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20-30

제7장 - 로티안의 주인 (4)

"마력이 또 늘어났어요!"

다음 날 아침.

어제처럼 유성의 방에 찾아온 르네는 활짝 웃으며 눈을 빛냈고, 유성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그날 전투에서 르네도 충분히 활약했으니까."

정면에서 직접 싸운 장본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코볼트의 왕자는 마지막 순간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닌 도주를 선택했다.

그런 코볼트의 왕자에게 왕의 시간으로 말미암은 황금의 일격을- 라이징 임팩트를 명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나데인과 르네의 덕분이었다.

코볼트의 왕자로부터 찰나를 빼앗은 붉은 피의 얼음.

유성이 콕 집어 설명하자 르네는 부끄럽다는 듯 뺨을 붉히더니 결국 다시 미소 지었다.

칭찬도 칭찬이었지만 르네 자신의 활약을 유성이 제대로 봐주었다는 사실이 기뻤기 때문이었다.

물론 르네의 활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수성전 와중에 코볼트들을 상대로 펼친 활약을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도 1.5배 강해진 거야?"

"네. 이제 마력량만 놓고 보면 전 대륙의 모든 스무 살 이하 마법사들 가운데 최강일지도 몰라요."

애당초 강한 축에 드는 마력이 2.25배 강해졌으니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얼굴도 더 예뻐진 것 같네.'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전보다 예뻐졌다는 느낌 하나만은 확실했다.

유성은 어젯밤 르네가 가진 5pt 가운데 3pt를 써서 마력을 강화했다.

남은 2pt는 투자하지 않고 저장.

체력이나 민첩성을 키워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끝내 참은 이유는 군마 소환 때문이었다.

'다음에도 레벨 업 하면 결국 마력 증가로 손이 갈 거 같단 말이지.'

즉, 이번에도 포인트를 남기지 않고 다 써버리면 다음 레벨 업 때도 군마 소환을 찍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지리라.

'군마가 필요하긴 해.'

유성 자신에게도 군마가 생겼으니 르네와 같이 타는 수도 있긴 했지만, 언제나 붙어 다닐 순 없으니 역시 르네에게도 군마가 필요했다.

'맨손 전투는... 끌리긴 하지만 참아야지.'

왕의 안목으로 확인했을 때 르네에게 권법가의 재능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갑자기 마법사에서 권사나 마법권사로 테크를 트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다.

'권사 쪽 재능이 생각보다 크면 뭐... 딱히 안 키워줘도 어련히 꽃을 피우겠지.'

레벨 업을 하면 포인트를 쓰지 않아도 능력치가 일정량 오르게 되어 있었다.

즉, 르네에게 따로 포인트를 쓰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는 거의 기사에 준하는 육체 능력을 갖추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였다.

'그래, 어련히 마법권사 되겠지 뭐.'

일단은 마력이다.

마력이 세면 마법의 위력도 강해지고 사용횟수도 늘어나는 법이니 무조건 마력부터 찍어주는 것이 정석이다.

"아무튼 밥 먹고, 일과 시작하자."

"네, 계승... 아니, 영주님."

르네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절로 같이 웃게 된 유성은 기분 좋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영주가 된 것은 좋았지만 느긋하게 영주의 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라투스 남작령- 로티안을 중심으로 한 마을들의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다시피 한 유성은 당장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머릿속에 나열하였다.

1. 성벽의 보수.

2. 주변 정찰.

3. 정보 수집.

4. 왕도를 비롯한 주변 영주들과의 접촉.

5. 코볼트의 왕자가 남긴 코볼트 신의 신물들의 처리.

성문이 박살난 성벽을 보수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었다.

흉성의 시대가 시작된 이상 언제 또 새로운 괴물들이 몰려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리였지만 로토 마을을 비롯한 파괴된 마을들에도 직접 가든 사람을 파견하든 상황을 살펴보러 가봐야 했다.

그리고 정보 수집.

라투스 남작은 르네의 본가인 발투아 백작가뿐만 아니라 왕도에까지 도움을 청했다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로티안 외의 다른 지역에도 괴물들이 쳐들어왔는지 정보가 필요했다.

로티안을 중심으로 했을 때 주변에 자리한 영지는 크게 넷이었다.

동쪽에 위치한 볼보 남작령.

북부에 위치한 파비안 남작령.

북서쪽에 위치한 발투아 백작령.

마지막으로 북동쪽에 자리한 카리안 백작령.

시몽 경은 저 네 영지와 왕도, 이렇게 다섯 곳에는 라투스 남작의 죽음과 새 영주인 유성의 취임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했고, 유성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발투아 백작가라면 르네가 있으니 별말 없이 넘어가겠지만... 다른 두 영지는 조금 다를 수도 있으니까.'

라투스 남작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상속자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옆의 두 영지가 라투스 남작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유성 자신이야 흉성의 시대를 확신하고 있으니 괴물들과 싸울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볼보 남작과 파비안 남작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었다.

'정보 수집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통신 마법이 존재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소통은 사람을 통해 직접 하는 것이 기본인 세계였다.

이웃 영지에 사람을 보내고 그 답변을 들으려면 며칠씩 기다려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코볼트 신의 신기는 일단은 호재인가.'

코볼트의 왕자가 사용하던 갑옷과 도끼.

심하게 파손된 갑옷과 달리 도끼는 거의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유성은 두 신기 모두 녹여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코볼트의 왕자를 잡은 거지 코볼트의 신을 잡은 게 아니니까.'

코볼트 신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그 신기를 사용하다 저주라도 걸리면 어쩌겠는가.

그리고 사실 키가 3미터나 되던 코볼트의 왕자 전용으로 만들어진 무구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기도 했다.

'녹이는 게 좀 문제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로티안은 변경 도시 중에서는 제법 발달한 곳이었지만 그래봐야 인구 수천 명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악신의 힘이 어린 무구를 녹이기에는 대장장이들의 실력과 대장간의 규모 모두 손색이 있었다.

'일단 해보라고 하고, 못 하면... 퍼거스랑 멜리사를 불러보자.'

유성 성에 추거된 대장장이들.

아직 레벨들이 낮았지만 그래도 카멜롯의 대장장이들이니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는가.

산재한 문제들에 대해 빠르게 생각하던 유성은 르네와 행정관들이 정리한 문서들을 즉석에서 받아 검토하였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보는 문자들이었지만 다행히 보는 순간 한글을 읽듯이 읽을 수 있었다.

그냥 무슨 뜻인지 바로 머릿속에 꽂히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인구 현황.

세수량.

비축된 식량과 라투스 남작가의 재산 등등.

숫자들을 점검하던 유성은 아예 새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르네와 행정관들은 소리 죽여 감탄했다.

유성이 처음 보는 문자를 쓰고 있는 건 둘째치고 난잡한 정보들을 빠르게 정리해 문서 한 장으로 간추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전투만 잘하시는 게 아니었구나.'

코볼트의 왕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평생 검만 잡고 살아오셨겠거니- 했는데 이런 문관적인 면모까지 갖추셨을 줄이야.

사실 유성이 하고 있는 문서 정리는 판타지 모나크의 영지 관리 규격에 맞추어 기존의 정보들을 정리한 것에 불과했지만 이 정도 문서 정리 능력을 갖춘 기사조차 희귀한 것이 이 세계였다.

이쪽 세상의 기사들이 멍청하거나 지적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애당초 문서 정리를 하는 기술- 회계학으로 따지면 복식 부기 같은 기법의 발전이 아직 되어있지 않아서였고, 다른 하나는 기사들이 문서 정리 같은 걸 배울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의 기사는 명예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기사도를 각성한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영예로운 지위였다.

즉, 대부분의 기사들은 수련에 열중하였고, 그러다 보니 수련 외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뒤에는 '어차피 나는 싸우는 자니까 싸우는 일이나 열심히 하자'며 다른 일들을 외면하는 것 또한 보통이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거침없는 속도로 문서 위의 숫자들을 정리하던 유성은 미간을 좁혔다.

'그나마 피난민들의 숫자가 적은 게 다행인가.'

마을이 세 개나 사라졌지만 피난민의 숫자는 유성 자신이 이끌고 온 이들을 모두 합쳐 봐야 쉰 명 남짓에 불과했다.

피난민이 많지 않기에 그들을 관리할 고민 역시 적었지만, 애당초 피난민들이 적은 이유를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유성이었다.

마을 세 개가 사실상 궤멸하였다.

천 명도 넘는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 피난조차 오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유성은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인적인 청각에 잡힌 소리들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성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자 르네와 행정관들은 이유를 몰라 당황한 표정들을 지었지만 유성은 무어라 설명하는 대신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피난민들이 보였다.

더욱이 숫자가 적지 않았다.

얼핏 보아도 쉰이 넘는 숫자였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니, 어디서 온 것일까.

"영주님! 급한 소식입니다!"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것은 로빈이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예를 표할 생각도 하지 못한 그녀는 유성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거의 쏟아내듯 빠르게 말했다.

"볼보 남작령이 함락당했습니다! 볼보 남작은 사망! 볼보 남작 영애가 소식을 가지고 방금 도착했습니다! 괴물들입니다!"

연달아 전해진 정보에 르네와 행정관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 유성은 이를 악 물었다.

다시 창밖을 돌아보았다.

* * *

볼보 남작 영애.

이세리나 볼보는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시집을 갔다가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왔던 미망인으로 볼보 남작가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성이 함락될 것을 직감한 볼보 남작이 미리 탈출시킨 덕분에 목숨을 건진 영애- 이세리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나마 상황을 설명했다.

"끔찍한 괴물들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녹색 괴물들이었는데, 둘 모두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큰 놈들은 창칼로 찔러도 죽지 않고 힘이 어마어마합니다. 바위를 수십 개나 던져 성벽을 파괴했습니다. 작은 놈들은 고블린, 그래요. 아마 고블린일 겁니다. 시릴 경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두서가 조금 없기는 했지만 필요한 정보들을 제대로 담고 있었다.

"이세리나 영애, 시릴 경은...."

"전사했습니다. 그의 희생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세리나의 말에 시몽 경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시릴 경이라는 기사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던 것 같았다.

유성은 이세리나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정리함과 동시에 주변 지도를 떠올려 보았다.

로티안과 볼노 남작령의 본성인 볼라노 사이의 거리.

이세리나가 여기까지 도망쳐오는 데 걸린 시간.

'거의 동시야.'

모두 고려했을 때 볼라노가 공격받은 시기는 로티안이 공격받은 시기와 대동소이했다.

그렇다면 볼라노를 점령한 놈들은 지난 사흘 사이에 무엇을 했을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영주님, 대비를 해야 합니다. 성벽의 보수를 서두르고 다시 한번 징병을 해 병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란트 경의 제안은 타당했다.

미지의 괴물들이 밀려올 가능성이 높으니 수성전 준비를 하자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유성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볼라노를 점령한 괴물들이 이곳을 향해 밀려온다 할지라도 수성전은 답이 될 수 없었다.

이번 상대는 수성전을 고려하기 힘든 적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르네, 종이와 펜을 부탁할게."

유성의 말에 르네가 바로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유성은 펜을 쥐자마자 바로 그림을 그리더니 이세리나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세리나, 커다란 녹색 괴물들이 혹시 이렇게 생겼습니까?"

유성의 물음에 이세리나는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마, 맞아요. 그놈들이에요!"

끔찍한 기억들이 떠오르기라도 했는지 이세리나가 거의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자 모두들 유성이 그린 괴물의 그림을 보았고, 바로 다시 유성을 보았다.

궁금증이 가득한 모두의 시선에 유성은 숨을 깊이 내쉰 뒤 답했다.

"늪지 트롤이다. 고블린들을 노예로 부리는 식인 괴물들이지."

판타지 모나크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괴물들이었다.

"키는 보통 3~5미터 사이고 정말 큰 놈은 10미터까지도 자란다. 재생력이 매우 강해서 베이거나 찔린 상처 정도는 순식간에 재생해내고 시간이 좀 필요하지만 잘려 나간 사지를 재생하는 것도 가능하다. 힘이 매우 강하고 입에서는 강철도 녹이는 산성액을 토한다."

유성의 설명에 행정관들은 넋이 나간 표정들이 되었다.

정말로 저런 괴물들이 실존한단 말인가?

"이, 이세리나 영애, 놈들의 숫자를 혹시 아시오?"

그나마 이성을 유지한 시몽 경이 묻자 이세리나는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수십 마리는 됩니다. 하늘을 뒤덮을 것 같은 바위 비에 성벽이 박살나던 광경은...."

이세리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그랬기에 집무실 안의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성의 말대로였다.

저런 괴물들을 상대로 수성전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유격전을 한다."

"네?"

"유격전. 늪지 트롤들의 행동 패턴을 고려한다면 볼라노를 함락한 놈들은 지금쯤 주변 마을들을 유린하며 마음껏 인육을 취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흩어진 놈들을 요격해서 각개 격파한다."

유성의 설명에 집무실에 있던 모두는 더더욱 당황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당황한 것은 이세리나와 란트 경이었다.

"여, 영주님! 하지만 대체 무슨 병력으로 유격전을. 아니, 지금 설마 징집병들로 놈들을 요격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어설픈 병력으로는 놈들을 상대할 수 없어요! 모두 죽을 거예요!"

연달아 목소리를 높인 두 사람은 동의를 구하듯 집무실의 모두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반응들이 이상했다.

"유격전?"

"유격전."

"아."

"아!"

서로를 돌아보며 눈을 깜박이던 이들은 이내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감탄했고, 르네는 회심의 미소까지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지랄들인 것일까.

다들 새 영주가 죽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일까?

설명을 갈망하는 란트 경과 이세리나를 마주한 유성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잠깐 밖으로 나와보도록."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8장 - 유격전

집무실 밖.

내성 안뜰에서 소환된 카멜롯의 군세를 마주한 이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애당초 유성의 기사도 자체를 처음 보는 란트 경과 이세리나는 너무 놀라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고, 이미 본 적이 있는 로빈이나 시몽 경 같은 경우에도 몹시 놀란 얼굴들이었다.

"와."

르네마저도 놀랐지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과는 외양부터가 달라진 카멜롯의 군세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해진 옷을 입고 무기를 빙한 농기구들을 든 채 아무렇게나 서있던 농노 부대는 없었다.

통일된 제복과 통일된 장구류 일체.

긴 창을 든 채 오와 열을 맞추고 선 일반 보병대의 위용.

궁수 부대 역시 깃털 달린 베레모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이 달라 보였다.

이전의 궁수 부대는 그냥 궁수 부대였다면, 지금의 궁수 부대는 특수 부대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경기병대.

외양의 변화는 없었지만 숫자의 변화는 있었다.

군마를 탄 기병이 열 기나 되니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각각의 부대 앞에 선 부대장들.

태양을 연상케하는 황금의 여인과 엘프의 기사, 앞의 둘에 비해 수수해서 그렇지 다부진 미녀 느낌이 물씬 나는 늠름한 여기사까지.

특히 케이트와 바나데인은 부대의 승급과 더불어 외양- 정확히는 입고 있는 의복의 형태가 이전보다 멋지게 변한 덕에 안 그래도 대단한 미모들이 더 살아나다보니 마치 전설이나 신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로 보일 지경이었다.

'확실히 옷이 날개구나.'

물론 옷걸이들부터가 탁월하긴 했지만.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를 필두로 카멜롯의 군세 모두가 유성에게 예를 표했다.

딱히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었지만 60명이 넘는 인원이 동시에 예를 표하니 실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경이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애써 입꼬리를 진정시킨 유성이 마주 예를 표하자 케이트는 새삼 자애로운 미소를 짓더니 유성에게 눈인사를 한 뒤 군세와 함께 빛이 되어 사라졌다.

"와아아...."

카멜롯의 군세가 다 함께 빛이 되어 사라지는 광경에 이세리나는 마음에서 우러난 감탄을 흘렸다.

은은한 빛 사이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케이트와 바나데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다른 이들의 반응도 대부분 비슷했다.

로빈과 에드가는 황홀한 얼굴로 미소들을 흘려댔고, 란트 경은 체통도 잊은 채 아이처럼 연신 우와우와 하며 거듭 감탄할 따름이었다.

유일하게 반응이 조금 다른 이가 있었다면 르네였는데, 그녀는 모두가 유성의 기사도에 크게 감탄하는 모습이 무척 흡족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후후훗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미 군세는 모두 사라진 뒤였지만 여전히 여운에 빠져 있는 이세리나와 란트 경을 돌아본 유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본 것이 나의 기사도다."

