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60-70

제17장 - 잠입 (3)

중갑 기병대 기용을 위한 선결 조건.

대장간 레벨3, 금속 제련소 레벨2, 마구간.

세 가지 요소가 지금 모두 갖춰졌다.

그랬기에 유성은 말을 타고 달리며 손을 놀렸다.

그러자 기대한 문구를 담은 새하얀 빛의 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병종

[중갑 기병대(15인) 추가: 150pt]

[중갑 기병대 증원(1인): 15pt]

[중갑 기병대장 추가: 40pt]

예상대로 비쌌다.

하지만 예상한 바였다.

유성 성과 빛의 군세의 전반적인 등급이 높아짐에 따라 필요 포인트가 무섭도록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라리 좋았다.

예전에 처음 경기병대를 추가할 때처럼 막 3인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했으니 말이다.

'20인 부대 완편에 필요한 포인트는 265포인트!'

역시 비쌌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었다.

밴시 여왕을 쓰러트린 이후 지금까지 포인트를 모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영주 회의 탈출 과정에서 생긴 포인트를 전부 모아둔 것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주군! 놈들과의 거리가 가깝습니다!"

뒤를 돌아본 루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유성은 뒤를 돌아보는 대신 다시 앞을 보며 손을 놀렸다.

상태창을 볼 수 있는 르네와 질리언이 유성의 손끝과 상태창을 보았다.

"잡아라! 잡아!"

지휘관으로 보이는 랫맨이 악을 써대자 늑대 쥐에 탄 랫맨들이 채찍질을 해댔다.

늑대 쥐들이 속도를 더욱 높였고, 유성 일행과 놈들 사이의 거리는 이제 겨우 십여 미터 남짓에 불과했다.

그리고 유성이 측면을 보았다.

그대로 말을 달리며 손을 뻗었고,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했다.

"중갑 기병대! 집결하라!"

빛이 일었다.

새벽 직전의 가장 어두운 밤을 몰아내듯 눈부신 황금빛 섬광이 아침의 햇살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키아악!"

선두에서 달리던 놈들이 갑작스러운 빛에 놀라 발을 헛딛거나 넘어졌다.

덕분에 추격하던 놈들의 대열이 엉망이 되었지만 직후에 일어날 일에 비하면 사소한 사건에 불과했다.

눈부신 빛 사이.

거대한 군마를 탄 기병들이 일렬로 도열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중갑 기병대란 이름답게 기수들은 물론이고 군마들까지도 모두 두터운 철갑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갈색 말을 탄 장신의 기사가 긴 창을 늘어트린 채 자리했다.

은색의 갑주를 입은 다른 기병들과 달리 그는 금색 선으로 용의 형상이 새겨진 짙고 푸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중갑 기병대의 대장.

기사 롤랑드.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투구를 쓴 그는 창끝으로 랫맨들의 측방을 가리켰다.

"추행진을 펼쳐라!"

명령하며 롤랑드가 선두로 나섰다.

그러자 일렬로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말을 몰아 거대한 쐐기 형태의 추행진을 형성하였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롤랑드가 선창하며 돌진하자 중갑 기병들 역시 크게 외치며 창끝을 앞으로 세웠다.

롤랑드를 포함해도 스물 한 기밖에 되지 않았지만 추행진을 펼친 채 돌진하는 중갑 기병대의 위용은 전차 군단을 방불케 했다.

"피, 피해!"

"으아아!"

혼비백산한 랫맨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지만 그런다고 피할 수 있는 돌진이 아니었다.

중갑 기병대의 성난 돌진이 그대로 랫맨들의 측방을 후려쳤다.

쾅! 콰가가가강!

랫맨들이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창에 찔려 죽은 놈들보다 군마에 치이거나 밟혀 죽은 놈들이 훨씬 더 많았다.

더욱이 두려운 것은 중갑 기병대의 돌진력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꿰-뚫어라!"

롤랑드가 명령하며 랫맨들을 짓밟고 달렸다.

중갑 기병대 모두가 그런 롤랑드를 따라 달리니 랫맨들의 부대는 짓밟히다 못해 완전히 양분되고 말았다.

"와아."

기어코 랫맨들의 부대를 관통해버린 중갑 기병대를 보며 르네가 감탄했다.

루안은 흥분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고, 질리언 역시 가슴이 벅차올라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명치 부근을 짓눌렀다.

그리고 유성은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랫맨들의 숫자를 헤아림과 동시에 땅굴 안으로 따라 들어왔을 놈들의 숫자 역시 가늠하였다.

르네가 빛의 새로 정찰할 때 확인해두었던 사람들이 감금된 장소들을 기억했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그 이상을 노린다.

"중갑 기병대! 다시 쳐라!"

유성이 크게 명령하자 롤랑드가 중갑 기병대를 이끌고 달리며 선회를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랫맨들이 기업을 하며 도망치고자 하니 대열이 다시 한번 엉망진창이 되었다.

"정예 보병대! 엘프 궁병대! 집결하라!"

유성이 명령했다.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상황이었던 터라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며 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르네가 그런 유성을 붙잡아주었다.

그리고 황금빛이 일었다.

케이트를 필두로 하는 정예 보병대와 바나데인이 이끄는 엘프 궁병대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을 탈환한다."

유성이 말했고 케이트가 인지했다.

그녀가 깃발을 높이 드니 지미가 뿔나팔을 크게 불었고, 정예 보병대가 랫맨들을 향해 돌진했다.

"장전! 너머를 쏴라!"

바나데인이 명령과 동시에 효시를 쏘자 엘프 궁병대 모두가 저마다의 시위를 당겼다.

엘프들이 쏜 화살이 정예 보병대의 머리 위를 지나 랫맨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키악! 칵! 컥!"

선두에 있던 랫맨들은 정예 보병대의 칼에 맞아 죽었고, 뒤에 있던 놈들은 엘프들의 화살에 당했다.

그리고 중간에 있던 놈들에게 다시 한번 재앙의 철퇴가 후려쳐졌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

중갑 기병대.

돌진 그 자체만으로 전장의 재앙을 일으키는 자들.

랫맨의 숫자는 수백이었지만 무의미했다.

순식간에 백 마리 이상이 죽어나가니 완전히 정신이 나간 랫맨들이 도주를 택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도망쳐!"

카멜롯의 군세가 남쪽에 있으니 랫맨들은 자연스럽게 북쪽- 즉, 자신들이 나왔던 루셴을 향해 도망쳤다.

그 모습을 본 성벽 위의 랫맨 지휘관은 퍼뜩 정신을 차려 다급히 명령했다.

"성문을 닫아! 어서!"

밖에 나간 랫맨들 따위 버려버린다.

랫맨 지휘관의 명령에 랫맨들이 서둘러 성문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닫지 마! 닫지 마!"

랫맨들이 필사적으로 달리며 외쳤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도개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성은 질리언을 돌아보았다.

이미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

"옴팔로스의 방벽이여!"

벽이 솟구쳐 올랐다.

도개교와 땅 위로.

갑자기 나타난 신성의 방벽에 막힌 도개교는 올라가지 못했고, 랫맨들은 서둘러 다리를 건너 반쯤 닫힌 성문에 달라붙었다.

"들여보내 줘!"

"안 돼! 막아!"

랫맨들이 옥신각신하는 그때 롤랑드가 중갑 기병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좁은 대열! 간다!"

3열 종대.

롤랑드를 필두로 하여 중갑 기병대가 줄줄이 열을 갖추었고, 롤랑드는 그대로 도개교를 지나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으악! 악!"

"안 돼!"

공포에 질린 랫맨들이 비명을 지르며 성문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성문이 활짝 열렸고, 롤랑드와 중갑 기병대는 랫맨들을 짓밟으며 성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정예 보병대! 우리도 간다!"

깃발을 높이든 케이트를 따라 정예 보병대가 성문을 향해 달렸다.

바나데인이 이끄는 엘프 궁병대는 따라서 달리는 대신 저마다 성벽 위를 저격, 성벽 밖으로 활을 내밀던 랫맨들의 머리와 가슴을 꿰뚫었다.

"휩쓸어라!"

롤랑드는 중갑 보병대와 함께 멈추지 않고 달렸다.

뚜렷한 목적 없는 돌진이었지만 그들의 움직임만으로도 성 안에 혼란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한편 정예 보병대는 어느새 머리 위로 나타난 빛의 새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성문을 향해 달리기 직전 유성에게 들은 명령대로 교회나 창고 같은 곳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주었고, 지미가 소리 높여 외쳤다.

"구원군이다! 구원군이 왔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왔다!"

"흑기사! 로티안의 흑기사!"

이제는 지미와 정예 보병대만이 아니었다.

풀려난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왔다.

괴물들의 군대에게 연전연승한 로티안의 구원자가 왔다.

이미 주변 일대에 이름이 널리 퍼진 유성이었다.

볼보 남작령에서 구원받았던 이들은 다시 한번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유성의 이름에 열광했다.

"우아아아아아!"

사람들이 횃불을 비롯해 무기로 삼을만한 것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랫맨들에게 제압당했을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병사들이 있다.

싸우는 자들이 있다.

무엇보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있다!

랫맨들에게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들이 노성을 터트리며 랫맨들에게 달려들었다.

유성의 수공과 성문 밖의 전투로 인해 이미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랫맨들이었다.

사기까지 꺾인 상태니 제대로 된 전투가 될 리 없었다.

이번에는 랫맨들이 싸우기도 전에 도망쳤고, 성안의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이, 이 개 같은!"

문자 그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땅굴 밖으로 기어 나온 리갈이 욕지거리를 토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였지만 눈앞의 광경이 말해주고 있었다.

실패다.

영주들을 몰살하기는커녕 땅굴이 무너졌고, 루셴마저 빼앗기게 생겼다.

리갈은 손을 떨었다.

영주들 건이야 다크 엘프들의 탓이었지만- 아니, 이 모든 사태가 모두 거드름만 피울 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다크 엘프들 때문이었지만 족장들이 그런 것을 알아줄 리 없었다.

이 정도 실패를 했으니 리갈 자신의 목숨은 이제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르키스 이 빌어 처먹을 놈 같으니!"

나르키스가 보이지 않았다.

리갈 자신이 살았는데 그가 죽었을 리 없으니, 먼저 빠져나온 뒤 성안의 상황을 보고 도주한 것이 분명했다.

리갈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르키스 놈을 잡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하악, 하악, 하."

리갈은 거친 숨을 토하며 품속을 뒤졌다.

녹색 액체가 든 시약병을 잠시 바라본 그는 뚜껑을 부수듯 뜯어내더니 단숨에 안에 든 약을 삼켜버렸다.

"그윽... 극... 악...."

마치 독이라도 먹은 것처럼 꺽꺽거리던 리갈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온 몸에 혈관이 두껍게 일어나는가 싶더니 마치 변신이라도 하듯 근육이 부풀며 덩치 자체가 커졌다.

랫맨에게 일시적으로 오우거의 힘과 트롤의 재생력을 부여해주는 약물이었다.

약 효과 끝나면 사용자는 반드시 죽는 극약이었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크아아아아아!"

리갈이 포효하자 도망치던 랫맨들이 순간 멈춰 섰다.

생존 본능을 초월한 복종의 본능이 그들을 멈춰 세운 것이었다.

"도망치지 마라! 집결해라! 내 곁에 모여라!"

리갈의 명령에 랫맨들이 모여들었다.

그래도 아직 수백 마리 넘게 남아 있던 랫맨들이 한곳에 뭉치기 시작하자 그 위용이 제법 대단했다.

패닉 상태에 빠졌던 랫맨들도 저들의 숫자가 늘어나니 안정감을 되찾았다.

유성은 그런 랫맨들과 리갈을 보았다.

코볼트의 왕자 때와 같았다.

오우거처럼 거대한 저 랫맨을 쓰러트리면 랫맨이 몇이 남았든 이 전투는 승리한다.

"르네."

유성의 부름에 르네는 유성의 허리를 한 번 꼭 끌어안더니 레이니의 등에서 내렸고, 무어라 말하는 대신 유성에게 마법을 걸어주었다.

피로 회복의 마법.

유성은 웃었고, 르네 역시 작게나마 웃었다.

이기고 돌아오라는 듯 움켜쥔 주먹을 들어올렸다.

케이트가 자신의 깃발을 유성에게 주었다.

창 대신 깃발을 옆구리에 낀 유성은 말을 앞으로 몰았고, 롤랑드와 중갑 기병대가 그런 유성의 곁에 자리했다.

"기사 롤랑드, 주군을 뵙습니다."

"유성이다. 자리가 좋지 않지만 경을 만나 무척이나 반갑다."

유성의 말에 롤랑드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투구로 얼굴을 반 이상 가렸지만 하관만 봐도 최소 루안 이상의 미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성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어설프게나마 오와 열을 갖춘 채 싸울 태세를 하는 랫맨들과 놈들 사이에 자리한 거대한 랫맨- 리갈을 보며 말했다.

"정면돌파한다. 선두에는 내가 서겠다."

유성의 말에 롤랑드는 다시 시원한 미소를 짓더니 호쾌하게 답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유성이 말을 달렸다.

롤랑드와 중갑 기병대가 다시 한번 쐐기 진형을 이룬 채 유성의 뒤를 따랐다.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유성의 두 눈에 황금빛 안광이 어렸다.

제17장 - 잠입 (4)

유성이 얻은 최초의 기사단 명령인 '왕의 시간'은 휘하의 기사들이 가진 기사도를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실로 굉장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왕의 시간이 끝난 이후에는 심신 모두가 극도로 소모되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 외에는 사용을 자제하는 능력이기도 했다.

왕의 시간을 발동시킨 유성이 깃대를 곧게 세우고 돌진하며 헥토르의 기사도를 사용했다.

카멜롯의 거신병.

지면을 박찬 순간 유성을 태운 르네의 군마 레이니의 전신이 거짓말처럼 부풀어 올랐다.

유성 역시 부풀어 오르니, 레이니와 유성의 덩치가 세 배 이상 거대해졌다.

쾅! 쾅! 쾅! 쾅!

레이니가 땅을 한 번 박찰 때마다 지면이 요동쳐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히, 히익!"

"끼아아!"

보병 입장에서 보면 평범한 중갑 기병의 돌진조차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몇 배는 거대한 거인이 돌진해오니 두려움에 정신들이 나가버렸다.

"도망쳐!"

"으아아!"

리갈의 명령을 받고 모여들었던 랫맨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성에 의해 자극된 생존 본능이 두려움과 공포로 만들어진 랫맨들의 복종심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리갈은 충혈된 눈으로 이를 악 물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랫맨들을 붙잡거나 무어라 명령을 하는 대신 정면에서 돌진해오는 유성을 보았다.

"으, 으아아아아아!"

리갈은 도망치지 않았다.

두 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약물로 증폭된 마력을 모조리 방출하였다.

단순한 마력의 방출.

제대로 된 마법이 아니었지만 영창과 구성의 과정이 없었기에 그만큼 빨랐다.

거칠게 방출된 시커먼 마력이 유성을 향해 뻗어나갔다.

유성은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방향을 틀지도 않았고, 방패를 세워 막지도 않았다.

그저 기사도를 해제할 따름이었다.

콰하-!

리갈의 마력이 순식간에 본래 크기로 돌아간 유성의 머리 위를 지나 조금 더 나아가더니 그대로 지면과 충돌해 폭발했다.

콰앙!

주변 일대를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충격파 역시 굉장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빗나갔다는 것이었다.

"비, 빌어처먹을!"

리갈이 욕지거리를 토하며 재차 마력을 방출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리였다.

유성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유성은 정면을 보았다.

깃대를 움켜쥔 팔에 힘을 주며 다시 한번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세 가지 기사도의 조합.

케이트의 카멜롯의 영광.

바나데인의 꿰뚫는 일격.

다이애나의 충격의 다이애나.

유성의 전신에서 일렁이던 황금빛 오라가 깃대의 끝에 집중되었다.

밝게 빛나기 시작했고, 그 빛은 마치 아침의 영광을 밝히는 태양처럼 찬란했다.

삼기사 결합.

라이징 임팩트.

코볼트의 왕자를 분쇄했던 일격이 리갈에게 닿은 순간 무시무시한 충격파와 함께 굉음이 일었다.

