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른 아침, 은하 길드와 로즈원 길드의 야영지에 때아닌 비명이 울렸다.
갑작스런 비명에 양 길드의 공대원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비명의 근원지는 로즈원 길드의 길드장인 이하나가 머물던 텐트다.
그 텐트 안에서 이하나의 보좌관 격으로 활동하던 헌터가 통곡을 쏟아냈다.
"길드장님! 길드장니이임─!!!"
싸늘하게 식어 있는 이하나의 시신.
로즈원 길드의 공대원들은 당연하고 은하 길드의 공대원들 역시 큰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그것은 소란을 듣고 찾아온 권제나와 윤명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윤명호의 반응이 격했다.
"하나 씨! 하니 씨이─!!"
인파를 헤치고 텐트로 뛰어 들어간 윤명호가 이하나를 붙잡는다.
그녀에게는 어제와 같은 온기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어떻게 이런 일이…?! 보초, 보초는 도대체 뭘 했어?!"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고함에 모여들어 있던 공대원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S랭크 헌터가 뿜어내는 기세에 아무리 경험 많은 베테랑 헌터들이라도 일순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해, 윤명호."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멀쩡한 야영지 한가운데서 헌터가… 그것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 죽었는데…!"
"…난 분명 진정하라 했다."
섬뜩- 윤명호가 내뿜던 기세와 비교도 되지 않는 차가운 한기에 공대원들은 물론이고 윤명호까지 주춤거렸다.
그제야 윤명호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평소의 장난기 넘치던 스승이나 누나의 얼굴이 아닌 대형 길드의 부길드장, 한 명의 SA랭크로서 얼굴을 해 보인 권제나가 있었다.
"네 맘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진상을 알아야 해."
"…예, 부길드장님."
힘없이 중얼거리는 윤명호의 어깨를 권제나가 살짝 두드렸다.
그러고는 이내 모여 있는 공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최초 발견자는?"
"…접니다."
최초 이하나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던 바로 그 보좌관이었다.
흘깃 그녀를 살핀 권제나가 재차 입을 열었다.
"발견 당시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따로 저항한 흔적도 보이지 않고… 너무 편안한 얼굴이라, 처음에는 단지 잠드신 줄 알았어요."
울음을 참으며 설명하는 보좌관의 모습에 권제나가 이하나의 시신을 살폈다.
그녀의 말처럼 시신에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은은한 미소까지 그려진 얼굴은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권제나가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 이하나 헌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요? 마지막으로 함께한 건?"
"…다른 헌터들과 가벼운 잡담 이후에 바로 텐트로 들어가셨습니다. 이후 보초를 서던 헌터들이 계속해서 앞을 지켰지만 별다른 침입자 같은 건 없었습니다."
보좌관의 설명에 권제나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보초들은 물론이고 내 감지까지 속인 침입자가 이하나 헌터의 텐트에 숨어들었다…? 거기다가 S랭크인 이하나 헌터가 제대로 반항하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었다…?"
무심코 조용히 중얼거리던 권제나가 근처 공대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막 구역에서 나오는 고스트 타입의 몬스터는 뭐가 있죠?"
"…주로 나오는 건 [레이스] 정도입니다. 상위 몬스터라면 [벤시] 같은 게 나오기도 하지만, 벤시로는 이번 같은 짓이 불가능합니다."
"…하긴 그런 게 들어왔다면 난리가 났을 테니까요. 애초에 몬스터의 소행이라면, 이하나 헌터만 이렇게 당하는 게 말이 안 되죠."
나지막이 중얼거린 권제나의 시선이 흘깃 윤명호를 향했다. 그는 허옇게 죽은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일단 이번 조사는 여기서 중지하겠습니다. 이견은 받지 않습니다. 은하 길드의 부길드장이자 이번 조사의 책임자로서 조사 중지를 선언합니다."
-각자 돌아가 짐을 꾸리세요.
우린 조속히 미궁을 빠져나갑니다.
"…이하나 헌터의 시신은 어떻게 할까요?"
"…챙깁니다. 그 시신을 꼭 확인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권제나가 흘깃 윤명호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권제나로서 이번 일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다.
단순히 윤명호 때문이든 이전에 쌓은 이하나와의 친분을 떠나서.
그녀가 책임자로 있는 조사 도중 S랭크 헌터이자 한 길드의 길드장인 헌터가 사망했으며, 그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이 불가능하다.
일단 조속히 귀환을 결정하기는 했으나 만약 이 소식이 바깥에 알려지면 얼마나 시끄러워질지, 권제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무엇보다 이번 일이 알려진다면 크게 반응할 곳이 하나 있었다.
'샤를로트 미셸. 그녀가 절대 가만있지 않겠지.'
자신이 그리도 아끼던 애제자가 사망했으니 그녀의 분노가 얼마나 클지 쉬이 짐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SS랭크 헌터의 분노를 온전히 감당해야 될 것은 바로 은하 길드와 권제나가 될 터였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권제나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제90화
산림 구역 리자드맨의 부락을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현명한 비늘을 포함한 리자드맨들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울했던 기분이 한층 나아지는 것 같다.
[흑… 흐윽….]
'…울지 마, 머리 아파.'
[그치만… 그치만…! 이, 이 나쁜 놈아─! 네가 죽였잖아! 흐윽…!]
왼쪽이가 슬프게 울었다.
무척 드문… 아니,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보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서럽게.
제 마음에 솔직한. 저래 보여도 마음 약한 왼쪽이인 만큼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만큼 이하나를 살리고 싶던 것일까?
그녀의 무엇을 보았기에?
[흑… 우리(나)의 첫사랑이었다구… 흐윽… 이 잔인한 놈….]
'…그랬나?'
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가슴이 조금 허한 느낌인 건 그것 때문이었나?
문득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이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단지 인간이었을 적 악연의 매듭을 지었던 것뿐. 다른 사감은 없어.]
[흐윽… 이 잔인한 놈! 역시 먹는 것밖에 머리에 든 게 없는 거지! 바보! 바보! 멍청이─!!!]
[따지고 보면 나도 너고 너도 나다. 우리는 하나니까.]
[…짜증나─! 이런 감수성 없는 놈들하고 하나라니! 설이 보고 싶어─!!!]
[나도 설이 보고 싶다… 그리고 배─고─파….]
설이가 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 녀석들아.
그래, 어찌 되었든 복수는 끝났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가족들의 곁으로.
[…그래서 문득 생각난 거지만, 우리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아?]
훌쩍- 어느새 눈물을 그친 왼쪽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녀석의 말에 조용히 수긍했다.
이하나와의 대화를 통해 문득 깨달았다.
내 인간 시절 은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은원 중의 '은'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광열이 아저씨… 분명 내 또래의 아들이 있다 했었지.'
그래서 특히나 내게 더 많은 신경을 써주던 사람이었다.
분명 예쁘고 순박한 와이프와 열심히 공부하는 효자 아들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아저씨의 아들이 당시 고등학생쯤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분명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은원의 '원'은 모두 해결했으니 이제 '은'을 해결할 차례다.
아저씨에게 받았던 과분한 호의를 생각해 그의 가족들에게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문득 내 가족들에 대한 생각도 떠올렸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이 가족들은 설이나 스노우가 아닌 인간이었을 적의 가족이다.
그들하고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여동생이 조금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워낙 야무진 녀석이니 알아서 잘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내가 사라진 지 3년이나 지났으니 벌써 나 같은 건 까맣게 잊고,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여동생이라면 한 번쯤 보고 싶기는 하다.
며칠 정도 리자드맨의 부락에서 신세를 졌다.
벌써 떠나냐며 아쉬워하는 리자드맨들과 작별을 나눴다.
떠나기 전, 현명한 비늘이나 다른 세 녀석에게 슬쩍 귀띔했다.
이후의 내 계획에 대해서.
녀석들은 나만 믿는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끝없는 신뢰가 꽤 무거웠다.
* * *
미궁 밖으로 나가는 길.
대인원의 헌터들과 마주했다.
이하나와 함께하던 바로 그 헌터들이었다.
다들 분위기가 무겁다.
일행의 선두에 있던 한 남자와 마주했다.
생기 없는 얼굴을 한 남자였는데 느껴지는 실력은 S랭크였다.
무심코 시선을 마주치다 조용히 탄성을 내뱉었다.
낯이 익다 싶더니 3년 전의 바로 그 남자다.
당시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특유의 향은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다시 미궁으로 돌아왔구나.
그것도 상당한 실력과 함께.
언젠가 상상했던 망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괜스레 반가운 기분이다.
"눈을 고쳤군."
"…예?"
스쳐 지나가며 슬쩍 내뱉은 말에 남자가 나를 보았다.
여전히 생기 없는 얼굴이 멍하니 나를 향한다.
"그쪽 이름은?"
"…윤명호입니다만."
"그렇군.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저기, 저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슬며시 바라보는 눈빛이 그리 곱지는 않았다.
방금까지도 생기 하나 없이 힘없던 눈매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사납게 변했다.
흡사 으르렁거리기라도 하듯 사정없이 나를 노려본다.
"아니, 아무것도. 그저 반가워서 말이지."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별다른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리자 한층 누그러진 기세로 윤명호가 물었다.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3년 전쯤에 만났었지."
"아… 그래서… 혹시 병원 같은 데서 만났었나요? 그때는 분명 제가 눈을 다쳐서…."
"아니. 병원은 아니다."
"...? 그럼…?"
의아하게 물어오는 윤명호에게 잠시 어찌 말할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한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여자가 슬며시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대화는 그쯤 하자."
"아, 부길드장님… 죄송합니다."
"아냐, 너한테도 인연이 있는 사람인 거 같은데…."
여인이 흘깃 내 전신을 훑었다.
"죄송하지만 대화는 여기까지만 해 주세요. 저희가 좀 급해서… 더 따로 나눌 얘기가 있다면 미궁 밖에서 해주시겠어요?"
"아니, 딱히 더 할 말은 없다."
"…그래요? 그럼 이만 실례해도 될까요?"
문제없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여인이 곧 윤명호를 챙겨 자리를 피했다.
떠나가는 윤명호가 나를 향해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인다.
'SA랭크… 그것도 SS랭크에 상당히 근접한 상태다.'
이전에 그 기세를 느끼긴 했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서 확인하니 의외로 쉽사리 승리할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문득 리사가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머지않은 시기에 SS랭크가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당시 리사는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여겼지만 아무래도 정작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바로 그녀인 모양이다.
"이건 또 재밌는 상대가 되겠어."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 * *
"너, 내가 아무하고나 얘기하지 말랬지?"
대뜸 그리 잔소리를 내뱉는 권제나의 모습에 윤명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네다섯 살 먹은 애인가요? 저 S랭크 헌터라고요. 제 걱정이 아니라 상대 걱정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불만 섞인 윤명호의 투정에 권제나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고는 힐끔 시선을 돌려 아까 사내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이후였다.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방금 제가 마주친 사람이요?"
"그래… 그 남자 말이야."
윤명호가 흘깃 사내가 있던 곳과 권제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피식 웃음을 흘린다.
"농담도 참… 저 이제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아요. 당장 제가 봤을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 빡대가리야… 바로 그게 이상하다는 거잖아."
"…아?"
멍청하게 반문하는 윤명호의 모습에 권제나가 짧게 혀를 찼다.
그녀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나한테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공대장… 아니, 부길드장님한테도요?"
"그래.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거든… 헌터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 기세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권제나의 시선이 재차 사내가 있던 곳을 향했다.
"너 저 남자랑 무슨 관계였어? 너한테 뭐 하러 말 건 거야?"
"…3년 전에 저랑 마주쳤던 적이 있다고 했어요. 처음 건넨 말이 '눈을 고쳤군'이었나…?"
"…병원에서 마주친 건 아니라 했지?"
"…네. 아니라고 했어요."
"...."
권제나가 꾹 입을 다물었다. 심각해진 그녀의 기색에 윤명호 역시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권제나가 재차 입을 열었다.
"…3년 전에 깜짝 새에 대해서 조사했던 거 기억나지?"
"…네, 깜짝 새가 단체로 습격하는 경우는 몇 없다고요."
"그래. 단체로 그 알을 빼앗기거나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습격할 일은 없어."
"공대장님… 혹시요… 혹시…."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마. 나도 그냥 찜찜해서 말해본 것뿐이니까. 무작정 저 남자가 3년 전 사건의 범인이라고 볼 수는 없어."
"...."
조곤조곤 타이르듯 말한 권제나였지만 윤명호의 얼굴은 이미 잔뜩 심각해진 이후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의 마음속에서 저 사내가 3년 전 저와 제 친구들을 위험에 빠트린 장본인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터.
권제나는 괜스레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리 말하지만 함부로 접근하지 마. 3년 전 일과 별개로 굉장히 위험한 남자야."
"…알고 있어요. 조심하겠습니다."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윤명호였지만 그 모습이 영 미덥지 못했다.
권제나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좀 괜찮니?"
"…네? 아… 괜찮아질 거예요."
한순간 권제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윤명호였으나 이내 그 의미를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권제나가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들면 말해. 누나가 위로해줄게."
"…누나는 무슨. 아줌마나 다름없으면서…."
"…너 지금 말 다 했냐?"
"…저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얼마 전에 길드장님한테 들었어요. 이대로 가다간 노처녀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퍽- 짧은 구타음이 울렸다.
권제나 특유의 철권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윤명호가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진짜… 뭐만 하면 손부터 올라가는 버릇 좀 고치면 안 돼요? 부길드장님 때문에 제 능력치 중에서 내구가 제일 높아요!"
"네 주둥이부터 좀 고치면 내 손버릇이 많이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 이 기회에 나를 위해 그 버르장머리 없는 주둥이부터 좀 손봐보자. 내가 도와줄게."
"…죄송합니다."
언제 까불었냐는 듯 금세 꼬리를 내리는 윤명호의 모습에 권제나가 짧게 코웃음 쳤다.
이렇게 쉽게 항복할 거면서 언제나 왜 그리 까부는지 모르겠다.
그 원인에 대부분이 자신의 행동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권제나는 입을 삐죽 내민 윤명호를 남겨두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윤명호의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부러 모른 체하며 그녀가 슬쩍 미소지었다.
'그래도 금방 털어내는 것 같아 다행이네.'
요 며칠 사이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이라 걱정했지만 이제는 안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문제는 명호가 아니라 내 쪽인데….'
이번 일로 인해 일어날 여러 일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당장 쏟아질 각종 매체들의 비난은 둘째 치고 당장 소식을 듣고 미쳐 날뛸 SS랭크 헌터의 존재가 가장 두렵다.
'길드장 아저씨랑 나랑 둘이서면 막을 수 있을까…?'
아니, 절대 무리다.
SS랭크란 것은 살아 있는 자연재해나 마찬가지.
그 앞에서 숫자는 정말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아무리 한 단계 밑의 SA랭크라고 하더라도 SS랭크 앞에서는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씨… 자존심 상하게….'
이하나 헌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곧 자연재해를 맞닥뜨릴 사람의 입장에서 조금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궁 밖으로 귀환하는 도중 권제나의 입에서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 * *
미궁을 나서자 출입구 앞을 가득 메운 기자들이 보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마중 나온 나연성에게 물어보니 로즈원 길드의 길드장이 죽은 것 때문에 난리가 났단다.
내 탓이었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는 나연성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급히 화제를 돌려 내가 나올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 내가 처음 미궁에 들어간 뒤부터 계속 기다렸단다.
왠지 조금 미안해졌다.
다음부터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니 나연성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한테 혼난단다.
더 미안해졌다.
이후 리사를 만났다.
장소는 이번에도 고기집.
다만 저번에 만났던 고기집은 아니다.
그 집 고기가 참 맛있었는데….
조금 아쉽다.
특히 오른쪽이가 굉장히 슬퍼했다.
흡사 이하나를 죽였을 당시의 왼쪽이를 보는 것 같다.
그 정도로 슬픈 일인가…?
내가 언제 나올지 몰라 지난번처럼 소를 잡지는 못했다고 리사가 사과해왔다.
굳이 사과할 필요 없는 일이었지만 오른쪽이가 굉장히 슬퍼했으므로 일단 사과는 받았다.
그래도 대신이라며 돼지고기가 산처럼 준비되어 있으니 마음껏 먹으란다.
오른쪽이가 굉장한 기세로 부활했다.
이후 식사를 진행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주된 내용은 이하나와 관련된 이야기.
당연하게도 프랑스에서 SS랭크 헌터가 출발했단다.
며칠 동안 급한 일정만 우선 처리한 뒤, 다른 자잘한 일정은 다 미뤄둔 채 전용기를 타고 출발했다는데.
도착 예정 시간은 한 시간 후라고.
그리고 출발 당시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고.
정부에서는 진지하게 국가 비상령을 선포해 서울 주민들을 피난시키는 것을 고민 중이라고.
이미 몇몇 고위 계층의 사람들은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고….
리사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나를 노려보며 말하는데 딱히 할 말이 없다.
내 탓인가?
내 탓이다.
분명 내 탓이니까 고기는 뺏어가지 마라.
흥분한 오른쪽이가 무심코 너를 죽일까 무섭다.
유능한 인재를 이렇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리사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었다.
그 기세가 상당히 심상치 않았기에 얌전히 들었다.
심상 속에서 왼쪽이가 [현지처]라고 말하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딱히 바람이 아니니까.
애초에 스노우와 난 아무 사이도….
확실히 스노우가 엄마고 내가 아빠기는 하지만….
그렇군. 스노우와 나는 틀림없는 부부다.
왼쪽이에게 논리로 논파당했다.
왼쪽이가 오른쪽이한테 졌으니 우리 셋 중에서 논리가 가장 딸리는 건 나인가?
이후 왼쪽이한테 잔뜩 놀림당했다.
억울하다.
식사가 끝난 후 리사가 언제나처럼 나를 유혹해 왔지만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스노우와 내 관계를 확실히 인지한 지금에 와서는 더 단호히 철벽을 쳤다.
나 딸도 있으니까.
"…설마 했던 유부남? 이건 또 상당히 끌리네요…."
이후, 위험한 눈으로 나를 보기 시작한 리사를 피해 도망쳤다.
제91화
막 정오가 지난 이른 오후 시간. 인천 국제공항의 활주로 한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곧 도착하기로 예정된 프랑스의 SS랭크 헌터 샤를로트 미셸을 기다리는 일행들이었다.
그중에 한 사람, 세계 최고의 헌터 중 한 명을 맞이하기 위해 헌터 협회의 협회장 노관식이 직접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설마했더니 정말 오는군."
"이하나 헌터가 상당한 애제자였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거의 후계자처럼 지냈다고 하더군요."
곁에서 조용히 덧붙이는 비서의 목소리에 노관식은 조용히 혀를 찼다.
"쯧… 뛰어난 헌터가 너무 이른 나이에 죽었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자 하나 죽었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다니… 순 제멋대로야."
"…그래도 샤를로트 헌터는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중국의 '왕퐝' 헌터 같은 경우에는 여러모로 격을 달리한다고 하니까요."
"…하긴 당장 10년 전의 성재명만 하더라도 보통은 아니었지… 확실히 그녀 정도면 숙녀나 다름없어."
"실제로 그렇게 불리기도 하니까요."
비서의 이야기에 노관식이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벌써 30여 년 이상을 헌터 협회의 협회장으로 지낸 노관식은 헌터들이 좀 더 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렇게 샤를로트가 내리기를 기다리던 노관식이 불현듯 한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대놓고 혀를 찬다.
"저 치는 또 왔군. 정말 안 끼는 데가 없어."
"…유철영 전(前) 총리군요."
"여당의 대표적인 대선 후보 중 하나지. 슬슬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니 얼굴 비출 때가 되긴 했어… 그래도 대단하군. SS랭크 헌터가 분노해서 찾아오는데 도망가지도 않고 말이야. 다른 놈들은 진작에 다 서울을 떠났는데…."
그리 중얼거리던 노관식이 불현듯 이쪽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오는 유철영의 모습에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표정을 바꾼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서가 그런 노관식의 모습을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아이고, 협회장님. 여기서 다 뵙네요."
"아하하. 유 총리님, 이거 오랜만입니다."
"하하, 이제 저 총리 아닙니다. 그저 야인일 뿐이지요."
"허허, 유 총리님이 그저 야인이라니 지나가던 고블린이 웃겠군요."
"하하. 그저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말이."
