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31계층은 이전의 세 계층과 별다를 것 없는 곳이었다.
여전히 사막이 광활하게 뻗어 있었고, 사막의 군데군데 바위산이나 오아시스가 있다.
헌터들이나 몬스터들 역시 이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나 역시 이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찾고 있던 스켈레톤 메이지나 계층주급의 몬스터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정말 싹 쓸고 지나간 게 맞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28계층부터 31계층, 이곳까지 단 한 번도 계층주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로서는 주기적으로 위협이 될 만한 몬스터의 싹을 자른 것뿐이겠지만 나로서는 소중한 성장의 발판을 빼앗긴 느낌이라 꽤나 기분이 저조했다.
어떻게 제대로 된 몬스터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있을까?
그나마 28계층에서 보았던 '샌드 스콜피온' 정도를 몇 번 발견해서 망정이다.
이놈들 중에 딱히 마석이 있거나 했던 녀석은 없지만 좋은 스파링 상대가 되어주었다.
31계층에서 따로 볼 것이 없었기에 얼마 머물지 않고 다음 계층으로 향했다.
이제는 그래도 하나쯤 나오겠지.
여전히 싹 쓸고 지나갔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대를 멈출 수가 없다.
혹시나의 경우가 있으니까.
* *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32계층에서도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역시나 이곳에서도 싹 쓸고 지나간 모양이다.
몇 마리 정도 남겨두고 가도 아무런 문제 없을 텐데.
굳이 이렇게 싹 다 털어가야 속이 시원할까?
뒤늦게 출발한 후발 주자들은 어쩌라고?
헌터란 양반들이 참 배려가 없다.
그나마 사막 구역에서 처음 보는 몬스터를 발견했다.
[워킹 캐크터스].
랭크는 D에서 C.
이름 그대로 걸어 다니는 선인장이다.
1미터에서 2, 3미터 정도의 평균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개체에 따라서는 무려 5미터까지 자라는 거대 선인장 몬스터다.
캐리 시절 종종 이런 몬스터가 있다고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여러모로 신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사기(死氣)만 풀풀 풍기는 언데드만 실컷 보다가 저렇게 생명력 넘치는 녀석을 보니 너무나 반갑다.
비록 녀석은 나를 그리 반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만난 워킹 캐크터스는 C랭크와 D랭크 중간 정도의 수준이었다.
C랭크라고 하기에는 약하고, 그렇다고 D랭크라고 하기에는 강한 그런 어중간한 수준이다.
좋게 말해서 준C랭크라고 하면 좋을까?
어찌 되었든 나에게 있어서 그리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다.
녀석의 완력이나 몸 군데군데 박힌 날카로운 가시가 다소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결국 나를 어찌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은 아니다.
이쪽은 나름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봤지만 저쪽에서는 그닥 반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을 확인하자마자 그 가시가 잔뜩 박힌 팔을 마치 철퇴처럼 휘둘러 왔기에 급히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17계층의 현명한 비늘 이후 처음으로 몬스터 친구를 사귀나 했는데….
상대가 이리 비협조적으로 나와서야 나도 어쩔 수 없다.
녀석 자체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생각 외로 쓰러뜨리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현재로서 내 공격 수단은 신체를 이용한 직접적인 물리 공격인데, 녀석의 몸 군데군데 박혀 있는 가시 탓에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막 공격하려 치면 마치 고슴도치처럼 뾰족하게 가시를 세우는 탓에 들어 올렸던 꼬리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아무리 내구가 높고 단단한 비늘 같은 스킬이 있어도 따가운 건 따가운 거였다.
딱히 먹이로 삼을 것도 아니고, 단순히 친구 신청을 거절당한 것뿐이었기에 굳이 죽여야 할 필요는 없다.
따끔한 것도 싫고 굳이 죽일 이유도 없으니 얌전히 물러날까?
그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슬며시 등을 돌리려 하자 돌연 녀석이 양팔을 들어올렸다.
손가락 대신에 뾰족한 가시들이 박힌 뭉뚝한 양손이 내 쪽을 향한다.
갑자기 뭘 하려는 것일까?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리자 돌연 무언가 슈슉- 날아왔다.
따끔한 감각이 온몸을 쑤신다.
전혀 예상치 못한 통증에 한차례 몸을 비꼬는 사이, 눈앞의 녀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고작해야 걸어다니는 선인장 주제에 표정이 다채롭구나.
아니, 그전에 방금 나 뭔가 당한 거 같은데?
여전히 따끔거리는 고통에 시선을 내리면 내 비늘 곳곳에 빼곡히 박힌 가시들이 보인다.
조금 전 녀석의 손끝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가시를 날릴 수도 있어?
설마하니 나도 못하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서 있다가 공격을 허용했고 말이다.
다행히 비늘 자체를 다 뚫지는 못하고 겉에만 살짝 박혀 있는 상태였지만.
만약 이게 좀 더 위력적이었다거나 내가 어쩌지 못하는 독이라도 발려 있었다면 무척이나 아찔한 상태였다.
'미궁에서 무지는 죄다.'
얼마 전 내가 내뱉었던 말이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구나.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오늘은 내가 벌을 받는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조용히 반성했다.
그것보다 설마하니 저쪽에서 먼저 공격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얌전히 물러설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말이다.
얕보였던 것일까?
조금 전 예상치 못한 수에 당했다는 수치심이 조용히 분노로 변했다.
C랭크도 아니고, 고작해야 D랭크 중에서 조금 강할 뿐인 녀석이 이렇게 덤벼올 줄은 몰랐다.
내가 물러서려던 것이 자신보다 약해서라고 여긴 것일까?
이래서 지성 없는 몬스터란.
나름 자비를 베풀어도 전혀 모르는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평소 은신 상태를 유지하며 최대한 죽여놓았던 기척을 들어냈다.
Shii──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성큼 다가서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던 녀석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제야 내 수준을 짐작한 모양이다.
한순간 녀석의 얼굴에 낭패란 표정이 스쳤다.
아무래도 평소 숨겨놓은 기척 탓에 내가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녀석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봐줄 생각은 없다.
미궁에서 무지는 죄다.
덤볐으니 죽인다.
죽이지 못했으니 죽는다.
처음 녀석에게 가졌던 호의는 이미 진작에 사라졌다.
아무리 따끔해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왜 내 친구 신청을 거절했을까 후회하며 죽어라.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하니 싸움은 불과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평소 C랭크 몬스터를 상대로도 거뜬히 승리하다 보니, D랭크 몬스터 수준에서 내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꼬리를 이용해 비늘 곳곳에 박힌 가시들을 털어내며 바닥에 쓰러진 워킹 캐크터스를 보았다.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진한 연녹색의 체액이 걸쭉하게 모랫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이거 먹을 수는 있을까?
아무래도 가시가 많다 보니 조금 그렇다.
과거 혼 래빗을 먹으며 했던 상상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저 많은 가시들이 몸 어딘가에 걸리지는 않을까?
무턱대고 삼켰다가 영 좋지 못한 곳에 박히는 건 아닐까?
슬금슬금 차오르는 불안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과거 혼 래빗 때와는 다르게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니 녀석을 삼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당히 마석이 있는 것만 확인하고 갈까?
그렇게 녀석의 시체를 한차례 뒤적였다.
혹시나 했지만, 마석은 없었다.
고작해봐야 D랭크 몬스터였기에 별 기대는 안했다.
보통 마석이란 것이 저랭크보다는 고랭크의 몬스터에게서 자주 발견되니까.
분명 별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새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먹이도 얻지 못했으며, 마석도 못 얻었다.
녀석과의 랭크 차이도 있었기에 별다른 능력치의 상승 또한 없었다.
결국 이번 사냥은 순전히 시간만 낭비한 셈이다.
기분이 상당히 저조해졌다.
* * *
이후 32계층을 조금 더 탐색해 봤지만 당연하게도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다.
언제나처럼의 언데드와 헌터들 그리고 워킹 캐크터스 몇을 더 발견할 것뿐이다.
새로 만난 워킹 캐크터스들은 모두 사이좋게 해치워 줬다.
괜히 이 전에 당했던 것에 대한 화풀이를 한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또 얼마 머물지 않고 다음 계층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아마 다음 계층인 33계층 역시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을 확률이 높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해보았다.
어찌 되었건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몬스터의 평균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맞았으니까.
분명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면 좀 더 강한 상대들을 만날 수 있을 거였다.
그렇게 기대감을 안고 곧장 다음 33계층으로 이동했다.
* * *
믿었던 기대에 배신당했다.
부푼 기대를 안고 도착한 33계층에는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헌터들은 자비가 없구나.
후발 주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어떻게 마석을 얻을 만한 상대가 하나도 없을 수가 있을까?
상심이 크다.
사막 구역에 헌터가 많다 많다 하지만 설마하니 몬스터가 없을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다.
거의 배경처럼 활동하는 하위 언데드들을 제외하면 33계층에 제대로 활동하는 몬스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있다 해도 먹이사슬 최하위의 저랭크 몬스터 뿐이지, 내가 목표로 하는 비슷한 수준의 몬스터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몬스터가 없는 것은 헌터들 탓이다.
역시 이건 괘씸해서라도 싸울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인간성을 지켜보고자 돌무덤 이후로 최대한 헌터들과의 접촉을 줄였는데, 그때의 내 다짐이 무색하게 변할 것 같다.
인간성은 개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헌터들을 향한 분노가 솟아오른다.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강해지기는커녕 싸우는 법도 잊어버리겠다.
좋아, 당장 지나가는 아무 헌터나 붙잡고 싸우자.
몬스터와 싸우지 못하는 대신에 그들과 싸우면 능력치라도 잘 오르겠지.
게다가 슬슬 폭식에 저장 중이던 에너지도 조금씩 부족하다 싶은 참이었으니, 오랜만에 제대로 한번 날뛰어 봐야겠다.
그리고 그렇게 다짐하며 열심히 움직인 결과, 나는 상상 이상으로 위협적인 상대와 만나게 되었다.
지금껏 싸워왔던 헌터 중에서도 가장 강한 상대.
B랭크 헌터.
나는 나보다 한 단계 높은 랭크의 상대와 마주했다.
그냥 얌전히 있을 걸 그랬다.
제35화
무작정 아무 헌터나 찾아가서 싸우겠다고 얘기는 했지만, 정말 그러지는 않았다.
그저 기분만 내려고 그랬던 것뿐 정말 그러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쓸 만한 사냥감을 찾아 몸을 움직이고 있으면, 문득 헌터들과 마주했다.
이제는 습관처럼 항시 발동 중인 이쪽의 은신을 뚫고서 한 쌍의 눈동자가 이쪽을 똑바로 직시한다.
흔치 않은 푸른색의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성 헌터.
그 랭크는 무려 B다.
처음에는 그저 기분 탓인가 싶었지만 푸른 머리의 헌터는 분명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의 은신을 간파당한 것은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동랭크 수준을 벗어나 무려 A랭크에 달하는 <은폐> 스킬.
그것을 간파했다면 비슷한 수준의 탐지 계열 스킬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불현듯 울리는 직감의 경고에 미처 몸을 피하기도 전에 푸른 머리의 헌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이놈은? 뱀이 왜 사막 구역에 있어?"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중얼거린 푸른 머리의 헌터가 곧장 검을 휘둘렀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는 속전속결의 일격.
급히 몸을 피하려 하자 <직감>이 찌르르 울린다.
원래 피하려 했던 것보다 더 크게 훌쩍 몸을 물렸다.
그리고 몸을 물리는 것과 동시에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슬쩍 시선을 내려보니 비늘 한쪽이 꽤나 깊게 베여 있었다.
재생 덕에 금방 회복되기는 했지만, 만약 직감의 경고를 무시하고 적당히 몸을 피했으면 반 토막이 났을 것이다.
한순간 섬뜩함이 척추를 타고 올라온다.
"호오? 이걸 피해?"
-제법이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이라도 하듯 평이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린다.
검 끝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낸 푸른 머리의 헌터가 이쪽을 향해 씨익 웃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성호'에서 싹 쓸고 지나간 통에 도저히 잡을 만한 놈이 없었는데… 이것 참 잘됐네. 만나서 반가워, 몬스터?"
화사하게 웃어 보이는 푸른 머리의 헌터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런 그녀의 미소가 스산한 악마의 미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직감은 끊임없이 도망치라 경고를 보내오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예지 헌터! 그렇게 혼자 달려가면 어떡합니까! 위험해요!"
잠시 차예지라 불린 푸른 머리의 헌터와 대치하는 사이 그녀와 함께 있던 다른 헌터들도 하나둘 달려온다.
그 숫자는 푸른 머리의 헌터까지 합해서 총 다섯.
숫자는 그닥 많지 않았지만 그 랭크가 문제였다.
'C가 셋. D가 하나.'
당장 눈앞의 차예지만 빼고 보더라도 이쪽에서 먼저 덤비지 않을 만한 전력이다.
눈앞에 있는 B랭크한테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인데, 다른 동료들까지 나타나서야 이제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다.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요? 설마 제가 위험하다는 소리 아니죠? 다른 곳도 아니고, 고작 사막 구역에서?"
자신을 타박하는 헌터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인 차예지가 이쪽을 슬쩍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가 묘한 기대감에 반짝인다.
무슨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딱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문제는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갈까 하는 것이다.
"후… 아무리 차예지 헌터가 뛰어나다고 해도 미궁에서 방심하면 안 됩니다. 미궁이 얼마나 변덕스러운데요."
"칫… 그거 공대장님한테 많이 들은 얘기거든요? 잔소리는 그만하세요."
"차예지 헌터가 조금만 신중히 행동하면…."
"박필립 헌터."
"예? 예…."
"적당히 하세요."
"…예, 죄송합니다."
슬며시 저를 노려보는 시선에 차예지를 향해 무어라 잔소리를 늘어놓던 헌터가 사과와 함께 꾹 입을 다물었다.
기회라도 생길까 싶어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었지만 아무렇게나 서 있는 듯한 차예지에게서는 별다른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손쉽게 대화를 끝마친 차예지가 언제 정색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이쪽을 바라본다.
누가 본다면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라도 본 줄 알겠다.
"자. 방해꾼은 사라졌으니 한판 해야지, 몬스터?"
기분 좋게 내뱉은 차예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선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다른 헌터들도 슬며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젠장… 일단 D랭크부터 노려야 하나?'
평소대로라면 가장 강한 상대부터 처리하고 이후 약한 상대부터 차근차근 처리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다섯 명의 헌터 전체에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의 대형 길드 소속일까?
이제 보니 입고 있는 장비도 모두가 최상품으로 보였다.
특히나 가장 선두에 있는 차예지가 들고 있는 검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길드에서 중점적으로 키우는 슈퍼 루키라도 되는 것일까?
자그마한 궁금증이 차올랐지만 더 생각을 이어갈 겨를이 없었다.
헌터들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모두 비켜요."
"예? 그게 무슨…?"
그렇게 천천히 이쪽을 다가오는 헌터들의 모습에 긴장하고 있자 문득 차예지가 다른 일행들을 제지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한 반응을 보이는 헌터들.
당황하는 그들을 향해 차예지가 덤덤히 말을 잇는다.
"저놈 내 거예요. 나 혼자 잡을 거야."
이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번뜩이는 차예지.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황망한 표정을 짓는 다른 헌터들.
"하, 하지만 차예지 헌터!"
"박필립 헌터. 적당히 하라고 했죠? 나 당신 아랫사람 아니에요."
"크윽…."
외관으로 봐서는 아무리 봐도 박필립이라는 헌터가 훨씬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그는 쏘아붙이는 듯한 차예지의 말에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국 헌터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나이 같은 게 아니라 개인의 랭크와 강함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차예지의 말에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동료로 보이는 다른 헌터들도 별다른 반박 없이 조용히 눈치를 살피고만 있을 뿐이다.
이것 참… 상황이 굉장히 묘하게 흘러간다.
그것도 내게 제법 좋은 쪽으로.
'아무리 B랭크 헌터라도 혼자서 덤빈다면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하는 짓을 보니 경험도 적은 것 같은데, 분명 싸우다 보면 틈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빈틈만 충분히 생긴다면 도망은 문제도 아닐 거다.
아니, 도망을 넘어서 오히려 역으로 사냥하는 것도….
"하, 하지만 차예지 헌터! 위험합니다!"
차예지에게 눌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 같던 박필립이 무슨 생각인지 재차 입을 열었다.
차예지와의 일대일을 원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혹여나 박필립의 충고에 그녀가 마음을 바꾸면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 차예지는 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하다는 박필립의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모양인지 얼굴을 잔뜩 구겼다.
대충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보이는 부분이다.
"박필립 헌터! 위험하다고요? 제가?! 정말 적당히 해요! 다른 것도 아니고 고작 C랭크 몬스터를 상대로 어떻게 제가 위험할 수 있어요! 저는 B랭크라고요, B랭크!"
"하, 하지만…!"
"흥! 하긴 10년이 넘도록 C랭크에 머무는 박필립 헌터 같은 사람한테는 고작 C랭크 몬스터도 위험하긴 하겠네요!"
"차예지 헌터─!"
차예지의 말이 자존심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일까? 박필립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콧방귀를 낀 차예지가 덤덤히 말한다.
"헌터 경력 10년 동안 C랭크에 머문 당신과 3개월 만에 B랭크에 오른 저를 비교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누구하고는 다르게 저는 '엘리트'거든요?"
"크윽…!"
"그리고 저한테 자꾸 그렇게 대드셔야 하겠어요? 나중이 되면 제가 당신 상사가 될 텐데?"
비웃음을 잔뜩 머금은 채 히죽이는 차예지의 말에 박필립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푹 고개를 숙이며 제 스스로 분을 삭힐 뿐이다.
꽉 쥐어진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리고 그런 박필립의 모습에 작게 콧방귀를 내뱉은 차예지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박필립을 대할 때 하고는 다른 화사한 미소를 얼굴 한가득 지은 채로.
"오래 기다렸지? 별 같잖은 아저씨가 자꾸 방해해서 말이야."
슬며시 미소 짓는 얼굴이 무척이나 스산하다.
잠깐 상황을 지켜봐서 알겠지만, 이거 약간 미친년 아닐까?
"오랫동안 방치했다고 너무 상심하지는 마. 그만큼 내가 즐겁게 해줄 테니까. 그리고…."
스르릉-
들어올린 차예지의 검이 햇빛을 받아 한차례 번쩍인다.
"그 대신 너도 나를 잔뜩 즐겁게 해줘야 된다?"
히죽이며 훌쩍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이년은 미친년이 맞았다.
차예지는 제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무척이나 대단한 상대였다.
B랭크 헌터하고는 처음 싸워보는 것이었지만 차예지가 왜 저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말했는지 왠지 알 것만 같다.
거침없이 몰아치는 매서운 그녀의 공세를 막다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녀는 분명 같은 B랭크 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랭크 차이가 나도, C랭크 몬스터를 상대로 혼자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니까.
쉬이익─
바람을 가른 검이 그대로 내 목덜미를 노리고 휘둘러진다.
검 끝에 맺힌 마력. 정확히는 '오러'나 '검기'라 불리는 것이 이글거리며 나를 위협한다.
다급하게 몸을 물리자 차예지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붙으며 맹공을 퍼부어왔다.
매서운 그녀의 검 앞에서는 높은 내구도 두꺼운 비늘이란 스킬도 모두 통하지 않았다.
이것이 B랭크 헌터.
고작 한 단계 차이일 뿐이지만 지금의 내게는 강해도 너무 강하다.
지금껏 C랭크 헌터도 여럿 해치워 왔기에 내심 차예지 혼자라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나는 아직 역부족이다.
나는 그렇게 수십 분간 차예지 단 한 사람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
"와! 너 정말 되게 튼튼하구나! 완전히 반 토막 낼 생각으로 휘둘렀는데! 마음에 들어!"
잠깐 사이 내 몸통을 반쯤 베어낸 차예지가 화사하게 웃는다.
급히 마력을 돌려 재생으로 회복하기는 하지만 몸이 반쯤 베어져 나간 통증에 머리 한쪽이 아릿하다.
[스킬 <급속재생A>가 발동됩니다.]
[스킬 <근성A>가 발동됩니다.]
"와, 게다가 재생력도 뛰어나네? 너 정말 마음에 든다! 당장 데려가서 내 개인 샌드백으로 삼고 싶어!"
