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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 * *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리자드맨의 부락을 떠났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다시 만날 거라 걸 확신할 수 있었기에 큰 아쉬움 없이 헤어질 수 있었다.

애초에 내 목적은 리자드맨들과의 재회가 아닌 세 사람에 대한 복수니 여기서 더 머물 시간도 없었다.

많이 아쉬워하는 리자드맨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18계층을 떠났다.

목표는 미궁의 최상층.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게이트가 있는 곳이다.

산림 구역을 벗어나 상층 구역에 도착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계층의 면적이 점점 좁아지는 까닭에 이후에는 그리 헤매지 않고도 무사히 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애초에 헌터들의 기세가 많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면 그곳이 바로 게이트였으니 길찾기는 그리 문제가 없었다.

상층 구역은 엄연히 미궁 안임에도 실외라는 느낌인 다른 구역들과 달리 확실히 실내라는 느낌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

미로와 같은 지형.

길치인 사람이라면 곧장 미아가 되기 좋을 곳이다.

그리고 인간의 몸이라 혀를 사용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금 막막하다 싶은 곳이기도 하다.

상층까지 올라오며 종종 느꼈지만 그동안 너무 혀에만 의존해 왔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두컴컴한 내부는 딱히 문제가 없었다.

불마법을 사용해도 좋고 <마안>의 천리안 능력으로 어두운 곳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로 곳곳에 횃불을 든 헌터들이 즐비한 까닭에 그리 어두울 것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헌터들이 있는 곳만 잘 따라가면 되니 길 찾기도 문제가 없었다.

다행이다.

그것보다 3년 전에 비해 꽤 헌터들이 늘지 않았나?

내가 한창 캐리로 활동했던 시절보다 배는 많아진 것 같았다.

조금 궁금하기는 했으나 더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나와 별 상관이 없는 문제라 생각한 까닭이다.

상층 구역에서 주로 등장하는 몬스터는 최약의 대명사, 고블린과 코볼트다.

개인적으로 코볼트가 좀 더 강하다 생각하지만 사실 그리 큰 차이는 없다.

슬라임도 자주 등장하지만 이 녀석들은 사실 몬스터라보기에 굉장히 미묘한 G랭크니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일반인도 기본적인 장비만 갖추면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상층 구역.

헌터들 입장에서는 본격적인 미궁에 들어서기 전 훈련장 삼아 활동하는 곳이다.

그런 만큼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아무리 쉽다 해도 이곳이 바로 미궁이란 것이다.

실제 불과 몇 년 전 상층 구역에서 활동하던 헌터 상당수가 몰살을 당한 일이 있었다.

바로 이례적으로 강력한 에어리어 보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시 상층 구역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은 [미노타우로스].

수소의 머리를 가진 아인형의 몬스터로, 종종 상층 구역에서 에어리어 보스로 등장하기도 하는 놈인데.

보통은 C랭크지만 당시의 개체는 무려 A랭크 상당의 몬스터였다고 한다.

상층 구역으로는 유례가 없을 정도의 고랭크 몬스터.

당연하게도 상층 구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로서는 대항조차 할 수 없는 상대였다.

이후 소식을 듣고 찾아온 상위 헌터들에 의해 토벌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피해로 몇 년간 초보 헌터들의 숫자가 상당수 부족해지는 일이 생겼을 정도다.

그래서 지금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가 하면은….

"음머어어어어───!!!"

바로 내 앞에도 녀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유례없다고 표현될 A랭크 수준의 녀석이.

어째 나, 올라갈 때마다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란 보스는 다 만나는 것 같지 않나?

속으로 중얼거리는 내 물음에 왼쪽이가 '몰라, 바보─'하고 말해왔다.

오른쪽이는 언제나처럼 '배─고─파….'다.

설산 구역 이후 오랜만에 보는 소고기니 좀 흥분한 것 같다.

당장 녀석을 먹고 싶다고 난리다.

나 역시 마음 같아서는 오른쪽이의 요망을 들어주고 싶다만….

"모두 피하세요! 녀석은 못해도 B…! 아니, A랭크 상당의 몬스터입니다!"

"젠장…! 5년 전의 악몽이 여기서 다시 재현되는 건가!"

"괜찮아요, 모두들! 지금 여기에는 A랭크 헌터님이 계세요!"

"오오! A랭크 헌터!"

"됐어! 됐다구! 이걸로 살 수 있어!"

"지혜야, 아빠가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마!"

주변에 헌터들이 너무 많다. 대략 150명 남짓?

[죽이자! 다 죽이면 되잖아!]

"…그럼 너무 일을 크게 벌인 게 되잖냐."

[올라올 때는 다 죽였으면서! 이 바보!]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큰일이라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화랑 길드 건이나 산림 구역에서 한번 본신으로 돌아간 일 때문에 헌터들이 좀 시끄러운 모양인데, 여기서까지 또 학살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처음 출발할 때의 계획은 조용히 복수만 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처음부터 그리 행동하던가! 이 바보─!]

"…상황이 그랬던 걸 어쩌란 거야."

잔소리를 빙자한 왼쪽이의 깐죽거림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나를 놀리는 재미로 사는 모양이다.

[그걸 이제 알았냐, 이 바보야?]

"…어쨌든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 A랭크 헌터도 있는 모양이니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지."

오른쪽이가 조금 아쉬워했으나 기본적으로 참을 땐 참는 녀석이라 더 보채지는 않았다.

[밖에서 맛있는 소고기… 한가득….]

"…그래, 알았다."

대충 오른쪽이와의 협상까지 끝내고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과연 앞서 소리친 누군가의 말처럼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느껴지는 기세가 분명 A랭크의 그것이다.

'제법 강한데…?'

앞으로 나서는 여성 헌터의 모습에 조용히 감탄했다.

그녀는 이전에 싸웠던 송명신이나 한지우 이상의 수준이었다.

'당장 기회만 있다면 S랭크도 문제가 아니겠어.'

얼굴에 웬 이상한 가면을 쓴 탓에 대략적인 나이는 판단하지 못하겠지만, 만약 아직 젊다면 SA랭크도 충분히 가능할지 몰랐다.

"공대장, 구역주 토벌은 처음이네요."

"첫 상대는 아무래도 산림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라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상층 구역의 구역주라니… 역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아무리 상층의 구역주라도 방심하지 마. 녀석은 엄연히 A랭크의 몬스터다."

A랭크의 여성 헌터 뒤로 그 동료로 보이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섰다.

A랭크 헌터까지 포함하면 총 네 명이었는데 다들 꽤 실력이 좋아 보인다.

"전원 A랭크에 가까운 B랭크라…."

착용하고 있는 장비의 수준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어쩌면 대형 길드 소속의 이들일지도 몰랐다.

뒤에서 다른 동료들이 무어라 말하건 말건, 선두에 선 여성 헌터는 담담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덩치에 비해 커 보이는 장검을 손에 똑바로 쥔 채 그녀는 담담히 미노타우로스와 마주했다.

가면을 쓴 그녀의 얼굴이 담담히 미노타우로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노타우로스가 잔뜩 콧김을 내뿜는다.

"…빠르게 해치우죠. 소고기 먹고 싶어졌어."

"그게 구역주를 앞에 두고 할 말이에요, 공대장?!"

"음머어어어─!!!"

분노한 미노타우로스의 울음소리를 끝으로 헌터들과 미노타우로스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헌터들과 미노타우로스의 싸움은 꽤 싱겁게 끝났다.

아무래도 상대 중에 동랭크의 헌터가 끼어 있던 탓도 크고, 그녀를 지원하던 다른 헌터들의 몸놀림도 나쁘지 않았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다.

아무리 랭크가 높아질수록 헌터들보다 몬스터들이 더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상층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로서 몇 년 전의 참사를 재현할 뻔했던 녀석은 그렇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허망하게 그 목숨을 잃었다.

아무리 헌터들이 없었으면 내가 쓰러트릴 녀석이었다고는 해도, 같은 몬스터 된 처지로서 조금 가엾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멈출 수는 없지. 더, 더 강해져야 한다. 아무도 덤빌 생각조차 못 하도록.'

SS랭크.

아니, 그 이상까지 진화해 보일 테다.

그렇게 미노타우로스와 헌터들의 싸움은 내가 새롭게 다시 다짐할 수 있던 좋은 기회가 되었다.미노타우로스를 쓰러트린 헌터들은 곧장 녀석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덩치가 덩치인 탓에 꽤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빨랐다.

특히 A랭크의 헌터가 굉장히 빠르다.

거의 혼자서 녀석을 다 해체한 수준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이들이나 캐리들의 수준은 넘어서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의 해체까지 모두 끝나자, 중간부터 안전한 것을 깨닫고 모여들었던 인원들도 곧 흩어졌다.

흩어지는 와중에 헌터들의 이야기를 한 탓에 그들에 대한 정보도 조금 알 수 있었다.

어느 길드에도 속하지 않은 무소속의 6인조로 구성된 공격대.

이번에는 둘이 없었지만, 평소에는 여섯이서 활동하는 이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나름 유명한 이들이었는데, 1년 전쯤 처음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특히나 공대장인 A랭크의 헌터는 항상 가면을 쓰고 나와 또 다른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는데.

그 가면 안에 힐러의 치료로도 고칠 수 없는 큰 화상을 입었네, 못생긴 걸 넘어서 흉측한 얼굴이네, 그 가면은 사실 저주받은 장비로서 한번 쓰면 벗을 수 없네 등의 무성한 소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소문 같은 것 외에 그녀들에 대해 얻은 정보는 전무.

다른 공대원들의 정보는 알음알음 퍼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공대장인 A랭크의 헌터는 이름도 나이도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한다.

말 그대로 신비로운 인물.

이런 그녀의 신비로운 분위기 탓에 엄한 소문들이 생겨나는 것도 있을 것 같다.

"조금 신경 쓰이는군."

어느새 동료들과 함께 이동하는 가면 쓴 여성 헌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헌터였다.

[설마 반했어? 첫눈에 반한 거야? 스노우한테 이른다?]

"헛소리. 내가 인간도 아니고 설마… 그것보다 스노우한테는 왜 이르는 건데? 그녀가 무슨 상관이야?"

[응? 그 말 그대로 스노우한테 전해도 돼? 전해도 되는 거지? 응? 그렇지?]

"…정신 사나우니 그만해. 우리도 슬슬 이동하자."

[아, 말 돌리네! 말 돌리는구나! 이 바보!]

깐죽거리는 왼쪽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못 들은 채 무시했다.

어디까지나 한 몸 안의 같은 '나'이다 보니 이 지긋지긋한 사념도 끊을 수가 없다.

음소거 기능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가면 헌터에 대한 찝찝함은 전혀 해결하지도 못한 채 상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제80화

미궁으로의 입장은 굉장히 엄격하고 까다롭지만 반대로 나가는 건 굉장히 쉽다.

입장과 달리 별다른 확인 절차나 검사 없이 마음껏 나갈 수 있는데, 지친 헌터들이 조금이라도 편하라는 의도가 있지만 지금 내 입장에서는 조금 어떨까 싶었다.

혹시나 나 같은 인간으로 의태한 몬스터라도 있다면 도대체 어쩌려는 것일까?

물론 별다른 검사가 없는 덕에 내가 수월하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말이다.

쭉 곧게 뻗어 있는 광활한 거리.

그 너머로 보이는 높이 솟은 빌딩.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 저녁의 풍경.

3년 만에 나오게 된 미궁의 밖은 무언가 울컥하는 게 있었다.

나 스스로도 잘 몰랐지만 어렴풋이 바깥을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감정에 휩쓸릴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담담히 게이트 앞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곧 미궁을 나오는 인파에 섞여 거리를 걸었다.

다행히 미궁 밖에서는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인지 평소라면 시끄럽게 '죽여─'하고 속삭였을 미궁의 의지가 들려오지 않았다.

이것으로 괜히 내 신경을 어지럽힐 목소리 하나가 줄었다.

내 복장은 기본적으로 검은색 계통의 한복 차림이다.

아무리 헌터들이 많이 활동하는 거리라도, 이런 차림으로서는 조금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이는 미리 미궁을 나서기 전 다른 의복으로 바꿔입었다.

마력으로 만든 옷이라 그리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었다.

차림은 인간일 적 입던 옷차림을 참고했다.

다만 여전히 전체적으로 어두운 검은색 계통인 것은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색만은 안 바뀌더라.

슬슬 저녁 시간에 돌입한 미궁 앞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막 미궁에서 빠져나와 하루를 술 한잔으로 마무리하려는 헌터들.

돈 잘 버는 헌터들을 꼬시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또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이들까지.

이곳도 마지막 기억 속과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런 인파 속에 가만히 휩쓸려 이동하다 어느 순간 조용히 몸을 뺐다.

내 목적은 이런 번화한 거리보다 뒷골목 같은 곳에 있었다.

각성한 사람이라고 모두 헌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각성한 이들을 통틀어 '헌터'라고 지칭하지만, 헌터의 정확한 의미는 미궁을 공략하고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이들이다.

제 성격 때문이든 개인 사정 때문이든 각성했음에도 헌터가 되지 않는 이들도 있는데, 이런 이들이 가만있으면 몰라도 개중에는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보통 무허가 헌터나,불법 헌터라고들 부른다.

일반인에 비해 몇 배는 더 강한 힘을 지닌 이들인 만큼 불법 헌터들이 저지르는 죄는 특히 그 죄질이 나쁜 경우가 많다.

간단한 소매치기부터 강도, 살인, 강간, 납치 등의 중범죄는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 만큼 각성한 헌터의 관리에 대해서는 국가와 헌터 협회가 특히 주의해서 관리하는 아무렴 엄격한 관리가 있다 하더라도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거리의 중심 번화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어느 외곽의 뒷골목.

사람들로 붐비던 번화가와 달리 이곳은 몹시 한가했다.

그렇지 않아도 으슥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에 사람마저 없으니 마치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번화가와는 여러모로 그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이 으슥한 뒷골목을 조용히 걸었다.

딱히 이곳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거나 갑자기 담력 훈련이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곳에 목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나도 어디까지나 캐리 시절 소문으로만 들었던 것이기에 이 뒷골목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저 이곳에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암상이 있으며 각종 불법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중개소 비슷한 것이 있다고만 들었다.

어찌 보면 믿을 수 없는 소문 하나만 의식하고 찾아온 것이지만, 직접 이곳에 도착하고 나니 소문이 마냥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이 뒷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몇 개의 시선이 나를 진득하게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상당한 수준이군… C가 여섯. B가 셋. 그리고 A가 둘.'

무엇보다 이 뒷골목 안쪽의 건물에 꽤 묵직한 기척 하나가 느껴지고 있었다.

미궁을 올라오는 도중에도 한 번도 보지 못한 S랭크 헌터의 기척이 말이다.

'과연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하더니. 3년 전만 해도 국내에 열다섯밖에 없던 S랭크 헌터가 직접 관리하고 있나 보군.'

으슥하기만 하고 꽤나 초라해 보이는 주변 외관과는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보다 S랭크 헌터라. 옛날에는 전혀 닿을 수조차.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못했던 상대인데… 지금은 과연 어떨까?'

직접 싸운다면 당연히 이쪽의 승리겠지만 자만은 하지 않는다.

S랭크의 헌터라면 수많은 몬스터들과 싸워오며 경험을 쌓아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

당장 힘의 차이는 이쪽이 더 강할지 몰라도 단순 경험만 보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대들이었다.

'괜히 헌터들의 정점이 아니니까.'

만약 제대로 싸울 수 있다면 꽤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잠시 후 나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3층짜리의 상가 건물이었는데 보이는 것은 주변의 건물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말이다.

"…어이, 거기! 여기는 무슨 용무요?"

문득 뒤편에서 말이 들려왔다.

흘깃 시선을 돌리면 건장한 체격의 사내 하나가 삐딱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부터 나를 지켜보던 시선 중 하나다.

랭크는 C.

"이런 곳까지 뭔 볼일이 있어 왔겠나? 당연히 이 안에 볼일이 있지."

흘깃 턱 끝으로 앞의 건물을 가리켰다.

나를 부른 사내가 슬쩍 눈살을 찌푸린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소, 형씨."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덤덤히 답하니 사내는 '으음'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블랙 마켓'에 볼일이 있어 왔다면 번지수가 틀렸어. 그 건물이 아니라 저 건물이야."

그리 말한 사내가 흘깃 저편의 건물 하나를 가리켰다.

슬쩍 확인해보니 건물 지하에 상당한 깊이와 넓이의 공간이 있었다.

게다가 꽤 많은 사람들까지.

'과연, 내가 찾던 곳은 저곳이었나?'

그래도 저쪽보다는 이쪽에 더 흥미가 있다.

"아무래도 이쪽이 맞는 거 같은데?"

"…그곳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다. 댁은 아무래도 손님인 거 같은데… 몸 성히 돌아가고 싶다면 얌전히 가르쳐 준 대로 가는 게 좋을 거야."

뿌득- 뿌드득-

부러 이리저리 몸을 풀며 위협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내의 모습에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뒤쪽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는 A랭크라도 우스운 판인데 고작 C랭크가 눈앞에서 이러니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내 태도에 사내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네놈, 뭐가 우습냐?"

"아아,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딱히 비웃으려는 의도는 없었는데. 단지… 그냥 조금 귀여워 보여서 말이야."

나름 이쪽의 의도가 오해되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전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사내를 자극한 모양이다.

어느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사내가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일반인으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네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군… 너무 걱정하지 마라, 깽값은 충분히 줄 테니."

"…흐음."

흘깃 사내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아까부터 이쪽을 지켜보는 또 다른 이들을 향해서.

그중에서도 제일 기세가 강한 쪽을 보았다.

"이래도 되나? 난 엄연히 손님인데 말이지."

