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지금껏 내가 거쳐온 계층들의 이야기를 한 다음 날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본녀에게는 이런 스킬도 있다.]
그날의 대련 중 문득 스노우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녀의 몸이 한차례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드러난 스노우의 모습은….
[이, 인간?]
반짝이는 새하얀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미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의 초월한 미모를 가진 미녀였다.
게다가 전라의 모습으로.
[어떤가? 꽤 신기하지 않은가? 언제고 배웠던 것인데, 지금껏 쓸 일이 없어 잊고 있었구나.]
그리 말한 스노우가 가볍게 빙그르르 돌았다.
눈부신 백발이 허공에 나부낀다.
"컁컁─!"
그런 제 어미의 변한 모습에 한쪽에서 토순이와 놀고 있던(대련 중이던) 설이가 헐레벌떡 달려온다.
'엄마? 엄마 맞아?' 같은 의미의 울음이었다.
[그래, 설아. 어미가 여기 있다.]
스노우가 가볍게 설이를 안아 든다. 그리고 감탄했다는 듯 말한다.
[오오… 이 모습이 되면 설이를 편하게 안을 수 있구나.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군.]
복슬복슬한 여우를 안아 든 경국지색의 미녀. 마치 잘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감탄을 터트렸다.
딱히 전라의 미녀를 보아도 별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인간이었을 때라면 또 몰랐지만, 지금은 아예 종부터가 다르니까.
그럼에도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이 있는 만큼 조금 껄끄럽긴 했다.
[흠흠… 아름답군.]
[흐음? 아름답다? 이 모습이 말인가?]
[아아, 분명 그 모습은 인간의 기준으로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다. 깜짝 놀랄 정도다.]
[무어, 본녀가 아름다운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눈처럼 새하얀 그녀의 볼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위에 무언가를 걸치는 게 좋겠군. 인간의 기준으로 그것을 발가벗은 것과 다름없으니.]
[흐음… 의복이란 것인가? 과연 일전에 인간 무리를 보았을 때 무언가를 입고 있는 것을 보기는 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그리 말한 스노우가 품에 안고 있던 설이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재차 가볍게 마력을 움직인다.
그녀의 몸 위로 옷이 생겨났다.
하얀색과 푸른색이 조화를 이루는 예쁜 한복이었다.
[어떤가?]
[역시 아름답다.]
[…고맙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스노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밑에서 설이가 "컁컁!" '다시 안아줘!' 하고 울었다.
곧장 아무렇지 않게 설이를 안아 드는 스노우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거 나도 배울 수 있는 건가?]
[배우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다만 문제라면 신체가 변하는 만큼 적응이 쉽지 않다는 것이겠군.]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다. 그대는 다리가 없지 않나? 그나마 본녀는 적응이 쉬웠으나 애초부터 없었던 그대라면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
-본녀가 도와주마.
그리 덧붙이는 스노우의 말에 나는 '아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다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아마 내가 적응하는 데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원래 인간이었으니까.
'조금 낯설게 느껴지긴 하겠어. 이 몸으로 워낙 오래 있었더니.'
그래도 적응하는 데는 별문제 없을 것이다.
격한 행동은 당장에 무리라도 걷는 것 자체는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후 나는 스노우에게 특히 <인화의 술>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앞서 배우던 치료 마법이나 거대화, 축소화의 술보다 더 열심히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딱히 인간이었던 기억 때문에 다른 걸 제쳐두고 배우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인간일 때가 그립냐고 물으면 한시의 고민도 없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만큼 사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인화의 술에 달려드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 복수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신재준, 김준수, 이하나.'
절대 잊을 수 없는 세 사람.
뱀이 된 지 근 3년째인 지금까지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성장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설이와 스노우 그리고 토순이와 함께 지내면서도. 결국 여기까지 와서도.
나는 결코 그들에 대해 잊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복수를 생각할 때 나는 참으로 많은 고민과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B나 A 정도의 고랭크 몬스터가 되면 문제없이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거듭 고민해본 결과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헌터, 나는 몬스터.
미궁 내에서 만날 수 있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복수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한동안 상층에 잠복해 그들이 미궁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래서는 너무나 막연했다.
거기다 미궁에 들어올 그들이 혼자일 것도 아니고.
무리해서 복수를 달성한다 해도 이후 토벌대가 꾸려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작정 기다리는 것은 좋지 않은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내 성미와 맞지 않는 일이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이 아닌 내가 먼저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미궁에서 생활하며 깨우친 하나의 진리다.
그런 만큼 미궁 안이 아닌 미궁 밖으로 나갈 필요를 느꼈다.
다만 문제는 내가 너무 눈에 띈다는 것인데, 몬스터인 것은 둘째 치고 그 크기부터가 문제였다.
이만한 덩치로 미궁을 나선다면 단번에 헌터들이 몰려들 것이다.
덤벼든 헌터들을 어느 정도 쓰러트릴 수는 있겠지만, 상위 헌터들이 계속해서 모여들면 아무리 나라도 복수는 불가능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각한 게 스노우가 가르치는 거대화, 축소화의 술이다.
거대화의 능력은 잠시 미뤄두고, 축소화의 술을 사용하면 내 은신 능력과 더불어 별문제 없이 미궁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인화의 술이란 것이 등장했다.
이걸 내가 어찌 배우지 않을 수 있을까?
축소화의 술을 사용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확실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단순히 숨어다니는 것을 넘어서 인간으로 활동하며, 직접 기회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인화의 술에 매달릴 수밖에.
그런데 인화의 술을 사용하면, 왼쪽이나 오른쪽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설마 몬스터일 때처럼 머리가 세 개나 돋아나지는 않겠지?
조금 상상했더니 끔찍하다.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앞서 스노우가 말했던 것처럼 인화의 술을 배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화의 술에만 열심히 매달린 지 며칠, 나는 인간으로 변하는 데 성공했다.
* * *
다행히 걱정했던 것과 달리 머리가 세 개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왼쪽이와 오른쪽이는 그냥 내 의식 속에 평소와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움직일 몸이 사라진 만큼 평소보다 더 까칠하기는 했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에 문제가 있었을 뿐.
[흐음. 자신만만하더니 꼴이 꽤 웃기는구나?]
귓가로 스노우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짧게 코웃음 치듯 나를 비웃은 스노우가 보란 듯이 내 앞을 사뿐사뿐 걸어갔다.
당연히 인간의 모습으로.
"컁컁!"
'바보! 아빠 바보!' 같은 느낌의 울음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설이가 열심히 짖는 것이다.
평소보다 시야가 낮아서 그런지 설이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보였다.
이건 좀 기쁘지만….
파들파들- 몸을 움직여보지만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땅에 엎어진 그대로 나는 당분간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적응이 쉬울 것이라 생각했던 내 예측과 달리 막 인간이 된 몸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흐응~ 자, 설아. 네 아비의 저 바보 같은 모습을 보거라. 참으로 한심하지 않느냐? 설이 너는 커서 저런 어른이 되면 안 되는 게다. 알겠느냐?]
"컁컁─!"
동의하듯 우는 설이의 모습에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치욕스럽다.
그것보다 스노우가 어째 평소보다 굉장히 까칠하지 않나?
[그러게 본녀가 도와준다고 할 때 얌전히 받아들일 것이지… 괜히 고집 부리다가… 쯧.]
짧게 혀를 차는 스노우의 모습에 푹 고개를 숙였다.
설마 저것 때문에 삐진 것일까?
이제 보니 설이는 확실히 엄마를 닮은 모양이다.
그렇게 땅바닥에 엎어진 지 몇 시간.
결국 보다 못한 스노우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일어설 수 있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다리가 몹시 원망스럽다.
[평소에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것이니 일어서지 못할 만큼 나약할 수밖에. 하지만 본래의 신체 능력이 있으니 금방 강해질 것이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담담히 덧붙이는 스노우의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처음 인간으로 변해서 걷는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다. 그 거슬리는 것 좀 가리지 않겠나?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거슬리는 느낌이다.]
그리 말한 스노우의 시선이 슬쩍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정확히 내 가랑이 사이로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급히 스노우를 밀쳐냈다.
그리고 털썩- 곧장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쯧… 뭐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굉장히 바보 같구나… 인간일 때의 그대는 당분간 설이 곁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
몹시 치욕스럽다.
* * *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몸에 적응하도록 훈련한 것이 며칠.
나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 처음 적응만 하면 이후는 쉽다던 스노우의 말처럼 곧 뛰거나 하는 격한 움직임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몸을 완전히 내 의지로 컨트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굉장히 기뻤다.
[그래서 그 흉물스러운 것은 언제 치워주겠나? 아니면 본녀가 직접 떼어버려야 할까?]
급히 옷을 만들어 입었다.
마력으로 만들어 낸 것인데, 기왕이니 스노우와 비슷한 한복차림으로 했다.
색은 검은 계통.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스노우가 너무 무섭다.
인간으로 변했을 때의 내 외형은 기본적으로 과거 인간이었을 때의 외모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금 인상이 날카로워졌다거나, 키가 컸다거나, 몸집이 커졌다거나 하는 변화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나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얼마 못 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이후 세 사람과 만났을 때 그들이 누구에게 복수 당하는지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때를 생각하니 절로 흐뭇해진다.
무엇보다 과거보다 몇 배는 커진 특정 부위가 괜스레 굉장히 만족스럽다.
[흐으음~?]
"컁컁─?"
…딱히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렇게 인화의 술에 완전히 적응했을 때 내가 얻은 수확은 단순히 복수가 쉬워진다는 것만 있지 않았다.
바로 설이를 안을 수 있다는 것!
그 복실복실한 몸을 안자마자 나는 복수 따위 까맣게 잊었다.
복수 따위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뱀의 몸으로는 절대 할 수 없던 이것저것을 마음껏 즐겼다.
아, 발바닥이 몹시 말랑말랑하구나.
좋은 느낌이다.
그래, 그래. 토순이 너도 만져주마.
특히 귀를 중심으로….
아, 귀는 민감한가? 미안하다.
아니, 갑자기 왜 우는 거야?
뭐, 마님이 널 죽일 거라고?
스노우가 도대체 왜?
아니, 나는 딱히 널 건드릴 생각이….
그리고 옆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스노우가 조용히 구미호의 상태로 내 앞에 배를 깔고 앉았다.
토순이는 이미 멀리 도망친 이후다.
뭘 원하는 걸까?
잠시 멀뚱히 쳐다보자 스노우가 그 긴 꼬리로 불만스레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잠시 고민하다 이내 스노우의 몸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제야 스노우가 만족한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마음에 든 듯하다.
기세를 타 스노우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쓰다듬었다.
스노우의 숨이 조금 거칠다.
사념으로 왠지 굉장한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분위기가 묘해지려던 찰나, 어느새 다가온 설이에 의해 상황이 종료됐다.
스노우가 있는 힘껏 꼬리로 나를 쳐냈다.
다행히 인간의 몸이라도 능력치 자체는 그대로라 별 피해는 없었지만….
왜지?
나는 그냥 하란 대로 쓰다듬었을 뿐인데….
굉장히 억울해진 밤이었다.
제70화
<인화의 술>에 대한 적응은 완벽하다.
신체 능력 자체는 본래 몸의 능력을 그대로 따라가기에 조금 힘 조절이 필요했지만 스노우와의 집중 훈련 끝에 문제없이 해냈다.
단순 걷기나 달리기 따위도 무리 없이 해내며, 전투 행위 같은 격한 행위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래도 유일한 흠이라면 일부 스킬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인데, 적어도 마법 스킬은 확실히 사용 가능하니만큼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단순 신체 능력만으로도 A랭크의 몬스터를 가볍게 상대할 수 있는 만큼 딱히 걱정할 거리도 없었다.
여차하면 원래 몸으로 돌아가면 되고 말이다.
이것으로 복수를 위한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남은 것은 직접 위로 올라가 혹시 있을지 모를 변수를 확인하는 것이다.
직접 세 사람을 확인하고,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주위 관계는 어떤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 복수를 위한 사전 조사만 하면 된다.
한때 그저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복수가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만 복수하기에 앞서 조금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컁컁─!!"
사실 사소하다기보다는 꽤 큰 문제였다.
* * *
'데려가! 나도 데려가!' 같은 느낌으로 설이가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스노우와 토순이를 바라보지만 둘 다 시선을 피할 뿐이다.
완전히 내게 책임을 전가한 모습이다.
'아니, 분명 내 책임이 맞긴 하지만….'
"컁컁!" 열렬히 울어대는 설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데려갈 거지? 나도 데려갈 거지?'하고 보채듯 울어대는 설이의 모습은 역시 곤란했다.
사실 처음부터 설이를 놔두고 갈 생각은 없었다.
나 역시 설이와 헤어지는 것이 싫었기에 가능하면 데려가고 싶었다.
위가 아닌 아래로 내려간다면 또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이었기에 설이의 안전도 그리 큰 문제가 없었고, 설이가 함께라면 당연히 스노우도 함께였기에 설이가 위험할 일도 없었다.
그런 만큼 현실적으로 설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별문제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홀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번 복수는 지극히 내 사적인 것이었으니까.
인간 유준영으로서 남은 마지막 미련.
앞으로 몬스터 닉스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매듭지어야 하는 일.
그런 일에 설이와 가족들을 괜히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복수는 온전히 내 손으로만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요컨대 다른 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설이와 첫 상층 나들이는 복수를 모두 끝낸 뒤 산뜻한 마음으로 가고 싶으니까.'
사실 주된 이유는 이쪽이 제일 컸다.
괜히 설이와의 첫 상층 나들이에 복수 같은 우중충한 것이 끼어 있으면 별로니까.
이렇게 해서 혼자 떠나겠다는 내 말에 설이가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자기를 데려가지 않는다면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는 느낌이랄까?
일종의 비장함까지 느끼게 될 정도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컁컁!"
'나도 같이 가! 같이 갈 거야!' 내 품에 연신 얼굴을 부비며 울어대는 설이의 모습에 가슴이 마냥 편치 않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냥 이대로 안고 같이 올라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 나도 있고 스노우도 있으니까… 복수할 때만 살짝 빠지면 괜찮지 않을까? 이참에 가족 나들이라도 가는 셈치고….'
설이를 데려가기로 마음이 슬쩍 기우려던 순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스노우가 입을 열었다.
[그쯤 하거라, 설아. 착한 아이라면 아빠가 일을 나설 때 '잘 다녀오세요'하고 배웅하는 것이다.]
"컁! 캬앙─!"
[어허.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거기다 아빠가 그냥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일하러 가는 것인데. 착한 설이라면 '조심히 다녀오세요'하고 배웅해 줘야겠지?]
"컁… 캬앙…."
[괜찮다. 아빠라면 금방 돌아올 테니. 그렇지 않나, 그대?]
조곤조곤 자상한 어머니 포스를 뽐내며 설이를 타이르던 스노우의 시선이 흘깃 이쪽을 향했다.
잘 대답하라는 뜻이 담긴 그녀의 눈빛에 급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설아. 금방 돌아올게.]
"캬앙…?"
'진짜지?' 잠깐 사이 몹시 시무룩해진 설이의 울음소리에 한순간 마음이 미어졌다.
역시 그냥 이대로 같이 가는 것도….
[자, 설이가 물었으니 그대도 답해 줘야겠지. 얼른 돌아오겠다고 말하거라.]
조곤조곤 들려오는 스노우의 목소리에 확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설아. 볼일만 끝내고 바로 돌아오마. 올 때 설이 줄 선물도 가져오마.]
"컁컁…?"
'선물…?' 슬쩍 귀를 쫑긋거리며 되묻는 설이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설이가 좋아할 만한 거로 잔뜩 가지고 오마.]
그제야 설이가 평소처럼 밝게 "컁컁!" 울었다.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이후….
"피─ 피잇…."
[주인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토순아. 네 선물도 가져올게. 설이를 잘 부탁한다.]
"피잇─!"
[맡겨만 주세요!]
토순이와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고.
[조심히 다녀오거라.]
[집을 잘 부탁한다, 스노우.]
[내 걱정보다는 오히려 그대 걱정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혹시 누가 괴롭히거나 하면 곧장 본녀에게 말하거라. 본녀가 직접 본때를 보여주마.]
[…딱히 날 괴롭힐 상대가 상층에 있을 거 같진 않지만… 뭐, 어쨌든 든든하군.]
[흐음… 혼자라고 너무 들뜨지는 마라. 그대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면 본녀가 직접 찾으러 갈지도 몰라.]
[…볼일만 끝내고 바로 올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 내가 돌아오면 그땐 나 혼자가 아닌 다 함께 상층으로 가보자. 지금껏 보지 못한 세계를 볼 수 있을 거다.]