미친년.
데려가서 펫으로 삼는 것도 아니고 샌드백이라니.
싸우기 전부터 생각했고, 싸우면서도 계속 생각했지만 역시 이년은 미친년이 맞았다.
나는 미친년이 잠깐 공격을 멈춘 사이 곧장 꼬리를 휘둘렀다.
[스킬 <테일 스트라이크A>를 사용합니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이쪽의 공격을 '읏차-' 하고 가볍게 피해낸 차예지가 '음음'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당했는데도 아직 눈빛이 쌩쌩하네? 어지간한 몬스터라면 벌써 기가 죽어도 잔뜩 죽었을 텐데. 눈에 독기가 가득해. 음, 역시 뱀이라서 그러려나?"
잔뜩 노려보는 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차예지가 태평하게 중얼거린다.
어떻게 봐도 여유가 가득한 모습이다.
절대 위험할 리 없다고 자신하는 걸까?
으드득-
굉장히 비참하지만, 그게 맞았기에 무어라 할 말이 없다.
꽤 길지 않은 시간 싸움을 별였지만 나는 시종일관 그녀에게 당하고만 있었다.
애초에 이건 싸움이라 부를 만한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철저히 농락당하며 '사냥'당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큰 수치심을 느꼈던 적이 언제일까?
몬스터였던 시절에도 없었고 캐리였던 시절에서조차 느끼지 못했다.
평소에 내가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살의와 적의를 품었던 적이 있을까?
당장에라도 눈앞의 차예지를 찢어발기고 싶지만 내게는 힘이 없다.
'썩을 미친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속으로 조용히 그녀에 대한 욕지기를 내뱉는 것뿐.
지독한 무력감이 온몸을 덮쳐온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애써 무시해왔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죽여.
언제나처럼 헌터를 보자마자 들려오던 미궁의 의지.
과거에 다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모른 척 무시했지만, 미궁의 의지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속삭여왔다.
-죽여.
이 목소리를 받아들인다면 저번처럼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다.
그 힘으로 압도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농락만 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어쩌면 저 여유로운 차예지의 얼굴에 한 방 먹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죽여.
그것만 가능하다면 이번 한 번만 더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저 여유로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걸,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걸 볼 수만 있다면.
그녀의 생살을 입안 가득 씹어 삼킬 수 있다면.
정말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재생은 했지만 흘린 피가 많은 탓에 시야가 흔들린다.
잔상처럼 남아 있는 통증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이로 미궁의 의지가 속삭인다.
-죽여.
흐릿한 시야 너머로 유일하게 뚜렷한 한 가지.
여전히 나를 향해 여유롭게 미소짓고 있는 차예지의 얼굴.
가학적인 미소를 지은 채 희열로 가득찬 그녀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결국 미궁의 의지를….
제36화
홀린 듯이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이려던 순간 찌르르 직감이 울린다.
그것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던 걸까?
두 번 다시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서는.
스스로 다짐한 것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내가 나약했었나?
아니다.
나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그렇다면 스스로 내뱉은 말을 막 바꿀 정도로 줏대가 없었나?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미궁의 의지를 받아들이려 했던 것일까?
출처 불명한 꺼림칙한 힘을 빌릴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나?
아니다.
아직 내 몸은 움직인다.
그저 지레 겁먹고 스스로 이길 수 없다고 단정 지었을 뿐이다.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병신같이.
[스킬 <근성A>가 발동됩니다.]
나는 아직 싸울 수 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각하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
차예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
저년을 찢어발길 방법을.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롯이 내 힘만으로.
[스킬 <사고가속B>가 발동됩니다.]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조리 떠올린다.
필요하다면 고통조차 감내하겠다.
바라는 것은 승리.
지금만큼은 이득이니 손해니 따지지 않겠다.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 활로를 찾아낸다.
차예지의 검에 머리를 쪼개지는 미래.
이것은 아니다.
지켜만 보던 헌터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난도질당하는 미래.
이것도 아니다.
검에 꿰뚫려 쓰러지는 미래.
아니다.
목과 몸이 분리된 미래.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
찾았다.
사고를 끝낸 뱀이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 * *
"흠…? 뭔가?"
차예지가 불현듯 미간을 찌푸렸다.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네?"
딱히 더 강해졌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저를 노려보는 두 눈동자에는 독기가 가득했고, 느껴지는 기운은 고작해봐야 C랭크 정도에 불과했다.
누가 봐도 무언가 큰 변화가 생겼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차예지는 딱 꼬집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변화를 느꼈다.
차예지 본인이 한순간 섬뜩할 정도의 그런 알싸한 변화를 말이다.
'…뭐, 기분 탓이겠지. 고작 해봐야 C랭크 몬스터. 설마 내가 위험할 리 있겠어?'
차예지는 그런 작은 변화를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크게 티 날 정도도 아니었고 그래봤자 결국 C랭크 몬스터라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차예지는 은연중에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해봐야 C랭크 몬스터 나부랭이한테 국내 5대 길드 중 하나인 '북두'의 슈퍼 루키이자, 엘리트인 자신이 한순간이라도 섬뜩함을 느끼다니.
차예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차예지는 눈앞의 뱀에게 일어난 작은 변화를 모른 척 무시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험으로 돌아올지 상상도 못 한 채로 말이다.
"흠… 이제 슬슬 질리는 느낌인데. 그만 끝내볼까? 해도 지기 시작했고 말이야. 난 더운 것도 질색이지만 추운 것도 질색이거든. 얘, 미안한데 이제 그만 끝내자."
흘깃 저물기 시작한 석양을 바라본 차예지가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하다는 듯 슬픔 가득한 얼굴을 해 보인 차예지가 그 표정과는 반대로 살기 가득한 검을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적당히 공격하다 단숨에 끝내야지.'
꽤 짧지 않던 시간 동안 차예지는 뱀의 신체 능력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간 파악한 뱀의 능력이라면 그리 길게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그 단단한 내구나 재생 능력 탓에 한 번에 끝내지 않으면 금세 회복할 테지만, 차예지에게는 한 번에 끝장낼 힘이 있었다.
높은 내구나 재생 능력은 그녀에게 별문제가 없었다.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조금 아쉽기는 하네. 테이밍 스킬이라도 있었으면 냉큼 데려가는 건데… 나중에 길드장님보고 사달라고 해볼까?'
검 끝에 마력을 모아 두터운 오러를 만들어낸 차예지가 자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어느 때보다 더 날카롭게 만들어진 오러가 망설임 없이 뱀의 목을 노렸다.
단칼에 깔끔하게 베어낼 생각이다.
'비늘이 참 예쁘던데, 깔끔하게 베어내야 잘 써먹을 수 있겠지? 나중에 이걸로 방어구라도 만들어야 겠다. 게다가 이 정도면 당연히 마석도 있겠지?'
차예지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할 것이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간 살펴본 뱀의 능력이라면 이 공격을 피하지도, 막아내지도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차예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태껏 수세에 몰린 채 방어에만 전념하던 뱀이 처음으로 반격했던 까닭이다.
샤아악-
두터운 꼬리가 휘둘러진다.
차예지를 공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검을 막아낸다는 느낌에 가깝게 휘둘러진 꼬리.
예상치 못한 상황에 조금 당혹한 차예지였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원래 베어냈어야 할 목을 대신해 뱀의 꼬리가 잘려나간다.
깔끔하게 베어진 단면에서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한순간 시야를 가리는 핏물에 차예지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그리고 차예지가 물러나는 그 잠깐의 틈, 솟구치는 핏물 너머로 뱀이 쩌억 주둥이를 벌린 채 달려들었다.
"샤아아아───!!!"
"무슨…?! 큭…!"
다급히 검면으로 막아냈지만 뱀의 돌진은 막무가내였다.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뱀은 주둥이를 검면에 붙인 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다.
"크윽…! 이 자식이!"
뱀을 상대하며 시종일관 여유롭던 차예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다급히 주먹에 오러를 모은 그녀가 있는 힘껏 뱀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쾅─!
꽤 묵직한 타격음이 이어졌음에도 뱀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과 마찬가지의 독기 가득한 눈빛으로 차예지를 노려보며 그녀를 몰아세운다.
무심코 뱀의 두 눈을 마주한 차예지는 한순간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그 공포는 이내 분노로 변했다.
그녀의 드높은 자존심이 고작 해봐야 C랭크 몬스터에 불과한 뱀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던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공포보다 자존심이 더 강했다.
"차, 차예지 헌터!"
"고, 공대장님, 어떡해요? 저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끄응…."
갑작스레 밀리기 시작한 차예지의 모습에 지켜보고 있던 헌터들이 동요했다.
그들 모두가 차예지의 임시 담당자이자, 공대장인 박필립을 보았다.
갑작스레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에 박필립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괜히 나섰다가 또 한 소리 들을 게 뻔한데… 젠장 길드장은 저 썩을 년을 왜 나한테 맡긴 거야? 그렇게 싸고돌 거면 자기가 직접 싸고돌던가!'
랭크는 높지 않지만, 미궁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당분간 차예지를 보조하게 시킨 길드장을 욕하며 박필립이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여기서 차예지가 괜히 다치는 것보다는 도와주는 게 낫겠지? 나중에 돌아가서 길드장한테 까일 바에는 차라리….'
그렇게 박필립의 생각이 차예지를 도우려는 쪽으로 향하자, 불현듯 차예지가 소리를 높였다.
"씨X! 이 개 같은 뱀 새끼가!"
쾅─!
묵직한 발길질과 함께 차예지가 드디어 뱀에게서 벗어났다.
어렵사리 자유의 몸이 된 차예지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아릿하게 아려온다.
사정없이 몰아붙이는 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한 까닭이다.
"빌어먹을 뱀 새끼… C랭크 주제에…!"
분노에 반쯤 이성을 잃은 차예지가 곧장 뱀을 향해 달려들었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필립이 슬며시 눈가를 찌푸렸다.
괜히 지금 그녀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어떤 쓴소리를 들어야 할지 몰랐다.
'누가 봐도 내 딸뻘인 년한테 괜히 쌍욕을 들을 수는 없지.'
반쯤 기울었던 마음의 추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기울었다.
설마하니 그 차예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성격은 조금 많이 지랄 맞아도 차예지는 그 북두의 길드장이 애지중지하는 슈퍼 루키가 아니던가?
그녀의 말마따나 고작 해봐야 사막 구역에서 그것도 계층주도 아닌, 단순한 C랭크 몬스터에게 당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을 결정한 박필립은 이전에 그래왔듯 편안한 마음으로 차예지와 뱀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둘의 싸움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차예지의 일방적인 공세로 이어지고 있었다.
"죽어! 죽어어─!!!"
자존심에 상처 입은 차예지가 거침없이 검을 휘두른다.
검날에 맺힌 오러가 사정없이 뱀의 몸을 찢어발긴다.
비늘이 깨져나가고 생살이 찢겨진다.
시뻘건 핏물이 모랫바닥을 적시고차예지의 몸 곳곳에도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고작 C랭크 몬스터 주제에! 감히, 감히 나를…!"
자신의 피가 아닌 뱀의 피로 피칠갑을 한 차예지가 광기에 찬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쉼 없이 휘둘러지는 검날, 자꾸자꾸 늘어가는 상처 속에서 뱀이 조용히 눈을 번뜩였다.
상처는 늘어가는 만큼 계속해서 회복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슬슬 저장된 에너지가 부족한 까닭에 회복되는 속도가 처음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조금 전 완전히 끊어졌던 꼬리를 다시 회복하는 데 많은 마력을 쏟아부었던 탓도 있다.
분명 처음에 비해 확연히 더 불리해진 상황이었지만 뱀의 눈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여전히 그 눈동자 안에 독기를, 살의와 적의를 가득 품은 채 뱀이 조용히 기회를 엿본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헉…! 허억…! 죽어어─!"
슬슬 차예지도 지친 것일까?
한참 동안 검을 휘두르던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쉰다.
잔뜩 피로해졌음에도 여전히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독기가 무섭다.
그래도 처음에 비해 공격을 퍼붓는 횟수나 속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잔뜩 지친 차예지만큼이나 뱀의 상태도 그리 썩 좋지 못했다.
이제는 정말 거의 바닥을 보이는 에너지를 생각해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는 일부러 재생을 멈췄다.
꼭 필요한 곳만 재생할 뿐, 그것마저도 당장 위험하지 않을 만큼만.
그리고 딱 피가 흐르지 않을 정도로만 재생할 뿐, 완전히 회복시키지 않았다.
그렇기에 뱀의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매끄럽던 비늘은 군데군데 깨져나가 그 속의 여린 속살을 내비치고 있었고, 그 안에 자리 잡은 상처 속에서 끊임없이 피를 흘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엉망진창인 모습으로도 뱀의 눈은 여전히 죽지 않았다.
오히려 차예지가 잔뜩 지친 이 순간 그 어느 때 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주거어어─!"
분풀이를 하며 잔뜩 지친 차예지가 이제는 정말 뱀의 숨통을 끝장내기 위해 하늘 높이 검을 들어올렸다.
검 끝에 모이는 눈부신 짙은 오러.
그 서슬 퍼런 오러와 검날이 막 움직이던 순간 뱀이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퉷─
뱀의 입에서 돌연 무언가 툭 튀어나왔다.
피가 섞인 검붉은 보랏빛의 진득한 액체 덩어리.
마치 침을 뱉듯 톡- 뱉어낸 그것이 검을 내리찍던 차예지의 얼굴에 그대로 명중했다.
"크윽…! 이게 뭔…?!"
멈칫한 차예지가 눈앞을 가린 무언가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닦으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그녀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꺄아아아악─! 누, 눈이…! 얼굴이…! 아파아! 아프다고오─!"
손에 쥔 검까지 놓친 차예지가 양손으로 제 얼굴을 사정없이 비빈다.
단순히 얼굴에 묻은 액체를 닦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종래에는 손톱을 세워 연신 제 얼굴을 사정없이 긁어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차, 차예지 헌터?!"
"저, 저!"
"다, 당장 도와!"
그 급작스런 차예지의 변화에 지켜보던 박필립과 헌터들도 그제야 상황을 인지하고 차예지를 향해 덤벼든다.
그들로서는 갑작스레 일변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미처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없었다.
"아파아─!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
사막을 울리는 처절한 외침.
진한 푸른빛의 머릿칼이 붉게 물든다.
그 차예지가 저랬던 적이 있던가?
적지 않은 시간 차예지를 봐온 박필립으로서는 맹세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차예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혹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면?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길드장한테는 무어라 보고해야 할까?
차예지를 향해 달려가는 한순간 머릿속을 헤집는 수만 가지 생각에 경험 많은 그로서도 간과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독기 가득한 뱀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파! 아파! 아파!"
"차, 차예지 헌터! 우, 우리가 왔습니다! 잠시 상처를 살피게 진정을…!"
"포, 포션부터…! 으윽? 끄, 끄아아악!"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이다.
헐레벌떡 달려온 헌터 중 하나가 낚아채 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울리는 처절한 비명.
뒤늦게 이 자리에 자신들 말고 존재하는 또 다른 생명체를 떠올린 박필립이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꽈드득-
그곳에는 방금 낚아채 간 헌터를 씹어 삼키는 한 마리의 뱀이 있었다.
꿀꺽-
헌터를 집어삼키자마자 곳곳에 자리했던 상처들이 거짓말같이 사라져간다.
잔뜩 헤집어져 있던 속살이 다시 붙고, 피가 멎는다.
깨져나간 비늘이 다시 돋아난다.
시간을 되감기라도 하듯, 눈 깜짝할 사이 회복되는 뱀의 모습에 박필립이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Shii────
"아파! 아파! 박필립! 박필리이입! 당장! 당장 포션 내놔아─!"
말끔히 회복된 채 조용히 저를 내려다보는 독기 가득한 뱀의 눈동자.
그리고 옆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차예지의 고함.
박필립은 저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지는 것을 느꼈다.
"씨X… 이거 X됐네?"
무심코 내뱉은 욕지기 너머로 뱀이 쩌어억- 아가리를 벌린다.
제37화
박필립과 다른 헌터들은 마냥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차예지에 비해 랭크는 다소 떨어졌지만 경험만큼은 훨씬 앞서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들이 차예지의 부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은신으로 한순간 기척을 감추고 C랭크 하나를 제거하지 못했다면 꽤나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내가 위험한 일은 없었다.
저들의 전력을 줄이는 동시에 C랭크 헌터를 먹어 치움으로써 마침 부족했던 폭식의 에너지도 보충했다.
완전히 소화시킨 게 아니라 당장 급한 에너지만 보충하는 식이었기에 효율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상처를 회복할 정도는 되었다.
게다가 온전히 상처를 회복한 나와 달리 저들은 차예지라는 부상자를 신경 써야 했다.
뻔히 약점이 드러나 있는 상태.
그 앞을 지키는 다른 헌터들이 마냥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대놓고 약점이 드러난 상대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지독하게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쪽에서 알아서 자멸할 테니까.
차예지라는 약점이 있다고 해도, 바로 그녀를 없애버릴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그녀에 대한 살의는 존재했지만 아직 죽일 생각은 없다.
약점이란 것은 계속 존재하고 있을 때나 약점이었으니까.
차예지를 끈질기게 노리는 한편 직접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차예지를 노릴 것 같은 제스처만 취할 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박필립이나 다른 헌터들은 공세를 취하기보다는 수비에만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나는 그들이 전투에 똑바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틈이 날 때마다 차예지를 노렸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박필립과 헌터들의 몸에 상처가 자꾸만 늘어간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
"젠장─! 아직 치료는 멀었어?!"
"해독제가 안 들어요! 지금 가지고 있는 거로는 무리예요!"
만약 부상당한 이가 차예지가 아닌 다른 헌터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경험 많은 박필립은 지금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는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필립은 차예지를 버리지 못했다.
딱히 동료로서의 정 때문에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차예지의 신분이 꽤나 높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보아온 태도를 보면 얼추 짐작이 간다.
박필립과 차예지가 속한 단체 내에서 차예지의 비중이 꽤 큰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박필립은 만약 차예지를 버리고 갔을 때의 후폭풍을 걱정하는 것이다.
박필립이 조금 불쌍하기는 했다.
아까 전에 보니 꽤나 고생하는 것 같은데….
아마 이 자리에도 억지로 차예지를 따라오게 된 것이 아닐까?
자세히는 몰라도 상당히 불쌍해 보인다.
원치 않는 일에 끌려 나와, 결국 죽게 될 테니까.
말했다시피 대놓고 약점이 드러난 상대와 싸우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박필립이나 헌터들이 마냥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국 마지막까지 서 있는 것은 나였다.
박필림과 다른 헌터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계속해서 비명만 내지르던 차예지는 어느 순간 조용해져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니 그녀는 조용히 모랫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죽었나?
슬쩍 살펴보니 독에 중독되어 당장에라도 죽을 것만 같은 안색이었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지나친 고통에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다.
이년을 어떻게 할까?
딱히 손을 쓰지 않아도 차예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가지고 있는 해독제로 어느 정도 중화한 끝에 버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숨을 이어갈 정도로 내 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심정 같아서는 당장 깨워서 그녀가 나를 농락했던 것처럼 마음껏 희롱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내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당장 상처는 재생으로 회복됐지만 심적으로 지친다.
근성이나 한계돌파 같은 스킬 덕에 버티고 있는 것뿐이지, 당장 몸을 뉘이고 쉬고 싶다.
지금껏 흘린 피도 적지 않았으니 빈혈기도 있는 것 같다.
재생으로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흘린 피는 전혀 보충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이년을 도대체 어떻게 할까?
잠자코 고민하기를 잠시간, 결국 깔끔하게 죽이는 것으로 결정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단지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뿐이지 굳이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그런 것에 희열을 느끼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냥 여기서는 깔끔하게 끝을 내자.
나는 그대로 쩌억- 주둥이를 벌렸다.
차예지, 박필립과의 싸움이 끝난 후 진화할 줄 알았지만, 아쉽게도 능력치가 올랐을 뿐 진화는 하지 못했다.
진화가 꽤 가깝다고 느꼈는데 아직 조금 멀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어림짐작해 보면 이제는 정말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진다.
꼬박 하루를 쉬고 이동을 개시했다.
원래는 33계층에서 좀 더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차예지와 박필립은 분명 대형 길드 소속처럼 보였다.'
