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 아르투아 백작령 (4)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포인트를 200점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질리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파팟!
평소보다 다급하게 느껴지는 황금빛 섬광과 함께 유성과 르네, 질리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권을 사용하던 당시의 급박함을 드러내듯 나타나자마자 무너지듯 주저앉은 세 사람은 일단 거친 숨부터 토했다.
"하악, 하아."
"하아...."
한참을 그렇게 헉헉거리다 고개를 든 유성과 르네는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해냈네."
"해냈어요."
"하하."
"헤헷."
"하하하."
"헤헤헷."
"하하하하."
"흐흐흐흣."
그렇게 광인1과 광인2가 좋다고 웃고 있을 때 유일한 정상인1은 주저앉는 걸 넘어 쓰러진 채로 눈물 섞인 기도를 올렸다.
'옴팔로스 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머리 위로 수십- 아니, 수백 개는 될 거 같은 공격이 쏟아질 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흑흑. 그래도 다행이야. 이제 이런 일은 또 없겠지? 응, 없을 거야.'
질리언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을 때였다.
"계승자님, 이거 진짜 좋은 전술인 거 같은데요? 다음에 또 쓸 수 있을까요?"
광인2의 말에 순간 기겁을 한 질리언이었지만 다행히도 광인1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지만 그건 좀 힘들 거야. 신전에 축적된 힘에다가 포인트도 써야 하니까. 이번엔 어떻게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쓸 수 있었지만 다음에는 힘들겠지."
딱 초대권이 오기 직전인 상황과 신전의 레벨 업 이후에 쓰기 위해 직전 전투에서의 포인트를 모아둔 상황이 겹쳤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판국이니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장기간 포인트를 쓰지 않고 모으는 일은 고려하기 어려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하긴,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도 같아요."
"맞는 말이야. 레드 아이를 빠르게 격파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지휘관이라 해서 딱히 무력적으로 강하라는 보장이 없는 인간의 군대와 달리 괴물들의 군세는 높은 자리를 차지한 개체일수록 강력한 힘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레드 아이의 경우 고위 마법사이긴 해도 몸이 매우 약한 편인데다 군단의 중심에 있는 터라 방심하고 있던 것도 있어서 단번에 해치울 수 있었지, 앞으로도 이렇게 쉽게 적장을 해치울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도 해내긴 했네요."
"그래, 그게 중요한 거지. 르네의 활약이 대단했어. 특히 상대의 마법 구성을 순간적으로 간파해서 카운터 칠 수 있는 최적의 마법을 사용한 건 진짜 굉장한 일이야. 역시 르네. 왕의 마법사. 로티안의 자랑. 미래의 천마.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마법까지 잘 쓰는 마녀님."
원래 칭찬을 할 때는 구체적으로 해야 효과적인 법이었다.
유성의 핀 포인트 칭찬에 르네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헤실헤실 웃었고, 유성은 다시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질리언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아무튼 이런 미친 짓거리를 다시 안 해도 된다는 걸로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미친 짓을 연달아 두 번이나 한 두 사람이니 앞으로 더더욱 괴이한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기에 생각하지 않기로 한 질리언이었다.
"흑흑."
한편, 두 사람이 정겨운 미소와 한 사람의 흐느낌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제 말 걸어도 되겠지?
이제 말 걸도록 하죠.
시선을 교환한 그들은 다 같이 한 곳을 바라보았고, 시선이 집중된 여인- 케이트는 흠흠 헛기침을 토한 뒤 유성 일행에게 다가섰다.
"계승자님, 오셨습니까."
"아, 케이트. 오."
부름에 고개를 돌린 유성은 반사적으로 감탄했다.
케이트의 등 뒤로 완전 무장한 카멜롯의 군세가 도열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와 천마 기병대가 호출되었으니까요.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둔 상태였습니다."
유성이 감탄한 이유를 눈치챈 케이트의 말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그럼 평소에도 이런 느낌인 거야?"
부대 하나가 불려 나가면 다른 부대들도 나갈 채비를 한다든가.
"예, 물론이죠. 언제 어느 때고 싸울 수 있도록 평소에도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케이트가 활짝 웃으며 말하는 것과 반대로 지미를 비롯한 병사들의 얼굴에 순간 괴로움이 번졌다.
"그, 어떤 훈련인데?"
"종이 울리면 즉각 무장을 갖추고 집결하는 간단한 훈련입니다."
"종이 울리는 시기는?"
"하루에 두 번, 정해진 시간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사실 진짜 훈련이 되려면 아예 종이 울리는 시간은 물론이고 횟수까지 몰라야 하겠지만 그럼 항상 긴장 상태로 있어야 하니 정신적으로 너무 괴롭다는 결론이 이미 나와서요."
"이미 나왔다고?"
"예,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그런 결론을 내린 것만은 기억이 납니다. 사실 이번 훈련도 저번 개척으로 기억이 일부 돌아와서 떠올린 겁니다."
"과연."
케이트는 이전에도 군기반장이었다는 헥토르의 말이 문득 떠오른 유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케이트의 뒤에 도열한 병사들을 보았다.
지미의 그렁그렁한 눈빛이 무언가를 굉장히 호소하는 것 같았지만 유성은 애써 외면하였다.
만약에 종이 랜덤으로 울리는 구조였다면 뜯어말렸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 케이트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정말 무리한 일이었다면 다른 기사들이 말렸을 터였다.
'-라기엔 바나데인과 헥토르도 표정이 썩 좋진 않군.'
하지만 이번에도 외면한 유성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미 다이애나에게 어느 정도 전달받았을지 모르겠지만 랫맨의 군대와 대적하던 상황이다."
유성이 방금 완수한 작전에 대해 설명하자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들까지도 꽤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야 굉장히 효과적인 작전이군."
"흐흣, 저번에 땅굴에서 알아봤습니다."
"계승자께서는 굉장히 대범한 분이시군요. 감탄했습니다."
차례대로 바나데인, 헥토르, 롤랑드였다.
하지만 케이트는 살짝 엄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계승자님, 너무 위험한 작전이었습니다. 계승자님은 군주인 동시에 기사인 분이시니 전장에 서시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지만 너무 무모한 작전은 가능한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미안, 앞으론 좀 더 신경 쓸게."
좀 더 조심하겠지만 앞으로 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었기에 케이트는 미간을 좁혔지만 딱히 더 잔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유성은 다시 미안한 미소를 지은 뒤 르네를 돌아보았다.
"르네, 밖이 보여?"
유성의 물음에 눈을 감고 집중하던 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히 보여요. 연결이 유지되고 있어요."
이번 작전의 목적은 적의 최고 지휘관을 암살해 전의 진군을 멈추는 것이었다.
최고 지휘관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일단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확고한 계급 체계를 가진 랫맨들이라면 군단이 마비될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랫맨 군단이 과연 얼마나 멈추고 언제 다시 진군을 개시하느냐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개척을 끝내면 초대권을 사용했던 장소로 다시 돌아가게 되니 타이밍을 재서 개척을 완료하지 않으면 적진 한가운데 다시 떨어지는 사달이 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또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랫맨 군단이 로베르 남작령을 공격하고 나서야 돌아갈 수도 있으니 적이 정말 멈추었는지, 얼마나 오래 멈추고 있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이제는 르네의 시그니처 마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을 빛의 새였다.
"일단 그 자리에 멈춰 섰어요. 파란 눈을 가진 랫맨들끼리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게 보여요."
르네의 마력이 무척이나 강해진 덕분에 이제는 근 10km 밖에서도 연결을 유지할 수 있는 빛의 새였지만 그 이상 멀어지면 연결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성 성이라면 어떨까.
아예 멀리 떨어진 어딘가라면 빛의 새의 연결이 끊어질 터였지만 마법으로 형성된 아공간 같은 곳이라면 연결이 유지될 가능성이 있었다.
유성과 르네는 후자에 걸었고, 다행히 도박수가 먹혀들었다.
"다행이네. 하루 이상 지체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거야."
랫맨들의 특성상 새로운 레드 아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예 진군을 하지 않고 주둔할 가능성이 높았다.
레드 아이가 있다면 레지옹 인근에 있을 테니, 소식이야 마법으로 급히 전한다 해도 레드 아이가 다시 합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고려하면 적어도 하루, 잘하면 이틀 이상을 지체할 수 있을 터였다.
'카리안 백작이 서둘러 주기를 바랄 수밖에.'
영주연합군이 완편 된 뒤에 지원을 오며 너무 늦었다.
다소 부족하더라도 루셴과 인근 영지의 병사들만을 모아 지원을 와야 했다.
"그럼 개척은 좀 미루는 건가?"
바나데인의 물음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좀 쉬었다 가자고. 성녀님도 많이 지치신 것 같고."
유성이 질리언 쪽을 슬쩍 돌아보며 말하자 세상 처연한 성녀의 모습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케이트가 질리언에게 다가갈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르네가 유성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기요, 계승자님.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응?"
"전투에서 승리했으니까 포인트가 생겼겠죠?"
르네의 물음에 유성은 바로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어, 200포인트나 생겼네."
워낙 급했던 탓에 이제야 봤는데 실질적으로 레드 아이 외에는 잡은 게 없다시피 한 걸 고려하면 상당한 포인트였다.
레드 아이가 역시 거물이라 그런 것인지, 작전의 난도가 고려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유성의 대답에 르네는 환한 얼굴이 되더니 신이 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여기서도 포인트로 시설 설치나 개발이나 뭐 그런 걸 할 수 있을까요?"
"오. 될 거 같은데?"
포인트를 써서 건물을 짓거나 무장을 바꾸는 거야 유성 성에서 많이 본 것이었지만 그걸 현실에서 본다 생각하니 절로 흥미가 돋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개발 때면 나타나던 드워프들도 궁금했고 말이다.
"그럼 뭐가 새로 생겼는지 일단 리스트 좀 봐볼까?"
"네, 계승자님."
예쁘게 답한 르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자 따라 웃은 유성은 상태창을 향해 손을 놀렸다.
* * *
유성의 예상대로 레지옹은 함락당했다.
이유 역시 유성의 예상대로였다.
아르투아 백작은 랫 로드를 막아낼 수 없었다.
레지옹은 서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인 아르투아 백작의 본거지였다.
성벽은 높고 두터웠으며, 병사들의 무장 상태와 훈련도 역시 좋았다.
회전에서 크게 한 번 패했다고는 하지만 레지옹에는 여전히 5천이 넘는 병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없었다.
랫맨들 사이에 레드 아이들만 있었다면 그래도 버틸 수 있었을 터였다.
백작 휘하에는 많은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랫 로드는 아니었다.
랫 로드에게 마법을 걸었던 마법사들 대부분은 마력이 역류해 죽음을 맞이했다.
기사들 또한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애당초 백작령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던 샤를조차도 상대할 수 없었던 랫 로드였다.
기사들은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방들처럼 산화할 따름이었다.
성문을 부수고, 그대로 나아가며 덤비는 모든 것들을 학살한다.
랫 로드가 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랫 로드가 지난 자리를 따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랫맨들 앞에 레지옹은 함락당했다.
랫 로드.
발라카이는 우두커니 앉아 아르투아 백작의 잘린 머리를 들여다보았다.
워낙에 거대한 발라카이였기에 아르투아 백작의 머리가 마치 구슬처럼 보였다.
손바닥 안에서 백작의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던 발라카이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의 수장이었지만 이 머리에는 가치가 없었다.
자신의 애병에 더할만한 머리가 아니었다.
백작의 머리를 던져버린 발라카이는 땅에 박아놓은 자신의 애병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대검의 넓적한 검신에는 여러 종류의 해골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전부 다 장벽 밖에서 싸운 적들의 해골들이었다.
장벽을 넘어온 이후 새로이 장식된 해골은 아직 없었다.
그럴 만한 적을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벽을 넘기 전, 오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랫맨들의 대사제는 발라카이에게 경고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나약하고 무력하나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다고.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랫맨들의 신을 산산이 조각낸 인간의 괴물들.
하지만 그들은 사라졌다.
저 최후의 요새가 무너질 때 그들 역시 스러지고 말았다.
더 이상 성왕은 없다.
원탁의 기사들 역시 없다.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는 아직 진정한 성왕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단 한 명의 원탁의 기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의 불.
종족의 불.
인간의 빛.
발라카이는 본능에 따라 시선을 멀리 두었다.
북동쪽.
제국의 황실이 자리한 방향이었다.
제20장 - 이야기꾼의 밤
잿빛 하늘을 바라보던 남자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형."
발걸음은 지척에 도달한 뒤에야 멈추었다.
남자의 곁에 선 것은 키가 크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울 때라도 미소를 짓는 사람.
남자는 여전히 청년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잿빛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장벽은 결국 무너질 거야."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 세운 장벽.
인간의 불을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
하지만 남자는 알고 있었다.
결국엔 임시방편이었다.
엄청난 희생을 치러가며 세운 저 벽은 영원은커녕 천 년도 버티지 못하리라.
남자의 말에 청년은 빙긋 웃었다.
주변을 한번 슥 살핀 그는 잔소리쟁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남자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멍청한 녀석. 왜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러냐. 그럼 저게 영원할 줄 알았냐?"
청년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청년은 그런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인간의 왕이 잊고 있던- 아니,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알면서도 한 거잖냐."
영원하지 않을 거란 것을.
언젠가 장벽이 무너지고 빛이 탄로 날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하였다.
발버둥 치기 위해.
최후의 최후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하여.
그렇기에 청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연민과 애정을 담아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서, 내 동생아. 네가 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너는-"
거기까지였다.
거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최후의 요새를 향해 괴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 * *
르네와 질리언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우와!"
"와아."
르네의 반짝반짝은 사실 꽤나 흔한 일이었지만 질리언의 반짝반짝은 그렇지 않았다.
그랬기에 유성은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감탄을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세 사람 앞에서는 건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몹시도 신기했다.
땅에서 절로 기둥이 솟아나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각종 자재들이 자동으로 슥슥 붙어서 형상을 이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유성이야 게임에서 여러 번 본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그걸 실제로 보니 무척 신기하기는 했다.
르네와 질리언 역시 유성 성에서 몇 번 보긴 했어도 직접 보는 건 역시 다른지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특히 질리언이 말이다.
"정말 놀라워요. 저런 식으로도 건물이 지어질 수 있었군요? 그리고 저 드워프들은 마법이라도 쓰는 걸까요?"
로티안의 해자를 파고 성벽을 증축할 때도 그랬지만 건축 관련 일만 되면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질리언이었다.
드워프들이 망치질 한 번에 마법처럼 공사 진행도를 척척 끌어올리니 어린아이처럼 흥분해서 말이 많아졌다.
[언니 귀엽지 않아요?]
르네가 슬쩍 보낸 메시지 마법에 유성은 너도 귀엽다고 답하는 대신 그저 웃었고, 배시시 웃은 르네는 드워프들 쪽을 보며 메시지 마법을 이었다.
[그런데 드워프 아저씨들은 생각처럼 막 귀엽진 않네요. 오히려 좀 멋진 느낌?]
키가 작아서 그렇지 우락부락한 근육에 크고 풍성한 수염을 가진 드워프들은 진지하게 일하고 있어서 그런지 눈매마저 매서웠다.
