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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제26화

캐리로 일하던 시절 어느 헌터에게서 들었던 적이 있다.

헌터 최대의 적은 몬스터가 아닌, 미궁의 기후 그 자체라고.

고작 해봐야 산림 구역 초입에서만 활동하던 나로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헌터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막 구역에 비해 산림 구역은 정말 낙원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다.

어떻게 이렇게도 극과 극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일교차.

<더위 저항>이나 <추위 저항> 같은 스킬이 생겼다지만, 아직 랭크가 G에 불과한지라 별 효용은 없었다.

그나마 낮과 밤이 바뀌는 해 질 녘이나 해 뜰 녘에는 나았지만, 그 이외의 시간대에는 전혀 활동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사막 구역에 들어서기 전에 <폭식>으로 어느 정도 에너지를 저장해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쫄딱 없이 아사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냥감을 구하러 나섰다가 그대로 잘 말린 오징어 꼴이 됐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부분에서 전혀 웃을 수조차 없는 농담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사막 구역에 도착한 이래 이곳의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투자했다.

사실 딱히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 낮에는 그저 더위에 취해, 밤에는 추위에 떨며 가만히 늘어져 있었을 뿐이다.

역시 변온 동물에게 이런 기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염연히 동물이 아닌 몬스터였지만, 어쨌든.

며칠이나 지났을까?

그동안 내 노력(?)의 보람이 있었는지, 저항 스킬들의 랭크가 상승했다.

G에서 F.

고작 1랭크 상승한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더위와 추위에 고생하던 내 숨통이 크게 트였다.

여전히 가장 더운 정오 나 추운 새벽 시간에는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지만, 그 이외의 시간에는 어느 정도 참고 움직일 정도는 되었다.

정말 다행이다.

폭식에 저장돼 있던 에너지는 아직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고 있을 정도는 아니라서 슬슬 다시 사냥을 시작해야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사막 구역에서의 생활을 시작해볼까?

* * *

그동안 내가 마냥 늘어져 있던 것은 아니다.

더위나 추위에 반쯤 수면 상태로 제대로 된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는 했어도 해야 할 일은 제대로 처리하고 있었다.

사막 구역이라고 해서 구역 전체가 사막인 것은 아니고, 사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층이나 드물게도 초목이 자라는 오아시스 같은 것도 있다.

캐리 때부터 익히 알던 지식이지만 직접 사막 구역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미리 알고 있던 지식과 비교해 이 주변의 지형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또한 이 근처에 서식하는 몬스터에 대한 조사와 더불어 헌터들의 이동 루트, 주로 사냥하는 장소 역시 함께 조사한 상태였다.

비록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적어서 계층 전체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당장 내가 활동하기에 무리 없을 정도는 되었다.

아직 조사가 끝나지 않은 다른 곳은 이제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될 것이다.

저항 스킬의 랭크 업으로 내 활동 시간도 비약적으로 늘었으니까.

* * *

사막 구역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몬스터는 의외로 언데드 계열이다.

흔히 하위 언데드로 통용되는 [스켈레톤]이나 [좀비]를 시작으로 [구울]이나 [레이스] 같은 중위 언데드들이 주로 보인다.

녀석들은 죽지 않는 불사자(Undead)라는 이름에 걸맞게 낮과 밤 가리지 않고 휴식 없이 활동한다.

평소에는 무리를 짓지 않고 사막 이곳저곳을 방황하지만, 이따금 계층주나 구역주같이 상위종의 언데드 몬스터가 등장할 시 무리를 지어 주변의 생명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헌터와 몬스터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말이다.

[좀비 워커]. F랭크의 최하위 언데드가 사막 한가운데를 멍하니 방황했다.

내리쬐는 햇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어어어-' 기괴한 소리를 내뱉으며 하염없이 전진하고 있었다.

꽤나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살피던 나는 무심코 고개를 주억였다.

'눈이 상당히 좋아졌다.'

원래라면 흐릿하게 보였을 게 정상인 눈앞의 풍경이 무척이나 맑았다.

이게 다 일전에 현명한 비늘에게서 받은 마석 덕분이다.

그 마석을 통해 진화 과정에서 <마안>이라는 스킬을 얻을 수 있었다.

뭐, '마안'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가진 효과라고는 그저 눈이 좋아지는 정도밖에 없었다.

이것 역시도 뱀이 되었던 초창기라면 몰라도, 이미 시각보다는 혀에 더 의존하고 있었기에 사실 그닥 그리 큰 효용이 없었다.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애초에 별다른 노력 없이 리자드맨들의 호의로 얻은 선물이나 다름없기에 불만은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혀의 감지 범위보다 밖에 있는 대상을 관찰할 때는 이 '천리안'이 상당히 유용했으니까.

좀비 워커는 F랭크의 몬스터답게 몹시 약한 몬스터다.

평소라면 능력치 상승에도 별 영향도 없고 딱히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대였겠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흥미가 있다.

과연 언데드는 무슨 맛일까?

어디까지나 반쯤 썩어 있는 시체나 다름없었기에 시각적으로든 생리적으로든 그리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앞서 말했다시피 사막 구역에서 주로 서식하는 몬스터는 대부분 언데드 몬스터였으니까.

그나마 해골밖에 없는 '스켈레톤'들 보다는 그나마 살이 붙어 있는 '좀비'들이 먹을 게 있었다.

그리하여 있는 흥미, 없는 흥미 모두 끌어모아 직접 먹어보았다.

언데드에게서는 썩은 김치 맛이 났다.

어떤 맛이냐고?

더럽게 맛없었다.

벌써부터 이따금 간식 삼아 먹던 깜짝 새의 알 맛이 그립다.

꽤나 험난하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먹거리가 풍족했던 내 고향 산림 구역이 그립다.

조금 울적해지기는 했으나 금세 떨쳐냈다.

벌써부터 이래서야 앞으로의 험난한 길을 헤쳐나갈 수 없을 거다.

마음 단단히 먹자.

그래, 힘내는 거다.

이후, 폭식에 저장될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근방에 있던 언데드 몬스터들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도중에 스켈레톤 같은 몬스터도 잡아먹어 보았는데 의외로 좀비 계열보다는 이쪽이 더 나았다.

의외로 고소하고 씹는 맛도 있었다.

그래 봐야 같은 언데드 몬스터라 다른 정상적인 몬스터에 비해서 하자가 좀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것뿐이다.

문득 사냥감을 찾아 사막을 횡단하는 헌터 무리를 보았다.

그들을 보니 절로 조금 전 먹었던 언데드들의 끔찍한 맛이 떠오른다.

언데드보다는 헌터를 잡아먹는 게 나을까?

잠깐 고민했다.

단순히 강해지기 위한 목적이 아닌 잡아먹기 위해서 헌터들을 공격해야 한다는 점은 전 인간으로서 양심이 조금 찔려왔지만, 나는 뱀(몬스터)다.

늘 그렇듯 뱀에게는 양심이 없다.

이제 와서 이런 인간적인 고민을 하기에는 지금껏 너무 많이 죽여왔다.

후회하고 멈췄을 거라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이미 어떻게든 인간들에게 접촉해 전혀 다른 삶을 살았겠지.

아니면 진작에 죽었거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Shii───

달빛에 몸을 숨긴 뱀이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C가 하나. D가 둘. E가 셋. 캐리 겸의 F가 하나.

총 일곱으로 구성된 소규모 공격대였다.

C랭크가 하나에 D랭크도 둘이라는 사실이 제법 위협적으로 다가왔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접근한다.

바로 지척까지 도착했음에도 그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날도 저물었고, 당장 안전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려는 듯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이들의 뒤를 눈 깜짝할 사이 급습했다.

가장 먼저 노린 것은 역시나 가장 강한 C랭크 헌터였다.

"커어억─!"

갑작스러운 기습과 동시에 곧장 목을 부러트리는 내 공격에 C랭크 헌터는 너무나 손쉽게 죽어갔다.

"고, 공대장?!"

"기, 기습이다!"

"히, 히이익!"

뒤늦게 반응한 다른 헌터들이 허겁지겁 대응하지만, 첫 공격에 가장 강한, 그것도 공대장으로 보이던 동료를 잃은 그들로서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모두 진정하세요! 진형을 갖추고 침착하게 대응하면…!"

그나마 상황 판단이 빠른 D랭크 하나가 급히 다른 이들을 추슬러보려 했지만 이쪽에서 그걸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Shaa──!

그래도 나름 한가락 한다는 것일까? D랭크 헌터는 거침없이 달려드는 내 공격을 '큭…!'하고 작은 신음과 함께 피해냈다.

"모두 진형을 갖춰요! 상대는 C랭크 몬스터! 진형만 갖추면 충분히 사냥할 수 있습니다!"

무사히 공격을 피하고 곧장 소리치는 D랭크 헌터의 외침에 다른 헌터들도 그제야 서둘러 진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수 대 일. 전형적인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한 진형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내 예상과 상황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사막 구역까지 진출한 헌터들이란 건가?'

낙원이라 불리는 산림 구역에 안주한 헌터들과는 여러모로 그 대응부터가 달랐다.

이러면 싸움이 조금 힘들어지겠는걸?

애초에 이쪽의 사냥 방식이자 전투 방식의 대부분이 처음의 기습 공격에 큰 힘을 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불리한 것은 이쪽이었다.

너무 쉽게 보고 덤빈 것일까?

"전위는 저와 창식 씨가 맡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보조를 해주세요!"

평소 공대장이라도 되려고 했던 것일까? 금세 능숙하게 다른 헌터들을 지휘하는 D랭크 헌터의 모습에 짧게 혀를 날름거렸다.

아무리 봐도 잘못 건드렸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깟 식욕이 뭐길래. 그냥 눈 딱 감고 썩은 김치나 계속 먹을걸.

하는 후회도 잠깐 들었으나 그것과 별개로 강한 투지도 일었다.

그래, 지금껏 헌터들과 너무 쉽게 싸워온 감이 없잖아 있었다.

저렇게 여럿이서 하나를 상대하는 게 바로 제대로 된 헌터지.

'불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질 것 같지는 않군.'

Shii───

객관적으로 전력을 판단해봤을 때도 승률이 그리 낮지는 않았다.

일단 저쪽이 숫자가 많긴 했지만 결국 D랭크 둘에 E가 셋, 거기다 캐리 겸의 F가 하나일 뿐이다.

첫 기습에 C랭크를 죽이지 못했다면 당장 도망치는 게 현명했겠지만 저 정도 전력이라면 눈 딱 감고 싸워볼 만했다.

승리하기만 한다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상당할 테니까.

슬금슬금- 차오르는 자신감에 재차 혀를 날름거렸다.

당장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언데드 몬스터나 잡다한 다른 몬스터들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헌터는 없다.

소란을 듣고 달려올 이는 없을 거다.

몬스터들이야 자기보다 강한 몬스터가 있다면 그쪽으로는 애초에 잘 오지 않으니까.

Shii───

더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쪽을 주시하며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는 헌터들을 향해 냉큼 달려들었다.

'역시 가장 먼저 노려야 할 건…'

보통의 몬스터라면 가장 전위에 있는 방패를 든 D랭크 헌터부터 노렸겠으나, 이쪽은 보통의 몬스터가 아니다.

무려 전 인간이었던 몬스터. 캐리였을 적 헌터들의 진형에 관한 부분이나 몬스터와 싸울 때의 대처 방법 정도는 다 꿰고 있었다.

'가능하면 머리인 공대장부터 노려야겠지만.'

임시로 공대장이 된 D랭크 헌터가 이쪽을 예의 주시하는 모습을 보니 단기간에 그를 해치우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그를 노렸다가는 오히려 잔뜩 손해만 보고 물러나야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렇다면 역시…'

Shii───

목표물을 정하자마자 <돌진>을 사용해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노린 것은 F랭크 헌터.

적을 노릴 때 가장 약한 부분부터 천천히 공략하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중 하나였다.

"온다…!"

"제가 막겠… 엇?! 지, 지나간다?!"

"어, 어그로가…! 피, 피해요!"

비록 F랭크 헌터가 진형의 가장 뒤쪽에 위치했기에 달려드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런 잔상처들이야 <급속재생>으로 금세 치유할 수 있었다.

재생에 소모된 마력도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로 보충할 수 있었고, 소모된 에너지 역시 이 헌터들을 다 먹어치우면 회복 가능했다.

"히이익─!"

"아닛?! 자리 지켜요, 경훈 씨! 어디 갑니까?!"

저를 향해 달려드는 나를 보고 F랭크 헌터가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내빼기 시작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동료를 믿고 단단히 자리를 지키는 게 더 안전할 테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F랭크 헌터로서는 그대로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 것이다.

살짝 <위압>을 사용하길 잘했다.