정확히 어느 길드인지는 짐작하지 못했으나, 그 정도의 실력과 장비라면 분명 잘 알려진 거대 길드일 게 분명하다.
'어쩌면 5대 길드일지도 모른다.'
다른 여타의 헌터들이라면 몰라도, 그들과 같은 거대 길드 소속이라면 분명 사라진 이들을 찾기 위해 수색대를 꾸릴 것이 뻔하다.
그저 평범한 헌터도 아니고 차예지 같은 장래성을 가진 헌터가 실종되었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 분명했다.
그런 만큼 계속해서 33계층에 머무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실종된 이들을 찾기 위해 수색대가 언제 도착할지는 몰랐지만, 최대한 이곳에서 빨리 떠나는 게 현명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34계층으로 이동했다.
34계층으로 가는 게이트 앞에서 헌터들을 만났다.
총 열 명으로 구성된 공격대.
랭크는 C가 하나에 나머지는 전원 D랭크 이하였으나, 숫자가 많다.
어쩔까?
괴물같이 강하던 차예지와 싸워서 끝내 승리했기 때문일까?
숫자는 많았지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첫 기습으로 C랭크 헌터를 처치하고 다른 헌터들을 하나씩 치워가면 쉽게 이길 것 같다.
잠시 고민했지만, 끝내 그들을 습격하지는 않았다.
실종된 차예지를 찾아 수색대가 올 거라 생각하면 이 계층에서 또 다른 헌터들이 실종되는 일은 없는 편이 나았다.
괜한 흔적을 남길 수도 있을 테니까.
가급적 빠르게 33계층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 옳다.
결국 다른 게이트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별 트러블 없이 무사히 34계층에 도착했다.
이제는 당연하다시피 찾아 헤매던 메이지 계열의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좀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할까?
애초에 수색대를 피해 가능한 33계층에서 멀리 떠날 생각이었기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가능한 게이트를 찾는 쪽으로 주변 지리를 수색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계층이 커지기 때문에 단순히 게이트를 찾는 것만으로도 조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게이트를 찾으면서 틈틈이 몬스터나 헌터들을 사냥하며 거의 고갈되었던 폭식의 에너지도 충전했다.
그러던 와중에 폭식의 랭크가 A로 상승했다.
두꺼운 비늘 같은 스킬도 어느 순간 B랭크로 상승했다.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대략 이틀 정도의 시간 끝에 무사히 35계층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발견했다.
35계층부터는 조금 특별하다.
28계층부터 41계층까지로 이루어진 사막 구역에서 정확히 절반을 넘은 시점으로, 서식하는 몬스터의 수준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전 계층에서의 계층주가 C나 B 정도였다면 35계층부터는 B 이상의 계층주가 종종 출몰하고, 구역주(에어리어 보스)에 이르러서는 A이상, S랭크의 몬스터도 등장한다.
전혀 쉽게 볼 만한 곳이 아니라고나 할까?
가급적 B랭크가 되고 나서 건너가고 싶었으나 수색대의 일도 있고, 목표로 했던 메이지 계열 몬스터를 찾기 위해서라도 35계층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이동하자.
35계층은 마력의 농도부터가 달랐다.
지금까지 조금씩 조금씩 강해지던 농도가 35게층에 드려서고 나서부터는 확연히 체감될 정도로 달라졌다.
후끈후끈 내리쬐는 태양 빛도 상당히 강해진 느낌이다.
이렇게 된다면 밤에는 또 얼마나 추울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역시 변온 동물에게 이곳은 너무나 혹독하다.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마력의 농도 때문일까?
이곳에는 확실히 메이지 계열 몬스터가 있었다.
내가 그리도 찾던 스켈레톤 메이지.
랭크는 D에서 C 정도까지 성장한다.
마법을 사용하는 특수한 몬스터답게 전혀 쉽게 볼 수 없는 녀석이지만, 이쪽의 은신을 간파하지 못하는 이상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늘 그렇듯 기습으로 곧장 해치웠다.
뼈맛이 제법 고소하다.
스켈레톤 메이지를 해치웠지만 당장 마법 스킬이 생기기는 않았다.
아무래도 마석이 없는 녀석이었을까?
몇 마리 정도 더 사냥할 필요를 느꼈다.
35계층의 밤 사막에는 또다른 특이한 몬스터가 등장했다.
[레이스]라고 불리는 몬스터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악령형 몬스터다.
랭크는 보통 D에서 C 정도인데 상위 개체에 따라서는 B랭크나 그 이상까지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특이점으로서는 웬만한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특히나 헌터들 사이에서 위협적인 몬스터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약점이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쓰러트릴 방법이 없는 불사신은 아니다.
녀석들의 약점은 바로 마력을 이용한 공격으로, 특히나 마법이나 오러 같은 공격에 약하다.
그렇기에 이 녀석들이 주로 등장하는 35계층부터는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진짜 헌터들이 활동하는 곳이었다.
그러니만큼 나도 더더욱 조심스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차예지에게 내 은신을 들켰던 만큼 또다시 언제 들킬지 모른다.
항상 긴장하며 조심하자.
* * *
늦은 밤, 예상대로 으슬으슬 추위에 떨며 어렵사리 슬슬 잠드려는 찰나 귓가로 쇳소리가 울린다.
"끼이이이익─"
"끽─ 끽끽끽…."
소름 끼치기 그지없는 끔찍한 목소리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울리는 그 끔찍한 목소리에 혀를 날름거려 봤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다.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리며 급히 마력 감지를 펼쳤다.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레이스인가?'
아무래도 실제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으니 혀를 통한 감지에는 걸리지 않는 모양이다.
새로운 지식이 늘었다.
마력조작을 연습한다고, 마력을 통한 감지를 습관화해서 다행이다.
슬그머니 소리를 낸 레이스를 찾아 움직이니 어두운 달빛 아래 반투명한 흰색 덩어리가 하나 있었다.
반사적으로 혀를 날름거리자 여전히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제대로 눈앞에 보이는데도 말이다.
녀석은 나를 보고 '끽─ 끽끽끽….'하고 재차 소름 끼치게 웃었다.
기분 나쁜 놈이다.
눈앞의 녀석은 나와 같은 C랭크였다.
과연 그래서 당당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구나.
조금 얕보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보통 언데드 몬스터가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증오가 상당하는 것을 떠올려보면, 나를 얕봤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싶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겠지.
그나저나 눈앞에 있는 레이스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봤어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과연 왜 헌터들이 그리 난감해하는지 알 것도 같다.
"끽─ 끽끽끽….!"
이쪽을 보며 소름 끼치게 웃는 그 모습을 보면 몬스터고 뭐고 간에 생물로서 공포감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옛날부터 딱히 귀신에 대한 공포가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내가 귀신을 무서워했다면, 그 모습을 보자마자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 분명했다.
'물리 계열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 했지? 그렇담 독도 통하지 않을 테고.'
단순 상성만 보자면 역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대다.
그나마 이쪽이 마력을 꽤나 잘 다룬다는 것이 위안일까?
물리 공격에 대한 면역 정도를 제외하면 보통의 C랭크 몬스터 중에서도 능력만큼은 하위권을 달리는 녀석이니 그리 문제 될 것은 없는 상대다.
잠시간 여전히 나를 비웃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몸을 움직였다.
내 밤잠을 방해한 녀석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것보다 이 녀석 먹을 수는 있을까?
간밤에 움직였더니 조금 배가 고픈 것도 같은데….
제38화
레이스와의 싸움은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았다.
마력을 이용한 신체 강화를 했음에도 녀석에게 생각보다 큰 타격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러나 마법이 아니고 단순히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아예 공격이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다.
계속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쓰러지지 않을까?
레이스의 공격은 사기(死氣)에 의한 공격이다.
사기는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서서히 갉아먹는 그런 독과도 같다.
전투를 벌이는 내내 시시각각 내 생명력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외적인 상처는 전혀 없지만 속에서부터 천천히 갉아먹히는 감각이다.
어찌 보면 조금 위험하다 싶기는 하지만 이쪽에는 폭식이 있다.
시시각각 줄어드는 생명력을 곧장 폭식에 저장된 에너지로 보충한다.
일전에 차예지와 싸운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된 에너지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에너지를 다 소모하기 전에 먼저 쓰러트릴 수 있을 거다.
레이스를 쓰러트렸다.
처음 싸워보는 타입이기에 조금 힘겹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쪽에 별 피해는 없었다.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레이스는 곧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능력치가 조금 오르기는 했지만 소모한 에너지나 이런저런 것을 따져보면 어째 조금 손해 본 느낌이다.
마석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레이스의 습격이 있던 다음 날, 나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35계층의 지리를 탐색하는 한편 처음 목표였던 스켈레톤 메이지와 같은 몬스터들을 위주로 찾아다녔다.
수색대가 움직일 것을 생각하면 가능한 좀 더 깊숙이 내려가고 싶다만, 35계층의 수준을 보니 당장 다음 계층으로 움직이는 것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몬스터들만큼이나 헌터들의 실력도 결코 얕볼 수 없고 말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35계층의 지리를 파악하며 메이지 계열 몬스터를 찾을 예정이었다.
스켈레톤 메이지는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또 보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넓은 사막을 돌아다니며 마주친 개체가 넷 정도는 되었다.
주변 지리를 익히며 이곳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좀 더 멀리까지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 좀 더 많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낮에는 스켈레톤 메이지를 찾아다녔고 밤에는 간간히 레이스 같은 몬스터와 싸웠다.
그중에서 특히 지난 밤 발견한 레이스는 제법 특별했는데, 무려 마법을 쓸 줄 아는 녀석이었다.
싸움이 평소보다 조금 더 치열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승리했다.
레이스에게서 마석까지 주웠다.
마법을 사용하던 놈이었으니 조금 기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기대했던 마법 스킬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마법 스킬을 얻기는커녕 아무런 스킬조차 얻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마석을 얻는다 해서 단번에 스킬이 생기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진화 과정에서 반영되는 것 아닐까?
이전에 마안을 얻었을 때도 분명 진화를 하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얌전히 진화를 기다리면 되는 걸까?
아니, 얌전히 기다리지는 못하겠구나.
나답게 기다리자.
일단 마법을 쓰는 레이스에게서 마석을 얻기는 했으나 메이지 계열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혹시나의 가능성이 있으니 만약을 위해서 가능한 많은 몬스터를 먹을 생각이다.
의외로 스켈레톤 계열이 바삭바삭하고 고소해서 과자를 먹는 느낌이라 더 자주 찾게 된다.
더위 저항과 추위 저항이 각각 C랭크로 상승했다.
이제는 정말 더위나 추위에도 아무렇지 않은 느낌이다.
좀 더 깊숙이 내려가면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 계층에서 나는 이 혹독한 사막의 기후에 완전히 자유로웠다.
기쁘다.
* * *
모래 폭풍이 불었다.
자유롭다는 말은 취소다.
나는 지금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다.
미처 피할 곳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급한대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 머리만 빼꼼 내밀었는데, 아마 당분간은 이 자세로 있어야 될 것 같다.
모래 폭풍은 쉽게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기세라면 못해도 하루 이상은 지나야 할까?
저장된 에너지 탓에 며칠 굶는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역시 얼굴 한가득 쌓이기 시작한 모래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곳이 모래사막만 아니었다면, 좀 더 깊숙하고 멋진 땅굴을 파냈을 텐데….
산림 구역에서부터 갈고 닦은 굴파기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그렇게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모래 폭풍이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찰나였다.
모래 폭풍을 해치고 무언가 찰박찰박 걸어오기 시작했다.
매서운 모래바람 탓에 차마 혀로 감지할 생각은 못 하고, 눈만 힐끔 돌리자 스켈레톤 하나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여타의 다른 언데드 몬스터들이 그렇듯 별다른 목적 없이 그저 끝없이 방황하는 모양이다.
잠시간 물끄러미 바라보니 스켈레톤은 어느덧 내 근처까지 다가왔다.
나는 무심코 쩌억 주둥이를 벌렸다.
덥썩─ 콰드득-
입안에서 씹히는 뼈 맛이 제법 고소하다.
아무래도 새로운 사냥법을 찾은 것 같다.
새로운 사냥법을 찾아서 두근두근한 것도 잠시, 기대와 달리 또다른 사냥감이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그리 효율적인 사냥법은 아닌 모양이다.
아쉽다.
모래 폭풍은 딱 내가 예상했던 대로 하루가 지나서야 그쳤다.
머리 위로 수북히 쌓인 모래 더미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비늘 사이사이에 모래가 제법 깊숙이 박혀 있다.
오아시스라도 찾아가야 할까?
35계층의 지리를 탐색하며 오아시스가 어디쯤 있는지 파악해뒀다.
다행히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오아시스에는 선객이 있었다.
평소처럼 은신 상태로 이동한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서른 명 남짓한 숫자의 헌터들이었다.
C랭크도 여럿 보이고 그 차예지와 같은 B랭크도 몇몇 보인다.
다급히 올리는 직감에 급히 몸을 돌리려는 사이, 무언가 상황이 기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헌터들은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서른 명이 다 함께 싸우고 있음에도 다소 지나칠 정도로 밀리는 모습이다.
도대체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호기심에 슬쩍 살펴보니 그곳에는 거대한 전갈이 있었다.
직감이 다시 한번 찌르르 울린다.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진감이 내게 경고한 것은 헌터들의 존재가 아니었다.
서른이 넘어가는 헌터들의 존재 역시 내게 위협적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
사나운 기세를 흩뿌리며 무자비하게 헌터들을 몰아붙이는 괴물(몬스터).
무심코 녀석을 바라본 순간 단번에 깨닫는다.
계층주(플로어 보스).
지금껏 계층주 하나 없던 층들과 달리 이곳에는 계층주가 있었다.
서른 명이 넘는 헌터들의 숫자가 무색하게도 계층주는 강했다.
마치 강철처럼 단단한 갑각을 앞세워 무자비하게 집게발을 휘두른다.
사납게 휘두른 꼬리 끝의 독침에 헌터들이 우왕좌왕 도망친다.
랭크는 B 정도에 불과한 것 같았지만 과연 계층주라서 그런지 다른 B랭크 중에서도 압도적이다.
어쩌면 A랭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
전갈이 갑작스레 울음을 토해냈다.
사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 울부짖음에 멀리서 지켜보던 내 몸이 쭈뼛거린다.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이 정도인데, 직접 눈앞에서 겪은 헌터들은 과연 어떨까?
B랭크나 C랭크의 헌터들은 어느 정도 멀쩡해 보였으나 그 외의 다른 헌터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몸을 떨며 공포에 질린 헌터들.
개중 몇몇은 안간힘을 쓰며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듯했다.
내가 가진 위압하고 비슷한 스킬을 가진 것일까?
괜스레 쭈뼛거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됐다.
"꺄아아악─!"
"사, 살려…!"
"도망쳐─!!!"
헌터들이 내뱉는 비명으로 사막이 소란스러워졌다.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
무참히 짓밟히고 찢겨져 나가는 헌터들의 모습이 여실히 보인다.
B랭크 헌터들이나 C랭크 헌터들이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애초에 그들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 앞을 막아서도, 열심히 공격을 해보아도 전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의 앞을 막아설수록, 공격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전갈의 그림자가 공포스럽게 비쳤다.
결국 헌터들은 더 싸울 전의를 잃었는지 급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멀쩡한 헌터들을 주축으로 다른 헌터들이 다급히 동료들을 챙긴다.
역시 여기까지 왔다면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쓰레기는 아니란 것일까?
이미 늦은 동료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나마 살 희망이 있는 이들을 하나둘 챙긴다.
"우리가 최대한 버틸 테니 그전에 동료들을 챙겨 도망가세요! 합류 지점은 일전에 약속했던 그곳입니다!"
B랭크 헌터 중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미리 이런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계획을 세워둔 것일까?
그의 외침을 들은 헌터들이 각자 챙길 수 있는 동료들을 챙긴 채 급히 달려나간다.
그런 헌터들의 모습에 분노한 전갈이 다시 한번 미쳐 날뛰려 하지만, 그 앞을 다급하게 B랭크 헌터들이 막아섰다.
얘기했던 대로 다른 동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려는 모양이다.
몬스터와 헌터의 기준점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의 같은 B랭크니 저들이라면 아마 저 전갈을 상대로도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다.
단순히 시간을 끄는 것만 아니라 도주도 제법 쉽게 가능하지 않을까?
저 전갈의 파괴력은 잘 알겠지만 기동력 자체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마 그것은 직접 싸워 본 헌터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미리 동료들을 도망치게 할 생각을 했겠지.
잠시간 물끄러미 남은 헌터들과 전갈의 싸움을 지켜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마음 같아서는 계층주의 싸움을 좀 더 자세히 지켜보고 싶지만 중요한 할 일이 생겼다.
힐끔- 내 시선이 조금 전 헌터들이 도망친 방향을 향했다.
그들의 냄새는 이미 기억해뒀다.
가볍게 혀를 날름거리며 방향을 가늠했다.
조금 부지런히 쫓아가야 될 듯싶다.
B랭크 헌터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여유 따위 부리지 않고 전력으로 움직였다.
B랭크 헌터들을 제외하고도 여전히 많은 숫자의 헌터들이었지만 별문제는 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들보다 죽은 이들이 더 많았고, 살아남은 이들도 대부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C랭크 헌터도 여럿 있지만 그중 과반수 이상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렇게 다 지친 이들을 상태로 괜히 쫄 필요는 없다.
Shii───
언제나처럼 은밀하게 움직여 단번에 기습한다.
상대가 반응할 틈을 주지 않도록 곧장 몰아친다.
목덜미를 깨물어 부수고 꼬리를 휘두른다.
그대로 몸을 들이박기도 하고 독을 뱉어내기도 한다.
이미 잔뜩 지쳐 있는 그들로서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계층주(전갈)을 본 순간 생각했다.
녀석을 내 라이벌로 삼자.
지금껏 지나온 계층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녀석을 내 적수로 삼고 뛰어넘자.
녀석을 잡아먹자.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녀석을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움직였다.
그렇기에 먹었다.
내가 강해질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적과 싸우고 적을 먹는다.
인간성도 중요하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살기 위해 발악하는, 원통해하는 헌터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늘 그렇듯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다.
나는 뱀(몬스터)다.
[진화에 필요한 공적을 충족했습니다.]
[보다 상위 개체로의 진화를 시작합니다.]
이날 밤 나는 진화할 수 있었다.
제39화
[진화에 필요한 공적을 충족했습니다.]
[보다 상위 개체로의 진화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성향과 행동을 바탕으로 진화할 개체를 선별합니다.]
[스킬 <한계돌파A>를 확인했습니다.]
[선별 과정에 반영합니다.]
[선별 완료.]
[진화를 시작합니다.]
[진화 완료.]
[진화로 인한 보너스로 모든 능력치와 스킬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진화 과정 중 특정 몬스터의 마석을 확인했습니다.]
[[레이스C], [스켈레톤 메이지C] 등을 포함한 기타 17종의 마석을 확인, 새로운 스킬을 생성합니다.]
[개체의 특성과 획득한 마석의 동화율이 낮습니다.]
[스킬의 생성이 취소됩니다.]
[스킬 <한계돌파A>를 확인, 개체의 간절한 소망에 힘입어 취소된 스킬이 일부 변경되어 재생성됩니다.]
[스킬 <독마법G>를 획득합니다.]
[스킬 <마력저항G>를 획득합니다.]
-이름 : 유준영(?)
-종족 : 몬스터 - [프레데터 보아]▶상세 보기
-능력치
힘 B2 / 체력 B3 / 민첩 B3 / 내구 B11 / 마력 C46
-스킬
유체이탈SS [사용 불가], 근성A, 한계돌파A, 은폐A, 기습A, 조이기B, 직감A, 급속재생A, 돌진A, 극독A, 위압A, 카운터B, 독 내성B, 테일 스트라이크A, 폭식A, 두꺼운 비늘B, 마력조작B, 사고가속B, 신체강화B, 마안E, 더위저항C, 추위저항C, 독마법G, 마력저항G
따로 성장한 스킬도 보이고 그렇지 않은 스킬도 보인다.
전체적인 능력치 자체도 제법 상승했다.
역시 진화는 언제나 기쁘다.
'2, 3개월 만인가?'