르네의 취향이 근육질 남성인가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이두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계승자님, 저건 뭐하는 건물입니까?"
헥토르가 유성에게 다가와 물었다.
180 후반대 키인 유성이었지만, 아예 2미터를 훌쩍 넘는 헥토르는 역시 규격 외라는 느낌이었다.
유성은 머리 위에 생긴 그림자를 신기해하며 답했다.
"추가 숙소. 사람이 좀 많이 늘었으니까. 앞으로도 늘어날 테고."
"음. 살짝 수수하군요."
"그럼 어떤 걸 기대했는데?"
"창관이라든가."
"흠흠."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토한 유성은 헥토르를 데리고 좀 더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헥토르가 웃으며 말했다.
"흐흣, 농담입니다. 도서관을 기대했습니다."
"도서관을?"
"예, 제가 이래 봬도 책을 좀 좋아해서 말입니다. 직접 책을 쓴 적도 있습니다."
"오, 어떤 책이었는데? 혹시 소설?"
"흐흣, 소설은 아니고 사전 같은 거였습니다. 바다와 강에서 잡을 수 있는 어종에 관한 책이었죠."
제법 신기한 이야기였다.
카멜롯의 기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육체파라 할 수 있을 헥토르가 책상에 앉아 책을 집필하는 광경이라니.
상상만으로도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어울릴지도.'
헥토르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면 경험 많은 노인의 지혜? 현기? 그런 것들이 때때로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실 더 신기하기도 하였다.
입장상 기사들에게 하대를 하고 있기는 해도 시몽 경처럼 나이가 한창 많은 기사들을 상대할 때는 어색함을 느끼는 유성 자신이었다.
그런데 헥토르와 이야기를 할 때는 달랐다.
무척이나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나이 차가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궁금하신 거라도 더 있으십니까?"
헥토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묻자 유성은 마침 기회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다른 기사들은 좀 어때? 잘들 지내고 있나?"
케이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아무래도 케이트의 보고는 정말 '보고'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헥토르라면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헥토르는 기대대로 솔직한 이야기를 하였다.
"기본적으론 다들 잘 지냅니다. 하나씩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케이트는 늘 케이트 같습니다. 잔소리도 많고요. 병사들은 그게 다 애정이라며 헤벌쭉하지만 제 눈에는 그냥 잔소리가 맞습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성격입니다. 성격."
살짝 비판적인 의견이었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랬기에 유성 역시 웃으며 답했다.
"케이트가 좀 많이 예쁘긴 하지."
병사들이 케이트의 잔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유성이었다.
그리고 애당초 케이트의 잔소리에는 정말 애정이 묻어 있었으니까.
그냥 잔소리라면 아무리 케이트가 예뻐도 병사들 역시 듣기 싫어할 터였으니 말이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뭐, 사실이긴 하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케이트가 좀 많이 미녀긴 하죠. 잔정도 많다 보니 착각하고 상사병 걸린 인간들이 옛날부터 많았습니다."
"아, 뭔지 좀 알 것 같기도."
살짝 떨어져서 보면 마치 엄마- 아니, 엄마는 너무 갔고 큰누나처럼 병사들을 챙기는 케이트였으니까.
"케이트 말고 나머지는 어때?"
"바나데인과 다이애나도 평소와 같습니다. 개척 덕분에 좀 넓어지긴 했다지만 둘이 늘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궁금해?"
"계승자님은 안 궁금하십니까? 바나데인 그 도도한 녀석이 남들 없는 곳에선 다이애나에게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일지, 아니면 여전히 도도한 척 하면서 흥흥거릴지."
일전에 르네와도 잠깐 나누었던 화제였다.
"나랑 르네는 일단 전자라 생각하는데. 그런데 솔직히 바나데인보단 다이애나가 더 궁금하지 않아?"
"그렇죠. 저도 그쪽이 더 궁금합니다. 둘이 있을 때도 평소처럼 멍-해 있을지, 아니면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
다이애나의 다른 모습.
유성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나데인 이상으로 상상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상상할 수 있는 건 마구간 보고 좋아하던 모습 정도였다.
"두 사람은... 예전부터 연인이었던 거야?"
"예, 그럴 겁니다. 전장에서 싸울 때 외에는 늘 붙어 다녔죠."
바나데인은 원거리 공격을 하는 궁수였고 다이애나는 전방에서 싸우는 기사였으니까.
아무래도 전장에서도 붙어 다니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도 둘 다 안 보이는 건가?"
"예, 어딘가에 숨어 있겠죠."
새삼 주변을 한번 둘러본 유성은 남은 한 명을 물었다.
"새로 온 롤랑드는?"
"그 친구도 똑같죠. 예나 지금이나 바른 생활 청년입니다. 성실히 수련하고, 성실히 일하고, 성실히 쉬고. 그래서 좀 심심한 친구죠."
"예전이라면... 카멜롯이 있던 시절부터?"
"예,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진 않지만 정말 성실한 친구였죠. 창도 귀신처럼 다루고. 아마 창술 하나만큼은 카멜롯에서도 최고였을 겁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롤랑드는 기사도도 창술 관련이었지.'
롤랑드의 기사도인 혼연일섬.
엄청난 위력의 찌르기 공격이라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기사도였다.
"헥토르는 어때?"
"저요? 저야 잘 지내고 있죠. 연애할 아가씨가 별로 없다는 게 흠입니다만."
"어... 아가씨?"
유성이 되묻자 헥토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허허, 제가 이래 봬도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아십니까? 경지에 오른 기사에게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법입니다."
"그럼 케이트는 어때?"
"아니, 케이트는 좀. 엄청난 미녀인 건 저도 인정합니다만. 잔소리를 견딜 자신이 없군요. 물론 케이트 쪽이 싫다고 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요."
할아버지에게 잔소리하는 손녀의 모습을 떠올린 유성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건물 올라가는 것을 구경하던 르네가 돌연 흠칫하고 몸을 떨더니 급히 유성에게 다가와 말했다.
"계승자님. 랫맨들이 진영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계승자님 말씀처럼 블루 아이들끼리 다투기 시작했고요."
"역시 그렇군."
예상대로였다.
확고한 2인자가 있었다면 군을 정비하고 계속 전진했겠지만 레드 아이 밑에는 2인자가 없었다.
대등한 실력과 지위를 가진 블루 아이들만 여럿 있었으니 의견이 통일될 리가 없었다.
사실 저런 상황이면 인간들조차 일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는데 계급제가 확고한데다 서로 경쟁의식까지 치열한 랫맨들이었으니 말로 다투는 데 그치지 않고 암살자를 보내는 등 암투를 벌일 가능성까지 있었다.
물론 랫 로드가 있는 레지옹이 멀지 않았으니 그 정도까진 가지 않을 터였지만 레지옹에 의견을 묻고 자시고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 이틀은 우습게 지나갈 터였다.
"계승자님, 그럼 오늘은 유성 성에서 하루 묵는 건가요?"
살짝 기대 섞인 르네의 물음에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신난다."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낸 르네는 유성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여전히 구경하느라 바쁜 질리언에게 다가갔다.
"마녀님이 참 귀여우신 것 같습니다."
"그러게."
랫맨들과의 전쟁이 코앞에 있는 상황이었지만 쉬어줄 땐 쉬어줘야 했으니까.
유성은 르네의 웃는 얼굴을 보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케이트와 같이 목욕하고 다이애나와 함께 자고 헥토르와 함께 술을 마시는 등등 즐겁고 알차게 하루를 보낸 르네와 어째 더 지친 얼굴이 된 거 같은 질리언을 대동한 유성은 기사들과 함께 보랏빛 장벽 앞에 섰다.
세 번째 개척.
유성이 장벽을 향해 초대권을 내밀었다.
* * *
안개가 짙게 깔린 장소였다.
두 번째 개척 때가 생각난 유성은 그렇지 않으냐고 묻기 위해 르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불현듯 깨달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르네만이 아니라 질리언과 기사들 역시 사라졌다.
유성은 당황하는 대신 침착하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개척도 벌써 세 번째이니 조금 다른 구성이 나올 만도 했기 때문이다.
상태창을 열고 르네와 질리언의 상태를 확인한다.
큰 이상은 없다.
그러니 일단은 진정한다.
마음을 다스린 유성은 주변을 좀 더 명확히 인지했다.
아침이 밝아오는 새벽하늘과 짙게 깔린 안개, 아직은 차가운 공기.
물기를 머금은 수풀과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풀벌레 소리.
주변을 관찰하던 유성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안개 사이에 키가 큰 금발의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화려한 은색 갑옷과 역시나 화려한 붉은 망토.
안개 속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유성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돌아섰다.
잘생긴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 살 전후나 되었을까.
유쾌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로 유성을 보더니 마치 관찰이라도 하듯 멋진 턱수염이 난 턱을 어루만지다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가나의 말대로 된 것 같군."
작게 중얼거린 남자는 가슴을 활짝 펴더니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케이."
케이 이벨리우스.
"원탁의 기사다."
제20장 - 이야기꾼의 밤 (2)
원탁의 기사.
아서 왕과 함께 인간의 시대를 연 인류 최강의 기사들.
남자는 자신이 그들 중 한 명이라 말하고 있었다.
'케이 이벨리우스.'
이벨리우스라는 성은 처음 듣지만 이름은 유성도 알고 있었다.
13인의 원탁의 기사들 가운데 하나.
아서 왕의 의붓형.
베디비어와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아서 왕을 보필한 원탁의 창설 멤버 가운데 하나.
본래라면 유성이 아는 것은 여기까지였을 터였다.
판타지 모나크에는 원탁의 기사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눈을 뜬 뒤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수집해 읽은 유성이었다.
그랬기에 지금은 그에 대해 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키다리 기사.
입담이 좋고 재기가 넘치는 카멜롯의 이야기꾼.
금발벽안의 미남.
원탁에서 가장 약한 자.
하지만 강대한 마수 카스 팔루그를 격퇴한 용맹한 기사.
아서 왕과 가웨인을 동경하는 로빈이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케이 경이라고 말할 정도로 뭇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자.
"카멜롯의 영광을."
유성이 자연스럽게 카멜롯의 예를 표하자 케이는 빙긋 웃더니 똑같이 예를 표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천유성입니다."
"유성. 그 또한 별이지. 좋은 이름이다."
다시 빙긋 웃는 얼굴이 같은 남자가 보아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시원한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지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그럴싸한 기분이 들었다.
원탁의 기사 케이.
새삼 자세를 가다듬은 유성이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응?"
유성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되물은 케이는 이내 어색하게 웃더니 살짝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그냥.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보통은 우와아아아! 하면서 자지러지는 게 기본이거든. 나는 원탁의 기사니까."
"어... 그렇군요."
원탁의 기사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말이긴 했지만 좀 떨떠름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째 미지근한 유성의 반응에 케이 역시 어색해졌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시간이 많이 지났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얼마나 지난 거지?"
"500년 정도입니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원정에 나서고 실종된 것은 약 500년 전.
유성의 말에 케이는 쓰게 한 번 웃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멀린의 계산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버틴 셈인가...."
500년.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500년이 아닌 50년- 아니, 단 5년의 연장이었다 할지라도 목숨을 걸었을 아서와 원탁의 기사들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숨을 한 번 크게 삼킨 케이는 이내 다시 표정을 밝게 고치더니 유성을 보며 말했다.
"아무튼 네가 이 시대의 빛을 계승하는 자구나. 새로운 성왕 후보자."
"예, 그렇습니다."
"딱딱하기는. 좀 편하게 가자고. 가까이도 좀 오고. 아무튼 질문에 답해줄게."
그리 말하며 손짓을 하니 유성은 잠깐 머뭇거리다 케이의 곁에 다가섰다.
케이는 그런 유성에게 아예 어깨동무까지 하더니 적당한 바위 위에 함께 앉은 뒤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는 과거의 케이다. 이 시대에 내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여기 있는 나는 과거의 케이다. 모르가나의 마법으로 이 땅에 고정된 과거의 나이지. 뭐, 쉽게 말하면 분신? 뭐 그런 거다."
케이 본인이 시공을 넘어오거나 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알려주지는 못해. 나에게는 지금의 만남을 이루기 위해 감수해야만 했던 많은 제약들이 있으니까. 여기가 어딘지,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 말해줄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알겠습니다. 그럼 뭘 말씀하실 수 있으시죠?"
유성이 침착하게 되묻자 케이는 다시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예를 들면 개척?"
지금 유성이 하고 있는 것.
"개척을 할 때마다 성이 넓어지고 있지?"
"예."
"개척을 할 때마다 네가 마주하는 것은 시험이다. 그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대가이고, 대가를 치르면 성의 봉인이 하나씩 풀리며 영역이 개방되는 거다. 성의 기능도 조금씩 회복되는 것이고."
첫 번째 개척에서 도망친 거미들이 그대로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은 대답이었다.
"그럼 개척에 나타나는 괴물들은 진짜가 아닌 건가요?"
"진짜이면서 가짜지. 시험이 끝나면 사라지지만, 시험 중에는 너와 네 기사들을 죽일 수도 있는 존재들이니까."
시험이긴 했지만 실전이었다.
개척 중에 다치면 정말로 다쳤고, 목숨 역시 잃을 수 있었다.
"누가 이런 봉인을 만든 거죠?"
성을 감싸고 있는 보랏빛 장벽.
유성의 물음에 케이는 뻔하지 않으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멀린. 그리고 모르가나."
왕의 마법사와 천마의 마녀.
그 두 사람 또한 원탁의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괴물들이었다.
"필요한 일이었겠죠?"
"그랬겠지. 이러나저러나 결국 난 칼잡이라 마법쟁이들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봉인을 하지 않았다면 이 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다."
어떤 원리인지, 무엇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봉인을 한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물어도 답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유성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제 곁에는 카멜롯의 기사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도 기억이 봉인되어 있고요."
"그럴 거야. 그 친구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들의 영혼도 이 성 덕분에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성의 봉인이 풀리면서 그 친구들의 봉인도 함께 풀리는 거겠지."
성의 봉인은 성과 빛의 군세의 영혼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란 뉘앙스였다.
"개척은 모두 몇 단계인 거죠?"
"나도 모른다. 봉인한 건 내가 아니라 멀린과 모르가나니까."
"미개척지 너머에서 괴물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미개척지 너머에는 괴물들이 얼마나 있는 거죠? 그리고 놈들은 어째서 쳐들어오는 것입니까?"
유성의 물음에 케이는 바로 답하는 대신 미간을 한 번 좁히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아직 장벽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인가."
"장벽이요?"
대화의 흐름상 유성 성에 펼쳐져 있는 보라색 장벽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유성이 고개를 갸웃하자 케이는 숨을 한 번 길게 토한 뒤 말했다.
"인간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 괴물들은 그 장벽 너머에서 쳐들어오는 것이고."
유성은 케이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는 다섯 개의 왕국과 하나의 제국이 있었고, 그 영토를 모두 합치면 거대한 대륙 하나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세계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장벽이 존재한단 말인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흉성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곧 그 장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겠지."
괴물들은 장벽을 넘어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놈들은 장벽에 생긴 균열을 지나 인간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유성은 당황했다.
