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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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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가 없던 사이 성장한 것은 설이뿐만이 아니었다.

스노우의 뒤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토순이 역시 설이와 마찬가지로 성장해 있었다.

특히 잘 살펴보지 않으면 별다른 티가 안 나는 설이와 달리 토순이의 성장은 꽤 파격적이었다.

토순이는 원래 설이와 비슷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둘이 딱 붙여 놓으면 새하얀 털 뭉치 두 개가 모여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다시 보게 된 토순이는 뭔가 많이 달랐다.

[…그새 살이라도 쪘나?]

[아니에욧─! 너무해요, 주인님! 저는 단지 진화한 것뿐이라고욧─!]

못해도 세 배… 아니, 넉넉하게 다섯 배 정도 커진 토순이의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토순이가 열렬히 항의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잠시 말을 잃을 정도로 토순이의 진화는 충격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다 성장했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너무 불어난 게 아닐까?

특히 위가 아닌 옆으로.

잠시 시선을 돌려 스노우를 보았다.

내 시선에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진화가 맞다. 토순이는 분명 종으로서 진화했다.]

[…놀랍군. 틀림없이 너무 많이 먹어서 살이 찐 거라고 생각했다.]

[본녀가 식단 관리 하나 제대로 못 할 거 같은가?]

슬며시 노려보는 스노우의 시선에 곧장 사과했다.

[…아니, 미안하다. 단지 너무 놀라워서.]

[이해한다… 본녀도 처음에 봤을 때는 무척 놀랐으니까. 혹시 본녀가 안 보는 틈에 뭐라도 주워 먹은 건 아닌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스노우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이며 흘깃 시선을 돌렸다.

포동포동 살 찐 돼지… 아니, 토끼가 보였다.

[오늘은 돼지고기…?]

조용히 들려오는 오른쪽이의 목소리에 차마 반박을 못 하겠다.

그나마 귀여운 외모가 유일한 재산이던 토순이가….

그래… 내가 없던 사이 녀석은 모든 걸 잃었다.

[안 돼요! 버리지 말아 주세요, 주인님─!! 제가 잘할게요! 앞으로도 열심히 아가씨와 놀아드릴 테니까!]

"컁컁─!!!"

설이가 조용히 '토순이 살쪄서 못 뛰어!'하고 울어왔다.

흘깃 토순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말없이 시선을 피한다.

좋다.

오늘은 가족들과 재회한 기념으로 돼지고기… 아니, 토끼 고기를 먹어볼까?

[흐헝헝… 너무해요오… 버리지 말아 주세요오오….]

엉엉 울며 매달리는 토순이의 모습에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언제나 같은 농담이니까 울지 마라.

그래, 그래. 착하지.

토순이 너도 분명한 내 가족이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잡아먹거나 버리지는 않는다.

[쳇….]

오른쪽이가 드물게도 혀를 찼지만 애써 무시했다.

녀석의 반응을 신경 썼다간 이번에야말로 토순이가 통곡할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주인님… 저기 저 녀석들은 뭐죠…?]

[응? 스노우와의 대화를 듣지 못했나?]

[…아뇨. 분명 듣기는 했습니다만… 저 녀석들도 혹시 아가씨의 친구로…?]

[아아. 그럴 의도도 분명 있기는 하다만….]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은혜 갚기였으나, 분명 그런 의도도 있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자 정작 토순이는 어느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위험해요… 저의 유일한 존재 의의가… 이대로 가다간 아무것도 못 하는 식충이가 되어버려욧… 그리되면 이번에야말로 잡아먹혀 버렷…!]

중얼중얼- 홀로 무어라 중얼거린 토순이가 휙- 고개를 돌려 아직도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리자드맨들을 바라보았다.

[인정할 수 없습니닷─! 아가씨의 장난ㄱ… 아니, 놀이 친구는 저 토순이만으로도 충분하다구욧!]

빼액- 그리 소리친 토순이가 폴짝 뛰었다.

사실 그 통통한 몸 때문에 폴짝 이라기보다는 데굴데굴 굴렀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만.

저 녀석 밖에서 천적이라도 만나면 도망은 칠 수 있을까…?

그렇게 힘겹게 데굴데굴 굴러서 리자드맨들의 앞까지 도착한 토순이가 당당히 몸을 일으켰다.

옆으로 슬쩍 접힌 살집이 유독 눈에 띈다.

자꾸 입맛 다시지 마라, 오른쪽아.

[저 토순이! 주인님의 충실한 첫 번째 부하이자 아가씨의 첫 장난… 첫 친구로서 당신들에게 선언합니다!]

피─ 피잇─!!

드물게도 토순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주인님의 부하 자리도, 아가씨의 장난감 자리도. 저는 무엇 하나 양보할 수 없어욧!]

당당히 소리치는 토순이의 모습은 그 통통한 살집 탓에 그리 태는 안 났지만, 꽤나 엄숙하다.

이번 일을 꽤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다만 그런 토순이의 진지한 태도와 별개로 뼛속까지 시린 추위 탓에 리자드맨들은 토순이한테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확실히 할 수밖에 없습니닷!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는 맞서 싸우겠어요! 주인님에게 받은 영광스러운 '토순이'란 이름에 걸고 당신들을 쓰러트리겠습니닷!]

-자, 결투에욧!

토순이가 당당히 앞발을 내밀었다.

어서 하나 나와보라는 듯 까딱까딱 손짓하는 녀석의 모습에 말없이 탄식을 흘렸다.

토순이는 일단 저렇게(?) 변해 버렸어도, 어쨌든 진화함으로써 D랭크가 되었다.

그에 반해 리자드맨의 평균 랭크는 E. 저렇게 자신만만한 토순이의 태도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저렇게 보여도 일단은 D랭크 몬스터인 것이니 자신감이 생길 만하다.

다만 녀석에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즈─ 즈아아─?"

[이 살찐 돼지는…?]

추위 탓에 주변을 잘 신경 쓰지 못하던 현명한 비늘이 그제야 자신들 앞의 살찐 돼지… 아니, 토순이를 발견했다.

녀석이 슬쩍 고개를 갸웃거린다.

참고로 현명한 비늘의 랭크는 B. [드라고뉴트]라는 상위종의 몬스터다.

"즈아아─?"

[닉스. 이건 혹시 먹는 건가?]

"즈─ 즈아."

[돼지고기는 오크들 이후로 처음이군.]

"즈아아─ 즈─."

[구워 먹는 게 좋겠다. 내가 목을 벨 테니, 현명한 비늘, 네가 고기를 구워라.]

삼형제 역시 슬쩍 현명한 비늘의 옆으로 나섰다.

녀석들의 랭크는 C다.

그리고 네 마리를 따라 각각 D랭크까지 성장한 리자드맨들도 하나둘 앞으로 나섰다.

장시간 불을 쬐니 조금 나아진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의 모습에 토순이는….

[흐헝헝─ 주인니이임…! 살려주세욧─!!!]

데굴데굴 굴러 내 옆으로 도망쳐왔다.

이후 토순이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리자드맨들을 향해 확실히 녀석을 소개한다.

토순이는 내 가족이니까 건들지 말도록.

절대 비상식량이 아니니까.

아무리 맛있어 보여도 안 된다.

리자드맨들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덩달아 오른쪽이도 입맛을 다신다.

아니, 정말로 비상식량이 아니니까.

이후 잔뜩 주눅 든 토순이를 설이가 열심히 위로했다.

역시 설이는 참 착하다.

그리고 이런 느낌으로 나는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다른 가족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리자드맨들도 확실히 별문제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상이 기대된다.

아, 깜짝 새. 너희들을 딱히 잊은 건 아니다.

너희도 확실히 챙겨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제103화

리자드맨들의 주거 공간을 만들었다.

의외로 스노우는 우리가 거처로 사용하는 동굴에서 리자드맨 역시 함께 지내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리자드맨들 쪽에서 극구 사양했다.

마치 3년 전 처음 내 보금자리에 발을 들일 때의 표정을 보는 것 같았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스노우는 무척 상냥한 편인데….

뭐? 나랑 설이한테만 그렇다고?

기본적으로 다른 몬스터들을 무시하고 깔본다고?

어지간한 상대는 아예 몬스터 취급도 안 해준다고?

에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스노우가 얼마나 상냥한데.

봐라, 토순이한테도 잘해주는 그녀가 아닌가?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무래도 리자드맨들이 스노우에 대해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스노우가 꽤 차갑고 도도하게 생기긴 했지만 속은 따뜻한 여우인데 말이다.

녀석들이 얼른 빨리 스노우의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찌 되었든 리자드맨들이 같은 동굴에서 지내기를 거부한 까닭에 급히 다른 주거 공간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다만, 우리 거처 근처에는 리자드맨들이 다 지낼 만한 공간이 따로 없었기에 급히 새로 하나 만들어야만 했다.

우리가 머무는 거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을 선택했다.

왕년에 굴 좀 파본 솜씨를 발휘할 차례였다.

그때와 달리 마법도 있었고, 지켜보던 스노우의 도움도 있었기에 리자드맨들이 지낼 만한 커다란 굴을 파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장 리자드맨들의 숫자도 있고 이후 숫자가 늘어날 걸 생각해 꽤 넉넉하게 굴을 만들었다.

대충 200마리 정도는 문제없이 지낼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후의 확장 가능성까지 고려해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너무 큰 거 아니냐며 리자드맨들이 걱정했지만 정작 이쪽은 별걱정 하지 않았다.

내 크기가 크기인지라 이 정도도 조금 작아 보이던 탓이다.

뭐, 좁은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아무렴 좋지 않을까?

평소 리자드맨의 생활 환경을 고려해 동굴 한가운데 작은 호수도 만들었다.

추운 탓에 물이 얼지 않도록 따로 스노우가 마법적 처리까지 해주었다.

다만 스노우의 방식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었기에 이후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언제 한번 용암구역에 가서 '용암석'이라도 하나 구해 와야겠다.

그렇게 완성된 주거 공간에 리자드맨들은 무척 감동한 눈치였다.

녀석들 모두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말 감동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뿌듯하다.

당장에 넓은 공동과 작은 호수만 덩그러니 있는, 주거 공간이라 하기에는 조금 삭막한 곳이었지만 그건 이제부터 조금씩 채워가면 될 것이다.

다 채우기에는 조금 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은 것이 조금 문제였지만….

추가로 리자드맨들의 주거 공간 한쪽에 깜짝 새들을 위한 둥지도 따로 만들어 주었다.

솔직히 깜빡 잊고 있다가 뒤늦게 만든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깜짝 새들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만약 불만을 말했다거나 한다면 이날 저녁은 모처럼의 치킨 파티였을 텐데.

오른쪽이가 조용히 입맛을 다신다.

이후 리자드맨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우리가 지내는 동굴로 돌아왔다.

비록 이곳에서 지낸 시간은 무척 짧았지만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안락함이 느껴졌다.

과거 18계층의 옛 보금자리에서나 느껴봤던 감정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할 말이 있군.]

동굴 한쪽에 조용히 똬리를 뜬 채 누워 통통- 비늘을 두드리는 설이의 발바닥 어택을 즐기고 있으면, 문득 스노우가 말해왔다.

[뭐지?]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모습에 스노우의 시선이 흘깃 움직였다.

[설아, 아가.]

"컁─?"

막 왼쪽이의 머리 위에서 오른쪽이의 머리 위로 폴짝 뛰어가던 설이가 의아하게 스노우를 바라본다.

[그동안 연습했던 걸 아버지한테 보여 줘야겠지?]

"캬앙─!!!"

스노우의 말에 설이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펄쩍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통통- 다급히 내 머리를 두드린다.

정확히는 오른쪽이의 머리를.

[설이가 연습했던 거?]

[후후, 기대해도 좋다.]

"컁컁!"

슬그머니 웃으며 말하는 스노우와 자신만만히 머리를 두들기는 설이의 손짓에 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줄 생각인지.

그렇게 자그마한 기대와 함께 설이에게 집중하고있자, 설이의 몸에서 자그마한 마력이 한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미세한 흐름에 조금 놀라고 있는 사이 문득 목소리가 들려온다.

"컁─!"

[파파!]

Shii───?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맑고 명랑한 목소리.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순간 멍하니 있자 재차 다시 한번 들려왔다.

[파파! 좋아!]

짧지만 강렬한 단어.

머릿속에 번개라도 친 듯 번쩍인다.

멍하니 설이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급히 스노우를 살폈다.

그녀가 후후- 웃었다.

[설이가 말하지 않느냐? 어서 대답해 주거라.]

장난기 가득한 스노우의 목소리에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 이 귀여운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설이였다.

[서, 설아…?]

[응, 아빠!]

'왜 불러?'하고 설이가 내 머리를 통통- 두들긴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오른쪽이의 머리였지만 지금은 별 상관없을 것이다.

애초에 오른쪽이를 포함해 왼쪽이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으니까.

우리 모두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설이를 바라보았다.

꼬리가 세 개라는 이유와 파격적인 토순이의 변신 탓에 당장에 잊고 있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다.

사념 대화를 통해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랭크는 바로 E.

설이 역시 F에서 진화해 E가 되었으니, 이제 얼마든지 사념 대화를 통한 대화가 가능한 랭크였다.

[설아… 다시 한번 말해줄래…?]

[파파?]

[…그것도 좋지만 이전에 했던 그거 있잖니.]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린 설이가 이내 말을 잇는다.

[좋아?]

"쉬이이이───!!!"

커억-! 하는 느낌으로 왼쪽이가 울음을 내뱉었다.

녀석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지만 내 심정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고랭크 몬스터의 위엄이나 체면 따위 내던져 버리고 헤벌쭉 웃고 싶은 기분이다.

[…기쁜 건 알겠지만 표정 관리 좀 하는 게 어떻겠나? 험악한 인상과 달리 한심한 낯짝이구나.]

찰싹- 비늘을 때리는 스노우의 꼬리 짓에 그제야 '흠흠' 표정을 바로 했다.

아무래도 방심하는 사이 얼굴 근육이 느슨해진 모양이다.

이후 참을 수 없이 울컥하는 감정에 꼬리 끝으로 열심히 설이를 쓰다듬었다.

설이가 '컁컁!' 기분 좋은 듯 울었다.

[묻지 않아도 대답은 이미 들은 것 같지만… 그래서 기분은 어떤가?]

잔뜩 설이를 귀여워 해주고 있자 스노우가 조용히 물어왔다.

굳이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그동안 많이 연습했나 보군.]

[아아. 그대에게 들려주기 위해 밤낮으로 연습했다. 재능있는 아이라 빨리 익히기는 했지만 많이 고생했지. 좀 더 칭찬해 주거라.]

슬그머니 내 옆에 배를 깔고 누우며 스노우가 답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좀 더 열심히 설이를 귀여워해 주었다.

'아빠! 간지럿!' 하고 설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또 발바닥 어택과 다른 느낌으로 힐링되는 것 같았다.

[다른 것 역시 연습하기는 했다만 역시 가장 진도가 빠른 건 사념 대화였다.]

[다른 것?]

[아아, 간단한 마법 몇 개를 가르쳤지. 이쪽 연시 진도가 나쁘지 않다.]

거기까지 말한 스노우가 내 몸 위로 가만히 턱을 괴었다.

[그래도 그리 많이 배우지는 않았다.]

[흠? 왜지? 설이가 힘들어하기라도 했나?]

[그대가 가르칠 것도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담담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멈췄다.

제 몸을 쓰다듬는 내 꼬리 짓에 맞춰 고롱고롱- 숨을 내뱉던 설이가 의아하게 '컁?'하고 울어온다.

[…배려 고맙군.]

[후후. 부군을 보살피는 건 부인의 책무 중 하나다.]

느긋하게 속삭이듯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스노우가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서늘할 줄 알았는데 꽤 뜨뜻하구나.]

[…마법으로 몸을 데우고 있으니까.]

[그런가? 포근해서 좋구나.]

스노우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살랑살랑- 그녀의 꼬리가 부드럽게 좌우로 흔들렸다.

무언가 굉장히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스노우─! 스노우─! 내 얘기 좀 들어봐! 그게 있지. 이 녀석이 있지! 그새를 못 참고 바람피웠어! 현지처가 생겼다고─!]