사막 구역에 진입한 이후 따로 날짜를 세지 않았기에 정확한 시각은 모르겠지만, 얼추 그 정도 시간이 지났다.
처음 뱀이 되고서 대략 8, 9개월.
이 정도면 제법 빠르게 진화한 게 아닌가 싶다.
'본인을 슈퍼 루키라 했던 차예지가 반년 만에 B랭크가 됐다고 했던가?'
헌터와 몬스터의 기준점이 다르니 정확한 비교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이쪽 역시 나름 몬스터계의 슈퍼 루키라고 할 만한 속도였다.
괜스레 뿌듯해진다.
▶[프레데터 보아] B랭크
: [프레데터 보아]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포식자입니다.
한번 점찍은 먹잇감을 절대 놓치지 않는 집요한 사냥꾼이자,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몬스터계의 무자비한 학살자이기도 합니다.
주로 남아메리카 미궁의 깊은 밀림 속 늪지 부근에서 서식하며 혹여 만나게 된다면 곧장 도망치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 무자비한 포식자가 당신을 목표로 삼지 않도록요.
오랜만에 한번 상세 보기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상태창을 닫았다.
잔혹하고 무자비하다는 표현이 괜히 마음에 걸린다.
나랑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얼마나 자비롭고 감수성 넘치는 뱀인데….
그래, 나에게 양심은 없다.
어쨌거나 훌륭히 진화에 성공했다.
그토록 원하던 <독마법>이라는 마법도 얻은 데다, 덤으로 <마력 저항>이란 스킬도 생겼다.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위력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토록 원하던 마법 스킬이 생겼으니 마음에 한껏 여유가 넘친다.
그렇다 해도 아직 새로 인정한 내 적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 뻔했지만.
당분간 새로운 신체에 적응할 겸 마법 연습에 힘을 내야겠다.
새로 생긴 독마법이란 스킬 덕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낮에는 주로 언데드들을 상대로, 밤에는 주로 레이스를 상대로 열심히 실습 훈련을 해보았다.
아직 간단한 독 뭉치를 쏘아내는 것 정도밖에 불가능했지만 단순히 독을 뱉는 것과 달리 확실히 마법이란 느낌이기에 잔뜩 신이 난다.
열심히 랭크를 높여야겠다.
단순히 마력을 조작하는 것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여러모로 다른 느낌이다.
마력은 단순한 감만으로도 충분히 조작 가능했지만 마법은 확연히 다르다.
확실한 계산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한 스킬이었다.
왜 가끔씩 당황한 헌터들이 제대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마법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수련해야겠구나.
<사고 가속> 스킬이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설마 몬스터가 되어서도 복잡한 계산을 해야 될 줄은 몰랐는데, 사고 가속 덕분에 복잡한 계산도 그리 어렵지 않더라.
앞으로 조금 더 훈련하면 어느 정도 실전에서도 확실히 사용 가능할 것 같았다.
언데드들이나 레이스 녀석들에게 며칠 더 협조를 부탁해야겠다.
* * *
요 며칠 사이 가장 크게 오른 내 능력치는 바로 마력이었다.
따로 접근전을 피하고 오직 독마법만으로 상대하다 보니 그간 가장 높았던 내구와 비슷한 수준까지 성장한 것이다.
만년 꼴찌였던 능력치의 성장이 굉장히 눈부시다.
기쁘다.
마력 능력치가 상승하는 만큼 독마법 역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 랭크가 어느덧 E까지 성장한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종류도 여럿 늘어났다.
랭크가 상승할 때마다 새로운 마법들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라 꽤나 놀랐다.
어쨌든 그동안 심심찮게 내 실습 상대가 되어준 많은 몬스터들에게 감사한다.
* * *
제법 많은 숫자의 헌터들이 도착했다.
내 새로운 적수(전갈)을 토벌하려고 온 헌터들인 모양이다.
저번 헌터들에 비해 숫자도 늘었고 전체적인 전력도 크게 상승했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조금 조급해졌다.
내 적수가 제발 승리하기를.
녀석을 쓰러트리는 것은 나다.
저 많은 헌터들을 과연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녀석이 능력치에 이런저런 보너스를 받는 계층주라 하더라도, 저 숫자는 역시 무리에 가까울 것 같다.
아무래도 걱정돼서 가만두고 볼 수가 없다.
나는 조용히 움직였다.
헌터들은 내 적수가 자리를 잡고 있는 오아시스로 가기 전에 주변을 탐색했다.
꽤나 신중한 것일까?
계층주 토벌에 앞서 가능한 변수는 모두 없앨 생각인 모양이다.
잠시 지켜본 결과 B랭크는 꽤 여럿 있었지만, 다행히 A랭크까지는 없었다.
어쩌면 내 감각을 속일 정도로 기척을 잘 감췄을지도 모르니 좀 더 열심히 확인해보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한다면 이쪽 역시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까.
주변 탐색을 위해 제각각 조를 나눠 흩어진 헌터들이었지만 그들을 따로 습격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이쪽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을 위협할 만한 것들은 그게 뭐든 딱 질색이다.
안전하게 가자.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이이제이다.
과거 산림 구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변에 있는 다른 것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사막 구역에 깜짝 새는 없으니 대신에 차고 넘치는 언데드들을 이용했다.
안 그래도 살아 있는 생명에게 증오가 가득한 녀석들이니 따로 내가 할 것은 없다.
그냥 이곳저곳 흩어진 녀석들을 모아 끌고 가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헌터들이 막 내 적수를 토벌하기 위해 오아시스로 들이닥쳤을 때, 나도 움직였다.
우글우글- 제법 많은 수의 언데드들을 데리고, 막 전투를 시작한 헌터들의 뒤를 급습했다.
"씨, 씨X! 저게 뭐야?!"
"어, 언데드?! 저놈들이 갑자기 단체로 왜?! 그동안 별다른 낌새는 없었는데…!"
"설마 그사이에 상위 개체라도 태어난 건가?"
"저 정도 규모를 모을 정도의 상위 개체라면 분명 계층주급일 텐데…! 설마 계층주가 둘 이상이라는 소리야?"
"미친! 말도 안 돼!"
갑작스레 배후에서 나타난 언데드들의 모습에 헌터들이 기겁한다.
전방에서는 헌터들의 습격으로 잔뜩 예민해진 계층주가, 그리고 뒤에서는 계층주급 상위 개체가 있을지도 모르는 언데드 군단이.
헌터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상황이다.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진 채 지켜보던 나는 문득 내 적수를 바라보았다.
이쪽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녀석이 무자비하게 헌터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강해져서 찾아가마.
그때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쓰러지지 마라.
너는 내가 잡아먹는다.
이후 헌터들과 내 적수의 싸움은 당연하게도 내 적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언데드들의 랭크가 전체적으로 그닥 높지는 않았으나, 군데군데 C랭크의 개체가 있던 까닭에 헌터들로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무엇보다 전방에서 날뛰는 계층주를 두고 언데드들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앞뒤로 포위당한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멸당했다.
몇몇 이들이 도주에 성공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들은 살아서 이 사막을 떠나가지 못했다.
멀찌감치서 지켜보던 내가 습격했던 까닭이다.
그들이 너무 억울해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동안 마음껏 죽여왔으니 이번에는 그저 자신들의 차례였을 뿐이다.
무언가를 죽일 생각으로 왔다면 자신 역시 죽임당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 것이다.
계층주의 토벌을 위해 왔던 토벌대가 전멸했지만,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가 실패했으니 그 다음이 또 올 것이다.
그것도 훨씬 강해진 전력으로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A랭크 헌터가 여럿 끼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한없이 조급해진다.
시간이 얼마 없다.
투쟁에 투쟁을 계속했다.
싸우고, 죽이고, 먹어치웠다.
몬스터도, 헌터도 가리지 않았다.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인데,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여러모로 뭣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나에게 양심은 없다.
목표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
이런 내 모습이 딱 설명에 나온 그대로라,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미 완벽한 괴물이다.
또 다른 헌터들이 오기 전까지 과연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나 자신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정확한 계산이 힘들었다.
그저 노력할 뿐이다.
내가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다.
잠도 줄이고 휴식도 없이 정말 끝없이 하루 온종일 싸웠다.
[힘이 '1' 증가했습니다.]
[체력이 '1' 증가했습니다.]
[현재…]
[현재…]
힘이, 체력이 늘어난다.
[민첩이…]
[내구…]
민첩이 빨라지고 내구가 높아진다.
[마력이…]
마력이 계속해서 쌓여간다.
[스킬 <근성A>가 발동되었습니다.]
얼마 없는 시간을 짜내고 짜내서 성장한다.
몸이 피로를, 고통을 호소하지만 감내한다.
근성으로 돌파한다.
[스킬 <한계돌파A>가 발동되었습니다.]
이만큼이나 노력했던 적이 과연 언제였을까?
아무것도 없던 캐리였던 시절?
처음 뱀이 되고 난 이후?
지금껏 매일매일을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혹여 늦어서 내 적수가 이미 토벌당해 싸울 수 없다 하더라도, 한 점 후회 없도록 노력했다.
한계를 넘어선다.
[스킬 <한계돌파A>의 랭크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한계돌파S>↑]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몰두했다.
밤이고 낮이고, 시간도 장소도, 상대도 가리지 않고 싸웠다.
아직 내 적수는 토벌되지 않았다.
* * *
한차례 상태창을 확인한다.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단기간에 이뤄낸 성장치고 놀라울 정도다.
B랭크의 끝자락에 있을 거라 예상되는 녀석과 비교하면 초라하겠지만 녀석에게는 시간이 없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최소한의 자격은 갖췄다.
나는 오늘 내 적수(계층주)에게 도전한다.
오늘만큼은 다른 미래 따위 생각하지 않았다.
상상하는 것은 단 하나.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녀석을 잡아먹는다.
-이름 : 유준영(?)
-종족 : 몬스터 - [프레데터 보아]▶상세 보기
-능력치
힘 B27 / 체력 B24 / 민첩 B28 / 내구 B38 / 마력 B40
-스킬
유체이탈SS [사용 불가], 근성A, 한계돌파S, 암영S, 기습A, 조이기B, 직감A, 급속재생A, 돌진A, 극독A, 위압A, 카운터B, 독 내성B, 테일 스트라이크A, 폭식A, 두꺼운 비늘B, 마력조작A, 사고가속B, 신체강화B, 마안D, 더위저항C, 추위저항C, 독마법B, 마력저항C
제40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승리했다.
싸움의 세세한 과정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암영>으로 진화한 은신으로 내가 먼저 기습했고, 싸움이 시작되었다.
녀석은 역시 계층주답게 쉽지 않은 상대였다.
자세히 기억나는 것은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는 것밖에 없다.
맑은 오아시스를 새빨갛게 물들일 정도로 붉은 피.
당연하게도 그 피는 모두 내가 흘린 것이다.
나는 녀석의 단단한 갑각을 뚫지 못했고 녀석은 내 비늘을 뚫었다.
수련하며 가득 쌓아뒀던 에너지와 재생을 통해 일단 버티자는 일념 하나로 싸웠던 것 같다.
스스로도 도대체 어떻게 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서 있던 것은 나였다.
별다른 생채기 없이 쓰러진 녀석을 보니, 아마 내 독에 의해 서서히 중독되어 죽은 것이 아닐까?
단단한 갑각 속에서부터 천천히 갉아 먹히며 죽어갔을 것이다.
딱히 내가 상상한 싸움의 결말은 이것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승리했다.
승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듯, 결국 처음 바라던 대로 녀석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35계층의 계층주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쓰러트렸습니다.]
[현재 35계층의 계층주가 없는 바, 당신은 35계층의 계층주가 될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 시, 자신의 계층에 한해 모든 능력치와 스킬이 증가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알림이었다.
나보고 계층주가 되지 않겠냐는 물음.
당시와 마찬가지로 직감이 맹렬히 경고한다.
잠시간 멈춰서서 상태창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내 선택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얻은 힘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쉽게 얻은 힘은 결국 본질적으로 내 힘이 될 수가 없다.
다른 것에 힘을 빌리지 말고 나 스스로 강해지자.
한차례 다짐하며 몸을 돌렸다.
쉬고 싶다.
그렇게 더 이상 오아시스라고 부를 수 없이 엉망이 된 장소를 벗어났다.
능력치나 스킬이 변경되었다는 상태창의 알림을 들은 것 같은데 확인은 나중이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사막이 조금 소란스러운 느낌이다.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한차례 살펴보니 헌터들이 무척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막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서 조금 당혹스러운 감정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잠시 고민한 끝에 생각해냈다.
나 때문이구나.
정확히는 나와의 싸움으로 사라진 계층주 때문인 모양이다.
중간에 A랭크 헌터가 둘 정도 끼어 있는 걸 보면, 역시나 계층주 토벌을 위해 도착한 토벌대가 맞다.
다행히 두 A랭크 헌터는 S랭크까지 성장한 내 <암영>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다.
정말 다행이다.
토벌대의 헌터들은 정말 숨 가쁘게 움직였다.
갑작스레 사라진 계층주를 찾기 위해 계층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려는 모양이다.
지나가면서 흘린 말 중에 '던전 내 이상 사태' 같은 말이 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이번 일을 협회에서는 꽤나 크게 받아들인 것 같다.
위험하다.
따로 직감이 경고하지 않아도 정말 위험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헌터들에 의해 내 존재가 협회에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토벌당하는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그것 말이다.
암울하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어쩌다 내가 원래 인간이었던 캐리 유준영이라고 밝히는 걸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내게 죽었던 헌터들에 대한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만약 내 정체를 알리게 된다면 과연 어떨까?
이번에는 어디 연구 시설에 끌려가 실험체가 되는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암울하다.
물론 내 미래가 꼭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내가 생각지도 못한 최선의 미래가 있을 수도 있지만, 확신할 수 없는 그런 미래는 이쪽에서 사절이다.
이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나를 위협할 만한 변수는 절대 반기지 않는다.
나는 이미 몬스터다.
고생하겠지만 지금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온기를 나눌 만한, 대화할 만한 상대가 없다는 것에 가끔씩 쓸쓸하기도 하지만 결코 지금의 삶에 후회는 없다.
나는 몬스터다.
다시 한번 되뇌이며 몸을 움직였다.
헌터들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서둘러 이동할 생각이다.
목표는 36계층.
좀 더 깊숙이 내려가자.
* * *
35계층 전체를 토벌대가 통제해서 그럴까?
다음 계층으로 향하기 위한 게이트를 찾아 이동하면서 따로 헌터들을 만나지 못했다.
내게는 무척 다행인 일이었다.
혹여 헌터를 마주쳐 전투라도 벌였다간, 그 소란을 듣고 다른 토벌대의 헌터들이 달려올 것이 뻔했으니까 말이다.
작은 샌드맨 하나조차 보이는 족족 사냥해 보이는 토벌대의 모습을 보니 역시 이번 일을 협회에서는 꽤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이번 토벌대의 대장을 맡은 헌터가 그런 것일까?
어찌 되었든 이제 36계층으로 떠날 내게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렇게 헌터는커녕 몬스터와의 별다른 다툼도 없이, 쾌적하게 나는 36계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36계층에 도착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찬란한 햇살이었다.
몬스터와 헌터, 죽은 자와 산 자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유유히 몸을 움직였다.
내 적수와의 싸움 이후 상당히 자신감이 붙었다.
지금이라면 차예지와 다시 붙어도 잘 싸울 자신이 있었다.
상대의 방심이나 다른 요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내 힘만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한번 시험해 보고 싶다.
아니, 아직 토벌대가 35계층에 남아 있는 이상 괜한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헌터나 몬스터가 미궁에서 죽어 나가는 일이야 워낙 흔하다 쳐도, 지금같이 예민할 때는 작은 흔적이라도 저들이 놓칠 리 없다.
얌전히 있자.
날뛰는 대신에 조용히 주변 지리를 탐색했다.
어디에 어떤 몬스터가 살고 어디서 헌터들이 사냥하는지를 확인했다.
바로 위 계층인 35계층을 통제 중이다 보니 36계층에는 생각보다 헌터들이 적었다.
아니, 원래 36계층 정도면 사막 구역에서도 제법 깊숙한 곳이라 자연스레 헌터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숫자가 적은 만큼 확실히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
일종의 정예화 된 전력이라 할 수 있다.
대규모 원정대급 규모가 아닌 이상 활동하기 힘든 평야 구역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소규모 공격대로 활동하는 헌터들 중 가장 뛰어난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이다.
말했다시피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지 않기 위해 딱히 날뛰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폭식에 저장할 에너지를 위해 근처를 지나는 몬스터만 간간이 해치웠을 뿐이다.
절대로, 절대로 날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궁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나는 정말 의도치 않게 날뛸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움직이던 나를 습격한 것은 [구울]이란 이름을 가진 상위종의 언데드 몬스터다.
랭크는 B에서 A.
나를 습격한 녀석은 B랭크의 구울이었는데, 그 특유의 날카로운 손톱과 보통의 좀비들과 다른 재빠른 몸놀림이 위협적인 녀석이었다.
내 적수와의 싸움 이후 처음으로 상대하는 B랭크 몬스터였지만 자신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무려 계층주였던 내 적수와 눈앞의 녀석은 비교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녀석이 아무리 잘나봤자 결국 일반 몬스터지.
얼마든지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비록 언데드라는 특성 탓에 내가 자랑하는 독이나 독마법은 조금도 통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독이나 독마법 말고도 녀석을 쓰러트릴 수단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건 독이나 마법보다 순수한 육체 능력 그 자체다.
단단한 내구와 끝없는 재생력만 있으면 아무리 강한 녀석이라도 충분히 쓰러트릴 수 있다.
그런 생각에 나는 별생각 없이 녀석과 전투를 시작했다.
전투 자체는 자신했던 것처럼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녀석은 B랭크다운 재빠른 몸놀림과 언데드 특유의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나를 압박해 왔지만, 결국 녀석의 손톱은 내 비늘을 뚫지 못했다.
사실상 조금 빠른 것을 제외하면 같은 B랭크와 싸웠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녀석과의 싸움은 쉬웠다.
전에 싸웠던 것이 B랭크 끝자락의 계층주였기 때문일까?
더더욱 그런 감이 없잖아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내 꼬리가 녀석을 찌부러트리는 것과 동시에 승부는 끝이 났다.
너무나도 손쉬운 승리.
정말 강해졌구나 자신하며 승자로서의 권리를 취한다.
사실 이런 좀비 계열의 언데드는 그 특유의 썩은 김치 같은 맛에 잘 먹지 않지만, 그래도 명색의 B랭크 몬스터인 만큼 내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원래 맛없는 것이 몸에 좋은 법이다.
그리 생각하며 녀석을 덥썩 삼켰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았다.
<시독>이란 것이 있다.
좀비 계열의 언데드 몬스터들이 가진 독인데, 지금껏 상대해온 언데드 몬스터는 그 랭크가 낮아 내 독 내성으로도 별문제 없었지만 이 녀석은 다르더라.
정말 죽을 것 같다.
[스킬 <독 내성B>가 발동됩니다.]
가장 먼저 독 내성 스킬이 발동되었고.
[스킬 <급속재생A>가 발동됩니다.]
기다렸다는 듯 재생이 발동했다.
[스킬 <근성A>가 발동됩니다.]
그리고 근성이 발동되었으며.
[스킬 <한계돌파S>가 발동됩니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이었으면 한계돌파까지 발동되었을까?
고통이란 것이 한계를 돌파했다.
이런 고통. 지금껏 느껴본 적 없었다.
이게 바로 식중독일까?
그렇게 시름시름 앓던 내가 날뛴 것은 이 무렵에 찾아온 한 무리의 헌터들 때문이다.
[스킬 <독 내성B>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현재 <독 내성A>↑]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절대 날뛸 생각이 없었었다.
독 내성의 랭크가 올랐지만 여전히 아프다.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갉아 먹히는 듯한 끔찍한 감각에 반쯤 발작하고 있으면 불현듯 그들이 나타났다.
독에 저항한다고 미처 은신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원인이었다.
"…다들 여기 좀 봐."
"히이익? 배, 뱀!"
"마, 맙소사!"
지나친 고통과 달리 뚜렷한 정신 너머로 들려오는 흐릿한 목소리.
동굴 안에 가만히 똬리를 틀고 앉아 속으로 고통을 삭이고 있던 내 앞에 그들이 나타났다.
