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40-50

제13장 - 시체들의 밤 (2)

린드만의 별명은 행운아였다.

그가 정말로 행운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면 벽촌의 가난한 사냥꾼의 자식이 아닌 왕후장상의 자식으로 태어나 호강하며 살았을 터이니 말이다.

린드만은 그냥 평범한 사냥꾼이었다.

운 좋게 대단한 사냥감을 잡는 일도 없었고, 운 좋게 값비싼 약초를 발견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릴 적부터 행운아라 불렸다.

소위 말하는 악운에 강했기 때문이다.

코볼트들이 로토 마을을 덮쳐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을 학살한 와중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로티안에서 징병된 그는 코볼트 왕자가 이끄는 코볼트 군대와의 전투에서도 큰 부상 없이 살아남았다.

징집병 300명 가운데 100명가량이 죽거나 다칠 정도의 격전이었음에도 말이다.

트롤과 고블린들로 이뤄진 군세와의 싸움에서도 그는 죽지 않았다.

행운아 린드만.

이쯤 되면 불사신 린드만으로 별명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전우들 사이에서 나돌 즈음 그는 새로운 임무에 자원했다.

파괴된 로토 마을에 머물며 로토 숲 방면에서 새로운 침공이 없는지를 감시하는 임무였다.

조금 겁이 나긴 했지만 방어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적이 보이면 보고한 뒤 도망치는 임무라 용기를 내었다.

적잖은 추가 수당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이다.

도시인 로티안에서는 사냥꾼이 할 일이 거의 없었고, 몰려든 피난민들 때문에 물가도 오른 상황이었다.

단순 복무만으로도 끼니는 어찌어찌 이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위해서는 돈이 더 필요했다.

임무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파괴된 로토 마을에 들어설 때는 가슴이 아팠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마을 주민들의 시신들은 코볼트들이 잡아먹은 것인지, 아니면 짐승들이 물어간 것인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함께 온 동료들과 만든 망루 위에 올라 하루 종일 서쪽 방면을 쳐다보다가 하루에 두 번 연기로 이상 없음을 보고하는 것이 업무의 전부였다.

린드만은 사냥꾼이었던 전직을 살려 자잘한 짐승들을 잡아 동료들에게 고기를 팔거나 식량 보급을 위해 오는 보급병들에게 가죽을 팔아 부수입을 올렸다.

추가 수당까지 합치니 수입이 만만치 않았다.

사냥꾼 시절보다 배는 더 버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돈을 계속 모으면 로티안에 제대로 된 집을 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로티안에서 만났던 과부에게 새장가도 들고 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문대로 흉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라면 앞으로도 전쟁이 끊이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그냥 창관에서 탕진하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인 계획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어차피 꿈이었다.

달콤한 망상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는가.

린드만은 금발의 여기사님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사람인가 싶었다.

천사나 여신이 내려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쁘고 우아하고 청순하고 아무튼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여도 좋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기사님과 다시 같은 전장에 서고, 우연찮게 부상을 입은 기사님을 자신이 구하고,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묻고, 이런저런 와중에 정분이 쌓여 같이 물레방앗간에라도 들어가는 상상.

"으흐흐, 씨발. 말도 안 되지."

망상도 정도껏이라고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린드만은 울면서 웃었다.

망상 속에서는 벌써 결혼해 자식을 셋이나 둔 기사님의 얼굴을 지우고 현실을 보았다.

망루 아래에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죽은 시체들이 일어나 행진하고 있었다.

사이사이에는 새하얀 백골들도 있었고, 거대한 짐승들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어두워서 확신할 순 없었지만 수천은 족히 될 것 같았다.

망루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다리를 치운 구멍 아래에서 시체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보고 후에 깜박 졸지만 않았다면.

시체들의 선봉이 망루 근처에 왔을 때 바로 망루에서 내려가 도망쳤다면.

전부 뒤늦은 후회였다.

망루가 더욱 거칠게 흔들렸다.

린드만은 죽음을 직감했다.

그랬기에 최후의 용기를 발휘하여 임무에 충실하였다.

퍼엉!

마법사님이 만드셨다는 신호탄을 하늘을 향해 쏘자 새빨간 불꽃이 밤하늘에 그려졌다.

그러고 보면 마법사님도 참 미녀신데.

"흐흐흐."

마법의 불꽃을 보며 르네의 얼굴을 떠올린 린드만은 짧은 칼을 꺼내들고 이를 악물었다.

망루가 다시 흔들렸다.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 *

좀비들과 스켈레톤들로 구성된 언데드 대군이 로토 마을을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들의 것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 괴물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군단이었다.

코볼트나 고블린 같은 작은 괴물들도 있었고,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커다란 괴물들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저급한 언데드들답게 속도가 느렸지만 놈들은 피로를 몰랐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진군하니 행군 속도가 일반적인 군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삼천은 족히 될 거 같은 언데드 군대 사이로 뿔이 두 개 달린 언데드 바이콘 위에 탄 여자가 하나 있었다.

역병 의사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검은 로브로 전신을 감싼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늘 보던 하늘과는 확연히 다른 광경이었다.

"이곳이, 장벽 너머의 세계."

가면 속에서 여자는 메마른 미소를 머금은 뒤 다시 정면을 보았다.

이제는 언데드 군단의 일부가 된 코볼트들이 떠들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동쪽- 로티안을 향해 나아갔다.

* * *

소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야식을 먹던 중에 붉은 신호탄을 본 중간 지점의 정찰병은 바로 다시 붉은 신호탄을 터트린 뒤 도망칠 채비를 갖추고 망루 위에 올라 시선을 멀리하였다.

보름달이 밝은 덕에 제법 멀리까지 볼 수 있었던 정찰병은 언데드 대군을 발견하자마자 망루에서 뛰어내린 뒤 말을 타고 달렸다.

"시체, 시체들입니다! 숫자는 수천!"

붉은 신호탄을 보고 모여 있던 유성과 기사들은 밤새도록 말을 달려 로티안에 도착한 정찰병의 보고에 이를 악물었다.

새로운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둘째치고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언데드 군단.

아마도 좀비와 스켈레톤들로 이루어진 군세.

밤중에 관측한 것이라 숫자가 명확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수천이라 했으니 그 수가 지금까지 대적했던 적들보다 몇 배는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 어떡하죠?"

질리언 대사제가 울 것 같은- 아니, 이미 울먹이는 얼굴로 물었다.

유성은 숨을 한 번 크게 삼킨 뒤 모두에게 말했다.

"놈들이 로티안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이틀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거다."

발견된 위치와 언데드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사흘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었지만 일단은 보수적으로 접근한 유성은 질리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질리언 대사제님, 수성전 준비를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아, 네! 해보겠습니다."

질리언이 겁먹은 얼굴로나마 주먹을 꼭 쥐며 대답했다.

이미 지난 한 달 동안 그녀에 대해 꽤 많은 정보를 입수한 유성이었다.

겁이 많고 울보였지만 심지가 굳었고, 옴팔로스 교단의 대사제답게 수성전에 대한 지식은 가신단 중에서도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번 상대는 언데드 군단이었다.

성직자인 그녀 이상의 적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루안 경이 질리언 대사제님을 보조하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시몽 경, 징집병들을 소집하고 전투 대비를 맡기겠다. 란트 경은 시몽 경을 돕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에드가, 로빈."

"넵!"

유성의 부름에 에드가와 로빈이 동시에 답하자 유성은 그들을 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볼보 남작령 인근으로 정찰을 나간다. 그쪽 방면에서도 군세가 진군 중이라면 로빈은 바로 귀환, 에드가는 필로 마을에서 주민들의 피난을 지휘해라. 즉각 출발하도록."

"알겠습니다."

"카멜롯의 영광을."

예를 표한 에드가와 로빈이 즉각 돌아서서 달려나가자 유성은 이번엔 이세리나를 비롯한 행정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세리나 영애, 상단과의 거래를 맡깁니다. 행정관들은 주변 영지에 침공 소식을 전파하고 가능한 지원을 요청하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사실 지원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유성이었지만 그래도 말은 해두는 편이 나았다.

"나는 지금부터 성을 나가 정찰을 행하겠다. 상황을 봐서 요격전 역시 병행할 예정이다."

총사령관이 직접 정찰을 나서는 일이었지만 가신들 가운데 유성을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유성이 어찌 되든 상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성이 나서는 것이 최선임을 이미 지난 두 번의 전투로 학습했기 때문이다.

"르네는 나와 동행한다."

군대는 필요 없었지만 르네는 필요했다.

유성의 말에 르네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눈빛으로 물었고, 이번에는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르네가 출정 준비를 하러 떠나자 유성은 다시 한번 가신들을 다독인 뒤 성문으로 향했다.

"하아, 하아. 다녀왔습니다!"

성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배낭을 멘 르네가 도착했다.

"그럼 다녀오겠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예를 표하는 가신단에게 답례한 유성은 르네와 함께 말을 달렸다.

새벽이 밝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 * *

볼보 남작령을 주파했을 때처럼 쉬고 달리고를 반복하던 유성은 언데드 군세와 한 시간에서 반 시간 거리쯤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말을 멈추었다.

애당초 목적이 무력 정찰이 아닌 만큼 굳이 직접 육안으로 적을 관측할 필요는 없었다.

유성 자신에게는 르네가 있었으니 말이다.

"르네, 부탁할게."

"네, 계승자님."

즉답한 르네는 숨만 몇 번 고른 뒤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몇 시간이나 말을 달렸으니 여간한 마법사라면 지쳐 쓰러졌을 터였지만 그간 레벨 업을 통해 신체 능력이 꾸준히 강화된 덕분인지 지친 기색이 조금 있긴 해도 건재한 그녀였다.

"빛의 새여, 날아오르라."

나직이 주문을 읊조리자 르네의 머리 위로 순백의 새가 나타났다.

익히 보아왔던 빛의 새였다.

처음 만났을 당시만 해도 르네로부터 수백 미터 정도 떨어지는 것이 한계였던 빛의 새였지만 지금은 몇 km 이상을 떨어져도 유지에 문제가 없었다.

빛의 새가 아침 하늘을 갈랐다.

새의 눈으로 지상을 살펴보던 르네는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정찰병의 말대로였다.

아침 햇살 아래 수천을 우습게 헤아리는 규모의 언데드 군단이 느리지만 꾸준한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 이천하고도 수백. 대략 그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코볼트 군세가 일천가량이었으니 그 두 배가 넘는 대군이었다.

"거의 칠 할 가량은 좀비인 것 같아요. 나머지 삼 할은 스켈레톤 계열이고... 인간의 시신처럼 보이는 건 절반 정도에요. 나머지는 괴물들의 것 같아요."

군세 사이사이로 트롤이나 오우거 같은 거대한 괴물들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르네, 시체를 조종하는 자가 있을 거야. 무리 사이에 마법사처럼 보이는 자는 없어? 뱀파이어라든가."

판타지 모나크에는 다양한 언데드 군단이 등장했지만 그중에서도 좀비와 스켈레톤을 주력으로 부리는 군단이라면 지휘관은 대개 둘 중 하나였다.

뱀파이어 로드거나 네크로맨서거나.

"찾아볼게요."

르네는 의식을 좀 더 집중해 언데드 군세의 마력 흐름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삼천에 달하는 언데드 군단의 모든 마력 흐름이 단 한 명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뼈만 남은 스켈레톤 바이콘 위에 올라타 있는 검은 로브의 여자.

르네가 여자를 발견한 순간 여자 또한 르네를 발견했다는 듯 부드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역병의사의 가면 때문에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르네는 직감할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저쪽 또한 이쪽을 인식했다.

"안녕."

여자가 말했다.

가면 아래에서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대한 죽음의 마력이 빛의 새를 폭발시켰다.

"꺄악!"

"르네?!"

갑작스런 비명에 깜짝 놀란 유성이 그대로 쓰러지려는 르네를 부축했다.

하지만 여전히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던 르네는 유성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괜찮아?"

르네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도저히 말을 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성은 그런 르네를 재촉하는 대신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몇 번이나 숨을 고른 끝에 겨우 안정을 찾은 르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성을 보며 말했다.

"한 명. 네크로맨서로 추정되는 여자가 한 명 있어요."

거기까지 말한 르네는 어깨를 움츠렸다.

가면 너머로 마주했던 여인의 녹색 눈동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인의 마력은 실로 막강했다.

거듭된 레벨 업 덕분에 또래의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실로 차원이 다른 마력을 갖추게 된 르네 자신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마력은 단순히 강한 것을 넘어섰다.

실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죽음의 마력이었다.

르네의 설명을 들은 유성은 이를 악물었다.

그 정도의 고위 네크로맨서라면 삼천의 좀비 군단만으로 끝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훨씬 더 고등한 언데드 몬스터들 역시 이번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리라.

"돌아가자, 르네."

강력한 네크로맨서가 이끄는 언데드 군단이라면 원거리에서 요격으로 대미지를 입혀 봐야 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어차피 다시 일으켜서 진군시킬 터이니 말이다.

차라리 돌아가서 남은 시간 동안 수성전 준비를 보다 철저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내 뒤에 타. 함께 타고 가자."

죽음의 마력에 노출된 탓인지 여전히 비틀거리는 르네를 뒤에 태운 유성은 다시 로티안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같은 시간.

볼보 남작령으로 이어지는 미개척지에서도 괴물들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14장 - 죽음의 군세

유성과 르네는 로티안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틈틈이 말을 멈춰 세우고 빛의 새를 날려 보냈다.

가까이 접근해 병종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진군 속도만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언데드 군단의 진군 속도는 여전히 느렸다.

뛰지 않고 걷기만 하는데 애당초 언데드다 보니 그 걷는 속도마저 느렸기 때문이다.

"지금 속도면 로티안에 도착하기까지 적어도 사흘, 어쩌면 나흘도 걸릴 것 같아요."

유성 입장에서는 희소식이었다.

언데드 군단에 대한 대비를 할 시간이 늘어난 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놈들이 코블트들에게 파괴된 마을을 지날 때마다 얕게나마 묻어두었던 마을 주민들의 시신들이 좀비가 되어 언데드 군세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르네, 로티안에 소식을 전해야 해. 진군 속도를 확인하면서 돌아와 줘."

"알겠습니다."

둘로 나뉘어야 한다는 유성의 말에 르네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은 그런 르네를 보며 못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르네도 어린 애가 아니었다.

아니, 이제는 또래 중에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가슴을 두드리는 르네를 보며 미소 지은 유성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로티안을 향해 달렸다.

"영주님!"

로티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이후였다.

하지만 수성전 준비가 한창인 로티안인 터라 유성이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기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시몽 경과 란트 경, 그리고 루안 경이었다.

유성은 그들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빠르게 말했다.

"언데드 군단이 온다. 현재 숫자는 약 3천. 르네가 놈들의 진군 속도를 확인 중이다. 앞으로 사흘 후쯤에 로티안에 도착할 것 같다."

빠르게 전달된 정보에 시몽 경과 란트 경이 눈을 크게 떴다.

애당초 수천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3천이란 숫자를 들으니 눈앞이 캄캄해진 탓이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고블린들과 코볼트들의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예?"

이건 또 갑자기 무슨 명령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언데드 군단의 숫자에 놀라있던 시몽 경과 란트 경이 순간적으로 머리가 마비된 듯 눈을 깜박이자 루안 경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주군, 적들 사이에 강력한 네크로맨서가 있는 겁니까?"

"그래, 지금도 파괴된 마을을 지날 때마다 언데드 군단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2천이 조금 넘던 언데드 군세가 어느새 3천이 되었다.

로티안 인근에서 죽은 괴물들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1천은 족히 될 터이니 방치해 뒀다간 적들의 군세가 더욱 커질 터였다.

