."

차에서 내린 김백동이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며 말했다.

불이 꺼진 꽁초가 돌연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대로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김백동은 멀어져가는 차를 뒤로한 채 정면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갔다.

이곳이 이전석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였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런, 제가 조금 늦었나보군요."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이전석의 모습이 보였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다행이 이전석도 방금 온 모양.

"아메리카노."

"저는 망고라떼로."

두 사람이 먼저 메뉴를 주문했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인 뒤 돌아간다.

"커피를 안 좋아하시나요?"

김백동의 물음에 이전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만, 망고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요."

"그렇군요."

뭐, 사람마다 다양한 취향이 있기 마련.

"그보다"라며 김백동이 말을 이었다.

"문자로 보내드렸던 제안은 조금 생각해보셨는지?"

협회의 감독관이 되어보지 않겠냐는 제안.

김백동은 그가 협회에 들어오면 A급 헌터와 동등한 계약금에, 던전 및 아이템과 관련된 갖은 혜택이 있을 것이라 설명했다.

감독관이 될 인재.

그 정도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이전석은 깔끔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연한가.'

김백동은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아쉬움을 삼켰다.

감독관.

명예와 지위.

모든 걸 가진 직업.

돈도 어마무시하게 벌어들인다.

이것만 보면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직업이다.

물론 그만큼 단점도 존재했다.

바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

일반적인 헌터와는 다르다.

감독관은 늘 빌런과 마주하고, 매년 발생하는 사상자만 수십을 넘어갔다.

고작 한 부서에서 발생하는 사망자만 그 정도다.

아무리 복지가 좋아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 샘이다.

헌터보다 더 위험한 헌터.

그게 바로 감독관이었다.

그래서 김백동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대신 제 쪽에서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안 말입니까?"

갑작스런 이전석의 말에 김동백이 의문을 표했다.

역제안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협회 빌런 대응부서에는 다른 길드나 사무소처럼 용병 시스템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그리 많이 사용되는 시스템은 아니다.

용병이라고 한들 위험한 건 매한가지니까.

똑같은 위험부담.

전혀 다른 봉급과 명예.

용병으로 들어올 바엔 정식으로 입사하게 훨 나았다.

그럼에도 용병이 꾸준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건, 그만큼 빌런 대응부서가 인재부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전석은 말했다.

"빌런 대응부서 용병으로서, 약 2개월 뒤 협회에서 진행하는 작전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순간.

김백동으로부터 살기가 흘러나왔다.

"죄송하지만, 그 정보를 어디서 들었는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어느새 그의 왼손에 쥐어진 검.

커피를 가지고 오던 직원이 깜짝 놀라 넘어진다.

이전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이조차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제겐 예지능력이 있습니다."

"······예?"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1화

미래예지

'이 양반이 먼저 연락해올 줄은 몰랐는데.'

이전석이 김백동을 쳐다보았다.

그와는 나름 면식이 있었다.

미래.

정확히는 전생에 알고 지내던 사이다.

복수에 미쳐 한참 여명회를 쫓던 때.

이전석은 우연히 김백동과 마주쳤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안면을 트게 됐다.

'원래는 천천히 등급을 올릴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바로 김백동의 존재 때문이다.

그가 가진 권한이라면 F급인 이전석도 용병으로서 팀에 합류시킬 수 있을 터.

그렇게 되면 더 놓은 수준의 빌런이나 던전은 물론이고 협회에서 주최하는 대규모 작전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전석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예지라는 단어로 포장하며 김백동에게 역으로 제안을 건넸다

※ ※ ※

"제가 본 미래에서 협회는 빌런소탕 작전을 진행하다 약 420명가량의 사상자를 발생시킵니다. 당연히 그중에는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고요."

"······."

이전석의 말에 김백동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현재 작전에 참여하기로 예정된 헌터는 254명.

즉.

그 배에 해당하는 민간인이 사망한다는 소리다.

"김백동 씨도 그곳에서 팔 한 쪽을 잃습니다."

김백동이 본능적으로 제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전석의 눈빛에 무심코 움츠러들고 말았다.

SS급 헌터인 그가, 이제 막 헌터가 된 사람에게 압도되고 만 것이다.

'······어이가 없군.'

내심 헛웃음을 집어삼킨 김백동.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헌터님의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

"하지만"이라며 이전석이 말을 잇는다.

"증명할 순 있죠."

"그게 무슨······."

"5분."

이전석이 다섯 개의 손가락을 펼쳤다.

"정확히 5분 뒤, 기상청에서 지진 경보를 보낼 겁니다. 진도 5, 발생지는 인천입니다."

김백동이 이전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탁한 동공을 마주본다.

거짓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눈빛.

확신에 들어찬 표정이 도리어 김백동에게 의아함을 자아냈다.

"만약 그게 거짓이라면······ 저는 헌터님을 범죄자로서 협회로 연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가 유출됐다.

협회에서도 상위 간부진들에게만 알린 기밀이.

쉽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상관없습니다."

그럼에도 이전석은 너무도 당당했으니.

곧 5분이 지났다.

김백동은 휴대폰을 확인했고-.

우웅-!

귀신 같이 알람이 울렸다.

기상청에서 문자가 도착한 것.

그 내용 또한 이전석이 말한 대로다.

'정말 예지 능력이 있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별에 별 능력과 각성자를 봐온 김백동이지만, 그런 그조차 시간과 관련된 특성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미래를 예지하는 특성이라니···.

오히려 믿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김백동의 의심과는 별개로 이전석은 전생에 있던, 누구나 알법한 굵직한 일들을 예지라는 포장지를 덧씌워 알려줬다.

그리고 그것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아 떨어졌으니.

"정확히 3분 뒤, 이곳에서 거대화 특성을 지닌 빌런이 날뛰기 시작할 겁니다."

이전석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만약 그의 말- 아니, 미래예지가 진짜라면.

'세상의 판도가 변할 거다.'

빌런과 헌터의 대립.

정부와 협회의 관계.

길드와 사무소, 그 외 무소속 헌터들 간의 다툼.

그 모든 게 변하고 말 것이다.

그것도 이전석- 아니, 그가 소속된 단체에 이로운 방향으로.

"······."

"······."

입을 다문 두 명의 사내.

주변 사람들도 김백동이 발하는 기세에 차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

그저 시계 흘러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꿰뚫고 들어올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백동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3분.'

약속한 3분의 시간이 지났다.

"이전석 씨······."

김백동이 입을 연 찰나.

콰앙-!

돌연 큰 폭발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김백동은 꽤 당황한 표정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영등포 한 거리.

몬스터를 연상케 하는 5미터의 거대한 남자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다.

큼지막한 덩치로 보아 능력은 아마 거대화.

이전석이 말했던 것과 똑같다.

상황, 인물, 능력.

그 모든 게 일치한다.

'······황당하군.'

김백동이 이전석을 훑어보았다.

여전히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전석이 그런 증거들을 보여줬으니.

"이걸로 예지에 관한 능력은 증명됐을 거라고 생각하고······."

문득.

이전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검 한 자루를 품에서 꺼낸다.

뭉툭한 날의 회색 단도.

"면접은 저놈을 제압하는 걸로 보면 되겠습니까?"

이전석이 마치 허락이라도 구하려는 것처럼 나지막이 물어왔다.

김백동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석의 기세에 위압되었기 때문일까.

분명 그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새까만 피를 모아 쏟아넣은 듯한 눈빛.

단순 특성의 영향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이질적이며 기괴하다.

그러나.

김백동이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홀로 C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아냐 이바노프에게 추천받을 정도의 재능.

그걸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미래예지가 가능한 특성에 뛰어난 전투실력······.'

만약 이 모든 게 진짜라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

놓쳐선 안 될 인재다.

아니.

단순 인재에서 그치지 않는다.

보석.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다이아몬드.

"그럼."

이전석이 날에 손을 베며 카페를 나갔다.

이윽고.

김백동은 이전석이 가진 진가를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 ※ ※

영등포 거리 한 가운데.

5미터의 거구가 미쳐 날뛰고 있다.

"사, 살려줘!"

"꺄아악!"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비명.

이전석이 적단도로 손을 그었다.

피가 흩뿌려지며 단도가 변한다.

뭉툭했던 날이 예리하게 서고, 짙고짙은 피색으로 물든다.

그것을 한 손에 쥐어든 이전석.

그가 거구의 빌런을 막아섰다.

"뭐냐, 너어!"

덩치만큼이나 둔탁하고 커다란 음성.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적단도를 쥔 채 자세를 잡을 뿐.

"헌터!"

그때.

빌런이 괴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양팔을 크게 휘둘러 왔다.

"주거어!!"

특성의 영향일까.

말투가 꽤 어눌해져 있다.

후웅-!

이전석은 재빠르게 공격을 피했다.

양쪽 위에서 대각선으로 들어오는 주먹.

그것을 가랑이 밑으로 지나며 회피한다.

속도가 느린 건 아니지만···.

'덩치가 커서 빈틈이 훤히 보이는군.'

어눌한 말투만큼이나 지능도 낮아진 걸까.

놈의 뒤로 돌아간 이전석.

탓-.

그가 땅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180도, 유연하게 회전하는 몸.

마치 허공을 딛고 거꾸로 선 듯 왼손으로 빌런의 머리를 짚는다.

그리고.

화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크아아악!!"

비명이 귀청을 뚫고 들어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발화가 순식간에 녀석을 집어삼켰다.

"아파! 아파아!!"

그러자 빌런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후웅-.

동시에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몸이 중심을 잃고 넘어간다.

이전석은 당황하지 않고 몸의 각도를 미세하게 비틀었다.

정면.

빌런과 이전석의 시선이 마주친다.

시간이 멈춘 듯 짧은 찰나의 순간.

이전석이 오른팔을 움직였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서걱-.

적단도로 녀석의 목을 벤다.

허공에 그어지는 새빨간 실선.

마치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피.

이전석은 발화로 쏟아지는 핏물을 걷어내며 침착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재빨리 거리를 벌린다.

그런데.

'···이상하군.'

이전석이 표정을 찌푸렸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바로 빌런의 모습 덕분이다.

"아파아! 아프다고!!"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는 빌런.

마구잡이로 주변을 때려 부순다.

아스팔트 도로가 뒤집어지고, 길고양이의 사체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틀림없이 목을 베었다.

그것도 동맥을 말이다.

금방이라도 죽어도 이상할 게 없건만, 녀석은 쓰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오히려.

'상처가 아무는군.'

불꽃에 재가 되어 사라진 머리칼.

찢어진 근육과 검게 불탄 피부.

그것들이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한 것.

불꽃 속에서 죽지 않고 끊임없이 재생하는 빌런의 모습은 실로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무간지옥에 떨어진 죄인을 보는 듯하다.

이 또한 거대화가 지닌 효과 중 하나인 걸까.

오우거 만큼 재생력이 뛰어나보이진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빠르게 상처가 아물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어.'

[적단도가 피를 흡수합니다.]

[적단도의 공격력이 '100' 증가합니다.]

한층 더 날카로워진 적단도.

그 위에 발화를 덧붙인다.

열과 날이 서로 맞물리며 살상력을 높였다.

"사람···! 사람을 죽여야 해! 그러면 이 고통도······!!"

빌런이 괴상한 말과 함께 주변을 살폈다.

보면 알 수 있듯 꽤나 정신이 나가 있다.

물론 이전석과 같은 종류는 아니다.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니었다.

단지 살인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잊어버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던가.

중요한 건 오직 하나 뿐이었다.

놈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

이전석에게 그는 한낱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서걱-.

이전석이 몸부림치는 놈의 다리를 벴다.

상처에 불꽃이 지져지며 재생을 늦췄다.

반대쪽 다리,

팔과 복부,

무수히 많은 검격이 난도질했다.

"크아악!!"

비명이 바람과 함께 울려 퍼진다.

빌런은 점차 지치는 듯 했다.

당연한 일이다.

특성도 어디까지나 능력.

마나를 활용하는 스킬이다.

그러니 명확한 한계가 있을 터.

무한한 재생은 불가능 할 거다.

반면 적단도는 베면 벨수록 더욱 붉게 물들었고,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졌으니.

[적단도가 피를 대량으로 흡수합니다.]

[적단도의 공격력이 '200' 증가합니다.]

공격력이 어느새 천을 넘어갔다.

서걱-.

한 번의 참격으로 근육과 뼈가 갈라졌다.

이전석은 녀석의 두 발목을 베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빌런은 차마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쿠웅-!

바닥에 쓰러지는 거체.

지진이 인 듯한 충격이 울린다.

부서진 바닥에 핏물이 고이고.

"끄, 으윽······."

거대화된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드디어 능력이 한계점에 달한 모양.

쏴아아-.

그때쯤.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발화는 특별한 불꽃이 아니다.

단지 화상이라는 저주만을 남길 뿐.

그 불길은 소나기를 마주하자 허무하리만치 쉽게 꺼져버렸다.

그리고 새까맣게 그을린 녀석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 살려······."

뒤늦게 이성이 되돌아온 걸까.

빌런이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살려줘···! 나, 나는··· 내가 원해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게······!"

"미안하지만."

이전석은 적단도를 바로 잡았다.

날 끝이 여전히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빌런에게 가져다 댄다.

"내가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라서."

어깨를 으쓱인 이전석.

이내.

푸욱-.

그가 적단도를 내찔렀다.

목을 파고 들어가는 날 끝.

피가 울컥 터져 나온다.

동공이 커졌으나 그것도 잠시뿐.

곧 그의 눈동자가 빛을 잃고···.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거대화(C)를 습득하셨습니다!]

[빌런을 사냥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구하셨습니다.]

[선업을 '3000'만큼 획득합니다.]

[악업이 소폭 줄어듭니다.]

시스템이 빌런의 죽음을 증명하듯 무수하게 나타났다.

이전석은 푸른 창 너머로 비에 젖어 차게 식어가는 시체를 바라봤다.

━내가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라서.