평온하고 고요하던 분위기에 쩌저적- 금이 갔다.

동굴의 온도가 오싹 내려앉는다.

[…흐으음─?]

심기 불편한 스노우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려 퍼진다.

그녀의 현재 기분을 대변하듯 기다란 아홉 개의 꼬리가 거칠게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한쪽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토순이가 급히 설이를 챙겨 도망간다.

[왼쪽이여.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싸늘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몸이 굳는다.

<직감>이 맹렬히 경고를 보내온다.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으니 당장 왼쪽이의 입을 막으라고!

하지만 우리의 대화 방법은 어디까지나 발성이 아닌 사념을 통한 것.

급히 왼쪽이의 입을 막아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 없었다.

오히려 스노우만 더 자극하는 꼴이 되었다.

[그냥 홀라당 넘어가 버렸어! 밥 몇 번 사준 거 가지고 그냥 홀라당 넘어갔다구! 아주 그냥 헤벌레 해가지고! 내가 죽이자고 했는데도 싫대!]

[호오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스노우의 눈빛이 바깥의 칼바람만큼이나 매서웠다.

[그,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리사는 꽤 유용한….]

['리사'? 그 불여우의 이름이 리사인가? 그렇게 이름을 부를 정도면 무척 친한가 보군?]

[…아니다. 우리는 굉장히 비즈니스적인 관계다.]

['우리'인가? 그 불여우하고는 '우리'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한 사이인가?]

서늘하게 물어오는 물음에 급히 말을 정정했다.

[그녀하고는 그냥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함께 밥을 먹은 건?]

[…오른쪽이가 보채서 어쩔 수 없었다.]

그리 말하며 급히 화살을 오른쪽이에게로 돌렸다.

스노우의 시선이 오른쪽이를 향한다.

아무것도 모른 척 눈을 껌뻑이던 녀석이 갑자기 자신을 향한 화살에 눈을 번쩍였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알다시피 우리 몸의 주도권은 모두 '가운데'에게 있다.]

평소의 질질 늘어지던 말투는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차분하고 담담히 내뱉는 말에는 묘한 무게가 있었다.

다시 스노우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사, 사실과 다르다. 그녀하고는 정말 아무런 관계도 아닌….]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 불여우가 같이 뜨거운 밤을 보내자고 했어! 원나잇이라고 했다구!]

싸늘하다.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는 스노우의 청명한 푸른 눈이 유난히 차갑다.

SS랭크의 몬스터가 보내는 살기에 사정없이 몸이 떨려온다.

'이대로 있다간 미래는 뻔하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급히 입을 열려던 순간 나보다 한발 앞서 스노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 사이엔 많은 대화가 필요한 것 같구나.]

담담히 들려온 목소리는 무척이나 고요하고 평온했다.

조금 전까지 뿜어내던 기세가 모두 거짓말인 양 평온한 목소리에 한순간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그 냉정하고 이성적인, 그리고 합리적인. 또한 무엇보다 상냥한 스노우가 고작 왼쪽이의 말만 듣고 오해할 리가 없지.'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우선 대화부터 하자는 걸 보면 역시 그녀는 상냥한 것이 분명했다.

[자, 따라 나오너라. 대화를 나누기엔 여긴 너무 비좁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본녀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좋게 말할 때 따라오도록.]

휙- 몸을 돌린 스노우가 먼저 걸어 나간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왼쪽이의 목소리가 웅웅- 머릿속을 울렸다.

[캬캬캬─! 대화(물리)인 거네! 아이, 꼬셔라! 너무 좋아─!]

깐족거림 가득한 녀석의 목소리에 잠시 침묵하던 나는 이내 조용히 말했다.

[…잊었나? 너하고 나는 한 몸이다.]

[…아.]

왼쪽이의 웃음이 뚝-하고 멎었다.

[…마,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어이! 이봐, 스노우! 오해야! 오해라구!]

[…이미 늦었다. 우리에게 남은 건 하나밖에 없어.]

[아… 아아! 안 돼!]

제 무덤을 제가 판 왼쪽이의 모습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온 첫날부터 스노우와 대련하게 생겼다.

그것도 벌써 진작에 날이 저문 늦은 저녁에 말이다.

[안 나오고 뭐 하고 있지? 설마 본녀가 직접 밖으로 끄집어내 줘야 하는 건가?]

동굴 밖에서 들려오는 거친 스노우의 목소리에 결국 몸을 움직였다.

굉장히 억울하다.

제104화

살아남았다.

꽤 오랜 대련 끝에 먼저 사뿐사뿐 동굴로 걸어가는 스노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샤를로트와의 싸움 이후 꽤나 자신감이 생긴 상태였는데 스노우와의 대련으로 다시 겸손이란 걸 배울 수 있었다.

역시 스노우는 강하다.

앞으로 부부 싸움은 가급적 피하는 거로 결정이다.

[그래도 그사이에 꽤 성장했구나, 그대. 슬슬 봐주면서 하는 건 힘들겠어.]

이후 한결 산뜻해진 분위기의 스노우가 짐짓 그리 말해왔지만 이미 잔뜩 기죽은 내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에 스노우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게 오해할 만한 짓은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나름 처신 잘했다고 생각한다만….]

[그럼 본녀에게 잘 설명하지 그랬느냐?]

[말할 틈도 안 줬으면서….]

자그맣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스노우가 재차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 그래. 본녀가 잘못했다. 이렇게 사과할 테니 기분 풀거라.]

그리고 마치 내가 설이에게 하듯 쓱쓱- 내 몸을 쓰다듬는다.

이건 이것대로 또 묘한 기분이다.

[그래서 이제 그동안의 이야기나 좀 해주거라. 궁금해서 더 못 견디겠구나… 자, 설이와 토순이도 어서 이리 오거라. 함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자꾸나.]

스노우가 설이와 토순이를 불렀다. 둘을 능숙하게 제품에 품은 그녀가 재촉하듯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우선 이 위층의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내가 저번에 말했었지, 이 위층은 붉은 용암이 강처럼 흐르는 곳이라고. 그곳의 지배자는 아르데라는 커다란 와이번인데….]

도란도란-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 * *

이튿날, 조용히 눈을 떴다.

익숙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군. 돌아왔었지.'

얼마 만에 맞이하는 동굴에서의 아침일까? 습관적으로 혀를 날름거리며 한차례 주변을 살폈다.

내 품에 사이좋게 기댄 스노우와 설이 그리고 토순이가 보인다.

[일어났는가, 그대?]

[아아… 혹시 내가 깨운 건가?]

슬며시 눈을 뜬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는 제 품안에 잠들어 있는 설이와 토순이를 한 번씩 핥았다.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것보다 그대가 돌아오니 드디어 동굴이 좀 꽉 찬 느낌이구나.]

[덩치가 덩치니까 말이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만… 뭐, 그것도 맞는 말이니 별 상관은 없겠구나.]

스노우는 설이나 토순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쭈욱- 기지개를 켠다.

[오랜만에 대련은 어떤가? 그대가 떠나기 전에는 매일 했었는데.]

[…대련이라면 바로 어제 하지 않았던가?]

[그건 대련이 아니라 단순 '대화'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꾹 입을 다물었다.

만약 여기서 무어라 토를 달면 아침부터 고달파질 것이 분명했다.

[흥─ 그래서 대련은 어쩔 테냐? 할 테냐, 말 테냐?]

[…굳이 사양하지는 않겠다.]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그전에 리자드맨들을 불러도 괜찮은가?]

[그들을…? 아아. 분명 훈련시킬 생각이랬지… 좋다. 그들도 함께하는 거로 하지.]

흔쾌히 수긍하는 스노우와 함께 리자드맨들의 거처로 향했다.

꽤 이른 아침이었음에도 리자드맨을 모두 일어나 있었다.

밤사이 무슨 변고는 없던 모양인지 다들 썩 괜찮은 상태였다.

특히 동굴 가운데 만들어 둔 호수의 평판이 좋다.

깊이도 온도도 딱 적당한 것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한다.

리자드맨들이 깊은 감사를 표했다.

감사 인사는 내가 아닌 스노우에게 하도록.

호수에 힘 써준 것은 그녀니까.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절을 했다.

내게는 나름 익숙하다면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과연 스노우는 어떨지.

스노우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그들의 감사를 받았다.

오연하게 턱을 치켜들고 가만히 내려다보는 모습이 몹시 익숙해 보인다.

잊고 있었는데 스노우는 이 계층의 플로어 보스였다.

그것도 에어리어 보스에 한없이 가깝다고 추측되는.

과연 익숙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그런 리자드맨들의 감사를 끝으로 깜짝 새들이 불쑥 내 앞에 찾아왔다.

너희들도 아침 인사하러 왔니?

그래, 밤사이 별일은 없었고?

아무 일 없었단다.

오히려 너무 편안해서 좋았다고.

열심히 자신들의 행복함을 어필하는 깜짝 새들의 모습에 절로 흐뭇해진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렇게 깜짝 새들과의 아침 인사도 끝내고 리자드맨들과 막 훈련을 떠나려는 순간.

깜짝 새들이 다시 한번 나를 붙잡았다.

용건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뭘까?

깜짝 새들은 나에게 싱싱한 알을 내주었다.

갓 낳은 알인지 몹시 뜨끈뜨끈했다.

아니… 굳이 줄 필요는 없는데….

물론 너희를 데려온 이유가 알인 건 맞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간 있는 정 없는 정 다 들었는데 함부로 알을 뺏어 먹을 생각은 없었다.

이래 보여도 엄연히 너희의 자식 아닌가?

얘기를 들어보니 유정란이 아닌 무정란이란다.

몬스터도 무정란을 낳는구나.

조금 놀라웠다.

결국 사양 않고 받기로 했다.

조금 부족한 거 같으니까 내친김에 둥지 안에 있는 알도….

깜짝 새들이 열심히 말린다.

그건 유정란이라고.

어쩐지 유난히 맛있어 보이더라.

오른쪽이가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깜짝 새들한테 받은 알은 바로 먹지 않고 가만히 챙겼다.

나중에 설이가 일어나면 줄 생각이었다.

물론 토순이 몫도 따로 챙겼다.

아, 스노우 너는 바로 맛봐도 좋으니까.

분명 맛있을 거다.

내가 장담한다.

내 고향의 맛이다.

우아하게 달걀을 반으로 쪼개, 그 내용물을 조심히 핥아먹은 스노우가 극찬을 내뱉었다.

괜스레 어깨가 으쓱거린다.

어떠냐, 내 고향의 맛은?

덩달아 지켜보던 깜짝 새들도 함께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음에는 그냥 생이 아닌 후라이라도 해줄 테니까.

그것도 기대할 만하다.

비록 소금은 없지만 그런대로 맛있을 테니까.

그렇게 스노우와 함께 잠시 깜짝 새들의 달걀에 대한 평을 늘어놓고 있는 사이 문득 리자드맨 하나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면 녀석이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알이었다.

깜짝 새의 알과 비교해서 몇 배는 더 큰 사이즈.

흔히 알고 있는 타조 알보다 훨씬 더 큰 사이즈다.

어딘가 익숙한 것이 분명 몇 번 본 적 있는 알이었다.

이걸 어디서 봤더라…?

분명 리자드맨들의 부락에서 자주 봤었던 것 같은데….

…이거 혹시 리자드맨 알 아닌가?

슬쩍 알을 가지고 온 리자드맨을 바라보니 녀석이 씩 웃으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왠지 모르게 선대 현명한 비늘이 떠오르는 포즈였다.

과연 그 후손이 맞긴 하구나.

아니, 아니. 그것보다 갑자기 왜 너희 알을 가지고 오는 거냐?

뭐? 이건 무정란이 아니라 확실한 유정란이라고?

깜짝 새들의 알보다 크기도 크고, 영양도 좋고, 맛도 좋다고?

아니,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냐?

무정란이라도 좀 그런데 하물며 유정란이라니.

이건 틀림없는 너희 자식 아니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깟 알보다는 내 입맛을 만족시키는 게 우선이란다.

알이야 앞으로 얼마든지 나을 수 있다고.

나름 감동스런 이야기이기는 하다만….

…이거 다른 녀석들한테는 말하고 가져온 거지?

흘깃 시선을 돌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엄지를 들어 올린다.

녀석들은 틀림없는 선대 현명한 비늘의 후손들이었다.

알을 가지고 온 리자드맨이 깜짝 새들을 향해 씩 웃음 짓는다.

그것이 틀림없는 승자의 미소라 깜작 새들이 분한 듯 부리를 갈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걸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리자드맨과 깜짝 새의 희비가 교차했다.

리자드맨이 어째서냐며 울부짖었고 깜짝 새들이 당당하게 날개를 퍼덕였다.

아니, 어째서고 자시고. 아무리 내가 몬스터라도 남의 새끼를 먹지는 않는다.

…아니. 분명 이전에 몇 번… 아니, 셀 수 없이 많이 먹기는 했다만….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다.

남의 새끼가 아니라 친구의 새끼는 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기는 건 멈추도록.

단체로 우겨도 소용없으니까.

살짝 맛만 보고 고민하지도 않을 거니까.

제발 바닥에 알을 던지려는 건 그만둬라.

내가 미안하다….

그렇게 앞으로도 달걀은 깜짝 새들의 것만 먹는 것으로 결정했다.

깜짝 새들이 우쭐한 얼굴로 날개를 연신 퍼덕거렸다.

괜히 리자드맨들을 자극하는 건 그만둬라….

나중에 무정란이라며 유정란을 가져올까 무섭다.

이후 잠에서 깨어난 설이가 처음으로 달걀을 맛보았다.

[고기가 더 맛있져! 고깃! 소고깃!]

깜짝 새들도 좌절하고 나도 좌절했다.

그래… 확실히 고기가 더 맛있긴 하지….

[저는 맛있어욧, 주인님!]

그래도 토순이 입맛에는 맞는 모양이다.

조금은 자존심을 회복했다.

그런데 지금의 토순이한테 과연 맛없는 게 있기는 할까?

우걱우걱- 먹는 모습이 마치 토끼가 아닌 돼지 같구나….

오른쪽이가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왠지 토순이라면 언데드도 맛있게 먹을 거 같았다.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아침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리자드맨들은 본녀가 맡지.]

불쑥 내뱉은 스노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재차 말을 잇는다.

[그대는 설이와 토순이를 봐다오. 그간 그대가 없어서 많이 외로워했으니.]

[…고맙다.]

세심한 스노우의 배려에 감사를 전했다.

그녀가 언제나처럼 후후- 웃는다.

[두 아이를 확실히 챙긴 다음에는 본녀의 차례다. 외로웠던 건 둘뿐만이 아니니까.]

장난스레 그리 말한 스노우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녀의 꼬리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묘하게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에베베─ 얼굴 빨개졌대요! 부끄러워한대요!]

'…닥쳐.'

언제나처럼 깐족거리는 왼쪽이의 목소리에 그 기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리자드맨들은 스노우에게 맡기고 설이와 토순이 앞에 서게 되었다.

익숙한 듯 얌전히 내 앞에 쪼그려 앉은 설이가 곧장 '컁컁─!' 울었다.

[아빠! 뭐 배워? 뭐 배우는 고야?]

언제나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괜찮은 울림이다.

잠시 '아빠'라는 마법의 단어에 빠져 있으면, 그새를 못 참고 설이가 '컁컁!' 내 몸을 두드려왔다.

[빨리! 빨리이이─!]

[…그래. 우선 그동안 뭘 배웠니?]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꺼낸 물음에 설이가 막힘없이 입을 열었다.

[나 이거 할 줄 알아!]

설이의 주변으로 자그마한 마력이 모여든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눈에 보일 정도의 선명한 마력이었다.

내가 E랭크였을 당시와 비교하면 엄청난 수준이다.

애초에 내가 E랭크였을 당시에는 마력의 'ㅁ'자도 몰랐으니 비교할 수조차 없었지만.

'설이는 천재가 분명하다.'

[이제 겨우 마력 조금 움직였을 뿐이거든…?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안 했거든…? 그런데 천재는 뭔 개소리야, 이 바보야─]

'그렇다면 넌 설이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분명 설이가 천재는 맞지만….]

'그렇다면 괜한 딴죽은 피하도록. 설이의 행동에 집중해라.'