하하호호- 적어도 겉으로는 화기애애 대화를 나누는 두 노괴의 모습에 노관식의 비서가 조금 질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유철영을 따라온 웬 여성과 눈이 마주쳤는데 잠시 당황한 비서가 금세 표정을 바꾸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여성은 그런 비서의 행동을 모른 체 담담히 인사를 받아줄 뿐이었다.
비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유 총리님은 이곳에는 뭐하러 오셨는지요?"
"하하, 당연히 그 유명한 샤를로트 헌터를 보러 온 거 아니겠습니까? 국빈을 모시는데 아무래도 정부 쪽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지요."
"호오… 방금 전까지는 분명 야인이라고…."
"하하, 야인이기 이전에 정치인이고 전 총리지 않습니까? 요즘 '이런저런 문제'로 다들 바쁘니, 한가한 저라도 이렇게 와야지요."
"으음…."
노관식이 짧은 신음을 흘렸다. 유철영이 콕 집어 말한 '이런저런 문제'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확실히 요즘 좀 상황이 묘하긴 합니다."
"하하. 이럴 때일수록 협회장님께서 잘 이끌어나가 주셔야지요. 협회장님만 믿겠습니다."
"…유 총리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시지요."
"하하. 야인에 불과한 제가 뭘 할수있겠냐만은… 그래도 이리저리 힘 좀 써 보겠습니다."
소탈하게 웃어 보이는 유철영의 모습에 노관식이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찼다.
몇 년째 봐오던 인물이지만 볼 때마다 상대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영악한 너구리 같으니라고… 정말 말발 하나는 끝내주는구먼.'
솔직히 이런 타입의 정치인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미궁에 들어가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쇠하기는 했지만 노관식 역시 SA랭크의 헌터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40년 이상을 활동해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그렇게 잠시 속내를 숨긴 채 유철영과 화기애애 대화를 나누던 노관식이 불현듯 유철영의 옆에 서 있는 여성을 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보좌관쯤이라 생각했지만 노련한 헌터의 예리한 눈으로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유 총리님. 실례가 안 된다면 옆의 분은…?"
"아. 이거 참. 소개가 늦었군요. 제 딸 화영이입니다."
-자, 화영아. 얼른 인사하렴.
슬쩍 저를 앞으로 내세우는 유철영의 행동에 그의 딸 유화영이 군말 없이 앞으로 나선다.
"유화영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협회장님. 잘 부탁드려요."
다소곳이 저를 소개하는 유화영의 모습에 노관식이 한차례 '흐음'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한순간 묘한 눈빛으로 빠르게 그녀를 살펴본 노관식이 이윽고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영광은 무슨. 나야말로 만나서 반가워요, 화영 양. 어쩜 이리도 미인인지. 유 총리님도 참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하하. 말 잘 듣는 착한 딸입니다. 효녀가 다름없어요."
흐뭇하게 웃으며 유철영이 유화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다정한지 누가 봐도 영락없는 팔불출의 아버지였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던 노관식이 이내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드님이 하나 계시지 않았습니까?"
무심코 내뱉은 노관식의 말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뚝 가라앉았다.
노관식은 제가 지뢰를 밟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들놈은 실종됐습니다."
"…으음. 실종이라구요…? 그렇다면 혹시…?"
"예, 미궁에서 실종됐지요."
"…으으으음. 미안합니다. 제가 그것도 모르고 괜한 얘기를…."
눈에 띄게 확 가라앉은 유철영의 모습에 노관식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관식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참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노관식의 모습에 유철영이 일부러 '허허'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3년이나 지난 일인 것을… 이미 가슴속에 묻어둔 아들놈입니다."
"…미궁에서 실종됐다면, 아드님은 헌터셨습니까?"
"아뇨. 재능은 없었던 모양인지 짐꾼으로 일했다고 하더군요. 당시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특히 화영이가 많이 슬퍼했습니다."
노관식의 시선이 자연스레 유화영을 향했다. 그의 시선에 유화영이 푹 고개를 숙였다.
느껴지는 그녀의 분위기가 몹시 침울한 것이 누가 봐도 상심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관식이 나지막이 신음을 내뱉었다.
"…유감입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시 한번 가라앉는 분위기에 막 어색해지려던 찰나였다.
그들이 기다리던 전용기가 도착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예… 모쪼록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유철영과 유화영 부녀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꾸벅 고개 숙이고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노관식이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푹 한숨을 내쉰다.
"실수했군."
괜한 말을 꺼내 유철영에게 큰 빚이라도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딱히 유철영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게 하나하나 쌓이다 보면 정말 뭐라도 해줘야 할지 모른다.
"아니. 저 너구리라면 다 의도한 걸지도 모르겠군."
조용히 중얼거리던 노관식이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언젠가 유철영이 저에게 할 부탁이 그리 큰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앞으로의 대선에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그것보다 황 비서."
"예, 협회장님."
"유 총리의 딸 봤나? 어땠어?"
갑작스런 노관식의 물음에 비서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아름다운 아가씨였습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예? 그럼…?"
멍청하게 저를 바라보는 비서의 모습에 노관식이 짧게 혀를 찼다.
"이렇게 어리숙해서야… 쯧… 아직 크려면 멀었구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비서의 물음에 굳이 답하지 않은 노관식이 흘깃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경호원이나 다른 보좌관들 사이에 뒤섞인 두 부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헌터란 말이지…."
"…예? 누구 말씀이신지…? 설마… 전 총리님의 따님이요?"
깜짝 놀라며 물어오는 비서의 물음에 노관식이 대놓고 혀를 찼다.
"그래, 욘석아. 그것도 너보다 강하다."
"그게 무슨…?"
"못해도 A랭크 상위 수준이다. 기회만 있다면 당장 S랭크에도 도달하겠어…."
노관식의 이야기에 비서가 조용히 탄성을 흘렸다.
비서의 랭크는 B에 불과했다.
"…돌아가면 한번 조용히 알아보게. 반응을 봐서는 유 총리도 모르는 거 같은데…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걸 수도…."
무심코 중얼거리던 노관식이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에잉. 쯧… 역시 머리 굴리는 건 나하고 안 맞아. 진짜 올해만 하고 은퇴하든지 해야지 원."
"…그 말, 매년 하셨던 거 같은데요?"
"…어찌 30년째 믿고 맡길 만한 녀석이 없어… 너라도 빨리 커야 될 텐데…."
그리 말한 노관식이 잠시간 제 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포옥 한숨을 내쉰다.
그런 노관식의 반응에 비서가 발끈했다.
"그 반응은 뭡니까, 협회장님?!"
"에잉. 쯧…."
"아니, 말씀을 해주서야…!"
"됐다. 욘석아. 늦었어. 우리도 얼른 가자. 대단하신 SS랭크의 얼굴 좀 보러."
그리 말한 노관식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분한 표정을 짓던 비서 역시 이내 노관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곧 인파가 가득 몰린 비행기 앞에 멈춰 섰다.
비행기 한편에 자리한 프랑스 국기와 붉은 장미가 그려진 깃발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리고 잠깐의 기다림 끝에 곱게 깔린 레드 카펫 위로 여인이 걸어 나온다.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동자.
이미 마흔을 훌쩍 넘긴 50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
전 세계에 단 넷밖에 없는 헌터들의 정점.
프랑스의 SS랭크 헌터.
21세기의 잔다르크, 장미검의 샤를로트 미셸이다.
조용히 걸음을 내딛는 샤를로트의 모습은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딱히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님에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지켜보던 누군가 무심코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과 달리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한없이 차갑고 위압적이다.
보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레이디의 그것이었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냉엄한 군주의 그것이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절묘한 조화.
프랑스의 SS랭크 샤를로트 미셸은 그런 인물이다.
이윽고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마침내 샤를로트가 지면에 발을 디뎠다.
미리 기다리던 기자들의 플래쉬가 일제히 터지고 그녀를 마중 나왔던 이들이 순식간에 몰려든다.
그런 이들을 무심히 훑어보던 샤를로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 사랑스런 제자. 하나는 어디 있죠?"
온기 하나 실리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제 분노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대한민국의 땅을 처음으로 밟은 SS랭크 헌터의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 * *
그리고 이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두 사람이 있었다.
"이거 X된 거 맞죠?"
"내 탓 아니… 그래, 내 탓이 맞으니 고기는 뺏어가지 마라."
한 고깃집에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블랙 마켓의 사장이자 S랭크의 헌터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리사의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다.
제92화
프랑스의 SS랭크 헌터 샤를로트 미셸이 도착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까지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 제 제자부터 찾았다.
저를 마중 나온 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녀는 준비된 리무진을 타고 곧장 공항을 나섰다.
단순히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제자 사랑이 지극한 한 명의 스승일 뿐이었지만 그녀의 정체를 생각하면 절대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자연재해.
국가 재앙.
신(新) 전략 병기 등으로 불리는 존재.
단신으로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아가 나라 하나를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샤를로트 미셸이다.
지구에 단 넷밖에 없는 SS랭크의 헌터.
그녀의 방문에, 그것도 그리 좋지 못한 이유로의 방문에 이미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언론들까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이대로 서울이 쑥대밭이 되는 것 아니냐고.
당장 대한민국의 헌터계 수준으로는 미쳐 날뛰는 그녀를 막을 수 없다.
현재 국내의 SA랭크 헌터가 모두 나선다면 어느 정도 억제는 가능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피해를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다수의 인원이 그녀를 막는다 해도 그렇게 되면 프랑스와의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될 것이다.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상대를 건든 것이니까.
이제 막 전성기 때의 수준을 회복해가는 대한민국의 사정상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
그나마 그녀가 SS랭크 헌터들 중 제법 정상적인 편에 속했기에 망정이지.
중국의 유명한 망나니인 '왕퐝'이었다면 이미 도착한 시점에서 서울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리사는 연신 뉴스 특보로 보도되는 샤를로트의 방한 소식을 보며 덜덜 몸을 떨었다.
어찌나 몸을 떨던지 식탁이 자꾸 흔들려 도저히 식사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꾸 계속되는 오른쪽이의 잔소리에 흘깃 그녀를 바라보니 마치 이쪽의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리사가 굉장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무시하지 마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 법이다."
"지금 상황에 밥이 넘어가요?!"
"…잘만 넘어가는… 알겠다. 미안하군. 집중하지."
심상치 않은 리사의 기세에 급히 젓가락을 놓았다.
곧장 오른쪽이가 불만을 토로해 왔지만 다행히 앞서 먹은 양이 꽤 많았기에 그리 심한 수준은 아니었다.
"정말 어쩔 거예요?! 진짜로 찾아왔다고요! 그 샤를로트 미셸이!"
"…그래, 그렇군. 그래서 뭐가 문제지? 딱히 우리가 특정될 만한 일은 없을 텐데. 너희가 조사 과정에서 흔적을 흘렸다면 모르겠지만…."
"저희가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정말 뭐가 문제지? 샤를로트가 굉장한 것은 이해한다만, 중요한 우리가 들키지 않으면 문제없는 거 아닌가?"
덤덤한 내 모습에 리사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샤를로트가 만약 혼자 왔었다면 괜찮겠죠."
"흠?"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니 리사가 설명을 이었다.
"샤를로트와 동행한 이들 중에 유명한 헌터가 하나 있어요. 스킬은 '사이코메트리'. 사물에 접촉해서 그와 관련된 정보나 기억을 읽는 스킬이죠. 헌터로서는 사실 그리 좋은 능력은 아니지만…."
"…과연. 헌터로서는 몰라도 이런 일에 있어서는 굉장한 스킬이군."
리사가 힘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미 샤를로트가 찾아오는 것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확정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리사의 이야기를 들은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찾아오는 건 확정이군."
"예… 그러니까 이제 이리 태평하면 안 되겠다는 걸 알겠죠? 그러니까 은근슬쩍 젓가락 들지 마세요!"
빼액- 소리치는 리사의 목소리에 찔끔하며 들어 올리던 젓가락을 도로 내려놓았다. 오른쪽이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정말 위험하다는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흠. 그리 걱정하지 마라. 너한테 피해가 가게 하지는 않을 테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오는 리사의 모습에 덤덤히 말했다.
"사이코메트리로 범인을 찾는다면, 어디까지나 들키는 건 나다."
"…그렇죠."
"그러니 나와 너희가 연관되었다는 사실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는 거다."
"…당신 헌터 라이선스를 우리가 만들었다는 걸 잊었나요? 본격적으로 당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면 분명 덜미가 잡혀요."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흥분한 채 소리치는 리사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쪽이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쪽이 먼저 움직이면 너희가 들킬 일은 없다."
"…그게 무슨…?"
한순간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리사의 모습에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요컨대 이쪽에서 먼저 찾아가 주겠다는 뜻이다."
"...?"
리사가 그녀답지 않게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일전에 소 다섯 마리를 추가로 주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때처럼.
그런 리사의 모습에 왼쪽이가 속으로 신나게 비웃었다.
이후, 정신을 차린 리사가 당연하게도 잔뜩 잔소리를 해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식사에 방해되니 차분히 설명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제법 길었던 설명에도 리사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도 이미 내가 결심을 굳혔다는 것은 이해했는지 더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온전히 식사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니 오른쪽이 너도 불평하는 건 그만해라.
"…자신은 있어요?"
"무슨 자신?"
"…샤를로트 그 여자를 이길 자신이요."
조용히 들려오는 리사의 목소리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조금 힘들겠군."
"…역시! 그렇다면 당장 대책을 생각해야…! 아니, 그냥 잠시 이 나라를 떠나요! 미국이나 중국은 어때요? 다른 SS랭크가 있는 나라라면 아무리 그녀라도 멋대로 활개 치고 다니진 못할 거라고요!"
열렬한 기세로 이후의 대책을 이야기하는 리사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오해했군. 내 말은 지금 상태로는 힘들다는 말이다."
"…무슨 뜻이에요?"
"어디까지나 이쪽의 이야기다만… 뭐, 싸워서 질 생각은 없다. 애초에 질 싸움은 하지 않는 주의라…."
담담히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리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른쪽이가 불평할 테니까.
[거짓말했네─! 질 싸움은 하지 않는다니! 3년 동안 대책 없이 들이박았던 게 몇 번이야? 이 거짓말쟁이─!]
왼쪽이가 뭐라 말해왔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아, 이 집 잘하네.
"아, 그러고 보니 부탁할 게 있다."
막 식사가 끝나갈 무렵.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리사가 그런 내 모습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뭔가요?! 무슨 부탁이에요?! 역시 도망치는 게 낫겠죠? 여권을 준비할까요? 미국? 중국? 아니면 등잔 밑이 어둡다고 프랑스로…!"
"…아니, 그쪽 부탁이 아니다."
맹렬한 리사의 기세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리사가 실망한 듯 혀를 찼다.
"쯧, 그럼 뭐예요? 설마 죽으러 가기 전에 한 번 하자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쪽은 대환영인데."
"…가끔씩 네 머리가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하군."
"저도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참 궁금해요."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리사의 눈빛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부탁이 있다. 아니, 대가는 치를 테니. 의뢰라고 하는 게 맞겠군."
"그래서 무슨 의뢰예요? 혹시 샤를로트에 관한 정보라면 공짜로 드릴게요."
"그건 고맙게 받지. 그것보다 내가 의뢰할 건 그게 아니다."
"그러면요?"
"사람을 하나 찾아줬으면 한다."
덤덤히 꺼낸 이야기에 샤를로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요? 이번엔 또 누구를 죽이게요? 만약 또 일을 키울 생각이라면 멈추는 게…."
"…나도 항상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
"...."
리사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확실히 미궁 밖으로 나와서 한 일이라곤 먹는 것과 죽이는 일밖에 없었다.
"…에휴.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괜찮아요. 누굴 찾고 싶은데요?"
"…박광열 기억하나?"
"이번에 찾은 세 사람과 3년 전에 같은 공격대였던 헌터요? 그 공대장?"
한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리사가 '으음'하고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왜요?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요."
"내가 찾고 싶은 건 그 사람의 아들이다. 정확히는 아들을 포함해서 그 가족들까지… 친척까지 찾을 필요는 없다."
"으음… 일단 알겠어요. 박광열 헌터에 관해서는 이전에 따로 찾아놓은 게 있어서… 얼마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는 한편 재차 물었다.
"그럼 얼마나 걸리지?"
"한 하루 정도요. 당장 뒤적여보면 반나절 만에도 가능할 거 같은데…."
"그럼 빠르게 부탁하지."
리사는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를 꺼내 부하들에게 지시까지 내리는데, 기색을 보아서는 정말 반나절 만에 정보가 모일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사람 가족은 왜요?"
"…개인적인 사정이다."
"전 그 개인적인 사정이 궁금한 건데요."
새초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리사의 모습에 잠시 고민했다.
그 잠깐의 침묵에 리사가 더 못 참고 뾰로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치─ 그냥 말해주면 어디 덧나요? 우리 사이에 이 정도 말해줄 정도는 되잖아요?"
"…우리가 무슨 사이지?"
"밥 사주고 밥 얻어먹는 사이? 일종의 썸? 뭐, 그런 사이죠."
"…딸이 있다고 분명 말했다만."
덤덤히 내뱉는 말에 리사가 씩 웃어 보였다.
"네, 들었어요. 유부남이라니… 그게 또 매력 있기는 하죠."
"…역시 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당신 생각?"
"...."
꾹 입을 다문 내 모습에 리사가 킥킥 웃었다.
"무엇보다 가만 생각해보니 딸이 있다고 했지 와이프가 있다고는 안 했잖아요?"
"…확실히…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네, 그래요."
"그렇다면 정정하지. 딸도 있고, 부인도 있다."
"흐음? 정말요?"
리사가 슬며시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또 뭐가 문제지?"
"딸이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참 당당한데, 부인이 있다고 할 때의 당신은… 음, 뭐랄까? 조금 자신이 없는 것 같아서요."
그걸 또 꿰뚫어 보는 건가? 첫 만남 때부터 그러더니 확실히 추리하는 게 취미가 맞는 모양이다.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흐뭇해하는 리사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난 확실히 부인이 있다."
"치─ 아쉽네요."
짧게 혀를 찬 리사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지."
"이럴 때는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굳이?"
"…부인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 못 하는 이유가 있네."
"…왜 이야기가 그리로 가는 거지?"
리사는 구태여 내 의문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나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확- 엉터리로 조사해서 줄까 보다."
"비즈니스는 확실히 해라."
"쯧, 농담도 못 하겠네."
그리 말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리사가 먼저 방을 나섰다.
"조사한 건 알아내는 대로 보내 드릴게요. 샤를로트에 대한 것도 잊지 않고 넣어 드릴 테니까."
"고맙군."
"알면 근처 호텔로 가실래요? 스위트룸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데."
"…거절하지."
"원래 이런 큰 싸움을 앞두면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 음양합일이 필요한 법인데…."
은근슬쩍 중얼거리는 리사를 피해 먼저 고깃집을 나섰다.
뒤편에서 짧게 혀를 차는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거다.
그렇게 리사와 헤어지고 잠시 근처 거리를 걸었다.
'바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군.'
[바보─ 멍청이─! 그러게 살려줬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이 바아보─!!]
[배─고─파… 설이 보고싶다….]
연례행사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두 파트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춰 섰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빌딩의 한 전광판에서 샤를로트의 모습이 연신 비치고 있었다.
'SS랭크 헌터라… 미궁을 올라온 뒤의 제대로 된 첫 상대인가.'
그것도 인간 상태로는 답이 없는 상대다.
본신으로 돌아가 제대로 싸워야지만 승산이 있는, 그것도 열에 일고여덟은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그런 터무니 없는 상대.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제93화
리사가 장담했던 대로 반나절 만에 박광열 아저씨의 가족들에 대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연성을 통해 전달된 정보를 차근히 훑었다.
아저씨의 가족들에게는 다행히 별문제가 없었다.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당시에는 꽤나 큰일이었던 모양이지만 아저씨가 일찍이 들어놓은 헌터 사망 보험 덕에 당장 먹고살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고.
현재는 성인이 된 아저씨의 아들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시작해, 그리 풍족하지는 못해도 큰 탈 없이 생활하는 중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영화나 소설 속처럼 가장의 부재로 불우한 생활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만약 아저씨의 아들이 아직 어린 나이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다 성장한 이후라 천만다행이었다.
당장 보기에는 큰 탈도 없어 보이고 그들 나름대로 잘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조금 문제가 있었다.
아들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은 좋은데, 그 방법이 하필….
"미궁이라니…."
짧게 혀를 찼다.
과연 헌터의 아들이라는 것일까?