유성의 기사도.

카멜롯의 군세를 소환하는 능력.

유성의 선언 덕분에 여운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란트 경과 이세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의 기사도를 보고 나니 많은 것들이 납득되었기 때문이다.

수성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영주가 유격전을 펼치자고 한 이유.

어째서 라투스 남작이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로티안을 상속시켰는지에 대한 이유 등등.

'코볼트의 왕자를 꺾은 기사.'

이세리나는 로티안까지 도망쳐 오면서 들었던 소문들을 새삼 떠올렸다.

로티안의 흑기사.

코볼트들을 짚단 베듯이 베어내는 기사.

코볼트의 왕자를 황금의 검으로 쓰러트린 태양의 성기사.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기사를 그리 많이 알지는 못하는 이세리나였지만 로티안의 영주- 유성과 같은 기사도를 가진 자에 대해서는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런 기사도가 가능하구나.

세상에는 이런 기사도 있구나.

볼라노를 함락시킨 녹색 괴물들- 늪지 트롤들은 이세리나에게 있어 악몽 그 자체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로티안까지 도망쳐 오면서도 딱히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해 도망친 것에 불과했다.

볼라노 함락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 로티안 역시 머잖아 비슷한 운명에 처할 것이란 생각마저 하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남자라면 할 수 있다.

아버지와 볼라노의 원수인 트롤들을 쓰러트릴 수 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만감이 교차해 눈물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유성은 이세리나를 보았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대강이나마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는 대신 당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였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격에는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않다. 나와 르네 둘이서 요격에 나서겠다."

유성의 말에 란트 경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단을 소환하는 기사도라니.

세상에 이보다 더 유격전에 적합한 능력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니, 진짜 생각할수록 사기인데?'

적도 눈이 있으니 군대가 움직이면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사 한 명이라면?

찾기 힘들다.

작정하고 파고들면 적진 깊숙한 곳까지 잠입하는 것 역시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가 더 사기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기사 한 명이 잠입해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유성은 달랐다.

잠입한 뒤 군단을 소환한다.

적들 입장에서는 본진이나 후방에 갑자기 군단이 공간이동을 해온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보급 문제도 없다?'

군무에 종사하지 않은 자들이 흔히 하는 착각과 달리 군대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보급이 반드시 필요했고,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군단을 먹이기 위해서는 일단 식량이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식량을 군단에게 보급하기 위해서는 운송 수단과 인원이 필요했고, 다시 그 운송 부대를 지키기 위한 수비 병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성의 기사도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유성 한 명이 먹을 식량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보급선 유지?

그딴 게 왜 필요한가.

그냥 말에 며칠 먹을 식량만 싣고 달리면 그만인 것을.

물론 그 말이 먹을 식량 역시 필요하고, 말을 타면 눈에 띌 가능성 역시 높아지겠지만-

"그리고 하나 더. 알폰스."

유성이 낮게 말한 순간이었다.

유성의 바로 옆에 힘세고 강해 보이는 칠흑의 군마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흑마의 출현에 르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계승자님, 저 말도 기사도의 일부인가요?"

"새로 추가된 녀석이야."

유성이 씩 웃으며 말하자 유성 옆에 서 있던 칠흑의 군마- 알폰스가 르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똑똑해 보이네요. 잘생겼고요."

르네의 칭찬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이 된 알폰스는 마치 쓰다듬어 달라는 듯 르네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만져도 될까요?"

"얼마든지."

유성의 허락에 르네가 슬쩍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알폰스는 기분 좋다는 듯 르네의 얼굴과 가슴에 머리를 비볐고, 유성은 쓰게 웃었다.

'수컷이라 그런지 미인을 밝히네.'

아무튼 르네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에 유성은 만족했고, 르네는 웃으며 알폰스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란트 경은 생각했다.

'말도 있네.'

즉, 말도 소환할 수 있다는 것이니 그나마 생각했던 단점조차도 사라진 셈이었다.

"시몽 경, 로티안을 부탁한다. 성벽 보수와 징집병들의 훈련을 병행하고 있어라."

"그리하겠습니다."

유성의 말에 시몽 경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유성은 연이어 로빈과 에드가를 가까이 부른 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빈, 에드가. 요격전에 따라오고 싶겠지."

유성의 말에 로빈과 에드가가 동시에 눈을 빛냈고, 로빈은 아예 고개까지 끄덕였다.

하지만 유성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두 사람은 로티안에 남아줬으면 한다. 시몽 경은 분명 믿음직한 기사이지만 아직 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 두 사람이 로티안에 남아야 한다."

사실 르네와 단 둘이 움직이는 쪽이 로빈과 에드가를 대동하는 것보다 기동성을 비롯해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점이 많았기 때문이었지만 지금 꺼낸 말도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르네는 유성 자신의 사람이었고, 로빈과 에드가는 르네의 사람들이었다.

유성 자신이 성을 비우는 상황이니 믿음직한 이들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유성의 설명에 로빈과 에드가는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이 자신들을 '내 사람'이라 여겨준 것에 감동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에게 있어 유성은 갑자기 나타난 카멜롯의 후예가 아닌 호수의 여신이 흉성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구세주였다.

더욱이 로티안 수성전에서 코볼트 왕자와의 결전으로 그 사실을 입증하기까지 한 마당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엄밀히 따지면 발투아 백작가의 사람이지만.'

그래도 뭐랄까.

이미 르네가 유성 자신의 사람이 된 마당이니 두 사람이 유성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는 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을 납득시킨 유성은 연이어 시몽 경을 따로 불러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을 맡길 수 있는 건 시몽 경뿐입니다. 라투스 남작님도 제게 로티안을 맡기실 때 시몽 경을 믿고 의지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유성의 말에 입을 꾹 다문 시몽 경이 눈시울을 붉혔다.

새삼 라투스 남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라투스 남작은 시몽 경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분명 시몽 경의 이야기를 했을 거라 생각하는 유성이었다.

애당초 좋은 게 좋은 것이었고 말이다.

"로티안을 잘 부탁합니다."

"예, 영주님."

가까운 자리에서는 말을 높인다.

유성 입장에서는 한참 연상인 시몽 경에게 말을 놓는 것이 영 거북해서 사용한 존댓말이었지만 시몽 경에게는 다른 의미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더욱 굳은 충성을 바치겠다는 눈빛이 된 시몽 경의 모습에 만족한 유성은 다시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식량을 준비하는 대로 바로 출정하겠다. 르네, 준비해서 돌아오도록."

"네, 계승자님."

바로 답한 르네가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유성은 그사이에 볼로나 인근 지도를 펼친 뒤 이세리나와 시몽 경 등에게 지리를 재차 확인하였다.

그리고 십여 분 남짓 후 배낭 하나를 매고 돌아온 르네를 마주한 유성은 바로 알폰스를 소환했다.

"그럼 다녀오겠다. 소식을 전하기 전까지는 성을 굳게 지키되 언제든 출병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그리하겠습니다."

시몽 경이 굳은 얼굴로 답하자 유성은 이세리나를 돌아보았다.

"이세리나 영애, 다녀오겠습니다."

"무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이세리나가 공손히 예를 표하자 마주 예를 표한 유성은 마지막으로 등 뒤에 자리한 르네에게 말했다.

"꽉 잡아."

"네! 계승자님."

그리고 정말로 유성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머리까지 기대는 르네의 모습에 작게 웃은 유성은 바로 알폰스를 출발시켰다.

목적지는 볼로나.

볼보 남작령을 향해서였다.

제8장 - 유격전 (2)

너무나 갑자기 진행된 출정이었지만 필요에 의한 일이었다.

볼로나가 함락된 것은 약 사흘 전.

늪지 트롤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만약을 대비한다면 로티안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시급히 움직여야만 했다.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상황 파악과 요격.'

그리고 만약 늪지 트롤들의 다음 목표가 로티안이라면 요격을 통해 최대한 놈들의 진군을 늦춘다.

유성은 동쪽으로 말을 달리며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주변 일대의 지도를 그려보았다.

볼로나는 로티안과 마찬가지로 왕국과 미개척지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도시였다.

로티안의 동쪽에 위치했고, 로티안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목초지 하나와 마을 두 개가 존재했다.

이세리나가 필사적으로 말을 달려 도착하는 데 걸린 시간이 사흘 남짓이었다.

평범하게 이동한다면 도보로는 적어도 엿새 이상이 걸릴 거리였고, 늪지 트롤들의 느린 발을 생각한다면 열흘까지도 걸릴 수 있는 거리였다.

로티안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이틀.

말을 달린다 해도 반나절 이상은 걸릴 거리였다.

유성은 두 시간 이상을 달린 뒤 잠시 멈춰 휴식을 취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 직접 달리는 건 말이니 말만 힘들 거라 생각하기 쉬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달리는 말의 등은 위아래로 엄청나게 흔들리기 마련이었고, 탑승자는 그에 따른 충격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더욱이 아무리 안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버티는 힘과 균형 유지 또한 필요했으니 체력과 집중력의 소모 역시 적지 않은 편이었다.

'르네도 은근 잘 버티네.'

기승에 재능이 있어서 그런지 두 시간이나 말을 달렸음에도 제법 멀쩡해 보이는 르네였다.

'생각해 보니 이세리나도 보통이 아니구나.'

사흘 내내 말을 달렸는데도 쓰러지지 않고 유성 자신과 대면했으니 이세리나에게도 기승 재능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알폰스를 돌려보내고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자 르네가 빛의 새로 주변을 정찰하며 물었다.

"계승자님, 늪지 트롤들은 어떤 괴물들이죠?"

로티안에서 대강의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말 그대로 대강일 뿐이었다.

늪지 트롤과 직접 싸워야 하는 마당이니 조금 더 상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성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괴력과 재생력을 동시에 갖춘 괴물이야. 덩치가 큰 만큼 맷집도 대단한 편이고."

머리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지성이 없는 수준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근접전 능력이 뛰어나. 입에서 뱉는 산성액은 사거리가 짧아서 그렇지 강철도 녹일 정도의 물건이라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고."

"멀어지면 돌을 던진다는 거죠?"

"맞아. 돌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사람 머리만 한 돌을 던지면... 위력과 속도가 대포알을 연상시킬 정도야. 그리고... 발이 느리다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사실은 좀 달라."

유성의 말에 르네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유성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트롤들 자체는 빨라. 덩치도 커서 5~7미터 정도는 눈 깜박할 사이에 좁혀올 수도 있어."

덩치가 커서 굼떠 보이지만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다.

당장 야생의 곰들도 작정하고 달리면 상상 이상의 속도를 보이지 않던가.

"하지만 다행히 그런 속도를 오래 유지할 순 없어. 금방 지친다고 해야 할까?"

"아, 그래서 발이 느린 거군요?"

순간 속도는 높지만 그 속도를 오래 유지할 수 없다.

그러니 크게 보면 이동 속도 자체는 느리다 할 수 있다.

"덩치가 워낙 크니까 무게도 많이 나가고, 항상 배가 고픈 상태라 활동량도 적은 편이야."

유성이 생각하는 늪지 트롤은 기본적인 기동력은 느리지만, 일단 붙으면 상대를 확실하게 박살 내는 중장전차 같은 존재였다.

"트롤들을 상대할 때 제일 까다로운 건 역시 재생력이야. 애당초 맷집이 좋아서 잘 죽지도 않는 놈들이 회복까지 해대니까 전투 지속력이 엄청나."

평범한 병사들은 어디 한 군데만 찔려도 바로 전투력의 대부분을 상실하기 마련이었지만 재생력을 갖춘 트롤들은 달랐다.

놈들은 정말로 숨이 끊기기 전까지는 계속 싸울 수 있는 괴물들이었다.

"볼로나가 함락되고 사흘이니 인근 마을에는 트롤이 있어봐야 두어 마리 뿐일 거야. 트롤 보다는 고블린들을 훨씬 많이 볼 가능성이 높아."

늪지 트롤들은 고블린들을 부족 단위로 부렸다.

이세리나의 말마따나 늪지 트롤의 숫자가 수십 정도라면 볼로나에 입성한 고블린의 숫자는 일천을 우습게 넘길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유성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의식의 일부를 빛의 새에 할당하고 있던 르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피난민들이에요! 고블린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어요!"

"알폰스!"

빛과 함께 나타난 칠흑의 군마 위에 올라탄 유성은 르네까지 태운 뒤 바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쪽이에요!"

유성의 눈에도 보였다.

고블린 십여 마리가 사람들을 덮치고 있었다.

"르네! 꽉 잡아!"

르네가 대답하는 대신 유성의 허리를 강하게 안았고, 유성은 돌진하며 검을 뽑아들었다.

땅울림 소리를 들은 고블린 몇이 유성 쪽을 돌아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유성이 놈들과의 거리를 좁힌 이후였다.

츠팟!

고블린 한 놈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알폰스가 진로에 가로놓인 고블린들을 짓밟았고, 르네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페럴라이즈!"

"키악!"

쓰러진 피난민의 등에 칼을 꽂으려던 고블린이 그 자세 그대로 마비되었다.

유성은 카멜롯의 군세를 부를 것도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 고블린들에게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세 놈을 쓰러트렸다.

"싸워라! 싸워!"

개중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부하들이 유성에게 덤벼들면 그대로 도망칠 생각 같았다.

하지만 유성은 놈의 치졸한 계략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로 놈을 향해 똑바로 돌진하니 진로상에 있던 고블린들이 알아서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

"키악!"

대장 고블린의 목이 깨끗이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유성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다시 고블린들을 공격했고, 알폰스와 르네 역시 고블린들을 공격해 순식간에 놈들을 전멸시켰다.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 1점을 획득했습니다.]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상태창 문구를 빠르게 확인한 유성은 피난민들을 돌아보았다.

경상을 입은 자가 몇 명인가 있었지만 다행히 죽은 자는 없었다.

유성이 너무 순식간에 고블린들을 처리한 터라 상황을 쫓아가지 못하던 피난민들은 눈을 몇 번이나 깜박인 후에나 자신들을 살았음을 실감했다.

"으아아앙."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긴장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우는 자와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감사를 표하는 자들이 뒤엉킨 가운데 장년의 사내 하나가 유성에게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보아하니 피난민들의 대표 같은 자인 모양이었다.

"저희는 라구스 마을 사람들입니다. 로티안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습니다."

나이를 괜히 먹은 것이 아니라는 듯 자질구레한 이야기 대신 딱 필요한 이야기만 꺼낸 남자였다.

라구스 마을은 볼보 남작령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도를 떠올린 유성이 물었다.

"필로 마을은 어떤 상태지?"

"모르겠습니다. 괴물들에게 함락당한 것 같아 돌아서 이동 중에 고블린들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유성이 목표로 삼은 로티안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마을이 필로 마을이었다.

'마을을 우회해서 이동하는 피난민들을 발견한 고블린들이 사냥 부대를 보낸 건가.'

얼추 상황을 파악한 유성은 다시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서둘러 로티안으로 가라."

"기, 기사님은?"

"나는 필로 마을로 간다."

유성의 말에 사내는 순간 흠칫했지만 주변에 널려 있는 고블린들의 시체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 무운을 빕니다."

"로티안은 안전하다. 서둘러 가라."

거기까지 말한 유성이 다시 알폰스 위에 올라타자 사내가 퍼뜩 고개를 들며 물었다.

"기, 기사님은 누구신지?"

실로 단순한, 생명의 은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얼굴에 르네가 활짝 웃더니 유성을 대신해서 말했다.

"빛의 계승자이신 동시에 로티안의 주인이신 유성 님이십니다. 저는 유성 님의 마법사인 르네고요!"

발랄하게 외친 르네가 다시 활짝 웃자 사내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당황하며 고개를 조아렸고, 다른 피난민들은 동경과 경탄이 섞인 눈으로 유성과 르네를 바라보았다.

"가자, 르네."

"네, 유성 님."

어쩐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조금 섞인 목소리로 말한 유성이 그대로 말을 달리자 작게 웃은 르네는 여전히 이쪽을 쳐다만 보고 있는 피난민들에게 외쳤다.

"로티안으로 가세요! 어서!"

"가, 가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외친 장년의 사내는 피난민들을 수습해 발걸음을 서둘렀고, 르네는 유성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유쾌한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비록 다들 경상에 그쳤지만 조금만 늦었다면 죽는 이가 나왔을 터였다.이세리나와 함께 로티안에 도착한 피난민의 숫자는 오십 명 남짓이었다.

필로 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숫자가 못해도 수백 명은 될 터이니 남은 사람들이 어찌 되었을지가 걱정이었다.