"네, 네크로맨서면 그, 막 시체를 일으키고 그런 겁니까? 저주도 걸고?"

"그래, 더욱이 평범한 네크로맨서가 아닌 것 같았다. 좀비나 스켈레톤에 그치지 않고 고위 언데드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허어...."

질문했던 란트 경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트롤과 고블린이라는 괴물의 군세를 경험해본 그였지만 언데드 군세는 느낌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군대.

시체를 일으키는 사악한 강령술사.

신화와 전설 속의 존재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영주님, 처리를 위해 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

그나마 침착함을 되찾은 시몽 경이 유성에게 물었다.

이미 전염병 등의 문제를 대비하고자 한 차례 불태운 뒤 얕게나마 땅에 묻어둔 고블린들과 코볼트들의 시체였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한 번 더 불태운다. 그 뒤 망치로 뼈를 부순다."

땅에 깊이 묻기에는 시간과 노동력 양쪽 모두가 부족했다.

다시 한번 불태운 뒤 뼈를 부숴 설사 언데드로 일어나더라도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답한 시몽 경이 여전히 얼을 타고 있는 란트 경을 재촉해 어딘가로 이동했다.

루안 역시 유성을 보며 말했다.

"전투 사제단을 집결시키겠습니다."

애당초 철퇴로 무장한 전투사제단이니 시체 파기를 위해 따로 장비를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부탁한다. 질리언 대사제는 무얼 하고 있지?"

"수성 준비를... 지금 온 것 같습니다."

루안의 말에 유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질리언 대사제가 거의 뛰다시피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향을 보니 방금까지도 성벽 위에 있었던 모양이다.

"하아, 하아. 계승, 자님."

유성 앞에 도착한 질리언이 겨우겨우 예를 표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였다면 웃으며 질리언이 진정되기를 기다릴 유성이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질리언이 어느 정도 숨을 추스른 것 같자 유성이 바로 물었다.

"질리언 대사제님, 적들 사이에 강력한 네크로맨서가 있습니다. 언데드 군단을 막을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판타지 모나크 내에서라면 유성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현실에서는 무리였다.

당장 로티안의 전력부터가 유성이 부리던 검은 늑대들의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실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유성의 물음에 질리언은 여전히 가쁜 숨을 진정시키듯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살짝 누른 채 답했다.

"성벽에 옴팔로스 님과 호수의 여신님의 문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수도 준비하고 있고요. 무, 물론 양쪽 다 제가 준비한 거라 효과가 미미하긴 하겠지만... 그,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루안 경도 도와줬고요."

일반 사제 이하의 신성력을 가진 질리언이다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던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아까보다는 커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크로맨서라면 역시 계승자님의 신성력이 가장 효과가 좋을 겁니다. 호수의 여신께서는 생명의 여신이시기도 하니 죽음의 힘을 다루는 네크로맨서들과 상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알겠습니다. 놈들이 도착하는 것은 앞으로 사흘 뒤로 추정됩니다. 계속 방비 강화에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이러나저러나 한 교단의 대사제인 질리언이었다.

비록 책상 위에서 쌓은 이론에 불과하다지만 수성전에 대한 지식은 서부 지역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자인만큼 이번 수성전에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질리언과의 대화가 일단락 된 유성이 다시 루안을 돌아보았다.

"루안, 전투사제단을 소집해 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루안이 발걸음을 돌리자 유성은 어깨를 조금 늘어트린 채 긴 숨을 토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갑옷을 벗고 쉬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당장 르네는 지금도 성 밖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그때였다.

질리언이 아직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유성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이해했다.

그녀가 돌아가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는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르네는 함께 오지 않았습니다."

"네?"

유성의 말에 질리언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응을 보니 르네를 찾고 있던 것이 맞는 모양이긴 했는데,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 나와서 놀란 것 같았다.

유성은 안심하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르네가 지금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성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르네는 뒤에 남아서 언데드 군단의 진군 속도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일이지만 오직 르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

마법을 통한 정찰.

유성의 말을 이해한 질리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제법 다부진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럼 저도 다시 문장을 그리러 가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유성이 이번에도 진지한 어조로 답하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질리언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르네가 홀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말에 무언가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반 시간 뒤.

"살점을 태워라! 뼈를 부숴!"

"트롤들이 다시 살아나면 어찌 될지 알지? 아예 가루로 만들어라!"

시몽 경과 란트 경의 지휘하에 징집병들이 로티안 인근에 적당히 파묻어 두었던 코볼트들과 고블린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야밤에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냐는 듯 제법 반항적인 병사들이었지만 이번 적이 시체를 일으켜 싸운다는 말을 듣고 나자 다들 집요할 정도로 열심히 시체를 부숴댔다.

현재 로티안이 보유한 병사의 숫자는 약 600명 남짓.

실전을 통해 이전보다 숙련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리 많은 숫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부대의 숫자는 여전히 셋.'

유성 자신이 보유한 부대의 숫자는 넷이었지만 동시에 모두를 운용할 수는 없었다.

케이트의 보병대.

바나데인의 궁병대.

다이애나의 경기병대.

헥토르의 중장 보병대.

'소환 중이던 부대를 되돌려 보내고 새로운 부대를 소환할 수는 있지만, 한 번 돌려보낸 부대를 바로 다시 소환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처음에 어떤 부대를 소환할지는 물론이고 어떤 부대를 예비대로 둘지를 잘 선택해야 했다.

유성은 상태창을 열어 유성 성을 보았다.

기사들과 부대의 모습을 확인할 목적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이번 전투 이전부터 준비해둔 하나의 수.

어쩌면 이번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는 요소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직인가.'

언데드 군단이 도착하는 것은 사흘 뒤.

지금 속도라면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상태창을 닫은 유성은 전투사제단과 함께 직접 괴물들의 시체 처리 작업을 진행했다.

이틀 뒤 오후.

볼보 남작령 방면을 확인하러 떠난 로빈과 에드가의 연락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와중에 필로 마을의 피난민들이 로티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그날 밤 자정 무렵.

녹초가 된 르네가 로티안의 성문을 두드렸다.

"거의 다 왔어요. 내일 오후에는 로티안에 도달할 거예요."

네크로맨서가 이끄는 언데드 군단.

코볼트들에게 파괴된 마을의 시신들을 더해 이제는 그 숫자가 3천5백에 육박했다.

"수고했어. 오늘 밤은 푹 쉬어."

"네, 계승자님."

힘들고 두려운 와중에도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 르네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시간이 흘렀다.

밤이 지나 아침이 밝아왔고, 로빈과 에드가에게서도 소식이 도착했다.

볼보 남작령에 고블린 군단 출현.

동진 중.

신호탄을 통한 보고로 알 수 있는 정보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유성은 숨을 길게 토한 뒤 볼보 남작령의 동쪽을 바라보았다.

로티안의 반대편 방향.

서부 지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을 가진 아르투아 백작령이 있는 곳.

'부디 잘 버텨주기를.'

기도라기보다는 기원.

짧게 소망한 유성은 다시 전투 준비에 매진하였다.

바람이 불었다.

시간이 흘렀다.

동쪽에서 떠오른 태양이 가장 높은 곳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 무렵.

붉게 물든 저녁 하늘 아래 죽음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14장 - 죽음의 군세 (2)

성벽 위에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징집병들 가운데 일반 보병의 수는 553명.

남쪽 성벽 위로 길게 자리한 그들 사이사이마다 전투사제들이 자리했다.

루안 경이 이끄는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 총원은 50명.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문 위 성벽에 케이트가 이끄는 정예 보병대가 위치했다.

정예 보병대의 총원은 40명.

바나데인이 이끄는 정예 궁병대 40명은 징집병들 사이에서 뽑은 55명의 궁병대와 함께 일렬로 길게 자리를 잡았다.

성벽 위에 자리한 아군의 수는 약 700명 남짓.

코볼트의 왕자나 트롤들과 싸울 때에 비하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난 병력이었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적들의 규모는 전보다 몇 배는 더 커졌기 때문이다.

유성은 케이트의 곁에 섰다.

질리언은 반쯤 우는 얼굴이 되긴 했지만 루안과 함께 서쪽 성벽의 북쪽 방면에 자리했고, 르네는 바나데인과 함께 남쪽 방면에 자리했다.

시몽 경과 란트 경, 일단 홀로 돌아온 로빈 역시 성벽 위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적이 올 거란 사실은 이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

싸움이 시작될 시기 역시 하루 전부터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각오를 다질 시간은 충분했지만 모두가 강철의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적이 온다.

먼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검고 불길한 연기가 밀려든다.

병사들 사이로 두려움이 번졌다.

하지만 대열을 이탈해 도망치는 이는 없었다.

이미 두 번의 전투를 겪은 자들은 알고 있었다.

싸워 이기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열화의 흑기사와 함께라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억지로나마 미소를 짓는 자들이 있었다.

처음 전장에 끌려 나와 다리를 떨며 마른침을 삼키는 자들이 있었다.

"온다."

누군가가 말했다.

억눌린 난잡한 침묵 속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넓게 퍼졌다.

그것은 시체의 군단이었다.

타는 노을 아래 시체의 군단이 진군해 오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해서 3천5백 남짓.

거리가 제법 멀었지만 그래도 대강은 구분이 가능했다.

반쯤 썩거나 부패한 시체들과 사이사이에 서 있는 해골 병사들.

그리고 그 사이에 홀로 산 자가 있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 사이에 선 자.

두 개의 뿔이 달린 해골마 위에 탄 여자는 고개를 들어 성벽 위를 보았다.

두려움에 떠는 자들과 용기를 내는 자들과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과 유성의 얼굴을 보았다.

여자가 웃었다.

가면 속의 미소는 메말랐지만 그것은 분명 미소였다.

"가라."

여자가 성벽을 가리키며 명했다.

충실한 시체들이 성벽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선두에 선 놈이 달렸다.

최초의 하나를 시작으로 모든 시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괴성은 없었고 비명도 없었다.

시체들은 소리 없이 침묵 속에 질주했고, 그 모습이 더욱 큰 기괴함을 낳았다.

"바나데인!"

"쏴라!"

유성이 명령한 순간 바나데인이 팽팽히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그것은 효시였다.

이내 일백에 육박하는 궁수들이 일시에 화살을 내쏘았다.

파파파파파파팟!

노을이 내린 하늘을 일백 개의 화살이 갈랐다.

모두가 불화살이었다.

화아아아악!

눈먼 화살도 명중할 정도로 시체들의 숫자가 많았다.

바나데인과 궁병대는 연속해서 활을 쏘았고, 이내 수백 개의 불화살이 시체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시체가 불탔다.

불타는 시체가 성벽을 향해 달렸다.

수백 개의 화살이 쏟아졌지만 화살로는 이미 죽은 시체의 군단을 저지할 수 없었다.

"멈추지 말고 쏴라!"

궁병대가 계속해서 활을 쏘았다.

지금 당장은 효과가 없어 보이지만 시체의 군단이라 해서 무적은 아니었다.

사지가 불타 사라지면 전진할 수 없을 테니 결국엔 효과가 있을 터였다.

"온다! 준비해라!"

시몽 경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시체의 군단이 어느새 해자 앞까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물이 없는 해자였다.

선두에서 달리던 놈들이 깊게 판 해자에 빠지며 나자빠졌다.

두 번째 열도 그랬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열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다섯 번째 열은 그렇지 않았다.

시체들로 메워진 해자를 지나 성벽 앞에 도달했다.

시체들이 성벽을 긁었다.

개중에 덩치가 큰 트롤이나 오우거 좀비들이 성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리고 불꽃이 일었다.

놀랍게도 성벽과 부딪힌 좀비들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신성한 방벽!"

전투사제 가운데 하나가 환희에 차 외쳤다.

그는 어째서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는지를 단번에 이해했다.

신들의 문장이 새겨진 성벽이 일종의 신성기가 되어 부정한 존재들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는 것이었다.

"성수를 뿌려!"

란트 경의 외침에 맞춰 병사들이 시체들의 머리 위로 성수를 뿌렸다.

그러자 이번에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성수에 맞은 시체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진 것이다.

"질리언 대사제!"

유성이 저도 모르게 크게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

성수와 성벽 모두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유성만이 아니었다.

질리언의 바로 옆에 서있던 루안 역시도 몹시 놀란 얼굴로 질리언을 돌아보았다.

"대사제님!"

신성력이 약하지만 역시 괜히 대사제가 아니었군요!

루안의 시선에 섞인 존경과 감탄의 빛에 질리언은 당황했다.

아니, 작금의 상황 자체에 당황했다.

성수가 왜 저렇게 강하지?

왜 성벽이 신성기가 된 거지?

애석하게도 의문을 표할 시간이 없었다.

콰앙! 콰앙! 콰앙!

굉음과 함께 성벽이 뒤흔들렸다.

성벽을 두드리던 시체들이 폭발하며 일어난 충격이었다.

"성벽은?!"

"무사- 흐아악?!"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보고하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사다리도 없는 시체들이 저들끼리 뭉치는가 싶더니 시체 위에 시체가 쌓여 경사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온다!"

경사로를 타고 시체들이 달렸다.

해자에 빠져 있던 시체들도 기어올라 합류하였고, 거대한 시체들이 불타는 주먹으로 성벽을 두드려댔다.

"밀어내!"

"성수를 뿌-"

콰앙!

성벽 너머로 뛰어오른 시체 하나가 병사들 사이에서 폭발했다.

반경 3미터 내에 있던 병사들이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밀어내!"

"성벽에 오르게 하지 마라!"

병사들이 긴 창으로 시체들을 찔렀다.

찔러서 죽인다기보다는 밀어낸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모두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쾅! 쾅! 쾅!

연쇄적으로 일어난 폭발 속에서 다시 열댓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죽었다.

그리고 시체가 된 병사들이 일어났다.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밀어! 밀쳐!"

"침착해라! 놈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거짓이 아니었다.

경사로를 만드는 데 쓰이고 있는 시체들의 숫자가 많은 터라 실제로 성벽 위에 기어오른 시체들의 숫자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열화의 검을 휘둘러 시체들을 불사르던 유성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거대한 박쥐들이 보였다.

박쥐들 또한 시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박쥐들이 두 발로 쥐고 있는 것.

전부 시체였다.

더욱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팽창하고 있었다.

"바나데인!"

유성의 다급함 외침에 호응하듯 세 발의 화살이 빠르게 하늘을 갈랐다.

박쥐 세 마리의 머리통이 박살 났지만 아직 박쥐는 일곱 마리가 넘게 남아 있었다.

바나데인이 다시 시위를 당겼다.

남은 박쥐들이 죄다 북쪽 방면으로 몰려갔다.

"질리언!"

유성이 크게 외쳤다.

르네가 다급히 몸을 날리며 주문을 외웠다.

박쥐 두 마리의 머리가 더 박살 났다.

하지만 놈들은 이미 질리언의 머리 위에 있었다.

시체를 떨군다.

죽은 박쥐들이 추락한다.

질리언이 공포에 찬 분홍색 눈동자로 그것들을 보았다.

루안이 질리언을 끌어안으며 몸을 웅크렸고, 질리언은 눈을 꽉 감으며 기도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음이 울렸다.

단기간에 이어진 연쇄폭발로 사실상 하나가 된 거대한 폭발에 성벽 전체가 요동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성은 폭발로 말미암은 거친 바람을 느낄 수 없었다.

사방으로 튀는 피와 육편은 물론이거니와 병사들의 신음소리 역시 들을 수 없었다.

르네가 눈을 깜박였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케이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했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르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케이트가 웃었고, 병사들이 멍한 얼굴로 자신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순백의 방벽을 올려다보았다.

