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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49계층.

계층주가 있었다.

그것도 그 보기 힘들다는 [유니콘]이다.

보통 유니콘 하면 신성한 동물로 묘사되곤 하지만 미궁에서 발견되는 유니콘은 결국 몬스터다.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 조금 순하긴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란 것이지 헌터들에게 얄짤없는 것은 똑같다.

오히려 일반적인 동랭크의 몬스터보다 훨씬 강한 특수종에 가까운 것을 생각해보면 더 위험하기 그지없는 녀석이다.

계층주인 유니콘과 헌터들이 부딪혔다.

내가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이곳에 있던 헌터들이었는데 아무래도 원정 중에 녀석을 발견한 모양이다.

60명이 조금 안 되는 정도의 인원이 유니콘 토벌을 위해 덤벼들었다.

한 시간이 채 안 됐다.

유니콘이 제게 덤벼드는 헌터들을 전멸시킬 때까지 걸린 시간이.

이마에 달린 뿔에서 헌터들의 붉은 피를 뚝뚝 흘리는 새하얀 유니콘의 모습은 어찌 봐도 전설 속의 신성한 동물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몬스터일 뿐이다.

가능한 한 유니콘을 토벌하기 위해 올 토벌대와의 전투까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S랭크인 유니콘을 토벌하려면 그만한 수준의, 그만한 전력의 인원을 보내야 할 텐데 분명 꽤 적지 않은 헌터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 많은 헌터들을 상대로 제대로 도망칠 자신이 없다.

나는 아직 37계층에서 겪었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때처럼 조마조마하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고작 싸움 구경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싶지도 않다.

고작 단순한 싸움이 아니기는 할 테지만.

* * *

50계층.

주변의 마력 농도가 확 달라지는 곳이다.

지금까지는 굳이 신경 쓰지 않으면 그리 문제없는 정도였지만 50계층부터는 확실히 달랐다.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주변을 맴도는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짓누르듯 묵직하게 압박하는 짙은 마력에 온몸의 비늘이 쭈뼛 선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차올랐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잔뜩 긴장했던 것과 달리 50계층에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이 더러운 날씨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전했고 오크들도 여전히 볼 수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헌터들이 없다는 것 정도일까?

아무래도 현재 서울 대미궁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용암 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깊숙한 곳이다 보니 헌터들이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용암 구역에서 활동하는 것은 정말 몇몇 소수의 헌터와 길드들뿐이었으니, 용암 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 헌터들이 적은 것은 당연했다.

'아, 바로 전 계층인 49계층에 계층주가 나타난 것도 한몫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50계층에 헌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됐다.

조금 기분이 묘하다.

지금껏 좋든 싫든 헌터들을 꾸준히 보아왔는데, 앞으로부터는 헌터들을 보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생각하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다.

조금 아쉬운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행이다 싶다.

적어도 앞으로는 그 괴물 같은 헌터들에게 토벌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으니까.

굳이 헌터들에게 내 존재를 들킬까 싶어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었다.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낀다.

헌터들로부터 비교적 안전해졌다고는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헌터들의 존재가 사라진 것이지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몬스터부터 시작해서 미궁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기후까지.

당장 헌터들보다 위험한 것들이 이 밑에는 차고 넘친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헌터들보다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위험할 것이다.

이 밑은 최강이라 불리던 그 '성재명'조차 살아 돌아오지 못한 험지니까.

때아닌 해방감에 슬며시 풀어지려던 긴장감을 단단히 조인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항상 긴장하며 조심해서 살자.

그리고 강해지자.

더는 아무런 눈치도 볼 필요 없을 정도로.

나는 잘 할 수 있을 거다.

분명히.

제48화

오크라는 몬스터는 굉장히 호전적인 종이다.

지금껏 수많은 몬스터를 만나왔지만 호전성으로만 보자면 오크에 비할 수 있는 몬스터가 몇 없었다.

오크들이 얼마나 호전적이냐면, 자신이 속한 무리 말고는 모든 것을 적으로 보았다.

설령 같은 오크라 하더라도 부락이 다르다면 결국 적이자 사냥감이다.

동족포식까지도 서슴지 않는 잔혹하고 호전적인 종족.

그것이 바로 오크다.

50계층에는 총 세 무리의 오크들이 삼파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나는 일반적인 오크 무리였고, 다른 하나는 레드 오크였으며,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그린 오크]였다.

녀석들은 평원의 영역권을 가지고 한창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꽤나 심각한 전투였다.

비록 피부색은 다르지만 같은 동족이라 할 수 있는 상대를 죽이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다.

쓰러트린 상대를 그 자리에서 곧장 뜯어먹을 때는 아무리 나라도 조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호전적인 종족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건 호전적인 것을 넘어서 잔혹하기까지 했다.

사실 평야 구역에 처음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지랄 맞은 날씨 덕택에 평야 구역에 들어서자마자 그 기대가 시작부터 산산조각 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기대하고 있었다.

평야 구역에는 오크들이 서식하고 있었고, 부락을 지어 모여 사는 오크 정도라면 충분한 지성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리자드맨 정도는 될 테니 사념대화를 통한다면 분명 대화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번에도 산산이 조각났다.

오크의 호전성은 그들이 가진 지성 이상이었다.

대화는커녕 마주치자마자 전투를 벌이는 게 일상이다.

덕분에 깨달았다.

몬스터 사이에 지성 있는 대화는 사치다.

미궁은 결국 약육강식.

17계층의 리자드맨들이 특별했을 뿐 결국에는 이게 정상이다.

실제로 가만 생각해보면 17계층의 리자드맨 말고 이후에 만난 리자드맨들도 하나같이 나를 적대했었다.

그 점을 떠올려보면 역시 이상한 것은 현명한 비늘이나 17계층의 리자드맨들이겠지.

그리 생각하니 아주 조금 씁쓸해졌다.

결국 그때처럼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없는 것일까?

몬스터를 상대로 마음 편한 대화를 바라기에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일까?

이런 생각도 종종 든다.

아예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물론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인간 유준영이었을 때의 기억 없이 오롯이 지금의 내 기억밖에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도 않았을 텐데.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을 텐데.

외로움 따위 느끼지 않고 온전한 몬스터로 살 수 있었을 텐데.

부질없는 망상이다.

인간 유준영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

물 흐르듯 흐르기 시작한 상념을 떨쳐냈다.

가볍게 고개를 젓는 내 앞에 펼쳐진 것은 광기에 휩싸인 채 서로를 죽고 죽이는 몬스터(오크)들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내가 있을 곳이자 지금의 내가 있는 곳이다.

잠시간 그 잔혹한 풍경을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몸을 움직였다.

오늘의 날씨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말 지랄 맞기 그지없었다.

나를 위협하던 헌터들의 존재가 없기 때문일까?

나는 별 망설임 없이 세 진영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평소라면 위험해서라도 절대 끼어들지 않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지금만큼은 위험성이라든지, 상대의 숫자라든지, 전력이라든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몸을 움직이고 싶다.

나는 평원을 가득 채운 광기에 몸을 맡겼다.

스스로의 이중성을 느낀다.

언젠가는 그나마 남아 있던 인간성을 지키고자 했으면서 또 지금은 그 일말의 인간성마저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스스로를 이제는 명백한 몬스터라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직 완전한 몬스터가 아니라 생각한다.

이렇게 어중간해서야.

나 자신의 이중성에 절로 자조적인 미소가 흘렀다.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툼에 승자는 없었다.

셋 다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얻은 것은 없다.

승자는 없고 패자들만 있는 싸움.

그것은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번 전투로 얻은 소득은 거의 없었다.

이미 B랭크의 한계까지 성장한 능력치는 그 이상 쉽게 오르지 않았고 오크들과의 전투에 상처만 잔뜩 입었다.

전투의 도중에 이따금 오크들을 잡아먹기는 했으나 새로 보충한 에너지보다 상처를 재생하는 데 든 에너지가 더 많았다.

어떻게 봐도 손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싸움.

나는 조용히 전투가 있던 평원을 떠났다.

참지 않고 마구 몸을 움직였음에도 여전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한 기분이다.

* * *

51계층은 평야 구역의 다른 계층들에 비해 유달리 날씨가 더러웠다.

쉼 없이 몰아치는 세찬 강풍에 몸이 몇 번이고 들썩거렸다.

아무래도 영 좋지 않은 시기에 도착한 것 같다.

가급적 빠르게 이동하고 싶었으나 날씨가 날씨인지라 제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적당히 땅굴을 파고 그 안에 몸을 숨겼다.

여전히 폭풍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래 들어 잡생각이 많아진 것 같다.

과거에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만, 근래에는 나도 꽤 강해지고 아무래도 좀 더 여유가 넘치다 보니 그런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토굴 속에서 날씨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런저런 상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 주제는 저번부터 이따금 생각하던 것.

여전히 해답 없는 문제에 가슴 한편이 답답해진다.

이럴 때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도록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인데….

이놈의 더러운 날씨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평야 구역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역시 나와 가장 맞는 곳은 산림 구역인데….

무심코 떠오르는 리자드맨들에 대한 기억에 나지막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별다른 감정적 교류가 없다시피 하다 보니 꽤나 외롭다.

하다못해 말을 나눌 말벗이라도 있었다면 좋으련만….

말했다시피 다른 몬스터들에게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사치다.

아니, 다른 몬스터들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사치다.

살아남기에도 강해지기에도 바쁜데, 시답잖은 대화나 감정적 교류를 나눌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역시 여유가 생기니 잡생각이 많아지는구나.

이놈의 폭풍은 도대체 언제 그칠까?

아니, 아예 그치는 것을 바라지는 않으니 최소한 움직일 정도로만 날씨가 풀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뭐든 하지.

결국 세차게 몰아치던 폭풍은 사흘이나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오랜 시간 토굴 속에 있느라 잔뜩 굳은 몸을 풀어주며 밖으로 나섰다.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해 잠잠해졌다 뿐이지 여전히 더럽기 그지없는 날씨가 나를 반겼다.

그나마 여기는 오크들이 안 날아다니는구나.

그건 좀 마음에 들었다.

51계층은 그 날씨만 다른 기후에 비해 더 지랄 맞은 게 아니라 워프 게이트도 찾기가 힘들었다.

딱히 다른 계층에 비해 숨겨져 있다는 느낌은 아닌데 이상하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부지런히 돌아다닌 결과. 결국 워프 게이트를 찾을 수는 있었다.

망설임 없이 곧장 52계층으로 이동했다.

* * *

52계층은 별것 없었다.

여전히 오크들이 서로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것 정도뿐이다.

다른 계층들에 비해 헌터들이 잘 보이지 않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물론 당연하게도 날씨는 여전히 더럽다.

* * *

53계층에는 계층주가 있었다.

A랭크.

일전에 보았던 유니콘에 비해 한 랭크 낮은 등급의 계층주였지만 오히려 지난번의 유니콘이 특이했을 뿐이다.

보통 평야 구역에서 S랭크라면 구역주(에어리어 보스)까지도 가능한 등급이었으니까.

보통 각 구역마다 구역주들의 랭크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상층 구역은 C랭크, 산림 구역이 B랭크, 사막 구역은 A랭크.

그리고 평야 구역이 S랭크.

보통 이런 식으로 일정 수준의 평균이 정해져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당장 내가 보았던 것들처럼 평균에 비해 훨씬 강한 수준의 몬스터가 계층주, 또는 구역주가 될 수도 있다.

앞에서 설명한 랭크들도 정확히는 평균이 아니라 구역주가 될 수 있는 최소치에 가까웠다.

구역주란 것은 결국 그 구역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

적어도 최소치 정도는 되어야 될 수 있다.

53계층의 계층주는 오크였다.

당연하게도 일반적인 오크는 아니고 [블랙 오크]라는 아종이다.

일반적인 오크들에 비해 훨씬 험상궂은 인상을 가진 녀석들은 일반 오크를 기준으로 다섯 배에서 최대 열 배까지 강하다고 하는데.

이는 직접 부딪혀 본 결과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B랭크의 [블랙 오크 워리어]와 싸웠는데 꼼짝없이 역으로 사냥당할 뻔했다.

내 특유의 재생 능력 덕택에 결국 승리하긴 했지만.

이렇듯 다른 오크들에 비해 강력한 블랙 오크 중에서도 52계층의 계층주는 [블랙 오크 샤먼]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주술사로 주술 같은 마법에 능통한 몬스터다.

평소라면 아무래도 계층주이고 그 무리의 숫자가 워낙 많았기에 조용히 피해갔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녀석이 샤먼이란 것에서부터 뭔가 느낌이 팍 왔기 때문이다.

만약 녀석의 마석을 먹을 수만 있다면 새로운 마법 스킬들이 생기지 않을까?

독마법이란 스킬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정통 마법하고는 달랐기에 내 마법에 대한 열망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나도 불덩이를 날리고 싶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한번 위험을 무릅써 보았다.

녀석을 잡아먹겠다.

비록 그 상대가 A랭크에다가 계층주, 게다가 그 밑의 수많은 부하들까지 두고 있는 녀석이라지만, 내게도 다 생각이 있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기는 했어도 언제나처럼 목숨까지 걸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직 해야 할 것이,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으니까.

* * *

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비록 내 독은 상대를 죽이는 것에만 특화된 독이지만 독마법으로 사용하는 독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수면독이나 마비독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상대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독까지 그 종류나 위력이 꽤나 다양하다.

지금껏 그리 쓸 일이 없어서 그렇지 제대로 쓰려고만 하면 무궁무진한 활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독마법 자체도 꼭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데….

역시 나는 불덩이가 날리고 싶다.

'파이어 볼' 하고 말이다.

내 독마법의 랭크는 아직까지 B랭크다.

그리 낮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생각하면 그리 높은 수준도 아니다.

만약 상대를 단번에 중독시키거나 죽이려고 했다면 아무래도 역부족이었겠지만, 다행히도 내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천천히라도 좋으니 확실히 중독시킬 생각이다.

아무래도 얼마간은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더러운 날씨 탓에 정말로 싫었지만 불덩이를 향한 나의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오크들의 부락에 독을 풀었다.

효과는 느리지만 확실히 나타났다.

제49화

내가 사용한 독은 세 가지다.

수면 독과 마비 독, 그리고 상대를 약체화시키는 독.

이렇게 총 세 가지를 사용했다.

어디까지나 독마법을 이용한 것이기에 혹시나 마력에 예민한 샤먼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들키는 일은 없었다.

길면 일주일 정도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블랙 오크들의 자체적인 내성이 그리 높지 않은지 녀석들을 모두 중독시키는 데 나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부락에 쓰러지는 오크들이 속출했다.

물론 모든 오크가 쓰러진 것은 아니다.

개체마다 편차가 존재했다.

랭크가 높은 오크 같은 경우에는 쓰러지지 않았지만 일부 신체가 마비되거나 크게 기력이 쇠한 것이 눈에 보인다.

계층주인 샤먼 같은 경우에는 겉으로 보기에도 큰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분명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전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슬 움직여도 괜찮을 것 같다.

목표는 샤먼의 마석이지만 녀석만 처리할 수는 없었다.

녀석의 보금자리가 오크 부락의 중심지에 있기도 했고, 부락의 오크들 상당수가 쓰러진 지금에도 녀석의 보금자리 주변만큼은 경비가 철저했기 때문이다.

샤먼의 마석을 얻으려면 오크들과 싸우는 것은 필연이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부터 이런 점은 예상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부락에 있는 오크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는 하지만, 시작부터 독을 이용해 전력의 대부분을 갉아먹었으니 걱정도 없다.

아무리 블랙 오크가 동랭크의 다른 오크들보다 강하다고는 해도 저렇게 비실대서야 내 한 끼 식사일 뿐이다.

오랜만에 상당히 포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는 샤먼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오크들부터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을 변경했다.

역시 이런 습격에는 가장 강한 우두머리부터 먼저 처리하는 게 옳다.

그간 독을 풀기 위해 부락을 몇 번 들락거린 결과, 아무리 A랭크의 샤먼이라도 내 은신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샤먼이 머무는 보금자리까지 숨어들 수 있었다.

예상대로 샤먼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보금자리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내 예상보다 한층 더 상태가 심한 것 같다.

독 내성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일까?

아무리 중독되었다고는 해도 명색의 A랭크의 계층주인만큼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한 샤먼은 상당히 골골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랭크가 낮은 다른 블랙 오크들보다 더 심해 보인다.

괜히 다른 독을 쓸 필요 없이 내 독을 풀었던 게 좋았을까?

독마법과 내 자체적인 독을 잘 조합하면 생각보다 쉽게 죽일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후회스럽기는 해도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내 예상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랄까?

나름 격렬한 전투를 생각했지만 저런 상태의 샤먼이라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코앞에서 저를 살피는 내 존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걸 보면 이대로 콱 집어삼켜도 괜찮을 것이다.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신속했다.

공격의 순간 꾹 감겨 있던 샤먼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일반적인 A랭크 몬스터보다 신체 능력 자체도 낮고, 약체화되어 있는 녀석은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덥썩- 콰직─

처음 먹어본 블랙 오크는 흑돼지 맛이 났다.

이름 그대로였다.

* * *

샤먼 정도 몬스터라면 당연히 마석이 있을 것이고, 그 마석을 먹어치우는 데 성공했지만 당장 무언가 변화는 없었다.

아마 이전에도 그랬듯 진화가 끝나면 새로운 스킬이 생길 것이다.

다행히 체감하기로는 진화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기에 별로 조급함은 없다.

제발 내가 소망하던 화속성 마법이 생겼으면 좋겠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간절히 빌어야 할까?

따로 빌 신은 없고… 역시 시스템한테?

샤먼을 생각보다 쉽게 먹어치운 뒤, 예정했던 대로 다른 오크들을 습격했다.

우두머리의 보금자리에서 뛰쳐나오는 내 모습에 오크들이 몹시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런 녀석들을 즐겁게 바라보다 곧장 난동을 피웠다.

당연하게도 오크들이 나를 막으려 했지만, 그들로서는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나와 같은 B랭크도 여럿 있기는 했으나 평소보다 약해져서야 당연히 무리다.

나를 막기 위해 곳곳에서 달려오는 오크들을 아주 맛있게 잡아먹었다.

흑돼지 무한 리필 파티였다.

오크들의 호전성은 정말 대단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동료들이 자꾸만 잡아먹혀도 끊임없이 덤벼든다.

함성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달려드는 녀석들의 모습에서 광기를 느낀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만 덤벼드는데도 끝이 없다.

조금 당황스럽다.

원래는 적당히 싸우다가 슬그머니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뒤가 없이 덤벼드는 녀석들을 보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뇌리를 강타한다.

이제 와서 빠져나가려고 하면 과연 저 녀석들이 순순히 나를 보내줄까?

아무리 그래도 우두머리를 잃고 계속 쓰러트리다 보면 녀석들 쪽에서 먼저 도망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래. 이건 역시 뭔가 잘못됐다.

그냥 얌전히 샤먼만 먹어치우고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열심히 노력하는 수밖에.

처음에는 단순히 즐길 생각밖에는 없었지만 심상치 않은 상황을 깨닫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덤벼드는 오크들을 죽이고 먹어치운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반복적인 행동을 계속한다.

시간이 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넓은 오크 부락에 있는 것은 나밖에 없었다.

승리한 것이다.

조금 얼떨떨하다.

그 많던 오크들을 내가 다 해치우다니.

물론 쓰러져서 움직일 수 없던 오크들이 아직 부락 곳곳에 있겠지만, 적어도 당장 근처에 더 움직일 수 있는 생물은 분명 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기분 좋은 쾌감이 온몸을 강타했다.

분명 정상적인 상태의 오크들이었다면 이렇게 승리하는 것은 물론,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

그래도 어쨌거나 결국 살아남고 승리한 것은 나였다.

애초에 오크들을 약화시킨 것도 내가 해낸 것이었으니 이번 승리는 순수하게 기뻐해도 좋을 것이다.

무지무지 기쁘다.

쓰러트린 오크의 숫자가 숫자이니만큼 진화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아직 뭔가 부족한 것일까?