보통 같으면 꺼려질 법도 하건만, 아저씨의 아들은 제 아버지를 잃게 만든 미궁으로 직접 찾아갔다.
이해는 된다.
미궁은 위험한 대신 그만큼 확실한 보상을 주는 곳이니까.
대학 진학을 포기한 건장한 성인이 단번에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역시 미궁만 한 곳이 없었다.
그래, 충분히 이해는 가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헌터도 아니고 '캐리'라니."
절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온다.
그렇다.
아저씨의 아들은 캐리다.
보통 가족 중에 헌터가 있으면 다른 가족들도 각성할 확률이 꽤 높은 편에 속하지만, 어디까지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확률이 높다는 것뿐 정말 각성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헌터인 아저씨의 아들이 각성하지 못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언가 할 말은 많지만 구태여 꺼내지는 않는다.
언제나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까.
내가 할 것은 은혜를 갚는 것뿐이지 괜한 오지랖을 부리는 게 아니다.
그래도 하필 캐리라니….
캐리로서의 고충을 직접 절실히 느껴본 입장에서 가슴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찾아가 보았다.
* * *
슬슬 해가 저물어갈 늦은 오후 시간.
오후 사냥을 끝마친 헌터들이 하나둘 미궁을 빠져나올 시간이다.
그리고 캐리들이 가장 바쁠 시간이기도 했다.
"어이! 박민성! 빨리빨리 움직여! 얼른 처분하고 저녁 먹으러 가야 해! 예약한 시간에 늦으면 네가 책임질래?"
한 헌터의 호령에 젊은 남자가 허겁지겁 움직였다. 바로 아저씨의 아들, 박민성이다.
박민성은 제 몸집보다 훨씬 더 큰 박스를 홀로 낑낑거리며 옮겼다.
당연하게도 주변의 다른 이들은 그를 돕지 않았다.
흔한 캐리의 일상이다.
헌터 중 한 명만 나서도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무리 저게 캐리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처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거기다 단순히 그저 무관심한 거라면 몰라도, 헌터에 따라서는 심한 짓을 하는 일도 있으니 어찌 처량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어이!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비싼 돈 받으면서 쉬엄쉬엄할래?"
헌터 하나가 박민성이 옮기던 박스를 툭툭 건드렸다. 보기에는 가볍게 건드리는 것 같지만 헌터와 일반인의 완력은 그 차이가 크다.
그저 가볍게 툭툭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캐리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당해봐서 안다.
게다가 지금은 상황이 한층 더 심하다.
그저 작은 심술을 부리는 정도가 아니라 대놓고 괴롭히고 있었다.
툭툭 건드리는 손짓에 박민성이 옮기던 박스가 쓰러져 내렸다.
그 속에 담긴 미궁의 각종 부산물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헌터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 병신아! 그거 하나 똑바로 못 옮겨?! 그게 다 얼마짜린 줄 알고?!"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허리가 부서져라 머리를 숙여 사과한 박민성이 허겁지겁 쏟아진 부산물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마석부터 이름 모를 몬스터의 신체 부위, 미궁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채집물까지.
이리저리 뒤죽박죽 섞인 것들이 난잡하게 어지러웠다.
그리고 이런 박민성의 모습을 헌터는 당연하게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 병신! 똑바로 안 해? 내가 이런 꼴 보려고 비싼 돈 드려서 널 고용한 줄 알아? 어린놈이 불쌍해 보여서 끼워줬더니! 이게 빠져가지고!"
헌터와 박민성의 나이가 그리 차이 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헌터에게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그저 저 헌터에게는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것에 논리도, 이성도 필요지 않았다.
미궁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캐리에게 푸는 헌터들의 모습은 꽤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당장 미궁 앞만 가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랄까?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분명 이상한 일임에도.
그래도 박민성을 괴롭히는 헌터는 꽤나 괜찮은 편에 속한다.
저게 어떻게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겠냐만은 정말 별의별 꼴을 다 보고 들어온 내 입장에서는 저 헌터는 제법 양심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박민성이 몸 성히 미궁을 빠져나왔다는 것부터가 저 헌터가 괜찮은 편이란 걸 알려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한동안 박민성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당장 내가 나서서 박민성을 도와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는 당장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도 이후에는 그러지 못하니까.
박민성이 만약 캐리 일을 포기한다면 모르겠지만.
이후에도 내가 항상 박민성의 곁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당장 이번 일만 도와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박민성이 캐리 일을 계속할 것이라는 가정하에 좀 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필요하다.
과연 만족스러운 방법이 뭐가 있을까?
"어? 주인님?"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여섯 명의 젊은 남녀가 있었다.
윤지수와 그 일행들.
사막 구역을 지나는 과정에서 만난 젊은 헌터들이며 <마안>의 정신 지배 능력을 사용해 내 충실한 부하가 된 이들이다.
처음에는 정보원으로서 사용할 예정이었지만 예상외로 블랙 마켓의 유용함과 편리함 때문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비록 그 존재조차 잊고 있던 이들이지만 이렇게 만나니 무척 반갑다.
마침 박민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딱 맞는 인재들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재빨리 윤지수 일행을 살폈다.
따로 데리고 다니는 캐리는 없는 모양.
딱 알맞다.
냉큼 명령했다.
당연히 거부는 없었다.
이걸로 앞으로 박민성은 윤지수 일행의 캐리로서 함께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는 다 해둔 셈이다.
그래도 대뜸 윤지수 일행과 박민성을 만나게 할 수는 없다.
따로 박민성을 만나 사정을 설명할 시간적 여유도 없고, 별도의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우선 부산물을 처분한 후 박민성과 헤어진 헌터들을 만났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딱히 죽이지는 않았다.
그저 정신 지배를 조금 강하게 했을 뿐.
아마 앞으로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딱히 좋지 않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것에 대한 화풀이는 아니다.
정말로.
정신 지배를 통해 박민성에게 자연스레 해고 통보를 보냈다.
원래 캐리들이 느닷없이 해고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다 보니 박민성도 딱히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공격대를 찾는 박민성에게 자연스레 윤지수 일행이 접근한다.
이후 박민성은 윤지수 일행의 캐리가 되어 함께 움직인다.
여기까지가 마침 윤지수 일행이 나타나 할 수 있던 계획이다.
물론 아무리 윤지수 일행과 함께라도 박민성의 안전 문제 같은 것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거기까지는 당장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캐리가 될 것을 선택했을 때부터 죽음에 대한 위협은 자연스레 따라다니는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박민성 본인의 선택인 만큼 나도 더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해줄 것은 여기까지다.
물론 그렇다고 이렇게 마냥 방치할 생각도 없다.
그래서는 당장에 아저씨를 볼 면목이 없으니까.
단지 지금 당장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만큼 최소한의 조치를 했을 뿐이다.
이후의 일은 당장에 다가온 문제를 해결한 다음 천천히 생각해 볼 예정이었다.
'…이제 슬슬 찾아갈 시간이군.'
느릿느릿 넘어가기 시작하던 해가 어느새 다 저물었다.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 불빛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긴다.
향할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호텔.
만날 이는 당연하게도 샤를로트였다.
* * *
미궁 거리의 번화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급 호텔. 샤를로트는 이곳의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었다.
부족할 것이 없는 최고급 시설에도 샤를로트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나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딱히 몸이 안 좋아서가 아니라 크나큰 상심으로 인해 단시간 만에 수척해진 것이다.
바로 조금 전 이하나의 모습을 확인한 이후 줄곧 이 모습이다.
"…에이미 헌터."
잔뜩 쉰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샤를로트의 호명에 한쪽에서 없는 것처럼 조용히 부동하고 있던 헌터 에이미가 급히 답했다.
"예, 샤를로트 님."
"…스킬 사용은 끝났나요?"
평소의 샤를로트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힘 없는 목소리.
그것에 여러 가지 감정을 두루 느끼며 에이미가 공손히 답했다.
"네, 끝났습니다."
"…어땠나요?"
재차 나지막이 물어오는 물음에 에이미는 제가 보았던 모습을 조용히 회상했다.
편안히 잠든 것 같은 이하나의 모습에 처음에는 살인은 아니지 않을까 싶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이하나 헌터는 살해당했습니다."
섬뜩- 조심스럽게 내뱉은 에이미의 대답과 함께 실내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어딘가 우중충하고 우울했던 이전과 달리 한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살기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단순한 살기일 뿐임에도 에이미가 숨이 막히는 듯 컥컥- 목을 부여잡았다.
"…누구한테?"
"…허억… 헉…! 나, 남자였습니다…."
한순간 풀어진 분위기에 에이미가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에이미의 모습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샤를로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몇 명이요?"
"호, 혼자였습니다."
"한국의 헌터 중 SA랭크 이상의 헌터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헌터는 모두 다섯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권제나 헌터의 경우는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아니었습니다."
"…사내의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이는 없나요?"
"공식적으로 확인된 이들 중에는…."
조심히 말끝을 흐리는 에이미의 모습에 샤를르토가 담담히 내뱉었다.
"비공식적으로는 있을지도 모른단 거군요."
"…뒤에서만 활동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겁니다. 미궁에 출입해야 하는 만큼 헌터 라이선스는 있겠지만…."
"랭크를 속였을 거다."
덤덤히 중얼거리는 샤를로트의 목소리에 에이미가 고개를 주억였다.
샤를로타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잠시간 찾아온 정적에 에이미가 식은땀을 흘렸다.
잠깐뿐이었지만 정면에서 받게 된 SS랭크 헌터의 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에이미가 전투 쪽으로는 별다른 재능이 없는 반쪽짜리 헌터라 하더라도, 나름 A랭크에 달하는 상위 랭크 헌터.
그럼에도 단순히 살기만으로 숨이 막힐 정도라니.
에이미는 새삼스럽게 샤를로트의 힘을 한 번 더 실감했다.
그리고 조용히 애도를 보낸다.
이런 괴물 같은 이에게 찍힌 사내에게.
"…뒤쪽부터 한번 싹 쓸어봐야 할까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샤를로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물음이었지만 에이미에게 한 질문은 아니었다.
평소 스스로 묻고 답하는 샤를로트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에이미는 샤를로트의 사색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기척을 지웠다.
그리고 그 순간 불현듯 샤를로토가 번쩍 눈을 뜬다.
바로 조금 전에 느꼈던 기세보다 배는 강한 기세가 한순간 뻗어져 나왔다.
에이미가 급히 숨을 참는다.
"커… 커억…! 샤, 샤를… 로트 님…!"
불현듯 기세를 내뿜은 샤를로트는 에이미가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샤를로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밖이었다.
에이미의 시선도 더듬더듬 그녀를 따라 향했다.
A랭크 헌터의 발달된 신체 능력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빌딩 옥상의 사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여전히 시선은 창밖에 고정한 채 샤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저 사내인가요?"
여전히 기세를 내뿜고 있는 상태 그대로였지만, 자신에게만은 기세가 향하지 않도록 한 것인지 에이미는 몸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꼈다.
샤를로토와 단둘이 남고서 벌써 두 번째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에이미가 급히 말했다.
"예, 예…! 맞습니다…! 저 남자예요!"
소리치듯 내뱉은 대답에 샤를로트의 기세가 한순간 더 진해졌다.
그녀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그려진다.
"직접 찾아왔다 이건가요…? 이 샤를로트한테? 그것도 감히 내 사랑스런 제자를 죽인 범인이…?"
샤를로트가 내뿜는 기세에 주변의 장식품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탁자며 의자가 흔들리고, 두꺼운 유리창에 금이 간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에이미의 몸이 공포로 덜덜 떨렸다.
그리고 이내 빌딩 너머에서 샤를로트를 바라보던 사내가 몸을 돌렸다.
그것도 마치 따라오라는 것처럼 유유히 걸어 나간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샤를로트가 작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도전인가?"
SS랭크 헌터가 되어 세계 헌터계의 정상에 선지 벌써 십수 년. 이렇게 건방진 도발을 받아본 게 과연 언제일까?
그것도 제 사랑스런 애제자를 죽인 범인한테.
분노를 넘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 된 샤를로트가 나지막이 고했다.
"저 사내를 쫓아갑니다.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고 전하세요."
그리 말한 샤를로트가 에이미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스위트룸의 유리창을 깨부수며 떠나갔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에이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휑하니 뚫린 유리창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소란을 듣고 호텔 직원이 찾아오고 나서였다.
제94화
사내는 샤를로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동했다.
샤를로트가 주변의 피해를 생각해 전력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어도, 당장 뉴스 속보에 보도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음에도 잡힐 듯 말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특정한 스킬을 사용 중이기라도 한 듯 주변 사람들이 전혀 사내의 존재를 인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오직 샤를로트만이 쫓아올 수 있도록 그녀에게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샤를로트의 눈매가 살짝 굳어졌다.
'건방진….'
도대체 몇 년 만에 겪어보는 도발 가득한 도전일까?
제 제자를 죽인 범인인 것은 제쳐 두고서라도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내를 쫓아 샤를로트가 향한 곳은 미궁이었다.
세계 8대 미궁에 속한 미궁 중 하나인 서울 대미궁.
샤를로토 본인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으나 그 위명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같은 SS랭크 헌터였던 성재명이 실종된 곳이기도 하니까.
마치 유령처럼 게이트 앞 검문소를 통과한 사내를 쫓아, 샤를로트 역시 거침없이 게이트를 통과했다.
검문소의 직원들이 '어? 어?!'하고 당혹스러운 소리를 내뱉지만 샤를로트는 거기까지 신경 써주지 않았다.
게이트를 통과해 미궁에 들어선 샤를로트는 더 이상 주변을 배려하지 않았다.
곧장 전력으로 사내를 뒤쫓기 시작했다.
쾅-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미궁의 바닥이 움푹 파여갔다.
그렇게 샤를로트가 전력으로 이동을 시작했음에도 사내는 잡히지 않았다.
마치 그녀처럼 그 역시 주변을 배려하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아까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제야 샤를로트는 건방진 불쾌함 말고도 사내에 대한 또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상당한 실력자군요.'
당장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분노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지만, 계속된 추격전 끝에 어느 정도 머리가 식은 샤를로트는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 기세를 드러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실력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다.
아무리 현재 샤를로트가 아무런 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평소 사용하던 애병만 챙긴 상태라고는 하지만 SS랭크의 헌터다.
현 인류 최강의 한 사람인 그녀가 전력으로 뒤쫓음에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한 수준의 강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자의 복수가 그리 쉽지만은 않겠군요.'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침착하게 대응했어야 할 것을.
하다못해 제 장비라도 제대로 챙겼어야 했다.
샤를로트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애초에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샤를로트라면 곧장 사내를 뒤쫓을 테니까.
누가 뭐래도 사내는 그녀의 애제자를 죽인 범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내와 샤를로트의 추격적은 장장 한 시간 가까이나 계속되었다.
그 긴 시간을 전력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샤를로트나 그런 샤를로트에게 따라잡히지 않은 사내나 이미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사내와 샤를로트가 도착한 곳은 사막 구역의 28계층.
정상적인 속도라면 아무리 다른 몬스터들을 다 무시했다 하더라도, 못해도 하루 이상은 걸렸을 거리를 그들은 단 몇 시간 만에 주파했다.
사막 한가운데 사내가 조용히 멈춰 서고 그를 뒤따른 샤를로트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모래 위로 내려섰다.
두 사람 다 지친 기색은커녕 숨소리 하나 변하지 않았다.
"…우선 묻겠습니다.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샤를로트가 먼저 사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지막이 물어선 물음에 사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모르면 말이 안 되지. 프랑스의 SS랭크 헌터. 장미검의 '샤를로트 미셸'."
제 정체를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사내의 모습에 샤를로트는 잠시 헛웃음을 내뱉었다.
당연하겠지만 사내가 그녀의 정체를 모른다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이번엔 확인 차 묻겠습니다. 저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는요?"
"어디까지나 쫓아온 건 그쪽이다만…."
"…저는 그쪽과 잡담을 나누려는 게 아닙니다."
작게 기세를 내뿜으며 사납게 말하는 샤를로트의 모습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당연히 도전이다."
"…그렇군요. 도전을 받아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긴가민가했습니다… 그것도 이런 시건방진 도전은."
샤를로트가 말없이 사내를 노려보았고 사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먼저 그 침묵을 깬 것은 이번에도 샤를로트 쪽이었다.
"…재차 확인 차 묻겠습니다. 당신이 제 제자를… 하나를 죽였나요?"
비교적 덤덤했던 이전과 달리 확연히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A랭크의 헌터였던 에이미가 숨까지 막힐 정도였던 흉흉하기 그지없는 살기.
그 살기를 정면을 받아내며 사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유를 묻겠습니다. 왜죠? 혹시나 저를 도발하기 위해서였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라면… 지금껏 살아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스르릉- 허리춤에 매어져 있던 샤를로트의 애병, '백장미'라는 이름을 가진 기다란 세검이 부드럽게 뽑혀져 나왔다.
사내의 대답을 기다리는 샤를로트의 모습은 이미 달려들 준비가 만반이었다.
그리고 그런 샤를로트의 모습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녀를 생각해서라도 너에게는 말해주는 게 좋겠군."
중얼거리듯 말한 사내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그녀하고는 풀어야 할 매듭이 있었을 뿐이다."
사내의 대답에 잘 벼려진 검같이 날카롭던 샤를로트의 기세가 한순간 흔들렸다.
번뜩 떠오른 제자와의 기억에 샤를로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3년 전의 그 사건인가요?"
"역시 알고 있는 모양이군."
"…그 아이에게 풀어야 할 매듭이라 할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샤를로트가 잠시 사내를 훑었다.
"당시 사건의 관련자는 이미 죽었을 터… 당신은 그 지인인가요?"
"아니, 틀림없는 본인이다."
"…무슨?"
단단하던 샤를로트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린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어찌 이미 죽은 사람이….
그런 샤를로트의 모습에 사내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쪽이 믿고 말고는 상관없다. 이쪽은 이미 매듭을 푼 지 오래니까."
"…미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는 하죠… 그래요, 당신이 3년 전 사건의 희생자… 아니, 생존자라고 인정해요."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른 샤를로트가 이내 이전과 같은 날카로운 기세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꼭 하나를 죽였어야 했나요?"
"내가 그녀를 용서라도 했어야 한다는 건가?"
"…하나는 그 일 이후로 매일을 후회하며 살았어요.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의 기억에 슬퍼하고 아파했죠. 그런 가엾은 아이를 용서해줄 수는 없었나요?"
"…그건 내가 아닌 그녀의 사정이지. 나는 내 몫의 정당한 복수를 했을 뿐이다."
"그 복수가 꼭 하나의 죽음이어야 했나요?"
"그것 말고 또 뭐가 있지?"
"예를 들어…."
무어라 말을 이으려던 샤를로트의 말을 사내가 '그만'하고 끊어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 하지. 그쪽의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변할 건 하나 없으니까."
"…그렇죠. 이제 와서 하나가 살아 돌아올 리 없겠죠… 그래요, 당신이 말이 옳아요."
샤를로트가 조용히 자신의 애검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하나에게 그랬듯 저도 당신에게 제 몫의 정당한 복수를 하겠습니다."
"바라던 바다."
이후 짧은 침묵 끝에 두 사람이 격돌했다.
샤를로트가 거침없이 제 애검을 내찔렀다.
그야말로 전광석화나 다름없는 재빠른 일격.
그 매섭게 찔러오는 검에 맞서 사내 역시 어느샌가 '청송검'을 꺼내 들어 대응했다.
챙-
검끼리 부딪쳐 생긴 날카로운 소음이 짧게 울리고 눈으로 쫓아가기 힘든 공세가 연달아 이어진다.
매 순간 매섭게 찔러오는 샤를로트의 공격에 사내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물론이고 그 피부 위로도 자잘한 상처들이 계속해서 늘어난다.
한차례의 교환 후 샤를로트가 이번에는 사내의 미간을 노리고 제 애검을 내질렀다.
사내가 재빨리 공격을 쳐내면,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차 다음 공격들이 이어진다.
SS랭크 헌터의 위용에 걸맞는 강맹하고 날카로운 연격.
결국, 더 버티다 못한 사내가 훌쩍 물러섰다.
"가진 바 능력에 비해 검 실력은 형편없군요."
그런 사내를 곧장 뒤쫓지 않고 잠시간 바라보며 샤를로트가 여유롭게 내뱉는다.
