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50-60

제15장 – 영주 회의 (6)

"끼아아아아아아아!"

옴팔로스의 방벽을 없애고 일행이 돌진해오자 제단을 향해 모여들던 밴시들 가운데 일부가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옵니다!"

"우오오오오오오오!"

케이트가 외친 순간 헥토르가 앞으로 치고 나가며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카멜롯의 거신병.

순식간에 거대해진 헥토르가 큰 보폭으로 달려 나가니 그 속도가 군마에 뒤지지 않아 마치 폭주하는 전차 같았다.

"으하하하하핫!"

마치 지금껏 방벽 위에 있어 답답했다는 듯 호탕하게 웃은 헥토르는 대형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헥토르와 함께 거대해진 도끼의 자루 길이는 자그마치 7미터에 달했으니, 한 번 휘두르자 달려오던 밴시들 가운데 십여 마리가 단숨에 지워졌다.

"돌려 깎는다! 다이애나! 성녀님을 모시고 하늘로!"

유성이 검기를 날리며 명령하자 다이애나는 즉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외곽으로!"

제단을 향한 일점돌파 대신 주변으로 우회를 명한 유성은 따라붙는 밴시들을 제거하며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유령마에 탄 밴시들이 다이애나를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바나데인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발사된 화살들이 유령마 위에 탄 밴시들의 머리를 꿰뚫었고, 다이애나 역시 구경만 하지 않고 창을 내찔러 다가오는 밴시들을 쓰러트렸다.

"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바로 그 순간 제단 위에 있던 밴시 여왕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무지막지한 귀곡성을 내질렀다.

마법에 무지한 자들도 느낄 수 있을 만치 섬뜩하면서도 위협적인 마력이 실린 외침이었다.

무방비 상태로 당하면 평범한 병사들은 물론이고 단련된 기사들조차도 치명상을 입을 것 같았다.

무방비.

무방비 상태라면 말이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가 마주 외치며 깃발을 땅에 꽂았다.

그러자 일행 앞으로 황금빛 아우라가 펼쳐져 밴시 여왕의 귀곡성을 막아냈다.

"역시 성능 좋구만!"

듣는 이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파괴하는 밴시 여왕의 귀곡성을 단박에 막아내는 것을 본 헥토르가 나름 칭찬이라며 껄껄 웃었지만 케이트는 웃는 대신 미간을 좁히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르네가 즉각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월!"

르네의 특기는 원소 마법.

그중에서도 불과 얼음은 르네의 주특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의 장벽이 크게 일어나 펼쳐지니 밴시 여왕의 귀곡성을 마치 파도처럼 타고 돌진해오던 밴시들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성은 하늘을 보았다.

유령마들을 모조리 떨쳐낸 다이애나가 제단의 바로 위 상공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역시 성녀! 질리언 언니가 귀곡성도 막아낸 모양이에요!"

르네가 환호하는 가운데 질리언은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자 꼭 안고 있던 다이애나의 허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대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사실 질리언은 아직 성녀로서 미숙했다.

옴팔로스의 선택을 받아 신성력 자체는 폭증했지만, 여전히 신성력의 운용 자체가 서툴렀기 때문이다.

애당초 신성력을 다뤄본 일이 별로 없는 질리언에게 무지막지한 신성력이 생겼으니, 이를 잘 통제하면 그게 더 신기한 일일 터였다.

아무튼 그렇기에 질리언이 사용할 수 있는 기도는 물론이고 하루에 쓸 수 있는 횟수 역시도 상당히 제한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한된 능력이나 하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철벽의 옴팔로스시여, 우리를 수호할 방벽을 내려주소서. 사이하고 사특한 무리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소서."

옴팔로스의 방벽.

방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방벽의 요새를 만드는 데 사용한 기도로, 질리언은 하루에 열 개의 방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쾅! 쾅! 쾅! 쾅!

굉음과 함께 신성의 방벽이 지면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다.

그 수는 모두 넷.

밴시 여왕이 탄 제단의 사방을 봉하듯 솟구친 거대한 방벽을 본 르네는 폴짝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성공이에요!"

하지만 유성은 르네와 함께 환호하지 않았다.

질리언의 계획은 방벽으로 제단의 사방을 막는 것이 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계획의 성사 여부는 그다음에 달려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아!"

방벽에 포위된 벤시 여왕이 하늘을 향해 귀곡성을 내지른 그 순간 질리언 역시 두 손을 모아 쥔 채 다시 한번 신성력을 발동시켰다.

"우리를! 수호하소서!"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굉음이 일었지만 새로운 벽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질리언은 새로운 벽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옴팔로스에게 기도하여 청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제단을 포위한 방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앞뒤를 막은 벽은 가만히 있는데 좌우의 벽이 서로를 향해 움직였다.

"끼, 끼아?! 끼아아아아아아!"

벽이 다가오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밴시 여왕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방벽 밖의 밴시들 역시 패닉 상태에 빠져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와, 저게 진짜 되네."

르네가 저도 모르게 말한 그때 케이트 역시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두 사람뿐만 아니라 유성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 역시 황당함과 기꺼움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말이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실제로 보니 황당하다고 해야 할까?

"끼아아아아아아!"

콰강!

방벽과 방벽은 결국 마주하진 못했다.

제단을 뭉개버릴 기세로 전진하던 방벽들이 산산이 조각나 무너졌기 때문이다.

"끄윽."

방벽이 무너진 여파를 돌려받은 듯 질리언이 비틀거렸지만 잠시뿐이었다.

눈을 떠 지상을 확인한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며 미소 지었고, 다이애나 역시 작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끼아아...."

방벽이 무너졌지만 제단 역시 무사하진 못했다.

밴시 여왕은 밴시들을 흡수해 모은 힘을 신성력 덩어리인 방벽을 강제로 파괴하는 데 거의 다 소진하였고, 그 제단조차도 결국 파괴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부서진 제단과 빈사까진 아니더라도 이미 너덜너덜해진 밴시 여왕, 그리고 수십 마리밖에 남지 않은 밴시들뿐.

'옴팔로스 님 감사합니다. 너무 좋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질리언은 얼른 두 손을 모아 쥐고 다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옴팔로스의 방벽은 수비용이지 공격용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인간의 왕을 도와 사특한 이들을 멸하는 데 사용하였으니 옴팔로스께서도 흡족해하시리라.

"자, 아무튼 가볼까?"

밴시 여왕이 회복하기 전에 끝장을 내러.

유성의 말에 모두는 저마다의 말고삐를 움켜쥐었고, 헥토르는 앞장서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하하하핫! 상성이 너무 안 좋았구나!"

확실히 밴시들 입장에서는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언데드, 그중에서도 유령인데 성왕과 성녀가 상대라니.

"기, 기아아아!"

밴시 여왕이 어쩐지 모를 억울함을 담아 귀곡성을 내질렀지만 이는 문자 그대로 최후의 단말마일 뿐이었다.

수십 마리밖에 남지 않은 밴시들은 헥토르의 도끼날 앞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고, 밴시 여왕의 마지막 발악 같은 귀곡성은 이번에도 케이트의 기사도에 막히고 말았다.

"잘 가라."

남은 마력 모두를 쏟아 부은 열화의 검기.

황금빛 태양을 연상시키는 원형의 검기에 적중당한 밴시 여왕은 비명조차 없이 소멸하였다.

[밴시 500/500]

[밴시 여왕 1/1]

[개척 목표 달성]

[제2구역 개척에 성공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 50점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케이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바나데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다이애나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질리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질리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질리언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파괴된 마구간 확보(수리 가능)]

[파괴된 주점 확보(수리 가능)]

줄줄이 떠오른 상태창 문구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리언이 이번 전투에 기여도가 높기는 했지.'

거기다 제일 쪼렙이니 한 번에 잔뜩 레벨 업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나저나 마구간인가.'

마구간.

중갑 기병대를 신설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시설.

물론 조건 달성을 위해서는 아직 대장간과 금속 제련소 레벨 업이 필요했지만 일단 필요 시설을 모두 갖췄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중갑 기병대.'

기존에도 다이애나와 경기병대로 랜스 차징을 하긴 했지만 역시 진짜 랜스 차징의 로망은 중갑 기병에게 있었다.

더욱이 이제 다이애나의 기병대는 전원이 페가수스 라이더들로 구성된 천마기병대가 되었으니 중갑 기병대와의 조합이 훨씬 더 좋아졌다.

정면에서 전차처럼 적을 향해 맹진하는 중갑 기병대와 후방- 그것도 하늘에서 강하하며 돌진하는 천마기병대라니.

적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리라.

'그리고 중갑 기병대 영웅도 나올 거고.'

이번엔 어떤 영웅이 나올 것인가.

기사도는 또 어떤 걸 가지고 있을까.

'주점은 병사들이 좋아하겠고.'

군대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었다.

로봇 병사도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니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단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변변찮은 오락 시설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도 되고 병사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는데 마침 딱 적당한 시설이 나와 준 기분이었다.

'르네도 좋아하겠네.'

구경하는 맛이 더해질 테니까.

얼큰하게 취해서 즐거워하는 3등신 병사들의 모습과 케이트를 비롯한 기사들의 모습을 상상해본 유성은 저도 모르게 웃은 뒤 다시 현실을 보았다.

케이트와 르네가 활짝 웃으며 칭찬 세례를 퍼붓자 다이애나와 함께 안착한 질리언이 아닌 척하며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성녀님, 정말 멋진 활약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보다는 기사님들과 계승자님의 활약이 훨씬 더 두드러졌는걸요."

"에이, 무슨 소리예요. 이번 전투는 시작부터 끝까지 언니가 대활약했잖아요."

르네가 괜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어깨를 두드리자 질리언은 '아,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라고 하며 생긋생긋 웃었고, 그걸 본 헥토르는 뒤돌아선 채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눌렀다.

'헥토르가 사람이 됐네.'

대놓고 웃으면 또 이런 쪽으론 약한 질리언이 민망함에 몸부림칠 터이니 말이다.

"다들 잘했어. 이번에는 비교적 쉽게 이길 수 있어서 다행이네."

첫 번째 개척 때와 비교해보면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월했다는 느낌이었다.

유성의 말에 케이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계승자님과 성녀님 덕분입니다."

"가끔은 쉽게 이기는 날도 있긴 해야겠지."

케이트에 이어 말한 바나데인은 숲 쪽을 돌아보았다.

짙게 깔려 있던 안개와 함께 숲 자체가 천천히 사라지며 숨겨져 있던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상으로 언급된 마구간과 주점.

그리고 주점 건물 안쪽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는 한 줄기 빛.

'원탁의 기사의 무구.'

새삼 왼팔에 차고 있는 가레스의 황금 방패를 돌아본 유성은 주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제15장 - 영주 회의 (7)

마구간과 마주하고 선 주점은 대장간이나 식당 같은 시설들이 처음 그러했던 것처럼 아직 레벨1에 불과해서 그런지 그리 크지 않았다.

맥주잔 모양의 간판이 달려 있는 2층짜리 목조 건물.

"오, 혹시 술집인 건가?!"

간판을 확인한 헥토르가 크게 기뻐하자 케이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었다.

헥토르는 둘째치더라도 병사들이 좋아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와인도 팔면 좋겠군."

바나데인이 그렇지 않으냐는 듯 다이애나를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주점이 아닌 마구간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다들 취향이 뚜렷하네.'

작게 웃은 유성은 헥토르만큼이나 흥분한 르네와 함께 주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영화나 게임에서 흔히 본 판타지 주점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바와 둥근 나무 탁자들과 의자들.

그리고 바에 서서 술잔을 닦고 있는 주점 주인.

거의 헥토르만큼이나 덩치가 좋은 중년 사내였는데,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은 무척이나 두꺼웠고, 앞치마로 가린 배는 다소 튀어나와 있었지만 절대 그냥 살로는 보이지 않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옆에는 바에 기대어 선 여급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낸 밝은 금발과 시원한 기분이 들게 하는 환한 미소가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주점 주인: 호퍼]

[주점 여급: 비앙카]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유성은 저도 모르게 왕의 안목까지 사용해 보았다.

호퍼의 풍채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다.

'과연.'

은퇴한 전사라도 되는지 전투 관련 능력이 무지막지한 호퍼였다.

정말 헥토르급은 아니었지만 지미 정도는 무난하게 이길 것 같았다.

'비앙카도 평범하진 않네. 은퇴한 모험가 부부...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나 보이기는 하는데 아무튼 좀 그런 콘셉트인 건가.'

나중에 여차하면 저 둘을 소환해보자- 라는 생각으로 일단 관찰을 멈춘 유성은 말없이 꾸벅 고개만 숙여 보이는 호퍼와 웃으며 예를 표하는 비앙카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나머지 일행을 들어오게 하였다.

"안녕하세요, 전 르네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전 비앙카랍니다?"

르네가 언제나처럼 빠르게 친목을 쌓는 동안 주점 안에 들어온 기사들은 주점 안을 돌아보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보았다.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원탁의 기사의 무구는 주점 2층에 있는 모양이었다.

"르네."

"네, 계승자님. 나중에 또 이야기해요, 비앙카 언니."

비앙카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눈 르네가 돌아오자 유성은 감탄과 새삼스러움이 반씩 섞인 눈으로 르네를 보았다.

"어, 제 옷에 뭐 묻었나요?"

"아니, 그냥 신기해서."

실라테온 왕국 서부 제일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발투아 백작가의 여식이 어떻게 자라면 이렇게 친화력 넘치는 성격이 되는 것일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르네에게 그냥 미소로 얼버무린 유성은 기사들과 함께 2층으로 향했다.

주점 2층은 여관이라도 되는지 작은 방들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유성은 그중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가장 안쪽의 방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도 허공에 자리한 무구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칠흑의 망토.

"아그라베인의 망토."

지난번 가레스의 방패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케이트였다.

원탁의 기사 아그라베인.

그가 사용하던 망토.

케이트의 눈에는 순수한 그리움이 어린 반면 다른 기사들의 눈에는 다소 다른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약간의 거리감, 언짢음, 불편함 같은 종류의 감정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다른 기사들 역시 그리움의 감정을 보였다.

유성은 가레스의 방패 때 그러했던 것처럼 망토에 다가가 손을 뻗어 보았다.

그러자 겉감이 검고 안감이 하얀 망토가 절로 날아와 유성의 등에 자리를 잡았다.

[흑백의 망토]

원탁의 기사 아그라베인의 망토.

아그라베인이 항시 두르고 다니던 망토로 강력한 수호의 힘이 담겨 있다.

[고유 스킬: 흑백 반전]

망토의 겉감과 안감을 뒤바꾼다.

칠흑은 강한 물리 방어력을, 순백은 강한 마법 방어력을 발휘한다.

선업치가 높을수록 망토의 방어력이 강해진다.

상태창 문구를 읽은 유성이 눈을 감자 젊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창백한 안색과 날카로운 눈매,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표정.

동생인 가레스와는 얼굴은 물론이거니와 성격도 닮지 않은 과묵한 남자.

그가 유성을 보았다.

무어라 말하며 마치 생전 처음이라도 되는 듯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그라베인.

원탁의 균형의 지키는 자.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유성은 뒤를 돌아보았고, 은은한 빛에 휩싸인 기사들을 볼 수 있었다.

개척의 성과 가운데 하나.

기사들의 봉인된 기억의 해금.

케이트의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서글픈 눈물을 흘릴 따름이었다.

[기사 케이트에게 채워져 있던 기억의 봉인이 하나 해금되었습니다.]

[왕국검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왕국창법을 습득했습니다.]

[맨손전투술을 습득했습니다.]

[기마술을 습득했습니다.]

[케이트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지금까지 검만 사용하던 케이트에게 다른 병장기 스킬들이 생겼다.