[그거 기대되는군.]
스노우와도 제법 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이를 한번 힘껏 껴안은 후 나는 70계층을 떠났다.
* * *
69계층. 용암 구역의 가장 마지막 계층.
용암이 강처럼 흐르고, 작열하는 대지가 가득 펼쳐진 설산 구역과는 정반대의 땅.
거의 반년 만에 나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반년 만에 돌아온 69계층은 마지막에 보았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여전히 몹시도 뜨거웠고 그만큼 척박한 땅이다.
수마법을 사용해 얼음 덩어리 몇 개를 만들어냈다.
<고열내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작은 얼음 조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크다.
한창 용암 구역에 머무를 때부터 종종 사용하고는 했다.
'정말 하나도 변함없는 곳이군.'
종종 헌터들이 보이는 초반부와 달리 용암 구역의 마지막 계층인 이곳에는 헌터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근 가장 깊숙이 도달한 헌터들조차도 초입 부분이 한계였으니까.
그마저도 헌터 개인이 아닌 대형 길드의 대규모 원정 때였으며, 당시 무사히 살아 돌아간 헌터가 전체의 1/3도 채 되지 않았다.
'…그것보다 슬슬 모여드는걸?'
슬며시 주변을 살폈다.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희뿌연 수증기.
곳곳의 바위틈마다 자리 잡은 날카로운 기척.
어느새 주위로 이곳 용암 구역의 몬스터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원래 몸이 아니라 혀의 감지는 사용하지 못하지만, 마력감지를 통해 주변 상황 정도는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현재 뱀의 몸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덩치가 큰 원래 몸보다는 인간의 몸이 여러모로 편했으니까.
겨우 다시 찾은 팔과 다리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인간 상태라 그런가? 아니면 하도 오랜만에 돌아와서 그런가. 다들 내가 누군지 잊은 거 같은데.'
한창 용암 구역을 돌아다닐 때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감히 내게 덤비다니?
흘깃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한 바위… 아니, 바위라기보다는 작은 돌산이라고 불러야 좋을 정도의 커다란 돌덩이 뒤에 숨어 있을 녀석을 보았다.
모여든 녀석 중에 그나마 가장 강한 녀석이다.
기세로 보아서는 랭크 A.
이 정도라면 이 근처에서 나름 힘 좀 쓰고 다닐 녀석일 것이다.
"크르르…."
내 시선을 눈치챈 녀석이 곧 바위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척 보기에는 공룡을 닮았다 싶은 외관. 짧은 앞발과 길쭉한 뒷발. 온몸에 돋아난 비늘. 파충류 특유의 찢어진 눈동자.
바로 [드레이크]라고 불리는 몬스터다.
최소 A랭크 이상의 아룡종 몬스터.
일부에서는 '지룡'이라고 부를 정도로 드래곤에 가깝다고 알려진 몬스터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녀석은 [레드 드레이크]라 부르는 녀석으로, 특히 이곳 용암 구역에서 자주 발견된다.
"크롸아아──!"
녀석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자 잇따라 다른 녀석들 역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개중에는 녀석과 같은 드레이크도 있었고 전혀 다른 종류의 몬스터도 있었다.
보통의 몬스터들은 같은 종이 아니라면 이렇게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지만.
이 녀석들은 특이하게도 다른 종임에도 함께 무리 지어 활동했는데, 이는 녀석들이 이 계층의 주인이자 구역의 지배자인 아르데의 부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죽이기는 찝찝한데.'
아르데에게는 꽤 적지 않은 은혜를 입은 만큼 그 부하인 녀석들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내가 워낙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무엇보다 인간의 몸인 만큼 녀석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생각도 없지.'
적당히 이 녀석들을 본보기로 삼으면, 다들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지 않을까?
물론 아르데의 부하들인 만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내가 돌아왔다는 사실만 알릴 수 있을 수준이면 되었다.
천천히 인화의 술을 풀었다.
-Shaaa───
"크… 크아아아─?!"
[포, 포포포, 폭군?! 폭군이 다시 돌아왔다?!]
"크아앙!"
[포, 포악한 뱀! 사, 살려줘! 두목님을 불러!]
"크… 크캬앙!!!"
[저,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살려주세요!]
본신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녀석들은 머지않아 계층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이쪽은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러니 김이 팍 새는 느낌이다.
이 상태라면 그리 머지않아 마중인이 데리러 올 것 같은데….
일단 저 시끄러운 입이라도 막아야 할까?
마중인이 도착했다.
자주 마주치고는 했던 외눈박이 [레드 와이번].
아르데의 세력 중 대충 2인자쯤 되는 녀석이다.
랭크는 여전히 S.
내가 아직 A랭크일 당시 대련이라도 하면 꽤 좋은 승부를 펼쳤던 녀석이다.
당시 승률은 40퍼센트 정도 됐다.
녀석이 도착하는 걸 확인하고 꼬리로 목을 휘감고 있던 드레이크 하나를 놓아주었다.
열심히 도망간다.
[인간 하나가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너였나?]
[인화의 술을 배웠다. 꽤 편해서 이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지.]
[…적어도 이곳에 돌아왔다면 원래 모습으로 움직여라. 다른 녀석들이 동요한다.]
[고려해보지.]
[....]
레드 와이번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다시 만나 반갑군… 과연 그때 장담했던 대로 상당히 강해졌군.]
[너는 그대로군. 이제는 내 비늘 하나 스치지 못하겠어.]
[…도발하는 거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
레드 와이번이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그 입에서 브레스를 뿜을 듯한 기세였지만 녀석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금 김샜다.
[괜한 도발하지 마라.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너하고는 딱히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쫄은 건가?]
재차 녀석들 도발할 의도로 말했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꽤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맞다. 솔직히 이제는 전혀 싸움이 되지 못하겠군. 여기 있을 때도 종종 느꼈지만 네 녀석의 성장 속도는 이상하다. 보통의 몬스터가 평생을 걸쳐 이뤄낼 성과를 단기간 만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말처럼 내 성장 속도는 몹시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보통의 몬스터가 10년, 20년이 걸려도 못 이룰 성과를 나는 단기간 만에 이루었다.
그 아르데조차 100년 가까이 살아 지금 같은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내 성장 속도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인간이었을 적의 각성자였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나에게는 다른 몬스터들에게는 없는 상태창이 있으니까.
참고로 스노우는 18년 정도 살았다고 한다.
마그마 와이번의 겨우 1/5 정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 역시 상당히 빠른 성장 속도다.
의외로 그녀는 나보다 연하였다.
어디까지나 인간일 적을 포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잡담은 이쯤 하도록 하지. 두목님이 기다리신다.]
[…내가 도착한 걸 알고 있던 건가?]
[두목님은 이 땅 전체를 항상 지켜보고 계시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그것도 그렇군. 여전히 놀라운 감지 능력이야.]
[그야 두목님이니까 당연하지.]
거기까지 말한 레드 와이번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조용히 이쪽의 눈치를 살피던 녀석들을 향해 '어이! 너희는 이만 해산해라!'하고 소리친 녀석이 천천히 날개를 퍼덕였다.
[그럼 이제 출발하자.]
[그전에 좀 태워주면 안 되나?]
[…뭐?]
[예전부터 항상 그 등 위에 타고 싶었거든.]
[....]
잠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는 레드 와이번의 시선을 모른 척한 채 슬그머니 그 등 위로 올랐다.
다행히 레드 와이번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쉴 뿐 딱히 내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다시 인간으로 변해 타게 된 녀석의 등 위는 생각보다 편안했다.
그렇게 레드 와이번의 등에 탄 채 나는 용암 구역의 주인, 지배자, 정점.
에어리어 보스 마그마 와이번 아르데의 레어로 향했다.
생애 첫 비행은 상당히 즐거웠다.
제71화
[오랜만이구나, '작은 뱀'아.]
전체적인 외향은 이곳까지 나를 태워다 준 [레드 와이번]과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그 덩치가 다르다.
원래 내 몸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덩치. 마치 하나의 산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용암 구역의 지배자, 주인, 정점.
SS랭크 몬스터이자 용암 구역의 구역주(에어리어 보스) 마그마 와이번 아르데.
반년 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태산과도 같았다.
바로 밑인 SA랭크까지 성장했음에도 전혀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말했던 대로 돌아왔다, 아르데.]
조용히 부른 이름에 그가 마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홀홀- 웃는다.
[많이 강해졌구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어. 벽을 넘었나 보지?]
인간의 몸인 상태였음에도 그는 내 기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애초에 내가 69계층에 들어서자마자 내 존재를 눈치챘었다고 하니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우 넘을 수 있었지. 도움도 많이 받았다.]
한차례 고개를 주억이는 내 모습에 아르데가 재차 홀홀 웃었다.
[소중한 것이 생겼구나.]
[…그런 것까지 꿰뚫어 보는 건가?]
[이만큼 오래 살면 어지간한 것은 다 보이는 법이란다, 작은 뱀아]
[그렇군… 그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나는 이제 '닉스(Nyx)'다.]
담담히 내뱉은 말에 아르데가 '호오….'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닉스. 좋은 이름을 가졌구나. 스스로 지었나?]
[…좋은 조언을 받았지.]
[소중한 인연에게서 얻은 이름이구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소중히 하거라.]
[…충고 고맙게 듣지.]
[홀홀홀-]
아르데는 재차 즐겁다는 듯 웃었다.
정말 그 흉악한 외모와 다르게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이다.
그러니 그 많은 몬스터들을 부하로 거둔 채 지켜주는 것이겠지.
[그래서 이곳에는 뭐하러 돌아온 게냐? 소중한 이들 곁에 있지 않고?]
[…매듭을 짓기 위해서.]
잠시 고민하다 내뱉은 말에 아르데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너도 많은 사정이 있었지… 그래,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게냐?]
[금방 돌아올 예정이다. 못해도 이번만큼은 걸리지 않겠지.]
[홀홀- 급한 모양이구나.]
[아아.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어서.]
아르데가 흐뭇하게 웃었다.
마치 손자의 성장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할아버지처럼.
[너에게도 소중한 것이 생겨서 다행이구나. 그래, 닉스. 너에게는 기댈 곳이 필요했어. 아무리 투쟁 속에 살아가는 것이 몬스터라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쉴 만한 휴식처는 필요한 법이지. 가능하면 내가 너의 기댈 곳이 되고 싶었다만… 너는 언제나 그렇듯 홀로 일어서는구나.]
-대견하다.
조용히 들려온 목소리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이 에어리어 보스 같지 않은 에어리어 보스는 내게 몇 없는 호의를 보여준 상대다.
정말 많은 은혜를 입었고 과분한 관심을 받았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조용히 읊조린 목소리와 함께 홀홀- 웃는 아르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 아르데와 작별을 고했다.
* * *
아르데의 레어에서 나온 이후 다시 한번 레드 와이번의 등에 신세 졌다.
근처의 가까운 게이트로 이동하며 녀석과 사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위층으로 가는 건가?]
[그래, 일단 고향까지 돌아갈 생각이다.]
[고향이라… 분명 수풀이 우거진 푸른 산림이라고 했지… 나로서는 잘 상상이 안 가는군.]
[꽤 아름다운 곳이다. 언젠가 너도 한번 보러 가는 건 어떤가?]
가볍게 내뱉은 말에 레드 와이번 역시 가볍게 웃었다.
[농담도 원. 나는 두목님 곁을 떠날 생각이 없다.]
[아르데라면 언제든지 다녀오라고 말할 것 같은데.]
[그분이 그리 말씀하시더라도 굳이 떠날 생각은 없다. 마지막까지 그분의 곁을 지키는 것이 내 꿈이자, 목표다.]
[충신이군.]
[충성심 하니만큼은 내가 미궁 제일이지.]
농담처럼 진심을 내뱉는 녀석의 목소리에 가볍게 웃었다.
한차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좀 어떻지? 무슨 특별한 소식이라도 있나?]
[흐음… 특별한 소식이라… 최근에는 딱히 없는데….]
거기까지 말한 레드 와이번 불현듯 '아'하고 말을 이었다.
[네가 떠났을 때쯤 인간들이 왔었다.]
[뭐…? 인간들이…? 이 층에?]
[이 계층은 아니다. 다섯 층 위인데… 그래. 대충 200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고 하더군.]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이곳에서 다섯 층 위라면 64계층을 말하는 것이다.
그 계층이라면 최근 들어 헌터들이 가장 깊이 도달한 계층이 아닐까 싶었다.
'200명 정도 규모라면 대규모 원정대 수준이군. 어디 대형 길드가 직접 나섰나?'
앞으로를 생각하면 제법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었기에 머리 한구석에 조용히 기억해 놓았다.
[그래서 찾아온 이들은 어떻게 됐지? 몇이나 살아 돌아갔지?]
[거의 대부분이 살아 돌아갔다.]
[…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곳에 지배자가 없었나?]
[인간들의 수준이 꽤 뛰어났다더군. 당시 그 땅의 지배자를 죽이고 귀환했다고 한다.]
[…놀랍군.]
조용히 탄성을 내뱉었다.
보통 이런 하층 원정의 경우 그 피해가 큰 것이 정상인데, 레드 와이번의 이야기대로라면 원정대의 전력에 거의 손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위 랭크의 헌터가 많이 끼어 있었나? 대한민국에 그 정도 전력의 길드가 있다고…? 내가 모르던 사이 헌터들 수준이 오르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대형 길드 몇 곳이 연합하기라도 했던가.
어느 쪽이든 몬스터인 내 입장에서 썩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인간들은 가만히 내버려 뒀나? 네 성격에 끝까지 추적해서 다 죽일 거 같은데.]
[…두목님께서 추적은커녕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 하셨다.]
[…왜? 아무리 아르데라도 제 부하들이 당했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텐데.]
[두목님께선 추적 이후에 있을 더 큰 싸움을 경계하신다. 인간들을 쓰러트려 봤자 더 많은 인간들이 몰려올 뿐이라고 하셨지.]
[…과연.]
오래 산 몬스터답게 그 지혜가 남달랐다.
보통 몬스터라면 전혀 생각하지도 않을 곳까지 세심히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건 아닌가?]
아무리 아르데가 보통의 몬스터보다 훨씬 온화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몬스터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제 구역까지 들어와 제 부하를 해친 녀석들에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무른 성격은 아니었다.
[두목께서는 어디까지나 단체로 움직이는 것을 금지하셨지.]
[…그렇군. 개인으로서의 응징은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해도 어디까지나 적당히다. 복수가 좋다고는 하지만 제 몸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 말하는 레드 와이번의 말에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복수가 중요하긴 하지만 제 몸을 희생시킬 필요는 없었다.
나 역시 그것을 알기에 확신이 든 지금까지 조용히 참아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레드 와이번과 사소할 잡담을 나누던 사이, 마침내 다음 계층으로 향하는 전이문에 도착했다.
녀석과는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는 전이문을 통과했다.
당분간 계속해서 올라갈 예정이다.
용암 구역에서는 아쉽게도 별다른 트러블이 생기지 않았다.
다른 구역과 달리 에어리어 보스인 아르데의 주도 아래 각 계층마다 끈끈한 연결고리가 있는 용암 구역의 특성상, 이미 내가 돌아왔다는 것이 다 소문이 난 모양이다.
그것도 원래의 몸이 아닌 인간의 몸으로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 세세한 인상착의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소름도 돋았다.
* * *
55계층. 평야 구역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넓은 평지만이 가득한 땅. 그리고 그 어느 구역보다 그 기후가 몹시 극적인 곳이기도 하다.
마침 내가 55계층에 도착했을 때는 천둥·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불고 있었다.
절로 옛 기억이 떠오른달까? 당시에 했던 고생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고생했었지.
그리고 그 고생은 성장한 지금에 와서도 그닥 바뀌지 않았다.
단순히 덥고 추운 것이라면 내성이라도 있어서 견디겠지만, 그냥 날씨가 지랄 맞은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빨리 지나가자.
못해도 SA랭크의 몬스터를 만났다.
[오크 로드].
수많은 오크를 거느리는 군주형 몬스터로 집단전이 주를 이루는 평야 구역에서 과히 최강이라 부를 만한 녀석이었다.
척 봐도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은 것이 아무래도 구역주(에어리어 보스)인 모양이다.
가급적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무시하려 했으나 녀석의 기세가 내게 덤빌 생각 한가득이었다.
아무래도 인간의 몸 상태라 그런 것일까?
나도 꽤 얕보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같은 SA랭크 몬스터를, 그것도 에어리어 보스를 상대로 인간의 몸으로 싸우기에는 문제가 있었기에 곧장 인화의 술을 풀었다.