콰직-

그대로 다른 헌터들을 지나쳐 저만치 달려나가는 헌터를 등부터 낚아채듯 깨물었다.

'끄아아아!' 고통 어린 비명과 살려달란 외침을 들으며 세차게 머리를 휘저었다.

주둥이 사이에 매달린 헌터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툭-

힘없이 모랫바닥 위로 널브러진 F랭크 헌터의 모습에 황량한 사막 위로 기다란 침묵이 자리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모래 위를 구르는 F랭크 헌터의 시체는 제법 시각적 공포가 강한 편이었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나는 가볍게 포효를 내뱉었다.

Shaaa───!!!

그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 소리에 이번에는 감히 공대장이 된 D랭크 헌터도 무어라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제27화

쩌억- 주둥이를 벌린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죽어버린 동료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는 다섯을 향해 몸을 날린다.

그나마 아까부터 대처 능력 하나는 좋은 D랭크 헌터가 그런 내 움직임에 다급히 몸을 날렸다.

정면으로는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나를 막기보다는 동료와 함께 몸을 피하는 것을 택했다.

콰직-

아슬아슬하게 동료를 챙겨 몸을 피한 헌터의 뒤를 이어 또 다른 D랭크 헌터가 이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실드 태클!"

기합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잠시간 무방비해진 머리를 향해 방패를 내리친다.

찌르르 울리는 <직감>과 함께 급히 머리를 피해 보려 하지만, 조금 늦었다.

쾅!

머리를 내려찍는 묵직한 충격과 함께 일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가벼운 뇌진탕일까?

어질어질한 시야를 대신해 연신 혀를 날름거리자 재차 이쪽을 공격하는 대신에 도망치기 시작한 헌터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대로 도망칩시다!"

"하, 하지만!"

"C랭크 몬스터예요! 공대장님이 살아계셨다면 몰라도 지금의 우리로는 힘듭니다!"

그리 외치며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모습에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상황 파악이나 대처 능력 하나는 뛰어난 것 같았다.

슬금슬금 회복되기 시작한 시야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이들의 뒷모습을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대로 놓쳤다간 나에 대해서 알려질 텐데….'

이래 보여도 나는 C랭크 몬스터로서 계층주도 될 수 있을 수준의 몬스터다.

저들이 저대로 살아서 돌아간다면 나에 대해 협회에 보고할 것이 자명한 일.

그리된다면 당장 내게 토벌령이 내려질 것이 분명했다.

'못해도 C나 B랭크 헌터들이 여럿 파견되겠지.'

그때를 생각하면 역시 저렇게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게이트 쪽으로 도망치려나?'

다행히 근처의 게이트하고는 제법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그들이 도망친 방향은 근처의 게이트하고도 정반대의 방향.

나를 피해 빙 돌아서 갈 거라 생각하면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앞서 쓰러트렸던 두 헌터도 잊지 않고 먹어치우며 나 역시 뒤늦게 몸을 움직였다.

도망친 헌터들을 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혀의 감지나 마력을 이용한 감지를 통해 그들이 도망칠 루트를 찾아 근처에 미리 대기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쉬지 않고 달린 탓인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들의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았다.

잔뜩 묻은 흙먼지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달리는 이들의 모습이 몹시 처량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아무도 버리지 않고 처음 그 인원 그대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에서 나름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버려두고 도망쳐야 할 미끼를 내가 먼저 처리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군.'

F랭크로 보이던 캐리를 떠올렸다.

캐리란 것은 짐꾼.

비각성자뿐만 아닌 각성한 헌터들 역시도 가끔 캐리로 활동할 때가 있는데, 보통 사냥하는 곳에 비해 그 수준이 낮거나 랭크가 부족한 헌터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나름 각성한 헌터라 어디까지나 비각성자인 헌터에 비해서 좋은 대우를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캐리는 캐리다.

공격대에 있어서 그리 큰 비중 없는 단순한 짐꾼.

여차할 때는 미끼로 버리고 가는 일이 흔한 것은 당연했다.

"헉… 허억…! 조금만, 조금만 쉬었다 갑시다!"

"…안 됩니다. 언제 그 녀석이 쫓아올지 모르니까요."

"이미 두 명이나 당했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놈도 만족하지 않았을까요?"

"맞아요. 쫓아올 거라면 바로 쫓아왔지. 아직까지 아무런 일도 없는 거 보면 배가 불러서 돌아간 게 분명해요."

랭크가 낮아 상대적으로 체력이 부족한 E랭크 헌터 셋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런 셋의 의견에 조금 설득된 것일까? 앞장서 이동하던 D랭크 헌터가 슬며시 멈춰 섰다.

"흐음…."

"세 분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저흴 쫓아올 거였으면 진작에 나타났겠죠. 조금만 쉬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잠시만 휴식하고 이동하도록 하죠. 그래도 주변 방비는 잊지 말고…."

"이렇게 딱 트인 사막 한가운데서 무슨 방비가 필요하겠어요! 놈이 '샌드 웜'도 아니고, 땅속에서 나오지는 않겠죠!"

잠깐의 휴식이 반갑기라도 한 것일까? 곧장 바닥에 주저앉으며 늘어지는 이들의 모습에 D랭크 헌터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는 C랭크 몬스터입니다. 저희가 처음 기습당할 때를 생각하면 주변 정찰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사막 구역에 몬스터가 녀석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준비는 철저히 해야…."

"아니! 그런데 휘성 씨! 아까부터 말이야, 왜 공대장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해요?"

"…예?"

한순간 멍청하니 되묻는 '휘성'이란 D랭크 헌터를 향해 E랭크 헌터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쏘아붙였다.

"아니- 그렇잖아요? 아까야 뭐 위급 상황이라서 그럴 수 있다 쳐도, 계속 휘성 씨가 공대장처럼 행동하면 곤란하다 이거예요."

"…무엇이 곤란하다는 거죠?"

"무엇이고 자시고, 곤란한 게 하나가 아니니까 그렇죠. 예를 들어 창식 씨!"

"예? 저 말입니까?"

한쪽에 멀뚱멀뚱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또 다른 D랭크 헌터를 E랭크 헌터가 가리켰다.

"그래요, 창식 씨. 창식 씨도 명색의 D랭크 헌터 아닙니까? 같은 랭크 헌터가 자꾸 이래라저래라 명령만 내리는데 창식 씨는 하나도 안 불편해요?"

"…예, 저는 별로…."

"아니! 그리고 또 말이야!"

'창식'이라 불린 D랭크 헌터가 자신의 의견에 부정하자, 곧장 화제를 돌리는 E랭크 헌터였다.

그런 E랭크 헌터의 모습에 휘성이라 불린 헌터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괜한 말로 말다툼하기 싫다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처럼 휘성이라는 헌터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발끈한 것인지 E랭크 헌터가 한층 소리를 높여 바락바락 떠들었으나, 휘성이란 헌터는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듯해서 숨어서 지켜보던 나도 잠시 목적을 잊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E랭크 헌터가 D랭크 헌터한테 저렇게 바락바락 대들 수 있다니, 여러모로 놀랍다.

특히나 저렇게 대드는 상대를 그냥 무시하고 봐주고 있는 휘성이란 헌터가 가장 놀랍다.

다른 동료들의 눈치라도 보는 것일까?

나 같았으면 진작에 모랫바닥 안에 뜨끈뜨끈한 묫자리를 마련해 줬을 텐데 말이다.

너무 몬스터 마인드인가?

'그것보다 정말 대범하기는 하군. 몬스터들이 드글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저렇게 큰소리라니.'

사실 대범하다기보다는 그냥 멍청한 것 같지만 딱히 이쪽하고는 별 상관이 없었다.

그것보다 슬슬 소리를 듣고 슬금슬금 모여드는 몬스터들보다 앞서 움직일 필요를 느꼈다.

'…아니 잠깐. 굳이 이쪽에서 먼저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Shii───

한차례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의 기색을 살폈다.

바락바락 점점 커져가는 소리에 이끌려 하나둘 이쪽으로 접근하는 몬스터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당장 그리 강한 녀석은 없었지만 그 수가 제법 되었다.

'먼저 움직이기보다는 이대로 몬스터들이 먼저 헌터들에게 덤벼두도록 해야겠군.'

그 숫자가 많기는 해도 앞서 보았던 휘성이란 헌터의 실력을 보면 그리 큰 피해 없이 전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법 소모는 있겠지만 결국 문제없이 처리하겠지.

그렇다면 이쪽은 몬스터들과 싸우며 한층 소비된 헌터들을 상대하면 된다.

그리 판단한 순간 나는 한층 더 은밀히 몸을 숨겼다.

이참에 헌터들의 실력이나 제대로 한번 구경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모여든 몬스터들의 모습에 휴식을 취하던 헌터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들 역시 몬스터들이 갑작스레 몰려든 이유가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E랭크 헌터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아무리 철면피라도 찔리는 것인지, E랭크 헌터는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몬스터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이 판을 치는 사막 구역답게 모여든 몬스터들도 하나같이 스켈레톤이나 좀비 같은 몬스터들이었다.

평균 랭크는 E나 F.

아무리 높아 봐야 D랭크 정도라 그들 다섯으로도 무리 없이 몰려든 몬스터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러 열심히 움직이던 E랭크 헌터가 조금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보관 중이던 회복 포션에 의해 말끔히 회복되었다.

그렇게 쓰러트린 몬스터들의 시체에서 마석 따위의 돈이 될 만한 것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한 그들의 모습에 나도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후… 이런 일은 경훈 씨가 잘했는데…."

"쯧… 멍청하게 행동하니까 그런 거 아냐? 거기서는 도망치지 말고 딱 버티고 서 있었어야지. 그렇게 멍청하니까 각성하고 나서도 겨우 캐리로 빌어먹고 사는 거지. 뭐, 그렇게 빌어먹고 살던 것도 오늘로써…."

-끝이었지만….

짜증을 내듯 툴툴거리는 목소리는 끝까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배후의 모랫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불쑥 솟아오른 까닭이다.

"끄아아악!"

"기, 기습!"

"하상록 씨!"

콰드득-

연신 발버둥 치는 헌터의 허리를 강하게 짓씹은 나는 그대로 축 늘어지는 헌터의 몸을 바닥으로 내던지며 곧장 다음 목표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들 중에서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장비를 챙기는 휘성이란 헌터가 보였다.

'역시 재능 있는 사람이군.'

나이도 젊어 보이고, 이대로 계속 성장만 한다면 유명 길드에 속해 공대장을 맡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어떻게든 출세할 만한 사람이라 생각됐지만….

'저 사람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지. 하필 만난 몬스터가 이쪽이라.'

내가 아닌 다른 평범한 몬스터였다면 굳이 이렇게 뒤를 쫓는 일도 없었을 테니 분명 저 사람도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일을 교훈 삼아 한층 더 성장했겠지.

왠지 그런 미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조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으나, 그렇다고 달려들던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스킬 <신체강화C>를 사용합니다.]

[스킬 <돌진B>를 사용합니다.]

쩌억- 주둥이를 벌린 채 맹렬히 덤벼드는 내 모습을 보고 조금 당황할 만도 하건만, 휘성이란 헌터는 침착하게 제 무기를 들어 올렸다.

'정면으로 받아칠 생각인가?'

스킬이라도 써서?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휘성이란 헌터가 선택한 행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면으로 받아치는 것이 아닌, 그대로 공격을 흘리는 것을 선택했다.

슬며시 옆으로 비켜서는 것과 동시에 이쪽을 향해 무기를 찔러넣는다.

내가 달려들던 힘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런 상대의 노림수를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쪽에서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의 무기가 이쪽의 비늘을 뚫지 못할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킬 <두꺼운 비늘C>가 발동됩니다.]

"큭…! 이런!"

비늘을 뚫기는커녕 그 반발력으로 오히려 밀려난 휘성이 바닥을 구른다.

"윤휘성 헌터!"

위험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동료의 모습에 그제야 다른 헌터들도 행동을 개시했다.

제 몸만 한 커다란 방패를 꺼내 든 창식이라는 또다른 D랭크 헌터가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 윤휘성 헌터에게서 떨어져! 실드 태클!"

이전과 마찬가지로 방패를 앞세운 채 달려드는 헌터의 모습.

나는 기다리고 있던 상황에 슬며시 혀를 날름거렸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C>를 발동합니다.]

[스킬 <카운터C>를 발동합니다.]

쉬이익- 쾅!

방패를 휘두르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 절묘한 반격(카운터).

내 꼬리에 얻어맞은 헌터가 '커억-!'하고 피떡이 되어 저만치 날아갔다.

순식간에 리타이어 당하는 D랭크 헌터의 모습에 살아남은 두 E랭크 헌터들이 멈칫거린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미 공포가 가득했다.