총 숫자는 여덟.
B랭크 하나에 C랭크가 다섯, 나머지 둘은 D랭크였다.
"B랭크 몬스터군."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무리인데…? 도망갈까?"
"잠깐. 이만큼이나 접근했는데도 반응이 없어."
"죽은 걸까?"
"아니, 구울의 독에 당한 것 같군. 앓고 있다."
처음에는 이쪽의 모습에 당황하던 헌터들은 이쪽에서 별 반응이 없자 점점 호기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슬금슬금 조심스레 접근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대놓고 이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허… 이만큼이나 다가왔는데도 공격을 안 한다? 몬스터가?"
"그 구울의 독이니까 말이지. 아마 이대로 놔둔다면 알아서 죽을 거다."
"허… 이렇게 얌전한 B랭크 몬스터는 또 처음이네."
"와… 사진이라도 한 방 찍고 싶네, SNS에 올리게."
"제발 SNS좀 끊어. 그거 중독이야."
화기애애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떴다.
이쪽과 눈을 마주한 헌터 하나가 "히이익─" 비명을 내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 저거 방금 날 본 거 같은데?!"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걱정 마라, 아직까지 공격하지 않은 걸 보면 죽어가고 있는 거다. 제대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것 같은데…."
눈살을 찌푸리며 이쪽을 살피는 헌터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흘깃 제 동료들을 바라보는 것을 보니 마음을 굳힌 것 같다.
나를 공격하기로.
그래, 이게 바로 헌터들의 모습이지.
몬스터라면 일단 죽이고 본다.
그것이 어느 상태이든, 자신들을 적대하든, 그렇지 않든.
몬스터와 헌터의 관계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마침 잘되었다.
안 그래도 끔찍한 고통에 스트레스가 쌓여갔는데 말이다.
아직 몸의 거동이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첫 기습에 B랭크 헌터를 제거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될 거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짜증에 세세한 계획 같은 것은 세우지 않았다.
그냥 눈앞에 보이는 놈들을 죽여버리자.
끊임없이 재생하는 덕에 모자란 에너지를 채우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스킬 <독 내성A>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현재 <독 내성S>↑]
끔찍하던 고통이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아직 말끔히 나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행동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정말 공교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막 움직이려고 마음먹은 찰나에 몸이 말끔해지다니.
이것 역시 딱 마침 잘되었다.
"흐흐… 이게 웬 떡이냐? 이 정도면 마석도 나올 법한데."
"이번에는 돈 좀 만지겠군."
"깔끔히 목을 베죠. 비늘도 상당히 고급져 보이는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누가 할래요? 역시 공대장님이?"
"네, 제가 하죠."
B랭크 헌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앞으로 나섰다.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매끄럽게 뽑아 든 그가 내 앞에 선다.
담담한 눈빛으로 잠시간 나를 바라보던 그는 이내 자신의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나는 언제나처럼 쩌억- 주둥이를 벌렸다.
"꺄아아악!"
"고, 공대장님─!"
"도, 도망쳐어!"
"아냐, 도망치는 것보다는 일단 녀석을 막아야…! 크윽!"
"끄, 끄어어억!"
"사, 살려…!"
이윽고 소란을 듣고 또 다른 헌터들이 찾아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냥 중이던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한 번 주둥이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사고 치고 싶지 않았는데.
제41화
소란을 듣고 찾아온 헌터 다섯 무리 정도를 해치웠을 때쯤 생각했다.
사고 쳤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짜증이 차츰 사라지고, 냉정해지기 시작한 머리로 주변을 둘러보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한다.
제대로 사고 쳤다.
가급적 36계층에 오랫동안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이래서야 급히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
공격대 한두 개쯤이야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하룻밤 사이에 다섯 개나 사라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 그래도 토벌대가 바로 위층에 머무르고 있다.
안 그래도 사라진 계층주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 뻔한데, 이런 사건을 그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오겠지.
좋아, 도망치자.
36계층의 탐색이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37계층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를 하나 찾아 놓았기에 사막을 헤맬 일은 없었다.
되도록 전투를 피하며 나는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그렇게 정오쯤이 돼서야 37계층에 도착했다.
* * *
37계층의 사막은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으스스했다.
내리쬐는 태양은 여전했지만, 조금 한기가 돈다고 할까?
분명한 마르고 건조한 날씨임에도 무언가 음습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무심코 혀를 날름거리면, 언데드 특유의 시체 썩는 내가 혀를 사정없이 자극해왔다.
다른 계층보다 숫자가 좀 많다.
지금껏 지나온 계층들이 10 정도라면 이곳 37계층은 못해도 4, 50 정도는 될 것 같다.
거기다 내가 확인한 것은 결국 일부일 뿐이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상위 개체라도 나타난 것일까?
조금 조사를 해볼 필요를 느꼈다.
정말 예상대로 상위 개체의 언데드가 나타난 것이라면 아무래도 위험하다.
나타난 상위 개체가 어떤 종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만큼 언데드의 숫자가 불어날 정도라면 상당히 강력한 개체일 수도 있었다.
단순히 B랭크의 계층주가 아니라 그 이상.
못해도 A랭크 일지 몰랐다.
그렇게 탐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언데드 군단을 마주칠 수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를 가득 메우고 있는 죽지 않는 불사자들.
랭크 자체는 몇몇 개체를 제외하고는 그리 높지 않아 보이지만, 그 숫자가 무지막지하다.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기(死氣)가 흘러넘친다.
이미 언데드 군단이 머무르는 곳의 근처는 짙은 사기로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끔찍하구나.
저렇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본능적인 공포와 혐오를 느꼈다.
저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움직일 것을 생각하니 머리 한쪽이 멍해진다.
헌터들이 고생하겠군.
특히나 저 군단을 이끌고 있는 녀석이 굉장히 위험하다.
군단의 중심에서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목 없는 기사, [듀라한].
이쪽의 예상에 맞게 녀석은 A랭크 몬스터였다.
그것도 단순한 A랭크 몬스터가 아니라 계층주급의 A랭크 몬스터다.
저것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보다 본격적인 대규모 토벌대가 필요할 것이다.
정말 헌터들이 고생할 거 같다.
무지막지한 숫자를 자랑하는 언데드 군단을 발견했지만 당장 내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언데드 특유의 생명에 대한 적의를 생각하면 나 역시 조심하기는 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은신 상태로 행동하는 나를 녀석들이 발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A랭크나 되는 듀라한이라면 조금 조심해야 될지도 모르겠다만, 일전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전혀 이쪽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면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처음 언데드 군단을 마주했을 때는 아무래도 곧장 다음 계층으로 넘어가는 게 어떨까 싶었지만 얼마 안 가 생각을 바꾸었다.
이런 언데드 군단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분명 대규모의 토벌대가 조직될 것이다.
꽤나 적지 않은 숫자의 헌터들이 몰려들겠지.
개중에는 고랭크 헌터들도 여럿 끼어 있을 테지만, 그보다 적지 않은 저랭크 헌터들도 참여할 것이다.
저 무지막지한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최소한의 숫자는 맞춰야 될 테니까.
내가 노리는 것은 간단하다.
언데드 군단을 처리하기 위해 토벌대가 도착하면, 군단과 토벌대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노리자.
딱히 큰 것을 탐낼 생각은 없다.
괜히 욕심부리다가 배가 터질지도 모르니까.
그저 적당히 양심껏 움직일 생각이다.
토벌대가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분간 37계층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내 은신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이상, 당장 언데드 군단이 내게 위험이 될 만한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언데드 군단이 워낙 강력해서일까?
37계층에는 언데드말고 다른 몬스터를 찾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C랭크나 D랭크의 몬스터는 당연하고 그 이하의 저랭크 몬스터들도 쉽게 보지 못했다.
언데드 만큼이나 흔하게 돌아다니는 샌드맨들도 37계층에서만큼은 그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문제다.
언데드말고 먹을 게 없거든.
알다시피 언데드, 그것도 좀비 계열의 언데드에게서는 썩은 김치 맛이 났다.
그나마 스켈레톤 같은 뼈만 있는 녀석들은 바삭하고 은근 고소한 것이 간식처럼 이따금 주워 먹어도 문제없었으나, 좀비 계열은 다르다.
그닥 챙겨 먹고 싶지 않다.
거기다 스켈레톤 계열의 녀석들 역시 어디까지나 간식처럼 이따금 먹으면 괜찮다는 것이지, 매 끼니 챙겨 먹기에는 상당히 물리는 타입이다.
다행히 37계층에 도착하기 전 워낙 폭식을 했기에 당장 저장된 에너지가 부족할 일은 없었지만, 이후 토벌대가 도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여차할 때를 생각해 최소한의 에너지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렇다는 것은….
역시 먹어야 되는구나.
좋아, 눈 딱 감고 먹어보자.
언데드 몬스터들은 군단처럼 한곳에 모여 있지만 모든 개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몇몇 개체는 군단에서 떨어져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막을 배회하고는 하는데, 내가 먹이로 삼은 것은 주로 이런 녀석들이었다.
정말 눈 딱 감고 집어삼킨 녀석들에게서는 당연하게도 썩은 김치 맛이 났다.
그래, 좋게 말해서 묵은지 수준이다.
굉장히 시큼하다.
괜스레 속이 더부룩해지는 느낌이구나.
한 무리의 헌터들이 37계층에 도착했다.
토벌대가 도착한 것인가 싶었지만 조금 틀리다.
랭크는 B가 하나, C가 둘이다.
단순히 사냥을 위해서 온 공격대일까?
이 역시 조금 틀렸다.
이들은 토벌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인 사냥을 위해 온 공격대도 아니었다.
이들은 정찰대다.
이 헌터들이 정찰대인 줄은 어떻게 알았냐면, 의외로 알아보기 쉬웠다.
단순 사냥을 하러 온 것치고 그 숫자도 적고, 무엇보다 대놓고 언데드들을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이들의 리더로 보이는 B랭크 헌터는 놀라운 수준의 은신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당장 나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한순간 사라진 그의 기척을 전혀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혀를 통해 희미하게 그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전혀 어디에 숨었는지 모를 정도다.
역시 미궁은 넓구나.
이런 헌터들이 기습한다면 꽤나 위험할 것 같다.
기감을 좀 더 예민하게 단련해야겠다.
정찰대로 보이는 세 명의 헌터는 정말 부지런히 움직였다.
단순히 언데드 군단의 숫자를 파악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주변의 지리나 그들의 대략적인 능력까지 확인한 것 같다.
듀라한이 있는 중심지까지 다가가지 않았지만, 외곽을 돌며 따로 활동하는 언데드들의 수준을 통해 군단의 실질적인 수준까지 파악한 모양이다.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세 헌터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심각하네요. 설마 '듀라한'이라니."
"위험해서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언데드들의 숫자를 보면 못해도 A랭크 상위 수준입니다. 녀석을 쓰러트리려면 A랭크 헌터 세 사람은 필요해요."
"다른 언데드까지 생각하면 그 위험성은 S랭크에 준합니다."
"…큰일이네요. 현재 전력으로 상대가 가능할까요?"
"A랭크 헌터만 다섯이긴 하지만, 저 무지막지한 물량을 생각하면 역시 저랭크 헌터들이 더 있어야 될 것 같군요."
"협회장님께 보고하고 다른 길드들에게 공문을 돌려 봐야겠어요."
"서둘러 돌아가죠."
짤막한 대화를 나눈 헌터들이 다시 바쁘게 움직인다.
서둘러 워프 게이트를 통해 떠나가는 세 헌터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혀를 날름거렸다.
사실 돌아가는 그들을 습격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딱히 별다른 이득이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도 토벌대가 정상적으로 도착하는 것이 낫기도 하고.
뭐, 생각보다 토벌대의 수준이 좀 더 높을 것 같지만 그닥 걱정되지는 않는다.
그리 깊숙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헌터들이 돌아가고 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리던 토벌대가 도착했다.
평소처럼 스켈레톤 하나를 잡아먹고 와그작와그작 씹어 삼키는 사이, 문득 수많은 기척들이 나타났다.
사막 곳곳에 흩어져 있는 워프 게이트를 통해 헌터들이 들이닥친다.
내 감지 범위가 아직 사막 전체를 커버할 수준은 아니라 그 일부만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말 많은 수의 헌터들이 게이트를 통해 넘어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시각각 혀를 통해 느껴지는 새로운 기척들에 나는 조용히 전율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은 여러모로 달랐다.
대한민국에 이렇게 많은 헌터들이 있구나.
이것도 전체 헌터들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할 텐데.
헌터들의 전체적인 랭크 자체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나는 한순간 압도당하는 것을 느꼈다.
제각각 다른 게이트를 통해 넘어온 헌터들은 미리 정해놓았던 모양인지 빠른 속도로 한곳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들을 따라 움직이니 그곳이 바로 이번 토벌대의 중심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위험한 기척을 가진 헌터가 하나도 아니고 무려 여섯이나 있었다.
일전에 주워들은 대로 바로 그 A랭크 헌터들인 모양이다.
그것도 당시 헌터들의 이야기로는 분명 다섯이라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간 추가적인 지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토벌대와 언데드 군단의 싸움은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날 것 같다.
랭크가 오르며 전에 비해 더 성능이 좋아진 천리안의 능력을 통해 멀찍이 떨어진 채 A랭크 헌터들을 살폈다.
무려 S랭크 정도의 위험성을 가진 계층주와의 싸움임에도 그들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당찬 얼굴로 각자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 절대 이번 토벌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나도 처음 봤을 때는 이번 싸움이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날 것이라 생각하긴 했다.
그래서 내가 주워 먹을 게 많이 없을까 봐 조금 안타깝기도 했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토벌대의 전력은 대단했다.
언뜻 보기에는 조금 과해 보이기도 한달까?
일전에 왔다 갔던 정찰대가 강하게 어필한 모양이다.
아니면 얼마 전 35계층에서 토벌대가 무려 두 번이나 궤멸당했으니, 이 정도 전력도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다 싶었다.
A랭크 헌터들을 잠시간 관찰하던 나는 그중에서 조금 낯익은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인상의 남자와 그런 남자와는 반대로 무척 쾌활해 보이는 인상의 여자.
둘 다 TV에서 자주 보던 유명 헌터들이다.
곽수용과 이지민.
두 사람은 커플 헌터로서 나란히 A랭크의 헌터들이다.
그 외모도 그렇고 실력도 굉장히 뛰어나서 TV에 자주 얼굴을 비치고는 하던 이들이다.
어지간한 연예인이나 아이돌보다 더 인기가 많은 헌터 스타 커플.
캐리이던 시절부터 TV에서나 보던 이들을 이렇게 보게 되니 여러모로 놀랍다.
그것도 캐리이던 당시 두 사람의, 특히나 항상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곽수용의 팬이었던 나였기에 슬그머니 팬심이 차오르기도 했다.
물론 괜히 두 사람 앞을 얼쩡거리다가는 그대로 순삭당할 것이 뻔할 테지만.
오래된 팬심은 아무래도 조용히 가슴 속에 묻어둬야 할 것만 같다.
원통하다.
그나저나 저 두 사람이 이번 토벌대에 참가하다니.
아무래도 둘 다 유명한 헌터들이다 보니 상당히 바쁠 텐데, 굳이 이렇게 나선 것을 보면 이번 토벌을 얼마나 협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반드시 성공시킨다는 생각이구나.
유명세만큼이나 뛰어난 실력을 가진 두 사람이니까.
게다가 캐리이던 당시에 듣기로는 두 사람 다 S랭크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토벌은 정말 큰 어려움 없이 토벌대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역시 내가 주워 먹을 만한 건 별로 없을 모양이다.
오히려 저 헌터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히 피해 다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안타깝다.
그렇게 잠시간 대기하며 정비하던 토벌대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당연하게도 언데드 군단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제42화
토벌대의 움직임은 잘 모르는 내가 보더라도 굉장히 신속하고 체계적이었다.
미리 다 준비를 해놓았던 듯 재빠르게 언데드 군단을 타격했다.
돌진하는 것과 동시에 두 개로 나눠진 토벌대는 각각 세 명의 A랭크가 앞장선 상태로 언데드 군단과 격돌했다.
숫자로는 확실히 토벌대가 밀렸지만 그 질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선두의 A랭크 헌터들이 시작부터 날뛰기 시작하니 언데드들은 마치 낙엽처럼 휩쓸려 나갔다.
[구울]이나 [자이언트 좀비]같이 나름 상위종의 언데드가 그 앞을 막아서 봤지만,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A랭크 헌터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순 기세만 보자면 초장부터 확실히 상황이 토벌대에게 유리하게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닌, 언데드다.
지성도 감성도 없이 오로지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적의와 증오만 가득한 존재.
아무리 기세에서 밀렸어도 그들은 전혀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토벌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언데드들이 내뱉는 끔찍한 울부짖음과 헌터들이 내뱉는 기합 섞인 함성이 사막 한가운데서 뒤섞기기 시작했다.
선두에 있는 A랭크 헌터들이 워낙 날뛰어서일까?
군단의 중심에 있던 듀라한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로막고 있던 다른 언데드들을 방해된다는 듯 가볍게 치워낸 녀석이 한쪽에 세워놓았던 뼈로 된 말을 이끌고 천천히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녀석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지켜보고 아무 생각 없이 날뛰는 것처럼만 보이던 A랭크 헌터들이 또 다른 행동을 개시했다.
곽수용과 이지민을 포함한 네 명의 A랭크 헌터가 거의 동시에 듀라한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그들 넷이 듀라한을 맡고 나머지 두 명의 A랭크 헌터는 지금처럼 계속 토벌대를 지휘하려는 모양이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려는 걸까?
흥미진진한 광경에 조용히 똬리를 틀고 앉아 구경했다.
싸움 구경 좀 하다가 틈이 생기면 슬그머니 끼어들 생각이다.
언데드 군단과 토벌대의 전투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불, 물, 바람, 땅, 번개. 각종 속성의 마법들이 화려하게 난무한다.
단순히 지켜보는 것뿐임에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볼거리가 풍성하다는 느낌이다.
전투 자체는 토벌대 쪽의 일방적인 압도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점이 재밌다.
쓰러트려도, 쓰러트려도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언데드들.
그 무지막지한 숫자에 토벌대 역시 조금 주춤거리는 느낌이다.
여전히 A랭크 헌터들이나 그 밑의 고랭크 헌터들은 화려하게 날뛰는 느낌이긴 하다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데려온 헌터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니 더 잘 보인다.
지치기라도 하는지 주춤주춤 뒤로 밀려나는 토벌대의 모습이.
아직까지는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분명 토벌대의 진형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저 작은 균열을 놔뒀다간 완전히 무너져내릴 미래가 뻔히 보인달까?
시시하게 끝날 거라 생각했던 전투가 의외로 꽤 길게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슬쩍 움직여볼까?
아쉽게도 상황은 내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지휘하는 A랭크 헌터들 역시 바보는 아닌지, 생겨난 자그마한 틈을 금세 메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처럼 멀리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직접 현장에 있기 때문에 이런 작은 틈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저런 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본연의 재능?
어느 쪽이든 여러모로 대단하다.
그것보다 아쉽게 됐다.
슬쩍 끼어들 타이밍이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저렇게 체계가 잡혀 있어서야 섣불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그야말로 순삭일 테니까.
한편 듀라한과 싸움도 다른 전투 못지않게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전위의 곽수용을 중심으로 네 명의 헌터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곽수용과 이지민이야 원래 커플 헌터로서 그 연계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다른 두 헌터도 두 사람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잘 움직여주고 있다.
솔직히 이쪽이 눈으로 따라가기에 조금 벅찰 정도로 매 순간 완벽한 연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곳에 듀라한이 아닌 내가 있었다면 처음 몇 합 만에 패배할 것이 뻔했다.
저들 앞에서는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도 사실상 쓸모가 없겠지.
단번에 머리통을 베어내면 재생도 못 할 테니까.
네 헌터의 폭풍과도 같은 연계에도 듀라한은 상당히 잘 버티고 있었다.
괜히 계층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동랭크의 네 헌터를 상대로도 굉장히 선전하고 있다.
피할 건 피하고 막아낼 건 막아낸다.
치명상이 아니라면 딱히 공격을 막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공격한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언데드 특유의 광기 가득한 공격법과 상위 언데드다운 지성이 뒤섞인 훌륭한 전투법이다.
