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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제61화

설이는 한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새끼 때가 다 그런 것인지 잠깐 눈을 떼면 다른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 버린다.

넓은 감지 범위를 가진 혀가 있기에 한순간에 뿅-하고 멀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없지만, 역시 불안하다.

마음 같아서는 줄이라도 하나 묶어서 내 몸에 연결해두고 싶다.

아쉽게도 줄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그 대용으로 꼬리가 있으니 다행이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쪼르르 달려나가는 설이를 붙잡는다.

설이가 "컁컁!" 불만스레 울었지만 봐주지 않는다.

사고 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게다가 아직 밖에는 눈보라가 불고 있었다.

"컁─!"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얌전히 내 옆에 붙어 있어.

자, 여기 네가 좋아하는 불꽃이다. 열심히 쫓도록.

"컁컁!"

너무 많이 쫓아서 질린다고?

…금방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어주마.

아쉽게도 이렇다 할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급한 대로 다른 불 마법을 이용해 동물 모양의 불꽃을 만들어 냈지만 설이는 조금도 반기지 않았다.

같은 불이라서 통하지 않는가 보다.

마냥 쉬운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꽤 까다롭다.

쉽사리 새 장난감을 만들어주지 못한 채 끙끙대는 나를 보고 설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여우 주제에 표정이 너무 다채롭다고.

"컁컁!"

느낌상 '나가서 놀래! 나갈래! 나갈 거야!' 같은 의미였다.

설이는 태생이 태생인지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아무 문제 없었다.

역시 몬스터 같은 느낌이랄까? 밖에 나가더라도 분명 별문제 없을 것이다.

무슨 문제가 있다 싶으면 다시 데리고 들어오면 되니까.

게다가 주변의 몬스터도 내가 싹 깨끗이 해치운 상태였기에 설이를 건드릴 만한 건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내가 붙어 있을 테니 문제가 생길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설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에 미온적인 이유는, 바로 내가 뱀이기 때문이다.

'변온 동물에게 이런 추운 날은 무리다.'

내가 몬스터라 망정이지 정상적인 뱀이었다면, 분명 동면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얼어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화창한 날에도 나가기 싫은데 눈보라까지 와서야….'

개인적으로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날씨다.

하지만 이런 내 심정을 전혀 모르는 설이는 "컁컁─!" 울면서 나를 재촉했다.

대충 '나가자! 얼른! 얼르으으은─.' 같은 의미였다.

Shii───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결국 설이의 고집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 너무 무르지 않나…?

S랭크에 준하는 A랭크 몬스터로서.

지금껏 지나온 계층에서 잔악한 포식자라 불리며 공포의 상징이 되었던 내 위엄을 생각하면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역시 단단하게 주의를 줄 필요가….'

"컁─!"

행복하게 꼬리를 흔드는 설이의 모습을 보니 아무렴 좋겠다 싶었다.

지금 기분이 절대 나쁘지 않으니까.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설이의 행동이 조금 민폐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툭하면 떼를 쓰고, 어떨 때는 짜증을, 어떨 때는 분노까지 느끼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설이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아이일 때는 저게 일이니까.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이 세 가지만 확실히 지킨다면 조금 말 안 듣는 거쯤이야 허허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 제발 이대로 밝게만 자라다오.

그러니까 펭귄 고기는 싫다고? 버팔로 고기를 잡아달라고? 이 눈보라를 뚫고?

게다가 오늘은 입맛이 별로니 살짝 피 맛이 나는 미디움으로?

엉망진창 혼냈다.

"컁컁…!"

구슬픈 설이의 울음소리가 눈보라의 소음에 조용히 파묻혔다.

편식하는 아이는 나쁘다.

* * *

평화로운 하루다.

설이는 언제나 생기발랄하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먹고 열심히 놀았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빵빵하게 부른 배를 이끌고 내 머리맡에서 잠들었다.

낮에 모처럼 발견한 버팔로 무리를 열심히 뒤쫓았으니 지칠 수밖에.

C랭크 몬스터를 쫓는 F랭크 몬스터라니.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나 잡아먹어 주세요.'하고 제 발로 찾아가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뭐, 설이의 상황이 보통은 아니었지만.

설이에게는 나라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었다.

설이가 열심히 버팔로 무리를 뒤쫓자마자 적당히 몇 놈을 쓰러트려 주었다.

맥없이 픽 쓰러진 버팔로 무리에 설이가 실망할 수도 있으니 몇 마리는 적당히 마안의 매혹 능력을 사용해 그대로 달리도록 만들었다.

설이가 굉장히 기뻐해서 나도 기뻤다.

되게 멋진 아빠… 아니, 주인님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설이가 얌전히 잠든 한밤중. 동굴에 누군가 찾아왔다.

Shii───

눈보라는 며칠 전 진작에 그친지 오래였기에 혀의 감지 범위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동굴에 거의 다 다가와서야 그 기척을 느끼다니….

'보통 놈은 아니군.'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설이가 도중에 깨지 않도록 꼬리를 이용해 슬며시 다른 자리로 옮겨 주었다.

도중에 설이가 잠시 낑낑거리는 바람에 흠칫했지만 다행히도 깊이 잠든 탓에 설이는 깨지 않았다.

'깨어나면 분명 같이 간다고 난리겠지.'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직감>에 별다른 경고가 없는 것을 보아, 그리 위험한 상대는 아닐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설이를 데려가도 상관은 없겠지만….

'이때 아니면 육아 스트레스를 언제 풀겠어. 나도 좀 즐겨야지.'

게다가 잘 자는 애를 굳이 깨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괜히 애를 내버려 두고 홀로 외유를 나가는 아버지의… 아니, 주인의 심정을 느껴 그리 덧붙여 본다.

'그래서 찾아온 놈은 뭐 하는 놈이려나?'

얼마 전의 난동 탓에 이제 이 계층의 몬스터들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굳이 기세를 드러내지 않으면 막 덤비고는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내 꼬리만 슬쩍 보였다 싶어도 냉큼 도망칠 정도다.

'게다가 요즘에는 설이의 하얀 털만 봐도 도망친다고 하던데….'

자식과 아버지… 아니, 주인과 애완동물 둘 다 사이좋게 악명을 떨친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Shii───

그래서 과연 어떤 놈이 찾아온 것일까?

호기심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동굴 앞에서 가만히 방문객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의문의 방문객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반짝이는 새하얀 털.

무언가를 바르기라도 한 것인지 윤기를 머금은 결 좋은 털이었다.

그다음 눈에 들어온 것은 기다란 아홉 개의 꼬리.

살랑살랑 흔들리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아홉 개의 꼬리는 척 보아도 상대가 범상치 않은 놈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내 시선을 집중시킨 것은 바로 그 청명한 푸른색의 눈이다.

꿰뚫어 보듯 나를 고요히 응시하는 시선에 절로 몸이 반응했다.

방문객의 정체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새하얀 여우.

'구미호'였다.

'보통 상대가 아니다.'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놈은 절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것을 말이다.

'<직감>은 분명 아무런 경고가 없었는데… 젠장, 설마 이제 와서 고장이라도 난 건가?'

한순간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던 직감이 이제 와서 설마 무반응이라니?

게다가 당장 상대가 눈앞에 있음에도 별다른 경고가 없다.

별다른 기세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가 아는 [구미호]란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강하다.

못해도 S랭크 이상. 실제로 강원도에 있던 어느 미궁에서 뛰쳐나온 구미호는 근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강했다.

당시 녀석의 랭크는 SA. 그때는 아직 실종되지 않았던 SS랭크 헌터 성재명이 직접 나서서 해치웠었다.

그렇게 강한 개체가 있을 정도로 구미호란 몬스터는 만만치 않은 존재다.

특히나 당장 눈앞에 있는 놈은 그 분위기가 워낙 신비롭다 보니 더 위험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당장 녀석이 위험한 기세를 보이지 않아 다행이랄까?

그리 생각한 순간 놈에게서 마력이 움직였다.

움찔 몸을 떠니 그것은 익숙한 사념대화였다.

[아이를 보러 왔다.]

머릿속으로 들려온 것은 가느다란 미성.

무척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다짜고짜 용건인가? 어지간히 얕보였나 보네… 잠깐… 그것보다 아이라고…? 설마?'

처음 녀석의 외모를 봤을 때부터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았나 보다.

놈… 아니, 그녀는 아마 설이의 엄마였나 보다.

Shii───

[아이라니, 무슨 아이를 말하는 거지?]

[뒤편의 동굴에 있는 내 아이를 말하는 게다. 본녀를 속일 생각은 마라. 그 아이와는 마력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냄새도 아이의 것이 맞다.

혹시나 싶어서 모른 척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Shii───

[…아이와는 무슨 관계지?]

[이미 짐작했으면서 묻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당연히 아이는 본녀의 자식이다. 그것보다 계속 시간을 끌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대가 그동안 내 아이를 돌봐준 것을 알기에 참아주고 있는 것뿐. 본녀의 인내심은 그리 강하지 않다.]

그리 말한 구미호는 그제야 숨기고 있던 기세를 드러냈다.

분명 살짝만 드러냈음에도 범상치 않다.

오랜만에 온몸의 비늘이 쭈뼛서는 느낌이다.

'절대 S랭크가 아니다. 그 이상이야…!'

이 정도 기세를 느낀 것은 용암 구역의 에어리어 보스, 마그마 와이번 '아르데'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만약 싸운다면 솔직히 내게는 전혀 승산이 없었다.

'…비켜 줘야 하나?'

여전히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구미호의 시선을 느끼며 잠시 고민했다.

아까부터 계속 말을 돌릴 때부터 짐작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설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설이를 데리고 떠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모라도 뺏길 생각은 없다.'

이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제 설이는 확실히 '내 것'이었다.

온전히 내가 품에 안은 상대.

소중하다고 생각해버린 것을 그 상대가 아무리 아이의 부모라도 빼앗길 수 없었다.

'랭크만 낮았다면….'

냉큼 그녀를 죽여버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을 것이다.

설이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겠지 내 것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나았다.

너무 잔인하고 비정한 짓인 거 같지만 상관없다.

나는 뱀.

몬스터니까.

애초에 내가 처음 설이를 발견했을 당시 설이는 늑대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었다.

지금 구미호의 모습을 보니 실수로 헤어진 것은 아닐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이미 한번 설이를 버렸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그러니 내가 설이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문제없는 일일 것이다.

설이도 저를 버린 부모를 원망하고 있을지 모르니 이 기회에 내가 복수를 하는 것도 괜찮을 거다.

복수는 내 전문 분야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이상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에도 나를 해치우고 설이를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눈앞의 구미호였으니까.

그럼에도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은 앞서 그녀가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동안 내가 설이를 돌봐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비키는 게 맞다. 전혀 승산이 없어. 하지만….'

역시 비키지 못하겠다.

이별은커녕 아직 함께할 것들이 더 많이 남았는데….

'…그래. 기회를 노리자.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한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이를 보러 동굴로 들어갈 때라던가 설이를 만났을 때라든가.

그 틈에 노리면 성공할지도 몰랐다.

물론 설이 눈앞에서 제 부모를 죽인다면 설이가 날 영영 미워할지도 몰랐지만, 상관없다.

나는 단지 내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마안의 능력을 써서라도….

Shii───

무심코 이어가던 상념을 중단했다. 이 이상 나아갔다간 되돌릴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이한테 정신 지배라니.

말도 안 된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같은 의미로 설이가 슬퍼할 만한 짓도 할 수 없었다.

쿵-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힘차게 찍었다.

정신을 차리자는 의미에서 그리고 내가 내 자신에게 준 벌이다.

꽤나 전력으로 내려친 까닭에 피가 흘러내렸지만 <초재생> 덕에 별문제는 없었다.

이미 상처는 다 아물었다.

[…미친 건가, 그대?]

그리고 이런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구미호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설이를 빼앗아 갈 것이 분명한 상대였던 만큼 한순간 살의가 피어올랐지만 금세 진정시켰다.

역시 설이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녀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미안하군, 잠시 정신이 나가서… 좋아, 이제 데리고 가주지.]

Shii───

가볍게 울며 몸을 돌렸다.

상대에게 무방비하게 등을 보여주는 꼴이었지만 어차피 별 의미 없는 행동이다.

그녀가 나를 해치우고자 했으면 이미 진작에 해치웠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은연중에 그녀가 나를 공격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도 있다.

그리된다면 나도 정당방위로 공격할 수 있으니까….

'안 돼… 착한 생각을 하자. 착한 생각… 설이를 떠올리는 거야. 그 복실복실한 털과 도톰한 발바닥….'

마음이 안정되고 치유되는 느낌이다.

역시 설이는 만능 치유제였다.

'그런데 설이가 크면 그녀처럼 되는 건가?'

불쑥 차오른 생각에 힐끔 시선을 돌렸다.

우아하고 기품 넘치는 걸음으로 나를 따라오는 구미호의 모습이 보였다.

몹시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다.

몸의 매끄러운 곡선은 몬스터인 주제에 묘한 색기를 흘리는 것 같다.

그렇게 그녀처럼 성장한 설이를 떠올리니 조금 아쉬웠다.

'…설이는 그냥 지금 이대로 있어 줬으면.'

훌륭하게 장성한 모습도 한번 보고 싶기는 하지만 역시 설이는 지금 같은 모습이 제일이라 생각한다.

성장이나 진화 같은 거도 아예 안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리 머지않아 동굴에 도착했다.

최대한 늦게 움직여보았지만 애초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기에 별 소용은 없었다.

동굴을 눈앞에 두니 괜스레 <직감>이 미워졌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평소처럼 경고를 보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진작에 설이를 데리고 도망쳤을 텐데.

당장 용암 구역으로 넘어가 구역주인 아르데에게 찾아갔을 것이다.

아무리 구미호라도 구역주인 아르데한테는 안 될 테니까.

'이제 와서는 아무런 소용도 없지만….'