"큭… 모두 정신 차리세요! 넋 놓고 있으면 안 됩…!"

[스킬 <위압A>를 사용합니다.]

무어라 소리치려는 휘성이란 헌터를 상대로 위압을 발동했다.

그대로 흠칫 굳은 그를 내버려둔 채 몸을 움직였다.

먼저 노릴 것은 두 E랭크 헌터였다.

가만히 놔뒀다간 그대로 도망칠지도 몰랐으니까.

앞서 말했지만, 괜히 이들을 살려줘서 이쪽에 대해 떠들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오늘 내게서 도망치는 상대는 아무도 없을 예정이다.

"히… 히이익…."

"사, 살려…!"

공포에 반쯤 넋을 놓은 두 헌터를 처리하는 것은 무척이나 손쉬웠다.

애초에 랭크 차이부터가 났으니, 어린애 손목을 비틀 듯 가볍게 그 목을 꺾었다.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두 헌터의 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내 위압에서 자유로워진 휘성이란 헌터가 이쪽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나를 찢어 죽일 듯 매서웠다.

"모두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한 자 한 자 짓씹듯 내뱉는 목소리 속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반드시 나를 죽이겠다는 각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분명 오늘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굉장한 헌터가 되었을 텐데.

나는 몬스터. 그는 헌터.

서로 죽고 죽일 수밖에 없었다.

"히아아압!"

기합성과 함께 달려드는 그를 향해 나 역시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뱀과 작은 인간의 신형이 충돌하고.

콰직-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승자가 가려졌다.

제28화

사막 구역에는 참 많은 헌터들이 활동 중이다.

캐리 시절 듣기로는 서울 대미궁을 드나드는 전체 헌터 중 5, 60%나 되는 인원이 활동한다고 했었는데, 실제 겪어보니 확실히 그만한 인원이 활동 중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림 구역에 비해 계층 하나하나의 크기가 훨씬 넓기에 그리 비좁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확실히 산림 구역에 비해 헌터들과의 조우 비율이 높았다.

대한민국에 이만큼 많은 헌터들이 있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괜히 사막 구역에 넘쳐나는 언데드 몬스터들의 원인이 이렇게 많은 헌터들이란 것이 아니었다.

사막 구역에서 많은 헌터들이 활동 중인 만큼 고랭크의 강한 헌터들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정확히 직접 대면했다기보다는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본 것뿐이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고랭크 헌터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더 깊숙한 계층까지 원정이라도 가는 것일까?

무려 2, 300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대열을 맞춰 전진한다.

하나하나의 랭크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만한 숫자는 확실한 위협이 된다.

생존 본능에서부터 진화한 직감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왔다.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숫자보다 더 두려운 것은 대열의 선두에서 앞장서는 단 한 명의 헌터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으스스 소름이 돋았다.

단지 무표정한 얼굴로 앞장서 걷고 있을 뿐임에도 위압감을 느낀다.

얼마나 강할까?

B? A?

아니, 그 이상이 분명했다.

<은폐>와 마안의 천리안 능력을 이용해 멀리서 지켜보고 있음에도 두려움이 몰려왔다.

헌터들의 대열을 지켜보던 것을 멈추고 곧장 몸을 돌렸다.

괜히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 저기 저 '괴물'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이만큼 성장했음에도 나는 아직 약하구나.

안주하지 말고 더 성장해야겠구나.

새삼 다시 한번 상기한 사실에 재차 다짐한다.

강해지자.

처음 내가 17계층의 숲을 떠난 이유를 떠올렸다.

안락한, 편안한 성장이 보장된 여왕의 곁을 떠난 이유를 생각했다.

나는 고작 C랭크의 몬스터.

그동안 겨우 헌터 몇을 죽였다고 너무 기고만장해져 있었다.

나는 조금 강해졌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아직 한없이 약자에 가까웠다.

저 높은 곳에서 보자면 캐리이던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스스로 몸을 숙인다.

그게 나쁘단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훌륭한 대처 방법의 하나니까.

하지만 계속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힘이 없어서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과 힘이 있음에도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니까.

'힘을 키우자.'

끊임없이 되뇌였다.

다음에는 먼저 몸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내가 아닌 남이 나를 피할 정도로 강해지고 싶다.

'강해지자.'

이날, 나는 스스로 재차 다짐했다.

* * *

더위 저항이나 추위 저항의 랭크가 E까지 성장했다.

여전히 편안하다 싶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굳이 무리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사막 구역에 대한 적응은 어느덧 완벽해져 가고 있었다.

사막 구역의 몬스터는 언데드 몬스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언데드 몬스터가 주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생태계를 가진 대미궁의 특성상 다른 종류의 몬스터들도 확실히 사막 구역에 서식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샌드 스콜피온]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샌드 스콜피온은 전갈형 몬스터인데, 그 랭크는 C랭크 몬스터로 나와 같다.

내가 어지간한 C랭크 몬스터 중에서는 확실히 강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샌드 스콜피온은 쉽게 볼 수 없는 몬스터다.

그 크기가 무려 4, 5미터에 달할 정도로 큰 덩치를 가지고 있으며, 어지간한 충격은 다 막아내는 단단한 갑각과 무지막지한 집게발 그리고 치명적인 독침까지 가지고 있다.

단순히 신체적인 특징만 보자면 나보다 훨씬 전투에 적합한 신체였다.

어지간한 헌터들도 랭크 차이가 크지 않으면 정면 대결보다 숫자를 이용한 깎아 먹는 전술을 사용할 정도로 랭크에 비해 강한 몬스터 중 하나다.

오늘 나는 이 녀석을 만났다.

* * *

녀석과의 전투는 역시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 역시 <두꺼운 비늘>이나 낮지 않은 내구덕에 녀석의 공격에 쉽게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나 역시 녀석의 단단한 갑각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그 단단한 갑각을 뚫을 수 없다면 차라리 <조이기>를 통해 서서히 찌그러트려 죽일 생각도 했지만.

녀석 역시 나처럼 큰 덩치에 맞지 않게 굉장히 민첩했기에 각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들이댔다간 녀석의 무지막지한 집게발에 그대로 토막 날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함부로 몸부터 들이밀 수도 없었다.

그나마 녀석이 가진 독침은 내 독 내성 덕분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 반대로 내 독 역시 녀석이 가진 내성 덕분에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문제였지만 말이다.

녀석과 전투를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결판은 아직도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장기전이다.

뱀의 신체란 것은 의외로 이런 장기전에 그리 적합하지 않다.

이런 정면 대결보다는 기습을 통한 사냥에 훨씬 적합한 신체인 것이다.

그나마 폭식이나 급속재생 같은 스킬 덕택에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다.

사실 단순히 먹이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이득보다는 손해가 훨씬 큰 싸움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끝까지 버티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

이 싸움이 단순히 먹이를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내 성장을 위한 싸움이었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해가 높이 떠 있을 때부터 시작한 싸움은 어느덧 해가 지고 달이 떠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정말 쉽지 않구나.'

폭식이나 재생 덕택에 여기까지 버티고 있는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와 싸우고 있는 이 녀석도 어느 의미로 정말 대단하다.

그저 단순한 개체가 아닌 것일까?

한번 사념대화로 대화를 나누고 싶단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멈추었다.

지금 녀석과 나 사이에 대화는 필요 없었다.

단지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

한 마리의 몬스터로서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쉬아아──!!!"

"키르르르──!"

폭식과 재생의 연계로 아무런 상처도 없는 나와 달리 녀석의 몸은 상처투성이다.

단단했던 그 갑각도 연신 두드려 맞은 끝에 그 단단함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날카롭던 독침도, 위압적이던 집게발도 모두 한 꺼풀씩 꺾여나가 있었다.

슬슬 이 길었던 싸움도 끝을 낼 때가 온 것 같다.

승패를 가른 것은 결정적으로 폭식과 재생 덕택이다.

결국 누적된 피로와 부족한 체력 탓에 샌드 스콜피온은 내게 큰 틈을 내보였다.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녀석을 공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 온몸을 조여오는 기다란 몸뚱이.

까드득- 빠드득-

단단했던 갑각 위로 금이 가기 시작하고, 마침내 와그작- 부서져 내린다.

연신 발버둥치던 녀석의 몸이 한순간에 축 늘어졌다.

보통의 시뻘건 핏물과 달리 녹색의 진득한 체액이 내 비늘을 타고 흘러내렸다.

Shii───

승리했구나.

머릿속을 울리는 상태창의 알림을 들으며 긴장을 풀었다.

온몸에 나른한 피로가 몰려든다.

이번 싸움으로 소모도 그리 적지 않았지만, 그만큼이나 얻은 소득도 적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능력치가 올랐다.

특히나 내구가 중점적으로 올랐다.

어느 틈엔가 내 능력치 중에서도 첫 번째를 자랑할 정도로 말이다.

능력치가 오른 것은 평범하게 기뻤지만 내구가 올랐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많이 맞았다는 뜻이기에 언제나처럼 마냥 순수하게 기뻐할 수는 없었다.

나름 열심히 피한다고 피했는데 말이지.

스킬의 성장도 적지 않았다.

주력 스킬이라 할 수 있는 스킬들의 성장은 없었지만 주력 스킬들에 비해 다소 랭크가 떨어졌던 스킬들 역시 이번 기회로 적지 않은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분명 적지 않은 소모가 있던 것은 맞지만 충분한 보상을 얻을 수 있었기에 무척 값진 승리였다.

한 차례 상태창을 살펴보며 실시간으로 내가 강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자,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혀를 날름거리며 시선을 돌려보니 그곳에는 한 무리의 헌터들이 있었다.

"이거 이렇게 나가도 되는 거예요? 저놈 저거 멀쩡해 보이는데?"

"괜찮아, 괜찮아. 두 놈이 싸우는 거 못 봤어? 그렇게 쉬지 않고 열심히 싸웠는데, 이긴 놈도 어지간히 지쳤을 거야."

"그치만 아무런 상처도 없는데…."

"아이, 괜찮다니까! 용호 씨, 저만한 몬스터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잡아가면 돈이 얼만지 알아? 용호 씨나 우리나 몇 달은 열심히 굴러야 벌 돈을 한 번에 버는 거라고!"

"맞아요!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어요? 몬스터들끼리 싸워서 한쪽이 죽는 경우가 흔치 않다니까요? 특히나 저 정도 되는 몬스터들끼리면 어느 정도 간만 보다가 도망가는 게 정상인데!"

왁자지껄- 꽤나 떠들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며 등장한 것은 다섯 명의 헌터였다.

랭크는 D가 하나에 E가 넷. 나에 비해서 결코 높지 않은 랭크였다.

숫자도 적고 랭크도 낮고.

평소 같았다면 당연히 나를 피했어야 할 수준의 상대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을 드러낸 채 말이다.

"흐흐… 이 녀석들만 팔아치우면 돈이 다 얼마야? 우린 이제 부자네요!"

"그동안 모래 위에서 구르기만 했더니 결국 이런 행운이 오네요! 저놈들 저거, 당연히 마석도 있겠죠?"

"두 놈 다 당연히 있겠지. 흐흐… 저 비늘이나 갑각은 다 내다 팔지 말고 장비로 만들어서 써도 되겠다."

"이야- 존나 대박. 그 장비만 있으면 우리 전부 랭크 업이라도 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랭크 업이 문제겠냐? 이런 놈들을 두 마리나 데려가면 대형 길드는 아니더라도, 중소 길드에서는 반드시 스카웃하러 올걸? 그럼 우리 인생은 이제 완전 핀 거란 말이야."

"우리가 해치운 게 아닌데도요?"

"그런 거 알게 뭐람. 우리만 입 꾹 닫고 있으면 아무도 몰라. 재현이 너도 스포츠카 하나 뽑고 싶다며?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조용히 입 닫고 있어."

다섯 명의 헌터들은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전혀 이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저들끼리 얘기한 대로 내가 지쳐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일까?

그 말이 맞다.

폭식으로 상처와 체력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몸의 피로는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이번 싸움으로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이 싸움이 조금만 더 계속됐다면 결국 바닥을 드러냈을지도 모른다.

"흐… 잔뜩 지쳤을 놈이 눈빛 하나는 살아 있네? 이야, 역시 뱀 새끼라 이건가?"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전혀 지쳐 있는 눈빛이 아닌데?"

"아이참, 용호 씨! 자꾸 초치지 마요! 몇 시간 넘게 싸웠을 건데 어떻게 안 지쳐요? 그냥 눈빛만 저런 거라니까!"

"와… 공대장님 이놈 덩치 좀 보세요. 가까이서 보니까 더 크네요. 역시 C랭크 몬스터인가?"

"이 정도 수준이면 거의 계층주 아니에요? 같은 C랭크 몬스터를 쓰러트렸는데."

