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판타지 모나크.
인간, 엘프, 오크, 드워프 등등 여러 종족들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판타지 월드에서 자신만의 군단을 이끌고 세계를 호령하는 가상현실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플레이어는 마치 진짜 전장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 넘치는 전투를 체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검과 마법의 세계에서 다양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최전선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돌진하는 기사나 홀로 전장을 종횡하는 칼잡이부터 직접 싸우는 대신 수천,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히트를 친 판타지 모나크를 플레이하는 사람의 수는 수천만에 달했고, 자연 판타지 모나크 속에는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여러 유명 군단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군단들 가운데서도 최강의 군단을 꼽으라면 모두가 오직 하나의 이름만을 떠올렸다.
검은 늑대들.
칠흑의 갑주와 창으로 무장한 중갑 기사단을 주축으로 한 고기동 병단.
공식전 기록 128전 128승 무패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가진 이 군단의 군단장인 흑기사09를 사람들은 최강의 플레이어라 불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그를 최강의 플레이어라 부르는 이유가 최강의 군단인 검은 늑대들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검은 늑대들의 주인.
흑기사09.
판타지 모나크의 수많은 군주들 가운데서도 정점에 선 그는 최고의 전장지휘관인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강한, 문자 그대로 최강의 기사였다.
총사령관이 최전선에서 직접 싸우면서 전군을 통솔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그냥 하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안 되게 잘하는 것이 바로 흑기사09였다.
"검은 늑대들이 최강인 이유의 팔 할은 그냥 흑기사09의 존재 그 자체일걸요?"
"흑기사09는 그냥 싸움을 잘해. 타고났어."
판타지 모나크의 랭커들에게서 온갖 종류의 감탄을 이끌어 내는 존재인 흑기사09- 천유성은 지금 무척이나 흥분하고 있었다.
[카멜롯의 기사왕: 성왕 아서 팬드래건의 힘을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습니다.]
눈앞에 떠오른 문구에 유성은 다시 한번 눈을 깜박였다.
기사왕 자체야 현재 유성의 게임상 직업이었으니 놀라울 게 없었지만 '성왕 아서'는 달랐기 때문이다.
"성왕 아서면 설마 그 아서?"
판타지와 벽을 쌓고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검인 엑스칼리버의 주인.
세계의 온갖 신화와 전설을 모티프로 사용하는 판타지 모나크였지만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은 아서 왕 전설이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막상 게임 내에서는 아서 왕이나 원탁의 기사들과 관련된 요소들을 그리 찾아볼 수 없었다.
판타지 모나크에 설정으로만 존재하는 아서 왕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최초의 성왕.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온갖 악신들과 괴물들을 물리치고 인간의 시대를 연 자.
호수의 여신이 별빛을 벼려 만들었다는 별의 성검 엑스칼리버의 주인.
기사들 중의 기사들이라는 원탁의 기사들을 이끄는 자.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오백여 년 전 엑스칼리버와 함께 사라진, 그렇기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왕.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정확히는 아서 왕과 관련된 전직 퀘스트가 등장한 것이었지만 아무튼 아서 왕과 관련된 단서가 판타지 모나크 최초로 등장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성왕 아서 팬드래건의 힘을 계승하시겠습니까?]
모든 능력치와 레벨이 초기화 됩니다.
지금까지 육성한 군단과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습니다.
연달아 떠오른 문구들이 순간 멈칫하게 만들었지만 말 그대로 순간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레벨과 능력치는 물론이고 판타지 모나크 최강의 군단인 검은 늑대들 역시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설정으로만 존재하던 아서 왕의 힘이지 않은가.
애당초 판타지 모나크 최초 비공식전 포함 200연승 업적 덕분에 해금된 컨텐츠이니 유성 자신 말고는 아서 왕의 힘을 계승할 수 있는 유저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전세계 최초.
전세계 유일.
최초이자 최강인, 성왕 아서 팬드래건의 힘을 계승하는 자.
이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유성이 손을 놀려 수락하자 다시 새로운 문구들이 떠올랐다.
[한 번 선택하면 절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정말로 성왕 아서 팬드래건의 힘과 사명을 계승하시겠습니까?
마치 정말 만류라도 하듯 전장을 질주하는 검은 늑대들의 영상이 문구 뒤로 아련히 떠올랐지만 유성은 선택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래, 계승하겠어."
다시 수락 버튼을 누르자 이번에도 만류하는 문구가 떠올랐다.
[마지막 확인 작업입니다.]
진정으로 성왕의 계승자가 되는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거친 세상과 힘겨운 시련들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아니, 진짜 뭔데 이건?"
무슨 확인 작업을 세 번이나 한단 말인가.
거기다 거친 세상 운운하는 멘트는 또 무엇이고.
'이쯤 되니 뭔가 싸하긴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수락하면 소설이나 만화에 흔히 나오는 것처럼 게임 속에 빙의라도 당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니 가능성이 좀 있긴 해.'
최강의 플레이어.
랭킹 1위.
아무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직업.
계속해서 떠오르는 경고문에 가까운 시스템 문구들.
정말로 뭔가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유성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임 속에 빙의는 개뿔.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소설은 소설, 만화는 만화일 뿐이니.
씩하고 웃은 유성은 다시 한번 수락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제1장 -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성왕국 카멜롯의 멸망으로부터 500여 년.
인세를 수호하는 성왕의 빛이 사그라지고, 원탁의 기사들의 영광조차 잊힌 옛 전설이 되어가는 시대에 마침내 성왕의 빛을 계승할 자가 나타났으니,
그의 이름은-
멍한 얼굴로 서서 하늘을- 정확히는 하늘 위에 펼쳐진 글귀를 올려다보던 남자- 유성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저게 뭐지?
이벤트 인트로라도 되나.
그런데 왜 말을 하다가 말지.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늘어놓으며 눈을 몇 번 더 깜박인 유성은 어느 순간 번쩍하고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잠깐.'
멍했던 정신이 돌아옴과 동시에 기억 역시 돌아왔다.
수락 버튼을 누른 순간 끊겼던 의식, 그리고 다시 의식이 이어진 지금 이 순간.
유성은 일단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배경인 푸른 하늘과 커다란 숲, 우거진 수풀 등이 보였다.
그리고 유성은 생각했다.
'이상해.'
위화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판타지 모나크의 하늘은 저렇게 리얼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풀 다이브 가상현실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정말로 진짜 같은 것은 아니었다.
디테일이 높고 그럴싸하긴 하지만 결국 3D 그래픽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렇지 않았다.
지나치게 진짜 같았고, 그래서 그런 것인지 조금 미친 생각 같았지만 게임 속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진짜 하늘과 진짜 숲.
물론 하늘에 하얀색 글자가 떠 있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초현실적인 기분이 들어 보다 강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일까.
지금 이 광경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크허헝! 컹!"
갑자기 들려온 거친 목소리에 유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덕 아래였다.
고함과 거친 숨결, 거기에 말발굽 소리까지.
여러 소리가 동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훅-!
언덕 아래쪽에서 뜨거운 열풍이 불어왔다.
유성의 눈동자에 땀에 젖은 말과 그 위에 올라탄 소녀가 보였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군데군데 피에 젖은 옷을 입은 소녀는 정신없이 달리던 중 정면을 보았고, 유성과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 머리칼과 하얀 얼굴, 금빛 눈동자.
두려움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소녀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번졌고, 이내 다시 간절함이 더해졌다.
"잡아! 잡아라!"
소녀의 등 뒤에서 다시 거친 목소리와 함께 개의 머리를 가진 휴머노이드 몬스터- 코볼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더욱 겁에 질린 소녀는 유성을 바라보더니 필사적인 얼굴로 외쳤다.
"상태창! 상태창을 외치세요!"
상상도 못 한 소녀의 외침에 당황한 유성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고, 소녀는 다시 한번 소리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빨리 상태창을- 꺅!"
연달아 날아온 투척 도끼에 몸 여기저기가 찍힌 말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자 소녀 역시 엉망진창으로 낙마해 바닥을 굴렀다.
"크헝! 컹!"
"한 놈이 더 있다!"
"남자다! 죽여! 잡아먹자!"
쓰러진 소녀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한 코볼트들이 유성을 보고 소리치더니 킬킬 웃으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멍하니 얼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성은 억지로 숨을 쉬었다.
그리고 일단 돌아서서 달렸다.
급격히 좁혀진 코볼트들과의 거리를 조금이나마 벌리며 생각했다.
상태창.
그래, 상태창.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수상하기 짝이 없던 전직 문구.
랭킹 1위.
게임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배경.
소녀, 그리고 코볼트.
설마 진짜로 게임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이세계 전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등 뒤에서 코볼트들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상태창!"
유성은 크게 외쳤다.
그러자 파앗-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빛의 창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너무나도 익숙한 판타지 모나크의 상태창이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급박한 와중에도 바로 필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직업: 견습 기사
레벨: 1
지위: 초급 지휘관
아니, 잠깐.
1레벨? 거기다 견습 기사?
초기화한다더니 진짜 된 거냐!
하지만 분노는 잠시뿐이었다.
상태창의 존재 유무를 확인한 순간 이미 유성의 두뇌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스킬 창! 인벤토리!"
상태창이 있는데 스킬창과 인벤토리가 없겠는가?
파앗!
역시나 이번에도 빛의 창이 떠올랐다.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
- 농노 부대 집결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본 적이 없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도 어떤 스킬인지 짐작이 가능했다.
유성은 급제동을 한 뒤 돌아서며 소리쳤다.
"농노 부대! 집결하라!"
"우오오오오!"
유성의 부름에 호응하듯 나름 우렁찬 외침과 함께 흐릿한 빛이 일더니 유성의 눈앞에 열 명의 장정들이- 아니, 허름한 차림의 농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해진 옷과 무기인지 농기구인지 구분이 어려운 무언가를 들고 선 자들.
체형도 각기 제멋대로였지만 다들 어딘가 부실해 보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아군이었다.
숫자도 열 명이나 되니 코볼트들보다 세 배 이상의 숫자였다.
"마, 마법?!"
"매복이다?!"
갑자기 나타난 농노 부대에 놀란 코볼트들이 당황한 그때였다.
"으아악! 괴물들이다! 도망쳐!"
"도망치자!"
코볼트들과 눈이 마주친 농노 부대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운 광경이었지만 동시에 예상대로의 광경이기도 하였다.
판타지 모나크에 농노 부대 집결이란 스킬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농노 부대 자체는 존재했기 때문이다.
농노 부대.
농노들을 강제로 징집해 만든 부대.
당연히 사기가 낮았다.
전투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무장도 부실했다.
그런 농노 부대에게 사람도 아닌 괴물을 상대하라고 하니 바로 사기치가 바닥을 찍고 도망치는 것이 당연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툭하면 멘탈이 터져서 도망치는 게 농노 부대이지 않던가.
그랬기에 유성은 실망하지 않았다.
농노 부대가 도망치는 그때 유성 또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유성이 택한 것은 도주가 아니었다.
농노 부대가 코볼트들의 주의를 완전히 빼앗은 그 순간, 그의 손은 인벤토리를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도망쳐!"
"농노 살려!"
현실과 가상현실은 달랐다.
아무리 풀 다이브 가상현실 게임이라 할지라도 게임 속의 검술 고수가 현실의 검술 고수가 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유성이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본적인 육체 성능의 차이였다.
판타지 모나크 속 캐릭터들은 게임 캐릭터들답게 모두 초인이었다.
반면 현실의 플레이어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초인의 육신으로 펼치던 기예를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펼치는 것이 가능이나 하겠는가?
하지만 만약 현실에서도 초인의 육체를 손에 넣는다면,
그리고 그 사용자가 판타지 모나크 최강의 기사라면!
"잠깐! 놈이 사라졌-"
인벤토리에서 꺼내든 장검을 순식간에 뽑아들었다.
농노 부대가 도주한 그때 측면으로 몸을 날렸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코볼트를 향해 돌진했다.
지면을 박찬 그때 코볼트 중 하나가 유성을 발견했지만 그때는 이미 유성이 지면을 박차 오른 후였다.
츠확!
있는 힘껏 휘두른 검이 코볼트의 등을 부수듯이 갈라놓았다.
"크억-?"
뒤늦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코볼트가 앞으로 쓰러졌다.
그런 놈을 지나쳐 다시 몇 걸음 이동한 유성은 피와 살점이 묻은 검에 기겁함과 동시에 이를 악물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한 명은 기습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나머지 둘은 어떨 것인가.
유성은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예상하며 기대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유성의 바람 그대로 이루어졌다.
"으아아! 기사님을 따르자!"
"죽여! 죽여!"
"우리가 훨씬 더 많아!"
사방으로 흩어졌던 농노 부대가 다시 반전하여 코볼트들을 덮쳤다.
농노들이 용기를 보인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들 쪽에 기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그 기사가 잘 싸웠으니까.
이쪽이 오히려 더 강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으니까!
강약약강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 농노들이었다.
단숨에 용기백배하여 달려드니 그 기세가 실로 범상치 않았다.
"이, 인간 놈들!"
"크악!"
농노 부대의 죽창이 코볼트들의 등과 엉덩이를 찌르고 손도끼가 머리통을 강타했다.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온 공격에 버티지 못한 코볼트들이 제자리에 넘어지자 농노 부대가 그런 놈들을 순식간에 에워싸고 뭇매를 때리기 시작했다.
"죽여! 죽여!"
"밟아! 밟아!"
코볼트 한 마리에 다섯 명씩 달려들어 묵사발을 내놓으니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코볼트들이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으아아! 우리가 이겼다!"