분명 체감상 멀지 않았다고 느끼고는 있지만, 그 거리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정말 슬슬 진화하면 좋겠는데….

이후, 부락을 떠나지 않고 한차례 정리를 했다.

중독된 채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오크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전투를 치르며 적지 않은 오크들을 잡아먹었지만, 실제로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양은 싸우기 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먹어치우는 족족 재생이나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한차례 부락을 둘러본 결과 살아남은 오크들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당장 내게 덤벼들었던 오크들보다 배는 많은 숫자다.

조금 뒷덜미가 서늘했다.

만약 이 녀석들 전부가 전투에 참여했다면 어땠을까?

오크들을 먹어치우며 계속 에너지를 보충하는 이상 쉬이 패배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길 거라고 상상되지도 않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 무지막지한 숫자를 버티지 못하고 결국 도망쳤겠지.

처음부터 부락에 독을 풀어 다행이다.

그나저나 오크가 정말 많기는 하다.

한 계층의 오크를 대부분 몰살시켜도 바퀴벌레처럼 다시 기어 나온다는 이야기에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과연 소문대로의 어마어마한 번식력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있는 녀석들을 다 죽인다 해도 언제가 다시 숫자가 늘어나겠지.

무심코 평소처럼 무한 리필을 떠올렸지만 오크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마냥 편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한번 이겼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면 오히려 잡아먹히는 건 나일 수도 있다.

항상 주의하자.

이후 무사히 부락 내의 오크들의 씨를 말린 나는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53계층을 떠났다.

항상 짜증 나기만 했던 지랄 맞은 날씨도 오늘만큼은 조금 산뜻한 거 같다.

쿠르릉- 쾅─!

강렬한 번개가 바로 코앞에 떨어졌다.

산뜻하다는 말은 취소다.

* * *

54계층에는 별것 없었다.

53계층처럼 계층주가 있었지만 샤먼 때와는 달리 이쪽에서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상대였다.

못해도 A랭크 후반. 준 S랭크의 몬스터다.

이번에는 얌전히 지나가자.

평야 구역의 마지막 계층인 55계층은 현 헌터들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용암 구역으로 향하기 전의 마지막 관문이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한밤중이었다.

54계층에서 게이트를 찾기가 조금 힘들었던 까닭이다.

중간에 계층주를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기에 더 힘들었다.

평야 구역의 마지막 계층이자, 용암 구역으로 향하는 관문이 눈앞에 있다.

이제 슬슬 이 지긋지긋한 평야를 떠나겠구나 싶어 시원함을 느끼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조금씩 평야 구역의 더러운 기후에 적응하고 있기도 했고, 계속 지내다 보니 이곳도 나름 살 만한 곳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마음만 먹으면 돼지고기도 자주 먹을 수 있고 정말 화속성 마법만 생기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심코 생각을 잇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별생각을 다 하는구나.

이 지옥 같은 곳이 살 만하다니.

스스로 생각해 놓고도 참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원섭섭한 마음에 막 55계층으로 발을 들인 찰나,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언제나처럼 광활한 평원과 내리치는 폭풍우였다.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어두컴컴한 먹구름 아래 즐비한 수많은 시체.

무심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쿠르르- 쾅─!' 내리치는 번개에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무슨…?

평야를 가득 메운 것은 익숙한 오크들의 시체와 헌터들의 시체였다.

대규모 전투라도 벌어진 것일까?

슬금슬금 주변을 경계하며 이동하니 딱히 살아 있는 기척은 없었다.

가까이서 살피니 그 숫자가 훨씬 많다.

오크들 쪽의 숫자가 더 많긴 하지만 헌터들 쪽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다.

따로 위로 올라가는 헌터들의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 용암 구역의 원정에서 돌아오던 헌터들인 것일까?

정확한 판단은 할 수 없었지만 얼핏 그럴 것 같았다.

헌터들이 입고 있는 장비 위에 새겨진 길드 마크가 제법 익숙했기 때문이다.

5대 길드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유명한 길드였지.

공격적인 확장 방법으로 다른 중소 길드들을 흡수하며 그 덩치를 불린 대형 길드였다.

분명 기억하기로는 단기간에 덩치는 커졌어도 그 반작용으로 실속은 전혀 없는 그런 길드였었는데….

용암 구역에 원정을 다닐 정도면 그간 내실도 제법 단단히 다진 모양이었다.

물론 이렇게 많은 헌터들이 죽어서야 그 단단해진 내실도 이제는 별 소용은 없을 테지만.

그렇게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불현듯 미약한 기척을 느꼈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것 같은 자그마한 숨소리.

나는 곧장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다른 오크들보다 서너 배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거대한 오크와 그런 오크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은 헌터가 하나 있었다.

주변보다 특히나 엉망인 풍경이 이곳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미약하게 들려오는 숨소리는 헌터에게서 나고 있었다.

제법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헌터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기절한 것일까?

조금 더 접근해 본다.

여전히 미동도 없다.

그제야 조금 경계를 풀고 좀 더 자세히 헌터와 쓰러진 오크를 관찰했다.

당장 끊어질 듯 미약하게 느껴지는 헌터의 기척은 분명 S랭크의 것이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자그마한 기운이었지만 그럼에도 섬뜩하다.

무심코 쭈뼛거리는 비늘을 진정시켰다.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인 오크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커다란 덩치와 다른 오크들에 비해 훨씬 정교한 장비를 입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강한 오크였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주위에 쓰러진 헌터들의 숫자를 보자면 S랭크 이상의 몬스터였을 것이다.

못해도 계층주. 어쩌면 구역주.

그리 생각하자 지금의 풍경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됐다.

원정 귀환 도중 만난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로 헌터들은 동귀어진이라도 한 모양이다.

물끄러미 오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불현듯 눈을 감고 있던 헌터의 눈이 슬며시 뜨였다.

반사적으로 움찔 몸이 떨렸다.

"───."

헌터의 입에서 무어라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뜻을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언어가 아니었다.

다행히 덤벼들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다 죽어가는 상태라고 해도 S랭크인 만큼 위험할지도 몰랐는데, 정말 다행이다.

"────."

헌터는 또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이번에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언이라도 남기려는 것일까?

이제 보니 눈앞에 있는 상대가 몬스터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하긴 다른 몬스터였다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헌터를 가만두고 보지는 않았을 테니, 나를 다른 헌터쯤으로 오해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잠자코 헌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잠시간 무어라 중얼거리던 헌터는 이내 눈을 감았다.

여전히 무어라 내뱉은 것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헌터의 얼굴은 제법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실낱같이 이어지던 미약한 숨이 끊겼다.

잠시 숨이 끊어진 헌터를 바라보던 나는 곧 쩌억- 주둥이를 벌렸다.

헌터와 함께 오크 역시 집어삼켰다.

이후, 도착하기 전과 달리 아무런 시체도 남지 않은 평원을 뒤로한 채 나는 워프 게이트를 넘었다.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마경.

용암 구역이다.

제50화

용암 구역에 도착한 이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정확한 날짜를 세는 것은 포기했다.

여유롭게 날짜 따위를 세기에는 용암 구역이 마냥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저 얼추 짐작으로 반년 정도 흐르지 않았을까 싶었다.

처음 산림 구역을 떠나고서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현재 용암 구역 61계층에 머무르고 있다.

용암 구역은 그 이름 그대로 시뻘건 용암들이 마치 강이나 바다처럼 흐르는 곳이다.

미궁의 환경이 원체 험하기는 하지만 용암 구역은 이전의 구역들과 그 궤를 달리하는 곳이다.

바로 이전 구역인 평야 구역과 비교해서 활동하는 헌터들의 숫자도 대폭 줄어들었고, 그마저도 개인으로 활동하는 헌터는 존재하지조차 않는다.

못해도 100여 명 이상의 헌터로 구성된 대형 공격대만이 간간이 구역의 초입 부분에서 활동할 뿐이다.

서식하는 몬스터의 수준도 크게 올랐다.

미궁 생태계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저랭크 몬스터들의 수준은 크게 달라진 바 없다.

하지만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고랭크 몬스터들의 수준이 말도 안 되게 높다.

지나가다 툭하면 마주치는 게 B랭크 몬스터고, A랭크 몬스터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이상의 S랭크 몬스터조차 이따금 보이는 것이, 그 기후만큼이나 이곳 용암 구역은 인와마경이었다.

헌터들 입장에서 이만큼이나 지옥 같은 곳이 또 있을까?

용암 구역에 도착한 이후 나는 정말 많은 적들과 싸웠다.

나보다 약한 적들도 많았지만 때로는 나보다 강한 적들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해치워 잡아먹었고 때로는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간 적도 있었다.

그중에는 몬스터도 있고 헌터도 있었다.

그 수가 소수일 때도 있었으며 다수일 때도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때로는 싸움에 지쳐 잠시 휴식을 취했던 적도 있지만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산림 구역, 여왕과 헤어진 이후부터 지난 내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생존 그 이상을 넘어선 투쟁.

혈투를 넘어선 사투.

그 무수한 전투 끝에 나는 어느 순간부터 A랭크 몬스터가 되어 있었다.

용암 구역에 도착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되었다.

내가 A랭크가 된 것도 막 평야 구역을 넘어서 용암 구역에 도착했을 쯤이니, A랭크가 된 것도 딱 반년쯤 지난 셈이다.

G랭크에서 C랭크까지 반년. C에서 A까지 1년. 그리고 A랭크가 된 지도 어언 반년째.

나는 아직 A랭크에 머물고 있다.

조급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능력치나 스킬의 상승도 어느 순간부터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동급의 A랭크 몬스터를 쓰러트려도 이렇다 할 큰 변화가 없었다.

마치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 앞에 꽉 막힌 것처럼.

아직 A랭크가 된 지 고작 반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그리 조급할 필요는 없다 싶지만, 그럼에도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간 막힘없이 나아가던 성장이 근래 들어 갑작스레 막혀버린 것이다.

어찌 조급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렇기에 계속해서 아래로 향했다.

더 아래로, 더 깊은 곳으로.

강해지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보고 움직였다.

지금에 와서는 처음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던 동기인 복수도 뒷전이었다.

복수를 위해 강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닌, 과정 그 자체가 목표가 된 것이다.

나는 강해지는 것만을 목표로 오늘도 싸움을 계속했다.

높이 뻗은 화산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검은색의 재와 연기가 날렸다.

하늘을 가득 메운 연기와 재 탓에 용암 구역은 사시사철 어두컴컴하다.

그나마 시뻘겋게 강처럼 흐르는 용암 탓에 그리 어둡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용암 특유의 시뻘건 색깔 탓에 전체적으로 그 분위기가 전혀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지옥에 가깝다면 가까웠지.

"크르르르──."

고대에 살았다던 공룡, 그중에서도 티라노사우루스와 비슷하게 생겼을 것만 같은 거대한 파충류.

흔히들 '지룡(드레이크)'라고 부르는 몬스터가 눈앞에 있다.

그 랭크는 A. 단순히 태어난 순간부터 B랭크에서 시작하는 몬스터계의 금수저다.

나 역시 엄연히 한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인 여왕을 어미로 둔 몬스터 계의 금수저지만, 그래도 눈앞의 녀석과 비교하면 상당히 뒤처진다.

누가 뭐라 해도 녀석은 그 흉악하다는 용종의 몬스터니까.

어디까지나 아룡종에 속하는 드레이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용종은 용종이다.

그동안 내가 싸워왔던 상대 중에서도 나름 순위를 다투는 녀석이었다.

전투를 앞선 몸이 자연스레 긴장하며 고조되기 시작한다.

"크아아아─!!!"

성난 울음과 함께 덤벼드는 녀석을 시작으로 나 역시 행동을 개시했다.

과거 C랭크로 진화할 당시 리자드맨 현명한 비늘에게서 받은 마석을 통해 <마안>이라는 스킬을 얻은 바 있다.

'마안'이라는 이름과 달리 지금까지는 그리 좋은 효과가 없었지만, 랭크가 오르며 성장한 끝에 이제는 제법 이름값을 하는 스킬이 되었다.

말 그대로 '마안'으로서의 성능을 확실히 뽐내기 시작한 것이다.

성난 멧돼지처럼 덤벼드는 드레이크를 피해 몸을 움직이는 한편 슬며시 눈을 떴다.

기존의 두 눈이 아닌, 이마 한가운데 새롭게 자리한 세 번째 눈을 말이다.

"크르르─?"

이상을 느낀 드레이크가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 급히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녀석이 내려다본 한쪽 몸이 그 상태 그대로 쩍 굳어 있었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의 얼굴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천리안과 매혹 능력 이후에 새롭게 생긴 '석화'의 능력이다.

'역시 용종은 용종이군. 랭크가 높아서 그리 큰 효과는 없어.'

처음 노린 것은 녀석의 몸 전체를 돌로 바꿔버리는 것이었으나 아쉽게도 신체 일부밖에 바꿀 수 없었다.

높은 내성 탓에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다.

나는 슬며시 세 번째 눈을 닫았다.

비록 처음 생각했던 대로 녀석을 완전히 돌로 바꿀 수는 없었으나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체 중 일부가 돌로 변한 녀석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진 까닭이다.

"크아앙─!"

잔뜩 굼뜨기 시작한 녀석을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뱀의 신체 조건이 싸움에 유리하지 않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장기전으로 흘러갔을 때의 일이다.

오히려 기습이나 단기 결전에 한해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이제는 자연스레 한계까지 수축시킨 근육을 일시에 팽창시킨다.

잔뜩 눌려 있던 스프링이 솟아오르듯 내 몸이 녀석을 향해 탄력을 받아 터져나갔다.

멀쩡했던 몸 상태라면 모르겠으나 신체 일부가 돌로 변한 지금의 녀석으로서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삽시간에 녀석의 몸을 감싸 안아 그대로 몸을 조인다.

길쭉한 녀석의 목에 주둥이를 박아넣었다.

살기 위해 녀석이 이리저리 몸을 버둥거리지만 그래봤자 더 단단히 조일 뿐이다.

"크… 크르르…."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발버둥 치던 녀석의 몸이 어느 순간 잠잠해지더니 그대로 축 늘어진다.

쿵쿵- 연신 뛰어대던 심장의 고동도 뚝-하고 멎었다.

스르르- 몸을 풀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채 잠시간 쓰러진 녀석을 잠시간 내려다보았다.

분명 같은 A랭크 몬스터였음에도 쓰러트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녀석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 계층에서 나름 힘 좀 쓰고 다닐 만한 수준이었음에도 내게는 너무나 쉬웠다.

그렇기에 승리했음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저 언제나처럼 덤덤히 승자로서의 권리를 누릴 뿐이다.

쩌억- 주둥이를 벌려 그대로 녀석을 집어삼켰다.

꿀렁꿀렁- 목을 넘어, 식도를 타고 위장 너머로 넘어가는 게 느껴진다.

<폭식> 덕에 소화 시간은 비약적으로 빨라졌지만 여전히 이때가 가장 무방비해지는 시간이다.

습관적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메케한 화산재 냄새와 간간이 느껴지는 저랭크 몬스터들의 기척.

당장 나를 위협할 만한 상대는 근처에 없었다.

잠시간 삼킨 녀석의 시체가 완전히 소화되기를 기다린 다음 몸을 움직였다.

후덥지근한 열기를 피해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이다.

* * *

현재 마안의 능력은 총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잘 알다시피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까이 있는 것처럼 크게 볼 수 있는 천리안 능력이다.

이 능력은 굳이 세 번째 눈이 아니더라도 평범하게 사용이 가능하다.

두 번째는 편의상 매혹 능력이라 이름 붙인 능력이다.

내가 적당히 '매혹'이라 이름 붙이긴 했지만 그 정확한 능력은 정신 지배에 가깝다.

가벼운 매혹이나 간단한 암시를 통해 상대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인데, 마법 저항력이 높거나 어느 정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상대라면 저항이 가능했다.

물론 마력을 다룬다고 해서 다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기본적으로 나보다 마력이 낮은 상대라면 열에 아홉은 저항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 능력은 무조건 세 번째 눈을 통해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메두사처럼 상대를 돌처럼 굳게 만들 수 있는 석화 능력이다.

이는 굉장한 것 같지만 아까 드레이크를 상대로 보았던 것처럼 사실 제한이 있는 능력이다.

앞서 매혹 능력이 그랬던 것처럼 마법 저항력이 높다거나 어느 정도 마력을 다룰 수 있다면 자체적인 내성으로 저항이 가능하다.

보통 나보다 약한 상대들, 정확히는 양학을 할 때 종종 사용하고는 한다.

귀찮게 몸을 움직일 필요가 없거든.

이 능력 역시 무조건 세 번째 눈을 통해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현재까지 <마안>의 능력은 이 세 가지뿐이지만 앞으로 또 새로운 능력이 더 생길 것이라 생각된다.

천리안을 제외한 다른 두 능력도 <마안>의 랭크가 오르며 생겼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또 어떤 능력이 생길지 기대된다.

* *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일반적인 A랭크 몬스터가 아니다.

단순히 보통의 A랭크 이상으로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일반적인 A랭크 몬스터의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개체와는 다른 특별한 능력이나 특징을 가진 개체.

흔히들 '변이종'이라 부르는 개체가 바로 나다.

-이름 : 유준영(?)

-종족 : 몬스터 - [서드 아이 스피릿 보아]▶상세 보기

-능력치

힘 A55 / 체력 A53 / 민첩 A58 / 내구 A67 / 마력 A68

-스킬

유체이탈SS [사용 불가], 근성A, 한계돌파S, 암영S, 암습S, 조이기A, 직감S, 초재생S, 맹진A, 극독A, 위압S, 카운터A, 독 내성S, 테일 스트라이크A, 폭식S, 두꺼운 비늘A, 마력조작S, 사고가속A, 신체강화A, 마안B, 고열내성A, 혹한내성A, 마력저항A, 독마법A, 화마법D, 수마법D

내 원판이 되는 종은 [스피릿 보아]라는 몬스터다.

남미 쪽의 미궁에서 던전 보스(미궁주)로 주로 등장하는 몬스터로, 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반(半)정령에 가까운 몬스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 정령 같은 존재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정령처럼 마법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해서 정령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반정령이라 불리지만 엄연한 몬스터.

그것도 미궁의 주인으로서 주로 나타나는 위험도 최상의 A랭크 몬스터.

그것이 바로 [스피릿 보아]다.

그리고 그 스피릿 보아에서 한 발짝 나아간 변이종이 바로 나, [서드 아이 스피릿 보아]다.

단순히 직역해서 '세 번째 눈을 가진' 스피릿 보아라 보면 되는데, 이러한 변이는 아무래도 내가 가진 <마안>의 영향인 것 같았다.

기본적인 특징은 스피릿 보아와 크게 다른 것이 없으며,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역시 이마 가운데 숨겨진 세 번째 눈이다.

그 능력은 앞서 설명했던 것과 같았다.

그 이후로 잠시 열기를 피해 몸을 식힌 나는 재차 활동을 재개했다.

아무리 많은 적을 쓰러트려도 이렇다 할 성장이나 변화는 없었으나,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잔혹한 미궁이다.

가만히 있어서는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성장을 위해 강해지기 위해 나는 더욱더 강한 상대를 찾아야 했다.

제51화

아래로. 더 아래로.

하염없이 전진했다.

가로막는 상대가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망설임 없이 쓰러트렸다.

이미 같은 A랭크의 몬스터도 어지간해서는 내 상대가 되지 않는데 그마저도 되지 않는 몬스터들이 나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위협이 없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나보다 랭크가 낮은 몬스터라도 무리를 짓기 시작하면 상대하기 버거웠다.

A랭크 몬스터 중에서도 제법 만만치 않은 상대가 있었으며, 개중에는 나같이 동랭크의 몬스터 중에서도 조금 특출나다 싶은 놈들도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용암 구역의 62계층.

평소와 마찬가지로 덤벼드는 놈들과 또 나를 피해 도망 다니는 놈들까지 모두 공평하게 쓰러트리고 있자 불현듯 녀석이 나타났다.

"크르르…."

나지막한 하울링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곳 용암 구역에서 제법 익숙하게 볼 수 있는 '레드 드레이크' 중 하나였다.