"뭐, 협회에 보고할 때 대충 그렇게 보고하자. 그럼 이놈 몸값도 더 올라가겠지."

"흐흐… 겸사겸사 이 녀석을 잡은 우리 몸값도 더 올라가고요?"

"흐… 굳이 그걸 말해야겠냐? 당연하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 헌터들이 다가왔다.

그래도 마냥 바보는 아닌지 대화 내용과 달리 어느 정도 경계를 하면서 다가오는 모습이다.

슬며시 각자의 무기를 빼든 채 슬금슬금 다가오는 헌터들의 모습에 조용히 눈을 껌뻑였다.

앞서 말했지만, 분명 나는 지쳐 있었다.

이대로 다시 싸우라고 하면 불과 몇 분도 되지 않고 쓰러질 정도로.

그런데….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쓰러질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정도 수준의 상대들이야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어…? 어어? 고, 공대장님? 저놈 저거 우, 움직이는데?"

"야야, 당연히 우리가 다가가는데 움직이지. 그래 봤자 다 허세니까 쫄 필요 없어! 냉큼 모가지만 싹둑- 하면…."

무어라 말을 내뱉던 헌터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퍼억- 빠른 속도로 휘둘러진 무언가에 휩쓸려 훌쩍 날아갔기 때문이다.

"어어? 어어─?!"

"이런 씨X! 어쩐지 기분이 영 X같더라니! 뭐 해요?! 당장 도망쳐요!"

"히이익! 사, 살려줘!"

Shii───

슬며시 몸을 움직이는 나를 피해 헌터들이 혼비백산 달아나기 시작한다.

아까 전까지의 자신감이나 욕심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죽음에 대한 공포에 그들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침 저장된 에너지가 부족하던 참이었는데, 참 잘되었다 싶었다.

이렇게 직접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게 바로 포장 배달인가?

나는 금세 저만치 달아나는 헌터들을 여유롭게 쫓았다.

마침 배가 고프기도 하고, 언제나처럼 누구 하나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제29화

28계층. 사막 구역에 온 것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일수로 따지면 한 달 정도 되었을까?

이 계층에서 만나볼 수 있는 몬스터는 거의 다 만나본 것 같았다.

딱히 계층주 같은 몬스터도 없고, 슬슬 다음 계층으로 내려가는 게 어떨까 싶다.

고민은 짧았고, 결정도 빨랐다.

곧장 29계층으로 향했다.

그간 28계층의 지리를 충분히 익혀 두었기에 다음 계층으로 가는 게이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소 문제가 있다면 마침 찾아간 게이트에 헌터들이 다수 있다는 것일까?

숫자는 여덟.

그중 C랭크가 셋이나 있었다.

둘 정도라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겠으나 셋은 무리다.

첫 기습으로 하나를 해치운다 해도, 이후 남은 둘을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아예 C랭크 셋만 있으면 몰라도 남은 다섯까지 상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강해지려면 가끔씩 시련도 통과해야겠지만 그렇다고 괜히 목숨까지 걸고 싶지는 않았다.

이쪽 게이트는 틀렸나?

조금 거리가 멀더라도, 다른 게이트로 이동해야겠다 싶은 생각에 막 몸을 돌리려던 찰나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그래서 말이지─!"

그리 작지 않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큰 특징 없는 평이한 목소리.

한번 듣고서 쉽게 잊을 정도로 가벼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에 박혔다.

"그 모지리가 멍청하게 바닥을 구르는 거 아니야?"

"어머어머. 그래서요? 어떻게 했어요?"

"어쩌긴 뭘 어째? 남들 눈도 있으니 바로 일으켜 세웠지. 그러니까 막 고맙다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데…."

휙- 홀린 듯 시선을 돌린 곳에는 둥글게 모여 앉은 헌터들 사이에서 연신 입을 놀리는 한 사내가 있었다.

목소리만큼이나 평범한 인상.

길가를 지나가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칠 법한 흔한 얼굴.

슬며시 미소 짓는 모습이 제법 훈훈해 보이는 사내.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이민성.'

그는 내가 캐리였던 시절 만났던 헌터 중 하나다.

그것도 막 캐리가 되고서 만나게 된 첫 번째 헌터이자, 내 첫 번째 공대장이었다.

"큭큭. 자길 누가 밀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아, 정말 멍청한 자식. 역시 각성도 못한 캐리답더라니까. 조금만 친절을 베풀어도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영!"

"꺄르르─ 정말 우리 공대장님은 캐리를 참 싫어하신단 말이에요? 어쩜 그렇게 못 괴롭혀서 안달인지! 듣는 우리야 웃기지만."

"아아. 딱히 캐리를 싫어하는 건 아냐. 오히려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데? 더러운 해체 작업도 대신해줘. 짐도 옮겨줘. 수발도 들어줘. 내가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

"킥킥. 그럼 뭐예요? 그럼 왜 평소에 그렇게 못 괴롭혀서 안달인데?"

"하하. 다 애정이지. 애정이야. 각성도 못한 덜떨어진 것들이 돈이라도 벌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워? 괜히 나대다가 죽지 말라고 배려해주는 거야."

"킥킥. 말도 안 돼. 실은 그냥 잔뜩 괴롭히고 싶을 뿐이면서."

"아아! 들켜버렸나!"

와하하- 웃고 떠드는 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행의 가운데에서 연신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민성.

그는 내 기억 속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것 없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평범하게 생겼고 여전히 역겨웠다.

사실 이민성의 첫인상은 딱히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체 미궁에 뛰어든 나를 캐리로 받아줬던 사람인만큼 오히려 당시의 내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 감정이 불과 채 일주일도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민성은 캐리를 혐오하는 대표적인 헌터들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을 몹시도 혐오했다.

각성도 못한 것들이 나대는 꼴이 보기 싫다고 했던가?

그는 각성한 이들을 진화한 신인류라 믿는 인간이었고, 각성하지 못한 이들은 도태된 머저리들이라 생각하는 역겨운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허구한 날 별 쓸모없는 이유로 트집을 잡기 일쑤였고 종종 도를 넘은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직접적인 신체적인 폭력은 하지 않았다는 점일까?

그마저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쓰레기에 손이 닿았다간 제 손마저 더러워질 거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에잉- 쯧. 하나하나 굼뜨기는! 똑바로 해요, 똑바로 해! 각성도 못 한 걸 불쌍해서 데려와 줬더니 일도 못하면 어떡해? 잘 좀 합시다, 유준영 씨!]

[하! 이 덜떨어진 머저리가! 그것 하나 똑바로 못해? 일을 이따위로 해놓고 돈은 돈대로 받아 가겠다고?! 이래서 각성도 못 한 덜된 것들은!]

[뭐? 헌터가 되겠다고? 쯧─ 뭔 개나 소나 헌터야? 너 같은 떨거지가 헌터가 될 수 있다 생각해? 준영아, 너는 그냥 계속 캐리나 해라. 너 같은 것들한테는 캐리가 딱이지. 괜히 허튼 생각하지 말고….]

[쯧쯧. 잘하자, 준영아. 너 이 새끼, 나 아니었으면 정말 어쩔 뻔했냐? 다른 공대 들어갔으면 너는 진작에 몬스터 밥이었어 인마! 정말이지 내가 자비로워서 망정이지.]

[정말 혐오스러워서 못 봐주겠네! 어이, 유준영! 각성도 못 한 떨거지 중에서 그나마 똘똘해 보여서 데려왔더니! 이래서는 미끼로밖에 못 쓰겠잖아!]

[야, 유준영! 너 지금 공대를 나간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동안 내가 오냐오냐 해줬더니 이 새끼가─!]

[…그래. 가라, 가. 나 아니면 너 같은 쓰레기를 누가 주워가겠냐? 쯧- 은혜 갚을 생각은 안 하고 남 뒤통수나 치네. 이래서 각성도 못 한 떨거지는 상종해서는 안 돼.]

주르륵- 떠오르는 기억의 단편들.

이민성은 마지막 순간까지 쓰레기였다.

채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캐리가 얼마나 헌터들에게 천대받는 직업인지 여실히 깨닫게 해준 쓰레기다.

다른 건 몰라도 그와의 경험 덕분에 이후 캐리로 일하며 갖은 모욕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민성에게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른 헌터들이 하는 것은 짓궂은 장난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전혀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군.'

Shii───

워낙 더러웠던 기억이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생각도 안 한 것이 분명하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떠올리는 것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를 다시 보게 된 덕에 기분은 몹시 나빠졌지만, 그에 못지않게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내게는 힘이 있으니까.

마냥 당하기만 하던 캐리 유준영이 아니니까.

'떠나면서 분명 언제가 꼭 갚아준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말이지.'

이것 참 의도치는 않았지만, 정말 잘되었다.

딱히 복수 같은 거창한 것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아깝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이 설령 호의가 아닌 복수심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감정을 쏟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그러니까 이건 복수가 아니다.'

그저 평소와 같은 행동의 연장선일 뿐이다.

마침 배가 고프니 나는 단순히 평소처럼 먹이를 사냥할 뿐이다.

그 사냥감이 과거에 악연이었던 인간이란 것은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았다.

'꼭꼭 씹어 삼켜주마, 이민성.'

Shii──

한 마리의 뱀이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 * *

<은폐>로 진화한 내 은신의 랭크는 A다.

내 랭크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스킬로, 감지 계열의 스킬이 있는 게 아니라면 결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는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스르르-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이민성과 그 일행들은 내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하하호호- 떠들기 바빴다.

일행의 가운데에서 신이 난 채 떠들고 있는 이민성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 역겹기 그지없는 웃음은 정말 여전했다.

가까이서 다시 보니 재차 살의가 차올랐다.

'그렇게 웃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잠시간 이민성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틈을 엿봤다.

"하하─ 이번에 나가면 또 새로 뽑아야겠지. 이번 놈은 좀 쓸 만하면 좋겠는데."

"킥킥- 공대장님 마음에 드는 캐리가 어디 있어요? 차라리 돈은 좀 더 주더라도 각성한 F나 G랭크 헌터를 고용하는 게 어때요?"

"에이- 안 돼. 아무리 랭크가 낮아도 헌터는 헌터라고. 그 돈이면 쓸모없는 버러지를 몇이나 고용할 수 있는데? 여차하면 미끼로 쓸 수도 있는 놈을 구하는 게 맞아."

"큭큭… 공대장님 진짜 이럴 때 보면 나쁜 새끼 같아 보이는 거 알아요?"

"아아. 나쁜 새끼라니? 말이 좀 심하네? 나는 단지 혐오스러운 걸 참을 수 없는 것뿐이야! 그러게 주제를 알고 적당히 나대야지! 각성도 못 했으면 얌전히 집구석에나 박혀 있어야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미궁을 들락거려?"

"와, 진짜 쓰레기 같다! 킥킥!"

"크크… 쓰레기는 내가 아니라 주제도 모르는 그것들이 쓰레기지. 아아, 어쨌든 이번에 나가면 좀 쓸 만한 놈으로 하나 구해야겠어. 요새 우리끼리 다니려니 영… 조금 더럽더라도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리 말한 이민성이 히죽이며 어깨를 으쓱일 때였다.

기회를 엿보던 나는 곧장 몸을 날렸다.

노리는 건 이민성이 아니다.

일행의 끄트머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C랭크 헌터.

단번에 끝장낼 요량으로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스킬 <신체강화B>를 사용합니다.]

[스킬 <기습B>를 사용합니다.]

[스킬 <돌진B>를 사용합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흠칫 몸을 떨며 이쪽을 바라보는 헌터와 눈을 마주한다.

당혹으로 가득찬 그의 눈동자를 덤덤히 바라보며 순식간에 목을 물어뜯었다.

콰직─ 입안으로 진득한 피 냄새가 가득 퍼져 나왔다.

"끄아아악─!"

"웅아!"

"칫! 습격이다!"

C랭크 헌터가 당하자마자 다른 헌터들이 서둘러 전투 진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재빨리 이쪽과 거리를 두고서 물러서는 이들의 중심에는 이민성이 있었다.

'과거에는 분명 D랭크였는데… 어느새 C랭크까지 올랐구나.'

예전부터 그 썩어빠진 인성과 달리 실력만은 있던 사내였다.

그러니 더더욱 캐리들을 업신여겼지.

"뱀? 무슨 몬스터지? 사막 구역에서는 못 보던 녀석인데?"

"박웅 헌터가 한 번에 당했다. 못해도 C랭크 몬스터야."

"느껴지는 기세만 보면 거의 B랭크인데요? 설마 계층주쯤 되려나? 28계층에서 계층주가 나온 지 꽤 오래되지 않았어요?"

"못해도 석 달은 됐겠지. 그렇다면 슬슬 계층주가 나올 때가 되긴 했어."