"손님도 손님 나름이다. 이미 후회해봤자 늦었어."

자신에게 말한 거로 오해한 것일까?

사내가 히죽 웃으며 다가온다.

꼴을 보아하니 이런 적이 한두 번 있던 일은 아닌 모양이다.

"뭐, 저쪽도 딱히 나설 건 아닌 모양이니까. 이건 그냥 정당방위일 뿐이다. 괜히 나중에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 갑자기 뭔 헛소리…."

의아하게 중얼거리던 사내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쿵'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머리가 땅에 처박혀서야 더 말을 이을 수는 없을 것이다.

"끄아악─."

한 박자 늦게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사내의 머리를 발로 쾅- 쾅- 연달아 내리찍었다.

시선은 여전히 다른 녀석들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하면서.

'아차, 무심코 머리를 터트릴 뻔했군.'

섬세한 힘 조절이 필요하다. 여기는 미궁 안이 아니니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었다.

뭐, 번화가도 아니고 이런 외진 곳에서라면 딱히 그럴 필요까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미궁 밖으로 나온 첫날부터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습관이라도 들었다간 나중에 스스로를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만."

이미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한 사내의 머리를 딱 한 번 정도 더 밟아줄 생각으로 발을 들어 올렸을 때쯤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숨어 있던 녀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른 녀석들 전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다가 소란을 듣고서 다른 이들까지 몰려들었다.

느껴지는 기세는 제각각이지만 전원이 헌터다.

얌전히 발을 내려놓았다.

딱히 저쪽의 요구에 따른다기보다는 이 상태로 한 번 더 밟았다간 아무래도 곧 죽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저쪽이 계속해서 숨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저렇게 직접 나온 이상 굳이 이 녀석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꽤나 늦게 나오는군."

"…그쪽은 누구지?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체적으로 날카롭게 생긴 중년 사내였다.

왼쪽 뺨에 길게 자리한 흉터가 꽤나 인상적이다.

"이미 말했지만 이쪽은 엄연히 손님이다. 이곳에 볼일이 있어 왔다."

"…손님이라면 이쪽이 아니라 저쪽 건물이라 말해줬을 텐데."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이 안에 있어서 말이야."

태연히 그리 내뱉은 순간 차분하던 중년 사내의 기색이 돌변했다.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날카롭고 사납게 변했다.

"네 녀석. 사장님한테 무슨 용건이지?"

"흠. 이 안에 있는 게 사장인가? 딱히 사장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사장이 이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맞다면, 그한테 볼일이 있는 것도 맞다. 정확히는 흥미지만."

거짓 없이 밝힌 이쪽의 의도에 중년 사내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한 번에 이쪽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 못한 듯,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딱히 우리 사장님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 그쪽이 말하기 전까지 사장이란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흥미 있는 건 그냥 강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저 안에 있는 사장님의 기척을 느꼈다? 허…."

중년 사내는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어느새 조금 전까지의 적대적인 기세를 말끔히 지운 사내가 주변에 몰려든 다른 이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물러서라."

"하, 하지만 형님!"

"…걱정하던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냐. 적어도 이곳에서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사장님뿐이다."

"…그, 그런…!"

재차 부하들에게 거듭 물러가라 명령하는 중년 사내의 모습에 나지막이 감탄했다.

꽤나 눈치가 좋은 모양이다.

그는 정확히 이쪽과 자신들의 차이를 깨닫고 있었다.

아니면 꽤 감이 좋거나.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슬슬 평소처럼 다 죽이자고 말하는 왼쪽이의 사념에 짜증이 확 솟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쪽 이름은?"

"…나연성이다."

나연성. 일단 확실히 기억해둔다.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랭크가 높아 정신 지배는 무리겠지만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가지. 사장님에게 안내해 주겠다."

"그쪽 사장에게 허락은 안 받아도 되나? 일단 나름 불청객 취급 같은데."

"그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나…? 뭐, 네 녀석이 말린다고 해서 들어먹지는 않을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사장님의 허락이라면 이미 받았으니까."

"…이미 받았다? 그런 낌새는 못 느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부터가 이미 허락한 거다."

그리 말한 나연성은 더 말을 잇지 않고 나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히 위층이 아닌 지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건물 아래.

그 사장이라는 S랭크의 헌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꽤 삼엄해 보이는 보안 절차가 있는 것 같았지만 나연성과 함께니 별 어려움 없이 지날 수 있었다.

만약 내 자력으로 강행 돌파라도 하려 했다면 꽤 힘들 뻔했다.

단순히 지하나 건물 전체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 보안을 뚫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꽤 긴 길을 지나 마침내 사장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꽤 두꺼워 보이는 철문 앞에서 나연성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문 앞에 사장님이 있으니 들어가도록."

"그쪽은 같이 안 가는 건가?"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그쪽 사장이랑 내가 단둘이 있게 되는데 괜찮은 건가?"

"…나 정도의 전력이 함께한다 해서 크게 바뀔 것은 없을 게 분명하니… 그래도 경고하지. 사장님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라."

"만약 그랬다간?"

"평생… 평생 동안 네놈을 저주하마."

단단히 힘주어 말하는 나연성의 모습에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저주인가?"

"나로서는 네놈을 저주하는 게 고작일 테니까."

"…현실적이군."

나연성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들어가라는 듯 철문을 향해 눈짓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연성과 더 떠들지 않고서 곧장 철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제81화

[스킬 <불굴SA>가 발동됩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알림이 들려왔다.

흘깃 눈살을 찌푸리자 무언가 묘한 냄새가 코를 간질었다.

'이건…?'

일종의 미약? 미향이라 해야 할까?

온몸이 후끈후끈하는 게 마치 발정제라도 맞은 기분이다.

이런 향도 일종의 독으로 분류되기 때문일까, 내성 덕분에 조금 기분 나쁜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기분 나빠! 기분 나쁜 냄새야! 부수자! 다 죽이자!]

특히나 왼쪽이의 반응이 격렬하다.

원래도 이런 녀석이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배는 더 화가 난 거 같은 느낌이다.

'일부러 준비한 건가?'

너무 순순히 안내해준다 싶더라니 나름대로 대비를 한 모양이다.

'흠. 경고가 조금 부족했던 걸까?'

용건만 끝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이 기회에 확실히 알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런 장난을 계속하다간 정말 큰일 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줄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철문 안은 평범한 집무실이었다.

천장에 닿을 것같이 높이 쌓여 있는 서류들과 책상 한쪽에 앉아 있는 여성 하나.

사각사각-

누군가 들어왔음에도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여성은 제 앞의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런 여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제야 여성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안색은 나쁘지 않으시네요."

"이 방의 향은 일부러 해놓은 건가?"

"고의는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체질 같은 거라 조절이 안 되거든요. 그나마 지금이 조금 희석된 수준이죠."

"스킬인가?"

여성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막 작업이 끝난 서류 하나를 한쪽에 올려놓으며 그녀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안경 안에 가려져 있던 이지적으로 보이는 외모가 밖으로 드러났다.

"반가워요. 블랙 마켓의 사장을 맡고 있는 '리사'라고 해요."

"'리사'? 한국인이 아닌가?"

"당연히 한국인이죠. '리사'는 가명이랄까?"

"가명이란 걸 말해줘도 상관없는 건가?"

"조금만 생각해도 가명인 건 다 알 텐데요, 뭘. 그냥 제 본명을 알려주지 않는 것만으로 족해요."

그리 말한 리사(가명)은 자연스레 책상 서랍을 뒤적여 시가 한 대를 꺼내었다.

그리고 시가를 입에 물며 능숙하게 불을 붙인다.

"그래서 그쪽은요?"

"닉스다."

"그쪽도 대놓고 가명 같네요, 뭘."

이쪽은 분명 솔직하게 말해준 것이지만 리사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딱히 그런 오해를 풀어줄 이유는 없었기에 나도 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여전히 제 책상 앞에 앉은 채 리사가 집무실 한쪽의 소파를 가리켰다.

"실례하지."

"차라도 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제가 차를 잘 못 끓여서요."

"그러면 보통 부하들을 시키지 않나?"

"제 부하들도 차를 참 더럽게 못 끓여요. 여기까지 데려다준 아저씨 봤죠? 차 잘 끓이게 생겼어요?"

나연성의 외모를 떠올리고서 조용히 그녀의 말에 납득했다.

어찌 봐도 차를 잘 끓일 거 같은 외모는 아니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이는 내 모습에 리사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는 '후' 연기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목적은요? 저한테 용건이 있다면서요. 정확히는 제일 강한 사람이랬나? 뭐, 여기서 제일 강한 건 제가 맞으니 상관은 없죠."

"S랭크인가?"

"비공식이기는 하지만요. 협회에는 대충 B 정도로 등록돼 있어요."

리사는 순순히 제가 S랭크 헌터인 것을 인정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현재 협회에는 B랭크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 주었는데, 그 모습이 꽤 의외다 싶어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꽤 순순히 말해주는군."

"그쪽한테 밉보이고 싶지 않거든요… SA?"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다.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던 듯 리사가 '와우'하고 담담히 탄성을 내뱉었다.

"우리나라에 그쪽 같은 사람이 있다고는 지금껏 전혀 못 들었는데… 그쪽도 비공식이에요?"

"그런 셈이지."

"…정확히는 아니라 이 뜻이죠? 최근에 SA가 되었나? 아니면 외국에서 활동하던 헌터?"

'흐음' 내 정체를 추리하듯 잠시간 이쪽을 살피던 리사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소란스러운데 굳이 다른 곳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앞서 말한 용건이나 말해줄래요?"

"첫 번째는 일단 그쪽한테 흥미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흥미는 어떻게 됐나요? 조금 만족하셨어요?"

"다른 S랭크들은 다 너 같은 수준인가?"

"흐음… S랭크 헌터들에 대해 잘 모른다… 정말 최근에 SA가 됐거나 외국에서 활동하다 오셨나? 아니, 괜한 곳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 참."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리사가 이내 말을 잇는다.

"지금 국내의 S랭크 헌터는 총 21명이에요. 저까지 포함하면 22명이려나… 어쨌든 S랭크는 지난 3년 사이 일곱 명이나 늘었죠. SA랭크도 셋에서 다섯섯까지 늘었고요. 당신까지 포함하면 이쪽은 여섯 명이네요."

"많이 늘었군."

"뭐, 성재명 헌터의 실종 이후 대한민국 헌터계의 두 번째 전성기다 뭐다 말이 많아요.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SS랭크도 생기지 않겠냐 하는 추측이 많죠."

거기까지 말한 리사가 재차 후- 연기를 내뱉었다.

"저는 사실 이 이야기에 부정적이었는데… 당신을 보니 좆문가들 수준도 꽤 괜찮네요. 정말 조만간 SS랭크가 나타나겠어."

"무슨 뜻이지?"

"당신이라면 SS랭크에 한없이 가까운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미국의 SS랭크 헌터 가르시아를 본 적 있거든요. 그 사람이랑 당신이랑 꽤 닮아서요. 물론 당장 기운 자체는 가르시아 쪽이 압도적이기는 한데…."

-뭐, 분위기 자체는 당신 쪽이 더 무섭지만요.

그리 말하며 나른하게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리사의 모습에 조금 더 흥미가 동했다.

과연 국내 최고의 블랙 마켓을 운영하는 사장이란 것일까.

대충 보아온 모습만 봐도 유능할 거 같은 느낌이다.

'나중에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당장 정신 지배는 통하지 않을 거 같아도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연성과 함께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먹이를 노리는 뱀 같은 눈빛으로 보지 말아줄래요? 아무리 제가 맛있게 생겼어도 아직 잡아먹히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덤덤히 들려온 목소리에 무심코 이어가던 상념을 멈추었다.

이쪽을 조금 질린 기색으로 바라보는 리사에게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나 찍힌 건가? 그것도 장래의 SS랭크 헌터님에게 찍힌 거예요? 부디 나쁜 쪽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두 번째 용건이다만."

"확답을 주지 않는 걸 보니 기분이 조금 묘하네요… 뭐, 그래서 그 두 번째 용건이란 건요?"

"장비류를 처분하고 싶다."

"장비류요? 흐음?"

리사가 슬쩍 이쪽을 살폈다.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주억였다.

"그쪽이 처분하려는 장비가 뭔지는 몰라도 이런 뒤쪽에서 처분하려는 걸 보니… 그리 떳떳하지는 못한 물건인가 보네요. 아니면 정식 루트로 처분하기에는 당신이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거나… 으음… 이건 꽤 궁금한데… 아니, 아니. 괜한 데 관심 가지면 안 돼."

추리하듯 홀로 중얼거린 리사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한번 보여주시겠어요? 어느 장비를 처분할 생각이죠?"

"으음…."

잠시 집무실 내부를 살폈다.

그리 작은 곳은 아니었지만 장비의 수량이 수량이다 보니 다 꺼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잠시간 살피던 리사가 '아아'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꽤 많나 보네요. 어디 공격대라도 습격하셨나?"

"제법 눈치가 빠르군."

"…젠장. 진짜였나요? 농담이 아니고? 이거 점점 더 당신이 궁금해지는데… 너무 위험한 냄새가 난단 말이죠. 으음… 안 돼. 안 되지. 참자, 참아."

또다시 갈등하듯 고개를 저어 보인 리사가 곧 말을 이었다.

"그럼 일단 대충 제일 값어치 있는 거만 보여 주시겠어요?"

곧장 허리춤의 아이템 가방을 뒤적였다.

캐리였을 적 사용하던 그 근처의 것하고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고급품이었다.

당연히 이것도 송명신 헌터에게서 받아왔다.

내가 꺼낸 것은 당연하게도 송명신 헌터가 사용하던 검이다.

푸른색의 손잡이에 새하얀 칼날이 유독 아름다운 검.

단순한 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운 자태.

이름은 모르지만 특히나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물건이었다.

내가 쓰던 나중에 스노우한테 선물로 주던 딱히 처분할 생각은 없었지만, 가장 값어치 있어 보이는 물건이니만큼 이걸 꺼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꺼낸 검을 확인한 리사의 얼굴이 흠칫 굳어진다.

"이건… '청송검'…?"

"흠? 아는 물건인가?"

"당신이 이걸 어떻게…? 이거 어디서 났어요?"

"미궁에서 주웠다만."

"…오, 젠장…."

시종일관 차분한 모습을 보이던 리사가 조금 흥분한 듯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피고 있던 시가를 거칠게 재떨이 위에 비벼 끄며 이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대화를 시작하고 난 이후 처음으로 책상 앞에서 움직인 것이다.

"이거 화랑 길드의 부길드장이 쓰던 검이에요."

"그렇군."

"…최근 화랑 길드가 여러모로 소란스러운 건 알아요?"

"전혀 모른다만."

"협회는 물론이고 헌터계 전체가 난리라고요. 요즘같이 미궁 탐사가 완전히 정형화된 시대에, 상위 헌터로 구성된 공격대가 전멸하는 일은 상당히 드문 일인데. 이번 화랑 길드가 그랬어요. 한번은 어디까지나 2군 전력이라 그럴 수 있다 쳐도, 두 번째는…."

중얼중얼 말을 잇던 리사가 문득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혹시나 싶은 얼굴로 물었다.

"…첫 번째 사건도 혹시 당신이 한 일인가요?"

"글쎄."

"…오 마이 갓. 이 위험한 남자… 그래서 더 매력 있네."

아까보다 조금 더 흥분한 것 같은 리사는 어느새 내 앞에 몸을 앉혔다.

그녀가 급히 손을 내민다.

"아이템 가방 하나 더 있죠? 잠시 이리 줘봐요. 허튼짓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그리 말하는 리사의 모습에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아이템 가방 중 하나를 적당히 내밀었다.

"오 마이 갓, 오 마이 갓."

가방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리사가 탄식과도 같은 탄성을 터트렸다.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지면 화랑은 물론이고 헌터 협회도 당장 움직이겠네요. 헌터계 전체에 큰 지각 변동이 생기겠어요."

"그렇군."

"…당신. 지금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는 그러는 거예요? 화랑의 길드장이 지금 얼마나 빡 돌아 있는데…."

나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사가 '하─'하고 탄식을 터트렸다.

"당신… 당신은 무슨 일이 생길지 다 알고 있는 거야… 이것도 일부러 나한테 보여준 거고… 오히려 무슨 사건이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거네."

"굳이 일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그렇다고 굳이 두려워서 피할 생각도 없거든."

태연하게 내뱉은 말에 리사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데인져러스한 남자를 봤나… 오히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만… 저기, 당신 혹시 애인 있어요? 없다면 나는 어때요?"

슬며시 미소를 짓는 리사의 모습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딱히 그녀의 외모에 끌렸다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스노우의 얼굴이 떠오른 까닭이다.

잠시 멈칫했던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쪽으로는 관심 없다."

"…흐음. 네, 뭐. 일단은 알았어요. 그래도 맘 바뀌면 언제든 말해줘요. 난 원나잇도 괜찮으니까."

"...."

[저 여자 미쳤나 봐! 바보야! 죽이자! 찢어 죽이자!]

'유용한 상대야.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스노우한테 이를 거야! 이를 거라고 이 바보─!]

곧장 깐죽거리기 시작한 왼쪽이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차례 고개를 저은 다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것들 처분할 수 있나?"

"…당연히 가능하죠. 이래 봬도 국내 최대 규모의 블랙 마켓이랍니다. 단순히 국내에서만 아니고 해외 루트를 통해 팔아도 돼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렇다면 청송검만 빼고 다 팔아주면 좋겠군."

"그게 제일 비싼 건데…."

조용히 중얼거리는 리사에게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다른 아이템 가방들도 던져주었다.

그녀의 입이 꾹 닫혔다.

"다 팔면 얼마 정도 되겠나."

