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pouy / Chapter 9 - 9

Chapter 9 - 9

제113화

뱀의 이름을 정했다.

녀석의 이름은 루엘.

선악과의 뱀–사탄–루시퍼–루시엘–루엘 순으로 변화를 거쳐 결정했다.

아직 성별을 모르는 까닭에 수컷이든 암컷이든 둘 다 쓸 수 있을 만한 이름으로 지었다.

나름 잘 지은 이름인 거 같아 만족스럽다.

[이 아이. 여자아이구나.]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후후. 이미 여자아이만 둘 기르고 있으니 이 정도는 가뿐하다.]

이후 스노우의 설명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암컷인 모양이다.

'루엘'보다는 '루시'가 좋았을까?

아니, 이미 지었으니 번복은 하지 않는다.

루엘 역시 자기 이름에 꽤 만족한 것 같고.

G랭크. 그저 살아가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최하위의 몬스터였지만 루엘은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에 대한 호감이나 호의 정도는 명확히 판단한다고 해야 할까?

녀석은 제게 살갑게 다가오는 설이와 토순이와 꽤 잘 어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보다 덩치가 큰 둘의 모습에 조금 경계하는 것도 같았으나, 어느 정도 적응하자 이제는 거리낄 것 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작은 뱀, 여우, 토끼.

셋의 조합은 상당히 언밸런스했지만, 다들 귀여운 외모를 가진 탓에 그 나름의 조화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 상당히 귀여웠다.

아무래도 같은 동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먼 친척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미궁에서 처음 만난 같은 뱀 계열의 몬스터이기 때문일까?

나는 루엘에게 꽤 친근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설이나 스노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 만난 녀석을 상대로 과한 감정을 느낀다는 자각이 있었다.

이에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할 테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유라 생각하는 것은 역시 여왕을 생각나게 만드는 샛노란 눈동자가 아닐까 싶었다.

무엇보다 녀석과 만난 장소가 여왕과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던 것이 큰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묘한 인연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루엘은 G랭크 몬스터치고 상당히 영리하다.

저에게 향하는 호의와 적의를 명확히 구분할 줄 알고 분명히 이쪽의 말도 알아듣고 있었다.

비록 랭크가 낮은 탓에 사념 대화는 불가능했지만 그 근처의 몬스터들보다는 몇 배 정도 우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한번 가르쳐 보았다.

뱀의 사냥 방식을.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했기에 본체로 돌아왔다.

주변의 숲을 무너트리는 무지막지한 덩치에 루엘이 제법 놀란 것 같다.

'샤아아───!!!'하고 어느 때보다 커다란 울음을 내뱉었는데, 곁에 있는 스노우가 적절히 달래줘서 별문제는 없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본체에 설이가 기쁘게 달려든다.

미끄럼틀이라도 타고 싶은 모양이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루엘의 교육을 위해서니 조금만 참아다오.

나중에 마음껏 타게 해줄 테니까.

"컁컁!"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설이를 스노우가 능숙하게 달랬다.

[이제는 언니가 된 것이니 양보할 줄도 알아야겠지?]

[언니…? 설이가 언니야?]

[그렇구나. 루엘을 위해 이번에는 아빠를 양보해 주자꾸나. 좋은 언니가 되어야겠지?]

[응! 쪼은 언니 될 거야!]

역시 어머니는 위대하다.

그것보다 설이가 언니인가?

확실히 루엘보다는 설이가 연상이기는 한데….

다부진 모습으로 루엘을 챙기려는 설이를 보니 아무렴 좋겠다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뱀으로서 루엘의 사냥 훈련을 개시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 사이즈가 너무 크다는 것일까?

루엘과의 크기 차이는 둘째 치고 사냥할 만한 사이즈의 몬스터가 없었다.

일전에 스노우에게 배웠던 축소화의 술을 사용했다.

크기는 한창 산림 구역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사이즈.

몸길이가 대략 10미터가 조금 안 되는 정도다.

한순간에 작아진 사이즈에 지켜보던 아이들의 반응이 대단하다.

특히 언제나처럼 설이의 반응이 가장 열렬했다.

순식간에 이쪽을 향해 달려들어 오는데, 아무래도 사이즈가 사이즈인지라 조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설이가 그동안 착실히 스노우에게 배웠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분명히 성장했구나.

별다른 고통은 없었지만 훌륭한 보디 어택이었다.

훌륭한 언니가 되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잠시 날뛰던 설이의 문제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했다.

이번에도 능숙하게 설이를 제지한 스노우의 모습이 몹시 듬직하다.

그래서 어쨌거나 사냥 교육을 시작했다.

뱀의 사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은신.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정거리까지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사히 사정거리 안까지 접근했다면 이제 슬금슬금 기회를 엿볼 차례다.

괜히 성급하게 돌진해서는 안 된다.

신중히, 마지막까지 빈틈을 엿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 덤벼든다.

이때는 망설임 없이 상대를 한 번에 휘감는 게 중요하다.

상대를 조일 때 역시 온몸의 근육을 이용해서 확실히.

조금의 발버둥도 허용치 않도록 단단히 조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상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여기까지.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레서 울프]의 협조를 받아 사냥 수업을 시작했다.

협조를 해준 레서 울프에게 작은 감사를.

수업이 끝난 후 레서 울프는 당연하게도 미니 사이즈의 오른쪽이가 먹었다.

자, 그래서 어떤가?

이 정도라면 무척 쉽지 않은가?

전혀 쉽지 않은 모양이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사냥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은신부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은신도 제대로 못 해서야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아무래도 당장에 사냥보다는 기본기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될 것 같았다.

아마 이 상태라면 <조이기> 같은 뱀의 기본 공격도 똑바로 못할 것 같았다.

정말 그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던 거니?

스노우에게 애 기죽이지 말라며 혼이 났다.

지금껏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으니 못하는 게 당연하단다.

아니. 나는 혼자서 익혔….

그건 내가 이상한 거란다.

보통 사냥 같은 건 어미한테 배우지 못하면 제대로 못 하는 거라고.

이후 홀로 사냥을 하려 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어디까지나 내가 특별한 경우일 뿐이라고.

맞는 말이지만 어째선지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다.

뭔가 괴물 같은 취급을 받은 기분이다.

아니, 분명 몬스터가 맞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설이와 토순이가 잔뜩 위로해줬다.

힘냈다.

이후 루엘의 교육은 스노우가 담당하게 되었다.

종족적으로 문제가 있다 싶었지만, 은신 같은 것은 스노우도 당연히 할 수 있었기에 가르치는 데 별문제는 없다고 한다.

오히려 나보다 스노우 쪽의 은신 능력이 몇 수 높기에 이쪽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주지 않을까?

거기다 마력 훈련까지 천천히 시킬 예정이라는데….

뭔가 내가 할 일을 뺏긴 기분이라 조금 묘했다.

아, 설아. 혹시 미끄럼틀이 타고 싶니?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금방 원래 사이즈로 돌아가서….

이후 놀이기구가 되어 설이와 토순이랑 잔뜩 놀았다.

역시 자녀 교육은 아빠보다는 엄마 쪽에 맡기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아닌가?

어쨌든 이런 느낌으로 우리는 산림 구역을 여유롭게 탐방했다.

도중에 본체 사이즈로 돌아가 놀이기구가 되었던 까닭에 잠깐 헌터들 사이에 소란이 생기기도 했던 모양이지만, 이쪽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훗날 듣기로는 이따금 나타나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뱀 몬스터로서 내 이야기가 산림 구역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뽑힌다고 한다.

이 역시 이쪽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느낌으로 느긋하게 움직여 어느덧 18계층에 도착했다.

산림 구역의 다른 곳과 별 차이는 없는 곳이지만, 역시 내 고향이라 할까?

다른 계층과는 조금 느낌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보다 왠지 저번보다 늑대가 더 늘어난 것 같지 않나?

막 게이트를 넘어 도착한 우리를 반겨준 것은 수십 마리가 넘는 [사일런트 울프]들이었다.

[호오… 그래도 그대의 고향이라고 환영 인사라도 나와준 것인가? 이제 보니 그대도 제법 하지 않는가?]

[…틀리다.]

스노우의 오해에 단호히 답했다.

애초부터 늑대들의 기세가 어떻게 봐도 이쪽을 환영하는 거라고는 볼 수 없었다.

[후후. 본녀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다. 그저 농이니라… 그것보다 본녀의 땅에 있는 우락부락한 것들하고는 확연히 달라. 토순이 정도 되는 앙증맞은 것들이 저리 모여 있으니… 상당히 귀엽구나.]

스노우가 설산 구역에서 생활하는 늑대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설산 구역에서 할동하는 늑대들은 B랭크인데 반해, 산림 구역의 늑대들은 기본 E랭크의 몬스터였으니.

SS랭크의 몬스터인 스노우의 입장에서 귀엽게 보여도 할 말이 없었다.

"크르르…."

늑대들은 당연하게도 우리들을 경계했다.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슬금슬금 우리를 포위하는 꼴이 여차하면 공격할 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나 스노우 둘 다 트러블을 방지해 확연히 그 기세를 줄이고 있었으니 평범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함께하는 설이를 비롯한 아이들조차 저랭크의 몬스터였으니 더더욱 얕보일 수밖에.

나로서는 옛 기억도 나고 조금 우습다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무래도 내 팔에 매달려 있던 루엘 쪽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쉬─!!! 쉬이이───!!!"

다급하게 울음소리를 내뱉는 것이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위험에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신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울음소리를 내뱉는 루엘을 상냥히 쓰다듬었다.

설이나 토순이와 달리 매끈한 비늘의 감촉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것보다 루엘 역시 내 본체를 봤음에도 고작 이런 늑대들한테 위협을 느끼는 것일까?

이 기회에 루엘한테도 확실히 보여주는 게 좋을까?

나나 스노우한테 이런 늑대들 따위야 얼마가 모이든 별 위협이 안 된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이전의 사냥 교육 실패로 조금 실추된 내 명예 회복을 위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오들오들 몸을 떨며 "쉬─쉬─" 울고 있는 루엘을 스노우에게 맡긴다.

조심스럽게 루엘을 받아든 스노우가 내게 말했다.

[귀여운 녀석들인데… 쯧, 적당히 하거라.]

아무래도 루엘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스노우는 모성에 제대로 눈을 뜬 모양이다

저 근처의 저랭크 몬스터들은 설마 모두 어린아이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이후 어떻게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보여줄지 생각하며 가볍게 몸을 풀던 찰나, 갑작스레 기척 하나가 끼어들었다.

얼굴을 가린 민무늬 가면과 두터운 로브. 그 사이로 튀어나온 결 좋은 긴 흑발.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던 헌터의 등장이다.

"…괜찮으세요?"

차갑지만 상냥히 물어오는 물음에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기억 속의 헌터는 못 보던 사이 S랭크까지 성장해 있었다.

흘깃 이쪽을 살핀 가면의 헌터는 이쪽의 안전을 확인하고는 곧 늑대들 쪽을 돌아보았다.

이쪽을 대할 때와는 다른 난폭한 기운이 일시에 뿜어져 나왔다.

S랭크 헌터가 내보이는 무거운 기세다.

[호오… 제법 쓸 만한 인간이구나.]

뒤편에서 나지막한 스노우의 탄성이 들려온다.

그녀 역시도 가면의 헌터가 한 실력 하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곧 동료들이 도착할 거예요. 그때까지 가만히 제 뒤에 계셔주세요."

여전히 차갑지만 상냥한 목소리로 가면의 헌터가 조용히 당부했다.

그러고는 홀로 수십 마리의 늑대들에 맞서 당당히 선다.

보이는 모습만으로는 누가 봐도 헌터 쪽이 불리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상황이 달랐다.

그녀가 내보이는 무거운 기세에 늑대들이 하나둘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조금 전 이쪽을 향해 드러내던 사나운 기세는 모두 거짓말인 양, 꼬리까지 가랑이 사이로 숨긴 채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공대장!"

"홀로 먼저 가는 게 어딨습니까!?"

"쫓아오느라 힘들었다구요!"

이윽고 가면의 헌터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의 동료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저번 미노타우로스 사냥에 보았던 이들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이다.

그들 역시 가면의 헌터와 마찬가지로 모두 성장해 있었다.

전원 A랭크.

6인의 소규모 공격대치고는 몹시 훌륭한 수준이다.

"…사람을 구하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

"에? 다른 헌터가 있었나요?"

헌터들이 뒤늦게 이쪽을 살폈다. 그리고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는다.

"이런… 아직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 있었네요… 오늘은 분명 18계층 소탕 작전 때문에 출입을 금지한다고 알렸는데…."

"알림을 못 본 헌터도 있을 수 있지… 그것보다 무사한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괜찮으세요?

여성 헌터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며 물었다.

흘깃 가면의 헌터와 그 동료들을 살피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주억였다.

"괜찮습니다."

"일행은 두 분뿐이신가요? 혹시 다른 일행이 있다면…."

"아뇨, 처음부터 두 명이었습니다."

담담히 내뱉은 이야기에 헌터가 나와 뒤편의 스노우를 살폈다.

잠시 우리를 훑어본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 저는 화영 공격대 소속 양유이라고 해요. 이래 봬도 A랭크 힐러죠. 혹시 다친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말끔히 고쳐드릴 테니까요."

그리 말한 양유이가 재차 이쪽을 살핀다.

혹시 상처라도 있으면 바로 치료해줄 것 같은 기색이다.

양유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흘깃 가면의 헌터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덩달아 이쪽을 살피던 양유이 역시 시선을 돌렸다.

"저희 공대장님이세요. 얼마 전에 S랭크가 되셨죠. 혹시 소식 들으셨어요?"

"…아뇨. 제가 다른 일에는 거의 신경을 못 써서."

"아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아직 여기에 계셨겠죠. 알림을 못 보셨나 보네요."

"알림이요?"

의아하게 되묻는 나를 향해 양유이가 담담히 설명했다.

"얼마 전에 18계층에서 에어리어 보스가 나타났거든요. [하얀 유령 늑대]라는 이름을 가진 몬스터인데 무려 A랭크의 몬스터예요. 밑에 수하로 둔 늑대들도 많아서 헌터들의 피해가 꽤 컸죠."

양유이의 설명에 조용히 탄성을 내뱉었다.

A랭크라면 산림 구역 같은 상층에서 보기 드문 상위 랭크의 몬스터였다.

"그렇군요. 그래서 이번에 여러분이 소집된 건가요?"

"네. 저희 말고 다른 공격대나 길드에서도 여럿 소집됐어요. 일단 수하들부터 차근차근 공략한 다음 에어리어 보스까지 한꺼번에 토벌할 예정이죠."

이것저것 친절히 설명해주는 양유이의 설명에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는 한편 시선은 어느새 싸움을 시작한 가면의 헌터에게로 향했다.

당연하다시피 S랭크 헌터인 그녀는 E랭크의 늑대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간간이 상위 개체인 고랭크의 늑대들도 몇몇 끼어 있었지만, 그녀나 다른 헌터들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저번부터 느꼈지만 묘하게 시선이 가는군.'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신경 쓰인다.

심상 속에서 왼쪽이가 첫눈에 반했네 뭐네 하면서 깐족거렸지만, 절대 그런 쪽으로는 아니었다.

그저 단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인데… 그 놓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찜찜한 기분과 함께 가면의 헌터를 비롯한 그 동료들이 늑대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일방적인 싸움은 금방 끝이 났다.

제114화

아무런 피해도 없이 수십 마리의 늑대들을 학살한 헌터들은 잠시간 휴식을 취했다.

그들이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는 사이 어느새 가면의 헌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 분은 이제 어쩌실 건가요? 원하신다면 안전한 상층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조금 머뭇거리는 듯하면서도 상냥히 물어오는 목소리에 잠시 가면의 헌터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가면 탓에 그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쪽을 보는 눈빛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묘한 느낌이다.

"배려는 고맙습니다만, 바쁘신 것 아닌가요?"

흘깃 뒤편의 다른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불퉁해 보였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따라 제 동료들을 한번 살핀 가면의 헌터가 한순간 작은 기세를 내뿜었다.

그리 강하지 않은 기세였지만 불퉁하게 이쪽을 보던 헌터들이 움찔할 정도는 되었다.

그녀의 동료들이 모두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바래다 드릴 시간은 있어요."

자그마한 목소리로 내뱉은 가면의 헌터가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조금 간절해 보이기까지 눈빛에 조금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흘깃 시선을 돌려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품 안에 세 아이를 품은 스노우가 한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이쪽의 대화 내용을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얼추 상황은 짐작하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전적으로 내 뜻에 따른다는 것이거나.

"배려는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왜죠? 동료들이 문제라면…."

재차 제 동료들을 바라보며 기세를 내뿜는 그녀의 모습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희도 제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담담히 내뱉은 말에 가면의 헌터가 흘깃 나와 스노우를 살폈다.

찬찬히 우리를 훑어보던 그녀가 잠깐의 침묵 끝에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마지못해 허락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어요… 몸조심하세요."

조금 기분 상한 듯 전보다 쌀쌀맞은 목소리로 내뱉은 가면의 헌터가 휙- 몸을 돌렸다.

두터운 로브의 망토가 가볍게 흩날렸다.

잠깐 대화를 나눴던 양유이 헌터가 이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끝으로, 먼저 달려나간 가면의 헌터들을 따라 그녀의 동료들이 휙휙- 숲속으로 사라졌다.

고랭크 헌터들다운 재빠른 움직임이다.

[흐음… 무슨 얘기를 나누었나?]

[…대충 짐작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본녀가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언어로 대화하는 것을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다. 그저 그대가 이쪽을 바라보기에 대충 알아들은 척한 것뿐이지. 그래서 무슨 얘기를 했지? 제법 대화가 길어지던데….]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스노우의 눈빛에 곧바로 가감 없이 사정을 설명했다.

왠지 잘못 말했다간, 그대로 대화를 빙자한 대련이 시작될 거 같았다.

[흠… 그렇군.]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이전까지의 묘한 분위기는 어느새 말끔히 사라져 평소와 같았다.

이걸로 안심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제법 친절하구나. 이런 배려까지 해주니 말이다.]

[…그만큼 잔인하기도 하지.]

덤덤히 덧붙인 목소리에 스노우가 재차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고는 슬슬 답답한지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한 설이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재차 자유의 몸이 된 설이가 "컁컁!" 신나게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토순이가 급히 그 뒤를 뒤쫓는다.

정말 언제나 해맑구나.

그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여전히 제 품을 떠나지 않은 루엘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스노우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지배자를 처리하러 간다고 했나?]

[그렇지. 그들 말고도 다른 인간들도 여럿 있는 모양이다.]

[호오… 그건 좀 궁금하구나. 인간들의 싸움 방식이라…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군.]

흥미롭다는 듯 저편을 바라보는 스노우의 모습에 곧장 물었다.