못해도 A랭크 이상.

그냥 평범한 레드 드레이크 중 하나라면 이미 몇 번이고 쓰러트려 왔기에 큰 문제 될 것 없었지만, 눈앞에 나타난 놈은 다른 것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보통보다 1.5배 정도 더 보이는 덩치와 한층 더 날렵하고 사나운 외모.

결정적으로 한쪽 눈 위로 자리한 길쭉한 흉터까지.

척 보기에도 녀석의 모습은 범상치 않았다.

'플로어 보스(계층주)?'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몸이 자연스레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반사적으로 온몸의 근육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먼저 공격할까? 아니면 한 번쯤 지켜보면서 놈에 대해 파악할까?'

싸우지 않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놈을 마주친 순간부터 녀석을 쓰러트리기로 마음먹었다.

혹여 놈이 나보다 강할 수도 있었다만 도망 따위는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직감>이 생각보다 조용한 걸 보면 상대하지 못할 적은 아니다.'

그동안 함께해온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직감'이라면 다른 어느 것보다 신뢰할 수 있었다.

때로는 내 개인의 판단보다 직감 쪽의 판단을 더 신뢰하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크르릉."

아무래도 방어보다는 선공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사이 불현듯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소란을 피우던 것이 네놈이냐?]

귀가 아닌 머릿속에 곧바로 전해지는 사념.

기억 한구석에서 경험해본 이것은 틀림없는 '사념대화'였다.

Shii───

산림 구역에서 여왕과 헤어진 이후로 처음 들어보는 사념대화였다.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념대화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투지가 한풀 꺾여나갔다.

[사념대화를 할 줄 모르는 건가?]

크르르─

재차 머릿속을 울리는 묵직한 저음에 잠시 머뭇거리다 답을 했다.

[…알고 있다.]

오랜만에 해본 사념대화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익숙지도 않았다.

[흠… 적어도 대화를 할 지성 정도는 있는 모양이군.]

짤막하게 답한 나를 향해 한 차례 콧방귀를 뀐 놈이 재차 말을 잇는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물으마. 네놈이 요즘 위층을 소란스럽게 만들었던 그놈이냐?]

[딱히 소란까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사냥을 했던 적은 있지.]

[흐…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는군.]

짧은 코웃음과 함께 고개를 주억인 녀석이 물끄러미 이쪽을 노려봤다.

[한 가지 묻지. 굳이 막아선 녀석들을 쓰러트린 이유는? 네놈 정도의 지성이 있다면,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잘 타이른다? 몬스터끼리? 우스운 질문이군.]

이전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이쪽이 코웃음을 칠 차례였다.

삐딱하게 웃는 나를 향해 놈이 쓰게 웃었다.

[…뭐, 네 녀석 이야기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몬스터끼리 대화가 다 무슨 소용이겠나? 그저 서로 죽고 죽이면 그만이지.]

느릿느릿 고개를 주억이던 놈이 이내 활짝 몸을 폈다.

안 그래도 커다랗던 덩치가 아까보다 배는 커 보였다.

[두목님이나 형님은 어디 한번 잘 타일러 보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쪽은 영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다!]

[두목? 형님?]

의아하게 반문하는 나를 향해 놈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싸움이구나! 비록 그 상대가 네놈처럼 되다 만 뱀에 불과하지만!]

[…있는 거라고는 고작 짧은 팔다리가 전부인 도마뱀 놈이.]

크르르-

쉬이이-

한차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우리는 곧장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비록 제대로 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데다, 오랜만에 나눠본 대화에 그 투지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나만큼이나 놈 역시 싸울 생각뿐이었으니 말이다.

놈은 그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무척 민첩한 몸놀림을 보여줬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한순간 그 움직임을 눈에서 놓칠 정도였다.

평소 시각보다는 혀의 감지 능력에 더 의존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간발의 차이로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한 나를 대신해 텅 빈 허공을 물어뜯은 놈의 주둥이가 곧장 이쪽을 향했다.

"───!!!"

차마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사나운 울부짖음 토해낸 놈이 그 길쭉한 꼬리를 휘둘렀다.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기다란 꼬리에 나 역시 지지 않고 마주 꼬리를 휘둘렀다.

마침 내게는 이 상황에 딱 어울리는 스킬이 있었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A>를 사용합니다.]

언제나처럼 들려오는 고저 없는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놈과 내 꼬리과 허공에서 충돌했다.

"샤아──!"

"크아아아───!!!"

아찔한 고통이 밀려온다.

분명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마치 꼬리가 뚝 끊어진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저놈도 같은 스킬을 가진 건가?'

다행히 놈 역시도 나만큼이나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스킬 <근성A>가 발동됩니다.]

[스킬 <초재생S>가 발동됩니다.]

곧바로 발동되는 두 스킬 덕에 고통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에 반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놈을 향해 이번에는 이쪽에서 먼저 몸을 날렸다.

[스킬 <신체강화A>를 발동합니다.]

[스킬 <맹진A>를 발동합니다.]

마력을 통한 '신체강화'에 더불어, 저랭크 시절 때부터 꾸준히 사용해오던 돌진의 상위 스킬 '맹진'까지.

마치 미사일처럼 쏘아져 나가는 이쪽의 행동에 놈의 황급히 몸을 피했다.

이번에도 그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급히 몸을 피하는 녀석을 향해 나는 곧장 세 번째 눈을 사용했다.

동일한 랭크, 용종이 가지는 자체적인 마력저항력까지 생각하면 석화든 매혹이든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작은 틈 하나뿐이었다.

직접적인 피해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단순히 놈이 멈칫할 그 잠깐의 틈이면 된다.

Shaa──!!!

사용하는 것은 마안의 능력 중 석화의 능력.

이전에 드레이크를 상대했던 때와 달리 작은 시체 일부 하나조차 석화시키지 못했으나 바라던 대로 작은 틈을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물러서던 녀석의 몸이 한순간 멈칫한다.

그것은 정말 찰나의 짧은 틈에 불과했지만 지금과 같은 극박한 상황에서는 너무나 치명적인 실수였다.

드러난 녀석의 작은 틈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커다란 녀석의 몸을 매끄럽게 감싼다.

지금껏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수백 수천 번도 더 해왔던 '조이기'.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 동작과 동시에 그대로 녀석의 목덜미에 주둥이를 박아 넣는다.

그대로 있는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한 놈의 몸에 독을 집어넣는다.

랭크A의 <극독>.

동일한 랭크의, 그것도 용종을 상대로 곧장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되지만 지금과 같은 지구전은 자신 있다.

이제 버티기만 하면 승리하는 것은 나다.

"크롸아아아───!!!"

놈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일찍이 나와 상대해왔던 수많은 적들이 그러했듯 안간힘을 다해 몸을 버둥거린다.

그 죽을힘을 다한 발버둥에 온몸의 근육의 찢어질 듯 아려왔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힘을 풀지는 않았다.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 힘을 뺏다간 유리하던 전세가 단번에 역전될지도 몰랐다.

'내 능력치 중 내구가 두 번째로 높으니만큼 앞으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A랭크의 한계치인 70에 가까운 만큼 사실상 준 S랭크에 해당하는 능력치였다.

아무리 놈이 있는 힘껏 발버둥 쳐도 문제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크… 크르르…."

바들바들 경련하기 시작하는 놈의 신체에 슬슬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꼈다.

문득 녀석이 내뱉은 '두목'이나 '형님'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이제 와서 녀석을 풀어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었다.

죽다 살아난 녀석이 과연 내게 협조적일지는 둘째 치고, 애초부터 몬스터 사이에 대화란 것은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다.

아니, '몬스터 사이'가 아니라 몬스터 그 자체에 있어서 대화는 사치다.

나는 지난 1년 6개월 동안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보라.

그나마 대화가 통할 만했던 놈 역시도 대화보다 싸움을 원하지 않았던가?

애초의 몬스터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약하면 죽는다.

강하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곳까지 도달하며 내가 깨우친 단 하나의 진리이자 진실이다.

꿀꺽-

익숙하게 숨을 거둔 놈의 신체를 집어삼킨다.

언제나처럼 승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취했다.

놈의 커다란 덩치 탓에 삼키는 데 조금 애를 먹었지만, 그 이후로는 문제없었다.

<폭식> 덕에 소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니까.

이미 전투 중 소모했던 마력 같은 에너지는 진작에 회복되었다.

역시 괜히 A랭크의 몬스터가 아니다.

지금껏 먹어왔던 녀석 중에서도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 위장으로 넘어간 놈의 신체가 소화되기를 기다리다 몸을 움직였다.

근처에서 당장 느껴지는 생물의 기척은 없었다.

놈과의 전투 탓에 이미 멀찍이 도망친 모양이다.

'당장 배가 부르니 딱히 사냥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폭식이 가진 무제한적인 에너지 저장량을 생각하면 가능한 사냥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적들을 사냥하고 싶었다.

저장된 에너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쁜 것은 없었으니까.

Shii───

어슬렁어슬렁 <암영>을 사용해 은신 상태로 이동했다.

혀의 감지나 마력을 이용한 탐지를 통해 최대한 다른 먹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당장 전투를 펼쳤기에 가급적 약한 사냥감을 찾고는 싶었으나 그렇다고 굳이 강한 상대가 나타나면 피할 생각은 없었다.

몸은 지치지만 그만큼 얻을 수 있는 소득도 상당할 테니까.

실제로 레드 드레이크 놈을 쓰러트린 이후 정체되었던 능력치도 조금은 상승했다.

비록 전체적으로 보아도 1에서 2 정도밖에 상승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근래 들어 처음 보는 능력치의 상승이었던 만큼 기쁘기 그지없었다.

당장 벽을 넘었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상대나 사냥감을 해치우며 좀 더 아래로 내려가던 중.

어느 날 나는 또 다른 상대와 마주할 수 있었다.

펄럭펄럭-

커다란 날개로 주변의 화산재와 연기를 날려버리며 등장한 것은 새빨간 비룡(와이번)이었다.

틀림없는 S랭크의 몬스터.

녀석과 마주한 것은 64계층의 어느 화산에서였다.

제52화

63계층을 지나 64계층에 도착하고서 막 주변의 지리를 익히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소처럼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어슬렁어슬렁 이동하고 있으면, 불현듯 <직감>이 찌르르 울렸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다급한 경고.

그에 생각하기에 앞서 급히 몸을 피하려 치면, 그것은 어느샌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전에 싸웠던 레드 드레이크만큼이나 커다란 덩치.

다른 와이번(비룡)에 비해 2, 3배는 더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짙은 붉은색의 와이번.

도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지 모를 한 마리의 레드 와이번이 허공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고요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Shii──.

느껴지는 위압감이 심상치 않다.

슬쩍 그 기세를 가늠하려 치면 오싹- 하고 무언가 몸을 조여오는 것 같았다.

'S랭크…!'

위기 감지에서부터 진화한 직감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낸다.

이성에 앞서 본능이 외친다.

도망치라고.

지금껏 S랭크 몬스터를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당장 이전 구역인 평야 구역에서만 하더라도, 이곳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수의 S랭크 몬스터를 보아온 적이 있었다.

용암 구역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S랭크 몬스터를 보았다.

사실 그중에서 직접적으로 부딪힌 놈도 몇 있었다.

아무리 하나같이 규격 외인 S랭크 몬스터라 하더라도, 평균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놈들을 상대로 싸웠던 적이 있다.

비겼던 적도 있고 이겼던 적도 있으며, 결국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던 적도 있다.

그 승패야 어쨌든 싸움의 끝에 항상 나는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가 부족할 정도의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매번 느낄 수 있었다.

S랭크는 확실히 그 궤를 달리한다고.

아무리 시간이 흐르며 헌터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어 S랭크 몬스터의 위용이 과거만 못하다 하더라도 S랭크 몬스터는 S랭크다.

도저히 얕볼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나 지금 눈앞에 나타난 녀석은 진짜배기였다.

지금껏 내가 싸워봤던 어중간한 S랭크 몬스터가 아닌 진짜 중의 진짜.

제대로 된 S랭크 몬스터로서의 위엄을 갖춘 규격 외의 몬스터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긴장감과 불안감.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한 일말의 호승심과 투지.

여전히 이쪽을 내려다보며 날갯짓을 하는 와이번을 향해 슬며시 혀를 날름거렸다.

'승률이 어느 정도일까?'

후하게 계산하면 8대2에서 9대1 정도. 냉정하게 판단하면 이쪽에 전혀 승기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준 S랭크 몬스터 정도라고 해도 S랭크에 준한다뿐이지 실제 S랭크에 비하면 숨길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녀석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룡(와이번).

과거에 비해 대공 수단이 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하늘을 날 수 있는 상대에게는 내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조건들을 따지며 냉정히 계산해 본 결과 안타깝게도 내 승률은 없다라고 할 수 있었다.

'도망치는 게 최선인가?'

아무리 내가 강함에 반쯤 목을 맸다고 하더라도 무의미하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도망칠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당장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하면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이후 녀석의 추격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녀석의 기동성을 봤을 때 거의 불가능하겠지.'

흘깃 튼튼한 녀석의 날개를 보건대, 땅을 기어 다니는 나랑 달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의 기동성이 얼마나 차이가 날지.

'그나마 녀석이 당장 적의를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녀석이 무슨 목적으로 내 앞에 나타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신경전을 펼치고 있자, 문득 녀석이 그 큰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지상에 내려앉았다.

[최근 소란을 피우던 게 너인가?]

쿵- 묵직한 소음과 내려앉은 녀석이 대뜸 사념대화를 통해 그리 말해왔다.

내심 긴장하고 있던 이쪽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녀석의 반응에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의 레드 드레이크도 그렇고, 녀석과 같은 S랭크 몬스터가 찾아올 정도로 내가 소란을 피웠던가?

[…이쪽도 제법 유명해진 모양이군. 이렇게 찾아오는 상대가 있으니… 그래서 그건 왜 묻는 거지?]

[두목님의 영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놈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으니까.]

[…두목님?]

언뜻 일전에 레드 드레이크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몬스터 주제에 무슨 조직이라도 있는 걸까?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일전에 레드 드레이크가 말했던 형님이란 것이 바로 눈앞의 와이번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이런 와이번을 부하로 두고 있다는 두목이란 존재는 과연….

[위에서 왔다면 두목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게 당연할 테지. 알았다면 지금처럼 경거망동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담담히 전해지는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차례 혀를 날름거렸다.

대충 편하게 있는 것 같음에도 녀석에게서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쪽을 찾아온 이유는 뭐지? 자기 영역에서 소란을 피운 놈에게 본때라도 보여줄 생각인가?]

[원래는 단순한 경고가 전부였다만… 상황이 변했다.]

슬며시 날개를 퍼덕이는 녀석의 움직임에 곧장 몸을 물렸다.

다행히 딱히 공격할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별다른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작은 움직임에도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변했다라?]

[얼마 전에 너를 찾아왔던 녀석이 있을 거다. 우리 쪽에서도 나름 강한 녀석이었는데….]

앞전과 마찬가지로 무덤덤하게 내뱉던 녀석이 불현듯 눈을 번뜩였다.

한순간 확- 쏟아지는 기세에 온몸이 움찔거린다.

[네 녀석이 해치웠나?]

[먼저 덤벼 왔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부하는 부하. 나름대로 복수는 해줘야겠지.]

펄럭펄럭- 녀석이 힘찬 날갯짓을 시작했다.

별다른 것 없이 단순한 날갯짓에 불과했음에도 내 커다란 몸이 한순간 들썩일 정도의 강풍이 몰아친다.

유유히 하늘로 날아오른 녀석이 재차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복수는 그렇다 쳐도 두목님께서는 쓸데없이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시니까. 목숨은 뺏지 않으마.]

녀석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다는 듯 지극히 담담히 선고했다.

나 같은 것 따위야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다는 듯한 녀석의 태도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비록 녀석이 한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무 기고만장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 독은 꽤 매섭거든.]

[흠. 네 얄팍한 이빨로 뚫기에는 내 비늘이 너무 단단하지 않을까 싶군.]

삐뚜름한 미소와 함께 도발하는 녀석을 향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Shaa───!!!

몸의 탄력을 이용해 녀석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스킬까지 사용하며 달려드는 내 공격은 아무리 S랭크의 몬스터라도 무시하지 못할 만한 위력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리 강하다 해도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빛살처럼 쏘아진 내 공격을 녀석은 너무나 쉽게 피해냈다.

'빌어먹을 날개!'

한 번의 날갯짓으로 유유히 허공으로 떠오른 녀석의 모습에 절로 눈가가 찌푸려진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대는 영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슈우웅-

돌진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다시 땅으로 떨어진 나를 녀석은 곧장 공격해왔다.

뾰족하게 세운 날카로운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력을 다하지 않은 듯 여유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공격이었지만 정작 당하는 입장으서는 온몸의 비늘이 곤두설 정도의 섬뜩한 공격이었다.

한차례 가벼운 공격을 끝낸 녀석은 유유히 하늘을 활공했다.

그 여유롭기 짝이 없는 녀석의 태도에 재차 눈가가 찌푸려졌다.

'언제까지 여유롭나 한번 보자.'

가능하면 상대의 전력을 살피며 천천히 깎아 먹는 식의 전투를 하고 싶으나, 그런 식으로 해서 이길 만한 상대가 도저히 아니었다.

아니, 이기는 것을 떠나서 살아남으려면 이것저것 재지 않고 곧장 전력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Shii────

내 원판이 되는 [스피릿 보아]는 마법을 정령처럼 다룬다 해서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 변이종인 나 역시 진화하며 그에 못지않은 마법 능력을 갖추게 되었는데, 사실 지금껏 육체 능력에 의존해서 싸움을 벌이다 보니 그리 능숙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화마법이나 수마법의 랭크는 고작 D.

이 정도 수준으로 S랭크나 되는 레드 와이번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다만 그리 마법에 능숙하지 못한 나라도 한 가지 자신 있는 마법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독마법이다.

그 랭크가 D밖에 안 되는 다른 마법들과 달리 무려 A.

아무래도 자체적인 독과 조합해 사용할 일이 많다 보니 그 랭크가 특출나게 높았다.

비록 S랭크인 녀석에게는 그리 큰 피해를 줄 수는 없을 테지만 내 독과 조합한다면 절대 무시 못 할 피해를 줄 수는 있었다.

준비가 끝난 마법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사용했다.

보랏빛의 독으로 된 창, 포이즌 스피어가 레드 와이번을 노리고 쏘아졌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손쉽게 그 공격을 피해냈지만 애초부터 노리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포이즌 스피어의 뒤를 이어 한 박자 느리게 쏘아진 보랏빛 뱀의 형상.

창의 그림자에 가려 모습을 숨기고 있던 베놈 쇼크가 녀석을 노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

한차례 짧은 포효를 내지른 와이번이 크게 날개를 펄럭였다.

급하게 마법을 피해 선회하려는 듯한 녀석의 행동에 나도 가만있지 않았다.

곧장 세 번째 눈을 떴다.

사용하는 것은 늘 그랬듯이 석화의 능력이다.

평소라면 랭크가 낮은 내 마안으로는 녀석에게 아예 통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좀 더 힘을 냈다.

마력을 모은다.

치켜떠진 세 번째 눈에 아릿한 고통이 몰려든다.

당장이라도 마력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질끈 눈을 감고 싶어지지만 감내한다.

[스킬 <근성A>를 발동합니다.]

한도를 초과해 모여든 마력에 눈 안의 실핏줄이 터져나간다.

울컥- 터져 나온 핏물이 피눈물이 되어 이마 한가운데를 흘러내렸다.

[스킬 <초재생S>가 발동됩니다.]

끔찍하게 몰려드는 고통을 참아내고 흘러내리는 피눈물을 무시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나는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힘차게 날갯짓하던 녀석의 튼튼한 날개가 한차례 멈칫했다.

비록 돌로 변하지는 않았으나 잠깐의 멈칫함이 큰 틈을 만들어 내었다.

온갖 고통을 감내하고, 마력을 쏟아낸 것치고는 몹시 초라한 결과였으나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노리던 것이 그것이었으니까.