그렇게 잔뜩 늦장을 피우다 재촉하는 구미호의 기세에 결국 그녀를 동굴 안으로 들일 수밖에 없었다.

설이는 여전히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제62화

동굴 안에 잠들어 있는 설이를 발견한 구미호는 내가 미처 제지하기도 전에 그 곁으로 다가갔다.

사뿐히 근처에 내려앉은 그녀가 가볍게 설이의 몸을 핥았다.

"뀨우웅…."

잠에서 깨지는 않고 가볍게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를 하는 설이의 모습에 구미호의 입가에 절로 자그마한 미소가 지어졌다.

'저렇게 보니 어미는 어미군.'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나 기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결 그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부모의 모습이랄까? 괜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봤자 결국 자식을 버린 부모지.'

사정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설이가 위험했던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샘솟는 질투심을 진정시켰다.

잠시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설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구미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재차 가볍게 설이의 몸을 핥은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선 감사를 전하지. 그동안 아이를 보살펴 주어 고맙군. 원래는 보자마자 했어야 했는데… 본녀도 급한 마음에 그랬던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게.]

구미호의 감사에 슬쩍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의 말처럼 이미 뒤늦은 인사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던 까닭에 절로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녀의 감사도 전혀 감사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제 설이는 자신이 데려갈 거라 이건가? 빌어먹을, 역시 기회를 봐서 해치워야….'

그리 이어가던 상념은 얼마 가지 않았다. 구미호가 재차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그게 무슨 소리지?]

[…이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말이다만? 그대가 맡아 지금처럼 잘 돌봐 주었으면 좋겠는데… 혹시 내키지 않는 건가? 원한다면 보상이라도….]

구미호가 무어라 더 중얼거렸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한순간 상황을 이해 못 한 뇌가 기능을 정지해버린 탓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뭐라고…?'

나한테 아이를 맡아달라고 한 건가? 그 아이는 설이고?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아니, 아니, 잠깐만! 여기서는 원래 설이를 데리고 돌아가는 전개 아니냐고?!'

그런데 설마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전개라니?

겨우 상황을 받아들인 뇌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기능을 정지해 버릴 것 같다.

Shii───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거 아니었나?]

[본녀는 한 번도 아이를 데리고 간다고 한 적이 없다만?]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녀가 내게 아이를 데리러 왔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지금껏 나 혼자 추측하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것도 모르고 죽인다거나 뺏길 수 없다거나 한 건가?'

왠지 굉장히 부끄러워졌다.

역시 먼저 공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서 그대여. 본녀의 부탁에 대한 대답은?]

[…그거라면 문제없다. 지금까지도 잘 보살펴 왔으니까… 다만, 그럴 이유가 있나? 모습을 보아하니 아이를 꽤 아끼는 것 같던데….]

한순간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간일 적 어머니가 아닌 내 생물학적 어머니인 '여왕' 말이다.

혹시 눈앞의 구미호도 여왕과 비슷한 이유는 아니겠지?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니 곧장 구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과 달리 씁쓸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본녀도 사랑스런 내 아이와 떨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건가?]

[그렇다.]

구미호가 담담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Shii──'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말해줄 수 있는 사정인가?]

[굳이 숨길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아이를 보살펴 줄 그대에게라면 더더욱 숨길 수 없지.]

구미호가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녀에게는 평생의 호적수가 있다. 놈도 본녀와 같은 지배자지.]

'지배자라는 건 역시 계층주쯤 된다는 것일까?'

그녀의 기세를 생각하면 구역주 정도는 아닐까 생각했지만, 역시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예상외로 설산 구역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거나.

[본녀가 지배하는 땅은 이곳. 놈이 지배하는 땅은 이보다 두 층 아래의 땅이다. 호적수라고는 하지만 지배하는 땅이 달랐기에 지금껏 직접 부딪힌 적은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는 건가?]

[놈이 먼저 본녀의 땅에 발을 들이밀었다. 단순히 염탐 정도의 의미였던 것 같지만, 놈의 호적수이자 이 땅의 지배자로서 묵과할 수 없는 일. 본녀 역시 바로 응징에 들어갔지.]

[그렇군. 그래서 그동안 설이 곁에 없었다는 건가?]

이 층에 왜 계층주가 없나 했더니 단순히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일 뿐이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간 내가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던 것은 모두 이 층에 계층주가 없었기 때문이니까.

만약 그녀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녀에게 당했을 운명이다.

[…'설이'?]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구미호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아'하고 입을 열었다.

[아이의 호칭이다. 아무렇게나 막 부를 수는 없었으니까… 혹시 다른 이름이라도 있나?]

조심스럽게 물은 물음에 다행히도 구미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이에게 이름을 짓지 않았다. 본녀에게는 그저 '아이'이면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군. 아이에게도 이름이 필요하겠지. 이번에도 감사를 전하지.]

[감사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단지 내가 부르기 편했으면 하고 지은 것뿐이니까… 그리고 아이의 이름은 '설'이다.]

[…그렇군. '설'인가? 의미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울림이다.]

내가 지은 설이의 이름에 만족했다는 듯 구미호는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괜스레 흐뭇해지는 기분이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슨 행동을 하든 다 밉상으로 보이던 그녀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친근함까지 느끼고 있었다.

같은 자식을 둔 부모이기 때문일까?

아, 물론 나는 아빠가 아니라 주인님이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지은 이름을 어미인 그녀에게 인정받아 기분만은 좋았다.

솔직히 설이에게 다른 이름이 있는 건 아닐까 조금 걱정했었지만 앞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설이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묻는 것이지만, 일은 다 해결했나? 설이를 맡긴다는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쉽게도 놈은 본녀의 호적수. 쉽게 결판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이… 설이가 걱정되어 급히 돌아왔으니….]

슬쩍 말끝을 흐리는 구미호의 모습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더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구미호.

못해도 최소 S랭크의 몬스터.

뛰어난 육체 능력과 그것보다 더 뛰어난 마법, 주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다.

게다가 그녀는 못 해도 SA나 SS에 근접할 것이 분명하고, 한 계층의 지배자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과연 제 아이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까?

당장 이렇게나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혹시 이것에도 말하지 못할 무언가의 사정이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물어보았다.

[…본녀 역시 떠나기 전 모든 대비를 끝마쳤다. 평소 지내던 은신처에 다양한 것들을 준비해 놓았지. 하지만… 그대도 설이와 지냈다면 알고 있겠지? 아이의 활동성을….]

단번에 이해되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와 같은 눈빛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대화는 없었지만 분명 뜻은 통했다.

같은 고생을 한 동지로서 우리 사이에 묘한 전우애가 싹텄다.

'과연 설이는 엄마 앞에서도 생기발랄했었군.'

가만 생각해보면 처음 설이가 나를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대범하다거나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익숙해진 것뿐이다.

바로 곁에 나보다 더 강한 플로어 보스가 항상 같이 있었을 테니까.

설이에 대한 의문이 하나 사라진 기분이다.

'그래도 하는 짓을 보면 대범하거나 겁이 없는 것도 맞지… 아니, 좋게 말해서 호기심이 많다고 해둘까?'

홀로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그래, 설이는 단지 호기심이 많은 아이일 뿐이다.

[…그래서 바로 떠날 생각인가?]

[곧장 떠날 생각이다. 이번에는 확실히 결판을 내는 게 좋겠지. 질긴 악연을 끝낼 거다.]

단호하게 내뱉는 모습에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설이는 보고 가지 않을 생각인가? 기뻐할 텐데?]

슬며시 물어본 물음에 구미호가 쓰게 웃는다.

[다시 돌아온 것도 아니고 금방 떠나야 한다. 잠깐의 만남은 이별을 더 슬프게 할 뿐이다. 말끔히 일을 끝내고 돌아와서 만날 생각이다… 무엇보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설이의 고집을. 분명 본녀를 따라나서려 할 테지.]

슬며시 덧붙이는 말에 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입에서 절로 쓴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녀 역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같이 가자고 따라나서는 것을 말린다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착한 아이는 얌전히 기다려야 된다고 분명 말했는데도….]

[알지. 잘 알고 있다….]

다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노고를 다 알 수 있었다.

전우애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래서 그 호적수라는 상대는 얼마나 강한 거지? 돌아올 자신은 있는 건가?]

잠깐의 침묵 끝에 조용히 물었다.

그런 내 물음에 그녀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놈은 내 호적수.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얕봐도 좋을 놈이었다면 본녀의 호적수가 되지도 못했을 테니… 본녀와 놈의 실력은 거의 동급. 개인적으로는 본녀가 조금 더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놈도 마찬가지일 테지.]

당장 내가 승패를 장담하기는커녕 도저히 이길 거라고조차 생각되지 않는 그녀와 동급의 상대.

슬쩍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조금 쉽게 보고 있었지만 역시 설산 구역.

전혀 쉽지가 않다.

[그리고 돌아올 자신이 있다고 물었는가?]

그녀의 호적수에 대해 생각하며 잠시 몸서리치고 있었더니 불현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입에서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본녀는 항상 승리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쭉 펴진 몸, 꼿꼿이 솟은 아홉 개의 꼬리. 그리고 청명한 푸른 눈.

그녀의 모습은 몹시 당당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설이를 두고 함부로 죽을 생각도 없다. 본녀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알다시피 조금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라….]

이번에도 격하게 공감했다.

나는 열렬히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의 뜻을 밝혔다.

[그래도 그대 같은 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잡놈들은 항상 상대를 죽여 먹을 생각밖에 하지 않으니… 재차 말하지만 그대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설이는 무사하지 못했을 테고 내가 이렇게 안심하고 떠날 수도 없었겠지.]

구미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중하면서도 여전히 기품이 넘치는 그 인사에 한차례 고개를 주억였다.

[안심하고 다녀와라. 설이는 내가 확실히 지키고 있을 테니까. 엄마 생각은 나지 않을 정도로.]

마지막에 조금 사심을 덧붙였다.

구미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최대한 금방 다녀오지. 그리고 설이가 본녀를 잊을 리가 있겠나? 이래 봬도 어미인 것을.]

그녀가 여유롭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홉 개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이래 봬도'라고 말한 걸 보니… 그래도 모자란 어미라는 자각은 있나 보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식에게 해를 끼친 어미니까… 하마터면 아무것도 못 하고 설이를 잃을 뻔했다… 설이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 미안함은 나중에 와서 갚는 게 좋을 거다. 알겠지만 설이는 잘 삐지고, 의외로 뒤끝이 기니까. 후에 충분히 보충해둬.]

구미호는 '아아'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려 잠든 설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떼어내더니 고요히 나를 보았다.

청명한 푸른 눈과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하는 말이지만, 아이를… 설이를 잘 부탁한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니 얼른 다녀올 생각만 해라.]

[…믿겠다.]

그리 말한 구미호가 훌쩍 몸을 날려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혀의 감지로도 그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강하기는 정말 더럽게 강하구나 싶었다.

'처음 기척을 드러내고 온 것은 일부러였나?'

새삼 그녀와 적대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동굴 입구를 잠시간 바라보다 흘깃 시선을 돌렸다.

설이는 제 어미가 왔다 갔는지도 모른 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잠시간 설이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곧 조용히 설이의 옆에 몸을 뉘었다.

새근새근 잠든 설이의 숨소리만이 조용히 동굴 내부를 울렸다.

제63화

밤사이 엄마가 찾아갔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설이는 아침부터 해맑았다.

'컁컁!' 언제나처럼 울음을 내뱉으며 나를 재촉한다.

오늘은 날이 좋으니 나가서 놀고 싶은 모양이다.

설이는 따로 놀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잘 노는 타입이다.

매번 새로운 놀이법을 찾아내고는 하는데, 오늘은 내 몸을 가지고 놀 생각인 것 같았다.

낑낑거리며 힘겹게 내 몸 위로 오른 설이가 통통- 몸을 두드렸다.

"컁컁─!"

내 몸을 미끄럼틀로 이용할 생각인가? A랭크 몬스터의 몸을 놀이기구로 쓸 생각을 하다니….

대범하다고 칭찬을 해줘야 할까? 내 몸은 장난감이 아니라 화를 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몸을 움직였다.

"컁!"

만족스럽다는 설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내 위엄보다는 네 행복이 더 소중하지.

마침 구미호가 부탁하고 떠난 지도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부탁이 없었더라도 설이에게 잘해줄 생각이었지만.

내 몸을 미끄럼틀처럼, 때로는 꼬리에 매달려 그네처럼 놀이기구로 사용하는 설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렇게 혼자서도 잘 노는 걸 보니 내 입장에서 편하기는 한데, 뭔가 설이에게 부족하다 싶었다.

잠시간의 고민 끝에 설이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친구… 친구가 필요하다. 다른 또래 애들과 같이 뛰어놀아야지.'

그래야 사회성도 키우고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사실 몬스터인 설이에게 그런 건 다 필요 없었지만.

그래서 설이의 친구는 누구를 구해야 할까?

일단 설이를 지킬 수 있도록 강해야 하고 머리도 좋아야 한다.

설이와 함께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체력도 좋아야 하며 설이가 원하는 걸 제때제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눈치도 좋아야 한다.

'그런 놈이 어디 없을까?'

슬쩍 고민해 보지만 후보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강한 놈을 찾는 것은 쉽다.

혹시 설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다.

<마안>의 정신 지배 능력을 사용해도 좋으니까.

다만 아직 <마안>의 랭크가 낮은 까닭에 정신 지배를 해도 간단한 명령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해서 <마안>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스스로 설이의 충실한 종… 아니, 친구가 되어줄 녀석을 찾고 싶지만.

어디 그런 녀석이 있겠는가?

설이를 지킬 정도의 강함이나 어느 정도 지성을 갖고 있으려면 랭크가 높아야 하는데, 그런 녀석들은 보통 대가리가 커서 말을 더럽게도 안 들었다.

내가 협박해서 설이를 지키라고 해도, 역으로 설이를 해칠 녀석들이 한둘이 아닐 정도로 성격도 안 좋다.