여전히 제일 잘 쓰는 것은 검이었지만, 다른 무기들도 가리지 않고 다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제일 큰 변화는 역시 능력치였다.

애당초 다른 기사들에 비해 처지는 곳 없이 모든 능력치가 두루 발전해 있던 케이트였는데, 여기서 추가 상승까지 더해지자 정말 못 하는 게 없는 올라운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의 유무를 따지기에 앞서 그냥 체급 자체가 높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렇다고 케이트가 헥토르보다 힘이 세거나 바나데인보다 민첩한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모든 능력치가 2등인 올라운더 기사.

그것이 바로 지금의 케이트였다.

'병사들 사이에서의 인기랑 외모는 1등일 것 같지만.'

잠시 케이트의 자애로운 미소를 떠올린 유성은 다른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기억이 해금되었는데, 케이트만큼 큰 변화를 보인 이는 없었다.

다이애나의 경우엔 지난번 변화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 가장 변한 것이 적었다.

'기억이 해금될수록 다들 강해지고 있어.'

바나데인은 이미 뛰어난 궁술이 더욱 발전하였고, 다이애나는 창술이, 헥토르는 근력이 강화되었다.

"언니, 괜찮아요?"

기사들을 감싸고 있던 빛이 가시자 르네가 케이트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케이트는 르네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은 뒤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케이트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케이트는 늘 그랬지. 우리 중에서 눈물이 제일 많았어."

헥토르가 말했다.

평소처럼 놀리는 투가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옛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조금, 조금만 더 기억이 돌아오면... 온전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바나데인의 말에 다이애나는 미간을 좁힐 뿐 동의를 표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사들마다 봉인된 기억의 양이나 현재 해금된 기억의 양이 다른 것 같았다.

유성은 눈물을 그친 케이트가 호흡을 가다듬을 동안 잠시 기다린 뒤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수고 많았어. 이제 그만 돌아가자."

주점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지미를 필두로 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온 상태였다.

"오! 오오! 오오오오!"

주점 간판을 보며 감탄한 지미와 병사들은 주점 안에 들어가고 싶어 안절부절못했고, 유성은 그런 병사들을 위해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피해주었다.

"감사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지미의 감사 인사에 가볍게 손만 한 번 들어준 유성은 기사들과 신전 앞에서 헤어진 뒤 유성 성을 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후우...."

긴 숨을 토한 유성은 비틀거리는 르네와 그 옆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긴 숨을 토하고 있는 질리언을 확인한 뒤 정면을 보았다.

이번에도 로빈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덕분에. 다녀온 사이에 혹시 다른 일은 없었고?"

"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유성 성에서 보낸 시간이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사이에 뭔가 일이 터졌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르네, 고생했어. 질리언 성녀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계승자님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쉬시지요."

"예, 성녀님도요."

질리언이 예를 표하고 물러나자 잠시 망설이던 르네 역시도 로빈과 함께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주점이 생긴 유성 성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먼저 불러서 보라고 했을 유성이었지만 이번에는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대장간을 레벨 업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금속 제련소를 레벨 업 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중갑 기병대의 영입 조건을 채우기 위한 시설들의 업그레이드.

개척 전투와 레벨 업으로 얻은 포인트를 모두 투자하니 빠듯하게나마 두 시설 모두 업그레이드가 가능했지만 애석하게도 바로 중갑 기병대를 영입할 수는 없었다.

[대장간 레벨 업 완료까지 170시간 12분 54초]

[금속 제련소 레벨 업 완료까지 170시간 12분 54초]

'시간 단축 캐쉬 템은 없겠지.'

쓰게 웃은 유성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창을 뒤져 보았지만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주일인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영주 회의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저번 개척과 마찬가지로 이번 개척 역시 성과가 많았다.

유성 자신과 카멜롯의 군세는 꾸준히 강해지고 있었다.

마음을 편히 먹은 유성은 다시 상태창을 열었다.

주점 앞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술잔을 들고 있는 지미와 병사들의 모습에 빙긋 웃고는 르네와 질리언의 상태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잿빛 하늘 아래에서 장벽을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인간의 왕 아서가 옴팔로스를 비롯한 인간의 신들과 함께 세운 장벽이었다.

저 벽이 있었기에 인간들은 문명의 불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벽은 완벽하지 못했다.

아서와 옴팔로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 벽은 기실 발악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인간의 시대를 연장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인간들이 불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서와 옴팔로스는 많은 희생을 치러가면서까지 눈앞의 장벽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잊힌 역사였다.

일곱 왕들 가운데 하나인 사령왕 같은, 극히 일부를 제한다면 장벽 밖의 존재들 역시 대부분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최후의 요새'조차도 기억하는 이가 드문 것이 장벽 밖의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벽 밖의 존재들조차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기억했다.

인간의 괴물들.

그렇게밖에 표현 못 할 초월적인 존재들.

우두커니 앉아 장벽을 바라보는 자의 이름은 발라카이였다.

그는 랫맨들의 여러 왕들 가운데 하나였다.

평범한 랫맨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육신과 머리 위에 왕관처럼 돋아난 크고 웅장한 뿔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랫 로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에 의해 파멸한 랫맨들의 신의 피를 이은 신혈자들.

발라카이는 장벽의 균열을 바라보았다.

점점 더 균열이 커지고 있었다.

그럼에 따라 균열을 통해 새어 나오는 빛의 열기와 밝기 역시 커져만 갔다.

하지만 아직은 작았다.

너무 작아 미약한 존재들만이 장벽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발라카이는 인내했다.

아직은 균열이 너무 작았지만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은 미래에 발라카이 자신이 장벽 안으로 들어서는 것 역시 가능해질 터였다.

발라카이는 기다렸다.

장벽 안에서 새어 나오는 문명의 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제16장 - 영주 회의 Ⅱ

루셴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유성과 르네, 질리언이 타고 있었다.

루안은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었고, 로빈은 마차의 후위를 맡았다.

전투 사제단은 옴팔로스 수도원에 대기시켰다.

영주 회의에 병력을 끌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명목상은 영주 회의지만 발투아 백작령이나 아르투아 백작령에서는 아마 고위급 가신이 올 가능성이 높을 거예요."

마차 안.

질리언과 나란히 앉은 르네가 말하자 맞은편에 홀로 앉은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이번 회의의 실질적인 목적은 정보 교류와 지금까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공조를 위한 사전 작업 정도일 테니까."

옆의 영지가 공격을 받아도 돕지 않는다.

당장 로티안만 하더라도 침공당할 때마다 매번 주변 영지에 도움을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원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공격이 한두 번으로 그칠 때였다.

로티안뿐만 아니라 여러 영지가 지속적으로 공격받는 현 상황에서 저만 살겠다고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되지 못했다.

국경 안쪽의 영지들 입장에선 방패 역할을 해주는 영지들이 사라지면 그다음은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영주 회의는 이러한 상황을 바꾸기 위한 회의였다.

다 같이 모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위기의식을 공유한 뒤 지금부터라도 서로 돕자는 것을 약속하기 위한 회담.

하지만 결국 그뿐인 모임이기도 하였다.

왕국이 주최하는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카리안 백작이 여는 일종의 친목회였으니, 발투아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 입장에선 자신들보다 아래면 아래지 결코 위가 아닌 카리안 백작의 소집에 몸소 나설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준전시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유성의 대답에 르네는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역시 우리 계승자님! 전투만 잘하시는 게 아니라니까?"

대놓고 하는 칭찬이었지만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기에 유성은 조금 민망하다는 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 마음 안다는 듯한 눈빛이 된 질리언이 우아하게 웃더니 르네에 이어 설명했다.

"계승자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명목상의 회의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참가하는 인원의 수는 꽤 많을 겁니다. 주변의 독립 남작령에서는 영주인 남작들이 직접 행차할 테고, 여러 백작령들에서도 백작령 휘하의 남작들이 참여할 테니까요."

대리인을 파견하는 건 어디까지나 발투아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 정도일 뿐이었다.

당장 유성이 직접 나선 것처럼 남작들은 영주 본인이 직접 올 가능성이 높았다.

"질리언 언니 말이 맞아요. 모두 합치면 열댓 명 정도가 참여하는 제법 큰 규모의 회의가 될 거예요."

모두 저마다의 영지를 가진 남작들이었다.

유성에게 로티안을 물려준 라투스 남작이나 지금은 고인이 된 볼보 남작처럼 큰 영지를 가진 자들은 아니었지만, 영지를 가진 남작이 열 명도 넘게 모인다는 것은 확실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유성은 이전에 읽은 주변 영지의 주인들 정보를 떠올리며 르네에게 물었다.

"르네, 백작령들에서는 대충 누가 올지 알 수 있을까? 남작들 중에서도 유력한 자라든가."

"발투아 백작령에서라면 아마... 바리안 남작이 올 가능성이 높아요."

"바리안 남작?"

"네, 전대부터 저희 집안과 연을 맺은 가신 가문의 주인이에요."

다른 누구도 아닌 발투아 백작의 친딸인 르네였다.

발투아 백작령에 대한 정보라면 그녀보다 해박한 이를 찾기 어려울 터였다.

"백작가의 가신들 중에서 서열로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에요. 사석에서는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고요."

한마디로 말해 발투아 백작의 심복이란 소리였다.

"그럼 르네와도 친한 분이시겠네?"

"네, 공석에서는 무척 엄격하고 근엄하신데 사석에서는 기본적으로 짓궂고 장난기도 많으신 분이세요. 어릴 때부터 저희 남매를 많이 귀여워해주셨고요."

"음...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네."

저 설명만으로도 대충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진다고 해야 할까?

유성의 대답에 르네는 살짝 복잡한 미소를 지은 뒤 질리언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질리언은 숨을 한 차례 고른 뒤 유성을 보며 말했다.

"아르투아 백작령이라면... 평소라면 백작의 후계자인 샤를 경이 오겠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가 올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전투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샤를 경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하니 더더욱 영지를 비우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대주교는 단순히 수도원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는 자가 아니었다.

옴팔로스 교단의 신자는 서부 어디에나 있으니, 그녀는 싫든 좋든 서부 지역의 영주들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샤를 아르투아.

아르투아 백작의 후계자.

젊은 나이에 2단계 기사도를 완성한 백작가의 기린아

"샤를 경이 오지 않는다면 백작의 오랜 가신인 빌리엄 남작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샤를 경이 와도 함께 올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고요."

"어떤 사람이죠?"

유성의 물음에 질리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조금이지만 싫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돈과 여자를 심하게 밝히는 탐욕스러운 자이지만... 유능하긴 합니다."

얼굴을 보니 단순 소문만이 아니라 직접 불쾌한 일을 겪거나 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르네는 잠시 질리언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어서 설명을 계속했다.

"독립 영주들 쪽에서는 계승자님을 제한다면 오베르 남작과 앙주 남작 정도가 중요할 것 같아요."

르네는 어느새 꺼낸 지도를 펼치더니 카리안 백작령과 아르투아 백작령 사이에 위치한 작은 영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베르 남작은 직접 상단을 운영해 큰 부를 쌓았을 정도로 상재가 뛰어난 인물이고, 앙주 남작은 가문과 영지 자체는 작고 큰 힘이 없지만 남작 자체가 강해요. 소문대로라면 최근에 2단계 기사도를 완성했다고 하고요."

둘 외에도 독립 영주가 몇 명 더 있었지만 딱히 눈에 띄는 자는 없었다.

서부의 남은 두 백작령에서도 사람이 올지 의문이었지만, 온다 해도 크게 주의할 인물은 없어 보였다.

"카리안 백작 쪽에서는 주의할 인물이 있나?"

"여럿 있지만 하나만 꼽자면 현재의 백작을 어린 시절부터 가르친 몽포르 남작 정도가 있겠네요. 그... 딱히 흉보는 건 아니지만 별명이 늙은 독사인 사람이에요."

르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질리언도 작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별명 그대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인 모양이었다.

'발투아의 고지식한 바리안 남작, 아르투아의 탐욕스러운 빌리엄 남작, 독립 영주인 부자 오베르 남작과 기사 앙주 남작, 카리안의 늙은 독사 몽포르 남작.'

요주의 인물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넣은 유성은 창밖을 돌아보았다.

느릿느릿하게나마 나아가던 마차가 완전히 멈추었기 때문이다.

"루셴에 도착했습니다. 루안 경이 검문 중인 병사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금방 다시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로빈이 마차 창문에 다가와 말했다.

아예 고개를 창문 밖으로 내밀어 보니 높은 성벽과 커다란 성문, 성문 앞에 쭉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통행인들.

그리고 경비대장쯤으로 보이는 자와 대화 중인 루안의 모습이 보였다.

줄을 서고 있던 자들은 유성의 마차를 보고 다들 놀란 눈치였는데, 개중에 한 명이 유성을 알아 본 모양이었다.

"로티안의 흑기사?"

"흑기사님이?"

저들끼리 작게 한 말이었지만 기사의 초인적인 청각을 가진 유성이었다.

"큰 회의가 열린다던데 그래서 오신 건가?"

"흑기사님께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소문과 달리 뿔이나 꼬리는 없는 거 같은데?"

"입에서 불을 뿜는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었나?"

무슨 악마도 아니고 뿔과 꼬리라니.

불은 또 왜 뿜는단 말인가.

"흰소리들 하지 말아. 그분이 구하신 목숨이 몇인 줄은 알고 그러는 건가?"

"맞아요. 흑기사님 아니었으면 저흰 다 죽었을 거예요."

줄서는 이들 가운데 볼보 남작령 출신들이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헤헤헷."

옹호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르네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질리언 역시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고 말이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유성은 창밖으로 고개를 숙인 채 마차에 예를 표하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았다.

개중에 몇 명 눈에 익은 자들이 있었다.

르네와 함께 볼보 남작령을 누비던 와중에 구한 수백 명도 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그들의 모습에 안도감과 약간의 쑥스러움을 동시에 느낌 유성은 다시 고개를 돌렸고, 르네는 유성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잘 안다는 듯 고양이 같은 얼굴로 웃었다.

* * *

볼보 남작령과 아르투아 백작령과의 교역으로 발전한 도시답게 루셴의 규모는 상당했다.

잘 닦인 중앙도로 좌우로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성벽 안에 자리한 집들의 숫자만 해도 수백 개는 우습게 넘을 것 같았다.

'인구만 해도 로티안의 두 배 이상은 될 것 같은데.'

언제나 그러했지만 이 시대에는 특히 인구는 곧 국력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노동력도 풍부해질 수 있었고, 뽑을 수 있는 병사의 숫자 역시 늘어났다.

볼보 남작령이 무너졌을 때 처음에는 피난민들을 받아주지 않던 카리안 백작령이 어느 정도 안정화가 이루어지고 나자 바로 피난민들을 긁어모으듯 흡수한 것도 그래서였다.

볼로나 역시 꽤 발전한 도시였지만 유성이 방문했을 때는 이미 황폐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발전된 상업 도시를 방문하는 것은 유성에게도 처음이었다.

'냄새는 어쩔 수 없네.'

사람이 많으니 생기는 자연스러운 문제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확실히 내성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고약한 냄새가 줄어들었다.

"로티안의 흑기사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루셴의 시장인 헥센이라 합니다."

내성 입구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 싹싹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웃으며 일행을 환대했다.

로티안의 흑기사.

병사들이나 주민들도 아니고 도시 하나를 책임지는 시장까지도 그리 부르는 것은 사실 유성을 부를 만한 공식 호칭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유성은 라투스 남작에게 로티안을 비롯한 라투스 남작령 전부를 물려받았고, 주변 영주들에게 나름 인정도 받았지만 실라테인 왕실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즉, 유성은 아직 정식 남작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러다 보니 별명인 로티안의 흑기사가 공식 호칭 대신 쓰이는 상황이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 양과 옴팔로스 교단의 대사제이신 질리언 님이십니다."