[....]

왼쪽이가 조용히 침묵했다.

그런 왼쪽이의 반응에 짧게 혀를 차며 설이의 모습에 계속 집중했다.

잠시간 마력을 모으며 조용히 집중하던 설이가 이윽고 '퍄─!'하고 숨을 내뱉었다.

설이의 앞에 자그마한 불꽃이 생겨났다.

[만들어써! 내가 만들어써!]

자기가 만들어낸 불꽃 앞에서 잔뜩 신이 난 설이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잠시 그런 설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이윽고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잘했다, 설아.]

[나 잘해써?]

[그래. 아주 훌륭하다. 우리 설이는 천재가 분명하구나.]

'컁컁─!' 신이 난 설이가 기쁘게 울었다.

그런 설이의 머리를 열심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토순이 너도 한번 해보아라. 스노우한테 뭘 배웠지?]

[잠시만요, 주인님!]

토순이가 설이와 비슷하게 집중을 시작했다.

그리고 설이보다 배는 이른 시간 만에, 설이보다 더 큰 불꽃을 만들어냈다.

[…잘했다.]

[…아가씨하고 너무 반응이 다른 거 아닌가요?]

[불만인가?]

[아뇨… 아닙니닷….]

이런 느낌으로 설이와의 훈련을 시작했다.

제105화

이후 진행된 교육에서 거듭 깨닫는다.

설이는 천재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잘 배울 리가 없으니까.

[만들었어! 만들었어!]

[잘했다, 설아! 우리 설이는 천재구나!]

[잘했어! 잘했어!]

간단한 마법 몇 개를 가르쳐 줬는데 곧잘 배웠다.

한번 보고 바로 따라 할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설명만 확실히 해주면 바로 성공할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확인해 본 설이의 마법 속성은 수마법과 화마법.

다른 마법 속성도 있는 것 같지만 당장 내가 쓸 수 있는 게 독, 화, 수. 이렇게 세 가지밖에 없기에 자세한 확인은 불가능했다.

더 가르쳐주지 못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일단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거라도 확실히 가르치자.

[주인님… 저는요…?]

[…미안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흐헝헝─.]

…물론 토순이도 확실히 챙겼다.

그렇게 설이와 토순이에게 착실히 마법을 가르치고 있자 문득 스노우가 다가왔다.

리자드맨들의 훈련은 벌써 끝난 것일까?

[기초 체력이 부족한 거 같아서 뺑뺑이를 돌렸다.]

적당히 설산 열 바퀴만 돌게 시켰다고 한다.

…이 설산 꽤 넓지 않았었나?

과연 열 바퀴를 하루 만에 다 돌 수 있을까?

당장에 내 감지 범위보다 더 넓은 거 같은데….

B랭크인 현명한 비늘이라면 몰라도 다른 녀석들은….

[근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렇군요….

당장 그들의 조교… 아니, 선생님은 스노우니까 괜한 참견은 하지 않는다.

나는 설이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바쁘니까.

[그런데 그런 체력 훈련은 리자드맨들보다 토순이가 급한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렇군. 본녀가 큰 우를 범했어.]

[저는 살찐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진화한 것뿐이에요옷─!]

토순이가 열심히 항변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당장 리자드맨들을 쫓아 설산을 돌도록 만들었다.

우선 적당히 다섯 바퀴만 돌고 오도록.

이걸로 설이와 단둘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스노우도 함께였지만 그녀라면 괜찮았다.

그렇게 스노우와 설이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스노우. 무심코 생각났다만, 그들만으로 괜찮은가? 근처의 다른 몬스터들은…?]

한가롭게 햇볕을 쬐던 스노우가 움찔 몸을 떨었다.

[…괜찮을 거다. 이 근처는 확실한 본녀의 구역이니까. 감히 그들을 건드릴 잡놈들은 없겠지.]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혹시 덤벼드는 잡것들이 있어도 그 정도는 근성으로 해결해야지.]

[....]

어쩐지 굉장히 껄끄럽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저 멀리서 깜짝 새 하나가 급히 날아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늑대 무리한테 습격을 받았단다.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그, 그 정도쯤이야. 근성으로 돌파해야지!]

이후 재빨리 이동했다.

오랜만에 내 머리 위에 탄 설이가 상당히 신나 보였다.

[아빠, 달렷!]

* * *

리자드맨들을 습격했다는 늑대들은 설산 구역에서 서식하는 [스노우아이스 울프]라는 몬스터다.

랭크는 B. 보통 일고여덟 마리 정도가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녀석들로, 설산 구역에서는 딱 평균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다.

'리자드맨들의 숫자가 숫자니까 한 번에 당하지는 않겠지만….'

거기다 현명한 비늘이나 삼형제도 있으니 당장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너무 시간을 끌면 위험했다.

리자드맨들 쪽의 B랭크는 현명한 비늘뿐이다.

삼형제는 C랭크였고 대부분의 리자드맨들이 아직 E랭크에 불과했으니, 싸움이 계속 진행된다면 역시 늑대들 쪽이 우세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것보다 리자드맨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늑대들하고 악연이 있는 거 아닌가?

산림 구역에서도 그렇고 설마 여기서도 늑대들과 부딪히게 되다니….

분명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렇게 급히 도착한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내 상상과 조금 달랐다.

"즈아아아─!!!"

현명한 비늘과 삼형제가 늑대들의 시체를 밟고 당당히 포효하고 있었다.

[보아라! 역시 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근성으로…!]

아니, 너희들. 분명 B랭크는 현명한 비늘뿐이지?

삼형제는 분명 C랭크지?

아무리 다른 리자드맨들의 도움이 있다 쳐도, B랭크 몬스터 여덟 마리를 어떻게…?

[근성입니닷!]

[근성!]

…스노우에게 잠깐 훈련을 맡긴 반나절 사이에 무언가 큰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알고 보니 이길 수 있던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 헌터들에게서 받아온 장비가 상당히 좋은 장비였었다.

역시 사람이나 몬스터나 템빨이 진리다.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토순이의 활약도 대단했다고.

직접적으로 싸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서포트하는 것이 상당히 능숙했다고 한다.

피─ 피잇!

[에헴! 저도 할 땐 한다구욧!]

아무래도 토순이 역시 스노우한테 제대로 배우긴 했나 보다.

아깐 대충 봐서 잘 몰랐네.

이렇게 이번 습격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이후 다시 설산 열 바퀴를 돌려던 리자드맨들을 붙잡았다.

조금 계획을 변경할 필요를 느꼈다.

[본녀의 훈련 방식에 불만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단지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서 말이지.]

[더 좋은 방법이라…?]

[더 쪼은 방법?]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노우와 그런 스노우를 따라하는 설이.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힐링했다.

[그래. 옛날부터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지.]

[…과연. 그런 뜻이군.]

[과연. 그런 뜨시군.]

뭔가를 깨달은 듯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스노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또 그걸 따라 하는 설이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실전은 더 이상 훈련이라 할 수 없는데욧….]

조용히 중얼거리는 토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나는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기 바쁘다.

어쨌든 리자드맨들이 늑대들을 쓰러트림으로써 자신들의 가능성을 증명했으니 나도 그에 답해줄 차례다.

늑대들은 이미 쓰러트렸으니 다음은 버팔로 정도가 좋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버팔로의 랭크는 고작 C.

B랭크도 쓰러트린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다.

[녀석들이 분명 늑대들보다 약한 건 맞지만… 그, 숫자 때문에 오히려 늑대들도 피하는 상대인데요….]

자꾸 태클 걸지 마라, 토순아.

이번에야말로 웰던으로 구워지고 싶으냐?

마침 살도 통통히 올랐으니….

[죄, 죄송해욧! 잘못했습니닷, 주인님! 용서해 주세요오옷─!!!]

어찌 되었든 이렇게 해서 리자드맨들은 버팔로 사냥에 나서게 되었다.

[고깃! 고기 쪼아! 소고깃─!]

제일 중요한 설이가 기뻐하는 거 같아 흐뭇하다.

그래, 언제나 그렇듯 우리 설이만 행복하면 문제없다.

[마운틴 버팔로]라는 이름을 가진 버팔로 녀석들은 명색의 '소'이면서도 채식이 아닌 육식이다.

엄연한 몬스터라는 느낌일까?

하긴 풀 한 포기 제대로 보기 힘든 척박한 땅이니, 육식일 수밖에 없긴 했다.

어찌 되었든 버팔로 녀석들은 육식계의 몬스터로 4, 50마리 이상이 항상 무리를 지어 행동한다.

그 많은 숫자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 녀석들은 귀가 좋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도 예민하게 파악한다.

예전에 한창 버팔로 무리를 사냥할 때는 보통 설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주 찾아왔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도 설이가 활약할 시간이다.

자, 설아. 마음껏 놀렴.

저기 리자드맨 아저씨들을 열심히 쫓아가는 거야.

[술래잡기! 나 술래 자래!]

신나게 소리친 설이가 다다다- 뛰어간다.

그런 설이의 모습에 당황한 리자드맨들이 엉거주춤 어색하게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잠시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내 곁의 토순이가 분한 듯 중얼거렸다.

[뺏겨 버렸어욧… 결국 뺏겨 버렸다구욧… 토순이의 유일한 존재 의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닷!

중얼중얼 열심히 쫓고 쫓기는 설이와 리자드맨들의 모습을 토순이가 가만히 노려보았다.

흘깃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토순이의 존재 의의는 진화를 확인한 순간부터 새로 하나 생겼다.

[비상식량.]

무심코 중얼거린 목소리에 토순이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 아가씻! 저, 저도…! 토순이도 끼워주세욧!]

데굴데굴- 몸을 굴리며 토순이가 뒤늦게 무리 사이에 합류했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스노우가 피식 웃는다.

[그대는 토순이에게 너무 짓궂다.]

[아아. 반응이 좋으니까. 놀리는 맛이 있다.]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내 모습에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적당히 하거라. 그렇지 않아도 심지가 약한 아이인데. 저러다가 덜컥 심장 마비라도 오면 어쩔 테냐?]

[…확실히 이곳 토끼들은 죄다 심장 쪽이 약하긴 했군. 좋아, 앞으로는 조금 자중하지.]

그리 말하고 나서야 스노우가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내가 없던 사이 스노우는 완전히 토순이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설이 정도는 아니라도 엄연한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내가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던 약간의 어색함은 어느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스노우.

말하지 못한 게 있다.

딱히 이번 건 농담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스노우의 꼬리로 엉망진창 두들겨 맞았다.

비늘이 쿵쿵- 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스노우한테도 <테일 스트라이크>가 있는 모양이다.

상당히 아팠다.

아니, 농담이니까.

그렇게 스노우와 가벼운 농을 주고받는 사이 먼 곳에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는 수십의 기척.

틀림없는 버팔로 무리였다.

정말이지 학습력이 없구나.

나와 스노우의 눈이 흘깃 마주쳤다.

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설이를 챙기지.

스노우 너는?

토순이를 챙긴다고?

토순이도 같이 끼여서 사냥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직 토순이는 이르다고?

아까는 제법 활약한 모양인데….

알겠습니다. 부인의 의견을 따르지요.

그럼 제가 설이를 챙길 테니 부인은 토순이를….

재차 꼬리로 얻어맞았다.

장난치지 말란다.

부인을 부인이라 부른 것뿐인데….

왠지 억울하다.

어느새 완전히 적응한 리자드맨들과 여전히 술래잡기를 즐기던 설이를 조용히 불렀다.

조금 아쉬워하던 설이였지만 곧 쪼르르 이쪽으로 달려온다.

착하다, 우리 설이.

나와 스노우가 설이와 토순이를 챙기자 리자드맨들도 자연스레 깨달은 모양이다.

사냥감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녀석들이 각자 전의를 다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실전이라 하지만 너무 긴장하지 마라.

여차하면 나랑 스노우가 있으니까.

스노우는 치료 마법의 달인이니 정말 죽은 것만 아니면 바로 살려줄 거다.

딱 죽을 것 같을 때 바로 구해줄 테니까.

그래, 이전에 말했다시피 이건 엄연히 훈련의 일환이다.

다 너희가 강해지기 위한 과정 중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싸워라.

당장 눈앞의 적에만 집중하는 거다.

리자드맨들의 몸에서 끝 모를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조금 전보다 훨씬 보기 좋은 모습이다.

그래, 이래야 좀 제대로 싸울 수 있지.

[고기 오는 고야? 소고깃?]

내 머리 위에서 조용히 물어오는 설이의 목소리에 오른쪽이가 드물게 신이 난 기세로 고개를 주억였다.

[고깃! 맛있는 고깃!]

설이가 신이 나 보여서 흐뭇하다.

그리고 얼마 후 마침내 기다리던 버팔로들이 도착했다.

마주친 두 진영은 잠깐의 신경전 끝에 곧장 전투를 시작했다.

제106화

리자드맨들은 결국 버팔로 무리를 상대로 이기지 못했다.

장비빨로 어느 정도 분투하기는 했으나 결국 평균 랭크의 차이와 숫자의 차이 앞에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조금 위험하다 싶은 순간 내가 적절히 개입해서 상황을 종료시켰다.

<마안> 한 번에 깔끔히 정리되었다.

전체적으로 상처가 심했기에 스노우가 직접 나서서 수고해줬다.

아무래도 나보다 치료 마법에 뛰어나다 보니 이런 광역 치유에는 스노우가 제격이었다.

자국 하나 없이 상처도 말끔히 나았지만 리자드맨들은 몹시 시무룩해져 있었다.

분한가 보다.

괜찮아, 너희들은 잘 싸웠다.

그저 상대가 더 강했을 뿐이다.

다음에는 지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하면 된다.

자, 기분 풀고 고기나 먹자.

너희가 직접 쓰러트린 고기도 있으니까.

내가 맛있게 구워주마.

의기소침해진 리자드맨들을 열심히 위로했다.

내 열렬한 위로와 환상적인 고기 맛에 녀석들도 조금 회복된 느낌이다.

정확히는 내 위로 때문이 아닌 고기 덕인 것 같지만 그 고기를 내가 구웠으니 별 차이 없지 않을까?

[고깃! 고기 쪼앗! 웰던! 빠삭하게!]

설이가 "컁컁!" 행복하게 울었다.

오랜만에 구워보는 건데도 아직 실력이 줄지는 않은 것 같다.

다행이다.

[그대가 없는 사이 본녀도 열심히 해봤지만 그대의 고기는 확실히 다르군. 뭔가 비법이라도 있나?]

묵묵히 고기의 맛을 음미하던 스노우가 불쑥 물어왔다.

[딱히 요령 같은 건 없다만… 그래, 맛있게 먹는 설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구웠다.]

[…과연 정성이란 건가?]

스노우가 깨달은 얼굴로 한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걸로 납득해 주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이후, 잠깐의 휴식 끝에 곧장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실전은 겪어 보았으니 오후에는 이제 그 실전을 통해 얻은 걸 체화시킬 시간이다.

가볍게 나나 스노우와 대련하면 된다.

아, 이건 단체가 아닌 1대1로 진행할 거니까.

리자드맨들이 잔뜩 울상을 지었다.

차라리 몇 번이고 더 싸우겠단다.

하다못해 설산 열 바퀴라도 마저 돌겠다는데.

응, 안 돼.

허락할 수 없다.

실전도 좋지만 이런 대련도 중요하니까.

설이도 걱정할 필요 없다.

오후에는 토순이한테 맡길 생각이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사양할 필요 없다.

에이, 살살 해준다니까.

설마하니 나나 스노우가 너희들을 해치기라도 하겠는가?

이후 여전히 울상인 리자드맨을 상대로 1대1 개인 교습(대련)을 시작했다.

진심으로 하면 덤비기도 전에 순삭될 테니 한 마리당 10분 정도를 잡고 적당히 어울려줬다.

솔직히 전력으로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시간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리자드맨들이 문자 그대로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역시 힘 조절이 제일 어렵다.

힘 조절이 어려운 나와 달리 스노우는 꽤 능숙하게 리자드맨들을 상대했다.

그 비결을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대하고 여러 번 해봤으니 쉽다.]

그렇군요.