지금 설명대로라면 상징적인 의미의 장벽이 아닌, 진짜 거대한 장벽이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그런 장벽을... 아니, 애당초 왜 그런 장벽이 필요했던 것이죠?"
진시황이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겠다고 만리장성을 지은 것처럼 괴물들을 막기 위해 인간의 세계 전체를 뒤덮는 성벽이라도 만들었단 말인가?
유성의 물음에 케이는 어째서인가 애달픈 미소를 지은 뒤 말했다.
"장벽... 그것은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 필요했던 것. 빛을 숨기기 위한 임시방편. 괴물들이 쳐들어오는 건 뭐, 예나 지금이나 같겠지. 그들이 빛을 원하기 때문이다."
빛.
순간 유성은 로토 숲 인근에서 코볼트들과 싸웠을 때를 떠올렸다.
코볼트들이 횡설수설 떠들어댄 말 중에는 빛과 불이 있었다.
"빛이라면?"
"인간의 빛. 문명의 불."
장벽 밖의 세계가 잃어버린 것.
아서가 장벽을 세워가면서까지 숨기고자- 아니, 지키고자 했던 것.
"여기까지. 더 이상은 말해줄 수 없어. 슬슬 시간이 되기도 했고 말이야."
새삼 하늘을 올려다 본 케이는 멀리서 터오는 동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까 개척은 시험이라고 했잖아? 그럼 내가 여기 왜 있을까?"
짓궂음이 가득한 얼굴에 유성은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시험인 겁니까?"
"정답."
"...그럼 설마 제가 케이 경을 이겨야 하는 겁니까?"
원탁의 기사를?
유성의 물음에 케이는 짓궂음이 한층 짙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셈이-"
츠확!
순식간에 찔러 들어오는 단검을 피해 케이의 신영이 옆으로 크게 이동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
유성의 단검을 간신히 피해낸 케이는 황당한 얼굴로 유성을 보더니 이내 양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 소름 돋은 거 아니? 너 방금 완전 자연스럽게 찌르고 들어왔다?"
"아쉽군요. 쉽게 갈 수 있을까 했는데."
진심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원탁의 기사를 상대하는 게 쉽진 않을 테니 말이다.
유성의 말에 케이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아서보다 조금 더 마음에 들지도. 넌 가웨인보단 란슬롯에 가깝구나. 아무튼 말했듯이 이건 시험이다. 물론 시험 중에 진짜로 죽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예 불가능한 과제는 여간하면 제시하지 않아. 적어도 나는 그렇다."
유성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고쳤다.
케이가 그런 유성을 보며 말을 이었다.
"유성, 아서의 계승자야. 기사도의 단계에 대해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
모두 3단계로 구분된 기사도.
1단계는 기사도의 발현.
자신이 기사도가 무엇인지 깨닫는 단계.
2단계는 기사도의 발전.
기사도는 곧 기사의 영혼이었으니.
자신의 기사도를 온전히 인지하여 발전시키는 단계.
3단계는 기사도의 구현.
앞의 단계들을 통해 구축된 자신 안의 세계- 소우주를 현실에 구현화하는 것.
스스로의 심상으로 세계 자체에 일시적으로나마 변혁을 일으키는 단계.
1단계 기사도의 사용자는 많았다.
기사의 최소 요건이라 해도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단계부터는 흔치 않았다.
2단계에 도달한 기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었다.
3단계 기사도 사용자는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
작금의 세계에는 3단계 기사도 사용자는 단 열 명뿐이었다.
그만큼이나 희귀한 능력이 바로 3단계 기사도였다.
유성 자신의 기사도는 현재 1단계.
판타지 모나크에서 경험해 보았던 것은 2단계의 극의.
3단계 기사도는 아직 목격조차 해보지 못한 유성이었다.
하지만 원탁의 기사는 달랐다.
그들이야말로 기사도의 극에 도달한 자들.
"그렇다면 빛의 계승자야. 우리 원탁의 기사들이 전원 3단계 기사도에 도달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겠지?"
"예."
"지금부터 나는 3단계 기사도를 펼칠 거다."
3단계 기사도는 세계를 변혁한다.
마치 마법사들의 영지처럼 세계의 일부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인다.
"나의 기사도는 이야기꾼의 밤. 사람들의 믿음을 재료로 공상과 허구를 현실로 바꾸는 힘. 그것이 나의 영혼. 나의 소우주."
변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럴싸한 외침이나 주문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새벽하늘이 검정으로 물들었다.
흐드러지게 많은 별들 아래 차가운 바람이 불어 안개들을 밀어냈다.
남겨진 것은 환한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초원과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케이는 자연스럽게 검을 뽑아들었다.
멀찍이 선 유성을 겨누며 선언했다.
"네게도 나의 힘을 일부 허락했다. 그러니 상상해라. 미래의 자신을. 원탁의 기사 중 하나인 나를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이것이 원탁의 기사 케이가 준비한 시험.
상상해라.
미래의 자신을.
언젠가 얻게 될 힘을 미리 체험하라.
멀린이 보았다면 지나치게 상냥한 시험이라 했을 터였다.
케이의 시험은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래의 자신을 상상한다.
지금보다 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막연하게는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온전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원탁의 기사.
어설픈 상상으로 떠올린 미래의 자신으로는 결코 대적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케이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유성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유성 자신에게 있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스스로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유였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경험해 보았으니까.
유성은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지 않았다.
과거의 자신을 기억했다.
흑기사09.
검은 늑대들의 주인.
판타지 모나크 사상 최강의 기사.
세계가 변혁한다.
아니, 진감한다.
유성의 머리칼이 길어졌다.
칠흑의 갑주 위로 검은 늑대의 가죽으로 만든 망토가 덧씌워졌다.
손에 쥐는 것은 진은의 검이 아닌 용의 송곳니로 만든 참마의 검.
왼팔에 차는 것은 가레스의 방패가 아닌 요정왕의 방패.
"어, 저기요?"
케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유성의 전신에서 마치 검은 불꽃처럼 일렁이는 칠흑의 아우라에 마른침을 삼켰다.
뭐지?
저 새끼 뭐지?
성왕이 아니라 마왕이었나?
아니 씨발 저게 대체 뭔데?
유성은 숨을 깊이 삼켰다.
케이를 보았고, 지면을 박찼다.
"한 걸음."
참마의 검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제20장 - 이야기꾼의 밤 (3)
무지막지한 빠르기였다.
펼치는 것은 흑뢰신검.
제국검법의 극의에 도달한 흑기사09만이 펼칠 수 있었던 고유검술.
빠르지만 가볍지 않았다.
벼락처럼 쏟아지는 일격은 태산같이 무거웠다.
그야말로 검은 번개.
여간한 수준의 기사들로서는 자신들의 목이 잘리기 직전까지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하지만 케이는 달랐다.
유성이 지면을 박찬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검은 번개가 그리는 궤적을 명확히 인지하였고, 쏟아지는 번개의 궤적에 자신의 검을 정확히 밀어 넣었다.
콰앙!
충돌한 순간 굉음이 터졌다.
흑뢰신검의 무거움을 그대로 받아치며 난 굉음이었다.
유성과 케이가 동시로 뒤로 밀려났고, 유성이 사납게 웃었다.
역시 원탁의 기사.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수준의 강자.
간만에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유성 자신 외에 여러 사람들의 목숨이 걸린 전쟁이 아닌, 순수한 대결이라는 사실이 그간 억눌려왔던 기질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유성이 판타지 모나크의 최강자가 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들 가운데서 가장 순수한 하나.
유성은 강자와의 전투를 즐겼다.
전투 그 자체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 유성 앞에는 최고의 상대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 피가 끓어오르지 않겠는가.
흑뢰신검의 일격이 튕겨나간 순간 유성은 오히려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유성의 미소에 케이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이 자식 진짜 란슬롯 닮았네."
강함에 있어서는 태양의 기사 가웨인과 호각이었지만, 순수한 검술로는 원탁 최강을 자부할 수 있던 자.
인류 최강의 검호.
유성이 호흡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검을 펼쳤다.
칠흑의 번개가 케이를 향해 휘몰아쳤다.
카카카카카카카캉!
검과 검이 얽히고 부딪힌다.
밀어냄과 동시에 다시 엮이며 서로의 진로를 가로막는다.
엄청난 속도였다.
동시에 무지막지한 힘의 충돌이었다.
검과 검이 한 번 맞부딪힐 때마다 충격파가 일어 주변을 진감시켰다.
검기- 오라 블레이드를 넘어선 검강끼리의 격돌이었기에 합이 이루어지고 있었지, 만약 순수한 검끼리의 격돌이었다면 아무리 명검들 간의 격돌이었다 한들 서로의 검이 버티지 못 했을 터였다.
유성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기운의 색은 칠흑이었다.
참마의 검을 휘감은 검강 역시 칠흑이었기에 정말로 검은 번개를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케이의 검강은 반면 은색이었다.
검강(劍罡).
그것은 검에 어리는 별.
사람의 손으로 펼치는 하늘의 이치.
찬란하게 빛나는 별빛이 칠흑의 번개와 충돌하며 산개하니 마치 밤하늘이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케이는 이를 악물고 힘을 끌어올렸다.
점점 더 거세지는 유성의 공격에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밀어낸 뒤 소리쳤다.
"내가 비록 원탁 최약체라 불리지만 그건 곧 인간들 중에 13번째로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거든?!"
어째 미묘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원탁의 기사는 13명.
그들 가운데 최약이라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저 머나먼 검의 지평에 닿은 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케이의 기세가 일변했다.
지금까지 방어에 치중하던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디며 공세에 나섰다.
쾅! 쾅! 쾅! 쾅! 쾅!
케이의 검술은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수했다.
하지만 빈틈이 없었다.
너무도 단단해 마치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게 하였다.
유성은 생각했다.
케이는 유성 자신보다 강하다.
흑기사09의 힘만으로는 눈앞의 남자를 이길 수 없다.
조금씩 밀리다가 끝내 패배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힘을 더한다.
새로운 힘을.
흑기사09의 힘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새로이 얻게 된 힘을.
콰앙!
검은 벼락이 폭발했다.
케이가 뒤로 크게 밀려남과 동시에 유성이 호흡을 바꾸었다.
성왕십자검.
제일검, 열화.
황금의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유성의 두 눈동자가 황금으로 물들며 새로운 힘을 발산했다.
케이가 웃었다.
정면에서부터 느껴지는 성왕의 힘에 환호했다.
둘이 다시 충돌했다.
금과 은이 격돌하는 광경은 실로 아름다웠다.
"그것뿐인가?! 열화의 검이 네 전부인 것이냐?!"
유성은 행동으로 답했다.
황금빛 불꽃 대신 거칠게 일어난 질풍이 케이의 검을 타넘었다.
하지만 케이는 거짓말처럼 질풍을 흘려보낸 뒤 재차 유성을 압박했다.
그 순간 유성은 깨달았다.
성왕십자검으로도 케이를 꺾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성왕십자검이기에 이길 수 없다.
케이는 성왕십자검을 잘 알았다.
그것이 자신의 왕이 펼치던 검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자신의 동생이 몇 번이나 보여준 검이었기에.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유성은 궁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니, 그것은 본능이었다.
검은 늑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성왕의 힘만으로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그 둘을 하나로 합친다.
검은 늑대의 힘에 성왕의 힘을 더해 새로운 힘을 창안한다.
유성의 두 눈에서 찬란한 빛이 일었다.
동시에 검은 벼락과 황금빛 불꽃이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발현되는 것은 검은 태양.
금환일식의 하늘처럼 칠흑 속에 밝게 빛나는 원형의 띠.
불꽃처럼 타오르던 유성의 검강이 안정되었다.
칠흑의 검강의 테두리를 따라 태양의 빛이 그려졌다.
유성이 그것을 휘둘렀다.
성왕십자검.
흑뢰십이식.
검은 태양.
마주한 순간 케이는 알 수 있었다.
막을 수 없다.
피하거나 튕겨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랬기에 케이는 미소 지었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질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검을 검은 태양을 향해 밀어 넣었다.
빛이 일었다.
격렬한 충격과 함께 케이가 펼쳤던 세계가- 이야기꾼의 밤이 산산이 조각나 무너져 내렸다.
"하아, 하아, 하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유성이 거친 숨을 토했다.
그런 유성에게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대자로 누운 케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 씨발. 잘하길 바랐지만 이 정도를 바라진 않았는데."
농담이었다.
잘하면 잘할수록 좋은 것이었으니까.
케이의 얼굴에 그려진 흡족한 미소가 그 증거였다.
유성은 다리에 힘이라도 풀린 듯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케이의 기사도로 유지되던 검은 늑대의 힘이 사라지니 검은 태양을 펼친 여파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우, 후우, 후우...."
온몸이 순식간에 땀투성이가 되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 다시 일어서기는커녕 그대로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케이는 바로 일어서서 그런 유성에게 다가섰다.
유성은 그런 케이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원탁의 기사.
생각해보면 방금 격돌에서 케이는 자신의 기사도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유성에게만 기사도의 힘을 사용했을 뿐, 정작 자신에게는 어떠한 보정조차 가하지 않았다.
즉, 기사도 없이 순수 역량만으로 유성 자신과 겨룬 것이란 소리였다.
'이겨도 이긴 게 아니네.'
전력을 다한 케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유성의 얼굴엔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케이와의 대결로 말미암아 새로이 얻게 된 검은 태양의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저 즐거워서.
지금의 격돌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어우, 란슬롯은 이쁘기라도 했지."
실실 웃는 유성을 보며 소름 돋는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떤 케이는 유성의 옆에 털썩 앉아 물었다.
"계승자야. 너 원래 뭐하던 놈이니. 마왕이라도 돼?"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냥 사람이었습니다."
"모르겠다, 무슨 말 하는지. 아무튼 지금은 성왕의 계승자니 괜찮은 거겠지."
스스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케이는 푸른 눈동자로 유성의 전신을 훑어본 뒤 다시 물었다.
"어때? 도움은 좀 되었고?"
"예,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케이의 기사도가 있었기에 펼칠 수 있었던 검은 태양이다.
밖에 나가서는 지금과 같은 힘을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가치가 있었다.
유성 자신은 이전보다 현격히 강해졌다.
레벨은 오르지 않았지만 힘을 다루는 방법을 보다 깊이 이해했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힘을 운용할 수 있었다.
유성의 대답에 씩하고 웃은 케이는 다시 안개로 뒤덮인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좀 기다려야 할 거다. 다른 곳들은 아직 시험 중이니까."
케이의 말에 유성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다른 곳들이요?"
"어, 다른 곳들. 내가 뭐 자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이 유일한 기회인데 너만 가르치고 있을 순 없잖냐."
이게 무슨 말일까.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잠깐뿐이었다.
"설마 그럼 다른 곳들에도 케이 경이?"
케이 경은 애당초 여기 있는 자신이 분신 같은 존재라 하였다.
그렇다면 다른 일행들은 다들 또 다른 분신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성의 물음에 케이는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지고 나서 하는 변명이나 핑계는 아닌데, 내가 풀 파워는 아니었거든?"
분신 때문에 힘이 약해진 상태였으니까.
딱 분신의 숫자대로 n분의 1이 된 수준은 아니었지만, 본인 말마따나 전력 상태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원탁의 기사군요."