어느새 바로 지척까지 접근한 뱀의 형상이 레드 와이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주둥이를 쩍 벌리는 뱀의 형상은 당장에라도 녀석과 충돌할 것 같았다.

'됐다. 당장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중독만 된다면….'

고작 1할 정도에 불과하던 승률이 크게 오를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당장 승리를 떠나서 시종일관 여유롭던 녀석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이 몹시 기뻤다.

보라, 잔뜩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을….

'무슨…?!'

자신만만하게 바라본 녀석의 얼굴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잔뜩 낭패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정작 보게 된 녀석의 얼굴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오는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의외라는 감정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베놈 쇼크를 보고서 레드 와이번은 가볍게 포효를 내질렀다.

공기를 진동시키는 울음소리와 함께 녀석의 주변을 둥근 불의 장막이 감쌌다.

퍼엉-

두터운 불의 장막과 충돌한 베놈 쇼크가 허망하게 터져나갔다.

이윽고 장막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레드 와이번은 여전히 여유롭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스킬? 화속성 마법의 일종인가?'

이것저것 쥐어 짜낸 회심의 공격이 허망하게 실패해 낭패와 분노가 차올랐지만 그것과 별개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과연 S랭크.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 이건가?'

마력이야 <폭식>으로 저장한 에너지를 끌어다 쓰면 된다지만 한계까지 사용한 마안은 당분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장 쓸 수 있는 방법은 마법을 이용한 공격 정도뿐인데….

'화속성 마법은 녀석의 속성을 생각하면 크게 쓸모가 없을 거고, 수속성 마법은 단순한 견제기 정도로밖에 쓸 수 없다.'

남은 건 처음 그랬던 것처럼 독속성 마법뿐이다.

그마저도 앞서 손쉽게 막아냈던 점을 생각하면 큰 효용이 없을 것이 뻔했다.

'…최대한 버티면서 기회를 잡자. 폭식과 초재생의 조합이라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아무래도 녀석과의 싸움은 그리 자신 없는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될지 모르겠다.

다만….

"크르르─."

이전과는 달리 슬슬 제대로 할 생각인지 기세를 드러내는 녀석을 보자면 버티는 것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제53화

패배했다.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당했던 게 과연 얼마만일까?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레드 와이번은 과연 S랭크 몬스터다운 전투력을 자랑했다.

폭식에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도 모조리 소모했다.

부족한 마력 탓에 재생도 되지 않으니 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었다.

성하지 않은 곳이 없고 이미 정신적으로도 한계에 가깝다.

움직이지 않는 머리를 대신해 눈동자만 간신히 굴려 시선을 돌리자, 무언가 미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레드 와이번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 역시 길어진 싸움의 여파로 이곳저곳 자리한 상처가 눈에 띄었다.

그래봤자 나와 비교하면 결국 경미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대단하군.]

비꼬는 게 아닌 순수한 감탄을 담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나를 이 정도로 몰아붙인 건 동급의 형제들 정도밖에 없었는데… 과연 실력을 믿고 날뛸 만하군.]

녀석 나름대로 칭찬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오랜만의 패배로 심사가 잔뜩 뒤틀린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꼬는 것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Shaa───.

사념대화를 할 정도의 조그마한 마력도 남아 있지 않아, 얼마 없는 힘을 짜내어 낮게 울음을 토해냈다.

불만 가득한 울음소리에 녀석이 잠시간 침묵했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재차 불만스럽게 바라보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 바로 기절하듯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남은 오기로 끝까지 정신을 붙잡고 버티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마지막만은 당당하게 있고 싶었으니까.

'이렇게 끝나는 걸까?'

언젠가 이런 결말이 되지 않을까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다른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잡아먹을 때부터 어렴풋이 상상하고 있었다.

나도 내가 사냥하는 녀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내가 그러했듯 나보다 강한 녀석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라고.

그리고 결국 내가 상상하던 것은 현실이 되었다.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 생각나는 하나만 떠올려 보더라도 내게는 복수가 남아 있다.

'김준수, 신재준, 이하나.'

세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되뇌면 몸에 조금 활력이 도는 것도 같았다.

그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적어도 세 사람이 당시에 내가 겪었던 감정들을 백배 천배로 느꼈으면 좋겠다.

'복수에서 끝날 게 아냐.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

복수는 단지 내 삶에 있어서 당연히 거쳐 가야 하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복수를 하고는 싶어도 그것에 모든 것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복수는 결국 단기적인 목표는 될 수 있어도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할까?'

아무래도 나 자신도 몰랐지만 나는 상당한 욕심쟁이였던 모양이다.

당장 생각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물론 당장 죽어가는 와중에 삶의 목표를 정할 정도로 내게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그래, 우선 지금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다.

슬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보는 레드 와이번의 모습이 보인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조심스레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끝을 맺으려는 것일까?

내가 그러했듯 승자로서의 권리를 누리려는 것일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근성! 스킬 <근성A>가 <불굴S>로 성장합니다!]

[스킬 <한계돌파S>가 <한계돌파SA>로 성장합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상태창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한계까지 내몰린 신체가 당장 멈추라며 비명을 토해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찢겨져 나간 상처에서 울컥 핏물이 터져 나왔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등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히 머리를 들어 올려 몸을 세웠다.

그리고 평소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Shii───

마주한 레드 와이번의 얼굴은 당혹인지 혼란인지 뭔지 모를 감정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런 녀석의 한심한 낯짝을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재차 몸에 활력이 도는 기분이다.

[…정말 대단하군… 꼬리 끝조차 까딱하기 힘들 텐데… 놀랍다.]

웅웅- 녀석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는 것 같았지만 뭐라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또렷한 정신과는 별개로 자꾸만 눈이 감기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정신도 그닥 또렷하지만은 않았다.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곧장 목덜미를 물어뜯어 주마.'

오직 그것 하나만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잠신 감탄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레드 와이번이 재차 몸을 움직였다.

성큼 다가오는 녀석을 향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이제는 별다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레드 와이번의 얼굴과 시야를 붉게 물들이는 새빨간 핏물을 끝으로 흐릿해지는 의식에 몸을 맡겼다.

아무래도 이제 정말 한계인 모양이다.

[정말 감탄스럽기 그지없는 정신력이군… 그리 걱정하지 마라. 처음 말했던 것처럼 너를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라.

흐릿해지는 의식 너머로 얼핏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 * *

쿵-

바닥을 향해 쓰러지는 커다란 몸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투쟁을 포기하지 않은 뱀의 모습을 바라보며 레드 와이번은 가볍게 날개를 펄럭였다.

최후에 선보인 뱀의 공격은 확실히 그에게 닿았다.

비록 치명상은 아닐지 몰라도 단단한 비늘을 뚫고 피를 튀길 정도의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S랭크 몬스터인 레드 와이번조차 한순간 섬칫할 만큼.

슬며시 제 목에 난 상처를 날개로 쓰다듬으며 짧게 혀를 찬 레드 와이번이 곧 몸을 움직였다.

한 발짝 성큼 뱀을 향해 다가간 녀석이 곧 익숙하다는 듯 뱀의 몸체를 발에 쥐었다.

[…생각보다 더 무겁군.]

혹여나 상처가 덧날까 퍽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뱀을 잡아 올린 레드 와이번은 가볍게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 고작 몇 번의 날갯짓만으로 제 몸보다 더 길쭉한 뱀의 몸을 가볍게 집어든 채, 그는 천천히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레드 와이번은 기절한 뱀을 집어 든 채 원래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두 고랭크 몬스터가 사라진 장소는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다시 평소처럼 고요해졌다.

* * *

의식이 부상한다.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시뻘건 벽면.

습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을 살펴보니 이곳이 어딘가의 동굴 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쪽에 흐르는 용암을 조명 삼아 커다란 동굴 내부를 살폈다.

'여긴 어디지…?'

슬며시 눈가를 찌푸리는 것과 함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나는….

Shii───

번뜩 떠오른 마지막 기억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아릿한 고통이 느껴진다.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걸까?

흘깃 살펴보니 상처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를 다 사용했었지.'

평소라면 다 회복되었을 상처들이 아직 다 아물지 않고 있었다.

슬쩍 살펴보니 핏물이 슬쩍 흘러내리는 곳도 있었다.

'…살아남은 건가?'

몸 상태를 살피는 한편 재차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판단했다.

어떻게 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 분명히 살아 있었다.

마지막에 분명 살고자 하기는 했지만, 사실 살아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는데….

쿵-

[일어났군.]

무언가를 내려놓는 묵직한 소음과 함께 커다란 거구가 동굴로 들어섰다.

재빨리 시선을 돌려 살피니 그곳에는 레드 와이번이 있었다.

나를 무력하게 참패시켰던 바로 그 녀석이 말이다.

[…죽이지 않은 건가?]

나지막이 물어본 물음에 레드 와이번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보면 모르는 건가?]

[왜지?]

[흠. 네가 생각보다 강해서 다소 손속이 과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녀석의 이야기에 슬며시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그런 말을 한 것도 같았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아니라 제압할 목적이었나?]

[엄밀히 말하자면 제압보다는 단순히 대화를 위해서였다. 너에게 두목님의 뜻을 전할 생각이었지.]

[두목님이라…? 저번부터 자주 들었는데 그게 누구지?]

[이 영역의 주인이지.]

덤덤히 전하는 레드 와이번의 이야기에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녀석이 말하는 두목이란 것이 에어리어 보스(구역주)를 말하는 것인 모양이다.

[그것보다 다행이군. 조금만 늦게 일어났어도 위험할 뻔했었는데 말이지.]

[무슨 뜻이지?]

위험할 뻔했다는 이야기에 눈가를 찌푸리며 반문하는 나를 향해 녀석이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의 의미다. 싸울 때의 재생 속도와 달리 쓰러지고 나서는 영 회복이 더뎌서 말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렸겠지.]

흘깃 레드 와이번의 시선이 내 상처들을 향했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레 상처들을 훑어본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과연 일어나지 못했다면 녀석의 말처럼 꽤 위험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동안 쓰러져 있었지?]

[딱 사흘째다.]

짤막하게 답한 레드 와이번이 날개 끝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것보다 배가 고프지는 않나? 먹어라.]

녀석의 날개 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곳에는 큼지막한 물고기가 여럿 쌓여 있었다.

'마그마 피쉬'. 용암 구역에 서식하는 몬스터 중 하나로, 용암 속을 마치 물처럼 생활하는 몬스터 중 하나였다.

앞서 녀석이 들어오며 내려놓았던 소음의 원인이 바로 저것이었던 모양이다.

쓰러져 있던지 사흘이나 흘렀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녀석이 챙겨온 마그마 피쉬를 보자마자 허기가 몰려왔다.

이것도 도대체 얼마만의 허기일까?

패배만큼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허기에 나는 레드 와이번이 건네는 마그마 피쉬를 허겁지겁 받아먹었다.

마그마 피쉬 하나의 크기가 꽤 컸는데도 하나 가지고는 부족한 느낌이었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한쪽에 쌓여 있던 마그마 피쉬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잘도 먹는군.]

조금 질린 듯이 내뱉는 레드 와이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식사에 집중한다고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런 나를 잠시간 바라보던 녀석이 흘깃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부족한 에너지를 충전함으로서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재생에 의해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재차 레드 와이번이 질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싸울 때도 느꼈지만 정말 기가 막힌 회복력이군. 벌써 다 아물어 가다니….]

[내 자랑거리 중 하나지.]

슬며시 녀석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몸이 말끔히 나으면 곧장 설욕전을 펼쳐줄 테니까.]

[사흘 만에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건가?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너로서는 무리다.]

[흥.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지난번에 충분히 대본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지.]

히죽이며 답하는 녀석의 모습에 모른 척 식사를 계속했다.

그것보다 대뜸 설욕전을 펼친다는 내 이야기에도 레드 와이번은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를 살려주고, 보살펴 주는 것에서 눈치챈 대로 내게 나름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야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절대 패배한 채로 끝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설령 다시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별문제는 없었다.

이전과 달리 녀석에게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패배하더라도 그것이 더 이상 끝이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패배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해 나는 계속해서 도전할 생각이었다.

S랭크 몬스터인 녀석과의 싸움은 분명 내게 큰 성장을 안겨다 줄 테니까.

'싸움보다는 대련이라고 보는 게 좋겠군.'

솔직한 심정으로 몬스터끼리 서로 먹고 먹히는 사투가 아닌 대련이란 말이 과연 어울릴까 싶었으나, 굳이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녀석이 내게 보이는 호의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 호의의 대가는 언젠가 내가 녀석에게 승리하게 된다면 그때 갚아주는 것으로 해결하면 될 것이다.

'그것보다 마그마 피쉬라. 생각보다 맛있군.'

아무리 내성 스킬이 있어도 용암 속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는 무리였기에 한 번도 사냥해본 적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조금 버릇이 될 것 같다.

* * *

Shii───

사흘 만의 식사를 끝내고 조금 든든해진 속에 나른한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싸우기 전에 비하면 모자랐지만 어느 정도 소모했던 에너지를 회복한 느낌이다.

한 100분의 1정도?

[다 먹었나?]

[아아. 고맙군. 덕분에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것 같아 다행이군.]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단은 급한 불은 껐다.]

[…그렇게 먹고도?]

슬며시 눈가를 찌푸리는 레드 와이번의 시선에 모른 척 혀를 날름거렸다.

그런 내 모습에 짧게 혀를 찬 녀석이 이내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충분히 쉬었다면 그만 일어나라.]

[식후 운동 겸 한판 붙어줄 생각인가? 나로서는 기쁜 이야기다만.]

[나중이면 몰라도 이제 막 일어난 녀석과 드잡이질을 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두목님을 뵈러 갈 거다.]

담담히 내뱉는 녀석의 목소리에 잠시간 침묵했다.

직접적으로 에어리어 보스를 만난다는 사실 꽤나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게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아직 보지 못한 에어리어 보스가 나름 내게 호의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일까?

적어도 일부러 목숨까지 살려줬다면 대뜸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 확신하니 부담스럽던 마음도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호기심이었다.

지금껏 여러 구역들을 지나왔지만 산림 구역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에어리어 보스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타이밍이 안 맞았다고 해야 할까?

마침 내가 지날 때쯤에는 에어리어 보스들이 모조리 헌터들의 손에 사냥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만나볼 두목이란 에어리어 보스는 여왕 이후 처음으로 보게 될 에어리어 보스였다.

그것도 여왕과 마찬가지로 당장 나를 해칠 걱정이 없는 안전한 에어리어 보스 말이다.

그런 상대를 상대로 어찌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에어리어 보스라면 과연 어느 정도일까?'

레드 와이번의 수준을 생각하면 못해도 SA랭크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나게 될 에어리어 보스에 대한 기대를 품에 안은 채 나는 레드 와이번을 따라 이동했다.

제54화

커다란 화산의 분화구 안 깊숙한 곳.

레드 와이번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커다란 공동이었다.

나를 이곳까지 안내해준 레드 와이번은 바깥에 남았다.

제 두목과 외부인이라 할 수 있는 나를 1대1로 만나게 해도 괜찮은 것일까?

고작 나 따위로는 두목에게 절대 위해를 끼칠 수 없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묘하게 불쾌하다.

용암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히 흐른다.

A랭크에 다다른 고열내성으로도 후끈후끈한 열기를 다 막을 수는 없었다.

비늘을 넘어서 속살까지 다 익어버릴 것 같다.

넓은 공동 안을 잠시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레드 와이번이 말한 '두목'이란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자리를 비우기라도 한 것일까?

레드 와이번에게 따로 이야기를 들은 건 없었는데….

그렇게 잠시 보이지 않는 상대의 모습에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불현듯 공동 한쪽에 있던 거대한 산이 움직였다.

쿠구궁─

작지 않은 소음과 함께 잔잔하던 용암 호수 위로 파문이 생긴다.

숫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공동이 흔들린다.

갑작스런 상황에 주변을 경계하다 무심코 마주치고 만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거대한 한 쌍의 눈동자를 말이다.

'크다.'

마치 거대한 산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리 작다고만은 할 수 없는 크기였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너무나 컸다.

전체적인 외향은 레드 와이번이나 다른 와이번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큰 차이가 있다면 바로 그 커다란 크기.

그 압도적인 크기에 무심코 감탄하게 된다.

용암을 닮은 시뻘건 눈동자가 조용히 이쪽을 살핀다.

그 커다란 사이즈에 무심코 감탄하는 것도 잠시, 이윽고 경악했다.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그 존재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직접 상대와 눈을 마주한 지금에도 마찬가지다.

바로 앞에 있음에도, 분명 이쪽에서 상대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분명 눈앞에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

마치 대자연 그 자체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기세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점점 압도당하는 것만 같았다.

[작은 뱀이구나.]

자그마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는 내 생각과 많이 달랐다.

생각했던 것처럼 위협적이지도, 또한 고압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담담했고 언뜻 작은 호의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똑바로 눈앞의 상대와 마주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 호의가 가득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어쨌든 긴장이 조금 풀리기는 했으니까.

그렇다고 곧장 경계까지 풀지는 않았다.

아무리 호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믿기에는 지금껏 내가 겪어온 미궁의 경험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으니까.

물론 내가 경계하고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비하지 않고 멍청히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당신이 그 '두목'인가?]

조심스럽게 사념으로 전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명백히 경계심 섞인 내 목소리에 눈앞의 거대한 비룡은 순순히 긍정했다.

[그렇지. 내가 이 영역의 주인인 마그마 와이번 '아르데'다. 만나서 반갑구나, '작은 뱀'아.]

덤덤히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조금 당혹스러웠다.

뒤를 이어 나온 '작은 뱀'이라는 호칭이 무척 낯설었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어디 가서 작다고 들을 정도의 사이즈는 분명 아니다.

충분히 대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고 단순 몸길이만 보자면 그 이상이다.

그런 만큼 '작다'라는 말이 무척 생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선뜻 저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역시 상대의 저 무지막지한 크기 때문이겠지.

'저쪽 입장에서는 작아 보일 수밖에 없겠군….'

그렇다 보니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저 호의적인 눈빛으로 이쪽을 보는 상대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우선 감사를 전하지. 고맙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생각하고 있던 감사를 전했다.

사실 눈앞의 와이번에게는 제 영역에서 날뛰는 나를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더 편했을 것임에 이렇게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대 입장에서 나는 그저 제 영역에서 마구잡이로 날뛰며 부하들을 죽인 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의문이다.

구역주(에어리어 보스)일 것이 분명한 마그마 와이번이 내게 이토록 호의를 보내는 이유가 말이다.

선뜻 건넨 내 감사 인사에 마그마 와이번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했다는 듯이 빙그레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 상대의 반응에 이쪽으로서는 더더욱 혼란스럽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작은 뱀아.]

[....]

[혼란스러울 만하지. 나 같은 경우를 쉽게 볼 수는 없을 테니.]

-끌끌끌

와이번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말처럼 그 같은 유형의 몬스터는 처음 본다.

몹시 당혹스럽다.

그렇게 잠시간 웃음 짓는 와이번의 모습을 올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마냥 끌려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상대 쪽에서 당장은 나를 해할 생각이 없어 보이니 금쯤은 상관없겠지.

나는 선뜻 말했다.

[…솔직히 내게 이러는 이유를 잘 모르겠군. 그쪽의 입장에서 나는 멋대로 남의 영역에서 난동을 부리고, 부하들을 죽인 명백한 '적' 아닌가?]

[홀홀- 난동이라… 밑의 아이들이 조금 소란을 피우긴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원래 젊은 시절에는 이런저런 사고도 치는 법이니까.]

마치 늙은 노인처럼 가볍게 웃어넘긴 와이번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에게 당해 죽은 아이들은 실제로 몇 없다. 강한 적이 나타나면 알아서 잘 도망가라고 미리 말해 두었거든.]

[…몇 없다고는 해도 아예 없지는 않겠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레드 와이번이 찾아오기 전에 싸웠던 드레이크가 있었다.

다른 개체에 비해 몇 배는 큰 덩치를 자랑하던 녀석.

생각보다 강적이었기에 분명히 기억이 남아 있다.

그 녀석은 분명 눈앞의 와이번에게 명령을 듣고 찾아온 거겠지.