옴팔로스의 방벽.

질리언의 머리 위에 그것이 펼쳐져 있었다.

수십 미터는 족히 됨직한 신성의 방벽이 시체들의 대폭발로부터 성벽 위의 병사들을 보호했다.

질리언 안고 웅크렸던 루안은 뒤늦게 고개를 들어 방벽을 보았고, 당황했다.

옴팔로스의 방벽.

루안 자신도 잘 아는 신성마법이었다.

심지어는 사용 역시 가능했다.

하지만 루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옴팔로스의 방벽이 거대해도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다.

5미터 남짓.

루안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벽의 크기였다.

신성력이 뛰어난 대사제들이라 해도 십여 미터 정도 크기의 방벽을 만드는 것이 한계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십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저 거대한 방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어디서 갑자기 성녀라도 나타난 것이-

루안은 눈을 깜박였다.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웅크리고 앉은 채 울면서 기도하고 있는 질리언의 모습을 보았다.

사고의 과정 없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성녀?"

그 순간 이해가 되었다.

성녀.

그래, 성녀.

성녀라면 할 수 있다.

성벽을 신성기로 바꾸는 것도, 대량의 성수를 양산하는 것도!

질리언이 지금까지 신성력을 감춘 것일까?

애당초 그녀가 대사제가 된 것은 성녀의 자질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그녀는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사제였던 그녀가 성녀가 된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었군요!"

옴팔로스의 신탁을 받았다는 그녀의 말.

옴팔로스가 질리언을 선택했다.

그녀를 왕을 보필할 성녀로 거듭나게 하였다.

루안의 외침에 깜짝 놀란 질리언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신성의 방벽에 당황했다.

저, 저게 뭐지?

옴팔로스의 방벽?

어디서 성녀라도 나타난 건가?

당황하는 질리언을 보며 루안은 크게 웃었다.

그리고 옴팔로스와 주군께 감사했다.

주군을 만났기에 질리언은 성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 루안 자신과 질리언 본인은 물론이고 수많은 병사들 역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성이 알았다면 살짝 소름이 돋았을 것 같은 의식의 흐름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성에게는 루안의 머릿속을 살펴볼 능력 따윈 없었다.

하지만 유성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했다.

질리언의 모습을 본 순간 루안과 같은 결론을 낸 유성은 한 차례 크게 웃은 뒤 소리쳤다.

"루안 경! 대사제님을! 성녀님을 보필해라!"

"알겠습니다!"

루안이 크게 외치자 질리언이 다시 당황했다.

성녀? 내가?

내가 성녀라고?

하지만 질리언에게 상황을 설명할 시간도, 더 이상 웃고 기뻐할 시간도 없었다.

시체들이 계속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가 깃발로 땅을 찍으며 황금빛 광휘를 퍼트렸다.

시체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지만 숨 돌릴 틈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츠콰가아아아아아!

기괴한 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머리 위로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시체들이었다.

불타고 부서지고 짓뭉개진 시체들이 하나로 뭉쳐 몸길이가 수십 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뱀의 형상을 이루더니 그대로 성벽을 타고 오른 것이었다.

콰가가가각!

성벽 위로 몸을 크게 세운 시체의 뱀이 스스로의 몸을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 성벽 위를 강타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이 시체에 깔려 압사했고, 그대로 뱀의 일부가 되었다.

"파이어 볼!"

르네가 시체의 뱀에게 거대한 화염구를 쏘았다.

직경이 3미터는 됨직한 무지막지한 화염구가 폭발해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자 아무리 거대한 시체의 뱀이라 해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시체의 뱀은 하나가 아니었다.

열화의 검으로 시체들을 불사르던 유성은 성벽 아래에서 다시 뭉쳐 일어나는 시체의 뱀뿐만 아니라 성벽 저 너머에서 일어서고 있는- 부서지고 파기된 시체들이 엮여 만들어진 시체의 뱀들이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처음 생각한 대로였다.

네크로맨서의 수준이 높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그랬듯이 결국 시체 군단의 강함을 결정하는 것은 네크로맨서의 역량이었다.

살을 태우고 뼈를 부순 시체마저 일으키는 자였다.

소모적인 싸움을 이어나가봐야 결국 아군의 시체만 늘어날 뿐이니 소모전을 택하는 것은 하책이었다.

유성은 눈동자를 굴렸다.

성벽 아래, 바이콘을 탄 네크로맨서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수백에 달할 시체들이 그녀의 곁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지평을 불태우던 태양의 빛이 사라지고 보랏빛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그리하여 찾아든 순간적인 어둠.

해와 달은 물론이고 별빛조차 없는 검은 하늘 아래.

역병 의사의 가면 속에서 네크로맨서가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시체의 뱀들이 성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14장 - 죽음의 군세 (3)

전투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죽음을 도외시한 적들의 공격에 벌써 적잖은 수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친 상황이었다.

유성은 빠르게 수를 헤아렸다.

성벽 위에 남은 병사의 수.

네크로맨서 곁에 남아 있는 시체의 수.

저만치 먼 곳에서 일어나 성벽을 향해 몸을 뒤틀며 다가오는 시체의 뱀의 숫자.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같은 소모전으로 흘러가면 필패한다.

무한의 군세에 유한의 군세로 맞서는 셈이니 전투의 승리 조건 자체를 바꾸어야 했다.

"계승자!"

바나데인이 벼락처럼 외치며 연달아 활을 쏘았다.

저만치서 시체를 든 박쥐들이 새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콰가가! 콰가가!

동시에 시체의 뱀들 역시 솟구쳐 몸통으로 성벽을 후려쳤다.

혼란을 틈타 성벽을 기어오른 시체들이 폭발하며 병사들을 죽였고, 죽은 병사들이 검은 연기와 함께 일어나 살아있는 병사들을 덮쳤다.

"턴 언데드!"

"죽음으로 돌아가라!"

전투사제들이 신성한 빛으로 시체들을 밀어붙였다.

성녀로 각성한 질리언은 엉엉 울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쥐고 기도하니 성벽 위로 반투명한 벽이 솟구쳐 시체의 뱀이 성벽 위로 쏟아지는 것을 막아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르네가 화염구 두 개를 연달아 내쏘았다.

시체의 뱀 두 마리가 동시에 불타올랐지만 새로운 시체의 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성은 결단을 내렸다.

"르네! 성벽을 맡긴다!"

"네!"

르네는 답한 즉시 성벽 위로 불의 장벽을 솟구치게 했다.

또래 마법사들에 비해 3배 이상의 마력을 가진 르네였지만 단시간에 쏟아낸 마법이 너무 많았다.

순간 격심한 어지럼증과 함께 코피가 주륵 흘러내렸음에도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다시 지팡이를 들고 시체의 뱀을 향해 화염구를 내쏘았다.

유성은 불길이 치솟지 않은 부분을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다이애나! 집결하라!"

파앗!

황금빛 섬광과 함께 에니카에 탄 다이애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성은 무어라 설명하는 대신 에니카에 올라 다이애나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다이애나 역시 이미 해야 할 바를 안다는 듯 에니카를 몰아 상공으로 치솟았다.

"기아아-!"

거대한 시체 박쥐들이 그런 에니카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바나데인이 이를 용납지 않았다.

연달아 쏟아진 불화살들이 박쥐들의 머리를 불태웠고, 다이애나는 마치 곡예라도 하듯 현란한 비행으로 박쥐들을 지나쳐 더 높은 상공으로 치솟았다.

하지만 아직 박쥐들이 남아 있었다.

정면에서부터 초음파를 쏘며 돌진해오는 놈을 본 유성은 오른팔로 다이애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왼팔을 크게 휘둘러 가레스의 황금방패를 쏘듯이 내던졌다.

박쥐의 머리를 부수듯 찢어버린 가레스의 방패가 허공에서 크게 회전하더니 박쥐 한 마리의 날개를 더 찢어버리고 유성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바나데인의 화살이 다시 더해졌다.

다이애나는 등 뒤에서 날아드는 화살들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는 듯 앞만 보며 날았고, 바나데인은 그러한 신뢰에 부응하였다.

박쥐들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가운데 다이애나는 더욱더 고도를 높였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갑니다."

낮고 작게 말한 다이애나는 허벅지로 안장을 강하게 조였다.

방패를 든 손을 당기고 랜스를 옆구리에 꽉 낀 뒤 하늘을 향했던 시선을 지상으로 돌렸다.

그리고 에니카가 활강을 개시했다.

순백의 페가수스가 어두운 밤하늘 사이에서 강하하는 모습은 흡사 하얀 유성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드래군 다이브.

수백에 달하는 시체들 사이에 자리한 네크로맨서는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드는 다이애나를 가리켰다.

트롤과 오우거의 좀비들이 곁에 있던 코볼트와 고블린 좀비들을 다이애나를 향해 던졌다.

네크로맨서의 머리 위에 형성된 보랏빛 마법의 화살 수십 발이 동시에 발사되었다.

다이애나는 그 모든 것들을 보았지만 조금도 주저치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속도를 높이며 올곧은 궤적을 유지했다.

"랜스 차징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

그것은 각오이자 맹세.

에니카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다이애나의 창끝에서부터 황금빛 광휘가 피어올랐다.

유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질풍의 오더가 다이애나와 에니카를 휘감아 그 속도를 더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콰가가가가가가가-!

시체들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수십 발에 달하는 마법의 화살들 가운데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다이애나의 맹진을 막지 못했다.

창끝에서부터 일어난 황금빛 광휘가 마법의 화살들과 폭발의 충격파를 분쇄했다.

콰가가가가가가!

거대한 충격이 지면을 강타했다.

다이애나의 기사도가 발동함과 동시에 충격음을 부수고 원형의 충격파가 주변 일대로 퍼져나갔다.

소리를 앞서는 그것에 수십 구에 달하는 시체들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

고블린이나 코볼트의 시체는 물론이고 트롤과 오우거의 시체들 역시도 다이애나의 일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에게는 닿지 못했다.

연이은 공격이 결국 다이애나의 궤적을 조금이나마 꺾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의 랜스는 네크로맨서를 꿰뚫지 못했고, 충격파는 네크로맨서 앞에 겹겹이 쌓인 시체의 벽에 결국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체념하지 않았다.

부서진 랜스를 버리고 거친 숨을 토하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부서진 시체들 너머에서 새로운 시체들이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왔다.

그리고 유성이 소리쳤다.

"중갑 보병대! 집결하라!"

성벽 위에 자리하고 있던 바나데인과 정예 보병대가 사라짐과 동시에 유성의 눈앞에서 황금빛 섬광이 작렬했다.

"쉴드 월!"

중갑 보병대 30인이 등장과 동시에 거대한 방패를 세우니 그야말로 강철의 벽과 같았다.

퍼퍽! 퍽! 퍼퍽!

달려오던 시체들이 방패 벽에 막혀 나자빠졌고, 중갑보병대는 그대로 방패를 휘둘러 시체들을 밀치고 박살 냈다.

"길을 연다! 중앙 벌려!"

헥토르의 명령에 중갑 보병대가 좌우로 갈라졌다.

대략해서 5미터 남짓한 공간이 생기자 중앙에 홀로 남게 된 헥토르가 도끼와 방패를 든 팔을 벌리며 사납게 웃었다.

"간다."

발걸음을 내디디며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카멜롯의 거신병.

한 걸음을 디딘 순간 헥토르의 덩치가 커졌다.

두 걸음을 내디뎠을 때는 그 키가 무려 6미터에 육박했다.

"으하하하핫!"

거인이 된 헥토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양팔을 휘둘렀다.

주인을 따라 거대해진 도끼가 낮게 지면을 휩쓸자 시체 수십 구가 단번에 박살이 났다.

"구어어!"

오우거와 트롤의 시체들이 그런 헥토르를 막기 위해 돌진해왔지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벼락처럼 내려친 도끼에 오우거 좀비가 좌우로 갈라져 쓰러졌고, 방패에 얻어맞은 트롤의 머리가 마치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네크로맨서와의 사이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존재했다.

네크로맨서는 가면 속에서 미소 지었다.

손을 들어 헥토르를 가리키니 죽음의 마력이 저주가 되어 헥토르와 중갑 보병대를 급습하였다.

"잡스러운 짓을!"

헥토르가 야수처럼 포효하자 노도처럼 밀려들던 저주의 힘이 약화되었다.

거기에 지휘관 명령이 더해졌다.

수호의 오더.

케이트의 정예 보병대로부터 기인한 황금빛이 유성으로부터 발산되어 중갑 보병대를 저주의 힘으로부터 지켜주었다.

하지만 저주의 힘을 온전히 상쇄할 수는 없었다.

네크로맨서의 저주가 다시 한번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시체들 역시 다시 일어나 중갑 보병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손톱으로 찢고 이빨로 물기보다는 물량 그 자체로 중갑 보병대를 찍어 눌러 압사시키겠다는 계획으로 보였다.

"버텨라! 버티는 거다! 쉴드 월!"

중갑 보병대가 다시 방패의 벽을 세웠다.

방파제에 부딪힌 파도가 박살이 나듯 방패벽과 충돌한 시체들이 부서졌지만 바로 연이어 2파, 3파가 몰아쳤다.

유성은 지금 같은 상황을 예상했다.

그랬기에 당황하는 대신 에니카의 등에서 내리며 다시 손을 놀렸다.

다이애나가 에니카를 다시 상승시키고 케이트와 정예 보병대를 돌려보낸다.

유성 자신이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부대의 숫자는 셋.

케이트와 바나데인을 돌려보내고 헥토르와 다이애나를 불러냈다.

남은 것은 마지막 하나.

"퍼거스, 멜리사! 집결하라!"

유성 성의 대장장이들.

황금빛 섬광과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퍼거스는 등장하자마자 듣게 된 시체들의 폭발음과 코를 찌르는 썩은 내, 하늘에서 쏟아지는 저주의 비를 보며 당황했지만 멜리사는 달랐다.

그녀는 퍼거스의 등에 실려 있던 물건을 재빨리 회수한 뒤 유성에게 내밀며 무릎을 꿇었다.

그것이야말로 케이트와 정예 보병대를 돌려보내면서까지 대장장이들을 이 땅에 불러낸 이유.

멜리사의 두 손바닥 위에 올라간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코볼트 신의 신기를 녹여 만든 금속에 진은을 더하여 만들어낸 진은의 검.

간신히 시간에 맞춘 검이기에 검집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된 손잡이 역시 없었다.

그저 검을 쥘 수 있도록 급하게 만든 나무 손잡이가 달려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유성이 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검이 아니다.

신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금속에 진은을 더하여 만든 이 검은 능히 성검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퍼거스와 멜리사가 다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유성이 움켜쥔 진은의 검을 따라 황금빛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성왕십자검,

열화(烈火).

유성이 허공을 베었다.

칼날로부터 발산된 황금빛 열화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저주를 불살라 소멸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신성한 기운으로 주변 일대를 정화하였다.

중갑 보병대를 밀어붙이던 시체들이 돌연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반면에 조금씩 지쳐가던 중갑 보병대에게 새로운 활력이 불어넣어졌다.

"중갑 보병대, 돌진하라!"

"우오오오오오!"

유성의 명령을 받은 즉시 중갑 보병대가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선두에 선 헥토르가 시체들을 휩쓸며 노도처럼 나아갔고, 열화에 휩싸인 진은의 검을 든 유성이 그 뒤를 따라 돌진했다.

네크로맨서가 그런 유성을 보았다.

진은의 검을 본 그녀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메마른 미소를 그리던 입술을 일그러트린 그녀는 다급히 죽음의 마력을 발산하였다.

콰가가가!

수십 발의 화살이 겹쳐 만들어진 죽음의 창이 유성을 향해 쏟아졌다.