"그래, 원탁의 기사지. 원탁에선 최약체긴 하지만."
장벽 밖의 존재들이 부르기를 인간의 괴물들.
인간의 시대를 위협하는 모든 존재들과 대적한 인류 최강의 전투 집단.
"케이 경, 살짝 실례되는 질문을 해도 될까요?"
"실례되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네 녀석을 마구 비난하고 싶지만 뭐, 아까 말했듯이 유일한 기회니까. 해봐라."
"원탁 최강은 가웨인과 란슬롯이죠?"
"그렇지. 둘이 비등비등하지. 검술은 란슬롯이 최고인데, 출력이라고 해야 하나... 순간적으로 발산할 수 있는 힘은 가웨인이 최고거든. 종합적인 전투력을 합치면 둘이 동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케이 경과 그 둘을 비교하면 어떻죠?"
유성의 물음에 케이가 쓰게 웃었다.
"정말 실례되는 질문이군. 실례되는 질문이야. 원탁 최약체에게 원탁 최강이랑 비교하면 얼마나 약하냐고 묻다니."
"아니, 얼마나 약하냐가 아니라...."
두 사람이 케이에 비해 얼마나 강하냐지만 사실 그게 그거이긴 했으니까.
유성이 쭈그러들자 케이는 유쾌하게 웃더니 유성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그냥 나보다 강해. 몇 배는 강하다 뭐 이런 걸 정확히 계량할 수 있겠냐. 그냥 강해. 좀 많이. 음, 그래. 내가 두어 명 있어도 못 이길 정도로."
거기까지 말한 케이는 입맛이 쓰다는 듯 혓소리를 한 번 낸 뒤 다시 유성을 보았다.
이 시대의 성왕.
아직 성왕의 빛을 온전히 잇지 못한 미숙하기 짝이 없는 존재.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서 팬드래건.
케이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
케이는 다시 유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쯤 하라는 듯 자신을 돌아보는 유성의 얼굴에 피식 웃고는 그 옛날 아서에게 했었던 말을 똑같이 입에 담았다.
"계승자야, 빛을 잇는 자야. 잊지 말거라. 너는 왕이라는 것을. 너는-"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안개를 헤치며 불어온 그것이 케이의 말을 가렸지만 유성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있었다.
말을 마친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냐고 확인하거나 명심하라고 다시 말하는 대신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 안개를 보며 말했다.
"거의 다들 끝난 모양이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군."
케이의 말에 유성은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버티고 선 뒤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가 웃었다.
자세를 바르게 한 뒤 엄숙한 얼굴로 예를 표하였다.
"카멜롯의 영광을."
안개가 모두 걷혔다.
새벽녘이던 하늘 역시도 아침의 태양이 떠올라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케이는 그 하늘을 보았다.
장벽을 넘은 이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그것을 두 눈 가득 담은 뒤 마지막으로 유성을 돌아보았다.
"안녕이다, 미래의 왕이여."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케이의 전신을 뒤덮었다.
유성은 케이를 보며 미소 지었고, 케이 역시 웃었다.
마지막으로 무어라 작게 속삭인 뒤 빛이 되어 사라졌다.
* * *
기사들이 하나씩 유성의 곁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헥토르, 롤랑드.
다섯 모두 케이를 만나 저마다의 성과를 손에 넣었다.
질리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들과 달리 성녀인 그녀는 직접 대결을 하는 대신 여러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것을 얻었다는 것을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명.
케이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계승자님?"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르네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유성은 물론이고 질리언도 보이지 않았다.
르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모두가 흩어졌다.
유성과 질리언만이 아니라 기사들 역시도 개척을 시작한 순간 서로 다른 곳에서 눈을 떴으리라.
마른침을 꿀꺽 삼킨 르네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유성이 없다는 사실 하나에 생각 이상으로 동요하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억지로 숨을 가다듬었다.
개척은 시작되었다.
그러니 떨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닥쳐올 난관을 해결해 개척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마음을 다잡은 르네가 마력을 일으켰다.
그러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안개 너머에 서 있는 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그저 르네 자신이 그녀의 존재를 이제야 눈치챈 것뿐이었다.
르네는 지팡이를 꼭 움켜쥔 채 여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치 그 시선에 응답이라도 하듯 안개가 걷히며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새하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머리칼의 여인.
르네와 마주한 그녀가 미소 지었다.
다정하면서도 요염한 신비로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나의 이름은 모르가나 르 페이."
왕의 마법사 멀린조차도 한 수 접어줘야만 했던 하늘의 마녀.
그녀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 넋이라도 잃은 듯 멍하니 선 르네에게 다가서며 다시 한번 속삭였다.
"반갑구나, 왕의 마법사야."
하지만 르네는 반응하지 못했다.
텅 빈 눈동자로 모르가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모르가나는 르네의 그런 행동에 화내지 않았다.
애당초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은 모르가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모르가나는 르네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멈추었고,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것이었구나.
멀린의 말도 아주 틀리지는 않았어.
어느새 처연한 얼굴이 된 모르가나는 르네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마법의 주문을 읊조렸다.
천마의 마녀의 보랏빛 마력이 르네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21장 - 성벽 너머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흑뢰십이식: 검은 태양을 습득했습니다.]
"레벨이 오르긴 했네."
상태창 문구를 확인한 유성은 연이어 검은 태양을 확인했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흑뢰십이식: 검은 태양]
레벨이 부족합니다.
체력이 부족합니다.
마력이 부족합니다.
"예상대로인가."
검은 태양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검은 늑대들의 주인인 흑기사09의 힘에 성왕의 힘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케이의 기사도 지원이 없는 지금의 유성 자신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길은 보았다.
케이와의 일전은 경험이 되어 유성 자신의 영육에 분명히 새겨졌다.
그러니 되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손에 넣을 힘이었고, 이번 일을 통해 그 미래에 보다 가까워졌다.
주먹을 꽉 움켜쥔 유성은 상태창을 해제했다.
조금씩 걷혀가는 안개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 아니, 체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계승자님."
2미터 30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거인이 흔하진 않았으니까.
언제나처럼 통쾌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헥토르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유성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케이 경을 만났나?"
"예, 그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쾌한 남자더군요."
헥토르를 비롯한 유성의 기사들은 모두 카멜롯 출신의 영혼들이었으니 원탁의 기사인 케이와 구면인 것이 이상하진 않았다.
"그럼 헥토르도 케이 경의 기사도를 경험한 건가?"
"기사도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문답 좀 나누고 가볍게 몇 수 주고받는 정도였습니다."
껄껄 웃은 헥토르는 턱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계승자님은 케이의 기사도를 경험하셨습니까?"
원탁의 기사 케이의 3단계 기사도.
이야기꾼의 밤.
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와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헥토르가 감탄했다는 듯 작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대단합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겠군요. 성과를 얻으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탄복해서 하는 말이었다.
케이의 기사도를 통해 미래의 강해진 자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분명 무척이나 진귀한 경험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쯤이었다.
저만치에서 안개를 헤치며 또 다른 인영 하나가 더 나타났다.
"케이트?"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쓰고 있던 케이트가 유성의 부름에 퍼뜩 고개를 뜰었다.
"계승자님."
"잘 다녀왔어?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걱정스럽게 묻자 케이트는 염려 말라는 듯 다정하게 웃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다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예,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 그렇습니다."
물리적으로 부상을 입었다기보다는 정신적인 타격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어째 평소보다 지쳐 보이는 모습에 헥토르가 껄껄 웃더니 알겠다는 듯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잔소리쟁이가 잔소리라도 들은 모양이군. 그것도 거하게."
헥토르의 말에 케이트가 즉각 눈매를 날카로이 했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아니, 진짜야?'
케이한테 잔소리 들어서 머리가 아픈 거라고?
유성이 저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케이트는 부끄럽다는 듯 뺨을 살짝 붉히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 남자를 만나면 예전부터 머리가 아팠습니다. 말이 진짜 많은 남자라...."
아무래도 상성이 정말 안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입술을 몇 번 움츠리더니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도움이 되긴 했죠. 옛날부터. 아주 틀린 말은 또 하지 않기도 했고요."
케이트의 말에 헥토르는 다시 웃었고, 유성은 과거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바나데인을 처음 불러냈을 때.
유성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바나데인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실력은 인정한다는 말을 할 때의- 딱 그때 그 표정이었다.
두 사람에 이어 다이애나와 롤랑드가 나타났다.
다이애나는 평소처럼 별말이 없었고, 롤랑드는 즐거운 대련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기사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바나데인이 도착했다.
"바나데인도 케이 경을 만났지?"
유성의 물음에 바나데인은 살짝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아하니 헥토르나 롤랑드처럼 대련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바나데인, 케이에게 뭔가 한 소리라도 들은 건가?"
헥토르가 속 시원하게 물어주자 바나데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딱히 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내게는 별로 해줄 말이 없다더군. 내가 이미 준비가 되어있다는 말 외에는 말이다."
"준비가 되어있어?"
"그래, 그렇게 말했다. 그게 전부였고."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무슨 준비를 의미하는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케이 경이 한 말이라고 하니 허튼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분명 케이트의 말처럼 말이 많고 시끄러운 남자였지만 아무 말이나 늘어놓는 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에 이어 질리언이 도착했다.
케이 경과 그냥 잡담만 하다 왔다는데 얼굴을 보니 만족도가 꽤 높아 보였다.
'케이 경이 칭찬을 많이 해준 모양이네.'
질리언은 대놓고 하는 칭찬에도 흐물거릴 정도로 칭찬에 약했으니까.
"그런데 계승자님, 르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요?"
"예,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질리언의 물음에 답하며 유성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르네이니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막상 또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는지 질리언과 말을 마치자마자 안개 너머에서 르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르네!"
"아! 계승자님!"
유성의 부름에 손까지 번쩍 든 르네가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평소처럼 밝고 활기찬 모습인 걸 보니 괜한 기우였던 모양이다.
"르네도 케이 경을 만났어?"
"네? 케이 경이요? 설마 원탁의 기사 케이 경 말씀인가요?"
유성의 물음에 르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 그렇긴 한데."
"와! 진짜 원탁의 기사라니! 로빈이 들으면 난리가 나겠는데요?"
르네가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말하는 걸 보니 정말 케이를 만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성이 즉답하는 대신 의아해하자 르네는 급히 주변을 돌아보더니 기사들의 눈빛을 확인한 뒤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뭐에요, 설마 나 빼고는 다들 케이 경을 만난 거예요?"
주변의 모두가 표정으로 무언의 대답을 하자 르네가 헉하며 입술을 움츠렸다.
질리언이 그런 르네에게 물었다.
"르네, 르네는 그럼 누굴 만난 거죠?"
"저요?"
"네, 케이 경을 만나지 않았다면 누굴 만난 거죠?"
질리언의 물음에 르네는 눈을 한 번 깜박인 뒤 기억을 더듬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지만 얼른 떠오르는 것이 없어 당황했다.
"어... 누구지. 누굴 만난 거지?"
"르네?"
"아니, 그, 뭐랄까. 누굴 만난 거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냥 막 포근하고 따뜻하고... 좋은 꿈을 꾼... 기분이라고 할까요?"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꺼낸 말에 모두들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괜찮은 거지?"
유성이 대표로 묻자 르네는 걱정 말라는 듯 활짝 웃더니 있지도 않은 근육을 자랑하듯 팔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네, 오히려 쌩쌩한걸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전신에 힘이 넘쳤다.
어쩐지 모르게 마력도 더 정순해진 기분이었고 말이다.
그런 르네를 가만히 바라보던 케이트가 말했다.
"어쩌면 르네 양이 특별한 경우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왕의 마법사니까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소리였다.
성을 에워싸고 있는 보랏빛 장벽을 만든 것은 아서 왕의 마법사였던 멀린과 천마의 마녀 모르가였으니 말이다.
케이트의 말대로 당대 왕의 마법사인 르네만 다른 경험을 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누굴 만났는지 기억하지 못 한다는 건데....'
통상적으로 생각한다면 멀린을 만났을 터였지만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딱히 이상은 없는데.'
상태창에도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굳이 따지면 최대 마력량이 다소 늘어나긴 했는데, 그것도 막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계속 붙잡고 있는다고 딱히 답이 나오는 일도 아니었기에 유성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당사자인 르네도 계속 좋은 느낌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고 말이다.
[개척을 완료했습니다.]
일행이 모두 모이자 빛의 문구와 함께 개척이 완료되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주변의 환경이 변하며 안개에 감춰져 있던 것들이 드러났다.
"오."
"어?"
"와."
차례대로 유성, 질리언, 르네였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이제까지는 개척을 마치면 건물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부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보다도 더 큰 크기의 화살을 쏘는 거대한 노포 세대와 아홉 명의 병사들.
척 봐도 대단한 위력일 거 같은 공성병기 부대의 등장에 유성은 물론이고 기사들의 표정까지도 밝아졌다.
'기사는 없는 것 같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냐.'
바나데인의 부대를 엘프 부대로 승급시킬지 공병 부대로 승급시킬지 고민했던 과거를 떠올린 유성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발리스타 부대의 장인 랜도입니다. 빛의 계승자님께 인사드립니다."
안경을 썼음에도 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였다.
"유성이다. 합류를 환영한다."
"영광입니다."
유성 앞에서 예를 표하는 모습에 케이트가 만족했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고, 헥토르는 낄낄 웃은 뒤 발리스타 부대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발리스타들을 보았다.
"이거 상당한 물건이군."
"마력도 느껴져요."
르네의 말에 랜도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발리스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카멜롯의 마도공학 기술이 집약된 명품입니다. 마법 부여를 통해 다양한 종류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고, 산탄을 장전하면 다수의 적을 공격하는 것 역시 가능합니다."
"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발리스타로 산탄을 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능하니 하는 말일 터였다.
'나중에 숫자가 더 늘면 진짜 유용하겠는데.'
거대한 괴수와 싸울 때는 물론이고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는 다수의 적과 싸울 때 역시 유용할 거 같은 병기였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르네와 질리언 역시 관심이 간다는 듯 발리스타를 구경하자 랜도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흥."
그리고 한 사람.
어쩐지 모르게 뚱한 표정이 된 바나데인은 발리스타가 아닌 다른 곳을 살폈고, 이내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계승자. 발리스타가 다가 아니다."
"어?"
고개를 돌린 유성은 바나데인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보았고, 이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저만치 조금 떨어진 곳에 물건 두 개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얇은 책이었다.
유성이 가만히 손을 뻗어 표지를 만지자 책이 그대로 흩어지더니 빛의 가루가 되어 유성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전술서를 손에 넣었습니다.]
[최대 소환 가능 부대 숫자가 1 늘었습니다.]
빛의 문구와 함께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에 유성은 주먹을 불끈 쥐었고, 르네는 꺄-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정말로 마침내.
드디어 소환 가능한 부대 숫자가 늘었다.
앞으로는 세 부대가 아니라 네 부대를 소환할 수 있다!
"르네!"
"계승자님!"
"르네!"
"계승자님!"
유성과 르네는 격렬히 포옹했고, 그것도 부족하다는 듯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기뻐했다.
물론 상태창 문구를 읽지 못하는 나머지 인원들은 저것들이 갑자기 왜 저러나 하는 얼굴들이 되었지만, 설명을 듣고 난 뒤에는 똑같이 기뻐했다.