찬란한 황금의 빛이 한순간 밤을 몰아내고 세상 전체를 비추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충격을 견디지 못한 리갈의 몸이 폭발하듯 붕괴했다.

부채꼴로 뻗어나간 충격파에 휩쓸린 랫맨 수십 마리가 문자 그대로 박살이 났다.

그리고 중갑 기병대가 돌진했다.

유성의 좌우에서 쐐기 진형을 이루었던 그들이 유성을 지나 충격과 공포에 빠져 있는 랫맨들을 덮쳤다.

콰가가가가가가가!

짓밟고 부수고 나아갔다.

중갑 기병대를 운 좋게 피한 랫맨들조차 도망치다 서로를 밀고 자빠져 적잖은 수가 죽거나 다치고 말았다.

레이니를 멈춰 세운 유성은 거친 숨을 토하며 그 광경을 보았다.

케이트의 기사도인 카멜롯의 영광으로 보호받은 덕분인지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며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지켜보던 인간들도 그제야 두 손을 높이 들며 환호했다.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에 순간 말을 잊은 것은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흑기사!"

"흑기사!"

"로티안의 흑기사!"

"전군! 돌진하라!"

케이트의 명령에 정예 보병대가 랫맨들을 향해 돌진했고, 루셴의 주민들이 정예 보병대의 뒤를 따라 돌진했다.

바나데인이 이끄는 엘프 궁병대는 어느새 지붕 위 같은 고지대에 자리 잡은 채 도망치는 랫맨들을 하나씩 사살했다.

"하아... 하아...."

유성은 레이니의 등 위에 올라탄 채 연신 거친 숨을 토했다.

전신이 뜨거웠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유성은 쓰러지거나 축 처지는 대신 현재의 자세를 유지했다.

리갈이 죽고 랫맨들도 분쇄된 지금 땅굴에서 보았던 다크 엘프들의 수장은 도망칠 가능성이 높았다.

유성 자신이 틈을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유성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리갈이 싸우는 모습을 관찰하던 나르키스는 살아남은 다크 엘프들과 함께 퇴각했다.

유성이 사실은 쓰러지기 직전 상황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그들이니, 성안의 기세가 완전히 넘어간 이상 퇴각을 상책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계승자님."

숨만 겨우 몰아쉬는 와중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르네의 얼굴이 보였다.

질리언과 루안 역시도 르네의 뒤에 서 있었다.

루안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르네와 질리언은 물에 홀딱 젖은 상태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터라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미모가 워낙 대단하다 보니 여전히 예뻤지만, 그래도 전신에 고생한 흔적이 가득했다.

"다들 정말 고생했어."

유성의 말에 르네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땅굴 부수자고 정말 셋이서 (루안은 망만 봤으니) 쳐들어가게 될 줄이야.

그것도 그냥 쳐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적들을 끌어들여 단체 수장을 노린다?

좋은 생각이었다.

해자와 땅굴을 연결해 땅굴 자체를 수몰시킨다?

이것 역시 좋은 생각이었다.

다만 실행 방법이 심히 비정상적인 게 문제였을 뿐.

땅굴을 수몰시키겠다고 직접 땅굴 안에 들어가 천장을 향해 땅을 파는 작전이라니.

바리안 남작의 죽음과 반드시 땅굴을 파괴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돌아가서 이견 하나 없이 참여하긴 했지만 막상 다 끝나고 돌아보니 확실히 미친 짓이기는 했다.

"미안. 내가 좀 너무했지?"

르네의 눈치를 살핀 유성이 작게 웃으며 미안한 얼굴로 말하자 르네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나마 아시긴 하니까 다행...이긴 한데."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을 피해 질리언이 만든 방벽 속으로 몸을 던지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한 르네였지만 그래도 결국 잘 되긴 했으니까.

애당초 르네 자신도 동의한 작전이긴 했고.

그리고 뭐랄까, 기억을 돌이켜보니 자신의 허리를 확 잡아당겨 안던 유성의 모습이 참 멋졌다고 해야 할까?

박력 있고, 진지하고, 막 크고 따뜻한?

실시간으로 기억을 미화하던 르네는 결국 뺨을 살짝 붉혔고,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질리언은 생각했다.

'중증이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하는지가 눈에 다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렇게 뺨을 붉히던 르네는 괜한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정돈했지만 잠깐뿐이었다.

이제는 거의 왜곡 수준의 미화가 된 기억 속의 유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겼다. 승리했다.

땅굴을 무너트렸을 뿐만 아니라 아예 루셴까지 탈환하였고, 루셴에 잡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전과를 생각하니 자꾸만 미소가 그려졌다.

르네가 웃자 유성 역시 웃었고, 서로를 보며 웃는 왕과 왕의 마법사를 본 왕의 성녀는 생각했다.

'따라가기 벅차.'

역시 이 두 사람, 정상이 아니야.

하지만 질리언도 얼굴은 이미 웃고 있었다.

급히 탈출하느라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루셴의 주민들을 구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아, 그리고. 이왕들 온 거 같이 볼까?"

그리 말한 유성은 레이니의 등에서 내리더니 잠깐 비틀거리다 르네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상태창을 열었다.

[승리했습니다.]

[도시를 구원했습니다.]

[지휘관 포인트를 300pt 획득했습니다.]

[선업 수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20에 도달했습니다.]

[클래스 업이 가능합니다.]

[성왕 스킬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새로운 성기사 스킬들을 습득했습니다.]

[성왕십자검의 새로운 검을 습득했습니다.]

[유성 성에 새로운 군수 시설이 추가되었습니다.]

[다섯 명의 기사들이 모였습니다.]

[새로운 기사단 명령이 추가되었습니다.]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질리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예 보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천마 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엘프 궁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갑 보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갑 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도시 구원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땅굴 파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웜 슬레이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줄줄이 올라가는 상태창 문구에- 특히 300pt를 얻었다는 문구와 새로운 시설이 추가되었다는 문구에 르네는 활짝 웃었고, 질리언 역시 우아한 미소를 머금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지미의 외침을 루셴의 주민들이 따라 외친 그때, 유성은 시선을 멀리하였다.

동쪽에서부터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에 도착한 영주들은 앙주 남작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진맥진해서 급한 명령 몇 가지를 내린 뒤에는 거의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영주들의 잠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아침이 밝자마자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영주들을 급히 깨웠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된 거냐? 성공한 건가? 로티안의 흑기사가 땅굴을 파괴한 것이냐?"

라발 남작의 물음에 다른 영주들 역시 퍼뜩 잠에서 깬 얼굴로 수도사들을 보았다.

오베르 남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아침이니 로티안의 흑기사와 헤어진 지 최소 8시간 이상이 흘렀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수도원에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어딜 간 것일까.

설마 루셴에서 전사라도 한 것은-

오베르 남작이 수도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웃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 사이에는 아무래도 아예 잠을 자지 않은 것 같은 앙주 남작이 퀭한 얼굴로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오베르 남작은 확신했다.

성공했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루셴에 뚫린 땅굴을 파괴했다!

"역시! 믿고 있었다고!"

라발 남작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오베르 남작도 저도 모르게 똑같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니오."

"엥? 그게 무슨 소리요? 전부가 아니라니."

어느새 영주들의 대변인 비슷한 존재가 된 라발 남작이 묻자 앙주 남작은 어쩐지 모르게 허탈함이 섞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루셴을 탈환했소."

"뭐, 뭐요? 뭘 했다고?"

"말 그대로요. 로티안의 흑기사가 혼자서 루셴에 쳐들어가 랫맨들을 몰아내고 도시를 탈환했소."

정확히는 르네와 질리언과 루안도 있었으니 혼자는 아니었지만 크게 보면 그게 그거인 이야기였다.

루셴의 탈환.

기적 같은 전과에 영주들은 말을 잊었다.

환호조차 지르지 못한 채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

카리안 백작이 루셴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제18장 - 로티안의 흑기사

사실 전투가 끝난 직후 그대로 졸도하고 싶은 유성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전투 후의 뒷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셴의 책임자인 헥센 시장은 영주들과 함께 도망쳤으니 지금쯤 수도원에 있을 터였다.

그랬기에 유성은 유성 자신을 대신해 뒷정리를 맡아줄 루안을 도와 성내를 안정시킬 수 있는 루셴의 유력자를 따로 찾아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금방 찾았다는 사실이었다.

"넵! 제가 경비대장인 마테오입니다!"

난리통에도 어찌어찌 목숨을 부지한 경비대장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것 같은 노련한 인상의 중년남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니 부담스럽긴 했지만 잘된 일이었다.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진 것이 아니라, 정말 유능해서 살아남은 자가 무척이나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전부터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실 소문으로만 들었을 때는 으레 그렇듯이 과장된 이야기라 생각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아서왕 전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유성의 활약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좋게 봐주니 고맙습니다. 루안 경과 함께 성내를 안정시키고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랫맨들을 수색해 주셨으면 합니다."

유성 자신의 부하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말을 높인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유성에게 생각지도 못한 존대를 받은 마테오는 마음속으로 유성의 평가를 더욱 높였다.

저토록 굉장한 기사가, 거기에 영지를 가진 귀족이 존대를, 거기다 명령이 아닌 부탁을 하다니.

"옙! 목숨을 걸고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아니, 굳이 목숨을 걸... 아닙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말려서 무얼 하리.

유성의 말에 다시 힘차게 답한 마테오는 바로 돌아서서 수하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랫맨 수색과 성내의 안정화는 마테오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다음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른 유성은 내성 쪽을 돌아보았다.

발소리를 듣고 감지한 그대로 루안이 다가오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루안이 대뜸 꺼낸 말에 유성은 침음을 한 번 삼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에게 맡긴 일.

회의장에서 죽은 영주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

영주 회의의 습격이 있었던 것은 벌써 10시간도 전의 일이었다.

성을 한 번 장악한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이 시신을 훼손하거나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찾아보지도 않는 것은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랫맨들은 영주들의 시신들을 따로 보관해두었다.

애당초 놈들의 목적은 영주들을 몰살시킨 뒤 영주를 잃은 영지들에 큰 혼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분명했으니, 혼란을 일으킬 도구로서 영주들의 수급을 남겨둔 것이었다.

적당히 처리된 상태로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바리안 남작의 수급을 마주한 유성은 입술을 깨문 뒤 일단 묵념부터 하였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유성은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고, 르네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었다.

"루안, 바리안 남작을 포함해서... 영주들의 장례를 치를 준비를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유성의 말에 루안이 어두운 얼굴로 무겁게 답했다.

"그래, 부탁할게."

다시 한번 당부하듯 말한 유성은 그대로 창고를 나와 복도에 섰다.

깨진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엉망진창이 된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 연회를 위해 화려하게 장식되었던 복도를 떠올린 유성은 긴 숨을 내쉰 뒤 발걸음을 내디뎠다.

르네와 질리언은 지쳐서 잠든 상태였다.

그나마 팔팔한 루안에게 뒷일을 맡긴 유성은 아까 미리 찾아둔 내성의 시종을 따라 숙소로 이동했다.

일단은 조금이라도 자야만 할 것 같았다.

* * *

유성이 다시 눈을 뜬 것은 한밤중이 다 되어서였다.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어마어마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창문을 통해 한밤중인 것을 확인한 유성이 짐짓 인기척을 내자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시종이 문밖에서 목소리를 냈다.

"일어나셨습니까."

"예, 씻을 준비를 부탁합니다."

정확한 시간까지는 모르겠지만 창밖만 봐도 무척 늦은 시간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수도원에 소식을 전하라 명해두었으니 아마 대부분의 영주들이 루셴이나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을 터였다.

그리고 몇 분.

유성이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 침대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니 이내 방문을 열고 시종과 르네가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르네가 밝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유성은 붉게 충혈된 르네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

눈물 자국은 지운 것 같았지만, 눈을 보면, 그리고 평소와 조금 다른 기색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바리안 남작의 수급을 확인하고 왔을 터였다.

직접 보았든, 그저 수급을 회수했다는 사실을 확인만 하였든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기에 유성은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엔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마주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래, 르네도 잘 잤어?"

"그럭저럭요."

빙긋 미소 지은 르네가 살짝 눈짓으로 신호를 주자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를 작은 수레에 실어 나른 시종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유성이 자연스럽게 세수를 하는 사이 르네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질리언 언니는 여전히 자고 있어요. 육체적으로 지친 것도 있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컸던 것 같아요."

르네의 말에 세수를 마친 유성은 쓰게 웃었다.

마법으로 천장을 부수는 르네를 보며 기겁하던 질리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주들도 돌아왔어요. 카리안 백작이랑 헥센 시장 외에도 대부분의 영주들이 함께 왔어요."

"아르투아 백작령 쪽도?"

"네, 사실상 빌리엄 남작의 수행원들만 남은 상태라... 직접 루셴의 상황도 살펴보고, 빌리엄 남작의 시신도 회수할 생각으로 온 것 같아요."

끝에 가서는 다시 목소리가 우울해진 르네였지만 유성도 르네도 굳이 바리안 남작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카리안 백작이 계승자님을 뵙고 싶어 해요. 사실 계승자님을 뵙고 싶어 하는 건 다른 영주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더라고 할까요? 독대를 원하고 있고요."

단순히 루셴 탈환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카리안 백작이 원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이야기.

"르네 생각에는 어때?"

"계승자님의 힘을 직접 목격했으니까요. 영리한 사람이니 엉뚱한 소리는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엉뚱한 소리라면?"

"뭐, 내 부하가 되라- 이런 거?"

성대모사라도 하듯 짐짓 장난스럽게 말하는 르네의 모습에 작게 웃은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접한 정보와 짧게나마 왕의 안목으로 살펴본 결과를 종합해보면 카리안 백작은 분명 영리한 자였다.

되도 않는 헛소리보다는 훨씬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제 생각에는 일단 당근을 내밀 것 같아요. 어느 정도 당근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계승자님이 목숨은 물론이고 도시까지 구해줬는데 쩨쩨하게 나오진 않을 거예요."

"영리한 자니까?"

"네, 계승자님 정도는 아니지만."

르네의 말에 다시 웃은 유성은 한 차례 숨을 고른 뒤 물었다.

"당장 만날 필요는 없겠지?"

"물론이죠. 계승자님이 만나주시는 거지, 그쪽이 만나주는 게 아니니까요."

팔짱을 낀 르네는 흥 하고 콧소리까지 내더니 이내 다시 유성에게 말했다.

"그보다 시장하시죠?"

"어, 많이 고프네."

사실상 어젯밤부터 만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셈이었으니까.

인식하고 나니 새삼 배가 고픈 유성이었다.

"후훗,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뒀죠. 아까 나간 시종 아저씨가 금방 식사 가지고 올 거예요."

"과연 왕의 마법사. 역시 유능해."

"흐흥, 당연하죠. 저도 아직 안 먹었으니 같이 먹어요."

"그래, 먹으면서 같이 상태창도 좀 보자."

"와, 상태창! 아직 포인트 안 쓰셨죠? 네?"

유성의 말에 르네가 기다렸다는 듯 가까이 다가서며 묻는데 눈이 보통 초롱초롱한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괜히 장난을 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로 상태창을 열었다.

막상 말하고 보니 유성 자신도 기대되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벨 20.

두 번째 클래스업의 시간이었다.

* * *

이름: 천유성

성별: 남

직업: 고위 성기사(New!)

레벨: 20

지위: 중급 지휘관

특이사항: 성왕의 계승자, 군단의 주인, 원탁의 계승자, 용의 심장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

[성왕 스킬]

왕국검법 Lv5 / 제국검법 Lv5 / 용왕심법 Lv5 / 용왕로 Lv4 / 왕의 안목 Lv3 / 군마 소환 Lv4

[성왕십자검]

열화의 검 / 질풍의 검(New!)

[성기사 스킬]

오라 블레이드 / 오라 실드 / 승리의 함성 / 오라 블래스트 / 여신의 축복(New!) / 여신의 치유(New!)

[지휘관 명령]

질풍의 오더 / 수호의 오더 / 관통의 오더 / 거인의 오더 / 돌진의 오더(New!)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 / ???(New!) - 조건 미충족. 기사들의 3단계 기억 해금 필요

[장비]

진은의 검 / 가레스의 황금 사자방패 / 아그라베인의 망토 / 갑옷

"확인할 게 너무 많은데요?"