애초에 남의 명령을 듣기나 할까?

'전혀 아니지.'

기본적으로 랭크가 높은 몬스터들은 자존심이 강하니까.

그런 만큼 설이의 부하… 아니, 친구는 적당한 랭크의 녀석들로 골라야 하는데.

어디 말 잘 듣고, 적당히 강하고, 눈치 빠른 녀석이 있을 리가… 있다.

'현명한 비늘…!'

거의 2년여 만에 떠오른 녀석의 이름에 머리가 번쩍인 것 같았다.

과연 녀석 정도면 설이의 부하로서 최고의 인재였다.

당시 살아남은 네 마리의 리자드맨들도 함께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 분명했다.

'문제라면 녀석들이 상층에 있다는 건데….'

녀석들이 있는 곳은 당연하게도 18계층.

현재 내 위치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일반 몬스터인 녀석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을 리도 없지….'

그저 평범한 몬스터가 2년 가까이 헌터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몇 번을 고민해도 답은 절대 아니었다.

조금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렇다.

혹시나 녀석들이 진화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나처럼 깊은 하층까지 내려오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리 진화했다 한들 헌터들에게 토벌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조금 씁쓸하군….'

뱀이 되고서 처음으로 호의를 나눈 첫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기에 괜스레 입맛이 쓰다.

그렇게 괜스레 씁쓸해진 마음에 아쉽게도 설이의 친구 구하기 계획은 잠시 뒤로 미뤄두었다.

그때 동안 내가 잘 놀아주면 되니까.

* * *

구미호가 설이를 정식으로 내게 맡기고 간 지도 며칠.

아직 그녀에게서 소식은 없다.

금방 돌아온다 했지만 역시 너무 늦어지는 것 아닐까?

그만큼 호적수라는 상대가 강한 것일까?

'혹시 이대로 못 돌아오는 건….'

솔직히 그것도 내게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녀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설이는 이대로 쭉 나만의 작은 설이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설이가 슬퍼할 만한 생각은 하지 말자. 설이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종종 나쁜 쪽으로 빠지려는 생각을 겨우겨우 진정시킨다.

요즘 설이를 보며 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신경 쓰지 않으면 이렇게 종종 옛날 버릇이 나오고는 했다.

'그런데 설이한테 정말 엄마가 필요한 게 맞나…?'

흘깃 바라본 설이는 오늘도 해맑다.

신나게 설원 위를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있었다.

너무 멀리 간다 싶으면 적당히 꼬리를 움직여 제지했다.

설이 입장에서 벌써 제 어미와 헤어진 지도 꽤 오래되었을 텐데, 나는 아직도 설이가 제 어미를 찾는 것을 보지 못했다.

슬퍼하기는커녕 시종일관 밝고 천진난만한 것을 보아하니 딱히 괜찮을 것도 같은데….

그래서 한번 물어보았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니?]

설이가 엉망진창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립지 않은 게 아니라단순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거 같다.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뛰어놀던 것도 멈추고 성대하게 울음을 터트렸으니까.

괜한 말을 했다….

설이의 울음은 금방 멈추지 않았다.

아껴두던 비장의 수 '우리 설이 높이높이!'까지 해봤으나 더 서럽게 울 뿐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이것저것 평소 설이가 좋아하던 갖가지 방법을 써 보았음에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먕─!! 먀아앙───!!!"

설산이 떠나가라 서럽게 우는 설이의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간간이 설이가 내뱉는 울음을 해석해보면, '엄마 보고 싶어!', '엄마한테 갈래!', '엄마 어딨어?' 같은 의미였다.

내 생각보다 설이는 제 어미를 많이 그리워하는 모양이었다.

설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몬스터들에게 화풀이만 할 뿐 정말 아무것도 못 했다.

결국 설이는 한참을 울다가 지쳐 잠들었다.

곤히 잠든 설이를 데리고 동굴로 돌아왔다.

경솔했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엄마란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쉽게 말해버렸다.

오랜만에 반성한다.

다시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자.

특히 설이와 관련된 일에는 더더욱.

그래서 문제는 아직 이 일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깨어난 설이가 평소와 다름없다면 다행이겠지만, 이미 애써 의식하지 않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이상 평소와 같을 리가 없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다시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까?

그런 일은 당연하게도 사양이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구미호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겠지만, 금방 돌아오겠다던 그녀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이상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생각보다 호적수의 상대가 힘들었다거나, 도중에 다른 일이 생겼다거나, 혹은 이미 죽었다거나….

무심코 이어 가던 상념을 중단했다.

설이가 슬퍼할 만한 생각은 하지 말자.

두 번째로 떠오른 해결책은 직접 찾으러 가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설이 혼자서는 말도 안 되고 내가 함께 그녀를 찾으러 가는 것이다.

이 경우는 꽤 신빙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쉽게 허락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비교적 평범했던 70계층과 달리 이 밑은 어떨지 모르니까.

당장 아래 계층까지는 별문제 없다 하더라도 이후 구미호의 호적수가 있는 층에 도달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서든 내 한 몸 정도야 건사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설이가 끼어든다면 무리였다.

별다른 위협이 없는 이곳과 달리 구미호의 호적수가 있을 곳은 어디에 어떤 위협이 있는지 전혀 미지수였으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세 번째 방안이 나 혼자 그녀를 찾으러 가는 것이지만, 이 계획은 제대로 틀을 잡기도 전에 폐기했다.

절대 설이를 혼자 놔둘 수 없다.

집에 가만히 있으라 해도 절대 가만있을 설이가 아니다.

이미 한번 탈출한 전적이 있고 제 어미조차 막지 못했던 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당연히 기각이다.

무엇보다 내가 설이랑 떨어지기 싫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역시 최선은 일을 끝낸 구미호가 빨리 돌아오는 것이다.

이 계획에 있어서는 그저 간절히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준비한 차선책은 바로 설이의 신경을 돌리는 일이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구미호의 부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설이를 즐겁게 만들어 버리면 된다.

아무래도 그동안 미루었던 계획을 실행해야겠다.

설이의 부하… 아니, 새로운 장난ㄱ…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

똘똘한 놈으로 하나 구해 봐야겠다.

가능하면 쉽게 망가지지 않을 녀석으로….

* * *

다행히도 잠에서 깨어난 설이는 크게 울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마냥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그리 좋아하던 버팔로 고기를 한 아름 가져왔음에도 전혀 입도 대지 않았다.

평소와달리 시무룩한 설이의 모습에 나까지 축 처지는 느낌이다.

계획을 서두르자.

시무룩한 설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평소와 달리 안 나겠다고 낑낑- 거리던 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기에 조금 억지로 데리고 나왔다.

불만스레 통통- 거리는 발바닥 어택이 오늘따라 유난히 힘이 없었다.

평소와 달리 전혀 힐링 되지 않는다.

금방 좋은 장난감… 아니, 친구를 찾아주마.

그렇게 힘없는 설이를 데리고 설산을 뒤졌다.

자주 보이던 몬스터들과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이름 모를 희귀한 몬스터들을 여럿 발견했다.

아쉽게도 설이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즉석에서 발견한 버팔로 무리를 화려한 불쇼로 익혀 줬음에도 조금 깨작거리고 말 뿐이다.

괜스레 다른 몬스터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한참을 설산을 뒤적이다 어느 순간 처음으로 설이에게 반응이 왔다.

언제나처럼 나와 마주치자 눈을 까집고 쓰러진 [스노우 레빗]에게 관심을 보인 것인데.

정확히는 오늘따라 토끼의 행동이 유난히 마음에 들지 않던 내가 화풀이도 할 겸 녀석을 다진 고기로 만들려던 순간, 설이가 "컁컁!" 평소처럼 울었다.

통통- 다급하게 내 머리를 두드리는 발바닥 어택에 힘이 느껴졌다.

아, 힐링된다.

내 머리에서 뛰어내린 설이는 곧장 스노우 래빗에게 달려갔다.

이미 눈까지 까집고 죽은 녀석에게 왜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혹시 오늘따라 토끼 고기가 먹고 싶은 것일까?

적당히 웰던으로 구어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산뜻하게 미디움으로….

쓰러진 토끼에게 다가간 설이는 몇 차례 녀석을 킁킁거렸다.

설아, 아쉽게도 녀석은 이미….

설이가 "컁컁!" 울음을 내뱉자 스노우 래빗의 눈썹이 한차례 파르르 흔들렸다.

…부활 주문이라도 외운 건가?

설마 우리 설이에게 그런 놀라운 재능이…?!

아니었다.

사실 스노우 래빗은 처음부터 살아 있었다.

들어 보니 단순히 연기를 한 것뿐이라고.

…왜?

평소 심장마비로 쓰러진 스노우 래빗들을 내가 딱히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 가지고 있던 <연기>라는 스킬로 죽은 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설이에게 들켰던 모양이다.

이상. 사념대화를 통해 내게 모든 걸 전한 토끼가 내 앞에 오체투지 했다.

손까지 싹싹 빌어가며 연신 머리를 조아린다.

그 옆에서 왠지 모르게 신이 난 설이가 "컁컁!" 울었다.

…뭐지, 이 토끼?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잠시간 내 앞에 엎드린 토끼 녀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런 내 행동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설이가 다급하게 "컁컁!" 울었다.

거친 발바닥 어택이 내 몸에 연신 닿았다.

대충 그 뜻을 해석하자면, '불쌍해! 살려줘!'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딱히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가급적 설이 앞에서는 살생을 최대한 줄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설이가 이리 말하는 걸 보면 평소 내 이미지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괜스레 억울해졌다.

오히려 나는 토끼에게 상당히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를 보고 심장마비로 죽지 않은 유일한 토끼고, 내게 엎드려 조아리는 행동을 할 정도인 것을 보니 지성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사념대화를 통한 대화 역시 E랭크 답지 않게 꽤 매끄러웠고 말이다.

슬그머니 이쪽을 힐끔이는 것을 보니 눈치를 살필 정도의 능력도 있다.

가만 보니 이 녀석이 딱이다.

설이의 새로운 장난ㄱ… 아니, 첫 부하….

첫 친구로서 말이다.

그래서 데려왔다.

애완동물이 늘었습니다.

* * *

이름은 아직 짓지 않았다.

언제 폐기… 아니, 설이와 절교할지도 모르니 괜한 정이 들지 않도록.

그것보다 그렇게 사양할 필요 없다.

설이도 너를 마음에 들어 하니까.

어허, 과분하다니?

설이의 기분을 풀어준 것에 대한 상이기도 하니 고맙게 받도록.

그리고 당연히 알겠지만 처신 잘해라.

웰던으로 구워지고 싶지 않으면….

토끼가 쓰러졌다.

또 연기하는 줄 알았는데 다급한 설이의 몸짓을 보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급히 CPR을 해서 되살렸다.

힘겹게 마련한 장난감이 이렇게 쉽게 고장 나서는 안 된다.

그렇게 울어도 되돌려 보내줄 생각은 없으니까.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제64화

첫날 너무 감격스러운 마음에 심장마비까지 일으켰던 토끼였지만, 다행히 이후부터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녀석은 충실한 설이의 장난감으로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심 쉽게 망가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던 내 생각과 달리 녀석은 빠른 속도로 적응하고 있다.

이건 또 다른 의미로 희귀한 녀석이다.

설이도 녀석을 꽤 마음에 들어 했는데 요 며칠 사이 우울했던 기색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걸로 또 당분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딘가로 갈 때마다 설이는 항상 내 머리 위를 애용했는데, 설이의 친구(장난감)으로서 함께하는 토끼 역시 설이와 함께 내 머리 위를 애용하게 되었다.

다른 건 다 적응하던 녀석이었음에도 이것만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여전히 내 머리 위에 탈 때마다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당연히 그럴 때마다 괜스레 설이가 내 머리를 통통 두들기는 것은 덤이다.

조금 심한 반응이라 생각하지만 애초에 지금 것도 많이 나아진 것이긴 했다.

처음 머리 위에 탔을 때는 그대로 오줌을 지렸으니까.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화가 치솟아 오른다.

설이가 열심히 말리지 않았다면 녀석은 웰던으로 보기 좋게 구워졌을 것이다.

설이에게 감사해라.

어쨌든 토끼의 적응은 순조로웠다.

이제는 설이를 따라 웰던으로 익힌 버팔로 고기를 즐기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다만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는 늑대 고기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전에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정이다.

설이와 토끼가 노는 방식은 꽤 다양했다.

그중에서 특히 즐기는 것은 술래잡기였는데 주로 동굴이나 동굴 밖을 자주 뛰어다녔다.

다만 조금 특이한 것이 있다면 항상 쫓아가는 것은 설이고 쫓기는 것은 토끼다.

왜일까?

사실 어렴풋이 이유는 알겠지만 애써 모른 척 무시했다.

설이만 행복하면 됐다.

그것 말고도 다양한 놀이가 있다.

그중에는 내 몸을 사용하는 놀이도 몇 개 있었는데 이건 토끼가 굉장히 부담스러워했으므로 아쉽게도 자주 하지는 못한다.

아, 굳이 애쓸 필요는 없다.

솔직히 지금 정도로도 만족하고, 괜히 놀다가 또 오줌을 지리거나 하면 그때야말로 저녁으로 토끼 고기를 먹게 될지도 모르니까.

…농담이니까 그렇게 울지 마라.

그래, 미안하다.

자, 제대로 사과했으니까 설이 너도 내 머리를 두드리는 건 멈춰.

물론 기분 좋기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앞으로도 종종 토끼를 놀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때마다 설이가 발바닥 어택을 해올 테니까….

조금만 희생해다오, 토끼야.

* * *

어느 날의 일이다.

이날은 유난히 날씨가 화창했으므로 꽤 먼 곳까지 나가 놀았는데. 설이와 잘 놀고 있던 토끼가 돌연 다급히 나를 찾았다.

"피─! 피잇! 피이─!!"