"승리다! 승리!"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농노 부대의 모습에 유성은 어이없음과 기쁨, 안도 등등이 뒤섞인 멍한 웃음을 흘리며 검을 늘어트렸다.
여전히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지금 이게 현실인지 게임인지, 현실이라면 유성 자신이 정말 괴물을 죽인 것인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유성은 의식적으로 생각을 단순하게 했다.
차오른 숨을 토하며 상태창을 보았고, 기대했던 문구에 작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1점 획득했습니다.]
[소녀를 구출: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1점 획득했습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도 반가운 레벨 업 문구.
헛웃음을 지은 유성은 농노 부대를 돌아보았다.
제1장 -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2)
"약탈하자! 약탈!"
"벗겨! 전부 벗겨!"
"손도끼는 내 거야!"
"오! 이 자식 허리춤에 주머니도 달고 있어!"
"돈 있어? 돈 들었어?"
"흐흐흐, 이것 봐 단검도 있어."
농노들은 신이 나서 죽은 코볼트들의 몸을 뒤지고 있었다.
아니, 아예 그냥 발가벗긴 뒤 챙길 수 있는 것들을 죄다 챙기는 중이었다.
어디까지나 게임임에도 그 와중에 나름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판타지 모나크인지라 농노 부대가 약탈 행위를 하는 일이 잦긴 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게임적 생략으로 인해 그냥 '약탈을 했다!' 정도로만 표시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 약탈을, 그것도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을 대상으로 한 약탈을 직관하고 있자니 순간 정신이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그만! 다들 멈춰!"
저도 모르게 멍하니 보고 있자니 덩치 큰 사내 하나가 흠칫하고 놀라 농노들을 제지했다.
"어, 그... 아! 기사님 대신 저희가 전리품들을 회수했습니다. 헤헷."
물 흐르듯 농노들에게서 각종 금품들을 회수한 사내가 유성에게 굽신거리며 말했다.
앞으로 내민 주머니에는 동전과 반지, 목걸이 같은 자잘한 금품들이 들어 있었다.
'얘가 대장인가?'
농노 부대의 대장인 십인장 지미.
이름과 지위를 알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처럼 지미의 머리 위해 녹색 글자로 '십인장 지미'라는 문구가 선명히 떠 있었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웃는 지미의 얼굴을 마주한 유성은 네가 챙긴 창이랑 손도끼도 내놓으라 말하는 대신 그냥 고개만 끄덕인 뒤 주머니를 받았다.
이번에도 단순한 이유였는데, 새로운 무장을 보급(?)받은 덕분에 농노 부대의 전반적인 전투력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흐흐흐,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지미를 필두로 농노 부대 모두가 머리를 조아린 직후였다.
나타났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흐릿한 빛이 이는가 싶더니 농노 부대 전체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 역순으로 일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이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인지 유성은 깜짝 놀라는 대신 제법 차분하게 이성적인 사고를 이어나갔다.
'전투 중에 불러낼 수 있는 소환 부대 개념인가?'
정말 그렇다면 무척이나 전술적인 활용이 가능할 터였다.
적들의 눈앞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부대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완벽한 매복이 가능한 부대가 어디 있겠는가.
'성장도 가능해.'
일부나마 무장이 바뀌니 전투력이 올랐다.
판타지 모나크와 같다면 전투 숙련도가 상승함에 따라 부대원 개개인의 전투력 역시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당장 검은 늑대들의 주력이었던 흑색창기병대도 시작은 농노 부대이지 않았던가.
뭔가 본격적으로 상태창과 스킬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진 유성이었지만 일단은 생각을 끊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코볼트 시체 세 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하나 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고 있는 보랏빛 머리칼의 소녀.
유성은 급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저기, 괜찮아?"
"하아... 하아... 읏...."
유성의 물음에 비틀거리다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소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유성을 보았다.
"계승...자님?"
새삼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소녀가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성은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계승자. 빛의 계승자?'
아까 상태창에서 보았던 '기사도'의 이름.
유성이 일단 고개를 끄덕이자 유성의 반응을 살피던 소녀는 안도의 숨을 크게 쉬더니 옅게나마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제 이름은 르네, 르네 발투아입니다."
이제 십 대 후반쯤이나 되었을까?
다시 보니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녀였다.
"어... 나는 천유성."
유성의 대답- 정확히는 이질적인 이름에 소녀는 오히려 기쁘다는 듯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아, 하아... 역시 개꿈이 아니었...."
거기까지였다.
정말로 안심했기 때문에 긴장의 끈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소녀는 그대로 무너지듯 쓰러져 눈을 감았다.
덕분에 당황한 유성은 급히 소녀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었는데, 숨을 쉬는 걸 보니 탈진해서 기절한 모양이었다.
'물론 탈진 자체가 단순히라는 말을 붙일 상태는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난데없이 판타지 모나크 같은 세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코볼트랑 싸웠고, 눈앞에는 기절한 소녀가 있었다.
여전히 당혹스러웠지만 유성은 숨을 한 번 크게 고른 뒤 재차 이성적인 판단을 하였다.
'일단 얘 데리고 숨자.'
유성 자신을 계승자라 부른 것도 있고 기절하기 직전에 개꿈 운운한 거 보면 르네는 지금 상황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상태창을 외치라 한 것도 그녀였고 말이다.
'웹소로 치면 초반에 나오는 천사나 요정 뭐 그런 역할일지도.'
용사소환을 한 왕녀라든지.
르네를 품에 안아든 유성은 쓰러진 말을 한 차례 살펴보았다.
애석하게도 이미 숨이 끊어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가볍게나마 묵념을 해준 유성은 적당히 이백여 미터 정도를 이동한 뒤 우거진 수풀 쪽에 르네를 눕히고 자리를 잡았다.
'좋아, 그럼 다시 스킬이다.'
이 세상에 오게 된 이유야 어찌 되었든, 괴물이 실존하는 지금 유성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었다.
그리고 강해질 수단이 눈앞에 있었다.
"상태창."
이름: 천유성
성별: 남
직업: 견습 기사
레벨: 2
지위: 초급 지휘관
특이사항: 성왕의 계승자(???), 군단의 주인(군단의 전투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소유자의 전투력 역시 강해진다), 원탁의 계승자(???), 용의 심장(???)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
[기사 스킬]
왕국검법 Lv1 / 제국검법 Lv1 / 용왕심법 Lv1
[군단 관리]
아까는 급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상태창과 스킬창을 빠르게 훑어본 유성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전반적으로 판타지 모나크에서 보아온 것들이었지만 아예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왕국검법과 제국검법.'
이건 익숙한 것이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가장 흔한 검술을 꼽으라면 크게 두 가지 검술이 경합을 벌이게 되어 있었다.
왕국에서 가르치는 왕국검법과 제국에서 가르치는 제국검법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당장 유성의 캐릭터였던 흑기사09도 고유검술인 흑뢰십일식을 익히기 전에는 왕국검법과 제국검법을 제일 자주 사용했으니 말이다.
'일단 왕국검법이랑 제국검법을 익히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면 아무리 유성 자신이 판타지 모나크 최강의 기사였다고는 하지만 레벨까지 초기화된 마당에 갑작스러운 실전에서 기습으로나마 코볼트 한 놈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왕국검법 덕분일지도 몰랐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마치 몸에 새겨진 기술을 사용하는 것 같은 익숙함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이번엔 아예 처음 보는 것에 시선을 두었다.
'용왕심법.'
판타지 모나크의 제목이 괜히 '판타지' 모나크인 것이 아니었다.
판타지 모나크의 기사들은 단순히 육체만 단련하는 자들이 아닌, 마력을 통해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이었다.
기사도라 하여 기사들이 사용하는 마법이 아예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기사들은 초인이었고, 그들을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마력을 기르기 위한 기술이 바로 심법이었다.
'성왕의 심법.'
아서 왕 전설 속의 주인공인 아서 왕에게는 용의 피가 흐른다는 전설이 있었다.
애당초 이름부터가 아서 '팬드래건'이지 않던가.
용왕의 심법.
용왕의 마력.
더욱이 누가 봐도 특별해 보이는 용의 심장까지.
양쪽 모두 랭크를 붙인다면 최소 S, 최대 EX가 아닐까?
'그래, 내가 검은 늑대들까지 포기하고 선택한 직업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지.'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 할 생각은 아닐지도-
'아니지, 지금이야말로 해야지.'
이 스킬들 하나하나가 유성 자신의 목숨 줄이었으니 말이다.
'기사 스킬들은 직접 숙련도를 올려야 오르는 것 같고.'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각종 검술, 창술들은 그냥 많이 써서 숙련도를 높이는 것 외에는 사실상 레벨을 높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군단 관리 쪽은 이야기가 달랐다.
지휘관 포인트를 사용해 군단에 소속된 부대들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군단의 전투력이 강해지면 내 전투력 역시 강해진다 이거지?'
특이사항 가운데 하나인 군단의 주인의 효과.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본 적이 없는 스킬이었지만 설명 문구만으로도 어떤 능력인지를 쉬이 알 수 있었다.
정황상 군단의 전투력에 비례해 유성 자신의 전투력 역시 강해지는 보정 효과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좋아, 그럼 군단 관리를 봐보자.'
[군단 관리]
[지미의 농노 부대 5명 증원 1pt]
[지미의 농노 부대에 기수 추가 2pt]
[한스의 농노 부대 추가 5pt]
포인트는 2밖에 없는데 하고 싶은 것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성은 별 고민 없이 포인트를 사용해 지미의 농노 부대에 기수를 추가했다.
'일단 도주를 막아야 해.'
이번에야 갑작스러운 도주로 적에게 혼란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이런 요행수가 먹힌다는 보장은 없었다.
작전이면 모를까, 적과 마주하자마자 도망치는 부대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판타지 모나크에서 부대에 기수를 추가하면 부대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가 발동하였는데, 농노 부대의 경우 사기치가 올라 적을 마주하자마자 도망치는 경우가 줄어들었다.
'괜히 한번 불러보고 싶네.'
기수도 기수였지만 깃발의 모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봐야 농노 부대니 남루한 천에 대충 그린 깃발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었다.
"마지막은 선업 수치인가?"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본 적이 없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선업 수치라는 이름만 봐도, 더욱이 선업 수치를 획득한 상황만 봐도 대강 짐작이 갔다.
'소녀를 구했다면서 선업 수치를 올려 줬단 말이지.'
즉,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올릴 수 있는 수치인 것이 분명했다.
'선한 일의 정확한 기준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치가 있다는 건 쓸 곳 역시 있다는 거겠지.'
물론 선업 수치 얻자고 소녀를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왕지사 좋은 일도 하고 포인트도 얻으면 좋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선업 수치라는 걸 어디에 쓸 수 있는 것일까.
상태창을 조작하다 보니 관련된 문구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성왕은 인간의 세계를 지키는 자.]
[인간을 지키고 쌓은 선업이 많아질수록 성왕의 힘과 운명 또한 강해진다.]
"오."
구체적으로 어떻게 강해지는지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았지만 상당히 직관적이면서도 마음에 드는 시스템이었다.
'군단의 주인까지 고려하면 보정 효과를 복수로 받는다는 건가?'
한 번 강화된 전투력이 다시 한번 강화된다.
'판타지 모나크에 있었다면 진짜 사기 직업이었겠네.'
역시 판타지 모나크의 근본인 아서 왕의 힘을 이어받은 자.
성왕의 계승자라는 클래스명이 아깝지 않은 성능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으읏...."
작은 신음과 함께 르네가 눈을 떴다.
제1장 -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3)
어렵사리 눈을 뜨는 르네를 마주한 순간 유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다소 엉뚱한 것이었다.
'아니 얘는 뭔 기절하고 20분도 안 되어서 눈을 뜨네.'
당혹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좋은 일이기는 했다.
"정신이 좀 들어?"
유성의 물음에 다소 비몽사몽인 얼굴로 눈을 깜박인 르네는 힘없는 손으로 자기 허리춤을 더듬으며 말했다.
"무, 물을...."
허리를 보니 가죽으로 된 물통이 벨트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유성은 일단 물통을 챙긴 뒤 르네를 일으켜 앉혔다.
"자, 천천히 마셔."
"가, 감사...."
거의 반 이상 흘리긴 했지만 꿀꺽꿀꺽 물을 마신 르네는 겨우 살았다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깨를 늘어트린 채 잠시간 멍하니 있던 르네는 눈을 한 번 꽉 감았다 뜬 뒤 유성을 마주하였다.
하얀 얼굴과 금빛 눈동자.
눈가에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 보랏빛으로 화장이 되어 있어 그런지 요염한 느낌이 드는 외모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르네 발투아입니다."
르네가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말하자 유성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여러 가지 대답을 한 번에 이끌어낼 수 있는 질문을 하였다.
"어떻게 된 거지?"
유성의 물음에 르네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새삼 자세를 바르게 한 뒤 답했다.
"저는 발투아 백작가의 차녀입니다. 호수의 여신께서 내리신 계시를 받고 빛의 계승자님을 찾아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호수의 여신.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전설에 나오는 존재.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신성왕국 카멜롯을 수호하는 인간의 여신으로 알려진 존재였다.
"계시라면 어떤?"
"로토 숲에 성왕의 빛을 계승할 자가 도래할 것이니, 그를 맞이하여 각성의 외침을 전달하라."
"어, 그게 설마 상태창?"
"네, '상태창'을 외치라 하셨습니다.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성스러운 뜻이 담긴 신들의 단어겠죠?"
르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상태창' 부분만 한국어 발음이었던 걸 보면 진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외친 모양이었다.
"음... 그래."