"…안에 내용물에 따라 다른데… 화랑 길드가 쓰던 물건들인 만큼 꽤 값이 나갈 거예요. 대충 요정도."

리사가 조용히 손가락 몇 개를 들어 올렸다.

"억?"

"에이. 많이 쓰셔도 돼요."

"십억?"

"백억 단위인데."

"…많군."

인간일 적 전혀 만져보지 못했을 거금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모습에 리사가 피식 웃는다.

이곳에 와서 처음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럼 이제 세 번째 용건이다."

"솔직히 이제는 무서울 지경인데… 과연 세 번째 용건은 뭘까요? 이번에는 어떤 또 짜릿한 소식을…."

"김준수, 신재준, 이하나. 세 헌터의 행방을 알고 싶다."

제 말을 도중에 끊고 내뱉은 내 모습에 리사가 잠시 '으음….'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다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 들었던 소식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요. 참, 괜히 긴장했어."

"세 사람에 대한 정보는 구할 수 있나?"

"저희가 평소에 주로 하던 것들이니까 문제는 없어요. 상황에 따라서는 깔끔히 청부 살인까지 가능한데… 어떠세요?"

"아니, 내가 직접 해결할 생각이다."

리사가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었다.

"저 세 사람, 누군지 몰라도 참 불쌍하네요. 하필 SA랭크한테 찍히다니… 그것도 요즘 화제가 된 화랑 사건의 범인인 남자한테…."

"잡설이 길군. 그래서 세 사람에 대해 알아내는 데 얼마나 걸리지?"

"으음… 상대에 따라서 좀 달라요. 기존에 제공된 정보가 좀 있다면 수월하겠는데…."

"세 사람 다 3년 전 기준으로 E랭크 헌터였다. 당시에 D랭크의 박광열 헌터와 함께 행동했었지."

"그 정도만 있으면 금방이에요."

그리 말한 리사가 재차 시가를 꺼내 피웠다.

"원하는 정보는 어느 정도죠? 나이, 학력, 가족, 연인의 유무, 현재 몸무게, 키. 다양하게 구할 수 있는데."

"별 볼 일 없는 개인 정보는 필요 없다. 그냥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 최소 이틀에서 최대 사흘 정도 걸릴 것 같네요. 정보를 구하고 그 정보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그 정도는 필요해요."

"그렇군. 알겠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리사가 흘깃 나를 바라본다.

"연락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찾아가 드릴 수도… 아뇨, 생각해 보니 이쪽에서 그쪽을 찾는 건 무리일 거 같네요. 따로 계신 곳을 알려 주신다면 찾아가 드릴게요."

"됐다. 사흘 후에 직접 받으러 오지. 대금은 아이템을 처분한 다음 알아서 빼가도록."

"수수료는 어느 정도 떼가는 거 아시죠?"

"바가지만 씌우지 않으면 상관없다."

거기까지 말한 다음 곧 몸을 돌렸다.

뒤편에서 리사가 잘 가라 배웅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나갈 때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연성의 안내를 받아 건물을 빠져나왔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

잠시 멈춰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복수의 때가 훌쩍 다가왔다.

제82화

장장 3년 만에 바로 눈앞까지 훌쩍 다가온 복수에 조금 흥분했다.

심정 같아서는 당장 날뛰고 싶을 정도였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미궁 밖.

날뛰고 싶어도 날뛸 수가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다시 미궁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나갈 때는 몰라도 입장할 때는 엄격한 심사가 있는 만큼 다른 신분이 없는 지금의 나는 미궁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바보─ 정신 지배는 폼이야?]

'전산 시스템은 어떻게 처리할 건데?'

[....]

'바보는 너였군.'

피식- 웃음을 내뱉자 심상 속에서 왼쪽이가 거칠게 포효했다.

만약 본신이었다면 진작에 목을 물어뜯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왼쪽이에게 한 방 먹이고서 조금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오랜만에 바깥의 문물을 조금 경험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나 배고프다… 밥….]

이 기회에 오른쪽이가 원하던 소고기도 먹여 줘야겠다.

무한리필집을 찾아봐야지.

* * *

문제가 생겼다.

돈이 없다.

급하게 다시 블랙 마켓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내 모습에 나연성이 '뜨억'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 용건을 듣고 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중에 처분할 장비의 대금에서 일부를 받았다.

현찰로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 카드를 주더라.

급하게 준비한다고 5억 정도밖에 들어 있지 않다며 내게 사과하는데… 정작 나로서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일 적이었다면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을 거금이 손에 들어왔다.

아무리 몬스터가 되어 대범해진 나라도 정말 '억' 소리가 나는 거금 앞에 조금 겸손해진 느낌이다.

이후 당당히 번화가로 돌아갔다.

늦은 새벽이었음에도 이곳의 번화가는 한낮처럼 밝았다.

헌터들을 위한 각종 유흥 시설이 즐비한 곳이다.

헌터뿐만 아니라 다른 젊은이들도 모이는 곳이라 그런지 활기가 가득하다.

오랜만에 느껴본 활발한 분위기에 나까지 덩달아 들뜨는 느낌이다.

왼쪽이가 시끄럽다며 평소처럼 '다 죽이자─'를 시전했다.

미궁이었다면 미궁의 의지와 함께 쌍으로 난리였을 텐데 다행히 미궁 밖이라 평소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음소거가 땡기는 건 당연했지만.

오른쪽이의 요망대로 고기를 먹으러 이동했다.

다 쓰지도 못할 거 같은 많은 돈이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일 적의 감각 탓일까? 24시간 소고기 무한리필집에 들어갔다.

다행히 오른쪽이는 일단 배만 차면 된다는 듯 별말 하지 않았다.

왼쪽이가 돈도 많은 김에 레스토랑이나 가자고 캬악-거렸지만 늘 그렇듯 적당히 무시했다.

정말 본신이 아니라 다행이다.

적어도 목을 물릴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맛보게 된 바깥 세계의 조미료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함께 시킨 콜라나 맥주에 그만 탄성을 내뱉었다.

어찌 3년 동안 이걸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었을까?

나중에 꼭 설이와 스노우에게 먹여주고 싶다.

아, 토순이도 당연히 함께.

고기를 시켰다.

고기를 시켰다.

고기를 시켰다.

고기를….

사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

돈은 안 받아도 되니까 제발 이만 가달란다.

확실히 많이 먹기는 했다.

옆으로 한가득 쌓아놓은 빈 접시들을 보며 탄식을 내뱉는 손님들도 있을 정도니까.

아무리 무한 리필이라도 이 정도면 민폐다.

오른쪽이가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가게를 나섰다.

사장 아저씨는 돈은 필요 없다 했지만 굳이 계산하고 밖으로 나섰다.

솔직히 돈을 안 내기에는 너무 양심이 찔렸다.

뱀에게 양심은 없지만 지금은 인간이니 세이프일 것이다.

좋아, 다른 가게로 가보자.

무한리필집은 좀 그러니 그냥 고기집으로 가자.

그곳이라면 눈치는 안 보일 테니까.

그리고 새로 들어간 고기집 사장 아주머니로부터 고기가 다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100인분 다 못 찍었는데….

나는 물론이고 오른쪽이가 굉장히 아쉬워했다.

사장 아주머니는 아주 역대급 기록이라며 사진이라도 한번 찍지 않겠냐고 물었다.

정중히 거절했다.

이런 느낌으로 번화가의 각종 음식점을 탐방했다.

가는 곳마다 가게들을 조기 마감시키며 한동안 미궁 번화가 폭식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둘째 날부터는 음식점 말고 다른 곳에도 가보았다.

클럽, 노래방, 피시방, 게임센터, 유흥주점 등등 갈 수 있는 곳은 다 가보았지만 딱히 흥미가 가는 곳은 없었다.

아직 즐기지 못한 것이 더 많았지만 아무래도 제일은 역시 음식점 탐방인 것 같았다.

오른쪽이와 합심해 여러 음식점들을 털었다.

그리고 그렇게 매일 흥청망청 돈을 쓰는 나날을 보내며 마침내 사흘이 흘렀다.

다시 블랙 마켓을 방문했다.

저번과 달리 한낮에 블랙 마켓이 있는 뒷골목을 방문했다.

으슥하고 위험한 분위기의 이전과 달리 한낮의 뒷골목은 꽤 한가로운 분위기였다.

물론 들어서자마자 감시하기 시작한 눈길은 지난번과 마찬가지였지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들어가시죠."

그래도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손님이라는 느낌으로 얼마 가지 않아 마중이 나왔다.

나연성이 아닌 다른 A랭크의 헌터였다.

안내인을 따라 이번에도 건물의 지하를 향했다.

마찬가지로 삼엄해 보이는 보안 절차를 지나 리사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들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였다.

두 번째로 방문한 리사의 집무실은 여전히 묘한 향이 가득 퍼져 있었다.

[스킬 <불굴SA>가 발동됩니다.]

알림이 울린다.

"어서 오세요. 사흘 만이네요."

지난번과 달리 리사는 책상 앞이 아닌 응접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잘 못 끓인다던 차까지 두 잔 끓여놓은 채로 말이다.

자연스레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차 못 끓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동안 배웠어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리사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슬쩍 찻잔을 들어 맛을 보니 도저히 사흘 동안 배워서 익힌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솜씨였다.

흘깃 리사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래서 정보는?"

"어머, 바로 용건인가요? 모처럼인데 차 맛은 어떠신지?"

"...."

[이 여자 마음에 안 들어! 죽이자─! 죽이자고─!]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내 모습에 리사가 손사래를 친다.

"알았어요, 알았어. 장난은 이쯤 하죠."

"…차는 맛있었다."

"어머, 고마워요."

생긋 웃은 리사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보시면서 들으세요."

눈 깜짝할 새 장난기를 지운 그녀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선 만만한 쪽부터 말하도록 하죠."

"만만한 쪽?"

"랭크가 낮고 처리하기 쉽다는 뜻이에요. 아, 이 처리의 기준은 저희들 기준이에요. 당신 수준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쉽게 처리할 수 있겠죠. 어쨌든 그래서…."

리사의 말에 맞춰 첫 장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였다.

지금껏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그 얼굴.

"김준수. 나이는 스물넷. 현재 랭크 E. 당신이 말해줬던 3년 전과 비교해 전혀 발전이 없어요. 사실상 헌터로서는 끝인 셈이죠."

"…그렇군."

"그래도 나름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라 공격대에는 곧잘 들어가는 모양이에요. 다만 어디까지나 임시 공격대고, 그 성격 탓에 얼마 못 가는 상황이죠."

"...."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서류를 훑었다.

최근 3년간 김준수가 보낸 세월이 모두 이곳에 적혀 있었다.

"3년 전 공대장과 함께 일하던 캐리가 미궁에서 돌연 실종. 그 사건의 충격 때문인지 매일매일 술만 마시면서 지냈어요. 그리고 술을 끊지 못해 지금은 거의 알콜 중독 수준이죠. 헌터라 그런 병에 걸릴 리는 없지만요."

"…나름 힘들게 보냈다 이건가?"

"네. 나름 고생고생하면서 보냈더라고요. 당신이 부탁한 셋 중에서 가장 처량한 인생이에요."

잠시 물끄러미 서류를 바라보았다. 서류에 적힌 김준수의 삶은 과히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볼품없는 E랭크의 헌터.

나름대로 경험은 많지만 3년 전 이후 급격히 예민해진 성격 탓에 어찌어찌 들어간 임시 공격대에서도 쫓겨나기 일쑤.

그야말로 하루 일해 하루 먹고사는, 내일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다음은?"

"흐음… 다음은 신재준이에요."

흘깃 내 눈치를 살핀 리사가 재차 말을 이었다.

"나이는 스물넷. 랭크는 B. 3년 전에 비해 나름 성장했다고 할 수 있어요. 헌터 기준으로 보면 딱 평균 정도의 성장을 이뤘다고 할 수 있죠. 정확히는 조금 더 나은 정도인데… 음, 사실 이쪽은 평소 행실이 그다지 좋지 않아요."

"어떤 일을 하길래?"

"협회에 정식 등록된 헌터지만 좀 뒤가 구린 짓을 많이 한달까요? 반쯤은 이쪽에 발을 걸치고 있죠."

"불법 헌터들이 하는 짓을 한다는 건가?"

"3년 전 당시에는 김재준과 나름 같이 지냈던 모양인데… 이후 둘 사이에 뭔가 있었는지 따로 행동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쁜 짓에 손을 댄 거 같은데… 음, 불법 각성 브로커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손 안 대는 게 없나 봐요."

"…그렇군."

짧게 혀를 찼다.

불법 각성 브로커란, 미궁에 들어가면 각성할 수 있다는 소문을 이용해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들을 데리고 미궁을 들어가는 이들을 말한다.

내가 캐리로 일하던 3년 전에도 흔하게 있던 것이다.

"미성년자 브로커는 물론이고, 사냥 중인 헌터들에게 몬스터를 일부로 유도하거나 직접 다른 헌터들을 습격한 정황도 있어요."

"악질이군."

"네, 악질 중의 악질이죠. 저희도 뭐 깨끗한 일을 하는 건 아닌데 이 녀석은 선을 넘었어요."

담담히 고개를 주억이며 서류를 훑었다.

그곳에는 그간 신재준이 해온 각종 악질적인 범죄가 가득 적혀 있었다.

개중에는 아무리 몬스터인 나라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한 일도 여럿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이하나는?"

"…그녀는 조금 특별한데… 으음, 이쪽은 아무리 당신이라도 조금 곤란하다 싶달까요?"

리사가 여유롭게 설명하던 앞서와 달리 이번에는 조금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곤란한 듯 신음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슬쩍 서류를 살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명하는 리사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이하나. 현재 랭크 S."

"…놀랍군. 정말 동일 인물인가?"

"네, 당신이 말했던 3년 전의 그녀가 맞아요. 저도 처음 듣고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설마 그녀일 줄이야."

한숨처럼 내뱉은 그녀가 설명을 잇는다.

"3년 전 사건 이후 그녀는 국내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어요. 그곳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해 프랑스 최고 길드인 '라비앙로즈'에 가입했죠."

"…SS랭크가 있는 바로 그 '라비앙로즈'인가?"

"네, 바로 그 라비앙로즈에요. 전 세계에서도 단 넷밖에 없는 SS랭크 헌터가 길드장으로 있는 바로 그 라비앙로즈요!"

그리 말하는 리사가 잠시간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덤덤히 받으며 서류를 확인했다.

3년간 이하나가 프랑스에서 보낸 행적들이 보였다.

"…이쪽은 역시 당신이라도 좀 무리 아닐까요?"

"상관없으니 계속해서 설명해."

리사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라비앙로즈에서 활동을 개시한 그녀는 장장 3년 만에 국내로 복귀했어요. 그리고 국내로 돌아온 그녀의 랭크는 무려 S. 대한민국의 스무 번째 S랭크 헌터가 된 거죠."

"복귀한 이유는?"

"형식적으로는 국내 헌터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라지만, 실상은 다르죠. 그녀가 복귀할 때 라비앙로즈에서는 탈퇴한 상태지만 실은 탈퇴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들의 후원을 받고 있죠."

"라비앙로즈의 하부 길드라도 차리려고 하는 건가?"

내 물음에 리사가 곧바로 긍정했다.

"바로 그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그녀가 근래 들어 새로운 길드를 창설했는데, 그게 바로 대한민국에 설치된 라비앙로즈의 전진 기지 같은 느낌이죠."

"해외 유학을 갔더니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 셈이군."

"맞아요. 완전 매국노가 따로 없죠."

거기까지 말한 리사가 조용히 시가를 피웠다.

한 차례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이내 '후'하고 연기를 내뱉었다.

"앞서 두 사람은 별문제 없겠지만 솔직히 이하나는 무리예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요."

"그녀를 건드리면 라비앙로즈도 움직이겠지."

"네, 좋은 명분이 생긴 셈이죠. 라비앙로즈에 소속된 SA랭크 헌터들이 국내로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 거고, 최악에는 SS랭크인 길드장까지 올지 몰라요. 현재 최고 랭크가 SA밖에 없는 대한민국 입장에서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거죠."

리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서류를 보았다.

3년 전과 달리 성장한 이하나의 사진이 보였다.

잠시간 톡톡- 서류를 건드렸다.

그런 내 모습에 리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마… 당신… 아니죠?"

"SS랭크라… 재밌는 경험이 되겠군."

"아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국내가 난장판이 될 거예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리사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이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솔직히 당신이란 큰 상관은 없죠… 하지만 그래도 SS라고요! 당신이 아무리 SS랭크에 가까워도…!"

"그건 말하지 않아도 이쪽이 더 잘 알고 있다. 진짜 SS랭크가 얼마나 강한지 정도는."

"그걸 아는 사람이…!"

와락- 소리치는 리사의 모습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내 마음은 굳건했다.

3년 전부터.

이제 와서 그 배후에 누가 있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정보들 고맙다. 대금은 알아서 가져갔겠지?"

"…수수료는 알뜰히 받아 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전에도 말했지만 바가지만 아니면 상관없다."

"…당신 상대로 바가지 씌울 생각은 없네요. 저희 블랙 마켓의 기본 이념이 바로 믿음과 신뢰라고요."

"…정말 어울리지 않는군."

리사가 가볍게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인가요?"

"우선 하나씩 찾아갈 생각이다. 그래, 그쪽이 분류한 만만한 녀석부터 찾아가는 게 좋겠지."

"…따로 도움이 필요한 건요?"

"거기까지 서비스해 주는 건가?"

슬쩍 물어본 물음에 리사가 피식 웃었다.

"어머, 돈은 다 받을 거랍니다."

"…그렇다면 필요 없다."

"어머어머, 돈도 많으신 분이 쪼잔하시네요. 얼마 빼가도 티도 안 날 거 같은데."