실로 아이러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이전석의 목표는 사후-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선한가 악한가.

그런 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명계는 오직 결과만을 중시했기에.

악행과 선행을 얼마나 쌓았는가.

그저 보이는 수치로만 사람을 판단한다.

결과적으로 악행을 모두 없애고 선행을 쌓는다면, 명계는 이전석을 그 누구보다 선한 의인으로 인정해줄 터였다.

그렇기에 이전석에게 중요한 건 오직 눈에 보이는 결과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전석 헌터님."

문득 누군가 옆으로 다가왔다.

이전석이 뒤늦게 고갤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김백동이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2화

첫 번째 권좌(權座) (1)

"우선, 테러를 막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백동이 고개를 숙였다.

수없이 많은 이들에게 빌런 사냥꾼이라 불리며 존경과 두려움을 산 남자라곤 생각할 수 없는 모습.

그것은 도리어 김백동이 진심으로 이전석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음을 의미했다.

의도나 이유가 어찌됐든···.

"헌터님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민간피해가 발생했을 겁니다. 협회의 감독관으로서 재차 감사드립니다."

이전석이 김백동을 훑어 보었다.

고개를 숙이는 그도 정작 온몸이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김백동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신과 피.

이전석이 빌런과 싸우는 동안, 그도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 발빠르게 현장을 돌아다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이 양반도 어지간히 정직한 사람이었지.'

착하다고 해야 될까?

말하기 애매한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다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시죠."

김백동의 물음.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사람은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주변정리는 경찰에게 인계했다.

카페에선 깨진 유리컵과 음료 값을 지불하곤, 이전과 똑같은 메뉴로 재차 주문을 넣었다.

"아, 알겠습니다···."

알바생일까.

여성이 긴장 어린 모습으로 말했다.

갑작스런 빌런의 등장.

그리고 이를 해결한 두 사람.

떠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반면.

"김백동 감독관님! 잠시 인터뷰 가능하겠습니까?"

기자들은 겁도 없이 다가왔다.

커피도 안 시킬 거면서 무턱대고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마이크를 들이대는 꼬라지.

이전석에게도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협회소속 헌터냐.

언제 각성했냐.

등급은 어떻게 되냐.

그들을 보며 이전석은 생각했다.

이 시대의 기자들도 어지간히 머리가 비어 있다고.

"자세한 인터뷰는 협회를 통하셨으면 좋겠군요."

결국 참다못한 김백동이 말했다.

기세를 한껏 퍼트린 영향일까.

"아, 알겠습니다···."

"저희가 실례한 것 같네요, 크흠."

기자들은 어깨가 움츠러든 채 카페를 나갔다.

그 사이.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커피 한 잔과 음료 한 잔.

그중 망고라떼가 이전석의 것이었다.

반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김백동.

"일단"이라며 그가 먼저 입을 땠다.

"헌터님께 예지와 관련된 특성이 있다는 건 믿겠습니다."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전석의 말대로 등장한 빌런.

특성 또한 그대로 일치한다.

다만.

"빌런의 시신을 잠깐 살펴봤습니다."

김백동은 의심 어린 눈초리로 말을 이었다.

"몸에 새겨진 검상이 일전 모 백화점에서 발견된 시신의 것과 흡사하더군요. 물론 제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한 가지 헌터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백동이 이전석을 쳐다봤다.

눈빛이 매섭기 그지없다.

이전석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기죽고 말았을, 그런 시선.

"북한산에서 던전 폭주에 휘말리신 것도 미리 예지로 보고 찾아가신 겁니까?"

이어진 김백동의 물음.

이전석은 침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지로 보고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는 걸 알았죠."

회귀했다는 걸 그대로 말할 순 없다.

말한들 믿어줄 리도 없었다.

대신 이전석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꾸며가며 설명했다.

사실 각성을 한지는 조금 됐다는 것.

다만 예지라는 능력을 선뜻 말하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

그리고.

"제가 본 광경을 남 일이라며 방치하기도 힘들더군요."

뻔뻔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거짓을 늘어놓는 이전석.

얼굴에 가면을 쓰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일이다.

다행이 김백동도 눈치 채지 못한 모양.

"그래서 혼자 그 위험한 곳에 찾아가셨다는 겁니까?"

나지막한 그의 물음에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백동이 황당 어린 눈빛을 띠었다.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론 죽지 않았죠."

"단순 결과만 따지기엔···."

불확정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각성한 건 예지능력만이 아니었으니까요."

김백동의 말을 끊듯이 이어진 말.

김백동은 적잖게 놀라고 말았다.

'···듀얼 각성자.'

내심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아무리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런 움직임은 말이 안 됐으니까.

게다가 그 검붉은 불꽃.

헌터시험에서의 경우까지 고려하면 최소 3개, 많으면 4개까지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 있었다.

미래예지, 불꽃발화, 전투특화.

그리고 언데드와 관련된 특성까지.

'어이가 없군.'

김백동이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정말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보통은 하나도 가지기 힘든 게 특성이다.

두 개도 극히 찾아보기 힘든데다, 세 개의 특성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네 개라니.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최소 S급까진 올라올 인재다.'

미래예지만 고려해서 그 정도다.

전투적인 측면까지 생각하면 SS까지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한 빌런을 압도하던 그 모습.

김백동은 사람들을 구하면서도 이전석으로부터 시선을 때지 못했고, 아주 잠깐이나마 그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전율했다.

소름이 돋았다.

미래예지와 뛰어난 전투적 재능.

이건 단순히 인재라는 영역을 넘어섰다.

이전석.

그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달리 가공이 필요하지 않은 보석.

검붉게 물든 탁한 빛깔의 다이아.

만약 세상이 그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발작이라도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전석을 가장 돋보이게 만드는 건 미래예지나 다른 여타 특성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스스로 타인 구하고자 하는 이타적인 영웅심.

그것이 김백동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다.

'······사람관상은 믿을 게 못되는군.'

김백동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전석의 무미건조한 눈빛.

특성의 영향일거라곤 진즉에 예상했지만, 이렇게 직접 눈을 마주하고 얘기하니 감상이 남달랐다.

그리고 내린 결론.

'반드시 포섭해야 해.'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대한 곁에 두어야 한다.

"일단 예지능력에 관해선 비밀로 부치도록 하죠. 밝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거기까지 말한 김백동이 뒤이어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헌터님께서 말씀해주신 '420명의 사상자'에 관해선 용병계약을 한 뒤 더 자세하게 들어보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420명의 사상자.

처음 이전석이 언급한 정보다.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는 빌런 소탕 작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어 돌려 말했다.

다행이 알아들은 것일까.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감독관님께 제 능력을 털어놓은 거니까요."

언뜻 보기에 듣기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김백동은 알고나 있을까.

그게 한낱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업을 쌓기 위한 속임수 말이다.

물론 그 사실을 굳이 주절거릴 필요는 없을 터.

이내.

이전석은 김백동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용병계약에 관해선 나중에 다시 연락을 준다고 했다.

이걸로 대충 오늘 할 일은 끝났다.

당분간의 목표나 계획도 마찬가지.

협회에서 대대적인 빌런소탕 작전이 시작되기까지 대략 2개월.

이전석은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힘을 기르고 선업을 쌓아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노을녘.

"다녀왔습니다."

"아들 왔니?"

뒤늦게 집에 들어가자 어머니- 한유리가 그를 반겨주었다.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걸 보니 저녁은 된장국인 듯하다.

"아버지랑 지혜는요?"

"그이는 회식 때문에 늦는다고 하고, 지혜는 친구들이랑 먹고 온다더구나."

"도와드릴게요."

"혹시 엄마 몰래 잘못이라도 했니?"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이전석의 효(孝)에 한유리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냥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얘도 참."

기분 좋은 듯 호호 웃는 한유리.

이전석이 손을 씻고 손을 거들었다.

요리는 못하지만 자르는 건 잘했다.

"어머."

손쉽게 고기와 채소를 자르는 이전석의 모습에 한유리도 적잖이 놀란 듯 했다.

"엄마 도와준다고 연습이라도 했나봐?"

"그냥······ 음, 유튜브 보면서 조금요."

이전석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사람을 썰며 배운 칼질이라곤···.

'말 못하지.'

말한들 믿지도 않겠지만.

이후 이전석은 한유리와 단 둘이 데이트 같은 저녁식사를 끝내곤 뒤늦게 방에 들어왔다.

'다행이 안 들켰네.'

비교적 깨끗한 옷.

흙먼지도 거의 안 묻어 있다.

피를 안 묻히려고 싸우는 도중에도 얼마나 애를 썼던지.

다행이 지금 그 덕을 봤다.

'헌터에 관한 건 당분간 비밀로 하자.'

알면 걱정할 게 뻔 하니까.

부모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기껏 돌아온 과거.

이 집만은 늘 평화로웠으면 한다.

물론 언젠가는 밝혀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럼······."

이내 침대에 걸터앉는 이전석.

"상태창."

그가 자신의 정보를 불러왔다.

빌런을 죽이고 얻은 특성.

이젠 그걸 확인해볼 차례였다.

※ ※ ※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

김백동이 차에 올라탄 직후.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인턴이 말했다.

그것도 잠시.

그가 김백동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경찰측에서 조사한 빌런의 인적사항입니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서류.

아무래도 인턴인 그도 김백동 못지않게 밖을 돌아다니고 있던 모양.

하긴 그만한 소동이 일어났는데 감독관인 그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김백동이 서류를 훑어보았다.

김만식.

42세.

남자.

2년 전 각성해 헌터가 되었으나, 사용할 때마다 지능이 떨어지는 특성 덕분에 제대로 된 활동도 하지 못하고 은퇴.

이후 수천에 달하는 빚에 허덕이며 현재에 이르렀음.

또한 환각이나 환청 등, 갖은 정신이상 증세로 수년 간 약 처방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됨.

범행동기는······.

'정신이상으로 인한 우발적 폭주인가.'

지능이 낮아지는 특성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해당 빌런과 이전석 헌터의 접점은?

"없습니다."

김백동의 물음.

인턴이 고개를 젓는다.

빌런과 짜고 친 건 아닐까 생각해 조사를 시켰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던 모양.

"혹시 몰라서 이전석 헌터의 과거행적을 다시 조사해봤습니다만, 꺼림칙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말에 김백동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다는 건 정말 예지라는 거군···.'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만 하는 상황.

"그보다 이야기는 잘 끝내셨나요?"

한참 서류를 살펴보고 있을 때.

인턴이 나지막이 물음을 던졌다.

아마 이전석과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대충."

김백동은 짧게 대답했다.

"아마 네 후배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오?"

"뭐, 금방 사라질 후배 같다만."

"후배가 생기면 생기는 거지 사라지는 건 또 뭐람."

후배라는 단어에 한껏 기대심을 부풀렸던 인턴.

그가 곧 이어진 말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용병으로 잠깐 들어온다는 이야기지."

김백동은 그리 말하며 서류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투박한 착신음이 울리고.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협회장님."

"헉···?!"

협회장.

그 단어에 인턴이 깜짝 놀라 허리를 바로 새웠다.

무려 한 기업의 정상이다.

그것도 한국 최초의 SSS급 헌터이자, 세계에서도 유명한 강자.

마치 군대 사령관을 마주한 것 같은 상황.

그러나 김백동은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그래. 백동이는 잘 지냈고?

"예. 잘 지냈습니다."

━네가 먼저 전화를 할 줄은 몰랐는데. 혹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그건 아니고··· 협회에 영입하고 싶은 헌터가 생겨 연락드렸습니다."

━흠? 그건 백동이 네가 가진 권한으로도 충분할 텐데?

"확실하게 가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 정도의 인재란 말이냐?

"예."

━네가 그렇게까지 확신할 정도라니······ 나도 궁금해지는구나.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김백동은 "그래서"라며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협회장님께 인재영입과 관련해서 이사급 권한을 받고 싶습니다."

예지에 관련해서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전석을 영입하기 위해서라면 최소 이사급 권한이 필요했다.

적어도 김백동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백동아. 아무리 나라도 그런 권한을 쉽게 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예."

━그럼 어디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보려무나. 네가 영입하려는 헌터가 우리 협회에 있어 얼마나 이득이 되고 유용한 인재일지.

추궁하는 듯한 협회장의 말.

충분히 예상하던 상황이다.

연선화.

여성으로서 최초로 협회장 자리에 오른 그녀는, 세상에 몇 없는 SSS급 헌터로 검선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런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인가.

김백동은 그 정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제가 말하고 싶은 헌터는 최근 헌터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한 이전석 헌터입니다."

그는 침착하게 협회장을 설득하기 위한 말을 이어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3화

첫 번째 권좌(權座) (2)

거대화

등급 : C

효과 : 몸을 거대화 시킨다. 마나를 제외한 모든 스탯이 '50'만큼 증가하며, 반사신경과 동체시력 같은 신체능력도 대폭 증가한다. 다만 거대화를 사용할 시 뇌기능이 크게 하락한다.

이전석은 거대화의 효과를 훑어봤다.

과연 예상한 그대로였다.

모든 스탯이 50만큼 상승.

그 외에도 신체능력 증강.

얼핏 보면 준B급이나 다름없는 효과다.

다만.

'뇌기능이 하락한다는 게 문제로군.'

심각할 정도의 디메리트.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영등포에서 거대화를 사용해 난동 부리던 녀석을 생각하면······.

'이건 못 써먹겠어.'

아무리 힘이 세도 지능이 짐승 수준으로 낮아지면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부분사용으로 단점의 폭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 그런 식의 응용은 불가능하겠지.'

이전석은 확신했다.

그게 될 리 없다고.

영등포에서 전신 거대화를 사용해 날뛰던 빌런.

부분 사용이 가능했다면?

애당초 녀석이 그렇게 사용했을 것이다.

몬스터 같은 형태로 날뛰지도 않았겠지.

'음······.'

거대화.

이 특성을 어떡하면 좋을까.