그 제 몸 아끼지 않는 광기 어린 공격에 아무리 넷이나 되는 A랭크 헌터들이라도 쉽게 결판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듀라한과 전투를 벌이는 곳이 확 뜨인 사막 한가운데다 보니, 다른 언데드들이 시시각각 달려드는 것도 쉽게 결판을 내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랭크 자체는 네 헌터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하더라도, 쉬지 않고 밀고 들어오면 그것도 문제다.
특히나 듀라한같이 제 몸조차 똑바로 돌보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상대가 있다면 더더욱 문제다.
잠깐의 틈이 그대로 목숨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듀라한 쪽도 결판이 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조급함만 부리지 않고 천천히 공략해 나간다면 분명 헌터들의 필승이다.
바로 눈앞에서 이런 재밌는 싸움이 벌어지기 때문일까?
몸이 자꾸만 달아오른다.
단순히 구경하는 것도 재밌지만, 역시 그냥 구경보다는 직접 몸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다.
외곽 쪽의 다툼에 슬쩍 끼어볼까?
슬슬 전투가 계속 이어지며 전체적인 헌터들의 주의력도 떨어진 것 같은데….
아니, 너무 위험하다.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저기 저 귀신같은 A랭크 헌터가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벌써 몇십 분째 이어진 전투에도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지휘를 해내는 모습을 보니 확실하다.
얌전히 구경만 하자.
언데드들의 숫자는 처음에 비해 확실히 줄어들어 있었다.
여전히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기는 하지만, 멀리서 계속 지켜본 결과 처음에 비해 정말 많이 줄었다.
이 기세로 간다면 얼마 못 가 전부 정리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헌터들도 지치기는 했지만 워낙 지휘를 잘하다 보니 그닥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듀라한 쪽의 싸움도 확실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전체적인 언데드 군단의 숫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조금씩 헌터들을 방해하는 언데드들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네 명의 헌터에게도 조금씩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된 전투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듀라한도 슬슬 한계에 몰린 상태였기에 자꾸만 수세에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질 것이 자명한 일.
아무래도 역시 이번 토벌은 처음 내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름없이 끝날 것 같다.
이변이 생긴 것은 한순간이었다.
착실히 군단의 숫자를 줄여나가던 토벌대 쪽은 별문제가 없었다.
저랭크 헌터들이야 당연하고, 고랭크 헌터들도 지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지만.
워낙 완벽한 지휘가 있던 덕분인지 큰 문제 없이 그대로 토벌이 끝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히려 문제가 있던 쪽은 토벌대 쪽이 아닌 듀라한과 싸우던 네 명의 헌터들 쪽이었다.
꽤 길어진 전투에 괜히 조급해지기라도 했던 것일까?
착실히 연계를 이어나가던 헌터들의 움직임이 한순간 삐걱였다.
곽수용이나 이지민이야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함께 연계를 이어나가던 헌터 한 명이 갑작스레 너무 치고 나간 것이다.
본인 딴에는 지친 듀라한을 상대로 마무리라도 하려던 모양이었던 것 같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사실 그 헌터가 그리 깊숙이 들어간 것도 아니다.
거리로 따지자면 겨우 반보에서 일보 정도.
불과 1미터도 채 안 될 짧은 거리를 살짝 앞으로 나선 것뿐이었으나, 이전부터 워낙 완벽한 연계를 해 왔기 때문일까?
그 작은, 고작 반걸음 차이가 문제를 일으켰다.
홀로 제 간격 안으로 들어선 헌터를 향해 듀라한의 손이 뻗어진다.
다 지친 몸으로 어떻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A랭크 헌터들조차 움찔하는 것이 고작일 정도의 눈부신 속도.
철컥─
판금 갑옷 특유의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듀라한의 건틀릿 안에 헌터의 목이 붙잡힌다.
"정다훈 헌터!"
"젠장! 멋대로 치고 나가서는…!"
"당장 구해야─!"
다급하게 헌터를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다른 세 명의 헌터.
그리고 그것에 앞서 듀라한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한순간에 짙은 사기가 휘몰아친다.
휘이이잉─
붙잡힌 헌터의 목을 중심으로 휘몰아친 사기는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검은색이었다.
달려들던 헌터들이 한순간 멈칫한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끄아아아!"
붙잡힌 헌터가 비명과 함께 연신 몸을 버둥거린다.
어떻게든 듀라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지만, 그 온 힘을 다한 발악에도 듀라한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붙잡힌 헌터는 그대로 생기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끄… 끄어어어…."
눈 깜짝할 새 말라비틀어진 미라 꼴이 되어버린 헌터.
자그마한 신음과 함께 더 이상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드, 드레인 터치!"
"생기를 빼앗은 건가?! 젠장, 정다훈 헌터!"
뒤늦게 울리기 시작한 울분 가득한 헌터들의 목소리에 듀라한이 붙잡고 있던 헌터의 목을 그제야 놓아주었다.
철퍼덕- 모랫바닥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제 동료들의 모습에 헌터들이 꾹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잔뜩 망가져 있던 듀라한의 갑옷은 말끔히 회복되어 있었다.
상황이 참 재밌게 흘러간다.
"젠장. 죽을 거면 그냥 깔끔히 혼자 죽을 것이지…! 다 잡은 놈을 저렇게…!"
"이지민, 진정해. 사람이 죽었어."
"그 죽은 놈이 트롤만 잔뜩하고 갔잖아! 어쩐지 아까부터 눈빛이 이상하더라니! 그놈 분명 막타 치려고 그런 거야!"
"…우선 눈앞의 녀석에게 집중하자. 쉽지 않을 거 같다."
곽수용과 이지민을 포함한 헌터 셋이 긴장한 표정으로 자세를 다 잡았다.
길어진 싸움으로 지친 그들과 달리, 지금의 듀라한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쌩쌩한 모습이었다.
숫자는 분명 헌터들 쪽이 유리했지만 저렇게 회복된 듀라한이 상대라면….
'분명 쉽지 않겠지. 토벌대를 지휘하는 헌터들 쪽이 합류한다면 모르겠다만.'
아직 언데드 군단의 정리가 다 끝나지 않아서 그건 무리다.
결국 세 헌터에게 남은 선택지는 셋이서 녀석을 쓰러트리거나, 토벌대가 언데드 군단을 다 정리하길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역시 다 회복된 듀라한이 상대라면 전자는 무리일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세 헌터와 듀라한의 2차전.
2차전의 행방은 처음의 싸움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처음부터 시종일관 싸움의 주도권을 가진 것은 헌터들 쪽이었지만 2차전부터는 확실히 주도권이 듀라한에게 있었다.
만전의 상태로 회복된 듀라한을 상대로 잘 버티던 세 헌터였지만, 원래 넷이서 싸우던 상대를 셋이서 어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처음과 달리 잔뜩 지친 상태로 말이다.
결국 또 한 명의 헌터가 목덜미를 붙잡혔다.
곽수용과 이지민이 아닌 다른 헌터였다.
"끄어어어─."
조금 전의 헌터가 그랬던 것처럼 붙잡힌 헌터는 곧 생기를 빼앗겼다.
안 그래도 만전의 상태였던 듀라한의 주위로 지독한 사기가 휘몰아친다.
단순히 풍기는 분위기만 보자면 A랭크 그 이상도 될 것 같았다.
멀리서 지켜보는 나조차 비늘이 쭈뼛거릴 정도의 지독한 기운이다.
살아남은 곽수용과 이지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짧은 눈 맞춤으로 의견을 나눈 두 사람이 재빨리 몸을 돌린다.
승산이 없다는 걸… 아니, 버티는 것조차 역부족이란 것을 깨달은 것일까?
아마 다른 헌터들과 함께 합류해서 맞서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언데드 군단도 슬슬 다 정리되어 가고 있고, 그리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듀라한이 가만히 그들을 놓아줬다면 말이다.
변화는 갑작스레 일어났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가만히 전투를 지켜보던 나는 불현듯 다급하게 울리는 직감의 경고를 받았다.
갑작스레 무슨 경고일까?
무슨 위협이 찾아온 것일까?
미처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변화는 일어났다.
듀라한을 중심으로 무지막지한 마력이 뭉치기 시작한다.
듀라한이 내뿜는 사기와 뒤섞인 마력이 '기우웅─'하고 묘한 소리와 함께 공명한다.
후퇴하던 곽수용과 이지민이 멍하니 듀라한을 돌아보았다.
토벌대를 이끌며 언데드 군단을 정리하던 A랭크 헌터들도 홀린 듯 듀라한을 보았다.
단순히 A랭크 헌터들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듀라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저것을 알고 있다.
'진화…!'
치열한 전투 중에 듀라한은 지금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한 적은 지금껏 몇 번이고 있지만 다른 몬스터가 진화하는 것은 처음 봤다.
그것도 단순한 저랭크의 몬스터가 진화하는 것이 아닌, 저 듀라한 같은 A랭크의 고랭크 몬스터가 진화하는 것은 말이다.
아마 나를 제외한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헌터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실제로 몬스터가 진화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몇몇 테이밍 스킬을 가진 헌터들 말고는 없으니까 말이다.
듀라한의 모습이 사기와 마력으로 뒤섞인 검은 고치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곽수용이 불현듯 소리친다.
"제길… 도망쳐─!"
평소의 차분하고 조용한 이미지와 달리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곽수용이 소리쳤다.
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헌터들이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직 남아 있는 언데드들을 남겨두고 다급하게 등을 보인 채 내달리는 헌터들의 모습.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무심코 검은 고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쩌저적- 고치에 금이 간다.
그리고.
철그덕─
절망이 내려섰다.
제43화
철그덕-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땅으로 내려선 녀석의 모습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검게 물든 칠흑 같은 갑주를 두르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던 목 위로 투구가 생겨났다.
A랭크 헌터 둘을 먹어치운… 아니, 분명 토벌대가 조직되기 전부터 훨씬 많은 헌터들을 먹어치웠을 것이 분명한 녀석이 새롭게 태어났다.
듀라한. 아니, 이제는 [데스나이트]가 된 녀석이 조용히 투구 사이로 시뻘건 안광을 토해냈다.
온몸에 소름이 싹 돋았다.
S랭크 몬스터, [데스나이트].
[리치] 같은 몬스터와 함께 언데드 중에서도 최상위 개체로 손꼽는 고랭크 몬스터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며 전체적인 헌터들의 수준과 기량이 상승했다 해도.
아무리 S랭크가 과거만큼의 위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해도.
그럼에도 S랭크는 S랭크다.
실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이미 재해나 다름없다.
도망칠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덜덜 떨린다.
직감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낸다.
도망쳐야 한다고.
내 생각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망치자.
구경은 관두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 인다….]
음습하게 머릿속을 울리는 스산한 목소리.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리자 데스나이트가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죽…인다….]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는 분명한 사념대화였다.
하지만 딱히 나 하나를 콕 지목해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를 대상으로 전달한 목소리였다.
다른 감정 하나 없이 오로지 살의만이 가득한 그 목소리에 온몸이 뚝 굳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 말고 다른 헌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는 곽수용과 이지민을 포함한 헌터들의 공격으로 쓰러진 말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웠다.
제 주인의 부름에 비척비척 다시 일어선 사령마가 제 등 위로 데스나이트를 태웠다.
[죽인다….]
다시 한번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가 손짓한다.
쓰러졌던 언데드들이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젠장! 도망쳐!"
"끄으윽…!"
다시 한번 일어서는 언데드들의 모습에 사막 곳곳에서 헌터들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 이놈들 왜이리 강해졌어?!"
"거, 검이 안 들어…!"
"사, 살려줘!"
다시 일어서기 전에는 고작 해봐야 E나 F랭크에 불과했던 언데드들이었지만, 다시 한번 일어선 녀석들은 달랐다.
랭크 자체는 이전과 똑같았지만 전체적인 능력치 같은 수준이 몰라보게 강해졌다.
고랭크 헌터라면 몰라도 저랭크 헌터들의 공격은 이제 제대로 통하지조차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음의 오라다.'
캐리이던 시절 한번 들어본 적이 있다.
군단을 지휘하는 몇몇 상위 개체의 언데드는 자신의 군단을 강화할 수 있는 스킬이 있다고.
그것이 바로 '죽음의 오라'.
저랭크 언데드라도 죽음의 오라를 가진 개체 곁에서 싸우게 된다면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강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설마 죽음의 오라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저건 더 이상 계층주 따위가 아니었다.
무려 계층주를 '따위'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무자비한 존재.
한 구역의 주인.
에어리어 보스(구역주)다.
[죽여라.]
이제는 제법 뚜렷해진 데스나이트의 냉담한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되살아난 언데드들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혼자서 싸우지 마라! 뭉쳐서 대응해!"
A랭크 헌터 하나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친다.
그의 외침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헌터들이 뒤늦게 힘을 합쳐 대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진형은 곳곳에서 되살아난 언데드들 탓에 다 붕괴된 지 오래다.
이제 와서 제대로 대응하려고 해도 그게 똑바로 될 리가 없었다.
A랭크 헌터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가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헌터들만을 모아 어렵사리 언데드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A랭크 헌터라면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제 한 몸만 챙겨서 도망가기에는 충분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도망치는 대신에 끝까지 다른 헌터들을 챙기려는 그의 모습은 꽤 멋있었다.
한편 직접 말을 몰고 앞으로 나선 데스 나이트는 사막을 이리저리 누비며 헌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녀석의 묵직한 중검에 헌터들은 랭크를 가리지 않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전에 A랭크 헌터들이 언데드를 상대로 날뛰던 것과 비슷한 장면이다.
그리고 그 앞을 다급하게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다.
곽수용과 이지민.
더 이상 헌터들의 희생을 볼 수만은 없었던지, 데스나이트에게서 꽤 멀찍이 떨어졌던 두 사람이 다시 한번 녀석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따라 남은 두 A랭크 헌터들도 함께했다.
단순히 토벌대를 지휘하는 것만으로 이번 위기를 타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이번 토벌에서 토벌대가 무사하려면 데스나이트부터 쓰러트려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느낀 것이 분명했다.
데스나이트를 쓰러트리지 않는다면, 언데드들은 그 이름 그대로 계속해서 살아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A랭크 헌터 넷에 S랭크 몬스터 하나.
수적으로는 당연히 헌터들이 유리했지만, 양쪽의 랭크가 다르다.
고랭크부터는 단순한 랭크 하나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A랭크 헌터가 넷이라고는 해도, S랭크 몬스터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도 그냥 S랭크 몬스터가 아니라, 추정하기로 구역주인 게 분명한 S랭크 몬스터다.
헌터들로서는 아마 버티는 것만 해도 용한 게 아닐까?
실제 헌터들과 데스나이트의 싸움은 내 예상과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하는 A랭크 헌터들이라 하더라도 S랭크에다가 구역주인 데스나이트를 상대로 버틸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는 따로 다른 언데드들이 방해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은 데스나이트 단 하나를 상대로 속절없이 밀려났다.
눈 깜짝할 순간, 토벌대를 지휘하던 A랭크 헌터 중 하나가 데스 나이트의 일검에 두 쪽으로 갈라졌다.
"젠장…!"
"크윽…!"
"허억… 허억…."
세 헌터가 제각기 다른 반응을 내보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처음과 같이 묵묵히 바라보며 데스 나이트가 철그덕-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녀석은 헌터들에게 조금의 쉴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죽어라.]
스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와 함께 데스나이트가 이지민에게 검을 휘둘렀다.
묵직한 중검이 이지민을 베어 가르기 위해 쉼 없이 내리꽂혔다.
"크윽…! 큭!"
"젠장, 지민아─!"
제 연인을 지키기 위해 곽수용이 달려들었다.
그런 그를 보조하기 위해 또 다른 A랭크 헌터 역시 몸을 날렸고,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두 헌터의 모습에 데스나이트가 태연히 손을 들어 올렸다.
[죽어라.]
특유의 어두침침한 마력과 스산한 사기가 뭉치기 시작한다.
건틀릿 끝자락에 둥글게 모인 어두운 구체는 기다리지 않고 곧장 저를 향해 덤벼드는 헌터들을 향해 날아갔다.
"피해요!"
일찌감치 위화감을 느끼고 막아내는 대신에 몸을 피한 A랭크 헌터와 달리, 제 연인을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가던 곽수용은 피하는 대신에 막아내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곽수용에게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끄… 끄아아악!"
"수용아─!!!"
연달아 울리는 두 연인의 목소리.
검은 구체에 적중당한 곽수용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고통에 연신 몸을 비틀었다.
수려한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진다.
그리고 그런 연인의 모습에 안타까운 비명을 내지른 이지민이었지만, 그녀에게도 제 연인을 챙길 여유 따윈 없었다.
제 연인에게 신경 쓴다고 드러난 잠깐의 틈을 데스나이트는 놓치지 않았다.
녀석이 재차 검을 내리찍는다.
"꺄아아악!"
서걱─
주인 잃은 팔이 힘없이 모랫바닥을 구른다.
천만다행으로 마지막 순간 몸을 피해 팔 한 짝만으로 그쳤지만, 데스나이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잘려나간 제 팔이 있던 어깻죽지를 붙잡은 채 고통을 삼키던 이지민을 데스나이트는 끝까지 노렸다.
"지, 지민아…!"
고통에 여전히 바닥을 구르면서도 제 연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곽수용은 이윽고 데스나이트의 검에 몸을 관통당한 제 연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끄, 끄아아…."
"아, 안돼! 지민아! 지만아아──!!!"
그 순간만큼은 제 몸을 괴롭히는 끔찍한 고통조차 잊고, 곽수용이 애달프게 제 연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곽수용이 그러거나 말거나 데스나이트는 묵묵히 검을 들어 올렸다.
검 끝에 매달린 이지민의 신형이 애처롭게 흔들린다.
그리고 가볍게 검을 털어내는 데스나이트의 행동에 결국 이지민의 몸이 모랫바닥을 굴렀다.
시뻘건 핏물이 순식간에 모래 위를 가득 적셨다.
"지민아아아──!!!"
"아, 안 됩니다, 곽수용 헌터! 위험…!"
뒤에서 저를 제지하는 A랭크 헌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곽수용이 제 연인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서걱─
달려나가던 곽수용의 머리를 데스나이트가 너무나 쉽게 베어냈다.
툭- 데구르르르….
몸뚱이 잃은 머리가 어렵사리 제 연인의 곁에 닿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나는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다.
팬심을 가지고 있던 두 헌터가 너무나 허무하게 간 것도 충격에 한몫하기는 했지만, 정확히 팬심보다는 전혀 다른 이유로 소름이 돋았다.
너무나 압도적이다.
아무리 랭크 차이가 난다지만, 그렇다고 저렇게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가 있을까?
분명 저들도 나름 재능 있는 헌터들인데.
그중에서도 곽수용과 이지민이라면 머지않아 S랭크 헌터가 될 것이라 기대받던 이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두 사람마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니.
두려운 한편 묘한 동경심도 생겼다.
헌터들이 아닌 저 데스나이트 녀석에게.
녀석의 압도적인 강함에 매료된다.
가능하면 녀석을 목표로 나도 강해지고 싶다.
당장 녀석을 적수로 삼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아직 넘을 수 없는 큼지막한 벽이 두 개나 있었으니까.
적어도 A랭크가 되기 전까지는 언감생심 쳐다볼 수도 없었다.
'아니, A랭크가 되어서도 당분간 쳐다볼 수 없겠지.'
녀석 정도로 강해지려면 얼마만큼 시간이 필요할까?
지금의 성장 속도를 보면 그리 멀지만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마냥 가깝지만도 않았다.
적어도 내가 다 성장할 때까지 녀석이 그대로 살아 있어 줬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그건 무리가 아닐까?
이번 헌터들의 토벌은 실패했지만, 토벌이 실패한 만큼 더 강한 전력이 녀석을 토벌하기 위해 찾아올 테니까.
안타깝지만 역시 녀석을 내 적수로 삼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눈 깜짝할 새 A랭크 헌터들 셋을 잃은 토벌대의 사기는 당연하게도 바닥을 기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A랭크 헌터가 녀석에게 맞서는 대신에 토벌대를 지휘하는 쪽으로 역할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렇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날뛰기 시작한 데스나이트는 마치 학살자처럼 헌터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절망 그 자체다.