일반적이지 않은 단어긴 하지.
유성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르네는 '아아, 역시'하는 표정이 되었고, 유성은 헛기침을 한 뒤 계속해서 물었다.
"코볼트들에게 쫓기던 건?"
"아, 그게. 이동 중에 코볼트들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로토 숲에는 본래 코볼트들이 없는 걸로 아는데... 어쩌면 흉성의 시대가 다가온 영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흉성의 시대.
갑자기 튀어나온 고유명사였지만 호수의 여신과 마찬가지로 유성이 이미 알고 있는 단어였다.
'대충 온갖 재앙이 들끓고 사방에서 괴물들이 몰려와 세상을 파국으로 내모는 상황.'
북유럽 신화로 치자면 라그나로크였고, 그리스 로마 신화로 치자면 기간토마키아라 할 수 있는 시대였다.
판타지 모나크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흉성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은, 하지만 이제 곧 도래할 것이라 믿어지는 혼돈의 시국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하늘에서 본 인트로 멘트도 그렇고 현재 이곳은 흉성의 시대가 도래했거나 정말로 도래하기 직전의 시대인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유성은 다시 르네에게 물었다.
"계시에서는 나랑 조우한 이후에 뭘 하라는 이야기는 없었고?"
"네? 아, 네. 없었습니다."
유성이 묻기 전에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지 르네가 순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지만 잠깐뿐이었다.
금방 다시 초롱초롱한 눈이 되었으니 말이다.
"...혹시 일행은 없나?"
"네, 혼자입니다. 사실 제가 계시 이야기를 했을 때 모두들 그저 꿈을 꾼 것이라 했지만... 이제 제가 새벽기도 중에 졸아서 개꿈을 꾼 게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겠죠."
마지막에 가서 후후훗 하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걸 보면, 거기다 백작가의 여식이 혼자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헛소리 말라고 무시라도 당한 모양이었다.
'한마디로 발끈했다는 거네.'
요사스러운 느낌을 주는 외모와 별개로 실제 성격은 꽤나 귀여운 느낌이 드는 르네였다.
"그럼 일단 발투아 백작령으로 돌아갈 예정인 거지?"
"네, 계승자님."
"아까 있던 곳에서 꽤 이동했는데 길을 찾을 수 있겠어?"
유성의 물음에 르네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음... 가능할 것 같아요. 일단 숲을 빠져나가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요."
뭔가 그냥 길을 모른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유성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틀린 말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좋아, 그럼 이동... 적이다!"
"꺅?!"
순간 벼락처럼 외친 유성이 르네를 확 잡아끌며 뒤로 크게 물러섰다.
비록 아직 2레벨에 불과하긴 했지만 기사라는 이름의 초인이 되며 증폭된 감각이 적의 인기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유성의 반응은 틀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르네가 앉아 있던 수풀 바로 뒤쪽에서 코볼트들이 튀어나오며 괴성을 질러댔다.
"크허엉!"
"크헝!"
모두 합쳐 일곱이었다.
유성은 놈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농노 부대! 집결하라!"
파팟!
이번에도 흐릿한 빛과 함께 유성과 코볼트들 사이로 농노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맹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있는 그들은 농노 부대의 출현에 깜짝 놀란 코볼트들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외쳐댔다.
"으아악! 괴물이다!"
"도망쳐!"
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도망칠 수 없었다.
농노들이 도망치려는 그 순간 깃발을 높이 들며 외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높고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도망치려던 농노 부대의 다리를 붙들었다.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농노 부대에 추가된 기수의 외침이 농노 부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용기에 불을 질렀다.
"우오옷!"
"싸, 싸우자!"
"싸우자!"
농노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움켜쥐고 외치자 금발의 여성 기수- 케이트가 다시 깃발을 높이 들며 외쳤다.
"카멜롯의 영광을!"
파앗-!
케이트가 들고 있는 깃발은 농노 부대의 깃발답게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카멜롯의 깃발이었다.
인세를 수호하는 신성왕국.
아서 왕이 인간의 시대를 열며 세웠던 인류 최초의 통일국가.
"우오오! 가자!"
"카멜롯을 위하여!"
케이트의 격려로 사기가 높아진 농노 부대가 저마다의 무기를 움켜쥐고 코볼트들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르네를 내려놓은 유성 역시 움직임을 개시했다.
"키악!"
농노 부대로 시선을 끌고 적의 배후를 친다.
직전 전투와 같은 전술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유성이 코볼트 한 놈의 등을 벤 순간 농노 부대 역시 정면의 적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끄악!"
"아아악!"
더욱이 예상치 못한 조력이 하나 더 있었다.
"파이어 애로우!"
농노 부대의 등 뒤에서 르네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커다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소리치자 허공에 형성된 불화살이 코볼트 한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마법! 마법이다!"
"마법사님이시다!"
농노 부대의 사기가 더더욱 올랐고, 코볼트들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 결과 농노 부대와 유성에게 앞뒤로 공격받은 코볼트들은 손발이 어그러져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우오오! 우리가 이겼다!"
"이겼다!"
"카멜롯 만세! 만세!"
농노 부대가 저마다 무기를 높이 들며 승리를 기뻐했다.
그런 농노 부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유성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기뻐하는 르네의 얼굴을 한 차례 확인한 뒤 농노 부대 뒤에 선 케이트를 보았다.
'뭐지, 무슨 SSR 랭크라도 뽑은 건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농노 부대를 자애롭게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의 금발 여인.
옷이 좀 남루하긴 했지만 농노 부대의 기수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의 미모인데다 얼굴도 하얗고 뭣보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귀티가 묻어나는 것을 보니 어떻게 봐도 평범한 평민이나 농노 같지가 않았다.
'거기다 효과도 강해.'
기수를 추가하긴 했지만 사실 농노 부대가 도망칠 가능성은 절반 이상이었다.
애당초 사기치가 낮아도 너무 낮은 것이 농노 부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케이트의 격려 한 방에 사기치가 근 세 배 이상 솟구치니 단순히 도망치지 않는 것을 떠나 전투력이 강화될 수준이었다.
이 세계도 그렇지만 스킬도 판타지 모나크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정말 SSR 랭크급 기수를 뽑은 걸지도 모를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유성의 시선을 눈치챈 케이트가 빙긋 미소를 짓더니 유성에게 다가와 가볍게 예를 표했다.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는 카멜롯의 인사법이었다.
"케이트입니다. 위대한 성왕의 계승자시여."
가까이서 보니 나이도 생각보다 어린 것 같았다.
적게 잡으면 십 대 후반, 많게 잡아도 스물을 갓 넘긴 나이 정도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올려다보는 케이트의 시선, 그리고 '성왕님의 계승자셨어? 그럼 왕자님?' 같은 얼굴로 놀라는 농노 부대의 눈빛을 마주한 유성은 잠시 갈등하다가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유성이다. 그대들의 분투에 경의를 표한다."
"영광입니다."
다시 예를 표한 케이트는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그대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엇? 아직 약탈 못 했는-"
"일단 가자. 지금 그럴 분위기 아냐."
"왕자님이셨구나."
농노 부대 역시 저마다 말을 남기며 빛이 되어 사라졌다.
직전 전투를 생각하면 좀 더 남아있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싶었지만 당장은 이미 사라졌으니 별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케이트와 농노 부대가 사라지자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된 르네가 눈을 깜박이더니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와아... 이게 계승자님의 기사도군요?"
기사도.
기사들의 마법.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지에 오른 기사가 발현할 수 있는 영혼의 힘.
기사도는 기사의 삶과 영혼을 반영했기에 비슷한 기사도는 존재할지언정 완전히 동일한 기사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사도는 영혼의 반영인 동시에 의지의 발현.
그렇기에 기사도는 고정되지 않았다.
기사의 의지가 성장하면 기사도도 함께 성장했고, 기사가 고결함을 잃고 타락하면 기사도 역시 함께 타락하였다.
'쉽게 말하면 기사들의 고유스킬.'
영역전개라든지, 고유결계라든지 뭐 그런 계열의 기술이라고 해야 할까.
직전 싸움에서는 쓰러져서 허덕이느라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르네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하긴, 갑자기 군대가 나타났는데 놀랄 수밖에.'
거기다 그 군대가 어디 보통 군대던가?
비록 농노 부대라지만 신성왕국 카멜롯의 군대였다.
물론 코볼트들을 약탈하며 즐거워하는 농노 부대의 모습을 보았다면 르네의 평가도 조금 달라졌겠지만, 케이트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역시 마법사였구나.'
체형과 장비, 거기에 눈가의 화장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딜 봐도 전사보다는 마법사처럼 보이는 르네였으니 말이다.
르네의 얼굴을 보니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있는 것 같았지만 유성은 손을 들어 그런 르네를 제지했다.
르네의 감탄을 듣는 것보다 당장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태창."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2점 획득했습니다.]
[악적 토벌: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지휘 가능한 병종이 추가되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3점 획득했습니다.]
레벨 업과 새로 얻은 스킬의 확인.
유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제1장 -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4)
하지만 유성도 바로 상태창을 열어 어떤 스킬을 찍을지 고민할 수는 없었다.
예상도 못 했던 SSR급(진짜 SSR급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수인 케이트의 등장으로 흥분하긴 했지만 상황 자체가 그리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적해왔어.'
코볼트들이 기습을 해온 상황이었다.
아마도 처음 싸웠던 장소에서부터 흔적을 찾았든 냄새를 이용했든 유성 자신과 르네의 뒤를 밟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한 번 더 그럴 수 있다.
더욱이 싸우는 와중에 제법 큰 소리가 나기도 했으니 근처에 다른 코볼트들이 있다면 이쪽으로 몰려들 가능성 역시 존재했다.
'일단은 이동해야 해.'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적들의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이동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르네, 등에 업혀."
"네? 어, 네?"
여전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유성이 무얼 하나 훔쳐보던 르네는 유성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유성은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했다.
"빠르게 이동해야 해."
유성의 말에 르네는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이 케이트의 등장에 흥분했듯이 유성의 기사도 자체에 흥분해 있던 르네였지만 애당초 마법사답게 명석한 그녀였다.
코볼트들이 더 나타날 수도 있다.
상황을 즉시 이해한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유성의 등에 업혔고, 그런 그녀를 단단히 업은 유성은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쪽입니다!"
달리기 시작하자 유성의 목을 꽉 끌어안은 르네가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방향을 알아내는 마법이에요."
유성의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자 살짝 겁이 났는지 르네는 유성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역시 마법사.
대충 숲을 나가면 어떻게든 된다고 말한 것이 그냥 대책 없이 한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좋아, 이 몸도 제법 익숙해.'
갑자기 평범한 인간의 몸에서 초인의 몸으로 뒤바뀐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지만 사실 유성은 지금의 몸을 다루는 데 딱히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풀 다이브 가상현실 게임이었던 판타지 모나크를 플레이 할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만렙이었던 흑기사09와 이제 겨우 3레벨인 현재의 육신 사이에는 현격한 격차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래도 경험이라는 게 있다 보니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었다.
'평범한 3레벨 기사보다 훨씬 강한 것 같기도 하고.'
선업 수치 덕분인지, 아니면 똑같은 기사라도 성왕의 계승자- 기사왕의 육신이라 그런지 현재 유성의 능력치는 6레벨 기사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둘 다겠지.'
선업 수치의 강화 효과 메커니즘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당장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숲을 빠져나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앗, 나타났어요. 코볼트들이 저희가 있던 곳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르네의 말에 유성은 발을 멈추는 대신 뒤를 살짝 돌아보자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한 르네가 빠르게 말했다.
"빛의 새 마법이에요. 일회용 패밀리어를 만들어내는 마법인데 거리가 멀어질수록 유지 시간이 짧아지긴 하지만 어느 정도 오감을 공유할 수 있어요."
즉, 출발하자마자 빛의 새 마법을 사용해 떠난 자리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더 유능한데?'
르네가 공격 마법을 사용해 코볼트들을 몰살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더욱이 수백 미터 밖에서도 오감을 공유할 수 있다면 빛의 새 마법의 쓰임새는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추적할 기세야?"
"어... 아니요. 포기할 것 같습니다. 거의 서른 마리에 가까운 숫자이긴 한데... 제 추측이지만 저희가 근처에 없다는 걸 깨달은 거 같고... 뭣보다 오는 길에 코볼트 시체를 꽤 봤을 테니까요."
유성이 쓰러트린 코볼트만 벌써 열 마리에 달했다.
오는 길에 그 시체들을 다 보았다면 쉽사리 덤빌 생각을 못 하는 것도 당연했다.
"계승자님 말씀대로 바로 자리를 피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남아 있었다면 꼼짝없이 놈들과 조우했을 터였다.
'서른 마리면 진짜 위험할 뻔했네.'
지금까지 유성이 비교적 손쉽게 승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모든 전투가 항시 매복이 가능한 기사도 덕분에 사실상의 기습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적인 우위였다.
양쪽 모두 없는 상황이었다면 설사 어찌어찌 이겼다 할지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리라.
작게나마 안도의 숨을 토한 유성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었다.
하늘을 보니 어느새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설마 야숙해야 하나.'
수백 미터를 넘게 달렸는데도 여전히 숲인 걸 보면 숲의 규모가 상상 이상인 것 같았다.
르네도 방향을 알 뿐이지 정확한 길은 모르는 것 같으니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야숙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르네, 빛의 새 마법을 사용해서 야숙할 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해볼게요."
르네가 눈을 감고 작게 주문을 읊조리자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새하얀 새가 유성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빛의 새가 높이 날아올랐다.