"…우리들만으로 되려나요? 도망쳐야 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이건 기회다. 계층주로 보인다고 해도 결국 C랭크 몬스터야. B랭크 몬스터가 아니라면 생각보다 쉽게 이길 수 있어."

담담히 내뱉은 이민성이 씨익 미소지었다.

기억 속에서도 종종 짓고는 하던 미소다.

자기 딴에는 굉장히 자신감에 찬 당당한 미소라 생각하겠지만, 정작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히죽이는 듯한 기분 나쁜 미소일 뿐이었다.

콰드득- 퉷!

그때까지 물고 있던 헌터의 시체를 뒤늦게 뱉어냈다.

목이 부러진 시체가 힘없이 모랫바닥을 굴렀다.

흘깃- 이민성의 시선이 싸늘한 주검이 된 제 동료를 향한다.

그의 얼굴에 스멀스멀 노기가 차올랐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제 동료인 헌터들에게만은 친절한 놈이었지.'

그 친절함을 캐리에게까지 보여줬으면 참 좋았으련만.

이제는 별 의미 없는 과정을 속으로 되뇌이며 가만히 이민성을 노려보았다.

그가 제 헌터들과 몇 마디 대화를 속삭였다.

먼저 공격할 셈일까?

아쉽게도 먼저 공격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볼 생각은 없었다.

"샤아아─!!!"

크게 울부짖으며 이쪽을 공격하려는 헌터들을 향해 먼저 몸을 날렸다.

제30화

그 인성이야 어쨌든 이민성은 분명 뛰어난 헌터다.

내가 지금껏 만나본 헌터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D랭크이던 시절에도 동랭크 헌터 중에서는 최고가 아닐까 싶었는데, 랭크가 오른 지금은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일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기고자 했으면 사실 첫 기습 공격에서 이민성부터 노리는 게 좋았다.

더군다나 이민성은 방패를 사용하는 전위의 탱커형 헌터이자 공대장.

이후의 전투나 혼란을 생각한다면 역시 이민성부터 노렸어야 옳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굳이 이민성부터 노리지 않았다.

그에게 절대 쉬운 죽음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가능한 나는 이민성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면 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똑똑히 봐주었으면 한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껴봤으면 한다.

'아차… 너무 집중했군. 놈에게 이런 관심은 사치다.'

다시 한번 되뇌인다.

이건 복수가 아니다.

그저 언제나 같은 단순한 사냥일 뿐이다.

잊지 말자.

전위에는 이민성이, 그 뒤로 다른 헌터들이 대열을 맞추고 서 있다.

살아남은 다른 C랭크 헌터는 가장 안전한 대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가능한 C랭크 헌터부터 노리고 싶었으나, 저래서야 쉽게 공격할 수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천천히 갉아먹어야겠군.'

가능한 단기 결전을 선호하지만, 이런 식의 장기전도 결코 나쁘지 않다.

폭식과 재생의 시너지는 이미 질리도록 경험해 봤으니까.

이번 사냥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갈지 잠시 고민한 끝에 곧 몸을 움직였다.

저쪽도 나름대로 나를 상대할 방법을 모의하는 것 같았지만, 더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좋은 대처 방법이 나오기 전에 먼저 공격한다.

[스킬 <돌진B>를 사용합니다.]

"샤아아──!!!"

"모두 내 뒤로 피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내 앞을 방패를 든 이민성이 막아선다.

보통의 몬스터라면 그대로 앞을 막아 선 이민성부터 공격했겠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사고할 줄 아는 몬스터.

지성이 있는 몬스터다.

괜히 저쪽이 원하는 대로 어울려 줄 필요가 없었다.

Shii───

앞을 막아서는 이민성을 그대로 지나친다.

목표는 비교적 대열의 바깥 쪽에 위치한 D랭크 헌터.

설마 내가 전위의 이민성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신에게 돌진할 줄은 몰랐는지, 헌터의 두 눈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젠장! 그쪽으로 간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마! 피해!"

사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목소리.

이민성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는지 D랭크 헌터는 급하게 바닥을 굴렀다.

그런 헌터를 향해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B>를 사용합니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기다란 꼬리.

신체강화까지 사용한 위력적인 공격이 그대로 헌터에게 작렬했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 그리고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헌터의 입에서 "크억"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구가 꽤 높은가 보네. 아직 숨이 붙어 있군… 그렇다면 마무리를….'

"이놈!"

마무리를 위해 재차 꼬리를 휘두르려 하자 이민성과 다른 헌터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훌쩍- 뛰어올라 단번에 내 머리 높이까지 떠오른 이민성이 있는 힘껏 방패를 내리친다.

과거에는 높은 내구에 비해 민첩이 꽤나 떨어진다고 한탄하던 그였는데, C랭크로 성장하며 민첩 역시 상당히 성장한 듯싶었다.

가벼운 경갑류의 방어구를 장비한 다른 헌터들과 달리 단단한 중갑으로 중무장한 이민성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빨랐다.

휘익─

휘둘러진 방패를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무려 일곱이나 되는 헌터들이 동료를 죽이려는 나를 가만히 둘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주효했다.

이민성의 공격을 손쉽게 피해냈음에도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다른 헌터들의 공격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다른 헌터들의 경우에는 D랭크나 E랭크에 불과했기에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남아 있는 또 다른 C랭크 헌터였다.

"신유정 헌터!"

두터운 방패를 앞세운 채 내 앞을 막아서던 이민성이 다급히 누군가를 불렀다.

그 외침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찌르르 울리는 <직감>에 다급히 고개를 돌린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기다란 지팡이를 들고 있는 C랭크 헌터가 있었다.

"캐스팅 끝났어요!"

'설마…!'

당혹하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퍼엉─!

그리 작지 않은 폭음과 함께 머리 한쪽이 화끈거렸다.

'크윽…! 설마 마법이라니!'

그 수가 적은 헌터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스킬.

설마 그 마법 스킬의 사용자가 바로 눈앞에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하필 이민성의 공대원으로 말이다.

"제대로 먹혀들었다! 모두 쉬지 말고 몰아쳐! 신유정 헌터는 계속해서 다음 공격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어요!"

화끈거리는 통증과 어질어질한 시야 너머로 소리치는 이민성과 헌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과 동시에 묵직한 일격이 재차 머리를 두드렸다.

쿵-

마치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그대로 찍어 내린 듯한 묵직한 충격.

아니, 실제로 방패에 그대로 내려 찍혔으니 망치로 내리친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스킬까지 사용한 것인지 단순한 망치로 내려 찍힌 것보다 충격이 더 컸다.

"몰아붙여! 몰아불여!"

웅웅- 마치 환청처럼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몹시도 시끄럽다.

상처들이야 재생의 영향으로 이미 진작에 회복되었지만, 연속해서 머리를 뒤흔드는 두 번의 충격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퍼엉─'하고 재차 내 몸에 불꽃이 터져나갔다.

'위험하다.'

따로 직감의 경고가 없더라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위험했다.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 탓에 당장 몇 시간이고 이렇게 얻어맞더라도 재생이 끊길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위험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당장 위험한 것을 떠나서 계속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도 하필 그 누구도 아닌 이민성에게 말이다.

[스킬 <근성A>가 발동됩니다.]

[스킬 <한계돌파B>가 발동됩니다.]

[스킬 <사고가속B>가 발동됩니다.]

여전히 머릿속은 어질어질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머릿속을 나지막이 울리는 상태창의 알림을 무시한 채 꼬리를 휘두른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B>를 사용합니다.]

딱히 목표를 노리지 않은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당연하게도 꼬리 끝에 닿는 것은 없었고, 그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지만 최초의 목표는 달성했다.

내 꼬리를 피해 이민성과 헌터들이 잠시간 공세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마력을 모두 재생에 때려 박는다.'

평소에는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알아서 마력을 소모해 재생이 활성화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직접 의식해서 마력을 재생으로 돌렸다.

평소 <마력 조작>을 열심히 사용하며 연습한 덕에 이번이 분명 첫 시도였음에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온몸의 자질구레한 상처들이 급속도로 회복되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 잔뜩 흔들리던 시야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

"──! 젠장, 저놈 재생하고 있잖아! 다들 다시 공격해!"

잠시간 공세를 멈추었던 이민성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이쪽이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

처음부터 대놓고 회복하고 있었으니 딱히 눈치채도 상관은 없었다.

이미 이전에 입었던 피해들은 거의 다 회복된 상태였으니까.

-죽여.

진득한 살의밖에 느껴지지 않는 냉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상태창의 알림과는 여러모로 다른 목소리.

-죽여.

헌터들을 만날 때마다 항상 들려오는 '미궁의 의지'다.

오늘도 어김없이 여느 때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강렬한 의지.

-죽여.

내 행동을 강제하려는 듯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

평소라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무시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죽여.

살의 가득한 그 강대한 의지를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미궁의 의지가 품은 거대한 살의를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일시적으로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인 대가로 일시적으로 현 29계층의 계층주(플로어 보스)가 되셨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현재 육체의 한계 이상으로 상승합니다.]

[경고. 한계를 넘어선 힘은 무리한 육체에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경고하듯 나지막이 속삭이는 상태창의 알림을 무시했다.

그동안 거부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온몸에 힘이 넘친다.

당장에라도 흘러넘칠 것만 같은 이 힘을 사용하고 싶다.

이유 없이 끓어오른 살의와 적의가 온몸을 잠식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 찢어발기고 싶다.

그리고 마침 내 앞에는 딱 좋은 상대가 있었다.

"…공대장. 저놈 저거 눈빛이 이상한데요?"

"…모두 조심해. 심상치 않아."

무어라 쑥덕거리는 이민성과 헌터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울린다.

아까와 달리 잔뜩 긴장한 듯한 이들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끝없이 끓어오르는 그들에 대한 살의와 적의하고는 달리 사실 내 이성은 그 어느 때 보다 냉정해져 있었다.

'…미궁의 의지가 이런 거였나?'

길었던 거부 끝에 마침내 받아들인 미궁의 의지에 대한 대가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이만큼이나 강한 힘.

바로 조금 전의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치는 힘.

당장 그 무엇과 싸우더라도 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진화 때마다 종종 느끼고는 하는 전능함이 온몸 한가득 느껴졌다.

완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닌, 단순히 이번 한 번만 받아들인 것뿐임에도 이 정도의 힘이라니?

완전히 받아들이게 된다면 과연 어떨까?

'…이건 조심해야겠다.'

당장 느끼고 있는 전능함과는 달리 나는 이 달콤한 힘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스멀스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살의와 적의가 내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애초에 이 힘은 내 힘이 아니다.'

스스로 성장하며 쌓아온 힘이 아닌 출처 불명의 빌려온 힘.

대개 이런 힘이 손쉽게 얻은 만큼 손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냥 속 편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이번 한 번만으로 족하다.'

속으로 그리 다짐하며 나는 곧 시선을 돌렸다.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헌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특히나 이민성이나 다른 C랭크 헌터의 눈빛이 가장 심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이들 중 가장 랭크가 높은 만큼 단번에 일변한 내 기세를 느낀 게 아닌가 싶었다.

-죽여.

다시금 머릿속에 속삭이는 미궁의 의지에 미간을 찌푸리는 한편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Shii───

한차례 혀를 날름거리는 것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이전부터 말했다시피 온몸에 힘이 흘러 넘친다.

아까와 같은 공격이었음에도 그 위력이 달랐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B>를 사용합니다.]

가볍게 휘두른 꼬리를 이민성이 다급히 막아낸다.

"크윽…!"

쾅-

분명 잘 막아냈음이 분명했음에도 이민성의 몸이 저만치 밀려났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헌터들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공대장 님!"

"젠장! 모두 조심해! 갑자기 위력이 올랐다!"

다급히 공대원들에게 경고를 전하는 이민성이었지만, 그의 경고가 닿기보다 내 공격이 먼저 헌터들에게 닿았다.

"샤아아─!"

콰직-

훌쩍 몸을 날려 돌진하는 나를 미처 피하지 못한 헌터가 그대로 몸을 물어뜯겼다.

입안 가득 퍼지는 진득한 피 냄새를 맡으며 나는 내게 물린 헌터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꺄아아악!"

"큭…! 신유정 헌터! 마법은 아직 멀었습니까?!"

"자, 잠시만요! 캐스팅 거의 다 끝났어요!"

귓가로 들려오는 이민성과 C랭크 헌터의 대화.

나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지 않았다.

휙─

"어? 어어? 어?!"

쾅-

입에 물고 있던 헌터를 C랭크 헌터를 향해 그대로 집어던졌다.

허공을 붉게 물들이는 핏물과 함께 그대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동료를 신유정은 피하지 못했다.