삽시간에 덩치를 부풀리고 작은 산만큼 커진 내 모습에 녀석이 한순간에 기겁한다.
녀석은 급히 부하들을 불렀다.
A랭크도 많이 보이고 S랭크도 종종 보인다.
꽤 강력한 군단인 모양이다.
녀석이 의기양양한 얼굴을 해 보인다.
오랜만에 제 스스로 몸을 움직이게 된 왼쪽이가 드물게도 흥분했다.
녀석이 제 이마의 <마안>을 사용했다.
녀석이 가진 마안의 능력은 정신 지배와 매혹이다.
수백 수천은 되어 보이던 오크 군단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꽤 장관이었다.
오크 로드가 당황한 것이 눈에 보인다.
정신 지배에 걸려들지 않은 몇몇 측근들과 함께 녀석이 급히 몸을 피한다.
도망가는 걸까?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절대 그냥 놓치지 않는다.
그 수하들과 함께 사이좋게 잡아먹어 주었다.
오랜만의 포식이다.
오른쪽이가 특히 기뻐했다.
아니, 뺏어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맛있게 먹어라….
같은 SA랭크라고 하지만 오크 로드는 기본적으로 S랭크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
보통의 S랭크보다는 당연히 강하겠지만 SA랭크와 비교하면 상당히 뒤떨어진 수준이다.
그럼에도 녀석이 SA랭크의 몬스터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녀석이 다루는 군단에 있다.
직접적인 전투 능력보다 군단을 통솔하는 보조적인 능력에 많은 힘이 실려있는 만큼, 군단을 잃은 녀석은 나약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스노우와 열심히 단련했던 나한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 녀석이다.
앞서 말했던 대로 평야 구역은 최대한 빠르게 벗어날 예정이었다.
가끔 시비를 걸어오는 몬스터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몸인 탓에 많은 녀석들이 시비를 걸어와 내버려 둔 녀석보다 해치운 녀석들이 더 많았지만.
49층.
이 정도까지 올라오니 슬슬 헌터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평야 구역이 집단전을 기초로 둔 구역이다 보니 모여 있는 헌터들의 숫자가 꽤 많다.
제일 작은 그룹이 6, 70 정도이고 가장 큰 그룹은 무려 300에 달했다.
무심코 개미 같다고 생각했다.
붙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의 몸이라면 6대4나 7대3.
원래의 몸이라면 100퍼센트 이길 수 있었다.
한번 싸워볼까?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 아니다.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괜히 49계층에서 활동 중이던 헌터 전멸!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이후가 귀찮아질 것이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 심상 속에서 지켜보던 오른쪽이가 조용히 입맛을 다셨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조금만 참아라, 나중에 맛있는 걸 먹게 해줄 테니까.
그렇게 간혹 보이는 헌터들을 모두 무시한 채 당초 계획했던 대로 빠르게 평야 구역을 벗어났다.
그리고 도착한 41계층. 사막 구역.
처음 내게 제대로 된 미궁의 혹독한 기후를 느끼게 했던 바로 그곳이다.
거진 2년 만의 귀환이었다.
제72화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미궁을 공략하기 위해 각종 장비류를 착용한다.
마석이나 몬스터의 소재를 이용한 공장에서 생성된 기성품부터, 장인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오더 메이드의 특제품까지.
몇몇 헌터들이 드물게도 미궁제의 특별한 장비들을 착용하고는 하는데, 그 숫자가 너무 적어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참고로 미궁제의 장비들은 인류가 만든 장비와 비교해 하나같이 뛰어난 성능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비들은 당연하게도 헌터들이 죽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게 된다.
동료나 다른 헌터들이 회수해 간다면 또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시체와 함께 버려지는 게 정상이다.
그리고 헌터의 시체라면 몰라도 사실 이러한 장비류는 몬스터들에게 크게 필요가 없다.
그러니만큼 바깥에서의 상식대로라면, 따로 회수하는 사람이 없는 이상 미궁 곳곳에 헌터들이 쓰던 장비가 산처럼 쌓여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곳은 바깥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미궁.
헌터들이 쓰던 장비는 얼마 가지 않아 모두 사라진다.
미궁이 모두 흡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흡수한 장비를 통해 또 새로운 미궁제의 장비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미궁 곳곳에 헌터들의 시체나 장비가 산처럼 쌓이지 않는 이유다.
헌터들이 죽고 버러진 장비들.
나 역시 지금껏 적지 않은 헌터들을 죽여왔기에 꽤 많은 장비류를 만나보았다.
캐리일 적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고가의 장비들이 여러 개.
당연하게도 내가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안타깝게 나는 뱀(몬스터)다.
헌터들의 장비를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방법이 없었다.
헌터의 장비는 기본적으로 모두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래서 낙담한 채 그 고가의 장비들을 모두 버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저것들을 도로 내다 팔기만 해도 수십 수백억은 거뜬히 벌 수 있겠지만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나는 인간의 몸. 버려진 헌터들의 장비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굳이 내가 쓰지 못할 장비라도 일단 챙긴 다음 밖으로 나가 되팔면 되었다.
'만약을 생각해서 자금을 벌어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여러 변수 탓에 복수가 당장 어떻게 진행될지는 몰랐지만 바깥에서는 자금이 있는 게 좋았다.
어느 상황에서든 기본적인 대처가 가능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잔뜩 챙겼다.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딱히 먼저 헌터들을 건드리지는 않았으니까.
정말이다.
…조금 유도하기는 했다.
* * *
60명 남짓한 인원의 헌터들이 사막을 지나고 있다.
평야 구역을 목표로 한 것인지, 그 인원도 그렇고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서 마침 이제 나도 장비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을 얻은 나는 그들을 습격… 하지는 않고 조금 꾀를 부렸다.
내가 직접 그들을 공격하기에는 아무래도 앞으로 내가 쓸 장비들의 주인들이다 보니, 내가 나서기에는 조금 그랬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이제이.
2년 전부터 자주 애용하고는 했던 수법이다.
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던 적당한 몬스터도 있었고 말이다.
녀석을 적당히 이용했다.
* * *
화랑 길드는 국내 5대 길드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헌터들 사이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길드로서 중견급 길드에 속하는 곳이다.
그리고 화랑의 제3 공격대.
그들은 현재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그들의 현재 계층은 41계층.
이제 한 층만 더 지나면 목표로 했던 평야 구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번 원정은 화랑 길드 입장에서 꽤 중요한 원정이었는데, 길드 내의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제1, 2 공격대가 아닌 제3 공격대가 평야 구역의 원정을 성공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탄탄히 다질 예정이었다.
정예가 아닌 2군 전력만으로 평야 구역 같은 하층 구역의 원정을 성공하는 것은 대형 길드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화랑 길드가 앞으로 대형 길드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원정이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원정의 책임자로 뽑힌 것이 A랭크의 헌터 이현우다.
'…이번 원정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단순히 길드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현우 개인으로서도 이번 원정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그래야 지금 같은 임시 공대장이 아닌 정규 공대장이 될 수 있어.'
현 화랑의 공격대는 총 세 개.
그중 제1, 2 공격대는 각각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이끌고 있으니 이번 원정에 성공해 제3 공격대의 정식 공대장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길드 내의 요직에 앉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나도 이제 위로 올라갈 때가 됐어… 이번 원정에 성공해서 길드의 요직에 앉은 다음,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만 받는다면 나도 S랭크가 될 수 있을 거야.'
현 화랑에는 길드장을 제외하면 S랭크 헌터가 없다.
부길드장이 S랭크에 가까운 A랭크이기는 하지만 이미 나이를 먹어 노쇠해진 상태.
이번 원정을 끝으로 길드의 지원을 받아 성장만 한다면 장차 대형 길드가 될 화랑의 부길드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길드에서 스카우트 받을지도 모르지… 혹시 내 길드를 차릴지도….'
그러기 위해서라도 S랭크가… 이번 원정을 꼭 성공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원정에 관해 이현우는 꽤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였다.
이현우 본인이 A랭크의 헌터로서 평야 구역과 같은 하층 원정에 제법 자주 참여한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둘째는 이번 원정의 전력이 그리 낮지 않은 까닭이다.
아무리 주요 전력이 아닌 제3 공격대만의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화랑 길드의 수뇌진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정말 어중간한 전력만을 파견하지는 않았다.
현재 공격대의 전원이 C랭크 이상의 베테랑 헌터들이고 B랭크의 헌터도 상당수, 거기다 A랭크 헌터도 이현우 본인을 포함해 여섯 명이나 있다.
세간에는 어디까지나 2군 전력이라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1군 전력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쉽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견제할 이들이 다섯이나 있다… 저놈들도 말하지는 않겠지만 나와 비슷한 것을 노리고 있을 거야.'
이현우의 시선이 저를 제외한 다른 다섯 명의 A랭크 헌터를 차례로 훑었다.
어디까지나 이현우가 더 적합하다 판단돼 임시 공대장이 되기는 했어도 다른 다섯 명의 A랭크들이 그의 아래는 아니었다.
만약 상황에 따라서는 각자 개별적인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의 견제는 반드시 필요할 터.
'…그래도 어디까지나 이번 목표는 44계층. 그걸 잊어선 안 되지.'
아무리 원대한 야망이 있다 하더라도 이현우는 멍청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괜한 견제 때문에 원정이 실패해서야 본말전도나 다름없었으니까.
목표는 44계층에서만 자생하는 [만드라고라].
상급 회복약의 재료로 사용되는 식물을 채집해 돌아가는 것이다.
이현우는 그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다.
이후 이현우가 이끄는 제3 공격대는 문제없이 이동을 계속했다.
미리 목표로 했던 워프 게이트에 점점 더 가까워짐에 따라 이현우는 슬슬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
전이문 근처는 보통 헌터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곳인 만큼 몬스터들의 접근이 적었다.
5대 길드나 다른 대형길드의 헌터들이 주기적으로 싹 정리하는데 몬스터가 나올 리가 있을까?
던전 안에서 찾기 힘든 안전 구역에 속하는 만큼 이현우는 절로 안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고, 공대장! 몬스터 반응입니다!"
시작은 주변의 탐지를 맡은 감지계 스킬을 가진 헌터로부터였다.
B랭크의 노련한 헌터가 답지 않게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그 헌터 역시 전이문에 가까워짐에 따라 어느 정도 긴장을 늦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급한 외침에 이현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위, 위치는? 수는 얼마나 됩니까?!"
-다들 습격에 대비하세요!
당황하는 것도 잠시, 괜히 화랑 길드에서 이번 중요한 원정의 책임자로 뽑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이현우는 곧 능숙하게 지휘를 내렸다.
그의 명령에 맞춰 공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꾸렸다.
기본적으로 A랭크의 상위 헌터들이 전면에 나서며 그 뒤를 다른 헌터들이 보조하는 형태의 진형이었다.
과연 전원이 베테랑답게 금세 짜여진 진형은 탄탄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이것으로 어떤 몬스터가 오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터.
이현우가 금새 진정된 안색으로 전방을 예의 주시했다.
다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감지계의 헌터는 여전히 그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 표정을 확인한 이현우가 표정을 굳혔다.
"어떤 녀석이 오는 거죠? 수가 많나요?"
"…괴, 괴물… 괴물이 있어요…! 괴, 괴물이 있다고요!"
-다, 다 죽을 거야…!
공포에 질려 소리치는 B랭크 헌터의 모습에 이현우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평소 어느 상황에서든 침착하고 노련하던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설마 계층주…? 아니, 구역주인가? 하지만 사막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는 얼마 전 은하 길드의 2공격대가 토벌했다고… 설마 그 사이에 다시 태어난 건가?'
상황이 좋지 않다.
이현우는 어쩌면 전멸을 생각해야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신체를 긴장시켰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나든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불명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KIRAAA───!!!"
사막의 모래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지렁이다.
다만 보통의 지렁이와 달리 그 크기가 작은 산을 보는 것처럼 거대했으며 그 주둥이는 수백 개의 날카로운 이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샌드 웜].
사막 구역에서 출현하는 최소 B랭크의 몬스터로, 사막 구역에서 자주 만나는 녀석들 중 하나다.
특히 모래 아래에서 몸을 숨기다 갑작스레 습격하는 경우가 많기에 많은 헌터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흉악한 몬스터.
녀석의 등장에 이현우가 급히 소리쳤다.
"다들 산개!"
이현우의 명령에 공대원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러면서도 절대 허둥대지 않고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이동했는데, 샌드 웜의 특징이 눈이 퇴화한 대신 진동을 느껴 먹이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은 하나! 한 번에 몰아쳐라! 물리 내성이 높으니 마법 위주로 공격해!"
이현우의 명령에 공대원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A랭크의 헌터들을 위주로 마법 스킬이 한꺼번에 샌드 웜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KIRAAA….!
그렇게 샌드 웜은 얼마 가지 못해 쓰러졌다.
일반 샌드 웜치고는 꽤 강한 개체였던지 A랭크 상당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A랭크가 여섯이나 되는 공격대의 파상공세를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수월하게 쓰러진 녀석에 이현우는 물론이고, 공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
"후…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군요."
샌드 웜은 지금 3 공격대의 수준이 아니라도 어느 정도 노련한 헌터가 있는 공격대라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B랭크의 헌터가 그리 호들갑을 떨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현우가 다소 가벼워진 어조로 B랭크의 헌터를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고작 이 정도가지고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세요…?
이현우의 뒷말을 조용히 삼켰다.
여전히 퍼렇게 죽은 안색으로, 이전보다 더 공포에 질린 듯한 감지계 헌터의 얼굴을 본 탓이다.
"괴물… 커다란 뱀… 녀석이… 녀석이 지켜보고 있어… 다 죽을 거야… 다 죽을 거라고…."
모두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이현우의 얼굴이 흠칫 굳어진다.
"무슨…?"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이현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굉음이 울린 탓이다.
공대원 중 몇이 피와 살점을 흩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꺄아아악!"
"…새, [샌드 이터]다!!!"
"새, 샌드 웜도 다수 출현!"
S랭크.
못해도 한 계층의 계층주나 심하면 구역주로도 분류될 만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의 샌드 웜은 그저 새끼로 보일 만한 압도적인 커다란 덩치.
못해도 4, 50미터는 훌쩍 넘길 만한 녀석의 등장에 사막은 한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잠시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현우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급히 소리쳤다.
"젠장! 산개! 산개하세요! 기존에 정해놓았던 조별로 행동! 샌드 이터는 우선 저와 A조가 맡겠습니다! 다른 조들은 샌드 웜들의 퇴치를 우선하세요!"
갑작스레 연달아 일어난 두 번째 습격치고는 꽤 빠른 대응이고, 대처였지만, 아쉽게도 상대가 나빴다.
상대는 S랭크의 몬스터.
정상적인 상태라면 현재 제3 공격대의 수준으로 어렵지 않게 토벌했을 상대지만 이런 기습에서는 답이 없었다.
난동이라도 일으키듯 사납게 움직이는 샌드 이터의 파괴적인 행위에 아무리 배테랑 헌터들이라도 쉽사리 대응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공대원들이 샌드 웜 무리에게 산채로 뜯어 먹힌다.
당장 구하러 가고 싶지만 눈앞에는 샌드 이터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이대로라면 눈앞의 녀석을 토벌하더라도 공격대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한 상황.
이번 원정은 실패다.
이현우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젠장…!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네 녀석…! 네놈 때문에…!"
죽어가는 공대원들.
원정 실패.
눈앞에서 놓친 꿈.
그에 대한 분노로 흥분한 이현우가 곧장 샌드 이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그를 따라 다른 A랭크의 헌터들도 몸을 날렸다.
이후의 원정이 어찌 되든, 공대원들을 구하려든, 일단 어떻게 해서든 눈앞의 적- 샌드 이터를 쓰러트려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한 마리의 뱀- 사람이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거대한 샌드 이터에게 달려드는 헌터들의 모습이 불나방이나 다름없었다.
제73화
헌터들은 어찌어찌 [샌드 이터]를 쓰러트리는 것에 성공했다.
비록 60명이던 인원이 겨우 열 명 남짓밖에 남지 않았지만.
최소 에어리어 보스급으로 추정되는 S랭크 몬스터를 토벌한 것이니만큼 나름 자랑스러워해도 될 만한 공적이다.
그것도 S랭크 헌터 하나 없는 전력으로 말이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감탄했다.
'현재 헌터들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
내 생각보다 더 떨어지는 헌터들의 기량.
얼마 전 레드 와이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눈앞의 헌터들도 꽤 수준 높은 이들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침 지나가던 적당한 놈을 도발해서 그들에게 유도해 보았는데 놈 한 마리만으로 성대하게 전멸 위기다.