[한번 살펴보겠나?]

[흠? 그래도 괜찮은가?]

[아아. 별다른 일정은 없으니까. 우리 정도의 은신 수준이면 이 근처의 인간들한테 들킬 일도 없을 테고.]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답하는 내 모습에 스노우가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그 인간이 다시 보고 싶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절대 아니다. 도대체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지?]

[흐음… 꽤나 그 인간한테 관심이 있던 거 같아서 말이다. 의식하지 않았다면 상관없다.]

조용히 말한 스노우가 저편에서 뒹굴고 있는 설이와 토순이를 챙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불만스레 바라보고 있자 스노우가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아아. 그저 농을 해봤을 뿐이니 그만 노려보거라. 그대의 마음은 본녀가 더 잘 알고 있다. 설이를 두고 그대가 어디 한눈을 팔겠느냐?]

스노우는 느긋이 걸어 설이를 내 품에 안겼다.

[그사이에 꽤 멀어졌구나. 잘못하면 늦을지도 모르니 조금 서두르는 게 좋겠어.]

그리 덧붙이며 먼저 훌쩍 몸을 날리는 스노우를 보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설이 때문에만은 아닌데 말이지.]

조용히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스노우가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빠? 안 가?]

이후 통통- 내 팔을 두들기며 채근하는 설이의 행동에 곧장 스노우를 따라 몸을 날렸다.

목적지는 저편에서 느껴지는 헌터들의 기척이 있는 곳이었다.

* * *

두 남녀와 헤어진 후, 가면의 헌터와 그 동료들은 곧장 다음 목적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사전에 다른 헌터들과 미리 조율해 정해놓은 집합 장소였다.

일행의 선두에서 묵묵히 앞장 서 달려나가는 가면의 헌터.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양유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공대장님… 아까 그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같은 공대원 정도를 제외하면 항상 타인에게 일정 이상의 거리를 두던 평소와 달리, 직접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던 모습을 떠올리니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몰랐다.

불과 2년여 만에 S랭크 헌터가 되고, 아무런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무소속으로서 화영 공격대의 공대장을 맡은 젊은 천재 헌터.

비록 항상 쓰고 다니는 가면 탓에 추녀라는 둥,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둥 이런저런 악소문들도 많았지만.

그 가면 안에 숨겨진 진짜 얼굴을 알고 있는 양유이로서는 전부 다 헛소리에 불과했다.

"정말… 외모도 그렇고 능력도 참 대단한 분인데. 왜 연애를 안 하는 걸까?"

공대장 정도의 능력이라면 남자 몇 명 정도는 부리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오늘 항상 철벽만 치던 공대장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사내가 나타났다.

이성 보기를 돌같이 해서 답답함까지 느끼게 만들었던 그 공대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적극성까지 보였고 말이다.

그동안 뒤에서 여러모로 공대장을 응원하던 양유이로서는 사내의 성격이나 능력은 둘째 치고 일단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미인이랑 같이 있던데…."

하필 반해도 임자 있는 사람에 반한 것일까?

마침내 나타난 운명의 상대가 이미 짝이 있다는 사실에 양유이는 통탄을 금치 못했다.

그것도 보통 그 짝이 보통 미인이 아닌, 경국지색이란 말도 아까울 정도의 엄청난 미인이란 것이 문제다.

'우리 공대장님도 한 얼굴 하시기는 하지만… 응, 솔직히 저쪽에 비하면 조금… 아니, 많이 부족하네.'

아무리 공대장을 응원하는 양유이로서도 거짓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미모였다.

"…공대장님, 힘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런 거 아니에요."

무심코 중얼거리던 양유이의 귓가로 조금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차게 달려나가던 양유이가 움찔 몸을 떨며 발을 삐끗했다.

고랭크 헌터 특유의 균형 감각으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볼품없이 땅을 구를 뻔했다.

겨우겨우 균형을 찾은 양유이가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제 바로 옆에서 달리고 있는 그녀의 공대장, 가면의 헌터가 있었다.

"고… 공대장님…?"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

나지막이 말하는 목소리에 양유이가 속으로 조용히 경악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설마 다 듣고 있던 것일까?

애초에 자신의 생각을 전부 입 밖으로 낸 그녀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귀신같이 제 얘기를 알아듣고 다가온 공대장의 행동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하… 그, 그게 말이죠."

"…유이 언니는 항상 생각이 너무 지나쳐요…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괜한 생각도, 행동도 하지 마세요."

담담히 내뱉는 목소리에 양유이가 잠시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까는 왜?"

조심스레 물어오는 물음에 가면의 헌터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야 할까, 말하지 말아야 할까 잠시간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조용히 답했다.

"…오빠랑 닮았어요."

"…오빠요? 공대장님이 찾고 계시다는 그…."

"…네. 많이 닮았더라고요."

차분히 들려온 목소리에 양유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하며 이미 그 사정을 다 들었던 양유이였기에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공대장이 이미 실종된 지 3년이 훌쩍 넘은 친오빠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양유이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잘 몰랐던 까닭이다.

그녀가 흘깃 다른 동료들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내 보았지만, 모른 척 그녀와 공대장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들은 모른 척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이런 일에는 괜히 참견하지 않는 게 제일이었다.

2년 동안 쌓아온 동료 간의 유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젠장…! 항상 이 입이 웬수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자신의 행동을 곧 후회하는 양유이였으나 언제나 후회는 뒤늦은 법이다.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쩔 줄 모른 채 당황하는 양유이를 향해 가면의 헌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덤덤히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은 말에 양유이가 한차례 입술을 달싹였다.

이윽고 그녀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또 보시고 싶으신 거죠? 나중에 저랑 찾아가 보실래요?"

"…어떻게요?"

"저희 인맥을 사용하면 헌터 하나 찾는 거야 식은 죽 먹기죠! 저한테 맡기세요! 오빠를 닮았다던 아까 그 헌터 정도야 금방 찾아내 드릴 테니까요!"

없는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신 있게 내뱉는 양유이의 모습에 가면의 헌터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물끄러미 양유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틀림없는 긍정의 표현이다.

비록 가면에 가려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양유이는 가면 속에 그려진 그녀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분명 잔뜩 부끄러운 표정으로 볼을 붉히고 있겠지.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며 양유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런 양유이의 모습에 가면의 헌터가 말없이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괜히 그 곁에 있다가 또 언제 덥썩 껴안길 지 모른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실제로 잠시간 저급한 욕망에 몸을 떨던 양유이가 돌연 제 옆을 향해 활짝 팔을 벌렸다.

곧 자리에서 없어진 공대장의 존재에 잔뜩 허탈한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이윽고 이쪽을 향해 반짝이는 눈을 보니 포기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가면의 헌터가 모른 척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약속했던 집합 장소가 그리 멀지 않았다.

다른 헌터를 돕는다고 조금 시간을 지체했기에 아마 그녀들이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일 거다.

그렇게 크게 늦지는 않았지만 함께하는 헌터들 중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한 이들도 있었기에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이쪽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한 헌터의 존재를 떠올리며 가면의 헌터가 좀 더 속도를 높혔다.

이번에는 또 어떤 지랄들을 쏟아낼지….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속으로 조용히 상상하며, 속도를 높이던 그녀는 불현듯 코끝을 타고 오는 묘한 냄새에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냄새를 맡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특히 예민한 감각을 가진 공대원 중 한 명인 한세영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

"공대장님…!"

"…나도 알아!"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답하며 가면의 헌터는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이전보다 배는 빨라진 그녀의 속도에 맞춰 공대원들 역시 급히 몸을 날렸다.

코끝을 타고 맡아지는 향은 틀림없는 피냄새였다.

그것도 상당히 진득한 혈향이다.

다른 헌터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화영 공격대의 이들이 막 집합 장소에 도착했을 무렵,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수풀 곳곳에 처참히 쓰러져 있는 헌터들의 모습을.

모두가 이번 소탕 작전에 함께하기로 했던 이들이다.

다른 이들에 비해 비위가 약한 양유이는 눈앞의 처참한 풍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울컥- 구역질이 차오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돼… 차유림 헌터에 조상현 헌터까지 당했다고…?"

"…거짓말… 거짓말이지…?"

비록 이번 소탕 작전에 참여한 헌터들 중 화영 공격대가 제일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헌터들도 절대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가면의 헌터와 같은 S랭크는 없었어도, 경험 많고 노련한 A랭크의 헌터들도 여럿 참여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눈앞의 상황은 어떤가?

그 경험 많고 노련한 A랭크의 헌터들조차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것도 잔뜩 훼손된 상태로.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처참히 짓이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그 참혹한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가면의 헌터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A랭크가 아냐."

"…네? 공대장님? 그게 무슨…?"

간신히 차오르는 토기를 억누른 양유이가 의아하게 물었을 무렵, 가면의 헌터가 급히 몸을 날렸다.

갑작스레 저를 밀치는 그녀의 행동에 양유이가 바닥을 굴렀다.

"꺄아악!"

"고, 공대장님!"

"습격이다! 모두 전투 준비…!"

다급히 외치는 공대원들의 목소리 끝에 가면의 헌터는 조용히 갑작스런 습격자를 노려보았다.

슬슬 해가 저물기 시작해 어두워지는 밤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반짝이는 은빛 털.

지독한 악의를 품고 저를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

이번 작전의 최종 목표인 에어리어 보스다.

다만 녀석은 사전에 들었던 정보와 여러모로 달랐다.

"…페, [펜릴]!?"

"S랭크 몬스터라고…!? 저런 녀석이 어째서 이런 상층에…!?"

"젠장…! 협회 녀석들 잘못된 정보를 알려준 건가!?"

"그런 게 아냐! 그것보다는 그 사이에 성장한 거야…!"

사전에 알고 있던 정보와 달리 한 단계 성장한 녀석의 모습에 공대원들이 기겁한다.

A랭크의 몬스터만 해도 상층 구역에서 보기 드문 고랭크 몬스터였지만, 실제 눈앞의 녀석은 보기 드문 것을 넘어서 아예 규격 외였다.

못해도 대인원의 대규모 공격대가 필요한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화영 공격대의 공대원들이 패닉에 빠졌다.

제115화

아우우우────!!!

펜릴이 하늘을 향해 기다란 하울링을 내뱉었다.

그에 화답하듯 숲 전역에서 "아우──!"하고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대충 들려온 숫자만 해도 수십이다.

저 중에서 일부만 온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펜릴의 눈치를 살피며 가면의 헌터가 한차례 제 검을 매만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전원 전투 대형."

가면의 헌터는 공대장으로서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명령을 내렸다.

사실상 지금 공격대의 전력으로 눈앞의 펜릴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후퇴를 명령할 수도 없었다.

눈앞의 적을 두고 도망칠 수 없다는 멍청한 이유는 아니었고 단순히 도망칠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어느새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수십의 늑대들.

온전히 후퇴에만 전념해도 공대원 중 몇은 희생될 것이 분명했고, 무엇보다 눈앞의 펜릴이 도망치는 자신들을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가면의 헌터가 펜릴을 전담해서 맡는다면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사이에 공대원들이 과연 몰려드는 늑대들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녀를 제외한 공대원 전원이 A랭크의 헌터라도 무리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대원들의 도움 없이 가면의 헌터가 펜릴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펜릴이 그녀와 같은 S랭크라고 하더라도 헌터의 S랭크와 몬스터의 S랭크는 차이가 있었다.

이래도 전멸, 저래도 전멸.

어느 쪽도 결과가 같다면 최소한 후회 없이 싸우다 죽는 것이 나은 것은 당연했다.

공대원들과 별다른 대화도 없이 그녀 혼자 결정한 것이었지만 공대원들은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았다.

반대는커녕 작은 불만조차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녀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애초에 그녀의 판단을 믿고 따르지 않았다면 지난 2년간 동료로서 함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게 공대장인 가면의 헌터를 중심으로 화영 공격대의 공대원 전원이 죽음을 각오하고 투지를 다졌다.

한 명의 헌터로서 그들은 패배할지언정 도망치지 않았다.

숲 전역에서 속속들이 늑대들이 몰려들기 시작할 때쯤,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가면의 헌터가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펜릴을 향해 몸을 날렸다.

눈 깜짝할 새 펜릴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녀가 검을 내뻗는다.

찰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짧은 시간.

보통이라면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의 S랭크 헌터다운 빠른 속도였지만 그녀가 상대하는 적 역시 S랭크의 몬스터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섬광과도 같은 공격을 펜릴은 대비하고 있던 것처럼 여유롭게 피해냈다.

거기다 단순히 몸을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검을 내뻗는 가면의 헌터에 맞서 앞발을 휘두른다.

휙─

깔끔히 들어오는 펜릴의 카운터를 가면의 헌터가 급히 막아낸다.

쾅- 발톱과 검이 부딪혔다고는 믿기 힘든 거친 소음이 울리고 짧은 교환의 충격으로 가면의 헌터가 훌쩍 밀려났다.

그 틈을 펜릴은 놓치지 않았다.

"…유이 언니!"

다급한 목소리가 공터를 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양유이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양유이가 손을 내뻗는 것과 함께 가면의 헌터의 앞에 반투명한 보호막이 생겼다.

힐 스킬만큼이나 희귀하다고 알려진 보호막 스킬이었다.

쾅─!!!

펜릴의 앞발과 부딪힌 보호막에서 묵직한 소음이 들려왔다.

한 번의 앞발질만으로 양유이의 보호막을 거뜬히 깨부순 펜릴이 재차 가면의 헌터를 노리고 반대 발을 휘둘렀다.

이전의 충격으로 여전히 허공을 날아가는 와중에 미처 피할 수 없는 공격이 가면의 헌터를 노렸다.

그리고 막 펜릴의 공격이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려는 찰나, 이번에는 다른 공대원들이 나섰다.

삽시간에 펜릴에게 접근해 사방에서 각자의 무기를 찔러넣는다.

피할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사방을 포위한 채 찔러오는 공격에 펜릴이 짧은 울음을 내뱉었다.

"크아앙──!!!"

위협적인 낮은 울림과 함께 펜릴을 중심으로 묵직한 마력의 파동이 터져나갔다.

펜릴에게 달려들던 공대원들이 맥없이 튕겨 나간다.

"크르르──."

가면의 헌터를 향한 공격을 멈춘 채 가볍게 땅 위로 내려선 펜릴이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펜릴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땅 위로 내려선 가면의 헌터와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든 공대원들이 잠시간 그런 펜릴의 모습을 살폈다.

짧은 전초전이 끝났다.

눈앞의 적은 그녀들의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상대였다.

무엇보다 어느새 슬금슬금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한 늑대들의 존재가 부담이 크다

개중에는 E랭크의 [사일런트 울프]보다 상위의 개체도 다수 존재했고, B랭크의 개체도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함께 이번 소탕 임무를 맡은 헌터들이라도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으로서는 얼마 버티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렇다 할 방법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가면의 헌터가 저도 모르게 무심코 입술을 깨물자, 폔릴의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늑대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해일처럼 덮쳐오는 늑대들의 공격에 화영 공격대가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결과가 보이는 일방적인 싸움의 시작이었다.

* * *

"헉… 허억…!"

가면의 헌터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상태는 이미 망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위에 걸치고 있던 두꺼운 로브는 어느새 이곳저곳 찢겨나간 상태였고, 로브 밑의 장비도 잔뜩 망가져 새하얀 그녀의 속살을 여지없이 밖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저곳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녀가 쓰고 있던 민무늬 가면은 어느새 깨져나가 원래의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싸움 끝에 가면의 헌터는 잔뜩 지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정상으로는 볼 수 없는 몸 상태.

그나마 다행이라면 동료들 중 아직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모두가 그녀와 다른 공대원들이 힐러인 양유이를 최우선으로 지킨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계속된 전투로 힐러인 양유이는 이미 가진 바 마력을 한계까지 쥐어 짜낸 상태였고, 더 이상 그녀를 지킬 공대원들 역시 중상으로 도저히 더 싸울 상태가 아니었다.

개중에 가장 나은 상태인 것이 가면의 헌터였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사실상 전멸이라고 봐도 좋을 만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화영 공격대는 제법 잘 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싸움 끝에 늑대들의 숫자를 상당수 줄일 수 있었고 고랭크의 상위 개체들까지 여럿 쓰러트렸다.

고작 여섯 명의 인원으로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직 쓰러트린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늑대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가장 중요한 녀석들의 우두머리마저 멀쩡히 건재하고 있었다.

머리 한쪽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에 한쪽 눈을 찡그리며, 가면의 헌터가 말없이 저편을 응시했다.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는 펜릴의 모습이 보였다.

별다른 상처는커녕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멀쩡한 모습.

이미 만신창이나 다름없는 그녀하고 여러모로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끝인가?'

여유롭게 저를 바라보는 펜릴의 시선에 가면의 헌터는 무심코 제 마지막을 직감했다.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상념에 그녀가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실종된 친오빠를 찾겠다는 생각에 헌터가 된 그녀였지만 헌터의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제 오빠를 찾기도 전에 제가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러한 것쯤은 처음 미궁에 발을 들일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니 제가 각오했던 것이 사실은 각오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서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 오빠가 죽었다는 것을.

그저 그녀 혼자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뿐이다.

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인정했지만, 그녀 혼자만 납득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만약 일찌감치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네 오빠는 이미 죽었다는 주변의 말을 납득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그녀의 아버지는 말했다.

네 오빠는 멍청한 녀석이라고.

제 아들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어리석은 사내라고.

실낱같은 희망만 믿고 바보같이 미궁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그런 아버지의 말에 당시의 그녀는 아무런 말도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이라면 답해줄 말이 생긴 것 같았다.

그녀의 오빠는 틀림없는 제 오라비라고.

그녀의 오빠도, 그녀 본인도 다신 없을 멍청한 사람이었으니까.

가면의 헌터, 유화영은 어느새 성큼 제 앞까지 다가온 펜릴의 모습에도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인정하지 않았다.

제 오빠의 죽음을.

크르르───

귓가로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뒤편에서 다급히 도망치라 소리치는 공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메아리치듯 흐릿하게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유화영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커다란 펜릴의 얼굴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이제 오빠를 만날 수 있는 걸까?'

숨 막히도록 삭막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느끼게 해준 사람.

그녀에게 있어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존재.

마지막으로 제 오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유화영이 천천히 저를 향해 다가오는 날카로운 어금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쾅───!!!

묵직한 타격음이 울린다.

갑작스런 소음에 멍하니 죽음을 기다리던 유화영이 번쩍 눈을 떴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는 한 사내가 조용히 서 있었다.

조금 사납고 날카롭긴 하지만 제 오빠를 지독히도 닮은 얼굴.

이전에 잠깐 마주쳤던 사내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를 유화영은 홀린 듯 바라보았다.

"…오빠?"

두 남녀는 잠시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저도 모르게 무심코 유화영이 입을 열었다.