"그러게."

레벨 20이 되어 고위 성기사가 된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기사까지 추가되었기에 이것저것 변한 것이 정말 많았다.

일단 눈에 띈 것은 왕의 안목.

"르네, 한번 봐볼게."

"네, 계승자님. 준비됐어요."

사실 왕의 안목을 쓰는 유성이라면 모를까 르네가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지만 흠흠 헛기침을 한 르네는 허리를 곧게 세운 뒤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럼 본다."

왕의 안목.

유성의 두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 르네 발투아]

[재능 개화도: 9%]

[천마의 재능: 하늘이 내린 마. 천마의 마녀에 도달할 수 있는 자.]

[권왕의 재능: 내지른 주먹은 하늘을 부수나니. 권왕의 재능을 타고난 자.]

[기승의 재능: 타는 일에 관해선 무엇이든 일류가 될 재능을 타고난 자.]

새로이 보이게 된 것들.

육각형 그래프와 막연한 재능 분야만 표시해주던 왕의 안목에 이제 대놓고 타고난 재능을 설명해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아니 그런데 천마의 재능이야 그렇다 쳐도 권왕의 재능...?'

레벨 업 할 때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권법 관련 능력들 때문에 설마 했는데 권왕의 재능이라니.

'이거 판타지 모나크로 생각하면... 진짜 미친 수준인데?'

천마의 재능은 마법 계열 재능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재능이었는데, 단순히 출력만 놓고 보자면 모든 마법 재능 가운데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천마의 마녀.

이렇게나 으리으리한 이명으로 불린 존재는 판타지 모나크 세계관에 오직 한 명만이 존재했다.

모르간 르 페이.

혹은 모르가나 르 페이.

성왕의 마법사인 멀린조차 버거워한 사상최강의 마녀.

르네에게 천마의 마녀가 될 재능이 있다.

놀랍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애당초 호수의 여신이 점지한 왕의 마법사니 그 정도 재능을 타고난 것도 이해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권왕의 재능이라고?'

권왕.

권법 계열의 재능에는 더 상위의 재능이라 할 수 있을 권신의 재능과 권황의 재능이 있긴 했지만 권왕의 재능만 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판타지 모나크 플레이 도중 권왕의 재능을 가진 병사를 발견한다면 그날부터 바로 금이야 옥이야 키울 마음이 넘쳐나는 유성이었다.

'사실 기승의 재능만 해도 대단한 건데 앞의 두 개가 너무 대단해서 평범하게 느껴질 정도야.'

천마의 재능에 권왕의 재능이라니.

'안 돼, 현혹되지 말자. 정답은 천마의 마녀다.'

권왕의 재능이 아깝긴 했지만 여기서 괜히 듀얼 클래스를 했다가는 양쪽 모두 어중간해질 뿐이었다.

물론 어중간하다 해도 천마와 권왕이니 무시무시한 마법권사가 탄생하겠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순수하게 천마나 권왕 둘 중 하나를 파는 쪽보다는 못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이미 투자도 많이 했고, 재능의 급도 더 높은 천마의 마녀를 파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았다.

"계승자님? 혹시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요?"

르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의 안목을 사용한 유성이 무어라 말도 없이 혼자 몸부림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천마냐 권왕이냐.

당연히 천마지만 권왕이 너무 아깝다.

그래도 권왕인데! 권왕인데!

-하는 것이 온몸으로 표출되었다고 해야 할까.

르네의 물음에 이성을 되찾은 유성은 일단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뒤 말했다.

"아냐, 좋아. 그냥... 르네가 너무 대단해서 그래."

"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유성이 새로워진 왕의 안목의 힘과 르네가 타고난 재능을 짧게 설명해주자 르네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자기 주먹을 돌아보았다.

"권왕...이요?"

"어, 권왕. 주먹으로 하늘도 부순대."

"제가요?"

"아니, 지금은 말고. 만약 권법가의 길을 걷는다면 그렇다고."

유성의 말에 르네는 눈을 감고 무언가 상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 권왕의 길을 걷는 자신을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된 것일까?

돌연 흠칫하고 몸을 떤 르네는 이내 강한 부정을 하듯 고개를 휙휙 가로저은 뒤 눈을 떴다.

"그냥 천마의 마녀 할게요."

"그, 그래."

헥토르 같은 근육질 거한이 된 자신의 모습이라도 상상한 것일까.

유성은 새삼 다시 몸을 떠는 르네의 주의도 돌릴 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튼 왕의 안목이 업그레이드되었어. 이거면 좀 더 제대로 된 역할 분담도 가능할 거고... 인재 발굴에도 좋을 거야."

"그러게요."

왕의 안목으로 보면 숨겨진 재능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으니 유성의 말마따나 인재 발굴에 최적화된 능력이었다.

'그리고... 저번 영주 회의 때 쓴 것처럼 인간이 아닌 자를 단번에 구분할 수 있고.'

왕의 안목은 인간의 왕으로서 인간의 재능을 살피는 것.

그렇기에 인간이 아닌 자의 재능은 볼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인간이 아닌 자를 한눈에 구분할 수 있었다.

"성왕십자검도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성기사 스킬도 추가되었어."

여신의 축복과 여신의 치유.

보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블레싱과 힐링 마법이었다.

전자는 지난번 개척 전투 때 질리언이 바나데인의 화살에 걸어준 것과 마찬가지로 신의 축복을 무기에 깃들게 해 일시적으로 신성기로 만드는 것이었고, 후자는 회복 마법이었다.

물론 전문 성직자이자, 그 계열 끝판왕인 성녀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위 성기사- 그것도 성왕의 계승자의 축복과 치유였다.

양쪽 모두 유용하게 쓰일 터였다.

"돌진의 오더는 롤랑드의 중갑 기병대가 추가되면서 생긴 건가."

아군 부대를 부정적인 기운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의 오더.

아군 부대의 이동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질풍의 오더.

찌르기 계통 공격의 관통력을 높여주는 관통의 오더.

아군 부대의 강인함을 증가시키는 거인의 오더.

그리고 이번에 추가된 돌진의 오더.

적에게 돌진할 때 아군의 돌진력을 강화시켜주는 지휘관 명령이었다.

'질풍의 오더랑 같이 쓰면 지금보다 더 무지막지한 돌격이 가능할 거 같은데?'

그리고 거기에 다시 다이애나의 기사도가 추가되면 어떨까?

흉악한 상상을 한 유성은 빙긋 웃으며 다시 상태창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추가된 롤랑드의 기사도를 아직 모르네.'

중갑 기병대의 롤랑드.

겉모습만 봤을 때는 창술의 달인인 호쾌한 미남자란 느낌이었다.

약간 케이트의 남자 버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성격도 올곧아 보이는 게 딱 그렇긴 한데.'

실제로 어떤지는 좀 더 대화를 해봐야 알 것 같았다.

"기사단 명령은 아직 조건이 덜 충족된 거죠?"

르네가 긴가민가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한글이랑 한국어를 가르쳐 준 뒤 얼마나 지났다고 딱히 교재도 없는데 띄엄띄엄이나마 상태창 문구를 읽을 수 있게 된 르네였다.

'과연 천마의 마녀.'

사실 천마의 마녀와 언어 능력은 별개였지만 어쩐지 모르게 납득한 유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아직 불충분 상태야. 아무래도 세 번째 개척 작업을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개척을 진행할 때마다 변하는 것은 유성 성만이 아니었다.

기사들 역시 자신들의 봉인된 기억을 해금하며 과거의 자신을 되찾아 갔다.

"그럼 계승자님, 유성 성 개발을 시작할까요? 어쩌면 세 번째 개척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고."

살짝 조르는 것 같은 말투에 쿡쿡 웃은 유성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 뒤 유성 성을 활성화시켰다.

제18장 - 로티안의 흑기사 (2)

새 식구가 스무 명이나 늘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북적거리는 느낌이 든 유성 성이었다.

"계승자님, 단순히 북적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숙소가 부족한 거 같은데요?"

"어, 그래?"

"네, 최대 수용인원을 넘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표정들도 안 좋고."

르네의 지적대로 자세히 살펴보니 숙소 주변 병사들의 표정이 다들 썩어 있었다.

숙소 안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그냥 봐도 불편해 보였다.

"일단 다른 것보다 막사 레벨 업부터 시켜줘야겠네."

어째 미안해진 유성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하며 포인트를 투자했다.

그러자 숙소 옆에 새로운 숙소를 짓는 모습과 함께 완공까지 필요한 시간이 표시되었다.

[숙소 레벨 업 완료까지 6시간 29분 42초]

노란 안전모를 쓴 땅딸막한 키의 인부들이 건물을 짓는데 속도가 보통 빠른 것이 아니었다.

"처음보는 얼굴들인데 요정 같은 걸까요?"

"그럴지도."

드워프도 따지고 보면 요정 비슷한 존재일 것 같으니.

새로 나타난 드워프로 추정되는 자들이 건물을 짓는 광경이 의외로 재미있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음식을 가져온 것이었다.

"제가 가져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르네가 시종을 돌려보낸 뒤 음식이 든 수레를 밀고 왔다.

야밤의 식사였지만 빵과 스프뿐만 아니라 고기와 면 요리도 몇 가지 올라가 있었다.

"많이 드실 거죠?"

"많이 먹어야지."

막상 음식을 보니 허기가 진 터라 유성은 제법 빠르게 음식을 흡입했고, 르네 역시도 옆에서 같이 요리를 먹으며 유성 성을 구경했다.

"그런데 계승자님."

"응?"

"이거 보니까 식당만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화장실이랑 목욕탕이랑 식당이랑 주점이랑 마구간 전부 수용인원을 초과해서 미어터지고 있어요. 병사들 표정도 다들 안 좋고요."

르네의 말대로였다.

대장간이나 금속 제련소 같은 시설은 문제 없었지만 나머지 편의 시설들은 전부 상태가 안 좋았다.

아예 선택해서 항목을 살펴보니 만족도에 다들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이용하려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사용자가 너무 많아서 위생 상태가 안 좋다 등등.

병사들의 불만사항을 읽던 유성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그, 그래. 의식주가 일단 받쳐줘야 하니까."

자고로 군대는 잘 먹고 잘 자야 잘 싸우는 법이었다.

대다수의 군인들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군대는 생각 이상으로 먹는 것을 신경 쓰는 집단이었다.

식사는 단순한 영양섭취 수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 수단인 동시에 사기를 유지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유성은 서둘러 상태창을 조작해 화장실, 목욕탕, 식당, 주점의 레벨을 전부 하나씩 높였다.

그러자 이번에도 안전모를 쓴 드워프 비슷한 존재들이 나와 공사를 시작했는데, 공사 현장을 지켜보는 병사들의 표정이 다들 좋게 변했다.

"비앙카도 좋아하네요."

"비앙카?"

"주점 웨이트리스요. 나름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다구요?"

르네가 그리 말하며 술집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금발의 웨이트리스를 가리켰다.

확실히 르네 말마따나 주변의 병사들 중에 눈에 하트 표시를 띄운 녀석들이 몇 명 보였다.

"참고로 병사들 사이에서 제일 인기가 좋은 건 케이트 언니지만 뭐랄까, 케이트 언니는 절벽 위의 꽃이라고 해야 하나, 선망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 그런... 동경의 대상처럼 보는 거고 현실적으로 인기가 좋은 건 비앙카랑 멜리사랑 릴리아인 것 같아요."

"릴리아?"

"설마 모르세요?"

"아니, 그... 어, 미안. 몰라."

유성의 말에 르네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쿡쿡 웃으며 식당을 가리켰다.

"식당 요리사예요. 비앙카가 야한 언니, 멜리사가 건강미 넘치는 언니라면 릴리아는 청순미라고 해야 하나, 푸근한 마음이 들게 해주는 언니에요."

"그렇구나."

비앙카는 야한 언니고 멜리사는 건강미녀고 릴리아는 청순한 아가씨였구나.

유성 성을 보는 시간은 확실히 유성 자신보다 르네가 많긴 했지만 저런 세밀한 정보까지는 어떻게 얻는 것일까.

'병사들의 반응을 관찰한 결과겠지?'

눈에 하트라든가, 이모티콘 같은 표정이라든가.

미세한 부분들이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다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유성은 새삼 고개를 돌려 르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고, 작게 웃었다.

"음? 왜요?"

"아니, 그냥."

유성이 다시 웃자 르네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다시 유성 성을 보며 말했다.

"다들 표정들이 좋아졌어요. 계승자님이 신경 써주신 걸 다들 느낀 모양이에요."

주둔지 전체가 급 확장 공사를 시작한 덕에 다들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지만 르네 말마따나 표정들이 좋았다.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다시 르네를 보며 말했다.

"내친김에 고기랑 술도 공급해서 파티 한번 열어주자. 대승도 거뒀고 새 식구도 생겼으니."

"와와! 계승자님 멋지다!"

병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르네의 환호를 받으며 유성은 식당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인원이 늘어서 그런지 전보다 고기와 식량을 뿌리는 데 필요한 포인트가 늘었지만 이런 일로 포인트를 아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남은 포인트는 대충 이 정도인가.'

쓰고 남은 40포인트에 이번에 전투 승리로 얻은 300포인트.

여기에 도시 구원 업적으로 얻은 포인트가 200포인트라 총 540포인트였는데 각종 확장 공사와 연회 준비, 그리고 병력 보충에 190포인트를 써서 350포인트가 남아 있었다.

유성은 캠프파이어를 피우고 술과 고기를 즐기기 시작한 병사들을 지나 대장간을 보았다.

레벨3이 된 대장간은 꽤 커진데다가 수련생 느낌이 나는 대장장이들도 많이 늘었는데, 레벨 업을 하려고 보니 조건이 붙어 있었다.

[신전 레벨 2가 필요합니다.]

대장간만이 아니었다.

금속 제련소 역시 신전 레벨2를 요구했고, 이번에 새로 추가되었다는 시설들도 하나 빼고는 전부 신전 레벨2가 충족되어야만 설치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붙어 있었다.

'일단 신전부터 레벨 업 시켜야 진행이 되겠네.'

신전의 레벨을 높이는 데 필요한 포인트는 무려 200포인트.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에 유성은 과감하게 포인트를 투자했다.

드워프처럼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 신전 공사를 시작하자 르네가 유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계승자님, 새로운 시설은 뭐예요?"

"일단 설치할 수 있는 건 가죽 가공소 하나야. 약간 대장간에서 같이 처리하던 가죽 가공 일을 독립적으로 하는 전문 시설 같은 느낌? 사실 진즉 왜 이런 게 없었지 싶긴 한 시설이긴 하네."

필요한 포인트는 30포인트.

늦게 나온 건물인 만큼 포인트를 꽤 필요로 했다.

대장간 옆에 가죽 가공소를 건설하고 나니 남은 포인트는 120포인트.

르네는 순식간에 완공된 가죽 가공소를 보다가 아쉽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음, 아직 개척 초대권은 안 나왔네요."

"아무래도 신전 레벨을 2로 만든 다음에야 다음 개척이 가능할 거 같아. 딱 그럴 각이야."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본성이나 회관 같은 본진 건물을 레벨 업 해야 다음 단계 건물들을 건설할 수 있었으니까.

유성의 말에 르네는 신전 레벨 업에 필요한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는 다시 미간을 좁혔다.

"으... 꽤 오래 기다려야겠네요."

"어쩔 수 없지."

신전 레벨 업에 필요한 시간은 120시간이었으니 앞으로 닷새는 기다려야 했다.

"그럼 이제 남은 포인트를 어떻게 하느냐인데."

남은 포인트는 120포인트.

대부분의 건설 관련 일이 막힌 상태였지만 여전히 포인트를 투자할 곳은 존재했다.