물론 놈의 부하들로 보이는 자잘한 몬스터들이 있었지만 워낙 미미한 수준이다 보니 굳이 승패에 별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찌 되었건 잔뜩 기대했던 것치고 헌터들의 기량은 생각보다 더 형편없었다.
괜히 실력을 보겠답시고 몬스터를 유도할 필요가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마침 왼쪽이가 좀 심심해하던 참이었으니 차라리 직접 나서는 게 나았을 정도로.
'아니. 저렇게 허약한 상대면 괜히 나섰다가 김만 새겠지.'
그리고 제대로 날뛰지 못한 왼쪽이의 짜증은 오롯이 내 몫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이 역시 나았다.
'그래서 슬슬 내 장비들이나 회수하러 가볼까?'
당초 목표로 했던 장비들의 회수를 시작해야겠다.
비록 아직 열 명 정도의 인원이 살아남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슬슬 오른쪽이의 식사 시간이었으니까.
* * *
"헉… 허억… 해, 해치웠나…?"
이현우가 격해진 숨을 몰아쉬었다. 마법과도 같은 부활 주문에도 쓰러진 샌드 이터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헌터들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살아남은 인원은요?"
"…총원 스물일곱입니다. 그중에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안 되는 중상자가 열셋입니다… 경상자는 제외했습니다."
"경상자가 아닌 사람이 없으니까요…."
이현우가 쓰게 웃었다.
S랭크 몬스터인 샌드 이터를 쓰러트린 것은 좋았으나 그 피해가 너무 컸다.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사망. 사실상 전멸이라고 해도 좋을 수치다.
'원정은… 포기해야겠지.'
엄연히 포기가 아닌 실패였다.
그것도 유례없을 정도의 처참한 실패.
무사히 살아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번 일로 인해 어떤 독박을 쓰게 될지 이현우로서는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한순간 이대로 그냥 죽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될 정도로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이현우는 어디까지나 이번 원정의 책임자이자, 임시라고는 하지만 제3 공격대의 공대장.
이런 곳에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래. 끝까지 책임은 져야지.'
S랭크의 헌터.
화랑 길드의 부길드장.
나아가 그 이상까지 꿈꾸던 이현우였기에 마냥 상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못해도 플로어 보스… 어쩌면 에어리어 보스를 잡았을지 모른다. 비록 원정은 실패했지만 이건 이것대로 기회다.'
짧은 순간 거기까지 상황을 판단한 이현우가 다소 밝아진 안색으로 몸을 움직였다.
일단 살아남은 공대원들을 추스르고 미궁을 탈출해야 했다.
'일단 발이 빠른 인원 몇몇을 차출해서 지금 상황을 바깥에 알린 다음 지원을 부탁한다. 그리고 중상자들은 포션으로 치료하고….'
생각을 이어가던 이현우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부상자 또는 동료의 시체를 살피던 헌터들의 한가운데 처음 보는 웬 사내가 조용히 서 있었다.
짙은 검은색 계통의 한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의 한복 차림이 조금 특이하기는 했으나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공장 같은 데서 생산되는 기성품이라면 모르겠지만 오더 메이드의 장인 제품이나 미궁제의 제품 중에 특이하게 생긴 것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입고 있는 장비가 특이하다 해서 괜히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현재 사내가 있는 곳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사막.
방금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르던 곳 한가운데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타난 사내.
비록 남자에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이현우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감이 경고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서는 느낌이다.
"…누구시죠?"
정체불명의 사내는 그래도 어디까지나 인간.
경계는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격렬했던 전투의 소리를 듣고 자신들을 돕기 위해 달려온 상위 랭크의 헌터일 수도 있었으니까.
조심히 사내를 부르는 이현우의 태도가 몹시 정중했다.
사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눈동자로 치열했던 전투 현장을 가볍게 훑어볼 뿐이다.
그 무심한 눈동자가 쓰러진 시체들, 정확히는 그 품의 장비들을 향하고, 이윽고 이현우 자신의 장비들을 가볍게 쓸어본 순간.
정체 모를 한기에 이현우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순간 사내의 눈에서 새빨간 붉은빛을 본 것도 같았다.
그렇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이현우가 재차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매 순간 공포에 질려 있던, 용케도 아직까지 그 숨을 붙이고 있던 감지계의 B랭크 헌터가 불현듯 소리쳤다.
"괴, 괴물이야! 커다란 뱀…! 녀석이 우릴…! 우리를 죽이러 왔어…!"
-도망쳐어어───!!!
비명처럼 소리치는 B랭크 헌터의 목소리에 이현우는 생각하기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앞서부터 경고해오던 그의 오랜 직감.
사내에게서 느껴지던 기묘한 위화감.
그리고 동료의 다급한 외침.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 이현우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사내를 향해 검을 내뻗었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사내를 죽이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이란 걸 느낀 것이다.
다만 이 재빠른 행동에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사내에게 달려들었다는 점일까?
사실 공격이 아닌 도망이라고 해서 그의 운명이 바뀔 일은 없었을 테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어…? 설마 내가 착각한 걸까? 정말 우릴 도우러 온 상위 헌터…? 그렇다면 당장 사과해야….'
검을 내뻗으며 무심코 생각을 잇던 이현우의 몸이 덜컥 멈췄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털썩 쓰러져 내린다.
원대한 야망을 가졌던 A랭크 헌터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모랫바닥 위로 몸을 잃은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고, 공대장…?"
"지금 무슨…?"
살아남은 헌터들 사이에 동요가 퍼져나간다.
전혀 상상치 못한 상황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머리가 따라잡지 못했다.
몇몇 눈치 빠른 헌터들이 이상함을 깨닫고 진작에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상대가 나빴다.
털썩- 털썩- 털썩-
사내가 무언가를 하기보다 앞서 살아남은 이들의 몸이 쓰러졌다.
모두 하나같이 보랗게 변한 얼굴로 입에서는 검게 죽은 피를 뱉어내고 있었다.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 독에 당한 것이다.
비록 몇몇 A랭크의 헌터들이 장비의 내성 따위로 저항하고는 있었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모두 얼마 가지 않아 이현우 때와 마찬가지로 쓰러져 내렸으니까.
"괴물… 괴, 괴괴, 괴물…!"
어느새 이 자리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감지계의 B랭크 헌터 하나뿐이었다.
도망가거나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사내를 보고 덜덜 몸을 떨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사내가 조용히 접근했다.
풀썩- 헌터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사내가 한차례 '아아'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마치 성대를 통해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라도 한 듯.
"나를 눈치챘었나?"
조그마한 호기심과 함께 별다른 고저 없는 사내의 물음에 헌터는 이번에도 '괴물'하고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완전히 공포에 질렸군. 따로 기세를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흘깃- 사내의 시선이 헌터의 가랑이 사이로 향했다.
누런 오줌에 헌터의 바지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사내가 작게 혀를 찼다.
"쓸 만하다 싶었는데 스킬만 좋은 거였나."
-아쉽게 됐군.
짧게 중얼거린 사내가 곧 흥미가 사라진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이후 사내는 여전히 공포에 질린 헌터는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조용히 쓰러진 헌터들의 시체에서 하나하나 장비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어찌나 여유로운지, 산산조각난 몇몇 헌터들의 시체…라기보다는 살점 사이에서 능숙하게 아이템 가방까지 찾아내 뒤적거렸다.
몸 곳곳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남에도 사내는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쓸 만한 건 몇 없군."
사내는 아쉬운 듯 작게 혀를 찼다.
그럼에도 이곳저곳 뒤적이며 모아둔 아이템 가방에 장비들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것을 보면 캐리일 적 옛 버릇을 다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여유롭게 장비들을 회수하던 사내가 마침내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더 이상 회수할 장비가 없다는 듯 가볍게 주변을 훑어본 사내는,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몇몇 헌터들의 시체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이내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
그때까지 B랭크의 헌터는 멍하니 '괴물'하고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짙은 피 냄새를 맡고 몇몇 몬스터들이 난장판이 된 사막으로 몰려들었다.
홀로 살아남은 헌터가 어찌 되었을지는 바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 * *
적당한 곳을 찾아 회수한 장비들을 한차례 살폈다.
앞서 가볍게 훑어보기는 했으나,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정확히 그 용도를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비록 감정 스킬이 없어 어느 장비가 좋은 것인지 알지는 못했지만.
장비에서 나오는 대략적인 마력의 흐름만 보고서 어느 정도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헌터들의 수준이 별 볼 일 없던 것 치고 장비의 수준은 꽤 높아 보였다.
다행이다.
참고로 장비와 함께 회수해온 헌터들의 시체는 오른쪽이가 해치웠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몸 상태로 먹기는 좀 그런지라 모처럼 원래 몸으로 돌아갔다.
모처럼의 상황에 왼쪽이가 흥분해 포효를 내질렀다.
정체불명 상위 랭크 몬스터의 포효에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헌터들도 소란스러워졌다.
민폐다.
아니, 나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 물지 마라.
그래, 앞으로는 네가 직접 나서게 해줄 테니까.
그래, 그래. 착하다.
그런데 왜 또 무는 걸까?
딱히 나는 널 설이 대하듯 한 적은 없다만….
아니, 사실 조금 그렇게 하기는 했다.
그래, 이번에도 내 잘못이니까. 물지 마라.
슬슬 비늘이 깨질 것 같다.
이런 느낌으로 오른쪽이는 식사를, 왼쪽이는 까칠하게 앙탈을 부릴 동안 나는 차분히 장비들을 살폈다.
대부분 내가 캐리일 적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준의 장비들인지라 그 성능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마력을 통해 추측해서 이쪽이 더 좋지 않을까 판단할 뿐이다.
이래서 될 수 있으면 장비의 수준을 말해줄 헌터 하나를 살리고 싶었던 건데….
내 존재를 눈치챈 헌터 하나가 꽤 마음에 들었으나 아쉽게도 최종적으로 탈락이었다.
그렇게 완전히 넋이 나가서야 제대로 내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응? 네 <마안>을 쓰면 된다고?
확실히 왼쪽이의 <마안>이 정신 지배이기는 하지만….
…조금 멍청했다.
반성하고 있으니까 제발 좀 그만 물어라.
다음에는 충분히 상의해서 해결할 테니까.
겨우겨우 왼쪽이를 달랬더니 이번에는 오른쪽이가 배고프다고 난리다.
건장한 헌터 다섯을 먹어치우고도 성에 안 차나 보다.
확실히 우리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그럴 수는 있다만….
알았다. 왼쪽이만 챙기지 않고 확실히 너도 챙겨줄 테니까.
"캬아아아───!!!"
[누가 누굴 챙겨!]
"쉬이이이─!"
[배─고─파─!]
왠지 설이와 스노우가 격하게 보고 싶어졌다.
이 둘에 비하면 설이는 천사가 아닐까?
"컁컁─!"
설이의 신난 모습을 떠올리니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내 양쪽의 파트너들과 동급 정도는 될 것 같다.
아, 물론 토순이도 보고 싶다.
사실 나보다는 오른쪽이가 더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토순이의 안전을 생각해서 열심히 말렸다.
어쨌거나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조금 더 서두를 필요를 느꼈다.
복수 따위 금방 끝내자.
제74화
서울의 한 도심가. 높이 뻗은 빌딩 사이.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창밖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똑똑-
"길드장.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들 두드리며 정중히 물어오는 질문에 길드장이라 불린 젊은 사내가 "들어와"하고 무심히 답했다.
이윽고 가지런히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 하나가 조용히 내부로 들어선다.
현 화랑 길드의 부길드장 A랭크 헌터 송명신이었다.
그는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 나이는 60을 훌쩍 넘겼다.
조용히 들어온 송명신의 모습에 창밖만 바라보던 젊은 사내, 현 화랑 길드의 길드장 S랭크 헌터 송재하가 몸을 돌렸다.
그 역시 보이는 것과 달리 나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송명신만큼은 아니었다.
길드장실로 들어선 송명신은 방의 주인인 송재하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내빈용 쇼파에 몸을 앉혔다.
그런 그의 태도에 송재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연스레 그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삼촌."
흘깃-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한 송재하는 편하게 송명신을 대했다.
두 사람은 단순한 부하직원 사이의 관계가 아닌 가까운 친척 사이다.
"내가 뭐 못 올 것을 왔냐? 조카 얼굴 좀 보러 온 건데 뭐."
"…평소에 자주 보러 오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또 숙모님 피해서 온 거예요?"
"크흐흠…! 이 녀석 무슨 말을…! 내가 어디 와이프 눈치 볼 사람이냐? 나 송명신이야, 송명신! 네 아버지랑 같이 이 화랑을 여기까지 키운 사람!"
가슴을 탕탕 치며 과장되게 말하는 송명신의 모습에 송재하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있는 일인 모양이다.
"그 대단한 사람이 숙모 눈치만 보고 계시죠… 그것도 결혼하고 40년째 내내요."
"크… 크흐흠…! 네 숙모가 사실 엄청 대단한 사람이야. 헌터도 아니면서 무슨 힘이…."
"그 얘기 숙모 앞에서는 하지 마세요."
"…나도 안다. 저번에 지나가듯 말했다가 맞아 죽을 뻔했어…."
"…힘내세요."
삼촌과 조카 사이에 잠시간 단란한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익숙한 넋두리에 정신이 반쯤 나갈 것 같던 송재하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삼촌. 이번 원정은 어때요? 왜 삼촌이 은퇴하겠답시고 편성했던 제3 공격대요."
"그래서 네 숙모가 말이다… 응? 아, 그거… 별문제는 없을 거다. 공대장 맡은 녀석이 꽤 똘똘한 녀석이거든. 야망이 꽤 크기는 하다만… 싹수가 있어. 끼워 넣은 다른 놈들도 다 괜찮고. 길드 평판에 문제를 일으킬 일은 없을 거야."
"그것 참 다행이네요. 이번 일은 길드 입장에서도 꽤 중요하니까요."
"야야, 아무렴 이 삼촌이 은퇴가 하고 싶다 해도, 설마 길드와 관련된 일까지 대충대충 처리할까?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지!"
"…평소 행실을 좀 생각해 보세요."
중얼거리듯 읊조린 송재하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그의 삼촌은 기본적으로는 참 유능한데 이렇게 사적인 자리만 되면 한없이 헤퍼지는 남자였다.
물론 그것이 삼촌의 매력이라고 숙모에게 듣기는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냥 바보 삼촌 같다 이 말이지….'
그리 생각하며 재차 한숨을 내쉬는 송재하였으나, 그러면서도 삼촌의 말처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의 삼촌이 헤프기는 참 헤펐지만 그래도 할 때는 하는 유능한 남자였으니까.
그러니 그의 엄격한 아버지가 아무리 가족이라고는 해도 부길드장의 자리에까지 그를 앉힌 것이고 말이다.
애초에 송재하 역시 길드의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모든 것을 제 삼촌에게만 맡겨두지 않았다.
그 역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은 모두 끝마친 이후다.
이제는 그저 가만히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
그렇게 재차 삼촌과 조카 사이의 단란한(일방적인)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행동은 이윽고 다급하게 길드장실을 찾아온 비서에 의해 끝나고 말았다.
그 순간만은 송재하로서 참 다행인 일이었다.
그 심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
"그, 그것이… 저, 전멸이라 했습니다."
"...."
화기애애했던 길드장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시종일관 밝게 제 이야기를 늘어놓던 송명신도, 싫은 듯하지만 그래도 즐겁게 그 이야기를 듣던 송재하도.
두 사람 모두 비서가 가지고 온 소식에 얼굴을 굳혔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지금 전멸이라고 하셨나요?"
"네, 네네네, 넷!"
"그게 그러니까 군사적 의미의 전멸이 아닌 사전적 의미의 전멸이죠? 그 완전히 다 죽었다고 할 때의 그 전멸이요."
"네, 넷! 마, 맞습니다!"
후….
송재하의 입에서 많은 의미가 함축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뿜어나오는 기세에 소식을 전하러 온 비서의 안색이 퍼렇게 죽어가기 시작했다.
일반인인 그녀가 S랭크의 헌터가 내뿜는 기세를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진정해라."
"…진정이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전멸이라잖아요, 전멸…!"
속에서 차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치는 송재하의 모습에 송명신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흘깃 비서를 바라본다.
그제야 함께 있던 비서의 존재를 눈치챈 송재하가 '하' 하고 숨을 내뱉으며 내뿜던 기세를 도로 거두어들였다.
비서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나가 보세요. 이번 관련된 사항은 빠짐없이 정리해서 보내 주시고요."
"네, 네! 길드장님!"
"…미안합니다."
송재하의 사과를 받는 둥 마는 둥 받은 비서가 급히 길드장실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히고 송재하가 탄식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한차례 거두어들였던 기세가 다시 스멀스멀 차오른다.