세 부대가 네 부대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 계산으로만 해도 전력이 30% 이상 폭증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실로 엄청난 성장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직 무구가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원탁의 기사의 무구.
최대 소환 가능 부대 수의 증가에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도 무구만 바라보고 있던 바나데인의 곁에 다가선 유성은 숨을 한 번 고르고 정면을 보았다.
허공에 자리한 것은 한 자루의 활.
유성은 활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어 보았다.
제21장 - 성벽 너머 (2)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그 날,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 * *
유성은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보였다.
남자와 여자.
아니, 여자.
유성은 남자의 시점에서 세상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이었지만 붉었다.
지상에서 타오는 불길이 하늘에 닿았고, 비명과 울부짖음이 귀를 어지럽게 하였다.
전쟁터였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저 먼 곳에서 짐승의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말했다.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앞에 버티고 선 여자.
쏟아지는 용의 불꽃 앞에서 남자를 지키기 위해 선 여자.
최후의 순간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여자가 웃었다.
너무나 아름답게.
너무나 애틋하게.
빛이 일었다.
용의 불꽃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 *
유성은 눈을 떴다.
절로 거칠어진 숨을 토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계승자님?"
르네가 비틀거리는 유성을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유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르네를 보았다.
작고 하얀 얼굴.
황금빛 눈동자.
유성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여자의 미소를,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순간 꿈에 대한 기억을 빠르게 잃어버리듯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감정만은 잊을 수 없었다.
남자의 절규.
비통함.
여자의 애틋한 미소.
"계승자님?"
"괜찮아. 어, 괜찮아."
안심시키기 위해 작게나마 미소까지 지어 보인 유성은 르네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바르게 세운 뒤 다시 정면을 보았다.
원탁의 기사의 무구인 검붉은 활이 허공에 자리하고 있었다.
"트리스탄의 활."
이번에도 케이트였다.
가레스의 황금방패와 아그라베인의 망토 때와 마찬가지로 케이트가 무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입에 담았다.
트리스탄.
원탁 제일의 명궁.
케이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제일 활을 잘 쏘는 남자.
케이트는 이번에도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뺨을 따라 흘렀다.
"예나 지금이나 울보구나."
헥토르가 그리 말하며 케이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덕분에 머리가 엉망이 된 케이트가 헥토르를 흘려 보았지만 잠시뿐이었다.
개척이 진행되며 기억이 돌아옴에 따라 감정 역시 돌아온 것인지 케이트와 헥토르의 관계가 더 깊어진 것이 느껴졌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저씨와 질색하면서도 그런 아저씨를 챙기는 조카.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이미지였지만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유성은 일단 트리스탄의 활을 손에 쥐어보았다.
이미 이전보다 길고 자세한 환영을 보았기 때문인지 따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괜한 미련을 갖는 대신 활을 들고 돌아섰다.
"바나데인."
유성 자신의 기사들 가운데 유일한 궁수.
유성의 부름에 트리스탄의 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나데인이 유성을 보았다.
유성은 그에게 트리스탄의 활을 내밀었다.
"네가 써라."
"...마다하진 않겠다."
바나데인은 참으로 바나데인스러운 대답을 하며 트리스탄의 활을 받아들었다.
"좋은 활이군. 좋은 활이야."
시위를 가볍게 당겨 본 바나데인은 평소답지 않게 옅은 미소까지 그렸다.
활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원탁의 기사의 활이니까.'
그것도 원탁에서 제일가는 명궁의.
아마 카멜롯의 모든 활들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물건이리라.
"고맙다. 잘 쓰겠다."
"그래."
바나데인에게 감사까지 들으니 묘하게 신숭생숭한 기분이 든 유성이었지만 옆에서 웃고 있는 르네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아무튼. 대충 정리가 된 건가?'
건물 대신 전투 부대가 나오긴 했지만 아무튼 두 가지 보상을 얻었다.
발리스타 부대와 트리스탄의 활.
평소라면 여기서 마무리가 되어야 했겠지만 유성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트리스탄의 활을 바나데인에게 건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와 장벽이 걷히며 보상 아닌 보상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유성 성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
첫 번째 개척 때는 평소와 같은 성벽이 그냥 이어져 있었다.
두 번째 개척 때는 내부로 이어졌기 때문인지 아예 성벽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개척인 지금.
성벽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성문? 성문인 거죠?"
르네가 눈을 깜박이며 묻자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에 성문이 있었다.
그냥 커다랗기만 한 성문이 아닌, 요새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도개교는 물론이고 몇 겹이나 되는 방호 장비가 되어 있는 커다란 성문이었다.
"한번 가보자."
유성이 그리 말하며 앞장서니 롤랑드와 헥토르가 호위하듯 유성보다 몇 걸음 앞으로 나섰고, 케이트와 다이애나가 유성의 좌우에, 바나데인이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언니."
"응."
평소에는 르네보다 조금 뒤처져 걷던 질리언이었지만 성문에 관심이 생긴 것인지 평소보다 발걸음이 조금 빨랐다.
유성 성에 있어 성벽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였다.
가까이 간다 해서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성벽 위로 오르는 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페가수스들도 성벽에는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기에 유성 성의 병사들은 성벽 위에 오를 수 없었고, 성벽 밖을 내다볼 수도 없었다.
물론 어차피 올라가 봐야 보랏빛 장벽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을 터였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보랏빛 장벽과 성벽 사이.
그 사이 공간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저 성문이 열린다면.
그리하여 유성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일행은 조심스럽게 성문 앞에 다가갔다.
커다란 누대와 측면탑들.
가까이서 본 성문은 폭만 해도 10미터에 달했고, 높이는 20미터가 넘을 것 같았다.
애당초 수십 미터에 달하는 유성 성의 성벽이었으니 이 정도 성문이 달려 있어도 이상하진 않았지만,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 크기의 성문이 필요할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성문을 오갔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짧은 추측이었다.
이내 생각을 접은 유성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 질리언을 확인한 뒤 다른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측면탑을 살피고 있던 롤랑드가 말했다.
"들어가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측면탑과 누대를 통해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성문 쪽은? 열 수 있나?"
저 정도 크기의 성문이었다.
성문은 둘째치고 철창문도 올려야 했으니 내부에 장치가 있을 터였다.
유성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누대 안쪽에서 들려왔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헥토르의 목소리였다.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안달이 난 표정의 질리언을 한 차례 돌아본 뒤 모두에게 말했다.
"일단 누대를 통해서 성벽 위로 올라가 보자."
성벽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성문을 열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유성의 허락 아닌 허락이 떨어지자 질리언은 서둘러 누대 안으로 들어갔고, 르네는 그런 질리언을 챙기기 위함인지 유성에게 눈짓한 뒤 바로 따라서 들어갔다.
누대 안은 모든 것이 큼직큼직해서 그렇지 크게 특별한 구석은 없었다.
루셴의 성문에 달린 누대와 거의 같은 구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질리언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지 연신 감탄하며 르네에게 무어라 설명을 이어갔다.
아마도 카멜롯 특유의 양식이라든가 그런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유성은 기사들과 함께 측면 탑에 달린 총안구 쪽에 다가섰다.
화살을 쏘기 위해 만들어놓은 좁은 창을 통해 밖을 보니 예상대로 보랏빛 장벽이 보였다.
성벽과 장벽 사이에도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깊고 넓은 해자가 있긴 했지만 그게 전부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보랏빛 장벽과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장벽 너머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넓은 벌판.
그리고 그 벌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괴물들의 시체.
수천이나 수만 정도가 아니었다.
적어도 십만은 우습게 넘을 숫자.
그리고 괴물들의 시체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괴수의 잔해들.
"최후의 요새."
저도 모르게 말한 유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성문의 정면에 위치한 거대한 용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 * *
성문에서 내려온 일행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보랏빛 장벽 너머로 보인 광경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십만을 우습게 헤아릴 것 같은 엄청난 규모의 대군.
유성 성의 성벽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높고 두꺼운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애당초 저 정도 규모의 적과 맞서 싸울 생각으로 지은 성이라면 지금 같은 규모가 되는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카멜롯이 아니야.'
직감했다.
이 성은 카멜롯이 아니다.
'아서 왕의 마지막 원정지.'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 년 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은 원정을 떠난다며 카멜롯을 나섰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 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마지막 원정지가 이 성이었다면.
그리고 이 성에서 엄청난 규모의 대군과 맞서 싸운 끝에 최후를 맞이한 것이라면.
얼추 말이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르네의 빛의 새.'
유성 성이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는 마법적 공간이기 때문에 빛의 새와의 연결이 지속된다고 생각한 유성과 르네였다.
하지만 이 성이 아서 왕의 원정지라면, 그래서 세상 어딘가에 실존하는 장소라면 빛의 새의 연결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유성은 미간을 좁혔다.
이 세계에 있어서는 신화이자 전설인 동시에 역사인 아서 왕 전설은 말하고 있었다.
아서 왕이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악적들을 물리치고 인간의 시대를 열었노라고.
아서 왕의 마지막 원정도 그 싸움의 연장선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인간의 시대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원정을 떠나 싸워야 할 새로운 적이 있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흉성의 시대는 도래하였고, 괴물들의 침공은 시작되었다.
어쩌면 유성 자신도 아서 왕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엄청난 규모의 대군과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었다.
적들의 규모는 나날이 커져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케이가 말한 장벽의 존재.
유성은 한 차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씻어내고 현재를 생각했다.
우선은 현재에 집중한다.
눈앞의 싸움을 이겨나가며 유성 자신과 군단의 힘을 키워나간다.
"계승자님?"
르네의 부름에 유성은 눈을 떴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유성은 짐짓 미소를 지어 안심시킨 뒤 의식적으로 밝은 목소리를 내었다.
"아무튼 성과가 있었네. 그것도 꽤나 많이."
"그러게요."
유성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르네는 언제 걱정했냐는 듯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유성의 의도를 이해하고 똑같이 밝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르네, 밖은 어때?"
"다소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세운 것 같아요. 명확히 보이진 않지만 진군을 개시한 건 아니에요. 그건 확실해요."
눈앞에 놓인 현재의 문제.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헥토르 롤랑드. 이번에도 모두 다 수고가 많았다."
"흐흣, 계승자께서 제일 수고하셨지."
실질적인 전투를 한 것은 유성뿐이었으니까.
헥토르의 말에 유성은 똑같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이니까. 부정은 하지 않을게."
"흐흣."
헥토르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 역시 미소를 지었다.
"바나데인."
부름에 가만히 활을 쳐다보고 있던 바나데인이 고개를 들었다.
유성은 눈짓으로 트리스탄의 활을 가리킨 뒤 말했다.
"활 잘 써라."
"잘 쓰겠다."
그리 말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딱 평소의 바나데인이었다.
물론 그런 바나데인을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흘기는 케이트 역시 딱 평소의 그녀였고 말이다.
"그럼 슬슬 돌아가 볼게."
개척이 마무리되었으니까.
르네와 질리언이 자연스럽게 유성의 좌우에 서자 일렬로 도열한 기사들이 먼저 예를 갖추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유성과 르네, 질리언이 화답한 직후.
황금빛 섬광과 함께 귀환이 시작되었다.
* * *
최후의 요새가 세워지고 오백 년.
우두커니 앉아 그저 바라만 보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은 왕이었다.
온통 잿빛만이 가득한 장벽 밖의 세계에서 일곱 왕이라 불리는 존재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백성이 없었다.
이끌어야 하는 종족 역시 없었다.
종족의 불을 지키기 위한 오백 년 전의 싸움에서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백성이 없는 왕.
그저 홀로 왕인 존재.
오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저 바라만 보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난 이유는 하나였다.
"걷히고 있어."
장벽이.
최후의 요새를 휘감고 있던 멀린과 모르가나의 마법이.
처음 한 번은 착각이라 여겼다.
다음 한 번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 번째인 지금은 확신했다.
아서가 세운 인간의 시대를 위한 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최후의 요새를 감싸고 있던 마법들 역시 풀리고 있었다.
"아서."
아서 팬드래건.
소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위치해 그저 무저갱처럼 어둠만이 가득한 곳.
소년은 그곳을 오랫동안 바라보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것을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오백 년 전 그날 아서가 부탁했던 것.
잔인한 부탁을 남겨 미안하다 했던 그것.
장벽 밖의 일곱 왕들 가운데 하나인 백룡왕은 최후의 요새를 돌아보았다.
아서, 멀린, 모르가나, 옴팔로스, 니니안, 케이, 가웨인, 란슬롯, 그리고 여러 원탁의 기사들.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며 백룡왕은 몸을 웅크렸다.
아서와 모두가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며 만들어낸 오백 년의 유예.
그것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서."
백룡왕은 작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해묵은 기억 속에서도 선명한 아서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는 잿빛 세상 속에서 잠시나마 좋았던 옛날을 추억하며 애달픈 미소를 머금었다.
제22장 - 아무튼 암살
황금빛 섬광과 함께 귀환한 유성은 일단 바로 자세를 낮췄다.
당장 인근에는 랫맨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이긴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르네와 질리언 역시 유성과 마찬가지로 급히 자세를 낮췄는데, 제법 그럴싸하게 전투 태세를 갖춘 르네와 달리 질리언은 그냥 쪼그려 앉는다는 느낌이었다.
"왜, 왜요."
"아뇨, 그냥."
유성의 시선에 질리언이 되묻자 유성은 그냥 한 번 웃은 뒤 손짓을 했다.
"일단 이동하죠. 르네."
"네, 계승자님."
딱히 명령을 전달하지 않았지만 유성과 눈빛을 한 번 교환한 르네는 기존에 만들어두었던 빛의 새를 회수한 뒤 새로운 빛의 새를 날려보냈다.
빛의 새로 정찰을 하며 기동을 한다.
유성과 르네에게는 과장 조금 보태서 숨 쉬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군영에서 대기 중이에요. 계승자님 예상대로 새로운 지휘관이 오기로 해서 기다리는 낌새에요."
수풀에 숨어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르네가 말했다.
지휘관인 레드 아이를 암살해 시간을 번다는 계획은 성공한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영주 연합군은 이름 그대로 연합군이었다.
영주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병력을 끌어 모으기 위한 시간도 필요했으니 이번에 지체시킨 하루만으로는 시간이 부족할 공산이 높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을 벌 것인가.
"뭔가 방법이 있을까요?"
항상 무언가 계책을 내던 유성이었으니까.
르네가 기대하는 얼굴로 묻자 질리언은 어째 걱정된다는 얼굴로 유성을 보았고, 유성은 두 사람을 마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긴 합니다."
100% 통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제법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 하나 있었다.
"어떤 방법이죠?"
르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자 유성은 떠올린 방법을 이야기했고, 해볼 만하다며 더욱더 눈을 빛내는 르네와 반대로 질리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 * *
레드 아이 조카로프는 레지옹을 나와 북부로 이동 중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없는 일이었다.
5천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가던 놈이 대낮에, 그것도 아군들 사이에서 암살을 당하다니.
'아니, 암살은 아닌가.'
그냥 대놓고 들어와서 죽였으니 암살이라 하기에는 좀.
목격자도 많고.