대장간 레벨이 3이 되면서 기종 병력들에게 새로운 대장간 장구류가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정예 보병대]

무기 강화: 20포인트

경갑 추가: 20포인트

투구 추가: 20포인트

[중갑 보병대]

도끼창 강화: 20포인트

철퇴 추가: 20포인트

방패 강화: 20포인트

[천마 기병대]

창 강화: 20포인트

투창 추가: 20포인트

[엘프 궁병대]

엘프 활 추가: 40포인트

[중갑 기병대]

마갑 강화: 20포인트 / 방어력 증가, 이동 속도 저하

중갑 강화: 20포인트 / 방어력 증가, 이동 속도 저하

방패 강화: 20포인트

랜스 강화: 20포인트

오랜만에 마주한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포인트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전투의 규모가 커지면서 포인트 벌이가 확 늘긴 했지만 역시 병종들의 티어 역시 높아지다 보니 포인트 역시 비싸진 느낌이었다.

'포인트를 집중해서 일단 두어 병종만 확실히 강화시키거나 전체적으로 조금씩 강화시키거나인가.'

잠시 고민한 유성은 일단 정예 보병대에 60포인트를 투자해 세 가지 강화를 모두 진행했다.

'정예 보병대가 제일 베이스가 되는 부대니까.'

숫자도 제일 많고 범용성도 제일 좋았으니 일단은 정예 보병대를 키우는 것이 맞았다.

'그다음이 문제인데.'

중갑 보병대의 강화도 강화였지만 천마 기병대의 투창과 엘프 궁병대의 엘프 활이 신경 쓰였다.

'투창이 추가되면 하늘에서 지상으로 공격하는 게 가능해져.'

투창의 숫자가 무한하진 않지만 단 몇 번이라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천마 기병대에게 원거리 공격 수단이 생기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엘프 활은 그렇지 않아도 긴 사거리를 더 늘려주는 거고.'

양쪽 모두 반드시 필요했다.

때문에 유성은 남은 60포인트를 투창과 엘프 활에 투자했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0포인트.

깨끗하게 다 쓴 포인트에 유성이 약간의 만족감과 허탈함을 느낄 때였다.

"와! 새 장비들 주셨군요!"

대장간 쪽을 본 르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고티어 장비들이라 그런지 제작 완료에 시간이 필요해서 바로 장착이 안 되었지만, 대장간에서 생산 중인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장착한 모습들이 기대되네요."

르네의 말에 유성 역시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병사들 쪽을 보았다.

다들 신나게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고 있었는데, 비앙카에게 말을 걸던 지미가 잘 안되었는지 울상이 된 얼굴로 찌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힘내라 지미."

"힘내요 지미."

거의 동시에 말한 유성과 르네는 서로를 돌아보았고, 작게 웃은 뒤 마지막으로 기사들을 보았다.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헥토르, 롤랑드.

다섯 기사들은 병사들 사이에 끼지 않고 주점에서 조용히 식사를 즐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사들이 끼면 병사들이 불편해할까 봐 배려를 해준 것 같았다.

"롤랑드는 어떤 사람이에요?"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마 루안 같은 친구가 아닐까?"

"아, 그렇군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르네의 모습에 다시 쿡쿡 웃은 유성은 유성 성을 닫았다.

유성 성 구경이 재밌긴 했지만 아직 마무리 지어야 할 일들이 몇 개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르네도 레벨 업 좀 해야지?"

유성의 말에 유성 성이 닫히는 걸 보며 아쉬워하던 르네가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부탁드려요!"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10

보유 pt: 20pt

무장: 참나무 지팡이 / 마법사의 로브

일반 스킬: 마력 강화 Lv6 / 전투명상 Lv1 / 군마 소환 Lv1

고유 스킬: 마력 저장 Lv1

고유 스펠: -

[르네의 클래스 업: 20pt]

[르네가 마력 강화 Lv7을 획득: 20pt]

[르네가 맨손 격투 Lv1을 획득: 3pt]

[르네가 전투 명상 Lv2를 획득: 5pt]

[르네가 마력 저장 Lv2를 회득: 5pt]

[르네가 새로운 마법을 획득: 5pt]

[르네가 군마 소환 Lv2를 획득: 5pt]

[르네의 근력을 강화: 1pt]

[르네의 민첩을 강화: 1pt]

[르네의 체력을 강화: 1pt]

"역시."

"네?"

"레벨이 10이 되면서 클래스 업이 떴어."

"어... 승급 같은 거요?"

"응, 지금은 왕의 마법사인데 승급하면... 왕의 중견 마법사?"

어째 좀 미묘한 이름이었지만 르네는 마음에 드는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와, 관록 있어 보이고 좋은데요?"

"그, 그래?"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눈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바로 승급부터 하자."

"네!"

르네의 대답을 들은 유성이 20포인트를 투자하자 새로운 빛의 창들이 떠올랐다.

[왕의 중견 마법사]

[능력치 전방이 소폭 상승합니다.]

[카멜롯의 마법서를 획득했습니다.]

"오."

르네의 상태창을 보니 장비 목록에 카멜롯의 마법서가 추가되었다.

"르네, 한번 불러볼래?"

"어, 네. 해볼게요. 지팡이 부르는 거랑 비슷한 요령이겠죠?"

혼잣말하듯 작게 말한 르네가 손을 놀리자 허공에서 초록색 책이 나타났다.

"와, 무거워."

초록색 표지에 금색으로 선이 들어간 멋진 책이었는데, 세로 길이만 30cm는 됨직한 게 정말 크고 무거워 보였다.

레벨 업 덕분에 여간한 성인 장정 이상의 힘을 가진 르네였지만 그래도 무겁다는 듯 끙끙거리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카멜롯의 마법서: 카멜롯의 대마법사 멀린이 남긴 마법서. 카멜롯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던 공용 마법들이 실려 있다.]

유성의 설명에 르네가 화색이 되어 표지를 넘겼다.

책 크기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이는 글자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는데, 글귀를 읽는 르네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와, 너무 좋아요. 완전 재밌을 것 같아요."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인 것일까.

압도적인 책의 크기 때문인지 약간 공감하기 어려운 유성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상태창을 보았다.

'남은 건 그냥 평소처럼 마력 강화하면 되겠지?'

레벨 6를 넘어 레벨 7로 갔기 때문인지 포인트 소모량이 무려 20포인트가 되었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였다.

'과연 천마의 마녀.'

판타지 모나크의 캐릭터들의 경우 마력 강화나 체력 강화 같이 기본 능력치와 관계된 성장 요소들은 캐릭터마다 한계치가 달랐다.

어떻게 보면 재능을 시스템적으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사실 마력 강화가 6을 넘어 7까지 뚫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마법사 100명 중에 1명 있을까 말까 한 재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르네는 천마의 마녀.'

적어도 10레벨까지는 강화가 가능하리라.

'솔직히 더 높을 것 같기도 하고.'

빙긋 웃은 유성은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법서를 잃고 있는 르네를 굳이 부르지 않고 질리언의 상태창을 열었다.

왕의 성녀: 질리언 예나트리

레벨: 4

보유 pt: 20pt

무장: 대사제복

일반 스킬: 측량 Lv3 / 방패술 Lv1 / 승마술 Lv1

고유 스킬: -

고유 기도: -

[질리언이 성력 강화 Lv1을 획득: 5pt]

[질리언이 방패술 Lv2를 획득: 5pt]

[질리언이 새로운 기도를 획득: 5pt]

[질리언의 근력을 강화: 1pt]

[질리언의 민첩을 강화: 1pt]

[질리언의 체력을 강화: 1pt]

'질리언은 아직 수수하네.'

레벨이 4라 그런가 수수한 편이었다.

유성은 일단 성력 강화를 레벨 3까지 올린 뒤 남은 포인트를 써서 새로운 기도를 하나 습득시켰다.

'정확히 어떤 기도가 생겼는지는 내일 질리언에게 물어봐야겠네.'

마법이 아닌 기도라 그런지 상태창만 보고는 명확한 해석이 되지 않았다.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을 질리언이 자면서 강해지는 광경을 잠시 상상해본 유성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여전히 마법서에 온 신경이 집중된 르네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르네, 르네."

"헛? 네?"

"일단 방으로 돌아가자. 밤도 너무 깊었고, 다시 자야 내일 일어나서 영주들 만나고 하겠지?"

"어... 네. 그래야죠."

르네가 그리 말하며 다시 눈동자를 마법서 쪽으로 돌리자 유성은 쓰게 웃은 뒤 손수 마법서를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마법서는 내가 맡아둘 테니까 오늘은 날 새지 말고 자는 거야. 알았지?"

"네? 너무해요. 마법서를 압수하시다니!"

"압수는 아니고 보관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일단 자. 내일 돌려줄 테니까."

유성의 말에 르네는 여전히 너무하다는 듯 울상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 마법서 때문에 제가 잠시 흥분했네요. 알겠습니다. 대신 계승자님도 푹 주무시는 거예요?"

"그래, 푹 잘게."

그리 말한 유성은 수레를 밀고는 보란 듯이 침대 위에 올라갔다.

그러자 르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계승자님, 자기 전에 양치하셔야죠."

"어, 미안."

저도 모르게 사과한 유성이 떠둔 물로 양치를 시작하자 빙긋 웃은 르네가 가볍게 예를 표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계승자님."

"그래, 르네도 잘 자. 좋은 꿈 꾸고."

"네, 계승자님도요."

눈웃음을 지은 르네가 유성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마친 유성에게 카리안 백작이 접견을 요청해 왔다.

제18장 - 로티안의 흑기사 (3)

루셴을 다스리는 것은 헥센 시장이었지만 그는 그저 관리일 뿐 루셴의 진정한 주인은 카리안 백작이었다.

더욱이 그는 서부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권력자였고, 왕도에도 많은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유성과 그의 만남엔 상하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크게 보면 둘 다 똑같은 왕국의 독립 영주였지만, 가진 것의 차이가 워낙 컸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다소 바뀌었다.

간밤에 있었던 전투로 말미암아 유성의 입지가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유성에게 갑자기 부와 권력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가진 것만을 놓고 본다면 이전과 동일한 것은 유성이나 카리안 백작이나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유성은 자신의 가치를 드러냈다.

이전까지의 유성이 그저 여러 풍문이 나돌던 강한 기사 정도였다면, 지금의 유성은 단신으로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로티안의 구원자.

볼로나의 복수자.

루셴의 탈환자.

빛의 군세를 부리는 카멜롯의 흑기사.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리안 백작을 비롯해 루셴 주변의 영주들이 유성에게 목숨 빚을 졌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면 유성은 더 이상 서부 변방의 남작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랬기에 유성과 카리안 백작의 만남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만나주는 형태가 되지 않았다.

남작과 백작, 가진 세력을 비교하면 몇 배나 차이가 될 이들 간의 만남이었지만 대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시장의 집무실이었다.

하지만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카리안 백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유성을 맞이하는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묻어났다.

유성은 헐렁거리는 그의 오른쪽 소매를 굳이 바라보지 않고 가볍게 예를 표했다.

"로티안의 천유성이오."

다소 입에 익숙지 않은 하오체였지만 카리안 백작에 맞춰 사용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카리안 백작이오."

"유성 님의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입니다."

카리안 백작에 이어 르네가 자신을 소개했다.

카리안 백작은 유성과 함께 온 르네를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르네를 내보낼지 말지를 고민했던 것 같았다.

"앉으시오."

유성과 르네에게 집무실 책상 앞에 놓여있던 소파 자리를 권한 카리안 백작은 두 사람이 착석하자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일단 루셴을 탈환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오. 덕분에 루셴의 수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소."

로티안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양했던 유성이었지만 이번에는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미 아시겠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르네가 카리안 백작의 눈을 보며 말하자 카리안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소파 앞 탁자 위에 미리 올려두었던 지도를 가리켰다.

"이번 습격으로 영주 회의에 참석했던 영주들 가운데 다섯이 죽었소. 그리고 그중에는 파비안 남작이라는 젊은이가 하나 있소."

유성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연회장에서도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지만 로티안의 북부에 위치한 영지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카리안 백작은 그의 영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는 내 보호를 받고 있던 자요. 애석하게도 부인은 물론이고 자식도 없이 죽어 상속인이 없는 상황이오."

이쯤 되니 카리안 백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유성이 고개를 들어 카리안 백작을 보았고, 카리안 백작 역시 유성의 눈을 보며 말했다.

"로티안의 흑기사께 넘겨드리겠소. 과정에 필요한 여러 자질구레한 일들은 내가 처리하겠소."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파비안 남작의 영지가 더해진다면 애당초 일반 남작령보다 거대한 로티안의 세력권을 고려했을 때, 유성은 단숨에 작은 백작령 정도의 영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더욱이 저 영지의 가치는 단순히 세력권과 인구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와! 계승자님! 이러면 저희 집이랑 직통로가 뚫려요!]

유성의 머릿속에 르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깜짝 놀란 유성이었지만 흠칫하거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대신 옆을 돌아보았고, 르네는 입을 꾹 다문 채- 그러니까 최대한 신난 표정을 감춘 채 머릿속으로 말을 이었다.

[카멜롯의 마법서에서 배운 메시지 마법이에요.]

[아무튼 계승자님, 이렇게 되면 이제 발투아 백작가로부터 직접 지원을 받기 편해질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현재 로티안과 발투아 백작가 사이에는 로토 산맥의 지맥이 가로막고 있는 터라 원활한 왕래가 어려웠다.

하지만 발투아 백작가와 평지로 맞닿아 있는 파비안 남작의 영지를 손에 넣게 되면 상황이 달라질 터였다.

[지금까지는 카리안 백작의 세력권이라 물자나 병력을 운반하기 어려웠지만 계승자님의 땅이 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바리안 아저씨도 안타까워했던 부분인데... 해결이 되었네요.]

바리안 남작의 이름이 나오자 잠시 침울해진 르네의 목소리였지만 잠깐뿐이었다.

르네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고, 그런 그녀를 한차례 돌아본 유성은 다시 카리안 백작을 마주한 뒤 말했다.

"감사히 받겠소."

대단한 선물이었지만 루셴을 탈환하고 카리안 백작의 목숨을 구했으니 받을 것은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유성의 모습에 카리안 백작은 쓰게 웃는가 싶더니 다시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볼보 남작령은 현재 주인 없는 땅이오. 물론 이세리나 영애가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녀에게는 폐허가 된 볼보 남작령을 복구할 재산과 능력이 없소. 그리고 그녀는 사실상 로티안의 흑기사 밑에서 관리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유성을 마주한 뒤 말을 이었다.

"당신이 가지시오. 볼보 남작령 복구에 필요한 자원과 재원은 이쪽에서 부담하겠소. 루셴에는 볼보 남작령의 생존자들과 로티안의 흑기사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이 있소. 그들도 모두 데려가시오."

실로 놀라운 제안이었다.

볼보 남작령의 복구에 필요한 자금을 댄다는 것도 놀라운데 영지민들까지 내어준다니.

인력으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인구는 곧 생산력인 동시에 군사력이었다.

왕국의 주민들에게는 자유롭게 이주해서 살 권리가 없었다.

물론 도망치거나 몰래 빠져나가는 경우가 꽤 많긴 했지만, 정식으로는 영주의 허락 없이 이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영지민 자체가 영주의 가장 귀한 재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리안 백작은 그 영지민들을 지금 유성에게 내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제안에는 르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깜짝 놀란 얼굴이 되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진짜요? 합!"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르네의 모습에 카리안 백작은 유쾌하게 웃는 대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이오. 모두 드리겠소. 그리고 이렇게 되면 로티안의 흑기사의 세력권은 여간한 백작의 세력권 이상이 되오. 그러니 백작위를 받을 수 있도록 왕도에 손을 써보겠소."

"네?"

르네는 이번에도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카리안 백작 이 사람이 지금 미치기라도 한 건가?

남작위도 아닌 백작위였다.

말 한마디로 어찌할 수 있는 작위가 아니었으니, 아무리 왕도에 연줄이 많은 카리안 백작이라 할지라도 상당한 자금을 소모해야만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거저 해주겠다?

너무나 즐겁고 기쁜 제안이긴 했지만 반대로 너무 그래서 의심이 들 정도였다.

유성은 지도를 한 차례 돌아본 뒤 카리안 백작에게 물었다.

"감사한 이야기지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를 알 수 있겠소?"

루셴을 구하고 목숨을 구해줬지만 이쯤 되면 보상이 너무 과했다.

유성의 물음에 카리안 백작은 쓰게 웃더니 다시 볼보 남작령을 가리키며 말했다.