이제 정말 더 볼 것은 없겠구나.
괜히 이 자리에 남아 있다가 저 재해나 다름없는 녀석에게 들킬 염려도 있으니 슬슬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곧장 다음 계층으로 이동하는 게 낫겠지.
결국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얻은 건 없지만, 재밌는 구경을 했으니 나름대로 만족이다.
이제는 다음 계층으로 이동해서 여유롭게 사냥이나 해야겠다.
며칠째 언데드만 먹었더니 영 속이 메슥거린다.
그렇게 학살당하는 헌터들을 뒤로한 채 몸을 돌리려던 나는 불쑥 들려온 '쿵─'하는 소음에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언데드 군단의 한가운데, 막 살해당하려던 A랭크 헌터와 데스나이트의 사이에 무언가 내려섰다.
"원정 갔다가 복귀하는 중인데… 이게 다 웬 소란입니까?"
선혈이 난무하는 전장 한가운데서 내뱉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목소리.
여유롭게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는 남자는 분명 보통의 헌터가 아니었다.
데스나이트와 같은 S랭크.
국내에 채 스무 명도 되지 않는 S랭크 헌터가 지금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44화
헌터와 몬스터의 랭크는 기준점이 다르다.
저랭크에서는 몬스터보다 헌터가 강하고, 고랭크로 갈수록 헌터에 비해 몬스터가 강해진다.
A나 B랭크 정도 되면 거의 동률이거나 몬스터가 더 강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S랭크라면 당연히 헌터에 비해 몬스터가 강하다.
헌터로서의 S랭크 기준은 S랭크 몬스터를 상대로 버틸 수 있냐, 없냐로 나뉜다.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버티는 것이다.
그만큼 같은 S랭크라 하더라도 몬스터와 헌터 간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일 뿐이다.
절대적이지는 않다.
헌터에 따라서는, 또는 몬스터에 따라서 이런 법칙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단신으로 SS랭크 몬스터를 사냥했던 성재명이나 미국의 가르시아가 있다.
둘은 같은 헌터임에도 다른 헌터들과는 여러모로 달랐으니까.
어찌 되었든 S랭크 헌터라 하더라도, 꼭 S랭크 몬스터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디까지나 S랭크 몬스터를 상대로 버틸 수 있다뿐이지, 실제 전투를 벌이면 다른 헌터들의 도움을 받아 사냥하는 게 기본이다.
원래 헌터란 홀로 사냥하는 것이 아닌, 동료들과 함께 사냥하는 자들이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조금 달랐다.
"다, 당신은…?"
"길드 '성호' 소속의 제3 공대, 공대장을 맡은 차원택입니다. 그나저나 이건 무슨 상황이죠?"
"서, 성호라면…! 5대 길드 중 하나! 거기다 3공대장이라면…."
"부, 분명 S랭크야!"
"사, 살았어! 살았다고!"
S랭크 헌터의 등장에 희망을 엿본 헌터들이 기뻐한다.
그런 헌터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가볍게 웃은 S랭크 헌터, 차원택이 흘깃 시선을 돌렸다.
그가 처음 등장한 이후부터 잔뜩 경계하며 저를 가만히 노려다 보는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 S랭크 몬스터군요."
나지막이 중얼거린 차원택이 흘깃 살아남은 헌터들을 살폈다.
"S랭크 몬스터를 상대로 고작 이 정도 전력으로 싸웠다고? 혹시 자살 특공대입니까?"
"…원래는 S랭크가 아니었습니다. 전투 중에 헌터들을 해치우고 진화했죠. 저흰 계층주 토벌을 위해 협회의 공문을 받고 파견된 헌터들입니다."
"호오… 그것참…."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중얼거린 차원택이 재차 데스나이트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시뻘건 안광을 토해내며 당장 달려들기라도 하려는 듯 차원택을 노려보고 있었다.
"진화 전에는 뭐였죠? 암흑기사? 사령기사? 아니면 듀라한?"
"듀라한이었습니다. '드레인 터치'로 상태를 회복하더군요."
"흠… 그렇군요. 특이 사항은?"
"검술 실력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어느 정도 지성도 갖고 있는 모양이고요."
"원래 기사 계열의 언데드 몬스터가 검술이 뛰어나긴 하죠."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차원택이 슬며시 제 검을 꺼내 들었다.
"왜 먼저 덤벼들지 않는가 했더니… 진화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었구나. 아직 경험이 적어."
차분히 중얼거린 차원택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함께 원정에서 귀환 중이던 공대원들이 이리로 오고 있었다.
그들이 도착하면 뒤는 문제없이 맡길 수 있을 터.
아직 중층 원정으로 인해 피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직 경험도 제대로 쌓지 못한 S랭크 몬스터를 상대로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차원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 공대원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버텨보도록 하죠. 뭐, 진화한 지 얼마 안 된 놈이니 어쩌면 그냥 혼자 토벌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슬쩍 말끝을 흐린 차원택이 A랭크 헌터를 돌아보았다.
별다른 말 없이 저를 돌아보는 시선에 A랭크 헌터가 단번에 그 뜻을 깨달았다.
"저 녀석에 대한 권리는 모두 포기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쇼."
"좋습니다. 곧 공대원들이 도착할 테니 그때까지만 최대한 버텨주세요. 제가 따로 챙겨 드리지는 못할 것 같아서…."
"네, 괜찮습니다. 오히려 따로 도와드리지 않아도 됩니까?"
조심스레 물어보는 A랭크 헌터의 대답에 차원택이 시원하게 웃었다.
"문제없습니다."
당당히 내뱉은 차원택이 훌쩍 몸을 날렸다.
S랭크 몬스터와 S랭크 헌터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차원택은 데스나이트를 빠르게 몰아쳤다.
데스나이트에게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노리고 단기 결전을 노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차원택의 노림수는 정확히 먹혀들었다.
A랭크 헌터들을 상대로 농락하던 데스나이트가 이제는 완전히 입장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데스나이트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차원택은 녀석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러면서도 앞서 A랭크 헌터가 경고했던 대로 드레인 터치를 생각해 일정 거리 이상은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
"역시 경험이 적군. 게다가…."
데스나이트의 일검을 피해내고 가볍게 검을 휘두른 차원택이 무심히 내뱉는다.
"어중간하게 지성이 생긴 덕에 언데드로서의 강점을 잃었어."
언데드로서의 강점이 무엇일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차원택이 생각하는 언데드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끝없는 적의와 살의였다.
증오를 넘어선 그 감정 탓에 제 몸 하나 제대로 돌보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덤벼든다.
어찌 보면 단점이라 할 수 있는 그것은 별다른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신체가 훼손돼도 큰 상관이 없는 언데드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다.
그런데 눈앞의 데스나이트는 어떨까?
진화한 탓에 지성이 생긴 것이 문제였다.
여전히 생명에 대한 증오는 남아 있었지만 생겨난 지성 탓에 손실을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 몸을 최대한 지키고 상대에게는 최대한의 피해를 준다.
어찌 보면 싸움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녀석에게는 모르니만 못한 것이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였다면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어중간하게 손실을 따지다 보니 오히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검을 내질렀으면 차원택에게 제법 큰 피해를 줬을지 모를 순간에 데스나이트는 저를 공격해오는 차원택의 검을 두려워해 몸을 피했다.
철그덕- 철그덕-
갑옷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는 데스나이트를 바라보며 차원택이 차분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나겠군."
대충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보인다.
담담히 고개를 주억인 차원택은 흘깃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도착한 차원택의 공대원들이 하나둘 언데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막 구역 너머, 대규모 전투가 주를 이루는 평야 구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다 보니 무지막지한 숫자의 언데드들을 상대로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몇몇은 혹시나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차원택과 데스나이트의 싸움을 여유롭게 지켜볼 정도였다.
한차례 그들을 살피던 차원택이 이내 검을 다잡았다.
지켜보는 이들이 나설 일 없도록 깔끔하게 끝낼 생각이었다.
이런 놈을 상대로 괜히 경험을 쌓도록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한 번에 끝내자.
차분히 속으로 중얼거린 차원택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커다란 반월을 그렸다.
* * *
S랭크 헌터와 S랭크 몬스터의 싸움.
지켜보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었다.
사실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미처 다 쫓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공부가 되었다.
S랭크라는 것이 어느 수준인지.
만약 그들을 적으로 만난다면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내 대답은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못 한다.'였다.
사고 가속까지 사용하며 고민했지만 답은 언제나 같다.
만약 현재 수준으로 S랭크를 마주친다면 정말 아무것도 못 할 것이 뻔했다.
그나마 A랭크가 상대라면 어찌 도망가거나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지만, S랭크는 다르다.
마주치는 순간 순삭이다.
데스나이트가 쓰러진 순간 언데드들을 감싸던 죽음의 오라가 사라졌다.
힘을 잃은 언데드들은 그렇지 않아도 그들을 여유롭게 상대하던 헌터들의 손에 순식간에 와해됐다.
언데드의 특성상 살아 있는 생명체를 보고도 도망갈 일은 없으니 뒷정리까지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를 가볍게 쓰러트린 S랭크 헌터까지 합류하자 정말 깔끔하게 끝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급히 몸을 돌렸다.
도망치자.
조금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서둘러 도망쳤다.
벌써부터 만약을 위해 주변을 정찰하는 헌터들이 하나둘 보이고 있다.
다행히 직접 움직인 S랭크 헌터는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지만, 뒤늦게 합류한 다른 헌터들은 굳이 휴식을 취할 필요도 없는지 여유롭게 산보하듯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A랭크도 여럿 있어서 더 조심히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조금… 아니, 상당히 무섭다.
은신이 있긴 하지만 최대한 헌터들을 피해서 움직였다.
저 많은 헌터 중에 내 은신을 꿰뚫어 볼 헌터가 하나쯤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분명 있을 거다.
S랭크 헌터와 뒤늦게 합류한 헌터들을 보니 분명 하층 원정에서 귀환 중이던 이들일 것이 분명한데.
하층 원정까지 다니는 이들 중에 뛰어난 감지 스킬을 가진 이가 하나쯤 없을 리 없었다.
마주치면 끔살이다.
조심조심 도망치자.
38계층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는 이미 몇 개고 발견해 놓았던 상태기에 당장 워프 게이트를 찾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비교적 외곽 쪽에 있는 워프 게이트를 골라 이동했다.
다행히 격전지였던 중심부를 벗어나자 더 정찰을 다니는 헌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방심은 금물이다.
언제 어디서 괴물 같은 헌터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워프 게이트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
이후 무사히 워프 게이트에 도착했다.
38계층으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를 보자마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S랭크 몬스터인 데스나이트를 봤을 때는 동경 비슷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지만, S랭크 헌터를 봤을 때는 공포부터 느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몬스터고 상대가 어디까지나 '헌터'이기 때문이겠지.
내가 어쩔 수 없는 몬스터란 것을 다시 한번 이렇게 느끼게 된다.
S랭크 헌터에게서 공포를 느꼈지만, 비교적 안전하다 싶은 38계층에 도착하자 또 다른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일종의 '오기'라고 할까?
아무것도 못 한 채 도망칠 궁리만 했던 나 자신이 한심하다.
물론 지금의 수준으로는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수치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조금 강해졌다 싶으면 또 항상 깨닫는다.
나는 아직 약하구나.
역시 미궁은 넓구나.
자만하지 말자.
더 강해지자.
사실 S랭크를 조금 무시하던 것도 없잖아 있었다.
미궁이 처음 등장했던 1세기 전이야 S랭크는커녕 A랭크도 몇 없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헌터들의 전체적인 수준이 꾸준히 상승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SS랭크 헌터들과 SA랭크 헌터도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성재명 사후 쇠퇴하고 있는 국내 헌터계는 몰라도, 미국같이 헌터 강대국으로 통하는 나라에는 수많은 S랭크 헌터가 있다.
발에 치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 명의 존재에 일희일비할 정도까지도 아니었다.
당장 바로 옆나라인 중국과 일본만 하더라도 S랭크 헌터가 수십 명씩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나는 S랭크 헌터를 조금 얕보고 있었다.
흔한 만큼 그리 대단치 않다고.
하지만 직접 본 S랭크 헌터는 역시 다르다.
은연중에 무시하던 마음이 쏙 사라질 정도로.
무시는커녕 오히려 경계하게 될 정도다.
내가 계속 몬스터로 살아간다면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한 이들.
그것도 아군이 아닌 적으로.
그때 과연 내가 그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조금 불안해졌다.
제45화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자 선택한 것은 싸움이었다.
정신없이 몰두했다.
쉼 없이 사냥하고, 전투하고, 투쟁했다.
가만히 있으면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안감에 더 없이 열중했다.
적어도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만큼은 불안감이라던지 다른 잡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에 불안함을 덜기에 이것만큼 최선의 선택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성장이 더디다.
38계층에 도착한 이후 일전에 느꼈던 불안함을 지우고자 정신없이 노력했지만, 어느 순간만큼 눈에 띄는 변화가 줄어들었다.
이따금 들려오던 상태창의 알림도 어느 순간부터 들려오지 않았다.
정체된 것이다.
이런 정체 구간은 지금껏 여럿 있어 왔지만, 이번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함을 느꼈다.
이런 조급함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37계층에서 느꼈던 당시의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다.
지금껏 노력만 하면 나 역시 그때 보았던 것만큼이나 강해질 수 있다고.
오히려 그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조금 자신이 없다.
막힘없이 성장하다 정체 구간에 들어섰기에 그런 감정은 더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괴물 같은 이들 사이에서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차오를 때마다 '나는 할 수 있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노력하면 된다.'라고 끊임없이 스스로 되뇌어 왔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원래 마음이란 것이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사냥에 열중했다.
전투를 벌이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싸웠다.
비록 성장을 알리는 상태창의 알림 같은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렇게라도 해야 다른 잡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 * *
[리빙 아머]라는 이름의 몬스터가 있다.
중위급 언데드에 속하는 사령형 몬스터로, 진화하면 듀라한과 같은 사령기사 계열이 되는 몬스터다.
평균 랭크는 C에서 D.
개체에 따라서는 B랭크까지 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그 전에 다른 상위종 언데드로 진화하는 경우가 많기에 볼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
나는 이 녀석을 사막 한가운데서 만났다.
이름 그대로 육신은 썩어 사라지고 영혼만이 남아 부유하는 기사의 갑옷.
개체에 따라서는 검이나 창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 만난 녀석은 별다른 무기는 없었다.
그저 으스스한 빛을 발하며 사막을 조용히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추정 랭크는 C.
덩치도 그렇고 랭크도 그렇고 한입에 꿀꺽하기에 제격이었지만, 그게 그리 쉽지가 않다.
여러 개체가 함께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리빙 아머를 제외하면 상위 개체가 없었기에 조금 의문이다.
일전에 37계층에 봤을 때처럼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해도 이상한 것은 이상한 것이다.
보통 상위 개체가 없는 경우라면 언데드들은 무리 지어 움직이기보다는 따로 방황하는 것이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상황에 고민하는 한편 곧장 습격을 개시했다.
따로 재볼 것도 없었다.
괜히 고민하다 보면 잡생각이 들고, 잡생각이 든다면 또다시 스멀스멀 불안함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일단 쓰러트리고 생각하자.
뭉쳐 있는 리빙 아머들은 나보다 랭크는 낮았지만 그래도 숫자가 열에 가까웠다.
당장 숫자로만 보면 C랭크 헌터 열 명이 있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진짜 C랭크 헌터 열 명이라고 보기에는 리빙 아머들 쪽이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쪽으로서는 조금 부담스러운 숫자다.
예전 같았다면 신중하게 이것저것 따져보며 움직였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굳이 따져볼 필요가 없다.
그동안 치른 수많은 전투로 숙달된 육체가 알아서 반응한다.
어지간한 공격은 내 내구를 뚫지도 못하고 설령 뚫는다고 하더라도 재생이 있다면 문제없다.
그렇게 조금 막무가내에 가깝게 전투를 벌였다.
승리한 것은 당연히 나다.
열에 가까운 리빙 아머를 정리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쉽다.
또한 그럼에도 불안하다.
이번 전투만 봐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안심이 되지는 않는다.
37계층에서 내 머릿속에 새겨진 기억들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늘 밖의 또 다른 하늘은 본 것만 같다.
이러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되뇌어 보지만 언제나처럼 별 효과는 없다.
또다시 몸을 움직인다.
괜한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몸을 움직였다.
* * *
리빙 아머 무리를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둔 이날 밤.
은신처로 사용하는 바위산의 깊숙한 동굴 안에서 조용히 똬리를 틀었다.
그 이후 몇 차례 정도 더 전투를 벌이고 승리했으나 아무렇지도 않다.
이렇다 할 능력치의 성장도 없고 스킬의 성장도 없다.
아무런 성장도 없으니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렇기에 남는 것은 언제나처럼 스멀스멀 찾아오는 불안함 뿐.
언제나처럼 눈을 감고 잠을 청해 그냥 외면해 버리고 싶지만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모른 척 미루던 것을 매듭지어야 하는 걸까?
똬리를 튼 채 앉아 조용히 고민했다.
내가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
직접적인 계기는 역시 37계층에서 보았던 헌터들 탓이다.
괴물(몬스터)보다 더 괴물 같던 무지막지한 이들.
그들과 비교해 보자면 나는 너무나 초라하다.
열심히 성장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멀었다.
그러한 사실에 나는 불안함을 느꼈다.
나 역시 내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압도적인 헌터들과의 격차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시간만 주어진다면 분명 그들만큼이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성장할 것이란 자신이 있다.
사실 내가 정말 걱정하는 것은 그들을 따라가지 못할 것에서 오는 걱정이 아니다.
이제부터 넘어갈 다음 계층들에는 그런 헌터들이 정말 차고 넘칠 텐데, 과연 성장할 때까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걱정이다.
미처 내가 다 성장하지 못한 사이 데스나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토벌당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몬스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닐까?
복수도 해보지 못하고?
그래, 사실 내가 정말 불안함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는 복수 때문이다.
37계층에서의 기억들이 계기가 되어준 것은 맞지만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은 최초의 다짐이었던 '복수'다.
신재준. 김준수. 이하나.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지금껏 의도적으로 애써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잊고 있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가슴 한쪽에 묻어두고 잊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복수할 거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던 이들의 뒷모습.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그것이 나를 버리고 도망쳐야 될 이유는 될 수 없다.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내 사정은 다르다.
이러한 복수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나는 이 삶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딱히 복수를 내 삶의 최종 목표로 삼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도 없다.
당시 내가 느꼈던 배신감과 무력감, 그리고 공포와 절망까지.
그 모든 것을 그들에게 똑똑히 알려주고 싶다.
그래서 걱정이다.
또한 두렵다.
내가 복수를 할 정도로 성장하기 전에 그때 보았던 헌터들 같은 괴물들 손에 무참히 토벌당할까 봐.
따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나름 괜찮게 성장했고, 그때 보았던 수준의 헌터들이 아니라면 복수도 가능한 거 아닐까?
다른 변수가 생기기 전에 일찍이 복수를 끝마치는 게 좋지 않을까?
당시 그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로도 충분히 복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 생각했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막연하게 복수하자 생각해 왔지만 정작 세세한 계획은 아직 그 무엇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들의 현재 수준이나 위치 등등 복수를 위해 알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뱀(몬스터)다.
그것도 그리 덩치가 작지 않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미궁 안보다 미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유리할 텐데, 이러한 내가 과연 미궁 밖으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은신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해보긴 했지만, 이쪽의 기척을 읽을 수 있는 헌터가 있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곧장 들키고 토벌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
이렇듯 당장 내가 복수를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계획들 세워보기는 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단순한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언제나 그렇듯 당장의 정답은 강해지는 것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함의 계기나 근본에 대해서 스스로 짚고 넘어갔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고 당장 강해진 것도 아니다.
불안함이 해소된 것도 아니며 뚜렷한 해법이 나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단순히 외면하고 있던 것을 직접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여전히 가슴 한편에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지만, 한결 나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이걸로 또 얼마 동안은 잘해나갈 수 있겠지.
분명 그럴 거다.
* * *
그렇지 않았다.
헌터들을 만났다.
대략 50명 정도일까?
37계층에서 보았던 S랭크 헌터같이 괴물 같은 헌터는 없었지만 하나하나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평야 구역으로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건가 보다.