[그 아이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단다, 작은 뱀아. 원체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였거든. 밑의 다른 아이들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반응도 있다만… 나로서는 역시 조금 안타깝구나.]

[그렇다면….]

[아니. 안타깝기는 해도 말했다시피 어쩔 수 없지. 내가 아이들을 나름 관리하기는 해도 행동마저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

[애초에 몬스터에게서 투쟁이란 것은 떼려야 뗄 수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 될 수 있으면 싸우지 말라는 이쪽의 방침 때문에 많이 답답해했었거든. 너와의 싸움 덕에 그 아이도 충분히 만족하면서 갔겠지.]

와이번의 이야기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전부터 조금씩 느끼고 있었지만 눈앞의 마그마 와이번은 정말 몬스터답지 않은 몬스터였다.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몬스터다운 몬스터,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구역주였음에도 말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밑의 부하들에게 싸우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내렸나 보지?]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아니라면 가능한 자제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

[바로 조금 전에 몬스터에게서 투쟁이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스스로도 그 말이 불가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몹시 이중적이군.]

나도 순간 놀랄 정도로 내 목소리는 삐딱하게 나갔다.

스스로 내뱉고 나서야 눈앞의 와이번이 건방지다고 화를 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저 무식하게 커다란 앞발로 슬쩍 찍어 누르기만 해도 나 같은 건 손쉽게 당할 게 너무나 뻔해서 절로 긴장되었다.

그리고 다행히 와이번이 내게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

당장 납작한 쥐포 신세는 면한 것 같다.

[홀홀- 그래, 작은 뱀아. 네 말이 맞다. 이중적이라고 하면 이중적일 수밖에 없겠지.]

순순히 수긍하는 와이번의 모습에 재차 흠칫했다.

적어도 화를 내진 않더라도 곧바로 수긍까지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이어진 와이번의 말에 그가 그저 수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신념이 있었다.

[나는 무척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어린 뱀아, 아마 네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긴 세월을 살아왔지.]

어느새 나를 부르는 와이번의 호칭이 '작은 뱀'에서 '어린 뱀'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와이번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싸움을 했다. 항상 승리만 했던 것은 아니지. 어느 때는 죽을 뻔도 했고 수치스럽게 도망친 적도 있다.]

[....]

[모든 몬스터들이 그러하듯 지난 내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고, 강해지기 위해 싸웠다.]

와이번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웅크리고 있던 몸이 펴지며 커다란 덩치가 한층 더 거대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별다른 기세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거대한 덩치 때문만은 아니었고 오래 산 자 특유의 연륜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끝없이 싸웠고 계속해서 싸웠다. 승리한 적만큼이나 패한 적도 많았으나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나였다. 그리고 그 끝에 결국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지.]

[....]

[이후로도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나를 상대할 적수는 없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나를 위협할 적수도, 도전자도 없는 무료한 삶을 살던 중에 불현듯 깨달았지.]

와이번이 슬며시 고개를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투쟁뿐인 삶의 끝에 무엇이 남느냐?]

[....]

[더 이상 상대할 적도 없고 함께할 동반자도 없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지?]

담담히 물어오는 질문에 선뜻 답을 꺼내지 못했다.

머리로는 당장 반박할 말이 몇 개도 떠올랐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단순히 와이번의 기세에 압도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심적으로 어느 정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와이번의 이야기가 옳다고 긍정할 수도 없었다.

그의 말에 긍정한다면 왠지 모르게 지난 내 삶이 부정당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작고 어린 뱀아.]

나지막이 부르는 시선에 어느샌가 무의식적으로 피하던 와이번의 눈을 마주했다.

맑은 용암 빛의 눈동자가 올곧게 이쪽을 향한다.

[투쟁하는 것도,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인자한 노인처럼 온화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그렇게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는 언제고 지쳐 쓰러지기 마련이지. 나는 그동안 그런 아이들을 너무나 많이 봐왔기에 네가 너무나 안타깝구나.]

[…나는….]

[작고 어린 뱀아, 너는 이미 지쳐 있구나.]

[....]

한숨처럼 내뱉는 와이번의 말에 이번에도 아무런 반박할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런 나를 와이번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재차 말을 잇는다.

[지쳐 쓰러지기 전에 잠깐 쉬어가는 것도 좋지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때라도 쉬어가면 된다. 아직 늦지 않았어.]

[....]

이번에도 대답 않는 나를 와이번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 온화한 시선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내 반응에 와이번, 아르데가 맑게 웃는다.

[쉴 곳이 필요하겠구나.]

[....]

[안내는 레드 와이번이 해줄 거란다.]

아르데의 목소리에 힘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따로 무언가를 한 것 없이 단순히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정확히는 이야기를 들은 것뿐인데 온몸에 힘이 쭉 빠진 것만 같다.

[쉬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구나. 그게 나든, 아니면 다른 아이들이든.]

상냥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쉬고 싶은 것만은 분명했다.

제55화

아르데와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말처럼 분명 나는 지쳐 있었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근래 들어 잡생각이 많아졌다고 스스로 느끼고는 했지만, 그게 단순히 여유가 많아져서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다.

싸움, 다툼, 투쟁.

별다른 교류 없이 그저 죽고 죽이는 삶.

몬스터로서의 삶에 있어 분명 이것이 당연하다 생각해 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일부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게 행동해 보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있다.

기꺼이 지금의 삶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런 다툼뿐인 삶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아니, 아르데의 말을 빌리자면 이미 지쳐 있는 거겠지.

전 인간이기 때문일까?

나는 분명 마음 한구석 어딘가로 계속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할 상대를 찾고 있었다.

스스로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을 지적당하다 보니, 그것도 첫 만남에서 꿰뚫어지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아프다.

내가 그렇게 읽히기 쉬운 스타일이었던가?

이렇다 할 제대로 된 교류를 가진 게 굉장히 오랜만이다 보니 잘 모르겠다.

인간일 적을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도 같은데….

뱀이 된 지 이제 겨우 2년 차쯤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때의 기억이 흐릿하다.

연수로 비교해보면 인간일 적의 시간이 열 배 가까이 더 많은데도 말이다.

'그간 워낙 치열하게 살아와서 그런가?'

매일매일 사선을 넘나들다시피 살아오다 보니, 비교적 평화로웠던 인간일 때의 기억이 점차 흐릿해질 수밖에 없을 법도 하다.

그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여럿 있기는 하니 인간이던 시절의 나도 참 힘들게 살았구나 싶다.

'확실히 쉴 때가 되긴 한 것 같군.'

가만히 지난 2년간의 세월을 되짚어보면 당장 싸우고, 죽이고, 잡아먹는 기억밖에 없으니 왜 지칠 법도 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렇게 살아서야 그 누구라도 지치겠다.

본디 무슨 일이든 휴식이 중요한 법이니.

이번만큼은 아르데의 의견을 받아들여 확실히 쉴 필요를 느꼈다.

아르데와의 만남이 끝난 이후 이전에 머물던 거처로 다시 안내받았다.

이전처럼 나를 안내해준 레드 와이번은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아르데와의 대화 이후 혼란스러워진 나를 배려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원체 성격이 조용해서 그런 면도 없잖아 있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홀로 조용히 생각할 곳을 안내받은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상념을 이어갔다.

똬리를 튼 채 가만히 앉아 늦은 새벽까지 계속해서 홀로 생각했다.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지 불과 채 하루도 되지 않았기도 했고, 고작 하룻밤 사이의 고민으로 무언가 바뀔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룻밤 사이의 고민 동안 느낀 것도 없잖아 있다.

지금껏 단순히 투쟁밖에 없을 거라 생각한 몬스터 사이의 관계에 새로운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저 그것 하나를 깨달았을 뿐임에도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편안해졌다.

단순히 17계층의 리자드맨들뿐만이 아니었다.

몬스터로서 분명 이상한 것은 다른 이들이 아닌 바로 그들이겠지만, 다행히도 이 넓은 미궁에 이상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한 녀석들은 이곳에도 있다.

은연중에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새로운 몬스터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다.

* * *

새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과정이 전혀 순탄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마음먹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특히나 지난 2년 동안 이렇다 할 대화라고는 몸으로 하는 대화(물리)밖에 모르던 나로서는 다른 상대에게 호의를 드러내고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쪽에서 어렵사리 다가가려 해도, 상대 쪽에서 계속 이쪽을 피해서야 방법이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르데 휘하의 몬스터들 중에서 나를 불편해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아무래도 같은 동료들을 여럿 잡아먹었기 때문일까?

나로서는 조금 안타깝기는 해도 거짓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 해결 방법이 없었다.

나 같아도 다른 동료를 잡아먹었을 상대를 마냥 편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르데 휘하의 몬스터들이 마냥 나를 피해 다니는 것은 아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녀석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레드 와이번이다.

전혀 친절하다고도, 상냥하다고도 할 수 없는 태도였지만 몇 일간 잔뜩 기피만 받던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잘 그러는 타입은 아닌데 그때만큼은 울컥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며칠 동안 주로 어울려 다닌 상대가 바로 레드 와이번이다.

그간 지내온 세월이 있다 보니 상상하던 것처럼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일전에 말했던 대련을 빌미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법 상당했다.

처음 상상했던 대로가 아닌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대화이기는 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몬스터로서의 대화는 이쪽이 더 알맞은 것 같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 정도라면 친구라 할 만하지 않을까 싶은 관계 정도는 되었다.

비록 지금까지 붙은 대련 중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해도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조금 나쁘기는 하다.

사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나쁘지만 역시 랭크라는 벽은 넘을 수 없었다.

특히나 항상 대련이 끝난 다음 삐뚜름한 얼굴로 이쪽을 비웃는 레드 와이번의 얼굴을 볼 때는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여실히 느끼게 된다.

언젠가 반드시 복수할 생각이다.

레드 와이번과의 대련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내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레드 와이번은 S랭크 몬스터로서 본래라면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만한 상대.

하지만 대련을 하는 때만큼은 마음 놓고 덤빌 수 있으니 그만한 샌드백이 또 없었다.

물론 단순히 가만히 맞고만 있는 샌드백이 아니라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고, 매번 반격을 넘어선 강공을 퍼붓는 샌드백이라서가 문제였다.

사실 저쪽이 이쪽의 샌드백이라기보다는 이쪽이 저쪽의 샌드백에 더 가까운 것도 같다.

일전에 레드 와이번이 말하기로는 금방금방 멀쩡히 고쳐지니 화풀이 상대로는 제격이라던데….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이렇게 또 늘었다.

언젠가는 내가 반드시 복수하겠다.

그렇게 대련이라기보다는 이쪽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경우가 아직까지는 많았지만, 분명 레드 와이번과의 대련이 내 성장에 도움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상태창의 모든 능력치가 빠르게 성장했다.

가장 눈부신 성장은 역시 '내구'일 수밖에 없었고, 다른 능력치들 역시 전혀 부족하지 않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기세를 이어가다 보면 S랭크로의 진화도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복수할 때가 머지않은 거다.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을 레드 와이번과의 대련으로 사용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아무리 내가 편하게 대한다고 해도 레드 와이번은 명색의 S랭크 몬스터인 만큼 할 일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데를 대신해 각 계층에 순찰을 돌기도 하고, 이따금 구역의 초입 부분에서 날뛰는 헌터들을 상대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상대를 해준 것은 아르데였다.

아르데와는 첫 만남 이후에도 여러 번 만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인자한 노인처럼 온화하게 웃는 아르데의 모습이 처음에는 영 껄끄러웠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며 이제는 레드 와이번만큼이나 편안해졌다.

아르데와의 만남에서 나눈 이야기는 주로 그의 일생에 관해서였다.

아르데는 그가 얘기했던 것만큼이나 정말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림잡아도 100여 년 이상을 살아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 만큼 적당히 덜어내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르데 자체의 화술도 굉장히 좋았고 이야기 역시나 흥미진진했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단순히 아르데의 이야기는 재밌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적인 관점으로 내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여럿 있었다.

아르데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 그간 내가 파악한 아르데는 몬스터답지 않은 몬스터란 것이다.

보통의 몬스터라면, 그것도 구역주 정도 되는 몬스터라면 당연히 흉포하고 포악하다고 생각되지만 아르데는 다르다.

그는 어떻게 이런 몬스터가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온화한 몬스터다.

혹시 나처럼 한때 인간이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이상한 몬스터다.

인간이었던 나보다 더 인간다운 몬스터라고 할까?

몬스터이면서도 몬스터가 아닌 것 같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들으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닌 모양인데….

아무리 깨달음을 얻었어도 몬스터가 이렇게까지 온화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몬스터답지 않은 몬스터, 인간다운 몬스터인 아르데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그런 것만은 또 아니란 것을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인간다운, 몬스터답지 않은 몬스터라고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다.

아르데는 인자하고 온화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냉철하고 비정하다.

아르데가 아무리 구역주라고는 하나 용암 구역의 모든 몬스터들을 관리하지 않는다.

사실 아르데 정도라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것 같지만 그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아르데가 관리하는 몬스터는 어디까지나 지성이 있고, 스스로 아르데를 따르겠다고 인정한 몬스터들 뿐이다.

이는 또 몬스터라 할 수 없는 굉장히 온건한 처사였지만 아르데가 그랬다고 하니 얼추 이해가 된다.

이미 내 마음속에 아르데는 그런 몬스터였다.

그리고 이렇게 온건한 아르데도 마냥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자신의 부하들이 공격받았을 때다.

사실 마냥 자신의 부하들이 공격받았다고 해서 아르데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전에 나의 경우가 그러했듯이 아르데는 몬스터들간의 투쟁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다툼이나 희생은 용인하고 있었고, 또 그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런 만큼 자신의 부하들이 공격받았다고 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날뛰는 게 아니라,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이는 편인데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일전에 한번 그러지 마라 경고했던 적이 있는 상대나, 자신의 권위를 누르고 망아지처럼 날뛰는 상대가 나타났을 때.

아르데는 구역주(에어리어 보스)로서의 위엄을 여실히 보여준다.

[죽여라.]

망설임 하나 없이 담담히 내뱉는 목소리에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온화하게 웃던 그 상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눈앞의 아르데는 풍기는 기세가 전혀 달랐다.

단순히 자신의 기세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으로 이미 전의를 상실한다.

평소의 아르데가 마치 커다란 태산같이 변함없는 평화로움을 풍긴다면, 지금의 아르데는 마치 폭발하는 활화산과 같다.

화를 잘 내지 않는 이가 화를 내면 더 무섭다고 했던가?

분명 나를 향한 적의가 아니었음에도 저절로 시선을 피하고 눈을 깔게 된다.

냉정한 목소리로 레드 와이번을 위시한 S랭크 몬스터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아르데의 모습에 깨달았다.

아무리 온화하고 상냥해도 몬스터는 몬스터구나.

그냥 옆집 할아버지처럼 편안히 볼 상대가 아니구나.

아르데의 분노는 명을 받은 다른 몬스터들이 사라지자마자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이전처럼 마냥 평범하게 아르데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르데는 이런 내 반응을 눈치채고 씁쓸히 웃었지만 이때만큼은 그 어떤 말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그동안 내가 너무 건방지지 않았나 조심히 기억을 더듬어볼 뿐이다.

앞으로는 조심하자.

결국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 * *

비록 그날 뒤로 아르데를 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껄끄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자 그날 느꼈던 떨림이나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다.

이후에는 다시 평범하게 아르데를 대할 수 있었다.

이런 내 반응에 아르데가 정말 기뻐하더라.

알고 보니 아르데의 부하들은 그를 너무 어려워해서 나만큼이나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잘 없었다고 한다.

하긴 평소부터 그런 모습을 자주 봐왔으면 대화는커녕 일단 머리부터 박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듯 아르데는 한번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상대에 한해서는 무자비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냉혹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기본적으로 온화하고 인자한 옆집 할아버지와 다름없다.

비록 화를 내면 그 덩치에 걸맞게 눈조차 못 마주칠 정도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호불호가 확실한 성격이라 선만 잘 지킨다면 상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레드 와이번보다 훨씬 대화하기 쉽다고나 할까?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말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새 속에 있는 얘기를 하나둘 꺼낼 정도로.

이런 식으로 아르데와의 만남 이후, 나는 용암 구역에서의 하루하루를 굉장히 충실히 보내고 있다.

제56화

아르데의 호의로 용암 구역 최하층, 69계층에 머무른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언제나처럼 레드 와이번과 대련을 나누던 중 불현듯 녀석이 입을 열었다.

[많이 성장했군.]

평소와 별다른 바 없는 담담한 말투.

무미건조하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절로 눈가가 찌푸려진다.

녀석의 공격에 막 땅을 구르던 참이다.

[…비꼬는 건가?]

퉁명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레드 와이번이 선선히 고개를 젓는다.

[처음과 비교하면 굉장히 성장했다. 봐라.]

레드 와이번이 날개 끝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 위로는 꽤 깊숙한 자상이 하나 남아 있었다.

테일 스트라이크를 사용한 내 공격에 생긴 상처다.

[이번에는 제법 아찔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쓰러지는 건 네가 아닌 내가 되었겠지.]

그리 말한 레드 와이번은 곧 가슴팍의 상처 말고도 제 몸에 난 다른 상처들을 가리켰다.

당장 몸 곳곳에 생긴 상처들만 보자면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상태다.

그야 그럴 것이 나는 이미 재생으로 모든 상처를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니 역시 조금은 으쓱해진다.

그 레드 와이번을 상대로 저만큼이나 피해를 주다니.

녀석의 말처럼 확실히 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지금 저 상태로 싸우더라도 내 승률이 3, 40퍼센트를 넘기지 못한다는 거겠지.

그래도 승률이 제로에 수렴하던 이전에 비해 크게 성장하기는 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S랭크 몬스터인 레드 와이번을 상대로 열 번 싸워 한 번 정도는 이기고, 두세 번 정도는 비기기 시작했으니 대단히 만족스러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상태창의 능력치만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싸우는 방법에 대해 배워나가고 있다.

레드 와이번과 대련을 하던 중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나를 기피하던 다른 몬스터들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모든 몬스터들이 나를 기피하던 것은 아니다.

레드 와이번과 같은 S랭크 몬스터 쯤 되면 사실 별로 날 기피하지 않았다.

딱히 레드 와이번처럼 가깝게 지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서로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에 대해서 별생각 하지 않았지만 레드 와이번과의 대화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몬스터들이 나를 피하는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단지 내가 무서웠을 뿐이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한다.

확실히 자기 동료들을 죽인 상대를 어찌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 예상했던 것이기 별로 씁쓸하지 않았….

달랐다.

다른 몬스터들이 나를 무서워한 이유는 딱히 제 동료들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아르데의 휘하에 무리를 짓고 동료처럼 서로 도우면서 살아도 기본적인 몬스터의 습성은 그대로다.

그런 만큼 사실 레드 와이번도, 다른 몬스터들도 그렇고 제 동료가 내게 죽은 것에 대해서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그들이 나를 기피했던 것은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무서웠다고.

언뜻 레드 와이번에게 듣기로는 나를 '포악한 뱀'이라 부르며 두려워하는 녀석들이 상당하다고 한다.

다른 S랭크 몬스터들이야 스스로 지킬 힘이 있으니 전혀 피할 이유가 없지만, 제 한 몸 제대로 지킬 힘이 없는 다른 몬스터들은 저절로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처음 그 이유를 알았을 때 안심하는 한편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랑 같은 A랭크 몬스터들까지도 나를 피해 다닐 이유가 있었을까?

레드 와이번과 만나기 전에 쓰러뜨렸던 커다란 드레이크가 원인인 모양이다.

나름 아르데 휘하에서 힘 좀 쓰던 녀석이 너무나 허망하게 당해 버렸으니, 절로 두려워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허구한 날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레드 와이번과 치고받고 싸웠으니 이런 두려움이 점점 더 강해질 수밖에.

가만 생각해보면 자업자득이기는 했다.

이제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하는 것은 쉬웠다.

저쪽이 이쪽을 두려워한다면 이쪽에서 먼저 친절하게 다가가면 된다.

내게 가지는 그 공포감만 없앨 수 있다면 상상만 하던 몬스터 친구 100명 사귀기는 이제 일도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다.