"형식적인 이유라면 루셴 앞에 방벽을 치고 싶기 때문이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루셴이 언제 다시 공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말은 되는 이유였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본인 말마따나 그저 형식적인 이유에 불과할 터였다.

그렇다면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유성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카리안 백작은 축 늘어진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한 차례 돌아보더니 탁자 위에 놓인 서부의 지도가 아닌, 벽면에 걸린 커다란 왕국 지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흉성의 시대가 시작되었소. 서부만이 아니라 왕국 전체- 아니, 다른 왕국들과 제국 역시 괴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소."

흉성의 시대는 더 이상 옛날이야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직면한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삼 알게 되었지. 쉬이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대체 길이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땅굴을 신화에서나 보던 괴수를 이용해 뚫고 나타난 괴물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이다."

잠시 말을 멈춘 카리안 백작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왕국이나 제국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겠구나-같은."

흉성의 시대는 도래했고, 괴물들의 힘은 예상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괴물들의 공세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난세가 시작될 거요.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난세를- 흉성의 시대를 극복해낸다면 나는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오."

르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카리안 백작은 그런 르네의 주먹이나 얼굴이 아닌 유성의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건 투자요. 언젠가 나의 주군이 될지도 모를 자에게 미리 성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오."

거기까지 말한 카리안 백작은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바르게 한 뒤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제 성의를 받아주시겠습니까?"

일종의 정치적 베팅이었다.

그리고 유성은 알 수 있었다.

카리안 백작은 지금 허튼소리나 단순한 떠보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카리안 백작.

서부의 실력자.

유성 자신과 영지를 맞대고 있으며, 본인의 역량 역시 무시 못 할 수완가.

그의 제안은 당연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지금 유성이 고민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일.

유성은 르네를 돌아보았고, 유성의 생각을 간파한 르네는 급히 메시지 마법을 사용했다.

[저요! 제가 할게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네?]

지금까지 너무너무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참아야만 했던 일.

르네의 애원에 유성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카리안 백작을 보며 말했다.

"카리안 백작, 그전에 나도 한 가지 말해야 할 게 있소."

유성의 말에 카리안 백작은 르네와 나눈 눈빛 교환과 미소 때문인지 다소 의아하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고, 유성은 스스로 말하는 대신 르네를 돌아보았다.

'부탁할게.'

눈빛으로 말하자 신난 얼굴이 된 르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표정을 가다듬고 카리안 백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리안 백작, 다시 한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호수의 여신께 계시를 받은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라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카리안 백작이 순간 당황했다.

호수의 여신?

왕의 마법사?

르네가 처음 만났을 때 대뜸 이런 소개를 했다면 망상증에 걸렸구나 하고 넘어갔을 카리안 백작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왕의 마법사'란 말에 유성을 급히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르네가 그런 카리안 백작을 보며 미소 지었다.

고풍스러운 예로 유성을 가리키며 마치 시를 낭송하듯 부드럽게 말하였다.

"여기 계신 분은 호수의 여신께 선택받은 자. 카멜롯의 빛을 계승하는 자. 마침내 돌아오신 인간의 왕- 천유성 님이십니다."

인간의 왕.

카멜롯의 빛을 계승하는 자.

당혹과 놀라움, 거기에 어쩐지 모를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카리안 백작의 얼굴을 마주한 유성은 르네를 돌아보았고, 눈앞의 상황과 스스로의 대사에 희열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쓰게 웃은 뒤 카리안 백작을 마주하였다.

'르네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어.'

그렇다면 유성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보다 강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자신이야말로 호수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성왕의 계승자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었다.

유성은 괜한 말로 품위를 손상시키는 대신 다른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왕의 안목.

유성의 두 눈동자에 황금빛 신성이 깃들었다.

제18장 - 로티안의 흑기사 (4)

왕의 안목은 성왕의 기술이었고, 유성이 왕의 안목을 사용할 동안에는 두 눈에 호수의 여신의 신성이 깃들었다.

하지만 카리안 백작에게는 여신의 신성을 알아볼 능력이 없었다.

루안이나 질리언이었다면 유성의 두 눈에 깃든 신성이 호수의 여신의 신성임을 바로 알아보았겠지만 카리안 백작은 성직자가 아니었다.

애당초 기사도 아닌 그였기에 기사가 발산하는 오라와 성직자의 신성력을 구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황금빛으로 물든 유성의 눈을 본 순간 카리안 백작은 확신했다.

진짜다.

눈앞의 남자는 돌아온 성왕의 계승자가 확실하다.

본능적인 직감만이 아니었다.

유성을 성왕이라 가정한 순간 머릿속에 있던 정보들이 전부 하나로 이어져 아름다운 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괴물들의 출현과 시기를 같이 하여 갑자기 나타나 카멜롯의 후예를 자처하는 방랑 기사.

난데없이 등장한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발투아 백작의 딸.

라투스 남작령과 볼보 남작령, 그리고 루셴에서 이뤄낸 기적과도 같은 전과.

기사가 아닌 자의 눈으로 봐도 비상식적인, 초월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기사도.

어느 순간 로티안에 흡수된 옴팔로스 교단의 성직자들.

카리안 백작은 유성을 성왕이라 간주한 상태로 스스로에게 묻고 답했다.

그는 왜 지금 나타났는가.

성왕으로서 흉성의 시대를 막아야 했으니까.

발투아 백작의 차녀는 왜 그의 곁에 있는가.

그가 성왕이니까.

라투스 남작은 왜 갑자기 그에게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물려주었는가.

그가 성왕이니까.

그는 어떻게 기적적인 승리를 거듭해왔는가.

그가 성왕이니까.

그가 가진 초월적인 기사도는 무엇인가. 그는 어떻게 그런 기사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가 성왕이니까.

질리언 대사제가 어째서 그의 밑으로 들어갔는가.

그가 성왕이니까!

하나씩만 놓고 본다면 비약이 심한 답안이었다.

하지만 저 모든 의문들에 답할 수 있는 하나의 답이라 생각하면 더 이상 비약이라 할 수 없었다.

흉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백 년이 넘는 세월을 넘어 성왕의 계승자가 돌아왔다.

평소 냉정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카리안 백작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 평정심을 유지할 순 없었다.

절로 거칠어진 숨을 토하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 남은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이 난세가 끝나고 나면 당신이 왕이 되어 있을 것 같다.

카리안 백작 자신이 유성에게 건넨 말.

진심이었다.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성왕이라니.

저 아서 팬드래건의 계승자라니.

"발투아. 발투아 백작도 알고 있습니까?"

정돈되지 않은 질문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발투아 백작의 차녀가 동석하고 있지 않은가.

"네, 알고 계세요."

탁자 밑으로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쥔 르네는 질리언을 흉내 내듯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발투아 백작이 알고 있다.

그는 이미 돌아온 성왕의 계승자와 한 배를 탄 사이다.

카리안 백작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덕분에 그는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과연, 과연 그랬군요. 그랬던 것이군요."

사실 지난 이틀 동안 카리안 백작에게 있어 유성은 미지의 존재였다.

유성의 기사도와 활약을 보고 크게 투자를 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투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숨기신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숨기는 것이 좋겠지요."

유성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자문자답에 가까웠다.

유성이 성왕이란 사실을 숨기고 있는 이유.

간단했다.

말해봐야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믿게 된다면 기득권층과의 불필요한 대립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발투아 백작과 카리안 백작 자신의 지지를 얻는다면, 그리고 카리안 백작 자신이 계획한 대로 유성이 백작이 된다면, 이 세 세력만 합쳐도 서부 전체를 독립시켜 하나의 왕국으로 만드는 일조차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실라테인 왕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세계에는 실라테인 왕국과 거의 비등한 국력을 가진 왕국이 둘이나 있었고, 왕국 둘을 합친 것 이상의 힘을 가진 제국이 존재했다.

성왕은 인간의 왕이었다.

즉, 왕국의 왕들은 물론이고 제국의 황제보다도 우월한 존재였다.

성왕의 귀환을 인정하는 순간 기존의 왕들은 왕위를 내어줘야 했으니, 쉬이 성왕의 존재를 인정할 리가 만무했다.

괴물이 쳐들어오는 마당에 설마 권력을 놓고 다투겠냐고?

반드시 다툰다.

다투게 되어 있다.

인간이란 그런 동물이었다.

그러니 숨기는 것이 맞았다.

세력이 좀 더 커질 때까지.

기존의 세력들이 어느 정도 이상 무너질 때까지.

카리안 백작은 고개를 들고 유성을 보았다.

여전히 황금으로 빛나는 유성의 눈을 마주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숙인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표한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 마티스 카리안, 마침내 돌아오신 인간의 왕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마티스 카리안.

카리안 백작의 본명.

르네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재차 주먹을 불끈 쥐었고, 유성은 왕의 안목을 해제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카리안에게 말했다.

"그대의 충성을 받겠다. 마티스 카리안. 그대는 이제부터 나의 가신들 가운데 하나이다."

유성의 말에 카리안 백작이 순간 움찔하였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내 다시 자세를 바르게 한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드린 일들은 가능한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혹여 따로 명하실 일이 있으신지요."

카리안 백작의 물음에 유성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을 말했다.

"랫맨들의 땅굴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봐 줬으면 한다."

수로의 물이 가득 차 수장된 땅굴인 터라 더 이상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저 땅굴의 끝에는 설사 지금은 철수했다 할지라도 괴물들이 머물렀던 장소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경로로 거기까지 도달했는지 역시 알아내야 했다.

"예, 이미 어제 오후부터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결과가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카리안 백작의 대답에 유성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유능한데다 부와 권력까지 쥔 수하가 생겼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되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부탁하겠다. 일단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로 하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리안 백작은 숨을 한 번 크게 고르더니 오른쪽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어찌 된 영문일까.

빛의 군세가 유성에게 하는 것을 보고 흉내 낸 것일까?

유성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찌 된 영문이든 그가 카멜롯의 예를 보였으니, 그대로 답해주면 될 일이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마주 예를 표한 유성은 르네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몇 초.

혼자가 된 카리안 백작은 일단 소파에 앉아 긴 숨을 토했다.

차분했던 그의 얼굴에는 소년 같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성왕이라니."

아서 팬드래건의 계승자라니.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은 카리안 백작은 다시 웃었다.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발투아 백작 다음이긴 했지만 자신이 두 번째다.

실질적인 도움은 오히려 발투아 백작보다 자신이 먼저 줄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제일가는 가신이 될 것이다.

흉성의 시대를 이겨낸다면 공신들 가운데 가장 앞에 서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같은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카리안 백작의 얼굴에 그려진 미소는 훨씬 더 맑고 순수했다.

"아서 팬드래건."

인간의 왕.

인간의 시대를 이룩한 위대한 자.

카리안 백작은 품 안에서 한 권의 얇은 책을 꺼내 들었다.

아서 왕 전설.

어린 시절부터 읽고 또 읽어 수백 번도 넘게 읽은 성왕의 이야기.

백작위를 놓고 벌어진 지독한 골육상쟁 속에서 유일한 위안이었던 형이 암살당하기 전날 밤 읽어주었던 책.

물론 카리안 백작은 알고 있었다.

아서 왕이 돌아온 것이 아니다.

유성은 성왕의 계승자일 뿐 성왕 본인이 아니다.

더욱이 유성의 존재는 흉성의 시대가 진짜임을 반증했다.

앞으로 닥쳐올 난세는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카리안 백작은 아서 왕 전설을 다시 품에 품은 뒤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아서 왕 전설에서 보고 또 보았던 그 인사.

카리안 백작은 눈을 감았다.

그대로 몸을 길게 늘어트린 채 잠시나마 모든 복잡한 일들을 잊고 미소를 머금었다.

* * *

카리안 백작이 여운에 잠겨 있을 때 르네는 복도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곳에 오자마자 두 팔을 높이 들며 기뻐했다.

"아싸! 카리안 백작 겟!"

가볍게 춤까지 추며 기뻐하는 모습에 유성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카리안 백작이 무슨 유니크 카드라도 돼?"

"네? 유니크 카드요?"

"있어, 그런 게. 아무튼 진짜 기쁜가 보네?"

"당연히 기쁘죠. 카리안 백작이 계승자님의 가신이 된 거잖아요. 거기다 조금 있으면 계승자님도 백작위에 오르실 테고, 와, 진짜 순식간에 엄청난 세력이 된 거 아세요?"

라투스 남작령이 일반 남작령에 비해 크다고는 해도 결국 남작령에 불과했다.

인구는 영지 전체를 합쳐도 수천에 불과했고, 그랬기에 생산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유성이 몇 번이나 승리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로티안의 병력 규모 자체는 그리 큰 변화가 없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파비안 남작령과 복구된 볼보 남작령을 흡수한다면 단번에 세력을 세 배 이상까지도 키울 수 있을 터였다.

괴물들의 공세는 나날이 거세지고 있었다.

빛의 군세 역시 강해지고 있긴 했지만 그들만으로 괴물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군대가 필요했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처럼 유성이 부릴 수 있는, 온전히 유성에게 충성하는 유성의 군대가 말이다.

그리고 이제 유성은 그런 군대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흐흐, 흐흐흐."

연신 미소를 흘리며 좋아하던 르네는 돌연 고개를 번쩍 들더니 유성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계승자님, 아까 왕의 안목으로 카리안 백작 보셨잖아요? 어땠어요?"

"어, 유능하더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유능했다.

기사나 마법사가 아닌 터라 전투력은 없다시피 했지만 그 대신 정치- 그중에서도 내정 쪽의 능력치가 그야말로 꽉 차 있는 게 딱 재상 하면 좋을 것 같은 인재였다.

유성의 대답에 르네는 그거 말고 더 없냐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결국 아예 소리 내어 물었다.

"어... 그게 다예요?"

"어, 단데?"

"그, 뭐 천마나 권왕이나 아무튼 그런 건 없어요?"

"응, 없더라."

유성의 대답에 르네는 실망인지 아쉬움인지 어깨를 늘어트렸고, 유성은 그런 르네의 이마에 살짝 딱밤을 놓았다.

"카리안 백작이 별로인 게 아니라 르네 네가 이상- 아니, 대단한 거야."

"어... 그런가요?"

"어, 그런 거야. 괜히 호수의 여신께서 선택하신 왕의 마법사가 아닌 거니까."

유성의 말에 르네는 얼굴을 붉히는가 싶더니 다시 흐흥 거리며 웃기 시작했고, 유성도 같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감수성이 풍부하긴 하더라."

"카리안 백작이요?"

"어, 마냥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인 것만은 아닌 것 같더라고."

"신기하네요."

겉으론 차갑고 냉정한 척하지만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선 시집을 읽으며 눈물도 보이는 감성 충만한 남자였던 걸까.

그렇게 르네가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였다.

"로티안의 흑기사님, 여기 계셨군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돌아서니 빙긋 미소 짓고 있는 오베른 남작이 보였다.

"꼭 직접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오베르 남작의 말에 유성과 르네는 잠시 서로를 돌아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웃음을 나누었다.

오베르 남작이 굳이 찾아와 개인적인 만남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

단순히 감사를 표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카리안 백작처럼 다른 생각이 있어서일까.

"예, 얼마든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그리고 그날 오후까지.

유성은 차례대로 자신을 찾아온 영주 다섯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제18장 - 로티안의 흑기사 (5)

영주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대동소이했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

앞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겠다.

목숨을 구해준 답례로 조만간 어떤 것들을 보내겠다 등등.

르네가 있기 때문인지 정략혼을 제시하는 자는 없었지만 다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성과의 연줄을 단단히 하고 싶은 눈치였다.

물론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영주들과는 꽤나 다른 이야기를 한 사람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하지만 부디 알려주었으면 하오. 그대는 3단계 기사도에 도달한 것이오?"

앙주 남작.

영주 회의에 참석한 영주들 가운데서 유성을 제한다면 유일한 기사인 그의 물음에 유성은 바로 답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위 같은 남자였다.

단정하게 잘랐을 뿐 딱히 멋을 부리지 않은 머리와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

그저 묵묵히 수행의 길을 걷고 또 걸었을 것 같은 남자.

닮지 않았다.

하지만 한 남자의 얼굴을 연상케 했다.

라투스 남작.

스스로의 목숨을 불태워 로티안을 지켜낸 영웅.