━대략 3천의 선업을 대출받을 수 있으시겠군요.

문득, 토요토의 말을 떠올렸다.

특성을 담보로 선업을 받는 것.

거대화도 일단 C급의 특성이다.

대출을 받으면 3천에 해당하는 선업이 들어올 거다.

하지만 과연 그게 최선일까.

이전석은 스켈레톤 워리어를 떠올렸다.

만약 녀석에게 거대화를 줄 수 있다면?

안 그래도 낮은 지능.

단점은 사라지고, 스탯 증가라는 장점만이 남게 된다.

특성의 이전.

불가능하진 않을 거다.

애당초.

'천살성의 능력부터가 이미 '이전'이나 다름없어.'

그저 '빼앗는다'라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전이라는 점에서 보면 천살성도 이전석이 생각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떠오른 생각 한 가지.

빼앗을 수 있다면-.

주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정확히는.

'갈취가 아니라, 부여에 해당하는 특성이 있을 거야.'

이전석은 전생의 기억을 뒤져봤다.

아쉽게도 그런 특성을 가졌던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이전석이 기억하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토요토."

이전석은 업상점을 사용했다.

대기라도 하고 있던 것일까.

"부르셨습니까, 고객님?"

마치 손으로 잡고 찢어지듯 갈라진 허공.

신사 모자를 쓴 토끼가 깡총 튀어나온다.

"특성을 위주로 물건을 좀 보고 싶은데."

이전석이 토요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번에 그가 상점을 보여줬을 때, 판매 목록에 특성도 적잖게 보였다.

이전석은 혹시 그중 '특성의 이전'과 관련된 게 있지 않을까 싶어 토요토를 부른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삼도천 밑바닥에 있던 적단도까지 주워 다 팔 정도로 알뜰살뜰한 토끼다.

특성의 종류라면 샐 수 없지 많겠지.

"얼마든지."

예상대로.

토요토가 고개를 끄덕인 직후.

눈앞에 창 하나가 툭 나타났다.

[업상점 - 특성]

오직 특성만이 나열된 상점창.

이전석이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그런데.

바람의 길(C) - 4만 업

대담자의 혼(A) - 10만 업

영혼 꽃(B) - 7만 업

드래곤 피어(A+) - 13만 업

신화강림(SSS) - 500만 업

'지랄 맞게 비싸군.'

가장 싼 C급조차 3만.

판매 가격이 대출금의 10배를 넘는다.

심지어 SSS급은 어떤가.

500만.

사람 한 명 구하는데 10밖에 오르지 않던 걸 생각하면 정말 지랄 맞은 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차라리 SSS급 빌런 한 명을 잡아다 족치고 말지···.

스르륵-.

끝도 없이 내려가는 스크롤.

'······없나?'

이전과 관련된 특성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없어도 그렇게 상관은 없었다.

거대화야 대출을 명목으로 토요토에게 팔아버리면 그만이니까.

다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한참 스크롤을 내리던 차.

"음?"

이전석이 유독 특이한 이름의 특성을 하나 발견했다.

아니.

특이하다기보다···.

익숙하다.

[망가진 천살성(E)]

천살성.

몇 번이고 들어본 이름.

하지만 그보다 더 이전석의 관심을 빼앗은 건 '망가진'이라는 단어였다.

자신의 것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망가졌다는 이름부터 등급까지.

하늘과 땅 차이.

마치 기존의 천살성을 그대로 뒤집어 놓은 듯한 특성.

이전석은 바로 효과를 확인했다.

망가진 천살성

등급 : E

효과 : 어딘가 일그러져버린 북쪽 하늘의 별. 본래 천살성과 달리 살인에 의한 충동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특성을 타인에게 빼앗기게 된다.

효과 또한 기존 천살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살인충동이 없고, 특성을 갈취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빼앗긴다.

'대체 이런 건 왜 있는 거야?'

그걸 본 이전석은 어이가 없어졌다.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오히려 독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 지뢰.

거대화도 굳이 따지면 이와 비슷하다.

얻는 이점보다 단점이 더 컸으니까.

비단 거대화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차라리 없는 게 더 좋을만한 특성이 모래알처럼 넘쳐났다.

어째서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가.

이전석으로선 통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아쉽네.'

망가진 천살성의 효과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이전석.

양도가 아닌 갈취.

특성을 주는 게 아니라 빼앗긴다.

그 사실이 참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전석이 원하던 양도와는 정말 한 끗 차이였기에.

"혹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신지."

문득, 토요토가 그리 물어왔다.

이전석은 내심 한숨을 쉬며 답했다.

"특성을 넘겨줄 수 있는 특성을 찾고 있는데."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거라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뒤이어진 토요토의 대답.

직후.

눈앞에 창 하나가 떠올랐다.

특성 양도

등급 : SSS

효과 : 자신의 특성을 타인에게 양도한다. 그 대가로 새로운 특성을 랜덤으로 획득한다.

"이건······."

"고객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정확히 부합하는 특성입니다. 단순 특성을 양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후 랜덤으로 시스템에 의해 특성을 한 가지 획득하게 되지요."

나쁘지 않은 효과다.

특성을 양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특성까지 랜덤으로 얻는다니.

흡사 모바일 게임의 리세마라를 연상케 하는 효과.

그러나.

"120만?"

허.

이전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름 아닌 특성의 가격 때문이었다.

120만 선업.

반면 C급을 담보로 대출받는 선업은 3천.

정말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가격이었다.

그런 이전석의 생각을 읽은 걸까.

"비싸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고객님께서 가진 대부분을 담보로 걸어도 이 특성은 구매하지 못하실 겁니다."

"지금 비꼬는 거냐?"

"설마요."

하하-.

묘한 표정으로 웃는 토요토.

그가 "단지"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게 무슨 뜻이지?"

이전석의 나지막한 물음에 토요토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답했다.

"천살성과 망가진 천살성. 똑같은 두 개의 별.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두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을 때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질지도."

토요토가 의미모를 미소를 짓는다.

외눈 안경이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천살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 안경의 능력인 것 같았다.

"능글맞은 놈이로군."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진 말해줄 수 없고?"

"이 이상은 정보료를 받아야 합니다만······ 적어도 고객님께 나쁜 일이 벌어지진 않을 거라 약속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전석이 푸른 창- 망가진 천살성을 쳐다봤다.

솔직히 말하면 도박이다.

두 천살성의 조합.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저놈의 의도도 꺼림칙하고.'

이전석이 토요토를 흘겨봤다.

어떤 특별한 일.

단순히 좋은 의미로 가르쳐준 건 아닐 거다.

이유는 없다.

증거도 마찬가지.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평소라면 철저히 무시했겠지만···.

'만약 일이 잘못 되도 빠져나갈 길은 많아.'

무엇보다 토요토는 상인이다.

상인은 신뢰를 중요시한다.

고객 한 명 한 명의 믿음을 보물처럼 여기고, 그것을 발판으로 수익을 늘려나가는 것.

그게 바로 상인이라는 족속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놈이 조금이라도 머리가 굴러간다면 지금 이 시점에 통수를 치는 머저리 짓은 하지 않을 거야.'

물론 그렇다 해도 섣불리 결정할 순 없는 일.

이전석은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기껏 주어진 기회이자 인생이다.

그걸 고작 섣부른 판단으로 낭비할 순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길 한참.

이전석은 뒤늦게나마 결정을 내렸다.

"선업을 대출받지. 담보는 거대화."

선업이야 이미 충분히 있지만, 이전석은 굳이 대출을 받기로 했다.

상태창에 표시된 12,050의 선업.

느닷없이 그걸 사용하기엔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의외로 그는 금전적인 부분에서 짠돌이 같은 성향이 강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하하-.

신사모자를 한 손으로 잡고 고개를 숙이는 토요토.

토끼가 저러고 있으니 참 이상했다.

그것과 별개로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특성 거대화를 담보로 업상인 토요토에게 3천의 선업을 대출받습니다.]

[한 달 안에 대출을 갚지 못할 시 거대화가 몰수됩니다.]

한 달.

생각보다 짧은 기간이 주어졌다.

'만 단위로 대출받았으면 거의 무조건 몰수당했겠어.'

이전석은 토요토를 슬쩍 흘겨봤다.

생각보다 영약한 토끼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대출이라지만.

'사실상 사채나 다름없군.'

그 정도로 일방적이며 극단적인 대출.

뭐, 거대화야 갚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으니 대출받은 거지만.

[망가진 천살성을 구매하셨습니다.]

이전석은 시스템을 조작해 특성을 구매했다.

대출받은 3천의 선업 중 2천 4백이 지불되고 6백이 남았다.

"그럼 저는 이만."

일을 끝냈다고 판단했다는 것일까.

토요토가 찢어진 공간 너머로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깡총 뛰어 사라지는 그의 모습.

이전석은 상태창을 눈앞에 띄웠다.

망가진 천살성.

그 효과를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천살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천살성이 망가진 천살성에 반응합니다.]

돌연 이상한 창이 나타났다.

"이건···."

이전석이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눈앞에 시스템이 떠오른 직후.

심장이 유독 크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내면에 존재하는 살의가 꿈틀거린다.

영원의 낙인 덕분에 외부로 튀어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억눌리고 짓눌려 굶주린 살의는 마치 비쩍 마른 맹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이윽고.

[살의가 망가진 파편을 먹어치웁니다.]

[두 개의 별이 융화되기 시작합니다.]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융화.

두 개의 특성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이전석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빛나는 한 개의 별이 다른 희미한 별을 집어삼키고 있음을.

[망가진 천살성이 소멸합니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특성.

동시에, 기존에 존재하던 천살성이 변화를 일으켰다.

[축하드립니다!]

[천살성의 등급이 EX+로 상승하였습니다!]

등급상승.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최고등급은 EX일 텐데······.'

거기서 등급이 더 오른다는 건 이전석으로서도 난생 처음 겪어보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변한 건 등급뿐만이 아니었다.

등급이 올랐으니 효과도 바뀌었을 터.

이전석은 바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천살성

등급 : EX+

효과 : 자신이 죽인 존재의 특성을 랜덤으로 갈취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서 피를 볼 때마다 강한 살인충동을 느끼게 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충동은 더욱 강해지며, 종국에는 이성을 잃고 피와 살육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 자신의 특성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

다른 건 전부 똑같다.

단, 마지막 한 줄.

문장이 하나 추가되었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 자신의 특성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다.]

'놈의 말이 이걸 의미하는 거였나?'

내심 놀란 듯한 이전석의 표정.

그는 토요토의 말을 되새겼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두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을 때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질지도.

과연 그 말 대로였다.

정말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망가진 천살성의 '빼앗긴다'라는 효과가, '양도'라는 형식으로 바뀌어 이전석이 가진 천살성에 생겨난 것이다.

한 달이라는 긴 쿨타임이 있었지만···.

효과를 고려하면 충분히 납득할만한 디메리트였다.

이전석은 곧 바로 천살성의 새로운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했다.

스켈레톤 워리어를 소환해 녀석에게 거대화를 넘긴다.

지능이야 떨어지겠지만 상관없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거대화를 가지면 단순 미끼가 아닌 탱커나 딜러로도 활용할 수 있게 될 테니.

그렇게 소환수를 꺼내려던 찰나.

"누구냐."

벌떡-.

이전석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내려놨던 적단도를 집어 든다.

"······."

조용한 방 안.

착각일까?

'아니, 분명 시선이 느껴졌어.'

이전석은 드물게 긴장했다.

방금 느껴졌던 기묘한 시선.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헌터.

그것도 꽤나 강한 이의 것이다.

스윽-.

이전석이 적단도로 손을 그었다.

단도의 날이 붉게 물드며 예리를 머금는다.

한손에는 불꽃을 피워 올렸다.

다름 아닌 발화를 사용한 것.

동시에 허공에 스켈레톤 워리어가 나타났다.

그것이 이전석을 따라 곡도를 치켜든 채 주변을 경계했다.

'위험해.'

본능이 경종을 울려댄다.

발화는커녕 줄곧 숨겨놓으려 했던 소환수마저 주저 없이 꺼낼 정도로 이전석은 격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때.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단다."

목소리가 들렸다.

꽤나 여리고, 청량한 여성의 음성.

"이걸 눈치 챌 줄은 몰랐는데-."

누군가 있었다.

이전석이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침대, 그 맞은편.

책상 의자에 웬 여자가 앉아 있다.

파도가 흐르듯 매끄러운 청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다.

귀신처럼 창백한 피부에 흑색 한복을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꽃 모양의 큼지막한 비녀를 꽂고 있다.

그리고, 좀처럼 숨길 수 없는 위압감.

"백동이가 말한 대로 재능 하나는 훌륭한 모양이구나."

여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4화

첫 번째 권좌(權座) (3)

갑작스런 여자의 등장에 이전석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온 이전석이다.

전생에는 누구도 그를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그리고 그건 여타 SSS급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온 영향일까.

특성이 사라지면서 감각도 일부 둔해졌다.

'특성에만 의지했던 폐해로군.'

쯧-.

이전석이 혀를 차며 적단도를 바로잡았다.

평범하지 않은 적이다.

강하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싸우면···.

'애매하군.'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진 특성이 너무 적다.

어머니를 지킬 수 있을까?

'최소 SSS급의 강자.'

SS급이던 김백동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눈앞의 여자가 SSS급 강자라는 걸 의미했다.

단 아홉밖에 존재하지 않는 '권좌(權座)'의 주인.

하지만.

'이런 권좌가 존재했나?'

이전석은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권자란 SSS급의 또 다른 이름이자, 개인이 국가를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지닌 초인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전생에서 이전석 또한 권좌의 자리에 올랐고···.

당연히 자신을 제외한 아홉 권자에 대해선 샅샅이 꿰뚫고 있었다.

애당초 그들을 죽인 게 이전석이다.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은 이전석으로서도 본 적 없는 강자였다.

아니면.