홀린 듯 새어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사내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화영이?"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틀림없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조심스레 제 이름을 내뱉은 사내의 목소리에 유화영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화했다.

경악, 환희, 반가움, 그리움, 분노, 슬픔, 기쁨 등.

미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감정으로 뒤죽박죽이 된 그녀의 얼굴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다양한 감정의 변화 끝에 마침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유화영은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빠 맞지?"

울컥하기라도 한 듯, 물기 가득한 목소리에 사내는 꾹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찾듯 망설이며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던 사내가 마침내 고개를 주억였다.

그 모습에 결국 유화영의 눈에서 주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흑…! 흐윽…!"

3년 만에 다시 재회하게 된 제 오빠의 모습에 유화영은 주변 상황도 잊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제 동생의 모습에 사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이곳에서, 그것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몰랐다는 듯.

당혹스런 표정을 짓던 사내가 이내 울음을 터트린 제 동생을 달래기 위해 조심스레 손을 뻗을 때였다.

"크아아아앙───!!!"

분노 가득한 늑대의 노성이 숲속을 울려펴졌다.

고막을 강타하는 성난 울음에 제 동생을 향해 손을 뻗던 사내가 멈칫 행동을 멈추었다.

제 동생을 한 번, 어느새 몸을 일으킨 펜릴을 한 번.

차례로 바라보던 사내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가볍게 유화영의 머리를 토닥였다.

"끝나고 얘기하자."

무뚝뚝하지만 상냥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 숙인 채 눈물 흘리던 유화영이 급히 제 오빠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어라 말리기도 전에 그녀의 오빠는 이미 몸을 돌린 채 성큼성큼 펜릴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오, 오빠아─!!!"

S랭크의 에어리어 보스를 상대로 3년 만에 겨우 다시 만난 오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유화영이 멀어져가는 제 오빠의 등을 향해 급히 손을 뻗었다.

마음 같아서는 냉큼 일어서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몸은 주인의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빠…! 오빠아!!! 안 돼─! 안 돼애──!!!"

결국 애처롭게 손만 뻗을 수밖에 없던 그녀가 목이 찢어져라 제 오빠를 불렀다.

다만 그런 그녀의 부름이 애석하게도 그녀의 오빠는 그녀의 부름을 무시한 채 묵묵히 펜릴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아… 아아…! 아, 안 돼…! 안 돼…! 제발…!"

[괜찮다.]

애처롭게 제 오빠를 부르던 유화영에게 차분한 미성이 들려왔다.

옥구슬이 굴러가듯 부드러운 목소리에 유화영이 번쩍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그녀의 곁에는 새하얀 백발의 미인이 있었다.

이전에 그녀의 오빠와 함께하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안심해도 좋다. 본녀의 부군은 강하니까.]

안심이라도 시키듯, 나긋나긋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의 의미를 유화영이 미처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여인의 말을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듯 그녀의 오빠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깨갱─!!!"

퍽─

짧은 구타음과 함께 S랭크의 에어리어 보스, 펜릴이 볼품없이 숲 너머로 날아갔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유화영이 멍한 표정을 짓자 곧 그녀의 오빠 역시 펜릴이 날아간 숲 너머를 향해 모습을 감췄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유화영의 머리로는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116화

숲 너머로 훌쩍 날아간 S랭크의 에어리어 보스 펜릴.

그리고 그런 녀석을 쫓아 유유히 사라지는 제 오빠의 뒷모습.

유화영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오빠가 3년 만에 나타난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인데 그 오빠가 S랭크의 몬스터를 뚜드려 팬다?

직접 제 눈으로 본 게 아니었다면 유화영은 절대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지금도 반신반의한 상태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눈앞의 광경은 오빠를 보고 싶은 유화영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주마등 비슷한 환상은 아닐까?

유화영은 슬며시 제 볼을 꼬집었다.

당연하게도 작은 통증이 몰려왔다.

역시 꿈이나 환상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이 모두 현실이란 뜻인데, 그렇다면 제 오빠가 펜릴을 날려버린 것도 사실이란 뜻이다.

유화영이 멍하니 펜릴과 오빠가 사라진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깨갱─'하고 구슬픈 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여전히 현실 같지가 않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감을 잊어가던 유화영에게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처가 꽤 심하구나.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겠어.]

조금 차가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린다.

번쩍 정신을 차린 유화영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세상 혼자 살 것 같은 우아한 미모를 가진 여성이 눈앞에 있었다.

양팔 가득 여우와 토끼를, 그리고 머리 위에는 뱀 한 마리를 얹어둔 모습이 어딘가 이상한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조화로웠다.

"…당신은?"

이전 제 오빠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워낙 신비로운 분위기 탓일까?

애초에 초면이나 다름없는 상대였기에 유화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약간의 긴장과 경계 가득한 목소리에 백발의 여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과 같은 무심한 표정으로 유화영의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슬며시 손을 뻗는다.

그에 반응해 곧장 몸을 움직인 유화영이었으나 이미 잔뜩 지친 그녀의 몸은 주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잠깐의 움찔거림 말고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유화영이 매섭게 여인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백발의 여인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괜찮다. 그대를 해할 생각은 없다.]

이전과 별다를 거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어째선지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긴장과 경계를 풀어버린 유화영이 멍하니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뻗은 그녀의 손위로 마력과 함께 새하얀 빛무리가 떠올랐다.

유화영의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치료 마법."

그제야 여인이 자신을 향해 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유화영이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괜히 경계한 자신만 우스워진 것 같았다.

유화영이 급히 여인을 향해 감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슬며시 건넨 유화영의 감사 인사에 백발의 여인은 별다른 대답 없이 잠시간 유화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청명한 푸른 눈에 유화영이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괜스레 볼이 붉어지는 기분이다.

[…이래 보니 정말 묘하게 닮기는 했어. 아무래도 끝나고 물어볼 것이 늘었구나.]

"컁컁─!"

한차례 의미 모를 말을 내뱉은 백발의 여인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에 급히 유화영이 따라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그런 유화영의 행동을 백발의 여인이 조용히 제지했다.

그녀가 유화영의 품에 안고 있던 여우와 토끼를 안겨줬다.

얼떨결에 여우와 토끼를 품에 안게 된 유화영이 멍하니 여인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본녀는 잠깐 그대의 동료들을 보고 오지.]

"…아! 모두…!"

뒤늦게 제 동료들을 떠올린 유화영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쓰러져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힐러인 양유이 말고는 모두가 중상이었다.

그 양유이마저도 이런저런 상처를 입고 마력 부족으로 탈진한 상태다.

그렇게 제 동료들의 상태를 확인한 유화영이 막 그들의 곁으로 달려가려던 순간이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백발의 여인이 가볍게 동료들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아까보다 좀 더 많은 마력과 빛이 모여들고 유화영이 그랬던 것처럼 동료들의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엉망이 된 장비는 그대로였지만 그 표정만큼은 편안히 잠든 것 같은 동료들의 얼굴에 유화영이 재차 탄성을 터트렸다.

"…상위 힐 스킬."

힐 스킬을 가진 헌터들 중에서도 몇몇 소수만이 갖고 있는 스킬이었다.

무엇보다 일반 힐에 비해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탓에 스킬을 갖고 있어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 스킬이다.

그러한 스킬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여인의 모습에 유화영이 나지막이 탄성을 터트린다.

못해도 S랭크 이상의 헌터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러한 유화영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낸 여인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주변을 에워싼 늑대들이 있는 곳이었다.

앞서 동료들 때와 마찬가지로 뒤늦게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던 늑대들의 존재를 깨달은 유화영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번에도 일으키려 했다.

여인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에 있는 늑대들의 모습을 확인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낑─끼이잉──."

"끼이잉──."

앞서 자신들을 둘러싼 채 사납게 울부짖던 녀석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잠깐 사이에 다시 확인한 늑대들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다리 사이로 꼬리를 숨긴 채 슬금슬금 눈치를 살핀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주둥이에서는 애처로운 낑낑-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사납던 녀석들 모두가 여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너희들의 사정은 딱하다만… 이번은 운이 나쁘구나. 부군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야.]

"낑─ 끼이잉─."

늑대들 중에서도 A랭크의 상위 개체가 여인의 발치에서 낑낑거렸다.

도대체 그 사납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사정해도 무리다. 본녀도 어쩔 수 없어.]

"낑… 끼이잉…."

[확실히 너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만… 하필 건드린 것이 부군의 동생이었던 것이 나빴다. 그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거라.]

"끼이잉…."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 여인의 모습에 A랭크의 몬스터가 그 발아래 배를 까고 누웠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낑낑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여인이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알겠다. 본녀도 최대한 노력해보마.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는 말거라. 본녀도 괜히 부군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으니.]

"끼이잉─."

그것만으로 만족한다는 듯 A랭크의 몬스터는 기쁘게 여인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도저히 흉포한 몬스터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저 한 마리의 애완견이나 다름없는 녀석의 모습에 유화영이 멍청한 얼굴을 해 보였다.

"저게 무슨…?"

재차 눈앞에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유화영이 멍하니 내뱉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여우가 "컁컁!" 울었다.

통통- 그 두툼한 발바닥으로 제 팔을 두드리는 모습에 유화영이 저도 모르게 여우를 쓰다듬었다.

굉장히 복슬복슬했다.

무심코 계속 쓰다듬으며 드는 생각은 이젠 아무래도 좋은 느낌이랄까?

유화영은 그쯤에서 의문을 품는 것을 그만두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들도 무사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무엇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오빠와 다시 재회하게 되었으니 다른 사소한 문제쯤은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흠… 저쪽은 슬슬 끝난 모양이구나.]

그렇게 유화영이 멍하니 제 품에 안긴 여우를 쓰다듬고 있는 사이 불현듯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제 발치에서 재차 연신 사정하는 늑대를 본체만체한 그녀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숲 너머에서 사내 하나가 조용히 걸어왔다.

한쪽 손에 커다란 덩치의 펜릴을 질질 끌고서 말이다.

당연하게도 사내의 정체는 유화영의 오빠였다.

그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자연스러운 제 오빠의 모습에 유화영이 무심코 정신을 놓아 버리려던 찰나였다.

"컁컁─!"

여우가 통통- 그녀의 팔을 두드렸다.

유화영이 재차 여우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제는 정말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구나.]

[이쪽보다는 더 급한 쪽이 있으니까….]

쿵- 아무렇게나 펜릴을 집어던진 사내가 여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

느릿하게 주변의 늑대들을 훑은 사내의 시선이 이윽고 제 동생을 향했다.

조금 굳은 얼굴이던 사내가 멍하니 여우를 쓰다듬는 동생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늑대들에게만 잔뜩 무겁던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괜찮니?"

"…으응? 아, 오빠?"

"…그래, 오빠다."

조용히 유화영의 곁으로 다가온 사내가 한차례 제 동생의 모습을 훑었다.

잔뜩 묻은 흙먼지나 말라붙은 핏물 탓에 절대 괜찮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상처는 없었다.

사내의 시선이 흘깃 백발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여인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고맙군.]

[별거 아니다. 그거보다 이번 일은 본녀에게 확실히 설명해줘야 할 것이다.]

[아아. 반드시.]

여인을 향해 한차례 고개를 주억인 사내가 재차 제 동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화영 역시 가만히 제 오빠를 바라보았다.

3년 만에 재회한 남매가 조용히 눈을 마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물끄러미 제 동생을 바라보던 사내가 몇 차례 입술을 달싹였다.

여러 가지 말들이 바로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끝끝내 내뱉지 못했다.

물끄러미 제 오빠를 바라보던 유화영 역시 몇 차례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껏 하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 가득 머물렀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던 두 사람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잘 지냈니?"

"…잘 지냈어?"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은 똑같은 말이었다.

누가 피 섞인 남매 아니랄까 봐 지독히도 똑같은 물음에 두 남매는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막혀 있던 남매의 말문이 열렸다.

"나는 잘 지냈어. 화영이 너는?"

"나도 잘 지냈어… 지금은 S랭크 헌터도 됐고. 좋은 동료들도 생겼고."

담담히 내뱉는 유화영의 대답에 사내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너 헌터는 도대체 왜 된 거야? 미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는 해?"

기다렸다는 듯 쏟아내는 잔소리에 유화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오빠가 할 말이야? 나는 그래도 각성이라도 했지. 오빠는 각성도 안 한 채로 미궁을 들락거렸잖아."

조용히 내뱉는 목소리에 사내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거에 대해서는 사내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사내는 한번 죽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그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고… 어쨌든 미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는 해? 당장 오늘만 해도 큰일 날 뻔한 거 몰라? 너 만약 내가 없었으면…!"

"이래 봬도 나 S랭크 헌터거든? 오늘이 예외였던 거뿐이지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 없었어!"

"그 예외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어!"

이번에는 유화영의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제 오빠의 말이 맞았다.

평소에 괜찮다고 해서 다음이 꼭 괜찮을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예외라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미궁.

지난 2년간의 승승장구로 나름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느끼고 있던 유화영은 오늘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제 오빠가 내뱉은 말에 내심 수긍하고 있는 유화영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수긍하고만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머리로는 분명 오빠의 말이 맞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냥 오빠의 의견을 인정할 수 없었다.

멀쩡히 살아 있었으면서 3년 동안 연락 한번 없던 오빠의 무심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헌터가 됐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오빠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주변에서 어리석다며, 포기하라며 내뱉는 말을 모두 무시한 채 묵묵히 오빠의 수색에만 집중했던 2년여의 노력.

그런 그녀의 노력은 하나도 모른 체 그저 무작정 잔소리만 늘어놓는 오빠의 모습이 유화영은 몹시 야속했다.

유화영이 꾹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사내를 노려보았다.

잔뜩 찡그려진 눈매와 앙다문 입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사내 역시 지지 않고 제 동생을 노려보았다.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는 두 남매의 얼굴이 지독히도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동안 이어질 것 같은 남매의 대치를 멈춘 것은 다름 아닌 한쪽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백발의 여인이었다.

[…그래서 슬슬 그 의미 없는 눈싸움은 끝내주지 않겠나? 아님 적어도 본녀가 알아들을 수 있게 사념으로라도 대화해주면 좋겠군. 전혀 의미를 모르겠다.]

조용히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에 두 남매의 눈싸움이 마침내 끝이 났다.

적어도 이제부터는 조금 더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헌터는 그만둬라. 위험하다."

"…싫어."

"…유화영!"

"왜? 뭐? 왜 부르는데!"

…아마도.

제117화

동생과 만났다.

어쩐지 묘하게 자꾸 눈이 가더라니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내 여동생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여동생은 헌터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어중간한 저랭크 헌터가 아닌 S랭크 헌터로서 헌터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했다.

평소 활동적이라기보다는 조용한 독서 같은 것을 더 선호하던 동생이었기에 여러모로 놀라웠다.

다만 놀라는 것도 잠시, 여동생의 상황이 꽤 위험했기에 곧장 몸을 움직였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스노우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간략한 사실만 전했다.

저기 쓰러진 여자가 내 동생이라고.

당연히 나는 몬스터. 동생은 인간.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우리 둘의 관계에 스노우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 보였지만 구태여 더 묻지는 않았다.

정말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담담히 고개를 주억이며 일단 수긍해주는 스노우의 태도가 참 고마웠다.

여동생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S랭크의 몬스터인 [펜릴]이었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못해도 평야 구역 정도는 되어야 만날 수 있는 상대다.

산림 구역에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아야 할 고랭크 몬스터.

녀석 같은 고랭크 몬스터가 어째서 산림 구역에 존재하나 의문도 들었지만 그런 의문은 잠시 접어둔다.

지금 당장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동생을 향해 쩌억- 주둥이를 벌린 빌어먹을 멍멍이 한 마리뿐이었다.

저놈이 지금 감히 누구한테 주둥이를 내밀어?

빌어먹을 멍멍이를 가볍게 밀쳐낸 다음 급히 동생을 살폈다.

이곳저곳 묻어난 흙먼지와 줄줄 흘러내린 핏물.

성한 곳이 없다.

기억 속에서 항상 단정하게 꾸미고 다니던 녀석이 지금은 완전 엉망이 되어 있었다.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는 눈에서 주르륵-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대 가만 안 둔다.

곧장 동생에게서 몸을 돌려 빌어먹을 멍멍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인지이쪽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연신 이를 드러내는 녀석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심상 속 파트너들의 반응이 꽤 뜨겁다.

[죽여버렷! 그냥 죽이지 말고 살과 가죽을 발라내서 조각조각 내버리자!]

[죽─여─.]

꽤 드물게도 파트너들과 내 의견이 일치했다.

뒤편에서 연신 나를 부르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제 딴에는 나를 걱정해서 그런 거겠지만 괜한 걱정이다.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리고 그동안 내 동생을 부탁한다, 스노우.

[맡겨다오.]

어느샌가 조용히 공터로 내려선 스노우가 한 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몹시 듬직하다.

그녀가 있다면 여동생도 안전하겠지.

이걸로 나도 안심하고 이쪽에 집중할 수 있었다.

"크르르… 커엉─!"

[말도 안 된다…! 거짓말이야…! 이 광활한 산림의 왕인 이 내가…! 어찌 한낱 인간에게…!]

[이쪽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으면서 말이 많구나. 얌전히 죽어라.]

"…커엉─?"

[…설마 인간이 아닌…? 그렇다면 어째서…? 어째서 왜 인간을 돕는 거지!?]

[네놈이 하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를 건드렸다. 그리고 마침 내가 이곳에 있었던 것이고. 탓하려거든 네 운이 나쁜 것을 탓해라.]

"깨갱…!"

[네, 네놈! 어째서 나를…! 어째서 같은 동포를…!]

<마안>을 사용하면 금방이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편안한 죽음일 거 같아 직접 몸으로 상대했다.

그래도 나름 S랭크 몬스터라고 요리조리 잘 피하며 버티기는 했지만 <약자멸시>의 백업을 받는 내 앞에서는 쓸모없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녀석은 마지막까지 내가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 의문을 품고서 죽어갔다.

녀석 입장에서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저 평소처럼 인간을 공격했고 죽였을 뿐이다.

평소와 그닥 다름없는 평범한 행동.

그런데 오늘은 하필 공격한 것이 내 여동생이었고, 마침 내가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녀석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고 나보다 약했던 것뿐이다.

마지막까지 의문을 품고 죽어간 녀석의 눈동자를 묵묵히 바라보다 조용히 몸을 돌렸다.

그대로 동생에게로 돌아가려다 왼쪽이가 급히 그런 내 행동을 막았다.

펜릴의 시체를 들고 가잔다.

오른쪽이도 아니고, 드물게 식탐이라도 부리려는 걸까?

아니었다.

왼쪽이는 우리가 잡은 펜릴을 동생에게 선물하자 이야기했다.