그에 송명신이 입을 열었다.
"조절 좀 해라. 나도 견디기 힘들어. 이 나이 먹고 내가 네 눈치까지 봐야 하냐?"
"…상황이 상황이잖습니까? 어떻게 참아요."
"이미 벌어진 일이다. 지금은 사태를 잠재울 방안을 생각해야 돼."
송명신의 이야기에 송재하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욱신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짚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알았을까요?"
"일단 대형 길드 쪽은 다 알고 있다 봐야겠지. 우리랑 사이가 좋지 않던 놈들은 당연할 테고. 그놈들이 이야기를 흘릴 테니 곧 기자들도 알겠군."
"…젠장. 곧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겠군요. 화랑 길드가 원정에 실패했다고."
"그것도 무리하게 2군 전력을 내보냈다가 아까운 헌터들 모두 잃었다고 말하겠지. 사실이 그렇고."
"화랑 길드 원정 대실패. 공격대는 전멸… 기사 제목이 벌써부터 보이는군. 제기랄…!"
답답한 마음에 송재하가 쾅-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S랭크 헌터의 분노가 담긴 주먹질에 팔걸이는 너무나 쉽게 부서져 나갔다.
흘깃 부서져 날아가는 팔걸이의 파편을 바라보던 송명신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책임지마."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삼촌?"
"이번 일 내가 전부 책임지고 해결하마. 전 길드장의 동생이자 현 길드장의 삼촌인 내가 나서면 좀 잠잠해지겠지."
"…삼촌."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다. 애초에 내가 키운 판이니까 내가 책임지는 게 맞아. 이참에 은퇴도 하고 좋지 뭐."
농담처럼 덧붙이는 송명신의 말에도 송재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지금 송명신은 제 스스로 제 몸에 오물을 묻히겠다고 한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화랑 길드의 전임 길드장과 함께 화랑을 여기까지 일으켜 세운 장본인.
비록 랭크는 A에 불과했지만 화랑 길드 내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하는 것이 바로 송명신이다.
그런 그가 직접 일선에 나서며 앞으로 받게 될 모든 비판들을 오롯이 홀로 책임지겠다고 한 것이다.
평소 저 스스로 화랑을 키웠다는 명예와 자부심으로 살아가던 그였으니 이번 일로 인해 받게 될 오명이 얼마나 가슴 아플까?
그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던 송재하는 차마 제 삼촌에게 그만두라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지금 가진 최선의 수라고 판단하고 있던 탓이다.
송재하는 송명신의 조카이기 이전에 화랑의 길드장이다.
그렇기에 그는 차마 제 삼촌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송재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던 까닭인지, 앞으로 제게 일어날 일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송명신은 크게 웃어 보였다.
"이놈아, 걱정하지 말래도.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냐. 화랑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신 형님을 위해서라도. 나는 너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어."
"삼촌…."
"그러니 이번 일은 걱정 붙들어 매라. 삼촌이 잘 해결해 볼 테니까."
그리 말한 송명신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재하가 가만히 그런 송명신을 바라보았다.
"일단 상황이라도 한번 파악해 봐야겠지. 적당히 미궁 좀 둘러보고 오마. 이미 남은 건 없겠지만 보여주기식이라도 이런 형식은 중요하니까."
"…제1 공격대와 제2 공격대를 데려가세요."
"둘 다 붙여줄 필요 없어. 2공만 데려가마. 지금 같은 상황에 너무 많은 전력을 데려가면 또 상황이 요상해져."
송재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삼촌의 안위 때문에 1, 2 공격대를 모두 붙여줄 생각이었으나 송명신의 말대로 지금 같은 상황에 함부로 길드 내의 모든 전력을 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신에 지우를 데려가세요."
"1공 부공대장 말이냐?"
"차기 1공대장으로 키울 생각입니다. 똘똘한 녀석이니 삼촌을 잘 보좌하겠죠."
"그냥 대놓고 내 경호원이라 말해라, 욘석아."
"…그럼 경호원이라 하죠. 어쨌든 녀석을 데려가세요. 필요하다면 다른 인원도 차출해서…."
"됐다. 어디 먼 곳 가는 곳도 아니고, 제집 드나들 듯 항상 가던 곳인데… 제2 공격대만 해도 사실 과하다 싶어. 적당히 산책하듯 다녀올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가볍게 말하는 송명신의 태도에 더 이상 권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기세를 느낀 송재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의 삼촌이 거부한다면 그로서도 더 권할 수 없었다.
삼촌 조카 관계를 떠나서 아무리 길드장이라도 길드 내의 최고 원로에게 함부로 명령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되었으니 나는 가보마. 적당히 상황 파악하면서 입장 발표나 정리해라. 갔다 오면 딱 인터뷰 한번 하고 끝낼 수 있게."
"예, 삼촌. 여기 일은 제가 다 준비해 놓을게요. 그러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송명신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채 길드장실을 나섰다.
그런 송명신을 배웅하며 송재하는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골똘히 머리를 굴렸다.
그의 생각 안에 송명신이 돌아오지 못할 거란 걱정은 전혀 없었다.
너무나 안일하게도.
이것이 삼촌과 조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 * *
현재 36계층에 도착했다.
하층이라 그런지 헌터들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헌터들 사이에서 최근 떠들썩한 화제는 원정을 떠났던 어느 길드의 공격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강력한 몬스터라도 만난 모양이다.
미궁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라 별 대수롭지는 않았다.
그것보다 새롭게 얻은 장비들을 처분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기존에 누군가 사용하던 장비니만큼 정상적인 루트로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미궁 밖으로 나가면 암상이라도 찾아봐야겠다.
아쉽게도 캐리일 적 이쪽으로는 별로 연관되지 않아 암상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오랜만에 돌아온 사막 구역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역시 언데드뿐이다.
과거에도 질릴 정도로 상대했던 녀석들은 이번에도 질릴 정도로 내게 매달려왔다.
언데드.
죽지 않는 불사자.
그 이름만 들으면 상당히 강할 것 같지만 의외로 별 볼 일 없다.
언데드 중 가장 최하위인 스켈레톤은 G나 F랭크의 몬스터고 그 위의 좀비 같은 녀석들은 외관이 좀 징그러울 뿐.
상대하기 어려운 녀석들은 아니다.
헌터 마켓에서 적당히 구입한 싸구려 성수로도 쉽게 무력화되는 녀석들이니까.
다만 상위종의 개체 같은 경우는 꽤 어려운 타입에 속한다.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불사자'란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녀석들이니까.
실제로 사막 구역에 처음 발을 들였을 당시 날씨 다음으로 고생한 것이 바로 녀석들 때문이었다.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사기.
헌터들에게 가지는 적의 만큼이나 강력한 살아 있는 생명을 향한 증오.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 녀석들은 헌터들은 물론이고 몬스터들에게도 굉장히 강력한 난적에 속한다.
물론 지금은 내 밥이지만.
36계층의 플로어 보스 [듀라한]과 녀석을 따르던 언데드 군단이 볼품없이 쓰러져 있다.
각각 냉기에 꽝꽝 얼어붙어 있다거나 불에 활활 타올라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언데드라 그런지 독마법은 별 소용이 없었다.
사막의 지평선 한쪽을 가득 메운 언데드 군단의 시체.
덤벼오길래 무심코 저질러 버린 느낌이다.
마침 왼쪽이가 짜증을 내길래 덩달아 열이 오른 내가 화풀이를 한답시고 휘두른 마법에 녀석들은 맥없이 당했다.
과거에 그리도 멀게만 느껴졌던 그 듀라한과 언데드 군단이 지금의 내게는 가벼운 운동 상대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다시금 성장했다는 것을 느낀다.
정말 많이 강해졌구나.
그나저나 이대로 두면 분명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헌터들이 현장을 볼 텐데, 그럼 분명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라도 먹어치워야 할까?
언데드라면 옛날부터 몇 번이고 먹어 보았기에 녀석들이 무슨 맛인지는 잘 안다.
물론 당시에는 통째로 삼켰던 탓에 딱히 맛을 느낄 겨를은 없었지만.
어쨌든 녀석들 덕분에 당시 별 진전이 없던 <독 내성>의 랭크가 크게 올랐었다.
분명 <시독>이라고 했던가?
한차례 크게 앓았었는데, 당시에는 꽤 위태로웠지만 이제는 추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른쪽아, 한번 먹어보지 않으련?
편식 한번 한 적 없던 오른쪽이가 처음으로 먹을 것을 거부했다.
놀랍다.
오른쪽이가 거부한 관계로 이 많은 언데드 시체들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언데드는 묵은지 맛이 났다.
역시 다신 먹고 싶지 않은 맛이다.
차라리 스켈레톤이었다면 과자라도 먹는 셈 치고 아작아작 씹어먹었을 텐데….
왼쪽이가 비웃었다.
아니, 우린 어차피 한 몸이라 내가 먹어도 결국 네가 먹은 것도 되는데….
이상한 거 주워 먹지 말라고 성대하게 목을 물렸다.
설이와 스노우가 격하게 보고 싶다.
토순이도.
제75화
현재 계층은 33층.
게이트를 찾아 사막을 횡단하는 사이 헌터들을 마주쳤다.
남자 둘, 여자 넷으로 구성된 소규모 공격대였다.
지금껏 딱히 은신 상태로 다니던 것도 아니었기에 인간 상태로 이동하며 몇 차례 헌터들과 마주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말을 걸어온 적은 처음이었다.
"저기… 혹시 혼자세요?"
그것도 무슨 헌팅 대사 같은 조심스러운 말은 인간일 적에도 겪어보지 못했다.
흘깃 시선을 돌려 말을 걸어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건강한 미인이다.
"아아… 크흠… 예, 혼자입니다."
사념대화가 아닌 성대를 사용한 평범한 대화는 아직 익숙지 않았기에 가볍게 목을 풀었다.
여자가 슬며시 웃으며 말을 받는다.
"다른 일행분은 없으신가요? 상태를 보아하니 전투 중에 동료를 잃으신 건 아닌 거 같은데… 혹시 상위 헌터분?"
"…예, 뭐. 그렇습니다."
적당히 대꾸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사실 아까부터 게이트를 못 찾아 꽤 사막을 헤매던 상태였기에 짜증이 꽤 올라와 있었다.
무심코 눈앞의 여자 헌터에게 손을 뻗지 않도록 조절하는 게 힘들다.
미궁의 의지가 여느 때처럼 자꾸만 '죽여'하고 속삭이고 있으니까.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냥 사막 구역에서 혼자 다니시는 분은 흔치 않으니까. 혹시나 하고 말을 건 것뿐이에요. 애초에 상위 랭크 헌터로 보이시는 분한테 함부로 손을 댈 멍청이들도 없을 테니까요."
적당히 건성으로 답하는 내 모습을 경계라도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여자가 급히 변명하듯 덧붙였다.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그래서 용건은요?"
"아, 저기… 그게 저희가 사실 사막 구역은 이번이 초행이거든요… 그래서 혹시 상위 랭크 헌터분이시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내뱉은 여자가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자연스레 여자의 뒤편에 있는 그녀의 동료들을 보았다.
과연 대충 볼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상태가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전체적으로 꾀죄죄한 것은 기본이요, 장비는 꽤 망가진 상태였고 온몸에서 고생의 흔적이 엿보인다.
"초행이라… 여긴 33계층인데 꽤 깊숙이 들어오셨네요?"
"…저희 일행 중에 바보가 한 명 있어서요…."
그리 말한 여자의 시선이 흘깃 뒤편의 헌터 하나를 향했다.
짧은 단발머리의 여인이었다.
자연스레 다른 공대원들의 시선도 그녀를 향하는 것을 보니 꽤 전과가 있나 보다.
'낌새를 보니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직감>에 걸리는 것도 없으니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일부러 꾸몄다고 하기에는 저 꾀죄죄한 몰골은 너무 리얼했으니까.
정말 며칠은 고생한 것 같다.
'그래서 어찌한담…?'
한차례 헌터들을 훑었다.
모두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초롱초롱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구세주를 보는 듯한 시선이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이전에 약속한 것도 있기에 두 파트너들에게도 한번 물어본다.
[아까부터 시끄럽잖아! 죽이자! 죽여!]
[배─고─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느 의미에서 참 한결같아서 좋기는 하다만.
이럴 거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던 것 같다.
'미궁 밖의 정보를 모으려면 정보원이 필요하지.'
[그럼 조종하면 되지! 눈을 쓰자! 눈을 써! 그리고 죽여!]
[배──고오──파아─.]
'…아니, 죽일 생각은 없다니까.'
그래도 <마안>을 쓰는 것에는 어느 정도 동의를 표했다.
재차 헌터들을 훑으며 그들의 실력을 가늠했다.
C랭크 셋에 D랭크 셋.
사막 구역에서 활동하기에는 그리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상위 랭크의 몬스터만 피해 다니면 어느 정도 활동할 수준은 되었다.
딱히 <마안>에 저항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니다.
'그래, 결정했다.'
-왼쪽아, 부탁해.
담담히 속으로 되뇌는 것과 함께 한순간 몸의 제어권이 넘어가는 느낌이다.
<마안>의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왼쪽이가 잠시 몸을 차지한 것이다.
그렇다고 제어권이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샤아아───."
마치 뱀이 우는 것 같은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눈앞의 헌터들이 잠시 움찔하는 것과 동시에 곧 눈의 초점이 나간 채 멍해진다.
<마안>의 효과가 제대로 먹힌 것이다.
"수고했어."
[그래서 언제 죽여? 언제 죽일 거야?!]
몸의 제어권을 도로 되찾자마자 내 심상 속으로 돌아간 왼쪽이가 곧장 채근했다.
그에 '안 죽인다니까'하고 재차 되뇌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는 눈앞의 여자 헌터를 보았다.
눈앞에서 살살 손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어느 정도로 해놨어?"
[말 잘 듣게 만들었지! 그래서 언제 죽여?]
"…그래. 잘했어."
[죽이자! 죽이자고!]
미궁의 의지와 함께 쌍으로 죽이라고 하니 이제는 그냥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정말 <불굴> 스킬이 없었다면 반쯤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뭐, 왼쪽이는 정말 눈앞의 헌터들을 죽이라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단순히 나를 놀리려는 의도였지만.
왼쪽이도 '나'인 이상 지금 하는 작업이 꽤 중요하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죽이자─!]
…정말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해하고 있겠지…?
어찌 되었든 이른 느낌으로 앞으로 내 정보원이 되어줄 여성 명의 수족을 만들었다.
다행히 왼쪽이도 확실히 이번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지 완전히 인격을 파괴하는 수준으로까지 능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평소 성정을 보면 헌터 한둘쯤은 그리 만들었을 법도 하지만… 꽤 참아준 것 같다.
사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암시와도 같은 간단한 정신 지배.
내게 거스를 수 없고 내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상태다.
기본적인 인격이나 행동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은?"
"윤지수입니다."
제일 처음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여자 헌터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보이던 것 그대로 이 윤지수라는 헌터가 이 일행의 리더이자 공대장인 모양이다.
앞으로도 이들의 관리는 그녀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정신 지배도 특히 더 잘 먹힌 모양이고.
"그럼 첫 번째 임무다. 게이트는 어디에 있지?"
이후 윤지수 일행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장장 여섯 시간 가까이 헤매던 것치고 게이트는 꽤 가까이 있었다.
억울하다.
[바보─! 바아보─!]
[배─고─파─.]
이 도움 안 되는 파트너들 같으니라고….
상층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계속해서 윤지수 일행과 함께 행동했다.
그녀들만으로 보냈다가 모처럼 만든 수족들이 쓸모없어질까 걱정되기도 했고, 길 찾기의 내비로서 이만한 녀석들이 또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인간 내비게이션.
몹시 훌륭하다.
그렇게 윤지수 일행과 서로 상부상조하며 가끔 등장하는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이동한 끝에 꽤 빠르게 계층을 넘어갈 수 있었다.
나 홀로 움직였다면 못해도 며칠은 걸렸을 시간이 배는 줄어든 것이다.
이것만으로 이미 윤지수 일행의 쓸모는 입증되었다.
그리고 막 29계층에 도착했을 때, 100여 명에 달하는 대인원의 헌터 무리와 마주쳤다.
100여 명에 달하는 대인원.
전원이 C랭크 이상, B랭크가 과반수. A랭크가 상당수.
상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하고서 처음 보는 본격적인 대형 공격대였다.
비록 S랭크는 없었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헌터가 둘.
분명 하층 원정을 목표로 하는 이들일 것이다.