유성이 필로 마을을 향해 말을 달리는 동안 르네는 빛의 새를 하늘에 띄웠다.

마력이 두 배 이상 강해진 덕분에 빛의 새의 유지 시간은 물론이고 날려 보낼 수 있는 거리 역시 크게 는 르네였다.

르네는 유성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빛의 새에 집중했다.

필로 마을이 보였다.

마을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르네는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았다.

고블린들이 보였다.

시체들이 보였다.

묶여 있는 사람들.

불가에서 구워지고 있는 고기들.

커다란 솥에 삶아지고 있는 고기들.

솥에 걸쳐진 손가락이 보였다.

고블린에게 끌려가며 울부짖는 소년이 보였고, 커다란 도마 위에서 시신을 토막 내고 있는 고블린이 보였다. 끌려가는 소년을 보며 절규하는 소녀도 보였다.

소년이 큰 칼을 든 고블린에게 끌려갔다.

소년이 울부짖었다.

고블린이 큰 칼을 들어올렸다.

"커흑! 컥!"

집중이 깨졌다.

너무나 끔찍한 광경에 욕지기가 오른 르네가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르네?"

유성이 불렀지만 르네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억지로 신물을 삼키며 거친 숨을 토했다.

"마을에, 마을에 사람들이 있어요."

마을 곳곳에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붙잡혀 있었다.

르네가 본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다.

고블린들의 노리개 신세가 된 여인들.

기둥에 묶인 채 손도끼의 표적이 되어 죽은 노인들.

고블린들은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지 않았다.

반수 이상을 살려둔 채 필요에 따라 사용하고 있었다.

쥐어짜낸 목소리로 이어진 르네의 보고를 모두 들은 유성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놈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거의, 거의 백에 가까웠어요. 트롤들은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있을 것 같아요. 부서진 벽 틈 너머로 커다란 괴물들이 보였어요."

트롤도 있고 고블린도 있다.

고블린의 숫자가 적지 않다.

마을 사람들 역시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

마을 사람들을 최대한 구하면서 고블린들과 트롤들을 몰살하기 위한 계획.

유성은 말을 달렸다.

필로 마을을 향해 전속력으로 나아갔다.

제8장 - 유격전 (3)

고블린 샤먼 유칼은 마을 광장 부근에 자리한 큰 집의 지붕 위에 앉아 주변을 돌아보았다.

백 마리가 훌쩍 넘는 고블린들이 저마다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간들을 도축하는 놈들.

도축한 고기를 요리하는 놈들.

인간 여자들을 상대로 씨를 뿌리는 놈들.

그냥 장난으로 기둥에 묶은 인간을 난도질하고 있는 놈들.

유칼은 갓 구운 손가락을 오도독 씹으며 인간들을 돌아보았다.

첫날은 울고불고 난리에 자꾸만 비명을 질러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에서 인간들이 도축 당해도 두려움에 떨 뿐 그리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른 놈부터 잡아먹힌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결국 똑같구나.'

유칼은 인간들을 처음 보지 않았다.

'장벽' 너머에도 인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인간들과 달랐다.

이 땅의 인간들이 훨씬 더 많았다.

'문명의 불'이란 것 덕분에 풍요롭게 살았는지 살이 뒤룩뒤룩 찐 놈들도 적잖게 보였고, 잘은 모르겠지만 재주도 훨씬 많아 보였다.

돌로 된 성벽과 그 안에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집들을 보았을 때는 경이로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똑같았다.

찌르면 죽었고, 때리면 울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벌벌 떠는 것은 유칼이 기존에 알던 인간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약하다.'

숫자는 많은데 오히려 약하다.

유칼은 웃음을 흘렸다.

움직이기 귀찮다며 자꾸 늘어지려는 트롤들을 다독여 가장 먼저, 제일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여자가 많았다.

씨를 잔뜩 뿌리면 새끼들이 잔뜩 늘어날 터였다.

그럼 더 많은 인간들을 차지할 수 있다.

새끼도 훨씬 더 많이 쳐서 수천, 수만이 넘는 고블린들을 거느릴 수도 있다.

그리한다면.

그리된다면.

유칼은 무리의 수장인 킬라칼이 말한 '빛'이나 '문명의 불'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장벽을 넘자 마주하게 된 풍요로운 세상에서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랬기에 유칼은 수많은 고블린들을 거느린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웃음을 흘렸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유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을의 입구 쪽을 보았다.

땅울림을 일으키며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인간들이었다.

말을 탄 인간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섯.

하지만 유칼은 방심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에는 간혹 특출나게 강한 놈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대부분 말을 타고 다녔다.

"종을 울려라!"

유칼이 소리치자 근처에 있던 놈이 줄을 당겨 마을 광장의 종을 쳤다.

종소리를 들은 고블린들이 저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광장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달려오던 다섯 놈이 말을 입구를 강타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마을 입구가 박살났다.

너무나 큰 굉음과 충격에 깜짝 놀란 유칼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흙먼지가 잔뜩 일어난 입구 쪽을 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지만 유칼은 반사적으로 판단했다.

"모여라! 전부 모여라!"

입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고블린들이 우르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흙먼지를 뚫고 나타난 인간들은 마을 곳곳에서 모여드는 고블린들을 보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유칼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충격에 놀라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지며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쳐라! 잡아라!"

대충 어떤 상황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놈들은 마을에 있는 고블린들의 숫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얼마 없는 줄 알고 다섯이서 들이닥쳤다가 백이 넘는 것을 알고 두려움에 빠진 것이겠지.

기분이 좋았다.

말이 다섯 마리나 되니 말고기를 특히 좋아하는 트롤들 배를 채우기도 좋았고, 들이닥친 놈들 다섯- 아니, 이제 보니 여섯이었는데 어찌 되었든 여자가 둘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좀 특별해 보였다.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다.

마력을 품고 있다.

둘 중 하나는 마력의 양이 정말 굉장하다.

유칼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저 여자를- 보라색 머리를 가진 여자를 잡아다 새끼를 치면 강한 새끼들이 많이 태어날 것 같았다.

어쩌면 유칼 자신 같은 샤먼들이 잔뜩 태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칼의 노란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음심이 들기 시작한 하체를 감추지도 않은 채 유칼이 고블린들을 재촉했다.

"잡아라! 반드시 잡아라!"

"탈출한다!"

특별한 보라색 여자를 뒤에 태운 인간이 다급한 얼굴로 외치더니 그대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돌아서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놈들은 마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

낄낄거리며 웃은 유칼은 지붕에서 내려와 어린 시절부터 길들인 늑대 위에 올랐다.

"화살은 쏘지 마라! 붙잡아야 한다!"

늑대를 돌진시키며 그리 외치자 고블린들이 왁자하게 웃으며 유칼의 뒤를 따랐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 덕분에 겁을 먹고 도망치는 인간들을 붙잡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리고 손쉬운 일인지 학습한 고블린들이었다.

벌건 대낮부터 늘어지게 자고 있던 늪지 트롤들이 소란을 듣고 깨어났는지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유칼은 자신만의 왕국을 꿈꾸며 달리고 또 달릴 따름이었다.

어느새 마을을 빠져나왔다.

인간들은 잡힐 듯 말 듯 하면서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거리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거리가 벌어졌다.

마치 지금까지는 일부러 천천히 달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인간들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유칼은 당황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수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당혹스러운 일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집결하라!"

선두에서 달리던 인간이 외쳤다.

그리고 빛이 일었다.

언덕 위에 갑자기 인간들이 나타났다.

뭐지?

숨어 있던 건가?

매복?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정도 숫자의 인간들이 움직였다면 분명히 눈치챘을-

파바바바바밧!

언덕 위에서 쏟아진 화살의 비가 유칼의 생각을 끊었다.

유칼은 지팡이를 머리 위로 휘두르며 다급히 마력을 발산해 화살들을 쳐냈지만 그럴 재주가 있는 것은 유칼뿐이었다.

"키악!"

"칵!"

선두에 서서 달리던 고블린들이 화살을 맞고 나자빠졌다.

화살비가 멎지 않았다.

재차 쏟아지는 화살비를 피해 등을 돌리며 유칼이 소리쳤다.

"도망쳐! 함정이다! 도망쳐라!"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고블린들의 배후에서 눈부신 황금빛과 함께 인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카멜롯의 영광을!"

"우오오오오오오오오!"

금발의 소녀가 크게 외친 순간 다시 한번 황금색 빛이 크게 일었다.

눈이 부신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고, 그런 놈들을 향해 성난 창의 노도가 밀려왔다.

"키악! 칵!"

순식간에 고블린 수십이 떼몰살을 당했다.

유칼은 당황했다.

아니, 너무나 황당해서 생각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언덕 위의 인간들은 그렇다 쳐도 배후에서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컥!"

"족장!"

"크악!"

다시 화살비가 쏟아졌다.

길을 막고 있는 창병들은 저들끼리 밀집해서 창을 앞으로 내민 채 버티고 있는데 도저히 어찌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흩어져! 흩어져라!"

유칼은 늑대에서 뛰어내렸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고블린들 사이에 섞여 어떻게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불가능했다.

늑대의 등 위에서 뛰어내린 그 순간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고블린들의 측방을 향해 달려오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다."

기병 열 기.

선두에 선 갈색 머리 여자가 짧게 말하며 창을 앞으로 세웠다.

유칼은 마을 입구를 부쉈던 충격파를 떠올렸다.

욕지거리를 토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고, 그것이 유칼의 마지막이었다.

콰앙!

거대한 충격파에 휩쓸린 고블린 이십여 마리가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나 흩어졌다.

고블린들 대다수를 마을 밖으로 유인한 뒤 포위 섬멸한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적어도 팔십 마리 이상은 될 고블린들을 이렇다 할 피해 없이 몰살할 수 있었다.

유성은 차오른 숨을 토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언덕 위에서 바나데인이 정예 궁병대와 함께 내려오고 있었고, 케이트가 오와 열을 맞춘 창병대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다이애나와 경기병대가 유성을 보았다.

유성은 다시 숨을 골랐다.

등 뒤에서 허리를 꽉 끌어안은 르네의 손길이 느껴졌다.

유성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함성이 터졌다.

우렁찬 승리의 포효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 것 같았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유성이 그렇게 했다.

유성이 검을 내리자 카멜롯의 군세가 함성을 멈춘 채 유성을 바라보았고, 유성은 그들에게 눈짓한 뒤 귀환의 명령을 읊조렸다.

이대로 돌아서서 마을을 공격하는 대신 카멜롯의 군세를 돌려보내는 이유.

바나데인이 쓰게 웃었고, 케이트가 자애로운 미소 대신 조금은 성난 미소를 머금었다.

모두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은 것은 유성과 르네, 알폰스뿐이었다.

한 차례 숨을 가다듬은 유성은 등 뒤를 향해 물었다.

"준비되었어?"

"네, 계승자님."

르네가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성은 마주 고개를 끄덕인 뒤 정면을 보았다.

필로 마을을 향해 다시 한번 말을 달렸다.

* * *

마을에 남은 고블린들은 삼십여 마리 정도였다.

딱히 마을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기보다는 늦장을 부리다가 유칼을 따라갈 타이밍을 놓친 놈들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인간들을 잡으러 가?

새로운 인간들?

여자도 있나?

말고기가 생길 거라고?

저들끼리 떠들던 고블린들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유칼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놈이 말했다.

"온다."

정말이었다.

뭔가 하나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유칼이 아니었다.

말 위에 탄 인간 둘.

그냥 그게 다였다.

고블린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고블린들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유성은 마을 안까지 들어섰다.

그리고 다시 마을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무엇일까.

어떻게 된 것일까.

저 인간은 대체 무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저 인간 아까는 둘이 아니지 않았나?

더 많지 않았나?

왜 둘뿐이지?

둘이서 도망친 건가?

다른 놈들은 잡혔고?

아, 그래서 유칼과 다른 녀석들이 안 오고 있는 거구나.

그럼 저놈은?

"잡아!"

목소리의 주인은 고블린이 아니었다.

늪지 트롤들.

소란 때문에 잠에서 깬 놈들이 쇠 긁는 목소리로 호통을 치자 고블린들은 더 이상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명령받은 대로 유성과 르네를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유성은 이번에도 알폰스의 속도를 조절했다.

잡힐 듯 말 듯 한 간격을 유지하며 고블린들을 유혹했고, 이번에도 적당한 곳에 도달하자 반전하며 카멜롯의 군세를 소환했다.

"크악! 칵!"

"키악!"

아까보다 수가 적으니 전멸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도 적었다.

고블린 삼십여 마리를 순식간에 박살 낸 창병들은 그대로 반전해 마을 입구를 향했고, 유성은 뒤늦게 나타난 늪지 트롤 세 마리를 마주하였다.

늪지 트롤들도 유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놈들은 고블린이 아닌 늪지 트롤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성난 괴성을 지르며 카멜롯의 군세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유성이 말했다.

"경기병대, 집결하라."

트롤들의 측방에서 경기병대가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경기병대의 모습에 당황한 트롤들은 절로 발걸음이 느려졌고, 다이애나가 이끄는 경기병대는 그런 트롤들의 곁을 빠르게 지나며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투척."

짧은 명령에 경기병대 전원이 정예 궁병대에게 넘겨받은 기름병들을 트롤들을 향해 던졌다.

난데없이 기름을 뒤집어쓰게 된 트롤들은 욕지거리를 토하며 경기병대를 잡으려 했지만 무리였다.

경기병대가 이미 저만치 멀리까지 도망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파이어 볼!"

르네가 트롤들을 향해 화염구를 던졌다.

그리고 때를 맞추듯 바나데인을 필두로 한 정예 궁병대 전원이 트롤들을 향해 불화살을 쏘았다.

츠화악!

화염구가 폭발함과 동시에 거대한 화마가 트롤들을 집어삼켰다.

덩치가 큰 만큼 면적 역시 넓어 궁병대의 화살 역시 대부분이 명중했다.

"크아악! 칵!"

불길에 휩싸인 트롤들이 바닥을 구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기름이 붙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크아악!"

세 마리 중 한 놈이 몸을 일으켰다.

불타는 와중에도 노성을 터트린 놈은 불이 붙은 손으로 얼굴을 털어내려다 비명을 지르더니 실눈이나마 뜬 채 방향을 잡았다.

불은 언젠가 꺼진다.

상처는 언젠가 재생된다.

그러니 되었다.

눈앞의 인간들만 죽이면 되는 것이다.

놈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유칼이 그랬고 고블린들이 그랬던 것처럼 늪지 트롤 역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면.

황금빛 오라 블레이드가 늪지 트롤의 팔을 갈랐다.

다리를 잘랐고, 순식간에 사지를 베어 주저앉혔다.

트롤은 불에 타는 고통 속에서 정면을 보았다.

황금빛 오라 블레이드를 든 칠흑의 기사가 보였다.

그리고 다시 일섬.

늪지 트롤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목에서 떨어져 나간 놈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제8장 - 유격전 (4)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20점 획득했습니다.]

[악적 격파: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마을 해방: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10점 획득했습니다.]

[일반 보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예 궁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경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승급 가능!)]

[새로운 병종이 추가되었습니다.]

[군수 시설: 새로운 군수 시설이 추가되었습니다.]

[왕의 마법사: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상태창 문구를 확인한 유성은 거칠게 차오른 숨을 토하며, 여전히 불타고 있는 트롤의 시체를 보았다.

아무리 재생력을 가진 트롤이라지만 이 정도면 죽었다고 봐야했다.

'트롤의 약점. 머리가 잘리면 죽는다.'

처음 들었을 때는 유성도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었다.

재생력 덕분에 치명상을 입어도 죽지 않는 트롤들도 머리가 잘리면 깔끔하게 죽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유성이 직접 목을 벤 대장 트롤을 제외한 나머지 트롤들은 불타는 와중에도 아직 죽지 않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케이트의 지휘를 받은 창병들이 그런 트롤들에게 창을 박아서 막타를 치는 걸 지켜보던 유성은 검을 회수한 뒤 마을 쪽을 보았다.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고블린들과 트롤들을 일소했으니 이제 사람들을 풀어줄 차례였다.

"르네, 가자."

"네, 계승자님."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크게 한 르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유성의 뒤에 붙었다.

평소에는 전투에서 이길 때마다 환하게 웃던 그녀였지만 마을의 상황을 알아서인지 나름 진중한 표정이었다.

마을 안은 조용했다.