헥토르가 방패를 세워 막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시체들의 연쇄폭발이 헥토르를 무릎 꿇게 하였고, 허공에서 크게 궤적을 뒤튼 죽음의 창이 헥토르를 지나 유성을 향해 쇄도했다.

유성은 그것을 보았다.

거리를 재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막아낸다.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

크허어어엉!

가레스의 황금 방패가 포효했다.

순간 기세가 눌린 죽음의 창을 비껴내듯 막아내는가 싶더니 그대로 후려치듯 밀어내 지면을 향하게 만들었다.

콰앙!

마법의 폭발을 보지 않았다.

그대로 등진 채 유성은 오직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네크로맨서가 그런 유성을 보았다.

다급히 수인을 맺어 마력을 발산하자 주변에 있던 시체들이 하나로 뭉쳐 높은 벽을 이루었다.

어찌나 급했는지 타고 있던 바이콘의 해골마까지도 벽을 만드는 데 사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성은 이번에도 멈추지 않았다.

벽을 향해 가레스의 황금 방패를 던졌고, 맹렬히 회전하며 날아간 방패가 시체의 벽을 단숨에 파고들었다.

벽을 가르기 위함이 아니었다.

달리면서 도약한 유성은 벽 중앙에 박힌 방패를 밟고 재차 솟구쳐 단번에 시체의 벽을 뛰어넘었다.

"마, 막아!"

다급히 외친 네크로맨서가 마구잡이로 마력을 발산했다.

새카만 사기로 뒤덮인 죽음의 마력이 유성을 향해 밀려들었다.

유성도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한계까지 당긴 진은의 검을 휘두르며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츠화아아아아아-!

성스러운 불꽃이 죽음의 마력을 불살랐다.

거대한 검기가 마력을 갈랐고, 반으로 갈린 죽음의 마력이 애꿎은 시체의 벽과 충돌했다.

그리고 네크로맨서는 보았다.

자신 앞에 당도한 유성이 진은의 검을 휘두르는 것을.

순백의 칼날이 네크로맨서의 목을 갈랐다.

제14장 - 죽음의 군세 (4)

네크로맨서의 머리가 허공에 떠올랐다.

날카로우면서도 파괴적인 일격은 네크로맨서의 가늘고 긴 목을 단번에 끊어냈다.

절단면 사이에서 붉은 피가 왈칵하고 쏟아졌다.

동시에 머리와 목에서 각기 뿜어져 나온 검은 마력이 서로를 향했다.

마법에 문외한인 자가 봐도 저 둘이 하나로 엮인다면 네크로맨서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네크로맨서의 절단면 사이에서 돌연 황금빛 불꽃이 일었기 때문이다.

진은의 검은 단순히 날카로운 검에 그치지 않았다.

부정한 힘을 불사르는 성스러운 검이었다.

목에서부터 일어난 황금빛 열화가 검은 마력은 물론이고 네크로맨서의 머리와 몸을 동시에 불태웠다.

네크로맨서의 육신은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재가 되어 무너졌다.

머리 쪽 역시 얼굴을 가리던 역병 의사의 가면이 타오르며 네크로맨서의 맨얼굴이 잠시나마 드러났다.

하얗고 젊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했지만 기묘하게도 눈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검고 공허한 눈.

유성은 그 눈을 보았다.

그 너머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직감했다.

화르륵-!

네크로맨서의 머리 역시 불타올라 재가 되었다.

르네의 몇 배나 되는 검은 마력을 연료로 하듯 황금빛 열화가 크게 일어 주변의 사이함을 불태우자 이내 변화가 일어났다.

"그어어...."

소리 없이 싸우던 시체들이 낮은 목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마치 도미노가 넘어가듯 네크로맨서 주변에 있던 시체들을 시작으로 로티안의 성벽을 공격하던 시체들까지 힘을 잃고 제자리에 쓰러지거나 심한 경우엔 재가 되어 소멸하였다.

기사도의 힘으로 거인이 된 덕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던 헥토르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고, 그 주변에서 싸우던 중갑 보병대는 저마다 방패와 도끼를 늘어트린 채 안도의 숨을 토했다.

싸운 시간 자체는 극히 짧았지만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힘겨운 싸움을 한 그들이었다.

하늘 위에서 2차 차징을 준비하던 다이애나는 안도의 숨을 토하며 성벽 쪽을 돌아보았다.

성벽 위에서 무아지경으로 싸우던 병사들은 눈앞에서 무너지는 시체들을 보며 그저 숨을 헐떡일 뿐이었고, 정신없이 마법을 난사하던 르네 역시도 당장은 기뻐할 여력조차 없는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따름이었다.

질리언은 조금 더 심했다.

눈을 꼭 감은 채 기도하던 그녀는 시체들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여전히 열심히 기도 중이었기 때문이다.

질리언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루안 경은 그런 질리언의 모습을 보며 그저 웃었고, 성벽 너머- 유성이 있는 곳을 바라본 병사들은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했다.

"주군께서! 사악한 마법사를! 참하셨다!"

헥토르가 성벽을 보며 크게 소리치자 쩌렁쩌렁한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유성은 그 모든 시선에 응답하듯 진은의 검을 높이 들었고, 달빛에 반사되는 순백의 칼날은 멀리서도 알아보기에 충분하였다.

"이겼다!"

"이겼다!"

"영주님 만세!"

"만세!"

성벽 위에서 병사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주저앉아 헐떡이거나 살았다는 안도감에 우는 자들도 있었지만 기뻐 외치는 자들이 많아 성벽 너머에 있던 주민들 역시도 승전을 알게 되었다.

"으아아! 성녀님 만세!"

질리언 주변에서 싸웠던 병사들이 엉엉 울면서 만세를 했다.

눈앞에서 성녀의 기적을 목도하고, 그 기적 덕분에 목숨을 건진 자들이었기에 감동이 더욱 큰 것 같았다.

"옴팔로스 님 만세!"

"만세!"

병사들의 눈물 섞인 환호성에 비로소 눈을 뜬 질리언은 주변에 가득한 예비 신도들- 아니, 병사들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고,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이겼구나.

이겼다.

살았다!

옴팔로스 님 감사해요!

질리언이 다시 울면서 기도하기 시작하자 병사들은 재차 감동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물을 흘리며 신께 기도하는 질리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성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우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루안조차도 순간 헉하고 숨을 삼킬 정도였으니 일반 병사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병사들은 질리언을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병사들이 오늘부터 옴팔로스를 믿을 것을 다짐하였다.

덕분에 갑자기 기도회 분위기가 된 서쪽 성벽의 북쪽 방면과 달리 남쪽 방면은 좀 더 순수하고 단순한 기쁨으로 가득하였다.

"마녀님도 만세!"

"만세!"

마녀라는 호칭에 르네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지만 누구보다 분위기를 잘 타는 그녀였다.

질리언처럼 울면서 기도하거나 마력 고갈을 호소하며 주저앉은 대신 병사들과 함께 만세하며 기뻐하니 환호성 소리가 더더욱 높아졌다.

분위기가 좀 대조적이지만 어쨌든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는 성벽을 돌아온 유성은 진은의 검을 갈무리한 뒤 긴 숨을 토했다.

[도시 수호: 선업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죽음의 군세 격파: 선업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다이애나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헥토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왕의 성녀: 질리언이 추가되었습니다.]

[질리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달성 : 성검의 주인]

주르륵 떠오른 상태창 문구를 읽은 유성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성녀 맞네."

옴팔로스의 성녀 질리언.

르네처럼 상태창에 추가까지 되었으니 앞으로 더 빠른 성장이 가능할 터였다.

'전투에 내보낼 성격은 아닌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정도 되는 인재를 그냥 썩힐 수는 없었으니까.

울상이 된 질리언의 얼굴이 절로 떠오른 터라 다시 한번 작게 웃은 유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멋진 싸움이었습니다."

"그쪽도. 덕분에 이길 수 있었어."

담백한 칭찬에 유성 역시 짧고 굵게 화답하자 헥토르는 호탕하게 웃더니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헥토르와 중갑 보병대가 빛이 되어 사라졌다.

다이애나와 에니카 역시 돌려보낸 터라 혼자가 된 유성은 시체로 가득한 주변을 돌아본 뒤 네크로맨서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황금빛 열화가 가장 크게 피어오른 장소인 터라 시체는 물론이고 사이한 기운조차 남지 않아 이질적인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유성이 다시 바라본 것은 그런 위화감 때문이 아니었다.

네크로맨서를 참하던 순간 본 검고 공허한 눈동자.

네크로맨서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눈만은 전혀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 자리에 선 네크로맨서가 아닌 그 너머의 존재.

마른침을 삼킨 유성은 다시 성벽 쪽으로 돌아섰다.

여전히 만세 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성벽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그려졌지만 잠깐뿐이었다.

"아."

다이애나는 좀 늦게 돌려보낼걸.

연달아 사용한 열화의 검 때문인지 알폰스를 불러낼 여력도 없었던 유성은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쉰 뒤 성벽을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 * *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유성이 도착하기 전부터 성문을 활짝 열고 대기 중이던 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유성을 환영했다.

환영 인파의 선두에 자리한 것은 역시 르네였다.

"수고하셨어요."

"르네도 정말 수고했어."

뻔하지만 다정한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약간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질리언 대사제님은?"

유성이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묻자 르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 긴장이 풀리셔서 그런지 혼절하셨어요."

어색하게 웃으며 답한 말에 유성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이해했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신탁을 받은 직후에 성녀로 각성한 듯했지만 제대로 힘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으니 지칠 만도 했다.

'루안이 안 보이는 건 그래서인가.'

혼절해버린 성녀를 옮길 사람이 그 외에는 딱히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질리언 대사제... 아니, 성녀님의 활약이 대단하긴 했으니까."

머리 위를 뒤덮었던 수십 미터에 달하는 신성의 방벽은 정말 대단했다.

괜히 성녀가 아니라고 해야 할까?

아직 보진 못했지만 성직자들의 전매특허 가운데 하나인 치유의 힘 역시도 범상한 수준은 아닐 게 분명했다.

'진짜 무조건 데리고 다녀야겠네.'

사실 신성력도 애매한 질리언을 이번 수성전에 투입한 것은 성벽에 새긴 옴팔로스의 신성진을 다룰 만한 사람이 그녀뿐이라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성녀가 되었으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성녀를 어떻게 참아.'

최고의 회복 능력자인 동시에 방어 능력자인데.

앞으로 전장이란 전장에는 모두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다.

'죄송합니다, 질리언 성녀님.'

무섭다고 울먹거리는- 아니, 그냥 엉엉 우는 질리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물론 르네의 활약도 대단했어."

타이밍이 약간 늦은 거 같긴 했지만 유성의 칭찬에 르네는 조금 짓궂게 웃더니 가슴을 활짝 펴며 말했다.

"전 왕의 마법사니까요."

"그래, 그러니 이제 쉬어도 돼."

무리를 한 것은 질리언만이 아니었다.

르네 역시도 괜찮은 척 발랄하게 굴고 있지만 유성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마 당장이라도 쓰러져 잠들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리라.

"로빈, 부탁할게."

"예, 영주님."

르네 곁에 자리하고 있던 로빈이 즉답하며 르네의 어깨를 안았다.

그러자 르네는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이내 어설픈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어... 좀 이상하지만...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잘 자. 르네. 좋은 꿈 꾸고."

유성이 허락하듯 답하자 르네는 마치 줄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로빈의 품에 몸을 기대더니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었다.

정말 억지로 버티고 있던 모양이었다.

로빈에게 르네를 맡긴 유성은 성문을 지나 병사들과 주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내성으로 향했다.

내성 입구에는 이세리나와 관리들이 도열해 있었다.

"승전 축하드립니다."

"흐흐흐, 대승입니다. 대승이요!"

이세리나에 이어 란트 경이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생긴 건 장비 같으면서 실상 무력은 평범하지만 그래도 정이 가는 사내였다.

유성은 두 사람에게 적당히 응답한 뒤 전후 정리를 위한 지시를 내렸다.

중간에 시몽 경이 온 덕분에 일을 제법 빠르게 마무리한 유성은 이세리나가 시녀들을 시켜 준비해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뒤 눈을 감았다.

세 번의 침공과 세 번의 저지.

공격은 언제까지 이어지는 것이고, 공격해오는 이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코볼트의 왕자와 트롤, 이번에 쳐들어온 네크로맨서까지.

유성은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여자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짐승 뼈를 마치 모자나 투구처럼 쓰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의 머리칼은 하얗고 길었다.

전신을 빠짐없이 감싼 망토는 잿빛으로 어두웠다.

하지만 그 잿빛을 제대로 분간할 수 있는 자는 드물 터였다.

어두운 세상이었다.

낮과 밤이 뒤섞인 것 같은 잿빛 하늘에는 태양과 달은커녕 별조차 없었다.

하늘이 어두우니 땅 또한 어두웠고, 세상에 가득 찬 어둠은 점점 더 짙고 어두워져만 갔다.

장벽 밖의 세계.

문명의 불을 잃어버린 세상.

여자는 장벽 밖에서 왕이라 불리는 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로티안을 침공한 네크로맨서가 사용하던 마력의 진정한 주인이었다.

홀로 선 여자는 장벽을 보고 있었다.

높게 솟은 보랏빛 장벽에는 자잘한 균열들이 가득했다.

개중에는 제법 크게 벌어져 아예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곳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부터 이질적인 것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명의 불의 빛과 온기.

장벽 밖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문명의 세례.

여자는 캄캄한 숲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숲 한가운데 외로이 빛을 발하는 작은 모닥불을 더해보았다.

너무나 작고 연약하지만, 어둠밖에 없는 세상이기에 너무나 눈에 띄는 그 빛.

그 빛을 발견한 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아서."

인간의 왕.

옴팔로스를 비롯한 인간의 신들과 함께 장벽을 만들어 인간의 세계를 만든 자.

하지만 장벽은 완벽하지 않았다.

아서가 감춘 빛은 탄로 나고 말았다.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온기를 바라보던 여자는 시야을 조금 더 넓게 하여 장벽 전체를 바라보았다.

숲의 주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빛에 이끌려.

온기를 따라.

다시 한번 불의 세례를 갈망하며.

"아서."

메마른 미소를 머금은 여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텅 빈 하늘이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제15장 – 영주 회의

다음 날 오후.

전투에서 전사한 자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을 마친 유성은 집무실에서 각종 보고를 받았다.

일단은 전사자의 수.

카멜롯의 군세와 전투사제단을 제하면 약 600명 남짓한 병력 가운데 100명 정도가 죽거나 다쳤다.

다섯 배가 넘는 대군과 싸운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선전이었다.

죽음의 군세 측에서 시체폭발과 시체의 뱀 등 시각적으로 위협적인 공세를 펼치긴 했지만 결국 어찌하지 못한 성벽의 높이와 예상치 못한 질리언의 신성 마법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질리언의 방벽이 없었다면 박쥐들의 시체 폭격 때 사상자가 어마어마했겠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질리언의 신성 마법이 펼쳐지던 광경을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유성이었다.

'내가 누구? 휘하에 성녀를 둔 군단장.'

성녀는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무척이나 희귀한 인적 자원이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최상급 성직자이니 전략적 가치는 물론이고 전술적 가치 역시 엄청났다.

'더욱이 질리언은 내정도 잘하지.'

평시와 전시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하는 전천후 인재라고 해야 할까.

그냥 질리언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등 따습고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르네도 진짜 유능하고.'

원소 마법에 능한 르네는 화염계 마법과 빙계 마법 양쪽 모두 능숙한 사용이 가능했는데 그 위력까지 남달랐다.