그 규모에 조금 감탄할 뿐 딱히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기에 윤지수 일행과 멀찍이 물러서서 그들이 지나가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옆에서 윤지수 일행이 조용히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 잠시 말씀 좀 묻겠습니다."
그들이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예기치 못한 상황이 찾아왔다.
일행의 한쪽에서 조용히 걷고 있던 중년 남성이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생긴 것은 그냥 평범한 아저씨 같았지만 앞서 S랭크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던 두 명의 헌터 중 하나였다.
흘깃 윤지수에게 눈치를 주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윤지수가 앞장서 헌터를 맞이했다.
저보다 상위 랭크일 것이 뻔한 헌터를 대하는 것에 대한 긴장감과 경계심에 몹시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중년 남성이 씩 웃었다.
"아뇨,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화랑 길드의 부길드장 송명신이라 합니다."
"화랑 길드라면…."
윤지수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뿐만 아니라 뒤로 빠져있던 다른 일행들도 조용히 탄성을 내뱉는 것을 보면 꽤 유명한 길드인 모양이다.
내가 캐리일 적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길드인데, 요 3년 사이 성장한 곳일까?
흘깃 옆의 일행들에게 시선을 주니 그들이 앞다투어 설명해준다.
화랑 길드.
전임 길드장이 하층 원정 중에서 사망한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현 길드장이 부임하며 최근 2년 사이에 크게 성장한 길드란다.
그 성장은 현재 진행형이며, 현 길드장은 국내 21명의 S랭크 헌터 중 하나로 머지않아 SA랭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큰 사내라고.
아직 길드 자체는 중견 길드급이지만 곧 대형 길드가 될 것이 분명하단다.
주식이라도 있으면 냉큼 샀어야 했다는 한탄도 들었다.
다만 바로 요 최근에 하층 원정을 떠났던 제3 공격대가 말 그대로 전멸당해 약간 휘청이고 있다는 것이 화랑 길드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저 대규모 공격대는…."
"아마 이번 사건의 조사를 위해 파견된 모양이에요. 보여주기식이기는 하지만 저런 건 중요하니까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얼마 전에 들었던 공격대 전멸 소식이 바로 이들의 이야기였나 보다.
그렇게 내가 일행에게 설명을 듣던 사이, 윤지수와 송명신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아, 그러니까 아가씨네는 33층까지밖에 못 갔다 이건가?"
"네… 보시다시피 저희 실력이 그리 좋지는 못해서요."
슬쩍 송명신의 시선이 일행을 향한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 속 잘 벼려진 칼날같이 예리한 눈빛이 차례차례 일행 한 명씩을 훑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나를 향한 시선이 잠시간 진득하게 머물렀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어느 헌터가 멀리서 지켜보던 내 존재를 알아챈 만큼 그 이후부터는 확실히 기색을 숨기고 다녔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애초에 들켰을 때는 그냥 다 죽여버리면 된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렇구만."
송명신은 그리 말하며 먼저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한 것일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묘하게 아쉬운 마음이다.
특히나 내 파트너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다 죽이자! 다 죽여!]
[먹을 거 잔뜩… 배─고─파아─.]
아니, 나도 아쉽기는 하다만… 너희들은 조금 지나친 게 아닐까?
"그래서 아가씨네들은 뭐 아는 게 없는 거지?"
"네… 안타까운 일이라 뭐라도 알려드리고 싶은데… 죄송해요."
"아니, 아니. 아가씨가 미안하긴 뭘 미안해. 정작 사과해야 할 것들은 저 아래의 몬스터들인데."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윤지수에게 송명신은 손사래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윤지수와 일행들을 차례차례 훑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훤칠한 게 미래가 아주 창창한 헌터들이야. 혹시 나중에 잘되면 우리 길드로 찾아와, 내가 아주 좋은 조건으로 계약해 줄 테니까."
가벼운 태도로 그리 말한 송명신이 이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네들의 귀한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네. 미궁 밖으로 나간다고 했던가? 조심해서 살펴 가게."
"…네. 부길드장님도 몸조심하세요. 바라시던 거 이루시길 빌게요."
"허허. 덕담 고맙네, 아가씨!"
기분 좋게 웃어 보인 송명신이 재차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떠나갔다.
그를 기다리던 공격대가 이내 다시 출발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윤지수를 포함해 일행들이 '헉'하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헉…! 완전 대박…! 저게 A랭크 헌터의 기세인가? 중간에 조용히 노려보는데 나 완전 지릴 뻔했어!"
"진짜 지린 거 아냐? 킁킁- 좀 냄새나는 것 같은데?"
"뭐래! 나 안 지렸거든?!"
아웅다웅 다투기 시작하는 일행들의 모습에 금세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적당히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이제 완전히 사라진 공격대가 있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아보─.]
'…갑자기 뭐가?'
[쟤들 말 못 들었어? 아까 그놈이 기세를 흘렸다잖아.]
'…그게 왜?'
[이 바아보─! 너 그 기세에 쪼는 척 조금이라도 했어?]
'…아!'
조용히 탄성을 터트렸다.
너무 미약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그 나름대로 일행들을 테스트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그 테스트에 걸린 모양이고.
'…어쩐지 너무 오래 쳐다본다 했지.'
[바보─! 멍청이─! 봐 봐! 쥐새끼도 하나 붙었잖아!]
왼쪽이의 말대로 마력감지에 느껴지는 기색이 하나 있었다.
공격대가 사라진 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 딱 그 말이 맞았다.
'…이거 당한 건가?'
[보기 좋게 당했네! 멍청하게! 상층이라고 너무 긴장을 풀고 있다 했어!]
'확실히… 조금 방심하고 있기는 했지….'
그런데 그게 상관이 있나? 상대가 저렇게 약한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멍청아─!]
'지렁이가 꿈틀거려도 별문제는 없는데….'
조용히 속으로 되뇌다 이내 말을 삼켰다.
이 이상했다가는 왼쪽이가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난은 이쯤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어쩔 거야?]
'일단 네가 좋아하는 걸 할 예정인데.'
[죽일 거야? 죽일 거지? 죽이자─!]
금세 태도를 바꾼 채 잔뜩 흥분하는 왼쪽이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덩달아 조용하던 오른쪽이도 흥분하고 있었다.
[밥…! 먹을 거 잔뜩…! 먹고싶다─!]
'…그래. 예정에는 없던 일이지만 모처럼의 포식 시간이다.'
오랜만에 오른쪽이가 만족할 만한 식사 시간이 될지도 몰랐다.
뭐, 이 녀석이 과연 만족할 때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이후 나는 조용히 윤지수 일행에서 떨어져 나왔다.
향할 곳은 당연하게도 한 곳밖에 없었다.
화랑 길드의 공격대가 있는 곳.
제76화
송명신은 연신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송명신의 보좌로 따라온 한지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응? 아, 1부공…."
"아까부터 자꾸 뒤만 쳐다보시네요"
"으음… 자네는 어때 보였나?"
대답 대신에 되묻는 송명신의 모습에 한지우가 잠시 제 턱을 매만졌다.
그가 조금 전 헤어졌던 헌터들의 모습을 조용히 떠올렸다.
"딱히 특별한 점은 못 느꼈던 것 같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던 헌터들이었으니까요. 단지 부길드장님 말씀처럼 그 남자가 조금 특이하다 싶었습니다만…."
그리 말한 한지우 역시 흘깃 뒤편을 바라보았다.
"생긴 게 조금 사납다, 날카롭다 뿐이지.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으음…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하지만 말야, 1부공… 평범한 헌터가 내 기세를 견딜 수 있을 거 같아? 다른 동료들은 전부 긴장하고 있었는데?"
"…관련 스킬이 있다거나 조금 둔한 사람이라면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대놓고 기세를 흘리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끄응… 그것도 그렇다만…."
"게다가 상대는 '인간'이었습니다. 이번에 3공격대를 전멸시킨 건 몬스터예요.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타이르듯 내뱉은 말에 송명신이 재차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그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자꾸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래서 제가 따로 사람을 붙이지 않았습니까? 곧 연락이 올 겁니다."
"그 붙인 사람은 괜찮은 녀석인가?"
"상위 랭크 몬스터 레이드에서 정찰조로 활동하는 헌터입니다. 은신술은 물론이고 추격에도 능합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담담히 자신하는 한지우의 말에도 송명신의 안색은 여전히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순간 눈동자가 붉게 번쩍인다 싶었는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감인지 아니면 늙은 사람 특유의 통찰력 때문인지, 송명신은 조금 전 만난 사내의 모습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다.
"에잉… 괜한 기우겠지. 그냥 느낌이 묘한 젊은이였을 뿐이야… 아무렴 사람인데…."
애써 불안함을 떨쳐 내려는 듯 한숨을 내쉰 송명신이 얌전히 붙여둔 감시인의 보고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그의 감각에 무언가 걸렸다.
"피해─!"
"피하십쇼─!"
송명신과 한지우가 소리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두 상위 헌터의 예민한 감각에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물체가 포착되었다.
두 사람이 훌쩍 몸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이 있던 자리로 무언가 펑- 하고 떨어져 내렸다.
데구르르….
툭-
"…머리?"
"…박은우 헌터?"
모랫바닥을 붉게 물들이며 몇 차례 바닥을 구른 정체불명의 정체는 사람의 머리였다.
그것도 앞서 한지우의 명령으로 헌터들을 미행하러 떠났던 바로 그 헌터 말이다.
은신과 추적술에 능하다는 헌터는 미행하러 떠난 지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목만 덩그러니 돌아왔다.
"이, 이 무슨─!"
"전원, 전투 준비…!"
제 직속 부하는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같은 길드 소속으로 제 아랫사람의 죽음이다.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송명신의 고함이 울렸다.
그것과 동시에 한지우가 재빨리 명령을 내린다.
이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헌터들이 당황은 뒤로한 채 곧장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습격을 대비한 진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막 진형을 쌓아 올린 헌터들 사이로 웬 사내 하나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사내는 당연하다시피 그곳에 서 있었다.
100여 명에 달하는 헌터들 중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송명신과 한지우를 포함한 몇몇 상위 랭크 헌터들뿐이었다.
어느 틈엔가 헌터들 사이에 자리한 사내의 모습에 송명신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자네는."
"음. 조금 전에는 미처 인사를 못 했었지. 다시 만나 반갑다."
긴장감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태연한 목소리에 송명신이 한차례 입술을 달싹였다.
짧은 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송명신의 시선이 흘깃 사내의 발치로 향했다.
조금 전 날아온 헌터의 목이 사내의 발밑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네가 그랬나?"
"이 헌터를 이리 만든 것이라면 분명 이쪽이 맞다."
"…어째서?"
"흐음?"
조용히 되묻는 송명신의 모습에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사내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궁 안에서 상대에게 미행을 붙였다… 그건 즉 무슨 꿍꿍이가 있다. 이거 아닌가? 이쪽은 단지 사전에 위협을 제거했을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
송명신이 조용히 탄식을 내뱉었다.
'이놈. 사람을 죽인 게 처음이 아니다!'
그 눈을 마주했을 때부터 느끼던 기묘한 불안함은 바로 이것이었나? 송명신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물론 미행을 붙인 것은 이쪽의 잘못이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지 않나? 그에게도 가족이 있어."
"사정 있는 사람이야 누구든 있지. 단지 그는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자네도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단 소린가?"
송명신의 말을 끝으로 어느새 진형을 사내를 포위하듯 바꾼 제2 공격대였다.
빠져나갈 구멍 없이 촘촘하게 저를 포위한 이들의 모습을 사내가 덤덤히 훑었다.
"책임은 그쪽이 아니라 내가 묻는 거겠지."
"…말만큼이나 실력이 있었으면 좋겠군."
사내의 태도는 헌터 100여 명. 그것도 전원이 C랭크 이상에 B랭크가 과반수.
거기다 A랭크 헌터도 상당수 포함된 공격대를 상대로 보일 만한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이만한 인원수를 상대로 제법 자신이 있는 것 같다만… 이만한 전력이면 S랭크 헌터라도 몸 성히 못 벗어난다.'
게다가 송명신이 아는 바 중에 사내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S랭크 헌터는 없었다.
그러니 잘 쳐줘 봐야 S랭크에 가까운 A랭크 헌터라는 뜻.
송명신은 일단 사내를 제압한 다음 천천히 대화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낌새가 이상해서 한번 살펴볼 생각뿐이었는데… 상황이 요상하게 흘러가는군… 지금 같은 상황에 괜히 구설수를 만들 필요는 없다만….'
길드원이 죽었다.
비록 그 원인을 따지자면 분명 이쪽이 시작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
길드의 체면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1부공."
"예, 부길드장님."
"확실히 제압하게. 시작은 이쪽부터였지만 저쪽은 길드원을 죽였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다소 상처를 입어도 괜찮으니 살아만 있게 해."
"예, 알겠습니다."
담담한 한지우의 대답을 끝으로 100대 1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따로 지켜보지 않아도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이었다.
설령 S랭크 헌터라도 이만한 숫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송명신이 덤덤히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일말의 불안함.
스멀스멀 차오르는 이유 모를 감정을 애써 눌러 참으며 송명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은퇴해야지, 원… 말년에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사정이야 어찌 됐든 자신이 괜한 기우 탓에 아까운 헌터 둘을 잃게 되었다.
괜한 오지랖만 부리지 않았어도, 사내를 미행하라 시켰던 헌터도 무사했을 것이고 저 당당한 사내 역시 무사했을 것인데.
'말년에 대한민국 헌터계에 못 할 짓을 하는구나… 형님 뵐 면목이 없어.'
송명신이 그리 한탄하던 사이 불현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멍하니 미궁의 하늘을 올려다보던 송명신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들려온 비명은 꽤 익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송명신과 대화를 나누던 제1 공격대 부공대장 한지우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송명신이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사내의 주위로 어느새 피투성이가 된 공대원들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 적지 않은 숫자가.
"이, 이게 무슨?!"
잠깐 한눈을 팔았던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악하는 송명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계속해서 공대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끄, 끄아악!"
"제, 젠장! 피해!"
"혜, 혜진아─!!!"
이미 주변은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였다.
팔다리를 잃은 헌터가 바닥을 뒹구는가 하면, 멀찍이서 기회를 엿보던 헌터는 온몸이 보랗게 변하며 피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불에 타 새까맣게 탄 헌터도 있으며 사막 한가운데서 꽝꽝 얼어붙은 헌터도 있다.
정신이라도 나간 듯 바보처럼 헤헤- 웃는 이들도 여럿이고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부공대장이었던 한지우의 상태가 가장 심하다.
사내의 손에 목을 붙잡힌 한지우는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것도 자신의 피가 아닌 다른 동료들의 피로 말이다.
한지우를 붙잡은 사내가 그를 마치 무기처럼 휘두른 까닭이다.
이미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인세의 지옥이 바로 이곳이다.
송명신의 입에서 노기 가득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노오옴──!!!"
분노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송명신이 사내를 향해 달려든다.
평소 애용하던 SA급 무기인 '청송검'이 주인의 분노에 따라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었다.
저를 향해 덤벼드는 송명신을 흘깃 바라본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한지우를 가볍게 던졌다.
"윽…!"
저를 향해 날아오는 한지우의 몸에 송명신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사이 수백 번도 더 고민한 송명신이 결국 어쩔 수 없이 한지우를 받아냈다.
다행히 처참한 몸 상태와 달리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끄… 끄어억!"
"부공! 정신 단단히 차리고 있게! 금방 치료해 주겠네!"
받아든 한지우를 급히 근처 바닥에 내려놓은 송명신이 재빨리 사내를 살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한지우를 던진 뒤 곧바로 공격이 날아오기 마련이지만 어째선지 사내는 조용했다.
송명신이 그 이유를 확인하니, 사내는 송명신에게는 전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다른 공대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저, 저놈이… 감히…!!!"
폭격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쏟아지는 마법 공격에 공대원들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나마 A랭크나 몇몇 B랭크의 헌터들이 분투하고는 있지만, 사내에게 접근한다 해도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이지 못했다.
'마법의 위력을 보면 마법 계열 위주의 헌터가 분명한데, 근접전도 그에 못지않다.'
분노하는 와중에도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송명신 꾹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는 건가? 설마 S랭크 이상이라고? 국내에 저런 헌터가 도대체 어디서…."
단순히 3공격대의 전멸 원인을 조사하려던 형식적인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늦은 후회일 뿐이다.
"젠장…! 전원 후퇴해라! 내가 잠깐이라도 녀석을 붙잡고 있는 사이 모두 도망치는 거다! 길드장에게 이 소식을 전해!"
송명신은 현명하게도 사내에게 총공격을 하는 것이 아닌 그나마 남아 있는 전력이라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아무리 S랭크 이상의 헌터라도, 나 역시 S랭크에 한없이 가까운 A랭크 헌터다! 수비에만 전념하면 잠깐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야!'