스노우한테 저는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이 연약한 존재였군요.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니, 닉스! 사, 살살! 살살 부탁한다! 뼈가… 뼈가 아프닷…!]

마침 차례였던 현명한 비늘이 비명을 지른다.

아차, 무심코 그만 힘이….

절대 화풀이한 거 아니다.

그런데 현명한 비늘.

너는 분명 B랭크였었지?

그렇다면 다른 리자드맨들보다 더 튼튼한 거 아닌가?

조금 힘을 줘봤다.

"즈, 쯔아아앗─!!!"

사념조차 전해지지 않는 성대한 비명이 울렸다.

이런. 이번에도 무심코 힘을 더 줘버렸다.

미안하다, 현명한 비늘.

용서해다오.

이런 느낌으로 리자드맨들과 1대1 개인 교습을 진행한 결과, 세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리자드맨들이 모두 지쳐 쓰러졌다.

조금 근성이 부족한 거 아닐까?

[사, 살려… 즈, 어….]

시간이 조금 어중간하게 남았다.

과연 이전에 스노우가 말했던 대로 기초 체력이 부족한 것 같다.

솔직히 한 순번 정도는 더 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치료 마법을 사용해볼까?

나는 무리라도 스노우의 치료 마법이라면 다시 쌩쌩하게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은데….

리자드맨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오, 저렇게 소리지를 힘이 남아 있다면 아직 더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은근슬쩍 스노우에게 물어봤으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런 근육통 정도는 치료 마법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복하는 게 이후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리자드맨들이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쉰다.

아쉬운 마음에 짧게 혀를 찼다.

그런 나를 스노우가 조용히 불렀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스노우 왈.

"그대 차례다."

이후 리자드맨들과 함께 바닥에 조용히 몸을 뉘었다.

생각보다 편하다.

미안하다, 얘들아.

드디어 너희 마음을 좀 알 것 같구나.

내가 오랜만에 돌아와서 잊고 있었다.

대련이란 이름의 일방적인 구타 행위를.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으니 저쪽에서 토순이와 놀고 있던 설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무래도 미끄럼틀을 타고 싶은 모양이다.

이것도 상당히 오랜만이다.

슬며시 몸을 움직였다.

타고 놀기 좋게 적당히 몸을 기울인다.

설이가 신이 난 채 내 몸을 타고 올랐다.

이윽고 "컁컁─!" 즐거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설이만 행복하면 됐다.

[재밌어 보이는구나. 본녀도 조금 실례해도 되겠느냐?]

아무렴 마음껏 사용하시지요, 부인.

그렇게 30여 마리의 파충류들이 차가운 설원 위에 쓰러져 있으면, 그와는 반대로 토순이를 포함한 세 마리의 포유류들이 여유롭게 설원 위를 노닐었다.

이게 변온 동물과 정온 동물의 차이일까?

물론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리자드맨들과의 설산 구역 2일 차도 평화롭게 저물었다.

* * *

이후의 하루는 2일 차 때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깜짝 새들의 알(무정란)으로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에는 가볍게 실전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리자드맨들과 버팔로 무리를 사냥하고 사냥한 고기로 점심을 해결한다.

그리고 잠깐의 휴식 후에 1대1 맞춤 대련으로 오후를 보낸다.

리자드맨들이 하나둘 쓰러지고 마지막 현명한 비늘까지 쓰러지면, 그때부터 나와 스노우의 대련이 시작된다.

이후 언제나처럼 나의 패배로 대련이 끝나는 것으로 이날 하루의 대략적인 일과가 모두 끝이 난다.

이후부터는 자유 시간. 각자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

아무래도 리자드맨들 같은 경우는 아직 랭크가 낮았기에 거처 근처를 벗어나진 못했지만, 애초에 추운 밖보다는 뜨뜻한 안을 선호했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충분히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넓게 굴을 파서 다행이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종종 스노우나 내 요망에 따라 추가적인 대련을 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설이와 토순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같이 시간을 보낸다고 해봐야 언제나처럼 내 몸을 가지고 설이가 노는 것뿐이었지만.

또 의외로 지난번 미끄럼틀 이후로 스노우도 종종 끼어 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런 느낌으로 우리의 하루 일과는 굉장히 평화롭다.

때때로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것도 그닥 문제가 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조금 단조로운 일상일지라도 내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스노우로부터 슬슬 리자드맨들의 거처에 만들었던 호수의 마력이 다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다시 충전하는 게 어떨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매번 번거롭게 마력을 충전할 수는 없으니 이 기회에 용암석을 챙겨오는 게 나았다.

용암석은 용암 구역에서만 구할 수 있는 광물로써, 일종의 보온석과 같은 효과를 지닌 물건이었다.

물론 일반 보온석과 비교해서 그 화력이랄까, 온도가 굉장히 뜨거웠지만.

어쨌든 호수를 뜨뜻하게 데우는 데 역시 저만한 물건도 없었다.

그렇게 하여 용암 구역에 가기로 결정했다.

금방 다녀올 생각이었기에 홀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런 내 결정에 반대한 것이 바로 설이.

언제나처럼 자기도 데리고 가 달란다.

솔직히 귀엽기는 했지만 그만큼 조금 버겁기도 했다.

사념 대화를 배우면서 목소리까지 머릿속을 웅웅- 울리기 시작했거든.

[데려가앗! 설이도 데려갓!]

빼애앵- 머릿속을 울리는 설이의 목소리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금방 다녀온다니까?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렴, 설아.

[같이 갈랫! 파파랑 같이 갈 거야!]

솔직히 데리고 가는 거야 문제가 없었지만… 용암 구역의 온도를 설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내 마법으로 커버가 가능할 테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설이한테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닐까 그게 걱정이다.

무엇보다 설이와의 첫 상층 나들이는 이런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나중에 천천히 느긋하게 다녀오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떼를 쓰는 설이와 난감해하는 나의 행동을 끝낸 것은 당연하게도 스노우였다.

엄한 어머니 모드에 돌입한 그녀가 간단히 설이를 제압했다.

역시 어머니는 강하다.

['다녀오세요.' 해야지.]

[…다녀오세욧….]

축- 늘어진 귀와 꼬리가 몹시도 안타깝지만 모처럼 스노우가 상황을 진정시킨 이후다.

이제 와서 내가 설이를 데리고 간다고 하면 그것만큼 스노우한테도 난감한 상황이 없을 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작별을 나누었다.

아빠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다오, 설아.

나중에 많이 놀아줄게.

그렇게 급히 상층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용암 구역의 몬스터들이 당황한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은 빨리 용암석을 찾아 설이한테 돌아가야 했다.

* * *

그런데 슬쩍 살펴본 용암 구역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평소보다 어수선하면서 무척 날카로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급히 근처의 드레이크 하나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나를 알고 있던 녀석인 듯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기에 냉큼 붙잡았다.

자, 이유를 말해 봐라.

이 분위기는 뭐냐?

용암 구역에 헌터들이 찾아왔단다.

이곳 69계층은 아니고 58계층까지 도달했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에 현재 분위기가 조금 예민하다고.

특히 지난번에 왔던 헌터들이 플로어 보스를 쓰러트리고 간 일 때문에 더더욱 긴장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현재 레드 와이번이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상층까지 올라간 상황이라고.

벌벌 떨며 설명을 끝낸 녀석을 얌전히 놓아주었다.

왠지는 몰라도 '가, 감사합니다!'하고 급히 도망치는 녀석을 베웅하며 잠시 고민했다.

'…리사의 말대로 요즘 헌터들의 수준이 꽤 늘긴 했나 보군. 이렇게 금방 용암 구역에 도달한 이들이 다시 나타날 줄이야.'

이건 조금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고민은 거기서 끝.

이후 더 이상 헌터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급한 것은 용암석을 찾아 돌아가는 일.

헌터들 따위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레드 와이번하고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면 될 테니 지금은 아쉬운 대로 안부만 전하기로 했다.

지나가던 드레이크 하나를 붙잡고 레드 드레이크에게 안부를 전해달라 부탁했다.

덜덜 몸을 떠는 녀석의 모습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죽고 싶지 않고서야 내 부탁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다.

내가 너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다.

나중에 레드 와이번을 만났을 때 아무런 말도 없다면….

그때야말로 용 고기를 먹는 날이다.

이후 용암석을 찾아 급히 집으로 향했다.

아르데에게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괜히 신경 쓰이게 하지 않았다.

아르데하고도 다음에 다시 만나면 되니까.

무엇보다 아르데와 다음에 만날 때는 가족들과 함께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설이와 약속했던 대로 볼일만 끝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급히 돌아온 나를 향해 설이가 '느젔져!'하고 소리쳐서 조금 쇼크였다.

중간에 드레이크들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던 게 원인인 모양이다.

다음에는 정말 용건만 끝내고 돌아오는 거로.

그렇게 리자드맨들의 거처에 무사히 용암석을 설치했다.

뜨끈뜨끈 열기를 발산하는 게 온천 같은 느낌이다.

이건 너무 뜨거워서 문제라고?

…근성으로 극복해라.

내성을 기르는 거다.

너희는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늘도 무척 평화로운 하루를 보냈다.

그나저나 레드 와이번은 과연 헌터들을 상대로 잘할 수 있을까?

그 실력을 잘 알기에 별문제는 없을 것 같다만 그래도 역시 조금 불안하다.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는데….'

다음에 무사히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녀석에게도 가족들을 소개해주고 싶으니까.

제107화

리자드맨들이 진화했다.

E랭크에 있던 몇몇이 D랭크로, D랭크에 있던 녀석들 중 또 일부가 C랭크로.

그리고 C랭크였던 삼형제가 B랭크까지 성장한 것이다.

삼형제 역시 현명한 비늘과 같은 [드라고뉴트]로 진화했다.

마법 쪽에 특화되어 보이는 현명한 비늘과 달리 근육이 굉장히 발달해 있다.

성대하게 축하해 주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그렇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조금 훈련의 강도를 높여도….

삼형제를 포함해 진화한 리자드맨들이 모두 내 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제발 살려달란다.

아니, 진화했으면 강도를 높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원래 철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듯, 사람… 아니, 몬스터도 마찬가지다.

너희도 열심히 두드리다 보면 더 단단해질 수 있다.

내가 경험해봐서 안다.

내가 말했던가?

내 능력치 중에서 내구가 제일 높다고.

원래는 민첩이나 힘이 제일 높았지만….

어쨌든 이것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열심히 노력하자.

내가 충분히 단련시켜 주마.

에이, 사양할 필요 없다.

이건 강제니까.

원래 다른 녀석들에 비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던 현명한 비늘이 조용히 삼형제를 위로해 주었다.

텁텁-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삼형제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니, 현명한 비늘. 너도 강도는 더 높일 계획이다.

제일 앞서던 녀석이 다른 녀석들한테 따라잡혔잖아?

그래서야 족장 체면이 말이 아니지.

현명한 비늘도 내 꼬리 끝에 매달렸다.

제발 봐달라고 열심히 사정사정하지만 소용없다.

걱정하지 마라, 안 죽는다.

내가 겪어봐서 안다니까.

정말 단단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에이, 요즘은 법사도 내구를 올린다.

민첩을 올려서 피해봤자 어차피 스치기만 해도 똑같이 터질 거, 내구라도 높여서 한 대라도 더 버티는 게 아무래도 낫지 않겠나?

이해를 못 하겠다고?

그러면 그냥 얌전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렇게 리자드맨들의 훈련 강도를 높이게 되었다.

다들 안색이 퍼렇게 죽어 있지만 그래도 막상 해보니 문제없이 따라와 주었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왜 그렇게 사양한 걸까?

그래도 이 정도면 조금 더 강도를 높여도….

이번에야말로 차라리 죽여달라며 울부짖는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호오… 과연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것이구나. 본녀도 조금 참고하도록 하지.]

왼쪽이가 자업자득이라면서 열심히 비웃는다.

…아니. 저번에도 말했지만 린 한 몸이라니까.

이후 성대하게 목을 물렸다.

스노우한테도 엉망진창 당했다.

역시 뭐든 직접 겪어봐야 안다고, 지금이라면 리자드맨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미안하다, 얘들아.

반성했다.

진화 소식은 리자드맨들뿐만이 아니었다.

깜짝 새 녀석들도 진화했다.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알을 가지러 둥지를 찾아가니 어느새 훌쩍 커져 있는 녀석들이 있었다.

종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D랭크의 몬스터다.

뭔가 주변의 환경에 따라 진화한 듯 온몸이 하얗다.

꼭 백조를 보는 것 같다.

처음 발견한 몬스터는 최초 발견자가 이름을 짓는 관례에 따라 이번에도 내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명명, [화이트 스완].

원래 '스완'이란 이름 자체가 백조라는 뜻이지만 아무렴 상관있을까 싶었다.

누구한테 말해줄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눈 백조'라는 뜻에서 '스노우 스완'이라 이름 붙이려고 했지만, 왠지 스노우나 설이가 생각나길래 급히 변경했다.

아무래도 설산 구역이다 보니 너무 '눈'에만 의식하는 거 같다.

다음을 생각해서 또 다른 걸 찾아야….

이후 깜짝 새… 아니, 이제는 화이트 스완이 된 녀석들에게 따로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무래도 리자드맨들처럼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겨우 네 마리뿐이니만큼 이름을 짓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매일같이 신선한 달걀을 제공해주니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적당히 '일조', '이조', '삼조', '사조'라 이름 붙였다.

참고로 이름의 '조'는 새 조(鳥)의 '조'다.

나로서는 그냥 적당적당한 느낌으로 지은 이름이지만 막상 본인들에게는 달랐던 모양이다.

백조 녀석들이 단체로 울음을 터트렸다.

뭔가 굉장히 감동한 느낌인데….

대충 이름을 지은 장본인으로서 무척 양심에 찔렸다.

아니, 뱀은 양심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못 본 거로….

이후 어떻게 소문이 난 건지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내 앞에 몰려왔다.

기세가 굉장히 심상치 않다.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유는 하나다.

자신들에게도 이름을 지어달라는 것.

깜짝 새… 아니, 백조들이 와서 열심히 자랑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치킨을 먹어야 될 것 같다.

어찌 되었든 이미 소식은 전해졌고, 리자드맨들은 단체로 내게 항의하러 몰려온 상황이다.

주 용건은 자신들에게도 이름을 달라는 것.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이름에 집착하는 거지? 없어도 지금껏 잘 생활하지 않았나?]

[이름. 많은 것을 의미. 특히 확실한 부하로서의 인정.]

대표로 답해온 리자드맨의 대답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이름이 없어도 너희들은 이미 내 부하나 다름없는데….

조금 난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 리자드맨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면 한쪽에서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스노우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적당히 지어주면 어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이름에 집착하는 거 같은데… 그 의미야 둘째 치고, 서로를 부를 때 이름이 있고 없고는 다르니 뭐라도 지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차분히 들려온 스노우의 목소리에 리자드맨들이 맞다는 듯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몇몇은 환호까지 내뱉으며 스노우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희들 스노우를 무서워하던 거 아니였나?

언제부터 그렇게 아이돌 같은 취급을 했다고.

'근성입니다!'하고 답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단단히 세뇌된 모양이다.

스노우, 이 무서운 여우….

어찌 되었든 그렇게 해서 어쩔 수 없이 리자드맨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다.

한 번에 서른 개에 가까운 이름을 다 떠올릴 수는 없던 관계로 결국 글자 몇 개를 돌려쓸 수밖에 없었다.

리가, 리나, 리다, 리라, 리마….

자가, 자나, 자다, 자라, 자마….

드가, 드나, 드다, 드라, 드마….

이후 새끼들이 태어날 때를 생각해 뒤는 넉넉히 남겨두었다. 만약 더 늘어난다면 그때는 '맨'으로 시작할 예정이다.

나는 분명 노력했다.

리자드맨들이 단체로 환성을 터트렸다.

고요하던 설산에 짧은 메아리가 울린다.

스노우의 품에서 낮잠을 자던 설이가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렇게 좋았던 건가…?

어쨌든 리자드맨들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첫날 그들의 거처를 만들었을 때 이상의 놀라운 반응이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미리 지어줄 걸 그랬나?

처음에는 조금 막막했지만 막상 이름을 짓고 보니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괴상한 춤까지 추는 리자드맨들의 모습에 괜히 흐뭇해지는 느낌이다.