유성이 두 사람을 소개하자 헥센이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카리안 백작님은 회의가 열리는 모레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여독이 쌓이셨을 텐데 지금 바로 숙소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유성 일행이 제일 먼저 도착한 것 같았다.

회의 개최가 모레였으니 아마 내일쯤이나 되어야 영주들이 모일 듯했다.

"감사합니다."

커다란 도시답게 손님방도 훌륭했다.

르네와 질리언, 루안 세 사람 또한 유성의 방 근처에 각자의 방을 받았는데 모두가 훌륭한 방이었다.

적당히 짐을 풀고 여독을 푼 뒤 몇 시간.

헥센 시장과 저녁 식사를 마친 일행은 유성의 방에 모여 낮 동안 모은 정보들을 공유했다.

"아무래도 왕국 전체가 공격받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특히 남부 쪽은 서부보다 더 공세가 심한 것 같습니다."

"다른 왕국들도 비슷한 것 같아요. 아직은 풍문 수준이지만 바질 왕국은 왕자가 친정했다가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제국 북부는 괴물들의 대규모 공격에 아비규환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어요."

사실 서부의 공세를 유성이 잘 막아냈기 때문인지 만약 코볼트의 왕자에게 로티안이 뚫렸다면, 그리고 트롤들이 다시 집결하여 고블린들과 함께 진군했다면 서부 역시 난장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국왕 전하께서 병환으로 쓰러지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왕실 쪽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니 진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질리언과 르네에 이어 루안 역시 가져온 정보를 이야기했다.

왕궁이 있는 수도에서 내려온 상인들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라는데 정황상 신빙성이 높아 보였다.

"그, 저는 좀 다른 이야기인데... 얼마 전부터 루셴 인근에 약한 지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진이?"

"네, 그리 길지도 않았고 살짝 느낄 정도였지만 지난 일주일 사이에 두어 번 정도 있었다는 모양입니다."

약간 자신 없는 얼굴로 이야기를 꺼냈던 로빈은 유성이 관심을 보이자 최대한 상세하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을 안내해줬던 시종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흑기사님, 바리안 남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바리안 남작.

발투아 백작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인 심복 중의 심복.

예기치 않은 방문에 잠시 당황한 유성이었지만 일행들- 그중에서도 르네와 한 번 시선을 교환한 뒤 문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시라 해라."

워낙 큰 손님방이라 바로 침실이 드러나는 구조가 아닌, 손님 방 안에 따로 거실과 침실이 구분되어있는 형태였다.

유성이 새삼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자리에서 일어서자 때를 맞추듯 문을 열고 덩치 큰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2미터에 육박할 것 같은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수염으로 뒤덮인 딱딱한 표정의 얼굴은 마치 바위를 연상케 했다.

호위 기사 하나만 데리고 유성의 방을 찾아온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유성을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가 로티안의 흑기사인가."

유성도 바리안도 남작이었으니 신분상의 고하는 없었다.

하지만 연장자였기에 유성이 존대하며 답했다.

"예, 천유성이라 합니다."

이국적인 외모와 근방에선 들어볼 수 없는 이색적인 이름.

하지만 바리안 남작은 그런 것엔 관심이 없다는 듯 유성을 한참 동안 노려보기만 하였고, 유성은 그런 바리안 남작의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하였다.

그렇게 1분 남짓이나 지났을까.

유성이 슬슬 먼저 말을 꺼내 볼까 하던 차에 바리안 남작이 돌연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 합격!"

"예?"

유성의 되물음에 바리안 남작은 방금까지의 무표정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헥토르 같은 웃음을 흘리며 유성에게 말했다.

"흐흐,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 배짱이 있어서 마음에 들어. 내가 작정하고 노려보면 보통 다들 움츠러들기 마련이거든. 아무튼 그래서 자네, 우리 르네랑 날은 언제 잡을 생각이지?

"그, 예?"

처음에는 칭찬을 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가서 이상한 이야기가 되었다.

유성이 당황해서 되묻자 바리안 남작 역시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헛, 설마 벌써 식을 치른 건가? 설마 첫날밤도? 혹시 아이를 가진 건 아니-"

"아, 아저씨! 지금 뭐라는 거예요!"

얼굴이 새빨개진 르네가 바리안의 팔을 확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바리안 남작은 꿈쩍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팔에 매달린 르네를 자신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르네 너 시집가는 거 아니었니? 편지에 흑기사님이 멋있다느니, 잘생겼다느니, 다정하다느니 그런 이야기만 잔뜩- 읍읍!"

"계, 계승자님. 일단 저희끼리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괜찮죠? 네?!"

"그, 그래."

유성이 얼결에 답하자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바리안 남작의 입을 막은 르네는 다시 바리안 남작의 팔을 당기며 소리쳤다.

"빠, 빨리 가요! 아저씨!"

"허허, 부끄러워하기는."

"아저씨!"

거의 비명 같은 외침이었지만 바리안 남작은 그저 귀엽다는 듯 허허 웃더니 유성을 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 나중에 다시 봅세나!"

"아, 예. 살펴 가시죠."

"하하하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변한 르네가 바리안 남작을 질질 끌며 퇴장하자 침묵한 채 눈으로만 웃고 있던 호위기사 역시 퇴장하였고, 로빈 역시 잠시 눈치를 보다 말했다.

"그, 저도 일단 따라가겠습니다."

"어, 그래."

이번에도 얼결에 답하자 꾸벅 고개를 숙인 로빈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리하여 방에 남게 된 것은 유성과 질리언과 루안 세 사람뿐.

잠시 서로를 돌아본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매우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질리언이 먼저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흠흠, 그럼 계승자님. 저희도 일단 물러가겠습니다."

"예, 편히 쉬시죠."

"물러가겠습니다."

질리언과 루안이 방을 나서자 혼자가 된 유성은 일단 자리에 앉은 뒤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르네가 썼다는 편지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십여 분가량이 지났을까.

얼굴은 물론이고 목까지 빨개진 르네가 돌아와 꾸벅하고 허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계승자님. 그, 저희 아저씨가 좀 주책이라...."

"아니, 뭐... 유성 성이나 좀 볼래?"

유성의 제안에 르네는 순간 혹한 듯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아뇨, 오늘은 일단 돌아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계승자님."

"그래, 르네도 잘 자고."

"네, 계승자님."

르네가 다시 물러나자 유성은 이번에도 똑같이 홀로 앉아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웃음을 흘렸다.

'바리안 남작이라....'

생각했던 거랑 조금 다른 인물이었지만 나빠진 건 딱히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좋다면 모를까.

'르네의 편지 내용이 궁금하긴 하네.'

대체 유성 자신에 대해 무어라 쓴 것일까.

뺨을 긁적인 유성은 망상을 끊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영주 회의에 참가하는 영주들 전원이 루셴에 도착했다.

제16장 - 영주 회의 Ⅱ (2)

어제와 달리 오늘의 대화는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이루어졌다.

유성과 바리안 남작이 나란히 섰고, 르네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무척이나 조마조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옆에 붙어 바리안 남작이 또 허튼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독대해야만 한다."

발투아 백작가와 유성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필요한 대화.

눈치가 빠른 르네였다.

바리안 남작이 유성과 어떤 대화를 나누려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로 중요한 대화였고, 독대를 하는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그치만 불안한 건 불안한 거니까.'

르네는 초조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그런 르네의 시선을 느낀 바리안 남작은 껄껄껄 소리 내어 웃더니 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소개하지. 발투아 백작 각하로부터 밀명을 받고 온 바리안 남작일세."

"천유성입니다."

발투아 백작의 밀명.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유성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바리안 남작이 다음에 꺼낸 말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로티안의 흑기사. 르네가 받은 신탁이 사실이라면 자네는 호수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 할 수 있겠지."

르네가 유성을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호수의 여신의 신탁을 받아 이루어진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르네가 자주 억울해하듯이 처음엔 르네의 이야기를 믿지 않은 발투아 백작가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헛소리나 망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로티안의 흑기사.

태양의 불꽃을 다루는 자.

코볼트의 왕자와 거대한 트롤을 쓰러트리고, 시체의 군단을 이끄는 사악한 마법사도 처단한 카멜롯의 후예.

바리안 남작이 유성을 보았다.

황금이 어리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곧고 강인한 유성의 눈을 보며 물었다.

"진실은 어떠한가? 자네는 진정 호수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자인가?"

바리안 남작이 아닌 발투아 백작가의 의지를 대행하는 자로서 묻는 것이었다.

유성은 숨을 고르거나 시선을 피하는 대신 바리안 남작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흉성의 시대를 막고 다시 한번 인간의 시대를 열기 위해 이 땅에 선 자입니다."

흉성의 시대를 막는다.

처음에는 너무나 막연하게 느껴진 이야기였다.

사실 지금도 명확한 길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유성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괴물이 사람을 죽인다.

코볼트가, 고블린이, 트롤이, 언데드가 되어 다시 일어난 시체들이.

그들로부터 사람을 지킨다.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을 지켜낸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싸움을 통해 내린 유성의 결론이었다.

아니, 유성 자신이 해내고 싶은 일이었다.

유성의 대답에 바리안 남작은 바로 다시 물었다.

"자네가 성왕의 계승자라는 증거는 있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유성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은은한 황금의 기운이 유성의 전신에서 일어나 넘실거렸고, 바리안 남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유성의 오라에 위압감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인간인 이상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느낌.

하지만 바리안 남작은 가슴의 두근거림을 감추었다.

동요를 드러내지 않은 채 유성을 보며 말을 이었다.

"호수의 여신의 신성력인가. 하지만 그저 드물 뿐 성왕의 계승자를 자처할 수 있을 정도의 증거는 아니지. 기사도 또한 분명 대단하겠지만... 그 또한 그저 놀라운 기사도일 뿐 확증이 될 수는 없지. 그래서 공표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입니다."

성왕의 빛을 계승하는 자.

이는 곧 유성이 인간의 왕위 또한 계승하는 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루안이나 질리언과도 나누었던 대화이지만 현재의 기득권들- 왕좌를 지키고 있는 세 왕국의 왕들과 저 제국의 황제로서는 유성의 존재 자체가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성왕의 계승자임을 천명하더라도 당장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예기치 못한 적을 늘릴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유성은 지금까지도 침묵하며 묵묵히 힘을 길러나갈 따름이었다.

유성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바리안 남작은 유성이 말한 다른 이유들이 무엇인지를 쉬이 짐작했다.

"영주 회의에서도 함부로 꺼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겠군. 하지만...."

말끝을 흐린 그는 잠깐이나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더니 이내 유성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예를 갖추었다.

"주군께는 잘 전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발투아는 돌아오신 인간의 왕과 함께 할 것입니다."

흉성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눈앞의 유성이 가장 큰 증거였다.

그러니 발투아는 성왕의 계승자와 함께 한다.

실리와 명분은 물론이거니와 가깝고 먼 미래의 일들을 모두 고려했을 때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성이 그리 말하며 바리안 남작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는 경건하기까지 했던 표정을 풀고 씩 웃었고, 유성 또한 같이 웃었다.

저만치서 르네가 쭈뼛쭈뼛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 끝내신 거죠?"

"아마도. 그렇죠?"

"그렇습니다, 흐흐."

바리안 남작이 다시 평소처럼 웃자 급 불안해진 르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상한 이야기 한 건 아니죠?"

"흐흐, 글쎄.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놀릴 생각만 가득하지 제대로 답할 가능성이 0에 수렴할 것 같은 바리안 남작의 표정을 확인한 르네는 바로 유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계승자님?"

"어, 그냥 르네가 많이 예쁘고 착하고 귀엽다는 이야기를 했어. 그렇지 않습니까?"

"예, 그랬지요. 르네가 착하고 귀엽고 예쁘고 깜찍하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바리안 남작이 좋다고 능청스럽게 답하자 르네는 민망함에 몸을 떨다 결국 어설픈 인사를 남기고 빠르게 퇴장했다.

그리고 그런 르네의 뒷모습을 보며 유성이 말했다.

"진짜 귀엽네요."

"진짜 귀엽지요."

흐흐 웃은 바리안 남작은 다시 얼굴의 웃음기를 지운 뒤 말했다.

"그럼 영주 회의 때 뵙겠습니다. 영주 회의 때는 바리안 남작으로서 로티안의 영주를 대해야 하니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추후 발투아와의 일은 영주 회의가 끝난 뒤에 다시 논의했으면 합니다."

"예, 그러도록 하죠."

유성이 수락하자 바리안 남작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한 뒤 유성의 방을 나섰다.

바리안 남작.

르네를 아끼는 좋은 사람이란 점을 떼어놓고 봐도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발투아 백작이 어째서 그를 심복으로 두고 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투아 백작도 새삼 궁금하네.'

르네의 아버지.

그는 어떤 사람일까.

르네와 바리안 남작을 보면 기본적인 인품은 사람 좋은 아저씨일 것 같은데.

하지만 그간 모은 정보에 따르면 발투아 백작은 단순히 사람 좋은 호인이 아니었다.

그는 서부 변경 지대 제일의 힘과 권력을 가진 백작이었고, 자신이 가진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사례들이 그가 필요할 때라면 얼마든지 비정해질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해주었다.

'발투아는 함께 한다.'

이제 겨우 손을 잡은 정도에 불과했지만 든든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심호흡으로 머릿속을 비운 유성은 발코니에 앉아 아래쪽- 정확히는 내성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마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늑대와 벼가 들어간 문장을 보니 아르투아 백작령의 마차인 모양이었다.

마차에선 넉넉한 풍채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 남성이 내렸다.

체형상 저 남자가 2단계 기사도를 완성한 샤를 경일 것 같지는 않으니 질리언이 말했던 탐욕스러운 빌리엄 남작인 것 같았다.

왕의 안목으로 관찰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지만 확실히 평범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마차는 계속 도착했다.

유성은 발코니에 앉아 시간을 보냈고, 르네와 질리언은 그런 유성 옆에 앉아 유성 성을 보며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 누군가 도착할 때마다 설명을 해주었다.

영주 회의에 참여하는 인물은 모두 열네 명이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마지막 참석자가 루셴의 내성에 도착했다.

"저 남자가 카리안 백작입니다."

늑대와 강철 망치의 문장.

검은 수염을 멋지게 기른 잘생긴 남자였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는데, 기사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단련을 했는지 체구가 썩 훌륭한 편이었다.

호위 기사로 보이는 여기사와 함께 내린 그는 굽신거리며 환대하는 루셴의 시장 헥센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멀리하였다.

유성이 자리한 발코니.

기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 서로의 이목구비를 명확히 확인하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지만 카리안 백작이 고개를 든 순간 유성은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서로가 서로를 인지하였다.

유성은 숨거나 움츠리는 대신 카리안 백작을 가만히 마주하였고, 카리안 백작은 그런 유성의 모습에 빙긋 웃더니 헥센 시장과 함께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 * *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카리안 백작이 유성의 적인 것은 아니었다.

볼보 남작령 건으로 약간의 마찰이 있긴 했지만 사실상 서로 접촉한 적조차 없었기에 '다소 불편한 관계' 정도가 유성과 카리안 백작의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애당초 이번 회의의 목적은 이제부터라도 서로 돕자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지금의 불편한 관계 역시도 해소될지 몰랐고 말이다.

"똑똑한 사내이긴 합니다."

저녁 식사 자리.

유성과 르네, 질리언과 루안, 로빈이 모여 앉은 자리에 바리안 남작 역시 함께하고 있었다.

"아저씨, 내일 오신다면서요."