이쪽 입장에서야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상대였어도, 동생 같은 헌터 입장에서는 값진 보물이나 다름없을 것이라고.

왼쪽이가 드물게 기특한 의견을 내놓았다.

조용히 감탄하니 금세 우쭐해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칭찬했다.

왼쪽이가 잔뜩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왤까?

우쭐해졌다가 짜증 냈다가.

너무 전환이 빨라서 당황스럽다.

부끄럽기라도 한 것일까?

어찌 되었든 왼쪽이의 의견을 수용해서 펜릴의 시체를 들고 가기로 결정했다.

다만 덩치가 너무 커서 들고 가기가 조금 애매했다.

결국 바닥에 질질 끌고 가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래도 명색의 에어리어 보스이자, S랭크 몬스터의 시체인 만큼 조금 너무한 것도 같았지만….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약한 게 죄였다.

이후 동생과 스노우가 기다리는 공터로 돌아왔다.

한쪽 손에는 커다란 펜릴의 시체를 질질 끌면서.

주변에 모여있던 늑대들이 슬금슬금 이쪽의 눈치를 살핀다.

스노우가 알아서 다 처리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것일까?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니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들도 동생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니 잠깐 잠잠해졌던 분노가 다시 한번 차올랐으나 눈치 좋게 스노우가 끼어 들어왔다.

운이 좋구나, 너희들.

끌고 온 펜릴의 시체를 적당한 곳에 던져둔 채 동생을 살폈다.

그 품에 안겨 있는 설이와 토순이가 보였다.

동생은 조금 멍한 표정으로 설이를 연신 쓰다듬고 있었다.

얌전히 그 손길을 즐기고 있던 설이가 이쪽을 향해 "컁컁─!" 울었다.

그새 제법 친해진 것일까?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괜찮아 보이니 이제 됐나?

우두머리와 달리 너희는 정말 운이 좋구나.

이후 동생과 제대로 대면했다.

오랜만에 재회한 동생에게 이것저것 할 말이 많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았다.

3년 만에, 그것도 사람이 아닌 몬스터로서 돌아온 내가 이제 와서 동생에게 무어라 해도 괜찮을 것일까?

이미 나는 사람이 아닌 몬스터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인연을 이렇게 이어가도 괜찮은 것일까?

괜찮았다.

한번 말문이 트이니 이후에는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그 과정에서 잠깐의 다툼도 있었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남매 싸움일 뿐이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이후 3년간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고자 했지만, 아쉽게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동생의 동료들 역시 하나둘 깨어나는 상황이었던 터라 아쉽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었다.

밀린 대화는 미궁을 나간 다음에.

아아, 이대로 모른 척 떠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라.

절대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내 팔에 매달릴 필요 없다.

아니, 분명 3년 동안 연락 한번 안 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나중에 차분히 설명해 줄 테니까.

그러니 일단 내 팔에서 떨어져라.

그쪽에서 구경 중인 동생의 동료들도 함께 말려줬으면….

아니, 분명 연락 안 한 내 잘못이 크긴 하지만….

그것보다 못 본 사이에 너무 달라붙는 거 아닌가?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조용하던 녀석이 갑자기 활발해지니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얘, 평소에도 이런가?

동료들도 이렇게 활발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고 한다.

이전에 대화를 나누었던 양유이 헌터가 조용히 '브라콤'하고 중얼거리는데….

누가? 얘가?

에이… 설마 아니겠지?

이후 동생과 그 동료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애초부터 오랜만에 만난 터라 따로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저쪽에서 너무 끈질기게 달라붙어 왔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내 팔에 매달려 오는데….

정말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괜찮나?]

[아아? 본녀라면 괜찮다. 그대가 그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꽤 신기하기도 하고 말이다.]

[…미안하군.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설명해주마.]

조용히 건넨 사과에 스노우가 자그맣게 웃었다.

[그리 서두를 필요 없다. 언제가 되었든 나중에 확실히 설명만 해주면 되니까… 그것보다 본녀는 루엘이 걱정이구나.]

그리 말한 스노우가 슬며시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옷소매 너머로 뱀 한 마리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쉬───."

[…그렇군. 내가 너를 배려하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루엘.]

한차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루엘이 재차 '쉬─'하고 울어왔다.

아무래도 인간과 만나도 별문제 없는 설이와 토순이와 달리, G랭크로서 아직 미궁의 의지에 대항하지 못하는 루엘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꽤 곤혹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바로 옆에 헌터들이 있음에도 아직까지 덤벼들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루엘은 정말 영리하구나. 상대와 자신의 차이를 확실히 느끼고 있어. 덤비면 틀림없이 죽는다는 걸 알고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

이어진 스노우의 설명에 조용히 감탄했다.

이전부터 영리하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설마 미궁의 의지에 스스로 견딜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뭔가 흐뭇해진 마음에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으니 루엘이 기분 좋게 '쉬─' 울었다.

[…그래도 견디기 힘들면 말하거라. 따로 떨어져서 이동해도 괜찮으니까.]

"쉬이──."

자신은 괜찮다는 듯 루엘이 한차례 울었다.

그 대견한 모습에 재차 그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조금 늦게 확인하기는 했지만 스노우도, 루엘도 일단은 괜찮은 모양이다.

다행이다.

그래서 남은 건 설이와 토순이인데….

사실 둘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설이야 그 특유의 호기심과 친화력으로 이미 동생을 비롯한 그 동료들에게까지 금세 이쁨받는 중이었고.

토순이는….

"이거 정말 토끼…? 돼지가 아니라?"

"…토끼와 돼지의 중간쯤인 몬스터가 아닐까? 신종 몬스터인 거지."

"살집 두툼한 것 좀 봐. 쿡쿡 찌르니까 출렁거려."

…나름 이쁨받는 중이다.

절대 괴롭힘이 아니니까.

토순이가 인간의 언어를 몰라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동생과 그 동료들은 꽤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스노우의 치유 마법으로 지금은 말끔히 나은 상태였다.

당장에라도 전투에 들어가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무리는 하지 않는다.

실제 죽음에 가까울 정도의 중상을 입었었으니, 당장 괜찮은 것 같아도 적지 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늑대들을 상대로 무기를 들어 올리는 짓은 그만둬라.

쟤들은 싸울 생각 없어 보이니까.

당장 나랑 스노우가 있어서 별문제는 없겠지만 우리가 없으면 지는 것은 너희다.

아무리 펜릴이 없어도 저 숫자는 무리니까.

그렇게 의욕을 드러내지 말도록.

동생의 동료들이 보인 근성 넘치는 모습에 스노우가 조금 감명받은 눈치였다.

다치면 자신이 치료해준다며 당장 싸워도 괜찮다고 말하는데….

조금 전까지 늑대들이 불쌍하다며 은연중에 봐주자는 눈빛을 보냈던 것은 어디의 누구인가?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다.

결국 늑대들은 얌전히 보내주었다.

분명 처음만 하더라도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다만 다소 생각이 바뀌었다.

당장은 무리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살려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늑대들은 이것저것 준비를 하고 나서 다시 만나기로 하자.

이에 관해 동생이나 그 동료들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딱히 귀담아듣지 않았다.

헌터로서의 본분이니, 죽은 다른 헌터들의 복수니 뭐니 말하는데 몬스터인 내 입장에서는 좀….

그리 말한다면 당장 죽어야 할 상대는 당연히 나겠지만.

열심히 토로하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먼 산을 바라보았다.

계속 그리 말해도 나한테는 전혀 와닿지 않으니까.

아무래도 지금껏 죽인 헌터들 숫자가 좀….

그러니 너희도 괜히 힘 빼지 말고 열심히 설이랑 토순이를 귀여워해다오.

그러면 복수 따위 더는 아무래도 좋아질 것이 분명하니까.

내가 장담한다.

제118화

동생의 동료들은 상당히 수다스러운 이들이었다.

이번에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수다로 극복하려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이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미궁 밖으로 복귀하는 도중 쉼 없이 떠드는 모습은 조금 질릴 정도였다.

그래도 딱히 신경에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그들이 동생의 동료들이라는 점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의 수다는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의 즐거운 대화였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달까?

기억 속 말없이 조용하던 동생도 간간이 그들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보니 평소 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특히 수다스러운 그들의 분위기에 설이가 굉장히 신나 보였다.

비록 그 말뜻은 못 알아듣겠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탓에 굉장히 즐거운 모양이다.

동생과 그 동료들의 수다는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는데, 설이와 토순이는 물론이고 나와 스노우에 대한 화제도 여러 번 위로 올랐다.

주로 우리 둘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는데 스노우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관계로 항상 답하는 것은 나였다.

거짓 없이 사실대로 고했다.

동생이 결혼은 또 언제 한 거냐며 마구 따지기 시작했다.

분명 옛날에는 조금 대들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조용하고 다소곳한 아이였는데….

못 본 사이에 왜 이리 왈가닥이 된 것일까?

아무래도 헌터가 된 영향이 꽤 큰 모양이다.

역시 헌터는 그만두게 해야….

알았다. 알았으니까 내 팔에 그만 좀 매달려라.

팔이 떨어질 거 같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찐 모양이지?

엉망진창으로 얻어맞았다.

역시 못 보던 사이에 완전 왈가닥이 되어 있었다.

그것보다 과연 S랭크 헌터라는 것일까?

제법 아프다.

이런 느낌으로 우리는 미궁 밖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은근한 기세를 내뿜었던 까닭에 다른 몬스터들의 습격은 없었다.

도중 양유이를 비롯해 통성명을 나눈 동생의 동료들에게 바깥의 소식도 전해 들었다.

이전 박민성에게도 간단히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아직 캐리에 불과한 박민성보다 고랭크 헌터로서 뒷사정에도 빠삭한 이들에게 듣는 정보가 좀 더 유익했다.

이야기를 듣기로는 샤를로트 사망 이후, 별다른 큰 소식은 없는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것도 오늘까지인 모양이다.

바로 산림 구역에서 나타난 S랭크 몬스터 [펜릴] 때문이다.

펜릴이야 내가 쓰러트리긴 했지만 애초에 펜릴 같은 몬스터가 산림 구역에서 나타난 것부터가 상당한 이상 사태라고 한다.

A랭크 몬스터만 해도 별도의 조사가 필요한데, 거기서 한술 더 뜬 S랭크 몬스터가 나타났으니 상당한 조사가 필요할 거라고.

그나마 내가 펜릴을 처리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많은 헌터들이 피해를 입을 뻔했을 거란다.

그리 말하며 이전에 구해준 감사까지 포함해 슬쩍 고개를 숙이는데 정작 나로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동생만 아니었다면 그들이 어찌 되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꽤 긴 대화를 나누며 나름 친해졌다고 할 수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들은 나에게 타인에 불과했으니까.

그래도 동생이 이들과 꽤 잘 지내는 걸 확인하고 친한 사이란 걸 파악한 이상 함부로 죽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들이 죽는다면 동생이 슬퍼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들을 조금 단련시킬 필요를 느꼈다.

지금 같은 수준으로는 어디 가서 딱 죽기 좋으니까.

무엇보다 여차할 때는 동생을 지킬 고기 방패가 필요하다.

나중에 스노우와 조금 의논해 봐야 할까?

* * *

무사히 미궁을 빠져나왔다.

산림 구역을 벗어난 이후, 상층 구역에 들어서서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비교적 편안히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록 미궁 앞의 검문소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헌터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동생과 그 동료들의 도움으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꼭 케이지에 넣어서 데려와 주세요."

테이밍한 몬스터라도 반드시 케이지에 넣어서 데려와 달라는 직원의 이야기를 가볍게 흘려들었다.

소중한 딸인 설이를 케이지 같은 곳에 넣을 수 있을쏘냐?

나는 물론이고 스노우가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다.

토순이라면 조금 고민해봄 직하지만 설이는 절대 안 된다.

어찌 되었든 S랭크 헌터인 동생 덕분에 검문소 직원도 그 이상 우리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이것이 인맥의 중요성일까? 권력의 위대함을 엿본 느낌이다.

"그럼 우리는 협회에 보고하러 가볼게요. 두 분은 공대장님과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대표로 말한 양유이가 다른 동료들을 챙기며 떠나갔다.

여전히 내 팔에 꼭 달라붙어 있던 동생이 그런 동료들을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원래 저런 보고는 공대장인 네가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괜찮아. 별로 안 중요해."

조용히 답한 동생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가면을 대신해 아이템 가방에서 또 다른 가면을 꺼내 쓴 터라 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직접 보지 않아도 가면 아래의 표정이 어떨지 뻔히 알 수 있었다.

분명 맡은 바 책임을 다하던 야무진 아이였는데, 3년 사이에 왜 이리 변해 버린 것일까?

일부러 시선을 피하는 동생의 행동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동생의 태도가 왜 그런 것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던 까닭이다.

나 역시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느긋하게 나누고 싶었으니 애초에 별 상관없었다.

이후 동생의 집으로 향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2년 전 성인이 된 이후부터 독립해서 혼자 사는 모양이었다.

슬며시 떠오른 부모님의 얼굴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괜스레 혼자 그 집에 남겨졌을 동생에게 미안한 기분이다.

말없이 동생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동생의 집.

무려 고층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펜트하우스다.

…몹시 성공했구나.

조금 부럽… 아니, 대견스럽다.

집안에 들어서자, 설이가 굉장히 흥분했다.

미궁 밖으로 나설 때부터 상당히 흥분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뭔가 거기서 한 템포 더 업 된 느낌이다.

곧장 토순이를 데리고 집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하는데, 혹시나 놀다가 뭔가를 부수거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동생이 별 상관없단다.

전부 얼마 안 하는 것들이라고.

나중에 얼마든지 또 구할 수 있으니 마음껏 뛰놀게 하란다.

대충 봐도 고가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들이 상당히 있는데….

뭐, 주인이 허락했으니 별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나 역시 돈이라면 모자라지 않게 있으니까.

아마 지금쯤 이전에 처분을 맡겼던 장비들의 대금도 모두 들어왔을 테니 혹시 부수더라도 문제없었다.

그렇게 설이와 토순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안심하고 지켜보려 하니, 막 저편으로 달려갔던 설이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뒤편에서 황급히 굴러… 아니, 쫓아오는 토순이의 모습이 보인다.

"컁컁─!"

[엄마! 루엘! 루엘도 내려줘!]

왜 급히 돌아오나 했더니 아무래도 루엘도 챙기려는 모양이다.

놀고 싶은 와중에도 잊지 않고 루엘을 챙기는 모습이 꽤 언니 같았다.

스노우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설이의 머리를 상냥히 쓰다듬었다.

[루엘은 아직 약하니 잘 챙겨줘야 한다.]

[웅! 알았져!]

두 귀를 쫑긋 세우며 야무지게 답한 설이의 머리 위로 스노우가 조심스레 루엘을 올려주었다.

"쉬──."

미궁을 막 빠져나온 터라 미궁의 의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루엘은 꽤 편해진 안색이었다.

이후 루엘을 데리고 다시 탐험을 떠나는 설이의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뱀도 있었어?"

"아아… 얼마 전에 새로 생긴 가족이다. 이름은 '루엘'이지."

"…테이밍 스킬로는 보통 한 마리밖에 조련할 수 없을 텐데."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후 자리에 앉은 우리를 위해 동생이 마실 것을 챙겨왔다.

상큼한 오렌지 주스다.

동생이 옛날부터 좋아했던 거구나.

사양 않고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니 이것도 꽤 그리운 맛이다.

곁에 있던 스노우가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국지색의 미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쥔 유리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그게 또 상당히 우스웠다.

가볍게 실소를 흘리며 스노우에게 오렌지 주스를 설명했다.

스노우가 급히 아이들을 부른다.

역시 엄마랄까? 맛있는 것은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모양이다.

잠시 스노우 때와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설이가 연신 "컁컁!" 의미를 알 수 없는 울음을 내뱉었고, 진화한 이후 축 늘어져 있기만 하던 토순이의 귀가 옛날처럼 쫑긋- 솟았다.

굉장한 맛인 모양이다.

무척 흐뭇하다.

루엘의 경우에는 아쉽게도 별다른 맛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뱀의 혀는 맛을 느끼기 위해서보다는 탐지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니까.

괜스레 옛날 생각이 떠올라 슬며시 루엘의 몸을 쓰다듬었다.

너도 진화하면 마음껏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때 많이 먹게 해줄 테니 조금만 참자꾸나.

"쉬───."

루엘은 알겠다는 듯 조용히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 대견한 모습에 재차 루엘의 몸을 쓰다듬었다.

루엘은 설이나 토순이와는 또 다른 개성이 있었다.

이후 바깥의 음료를 처음 먹어본 미궁의 촌 몬스터들을 뒤로한 채,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할지, 어디까지 설명할지는 이미 이곳까지 오며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딱히 무언갈 숨길 생각은 없었다.

3년간 날 열심히 찾아온 동생을 생각해서라도.

하나의 거짓 없이 동생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혹여 이 이야기 때문에 동생이 날 배척하더라도 상관없다.

후회하지 않겠다.

나는 지금의 내 삶에 무척이나 당당하니까.

길었던 이야기가 끝나자 동생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나와 스노우를 번갈아 보는데 아무래도 인간으로 의태한 몬스터란 것이 가장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스노우의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았지만, 머리 하나만큼은 명석하던 동생이었으니 어렵지 않게 스노우의 정체 또한 추측한 것 같다.

동생이 처음부터 내 이야기를 믿었던 것은 아니다.

거짓말하지 마라며, 농담이라면 참 재미없다며 끝까지 부정하는데 어쩔 수 없이 잠시 본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 덩치가 너무 큰 관계로 여기서는 스노우가 대신 나서주었다.

평소보다 두 배 정도 작아진 스노우의 모습에 동생이 기겁했다.

따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무려 SS랭크의 몬스터 [구미호].

그나마 이성을 잃고 바로 무기를 빼 들지 않았단 점이 칭찬할 만하다.

이후 이쪽이 몬스터란 사실을 입증한 다음, 스노우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몇 잔째인지 모를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몇 박스 사서 가야 할까?

아이템 가방이 있으니 꽤 많은 양을 챙겨도 문제없을 것이다.

이후 동생이 정신을 차리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맞닥뜨린 놀라운 사실에 머리가 잠시 고장 난 모양이다.

멍청한 표정을 짓는 동생의 품으로 자연스레 설이가 파고 들어가 어느새 쓰다듬을 받고 있었다.

그게 또 상당히 웃기다.

이후 설이 덕택에 어찌어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동생과 다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리 동생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실을 밝히는 것에 걱정이 있었지만, 이후 대화를 나눠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해 헌터가 되어 위험한 미궁을 제 발로 들어간 동생.

3년여의 세월 동안 실종된,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없는 오빠를 찾아 헤맨 내 여동생.

그녀라면 믿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만했다.