어느새 설이와 토순이도 끼어서 즐겁게 놀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것 같으니 슬슬 오늘 일과를 시작하도록 하지. 꽤 시간이 늦었다. 평소보다 조금 빡빡하게 가야겠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스노우의 모습에 리자드맨들의 움직임이 뚝 멎는다.

그렇다.

아직 오늘의 일과가 끝나지 않았다.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았으나 본녀의 서방님을 잘도 괴롭혀 주더군… 뒷일은 모두 생각하고 저지른 거겠지?]

고요히 울리는 스노우의 목소리가 스산하다.

그런 스노우의 모습에 조금 감동하는 한편 조용히 설이와 토순이를 챙겼다.

아무래도 여기는 조금 위험할 것 같으니까 우리는 저기서 놀자꾸나.

아빠가 재밌게 놀아주마.

응? 엄마는 조금 바쁜 모양이니 일단은 우리끼리 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래, 엄마도 금방 올 테니까.

잠시 우리끼리만 놀고 있자.

이후 리자드맨들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설산에 한가득 울려 퍼졌다.

그렇게 리자드맨들의 일을 해결하니 이번에는 백조들이 찾아왔다.

이번 일을 사과하러 온 것일까?

아니, 아까 치킨 얘기는 그냥 농담이니까.

* * *

아니었다.

녀석들은 자기들 이름은 대충 지었으면서 리자드맨들한테는 멋진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항의하러 온 거였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치킨이 올라올 예정인 모양이다.

죄송하다며 급히 떠나가는 백조들을 잠시간 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삼형제가 찾아왔다.

현명한 비늘과 함께 이미 이름이 있는 관계로 한쪽에서 조용히 보고 있던 녀석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무슨 용건으로…?

백조 녀석들과 같은 이유다.

그러고 보니 도마뱀 고기는 닭고기 맛이 난다고 했던가…?

치킨과 함께 올리면 괜찮을 것 같….

열심히 도망치는 삼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이제 마지막이겠….

토순아, 너는 또 무슨 용건이니?

혹시 너도 오늘 저녁상에 올라가고 싶다는….

[아, 아뇻! 그냥 저한테 이런 예쁜 이름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욧!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 그렇다면 괜찮다.

그래, 그래. 고맙다.

우리 토순이는 참 눈치가 빨라.

그렇게 한동안 토순이를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토순이가 참 기특하단 말이지.

그런데 토순아. 왜 그렇게 떠는 거니?

설마 너도 혹시….

이 이상은 토순이의 안전을 위해서 더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뭔가 기회가 왔다는 걸 눈치챈 오른쪽이가 조용히 입맛을 다셨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물으면 처벌이라는 명목하에 냉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이런 느낌으로 리자드맨들은 열심히 설산 구역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당장 현명한 비늘과 삼형제라면 별문제가 없고 다른 녀석들도 지금 같은 속도라면 그리 멀지 않아서 스스로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즉, 가족들과 나들이 갈 시간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리자드맨들만 완벽히 적응하면 곧장 떠나자. 일단 아르데와 레드 와이번부터 만나고… 그전에 설이나 토순이가 용암 구역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여차하면 최단 거리로 이동해서….'

이후의 계획을 조용히 생각해본다.

평생 새하얀 눈만 보고 살아왔을 설이와 스노우에게 어서 빨리 훨씬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바깥의 여러 음식도 먹여주고 싶군.'

설이의 반응도 그렇고 특히 스노우의 반응이 궁금하다.

의외로 안 그럴 거 같으면서 이런 쪽의 반응은 확실한 그녀였으니까.

'나나 스노우는 인화의 술이 있으니 문제없겠고, 설이와 토순이는… 일단 테이밍했다고 설명해야 되려나?'

제 딸을 테이밍한 몬스터로 소개하는 게 영 달갑지 않았으나, 현재로서 설이나 토순이를 미궁 밖으로 데리고 나갈 방법은 그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스노우는 그렇다 쳐도, 설이와 토순이가 헌터들을 만나도 괜찮을까?'

확실한 보호자가 둘이나 있으니 안전상의 문제가 아닌, 혹여나 미궁의 의지에 잠식되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이건 따로 스노우와 상의해 봐야겠군.'

단기간에 정신 내성 스킬이라도 생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어쨌거나 그리 멀지는 않은 거 같군.'

영 속도가 안 나온다 싶으면 조금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 했을 텐데 리자드맨들이 잘 따라와 줘서 다행이었다.

어서 빨리 리자드맨들이 충분히 성장해 줬으면 좋겠다.

제108화

리자드맨들의 진화가 속속들이 진행 중이다.

얼마 전에 하나둘씩 D랭크로 진화하더니 오늘도 몇 마리가 더 D랭크로 진화했다.

이 상태라면 머지않아 전원이 D랭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힘내자.

마침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E랭크의 리자드맨이 D랭크로 진화했다.

그뿐만 아니라 C랭크까지 진화한 개체도 제법 숫자가 되니 이제 어디 가서 맞고 다닐 걱정은 안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마음 놓고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다.

스노우에게 소식을 전했다.

[준비해야겠군.]

이후 스노우는 이런저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뭔가 상당히 바빠 보이는데, 나는 상관 않고 얌전히 지켜보았다.

왠지 본능적으로 지금 건드리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란 걸 이해한 까닭이다.

아, 설아. 얌전히 아빠 옆에 있으렴. 그러다 엄마한테 혼난다.

[그대도 가만히 있지 말고 집 주변 좀 싹 정리하고 오거라. 우리가 없는 사이 리자드맨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스노우의 잔소리에 곧장 집 주변 정리에 나섰다.

평소부터 자주 하고는 했던 일이었기에 이렇다 할 강한 몬스터들은 없었지만 실히 떠나기 전 한 번쯤 정리하는 게 나았다.

한가해 보이는 현명한 비늘과 삼형제를 데리고 주변을 싹 훑었다.

A랭크 몬스터가 몇 보이길래 현명한 비늘들에게 맡겼다.

좋은 싸움을 하더라.

떠나기 전 현명한 비늘이 A랭크만 되면 확실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오는 마석들을 모두 현명한 비늘에게 몰아주었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마치고 돌아오니 스노우의 준비도 모두 끝난 상태였다.

떠나기 전 거처에 여러 마법들을 설치한 모양이다.

리자드맨들의 거처에도 설치했단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확실히 스노우가 더 꼼꼼하다.

현명한 비늘이 A랭크가 되었으면 하고 바랬지만 결국 A랭크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역시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약간 소화 불량 증세를 보이는 현명한 비늘을 보고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찼다.

어쨌든 이걸로 준비는 끝.

현명한 비늘과 삼형제들에게 당부를 한 채 출발했다.

설이가 상당히 신이 났다.

그에 반해 토순이는 꽤 겁이 난 모양인지 뭔가 걱정이 많아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확실히 지켜 줄 테니까.

그리고 의외로 가장 신이 나 보인 것은 스노우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아홉 개의 꼬리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린 것은 비밀이다.

용암 구역은 상당히 덥고 뜨거운 곳이었기에 미리 스노우한테 이야기를 전해둔 상태였다.

스노우라면 몰라도 설이와 토순이한테는 상당히 버거울 테니까.

상층으로 향하는 전이문 앞에서 스노우가 간단히 마법을 사용했다.

뜨거운 온도에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이라는데, 공격 마법밖에 모르는 나와 달리 스노우는 여러모로 유용한 마법을 여럿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배워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69계층 용암 구역.

설이와 토순이가 탄성을 내뱉는다.

스노우도 티는 안 내지만 꽤나 놀란 모양이다.

[빨개! 새빨개!]

새하얀 설원 말고 처음 보는 또 다른 풍경에 설이가 "컁컁!" 연신 내 머리를 두드렸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대단하구나. 정말 후끈후끈해. 그대 말처럼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면 제법 고생할 뻔했어.]

조용히 감탄하는 스노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래도 평범한 편이다. 주기적으로 화산이 폭발하는데 그때는 정말 지옥 같은 곳이지.]

[놀랍군… 고작 층 하나로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스노우가 재차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 문득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묘하군….'

전체적으로 어수선하다 할까? 저번에 왔을 때와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조금 더 우중충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였다.

'저번 일이 설마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적당히 주변에 지나가는 놈을 하나 잡아 물어보아야 할까?

잠깐 그리 고민하는 사이 저편에서 와이번 하나가 날아왔다.

레드 와이번은 아니었고 평소에 녀석을 따라다니던 아르데의 부하 중 하나였다.

[…닉스 님, 오랜만입니다.]

사뿐히 내 앞에 내려앉은 녀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생명체의 모습에 설이가 "컁컁!" 내 머리를 두드렸다.

신기한 모양이다.

[너 혼자뿐인가? 레드 와이번은? 저번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의아한 마음에 물어보니 이번이 안색을 흐렸다.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우선 두목님께 안내하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함께 오시지요. 모두 두목님께서 초대하셨습니다.]

그리 말하는 녀석의 모습에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궁금증이 차올랐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는다.

이후에 만날 아르데가 설명해 줄 테니까.

이후 와이번의 안내를 받아 아르데의 레어로 이동했다.

이곳 역시 바깥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우울한 분위기였다.

[…닉스여,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몇 달 만에 다시 만난 아르데는 상당히 지쳐 보였다.

그 육체는 여전히 태산처럼 강인해 보였지만 정신적으로 지친 것 같은 모습이다.

무언가 큰일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함께 온 이들은 저번에 말한 가족들이냐?]

[예. 소중한 가족들입니다.]

아르데의 시선이 한차례 일행을 훑었다.

커다란 용의 시선에 설이가 놀란 듯 "컁컁" 울었고 토순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홀홀- 귀여운 아이들이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쪽은….]

아르데가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았다.

불꽃을 담은 주홍빛 아르데의 눈동자와 청명한 푸른빛 스노우의 눈동자가 잠시간 마주쳤다.

[…만나서 반갑네. 이곳의 지배자 아르데라고 하네. 그대는 아래쪽의 지배자인가?]

[이쪽 역시 만나서 반갑다. 스노우라고 한다. 본녀가 한 땅의 지배자인 것은 맞지만 그대처럼 구역의 지배자는 아니다.]

[…놀랍군. 이 아래도 상당히 굉장한 곳인 모양이야.]

가볍게 중얼거린 아르데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좋은 가족들을 얻었구나.]

[항상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마음 잃지 않고 소중히 하거라.]

평소처럼 덕담을 건넨 아르데가 이윽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소중히 하는 것을 하지 못했지….]

한탄처럼 내뱉은 말에 더 못 참고 사정을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래. 눈치챘겠지만 큰일이 있었다.]

아르데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닉스여. 나는 평소부터 괜한 분란은 피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끝없는 투쟁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서로 겨루지 않고 살아간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지막이 내뱉는 아르데의 목소리는 상당히 무거웠다.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살피던 설이마저 꾹 입을 다물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나쁜 생각이 아니었어. 투쟁심 많은 몬스터들이라도 충분히 다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지… 나는 상당히 만족했단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구나.]

아르데가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인간들이 나타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저쪽이 먼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굳이 이쪽에서 손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항상 죽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저쪽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르더구나.

슬쩍 고개를 내려 아르데가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 주홍빛 눈동자가 마치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인간들은 탐욕스럽다. 끝을 모르지.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찾아온다. 그래서 굳이 손을 쓰지 않았건만… 그것들이 결국 정도를 넘었어. 건드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을 건드렸다.]

[…레드 와이번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렇다, 닉스여. 그 아이는 죽었다.]

어렴풋이 짐작하던 것이 사실이 되었다.

가슴 한쪽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그리되었습니까?]

[…동포를 붙잡혔다. 아직 성룡이 되기 전의 어린 헤츨링이었지… 그 어린 것을 구하려다….]

아르데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평소 제 일족과 부하들을 소중히 하는 아르데만큼이나 제 부하들을 소중히 하던 레드 와이번이었으니, 당시의 상황이 어땠을지 짐작이 되었다.

절로 탄식이 흘러나온다.

[…닉스여. 나는 어쩌면 좋겠느냐? 현명한 너이니 의견을 내다오.]

나지막이 물어오는 아르데의 물음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르데는 현명하다.

그는 인간, 헌터들을 죽이면 그들이 어떻게 나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평소에는 헌터들이 나서건 말건 최소한의 대처만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레드 와이번은 아르데의 직계 일족.

그냥 보통의 부하가 아닌 아르데 휘하 세력의 2, 3인자이자, 그의 후손 중 하나다.

그런 만큼 아르데의 분노는 평소와는 그 정도가 달랐다.

아르데 본인이 직접 나서고 싶을 만큼.

사실 아르데 스스로도 어느 정도 고민은 끝마쳤을 것이다.

이미 내 답을 듣지 않아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해진 상황.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질 상황도 아르데라면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르데가 굳이 내게 물은 이유는 마지막 확인이나 다름없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마음 가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어르신.]

[…내가 그래도 되겠느냐? 지금껏 내 스스로 걸어온 길을 버리고 그저 감정에 휩쓸려 내 마음대로 움직여도 되겠느냐?]

[어르신이 선택한 것이니 그것 또한 어르신의 길입니다. 망설이지 마세요. 모두가 어르신을 지지할 겁니다.]

아르데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의 시선이 흘깃 스노우를 향했다.

[아래층의 지배자여. 그대라면 어쩌겠는가?]

[스노우라고 편하게 불러도 좋다. 그리고 본녀라면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지. 당한 만큼 갚아준다. 그게 전부다.]

[…그렇군. 바보 같은 물음이었다… 답변 고맙군, 스노우.]

[천만의 말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스노우의 모습에 아르데가 마찬가지로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그 시선을 다시 내게로 향한다.

[닉스여. 나는 응징할 것이다. 그대의 말처럼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인간들을 찢어발기려고 한다.]

[어르신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담담히 답하는 내 모습에 아르데가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미리 말하마, 닉스여. 이번 일에 너는 크게 상관하지 말거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어르신?]

[너라면 레드 와이번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를 돕겠다며 나서겠지… 나는 그것을 원치 않는다.]

[…제가 외부자이기 때문입니까?]

아르데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닉스, 너는 내가 그런 생각에 말리는 것 같으냐?]

[…아닙니다. 어르신.]

한차례 마주 본 아르데의 눈빛에 고개를 저었다.

아르데라면 내가 외부자라는 이유로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게 할 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너에게는 지금 가족들이 있지 않으냐?]

흘깃- 아르데의 시선이 스노우와 설이 그리고 토순이를 향한다.

조금 전까지의 격정적인 눈빛과는 달리 한결 편안해진, 포근한 눈빛으로 아르데가 내 가족들을 훑었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온 것 아니냐? 그런데 굳이 피를 볼 이유가 없지. 거기다 어린아이도 있어서야….]

[하지만 그래서는….]

[걱정하지 마라, 닉스여. 나는 '아르데'다.]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결국 조용히 수긍했다.

그의 말처럼 나 혼자도 아니고,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전에 끼어들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홀홀- 괜찮다. 오히려 이쪽이 미안하지. 너 역시 그 아이와 많이 친했을 텐데….]

[제 몫까지 부탁드립니다.]

[아무렴… 다시는 이 땅에 발도 못 들이게 만들어줄 생각이다.]

다소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아르데가 곧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미안하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왔을 텐데… 상황이 좋지 않았어.]

[괜찮습니다. 그런 것에 신경 쓸 이들이 아니라서….]

흘깃 시선을 돌리면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고 설이가 다부지게 "컁컁!" 울었다.

[설이는 괜찮아!]

[홀홀- 귀여운 아이구나… 그래, 바로 상층으로 떠날 테냐?]

[예. 아무래도 더 이상 남아 있는 것도 민폐일 것 같으니… 어르신은 바로 나서실 겁니까?]

아르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우선 부하들을 모아야겠지. 그 다음 준비를 마치고, 한꺼번에 몰아칠 예정이다.]

[…큰 소란이 일겠군요.]

아르데가 한차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 되었든 너희는 먼저 출발하거라. 소란이 일기 전에 빨리 위로 올라가는 게 좋겠어.]

[예, 어르신. 몸조심하십시오.]