더욱이 르네는 단순히 화력만 쏟아붓는 폭격형 마법사가 아니었다.

정찰은 물론이고 방어 계통에도 능했으니, 진정한 전천후 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삼국지로 치면 와룡봉추인가.'

오른팔의 르네, 왼팔의 질리언.

실로 든든하기 짝이 없는 마녀와 성녀 조합이었다.

'내친김에 스탯 좀 찍자.'

이제는 질리언도 르네처럼 상태창을 통한 성장이 가능했다.

두 사람 모두 이번 전투로 레벨이 올랐으니 성장을 시켜줄 차례였다.

'르네랑은 이미 이야기가 되었고.'

마력 성장을 가장 우선시하고, 포인트가 남으면 마력 저장 쪽을 올리기로 지난번에 이미 이야기가 된 르네였다.

유성은 일단 상태창에서 르네의 항목을 선택하였다.

[영웅 관리]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9

보유 pt: 15pt

무장: 참나무 지팡이 / 마법사의 로브

일반 스킬: 마력 강화 Lv5 / 전투명상 Lv1 / 군마 소환 Lv1

고유 스킬: 마력 저장 Lv1

고유 스펠: -

[르네가 마력 강화 Lv6를 획득: 10pt]

[르네가 맨손 격투 Lv1을 획득: 3pt]

[르네가 전투 명상 Lv2을 획득: 5pt]

[르네가 마력 저장 Lv2를 회득: 5pt]

[르네가 새로운 마법을 획득: 5pt]

[르네가 군마 소환 Lv2를 획득: 5pt]

[르네의 근력을 강화: 1pt]

[르네의 민첩을 강화: 1pt]

[르네의 체력을 강화: 1pt]

'마력 강화랑 마력 저장 찍으면 딱이네.'

맨손 격투는 여전히 생각이 없었지만 전투 명상과 새로운 마법 쪽은 조금 아쉬운 유성이었다.

'그래도 마력 강화를 멈출 수 없긴 하지.'

가장 효율이 좋은 성장이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은 질리언인가.'

[영웅 관리]

왕의 성녀: 질리언 예나트리

레벨: 2

보유 pt: 5pt

무장: 대사제복

일반 스킬: 측량 Lv3 / 방패술 Lv1 / 승마술 Lv1

고유 스킬: -

고유 기도: -

[질리언이 성력 강화 Lv1를 획득: 3pt]

[질리언이 방패술 Lv2를 획득: 5pt]

[질리언이 새로운 기도를 획득: 5pt]

[질리언이 군마 소환 Lv1를 획득: 5pt]

[질리언의 근력을 강화: 1pt]

[질리언의 민첩을 강화: 1pt]

[질리언의 체력을 강화: 1pt]

'오, 그래도 스킬이 있네.'

역시 옴팔로스 교단의 대사제라고 해야 할까.

'방패술도 있고.'

레벨이 낮긴 해도 시작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키울 생각은 별로 없지만.'

르네의 격투나 질리언의 방패술이나 몹시도 함정 카드 같았으니 말이다.

'군마부터 가자.'

성력 강화가 끌리긴 했지만 앞으로 계속 전장에 데리고 다닐 걸 생각하면 역시 군마 소환이 우선이었다.

르네와 달리 아직 성장 방향에 대해 논의가 되지 않은 질리언이긴 했지만 시작 빌드는 사실상 고정된 것이었기에 유성은 주저 없이 군마 소환을 선택했다.

'그래, 내친김에 나머지도 처리하자.'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헥토르 모두 레벨이 올랐다.

유성은 각각의 부대를 최대 인원까지 충원시킨 뒤 영웅들과 부대의 성장 정도를 확인했다.

[부대 관리]

케이트의 일반 보병대 Lv5(승급 가능!)

기수/부대장: 케이트

나팔수/부부대장: 지미

구성원: 50+1(최대: 50+1) / 예비대: 0

[보병대 5명 증원: 2pt]

부대장: 케이트

레벨: 8

무장: 카멜롯의 깃발 / 평범한 장검 / 징 박힌 가죽 갑옷 / 둥근 나무 방패 / 군마

기사도: 카멜롯의 영광 Lv2

칭호: ???의 챔피언(잠김 상태)

스킬: 왕국 검법 Lv3 / 오라 블레이드 Lv3

바나데인의 정예 궁수 부대 Lv5

부대장: 바나데인

구성원: 50+1(최대: 50+1) / 예비대: 0

[궁수 2명 증원: 3pt]

궁수 부대장: 바나데인

레벨: 8

무장: 엘프 장궁 / 단검 / 가죽 갑옷

기사도: 꿰뚫는 일격(공격의 관통력과 위력을 강화시킨다.)

칭호: ???의 사수(잠김 상태)

스킬: 속사 Lv3 / 멀티플 샷 Lv2 / 고속 기동 Lv1

다이애나의 정예 경기병대 Lv5(승급 가능!)

부대장: 다이애나

구성원: 30+1(최대: 30+1) / 예비대: 5

[정예 경기병대 1명 증원 2pt]

[정예 경기병대에 기수 추가 2pt]

천마기사: 다이애나

레벨: 8

무장: 단창 / 장검 / 가죽 갑옷 / 나무 방패

기사도: 충격의 다이애나

칭호: ???의 기수(잠김 상태)

스킬: 가속 Lv1

헥토르의 중갑 보병대 Lv2

부대장: 헥토르

기수: 한스

구성원: 35+1(최대: 35+1) / 예비대: 0

[중갑 보병대 1명 증원: 2pt]

[대장간 추가 효과: 방패 강화: 10pt]

부대장: 헥토르

레벨: 6

무장: 대형방패 / 대형도끼

기사도: 카멜롯의 거신병

칭호: ???의 챔피언(잠김 상태)

스킬: 오라 웨폰 Lv2 / 강체술 Lv1

'좋아, 다시 승급 레벨이 되었어.'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의 부대 모두 5레벨이 됨에 따라 승급이 가능해졌다.

"잠깐, 승급 루트가 왜 이래."

저도 모르게 육성을 낸 유성은 다시 상태창을 보았다.

[일반 보병부대를 정예 보병대로 승급: 20pt]

이건 일반적이었다.

[정예 기병대를 천마 기병대로 승급: 30pt]

이것도 예상했던 그대로라 반가울 뿐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이 이상했다.

[정예 궁병대를 엘프 궁병대로 승급: 30pt]

[정예 궁병대를 기계화 부대로 승급: 30pt]

궁병대 승급 루트가 조금 이상했다.

'엘프 부대라니. 그럼 지금 부대원들 종족이 바뀐다는 건가?'

아니면 설마 지금 부대원들은 그대로 둔 상태로 엘프 부대원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일까?

'아니 이게 무슨 테세우스의 배도 아니고.'

전사자가 생길 때마다 엘프의 비율이 늘어나서 결국 엘프 부대가 된다.

그리고 그전까지는 엘프 없는 엘프 부대이다.

'차라리 그냥 지금 부대원들이 엘프가 되는 게 낫겠는데.'

유성은 일단 엘프 부대의 정보를 살펴보았다.

'쉽게 보면 인간 궁병대의 상위호환이구나.'

더 멀리, 더 정확하게 쏘고 더 빠르게 움직인다.

'확실히 끌리긴 하네.'

기존의 궁수 부대보다 사거리가 긴 것도 긴 것이었지만, 기동력이 좋다는 점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기계화 부대는... 오오오.'

마지막에 가서는 육성까지 조금 흘린 유성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발리스타!'

기계화 부대는 활이나 석궁 같은 개인 병기가 아닌 공성병기- 거대한 발리스타들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이거 나중 가면 대포도 쏘는 거 아냐?'

매력적이다.

이쪽 역시 몹시도 매력적이다.

엘프 부대일 것인가 기계화 부대일 것인가.

눈을 감고 고민하고 또 고민한 유성은 이내 마음을 굳혔다.

'엘프로 간다.'

기계화 부대도 매력적이었지만 부대장인 바나데인과의 조합을 생각한다면 엘프 부대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전원이 레골라스인 부대라니. 생각만 해도 강할 것 같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유가 있다면,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했지만 기계화 부대를 다음에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차하면 영웅 없는 일반부대로 뽑아도 되고.'

마음을 정한 유성은 주저 없이 엘프 부대를 선택했고,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오."

[부대 관리]

바나데인의 엘프 궁병대 Lv1

부대장: 바나데인

구성원: 30+1(최대: 30+1) / 예비대: 20

[궁수 1명 증원: 3pt]

기존의 부대원들이 전원 엘프가 되었다.

유성은 급히 유성 성을 활성화시켜 바나데인의 부대원들을 찾아보았다.

'진짜다. 전부 엘프가 됐어.'

귀가 길고 잘생긴 궁병들.

어차피 3등신이라 다 똑같이 보여야 정상임에도 어쩐지 모르게 팔다리가 길어진 기분도 들었다.

'다들 놀라고 있네.'

지미는 너무 놀라 눈을 부릅뜬 채 입까지 크게 벌렸고, 병사들 역시 깜짝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고들 있었다.

엘프들- 그러니까 궁병들 역시 놀라긴 매한가지인지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맘에 들어하는 것 같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 보고 하트 띄우는 녀석도 있는 걸 보면.

'근데 바나데인 얘는 또 어딜 간 거야?'

가만 보니 다이애나도 안 보였다.

얘네 둘이 진짜 사귀는 건가?

'아무튼 돌아가서.'

유성은 케이트의 부대와 다이애나의 부대도 승급시켰다.

일반 보병대는 정예 보병대가 되면서 옷이 좀 더 멋져진 것 외에는 외양상 큰 변화가 없었지만 다들- 특히 지미가 꽤 만족한 것 같았다.

전에는 없던 배래모를 몇 번이나 고쳐 쓰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천마 기병대.

유성 성 안에 난데없이 날개달린 말들이 잔뜩 생겨났다.

본래 성의 말들 가운데 보스였던 알폰스는 매우 당황한 눈치였고, 에니카는 어쩐지 모르게 흐뭇한 얼굴이었다.

'설마 보스가 바뀌는 건가.'

잠시 알폰스의 권위에 대한 걱정을 한 유성은 다시 상태창을 열었다.

유성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이름: 천유성

성별: 남

직업: 카멜롯의 성기사

레벨: 16

지위: 중급 지휘관

특이사항: 성왕의 계승자, 군단의 주인, 원탁의 계승자, 용의 심장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

[성왕 스킬]

왕국검법 Lv4 / 제국검법 Lv4 / 용왕심법 Lv4 / 용왕로 Lv3 / 왕의 안목 Lv2 / 군마 소환 Lv3

[성왕십자검]

열화의 검

[성기사 스킬]

오라 블레이드 / 오라 실드 / 승리의 함성 / 오라 블래스트 (New!)

[지휘관 명령]

질풍의 오더 / 수호의 오더 / 관통의 오더 / 거인의 오더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

상태창을 쭉 확인한 유성은 성기사 스킬 항목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생겼구나.'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5레벨 간격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이전까지는 14레벨이었지만 이번 전투로 16레벨이 되면서 생긴 큰 변화.

'오라 블래스트.'

다르게 말하자면 검기 날리기.

지금까지는 검신을 따라 검기를 일으키는 게 전부였지만 이제 검기를 날려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이걸 배우고 안 배우고 차이가 엄청 크단 말이지.'

검기 날리기를 할 수 있는 기사와 그렇지 않은 기사는 공격 범위는 물론이고 한 번에 공격할 수 있는 대상 숫자에서도 현격한 차이가 났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기사로 무쌍 플레이를 하려면 반드시 익혀야 할 기술이었다.

유성은 시험 삼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페이퍼 나이프에 살짝 검기를 씌운 뒤 벽을 향해 내쏘아보았다.

츠확!

멋지게 날아간 초승달 모양의 황금빛 검기가 벽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

'열화의 검도 날릴 수 있으려나?'

지금까지는 크게 휘둘러서 불꽃을 방사하는 느낌이었는데 르네의 파이어볼처럼 열화의 검도 구 형태로 뭉쳐서 날릴 수 있지 않을까?

유성의 눈이 금빛으로 변함과 동시에 페이퍼 나이프 위로 황금빛 열화가 피어올랐다.

집중.

그리고 발사.

콰학!

"된다!"

엄지손가락만 하게 뭉친 황금빛 열화가 벽에 충돌한 순간 폭발하며 주먹만 한 크기의 화염이 되었다.

'좋아. 이제 수성전 할 때 대포 역할을 할 수 있겠어.'

흐뭇한 미소를 지은 유성은 괜히 다시 열화의 불꽃을 모아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계승자님!"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르네가 날렵하게 몸을 굴리며 나타났다.

"습격-은 아닌 것 같네요?"

르네가 무릎을 털며 일어나자 유성은 일단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방금 좀 멋있었어."

"제가 좀."

부끄럽다는 듯 아하하 웃은 르네였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다시 미간을 좁힌 그녀는 유성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무슨 일이었죠? 폭발음이 들려서 깜짝 놀라 달려 온 건데."

"아, 그게."

어색하게 웃은 유성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르네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계승자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어?"

아니, 잘못하긴 했는데 이 정도로 화를 낼 일이었나.

당황한 유성이 바로 답하지 못하고 어버버하자 르네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유성 성 키울 땐 같이 하기로 했잖아요!"

"아, 그거였나."

"아, 그거였나-라뇨.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르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얼굴로 말하자 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 마. 아직 시설 업그레이드는 안 했으니까."

"그럼 다행- 잠깐, 아직이요? 그럼 다른 뭔가 한 게 있는 거예요?"

"어? 어... 어."

있지.

크게 변한 게 두 가지 있지.

유성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유성 성을 보여주었고, 틀린 그림 찾기 하듯 유성 성을 바라보던 르네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15장 – 영주 회의 (2)

"와! 엘프! 와! 천마!"

유성 성을 본 르네가 환한 얼굴이 되어 외쳤다.

"정예 궁병대의 대원들이 전부 엘프가 되었네요?"

놀랍게도 유성 성에 거하는 병사들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있는 르네였다.

길어진 자기 귀를 만지며 신기해하거나 어쩐지 모르게 멋진 포즈를 잡기 시작한 병사들을 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확인한 르네가 묻자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신기하지?"

"신기하죠. 어떻게 된 걸까요? 애당초 카멜롯의 병사들은 영혼 상태였으니... 어쩌면 애당초 엘프의 영혼들이었던 건 아닐까요?"

"어? 오... 가능성이 있을지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는데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았다.

본래 엘프의 영혼인데 조건이 되지 않아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가 이제야 진정한 모습을 찾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럴싸한 것도 그럴싸한 것이지만 갑작스러운 종족 변화에 대한 거부감도 줄어들었다.

'진짜 그럴 수도 있겠는데?'

본래 엘프들이었다고 생각하고 보니 갑자기 종족이 변하면서 신체 역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적응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그럼 페가수스들도 마찬가지인가?'

오늘 낮까지만 해도 그냥 말이었는데 날개가 생기자마자 바로 자연스럽게 비행을 시작한 페가수스들이었다.

'가능해, 가능성이 있어.'

케이트나 바나데인 같은 기사들이 봉인된 기억을 찾을 때마다 본래의 힘과 모습을 되찾는 것처럼 병사들 역시도 레벨 업과 승급을 통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아닐까?

'흥미롭네.'

본래 대단했던 이들이었다고 생각하고 보니 병사들의 모습이 다시 보이는 기분이었다.

엘프가 된 여자 궁수들을 보며 눈에 하트까지 띄워가며 좋아하는 지미의 모습에서 살짝 마음이 꺾일 뻔했지만 잠깐뿐이었다.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한 지미이지 않던가.