그 와중에도 조금씩 노을의 빛이 진해지니 저 먼 곳에서부터 보랏빛 황혼이 밀려들고 있었다.
"적당한 곳을 찾은 것 같아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르네가 말하자 하늘 높이 날아올랐던 빛의 새가 고도를 낮추더니 길을 인도하듯 앞장서기 시작했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여야 하다 보니 생각보다 거리가 있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져서 밤이 찾아온 후였다.
그리고 유성은 두 가지 사실에 감탄했다.
하나는 생각 이상으로 숲의 밤이 어둡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에 대비라도 되듯 별빛과 달빛이 참으로 선명하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밤이 찾아왔을 때만 해도 눈앞조차 식별하기 어려운 어둠에 문자 그대로 눈이 캄캄해졌는데, 달과 별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럭저럭 주변을 살피는 것이 가능해졌다.
르네가 야숙 장소로 찾은 곳은 커다란 바위와 쓰러진 큰 나무의 틈바구니였다.
막힌 구조라 유사시에 도망치기는 쉽지 않을 터였지만 몸을 숨기기에는 확실히 좋은 장소로 보였다.
유성은 틈바구니에 르네와 나란히 앉은 뒤 생각했다.
'일단 스킬을 찍자.'
주변 지형이나 르네의 좀 더 자세한 사정, 흉성의 시대 등등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최우선 사항은 역시 생존 가능성 자체를 끌어올리는 스킬의 강화였다.
'살아남기 위해선 강해져야 하고, 강해지기 위해선 싸워 이겨야 해. 싸워 이기기 위해선 강해져야 하고.'
새삼 각오를 다진 유성은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군단 관리]
케이트의 농노 부대
구성원: 10+1
[케이트를 챔피언으로 승격 3pt]
[농노 부대 5명 증원 1pt]
[농노 부대에 나팔수를 추가 1pt]
[한스의 농노 부대(5인 구성) 추가 5pt]
새로운 병종
[궁수 부대(3인 구성) 추가 5pt]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은 5pt.
할 수 있는 일의 선택지는 많았지만 유성은 이번에도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일단 케이트의 부대에 올인하자.'
단순히 기수인 케이트의 잠재력이 높아 보여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였다.
1. 한스의 농노 부대에는 기수가 없다.
즉, 늘려봐야 도망만 칠뿐이다.
포인트 여분이 있어서 기수를 붙여줄 수 있다면 모를까, 달랑 농노 부대만 추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포인트 낭비였다.
2.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 부대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숫자가 너무 적다.
당장의 전투력을 고려한다면 역시 케이트의 농노 부대에 포인트를 집중하는 것이 맞았다.
'농노 부대에 챔피언 붙여보는 건 처음이네.'
판타지 모나크에서 챔피언은 부대별로 한 명씩 붙일 수 있는 강력한 전사들- 소위 말하는 영웅 캐릭터를 의미했다.
부대에 따라 지휘관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정말 대전사 역할에만 몰두할 수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상당한 고급 병종이었기 때문에 농노 부대 같은 하급 부대에는 아예 챔피언을 붙이지 못하거나 붙일 수 있어도 안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무튼 챔피언이 되면 케이트도 전투력이 생기겠지.'
어쩌면 강력한 여기사가 될지도.
잠시 챔피언 버전 케이트를 상상한 유성은 작게 웃으며 다음 포인트를 소모하였다.
'이왕 키울 거 확실하게 가자.'
부대에 나팔수도 추가한다.
나팔수는 군악병이라 볼 수 있었는데, 부대에 따라 효과가 달랐다.
'보통은 사기를 높이거나 이동속도를 높이는 편이지.'
아무튼 그리하여 완성된 새로운 농노 부대.
[케이트의 농노 부대]
대전사: 케이트
기수: 케이트
나팔수: 지미
구성원: 15+1명
아까보다 훨씬 더 풍성해진 부대 창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늘어난 인원은 5명이었지만 부대의 전투력 자체는 거의 두 배 이상 강해진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지미가 나팔수가 되었네.'
케이트가 부대장이 되었기 때문인지 십부장이던 지미의 직책이 나팔수로 바뀌었다.
'나중에는 엘리트 기사로 성장이 가능할지도.'
유성 자신에게 전리품들을 건네며 흐흐 웃던 지미의 얼굴을 떠올린 유성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초반에는 팍팍 성장하는 맛이 있구나.'
전투 한 번 할 때마다 부대가 성장하는 것이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유성이 흐뭇함을 느낄 때였다.
"저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르네가 육포 조각을 내밀고 있었다.
"어, 고마워."
유성의 감사에 르네는 기분 좋게 웃더니 자기 몫의 육포를 씹었다.
'진짜 유능하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집 나온 철없는 귀족 아가씨 비슷한 무언가가 아닐까 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에 여행 준비도 나름 철저한 거 보면 혼자서 나 찾아올 만도 했네.'
호수의 여신이 왜 그녀에게 계시를 내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까, 멘탈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코볼트들에게 쫓기고 실제로 타고 다니던 말까지 잃을 정도로 고생을 한 데다 지금은 야숙까지 하는 처지였지만 여전히 씩씩한 모습이었다.
'기분도 은근 좋아 보이고.'
르네가 고생을 즐기는 변태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냥 지금 이 상황- 그러니까 성왕의 계승자인 유성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유성은 이번에도 그런 르네의 기분을 공감할 수 있었다.
르네 입장에서는 자신이 모시던 신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직접 내리신 계시를 이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르네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는 종교가 없는 유성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르네, 이 근방의 지형을 대충이라도 알 수 있을까?"
"아, 네."
바로 고개를 끄덕인 르네는 육포 조각을 꿀꺽 삼킨 뒤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로토 숲이고요, 요 근처에 제가 지나쳐온 마을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목책도 있는 제법 큰 마을이죠. 그리고 여기서 도로를 따라 쭉 올라가면 로티안이란 이름의 도시가 하나 나오고... 여길 지나쳐서 다시 보름 정도 올라가면 발투아 백작령에 속하는 마을이 나옵니다."
정말 대략적인 지도였지만 그래도 대강의 형태를 잡는 데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 일단의 목적지는 발투아 백작령이라 치고.'
호수의 여신이 괜히 르네에게 계시를 내린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일단은 르네의 본가인 발투아 백작령을 유성 자신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타당한 선택이었다.
유성은 나뭇가지로 지도에 디테일을 더하고 있는 르네에게 물었다.
"르네, 지금이 혹시 흉성의 시대인가?"
사방에서 괴물들이 몰려와 인간의 시대를 끝내려 한다는 말세의 시대.
유성의 물음에 르네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다소 어두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쩌면... 정말 흉성의 시대가 시작되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성은 르네의 속내를 알 것만 같았다.
'애당초 여신의 계시와 내 존재 자체가 흉성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입증하는 것일 테니까.'
물론 흉성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지만, 르네 입장에서는 정말로 말세가 다가오고 말았다는 두려움을 느낄 만도 하였다.
'근데 생각해보면 르네보다는 내가 문제네.'
돌아가는 정황상 유성 자신이 흉성의 시대를 막아야 했으니 말이다.
가능한지 여부는 둘째치고 위험한 상황인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유성은 신세를 한탄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 당장 눈앞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이번에도 합리에 따른 판단을 내렸다.
"르네, 불침번을 정하자. 앞에 할래, 뒤에 할래. 아, 혹시 불침번을 안 서도 되는 마법이 있다든가?"
유성의 기대 섞인 물음에 르네는 씩 하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람 마법이 있어요. 제가 여기까지 혼자 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죠."
혼자서는 불침번을 설 수 없었으니 말이다.
"유능해. 진짜 유능해."
유성이 그리 말하며 작게 박수까지 치자 르네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더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알람 마법을 사용했다.
뭔가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르네의 당당한 표정을 보니 마법이 제대로 걸린 모양이었다.
"좋아, 르네. 그럼 나는 이제 잘게."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활동해야 할 테니 일찍 자는 것이 맞았다.
체력의 회복과 보존을 위해서도 빠른 수면이 맞는 판단이었고 말이다.
항상 합리에 기반하여 승산을 높일 수 있는 행위를 반복한다.
유성이 판타지 모나크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물론 아무리 유성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서 바로 잠드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러나저러나 육신과 정신 모두가 지쳐있었는지 의외로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유성의 귓가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1장 -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5)
빛을 계승하는 자여.
성왕의 검을 높이 들 자여.
나직한 부름인 동시에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가깝지 않았다.
먼 곳에서부터 전해진 목소리가 간신히 귓가에 닿은 것만 같았다.
유성은 천천히 눈을 떴다.
르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보인 것은 별.
검고 검은 밤하늘 위에 자리한 수많은 빛, 수많은 별.
유성은 태어나 처음으로 쏟아질 것처럼 많은 별이라는 표현을 실감했다.
분명 검고 어두운 밤하늘이었지만, 그렇기에 별 하나하나의 빛을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별의 아이여.
황혼에서 일어나 새벽을 이끄는 자여.
마치 빨려들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밤하늘을 우러르던 유성은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밤하늘을 마주하던 두 눈에 별빛을 가득 담은 호수가 들어왔다.
잔잔한 호수.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귓가를 간질이는 풀벌레 소리.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어디선가 몰려온 안개가 호수를 뒤덮으니, 흐릿한 가운데 대강의 윤곽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검이었다.
호수의 표면에 반쯤 잠긴, 마치 호수에 꽂혀 있는 것 같은 한 자루의 검.
마주한 순간 절로 어떤 검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것은 별빛으로 벼린 성왕의 검.
해방을 상징하는 황금의 태양.
하지만 유성은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마치 아직은 허락되지 않았다는 듯 성검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유성은 그저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성왕의 빛을 계승할 자여.
마침내 장벽 너머로 빛이 발각되고 말았으니, 바야흐로 흉성의 시대가 시작되리라.
신비로운 목소리의 주인 역시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유성은 대화를 시도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무리였다.
닿을 수 없었다.
호수의 여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가능했지만, 유성의 목소리를 그녀에게 전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그나마도 한계였다.
호수의 안개가 점점 더 짙어져 가는 가운데 조금 전보다 약하고 가늘어진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혼에 일어선 그대, 어두운 밤을 걷어내고 아침의 영광을 이끌 새벽을 열 터이니.
흉성의 시대를 이겨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때 그대는 그대의 소망 세 가지를 이룰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였다.
안개가 시선을 가득 채웠고, 유성의 두 눈이 절로 다시 감기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오히려 사고는 더욱 또렷해졌다.
'그러니까 방금 호수의 여신과 연결이 된 건가.'
호수의 여신.
성왕 아서 팬드래건에게 요정신검 엑스칼리버를 전해준 존재.
지금까지의 정황상 유성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온 것은 호수의 여신일 터였다.
'흉성의 시대.'
호수의 여신이 유성 자신을 이 세계에 불러온 이유.
유성 자신이 맞서야만 하는 상황.
새삼 숨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이미 대강 짐작하고 있던 것이지만 역시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달랐다.
다른 세계에, 그것도 멸망 직전인 세계에 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계속 싸워 이겨야만 한다.
유성은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해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이미 눈앞에 닥친 상황에 대해 재차 한탄하는 대신 현실을 보았다.
'흉성의 시대 이후에 이어진 말들.'
진정한 소망을 세 가지 들어주겠다.
흉성의 시대를 이겨내고 인간의 세계를 구하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그래도 목표와 보상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당장의 방향성 역시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유성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현실이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삼키며 눈을 몇 번 깜박인 유성은 옆을 돌아보았다.
망토로 온 몸을 덮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잠든 르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잠들기 전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 들었다.
"아."
알 수 있었다.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직업: 마법사
지위: 백작가의 차녀
르네가 상태창에 편입되었다.
왕의 마법사.
'그럼 이제 르네도 군단의 부대원들처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건가?'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케이트나 농노 부대처럼 소환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딱히 명쾌한 해설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으으응...."
유성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꿈이라도 꾸는지 르네가 꿈틀거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유성은 그런 르네를 한 차례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새삼 주변을 살펴보았다.
무척이나 깊은 밤.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별의 바다를 이룬 밤하늘.
그리고 불길.
연기.
저만치 먼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순간 멍한 얼굴이 된 유성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멀긴 했지만 분명 불길과 연기였다.
그리고 방향을 고려한다면 숲 바깥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디서 불이 난 것일까.
이번에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 합리적으로 추론해도 당장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르네! 일어나! 르네!"
"아흐, 로빈. 좀만 더 잘...."
"일어나! 불길이 일고 있어!"
유성은 어깨를 흔드는 대신 르네를 아예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억지로나마 잠에서 깨어난 르네는 비몽사몽한 가운데 밤하늘을 보았고, 이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마을이 있는 방향이지?"
"아, 아마도요!"
그저 숲을 빠져나가고 있을 뿐 정확한 길이나 현재 위치는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을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업혀!"
유성이 등을 돌리자 르네는 바로 폴짝 뛰어 유성의 등에 매달리듯 업혔다.
유성은 불길이 피어오르는 방향을 향해 쏜살같이 달렸고, 르네는 바로 마법을 사용하였다.
"빛의 새여! 날아오르라!"
다급함과 간절함을 담은 영창에 빛의 새가 호응하였다.
마치 효시처럼 날카롭게 날아오른 빛의 새가 유성을 앞질렀고, 르네는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하였다.
"마을, 마을이 불타고 있어요. 코볼트들과 사람들이 싸우고 있어요."
빛의 새가 유성보다 먼저 마을에 도착했다.
르네는 마른침을 삼킨 뒤 계속해서 말했다.