"…설마 그런 생각으로 내 돈을 빼갈 건 아니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그쪽한테 그럴 정도로 용기가 많은 건 아니라…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싸게 도와드릴게요."

"그러지."

짧게 고개를 주억인 나는 곧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를 향해 리사가 조용히 말한다.

"화랑 길드 아이템 처분 건으로 조금 시끄러울 수도 있어요."

"흠?"

"아무리 우리가 조심한다 하더라도 덜미가 잡힐 수 있다는 말이에요. 열심히 숨길 계획이라 저희나 그쪽 정체가 들키는 일은 없겠지만…."

슬쩍 말끝을 흐린 그녀가 이내 덤덤히 덧붙인다.

"그쪽은 오히려 상대가 눈치챘으면 하고 바라고 있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들켜도 상관없기는 하지."

"…이제 보니 위험한 것뿐만 아니라 미치기까지 했네요… 너무 매력 있어."

조용히 중얼거린 그녀가 이어 말했다.

"역시 나랑 안 사귈래요? 그냥 파트너 관계라도 좋을 거 같은데."

"…사양하지."

한차례 고개를 저은 나는 급히 리사의 집무실을 나섰다.

뒤에서 '귀엽기도 하네'하고 중얼거리는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었다….

[미친년! 미친년이야─! 죽이자! 죽여버려─!]

왼쪽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한동안 머릿속을 시끄럽게 울렸다.

제83화

김준수는 처량한 인생을 살고 있다.

최고 고수익 직종에 뽑히는 헌터로 종사하고 있음에도 삶의 질이 그리 좋지 않았는데,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하류 인생이었다.

그마저도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공격대에는 가입하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가입한 곳도 그 더러운 성격 탓에 머지않아 잘리기 일쑤다.

적어도 랭크라도 높았다면 좀 더 안정적인 수익을 벌 수 있었겠지만 김준수의 랭크는 고작 E.

3년 전 그날로부터 아무런 발전도 없었다.

그래, 김준수가 이리된 것은 모두 3년 전 그날부터였다.

서울 대미궁 앞 번화가 거리의 어느 외진 골목.

오늘도 어김없이 김준수가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된 공격대에 가입하지 못한 그로서는 주로 상층 구역에서만 활동했는데, 그래도 고수익 직종에 뽑히는 헌터답게 하루에 못해도 100만 원 상당의 돈은 매일 만지고 있었다.

이리 번 돈을 매일매일 다 쓰고 있어서 문제지만 말이다.

"끄윽… X발… 아주 그냥 살판났네, 살판났어… 뭐가 그리 신나는 거야? 기분 나쁘게…."

주점마다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김준수가 얼굴을 구겼다.

분명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다.

저만 홀로 동떨어진 거 같았다.

"X발… 개같네 진짜… 그 덜떨어진 공대장 자식… 실력은 쥐뿔도 없는 게… 감히 날 짤라?"

딸꾹-

딸꾹질을 내뱉으며 김준수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흘깃 그런 그의 모습을 확인한 행인들이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김준수가 재차 욕지기를 내뱉었다.

괜한 자격지심이 차오른 까닭이다.

"빌어먹을 세상…! 진짜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거다. 내가 성공만 하면… 그래, 상위 헌터만 되면 다 내 발밑에서 살살 기게 해주마. 날 짜른 공대장 너 이시끼부터… 딸꾹-."

김준수는 그리 중얼거리며 히죽히죽 웃었다.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사람의 그것이다.

슬금슬금 그를 피해 걷는 행인들의 모습에도 김준수는 안하무인이다.

그리고 그런 김준수 앞을 누군가 조용히 가로막았다.

퍽-

제 앞을 가로막은 사람을 미처 피하지 못한 김준수가 그대로 비틀거리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평소 헌터의 운동 신경을 생각하면 피하지는 못하더라도 넘어질 정도는 절대 아니었으나 김준수는 지금 헌터치고는 드물게 굉장히 취한 상태였기에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억? 씨발… 뭐야? 어떤 자식이야?"

바닥에 쓰러진 김준수가 얼굴을 찡그리며 저를 막아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주변의 불빛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꽤 날카로운 인상을 가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곧장 욕지기를 내뱉으려던 김준수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 만만하다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X발…."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린 김준수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김준수가 아무리 막장 인생을 살고 있어도, 눈앞에 있는 사내 같은 부류에게 함부로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헌터라 해도 김준수는 고작 E랭크 나부랭이였으니까.

그는 나대야 할 상황과 말아야 할 상황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김준수는 푹 고개를 숙인 채 일어섰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주변 행인들이 모두 그를 향해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일어난다.

'X발… X발… 쪽팔려….'

김준수는 급히 자리를 뜨려 했다.

저를 막아선 사내가 붙잡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텁-

묵직한 손이 김준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일순간 당황한 김준수였지만 이내 화가 끓어올랐다.

이전부터 느끼던 수치심과 모멸감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사내가 무서워 보이건 말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씨발… 아주 그냥 내가 만만해 보인다 이거지? 좋아, 끝장을 보자…!'

막 김준수가 제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떨쳐 내고 사내를 향해 덤비려던 순간이었다.

꾸욱-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이 실렸다.

"악…!"

비명이 터진다.

김준수가 엄연히 미궁에서 활동하며 고통에 어느 정도 익숙한 헌터라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근처의 몬스터들이 공격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어깨가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아악…! 아파! 아프다고…!"

김준수의 비명에 삽시간에 주변의 시선이 모여든다.

몇몇 행인들이 신고라도 하려는 듯 급히 휴대폰을 들어 올린다.

그런 주변의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내가 조용히 김준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김준수."

"...! 너, 너 이 새끼! 내가 누군지 알고 왔구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였어?! X발…! 누가 보냈냐? 누가 시키던?"

김준수는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상위 헌터로 보이는 사내를 보내 가면서까지 자신에게 해를 입힐 만한 상대가 누가 있을까?

'X발… 누가 있지? 누가 있어? 박상혁? 이준구? 윤명찬?! 아냐… 그 쓰레기 새끼들은 아냐… 그렇다면 혹시…!'

번뜩 떠오른 이름에 김준수가 급히 소리쳤다.

"너, 너 이 새끼! 신재준이 시켰냐? 드디어, 드디어 이 김준수를 처리해야겠다고 결정이라도 했다든? 그 새끼…! 그 튀겨 죽어도 시원찮을 쓰레기 새끼! 진작에 신고했어야 되는데!"

홀로 고민하고 홀로 납득한 김준수가 발광하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내가, 내가 이대로 당할 거 같아? 잘못 골라도 한참을 잘못 골랐어! 내가 괜히 미친놈처럼 매일 술만 먹고 돌아다닌 줄 알아? 다 이럴 때를 생각했던 거라고? 네놈이 여기서 과연 날 어찌할 수 있을 거 같아?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그리 소리친 김준수가 급히 주변의 행인들을 향해 소리친다.

아니, 이번에도 소리치려 했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X발? 무슨 사람 눈깔이….'

저리도 무섭냐?

한순간 사내의 눈이 붉게 번쩍이는 것 같다고 생각한 김준수는 이내 의식을 잃었다.

이후 행인들에 의해 신고를 받고 경찰과 협회의 헌터들이 도착했으나, 이미 사내와 김준수는 사라진 이후였다.

* * *

"끄… 끄으응."

김준수의 의식이 천천히 깨어났다.

작은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던 김준수가 불현듯 번쩍 눈을 뜬다.

마지막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통 어두운 새까만 공간. 한쪽에 뚫려있는 작은 창을 통해 바깥의 불빛이 들어온다.

"…공장? X발… 여기가 어디야?"

그놈이 날 데리고 온 건가? 김준수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나마 다행히 몸이 묶여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X발, 내가 당할 거 같아? 기필코 살아남는다… 그리고 신재준… 그 개새끼… 이번에야말로 신고해 주겠어… 아무리 사정사정해도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김준수가 품을 뒤적였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일단 휴대폰의 불빛이라도 비춰보고자 하는 것이다.

"전화도 안 뺏었네… 하, 이 신재준 이 새끼… 어떤 얼척이를 구한 거야? 제대로 해놓은 게 없잖아! 뭐,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지만…."

김준수가 다소 진정된 느낌으로 전화를 들었다.

일단 신고부터 할까?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역시 협회나 경찰에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김준수가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조용히 목소리가 울렸다.

"김준수."

"…억! X발!"

우당탕탕탕-

갑작스럽게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김준수가 바닥을 굴렀다.

어딘가에 부딪힌지는 모르겠지만 몸 이곳저곳이 아팠다.

그의 휴대폰 역시 바닥을 굴렀다.

"너, 너 이 새끼!"

저벅저벅-

와락 소리치는 김준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땅에 떨어진 김준수의 휴대폰을 주웠다.

휴대폰의 불빛에 사내의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

김준수에게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너, 너! 낯이 익은 거 같은데…! 신재준 똘마니냐?! 그놈이 뭐라면서 시키든?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흠… 신재준이랑 아직도 연락하고 있나?"

"무, 무슨 개소리를…?"

무심코 반문하던 김준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 설마 신재준이 시킨 거 아니냐?"

"질문은 내가 했다. 신재준이랑 아직 연락하고 있나?"

차분한 목소리가 폐공장을 울렸다.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던 김준수가 불현듯 느껴진 오한에 꾹 입을 다물었다.

고작 E랭크의 헌터 나부랭이지만, 몇 년간 나름 헌터로서 활동한 덕에 김준수한테도 어느 정도의 눈치란 것이 있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한테 함부로 반항하면 안 된다.

무조건 죽는다.

마치 상위 랭크의 몬스터를 눈앞에서 마주한 것 같은 공포와 절망감.

김준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김준수의 귓가로 다시 한번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세 번째군. 신재준과 아직도 연락하고 있나?"

"아, 아니! 아니야! 그 쓰레기 자식과는 전혀 아무런 인연도 없어!"

"그럼 아까 전의 얘기는 뭐지? 왜 신재준이 널 노린다는 거냐?"

"여, 연락한 적은 없지만 얼마 전에 똘마니를 보내왔었어! 처신 잘하라고! 그래서 나는 영락없이 네가 그놈이 보낸 놈인줄…!"

"그만. 더 설명 안 해도 되겠군."

차분히 들려온 목소리에 김준수가 꾹 입을 다물었다.

'씨발… 뭐지? 뭐야? 이 새끼는 또 뭐 하는 놈이야? 신재준에 대해서는 왜 궁금해하는 거고? 애초에 나를 납치한 이유가 뭐냐고?'

짧은 시간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들.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할 정도로 김준수는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딱 한 가지.

한 가지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살고 싶다.'

김준수도 나름대로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어본 몸이지만, 그럼에도 삶에 대한 열망만은 그 무엇보다 간절했다.

오히려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느낌에 살고 싶다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상태였다.

김준수는 어느새 슬슬 보이기 시작한 눈으로 어둠을 뚫고 그 가운데의 사내를 보았다.

어디선가 본 거 같은 익숙한 얼굴.

이 얼굴을 기억해 내는 것만이 제 유일한 살길이 아닐까?

김준수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맹렬히 굴렸다.

"김준수."

무심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김준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마치 사신의 그것처럼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예, 예에?"

"참 생각을 많이 했다. 잘살고 있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쾌했겠지만, 이건 처량해도 너무 처량해서 말이지."

김준수는 지금 사내가 무어라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준수는 아까부터 스멀스멀 차오르는 스산함에 달달 몸을 떨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미 처참한 인생을 살고 있는 녀석한테 뭘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복수가 될까 고민했을 뿐이지."

"…보, 보보, 복수요?"

"그래. 복수."

사내가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 느릿한 고갯짓에 김준수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보, 복수라뇨?! 저기…! 서, 선생님! 제가 당신께 무슨 잘못이라도…?!"

다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사내가 '흠?'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내 '아아'하고 한차례 고개를 주억인다.

"그래. 네 입장에서는 조금 갑작스럽긴 하겠군. 이미 다 잊고 평범하게 살고 있었을 테니까… 이건 조금 참고가 되겠어. 다른 두 녀석 차례에는 미리 알려 줘야겠군."

그리 말한 사내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에 김준수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시시각각 덜덜 떨린다.

"김준수."

"사, 살려주세요…! 죄, 죄송합니다! 제, 제가 뭘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반성하겠습니다! 사죄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까…!"

바들바들 떨며 소리치는 김준수의 목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고서 사내는 조용히 걸음을 내디뎠다.

김준수가 막 더 이상 물러설 곳 없이 벽에 닿았을 때, 그 앞에 멈춰선 사내가 조용히 눈을 맞췄다.

"나를 봐라."

어둠 속에서 새빨간 눈동자가 번뜩인다.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시뻘건 색.

김준수의 몸이 사정없이 떨린다.

"사, 살려…."

"누가 떠오르지? 아직도 모르겠나? 정말 아무것도?"

차분하면서도 조금 격앙된 것 같은 목소리가 뇌리를 울린다.

김준수가 멍하니 사내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얼굴이다.

'어디서 봤지? 어디서 봤던 거야…?! X발! 생각해! 생각해 내라고 김준수!'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김준수가 불현듯 몸을 떨었다.

조금 날카롭게 변했지만 확실히 아는 얼굴이다.

지난 3년간 시도 때도 없이 꿈속에서 나타나 그를 괴롭히던 두 얼굴 중 하나.

홀린 듯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김준수가 버럭 소리쳤다.

"유, 유준영…!"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드디어 기억해 냈군."

"네, 네가 어떻게…?! 너, 넌 분명히…!"

"과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김준수. 중요한 건 지금 내가 네 앞에 있다는 거지."

"…X발…! 젠장…! 제엔장!"

김준수가 퍽- 사내의 몸을 있는 힘껏 밀쳐냈다.

사력을 다한 행동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사내에게 별 효과가 없었다.

김준수의 거센 행동을 묵묵히 받아준 사내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김준수, 내가 말했었지. 참 생각을 많이 했다고."

"X발… X발…! X이발…!"

"이미 밑바닥 시궁창 인생을 사는 너한테 도대체 뭘 해야 좋을까. 뭘 해야 널 절망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너 같아도, 너라면 어땠을 거 같아?! 네가 만약 우리 입장이었다면…!"

"그러다 깨달은 거야. 너 같은 녀석한테는 그 목숨만큼 값진 게 없다는 걸."

사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손을 피하고자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김준수였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피할 수 없었다.

손은 당장 눈에 보일 정도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주, 준영아! 유준영! 우, 우리 그래도 제법 괜찮았지 않냐? 요, 용서해 줘! 평생,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 응? 제발!"

"그냥 바로 죽이는 것만큼 시시한 것도 또 없을 테니. 천천히 죽여주마. 걱정하지 마라, 치료 마법도 배웠으니 혹시나 죽을 걱정은 안 해도 좋다."

"씨, X발! 야! 솔직히 나만,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신재준이랑 이하나는?! 그 개 같은 두 년놈들은…?!"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 두 사람도 그리 늦지 않게 너를 만나게 될 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도록."

"X발… X발…! 야, 주, 준영아! 유준영! 살려줘라! 살려줘! 그때는 내가,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와락와락 살기 위해 소리치는 김준수의 목소리에 사내는 조용히 웃었다.

"처음은 간단한 독부터 시작하지. 걱정하지 마라, 즉사할 만큼의 강한 독은 아니니까."

"아… 아아…!"

덥석-

사내의 손이 마침내 김준수의 목에 닿았다.

"낮이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그때까지 천천히 즐기자."

덤덤히 들려온 사내의 목소리를 끝으로 폐공장에 한 남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제84화

동이 떠오르기 시작한 이른 아침.

새벽 내내 인근을 울리던 울부짖음도 어느새 잠잠해졌다.

공장 앞을 지키던 나연성이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나연성은 두꺼운 공장의 철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정리를 위해 잇따라 따라오던 그의 부하들이 급히 입을 막는다.

뒤늦은 몇몇은 이미 '우욱'하고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이건… 대단하군."

보이는 것이라곤 피, 피, 피뿐이다.

폐공장의 내부가 피로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자리한 잔뜩 짓이겨진 고기 조각. 그리고 그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내.

나연성은 조심히 표정을 고쳤다.

그가 천천히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연성의 부하들이 급히 정리를 위해 움직였다.

뒷정리를 시작한 나연성의 부하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사내가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온 나연성을 흘깃 돌아보았다.

나연성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담배 있나?"

"…아뇨. 저는 비흡연자라… 원하신다면 구해 올까요?"

나연성의 물음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비흡연자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을 하고 항상 마지막에는 담배를 피는 거라고 말하는 녀석이 있거든."

담담히 내뱉은 사내의 모습에 나영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나연성을 향해 사내가 살살 손을 저었다.

"아니, 이쪽의 얘기다. 어쨌든 굳이 담배를 구해 올 필요는 없다."

그리 말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내가 부탁한 건?"

"준비해 놓았습니다."

나연성이 재빨리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카드였는데, 흔히 말하는 '헌터 라이선스'였다.

"이름은 말씀하신 대로 유준영. 랭크는 C. 소속 길드는 이름만 등록된 유령 길드입니다. 이걸로 문제없이 미궁에 입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

나연성의 설명에 담담히 고개를 주억이며 사내가 물끄러미 제 손에 들린 헌터 라이선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나연성이 급히 덧붙인다.

"혹시 랭크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면 어쩔 수 없습니다. B랭크부터는 협회에서 꽤 깐깐하게 관리합니다. 그 이상의 랭크를 원하신다면 직접 협회에 들리시거나, 본인을 직접 밝히셔야…."

"아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랭크는 오히려 마음에 드는군."

"…그렇다면?"

"그냥 감회가 남달라서…."