그나마 거동이 가능하거나 울타리 같은 곳에 갇혀 있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유성과 르네를 살펴보긴 했지만 바로 환호성을 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유성과 르네의 등 뒤로 카멜롯의 군세가 진입해 들어오자 사람들의 얼굴에 비로소 환희가 번졌다.

"으아아!"

"와아!"

이제 살았다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기쁨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이었다.

눈앞에서 지인들이 도축당하고 조리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 기간이 짧았다 한들 정신적인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환호하는 사람들보다 차오른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마을 사람들을 풀어줘."

유성의 명령에 기사들과 휘하의 병력이 빠르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풀려날 때마다 거듭 감사를 표했는데, 소녀 하나는 주저앉아 울기만 하였다.

르네는 소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빛의 새로 보았던 소년의 지인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르네는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이를 악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녀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까운 곳에서 감사의 말이 들렸다.

르네가 돌아보니 엄마 손을 잡은 아이가 울면서 감사하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 역시 울면서 감사했다.

르네는 두 사람을 마주한 채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괜찮다고.

다 끝났다고.

유성 님이 나쁜 놈들을 모조리 다 내쫓아 버렸다고.

아이와 어미에게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한 르네는 풀려난 마을 사람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새삼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을 구한다.

괴물들로부터 사람을 구한다.

의식적으로 재차 미소를 지은 르네는 크게 숨을 고른 뒤 유성을 찾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미처 도망치지 못한 고블린을 심문 중인 유성의 모습이 보이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르네.'

울다가 웃다가 이게 뭐하는 짓이람.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뒤 크게 숨까지 골라 표정을 가라앉힌 르네는 유성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심문을 마친 유성이 르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상대로야. 트롤들이 각기 흩어져서 볼보 남작령을 유린하고 있어."

볼라노를 함락시킨 것은 늪지 트롤들의 왕 골고였다.

놈과 그 측근들이 도시를 점령한 채 매일 같이 인육으로 축제를 열자 그 밑에 남아 먹고 마시는 트롤들도 제법 있었지만 적잖은 숫자의 트롤들이 각기 부리는 고블린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진 모양이었다.

볼보 남작령 전체가 필로 마을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소식이었지만 유성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지금처럼 소규모로 흩어져 있는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요격이 가능했다.

즉, 각개격파로 놈들의 숫자를 줄이기 최적인 상황이었다.

"그럼 다음은... 코퍼 마을인가요?"

볼보 남작령의 테두리를 크게 돌며 요격을 한다.

르네가 필로 마을로부터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 이름을 말하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계승자님, 계승자님을 뵙고 싶다는 자들입니다."

지미가 젊은 사내 둘을 이끌고 나타났다.

대충 촌장 정도 왔구나 싶었던 유성은 조금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척 봐도 평범한 농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짧게 자른 머리와 다부진 몸.

단순히 농사 일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형태의 단련된 근육.

뭣보다 눈빛이 달랐다.

농민이 아닌 전사의 눈이었다.

'자경단원? 용병?'

양쪽 다 아니었다.

'전투사제단.'

볼보 남작령 북부에 위치한 철벽의 신 옴팔로스를 모시는 전투사제단.

왼쪽 손등에 새겨진 벽의 문장이 그 증거였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들인가."

유성이 눈을 바라보며 말하자 두 사람은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들입니다. 저희와 마을을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들답게 일단 감사부터 표한 그들은 다시 유성을 보며 물었다.

"귀하는 누구신지요."

따지듯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약간의 의아함과 호기심이 뒤섞인 형태의 질문이었다.

비록 싸우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정황상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그 많은 고블린들과 트롤들을 일소했다.

특히 트롤을 셋이나 쓰러트린 점이 중요했다.

자신들이 경험해본 트롤들은 단순히 병사가 좀 많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괴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티안의 유성이다."

"로티안? 로티안이라면...."

유성의 말에 미간을 좁힌 사내는 뒤에 있던 사내를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친 둘은 거의 동시에 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로티안의 흑기사?"

"코볼트의 대군에게 함락 직전이던 로티안을 구원하고 손수 코볼트의 왕자를 참한 로티안의 흑기사십니까?"

깜짝 놀란 사내들이 진심으로 감탄한 얼굴이 되어 말하자 유성은 이를 악물어 표정을 관리했다.

육성으로 듣게 된 흑기사란 별명도 별명이었지만 이어진 설명이 육성으로 듣기에는 너무나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 그래. 그게 나다."

유성이 간신히 말한 그때 뒤에 살짝 물러나 있던 르네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라투스 남작님의 유언으로 유성 님께서 로티안의 새 영주가 되셨습니다. 참고로 저는 유성 님의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입니다."

르네가 살짝 로브의 치맛단을 들어 올리며 예를 표하자 전투사제들은 잠시 넋을 놓고 그런 르네를 바라보았다.

연달아 레벨 업을 거친 르네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히 사제가 아닌지 금방 정신을 차린 둘은 르네의 말에 집중했다.

"발투아라면... 발투아 백작가의 영애십니까?"

"네, 차녀예요."

르네가 다시 활짝 웃으며 말하자 절로 얼굴이 붉어진 전투사제들이 어색하게들 미소를 지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앞뒤 자르고 핵심만 묻는 말에 전투사제들이 다시 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볼보 남작으로부터 구원 요청이 있었습니다. 대사제님께서 전투사제단의 파견을 명하셨고, 저와 여기 있는 형제는 선행 정찰을 나섰다가 부끄럽게도 잡히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부끄럽다는 듯 우울한 기색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전투사제를 위로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이 움직이는 건가?"

"예, 다만 이미 볼보 남작령이 함락된 상태라 지금은 다시 어떤 방침을 세웠을지 모르겠습니다."

볼보 남작령 북부에 위치한 수도원은 규모가 제법 크기는 해도 일단 분류상으로는 일반적인 수도원이었다.

때문에 전투사제단이라고 해봐야 수십 명 정도의 구성일 터였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옴팔로스의 철벽은 외부의 적들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장벽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들에게 있어서 방위 수단인 전투술의 수행은 곧 신을 향한 기도와 다름이 없었다.

당연히 전투사제들은 마치 기사처럼 평생에 걸쳐 무를 쌓았고, 그 덕분인지 옴팔로스 교단에는 신성 마법과 별개로 기사도를 사용 가능한 사제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런 전투사제단이 참전한다.

이는 분명 큰 호재였다.

"로티안의 흑기사님."

"...유성이면 된다."

유성이 호칭의 정정을 요구하자 전투사제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예, 유성 님, 저희와 함께 옴팔로스 교단으로 가시죠. 유성 님의 군세와 전투사제단이 힘을 합친 뒤 주변 영지의 영주들까지 끌어들인다면 볼보 남작령을 탈환할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같이 가시죠!"

묘안이라는 듯 뒤에 있던 사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지만 유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같이 가지 않는다."

"예?"

"나는 계속 볼보 남작령을 돌아다니며 요격전으로 적들의 숫자를 줄이겠다. 전투사제단과 합류한다면... 전투사제단을 이끌고 필로 마을로 와라. 나도 시간을 맞춰 필로 마을로 돌아올 테니."

유성의 말에 전투사제는 황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 흑기사님과 휘하 병력들이 강한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숫자의 병력만으로 현재의 남작령을 활보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유성이다."

"예? 아, 예. 유성 님. 아, 아무튼... 그런데 어째서?"

설명을 부탁하는 전투사제의 얼굴에 지금껏 잠자코 있던 르네가 후후훗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면 아시게 될 거예요."

"예?"

안다니? 무엇을?

설마 추가 병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보다 두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름들이 어떻게 되지?"

"필과 빌입니다."

"그래, 필. 자네는 전투사제단으로 복귀해서 현재 상황과 나에 대해 알려주게. 그리고 빌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로티안으로 가게."

"저, 정말 요격전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마을 사람들을 맡긴다는 유성의 말에 전투사제들이 이걸 어떻게 말려야 하나-하는 얼굴이 되어 말했다.

걱정이 가득한 그 목소리에 르네가 다시 끼어들려는 찰나, 청아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계승자님, 전원 집합했습니다."

케이트였다.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던 전투사제들은 케이트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고, 이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서, 성녀?"

"아뇨, 저는 계승자님의 기사입니다."

케이트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전투사제들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유성은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르네랑 케이트가 좀 많이 예쁘기는 하지.'

결국 쓰게 웃은 유성은 전투사제단에게 무어라 하는 대신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한 카멜롯의 군세를 돌아보았다.

거의 아무런 피해 없이 승전한 덕분인지, 아니면 마을을 해방했기 때문인지 병사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물론 유성도 그들이 자랑스러웠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다이애나와 그 곁에서 작게 웃고 있는 바나데인을 돌아본 유성은 군단을 대표해 앞장 서 있던 케이트를 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다들 수고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를 비롯한 카멜롯의 군세 전원이 화답하듯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광경에 전투사제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감탄한 때였다.

"비, 빛이?"

카멜롯의 군세가 빛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빛은 작고 미미했지만 그 수가 많았고, 케이트와 바나데인, 다이애나의 빛은 황금빛으로 아름다웠다.

살아생전 보지 못한 신화적인 광경에 마을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닫지 못했고, 전투사제들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빛과 함께 나타나 빛과 함께 사라지는 빛의 군세.

순간 전투사제 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 된 그는 급히 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잠깐! 설마 기사도입니까?!"

빛의 군세를 소환하는 기사도.

필의 말에 빌 역시 깜짝 놀라 유성을 보았고, 유성은 굳이 답해주는 대신 그저 빙긋 웃은 뒤 어느새 소환한 알폰소 위에 올라탔다.

"르네."

"네, 계승자님."

유성의 부름에 예쁘게 답한 르네가 유성의 손을 잡고 알폰스 위에 올랐다.

"요격을 이어 나가겠다. 잘 부탁한다, 필과 빌."

"어, 으, 예. 알겠습니다."

얼핏 셈해도 60이 넘는 숫자였다.

더욱이 성녀같이 아름다운- 아니, 분명 성스러운 기운을 전신에서 발하고 있던 금발의 기사.

그녀는 인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자유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이런 기사도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기사도를 가진 자를 대체 무어라 해야 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이해가 되었다.

요격을 계속하겠다는 유성의 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그의 기사도.

"로티안의 흑기사."

필이 저도 모르게 말했고, 빌이 고개를 들어 어느새 달리기 시작한 유성과 르네의 뒷모습을 보았다.

"로티안으로 가세요!"

르네가 그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고, 필과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웃으며 행동을 개시했다.

제8장 - 유격전 (5)

필로 마을을 떠나고 한 시간 남짓을 나아간 유성은 일단 말을 멈추고 잠시 쉬어갈 곳을 찾았다.

저만치서 노을이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쉬긴 해야겠네.'

카멜롯의 군세를 소환하기 위해 필요한 대가는 유성의 정신력이었다.

성능을 고려하면 가성비가 무척 좋은 능력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한계라는 것이 존재했다.

말을 타고 달릴 때는 몰랐지만 막상 말에서 내리고 나니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럼증이 느껴져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알폰스를 돌려보낸 유성은 낙엽이 잔뜩 쌓인 커다란 바위에 몸을 묻듯이 앉아 등을 기댔다.

그러나 르네 역시 주변을 한 차례 돌아보며 무어라 주문을 외운 뒤 유성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발열 마법을 걸게요."

르네가 그리 말하며 바위에 손바닥을 얹자 마치 온돌이라도 된 것처럼 바위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이러나저러나 숨어 다녀야 하는 상황이니 불을 피우기 곤란했는데, 역시 유능한 르네였다.

'근데 진짜 쓰는 마법의 숫자가 많네.'

지금까지 본 것들만 해도 얼추 열 손가락을 다 채우고도 남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르네, 마법은 어디서 배운 거야?"

유성의 물음에 르네는 낙엽들을 이불처럼 몸 위에 덮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벨레스 님께 배웠어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지에 계시던 분이신데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눈까지 빛내는 걸 보니 스승인 벨레스를 무척 따르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잠시 영지를 떠나셨는데 스승님이 계셨으면 다들 제가 받은 계시를 개꿈이라고 매도하지 않았을 거예요. 스승님은 제가 받은 게 계시라는 걸 간파하셨을 테니까요."

가족들에게 개꿈 취급 받은 게 어지간히 억울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서 가출했을 정도니까.'

입술을 삐쭉이기 시작한 르네를 보며 작게 웃은 유성은 잠들거나 식사를 하기에 앞서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로 하였다.

"르네, 잠시 점검 좀 하고 있을게."

"어, 저번에 말씀하신 상태창이요?"

"그래, 그거."

마력 성장 관련 이야기를 좀 더 했을 때 대충 설명해줬더니, 어느 정도 상태창에 대해 이해한 르네였다.

'어, 그럼 일종의 장부 같은 건가요?'

설명을 다 듣고 난 뒤 르네가 했던 말을 떠올린 유성은 작게 웃었다.

이것저것 증감을 기록하는 표니, 크게 보면 상태창 역시 일종의 장부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상태창."

이름: 천유성

성별: 남

직업: 견습 기사

레벨: 9

지위: 초급 지휘관

특이사항: 성왕의 계승자, 군단의 주인, 원탁의 계승자, 용의 심장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

[성왕 스킬]

왕국검법 Lv2 / 제국검법 Lv2 / 용왕심법 Lv2 / 용왕로 Lv1 / 왕의 안목 Lv1 / 군마 소환 Lv1

[성기사 스킬]

오라 블레이드 / 오라 실드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

[군단 관리]

[성 관리]

레벨이 오르며 전반적인 능력치가 오르긴 했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유성은 씩하고 미소를 지었다.

현재 레벨인 '9레벨'에 자연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10레벨 단위로 큰 게 온단 말이지.'

판타지 모나크에서 직업적 성장을 체감할 수 있는 레벨 단위는 5였다.

유성이 5레벨이 되었을 때 오라 블레이드를 습득한 것처럼 5레벨 때마다 직업과 관련된 스킬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5레벨 주기에서도 두 번씩 찾아오는 10레벨 주기 때는 보다 큰 성장을 체감할 수 있었다.

더욱이 10레벨은 보통 클래스 업을 하게 되는 구간.

견습 기사가 기사가 되고, 견습 마법사가 마법사가 되는 구간이었다.

그런데 유성 자신의 현재 레벨이 9였다.

앞으로 1만 더 올리면 큰 걸 하나 얻을 수 있으리라.

'어쩌면 기사도에 변화가 있을지도.'

클레스 업은 그만큼이나 큰 변화였으니 말이다.

'10레벨 되어보면 알겠지.'

빙긋 웃은 유성은 군단 관리를 선택했다.

케이트의 일반 보병대 Lv2

기수/부대장: 케이트

나팔수/부부대장: 지미

구성원: 35+1(최대: 35+1) / 예비대: 2

[보병대 5명 증원: 2pt]

[대장간 추가 효과: 나무 방패 장착: 10pt]

부대장: 케이트

레벨: 5

무장: 카멜롯의 깃발 / 평범한 장검 / 징 박힌 가죽 갑옷 / 둥근 나무 방패 / 군마

기사도: 카멜롯의 영광

칭호: ???의 챔피언(잠김 상태)

스킬: 왕국 검법 Lv2 / 오라 블레이드 Lv1(New!)

바나데인의 정예 궁수 부대 Lv2

부대장: 바나데인

구성원: 25+1(최대: 20+1) / 예비대: 2

[궁수 2명 증원: 3pt]

궁수 부대장: 바나데인

레벨: 5

무장: 엘프 장궁 / 단검 / 가죽 갑옷

기사도: 꿰뚫는 일격(공격의 관통력과 위력을 강화시킨다.)

칭호: ???의 사수(잠김 상태)

스킬: 속사 Lv2 / 멀티플 샷 Lv1(New!)

다이애나의 경기병대 Lv4(승급 가능!)

부대장: 다이애나

구성원: 10+1(최대 20+1)

[경기병대 1명 증원 1pt]

[대장간 추가 효과: 편자 장착: 10pt]

경기병 부대장: 다이애나

레벨: 4

무장: 단창 / 장검 / 가죽 갑옷 / 나무 방패

기사도: 충격의 다이애나

칭호: ???의 기수(New! / 잠김 상태)

스킬: 가속 Lv1(New!)

케이트와 바나데인 모두 레벨 5가 되면서 각자 새로운 스킬을 습득했다.

'케이트는 오라 블레이드고 바나데인은 멀티플 샷이니 동시에 두 발 쏘기인가?'