"불길, 연기, 너무 많은 코볼트들, 로빈! 에드가!"
르네가 돌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유성이 빠르게 물었다.
"혹시 백작가의 사람이 있는 거야?"
"네, 백작가의 기사들이에요!"
듣는 순간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계시에 따르기 위해 홀로 백작가를 나선 르네.
하지만 백작가 입장에서는 그냥 개꿈을 핑계로 가출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집 나간 차녀를 붙잡기 위해 기사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그 기사들이 르네의 발자취를 따라 이동하다 마을에 도착했다.
백작가의 기사 둘.
마을이 단숨에 함락되지 않고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추론의 시간은 짧았다.
유성은 더욱 속도를 높였고, 마침내 마을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목책까지 세워진 커다란 마을이었다.
하지만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커다란 불길과 연기, 비교적 멀쩡한 목책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각종 고함과 비명, 울음소리.
유성은 지면을 박차 올라 단숨에 목책을 뛰어넘었다.
사람 키보다 높은, 2미터를 훌쩍 넘는 높이였지만 초인인 기사에게는 조금 높은 장애물에 불과했다.
"로빈! 에드가!"
지면에 안착하자마자 르네가 다시 소리쳤다.
유성은 르네가 어딜 보며 소리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을 광장에 세워진 신전 입구를 가로막듯 버티고 선 채 코볼트들을 상대로 분전하고 있는 두 사람.
"로빈!"
르네가 다시 기사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닿을 수 없었다.
거리는 둘째 치고 주변의 소음이 너무 많았다.
유성은 숨을 골랐다.
의식을 확장해 주변을 인지했고, 지면을 박찼다.
신전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 * *
로빈 일리아는 발투아 백작가의 준기사였다.
나이는 열여덟.
이 정도 나이에 준기사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는데, 몇 달 뒤에는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을 예정이었으니 또래 중에서는 상당한 실력자인 셈이었다.
더욱이 로빈은 여자였고, 나름 미인이었다.
그러니 희소성만 따진다면 왕국 내에서도 손에 꼽을 인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로빈은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하악······ 하악······ 하······."
가출한 아가씨 잡으러 나선 여정은 사실 그리 힘들지 않았다.
잔뜩 신이 난, 그리고 동시에 다들 개꿈이라 무시한다며 화가 난 아가씨가 성내에 몇 없는 동성 또래 친구인 로빈 자신에게 몇 번이나 여신의 계시라 주장하는 개꿈에 대해 이야기해준 덕이었다.
가출의 목적지를 아는데 어찌 추적이 어렵겠는가.
하루 차이로 마을에 도착했을 때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아, 그냥 여기서 하루 묵고 있으면 시무룩해진 아가씨께서 마을에 오시겠지.'
나름 고집과 근성이 있는 아가씨라 바로 내려오실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밤이 너무 늦기 전에는 내려오시리라.
하지만 정작 로토 숲에서 내려온 것은 아가씨가 아니었다.
얼핏 봐도 일백을 넘을 것 같은 코볼트들의 무리였다.
초인인 기사에게 있어 코볼트 따위는 우습게 베어 넘길 수 있는 하찮은 미물에 불과했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았다.
마을을 지킬 이는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자경단과 마을의 주인인 기사- 윌리 경뿐이었고, 그치들은 마을 사람들을 신전으로 대피시키는 와중에 거의 다 죽거나 흩어지고 말았다.
"하아... 하아...."
윌리 경이 어디에서 싸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을 사람들이 숨은 신전 입구를 지키며 싸우고 또 싸울 뿐이었다.
검은 든 손이 떨렸다.
힘이 빠진 다리가 후들거렸고, 바닥난 마력을 증명하듯 눈앞이 흐릿했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순 없었다.
개좆같은 코볼트들이 재차 몰려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씨발!"
로빈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고 뭐고 그냥 다 버리고 도망친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다.
여기서 이런다고 과연 마을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 역시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양쪽 모두 할 수 없었다.
로빈은 기사였으니까.
기사도를 발현한 진정한 기사- 그것이 바로 로빈 일리아였으니까!
"덤벼! 이 개새끼들아!"
바닥난 마력 덕분에 더 이상 기사도를 발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로빈은 크게 외쳤고, 바로 옆에서 로빈의 2년 선배였지만 어느새 준기사 동기가 된 에드가 역시 무어라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로빈의 눈에 하얀 새가 들어왔다.
빛으로 만들어진 새.
불길과 연기로 뒤덮인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로빈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새.
낯이 익었다.
분명 로빈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이었다.
"아가씨?"
저도 모르게 말한 그 순간이었다.
"로빈!"
에드가가 소리쳤다.
어느새 짓쳐든 코볼트들이 눈앞에 있었다.
로빈은 검을 당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휘두를 수 없었다.
조금 더 빠른 자가 있었으니까.
아가씨의 하얀 새가 그러했던 것처럼 순식간에 나타나 로빈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검은 뒷모습이 있었으니까!
"농노 부대! 집결하라!"
츠팟!
흐릿한 빛과 찬란한 황금의 빛.
로빈의 눈앞에 하늘의 군세가 강림했다.
제2장 - 간격
사실 하늘의 군세라 하기에는 다소- 아니, 상당한 어폐가 있었다.
이름 그대로 농노 부대였으니 말이다.
건장하지 못한 체구와 허름한 옷가지.
제대로 된 무장이 아닌 죽창이나 농기구 같은 것을 들고 선 오합지졸들.
하지만 적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평범한 농노들과는 달랐다.
농노 부대의 선두에 선, 흐릿한 빛이 아닌 찬란한 황금빛과 함께 나타난 소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전원! 전투태세!"
가죽 갑옷을 입은 케이트가 정면을 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러자 농노 부대 전원이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정면을 노려보았고, 금방이라도 로빈과 에드가를 찢어발길 기세로 달려들던 코볼트들은 당황하고 놀라 급히 발을 멈추었다.
케이트는 그런 코볼트들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깃발로 땅을 찍으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전원! 공격하라!"
"와아아아아!"
케이트의 외침에 농노 부대가 호응했다.
깃발에서부터 발현한 은은한 빛이 그런 농노 부대를 휘감았고, 농노 부대원들은 힘과 용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찢어발겨!"
나팔수인 지미의 외침과 동시에 농노 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선공을 당한 코볼트들의 전열이 무너지는 가운데 깃발을 땅에 꽂은 케이트가 직접 검을 뽑아들고 돌진했다.
"카멜롯에! 영광을!"
"영광을!"
케이트의 외침을 농노들이 따라 외치며 공격의 열기를 더했다.
그리고 유성은 늘 그랬듯이 혼란에 빠진 코볼트들의 배후를 급습했다.
양떼 사이에 늑대 한 마리가 난입한 셈이었으니 손발이 어그러진 코볼트들의 대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던 로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빈!"
"아가씨?!"
집 나간 아가씨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자신을 와락 끌어안는 그녀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마주 끌어안은 로빈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품에 안긴 르네를 보았다.
그러자 르네가 바로 고개를 들며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우문이었다.
대부분 코볼트들의 피이긴 했지만 몸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는 로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잔상처에 불과했기에 로빈은 보다 중요한 것에 집중했다.
"아가씨는요?! 괜찮아요? 아니, 어쩌다 지금 여기에?"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아까 본 것은 정말 르네 아가씨의 마법이었던 것일까?
혼란스러운 와중에 르네는 돌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여기 빛의 계승자님이 계시니까!"
"빛의... 계승자?"
로빈은 눈을 깜박이다 정면을 보았다.
어느새 코볼트들을 거의 다 몰살시킨 하늘의 군세와 황금빛 소녀, 그리고 검은 옷의 기사가 보였다.
빛의 계승자.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르네 아가씨가 집을 나가기 전에 억울하단 얼굴로 몇 번이나 반복했던 그 이야기.
"서, 설마! 진짜로?!"
로빈이 깜짝 놀라 되묻자 르네의 얼굴에 다시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런 걸 원했어.
이제 집에 돌아가면 언니, 오빠, 동생, 아버지, 어머니, 아무튼 그냥 전부 다 이렇게들 놀라겠지?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도파민에 취할 때가 아니었다.
마을이 공격받고 있었다.
로빈도 다쳤고, 이제 보니 에드가도 멀쩡해 보이진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로빈, 싸우고 있는 건 너와 에드가 둘뿐인가?"
코볼트들을 몰살시킨 유성이 로빈에게 다가와 물었다.
처음 보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로빈은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답했다.
"아, 아닙니다. 윌리 경 역시 어디선가 싸우고 있을 겁니다."
윌리 경 일행이 모두 죽었다면 코볼트들이 죄다 이곳에 몰려들지 지금처럼 산발적으로 흩어지진 않았으리라.
로빈의 대답에 유성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그녀의 어깨 너머에 자리한 신전 입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신전 안에는 마을 사람들이 있고?"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로빈은 생각했다.
빛의 계승자라길래 당연히 황금빛 머리칼의 소녀가 성왕의 계승자인 줄 알았는데 이 남자가 계승자인 건가?
키가 크네. 외모가 조금 이질적이라 그런지 인상적이고.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
왕국에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이런 로빈의 잡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유성이 스스로의 가슴 위에 주먹을 올리며 꺼낸 말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을 지킨 그대들의 용기와 분투에 경의를 표한다."
낯선 남자의, 그것도 갑작스러운 칭찬이었지만 로빈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강한 만족감.
한 번에 꽉 차는 것 같은 승인 욕구.
왜 이런 것일까.
눈앞의 남자가 잘생겨서? 르네 아가씨에게 눈앞의 남자가 빛의 계승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성왕의 계승자.'
그러고 보면 갑자기 나타난 뒷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후에 일어난 기적도.
하늘의 군세.
황금빛 소녀의 호령과 용맹하게 돌진하는 농노 부대.
잠깐, 농노 부대?
로빈이 다소 빨개진 얼굴로 망상을 잇는 사이 어느새 로빈을 지나친 유성은 아까부터 묘하게 소외되고 있던 에드가에게도 치하의 말을 한 뒤 주변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코볼트들의 시체가 제법 많아. 단둘이서 여길 지키며 베어낸 건가.'
유성이 괜히 경의를 표한 것이 아니었다.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건넨 인사이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 기사들의 모습에 실제로 감탄했기 때문이다.
"에드가 경, 혹시 적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르네의 물음에 에드가가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수십, 어쩌면 백을 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유성과 르네가 측면에서 들어와서 그렇지 현재 위치는 마을 입구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목책 입구를 부수고 넘어온 코볼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이는 와중에 일단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신전으로 인도한 뒤 미친 듯이 싸우다 보니 지금인 터라 로빈과 에드가도 가지고 있는 정보가 적었다.
유성은 일단 돌아서서 케이트와 농노 부대를 보았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덕분인지 모두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제법 군율을 지키고 있었다.
겉모습만 떼고 보면 어디 정예부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이게 챔피언의 힘이지.'
깃발을 들고 늠름히 서서 주변을 경계하는 케이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전과 달리 전투가 이어지는 상황인 터라 바로 돌아가지 않고 주변 경계를 하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유성은 자신을 돌아보는 케이트에게 눈짓으로 대기할 것을 명한 뒤 르네를 돌아보았다.
"르네, 빛의 새로 코볼트들의 위치를 찾아줘."
"알겠습니다!"
빠르게 답한 르네가 다시 빛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로빈과 에드가가 잡은 것들과 여기까지 오며 상대한 것들, 그리고 방금 쓰러트린 것들을 모두 합치면 근 오십.'
설사 일백 마리의 코볼트들이 몰려왔다고 해도 반수 가까이가 쓰러진 상황이었다.
일백이나 되는 무리가 그냥 몰려왔을 리는 없으니 놈들 사이에도 반드시 장수 격인 놈이 있을 터였다.
무리의 절반 가까이 혹은 이상이 쓰러진 상황.
이렇게 되면 놈이 보일 행동은 둘 중 하나였다.
남은 놈들을 이끌고 물러서거나 아니면 전부 데리고 문제의 원흉을 제거하려 하거나.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정보가 급했다.
코볼트들의 남은 숫자는 어찌 되는지, 놈들은 어떻게 기동하고 있는지, 마을의 주인이라는 윌리 경과 휘하 자경단원들의 상황은 어떠한지.
"찾았어요!"
르네가 소리친 그 순간이었다.
"꺄악!"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던 르네가 돌연 비명을 지르더니 얼굴을 감싸며 무너지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르네?"
"아가씨?!"
로빈과 에드가 역시 깜짝 놀라 르네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유성은 직감했다.
"빛의 새가 당한 건가?"
르네와 오감을 공유한다는 빛의 새.
르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모습과 행동이 답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던 르네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소리치듯 말했다.
"오고, 오고 있어요. 투창, 투창을!"
콰앙!
공기가 꿰뚫렸다.
폭발음에 가까운 무언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터졌고, 유성과 모두는 투창에 꿰여 날아가는 농노 부대원을 볼 수 있었다.
빛의 새를 잡은 무기.
지금 날아온 투창.
유성과 모두가 같은 곳을 보았다.
평범한 코볼트의 세 배- 아니, 다섯 배는 족히 됨직한 덩치의 거대한 코볼트가 그곳에 서 있었다.
거리는 50미터 남짓.
하지만 눈이 마주쳤다.
유성이 벼락처럼 외쳤다.
"다시 온다!"
콰앙!
투창이 대기를 부수며 돌진해왔다.
"흩어져!"
케이트의 외침에 넋이 나가 있던 농노 부대는 반사적으로 대응했고, 덕분에 투창은 농노 부대가 아닌 신전의 벽을 부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가라!"