아무튼 병력을 이끌고 북부에 위치한 로베르 남작령을 격파하기 위해 기동 중이던 레드 아이 머로우는 죽었고, 덕분에 5천 군세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멍청한 놈."
솔직히 5천 군세 사이에 난입해서 지휘관 목을 따버린 인간 놈이 대단한 거긴 했지만 머로우 또한 멍청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놓고 들어오는 걸 그대로 맞아주다니.
같은 레드 아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놈의 씨족은 입지가 좁아지긴 했지만.'
독립적으로 군세를 이끌고 정복 활동에 나서는 것은 레드 아이들 사이에서도 영예로운 일이었다.
머로우가 멍청하게 죽은 덕분에 조카로프 자신이 그 임무를 맡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머로우의 무능함에 덕을 본 셈이었다.
'그래, 그러니 명복 정도는 빌어주마. 병신 같은 놈.'
끌끌끌 혀를 차며 짧게나마 묵념을 한 조카로프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장벽 밖에서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다시피 했지만 장벽 안의 세계는 달랐다.
아침 일찍 떠오른 찬란한 태양이 어느새 머리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두어 시간 안에 머로우가 남겨둔 군세와 합류할 수 있을 터였다.
조카로프는 약 삼백 마리의 랫맨들을 이끌고 이동 중이었다.
사실 본래라면 휘하의 경호원들만 데리고 빠르게 이동했을 터였지만 아무래도 머로우의 죽음이 신경 쓰인 탓에 호위 병력을 조금 붙인 것이었다.
'뭐, 공격받을 가능성은 낮겠지만.'
5천 군세 사이에 난입해 머로우의 목을 딴 인간의 활약은 대단했지만 놈은 결국 난입한 병력과 함께 죽었다.
장벽을 넘어 여기까지 진군하는 사이에 봤던 인간 기사들은 제법 강하긴 했지만 천사로 변했던 인간을 하나 제외하면 수준들이 다 거기서 거기였다.
머로우의 목을 딸 정도의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흔치 않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방심하지 않아.'
머로우가 죽은 것은 방심했기 때문이다.
레드 아이가 괜히 레드 아이겠는가.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의 수준도 다 거기서 거기였다.
제일 강한 놈이라고 해봐야 블루 아이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으니 마법전에서 밀릴 일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설마 또 하겠어?'
정공법도 아닌 깜짝 전략을 연속으로 쓰진 않겠지.
나름의 결론을 내린 조카로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늑대쥐의 안장에 달린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노곤한데 잠이나 좀 잘까.'
조카로프가 눈을 감은 그 순간이었다.
선두에서 걷던 랫맨 한 마리가 갑자기 풀썩하고 쓰러졌다.
옆에서 걷던 랫맨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쓰러진 랫맨의 관자놀이에 화살이 하나 박혀 있었다.
"어."
멍한 목소리를 낸 랫맨이 고개를 들어 화살이 날아왔을 방향을 보았고, 눈을 크게 떴다.
하늘.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의 비.
파파파파파파팟!
백여 개에 달하는 화살들이 랫맨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무방비 상태로 걷던 랫맨 수십 마리가 눈먼 화살들에 맞아 나자빠졌고, 랫맨들 사이에서 뒤늦은 고함 소리가 터졌다.
"저, 적습이다!"
"방패 세워!"
"저, 저게 뭐-."
콰가가!
마지막 외침은 굉음에 묻혀 마무리되지 못했다.
거의 기둥만한 크기의 거대한 화살들이 랫맨들 사이에 폭격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발리스타! 발리스타다!"
일반적인 화살 공격이 비라면 발리스타의 공격은 흡사 벼락과 같았다.
발리스타의 굉음이 한 번 터질 때마다 랫맨 십여 마리가 몸이 터지거나 꿰뚫려 죽었다.
"동요하지 마라! 카르마조프! 칸타쿨레!"
조카로프가 크게 외치며 주문을 외우자 조카로프 주변에 있던 노예 랫맨 열 마리의 머리가 터지며 강력한 마법이 발동되었다.
타타타타타탓! 쾅! 쾅!
랫맨들의 머리 위로 펼쳐진 진한 보랏빛 방벽이 화살의 비는 물론이고 발리스타까지 완벽히 막아내었다.
"우오오오오!"
조카로프의 마법에 랫맨들이 열광했다.
하지만 조카로프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생각했다.
이 상황을 어찌 타파할 것인가.
노예의 머리 하나를 더 터트려 발동시킨 관측 마법 덕분에 화살을 쏘고 있는 놈들의 위치와 숫자는 파악한 상태였다.
엘프 궁수가 약 50에 발리스타가 세 대.
언덕 위에 자리한 놈들과의 거리는 일반적인 화살의 사거리를 한참이나 넘어섰지만 엘프 놈들이라면 이해가 갔다.
쾅! 쾅! 파파파파팟!
조카로프의 방벽에 계속 튕겨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화살 아까운 줄 모르는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어댔다.
랫맨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튕겨 나가는 화살들을 보며 적을 비웃었지만 조카로프는 아니었다.
뭔가 있다.
방벽의 내구도를 낮추려는 것일까?
아니면 마법을 계속 유지하게 해서 조카로프 자신을 소모시키려는 것일까?
양쪽 다 정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답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 저거!"
랫맨 하나가 돌연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조카로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페가수스!"
천마 기병대 마흔 기가 랫맨들을 향해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렸다.
조카로프는 뭐가 되었든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강력한 방벽 마법을 펼치고 있었기에 대단위 마법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조카로프는 빠르게 판단했다.
페가수스들의 급강하 공격은 분명 위협적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마흔 기였다.
이쪽은 삼백이었으니 일단 몸으로 받아내고, 땅에 떨어진 놈들을 공격하면 되는 일이었다.
"버텨라! 일단 버티고-."
쾅! 쾅! 쾅!
거기까지였다.
페가수스들이 강하한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원형으로 퍼져나간 충격파가 랫맨들을 휩쓸었다.
덕분에 늑대쥐에서 떨어진 조카로프는 극도로 당황했다.
페가수스들의 급강하와 강력한 충격파의 발생 사이의 연관점을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지면을 찍고 잠시 날개를 쉰 페가수스들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 순간 랫맨들은 볼 수 있었다.
"돌진하라!"
페가수스들의 빈자리를 채우겠다는 듯 돌진해오는 스무 기의 중갑 기병들.
대지를 질타하며 달려온 그들이 충격파로 나자빠진 랫맨들을 사정없이 짓밟으며 나아가니, 랫맨들은 반격은커녕 옆으로 밀려나거나 도망치며 길을 열어줄 따름이었다.
조카로프도 그것을 보았다.
하지만 랫맨들에게 멍청한 짓거리 말고 놈들을 막으라 소리칠 수 없었다.
중갑 기병들이- 정확히는 선두에 선 자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칠흑의 군마와 칠흑의 기사.
마주한 순간 조카로프는 알 수 있었다.
저놈이다.
저놈이 머로우를 죽인 바로 그놈이다!
'미친! 거짓 보고였던 것이냐!'
머로우 휘하의 블루 아이들은 머로우 암살범을 처단했다고 보고했지만 거짓이었다.
아마도 범인조차 잡지 못했다는 보고를 올리기 두려워 거짓 보고를 한 것일 터였다.
"했던 짓을 또 하다니! 우리가 우습게 보이더냐!"
조카로프가 나름 용맹하게 외치며 급히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 그런 조카로프를 향해 달리는 유성의 바로 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참고 있던 질리언이 롤랑드의 등 뒤에서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옴팔로스의 방벽이여!"
이 짓을 설마 또 하게 될 줄이야.
약간은 비명 같은 성녀의 기도는 옴팔로스에게 닿았고, 옴팔로스의 이적이 일어나 성녀의 바람을 이뤄주었다.
쾅! 쾅! 쾅!
굉음과 함께 반투명한 옴팔로스의 방벽들이 연달아 솟구쳐 올랐다.
목적은 하나.
레드 아이와 랫맨들을 분리시키는 것.
좌우에 3개씩 방벽 여섯 개가 솟구쳐 오르니 레드 아이와 유성 사이에 직통로가 뚫린 셈이었다.
"디스펠! 카운터 매직!"
그리고 르네가 외쳤다.
조카로프의 수인에 따라 형성되기 시작한 마법의 구성을 간파한 그녀가 한발 빠르게 마법을 완성시키자 조카로프의 마법이 거짓말처럼 파훼되었다.
조카로프는 머로우가 그랬던 것처럼 당황했다.
유성 일행에게는 두 번째 하는 일이었기에 그만큼 숙달되어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공격할 수 있었지만 당하는 조카로프 입장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성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달리던 군마의 위에서 돌연 뛰어내리더니 자신의 발로 지면을 박찼다.
머로우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유성의 두 다리에서 칠흑의 기운이 불꽃처럼 솟구쳤다.
흑뢰일식.
번개걸음.
흑기사09의 기술.
순간 속도라면 달리는 말보다도 더 빠른 경신법이었다.
파파팟!
조카로프가 눈 깜박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유성이 진은의 검을 휘둘렀다.
머로우 때와 마찬가지로 조카로프가 차고 있던 목걸이가 터지며 마법이 발동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엇?!"
그나마 1미터 정도 이동했던 머로우와 달리 조카로프는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다.
순간이동 마법 자체가 완벽히 봉쇄된 탓이었다.
어째서!
조카로프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 그때 르네 역시 당황했다.
자신이 한 일이었지만 결과물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다.
'마법이... 자연스러워.'
지금까지는 마력이란 도구를 부렸다면, 방금은 마치 사지의 연장선처럼 마력을 다뤘다고 해야 할까?
갑작스러운 변모였지만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츠확!
유성의 검이 조카로프의 머리를 정확히 날려 버렸다.
경악한 얼굴 그대로 조카로프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고, 유성은 다시 알폰스 위에 오르며 소리쳤다.
"그대로 달린다! 관통해라!"
"옴팔로스의 방벽이여!"
질리언은 네 장 남은 방벽을 모조리 펼쳐 랫맨들의 진로를 방해하고 길을 열었다.
머로우 때야 적들의 숫자가 워낙 많은데다 괴수들과 블루 아이들도 잔뜩 있어서 금방 부서진 옴팔로스의 방벽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옴팔로스의 방벽들이 무너지지 않고 건재하니 그만큼 도망칠 각을 잡기가 수월했다.
파파파파팟!
랫맨들을 관통해 달리는 유성 일행과 중갑 기병대의 머리 위로 화살들이 빗발쳤다.
아군 오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아니,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것 같은 사격이었다.
쾅! 쾅! 쾅! 쾅!
심지어는 발리스타까지도 사격을 멈추지 않으니 랫맨들이 유성 일행을 추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파앗!
자신의 어깨 옆을 스치듯 날아가 득달같이 달려오던 랫맨 기수의 미간 사이를 꿰뚫는 바나데인의 화살에 유성은 욕지거리와 함께 미소를 지었다.
곡사도 아닌 직사를 아군 사이로 내쏘는 바나데인의 맹랑함도 맹랑함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바나데인의 실력이라면 할 만하지-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우스웠기 때문이다.
"계승자님!"
바로 그때 르네가 유성을 불렀다.
급히 뒤를 돌아본 유성은 르네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해버릴까요?
애당초 삼백 마리 정도였던 랫맨들이었다.
조카로프를 참하는 과정에서 죽거나 다친 랫맨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 데다 조카로프의 죽음을 인지한 랫맨들 가운데 일부는 도망까지 치고 있는 판국이었다.
이 정도면 할만하다.
조카로프를 잡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아예 쓸어버릴 수 있다.
"그래! 하자!"
"네! 계승자님!"
두 사람이 말머리를 돌렸다.
질리언은 역시 이렇게 되었느냐는 얼굴로 흑흑 울며 기도했고, 유성은 하늘에서 투창을 던지고 있는 천마 기병대를 한 차례 본 뒤 빠르게 명령했다.
"엘프 궁병대, 발리스타 부대 퇴각하라! 정예 보병대, 중갑 보병대 집결하라!"
후방의 원거리 부대를 돌려보내고 근접 전투 병단을 소환한다.
소환 가능 부대가 네 부대로 늘어난 터라 중갑 기병대와 천마 기병대는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가 등장하자마자 냅다 깃발을 꽂으며 외치자 용기백배한 정예 보병대가 랫맨들을 향해 돌진했다.
"우리도 간다!"
"우오오오오!"
중갑 보병대 역시 랫맨들을 향해 돌진했다.
"디스펠! 카운터 매직!"
이미 지휘관인 조카로프가 죽은 상황이었다.
블루 아이들의 마법 역시도 르네가 신들린 듯 파훼해버리니 랫맨들 입장에선 제대로 싸울 수 없는 판이 되었다.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포인트 150점을 획득했습니다.]
[선업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질리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대형 노포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갑 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갑 보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연쇄 암살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승리.
조카로프가 이끌던 증원군을 전멸시킨 유성 일행은 전장을 이탈했다.
제22장 - 아무튼 암살 (2)
전투가 마무리되자 유성은 빛의 군세를 모두 돌려보낸 뒤 일단 북동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랫맨들은 전멸시켰지만 추가적으로 돌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으니 일단 자리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십여 분 남짓을 달린 유성은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성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온 르네의 상기된 얼굴과 조금 뒤처져서 달려오고 있는 질리언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하아."
"후우, 후우."
유성이 거친 숨을 토하자 르네 역시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헐떡였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는 머리칼이 붙어 있었고, 레드 아이에 이어 블루 아이들과도 마법 대결을 펼친 터라 심신 모두가 지쳐 보였지만 그래도 얼굴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이겼다.
승리했다.
유성도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르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마주 주먹을 내밀어 유성과 주먹을 살짝 맞부딪혔다.
"잘했어, 르네. 정말 최고였어."
"계승자님도요."
그리고 서로를 보며 다시 웃고 있자니 뒤늦게 도착한 질리언이 핼쑥해진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좋게 말하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고, 안 좋게 말하면-.
'화, 환장? 환장의 커플?'
성장 환경상 그 이상으로 마땅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은 질리언이 결국 포기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유성과 르네가 질리언을 보며 말했다.
"성녀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언니 오늘 정말 멋졌어요. 예전보다 전투에 많이 익숙해지신 거 같고요."
"아하하...."
그저 웃지요 모드가 된 질리언이 다소 애처로운 미소를 짓고 있자니 르네가 유성을 보며 물었다.
"계승자님, 그럼 이제 로베르 남작령으로 돌아가나요?"
레드 아이를 연달아 두 마리나 쓰러트렸으니 처음 세웠던 목표는 이미 충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성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고, 질리언은 불안한 눈으로 유성을 보았다.
그간의 경험상 무언가 미친- 아니, 그건 너무 말이 심하고 아무튼 비정상적인 발언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이대로 돌아가야겠지만...."
-겠지만.
~~해야 하지만.
부정의 의미.
그랬기에 르네는 눈을 빛내기 시작했고, 질리언은 반대로 눈에서 생기를 잃어갔다.
그리고 유성이 말했다.
"제게,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생각.
그놈의 생각.
질리언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어깨를 늘어트렸고, 르네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일단 이걸 보시죠. 상태창."