권좌에 필적할 정도의 강자가 달리 또 있었단 걸까?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전석이 세상의 공적이 되어서까지도 나타나지 않던 존재가 지금 모습을 드러내다니.

"나쁜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니니 그리 경계하지 말거라."

여자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이전석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살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감정을 숨기는 건 권좌급 강자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이 상황에 경계하지 말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갑자기 집안에 나타난 괴인.

하물며 그 기세는 폭풍과도 같았으니.

"하긴, 그것도 그렇겠구나."

"그럼"이라며 여자가 말을 잇는다.

"이거라면 믿을 수 있겠느냐?"

동시에 품에서 꺼내는 마패 하나.

분홍 끈으로 장식된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오직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협회장?"

그렇다.

협회장.

검선- 혹은 '검의 권좌'라고도 불리는 여인.

연선화.

그녀의 증표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다만.

'이 여자가 검선이라고?'

이전석이 좀처럼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그가 전생에서 본 연선화의 모습은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백발의 노인이 전부였으니까.

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년 후.

하지만 현재 그녀의 모습을 보라.

주름도 없이 뽀얗고 매끈한 피부.

머릿결은 보석처럼 반짝이며 비단과도 같이 부드럽다.

노인이란 단어와는 한참 거리가 먼 모습.

병에 들어 죽어가고 있지도 않다.

아니면, 그 5년 새 병에 들고 노쇠했다는 건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말 당신이 협회장이라고?"

"그럼 내가 무엇으로 보이느냐?"

"······."

젊은 여자.

꽤나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허리춤에 찬, 도 형태의 길쭉한 검.

"우선 멋대로 자네의 집에 들어온 건 사과하도록 하마."

그녀가 청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온화하고 상냥하기 그지없는 어조.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거지만.

'살기가 전혀 없어.'

단순히 상대방을 죽이겠단 의미의 살기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감정.

살의, 분노, 증오, 원망.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일체 느껴지지 않았다.

전생에 잠깐 봤던 연선화와 똑같다.

병상에 누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그녀도 눈앞의 여자처럼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선인(善人).

죄를 무더기처럼 쌓아올린 이전석과 달리, 일평생 선만을 행하며 살아온 사람.

"백동이가 보기 드물게 열정적이라 잠깐 찾아와본 게 전부란다."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듯 말하는 여자.

여전히 믿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믿는 것밖엔 길이 없었다.

"백동이라면··· 김백동 감독관?"

여자- 연선화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아이가 원체 칭찬을 많이 해서 호기심이 동했지. 헌데 보러오길 잘했구나."

전신을 훑는 듯한 연선화의 시선.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악의가 조금도 없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 도리어 이전석에게는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모습에서 옛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쌍한 아해로구나.

전생.

병실에 누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으로 그런 말을 하던 연선화.

그녀는 자신을 죽이러 찾아온 악귀를 동정했다.

모습도, 목소리도, 기세도.

모든 게 다르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양반이 맞군.'

눈앞에 있는 여인은 틀림없는 연선화 본인이라고.

"그래서."

이전석이 적단도를 거둬들이며 물었다.

"만족하셨습니까?"

"충분히 만족했지."

후후-.

연선화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백동이와 용병계약을 하기로 했더라지."

"······예."

이전석이 나지막이 답했다.

혹시 김백동이 예지에 관한 것도 말했나?

순간 불안감이 올라왔지만 잠시뿐이었다.

이전석은 곧 냉정을 되찾았다.

김백동이 그렇게 입이 싼 사람은 아니었기에.

하물며 예지라는 중요한 정보를 상사랍시고 마냥 보고할 만큼 멍청한 사람도 아니었다(예지가 아니라 그냥 지식일 뿐이지만).

다행이 연선화의 눈치를 보니 예지와 관련된 것들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모양.

이전석이 내심 안심하고 있을 때.

"흐음······."

무언가 생각하듯 입을 다물고 있던 연선화가 돌연 당황스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혹, 내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예?"

이전석도 그 말에는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뜬금없이 제자라니?

"물론 협회에 영입하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거라. 제자가 된다고 한들 자네가 협회와 연관되는 일은 없을 게야. 단지 내게 가르침을 받는 것뿐이지."

"······."

이전석은 뭐라 대답하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검선의 제자.

나쁜 제안은 아니다.

연선화의 의도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녀의 검술은 누구나 탐낼만한 것이었으니까.

창천매화(昌天梅畵).

전생에 딱 한 번.

그 검술을 본적이 있다.

우연히 찾은 병원 옥상.

연선화는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주름진 손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걸 보았을 때.

이전석은 감탄했다.

살의 어린 천살성조차 일순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의 검격.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은 천살성이 그녀를 죽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세월을 타지 않는 아름다움은 지금도 또렷이 떠올랐다.

"······고민하고, 다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전석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렇다고 마냥 승낙하는 것도 껄끄러웠다.

검선의 제자.

쉽게 결정해도 될 사안이 아니다.

무엇보다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라 당황스럽기도 했고···.

"상관없단다."

연선화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이내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실례했구나. 혹여 제자가 될 생각이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하거라."

그리고 건네준 명함 한 장.

연선화.

SSS급 헌터.

대한민국 헌터협회 협회장.

그걸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들자.

"······사라졌군."

연선화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매화일까.

의자 위에 분홍색 꽃잎이 남아 있다.

손으로 잡으려 하자 흩어져 사라진다.

먼지처럼 흩날리는 분홍빛 입자.

은은한 꽃내음만이 희미하게 코끝을 맴돈다.

"아들, 밥 먹으렴!"

이내한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석은 고민을 거듭 생각할 틈도 없이 방을 나가야만 했다.

※ ※ ※

달빛조차 흐릿한 밤하늘.

분홍 꽃잎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잔잔한 물살처럼 정처 없이 흩날리는 꽃잎.

그것이 어느 빌딩 위에 내려섰다.

헌터협회 건물 옥상.

휘이잉-.

이내 꽃잎이 수십, 수백으로 분열하며 사방으로 만개하더니.

뚜벅-.

그 사이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청발에 녹안.

마치 꽃잎을 사람으로 깎아내린 듯한 미모.

헌터협회의 협회장인 연선화였다.

그녀를 향해 누군가 다가온다.

새까만 정장.

머리와 눈까지 온통 새까만 남자.

연선화가 그를 힐끗 흘겨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던 게냐?"

"비서니까요."

"비서라도 쉴 땐 쉬어야지. 늘 야근이나 해서야 되겠느냐."

연선화의 따지는 듯한 물음.

남자- 유한설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이라는 듯 물음을 던졌다.

"보고 싶다고 하시던 건 만족하셨습니까?"

보고 싶다고 했던 것.

아무래도 협회를 나오기 전 연선화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잠시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자네는 이만 퇴근하도록 하거라.

물론 퇴근하긴커녕 계속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지만···.

이전석을 떠올린 연선화가 피식 웃었다.

"충분히 만족했지."

"그 말씀은···."

"제자로 삼기로 했단다."

"······!"

유한설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입까지 벌린 게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연선화는 일평생 제자를 두지 않았으니까.

가르침을 원하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막대한 돈.

뛰어난 아이템.

백 년에 한 번 나올법한 재능.

그 무엇도 연선화를 움직이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제자라니.

"그렇게 마음에 드셨던 겁니까?"

나지막한 유한설의 말.

연선화가 점점 밝아지는 달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물러가고 짙어지는 달빛.

"재능이 있었고, 가능성이 보였다. 그거면 된 거 아니겠느냐."

"······."

유한설은 속으로 놀람을 삼켰다.

재능.

지금까지 그녀에게 가르침을 청한 사람들 중, 재능 없던 둔재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유명한 길드의 자제, 혹은 길드장.

헌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

하지만 연선화는 그들 중 누구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각성한지 한 달도 안 된 아해였단다. 그런데도 작정하고 숨긴 내 기척을 알아차리더구나. 압도적 강자를 눈앞에 두고도 당황하지 않았지. 대처도 훌륭했고 가진 특성도 좋았어."

피를 매개로 활성화된 단검.

검붉게 타오르던 불꽃.

갑자기 나타난 스켈레톤.

세상 모든 걸 집어삼킬 듯 공허하고 무기질적인 눈동자까지.

그 모든 게 연선화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도 있었지."

"흥미 말씀입니까?"

"그래."

연선화의 말에 유한설이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연선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옅은 웃음만을 흘릴 뿐.

그녀는 "물론"이라며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제안을 한 것뿐이란다. 그 아해가 반드시 제자가 될 거란 보장도 없지."

"아무리 그래도 협회장님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곤······."

"그리 생각하느냐?"

"예. 검선의 제자라면 누구나 탐낼 법한 자리 아닙니까."

"한때는 자네도 원했었고 말이지."

"그건······."

"뭐, 이제와 들출 생각은 없네. 부끄러운 과거는 부끄러운 대로 넣어둬야지."

연선화가 익살맞게 웃었다.

잘 보면 그녀도 나이에 맞지 않게 어딘가 장난스런 면모가 있었다.

"한설아."

"예, 협회장님."

"시간이 늦었구나. 이제 그만 퇴근하거라."

"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는 건 나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다."

"······알겠습니다."

연선화의 재촉에 유한설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가볍게 인사를 남긴 뒤 옥상을 내려가는 유한설.

연선화는 홀로 남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보는 건 그녀의 몇 안 되는 취미였지만, 오늘은 유독 구름이 많아 그닥 운치가 좋지 못했다.

그래도 연선화는 기분이 좋았다.

이전석.

그만한 원석은 좀처럼 보기 드물었기에.

물론 단순 재능뿐이었으면 그녀가 이전석을 제자로 눈독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재능보다 남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존재감.

그게 연선화로선 흥미로웠고,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도 슬슬 계승자를 남겨야겠지.'

창천매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검술.

'시간이 많지 않은 게 아쉽구나.'

연선화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뒤늦게 옥상을 내려갔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5화

암살자 (1)

연선화가 이전석의 집을 찾아온 뒤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김백동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이전석의 등급이 낮은 게 원인일까.

그의 권한으로도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뭐, 초조해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협회에서 진행하는 대규모 작전까진 시간도 널널했으니 굳이 다급해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집에만 있으랴.

이전석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당장 눈에 띄는 빌런이나 던전 폭주도 없고······.

(그런 게 일상 속에서 쉽게 나타날 리 없으니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전석은 F급 던전을 찾았다.

천살성의 새로운 효과를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허공에 물감을 뿌린 듯한 게이트.

이전석이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잠시."

돌연 누군가가 앞을 막아섰다.

검은 복장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다.

왼쪽 가슴엔 배지를 달고 있다.

꽃나무가 새겨진 배지.

그것은 화산을 의미하는 문양이었고, 남자가 화산길드 소속임을 알려주었다.

"헌터증 제시 바랍니다."

그가 이전석을 가로 막은 채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전석. F급 헌터. 확인되셨습니다."

슬쩍 헌터증을 훑어본 남자가 이내 길을 비켜섰다.

이처럼 협회나 길드에선 던전을 관리하기 위해 헌터를 배치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세간에선 그들을 흔히 입구를 지키는 헌터라 하여 문지기라 부르곤 했다.

"감사합니다."

이전석은 그런 문지기로부터 헌터증을 되돌려받은 뒤 다시 게이트로 들어갔다.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스템이 떠오르며 시야가 일그러진다.

마치 세상이 회전하는 듯한 감각.

곧 빛이 스며들며 시야가 돌아왔다.

던전 내부.

그곳은 나무로 가득한 숲이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보자, 꽉 들어찬 나뭇잎들 사이로 저녁노을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아귀의 낙원(F)에 입장하셨습니다.]

뒤이어 눈앞에 나타난 창 하나.

아귀.

고블린을 뜻하는 이명이다.

즉, 이곳은 고블린이 주로 등장하는 던전이라는 의미다.

등급은 F.

아귀의 낙원

등급: F

내용: 아귀들은 그곳을 낙원으로 여겼다.

내용도 별 다를 게 없다.

의미심장한 한 마디가 적혀 있을 뿐.

'낙원이라······.'

옛날에는 별 생각 하지 않았던 단어다.

하지만 이제 보니 감상이 남달랐다.

명계에서 낙원은 주로 천국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돌연 생겨난 선업과 악업 스탯.

그리고 업상점이라는 특성까지.

시스템과 명계.

둘 사이에 어떤 관계라도 있는 걸까?

'음.'

모르겠다.

의심은 되지만 증거가 없다.

결국 이전석은 생각을 포기했다.

지금 당장 뭐라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애당초 시스템에 표기된 낙원이란 단어가 정말 천국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슥-.

이내 눈앞에서 시스템을 치워버린 이전석.

"소환."

그가 스켈레톤 워리어를 불러냈다.

허공에 거대한 뼈다귀가 형성된다.

척-.

스켈레톤 워리어가 모습을 드러낸 즉시 무릎을 꿇고 고개마저 숙였다.

흡사 잘 훈련된 군인을 보는 것 같다.

이 또한 높은 충성도의 영향일까.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전석이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빛 무리가 꽃가루처럼 흩날렸다.

특성의 사용법이라면 잘 알고 있다.

시스템은 특성을 얻자마자 머릿속에 설명서도 함께 넣어주곤 했으니까.

마치 인간이 초능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건 천살성의 새로운 효과도 마찬가지였다.

회색의 빛이 손을 따라 가슴팍에서 외부로 흘러나온다.

[거대화의 정수.]

뒤이어 눈앞에 떠오른 창.

특성의 근원이라고도 불리는 구체.

이전석도 몇 번 본 적이 있어 그리 당황하진 않았다.

"양도."

한 마디.

시동어가 되는 말을 읊었다.

그러자.

[스켈레톤 워리어가 거대화를 양도받습니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거대화를 획득하였습니다.]

회색빛이 스켈레톤 워리어에게 스며들었다.

담보로 지정된 특성이라고 해도 다행이 소환수에겐 양도가 가능한 모양.

그런데.

[스켈레톤 워리어가 당신의 선물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돌연 녀석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단순 비유법 같은 게 아니다.