그렇게 유성이 홀로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3등신 페가수스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관찰하던 르네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3등신이라 좀 웃기지만 실제로 보면 멋지겠죠?"

확실히 3등신이다 보니 멋지기보다는 웃긴 페가수스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쿡쿡 웃은 유성이 물었다.

"르네, 혹시 왕국이나 제국에도 천마 기사단이 있을까?"

"실라테인 왕국에는 없어요. 하지만 카발 왕국에는 천공 기사단이라고 아주 유명한 천마 기사단이 하나 존재해요. 그리고 제국에는 그리폰 라이더들로 구성된 황금 기사단이 있죠."

"그리폰?"

"네, 제국 황제 직속인 근위 기사단인데 단위 전투력은 제국 제일이라 불려요. '마스터 나이트'들 가운데 한 명인 천검의 포르테가 황금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해서 위세가 정말 대단하다고 해요."

르네의 설명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이 그리폰 라이더라면 인정할 수밖에."

그리폰은 하늘의 제왕인 독수리와 지상의 제왕인 사자가 한 몸에 결합된 문자 그대로 괴수였다.

그런 그리폰 라이더들로 구성된 기사단이라면 대륙 최강을 자처해도 될 것 같았다.

"아무튼 와... 새삼 대단하네요. 진짜 엄청난 거 아니에요? 천마 기병대라니."

카발 왕국과 제국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바꿔 말하면 그 둘 외에는 공중 기병대라 할 만한 병력을 보유한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제 유성에게 페가수스 라이더들로 이루어진 천마 기병대가 생긴 것이었다.

하늘을 누빌 수 있는 천마 기병대의 효용성은 실로 엄청났다.

더욱이 천마 기병대를 이끄는 것은 다이애나이지 않던가.

"와, 그럼 저번 전투 때 다이애나 언니랑 계승자님이 하셨던 유성 낙하 같은 걸 단체로도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진짜 엄청난데요?"

위력도 위력이지만 하늘에서 내리꽂는 공격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전장 전체가 사실상 사정권이라 해도 좋았으니 말이다.

르네의 감탄에 유성은 씩 웃으며 말했다.

"성왕의 군단이니 당연하지."

모처럼의 허세에 르네는 까르르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성왕의 군단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죠. 여기 엘프도 있고, 천마도 있고. 이러다 나중에는 막 천사도 나오는 거 아닐까요? 드래곤이라든지."

"어쩌면 그럴지도. 아니, 거의 무조건 그러지 않을까?"

판타지 모나크에는 양쪽 모두 존재했으니 말이다.

와이번을 타고 싸우는 와이번 라이더.

등에 돋아난 날개로 하늘을 누비는 천사병.

강력한 드래곤들을 타고 싸우는 기병계의 끝판왕인 드래곤 나이트.

당장 유성만 하더라도 검은 늑대들의 군단장이었던 시절에는 새카만 비늘을 가진 블랙 드래곤을 타고 전장을 누빈 기억이 있었다.

'일단 나한테 용의 심장이 있으니까.'

진짜 군단에 드래곤이 추가될지는 의문이었지만 아무튼 드래곤 자체는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계승자님, 포인트는 얼마나 남으셨어요?"

"아직 제법 많아."

부대원 충원과 승급에 막대한 포인트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인트가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전투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얻게 되는 포인트 역시 많아졌기 때문이다.

유성의 말에 르네는 활짝 웃더니 유성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시설 설치 가볼까요?"

"그래, 가보자."

[군수 시설 관리]

[마구간 추가: 30pt]

[대장간 Lv2]

본격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대장간.

보다 고도의 작업을 수행하기에는 시설과 인원 모두가 부족하다.

[대장간 레벨 업 포인트: 40pt]

[막사 Lv2]

병사들이 머무는 막사.

다수의 인원이 함께 머무는 터라 불편하고 청결하지 못하다.

[막사 레벨 업 포인트: 30pt]

그 외에도 목욕탕, 화장실, 간이 식당 등등 기존 시설의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당연히 전부는 못 하겠죠?"

"어, 남은 게 100pt라."

그리 말하며 항목을 살피던 유성은 마지막 항목에서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기존의 것들과 다른 아예 새로운 시설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신전 건설: 100pt]

[성녀의 합류로 신전의 건설이 가능해졌습니다.]

[신전을 통해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설명을 모두 읽은 유성이 르네를 돌아보자 때를 맞추듯 마찬가지로 유성을 돌아본 르네가 말했다.

"신전. 분명 엄청 중요한 시설일 거예요. 건물도 무척 멋질 거고."

잔뜩 흥분한 어조로 말한 르네는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계승자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질리언 언니도 불러올까요?"

르네와 마찬가지로 상태창에 추가된 질리언이었다.

질리언 역시 유성 성을 볼 수 있을 터였고, 다른 무엇도 아닌 신전 건설이니 그녀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르네의 생각이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상태창과 유성 성에 대한 설명은 어차피 필요한 일이었다.

내친걸음에 한 번에 해결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잠깐만요. 금방 데려올게요."

"그래, 뛰다가 넘어지진 말고."

"걱정 마세요!"

씩씩하게 답한 르네는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대략 십 분 남짓이 지났을까.

"계승자님! 다녀왔습니다!"

질리언의 손을 붙잡은 르네가 개선장군처럼 돌아오자 유성은 작게 웃은 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질리언에게 말했다.

"질리언 성녀님, 오셨습니까."

"아, 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이죠?"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을 보면 아마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그냥 끌고 왔으리라.

유성은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상태창을 펼쳤다.

"일단 이걸 보시죠."

"마법?"

갑자기 나타난 빛의 창에 질리언이 눈을 깜박이자 르네가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상태창이란 거예요. 언니도 보이죠?"

"어, 언니요?"

"네, 언니. 언니니까 언니."

르네가 애교를 부리듯 얼굴이 가까이 하며 말하자 질리언은 더욱 당황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 네, 언니. 그, 아무튼 빛의 창이 보여요. 저게 뭐죠?"

"그러니까...."

말끝을 한 번 흐린 유성은 빠르고 정확하게 상태창에 대해 설명했다.

인위적으로 성장을 가속시킬 수 있다는 말에 놀란 질리언이었지만 옆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는 르네를 보더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의 마력량이 또래에 비해 압도적인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알겠습니다. 정말 대단한... 잠깐, 이제 저도 상태창으로 성장이 가능하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르네가 왕의 마법사라면 질리언 님은 왕의 성녀시니까요."

유성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질리언은 입술을 움츠려 미소를 감추었다.

성녀라는 호칭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

인간의 왕의 성녀.

일반 성직자보다도 못한 신성력으로 잘도 대사제 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비아냥을 듣던 시절은 이제 안녕이었다.

질리언 자신은 무려 성녀, 그것도 성장하는 성녀였으니 말이다.

'이제 교단의 높은 분들도 절 무시하지 못하시겠죠.'

마음속으로나마 후후훗 웃은 질리언은 성녀에 어울리는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고, 유성과 르네는 서로를 돌아본 뒤 눈빛을 나누었다.

'기분 엄청 좋아 보이죠?'

'어, 미소가 계속 짙어지네.'

물론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실제로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눈치를 통해 어느 정도 뜻을 주고받는 것은 가능했기에 두 사람은 소리 죽여 웃은 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했다.

"그럼 군마 소환부터 해볼까요?"

"언니가 앞으로 타고다닐 말을 불러내는 거예요. 군마를 부른다고 상상하면서 이름을 불러보세요."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새삼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킨 질리언은 집무실 한 쪽의 넓은 공간을 가리키며 조용히 군마의 이름을 불렀다.

"제롬."

부름이 끝남과 동시에 황금빛 섬광이 일며 부드러운 갈색 털을 가진 커다란 군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고 맑은 눈을 가진 녀석은 자연스럽게 질리언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였고, 질리언은 천천히 제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솔직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계승자님."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돌려보내면 이제 제롬도 유성 성에서 보일 거예요."

르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질리언은 다시 제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돌아가렴, 제롬."

질리언이 명하자 다시 은은한 황금빛과 함께 제롬이 사라졌다.

르네는 바로 유성 성을 돌아보더니 말들이 모여있는 곳을 가리켰다.

"여기 있어요!"

3등신으로 변한 제롬이 알폰스와 레이니 근처에 서 있었는데, 3등신임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바로 신전을 건설하겠습니다."

유성이 그리 말하며 신전을 선택하자 유성 성 위로 선택지가 떠올랐다.

[신전 건설]

[최초의 신전을 짓습니다. 신을 선택하십시오.]

1. 호수의 여신

2. 철벽의 옴팔로스

'아니.'

여기서 선택지가 나올 줄이야.

유성과 르네는 거의 동시에 질리언을 돌아보았고, 질리언은 조금 쓰게 웃더니 괜찮다는 듯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호수의 여신의 신전을 먼저 짓도록 하죠. 옴팔로스 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괘념치 마시기를."

호수의 여신은 인간의 신.

굳이 따지면 옴팔로스의 상관 같은 존재였으니 먼저 짓는 것이 맞았다.

"그럼 짓겠습니다."

유성이 빈 부지를 선택한 뒤 건설 버튼을 누르자 순식간에 신전이 건축되었다.

가운데 작은 섬이 하나 떠 있는 동그란 원형 호수와 호수를 에워싼 벽과 기둥들, 입구에 놓여 있는 하얗고 커다란 호수의 여신상.

[호수의 여신의 신전이 건설되었습니다.]

[주둔지에 여신의 축복이 깃듭니다.]

[전장에서 여신의 축복을 사용 가능합니다.]

전부 반가운 문구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유성 성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유성 성 개척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유성 성의 초대권이 발부됩니다.]

[초대권 충전에 필요한 시간: 119시간 59분 51초.]

유성 성의 초대권.

르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제15장 – 영주 회의 (3)

"초대권? 어, 혹시 저 성에 가볼 수 있는 건가요?"

질리언의 물음에 르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제 막 세워진 신전을 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네, 맞아요. 호수의 여신님의 신전에도 들어가 볼 수 있을 거예요."

겉이 저렇게 멋진데 안은 또 얼마나 멋질까.

하지만 질리언은 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감동하는 대신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그럼 저희도 저렇게 되는 건가요? 그, 머리도 크고 납작한 그림 같은?"

"네?"

"아니, 저 안에 들어간다고 하셨으니...."

"아뇨, 아뇨. 그냥 저렇게 보이는 거지 안에 들어가면 그냥 사람들이랑 똑같아요. 유성 님이 불러내신 군대 보셨죠? 케이트 언니랑."

르네가 전혀 아니라는 듯 손까지 내저으며 말하자 질리언은 잠시 지난 전투 때 보았던 카멜롯의 군사들을 떠올려 보았다.

커다란 깃발을 든 천사 같은 외모의 금발 머리 여기사와 위풍당당하게 도열한 병사들.

"아, 혹시 저분인가요?"

때마침 케이트가 신전 입구에 서서 호수의 여신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3등신 케이트의 모습에 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케이트 언니예요. 저 모습도 예쁘죠?"

"네, 예쁘시네요."

조금 안심했다는 듯 안도의 숨을 토한 질리언은 다시 유성 성 전체를 시야에 담아 보았다.

"신기하네요."

유성 성.

성왕의 거처.

카멜롯의 군세가 머무는 본거지.

르네와 질리언이 그렇게 유성 성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유성은 보다 실무적인 일을 하고 있었다.

'오, 이게 여신의 축복인가.'

[호수의 여신의 축복 Lv1]

[카멜롯의 군세의 체력이 1.5배 증가합니다.]

[카멜롯의 군세의 회복력이 1.5배 증가합니다.]

[카멜롯의 군세의 각종 저항력이 1.5배 증가합니다.]

호수의 여신은 곧 생명의 여신이라더니 단순하면서도 좋은 효과들이었다.

병사들의 생존율이 크게 늘 것 같았다.

'그런데 Lv1이라는 건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거겠지?'

신전 레벨을 높인다거나 신물 같은 걸 구하면 되지 않을까?

유성은 혹시 단서를 얻을 수 없을까 해서 상태창을 살펴보았고, 르네와 질리언은 여신상 앞에 모여 기도를 올리는 병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영주님, 시몽입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상태창에서 눈을 뗀 유성은 마찬가지로 상태창에서 눈을 뗀 르네와 질리언을 한 차례 돌아본 뒤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게."

"예, 아. 마녀님과 성녀님도 계셨군요."

지난 전투 이후 마녀님과 성녀님으로 호칭이 정립된 두 사람이었다.

르네와 질리언은 시몽 경에게 각자 묵례로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자세를 바르게 했다.

상태창이 보이지 않는 시몽 경은 바로 다시 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주님, 에드가 경에게서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말해보게."

시체 군단을 잘 막아낸 상황이었지만 아직 남쪽에서 밀고 올라온 고블린 군단이 남은 상황이었다.

그 규모가 이전보다 작고 트롤들도 없는 순수 고블린 부대였지만 그렇다고 아예 신경을 끌 수는 없었다.

유성의 재촉에 시몽 경은 나름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르투아 백작령이 침공해온 고블린들을 요격, 대승을 거뒀다고 합니다."

기쁜 소식이었다.

신호탄이나 전서구를 이용한 정보 전달이었는지 승리했다는 사실 외에는 딱히 더 정보가 없는 듯했지만 시몽 경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황상 샤를 경이 활약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질리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투아 백작의 후계자입니다. 2단계 기사도를 각성한 무척 강한 기사라고 들었습니다."

20대 중반에 2단계 기사도라면 확실히 대단했다.

애당초 사용자가 드문 2단계 기사도를 무척이나 이른 나이에 터득했다는 것이니 말이다.

당장 유성 진영의 유일한 2단계 기사도 사용자인 루안조차도 2단계 기사도에 들어선 것은 20대 후반이 다 되어서였다.

흥미가 생긴 유성이 질리언에게 물었다.

"어떤 기사도인지도 혹시 알려졌습니까?"

"예, 유명합니다. 천사로 변하는 기사도라고 합니다."

"천사로요?"

"네, 아르투아 백작령은 풍요의 에스트리엘 님을 모시는데, 샤를 경은 에스트리엘 님의 천사로 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신실한 신앙심을 가진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기사도는 기사의 영혼뿐만 아니라 기사의 삶 또한 반영하기 마련이었다.

천사로 변하는 기사도를 가진 걸 보면 질리언 말마따나 무척이나 신실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영주님! 란트입니다!"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유성이 허락하자 란트 경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헐레벌떡 달려온 듯 숨이 차오른 그는 이미 집무실 안에 자리하고 있던 모두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에드가 경에게서 연락이 왔네. 아르투아 백작령이 고블린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군."

시몽 경이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자 란트 경이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오! 좋은 소식이군요!"

"그래, 란트 경. 그쪽은 무슨 소식이지?"

유성이 묻자 란트 경은 잠시 허둥거리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답했다.

"영주님, 카리안 백작의 사절이 도착했습니다."

"카리안 백작령에서?"

"예, 지금 대기실에서 대기 중인데 불러올까요?"

란트 경의 물음에 유성은 좌우를 한 번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데려오게."

"예! 다녀오겠습니다!"

란트 경이 다시 밖으로 나가자 유성은 문 밖에서 대기 중인 병사를 불러 이세리나 영애를 데려오게 하였다.

카리안 백작의 사절이니 모두가 함께 맞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북부의 카리안 백작.

볼보 남작령 일로 가벼운 마찰이 있긴 했지만 약간의 신경전이 오갔을 뿐 사실 지금까지는 간단한 서신조차 나눈 적이 없는 관계였다.

그런 자가 갑자기 사절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다 같이 좀 더 협력하자는 게 아닐까요?"