조용히 덧붙인 목소리에 아르데가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 아르데와의 만남을 끝마친 우리는 곧장 상층으로 이동했다.

제109화

[…무지막지한 상대군. 못해도 본녀보다 반수에서 한 수 정도 앞선다.]

막 69계층을 떠나 68계층에 들어섰을 무렵, 스노우가 조용히 말해왔다.

흘깃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도 느낄 수 있나?]

[아아… 여차하면 그대와 설이를 챙겨 도망쳐야 했으니 주의 깊게 살폈다.]

뭔가 스노우가 굉장히 듬직한 소리를 해왔다.

[…아르데가 이쪽을 공격할 리는 없다만.]

[기세가 워낙 날카로워서 말이다. 이후에는 사정이 있다는 걸 깨달아서 본녀도 편히 있을 수 있었다.]

[그렇군.]

담담히 고개를 주억인다.

[그것보다 아르데가 그리 강한가? 내 입장에서는 둘 다 비슷한 거 같은데.]

[상당히 강하다. 본녀랑 맞붙는다면 열에 아홉은 질 수밖에 없을 거다.]

[…그건 놀랍군.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 건가?]

같은 SS랭크라도 확실히 100년 이상 살아온 아르데하고 아직 20년도 채 살지 못한 스노우는 많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본녀도 좀 더 열심히 수련해야겠구나. 호적수를 이긴 이후에는 더 이상 본녀의 맞상대는 없다고 여겼는데….]

-설마 이런 상층에 저런 상대가 있을 줄이야.

중얼중얼 속삭이는 스노우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모습은 또 의외의 모습이었다.

[따라가는 내 입장도 조금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부부로서 차이가 크게 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래서 말이다.]

[…그대에게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그대의 성장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아는가?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토순이가 오우거만큼이나 강해진 격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만.]

[본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담담히 들려온 목소리에 마지못해 수긍했다.

스스로도 성장이 빠르다는 자각은 확실히 있었다.

이게 다 상태창 덕분일까?

[그것보다 괜찮은가?]

[응? 뭐가 말인가?]

어느새 내 머리에서 내려가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한 설이와 토순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이, 문득 스노우가 물어왔다.

[이번에 죽었다던 이는 그대의 친구 아닌가?]

[…아아. 분명 친구 같은 사이였지. 이곳에서 머무를 때 제법 신세를 졌었다.]

한차례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하는 내 모습에 스노우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복수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이쪽은 별 상관 안 한다만… 그대만 원한다면 설이와 토순이를 챙겨 기다리고 있겠다.]

이쪽을 생각하는 스노우의 배려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르신도 그리 말했으니 굳이 이쪽이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다.]

[…호오.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다인가?]

[눈치가 빠르군.]

[그대와도 꽤 오랜 인연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부부이지 않은가?]

차분한 스노우의 목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지? 따로 뭐라도 할 생각인가?]

[…조금 움직일 생각이다. 이쪽도 나름 친구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 테니 그때는 설이와 토순이를 부탁하지.]

[믿고 맡겨라.]

듬직한 스노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생각했다.

'헌터들이 분명 58계층에 있다고 했던가?'

아르데와의 얘기도 있으니 크게 날뛸 생각은 없다.

그저 친우의 넋을 달래주고 싶을 뿐이다.

[오랜만에 포식하겠구나!]

[배─고─파….]

두 파트너들 역시 의욕 만땅이었다.

이후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위로 향했다.

구경할 거 구경하며 즐길 거 다 즐기며.

가끔씩은 설이가 사고 치지 않도록 잘 확인하며.

그렇게 우리는 여유롭게 용암 구역을 횡단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58계층.

들어서자마자 헌터들의 기운이 가득하다.

설이와 토순이를 스노우에게 맡긴다.

금방 돌아오마.

말했다시피 그리 심하게 날뛸 생각은 없다.

아르데의 몫도 충분히 남겨둬야 했으니 나는 내 몫만 챙겨서 금방 돌아갈 예정이다.

놀랍다.

직접 확인한 헌터들 중에는 무려 SA랭크가 하나 있었다.

거기다 S랭크도 셋이나 있는 것이 과연 레드 와이번이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해치우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당히 저랭크의 헌터들만 상대해야겠다.

저랭크라 해도 B나 C랭크는 되었으니 실제로 그리 저랭크라 할 수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은신 능력을 맘껏 발휘해보았다.

SS랭크의 샤를로트조차 곧장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높은 은신 능력이다.

이곳 헌터들의 수준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보초를 서던 몇 명과 일행과 떨어져 있는 몇몇 헌터들을 조용히 사냥했다.

대략 30여 명쯤 사냥했을 무렵 헌터들이 이변을 눈치챘다.

마지막으로 식량 같은 보급 물자를 불태운 뒤 조용히 물러났다.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족한 것 같지만 그래도 레드 와이번의 넋을 기릴 정도는 될 것이다.

잘 가라, 친구야.

* * *

다시 스노우와 가족들에게 돌아왔을 무렵 문제가 발생했다.

정확히는 문제라기보다 잠시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바로 미궁의 의지.

당장 나나 스노우 정도라면 문제없을 테지만 설이와 토순이가 문제다.

전혀 인간의 침입이 없던 설산 구역에서 생활하던 설이와 토순이는 이번이 처음 인간과의 교류였다.

따로 내성 스킬이라도 있다면 문제없겠지만 당장 설이와 토순이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지금은 괜찮더라도 이후 육안에 보일 정도로 헌터들에게 접근한다면 바로 미궁의 의지가 개입해올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토순이는 몰라도 설이가 의지를 잃고 살의만 가득 품은 채 헌터들에게 무작정 덤벼드는 꼴을 아빠로서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스노우와 상담했다.

[문제없다. 설이라면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어떻게? 설이에게 내성이라도 있었나?]

[흠? 본녀가 말하지 않았나? 본녀의 일족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깟 잡소리쯤은 아무렇지 않다.]

아무래도 설이는 상당한 금수저인 모양이다.

그깟 잡소리(미궁의 의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과연 SS랭크 몬스터를 어미로 둔 몬스터답다.

어쨌거나 다행이다.

적어도 설이는 괜찮은 것 같다.

그렇다면 토순이는?

[흐음… 확실히 토순이는 문제겠구나.]

스노우가 '흐음'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갑작스레 우리 둘의 시선에 집중된 토순이가 잔뜩 당황했다.

[…이건 근성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겠구나.]

스노우 역시도 딱히 해결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보다 너무 '근성'을 좋아하는 것 같지 않나?

만약 스포츠 감독이었다면 분명 선수들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악덕 감독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토순이에 대해서는 근성… 아니, 이쪽에서 잘 살피고 있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잘 붙잡고 있으면 함부로 덤벼들지는 않겠지.

설이만 괜찮다면 별문제는 없다.

그렇게 친우의 넋을 기린 채 58계층을 떠나 계속해서 위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55계층 평야 구역.

미리 경고하긴 했지만 도착하자마자 쏟아진 거센 폭풍우에 모두 정신이 없었다.

특히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설이가 거센 바람에 날아갈 뻔해서 난리도 아니었다.

정말 십년감수했다.

정작 설이 본인은 상당히 즐거웠던 모양이지만.

이후 스노우의 마법으로 몰아치는 바람과 폭우를 막아냈다.

스노우는 정말 유용한 마법을 여럿 알고 있다.

참고로 토순이는 거센 바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무겁구나.

평야 구역부터는 슬슬 헌터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하는 곳, 여기서부터는 인화의 술을 사용해 인간 모습으로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오랜만에 본 우리의 인간 모습에 왠지 모르겠지만 설이가 잔뜩 신이 났다.

아니, 사실 처음 나들이를 시작한 이후로 설이는 항상 신이 나 있기는 했다.

처음 보는 것들이 너무 신기한 모양이다.

어쨌든 행복해 보이니 별 상관은 없었지만.

그것보다 스노우. 설이는 내가 안을 테니 토순이를 부탁한다.

아니, 절대 무거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결국 내가 토순이를 안고 가게 되었다.

[주, 주인님…! 아파욧! 손에 힘이 너무…! 흐헝헝─!]

미안하다, 무심코 그만….

그것보다 토순아.

우리 집에 돌아가면 운동 좀 하자구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건 이미 종족 특성 같은 거라서 안 된다고?

그런 게 어딨어? 전부 근성이면 해결된다.

정 안 되겠으면 진화라도 하던가.

내 기필코 네 살을 빼고 말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토순이를 안고 있으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설이 같은 복실복실한 감각은 없지만 푹신푹신한 것이 나름 괜찮은 느낌이었다.

묘하게 중독되는 느낌인데….

이런 게 그 안는 배게 같은 건가?

인간 모습으로 있을 때는 종종 애용해야겠다.

이후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노우가 토순이를 데려갔다.

대신에 설이를 맡기기는 했는데….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뭐, 나로서는 설이를 안을 수 있어서 아무래도 좋지만.

[마, 마님! 저는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욧! 그냥 있었을 뿐이에욧! 억울해욧! 억울하닷… 헉! 죄, 죄송합니닷! 살려만 주세욧! 흐헝헝─!]

분명 스노우가 얼마 전에 토순이한테 잘해주라고 한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이 토순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토순이는 자기만 괴롭힐 수 있어, 이런 건가?

"컁컁─!"

[아빳! 저기 토순이! 토순이들이 잔뜩!]

행복해 보이는 설이를 보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것보다 설아, 저건 토순이가 아니란다.

엄연히 [오크]라는 이름이 있는 다른 종이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토순이랑 오크를 비교하면 안 되지….

오크한테 실… 아니, 토순이한테 실례잖니?

아무리 많이 닮기는 했어도….

그것보다 슬금슬금 오크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인간 모습으로 변하며 나나 스노우나 기세를 확 줄였더니 아무래도 만만하게 보인 모양이다.

흘깃 스노우를 바라보니 그녀가 담담히 고개를 주억인다.

마음대로 하라신다.

설아,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돼지고기인 모양이란다.

이게 또 아주 맛있어요.

아니, 아니. 토순이 얘기가 아니라… 저기 저 토순이 친구들 얘기야.

어쨌든 상당히 맛있으니 기대해도 좋다.

그렇게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녀석들을 일시에 손봐주었다.

<마안>으로 깨끗이 죽인 다음 수마법을 이용해 깔끔히 해제했다.

사실 이런 해제 작업에는 수마법보다 풍마법이 더 좋을 것 같지만 아쉽게도 풍마법을 배우지 못했다.

스노우는 알고 있던 모양인데 이후에 부탁해 볼까?

이후 적당한 온도로 고기를 구웠다.

아무래도 소가 아닌 돼지다 보니 평소와 달리 적당하게 구워 보았는데, 다행히 모두 상당히 만족했다.

특히 스노우의 평이 좋았다.

상당히 극찬을 쏟아냈는데, 그녀는 소보다는 돼지인 것 같다.

평야 구역에 나쁜 점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좋은 점도 있었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오래 있어야 할 이유가 늘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소화 겸 느긋이 평야 위를 걷는 사이 문득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미리 챙겨왔던 아이템 가방을 뒤적인다.

가족들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얻은 '청송검'을 꺼내었다.

스노우와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까먹고 있다가 이제야 전해주게 되었다.

모처럼의 인간 모습이니 헌터인 척하기 위해서라도 검 하나 정도는 장비해 주는 게 좋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청송검보다는 역시 샤를로트가 쓰던 백장미란 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그때 모른 척 슬쩍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샤를로트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스노우라면 분명 검을 쓸 줄 알 거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녀는 검을 잘 다루지 못했다.

의외였다.

그녀는 항상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이미지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본녀가 인간들의 무기를 어떻게 쓰겠느냐?]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그럴싸했기에, 아니 몹시 아름다웠기에 도로 가져가지는 않는다.

단순 관상용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스노우에게 뒤늦게 선물을 전하면 설이가 "컁컁!" 울어왔다.

[아빠! 설이 선물! 설이도 선물 주세요!]

그러고 보니 그런 약속을 했었다.

까맣게 잊고 말았다.

당황하는 내 반응에 잔뜩 실망하는 설이다.

그런 설이를 향해 다급히 내뱉는다.

우리 설이 선물은 밖에 있단다.

너무 귀한 거라 함부로 들고 갈 수가 없었거든.

밖에 나가면 바로 전해주마.

변명인 게 분명한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설이는 상당히 기뻐했다.

밖에 나가면 리사와 바로 상담해 봐야겠다.

되도록 비싸고 좋은 걸 선물해야지.

이후 너른 평야를 산책하듯 걸었다.

도중에 날씨가 상당히 풀렸기에 설이와 토순이도 뛰어놀 수 있게 해주었다.

설이가 상당히 신이나 평야 위를 뛰어다녔다.

처음 보는 푸른 풍경이 마음에 드나보다.

나중에 산림 구역에 도착하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여유롭게 보내던 중 한 무리의 헌터들과 마주했다.

제110화

마주친 헌터들의 숫자는 셋.

느껴지는 기척은 A가 하나, B가 둘이다.

평야 구역에서 활동하기에는 상당히 적은 숫자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느껴지는 기척이 이들만이 아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60명 정도 되는 헌터들이 추가로 있었다.

아무래도 정찰조인가 보다.

"저기 봐. 사람이 있어."

"미궁에서 다른 헌터가 있는 게 뭐 어때서?"

"아니, 그게 아니고 겨우 두 명뿐이라고."

"우리처럼 정찰이라도 하러 왔나 보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헌터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조용히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는데, 발달한 신체 능력 탓에 뭐라는지 다 들리고 있었다.

"그것보다 엄청 미인인데. 새하얀 백발이라… 외국인인가?"

"입고 있는 복장도 되게 특이하네… 그리고 품에 안고 있는 건… 몬스터?"

"테이밍한 몬스터치고는… 되게 약해 보이지 않나?"

"한쪽은 돼지 같은데… 설마 토끼인가? 아니, 그래도 토끼치고는 너무 살찌지 않았나?"

속닥속닥 들려오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들이 보기에도 토순이는 좀 심한 모양이다.

역시 열심히 다이어트를 시킬 필요가….

[흐음… 저들이 무어라 하는 거지?]

[음…? 아아. 스노우는 인간의 언어를 몰랐던가?]

[애초에 인간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다만.]

조용히 머릿속을 울리는 스노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주억였다.

사념 대화라면 몰라도 저렇게 육성으로 내뱉는 언어는 아무래도 알아듣기 힘들 것이다.

[알려주고는 싶지만 당장에는 좀 힘들군. 일단 내가 인간의 언어를 알고 있으니 별문제는 없을 거다.]

[호오…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것이냐?]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어물쩍 넘어가려는 내 태도를 눈치챈 것일까?

스노우는 더 물어오지 않았다.

가끔씩 있는 이런 스노우의 배려가 참 고마웠다.

[그래서 토순이는 어떻지? 설이는 역시 별문제 없다만….]

단순히 문제가 없는 것을 떠나서 오히려 인간들한테 꽤 큰 호기심을 느낀 모양이다.

설이는 내 품에 안긴 채 연신 팔을 통통 두드렸다.

[아빳! 저기! 저기이이!]

아무래도 당장 달려가서 확인해보고 싶은 것 같은데, 역시 바로는 무리였다.

흘깃 스노우를 살핀다.

[흐음… 어떠냐, 토순아? 괜찮으냐?]

[으… 으으… 네… 네엣… 저는 괜찮아욧….]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 끙끙 앓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토순이 나름대로 미궁의 의지에 저항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그리 괜찮지는 않아보았다.

[아무래도 당장 접촉은 힘들어 보이는군.]

[그렇담 가능한 우회 해서 이동해야겠구나.]

그리 말한 스노우가 저편의 헌터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따로 인간들과 접촉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저쪽에서 먼저 접촉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접촉할 필요는 없지… 그것보다 스노우, 넌 어떤가? 다른 이상은 없나?]

[참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자그맣게 나를 채근한 스노우가 피식 웃으며 가벼운 목소리 답했다.

[별다른 이상은 없구나.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본녀의 일족에게 머릿속을 울리는 헛소리 따위 그저 시끄러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스노우는 한차례 토순이를 고쳐 안았다.

[토순이가 제법 힘들어 보이니 조금 서두르자꾸나.]