"흐흐,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러면 사이도 더 돈독해지고 그러지 않겠니?"

르네는 눈을 가늘게 떴고 바리안 남작은 다시 웃은 뒤 유성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백작의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같은 항렬의 피붙이 중에는 살아남은 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참혹한 계승전 끝에 백작위에 오른 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계산이 빠르고 머리도 잘 돌아갑니다. 이득을 따라 움직이지만 소탐대실하는 성격은 아니지요. 제게 친구나 사위로 삼을 생각이 있느냐 물어보면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같이 일을 할 상대로는 어떠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할 겁니다. 적어도 계약상의 신의는 있는 사내니까요. 무엇보다 유능하고요."

담백하면서도 이해가 잘 되는 인물평이었다.

"그러니 내일 회의에서 명확한 문장으로 조약을 맺는 게 중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막연히 서로 돕니 어쩌니 하면 도와주는 시늉만 할 테지만 제대로 약조를 나눈다면 그대로 수행할 인물이니까요. 일단 저는 그럴 생각으로 왔습니다."

"남작님만 따라가면 될 것 같군요."

"흐흐, 힘 좀 써보겠습니다."

바리안 남작이 씩 웃으며 가슴을 두드리자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부 제일의 힘을 가진 발투아 백작가인 만큼 방금 말처럼 바리안 남작이 알아서 잘 조약을 맺어주리라.

카리안 백작에 대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르네가 바리안 남작에게 물었다.

"백작령도 공격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상황이 어때요?"

"뭐, 아직은 버틸 만하다. 쳐들어온 적들의 규모도 딱히 엄청나진 않았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발투아 백작령은 지금까지 괴물들의 공격을 두 번 당한 모양이었다.

"처음은 코볼트들이었고, 두 번째는 고블린들이었지."

숫자는 양쪽 모두 일천에 육박했지만 코볼트의 왕자나 늪지 트롤 같은 특수 병종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말 그대로 무난하게 격퇴했다는 것이 바리안 남작의 설명이었다.

"그보다는 르네, 네 이야기를 들려주렴. 오면서 수집한 소문들 중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영웅소설이 몇 권은 뚝딱 나올 것 같던데."

바리안 남작의 물음에 르네는 눈을 반짝 빛내더니 허락을 구하듯 유성을 돌아보았다.

해도 되죠?

말하지 않는데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기에 유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시작은 제가 신탁의 장소를 찾기 위해 로토 숲에 갔을 때였는데...."

신이 난 르네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질리언과 루안 역시도 관심을 가졌다.

처음엔 하도 들어서 시큰둥하던 로빈 역시도 유성 성 이야기가 나오니 흥미를 보였고 말이다.

"그래서 계승자님이 이렇게! 검을 휘두르시니까 불꽃이 확! 하고!"

"계승자님이 사람들을 구하시면서 '로티안으로 가라! 나는 로티안의 흑기사! 호수의 여신의 챔피언이다!'라고 외치시니까 사람들이 다들 감탄해서 '우와아아~' 하고!"

"계승자님이 방패를 던지시면서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시는데~"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언제?'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은 이야기였지만 큰 틀로 보면 전부 맞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랬기에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중요한 대목마다 '진짜 그러셨어요?' '오오오.' '멋지다.' '하루 종일 하실 수 있구나.' 같은 추임새를 내거나 눈빛을 보내와도 유성은 그저 민망해할 뿐 딱히 긍정이나 부정은 하지 않았다.

'어쩌며 르네 눈에는, 아니, 르네 머릿속에는 저렇게 기억이 된 걸지도.'

기억이란 본래 주관을 거쳐 왜곡되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거예요. 후."

길고 긴 이야기를 마친 르네는 목이 탄다는 듯 과즙 탄 물을 꿀꺽꿀꺽 마셨고, 현란한 이야기 솜씨에 매료되어 있던 관객들- 그러니까 로빈과 질리언은 작게 박수까지 치며 감탄했다.

"음, 정말 놀라운 이야기군요."

어째 소문보다 더한 것 아니냐는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의심하는 눈치는 아닌 바리안 남작이었다.

"페가수스 라이더들로 이루어진 기병대라니,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보여주실 거라 믿습니다."

"원하시면 내일이라도 보여드리죠."

"흐흐, 그럼 영주 회의 기간 중에 한번 보여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영주들 기를 팍 꺾을 수도 있겠군요."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바리안 남작이 껄껄 웃자 로빈 역시도 기대 섞인 시선을 유성에게 보냈다.

천마 기병대가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말로 내일 뵙지요."

"예, 살펴가시죠."

"내일 봐요, 아저씨."

바리안 남작이 물러가자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 역시 파하게 되었다.

유성 성을 구경하느라 남아있던 르네까지 돌아가자 유성은 일찌감치 씻고 자리에 누웠다.

내일부터 영주 회의였으니 오늘은 일찍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 잠이 들려던 찰나에 유성은 벌떡 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진?"

작은 진동.

그리 크진 않았지만 느끼지 못할 정도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단발로 그쳤기에 잠시 침대 위에 앉아있던 유성은 결국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음 날 오후.

영주 회의가 시작되었다.

제16장 - 영주 회의 Ⅱ (3)

평소의 영주회의라면 회의에 앞서 성대한 연회가 열리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 터라 간소한 만찬회 정도로 축소가 되었다.

"그래도 공식 석상이니까 제대로 준비해야 해요."

유성의 방.

짙은 보라색 머리칼에 잘 어울리는 파란 드레스를 입은 르네가 유성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며 말했다.

로티안의 영주로 취임한 시기가 시기다 보니 예복보다는 갑옷 걸칠 일이 많았던 터라 돌이켜 보면 이렇게 예복을 차려입는 일 자체가 처음인 유성이었다.

금실로 자수를 놓은 화려한 검은 정장이 유성의 눈에는 다소 과해 보였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르네가 고른 복장인 만큼 그냥 얌전히 입기로 했다.

백작가 영애가 고른 옷인데 설마 이상하기야 하겠는가.

"음, 좋아.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까 옷도 태가 확 사네요."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유성의 전신을 한눈에 담은 르네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지 뺨이 살짝 상기된 상태였다.

덕분에 괜히 쑥스러워진 유성은 오히려 르네를 보며 말했다.

"르네도 무척 잘 어울려. 만찬회장에서 제일 눈에 띌 것 같은데?"

어깨가 드러난 오프 숄더 드레스.

평소와 달리 머리칼을 뒤로 묶어 정돈한 상태였기에 가늘고 긴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난 데다, 드레스의 색이 기본적으로 어둡다보니 르네의 맑고 하얀 피부가 더욱 도드라졌다.

"헤헷."

르네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살짝 꼬더니 슬쩍 손을 내밀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필수인 에스코트.

지난 이틀 동안 르네와 질리언에게 관련 예법에 대해 확실히 교육받은 유성이었던 터라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르네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럼 가실까요?"

"네, 계승자님."

유성의 키는 180 후반대였고 르네의 키는 160 전후였으니 둘 사이에는 20cm가 훌쩍 넘는 키 차이가 났지만 그게 오히려 또 좋게 보였다.

방을 나서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질리언과 루안, 로빈이 작게 감탄하며 유성과 르네의 예복을 칭찬했다.

"성녀님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하얀색 법복을 입은 질리언은 르네처럼 노출이 있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더 우아한 느낌이 들었다.

루안 역시 유성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딱 성직자라는 게 느껴지는 법복을 입어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네 사람과 달리 평소와 거의 똑같은 복장을 한 로빈.

"아니, 저는 호위기사라."

가슴께에 브로치를 다는 등 약간 멋을 부리기는 했지만 애당초 백작가의 기사답게 평소 복장도 어디 가서 꿀리는 게 아니었던 만큼 사실상 변화가 없는 그녀였다.

유성과 르네뿐만 아니라 루안과 질리언 역시 외모가 뛰어나다 보니 네 사람이 뭉쳐 걷자 자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아니 무슨 사람들 얼굴에서 빛이. 멀리서도 바로 알아봤습니다."

바리안 남작이 껄껄 웃으며 일행에게 다가왔다.

첫날 보았던 호위기사 외에는 따로 일행이 없었는데, 둘 모두 화려함보다는 진중함이 느껴지는 짙은 색 계열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바리안 남작의 풍채가 워낙 좋다 보니 저렇게 예복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것 같았다.

본래 만찬회나 연회 자리에서는 무기 소지가 금지인 것이 기본이었지만 워낙 여러 지역의 영주들이 모인 자리였던 터라 최소한의 무구와 한 명의 호위기사는 동행이 허가된 상태였다.

덕분에 일행은 유성과 르네를 로빈이, 질리언을 루안이 호위한다는 형식으로 전원이 함께 입장할 수 있었다.

"대부분 이미 도착해 있군요."

바리안 남작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만찬회장 곳곳에는 이번에 회의에 참석하는 영주들 대부분이 저들끼리 혹은 홀로 서서 담소를 나누거나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주최자인 카리안 백작이 들어오면 그때 다 같이 회의장으로 이동할 거예요."

카리안 백작이 시간관념이 없어서 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방문한 손님들 간의 교류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유성은 르네와 함께 걸으며 티 나지 않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오베르 남작이에요."

상단을 경영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자.

르네의 속삼임을 들으며 창가 쪽을 보니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붉은 머리 여자가 사내들 여럿을 앞에 두고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표정과 이쪽 세상에서는 처음 보는 색안경을 쓰고 있는 모습이 파티를 즐기는 셀럽을 연상케 했다.

"저 사람은 앙주 남작이고요."

오베르 남작과 달리 홀로 서 있는 딱딱한 인상의 사내.

키가 그리 크진 않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는 유성과 눈이 마주치자 눈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지 않고 그냥 쳐다만 보았다.

딱히 적대감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호감도 느껴지지 않는 묘한 시선이었다.

"질리언 대사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양쪽 다 남작인 터라 어느 누가 먼저 눈을 돌리거나 예를 표하기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손님 하나가 질리언에게 다가와 말을 건 덕분에 자연스럽게 상황이 해소되었다.

영주 회의긴 했지만 아직 회의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기에 만찬회장에는 헥센 시장을 비롯한 루셴의 주요인사들과 귀족가의 자제들 등등 다른 손님들도 많이 참석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질리언이 부드럽게 응대하며 유성과 르네, 바리안 남작 등을 소개하자 손님이 살짝 호들갑으로 보일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오, 요즘 명성이 자자하신 로티안의 흑기사님이시군요!"

목소리도 살짝 높으니 만찬회장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단번에 일행에게 쏠렸다.

"로티안에서의 활약은 모두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위급한 시국에 흑기사님처럼 뛰어난 기사 분이 등장하셔서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모릅니다."

"과찬이십니다."

유성이 적당히 응대하자 다른 손님들도 일행에게 모여들었다.

당장 유성만이 아니더라도 질리언과 바리안 남작이 있는 만큼 손님들 입장에서는 안면을 트기 위해서라도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역시 유성이었다.

그간 로티안에만 박혀 있어서 잘 몰랐을 뿐, 이미 실라테인 왕국 서부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유성이었다.

특히 볼보 남작령에서의 활약은 기사소설에 나오는 영웅들의 행적을 방불케 했으니, 귀족들뿐만 아니라 그 호위기사들도 무척이나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모두가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속된 말이지만 빠가 까를 만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 근본도 없는 자이거늘. 애당초 정식 남작도 아니잖은가."

영주 회의에 참석하는 영주들 가운데 하나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다만 문제는 일부러 들으라고 한 것인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는지 주변에 다 들렸다는 것이었다.

일단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고, 자연 유성과 일행들 역시 그를 돌아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영주- 카리안 백작령 인근의 독립 영주인 라발 남작은 민망해하거나 수그러드는 대신 자기가 뭐 틀린 말 했냐는 듯 다시 한번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여기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영화나 소설에서 본 것처럼 장갑이라도 던져야 할까?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유성이 뭘 하기도 전에 르네가 도끼눈을 떴기 때문이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유성의 눈에는 이제 뭘 해도 귀여운 르네였지만, 기본적인 인상 자체는 강아지 같은 성격과 달리 고양잇과 동물을 연상시키는 도도한 마녀에 가까웠다.

그런 르네가 노여움을 감추지 않고 노려보는데 목소리와 눈빛에 마력까지 섞으니 그 박력이 실로 대단했다.

더욱이 르네는 그냥 마녀가 아니었다.

서부 제일의 무력과 재력을 가진 발투아 백작가의 영애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똑같이 도끼눈을 뜬 자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바리안 남작이었다.

"자네, 혹시 머리가 나쁜 건가?"

발투아 백작 영애가 찰싹 달라붙어 있고, 그 옆에는 발투아 백작의 심복이 서 있는데 시비를 건다?

바리안 남작의 발언은 꽤나 모욕적이었지만 라발 남작은 역정을 내기는커녕 마른침을 삼키며 움찔했다.

"그, 아니, 저, 제가 실언을 좀...."

중언부언하던 라발 남작은 결국 빨개진 얼굴로 무어라 알 수 없는 사죄를 남긴 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고, 바라보던 손님들 사이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의 웃음들이 흘렀다.

"흥, 어디서 근본을 찾아. 근본을. 따지고 보면 우리 계승자님보다 근본 넘치는 분이 어디 있다고."

르네가 아직도 분이 덜 풀렸다는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르네에게 있어 유성은 호수의 여신이 직접 점지한 아서 왕의 계승자였다.

인간의 시대를 연 성왕의 계승자인 동시에 호수의 여신의 점지를 받은 인간보다 근본 넘치는 자가 이 땅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정통성만 따지면 실라테인 왕국의 국왕은 물론이고 제국의 황제조차도 한 수 접어줘야 하는 사람이 바로 유성이었다.

"아저씨, 저 사람 이름이랑 얼굴 기억하셨죠?"

"그야 물론이지."

르네의 물음에 바리안 남작이 사납게 웃으며 답했고, 유성은 기쁘고 든든하면서도 새삼 르네가 대단한 권력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참아, 참아. 진짜 머리가 좀 나쁜 사람이었나 보지."

유성이 달래는 어조로 말하자 르네는 입술을 한 번 삐쭉인 뒤 말했다.

"계승자님은 너무 자비로우세요. 저런 인간은 다시는 까불지 못하도록 한 번 밟을 때 제대로 밟아놔야 하는데. 아예 이쪽은 쳐다도 못 보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평소에 알고 있던 르네가 맞는 것일까.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고, 유성 자신을 위해 화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그저 귀엽게 보일 따름이었다.

'나도 좀 중증이구나.'

유성이 그리 생각할 즈음이었다.

"카리안 백작 각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연회장 안의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같은 곳을 돌아보았다.

이번 영주 회의의 유일한 백작인 동시에 루셴을 비롯한 주변 일대의 지배자.

키가 크고 늘씬한 여기사와 함께 입장한 그는 연회장의 모두를 한 차례 돌아본 뒤 가볍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기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말했다.

"만찬회에 참석해주셔서 모두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영주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니 각지에서 모인 영주님들께서는 회의장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회장 옆에 마련된 회의장.

저곳에서 본격적인 식사를 하며 회의를 진행할 예정인 모양이었다.

주최자인 카리안 백작이 가장 먼저 회의장으로 향하자 영주들이 하나씩 회의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성 역시 주변에 모여들었던 손님들에게 예를 표한 뒤 일행과 함께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이라지만 기본적으로 연회장의 연장이기 때문인지 발코니가 연결된 개방된 장소였는데, 그래도 기밀성을 지키기 위함인지 발코니와 식탁 사이의 거리가 상당해 이야기를 엿듣거나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수십 명이 들어가도 자리가 넉넉해 보이는 큰 회의장 가운데는 식탁이 놓여 있었는데, 자리마다 명패가 있어 앉을 자리를 알려주고 있었다.