르네가 희망적인 어조로 말했지만 다들 반응이 미지근했다.

지금까지 로티안이 공격을 받을 때마다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거절하며 병사는커녕 물자조차 지원하지 않은 카리안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괴물들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카리안 백작 역시 흉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인지했을 터이니 말이다.

"로티안의 흑기사님을 뵙습니다. 카리안 백작님을 모시는 리암이라 합니다."

란트 경과 함께 도착한 사절은 중년 남성이었는데, 그냥 딱 봐도 사절 같이 생긴 남자였다.

"로티안의 유성이다."

유성이 짤막하게 답하자 다시 예를 표한 리암은 듣기 좋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 주인이신 카리안 백작께서 작금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영주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십니다. 왕국 서부의 여러 영주분들이 참여하실 예정이오니, 로티안의 흑기사께서도 참여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초대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말을 마친 리암은 카리안 백작의 인이 찍힌 서신을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받도록 하겠다."

유성이 그리 말하자 리암 곁에 서 있던 시몽 경이 서신을 챙겼다.

"리암 공, 초대장은 잘 받았지만 자리를 비우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 일단 검토해보겠네. 방을 내줄테니 여독을 풀게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공손히 예를 표한 리암은 란트 경을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영주님, 열어 보겠습니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마자 시몽 경이 말했다.

혹시 봉투 안에 어떤 수작질을 해뒀을지 모를 일이었기에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서신은 영주가 아닌 다른 이가 열어 보는 것이 관습이었다.

유성이 허락하자 시몽 경이 페이퍼 나이프로 봉투를 찢고 서신을 꺼내들었다.

"이상 없는 듯합니다."

"마법적으로도 문제없는 것 같아요."

시몽 경에 이어 르네가 말하자 질리언은 잠깐 주저하다 말했다.

"그, 신성적으로도 문제없습니다."

딱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종이였으니까.

르네까지는 그렇다 해도 신성적으로 문제없다는 질리언의 말에 결국 작게 웃고만 유성은 시몽 경에게 손을 내밀어 서신을 받았다.

'내용도 평범하네.'

긴 미사여구를 제하고 보면 카리안 백작령의 도시인 루셴에서 영주 회의를 열 테니 참여하라는 이야기였다.

유성은 르네에게 서신을 넘겨 모두에게 내용을 공유하도록 한 뒤 생각했다.

'열흘하고도 이틀 후.'

로티안에서 루셴까지는 천천히 가도 나흘이면 닿을 수 있었으니 일정은 무척 넉넉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보름도 안 되는 일정은 무척이나 급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영주 회의는 적어도 한 달 전에는 통보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급한 상황이란 건가.'

어쩌면 유성 자신이 모르는 정보를 카리안 백작이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당장 실라테인 왕국을 비롯해 인간의 세계 전체가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공격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으니 말이다.

유성이 고민하는 동안 서신의 낭독을 마친 르네가 서신의 내용을 다시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일정이 꽤 급하긴 하지만... 양식이나 문구를 보니 왕국 서부 일대의 영주들을 거의 다 초대한 것 같아요."

귀족인 그녀의 눈에는 행락 상에서 더 많은 것들이 보인 모양이었다.

"다른 영주들은 초대에 응할까?"

유성의 물음에 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들 정보가 귀한 상황이고... 정말로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까요. 카리안 백작은 예전부터 왕도의 귀족들과 연이 닿아있는 걸로 유명했으니 어쩌면 상당한 고급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적어도 아르투아 백작령과 발투아 백작령은 응할 거라고 생각해요."

발투아, 카리안, 아르투아 세 가문은 서부에서 가장 강한 세 가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세 가문이 모이는 것이니 사실 다른 가문들은 끼든 안 끼든 큰 의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인가?"

유성이 그리 물으며 주변을 돌아보자 딱히 이견이라 할 것이 없었다.

"좋아, 그럼 우리도 참가하도록 한다."

로티안과 루셴의 거리는 가까웠다.

혹시라도 영주 회의 중에 적이 쳐들어온다 해도 급히 돌아올 수 있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일단은 나와 르네, 질리언 성녀님이 영주 회의에 참석하면 될 것 같다. 호위로는 루안과 전투사제단을 데려가겠다."

유성의 선언에 시몽 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란트 경은 살짝 아쉽다는 표정이 되었다.

유성은 이세리나에게도 물었다.

"영애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사실상 유성의 가신 노릇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볼보 남작령의 정당한 상속자였다.

하지만 이세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가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요."

미망인인데다 유성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으니 무슨 말이 나올지 대충 예상이 되는 그녀였다.

볼보 남작령을 사실상 비워두고 있는 지금이니 괜한 구설수에 휘말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떠나있는 동안 로티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성을 보살피겠습니다."

영주 회의에 향할 인선까지 정해졌으니 더는 논할 이야기가 없었다.

유성은 카리안 백작의 사절을 불러 초대에 응할 것을 알린 뒤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카리안 백작의 사절이 떠나고 닷새 뒤.

로티안에서는 여전히 공사가 한창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파괴된 성벽의 복구도 있었지만, 해자 공사가 보다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확기가 지난 상황인데다 볼보 남작령의 수확물을 거의 전부 가져온 터라 로티안의 식량 사정은 무척 좋은 편이었다.

공사를 시키고 임금을 주니 피난민들도 배를 곯지 않았고, 이런 소문이 퍼진 것인지, 아니면 계속된 승리 소식 때문인지 각지에서 매일 조금씩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 뒤.

카리안 백작령에 인접한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아니, 대사제님이 성녀님이 되셨다고요?!"

"옴팔로스 님의 신탁을?"

"아니, 우리 대사제님이 비록 신성력은 쥐꼬리만 하지만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니신... 아뇨, 아뇨. 그냥 놀라워서 하하핫. 저는 예전부터 우리 성녀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질리언의 소리 없는 눈빛 공격에 어색하게 웃은 막심 사제- 부수도원장은 모두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물론 애당초 수도원이었기에 딱히 환영 연회 같은 것을 연 것은 아니었지만 아늑한 숙소와 따뜻한 식사, 그리고 깨끗한 목욕물이 있었으니 일행 모두가 만족하였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지나 야심한 시각.

유성의 침소에 세 사람이 방문하였다.

"자, 이렇게 저랑 언니랑 손을 잡고, 제가 다시 계승자님 손을 잡으면 돼요."

르네의 설명에 질리언은 숨을 크게 고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막상 유성 성에 간다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르네는 그런 질리언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준 뒤 다시 유성의 손을 깍지 껴잡았다.

"음, 역시 커요."

저번처럼 흠칫 놀라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 르네는 살짝 얼굴을 붉혔고, 유성은 쓰게 웃은 뒤 르네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한 사람.

손을 잡고 선 세 사람 옆에서 부러운 얼굴을 한 채 입술을 내밀고 있는 로빈의 모습에 르네가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로빈,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선물 사오시고요."

"팔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소꿉친구간의 대화에 질리언이 작게 웃자 유성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린 뒤 상태창을 열었다.

[유성 성 초대권의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초대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영주회의 전에 이뤄지는 두 번째 방문.

유성은 예를 눌러 초대권을 활성화시켰다.

제15장 – 영주 회의 (4)

나팔수 지미(남, 21세)는 눈앞에서 마치 벼락처럼 번쩍이는 섬광이 터졌음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도착했네."

빛이 흩어진 자리에서 나타난 유성은 일단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깍지 손을 낀 르네와 질리언이 한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성녀님도 괜찮으신가요?"

"하아, 괜찮아요. 이번에도 살짝 어지럽긴 하네요."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르네는 저번처럼 비틀거렸지만 질리언은 의외로 멀쩡해 보였다.

계속된 레벨 업 덕분에 강화된 르네의 신체능력은 일반인을 기준으로 해도 허약한 편인 질리언과 비교할 바가 아닌데도 저런 것을 보면 공간이동 자체에 개인차가 꽤 심하게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도착했구나.'

유성은 일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확인한 것처럼 유성 성 내부도 아침이었다.

유성 성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정황상 시간의 흐름은 유성 자신이 있는 장소와 동일한 것 같았다.

'나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역시나 유성 성은 물리적인 공간에 실존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어떤 마법이나 신적인 힘에 의해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 같은 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리적으로 실존하는 장소의 시간을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잠시 보랏빛 장벽들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우러른 유성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저만치에서 눈에 익은 청년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지미!"

똑같이 청년을 알아본 르네가 손을 번쩍 들더니 반갑게 흔들며 외쳤다.

그러자 달리던 청년- 지미는 이쪽 눈치를 조금 살피는가 싶더니 똑같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마법사님!"

"지미!"

"마법사님!"

"지미!"

그렇게 몇 번 부르니 어느새 일행 앞에 도달한 지미였다.

활짝 웃으며 서로 마주하는 걸 보니 무척 친한 사이 같았다.

'아니, 언제 또 저렇게 친해진 거지?'

르네가 유성 성을 관찰할 시간이야 많았지만 지미가 르네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지미는 제일 먼저 소환된 농노 부대의 일원이었으니 카멜롯의 군세 가운데서는 르네를 가장 자주 만난 병사이기는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또 말이 되는 거 같긴 하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아무튼 자주 보긴 했으니까.

더욱이 친화력 하나는 로티안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르네이지 않던가.

질리언과도 어느새 언니동생하고 있는 르네의 친화력을 떠올린 유성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유성을 보며 잠시 당황하던 지미는 일단 예를 표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 마주 예를 표한 유성은 주변을 한차례 돌아본 뒤 물었다.

"기사들과 장병들은?"

"연병장에 도열해 있습니다."

지난번과 달리 방문 일정을 미리 전파한 유성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딱히 방문 일정을 전파할 생각이 없었다.

뭔가 사단장이 부대 방문하겠다고 공지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단장이 온다 → 사단장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 병사들이 고생한다.

이 얼마나 명확한 프로세스인가.

하지만 결국 방문 일정을 전파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개척에 직접 참여하는 기사들이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게 그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단장이 일주일 뒤에 방문한다고 공지하고 방문하기 vs 사단장이 갑자기 방문해서 부대 뒤집어 놓기.

정도야 다르겠지만 둘 다 고달프기는 매한가지였다.

"계승자님 오신다고 준비하고 있나 봐요."

르네가 기대된다는 듯 웃으며 말하자 지미가 쓰게 웃었고, 유성 역시 쓰게 웃었다.

"사열 지휘는 누가 하지? 역시 케이트인가?"

"예, 케이트 대장이 다른 기사들보다 제식을 중시하는 편입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답한 지미는 미리 돌아가서 알리겠다며 예를 표한 뒤 물러갔다.

그러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질리언이 새삼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이 생각보다 크군요."

상태창으로 볼 때보다 훨씬 더 큰 느낌이었다.

르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언니. 유성 성으로 볼 때보다 4배 정도 넓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성인 장정을 3등신으로 표시하는 유성 성이었으니 축적 면에서도 실제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히 넓어지긴 했구나.'

지난번에 왔을 때는 그래도 주둔지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는데 개척 한 번 했더니 아예 다른 구간이 생겨나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르네 말로는 기본보다 두 배쯤 커졌다고 했지.'

유성 성에 대해서는 최고 전문가라 할 수 있을 르네의 설명을 떠올리며 새로이 개척된 구간에 들어선 유성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들어가자마자 연병장에 도열해 있는 병사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와아."

르네는 물론이고 질리언 역시 눈을 빛내며 감탄했다.

이전 전투 때와는 부대의 규모는 물론이고 외양까지 크게 발전해 있었다.

더욱이 밖에서는 한 번에 세 부대만 소환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는 데다가 예비대 인원들도 나올 수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전원 집합이니 그 규모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농노 부대 시절의 허름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정예 보병대 50인은 장비만 좋아진 게 아니었다.

다들 벌크업이라도 했는지 키와 덩치가 좋아졌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지미는 농노 부대였던 시절보다 덩치가 두 배는 커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정예 보병대 옆에 자리한 엘프 궁병대.

밖에서는 한 명도 찾아보기 어려운 엘프가 50명이 넘게 모여 있는 광경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었다.

전반적으로 호리호리했지만 다들 키가 크고 늘씬한데 얼굴까지 예쁘고 잘생겼으니 절로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엘프 부대가 일행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잠시뿐이었다.

바로 그 옆에 훨씬 더 화려한 부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천마 기병대.

예비대까지 합쳐 근 40에 가까운 페가수스 라이더들이 저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광경은 실로 환상적이었다.

"와아...."

르네가 아닌 질리언이었다.

날갯짓하며 내려오는 페가수스 무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일종의 사열 쇼인가.'

이래서 방문 일정 알리는 걸 고민했던 것인데.

그래도 멋진 광경이긴 해서 기분이 좋기는 했다.

저것도 다 훈련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죄책감도 덜했고 말이다.

어찌 되었든 엘프 부대 옆에 40여 명의 천마 기병대가 안착했다.

선두에 자리한 것은 역시나 에니카 위에 올라탄 다이애나였다.

그리고 다시 그 옆.

중갑 보병대 40인이 10명씩 4열 횡대로 모여 방진을 이루고 있으니 그 위압감이 실로 굉장했다.

더욱이 다들 덩치가 산만 하다 보니 기실 그리 많지 않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움직이는 성을 보는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도열해 있는 것은 퍼거스와 멜리사를 필두로 한 비전투 인원들이었다.

대장장이, 요리사, 금속 제련사 등등.

모양새는 제일 빠졌지만 다들 중요한 인재들이었다.

그렇게 유성이 모두를 훑어보고 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예 보병대의 선두에 있던 케이트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대 차렷."

각각의 부대에 부대장들이 있었지만 역시나 카멜롯의 군세 전체를 지휘하는 것은 케이트였다.

그녀의 명령에 도열해 있던 전원이 자세를 바르게 했다.

절로 엄숙해진 분위기에 질리언이 어깨를 움츠리고 르네가 마른침을 삼킬 즈음.

케이트가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선창했다.

"계승자님께 경례,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2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시에 예를 표하며 목소리를 모으자 유성은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카멜롯의 군세.

유성 자신의 군단.

독재자들이 가장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이 사열식을 할 때라는 이야기를 떠올린 유성은 쓴웃음을 삼킨 뒤 마주 예를 표하였다.

"카멜롯의 영광을."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린 뒤 내리자 카멜롯의 군세가 동시에 주먹을 내리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군대, 특히 백병전을 중심으로 한 작금의 군대에 있어 제식은 단순한 허례허식이 아니었다.

발맞춰 걷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대라는 조직을 지탱하는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수많은 개인들로 구성된 조직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만 진정한 군대의 힘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유성은 눈앞의 장병들이 그저 이름만 정예가 아닌 진정한 강병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계승자님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케이트가 다시 대표로 말하자 유성은 빙긋 웃은 뒤 모두가 가장 기다린 말을 꺼냈다.

"쉬어, 그리고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해산. 일상 활동에 복귀하도록."

소리 없는 환호성이 들린 것은 착각이 아닐 터였다.

병사들은 오와 열을 칼같이 지킨 채 무표정한 얼굴로 질서 있게 퇴장했지만 유성은 느낄 수 있었다.

병사들의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하다는 것을 말이다.

케이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침묵하는 사이 각각의 부대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케이트 곁- 정확히는 유성 앞에 모여들었다.

"다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네."

"계승자님도 건강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흐흐, 사열 연습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케이트가 워낙 쪼아대서리."

케이트에 이어 헥토르가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다이애나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바나데인은 쓴웃음을 지었는데 아무리 봐도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케이트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군대에 제식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다들 열심히 한 거고."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헥토르가 다시 능청을 떨자 케이트는 무척이나 뚱한 표정을 지었고, 유성은 작게 웃었다.