설이가 아쉬운 듯 "컁컁" 울었으나 토순이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었다.

딱히 인간을 공격하는 것 자체는 별문제 없었으나 역시 토순이가 미궁의 의지에 삼켜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제 스스로 인간을 공격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모르겠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로 휘둘리게 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본다.

토순이 역시 소중한 가족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곧장 자리를 피했다.

한동안 이쪽을 지켜보던 헌터들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 우리의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같았으나 이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후 토순이를 위해 최대한 헌터들과 접촉하지 않은 채 이동했다.

평야 구역의 날씨도 그리 좋지 않은 탓에 빠르게 사막 구역으로 넘어갔다.

지평선 너머까지 멀리 뻗은 고운 모래사장.

설이는 이번에도 당연히 상당히 신이 나 있었다.

사막 구역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내 품에서 벗어나 모래 위를 뛰어다녔는데, 그 새하얀 털 이곳저곳에 모래가 묻어나고 있었다.

스노우가 곧장 설이를 붙잡아 왔다.

[숙녀가 그렇게 지저분하게 돌아다니면 안 된다.]

"컁컁!"

설이가 불만스럽게 울었지만 스노우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간절한 눈으로 나를 봐도….

아빠도 이번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겠구나.

미안하다.

이후 간단한 수마법과 풍마법에 의해 설이의 몸에 깨끗하게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스노우의 품에 얌전히 안겨졌다.

설이가 연신 몸을 버둥거려 보지만 쓸데없는 저항이다.

얌전히 포기하렴, 설아.

사막 구역은 아무래도 평야 구역보다 헌터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이쪽에서 피해 다닌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토순이가 꽤 힘들어했다.

솔직하게 근처의 헌터들을 모두 처리하면 어떨까 싶은 심정이었다.

더 이상 만날 헌터가 없으면 토순이도 괜찮을 테니까.

그리고 꽤 괜찮다 싶었던 내 계획을 거부한 것이 바로 토순이와 스노우다.

토순이는 굳이 자기 때문에 내가 나설 필요 없다는 이유였고 스노우는 또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대가 인간에 대해 설명할 때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죽이면 죽일수록 더 강한 이들이 자꾸자꾸 찾아온다고. 우리는 어디까지나 나들이를 나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 줬으면 좋겠구나.]

스노우의 이야기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녀의 말처럼 괜히 헌터들을 죽여 소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어도 이전에 내가 일으켰던 사건의 여파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이 이상 괜한 소란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렇다면 여전히 토순이가 문제인데.

이 건에 대해서는 토순이가 직접 이야기해 왔다.

[근성으로 해결해 보겠습니닷!]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근성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데….

옆에서 흡족하게 웃는 스노우의 모습에 말을 삼켰다.

스노우의 근성론에 토순이는 이미 완전히 세뇌된 모양이다.

저렇게 되지 않도록 설이라도 지키도록 하자.

[근성!]

"컁!"하고 울어대는 설이의 모습을 보니 이미 늦은 것 같지만.

어찌 되었든 이후 토순이의 강력한 자기주장하에, 딱히 헌터들을 피하지 않은 채 이동했다.

헌터들을 마주칠 때마다 매번 상당히 괴로워하는 토순이의 모습에 지켜보는 이쪽도 상당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여기서는 잠자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토순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이니까.

훌륭한 어른이라면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켜봐 줄 의무가 있었다.

혹시 사고를 치더라도 그걸 해결해 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토순이는 훌륭히 미궁의 의지에 저항해 보였다.

대략 열일곱 번째로 헌터들과 마주쳤을 무렵 드디어 편안해진 안색으로 당당히 저항한 것이다.

굉장히 흐뭇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토순아.

저항하는 것은 좋은데, 중간에 자꾸 중얼거린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죽을지도 모른다니?

미궁의 의지가 하는 말보다 내가 더 무섭다는 거니?

일단 모른 척 지켜보기는 했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구나.

이후 토순이가 열심히 사정을 설명했다.

태반이 급조된 변명처럼 들렸지만 일단은 조용히 넘어가 주었다.

누가 뭐래도 토순이는 열심히 이겨 보인 것이니까.

그런 느낌으로 이제는 완전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가급적 헌터들을 피해서 이동하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애초부터 주변 시선 따위 그리 신경 쓰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문제랄까?

한결 편안해진 기분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와, 대박… 감탄밖에 안 나온다… 어디 모델인가?"

"…아무리 헌터 중에 미남 미녀가 많다지만… 저건 넘사벽인데? 가슴도 대박…."

"외국인인가? 남자 친구는 있을까? 한번 들이대 봐?"

속닥속닥 들려오는 목소리에 괜스레 심기가 불편해진다.

미궁에 왔으면 열심히 몬스터나 사냥할 것이지, 왜 남을 훔쳐보는 것일까?

확 그 눈을 다 뽑아버려야 정신을 차릴까?

[꽤 언짢아 보이는구나. 무슨 문제라도 있나?]

차분히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다.

품에 설이를 안고 있는 스노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확실한 미인이다.

경국지색이 있다면 바로 그녀를 두고 하는 말 아닐까?

[…별거 아니다. 단지 주변의 시선이 좀 신경 쓰여서 말이지.]

[흐음… 과연 인간들은 주변에 관심이 많은가 보지? 본녀도 이전부터 끈질기게 달라붙는 시선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구나.]

그리 말한 스노우가 흘깃 주변을 살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헌터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개중에는 남자 헌터들뿐만 아니고 여자 헌터들도 여럿 끼어 있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남을 홀리는 그녀의 미모였다.

스노우 역시 주변의 시선 탓에 기분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싹 해치워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그녀 역시 이쪽처럼 꽤 자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언짢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노우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다.]

[…본녀는 어느 모습이든 아름답다. 당연한 일이지.]

담담히 답한 스노우였지만 조금 붉어진 얼굴은 속일 수 없었다.

스노우와 함께 지낸 지도 꽤 오랜 시간이다 보니, 이제 그녀의 반응이 어떤지 정도는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첫 만남의 위엄 넘치는 모습과 달리 그녀는 꽤 귀엽다.

과연 설이의 엄마랄까.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아름다운 것에는 자연히 시선이 몰리기 마련이니까.]

[…그리 말하는 것치고 그대의 기분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만.]

[다른 것들이 그대를 훔쳐보는데 기분이 좋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말했다시피 아름다운 것에 눈이 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말은 잘하는구나, 정말. 구렁이가 따로 없어.]

[언제나 말하지만 진짜 구렁이니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은 말에 스노우가 조용히 이쪽을 흘겼다.

나는 모른 척 그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서두르자. 산림 구역이 그리 멀지 않았다.]

[산림 구역이라면 그대의 고향이라 했던가? 푸른 수림이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라 들었는데….]

[정확히 내 고향이라 하려면 조금 더 올라가야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고향은 맞지… 장담하지, 꽤 마음에 들 거다. 지금껏 지나온 곳들하고는 달리 온화한 곳이니까.]

[호오… 기대해봐도 좋으냐?]

[아아. 지금까지의 풍경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내 고향의 풍경도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설이가 마음껏 뛰어놀아도 좋을 곳이다. 재밌는 것이 많지.]

[후후. 기대되는구나.]

조용히 웃어 보이는 스노우와 함께 재차 걸음을 서둘렀다.

산림 구역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28계층.

산림 구역까지 딱 한 층만 남겨둔 시점에서 제법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했다.

이쪽을 발견한 저쪽 역시 곧장 반응을 보여왔다.

"어라? 주인님?"

한순간 스노우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쪽을 주인님이라 부르는 것은 토순이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토순이가 부르는 것과 저쪽이 부르는 것은 여러모로 차이가 있으니까.

[…흐음.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불쾌하구나.]

여우의 직감은 상당히 정확하다.

매번 기가 막힌 타이밍에 마주친달까?

아무리 이쪽의 부하라지만 나름대로 인연이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윤지수 일행의 모습에 조금 반가웠다.

한쪽에 끼어 있는 박광열 아저씨의 아들, 박민성의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다.

그때에 비해 표정이 많이 밝아진 걸 보니 윤지수 일행과 함께 잘 지낸 모양이다.

정신 지배 때문에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 명령을 충실히 지켰던 것 같다.

나중에 상이라도 줄까?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윤지수 일행과 잠시 동행하게 되었다.

제111화

[그래서 저들은 누구지?]

윤지수 일행과 동행하게 된 이후 한참 동안 묘한 눈초리로 그들을 살피던 스노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묘한 무게감 가득한 그녀의 물음에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했다.

다행히 스노우는 납득한 듯 보였다.

무엇보다 내가 정신 지배를 통해 그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유에는 퍽 만족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무엇이 그리 만족스러운 것일까?

이유를 모르겠다.

"어머, 너무 귀엽다~!"

"여우인가? 꼬리가 세 개? 어쩜! 너무 귀여워!"

"컁컁!"

윤지수 일행은 특히나 설이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윤지수를 시작으로 일행 모두가 설이를 에워싼 채 잔뜩 귀여워하고 있었다.

설이가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기색이었다면 당장 제지했겠지만, 다행히 설이도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윤지수 일행 주위를 뛰어다니며 열심히 '컁컁' 울어대는 모습이 잔뜩 신이 난 모양이다.

그동안 헌터들한테 강한 호기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여건상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탓에 더 그런 모양이다.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호기심이 폭발한 느낌이다.

"얘는 토끼?"

"그러기엔 살이 너무 찌지 않았나? 돼지를 베이스로 한 신종 몬스터 아냐?"

"하지만 그러기에는 귀가 너무 길지 않나? 아무리 봐도 토끼잖아."

"걷기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근데 의외로 푹신푹신해서 감촉은 좋아. 집에 데려가서 안고 자고 싶어."

의외로 토순이에 대한 관심도 나쁘지 않았다.

토순이의 종에 대해 짧은 토론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그 특유의 귀여운 외모 탓에는 꽤나 사랑받는 느낌이다.

그렇게 윤지수 일행의 관심이 모두 설이와 토순이에게 쏠려 있던 순간, 나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박민성에게로 다가갔다.

박광열 아저씨의 아들이다.

박민성과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난번에 몰래 숨어서 지켜본 것까지 포함하면 겨우 이번이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민성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그 얼굴 곳곳에 박광열 아저씨의 흔적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진한 눈썹과 순박해 보이는 눈매가 똑 닮았다.

제게로 훌쩍 다가온 내 모습에 박민성이 흠칫 몸을 떨었다.

윤지수 일행이 나에 대해서 설명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의 눈에는 그저 윤지수 일행과 아는 사이의 고랭크 헌터쯤으로 보일 것이다.

한낮 캐리로서는 닿고 싶어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저 하늘 너머의 존재.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간 묵묵히 박민성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잘 지내고 있나?"

불쑥 꺼낸 물음에 당황한 박민성이 멍청히 "예? 예?"하고 답해왔다.

그 어리숙한 모습이 또 아저씨와 닮았기에 어느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다.

"별문제는 없나? 따로 괴롭히는 녀석들은 없고?"

"아… 예… 그게… 윤지수 헌터님 공격대에 들어온 뒤로는 없습니다…."

우물쭈물 조심스레 답한 박민성이 흘깃 내 눈치를 살폈다.

척 보아도 이쪽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치다.

내가 누군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자신을 아는 사람일까?

그런 궁금증 가득한 눈빛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박광열 아저씨에게 신세를 많이 졌었다."

"…아!"

박민성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살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박민성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버지를 아시나요?"

"같은 공격대에 속했었지… 정말 좋으신 분이었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애초에 박민성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던지 잠시간 먹먹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3년이나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가슴에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좀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미안하군. 이쪽도 그간 여러 사정이 있어서…."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처음이거든요… 아버지 동료라면서 찾아오신 분은…."

꾸역꾸역 내뱉은 박민성이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무엇인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일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박민성이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아버지는… 저희 아버지는 훌륭한 헌터셨나요?"

한참 만에 입을 연 박민성의 목소리는 살살 떨리고 있었다.

일견 애처롭게까지 보이는 눈빛이 나를 향했다.

"…박광열 아저씨… 아니, 박광열 헌터는 분명 훌륭한 헌터였다. 랭크가 그리 높았던 건 아니지만 공대장으로서 항상 주변을 챙길 줄 알았지."

담담히 꺼내 이야기에 박민성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잠시간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 가볍게 그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흑….'하고 작은 흐느낌이 들려왔다.

이후 박민성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아저씨의 전 동료란 것을 안 까닭일까? 박민성은 내게 무척 친근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고랭크 헌터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거리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아저씨를 닮은 그 특유의 넉살로 사람 좋게 달라붙어 온다.

나를 '형'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또 그것이 기분 나쁘기보다는 옛 아저씨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형. 그럼 형은 얼마나 강한 거예요? 윤지수 헌터님들이랑 얘기하시는 걸 보니까 혹시 A랭크?"

"적어도 샤를로트 헌터보다는 강하지."

담담히 내뱉은 사실에 박민성이 어이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인을 들먹이면 어떡해요, 형? 그것도 샤를로트 헌터라면 SS랭크 헌터라고요. 헌터들 중 최강! 그렇게 돌아가실 만한 분이 아니었는데…."

"…흠. 샤를로트 헌터가 죽은 건 확실히 알려졌나 보지?"

"얼마 전에 라비앙로즈에서 공식적으로 사망이라 발표했잖아요. 뉴스도 안 보셨어요?"

"최근에는 좀 여러모로 바빠서 말이지. 챙겨볼 시간이 없었다."

"으음… 보통은 실종이라 표현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사망이라 표현해서 말이 많았어요. 샤를로트 헌터가 살아 있을 일말의 가능성까지 완전히 배제한 거잖아요."

박민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다면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던가?"

"다른 건 다 설명해도 그것만은 발표하지 않더라고요. 또 그것 때문에 한동안 말이 많았는데, 자세한 사정은 아무도 몰라요."

박민성의 이야기에 재차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에이미 헌터에게 건 암시가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이걸로 앞으로도 내 존재에 대해 퍼지는 것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후 라비앙로즈의 동향은 어떻지? 길드장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었으니 큰 소란이 있었을 법한데."

"아… 그거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겠더라고요. 이번에 SA랭크가 된 에이미 헌터가 단번에 내부를 휘어잡았다고 해요."

"…SA랭크라고? S가 아니라?"

의아하게 반문하는 내 모습에 박민성이 고개를 주억였다.

"네. 안 그래도 사이코메트리 스킬로 유명하던 헌터였는데 단번에 두 계단이나 올랐다고 말이 많았어요. 사실은 실력을 숨기고 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도 있고요."

"…정말 SA가 됐단 말이지… 이건 놀랍군."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당시만 해도 겨우 A랭크 언저리에 불과하던 그녀가 불과 반년여 만에 SA랭크가 되다니.

정말 놀라운 성장 속도였다.

"그렇다면 국내 상황은 어떻지? 아무래도 그리 조용하지만은 않을 거 같은데."

슬쩍 화제를 전환한 내 물음에 박민성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어휴. 말도 마세요. 그동안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고요."

"호오… 많은 일이 있었나 보지?"

"네. 많은 일이 있었죠."

그리 말한 박민성이 조용히 설명을 이었다.

"샤를로트 헌터가 죽은 뒤부터 대대적인 난리의 시작이였죠. 프랑스에서 공식적으로 항의하지를 않나. 샤를로트 헌터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밝혀야 된다며 대대적인 조사대가 파견되기도 하고. 평야 구역에서 활동 중이던 헌터 300명이 갑자기 전원 사라지지 않나."

"...."

"요 몇주 사이에 비교적 잠잠해지기는 했어도 사실 아직까지 헌터계 전체가 초긴장 상태예요. 미궁에 입장할 때도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박민성이 불쑥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형은 왜 이런 걸 물어봐요? 아무리 뉴스를 안 봤어도 그동안 미궁을 들락거렸으면 충분히 알고 있을 법한데…."

'으음'하고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박민성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누가 봐도 말을 피하는 내 모습에 구태여 박민성은 더 묻지 않았다.

"그래서 형. 형은 진짜 얼마나 강한 거예요? 이번엔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좀 말해주세요."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 정도는 된다."