[주인님, 위험해요! 적이, 적이 오고 있어요! 얼른 아가씨를 데리고…!!!]

토끼는 꽤 출중한 감지 능력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설이와 잘 놀아주는 것 말고도 다른 능력이 있었다.

꽤 유용한 장난감이다.

태평한 내 반응에 토끼가 열심히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 모습이 꽤 간절하기도 하고 무척 안쓰러웠기에 나도 대충 반응을 보였다.

Shii──

[문제없다.]

토끼가 말하기 전부터 이미 내 감지 범위 안에 들어오고 있던 녀석들이니 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느껴지는 기색을 봐서는 버팔로 무리인 것 같은데 아마 설이와 토끼가 내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모양이다.

이 녀석들은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일까?

아, 지금껏 찾아온 버팔로 녀석들은 모조리 우리의 먹이가 되었으니 학습이 안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뭐, 기왕 찾아온 출장 뷔페. 나로서는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설아, 고기 온다.]

"컁─?!"

적당히 '고기? 무슨 고기?'냐는 설이의 물음에 씩 웃음을 지었다.

[우리 설이가 좋아하는 소고기.]

'컁컁!' 설이가 기쁜 듯 울었다.

나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유일하게 적응 못 하고 있는 것은 토끼뿐이다.

"피이…."

[숫자가 꽤 많은데요….]

Shii──

[문제없다.]

이후 찾아온 출장 뷔페는 내 모습을 보고 급하게 유턴을 시도했으나 이미 내 눈에 보인 시점에서 아웃이다.

맛있게 구워 먹었다.

토끼도 해탈한 듯 얌전히 소고기를 즐겼다.

이것 말고도 토끼는 꽤 여러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E랭크 주제에 꽤 똘똘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다재다능한 녀석이었다.

이제 적당히 애완동물 정도로는 인정해주자.

이름도 지어 줘야겠다.

잠깐의 고민 끝에 '토순이'라 지었다.

정말 성의 없다 싶이 지은 이름이지만… 원래 애완동물 이름이 그런 법이다.

오히려 이런 단순한 이름이 더 정이 있어 보이고 좋지 않은가?

토끼… 아니, 토순이도 별 불만이 없어 보이니 전혀 문제없다.

참고로 토순이는 암컷이다.

이런 느낌으로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마침내 구미호가 돌아왔다.

장장 두 달 만의 귀환이었다.

* * *

몰아치던 눈보라가 멎고 며칠 만에 맑은 달이 뜬 늦은 한밤중이었다.

낮 동안 신나게 놀다 지친 설이와 토순이는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쪽쪽- 설이가 토순이의 귀를 사정없이 빨아댔다.

잠든 토순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늘 그렇듯 설이만 행복하면 됐다.

그렇게 잠이 든 두 녀석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문득 동굴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이미 알고 있는 기척이다.

마중을 위해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동굴 앞에서 기다리길 잠시간, 곧 새하얀 여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기품 가득한 신비로운 분위기다.

[늦었군.]

Shii──

가볍게 타박하듯 전한 사념에 사뿐히 내 앞에 내려앉은 구미호가 피식 웃는다.

[미안하군. 일이 좀 많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군. 설마 싸우지 않았나?]

별다른 상처 없이 여전히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새하얀 털을 보고 물었다.

구미호가 가볍게 고개를 젓는다.

[완벽히 마무리하고 왔다. 본녀는 한번 하고자 한 것을 멈추지 않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한데… 호적수라는 녀석이 사실은 약하다거나.]

[놈은 분명한 본녀의 호적수였다. 그 힘은 절대 본녀의 아래가 아니었지. 그럼에도 본녀가 멀쩡한 것은 어디까지나 회복한 것뿐이다.]

-회복 마법을 조금 사용했다.

담담히 덧붙이는 목소리에 그제야 어렴풋이 그녀가 왜 이리 늦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상처를 회복하고 오느라고 늦었군.]

[그런 것도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 해주지. 우선은….]

슬쩍 말끝을 흐린 구미호의 시선이 동굴 안을 향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먼저 앞장서 동굴로 향했다.

그녀가 조용히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렇게 장장 두 달 만에 마주친 제 아이의 모습에 구미호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설이의 몸을 핥았다.

슬며시 구미호가 설이의 곁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능숙하게 설이를 품었다.

"뀨우웅─" 설이의 자그마한 잠꼬대 소리가 들린다.

그 모성 넘치는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런데 못 보던 것이 있군?]

[…아아. 토순이를 말하는 건가? 설이의 장난감… 아니, 친구다.]

흘깃 구미호의 시선이 저만치 잠들어 있는 토순이를 향했다.

설이에게서 해방된 토순이의 표정은 꽤나 편안해져 있었다.

[그렇군. 아이에게 친구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따로 묻지는 않는 건가?]

[본녀도 언젠가 시중들 녀석을 구해주고자 했으니 문제없다. 그대가 어련히 알아서 잘 구했겠지.]

그리 말한 구미호가 재차 설이의 몸을 핥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완전히 돌아왔군.'

이걸로 다시 그녀가 설이를 떠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게 설이를 맡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 나는 설이의 곁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

슬며시 차오르는 살의를 진정시켰다.

애초에 그녀를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나보다 강한 것을 떠나서, 그녀는 무엇보다 설이의 엄마였으니까.

설이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는다.

지금 내게 중요한 단 하나의 명제였다.

[그래서 갔던 일은 어떻게 해결했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이야기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차오른 살의를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가만히 있다간 화를 주체하지 못할 것 같으니 딴생각 못 하게 화제나 돌려볼 심산이었다.

[호적수와의 싸움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어림잡아 칠 주야 정도는 싸운 것 같군.]

[오래도 싸웠군.]

[괜히 호적수가 아니지… 그래서 계속 얘기를 하자면 싸움은 어떻게든 본녀의 승리로 끝이 났다. 버거운 상대였지만 본녀는 패하는 법을 모르니.]

[…설이한테는 자주 패할 거 같은데?]

[…설이는 예외다. 그것보다 이야기를 끊지 마라. 얌전히 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제법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구미호의 모습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살랑거리는 아홉 개의 꼬리가 꽤 무섭다.

[흠흠… 어쨌든 기나긴 싸움 끝에 본녀는 승리할 수 있었다. 다만 놈은 본녀의 호적수. 싸움이 끝난 뒤의 상처가 제법 컸지. 치유 마법으로도 한 번에 회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재다능한걸? 치유 마법도 쓸 수 있다니….]

'꽤 탐나는군.'

치유 마법이라면 사실 <초재생>이 있는 내게는 별 쓸모가 없었지만 딱히 나를 위해 쓸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설이가 언제 다칠지도 모르니까.

'…아니, 애초에 다칠 일이 없도록 해야지.'

그럼 치유 마법은 굳이 필요가 없나?

그리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평소 설이의 행실을 생각하면 치유 마법은 필요했다.

딱히 몬스터에게 습격받을 일은 없겠지만 혼자 뛰어다니다가 자주 넘어지기도 하니까.

그때를 위해서라도 치유 마법을 배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본녀가 유능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구미호가 말을 이었다.

흘깃 시선을 돌리니 그녀는 도도하게 코를 치켜들고 있었다.

조금 우쭐해대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녀 특유의 기품이나 우아한 분위기 덕분에 꼴사납기보다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몸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 건가? 아까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확실히 몸을 회복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리도 늦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단지 돌아오던 중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것 뿐이지.]

[그게 무엇이지?]

[새로운 지배자를 만났다.]

[…뭐? 새로운 지배자?]

저 지배자란 것은 분명 계층주는 말하는 것일까?

설마 그렇다면 그녀는 계층주와 싸우고 또 다른 계층주를 만나기라도 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바로 이 아래층의 지배자였지.]

[…새로 탄생한 건가?]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말없이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찾으러 갔다가는 큰일 날 뻔했군.'

그녀의 호적수가 있다는 층에는 가지도 못할 뻔했다.

나는 어찌 되든 괜찮지만 설이도 위험할 수 있었던 만큼 조금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그 새로운 지배자하고는 어떻게 됐지? 단순히 만난 것만으로는 이렇게 늦을 필요가 없을 텐데.]

[본녀가 지배하는 땅의 바로 아래층의 지배자다. 이후를 생각해서도 살려둘 수는 없었지.]

[…설마?]

[지배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더군. 그래도 지배자는 지배자. 이번에도 상처를 치료하느라 늦었다.]

그리 말하며 한차례 설이의 몸을 핥는 그녀의 모습에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연달아 플로어 보스와 싸워서 두 마리 다 쓰러트렸다.

물론 그사이에 회복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다.

'사실 단순한 플로어 보스가 아니라 에어리어 보스 정도 되는 거 아닌가?'

분명할 정도의 합리적인 의심이다. 잠시간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녀가 가지고 온 것이 있다.]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건 말건 구미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그녀의 품에서 웬 보랏빛의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생김새,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마력.

그것은 틀림없는 몬스터의 마석이었다.

그 숫자도 두 개.

앞서 그녀가 꺼냈던 이야기의 흐름상 분명 두 플로어 보스의 것이 분명했다.

[그, 그건…?]

[흠? 그대라면 꽤 익숙할 텐데? 놈들에게서 나온 마석이다.]

[…그러니까 그걸 왜 들고 있는 건지 묻는 거다.]

[흐음. 당연하지 않은가? 그대에게 주기 위해서다.]

[...?]

잠시 멍청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내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태연히 말을 잇는다.

[일전에 본녀가 말하지 않았나? 그대에게 보상을 줄 것이라고. 본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음, 그래도 보상이란 말은 조금 그렇군. 그냥 답례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답례라고…? 그 귀한 걸?]

다름 아닌 플로어 보스의 마석.

그것도 미도달 계층인 70계층 이상의 계층주에게서 나온 마석이다.

당장 미궁 밖의 인간들에게 판다고 하면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귀한 물건이 분명하다.

몬스터들에게도 성장을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

당장 나만 하더라도 현명한 비늘에게서 받은 마석으로 <마안>을 얻고, 여왕에게서 받은 마석을 통해 진화에 영향을 주지 않았던가?

모르긴 몰라도 저 정도 수준의 마석이라면 당장 정체돼 있던 내 성장에 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이렇게 넘겨준다니? 선뜻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내가 아닌 설이에게 주어도 좋은 것 아닌가? 그 정도의 마석이라면 설이도 빠르게 성장할 텐데.]

[한 번에 너무 강한 마석을 먹이면 설이의 몸이 버티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그냥 그쪽이 먹어도 되었을 텐데. 그 정도의 마석이라면 그쪽한테도 큰 도움이….]

[물론 이 두 마석이라면 본녀도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 정도다. 아마 이 두 마석을 섭취하면 본녀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본녀가 강해지는 것보다 은혜를 갚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다.]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구미호를 바라보니 그녀가 슬쩍 웃어 보였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그만큼 그대가 해준 일은 본녀가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니까.]

[....]

[아이. 설이는 본녀의 반쪽이나 다름없다. 그런 반쪽을 구해주고 보살펴준 그대에게 이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다. 그대는 본녀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내게도 설이에게도 그대는 은인이다.]

Shii─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마주하는 푸른 눈이 보였다.

[…그렇군. 무를 생각은커녕 아깝지도 않은 모양이군.]

[본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 않느냐. 당연한 것이다.]

당당한 웃음과 함께 그리 말한 그녀가 슬며시 두 마석을 내게로 건냈다.

부드럽게 다가온 마력을 느끼며 나 역시 마력을 움직여 그것들을 받아냈다.

역시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다.

여러모로 익숙지 않은 느낌이랄까? 잠시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게 구미호가 재차 말을 건넸다.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이건 그저 답례일 뿐 아니라 일종의 뇌물이기도 하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의아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에 그녀는 씩 웃는다.

[무얼. 당연히 설이에 관한 이야기다.]

[...?]

[앞으로도 설이를 잘 부탁한다는 의미지. 그대는 조금 이상한 데서 눈치가 없군.]

담담히 내뱉는 말에 절로 탄성이 흘렀다.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계속 있어도 된다는 건가? 그쪽이 돌아왔음에도?]

[흠? 설마 떠날 생각이었나, 그대? 설이가 알았다면 많이 슬퍼하겠는데….]

[아니,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다급히 덧붙인 내게 구미호는 태연히 말했다.

[그렇다면 된 것 아닌가?]

[…그런 의미가 아니란 것을 알 텐데. 나는 그쪽이 돌아왔길래 당연히….]

[되었다. 싫은 게 아니라면 거절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본녀는 단지 설이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것뿐이다.]

슬며시 내뱉은 구미호가 그대로 몸을 뉘었다.

자연스럽게 바닥에 배를 깔고 누운 그녀가 말했다.

[이야기는 이쯤 하지. 급하게 돌아오느라 꽤 지친 상태다. 이제는 쉬고 싶군. 그대도 이만 잠드는 게 좋을 거다. 내일 아침 설이의 반응을 생각한다면….]

[…그 이야기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바로 잠들 수는 없겠어.]

한숨처럼 내뱉으며 꼬리로 두 마석을 가리켰다.

구미호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온전히 그 힘을 흡수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지. 호위라도 필요한가?]

[괜찮다. 지금껏 혼자서 다 해왔으니… 단지 조금 멀리 다녀올 생각이다. 어쩌면 아침까지 못 돌아올 수도 있겠군.]

[흠. 알겠다. 그래도 가능한 한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군. 설이가 슬퍼할 테니.]

[아아. 금방 돌아오지. 그럼 그동안 설이를….]

[본녀가 누구라 생각하는 건가? 다름 아닌 설이의 어미다. 그런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아도 좋다.]

그리 말한 그녀가 제 두 앞발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완전히 잠들 기세인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다 이내 몸을 움직였다.

[조심히 다녀와라.]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를 끝으로 동굴을 나섰다.

몸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운 것 같았다.

그동안 고민하던 여러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하게 됐으니까.