상석에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카리안 백작이 자리하였고, 그 외 자리는 지역별로 배정한 느낌이었다.

덕분에 바리안 남작과 질리언은 유성과 다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다.

영주들이 모두 착석하고 호위기사들이 시립하자 카리안 백작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시종들이 음식이 든 수레를 밀며 줄줄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음식이 모두 놓이고, 영주들 모두의 잔이 채워지자 카리안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렇게 참여해줘서 모두 감사하오. 한자리에 모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함께 한 잔씩 들도록 합시다."

의례적인 건배사였기에 유성을 비롯한 모두는 저마다의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촤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술잔을 든 카리안 백작의 손목이 잘려 나갔다.

비명은 터지지 않았다.

카리안 백작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옷의 사내를 보며 놀라는 자도 거의 없었다.

공격받은 것은 카리안 백작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커헉?"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이 바리안 남작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르투아 백작령에서 온 빌리엄 남작의 잘린 머리가 식탁 위에 떨어졌고, 늙은 독사 몽포르 남작의 찢어진 배에서 내장이 쏟아져 내렸다.

카카캉!

그림자에서 솟구친 사내의 검을 유성이 아그라베인의 망토로 막아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보랏빛 피부의 남자였다.

하얀 머리칼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귀가 그의 종족을 알려주었다.

'다크 엘프!?'

"꺄아아악!"

오베르 남작이 뒤늦은 비명을 터트렸다.

앙주 남작 덕에 목숨을 구한 그녀는 사방에서 튄 피를 보고 반쯤 착란 상태에 빠졌다.

유성은 재차 검을 휘둘러 다크 엘프 암살자를 밀어냄과 동시에 주변을 인지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질리언과 다크 엘프 암살자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루안, 잘린 손목을 붙잡은 채 신음하는 카리안 백작과 암살자를 향해 달려드는 여기사- 그리고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바리안 남작.

"아저씨!"

"중갑 보병대! 집결하라!"

르네의 비명과 유성의 목소리가 겹쳤다.

금빛 섬광이 폭발해 모두의 시선을 빼앗았고, 강철의 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오오오오!"

헥토르가 바로 도끼를 휘둘러 유성이 밀쳐냈던 다크 엘프 암살자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밀어붙여! 원형 대형을 짠다!"

중갑 보병대는 즉각 반응했다.

눈앞의 다크 엘프 암살자들을 방패로 밀어낸 중갑 보병대는 식탁을 중심으로 원형진을 짜 영주들을 보호했다.

하지만 다크 엘프들도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폭발음과 함께 더 많은 다크 엘프들이 창밖에서부터 회의장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저씨! 아저씨!"

르네가 울면서 바리안 남작에게 매달렸다.

급히 달려온 질리언이 바리안 남작의 상태를 살폈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 언니? 왜, 왜요? 왜 회복마법을...."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르네가 물은 그때였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연회장 건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요동쳤다.

지진.

지진의 원인.

지진과 함께 오는 것.

유성은 숨을 멈췄다.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다크 엘프들 너머, 해가 지기 시작한 루셴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제16장 - 영주 회의 Ⅱ (4)

회복 마법은 이름 그대로 상처 입고 망가진 육신을 회복하는 마법이었다.

부활 마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질리언은 회복마법을 펼치려던 손을 멈췄다.

성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미숙한 그녀였다.

죽은 자의 소생 같은 고위 기적은 지금의 질리언에게는 무리였다.

"언니?"

르네가 다시 질리언을 불렀다.

영민한 그녀였다.

질리언이 회복마법을 쓰는 대신 손을 멈춘 순간 원하지 않는 진실을 간파했다.

르네가 바리안 남작을 보았다.

입가와 가슴에 토해낸 피가 가득했다.

가슴에는 손가락이 몇 개는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창백한 얼굴.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

르네는 비명을 삼켰다.

이를 악물었지만 눈물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온기를 잃기 시작한 바리안 남작의 손을 꼭 잡은 채 소리 죽여 흐느꼈다.

유성은 그런 르네를 인지했다.

하지만 등을 토닥이거나 품에 안아 온기를 나눠줄 수 없었다.

"수비 대형! 방패 벽을 세워라!"

헥토르의 외침에 따라 중갑 보병대가 방패를 세우고 간격을 좁혔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발코니를 통해 다크 엘프들이 난입을 계속했다.

중갑 보병대의 위용에 눌린 듯 바로 공격해 오진 않았지만 양측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의 소강상태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이제 곧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

중갑 보병대 40인은 상당한 전력이었다.

평범한 징집병이라면 백 명이 넘게 있어도 중갑 보병대를 당해내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상대는 징집병이 아닌 다크 엘프들이었다.

'암살자는 모두 일곱.'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기습하는 것은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다크 엘프 암살자들의 상징적인 기술이었다.

물론 고등한 기술답게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크 엘프 암살자들 가운데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소수뿐.

영주들 가운데 대다수가 목숨을 건진 것도 그래서였다.

애당초 공격받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것이었다.

발코니를 통해 지금도 수를 늘리고 있는 것은 다크 엘프 전사들이었다.

저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밖의 상황은 지금 어떠할 것인가.

보이지 않았지만 추론할 수 있었다.

굉음과 지진.

다크 엘프만이 아니다.

놈들과 함께 하는 세력이 하나 더 있다.

"꺄아아악!"

"으아아!"

"살려-"

회의장 밖에서도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노을이 지던 창밖이 검은 연기와 불꽃으로 얼룩졌다.

유성은 거리를 재었다.

지난 이틀 동안 내성에 머물며 머릿속에 그렸던 건물의 조감도를 떠올림과 동시에 소리쳤다.

"헥토르! 길을 열어라!"

"우오오오오!"

유성이 명령한 순간 헥토르가 달려 나가며 기사도를 발동시켰다.

갑작스러운 거인의 돌격에 다크 엘프들이 당황했고, 수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중갑 보병대가 따라서 돌진했다.

"정예 보병대! 집결하라!"

파앗!

케이트와 지미를 필두로 한 정예 보병대가 중갑 보병대의 빈자리를 채우듯 등장했다.

새로이 나타난 병력에 영주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유성은 바로 명령했다.

"절반은 중갑 보병대를 돕고 절반은 영주들을 지킨다!"

"카멜롯의 영광을!"

명령을 인지한 직후 케이트가 기사도를 발동했다.

눈부신 황금빛 섬광이 회의장 안을 가득 채웠고, 갑작스러운 빛에 노출된 다크 엘프들이 시력을 잃었다.

"찢어 발겨!"

케이트가 발하는 빛을 등지고 있던 덕분에 시야가 멀쩡한 중갑 보병대가 시력을 잃고 비틀거리는 다크 엘프들을 도끼 창을 찍어대니 연속된 병력의 등장에 당황하던 다크 엘프들이 등장했던 기세가 무색하게 죽어나갔다.

유성은 한 차례 숨을 골랐다.

무척 넓은 회의장이었지만 유성이 불러낸 병력만 아흔 명에 육박하니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 앉게 된 영주들 주변에는 카멜롯의 군세가 가득한 형국이 되었다.

"르네."

유성의 부름에 르네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한 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유성은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는 대신 자리에 앉아 바리안 남작의 눈을 감겨주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함께 한 시간은 이틀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성 자신도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멈춰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유성은 르네를 보았다.

뺨을 따라 쉼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르네의 손을 한 번 잡아주었다.

조금이나마 온기를 나눠준 뒤 다시 한번 눈을 보며 말했다.

"가야만 해."

르네가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비틀거렸지만 바로 곁에 있던 질리언이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유성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크 엘프 암살자는 그림자 사이를 이동할 수 있지만 무적은 아니었다.

횟수에 제한이 있었고, 지금처럼 사람이 많아 그림자가 뒤섞여 있으면 오히려 이동에 불편함이 생겼다.

유성은 살아남은 영주들과 호위기사들을 한차례 돌아본 뒤 주변에 있던 카멜롯의 군세에게 말했다.

"탈출한다. 목적지는 옥상. 길은 내가 인도하겠다."

"미, 미쳤소!? 옥상이라니! 위로 가서 뭘 하겠단 거요!"

"맞아요! 고립될 거예요!"

유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발 남작과 오베르 남작이 소리쳤다.

그들의 말에도 논리는 있었다.

하지만 유성은 그들과 말을 나누는 대신 영주들과 호위기사들을 한눈에 담은 뒤 왕의 안목을 발동시켰다.

인간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성왕으로서의 능력.

즉, 왕의 안목을 사용하면 인간이 아닌 자를 가려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파앗!

유성이 바로 근처에 있던 자의 목을 날려버렸다.

근처에 있던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지만 잠깐뿐이었다.

땅에 떨어진 머리가 다크 엘프의 것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변장 마법.

이 또한 다크 엘프들이 즐겨 쓰는 마법이었다.

유성은 카리안 백작을 보았다.

잘린 팔을 필사적으로 지혈하고 있는 그는 인간이었다.

"간다! 중갑 보병대가 길을 뚫는다. 나와 헥토르가 선두에 나선다. 케이트, 르네와 성녀님을 부탁한다. 로빈과 루안은 케이트를 돕는다. 지미, 진격 나팔을 불어라."

연이은 명령에 카멜롯의 군세와 일행들이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부-웅-!

지미가 힘차게 분 나팔 소리가 잠깐이나마 주변의 소음을 억눌렀고,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영주들을 제정신으로 되돌렸다.

"간다."

마지막으로 르네를 돌아본 유성이 앞으로 치고나갔다.

기사도를 풀고 정상 크기로 돌아간 헥토르가 유성보다 한발 앞서 달려 회의장 문을 박살 냈다.

"전원! 기동한다!"

중갑 보병대와 정예 보병대가 달려 나가자 잠시 멍해 있던 영주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같이 갑시다!"

"같이 가요!"

라발 남작과 오베르 남작은 필사적으로 따라붙었다.

앙주 남작은 스스로 영주들의 최후미에 섰고, 로빈에게 질리언을 맡긴 루안이 그런 앙주 남작과 함께 후방을 지켰다.

"살려주세요!"

"꺄아악!"

회의장 밖은 아비규환이었다.

성의 사용인들과 만찬회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인사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은 다크 엘프들만이 아니었다.

이족 보행을 하는 거대 쥐인 랫맨들.

지진을 일으키고 작금의 사태를 초래한 것은 놈들임이 분명했다.

육로를 통해 침공해온 지금까지의 괴물들과 달리 놈들은 땅굴을 이용했을 터였다.

"끼에엑!"

투구를 쓴 랫맨 하나가 괴성을 지르자 수십- 아니,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은 랫맨들이 사방천지에서 모여들었다.

하나하나는 아이 정도의 체구에 불과했지만 그 수가 저리 많은데다 완력만이라면 성인 남성 이상인 놈들이었다.

"붙잡히지 마라! 돌파하는 거다!"

유성이 크게 외치며 검기를 날렸다.

열화의 불꽃이 랫맨들을 휩쓸었고, 헥토르가 다시 기사도를 펼치며 돌진해 랫맨들을 부수고 짓밟았다.

"파이어 월!"

"옴팔로스의 방벽이여!"

르네와 질리언이 연달아 외쳤다.

복도를 하나 지날 때마다 불꽃의 벽과 신성의 벽이 통로나 창문을 막아 랫맨들의 빠른 충원을 저지했다.

"미, 미친! 저, 저게 대체 뭐야!"

몰려드는 랫맨들을 박살 내며 위로 향하던 와중에 라발 남작이 창밖을 보며 비명처럼 외쳤고, 다른 영주들 역시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내성의 입구 부근.

땅을 뚫고 솟구친 거대한 랜드 웜이 몸부림을 치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랜드 웜.

지진의 원인인 동시에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을 이 도시까지 옮긴 이동수단.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랫맨들이 사육하는 괴수들 가운데 하나로, 지금처럼 적진에 난입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루, 루셴이...."

루셴은 문자 그대로 불타고 있었다.

랜드 웜이 뚫어놓은 땅굴에서 튀어나온 랫맨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도시를 불태웠다.

비명과 불꽃, 울부짖음만으로 뒤덮인 아비규환의 현장.

다리에 힘이 풀린 헥센 시장이 제자리에 주저앉았지만 멈춰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카리안 백작이 남은 한 손으로나마 헥센 시장의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한 뒤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려라! 지금은 가야 한다!"

헥센 시장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안 백작은 한 차례 신음한 뒤 선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예 보병대와 중갑 보병대에 막혀 보이지 않았지만 선두에서 달리고 있을 자를 떠올렸다.

콰앙!

헥토르가 옥상- 정확히는 옥외정원으로 이어진 문을 박살 냈다.

크게 검을 휘둘러 진은의 검에 묻은 피를 떨쳐낸 유성은 거친 숨을 토하며 옥외정원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옥외정원에는 아직 적들이 자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적들은 땅굴을 통해 나타났다.'

다크엘프는 소수. 대부분은 랫맨들.

유성은 숨을 고르며 정원 아래를 보았다.

루셴의 병사들은 조직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채 산발적인 저항을 하다 죽어나갈 뿐이었다.

불길은 사방에서 일고 있었다.

옥외정원보다 높은 성벽 위를 랫맨들이 달리고 있었다.

바로 밑에 층에서도 또 다른 랫맨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랫맨들의 가장 강한 무기는 비정상적인 번식력을 기반으로 한 무지막지한 숫자.

유성을 따라 주변을 돌아본 영주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라발 남작이 다시 비명처럼 외쳤다.

"내, 내가 말했잖아! 옥상은 안 된다고! 이제 다 죽게 될 거야!"

공포에 질려 있지만 그의 말에는 이번에도 논리가 있었다.

공중정원에는 더 이상의 퇴로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로티안의 흑기사가 불러낸 병사들이 강하기는 했지만 이곳에 갇히면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당장 성벽 위에서 화살이라도 퍼부어 대면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카리안 백작은 라발 남작처럼 패닉에 빠지거나 유성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는 거친 숨을 토하며 유성을 바라보았고, 오베르 남작 역시 이번에는 벌벌 떨긴 해도 입술을 깨문 채 유성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라발 남작도 떠올린 것을 로티안의 흑기사가 떠올리지 못했을 리 없다.

그가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은 탈출할 계획 역시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조잡한 화살을 든 랫맨들과 소수이긴 해도 하나하나가 명사수인 다크 엘프 궁수들이 성벽 위에 자리를 잡은 그때.

"중갑 보병대, 정예 보병대. 귀환하라."

유성의 명령과 동시에 빛이 일었고, 영주들의 곁을 지켜주던 카멜롯의 군세 모두가 황금의 빛으로 화해 사라졌다.

그리고 직후.

갑작스러운 빛에 랫맨들과 다크엘프들이 다시 한번 당황한 바로 그 순간.

"천마 기병대, 집결하라."

지상이 아닌 하늘로부터.

황금빛 섬광들이 작렬했다.

제16장 - 영주 회의 Ⅱ (5)

오베르 남작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무척이나 속물적인 인간이었다.

아버지를 암살하고 그 재산을 갈취하려 한 삼촌과 싸우고 또 싸운 끝에 결국 삼촌 일가를 몰살시키고 아버지의 재산과 상단을 지켜낼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잃게 된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던 꿈 많고 순수했던 소녀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그저 사람을 믿지 못하는, 오직 이해득실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닳고 닳은 상인뿐이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억지로 뒤집어쓴 가면 속에는 아직 어리고 순수하던 시절의 오베르 남작이 남아 있었다.

"세상에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베르 남작은 저도 모르게 해맑은 감탄을 토했다.

머리 위 하늘.