"…오오! 굉장히 있어 보이네요! 못해도 A랭크 정도는 되는 거죠?"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박민성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넉살 하나만큼은 분명 아저씨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박민성이 짧게 감탄을 내뱉었다.

"오오! 완전 여유 있어 보여! 대박! 확실히 A는 되는 거네요! 그러니까 단둘이 사막 구역을 태평하게 돌아다니는 거고요!"

박민성의 시선이 흘깃 나와 스노우를 향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한쪽에 설이, 토순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지수 일행을 지켜보던 그녀가 흘깃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박민성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그… 여자 친구분이신가요?"

"아아… 내 부인이다."

"혀, 형수님이요!?"

깜짝 놀라는 박민성의 모습에 덤덤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째선지 박민성의 분위기가 이전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대박! 완전 대박! 너무 아름다우세요! 형님 진짜 대박이네요!"

연신 감탄을 터트리는 박민성의 모습에 슬쩍 시선을 돌려 스노우를 보았다.

좀 전 박민성과 눈이 마주친 이후부터 계속 이쪽을 바라보던 스노우가 내 시선에 슬며시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말없이 시선을 피했다.

"와… 대박… 진짜 대박… 너무 존경스러워요, 형."

"…어째 고랭크 헌터라는 것보다 이쪽을 더 부러워하는 눈치인데."

"크흐흠…! 오해예요, 형!"

헛기침을 내뱉으며 열심히 부정하는 박민성이었지만 그리 신빙성은 없었다.

"그럼 형수님도 헌터신가요?"

"아아… 확실히 그녀가 나보다 강하다."

"…대박. 형보다 강하면 S랭크? 진짜로요?"

"오해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하고 있지만…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갈까. 어쨌든 그녀가 나보다 강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박민성이 몇 번째인지 모를 감탄을 터트렸다.

그의 눈빛이 동경으로 연신 반짝거렸다.

"저도 형 같은 헌터가 되고 싶어요."

"…노력하다 보면 분명 가능하겠지."

"…열심히 노력할게요."

나지막이 답한 박민성이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조용히 말을 잇는다.

"형… 혹시 있잖아요…."

"뭐지?"

"…윤지수 헌터님 공격대에 제가 들어올 수 있던 게 혹시 형 덕분인가요?"

불쑥 물어온 질문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그것을 눈치챈 것일까?

생각보다 영리해 보이는 박민성의 모습에 나지막이 감탄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쪽은 아저씨한테 받은 은혜를 갚은 것뿐이다."

"…그래도 감사해요…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솔직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참 많이 생각했거든요. 아버지는 헌터셨지만 정작 찾아오는 헌터들은 하나도 없어서… 아버지가 과연 괜찮은 헌터였을까? 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박민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묵묵히 내뱉는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제가 캐리로 일하면서 이것저것 겪어보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혹시 우리 아버지도 이런 헌터가 아니었을까? 지금 눈앞의 헌터들처럼 캐리한테 남한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장례식장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참 많이 들었는데…."

한차례 숨을 고른 박민성이 이쪽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나쁜 헌터가 아니란 걸 알려주셔서."

"내가 보증하지… 박광열 헌터는 틀림없는 훌륭한 헌터였다."

"…고맙습니다."

재차 꾸벅 고개를 숙이는 박민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이걸로 아저씨에게 받았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은 것이 아닐까?

제112화

산림 구역에 도착했다.

"그러면 또 다음에 뵙겠습니다, 주인님."

"다음에 또 만나요, 형!"

윤지수 일행과는 얼마 안 가 헤어졌다.

계속해서 동행하기에는 이쪽에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또한 이후의 일정을 생각해 일찌감치 헤어졌다.

잠깐 사이 윤지수 일행과 친해진 설이가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이번이 마지막 만남은 아니었기에 설이는 아쉬움 마음을 달래며 이별을 꾹 참아냈다.

우리 설이 대견하다.

헤어질 당시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윤지수의 모습에 이쪽을 바라보는 박민성의 눈빛이 조금 묘해졌지만,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언젠가 이쪽을 부르는 윤지수의 호칭을 정정해줄 필요를 느꼈다.

[흐음… 나쁘지 않은 이들이로다.]

[마음에 들었나 보군?]

멀어져가는 윤지수 일행을 바라보며 내뱉는 스노우의 목소리에 슬며시 물으니, 그녀가 덤덤히 고개를 주억였다.

[설이나 토순이에게 향하는 태도를 지켜보면 그 심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애초에 그 심성이 나빠서야 설이가 먼저 다가가지도 않을 터. 인간만 아니라면 설이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스노우의 모습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리 정신 지배를 통해 통제하고 있어도 그들은 인간.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였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틀림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은인의 아들인 박민성도 그닥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구나. 그대가 또 좋은 부하들을 구했어.]

차분히 들려온 스노우의 목소리에 재차 고개를 주억였다.

별생각 없이 정신 지배를 하기는 했어도 꽤 괜찮은 이들을 뽑았다.

[그것보다 본녀 역시 인간의 언어를 배울 필요를 느꼈다. 아무래도 답답하구나.]

슬쩍 팔짱을 끼며 스노우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얼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진한 불만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밖으로 나가면 당장 알려주지. 좋은 선생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나쁘지 않게 가르치도록 노력하마.]

[기대하고 있겠다.]

조용히 덧붙이는 스노우의 목소리에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껏 스노우한테 당한 걸 갚아줄 기회가 찾아온 거 같았다.

스노우만큼은 아니라도 꽤 험… 아니, 엄하게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것보다 이곳은 어떤가? 제법 괜찮지 않나?]

[아아. 그렇구나. 확실히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나 저 푸른 숲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구나.]

그리 말한 스노우가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 한가득 빼곡히 들이찬 푸른 숲의 모습에 그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본녀의 땅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다. 특히나 저 알록달록한 꽃들. 몹시 아름답구나.]

스노우의 시선이 저편을 향했다.

땅 한쪽에 조용히 피어 있는 꽃 몇 송이가 있었다.

토순이가 슬며시 꽃 근처로 다가갔다.

토순이 역시 처음 보는 꽃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녀석이 킁킁- 냄새를 맡는 것과 동시에 아름다웠던 꽃이 쩌억- 입을 벌린다.

깜짝 놀란 토순이가 번쩍 뛰어올랐다.

[주인님…! 흐헝헝─!!!]

[…저건 몬스터군.]

[…과연 그렇구나. 너무 미미해서 눈치채지 못했다.]

헐레벌떡 이리로 도망오는 토순이를 스노우가 조용히 품에 안았다.

저편에서 이리저리 뛰어놀던 설이가 토순이 비명에 "컁컁!" 뛰어온다.

[노는 거야? 설이도 놀래! 끼워줘!]

아무래도 설이에게는 토순이의 비명이 단순한 놀이라고 생각된 모양이다.

역시 여러모로 크게 될 아이다.

토순이가 도망친 꽃은 분명 내 기억에 있는 몬스터였다.

식물계 몬스터의 일종으로, 아쉽게도 그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랭크는 G였다.

사실 몬스터라기보다는 그저 식충 식물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몬스터로, 내가 산림 구역에서 생활하던 당시에도 전혀 거들떠보지 않던 종류의 몬스터였다.

다른 이동 능력도 없고 그저 한 자리에 조용히 피어 있을 뿐이라 다른 G랭크의 몬스터처럼 그닥 위험한 녀석은 아니었다.

[흐헝헝─!! 잡아먹히는 줄 알았어요옷!]

…적어도 토순이는 예외인 것 같지만.

[꽃이야?]

[그렇구나. 설이를 닮아 어여쁜 꽃이구나.]

[설이 예뻐?]

[그래, 우리 설이는 참 예쁘단다.]

스노우와 설이가 조금 전 토순이를 위협했던 꽃 앞에 둘러앉아 단란한 모녀간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설이가 조심스레 그 앞발로 톡톡 꽃을 건드리면 토순이 때와는 달리 꽃은 아무런 위협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꽃도 사람… 아니, 몬스터를 차별하는 것일까?

[아무리 봐도 마님한테 잔뜩 쫄은 거 같은데요…?]

슬며시 바라보니 과연 설이의 뒤에서 꽃을 바라보는 스노우의 기세가 무겁다.

조금이라도 설이에게 해를 입혔다간 그대로 뿌리째 뽑아내 잘게 가루를 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과연 이렇다 할 지성이 없는 녀석이라도 저 정도면 얌전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설이와 스노우가 꽃을 가지고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함께 그 풍경 속에 끼어들고 싶지만 아쉽게도 토순이가 꽃 근처로만 가면 경기를 일으키기에 어쩔 수 없었다.

꽃 알레르기라도 생긴 모양이다.

[알레르기보다는 트라우마 아냐?]

왼쪽이가 조용히 물어왔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아, 토순아. 굳이 사과할 필요 없다.

너도 소중한 내 가족이니까.

가족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설이와 스노우가 단란한 모녀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토순이와 함께 주인과 애완동물로서의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 잠시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문득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너무나 희미해서 무심코 그저 지나칠 뻔한 작은 감각.

흘깃 시선을 돌리면 수풀 속에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흠?]

잔뜩 토순이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토순이의 입에서 '하아앙-'하고 조금 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대로 토순이를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갑작스런 움직임에 이쪽을 지켜보던 눈동자가 당황한 듯 급히 몸을 피했지만, 애초에 산림 구역 수준에서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속도가 녹록지는 않았다.

가볍게 걸음을 내딛는 것과 함께 수풀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눈동자의 주인과 마주했다.

[…뱀?]

Shii───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내뱉는 건 틀림없는 뱀이었다.

새하얀 비늘과 샛노란 눈. 뱀 같지 않은 귀여운 외모를 가진 녀석은 G랭크의 [베이비 스네이크]였다.

Shaa───

정면으로 마주친 시선에 녀석이 곧장 낮은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제 딴에는 나름 위협한다고 내뱉은 소리였겠지만 지켜보는 이쪽 입장에서는 가당치도 않다.

오히려 그 귀여운 외모 탓에 웃음마저 나올 것 같았다.

이건 또 묘하게 옛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상대다.

나도 이런 적이 있었지.

어느새 꽃에서 관심을 뗀 스노우와 설이가 다가왔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하아앙, 거긴 안 돼욧, 주인님'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토순이를 품에 안은 채, 내 옆으로 다가온 스노우가 조용히 묻는다.

[호오? 그건?]

[이쪽을 지켜보는 기척이 느껴지기에 확인했더니 있었다… 일단은 이쪽의 동족인 모양이다만….]

슬쩍 말끝을 흐리고 있자 설이가 뱀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빠…? 아빠…?]

뱀을 한번, 그리고 나를 한번 돌아보는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뜻만 보자면 '아빠하고 똑같아.' 같은 느낌이었다만, 아무리 그래도 뭔가 많이 생략된 게 문제다.

혹시 다른 뱀을 만나면 설이가 무작정 '아빠!'하고 쫓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지금부터 확실히 교육할 필요를 느꼈다.

설아, 알겠지? 아무 뱀이나 막 따라가면 안 돼요.

고기 구워준다 해도 안 돼? 알겠지?

다행히 설이는 충분히 알아들은 모양이다.

금세 내게서 뱀으로 관심을 돌리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나는 똑똑한 설이를 믿는다.

[흐음… 상당히 귀엽게 생겼구나. 그대도 어릴 때는 이랬었나?]

[…분명 이런 시절도 있었지. 그때는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생활했다만… 이제는 다 추억이군.]

이제는 아련한 옛 기억을 회상하며 덤덤히 내뱉었다.

흘깃 이쪽을 바라보던 스노우가 피식 웃는다.

[훌륭히 성장했구나. 우리 닉스, 장하다.]

[…설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는 좀 아닌 거 같다만.]

[후후. 본녀는 그저 칭찬을 한 것뿐이다만?]

[…그러니까 그 방식이 조금 문제인 것 같지 않나?]

불만스레 내뱉은 말에 스노우는 모른 척 후후-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슬며시 뱀에게 앞발을 갖다 대려는 설이를 가로막는다.

뱀이 샤── 하고 연신 위협적인 울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이 작은 아이는 그대의 일족인가?]

[…확신할 순 없군. 이쪽의 어머니가 확실히 많은 형제를 낳기는 했다만… 지금껏 한 번도 마주한 적은 없다. 애초에 벌써 3년도 더 된 일이니, 아직까지 살아남은 녀석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없군. 어머니 역시 확실히 끝을 맞이했으니.]

[…그렇군. 그렇다면 이 아이는 그대의 형제가 낳은 자식쯤으로 생각하면 되겠구나. 시간을 생각하면 그 먼 후손쯤이 맞겠다만.]

[…그렇게 되겠군.]

스노우의 말에 긍정하며 여전히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이쪽을 경계하는 뱀을 바라보았다.

불안에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가 몹시 애처롭다.

괜스레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꽤 오랫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모양이군.]

[흠? 그런 거까지 알 수 있나?]

[아아. 잘은 모르겠지만 느낄 수 있지. 애초에 다른 건 몰라도 향을 느끼는 것만큼은 확실하니, 우리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왔다는 건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허기를 느꼈다는 것일 테니까.]

내가 직접 경험해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허기에 눈이 뒤집히면 먹이 말고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흐음… 그래서 어쩔 생각인가?]

흘깃 이쪽을 바라보며 스노우가 물었다.

그녀의 시선에 묵묵히 뱀을 바라보았다.

겨우 인간으로 변한 내 팔 정도의 길이를 가진 작은 녀석.

솔직히 내가 특이한 케이스지, 겨우 이런 작은 뱀 한 마리가 산림 구역에서 홀로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괜스레 옛 내 모습이 투영된 까닭일까? 아니면 내 먼 친척쯤 되는 녀석이기 때문일까?

그리 남 같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먹을 거라도 구해 줘야겠군.]

[그렇군. 그럼 본녀가 도울 일은?]

[없다. 아이들과 잠시 쉬고 있어라. 금방 돌아오지.]

스노우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근처에 느껴지는 기척을 따라 곧 몸을 움직였다.

너무 많으면 작은 뱀의 배가 터질 수도 있으니 적당한 녀석으로 잡아올 생각이었다.

역시 이 근처에서 적당한 녀석이라면….

그래, [혼 래빗]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토순이가 생각나기는 했지만 엄연히 토순이와 혼 래빗은 다른 종.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아무렴 돼지와 토끼가 같은 종일 리가 없지.

채 1분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혼 래빗 두 마리를 잡아 돌아왔다.

<마안>의 능력으로 깔끔히 즉사한 녀석들을 잡아 돌아오니 이쪽을 보는 토순이의 눈빛이 잠시간 흔들렸다.

괜히 미안하다.

어찌 되었든 여전히 이쪽을 경계하는 뱀에게 혼 래빗 중 하나를 던져주었다.

'샤──' 묘한 시선으로 이쪽을 경계하던 녀석이 이내 더 배고픔을 참지 못한 채 허겁지겁 혼 래빗을 삼켰다.

꿀꺽꿀꺽- 입안으로 사라지는 혼 래빗의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았다.

특히나 저쪽을 보는 설이의 눈빛이 굉장히 반짝인다.

상당히 신기한 모양이다.

토순이는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스노우의 품에 고개를 파묻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토끼 말고 다른 걸 잡아 와야겠다.

저를 보는 여러 시선에 당황한 듯 뱀의 눈빛이 잠시간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래도 역시 허기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꾸역꾸역 먹는 모습이 은근 대견하다.

슬며시 한 마리 정도 더 줄까도 싶었으나, 금세 통통해진 배를 보니 역시 더 줬다간 그대로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식사를 끝낸 뱀은 잠시간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쉬──'하고 이전보다 비교적 편안한 울음소리를 내뱉은 녀석이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녀석이 슬며시 내 발치로 다가왔다.

그리고 꾸물꾸물 내 다리를 타고 오른다.

[가족이 늘 것 같구나.]

[새 친구! 조아!]

[히이익─ 주인님이 두울…!]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어느새 얌전히 내 팔목 쪽에 자리 잡은 뱀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Shii───

녀석이 한차례 혀를 날름거리며 눈을 맞춰왔다.

그 샛노란 눈동자가 묘하게 여왕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녀석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새 가족이 늘었다.

제11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