지금까지의 교환이 무척 일방적이었음을 알려주듯, 잠깐 사이 엉망이 된 사내와 달리 샤를로트의 모습은 처음과 같이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호흡조차 전혀 가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샤를로트와 엉망이 된 사내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사내의 몸 위로 이곳저곳 자리한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아문다. 게다가 넝마가 되어가던 옷들조차 깔끔하게 원상 복구되었다.
마치 되감기라도 하듯 말끔해진 사내의 모습에 샤를로트가 잠깐 눈을 크게 떴다.
"스킬인가요?"
"그런 셈이지."
담담히 고개를 주억인 사내가 곧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끝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모이기 시작한 방대한 마력에 샤를로트가 곧 원래대로 안색을 고치며 곧장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파공성을 만들어내며 급히 사내와의 거리를 좁히는 샤를로트의 앞으로 커다란 얼음벽이 생겨났다.
"이번엔 마법인가요?!"
크게 소리친 샤를로트가 검을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얼음벽이 깔끔히 위아래로 베어졌다.
그리고 가뿐히 얼음벽을 베어낸 샤를로트의 행동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얼음벽을 넘어선 그녀의 앞으로 수십 개의 화염구가 날아온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위협적이다.
잠깐의 고민 끝에 샤를로트는 화염구를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하는 것을 선택했다.
콰과광-
샤를로트와 충돌한 화염구들이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연신 터져 나오는 폭음과 불길 속에서 한줄기 날카로운 바람이 빠져나왔다.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예리한 검날을 앞세워 샤를로트가 불길 속을 돌파했다.
뜨거운 불길 속을 돌파한 것치고 샤를로트의 상태는 옷이 조금 그을려진 것 외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비록 평소 사용하던 장비는 없었지만 그녀의 몸 자체가 SS랭크에 걸맞은 내구를 가지고 있던 덕이다.
그 곱고 우아한 외모와 달리 상당히 터프한 방식으로 불꽃을 돌파한 샤를로트는, 그 기세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사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마치 섬광처럼 쏘아진 샤를로트는 곧 사내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사내가 마침 준비가 끝난 다음 마법을 쏘아냈다.
보랏빛의 작은 뱀 한 마리가 샤를로트를 노리고 날아든다.
여태껏 모든 사내의 공격을 정면돌파 하던 샤를로트도 이번만큼은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휘익-
방금까지 쏘아지던 기세가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샤를로트의 몸이 움직인다.
관성 같은 물리법칙 따위는 무시한 것처럼 그녀가 부드럽게 회전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궤도를 바꾼 그녀의 검이 이번엔 사내의 목을 노리고 움직였다.
몸을 피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샤를로트였다.
솨아악-
사내가 쏘아낸 보랏빛 뱀이 샤를로트를 통과하는 것과 사내가 아슬아슬하게 샤를로트의 검을 피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만, 말끔히 사내의 공격을 피해낸 샤를로트와 달리 사내는 그렇지 못했다.
훌쩍 뒤로 물러선 사내의 목 위로 울컥 핏물이 흘렀다.
곧 이전처럼 아물기는 했지만 상당히 많은 피가 이미 모랫바닥을 적셨다.
"완전히 목을 베어낼 생각이었는데… 잘 피했군요."
휙- 자연스레 허공에 검을 휘두른 샤를로트가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몇 차례 제 목을 매만지던 사내가 덤덤히 말을 받았다.
"그렇군.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런 아찔한 느낌은 상당히 오랜만이군."
"…포기할 생각은 없는 건가요? 당신을 살려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최대한 깔끔히…."
샤를로트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단호한 사내의 태도에 샤를로트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지만 이내 속으로 삼켜낸 샤를로트가 마지막으로 권했다.
"이대로 계속 싸워도 달라질 건 없어요.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죠. SA랭크와 SS랭크의 벽은 그만큼 높아요. 그래도 계속할 건가요?"
"…그래. SA와 SS의 차이는 꽤 크군."
"그렇다면…."
"확실히 이 몸으로는 더 힘들겠어."
조용히 덧붙이는 사내의 말을 샤를로트가 당장 이해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한차례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녀의 표정이 이윽고 경악으로 뒤바뀐다.
-Shaaaaa───!!!
커다란 뱀의 포효가 사막의 밤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제95화
한순간 내리쬐는 달빛을 다 가릴 정도의 커다란 덩치.
마치 밤하늘을 보듯 새까만 비늘.
저를 응시하는 세 쌍의 붉은 눈동자.
머리 셋 달린 커다란 뱀의 모습에 아무리 샤를로트라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까지 멀쩡히 싸우던 상대가 갑자기 몬스터가 되어버린 것이었으니까.
'스킬…? 아니, 이건….'
헌터로서 벌써 30년 가까이 활동해 온 샤를로트였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스킬 같은 게 아니다.
저를 향해 쏘아지는 흉포한 적의와 살의는 오랜 시간 느껴본 바로 그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헌터나 그녀와 같은 인간이 아닌 명백한 몬스터다.
"…어떻게? 설마 여태껏 저를 속인 건가요?"
[이쪽은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귀가 아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샤를로트가 물끄러미 뱀의 머리를 올려다보았다.
세 쌍의 붉은 눈동자가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3년 만에 살아 돌아올 수 있던 것도 몬스터가 되었기 때문인가요?"
[굳이 그쪽한테 설명해 줄 필요를 못 느끼겠군.]
"…그런가요? 확실히 저한테 설명해 줄 필요는 없죠."
샤를로트는 이내 수긍한 듯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에 놀라던 것도 잠시, 그녀는 평소의 침착한 안색을 되찾아 있었다.
아니, 침착함을 넘어서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으로의 의태. 사람의 지성을 가진 몬스터라… 역시 놀랍기는 하네요. 미궁에는 아직 놀라운 것들이 차고 넘쳐요."
[…완전히 헌터의 얼굴을 하고 있군.]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샤를로트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지금껏 보아온 모습하고는 또 다른 모습.
잔뜩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신이 난 것 같기도 해 보였다.
"돌아가면 알려야 할 것들이 늘었네요… 솔직히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이후를 생각해서라도 당신을 포획해가고 싶지만… 역시 하나의 복수는 해야 되니까요."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나?]
-Khaaa───!!!
기다렸다는 듯 위협적으로 울음을 내뱉는 왼쪽 머리의 모습에 샤를로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과연 그 크기는 위협적이네요… 하지만 그거 알고 계시는가요? 덩치가 커진 만큼 노릴 만한 표적이 더 늘었다는 거."
[과연 덩치만 늘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애초에 헌터는 사람이 아닌 몬스터를 사냥하는 이들이에요. 그런 헌터의 정점인 제 앞에서 몬스터의 모습이라…."
-상당히 건방져요.
조용히 덧붙인 샤를로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 이름은요? 당시 사건의 희생자 중 하나라면… 유준영? 분명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그녀에게 그런 거까지 들은 건가?]
"말했잖아요, 매일을 후회하며 살았다고. 당신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잠시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샤를로트가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자 그제야 재차 목소리가 울린다.
[…지금은 '닉스'다. 그 이름은 버렸다.]
"…완전히 몬스터로 살아가기로 결정하신 거군요."
뱀, 닉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혀를 낼름거리며 조용히 샤를로트를 응시하고만 있을 뿐.
샤를로트가 한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하나에 대한 복수 말고도 당신을 죽여야 할 이유가 늘었네요."
[언제는 살려줄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역시 넌 상당히 건방져."
샤를로트가 제 애검을 들어 올렸다.
"프랑스, 라비앙로즈의 길드장 샤를로트 미셸. 지금부턴 단순한 제자의 복수가 아닌 헌터로서의 본분을 다하겠습니다."
담담히 내뱉은 그녀가 곧장 제 앞의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커다란 크기 차이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당당한 태도였다.
첫 시작은 가운데 머리부터였다.
'Shii─'하고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한순간 녀석을 중심으로 자욱한 운무가 퍼졌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보랏빛의 안개다.
'독인가요…? 확실히 뱀은 뱀이군요…!'
샤를로트 역시 SS랭크의 헌터로서 자체적인 독 내성 스킬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다.
장비라도 있다면 별 상관 없이 돌격했겠지만 역시 현재 상태로 그냥은 무리다.
샤를로트가 크게 검을 휘둘렀다.
스멀스멀 몰려들던 독안개가 샤를로트를 중심으로 크게 밀려났다.
다만 그럼에도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고, 여전히 주변에 자욱이 퍼져 스멀스멀 샤를로트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공간은 확보한 바, 샤를로트는 재차 돌진을 감행했다.
이전과 같은 섬광과도 같은 돌진.
그녀를 맞이한 것은 오른쪽 머리였다.
-Khaaa───!!!
오른쪽 머리의 위협적인 울부짖음과 허공에서 수십의 불덩이가 쏘아진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돌발적으로 쏘아진 커다란 불덩이.
이전 샤를로트를 노리던 것들과 숫자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크기나 위력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장비라도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샤를로트라도 맨몸으로 이걸 돌파하기는 상당히 위험했다.
그녀가 능숙하게 백스텝을 밟는다.
그리고 그런 샤를로트의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 그녀가 몸을 물린 곳 위로 뾰족한 얼음 기둥들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제 발밑에서 생겨난 얼음 가시에 샤를로트가 급히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그녀는 한순간 불편한 마력의 기류를 느꼈다.
"...!"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샤를로트는 곧 뱀의 오른쪽 머리 한가운데 자리한 세 번째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석화의 마안…!"
자체적인 내성 덕택에 그리 큰 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한순간 샤를로트의 몸을 불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능력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자욱한 독안개, 전방에서 쏘아지는 수십의 불덩이, 발밑에서 당장에라도 그녀를 꿰뚫을 것 같은 얼음 가시까지.
샤를로트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샤를로트는 당황하거나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히, 오히려 작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콰과광──!
불덩이와 얼음 가시가 충돌한다. 커다란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곧 그 위로 독안개가 삽시간에 뒤덮인다.
완전히 사라진 샤를로트의 모습을 닉스가 한순간 가만히 바라보았다.
Shii───
그리고 닉스가 짧게 혀를 날름거린 순간, 혀를 타고 묘한 향이 느껴졌다.
'이건…? 장미향?'
혀끝이 아릿할 정도로 진하게, 사막을 가득 메운 향의 정체는 바로 장미향.
한순간 정신이 멍해질 거 같은 진한 향기와 함께 자욱이 깔려 있던 운무가 한순간 펑- 하고 터져나갔다.
붉은 장미꽃이 한없이 흩날린다.
흙먼지는 물론이고 자욱이 깔려 있던 안개까지 모두 몰아내며 주변을 붉게 물들인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샤를로트가 당당히 서 있었다.
샤를로트를 '장미검'이라 불리게 해준 스킬이자 지금의 샤를로트 미셸을 있게 해준 그녀의 대표적인 스킬.
그것이 지금 닉스를 상대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지독하군.'
머리가 어질어질 어지럽다.
시야를 현혹하는 붉은 장미의 파도.
혀를 타고 넘실거리는 짙은 장미향.
닉스의 미간이 자연스레 찌푸러졌다.
-Khaaa───
가장 격하게 반응한 것은 역시 왼쪽 머리였다.
향기로운 것을 넘어서 지독하기 그지없는 장미향에 더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왼쪽 머리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뱉는 것과 동시에 얼음 조각 몇 개가 허공에서 생겨났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뾰족한 가시가 샤를로트를 노리고 쏘아졌다.
저를 향해 매섭게 날아오는 샤를로트가 일찌감치 검을 휘둘렀다. 그녀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붉은 장미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쏘아진 얼음 가시들은 모두 붉은 파도에 막혀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샤를로트의 공격이 시작됐다.
쾅─!
묵직한 소음과 함께 샤를로트의 신형이 폭발하듯 쏘아졌다.
곧게 내뻗은 검날을 따라 장미 꽃잎이 휘몰아치듯 움직인다.
한순간에 거대한 붉은 창이 만들어졌다.
Shaa──!!!
오른쪽 머리가 포효한다. 그와 함께 커다란 불길이 솟구쳤다.
화산이 폭발하듯 발밑에서 터져 나오는 불길을 샤를로트는 이전과 달리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속도를 높여 한층 더 맹렬히 돌진한다.
장미 꽃잎은 단순히 시각적 효과나 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꽃잎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이나 다름없으며, 하나의 두터운 방패나 다름없다.
한순간 샤를로트의 몸을 감싼 붉은 꽃잎에 치솟아 오른 불길은 샤를로트의 몸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섬광처럼 쏘아지는 샤를로트를 따라 붉은 궤적이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찰나 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샤를로트의 거대한 창이 마침내 닉스와 격돌했다.
정확히 가운데 머리를 노리고 쏘아진 검날에 닉스가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는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스아악-
샤를로트의 붉은 창이 아슬아슬하게 닉스의 몸을 스친다.
다만 그 여파만으로도 닉스의 두터운 비늘에 기다란 자상이 생겼다.
곧바로 아물기는 했지만 과연 용서 없는 위력이었다.
닉스가 한차례 혀를 날름거렸다.
"역시 덩치가 크니 그만큼 때리기 쉬운 법이죠."
-이만한 샌드백이 또 어디 있을까요?
어느새 붉은 창이 사라지고 샤를로트의 주위로 붉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여유롭게 덧붙이는 샤를로트의 모습에 닉스가 눈가를 찌푸렸다.
[상당히 즐거운 모양이군.]
"헌터의 본업은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 그것도 당신 같은 강적이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죠. 무엇보다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몬스터. 정말 하나의 일만 없었다면 데려다 키우고 싶은 마음이에요."
Shiii───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닉스가 샤를로트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승리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
그 여유롭기 짝이 없는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곧장 닉스가 몸을 움직였다.
Shaaa───!!!
세 머리가 동시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닉스가 먼저 샤를로트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흉흉한 기세로 저를 향해 덤벼드는 닉스의 모습을 샤를로트가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Khaaa──!!!
왼쪽 머리가 포효하는 것과 동시에 한차례 주변의 기온이 확- 내려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낮은 기온을 자랑하던 사막 구역의 밤이 지금은 마치 저 아래의 설산 구역만큼이나 차갑게 얼어붙었다.
차가운 얼음 폭풍이 일었다.
"<블리자드>…! 그런 상급 마법까지 사용 가능했군요!"
삽시간에 주변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얼음 폭풍에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던 샤를로트가 이내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매섭게 휘날리던 얼음 조각들과 장미 꽃잎이 쉼 없이 부딪혀 내렸다.
그리고 잠깐의 시차를 두고 샤를로트의 발밑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전에 치솟아 오른 불길과 달리 더 검고 뜨거운 불길이었다.
'블리자드에 이어 <헬파이어>까지…? 수마법과 화마법 모두 S랭크 이상이란 건가요?'
이건 마치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와 다름없었다.
능숙하게 발밑에서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피한 샤를로트가 다음에는 또 무엇이 올지 기대하며 주변을 살폈다.
한데 뒤섞인 붉은 꽃잎과 얼음 폭풍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웠지만, 예민하게 달아오른 감각이 언제 어느 때라도 상대의 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일전에 독마법도 사용했으니… 이번에는 독인가요?'
독 계열의 상급 마법이라면….
무심코 생각을 잇던 샤를로트가 불현듯 불쑥 다가온 기척에 크게 몸을 틀었다.
어느샌가 지척까지 다가온 닉스가 그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은신 스킬!"
처음 닉스를 추적하며 보았던 기척을 숨기는 스킬의 존재.
분명 그 존재를 확인했음에도 샤를로트는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앞서 보여준 닉스의 여러 모습들 탓에 그만 잊고만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상대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급히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붉은 파도가 재빨리 넘실거렸지만, 이미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닉스를 막기에는 조금 모자랐다.
커다란 닉스의 입이 샤를로트를 향해 활짝 열렸다.
덥썩─ 콰직─!!!
제96화
닉스의 세 머리가 각각 샤를로트의 손과 발을 꿰뚫는 순간이었다.
콰직- 처참하게 찢겨 나갔어야 할 샤를로트의 몸이 마치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에 닉스가 급히 몸을 피하려는 순간, 돌연 왼쪽 머리가 끔찍한 비명을 내뱉었다.
-Khaaa───
샤를로트의 검이 왼쪽 머리의 한쪽 눈을 꿰뚫었다.
고통에 겨운 울부짖음과 함께 닉스의 가운데 머리와 오른쪽 머리가 급히 샤를로트를 쫓아 움직였다.
저를 노리고 접근하는 두 머리를 피해 샤를로트가 훌쩍 몸을 띄웠다.
-Shaa───!!!
공중으로 몸을 피한 샤를로트를 향해 불덩이가 작렬한다.
이제는 당연하다시피 붉은 장미꽃이 그런 불덩이를 막아낸다.
이윽고 샤를로트가 꽃잎 한 장을 사뿐히 밟는다.
마치 발판처럼 꽃잎을 이용한 그녀가 공중에서 능숙하게 방향을 전환했다.
쏴악─
곧장 이어지는 돌진 공격. 샤를로트의 목표는 여전히 눈을 다 회복하지 못한 왼쪽이었다.
그런 샤를로트를 향해 오른쪽 머리가 급히 석화의 마안을 사용해 보지만 붉은 장미꽃에 막혀 별 소용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휘몰아치는 연격. 샤를로트는 꽃잎들을 발판처럼 사뿐히 즈려밟으며 전광석화처럼 닉스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닉스의 두꺼운 비늘들이 엉망진창이 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특히 중점적으로 공격당한 왼쪽 머리가 커다란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삽시간에 확- 내려간 기온과 함께 수백 개의 얼음 조각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다.
다른 두 머리에도 피해가 갔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그제서야 샤를로트가 공격을 멈추고 뒤로 훌쩍 물러섰다.
-Shii──.
샤를로트의 공격 이후, 닉스의 몸은 이미 망신창이였다.
다른 두 머리 쪽도 엉망이었지만 특히 왼쪽 머리의 피해가 가장 크다.
여전히 한쪽 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고, 이곳저곳 상처가 굉장히 많고 깊다.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 번에 다 회복되지 않을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다.
잠시 닉스와 거리를 두고 선 샤를로트가 한차례 허공을 향해 검을 털었다.
덕지덕지 묻어 있던 시뻘건 피가 모래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굉장한 재생 능력이군요. 단순 재생력만으로는 지금껏 상대한 몬스터 중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놀랍다는 듯 말하는 샤를로트의 목소리에 닉스가 사납게 'Shii─'하고 울었다.
따로 들려오지 않는 닉스의 목소리에 샤를로트는 살포시 웃었다.
"과연 그 재생력이 얼마나 지속될지… 한번 두고 볼까요?"
그리 말한 샤를로트가 다시 공격을 이어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울컥- 하고 차오르는 구토감에 샤를로트가 급히 입을 막았다.
쿨럭- 쿨럭-
검붉게 죽은 피가 손 위로 한 움큼 쏟아진다.
진득하게 묻어나는 제 피에 샤를로트의 시선이 흘깃 제 오른팔로 향했다.
그곳에는 바로 조금 전 닉스의 공격을 피하던 중 미처 다 피하지 못하고 생긴 작은 상처가 있었다.
'…독이군요.'
어지간한 독이라면 샤를로트의 자체 내성 때문이라도 별문제 없었지만, 닉스의 독은 어지간한 독이 아니었다.
의식하자마자 욱신욱신 쑤셔오기 시작한 상처.
천천히 보랗게 물들어가는 상처 부위의 모습에 샤를로트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장비만 제대로 있었다면.'
하다못해 엘릭서가 든 아이템 가방이라도 챙겨왔다면 별문제 없었겠지만, 현재 샤를로트가 가진 장비는 달랑 검 한 자루.
평소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나빴다.
'랭크로만 보자면 S랭크 이상의 독.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네요.'
샤를로트가 냉정히 제 상태를 추측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냥할 맛 나는 몬스터의 존재에 가능한 천천히 즐기고 싶었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장기전은 피하고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겠습니다.'
마력을 이용해 당장에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한 독을 막아내며 샤를로트는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다.
한편 샤를로트가 독에 의해 데미지를 입고 있던 사이 닉스의 몸은 어느덧 다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 많은 상처들이 이렇게 단시간만에 다 회복되었다는 것에서 정말 경이로운 재생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Shaa──.
눈까지 완전히 회복된 왼쪽 머리가 샤를로르틀 바라보며 사납게 울었다.
샤를로트가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닉스 역시 알고 있었다.
몸을 회복하는 잠깐의 대치 상황 중에도 계속해서 샤를로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기전을 피하고 단기 결전으로 끝을 보려는 샤를로트의 의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쪽이 단기전을 노린다면, 이쪽은 장기전을 노린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버티기만 할 생각은 없다.