또한 그것이 지금까지 잊지 않고 나를 찾아준 동생에 대한 보답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처음의 불안과 달리 막상 진실을 털어놓고 보니 꽤나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참고로 도중의 대화는 모두 사념 대화를 통해 진행했기에 스노우 역시 모두 듣고 있었다.

사실 동생의 반응만큼이나 스노우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 한편, 또한 상당히 두려웠었다.

그러나 그런 내 걱정과 달리 우리 쿨한 마님께서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냐며 잔뜩 김샌 반응을 보였는데….

잔뜩 걱정한 나로서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스노우와 나 사이에는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을 예정이다.

사실 동생의 반응보다 이쪽이 더 신경 쓰였다.

제119화

한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 노관식은 방금 막 들어온 소식에 골머리를 앓았다.

"…잠잠해진 지 겨우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사건이냐…?"

찌푸려진 미간을 문지르며 노관식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나온 몬스터가 [펜릴]이라고?"

"예. 화영 공격대가 가져온 사체를 확인해본 결과 틀림없는 S랭크의 펜릴이었습니다."

조심스레 답하는 비서의 목소리에 노관식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샤를로트 사망 사건의 여파가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또 사건이 터졌다.

단순히 헌터 몇 명이 죽은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협회의 의뢰를 받고 상위 랭크 헌터가 여럿 죽기는 했지만 헌터의 죽음이야 늘 있는 문제였고, 지금껏 일어난 큰 사건들에 비하면 그리 화제가 되지 못할 이야기였다.

다만 이번 일은 헌터들을 죽음으로 이끈 그 원인이 문제다.

"도저히 산림 구역에서 나올 만한 녀석이 아니지?"

"…예. 수십 년 전, 헌터들이 처음 산림 구역에 발을 들인 이후 최초로 나타난 S랭크의 몬스터였습니다."

"…흐으음."

노관식이 가만히 팔짱을 꼈다.

무언갈 생각이라도 하듯 그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노골적인 이상 사태인가… 다른 전문가들 의견은 어떤가?"

"이렇다 할 추론은 없습니다만… 그나마 가장 나은 의견이라면 미궁 내의 생태가 변화하고 있다고밖에…."

"미궁 내의 생태 변화? 그게 가능한가? 미궁이 처음 나타난 지 벌써 100년이 다 돼가는데, 지금껏 그런 변화는 없었잖나?"

"어디까지나 추론 단계입니다만 없을 만한 일도 아니라고 합니다. 애초에 미궁은 미지투성이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리 큰 문제는 아니라고…."

"큰 문제가 아니긴 무슨… 작은 변화에도 당장 죽어 나가는 건 헌터들인데…."

짧게 혀를 찬 노관식이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조사대를 파견해야겠군."

"…일전에 하던 조사를 마저 하시려는 생각입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이상 상태라면 확실한 조사가 필요하지."

그리 말한 노관식이 흘깃 비서를 바라보았다.

"어중이떠중이들한테 맡길 생각하지 말고 대형 길드 위주로 공문 돌려. 낌새를 보니 어지간한 치들은 나서봤자 개죽음당할 뿐이야."

"…그리 심각합니까?"

"못해도 S랭크가 나서야 될 만한 일이지. 솔직히 S랭크도 좀 위험하다 싶은데…."

조용히 말을 잇던 노관식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까 화영 공격대 상태는 어떻든?"

"…장비가 좀 상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건 갑자기 왜?"

"화영 공격대 공대장은? 그 아가씨는 어땠어?"

의아하다는 듯 물어오는 비서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은 채 노관식이 제 궁금한 것만 물었다.

그런 제 상사의 모습에도 평소 자주 있던 일이었기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은 비서가 담담히 답했다.

"유 총리님의 따님 말씀이십니까? 으음… 보고하러 온 것은 공대원들뿐이었습니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급한 일이 생겨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모양인데…."

"후… 다행이구만. 그 아들내미도 미궁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그 딸까지 미궁에서 죽었으면 난리가 날 뻔했어."

비서의 설명에 노관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영 공격대의 공대장인 유화영이 전 총리인 유철영의 딸이란 것은 그들 역시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제 생각해보니 굉장히 섬뜩하군요. 만약 그 아가씨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 너구리가 과연 무엇을 뜯어내려 할지… 상상만 해도 무섭군. 게다가 이번 일은 협회에서 맡긴 임무였으니 더더욱 난리를 피웠겠지."

"…정말 다행입니다."

노관식을 따라 비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비서를 흘깃 바라보던 노관식이 재차 무언갈 떠올린 듯 '아'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펜릴을 쓰러트린 건 그 아가씨네 공격대인가?"

"…따로 그런 이야기를 보고 받은 적은 없습니다만, 일단 펜릴의 시체를 가지고 온 게 그들이니 그렇지 않을까요?"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서의 모습에 노관식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개운치 않아 보이는 표정에 비서가 의아하다는 듯 노관식을 바라보았다.

"뭔가 문제라도…?"

"…아니. 분명 화영 공격대 인원이 여섯 명인가 그랬지?"

"네. 공대장인 S랭크인 유화영 헌터와 A랭크의 헌터 다섯 명으로 구성된 소형 공격대입니다. 따로 길드에 소속되지는 않았고요."

"…함께 임무에 파견된 다른 헌터들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죽어 있었고?"

"…예, 그렇습니다만…."

슬쩍 말끝을 흐리며 의아하게 바라보는 비서의 시선에 노관식이 '으음….'하고 입을 열었다.

"겨우 여섯 명이서 펜릴을 잡을 수가 있나?"

"…이전 헌터들과 싸움에서 펜릴이 제법 피해를 입었다면…."

"펜릴은 상당히 많은 숫자의 늑대들을 부하로 두고 있었지. 산림 구역의 늑대들이야 기본 E랭크지만 이번에는 D나 C랭크 이상의 상위 개체도 상당수 있었어. 게다가 보고로는 B나 A랭크의 고랭크도 여럿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겨우 여섯이서 그 부하들을 뚫고 펜릴을 죽일 수 있었다고?"

-그게 지금 말이 된다 생각하나?

조용히 물어오는 노관식의 물음에 비서의 말문이 막혔다.

잠시 당황한 비서가 금방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협회장님의 말씀은 혹시 화영 공격대가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단지 조금 의아했을 뿐이지."

"…혹시 화영 공격대의 공대원들이 랭크를 속이고 있다고?"

"…전원이 S랭크가 아닌 이상 그만한 숫자와 펜릴이 상대라면 못해도 SA랭크는 있어야겠지… 아니, 단순 SA랭크의 헌터로도 좀 힘들 거 같은데…."

홀로 중얼거리는 듯한 노관식의 목소리에 비서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협회장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혹시… 그… SS랭크가…?"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정도쯤은 돼야 여섯 명 전원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겠지. 아마 화영 공격대 중에는 없을 거다."

"…제삼자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아마도."

"…바로 조사해 보겠습니다."

괜스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비서가 급히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그런 비서의 행동을 노관식이 조용히 막았다.

"너무 깊숙이 파고들지는 마.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SA랭크라는 가능성도 있어. 뭣보다 만약 정말 SS랭크라도 그 정도 되는 이가 아직까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야."

"…뒷세계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안 그래도 요즘 뒤쪽이 꽤나 소란스러운 모양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여차하면 외국계 헌터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적당히 뒤져봐."

노관식의 이야기에 비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후 급히 협회장실을 빠져나가는 비서의 뒷모습을 노관식이 잠시간 바라보았다.

"…SS랭크 헌터라… 정말일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면 좋겠구만."

그렇다면 최근 들어 조금씩 압박이 심해지는 중국이나 일본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홀로 협회장실에 남겨진 노관식이 의자의 등받이에 조용히 몸을 기대었다.

협회장의 하루는 너무나 바쁘다.

* * *

"컁컁!"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설이가 신이 나 울었다.

'반짝여! 예뻐!' 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린다.

그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한쪽에서 이쪽을 노려보던 동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오빠도 몬스터고… 그… 새언니…도 몬스터라 이거지?"

"…몇 번을 말해야 알겠냐? 그렇다니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동생의 물음에 조금 짜증을 담아 답했다.

슬쩍 저를 노려보는 시선에도 동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3년 만에 돌아온 오라비가 갑자기 자기를 몬스터라 말해도 전혀 믿을 수 없거든…? 그것도 무려 SS랭크의 몬스터 새언니를 데리고 말이야."

흘깃 동생의 시선이 움직였다.

녀석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그곳에는 소파 한쪽에 앉아, 여유롭게 바깥의 음식들을 맛보는 스노우가 있었다.

그 곁에는 토순이와 루엘이 찰싹 붙어 있었다.

[맛있어욧! 최고에욧! 이게 바로 인간의 맛! 저 빠져버릴 거 같아욧!]

[호오… 이 치킨이란 것은 참으로 훌륭하구나. 먹어도 먹어도 질릴 것 같지가 않은 맛이야.]

"쉬──."

스노우와 아이들은 이미 동생이 주문한 치킨의 맛에 잔뜩 매료되어 있었다.

과연 몬스터에게도 치느님은 통하는 모양이다.

"…저거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 아냐?"

"아까 보고도 못 믿는 거냐? 저렇게 아름다운 외모라도 알맹이는 분명 몬스터다."

"...."

동생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결국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아빳! 반짝이는 게 잔뜩!]

어느새 창밖 구경을 끝낸 설이가 우다다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컁컁!"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그래. 반짝이는 게 잔뜩 있구나.]

[예뻐! 밤하늘 같아!]

신이 난 듯 조잘거리는 설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인간 모습일 때의 가장 큰 장점을 뽑으라면 역시 손이 있다는 것이다.

꼬리로 쓰다듬는 것 역시 나쁘지는 않지만 확실히 손으로 쓰다듬는 게 좀 더 안정감이 있었다.

"…완전 아빠네."

"틀림없는 아빠니까."

조용히 중얼거리는 동생의 목소리에 태평히 답했다.

나와 설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생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몬스터 새언니에다가 몬스터 조카까지 생기다니… 믿을 수 없어."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해라."

"...."

녀석이 재차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결국 어렵사리 현실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진작에 그랬으면 편했을 것을.

이후 설이와 함께 치킨을 먹으러 스노우 쪽에 합류했다.

꽤 많이 시킨 것 같은데 벌써 남은 게 몇 없었다.

아무래도 추가 주문이 필요한 모양이다.

동생에게 부탁했다.

오른쪽이가 상당히 입맛이 동한 것 같으니 못해도 스무 마리… 아니, 넉넉잡아 삼십은….

그렇게 괴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지 마라, 동생아.

오빠가 분명 몬스터는 맞지만 그래도 그 시선은 조금 상처받는구나.

이건 내가 많이 먹는다기보다는 내 안에 식충이가 하나 살고 있어서….

언제 한번 내 본체를 동생한테 꼭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고 놀라지나 마라.

이후 가족들과 치킨 파티를 벌였다.

중간에 조금 부족한 거 같아서 이것저것 배달 음식들을 잔뜩 시켰는데 스노우와 아이들에게 모두 평이 좋았다.

스노우와 설이는 모녀답게 둘 다 치킨을 가장 좋아했으며 토순이는 의외로 족발을 좋아했다.

만약 또 먹고 싶으면 자기 앞발을….

참고로 루엘은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었다.

아무래도 미각이 없던 까닭에 따로 호불호를 가릴 수는 없었다.

그나마 한 번에 삼켜도 좋을 만한 음식을 가장 선호하는 것 같았다.

빨리 루엘이 진화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

덧붙여 나는 역시 소고기가 가장 취향이다.

언제 한번 모두를 데리고 이전에 리사와 함께 갔던 고깃집에 찾아가야겠다.

이번에는 인원이 인원이니 못해도 열 마리는 잡는 게 좋겠지?

뭐? 부족하다고?

아니, 오른쪽이 너는 항상 부족하잖아.

어쨌든 우리는 이런 느낌으로 바깥에서의 첫날 밤을 보냈다.

모두 기뻐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것보다 오빠."

"왜?"

"오빠는 뱀이라고 하지 않았어?"

"분명 그렇지."

"근데 부인이랑 딸은 여우네? 거기다 토끼도 있지 않았나? 뱀은 일단 그렇다 치더라도…."

"마음으로 낳았다."

"...."

동생은 이번에도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이는 게 편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아니, 받아들였다기보다는 포기한 게 맞으려나?

제120화

이튿날, 할 일 없이 동생의 집에서 한가하게 앉아 있을 때였다.

어제 그렇게 집안을 돌아다녔음에도 아직 구경하지 못한 게 가득한지 설이가 토순이와 함께 열심히 집안을 뛰어다녔다.

참고로 루엘은 어제 먹은 음식물을 소화한다고 얌전히 스노우의 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스노우가 그런 루엘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법 그림이 된다.

그렇게 거실에 앉아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 오늘은 오프라며 늘어져 있던 동생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정수기에서 찬물을 한잔 따라 마신 녀석이 흘깃 거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너무 편안하지 않아?"

"불편해할 건 또 없으니까."

덤덤히 답하니 동생은 '그렇긴 하지.'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녀석이 슬쩍 스노우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알게 모르게 스노우를 어려워했던 동생은 밤새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어느샌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밤사이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언니'하고 달라붙는 모습이 굉장히 묘하다.

아니. 태어난 나이를 따지면 스노우 쪽이 분명 훨씬 어리니까.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야, 오빠?"

잠시 스노우에게 예쁨(?)받던 동생이 돌연 이쪽을 향해 물었다.

"…글쎄. 딱히 예정은 없다. 이번에는 그저 스노우와 아이들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던 거뿐이니까."

"…그래?"

동생이 느릿하게 내뱉으며 흘깃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누가 보아도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잠시 우물쭈물거리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동생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할 말 있으면 해."

"…부모님은 어쩔 거야?"

조용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어온 질문은 무척 갑작스러웠다.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은연중에 동생이 혹시 묻지 않을까 계속 상상하던 물음이었으니까.

다만 머릿속으로 예상하였다고는 해도 실제 이렇게 직접 듣게 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따로 만날 생각은 없어."

내심 당황한 마음을 숨긴 채 덤덤히 답했다.

잠시간 이쪽을 바라보던 동생이 재차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부모님을 만날 생각은 없어. 이쪽은 더 이상 인간 유준영이 아니니까. 난 '닉스'다."

다소 냉정하게 내뱉은 말에 동생이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 사이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진 동생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이 떨렸다.

3년간 열심히 오빠를 찾아 헤맸던 아이에게 조금 심한 말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말한 것처럼 나는 더 이상 인간 유준영이 아니니까.

조금 냉정히 말해서 여동생… 유화영하고는 별 관계없는 몬스터 닉스에 불과했다.

대번에 의기소침해진 동생의 모습에 옆에서 조용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노우가 흘깃 이쪽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바라보는 눈동자에 왜 우리 애 기를 죽이느냐는 듯한 채근이 담겨 있었다.

스노우가 가볍게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비록 이야기를 알아듣지는 못할 테지만 느껴지는 분위기로 대충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스노우의 위로에 동생이 조용히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생긴 게 많이 다르긴 했지만 정말 친자매 같아 보이는 둘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밤사이에 정말 많이 친해지기는 한 모양이었다.

결국 계속되는 스노우의 채근 담긴 눈빛에 먼저 항복한 것은 이쪽이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너는 언제까지나 내 '동생'이다.]

조용히 전한 사념에 흠칫 몸을 떤 동생이 느릿하게 스노우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흘깃 이쪽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괜스레 미안해졌다.

"…정말?"

[…그 두 인간이라면 몰라도 넌 틀림없는 내 가족이야.]

재차 담담히 전하는 진심에 동생이 표정이 그제야 환해졌다.

곧장 스노우의 품에서 빠져나와 내 품에 안겨드는 동생을 마지못해 마주 안아주었다.

정말 못 보던 사이 어리광이 늘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스노우가 잠시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헌터라는 걸 부모님… 특히 아버지가 알고 있어?]

내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동생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안겨 있던 동생의 몸이 흠칫 떨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확실히 아버지가 알고 있으면 절대 헌터 같은 걸 하도록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알면서 방치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모르고 계셔."

[…그렇구나.]

조용히 답하는 동생의 목소리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말을 꾹 참아내 가만히 녀석의 머리를 토닥였다.

따지고 보면 이 녀석도 나도 참 힘들게 살았다.

과거에는 그것을 몰랐지만 인간 유준영과 몬스터인 나를 확실히 구분 짓게 된 지금에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족은 뒷전이고 항상 자신의 성공밖에 모르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만을 사랑하고 오로지 아버지만 바라보던 어머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참 지랄 맞은 집안이기는 했다.

그런 집안 환경에서도 엇나가지 않고 이렇게 잘 자라준 동생이 문득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이후 잠시 동생과 모처럼의 단란한 남매간의 우애를 다지고 있는 사이, 어느새 집안 구경이 끝난 설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한순간에 내 품으로 파고들어 이리저리 몸을 부비는 설이의 모습에 꽤 우울해 보이던 동생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활발한 조카네."

"컁컁─!"

쓱쓱- 머리를 쓰다듬는 동생의 손길에 설이가 기분 좋게 울었다.

그런 동생을 향해 설이를 안겨주고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샌가 냉장고에서 꺼내온 오렌지 주스를 홀짝이던 스노우가 흘깃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디 가느냐?]

[아아. 따로 볼일이 생각나서 말이지.]

스노우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혼자 갈 생각이냐?]

[굳이 혼자 갈 생각은 없었지만… 음….]

흘깃 시선을 돌렸다.

동생의 품에 안겨 이리저리 장난을 치는 설이의 모습을 보니 별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모처럼이니 함께 갈까?]

[호오….]

슬며시 내뱉은 말에 스노우가 짐짓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데이트 신청인가?]

[아아. 모처럼 단둘만의 시간이겠군.]

별 반박 없이 순순히 수긍하는 내 모습에 스노우는 '음'하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그닥 다름없는 포커페이스였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내가 보기에는 분명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정말 의외의 곳에서 부끄럼을 잘 탄다.

[그럼 동생아. 다녀올 테니 아이들을 부탁한다.]

"아? 아아, 응. 조심해서… 아니, 사고만 치지 말아줘."

시원스럽게 이쪽을 배웅하던 동생이 돌연 당부의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진짜 정체 때문일까? 꽤 걱정되는 모양이다.

우리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이.

[그래도 함부로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아.]

"…'함부로'가 아니라면 공격하겠다는 말이네?"

[먼저 걸어온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아니라.]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전화가 없어.]

"...."

동생은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한순간 이걸 따라가 말아 고민하는 기색이었다만, 제 발치에 매달려 "컁컁!" 우는 설이의 존재 때문에 결국 얌전히 남아 있는 것을 선택했다.

"제발 자중해 줘… 3년 만에 만난 오빠가 뉴스에 나오는 걸 원치 않아…."