막혀 있던 성장도.

설이와의 일상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제65화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높이 뻗은 설산의 한가운데, 평소 지내던 동굴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이곳을 차지하고 있던 주인은 일찌감치 내게 자리를 양보해줬다.

다소 대화가 통하지 않아 조금의 물리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은 비밀이다.

Shii──

가만히 똬리를 틀고 앉았다.

구미호에게서 받은 마석이 둥둥- 내 주위를 떠다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절로 흥분이 차올랐다.

반년 넘게 정체되어 있던 내게 드디어 성장의 계기가 찾아온 것이다.

못해도 SA랭크 이상. 그것도 계층주의 마석이었으니 막혀 있던 성장도 단번에 뚫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진화까지 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동안 많은 마석을 얻었지만 이 정도 수준의 마석은 처음이었으니 절로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들뜬 마음으로 부유중인 마석을 바라보다 이내 차례로 하나씩 삼켰다.

꽤 오랜만에 귓가로 알림이 들려왔다.

[[블리자드 트윈 헤드 오우거]의 마석을 섭취했습니다.]

[SS랭크 몬스터의 마석입니다.]

[현재 육체로 모든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경고, 과다한 에너지의 섭취로 신체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합니다.]

[스킬 <폭식S>를 확인했습니다.]

[과다한 에너지를 저장합니다.]

[[블리자드 트윈 헤드 오우거]의 마석으로부터 일부 스킬과 능력치를 계승받습니다.]

[스킬 <냉기무효SS>의 영향으로 스킬 <혹한내성A>가 S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스킬 <단단한 외피SS>의 영향으로 스킬 <두꺼운 비늘A>가 S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스킬 <초재생SS>의 영향으로 스킬 <초재생S>가 SA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스킬 <다중인격SS>의 영향으로 스킬 <다중사고C>가 생성되었습니다.]

[[로얄 엠페로트]의 마석을 섭취했습니다.]

[SA랭크 몬스터의 마섭입니다.]

[현재 육체로 모든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스킬 <폭식>을 통해 과다한 에너지를 저장합니다.]

[[로얄 엠페로트]의 일부 스킬과 능력치를 계승받습니다.]

[스킬 <수마법C>의 랭크가 A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스킬 <위압S>의 랭크가 SA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스킬 <마력조작S>의 랭크가 SS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스킬 <사고가속A>의 랭크가 S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스킬 <신체강화S>의 랭크가 SA랭크로 성장했습니다.]

[진화를 위한 공적을 확인했습니다.]

[진화 불가.]

[필요한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조건을 만족하세요.]

마지막으로 들려온 알림을 끝으로 조용히 눈을 떴다.

비록 진화는 하지 못했지만 큰 변화를 느꼈다.

체감상 두세 배 이상은 확실히 강해졌다.

이제는 단순히 S랭크에 준하는 몬스터가 아니라 정말 S랭크 정도의 힘을 가진 몬스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막혀 있던 능력치도 크게 성장했고 무엇보다 스킬들의 랭크 업이 가장 두드러졌다.

'지금껏 진화할 수 없었던 건 따로 조건이 있기 때문이었군.'

그 조건을 몰랐으니 지금껏 진화를 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건 진화를 위한 공적 자체는 이미 다 모였다는 것일까?

이제 남은 건 그 조건이란 것을 알아보는 일밖에 없었다.

'구미호에게 정말 큰 선물을 받았군.'

어느 정도 성장의 계기가 되어줄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크게까지 성장하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단순한 계기만 되었어도 값진 선물이었는데 이제는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큰 선물이었다.

'그것보다 SS랭크 몬스터의 마석이라니… 놀랍군.'

아마 구미호의 호적수인 녀석이 SS랭크의 몬스터인 모양인데, 그렇다는 말은 그녀 역시 SS랭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몬스터로서 도달할 수 있는 거의 끝이라 할 수 있는 단계.

지금껏 만난 본 몬스터 중에서 두 번째 SS랭크 몬스터였다.

'그 아르데와 동급이라니… 정말 에어리어 보스 수준이군.'

정말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똬리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흘깃 바라본 밖은 이미 동이 떠오른 지 오래였다.

별로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설이가 걱정하겠군.'

서둘러 돌아갈 필요를 느꼈다.

진화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몇 단계 성장한 나는 온몸에 주체 못 할 힘을 느꼈다.

당장 성장한 힘에 적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며 눈에 보이는 몬스터 몇을 적당히 해치웠지만 아쉽게도 몸풀기조차 되지 않았다.

조금 더 강한 상대와 싸울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 동굴은 꽤나 소란스러운 상태였다.

"먀아아아우우우웅───!!!"

빼액 울음을 터트린 설이의 울음소리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울음에 걱정보다는 괜스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설이가 적어도 나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슬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설이의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조금 느려졌던 움직임을 좀 더 서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동굴 앞에는 구미호와 설이, 그리고 토순이가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컁─! 캬아앙──!!!"

설이가 헐레벌떡 내게 덤벼들었다. 거의 들이박는 수준으로 달려든다.

낑낑거리며 한참을 내게 몸을 부비는 설이의 몸을 꼬리로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디 갔었어! 왜 이제 와!' 같은 느낌으로 설이는 한참을 내 품에서 부비적거렸다.

[…꽤나 늦었지 않은가, 그대….]

힘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새벽에 헤어졌을 때보다 배는 핼쑥해진 모습의 구미호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막 돌아왔을 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여러가지 조정할 필요가 있다 보니….]

[…확실히 강해지기는 했군. 이제 그 근처의 잡놈들보다는 확실히 강하다. 본녀가 쓰러트린 아래층의 지배자와도 좋은 싸움을 할 수 있겠어.]

[그런가? 그건 조금 기쁜 이야기군… 그것보다 안색이 많이 창백한데… 무슨 일 있었나?]

슬며시 물은 물음에 구미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 사이 그녀의 눈빛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오갔다.

[무슨 일이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예상외로 설이가 그대를 많이 좋아하더군… 처음 본녀를 보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그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계속 저 상태였다.]

불쑥 조심성 없게 구미호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내가 겪었던 그대로를 그녀가 겪었다고 생각하니 지금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왠지 미안해졌다.

[…힘냈군.]

[아아, 힘냈고말고. 개인적으로 조금 더 그대가 빨리 돌아왔으면 하고 바랬지만… 뭐,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솔직히 마석의 힘을 감당 못 하는 경우도 생각했었지만 별 탈 없는 거 같군.]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문제없이 넘겼다… 그것보다 고맙다. 큰 선물을 받았어.]

[본녀는 그저 답례를 한 것뿐이다. 그거 이상의 의미라면… 그래, 뇌물일 뿐이지. 앞으로도 설이를 잘 부탁한다.]

구미호의 말에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그제야 남아 있던 또 다른 녀석을 보았다.

애완동물 겸 장난감 겸 설이의 친구.

토순이와 이야기를 나눌 차례다.

녀석은 한쪽 구석에서 파들파들 몸을 떨고 있었다.

[주인님! 주인니이이임!]

흐헝헝- 하는 느낌으로 토순이는 내게 달려들었다.

평소에는 잘 없는 스킨십이랄까?

시선을 주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달려든 토순이의 모습에 잠깐 당황했다.

안 이러던 애가 갑자기 왜 이래?

[주인님! 흐헝─ 저는…! 토순이는…! 토순이는…! 주인님이 저를 버리신 줄 알았어요오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일어나고 보니 지배자님이 저를 가만히 노려보고 계시질 않나, 주인님은 없질 않나, 아가씨는 울음을 터트리질 않나!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구요오!]

엉엉- 눈물 콧물 다 빼며 이야기를 전하는 토순이의 모습에 얼추 상황이 짐작되었다.

과연… 미리 구미호에게 말해놓기는 했지만 토순이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니, 녀석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SS랭크 이상의 몬스터. 그것도 플로어 보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주인.

그 사실에 울음을 터트린 아가씨.

토순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가 아닐까? 솔직히 나 같아도 당황한다.

[미안하다. 네가 고생이 많았구나.]

[주인님─! 흐헝헝──!!! 토순이는… 토순이느은…!!]

꼬리로 쓱쓱-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이 한층 더 격하게 내 몸에 머리를 부볐다.

설이만큼은 아니지만 꽤 마음에 드는 감촉이다.

이거 종종 울려 봐야겠는걸…? 구미호에게 조금 부탁해볼까?

그것보다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는데, 콧물은 좀 그만 묻히면 안 되겠니?

이대로 가다간 내가 왠지 오늘 너를 저녁으로 삼을 거 같구나.

평소라면 내가 조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치 좋게 행동하던 토순이였지만, 오늘은 조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일까?

여전히 흐헝헝- 내 품에 몸을 비볐다.

슬슬 비늘에 묻어나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액체에 이걸 먹어, 말아 고민하던 찰나, 내 품에서 조용히 고개를 파묻던 설이가 몸을 움직였다.

역시 제 장난감… 친구를 챙기는 것은 설이밖에 없었다.

"컁컁─!!!"

내 품에서 벗어난 설이는 제 어미의 곁으로 뛰어갔다.

뭔가 신난 기색으로 달려갔는데,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그 울음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갸웃거리니 돌연 설이와 짧은 대화를 주고받던 구미호가 이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조금 곤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슨 문제 있나?]

[…아니, 아무 문제 아니다. 단지 조금 곤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두루뭉술하게 둘러대는 구미호의 모습에 재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내 반응에 이번에도 구미호는 곤란하다는 듯 웃을 뿐 내 의문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설이는 여전히 구미호의 곁에서 "컁컁!" 울었다.

'뭐, 설이가 신나 보이니 됐나?'

"컁! 컁컁!"

[아가, 그건 좀 곤란하구나. 본녀는 여우고 그는 뱀이니까.]

"컁! 캬앙─!"

[아니,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 아니라….]

"컁컁!"

[그래. 그는 이미 네 아비나 다름없지… 하지만 종족적 차이란 것이….]

"캬아아앙!"

[…그래. 우리 아가의 고집을 누가 이길까? 이 어미가 좀 고생해보마….]

"컁컁?"

[어허, 이 어미를 믿지 못하느냐? 본녀가 마음만 먹으면 그 어떤 수컷도 다 넘어오는 법이다. 여기서는 전문가인 이 어미만 믿거라.]

"컁!"

마지막 말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충 '믿어!' 같은 의미인데, 과연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조금 궁금해졌다.

그것보다 나만 빼고 얘기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슬슬 질투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흐헝헝─ 주인니이임─!!!]

그래… 나한테는 네가 있었지.

그래서 우리 토순이는 레어가 좋니, 웰던이 좋니?

아, 중간인 미디움이 마음에 드려나?

아니, 그냥 오늘 저녁 이야기를 한 것뿐이야.

오랜만에 토끼 고기를 먹을 생각인데. 아무래도 굽는 방식은 본인 의견을 반영해야겠다 싶어서….

[흐헝헝──!!!]

토순이의 울음소리가 한층 더 격해졌다.

아니, 그냥 농담이니까.

그러니까 설아, 나는 딱히 네 장난… 친구를 괴롭힌 게 아니란다?

그러니 내게 머리를 들이박는 건 좀 멈춰줄래?

분명 기분은 좋지만 그것보단 발바닥 어택을….

다시 설이의 관심을 내게 되돌리는 데 성공했다.

저편에서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구미호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한심하다는 듯한 구미호의 시선이 아프게 찔러왔다.

왠지 패배한 느낌이다.

제66화

거처를 옮겼다.

70계층에 도착한 이래 지금껏 생활하던 동굴을 떠나 구미호가 원래 사용하던 동굴로 이동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의 말로는 상당히 큰 동굴이라 하던데.

내게는 조금 작게 느껴졌던 지금 동굴과 달리 내가 쭉 몸을 펴도 될 정도의 커다란 사이즈라고 한다.

설이와의 추억이 있는 동굴을 떠나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내게 좀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곳보다는 넓은 곳이 확실히 나았기에 과감히 이사를 결정했다.

다만 정작 설이가 많이 아쉬워했다.

떠나지 않겠다고 "컁컁!" 울어대는 설이를 달랜 것은 토순이였다.

역시 생각보다 유능한 장난감이다.

먹지 않길 잘했다.

구미호의 거처는 설산 정상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깊숙한 곳에 있었는데, 몇몇 마법적 조치를 한 것인지 그곳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전까지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이것도 혹시 나중에 배울 수 있을까?

동굴의 내부는 과연 그녀의 말처럼 커다란 넓이를 자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내가 몸을 펴도 남을 만한 크키다.

이 넓은 곳에 구미호와 설이 두 모녀만 살았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원래 생활하던 거처로 돌아온 설이는 상당히 하이 텐션이었다.

동굴로 들어오자마자 다다다 열심히 동굴 안을 뛰어다녔다.

그 뒤를 토순이가 급히 쫓는다.

잠시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그대? 마음에 드는가?]

[…응? 아아, 과연 넓은 곳이군.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겠어.]

[그것참 다행이군. 만족했다니 기쁘다.]

[흐음? 굳이 기뻐할 일까지는 아닌 거 같은데….]

[크흠…! 그런 일이 있다!]

답지 않게 조금 당황한 듯한 구미호를 잠시 의문스레 쳐다보다 슬쩍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괜찮은가? 여기는 그대와 설이의 보금자리일 텐데. 엄연히 외부인인 나와 토순이가 생활해도….]

[문제없다. 이미 그대는 설이의 가족이니까. 내게도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다. 저 토끼… 토순이도 꽤 마음에 들고 말이다. 그대가 좋은 시종을 골랐군.]

구미호가 흘깃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설이가 "컁컁!" 울음을 내뱉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 뒤를 그림자처럼 토순이가 뒤따랐다.

몹시 흐뭇한 광경이다.

[그것보다 가족이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아니, 그저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다.]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사실 내게 가족이란 말보다 어색한 말은 없을 것이다.