유성이 상태창을 열자 빠르게 훑어본 르네가 어느 순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내내 붙어 다닌 만큼 유성의 사고패턴을 학습한 그녀였기 때문이다.
"잘 통할까요?"
"안 통하면 뭐, 바로 빠지면 되니까."
"그렇긴 하네요. 리스크가 비교적 적을 것 같아요."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일까.
질리언이 자신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르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언니, 이런 거예요. 이 작전은 아마 언니도 마음에 드실 건데...."
그렇게 이어진 설명에 질리언은 얘네 둘이 또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이내 르네의 말마따나 작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약간 화색이 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습니다."
유성이 세운 또 하나의 작전.
"그럼 조금 쉬었다가 개시해보죠."
그렇게 말한 유성은 저만치 보이는 그늘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잠깐 쉬더라도 제대로 쉬어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뒤.
유성은 작전을 시작했다.
* * *
블루 아이 겔리온은 초조한 눈으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레지옹에서 출발한 새 지휘관이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어째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오지 않는 것일까.
랫맨 사회는 씨족을 근간으로 하는 여러 파벌들로 갈라져 있었고, 레드 아이 머로우는 겔리온과 다른 파벌에 속한 자였다.
때문에 다른 블루 아이- 정확히는 머로우의 파벌에 속한 블루 아이들에 비해 대놓고 차별대우를 받고는 했는데, 이번에 새로 오는 레드 아이인 조카로프는 겔리온과 같은 파벌에 속한 자였다.
즉, 그가 오기만 하면 블루 아이들 사이에서의 서열 관계가 역전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지휘관이 군단 한복판에서 난입한 적에게 죽임을 당한 와중에 파벌 싸움이니 대우니 이런 것들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닐지 몰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랫맨들에게 있어 파벌 다툼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왜 이렇게 늦는 거지....'
설마 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정답이었다.
조카로프와 그 호위병력은 유성에게 전멸당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겔리온은 그저 초조한 얼굴로 남쪽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으으, 안 되겠다. 마중이라도 좀 보내봐야겠다. 거기 누구 없-."
쾅! 쾅! 쾅!
연달아 터진 굉음이 겔리온의 말을 끊었다.
깜짝 놀란 겔리온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끄악!"
"아아아악!"
콰가강!
"공격! 공격이다!"
"불화살이야! 불화살이다!"
랫맨 병사들의 비명 같은 외침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순간 도망치고 싶어진 겔리온이었지만 일단 소리가 들려온 곳이 다소 거리가 있었기에 막사를 나와 밖을 보았다.
병사들의 말대로였다.
하늘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숫자는 수십 발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부 불화살인 게 문제였다.
츠화악!
화악!
군영에 불이 붙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랫맨들이 급히 불을 끄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고, 겔리온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막사에서 튀어나온 블루 아이들이 각자 마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명령을 내려 상황을 수습하려 하였다.
쾅! 쾅! 쾅! 쾅!
그리고 다시 굉음이 터졌다.
거의 기둥만한 크기의 대형 화살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와 꽂히더니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콰가강!
폭발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랬기에 이번에는 비명이 없었다.
폭발이 가신 자리에 남은 것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박살이 난 랫맨들의 시체뿐이었다.
"저쪽이다! 원거리 공격이다! 부대를 파견해라!"
블루 아이 바텐이 크게 외치자 늑대 쥐에 탄 랫맨들이 군영 밖으로 달려나갔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순간적으로 놀라긴 했지만 날아오는 화살의 숫자가 적었다.
소규모 부대가 원거리에서 공격을 한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발리스타다.'
화살 크기를 보면 레지옹의 성벽에서 보았던 발리스타보다도 더 커다란 장치를 썼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동이 쉽지 않다.'
발리스타는 지나치게 크고 무겁다.
한 번 전개해서 사격을 했다면 그 자리를 떠나기 쉽지 않을 테니 기동력이 빠른 늑대 쥐 부대를 파견하면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겔리온의 생각은 타당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빌어처먹을! 대체 어디 있는 거냐!"
늑대 쥐 부대의 대장인 라쿠안은 욕지거리를 토했다.
충분히 먼 거리까지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늑대 쥐 부대는 인간들의 발리스타나 궁수 부대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
발리스타 부대가 갑자기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기라도 했단 말인가?
정답에 무척이나 근접한 그였지만 정답인 것을 알았더라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결국 라쿠안은 주변만 몇 번 더 돌아보다 군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회군하는 늑대 쥐 부대를 멀리 떨어진 수풀 속에서 지켜보던 유성과 르네는 흐뭇하게 웃었고, 질리언 역시 이번에는 제법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유성의 작전은 단순했다.
멀리서 쏘고, 올 것 같으면 튄다.
발리스타 부대의 최대 문제점인 기동성은 유성에게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불렀다 귀환시키면 되었으니 말이다.
"르네, 피해를 얼마나 준 것 같아?"
"수십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유성의 물음에 르네가 즉답했다.
적들의 군세가 5천에 달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미미한 손해였다.
하지만 유성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할 만하겠어."
애당초 이 짓을 한 번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르네와 얼굴을 마주한 채 속이 까만 미소를 주고받은 유성은 아예 드러누운 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유성은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 * *
겔리온은 미칠 것 같았다.
쾅! 쾅! 쾅! 쾅!
"으악!"
"또! 또 왔습니다! 또!"
파파팟! 파파팟!
군영을 향해 불화살들과 발리스타용 대형 화살들이 날아온다.
군영을 불태운다.
조금씩이지만 병력을 갉아먹는다.
"X발! 또 없어! 또! 또 없다고!"
늑대 쥐 부대의 대장인 라쿠안은 다섯 번째 출격에서 돌아오던 중에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그리고 일곱 번째 공격이 끝났을 때.
블루 아이들은 무언의 합의 끝에 군영을 거두고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누적되기 시작한 피해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조카로프 부대의 생존자가 상황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조카로프가 죽었고, 호위하던 병력도 사실상 전멸했다.
이러면 결국 레지옹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군영을 거둬라! 레지옹으로 철수한다!"
계속된 습격에 녹초가 되어 있던 랫맨들은 블루 아이들의 명령에 서둘러 철수 준비를 하였다.
'설마 또 오진 않겠지?'
말로 하면 부정이라도 탈까봐 속으로만 생각한 겔리온은 동서남북 사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행히 이번에는 사방 중 어디서도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단지 그저 머리 위에서 투창이 쏟아질 따름이었다.
"으아아악!"
블루 아이들이 괴성을 질러대며 하늘을 향해 마법을 난사하자 천마 기병대는 약이라도 올리듯 그대로 반전해서 도망쳐 버렸다.
애당초 투창을 던진 것도 그냥 신경을 긁기 위해서라는 듯이 말이다.
"철수다! 철수야! 서둘러라!"
싸움도 어느 정도 손발이 맞아야 가능한 것이었다.
저렇게 대놓고 튈 생각으로 들어온 놈들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하루 사이에 10년은 늙은 것 같은 얼굴이 된 블루 아이들은 군세를 이끌고 레지옹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유성은 지친 얼굴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중간중간 휴식을 취했다지만 지금 같은 연속 소환은 유성에게도 무척이나 무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슬슬 한계인가 싶었는데 다행히 놈들 쪽에서 먼저 물러나 주었다.
'레지옹으로 돌아가는 시간, 다시 북부로 진군하는 시간. 모두 고려하면 시간은 충분히 끌었어.'
영주 연합군의 1차 지원군 정도는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르네."
"네, 계승자님."
"부탁할게."
유성의 말에 르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연스럽게 유성을 부축했다.
이전에 코볼트의 왕자와 싸운 직후에 로티안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같은 맥락이었다.
유성은 르네에게 몸을 기대며 졸도하듯 쓰러졌고, 르네는 그런 유성의 몸을 단단히 지탱하며 군마를 불러냈다.
"언니, 조금만 도와줘요."
"으응."
질리언이 어설프게 답하며 부축하는 걸 돕자 르네는 유성과 르네 자신의 허리를 앞뒤로 잘 묶은 뒤 마법을 써서 군마 위에 올라탄다.
"음, 좋아. 잘 고정됐어."
앞뒤는 물론이고 옆으로도 몸을 살짝 흔들어본 르네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르네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진 유성의 얼굴.
'멋있는데 귀여워.'
로빈이 들었다면 실로 미묘한 눈을 했을 것 같은 생각을 한 르네는 빙긋 웃더니 다시 정면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뒤 오후, 유성 일행이 로베르 남작령에 도착했을 때.
서부 영주 연합군의 1차 지원군 역시 로베르 남작령 인근에 도달하였다.
제22장 - 아무튼 암살 (3)
로베르 남작은 어린 시절부터 기사도 문학을 동경해 왔다.
강력한 용과 싸워 사람들을 구하고, 사악한 마법사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용맹하고 멋진 기사.
매일 밤 유모가 읽어주는 기사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그의 꿈은 당연히 멋진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로베르 남작에게는 기사의 재능이 부족했다.
아니, 기사는커녕 병사의 재능조차도 없었다.
그는 심각한 몸치였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졸라 초빙한 유명한 기사에게서 직접 기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 로베르 남작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삼 일 밤낮을 엉엉 운 후에야 겨우 현실을 받아들인 그는 멋진 기사 대신 멋진 영주로 장래희망을 바꾸었지만 그렇다고 기사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본래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은 더 커지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로베르 남작은 딱히 유명한 수집가나 평론가는 아니었지만 열정적인 기사도 문학 매니아였다.
그의 서고에는 '멋진 영주'라는 목표 달성에 해가 되지 않는 수준의 재정을 이용해 모은 기사도 문학이 가득 차 있었고, 서고의 비밀 방에는 울적한 일이 있을 때마다 혼자서 입어 보곤 하는 멋진 경갑 세트가 숨겨져 있었다.
로베르 남작이 가장 좋아하는 기사는 아르투아 백작의 후계자이자 백작령 제일의 기사인 샤를 경이었다.
무려 천사로 변하는 기사도를 가진 그는 어린 시절 동경했던 기사도 문학 속의 기사와 여러모로 닮은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샤를 경 또한 자신을 보면 수상하게 눈을 빛내는 중년의 남작을 소름 끼쳐 하는 대신 미래의 가신인 그에게 친필 사인을 해주는 등(정말 이런 것을 원하는 게 맞느냐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나름 섭섭지 않은 대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로베르 남작의 귀에 새로운 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로티안의 흑기사.
코볼트들의 침공을 받아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로티안에 홀연히 나타난 방랑 기사.
그는 코볼트의 왕자를 베어 로티안을 구원하였고, 라투스 남작의 뒤를 이어 로티안의 영주가 되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참으로 모범적인 기사도 문학의 도입부라 할 수 있는데, 이후의 행적은 더더욱 굉장하였다.
로티안의 흑기사는 아름다운 여자 마법사와 단둘이서 트롤들과 고블린들에 의해 멸망한 볼보 남작령을 종횡무진하였다.
목적은 단 하나.
볼보 남작령에 남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미쳐버린 낭만이었다.
아니, 낭만이 아니라 실로 기사의 모범과도 같은 남자였다.
그는 볼보 남작령의 수많은 백성들을 구원하였고, 끝내는 트롤들과 고블린들을 격퇴해 볼보 남작령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이쯤하여 로베르 남작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무려 카멜롯의 후예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어찌 이리 완벽할 수가.
실로 화룡점정과도 같은 이야기 아닌가.
카리안 백작이 주관하는 영주회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로베른 남작은 너무나 참석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주군인 아르투아 백작이 회의의 참석자로 빌리엄 남작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무척 아쉬웠지만 멋진 영주가 되기 위해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닌 이상 주군의 명령에 잘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때문에 로베른 남작은 로티안의 흑기사가 로티안을 침공한 네크로맨서와 시체 군단을 격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아쉬움의 눈물만 흘렸을 뿐, 지금이라도 영주회의에 참석하겠다며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현재.
로베르 남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 뭐가 어째?"
"어, 그러니까 로티안의 흑기사께서 적들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 적장의 목을 베겠다고 하셨습니다."
로베르 남작령을 향해 진군 중인 랫맨들의 5천 대군.
그들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 로티안의 흑기사가 세운 계획은 하나.
5천 대군 사이에 난입하여 적장을 암살하는 것.
"아니, 그게 어떻게 암살이야! 그런 건 암살이 아니지! 자살이면 몰라!"
"아, 아무튼. 그렇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유성에게 전령 역할을 명령받은 패잔병 발터가 자기도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답하자 로베르 남작은 다시 화를 내었다.
"그럼 결과는? 결과는 보고 왔어야지!"
"그, 최대한 서둘러 로베르 남작령에 가 상황을 전파하라 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유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것은 발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로베르 남작령으로 서둘러 가라는데.
괜히 구경하다가 잡히는 것 역시 사절이었고 말이다.
"그으으... 일단 알았다. 물러가거라."
"예."
발터가 속으로 안도의 숨을 토하며 물러나자 로베르 남작은 초조한 얼굴로 남쪽을 보았다.
적진에 난입한다는 로티안의 흑기사도 걱정이었지만, 영주로서는 무려 5천이나 되는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이 더 끔찍하였다.
"부디, 부디 한번 더 기적을 일으켜주소서."
로티안의 흑기사시여.
로베르 남작을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다음 날.
랫맨들의 대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벽 위에 선 로베르 남작은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랫맨들의 대군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로베르 남작은 성벽 위에 서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또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성벽 위에 자리하고 있던 로베르 남작은 환희에 차 외쳤다.
"로티안의 흑기사님이시다!"
그랬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멋진 흑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양옆에는 아름다운 마법사와 우아한 성녀가 함께하고 있었고 말이다.
"흐어어! 믿고 있었습니다!"
5천 대군 사이로 난입하여 적장의 목을 베다니.
기사도 문학에 나왔어도 비현실적이라 욕을 먹었을 위업을 실제로 달성할 줄이야.
성문 밖까지 마중 나온 로베르 남작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자 르네는 활짝 웃었고, 유성은 조금 곤란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성안으로 이동하며 로베르 남작이 묻자 주변에 있던 이들 역시도 무척 궁금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유성은 직접 설명하는 대신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르네에게 발언권을 돌렸고, 르네는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계승자님께서 5천 대군 사이에 난입해 적장인 레드 아이를 암살하셨습니다."
르네의 설명에 모두는 질리언을 돌아보았고, 질리언은 그저 웃지요-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오!"
사실이었다.
정말로 5천 대군 사이로 난입해 적장을 암살했다.
"그리고 새로 파견된 레드 아이도 암살하셨습니다."
"예?"
뭘 또 암살해?
레드 아이를?
그러니까 적장을 두 명?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레드 아이의 호위 병력 3백을 전멸시킨 뒤 지휘관을 기다리며 주둔 중이던 5천 대군 역시 패퇴시켰습니다."
르네의 말에 로베르 남작은 눈을 깜박였다.
순간적으로 르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천 대군을 패주시켜?
어떻게?
아니, 그전에 호위 병력 3백을 전멸시켰다고?
그건 또 어떻게?
로베르 남작 일동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사정없이 솟구쳐 오르자 르네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고, 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르네가 일부러 지금처럼 이야기한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르네."