샤를로트 정도 되는 헌터라면 중독되었다고 해도 마력을 통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 당연했기에, 그녀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만큼 무작정 버틴다고 해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닉스로서는 싸움을 최대한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한편 계속해서 기회를 만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닉스가 조용히 샤를로트를 바라보며 한차례 혀를 날름거렸다.
이윽고 각각 다른 의도를 가진 헌터와 몬스터가 곧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몸풀기였다는 듯 사납게 휘몰아치는 붉은 파도.
공방의 균형을 중시했던 이전과 달리 샤를로트는 오로지 공격에만 무게를 실었다.
이게 바로 SS랭크 헌터구나 싶을 정도로 샤를로트의 공격은 거침없고 매섭다.
그에 맞서는 닉스는 일단 방어에만 충실했다.
애초에 샤를로트의 공세가 너무나 거셌기에 반격할 틈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가끔 기회를 엿봐 왼쪽 머리나 오른쪽 머리의 마안을 사용해보려 했으나 샤를로트는 제대로 마안을 사용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마안을 쓰려고 슬며시 가운데 눈을 뜨는 족족 꽃잎을 사용해 눈을 가렸다.
단순히 눈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다시 눈을 뜨지 못하도록 눈을 집요하게 노렸다.
닉스에게 혀가 있어서 망정이지, 눈에만 의존해 왔다면 진작에 결판이 나도 났을 것이다.
'접근전으로는 답이 없다…!'
그렇게 장장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된 공방 끝에 닉스는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닉스 역시 나름 근접전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몬스터가 된 지 이제 겨우 3년 차인 닉스와 달리.
SS랭크가 된 지도 벌써 십수 년도 더 된 샤를로트는 그 경험의 차이가 컸다.
당장 신체 스펙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오히려 민첩을 제외한 다른 능력 자체는 닉스 쪽이 조금 더 우세했지만.
샤를로트의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는 그 차이가 그리 큰 효과가 없었다.
-Khaa──!!!
닉스는 샤를로트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노력했다.
독을 쏘아 보내거나, 불길을 일으키거나, 얼음벽을 만들어 보기도 했으나 무지막지한 샤를로트의 맹공 앞에선 그리 큰 효과가 없었다.
'버겁다….'
실전에서 이만큼 몰려본 적이 도대체 얼마 만일까?
스노우와의 대련을 제외하면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것도 스노우와의 대련은 실전이 아닌 단순 훈련에 불과했던 것을 고려하면 이런 사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 만큼 굉장히 버겁고 힘들기는 했으나 또 그만큼 심장이 뛰었다.
거친 투쟁.
당장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처절한 결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스릴 넘치는 상황.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에 와서 닉스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닉스가 지금까지의 생활에 불만이 있다거나 부족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그만큼 지금의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뿐.
닉스는 이 싸움의 이유도, 목적도 잊고서 눈앞의 적-헌터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이런 닉스의 반응을 샤를로트가 모두 지켜보았다.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건가요…?'
막힘없이 검을 내지르며 샤를로트는 희열 가득한 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샤를로트의 머리통보다 배는 더 커다란 눈동자.
파충류 특유의 쭉 찢어진 그 새빨간 눈동자는 분명 투쟁에 대한 희열로 번뜩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말끔히 사라진 살의와 적의.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자리 잡은 순수한 투쟁심.
샤를로트는 이런 눈동자를 잘 알고 있었다.
'가르시아… 그리고 성재명…!'
전자는 현재 SS랭크 헌터들 중에서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이였고, 다른 한 명은 10년도 더 전에 최강이라 불리던 이였다.
같은 SS랭크 중에서도 그 격이 전혀 달랐던 둘.
두 사람 모두 샤를로트의 기억 속에서 한없이 최강에 가까운 이들이다.
만일 SSS랭크가 될 헌터가 있다면 그 자리는 분명 두 사람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성재명은 10년 전 실종되었고 성재명이라는 최고의 라이벌을 잃고 오랜 시간 정체된 가르시아라 하지만, 여전히 샤를로트의 기억 속에서 두 사람만 한 헌터는 없었다.
아무리 샤를로트 본인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의 앞에서는 태양 앞 반딧불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두 사람의 한창때 눈빛을 지금 눈앞의 몬스터가 해 보인다.
몬스터와 헌터.
도저히 같을 수 없는 두 존재임에도 그 눈빛만은 소름 끼치게 똑같았다.
'어째서 왜 두 사람과 같은 느낌을…?!'
샤를로트는 한차례 전율했다.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거 같았던 감각.
그것을 헌터도 아닌 몬스터에게서 느낄 줄은 몰랐다.
'절대로… 절대로 살려둬선 안 됩니다…!'
만약 이자가 살아남는다면 도대체 앞으로 어디까지나 성장할 것인가?
그리고 그로 인해 헌터가, 인류가 받게 될 피해는?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 이제는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전율스런 감각 속에 샤를로트의 움직임이 한순간 흔들렸다.
싸움에 그리 큰 지장을 주지 않는 무척 작은 흔들림이었지만 닉스는 그 작은 틈조차 놓치지 않았다.
찰나간의 흔들림에 닉스의 가운데 머리가 조용히 세 번째 눈을 떴다.
공격을 이어가던 샤를로트 무심코 미묘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워낙 작고 세밀한 움직임이라 집중하지 않는다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감각이지만, 예리한 샤를로트의 감각은 그 작은 움직임마저 확실히 포착했다.
샤를로트가 흘깃 시선을 돌리자, 딱 저를 바라보는 가운데 머리의 세 번째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샤를로트가 급히 몸을 피했다.
반사적으로 눈과 저와의 사이를 가린 장미 꽃잎들이 후두둑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그 생생했던 붉은빛을 잃고 모두 말라비틀어진 채로.
"…이건?!"
샤를로트의 입에서 당혹스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을 잃고 떨어져 내린 꽃잎들은 모두 시들시들 메말라 있었다.
다시 마력을 퍼부어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꽃잎이야 다행히 스킬을 통해 다시 만들어내면 되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도 놀라운 건 놀라운 거다.
샤를로트는 급히 붉은 파도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닉스를 관찰했다.
가운데 머리의 세 번째 눈은 어느새 다시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위력만은 똑똑히 확인했다.
"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눈인가요…? 정말 터무니없군요."
샤를로트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상대에 따라서는 도저히 대응할 방법도 없을 정도의 위력적인 능력이다.
그나마 대단한 능력인 만큼 바로 연달아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점이 다행일까?
샤를로트는 무심코 마치 잠든 것처럼 죽어 있던 이하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나도 그 눈을 사용해 죽였군요…."
[고통은 없었을 거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샤를로트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잠시 잊고 있던 제자의 복수가 떠오른다.
"…그 눈, 깨끗이 도려내 드리죠."
[할 수만 있다면.]
덤덤히 들려온 목소리를 끝으로 샤를로트가 곧 붉은 파도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욱신욱신- 격한 움직인 탓에 독이 진행되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다.
확실히 몸을 갉아먹는 게 느껴질 정도의 지독한 맹독.
샤를로트는 한차례 마력을 순환시키며 독을 진정시켰다.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당장 독을 회복시킬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진행을 막을 수는 있을 터였다.
그렇다 해도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현재 사용 가능한 마력량은 평소의 3분의 1정도… 꽤 소모가 컸군요.'
그만큼 닉스와의 싸움이 힘겨웠다는 뜻이다.
다른 것도 까다롭지만 가장 거슬리는 것은 저 무식할 정도의 재생 능력.
도대체 그 한계란 것을 모르는 듯 계속해서 회복되는 상처들에 자꾸만 의도치 않은 소모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게는 안 됩니다. 너무 불리해요.'
자신의 몸 상태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 샤를로트는 슬슬 정말 한계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상대인 닉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터.
'이번 한 방에 끝을 보도록 하죠.'
원래는 이후에 있을 리옹 대미궁에서의 심층 원정에서나 사용할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샤를로트가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휘이잉─
바람의 흐름이 변했다.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위적인 흐름.
고요하던 바람이 한순간 샤를로트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게 내뻗은 그녀의 검 끝으로 붉은 파도가 거세게 휘몰아친다.
최초 사용해 보였던 거대한 붉은 창과도 비슷한 모양.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 두께는 훨씬 얇고, 가늘었으며 모여든 마력의 흐름부터가 다르다.
일전의 붉은 창이 커다란 마상용 창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한 자루의 검.
새하얀 칼날 위로 붉은 장미 꽃잎들이 겹겹이 쌓여간다.
'…저게 마지막 공격이겠군.'
뒤가 없는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모여드는 마력의 기세에 닉스는 조용히 확신했다.
'<폭식>으로 저장해 놨던 에너지도 어느새 거의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이로운 재생 능력도 무한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폭식으로 저장해 놓았던 에너지를 사용했던 것.
사실 닉스 역시도 이 이상의 전투를 이어 나간다면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내 재생 능력이 계속된다고 믿게 만든 덕에 조급해진 샤를로트가 승부수를 띄우기 시작했다.'
일부러 에너지를 신경 쓰지 않고 재생에 전력을 다한 보람이 있었다.
닉스의 허세에 샤를로트가 껌뻑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러니 저 공격만 피한다면… 아니, 바보 같았군. 애초에 피할 수 있을 만한 공격이 아니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느껴지는 낌새가 그렇다.
샤를로트가 바보도 아니고 지금 같은 상황에 피할 수 있을 만한 공격을 하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닉스에게는 저것에 대응할 만한 수단이 필요했다.
다만 정상적인 몸 상태로도 온전히 막아내기 힘들었을 공격을, 잔뜩 지친 지금에서 어찌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잠깐 닉스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사막을 가득 메우던 꽃잎들이 모두 사라졌다.
전부 샤를로트의 검 한 자루에 모인 것이다.
그 무지막지한 숫자가 모두 압축된 붉은 검.
느껴지는 마력도 기세도 모두 심상치 않았다.
"…이걸로 끝입니다."
Shii───
담담히 들려온 목소리에 닉스도 조용히 대비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곧 샤를로트가 몸을 움직였다.
번쩍─
붉은 섬광이 폭발했다.
제97화
파공성과 함께 새빨간 칼끝이 다가온다.
얼음벽을 깨부수고, 불기둥을 뚫고서, 저를 향해 날아온 독 뭉치를 그대로 호쾌하게 돌파하며 샤를로트의 칼끝이 나를 노리고 다가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찰나의 순간.
일찍이 준비해 놓았던 대응들이 모두 한꺼번에 돌파당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샤를로트의 칼끝이 바로 코앞까지 당도했다.
그녀의 검이 노리는 것은 바로 나.
가운데 머리였다.
[스킬 <사고가속S>가 발동되었습니다.]
세상이 느려진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왼쪽이였다.
미처 제지할 틈도 주지 않고 왼쪽이가 머리를 움직였다.
녀석은 내 앞을 막아서며 샤를로트의 돌진을 제지한다.
삽시간에 얼음 마법을 사용하고, 샤를로트 같은 SS랭크 헌터에게는 별 효과도 없을 <마안>까지 사용한다.
콰직-
왼쪽이의 목 한가운데가 처참히 꿰뚫린다.
피가 튀었다.
왼쪽이에 이어 다음으로 나선 것은 오른쪽이였다.
녀석 역시 미처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나와 샤를로트의 진로 사이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 댄다.
이번 싸움에서 연신 사를로트를 견제했던 석화의 마안과 뜨거운 불길이 샤를로트를 막아선다.
콰직-
오른쪽이의 머리 한쪽이 무참히 꿰뚫린다.
피가 튀었다.
[스킬 <분노S>가 발동됩니다.]
[스킬 <불굴SA>가 발동됩니다.]
두 파트너의 희생에도 샤를로트의 돌진은 전혀 기세를 잃지 않았다.
내뻗은 검의 붉은 궤적을 따라 그녀의 금발이 팔랑인다.
청명한 푸른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스킬 <한계돌파SA>가 발동되었습니다.]
피하는 것은?
불가.
막아내는 것은?
불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받아치는 것.
세 번째 눈을 뜬다.
SA랭크로 진화하며 새롭게 얻게 된 마안의 능력.
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눈.
내가 '사안'이라 이름 지은 이 능력은 아쉽게도 샤를로트 같은 강한 상대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
그녀 같은 강한 상대를 죽이려면 최소 몇 시간 이상은 계속해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그 전에 마력이나 내 눈이 더 버티지 못한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상대를 약화시키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한 번에 마력을 때려 박는 것으로 저 거칠 것 없는 기세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남아 있는 마력을 몽땅 눈에 때려 박았다.
살을 잡아 찢는 거 같은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감내한다.
그 고통까지 양분으로 삼아 온 신경을 집중한다.
눈앞에는 나를 죽이려는 헌터.
[스킬 <카운터SA>가 발동됩니다.]
나는 그 헌터를 죽이려는 몬스터.
[스킬 <저돌맹진S>가 발동됩니다. ]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둘이 마침내 교차한다.
* * *
Shii───
철퍼덕-
커다란 몸이 쓰러지고 흙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폭식>에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는 진작에 다 소모한 지 오래.
몸 하나 까딱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지막의 마지막 힘을 짜내 고개를 들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우우─."
나지막이 숨을 내뱉는 금발의 헌터가 있었다.
그녀의 검에 달라붙어 있던 붉은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천천히 사라진다.
"…대단하네요."
내게로 천천히 몸을 돌린 샤를로트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마지막의 내 반격으로 꿰뚫린 허리춤의 상처를 부여잡으며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정말… 정말로 대단해요. SS랭크 몬스터를 여럿 토벌한 적도 있지만, 지금이 가장 힘겨운 싸움이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내가 만난 몬스터 중 최고입니다."
[그쪽 역시 내가 만난 헌터 중 최고였다.]
"후후… 그게 과연 앞으로도 계속될지 모르겠군요."
나지막이 중얼거린 샤를로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입에서 울컥- 검붉은 핏물이 쏟아졌다.
허리춤의 상처에서는 꾸역꾸역 핏물이 흐른다.
힘겹게 제 애검에 몸을 기댄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내 패배로군….]
"…아뇨. 틀림없는 당신의 승리입니다."
그리 말한 샤를로트는 기침과 함께 다시 한번 시꺼먼 핏물을 내뱉었다.
[…그쪽이 완전무장한 상태였다면 틀림없는 내 패배였다.]
"…확실히 엘릭서라도 한 병 있었다면 결국 살아남는 건 저였겠죠."
담담히 내뱉은 샤를로트가 후후- 웃는다.
"하지만 결국 더 버티지 못한 것 역시 저입니다. 독 내성도 열심히 올린다고 했지만 그것도 당신의 독 앞에서는 무력하군요. 그동안 너무 장비의 성능에만 의존했던 거 같습니다. 그게 참 아쉽네요."
샤를로트는 이윽고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다.
"제자의 복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못난 스승입니다… 이대로 하나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녀라면 아무 말 하지 않을 거다. 그런 여자니까.]
"…예, 하나는 그런 여자죠."
샤를로트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맑게 반짝이는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앞으로 어쩌실 예정이죠?"
[…일단 몸부터 회복해야겠군. 솔직히 상처만 보면 이쪽이 더 심한 상황이니까.]
샤를로트가 재차 후후- 웃었다.
"저를 상대로 이렇게 살아남은 것 자체가 대단한 겁니다. 당신은 좀 더 자긍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샤를로트를 패배시킨 유일한 몬스터니까요."
장난스레 말한 샤를로트가 재차 울컥- 핏물을 토해냈다.
슬슬 한계에 다가오는지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염치없지만 하나만 부탁하겠습니다…."
[…뭐지?]
"프랑스를… 제 길드를… 인류를 너무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딱히 인간을 적대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친화적인 것도 아니죠."
곧장 덧붙이는 샤를로트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샤를로트가 한숨처럼 내뱉는다.
"몬스터인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뭐하지만… 그래도 부탁합니다… 인류에게는 잘못이 없어요."
[몬스터에게도 잘못은 없지.]
"…그것도 그렇군요."
샤를로트가 쓰게 웃는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뱀 같은 혀를 가졌군요."
[틀림없는 뱀이니까.]
"그것도 또 그렇군요."
후후- 잔잔하게 웃어 보인 샤를로트가 이내 푹 고개를 숙였다.
모랫바닥 깊숙이 꽂힌 그녀의 검이 주인의 몸을 따라 부르르 경련한다.
정말 마지막이 다가온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나?]
"…어머, 친절하기도 하셔라… 그렇네요… 유언이라…."
샤를로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를 따라온 에이미 헌터에게 전해주세요. 이번 일을 함구하라고."
[....]
꽤나 의외의 말이었던 까닭에 의아하게 샤를로트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시선에 창백하게 질린 안색의 샤를로트가 후후- 덧붙인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에게 제 길드가 박살 날 테니까요."
[…부정은 못 하겠군.]
샤를로트가 재차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러다 함께 터져 나오는 핏물에 재차 푹 고개를 숙였다.
반짝이던 금발이 힘을 잃고 모랫바닥 위로 형편없이 흘러내린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싸움이 당신이라 다행이었습니다."
[…나 역시.]
조용히 덧붙인 사념을 끝으로 샤를로트는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계 헌터계의 정점 중 하나.
프랑스의 자랑이자 자존심.
SS랭크 헌터. 장미검 샤를로트 미셸의 마지막이었다.
잠시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샤를로트의 모습을 바라보다 그제야 털썩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헌터들의 정점 중 하나, SS랭크 헌터를 살해하셨습니다.]
[이는 굉장한 공적입니다.]
[하지만 전력의 상태는 아니었기에 진화에 이룰 만한 공적에는 모자랍니다.]
[스킬 및 능력치가 크게 증가합니다.]
꽤 오랜만에 들려온 시스템의 알림에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승리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승리의 여운을 즐길 수는 없었다.
온몸이 쓰라리고 아프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과 피로.
어쩔 수 없이 한동안 모랫바닥 위에 몸을 뉘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 멍청이─ 이겼는데 꼴이 이게 뭐야! 파티를 해야지!]
[배─고─파….]
불현듯 제 한 몸 희생하며 내게 기회를 만들어줬던 두 파트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록 두 머리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본체인 내가 무사했기에 두 녀석 역시 무사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이 말에 동감이다. 정말 배고프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공복감일까?
안 그래도 온몸이 아픈데 배까지 쿡쿡 쑤시기 시작하니 딱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 배고프면 저거라도 먹던지! 이 바보 멍청이들─!]
왼쪽이의 목소리에 흘깃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무릎 꿇고 쓰러져 있는 샤를로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맞아…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넌 너무 매정해….]
답지 않게 의견이 일치하는 나와 오른쪽이의 모습에 왼쪽이가 '캬아아─!' 사나운 울음을 내뱉었다.
[이 머저리들! 대체 무슨 상관이야! 헌터가 죽으면 몬스터한테 먹히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래도 그렇지. 방금 전까지 열심히 싸웠던 상대를… 가능하면 온전한….'
[캬아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만약 저쪽이 우릴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 거 같아? 그대로 해체돼서 마석이고 비늘이고 이빨이고 잔뜩 뜯어 갔을 거 아냐?! 그거에 비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게 얼마나 온건한 처사인데!]
-맞아?! 아니야?!
사납게 울부짖는 왼쪽이의 목소리에 말없이 수긍했다.
확실히 녀석의 이야기가 맞았다.
애초에 헌터와 몬스터란 그런 관계.
아무리 마음에 드는 상대였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미궁은 원래 약육강식.
나는 승리했고 그녀는 패했다.
그러니 나는 승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정도의 마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모든 마력을 재생에 돌렸다.
왼쪽이와 오른쪽이가 부활했다.
원래부터 살아 있었지만, 머리가 도로 복구되니 평소보다 배는 극성이다.
오른쪽이는 배고프다고 난리고 왼쪽이는 그냥 난리다.
재생부터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언제나의 래퍼토리대로 성대하게 목을 물렸다.
게다가 이번에는 오른쪽이도 좀 기분이 나빴는지 함께 물어왔다.
아까 샤를로트에게 당한 곳이라 비늘이 굉장히 얇다.
목이 싹둑- 끊어질 것 같다.
어이, 그만해라.
어쨌든 아직 상처가 꽤 남아 있기는 했지만 최소한 거동이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흘깃- 샤를로트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주인 잃은 새하얀 세검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거라도 일단 제대로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침 샤를로트의 마지막 유언도 전해야 했으니 일단 챙길까?