실재로 텅 빈 구멍에서 광대뼈를 타고 통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실로 기괴하기 그지없는 광경.

"왕, 이시여··· 감사, 를······."

스켈레톤 워리어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소환수와 소환주의 관계인 탓일까.

이 또한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중요한 건 녀석이 거대화를 얼마나 잘 다룰 수 있냐는 것이었다.

"크륵···."

때마침 나타난 고블린 한 마리.

흉측한 외형을 가진 괴물이다.

신장은 유치원생과 엇비슷하다.

원시인들이 입을 법한 가죽옷을 걸치고 있으며, 한 손에는 제 팔뚝만한 단검을 들고 있다.

"크르륵!"

녀석이 이전석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고블린의 주식은 고기.

그중 인간의 살코기를 가장 좋아한다.

놈은 이전석을 사냥감으로 인식한 듯 타액을 질질 흘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아마 탐색하고 있는 것이리라.

사냥감의 저력을.

반면.

"스켈레······ 흠, 이름이 길군."

이전석은 스켈레톤 워리어를 부르려다 생각보다 긴 이름에 말을 바꿨다.

"지금부터 네 이름은 스켈이다."

단순히 앞 두자를 따왔을 뿐인 이름.

그러자 눈앞에 시스템이 떠올랐다.

[스켈레톤 워리어의 이름이 스켈로 변경됩니다.]

[스켈이 자신의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건 이전석도 예상치 못한 변화였다.

'···음, 시스템까지 바뀔 줄은 몰랐는데.'

더 좋은 이름으로 지어줄 걸 그랬나?

뭐, 소환수 본인은 마음에 들어 한다니 이대로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때.

쉬익-!

옆에서 비수가 날아왔다.

꽤 작은 크기의 날붙이.

날 끝에 독이 묻어 있다.

카앙-!

이전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단도로 비수를 쳐냈다.

"크륵?!"

그러자 놀라 주춤거리는 고블린.

그것도 잠시.

"스켈."

이전석이 스켈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음껏 날뛰어봐."

"존명······."

주인의 뜻을 눈치 챈 걸까.

[스켈이 거대화를 사용합니다.]

스켈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정확히 5미터.

그만큼 신장이 커진 것이다.

이전석은 스켈의 상태창을 쳐다봤다.

스켈

(스켈레톤 워리어)

등급 : F

[근력 - 70] [민첩 - 58]

[체력 - 61] [마나 - 4(8)]

특성 : 돌격(F), 거대화(C)

충성도 - 100%

거대화를 사용한 영향일까.

마나가 8에서 4로 줄어들었다.

대신이라는 듯 마나를 제외한 모든 스탯이 50만큼 증가해 있었다.

변화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텅 빈 구멍.

청색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마치 안광이라도 번뜩이듯 빛을 머금었고.

"━━━!"

뒤이어 괴음이 울려 퍼졌다.

"크. 크르으······."

고블린이 겁먹은 듯 몸을 떤다.

쿵-!

스켈이 거대한 발을 내딛었다.

마치 천지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충격.

나무들이 요동치며 바람이 술렁인다.

고블린이 바닥에 넘어졌다.

사타구니로 무언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다닥 부딪치며 떨리는 치아.

공포가 녀석을 휘어잡고 있었다.

어느새 고블린 앞에 도달한 스켈.

"━━━!"

녀석은 제 신체처럼 거대해진 곡도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직후.

쿠웅-!!

고블린의 신체가 그대로 짓뭉개졌다.

마치 몽둥이를 휘두른 것 같은 광경.

형태를 잃어버린 육편이 핏물과 함께 사방으로 비산한다.

[고블린을 사냥하셨습니다.]

뒤이어 나타난 시스템.

'괜찮은데?'

스켈의 모습을 본 이전석이 내심 감탄했다.

하긴 근력 스탯이 무려 70을 넘어갔다.

그 힘은 이미 상식을 벗어나 있었으니.

일개 고블린 따위가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내 이전석을 돌아보는 스켈.

"······."

이전석은 침묵했다.

스탯은 올라갔다.

그건 확인했다.

다만 그보다 중요한 요지는 지능이다.

거대화의 여파로 낮아진 지능이 소환주인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인가.

그러나.

쿵-.

스켈이 무릎을 꿇었다.

고개도 숙였지만 덩치가 커서 이전석을 내려다보는 형태가 되었다.

"······."

달리 말은 없었다.

지능이 낮아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상태창에 표시된 충성심은 여전한 듯 보였다.

다행이라며 안도를 삼킨 찰나.

[거대화의 지속시간이 끝났습니다.]

스켈의 덩치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지속시간?'

이전석은 눈을 찌푸렸다.

빌런이 사용할 땐 지속시간 같은 건 없어 보였는데···.

게다가 시간도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대략 20초 정도.

숙련도의 차이일까?

'생각보다 더 황당한 특성이었군.'

짧은 지속시간과 짐승 수준으로 낮아지는 지능.

도저히 써먹을 게 못 된다.

'원 주인은 아마 반복된 사용으로 지속시간을 높였겠지.'

그런데도 지능하락이란 단점만은 없애지 못해 자포자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스켈에겐 의미 없는 단점이다.

지능 하락은 충성심으로 상쇄됐다.

복잡한 명령은 따르지 못하겠지만, 제 주인도 구분하지 못하고 날뛰지 않는 건 확인했다.

지속시간?

그거야 늘리면 그만이었다.

영등포에서 날뛰었던 빌런.

녀석을 보면 지속시간은 아마 분단위로도 늘어날 터.

때문일까.

이전석은 생각했다.

'만약 앞으로도 언데드를 테이밍하고 특성을 건네줄 수 있다면···.'

일인군단.

개인으로 수천수만- 혹은 억 단위의 헌터와 맞먹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실재로 전생에 그런 헌터가 있었다.

억까지는 아니지만 그는 홀로 수십, 많게는 수백의 헌터까지 상대했다.

지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권좌.

정령과 신수를 자유자제로 다루며 단신으로 '군단'이란 이명을 얻은 SSS급 헌터.

물론 망자의 왕이 C급 특성인 만큼 계약할 수 있는 소환수엔 한계가 있겠지만···.

이전석은 생각했다.

진화의 룬으로 등급을 올리면 그 한계치도 늘어나지 않을까?

그럼 좀 더 많은 게 가능해질 거다.

'계륵인 줄 알았던 특성이 이런 식으로 당첨이 될 줄이야.'

이전석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기에.

그때.

"······!"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금세 바람에 섞여 사라져버린 희미한 음성.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영원의 낙인은 사람의 얼굴이나 말투, 심지어 목소리까지 잊어버리지 않게 만든다.

아주 잠깐 흘려들은 말조차 또렷하게 기억하게 됐으니.

덕분일까.

이전석은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세 눈치 챌 수 있었다.

예상대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달려가자···.

북한산 던전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가 고블린 서너머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화산의 길드원이었던가?'

아마 이름이 최은하였을 거다.

분명 헌터가 아닌 매니저였을 터.

헌데.

그런 그녀가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걸까.

의문은 잠시뿐이었다.

"스켈, 잠깐 들어가 있어."

이전석은 스켈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있는 힘껏 적단도를 내던진다.

푸욱-.

적단도의 날이 고블린 머리를 파고들었다.

녀석이 피를 흩뿌리며 털석 쓰러진다.

"헉!"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

최은하가 몸을 떨며 깜짝 놀랐다.

그 사이.

이전석이 빠르게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적단도를 빼낼 틈은 없었다.

나머지 세 마리의 고블린.

녀석들이 이전석을 인식하자마자 단검을 앞세우며 달려든 것이다.

"다, 당신은···."

최은하의 말이 희미하게 들린다.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할 뿐.

'우선 앞의 두 마리부터.'

다른 한 마리에 비해 비교적 속도가 빠른 두 마리.

놈들의 머리를 동시에 움켜쥔 채 그대로 땅에 쳐 박는다.

근력 스탯이 낮아 큰 충격은 주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화륵-!

발화를 사용해 녀석들의 머리를 통구이마냥 태워버렸다.

[레벨이 상승하셨습니다!]

직후 26으로 오른 레벨.

이전석은 나머지 한 마리를 쳐다봤다.

"크륵······?!"

녀석이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다.

아주 잠깐의 틈.

이전석이 적단도를 빼들었다.

촤악-.

피를 머금은 채 한층 더 예리해진 날.

그것을 역수로 쥔 채 고블린의 목을 벤다.

녀석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무력하게 목이 베이며 죽을 뿐.

겁먹은 포식자를 죽이는 건 이토록이나 손쉬웠다.

털석-.

이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고블린.

이전석은 적단도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리고.

"그래서, 매니저나 되시는 양반이 왜 이런 곳에 있답니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최은하를 돌아보며 물었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6화

암살자 (2)

화산.

대한민국 랭킹 7위의 길드.

길드장부터 상위 간부진들이 모두 일가친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뛰어난 실적으로 추후 협회를 대신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점쳐지는 기업.

최은하는 그곳의 직원으로, 길드가 소유한 던전에 이상이 없나 조사를 나왔다.

그런데.

"팀원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겁니까?"

"네······."

최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시 그녀의 말을 정리해보자.

최은하가 소속된 곳은 헌터 공략팀이라고 한다.

그것도 D급으로 이루어진 최하위 팀.

본래 그녀의 팀은 E급 던전을 공략하기로 스케줄을 잡아놨었지만.

'상부의 명령으로 갑자기 스케줄이 공략에서 조사로 변경됐다고 했지.'

조사하는 던전은 F급인 아귀들의 낙원.

현재 이전석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조사에 나온 팀원들이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이전석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음을 던졌다.

"혹시 그쪽, 길드장 딸입니까?"

"네? 아, 네. 막내이긴 한데···."

우물쭈물 내뱉는 대답에 이전석이 '역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군.'

최은하.

그녀는 길드장의 막내딸이다.

화산에서 제일가는 지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하위 팀의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비각성자라는 특이점과 갑작스런 스케줄 변경까지.

'서열 싸움인가.'

가능성이라면 그것밖에 없었다.

아직 본인은 모르는 눈치지만···.

'팀원들은 모두 죽었겠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대 기업의 서열싸움은 대게 진흙탕인 법이니까.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특히 각성자로 이루어진 길드일 경우 그런 성향이 더 강한 편이었다.

'귀찮은 일에 휘말렸군.'

괜히 구해준 걸까?

아니.

이전석은 생각을 바꿨다.

대형 길드의 서열 싸움이다.

거기에 휘말린 불쌍한 여인.

더욱이.

'선업이 안 오른 걸 보면 아직 위험은 사라지지 않았어.'

누군가 여전히 최은하를 노리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큰 위험.

이런 상황에 최은하를 구해주면 선업도 더 많이 올라갈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당장 빌런이나 던전 폭주가 없어 찾은 곳이 바로 이 던전이 아니던가.

이전석으로선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

"일단 던전부터 나갑시다."

이전석이 최은하를 일으켜 새웠다.

어쨌든 장소가 좋지 않다.

던전 내부는 언제 기습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석은 우선 던전부터 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게이트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출구.

"어? 게, 게이트가······."

당황하는 최은하.

그때였다.

'음······?'

이전석의 눈앞.

띠링-.

명쾌한 효과음과 함께, 돌연 기묘한 창이 나타났다.

[최은하가 첫 번째 운명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녀에게 주어진 '죽음의 운명'을 뒤트십시오.]

[보상 - ???]

'이건 또 뭐야?'

이전석이 의문 섞인 눈빛을 띠었다.

마치 게임 속 퀘스트 같은 내용.

보고 있자니 당혹스러움이 몰려온다.

'죽음의 운명.'

이전석은 그 단어를 바라보았다.

죽음.

하필이면 지금 떠오른 단어.

이유 없이 나타나진 않았을 거다.

예상대로.

주변에 기척이 하나 느껴졌다.

"분명 이쯤에 있었을···."

"조용."

이전석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곧 최은하가 입을 다물었다.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바람과 함께 감돌고.

"······."

이전석이 적단도를 휘둘렀다.

카앙-!

그러자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검 한 자루.

그것이 적단도에 의해 쳐내진 것이다.

"이걸 막을 줄은 몰랐는데."

이후.

누군지 모를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그 속에서 장검을 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인가?'

이전석은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더욱이 왼쪽 가슴에 달려 있는 배지.

문지기 헌터와 똑같은 모양이다.

그것은 눈앞의 남자가 화산에 소속된 헌터임을 의미했다.

'갑자기 기습을 해온 걸 보면··· 최은하가 죽길 바라는 다른 후계의 짓이겠군.'

그렇다면 적이라는 소리다.

탓-.

고민이나 망설임 따윈 없었다.

이전석은 즉시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이동하고.

카앙-.

다시 한 번 날과 날이 맞부딪혔다.

허공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두 개의 검.

"경호원이 있단 소리는 못 들었다만···."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뭐, 그래봤자 화산 앞에서는······."

이내 자신만만 한 어조로 말을 잇지만.

"······음?!"

돌연.

남자의 복부를 이전석이 다리로 후려쳤다.

팔로 막은 건지 조금 밀려나다 멈춘 남자.

"이 자식···."

그가 이전석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나 이전석은 아랑곳 않았다.

다시 코앞까지 접근한 뒤.

적단도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벴다.

남자는 가까스로 적단도를 쳐냈지만.

'이런···!'

차마 반대쪽 손은 신경 쓰지 못했다.

남자의 얼굴을 향해 내밀어진 이전석의 왼손.

그곳에서부터 불꽃이 발아하더니.

콰앙-!

곧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굉음과 함께 뒤흔들리는 공기.

"크윽······!"

남자가 이를 악문 채 바닥을 나뒹군다.

그의 얼굴 한 면에 짙은 화상이 새겨졌다.

단순 상처가 아닌 저주인 만큼 웬만해서 화상이 지워지는 일은 없을 터.