라투스 남작은 분명 범부의 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고 포기하는 대신 끊임없이 노력해 자신만의 기사도를 성취하였다.

외모는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삶의 방식과 영혼이 라투스 남작과 닮은 사내였다.

그렇기 때문일까.

유성은 잠시 고민한 끝에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아직 3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사도는 1단계 기사도입니다."

유성의 대답에 앙주 남작이 눈을 부릅떴다.

그는 화라도 난 것처럼 얼굴을 붉혔지만 잠깐뿐이었다.

담담한 유성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그는 헛웃음을 흘린 뒤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군. 진짜 1단계란 말이오?"

"예, 1단계입니다."

유성이 이번에도 담담히 답하자 앙주 남작은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인 끝에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놀라운 일이군. 그런 기사도가 1단계 기사도라니...."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날 보았던 빛의 군세가 절로 떠오르는 앙주 남작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 기사도가 1단계 기사도라니.

기사도는 본디 기사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눈앞의 남자는- 로티안의 흑기사는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겨우 1단계부터 그런 기사도를 가진 것일까.

앙주 남작은 깊게 고민하는 대신 다시 유성을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입 밖에 나온 말은 다소 담백한 말이었다.

"2단계가 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구려."

"도달하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유성의 대답에 앙주 남작은 소탈하게 웃었다.

"솔직하게 답해주어 고맙소."

앙주 남작 스스로가 말했듯이 무례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에 솔직하게 답해준 유성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앙주 남작의 모습에 유성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앙주 남작님이라 말씀드린 겁니다."

"하핫, 더 고맙구려."

이번에도 소탈하게 웃은 앙주 남작은 돌연 표정과 자세를 가다듬더니 멋지게 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웠다.

"발락 앙주가 맹세하나니, 로티안의 흑기사가 바랄 때, 나의 검은 그의 검이 될 것이다."

도움을 청하면 절대 거절하지 않고 함께 싸우겠다는 맹세였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지나가듯 보았던 대사였지만 무어라 답해야 할지가 거짓말처럼 떠올랐다.

그랬기에 유성은 똑같이 표정과 자세를 가다듬은 뒤 검을 뽑아 가슴 앞에 세우며 말했다.

"때가 되었을 때, 나의 검은 발락 앙주의 검과 함께할 것이다."

짝을 이루는 문구에 앙주 남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검을 거둔 그는 무척이나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부름을 기다리고 있겠소. 언제든지 불러만 주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앙주 남작은 숨을 한 번 크게 삼키더니 이번엔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유성이 성왕의 계승자라는 것을 알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유성은 카멜롯의 후예를 자처하는 방랑기사였으니, 카멜롯의 오랜 예법을 갖춰 유성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유성도 그런 앙주 남작의 뜻을 이해했기에 똑같이 웃으며 예를 표하였다.

"카멜롯의 영광을."

"그럼 이만 물러가겠소."

이번에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한 앙주 남작이 방을 나섰다.

'마음에 드네.'

꾸밈없이 담백한, 그저 올곧게 나아가는 한 자루 검과 같은 사내.

그런데 그때였다.

"계승자님."

"응?"

"진짜 1단계였어요?!"

르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표정을 보니 아까 처음 들었을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앙주 남작이 있어서 참았던 것 같았다.

그랬기에 유성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어, 1단계 맞아."

"아니, 그게 1단계면 나중에 2단계 되었을 땐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뭐 요새라도 튀어나오나?

비공정이라든지?

"그러게.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하네."

더욱이 기사도의 끝은 2단계가 아니었으니까.

2단계도 모르는 마당이니 3단계는 아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음, 아무튼 좋아요. 역시 계승자님. 성왕의 계승자시니 기사도도 비범하신 거겠죠. 아서 왕은 기사왕이라고도 불렸으니 계승자님도 기사왕이시고, 그럼 계승자님의 기사도는 기사왕의 기사도니 기사도의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음, 그래요. 이제 납득이 좀 되네요."

자문자답하듯 납득하는 르네의 모습에 다시 웃은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주들이 계속 찾아오는 바람에 적당한 방 하나를 잡고 계속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젠 유성 자신의 숙소로 돌아갈 때였다.

"가자, 르네."

"네, 계승자님."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숙소로 향하였다.

* * *

이후의 일정은 무난하면서도 제법 급하게 돌아갔다.

우선은 죽은 영주들을 위한 약식 장례가 치러졌다.

다시 엉엉 울음을 터트린 르네는 발투아 백작의 수하들에게 서신을 한 장 맡겼다.

본래라면 바리안 남작이 직접 발투아 백작에게 전달했어야 할 이야기를 담은 서신이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영주 회의였다.

함께 생사의 위기를 넘긴 덕분인지 아니면 유성의 존재 때문인지 회의장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눈앞에 직면한 위기 앞에 연대 의식이 생긴 영주들은 서로간의 긴밀한 협조를 약속한 뒤 회의를 파하였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뵐게요."

"기다리고 있겠소."

회의가 끝나자마자 유성에게 모여든 영주들이 인사말들을 건넸다.

예정보다 오랜 시간을 머물게 된 터라 다들 서둘러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병사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회의장 안에 들어오더니 곧장 카리안 백작에게 달려가 무어라 귓속말을 하였다.

병사의 표정이 워낙 다급한데다가 이야기를 듣는 카리안 백작의 표정 역시 실시간으로 심각해지자 영주들은 저마다 하던 말을 멈추고 카리안 백작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실 다들 짐작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랬기에 회의장 안에는 긴장된 침묵이 가득했고, 마침내 카리안 백작이 입을 열었다.

"좋지 않은 소식이오. 랫맨들의 대군이 아르투아 백작령을 침공했다고 하오."

예상했던 바로 그 내용이었다.

라발 남작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대군이라 하면 대, 대체 얼마나 되는 거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1만 이상은 되는 것 같소."

"1만?!"

실로 엄청난 숫자였다.

서부 영주들의 군사를 모두 합쳐야 겨우 될 법한 숫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총력전을 각오하고 병력을 모은다면 수만 대군까지도 넘볼 수 있을 터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부 영주들이 총집결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더욱이 카리안 백작은 최소 1만이라 했으니, 아르투아 백작령만으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는 대군이 분명했다.

"아르투아 백작령이 침공당한 것은 어젯밤이오. 마법을 통한 전보라 자세한 정보까지는 알 수 없지만 아르투아 백작 본인이 지원을 청하고 있소. 아마 귀공들의 영지에도 전보가 도착했을 거요."

영주들의 얼굴이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자존심 높은 아르투아 백작이 단 하루 만에 마법 전보까지 써서 도움을 청할 정도이니 랫맨들의 군세가 정말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리안 백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라발 남작을 시작으로 다른 영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연합군을 형성해야 하오. 흉성의 시대가 도래한 지금, 괴물들의 공격에 맞서 집결해야 할 때요."

왕도의 느려터진 대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단순히 협력하자고 논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은 반역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카리안 백작의 얼굴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영주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반역으로 몰릴 위험성도 문제였지만 단순히 돕자고 말하는 것을 떠나 실제로 병력과 물자를 대는 것은 쉬이 입 밖에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리안 백작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로티안은 연합군에 참여할 것입니다."

유성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 순간 영주들이 마치 눈치싸움이라도 하듯 다시 한번 서로를 돌아보았고, 오베르 남작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로티안의 흑기사께서 참여하신다면 저 역시 참여하겠습니다."

"나도 참여하겠소."

두 번째로 나선 것은 앙주 남작이었다.

그러자 오베르 남작과 앙주 남작을 번갈아 쳐다본 라발 남작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나, 나도 참여하겠소."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나도 참여할 거요."

라발 남작까지 나서자 다른 영주들 역시 앞다투어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이런 영주들의 모습에 카리안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리안 백작 자신의 말에는 망설이던 영주들이 유성이 참여한다고 하자 바로 동참하겠다고 돌아서는 모습에 실로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쉬움이나 못마땅함보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다.

과거의 카리안 백작과 달리 지금의 카리안 백작은 유성이 성왕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투아 백작가에서도 참여할 거예요, 반드시."

르네가 낮게 말하자 영주들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1만이란 숫자에 위축된 것이 사실이었지만, 서부의 영주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리안 백작이 다시 말했다.

"말만으로는 안 되오. 실제로 병력과 물자를 모아야 하오. 그것도 가능한 빨리."

그냥 모은다고 모이는 병력이 아니었다.

각각의 영지에 흩어져 있는 병력을 루셴에 모으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과연 그때까지 아르투아 백작령이 버텨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니 아무리 서둘러도 부족했다.

"카리안 백작."

유성의 부름에 머릿속의 주판을 튕기기 시작하던 카리안 백작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유성은 카리안 백작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연합군의 결성을 부탁합니다. 로티안의 병력은 루안 경이 총괄할 겁니다."

유성의 말에 오베르 남작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로티안의 병력을 유성이 이끌지 않겠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유성은 괜한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정답을 내놓았다.

"저는 지금부터 아르투아 백작령으로 향하겠습니다."

"자, 잠깐!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설마 병력도 하나 없이 단신으로... 아!"

유성의 말에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라발 남작이 불현듯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영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신으로 아르투아 백작령을 지원하러 간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개소리였지만 로티안의 흑기사에게는 달랐다.

그가 곧 군단이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연합군을 결성해 남하하도록 하겠소."

카리안 백작이 상기된 얼굴로 답하자 유성은 다른 영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영주분들도 부탁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라발 남작을 시작으로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이 중심이 된다면 정말로 서부의 영주들 전원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기 때문이다.

"르네."

"네, 계승자님."

유성의 부름에 르네가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아르투아 백작령으로 함께 가자는 뜻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르네와 눈빛을 교환한 유성은 이번엔 질리언을 돌아보았다.

"질리언 성녀님."

"...함께 하겠습니다."

유성의 부름에 질리언이 순간 입술을 깨물며 울상이 되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왕의 마법사와 성녀가 함께한다.

"루안, 로티안의 병력을 부탁한다."

유성의 말에 루안은 순간 자신도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스스로를 억눌렀다.

로티안의 병력을 이끌고 연합군에 참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유성은 마지막으로 로빈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대답할 것도 없다는 것이 르네의 곁에 섰다.

본래 로빈은 루안과 함께 보낼 생각이었던 유성이었지만 생각을 고쳤다.

유성 자신 말고도 여차했을 때 르네와 질리언을 호위할 인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함께할 인원의 정리가 끝나자 유성은 다시 영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모두들 아르투아 백작령에서 뵙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유성은 카리안 백작과 묵례를 나눈 뒤 그대로 돌아서서 회의장을 나섰다.

"보급품은 미리 챙겨둔 게 있어요."

르네가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볼보 남작령에서 유격전을 한 이후 언제가 또 비슷한 일이 생길 거란 생각에 준비해둔 보급품이었다.

"역시 유능해."

"저는 왕의 마법사니까요."

르네가 빙긋 웃자 마주 미소를 그린 유성은 질리언을 돌아보았고,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번엔 땅굴을 부수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아마도."

질리언은 무어라 답하는 대신 그저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고, 네 사람은 내성을 나오자마자 군마를 소환해 탑승했다.

"와아아! 흑기사님!"

"로티안의 흑기사다!"

"마녀님!"

성문을 향해 말을 달리는 유성 일행을 보며 남쪽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는 루셴의 주민들이 환호했다.

유성은 괜한 불안감을 조장하는 대신 주민들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준 뒤 성문을 통과했다.

"저쪽이에요!"

로빈과 함께 말을 탄 르네가 남동쪽을 가리켰다.

서부 제일의 곡창지대인 아르투아 백작령이 위치한 방향.

유성과 일행들은 말을 달렸다.

제19장 - 아르투아 백작령

아르투아 백작 휘하에는 네 명의 남작이 있었다.

아르투아 백작령에서 이번 영주회의에 참석한 것은 빌리엄 남작뿐이었으니 나머지 세 남작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고 있거나 이미 아르투아 백작의 소집을 받고 전장에 나섰을 터였다.

아트루아 백작령을 향해 최단 거리로 달리던 일행은 해가 지자 적당한 곳에서 야숙 준비를 했다.

모닥불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르네는 땅바닥에 지도를 그리며 말했다.

"아르투아 백작령은 대충 이런 구조예요."

볼보 남작령의 동남쪽에 위치한 아르투아 백작령은 크게 보면 세로가 긴 직사각형 형태의 땅이었다.

루셴을 감싸고 있는 커다란 강이 만드는 삼각주 안에 위치하고 있기에 서부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사실상 영지 전체가 농토인 곳이었다.

"아르투아 백작이 머무는 본성은 여기예요. 딱 중앙이라 할 수 있죠."

직사각형의 중심점에 아르투아 백작의 본성이 있었고, 아래위로 각각 둘씩 남작령이 있었다.

"빌리엄 남작이 다스리던 땅은 어디지?"

"이쪽이요."

백작의 본성을 기준으로 남서쪽에 위치한 땅으로, 랫맨들이 서남부에서 밀려온 걸 생각하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땅인 셈이었다.

"바로 본성으로 향하실 건가요?"

르네의 물음에 유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틀 전- 사실상 사흘 전에 적들이 쳐들어왔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정보가 없는 상황이니 우선은 근처에 있는 남작령에 들려 정보를 모은 뒤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유성의 설명에 르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네, 적들의 숫자가 많긴 하지만 아르투아 백작령도 보통은 아니니까요. 샤를 경도 있고요."

당장 얼마 전에 고블린 무리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는 샤를 경이었다.

2단계 기사도를 완성한 강한 기사이니 맥없이 무너지진 않을 터였다.

"좋아 그럼 우선은 여기 로베르 남작령을 목표로 이동하자."

"네, 계승자님."

아르투아 백작의 본성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영지를 확인한 유성과 르네는 식사 준비를 시작했고, 몇 시간이나 말을 달린 탓에 반쯤 탈진한 질리언은 그냥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오전.

볼보 남작령을 지나 아르투아 백작령- 정확히는 로베르 남작령의 마을에 도착한 일행은 작게나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베르 남작이 소집령을 내린 것 같습니다."

전쟁이 났으니 영민들도 보호하고 징병도 할 겸 마을을 비우게 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대응이었지만 유성은 미간을 좁혔다.

마을을 비우는 시기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서두르자."

"네, 계승자님."

유성이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르네 역시 따라서 달리기 시작했고, 슬슬 허벅지와 엉덩이의 통증을 느끼고 있던 질리언은 마음속으로 울며 말을 달렸다.

수확이 끝나 텅 빈 밭들을 지나쳐 한참을 달리자 저만치 멀리 로베르 남작의 성이 보였다.

부유한 영지의 성답게 로티안이나 루셴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성벽이 커다란 마을 외곽을 둘러싸고 있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평범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공격받고 있어요!"

르네의 말대로였다.

어림 세어도 일천은 족히 되어 보이는 랫맨들이 로베르 남작의 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르투아 백작령이 공격받은 것은 불과 나흘 전이었다.

그런데 후방에 속하는 로베르 남작령이 공격받고 있다니.

사실상 남부의 남작령들과 아르투바 백작의 본성을 그냥 지나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속도였다.

설마 아르투아 백작령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라도 한 것일까?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유성은 일단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아직 거리가 제법 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병력이었지만 초인인 기사의 눈이었다.

집중해서 살피니 공격 중인 랫맨들의 병종을 살필 수 있었다.

'루셴과 달라.'

루셴을 공격한 랫맨들은 보병과 늑대 쥐를 탄 기병 단 두 종류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로베르 남작령을 공격하고 있는 랫맨들은 제대로 된 공성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늑대 쥐를 탄 기병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창과 방패를 든 일반 보병들 사이로 랫맨들의 인해전술을 상징하는 병종 가운데 하나인 거대 쥐들이 보였다.

손바닥 크기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한 보통 쥐들과 달리 거대 쥐들은 이름 그대로 덩치가 커서 작은 개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

그런 거대 쥐들이 잔뜩 모여 돌진하면 오히려 평범한 랫맨들의 돌진보다도 더 막기가 힘들었다.