조용히 중얼거린 사내가 카드를 조용히 품에 넣었다.

"그래서 알아보라 한 것은?"

"평소에는 거의 미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통 작업이 있을 때만 들어가는데… 다음 작업이 마침 사흘 후입니다."

사내가 덤덤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곧장 몸을 움직였다.

공장을 벗어나는 사내의 뒤를 나연성이 급히 따랐다.

"연락은 사흘 후쯤 다시 하겠다."

"예… 그리고 맡기신 장비 중 일부가 판매되었습니다."

"빠르군."

"고등급의 장비는 언제나 귀하니까요… 미리 받아 가신 금액은 제하고 추가분은 받으신 카드로 입금하겠습니다."

"얼마 정도지?"

"100억에 조금 못 미칠 겁니다. 이번 의뢰에 따른 정보료 등을 제외해서 대략 86억쯤 되겠군요."

나연성의 설명에 걸음을 옮기던 사내가 잠시 멈칫했다.

이내 곧바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나연성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많군.'하고 중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를.

"그럼 전할 말은 모두 끝인가?"

"예… 공적인 이야기는 모두 끝났습니다만…."

"…다른 할 말이 있는 건가?"

흘깃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에 나연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장님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리사의?"

"예. 꼭 한번 들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용건 없다 전해 다오."

"…혹시 거절하신다면 집 주소를 알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싫으면 좋은 호텔방을 예약해 놓았다고…."

재차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에 나연성이 슬쩍 눈을 피했다.

그 역시도 이런 말을 하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다.

"…사흘 후. 두 번째 일이 끝나고 들린다고 전해라."

"예. 기뻐하실 겁니다."

"...."

사내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나연성도 그런 사내를 더 붙잡지 않았다.

* * *

신재준은 전문 각성 브로커다.

당연하게도 이는 불법으로, 정부나 협회에 들키면 큰 엄벌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다 그렇듯 범죄를 저지른다 해서 반드시 처벌받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의 로비와 인맥이라면 충분히 처벌을 피할 수 있다.

신재준은 3년간 나름 뒷세계에서 알아주는 범죄 헌터로 활약했다.

기본적으로 각성 브로커로 활동했지만 돈만 된다면 청부 살인이나 납치, 몬스터 불법 유통 등 헌터가 할 수 있는 범죄란 범죄는 모두 스스럼없이 손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악질적인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을 속여 각성시켜 준다는 말로 미궁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저 미궁에 들어갔다 몸 성히 다시 나올 수 있다면 몰라도 신재준은 그렇지 않았다.

미궁에서의 죽음은 큰 화제가 되지 않으니까.

이렇듯 악질적인 범죄 행위를 밥 먹듯이 하는 신재준도 헌터이니만큼 당연하게 미궁에 들어가는 일이 잦다.

다만 일반적인 헌터와 달리 미궁에 들어가는 이유가 사뭇 달랐다.

서울 대미궁, 산림 구역 15계층.

여섯 명의 남녀가 숲 한가운데의 공터에 모여 있었다.

정상적인 공격대라면 잠시 장비라도 점검하거나 휴식이라도 취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들은 신재준이 포함된 공격대다.

전혀 장비 점검이나 휴식 시간이 아니었다.

"흑… 흐윽…."

"사, 살려주세요. 제, 제발요."

"도,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게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절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어요! 살려주세요!"

네 명의 남녀가 바닥에 무릎 꿇은 채 열심히 빌기 시작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한 헌터가 킥킥 웃었다.

"아니, 밖에 애 없는 사람이 어딨어? 나도 애만 세 명이라고."

"제, 제발 살려주세요! 와이프가 아파서 애들한테 제가 없으면 안 돼요."

"아아, 그런 구질구질한 사연. 아주 좋아해."

킥킥- 웃음을 내뱉는 헌터는 그 말투처럼 아주 비열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가 흘깃 시선을 돌려 뒤편에 서 있는 제 상사를 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상사는 신재준이다.

"형님, 이 자식 이거 어쩔까요? 제법 간절한 사정이 있는 거 같은데."

"흐음."

신재준의 시선이 아이가 있다는 남자를 향했다.

"아이는 몇이지?"

"세, 셋입니다. 셋이에요!"

"몇 살?"

"열 살짜리 하나랑 여섯 살짜리 쌍둥이 둘이에요! 와이프가 아파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텐데…!"

"휘유~ 이 새끼 이거 많이도 싸질렀네요, 형님. 와이프가 아주 미인인가 본데…."

호들갑을 떠는 제 부하의 모습에 신재준이 피식 웃었다.

"애는 셋에다가 와이프는 아프고… 돈이 아주 많이 나가겠어?"

"예, 예! 맞습니다! 돈이 급해서 오늘 이렇게 각성 브로커를…."

무심코 말을 잇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제가 믿고 따라온 각성 브로커가 바로 눈앞의 남자들이란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당장 돈이 없어도 괜찮다더니… 나중에 각성해서 갚으면 된다더니…!'

사실은 모두 보기 좋은 미끼였을 뿐이다.

무조건 안전을 보장해 준다는 이야기와 달리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흐음…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군."

"예… 예.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우린 아직 딱히 죽인다고 한 적 없는걸? 그렇지, 막내야?"

"예! 형님! 저희가 감히 고객님들 목숨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우렁차게 답하는 목소리가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에 화답하듯 먼 곳에서 '아우우'하고 울어대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남자를 포함한 다른 세 명의 일반인이 크게 몸을 떨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 저 B랭크 헌터입니다. 이런 상층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재준이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상냥하게 말했다.

다만 그럼에도 일반인 네 사람의 안색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 신재준의 태도를 모두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일반인들의 태도에 신재준의 부하가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 이 새끼들이! 우리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대답 안 해?"

"네, 넵! 미, 믿습니다! 믿어요!"

급히 소리치는 일반인들의 말에도 여전히 부하의 안색은 펴지지 않았다.

그에 더 몸을 떠는 이들이었으나 신재준이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야, 막내야. 적당히 해라. 소중하신 고객분들인데."

"아아, 죄송합니다. 형님!"

"사과는 내가 아닌 고객분들한테 해야지."

"옙! 죄송합니다, 고객님들!"

씨익- 비열한 웃음과 함께 막내가 허리를 숙였다.

분명 사과는 사과였지만 전혀 사과 같지 않은 사과였다.

"자, 그래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대뜸 신재준이 입을 열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려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 각자 다른 사정이 있겠지만 중요한 건 하나죠. 모두 돈이 부족하잖아요, 그죠?"

"...."

"대답!"

"네, 네엡!"

와락 소리친 부하의 목소리에 일반인들이 급히 답한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신재준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희한테 좋은 상품이 있습니다. 당장 1억 원부터 대출이 가능한 상품인데요… 금리는 뭐, 저희가 잘 알아서 좋게좋게 해드리겠습니다."

신재준이 아이템 가방에서 종이 서류 네 장을 꺼낸다.

그리고 그것을 제 부하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부하는 곧장 그것들을 일반인들에게 떠밀 듯 넘겼다.

"자, 약관이나 주요 항목들을 한 번씩 확인해 주세요. 나중에 난 몰랐다 이러시지 말고."

"…아니, 이거 금리가…."

"흐음?"

무어라 말하려던 여성이 저를 바라보는 신재준의 시선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슬쩍 웃음 지은 신재준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저희가 고객님들을 무척 소중히 합니다. 저희만 믿으시면 안전하게 미궁 밖으로 나가실 수 있어요. 다만… 저희 고객이라면 그걸 증명할 만한 서류가 있어야 되는데…."

"아, 아니! 들어올 때 사인한 서류 있잖아요!"

"아쉽게도 그건 미궁 탐사 도중에 잃어버려서요. 저희 막내가 제대로 관리를 못했습니다."

슬쩍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신재준의 부하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죄송함돠!"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혀 사과 같지 않은 사과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 분도 빠짐없이 사인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참고로 저희는 고객이 아닌 분의 안전은 장담하지 않습니다?"

슬며시 지어 보이는 신재준의 미소는 분명 악마의 그것이었다.

결국 네 명의 일반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서류를 받아든 신재준이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걸로 모두 제게 20억씩 빌리셨습니다. 아시겠죠?"

"2, 20억이라뇨! 분명 1억이라고…!"

"아뇨, 최소 1억부터라고 했지 대출금이 1억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천연덕스럽게 얼굴을 갸웃거리는 신재준의 모습에 결국 참다못한 한 남자가 와락 소리쳤다.

"이, 이 사기꾼…!"

퍽-

소리치는 것과 신재준의 부하가 남자를 힘껏 때렸다.

일반인과 신체 능력부터가 다른 헌터의 공격에 남자는 저만치 데굴데굴 굴러갔다.

잠시간 흙바닥을 구른 남자의 몸이 파들파들 경련한다.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막내야, 손속이 좀 과하구나."

"아, 죄송함돠. 형님! 너무 건방지길래 그만 무심코!"

"아아, 됐다. 서류는 받았으니까."

신재준은 받아든 서류를 아이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가벼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이제 다 죽여라."

"옙, 형님."

평범한 일상처럼 덤덤히 대화를 주고받는 두 상사와 부하의 모습에 날아간 남자를 제외한 일반인 세 사람은 잠시 벙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곧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한 남자가 급히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주, 죽이다뇨! 고객의 안전은 반드시 책임진다고…!"

"흐음?"

신재준이 그런 남자를 흘깃 바라보았다.

아이가 셋이고 부인이 아프다고 했던 바로 그 남자다.

"아까 저 사람이 하는 말 못 들었어요?"

"네…?"

신재준이 저편에서 파들파들 몸을 경련시키는 남자를 가리켰다.

"저 사람이 그랬잖아요. 사기꾼이라고."

"…예?"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에 신재준이 낄낄 웃었다.

"멍청한 게 아직도 이해를 못 하네. 당신들 속았다고."

"이… 이이…!"

분노와 함께 저를 향해 달려드는 남자를 신재준은 가볍게 밀쳐냈다.

달려들던 남자가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당신들이 빌린 돈은 가족들이 대신 해결해 줄 거야. 원금은 당연하고 이자까지 확실히 받아낼 테니 안심하라고. 아, 돈은 분명 당신들이 받은 거로 칠 테니까."

그리 말한 신재준이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일반인들의 입에서 갖가지 욕설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재준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3년 전 그날처럼.

그리고….

-Shaaaa───!!!

3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분노한 뱀의 울음소리가 숲을 울린다.

제85화

숲을 떠나 계층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커다란 울음소리.

그 흉포한 울음소리에 일반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기절했으며, 신재준과 그 부하는 도망칠 생각도 못 한 채 몸이 굳었다.

"무, 무슨…?!"

"혀, 형님?!"

당황한 신재준과 그 부하의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재준이 급히 몸을 움직인다.

"젠장…! 도망쳐!"

"예, 예? 혀, 형님 이 사람들을 어쩌고…."

"X발! 지금 그놈들 챙길 시간이 어디 있어?! 상황 파악 안 돼?! 당장 도망쳐도 모자랄…!"

소리치던 신재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어느새 수풀 너머에서 저를 바라보는 새빨간 눈동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씨, X발…."

저를 바라보는 새빨간 파충류의 눈동자.

신재준은 불현듯 3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신재준이 처음으로 제 본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범죄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한 그날의 기억.

저를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는 바래져버린 순수했던 옛날의 기억을 절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 기억이 추억같이 마냥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혀, 형님!"

우뚝 멈춰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재준을 그 부하가 불렀다.

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신재준이 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급히 몸을 움직이려던 찰나, 그보다 앞서 새빨간 눈동자가 먼저 움직였다.

"끄악!"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한차례 눈을 깜빡인 찰나 뒤쪽에 있던 부하의 비명 소리가 울린다.

신재준이 급히 몸을 돌리자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부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끄, 끄아아악─!!!"

제 부하를 물고 있는 커다란 뱀.

그것도 머리가 세 개나 달린 삼두사다.

그 덩치는 마치 산처럼 거대했으며 그 몸길이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었다.

어느새 조용히 근처 공터를 에워싸듯 감싼 커다란 뱀의 비늘이 보인다.

"혀, 형님! 사, 사사, 살려주세요─!!!"

뱀의 왼쪽 머리와 오른쪽 머리가 각각 부하의 양쪽 팔과 다리를 문 채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부하의 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마치 장난감 인형처럼 허공에 뜬 부하가 처절한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그의 부하가 어떤 위험한 상황에 부닥쳐 있든 신재준은 전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부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두 머리 말고 가운데의 또 다른 머리 하나가 고요히 저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재준이 손끝 하나 달싹이면 곧장 달려들 것 같은 기세다.

'씨, X발… 플로어 보스? 에어리어 보스? 무슨 산림 구역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신재준의 역량으로는 눈앞에 있는 괴물의 랭크가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그저 도저히 이런 상층에 있을 만한 몬스터가 아니란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끄, 끄으아아아─! 찌, 찢어져…! 형님, 찢어져요…! 사, 살려주세…!!!"

처참한 비명과 함께 뚜두둑- 하고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신재준이 조심히 눈동자만 돌려 확인하니 마침내 잡아당기는 힘을 견디다 못한 부하의 몸이 뚜둑- 끊어졌다.

시뻘건 무언가가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욱…."

신재준은 울컥 솟아오르는 토기를 참았다.

아무리 볼꼴 못 볼 꼴 많이 봐온 신재준이라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참상은 처음이었다.

오른쪽에 비해 많은 부분을 뜯어간 왼쪽 머리가 신이 난 듯 제 입에 물린 팔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재차 시뻘건 것들이 잔뜩 쏟아져 내렸다.

왼쪽 머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오른쪽 머리는 태연하게 뜯어낸 부분을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왼쪽 머리가 들고 있는 부분을 탐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머리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그 대수롭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과정에 결국 신재준은 참지 못하고 울컥 토사물을 쏟아냈다.

"우웩… 우웨엑──!!!"

그런 신재준의 모습을 가운데 머리가 처음 그대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동안 신재준이 미궁에 들어오기 전 먹었던 음식물을 모두 토해낼 때까지 가운데 머리는 물끄러미 신재준을 바라만 보았다.

"…씨X, 씨X…."

벅벅- 입가를 닦아내며 넋이 나간듯한 멍청한 얼굴로 신재준이 제 앞의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제길… 빌어먹을…."

괴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신재준을 건들지 않았다.

딱히 죽일 생각은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신재준이 손끝 하나 까딱이면 곧장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것이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신재준으로서는 그런 괴물의 모습에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고요히 저를 노려보는 괴물의 시선은 이미 호러 그 자체였다.

언젠가 보았던 공포 영화도 당장 눈앞의 괴물만 못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더 눈싸움만 하던 도중, 마침내 신재준의 인내가 먼저 바닥났다.

"썩을… 이 괴물 놈아! 용건이 뭐냐?!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죽일 거면 죽이고 살려줄 거면 살려줘!"

거의 자포자기한 것처럼 소리치는 신재준의 목소리에 괴물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정확히는 저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가운데 머리가 아닌 왼쪽 머리가 반응을 보였다.

-Shaaa──!!!

불쑥 제 앞까지 다가오며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뱉는 왼쪽 머리의 모습에 신재준이 발작하듯 경련했다.

그 크기만 해도 제 몸의 몇 배나 될 법한 머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Shii───

그런 신재준의 태도에 만족한 듯 왼쪽 머리가 도로 물러섰다.

나지막이 내뱉는 울음소리가 마치 비웃음과도 같이 들렸다.

"씨이발… 뭐냐… 뭐냐고 도대체…."

그런 괴물의 모습에 신재준이 부들부들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로서는 지금 상황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원래 이런 상층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상위 랭크의 몬스터.

장난감 인형이 찢어지듯 뜯겨나간 제 부하.

그리고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괴물.

이 정신 나간 상황이 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꿈일까?

"그래… X발… 다 꿈이야… 꿈이라고… 이런 개같은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어…."

마침내 넋이 나간 신재준이 중얼중얼 읊조렸다.

맨정신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회피하듯 모든 걸 그저 꿈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신재준을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재준.]

머릿속을 조용히 울리는 중후한 목소리에 신재준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가 급히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씨, X발! 사, 사람 있어요? 구해주세요! 여기, 여기 괴물이…!"

[널 구해줄 사람은 없다.]

저를 구원해줄 동아줄이라도 찾은 듯 간절히 소리치는 신재준의 모습에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불현듯 신재준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로 덜덜 떨리기 시작한 신재준의 눈동자가 제 앞의 괴물에게로 향했다.

"서, 설마…? 말도 안 돼…."

Shii───

혹시나 하는 신재준의 부정에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머리 셋 달린 뱀이 조용히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모, 몬스터가 말이라니? 여, 역시 꿈인 거야. 그래, 다 꿈이야…! 이런 X같은 꿈이라니…! 빌어먹을 막내 자식은 어서 날 안 깨우고 뭐 하는 거야? 어서… 어서 빨리…!"

[꿈이 아니다.]

"…비, 빌어먹을…!"

신재준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것만으로 모자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이미 공터 주변을 기다란 뱀의 몸이 가로막고 있었기에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높은 벽처럼 제 앞을 가로막은 뱀의 비늘을 신재준이 있는 힘껏 내리쳤다.

"X발…! X발…!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고, 일단 대화를 하자.]

연신 제 비늘을 내리치는 신재준을 뱀은 조용히 불렀다.

그 담담한 목소리에 신재준의 불안과 공포도 점점 진정되어 가기 시작했다.

"사, 살려줄 거냐?"

[이리 와라.]

제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단호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재준은 결국 덜덜 떨며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자리로 돌아온 신재준을 세 개의 머리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뭐냐?"