그런데 저걸 챙기려면 인화의 술을 사용해야 했는데, 솔직히 인화의 술로 돌릴 만한 마력이 없었다.
전부 재생으로 돌린 탓이다.
인화의 술이 생각보다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탓에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은 무리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다급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숫자는 넷.
S랭크가 둘 나머지 둘도 A랭크의 헌터로, 꽤나 급히 달려왔던지 그 기세가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소란을 듣고 찾아온 것일까?
이 정도의 난리임에도 접근할 생각을 하다니, 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이들일지도 몰랐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당장 마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터.
조용히 기다려 보았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누가 봐도 서양인들.
그것도 하나는 일전에 샤를로트의 숙소에 함께 있던 여자 헌터였다.
딱 봐도 샤를로트가 말한 에이미일 것이다.
사이코메트리를 가졌다던 바로 그 헌터.
조금 아쉽게 되었다.
도착한 이들은 주변의 풍경을 보고 한번, 그리고 물끄러미 저들을 응시하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 한번.
총 두 번이나 기겁했다.
딱히 싸울 생각은 없었기에 꼬리 끝으로 샤를로트의 검을 가리켰다.
헌터들이 비명을 지른다.
곧장 내게 달려들 기세의 이들을 바라보다 곧장 사념대화를 사용했다.
대상은 에이미 헌터.
[긴말은 하지 않겠다. 샤를로트의 마지막 유언이다. '오늘 일을 함구하라'.]
"…무, 무슨…?!"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당황한 에이미 헌터에게 재차 사념을 보냈다.
[사이코메트리가 있을 테지? 자세한 건 그 검의 사념을 읽어라.]
이후 잔뜩 경악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에이미 헌터였으나, 잠깐 기세를 내보이는 것으로 곧장 상황을 파악했다.
당장 내 말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의아하게 저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에이미가 샤를로트의 검에 손을 댔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돌아… 돌아갑시다…."
"무슨…?! 에이미 헌터…?! 도대체 뭘 본 겁니까? 샤를로트 님은요? 그분은 무사하신가요? 저 괴물은…?!"
"…돌아가요… 제발… 자세한 건 이후에 설명할 테니… 이번에는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렇게 의문 가득한 네 헌터가 떠나갔다.
떠나가는 와중에 나를 연신 흘깃거렸지만, 에이미 헌터의 판단을 믿는 듯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다.
샤를로트에 대한 예우로 굳이 싸울 생각은 없었지만 덤비기라도 했으면 냉큼 잡아먹어 버렸을 텐데.
특히 마지막에 나를 죽일 듯 노려보던 에이미의 시선이 꽤 유쾌했다.
'아,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죽였어야 했나?'
사이코메트리를 통해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몬스터면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내 정보까지 알아낸다면 이후에 조금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 몸을 움직였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 안 가 다시 맞닥뜨린 네 명의 헌터.
곧장 전투태세를 취했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저쪽이 덤빈다면 몰라도 내 쪽에서 먼저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공포에 떨면서도, 하지만 그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적의를 품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에이미와 조용히 눈을 맞췄다.
왼쪽이가 잔뜩 힘 써줬다.
그녀의 랭크 자체는 A랭크라 별문제는 없었다.
이후, 내 갑작스러운 재등장에 영문을 몰라하는 헌터들을 두고서 몸을 움직였다.
이제는 정말 쉬고 싶었다.
제98화
에이미와 다른 세 명의 헌터들이 숙소로 복귀했다.
"에이미 헌터, 샤를로트 님은?! 그분은 어찌 되었나! 어서 말해주게!"
"그래! 백장미가 그곳에 홀로 남아 있던 이유는 뭐고? 그 무지막지한 괴물은 또 뭔가? 샤를로트 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복귀하는 도중 계속되는 동료들의 물음에도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던 에이미가 계속되는 동료들의 채근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샤를로트 님은… 사망하셨습니다."
담담히 고하는 목소리에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한 S랭크 헌터가 참지 못하고 에이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게…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샤를로트 님이…! 그분이 설마…?!"
"…이번 일은 함구합니다. 샤를로트 님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제 멱살을 낚아챈 동료의 행동에도 에이미는 덤덤히 제 할 말만 내뱉었다.
그 지나치게 기계적인 반응에 다른 헌터들 역시 사실을 인지했다.
샤를로트 미셸이 사망했다는 것을.
"말도 안 돼! 그분이 어떻게…! 그것도 이런 변방의 소국에서…! 네가 잘못 본 거 아닌가?! 네 스킬에 문제라도 생긴 게…!"
격하게 쏘아붙이는 헌터의 행동을 다른 동료 헌터가 급히 제지한다.
"보얀, 진정하게. 에이미 헌터의 능력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지금 진정하게 생겼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샤를로트 님이라고! 그분이 이렇게 돌아가실 리가…!"
털썩- 에이미의 멱살을 잡던 S랭크 헌터, 보얀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믿을 수 없어… 믿을 수가…."
"…그건 나도 동의하네. 서울 대미궁이 리옹 대미궁과 같은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샤를로트 님이라면 별문제가 없어. 그것도 고작 28계층 정도라면…."
무심코 말을 잇던 헌터가 불쑥 떠오른 생각에 에이미를 돌아보았다.
"에이미 헌터…! 혹시 샤를로트 님과 싸운 적이 그 몬스터였나? 머리 셋 달린 뱀?"
황급히 소리친 목소리에 망연자실해 있던 보얀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놈이군…! 그놈이 샤를로트 님을 죽인 거야! 그렇다면 왜…! 왜 말린 거냐, 에이미! 넌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벌떡- 일어선 보얀이 재차 에이미의 멱살을 잡으려던 것을 다른 S랭크의 헌터가 급히 막아섰다.
그런 동료를 이리저리 밀치며 보얀이 있는 힘껏 악을 썼다.
"빌어먹을…! 대답해라, 에이미…! 아까 왜 우리를 말렸지…?! 설마 놈이 두렵기라도 한 거냐?! 아무리 기세가 심상치 않았어도 그렇게 상처 입은 놈을…!"
"…재차 말합니다. 이번 일은 여기서 끝입니다. 모두 함구하세요."
"너…! 지금 그게 무슨…!"
와락 소리치는 보얀의 목소리에 에이미가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샤를로트 님의 부재 시 전권 대리로서 명령합니다. 보얀 파를로, 이번 일은 여기서 모두 끝입니다."
"…그딴 개소리를 내가 들은 거 같아?!"
"…알렉사이 헌터. 보얀 헌터를 말리세요."
발악하는 보얀을 또 다른 S랭크의 헌터 알렉사이가 막아 세운다.
그 역시 보얀처럼 지금 상황을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전권 대리로서의 에이미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녀는 비록 자신들보다 랭크는 낮았지만, 샤를로트가 신임한 오른팔이었으니까.
"모두 짐을 챙기세요. 오늘 중으로 곧장 본국으로 귀국합니다."
"…다른 조사는 없는 겁니까?"
알렉사이와 보얀말고 남아 있던 다른 A랭크 헌터의 물음에 에이미가 한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그게 바로 샤를로트 님의 마지막 명령이니까요."
"…도대체 무엇을 보신 겁니까?"
조용히 물어오는 물음에 에이미가 잠시간 입술을 달싹였다.
"…괴물을 봤어요."
나지막이 내뱉는 에이미의 목소리를 끝으로, 샤를로트를 따라 한국에 들어왔던 헌터들이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이미 대한민국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에이미와 다른 헌터들이 샤를로트의 유언에 따라 아무리 이번 일을 함구하기로 했어도, 이전에 샤를로트가 서울 시내 한복판을 질주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녀가 미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몇 시간째 그 이유를 추측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급히 샤를로트를 쫓아갔던 라비앙로즈의 길드원들이 복귀했다.
그것도 찾으러 간 샤를로트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에 대한 추측으로 다시 한번 국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이들은 아직 샤를로트의 볼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의견을.
또 몇몇 이들은 샤를로트가 홀로 하층 원정을 개시했다는 의견을 내놓았으며.
극히 소수의 이들만이 조심스럽게 샤를로트가 사망하지 않았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렇게 각자의 추측으로 뉴스며 각종 언론들이 한창 소란스러운 와중, 라비앙로즈의 길드원들이 귀국길에 올랐다.
타고 온 전용기를 타고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제대로 난장판이 벌어졌다.
과연 샤를로트를 두고 귀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도 아무런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고서?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샤를로트의 사망 소식을.
물론 이에 대한 많은 반박 의견들도 있었지만 제대로 된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들이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로 귀국한 라비앙로즈 측에서 어떤 공식 입장도 발표하지 않는 것이 샤를로트의 사망에 대한 확실한 근거로 작용했다.
이는 단순히 국내뿐만 아니라 샤를로트의 입국 이후 시시각각 상황을 살피던 해외 언론들 역시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가 격동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실.
뉴스 특보로 보도되는 샤를로트의 사망 소식에 노관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뉴스를 지켜보던 비서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샤를로트 헌터의 실력을 생각하면 당연히 거짓이겠지만…."
"…그런 거치고 라비앙로즈 쪽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단 말이지."
"…예. 평소라면 거짓이라며 당장 길길이 날뛰었을 테지만… 이번에는 너무 조용합니다."
노관식이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프랑스 정부 쪽에서는 뭐라든?"
"…당장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만… 그쪽 역시 제대로 된 정보 파악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라비앙로즈 쪽에서 전부 함구하고 있다?"
"정확히는 귀국길에 오른 네 명의 헌터가 침묵하고 있겠죠. 프랑스 본국에 있는 라비앙로즈 길드도 아직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비서의 설명에 노관식이 몇 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하던 노관식이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샤를로트 헌터가 죽은 거겠지?"
"예… 99퍼센트 확신합니다."
"나머지 1퍼센트는?"
"어디까지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죠."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은 노관식이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짚었다.
"제 마음대로 찾아오더니… 이제는 제 마음대로 죽어 버리기까지 하는군… 그것도 하필 서울 대미궁에서라니…."
"…이것 모두 최근 있던 이상 사태와 관련 있는 거 아닐까요?"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SS랭크 헌터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일이 어딨겠어?"
노관식이 꾹꾹 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조사는 어떻게 됐어?"
"…의뢰를 수락한 길드 모두 별다른 소식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기대를 하고 있던 조사대가 은하 길드였는데…."
"그쪽은 이하나 헌터 사망 소식으로 난리가 났었지…."
"예… 거기다 샤를로트 헌터의 방한 소식 때문에 조사 활동이 모두 올 스탑 됐으니까요."
"끄으응… 정말 이게 다 무슨 꼴인지… 하나 해결하기 전에 또 하나가 일어나다니…."
노관식이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 사태도 이상 사태지만 다른 게 정말 난감하군."
"…프랑스 쪽의 반발 말씀입니까?"
"그것도 있고… 아니, 그쪽은 사실 이제 그리 큰 문제가 안 돼."
"예…?"
의아하게 바라보는 비서의 시선에 노관식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담담히 말했다.
"프랑스가 무서운 이유는 샤를로트 헌터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녀가 사라진 이상 그놈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해. 아니, 발톱까지 다 빠진 늙은 호랑이군…."
담담히 내뱉은 노관식이 흘깃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어쨌든 샤를로트 헌터가 죽었다고 판단된 와중에 프랑스도 옛날처럼 날뛰지는 못할 게야."
"…그렇다면 걱정하시는 건?"
조심스럽게 물어본 비서의 물음에 노관식이 한풀 힘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다른 SS랭크 헌터들이지."
"…아."
비서가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중국의 개망나니가 있구만… 미국의 두 SS랭크들도 잠잠하지는 않겠지."
"…미국의 레이샤 헌터가 평소 샤를로트 헌터와 친분이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거의 멘토, 멘티 관계라고 했던가? 그나마 얌전한 아가씨니 샤를로트 때처럼 무작정 들이닥치지는 않겠지만…."
조용히 중얼거린 노관식이 재차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진짜 문제는 중국의 개망나니나 가르시아 헌터란 말이지… 개망나니는 둘째 치고, 가르시아 그 양반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은 노관식이 털썩- 등받이에 몸을 파묻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르시아 헌터 말입니까? 딱히 다른 소문은 못 들었는데요… 최근에는 잠적한 채 조용하다고…."
"그 양반이 말이야… 예전에는 참 대단했어. 분명 신사적이기는 한데… 끄응…."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그래. 성재명이가 살아 있을 때는 완전 난리도 아니었지. 라이벌이다 뭐다 하면서 항상 치고받고 싸우니 원…."
옛 기억을 회상하듯 한탄을 내뱉는 노관식의 모습에 비서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후… 골치 아픈 SS랭크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문제나 해결해 보자구."
한차례 한숨을 내쉰 노관식이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흘깃 비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샤를로트 헌터가 그런 난리를 피며 미궁까지 들어간 이유는?"
"현재로서는 이하나 헌터를 죽인 범인을 쫓은 게 아닐까라는 의견이 가장 지배적입니다. 샤를로트 헌터가 그렇게까지 행동할 이유가 그것 말고는 없으니까요."
"그래. 레이디라고까지 불리는 헌터가 그렇게 주변 배려 없이 날뛸 이유는 그것 정도뿐이니까…."
-그렇다면.
노관식이 한차례 숨을 들이켰다.
"샤를로트 헌터는 그 헌터에게 패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예,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노관식이 가만히 팔짱을 겼다.
"흠… 국내 헌터 중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헌터는?"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뒷쪽에는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군."
노관식이 '흠-'하고 제 턱을 매만졌다.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블랙 마켓이었던가?"
"네, 정확한 규모는 파악이 불가능하지만.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쯧… 아까운 인재들이 다 뒤에서 놀고 있구만… 그래서 그쪽 총책임자의 랭크는?"
"워낙 은밀해서 정확한 파악은 불가능하지 못해도 S랭크 이상일 거라도 추측됩니다."
"…휘유. 그런 인재가 헌터를 해야 했었는데…."
가볍게 혀를 찬 노관식이 한차례 미간을 문지른다.
"그래서 샤를로트 헌터급의 인물은 확실히 없는 건가?"
"…그런 이가 있었다면 진작에 밖으로 드러났을 겁니다."
"확실히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지… 그렇다면 외부의 헌터인가?"
"SS랭크로 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제 막 SS랭크가 된 이가 샤를로트 같은 경험 많은 상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담담히 중얼거린 노관식이 골똘히 생각에 빠진다. 그런 노관식의 모습을 비서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 끝에 노관식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일단 당장 있는 정보만으로 알 수 있는 게 없군. 조사를 서둘러야겠어."
"뒤쪽부터 싹 훑을까요?"
"우선 미궁부터. 뒤쪽은 아무래도 아닐 거야. 그 치들도 머리가 있는데 굳이 샤를로트를 건드릴 이유가 없지."
"…그렇다면?"
조용히 되묻는 비서의 물음에 노관식이 덤덤히 입을 열었다.
"이하나 헌터를 죽인 범인을 샤를로트 헌터가 쫓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3의 인물이 나타나 샤를로트 헌터를 죽였다… 이렇게 가정하고 가보자."
"그 제3의 인물이라면?"
"미궁이니 당연히 몬스터겠지. 솔직히 국내에서 샤를로트 헌터를 죽일 수 있을 만한 헌터가 있을 수가 없어. 그나마 나나 쌍룡 길드 길드장 정도가 가능하겠지만… 끄응… 아무리 생각해도 승률이 1할도 채 안 돼."
-1대1로는 답이 없지.
그리 덧붙인 노관식이 이윽고 몸을 돌렸다.
"자자,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 앞으로 시끄러워질 테니 충분히 대비하도록 하고."
"예! 협회장님!"
크게 답하는 비서의 목소리를 끝으로 노관식이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SS랭크 헌터 둘을 잡아먹은 미궁이라… 이것 참 골치 아프군.'
그의 미간에 자리한 주름이 점점 더 깊어진다.
* * *
"그 다 늙은 아줌마가 죽었다고? 그것도 바로 옆의 작은 반도에서?"
"예… 아직 확실지는 않지만…."
"허… 이 정도면 거의 사망 확정이지! 이것 참 묘하네… 그 재수 없는 아줌마가 죽다니… 언제 한번 크게 먹여보고 싶었는데… 쯧…."
"...."
"…그것보다 벌써 둘이나 죽어 나갔단 말이야? 그 10년 전의 최강이라 불리던 성재명부터, 재수 없는 아줌마까지… 이야, 그 동네에 뭐 있는 거 아닌가? 나도 한번 놀러 가 봐?"
"와, 왕퐝님! 부디 자제를…! 아직 일정이 많습니다! 당장 다음 원정도 바로 코앞인데…!"
"쯧…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까 잔소리는 그만. 무심코 죽여버릴 뻔했잖아."
"헉…! 죄, 죄송합니다!"
* * *
"…샤를로트 씨가 돌아가셨다고요?"
"…예,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입니다."
"…제 일정이 어떻게 되죠?"
"적어도 1년 동안은 따로 시간을 내기 힘드십니다."
"…반년. 딱 반년으로 줄이죠."
"…예, 알겠습니다."
* * *
"샤를로트 님이…."
"관심 없다."
"…서울 대미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
제99화
몸의 회복이 얼추 끝났다.
모든 마력을 재생으로 돌린 덕에 적어도 외상만은 깔끔히 나았다.
다만 조금 문제가 있는데….
바로 지금껏 <폭식>에 저장해 놓았던 에너지를 모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딱히 에너지를 모은답시고 열심히 먹어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거의 1년 가까이 저장만 했던 에너지를 한 번에 다 소모했으니 다시 한번 샤를로트가 얼마나 강한 상대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강한 상대를 내가 이겼고 말이지.'
괜스레 자긍심이 차오른다.
샤를로트가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부족한 에너지인데….'
그동안 그리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막상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가 텅텅 비고 보니 몸을 유지하는 열량(에너지)가 너무 많이 든다.
'오른쪽이가 왜 항상 배고프다고 한지 알 것 같군.'
역시 덩치가 덩치다 보니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동안 사냥에 열중했다.
사막 구역과 산림 구역을 오가며 몬스터, 헌터 가리지 않고 보이는 족족, 기척이 느껴지는 족족 사냥했다.
하루 만에 내가 사냥한 숫자가 백을 훌쩍 넘기니 한동안 미궁에서 다른 생물들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많은 숫자를 잡아먹었음에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여기까진가….'
막 한 무리의 헌터들을 사냥했을 때 불현듯 느꼈다.
'이 이상 사냥했다간 문제가 있다.'
아무리 헌터보다 몬스터 위주로 사냥했다고 쳐도, 이렇게 단기간 만에 헌터들이 훌쩍 사라져서야 괜한 주의를 끌 뿐이다.
애초에 지금도 조금 간당간당하다 싶은데, 이 이상 헌터들을 건드렸다간 협회에서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러울 텐데.'
샤를로트의 유언 덕에 당장 에이미나 다른 라비앙로즈의 길드원들은 이번 일을 함구할지라도, 이미 알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다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협회나 정부 쪽이 상당히 바쁠 것이란 것도 예상할 수 있었는데, 만약 이 와중에 내 이야기까지 그들에게 전해진다면?
'…십중팔구 대규모 토벌대를 보내오겠지.'
소란스러우면 더 소란스러운 만큼 이런 문제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샤를로트의 죽음과 내 관련성을 눈치챌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런 점을 생각하면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헌터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한 것은 역시 악수였다.
그렇기에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었는데….
[배─고─파….]
'…그래. 우리가 자제할 수 있을 리 없지.'
그래도 이제부터라도 헌터를 죽이는 건 확실히 참을 필요가 있었다.
"꺄아악─!!"
"처, 처음 보는 몬스터! 변이종인가?! 못해도 A랭크 이상…!"
"도, 도망쳐─!!!"
"협회에 신고해! 변이종이다…!"
은신해야 했단 걸 깜빡해 버렸다.
어쩔 수 없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인 걸로.
* * *
샤를로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싸움이 끝나면 곧장 자신을 찾아오라 리사가 말했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만큼 그녀 쪽도 상당히 바쁠 테지만 거기까지는 내 알 바 아니었고.
무엇보다 에너지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괜히 인화의 술을 써가며 그녀를 만나러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랜만에 본래 몸으로 생활하니 상당한 해방감을 느끼는 중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슬슬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
설이와 스노우.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말이다.
물론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들릴 곳이 있었다.
18계층. 리자드맨의 부락을 방문했다.