수백 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 쥐들이 피리를 든 랫맨 곁에 웅크리고 앉아 돌진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거대 쥐들 옆으로는 사다리차를 앞세운 랫맨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다시 그들 뒤에는 거대한 공성 병기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위 대신 역병 주머니를 쏘아 보내는 투석기들뿐만 아니라 성문을 부수기 위한 공성추까지 있었는데, 유성은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투석기들 사이에 단 한 대뿐이었지만 마동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약이 아닌 마력의 힘을 이용하는 랫맨들의 마동포는 한 번 발사할 때마다 수십 마리가 넘는 랫맨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지만 일격에 성벽을 무너트릴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가진 병기였다.

다행히 이제 막 전투가 시작되려는 단계인 것 같았다.

"르네! 바로 공격한다!"

"네!"

유성이 랫맨들을 향해 돌진하자 르네 역시 용맹하게 그 뒤를 따랐다.

단 둘이서 성을 공격 중인 군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두려움이나 주저함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진짜 미친 거 같아!'

아니, 내가 미칠 것 같아!

속으로 절규한 질리언은 두려움과 주저함을 가득 품은 채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렸다.

랫맨들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성벽 위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랫맨들 역시 유성 일행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양쪽 모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군대를 향해 돌진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너무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성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달리며 거리를 잼과 동시에 어디를 어떻게 치고 들어가야 할지를 직감함과 동시에 계산했다.

"천마 기병대! 중갑 기병대! 집결하라!"

유성의 명령에 강한 빛이 일었다.

유성의 돌진을 멀뚱히 쳐다보던 랫맨들이 순간 일어난 황금빛에 순간 시력을 잃거나 몸을 웅크리며 비명을 질렀다.

츠화아!

달리는 유성의 좌우로 롤랑드가 이끄는 중갑 기병대가 나타났다.

롤랑드는 눈앞의 적들을 확인하자마자 유성과 속도를 맞춰 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추행진을 펼쳐라!"

유성을 최선두로 한 쐐기 형태의 진형이 갖춰졌다.

그리고 그런 중갑 기병대의 등 뒤에서 등장한 천마 기병대를 향해 유성이 소리쳤다.

"상공으로! 공성 병기를 공격해라!"

"상승한다!"

유성의 명령을 즉각 해석한 다이애나가 소리치며 고삐를 당기자 에니카가 지면을 박차 하늘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오오오!"

성벽 위에서 바라보던 병사들이 절로 감탄해 외쳤다.

맹진하는 중갑 기병대의 뒤에서 천마 기병대가 하늘로 솟구치는 광경은 실로 신화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관통한다!"

유성이 그리 외치며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거대 쥐들을 들이박듯 돌진했다.

"밟아버려!"

"멈추지 마라! 계속 달리는 거다!"

콰가가가가가!

중갑 기병대가 거대 쥐들을 짓밟으며 랫맨들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런 모두의 머리 위에서 랫맨들을 가로지른 다이애나의 천마 기병대가 지상을 향해- 정확히는 지휘관처럼 보이는 랫맨과 그 호위대를 향해 투창을 던졌다.

"마, 막아!"

"방패를 세워!"

랫맨들이 다급하게 방패로 머리 위를 가렸지만 일반적인 화살보다 훨씬 더 무겁고 위력이 강한 투창이었다.

방패를 부수고 쏟아지는 투창 세례에 지휘관 랫맨이 비명을 질렀고, 순간적으로 랫맨들의 지휘체계가 마비되었다.

유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거대 쥐들을 밟고 지난 중갑 기병대의 간격을 좁히게 한 뒤 그대로 랫맨 보병대의 측방을 관통했다.

"파이어 월!"

유성의 바로 등 뒤에서 달리던 르네가 마법을 발동시키자 맹진하는 중갑 기병대의 뒤로 불꽃의 벽이 솟구쳐 올라 랫맨 보병대를 갈라놓았다.

겁에 질린 랫맨들이 저들끼리 밀며 도망치니 절로 길이 열렸고, 중갑 기병대는 다시 한번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그 순간 다이애나는 유성이 파괴하라 명령한 공성병기가 무엇인지 직감했다.

투석기들 사이에 놓인 마동포를 목표로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드래군 다이브.

충격의 다이애나.

천마 기병대가 다이애나와 함께 급강하 비행으로 마동포를 향해 돌진해 거대한 충격파를 발생시켰다.

콰가강!

마동포를 단번에 부수진 못했지만 공성포의 지지대가 무너져 내렸고, 뭣보다 마동포의 제물로 쓰기 위해 포박해 두었던 랫맨 노예들 대부분이 충격파에 휩쓸려 터져나갔다.

마동포의 사용이 불가함을 확신한 다이애나는 천마 기병대를 이끌고 다시 비상했고, 혼란한 와중에 랫맨 보병대를 관통하고 지난 유성은 어느새 가까워진 성벽 위로 시선을 던졌다.

성벽 위에선 병사들은 물론이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까지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 무언가 행동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유성은 그들을 탓하는 대신 성벽 위를 주시한 채 명령했다.

"엘프 궁병대! 집결하라!"

로베르 남작령의 성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어느 정도 원거리에 부대를 소환하는 것이 가능하니, 높은 곳에 소환하는 것 역시 가능했다.

성벽 위에서 황금빛 섬광과 함께 바나데인과 엘프 궁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놀라고 당황해 멍해 있던 병사들은 자신들 사이에 갑자기 나타난 엘프들의 모습에 더욱 놀라 아예 굳어버렸고, 바나데인은 그런 인간들- 정확히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투구 쓴 남자를 보며 혀를 한 번 차더니 성벽 아래의 랫맨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격 개시! 연사한다!"

명령과 동시에 바나데인이 효시를 쏘자 엘프 궁병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활을 쏘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밧!

엘프 궁병대의 숫자는 쉰 명이었지만, 하늘을 가르는 화살의 수는 백 발을 훌쩍 넘어 근 이백 발에 가까웠다.

화살의 비- 아니 집중적 폭우에 유성과 중갑 기병대 근처에 있던 랫맨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다시 이동한다!"

중갑 기병대의 숫자는 십여 기에 불과했으니,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포위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유성의 생각대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랫맨들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조련사들이 피리를 불자 거대 쥐 수백 마리가 유성과 중갑 기병대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옴팔로스의 방벽이여!"

질리언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자 가로로 긴 방벽 세 개가 동시에 솟구쳐 올라 거대 쥐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그 사이에 중갑 기병대는 계속 움직여 랫맨들과 거리를 벌린 뒤 선회를 하였다.

다이애나가 이끄는 천마 기병대가 랫맨들의 지휘관을 향해 다시 투창을 던졌다.

바나데인과 엘프 궁병대가 다시 화살의 비를 퍼부었고,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로베르 남작 측의 지휘관이 투석병들과 궁병들에게 사격을 명령했다.

전장의 상황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 순식간에 인지한 유성은 중갑 기병대와 함께 다시 한번 랫맨들을 향해 돌진했다.

물론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랫맨 보병들이 대각선 방향으로 창을 박고 자세를 낮춰 중갑 기병대를 받아낼 준비를 하였다.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한 보병들의 전술이었다.

물론 랫맨들의 창 따위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한다면 무시하고 돌진할 수 있는 중갑 기병대였지만 그건 다른 방법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유성은 돌진하는 말 위에서 진은의 검을 바짝 당겼다.

펼치는 것은 성왕십자검의 두 번째 검.

열화에 이은 그것은 질풍일지니.

유성이 전방을 향해 진은의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길이가 10미터를 훌쩍 넘을 것 같은 날카롭고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날아가 랫맨 보병들을 강타했다.

"크아악!"

"꺼억!"

전열에 있던 랫맨들이 가슴이나 허리가 베여 쓰러졌다.

세워두었던 창대 역시 부러지거나 꺾이다 보니 처음 측방을 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파고들 틈이 생겨났다.

열화의 검기나 일반적인 오라 블래스트보다 위력은 약해도 절삭력과 공격 범위만큼은 훨씬 더 우월한 질풍의 검이었다.

"돌진하라!"

"우오오오오오!"

롤랑드와 중갑 기병대가 다시 한번 랫맨 보병들을 짓밟았다.

이 와중에도 계속 화살의 비가 쏟아지니 결국 버티지 못한 랫맨 지휘관이 휘하의 병력을 데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노, 놈들이 도망친다!"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랫맨들은 도망치는 지휘관의 뒷모습에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우오오! 이겼다!"

"와아아아!"

성벽 위의 병사들이 환호했지만 유성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중갑 기병대를 돌려보낸 뒤 케이트의 정예 보병대를 소환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가 기다렸다는 듯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속도만 따지자면 중갑 기병대가 당연히 우월했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보다는 숫자였다.

케이트가 발산한 황금빛 오라와 유성이 발동시킨 질풍의 오더를 겹쳐 받은 정예 보병대의 기동 속도는 보병 보다는 기병에 가까웠고, 도망치던 랫맨들은 순식간에 뒤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부숴버려!"

지미를 선두로 정예 보병대가 검을 휘둘렀다.

천마 기병대와 엘프 궁병대 역시 거칠게 공격했고, 로베르 남작군의 지휘관이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성문을 열어라! 적을 추격한다!"

"와아아!"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온 로베르 남작군까지 합류하자 랫맨들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포인트를 150점 획득했습니다.]

[도시 구원: 선업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상태창 문구를 확인한 유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르네와 질리언 너머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 있는 지휘관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그가 로베르 남작.

르네와 시선을 교환한 유성은 빛의 군세를 돌려보낸 뒤 르네와 질리언을 대동한 채 로베르 남작에게 다가섰다.

제19장 - 아르투아 백작령 (2)

"로티안의 흑기사! 혹시 로티안의 흑기사님이십니까?!"

갑자기 사라진 빛의 군세에 눈의 휘둥그레진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성을 보며 급히 물었다.

"예, 제가 로티안의 유성입니다."

"오, 세상에! 전 로베르 남작입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루셴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지요!"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로베르 남작의 얼굴에는 호의를 넘어 선망까지 어려 있었다.

[원래 기사도 문학 매니아로 유명한 사람이에요.]

[로베르 남작 입장에선 소설 속 주인공이 눈앞에 나타난 기분일걸요?]

머릿속으로 전달된 르네의 메시지에 유성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에서 내려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이쪽은 제 마법사인 르네, 그리고 옴팔로스 교단의 질리언 성녀님입니다."

유성이 말에서 내려 자신 곁에 선 르네와 질리언을 소개하자 로베르 남작이 다시 눈을 껌벅였다.

"질리언 대사제가 성녀?"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영지이다 보니 이미 면식이 있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정말로 놀란 로베르 남작의 얼굴에 질리언은 복잡한 심경을 느끼며 우아하게 답했다.

"얼마 전에 신탁을 받았습니다."

"오, 세상에나!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젠 신성마법도 펑펑 쓰시겠군요!"

하하하 웃으며 뼈를 때리는데 딱히 비꼬거나 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애당초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사람은 착하다는 걸 알고 있던 질리언은 어색하게 웃은 뒤 화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죠?"

아르투아 백작령이 공격받은 것은 겨우 나흘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아르투아 백작령 최북단에 위치한 로베르 남작의 영지가 공격을 받는다니.

아르투아 백작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성들을 내주었다면 모를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질리언의 물음에 로베르 남작은 급격히 우울한 얼굴이 되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전황이 매우 좋지 못합니다. 아르투아 백작님이 계신 레지옹을 랫맨들의 대군이 포위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포위하고도 남은 병력이고요."

"레지옹이요?"

르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지옹은 아르투아 백작의 본거지가 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레지옹이 포위당했다는 것은 곧 남부의 두 영지가 랫맨들에게 점령당했다는 것이니, 상황이 정말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샤를 경이 이끄는 백작의 본대는 어떻게 됐는지 아십니까?

유성의 물음에 로베른 남작은 더더욱 우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저도 출병 준비 중에 접한 소식들이라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회전에서 크게 패했다는 것 같습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랫맨들에 맞서 대규모 회전을 펼쳤지만 패배했고, 그 여파로 레지옹까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한 번에 밀려버린 모양이었다.

"샤를 경은 어떻게 되었죠?"

"모르겠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샤를 경은 단순히 강한 기사가 아니라 장차 아르투아 백작이 될 사람이었으니, 아르투아 백작가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유성은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보았다.

최선은 본성인 레지옹을 구원하는 것이었지만 1만이 넘는 병력을 유성 자신과 빛의 군세만으로 어찌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베르 남작령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상책은 아니었다.

"로베르 남작."

"예! 흑기사님!"

일단 아직까진 같은 남작이었지만 도시를 구해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에게 있어 유성은 선망하는 아이돌 같은 존재라 그런 것인지 빠릿하게 답하는 로베르 남작이었다.

다소 부담스럽긴 했지만 적대적인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유성은 성벽을 한 차례 돌아본 뒤 말했다.

"성에 머물면서 병력과 식량을 비축해주셨으면 합니다. 카리안 백작이 서부 영주 연합군을 결성하고 있으니 조만간에 지원군이 올 겁니다."

"영주 연합군이 결성된단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흑기사님이 연합군의 총사령관?"

로베르 남작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자 유성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직 정확한 지위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성을 지켜주십시오. 루셴에도 사람을 보내 최대한 빠른 지원을 요청해주셨으면 합니다."

유성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로베르 남작은 순간 멈칫하더니 살짝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흑기사님, 혹시 저희 성에 머물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예, 바로 남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성의 말에 로베르 남작이 헉하고 숨을 삼켰고, 질리언 역시 눈을 크게 뜨며 당황했다.

'아니, 여기까지 그렇게 강행군을 해놓고 오자마자 전투도 했는데 쉬지도 않고 다시 이동을 한다고요?'

하지만 마음의 소리였기에 유성은 듣지 못했다.

르네는 당연하다는 듯 유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로베르 남작은 왜인지 결의에 찬 얼굴이 되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실까요? 최대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아예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를까, 적은 수의 병력이 필요하진 않은 유성이었다.

그랬기에 르네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보급품을 좀 지원해주셨으면 해요."

"물론이지요, 말씀만 하십시오. 보급관을 불러와라!"

로베르 남작이 크게 외치자 병사들이 성안으로 급히 달려들어갔다.

아무래도 보급관이 오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 보였기에 유성은 질리언을 돌아보며 말했다.

"질리언 성녀님, 죄송합니다. 한시가 급한 듯하여...."

이미 아르투아 백작령이 반쯤 털렸고, 본성인 레지옹까지 위험하다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질리언은 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애써 우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흑흑."

아주 약간 속마음이 새어나가긴 했지만, 그리고 그걸 들은 유성이었지만 서로를 위해 모른 척을 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보급관에게 보급품을 받은 유성 일행은 로베르 남작령을 떠나 레지옹을 향해 이동했다.

* * *

다음날 늦은 오후.

레지옹으로 향하던 유성 일행은 빈 마을에서 일단 발을 멈췄다.

해가 지고 있기도 했지만 빛의 새로 전방을 정찰하던 르네가 마을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숨어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로티안의 흑기사고, 이쪽은 옴팔로스 교단의 질리언 성녀님과 발투아 백작가의 영애이자 나의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다."

마을 입구에 서서 그리 외치자 빈집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쭈뼛쭈뼛 머리를 내밀었는데, 그중 한 명이 질리언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질리언 대사제님?"

"발터?"

질리언도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질리언인 걸 확인한 병사- 발터는 안도의 숨을 토한 뒤 다른 병사들을 데리고 일행 앞으로 나섰다.

"예, 발터입니다. 그런데 대사제님, 성녀...시라고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한 물음에 질리언의 눈치를 살핀 르네가 서둘러 말했다.

"옴팔로스 님께 신탁을 받아 최근에 성녀가 되셨어요."

"오오오... 그럼 이제 신성 마법도 쓰실 수 있겠군요?"

발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로베르 남작도 비슷한 말을 했던 걸 보면 질리언에게 있어 신성마법은 정말 아킬레스 건 같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무어라 답하는 대신 쥐어짜낸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질리언은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얼른 화제를 돌려버렸다.

"발터, 이쪽은 로티안의 흑기사님과 발투아 백작가의 영애이신 르네 양이에요. 수도원에 곧잘 다니던 신실한 신자인 발터입니다."

서로를 소개시키자 발터가 유성과 르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질리언이 다시 물었다.