눈앞의 뱀이 당장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신재준은 확실히 진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나름 뒷세계에서 알아주는 인물답게 제법 당당하게 말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상황을 받아들이자 그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미래에 대한 계획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몬스터… 이건 분명 기회다!'

당장 쓸 만한 아이디어도 몇 개 떠오르고, 조금 더 머리를 굴리면 더 획기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를 것이 분명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의 괴물이 크나큰 위험처럼 느껴졌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다시 없을 기회처럼 느껴졌다.

'지금 대화만 잘 풀린다면….'

절로 그려지는 장밋빛 미래에 신재준의 눈이 한차례 번뜩였다.

그리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 탓에 신재준은 정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놓치고 말았다.

대표적으로 괴물이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평소에도 이런 짓을 자주 하나?]

"…이런 짓?"

흘깃 뱀의 머리가 기절해 있는 일반인들을 훑었다.

신재준이 조금 의문을 느끼다 고개를 주억였다.

"꽤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 혹시 사람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러니까 예를 들어 먹이 같은 것으로 말이다. 원한다면 내가 정기적으로 구해다 줄 수도 있는데…."

신재준의 눈빛이 은근한 탐욕으로 번쩍였다.

눈앞의 뱀에게 점수를 딸 생각에 신재준은 일단 말부터 내뱉었다.

애초에 사람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저 평소 하던 대로 적당히 돈이 급한 이들이나 멍청한 이들을 꾀어내면….

[이런 짓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나?]

생각을 잇던 신재준의 상념이 뚝 끊겼다.

갑작스런 뱀의 물음에 신재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렇지 않냐니…? 그게 무슨 뜻이지?"

[같은 인간을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느냐는 거다.]

"…아아. 그런 뜻인가?"

신재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뱀의 물음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그가 별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아무렇지 않아.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왔지. 어차피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몬스터도 마찬가지 아닌가? 당한 놈들이 멍청하고 나쁜 거다."

[....]

뱀은 잠시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신재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뱀의 모습에 신재준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스멀스멀 차오른 불안함에 신재준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뱀이 먼저 말했다.

[넌 전혀 변하지 않았군. 오히려 더 최악이 되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김준수의 상황도 그랬지만 네 녀석도 묘해… 아니,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이게 더 낫긴 하군.]

-별 신경 쓸 거 없이 복수할 수 있으니까.

덧붙이는 뱀의 목소리를 신재준이 이해하기도 전에 뱀이 몸을 움직였다.

스르르- 기다란 뱀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자, 잠깐! 잠깐만! 갑자기 이게 무슨 행동이냐! 대화… 우린 대화를 하던 거 아니었나?!"

[대화는 이제 끝이다. 딱히 더 물어볼 만한 게 있을 거 같지도 않군.]

"갑자기 무슨…! 뭔가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혹시 실수한 게 있다면…!"

[네놈의 실수는 3년 전에 저질렀다.]

"…3년 전? 그건 또 무슨…?"

멍하니 되묻는 물음에 뱀은 딱히 답하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뱀의 몸이 한순간 빛에 휩싸였다.

눈이 질끈 감길 정도의 번쩍이는 빛에 신재준이 급히 손으로 눈을 가렸다.

화악─

그리고 신재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커다란 뱀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웬 남자 하나가 그 자리에 대신 서 있었다.

신재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 혹시? 그 모습은…?"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던 거였나?

바로 조금 전까지의 불안은 또 어디로 간 것인지, 신재준은 사람의 말에 사람으로 변신까지 가능한 몬스터의 존재에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이건 틀림없는 기회다…! 돈을… 돈을 잔뜩 벌 수 있어…!'

신재준은 절로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했다.

그리고 이런 신재준의 계획은 당연하게도 아무 영양가 없는 생각이었다.

"몰라보겠나?"

"…응? 아, 무슨…?"

"김준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참 쉽게 잊는 거 같군. 이쪽은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데."

덤덤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신재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전부터 김준수는 무슨…? 혹시 내가 아는 그 김준수 이야긴가? 그 덜떨어진 머저리."

"그래. 3년 전 너와 함께 공격대를 꾸렸던 그 김준수다."

"…3년 전이라면…."

신재준의 얼굴이 묘해졌다.

조금 전부터 뱀이 이야기하는 3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까닭이다.

"…너는 혹시 그날 우리를 쫓아왔던 뱀이냐? 혹시 그동안 성장해서 이렇게…? 그렇다면 그날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를…."

조심스러운 신재준의 목소리에 사내로 변한 뱀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

"그래. 3년은 너무 길기는 했지… 발에 치일 정도로 흔했던 하찮은 캐리 하나를 기억하기에는."

"…캐리라고?"

재차 신재준의 얼굴이 묘해졌다.

이윽고 무언가 기억나기라도 하는 듯 그의 눈이 점점 더 커져간다.

다시 한번 눈이 간 사내의 얼굴.

분명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얼굴이다.

꽤 달라지기는 했지만, 저 얼굴은 분명….

"유, 유준영 캐리…?!"

사내는 대답 대신 그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도대체…?!"

"너희들은 정말 레퍼토리가 똑같군. 김준수도 똑같은 말을 하더니. 그러고 보니 그때도 단짝처럼 꼭 붙어 다녔지."

-쓰레기끼리 말이야.

덤덤히 중얼거린 사내가 곧 몸을 움직였다.

"자, 잠깐! 잠깐만! 네가 어떻게…?!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넌 분명 그날…!"

"지겹다. 어차피 이후에 할 말도 비슷할 테니 더 들을 필요도 없겠지."

"자, 잠깐! 말 좀…!"

이후 무어라 소리치는 신재준이었지만 사내는 그런 신재준의 목소리를 더 듣지 않았다.

그저 김준수 때와 마찬가지로 담담히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고요하던 숲에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제86화

동이 떠오르기 시작한 이른 아침, 부지런한 헌터들이 하나둘 미궁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

한 사내가 조용히 미궁을 나섰다.

한창때와 달리 아직은 한적하기만 한 번화가 위를 사내가 홀로 걸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옆으로 고급 세단 하나가 조용히 따라나선다.

사내의 시선이 흘깃 돌아갔다.

"볼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세단의 운전석에 타고 있던 것은 나연성이었다.

예기치 않은 그의 등장에도 사내는 그닥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히 고개를 주억였다.

"여긴 뭐 하러 왔지?"

"당연히 마중하러 왔습니다."

"…왜?"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구랑?"

"…사장님이랑요."

사내가 꾹 입을 다물었다.

열심히 반문하기는 했지만 그 기색을 봐서는 절대 잊고 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였달까?

모른 척하면 벗어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모양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사내의 기색에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 줬을지도 모르지만 사내를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연성이다.

제 사장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부하 직원.

21세기 현대에서 보기 드문 충신이다.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한 사내의 불편한 기색에도 그는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른 타시죠. 사장님이 기다리십니다."

"…굳이 마중 나오지 않았어도 알아서 찾아갔을 텐데."

"이제 보니 거짓말도 할 줄 아시는군요. 그쪽으로는 큰 연이 없어 보였는데."

"…아니, 딱히 거짓말이…."

"어찌 되었든 얼른 타시면 됩니다. 사장님이 유명한 음식집을 예약해 뒀습니다."

차분히 꺼내 이야기에 사내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설마 여기서 먹을 것으로 자신을 유혹할지 몰랐다는 듯 사내가 나연성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런 거로 넘어갈 것 같나?"

"참고로 한우입니다. 얼마든지 마음껏 시켜 먹으셔도 문제없다고 합니다."

"...."

사내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였으나 이내 포기한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오른쪽이 너 이 자식…."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한테 한 말 아니다. 그냥 식충이 녀석 때문에 조금 머리가 아파서."

가볍게 이마를 짚은 사내가 이내 순순히 차에 올랐다.

뒷좌석에 조용히 몸을 앉힌 사내의 모습에 나연성이 그제야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나연성과 사내가 도착한 음식점은 상당히 고풍스러운

예쁘게 쌓여 있는 기와가 특히 매력적인 전통 한옥이다.

안도 어찌나 넓은지 점원의 안내를 받아 이동한 사내가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원래 아침부터 영업을 하나?"

"사장님이 특별히 오늘 하루 동안 빌리셨습니다. 원래 불가능한데 평소 가게 주인과 잘 알던 사이라 사정사정해서 빌렸다고 합니다."

함께 걷던 나연성의 설명에 사내가 슬쩍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또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조용히 나연성에게 물었다.

"준비된 소고기는 충분한가?"

"예? 예. 한 마리를 그냥 잡았으니 다른 음식과 함께라면 충분할 거라…."

"그걸로 부족할 거 같으니 한 마리 더… 아니, 세 마리는 더 잡아다오."

"…예?"

"돈 때문이라면 내가 낼 테니 그렇게 해다오."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많이 드신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나 많이 들어가시나요?"

"…식충이가 하나 있다."

"예? 따로 일행이 계신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이쪽의 이야기니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냥 세 마리… 아니, 그것도 부족할지 모르겠군. 넉넉하게 다섯 마리는 잡아달라고 전해 다오. 부탁한다."

"…예, 일단 전하겠습니다."

아리송하게 머리를 갸웃거리는 나연성을 무시한 채 사내는 어느덧 도착한 방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에 리사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군."

살살 손 흔들어 인사하는 리사의 모습에 적당히 답한 사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앉혔다.

"가셨던 일은 잘 끝나셨나요?"

"그래."

조금 성의 없다시피 느껴지는 사내의 태도에도 리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 사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지어 보이던 웃음을 그대로 유지한 채 태연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시끄러워지겠네요."

"왜지? 미궁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건 흔한 일 아닌가?"

"앞이 아니라 뒤쪽 얘기예요. 신재준이 나름 뒷세계에서는 영향력 있던 녀석이거든요."

"흠. 그런가?"

"아아, 그렇다고 해도 막 거물은 아니고요. 그냥 거물급 인사와 조금 커넥션이 있는 정도?"

사내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어느새 음식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푸짐한 차림에 사내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굉장히 깔끔한 동작으로 음식들을 해치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리사가 씩 웃는다.

"굉장히 잘 먹는다고 소문난 거 알아요?"

"…어느 정도 자각은 있다. 하지만 이쪽도 본의는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군."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건가요? 혹시 많이 먹어야 그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다거나? 뭐, 그런 쪽의 페널티?"

첫 만남 때부터 무언가 추리하는 것을 좋아해 보이던 리사답게, 그녀는 밥을 먹는 사내의 모습에도 굉장히 관심을 가졌다.

아니, 단순히 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내에게 그만큼 관심도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뭐… 비슷하다."

리사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사내가 이내 적당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얼버무리는 모습이라 지켜보던 리사가 가볍게 입술을 삐죽였다.

"나름 밥 사주는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니에요? 왜 이리 비밀이 많아, 자꾸자꾸 더 알고 싶어지게."

리사가 은근한 시선으로 사내를 바라본다.

아직 밖은 한낮이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당장 사내가 수락만 한다면 근처 호텔로 달려갈 것 같은 눈빛이다.

아니, 사내만 괜찮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라도….

"계산이라면 내가 하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얻어먹고 싶지는 않다."

물론 이런 리사의 은근한 유혹도 단호한 사내의 철벽에 가로막혔지만 말이다.

"에휴… 됐어요. 됐어. 그냥 많이 먹기나 하세요."

사내는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주억였다.

그 모습에 리사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이제 셋 중에 남은 건 이하나뿐이네요?"

음식이 들어온 이래 계속해서 쉬지 않고 젓가락을 놀리는 사내와 달리 적당히 깨작거리기만 하던 리사가 문득 물었다.

"그렇지. 이제 마지막이군."

"흐음… 혹시나 해서 묻지만 멈출 생각은요? 이하나는 앞의 둘과 완전히 상황이 다른 건 아시죠?"

태연한 목소리로 가볍게 물어본 질문에 사내의 젓가락질이 뚝 멈추었다.

한차례 물로 목을 축인 사내가 리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리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멈출 거 같은가?"

"…아뇨, 전혀 그럴 생각 없어 보이네요."

"알면 됐군."

담담히 답한 사내가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사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한번 말했지만 그녀의 배후에 있는 건 SS랭크 헌터예요. 그 유명한 프랑스의 '샤를로트 미셸'이라고요. 그것도 벌써 20년 넘게 SS랭크로 활동한!"

"알고 있다."

"…정말 알고 있는 거 맞아요? 그 장미검의 샤를로트라고요. 21세기의 잔다르크, 전처녀라 불리는 바로 그 괴물이요."

조금 조급하게 느껴지는 리사의 목소리에 사내가 재차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그가 물끄러미 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사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걱정에 사내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그녀가 왜 자신을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정말 괴물을 못 본 모양이군."

"…네?"

"헌터의 SS랭크와 몬스터의 SS랭크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어요.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저도 S랭크 헌터 나부랭이거든요. 당신 정도가 아니라면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부류라고요."

평소 사내의 태도에 불만이었던 것일까? 짐짓 입술을 삐죽이는 리사의 모습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하위 랭크라면 헌터가 우세하지만 상위 랭크로 갈수록 몬스터가 헌터에 비해 더 강해진다. 같은 SS랭크의 헌터와 몬스터가 1대1로 붙으면 백이면 백 몬스터가 우세하지. 당연한 법칙이다."

"알고 있다니까요."

"SS랭크 헌터의 실질적인 전투력은 SA랭크 상위의 몬스터와 비슷하다. 물론 실제로 싸우면 SS랭크 헌터 쪽이 우세하기는 하겠다만 그래도 둘이 엇비슷한 것도 사실. 그렇다면 별문제 없다."

"…저기요, 뭔 뜻인지 전혀 이해가 안 가거든요?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세요."

불만스레 내뱉는 리사의 모습에 사내가 피식이며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진짜 괴물을 겪어본 자 앞에서 다른 괴물은 별 무서울 게 아니란 거다."

"…말투가 꼭 진짜 괴물… 그러니까 SS랭크 몬스터를 본 것처럼 들리는데요?"

조심스레 물어본 리사의 질문에 사내는 그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젓가락질을 계속했다.

리사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뭐, 좋아요. 어찌 되었건 자신이 있다는 거죠?"

"그런 셈이지."

"그래.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계속 걱정해서 뭐 하겠어요. 그래도 다행이네요. 당신도 나름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까."

"…내가 평소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나?"

슬며시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에 이번에는 리사가 피식 웃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 화랑 길드에 시비를 걸거나, SS랭크 헌터가 올지도 모르는데 지금처럼 태연히 밥을 먹지는 않아요."

"...."

자신도 묘하게 찔리는 게 있는지 사내가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전혀 쉬지 않는 젓가락질에 리사가 결국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슬슬 들어온 음식들이 다 바닥이 날 무렵.

정말 쉬지 않고 먹어치우는 사내의 모습에 감탄하던 리사가 문득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엔 또 뭐지?"

"…뭐에요? 그 귀찮다는 듯한 물음은? 제가 그렇게 귀찮아요?"

"...."

별다른 대답 없는 사내의 모습에 리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당신 정말 나쁜 남자예요… 그래서 더 매력 있지만."

"…그래서 용건은?"

"괜히 말 돌리기는… 뭐, 넘어가 주겠지만요."

장난스레 내뱉은 리사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 세 사람하고 무슨 관계예요?"

"…그건 왜 묻지?"

"에이. 이렇게 밥까지 사주는데 그 정도는 물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굳이 네가 살 필요는 없다. 내가 계산할 테니…."

"아니, 아니. 됐어요! 그냥 제가 궁금해서 그래요!"

리사가 급히 소리쳤다.

그런 리사의 모습을 흘깃 바라본 사내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별 중요한 것도 아니니 문제없긴 하지. 그저 단순한 복수다."

"…그 사람들이 뭔 짓을 했나요?"

"내 삶에 큰 변화를 일으켰지."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요. 당신에 대해 조금 조사를 해봤거든요."

"의뢰를 받는 입장에서 당연한 거니 기분 나쁠 것도 없다."

담담한 사내의 태도에 리사는 안심한 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그래서 어쨌든 당신 뒷조사를 조금 해봤는데…."

"나오는 게 없겠지."

"…잘 알고 계시네요."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리사가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또 따로 조사를 해봤어요. 당신이 말한 세 사람에 대해서. 그러니 나오던 게 있더군요."

"…뭐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젓가락질을 계속하며 사내가 되물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사가 이내 입을 열었다.

"3년 전, 세 사람은 같은 공격대였어요."

"…그렇군. 그래서?"

"놀라웠죠. 한 명은 밑바닥 시궁창 인생. 한 명은 나름 알아주는 뒷세계의 쓰레기. 또 한 명은 한국의 잔다르크다 뭐다 최고의 인생을 살아가는 슈퍼스타. 그 세 사람이 이전에 같은 공격대였다니…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죠. 같은 공격대였던 사람들의 인생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

"그래서 그 공격대가 어찌 해체됐나 확인해 봤는데… 3년 전 그 공격대에 속해 있던 두 사람이 실종됐더라고요."

리사가 조용히 사내를 바라보았다.

"당시 공대장을 맡았던 D랭크 헌터 박광열. 그리고 일반인 캐리 유준영."

"...."

"당신이 이번에 저희한테 발급받은 헌터 라이선스의 이름이 분명 '유준영'이었죠?"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이전과 전혀 변하지 않은 멀쩡한 안색에 리사가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이걸 보고 제가 무슨 생각한 지 알아요?"

"무슨 생각을 했지?"

"동료들부터 버림받은 하찮은 짐꾼이 3년 만에 다시 살아 돌아와서 복수하는 이야기.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 흔히 나오는 소재죠."

"흠… 그래서 네 생각에는 내가 3년 전 실종되었던 바로 그 하찮은 짐꾼이다?"