일찌감치 기세를 내뿜으며 느긋하게 움직이니 현명한 비늘이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저번에 귀띔했던 이야기에 결정은 했나?]
[우리 결정했다. 닉스를 따라간다.]
마음을 굳힌 듯 당당히 말하는 현명한 비늘의 모습에 조용히 뒤편의 다른 리자드맨들을 살폈다.
세 리자드맨 대전사들을 필두로 마중 나온 모든 리자드맨들이 굳게 고개를 끄덕인다.
확고한 듯하다.
* * *
계획의 첫 시작은 일전에 설이의 친구를 구하려 했을 때로 돌아간다.
결국 지금은 토순이라는 훌륭한 장난감이 생기기는 했지만, 토순이와 만나기 전까지 설이의 부하 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건 바로 리자드맨들이었다.
당시에는 거리 문제나 다른 이런저런 문제들로 포기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도 본인들의 동의 없이 함부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기에 일전의 마지막 방문 때 슬쩍 고민해 보라 이야기를 꺼냈는데, 다행히 모두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렇군. 떠날 이들은? 이게 전부인가?]
[부족 전체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나머지는 짐을 꾸리고 있다.]
[…빠르군.]
재빠른 리자드맨들의 행동에 한차례 고개를 주억이면서 슬쩍 그 숫자를 살폈다.
[…30이 좀 넘나? 확실히 예전에 비해 많이 줄긴 했군.]
2년여 전 떠나던 당시에 그 숫자가 7, 80 정도 되었으니 두 배 넘게 줄어든 셈이었다.
새삼 리자드맨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짐을 다 챙긴 리자드맨들과 부락을 떠났다.
인원이 인원인 만큼 눈에 띌 수밖에 없었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당분간 미궁 밖으로 나갈 계획도 없고, 이번에 상층을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소란이 일어난다 해도 이후 내가 다시 상층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다 가라앉아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니 굳이 헌터들을 잡아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른쪽이가 굉장히 기뻐했다.
당초 계획은 곧장 18계층을 떠나 빠르게 산림 구역을 벗어날 생각이었지만, 예정이 조금 달라졌다.
부락을 막 떠났을 시점에 리자드맨들이 간절히 부탁했기 때문이다.
늑대들에게 혼쭐을 내주고 싶다고.
그동안 당한 게 많기는 많았던 모양이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허락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리자드맨들 만으로 조금 버거울 것 같았기에 나도 조금 손을 거들었다.
인간 상태가 아니라 본신이었기에 거들어 줄 손은 없었지만.
왼쪽이가 신이 나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날 18계층 늑대들의 씨가 말랐다.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할 것이지.
이게 다 녀석들의 업보다.
떠나가는 길, 잊지 않고 깜짝 새의 알을 챙겼다.
그동안 많은 알들을 먹어왔지만 이만한 별미가 또 없다.
반드시 설이와 스노우에게 먹여주고 싶었다.
리자드맨들에게 부탁해 가능한 많은 알들을 챙겼다.
당연하게도 깜짝 새들이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으나 늑대들이 당한 꼴을 확인하고는 얌전해졌다.
몇몇은 자진해서 자기 알을 바치기도 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까지 공손하니까 오히려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너희들, 알을 목숨처럼 아끼는 거 아니였나…?
알 따위는 다시 낳으면 그만이라고?
그건 또 그렇긴 하지만….
여러모로 개운치 않기는 했지만 받을 건 다 받았다.
리자드맨들이 아니었다면 옮기기 힘들었을 양이다.
[그런데 닉스.]
[왜 그러나, 현명한 비늘?]
[가는 도중 알이 썩거나 하면 어쩌나?]
[....]
급하게 되돌아가 깜짝 새 부부 두 쌍 정도를 챙겼다.
아까 자진해서 알을 바친 그 녀석들이다.
아니,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서 너희들을 먹으려는 게 아니라….
단지 무한리필집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 울지 마라.
알만 잘 낳아준다면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줄 테니까.
그렇게 정확히 34마리의 리자드맨들과 두 쌍의 깜짝 새 부부와 함께 18계층을 떠났다.
중간에 우리를 보고 기겁하는 헌터들이 여럿 있었지만 딱히 협회에 신고는 못 할 거다.
오른쪽이가 열심히 일했거든.
나를 포함해 39마리나 되는 몬스터들 이끌고 열심히 계층을 내려갔다.
헌터로 치면 중형 공격대에 해당하는 숫자다.
평야 구역 같은 집단전이 생활화된 곳이면 몰라도, 이런 상층에서야 당연히 마주치는 몬스터건 헌터건 기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래 보이는 족족 사냥해 배를 채웠지만, 그것도 내려가면서 횟수가 점점 많아지니 이내 그냥 보내주게 되었다.
오른쪽이가 슬슬 배가 부른 기색이었다.
많이도 먹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계층을 내려가, 해가 저물 때쯤 28층 사막 구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꽤 커다란 문제를 마주해 버렸다.
[니, 닉스…! 추, 춥다아!]
"즈…! 즈아아─!!"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추위에 벌벌 떨었다.
그래, 리자드맨도 따지고 보면 파충류.
녀석들 역시 틀림없는 변온 동물이었다.
급히 마법으로 불을 피웠다.
덜덜 떨던 리자드맨들이 그제야 살 것 같은 얼굴을 해 보였다.
조금 미안하다.
[저, 저기… 저희도 조금 추운데….]
[…너희는 깃털이 있지 않나?]
[…그, 그게 그것이….]
어쩔 수 없이 깜짝 새들을 위한 불도 피워주었다.
[저, 저기…! 부, 불이 너무 가까운뎁쇼?!]
[아, 실수다. 미안하다. 치킨이 먹고 싶어지는 바람에 그만 무심코….]
깜짝 새들이 열렬히 날개를 퍼덕인다.
아니, 정말 실수라니까.
불 마법은 오른쪽이가 사용하니 사심이 조금 들어간 것뿐이다.
그것보다 걱정이다.
당장에야 내가 불이나 얼음을 만들어주면 괜찮겠지만, 최종 목적지인 설산 구역은 이곳에 몇십 배는 더 추운 혹한의 땅.
그전에 거쳐 가야 할 평야 구역이나 용암 구역도 굳이 말할 필요 없다.
'깜짝 새들은 둘째 치고, 리자드맨들이 과연 적응할 수 있을지….'
내성 스킬이라도 생긴다면 좋겠지만 내가 아닌 다른 몬스터들의 경우 스킬이 새로 생기는 경우가 무척 드물다.
과연 리자드맨들 전원이 내성 스킬을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굉장히 불투명했다.
'되도록 천천히 움직여야겠군.'
일단 천천히 기후에 적응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후 가야 할 다른 구역들을 생각하면 이곳 사막 구역은 훌륭한 적응 훈련장이 되어줄 것이다.
'거기다 이번 기회에 랭크도 높일 수 있도록 해야겠어.'
현명한 비늘은 C랭크, 다른 세 마리의 대전사들은 D랭크.
랭크적으로 봤을 때는 설산 구역에서 어찌어찌 생활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랭크였지만, 그래도 이후의 본격적인 생활을 생각하면 조금 더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가 저 넷을 제외한 다른 리자드맨들은 모두 E랭크였으니 확실히 성장할 필요가 있다.
다들 겨우 토순이급에 불과했으니까.
문득 이렇게 보니 토순이가 의외로 강하다 싶었다.
리자드맨이나 깜짝 새와 동급이었으니까.
과연 하층의 몬스터라는 것일까?
평소 설이한테 당하던 걸 떠올리면 전혀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말이다.
그렇게 리자드맨들의 적응을 위해 적당히 이동 속도를 조절했다.
낮이 되면 얼음 마법을 사용하고 밤이면 불 마법을 사용했다.
이동 도중 만나는 몬스터들도 되도록 리자드맨들이 상대하게 함으로써 리자드맨들의 성장을 도왔다.
당장 눈에 띄는 성과는 안 보였지만 현명한 비늘을 시작으로 세 대전사들이 하나둘 내성 스킬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당히 뿌듯하다.
그런데 현명한 비늘과 대전사들은 왜 우는 것일까?
혹시 왼쪽이가 괴롭혔니?
아니면 오른쪽이가 배고프다고 입맛을 다시든?
어느 쪽이든 말해라, 내가 당장 혼쭐을….
아니었다.
녀석들은 단지 내 하드한 트레이닝이 괴로웠던 모양이다.
그 지옥 같은 훈련 끝에 마침내 내성 스킬을 배워서 울컥하고 차오른 것이라고.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딱 적당한 상대도 찾아서 데려와줘, 죽을 거 같으면 제때 힐도 써줘.
전혀 부족할 게 없는 것 같은데….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라 너무 과해서 문제란다.
아니. 나 때는 말이야,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버티고 그랬어.
뭐? 휴식 시간?
그런 게 어딨어?
어휴… 나 때는 말이야….
격한 반응에 결국 조금 일정을 조정했다.
다른 리자드맨들을 포함, 깜짝 새들이 현명한 비늘과 세 대전사들을 열렬히 찬양했다.
그렇게 힘들었나…?
눈물까지 글썽이며 찬양하는 리자드맨들의 모습에 조금 미안해졌다.
확실히 반성한다.
이런 느낌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계층을 내려갔다.
제100화
과거에 살아남았던 네 마리의 리자드맨 중 하나는 C랭크의 [리자드맨 샤먼]으로, 현명한 비늘의 이름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세 마리의 리자드맨들은 각각 리자드맨 대전사로 성장하며 D랭크가 되었다.
다만 이 세 녀석은 현명한 비늘의 이름을 이은 녀석과 달리 그 이름이 없었는데, 이에 내가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다.
고심한 끝에 결정했다.
가장 덩치가 작은 녀석이 '첫째'요. 중간 덩치의 녀석이 '둘째'요. 가장 큰 녀석이 '셋째'다.
합쳐서 리자드맨 삼형제.
안다.
너무 대충 지은 거 같은 이름이란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비웃는 건 그만해라, 왼쪽아.
그렇게 비웃을 거 같으면 네가 한번 지어보던가!
당연하게도 왼쪽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결국 자기도 못 할 거면서….
애초에 우리는 하나니까 작명 센스도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각각 첫째, 둘째, 셋째라 불리게 된 리자드맨 삼형제는 자신들의 이름에 굉장히 만족해 보였다.
덩실덩실 춤까지 춰가며 기뻐하는 것을 보니 이름을 지어준 당사자로서 굉장히 뿌듯하다.
그런데 다른 리자드맨들이 나한테 슬금슬금 모여드는 건 왜일까?
너희들도 이름을 지어달라고?
30마리나?
무리다.
거기의 깜짝 새 녀석들도 실망한 듯 축 늘어지지 마라.
이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끌려왔다며 굉장히 우울해하던 녀석들 아니였냐?
전환이 너무 빠르다.
이날 밤 리자드맨 삼형제가 진화했다.
여전히 똑같은 대전사이긴 하지만 확실히 성장한 것이 느껴진다.
내 기준에서는 쥐꼬리가 또 쥐꼬리만큼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축하한다.
그래서 슬금슬금 몰려들지 마라, 너희들.
30이나 이름 짓기는 무리라고.
거기다 슬그머니 끼어 있는 현명한 비늘. 너는 이미 훌륭한 이름이 있지 않은가?
전대 현명한 비늘이 슬퍼한다.
아니,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어도….
어물쩍 넘어갈 뻔했던 마음을 다잡는다.
아무리 그래도 30개가 넘는 이름을 짓는 것은 무리였다.
1호, 2호, 3호 같은 이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현명한 비늘을 포함한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혀를 찼다.
이 녀석들 뭐지…?
* * *
이런 느낌으로 느긋하게 사막 구역을 전진했다.
어느새 과반수 정도의 리자드맨들이 내성 스킬을 배웠다.
남은 녀석들도 슬슬 불이나 얼음 없이도 문제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슬슬 얼마 남지 않은 거 같다.
의외로 깜짝 새들은 빠르게 내성 스킬을 배웠다.
네 마리 다 내성 스킬을 가지고 문제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오른쪽이가 조금 아쉬워했다.
기회를 봐서 은근슬쩍 태워 먹으려고 했거든.
이 녀석들 혹시 생존 본능 탓에 빨리 배운 걸까?
합리적 추론이다.
한밤중 꽤 많은 숫자의 언데드들과 마주쳤다.
사막 구역에 들어오고 난 이후 종종 마주치고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는 처음이다.
그 숫자가 대략 100 정도.
무리를 이끄는 것은 A랭크의 몬스터 [스켈레톤 캐스터]라는 녀석인데, 이 녀석이 진화하면 그 유명한 [리치]가 된다.
무리 중간중간에 [구울]이나 [레이스] 같은 것도 간간이 끼어 있는 것이 리치는 아니더라도 헌터들 입장에서는 꽤나 까다로운 상대일 것 같았다.
리자드맨들의 좋은 상대가 되어줄 것 같다.
현명한 비늘을 포함한 삼형제가 기겁했지만 쿨하게 무시했다.
저 정도는 거뜬히 쓰러트려야 훌륭한 몬스터가 될 수 있다.
자, 어서 싸워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며 왼쪽이한테 성대하게 목을 물렸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처리했다.
언데드 고기는 맛이 없어서 전부 남기고 왔다.
이후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먹을 수밖에 없었다.
시큼한 묵은지 맛에 울컥 구토감이 차오른다.
그래도 꾸역꾸역 먹었다.
이후 한동안 리자드맨들이 내 주위로 다가오지 않았다.
냄새가 나는가 보다.
꽤나 먹을 것이 풍족했던 산림 구역과 달리 사막 구역에는 제대로 된 먹을 것이 없었다.
자주 보이는 건 언데드요, [샌드맨] 같은 부정형 몬스터는 그냥 모래 덩어리나 다름없는 터.
전갈 같은 녀석들은 단단하기만 하고 먹을 부위가 별로 없다.
그나마 [샌드 웜] 계열의 지렁이들이 먹을 만하지만 어째선지 이 녀석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잔뜩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평야 구역에서 오크 고기나 먹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 생각하고 있으면 포식할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41계층.
사막 구역의 마지막 계층으로 리자드맨들도 대부분 내성 스킬을 문제없이 배웠고, 슬슬 사막 구역을 벗어나려던 시점이었다.
42계층으로 향하는 게이트 앞에 막 도착했을 때쯤 한 무리의 헌터들이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숫자는 대략 6, 70여 명 원정에서 복귀하던 중인 듯, 빠른 이동을 위해 차림이 제법 간소하다.
좋은 기회다.
"모, 몬스터?!"
"…리자드맨들? 산림 구역에 서식하는 녀석들이 여긴 어떻게…?"
"뭐, 조금 이상한 일이기는 한데, 별문제는 없겠어. 랭크는 고작 해봐야 E정도야. 그나마 높은 녀석들도 C니까. 빠르게 해치우고 올라가자고. 이번 일이야 협회에 보고하면 되겠지."
"…잠깐, 뭔가 이상…! 피해─!!!"
"뭐, 뭣…?! 뭐야 저 괴물은…?!"
Shaa───!!!
A랭크 헌터가 여덟.
절반 정도가 C랭크의 공격대였지만 당연하게도 내 상대는 아니었다.
그나마 랭크가 높은 이들은 내가 상대하고 다른 이들은 리자드맨들에게 맡겼다.
리자드맨들은 비슷비슷한 랭크의 헌터들을 상대로 꽤 잘 싸웠다.
아무리 내가 이들의 리더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 랭크 헌터들과 과반수가 넘는 헌터들을 상대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싸움을 보여주었다.
그간 열심히 훈련 시킨 보람이 있었다.
특히나 활약한 것은 현명한 비늘과 삼형제들이다.
넷이서 진형을 짜서 마치 헌터들처럼 싸웠는데, 여덟이나 되는 동 랭크의 헌터들을 상대로 호쾌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또 의외로 크게 활약한 것은 깜짝 새들이었다.
이 녀석들. 예전에도 느꼈지만 역시 머리가 좋다.
누구부터 처리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헌터들과의 싸움이 끝난 후 오랜만에 상당한 포식을 했다.
주인 잃은 장비들도 일단 모두 회수했다.
언제 다시 미궁 밖으로 나갈지는 몰라도 나중에 또 블랙 마켓에 처분할 생각이었다.
몇몇 장비는 리자드맨들이 사용하기로 했다.
아인형 몬스터답게 녀석들은 무기 활용을 꽤 잘하는 편이었으니까.
얼마든지 가져가도록 허락했다.
장비들은 헌터들이 사용하던 아이템 가방을 사용해 문제없이 옮길 수 있었다.
이렇게 싸움이 끝난 후 리자드맨들 몇몇이 진화했다.
현명한 비늘 역시 [드라고뉴트]라는 B랭크 몬스터로 성장했다.
축하할 일이다.
현명한 비늘을 포함한 진화한 리자드맨들을 축하하며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우린 42계층 평야 구역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우릴 반긴 건 평야 구역 특유의 무지막지한 기후였다.
역시 여기는 빠르게 벗어나자.
평야 구역 특유의 날씨를 처음 겪은 리자드맨들은 잔뜩 얼이 빠졌다.
매번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 불지, 거기다 천둥·번개까지 몰아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도 했다.
딱 내가 처음 평야 구역에 들어섰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기에 조금 유쾌했다.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렇다고 용암 구역이 편안한 곳은 절대 아니었지만.
되도록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으나 힘들었다.
나 혼자라면 은신을 통해 조용히 이동할 수 있었겠지만 숫자가 숫자인 만큼 조용히 이동하기는 역시 힘들다.
아무래도 리자드맨들의 랭크가 전체적으로 낮다 보니 몬스터들이 이곳저곳에서 덤벼온 것인데, 조용히 일행에 끼어 있는 날 보고 얌전히 몸을 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런 녀석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다 잡아먹었다.
오크 고기는 꽤 맛있다.
이런 일이 자꾸만 계속되니 어쩔 수 없이 기세를 드러내면서 이동했다.
거침없이 힘을 드러내고 다니니 더 이상 어중이떠중이들이 덤벼오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어중이떠중이 대신 확실한 실력자들이 덤벼오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거침없이 드러내는 내 기세를 눈치챈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이래서 그동안 적당히 기세를 숨기고 다닌 것인데….
어쩔 수 없지만 또 헌터들을 죽여야 될 듯싶었다.
집단전이 주를 이루는 평야 구역인 만큼 기본적으로 활동하는 헌터들의 숫자는 못 해도 50을 넘긴다.
게다가 내 기세가 기세인 만큼 여러 공격대에서 연합해 찾아왔는데, 그 숫자가 무려 300에 달했다.
바글바글 몰려든 헌터들의 모습을 보니 언제나 영상 속으로만 보았던 고랭크의 몬스터가 된 기분이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진짜 고랭크의 몬스터가 맞긴 하다.
모여든 헌터들 중에는 A랭크나 B랭크가 상당수였고 무엇보다 S랭크의 헌터도 하나 끼어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몰린 듯하다.
샤를로트와의 싸움 이후 다시 한번 제대로 싸워야 할 것 같다.
우선 리자드맨들부터 안전한 곳으로.
깜짝 새, 너희들은 날 수 있으니 알아서 피해라.
그렇게 리자드맨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후, 헌터들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몬스터과 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겪어본 대규모 싸움이었다.
300대 1.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과연 상대의 랭크가 아무리 나보다 낮다 해도 그게 이렇게나 많이 모이면 상당히 버겁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몬스터와 헌터의 상성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달까?
과연 헌터들은 몬스터 사냥의 스페셜리스트였다.
S랭크 헌터의 지휘에 맞춰 사냥을 하는 헌터들의 움직임은 상당히 조직적이다.
마치 하나하나 한 몸이 된 것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이쪽이 공격하려치면 급히 몸을 피하면서 곧장 다른 쪽이 공격을 시작하는데, 이 치고 빠지는 전술이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까다롭다.
작정하고 쓸어버릴라치면 바로 앞의 S랭크 헌터가 곧장 나를 견제한다.
이 헌터. 상당한 실력자였다.
랭크의 차이로 인한 전면전을 피하고 항상 동료들과 함께 움직인다.
아예 무시할라치면 자꾸 눈앞에서 날파리처럼 깐죽거리는데 너무 성가셨다.
최대한 에너지를 보존하며 싸우고 싶었는데. 역시 무리인 모양이다.
여태껏 열심히 모은 에너지를 여기서 다시 다 쓰게 생겼다.
억울하다.
"컥… 커억…!"