"발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레지옹 남쪽에서 큰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백작님의 군세가 크게 패했고, 부대가 흩어졌습니다. 저희도 일단 도망쳤다가 다시 레지옹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레지옹은 포위된 상태라 로베르 남작령으로 향하던 중이었습니다."

탈영병이 아니라는 것을 무척이나 강조하고 싶은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실 일행에게 있어서는 탈영병이든 아니든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적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르네가 묻자 발터는 기억을 더듬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 일단 숫자가 많았습니다. 1만을 훌쩍 넘는 것 같았는데, 샤를 경은 어차피 쥐새끼들이라며 걱정 말라고 하셨지만... 그건 그냥 쥐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보다 훨씬 큰 괴물 쥐뿐만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괴물들도 잔뜩 있어서 정말 끔찍했습니다. 하지만 제일 두려운 건 역시 놈들의 대장이었습니다."

떠듬떠듬 말을 하던 발터는 몸서리까지 치더니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쥐의 머리에 사슴뿔이 나고 덩치가 아주 큰 괴물이었는데... 으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이미 충분했다.

"랫 로드인가."

판타지 모나크에서 볼 수 있는 랫맨들의 최종 테크 유닛.

르네와 질리언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시선까지 모이자 유성은 르네를 보며 설명했다.

"날 때부터 랫맨들의 왕으로 태어난 존재야. 이전에 싸웠던 코볼트의 왕자처럼 랫맨의 신의 피를 이은 신혈자이기도 하고."

하지만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일반적으로 랫 로드가 훨씬 강했다.

랫맨들이 모시는 신이 코볼트의 신보다 더 강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유성의 설명에 질리언이 발터를 돌아보며 물었다.

"발터, 설마 샤를 경이?"

"예, 천사로 변하셔서 돌진하셨는데 순식간에 패하셨습니다. 그,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고요."

천사의 형상으로 변하는 기사도 덕분에 아르투아 백작령에서는 풍요의 신 에스트리엘의 사자와도 같은 대우를 받던 샤를 경이었다.

그런 샤를 경이 단숨에 패했으니 아마 거기서 승부가 결정되었으리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르투아 백작령의 군세가 회전에서 패하고 본거지인 레지옹이 포위된 것부터가 이미 안 좋았지만, 거기에 랫 로드까지 있다면 실로 최악이었다.

'레지옹은 버티지 못한다.'

랫 로드의 존재 때문이었다.

랫 로드는 랫맨들의 왕.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랫맨들의 전투력이 강화되었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랫 로드를 막을 방법이 없다.'

본래 전쟁에서는 아무리 강한 전사라 해도 결국 군대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판타지 모나크의 전쟁은 달랐다.

군대로도 막을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개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랫 로드가 성벽을 넘어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쓸어버린 뒤 성문을 연다면 어찌할 것인가.

랫 로드가 아예 성벽을 무너트려 새로운 통로를 만든다면 또 어찌할 것인가.

비대칭 전력을 막기 위해서는 비대칭 전력이 필요했고, 아르투아 백작령이 보유한 최강의 비대칭 전력은 샤를 경이었다.

그런데 샤를 경이 패한 지금 아르투아 백작령에는 랫 로드를 막아낼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유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여기서 레지옹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로베르 남작령으로 돌아가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상책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계승자님! 랫맨들의 대군이 접근하고 있어요!"

르네가 돌연 외친 말에 병사들이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과 질리언은 르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앞서 보내놓았던 빛의 새를 통해 적을 관측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거리는 얼마나 되지? 규모는?"

"4km 정도? 숫자는... 적어도 5천은 되는 것 같아요."

레지옹은 함락당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숫자였다.

"읏!"

"르네?"

순간 비틀거린 르네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흔들더니 거친 숨을 토하며 말했다.

"빛의 새가 소멸당했어요. 하얀 털에 붉은 눈을 가진 랫맨이었는데, 이마에 외뿔이 솟아 있었어요."

"레드 아이. 랫 로드 바로 아래에 위치한 랫맨들의 고위 마법사야."

아무래도 레지옹을 함락시키지마자 병력 일부를 북상시킨 모양이었다.

랫 로드 본인이 오지 않은 것은 호재였지만 레드 아이와 5천 군세라 해서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로베르 남작의 성은 로티안이나 루셴처럼 방비가 제대로 된 성이 아니었다.

해자도 없고 성벽도 낮았기에 5천이나 되는 병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최선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레드 아이가 이끄는 랫맨 군대의 기동을 지연시킨다.

이틀- 아니, 단 하루만 지연이 되더라도 놈들이 로베르 남작령까지 북상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있으니 영주 연합군의 1차 지원군을 기대해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무슨 수로 놈들의 기동을 지연시킬 것인가.

고심하던 유성은 순간 고개를 번쩍 들고 상태창을 열었다.

[신전의 레벨 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신전 Lv2가 되었습니다.]

[신전의 새로운 기능들이 개방되었습니다.]

[시간 단축: 신전에 축적된 신성력을 사용해 각 시설의 완료 시간을 단축시킵니다.]

[축성: 각종 도구들에 여신의 축복을 부여합니다.]

놈들과의 거리는 약 4km.

몇 가지 조건을 확인한 유성의 머릿속에 한 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제19장 - 아르투아 백작령 (3)

유성의 설명을 들은 질리언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 그게 설마 계획인 건가요?"

저도 모르게 되묻자 유성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확실히, 가능하겠네요."

유성의 말에 르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질리언은 다시 눈을 부릅떴다.

확실히?

가능하겠다고?

아니, 뭐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장당할 걸 전제로 땅굴 속에서 천장을 파기까지 했는데 뭐라고 말이 안 되겠는가.

하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어떻게 계획이 되는 거죠? 여기 정상인은 저밖에 없나요?'

마음의 소리만으로는 부족해서 간절한 눈빛까지 보내보았지만 유성과 르네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서로를 보며 미친 계획에 대해 논의할 뿐이었다.

"질리언 언니의 역할이 중요하겠네요."

"맞아, 성녀님 없이는 불가능한 계획이지."

거기까지 말한 르네와 유성은 질리언을 돌아보았고, 질리언은 기회는 이때라는 듯 간절한 시선을 보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언니, 이게 최선이에요."

"부탁합니다, 성녀님."

질리언은 입술을 깨물며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지만 유성과 르네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말 이것밖에 방법이 없나요?"

"예, 르네가 말했듯이 이게 최선입니다."

거짓말.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이 최선일 수가 있어!

그리고 이게 어떻게 암살이에요?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죽이는 건 암살이 아니라고요!

"언니."

"성녀님."

"언니."

"성녀님."

르네와 유성이 역으로 눈빛 공격을 해오자 질리언은 결국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흑흑...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언니예요!"

활짝 웃는 유성과 르네를 살짝이지만 노려본 질리언은 이내 다시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눈물을 삼켰다.

* * *

발터는 순간 유성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

뭘 어떻게 하겠다고요?

발터가 눈을 깜박이며 되묻자 질리언이 저게 바로 정상적인 반응이라며 급히 유성과 르네를 돌아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야기한 대로다. 그러니 너희는 지금 즉시 로베른 남작령으로 향해 이 서신을 전달해라."

유성이 서신을 내밀자 얼결에 받아든 발터는 우물쭈물하다 질리언을 돌아보았다.

"그, 대사제... 아니, 성녀님?"

지금 제가 들은 게 진짜인가요?

성녀님도 진짜 하시려고요?

안에 담긴 뜻이 명백한 눈빛에 질리언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발터는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 예. 그럼 명을 받들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고맙다. 그대와 병사들에게도 무운이 함께하기를."

생각지도 못한 유성의 답례에 움찔한 발터는 이내 감동한 얼굴이 되더니 유성에게 예를 표하고 병사들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그리하여 광인 둘과 정상인 하나만 남은 상황.

광인1이 광인2에게 물었다.

"르네, 적들의 위치는?"

"그리 멀지 않아요. 반시간 내로 이 마을 근처를 지날 거예요."

르네의 대답에 마른침을 삼킨 유성은 다시 상태창을 열어 몇 가지 조작을 하였다.

다행히 딱 포인트가 맞아 생각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르네, 그리고 질리언 성녀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왕의 마법사니까요."

유성의 말에 르네가 다부지게 답했고, 질리언은 그저 웃지요의 마음으로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반시간 뒤.

레드 아이가 이끄는 랫맨들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랫맨들의 사회는 철저한 계급제로 운영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과 직업이 정해졌고,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랫맨들에게 있어 이는 무척이나 공정한 일이었다.

애당초 능력이 다르게 태어났으니 말이다.

일반적인 랫맨보다 최소 수십 배에 달하는 마력을 품고 태어나는 레드 아이들은 랫맨들의 최상위 계급에 속했다.

어린 시절부터 마법사로 교육받은 그들은 랫맨 사회를 이끄는 지도층인 동시에 각종 마법과 마도구들을 개발하는 핵심 인재들이었다.

레드 아이 머로우는 자신의 전용 가마에 앉아 눈을 가늘게 떴다.

반 시간 전쯤 파괴한 빛의 새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비록 전투에 능하지 못하다고는 하나 강력한 마법사인 머로우는 빛의 새를 파괴하는 순간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상대도 강력한 마법사였다.

적어도 마력만이라면 머로우 자신보다도 우위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강력한 마법사는 장벽 밖에서든 안에서든 매우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였다.

머로우가 진군 속도를 늦춰가면서까지 진형을 바꾼 것도 그래서였다.

오천에 달하는 랫맨들이 레드 아이의 주위를 원형으로 감싸고 있었다.

끔찍한 생체실험의 결과물인 초대형 랫맨 여덟이 커다란 방패를 든 채 주변을 경계했고, 제물로 쓸 랫맨 노예 수백이 눈과 손을 포박당한 채 레드 아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만이 다가 아니었다.

레드 아이 자신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강력한 마법을 구사 가능한 블루 아이들이 있었고, 각종 괴수들과 랫맨 보병들이 존재 자체로 벽을 만들고 있었다.

자신을 에워싼 오천 병력을 보고 나니 새삼 마음이 놓인 머로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잿빛인 장벽 밖의 하늘과 달리 장벽 안의 하늘은 다양한 색이 있었다.

지금은 검정이었다.

하지만 달과 별이 있기에 몇 가지 색이 더해졌다.

'시간이 없다.'

장벽의 균열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덕분에 위대한 랫 로드께서도 넘어오실 수 있었지만, 여기서 균열이 더 커지면 그때는 일곱 왕들 역시도 장벽을 넘을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러니 그전에 최대한 앞서나가야 했다.

인간들이 훔쳐간 문명의 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종족뿐일 테니 말이다.

'쓸모없는 다크 엘프들 같으니.'

루셴의 실패를 떠올리니 다시 기분이 불쾌해진 머로우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기분도 풀 겸 노예 놈들의 머리를 터트리거나 사지를 찢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문득 느껴진 불길한 기분에 고개를 든 머로우는 눈을 깜박였다.

"어?"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검은 하늘 위에서 순백의 무언가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날개 달린 말 세 마리.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쏟아지고 있는 천마 기병.

"라카쿠스!"

머로우가 손바닥을 뻗으며 벼락처럼 외쳤다.

그러자 뒤따르던 노예들의 머리가 터져나감과 동시에 검붉은 장벽이 머로우의 머리 위로 펼쳐졌다.

선두에 있던 천마 기병- 다이애나도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일 따름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르네가 펼쳐 두었던 은신의 마법이 풀리자 질리언의 비명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지만 다이애나는 이번에도 개의치 않았다.

온 신경을 랜스에 집중한 채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드래군 다이브.

충격의 다이애나.

콰가강!

붉은 방벽과 충돌한 랜스가 문자 그대로 폭발했다.

무지막지한 충격파에 장벽은 산산이 부서졌고, 가마 주변에 있던 랫맨들은 나자빠지거나 밀려났다.

물론 다이애나 쪽도 무사하진 못했다.

랜스는 박살이 났고, 너무나 가파른 급강하에 지친 페가수스들은 바로 날아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애당초 천마 기병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수고했어! 돌아가!"

빛과 함께 천마 기병대가 돌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지면에 거의 쓰러지듯 주저앉은 질리언이 비명처럼 기도했다.

"옴팔로스의 장벽이여!"

파파팍!

지면을 뚫고 반투명한 장벽들이 솟구쳐 올라 사각형을 이루었다.

장벽 안에 자리한 것은 유성과 르네와 질리언, 그리고 머로우뿐.

장벽이 파괴된 충격에 순간 혼비백산했던 머로우는 급히 마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소리쳤다.

"막아! 어서 막아!"

초대형 랫맨들과 괴수들이 몰려들었지만 옴팔로스의 장벽에 막혔다.

물론 막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빨리요!"

질리언의 외침에 호응하듯 유성과 르네가 머로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라파카!"

"디그!"

머로우가 급하게 발산한 마력이 지면을 일으켜 벽을 만들었지만 거의 동시에 펼쳐진 르네의 마법이 흙으로 된 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머로우의 마법 구성을 보자마자 어떤 마법을 펼치는지 간파한 르네가 가장 적절한 주문을 사용한 결과였다.

"히익!?"

깜짝 놀란 머로우가 주저앉은 그때 유성이 질주했다.

순식간에 흙벽의 구멍을 지나 검을 휘둘렀다.

너무나 빠르고 정확했다.

더욱이 머로우가 마법을 쓴 직후라 해도 좋을 타이밍에 들어온 공격이었다.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하지만 머로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콰강!

유성의 검이 머로우의 목을 가르려는 순간 머로우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깨지며 마법이 발동했다.

근거리 순간이동 마법.

근접전에서 자신들이 무력해진다는 것은 레드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레드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어온 공격을 막기 위한 아티팩트를 반드시 가지고 다녔다.

"흐흣! 멍청한 놈들! 네놈들은 이제 죽은 목숨...."

거기까지였다.

유성과 르네를 비웃던 머로우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근거리 순간이동을 하긴 했는데 겨우 1미터 남짓 밖에 이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 어째서!?"

비명처럼 외친 순간 머로우는 이유를 깨달았다.

순간이동을 가로막는 마력의 장벽이 펼쳐져 있었다.

눈앞의 여자 마법사라면 충분히 가능한 재주이긴 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흙벽까지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이것까지-

"알고 있었거든."

혹시나 했는데 판타지 모나크랑 똑같아서 다행이야.

유성의 말에 머로우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것이 머로우의 마지막이었다.

재차 휘둘러진 검격에 머로우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옴팔로스의 장벽들이 무너졌다.

성난 괴수들과 초대형 랫맨들이 괴성을 지르며 돌진해 왔고, 블루 아이들 역시 악을 쓰며 마법을 펼쳤다.

질리언이 미친 계획이라 한 이유였다.

은신 마법을 사용해 부대의 머리 위로 접근한 뒤 다이애나의 드래군 다이브로 난입, 적장을 암살한다는 계획은 그럴싸해 보였지만 사실 말도 되지 않았다.

애당초 암살부터가 힘들겠지만 어찌어찌 적장을 암살- 아니,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로티안에서 쓰러트렸던 네크로맨서와는 경우가 달랐다.

적장인 레드 아이를 죽인다 해서 소멸할 일이 없는 랫맨의 군대였다.

적들의 수는 약 오천.

케이트나 헥토르의 부대를 불러내 저항해봐야 같이 죽을 사람을 늘리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성의 계획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질리언이 미친 짓이라 주장하면서도 결국 따라온 것은 살아나갈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옴팔로스의 장벽이여!"

질리언이 다시 기도해 새로운 방벽을 솟구치게 한 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르네가 그런 질리언의 허리를 안으며 손을 뻗었고, 지면을 박차 반전한 유성이 그런 르네와 질리언을 덮치듯 돌진했다.

카카캉!

새로운 장벽이 다시 무너졌다.

일행의 머리 위로 수십 개가 넘는 마법과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질리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르네가 황금빛 눈동자로 유성을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마력의 폭발을 시작으로 온갖 공격들이 지척까지 다다랐지만 르네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그랬기에 유성 역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미리 펼쳐 둔 상태창의 버튼을 눌렀다.

[유성 성의 초대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신전의 시간 단축 기능을 사용해 활성화시킨 세 번째 초대권.

황금빛 섬광과 함께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제19장 - 아르투아 백작령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