지금도 속사 덕분에 기관총처럼 화살을 쏴대는 바나데인인데 그걸 두 발씩 쏜다 생각하니 즐거운 동시에 화살이 남아날지 의문이었다.

'다이애나의 가속은 안 그래도 빠른데 더 빨라지는 거고.'

빠르면 빨라질수록 차징 공격의 위력 역시 강해지니 다이애나의 기사도에 잘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부대들도 레벨 업 하면서 최대 인원들이 늘었어.'

보병대와 궁병대 모두 예비대 인원이 충분했던 터라 따로 포인트를 투자해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현재 가진 건 30pt.'

하지만 유성은 대장간 효과를 바로 추가해주는 대신 10pt를 투자해 경기병대의 숫자를 최대치까지 올렸다.

'그리고 승급.'

[경기병대를 정예 경기병대로 승급: 10pt]

다이애나의 정예 경기병대 Lv1

부대장: 다이애나

구성원: 15+1(최대: 15+1) / 예비대: 5

[정예 경기병대 1명 증원 2pt]

[정예 경기병대에 기수 추가 2pt]

[대장간 추가 효과: 편자 장착: 10pt]

20pt를 써서 정예 경기병대로 승급시키니 전반적인 능력치가 크게 오른 데다가 기수까지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창만 쓰는 거 보니 역시 공기병계 테크인가.'

보통 경기병대 테크는 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활을 쓰게 되어 있었다.

애당초 경기병대의 역할 자체가 전장 이곳저곳을 빠른 속도로 오가며 화살을 뿌리거나 직접 창을 들고 측방이나 후방을 급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이애나의 경기병대는 활을 쓰지 않았다.

더욱이 다이애나의 기사도 자체가 일반적인 경기병대보다는 중갑 기병대에 더 어울리는 것이었고 말이다.

'종합해 봤을 때 공기병계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하지만 판타지 월드인 판타지 모나크이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바로 그 병종.

페가수스 라이더, 그리폰 라이더, 와이번 라이더 등등의 하늘을 누비는 공중 기병대.

'천마기사는 판타지의 로망이지.'

하늘 높은 곳에서부터 급강하 공격을 하는 천마 기사의 모습을 상상한 유성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이애나의 기사도 능력까지 고려하면 진짜 운석 같은 공격이 가능할 터였다.

'기술명은 미티어 스트라이크라든가.'

아니면 드라군 다이브라든지.

상상만 해도 즐거웠기에 조금 더 웃은 유성은 남은 10pt를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했다.

'일단 군수 시설까지 확인하고 보자.'

성 관리 버튼을 누르자 유성의 눈앞에 커다란 유성 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와."

옆에서 들린 감탄에 유성은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허공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르네가 보였다.

"잠깐, 르네. 혹시 상태창이 보여?"

"네? 아, 네. 보여요. 와... 저기 있는 거 케이트 언니 맞죠?"

르네가 나무 아래 앉아 깃발을 손질하고 있는 케이트를 가리키며 묻자 유성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물었다.

"혹시 글자도 보여? 아니, 읽을 수 있어?"

"아뇨, 글자까지는. 전부 처음 보는 글자라. 그래도 그... 유성 님이 계속 웃고 계셨으니까 뭔가 좋은 거구나 싶긴 했어요."

르네의 말에 유성은 새삼 민망해져 헛기침을 토했다.

생각해보니 옆에서 보면 허공을 보며 실실 웃는 이상한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래도 르네는 상태창이 보여서 그나마 나은 건가.'

역시 괜히 왕의 마법사가 아닌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왕 상태창이 보이니 같이 이야기라도 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성은 유성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멜롯의 군세야. 이제 저 성에 새로운 시설을 뭘 추가할 수 있을지 보려던 참이었어."

"아, 확실히. 지금은 막사랑 대장간밖에 없네요. 막사도 그냥 커다랄 뿐이라 케이트 언니랑 다이애나 언...니? 아무튼, 두 사람도 병사들이랑 같이 자고요."

살짝 뼈아픈 지적에 움찔한 유성은 군수 시설 창을 열어보았다.

[간이식당 추가: 5pt]

[간이 화장실 설치: 5pt]

[간이 목욕탕 설치: 5pt]

[훈련장 설치: 15pt]

[막사 Lv1]

병사들이 머무는 막사. 다수의 인원이 함께 자서 불편하고 청결하지 못하다.

장교들과 함께 자는 터라 병사들과 장교들 모두가 불편하다.

보병대는 현재 생활에 나름 만족하는 것 같다.

[막사 레벨 업 포인트: 10pt]

[대장간 Lv1]

간단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대장간.

보다 본격적인 대장간 일을 하기에는 시설과 인원 모두가 부족하다.

[대장간 레벨 업 포인트: 20pt]

추가할 수 있는 시설들이 제법 많았는데, 기존에 설치된 시설들의 설명들이 어째 참담했다.

'그리고 보병대는 왜 만족하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케이트의 자애로운 미소를 보는 게 복지인 건가.

생각해보면 케이트 성격상 매일 잘 때마다 잘 자라고 상냥하게 인사해줄 거 같은데 그건 나름 복지가 맞는 거 같긴 했다.

'아무튼 현재 가지고 있는 게 10pt뿐이라 이거지.'

현재 추가 가능한 시설들의 경우 대부분 편의 시설들이었는데 설치하면 사기 진작 및 피로 회복 속도 증가 같은 자잘한 효과들이 붙어 있었다.

'막사 업그레이드하면 장병들의 만족도랑 피로 회복 속도가 오르고.'

만족도가 낮다고 딱히 파업을 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전투력 유지 측면에서 보자면 병사들의 만족도와 피로도를 적절히 관리해줄 필요가 있었다.

"어... 유성 님?"

르네가 조심스럽게 묻자 유성은 상태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현재 추가 가능한 게 식당이랑 화장실이랑 목욕탕이야. 막사 업그레이드도 가능하고."

대장간 업그레이드는 애당초 포인트가 부족했다.

'부대 성장도 그렇고 포인트 쓸 일이 태산이네.'

원하는 만큼 팍팍 성장시키려면 그만큼 전투도 많이 하고 승전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현재 돌아가는 정황상 싫어도 전투를 해야 하긴 했지만 약간의 동기 부여 추가라고 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유성의 설명을 들은 르네는 유성 성을 보며 말했다.

"어, 전부 다 필요한 것들이네요. 생각해보니 다들 어디서 씻고 싸… 아, 아니, 아무튼 어디서들 씻고 하는 거죠?"

"어... 저기서 대충 씻으려나?"

성 내에 수로 비슷한 게 하나 있었으니 저걸 쓰는 것이 아닐까.

유성의 자신 없는 말투에 르네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병사들도 병사들이지만 케이트 언니랑 다이애나 언니가 불쌍해요."

유성도 그랬기에 할 말이 없기는 했다.

"으음, 그럼 일단 화장실. 그래, 화장실 추가하고 식당이랑 목욕탕 중에 뭘 추가해야 할까?"

"심적으로는 목욕탕이지만 둘 중에 하나면 식당이지 않을까요?"

흔히들 인간의 3대 욕구로 꼽는 것이 식욕, 성욕, 수면욕이지 않던가.

르네의 말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 즐거움이, 특히 군대에서의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유성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화장실이랑 식당을 추가하자."

훈련장과 대장간은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내린 유성이 간이 화장실과 간이식당을 선택하자 성 구석에 작은 천막 두 개가 생겼고, 다시 수로 근처에 제법 커다란 천막이 생겼다.

'그래, 결국 간이라 이거지.'

하지만 그래도 없던 게 생겨서 그런지 병사들의 표정이 밝았다.

3등신으로 데포르메 된 병사들이라 그런지 표정 변화 역시 격렬했는데, 무슨 이모티콘들을 보는 것 같았다.

'케이트랑 르네도 좋아하네.'

화장실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짓는 케이트와 예를 표하듯 가슴을 두드리는 다이애나의 모습에 쓰게 웃은 유성은 식당을 보고 다시 웃고 말았다.

[금일 담당 취사병: 지미]

요리사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지미가 커다란 냄비 앞에 국자를 들고 서 있었다.

문구로 보아 돌아가면서 취사병을 하는 시스템인 모양이었다.

'케이트가 당번일 때가 궁금한데.'

틈날 때마다 유성 성을 열어봐야 하나.

"병사들 머리 위에 하트가 뜨는데 좋다는 거겠죠?"

"어, 실제로 만족도가 꽤 올랐어."

유성의 대답에 르네는 케이트처럼 빙긋이 웃었고, 유성 역시 웃었다.

'더 잘해줘야지.'

벌써 몇 번이나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들이지 않던가.

"아무튼 르네, 그럼 이제 네 레벨 업을 하자."

"네? 저요?"

"어, 너."

군단 관리 쪽은 다 했으니 이제 유일한 개별 영웅인 르네의 레벨 업을 할 차례였다.

[영웅 관리]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4

보유 pt: 7pt

무장: 참나무 지팡이 / 마법사의 로브

고유 스킬: -

고유 스펠: -

[르네가 마력 강화 Lv2를 획득: 3pt]

[르네가 맨손 격투 Lv1을 획득: 3pt]

[르네가 전투 명상 Lv1을 획득: 3pt]

[르네가 새로운 마법을 획득: 3pt]

[르네가 군마에 탑승: 3pt]

[르네의 근력을 강화: 1pt]

[르네의 민첩을 강화: 1pt]

[르네의 체력을 강화: 1pt]

"와, 뭔가 올릴 수 있는 게 많네요."

읽을 수는 없지만 눈치가 빠른 르네답게 올릴 수 있는 항목이 많다는 것 정도는 바로 간파한 모양이었다.

유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래도 일단 마력을 성장시킬 생각인데 어때?"

"다른 선택지는 뭐가 있는데요?"

르네의 물음에 유성이 차례대로 쭉 불러주나 르네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했다.

"어, 맨손 격투라고요?"

"어, 사실 르네한테는 권법 재능이 있긴 해."

유성의 말에 르네는 더더욱 묘한 표정이 되더니 이내 무슨 생각이라도 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 일단 마력으로 부탁드릴게요."

"그래, 그게 정배지."

르네 자신이 생각해도 권법은 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남은 4pt는 군마 소환을 추가했으면 하는데 어때?"

"군마요?"

"어, 아무래도 기동성을 생각하면 나랑 르네가 각자 말을 타는 게 나을 테니까."

지금처럼 말이 한 필밖에 없으면 유성 자신이 말 타고 돌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르네를 두고 간다거나 뒤에 태우고 간다거나 하는데 양쪽 모두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유성의 말에 르네는 왜인지 조금 싫은- 아니, 아쉬운 표정으로 입술을 움츠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생각에도 말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군마를 추가하자."

군마를 추가하고 1pt는 이번에도 남기기로 했다.

"그럼 한번 불러 봐도 될까요?"

"응, 해 봐."

"레이니."

르네가 작게 부르자 은은한 빛과 함께 늘씬한 백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귀티나네.'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뭔가 고고해 보이는 말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르네가 다가가서 손을 내밀자 얌전히 머리를 내미는 것이 제법 온순해 보였다.

"응응, 착하지."

잠시 레이니와 장난치는 르네의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유성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태창의 빛 덕분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어느새 새카만 밤이 찾아와 있었다.

'조금 쉬고, 새벽에 출발하자.'

필로 마을의 참상을 보았기 때문인지 마음이 급해졌지만 유성은 스스로를 억눌렀다.

적어도 며칠은 이어질 요격전이었으니 체력 안배를 신경 써야 했다.

다시 돌아와 앉은 르네와 간편식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유성은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제8장 - 유격전 (6)

볼로나 함락으로부터 이레가 지난 시점.

인류를 수호하는 장벽- 그렇기에 철벽의 문장을 짊어진 철벽의 신 옴팔로스 교단 서부 지부는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이 볼보 남작령에서 올라온 피난민들이었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을 이끄는 사제기사 루안은 수도원 인근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난민촌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난민들이 보기 싫거나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루안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이 와중에도 주둔만을 명하고 있는 질리언 대사제에 대한 불만이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마을들이 해방되고 있다.'

볼보 남작령이 함락되고 닷새째가 되는 날부터 매일 꾸준히 피난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볼보 남작령 외곽 지대에 위치한 마을 주민들이 도망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냥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로티안의 흑기사님이 마을을 해방해 주셨습니다!"

"금발의 성녀님도 계셨어요!"

"요정님도 계셨습니다."

"기사님들도 잔뜩 있었습니다."

"바보야 그건 그냥 기병들이야."

"발투아 영애? 아, 아무튼 마법사 분도 계셨습니다. 엄청 미녀셨습니다."

잔뜩 흥분해서 떠들어대는 이야기들을 모두 들은 루안은 혼란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역시도 로티안의 흑기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코볼트의 왕자를 참하고 로티안을 지켜낸 태양의 흑기사.

흑기사에 태양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아무튼 그에 대한 이야기에는 꼭 태양이나 태양의 빛이 곁들어 있었다.

어찌 되었든 로티안을 구한 흑기사가 라투스 남작의 유언을 받들어 로티안의 새 영주가 되었다는 소식까지는 접한 로안이었다.

그런데 그런 로티안의 흑기사가 볼보 남작령 북부에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지?

무슨 군단을 데리고 공간이동 마법이라도 펼쳤단 말인가?

그런데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티안의 흑기사님이 마을을 해방해주셨습니다."

"로티안의 흑기사님이 저흴 구해주셨어요."

"흑기사님의 군대가 고블린 놈들을 박살냈습니다!"

새로 올라온 피난민들은 볼로나와 가까운 마을에 살던 이들이었다.

즉, 로티안의 흑기사는 지금 볼보 남작령을 휘젓고 있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소식이 3일 연속으로 들려왔다.

'소문을 종합해보면 병력은 일백 명 남짓.'

그런데 이 정도 병력으로 보급도 없이 볼보 남작령을 활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고블린들과 트롤들이 아무리 괴물들이라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군대가 활보하면 모를 수가 없어야 정상인데 피난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매번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해 전멸하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로티안의 흑기사는 매복과 기습에 특화된 기동전의 천재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마법을 사용한다든지.

그리고 로티안의 흑기사가 저렇게 활약하며 사람들을 구하고 있는 와중에 다른 누구도 아닌 철벽의 옴팔로스를 모시는 루안 자신과 전투사제단이 이렇게 주저앉아 있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마침내 오늘.

궁금증과 조바심 모두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루안의 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자가 나타났다.

"필!"

"루안 경!"

선행정찰을 보냈다가 실종된 전투사제 필이 피난민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로티안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필로 마을 사람들이었는데, 지리적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가장 먼저 해방된 것은 이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필, 어떻게 된 것이지? 로티안의 흑기사와 혹시 대화를 나눈 것이 있나? 그는 대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루안이 다급히 묻자 필은 순간 당황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로티안의 흑기사님께서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예상대로의 대답에 루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피난민들은 로티안의 흑기사와 대화를 나눴다고는 해도 대부분 북부로 가라, 계속 요격을 해야 하니 너희를 이끌 수는 없다- 정도의 말만을 들은 터라 얻어낼 만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필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예상대로 필은 지금까지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로티안의 흑기사님은 정말 대단한 기사십니다. 단순히 무용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한 기사도를 보유하고 계셨습니다."

"기사도!"

루안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피난민들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제일 궁금했던 것이 바로 흑기사의 기사도였기 때문이다.

기사도는 정말 신비한 힘이었다.

당장 루안 자신의 기사도 역시 실로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던가.

'뭔가 군사들을 기동과 관련된 기사도이지 않을까?'

루안이 어서 말하라는 눈빛을 열심히 쏘아 보내자 새삼 이야기꾼의 쾌감을 느낀 필은 저도 모르게 약간의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흑기사님의 기사도는 빛의 군세를 소환하는 능력입니다."

"소환? 빛의 군세를 소환해?"

"예, 그렇습니다. 수십 명이 넘는 빛의 군세를 자유롭게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소환된 군세들 사이에는 기사들 또한 있었습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자아와 의지를 가진 진짜 기사들이었습니다."

필의 설명에 루안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너무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터라 순간 뇌가 마비된 탓이었다.

'군단을 소환해?'

무언가를 소환하는 기사도는 이미 존재했고, 루안 역시도 몇 개인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단을 소환하는 기사도는 금시초문이었다.

라투스 남작보다 루안이 크게 놀라는 이유는 단순했다.

라투스 남작이 보았던 당시에 유성이 소환할 수 있는 것은 농노 부대와 궁병대가 전부였고, 그나마도 숫자가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필이 본 유성의 군세는 달랐다.