대열이 무너진 농노 부대를 향해 코볼트들이 돌진해 왔다.
"크허헝! 컹컹!"
얼핏 보아도 서른이 넘는 숫자였다.
그리고 놈들의 뒤에서 거대한 코볼트가 다시 투창을 들었다.
"지미! 뿔 나팔을 불어라! 케이트!"
유성이 다시 전열로 나서면 소리쳤다.
지미가 다급히 분 뿔 나팔 소리가 패닉에 빠져 있던 일행의 정신을 되돌렸고, 연이은 케이트의 외침이 농노 부대를 다시 집결시켰다.
"카멜롯의 영광을!"
깃발이 땅에 꽂히며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으아아!"
"맞서 싸워!"
농노 부대가 비명처럼 외치며 무기를 들었다.
로빈과 에드가가 욕지거리와 함께 전열로 나섰고, 케이트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스!"
르네의 외침이 마법을 자아냈다.
농노 부대와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도달했던 코볼트들의 선두가 미끄럽게 변한 바닥 때문에 우르르 넘어졌고, 덕분에 일행과 농노 부대는 돌진해 오는 적이 아닌 전열이 무너진 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찢어발겨!"
지미의 외침과 함께 농노 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크헝! 컹!"
"죽여!"
순식간에 공방이 오가며 몇이나 되는 코볼트들이 쓰러졌고, 농노 부대에서도 쓰러지는 자가 나왔다.
하지만 이쪽은 기사급 전력이 넷이나 있었다.
로빈과 에드가가 지쳤다고는 해도 기사였고, 유성과 케이트에게는 아직 여력이 남아 있었다.
"옆에서도 온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로빈과 에드가가 르네를 노리고 측방에서 달려드는 코볼트들에게 역으로 돌진했다.
열 마리 남짓.
앞에서 돌진해 온 것이 삼십쯤 되니 모두 합치면 대충 사십여 마리.
유성은 검을 휘둘렀다.
코볼트들의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일부러 놈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유성이 강했던 이유는 단순히 합리에 기반한 작전을 누적시켰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직감.
적을 마주한 순간 이기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번에 간파하는 능력.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코볼트들 사이에서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온전히 눈앞의 적들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결코 가장 큰 적을 잊지 않았다.
콰앙!
투창이 대기를 관통한 그때.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성이 돌아섰다.
자신의 정면에서 쇄도해오는 투창을 똑똑히 보았고, 이를 악문 채 몸을 살짝 기울였다.
츠콰아-!
"크헝!"
유성의 뺨을 스치듯 나아간 투창이 애꿎은 코볼트들을 덮친 그 순간 유성은 이미 질주하고 있었다.
투창을 던진 직후.
부하들을 모두 돌진시켜 혼자가 된 적의 지휘관.
"크허헝!"
당황한 거대 코볼트가 새 투창을 드는 대신 마주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고, 유성은 놈을 마주했다.
정면.
무기 없이 당기고 있는 거대한 주먹.
유성은 간격을 보았다.
다섯 걸음.
속도를 조금 늦춰 여섯 걸음으로 만들었다.
거대 코볼트가 그런 유성에게 맞추어 주먹을 내질렀고, 그 순간 유성은 다시 속도를 바꾸었다.
세 걸음.
코볼트의 주먹이 손가락 몇 개 간격으로 유성의 머리 뒤를 지났다.
유성이 상체를 숙이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하여 지척.
유성이 휘두른 검이 거대 코볼트의 목을 갈랐다.
제2장 - 간격 (2)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춰 상대의 반응을 이끈 뒤 순간적으로 가속하여 상대의 품에 파고든다.
이후 주먹을 내지르느라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향한 날카로운 베어내기.
자세와 위치, 거대 코볼트의 두꺼운 목 때문에 일검으로 머리를 날려버리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대 코볼트의 목을 갈라 큰 상처를 남긴 유성은 대각선으로 이동해 거대 코볼트의 품안에서 벗어났고, 거대 코볼트는 뒤늦게 유성을 쫓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놈의 목에서 피가 마치 폭포수처럼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커흑, 켁, 큭?"
급히 손을 들어 목의 상처를 막아보았지만 그런다고 해결된 일이 아니었다.
단시간에 피를 엄청나게 흘린 놈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앞으로 고꾸라져 일어나지 못했다.
"후우, 후우...."
유성은 그런 놈을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처음 놈의 투창을 피했을 때부터 매우 정밀한 움직임을 해낸 유성이었지만 냉철한 이성과 달리 전신이 뜨거웠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해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나 하던 짓을 현실에서도 이루어냈다.
정밀한 간격의 파악과 이를 이용한 전투.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스릴을 즐기며 했던 짓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작은 실수 하나로도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역시나 현실이기 때문인지 감각이 보다 날카롭게 날이 선 기분이었다.
적과의 간격은 물론이고 유성 스스로의 움직임을 보다 정밀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제3자의 눈으로 유성 자신의 움직임을 보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부-웅-!
웅장한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깃발을 높이 든 케이트의 낭랑한 목소리가 코볼트들 사이에서 터지듯 퍼져나갔다.
"계승자께서 적장을 격파하셨다!"
코볼트 무리를 이끌던 거대 코볼트의 죽음.
분명한 선언에 멈춰 있던 전장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우오오오!"
"와아아!"
농노 부대원들이 함성을 질렀고, 거대 코볼트의 죽음을 목격했던 코볼트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싸우느라 보지 못했던 놈들도 뒤늦게 뒤를 돌아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코볼트들의 사기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케이트는 이러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깃발을 높이 들며 목이 터지라 소리치니 그녀의 전신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방출되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평범한 외침이 아니었다.
아군의 기운을 북돋고 적의 사기를 꺾는 힘이 담긴 외침에 코볼트들이 두려움에 빠졌고, 아직 수적으로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 영광을!"
"영광을!"
농노 부대가 그런 케이트의 곁에서 각자 무기를 들며 소리쳤다.
겨우 열 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지만 함성 소리가 마을 전체를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키에엑!"
"카악!"
코볼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농노 부대 근처에 있던 놈들은 등을 돌린 순간 죽창과 곡괭이, 도끼 등에 등과 머리가 찍혀 죽어 나갔지만 열이 넘는, 거의 스물에 가까운 코볼트들이 도망친 셈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런 놈들을 뒤쫓는 대신 근처에 있던 놈 두어 명만을 제압한 뒤 농노 부대를 수습했다.
유성 역시 추적 명령을 내리는 대신 신전 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고, 코볼트들은 그런 유성이 있는 방향으로는 단 한 마리도 도망치지 않았다.
"후우."
검을 갈무리한 유성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신전 앞의 일행들을 보았다.
그러자 제일 후열에 자리하고 있던 르네가 활짝 웃으며 유성을 향해 달려왔다.
"계승자님! 우리가 이겼어요! 이겼다고요!"
요염한 얼굴로 해맑게 웃는 얼굴이 참 묘하면서도 어울렸다.
유성은 마주 웃으며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르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우리가 이겼어. 그리스 마법도 아주 좋았고. 적의 예기를 꺾기에 주효했어."
"가, 감사합니다."
유성의 칭찬에 뺨을 붉힌 르네가 부끄럽다는 듯 입술을 움츠렸지만 이내 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런 르네를 지나친 유성은 케이트와 농노 부대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어느새 쪼르르 따라온 르네가 입을 꾹 닫고 웃음기를 지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농노 부대는 무적이 아니었다.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농노 부대원 하나가 쓰러져 있었고, 케이트가 그런 농노 부대원에게 무릎베개를 해준 채 그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케흑... 큭...."
농노 부대원이 힘겨운 숨을 토하며 피로 물든 스스로의 손을 보았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는 두려움과 공포를 비롯한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빛과 함께 소환되는 농노 부대.
전투 중에 죽은 그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
당장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성은 지금 이 순간이 눈앞의 농노 부대원과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케이트는 침묵한 채 조용히 유성을 바라보았고, 유성은 말없이 다가가 자세를 낮추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번에는 생각하는 대신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피로 젖은 농노 부대원의 손을 잡고,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어린 얼굴이었다.
어쩌면 소년에 가까운 나이일지도 몰랐다.
죽어가는 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
르네에게 한 말, 로빈에게 한 격려, 사기를 북돋기 위해 외친 함성-
유성은 결국 이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농노 부대원의 손을 꽉 잡아주며 마음에서 우러난 말을 하였다.
"함께 싸워줘서 고맙다."
농노 부대원의 얼굴에 순간이나마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왈칵 피를 한 번 쏟은 그는 텅 빈 눈으로 먼 곳으로 보며 말했다.
"엄마...."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눈을 감은 농노 부대원의 몸이 흐릿한 빛이 되어 사그라졌다.
거대 코볼트의 투창에 처음 당했던 농노 부대원 역시 빛이 되어 사라졌으리라.
농노 부대원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텅 빈 손을 유성이 천천히 움켜쥐자 침묵하고 있던 케이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전입니다."
"...그래."
열댓 명밖에 안 되는 숫자로 세 배가 넘는 숫자의 코볼트들을 물리쳤으니 분명 대승이었다.
숨을 크게 삼킨 유성은 케이트와 얼굴을 마주했다.
차분한 기쁨과 애틋한 슬픔이 공존하는 얼굴에 유성은 순간 말을 잊었지만 이내 작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계승자님도 수고하셨습니다."
마치 성녀와도 같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케이트는 이내 표정을 정돈하더니 농노 부대원들이 밧줄로 꽁꽁 묶어 둔 코볼트 두 마리를 돌아보았다.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유성은 그녀가 어째서 코볼트들을 생포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유성이 화답하듯 답하자 다시 작게 웃은 케이트가 은은한 황금빛이 되어 사라졌고, 남은 농노 부대원들 역시 저마다 유성에게 인사를 한 뒤 흐릿한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광경에- 빛으로 휩싸인 칠흑의 기사의 모습에 로빈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이야기- 아니, 소설, 전설, 신화, 아무튼 뭐 그런 곳에서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성왕의... 계승자."
탄성처럼 흘러나온 로빈의 말에 에드가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런 두 기사들의 입덕 광경을 보지 못한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선 뒤 등 뒤에 서 있던 르네를 돌아보았다.
"르네."
"네, 계승자님."
방금 본 광경 때문인지 아까와 달리 제법 숙연해진 표정의 르네가 답했다.
유성은 그런 르네를 마주하며 말했다.
"빛의 새로 마을 주변을 살펴줘. 새로 접근 중인 코볼트들은 없는지, 마을의 생존자들... 특히 윌리 경이 살아 있는지."
"알겠습니다."
딱히 추가적인 공격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윌리 경 역시 죽었을 가능성이 컸지만 만약 살아 있다면 찾아서 데려가야 했다.
"로빈."
"네? 아, 넵!"
여전히 황홀한 얼굴로 유성을 바라보던 로빈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대답했다.
차렷 자세까지 취하는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은 유성은 그대로 로빈- 그리고 에드가의 모습을 살핀 뒤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치료부터 해야겠네. 두 사람 모두 정말 잘 해주었어."
"아, 아닙니다!"
"크흑."
상기된 얼굴로 수줍어하는 것은 로빈이었고, 아예 감격의 눈물로 눈시울을 붉히는 것은 에드가였다.
둘 다 아직 젊다 못해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평소에도 기사도 문학에 심취해 있어서 그런지 생각 이상의 반응들이었다.
'음... 뭐, 나쁠 건 없겠지.'
적대하거나 경계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
애당초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취한 태도와 말투이기도 하고.
'다음은 마을 사람들인가.'
굳게 닫힌 신전 입구를 바라보며 유성은 미간을 좁혔다.
생존자는 얼마나 될 것이고 그들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기본적으로는 피난인데.'
하지만 피난길에 오르기 이전에 일단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유성은 농노 부대가 사라진 자리에 꽁꽁 묶인 채로 자빠져 있는 코볼트들에게 다가갔다.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를 살피던 놈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유성을 바라보았고, 유성은 무어라 묻기에 앞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지레 겁을 먹은 코볼트들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말한다! 다 말한다!"
"부족장 따라왔다. 부족장이 멀리서 온 왕자님께 합류한다고 했다!"
"왕자님?"
빛의 새 마법을 시전 중이던 르네가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너무 의외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왕자라니.
설마 코볼트의 왕자라도 존재한단 말인가?
"그건 좀 싫은데...."
로빈이 작게 중얼거리는 와중에 유성은 코볼트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러자 왕자님을 입에 담았던 놈이 다시 빠르게 말했다.
"왕자님이 우릴 이끈다. 모두 모여 인간들을 쓸어버린다! 불을 찾는다!"
소리치는 코볼트들의 눈에 희열이 번졌다.
말하는 와중에 상황을 잊고 고조된 모양이었다.
"왕자의 이름은 뭐지?"
"모른다! 왕자님은 왕자님이다!"
"불은?"
"불은 불이다!"
조잡한 도구를 사용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코볼트들도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불을 찾는다고?
"불에 대해 더 아는 건 없나?"
"모, 모른다. 불을 찾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딱히 더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자 에드가가 다가와 유성에게 소리 없는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이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가 코볼트들의 숨통을 끊는 사이 유성은 미간을 좁힌 채 생각했다.
코볼트의 왕자.
왕자의 밑에 집결하는 코볼트들.
그들이 찾고 있는 불.
그리고 흉성의 시대.
드넓은 로토 숲에 인접한 마을은 이곳 하나가 아니었다.
어쩌면 인근의 마을들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난민들이 있다면 모두 로티안에 모이게 될 거야.'
르네가 이야기했던 인근의 도시.