[원래 인간인 만큼 나도 상식이란 게 있어.]

"…어제 들었던 이야기대로라면 그런 게 없는 거 같던데…."

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을 피해 급히 집을 나섰다.

스노우와 내가 둘 다 자리를 비우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별다른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루엘이나 토순이는 일단 그렇다 치더라도 설이는 조금 의외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스노우가 설명해 주었다.

[그 아이도 이제 언니라는 것이지.]

[언니라고?]

[그렇다. 루엘이 있지 않느냐? 동생 앞에서 의젓하게 행동하고 싶어 하는 게 모든 언니들의 마음 아니겠느냐?]

[과연… 그렇군.]

단번에 수긍했다.

이제 보니 설이도 열심히 언니가 될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묘하게 대견스럽다.

이후 동생의 집을 나선 우리는 조용히 번화한 거리를 걸었다.

한낮임에도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였다.

아무래도 스노우의 외관이 상당히 눈에 띄는 관계로 은신을 사용해 적당히 기척을 줄여서 행동했다.

가만히 걸음을 옮기던 스노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간들은 정말 많구나… 정말 끝도 없이 많아.]

나지막이 감탄하는 스노우의 모습에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헌터를 죽여도 죽여도 계속 나타날 만큼 바깥에는 많은 인간들이 있었다.

물론 바깥의 인간들 모두가 각성한 헌터는 아니었지만, 언제 누가 각성할지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깥의 인간들 모두가 잠재적 헌터나 다름없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역시 아무리 강한 힘을 갖고 있어도 자중할 필요가 있겠지.

'누가 얼마나 덤벼도 다 이겨낼 정도의 힘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몰라도 스노우 정도라면 당장 마음 내키는 대로 마음껏 행동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후 전국의 헌터들이 다 몰려든다면 과연 스노우라도 힘들겠지만.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디를 가는 것이냐?]

조용히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고 있으면 흘깃 스노우가 이쪽을 보며 물었다.

[아아. 과거 신세를 졌던 인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흐음? 그대가 인간일 때 신세를 졌던 이들인가?]

[아니. 몬스터가 된 이후에 만난 이들이지. 바깥에서 생활할 때 조금 신세를 졌었다.]

[…혹시 왼쪽이가 말했던 그 '리사'라는 불여우를 말하는 건가?]

[....]

물끄러미 바라보는 스노우의 시선이 몹시 차갑다.

[…일단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건에 대해서는 저번에 분명 오해라고 설명을….]

[호오… 꽤나 대담하지 않은가? 감히 본녀와 아이들을 두고….]

[오해다… 분명 오해니까 마력을 모으는 건 그만…! 여기는 멋대로 날뛰어도 좋을 미궁이 아니니까!]

다급하게 전달한 사념에 스노우가 그제야 슬그머니 모으기 시작한 마력을 도로 잠재웠다.

다행히 근처에 헌터가 없어서 망정이지 그녀의 행동을 눈치챈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다만 조금 예민한 사람들은 어느새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픽픽 그 자리에서 쓰러지기까지 했는데….

이거 아무래도 제대로 사고 친 모양이다.

동생에게 분명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어째 집을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고를 쳐버렸다.

그나마 내가 아니라 스노우가 친 사고라는 점이 위안일까?

사실 그리 큰 위안은 되지 못할 것 같지만.

쓰러진 사람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일단 재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이후 여전히 나를 묘하게 노려보는 스노우를 챙겨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이전부터 은신 상태로 있었기에 급히 자리를 벗어나는 우리를 신경 쓰는 이들은 없었다.

애초에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한 사람들을 챙기느라고 다들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것보다 스노우, 아까부터 내 옆구리를 꼬집는 건 그만둬 주지 않겠나?

아무리 내 내구가 능력치 중 가장 높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애초에 네 힘이 나보다 강하니까.

슬슬 옆구리가 뜯겨 나갈 것 같으니까 제발.

내가 제대로 설명할 테니까.

이후 어렵사리 스노우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왠지 모르게 지난번에 한 번 얘기했던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는 기분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은 스노우의 화를 달래는 것이 우선이니까.

아니, 애초에 내가 진짜 그럴 생각이었다면 혼자 왔겠지 아무렴 같이 가자고 권했겠는가?

다행히 스노우에게 내 진심이 통한 모양이다.

장장 30분 가까이 어느 빌딩 옥상에서 사정사정했다는 것은 비밀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노우의 오해가 다 풀리고 나서야 우리는 마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블랙 마켓이었다.

거진 반년만의 방문일까?

나연성이나 리사가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아니, 이건 그냥 지인으로서 안부를 걱정하는 것뿐이니까.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재차 스노우가 오해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한 번만 봐주겠다는 듯 이쪽을 보는 스노우의 시선이 무섭다.

어쨌든 그렇게 동생의 집을 나선 지 한참 후에야 겨우 도착한 블랙 마켓.

다시 들린 그곳은 어째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제121화

뒷골목에는 그 특유의 분위기란 것이 있다.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일반인들이 쉽사리 발을 들이기 힘든 분위기란 것이 있다.

그것은 블랙 마켓이 있는 이곳 뒷골목이 특히나 심했는데,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평소 소란스럽기보다는 조용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꽤나 시끌벅적한 느낌이다.

그건 아마 골목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낯선 기척들 탓이 아닐까 싶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어수선한 분위기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심해졌다.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한차례 싹 훑어보면 몇몇 패거리가 특히 드문 기세로 활개 치고 있었다.

슬쩍 살펴보면 한국인이 아니다.

일본인?

말하는 걸 들어보니 중국인도 몇 무리 있는 것 같다.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게 맞는 모양이다.

기감을 확 늘렸다.

뒷골목 근처 일대는 다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익숙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리사와 나연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조금 짜증이 차오른다.

"끄아아악!"

"무, 무슨…!?"

"습격인가!?"

마치 제집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어슬렁거리던 무리 중 하나를 붙잡았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었을 뿐이다.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내게 붙잡힌 네 명 중 제대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녀석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나라에 왔으면 그 나라 말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닐까?

정말 불성실한 녀석들이다.

이거 아무래도 다른 녀석들을 찾아봐야 할까?

짧게 혀를 차는 사이 한 녀석이 더듬더듬 한국어를 내뱉었다.

잘할 수 있으면서 왜 그랬던 걸까?

어쨌든 대화가 통하는 거 같으니 다른 녀석들을 찾을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조금 아쉽다.

"조, 좃또 맛떼 쿠다사이!"

조금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해볼까 하던 사이 내게 붙잡힌 녀석이 급히 소리쳤다.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던 말이었기에 잠자코 지켜보면 녀석은 허겁지겁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스마트폰…?

녀석이 침착하게 번역기를 돌렸다.

좀 똑똑한 녀석이다.

과연 현대인이라면 현대 문물을 사용할 줄 알아야지.

몬스터로 너무 오래 살았더니 그만 잊고 있었다.

어쨌든 번역기 덕분에 이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일본 헌터계에서 대한민국 헌터계를 장악하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에 앞서 우선 뒷세계부터 차근차근 점령해 나갈 생각이라고.

중국인들은 뭐냐고 물으니 그들과 비슷한 의도를 가지고 들어온 모양이란다.

현재 그들과 힘겨루기 중이라고.

참고로 원 블랙 마켓의 사장. 그러니까 리사는 완전히 몰아낸 상태라고 한다.

그녀의 부하 중 하나와 합심해 완전히 몰아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데….

"…그럼 전 블랙 마켓의 사장은 어찌 됐지?"

"아쉽게도 추격 도중에 놓쳐 버렸습니다. 최측근 몇몇만 대동한 채 잠적 상태인데… 저희랑 중국 쪽 추격계 헌터들이 쫓고 있으니 얼마 못 가 발견할 겁니다."

정신 지배를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술술 불어낸 녀석이 이내 바닥에 맥없이 쓰러진다.

강한 정신 지배의 반동으로 정신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죽은 건 아니다.

그냥 앞으로 일상생활이 조금 힘들 뿐.

이쪽도 양심이 있기에 죽이지는 않는다.

아, 뱀은 양심이 없던가?

모처럼 정보를 얻을 만한 녀석이 더 못쓰게 됐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흘깃 시선을 돌린 곳에 아직 정보를 말해줄 녀석들이 셋이나 남아 있었으니까.

번역기도 있으니 문제는 없다.

쓰러진 제 동료를 보고 어느새 오들오들 떨기 시작한 다른 녀석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미 대략적인 정보는 다 파악한 상태였기에 사실 더 물을 것도 더 없었지만 뭔가 이대로 끝내기가 아쉽다.

나는 아직 궁금한 게 참 많다.

[흠… 한 놈 정도는 살려두는 게 어떤가?]

막 세 명째에게 질문을 끝냈을 때였다.

한편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스노우가 입을 열었다.

스노우는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결계 비슷한 걸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의 노고에 감사한다.

[흠? 굳이?]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다만, 돌아가는 모습을 봐서는 이번뿐만 아니라 계속 사용하는 쪽이 더 이로운 거 아닌가?]

[…살려두고 스파이로 쓰자 이건가?]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고민했다.

흘깃 바라본 마지막 녀석은 아직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지만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알싸한 냄새가 아까부터 코끝을 타고 오는 걸 봐서는 바지에 지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과연… 정보원 하나쯤은 있는 게 좋겠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넋이 나간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녀석의 턱을 붙잡는다.

억지로 눈을 맞추고 곧장 정신 지배를 사용했다.

왼쪽이가 오늘 여러 번 수고해준다.

아, 이번엔 고장 낼 게 아니니까 적당히 강도를 조절하도록.

당분간 계속 써먹을 거 같으니까.

원래 인격은 남겨놓고 그저 말 잘 듣는 쪽으로, 이쪽을 배신하지 않게.

요구 사항이 많다며 왼쪽이가 캬악-거렸지만 언제나의 연례행사이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항상 다 해주는 츤데레 같은 녀석이니까.

아, 그것보다 이미 쓰러진 것들도 조금 손봐줄래?

이미 죽은 인격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말 잘 듣는 인형 같은 상태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다른 동료들 없이 저 녀석 혼자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겠냐?

저것들의 관리야 이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이번에도 왼쪽이가 조금 짜증을 냈지만 늘 그렇듯 묵묵히 할 건 다 해줬다.

정말 츤데레가 따로 없구나.

이후 정신 지배가 끝난 녀석과 말 잘 듣는 인형이 된 세 녀석을 돌려보냈다.

왼쪽이가 꼼꼼하게 신경 썼으니 별 이상은 없을 거다.

당분간 저쪽에서 정보를 모으다가 필요할 때마다 이쪽에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찾던 이는 못 찾는 건가?]

[아아… 조용히 잠적한 모양이다. 돌아가는 낌새가 묘하다.]

[흐음… 본녀도 빨리 이곳의 언어를 익혀야겠구나. 눈치만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군.]

불만스럽다는 듯 팔짱을 끼는 스노우의 모습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스노우에게 바깥의 언어를 알려줄 필요를 느꼈다.

거기다 단순히 언어뿐만 아니라 바깥의 상식도 이것저것 한꺼번에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조금 힘내볼까?

[…아까부터 조금 표정이 이상하다, 그대.]

[…으음. 오해다. 내 표정이 뭐가 어때서 그렇지?]

[…못된 장난을 생각했을 때의 설이의 표정과 닮았구나… 무슨 속셈인가?]

[…딱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앞으로 스노우, 너한테 어떻게 언어나 상식을 가르쳐줄지 조금 고민한 것뿐이다.]

[....]

이쪽을 바라보는 스노우의 시선이 꽤 날카로워졌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모처럼 스노우를 잔뜩 괴롭힐… 아니, 교육시킬 기회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대련 시간에 당한 것들을 갚아줄 기회다.

그래도 상대가 스노우이니만큼 너무 괴롭힐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조금. 아주 조금 심술을 담을 뿐이니까.

그러니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스노우.

네가 자꾸 그렇게 보니 더 괴롭히고 싶어지니까.

아쉽게도 스노우의 교육에 내가 나설 기회는 없었다.

무언가 이쪽의 낌새를 눈치챈 스노우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내 동생과 상의했기 때문이다.

동생이 냉큼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며 소리치는데….

내심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스노우를 위해 준비한 108가지 교육법이 다 쓸모가 없게 됐다.

너무 아쉽다.

밤사이 스노우가 동생에게 열심히 언어와 상식을 배울 때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낮에 있었던 일의 마무리를 위해서다.

사실 마무리라기보다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지만.

어쨌든 블랙 마켓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몸을 움직였다.

우선 잠적 중이라는 리사와 나연성을 찾을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서울이 아닌 지방이나 어쩌면 해외로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만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리사라면 아무리 급히 도망쳤어도 최소한의 준비는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잠적 중에도 최소한 바깥의 동태 정도는 살피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저쪽에서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고 먼저 접촉할 수 있도록 날뛰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뭐, 평소의 리사를 생각하면 너무 날뛰어도 오히려 너무 지나쳤다고 잔소리를 할 것 같았지만.

어쨌든 현재로서 그녀를 찾을 방법이 이것 말고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낮에는 일본 쪽을 만났으니 이번에는 중국 쪽을 만나볼까?

아니면 그냥 양쪽 다 만나는 건 어떨까?

잠시간 고민하던 나는 이윽고 몸을 날렸다.

목적지는 낮에 들렸던 뒷골목이다.

* * *

역시 한밤중부터가 제대로 된 영업시간이라는 것일까? 낮보다 배는 많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뒷골목 구석구석 기척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지하에는 못해도 수백이 넘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잠시간 주변을 살피다 슬며시 몸을 움직였다.

저 중 과반수 이상은 손님에 가까울 테지만 별 개의치는 않았다.

애초에 이곳 블랙 마켓을 이용한다는 것부터가 떳떳하지 못할 이들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니 조금 피해를 입는다고 해서 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내가 언제 상대를 봐가면서 덤볐다고.

"잠깐. 손님이십니까? 잠시 멈춰 주십시오. 입장하시려면… 끄어억─!"

"무, 무슨…!? 스, 습격…! 끄아악─!"

"꺄아악!"

"제, 젠장 당장 대피 방송을…!"

일전에 들렸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손님들이 입장하는 통로를 통해 출입했다.

그럼에도 저번처럼 앞을 막아서는 이들은 모두 해치웠다.

이쪽은 분명 정당하게 손님 전용 출입구로 들어왔는데 말이지.

저번에도 느꼈지만 손님에 대한 배려가 조금 부족하다 싶다.

이쪽을 막기 위해 덤벼드는 이들부터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이들, 직원, 손님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들을 모두 쓰러트렸다.

어찌 보면 무차별 학살이라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이쪽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것은 아니다.

이건 다 훗날 리사를 위한 행동이었다.

현재 이곳의 관리인은 리사가 아닌 그녀를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한 제3의 인물.

이야기를 듣기로 처음에는 일본 쪽과 손을 잡았지만, 최근에는 중국 쪽과도 접촉하며 이리저리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태라고.

그러니만큼 한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 난리라면 직간접적으로 이곳과 얽혀 있는 이들도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주인이 바뀌자마자 어떤 상황이 일어나는지.

그동안 리사가 이곳을 얼마나 잘 관리해 왔는지.

몸소 체감시켜 줄 생각이다.

그렇게 일단 눈앞에 보이는 이들은 모조리 해치우며 막힘없이 전진했다.

간간이 A랭크 헌터쯤 되는 이들이 나타났지만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전해 듣기로는 중국과 일본에서 각각 SA랭크의 헌터들과 S랭크 헌터들이 여럿 건너온 모양이다만, 현재 이곳에 그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가 SA랭크라면 몰라도 S도 아닌 A 정도여서야 잠깐의 방해도 되지 못한다.

<약자멸시>와 <마안>을 사용한 내 공격에 여지없이 쓰러져 내린다.

짧은 시간, 못해도 100여 명이 넘는 이들을 해치우고 마침내 블랙 마켓 지하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손님들은 다른 통로로 이미 다 도망친 이후인지 내부는 몹시 썰렁했다.

지하에서는 무슨 경매라도 진행되고 있었는지 좌석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고, 무대 한쪽 위에는 커다란 전시장 같은 것이 있었다.

전시장 쪽에서 느껴지는 기색에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철창 안에 갇힌 몬스터가 있었다.

무슨 조치라도 한 모양인지 현재는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당장 느껴지는 기색으로는 무려 A랭크에 상응하는 몬스터였다.

이마 한가운데 길쭉한 뿔을 가진 말.

흔히 [유니콘]이라 부르는 몬스터다.

다만 '유니콘'이란 친숙한 이름과 달리 한 성격하는 녀석으로, 엄연히 몬스터로 분류되는 고랭크 몬스터다.

제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에 유니콘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한차례 녀석과 시선을 마주하다 슬쩍 그 시선을 내렸다.

목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사슬이 보인다.

아무래도 저것 때문에 힘이 없는 모양이다.

잠시 유니콘과 시선을 교환하다 재차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는 녀석 말고 다른 몬스터들도 있었다.

랭크는 모두 제각각.

G랭크의 최하위부터 유니콘과 같은 A랭크의 고랭크 몬스터도 여럿 있다.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좋은 생각이 났다.

모든 철창을 깨부수고 몬스터들의 목에 걸린 쇠사슬도 모두 부수었다.

꽉 막힌 듯 억제되어 있던 몬스터들의 기세가 흉흉하게 폭발한다.

곧 풀려난 녀석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사전에 한번 기세를 한번 드러냈던 까닭에 멍청하게 이쪽을 향해 덤벼오는 녀석들은 없었다.

이쪽을 처리하기 위해서일까?

얼마 안 가 수십 명 정도의 무리가 빠르게 접근해왔다.

개중에는 S랭크도 둘 정도 끼어 있었는데, 따로 오는 것을 봐서는 각각 다른 소속인 모양이다.

중국과 일본일까?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만.

그래, 너희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겠지.

좋아, 마음껏 날뛰어라.

곧 도착한 헌터들과 몬스터 무리가 뒤섞였다.

랭크 자체는 헌터들 쪽이 더 높았지만 몬스터들의 숫자가 상당하다.

결국 랭크의 차이로 승리하는 것은 헌터들이 되겠다만, 당장 그들의 피해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일 것이다.

잠시간 헌터들과 몬스터들의 싸움을 바라보다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으니 돌아가자.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다.

제122화

잠깐의 산책을 끝내고서 집으로 돌아오니 동생과 스노우는 여전히 공부 삼매경이었다.

어느새 둘 곁에 모여들어 함께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굉장히 흐뭇하다.

그래, 설이도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런데 몬스터 상태로는 역시 발음이 어렵지 않을까?

일단 알아듣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그건 그렇지만….

문득 인화의 술을 사용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설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스노우를 닮은 새하얀 백발과 맑은 푸른 눈.

응, 분명 귀여울 것이 틀림없다.