"정황상 그래요… 분명 정황상은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리사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3년 전 미궁에서 실종된 일반인이 지금은 SA랭크의 헌터가 돼서 돌아왔다? 그리고 저를 버렸던 이들에게 복수한다? 차라리 당신이 당시 실종됐던 두 사람의 지인 중 한 사람이라는 게 더 신빙성 있죠."

"그렇겠지."

사내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사실을 말해줄 것 같지 않은 그 여유로운 태도에 리사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래… 비밀 많은 남자가 매력 있는 법이지… 자꾸 그렇게 해봐요. 진짜 내가 언젠가 확 잡아먹어 버릴 테니까."

"...."

꾹 입을 다무는 사내의 모습에 리사가 씩 웃었다.

"지 불리할 때만 입 꾹 다무는 것 좀 봐. 뭐, 그것도 귀엽지만."

"...."

"음식 다 먹은 지가 언젠데 젓가락질은 왜 계속하는 거예요? 혹시 수줍은 타는 건가?"

사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리사가 결국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자, 슬슬 그만 일어나죠. 달달한 디저트나 좀 먹으러 가요."

"…아직 안 끝났다."

조용히 중얼거리는 사내의 모습에 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 다섯 마리가 아직 안 나왔다."

리사가 멍청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런 리사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사내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괜히 빈 접시를 깨작거렸다.

"…다섯 마리요?"

"…그래."

"…다섯 접시가 아니라 다섯 마리?"

"…그래."

"…미친."

"…안 남길 테니 걱정 마라."

"…미친."

"...."

그렇게 사내가 주문한 소 다섯 마리가 다 도축되어 도착하기 전까지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자리 잡았다.

제87화

윤명호는 S랭크 헌터다.

3년 전, 불과 E랭크 헌터에 불과했던 그는, 현재 S랭크 헌터로서 은하 길드의 제2 공격대를 이끌고 있었다.

그의 스승 또는 누나나 다름없는 권제나가 SA랭크로 승급하며, 부길드장이 된 것으로 공석이 된 2공대장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원래 2공대장이었던 권제나의 영향력과 평소 윤명호와 권제나의 관계로 인해 사실상 부길드장 직속의 친위대나 다름없는 포지션이었다.

윤명호는 그 권제나의 친위대장쯤 되고 말이다.

최근 헌터계가 소란스럽다.

두 차례나 공격대가 전멸당한 화랑 사건이나 상층 구역에서 목격되는 규격을 벗어난 상위 랭크 몬스터.

국내 5대 길드는 물론이고 각종 대형 길드나 헌터 협회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행히 이변이 일어난 곳이 서울 대미궁 하나뿐이라 당장 전력을 분산하는 일은 없었으나, 오히려 서울 대미궁인 까닭에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

국내 헌터들뿐만 아니라 해외의 헌터들까지도 찾아오는 세계 8대 미궁 중 하나.

국가의 위신이나 여러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미궁의 이변을 조사하고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협회에서는 각 길드들에게 조사 의뢰를 맡겼다.

동원령처럼 딱히 강제력이 있는 의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력이 남아도는 대부분의 길드들은 참여할 수밖에 없는 의뢰였다.

그리고 국내 최고 길드 중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은하 길드에서도 당연히 이번 의뢰를 맡았다.

의뢰에 나선 것은 제2 공격대.

공대장 밑 이하 공대원들의 참여는 당연하고 마침 한가했던 부길드장 권제나까지 참여한 상황이었다.

의뢰를 받아들인 길드 중 권제나 같은 거물이 참여한 것은 은하 길드가 유일했다.

조사 의뢰는 길드 개별로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번 의뢰 역시 기본적으로 각 길드별로 따로 움직이는 상황이었지만 드물게도 은하 길드는 다른 길드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최근 새로 생긴 신생 길드.

'로즈원' 길드와 함께 말이다.

"권제나 헌터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즈원의 길드장인 S랭크 헌터 이하나입니다!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평소 알려진 그 털털한 성격대로 이하나는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꾸벅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하는 이하나의 모습에 권제나가 적당히 손을 흔들었다.

상대가 예의 바르게 인사한 것치고는 꽤 까칠한 태도였는데, 옆에 서 있던 윤명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이하나 헌터… 사실 저희 부길드장님이 어제 과음을 하셔서…."

"야, 이 씨! 너는 그걸 말하면 어쩌냐!"

퍽-

윤명호가 변명을 늘어놓는 것과 동시에 거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기겁한 이하나였으나 익숙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윤명호의 모습에 조용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하나 헌터가 오해하잖아요. 이럴 때는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죠."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하나 헌터한테 내 이미지가 어떻게 박히겠어! 술 좋아하는 미친년처럼 보일 거 아냐?!"

"…이미 충분히 그래 보입니다만."

조용히 중얼거리던 윤명호가 재차 손을 들어 올리는 권제나의 모습에 꾹 입을 다물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이하나가 생긋 웃었다.

"두 분 다 사이가 좋으시네요."

"…그렇게 보이시다니 이하나 헌터 조금 눈이 나쁘신 거 아닐는지…?"

윤명호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저를 보았으나 이하나는 쿡쿡-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이 녀석이 제 밑에서 오래 배웠거든요. 골치 아픈 남동생이나 다름없어요."

"부길드장님 같은 누님은 필요 없습니다만…."

퍽-

재차 짧은 타격음이 울리고, 이번에는 꽤나 아팠는지 머리를 감싸 쥐는 윤명호를 무시한 채 권제나가 이하나를 바라보았다.

윤명호를 대할 때와 달리 상냥하게 웃음 짓는 미소에 이하나가 조금 떨떠름하게 웃어 보였다.

"어쨌든 반가워요. 권제나예요."

"네! 권제나 헌터님! 그 위명은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왔어요!"

"아하, 부끄럽게… 굳이 위명이랄 것까진 없는데."

부끄럽다는 듯 한차례 수줍게 미소지은 권제나가 곧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하나 헌터는 프랑스에서 헌터 생활을 하셨죠? 그 유명한 '라비앙로즈'에서."

"네. 운이 좋아서 길드장… 샤를로트 헌터님의 눈에 들 수 있었어요."

"운만큼이나 재능도 좋았겠죠. 아무리 그래도 세계 최강 중 한 명인 샤를로트 헌터의 눈에 어찌 운만 좋아서 들 수 있겠어요?"

권제나의 말에 이하나가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혔다.

수줍게 미소 짓는 이하나의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던 권제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프랑스에서 활동하셨나요? 그쪽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 거 같아서…."

"…아뇨. 처음에는 저도 이곳에서 활동했어요. E랭크였을 때죠."

시종일관 밝은 태도였던 이전과 달리 살짝 가라앉은 태도로 말하는 이하나였다.

그 모습에 무언가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권제나다. 그녀가 조용히 침음을 흘렸다.

조금 묘해진 분위기에 권제나가 슬쩍 윤명호를 팔꿈치로 찔렀다.

윽- 작은 신음을 내뱉은 윤명호가 권제나를 흘깃 째려보고는 이내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쨌든 이번 조사 잘 부탁드립니다. 모처럼 하는 합동 조사니 잘해봅시다."

"…예. 아직 많이 부족한 저희 길드니 배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는 이하나의 모습과 함께 은하 길드와 로즈원 길드의 합동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번 조사는 뭘 중심으로 조사할 예정인가요?"

"음… 이번 조사가 왜 진행되는지는 아시죠?"

"네. 화랑 길드 사건과 더불어, 구역에 맞지 않는 고랭크 몬스터의 등장으로 인한 협회의 의뢰 아닌가요?"

"잘 알고 계시네요."

이하나의 물음에 윤명호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그리고 이내 설명을 잇는다.

"사실 이런 의뢰는 무언가 대상을 한정해서 조사할 수 없어요. 보통 무작정 미궁 전역을 뒤져보는 수밖에 없는데요… 아마 제일 처음 화랑 사건이 일어났던 사막 구역을 위주로 조사할 것 같네요."

"사막 구역이라… 저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네요."

"아… 한국에 있을 당시에는 E랭크셨을 테니…."

윤명호가 흘깃 이하나의 눈치를 살폈다.

무심코 또다시 그녀의 트라우마를 건 든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탓이다.

그리고 그런 윤명호의 모습에 이하나가 슬쩍 웃는다.

"그렇게 신경 써주실 거 없어요. 3년 동안 많이 털어 냈거든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윤명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하나가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했지만 여러모로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심 이참에 여자 친구나 사귀어 보라며 자리를 떠난 권제나가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부길드장님도 참, 굳이 괜한 일을 벌이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쉰 윤명호가 더 어색해지기 전에 급히 화제를 돌렸다.

"프랑스라면 역시 '리옹 대미궁' 쪽에서 활동하셨나요?"

"네, 맞아요. 한국에 서울 대미궁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리옹 대미궁이 있으니까요."

"그쪽은 좀 어때요? 같은 8대 미궁이라고는 하지만 많이 다르다고 하던데…."

"으음… 역시 가장 큰 차이는 각 구역이 다른 거 아닐까요? 등장하는 몬스터도 많이 다르고요."

윤명호가 한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당장에 말로만 들어서는 확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그동안 들어온 것이 있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럼 몇 층까지 가보셨어요? 리옹 대미궁 쪽은 분명 최고 도달 계층이 69층이었나요? 그랬던 것 같은데…."

"길드장님을 따라 63층까지는 가봤어요. 그 이상은 당시 상황상 무리였구요. 윤명호 헌터는…?"

"저는 얼마 전에 64계층까지 가봤네요. 길드 차원에서 최대한 준비하고 간 거였는데… 어휴, 당시 플로어 보스를 만난 탓에 결국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하나가 조용히 감탄을 터트렸다.

"서울 대미궁의 64계층이라면 용암 구역 아닌가요? 이야기를 듣기로는 열기가 굉장하다고 하는데."

"열 내성이 없으면 잠깐도 견디지 못할 정도죠. 저도 내성 스킬은 없어서 장비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었어요. 이하나 헌터는 어땠어요? 리옹 대미궁의 63계층은 설산이었죠?"

"말도 마세요. 정말 얼마나 춥던지… 당시 길드장님의 빠른 결단이 없었다면 공대원들 태반을 잃었을지도 몰라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부르르 몸서리를 치는 이하나의 모습에 윤명호가 킥킥 웃었다.

"고생하셨네요."

"윤명호 헌터도 많이 고생하셨겠네요."

"저는 뭐… 부길드장님 때문에 더 고생을 많이 했지만요."

"아아. 사이가 좋아 보이시던데?"

"그냥 평범한 스승과 제자 사이예요… 본인은 누나와 동생 사이라 말하기는 하는데… 으음, 저로서는 사양하고 싶네요."

이하나가 그랬던 것처럼 무슨 기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윤명호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그 모습에 이번에는 이하나가 킥킥 웃었다.

"참 닮고 싶은 관계네요. 그런 거 좋아 보여요."

"음? 이하나 헌터는 다르신가요? 듣기로는 샤를로트 헌터님과 사제 관계라 들었는데…."

"음… 길드장님이 나쁘신 건 아니에요. 단지 뭐랄까, 조금 엄하시달까? 언니라기보다는 어머니 같은 스타일이셔서…."

"아아,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이제 보니 이하나 헌터도 많이 당하셨구나? 잔소리가 심했죠?"

"…부끄럽지만, 네. 솔직히 견디기 어려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사실 그래서 도망치듯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있어요."

윤명호가 다 이해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당장 도망칠 만한 곳이 없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뿐이다.

"…이제 보니 우리 참 닮은 게 많네요."

"…네, 그동안 많이 고생하셨어요."

"…힘내죠, 우리."

"…네. 힘내요, 우리."

윤명호와 이하나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전우애를 다졌다. 당장 말하지 않아도 절로 서로의 과거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래서 말인데요. 이하나 헌터…."

"잠깐. 말을 끊어서 죄송한데. 호칭 좀 편하게 해주세요. 자꾸 듣기가 조금 불편해서…."

"아… 그럼? 하나 씨…?"

윤명호가 조심스럽게 바꿔 부른 호칭에 이하나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거면 돼요."

"…조금 부끄럽네요… 저도 편하게 불러주세요."

"네, 명호 씨."

"...."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니 윤명호는 저도 모르게 볼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항상 원수 같은 권제나와 붙어 다니다 보니 이런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어 본 게 얼마 만인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불쑥 차오른 부끄러움에 윤명호가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명호 씨. 아까 하시려던 말씀은…?"

"…아, 별것 아니에요. 그냥 연락처나 좀 교환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조심스럽게 내뱉은 목소리에 이하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조금 놀란 것 같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윤명호가 급히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 별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얘기를 하다 보니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해서…! 혹시 불편하시면…!"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조금 놀라서… 마침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거든요."

이하나가 수줍게 웃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런 이하나의 모습에 윤명호의 볼이 한차례 씰룩거렸다.

"그, 그럼 혹시…."

"…네. 돌아가는 길에 알려 드릴게요."

"…혹시 조사가 끝난 다음 용건이 없으시다면 같이 저녁이라도 드실래요?"

헌터로 활동하며 오랜 시간 단련된 직감을 통해 이건 틀림없는 기회라 여긴 윤명호가 거침없이 물었다.

비록 긴장으로 그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틀림없이 원하는 바를 전했다.

그리고 그런 윤명호의 물음에 이하나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윤명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저… 조사가 끝난 다음은 조금 곤란해요. 이래 봬도 저 길드장이고,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

"…그렇군요. 제가 배려를 해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아, 그런 뜻이 아니고…! 그저 조사가 끝난 다음이 곤란하달까…! 나중에… 나중이라면 괜찮아요!"

급히 덧붙이는 이하나의 설명에 시무룩해졌던 윤명호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가 활짝 핀 얼굴로 이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네. 나중에도 괜찮으시다면…."

-같이 저녁 먹어요.

수줍게 내뱉는 이하나의 목소리에 윤명호가 결국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내뱉었다.

"제가 근사한 데서 대접할게요!"

"아뇨,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사양하듯 내뱉는 이하나의 모습에 답지않게 흥분한 윤명호는 씩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더 말리든 말리지 않든 이미 윤명호의 머릿속에는 어디서 먹을지, 무엇을 할지 그날의 계획이 다 구상된 상황이었다.

'최대한 맛있고 비싼 곳으로 가자! 야경이 좋은 곳이 어디 있더라? 부길드장님한테 한번 물어봐?'

아니, 그랬다가는 어떤 음흉한 계획을 꾸릴지 몰랐다.

비록 자신이 한번 잘해보라며 밀어준 상황이라고는 해도, 평소의 권제나라면 분명 훼방을 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 꼴은 절대 못 보지. 암… 절대 못 봐!'

아무래도 권제나 말고 다른 공대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후에 있을 저녁 식사를 상상하며 행복하게 웃는 윤명호와, 그런 윤명호를 못 말리겠다는 듯 바라보며 수줍게 웃는 이하나와 함께 두 길드의 합동 조사대는 계속해서 미궁을 탐사했다.

그들을 따라오는 낯선 이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제88화

뜨거웠던 낮과 달리 해가 저문 사막 구역의 한밤중은 몹시도 쌀쌀했다.

조사대 전원이 경험 많은 헌터들이고, 각종 장비로 무장하고 있던 까닭에 별문제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확 떨어진 기온에 조사대는 사막 한가운데서 야영을 하기로 결정했다.

비교적 안전한 전이문 근처도 아니고 일반적인 사막 근처에서의 야영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SA랭크인 권제나와 S랭크가 둘이나 있는 이번 조사대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일찌감치 제 텐트를 치고 권제나의 텐트까지 준비한 윤명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씨 텐트를 내가 쳐 드렸어야 했는데….'

마음과 달리 현실은 원수 같은 부길드장의 텐트를 치고 있는 꼴이라니.

윤명호는 괜스레 답답해졌다.

"어이, 명호야."

"예? 예! 저 아무 욕도 안 했습니다!"

조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우렁찬 대답에 윤명호가 한순간 움찔했지만 다행히 권제나는 윤명호의 대답은 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정확히는 전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릴 것 같았달까?

권제나가 음흉한 미소와 함게 윤명호를 바라보았다.

"너 아까 좀 재밌더라?"

"…다, 다 듣고 계셨습니까? 설마?"

"아니, 굳이 내가 훔쳐 들으려 한 건 아니고… 알다시피 내 귀가 좀 좋잖아? 알아서 들리던걸?"

그리 말하며 히죽 웃어 보이는 권제나의 모습에 윤명호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우리 명호 참 많이 컸어? 여자도 꼬시고 말이야."

"…공대장님이 한번 해보라고 하셨거든요?"

당황스러운 상황에 예전 습관처럼 '공대장'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지만, 윤명호도 그렇고 권제나도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에게는 이쪽이 더 익숙했다.

"아니, 나는 그냥 우리 명호가 어떤 멍청한 짓을 할까 지켜보고 싶은 생각뿐이었거든? 근데 막상 보니까 정말 그렇게 덥석 꼬실 줄은 몰랐지 뭐야?"

"…처음에 분명 훔쳐 들으실 생각은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넘겨두자."

"…엄청 중요한 겁니다만."

슬쩍 저를 째려보는 윤명호의 시선에도 권제나는 언제나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솔직히 어때? 이하나 헌터 상당히 미인이잖아? 잘해볼 거야?"

"…저는 하나 씨의 외모가 아닌 마음에 끌렸습니다."

"에이… 마음은 무슨. 가슴이 그리 큰 것도 아니드만."

"…저는 가슴이 아니라 마음이라 말했습니다만…?"

조용히 되묻는 윤명호의 말을 권제나는 당연하다시피 무시했다.

"그래서 어찌 됐든 마음에 든다 이거지?"

"…예. 그러니까 제발 방해만 하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어머, 얘도 참. 누가 보면 내가 방해한 적 있는 것 같이 들린다? 애초에 너 여자랑 그렇게 대화한 거 처음 아니었니?"