왼쪽이의 이에 꿰뚫린 S랭크 헌터가 피를 토해냈다.
다른 동료들이 다 쓰러졌음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홀로 분투하다 마침내 쓰러진 것이다.
덥썩- 꿀꺽-
왼쪽이가 그대로 헌터를 삼킨다.
그것을 끝으로 길었던 이번 전투도 모두 끝이 났다.
그리고 열심히 모았던 에너지도 모두 동이 났다.
역시 억울하다.
그래도 쓰러트린 숫자가 숫자인지라 당장 배를 채우는 데 문제는 없었다.
평소라면 오른쪽이만 열심히 먹었겠지만 이번에 숫자가 너무 많아서 왼쪽이와 나까지 열심히 먹었다.
솔직히 샤를로트와 싸운 것보다 더 힘든 싸움이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대규모 공격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 싸움이랄까?
샤를로트 때는 그녀 하나에만 집중하면 됐지만 이번 싸움에서는 신경 쓸 게 너무 많았다.
든든한 두 파트너가 없었다면 제법 버벅댔을지도?
나보다 약한 다수를 상대하는 데 좋은 <약자멸시>나 <마안> 같은 스킬이 없었다면, 어쩌면 패배한 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굉장한 포식을 했다.
소모한 것의 5분의 3쯤 되는 에너지를 도로 회수할 수 있었다.
능력치도 조금이지만 상승했고 그리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이후 다시 합류한 리자드맨들과 함께 다시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바글바글 몰려들었던 헌터들을 해치우니 대놓고 기세를 드러내도 더 이상 덤벼들 상대도 없었다.
다른 몬스터들이야 저보다 강한 몬스터한테 굳이 덤빌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게 별다른 막힘없이 부지런히 이동한 결과, 마침내 용암 구역에 도착했다.
제101화
꽤 오랜만에 돌아온 용암 구역은 여전히 후끈후끈했다.
S랭크에 달하는 내성 스킬을 가지고 있음에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무지막지한 열기다.
당연하게도 저랭크의 내성 스킬을 가진 리자드맨들은 당장 죽을 거 같은 모습이었다.
급히 얼음을 만들어줬다.
리자드맨 한 마리당 하나씩 얼음을 만들어 줬지만 금방 녹아서 문제다.
만들어낸 얼음이 불과 1분도 채 되지 않아 다 녹을 정도의 무지막지한 열기.
얼음이야 마력만 있으면 계속해서 유지가 되지만 현재 저장된 에너지가 부족한 내 입장에서는 조금의 마력도 아까운 심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리자드맨들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얼음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다.
누가 와서 시비라도 걸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마그마 와이번 아르데의 영역.
다른 구역과 달리 계층 간의 교류가 활발한 곳인 만큼 이런 초입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아르데 휘하의 몬스터들이었다.
저쪽에서 먼저 덤빈다면 몰라도 이쪽에서 먼저 덤비기에는 여러모로 눈치가 보인다.
혹시 나를 몰라보고 덤벼오는 몬스터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마주치는 몬스터마다 나를 알아보고 슬금슬금 도망가기 바빴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다.
그래도 다행히 용암 구역의 모든 몬스터들이 아르데의 부하는 아니었다.
다른 몬스터와 의사소통할 지성이 없는 몬스터 같은 경우에는 이쪽에서 먼저 건드려도 문제가 없다.
다만 그런 녀석들은 대부분 사냥하기 까다로운 것이 문제다.
[마그마 피쉬]라는 몬스터가 있다.
랭크는 E. 용암 구역에서 그리 강하지 않은 부류에 속하는 몬스터다.
별다른 지성도 없고 아르데의 휘하도 아닌 몬스터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부류의 녀석이다.
마그마 피쉬는 다른 어류형 몬스터와 달리 용암 속에서 생활하는 몬스터.
이러한 생활 터전 탓에 낮은 랭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몬스터가 녀석들을 사냥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나 역시 뜨끈뜨끈한 용암은 부담스러운바,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녀석이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당장 내 에너지 보충도 필요하고 리자드맨들도 먹을 것이 필요했다.
깜짝 새들?
녀석들은 어디까지나 비상식량이니 굳이 뭘 먹일 필요가…?
농담이니까 그렇게 울지 마라.
용암에 바싹 익혀지고 싶지 않으면.
그런 느낌으로 마그마 피쉬 사냥에 돌입했다.
안 그래도 더워 죽으려 하는 리자드맨들이 용암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 움직이는 건 나다.
나도 용암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기에 꼬리 끝부터 살짝만 담가본다.
그리 뜨겁지는 않다.
어라? 이거 할 만한데?
<한계돌파>와 <불굴>이 발동했다.
<초재생>이 열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혀 괜찮지 않은 거로.
아무래도 S랭크의 고열 내성으로도 펄펄 끓는 용암은 무리인 것 같다.
이리된다면 완전 나가린데….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사람… 뱀은 원래 머리를 쓰는 법.
방법을 찾았다.
마침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드레이크 녀석 하나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나를 알고 있던 듯 별다른 대화(물리) 없이 협조해 주었다.
조금 아쉽다.
안 한다고 버텼으면 아르데의 부하고 뭐고 바로 잡아먹었을 텐데.
감이 좋은 녀석이다.
녀석의 랭크는 A.
내성 스킬 자체는 역시 용암 구역 출신이 맞는 듯 랭크에 비해 꽤 높은 듯 보였지만, 그래도 펄펄 끓는 용암 자체는 무리인 것 같았다.
곧장 뛰쳐나오려는 녀석을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열심히 치유 마법을 써줄 테니 딱 30마리만 잡아 오도록.
아니,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는 입이 많으니 60… 아니, 90… 그래, 딱 100마리만 채우자.
차라리 자신을 먹어달라며 엉엉 우는 녀석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꺼내주었다.
녀석에게서 잘 구워진 닭고기 냄새가 났다.
그래도 무척 협조적으로 도와준 녀석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녀석이 금세 아이디어를 냈다.
근처에 아르데의 부하가 아닌 녀석들도 많으니 그 녀석들을 먹으면 된단다.
먹히지 않기 위해 다급하게 말하는 녀석의 모습이 꽤 애처롭다.
아니, 먹을 생각은 없다니까.
그래도 네 아이디어는 훌륭하다.
그런데 우리가 아르데의 부하가 아닌 녀석들을 모르니 안내를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후 녀석의 도움으로 모두가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볼일을 마친 녀석이 인사도 없이 빠르게 떠나갔다.
꽤나 무서웠던 모양이다.
저런, 해치지 않는데….
대충 이런 느낌으로 용암 구역을 전진했다.
용암 구역의 넓이가 넓이인 만큼 빠르게 계층을 넘을 수는 없었지만, 그 덕에 리자드맨들의 내성 스킬은 착실히 성장하고 있었다.
현명한 비늘과 삼형제에 이르러서는 굳이 얼음이 없어도 활동이 가능한 수준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역시 얼음이 있는 게 낫기는 하겠지만.
새로운 스킬이 생겼다.
<통솔>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킬인데, [오크 로드]나 이전에 사막 구역에서 만난 상위 언데드 몬스터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스킬이다.
리자드맨들을 지금껏 잘 이끈 덕분에 생긴 스킬이었다.
어디까지나 집단전을 위한 스킬인 만큼 그리 유용하다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명색의 새로운 스킬인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
언제가 되더라도 쓸 일이 있을 테니까.
[돌아왔군.]
[아아, 오랜만이다.]
그렇게 도착한 용암 구역의 마지막 69계층.
미리 소식을 들었던 모양인지 레드 와이번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때 말했던 것처럼 꽤 빨리 돌아왔군. 볼일은 다 해결했나?]
[깔끔히 해결하고 오는 길이다.]
담담히 답하는 내 모습에 레드 와이번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그러다 흘깃 내 뒤편을 살피는데, 그 목소리가 조금 떨떠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서 뒤의 녀석들은…? 혹시 비상식량인가?]
[…동료라고 해야 할지. 부하 같은 녀석들이다… 그것보다 비상식량이라니. 말이 심하군.]
[네 녀석의 평소 행실을 생각해라. 안 그래도 다른 녀석들이 네가 대규모의 식량을 데리고 움직인다고 말이 많았다.]
[…과연 다른 녀석들 눈에는 그렇게 보인 건가?]
흘깃 뒤를 살폈다.
숨죽인 채 나와 레드 와이번의 대화를 지켜보는 리자드맨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과연 비상식량이라 말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해 보이고 있으니. 누가 봐도 비상식량 같지 않을까?
정작 리자드맨들은 더위 때문에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해 보인 것뿐이었지만.
[그래서 어쩔 생각이냐? 두목님을 뵈러 갈 거냐?]
[여기까지 왔다면 당연히 만나 봐야겠지… 하지만….]
흘깃 뒤편을 보았다.
과연 이 녀석들끼리 잘 있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오며 내성 스킬이 많이 성장하기는 했어도, 그래도 여전히 얼음 없이는 곧 말린 오징어가 될 것 같은 녀석들이다.
얼음의 유지에 내 마력이 필요한 만큼 함부로 녀석들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너 혹시 수마법 좀 사용할 줄 아나?]
[그런 거 취급하지 않는다.]
[…누가 '레드' 와이번 아니랄까 봐.]
당당히 답하는 레드 와이번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뒤의 녀석들이 걱정인가… 과연, 꼴을 보아하니 꽤 상층에서 데려왔나 보지?]
[내 고향에서 데려왔다. 내가 아직 약했을 시절, 꽤 큰 인연이 있는 녀석들이지… 내 첫 친구들이나 다름없다.]
[…그렇군.]
레드 와이번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 곳에서 커다란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민할 필요가 없겠군.]
[…그렇군. 설마 직접 행차하실 줄이야.]
자연스레 나와 레드 와이번의 시선이 움직였다.
뭉게뭉게 저 멀리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먼지구름 사이로 커다란 무언가 날아오고 있었다.
가볍게 날갯짓을 할 때마다 점점 크기가 커지는 그것은 흡사 커다란 산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일부러 움직인 건가?]
[그것도 있겠지만 슬슬 한번 주변을 둘러보실 시기이긴 하다. 공교롭게 타이밍이 맞았던 거겠지.]
[그렇군.]
나와 레드 와이번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형체를 바라보고 있자, 뒤편에서 현명한 비늘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니, 닉스… 저, 저건…?]
저쪽에서 별다른 기세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당장 눈에 보이는 그 크기만으로 현명한 비늘이 벌벌 떨고 있다.
단순히 현명한 비늘뿐만 아니라 다른 리자드맨들 역시 공포를 숨기지 못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 구역의 지배자. 마그마 와이번 '아르데'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 온화한 어르신이니까.]
차분히 현명한 비늘을 포함한 리자드맨들을 안심시키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아르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압도적인 크기를 가진 거구가 바로 코앞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돌아왔구나, 닉스여.]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꾸벅-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나를 따라 리자드맨들 역시 황급히 몸을 숙였다.
마치 나를 처음 봤을 때처럼 납작 엎드려 절을 하는 녀석들의 모습에 아르데가 홀홀- 인자한 웃음을 내뱉었다.
[친구들이냐?]
[과거에 인연이 있던 친구들입니다. 갚아야 할 은혜가 있어 이렇게 데려왔습니다.]
차분히 답하는 목소리에 아르데는 가볍게 리자드맨들을 훑었다.
[많이 도와주어야겠구나.]
[충분히 제 목숨은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시킬 생각입니다.]
[홀홀- 너무 팍팍하게 괴롭히지는 말거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씩 웃으며 답하는 내 모습에 아르데가 재차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간 웃음을 짓던 아르데는 이내 웃음을 지우고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갔던 일은 잘 해결한 것 같구나. 눈이 맑아.]
[…깔끔히 매듭지었습니다.]
[잘되었구나, 잘된 일이야.]
홀홀- 가볍게 웃어 보인 아르데가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는 게냐?]
[…예. 곧장 돌아갈 예정입니다. 꽤 오래 걸렸으니까요.]
아르데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당장 보고 싶은 게 가족이지… 이 늙은이가 너무 시간을 뺐은거 같으이… 어서 서둘러 가보거라.]
그리 말한 아르데는 이쪽에서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기 시작했다.
한차례 바람이 일었다.
[더 길게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지 않으냐? 다음에는 가족들과 함께 보았으면 좋겠구나.]
[…모두와 함께 만나러 오겠습니다.]
담담히 답한 내 목소리에 아르데가 홀홀- 웃으며 떠나갔다.
미처 다 돌아보지 못한 주변을 둘러볼 모양인 것 같았다.
[두목님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 오랜만에 널 만나 기쁜 모양이다.]
[…나 역시 나쁘지 않은 기분이군.]
만약 할아버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조금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점점 멀어져가는 아르데의 모습이 보였다.
[어쨌든 이제 바로 내려가야겠군.]
[아아, 가족들이 기다리니까.]
[…작별은 인사는 굳이 하지 않겠다. 다음에 또 만날 테니까.]
[이쪽도 굳이 인사는 하지 않겠다. 다음에 또 보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레드 와이번과 그대로 헤어졌다.
그리고 그 길로 곧장 게이트를 향해 움직였다.
이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한 게이트를 통해 마침내 가족들이 있을 70계층으로 돌아왔다.
눈부신 새하얀 설원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제102화
지평선 너머로 쭉 뻗은 눈부신 설원.
그리고 그 너머에 홀로 고고히 솟아있는 새하얀 설산.
다시 만나게 된 설산 구역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또 반가웠다.
당장 비늘이 베여나갈 것 같은 차디찬 칼바람까지도 반가울 지경이다.
그 이유는 역시 이곳에 날 기다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겠지.
"즈─ 즈아아─."
[주, 죽을 것 같다, 닉스…!]
벌벌 떠는 현명한 비늘의 모습에 그제야 아차 싶었다.
급히 불을 피웠다.
아니, 내가 딱히 너흴 잊은 건 아니고….
조금 감상에 빠졌더니 그만….
미안하다….
거의 얼어 죽어가던 리자드맨들이 겨우겨우 부활했다.
역시 변온 동물인 파충류에게 이 혹한의 땅은 너무 버겁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이곳이 앞으로 너희들이 살아갈 새로운 터전인데.
열심히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달랐다.
믿고 따라왔는데 그곳에 있던 것은 낙원이 아닌 지옥이었습니다.
내가 미안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데려온 책임이 있으니 확실히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마.
걱정하지 마라.
여기까지 오면서 <통솔> 스킬도 꽤 올랐으니 잘할 자신 있다.
딱 지금까지의 세 배 정도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다.
리자드맨들이 서로를 껴안고 서럽게 통곡했다.
한쪽 구석에 깜짝 새들까지 끼여서 함께 그러고 있으니 꽤 처량하게 보인다.
어허, 그래도 안 돼.
이제 와서 물러줄 수 없다.
이미 늦었어.
"컁─! 캬앙──!!!"
그렇게 절망에 빠진 리자드맨들 곁에서 열심히 멘탈 케어를 해주고 있는 사이, 불현듯 저편에서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휙─! 휙─! 휙─!
세 개의 머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번에 움직였다.
그리 멀지 않은 새하얀 설원 위. 자그마한 털 뭉치 하나가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 설이다.
Shii───
설이를 발견한 것과 동시에. 아니,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과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한달음에 성큼 가까워진 나를 향해 설이가 곧장 몸을 들이박았다.
못 본 사이 꽤나 훌륭해진 바디 어택이다.
스노우한테 열심히 배웠구나.
"컁컁─! 컁─!! 캬아앙──!!"
설이가 열심히 내 몸에 몸을 비볐다.
그 울음소리는 따로 해석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다 이해가 되었다.
[그래, 그래. 늦어서 미안하다.]
"컁─! 캬앙─!!!"
통통-
'나빴어!'하고 설이가 연신 비늘 위로 앞발을 두드렸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도톰한 발바닥 어택에 지친 마음이 절로 힐링되는 느낌이었다.
쓱쓱-
자연스레 꼬리 끝으로 설이를 쓰다듬으며 그 모습을 살폈다.
혹시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못 먹어서 야윈 건 아닌지.
건강하게 잘 있었는지.
한차례 살펴본 설이의 모습은 다행히 별 이상은 없었다.
스노우가 잘 챙겨준 모양이다.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여운 여우 귀도.
복실복실 파묻히고 싶은 새하얀 털도.
만지작거리고 싶은 도톰한 발바닥도.
그리고 연신 살랑거리는 꼬리도….
응? 꼬리의 개수가…?
늘었다…?
한순간 눈을 크게 뜨고 연신 내 품에서 몸을 비벼대는 설이를 살폈다.
다시 살펴본 설이는 분명 마지막에 헤어졌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었지만 묘하게 다른 부분이 하나 있었다.
살랑거리는 꼬리가 세 개.
못 보던 사이에 꼬리가 하나도 아니라 무려 두 개나 늘었다.
…과연 아이의 성장은 빠른 것일까?
[돌아왔군.]
예상치 못한 설이의 변화에 당황하고 있자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깃 시선을 돌린 곳에는 내 앞에 사뿐히 내려앉는 아름다운 여우가 있었다.
[아아. 지금 돌아왔다, 스노우.]
[어서 와라, 닉스.]
스노우의 기분 좋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잔잔히 울렸다.
그제야 정말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것보다 꽤 늦지 않았는가? 금방 돌아온다 하더니… 더 못 참고 직접 데리러 갈 뻔하지 않았는가.]
[…미안하군. 생각보다 일이 늦어져서.]
미안한 마음에 슬며시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보고 스노우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무얼.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다. 어디까지나 투정을 부려본 것뿐이야. 정말 그리 늦지도 않았고.]
[…그런가? 그래서 그동안 별일은 없었나?]
[뭐 별일이야 있었겠는가. 변함없이 평화로운 일상이었지.]
[그렇군. 다행이다.]
덤덤히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흘깃흘깃 설이를 살피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챈 스노우가 '아아'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대가 없는 사이 설이가 성장했다.]
[…보았다. 꼬리가 단번에 세 개로 늘었군.]
[그것에는 본녀도 조금 놀라는 중이다. 보통 두 개로 늘어야 정상인데 말이지….]
조용히 말끝을 흐리며 설이를 바라보는 스노우의 모습에 불쑥 불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쁜 일에 속하지. 꼬리가 단번에 세 개로 늘 만큼 설이의 재능이 뛰어났다는 것이니.]
[그런가? 그렇다면 확실히 기쁜 일이군.]
곧장 안심되는 마음에 쓱쓱- 설이의 머리를 재차 쓰다듬었다.
'컁컁─!' 설이가 기분 좋은 듯 울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녀 쪽에서의 물음이다만… 우선 그 뒤쪽에는 뭔가?]
-아까부터 바라보는 시선이 꽤 따갑다만.
흘깃 스노우가 내 뒤편을 살폈다.
그제야 나도 '아'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이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소개하지. 과거에 신세를 졌던 친구들이다.]
[호오?]
스노우가 흥미롭다는 듯 리자드맨들을 훑었다.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청명한 푸른 눈동자에 리자드맨들이 부르르 몸을 떤다.
[그대의 고향에서 데려왔는가?]
[아아. 은혜에 보답할 겸. 설이의 친구로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흘깃- 여전히 내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설이를 바라보니 스노우 역시 한차례 설이를 살폈다.
[설이의 친구로 말인가?]
[그렇다… 혹시 너무 주제넘었는가?]
조심히 물어본 물음에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본녀는 본녀 자신만큼이나 그대를 신뢰하고 있으니 아무런 문제 없다. 무엇보다 그대도 설이의 아버지니까. 하지만 단지….]
스노우는 조용히 말끝을 흐렸다.
[저들이 과연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는지….]
흘깃 리자드맨들을 바라보는 스노우의 눈빛이 꽤 안타까워 보인다.
나 역시 곧 시선을 돌려 리자드맨을 보았다.
내가 만들어낸 불 주위에 모여 서로 몸을 껴안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과연 스노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완벽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이겠다.]
[…본녀도 함께 도와주도록 하지. 하나보단 둘이 나으니까.]
스노우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흘깃 리자드맨들을 보았다.
우리의 시선에 녀석들이 추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걱정하지 마라.
스노우는 나보다 더 치료 마법에 능통하니 절대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통곡했다.
이렇게 나는 다시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피─! 피이잇──!!!"
[주인님! 토순이도…! 토순이도 있어요오─!!!]
…알고 있다.
절대 잊은 건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서럽게 울지 말도록.
내가 미안하다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