인간으로 변한 설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설이를 부둥부둥하고 있는 사이 문득 스노우가 입을 열었다.

스노우 왈, 설이가 인화의 술을 사용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나야 원래 고랭크의 몬스터였으니 쉽게 배운 편이지만, 보통은 그렇게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예로 토순이나 루엘이 인화의 술을 사용하려면 못해도 B. 최소한 A 이상은 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것도 인간 상태로 오래 있기에는 마력이 부족하기에 잠깐 정도밖에 변신하지 못한다고.

과연 그것은 조금 아쉽다.

그래도 스노우의 일족은 태생적으로 마력 컨트롤이 뛰어나니 설이라면 지금부터 열심히 훈련하면 곧 변신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다만 나나 스노우처럼 능숙한 변신이 아니라, 몬스터일 때의 흔적이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그렇다는 것은 즉, 여우 귀나 꼬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일까?

그건 오히려 좋구나.

나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생도 상당히 기대되는 모양이다.

그야 설이는 귀여우니까.

그래, 그래. 루엘 너도 충분히 귀엽다.

설이랑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

알고 있다.

응? 토순이 너는… 음….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내 모습에 토순이가 오랜만에 통곡했다.

'흐헝헝─' 이제는 익숙한 통곡 소리에 가만히 녀석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농담이니까.

통통한 것도 하나의 매력이다.

매번 바닥을 뒹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데.

그래, 그래. 우리 토순이 귀엽다.

"그래서 오빠.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렇게 잠시 아이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잠시 휴식 시간인지 부엌에서 마실 것들을 챙겨온 동생이 문득 물었다.

갔다 온 지가 언젠데 이제야 묻는 것일까?

[조금 산책을 다녀 왔다.]

잠깐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도 했지만 결국 적당히 둘러댔다.

동생 역시 S랭크 헌터로서 뒷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오빠가 잠깐 사이 인간 수백 명을 죽였다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몬스터인 나와는 달리 내 여동생은 분명한 인간이었다.

다행히 동생은 적당히 둘러댄 이야기에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고개를 주억이며 어느새 품에 안긴 설이를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습관이 된 것처럼 설이를 쓰다듬고 있다.

너도 설이의 복실복실함을 깨달은 모양이구나.

역시 굉장하지?

슬며시 마주친 시선에 동생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에 나 역시 마주 고개를 주억이니 옆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스노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흘깃 나와 동생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아아. 미안하군. 악의는 없었다. 단지 남매끼리 참 닮았다고 생각해서 말이다.]

담담히 들려온 스노우의 목소리에 가만히 동생의 얼굴을 살폈다.

동생 역시 마찬가지로 이쪽의 얼굴을 살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묘하게 기분 나쁘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 시간 끝에 동생과 스노우는 다시 한번 공부를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동생이 스노우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 역시 동생 나름대로 스노우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주로 미궁에 관한 정보라든지 하층에 무엇이 있냐라든지.

과연 계층주이기도 한 스노우니까 미궁에 관해 그녀만큼 잘 알고 있는 선생님도 드물 것이다.

그렇게 둘이 열심히 공부 삼매경에 빠져 있는 동안 나는 아이들과 느긋하게 있었다.

머리 위에 가만히 똬리를 틀고 앉은 루엘.

내 오른편에 자리를 깔고 앉은 토순이.

그리고 내 무릎 위에 둥글게 몸을 말은 설이까지.

모두 낮 동안 열심히 놀았던 모양인지 금세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흘깃 TV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은 나름 난리를 쳤다고 생각했지만 뉴스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저쪽에서 따로 입막음이라도 한 것일까?

못해도 수백 명이나 죽어 나갔는데, 그 이야기가 하나도 없을 수 있다니.

내 생각보다 뒤쪽의 힘이 강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중국과 일본 쪽의 힘이 강하다고 봐야 좋을까?

어찌 되었든 나름 열심히 했음에도 뉴스에서 짤막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으니, 난리를 피운 당사자로서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물론 뉴스나 각종 언론 매체에서 대대적으로 알려지는 것보다야 이렇게 조용한 쪽이 낫기는 하다만….

그럼에도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달까? 자존심에 조금 상처를 입은 느낌이다.

진짜 한번 제대로 뒤엎어줘…?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나 내 목적은 난리를 쳐서 유명인이 되는 게 아니라 리사와 연락이 닿는 것뿐이다.

괜한 난리를 피워서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 따위는 없었다.

그래. 분명 그건 알고 있는데….

[다 뒤엎어 버리자─! 나 잘할 수 있어!]

[먹을 거 잔뜩 있었는데… 하나도 못 챙겼어… 배─고─파….]

심상 속에서 조용히 이쪽을 부추기는 목소리들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 녀석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제멋대로 하려는 거 아닐까?

어느샌가 과정이 목적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든 아이들을 토닥이며 한쪽에서 공부하고 있는 스노우와 동생의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돌연 긴급 속보라며 뉴스가 떴다.

용암 구역을 원정 중이던 대규모 원정대의 소식이 돌연 끊겼다는 것이다.

아르데가 제대로 움직인 모양이구나.

그 실상을 다 아는지라 그저 그렇구나 하고 있던 이쪽과 달리 동생 쪽은 이 갑작스런 뉴스 속보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경악한 표정으로 멍하니 뉴스를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을 흘깃 살폈다.

[…원정대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조금 놀라서…."

혹시나 싶어 물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괜스레 안심됐다.

"…오빠.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뭐? 원정대 이야기?]

"음… 그것도 있고. 요즘 미궁이 좀 이상하잖아? 그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나 해서."

호기심 가득한 동생의 시선에 잠시 턱을 매만졌다.

[딱히 아는 건 없네. 인간들 입장에서야 이상 사태라지만 몬스터 입장에서는 평범하니까.]

"…그렇네. '몬스터 입장'에서는 평범한 거구나."

동생의 시선이 잠시 묘해졌다.

뭔가 굉장히 먼 것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보길래 금세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원정대에 관한 소식이라면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어떻게? 혹시 오빠가…?"

[…내가 딱히 뭘 하지는 않았어. 그저 평소 잘 알고 있던 이들이 관련된 것뿐이니까.]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는 동생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말을 이었다.

간략하게 이번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자, 동생이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는다.

"그런 일도 있구나… 확실히 몬스터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나쁜 거겠네. 자기 가족을 죽인 거니까."

[객관적으로 봐도 나쁜 건 인간들이지. 먼저 잘살고 있는 몬스터들을 건드린 셈이니까.]

"...."

동생이 잠시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르데와 레드 와이번에 관한 이야기에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어찌 보면 당장에 녀석 역시도 몬스터를 가족으로 둔 입장이니까.

그런 녀석을 향해 조용히 덧붙였다.

[뭐, 그렇다고 딱히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어. 몬스터들한테 있어서 투쟁은 당연한 거니까. 당장 헌터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몬스터들은 원래 서로 다투는 습성이 있으니. 아르데가 특이한 것뿐이지 보통 그렇게 나서서 보복하는 일은 잘 없다.]

"…그렇구나. 덕분에 여러 가지 알게 됐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동생이 고개를 주억였다.

당장에 내 말 몇 마디에 모든 고민이 해결 된 것은 아닐 테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괜찮을 것이다.

"그것보다 SS랭크라니… 그런 몬스터가 정말 실존했구나… 가장 최근에 발견된 것도 전부 다 해외였으니까… 그 아르데라는 와이번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려나?"

[흠… 당장 네 옆에 있는 스노우도 SS랭크 몬스터다만?]

"…스노우 언니는 나한테 몬스터라기보다는 그냥 새언니니까."

동생이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스노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공책에 적힌 '가나다라'를 보며 홀로 공부하던 스노우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시선에 동생이 어색하게 웃었다.

[흠. 본녀의 강함이 궁금한가?]

"에… 음… 아무래도 조금이요? 언니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예요?"

[으음… 어렵구나. 일단 그 근처의 잡것들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다만… 그렇지. 적어도 저기 있는 서방님보다는 강하다.]

흘깃 스노우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이쪽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에 슬쩍 미간이 찌푸려진다.

스노우로서는 별다른 악의 없이 순전히 사실만을 이야기한 것이겠지만 듣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어쩔까 싶다.

"헤에… 오빠보다 강하구나?"

[…미리 말하지만 스노우는 18년 이상 몬스터로서 존재했어. 그에 비해 나는 이제 겨우 3년 차일 뿐이라고.]

"그치만 인간일 적까지 치면 오빠가 분명 연상이잖아?"

[…인간일 적은 크게 상관이 없을 텐데?]

"응. 그렇겠지. 나도 딱히 별 의도는 없었어."

그리 말하며 히죽 웃어 보이는 동생의 모습이 조금 얄미웠다.

아니, 굉장히 얄밉다.

진짜 언제 한번 이쪽의 본모습을 보여줘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때 가서 오줌이나 지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 * *

그리고 다음날, 여전히 바깥 공부에 여념이 없는 스노우와 그런 스노우에게 이런저런 미궁의 지식들을 배우는 동생을 내버려 둔 채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도 혼자 갈까 싶었다만 설이가 조용히 달라붙어 왔기에 오늘은 모처럼 설이와의 데이트다.

뭐, 자연스레 토순이나 루엘도 함께해 왔기에 정확히는 아이들과의 나들이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딱히 불만은 없다.

루엘은 머리 위. 설이와 토순이는 양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을 거닐었다.

평범한 동물도 아닌 엄연한 몬스터를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아무렇게나 데리고 다녔지만 딱히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은신 상태로 움직였으니까.

번화한 거리의 모습에 설이가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토순이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숫자에 조금 겁에 질린 기색이 루엘은 딱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니, 꼬리 끝이 조용히 흔들리는 걸 보면 조금 놀라고 있는 거려나?

함께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차츰 루엘의 기분이 어떤지에 대해서 착실히 알아가고 있었다.

아, 지금은 조금 비늘이 쭈뼛한 느낌인데, 뭔가에 놀란 모양이다.

슬며시 내뱉는 "쉬──" 울음소리가 상당히 귀엽다.

괜찮아, 그리 놀랄 필요 없으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반드시 지켜주마.

옳지, 옳지. 착하다.

덩달아 수많은 인파에 겁에 질린 토순이도 착실히 달래주었다.

아니, G랭크인 루엘이라면 몰라도 토순이 너는 명색의 D랭크 아닌가?

이곳 대부분의 사람들이 싸움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니 그리 겁먹을 것 없다.

당장 토순이 네가 날뛰면 막을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 자신감을 위해서 한번 날뛰어 보는 건 어떻니?

분명 신날 테니까.

토순이가 전력으로 거부했다.

아무래도 며칠 사이 바깥의 상식을 배웠던 모양인지, 바깥에서 함부로 인간을 습격하면 금세 헌터들이 몰려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조금 아쉽다.

이후 아이들을 데리고 적당한 고깃집에 들어갔다.

아이들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룸으로 자리를 잡는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신을 해제했기에 서빙을 하러 들어온 종업원이 깜짝 놀라는 일이 생기기는 했지만, 정신 지배를 통해 간단히 해결했다.

자, 얘들아. 맛있는 소고기다. 얼른 먹자꾸나.

응? 동생과 스노우는 어쩌냐고?

루엘은 마음씨가 참 곱구나.

엄마나 고모도 챙길 줄 알고.

걱정하지 마라. 집에 들어갈 때 따로 사 들고 갈 테니까.

스노우가 치킨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몇 마리 사서 가자.

그래, 설이나 토순이 몫도 분명히 사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그렇다고 여기서 너무 많이 먹으면 집에 가서 치킨을 못 먹을 테니 적당히 조절해라.

뭐? 소고기 들어가는 배랑 치킨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다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니,설아?

고모한테 배웠다고? 고작 그 며칠 사이에?

그래… 나는 경고했으니 원한다면 마음껏 먹어라.

대신 나중에 이쪽을 원망하기 없기다?

그렇게 아이들과 한가롭게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을 무렵 누군가 조용히 우리가 있는 룸으로 찾아왔다.

제123화

똑똑-

조용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흘깃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은 고기를 먹는다고 여념이 없었고 나 혼자 조용히 문 쪽을 주시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종업원인 줄 알았으나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각성한 헌터 특유의 그것이었다.

못해도 A랭크.

그것도 S랭크에 가까운 A랭크다.

조금의 기회만 있으면 별 어려움 없이 S랭크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대가 여기는 뭐 하러 찾아온 것일까?

잠시 고민하고 있자 바깥의 기척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들어와라."

담담히 내뱉은 말에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오랜만입니다, 닉스 님.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꾸벅-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사내는 틀림없는 나연성이다.

리사와 함께 내가 찾던 인물.

저쪽에서 먼저 찾아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것도 몇 번 더 난리를 치고 난 이후일 거라 여겼는데 솔직히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역시 아무리 잠적하긴 했어도 바깥 상황은 확실히 주시하고 있던 것일까?

슬며시 차오른 반가운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자리를 권했다.

내 품에 안겨 고기를 받아먹는 아이들을 흘깃 살피던 나연성이 조심스럽게 내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저번까지만 해도 없었던 뺨 위의 흉터 자국이 유독 눈에 띈다.

"그 상처는?"

"…도망치던 중에 그만 당했습니다. 상대가 워낙 강했던 탓에…."

슬며시 말끝을 흐리는 나연성의 모습에 잠자코 고개를 주억였다.

얼굴 위의 상처 말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래서 이쪽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지? 일부러 찾아오라 난리를 치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사장님의 당부로 바깥 상황은 계속 주시 중이었습니다. 특히 닉스 님에 관한 것은 최우선이었기에. 어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근처 고깃집에 애들을 싹 풀어놓았습니다."

"…하필 고깃집?"

"사장님이 닉스 님이라면 분명 고깃집으로 갈 게 뻔하다고 하시기에…."

조용히 덧붙이는 나연성의 이야기에 딱히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리사는 어찌 됐지?"

"닉스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만나 보시겠습니까?"

나연성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흘깃 시선을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니 이미 충분히 많이 먹은 모양이다.

설이는 특유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연성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고.

토순이는 아무래도 나연성이 자신보다 강한 걸 느껴서인지 부들부들 몸을 떨고 있었으며.

루엘은 조용히 혀를 날름거리며 나연성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느새 고기 대신 나연성에게 완전히 관심을 돌린 아이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다. 애초에 리사와 만나볼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먼저 들릴 곳이 있다."

"예. 함께 따라가도 괜찮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나연성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주억였다.

딱히 숨길 것도 없다.

이후 고깃집을 나선 다음 미리 예정했던 대로 치킨을 샀다.

한 손에는 아이들을, 또 한 손에는 치킨을 한가득 들고 가는 내 모습에 나연성이 조금 당황한 것 같았으나 그리 내색은 하지 않더라.

저번부터 느꼈는데 참 눈치가 좋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이것만 전해주고 오도록 하지."

동생의 집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나연성을 대기시켰다.

별다른 불만 없이 수긍한 나연성을 뒤로한 채 동생의 집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공부 삼매경 중인 동생과 스노우에게 치킨과 아이들을 맡겼다.

아이들을 부탁한다.

이쪽은 둘이 먹을 간식.

나는 또 볼일이 있으니 이만….

곧장 등을 돌리려는 나를 스노우가 붙잡았다.

뭔가 느끼기라도 한 것인가?

조용히 따라붙는 스노우의 모습에 별다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부터 만나러 갈 상대가 리사인 만큼 나 역시 스노우가 있는 쪽이 좀 더 안정적이었다.

괜히 아무 말 없이 혼자 다녀왔다가 이후에 일어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렇게 스노우와 함께 다시 나연성에게로 이동했다.

그사이 다른 부하에게라도 시킨 것인지 나연성은 차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스노우의 모습에 나연성이 무심코 탄성을 내뱉었다.

"…이, 이분은…?"

"내 부인이다."

"…과연 사장님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오지 않을 만하군요… 솔직히 사장님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슬며시 이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이는 나연성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확실히 충실한 부하라도 그 차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스노우의 미모가 압도적이기는 하다.

원본이 구미호니까 아무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후 스노우의 미모에 깜짝 놀란 나연성과 함께 리사가 잠적하고 있을 은신처로 향했다.

처음에는 어딘가 깊숙한 산속 같은 곳에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차가 향한 곳은 번화한 시내 한가운데였다.

굉장히 유명한 고급 호텔. 그것도 스위트룸.

…아무리 봐도 추적을 피해 잠적한 사람이 머물 만한 곳은 아니지 않나?

조금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나연성이 옆에서 조용히 설명한다.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편이라고.

이렇게 대놓고 숨어 있는 편이 더 안전하단다.

혹여 위치가 발각되더라도 유명한 고급 호텔인 만큼 저쪽에서도 함부로 나설 수 없다고.

오히려 상대가 머뭇거리는 사이 도망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다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데 중간부터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저쪽이 맞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그리고 마침내 대면하게 된 리사.

나연성은 문밖에 대기한 채 나와 스노우만 안으로 들어섰다.

미리 보고를 받고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리사는 소파 위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슬쩍 인기척을 내고 들어서니 이쪽을 발견한 리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보게 된 그녀의 얼굴은 이전에 만났을 때와 비교해 제법 수척해져 있었다.

과연 이런 곳에 머물고는 있어도 나름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일까?

그렇게 잠시 리사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급히 이쪽을 향해 다가온다.

두 팔을 활짝 벌린 것이 당장에라도 이쪽에 안겨들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모른 척 피했겠지만 수척해진 얼굴을 보니 마냥 매정하게 피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여기서는 위로를 겸해서 한 번쯤 모른 척 당해주는 것도….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고민하고 있는 사이 문득 스노우가 몸을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 저와 나 사이에 자리 잡은 스노우의 모습에 달려오던 리사가 멈칫 몸을 멈추었다.

두 여인이 잠시간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모처럼의 감동적인 재회를 방해하는 당신은 누구죠?"

"그건 오히려 본녀가 할 말이로구나. 감히 남의 서방님에게 함부로 안기려는 파렴치한 불여우 그대는 누구인가?"

"...."

"...."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차가운 두 눈빛에 나는 말없이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스노우의 눈빛이 너무 매섭다.

딱히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것보다 스노우. 고작 요 며칠 사이에 한국말이 능숙하게 되었구나.

누가 봐도 뭐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발음이다.

"…그래서 당신 진짜 뭐죠?"

"흥. 굳이 설명해야 알겠느냐? 딱 보아도 서방님의 부인이지 않으냐?"

그리 말하며 슬쩍 이쪽의 팔짱을 끼는 스노우의 모습에 리사의 눈매가 가볍게 꿈틀거렸다.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일전에 말했었지. 부인과 딸이 있다고."

"…난 또 그런 컨셉 플레이를 좋아하는 건 줄만 알았는데… 진짜였어요?"

"…컨셉이 아니다."