이전석의 오른손에 새겨진 것처럼 말이다.

꽈악-.

이전석이 풀리려던 붕대를 재차 묶었다.

그러곤 왼손을 쥐었다 폈다.

'잘 되는군.'

방금 그 폭발.

발화의 효과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응용법.

마나를 의도적으로 불발시켜 폭발을 일으켰다.

시스템의 틈을 이용한 수법.

그러나 단발적인 위력은 단순 화염보다 훨씬 높았다.

촤악-!

남자가 품에서 꺼낸 붉은 포션을 제 얼굴에 흩뿌렸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에 그는 이를 악문 채 이전석을 노려보았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비웃음만을 흘릴 뿐.

"살수주제에 말이 많아."

직후.

그가 적단도를 비수처럼 내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적단도.

남자가 검을 들어 막으려 한다.

그러나.

'멍청하긴.'

이미 수없이 피를 들이켜 동급 무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진 적단도다.

그건 이미 평범한 철검이나 아이템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의 공격력이 아니었다.

"무슨···?!"

예상대로 적단도가 철검을 두부처럼 가르며 남자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크아악!"

남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이전석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남자의 지척까지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어깨에 박힌 채 존재감을 뿜어내는 적단도를 손에 쥐었다.

이번에도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서걱-.

이전석은 그대로 적단도를 빙글 돌려 남자의 어깨를 베어버렸다.

툭-.

촤악-!

허무하리만치 쉽게 잘려나간 팔.

단면에서 핏물이 솟구친다.

뒤이어 이전석이 남자의 목을 베고자 재차 적단도를 휘둘렀다.

그런데.

"······흠."

돌연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허공을 가로 지르는 적단도.

기습할 때 사용한 특성일까.

예상대로.

남자는 특성으로 모습을 지운 채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망할···! 저런 괴물이 지키고 있을 거라곤 못 들었다고······!'

피를 토해내며 이를 가는 남자.

그가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새까만 두 눈이 뇌리에 아른거린다.

공허하고 무기질 적이며, 영혼마저 집어 삼킬 듯한 포식자의 눈빛.

'임무를 포기하더라도 지금은 도망치는 게 살 길이야.'

이내 남자가 목걸이에 마나를 주입했다.

직후.

게이트가 다시 나타났다.

남자가 사라졌다 나타난 것과 비슷한 현상.

게이트 주변을 통명한 연기가 휘감고 있다.

그리고 그 게이트를 넘어가려던 차.

"과연."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템을 이용해 자신의 특성을 게이트에 적용시킨 건가."

바로 뒤.

이전석이 서있었다.

남자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의문과 경악.

그리고 공포가 남자를 집어 삼킨다.

"왜? 모습만 없앤다고 내가 못 찾아낼 줄 알았어?"

이전석이 웃음을 흘렸다.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만 같다.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한 이질감.

그 모습을 본 남자는 생각했다.

귀신이라고.

그래, 귀신이다.

"아아······."

귀신이 나를 잡으러왔구나.

서걱-.

이전석이 적단도를 휘둘렀다.

경악어린 남자의 눈빛.

흑색 눈동자가 빙글 회전한다.

뒤이어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

털석-.

주인을 잃어버린 몸뚱이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생명을 갈취하셨습니다.]

[랜덤으로 특성 하나를 획득합니다.]

['은신(A)'을 습득하셨습니다!]

※ ※ ※

목이 잘린 시신 앞.

이전석은 새로 얻은 특성의 효과를 확인했다.

은신

등급 : A

효과 :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서 지워버린다. 소모되는 마나에 따라 지속시간이 증가한다.

효과를 본 이전석이 비웃음을 흘렸다.

'특성이 주인을 잘못 만났군.'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특성.

그러나 남자가 사라진 자리엔 희미하게나마 아지랑이가 존재했다.

게다가 기척도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이전석이 그를 찾을 수 있던 이유.

이런 좋은 특성을 가지고도 그렇게까지 활용하지 못한 걸 보니 황당하기까지 할 따름이었다.

다만.

'나도 당장은 못 써먹겠어.'

가진 마나의 총량이 너무 적다.

현재 그의 마나는 고작해야 10.

잔여 마나는 1밖에 남지 않았다.

스켈을 소환할 때 고정적으로 소모되는 마나가 5.

발화의 단발적인 사용으로 어떻게든 마나소모량을 최소화했지만.

여기에 은신까지 더해진다면?

세 가지 특성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소화할 수 없게 될 거다.

'······슬슬 마나도 올려야 되나?'

이전석이 잠시 상태창을 펼쳤다.

고블린을 잡으며 오른 1레벨.

스탯포인트도 1만큼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해.'

턱없이 부족했다.

고작 1.

그 정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전생에선 무고한 사람을 죽여 마나와 관련된 특성을 얻었지만, 이번 생에는 그게 불가능했다.

비단 마나만이 아니다.

오감이나 다른 여타 신체능력 등.

전투와 관련된 모든 게 부족했다.

이전석의 싸움법은 어디까지나 압도적인 특성을 활용한 물량전.

그는 전사이지 기사가 아니다.

절제된 싸움법을 모른다.

최은하를 기습한 살수.

놈을 죽일 수 있던 것도 녀석이 그만큼 방심했기 때문이다.

초반에 기세로 압도했고 제 실력을 끌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비교적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녀석이 처음부터 방심하지 않고 신중하게 나왔다면 (물론 그래도 이겼겠지만)꽤나 힘든 싸움이 됐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이전석은 생각했다.

부족하다고.

전생과는 다르다.

현재.

그는 터무니없이 약했다.

조금이라도 강자다운 강자를 만난다면?

목이 베이는 건 이전석 본인이 될 거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람을 죽여 특성을 수급하는 것도 불가능.

때문일까.

이전석은 갈증을 느꼈다.

특성을 얻지 못해 생겨난 욕망.

강함에 대한 충동.

━내 제자가 되지 않겠느냐?

'제자라······.'

이전석은 연선화의 말을 떠올렸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자존심?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전석에게 중요한 건 그녀의 제자가 됨으로서 강해질 수 있냐는 확신이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이전석은 목 없는 사체로 다가갔다.

시체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목걸이.

그것을 슬쩍 집어 든다.

[복사의 목걸이(B)]

아이템.

효과도 예상대로다.

자신의 특성을 다른 사물이나 생명에게 적용하는 것.

그러나.

파삭-.

곧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목걸이.

'일회용이었나?'

이전석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하긴 그만한 능력을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아이템의 등급은 아무리 못해도 S는 되었을 것이다.

"저, 저기···!"

문득.

뒤에서 최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북한산에서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둔한 성격과 달리 예의는 남 못지않은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최은하에게 주어진 '죽음의 운명'을 비트셨습니다.]

[보상으로 '???'이 지급됩니다.]

또 다른 보상이 눈앞에 떠올랐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7화

계략(計略)

[최은하에게 주어진 '죽음의 운명'을 비트셨습니다.]

[보상으로 '???'이 지급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치직-.

그 위로 회색 모자이크가 덧대어진다.

마치 고장난 TV를 보는 것만 같다.

이내 물음표였던 보상이 새로이 바뀌었다.

[보상으로 '1만 선업'이 주어집니다.]

1만.

백도, 천도 아니다.

무려 만 단위의 선업.

'미친.'

그걸 본 이전석은 적잖이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많아봤자 2-3천 단위로 오르던 선업.

이전석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되던 백화점 테러조차 5천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1만이나 오른다니.

'······죽음의 운명을 비틀었다고 했지.'

이전석은 시스템의 문구를 되새겼다.

그리고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영등포에서 사람들을 구했을 적.

그 때는 시스템이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곳에는 최은하도 있었지만 시스템은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개입해오지 않았다.

운명.

어차피 북한산에선 죽지 않았을 운명이기 때문에?

'전생에서 최은하는 북한산이 아니라 아귀들의 낙원에서 죽었고, 그 운명을 바꾸고자 시스템이 개입했다?'

나름 일리 있는 추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난다.

시스템.

그것은 왜 최은하의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가.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화산.

최은하가 소속한 길드.

그곳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로인해 발생할 수많은 민간피해.

시스템은 최은하의 존재가 그것의 억제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

수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의문들.

"······."

시스템의 의도는 모르겠다.

어째서 직접적으로 개입했는가.

최은하의 생존을 원하는 이유.

혹,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온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여전히 시스템이 무얼 바라는진 모르겠지만.

'나를 이용하고자 한다면··· 좋아. 어울려주지.'

시스템에게 이성이 있는가.

이지와 의지, 지능이 존재하는가.

그런 건 모르겠다.

하등 관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녀석이 자신을 통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면, 자신 또한 그것을 철저하게 이용하면 될 뿐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침 잘 됐어.'

얼마 뒤 쿠데타를 일으키게 될 화산.

그걸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긴 했다.

그때.

때마침 최은하가 나타났다.

이 또한 시스템의 의도인지는 모르겠고, 알바도 아니었다.

다만 이전석은 그녀를 이용한다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화산을 거꾸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것도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말이다.

"우선 던전부터 나갑시다."

"아, 네."

이후.

두 사람은 뒤늦게 게이트를 지나 던전을 나왔다.

그리고 던전을 막 나왔을 무렵.

"참, 혹시 명함 좀 다시 받을 수 있을까요?"

이전석이 멋쩍은 어조로 물었다.

※ ※ ※

세상을 내리깔보듯 우뚝 솟아난 빌딩.

그 최상층.

한 남자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톱을 깎고 있다.

적갈색의 기이한 동공을 가진 남자다.

목덜미엔 까만 뱀 문신이 새겨져 있다.

딱-.

그가 엄지손톱을 잘라내고 길쭉한 봉으로 거칠거칠한 손톱을 다듬었다.

후-.

마지막으로 바람을 불어 정리.

그러자.

"치우겠습니다."

옆에 서있던 노인이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늘상 있는 일인 듯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노인이 쓰레기를 든 채 방을 나가고.

'···늦는군.'

그의 시선이 벽시계로 향했다.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표정 한 편에 짙은 짜증이 엿보였다.

'대체 비각성자 하나 죽이는데 얼마나 걸리는 거야?'

비각성자.

다름 아닌 최은하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몇 시간 전 있던 일이다.

남자는 최은하의 암살을 사주했다.

이유야 별 거 없었다.

흔히 있는 서열싸움일 뿐이다.

최은하는 이미 후계서열에서 한참 밀려나 있었지만,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미리 싹을 제거해두려는 것이다.

그런데, 고용한 암살자로부터 생각보다 오랫동안 연락이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양성소에서 가장 뛰어난 놈이라더니··· 순 거짓말이었군.'

최승철.

화산길드의 직계혈족이던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양 혀를 찼다.

물론 연락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최은하와 팀원들을 분리시키는데 성공.

━최은하의 팀원들을 사살.

딱 두 문장.

휴대폰에 날아온 문자다.

문제는 이후로 아무런 연락도 없다는 것.

'설마 실패했나?'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다.

실패.

그건 최승철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으니까.

"도련님."

그때.

쓰레기를 치우러 나갔던 노인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최승철의 비서이자, 유모이기도 한 박민순이었다.

"뭐지?"

"받아보심이 좋겠습니다."

박민순은 대답 대신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을 보니 전화가 연결되어 있다.

김인철.

F급 던전 아귀들의 낙원.

그곳의 게이트를 지키는 헌터.

세간에서는 흔히 문지기라고 불리며, 화산에서는 최승철 라인으로 잘 알려진 남자다.

당연히 그에겐 미리 언질을 해뒀었다.

최은하와 그녀를 죽일 암살자에 대해.

때문일까. 최승철은 김인철의 이름을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목소리.

━스, 승철 도련님이십니까?

수화기 너머의 음성은 떨고 있었다.

단순히 긴장했다거나 그런 게 아니다.

어딘가 두려움에 젖은 어투.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낀 최승철이 짤막히 명령했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라."

━그게·· 은하 아가씨께서 무사히 던전을 나오시길래 잠시 내부를 확인했더니······.

꿀꺽-.

희미하게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께서 보내신 암살자가 목이 잘린 상태로 죽어 있었습니다···.

"허?"

최승철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목이 잘려 죽다니?

아무리 그래도 양성소 출신의 살수다.

화산의 양성소는 암살자를 전문으로 육성하는 기관이었다.

그만큼 양성소를 통해 화산에 들어온 암살자는 하나같이 실력이 매우 좋은 편이었는데.

그런 그가 목이 잘린 채로 죽어 있었다고?

말도 안 된다.

아무리 오늘이 첫 임무라지만···.

"최은하."

━예?

"최은하 말고 같이 게이트를 나온 사람이 있나?

━아, 그거라면······.

잠시 기억을 되짚던 김인철.

그가 뒤늦게 말을 이었다.

━F급 헌터 한 명이 아가씨와 같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최승철은 확신했다.

'그놈 짓이로군.'

확실하다.

최은하의 팀원들은 진즉에 죽었다.

정작 최은하 본인은?

아무런 힘도 없는 일반인.

양성소 출신 암살자를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 계획에 제대로 찬물을 뿌렸어.'

최은하의 생존.

그리고 인재의 소실.

덕분에 계획이 꽤나 크게 어그러졌다.

쯧-.

최승철은 혀를 차며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최은하와 같이 나온 남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머리나 눈동자 색, 이목구비의 생김새, 간단한 인상과 당시 입고 있던 복장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아, 예! 알겠습니다.

김인철이 제 눈으로 봤던 남자의 용모를 자세히 설명했다.

최승철은 그 진술을 바탕으로 비서이자 유모인 박민순에게 조사를 명령했다.

이후.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을 나가는 박민순.

홀로 남은 최승철은 까득 이를 갈았다.

'설마 그년이 경호원까지 고용했을 줄이야···.'

엄밀히 말하면 경호원은 아니다.

그저 우연히 마주쳤을 뿐.

물론 그걸 최승철이 알 리 없고···.