보병대와 궁병대에 기병들까지 있었고, 기사도 셋이나 포함이 되어 있었다.

무장 상태와 규모 역시 라투스 남작이 목격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훨씬 더 크게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말도 안... 아니, 그럼 모든 의문이 해결된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이미 점령된 볼보 남작령을 종횡무진하며 신출귀몰하게 마을들을 해방할 수 있는 이유.

'그냥 혼자 다니면 되니까!'

보급도 별문제가 없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군대를 먹일 식량과 혼자 먹을 식량은 그 양과 운반을 위한 수고 등등이 모두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 그렇다 해도 실로 비범한 자이다.'

이러나저러나 홀로 볼보 남작령을 누비며 수많은 사람들을 해방하고 있는 로티안의 흑기사였다.

이는 아무리 군단을 소환하는 기사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로 기사들의 귀감이라 할 수 있는 자로군...."

"그렇습니다. 실로 기사다운 기상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북상하여 전투사제단에 합류하실 것을 권하자 볼보 남작령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한시라도 빨리, 그리고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한다며 거절하셨습니다."

유성이 했던 말에 살이 좀 많이 붙기는 했지만 일단 맥락 자체는 동일했다.

필의 말에 루안은 새삼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무리 대사제의 명이라고는 하지만 눈앞에서 어떤 만행이 벌어지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기사- 그것도 사제기사인 자로서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아니 된다. 질리언 대사제님의 명을 어기더라도 전투사제단을 출진시켜야 한다.'

이미 볼보 남작령 외곽 지대는 로티안의 흑기사가 모두 해방시킨 상황이었지만 아직 볼로나가 남아 있었다.

물론 흑기사의 군세와 전투사제단이 힘을 합쳐도 볼로나를 탈환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출진하여 흑기사를 맞이하는 성의나마 보여야만 했다.

아니, 보이고 싶었다.

'해방된 마을 사람들을 순서와 위치를 고려하면 현재 로티안의 흑기사가 어디에 있을지 대강이나마 추론할 수 있다.'

아마도 볼보 남작령의 동부 인근에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그런데 그때였다.

"루안 경, 로티안의 흑기사께서 만약 합류를 원한다면 필로 마을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필로 마을에서?"

"예, 아무래도 제가 전투사제단에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 등을 고려하신 것 같습니다."

필이 여기까지 오는 데 나흘이 조금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로티안의 흑기사는 볼보 남작령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본다면 볼보 남작령 동부에 위치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볼보 남작령 서부에 위치한 필로 마을에서 합류하자는 것은... 고블린들과 코볼트들이 로티안으로 향할 거라 보고 있는 건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루안은 다시 필을 보며 말했다.

"필, 안부를 묻는 것이 너무 늦어 미안하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 기쁘구나. 옴팔로스 님의 가호가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늘 함께하기를 기도하겠다."

"감사합니다. 저도 사제기사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여독을 풀고 있도록."

필과의 대화를 마친 루안은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이동한 뒤 휘하의 전투사제장들을 집합시켰다.

"지금부터 우리는 로티안의 흑기사에게 가세한다."

이미 피난민들을 통해 많은 이야기들을 접한 전투사제들이었다.

모두가 이견 없이 동의하자 루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 50인 전원이 남하를 개시했다.

* * *

같은 시각, 볼라노의 가장 높은 첨탑 위에 우두커니 앉은 고블린 샤먼 킬라칼은 인상을 쓴 채 먼 곳을 노려보았다.

볼로나를 함락시킨 것은 분명 늪지 트롤들의 왕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트롤들과 고블린들 모두를 이끌고 있는 것은 킬라칼이었다.

늪지 트롤들의 왕 골고는 킬라칼이 키운 트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킬라칼의 각종 주술과 비약을 흡수하며 자란 골고는 평범한 늪지 트롤들을 압도하는 힘과 덩치를 가질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인근의 늪지 트롤들을 지배하는 왕이 될 수 있었다.

골고는 여전히 킬라칼을 주인으로 여겼고, 그런 골고의 지배를 받는 트롤들은 다시 수많은 고블린들을 노예로 부렸다.

즉 킬라칼 아래 골고가 있고 그 아래 다시 트롤들과 고블린들이 있는 구도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킬라칼은 군세를 이끄는 자로서 고민했다.

장벽에 균열이 생기고, 균열 사이로 '빛'이 탄로났다.

그 빛을 좇아 균열을 지나 이 땅에 온 것까지는 좋았다.

장벽 밖의 세계에서는 이미 사라진 빛.

문명의 불이라고도 불리는 것.

킬라칼의 본능은 그 빛을 원했다.

하지만 킬라칼의 이성은 고블린들과 늪지 트롤들 정도로는 빛을 놓고 펼쳐질 쟁탈전에 낄 수 없음을 잊지 않았다.

문명의 불을 얻기 위해 더욱더 많은 괴물들이 장벽을 넘어올 터였다.

일곱 왕들 역시도 문명의 불을 얻기 위해 장벽을 넘으리라.

그렇기에 킬라칼은 본능을 죽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하였다.

불을 독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것이 가능한 자들이, 저 '일곱 왕'들이 넘어오기 전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일구자.

그리한다면 언젠가 왕들 가운데 하나가 넘어왔을 때 세력을 바치고 그에 합당한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완벽한 계획이었다.

인간들이 볼로나라고 부르는 이 땅을 차지할 때까지만 해도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요 며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볼로나 함락 이후 사방으로 흩어졌던 트롤들과 고블린들의 소식이 끊겼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고블린들을 보내보면 트롤들이고 고블린들이고 죄다 죽어 있다는 보고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실로 괴이한 일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병력이 각개격파 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누구에게 격파당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킬라칼은 자리에서 일어나 첨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리 곳곳에 피와 인육이 넘쳐났다.

볼로나 시내에는 아직도 트롤들이 30마리도 넘게 있었고, 고블린들은 500마리가 넘었다.

'슬슬 이동할 때인가.'

섣불리 외부를 정탐하기보다는 아예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한다.

'어떤 놈들이 각개격파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숫자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일정 규모 이상이라면 지금처럼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뭉쳐서 이동하면 된다.'

트롤들과 고블린들을 한데 모아 움직이면 볼로나 밖에서 설치고 있는 놈들이 아무리 날고뛰는 재주를 가졌다고는 해도 감히 덤비지 못할 터였다.

당장 이 성에 살던 놈들도 트롤들이 던져대는 바위의 비에 이렇다 할 저항조차 못 하고 박살이 나지 않았던가.

마음을 정한 킬라칼은 고개를 돌려 서쪽을 보았다.

트롤들과 고블린들이 인간들을 범하고 죽이고 잡아먹기 바쁠 때 그는 고문과 심문이라는 것을 하였고, 상당한 양의 정보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로티안. 그래, 로티안이라고 했지."

서쪽에 위치한 도시의 이름.

킬라칼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첨탑에서 내려가자마자 골고를 불렀고, 골고는 늘 그랬듯이 킬라칼의 말에 순종했다.

"가자, 이번에는 서쪽이다."

트롤 30여 마리와 고블린 500여 마리, 그리고 여러 용도로 사용될 굶주리고 지친 인간들 300여 명까지.

킬라칼이 이끄는 트롤들의 군세가 로티안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 * *

"진군을 개시했어요."

멀리서나마 볼로나가 보이는 볼보 남작령 북동부의 작은 숲 안.

빛의 새를 통해 볼로나를 관찰하고 있던 르네의 말에 유성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듯 숨을 크게 한 번 고른 뒤 물었다.

"규모는?"

"고블린은 500여 마리 정도 되고 트롤들은 40마리가 조금 안 되는 것 같은데... 확실히 지금까지 마주친 트롤들보다 훨씬 큰 개체들이 섞여 있어요. 어깨에 고블린을 태우고 있는 트롤이 한 마리 있는데 다른 트롤들보다 키가 두 배는 큰 것 같아요."

말을 마친 르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하나의 덩치가 3미터에서 5미터 사이에 달하는 트롤 30여 마리가 땅을 울리며 진군하는 모습은 그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 숫자의 트롤들이 로티안에 당도하면 로티안이 견뎌낼 수 있을까?

무리였다.

이세리나가 말했던 바위의 비가 새삼 떠오른 르네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기까지 오며 해방시킨 마을의 숫자는 작은 화전민 촌까지 포함해 모두 다섯.

쓰러트린 트롤들의 숫자는 십여 마리였고, 고블린들은 수백 마리에 달했다.

하지만 한 번에 상대한 것은 많아봐야 트롤 서너 마리에 고블린 백여 마리 남짓이었다.

저 정도 숫자가 뭉쳐 있으면 지금처럼 조금씩 요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오직 하나.

놈들과의 정면승부뿐이었다.

르네는 빛의 새를 해제하고 유성을 보았다.

르네의 금빛 눈동자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어려 있었지만 동시에 유성에 대한 신뢰와 믿음 역시 실려 있었다.

유성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

유성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근거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다섯 개의 마을들을 해방하는 동안 내내 유성과 함께 싸워온 르네였다.

그리고 그 다섯 번의 싸움을 거쳐나가며 르네 자신과 유성, 그리고 카멜롯의 군세는 모두 이전보다 강해졌다.

르네와 눈을 마주한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번 요격전은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필로 마을까지 포함한다면 여섯 개나 되는 마을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십여 마리에 달하는 트롤들과 오백 마리가 넘는 고블린들을 격퇴했다.

해방시켜 구한 마을 사람들의 숫자는 칠백여 명에 달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성과.

이름: 천유성

성별: 남

직업: 성기사

레벨: 11

지위: 중급 지휘관

특이사항: 성왕의 계승자, 군단의 주인, 원탁의 계승자, 용의 심장

다섯 번의 싸움을 거치며 레벨이 11이 되었고, 예상대로 클래스 업을 하게 되었다.

견습 기사에서 성기사가 됨에 따라 능력치가 대폭 상승하고 성기사 스킬들을 얻었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유성 자신의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는 단순히 카멜롯의 군세를 소환하는 기사도가 아니었다.

군세를 소환하는 것은 단지 부가적인 능력일 뿐, 기사도의 본질은 보다 넓은 개념을 포괄했다.

빛의 군세가 아닌 빛의 계승자.

그렇기에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힘.

유성은 머릿속으로 카멜롯의 군세 외의 전력들을 떠올려 보았다.

로티안에서 시몽 경과 로빈이 조련 중일 삼백여 명의 징집병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 50여 명.

양쪽 모두 트롤들을 상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은 개의치 않았다.

트롤들이 포함된 군세와 어떻게 싸울지 이미 계획은 수립된 상태였다.

결전의 장소는 로티안.

하지만 일반적인 수성전은 하지 않는다.

회전으로 결판을 짓는다.

"가자, 르네."

"네, 계승자님."

르네가 결심을 굳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성은 작게나마 웃은 뒤 알폰스를 소환했다.

필로 마을 인근에서 전투사제단과 합류한 뒤 트롤들을 앞질러 로티안에 도달한다.

유성은 르네와 함께 말을 달렸다.

그리고 엿새 뒤 오후.

킬라칼이 이끄는 트롤들의 군세가 로티안 인근에 도달했다.

제9장 - 빛의 계승자

킬라칼이 이끄는 트롤 군세가 로티안에 당도하기 이틀 전 오후.

나흘 내내 말을 달려 필로 마을에 도착한 유성과 르네를 기다리는 것은 반나절 차이를 두고 한발 먼저 도착한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이었다.

"사제기사 루안이 로티안의 흑기사님을 뵙습니다."

이제 막 세운 것 같은 막사 안에서 거의 뛸 듯이 걸어 나온 것은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사제기사 루안이었다.

애당초 전투사제단 전원이 근육질의 거한들이었지만 루안은 그런 전투사제단 사이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클 정도로 키가 크고 어깨도 넓었다.

그런데 여기에 얼굴까지 귀공자처럼 잘 생겨서 마치 움직이는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말에서 내린 유성은 '흑기사'라는 호칭에 살짝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로티안의 유성입니다."

"유성 님의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입니다."

르네가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예를 표하자 루안 주위에 있던 전투사제들이 다 같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사제기사라 다른지 루안만은 그저 미소로 화답한 뒤 다시 유성에게 말했다.

"유성 경, 안으로 드시지요."

루안의 얼굴에는 반가움만이 아니라 긴장감 역시 어려 있었다.

필로 마을로 이동하는 와중에 로티안을 향해 진군 중인 트롤들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사십 마리에 육박하는 트롤들이 오백여 고블린들과 로티안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변경지대에서 트롤들과 싸워본 적이 있는 루안이었다.

서너 마리만 동시에 나타나도 끔찍한 그 괴물들이 삼십 마리가 넘게 모여 진군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놈들을 어찌 막아낼 것인가.

볼로나의 성벽을 무력화시킨 놈들 앞에서 로티안의 성벽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루안의 막사 안에는 커다란 전장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전투사제단의 십부장들이 모이자 루안은 유성을 바라보았고, 유성은 숨을 한 번 크게 고른 뒤 모두를 보며 말했다.

"수성전이 아닌 회전을 할 겁니다."

"회전을?"

"트롤들을 상대로 말입니까?"

당혹감이 섞인 물음들에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계획을 설명했고, 루안을 비롯한 전투사제단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얼굴로 전장지도와 유성을 바라보았다.

그게 진짜 가능은 한 겁니까?

정말 그게 된다고요?

의문과 불신이 뒤섞인 눈빛들에 유성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유성이 말한 것.

십부장들은 이제 진짜 믿을 거냐는 얼굴로 루안을 돌아보았고, 루안은 다시 한번 유성을 바라보았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젊다 못해 어린 남자.

하지만 입으로만 떠드는 자가 아니었다.

모두가 볼보 남작령을 외면할 때 그는 홀로 고군분투하며 수백 명이 넘는 백성들을 해방하였다.

로티안의 구원자.

볼로나의 해방자.

그런 그가 제시한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

생각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트롤들의 군세가 볼로나의 백성들을 잡아먹으며 로티안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믿겠습니다."

루안이 유성의 눈을 보고 말했고,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짤막한 회의를 마친 일행은 다시 진군을 개시했다.

* * *

킬라칼이 이끄는 트롤 군세가 로티안에 당도하기 하루 전 저녁.

르네가 만들어낸 마법의 새가 전달해준 지령에 시몽 경을 비롯한 로티안의 가신단 일동은 무거운 얼굴로 전장지도를 바라보았다.

트롤들의 군세가 로티안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이미 진즉에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수성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유성은 성 밖에서의 회전을 명하고 있었다.

"생각이 있으실 거요."

"계획이 있으실 거예요."

시몽 경에 이어 로빈이 말했고, 란트 경과 어쩌다 보니 회의에 참가하게 된 이세리나 역시 불안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로티안이 가진 병력은 징집병 삼백.

트롤들은 물론이고 고블린들조차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인 규모와 전력이었지만 시몽 경은 유성의 말을 믿기로 하였다.

"준비들 하시오. 내일은 결전이 될 터이니."

시몽 경의 무거운 목소리를 끝으로 회의가 파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성을 지키기 위해 남은 란트 경을 제외한 세 기사- 시몽 경과 로빈, 에드가는 징집병들과 함께 성을 나섰다.

* * *

유성이 트롤들의 군세를 맞이하기로 한 장소는 로티안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때문에 사실상 로티안의 성벽을 등지고 싸우는 위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저 너른 평지.

오전 중에 합류한 일행은 일찌감치 싸울 자리를 잡았다.

삼백 명의 징집병들이 본대처럼 중앙에 위치했고, 본대 좌측에는 바나데인이 이끄는 궁병대와 일반 보병대가, 우측에는 루안이 이끄는 전투사제단이 자리했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은 큰 방패를 가진 일종의 중갑보병들이었다.

철벽의 신 옴팔로스의 사제들답게 방패를 이용한 방어술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벽을 세우는 각종 신성마법들을 보유한 그들은 수비의 전문가들이었다.

"저기 봐, 전투사제님들이야."

"옴팔로스시여."

성 밖에서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 동요하던 징집병들은 자신들의 좌우에 자리한 군세를 보고 조금이지만 안정감을 되찾았다.

특히 옴팔로스 교단의 존재가 징집병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동쪽에서 불어온 바람에 끔찍한 악취와 지독한 피비린내가 섞이기 시작했다.