단호하게 내뱉은 말에 리사가 잠시 입맛을 다셨다.

잠시 묘한 시선으로 나와 스노우를 바라보던 그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모처럼 마음에 든 남자였는데…."

"…미안하군."

"…그쪽이 사과할 필요 없어요. 이쪽만 더 비참해지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리사가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묘한 미소와 함께 여유롭게 저를 바라보는 스노우의 시선에 리사가 잠시 침묵하다 곧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언니로 모셔도 될까요?"

"…뭣?"

"저는 세컨드라도 상관없으니까요. 앞으로 언니로 모실게요. 뭣하면 왕언니로?"

담담히 내뱉는 리사의 모습에 아무리 스노우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여유롭던 스노우의 얼굴에 쩍- 금이 갔다.

가만히 두면 스노우가 당장 달려들 것 같았기에 급히 입을 열었다.

"장난은 이쯤 하지."

"딱히 장난은 아니었는데요?"

"...."

리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척해지기는 했지만 리사는 틀림없는 언제나 처럼의 리사였다.

조금 걱정한 것이 괜한 짓인 것 같다.

"그래서 이야기 좀 해보겠나? 반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냐?"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농을 주고받을 거 같았기에 급히 화제를 돌렸다.

나지막이 물어본 내 질문에 리사가 '끄응-'하고 이마를 짚었다.

"사실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그냥 완전히 당한 거죠, 뭐. 이쪽보다 강한 힘 앞에."

"…함께 넘어온 헌터들이 문제였나 보군."

"네. SA랭크 헌터들이 넘어왔거든요."

"중국과 일본?"

"잘 알고 계시네요. 일본에서 둘. 중국에서 하나가 넘어왔어요. 목적은 뒷세계 장악. 정확히는 한국 헌터계를 완전히 집어삼킬 계획의 발판이죠."

담담히 이야기를 내뱉은 리사가 품에서 조용히 시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흘깃 스노우를 향해 눈짓하는데, 잠자코 팔짱을 끼고 있던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허락을 받은 리사가 거리낌 없이 시가를 피웠다.

"일의 시작은 그쪽이 샤를로트를 죽이고 간 이후부터였어요."

"흠?"

"샤를로트가 죽은 후에 뒤쪽도 꽤 난리였거든요. 정부는 물론이고 협회에서도 자꾸 뒤흔들다 보니, 해외에서 스멀스멀 야욕을 드러내도 어찌 견제할 방법이 없었죠."

"…이쪽 탓이란 건가?"

"딱히 탓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랄까?"

후- 가볍게 연기를 내뱉은 리사가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엄청 강해 보이네요. 당신과 같은 SA?"

"아니다."

"…그럼 S인가요? 그런 거치고 지나치게 강해 보이는…."

"SS다."

뚝- 리사가 피고 있던 시가를 떨어트렸다.

재와 함께 탁자 위를 몇 바퀴 구르는 시가의 모습에도 리사는 전혀 그쪽으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거짓말이죠?"

"이런 걸로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있나?"

"…오 마이 갓… 부부가 쌍으로 고랭크의 헌터라고요? 그것도 부인 쪽은 SS랭크? 이제는 세상에 단 셋밖에 없는 그 SS랭크?"

놀람과 경악을 담은 리사의 얼굴에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완전히 진실이란 것을 깨달은 리사가 입을 쩍- 벌린다.

"…진짜 언니로 모셔야겠네…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다소 까칠하던 이전과 달리 리사의 말투는 어느새 친근하게 변해 있었다.

애교라도 부리듯 살살 간드러진 목소리에 스노우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스노우다."

"…부부가 쌍으로 가명인가요? 스노우라… 새하얀 머리카락 때문에 어울리긴 하지만…."

슬쩍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본 리사가 이내 한숨을 내쉬엇다.

"뭐, 이쪽도 가명을 쓰는 건 마찬가지니 별 할 말은 없지만요. 그래서 앞으로는 스노우 언니라고 부르면 되려나?"

"아무렇게나 불러도 상관없다. 불여우 그대가 더 이상 내 서방님에게 달라붙지만 않으면."

"…으음… 역시 그건 좀… 저 정말 세컨드라도 상관없는데, 어찌 허락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언니?"

스노우가 말없이 리사를 바라보았다.

당장 얼음 폭풍이라도 불 것 같은 차가운 시선에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리사였다.

"…엄청 무서운 언니네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리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당신이라면 그냥 모른 척 무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제의 난동은 이쪽을 위해서였죠?"

"너나 나연성한테는 크고 작은 빚이 있으니까."

"…고마워요."

그녀답지 않은 약한 표정으로 리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잠시간 그런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다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지? 설마 언제까지고 이렇게 숨어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원래라면 저쪽 SA랭크 헌터들 때문에 숨죽인 채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죠."

그리 말하는 리사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곧 눈을 반짝였다.

"공짜로 도와달라는 얘기는 안 할게요. 샤를로트 헌터를 쓰러트린 당신과 스노우 씨에게 정식으로 의뢰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 스노우가 흘깃 이쪽을 바라본다.

어떻게 할 것이냐는 그녀의 눈빛에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주억였다.

"보상은 두둑이 받을 거다."

"네, 비즈니스는 확실히 해야죠. 절대 실망하지 않을 거랍니다."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는 리사의 모습에 재차 고개를 주억였다.

계약은 이뤄졌다.

제124화

이후 리사는 현재 국내에 들어온 일본과 중국의 헌터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이런 정보들을 구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잠적하는 와중에도 이런 정보를 계속 수집해오던 걸 보면 역시 그리 호락호락한 이는 절대 아니었다.

"제가 일단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방비하게 도망친 건 아니에요. 이번에 제 뒤통수를 친 장본인 역시 평소부터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 처음부터 주의 깊게 살피던 중이었거든요. 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나빴달까? 샤를로트 사망 이후 소란스러운 와중에 일을 벌여서 그만…."

조용히 사정을 설명하는 리사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꼭 내 탓이라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딱히 내 탓은 아닌 거 같다만.

"샤를로트 사망 이후에 뒤처리는 신경 쓰지 않고 도망친 게 누구죠?"

"…그때는 나도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애초에 굳이 내가 그쪽에 보고해야 할 필요가…."

"...."

말없이 노려보는 눈동자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 탓도 조금 있는 거 같기도….

"뭐, 굳이 지난 일을 따질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본론으로 돌아가면… 우선 일본의 헌터들부터 소개할게요."

나지막이 숨을 내쉰 리사가 말을 이었다.

"일본의 헌터들 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이들은 두 사람이에요. 각각 SA랭크의 헌터죠."

"호오… SA가 둘이나 들어왔나?"

"네. 그것도 쌍둥이 형제예요."

"형제가 쌍으로 헌터? 거기다 둘 다 SA랭크? 그건 놀랍군."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는 내 모습에 담담히 고개를 주억이며 리사가 설명을 이었다.

"흔히들 '야마모토 형제'라고 부르는 헌터들이에요. 쌍둥이가 나란히 헌터가 된 것도 놀라운데 두 사람 다 SA랭크의 헌터죠. 일본 현지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꽤 유명한 이들인데…."

"딱히 들어본 적은 없군."

"…그래요. 당신에게 뭘 바라겠어요?"

"…그건 무슨 의미지?"

"딱히, 아무것도요."

뭔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쉰 리사가 재차 설명을 이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꽤 유명한 헌터예요. 상당히 알아주는 거물이라고 할까요? 양지에서도 꽤 유명한 이들인데 음지에서는 더 대단한 거물들이죠."

"…그런 이들이 대놓고 국내로 들어왔는데 협회 쪽에서는 반응이 없나?"

"공식적으로는 서울 대미궁의 탐사를 위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협회에서 뭘 어쩌겠어요? 애초에 정부나 협회에서도 함부로 뒷세계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못해요."

"그건 왜지?"

"일종의 불문율이랄까? 높으신 분들도 제각각 더러운 부분이 하나씩은 있다는 이야기죠."

"…그렇군."

리사의 설명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국내의 정치인이든 협회의 인물이든 마냥 깨끗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쯤은 인간이었을 적부터 진작에 알고 있었다.

뒤쪽에서 그들의 약점이나 치부 같은 것들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 가정했을 때, 괜히 정부나 협회에서 뒤쪽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주의해야 할 건 그 둘 정도인가?"

"네. 함께 따라온 S랭크도 여럿 있지만 당장에 당신과 언니가 조심해야 할 건 두 사람 정도겠네요."

그리 말한 리사가 흘깃 스노우를 곁눈질했다.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던 스노우가 그녀의 시선에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느냐?"

"…아뇨. SS랭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따지고 보면 언니나 당신이 조심해야 할 건 없겠어요. 언니는 둘째치고 당신은 그 샤를로트를 쓰러트린 헌터니까요."

그리 말하는 리사의 얼굴은 마치 한시름 덜었다는 듯 처음보다 많이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그런 리사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며 한동안 고민했다.

'SA랭크의 헌터라…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 과연 이 모습으로는 조금 힘들겠군.'

딱히 정면으로 싸워도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모습으로는 역시 조금 힘들 것이다.

아무리 <약자멸시>에 의해 백업을 받는다 해도, 상대가 SA랭크 정도 되면 그 한계가 있달까?

만약 둘과 싸우게 된다면 확실히 본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뭐, 스노우라면 인간의 모습으로도 무리 없이 승리할 것 같지만.'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의 무덤덤한 얼굴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스노우가 내 시선에 흘깃 이쪽을 돌아보았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듬직한 와이프가 있어서 괜스레 다행이다 싶었다.

적어도 나랑 그녀가 본신으로 날뛴다면 당장 국내에서 개인으로 우리를 막을 이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일본 쪽은 문제없다 쳐도 중국 쪽은 어떻지?"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렇네요. 중국이 남아 있네요."

덤덤히 물어본 내 질문에 리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앞서 일본에 대해 이야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금 의아해하던 찰나, 잠시 망설이던 리사가 이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사실 일본보다 더 큰 문제는 중국 쪽이에요."

"왜지? SA랭크가 여럿 들어오기라도 했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SS랭크가 끼어 있군."

리사는 내 말에 긍정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할 뿐이다.

그런 리사의 반응에 내 추측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SS랭크라… 중국의 SS랭크 헌터라면 그 유명한 왕퐝인가?"

"…네, 맞아요. 개망나니로 유명한 사내죠."

조용히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리사의 모습에 한차례 턱을 매만졌다.

"…왕퐝이 국내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듣지 못한 거 같은데… 다름 아닌 왕퐝 정도 되는 이라면 당장 뉴스에 보도돼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다행히 본인이 직접 오지는 않았어요. 현재 국내에 들어온 중국의 헌터들은 SA랭크 하나와 S랭크 헌터 몇몇뿐이죠."

"흐음… 그럼에도 문제가 있다는 말은…."

"네. 이번에 들어온 SA랭크 헌터가 왕퐝과 적잖은 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 직속 부하 중 하나랄까요? 그의 의형제 중 한 사람이죠."

조용히 이야기를 꺼낸 리사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이름은 '장웨이'. 랭크는 SA. 사실 실력 자체는 일본의 야마모토 형제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만 위험도는 그 이상이에요. 그를 상대하게 되면 어떻게든 왕퐝하고 부딪히게 될 거란 말이죠."

"…과연. 이쪽에서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상대다 이 말이군…."

리사가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팔짱을 꼈다.

'…왕퐝의 의형제가 국내로 들어왔다. 그 목적은 국내 뒷세계의 장악. 최악이라 가정하면 이번 일에 왕퐝이 직접 관여되어 있다는 건데.'

SS랭크가 직접 야욕을 드러내는 이상 리사의 힘만으로 어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가 SA랭크뿐이라면 약점으로 협박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부나 협회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적이 SS랭크라면 그것도 무용지물이군.'

자연재해, 국가적 재앙이나 다름없는 이를 상대로 정부나 협회가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없다.

같은 수준의 강자가 없다면 언제나 을이 되는 것은 힘이 없는 약자 쪽이다.

"…뭐, 그래도 이쪽하고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군."

잠깐의 고민 끝에 결론에 도달했다.

담담히 내뱉은 이야기에 조용히 이쪽의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리사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쉽게 말할 이야기가 아닌 거 같은데요… 뭐, 그 샤를로트마저 쓰러트린 당신이라면 아무렴 좋겠지만…."

그리 말한 리사가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거기다 언니도 함께 있으니 제아무리 왕퐝이라도 어쩔 수 없겠죠."

잠시간 묘한 눈빛으로 스노우를 바라보던 리사가 한차례 이마를 짚었다.

"…전 인류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현재 셋… 아니, 넷밖에 없는 SS랭크 헌터가 죽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어쩌겠어요. 이쪽이 살아남으려면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을."

짐짓 안타깝다는 듯 말을 내뱉은 리사가 돌연 이쪽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실패는 생각하지 않을게요. 그건 당신이나 언니에 대한 실례일 테니까. 그러니 저는 이번 일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을 줄지나 생각할게요."

"호오… 뭐 따로 생각해 놓은 거라도 있나?"

"솔직히 뭘 줘야 할지 도저히 견적이 안 나오네요. 당신들은 이미 그 실력만으로 가지고 싶은 건 모두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으음… 그래. 저라도 가지실래요?"

"...."

"지금 저를 가지시면 연성 아저씨나 뒷세계 최대 규모의 블랙 마켓도 세트로 함께 따라간다구요? 구미가 당기지 않으세요?"

불쑥 이쪽으로 몸을 들이대는 리사의 모습에 슬며시 눈을 돌렸다.

스노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얌전히 도로 눈을 돌렸다.

"사양하지."

"에이… 아쉽네."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리사의 모습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도대체 이 여자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완전히 농담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두 분한테 보상으로 도대체 뭘 줘야 할지 여전히 감이 안 잡히거든요… 어찌 보면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한테 그나마 저에게 가장 가치 있는 걸 드리고 싶었는데…."

"그 가장 가치 있다는 게 그대 자신인가?"

불쑥 입을 연 스노우의 물음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던 리사가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뇨. 저는 그저 부속품 정도랄까? 저한테 가장 가치 있는 건 역시 블랙 마켓 그 자체예요. 이 앞에서는 사실 제 목숨도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리 내뱉은 리사가 장난스레 덧붙인다.

"앞으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보면 역시 블랙 마켓의 소유권을 두 분에게 넘겨드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한낮 S랭크의 헌터로서 뒷세계의 정점으로 군림하는 것도 슬슬 한계를 느끼고 있는 중이고…."

리사가 표정을 고쳤다.

장난기 가득했던 웃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진지한 얼굴로 그녀가 똑바로 이쪽을 바라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을 무사히 끝내 주신다면 저를… 블랙 마켓을 가져주세요."

꾸벅- 한없이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 리사의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 아까 전과 같은 말이었음에도 그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태도를 싹 뺀 진지한 태도.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조용히 고민했다.

순식간에 그녀의 제안을 받았을 때의 메리트와 디메리트를 계산한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손해는 무엇인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블랙 마켓을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앞으로 이쪽에 완전히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보면 되겠나?"

"…네. 블랙 마켓 자체에 손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당신의 말에 따르겠어요."

"흐음. 만약 이쪽의 결정이 블랙 마켓에 해를 입힌다면?"

"…실력 없는 S랭크 헌터지만… 그래도 전력으로 반항하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블랙 마켓은 제 목숨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기에."

흔들림 없는 굳건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절로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밌군."

"...."

"그러면 묻지.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어째서 도망친 거지? 네 말대로라면 이번에도 끝까지 남아서 블랙 마켓을 지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지막이 물어본 질문에 리사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당신이 있었으니까요."

"…나를 기다렸다는 거군… 그래도 혹시 내가 그쪽을 돕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건가?"

"그때는 또 그때의 새로운 방법을 생각했을 거랍니다."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능숙하게 답하는 리사의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쪽을 바라보는 리사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감돈다.

"…말은 잘하는군."

"힘없는 약자가 살아남으려면 한 가지 재주는 있어야 해서요."

"S랭크 헌터가 언제부터 힘없는 약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같은 진짜 강자에 비하면 한없이 약자에 불과해요."

"...."

막힘없이 답하는 리사의 모습에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내 앞에서 조금 헤픈 모습을 보여 줘서 그렇지, 이렇게 보니 그녀는 틀림없는 한 단체의 수장이었다.

그저 힘 있는 몬스터에 불과한 나하고는 그 경험이 다르다.

"…만약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쪽이 해야 할 일은? 의무 같은 게 있나?"

"아뇨. 딱히 그런 건 없어요. 아무래도 그쪽에게 맡기기에는 영 불안해서… 실질적인 운영은 지금처럼 제가 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저 얼굴마담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이건가?"

"꼭 그렇다는 건 아니죠. 좋게 말해서 살아남기 위한 '힘'이 필요했다고 할까요?"

그리 말하며 씩 미소짓는 리사의 미소에 절로 헛웃음이 나온다.

건방지다.

어디까지나 이쪽에 부탁하는 처지에서 저렇게나 당당하게 나올 수 있다니.

그것도 바로 코앞의 면전에다 대고 말이다.

속으로는 이런 리사의 모습이 건방지다 생각되면서 한편으로는 또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동안 몰랐던 그녀의 매력을 알게 된 것 같달까?

제 입으로는 약자라 말하면서도 강자 앞에서 쉽게 굴하지 않고, 당당한 그녀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애초부터 고민은 끝나 있었고 결정도 이미 내린 상태였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내 결정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었다.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담담히 내뱉은 말에 리사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진다.

이전까지 알게 모르게 조금 경직되어 있던 얼굴에 환하게 웃음꽃이 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애초부터 운영 같은 건 모두 맡길 생각이었다.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바쁘니까."

"그건 기쁜 말이네요."

"딱히 블랙 마켓에 손해를 끼칠 생각도 없다. 모처럼 갖게 된 것을 부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어머. 그건 정말 다행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아서…."

"다만 한 가지만 명심해라."

나지막이 목소리를 낮춘 채 리사와 눈을 마주했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내 시선에 리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쪽에 거스르지 마라. 해를 끼치지 마라. 반항할 생각을 버려라."

"…그건…."

"반론은 허용치 않는다."

무어라 입을 열려던 리사의 말을 뚝 끊어낸다.

"말했다시피 블랙 마켓에 손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네가 우선해야 할 건 블랙 마켓이 아니다. 바로 나다."

"...."

"명심해라."

조용히 덧붙인 말에 리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잔뜩 흔들리면서도 계속해서 이쪽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눈을 돌렸다.

그제야 내 시선에서 해방된 리사가 그동안 내쉬지 못한 거친 숨을 내뱉었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한참 만에 내뱉는 리사를 보니 아무래도 정신 지배가 잘 먹힌 모양이다.

이걸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확보했다.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우리 마님 역시도 지금의 상황이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다행이다.

제12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