그저 그는 생각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내 계획에 찬물을 뿌린 대가는 치러줘야겠어.'

던전을 나온 직후.

최은하는 다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어딘가 많이 불안해 보이는 모습.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이전석을 데리고 온 그녀가 대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그런 일.

습격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최은하는 그게 굉장히 미안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전석은 어깨만 으쓱였다.

"정 미안하면 나중에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시죠."

"저, 정말 그런 걸로 괜찮나요?"

"안 괜찮으면, 뭐 대신 죽어주기라도 하시게요?"

"그건······."

최은하가 어물쩍거렸다.

쉽게 대답하질 못한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전석은 "그보다"라며 말을 이었다.

"그쪽은 이제 어쩌실 겁니까? 설마하니 살인을 협회에 보고하진 않으실 테고."

"다, 당연히···! 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최은하가 극구 부정했다.

그렇다.

멍청이라면 하지 않을 짓이다.

던전에선 범죄를 증명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 같은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는 공간.

녹음 같은 것들도 당연 불가능하다.

사람과 사람 간의 진술?

그런 건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

때문에 던전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웬만큼 큰 일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헌터가 묻어두고 가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그건 이전석과 최은하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일단 팀원들을 찾아보려고 해요."

팀원.

그 말에 이전석은 씁쓸한 느낌을 받았다.

어차피 이미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최은하는 그들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는 것 같았다.

"이전석 씨껜 정말···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몇 번째일까.

재차 고개를 숙이는 그녀.

"그럼 저는 이만······.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연락해주세요."

이내 최은하가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라도 또 이전석이 휘말릴까봐.

그래서 도망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전석은 멀어지는 최은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설마 여기서 화산과 엮일 줄은 몰랐는데.'

할 일이 없어서.

그래서 던전에 들어갔을 뿐이다.

단지 특성을 실험해보기 위해.

그런데 웬걸.

뜬금없이 화산과 얽혀버렸다.

'이대로 없던 일인 것처럼 지나가진 않겠지.'

적극적으로 서열싸움을 일으키고, 이미 권력을 잃은 후계마저 노렸다.

그런 놈이 이대로 이전석을 모른 채 할 리 없었다.

그러니.

'분명 최은하를 죽이기 전에 나부터 처리하려고 할 거야.'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하지만 이전석은 생각했다.

하등 의미 없는 짓이라고.

화산과의 대립.

그건 이미 한 번 겪어본 일이다.

놈들의 수법쯤이야 지겹도록 겪어봤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희롱하는지.

그 안에 품고 있는 자만심이 얼마나 크고 비대한 것인지.

수법도, 사상도.

모두 샅샅이 꿰뚫고 있다.

'아마 살수를 보내온 건 최승철이겠지.'

그런 짓을 할 만 한 사람은 화산에서도 그밖에 없었다.

'최승철의 성격을 고려하면 일주일 정도 침묵하다 그 후에 움직이겠군.'

무작정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우선 정보 탐색부터 하겠지.

놈의 신중한 성격을 이전석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일주일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다.

그때가 되면 이전석은 이미 협회와 계약한 상태일 것이다.

협회의 용병.

쉽게 손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살수를 보낸다?

협회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없다.

협회는 즉시 화산을 추궁할 거다.

그러니 최승철로서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최은하가 협회와 연관되어 있는지.

협회가 화산의 비밀을 파악했는지.

그러한 것들을 고민하기 시작할 터

'그럼 턴을 뺏기는 거지.'

고작 한 번의 턴.

별 거 아닌 실수.

싸움이란 대게 그런 것들의 차이로 결판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지금은 성장하는데만 집중하면 되겠어.'

이전석은 그렇게 당장의 목표를 잡았다.

그때.

지잉-.

때마침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8화

용병계약

━용병계약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혹시 조만간 한 번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김백동으로부터 그런 문자가 도착했다.

드디어 상부와 조율이 끝난 걸까?

그렇다면 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오늘 만나시죠.

이전석은 바로 답신을 보내며 김백동과의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2시간 뒤.

이전석은 곧장 헌터협회로 향했다.

그곳에서 바로 김백동과 만날 수 있었다.

김백동은 이전석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은 주로 귀빈들을 맞이할 때 사용합니다."

귀빈.

김백동은 그리 말하긴 했지만, 정작 응접실 내부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창문도 없고 별 다른 장식도 없이, 그저 회색 벽만이 주변을 꽉 채우고 있을 뿐이다.

흡사 취조실을 연상케 하는 광경.

중앙에는 낡은 책상과 의자 두 개가 있었으니.

"그리고."

예상대로.

김백동이 문을 걸어 잠구며 말했다.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때도 자주 사용하죠."

"그럴 것 같이 생기긴 했네요."

"하하."

이전석의 맞장구.

김백동이 옅은 웃음을 흘린다.

이후 두 사람이 마주 앉고.

"꽤 유명인이 되셨더군요."

김백동이 뜬금없는 한 마디를 건네 왔다.

유명인?

"제가요?"

"모르셨습니까?"

김백동은 이전석의 반응에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북한산에서 던전 폭주를 제압하고 영등포의 빌런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한 영웅. 인터넷을 보니 그런 내용의 기사가 하루에도 몇 개씩 쏟아지고 있더군요."

김백동이 슬쩍 제 휴대폰을 보여준다.

확실히.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전석의 행적이 그대로 기사가 되어 인터넷에 실려 있었다.

[북한산의 참사···. 뜻밖의 기적과 영웅.]

['얼굴이 무서운 사람? 하지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감히 나서 영등포의 빌런을 제압한 헌터. 그는 과연 누구인가?]

하나 같이 낯부끄러운 기사들이다.

비단 기사만이 아닌 댓글도 그랬다.

악플이 보이긴 했지만 그것도 극히 일부일 뿐.

대다수가 이전석을 칭찬하는 눈치였다.

'음······.'

이전석으로선 떨떠름하기만 했다.

평생 빌런으로서 살아온 그였으니까.

칭찬보다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언제부턴가는 비난보다 두려움 섞인 시선이 더 많아졌고, 모두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기조차 꺼려했다.

그런 자신이 이제와 영웅 취급이라니.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이전석은 내심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의외로 나쁘지만은 않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과연 그 말대로가 아닐 수 없었다.

"길드의 스카우트나 사무소 일원··· 특히 기자들이 난리도 아니더군요."

"물론"이라며 김백동이 말을 덧붙였다.

"인터뷰 같은 걸 꽤 귀찮아하시는 것 같아서 제 측에서 전부 잘라내고 있었습니다만, 괜한 짓을 한 건 아닐는지."

나지막한 김백동의 말에 이전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그런 건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 괜찮습니다."

사실 좋아하지 않는 편이 아니라 아주 싫어한다.

그 생각이 영등포에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 드러난 걸까.

"그럼 다행이군요."

김백동이 그리 말하며 휴대폰을 도로 가져갔다.

그리고 옆에 내려놨던 서류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든다.

"우선."

그가 다소 진지해진 어조로 말했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습니다만, 상부에서 무사히 계약서를 받아왔습니다."

이내 책상 위에 올려지는 서류 한 장.

"확인해보시죠."

용병 계약서.

이전석은 김백동이 건넨 그것을 찬찬히 살폈다.

얼핏 보기에 이상한 내용은 없었다.

조항 같은 것들도 평범한 계약서와 똑같다.

법에 빠삭한 건 아니지만, 이전석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애시당초.

'협회가 뒤통수라도 쳤다간 금세 신용이 떨어질 테니 괜한 짓거릴 할 이유도 없지.'

신용이 떨어지면 위상도 흔들린다.

헌터협회는 대한민국의 중심이다.

그런 곳이 휘청인다면 국가의 기반자체가 어긋날 스도 있었다.

"계약기간은 2달. 헌터님의 경우, 임시 감찰관 신분으로 빌런 대응부서에 소속될 예정입니다."

이전석이 서류를 살펴보는 사이.

김백동이 계약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용병이라도 일반직과 큰 차이는 없다는 것.

여타 감독관처럼 2인 1조로 활동하게 될 거라는 점과, 계약금 외의 수당은 해결한 사건의 규모와 재량에 따라 지급된다는 것까지.

그리고.

"빌런 대응부서에 소속되시는 만큼, 헌터님께선 차후 진행될 대규모 작전에도 참여하게 되실 겁니다."

대규모 작전.

이전석이 예지와 함께 언급했던 그 사건이다.

200명가량의 사상자를 내게 될 최악의 참사.

"다만, 헌터님께선 아직 정식으로 저희와 계약한 상태가 아니시죠. 지금이라도 원하신다면 결정을 무르실 수 있으십니다만······ 어떡하시겠습니까?"

김백동이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왠지 배려라도 하는 듯한 눈치다.

당연, 하등 쓸모없는 배려였다.

슥-.

대답 없이 옆에 놓여져 있던 펜을 집는 이전석.

그는 곧 바로 계약서에 자신의 싸인을 적었다.

덕분일까.

김백동이 민망한 듯 웃었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군요."

이내 계약서를 돌려받은 김백동이 악수를 건네왔다.

"비록 짧은 기간입니다만, 같은 동료로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이전석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걸로 계약은 성사됐다.

앞으로 2달 간 이전석은 협회의 소속되어 활동하게 될 터.

"부서에 대한 건 나중에 팀원들이 모였을 때 설명하기로 하고···."

김백동은 사뭇 진지해진 표정과 어투로 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본론.

틀림없이 예지에 관한 것이리라.

며칠 전 이전석이 꺼낸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한 달 하고 보름 뒤. 협회에서는 빌런단체 '개벽연합' 에 대한 대규모 토벌작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개벽연합.

수십- 수백 명의 빌런들이 모여 만들어진, 말 그대로 빌런들의 연합이다.

"해당 작전에 대해선 극비리에 취급 중이며, 협회 내부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때문에 협회에선 A급 이상의 헌터들로 이루어진 소수정예로 개벽연합의 본거지를 습격할 예정입니다만······."

김백동이 말끝을 흐리며 이전석을 쳐다보았다.

이전석이 그를 대신해 말미를 이었다.

"아마 대부분 죽겠죠."

역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김백동.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설마.

이전석이 기억하는 그날의 참사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일단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이 작전은 애당초 전제부터가 글러먹었습니다."

이전석이 책상 위에 엑스자를 그었다.

그에 김백동이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전제 말입니까?"

"예. 소수정예로 개벽연합의 본거지를 친다는 건 좋은 작전입니다만, 제가 본 미래에선 연합측은 이미 해당 작전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연합이 협회의 작전을 모를 거라는 확신.

그런 생각부터가 글러먹은 것이다.

"······설마."

김백동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 이전석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스파이는 아닙니다. 다만 연합측에 정보취득에 뛰어난 인재가 있을 뿐이죠."

"배신자가 없는 건 다행입니다만··· 설마 작전이 유출되었다니······."

믿을 수 없다는 김동백의 얼굴.

당연하다면야 당연한 일이다.

협회의 보안은 철통같기로 유명했으니까.

미국 국방부와도 엇비슷한 수준.

그게 바로 협회의 보안이었다.

헌데,

그런 곳의 정보- 그것도 기밀이 유출됐다.

당연히 쉽사리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정보의 유출. 그로인해 협회는 모든 전력과 작전을 분석당하고, 빌런들에게 되려 역습을 당하고 맙니다."

김백동이 팔을 잃어버리는 것도 그 과정에서 일어난 피해였다.

"협회에선 급히 타 길드와 사무소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시작부터 틀어진 작전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죠."

마치 옛날이야기라도 하듯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늘어놓는 이전석.

"협회는 뒤늦게 정보가 새어나갔음을 인지하고 대책을 세우지만, 이미 사상자는 수십을 거뜬히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연합에 의해 협회건물마저 공격당하며 상황은 손쓸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죠."

물론 협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에겐 연선화가 있었으니까.

수(數)에서 밀렸으나 전력은 훨씬 앞섰다.

이전석은 한참 나중에야 기사로 전해들은 사실이지만, 협회를 부수고 밀어닥치는 빌런들을 연선화는 단 일격에 쓸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측의 무분별한 테러로 사망자는 200을 족히 넘어섰고, 연합의 주요 인물들마저 놓치면서 협회의 작전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 후.

협회는 대중들에게 질타를 받게 된다.

따지고 보면 협회에서 시작한 작전.

그들이 아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피해다.

수많은 사람들이 협회에 돌을 내던졌다.

그 여파로 협회장과 대다수의 고위직이 퇴사.

협회의 위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본격적으로 화산이 협회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지.'

대한민국이 망국(亡國)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시발점.

이전석은 그것이 예지능력을 통해 바라본 미래의 결말이라고 설명했다.

'정확히는 나중에 김백동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를 이전석이 과거의 김백동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로군요."

김백동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헌터협회의 실패와 붕괴.

그로인한 화산의 봉기(蜂起).

그리고 대한민국의 멸망.

이전석의 이야기는 온통 난감한 것들 투성이였다.

도무지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저도 그 이상으로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다만 이번 작전이 실패하면 대한민국엔 전례 없을 정도로 커다란 혼란이 들이닥치게 될 겁니다."

"···확실히. 헌터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 것 같군요."

김백동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전석이 협회에 들어온 이유도 반쯤은 그것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혼란.

단순히 국가를 지키기 위해, 혹은 선업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오직 그 일념 하에 협회의 실패를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다시 돌아온 과거.

중요한 건 가족의 안위뿐이다.

그걸 망가트리려는 자가 있다면 세상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워버릴 것이라.

"일단··· 협회의 일원으로서 정보제공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르던 김백동.

그가 정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새 몇 년은 더 늙은 듯한 인상.

표정에서 짙은 고민이 엿보인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것만은 이전석도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협회의 내부사정을 잘 아는 건 김백동이고, 협회장과 이사- 그리고 간부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도 그뿐이었으니까.

"헌터님께서 제공해주신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재편성할 수 있도록 상부에 건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설득에 꽤 애를 먹을 것 같습니다만."