유성은 눈을 감았다.
온갖 생각과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애써 가라앉히고 합리를 떠올렸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찾고, 이를 행한다.
일단 생존자들을 수습하고 모두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2점 획득했습니다.]
[마을 구원: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지휘 가능한 병종이 추가되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5점 획득했습니다.]
[농노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케이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적장 격파'를 달성했습니다.]
레벨 업.
유성의 얼굴에 옅게나마 미소가 어렸다.
제3장 - 바나데인
결론부터 말하면 윌리 경은 사망했다.
자경단원 역시 전멸.
200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 역시 대다수가 죽어 살아남은 것은 30명이 채 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존자들을 인솔할 촌장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신전에 숨어 목숨을 건진 노년의 촌장은 촌장답게 눈치가 빨랐다.
신전에서 나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그는 르네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 빠르게 행동했다.
"다들 서둘러!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해!"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벗어나야 한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포기했다.
땅을 파고 묻는 것은커녕 한데 모아 불태우는 일조차 버거웠다.
식량과 재산을 챙길 시간조차 촉박한데 언제 또 시신들을 모은단 말인가.
촌장의 재촉 속에 사람들은 급히 떠날 채비만을 갖추었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유성 일행을 따라 마을을 나섰다.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달이 밝긴 해도 애당초 그렇게까지 멀리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두어 시간 정도 나아가 마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되자 유성 일행은 적당한 곳을 찾아 피난민들과 함께 야숙할 채비를 했다.
"이틀 정도만 더 가면 될 겁니다."
촌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바위에 기대 앉아 피난민들을 보았다.
수레 몇 대와 욱여넣듯 쌓아 올린 짐들, 그나마 끌고 올 수 있었던 가축 몇 마리.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은 자리를 잡자마자 대부분이 깊은 잠에 빠졌다.
한밤중에 갑자기 습격을 당해서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죽임을 당한 데다 정붙이고 살던 고향에서 도망치게 된 판국이니 놀라고 슬픈 것과 별개로 육신과 정신 모두가 지칠 수밖에 없었다.
유성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처음 르네와 만나 코볼트들과 싸운 것이 겨우 한나절 전이었다.
즉, 이 세계에 온 지 아직 하루도 되지 않은 유성이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겪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흉성의 시대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유성은 감상에 깊이 빠지는 대신 합리를 따랐다.
한차례 눈을 감았다 뜬 유성은 바로 상태창을 열었다.
[업적 달성: 적장 격파]
[추가 5pt 획득]
[군단 관리]
보유 pt: 12pt
케이트의 농노 부대 Lv2
기수: 케이트
나팔수: 지미
구성원: 12+1(최대: 20+2)
[농노 부대 5명 증원 1pt]
기수 챔피언: 케이트
레벨: 2
무장: 카멜롯의 깃발(사기치 +1) / 평범한 장검 / 가죽 갑옷 / 군마(New!)
기사도: 카멜롯의 영광(영향 범위 안에 들어온 아군의 의지와 전투력을 강화하고 적의 의지를 저하시킨다.)
[한스의 농노 부대(5인 구성) 추가 5pt]
[한스의 농노 부대에 기수 추가 1pt]
[한스의 농노 부대에 나팔수 추가 1pt]
새로운 병종
[궁수 부대(3인 구성) 추가 5pt]
[경기병대(2인 구성) 추가 5pt]
영웅 관리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1
무장: 참나무 지팡이 / 마법사의 로브
고유 스킬: -
고유 스펠: -
눈앞을 가득 채우는 상태창의 문구에 유성은 미간을 좁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농노 부대의 구성원 변화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15+1에서 12+1가 되었어.'
전투 중에 사망한 농노 부대원의 숫자는 셋.
투창에 맞아 죽은 부대원 하나와 유성 자신이 임종을 지킨 부대원 하나, 그리고 죽는 모습조차 보지 못한 부대원이 하나.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소모된 부대는 재편하기 전까지는 소모된 그대로였기에 이미 예상한 바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속이 쓰렸다.
전투력의 감소도 감소였지만 새삼 다시 농노 부대원의 죽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유성은 다시 상태창에 집중하였다.
'가지고 있는 건 12pt.'
그런데 할 수 있는 것들은 대폭 늘어났다.
물론 선택지가 늘어난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선택장애가 온다고 해야 할까?
'일단 우선순위를 정해보자.'
가장 먼저 포인트를 투자해야 할 것은 역시 케이트의 농노 부대였다.
기수와 나팔수를 갖추고 있는 상황인데다 이제 레벨도 오르지 않았던가.
'판타지 모나크 식이면 레벨 3까지 찍고 난 뒤에 일반 보병대로 승급이 가능해질 거야.'
검과 방패 혹은 창으로 무장한 일반 보병대.
그러니 일단은 농노 부대를 키워야 한다.
2pt를 투자해 인원을 최대치로 올렸더니 2명이 예비대로 남게 되었다.
케이트의 농노 부대 Lv2
기수: 케이트
나팔수: 지미
구성원: 20+1(최대: 20+1) / 예비대: 2
'좋아, 케이트의 능력까지 고려하면 평범한 농노 부대보다는 최소 두 배 이상 강한 전력이야.'
그럼 남은 것은 10pt.
가능한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았다.
1. 농노 부대를 새로 하나 늘린 뒤 포인트를 투자해 강화한다.
2. 궁수 부대를 추가한 뒤 강화한다.
3. 경기병대를 추가한 뒤 강화한다.
4. 강화는 포기하고 일단 궁수 부대와 경기병대를 모두 추가한다.
'가지고 있는 게 10pt니 농노 부대 하나를 완편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나쁘지 않았지만 유성은 이내 머릿속에서 1번 선택지를 지워버렸다.
보병대에 올인하기 보다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다양한 병종을 갖추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추가할 바에는 제대로 된 부대를 하나 만드는 게 낫겠지.'
마음 같아서는 궁수 부대와 경기병대를 둘 다 추가하고 싶었고, 그럴 포인트도 있었지만 역시 좀 무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수 3명과 경기병 2명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려면 포인트를 투자해 좀 더 싸울 수 있는 부대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궁수 부대와 경기병대 중 양자택일 상황인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 부대일 것인가 월등한 기동력을 갖춘 경기병대일 것인가.
판타지 모나크에서였다면 각각의 부대에서 승급 가능한 상급 부대- 즉, 승급의 테크트리 쪽을 좀 더 신경 썼겠지만 지금은 당장 쓸 수 있는 전력이 좀 더 중요했다.
애당초 궁수 부대와 경기병대 모두 결국엔 획득해야 할 병종이었고 말이다.
눈을 감고 몇 번인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유성은 이내 마음을 정했다.
'궁수 부대로 간다.'
[군단 관리]
궁수 부대 Lv1
구성원: 3(최대: 10)
[궁수 부대에 2명 증원 1pt]
[궁수 부대에 부대장 추가 3pt]
역시 궁수 부대.
1pt면 5명씩 추가되던 농노 부대와 달리 2명씩밖에 추가가 되지 않았다.
'4명 증원하고 부대장을 추가하자.'
바나데인의 궁수 부대 Lv1
부대장: 바나데인
구성원: 7+1(최대: 10)
8인 구성의 궁수 부대가 완성되었다.
근접 보병인 농노 부대 21명에 궁수가 8명이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나데인이라....'
이미 케이트 맛을 한 번 봤기 때문인지(?) 바나데인이라는 궁수 부대장에게도 기대가 되었다.
이번에도 황금빛 뿜으며 SSR랭크 급 영웅이 튀어나와 주지 않을까?
'그냥 지금 한번 불러볼까?'
가볍게 부대 사열도 해보고.
'그래, 이 김에 케이트랑도 대화 좀 해보자.'
항상 전투 끝나고 바로 사라지다 보니 아직 제대로 된 대화조차 못 해보지 않았던가.
더욱이 소환에 필요한 자원 등등 개인적으로 실험해볼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직 상태창 관리가 끝나지 않았다.
지휘관 포인트는 알뜰하게 다 썼지만 아직 영웅들이 남았기 때문이다.
'케이트도 강해졌어.'
농노 부대의 레벨이 오름과 동시에 케이트의 레벨 역시 올랐다.
당연히 전반적인 능력치도 올랐는데, 상태창을 살피던 유성은 한 가지 항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대가 강해질수록 영웅의 전투력 역시 강화된다.]
즉, 부대의 전투력이 강해질수록 영웅의 전투력에 보정치가 들어간다.
유성 자신이 군단 전체의 전투력 상승에 따라 보정을 받는다면 영웅들은 자신의 부대 전투력 강화에 따라 보정을 받는다고 해야 할까?
'지휘관은 부대의 전투력에 보정을 받고, 총대장인 나는 부대 전체- 즉 군단의 전투력에 따라 보정을 받는다는 건가.'
조금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농노 부대원 한 명의 전투력이 강해지면 결과적으로 케이트는 물론이고 유성 자신의 전투력까지 강해진다는 이야기였다.
'부대 키울 맛은 나겠네.'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은 유성은 다시 케이트의 상태창을 보았다.
'이대로 쭉쭉 크면 진짜 성녀 기사 같은 게 되지 않을까.'
성녀 기사라고 하니 뭔가 좀 기묘한 조합이었지만 케이트가 성녀 같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레벨2가 되면서 군마가 추가되었는데... 좀 특이하긴 하네.'
보병 부대에는 온 풋 히어로- 그러니까 보병 영웅이 붙는 것이 보통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반론이 그렇다는 것뿐이지 군마가 추가되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오히려 감사하고 싶었다.
'전투력 상승, 기동력 상승, 생존력 상승.'
그리고 유사시에는 유성 자신이 군마를 빌려 탈 수도 있다.
어떻게 봐도 기쁜 일이었다.
'르네는 아직 렙업을 안 해서 그런가 딱히 변한 게 없네. 케이트처럼 따로 부대가 있는 건 아니니 개별 성장을 하려나?'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했지만 일단 레벨 업을 해봐야 알 일이기는 했다.
물론 방식이야 어찌되었든 일단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지만 말이다.
'후우, 좋아.'
상태창을 닫은 유성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르네가 알림 마법 덕분에 불침번이 필요 없었던 터라 일행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럼 저쪽에서 잠깐 불러볼까.'
유성이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설 때였다.
"어... 계승... 자님?"
유성의 바로 옆자리에서 웅크린 채 자고 있던 르네가 스르륵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내었다.
얼굴을 보니 애당초 깨어 있던 것 같았다.
"안 자고 있었어?"
유성의 물음에 르네는 입술을 한 차례 오므리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 여러 가지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려서 좀."
유성과의 만남과 이후 목격한 기적들, 그리고 연달아 치른 전투 등등.
확실히 르네 입장에서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가슴이 두근거릴 만도 하였다.
"어디 가시나요?"
"잠깐 주변을 둘러보려고."
유성의 대답에 르네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놓고 저러니 따라오지 말라 하기도 뭐했다.
더욱이 '왕의 마법사'인 그녀이지 않은가.
"그래, 같이 가자."
"네."
유성의 허락에 활짝 웃으며 답한 르네는 쪼르르 걸어와 유성의 곁에 섰다.
유성은 그런 르네를 데리고 야숙지에서 살짝 떨어진 장소로 이동한 뒤 한차례 숨을 크게 고른 뒤 말했다.
"지금부터 부대를 불러낼 거야."
"설마 적이 주변에?!"
유성의 말에 흠칫 놀란 르네가 눈을 크게 뜬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유성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억누른 뒤 르네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아니고, 그냥 부대 사열 같은 거니까 긴장하진 말고."
"네? 아, 네."
부대 사열.
작게 중얼거린 르네는 민망함 때문인지 다시 입술을 오므렸다.
아무래도 버릇인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다시 정면.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유성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노 부대, 궁수 부대, 집결하라."
파앗-!
찬란한 황금빛들과 흐릿한 빛들이 유성의 눈앞에 펼쳐졌다.
제3장 - 바나데인 (2)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익숙한 케이트와 농노 부대였는데, 달라진 케이트의 모습에 르네가 와-하고 감탄을 표했다.
검고 커다란 군마 위에 올라탄 천사 같은 금발의 성전사.
성기사가 아닌 성전사인 이유는 입고 있는 옷이 가죽 갑옷이었기 때문이지만 이러나저러나 역시 압도적인 케이트의 미모였다.
챔피언이 되기 전부터 비범한 미모였는데 이제는 숫제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잠깐, 설마 레벨 업을 해서인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럼 나중엔 르네도?'
"계승자님?"
유성이 반사적으로 르네를 돌아보자 르네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진짜 얼굴이나 분위기 자체는 요사스러운 마녀 그 자체였는데, 하는 행동은 귀여운 르네였다.
"음, 아냐."
나중에 레벨 업 시켜보면 알겠지.
아무튼 다시 르네를 돌아본 유성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군마 위에 탄 채 카멜롯의 깃발을 들고 있는 케이트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절로 웅장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케이트의 곁에 자리한 것이 농노 부대인 터라 모양새가 좀 빠지긴 했지만 다르게 보면 민중을 이끄는 성처녀 같은 느낌도 없잖아 있어 이건 이거대로 좋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드는 광경이었다.
아무튼 이런 케이트와 농노 부대 옆.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부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르네는 다시 감탄을 토했는데, 선두에 선 인물을 보고는 눈까지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와! 엘프!"
그랬다.