날아오는 것이 자신의 동료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법을 사용하는 헌터답게 다른 능력치가 마력에 비해 낮기라도 한 것일까?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신유정은 날아오는 제 동료를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었다.

그래도 신유정은 괜히 C랭크 헌터가 아닌 것인지, 제법 안전하게 제 동료를 받아들었다.

비록 그 동료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혜정 씨? 괜찮─ 헉?! 주, 죽었어?!"

"─!!! 신유정 헌터!"

-당장 피해!

제 품에 안긴 동료의 시체를 보고 당황하는 신유정의 귓가로 이민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 다급한 외침에 신유정이 멍하니 고개를 들자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기다란 꼬리가 있었다.

"어?"

퍼억-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신유정이 품에 안긴 제 동료의 시체와 함께 저만치 날아갔다.

한참을 날아간 끝에 넓은 모랫바닥 위로 처박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살아남은 다른 헌터들의 안색이 그리 좋지 못했다.

"무, 무슨…."

"…신유정 헌터? 안혜정 헌터…?"

"...."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상황에 넋을 놓은 듯 황망히 두 헌터의 이름을 부르는 다른 헌터들.

그 이민성마저도 황망함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원래 싸움이란 서로가 한 번씩 주고받는 것.

만약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싸움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민성과 헌터들하고 싸움을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원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냥'이었으니까.

제31화

털썩─

"마, 말도 안 돼…."

차가운 모랫바닥 위로 피칠갑을 한 이민성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발치에는 형편없이 찌그러진 방패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퉤─' 물고 있던 헌터를 뱉어냈다.

철퍼덕- 데구르르르─

몇 차례 모랫바닥을 구른 헌터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저 던져진 그대로 축 늘어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진작에 숨이 끊긴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구…."

이민성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 같은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의 주위에는 앞서 던져진 헌터와 마찬가지로 모래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헌터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 역시 앞서의 헌터와 마찬가지로 이미 숨이 끊어졌다.

그래.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은 나와 이민성밖에 없었다.

Shii───

스르르-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음에도 이민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망칠 기력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자포자기한 것일까?

여전히 '말도 안 돼'만 계속 되풀이하는 이민성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만만한 얼굴로 잘난 체하던 녀석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뱃속 깊은 곳에서 묘한 쾌감이 불쑥 차오른다.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잊지 말자.

이건 복수가 아니다.

평소처럼의 사냥일 뿐이다.

단순한 사냥에 사감을 넣을 수 있을 리가.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구…."

여전히 그리 중얼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문득 도대체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사념대화라도 사용해 불쑥 입을 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민성에게만큼은 내가 누군지 말해주고 싶었다.

과거에 네가 그렇게 천하게 보던 내가, 각성조차 하지 못한 한낮 캐리가 지금 이렇게 네 앞에 있노라고.

그렇게 당당히 선언하며 과거에 내가 받은 모욕들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다.

아니, 그대로가 아니라 두 배, 세 배, 열 배로 되갚아주고 싶다.

바로 조금 전에 스스로 다짐했음에도 이토록 강렬한 충동에 휩싸이다니.

나 스스로도 몰랐지만 당시의 그 경험들이 내게는 제법 큰 상처로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건 복수가 아니다.'

이런 놈에게 감정을 쓰는 것은 낭비나 다름없다.

'이건 단순한 사냥일 뿐이다.'

처음 이민성을 발견했을 때부터 다짐한 하나.

나 스스로 다짐한 것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내, 내가… 언젠가 최강의 헌터가 될 내가… 마, 말도 안 돼."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푹- 고개를 숙인 채 모랫바닥만 바라보는 이민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민성이 이렇게 작았구나.'

캐리이던 시절에는 그렇게 커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다시 보니 너무나 작아 보였다.

그때보다 작아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내가 큰 거다.'

그게 신체적인 의미에서든 다른 여러 가지 의미에서든 말이다.

그렇게 잠시간 중얼거리는 이민성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쩌억- 주둥이를 벌렸다.

그런 내 행동에 이민성도 그제야 반응을 보인다.

"히이익─! 안 돼! 안 돼애애! 죽고 싶지 않아!"

바둥바둥- 이민성은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엉덩이로 바닥을 기었다.

나를 피해 물러서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언젠가 최강의 헌터가 될 이 내가─!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퍽-

급히 물러서던 이민성의 등에 무언가 닿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이민성의 시야에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동료의 시체가 있었다.

"히이익!!"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른 이민성이 엉금엉금 다른 방향으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푹푹- 잠기는 모래를 헤집으며 거침없이 나아간다.

그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모래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나아간 방향마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동료 헌터들의 시체가 있었다.

"히, 히익─!!!"

재차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르는 이민성의 모습에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이건 복수가 아닌 단순한 사냥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사냥감이 저러는 모습을 보니 꽤나 만족스럽다.

이 정도면 볼 건 다 봤다.

Shii───

재차 주둥이를 벌린다.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내뱉으며 이민성이 벌떡 일어나 도망친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철퍼덕- 쓰러진다.

그러고도 다시 일어나 도망치려는 그의 모습이 퍽 안타깝다.

"사, 살려─!"

콰직-

언제나처럼 느껴지는 피냄새.

그리고 입안 가득 울리는 비명소리.

나는 조용히 턱을 놀렸다.

과거의 악연 하나가 이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다수의 헌터들을 상대로 승리하셨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치열했던 전투의 영향으로 일부 스킬이 성장합니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B>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현재 <테일 스트라이크A>↑]

[스킬 <돌진B>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현재 <돌진A>↑]

언제나처럼 차분히 들려오는 상태창의 알림에 상태창을 막 확인해 보려는 찰나였다.

[일시적으로 연결되었던 미궁의 의지가 끊어집니다.]

[일시적으로 부여되었던 계층주(플로어 보스)의 권한이 회수됩니다.]

[상승했던 능력치가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한계 이상으로 무리했던 육체가 충격을 받습니다.]

온몸에 격통이 찾아왔다.

'크으윽─!!!'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충격이다.

몸 안에서부터 무언가 잡아 뜯는 것 같은 처절한 고통.

사냥의 성과를 미처 확인하고, 기뻐하기도 전에 나는 비명부터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한계 이상의 무리한 행동은 육체에 좋지 않습니다.]

[스킬 <한계 돌파B>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현재 <한계 돌파A>↑]

[스킬 <근성A>가 발동됩니다.]

재차 상태창의 알림이 무어라 들려왔지만, 알아들을 겨를이 없었다.

그 와중에 근성이 발동되었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그래도 고통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단지 정신만 또렷해질 뿐이다.

지독한 고통에 그대로 기절하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을 터.

하지만 이 정도의 고통이라면 차라리 기절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온몸을 몰아치는 고통과 달리 자꾸만 선명해지는 정신에 나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미궁의 의지…!'

한순간 얻었던 힘은 무척이나 달콤했지만 그 반동이 만만치 않다.

단번에 랭크 이상의 힘을 쓸 수 있는 대가로는 제법 가벼운 것일지 몰라도 이런 식의 고통이어서야 두 번 다시 쓰고 싶지는 않았다.

'젠장…!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온몸을 강타한 격통은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잦아들었다.

딱히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었기에 든든하던 재생도 지금만큼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서서히 잦아드는 통증에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 사라지니 이제 좀 살 것만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잔상처럼 남아 있는 자그마한 통증에 슬며시 눈가가 찌푸려진다.

내 난동의 영향으로 내 주변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나는 곧장 몸을 움직였다.

심정 같아서는 이대로 뻗어 쉬고 싶지만 이곳은 엄연히 게이트가 있는 곳이다.

그동안 다른 헌터가 오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로 헌터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란 말이다.

이 이상 괜히 이곳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또다시 다른 헌터와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원래는 바로 다음 계층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런 지리도 모르는 30계층으로 넘어갈 바에는 일단 익숙한 29계층에 남아서 휴식부터 취할 생각이다.

신체의 상처는 전혀 없었지만, 한동안 시달린 격통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가 상당하다.

절대 두 번 다시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직감이 경고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무시하지 않으리.

그것보다 이번 싸움을 통해 여러모로 깨달은 점이 많았다.

그것은 바로 마법.

캐리 시절부터 이곳저곳에서 이야기를 들은 적은 많았지만,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단순히 보는 게 끝이 아니라 직접 맞아 보기까지 했다.

그렇게 실제 몸으로 체험한 마법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고작 C랭크 헌터가 그 정도 위력이라면 그 위는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이지?'

보통 마법 스킬들이 고랭크로 가면 갈수록 그 위력이 강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랭크의 헌터가 펼치는 마법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확실히 마법을 익히기는 해야겠군.'

이전부터 마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마력 조작>이라는 스킬을 통해 마법의 기초를 다지긴 했지만 이후로 그 이상의 성과가 없었다.

내 나름대로 방법을 고심하기는 했지만 정작 중요한 스킬 그 자체가 없어서야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담 마법을 익힐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뭘까?'

누군가에게 배울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겠지만 몬스터인 내게 마법을 가르쳐 줄 상대가 어디 있겠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른 누군가에게 배울 수 없다면 다른 방법으로 '스킬북'을 통해 배우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과연 스킬북을 내가 사용할 수 있을까?

상태창이 있으니 아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알다시피 스킬북은 없어서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다.

스킬의 종류 상관없이 1년에 매물이 서너 개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역시 스킬북을 사용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군.'

위의 두 가지 방법 말고도 나는 새로운 스킬을 배우는 좋은 방법을 하나 알고 있다.

바로 <마안>을 얻었을 때처럼 다른 몬스터의 '마석'을 먹는 것이다.

원래 마석을 섭취한다고 하더라도 스킬을 배울 수는 없다.

그런 효과가 있었다면 세상의 많은 헌터들은 이미 스킬들이 한가득 넘치고 있었겠지.

그렇기에 나는 일전에 마안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몬스터만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석을 얻고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몬스터를 잡아먹는 몬스터들은 모두 하나같이 스킬이 한가득일 것이다.

그러니 마석을 통해 스킬을 얻는다는 것은 몬스터만의 특성이 아닌, 나 자신 개인의 특성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폭식>.

먹어치운 상대의 소화 속도와 효율을 늘리고 따로 에너지를 저장하는 스킬.

가만 생각해보면 마석을 통해 내가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던 것은 이 스킬의 덕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물론 단순히 폭식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를 더해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예를 들면 <한계돌파>라든가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마석을 통해 다른 몬스터의 스킬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마석을 통해 스킬을 얻었던 경우가 딱 한 번뿐이었던 까닭에 사실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도전해볼 가치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마법을 쓰는 몬스터를 노리자.'

사실 헌터들만큼이나 마법을 쓰는 몬스터는 보기 힘들었지만 이곳 사막 구역에서만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스켈레톤 메이지]

당장 지금 있는 29계층이나 다음 계층인 30층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지만, 사막 구역 깊숙한 계층으로 내려가면 종종 보이고는 하는 몬스터.

놈들을 내 목표로 정했다.

* * *

이튿날, 전날의 피로를 어느 정도 회복하고 길을 나섰다.

여전히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인 통증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으나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정말 두 번 다시는 미궁의 의지에 귀 기울이지 않을 생각이다.

전날 사냥을 펼쳤던 게이트 주변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게다가 현장을 조사하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헌터들까지 여럿 모여 있었다.

한번 싸워볼까 생각도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제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 있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현장을 지휘하는 헌터의 랭크가 심상치 않다.

대충 보아도 B이상.

제법 건실히 일하는 모습이 협회에서 파견된 것 같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미궁의 의지를 다시 한번 받아들인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게다가 설령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승률이 채 2할을 넘지 못했다.

이번에는 얌전히 다른 게이트를 찾도록 하자.

꽤 떨어진 다른 게이트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곧장 게이트를 넘었다.

30계층이다.

제32화

30계층에 도착한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사나운 모래 폭풍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진한 모래바람이 세상을 가득 메웠다.

온몸에 다닥다닥 달라붙는 모래의 감촉이 굉장히 불쾌하다.

몸을 피할 곳부터 찾아봐야 할까?

Shii──

습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가 곧장 후회했다.

혀끝에 모래알갱이가 달라붙었다.

기분이 더럽다.

30계층의 지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에 주변 탐색부터 해야겠으나, 모래 폭풍이 이렇게 심해서야 제대로 된 탐색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사나운 모래 폭풍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도 또 못 할 짓이라, 우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방향을 잡고 쭉 이동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나오지 않았다.

사나운 모래 폭풍을 뚫고 한참을 직진하기를 얼마간,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벌판뿐이었다.

게다가 모래 폭풍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잠잠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해지고만 있으니, 이제는 숫제 방향 감각까지 잃어버릴 지경이다.

이러다 사막 한가운데서 미아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

슬금슬금 차오르는 불안을 잠재우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일단은 움직이자.