"…그동안은 단지 제 인연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진지하게 내뱉는 윤명호의 목소리에 권제나가 결국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윤명호가 와락 얼굴을 구기자 그제야 권제나가 살살 손사래를 쳤다.

"뭐, 어쨌든 반가운 소식이네. 우리 명호 드디어 동정 떼겠구나?"

"...? 지금 무슨 소리를?"

"응? 우리 명호 드디어 동정 떼겠다고 말했는데?"

"아니, 공대장님… 이제 부길드장도 됐는데 제발 말 좀 예쁘게… 아니 아니, 그것보다 저 동정 아닙니다."

"뭔 헛소리야. 네 일거수일투족을 내가 다 아는데. 이 동정남아."

"...."

윤명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런 윤명호의 얼굴을 즐겁게 바라보던 권제나가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그 상태로 서른까지 갔으면 메테오도 썼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네."

윤명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이 상한 듯 벌떡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권제나가 살살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우리 귀여운 명호야."

"…안녕히 주무십쇼."

삐져서 가는 주제에 잘 자라는 인사를 하는 꼴이 퍽 귀엽다. 권제나가 멀찍이 사라지는 윤명호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내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아쉽긴 하네."

그렇게 홀로 씁쓸함을 삼킨 권제나가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한편 권제나와 윤명호가 가벼운 잡담을 나누던 그 시각.

일찌감치 텐트를 펼치고 잠자리에 들려던 이하나는 한 방문자를 맞이하게 된다.

미리 준비해 놓았던 침낭에 누우려던 이하나는 문득 시선을 느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낯선 시선.

그녀가 침낭 옆에 놓아두었던 검을 챙기며 번쩍 몸을 일으킨다.

S랭크 헌터 특유의 민첩한 몸놀림으로 낯선 방문객의 턱 밑에 순식간에 칼이 겨눠진다.

컴컴한 어둠 속에 저를 바라보는 사내가 조용히 서 있었다.

"누구시죠?"

보통의 여자라면 기겁했어도 몇 번은 기겁했을 상황이었지만, 이하나는 S랭크 헌터답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도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한밤중의 불청객을 바라보는 이하나의 눈빛만은 전혀 곱지 않았다.

낯선 불청객, 사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처음과 같이 이하나를 노려볼 뿐 아무런 행동도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사내의 반응에 이하나의 고운 눈매가 슬며시 구겨졌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건가요? 그렇다면 여기서 제 칼에 목이 베여도 상관없다는 거겠죠?"

스릉- 이하나의 칼끝이 예리하게 사내의 목에 닿았다.

이하나는 살짝 피부만 베어 피만 조금 낼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칼끝은 전혀 사내의 피부를 뚫을 수 없었다.

조그마한 생채기 하나 나지 않는다.

"무슨…?!"

사내를 향한 이하나의 경계심이 단번에 격상했다.

처음 목을 겨눌 때까지만 해도 저 혼자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라 여겼지만, 칼 하나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밖에 누구…?!"

이하나가 다른 이들을 부르려 급히 소리치려던 찰나, 지금껏 가만히 있던 사내가 처음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이하나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사내의 손이 이하나의 입을 막았다.

"읍…! 으읍…!"

"소란 피우지 마라, 이하나. 밖에는 당장 나도 껄끄러운 상대가 있으니."

껄끄러운 상대. 필시 권제나를 말하는 것일 터.

사내의 경고와 달리 이하나의 반응이 한층 더 격해졌다.

어떻게든 이 소란을 권제나가 알아차렸으면 하고 바라면서.

그리고 그 순간 마주친 사내의 눈동자가 붉게 번뜩였다.

"오해하지 마라. 내가 껄끄럽다는 건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란스러운데 여기서 SA랭크 헌터 하나가 죽어 나가면 한층 더 소란스러워질 테니."

사내의 말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내용이었음에도, 그 덤덤한 태도 탓에 거짓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사내는 진심으로 권제나를, SA랭크 헌터를 죽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하나가 곧 몸을 움직였다.

쏴악- 날카로운 칼날이 사내의 빈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간다.

바로 코앞에서 찔러 들어가는 S랭크 헌터의 공격은 도저히 피할 수 있을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 정도 속도와 거리라면 설령 권제나 같은 SA랭크라 하더라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사내 역시 이하나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다만….

깡-!

부드러운 살결이 아닌 단단한 쇠와 부딪힌 것과 같은 타격음이 울렸다.

눈이 동그래진 이하나가 급히 사내의 복부를 살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다.

"내 내구가 상당히 높기는 하지. 현재 능력치들 중에서 제일이다. 열심히 단련시켜 준 이가 있거든."

담담히 내뱉은 사내가 이하나의 입을 막은 손에 더 단단히 힘을 주었다.

단순히 입을 막은 것이 아니라 이제는 숫제 조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당연하게도 느껴지는 고통에 이하나가 몸을 버둥거렸다.

"이제 확실히 알았겠지? 쓸데없는 발버둥은 그만둬라. 네가 소란을 피워봤자 죽는 사람들이 늘어날 뿐이다."

조용히 들려온 목소리에 버둥거리던 이하나의 몸이 완전히 멈추었다.

그제서야 이하나의 입을 조이던 손의 힘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의외군. 너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읍…! 으읍…!"

이하나가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입을 가린 손 탓에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언어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좀 진정이 됐겠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쓸데없는 반항은 사양이다. 우선 입을 놓아줄 테니 대화를 하자."

그리 말한 사내가 이하나의 입에서 손을 풀었다.

어떤 짓을 해도 풀려날 것 같지 않던 손이 드디어 사라지자 이하나가 가빠진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억… 다, 당신은 누구죠?"

"그건 앞으로 차차 알게 될 테니 넌 대답만 해라. 질문은 내가 한다."

"그게 무슨…!"

무어라 소리치려던 이하나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까 전 사내의 경고를 떠올린 탓도 있고, 한순간 사내의 눈동자가 붉게 번뜩였던 까닭이다.

계속 입을 놀렸다면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죽는다.

"그럼 첫 번째 질문이다. 프랑스로 건너간 이유는?"

조금 진정된 것 같아 보이는 이하나의 모습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 사내의 물음에 왜 이런 것을 묻는 것인가 의문이 차오른 이하나였지만 이내 포기한 듯 순순히 대답했다.

"더 강해지고 싶어서요. 마침 샤를로트 헌터님께 좋은 기회를 받기도 했고."

"그것뿐인가?"

"…무슨 의미죠?"

"단지 정말 이유가 그것뿐이냐고 물은 거다."

이하나가 잠시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그 속내를 읽을 수 없는 무심한 눈동자가 저를 향하고 있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도망친 거예요."

"…무엇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지 못할 거 같았어요."

"왜지?"

이하나가 다시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심하기 그지없는 차가운 눈동자.

한순간 붉은빛으로 번뜩이는 사내의 눈빛에 이하나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지난 3년간 저를 보살펴준 샤를로트 미셸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그녀는 처음 보는 낯선 타인에게 말했다.

"저는… 3년 전의 저는 동료를 버렸어요."

이하나는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그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떻게든 함께 데리고 나가야 했는데… 성실히 일하던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밝게… 궂은일도 아무 말 없이 열심히 하는… 갖은 멸시 속에서도 당당히 버텨가던 그런 사람이었는데…."

"...."

"도와달라는 말을… 살려달라는 말을… 저는… 저는 아무것도 못 하고…."

흑흑-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왜 다시 돌아왔지?"

"…당당히 마주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저, 이런 한심한 여자지만… 이제는 털어내야 한다고… 샤를로트 선생님이…."

"…그 사람에게 미안한가?"

"…네… 한시도,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요. 언제나, 언제나 미안해서… 꼭, 꼭 사과하고 싶어서… 흑… 준영 씨, 미안해요… 미안해…."

"...."

이하나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고 잠시간 텐트 안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묵묵히 이하나의 울음소리를 듣던 사내가 한차례 제 눈가를 문질렀다.

"…정신계 내성이라도 있는 건가? 마안에 대응할 정도의…."

조용히 중얼거리던 사내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 능력이 통했나 통하지 않았나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사내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하나가 내뱉는 말은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사실이란 것인데….

"이것도 참 난감하군. 복수할 상대가 설마 후회하고 있다니…."

-앞의 두 놈하고는 달라.

사내가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그랬다.

이하나는 분명 다른 헌터들하고 달랐다.

언제나 저를 멸시하고 모욕하던 헌터들과, 겉으로는 그러지 않아도속으로는 얕잡아 보던 이들하고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래서 더 배신감을 느꼈었다.

"흑… 흐윽…."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이하나의 모습을 사내가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았다.

제89화

이하나.

그녀는 확실히 앞의 두 놈들과는 달랐다.

김준수처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까 고민되지도 않았고 신재준처럼 보자마자 살의부터 생기지도 않았다.

<마안>의 정신 지배 능력으로 들어본 그녀의 진실된 속마음은 마지막 복수를 앞둔 나를 망설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펑펑 울어가며 사과하는 이하나.

사죄하고 싶다고, 후회하고 있었다며 슬피 고하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심상 속의 두 파트너가 유난히 시끄럽다.

[반성하고 있대. 사죄하고 싶대… 우리 용서해주자!]

평소라면 문답무용으로 죽이자고만 말했을 왼쪽이가 오늘따라 굉장히 유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런 녀석과 대조적으로 먹을 것 말고는 관심도 없던 오른쪽이가 오늘은 굉장히 드물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죽이자. 사과한다 해서 그녀의 잘못이 사라지는 게 아냐. 길었던 우리의 복수도 이걸로 끝내자.]

양쪽 녀석들 다 평소하고는 굉장히 다른 반응이었다.

이 두 녀석들이 이럴 정도로 이하나의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솔직히 나 역시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큼 조금 충격받기도 했다.

[거짓말! 사실은 이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으면서! 그녀가 반성하고 사죄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었잖아!]

'…어디까지나 만약의 가능성이었을 뿐이지, 정말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서 어쩔 거야? 살려주자. 용서해주자!]

[안─돼.]

평소의 느긋한 목소리로 반대하는 오른쪽이의 모습에 왼쪽이가 '캬악'거리며 소리친다.

[평소에 먹을 거 말고는 관심도 없던 녀석이 갑자기 웬일이래! 쟤는 크기가 작아서 먹을 부분도 없어!]

[그런 이유가 아냐. 은원은 확실히 해야지. 우리(내)가 몬스터가 되면서 다짐한 건 반드시 지켜야 해.]

답지 않게 차분히 말한 오른쪽이의 의견에 왼쪽이가 잠시 '으으윽─'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이번 토론은 오른쪽이의 승리인가?

그리 생각한 순간 왼쪽이가 급히 말해왔다.

[그렇게 따지면 더더욱 죽여선 안 돼! 이 여자가 우리한테 해줬던 거 잊었어? 남들이 다 욕하거나 할 때 항상 우리를 챙겨줬잖아!]

'…과연. 은혜도 입었고 원한도 입었으니. 두 개를 합쳐서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

[그래! 바로 그거야! 그때 그 시절 우리(내)가 얼마나 그녀한테서 구원받았어? 살려주자!]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확실히 왼쪽이의 말대로 당시 그녀의 작은 친절이나 호의가 내게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당시 박광열 헌터와 함께 내가 가장 의지하던 상대가 바로 그녀 아니었던가?

[이 여자의 행동에 우리가 위로받은 건 사실이지만 결국 그것도 가식이었어. 마지막에 이 여자는 어찌 행동했지? 친절을 베풀었다 해서 우리를 죽음으로 내몬 게 없어지진 않아.]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위로해 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잖아!]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지.]

[따, 따지고 보면 사실 정말 우릴 죽음으로 내몬 건 신재준 그 개자식이잖아! 이 여자는 그냥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야! 막말로 우리라면 달랐겠어? 당장 살려고 도망쳤겠지!]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언제나 남는 건 결과뿐이야.]

차분히 답하는 오른쪽이의 모습에 왼쪽이가 분한 듯 '으윽─'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오른쪽이에게 논리에서 져버린 왼쪽이는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마침내 평소 성정대로 더 못 참고 분노를 터트렸다.

[캬아아악─!! 이 썩을 자식! 맨날 먹는 거 말고 관심도 없던 녀석이…! 좋아,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아무래도 머리 세 개는 너무 많기는 했어! 이봐! 빨리 본체로 변해!]

[넌 너무 조급해. 그렇게 기분이 앞서는 대로 행동하다가는 폐만 끼칠 뿐이야.]

[평소에 제일 기분대로만 행동하던 녀석한테 듣고 싶지는 않아─!]

'…그만.'

두 파트너들의 토론이 점점 과열되자, 그제야 중재에 나섰다.

이 이상 놔뒀다간 정말 치고받고 싸울지도 몰랐다.

[그래서 어쩔 건데?! 어쩔 거야?! 살릴 거지?! 역시 살릴 거지?!]

그리고 이런 내 중재에 왼쪽이가 급히 소리쳤다. 오른쪽이는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기다린다.

'잠시만 기다려.'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 왼쪽이가 잠시 '하지만, 하지만…!'하고 중얼거렸으나 더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보조 인격으로서 내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의사였다.

그렇게 두 파트너들을 무사히 진정시키고서 이하나를 바라보았다.

"이하나. 나를 봐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 그녀의 눈가는 채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여전히 글썽이고 있었다.

제대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은 분명 과거와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기억 속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어주고는 했던 눈매가 지금은 눈물로 퉁퉁 부어 있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이하나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홀린 듯 나를 바라보던 이하나가 불현듯 탄식을 흘렸다.

"…준영… 준영 씨…?"

"그래, 맞다."

"어떠, 어떻게? 준영 씨가 어떻게…?"

이런 부분은 아무리 이하나라도 다른 두 놈과 다르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들의 입장에서 죽은 사람이 3년 만에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이니 이 반응이 정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하나에게도 다른 두 놈과 마찬가지로 구구절절한 내 사연을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으니까.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아뇨. 아니에요… 이런 말을…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저, 너무 놀라서…."

어지간히 놀라웠던 것일까, 이하나는 횡설수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리저리 잔뜩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자코 그녀를 기다렸다.

"…흑… 감사… 감사해요… 흐윽… 이렇게, 이렇게 살아 돌아와 주셔서… 정말, 정말… 흑…."

한참 만에 그녀가 내뱉은 말은 사과도 변명도 아닌 감사였다.

여전히 <마안>의 효과가 남아 있으니 틀림없는 그녀의 진심일 터였다.

다시금 울음을 터트리며 내 앞에 엎드린 이하나의 모습을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봐봐! 이런 여자를 어떻게 죽여─?! 이 바보같이 착한 여자를! 우리 살려주자? 응? 사람은 실수하는 법이잖아!]

[조용. '내'가 생각하는 중이잖아. 넌 너무 말이 많아─.]

[캬아아악! 먹을 거밖에 모르는 네놈한테 듣고 싶지 않아─!]

[아니야… 설이도 중요해.]

[설이는 나한테도 중요하거든 이놈아!]

재차 불붙기 시작하는 두 파트너의 말다툼에 조용히 고민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서 조용히 이하나를 불렀다.

"…하나 씨."

3년 만에 내뱉은 낯선 호칭에 이하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네, 네! 준영 씨! 흐윽…! 고, 고마워요. 이렇게 찾아와줘서… 그리고, 그리고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후회하시나요?"

"네…! 언제나, 언제나 후회했어요…! 저, 준영 씨한테 너무… 너무 미안해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쩔 거 같나요?"

"함께… 함께 도망칠 거예요. 같이 미궁을 나와서… 맛있는 밥 한 끼 먹으면서… 이미 돌아가신 광열이 아저씨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같이…."

이미 3년 동안 쭉 생각해왔던 것인지 이하나는 막힘없이 내뱉었다.

"신재준과 김준수에 대해서 아시나요?"

"…두 사람하고는 연락이 끊겼어요… 그때 저, 도망치듯 프랑스로 떠나버려서…."

"그럼 두 사람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시겠네요."

"...."

이하나가 멍하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이하나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나는 물끄러미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한테 먼저 들리셨군요… 제가 마지막이었어요."

한참 만에 이하나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짐작한 듯, 그럼에도 겸허한 태도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어땠나요?"

"하나 씨하고는 많이 달랐어요. 고민할 가치도 없었죠."

"…그럼 저는 다른가요?"

초연한 태도로 물어오는 이하나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태도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답이 되었는지 이하나가 싱긋 웃는다.

"다행이에요. 두 사람하고는 달라서."

"…하나 씨는 지금부터 제가 뭘 할지 알고 계신가요?"

"네… 악연을 매듭지으려 하시는걸요."

옛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의 상냥한 웃음과 함께 이하나가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당당한 눈빛이다.

오히려 내가 그녀의 시선을 피할 것만 같았다.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으시나요?"

"준영 씨가 그렇듯 저도 이곳에 매듭을 풀러 왔어요."

"...."

잠시 입을 다문 나를 보고 이하나가 자그맣게 웃었다.

"샤를로트 선생님이 모든 걸 떨쳐내라고 하셨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렇네요. 물론 선생님께서 이런 상황을 바라신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라도 이렇게 당신에게 사죄할 수 있어서.

이하나는 모든 걸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끝나 있었다.

오히려 준비되지 않은 건 나였던 모양이다.

"…하나 씨가 제 악연은 아니었어요."

"…감사해요. 저에게도 준영 씨는 정말 좋은 인연이었어요."

복수가 끝났다.

이하나는 앞의 두 놈과 참 많이도 달랐다.

그리 상쾌하지도 뿌듯하지도 않았다.

조금 공허한 느낌이다.

이렇게 인간 유준영으로서의 복수가 모두 끝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