작게 주의를 주자 르네는 봐달라는 듯 우흐흥 웃더니 이야기꾼의 포로가 된 로베르 남작과 가신들 일동에게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 *
로베르 남작이 반짝이는 눈으로 내민 방패 위에 싸인을 하던 유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파발이 왔다 하셨습니까?"
"예, 서부 영주 연합군의 1차 지원군이 곧 도착할 거란 소식이었습니다."
로베르 남작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규모는 약 4천. 선봉을 맡은 것은 앙주 남작이라 합니다."
아르투아 백작령과 카리안 백작령 사이에 위치한 두 개의 독립 영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앙주 남작의 영지였다.
"기쁜 소식이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저 소식을 전했을 뿐입니다. 모두 흑기사님의 덕분이지요."
애당초 유성이 시간을 벌지 않았다면 서부 영주 연합군의 지원군이 있든 없든 로베르 남작령은 랫맨들에게 점령당했을 테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럼 저는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시지요."
"배려에 감사합니다."
유성이 방패를 내밀며 답하자 로베르 남작은 행복한 미소를 짓더니 방패를 소중히 안은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몇 초.
로베르 남작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르네가 유성을 보며 말했다.
"역시 카리안 백작. 정말 유능하네요."
연합군을 결성해 병력을 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병력을 모으는 것도 일이었지만 그렇게 모은 병력이 먹고 마실 보급품을 마련하고 운반하는 것이 더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리안 백작의 수완과 막대한 금력.
이 두 가지가 결합된 덕분에 빠른 지원군 파견이 가능했으리라.
"맞는 말이야. 이러면 정말 해볼 만하겠어."
로베르 남작령에 주둔 중인 병력에 지원군까지 모두 합친다면 근 5천에 가까운 병력이 되었다.
로베르 남작령의 성벽이 비록 로티안이나 루셴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벽은 성벽이었다.
성벽을 끼고 싸운다면 랫맨 1만이 몰려와도 맞서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오직 하나.
랫맨들의 신혈자인 랫 로드를 어찌 막아낼 것인가.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유성 자신과 기사들의 힘으로 랫 로드를 격퇴하는 것.
숨을 깊이 삼킨 유성은 고개를 들어 남쪽을 보았다.
레지옹이 자리한 방향이었다.
* * *
랫 로드 발라카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장벽을 넘은 이래 이렇게나 황당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레드 아이 둘이 죽고 5천 병력이 패주했다.
고작 세 사람에 의해.
파벌 싸움에 밀렸다는 이유로 발라카이에게 보고를 하게 된 블루 아이 겔리온은 머리를 바짝 낮춘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격노한 발라카이가 자신을 짓밟거나 찢어죽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를 낮춘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기에 겔리온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발라카이는 화를 내기는커녕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발라카이는 늙고 지친 랫 로드를 만났던 날을 기억했다.
그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랫맨들의 신을 산산이 조각낸 인간의 괴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만 등장하는 과거의 망령들이었다.
발라카이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애석하였다.
인간은 나약했다.
보잘것없는 랫맨 노예와 별반 차이도 없는 보잘것없는 종족이었다.
그런 인간들 사이에서 원탁의 기사와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발라카리의 흥미를 끌었다.
어쩌면 동질감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랫 로드인 자신 또한 나약한 랫맨들 사이에서 태어난 기적과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원탁의 기사는 없다."
"예?"
저도 모르게 반문했던 겔리온은 흠칫하며 몸을 웅크렸다.
발라카이는 그런 겔리온에게 눈길을 주는 대신 그저 시선을 멀리하며 말을 이었다.
"성왕은 없다. 원탁의 기사도 없다. 장벽 너머에서 마주한 인간의 기사들은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문명의 불이 가져다 준 안락함에 취한 것일까.
아니면 발라카이 자신이 아직 진정한 강자들을 만나지 못한 것일까.
발라카이는 후자이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어처구니없는 패전 소식에도 격노하는 대신 미소를 머금었다.
"내일 아침, 출진하겠다."
발라카이가 짧게 말했다.
발치에 엎드린 블루 아이가 무어라 쫑알거린 뒤 물러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는 부디 사냥할 가치가 있는 적이기를.
무구에 박힌 해골들을 쓰다듬으며 발라카이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가상의 적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1만 2천에 달하는 랫맨의 군세가 로베르 남작령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제22장 - 아무튼 암살 (4)
성벽 위에 선 로베르 남작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서부 영주 연합군이 위풍당당한 기세로 접근 중인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나 급하게, 그것도 각지의 영주들이 저마다의 병력을 끌어모은 것이기에 내걸고 있는 깃발들마저 서로 다를 정도로 통일감이 없었지만 로베르 남작은 오히려 그 '다름'에 감동을 받았다.
외부의 적에 맞서 서부의 영주들이 의기투합, 힘을 합쳤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것이야말로 괴물에 맞서는 인간의 군대.
하나로 뭉친 인간의 힘.
기사도 문학에서도 쉬이 볼 수 없는 광경에 로베르 남작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휘하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힘찬 함성으로 연합군을 환영하였다.
"앙주 남작이오."
"로베르 남작이오."
연합군의 선봉을 맡은 앙주 남작과 마주 선 로베르 남작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앙주 남작 역시 그가 평소 흠모하던 기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로베르 남작에게는 앙주 남작과 더불어 기사도에 대해 논할 시간이 없었다.
연합군을 이끌고 온 것은 앙주 남작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발 남작이오."
"오베르 남작님께 군권을 위임받아 출진한 기사 바르도입니다."
"카리안 백작 각하의 기사인 빌헬름 남작이라 하오."
줄줄이 이어지는 소개에 로베르 남작은 일일이 예를 표하며 응답했다.
라발 남작은 솔직히 관심도 없었지만 나머지 둘은 평소에도 이름을 알고 있던 기사들이었고, 이러나저러나 모두 로베르 남작령을 구하기 위해 와준 원군들이었으니 성심껏 맞이하는 것이 영주된 자의 도리였다.
"그런데 로베르 남작, 흑기사 경은 어디에 있소?"
인사가 끝나자마자 라발 남작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사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자들 역시도 유성을 찾고 있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앙주 남작마저 비슷한 반응을 보이자 로베르 남작은 어쩐지 모를 즐거움 속에 웃으며 말했다.
"로티안의 흑기사님께서는 르네 양과 함께 정찰을 나가셨습니다."
"아니, 흑기사 경이 직접 말이오?"
"예, 그게 제일 정확하다며 그리하셨습니다."
"아니, 뭐... 그럴 거 같긴 한데."
루셴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 라발 남작이 어정쩡한 얼굴로나마 납득했다.
확실히 로티안의 흑기사와 그의 마법사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정찰병 100명을 푸는 것보다 그냥 그 둘이 정찰 한 번 나가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터였다.
앙주 남작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로베르 남작을 보며 말했다.
"로베르 남작, 우선 현재의 전황을 알고 싶소."
오던 와중에도 어느 정도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어느 정도일 뿐이었다.
앙주 남작의 물음에 새삼 레지옹의 함락과 샤를 경의 패전을 떠올린 로베르 남작은 우울한 얼굴이 되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알겠소. 일단 안으로 드십시다. 흑기사님의 활약 또한 상세히 전달드릴 테니."
전황은 분명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에는 로티안의 흑기사가 있었다.
그 사실이 로베르 남작에게 희망을 주었다.
"부탁하겠소."
앙주 남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로베르 남작은 서부 영주 연합군의 지휘부 일동과 함께 내성으로 향했다.
* * *
유성의 활약을 전해들은 라발 남작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을 때, 유성은 르네와 함께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가 텅 빈 마을.
그냥 자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편하게 앉아있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자세를 바르게 하고 집중하는 표정을 지었다.
"계승자님, 보이시죠?"
"어, 잘 보여."
르네의 빛의 새를 이용한 정찰.
본래라면 빛의 새와 감각 공유가 가능한 것은 르네만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카멜롯의 마법서를 통해 새로운 마법들을 잔뜩 익힌 르네의 중계를 통해 유성 역시도 빛의 새와 감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랫맨들의 대군이 진군하고 있었다.
추정되는 병력의 수는 약 1만 2천.
더욱이 저 1만 2천은 인간보다 왜소한 체구를 가진 일반 랫맨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늑대 쥐에 탄 기병들만 해도 1천을 훌쩍 넘어 2천에 달했고, 진군하는 병력 사이사이에는 트롤이나 오우거와 랫맨을 결합해 만든 거대한 랫 오거와 랫 트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굉음을 울리며 전진하는 공성병기들.
강력한 마법사들인 레드 아이들과 블루 아이들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모두 합치면 스무 마리는 족히 될 것 같았다.
로베르 남작령 정도는 단숨에 짓밟아 버릴 것 같은 규모와 구성의 대군.
하지만 유성과 르네는 랫맨의 대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진군하는 군세의 중앙에 시야가 닿은 순간 다른 곳을 쳐다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랫 로드.
랫맨들 사이에서 태어난 기적.
이제는 사라져버린 랫맨들의 신이 낳은 마지막 신혈자.
머리에 돋아난 사슴뿔은 마치 왕관과 같았고, 전신의 검은 털은 너무도 검어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랫 로드는 가마에 연결된 옥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일반적인 랫맨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몸을 가진 랫 로드였기에 가마 역시 거대하였고, 수백 마리에 달하는 노예 랫맨들이 가마를 끌고 있었다.
랫 로드를 시야에 담은 르네는 식은땀을 흘렸다.
신혈자라면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코볼트의 왕자.
로티안을 침공했던 재앙.
하지만 같지 않았다.
눈앞에 자리한 랫 로드에 비한다면 코볼트의 왕자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랫 로드의 전신에서 요동치는 강력한 신혈자의 기운이 마녀의 눈에는 보였다.
오직 랫 로드 하나 때문에 레지옹이 함락되었을 거라는 유성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되는 르네였다.
그리고 랫 로드가 눈을 떴다.
피처럼 붉은 눈으로 빛의 새를 보았고, 그 순간 유성과 르네는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단순히 랫 로드가 빛의 새를 포착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랫 로드는 빛의 새를 통해 유성과 르네를 보고 있었다.
[너희인가.]
심지어 목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전해지는 랫 로드의 목소리에 르네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랫 로드의 검고 진득한 마력이 전신을 옥죄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랫 로드가 웃었다.
가마에 기대앉은 자세 그대로 미소 지었다.
그는 르네나 유성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 지은 채 말을 남길 따름이었다.
[기대하겠다. 아직은 어린 인간의 왕이여.]
랫 로드의 마력이 사라졌다.
네크로맨서 때처럼 빛의 새가 폭발하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보라는 듯 랫 로드는 빛의 새를 건들지 않았다.
그저 부드럽게 마력을 물릴 따름이었다.
"괜찮아, 르네. 이쯤하자."
유성의 말에 르네는 급히 빛의 새를 거두었다.
헐떡이며 눈을 뜨니 어느새 전신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르네는 거친 숨을 토하며 유성을 돌아보았다.
항상 활기가 넘치던 금빛 눈동자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랫 로드를 쓰러트려야 한다.
랫 로드를 격퇴해야만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저 괴물을 대체 무슨 수로.
단순히 힘만 강한 괴물이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이기도 했다.
신혈자인 그의 말에는 신성이 어려 있었다.
놈의 말이 곧 저주이자 마법이니, 평범한 마법사라면 놈의 적의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이 역류해 죽거나 실신할 것이 분명했다.
어, 어떡하죠?
르네는 눈으로 물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억지로 참았지만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유성은 그런 르네에게 섣불리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랫 로드를 마주한 순간 놀라고 당황한 것은 유성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랫 로드는 무척이나 강력한 존재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레지옹을 사실상 홀로 함락시킨 존재.
2단계 기사도를 완성한 샤를 경을 일격에 쓰러트린 랫맨의 괴물.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놈은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유성은 떨리는 르네의 손을 잡아 주었다.
르네가 너무 크다며 깜짝 놀랐던 그 손으로 르네의 작은 손을 온전히 덮어 온기를 나눠주었다.
르네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유성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그저 르네와 눈을 마주하였다.
유성의 검은 눈동자가 어느 순간 금빛으로 물들었다.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그리되었고, 르네의 숨결이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유성은 진정되었느냐고 묻는 대신 작게 웃으며 손을 거두었고, 르네는 얼굴을 좀 붉히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진군 속도가 빠르지 않아. 로베르 남작령에 도착하려면 이틀은 걸릴 거야."
유성의 말에 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영주 연합군이 완벽히 모이는 데는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랫 로드와 맞서기 위해 준비한 것들을 마무리 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성은 상태 창을 열어 유성 성을 보았다.
신전과 대장간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케이트는 병사들과 함께 신전에 모여 기도함으로써 신전의 두 번째 기능인 축성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있었다.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성스러운 불을 지폈고, 퍼거스와 멜리사는 쉼 없이 망치질을 했다.
랫 로드에 맞서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
유성은 마지막으로 바나데인을 보았다.
트리스탄의 활을 쥔 그는 평소처럼 다이애나와 함께 어딘가에 숨는 대신 성벽 위에 올라 빈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유성이 동시에 소환할 수 있는 부대의 수는 넷.
이는 소환할 수 있는 기사 역시 넷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중 한 자리는 바나데인의 것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바로 바나데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나데인이 다시 시위를 당겼다.
3등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옆모습이 참으로 멋지게 보였다.
'역시 엘프는 엘프네.'
쓰게 웃은 유성은 유성 성을 닫았다.
"이제 그만 돌아가- 르네?"
유성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르네가 어느새 1미터- 아니, 거의 2미터 가까이 거리를 둔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일까.
유성이 눈으로 묻자 르네는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듯 주저하더니 빨개진 얼굴로 작게 말했다.
"그, 냄새날까 봐...."
땀으로 푹 젖고 말았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유성은 눈을 깜박이다 웃었고, 르네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아니, 그, 미안. 아니, 근데 냄새 진짜 하나도 안 나는데."
아무래도 괜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랬기에 유성은 실수를 반복하는 대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로베르 남작령으로 돌아가자."
르네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고, 두 사람은 살짝 거리를 둔 채 말을 달렸다.
* * *
유성과 르네가 로베르 남작령에 귀환한 다음날 루안과 로빈, 에드가가 이끄는 로티안의 병력이 로베르 남작령에 도착했다.
전투 사제단은 이미 1차 지원군과 함께 도착한 상황이었기에 지원 온 병력은 보병 400명이 전부였지만 로티안을 지키기 위해 병력 일부를 남겨야 했으니, 이 정도면 가능한 많은 병력을 모아온 셈이었다.
"로빈!"
"아가씨!"
"로빈!"
"아가씨!"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하는 르네와 로빈 옆에서 질리언과 루안이 우아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발투아 백작가에서도 지원 병력을, 그것도 전원 기병으로 파견했지만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서 도착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오던 길에 접한 소식이었는지 에드가가 말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먼 길 오느라 고생들 했다. 오늘은 푹 쉬도록."
발투아 백작가의 병력이 도착했다면- 특히 지원군을 이끌고 있을 기사들이 합류한다면 랫맨들과의 전투 양상 자체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하루 뒤.
다음 날 오후.
랫맨들의 대군이 로베르 남작령에 당도했다.
제23장 - 랫 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