* * *

하지 못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이 있는 만큼 이쪽에서 먼저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법 따위 모른다.

그래도 나름대로 용기를 내고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먼저 다가가 보기도 했지만….

[히이익─!!!]

[포악한 뱀─! 포악한 배앰─!!!]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맹렬하게 거부당했다.

나름 용기를 냈음에도 시작도 전에 거부당한 나는 한동안 의기소침 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좋아하던 대련도 마다하고 거처에 틀어박힌 나를 향해 레드 와이번이 조용히 말해왔다.

[포기하면 편하다.]

제 딴에는 위로라고 해준 말일 테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제 두목이랑 다르게 전혀 말재주가 없는 녀석이다.

모처럼 잘 지어지지 않는 미소까지 짓고 찾아갔는데….

그 미소를 짓느라 얼굴 근육에 경련까지 일어난 걸 생각하면 참….

[…그게 미소였나? 누가 봐도 당장 너를 잡아먹겠다는 위협인 것 같았는데?]

정말 제 두목과 달리 말재주가 없는 놈이다.

그리고 어느 때처럼 레드 와이번이 구역 순찰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르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홀홀─ 포기하면 편하더구나.]

이제 보니 레드 와이번도 제 두목을 닮아 말재주가 없는 모양이다.

이 동네 몬스터들은 뱀의 마음을 너무 모른다.

어찌 되었든 다른 몬스터들이 나를 피하는 이유를 알게 된 이후에는 나름 이쪽에서 먼저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내 노력만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란 것을 인정한 것이다.

생긴 거부터가 이미 험악하게 생겼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럴 시간에 레드 와이번과 한 번이라도 더 대련을 하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였다.

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마음 한구석이 굉장히 쓸쓸하다.

나는 친구가 적구나.

오늘따라 17계층의 리자드맨들이 유달리 보고 싶다.

아아, 현명한 비늘이여.

아아, 나의 낙원이여.

역시 그곳은 천국이었다.

이렇듯 이곳에서 머무는 하루하루를 제법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

비록 내 생각대로 안 되는 부분도 많고 짜증 나는 일도 많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르데가 말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투쟁뿐인 삶에 무엇이 남으랴?

몬스터의 삶에 투쟁이 빠져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는 아니다.

그 이유를 나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 * *

아르데와의 첫 만남 이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얼추 짐작하기로는 5, 6개월 정도 지났을까?

이제 슬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간 내 능력치는 레드 와이번과의 대련으로 상당히 성장했다.

비록 근래 들어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변화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괄목상대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특히나 상태창 같은 내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전투 기술 같은 외적인 것이 크게 성장했다.

이제 레드 와이번과의 대련도 승률이 3할에서 4할을 넘어섰다.

이대로 조금만 더하면 마의 50퍼센트 벽도 넘을지 몰랐다.

물론 어디까지나 대련이 아닌 직접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사투라면 당연히 이쪽이 불리하겠으나, 지난번처럼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 * *

최근 구역의 초입 부분이 꽤 소란스러운 것 같다.

각 계층에 있는 연락용 파발(비룡)들이 꾸준히 아르데의 거처를 나다니고, 레드 와이번을 위시한 각 계층의 계층주급 몬스터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제법 대규모의 헌터 원정대가 도착한 모양이다.

내가 아르데와 만난 이후로 처음 듣는 헌터들에 대한 소식이다.

그렇기에 조금 궁금했다.

과연 헌터들을 상대로 아르데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평소의 온화했던 아르데를 생각하면 의외로 온건한 반응을 보일 것도 같고, 이따금 보이는 냉정한 모습의 아르데를 생각하면 절대 가만두고 보지도 않을 것 같았다.

아르데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당장 외부자라 할 수 있는 나는 조용히 그의 선택을 지켜볼 생각이다.

헌터들에 대한 아르데의 선택은 의외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럴 것 같은 반응이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르데는 헌터들에 대한 지나친 대응을 금지했다.

몇몇 반발하는 몬스터들이 있었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듯 레드 와이번을 위시한 몬스터들은 대체로 그런 아르데의 선택에 수긍했다.

반발하던 몬스터들도 구역주로서의 아르데의 위엄 앞에 결국 꼬리를 말았고 말이다.

이번 선택에 대한 이유를 아르데에게 들었다.

의외로 아르데는 헌터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번에 쳐들어온 헌터들 개인의 기량이 아닌 그들이 가진 잠재력에 대해서 말이다.

헌터들은 한번 쓰러트린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미궁 밖에는 원정에 찾아온 헌터들보다 훨씬 많은 수의 헌터들이 있다.

당장 이번 원정대를 쓰러트린다고 해도 그 뒤를 이어 제2, 제3의 원정대들이 찾아온다.

아르데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중에서 결국 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부하들이란 사실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르데는 결국 자신들의 부하들이 상할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당장 아르데 휘하 몬스터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제2, 제3의 원정대가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별 피해는 없을 것이다.

아르데까지 나설 필요도 없다.

그 휘하의 몬스터들만으로도 충분했다.

조금의 피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승리하는 것은 그들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또 그 다음에는?

자꾸만 늘어나는 적들의 숫자와 전력 앞에서 아르데와 휘하의 몬스터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설령 아르데가 직접 나선다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헌터들 쪽의 저력을 적게나마 알고 있는 내 입장으로서는 그리 길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보이는 미래였다.

당장 한국 쪽 헌터들의 수준으로는 힘들지 몰라도 국외로 눈을 돌리면 멀리까지 볼 필요도 없다.

당장 옆 나라인 일본의 헌터계 수준도 무시할 수준이 절대 아니며 중국에는 그 유명한 SS랭크 헌터인 왕퐝이 있다.

현실적으로 따지면 국내 헌터가 아닌 국외의 헌터들이 이곳에 오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결국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결국 패하는 것은 아르데 쪽이었다.

헌터들과 몬스터의 싸움은 사실상 반쯤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설명을 듣고서 아르데의 이야기에 수긍했다.

당장 오늘의 현재가 아닌 내일 있을 미래까지 생각하는 아르데의 혜안이 놀랍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자세한 미궁 밖의 사정을 모름에도 거기까지 내다보는 아르데의 지혜가 가장 놀라웠다.

종종 생각하고는 하지만 아르데의 지성은 이미 인간의 그것과 훌쩍 닮아 있었다.

어찌 봐도 몬스터답지 않은 몬스터였다.

나지막이 감탄하는 나에게 아르데는 홀홀- 조용히 웃었다.

언제나처럼 온화하게 웃어 보이며 그가 대뜸 말해왔다.

[그래, 작은 뱀아. 그래서 언제 떠날 생각이냐?]

담담하게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온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아르데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평소와 같이 맑은 눈동자로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갑자기 무슨…?]

[떠날 생각이었지 않느냐?]

되묻는 나를 향해 역으로 반문하는 아르데의 목소리에 입이 턱 막혔다.

따로 티를 내지 않았음에도 꿰뚫어 보는 아르데의 통찰력이 놀랍다.

[…어떻게 알았지?]

[슬슬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지… 얻을 건 다 얻었지 않느냐? 더 이상 여기서는 더 얻을 게 없으니, 떠나는 게 자연스러운 순리겠지.]

[…말은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홀홀─ 당연히 그래야지. 말도 안 하고 떠나면 그건 양심 없는 짓이지.]

평소에는 없던 양심이 괜스레 찔려온다.

모른 척 아르데의 시선을 피했다.

[근래 들어 조금 조급해 보이더구나. 벽에 막힌 거겠지.]

덤덤히 내뱉는 아르데의 목소리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분명 나는 이곳에서 많은 성장을 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아니다.

근래 들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성장이 멈춘 탓에 조금이나마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닐까 하는.

물론 단순히 능력치의 성장만이 성장은 아니겠으나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다 보니 더 더욱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이 조급함을 티 내지 않고, 조용히 가슴 속에 묻어두려 했다만….

[…그렇게 티가 났나?]

[나 정도 세월을 보내면 다 보이는 법이지.]

홀홀-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아르데의 모습에 꾹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인자하게 이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돌아와도 좋다.]

평소와 같은 온화한 아르데의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용암을 담은 순수한 눈동자가 맑게 이쪽을 향한다.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도록 하지.]

[느긋하게 돌아와도 된다. 조급해할 것 하나 없어. 앞으로 꾸준히 가다보면 언젠가 다 끝에 도착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는 뒤처지는 것 아닌가?]

[조금 뒤처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천천히 볼 수 있을 테니까.]

그 부하하고는 다르게 아르데는 말을 참 잘한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이것도 다 오래 산 자 특유의 연륜인 것일까?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향해 아르데는 재차 말을 이었다.

[굳이 내 생각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작은 뱀아.]

[....]

[너는 그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내 말에 망설일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어.]

여전히 입을 닫고 있는 내게 아르데가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투쟁이 전부는 아니다.]

평소보다 조금 낮게 머릿속을 울리는 아르데의 목소리에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제57화

초입 부분에 나타난 헌터들에 대한 문제로 한창 시끄러웠던 차였기에, 그저 조용히 떠났다.

근처의 지리나 다음 계층으로 향하는 게이트의 위치는 이미 알아 두었기에 헤매지 않고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게이트 앞에 도착해 막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려는 찰나에 날갯소리와 함께 커다란 비룡이 내려앉는다.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익숙한 기척.

레드 와이번이다.

[떠나는 건가?]

[얻을 건 다 얻었으니 떠나는 게 자연스러운 순리라고 하더군.]

[두목님이 말씀하셨나 보군.]

[그렇지.]

짧은 대화 끝에 침묵이 흐른다.

답지 않게 어색한 공기가 자리 잡았다.

이런 분위기가 싫어서 아르데에게만 말하고 조용히 빠져나온 것이었는데….

괜스레 가슴이 답답하다.

한참만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레드 와이번이었다.

[…마지막에 이겨놓고 도망가다니, 역시 생긴 것처럼 비겁하기 그지없군.]

지난번에 했던 마지막 대련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평소와 달리 조금 짜증이 묻어난 녀석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다음에 싸워도 어차피 내가 이긴다.]

[흥. 웃기는 소리. 내 밑에서 형편없이 기어 다니던 녀석이 많이 컸군.]

[덩치 자체는 원래 서로 엇비슷했다만?]

[처음부터 그랬지만 말 하나는 잘하는군. 혀 하나는 정말 뱀처럼 길다.]

[뱀이니까.]

[....]

레드 와이번이 입을 다물고 잠시간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콧구멍이 연신 벌렁거리고 날개가 움찔움찔거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만 같다.

그런 녀석을 향해 히죽이며 웃었다.

[…역시 안 되겠군. 떠나는 건 잠시 미뤄라. 네 녀석에게 예절이란 걸 주입해 줘야겠으니.]

[예절은 내가 아닌 네가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 언제부터 패배자 따위가 승자에게 목을 그리 빳빳이 들 수 있었지?]

[…그 승자와 패자가 바로 오늘 바뀔 거다.]

[패배자 따위와 어울려줄 시간 따위 없다.]

[....]

레드 와이번의 콧구멍이 아까 전의 세 배는 빠른 속도로 벌렁거린다.

놀리는 건 이쯤 해야겠다.

아쉽다.

재밌었는데.

[좀 더 강해져서 돌아오마.]

분위기를 환기하듯 담담히 내뱉은 목소리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레드 와이번이 이내 폭-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강해져서 돌아오는 게 좋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에 만났을 땐 정말 흠씬 두들겨 맞을 테니까.]

농담이 10퍼센트, 진심이 200퍼센트 정도 느껴지는 뼈 있는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방금은 정말이지 살기를 느꼈다.

[…명심하지.]

조심스럽게 내뱉은 목소리에는 이전과 달리 조금 힘이 없었다.

[…작별 인사도 이쯤 하면 되었겠지. 다음에 보자.]

제 할 일은 모두 끝마쳤다는 듯 레드 와이번이 미련 없는 얼굴로 날개를 퍼덕였다.

세찬 바람 사이로 하늘 높이 떠오른 녀석의 모습이 보인다.

[아아. 다음에 보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흘깃 이쪽을 바라본 레드 와이번이 곧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점점 멀어지며 이내 작은 점이 되어버린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먼지란 먼지는 다 뿌리고 가는군.]

녀석의 힘찬 날갯짓에 주변에 있던 흙먼지가 다 날렸다.

화산재 특유의 회색 재가 비늘 곳곳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마지막까지 기분 나쁜 녀석이다.

잠시간 레드 와이번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불만을 토해내던 나도 이윽고 등을 돌렸다.

눈앞에 다음 계층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가 보인다.

이 앞에 있는 것은 70계층.

새하얀 설원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저곳 역시 지금껏 겪어왔던 모든 미궁의 생태가 그렇듯 전혀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겠지.

전혀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흥분이나 열정 따위의 감정도 함께 느끼고 있다.

묘한 설렘이 차오른다.

나는 할 수 있다.

* * *

70계층, '설산 구역'.

현 서울 대미궁의 최고 도달 계층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대한민국의 유일한 SS랭크 헌터인 '성재명'이 도달했던 바로 그 계층이다.

그와 원정을 떠났다가 낙오되어 돌아온 생존자들을 통해 간신히 새하얀 눈과 얼음의 세계라는 것만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설산 구역'이라 이름 지어졌다.

그 성재명이 당시의 원정에서 실종되었기에 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말 그대로 미지의 계층.

이 미지의 계층에 나는 지금 도착했다.

2년하고도 반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끝에 마침내 이곳까지 도착했다.

성재명 이후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한 미지의 세계.

확실히 내가 많이 성장하긴 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가 알 수 있었을까?

한낱 캐리에 불과했던 내가 여기까지 올 것이라고.

나 자신은 물론이고 정말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벅찬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아니, 감동하기에는 이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성장에 감동하는 것도 좋지만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직 약하다.

나는 아직 이룬 것이 없다.

내게는 아직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 사실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차분히 감정을 조절했다.

이곳은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미지의 세계다.

괜히 들떠서 풀어져 있다가는 언제 어떤 위험이 덮쳐올지 모른다.

지나치게 조심할 필요는 또 없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긴장은 필요했다.

눈과 얼음의 새하얀 세계.

70계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기는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설원과 비늘을 뚫고 들어오는 혹한의 냉기였다.

살살 가볍게 불어오는 바람도 차가운 기온과 맞닿아 이미 칼바람이나 다름없었다.

막 사막 구역에 발을 들였을 당시의 나라면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얼어붙었을 것이다.

위층의 다른 구역들에서 내성 스킬들을 얻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용암 다음이 설산이라… 정말 끔찍하군.'

바로 이전 계층인 69계층 용암 구역과는 완전 정반대인 곳이다.

이러니 10년 전 원정을 왔을 당시 태반의 헌터들이 대응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돌아간 것이겠지.

그마저도 그나마 이 추위를 견디던 이들마저 당시 원정대장을 맡았던 SS랭크 헌터 성재명과 함께 10년째 행방불명인 상태였다.

'역시 미궁 최대의 적은 몬스터가 아닌 기후다.'

실시간으로 체력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슬며시 내뱉은 혀는 이미 얼어붙은 것 같다.

감지 능력이 평소의 몇 배는 떨어졌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급히 행동을 개시했다.

마력을 움직여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화속성 마법도 그간 열심히 훈련했기에 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다.

화르륵-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 앞에 불길은 금세 사그라들 듯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이 불길은 어디까지나 내 마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마력 소모가 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마력 수치도 상당히 성장했고 그간 효율적으로 마력을 사용하기 위해 고생고생 노력한 덕분이다.

현재 마력은 내 능력치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치를 자랑하고 있다.

참고로 두 번째로 높은 수치는 당연하게도 내구다.

불길이 있으니 그나마 조금 살 것 같다.

우선 얼어붙은 혀부터 녹인다.

다만 혀를 녹였음에도 몰아치는 눈보라에 감지 범위는 그리 넓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평소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마력을 통한 감지 역시 눈보라 탓에 그리 능숙하게 되지 않는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그냥 평범한 눈보라가 아닌 미궁 특유의 짙은 마력이 물씬 묻어난 눈보라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감지는 계속할 예정이다.

아르데와의 만남은 내게 큰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몇몇 깨달음을 얻게 해주었다.

투쟁뿐이라고 생각했던 몬스터로서의 삶에 전혀 다른 것도 있다.

같은 몬스터라도 소통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감정적 교류를 나눌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기나긴 투쟁 속에 지쳐가던 내게 꽤나 커다란 충격이었고, 행동을 달리할 계기가 되어주었다.

설산 구역은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다.

기본적인 초소한의 정보라도 있던 이전의 구역들과 달리, 알려진 것은 그저 눈과 얼음에 뒤덮인 새하얀 세상이라는 것뿐.

그 지리는커녕 어떤 몬스터가 서식하는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느 때보다 신중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혀와 마력에 의한 감지가 거의 무력화된 이상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S랭크가 된 <직감>이나 마안의 천리안 능력 정도뿐이다.

그것도 눈보라 탓에 눈으로 보는 것 역시 한계가 있으니 결국 믿을 건 <직감> 정도뿐인데, 내 직감은 그동안 함께해 온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오히려 때에 따라서는 그 어느 것보다 신뢰하고 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갑작스레 찌르르 울리는 직감에 판단하기에 앞서 먼저 몸을 피했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무언가 나를 습격해왔다.

"끄르끄르르아───."

새하얀 털. 커다란 덩치. 사람보다는 유인원에 더 가까운 것 같은 외형.

이건 또 고전적인 몬스터의 등장이다.

[설인]. 극지방에 가까운 미궁에서 종종 발견되고는 하는 아인형 몬스터.

랭크는 C.

지금의 내게는 딱히 먹이 정도로밖에 상대할 가치가 없는 몬스터였다.

'일부러 적당히 기척을 내면서 움직였더니 이런 어중이떠중이가 다 덤벼드네.'

이곳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종을 확인할 생각으로 그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 덤벼든다.

용암 구역에서 그리도 나를 두려워하던 다른 몬스터들이 보았다면 정말 놀라 까무러치지 않을까?

고작 C랭크 주제에 내게 덤빈다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용감하다고 칭찬할지도 모르지.'

비록 그 용기가 너무 지나쳐 만용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지만.

"끄르르아───!!!"

포효하며 덤벼드는 녀석의 모습에 잠시 고민했다.

아르데를 만나기 전 같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냥 냅다 쳐죽여 버렸겠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같은 몬스터를 죽이는 데 망설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봐─ 말은 할 줄 아나?]

슬며시 전해본 사념대화에 녀석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갑작스레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더욱 더 흥분한 듯 사납게 달려든다.

별다른 지성은 없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쪽도 굳이 거리낄 필요는 없겠지.

만약 대화가 가능했다면 또 몰라도 이런 상대라면 더 두고 볼 것도 없다.

녀석은 이제 건방지게 내게 덤벼든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쪽을 향해 덤벼드는 녀석의 모습에도 굳이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할 것은 그저 바라보는 것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꽉 닫혀 있던 이마 한가운데의 세 번째 눈을 조용히 떴다.

"끄… 끄르르─?"

내 세 번째 눈과 눈을 마주친 순간 녀석의 몸이 덤벼들던 상태 그대로 쩍 굳어졌다.

마치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의 얼굴을 마주한 것처럼 돌이 되어 버린다.

내가 가진 마안의 능력 중 석화의 능력이다.

싸움은 너무나 싱겁게 끝이 났다.

돌이라기보다는 마치 커다란 바위가 된 녀석을 지나치며 가볍게 꼬리를 휘둘렀다.

스킬까지 사용할 필요도 없다.

퍽- 하고 바위가 부서지며 곳곳에 돌조각이 날려 눈 속으로 파묻혔다.

나는 그대로 가던 길을 마저 서둘렀다.

여전히 눈보라는 매섭게 몰아쳤다.

-이름 : 유준영(?)