계속해서 이동하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나오지 않았… 지는 않다.

계속해서 이동하다 보니 생각한 대로 뭐가 나오기는 하더라.

그게 몸을 피할 곳이 아니라 몬스터라서 문제지만.

"크어어어─."

모래 폭풍을 헤치고 하염없이 전진하던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샌드맨]이라는 몬스터다.

사람과 비슷한 형상의 온몸이 모래로 이루어진 부정형(不定形) 몬스터.

일반적인 물리 공격은 잘 통하지 않고, 슬라임과 같이 몸속 어딘가의 핵을 파괴하는 것으로 쉽게 해치울 수 있는 몬스터다.

랭크는 E.

주된 특징은 모래로 이루어진 몸의 특성을 살려 사막 한가운데 위장한 채, 갑작스레 기습하는 걸로 유명하다.

세간에 잘 알려진 그 특징답게 샌드맨은 조용히 움직이던 나를 덮쳐왔다.

길을 찾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던 나는 그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꼬리를 휘둘렀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A>를 사용합니다.]

언제나처럼 차분히 들려오는 상태창의 알림.

퍼억-

그리고 연달아 들려오는 묵직한 타격음.

나를 덮쳐오던 모래 뭉치가 저만치 날아간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 음… 죽은 건가?

아무래도 내 꼬리가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은 것 같았다.

엉겁결에 휘두르긴 했지만, 설마 핵을 맞을 줄 알았겠냐고.

나로서는 덮쳐오길래 반사적으로 반격한 것밖에 없었지만, 저렇게 허망하게 쓰러진 모습을 보니 괜스레 미안해진다.

녀석도 나름 열심히 숨어서 사냥감을 기다린 걸 텐데….

내 내구를 생각하면 한 번쯤 모른 척 당해줘도 아무런 문제 없었을 텐데….

나는 어느새 주변의 모래에 동화되어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샌드맨이 있던 곳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긴 기다림 속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가버린 샌드맨에게 묵념한다.

몬스터의 삶이란 게 원래 다 그런 법이지….

다음 생에는 좀 더 강한 몬스터가… 아니, 차라리 인간으로 태어나길.

샌드맨의 기습 아닌 기습이 있은 후, 딱히 별다른 일은 없었다.

아무리 몬스터라 할지라도 이렇게 거센 모래 폭풍에는 쉽사리 활동할 수 없을 거다.

이미 진작에 몸을 피할 곳을 찾아 폭풍이 멎길 기다리고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도 얼른 몸을 피할 곳을 찾아야 할 텐데.

그리 생각하며 하염없이 전진하던 순간 딱 몸을 피하기 좋은 곳을 찾아냈다.

짙은 적갈색의 바위 몇 개가 마치 산처럼 우뚝 솟은 곳.

그 바위산 한가운데 꽤 괜찮은 틈이랄까,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부를 봐야 알겠지만, 내 몸 하나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슬슬 모래 폭풍을 뚫고 움직이는 것도 지치는 상황이라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동굴로 들어섰다.

선객이 있었다.

* * *

동굴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 앉은 헌터가 여러 명.

스르르- 동굴로 들어서는 나와 눈을 딱 마주친 그들은 대화를 나누던 그대로 마치 돌처럼 쩍-하고 굳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설마 누가 있을 줄은 몰랐지.

"몬스터─!"

"모두 무기 들어!"

굳어 있던 것도 잠시 각자의 무기를 빼들며 다급히 진형을 갖추는 헌터들의 모습에 나도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헌터들의 존재에 굉장히 당혹스럽다.

가만 생각해보면 모래 폭풍을 피해 헌터들이 이런 동굴로 들어오는 것쯤은 당연한 걸 텐데.

단순히 몸을 피할 곳을 찾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이런 사소한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니. 전혀 사소한 게 아니다. 만약 이곳에 몸을 피한 헌터가 고랭크였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헌터들의 랭크는 높아봤자 C에 불과했지만, 저중에 고랭크의 헌터가 하나라도 끼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처럼 다른 생각을 하며 여유를 피울 시간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주의해야겠군.'

이렇게 또 소중한 경험이 늘었다.

이걸로 나는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적인 부분에서도 확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것보다 문제는 당장 눈앞의 헌터들이다.

잠깐 사이 제법 여유를 피웠지만 사실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C랭크가 셋이다.'

좀 전에는 '높아봤자 C랭크'라고 했지만, C랭크라고 해서 절대 얕볼 수가 없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C랭크이지 않은가?

물론 몬스터와 헌터의 랭크는 여러모로 기준점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C랭크가 무려 셋이다.

첫 조우에서 기습으로 숫자를 하나 줄였다면 모르겠으나….

'과연 셋이나 상대할 수 있을까? 거기다 C랭크 헌터들 말고도 다른 헌터들이 있는데?'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된다면 절대 불가능했다.

당장은 재생 덕에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C랭크 셋과 나머지 다른 헌터들이 힘을 합쳐 난도질한다면?

얼마 못 가 저장된 에너지가 다 소모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 '직접'적으로 부딪힌다면 말이다.

Shii───

분주하게 움직이며 진형을 갖추는 헌터들을 바라보며 흘깃 시선을 돌려 동굴 내부를 살폈다.

입구는 제법 좁았지만 동굴 내부는 상당히 넓다.

내 덩치가 절대 작은 것은 아닌데, 동굴 안에 있으니 상당히 공간이 남는다.

당장 전투를 벌여도 딱히 비좁게는 느껴지지 않을 만한 공간이다.

'그러니 나를 보자마자 싸울 생각부터 했겠지.'

만약 동굴이 조금이라도 좁았다면 헌터들도 나와 싸우기보다는 다른 수를 강구하지 않았을까?

좁은 동굴에서 싸우기에는 그들도 여러모로 부담이 되었을 테니까.

나는 슬며시 동굴의 벽면을 살폈다.

"뱀 형태의 몬스터라… 사막 구역에 저런 몬스터가 있었나?"

"웜 계열의 몬스터면 몰라도, 뱀 계열의 몬스터는 듣도 보도 못했어."

"…설마 다른 구역에서 넘어온 건가?"

"…말도 안 돼. 계층을 이동하는 몬스터는 들어봤어도, 구역을 넘나드는 몬스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이상 사태인가? 협회에 보고하는 게 좋겠군."

"모두 잡담은 그만둬. 상대는 C랭크 몬스터다. 방심하면 위험해."

나를 보며 수군거리던 헌터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헌터 하나를 흘깃 바라보았다.

'저 남자가 공대장이겠군.'

전위의 바로 뒤 2열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창을 든 헌터.

냉정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는 그의 모습에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충분히 유리한 상황임에도 방심하지 않는군.'

직접적으로 부딪힌다면 정말 애먹이는 상대가 될 것이 뻔했다.

'뭐, 이쪽은 직접 부딪힐 생각이 전혀 없지만.'

곧 있을 싸움에 앞서 긴장하고 있는 헌터들의 모습에 나는 슬며시 몸을 움직였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헌터들이 내 작은 움직임에도 재빨리 대응했다.

"온다─! 모두 받아칠 준비를…!"

무어라 외치려던 공대장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내가 공격하면 그대로 받아치려고 긴장하고 있던 헌터들이 흠칫 몸을 떤다.

"저 녀석 지금…."

"도망치고 있는 거야…?"

뒤편에서 들려오는 허망한 헌터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몸을 피했다.

불리한 상황에서 괜히 싸워줄 생각은 없다.

"허… 몬스터가 덤비지 않고 도망간다고?"

"…이것도 이상 사태일까?"

"다른 의미로 '이상 사태'일 것 같기는 하네…."

허탈한 듯 내뱉는 헌터들의 목소리.

개중에는 이 상황이 웃긴지 피식이는 헌터들도 있었다.

아마 그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테지.

보통의 몬스터라면 '미궁의 의지' 때문에라도 헌터를 보면 무작정 달려들고 봤을 테니까.

그 영악했던 '깜짝 새'조차도 일단 헌터가 보이면 덤벼들고 본다.

아무리 경험 많은 헌터라도 나처럼 직접 코앞에서 헌터를 조우하고도 도망치는 몬스터는 처음 봤을 것이 분명하다.

"뭐… 일단 아무 일 없이 끝나서 다행인가?"

"싸워도 우리가 이겼을 테지만, 그래도 피해가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 아쉽긴 하네. 저만한 몬스터라면 마석도 나올 법한데. 다른 부산물로 장비도 만들 수 있을 테고."

"…저는 오히려 다행인 거 같은데요. 방금 그 녀석 눈빛이 조금 묘했거든요."

"눈빛이 묘했다니?"

"…잘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보통 몬스터하고는 달랐어요…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데… 그래, 마치 뱀 같았어요."

"뱀이었잖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아니, 뱀 눈깔 보고 뱀 눈깔이라 하지. 뱀 같은 건 또 뭐야?"

"…됐어요. 그냥 기분이 묘했다는 거뿐이니까요. 결국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됐지."

"그럼 진작에 그리 말하지. 괜히 사람 기분 뒤숭숭하게!"

바로 조금 전 긴장했던 것이 뭣하도록 헌터들은 금세 긴장을 풀고,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제법 냉정해 보였던 공대장 헌터마저도 그들 틈에 끼어서 화기애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들은 내가 정말 도망쳤을 거라 믿는 것일까?

확실히 지금껏 이런 경우가 없었고, 내가 워낙 뒤도 안 돌아보고 동굴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조금 기분 나쁘다.

내 모습이 그리 도망 잘 치도록 생긴 것일까?

나름 험악하게 생겨서 도망치기는커녕 두려움을 불러올 법한 외모라고 생각하는데….

굉장히 묘해지기 시작한 기분을 잠시 내버려 둔 채, 나는 동굴의 입구에 섰다.

저들로서는 정말 꿈에도 모를 것이다.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내가 사실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기에 후회해야 될 것이다.

도망쳐나간 나를 뒤쫓지 않은 것을.

적어도 내가 정말 도망쳤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확인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해서 그들은 오늘 죽을 테니까.

톡톡-

꼬리 끝으로 동굴 입구의 벽을 몇 차례 두드렸다.

동굴 내부에서 슬쩍 살펴봤지만 생각보다 그리 단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제법 단단하기는 하지만 전력을 다하면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다.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는 것뿐이지, 해치지 못한다는 건 아니다.'

먹이를 위한 사냥이라면 몰라도 이런 싸움에서는 굳이 정석대로 싸워줄 필요가 없다.

잠시 입구의 벽면을 만지며 그 단단함을 가늠하던 나는 곧 꼬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스킬 <신체강화B>를 사용합니다.]

[스킬 <한계 돌파A>를 사용합니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A>를 사용합니다.]

어느 때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상태창의 알림을 들으며 나는 있는 힘껏 힘차게 꼬리를 휘둘렀다.

쿠우웅─

"뭣?! 무슨…?!"

"꺄아악─ 지, 지진?!"

"아냐…! 모두 입구를 봐!"

뒤늦게 이쪽을 확인한 헌터들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온다.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헌터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재차 꼬리를 휘둘렀다.

'앞으로 두세 번 정도 더하면 되겠군.'

역시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A>를 사용합니다.]

다시 한번 들려오는 상태창의 알림과 함께 '쿠우웅─' 동굴이 흔들린다.

쩌저적─ 후려친 벽면에 금이 갔다.

"저놈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젠장! 모두 달려!"

"응? 공대장? 갑자기 무슨…?"

"닥치고 달려──!!!"

삽시간에 입구 쪽으로 달려오는 공대장을 따라 다른 헌터들도 엉겁결에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다.

역시 냉정한 공대장이다.

그 짧은 사이에 내 의도를 파악하다니.

'하지만 너무 늦었다.'

부랴부랴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헌터들을 바라보며 나는 재차 꼬리를 휘둘렀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A>를 사용합니다.]

쿠우웅─

금이 간 벽을 따라 균열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자그마했던 균열이 이윽고 점점 그 크기를 불려간다.

우스스- 작은 바위 조각과 흙먼지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헉─! 저놈 지금?!"

"동굴을…!"

"부수려는 거야?!"

"씨X 미친…!"

딱히 동굴 전체를 무너트릴 생각은 없었다.

그건 당장 내 힘으로 불가능하기도 했고, 내가 부술 것은 딱 입구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출구가 없는 이 동굴에 그들을 가두기에는 충분했으니까.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A>를 사용합니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헌터들을 바라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꼬리를 휘둘렀다.

쿠우웅- 쾅─

그것으로 끝이었다.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입구가 마침내 무너지는 것은.

쿠구구궁─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 사이로 잔뜩 일그러진 공대장 헌터의 얼굴이 보인다.