산산이 부서지는 황금빛 사이에서 커다란 날개로 활공해 오는 순백의 페가수스들.

동화 속- 아니, 신화의 한 장면 같은 그 광경에 오베르 남작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것은 오베르 남작만이 아니었다.

앙주 남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페가수스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놀라움은 오베르 남작의 것과 방향성이 달랐지만, 놀람의 정도는 훨씬 더 거대했다.

'이, 이게 진정 개인이 펼치는 기사도란 말인가?'

로티안의 흑기사는 빛의 군세를 소환한다.

소문은 익히 들었다.

회의장에서 갑자기 근 일백에 육박하는 군대를 소환했을 때도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페가수스 라이더들로 구성된 천마 기병대라니.

이것이 진정 2단계 기사도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3단계가 아니라?

더욱이 이게 끝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로티안의 흑기사의 기사도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그리고 다양한 병종이 숨겨져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카리안 백작 역시 거친 숨을 토하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로티안의 흑기사.

괴물들의 출현과 동시에 홀연히 나타나 로티안을 구한, 그리고 그 뒤에도 몇 번이나 상식을 초월한 대활약을 펼쳐 로티안을 지켜낸 남자.

난세는 영웅을 부르는 법이니, 혼란한 시국에 두각을 드러낸 방랑 기사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겨우 그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미, 믿고 있었다고!"

라발 남작이 환호하며 외쳤다.

대체 뭘 믿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것이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페가수스들이 공중정원에 안착했다.

유성은 르네와 질리언을 각각 다이애나와 그 부관의 뒤에 태운 뒤 근처에 있던 페가수스 라이더와 동승하며 외쳤다.

"빨리들 타시오!"

영주들을 챙겨야 한다.

사지에 버려두고 갈 수 없다는 인도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다크 엘프들이 어째서 영주들의 몰살을 꾀했겠는가.

영주들은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서 각각의 영지가 가진 힘을 끌어내야만 했다.

"내, 내가 페가수스에 타고 있어."

오베르 남작이 작게 중얼거리는 동안 영주들과 호위기사들이 모두 탑승하자 유성이 다이애나를 돌아보았다.

"출발합니다."

낮게 말한 다이애나가 박차를 가하자 에니카를 필두로 페가수스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바투스! 바투스!"

바로 그 순간 성벽 위에 자리한 랫맨들이 시끄럽게 외치며 화살을 쏘아댔다.

"회피 기동! 방패를 들어!"

다이애나가 비행하며 명령하자 페가수스 라이더들이 화살을 피해 반대쪽으로 비행함과 동시에 방패를 들어 미처 피하지 못한 화살들을 막아냈다.

랫맨들의 활과 화살은 확실히 조잡했다.

하지만 놈들 사이에는 다크 엘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갈레온!"

가레스의 황금 사자 방패의 장벽을 발생시킨 유성이 방패를 던졌다.

카리안 백작을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콰강!

방벽과 충돌한 화살이 폭발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유성은 팔을 뻗어 가레스의 황금 방패를 회수함과 동시에 질리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질리언은 유성과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옴팔로스의 방벽이여!"

허공에 방벽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질리언의 기도는 랫맨 들과 다크 엘프들이 자리한 성벽 위로 새로운 방벽을 솟구치게 만들었다.

"우오오!"

방벽에 막혀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이 화살을 쏘지 못하자 라발 남작이 감탄했다.

하지만 안심하긴 아직 일렀다.

적들은 성벽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아아아아아!"

네크로맨서와 싸웠을 때 본 거대 박쥐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유성은 놈들을 향해 다시 방패를 던진 직후 이번엔 진은의 검 위로 열화의 불꽃을 일으켰다.

츠화악!

황금빛 불꽃의 검기가 초승달 모양으로 뻗어나가 박쥐 여러 마리를 동시에 갈라놓았다.

"우와아!"

라발 남작이 다시 환호할 때 르네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마법을 펼쳤다.

일으키는 것은 바람.

르네의 손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돌개바람이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되어 박쥐들을 향해 휘몰아쳤다.

원소 마법.

르네는 불꽃과 얼음의 마법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풍수지화 사대원소를 사용하는 원소 마법 모두가 르네의 특기 분야였다.

박쥐들의 날개를 찢고 돌아온 가레스의 황금 방패를 장착한 유성은 거친 숨을 토하며 주변 일대를 다시 한번 인지했다.

지상에서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유성 자신과 르네가 박쥐 열댓 마리를 물리쳤지만 스무 마리가 넘는 박쥐들이 새로이 날아오고 있었다.

놈들이 오는 방향.

지상에서 이쪽을 공격하기 위해 잡고 있는 위치.

"남쪽으로! 수도원으로 간다!"

유성의 명령에 다이애나가 즉각 반응했다.

그녀가 방향을 잡고 나아가기 시작하자 천마 기병대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비행했다.

슈슈슉!

발밑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유성은 등 뒤로 쇄도하는 박쥐들을 향해 다시 한번 검기를 날리며 생각했다.

페가수스들은 그리 오랫동안 날 수 없다.

수도원까지도 한 번에 날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중에 착지해야 했고, 그때부터는 육로로 이동해야만 했다.

유성은 지상을 보았다.

루셴이 불타고 있었다.

랜드 웜이 뚫어놓은 커다란 구멍에서는 지금도 랫맨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기아아아아!"

랜드 웜이 다시 땅속에 파고들자 지면이 요동치며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참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쥐떼처럼 달려 나간 랫맨들에게 루셴의 주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유성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지상에 난입해 주민들을 구하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랫맨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한번 돌려보낸 부대는 바로 다시 불러올 수 없으니 동원할 수 있는 병력도 바나데인의 엘프 궁병대가 전부였다.

더욱이 지금 유성은 혼자가 아니었다.

인근 일대의 영주들을 모두 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셴의 주민들을 그저 외면만 할 수는 없었다.

유성은 성문 쪽을 보았다.

루셴의 주민들이 우르르 도망치고 있었다.

유성은 그런 주민들을 뒤쫓고 있던 랫맨들에게 검기를 날렸다.

"남쪽으로! 로티안으로!"

유성의 외침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등 뒤에서 터진 폭발에 놀란 것인지 고개를 들었던 주민들은 이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계승자님!"

앞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성은 고개를 돌렸다.

눈물로 범벅이 되었지만 형형하게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르네의 눈동자가 보였다.

가야 한다.

바리안 남작 때와 같았다.

지금은 가야만 할 때였다.

"가자."

유성의 명령에 페가수스 라이더가 다시 박차를 가했다.

박쥐들이 달려들었지만 유성의 검기와 르네의 마법이 놈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불타는 루셴을 뒤로한 채 천마 기병대가 수도원을 향해 날았다.

* * *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은 루셴을 함락시키기 위해 손을 잡았다.

루셴에 발을 들인 것은 다크 엘프가 먼저였다.

도시에 잠입해 정보를 모은 그들은 곧 영주 회의가 있을 것이란 사실과 참여하는 영주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크 엘프들을 이끌고 장벽을 넘은 자.

나르키스 데오른.

강력한 전사이자 마법사인 그는 수하의 보고에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의 영주들을 한 번에 몰살시키는 계획이 실패했다.

중요 암살 대상 6인 가운데 셋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셋이 살았고, 나머지 영주들도 대부분 목숨을 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랫맨들을 이용한 도시 장악 자체는 성공했다는 것이었지만 겨우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문명의 불을 독점한 인간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성벽 위에 선 나르키스는 새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이 내린 하늘은 검고 어두웠지만 달과 별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장벽 밖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인간들은 무려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문명의 불을 독식해왔다.

문명의 불이 제공한 아늑함은 놈들을 나태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막강한 힘 역시 쌓게 만들어주었다.

영주들을 몰살해 혼란을 야기하고 땅굴을 통해 확보한 후방 침투로를 지키면서 장벽 너머의 군대를 불러들여 남부를 확보한다.

첫 단추부터 어긋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실패한 계획은 아니었다.

나르키스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영주들을 놓친 것에 대해 항의라도 하듯 신경질적으로 코끝을 찡그리고 있는 랫맨의 마법사 리갈을 지나 도열해 있는 다크 엘프들을 보았다.

"지금 당장 추격조를 보낸다. 페가수스는 히포그리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장시간 비행은 불가능하니 서둘러 추격하면 놈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즉답한 다크 엘프들이 서둘러 성벽을 떠났다.

그러자 랫맨 마법사 리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직접 가진 않는 거요?"

"저들만으로 충분하다. 후속 부대 충원에 문제는 없나?"

나르키스의 물음에 리갈은 코끝을 찡그렸다.

"땅굴이 뚫렸으니 충원 자체는 문제없소. 당장 내일만 되어도 줄줄이 넘어들 올 거요."

현재 루셴에 침투한 랫맨의 숫자는 이천이 조금 못 되었다.

주민들의 숫자보다도 훨씬 적으니 제대로 된 도시의 장악과 수비를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럼 그만 가보겠소."

강력한 다크 엘프 마법사를 추궁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라도 했는지 리갈은 코끝만 몇 번 더 찡그리다가 성벽을 떠났다.

혼자가 된 나르키스는 고개를 돌려 불타는 루셴을 바라보았다.

다크 엘프들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문명의 불을 떠올렸다.

* * *

유성과 나르키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루셴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가수스들은 모두 지상으로 안착했다.

"뭐, 뭐야? 왜 멈추는 건데?"

라발 남작이 당황해서 물었지만 딱히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의 영주들이 같은 질문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페가수스들은 오래 날지 못한다."

대답한 것은 카리안 백작이었다.

오른손이 잘린 여파인지 온몸이 땀으로 푹 젖은 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였지만 눈빛은 전보다 더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그, 그럼 이제 어떡해야?"

라발 남작이 다시 영주들을 대표하듯 묻자 카리안 백작은 대답 대신 그저 침묵했고, 영주들은 유성을 바라보았다.

"날 순 없지만 달리는 건 가능합니다. 이대로 남쪽으로 이동,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에서 일단 숨을 고를 생각입니다."

다크 엘프들은 집요한 종족이었다.

추격은 반드시 있을 터였다.

'적어도 한 번.'

적의 추격을 맞받아칠 필요가 있었다.

유성은 그 장소로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을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유성은 이대로 탈출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미개척 지대에서 적들이 밀고 올 가능성이 높아.'

아무 생각 없이 루셴을 점령한 것이 아닐 터였다.

후방을 점한 뒤 정면에서도 군대를 보내 서부 지대의 남부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 놈들의 계획일 터였다.

그리고 놈들의 계획이 성사된다면 지금까지 공세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가 실라테인 왕국 서부를 덮칠 터였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놈들의 계획을 저지할 것인가.

유성은 한 가지 방안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방안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으로 영주들을 피신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 흑기사 공."

라발 남작이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바라보니 마른침을 꿀꺽 삼킨 라발 남작이 아까보단 조금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 감사하오. 덕분에 살았소. 무례하게 굴었던 건 사과하리다."

자기도 말하면서 민망한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와 별개로 유성은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그야말로 생각도 못 한 말이 생각도 못 한 인물에게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라발 남작이 끝이 아니었다.

오베르 남작 역시 유성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저도 감사해요.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영주 둘이 감사를 표하니 다른 영주들도 대부분 우물쭈물하긴 했지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하오."

카리안 백작도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영주들의 감사는 그저 말뿐인 감사가 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유성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였다.

라발 남작이야 민망해서 그런 것이 더 컸겠지만 다른 영주들이 우물쭈물하며 감사를 표한 것은 그래서였다.

유성은 그런 영주들을 바라보다 마주 예를 표해 영주들의 감사를 받아주었다.

"일단 이동하겠습니다."

비행으로 지친 페가수스들이 숨을 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성과 르네, 질리언이 각자의 군마를 불러내 탑승하자 앙주 남작을 비롯한 영주들이 다시 놀란 얼굴이 되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밤이 깊은 시각.

수도원에 도착한 유성 일행의 등 뒤로 다크 엘프 추격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16장 - 영주 회의 Ⅱ (6)

다크 엘프 암살자 멜리오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주한 영주들을 쫓아 루셴을 나선지 약 반 시간여.

히포그리프들이 그러하듯 페가수스들 역시 장시간 비행이 불가하다지만 한 번 내려왔다고 다시는 날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 시간에서 한 시간 사이.

어느 정도 날개를 쉰 뒤에는 다시 날 수 있을 터이니 이쯤해서 뒤를 잡지 못하면 결국 놓치고 말 가능성이 높았다.

"보인다."

장벽 밖.

문명의 불을 잃어 온통 잿빛인 그 곳에서도 깊고 어두운 숲과 지하에서 살아가는 것이 다크 엘프들이었다.

어둠은 다크 엘프들의 시야를 가릴 수 없었으니, 멜리오스의 두 눈에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페가수스들의 뒷모습이 선명히 새겨졌다.

"곧 따라잡는다. 전투를 준비해라."

페가수스는 날 수 있지만 그 큰 날개 때문에 지상에서는 일반적인 말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바이콘 위에 탄 멜리오스가 낮게 말하니 주변에 있던 다크엘프들이 살짝 뒤처져 달리고 있는 랫맨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페가수스의 수는 서른 남짓.

하지만 적중에는 백 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갑자기 소환한 전적이 있는 로티안의 흑기사가 있었다.

그랬기에 멜리오스는 상당한 숫자의 추격대를 꾸려야만 했다.

바이콘을 탄 다크 엘프 서른과 거대한 늑대쥐를 탄 랫맨 삼백.

다크 엘프들의 수신호를 받은 랫맨들은 거친 숨을 쉬며 늑대쥐들을 독려했다.

"다 왔다! 다 왔다!"

"이제 놈들을 덮친다!"

땀으로 범벅이 된 늑대쥐들이 괴성을 지르며 속도를 높였다.

멜리오스를 필두로 한 다크 엘프들은 한 손으로 사용 가능한 손 쇠뇌를 들어 페가수스들을 조준하였다.

200보.

150보.

100보.

파파파파파파파팟!

다크 엘프들과 랫맨들의 머리 위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페가수스들을 조준하던 멜리오스와 다크 엘프들은 깜짝 놀라 다급히 머리를 보호했지만 랫맨들은 그렇지 못했다.

"키악!"

"칵!"

"크아악!"

머리나 어깨를 꿰뚫린 랫맨들이 늑대쥐에서 굴러떨어졌고, 그렇게 나자빠진 랫맨들을 밟거나 피하다가 늑대쥐들의 대열마저 엉망이 되었다.

더욱이 문제는 화살의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방패 들어! 방패를 들어라!"

랫맨 지휘관이 필사적으로 외친 그때 멜리오스는 화살이 날아온 측면을 돌아보았다.

저만치 먼 언덕 위.

달빛에 반사되어 하얀 피부가 더욱 도드라진 엘프 수십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거리는 400보 이상.

일반적인 활의 사거리를 훌쩍 넘기는 거리였지만 엘프들의 화살은 거짓말처럼 추격대의 머리 위를 덮쳐왔다.

파바바바밧!

"키악!"

"크아!"

다크 엘프들은 화살을 피하거나 막아냈지만 랫맨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멜리오스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화살 비를 맞아가며 페가수스들을 쫓을 것인가, 엘프 궁병대를 공격할 것인가.

"저쪽이다! 저쪽이야! 달려라! 그리 많지 않다!"

바로 그 순간 랫맨 지휘관이 언덕을 가리키며 외쳤다.

랫맨들의 지휘관인 리갈이 나르키스의 힘에 눌려 사실상 명령을 따르는 처지였지만 그렇다 하여 랫맨들이 다크 엘프들의 수하인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동맹 관계였으니, 이 자리에서도 지휘권을 쥔 것은 멜리오스만이 아니었다.