농노 부대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기본 보병대 중에서는 낮은 티어에 속하는 터라 그냥 평범한 외양의 궁수 부대 앞에 절로 눈이 가는 인물이 서 있었으니, 아름답고 긴 금발과 수려한 외모, 호수같이 푸른 눈동자와 길고 뾰족한- 높게 솟은 귀를 가진- 누가 봐도 '와! 엘프!'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쟤가 바나데인이구나.'
숲의 종족 엘프.
온갖 신화와 전설은 물론이고 기존 서브컬처에서 모티프를 따온 판타지 모나크답게 엘프 역시 존재하였는데, 그 특징 역시 흔히들 '와! 엘프!' 하면 떠올릴 법한 것들을 갖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 사실상의 불로장생, 놀라운 활 솜씨, 날렵한 몸놀림, 고고한 성격, 높은 정령 친화력, 무척이나 수가 적어 만나보기 힘든 희귀 종족 등등.
'근데 궁수 부대장으로 엘프가 떴다 이거지.'
얼굴에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 전사도 아닌 엘프 궁수이지 않은가.
'이번에도 황금색이었는데 혹시 그냥 영웅은 다 황금색인 걸까?'
아니면 이번에도 SSR을 뽑았다든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았기에 유성은 흐뭇한 얼굴로 새로운 부대를 바라보았다.
한편 유성과 별개로 르네가 와와와 감탄했다는 감정을 얼굴뿐만 아니라 육성을 통해 드러내자 엘프 궁수- 바나데인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 도도한 모습에 르네는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다시 '와! 엘프!'를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코웃음 치는 모습이 실로 이야기 속의 엘프다웠기 때문이다.
'도도한 녀석이군.'
하지만 도도한 미녀라면 모를까, 도도한 미남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는 유성이었기에 같이 나타난 궁수 부대에도 시선을 주었다.
궁수 부대는 정말 딱 기본적인 궁수 부대 그 자체였다.
그냥 각자 해진 옷을 입고 있는 농노 부대와 달리 통일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평범한 천으로 만들어진 옷이라 딱히 방어력이 높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규군 느낌이 났다.
검정에 가까운 짙은 녹색 상의와 평범한 녹색 바지, 가죽 신발과 머리에 눌러 쓴 가죽 모자.
손에는 각자 활을 들었고 허리에는 단검을, 등에는 화살이 든 통을 메고 있었다.
'바나데인도 무장 자체는 크게 특이하진 않네.'
궁수 부대와 다른 것은 후드가 달린 녹색 망토를 두르고 있다는 것과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활을 들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인간, 언제까지 쳐다만 볼 셈이지?"
바나데인이 유성을 보며 말하자 르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케이트가 눈을 부릅떴다.
"바나데인, 계승자님께 대체 무슨 말버릇입니까. 말조심하십시오."
케이트가 바로 따지듯 사납게 말하자 바나데인은 흥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딱히 반박하진 않고 시선을 돌렸다.
'와, 케이트가 화도 낼 줄 아네. 그런데 케이트랑 이미 아는 사이인가? 하는 짓 보니 기가 또 막 센 타입은 아닌 것도 같군.'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바나데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바나데인, 나는 천유성이다. 이쪽은 왕의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
"계승자님의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입니다."
유성이 자신을 소개하자 흥분한- 정확히는 '왕의 마법사'라는 표현에 흥분한 르네가 뺨을 발갛게 붉히며 예를 표하자 바나데인은 다시 코웃음을 치는가 싶더니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며 답했다.
"이실리아의 아들 바나데인이다. 카멜롯의 동맹자로서 성왕의 계승자를 돕겠다."
카멜롯의 동맹자.
그 순간 유성은 바나데인이 왜 저런 태도와 말투를 고수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단순히 고등한 엘프로서 하등 종족인 인간에게 숙일 수 없다-라고 뻗대는 것이 아닌, 그냥 자신은 네 부하가 아니라 동맹자다. 그러니 대등한 입장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것이다.
'대충 알겠군. 그런 포지션인가.'
아무튼 유성 입장에서는 부를 때 나타나서 시키는 대로 잘 싸우기만 하면 그만인 터라 반말을 하든 존댓말을 하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더욱이 종족도 장생하는 엘프이니 반말 좀 듣는다고 딱히 위신이 깎일 것도 없었고 말이다.
"그래, 잘 부탁한다."
유성이 씩 웃으며 말하자 바나데인은 주먹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잘 부탁한다."
그래도 저렇게 바로바로 답하는 걸 보면 진짜 도도하다기보다는 그냥 도도한 척하는 걸지도.
잡생각을 마친 유성은 어느새 군마에서 내려 이쪽으로 다가온 케이트를 돌아보며 물었다.
"케이트, 바나데인과는 아는 사이인가?"
유성의 물음에 케이트는 즉답하는 대신 르네처럼 입술을 움츠리더니 이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응?"
잘 모르겠다?
유성이 되묻고 르네 역시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박이자 케이트는 평소처럼 자애롭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모두 성왕국 카멜롯을 살아갔던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과거를 떠올리면 모호할 뿐 명확한 기억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케이트의 말에 르네는 숨을 삼켰고, 유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들이 등장했을 때 예상했던 바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카멜롯의 영혼들... 그렇다면 과거에 존재했던 이들이란 말인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묻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과거 카멜롯이 존재하던 시절 그곳에서 살아가던 이들.
농노 부대는 카멜롯의 민초들이었을 터였고, 케이트와 바나데인은 카멜롯의 기사나 장교와 같은 존재였을 터였다.
'그럼 나중에는 원탁의 기사들도 나올 수 있다는 건가?'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카멜롯을 수호하는 인류최강의 전투 집단.
하지만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유성은 케이트를 보며 물었다.
"케이트, 내가 부르지 않을 때는 어떤 상태이지?"
"그게...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떤 성 같은 곳에서 편히 쉬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 뿐입니다."
'수면 상태랑 비슷한 건가.'
유성이 그렇게 영혼들의 상황에 대해 고민할 때였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케이트가 유성에게 조금 더 다가서며 물었다.
"그보다 계승자님, 지금 저희를 부르신 것은 전투를 위해서가 아닌 겁니까?"
"어, 대화를 좀 해보고 싶어서. 너희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싶고."
"그렇군요.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계승자님, 저희를 소환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계승자님의 정신력입니다. 그리고 전투 상황이 아닌 지금 같은 비전투 상황에서 저희를 소환하시면 훨씬 더 많은 정신력이 소모됩니다."
"정 부르고 싶으면 전부를 부르지 말고 부를 사람만 따로 불러라. 그편이 그래도 소모가 덜 할 테니."
케이트에 이어 바나데인 역시 목소리를 보탰다.
그러자 케이트는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이미 전투를 위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저희를 부르신 상황입니다. 계승자님께 무리가 될 수도 있으니 이만 물러가는 것을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군단을 소환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성 자신의 정신력.
이야기를 들어 의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케이트의 말처럼 비전투 상황에는 더 많은 정신력이 소모되기 때문인지 약간이지만 어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얼마든지요."
"혹시 선업 수치에 대해 알아? 선업 수치가 높아지면 성왕의 힘이 강해진다는데."
혹시나 해서 건넨 물음에 케이트는 잠시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카멜롯의 성왕은 인간의 세계를 지키는 왕. 인간을 위한 선행은 곧 성왕의 힘이 될 터이니- 선행을 쌓으시면 계승자님의 육체 능력뿐만 아니라 기사도는 물론이고 신성한 힘과 운명 역시 강해질 것입니다."
'선업 수치'라는 단어 자체는 낯설었지만 선행을 쌓아 강해진다는 메커니즘 자체는 기억이 난 것 같은 대답이었다.
'과연, 그래서였나.'
유성 자신의 현재 레벨은 4였지만 신체 능력은 판타지 모나크를 기준으로 했을 때 7~8레벨 기사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군단 전투력 강화에 따른 보정의 결과라 생각해도 꽤 과한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케이트의 말대로 선업 수치 덕분에 신체 능력이 재차 강화되었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기사도와 신성한 힘 역시 강화한다면... 생각 이상으로 큰 보정치가 될 것 같은데?'
아직은 마력이나 신력을 쓰는 기술이 없다시피 해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레벨이 더 올라 오라 블레이드 같은 스킬들을 습득한다면 선업 보정치의 효과를 보다 명확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명이 강해진다는 건 어떤 의미지?"
"말 그대로입니다. 응집한 선행의 힘이 성왕의 운명을 이로운 방향으로 이끌 것입니다."
다소 선문답 같은 이야기였지만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운명을 이끈다....'
나중에 기연 같은 것이라도 생기는 것일까.
생각지 않은 행운을 얻는다거나.
어느 쪽이든 반가운 일이었기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선업 수치가 없었어도 사람들을 구했을 유성이긴 했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던가.
의욕이 생기는 이야기였다.
"그래, 그럼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네, 계승자님."
유성의 말에 만족한 듯 부드럽게 웃어 보인 케이트는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오른 주먹을 올렸다.
그러자 뒤에서 구경하던 농노 부대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궁수 부대들 역시 같은 동작을 취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의 선창에 맞춰 부대원들이 목소리를 맞췄고, 미간을 좁히고 있던 바나데인 역시 주먹을 올리며 말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마지막에 살짝 따라붙은 것은 약간 소심한 얼굴로 가슴 위에 주먹을 올린 르네였다.
유성은 그런 르네의 모습에 빙긋 웃은 뒤 모두를 보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와 바나데인, 부대원들이 각각 금빛과 흐릿한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지자 새삼 감탄한 듯 탄성을 토한 르네가 슬쩍 다시 유성을 돌아보았다.
"왜?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어...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대체 뭘 물어보려고 저러는 것일까.
순간 엉뚱한 생각이 조금 든 유성이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그럼요, 그... 계승자님은 어디서 오신 거죠?"
유성이 소환하는 군단은 카멜롯의 영혼들이다.
그렇다면 유성은 누구이고 어디서 온 것일까.
카멜롯의 후예?
숨겨진 아서 왕의 자손?
르네의 물음에 유성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언제나 그러했듯이 빠른 결단을 내렸다.
"다른 세계에서 왔어."
"다른 세계요?"
"응, 다른 세계."
애당초 이미 천유성이라는 굉장히 이질적인 이름을 밝힌 상황이었다.
더욱이 르네는 유성 자신의 마법사.
호수의 여신이 점지해준 파트너였으니 아서 왕에게 멀린이 있다면 유성 자신에게는 르네가 있다- 같은 존재였다.
쓸데없이 숨기다 이상한 오해를 사느니 그냥 시원하게 말해버리는 게 낫다는 것이 유성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유성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르네는 잠깐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에게 있어 유성은 애당초 호수의 여신께서 보내주신 구세주였으니,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그럴싸하게 들린 탓이었다.
"어, 그럼 막... 어, 신들의 나라라든가?"
"뭐, 비슷할지도."
"와."
유성의 말에 르네는 입을 크게 벌리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얼굴을 보니 머릿속으로 온갖 망상을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서 자자."
"네? 아, 네!"
유성의 말에 망상에서 깨어난 르네는 어느새 앞장서기 시작한 유성의 뒤를 따랐다.
* * *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일행은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도시까지는 2~3일 거리로 비교적 짧은 편이었지만(어디까지나 이 세계를 기준으로) 언제 어디서 다시 코볼트들이 나타날지 모르니 최대한 서두르는 것이 사리에 맞았다.
그리고 그렇게 반나절 정도를 나아갔을 때였다.
"꺄악!"
"살려줘!"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온 비명 소리에 유성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만치 언덕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계승자님?"
마찬가지로 기사인 터라 오감이 발달한 로빈과 에드가 역시 같은 소리를 들었는지 유성을 돌아보았고, 유성은 얼른 고개를 끄덕인 뒤 피난민들을 멈춰 세우고 언덕 위에 올랐다.
"꺄아악!"
"커헝!"
저만치 멀리서 피난민 행렬이 코볼트 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피난민의 숫자는 열 명 남짓에 불과했는데, 코볼트들의 숫자는 얼핏 봐도 스물이 훌쩍 넘었다.
아직은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았다.
구해야 한다.
즉각적으로 판단한 유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로빈과 에드가가 이를 악문 채 피난민 행렬을 공격하려는 코볼트 무리를 보고 있었고, 뒤늦게 달려온 르네가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농노 부대, 궁수 부대, 집결하라."
유성의 명령에 금빛과 흐릿한 빛이 일며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로빈과 에드가였지만 새삼 감탄하였고, 아예 처음 보는 피난민들은 너무나 놀라 언덕 아래에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유성은 그런 반응들을 신경 쓰는 대신 빠르게 명령했다.
"르네, 농노 부대와 함께 언덕 위에서 피난민들을 지켜라. 궁수 부대, 피난민을 뒤쫓는 코볼트 무리를 공격해라. 케이트, 로빈, 에드가는 나와 함께 코볼트 무리를 정면에서 친다."
명을 마친 유성이 돌아선 순간이었다.
파팟!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고, 화살 두 대가 거의 동시에 쏜 것처럼 연달아 날아갔다.
"키엑!"
"켁!"
그리고 피난민들을 바짝 뒤쫓던 코볼트 두 마리가 쓰러졌다.
파팟!
다시 연사.
그리고 다시 쓰러지는 코볼트 두 마리.
바나데인이었다.
순식간에 코볼트 넷을 쓰러트린 그는 무심한 얼굴로 다시 화살을 재었고, 르네와 로빈은 거의 동시에 외쳤다.
"와! 엘프!"
그래, 이게 엘프지.
엘프 궁수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은 유성은 케이트와 함께 군마에 올랐고, 케이트는 바나데인에게 질 수 없다는 듯 군마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다시 파파팟!
경쾌한 화살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제4장 - 로티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