-종족 : 몬스터 - [서드 아이 스피릿 보아]▶상세 보기

-능력치

힘 A70 / 체력 A70 / 민첩 A70 / 내구 S10 / 마력 S12

-스킬

유체이탈SS [사용 불가], 불굴S, 한계돌파S, 암영S, 암습S, 조이기A, 직감S, 초재생S, 맹진S, 극독A, 위압S, 카운터A, 독 내성S, 테일 스트라이크A, 폭식S, 두꺼운 비늘A, 마력조작S, 사고가속A, 신체강화S, 마안B, 고열내성A, 혹한내성A, 마력저항A, 독마법A, 화마법B, 수마법C

제58화

이후로도 계속해서 눈보라를 뚫고 이동했다.

간간이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우선 쉴 수 있을 만한 곳을 찾는다.

설인도 꽤 자주 보였지만 더 자주 보이는 것은 의외로 [스노우 래빗]이다.

녀석은 E랭크 몬스터로 산림 구역에서 자주 보았던 [혼 래빗]의 먼 친척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미궁에서의 그 역할 역시 완전히 똑같다.

생태계 최하위.

다른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는 녀석이다.

토끼 계열의 몬스터는 또 상당히 오랜만에 봤기 때문일까?

꽤 반가웠다.

들뜬 마음에 가볍게 인사만 하고자 했는데 나를 마주친 녀석이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죽은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슬프다.

슬픔에 잠기는 것도 잠시 다행히 그리 늦지 않게 쉴 만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협곡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동굴이다.

동굴 안에는 안타깝게도 선객이랄까, 주인이 있었다.

북극곰을 연상시키는 외형의 [화이트 락 베어].

랭크는 B.

꽤 험상궂게 생긴 것이 나름 이 근처에서 힘 좀 쓰는 녀석인 것 같았다.

대화가 통할까?

안타깝게도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사념대화는 가능한 것 같지만 이쪽에 우호적으로 나올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달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미궁의 냉엄함을 보여주는 수밖에.

녀석 정도의 수준이라면 <마안>에 어느 정도 저항할 것이 분명했기에 여기서는 직접 나설 수밖에 없다.

싸움에 휘말린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기에 결판은 밖에서 냈다.

다소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별문제 없이 해치웠다.

잠깐의 운동으로 마침 몸에 적당히 열이 오른 느낌이다.

동굴 안에 자그마한 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당분간 이곳을 베이스 캠프 삼아 주변부터 탐색해 봐야겠다.

내일쯤이면 눈보라도 그치지 않을까?

아니었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눈보라는 계속해서 몰아쳤다.

오히려 어제보다 위력이 더 강해진 것 같았다.

한동안 지켜보는 게 좋을까?

아직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도 가득했으니 당분간은 굳이 먹잇감을 찾아 사냥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동면 모드에 들어가 눈이 그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틀렸다.

나흘째 눈보라가 멈추지 않는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절로 옛 기억이 떠오른다.

정말 지랄 맞은 날씨를 자랑했던 평야 구역에서의 기억이.

설마 여기도 비슷한 건 아니겠지?

나흘째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눈보라는 그날 저녁 얌전히 그쳤다.

언제 눈보라가 불었냐는 듯 맑은 밤하늘의 모습에 나는 나흘 만에 드디어 동굴을 나설 수 있었다.

당장 눈보라가 그쳤다고는 하지만 언제 다시 또 불어올지 모른다.

그전에 빨리 주변을 탐색해야 했다.

평야 구역에서 하도 많이 당했다 보니 절로 급해진다.

눈보라가 그친 덕분에 무력화되어 있던 혀나 마력감지 역시 원활히 작동했다.

덕분에 늦은 한밤중이었지만 문제없이 주변 탐색이 가능했다.

애초에 <마안>의 효과로 밤에도 한낮처럼 훤히 볼 수는 있었지만 역시 좀 더 익숙한 혀나 마력감지가 조금 더 편했다.

눈보라가 그치고 맑게 갠 70계층은 무척이나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애초에 낮이 아닌 밤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별들과 그 아래 우뚝 솟은 설산의 모습이 마치 잘 그려진 그림 같았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척들만큼은 흉흉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마력을 사용한 혀의 감지 능력은 그간 진화를 하며 크게 성장했다.

지금이라면 과거에 지냈던 18계층 정도는 전부 내 탐지 범위 안이다.

문제는 계층을 내려갈 때마다 계층의 크기가 계속해서 커진다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과연 70계층이라 그런지 성장한 혀의 감지 능력으로도 계층의 전부를 살피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금 돌아다니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동굴을 베이스캠프 삼아 주변부터 천천히 확인해 봐야겠다.

날씨가 맑아져서 그런지 탐색 첫날부터 많은 몬스터들을 만날 수 있었다.

G랭크의 최하위 몬스터부터 이름 모를 A랭크의 몬스터까지.

첫날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다양한 녀석들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에서도 내가 주의해야 했던 상대는 역시 이름 모를 A랭크의 몬스터다.

전체적인 모습은 펭귄을 닮았으며 머리에는 왕관 같은 뿔이 나 있었다.

덩치 자체는 나와 비교하기 우스울 정도로 작았으나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틀림없이 이 계층의 계층주이거나 그에 준하는 녀석일 것이 분명했다.

'플로어 보스…는 역시 아니겠지.'

당장 용암 구역만 하더라도 계층주의 랭크가 무려 S랭크에 달했다.

구역이 달라진다 해서 몬스터의 수준이 갑자기 크게 올라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이란 게 있다.

이전 구역의 계층주가 S랭크였으니 다음 구역의 계층주 역시 최소한 S랭크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이 녀석이 플로어 보스가 아니라면, 이 계층의 계층주도 최소 S랭크겠는걸.'

만약 계층주가 있다면 분명 좋은 상대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아직 S랭크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레드 와이번이나 다른 S랭크의 몬스터를 상대하기도 해봤으니 이번에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S랭크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는 있어도 실제 S랭크와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당장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계층주에 대해서는 잠시 내려놓고 우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왔고 또 투지를 불태우는 이상,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의상 한번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당연하게도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지성은 있는 모양인데 딱히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나보다.

안타깝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설산 구역에 도착하고서 만나는 첫 고랭크 몬스터인 만큼 이곳의 수준이 어떨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상대가 비록 A랭크의 몬스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방심하지는 않는다.

녀석의 랭크는 나와 동급.

비록 실질적인 힘에서는 차이가 나겠지만 어디까지나 나와 동랭크의 몬스터이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지금껏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몬스터이다 보니, 더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녀석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시작은 <위압>과 <마안>이다.

녀석 정도의 수준이라면 분명 저항할 것이 당연했지만 잠깐의 틈만 만들면 된다.

녀석이 잠깐 주춤하는 사이 <암영>으로 모습을 숨겼다.

잠깐 사이 눈앞에서 사라진 내 모습에 당황한 녀석이 "꾸엑─?"하고 멍청히 울었다.

당황하는 녀석에게 대비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곧장 몸을 움직였다.

사용하는 것은 <암습>과 <맹진>.

비록 스킬의 이름은 성장하며 변했지만 그 행동만은 과거부터 바뀌지 않은 내 1번 패턴이다.

상대에게 도달하기 전, <위압>과 <마안>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꾸엑─!!!"

어지간한 상대라면 당할 수밖에 없는 황금 패턴이었지만 녀석은 역시 A랭크의 몬스터라는 듯 내 공격을 거뜬히 피해냈다.

'과연 작은 덩치답게 날렵한 몸놀림이군.'

가장 자신 있는 공격이 막혔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지금껏 이런 상황쯤이야 여럿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황하지 않고 곧장 다음 공격을 이어가려던 순간, 아쉽게도 이번에는 내 차례가 아닌 녀석의 차례였다.

녀석은 도도도- 짧은 다리를 파닥거리며 내게 덤벼들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달리 무척이나 재빠르다.

녀석이 펭귄 특유의 날개를 한순간 퍼덕였다.

날개에 마력이 모인다.

이윽고 녀석의 날개는 마치 강철처럼 단단하게 변했다.

"꾸엑─!"

녀석이 강철로 변한 날개를 크게 휘둘렀다.

민첩한 몸놀림에 맞춰 상당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곧장 몸을 피했다.

한순간 비늘이 따끔거렸다.

'단순히 단단한 것뿐만 아니라 예리하기까지 한 건가? 게다가….'

슬쩍 시선을 돌려 따끔거리는 비늘 쪽을 살폈다.

<초재생> 덕에 아무런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피했는데도 상처를 입었다. <두꺼운 비늘> 덕에 깊게 베이지 않았을 뿐이야.'

아무래도 실제 보이는 것보다 사거리가 더 긴 모양이다.

'접근전은 쉽지 않겠군.'

Shii───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더욱 빨랐다.

<사고가속>을 통해 잠깐 사이 생각을 끝마치고 곧장 몸을 움직였다.

화르륵-

내 주변에 작은 불덩이가 생겨난다.

화염 계통의 가장 기초적인 마법 중 하나다.

그 크기는 농구공 정도.

원한다면 더 크기를 키울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맞추지 못하면 마력만 낭비하는 셈이다.

재빠른 녀석을 상대하는 만큼 질보다 양으로 승부할 생각이다.

화르륵-

재차 불덩이가 생겨난다.

다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가 아니다.

잠깐 사이에 불어난 불덩이는 삽시간에 수십 개는 더 생겨났다.

만들어낸 불덩이를 곧장 녀석을 향해 쏘아 보냈다.

녀석이 "꾸엑─" 울부짖으며 급히 몸을 피했다.

'A랭크인 만큼 어느 정도 마력저항도 있겠지만 이걸로 당분간 시간은 벌겠지.'

진짜 내 노림수는 고작 불덩이 정도가 아니다.

"꾸엑─!!"

날쌘 녀석답게 명중하는 공격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녀석의 마력저항 덕분에 그리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괜히 애꿎은 주변만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불덩이까지 모두 피한 녀석이 확- 치솟아 오르는 불길 속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위풍당당 그 자체다.

"꾸에엑───!!!"

당당히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녀석의 모습에 'Shii───' 조용히 울었다.

쐐액-

준비했던 마법이 녀석을 향해 날아간다.

꽤 빠른 속도이기는 했지만 재빠른 녀석이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녀석이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몸을 피하려던 순간, 불쑥 녀석의 주변에 두꺼운 얼음 기둥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 역시 미리 준비했던 마법이다.

"꾸, 꾸에엑──?!"

한순간에 사방이 가로막힌 녀석은 급히 몸을 바둥거렸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쏘아 보낸 마법이 녀석에게 명중했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눈깜짝할 사이 보랗게 물들었다.

중독된 것이다.

내가 사용한 마법은 수속성 마법의 일종인 '아이스 월'과 독마법 중 하나인 '바이올렛 카바니'란 마법이다.

아이스 월은 이름 그대로의 마법이고 바이올렛 카바니는 강력한 독을 상대에게 쏘아 보내는 마법인데, 일단 마법에 적중한 상대는 전신이 보라색으로 물들며 그 내장부터 천천히 녹아내린다.

그리고 종내에는 피부까지 천천히 괴사가 진행되는데 그 이름답게 매우 잔인한 독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내 독까지 곁들어진 마법이니, 동랭크의 독 저항 스킬을 가지지 않은 이상 녀석은 더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지나친 고통에 당장 죽고 싶어하지 않을까?

"────!!!"

털썩- 쓰러진 녀석이 이리저리 몸을 바둥거렸다.

이미 성대까지 망가진 것인지 계속해서 울부짖어 보지만, 결국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잠시 후 짧은 경련 끝에 완전히 몸짓을 멈춘 녀석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녀석을 사냥했음에도 별다른 알림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중간한 녀석을 상대로는 더 이상 성장도 못하지.'

레드 와이번과의 대련은 내게 많은 성장을 안겨 주었지만 그만한 정체도 함께 안겨 주었다.

이미 내 성장은 거의 한계 수준에 다다랐다.

녀석의 시체는 당연하게도 전신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전신이 마치 미라처럼 쪼그라들어 있었으며, 기세 좋게 서 있던 뿔은 바둥거리는 과정에서 부러졌다.

A랭크 몬스터의 최후답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다.

슬슬 괴사가 진행되는 녀석의 시체를 별 고민 없이 냉큼 삼켰다.

녀석의 시체 속에 독이 그대로 들어 있음에도 별 상관은 없었다.

'내 독에 내가 당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거뜬히 A랭크의 몬스터 하나를 쓰러트린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차 주변의 탐색을 계속했다.

이 넓은 70계층에는 아직 둘러본 곳보다 둘러보지 못한 곳이 더 많았다.

이런 느낌으로 70계층을 열심히 탐색한 결과, 녀석과 비슷한 수준의 A랭크 몬스터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딱히 이렇다고 할 강자가 없는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이 층에는 계층주가 없는 모양이다.

아쉽게 되었다.

계층주가 없다는 판단 아래 아쉬워하는 한편, 더 거칠 것 없이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슬슬 몬스터들이 하나둘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괜스레 용암 구역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이렇다 할 소득도 없고 슬슬 다음 계층으로 내려가 볼까 고민하며 게이트를 찾아 돌아다니던 중, 무리 지어 몰려 있는 늑대들을 보았다.

산림 구역에서 보았던 늑대들 이후 처음 보는 늑대들이었다.

물론 이 늑대들은 산림 구역의 [사일런트 울프]들은 아니었지만.

늑대들의 정체는 [스노우아이스 울프]다.

C랭크의 몬스터로 산림 구역 늑대들의 먼 친척이라고 보면 된다.

이전에 만났던 [스노우 래빗] 이후 또다시 보게 된 반가운 녀석들이다.

곧장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녀석들은 당연하다는 듯 도망쳤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다리가 부서지라 설원 위를 달려간다.

조금 슬프다.

늑대 무리가 있던 자리에 무언가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털 뭉치.

혹시 스노우 래빗일까?

불쑥 솟아오른 반가운 마음에 냉큼 털 뭉치를 향해 다가갔다.

이번에는 제발 심장마비로 죽지 않는 녀석이었으면 좋겠다.

스르르- 소리 없이 다가가니 돌연 털 뭉치로 위로 쫑긋- 두 귀가 솟아올랐다.

스노우 래빗이 아니었다.

녀석의 귀는 토끼 귀처럼 길쭉하지 않았다.

대신 그 끝이 뾰족했다.

토끼가 아니라 실망스럽다.

그래서 넌 누구니?

여우였다.

새끼인 것인지, 일반적인 여우처럼 날렵한 외형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외형이었다.

아니, 얼굴이나 몸 자체는 제법 날렵하고 갸름한 편인데 몸을 감싼 복실복실한 털 때문에 전혀 여우처럼 안 생겼다.

멀리서 보면 그냥 털 뭉치나 눈덩이라 착각할 것 같았다.

나를 본 녀석이 "컁─"하고 울었다.

…안 죽네?

랭크는 고작 F정도에 불과한 것 같은데 E랭크인 스노우 래빗과 달리 돌연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녀석은 돌연 내게 다가오더니 불쑥 그 복실복실한 몸을 비비기 시작했다.

뭐지, 얘?

"컁컁─."

열심히 내 몸에 몸을 비비는 녀석의 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걸 먹어? 말아?

근데 자세히 보니 꽤 귀엽다…?

불쑥 차오른 충동에 녀석을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동행인… 아니, 애완동물이 생겼다.

제59화

여우를 데려가고 싶지만 아쉽게도 데려갈 손이 없다.

그래서 급한 대로 입에 물어서 데려가기로 했다.

혹시 녀석이 놀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녀석은 스스로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참 대범한 녀석이다.

앞으로 크게 자랄 것이 분명하다.

여우는 의외로 달달한 맛이 났다.

혹시나 삼키지 않도록 조심했다.

베이스캠프로 삼은 동굴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떠올렸다.

마력을 이용하면 굳이 입안에 넣지 않더라도 녀석을 옮길 수 있었다.

그냥 사탕 하나 먹은 셈 쳤다.

입 밖으로 꺼낸 여우는 내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복실복실했던 털이 축 늘어져 있다.

"컁─!"

몸을 달달 터는 모습이 꽤 귀엽다.

한차례 몸을 턴 여우는 곧 내 품으로 달려왔다.

"컁컁!"

짖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슬쩍 몸을 피했다.

녀석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시 달려온다.

또 몸을 피했다.

그것을 몇 차례 반복.

그렇게 버림받은 표정 짓지 마라….

아무리 내 침이라지만 조금 더럽… 아니, 부담스러웠던 것뿐이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그래도 다시 은근슬쩍 다가오지는 말아줄래?

내 침 때문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축축 젖은 여우를 위해 불을 피웠다.

순식간에 동굴 안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화르륵- 한순간에 피어난 불꽃에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컁─! 컁─!"

녀석은 불을 보며 열심히 짖었다.

은근슬쩍 주의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

불이 신기하기라도 한 것인지 여우는 겁도 없이 불을 향해 코를 들이밀었다.

새하얀 털이 까맣게 탈 수도 있었기에 급히 꼬리로 저지했다.

"컁─! 컁─!"

녀석이 불만스럽게 울었다.

'알았어, 알았어.'

Shii───

적당히 건성으로 답하며 꼬리 끝으로 여우의 몸을 감았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녀석은 불만스레 울음을 토하며 연신 몸을 바둥거렸다.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저 복실복실한 털이 까맣게 타기라도 한다면 너무 아까울 테니까.

열심히 몸을 바둥거리는 여우에게서 신경을 끊은 채 조용히 고민했다.

충동적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리 후회는 없다.

이미 데려온 것을 후회해봤자 소용없으니까.

무엇보다 너무 귀찮아지거나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그때 처리해도 늦지 않았다.

직접 녀석을 데려온 주제에 너무 매정한 것 아닌가 싶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몬스터니까.

아르데와의 만남 이후 무작정 공격부터 하고 보는 습관은 고쳤지만, 그래도 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녀석도 나도 미궁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다.

몬스터란 것은 본래 그런 존재다.

그게 헌터에게든 같은 몬스터에게든, 또는 어떤 재난이든지 간에 몬스터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방금도 내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당장 녀석을 공격하던 늑대들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F랭크의 몬스터.

녀석에게 미궁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러니 당장 내 덕분에 그 생을 더 이어 나가게 됐으니 녀석 입장에서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터.

과연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녀석을 비상식량이자 애완동물로서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처우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여우는 여전히 내 꼬리 안에 갇혀 몸을 버둥거렸다.

그리고 그러다 얼마 못 가 이내 포기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쫑긋 솟아올랐던 귀가 함께 축 늘어졌다.

"컁…."

기운차던 목소리에도 힘이 빠졌다.

그 모습에 양심이 조금 찔리는 것도 같았지만 알다시피 뱀에게 양심은 없다.

피식- 가볍게 웃으며 여우를 내 머리 쪽으로 옮겼다.

강제로 내 앞까지 끌려온 녀석은 여전히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Shii──

가볍게 울며 허공에 불덩이를 소환해냈다.

이전 펭귄 녀석과 싸울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마법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많은 숫자를 만들어내진 않았지만 적당한 숫자를 만들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컁─!!!"

그 심정을 대변하듯 축- 늘어져 있던 귀가 쫑긋 솟았다.

여우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한순간에 내가 소환한 불덩이에 정신을 빼앗겼다.

참 변화가 빠른 녀석이다.

녀석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만들어낸 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딱히 막지 않았다.

그저 불덩이를 반복적으로 적당히 이리저리 움직였다.

늘상 마력 훈련을 하며 몇 번이고 해봤던 것이기에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마력이 조금 들긴 하지만 이런 간단한 거로 여우의 관심을 돌릴 수 있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다.

"컁─! 컁!"

복실복실한 털을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강아지가 따로 없었다.

어떻게 봐도 몬스터라고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다니던 여우는 이내 지친 듯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헥헥-거리며 숨을 내쉬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그리고 그런 내 기색을 눈치챈 여우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컁컁!"

몸은 지쳤더라도 울음소리를 낼 기운 정도는 있는 모양이다.

녀석이 요구한 것은 당돌하게도 자신을 옮겨달라는 것이었다.

아까 전 그랬던 것처럼 내 꼬리로 말이다.

꽤 편했나 보다.

녀석은 과연 알고 있을까?