김백동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당연했다.

아무런 증거도 증언도 없이 이미 결정된 작전을 바꾸는 게 어디 쉬운 일이랴.

특히 그게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더욱 난항을 겪을 것이다.

하물며 신경 써야할 건 그뿐만이 아니다.

정보의 유출.

어디서 작전이 새어나갔는지.

적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철저한 조사와 관리가 필요할 터.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벌어지는 건 멸망과 망국- 그로인한 파탄이었으니까.

'여명회에 대해선··· 굳이 꺼낼 필욘 없겠지.'

어차피 조만간 김백동도 눈치 챌 거다.

여명회가 신중히 숨어들고 있음을.

그러니 쓸데없이 입을 떠벌릴 필요는 없을 터.

"그럼 이만 나가도록 하죠."

이후.

이전석은 김백동의 말에 따라 응접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협회의 정문.

이전석이 그곳을 나서기전.

"내일은 주말이니 출근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하시면 됩니다."

김백동이 그렇게 말했다.

용병이라도 출근은 한다.

어디까지나 빌런 대응부서에만 해당되는 사항이다.

'······귀찮군.'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지는 건 처음이다.

기껏해야 알바를 해본 게 전부.

그런 이전석에게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출근을 한다는 건 실로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시작부터 결근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알겠습니다."

그가 김백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협회를 나서려던 차.

"참······."

김백동이 무언가 떠오른 듯 이전석을 붙잡았다.

"협회장님께서 '언제쯤이면 답을 받아볼 수 있겠느냐'라고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아···."

이전석도 그제야 연선화의 제안을 떠올렸다.

물론 결정이라면 이미 내렸다.

"그거라면 조만간 답변해드리겠다고 전해주세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저녁.

은행에서 나온 이전석이 통장을 확인했다.

그곳에 5천이라는 거액이 찍혀 있었다.

다름 아닌, 협회에서 지급된 계약금이었다.

비록 F급이라 해도 일단은 감독관이니까.

그만한 돈을 받는 건 당연했다.

오히려 F급이라 더 적게 받은 점도 없잖아 있었다.

'가족끼리 외식이라도 해볼까?'

통장 금액을 본 이전석이 생각했다.

이번에 찾아오는 주말.

가족과 어디 비싼 곳이라도 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가령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이라든가.

회귀 전이나 회귀 후나.

가족 모두가 모여 그런 비싼 곳에 가봤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기회에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쌓아두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부모님 선물도 좀 사고.'

여동생?

한 5백 정도 현금으로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어느 시대든 늘 그렇지만, 현금은 불변의 진리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이지혜는 좋아할 거다.

평소에도 꽤나 돈을 밝히고 알바에도 열심이던 그녀였으니까.

돈이 생기니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 외에도.

'아이템 중에 마나를 올려주는 게 있었지.'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19화

데뷔 (1)

주말.

아침식사 자리.

"너··· 이거 어디서 난 거냐?"

이한석이 떨리는 시선으로 제 아들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는 손목시계가 들려 있었다.

그것도 꽤나 고가의 명품 손목시계다.

얼핏 봐도 알 수 있는 고풍스러움.

식탁에 앉자마자 이전석이 건네준 선물은 뜬금없음을 넘어 당황스럽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아, 아들······?"

그건 한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명품 가방.

한유리는 놀란 듯 석상처럼 굳었으나 시선만은 마치 지진이라도 인 것처럼 떨고 있었다.

그리고 이지혜.

"······이거 위조지폐 아니지?"

"미쳤다고 위조지폐로 주랴?"

"그럼 진짜야······?"

"어."

"헐."

이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살면서 한 번 해볼까 싶은 말을 내뱉었다.

"오빠 존나 사랑해!!"

오만원권을 백 장이나 뭉치로 받은 이지혜는 정말 신이 난 듯 방방 뛰어댔다.

그때.

쿵-!

이한석이 식탁을 내리쳤다.

"전석아."

매서운 눈빛으로 제 아들을 노려본다.

"솔직히 말해라. 이거 다 어디서 난 거냐?"

한유리도 말은 안 했지만 똑같은 생각인 듯싶었다.

하긴 백수이던 아들이 하루아침에 명품 시계와 가방은 물론, 오백이라는 거액의 현금까지 제 동생에게 쥐어줬다.

부모로선 무언가 나쁜 일을 한 건 아닌지 걱정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저 취직했어요."

이전석이 힐끗 웃으며 답했다.

이한석은 그조차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전석아."

"네."

"막 취직한 신입한테 이런 거금을 주는 회사가 있다고 생각하냐?"

"음··· 있을 수도 있죠?"

"하아······."

한숨을 푹 내쉬는 이한석.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주마. 같이 경찰서에 가서 털어놓자꾸나.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와 네 엄마는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을 거야."

그 말에 한껏 신이 났던 이지혜도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건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돈은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는 게 그녀답다고 해야 될까.

'어쩔 수 없나.'

이전석은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원래는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밝히지 않고선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물론 모든 걸 곧이곧대로 밝힐 생각은 없었다.

"취직했다고 했죠? 그 취직처가 협회에요."

이전석이 명함을 식탁에 올려놨다.

그것을 슬쩍 흘겨본 이한석은 적잖이 놀란 어조로 물었다.

"협회? 그 헌터협회 말이냐?"

"네."

이전석의 대답.

이지혜 또한 놀란 것 같은,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냈다.

"그럼 오빠 각성한 거야?!"

"각성은 했지만 F급이야. 헌터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무직이고."

F급이라 적힌 명함을 직접 보여주는 이전석.

이럴 때를 위해 미리 사정을 설명하고 위조 명함을 받아왔다.

물론, 협회의 명함은 위조가 불가능하다.

명함에는 각각 고유코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조한들 금세 들통 나고 만다.

다만.

━이상한 짓에 사용하는 게 아니니 그 정도 배려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김백동은 가족을 위해서라고 설명하니 흔쾌히 가짜 명함을 만들어줬다.

"협회에 들어가면 등급이 낮아도 계약금으로 돈 많이 받는 거 아시죠?"

협회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만큼 돈을 꽤나 후하게 사용하는 편이다.

거액의 계약금이 그 대표적인 예다.

물론 아무리 협회라도 F급 헌터, 그것도 막 입사한 사무직이 이만한 돈을 받는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지만···.

"그걸로 부모님 선물부터 산 거예요. 지혜는 제가 평소에 모아뒀던 돈으로 조금 더 보태서 준 거고."

제 아들이 그리 말하니 이한석은 차마 뭐라 따지지도 못했다.

심지어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깨지 않은 저금마저 깨서 보탰다고 하지 않은가.

"후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는 이한석.

"정말 협회에 취직한 거 맞지?"

"협회 명함은 위조가 불가능한 거 아시잖아요."

부자가 서로 마주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럼 됐다."

이한석이 그리 말하며 은근슬쩍 시계를 품에 챙겼다.

그렇게 이전석을 따지고 들었지만 정작 명품이라고 하니 은근히 탐이 났던 모양.

"당신."

한유리가 그런 남편을 빤히 노려보았다.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이한석.

그 모습에 한유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의사가 욕심은 이리 많은지.

"아들."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한유리가 말했다.

"위험한 일만 하지 마렴."

"당연하죠. 사무직이라 직접 빌런이나 몬스터를 상대할 일은 없을 거예요."

거짓말이다.

이전석이 하려는 건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찌 솔직히 말하랴.

적어도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었다.

"알지? 엄마는 아들 안전이 제일이야."

죄책감.

그 말을 듣자 가슴이 아려왔다.

정말 신기한 기분이었다.

자신에게도 아직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다니.

'실망시켜드리지 말자.'

거짓말을 한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안전이 제일이라는 한유리의 말.

그것만큼은 배신할 생각이 없었다.

이 가정은 누구 하나도 없으면 안 된다.

이한석, 한유리, 이지혜.

그리고 이전석.

하나의 조각이라도 빠져버리는 순간, 가정의 행복은 망가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더 강해져야 해.'

가족들을 걱정시키지 않을 만큼.

다만 레벨을 올리는 건 갈수록 느려질 테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 특성을 갈취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내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이전석은 재차 연선화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주말.

가족과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

이전석은 "그보다"라며 말을 이었다.

"저희 오늘 같이 외식이라도 해요."

"외식 말이냐?"

"네. 이왕이면 좋은 식당에서."

아버지의 물음에, 이전석은 얼마만이지 모를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 ※ ※

"감사합니다."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이전석이 가게를 나왔다.

가족과의 외식이 있고 다음 날.

그는 바로 아이템샵을 찾았다.

그곳에서 간단한 천 방어구와 마나 효과가 있는 여러 아이템을 구매했다.

은신자의 코트

등급 : C

효과 : 착용 시 민첩이 +5 만큼 증가한다. 또한 숨을 참는 동안 기척이 사라진다.

검정색의 기다란 코트.

은신특성과 잘 맞을 것 같아 구매했다.

그 외에도 반지와 귀걸이도 있었다.

마나가 깃든 왼쪽 귀걸이

등급 : D

효과 : 착용 시 마나가 +3만큼 증가한다.

마나가 깃든 오른쪽 귀걸이

등급 : D

효과 : 착용 시 마나가 +3만큼 증가한다.

마나가 깃든 반지

등급 : D

효과 : 착용 시 마나가 +3만큼 증가한다.

각각 마나가 3씩 증가하는 효과.

이전석은 상태창을 확인해 봤다.

Lv. 27

[근력 - 10] [민첩 - 30]

[체력 - 20] [마나 - 19]

스탯 포인트 - 1

선업 - 22050(600)

악업 - @#%^@#TF

보유특성

└천살성(EX+), 영원의 낙인, 발화(B). 망자들의 왕(C), 은신(A)

30으로 오른 민첩.

마나 또한 19가 되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선업도 2만을 훌쩍 넘어가 있었다.

최은하를 구해주며 받은 보상이었다.

'괄호안에 있는 건 대출로 받은 선업일 거고.'

반드시 업상인에 사용해야 되는 만큼, 이런 식으로 따로 구분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스탯포인트 '1'을 사용하셨습니다.]

[마나가 '1'만큼 상승합니다.]

이전석은 19라는 애매한 수치에 곧 바로 스탯 포인트를 사용했다.

그러자 20을 달성한 마나.

'나쁘지 않군.'

이전석이 제 몸 상태를 확인했다.

이전보다 마나가 확연히 늘어났다.

기존의 배에 해당하는 양.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에너지가 혈관을 따라 전신으로 퍼져나간다.

'이 정도면 발화에 은신도 같이 사용할 수 있겠어.'

물론 거기에 스켈까지 소환하면 마나는 금세 바닥나게 되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게 한계야.'

더 좋은 아이템을 사기엔 돈이 너무 부족했다.

고작 아이템 세 개를 샀을 뿐.

그런데도 통장잔고가 벌써 7백 언저리밖에 남지 않았다.

'조만간 급 높은 던전에 한 번 들어가야겠어.'

마나의 부족.

근본적은 해결책은 레벨업 뿐이었다.

운기조식 같은 방법이 있긴 했지만.

'그건 지금 당장 불가능하고.'

그러니 당장은 던전에 들어가 레벨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협회에 들어가면 던전 공략도 진행하지 않을까?

특히 감독관은 빌런을 상대하는 만큼 레벨의 성장도 중요했으니 종종 던전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전석으로선 거기에 편승하면 되는 일.

띠링-.

그때.

휴대폰이 알람소리를 울렸다.

이전석은 즉시 알람을 확인했다.

'재밌게 즐기고 있네.'

SNS로 들어가자 여동생이 새로 올린 글이 보였다.

이지혜는 이전석이 준 돈으로 친구들과 호의호식을 하고 있다.

정말 즐거워 보이는 표정.

전생.

회귀 전.

절망과 우울에 눈물만 흘리던 때와는 다르다.

이전석은 생각했다.

이 웃음을 결코 빌런 따위에게 빼앗길 순 없다고.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힘이었다.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강함.

[연선화]

이전석이 연락처를 확인했다.

얼마 전 명함을 받고 저장해뒀던 번호다.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얼마 전 주셨던 제안에 답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전석은 곧장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휴대폰을 집어넣은 채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차.

"혹시 이전석 헌터님이실까요?"

"······?"

누군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 ※ ※

"······이전석."

최승철이 사무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확인했다.

한 헌터의 인적사항이 기록된 서류다.

이전석.

24세.

F급 헌터.

그리고······.

'임시 감독관이라.'

최근 용병으로 협회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본 그가 쯧- 혀를 찼다.

'이래선 쉽게 건드릴 수 없겠어.'

살수를 보냈다 들키기라도 한다면?

단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없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협회의 위치는 그만큼이나 높았다.

그렇다면 의문이 한 가지 생겨난다.

의도적인 행동인가, 단순 우연인가.

이전석과 최은하.

두 사람과 협회.

서로가 짜고 친 연극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에 우연을 거듭했을 뿐인 상황인지.

'모르겠군···.'

최승철이 서류를 아무렇게나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홍차를 마셨다.

당장 불안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전석.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만···.'

아쉽게도 최승철은 지금 이 빌딩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다른 후계들의 견제 때문이다.

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귀찮은 일인지.

"어떡하시겠습니까, 도련님."

문득.

뒤에 서있던 유모가 물었다.

최승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홍차를 음미할 뿐.

이내 그가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우리 여동생도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짓궂은 장난에 어울려주는 것도 오라비의 일 아니겠어?"

최승철이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기껏 세운 계획이 망가졌지만, 최근 최은하의 행적을 보고 있노라면 그건 그것대로 재미가 있었다.

결국 비참히 짓밟혀 죽을 벌레가 발버둥치는 모습이란······.

'정말로 아름답지.'

하하-.

최승철이 옅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알고나 있을까.

그 웃음조차 누군가의 예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무리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건, 어쩌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몰랐다.

회귀한 EX급 빌런이 악인을 너무 잘 죽임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