인간일 적 가족들은 남보다 못한 사이였고, 뱀이 된 이후의 가족이라곤 여왕 하나뿐이었으며, 그마저도 제대로 가족 같은 교류를 해보지 못했다.

'그런 내게 가족이라….'

뭐, 설이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족이라 할 만하다.

설이가 내 딸이라 생각하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니까.

그럼 토순이는 애완동물… 아니, 첫째 딸이라고 가정하면, 설이는 막내가 되는 것일까?

꽤 괜찮은 조합이다.

[그럼 내가 아빠고 그쪽이 엄마인가?]

슬쩍 구미호를 바라보니 그녀답지 않게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슬며시 덧붙인다.

[설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지. 본녀도 그대가 꽤 마음에 들고 말이다.]

[뭐, 종족은 다르지만. 그런 건 별 상관없겠지.]

내가 설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런 걸 따지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애초에 몬스터니까.

그렇게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고 있으니 구미호가 조금 환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아아,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잘 부탁한다… 부인, 이라 해야 하나?]

짐짓 장난스레 덧붙인 목소리에 구미호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말을 받는다.

[그, 그렇군. 보, 본녀… 아니, 소첩도 부디 잘 부탁드리옵니다. 부군.]

[...?]

뭔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구미호의 반응에 의아해졌으나 따로 묻지는 못했다.

어느새 한참을 동굴을 뛰어다니던 설이가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뒤에서 몹시 숨을 헐떡거리는 토순이는 덤이다.

"컁컁!"

느낌상 집안 구경을 시켜 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확인차 슬쩍 구미호를 돌아보니 그녀가 굉장히 묘한 표정으로 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본녀의 아이라 해야 할지. 타아밍이 참으로 기가 막히구나… 따로 방해할 생각도 아닐 텐데….]

자그마한 사념이 느껴졌지만 애초에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 듯 정확한 의미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어렴풋이 듣기는 했지만 그 의미를 전혀 모르겠다.

"컁컁!"

통통- 설이가 앞발로 내 머리를 두드렸다. 어서 가자는 의미가 다분한 행동이었다.

그 도톰한 발바닥 어택에 이번에도 나는 손쉽게 무너져 내렸다.

Shii──

자, 어디부터 가면 좋겠니.

그렇게 그날은 설이를 머리 위에 태운 채 열심히 새로운 거처를 탐험했다.

* * *

그날 밤.

언제나처럼 지쳐 잠든 설이와 토순이를 뒤로 한 채 구미호와 대화를 나누었다.

[진화에 대한 조건을 아는 게 있는가?]

내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구미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본녀 역시 아는 게 없다.]

[그러면 그쪽은 어떻게 진화했지?]

[그대가 말하는 진화가 종으로서의 진화를 말하는 것이라면, 본녀의 일족에게 진화란 것은 없다.]

[…그게 무슨 뜻이지?]

슬쩍 눈살을 찌푸리는 내 모습에 구미호가 가볍게 제 꼬리를 가리켰다. 풍성한 아홉 개의 꼬리가 부드럽게 살랑이고 있었다.

[본녀의 일족은 힘이 강해짐에 따라 진화가 아닌 꼬리의 개수만 늘어난다. 딱히 종 자체가 변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대가 말한 진화는 이런 진화와는 분명 다를 터.]

[…그렇군. 확실히 다르다.]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래도 그녀에게서도 진화의 조건에 대해서는 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가 아니라면 물어볼 만한 상대가….

'아르데에게라도 다녀와야 할까?'

언제나 나를 '어린 뱀' 또는 '작은 뱀'이라 부르는 그 온화한 에어리어 보스라면 어쩌면 진화의 조건에 대해서도 알지 몰랐다.

일단 확실한 것은 그는 구미호와 달리 차근차근 진화하며 성장한 개체니까.

그렇게 내가 잠시 용암 구역에 다녀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문득 구미호가 말했다.

[미안하군. 별 도움이 되지 못해서.]

[…아, 괜찮다. 이미 그쪽에게는 큰 선물을 받았으니까. 이쪽도 그 이상 바랄 정도로 염치가 없진 않아.]

[그런가? 그리 말해주니 다행이군.]

안심한 듯 자그맣게 미소짓는 구미호의 모습을 끝으로 그날의 대화는 끝이 났다.

일단 용암 구역의 방문은 잠시 미루기로 결정했다.

떠나겠다 하면 설이도 따라오겠다고 난리일 것이 뻔했으니까.

나와 설이 그리고 토순이에 이어 구미호가 합류한 일상은 크게 달라졌고, 또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상은 설이가 중심이었기에 큰 부분에 있어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세세한 몇몇 부분이 확실히 달라졌다.

우선 구미호는 꽤 엄한 어머니였다.

설이만 행복하면 아무래도 좋은 나와 달리. 그녀는 확실히 혼낼 때는 혼내는 스타일이었다.

당장 지금도 말 안 듣고 평소처럼 떼를 쓰기 시작한 설이에게 그녀가 엄하게 훈육을 시작했다.

"캬아앙───!!!"

엉엉- 울음을 내뱉으며 설이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미의 엄한 꾸중에 내게로 도망친 것이다.

괜스레 흐뭇해진다.

"컁컁!"

'엄마가 혼냈어! 나빠! 미워! 도와줘!' 같은 느낌의 울음이었다.

나는 적당히 설이를 달래며 꼬리로 그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런 내게 구미호가 다가온다.

[설이를 이리 다오. 이참에 확실히 혼내야겠다.]

[조금 봐주는 게 어떤가? 이맘때의 아이들은 다 이런 법이니.]

[지금부터 확실히 교육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응석쟁이가 되어버린다. 교육은 필요하다.]

그녀의 말에 잠시간 상상해본다.

장성한 설이가 아무것도 못 하고 내게 응석을 부려오는 모습.

"컁컁!" 귀엽게 울며 내게 머리를 부비며 부탁하는 모습.

'나쁘지 않은데…?'

슬쩍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구미호가 엄하게 소리쳤다.

[너도 그만 숨어 있고 나오거라!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꺙꺙─!"

'싫어! 잘못한 거 없어! 엄마 미워!' 같은 울음이다.

설이가 좀 더 깊숙이 내 몸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설이의 모습에 재차 구미호를 말리려 하니….

[그대는 너무 물러! 잠시 빠져 있어라!]

평소의 차분하던 모습과 달리 지금 그녀의 기세는 여러모로 심상치 않았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자, 설이야. 엄마한테 가야지?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무리란다.

"컁컁!"

'배신이야! 배신!'하고 설이가 열렬히 울었으나 못 들은 척 눈을 돌렸다.

지금의 구미호는 절대 항거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그 자체였다.

'살아남으렴, 설아… 나중에 놀아줄게.'

그렇게 어미에게 끌려가는 설이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마님은 대단하시네요….]

피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토순이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런 그녀를 따라 나도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원래도 강하긴 했지만 어머니는 더 강한 법이다.

이후 자신을 버렸다며 잔뜩 삐진 설이를 열심히 달랬다.

토순이까지 함께 달려들어서 달랬지만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버팔로 고기를 한가득 사냥해왔다.

열심히 웰던으로 구우니 그제야 설이는 평소대로 돌아왔다.

구미호도 함께 먹었는데 그녀도 버팔로 고기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것도 웰던으로.

과연 모녀가 나란히 입맛이 똑같았다.

참고로 그녀는 평소에 그냥 생고기를 먹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몬스터가 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지.

나도 인간일 적 기억이 없었다면 전혀 구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별다른 맛을 느낄 수도 없으니까.

그렇게 소소하게 변한 일상을 당분간 즐겼다.

그리고 그런 일상이 지속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문제를 발견했다.

기본적으로 나는 구미호를 '구미호' 또는 '그녀', '그쪽'이라 호칭한다.

그녀도 별 신경 쓰지 않고 나도 그냥 계속 그렇게 불렀는데, 계속 지내다 보니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이는 당연하고, 저 장난ㄱ… 애완동물인 토순이까지도 이름으로 부르는 마당에, 그녀를 계속 아무렇게나 부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본녀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지어줄 만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떠올렸다.

그녀는 제 아이에게도 별다른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본녀가 처음 세상을 자각했을 때 본녀는 혼자였다. 어미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곁에 없었지. 그때부터 혼자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이렇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땅의 지배자가 되었지.]

거기까지 말한 구미호는 슬쩍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요 며칠 또 눈보라가 불고 있었다.

[그동안 딱히 이름이란 것을 불릴 만한 상대는 없었다. 어지간한 잡놈들은 본녀를 보면 몸을 피하기 일쑤였으니. 다들 '지배자'라 불러서 다른 호칭도 필요 없었고 말이다.]

[…설이의 아버지는? 그쪽 혼자 설이를 낳은 것은 아니지 않나?]

[흥, 그 이야기는 되었다. 단지 그때는 아이를 만들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적당히 아무 녀석이나 잡아온 것뿐이다. 확실히 말하지만 설이에게 아비라 불릴 만한 상대는 그대 말고 없다. 설이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본녀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

단호히 말하는 구미호의 기세에 어쩐지 압도될 것 같은 기분이다.

무엇보다 당당히 설이의 아버지로, 그것도 그 어미에게 인정받으니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말이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은 이름이 없는 건가?]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지금의 본녀에게는 '설이의 어미'라는 호칭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 말하는 구미호의 모습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러 생각이 오간다.

[무, 물론 그것 말고도 다른 호칭을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그대의 부, 부인이라거나… 뭐, 그런 쪽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사념이 들렸지만 워낙 흐릿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흐릿한 사념이었으니 딱히 알아듣지 못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되묻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래도 호칭은 필요하지 않겠나? 앞으로도 계속 '그쪽'이라 부를 수는 없는 거니까. 누가 뭐래도 일단 우리는 '가족'이지 않은가? 가족에게 '그쪽' 같은 말을 호칭이라 부를 수는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선의 가족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남보다 못한 사이였던 인간일 적의 가족조차 그러지는 않았다.

적어도 형식상으로나마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로서 존재했었다.

그 콩가루 집안도 그럴 것인데 진짜 가족이라 여기는 이들을 막 부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말의 진심을 알아들은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구미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군. 확실히 그대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가족이니만큼 함부로 부를 수는 없지… 그런 의미에서 그대가 지어주겠나?]

[…그쪽의 이름을?]

[그래. 설이에게 '설'이란 이름을 주었던 것처럼. 본녀에게도 말이다.]

그녀의 말에 잠시 혀를 날름거렸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내가 잠시 멍해 있는 사이 구미호가 청명한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을 잠시 마주하니 도저히 못 하겠단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내 작명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 그래도 괜찮은가?]

[문제없다. 이미 '설'이란 예쁜 이름을 지었으니 본녀는 그대를 믿는다.]

차분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가볍게 침음을 흘렸다.

그 기대가 너무 무겁다.

'이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다.'

한순간 토순이의 이름이 슬쩍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도 토순이 같은 성의 없는 이름을 지을 수는 없었다.

열심히 생각해보자.

그리고 잠깐의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스노우'. 스노우는 어떤가?]

[무슨 뜻이지?]

[설이와 같은 의미다. 눈이란 뜻이지.]

사실 여러 가지 이름이 떠올랐지만 이것만큼 그녀와 잘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하지 못했다.

설이란 같은 뜻을 가진 의미기도 했고 눈처럼 새하얀 그녀에게 이만한 이름도 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게 안 되면 '화이트'나 '백설', '스노우 화이트' 같은 이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 나도 안다.

사실 내 작명 실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구미호가 내가 제안한 이름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스노우'… 스노우라… 괜찮은 울림이다. 게다가 그 뜻 역시 설이와 같다니… 훌륭한 선물을 받았구나.]

구미호. 아니, 이제는 스노우가 된 그녀가 은은하게 미소지었다.

평소 설이에게만 보여주고는 하던 부드러운 미소였다.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조금 겸연쩍은 느낌이다.

[그래서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돌연 스노우가 그리 물어왔다.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가족끼리 함부로 부를 수는 없다고. 그건 그대도 마찬가지지. 본녀도 언제까지 그대를 '그대'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긴 하지.]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한다.

'이름이라….'

현재 상태창에 표기된 내 이름은 '유준영'.

그 뒤에 '(?)'같은 영문 모를 표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20년 가까이 사용한 '내 이름'이다.

비록 인간일 적 사용하던 이름이긴 하지만.

사실 그동안 나 역시 스노우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이름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딱히 나를 부를 만한 이가 없었던 까닭이다.

현명한 비늘이나 리자드맨 때는 그들의 대화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고.

'자손' 같은 다른 호칭도 존재했기에 굳이 이름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내 생물학적 어머니인 여왕 역시 '아가' 같은 호칭을 사용했었다.

그 이후 만났던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내게 적대적이었고, 내 적들이었다.

인간이라면 몰라도 몬스터들은 자신의 적에게 이름 같은 걸 알리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 가깝게 지냈던 아르데 역시 나를 '어린 뱀'이나 '작은 뱀' 같은 호칭으로 불렀으며, 레드 와이번조차 '너'나 '네 녀석' 같은 호칭으로 불렀으니.

지금껏 내가 이름으로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스노우의 물음은 내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내 이름은 유준영이다… 하지만 이 이름을 계속 사용해도 좋을까?'

확실히 나는 '유준영'이다.

스무 살. 헌터를 지망해 미궁을 들락거리던 하찮은 캐리 유준영.

그건 틀림없는 '나'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정말로 '내'가 맞을까?

나는 유준영이지만 유준영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던 시절의 '유준영'이 될 수 없다.

어렴풋이 깨닫는다.

더 이상 유준영은 '내 이름'이 될 수 없었다.

[…내게도 이름이 없다.]

한참의 침묵 끝에 조용히 말했다.

오랜 고민 끝에 말한 것치고 무언가 숨기는 태도가 분명했지만, 스노우는 별다른 물음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주억일 뿐이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제 이름을 지으면 되겠구나.]