안 건드릴 테니 그냥 지나가 주세요.
제발….
못 본 척 무심히 지나가려 했는데 저쪽은 그럴 생각이 없나 보다.
곧장 무기를 빼 들고 덤벼든다.
선두에는 A랭크 헌터.
그 뒤를 따르는 B랭크 헌터들과 C랭크 헌터들.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무래도 난 잘해나갈 수 없는 모양이다.
* * *
어찌어찌 도망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샌드 웜] 무리와 마주쳐서 다행이다.
나름 비슷하게 생겼다고 도와준 걸까?
샌드 웜은 지렁이고 나는 나름 뱀이니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적어도 길쭉한 거 하나만큼은.
겨우 어느 정도 마음먹고 잘해 보려 했는데….
잘해 보기는커녕 불안함만 더 커졌다.
역시 미궁은 위험하다.
이러다 우울증이라도 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몬스터가 우울증에 걸리면 치료는 어떻게 받지?
어찌 되었든 내 일과는 크게 변함이 없다.
불안함과 조급함 때문이라도 나는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수많은 사냥과 전투를 벌였다.
별다른 휴식 시간도 없이 숨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고 정체되어 있던 성장도 느리지만 조금씩 진행됐다.
그제야 그동안 나를 압박하던 불안함과 조급함도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사냥을 계속했고 전투를 했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쉴 생각은 없다.
투쟁의 연속이다.
그렇게 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제46화
산림 구역을 떠나온 지 어느덧 10개월이 흘렀다.
어느덧 뱀이 된 지도 1년이 훌쩍 넘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나는 지금 사막 구역 41계층에 있다.
사막 구역의 마지막 층인 41계층.
별달리 특이한 것은 없다.
그저 초입과 비교해서 유달리 짙어진 마력 농도 정도가 전부다.
오늘 나는 사막 구역을 떠나 평야 구역으로 넘어갈 생각이다.
사막 구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름 : 유준영(?)
-종족 : 몬스터 - [프레데터 보아]▶상세 보기
-능력치
힘 B56 / 체력 B58 / 민첩 B55 / 내구 B60 / 마력 A2
-스킬
유체이탈SS [사용 불가], 근성A, 한계돌파S, 암영S, 기습A, 조이기B, 직감A, 급속재생A, 돌진A, 극독A, 위압A, 카운터B, 독 내성S, 테일 스트라이크A, 폭식S, 두꺼운 비늘B, 마력조작A, 사고가속B, 신체강화B, 마안D, 더위저항B, 추위저항C, 독마법B, 마력저항B
전체적인 능력치가 B랭크의 끝자락에 다다라있다.
지금이라면 약한 A랭크 몬스터하고도 충분히 비빌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사실 사막 구역에서 더 지내고자 한다면 얼마 정도 더 머물러도 되겠으나, 그러지 않았다.
딱히 사막 구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최근 들어 헌터들의 동태가 수상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간 머무르며 너무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닐까 싶다.
항상 움직일 때마다 내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고는 했으나, 그것도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헌터보다는 몬스터 위주로 사냥했음에도 최근 헌터들이 내 행적을 발견한 것 같다.
당장 대규모 토벌대가 파견된 건 아니지만, 이따금 주변을 정찰하듯 살피는 헌터들의 모습이 보이니 조심할 필요를 느꼈다.
역시 헌터들이 수색 중인 곳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좋겠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평야 구역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평야 구역은 몬스터가 대규모로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전처럼 단순히 몇 마리 정도가 무리를 짓는 것이 아닌 수십 수백 마리가 함께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데, 상위 개체, 그것도 계층주급의 언데드가 만든 군단이 보통으로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야 구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수십 수백이 뭉친 대규모 원정대가 기본이다.
예외적으로 소수로 활동하는 헌터들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럴 경우에는 공격대 전원이 고랭크 이상의 헌터였다.
평야 구역의 대표적인 특징은 역시 몬스터가 대규모로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것이지만, 사실 헌터들이 꼽는 평야 구역의 특징은 바로 그 기후에 있다.
평야 구역은 1년 365일 내내 태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1년 중 맑은 날은 하루도 없고 연중무휴로 폭풍을 동반한 천둥·번개가 내리친다.
어쩌다 조금 괜찮다 싶은 날에도 햇빛은커녕 온종일 뿌옇기만 하다고 하니, 조금 걱정이다.
헌터들이 꼽기로는 미궁에서도 가장 극적인 기후를 자랑하는 곳.
나는 평야 구역으로 들어섰다.
* * *
평야 구역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소문으로 들은 내용이라 어느 정도 얕보고 있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는데, 실제 겪어본 평야 구역의 날씨는 정말로 어메이징했다.
몬스터가 날아다닌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날개가 있다거나 다른 몬스터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 단순한 날씨 때문에 말이다.
몬스터를 날려 보낼 정도의 날씨를 '단순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평야 구역에 도착한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세찬 비바람에 의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였다.
그것도 꽤나 무게가 나가는 [오크]가 말이다.
여러모로 문화적 충격을 느낀다.
헌터들에 들키거나 말거나 조금 더 사막 구역에서 머무를 걸 그랬나?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은 과연 듣던 그대로 명불허전이었다.
처음에 오크가 날아다니던 게 잘못 본 게 아닌 듯 내 커다란 몸도 들썩거릴 정도로 바람이 거칠다.
자칫 잘못하다간 나까지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달까?
정말 농담이 아니다.
일단 몸부터 피할 곳을 찾았다.
평야 구역의 날씨는 사막 구역의 모래 푹풍이 우스울 정도였다.
모래 폭풍은 아무리 심해봤자 모래 좀 날리는 게 전부인데, 이곳의 폭풍은 그 이상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전부 그 이상을 보여준다.
사막 구역은 평야 구역과 비교하면 정말 천국이 따로 없다.
벌써부터 돌아가고 싶다.
사막 구역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으로만 그쳤다.
아무리 날씨가 더러워도 목숨이 위험한 사막 구역보다는 낫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태풍이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평야 구역에 도착한 지도 벌써 나흘째지만 첫날 도착한 작은 토굴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
저장된 에너지야 아직 충분하지만, 하루 종일 이렇게 좁은 토굴 속에 갇혀 있다 보니 너무 답답하다.
흘깃 밖을 살피면 오크를 포함한 몇몇 종의 몬스터들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역시 이곳에선 이게 보통이란 것일까?
여러모로 존경심이 생긴다.
열흘째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폭풍에 결국 토굴 밖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슬슬 저장된 에너지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폭풍이 심하긴 하지만 먹고는 살아야지.
이야기를 들었던 대로 오크들은 커다란 무리를 지어 활동했다.
단순히 산림 구역의 리자드맨들처럼 부족끼리 무리를 짓는 게 아닌 그 이상의 숫자가 함께 생활한다.
대략 그 숫자만 해도 3, 400은 거뜬히 될 것 같다.
개체들의 평균 랭크는 고작 C 정도지만 저렇게 숫자가 많아서야 덤벼들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별 수확도 없이 사냥을 끝냈다.
강제 다이어트인가?
* * *
평야 구역에서의 몬스터들은 대부분 무리를 지어 활동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몬스터도 있다.
무리를 지을 필요가 없이 강하거나 반대로 무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하거나.
내가 사냥한 몬스터는 당연하게도 후자였다.
전자에 해당하는 몬스터들은 거의 계층주급 몬스터로 A랭크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타르마딜로]라는 몬스터가 있다.
흔히 아는 '아르마딜로'와 비슷한 생김새의 몬스터인데 덩치가 꽤 크다.
대략 1미터 정도의 사이즈.
내 입장에서 한입에 먹기 딱 좋은 크기다.
그 랭크는 D에서 E.
덩치에 비해 그 랭크가 상당히 낮은 녀석인데, 단단한 등딱지 정도를 제외하면 별다른 공격 수단도 없고 특징도 없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지 않는 녀석들을 중심으로 사냥했다.
가끔씩 몇 마리가 뭉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오크들에 비하면 적은 숫자다.
게다가 랭크까지 낮고, 오크들과 달리 굳이 포기할 필요가 없는 상대다.
사실 이 녀석들보다는 오랜만에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으나 함부로 오크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사냥했다.
녀석들의 맛은 꽤 나쁘지 않았으나 반쯤 돼지고기에 꽂혀 있는 나로서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언젠가 강해지게 된다면 반드시 돼지고기를 먹을 테다.
몰아치는 태풍은 조금도 잠잠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라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혹시 다른 계층은 조금 낫지 않을까?
급히 43계층으로 이동했다.
* * *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쪽도 역시 마찬가지구나.
어쨌거나 같은 평야 구역이니까.
아, 오크가 날아다닌다.
그냥 다시 돌아갈까?
다시 42계층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으나 기왕 43계층까지 온 거 계속 이곳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42계층에 비해 이곳이 조금 더 바람이 심한 것 같기는 해도 결국 이것저것 비교하면 둘 다 비슷했기 때문이다.
딱히 평야 구역에서 얼마 동안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이전 사막 구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자연스레 떠날 때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사막 구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득하게 머물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 생각이 달라졌다.
평야 구역의 날씨가 조금… 너무 그랬기 때문이다.
속 시원히 말해서 정말 지랄 맞다.
다른 건 다 어찌어찌 참아도 습하고 꿉꿉한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래, 그냥 평야 구역은 빠르게 넘어가자.
그렇지 않아도 몬스터건, 헌터건 하나같이 무리를 지어 단체로 행동하는 곳이다.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다음 구역인 용암 구역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물론 지금 당장의 내 수준으로 용암 구역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끔찍한 날씨를 피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겠다 싶다.
조금 위험한 게 성장에도 좋을 테고.
그렇게 최소한의 명분을 만들어내며 나는 평야 구역을 빠르게 떠날 것을 결정했다.
* * *
내게는 <마안>이라는 스킬이 있다.
비록 '마안'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가진 능력은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천리안'뿐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은 스킬이라 생각한다.
가끔씩 멀리 떨어진 헌터들을 관찰할 때 정말 유용하게 써먹었다.
특히나 지금 같이 태풍 때문에 혀의 감지 능력이 크게 떨어졌을 때는 마력 감지와 함께 훌륭한 감지 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처음에는 분명 거의 계륵이나 다름없는 스킬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분명 내게 유용한 스킬 중에 하나다.
이런 마안에도 변화가 생겼다.
랭크가 오르며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다.
그 능력은 바로 '매혹의 마안'.
상대를 매혹해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다.
눈을 마주한 상대에게 간단한 암시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정신 지배를 할 수 있는 능력인데, 아직 그 랭크가 낮아 효과나 위력도 낮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 역시 다른 스킬들처럼 랭크가 오르면 성장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스킬이랄까?
앞으로는 가능한 한 자주 써먹어서 랭크를 열심히 높여 봐야겠다.
그나저나 <마안>은 랭크가 오를 때마다 새로운 능력이 추가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앞으로도 또 새로운 능력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건데….
마안의 랭크를 열심히 높일 또 다른 이유가 늘어난 것 같다.
아무래도 앞으로 눈이 건조해질 것 같은데, 어디서 좋은 안약이라도 미리 구해야 하는 거 아닐까?
마안의 새로운 능력을 파악한 내가 가장 먼저 행한 것은 오크를 사냥하는 것이었다.
돼지고기 먹어야지.
* * *
그들이 생활하는 대규모 부락에서 조금 떨어진 오크 하나와 슬며시 눈을 마주했다.
오크의 기본 랭크가 있는 만큼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아무래도 복잡한 암시가 아닌 그저 간단한 암시였기 때문인 모양이다.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멍하니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오크를 덥썩 집어삼켰다.
비록 돼지 특유의 노린내나 이런저런 잡다한 냄새가 함께 어우러져 내가 상상하던 돼지 맛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돼지고기란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다음에 화속성 마법이라도 배운다면 그때는 한번 구워 먹어 봐야겠다.
분명 맛있는 맛이 나겠지?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된다.
아, 그렇다고 평야 구역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다.
아무리 삼겹살이 좋다고 해도 평야 구역의 날씨는 좀 선을 넘었다.
돼지고기건 뭐건 하루빨리 이 지옥 같은 곳을 떠나고 싶다.
제47화
현재 내 능력치만 보자면 진화에 가깝지만, 실제 체감하기로는 아직 조금 멀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정확히 어느 정도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한다.
뭐, 지난 진화 이후로 꽤 시간이 흐른 만큼 이제 슬슬 진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하다.
물론 가능한 한 조급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딱히 성과를 보이지는 않지만.
사막 구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던 것이 언데드라면 평야 구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오크다.
사막 구역에서 언데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 돌아다니면 심심찮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언데드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딱히 상위 개체가 없더라도 항상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점이다.
이 녀석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다니지 않는다.
못해도 열댓 무리 이상이 항상 함께하고 있다.
그 랭크도 최소 C이상.
어지간한 헌터들만큼이나 전투력도 뛰어나고, 아무리 나라도 함부로 덤빌 수가 없다.
가끔씩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개체를 하나씩 처리하고는 있지만 워낙 그 숫자도 많고 번식력도 뛰어나다 보니 별 티도 안 난다.
그 무지막지한 숫자를 감당할 수 없는 나로서는 다행인 이야기였지만.
어찌 되었든 평야 구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오크라면 그 다음으로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의외로 헌터들이다.
정확히 자주 보인다기보다는 그만큼 많다는 뜻이지만, 어쨌거나 평야 구역에서 오크 다음으로 조우도가 높은 것은 바로 헌터들이다.
그런 만큼 나로서는 어느 때보다 주변 경계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했다간 내 존재를 들키고 어느 몬스터들처럼 토벌당할 수 있었으니까.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조심조심 숨어다닐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더러운 날씨 탓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차에 헌터들의 존재는 이런 내 스트레스를 한층 더 증가시켰다.
빠르게 평야 구역을 떠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한층 더 그럴 필요를 느낀다.
정말 최소한의 행동만으로 평야 구역을 떠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 때문에 내가 못 버틴다.
* * *
46계층에 도착했다.
46계층은 다른 계층들과 달리 거센 태풍이 없었다.
이곳은 설마 천국일까?
단순히 태풍만 없을 뿐이지 여전히 날도 흐리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그래도 지금껏 들렸던 다른 계층들에 비해 훨씬 좋은 날씨였기에 평야 구역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이 감정이 채 하루도 가지 못했지만.
도착한 첫날만 그랬을 뿐 46계층 역시 다른 계층들이 그랬듯 곧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 언제나처럼 내리치는 천둥·번개에 내 마음에도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그러면 그렇지.
괜히 좋다 말았다.
세상에 천국 같은 것은 없다.
* * *
47계층.
헌터들과 마주쳤다.
대략 100여 명 규모의 원정대에서 주변 정찰을 위해 파견한 정찰대인 모양이다.
인원은 세 명.
랭크는 전원이 B다.
그중 한 명이 꽤 뛰어난 감지 스킬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은신 상태인 나를 곧바로 찾아내더라.
당연하게도 마주치자마자 전투를 벌였다.
중간에 한 명이 지원을 부르기 위해 급히 도망가던데, 조금 상처를 입더라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없었다.
한꺼번에 몰려올 헌터들을 무슨 수로 상대하라고?
상처 따위야 재생으로 회복될 테니 문제도 아니었다.
세 명 다 B랭크이긴 했지만 전부 전투보다는 정찰에 특화되어 있는지 싸움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몰아치는 비바람만 아니었다면 더 빨리 끝냈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모래 폭풍 속에서도 싸워본 적 있지만 이곳의 폭풍은 그 정도가 달랐기에 영 적응되지 않았다.
아니, 이런 폭풍에 과연 적응할 수 있기는 할까?
역시 평야 구역은 나와 여러모로 맞지 않는 것 같다.
헌터들과의 싸움은 문제없이 끝났지만 몇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그 정도 규모의 원정대라면 정찰대가 하나만 있지 않을 것이고, 또한 실종된 헌터들의 행방에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란 점이다.
나를, 정확히는 실종된 헌터들을 찾기 위해 100여 명의 헌터들이 넓은 평야를 이 잡듯이 뒤졌다.
다행인지 S랭크 헌터는 없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A랭크 헌터의 숫자가 조금 많다.
마주치면 순삭이겠구나.
좋아, 도망치자.
조용히 다음 계층으로 도망치려 했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47계층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워프 게이트를 찾지 못한 것이 첫 번째 원인이요.
거센 비바람 탓에 혀의 감지가 평소보다 원활하지 못했던 것이 두 번째 원인이며.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조급했던 것이 세 번째 원인이었다.
괜히 게이트를 찾아 어슬렁거리다 이번에는 오크들을 마주쳤다.
[오크 버서커].
무려 A랭크에 해당하는 상위 개체와 마주쳤다.
그것도 단순한 오크가 아닌 [레드 오크]라는 종이다.
녀석들은 일반 오크보다 대략 세 배 정도 빠르고 강하다.
잘못 마주쳤다.
평야 구역은 역시 나랑 맞지 않는다.
레드 오크 버서커와 녀석을 따르는 [레드 오크 워리어]들.
그 숫자가 결코 적지 않다.
어찌 봐도 육십은 거뜬히 넘을 거 같다.
오크 버서커 하나만 있다면 어찌어찌해볼 텐데 저 숫자는 무리다.
일단 도망치는 것은 당연하고, 문제는 어떻게 도망치냐는 건데….
그렇군.
답이 없다.
"꾸워어어─."
"꾸에엑─ 꾹─."
이쪽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빨간 돼지들이 무섭다.
적당한 숫자였다면 분명 이쪽의 한 끼 식사였을 텐데 지금만큼은 오히려 이쪽이 녀석들의 한 끼 식사가 될 것 같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응?"
"큰일은 없을 거예요. 전투력은 낮아도 도망치는 실력 하나만큼은… 어?"
아직도 실종된 이들을 찾아 움직이는 헌터들.
높게 뻗은 수풀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들이 눈앞에 보이는 빨간 돼지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꾸에─?"
빨간 돼지들도 뒤늦게 헌터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양 진영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답을 찾았다.
따로 내가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이 침묵하던 헌터들과 오크들이 격돌했다.
순식간에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한 이들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물러섰다.
좋아, 이대로 도망치자.
슬며시 몸을 빼려던 찰나 번뜩 솟아오르는 생각에 멈칫했다.
이대로 도망치기엔 조금 아쉽지 않나?
그 잠깐 사이 내가 겪었던 치욕과 수모는 어쩌고?
다른 건 몰라도 저 빨간 돼지들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고작해야 돼지 주제에 나를 감히 먹이로 봐?
괘씸해서라도 맛있게 먹어 버려야겠다.
두 진영 간의 전투가 치열해지는 틈을 타 슬며시 싸움에 끼어들었다.
오크 버서커가 날뛰는 격전지가 아닌 외곽 쪽에서 움직일 생각이다.
조금 전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녀석 하나를 냉큼 먹어치웠다.
일반 오크들보다 세 배는 강하다더니 의외로 맛은 별 차이가 없었다.
헌터와 오크들, 딱히 누가 이겨도 별 상관은 없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서는 헌터들이 승리할 것 같다.
기본적으로 그 숫자에서도 헌터들 쪽이 많았고 전체적인 전력도 헌터들 쪽이 강했다.
점점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전투의 상황에 잠시 돼지고기 무한 리필을 즐기던 나도 슬며시 몸을 뺐다.
당했던 치욕을 완전히 되갚아 주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적당히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맘껏 포식하기도 했고.
이제는 정말 다음 계층으로 떠나자.
서둘러 워프 게이트를 찾자.
다행히 전투 이후에 헌터들은 딱히 수색을 더 계속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한 피로 탓인지, 아니면 실종된 이들이 오크에게 당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만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당장 급하게 워프 게이트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도 안 보여서 슬슬 불안해지던 차였는데 다행이다.
찾을 때는 지지리도 보이지 않던 워프 게이트가 조금 여유로워지니 금세 나타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떡하니 나타난 게이트의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다.
세상… 아니, 미궁의 악의가 느껴진다.
어쨌거나 48계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48계층.
별다른 건 없다.
여전히 천둥·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지긋지긋하게 몰아쳤고 오크가 날아다닌다.
헌터들이 정찰을 돌고 몬스터를 사냥한다.
딱히 별다른 트러블 없이 워프 게이트를 찾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 *
49계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