비록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지만, 그래도 남은 전력이라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면.
그리고 제 조카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다."
막 사내를 향해 덤벼들려던 송명신이 몸이 멈칫거렸다.
그의 시선이 멍하니 주변을 훑었다.
도망치던 헌터들이 일시에 쓰러져 나간 것이다.
사내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게 무슨?"
허망하다시피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깐 사이 잔뜩 쉰 목소리가 모랫바닥 위를 나뒹구는 공대원들의 모습을 향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수십의 헌터들이 쓰러졌다.
"말도… 말도 안 된다… 이, 이게 무슨…?"
"이건 역시 꽤 마력 소비가 심하군… 실전에서는 마음껏 못 쓰겠어."
"…'실전에서는'이라고? 그게 지금 무슨…?"
"흐음?"
조용히 중얼거리던 사내의 시선이 송명신을 향했다.
사내가 덤덤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너희로서는 제대로 된 실전도 안 되는군… 당신이나 아까 쓰러진 헌터가 처음부터 다른 헌터들과 협공했다면… 확실히 이 몸으로는 조금 힘들었을지 모르겠군."
"…네놈… 설마… SS랭크?"
덜덜 떨리는 송면신의 물음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농담도 재밌군. 진짜 SS랭크라면 이것과 비교도 안 된다. 그건 말 그대로 자연재해지."
"...."
송명신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사내의 이야기가 터무니없이 느껴진 까닭이다.
이미 송명신의 눈에는 사내 역시 재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수십의 헌터를 죽인 사내가 재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재해란 말인가?
"한 가지… 딱 한 가지만 묻겠다."
"뭐지?"
"이번에 전멸한 우리 3공격대… 혹시 네놈의 짓이냐?"
송명신의 물음에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상층으로 올라와서 건드린 대규모 공격대는 하나밖에 없었지. 당신이 말하는 3공격대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격대 하나를 전멸시킨 적은 있다."
"…역시 괜한 기우가 아니었군."
"당신 입장에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던 게 나았을 테지만."
"…그것도 그렇군. 괜한 오지랖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린 건가."
사내는 그저 가볍게 어깨만 으쓱였다.
여전히 한없이 태연하기만 한 사내의 태도에 송명신은 어째선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송명신은 그 웃음을 참지 않았다.
"또 하나만 더 물어도 되나?"
"얼마든지 물어도 상관없다. 시간은 널널하니까."
담담히 고개를 주억이던 사내가 불현듯 덧붙였다.
"아, 그래도 혹시 다른 헌터들이 올지도 모르니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군. 괜한 살생은 하고 싶지 않거든."
"흐… 괜한 살생이라… 이미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고도…?"
송명신이 느릿하게 주위를 훑었다.
군데군데 쓰러진 공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처참한 상태로 이미 숨이 끊겨 있었지만 몇몇은 끈질기게 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물어본다는 것은?"
"…자네 정말 사람인가?"
차분히 물어오는 송명신의 물음에 시종일관 태연하던 사내의 얼굴에 잠시간 놀라움이 번졌다.
사내가 그 놀란 표정을 전혀 숨기지도 않은 채 송명신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인간이 아닌 거 같은 기세를 펄펄 풍기는 주제에… 잘도 모르겠구나, 이놈아. 그 시뻘건 눈깔부터 좀 치워라. 오줌 지리겠군."
"그런 거치고는 상당히 담담한데 말이지."
"흐… 이 아저씨가 제법 잘나가던 사람이라… 자존심이 있는 법이지."
사내는 송명신의 말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예의 놀란 표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하… 인간으로 변신하는 몬스터라니…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될는지…."
"이쪽으로서는 딱히 인간들을 학살할 생각은 없지만… 뭐, 당신은 믿지 않을 거 같군."
그리 말한 사내가 느릿하게 송명신의 곁으로 다가왔다.
점점 제게 가까워져 오는 죽음의 모습에 송명신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염병… 말년에 별 지랄 같은 일이 다 생겨."
"혹시나 해서 묻지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나?"
"…뭐? 그게 뭔 개 같은 소리냐, 이놈아?"
"말 그대로의 의미다. 이쪽은 당신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를 위해 일할 생각은 없나?"
다소 뜬금없다 싶은 사내의 제한에 송명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사내의 제안을 고민한다기보다, 그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거절이다."
"그런가? 아쉽군."
"전혀 아쉽지 않은 표정인 주제에 말은 잘 하는군… 혹시 아까 일행들도 몬스터냐?"
"아니,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상위 랭크 헌터인 줄만 알고 있지."
"그나마 다행이군."
마지막에서야 조금 안심한 듯 송명신이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어느샌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뱀 새끼였군."
"…이건 또 놀랍군. 또 어찌 알았나?"
"눈깔이가 딱 뱀 눈깔인데 무슨… 알고 말 게 어딨어?"
송명신이 킬킬 웃었다.
그런 송명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사내가 마지막 말을 이었다.
"최소한 편하게 보내주지."
"참 고맙다, 이 괴물 놈아. 엿이나 먹어. 누가 순순히 죽어준다던?"
송명신이 검을 들어 올렸다.
무슨 수를 쓰든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상대를 눈앞에 두고 그는 검을 들었다.
"헌터로서의 자존심인가?"
"그런 거지, 이 괴물 놈아… 너 같은 녀석은 모르겠다만 원래 헌터란 이런 존재거든."
"…그래, 그걸 동경했었지."
송명신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중얼거린 사내가 한차례 몸을 풀었다.
"당신이란 헌터에 대한 예우로 나도 어느 정도 최선을 다해주지."
담담히 내뱉은 사내의 몸이 한순간에 부풀어 올랐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커다란 덩치.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새까만 비늘. 저를 노려보는 새빨간 눈동자.
그리고 세 개의 머리.
눈앞에서 마주한 괴물 본연의 모습에 송명신이 허탈하게 웃었다.
"니미… 편하게 보내준다며…."
* * *
이렇게 장장 40년에 가까운 시간 헌터로 활동했던 송명신이 그 길었던 생을 마감했다.
그와 함께 앞날 창창했던 100여 명의 상위 헌터들 역시 모두 그 목숨을 잃었다.
당연하게도 이 소식은 빠르게 미궁 밖까지 퍼져나갔다.
미궁 밖에 큰 소란이 일었다.
제77화
[방금 들어온 속보 알려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무리한 원정으로 길드 내 2군 전력의 상당수를 잃었던 화랑 길드의 소식입니다. 이번 전멸 사건 조사를 위해 파견했던 화랑 길드의 제2 공격대와 함께했던 부길드장 등의 주요 전력 일부가 그 과정에서 전원 전멸했다는 소식입니다! 이는….]
[현재 저는 화랑 길드의 본부 건물에 와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이번 사건으로 사망한 헌터들의 유가족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기자들로 북새통을….]
[헌터 협회는 이번 일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국내 5대 길드를 포함한 각 길드에 협조 공문을… 몇 년 만에 대미궁 전체에 대대적인 조사와 탐사를….]
[이번 사건으로 대형 길드로서의 약진을 준비 중이던 화랑 길드는 주춤할 수밖에… 사실상 전임 길드장의 사망 사건만큼이나 큰 타격을….]
[이 와중에 이번 조사대의 총책임자였던 부길드장이 현 길드장의 삼촌인 것으로 밝혀져… 일부에서는 무리한 혈연 경영으로 인한 폐해라….]
화랑 길드 본부 건물의 길드장실.
TV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뉴스 속보를 제외하면 길드장실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그것은 비단 평소 길드장실을 제집 드나들 듯하던 부길드장의 부재 때문만이 아니라, 이 방의 주인의 기분이 그만큼 저조했기 때문이다.
"...."
송재하는 소파에 앉아 들려오는 TV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딱히 분노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담담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어찌 보면 무척이나 평온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영 위태롭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의 삼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인상 좀 펴라고 한마디 했을 테지.
불현듯 떠오르는 제 삼촌의 모습에 송재하는 피식 웃었다.
입가로 번져나간 작은 웃음이 이내 점점 크게 그 소리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푹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송재하의 어깨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종래에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송재하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언제까지라도 이어질 것 같던 웃음은 어느 순간 딱 멈추었다.
그리고 숙어져 있던 송재하의 얼굴이 다시 위로 올라왔을 때, 그 위에 자리한 것은 더 이상 웃음이 아니었다.
분노라고 해야 할까 울분이라 해야 할까.
그것은 슬픔 같기도 했고 증오 같기도 했다.
딱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괴상한 표정을 지은 송재하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망할 미궁… 아버지 다음에는 삼촌이냐… 또 그 다음에는 뭘 뺏을 생각이지? 아버지와 삼촌이 남겨주신 이 화랑? 아니면 숙모나 사촌 동생? 도대체 이번에는 뭘 뺏어갈 생각이냐!"
쾅-!
내리친 주먹에 소파 앞의 탁자가 사정없이 터져나갔다.
그 파편이 이리저리 튀며 길드장실 내부가 엉망이 되었지만 송재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말릴 만한 사람도 더는 이곳에 없었다.
"하… 아냐, 아니야… 이렇게 화내고 있을 때가 아냐… 그래, 아버지나 삼촌이었다면… 이렇게 병신같이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지…."
송재하가 한차례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잠깐 사이 끓어오르던 분노를 진정시킨… 아니, 애써 속으로 삼킨 송재하가 평소의 냉정한 길드장의 얼굴로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천천히 하나씩 해결하자… 복수는… 그래, 복수는 나중에… 일단 내부부터 단단히 관리해야 해."
마치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걸듯 그렇게 중얼중얼 읊조린 송재하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송재하는 한 단체의 수장으로서 제 혈육의 죽음에도 함부로 슬퍼할 수조차 없었다.
평범하게 눈물 흘리기에는 그의 어깨 위에 있는 짐이 상당했으니까.
그렇다고 송재하는 전혀 잊지 않았다.
제 삼촌의 죽음을. 제 길드를 흔들었던 이번 사건을.
얼마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모든 진상을 밝혀낼 것이다.
이번 일에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줄 것이다.
송재하는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 * *
이전과 마찬가지로 쓰러트린 헌터들의 장비를 회수했다.
다만 지난번과 달리 그 수가 월등히 많았기에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그 숫자가 숫자인 만큼 모든 장비를 회수할 수도 없었다.
챙겨뒀던 아이템 가방이 상당히 부족했다.
적당히 봤을 때 좋아 보이는 장비만 따로 회수했다.
다 챙길 수도 없을뿐더러 이렇게 많은 장비를 다 가져가 봐야 어차피 팔기도 쉽지 않았으니까.
특히 마음에 든 것은 송명신 헌터가 사용하던 검이었다.
푸른색 손잡이에 새하얀 검신이 아름다웠는데, 왠지 모르게 스노우를 떠올리게 만들어 내심 나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당분간 내가 사용하다 스노우에게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
그것보다 스노우가 과연 검을 사용할 줄 알까?
뭐, 그녀라면 뭐든 잘 해낼 거 같은 이미지긴 하지만.
아마 문제없을 것이다.
참고로 헌터들의 시체는 오른쪽이가 먹어치웠다.
다만 모든 시체를 먹어치우진 못했는데, 역시 양이 너무 많았다.
남은 시신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몬스터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설마하니 배가 불러 더 먹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에 오른쪽이가 분한 듯 이를 간 것이 오늘의 주요 관전 포인트였다.
꽤 드문 상황에 왼쪽이와 함께 오른쪽이를 신나게 놀리다가 녀석이 잔뜩 삐졌다.
삐진 것을 풀어준다고 상당히 힘들었다.
미궁 밖으로 나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먹게 해준다는 약속을 해주고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약자멸시>라는 스킬이 생겼다.
많은 헌터들을 학살해서 생긴 스킬이라는데, 자신보다 약한, 정확히는 랭크가 낮은 적을 상대로 여러 가지 보너스를 받는 스킬이었다.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는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전형적인 양학용 스킬이랄까?
꽤 유용하다 싶은 스킬이 생겼다.
기쁘다.
이후 윤지수 일행과 다시 합류했다.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별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시 부하를 구할 수고를 덜어 다행이다.
그렇게 합류한 일행과 다시 상층을 향해 이동을 개시했다.
도중에 어째선지 상당수의 헌터들이 급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윤지수가 대표로 뭘 물어보기도 전에 다급히 아래로 향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조금 흥미가 생기기는 했지만 갈 길이 멀었던 까닭에 더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윤지수 일행의 착실한 길 안내와 내 완벽한 보호 덕에 우리는 곧 사막 구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마침내 도착한 산림 구역. 28계층.
무려 2년하고도 반년만의 귀환이었다.
맑고 푸른 청명한 하늘과 푸르르 수림이 나를 반겨준다.
"여기서 일단 헤어지지."
갑작스런 내 이야기에 조금 의아해하던 윤지수 일행이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내 정신 지배의 영향을 받고 있던 탓에 이내 별 이야기 없이 수긍했다.
제법 안전한 산림 구역까지 데려다주었으니 이제는 윤지수 일행의 실력만으로 무사히 미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윤지수 일행과 나는 헤어졌다.
따로 연락할 수단을 정하지는 않았으나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헌터인 이상 미궁 근처에 있으면 곧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 나를 위한 정보를 여럿 모아두면 좋겠다.
윤지수 일행이 떠나고 산림 구역 한가운데 홀로 남게 된 나는 잠시 느긋하게 주변을 살폈다.
마지막에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푸른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렇게 하염없이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역시 오지 않는 건가?"
그 풍경만은 분명 그대로였지만 과거와 달리 여왕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여왕 같은 에어리어 보스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헌터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저 깊은 하층이라면 몰라도 이런 상층에서는 무리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던 까닭일까, 아니면 여왕하고 별다른 감정의 교류가 없었던 까닭일까.
여왕의 부재를 직접 확인했음에도 슬프다거나 안타깝다거나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단지 조금 아쉬울 뿐이다.
그때와 달리 이번에 '아가'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제대로 된 반응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에게도 '닉스(Nyx)'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이 그저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설이랑 스노우가 보고 싶다.'
그렇게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나는 이윽고 몸을 옮겼다.
더 이곳을 있을 필요가 없었다.
현재 산림 구역에 따로 에어리어 보스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느껴지는 기척이 다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강한 녀석이 B 정도나 돼 보이는데, 저런 녀석이 에어리어 보스일 리가 없었다.
[바보! 여기는 산림 구역이라고! 저 정도면 틀림없는 에이리어 보스야!]
'...? 여왕은 A랭크였는데?'
[그건 여왕이 이상하리만치 강했던 거라고!]
'....'
왜 헌터들이 산림 구역을 '낙원'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다.
토순이도 여기서라면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산림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라고 판정되는 몬스터는 [골든 호크]라고 불리는 몬스터다.
이름 그대로 '황금색의 매'인데. 매치고는 꽤 큰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략 7, 8미터 정도 될까?
과연 에어리어 보스다운 위용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만, 아쉽게도 내 본체의 크기와 비교하면 너무 작지 않을까?
이전의 여왕과 비교하기에도 너무 작았다.
당장 산림 구역에 있을 때의 나하고 비교해도 작은 사이즈.
눈앞에서 마주한 매는 전혀 한 구역의 지배자라 불릴 만한 위용이 느껴지지 않는다.
[의외로 여왕한테 환상이라도 있는 거 아냐? 마마콤이라거나.]
'무슨 헛소리야?'
[그게 아니면 왜 멀쩡한 에어리어 보스를 붙잡고 괴롭히고 있는 건데?]
'…나는 단지 이 녀석이 내 눈앞에서 나는 게 거슬렸을 뿐이다.'
[…이제 와서 진지하게 말해봤자 소용없다, 이 바─보야.]
왼쪽이가 내 행동에 태클을 걸었지만 적당히 무시했다.
지금은 눈앞의 이 건방진 새대가리를 손봐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제 보니 이 녀석 깜짝 새를 닮았잖아?
게다가 새는 옛날부터 뱀의 천적.
내가 녀석을 처단할 이유로는 차고 넘친다.
[배─고─파… 치─킨─조─아….]
그새 소화가 끝난 오른쪽이도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으니 오늘 저녁은 치킨으로 낙점이다.
이날, 그 재빠른 몸놀림과 하늘을 난다는 이점을 살려 수많은 헌터들을 희생시켰던 산림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가 조용히 사라졌다.
최근 일어난 화랑 길드의 사건 탓에 큰 화제는 되지 않았으나 산림 구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헌터들 사이에서는 제법 화제가 된 이야기다.