그리 말한 스노우가 재차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본녀가 직접 지어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불가능하겠어. 본녀에게 그대 같은 작명 실력은 없으니까. 분명 좋지 않은 이름이 나오겠지.]

[…이름은 원래 남이 부르는 것이니만큼 도움을 받고 싶은데.]

['뱀돌이'같은 이름이 나와도 괜찮은가?]

[…사양하지.]

기겁하는 내게 스노우가 가볍게 피식 웃었다.

[그래도 가벼운 도움 정도는 줄 수 있다.]

[어떤 도움이지?]

[그대는 검다.]

스노우는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직접 말로 얘기해 주었다.

[그대의 눈은 붉다. 새빨간 눈에 검은 비늘. 가만히 보고 있으면 꽤 위협적인 인상이지.]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말이지.]

[어허, 잠자코 듣도록. 본녀가 직접 그대에게 조언하는 중이지 않은가?]

마치 설이를 타이르듯 말하는 스노우의 모습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내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든 말든 스노우는 담담히 자신이 할 말을 계속했다.

[그대는 크다. 처음 봤을 때는 작은 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지.]

[…꽤 크기는 하지. 딱히 불편한 점은 없지만.]

[또한 그대는 길다. 크기 자체는 본녀의 호적수보다 작지만 그 길이만은 그 호적수를 충분히 감쌀 수 있을 정도로.]

[…뱀이니까.]

[대충 눈에 보이는 그대의 특징은 이 정도다.]

[…그래서 그게 이름짓기란 무슨 상관이 있지?]

슬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물어본 물음에 스노우가 가볍게 웃었다.

[그대의 특징을 말해준 것이다. 본녀와 설이의 이름을 지었을 때처럼 그 특징을 활용하면 좀 더 쉽게 이름을 짓지 않겠는가?]

[…과연 그러한 의미였군.]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가 늘어놓은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장 나도 그녀와 설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외관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니까.

'그렇다면 당장 떠오르는 건 블랙이랑 레드 정도일까.'

검은 비늘에 붉은 눈.

그것 외에도 산처럼 커다랗다거나 몹시 길다는 특징도 있었지만, 그런 특징은 제외했다.

이름을 '마운틴'이나 '베리롱'같은 거로 지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잠시간 고민하던 내게 스노우가 재차 조용히 덧붙였다.

[또한 그대는 밤과 같다.]

[...?]

[그대의 비늘은 검고 반짝이니. 마치 밤하늘을 보는 것 같다. 마침 몸도 크고 거대하니. 딱 밤하늘 같지 않은가?]

[…그런가?]

담담히 수긍하는 한편 조금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지금껏 내 외견에 대한 이런 식의 칭찬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까닭이다.

흉악하고 사나워 보인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그것보다 밤하늘인가… 그것과 관련된 게….'

딱하고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나마 떠오르는 것이라면 달이나 별, 은하수 정도겠지만.

이를 이름으로 쓰자니 영….

'밤하늘. 밤. 밤인가….'

잠시간 고민하다 곧 한 단어를 떠올렸다.

'닉스(Nyx).'

유명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밤의 신.

한낮 몬스터의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거창하다 싶지만 조용히 되뇌어 보니 이만한 이름이 또 없다 싶었다.

아니,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 앞으로는 인간 유준영이 아닌 뱀(몬스터) 닉스(Nyx)로 살아가자.'

이제부터 나는 '닉스'다.

그리고.

[진화를 위한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진화에 필요한 공적을 확인했습니다.]

[진화를 시작합니다.]

이날 밤, 나는 그토록 원하던 진화를 이룰 수 있었다.

제67화

[S랭크 몬스터가 되기 위한 조건은 자신의 '이름'을 가지는 것.]

[모든 조건을 충족하였기에 진화가 가능합니다.]

[진화를 위한 개체를 선별합니다.]

[스킬 <한계돌파S>를 확인했습니다.]

[진화 과정에 반영합니다.]

[선별 완료.]

[진화를 시작합…]

[<폭식>에 저장되어 있던 상위 랭크 몬스터의 방대한 에너지를 확인.]

[현재 선별된 개체로의 진화는 불가라 판단.]

[보다 상위 랭크의 개체로 새롭게 선별합니다.]

[선별 완료.]

[진화를 시작합니다.]

[진화 완료.]

[진화의 영향으로 일부 스킬과 능력치가 성장합니다.]

조용히 눈을 떴다.

온몸의 감각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낀다.

온몸에 넘치는 힘. 지금이라면 스노우와 비등하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될 정도의 방대한 힘이다.

당장 주체 못 할 정도로 방대한 힘이 흘러넘쳤다.

슬며시 시선을 돌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스노우의 푸른 눈이었다.

마주친 시선에 스노우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강해졌군. 축하한다.]

[…고맙다. 스노우, 네 덕분이다.]

스노우는 대답 대신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에 슬쩍 시선을 돌려 밖을 살피니 눈보라는 어느덧 그치고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진화 중에 하룻밤이 꼬박 지난 것 같았다.

[아니다. 하루가 아닌 사흘이다.]

[...?]

[본녀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대는 진화를 시작했지. 거대한 고치에 쌓여 그대로 사흘을 지냈다. 뭐, 저번처럼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설이도 별문제는 없었다만….]

그리 말한 스노우가 흘깃 동굴 한쪽에 잠들어 있는 설이를 보았다.

[아마 깨어나면 고생 좀 해야 될 거다. 딱 본녀가 당한 만큼 시달렸으면 좋겠군.]

[....]

꾹 입을 다물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떠올렸다.

어떤 미래를 상상하든 참담한 미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그 '다른 머리'들은 뭔가? 신경 쓰지 않고 싶지만 한쪽이 아까부터 이쪽을 노려보는데….]

담담히 들려온 스노우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아'하고 시선을 돌렸다.

내 양옆으로 자리 잡은 두 개의 새로운 머리가 보였다.

진화 끝에 새롭게 생겨난 머리들이었다.

[셋 모두가 '나'다.]

-다만….

흘깃 시선을 돌려 왼쪽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에 따라 마주 나를 바라보는 왼쪽 머리.

그리고….

-캬아아아아───!!!

성대하게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머리를 보았다.

-쉬이이….

[배고파아아아….]

잔뜩 힘 빠진 울음소리와 함께 오른쪽 머리의 사념이 들려 온다.

그렇다.

이 녀석들은 틀림없는 '나'였지만 또한 그러면서도 '내'가 아니기도 하다.

각각의 머리가 각자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괜찮은가, 그거?]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스노우가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내가 답했다.

[문제없다… 누가 뭐래도 이 녀석들은 틀림없는 '나'니까.]

비록 <다중인격>의 영향으로 인격이 나뉘기는 했지만, 녀석들 모두 내 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성격이 조금 다를 뿐.

-캬아아아──!!!

-쉬이….

아니, 조금 많이 다를 뿐이다….

* * *

진화한 내 개체명은 [트리플 헤드 드라코].

말 그대로 머리가 셋 달린 구렁이다.

흔히 말하는 '쌍두사'에서 머리가 하나 더 생긴 '삼두사' 정도로 보면 좋을 것이다.

각각의 머리는 서로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어디까지나 메인이 되는 것은 가운데 머리.

즉 '나'다.

다른 두 머리는 어디까지나 보조를 맡는 서브 인격이라 할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다만 마법에 있어서는 각각의 머리가 다른 속성을 담당했는데, 왼쪽이 <수마법> 오른쪽이 <화마법>을 다룬다.

메인인 나는 <독마법>이다.

조금 더 능동적인 전투가 가능할 것 같았다.

이마에 있던 <마안>의 경우도 각각의 머리가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 능력도 마법처럼 나눠서 담당하게 되었는데, 왼쪽이 정신 지배. 오른쪽이 석화.

그리고 메인인 나는 새롭게 생긴 마안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천리안의 능력은 셋 다 가지고 있다.

당연하다시피 나는 이번에도 변이종의 몬스터가 되었다.

원판이 되는 [드라코]라는 몬스터는 SA랭크의 몬스터로, 그 변이종인 나 역시 SA랭크의 몬스터다.

한 번에 두 단계나 성장한 것인데 이전에 스노우가 건네주었던 마석의 덕인 거 같았다.

당시 다 흡수하지 못한 에너지를 이번 진화에 다 쏟아부은 것이 아닐까?

여러모로 스노우에게는 감사한 일뿐이다.

이것 외에도 많은 부분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당장 신경 써야 할 큰 변화는 이 정도다.

다른 세세한 부분에서는 앞으로 천천히 적응해가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메인인 가운데 머리를 나 '닉스'라 한다면.

좌우의 양 머리는 각각 '왼쪽이'와 '오른쪽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

무척 성의 없는 호칭이기는 하지만, 내 이름을 짓는다고 머리를 싸맸던 것이 바로 이전이었던 만큼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왼쪽이도 오른쪽이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캬아아아───!!!

…이미 지은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내 목을 무는 것은 그만둬.

너한테도 독이 있으니까.

물론 내 독이 나한테 통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기분이 묘하다.

-쉬이….

오른쪽 너도 배고프다면서 내 목을 무는 건 그만둬라.

내가 금방 먹을 걸 구해올 테니까.

대충 이런 느낌으로 나는 새로운 두 인격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 * *

"캬앙─!!!"

잠에서 깨어난 설이가 곧장 내 곁으로 달려들었다.

느낌상 사흘 동안 보지 못한 나에 대한 불만을 표하려는 것 같은데, 기세 좋게 달려오던 것도 잠시.

곧 저를 바라보는 세 개의 머리를 발견하더니 그대로 멈칫했다.

깜짝 놀란 설이의 털이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옆에서 스노우가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캬앙…?"

'맞아? 아빠 맞아?' 같은 느낌의 의미일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주억여줬다.

그제야 설이가 조심스러운 기세로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경계하는 기색 가득하게 말이다.

"컁… 캬앙…?"

'진짜? 진짜지?' 하는 느낌의 울음.

나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꼬리로 설이의 몸을 쓱쓱 쓰다듬었다.

그제야 완전히 나를 받아들인 설이가 "컁컁!"하며 내 품에 파고들었다.

다른 두 인격 때문에 다친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그것보다… 괜찮은가?'

흘깃 시선을 돌려 왼쪽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사납고, 까탈스러운 성격을 가진 녀석인 만큼 설이에게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혹시 설이에게도 그러면 어떡하지?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뜯어내야 할까?

솔직히 머리 세 개는 좀 많은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런 내 걱정과 달리 왼쪽이는 설이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껌뻑 죽는 거 같은 눈치다.

-Shii───!!!

[귀여워! 우리 설이 귀여워!]

연신 설이의 몸에 머리를 부비며 들려온 사념을 보면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오른쪽은 어떨까?

사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왼쪽이보다는 이쪽이 더 걱정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쉬지 않고 배고프다며 칭얼거리는 녀석이니까, 혹시 설이를 덥석 먹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일전에 설이를 입안에 넣고 움직였을 때 달달한 사탕 맛이 났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머리를 두 개만 남기는 것도….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런 내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왼쪽이처럼 격한 반응은 아니지만, 오른쪽이 역시 제 나름대로 설이를 반기고 있었다.

-쉬이….

[설이, 귀여워… 맛있는 거 줄까? 저기 토끼 고기가 있어… 내가 맛있게 구워줄게….]

설이 대신 저 멀리 바들바들 떨며 이쪽을 살피는 토순이가 위험해진 거 같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렇게 다른 두 인격 역시 별문제 없이 설이를 받아들였다.

뭐, 녀석들 역시 어디까지나 '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로써 애써 생겨난 머리가 줄어들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 토순이 너는 당분간 내게 접근 금지다.

아니, 아니. 딱히 네가 싫어진 게 아니라….

그래, 버릴 생각은 아니다.

다만 네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다가오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

나로서는 별 상관없지만 이제 와서 네가 사라지면 설이가 슬퍼할 테니까.

농담. 농담이니까 울지 마라.

나한테도 너는 소중한 장난… 아니, 애완동물이다.

그래 그래. 착하다.

아, 그래도 다가오지 말라는 건 진담이니까.

정말 먹힐지도 몰라.

응, 이번 건 농담이 아니다.

그 후 당분간 토순이는 내 10미터 안팎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오른쪽이 그런 토순이를 보고 조용히 입맛을 다신 건 비밀이다.

이후 진화한 내 일상은 크게 바뀐 게 없었다.

당분간 진화한 몸에 적응한다고 설이와 자주 놀아주지 못했지만, 스노우도 있고 토순이도 있으니 설이가 심심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매일 내게 불만을 토로하기는 하니 딱히 내가 잊힌 건 아닌 것 같아 기쁘다.

적응만 끝나면 금방 놀아줄 테니까.

몸에 대한 적응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 적응 과정을 도운 것은 바로 스노우였다.

적당히 내 싸움 상대를 해준 것인데, 아무래도 내 스킬이나 평소 싸움 방식 자체가 상대를 죽이기 위한 방식이라 스노우와의 대련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스노우 역시 확실한 내 가족이었으니까.

혹시나 그녀를 상처 입히는 일 따위 전혀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이런 내 걱정에 스노우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봐도 나를 얕보는 듯한 모습이라 왠지 모르게 울컥한 마음에 한번 진심으로 덤벼보았다.

진화하기 전의 나라면 몰라도 지금의 나는 단번에 SA랭크까지 성장한 몬스터계의 신성.

아무리 스노우라도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이다.

* * *

엉망진창으로 보기 좋게 당했다.

역시 스노우는 스노우였다.

계층주 둘을 해치우고 구역주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강함을 뽐내는 괴물 여우.

스노우 왈, '본녀에게 덤비기에는 아직 10년도 더 이르다'.

맞는 말인 거 같아 가슴이 더 아프다.

그렇게 전력을 다해도 스노우에게 별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매일같이 스노우와 대련을 계속했다.