내 꼬리 힘이라면 C랭크의 몬스터가 가볍게 곤죽이 되고, B랭크의 몬스터도 수 분 내로 으스러지게 된다는 것을.

"컁─!"

알 리가 있나….

바람대로 녀석을 옮겨주었다.

연약한 녀석의 몸이 으스러지지 않도록 적당히 힘을 조절했다.

부수는 건 쉬워도 이런 세세한 힘 배분은 역시 어렵다.

적당히 내 몸 근처에 내려놓았더니 녀석이 또 불만스럽게 "컁컁!" 울었다.

이번에는 또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잠시 그 뜻을 이해하려고 가만히 바라보니 녀석이 삐죽 입을 내밀었다.

"컁!"

그러고는 꼬물꼬물 기어서 내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내 머리에 턱- 하니 턱을 올리더니 이내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대로 잠든 것이다.

정말 이걸 먹어, 말아…?

그런데 솔직히 좀 귀여웠다.

아직은 비상식량보다 애완동물에 더 가까운 걸로.

딱히 무겁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이 내 머리를 베고 누웠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어쩔까 고민하다 이내 나도 눈을 붙였다.

작은 동굴 안에 녀석의 작은 숨소리와 불길만이 조용히 타올랐다.

* * *

이튿날, 여우는 오늘도 참 활기차다.

이른 아침, 언제나처럼 몸을 일으키니 당연히 내 머리에 몸을 기대고 있던 녀석이 대굴대굴 바닥을 굴렀다.

복실복실한 녀석이 그리 구르니 한순간 정말 공인 줄 알았다.

"컁컁─!"

몇 차례 바닥을 구른 녀석이 몸을 세차게 떨더니 이내 불만스레 울었다.

그 기운찬 목소리를 들으니 덕분에 녀석의 잠은 확실히 깬 것 같다.

Shii───

불만 가득한 녀석의 울음에 적당히 맞장구쳐 주며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동굴 한가운데 만들어 놓았던 불꽃이 아직까지 타오르고 있었다.

곧장 해제했다.

"컁─!"

제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아서일까? 녀석이 재차 불만 가득한 울음을 내뱉었다.

그제야 흘깃 시선을 돌려줬다.

"컁컁─!"

가만히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으니 녀석은 이내 불만스레 입을 삐죽였다.

여우 주제에 표정이 다채롭다.

그대로 조금 더 녀석을 쳐다보다 슬쩍 몸을 움직였다.

그런 내 모습에 깜짝 놀란 녀석이 언제 삐졌냐는 헐레벌떡 쫓아왔다.

따로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혀의 감지를 통해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모습이 그려졌다.

많이 쉬운 녀석이다.

조용히 동굴을 나서는 동안 헐레벌떡 나를 쫓아온 녀석이 "컁컁─" 열심히 울었다.

그것이 마치 어딜 가냐 묻는 것 같아서 "쉬이이──" 가볍게 울어줬다.

[네 밥 찾으러.]

"컁?"

사념대화를 통해 전달한 의사에 여우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런 녀석에게 가볍게 웃어주고는 꼬리를 이용해 내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컁!"

녀석이 또 기운차게 울었다. 역시 전환이 빠른 녀석이다.

사념대화를 사용하면 대화가 가능하지만 상대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다.

랭크가 높은 몬스터일 경우 원활한 대화가 가능했지만, 반대로 랭크가 낮을 경우 제대로 된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았다.

일례로 말이 능숙했던 여왕과 달리 간단한 단어만 사용했던 현명한 비늘의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 만큼 당연하게도 사념대화를 사용해도 여우와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F랭크니까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간단하게라도 의사소통을 하려면 적어도 E랭크는 되어야 한다.

"컁컁!"

내 머리 위에 떡하니 자리 잡은 여우는 잔뜩 신이 나 열심히 울었다.

드물게도 화창한 날씨에 먼 곳까지 한눈에 보이니 이곳저곳 둘러본다고 여념이 없었다.

녀석이 그렇게 신이 난 것과 달리 정작 나는 혹시나 녀석이 떨어질까 싶어 극히 조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의 몇 배는 느린 속도로 서행 중이다.

'이러다가 먹이나 제대로 찾을 수 있을는지….'

나는 아직 <폭식>에 저장 중인 에너지가 있으니 별문제는 없었지만 녀석은 달랐다.

내가 E랭크였던 당시 꽤나 먹어치웠던 것을 생각하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될 것이다.

'그나저나 아직 새끼인데, 고기를 줘도 되나…?'

여우는 포유류인 만큼 젖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나는 수컷이고, 무엇보다 뱀인 까닭에 젖을 주고 싶어도 젖을 줄 수가 없다.

'…설인이라도 하나 납치해야 되려나?'

대충 성장한 고릴라쯤 되는 녀석이니 분명 젖도 있을 것이다.

조금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설인을 찾아 떠날까 싶던 찰나, 평소처럼 열심히 움직이던 혀가 무언가를 감지했다.

한 무리의 몬스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시끄러운 만큼 어그로를 잘 끈다 이건가?'

당장은 관상용 정도의 존재 의의만 있던 여우의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갔다.

녀석은 이제 애완동물 겸 비상식량 겸, '미끼'다.

"컁컁!"

그렇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녀석은 여전히 생기발랄했다.

그 천진난만함이 참 부럽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몬스터 무리는 평소 종종 보고는 했던 녀석들이었다.

[마운틴 버팔로]. 랭크는 C.

항상 수십 마리가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몬스터로, 그 숫자 때문에 웬만한 상위 랭크 몬스터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녀석들이다.

참고로 생긴 건 영락없는 '소'지만 생긴 것과 달리 육식이다.

과연 몬스터라고나 할까?

굳이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여우의 소리에 이끌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얌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여우가 앞발로 내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왜 멈춰?' 같은 느낌의 울음이 곧 뒤따른다.

"컁컁!"

복실복실한 털에 감싸인 도톰한 발바닥이 느껴졌다.

잠시간 멍하니 그 감각을 즐겼다.

"컁─!"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머리를 두드리던 앞발의 힘이 강해졌다.

느낌상 '무시하지 마!'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 나름대로 힘을 준 것 같지만 전혀 간지럽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해 너무 미약해서 내 감각이 조금만 더 예민하지 않았다면절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힘이라도 있어야 마사지 받는 느낌으로 즐길 텐데….

여우를 조금 성장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래도 말랑말랑한 발바닥의 감촉만큼은 정말 좋았다.

"컁컁!"

계속된 앞발질에도 내가 전혀 반응이 없자 여우는 이번에도 역시 당연하게 삐졌다.

'흥!' 하는 느낌으로 고개를 돌린 여우가 곧 몸을 움직였다.

하는 모양을 지켜보니 내 머리에서 내려가려는 모양이다.

왜 그리 재촉하나 했더니 멈춰선 김에 잠시 바닥에서 놀고 싶은 모양이다.

슬쩍 꼬리를 움직여 제지했다.

"컁─!!!"

여우가 또다시 불만스레 울었다.

다시 한번 인정사정없는 발바닥 어택이 시작되었다.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회복되는 느낌이다.

삭막했던 미궁 생활에 새로운 활력소를 찾은 것 같다.

여기서는 여우가 바라는 대로 내려줘도 좋을 테지만, 슬슬 버팔로 무리가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만큼 녀석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냥 마음껏 뛰어다니게 해도 안전할 테지만.'

다른 몬스터라면 몰라도 내게는 수십의 버팔로 무리도 별것 아니다.

굳이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세 번째 눈을 사용해 바라만 보아도 된다.

이후 적당한 마법 한 발이면 쉽게 정리가 가능했다.

그럼에도 내가 굳이 여우를 말린 이유는 간단하다.

'내려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른바 말하는 '심술'이다.

거기다가 녀석의 발바닥 어택에 힐링 되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다.

그렇게 내가 여우에게 열심히 힐링 받던 와중에 마침내 버팔로 무리가 도착했다.

Shii───

[도시락이 도착했네. 맛있어 보이는 거로 하나 골라봐.]

내 태연한 말에도 여우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열렬히 내 머리를 두들겼다.

적당히 '위험해! 위험하다구!' 같은 느낌이었다.

아, 이번 건 조금 간지러웠다.

제60화

버팔로 무리를 쓰러트리는 건 너무나 당연하게도 굉장히 쉬웠다.

오히려 여우가 먹을 것을 생각해 최대한 깨끗한 상태로 처리하는 것이 어려웠다.

일단 수속성 마법을 사용해 적당히 목을 베었다.

"컁─! 컁컁─!!!"

내 머리에서 내려가 자유의 몸이 된 여우가 설원 한가득 쓰러진 버팔로 무리 사이를 열심히 뛰어다녔다.

바로 조금 전까지 위험하다며 내 머리를 열심히 두드리던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역시 전환이 빠른 녀석이다.

'그래서 고기는 먹을 수 있는 건가?'

혹시 녀석이 먹지 못할 것을 생각해 적당한 버팔로 세 마리를 살려두었다.

당연하게도 암컷들이었다.

'그래도 일단 소니까 젖은 나오겠지.'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역시 설인들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버팔로 무리 사이를 발발거리며 가끔씩은 '킁킁' 냄새를 맡던 여우가 이내 한 버팔로 앞에 몸을 앉혔다.

그리고 곧장 주둥이를 파묻는다.

'…고기 먹는구나. 아직 새끼인 주제에….'

역시 몬스터는 몬스터였다.

이걸로 버팔로나 설인들에게 기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살려둔 녀석들은… 음, 적당히 먹을까?'

그래도 명색의 소고기니까 맛은 좋을 것이다.

"컁컁!"

살려두었던 녀석들부터 천천히 잡아먹으려던 순간 한창 식사에 열중 중이었어야 할 여우가 나를 불렀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녀석이 재차 '컁컁!' 울었다.

대충 '이것 좀 뜯어줘!' 같은 느낌이다.

털이 두터워서 전혀 먹지를 못했구나… 저런….

확실히 F랭크의 몬스터가 C랭크 몬스터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선 녀석을 내 근처로 불렀다.

죽은 지 꽤 된 녀석 말고 싱싱한 녀석을 먹으라는 뜻에서였다.

싫다고 하신다.

아무래도 제 앞에 있는 녀석이 마음에 든 것 같다.

좋다, 내가 움직여준다.

이번에도 역시 적당히 수마법을 사용해 상처를 냈다.

여우가 기쁜 듯 울며 버팔로의 배에 주둥이를 처박았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내 꼬리가 그런 녀석을 막았다.

불현듯 그런 모습이 떠올랐다.

버팔로의 시체에서 나온 피로 물든 녀석의 모습.

새하얗고 복실복실하던 털이 벌겋게 물든 모습.

용납할 수 없다.

곧장 시체를 거꾸로 들어 올렸다.

이러면 알아서 피가 빠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뺏는 게 아니니까, 잠시만 기다려 보래도.

아, 발바닥 어택은 좋다.

계속해다오.

여우의 불만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착실히 버팔로의 시체에서 피를 뺀다.

그리고 냄새가 날 것 같은 내장도 치워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지독한 악취를 풍기면서 내 품에 달려들 게 뻔하니까.

하는 김에 조금 구워 보는 건 어떨까?

나는 별맛을 못 느끼지만 여우는 다를 테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보채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보래도.

맛있게 구워줄 테니까.

그래서 넌 레어가 좋니? 웰던이 좋니?

개인적으로 무난한 미디움을 추천하지만….

아, 그냥 달라고?

거, 잠시만 기다려봐라, 이 참을성 없는 녀석아.

내가 천국을 보여주겠다.

결국 어떻게 구울지 정하지 못하고 세 개 다 만들어 보았다.

다 구워진 고기에 여우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맛있게 잘 먹더라.

녀석은 의외로 웰던이 좋았다고 한다.

다음부터는 전부 바싹 구워 줘야겠다.

그리고 하는 김에 한번은 아예 전부 태워보는 건 어떨까?

또 발바닥 어택을 받고 싶으니까.

동굴로 돌아가는 길. 배가 빵빵해진 여우가 내 머리 위에서 잠들었다.

쌕쌕- 규칙적으로 내뱉는 숨소리와 미약한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갈 때는 그렇게 시끄럽더니….'

앞으로 좀 시끄럽다 싶으면 뭐라도 먹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녀석이 깨지 않도록 갈 때보다 더 조심히 몸을 움직였다.

동굴로 돌아가던 중 몇몇 몬스터들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여우가 깨는 일은 없었다.

뭘 하기도 전에 빠르게 해치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막 동굴로 돌아왔을 무렵 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루 사이에 이만큼이나 정이 들다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걸리적거린다거나 하면 바로 처리한다고 했었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그러지 못할 것 같았다.

'나답지 않게….'

지금껏 새끼이든 그렇지 않든. 귀엽든 흉측하든.

수많은 몬스터를 태연히 죽여왔지만 이 녀석에게만은 그럴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정에 굶주렸었나?'

아르데와 만난 이후 어렴풋이 느끼고는 했지만, 정말 그런 모양이다.

아무리 몬스터라도 내 흉포한 외모나 흉흉한 기세 탓에 내게 다가오지 못했지만 녀석은 달랐다.

거리낌 없이 다가오고 접해온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 오로지 순수한 감정만으로.

근 2년간의 여정 동안 느낄 수 없었던 감각이다.

이전에 장난스레 말했지만 투쟁 가득한 미궁 생활로 알게 모르게 지쳐 있던 나는 정말 녀석에게 치유받고 있었다.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불을 피웠다.

그리고 여전히 내 머리 위에서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녀석을 조심히 꼬리로 들어 바닥에 뉘었다.

왠지 모르게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재차 꼬리를 움직였다.

녀석의 턱이 내 머리 위에 놓였다.

'…그래. 비상식량은 빼주자.'

그런 생각을 했다.

녀석의 입에서 질질 침이 흘렀다.

비늘이 매끈매끈해졌다.

이걸 먹어, 말아…?

* * *

내 안에서의 여우에 대한 평가에 비상식량이라는 항목이 사라졌지만 문제가 있었다.

기껏 녀석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빠졌다.

바로 녀석의 호칭이다.

기왕 녀석을 애완동물 겸 미끼로써 인정했으니, 언제까지 '여우'나 '녀석' 등의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고민해봤다.

녀석의 종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른다.

일단 그 생김새 때문에 '여우'라고 부르고는 있으나 정확한 종은 몰랐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처음 보는 몬스터였으니까.

그래서 처음 보는 몬스터의 경우 항상 최초 발견자가 이름을 붙이는 관례상, 내가 한번 이름을 붙여봤다.

[눈 여우]. 적당적당한 것도 같지만 꽤 괜찮은 이름이라 생각한다.

내게는 나도 모르던 작명 센스가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여우의 종은 [눈 여우]로 확정이다.

그리고 거기서 따와서 녀석의 이름을 결정했다.

'설'. 눈 설(雪) 자에서 따서 '설'이다.

이번에도 역시 적당적당한 것 같지만 나로서는 대만족이었다.

여우… 아니, 설이도 만족한 듯 "컁컁!" 울었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뭐, 녀석은 애초에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한 것 같았지만.

그런데 얘는 수컷일까 암컷일까? 역시 새끼 때는 성별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앞으로 잘 지내보자 설아.

* * *

설이와 함께 지낸 지 대략 일주일.

새삼 느낄 수밖에 없다.

동물을… 생명을 기른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한 생명에 대한 책임 때문에라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설이는 다시 비상식량이 될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모든 동물을 키우는 주인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근데 하는 행동이 행동이라서일까?

사실 동물보다는 애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고집 많고, 쉽게 질리고, 잘 삐지고, 틈만 나면 빼액- 울며 떼를 쓴다.

한 네다섯 살쯤의 아이가 이런 행동을 보이지 않을까?

주인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부모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언제 내 참을성이 바닥날지 모르겠지만. 모처럼 이름까지 지어주지 않았던가?

어쨌든 힘내자.

그러니까 내 머리는 베개가 아니다, 설아.

막 침 흘려도 좋은 곳이 아니에요.

"캬아앙───!!!"

…진짜 이걸 먹어, 말아?

* * *

요 며칠 눈보라가 심하게 불었다.

굳이 나가고자 하면 나는 별문제 없었지만, 설이는 달랐다.

원래 이 계층 출신인 만큼 어느 정도의 냉기라면 괜찮을 테지만, 저렇게 눈보라가 심해서야 함부로 밖을 나다니게 할 수 없었다.

추운 건 둘째 치고 바람에 휙- 날아가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자꾸 나가자고 보채지 마라.

문제가 있다.

나야 <폭식>으로 항상 일정량의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어도 설이는 아니다.

녀석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했다.

눈보라를 뚫고 조금 사냥을 나가야 할 것 같다.

아빠… 아니, 집사가 이렇게 고생합니다.

그러니까 사냥하러 가는 거지 놀러 가는 게 아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그렇게 빼액거려도 안 된다.

시무룩한 표정 지어도 안 돼.

아빠… 아니, 집사… 주인님이 돌아올 때까지 집 잘 지키고 있도록.

혼자 집을 보는 것도 훌륭한 아이의 일이야.

그렇게 나는 사냥을 떠났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 혼자 집을 보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라 꽤 서둘렀다.

눈보라가 불어 사냥감을 찾기 쉽지 않았기에 일찍이 찾아두었던 설인들의 보금자리를 습격했다.

종종 애용하고는 하는 무한 리필 뷔페다.

설이는 설인보다 버팔로 고기를 더 좋아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잘 구워줄 테니 부디 이걸로 참아주기를….

돌아온 동굴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리 피워둔 불길만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나가지 말래도 결국 혼자 나간 것일까?

왜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 것일까?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혹시 몬스터라도 만난다면?

혹시… 혹시….

"샤아아─────!!!"

분노한 상위 몬스터의 울부짖음이 눈보라를 뚫고 설산을 울렸다.

눈에 뵈는 게 없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부쉈다.

눈보라 탓에 짧아진 감지 범위가 원망스러웠다.

온갖 감정들이 다 밀려들어 온다.

내 말을 듣지 않은 설이에 대한 분노와 짜증.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보다 더 커다란 걱정.

걱정만큼이나 커다란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분노에서 차오른 대상 없는 살의와 적의.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이 설산, 70계층의 몬스터란 몬스터는 모두 죽일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무사하기를.

[강력한 분노에 스킬 <광분G>가 생성되었습니다.]

[지나친 분노에 이성을 상실합니다.]

[당장 심신을 다스리세요.]

[한계치를 넘어선 분노입니다.]

[스킬 <광분G>가 <격노C>로 성장합니다.]

[당장 심신을 다스리…]

[스킬 <격노C>가 <분노A>로…]

[당장 심신을…]

"꺙─!"

눈보라와 내가 난사한 마법의 폭음을 뚫고 자그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것 같은 미약한 울음소리였지만, 난동을 피우는 내 귀에 똑똑히 박혀들었다.

분노로 흐릿하던 의식이 단번에 맑아졌다.

급히 시선을 돌린다.

눈보라 속 희미한 형체가 보였다.

눈을 닮은 순백의 자그마한 털뭉치.

그 위로 쫑긋 솟은 뾰족한 귀.

맹렬히 흔들리는 여우 꼬리.

거센 바람을 뚫고 이리로 달려오는 것은 틀림없는 설이였다.

Shii───!!!

녀석을 발견하자마자 급히 몸을 움직였다.

한달음에 그 곁으로 달려가니 녀석이 해맑은 얼굴로 "컁컁!" 울어온다.

느낌상 '난 이 정도 눈보라에도 끄떡없어!' 같은 의미일 것이다.

녀석의 그 태평한 반응에 한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이 와중에 녀석의 말을 정확히 해석하는 내가 밉다.

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꼬리를 흔드는 설이가 밉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큰 안도감을 느낀다.

Shii───

잘 있으니 됐다.

그래도 혼은 확실히 낼 예정이다.

그러니까 벌로 잡아 온 고기는 미디움으로 구울 거다.

그렇게 실망한 표정 지어도 안 돼.

이번에는 정말 드물게도 크게 화났으니까.

어쨌든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눈보라가 심하니까 먼저 뛰어가지 말고 손을 잡… 얌전히 내 머리 위로 올라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