닷새간의 행군 동안 삼백여 명의 볼로나 주민들을 모조리 잡아먹은 고블린들과 트롤들이 새로운 먹잇감들에 흥분이라도 한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모습들을 드러냈다.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 괴물들의 군세에 징집병들 사이로 억눌린 침묵이 맴돌았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술렁거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시몽 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땅을 울리며 진군해 오는 트롤들의 모습에 로빈은 절로 가빠진 숨을 가라앉히고자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골고의 어깨 위에 앉은 킬라칼이 인간들의 군세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지난 엿새 동안 나름 경계를 하며 진군한 그였다.

하지만 볼로나 밖의 트롤들과 고블린들을 사냥하던 의문의 부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엿새간의 진군은 무척이나 평화로웠고, 삼백여 명의 볼로나 주민들을 모조리 먹어 치운 트롤과 고블린의 군세 앞에 새로운 먹잇감들이 도열해 있었다.

킬라칼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성벽을 등지고 튀어나온 것이나, 의문의 부대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나 이상한 점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들이받아 찢어 죽이면 저들이 어찌할 거란 말인가.

"가라."

킬라칼이 나직이 말하자 골고가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높이 들며 괴성을 질렀다.

하늘과 땅을 울리는 포효에 인간들의 군세가 주춤하였고, 킬라칼뿐만 아니라 고블린들과 트롤들이 함께 웃었다.

골고의 명을 따라 정면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이 앞장서고 그 뒤를 트롤들이 따랐다.

볼로나에서는 성벽을 부수기 위해 트롤들이 앞장섰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기세가 오른 고블린들이 먼저 달려 나갔고, 순간적인 폭발력은 좋지만 발이 느린 트롤들이 자연스럽게 뒤처졌다.

하지만 이 또한 크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쾅 하고 부딪힌 순간 한데 엉킬 터이니 말이다.

"칼라- 후!"

"칼라- 후!"

고블린들이 돌진했다.

인간들 쪽에서 화살을 쏘아댔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숫자였다.

고블린들은 오백 마리나 되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로빈이 크게 외치자 병사들도 함께 외쳤다.

"옴팔로스의 방벽이 함께하신다!"

전투사제단 역시 크게 외치며 뿔피리를 불었다.

징집병들은 정면에서 달려오는 고블린들을 보며 비명 섞인 고함을 질렀다.

고블린들과 인간들의 전열이 충돌했다.

하지만 트롤들은 여전히 도착하지 못했다.

오히려 치고 나간 고블린들과 트롤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길 지경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면 사라질 공간이었다.

돌진 중에 생긴 약간의 시간차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전방이 아닌 측방에서 말을 달리는 자들이 있었다.

유성과 르네였다.

각자의 말을 탄 두 사람이 트롤들의 측방을 향해 달렸다.

골고 위에 자리한 킬라칼은 그런 유성과 르네를 발견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겨우 기병 둘로 무얼 한단 말인가.

저 기병 둘을 신경 써서 걸음을 멈추면 그게 오히려 바보짓이었다.

그렇기에 무시하고 정면을 보았다.

"칼라- 후!"

"죽어!"

"버텨내라!"

그 와중에 최초의 공방이 오갔다.

앞장서서 달려 나갔던 고블린들 대부분이 창에 찔리고 방패에 치여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인간들도 피해가 없지 않았다.

전투사제단과 일반 보병대는 굳건히 버텨냈지만 징집병들은 최초의 충돌만으로 진형의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성과 트롤들의 거리가 좁혀졌다.

구십여 미터 남짓.

말을 달린다면 순식간에 가로지를 수 있는 거리.

트롤들 몇이 그래도 유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랬기에 놈들은 킬라칼도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다.

"경기병대! 집결하라!"

유성이 말을 달리며 외쳤다.

그 순간 눈부신 황금빛과 함께 유성의 좌우로 기병들이 나타났다.

자신들의 군마를 탄 케이트와 다이애나가 유성과 르네의 좌우에 나타났고, 다시 그 옆으로 정예 경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내 자연스러운 쐐기 진형을 구축하였다.

트롤들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숫자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빛과 등장에 트롤들은 당황하였고, 당황한 놈들의 목소리에 더 많은 트롤들이 유성 쪽을 돌아보았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가 깃발을 높이 들며 외치자 다시 화려한 황금빛이 트롤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끄아아악!"

트롤들이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일부는 뒷걸음질 치다 나자빠졌고, 놈에게 걸린 트롤들 몇 마리까지 더 넘어진 탓에 돌진하던 진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킬라칼이 비로소 유성 쪽을 보았다.

그리고 유성이 그런 킬라칼을 보았다.

검 대신 쥔 창을 앞으로 세우며 새로운 힘을 발동시켰다.

중급 지휘관이 되면서 새로이 얻게 된 능력.

병종별로 추가되는 지휘관 스킬인 지휘관 명령.

"달려라!"

유성의 외침과 동시에 일어난 순백의 빛이 정예 경기병대 전체를 휘감았다.

케이트의 기사도인 카멜롯의 영광으로 이미 강화된 정예 경기병대 전원의 속도와 힘이 더욱 강해졌다.

경기병대의 지휘관 명령인 '질풍의 오더'의 효과였다.

기병대의 돌진 속도가 거의 두 배로 상승했다.

기병대와 트롤들 사이에 있던 거리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콰앙!

충격의 다이애나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더 강한 충격파를 발산하는 기사도였다.

유성을 선두로 한 정예 기병대의 돌진 공격이 트롤들의 측면을 강타한 순간 발생한 거대한 충격파가 트롤들을 측방에서부터 휩쓸었다.

파앗-!

충격파에 정면으로 노출된 트롤들은 폭발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의 일부가 사라졌다.

처음 당한 놈들을 완충재 삼은 두 번째 놈들 역시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정예 기병대가 그런 트롤들을 짓밟고 지나쳤다.

삼십 여 마리의 트롤들 가운데 십여 마리가 즉사했고, 다시 십여 마리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킬라칼은 당황했다.

충격파에 휩쓸리지 않은 전열과 후열의 트롤 십 여 마리 역시도 순간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에 놀라 마비라도 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트롤들을 지나치고도 수십 미터 이상을 나아간 유성이 거친 숨을 토했다.

다이애나는 방금 일격에 모든 힘을 쏟아 붓기라도 한 것처럼 비지땀을 흘리며 헉헉거렸다.

두 번은 불가능한 단 한 번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알지 못했다.

유성을 필두로 한 정예 기병대가 말머리를 돌리고 다시 창을 세우자 킬라칼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쳐라! 저놈들을 쳐! 거리를 주지 마라!"

돌진 공격을 못 하게 해야 한다.

그럼 이쪽에서 돌진해야 한다.

살아남은 트롤들이 주춤했지만 골고가 포효하며 돌진하니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고블린들에게 합류한 트롤들은 한 마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뒤에서 난 큰 소리에 놀란 고블린들이 돌아보거나 도망친 탓에 진형이 망가졌다.

시몽 경은 저만치 고블린들 너머에서 일어난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폐부 끝에서부터 치고 오른 희열을 토하며 검을 휘둘렀고, 징집병들 역시 영향을 받았다.

저마다 함성을 지르며 고블린들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유성이 다시 움직였다.

충격의 다이애나는 이번 전투에서 다시 사용하기 어려웠지만 지휘관 명령의 효과는 아직 남아 있었다.

정예 기병대는 트롤들에게 돌진하는 대신 다시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트롤들은 그런 기병들을 잡기 위해 있는 힘껏 지면을 박찼고, 그 속도는 분명 빨랐지만 지휘관 명령의 보조를 받는 기병들을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짧은 질주였다.

기껏해야 3분 남짓한 시간일 터였다.

하지만 애당초 지구력이 약한 트롤들이었다.

3분 간 이어진 전력질주에 놈들은 크게 지쳤고, 기병들을 쫓다 보니 사방팔방 흩어지고 말았다.

킬라칼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트롤들과 달리 한데 뭉친 정예 기병대가 르네의 마법을 필두로 트롤들을 하나하나 격파하기 시작했다.

전투사제단 측에서 무언가를 했는지 고블린들의 진형이 오른쪽에서부터 뭉개지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루안이 자신의 기사도인 '신앙의 벽'을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킬라칼은 그것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골고가 괴성을 질렀다.

놀라서 돌아보니 기병 한 기가 자신과 골고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검은 갑옷이었다.

말 역시 새카만 흑마였다.

기병대의 선두에 있던 놈.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리던 자.

킬라칼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놈이다.

저놈이 인간의 군세를 이끄는 놈이다.

"골고! 죽여라!"

킬라칼의 명령에 호응하듯 골고가 정면을 향해 다시 괴성을 질렀다.

거의 공격이나 다름없는 포효였다.

하지만 유성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놈의 포효는 유성과 닿은 순간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된 이유.

유성의 눈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유성의 검 끝에서 황금의 불길이 일어났다.

오라 블레이드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것.

유성이 성기사가 됨으로써 깨닫게 된 기사도의 진의가 이끌어준 힘.

유성의 기사도는 빛을 계승하는 자였다.

빛의 군세가 아니었다.

카멜롯의 군세를 부리는 것은 성왕이 가진 권능의 일부일 뿐 그 전부일 수 없었다.

성왕십자검(聖王十字劍).

그 첫 번째,

열화(烈火)의 검.

인간의 적을 멸하는 성왕의 불길.

황금빛 성화(聖火)가 골고를 향해 휘몰아쳤다.

제9장 - 빛의 계승자 (2)

"끼아악!"

검 끝에서부터 일어난 황금빛 성화가 허공을 불사르자 킬라칼이 비명을 질렀다.

불길에 직접 닿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가 일었기 때문이다.

골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마냥 두려워하는 대신 본능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크아!"

전장이 7미터에 육박하는 골고였다.

크게 일어난 불길을 향해 전력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니 그 여파만으로도 거친 강풍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콰가강!

몽둥이가 지면을 강타했다.

땅이 파이고 지면이 뒤흔들렸지만 그뿐이었다.

타점보다 훨씬 앞서 질주한 유성은 그대로 말을 달리며 골고의 종아리를 치고 지났다.

카캉-!

마치 검으로 바위를 내려친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골고를 치고 지나가는 유성의 뒷모습을 쫓아 고개를 돌리던 킬라칼은 크게 웃었다.

성화를 보고 잠시 두려움에 빠졌지만 역시 골고는 골고였다.

바위 같은 피부를 가진 골고에게 검격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날파리 같이 도망치는 저 놈을 붙잡기만 하면-

"크악!"

비명을 지른 것은 골고였다.

유성의 검격이 치고 지난 왼쪽 종아리 쪽으로 주저앉는 골고의 모습에 킬라칼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유성의 검격은 골고의 종아리를 온전히 베어내진 못했다.

하지만 오라 블레이드의 칼날은 골고의 종아리를 얕게나마 베었다.

그리고 그 상처로부터 성화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상처를 재생해!"

골고는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힘과 재생력 모두 평범한 트롤들을 크게 상회했다.

평범한 불이라면 붙어봐야 재생력으로 압도할 정도였다.

그런데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성화의 불길이 골고의 상처를 끊임없이 불태워 재생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어나라! 일어나! 골고! 불은 나중에 꺼주겠다! 일단 놈을 잡아!"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다.

불길 역시 크지 않았다.

킬라칼은 얼른 주문을 외워 주술을 발동시켰다.

골고의 머릿속에 주입된 환술이 통증을 줄이고 신체의 성능을 강화했다.

"크아!"

골고가 유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듯 돌진했다.

유성은 그런 골고를 상대하거나 역으로 달려드는 대신 말의 속도를 높여 거리를 벌렸다.

쾅! 쾅! 쾅!

골고가 연속해서 지면을 박차 몸을 날렸지만 유성을 쉬이 잡을 수 없었다.

약이 오른 놈이 산성액을 뱉어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지면이 넓게 녹아내리며 연기가 치솟았을 뿐 유성을 잡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킬라칼 역시 분통을 터트렸지만 잠시뿐이었다.

퍼뜩 고개를 든 놈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트롤들이 기병들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상태가 더욱 심각해 일부는 싸우고 일부는 도망치다보니 전선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골고! 인간들을 덮쳐라!"

말 탄 놈의 속셈을 비로소 깨달았다.

놈은 골고를 제외한 다른 군세가 무너질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었다.

"크아!"

골고가 반항하듯 노성을 토했지만 이내 결국 인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유성이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골고가 돌아선 순간 말머리를 돌리고 속도를 높였다.

"골고! 지금이다!"

부웅!

골고가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서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땅을 쓸듯이 휘몰아치는 일격은 실로 노도와 같았지만 이번에도 유성을 맞출 수 없었다.

유성 역시 기다렸다는 듯 볼보가 몽둥이를 휘두른 순간 타이밍을 맞춰 안장을 박차 도약했기 때문이다.

파앗!

알폰스가 사라지며 남은 빛 무더기를 골고의 몽둥이가 뒤늦게 치고 지난 그때, 몽둥이를 뛰어넘어 지면에 착지한 유성은 그대로 돌진해 골고의 발목을 베었다.

"크악!"

상처가 깊었다.

성화가 피어올라 상처와 피를 불태웠고, 골고는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유성이 달렸다.

주저앉으며 자연스럽게 땅을 짚게 된 골고의 손등 위에 올라타더니 그대로 순식간에 팔을 타고 올랐다.

"히, 히익!"

골고의 어깨에 자리하고 있던 킬라칼이 다급히 주문을 읊조렸지만 너무 늦었다.

성화의 불길에 휩싸인 유성의 검이 놈의 몸을 단칼에 갈라버렸다.

"끄아-"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킬라칼이 죽었다.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골고가 괴성을 지르며 어깨 위에 자리한 유성을 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주거어어어어!"

괴성과 손바닥.

그 순간 유성은 판단했다.

놈의 손을 피해 다시 뛰어내리는 대신 놈의 목덜미를 향해 달렸다.

쾅!

커다란 손바닥이 목덜미를 찍었다.

간격을 재어 그 공격을 피한 유성은 손등을 타 넘으며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베기로 골고의 목덜미에 상처를 낸 직후 역수로 쥔 검을 상처에 박아 넣었다.

"끄악!"

골고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유성은 검을 더 깊이 밀어 넣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검 끝에서 성화를 일으켰다.

문자 그대로 열화(烈火).

유성은 볼보 남작령에서 본 참상들을 잊지 않았다.

가족을 잃고, 지인을 잃고, 삶의 터전마저 잃고만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기억했다.

사람들을 죽이며 낄낄거리던 고블린들.

사람들을 산 채로 잡아먹던 트롤들.

열화의 불길이 더욱 더 거세어졌다.

골고의 목구멍을 불태우는 데 그치지 않고 폐부 끝으로 파고들어 놈의 폐를 불태웠다.

"그악! 컥! 끄악!"

바위 같은 피부를 가진 골고였지만 내부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폐가 불타고 내장이 불타니 그 고통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아아-"

입에서 차고 넘친 성화의 불길을 토해낸 골고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소리가 나며 지면이 뒤흔들렸고, 그 굉음에 전장에 있던 이들이 골고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쓰러진 골고의 등 위에 유성이 서 있었다.

그의 검이 황금빛 성화로 타오르고 있었다.

"영주님께서 승리하셨다!"

시몽 경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으아아! 영주님 만세!"

로빈이 따라 외치자 에드가 역시 외쳤고, 주변에 있던 병사들 역시 있는 힘을 다해 외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이겼다!"

"밀어붙여!"

승리의 함성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뒤를 돌아본 고블린들은 트롤들이 어느새 거의 다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패닉에 빠졌다.

트롤들을 각개격파하던 르네와 케이트가 유성을 보며 웃었다.

바나데인은 도망치기 시작한 고블린들을 쏘아 재끼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루안은 함성을 지르거나 미소 짓는 대신 멍하니 서서 유성을 바라보았다.

유성의 검 끝에서부터 일어나는 황금빛 성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기사인 동시에 신실한 사제인 그에게는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불길이 아니다.

평범한 오라 블레이드가 아니다.

저것은 성스러운 불꽃.

인간의 적을 멸하는 성왕의 불길일지니.

"호수의 여신이시여...."

철벽의 옴팔로스를 비롯한 모든 인간의 신들을 이끄는 인간의 수호여신.

루안은 유성의 성화로부터 그녀의 신성을 느낄 수 있었다.

유성이 호수의 여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루안 자신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고민할 것도 없었다.

흉성의 시대가 도래한 이때에 호수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가 나타났다면 철벽의 옴팔로스를 모시는 이로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

루안은 비로소 숨을 쉬었다.