"가라! 가라! 가라!"

랫맨들이 언덕을 향해 돌진하자 멜리오스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랫맨들을 도울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만이라도 페가수스들을 향해 달릴 것인가.

파바밧! 파바밧!

"언덕으로! 엘프들을 친다!"

페가수스 라이더들은 서른 남짓이었지만 놈들 사이에는 로티안의 흑기사가 있었다.

언제 또 백 명에 가까운 병력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으니 랫맨들 없이 다크 엘프들만으로 뒤를 잡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엘프들을 치고 다시 페가수스들을 친다.

측면으로 돌아가야 하는 셈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견뎌라! 거리를 좁히는 거다!"

직경이 30cm 남짓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방패임에도 불구하고 다크 엘프들은 날아오는 화살들을 거의 다 쳐냈다.

간혹 바이콘들에게 맞는 것들도 있었지만 겨우 화살 두어 발에 꺾일 바이콘들이 아니었다.

"키악!" "컥!" "악!"

물론 그 와중에도 랫맨들은 죽어나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더!"

닿는다.

언덕에 닿는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화살의 비가 순간 멎는가 싶더니 언덕 위에 있던 엘프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고!"

화살 비에 잔뜩 화가 난 랫맨 지휘관이 엘프들을 비웃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엘프들의 이동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거, 거리가 벌어진다!?"

정말이었다.

엘프들과의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기동 속도가 두 발로 달린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멜리오스는 거친 숨을 쉬었다.

등 뒤에 자리한 랫맨들과 늑대쥐들은 더욱 그러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고, 추격대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화살의 비로 돌아왔다.

파바바바바바밧!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엘프들이 즉각 반전해 화살을 쏘아댔기 때문이다.

"으악!"

"켁!"

다시 랫맨들이 죽어나갔다.

멜리오스는 이를 악물었다.

애당초 발이 빠르고 민첩한 엘프들이었고, 그건 다크 엘프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눈앞의 놈들은 도를 넘어섰다.

두 발로 뛰는 주제에 궁기병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 대장님! 페가수스들이!"

옆에서 들려온 외침에 고개를 돌린 멜리오스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엘프들을 쫓는 사이 거리가 벌어진 페가수스들이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후퇴한다! 후퇴한다!"

랫맨 지휘관이 등 뒤에서 소리쳤다.

멜리오스는 무슨 소리냐고 외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페가수스들이 이미 날아오르기 시작한 데다 지금까지 죽은 랫맨들의 숫자가 어느 새 수십을 넘었기 때문이다.

추격은 실패했다.

"후퇴한다."

멜리오스가 억누른 목소리로 말하자 다크 엘프들 역시 반전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엘프들이 후퇴하는 다크 엘프들과 랫맨들을 쫓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밧! 파바바바밧!

"바람이여!"

멜리오스가 바람의 마법을 부려 화살 비를 흩어버렸지만 고작해야 다크 엘프들을 지킬 따름이었다.

랫맨들이 죽어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반전하라!"

멜리오스가 빠르게 외치며 바이콘의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엘프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활을 멈추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거리를 벌리는 도주였다.

"개같은 놈들!"

멜리오스의 입에서 결국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엘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새 멈춰서 다시 화살을 날려댔고, 멜리오스는 결국 다시 도주에 가까운 후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성공이군."

엘프 궁병대의 지휘관.

바나데인이 다소 거칠어진 숨을 토하며 말하자 두 발로 달리는 엘프들 사이에서 홀로 말을 타고 달렸던 유성이 흐뭇한 얼굴로 엘프 궁병대를 돌아보았다.

가레스의 황금 방패를 얻었을 때 바나데인은 말했다.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고.

자신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 것 같다고.

하지만 막상 이후의 전투에서도 딱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의 두 전투 모두가 수성전의 형태로 이루어진 바람에 고정 포대 역할만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달랐다.

바나데인의 새로운 스킬인 고속 기동.

그리고 바나데인과 합을 맞춰 달릴 수 있는 엘프 궁병대.

바나데인의 고속기동의 효과는 바나데인 개인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부대 전체의 기동 속도를 높여주니 안 그래도 빠른 엘프들이 더 빨라질 수 있었다.

여기에 유성이 이동속도를 높여주는 질풍의 오더까지 더해주니 멜리오스가 극찬한 것처럼 궁기병대의 기동력을 상회하는 초기동 궁병대가 탄생했다.

'욕 할 만하네.'

판타지 모나크 시절 궁병대에 헤이스트 마법 걸고 비슷한 짓을 해본 적이 있는 유성이었다.

그것만 해도 상대가 게거품을 물며 극찬을 해댔는데 바나데인의 엘프 궁병대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수준이었다.

공격의 사거리와 정확도가 인간 궁병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 수고했다. 최고의 활약이었다."

유성이 치하하자 엘프 궁병대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 예를 받아준 유성은 바나데인과 엘프 궁병대를 일단 돌려보냈다.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포인트를 30점 획득했습니다.]

오늘만 두 번째 보는 상태창 문구였다.

루셴을 탈출했을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한 번.

짤막한 상태창 문구를 확인한 유성은 말을 몰아 잠시 낮게 날았다가 다시 착지한 페가수스들을 향해 달렸다.

"오오오! 또 다시 승리했소! 믿고 있었다고!"

유성이 돌아오자 잠깐 날아올랐다가 다시 지상에 착지한 페가수스들 사이에서 라발 남작이 크게 환호했다.

다른 영주들 역시 라발 남작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다들 기뻐하고 있었다.

삼백에 가까운 추격대가 뒤를 바짝 쫓아오자 다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적잖이 긴장했기 때문이다.

"축하드립니다."

오베르 남작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나니 상인의 뇌가 돌아가기 시작한 그녀는 눈앞의 유성이 마치 반짝이는 보석 상자처럼 보였다.

흉성의 시대는 실제로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난세가 펼쳐질 터이니 눈앞의 남자는 겨우 남작 정도에 머물지 않고 훨씬 더 높은 곳까지 치고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한 발 걸치자.

아직 세상이 흑기사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친분을 제대로 쌓아놓자.

다른 영주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풍문으로만 들었던 로티안의 흑기사의 가치를 실제로 체감하자 생각들이 많아졌다.

'그, 내가 무례하게 굴진 않았지?'

'라발 남작이 설칠 때 살짝 거들었는데 눈치 못 챘겠지?'

물론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놀란 이도 있었지만 말이다.

'엘프 궁병대라니, 저, 정말로 3단계 기사도란 말인가?'

병사들만으로 놀랐는데 페가수스 기병대에 이어 엘프 궁병대라니.

사실 유성 입장에서는 이제 밑천 다 턴 느낌이었지만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앙리 남작이었다.

대체 어떤 병종이 더 숨어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더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카리안 백작은 다소 복잡한 시선으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영주 회의에 참석한 영주들 가운데서 유일한 백작인 그였다.

아무래도 입장이나 생각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영주들에게 적당히 응답한 유성은 르네에게 다가갔다.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한 것인지 눈물범벅이었던 얼굴을 깨끗이 닦아낸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힘이 없긴 했지만 밝은 미소로 유성을 맞이하였다.

"고생하셨어요."

"르네도."

무어라 말을 더 길게 할까 했지만 미소로 마무리한 유성은 다른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도주극에 지쳤는지 질리언의 하얀 얼굴이 평소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긴 했지만 딱히 다치거나 불편한 곳은 없어 보였다.

루안 역시도 멀쩡했고 말이다.

"그럼 이제 수도원으로 가는 거요?"

라발 남작이 묻자 다른 영주들 모두가 마침 궁금했던 걸 잘 물어봐줬다는 눈으로 라발 남작을 보았다.

유성은 그런 영주들의 물음에 즉답하는 대신 다시 르네를 돌아보았다.

유성이 고민하는 이유.

르네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간 몇 번이나 함께 생사의 위기를 넘긴 두 사람이었다.

르네는 어떤 결정을 하든 함께 하겠다는 듯 유성을 바라보았고, 유성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영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영주 여러분들은 여기 있는 로빈과 함께 수도원으로 가십시오. 저는 루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미, 미쳤소!?"

유성의 말에 라발 남작이 깜짝 놀라 외쳤다.

다른 영주들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카리안 백작은 달랐다.

그는 어째서 유성이 루셴으로 돌아가겠다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루셴은 미개척지와 직접 닿아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로티안과 아르투아 백작령 입장에서는 후방인 도시였다.

그런 루셴에 적들의 침공로가 생겼다.

그대로 방치하면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발생할 터였다.

"그, 설마 루셴을 탈환하려는 건가요? 혼자서?"

카리안 백작이 한 것과 비슷한 생각을 떠올린 오베르 남작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묻자 유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셴을 점령한 랫맷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유성 혼자서 루셴을 탈환하겠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소리였다.

"랫맨들은 땅굴을 이용해 루셴에 침투했습니다. 저는 그 땅굴을 파괴하고 올 생각입니다."

랜드웜이라 해서 순식간에 엄청난 길이와 규모의 땅굴을 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 만든 땅굴을 파괴하면 당장은 놈들을 고립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유성의 말에 영주들은 비로소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땅굴을 대체 어떻게 파괴한단 말인가?

의구심에 가득 찬 모두의 시선에 유성은 르네와 질리언을 한 번씩 돌아본 뒤 말했다.

"생각이 있습니다."

제17장 - 잠입

유성은 영주들에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주들이 그걸 빌미로 유성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이 자리에 있는 영주들은 카리안 백작령에 속한 남작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일단은 대등한 관계였다.

더욱이 누구 하나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현재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유성이었다.

아니, 비단 주도권만이 아니었다.

유성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영주들을 몰살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가능하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유성이 갑자기 미쳐서 자기들을 죽일 거라 생각하는 영주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결국 현재 이 자리에서 결정권을 가진 것은 유성이었다.

유성이 정하면 영주들은 반대 의견을 낼 수 있을지언정 그 뜻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우리 설마 걸어가야... 하는 거요?"

라발 남작의 말에 영주들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심각해졌다.

영주들이 방금까지 타고 있던 페가수스들은 전부 유성의 기사도를 기반으로 했다.

즉, 유성이 같이 안 가면 페가수스들을 타고 이동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수, 수도원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 거죠?"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린 오베르 남작의 물음에 영주 하나가 손가락을 몇 번 꼽더니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결국 영주들은 가장 팔팔하고 전투력도 강한 앙주 남작을 필두로 세운 뒤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앙주 남작 말고도 각자 호위 기사를 한 명씩은 끼고 있으니 수도원에 가는 것 자체는 딱히 문제가 없을 터였다.

멀어지는 영주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성은 남은 일행, 정확히는 질리언을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유성의 말에 질리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우리끼리 루셴에 돌아가서 땅굴도 부수고 사람들도 구하고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질리언이었기에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살짝 눈물이 섞인 것 같은 목소리에 유성은 쓰게 웃은 뒤 질리언과 대조적으로 뜨거운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루안을 지나 르네를 바라보았다.

유성 성에서 얻은 마력 포션을 마시고 있던 그녀는 유성과 눈이 마주치자 소매로 입술을 닦은 뒤 형형한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계승자님, 대체 어떤 방법인 거죠?"

루셴에 뚫린 땅굴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원들의 힘만으로 파괴하는 방법.

르네의 물음에 유성은 설명을 시작했다.

* * *

멜리오스가 실패했다.

그것도 그냥 실패가 아니었다.

함께 출정했던 랫맨 삼백 여 마리 가운데 백 마리 가까이가 죽거나 다친 상태였다.

추격을 위해 부득이 랫맨들 중에서는 고급 병종이라 할 수 있을 늑대쥐 기병대를 내주었던 랫맨 마법사 리갈은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며 노성을 터트리다가 나르키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르키스 역시 노여움보다는 의아함이 앞섰기에 멜리오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놈들에게 병력이 더 있었던 건가?"

병사 백 명 정도를 불러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서 랫맨을 삼백 마리나 함께 보낸 것이었다.

그런데 랫맨만 백 마리 가까이 상해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다크엘프들 중에는 큰 부상을 입은 자가 없다?

근접 병력끼리 제대로 맞붙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렇… 습니다. 엘프들이 있었습니다."

"엘프들이?!"

인간들에게 빌붙어 문명의 불을 나눠 받고자 했던 버러지 같은 족속들.

장벽 밖에서는 이미 사실상 멸종해버린 놈들이었다.

나르키스가 놀라서 묻자 멜리오스가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엘프 궁병대가 있었습니다. 숫자는 어림 세어도 마흔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원거리에서 사격을 한 뒤 빠르게 도망치는 것을 반복하니 거리를 좁힐 수 없었습니다."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가 머릿속에 그려진 멜리오스는 이를 악물어 노여움을 삼켰다.

"알겠다. 일단 돌아가서 근신하고 있도록."

오늘만 두 번이나 실패한 멜리오스였지만 문명의 불을 잃은 이후 그렇지 않아도 적었던 동족의 수가 더욱 줄어든 다크 엘프들이었다.

나르키스가 말로만 적당히 멜리오스를 혼낸 뒤 물러가게 하자 랫맨 마법사 리갈은 못마땅하다는 듯 잇소리를 내었다.

"이제 어찌할 거요. 영주들의 처리는 다크 엘프들이 맡는다 하지 않았소."

"더 이상의 추격은 불가하다. 최고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시와 침투로를 확보했으니 절반의 목표는 이뤘다 할 수 있다."

나르키스의 말에 리갈은 헛웃음을 삼켰다.

말이 좋아 절반의 성공이지 결국 다크 엘프들은 맡은 바 임무를 실패했고 랫맨들만 해낸 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다크 엘프들의 사전 정찰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던 작전이긴 했지만 저 정도면 뻔뻔함이 너무 과했다.

'그러게 내 직접 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 같아서는 직접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기에 리갈은 잇소리를 내는 것에 만족하였다.

사실 평소였다면 리갈의 이런 잇소리만으로도 눈을 부라렸을 나르키스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건방진 쥐새끼의 이죽거림을 참아줄 수밖에 없었다.

"추가 병력은?"

"넘어오고 있소. 내일이면 도착할 거요."

루셴에 병력이 집중되는 것만으로도 다크 엘프- 랫맨 연합군의 남부 공략이 수월해질 터였다.

"인간들은?"

"적당히 죽이고 나머지는 모아뒀소. 나약한 족속들이더군. 일부는 먹이로 쓰고 나머지는 노예로 부릴까 생각 중이오."

루셴의 주민 숫자는 랫맨들의 몇 배에 달했지만 거의 다 비전투 인원이었으니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비전투 인원의 개념이 희박한 장벽 밖에서 온 리갈의 눈에는 인간이란 종 자체가 너무나 나약해 보였다.

"맡기겠다."

"그럼 물러가겠소."

리갈이 휙 돌아서 방을 나서자 나르키스는 눈을 감고 긴 숨을 토했다.

'로티안의 흑기사.'

리갈은 인간들을 폄하했지만 나르키스는 여전히 인간들을 경계했다.

인간들 가운데는 저 증오스러운 인간의 왕 아서와 그 기사들처럼 상식을 초월한 강자들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기사들이 가진 기사도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침투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리갈에게 말한 것처럼 절반의 성공은 이룬 셈이었다.

이제 내일이 되어 랫맨들이 도착하면 루셴의 방비는 더욱 튼튼해질 테니 국경을 넘어올 군대와 호응하는 것 역시 가능해질 터였다.

그리고 같은 시각, 내성 근처의 땅굴 입구.

노략질한 물건들을 놓고 낄낄거리는 랫맨들의 머리 위로 하얗고 작은 새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 * *

유성 일행은 루셴 인근의 수풀에 숨어 해자 쪽을 주시하였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을 대부분 모아둔 것 같아요. 교회나 회관 같은 곳에...."