이러나저러나 사이들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 다시 한번 소개하지. 질리언 성녀님이시다. 철벽의 옴팔로스께서 직접 신탁을 내려 선정하신 분이다."

소개 자체도 미리 예정되어 있었기에 질리언은 당황하는 대신 한 차례 성호를 긋고 말했다.

"질리언 예나트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케이트입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바나데인이다."

"다이애나입니다."

"허허, 헥토르라우."

기본적으로 전투 중에만 소환되는 기사들이었던 터라 질리언에게는 기사들 대부분이 초면이었다.

그나마 일면식이 있는 케이트와 바나데인도 그저 같은 성벽 위에 선 덕에 먼발치에서 본 것이 다였으니 사실상 이번이 첫 대면이었다.

"르네와 마찬가지로 성녀님 역시 카멜롯의 군세에 속한 분이시니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그렇군요. 지난번 전투에서의 활약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성녀님이 합류하신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케이트가 자애롭게 웃으며 말하자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던 질리언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대놓고 하는 칭찬이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질리언이 인정욕구가 강한 편이긴 하지.'

아무래도 일반 성직자 이하의 신성력 때문에 괄시를 당하고 살아서 그런 것 같았다.

질리언은 케이트에 이어 나머지 기사들을 돌아보았지만 다이애나는 늘 그렇듯이 침묵했고, 헥토르는 질리언의 활약을 보지 못했고, 바나데인은 이런 걸 칭찬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터라 별다른 칭찬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 실망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간 질리언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꾹 참은 유성은 바나데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바나데인, 부대원들이 갑자기 다 엘프가 되었는데 혹시 뭐 문제 된 것은 없었나?"

"딱히 없었다. 그리고 아마... 부대원들은 원래부터 엘프였을 거다. 이제야 본모습을 찾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인간에서 엘프가 된 것이 아니라 본래 엘프였다.

유성이 떠올렸던 가설 그대로였다.

그랬기에 유성은 다이애나를 돌아보았다.

"다이애나, 페가수스들은 어떻지? 그들도 마찬가지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짧게 답한 다이애나는 옆에 세워둔 에니카를 한 번 쓰다듬었다.

'엘프와 페가수스 모두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예상대로 나중에 천사병이 등장한다면 지금 부대원들 중에 본래 천사였던 자들이 있다는 것일까?

흥미로운 사색거리였지만 유성은 깊이 생각하는 대신 의식을 전환했다.

오늘 방문한 목적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개척에 나설 준비는 다들 되었나?

"준비되었습니다."

케이트가 대표로 말하자 다른 기사들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동의를 표했다.

"좋아, 그럼 신전에 들른 뒤 바로 개척을 시작하겠다."

개척이 끝나면 바로 돌아가야 했으니 신전에 들를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유성이 신전에 관심을 표하자 케이트가 활짝 웃으며 길잡이를 자처했다.

평소보다 꽤 들뜬 모습이었는데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따로 신관이 없어서 케이트 언니가 신관 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역시 르네.

유성 성 관찰의 전문가.

유성은 확실하냐고 되묻는 대신 바로 수긍한 뒤 케이트의 뒤를 따라 신전으로 향했다.

제15장 – 영주 회의 (5)

호수의 여신의 신전은 새로이 개척된 구간에 위치했기에 멀리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연병장 북측에 위치한 금속 제련소 바로 옆에 자리한 커다란 신전.

호수의 여신의 신전답게 중앙에는 원형의 호수가 있었는데,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호수 주위에는 키가 큰 나무들과 기둥들이 섞여 자연스럽게 일종의 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성당이나 교회보다는 그리스 로마 시절의 신전에 가까운 형상이었다.

"호수 중앙에 여신상이 있습니다."

무척이나 맑고 푸른 호수 중앙에 자리한 작은 섬.

섬 위에는 하얗고 작은 사당과 멀리서도 잘 보이는 석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곳은 평범한 호수가 아닌 여신의 가호가 어린 곳. 계승자님께서는 호수에 닿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케이트가 마치 신관처럼 자애롭게 웃으며 말하자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르네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유성은 잠시 다리도 없고 배도 없는 호수를 보다가 케이트를 돌아보았고, 이내 그녀가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라고 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가능할까요?

유성의 물음에 모시는 신은 달라도 전문가라 할 수 있을 질리언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호수의 여신께서 굽어살피실 겁니다."

어쩐지 그냥 잘 모르겠다고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유성은 일단 고개를 끄덕인 뒤 호숫가에 섰다.

바나데인이나 헥토르면 모를까, 케이트가 이런 일로 헛소리를 할 리가 없었기에 유성은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대신 바로 호수의 표면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면이 찰랑거렸다.

마치 눈을 밟을 때처럼 발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잠깐뿐이었다.

호수 위에 선 유성은 정말로 눈 위를 걷듯이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작은 기적.

르네는 두 손 모아 호수의 여신께 기도를 올렸고, 기사들은 무척이나 그리운 광경을 마주한 것처럼 유성의 뒷모습을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빙판 위를 걸을 때처럼 조심조심 걷던 유성은 어느 순간 자신감을 가지고 보폭을 크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착한 작은 섬.

호수의 여신의 신상은 얇고 소매가 긴,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신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탐스러운 머리칼은 무척이나 길어 엉덩이에 닿았고, 머리에 쓴 베일은 턱 끝에 닿아 얼굴 전체를 가렸다.

배 앞에 모아 쥔 두 손은 비어있었지만, 어쩐지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수의 여신.

인간의 수호자.

유성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온 장본인.

하지만 눈앞에 자리한 것은 결국 신상일 뿐 호수의 여신 본인은 아니었다.

유성은 여신상을 향해 한 차례 예를 표한 뒤 그 너머에 자리한 사당을 보았다.

석조로 된 지붕과 기둥 사이에는 빈 화로가 놓여 있었다.

유성은 더 다가가지 않았다.

유성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은 다가가선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유성은 다시 호수의 여신의 신상을 마주한 뒤 예를 표했다.

그러자 청량한 기운이 유성의 전신을 어루만지듯 지나갔다.

[그대에게 나의 축복을-]

언젠가 꿈에서 들었던 청아한 목소리.

"빛이 함께 하기를."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말을 읊조린 유성은 그대로 천천히 돌아섰다.

빛이 함께하기를.

빛을 잃지 않기를.

왕국검법과 성왕검법을 펼칠 때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른 말.

어쩌면 방금의 말 또한 유성 자신이 계승받은 무언가일지 모를 말이었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좋았다.

여신의 축복 덕분인지 발걸음도 가볍고 가슴 역시 시원했다.

유성을 보는 모두의 시선, 특히 르네의 얼굴도 무척이나 밝-

'-다기보다는 무척 신기한 걸 마주한 눈 아닌가?'

호수 위를 걸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었다.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랬기에 유성은 홀로 추리하는 대신 그냥 대놓고 물어보았다.

"르네, 왜 그래?"

"계승자님한테서 빛이 나요."

"응?"

"후광이요, 후광. 지금 막 빛나고 계세요."

르네의 말에 스스로를 돌아본 유성은 깜짝 놀랐다.

르네의 말마따나 황금빛 후광이 등 뒤에서 비추기라도 하는지 유성 자신의 전신에 황금빛이 은은하게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유성은 다시 묻는 대신 바로 상태창을 열었다.

[호수의 여신의 축복]

[남은 유지 시간: 58분 12초]

[축복의 유지 시간 동안 체력과 마력이 두 배로 강해집니다.]

[각종 능력치가 1.5배 증폭됩니다.]

[호수의 여신의 빛이 당신을 수호합니다.]

[부정한 기운에 대한 방어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오."

실로 대단한 축복이었다.

"르네, 케이트. 지금 바로 출발하자."

축복의 유지 시간이 남아 있을 때 개척 전투를 시작해야 했다.

유성이 재촉하자 케이트가 이번에도 활짝 웃은 뒤 경쾌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장벽 너머에는 각종 위험과 악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척에 성공한다면 새로운 영역뿐만 아니라 잊히고 파묻힌 기억과 보물들 역시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개척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왕과 마법사, 그리고 왕의 기사들뿐입니다.

제2구역의 개척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지난번처럼 장벽 위에 초대장을 붙이니 개척 문구가 떠올랐다.

제2지역 개척.

마지막으로 모두를 돌아본 유성은 바로 예를 선택했다.

* * *

빛.

그리고 공간의 이동.

눈을 뜬 유성의 눈앞에는 안개가 짙게 깔린 숲이 펼쳐져 있었다.

맑았던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고, 먼 곳에서부터 불어온 스산한 바람에는 차가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

유성은 일단 일행이 모두 제대로 도착했는지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홀로 비틀거린 르네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린 뒤 주변을 보며 말했다.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지 않아요?"

"딱 그래 보이긴 하군."

헥토르가 흐흐 웃으며 답하자 왜인지 움찔한 질리언은 두 손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유성은 지난번 개척 때처럼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이번에는 딱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계승자님, 이번 적들은 무엇이죠?"

"잠시만. 지금 확인해 볼게."

케이트에게 답한 유성은 상태창을 열었다.

[밴시 0/500]

[밴시 여왕 0/1]

[개척 목표: 밴시 여왕을 쓰러트리고 구역을 해방하라.]

밴시.

원한을 품고 죽은 여자 망령.

"어, 진짜 유령이네."

유성이 말한 순간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르네와 질리언은 서로에게 바짝 붙으며 입술을 깨물었고, 케이트는 두려워하는 대신 곤란하단 얼굴이 되어 말했다.

"밴시라면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을 겁니다."

"흐흐, 뭘 걱정하나. 오라 씌워서 패면 되는데."

헥토르가 그리 말하며 도끼날에 붉은빛 오라를 씌워보였다.

그러자 케이트 역시 고개를 끄덕인 뒤 황금빛 오라 블레이드를 형성했고, 다이애나 또한 말없이 창날 위에 푸른 오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유성은 바나데인을 돌아보았다.

넌 안 하냐는 시선에 바나데인은 오라를 일으키는 대신 활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화살에는 오라를 씌울 수 없다."

정확히는 씌울 수 있긴 했지만 손을 떠나는 순간 오라가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즉, 이번 적들을 상대로는 바나데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행의 유일한 궁수인 바나데인을 그냥 놀릴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질리언을 돌아보며 물었다.

"성녀님, 혹시 화살에 축복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무기에 신성력을 더하는 것.

유성의 물음에 질리언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법 당차게 답한 질리언은 다소 긴장된 얼굴로 바나데인에게 다가갔고, 르네는 등 뒤에서 두 팔을 작게 흔들며 소리 없는 응원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감은 채 바나데인의 화살통에 손을 대고 기도문을 외운 질리언은 눈을 빼꼼 뜨더니 환히 웃으며 외쳤다.

"돼, 됐다!"

은은한 빛을 띠기 시작한 화살들을 보며 기뻐하던 질리언은 흠흠 헛기침을 토하더니 다시 우아한 미소를 지었고, 유성과 나머지 일행들은 그녀를 민망함의 바다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모른 척을 해주었다.

"슬슬 오는 것 같군."

질리언에게 받은 화살통을 만지작거리던 바나데인이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안개 너머에서 옅은 녹색 형상의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한 번에 몰려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동하면서 싸울 것인지 묻는 케이트의 시선에 유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자리를 지킨다. 질리언 성녀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성의 물음에 질리언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이해했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펼치는 옴팔로스의 방벽.

질리언은 벽 네 개를 솟구치게 해 사방을 막더니 다섯 번째 벽은 바닥이 아닌 정면에 위치한 벽면에서 솟구치게 만들었다.

"오."

벽면에서 수평으로 벽이 솟구치니├ 모양이 되어 밟을 수 있는 바닥이 생긴 셈이 되었다.

"이거 꽤 그럴싸하구만."

순식간에 만들어진 신성의 요새 위에 선 헥토르는 감탄한 얼굴로 방벽을 둘러보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그런데 이러면 우리는 어떻게 공격하는 겁니까? 성벽 기어오르는 놈들 수성전하듯이 잡는 건가?"

헥토르의 물음에 바나데인은 훗 하고 웃으며 활에 화살을 재었고, 유성은 저래봐야 몇 발이나 쏘겠냐고 괄시하는 대신 더 좋은 것을 보여주었다.

"열화의 검."

진은의 검을 타고 오르는 황금의 불꽃.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때를 맞추듯 귀곡성을 지르며 돌진해오는 밴시들을 돌아본 유성은 그대로 진은의 검을 휘둘렀다.

오라 블래스트.

열화의 검기.

구 형태로 뭉친 황금의 검기가 밴시들의 선두를 강타한 순간 폭발과 함께 커다란 불꽃이 솟구쳤다.

[밴시 17/500]

[밴시 여왕 0/1]

유성이 웃으며 두 번째 검기를 준비하자 르네 역시 따라 웃으며 오른손 위에 화염구를 형성하였다.

쾅! 쾅! 쾅! 쾅! 슈슉! 쾅!

유성과 르네가 화염 폭격을 쏟아내는 사이사이로 바나데인의 화살이 날았다.

질리언은 성벽을 유지하느라 다른 신성마법을 쓰지 못했지만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하였다.

옴팔로스의 신성이 깃듯 방벽에 접근한 밴시들이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기 때문이다.

성벽에서 멀어지면 폭격이 쏟아지고, 가까이 가면 신성력에 노출된다.

"그래, 가끔은 쉽게 가야지."

늘 고생만 할 수는 없는 법.

호수의 여신의 축복 덕분에 마력과 생명력이 모두 두 배가 된 유성이 검기를 난사하자 밴시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끼아아아아아!"

밴시들 사이에서 유령마를 탄 개체들이 등장했지만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특수병종답게 숫자가 적었고, 일행 사이에는 바나데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슈슉! 슉! 슉! 슉!

신성이 깃든 화살들이 거짓말처럼 밴시 장군들의 미간 사이를 꿰뚫었다.

"계승자님! 슬슬 오는 것 같아요!"

소멸시킨 밴시들의 숫자가 300이 넘은 순간이었다.

르네의 말마따나 무언가가 오는지 숲을 에워싼 안개가 갑자기 짙어지며 사이한 기운을 발산하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종소리.

안개를 뚫고 나타나는 거대한 제단.

탑처럼 솟은 제단에는 바퀴가 달려 있었고, 유령마 여덟 마리가 제단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 선 자.

밴시 여러 마리를 시녀처럼 곁에 둔 밴시 여왕이 귀곡성을 지르자 남아있던 밴시들이 함께 비명을 지르며 제단에 모여들더니 마치 인신공양이라도 하듯 제단 위의 큰 불을 향해 몸을 던져댔다.

녹색의 불꽃이 점점 더 커져갔다.

제단이 방출하는 사이한 기운이 강해졌고, 흐릿하던 밴시 여왕의 형상이 점차 뚜렷해졌다.

검기를 날리기에는 제단의 위치가 너무 멀었고, 바나데인이 쏜 화살은 제단이 뿜어대는 사이한 기운에 막혀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 이제 어찌할 것인가.

밴시 여왕이 남은 밴시들을 모두 흡수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방벽을 해제하고 달려나갈 것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계승자님."

질리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저,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황상 밴시 여왕을 상대할 방법이라도 떠올린 모양이었다.

"말씀하시죠."

유성의 말에 질리언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차분한 어조로 설명하였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유성은 몹시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봅시다."

황당하지만 그럴싸한 질리언의 계책.

유성이 수락하자 질리언은 옴팔로스의 방벽을 해제하고 군마 위에 올랐다.

모두와 함께 밴시 여왕을 향해 돌진했다.

제15장 – 영주 회의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