그 상대가 상대인지라, 생사결이 아닌 단순한 대련임에도 능력치가 제법 매섭게 올랐다.

당분간 스노우를 사부님이라 부르는 게 좋을까?

한번 그렇게 불러보았더니 스노우가 질색했다.

나한테는 그런 호칭보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열심히 불러주었다.

스노우가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이후 대련에서 더 엉망진창으로 당했다.

…왜지? 불러달래서 불러준 것뿐인데….

여담으로 이런 우리의 행동에 설이가 자신도 놀아달라며 굉장히 삐졌다.

설이에게는 치고받고 싸우는, 정확히는 내가 열심히 얻어맞는 모습이 단순한 놀이로 보였나 보다.

…장차 크게 될 아이가 분명하다.

이후 설이도 대련을 하는 우리 옆에서 대련을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상대는 토순이.

랭크만 보자면 토순이 쪽이 훨씬 더 강했으나, 아무래도 설이는 토순이 입장에서 모시는 아가씨다 보니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토순이도 엉망진창으로 당했다.

동지를 만난 기분이다.

토순이를 쓰러트린 설이가 스노우에게 달려갔다.

칭찬을 바라고 간 것 같은데 스노우는 오히려 설이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역시 스노우. 친구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이야기해 주는 모양이다.

틀렸다.

슬쩍 흘러들어 오는 사념을 확인하니, 잔소리가 아닌 싸움 코치를 해주고 있었다.

거기서는 이 방법이….

그런 상황에서는 이 마법을….

그때는 앞발을 휙….

설이가 열심히 스노우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토순아, 힘내라.

나도 힘낼 테니까.

그래, 울지 말고… 조금만 더 버텨라.

설이라면 분명 금방 질릴 테니까.

나? 나는….

설이가 엄마를 닮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렇게 주인과 애완동물 사이에 끈끈한 애정이 생겼다.

제68화

대련 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노우는 자신의 몸 크기를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었다.

4, 5미터 정도의 크기를 가진 통상 사이즈부터 나보다 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초거대 사이즈까지.

때에 따라서는 설이 정도의 사이즈까지 몸을 줄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리 자주 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사이즈면 설이가 특히 놀아달라고 보챈다고.

언젠가 한번 보고 싶다 생각했다.

스노우가 기회가 생기면 보여 주겠다고 답했다.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꼬리로 얼굴을 가리는 게 꽤 부끄러운 모양이다.

어쨌든 내가 갑자기 이 소리를 왜 하느냐 하면, 나도 가능하면 배우고 싶기 때문이다.

스노우의 말로는 일종의 마법의 일환이라는데 다른 것이면 몰라도 마법이라면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스노우는 흔쾌히 허락했다.

거기다 더해 이전에 배우고자 했던 치료 마법도 함께 배우기로 했다.

역시 사부님이라 부르는 게 좋을까?

꼬리로 철썩 얻어맞았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설이의 발바닥 어택과는 조금 다른 몽실몽실함이다.

중독될 것 겉다.

왼쪽이와 오른쪽이는 어디까지나 내 인격에서 파생된 보조 인격이기는 하지만 그 성격이 나와는 정말 천차만별이다.

우선 왼쪽이.

이 녀석은 굉장히 사납고 까탈스럽다.

언제나 화가 가득하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포악한 성질을 자랑했다.

그것은 딱히 대상을 가리지 않으며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나에게까지 종종 그 흉포한 성질을 들어내고는 했다.

사실 항상 함께 있다 보니 그 성질머리를 가장 많이 겪는 게 바로 나였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시간과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않는 포악한 성질의 왼쪽이지만 녀석에게도 예외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바로 설이와 스노우다.

설이에 대해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스노우에 대해서는 조금 의외이긴 했는데.

사실 왼쪽이가 처음부터 스노우에게도 성질을 부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연하게도 스노우에게도 그 사나운 성질을 여지없이 내보인 왼쪽이지만 이후 몇 차례에 걸친 그녀와의 대련 끝에 지금은 얌전해졌다.

저도 모르게 스노우만 보면 푹 고개를 숙인다고나 할까?

굉장히 겸손해졌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을 보는 거 같았다.

뭐, 그 여파로 내게 더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미우나 고우나 한 몸이기에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내게 부리는 짜증도 정말 싫어서 그러는 거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한 애정표현에 가까우니까. 이른바 말하는 츤데레라는 거다.

아니라고? 부끄러워하기는.

아, 아닌 거 알겠으니까 깨물지 마라!

아프다!

아니, 한 몸이라 너도 아플 텐데 계속 깨무는 건 뭐냐?

너 때문에 잠들었던 오른쪽이가 깼다고!

아아, 내가 미안하다! 그만해라!

대충 이런 느낌으로 우린 굉장히 잘 지내고 있었다.

왼쪽이 다음에는 오른쪽이의 차례다.

이 녀석 역시 왼쪽이만큼이나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녀석은 굉장한 마이 페이스다.

기본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깨어 있을 때도 항상 힘 빠진 듯한 나태한 모습을 보인다.

항상 하는 말은 '배고파'.

실제로 그 먹성 또한 얼마나 대단한지.

항상 무언가를 먹을 때면 이 녀석이 다 먹어 치운다.

그래서 굳이 나나 왼쪽이가 입으로 무언갈 삼킬 필요가 없었다.

<폭식>으로 저장한 에너지는 항상 충분함에도 녀석에게 정도랄 것이 없었다.

그나마 이 녀석은 왼쪽이에 비해 얌전한 녀석으로 그 먹성만 제외하면 크게 트러블이랄 것이 없었다.

설이에게는 당연하고 스노우에게는 그냥 별 관심이 없는 거 같았고, 가끔 토순이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만 제외하면 이 녀석은 기본 조용한 녀석이었다.

제각각 특이한 성격을 가진 보조 인격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할 때는 확실히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나운 왼쪽이도 먹성 좋은 오른쪽이도.

전투나 사냥에 있어서는 똑 부러진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럴 때만큼은 확실히 내 인격이란 게 느껴지는 순간이랄까?

특히 스노우와의 전투에 있어서는 날이 가면 갈수록 숙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첫날 각자 제멋대로 움직였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착실히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고 협력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애초에 전부가 '나'라고 할 수 있었기에 따로 대화를 주고받지 않아도 무엇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제멋대로인 녀석들이긴 했지만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확실한 파트너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내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그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스노우와의 대련을 끝낸 어느 오후의 이야기다.

평소보다 맑은 하늘 아래. 열심히 대련을 빙자한 일방적인 구타를 하고 있는 설이와 토순이를 보며 한가롭게 햇빛을 쬐었다.

마치 설이처럼 내 몸에 몸을 기댄 스노우가 조용히 말한다.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음. 확실히. 요즘 들어 성장세가 무섭긴 하지.]

그녀의 말처럼 요즘 설이의 성장세가 조금 무섭다.

과연 그 어미의 재능을 착실히 이어받았다는 것일까?

스노우와 내가 적당히 코칭을 해주면 곧장 받아들여 제 몸에 체화시킨다.

상대가 한 단계 높은 랭크의 토순이라 다행이지, 동랭크의 몬스터였다면 상대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근래 들어 토순이도 버거워하는 것이 슬슬 눈에 보이니 어쩌면 E랭크로의 성장이 얼마 남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그때쯤이면 사념대화도 가능하려나?'

지금도 설이의 말을 알아듣는 것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으나, 그래도 멀쩡한 사념대화가 가능했으면 한다.

무엇보다 설이의 목소리로 직접 '아빠'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조금 걱정이구나. 숙녀라면 조금 다소곳한 품위도 가져야 할 텐데. 너무 활동적이기만 하니… 아무래도 교육을 좀 해야 할까?]

[…숙녀라… 설이는 여자아이였던가?]

[흠? 몰랐나?]

어찌 그것도 모르냐는 듯 채근하는 눈빛에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왼쪽이와 오른쪽이도 전혀 몰랐던 사실인 듯 나와 함께 시선을 피한다.

아니, 오른쪽이는 여전히 태평하게 설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단지 설이가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상관없었을 뿐이다. 설이는 설이일 뿐이니까.]

[흠. 말솜씨 하나는 정말 구렁이 같구나.]

[…진짜 구렁이니까.]

스노우가 피식 웃었다.

가볍게 꼬리가 살랑이는 것을 보니 별로 나쁜 기분은 아닌 거 같았다.

다행이다.

스노우와 대련을 하며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 만큼, 근래 들어 그녀의 눈치를 볼 때가 많아졌다.

슬며시 떠오른 대련 중의 스노우의 모습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잘못하면 뼈도 못 추린다.

[…조금 궁금한 게 있는데 괜찮은가?]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다 답해주마.]

불쑥 떠오른 생각을 지울 겸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흐음? 뜬금없이 그것은 왜?]

[별 이유는 없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지.]

스노우가 흘깃 나를 보았다.

청명한 푸른 눈이 한차례 꿰뚫듯 나를 보아왔으나 딱히 걸릴 것이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단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곳 70계층의 플로어 보스였고, 그녀라면 혹시 10년 전 실종되었던 성재명과 원정대를 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실제로 69층에서 생활 중이던 아르데는 성재명과 그 원정대를 보았다고 알려줬다.

당시에도 에어리어 보스였던 아르데인데, 그때 당시 제 구역을 지나가는 대규모 원정대를 보았다고 한다.

딱히 제게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기에 조용히 지나가는 이들을 굳이 건들지는 않았다고.

확실히 아무리 성재명과 그 원정대라 하더라도 아르데가 상대라면 절대 70계층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흐음…인간이라. 근래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군.]

[예전에는 본 적 있다는 말인가?]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과거에 한 번 본 적은 있다. 본녀가 아직 이 땅의 지배자가 되기 한참 전의 일이지.]

[…그들은 어떻게 됐지?]

[꽤 많은 인원들이 왔다가 대부분이 돌아갔다. 남은 이들은 채 50도 안 되던 거로 기억한다. 그중에 무척 강한 인간이 있었기에 본녀도 예의 주시했었지.]

[그래서? 남은 이들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당시 이 땅의 지배자를 쓰러트리고 아래로 내려갔던 건 확실하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본녀도 잘 모른다. 그때는 생존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때니.]

스노우의 이야기에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이곳에서 전혀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들이 진작에 다음 계층까지 넘어갔다면 단서가 없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의 성재명과 원정대는 70계층을 넘어 더 아래까지 내려갔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까지 내려갔을까?

조금 궁금해졌다.

[혹시 그들에 대해 알고 있을 만한 이는 없나?]

[흐음… 닉스, 그대가 그리 관심을 가지다니 드물구나. 설이에 관한 게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무관심한 그대인데 말이야.]

[…딱히 설이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관심은 있다.]

[그건 기쁜 말이로구나.]

스노우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아쉽게도 당시에 대해 알 만한 이들은 드물구나. 그나마 본녀의 호적수가 알고 있는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호적수는 이미 본녀의 손에 죽어 버렸으니….

미안하다는 듯 말끝을 흐리는 스노우의 모습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딱히 스노우에게 따질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 호적수 말고 다른 녀석들은 전혀 없는 건가? 오래 산 녀석들도 있을 거 아닌가?]

[본녀의 기준으로 오래 살았다고 할 만한 이들은 몇 없다. 본녀가 지배하는 이 땅을 제외하고, 이 아래는 매일이 투쟁일 뿐인 살육의 땅들이니까. 오래 살았을 만한 놈이 있을 리가 없지.]

[…그렇군. 그건 조금 아쉽네.]

짧게 혀를 차며 입맛을 다시는 나를 보고 스노우가 조용히 말해왔다.

[…본녀가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니. 괜찮다. 그저 조금 아쉬운 것뿐. 애초에 조금 궁금했을 뿐 그리 큰 관심도 없었다.]

[…바깥사람의 일을 내조하는 것도 부인의 본분 중 하나다만… 아직 본녀도 멀었구나.]

무어라 중얼거리는 스노우의 사념이 들려왔지만 워낙 흐릿했기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에 의아하게 스노우를 바라보니 그녀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 인간이라… 닉스, 그대는 인간에 관심이 많은가?]

[…으음. 이곳까지 오는 과정에 많은 인간들을 보았으니까. 여기서는 전혀 보지 못해 물었던 것뿐이다.]

실은 어디까지나 내가 원 인간이었기에 가지는 관심이었지만 그것을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다.

[과연. 자네는 위에서부터 내려왔구나… 자네의 원래 고향은 어땠지?]

[이곳과 달리 아늑한 곳이다. 당시에는 꽤 아득바득 살았지만… 여태 겪은 것을 생각하니 낙원과 다름없군.]

[호오… 꽤 관심이 가는구나?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겠나?]

[푸른 숲과 늪지가 가득한 곳이다. 혹한의 땅인 이곳과 비교하면 무척 풍요로운 곳이지. 날씨도 무척 맑다.]

[푸른 숲이라… 한번 보고 싶구나.]

[언제 한번 설이를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여기와 달리 설이에게 위협이 될 만한 녀석들도 적으니.]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스노우는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이 언젠가 분명 위로 향하고자 마음먹는 것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SS랭크와 SA랭크의 몬스터가 느닷없이 산림 구역에 등장이라… 난리가 나겠군.'

어쩌면 나는 조금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문제였으니 별문제는 없었지만.

[그래서 다른 곳은 어떤가? 그대가 있던 땅들 말고, 지금껏 거쳐온 것은 또 어땠지?]

[흐음… 내가 있던 곳은 산림 구역이라 하고, 그 다음은 사막 구역이라 한다. 그곳은 어쩌냐면….]

그렇게 이날 오후는 소녀처럼 이것저것 물어오는 스노우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드물게도 즐거워하는 스노우의 모습에 나 역시 괜스레 기뻐졌다.

이후 대련(놀이)를 끝낸 설이와 토순이도 함께해 나는 꽤 많은 이야기를 풀어야 했다.

무척 평화로운 하루였다.

제6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