그 너머로 절망인지, 공포인지 모를 얼굴로 참담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다른 헌터들의 얼굴도 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제33화

완전히 무너져내린 입구 너머로 희미하게 고함이 들려왔다.

쿵쿵-

가만히 갇혀 있을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연신 바위를 두들기는 소리 또한 들려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입구를 가로막은 바위 더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신 두드리는 충격 탓에 더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다.

저쪽에서도 그것을 깨달은 모양인지 연신 벽면을 두들기던 소란도 차츰 잦아들었다.

저 헌터들로서는 꽤나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세상에 어느 몬스터가 눈앞의 헌터를 두고 도망칠 줄 알았겠는가?

거기다 더불어 도망친 줄 알았던 몬스터가 설마 동굴의 입구를 무너뜨릴 줄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 점을 고려해보면 헌터들의 입장에서 이번 일은 무척 억울하게 당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억울하다고 해서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몰라서 당했다고 하면 그게 없었던 일이 되나?

아니다.

미궁에서 무지는 죄다.

잘 몰랐다고 한다면 오히려 몸이 더 고생했어야 한다.

도망치는 나를 보고 가만히 지켜볼 게 아니라 끝까지 쫓아와서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했어야 했다.

입구가 무너져 내릴 때 멍하니 지켜보는 게 아니라 아득바득 발악하며 어떻게든 탈출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고, 결국 무너져 내린 동굴 안에 갇히고 말았다.

언제 탈출할 수 있을지 기약도 하지 못한 채로.

다시 한번 말한다.

미궁에서 무지는 죄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벌은 다름 아닌 목숨이다.

* * *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렀다.

혹시나 헌터들이 입구를 뚫고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던 까닭이다.

흩날리는 모래바람이 똬리를 틀고 앉은 내 몸 위로 서서히 쌓여간다.

어느 순간 사납게 몰아치던 모래 폭풍이 잦아들었다.

어느새 몸 위로 수북이 쌓여 있던 모래를 한차례 털어낸다.

상황을 봐서는 헌터들이 한동안 동굴을 빠져나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무리해서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동굴이 무너질 것을 우려한 까닭일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당장 그들이 빠져나올 생각이 없다면 나도 더 이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저들이 과연 저 안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따로 식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못해도 보름 이상은 버티지 않을까?

오히려 헌터의 신체 능력을 고려하면 그 몇 배는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분간 해야 할 일정이 늘었다.

앞으로 매일매일 한 번씩은 꼭 이곳을 찾아와야겠다.

* * *

그날 이후의 내 일상은 굉장히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동굴 근처를 거점으로 삼아 주변 일대의 지리를 중심적으로 탐색했다.

언제나처럼 도중에 만나는 몬스터나 헌터들을 사냥하며, 앞서 다짐했던 것처럼 매일매일 동굴 안의 헌터들을 살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동굴 안에서 느껴지는 헌터들의 기척이 점점 더 약해져만 갔지만 그것 말고 딱히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면 큰일 없이 이곳에 더 들을 필요가 사라질 것 같았다.

한 10일 정도 흘렀을까?

어느 날 밤, 동굴이 한차례 크게 진동했다.

그 소란스러움에 눈을 뜨고 급히 이동하자, 쿠구궁─ 진동과 함께 돌덩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설마 탈출하기라도 한 것일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당혹하는 한편 내심 헌터들의 탈출을 반기는 나 자신이 있었다.

그래, 그간 열심히 살핀 보람이 있듯이 결국 헌터들은 멋들어지게 탈출했다.

동굴 안에서 지친 심신으로 과연 얼마나 잘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번 싸워보자.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이 우습게도 무너져 내린 돌더미 사이에서 빠져나오는 인형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내부에 있던 헌터들이 탈출을 위해 노력했던 모양이다.

자세한 방법은 모르겠지만 충격을 줘서 가로막고 있던 입구를 부수고 나오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시도 자체는 좋았지만 아쉽게도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오히려 충격에 의해 입구 부분의 천장까지 무너져 내리며 이전보다 더 많은 바위 더미만이 무더기로 쌓여갔다.

모르긴 몰라도 헌터들의 자력 탈출은 한층 더 멀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헌터들의 기척들이 한층 더 약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굴 앞을 찾았다.

미약하게 기척이 느껴지고는 있으나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희미하다.

개중 몇몇은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미약한 기운을 흘렸다.

조만간 정말 이곳을 찾을 이유가 사라질 것 같다.

어느 날을 기준으로 희미하게라도 느껴지던 기운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하나. 어떨 때는 둘 이상.

불과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동굴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고작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헌터가 과연 누구일지는 모르겠으나 어렴풋이 공대장 헌터가 아닐까 생각했다.

입구가 무너져 내리던 마지막 순간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헌터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렸다.

과연 저 안의 헌터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언제나처럼 동굴 앞을 찾은 순간이었다.

며칠 전부터 남아 있던 마지막 헌터의 기척도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앞서의 다른 헌터들이 그랬듯 저 실낱같은 작은 기척도 곧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기에 오늘은 따로 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얌전히 동굴 입구에서 똬리를 틀고 기다렸다.

딱히 이제 와서 마지막 남은 헌터가 동굴을 탈출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더 이상 쥐어 짜낼 힘도 없을 것이 분명했고, 나는 단지 마지막을 지켜봐 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 저들을 죽음까지 내몬 주제에 무슨 위선이라 생각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이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혼자서 쓸쓸히 죽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지독한 것이니까.

직접 경험해 보았기에 잘 안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

그 앞에 홀로 마주 선 감각은 몹시 끔찍했다.

뱀(몬스터)가 되고서 종종 느끼고는 했다.

아니, 느낀다기보다는 생각하고는 했다.

인간일 적의 나와 지금의 나의 차이점을.

나는 분명한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뱀(몬스터)의 육신을 가지고는 있지만 분명한 정신성은 몬스터라기보다는 인간에 가까웠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헌터들을, 분명 인간을 죽임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분명 나도 저들과 같은 인간이었음에도.

몬스터와 헌터이기에.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지금껏 그런 변명들을 대며 헌터들을 죽여왔다.

그러고는 아무런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비록 몸은 틀림없는 뱀(몬스터)지만, 정신만은 틀림없는 인간이라 생각했던 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는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요 며칠 동굴에 갇힌 헌터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확실히 자각했다.

성격이 변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몬스터가 되었기에 생긴 후유증 비슷한 것이라 여겼다.

바뀐 내 성격이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오히려 만족하는 마음이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히 성격이 변했다거나 작은 후유증이라기 보기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나라는 것을 이루는 '근본', 그 자체가 변했다.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정말 이상하다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내 마음은 한없이 고요했다.

고요하다 못해 작은 파문조차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이런 고민들이 다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것처럼.

이에 다시 한번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정말 '몬스터'가 되었구나.

사람이 아닌 '괴물'이 되었구나.

이러한 사실을 나는 여전히 덤덤히 받아들였다.

이상한 것을 알면서도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사람이든 몬스터든, 결국 나는 나다.

기다란 고민의 끝에 나오는 답은 항상 그것이었다.

이렇게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도 다 지금 이런 꼴(몬스터)가 된 까닭일까?

캐리 시절의 나였다면 이런 고민 탓에 몇 날 며칠을 어쩌면 몇 년을 괴로워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남을 해치지 못했겠지.

눈앞에서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그랬듯이 자신을 죽이려 드는 타인 앞에서도 그저 몇 안 되는 욕지기만 내뱉으며 저주만 했을 것이 분명했다.

멍청하고 순진한 호구.

그런 성격이었으니 단순한 동경만으로 위험한 미궁에 제 발로 들어왔다.

그리고 결국 믿었던 동료에게 버림받은 채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의 끔찍했던 마지막을 떠올리니 과거보다는 확실히 지금의 성격이 훨씬 마음에 든다.

여태까지의 행보가 어떻게 봐도 선하다기보다는 악에 가까웠지만, 애초에 이런 선악도 인간이었을 적의 기준이다.

몬스터에게 사람의 선악을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다.

애초에 미궁이란 것은 선악이 필요 없는 곳이다.

미궁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는 말할 것 없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미궁에 드나드는 헌터들한테도 선악 따위 필요치 않았다.

필요한 것은 강함.

바로 살아남기 위한 강함뿐이다.

선악을 따질 거라면 처음부터 미궁에는 들어와서는 안 된다.

새삼 자신이 따질 필요 없는 분명한 몬스터란 것을 자각했음에도 무언가 극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언제나 내놓는 대답처럼 나는 나다.

이제와서 딱히 내 행동이 바뀔 일은 없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헌터들을 죽인다.

그것에 죄책감이나 미안한 감정은 없다.

지금의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고, 헌터란 것은 애초에 제 목숨을 담보로 일하는 이들이다.

미궁을 탐험하며 수많은 부와 명예를 거머쥐지만 반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미궁에서 헌터들의 죽음이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저 그 원인이 다른 수많은 것 중에서 나로 바뀐 것뿐이다.

어쨌거나 인간성이랄까, 다른 인간의 죽음에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딱히 인간성 그 자체를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었다.

어렴풋이 완전한 괴물이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다른 지성 없는 몬스터처럼 오직 피와 살육만을 원하며 날뛰고 싶지는 않다.

이미 그 인간성이라고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와 버릴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지금 이렇게 동굴 앞에서 다가올 헌터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 헌터나 그들의 동료들에게 따로 사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서 말했다시피 적어도 이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위선이라 해도 좋다.

위선이 맞으니까.

그저 내 마음이 편하고자… 아니, 내 남은 인간성이란 것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어디에도 저 헌터나 그 동료들에 대한 배려나 슬픔도 없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다.

혹여 이러한 내 모습을 본 누군가가 욕을 해도 좋다.

공감 따위 바라지 않는다.

양심 따위 아프지도 않다.

애초에 뱀(나)에게는 양심 따위 없으니까.

* * *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약하게나마 이어지던 얇디얇은 생명의 기운이 마침내 끊어졌다.

잠시간 그 앞에 서 있던 나는 이윽고 등을 돌려 그 돌무덤을 뒤로했다.

제34화

돌무덤을 뒤로한 뒤의 내 일상은 사냥과 전투의 연속이었다.

주로 싸운 것은 헌터가 아닌 몬스터다.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부족한 인간성을 최대한 지켜보고자 헌터와의 싸움은 최대한으로 줄였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이전처럼 굳이 헌터를 직접적으로 찾아가 싸우는 일은 크게 줄었다.

그렇게 몬스터들 위주로 사냥과 전투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C랭크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편에 속할 수 있었다.

꾸준히 능력치가 상승했고 슬슬 다음 진화가 멀지 않은 느낌이다.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며 주변을 탐색한 결과 어느 정도 30계층의 지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별다른 이정표랄 것이 없는 광활한 사막 그 자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했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디에 어느 몬스터가 서식하고, 헌터들이 주로 활동하는 지역이 어디인지 파악은 끝났다.

안타깝게도 30계층에도 내가 원하던 '스켈레톤 메이지'와 같은 몬스터는 없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계층주나 그에 준하는 몬스터를 찾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이 역시 찾을 수 없었다.

얼마 전에 하층으로 원정을 떠난 대형 공격대가 싹 정리하고 가지 않았나 조심히 추측했다.

그때 보았던 헌터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가장 선두의 헌터.

못해도 A랭크 이상.

감히 추측하건대 S랭크가 아닐까 싶은 헌터였다.

당장 내가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의 까마득히 높은 상대.

당시에 느꼈던 그 서늘한 두려움을 상기하며 나는 몸을 움직였다.

목표는 다음 계층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있는 곳.

이번에는 다행히 게이트에 아무도 없었다.

무사히 31계층으로 넘어갔다.

* * *

31계층은 이전의 세 계층과 별다를 것 없는 곳이었다.

여전히 사막이 광활하게 뻗어 있었고, 사막의 군데군데 바위산이나 오아시스가 있다.

헌터들이나 몬스터들 역시 이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나 역시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찾고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나 계층주급의 몬스터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정말 싹 쓸고 지나간 게 맞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28계층부터 31계층, 이곳까지 단 한 번도 계층주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로서는 주기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의 싹을 자른 것뿐이겠지만 나로서는 소중한 성장의 발판을 빼앗긴 느낌이라 꽤나 기분이 저조했다.

어떻게 제대로 된 몬스터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그나마 28계층에서 보았던 '샌드 스콜피온' 정도를 몇 번 발견해서 망정이다.

이놈들 중에 딱히 마석이 있거나 했던 녀석은 없지만 좋은 스파링 상대가 되어주었다.

31계층에서 따로 볼 것이 없었기에 얼마 머물지 않고 다음 계층으로 향했다.

이제는 그래도 하나쯤 나오겠지.

여전히 싹 쓸고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대를 멈출 수가 없다.

혹시나의 경우가 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