그렇게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에어리어 보스를 깔끔히 먹어치운 다음 상층으로 이동했다.
이후 딱히 나를 거슬리게 했던 것들은 없었던 까닭에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간혹 마주치고는 했던 몬스터들이나 플로어 보스도,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향취 탓에 적당히 혼만 내주고 돌려보냈다.
오늘의 나는 좀 자비롭다.
"쉬─ 쉬익─."
얼굴 위로 끈적한 거미줄이 달라붙는다.
머리 위에 묻은 거미줄을 닦아내며 흘깃 위를 바라보니 웬 거미 하나가 거미줄에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이 꽤 뻘쭘해 보인다.
"…그래, 이 숲은 이런 곳이었지."
방심하고 있으면 언제든 상대를 습격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다는 사실에 들떠 내가 그만 잊고 있었다.
"…[레드 스파이더]였던가… 이건 또 그리운 녀석이군."
천천히 손을 뻗어 여전히 거미줄에 매달린 채 뻘쭘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거미를 잡았다.
손에 들린 무게감이 꽤 묵직했다.
"쉬─ 쉬이익…."
"그래, 그래. 너도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한 거겠지. 멍청히 걸어 다니고 있는 놈이 있으면 덮치는 게 맞아."
달달 몸을 떠는 거미 녀석의 몸을 살살 쓰다듬었다.
몸의 떨림이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봐가면서 덤볐어야지. 아무한테나 덤볐다가 그대로 거미 육포가 된다는 거 안 배웠니?"
"쉬─!! 쉬이익─!!!"
"쉿. 가만히 있어. 해치지 않아."
바둥거리기 시작한 거미를 달래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늘의 나는 자비로우니까 살려주마.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라."
-알겠지?
조용히 덧붙이니 거미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꽤 똘똘한 놈인 거 같다.
그대로 녀석을 원래 있던 나무에 도로 올려준 채 길을 걸었다.
캐리일 적 기억하고 있던 길은 2년 사이 그새 다 잊어, 숲을 꽤 헤매고 있다.
이 상태라면 얼마간 더 걸어야 되지 않을까?
어쨌든 부지런히 걸어보자.
뿌직-
"...."
"쉬… 쉬이익…."
슬쩍 고개를 드니 아까와는 또 다른 레드 스파이더가 뻘쭘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보니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거미줄이 손끝에 묻어났다.
[바─보! 이걸로 일흔세 번째 거미줄 샴푸야! 머릿결이 아주 좋아지겠는걸!]
꺌꺌-거리며 비웃는 왼쪽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그래, 오늘의 나는 자비롭다.
하지만 그만큼 많이 참았다.
아무래도 한번 알려줄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여왕의 자손이 돌아왔다고.
"샤아아───!!!"
산림 구역의 숲에서 커다란 뱀의 포효 소리가 울렸다.
그 흉포한 기세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고랭크 몬스터의 등장에 몬스터는 물론이고 헌터들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당연하게도 이번 일은 바깥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산림 구역에 유례없는 고랭크의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내 책임은 아니다.
탓하려거든 옛날 버릇 못 버리고 거미줄이나 쏴대는 거미 녀석들을 원망해라.
제78화
18계층.
내가 인간으로서 죽은 곳이자 몬스터로서 다시 태어난 곳.
뱀으로서의 지난 3년이 줄곧 투쟁의 연속이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곳.
다시 돌아오게 된 18계층에서 나는 조용히 옛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의 나는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강하지 않았기에 더 열심히 살았었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고 방심하다 위험에 빠진 것이 몇 번.
슬슬 살 만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다시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더 값어치 있었다.
원래 몸에서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온 상태였기에 이전과 같은 소란은 없었다.
조용히 기억을 더듬어 걸음을 옮겼다.
18계층 중심부에 위치한 늪지.
전체적으로 예전과 다를 게 없지만 하나 다른 게 있었다.
"부락은 없어졌군."
리자드맨들의 부락은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여왕의 부재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동요는 없다.
부락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깔끔한 모습에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향한 곳은 중심부의 동쪽.
내 보금자리가 있는 외곽의 숲이다.
늪지를 지나 숲을 걸으며 이전과 같은 참사를 겪지 않기 위해 적당히 기세를 내뿜었다.
그리 강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상층에서 이 정도 기세라면 다른 몬스터들이 섣불리 덤비지 못할 것이다.
간간이 숲을 순찰하는 늑대들의 모습이 보인다.
설산 지대에서 보이던 새하얀 녀석들이 아닌 확실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칙칙한 갈색빛의 늑대, [사일런트 울프]였다.
옛날에는 보기만 해도 이가 갈리던 상대였으나 이렇게 보니 꽤 반갑다.
아니, 많이 반갑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니 녀석들이 부들부들 몸을 떨다 급히 하울링을 토해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기다란 울부짖음이었다.
이것도 반갑다.
'그것보다 왜?'
녀석들은 야행성의 몬스터인 만큼 어지간히 큰일이 아니면 동료를 부르는 하울링은 낮에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하울링을 사용하다니… 큰 적이라도 나타난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니 지금 나는 어느 정도 기세를 뿜어내는 상태였다.
그것도 너무 심하면 오히려 역효과니까 적당히 B나 C랭크쯤의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탓인 거 같다.
그렇군, 내가 바로 그 큰 적이었구나.
납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저곳에서 늑대들이 몰려든다.
금세 바글바글 몰려드는 꼴을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런데 옛날에 많이 줄였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또 이렇게나 잔뜩 불어나 있었다.
역시 해충… 아니, 늑대는 주기적인 구제가 필요한 거 같다.
오랜만에 돌아온 기념으로 싹 정리해 볼까?
그리고 모여든 늑대들 중 익숙한 얼굴도 발견했다.
[그레이 킬러 울프]. 다른 놈들보다 더 큰 덩치의 칙칙한 회색 늑대.
옛날에 있던 녀석하고는 분명 다른 개체였지만 많이 반갑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세 마리나 있었다.
이건 좀 놀랍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반 사일런트 울프가 새끼처럼 보일 정도의 커다란 덩치.
시꺼먼 검은색 털을 자랑하며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처음 보는 뉴페이스였다.
느껴지는 랭크는 C.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이 계층의 플로어 보스인 모양이다.
내가 사라지고 나서 늑대들이 패권을 잡았나?
잠시 감탄하고 있으니 늑대들이 '크르르─' 위협적인 소리를 내뱉었다.
무심코 감탄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현재 상황을 떠올렸다.
아, 나 지금 포위당해 있구나?
아장아장 모여든 게 귀여워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잠시 고민했다.
옛날에 늑대들만 생각하면 이를 갈았던 것이 분명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복수는 이미 당시에 다 끝낸 이후였고 엄연히 지금 있는 늑대들과 그때의 늑대들은 다르니까.
이번에는 그냥 살려줄까?
아니, 그래도 너무 많이 바글바글하니 좀 징그럽기도 하다.
바퀴벌레 같달까?
적당히 숫자만 줄여야겠다.
하는 김에 저 검둥이도 조금 손봐줄 예정이다.
아까부터 오만하게 내려다보는데 기분이 나쁘다.
내가 지금 인간 상태라 그렇지, 본래 사이즈는 네가 쪼꼬미로 보일 만큼 크거든?
조금 겸손이란 것을 알게 해줘야겠다.
이후, 엉망진창으로 손봐줬다.
그레이 킬러 울프도 두 놈 정도 잡았다.
역시 세 마리나 있는 것은 조금 그랬기 때문이다.
늑대들의 개체 수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숲이 조금 망가졌다.
처음에 무심코 화염 계통의 마법을 썼다가 그만 나무 몇 그루가 넘어간 것인데, 나도 쓰고 나서 아차했다.
가능한 이 숲은 내가 기억하는 당시와 똑같이 보존하고 싶다.
이후, 도망치는 늑대들을 내버려 둔 채 걸음을 서둘렀다.
꽤 시간을 지체했으니 조금 서둘러야겠다.
* * *
마침내 내 보금자리가 있던 곳에 도착했다.
당연하게도 보금자리 안에는 몬스터가 가득했다.
보금자리를 유지하던 여왕의 마력이 다한 까닭이다.
내가 지내던 굴 안에도 이미 다른 거주자가 있었다.
슬쩍 손을 집어넣으니 혼 래빗이 딸려 나왔다.
응, 잘살고 있구나.
건드려서 미안하다.
보금자리 한가운데의 작은 공터.
내가 종종 능력치 노가다를 하거나 마력 수련을 하던 곳에 조용히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18계층은 내 기억과 변함없었지만 또 많은 부분이 달랐다.
여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 근처에 내 마력을 둘러씌우는 것은 어떨까?
지금의 내 수준이라면 쉽다.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는 이곳을 살아가는 몬스터들이 있으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다른 몬스터들도 편안히 지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얼마나 옛 추억에 빠져 있었을까?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숫자는 대략 스물.
기척을 보아 헌터들은 아니었지만 꽤 본격적이다.
모두 E랭크 이상의 몬스터고 D랭크가 넷. C랭크도 하나 있다.
조금 이상하다.
이곳의 플로어 보스는 아까 전의 그 검둥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플로어 보스급의 몬스터가 하나 더 있다고?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아무리 내가 지내던 당시와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 근처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 쪽에서 마중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리자드맨]이었다.
18계층까지 올라오며 리자드맨들을 여럿 보기는 했지만 역시 인연이 있던 18계층의 리자드맨들이었던 까닭일까, 괜스레 반갑다.
아까 늑대들을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정확히 100배 정도 반가웠다.
다만 반가운 것도 잠시, 곧 깨닫는다.
이 녀석들은 내가 기억하는 녀석들이 아니다.
현명한 비늘은 더 이상 없고 인연을 쌓았던 리자드맨들도 더는 없다.
들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한순간에 저조해진 기분에 리자드맨들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으나 참는다.
어찌 되었건 18계층의 리자드맨이라면 현명한 비늘이 이끌던 리자드맨들과 연이 있을 테니까.
당시의 은혜를 아직도 갚지 못했으니 괜히 이 녀석들을 향해 심술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물러가라 손짓했는데, 돌연 제일 앞의 리자드맨 하나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절을 했다.
덩달아 다른 리자드맨들도 녀석을 따라 절을 한다.
뭐지…?
"즈─즈아아─!!!"
[돌아왔다! 위대한 자손!]
놀람과 당황. 두 가지 감정을 느끼며 제일 앞에 무릎 꿇은 개체를 바라보았다.
랭크는 C. 앞서 계층주급이라 생각됐던 바로 그 개체였다.
내 입장에서는 한없이 미약했지만, 그 근처의 개체들과 비교해서 월등히 많은 마력을 봐서는 아무래도 샤먼인 모양이다.
'설마 현명한 비늘?'
번쩍이듯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급히 물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녀석은 현명한 비늘이 아니었다.
또한 그러면서 현명한 비늘이기도 했다.
[혹시 현명한 비늘인가?]
[틀리다. 나, 자손의 기억 속, 현명한 비늘이 아니다. 하지만, 현명한 비늘이기도 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름을 이었다. 나 당시 살아남았던 개체.]
현명한 비늘이 아니라는 말에 실망하는 것도 잠시, 이어진 녀석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급히 녀석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 분명 어딘가 낯이 익었다.
본신이 아니라 혀로 그 향을 확인하지 못해 미처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편에 무릎 꿇고 있는 녀석들도 훑었다.
D랭크의 리자드맨 세 마리.
녀석들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 역시 낯익은 얼굴들이 맞았다.
[너희들! 아직 살아 있었던 거냐?!]
반가운 마음에 대뜸 녀석들을 껴안았다.
앞으로 평생 보지 못할 거라 믿었던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난 기분이다.
아니, 분명 상황이 그랬다.
절대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옛 전우들을 2년하고도 반년 만에 다시 만났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까지…?]
상상하지 못한 기분 좋은 만남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곧 녀석들이 반가운 만큼이나 큰 의문을 느꼈다.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지? 부락은 어떻게 된 거고? 현명한 비늘은?]
속사포처럼 쏟아낸 물음에 대답한 것은 현명한 비늘의 이름을 이어받았다는 녀석이었다.
[선대 현명한 비늘, 말했다. 곧 인간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대비했다.]
[어떤 대비를…?]
[숲의 외곽으로, 어린 개체와 알을 옮겼다.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선대 현명한 비늘과 대전사들, 모두 싸우다 죽었다.]
[…그렇군.]
[또한, 선대 현명한 비늘, 말했다. 때를 기다리라고. 반드시 돌아온다, 위대한 자손. 그때까지 죽은 듯 기다리면, 우리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정말 돌아왔다. 강해져서, 위대한 자손. 기쁘다.]
녀석의 이야기에 지금까지의 사정을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확실히 과거에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 만약 내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때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고.
현명한 비늘은 그때의 약속을 믿고 그 후손들을 여태껏 기다리게 만든 것일까?
한순간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굳이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덤덤히 새로운 현명한 비늘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기다려 주었다.]
녀석은 눈물 맺힌 얼굴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살아남은 다른 세 마리의 대전사들 역시 녀석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그저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은 리자드맨들만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알아보았지?]
[나 진화하면서 마력을 느끼게 되었다. 위대한 자손의 마력 알고 있다. 굉장히 꼼꼼 숨겨져 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위대한 자손, 늑대들의 왕 혼내주었다?]
[아아, 조금 겸손이란 걸 가르쳐 주기는 했지.]
[기쁘다. 늑대들의 왕, 우리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혼쭐을 내줘서 기쁘다.]
[…나중에 다시 찾아가서 아주 끝장을 내주마.]
짧은 해후를 끝내고, 우선 현재 리자드맨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새로운 부락으로 향하는 와중에 신임 현명한 비늘을 포함한 리자드맨들이 환호를 내질렀다.
[그것보다 너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그렇고 상당히 강해졌군. 솔직히 놀랍다.]
[…추측하건대, 과거 여왕의 안식처에 들렸던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다.]
[…크흠. 그래서 이 정도 수준이라면 굳이 날 기다릴 필요 없이 자력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지?]
[인간들 강하다. 죽음 두렵지 않다. 하지만, 의미 없는 죽음 싫다. 또한, 만나고 싶었다, 위대한 자손.]
[그렇군… 그것보다 아직 말하지 않았군, 내 이름은 이제 '닉스(Nyx)'다.]
현명한 비늘이 고개를 주억였다.
계속해서 '닉스', '닉스'하는 사념이 조용히 들려오는 것을 보아 이름을 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런 현명한 비늘의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다, 마침내 리자드맨들의 새로운 부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너희의 새로운 부락이냐?]
마주하게 된 부락의 모습에 잠시 입을 달싹였다.
'아니, 이건 부락이라기보다는….'
과거에 들렸던 부락과 비교하면 그냥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부족한 것은 많지만, 안락한 곳이다! 위대한 자손… 아니, 닉스도 마음에 들 거다! 가장 극진한 대접을 준비하겠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현명한 비늘의 모습에 할 말은 많았지만 꾹 참아내었다.
'…내가 꼭 잘 살게 해주마.'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갚을 때가 드디어 돌아온 것 같다.
우선 살림살이부터.
제79화
리자드맨들에게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부락의 개선이었지만 딱히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리자드맨들이 기본적으로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기도 했고, 따로 무언가를 해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궁 밖으로 나가 바깥의 물건을 가져오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바깥의 물건은 미궁 안에 오래 방치해 놓으면 자연스레 미궁에 흡수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았다.
내가 건축이나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 리자드맨의 생활 수준 개선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그나마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주변의 위험들을 싹 치워 주는 것 정도일까?
다만 이것 역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싶었다.
늑대 같은 놈들이 리자드맨들 입장에서 성가신 적이기는 하지만 그들 최대의 적은 다름 아닌 헌터다.
이 헌터들은 죽여도 죽여도 꾸역꾸역 미궁으로 들어오는 족속들이니만큼 내가 그들을 처리해준다 해도 당장 그때뿐이다.
무엇보다 헌터들을 죽이면 더욱 상위 헌터가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
내가 항시 지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에 내가 리자드맨을 성장시켜 준다는 선택지도 있다만, 상태창을 가진 나라면 몰라도 다른 몬스터들의 성장이란 것이 그리 금방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따로 계획해둔 것도 있고 말이다.
이런 느낌으로 리자드맨들에게 은혜 갚기를 고민하며 그들의 부락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극진한 대접을 해준다는 현명한 비늘의 말대로 상당히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깜짝 새의 알에 여러모로 감회가 남다르다.
나중에 돌아가는 길에 몇 개 챙겨 가야겠다.
스노우와 설이에게 먹여줘야지.
물론 토순이 것도 잊지 않고 챙길 생각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