사제이자 기사인 그가 이제부터 충성을 바칠 주군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 * *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40점 획득했습니다.]

[도시방어: 선업 수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20점 획득했습니다.]

[지휘 가능한 새로운 병종이 추가되었습니다.]

[새로운 군수 시설이 추가되었습니다.]

[일반 보병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예 궁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예 경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예 경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왕의 마법사: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달성: 트롤 슬레이어]

[업적 달성: 고블린 슬레이어]

연달아 떠오른 상태창 문구를 보던 유성은 시선을 돌렸다.

환한 얼굴로 말을 달리던 르네가 유성에게 손까지 흔들며 외쳤다.

"대승이에요!"

르네의 말대로였다.

코볼트의 왕자를 잃은 코볼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트롤들을 잃은 고블린들은 더 이상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패닉에 빠져 도망치려던 놈들은 기세가 오른 징집병들과 전투사제단에 의해 문자 그대로 전멸하였다.

물론 이쪽의 피해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카멜롯의 군세에도 조금이지만 피해가 있었고, 징집병들 중에서도 사상자가 수십 명 이상 발생했다.

하지만 완승이었다.

그리고 코볼트들과의 전투에 이어 이번 전투까지 두 번의 전투와 승리를 경험한 징집병들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질 터였다.

'나도 그럴 거 같고.'

레벨이 오른 것도 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포인트를 쏠쏠하게 벌었다.

새로운 병종이 추가되었다는 것은 곧 새로운 영웅이 나온다는 뜻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열화의 검.'

빛의 군세가 아닌 빛을 계승하는 자.

성왕의 길을 의미하는 유성 자신의 기사도.

성왕십자검의 첫 번째 검인 열화의 검의 위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 검은 유성 자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많은 선업을 쌓으면 쌓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리라.

'빨리 시설 추가도 해주고 싶네.'

유성 성에 더할 새로운 시설들.

예전에 잠깐 즐겼던 방치형 모바일 게임이 떠올라 작게 웃은 유성은 이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비운 뒤 골고의 등 위에서 내려섰다.

어느새 다가온 르네가 말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고생했어, 르네."

"계승자님도 고생하셨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깊은 유대감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유격전에 나서서 이번 회전에서 승리하기까지 그야말로 동고동락하며 고생한 사이다보니 이전보다 훨씬 더 감정적 거리가 좁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가씨!"

"로빈!"

저만치서 로빈이 열심히 말을 달려오자 르네가 손을 크게 흔들며 반가워했다.

회전까지 시간이 워낙 촉박했던 터라 얼굴을 보긴 했어도 회포를 제대로 풀지 못한 두 사람이라 그런지 반가움이 더 큰 거 같았다.

그리고 로빈과 별개로 케이트와 다이애나 역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이애나가 워낙 지친 상태라 에니카 위에 거의 널브러져 있긴 했지만 케이트의 표정이 밝은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었다.

'바나데인은 뒷수습 중이네.'

바나데인만이 아니었다.

시몽 경과 란트 경은 사상자를 수습하고 뒷수습을 하느라 무척 바빠 보였다.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는 루안과 전투사제단의 모습까지 멀리서나마 확인한 유성은 어느새 얼굴을 마주한 채 서로 기뻐하고 있는 르네와 로빈을 지나 로티안의 성벽을 바라보았다.

승전 소식을 들었는지 도시의 주민들이 성벽 위에 올라와 환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유성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로티안을 지켜냈다.

괴물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유성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숨을 크게 골랐다.

이쪽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미소를 머금었다.

제10장 - 유성 성

판타지 모나크와 현실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전투 후의 뒤처리였다.

게임에서야 '승리!'라는 문구와 함께 전투 결과를 보고 받고 끝이었지만 현실은 훨씬 더 많은 일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성은 일단 카멜롯의 군세와 함께 트롤들이 확실히 죽었는지를 확인했다.

재생력을 가진 괴물들이다 보니 부활할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숨이 붙어있던 트롤들까지 모두 정리하고 나니 시몽 경이 이끄는 징집병들 쪽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았다.

도시 앞에서 싸운 만큼 부상병들은 바로 이송되었고, 남은 병사들은 고블린들의 확인 사살 작업을 진행했다.

마지막 트롤을 처리한 유성은 자신 앞에 도열한 카멜롯의 군세를 마주했다.

케이트는 이번 전장에서는 서로 떨어진 곳에서 싸운 일반 보병대를 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고, 바나데인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다이애나를 부축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유성은 지미를 필두로 한 일반 보병대와 정예 궁병대, 정예 경기병대 모두를 돌아본 뒤 주먹을 들어올렸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군세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유성은 바로 옆에서 똑같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고 있던 르네를 돌아본 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작게 웃고는 시몽 경과 징집병들을 향해 나아갔다.

"대승입니다."

시몽 경이 그답지 않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영주님 덕분입니다."

시몽 경의 말에 옆에 있던 란트 경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한 전투였습니다. 그 거인- 아니, 거대한 트롤을 단독으로 쓰러트리시다니. 진짜 영웅전설에나 나올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털보 얼굴의 란트 경이 어린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하니 우스우면서도 정감이 갔다.

"시몽 경은 물론이고 란트 경도 수고했다. 다들 정말 잘해주었어."

트롤들을 해치운 건 유성과 카멜롯의 군세였지만 고블린들을 상대한 건 로티안의 군사들이었다.

유성이 볼로나에서 요격전을 펼치는 동안 시몽 경과 란트 경이 징집병들의 훈련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결과를 얻지 못했으리라.

유성의 구체적인 치하에 시몽 경은 다시 미소 지었고, 란트 경은 쑥스럽다는 듯 코 밑을 매만지며 실실 웃었다.

"루안 경이에요."

옆에서 같이 웃고 있던 르네가 눈짓하며 말했다.

돌아보니 과연 중무장한 루안 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투 중이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루안 경과 전투사제단의 역할 역시 컸음을 잘 아는 유성이었다.

고블린들의 공세를 단순히 버티는 선에서 끝나지 않고 궤멸시킬 수 있었던 건 루안 경과 전투사제단이 고블린들의 전선을 붕괴시킨 덕분이었다.

"멋진 활약이었습니다. 조력에 감사합니다."

루안 경은 로티안의 가신이 아닌 외부의 인사였다.

유성이 말을 높이며 감사하자 루안 경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무척이나 뜨거운 눈으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시몽 경이나 란트 경의 눈빛과는 조금 다른, 단순히 존경을 표하는 것을 넘어선 어떤 시선.

'뭐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여자가 저런 시선을 보내도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루안 경 같은 미남이 저러니 더더욱 부담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루안 경의 뜨거운 눈빛은 그렇게까지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눈을 감고 한 차례 숨을 고른 그는 직전보다는 훨씬 덜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유성을 바라보더니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함께 이룬 승전이지요."

"예, 하지만 흑기사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단 전투 후 정리를 해야 하니 나중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훗날을 기약하는 것 같은 말을 남긴 그는 그대로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르네가 유성에게 조금 더 다가선 뒤 속삭이듯 말했다.

"루안 경이 계승자님께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아요."

옴팔로스 교단의 사제기사인 루안이었다.

그에게 좋은 인상을 새겼다면 손해 볼 일은 없으리라.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한 유성은 이쪽을 바라보는 징집병들에게 손을 흔들어 다시 한 번 환호하게 한 뒤 모두를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섰다.

* * *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내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것은 이세리나였다.

볼보 남작을 비롯한 볼보 남작령 모두의 원수를 갚아준 유성에게 이세리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예를 표했고, 유성은 심심한 위로의 말을 남긴 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엄밀히 말해 볼보 남작령의 상속권을 가진 것은 이세리나였다.

볼보 남작령이 초토화된 상황이라 영지를 계승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긴 했지만 당장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한다면 유성과 나눌 이야기가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영지는 초토화되었지만 물자와 피난민 문제가 남았으니까.'

트롤들과 고블린들이 볼보 남작령에서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더욱이 그 와중에 트롤들과 고블린들이 주로 먹어 치운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볼보 남작령에는 막대한 양의 물자가 그대로 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피난민들.

유성이 해방한 인원만 헤아려도 칠백이 넘으니, 이 또한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볼보 남작령의 현 상황상 피난민들과 물자 모두 로티안이 흡수해야 할 터였으니, 볼보 남작령의 상속자인 이세리나와의 긴밀한 협의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나눌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늘은 승전의 밤이었으니 말이다.

"로티안의 승리를 위하여!"

"영주님을 위하여!"

"로티안의 흑기사!"

"열화의 흑기사!"

"으흐흐 이번 전투에서도 살아남았어! 살아남았다고!"

최소한의 경계 인원을 제외한 징집병들은 곳곳에 피운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술과 고기를 즐기며 목소리들을 높였다.

목숨 건 전투를 마친 직후였다.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들 가운데서 죽고 다친 이도 여럿이었으니 하룻밤 정도는 이렇게 취해주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터였다.

그리고 유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병사들처럼 말술을 마시지 않을 뿐이지 여기저기 다니며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술기운이 턱까지 차오른 유성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밤바람 덕분인지, 아니면 인간을 초월한 기사의 신체능력 덕분인지 비교적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로티안의 성벽 위.

계단 위에 앉아 성 아래의 병사들과 주민들을 바라보던 유성은 고개를 돌렸다.

르네가 낑낑거리며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계셨어요?"

평소에도 잘 웃는 르네였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잘 웃었다.

기존의 미소가 '후후훗'이었다면 오늘은 미소를 '헤헤헤'라고 해야 할까?

술기운이 올라 빨개진 얼굴로 헤헤헤 웃은 르네는 유성의 옆에 찰싹 붙어 앉더니 반쯤 술이 찬 나무 술잔을 두 손으로 꼭 쥐며 말했다.

"계승자님."

"응, 르네."

"이겼어요."

그리고 다시 헤헤헤 웃던 르네는 무언가 더 말하기 위해 입술을 벌렸지만 이내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일까.

유성이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르네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우울해진 눈빛을 보니 어떤 말을 하려고 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단둘이서 볼보 남작령을 활보한 사이였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경험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르네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필로 마을의 이름 모를 소년.

화전민 마을에서 발견한 참혹한 시체.

손발이 묶인 채 고블린들의 노리개가 되었던 여인.

"이겨서 다행이에요."

르네가 유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고, 유성은 그런 르네의 어깨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유성의 어깨에 기댄 채 반쯤 졸던 르네는 돌연 고개를 들더니 눈을 깜박였고, 이내 얼굴을 붉혔다.

잠깐 존 덕분에 술기운이 달아나면서 새삼 자기가 지금 누구 어깨에 기댄 채 졸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어."

"괜찮아. 비슷한 일 많았잖아?"

유성의 말에 르네는 더더욱 얼굴을 붉혔다.

볼보 남작령을 활보하며 있었던 여러 일들이- 그러니까 서로 찰싹 붙어서 노숙했던 밤들이 연속해서 떠오른 탓이었다.

"그, 어, 으, 아!"

술기운이 완전히 날아갔지만 어째 얼굴은 더 붉어진 르네는 돌연 목소리를 높이더니 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계, 계승자님."

"응?"

"그, 언니. 케이트 언니랑 다이애나 언니 좀 볼 수 있어요? 카멜롯의 군세도요."

르네는 지금 두 사람을 소환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르네가 원하는 것은 상태창을 통한 유성 성의 관찰.

르네가 상태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노숙할 때마다 같이 유성 성을 관찰한 터라 제법 익숙한 일이었다.

"그럴까?"

"네, 그리고 이번 전투로도 포인트를 많이 얻으셨죠?"

"얻었지."

"그럼 성에 시설 추가도 가능하겠죠?"

"포인트 좀 봐야겠지만 가능은 하겠지?"

"그럼 빨리 봐요."

르네가 애교를 살짝 담아 조르자 쿡쿡 웃은 유성은 상태창을 열었다.

"일단 레벨 업이랑 포인트 확인 좀 하고."

"네."

유성 성도 유성 성이었지만 이왕 상태창을 연 만큼 획득 포인트와 레벨 업 확인이 우선이었다.

이름: 천유성

성별: 남

직업: 카멜롯의 성기사

레벨: 13

지위: 중급 지휘관

특이사항: 성왕의 계승자, 군단의 주인, 원탁의 계승자, 용의 심장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

[성왕 스킬]

왕국검법 Lv3 / 제국검법 Lv3 / 용왕심법 Lv3 / 용왕로 Lv2 / 왕의 안목 Lv2 / 군마 소환 Lv2

[성왕십자검]

열화의 검

[성기사 스킬]

오라 블레이드 / 오라 실드 / 승리의 함성

[지휘관 명령]

질풍의 오더 / 수호의 오더 / 관통의 오더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

[군단 관리]

[성 관리]

[업적 달성: 고블린 슬레이어]

[고블린을 대상으로 한 공격 10% 강화 / 스킬 포인트 10점 획득]

[업적 달성: 트롤 슬레이어]

[트롤을 대상으로 한 공격 10% 강화 / 스킬 포인트 20점 획득]

"이번에는 거의 레벨만 오르긴 했네."

유성 자신의 레벨이 11에서 13이 되었지만 역시 5의 배수 구간이 아니라 그런지 능력치 상승과 몇몇 스킬들의 레벨이 높아진 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아니지, 그래도 왕의 안목이 레벨 2가 된 건 제법 소득이 될 것 같은데?'

군마 소환도 레벨2가 되었는데, 찾아보니 알폰스의 능력이 강화되어 있었다.

"포인트는요?"

"전투로 40포인트, 레벨 업으로 20포인트, 업적 달성으로 다시 30포인트."

"와, 그럼 90포인트나 되네요?"

르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자 유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지금까지 중에 제일 많은 거 같은데?"

유성의 말에 르네는 앉은 채로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지금까지 늘 포인트 부족으로 유성 성에 시설 투자하는 일을 뒤로 미뤘었는데, 오늘에야말로 제대로 된 시설을 추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약간 인형놀이 하는 감성이려나?'

그러고 보면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이 관찰형 게임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어찌 되었든 르네가 좋아하니 유성 자신도 나쁠 것이 없었다.

애당초 시설 추가는 필요한 일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부대 추가부터 보자."

"새로운 병종이 나왔어요?"

"응. 이번에 새로 추가되었어."

유성의 말에 르네가 다시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자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며칠 보면서 대충 어떤 구조인지, 어떤 창이 뭘 의미하는지 정도는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 일본어 몰라도 일본 게임 할 수는 있으니까.'

영어 게임도 마찬가지고.

어찌 되었든 유성은 르네의 기대에 부응코자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의 부대 모두 레벨이 올랐는데, 셋 모두 1레벨씩만 더 올리면 승급이 가능하다는 표시가 떴다.

그리고 대망의 새 병종.

[중갑 보병대] - 대장간의 레벨 업이 필요합니다. / 훈련소가 필요합니다. / 금속 제련소가 필요합니다.

[중갑 기병대] - 대장간의 레벨 업이 필요합니다. / 훈련소가 필요합니다. / 금속 제련소가 필요합니다. / 마구간이 필요합니다.

[정예 검사부대] - 대장간의 레벨 업이 필요합니다. / 훈련소가 필요합니다. / 검술관이 필요합니다.

"아니, 잠깐."

"네? 왜요? 뭐라고 나왔는데요?"

르네의 물음에 유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새 병종이 세 개나 뜨긴 했거든?"

"네, 세 개. 어떤 병종인데요?"

"중갑 보병대랑 중갑 기병대랑 정예 검사부대."

"와!"

셋 모두 이름만 들어도 든든한 병종들이었다.

더욱이 각 병종마다 영웅이 추가될 테니 이 얼마나 듬직하겠는가.

"그런데 왜요? 혹시 포인트가 무척 비싼가요?"

"어, 근데 그것만이 아니야."

병종 당 추가하는데 필요한 포인트가 40포인트니 이전보다 훨씬 비싼 것도 비싼 것이었지만, 문제는 바로 추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유성 성의 시설 추가를 해야 병종 추가가 가능하다는데?"

"네? 어, 그럼 목욕탕이라든가?"

"아니, 그건 아니고. 대장간 레벨 업이랑 훈련소랑... 이것저것 많이 필요한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한 유성은 일단 포인트를 투자해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의 각 부대별 인원수를 최대치까지 채운 뒤 유성 성을 활성화시켰다.

그리고 직후.

평소와 다른 유성 성의 모습에 유성과 르네는 서로를 돌아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10장 - 유성 성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