바닥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빛의 새 조종에 집중 중인 르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성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침묵한 채 르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땅굴 근처에 랜드 웜이 있어요. 몸을 꽤 내놓고 있는데 자고 있는 것 같아요."

빛의 새로 루셴을 정찰한 르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랫맨들은 곳곳에 흩어져 있어요. 성벽 위에도 어느 정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느낌이에요."

"숫자는?"

"숨어 있을 수도 있지만... 일천에서 이천 사이가 아닐까 해요."

르네의 말에 유성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셴의 상황은 대강 예상대로였다.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계획을 정리한 유성은 르네를 보며 물었다.

"르네,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르네는 새로운 빛의 새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소환했다.

"좋아, 잘 부탁할게."

"네, 계승자님."

이미 유성과 함께 몇 번이나 생사의 위기를 극복한 르네였다.

더욱이 바리안 남작의 죽음 때문인지 이번 일에 대한 각오가 남다른 그녀였다.

르네와 눈빛을 교환한 유성은 이번엔 질리언 쪽을 돌아보았다.

"성녀님."

유성의 부름에 질리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와중에 들은 유성의 작전.

말은 되었다.

성공할 확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실패할 확률보다 성공할 확률이 더 높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미친 짓인 것 역시 사실이었다.

'아니, 누가 이런 미친 짓을 작전이라고 짜오냐고!'

마음 같아서는 마구 울부짖고 싶은 질리언이었지만 그 미친놈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랬기에 질리언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미친 짓은 맞아.

하지만 애당초 이렇게 소수 인원으로 적에게 함락된 도시에 들어가서 땅굴을 부수려면 그 정도 미친 짓은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법이니까.

그래, 거기다 나름 말도 되잖아?

미친 짓인 거 치고는 성공 확률도 높고.

'흑흑. 아니, 애당초 왜 함락된 도시에 달랑 세 명이 잠입해서 땅굴을 부수려고 하는 건데!'

그리고 이러나저러나 결국 미친 짓이라는 결론에서는 못 벗어나고 있잖아!

"성녀님?"

"아, 아니에요.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질리언이 울상인 채로 주먹을 쥐어 보이자 상상 이상으로 죄책감을 느끼게 된 유성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작전의 성공 확률- 정확히는 일행의 생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질리언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그... 네, 감사합니다."

부탁하면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다 들어주는 게 성녀답다면 성녀답다고 해야 할까.

유성은 미안한 얼굴로 다시 감사를 표한 뒤 마지막으로 루안을 돌아보았다.

"루안은 여기서 상황을 봐줘. 여차하면 도망쳐서 소식을 전하고."

유성의 말에 루안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질리언과 달리 루안은 이번 작전에서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작전을 위해 루셴에 침투하는 것은 유성 자신과 르네, 질리언 이렇게 셋뿐이었으니 말이다.

유성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루셴에 돌아오고, 정찰을 위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자정을 넘어 밤이 깊은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좋았다.

동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인 동시에 대부분의 랫맨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출발하죠."

유성이 낮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르네와 질리언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표는 루셴에 건설된 땅굴의 파괴.

성벽을 한 차례 바라본 유성은 발걸음을 떼었다.

제17장 - 잠입 (2)

"천마 기병대, 집결하라."

루셴과 마주한 언덕 위에 선 유성이 나직이 말하자 은은한 황금빛과 함께 천마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유성은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감았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잠시 눈을 붙이긴 했지만, 오늘만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된 소환이었던 터라 몸에 무리가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대로 심호흡을 해 집중력을 끌어올린 유성은 걱정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이애나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말했다.

"일단의 계획은 이래."

작전 목표를 짧게 설명하자 다이애나는 미간을 한 차례 좁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다이애나가 그리 말하며 자신의 뒷자리를 유성에게 내주자 근처에 있던 페가수스 라이더 둘이 나서서 르네와 질리언을 각기 나눠 태웠다.

"작전을 시작한다."

세 사람 모두가 탑승한 것을 확인한 다이애나가 짧게 명하니 천마 기병대 서른 기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저, 적이다!"

"페가수스다!"

새하얀 털과 날개를 가진 페가수스들이 성벽 위를 가로지르자 성벽 위에 있던 랫맨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일어나! 적이다!"

"놈들이 왔다!"

쾅! 쾅! 쾅! 쾅!

커다란 북까지 울려대니 반쯤 졸고 있던 랫맨들이 화들짝 깨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늘이다! 쏴라!"

"저쪽이다!"

성벽 위는 물론이고 아래쪽에서도 랫맨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지만 즉각적인 공격은 이뤄지지 않았다.

워낙 야심한 시각이었기에 랫맨들 대부분이 자고 있었던 터라 무장을 챙겨 모이는 것 자체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쪽으로!"

유성은 발밑에서 모여드는 랫맨들을 무시한 채 미리 봐두었던 지점을 가리켰다.

내성 인근.

땅굴의 입구 앞.

"저기다!"

유성이 가리킨 방향에는 땅굴을 파느라 지친 랜드 웜이 몸과 머리 일부를 내민 채 자고 있었다.

루셴에 만들어진 적들의 침투로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서는 땅굴뿐만 아니라 랜드 웜 역시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부대 상승! 추행진을 펼친다!"

목표를 확인한 다이애나가 앞장서 상승하자 천마 기병대가 그 뒤를 따라 쐐기 형태의 추행진을 공중에서 펼쳤다.

"저, 저거!"

"잡아라!"

내성에서 달려 나온 다크 엘프들이 고함을 지르며 활을 당기거나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아랑곳없이 랜드 웜만을 주시하더니 어느 순간 하강을 개시했다.

드래군 다이브.

충격의 다이애나.

몇 번이나 혁혁한 공을 세운 다이애나의 기사도가 추행진을 펼친 천마 기병대 전체로 퍼져나갔다.

참여하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질주하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다이애나의 기사도였다.

유성은 다이애나의 허리를 꽉 잡은 채 질풍의 오더로 속도를 높여주었고, 천마 기병대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다크 엘프들 가운데 일부가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콰가가가가가강!

엄청난 충격파가 지상을 휩쓸었다.

다이애나의 창끝에 등을 적중당한 랜드 웜은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등판이 문자 그대로 박살 났기 때문이다.

껍질이 부서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깊고 넓게 파였다.

다이애나가 모는 에니카의 등 뒤에서 뛰어내린 유성은 반쯤 부서진 랜드 웜의 머리에 진은의 검을 박아 넣은 뒤 열화의 불길을 일으켜 머릿속을 불태웠다.

"그그그그그극-"

움찔하며 꿈틀거리던 랜드 웜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이런 미친! 쳐라! 지금이다!"

"상승해!"

내성에서 허겁지겁 뛰쳐나온 랫맨 마법사 리갈의 외침과 유성의 명령이 겹쳤다.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은 지상에 착지한 천마 기병대를 향해 화살과 마법을 퍼부었고, 다이애나와 천마 기병대는 쏟아지는 포화를 피해 날아올랐다.

다이애나의 기사도가 만들어낸 충격파로 인해 흙먼지가 자욱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눈에 확 띄는 천마 기병대가 하늘로 솟구치니 자연 모두의 시선은 천마 기병대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랜드 웜의 시체 위에 자세를 바짝 낮춘 채 앉아 있는 유성과 르네, 질리언의 상태를 눈치챈 자는 없었다.

유성은 숨을 골랐다.

땅굴 파괴를 위한 작전은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르네와 질리언을 한 차례 돌아본 유성은 눈짓으로 신호한 뒤 랜드 웜의 시체를 박차고 달렸다.

"알폰스!"

칠흑의 군마가 지면에서 솟구치듯 나타나 유성을 태웠다.

"레이니!"

"제, 제롬!"

르네와 질리언 역시 달리며 외치니 각자의 군마가 나타난 두 사람을 등에 태웠다.

"가자!"

땅굴을 향해 달리며 목소리를 높인 유성은 아예 황금빛 오라까지 방출하였다.

마치 이쪽을 보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저, 저거!"

황금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천마 기병대의 모습에 당황하던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 가운데 일부가 유성을 발견했다.

"키악! 컥!"

땅굴 입구를 지키던 랫맨들을 단숨에 베어버린 유성은 그대로 땅굴 안을 향해 말을 달렸다.

르네와 질리언 역시 그런 유성을 따라 달렸다.

"잡아! 잡아야 한다!"

리갈이 길길이 날뛰며 소리치자 횃불을 든 랫맨들이 땅굴을 향해 몰려들었다.

뒤늦게 나온 나르키스 역시 상황을 인지하고는 멜리오스를 비롯한 엘프들을 이끌고 몸소 추격에 나섰다.

유성은 등 뒤에서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이 뒤따라오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랬기에 유성은 르네와 질리언을 앞으로 보내고 자신이 가장 뒤쪽에 자리했다.

진은의 검 위로 열화의 불길을 일으키니 캄캄한 동굴 속에서 마치 횃불을 든 것만 같아 더욱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저놈이다! 저놈이 로티안의 흑기사다!"

유성의 얼굴을 아는 멜리오스가 소리쳤다.

"헤이스트!"

리갈이 랫맨들에게 신속화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두 발로 달리던 랫맨들이 네 발로 뛰기 시작했는데, 그 속도가 여간한 준마들을 뛰어넘고도 남음이었다.

다크 엘프들 역시 뒤처질 수 없다는 듯 유령마 팬텀 스티드들을 소환해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다 왔어요! 여기예요!"

르네의 외침에 유성은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자신을 향해 득달같이 몰려드는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을 보며 소리쳤다.

"중갑 보병대! 집결하라!"

파앗!

눈부신 황금빛과 함께 중갑 보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어 태세!"

갑자기 나타난 그들이었지만 유성의 명령을 들은 즉시 방패를 세우고 도끼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넓다고는 하나 결국 땅굴 안이었다.

폭이 5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으니 중갑 보병대 마흔 명만으로도 땅굴을 완전히 틀어막는 것이 가능했다.

콰강! 콰강강!

달리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랫맨들이 중갑 보병대의 선두와 충돌해 박살이 났다.

중갑 보병대 역시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조금뿐이었다.

이내 다시 방패를 세우고 도끼 창을 앞으로 내미니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은 속도를 죽이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비켜라! 내가 마법을 쓰겠다!"

커다란 늑대 쥐 위에 탄 리갈이 손을 앞으로 뻗으며 주문을 외우니 시커먼 화염구가 중갑 보병대를 향했다.

"우오오!"

바로 그 순간 기사도를 발동시킨 헥토르가 거대한 방패로 리갈의 화염구를 막아냈다.

츠화악!

폭발한 화염구의 검은 불길이 땅굴 안을 가득 채웠고, 헥토르는 물러서는 대신 덩치를 최대한 키운 뒤 방패로 아예 땅굴을 막아버렸다.

"이, 이런 미친!"

욕지거리를 토한 리갈이 더욱 강한 마법을 준비하려 하자 나르키스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좁은 땅굴 안이었다.

방금보다 더 강력한 마법을 쓰면 자칫 땅굴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나르키스의 제지에 리갈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잠깐뿐이었다.

돌연 귀를 쫑긋한 놈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놈들! 반대쪽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

허세가 아닌 진짜였다.

유성 역시도 등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지원군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발걸음 소리를 들은 헥토르가 유성을 돌아보았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군마를 돌려보낸 르네가 천장을 향해 두 손을 뻗고 서 있었다.

질리언은 근처 구석에 웅크린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 되어 천장을 올려다보았고, 유성은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적진이 아닌 천장을 보며 사납게 웃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의문을 가진 그 순간이었다.

"디그!"

르네가 천장을 향해 마법을 펼쳤다.

지면이 아닌 천장을 향해 사용된 땅파기 마법이었지만 효과는 동일하게 발동했다.

천장이 수 미터나 파여 막대한 양의 흙이 쏟아져 내렸다.

헥토르는 여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대한 헥토르의 틈새 너머로 유성과 르네를 본- 정확히는 르네의 주문을 들은 나르키스는 눈을 크게 뜨고 경악했다.

유성이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지 간파했기 때문이다.

"서, 설마!"

"디그!"

르네가 다시 외쳤다.

한 번 파인 곳이 다시 파였고, 질리언은 '이건 미친 짓이야!'라고 부르짖는 얼굴이 되어 더욱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유성은 이제 천장이 아닌 정면의 나르키스와 그 수하들을 보았다.

유성이 하려는 것.

굳이 땅굴로 침투한 이유.

나르키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머릿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말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옳다고.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 짓을 저놈들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도망쳐!"

"디그!"

나르키스의 비명같은 외침과 르네의 주문이 겹쳤다.

다시 땅이 파였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쏟아지는 것이 흙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

땅굴은 남쪽에서부터 이어졌다.

즉, 수로가 아닌 해자 밑을 지났다.

그렇다면 땅굴에서 해자 밑으로 파고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천장에서 물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기둥 크기였지만 잠깐 뿐이었다.

물줄기가 순식간에 커지며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천장으로부터 쏟아져 내렸다.

"르네!"

헥토르와 중갑 보병대를 철수시킨 유성은 르네의 허리를 낚아채듯 안으며 질리언을 향해 몸을 던졌고, 질리언은 비명과 함께 기도했다.

"꺄아악!"

옴팔로스 님!

쾅! 쾅! 쾅!

신성의 방벽이 바닥과 벽에서 솟구쳐 올라 세 사람을 가두듯 보호했다.

콰가강! 콰가강! 콰가가가가가!

천장이 붕괴하며 더 많은 물이 쏟아져 내렸다.

신성의 방벽 위를 때리는 무지막지한 수량에 질리언은 엉엉 울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역시 미친 짓이었다.

땅굴을 수몰시키기 위해 땅굴 안쪽에서 해자를 향해 구멍을 뚫는다니.

세상에 이런 미친 짓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유성도 긴장한 얼굴로 신성의 방벽 너머를 보았다.

쏟아져 내린 물이 순식간에 땅굴 안을 휩쓸며 랫맨들과 다크 엘프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수로와 연결된 해자였다.

땅굴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양의 물이 쏟아져 내릴 터이니 반대쪽의 증원군들 역시 비슷한 신세가 되었으리라.

콰가가가가가가가-!

천장의 구멍은 점점 더 커졌다.

해자는 물론이고 수로의 수위가 내려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땅굴 속으로 밀려들었다.

"흑흑, 옴팔로스 님...."

눈을 뜨기 무서워 두 눈을 꼭 감은 질리언은 계속 기도했고, 유성은 르네와 서로 꼭 끌어안은 채 천장 쪽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운 어두운 물 사이로 수로에서 딸려온 것 같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와아...."

르네가 작게 감탄했고, 수족관이 떠오른 유성은 한 차례 쓰게 웃은 뒤 호흡을 가다듬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땅굴을 수몰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적어도 수백 명 이상의 적들을 수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 이제는 완벽한 성공을 위해 탈출할 때였다.

"성녀님."

유성의 부름에 흠칫하며 눈을 뜬 질리언은 겁먹은 얼굴로 유성을 보았다.

이 다음 순서가 무엇인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할 거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해야 합니다."

"해야 해요, 언니."

유성에 이어 르네가 말했고, 질리언은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더니 몸을 한 번 꿈틀거려 자세를 잡았다.

유성은 그런 질리언까지 남은 한 팔로 안은 뒤 마지막으로 르네를 돌아보았다.

"준비됐어?"

"네, 계승자님."

언제든 좋다는 듯 르네는 유성에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성녀님, 부탁합니다."

유성의 말에 질리언은 생각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이미 계속 미친 짓이었지만 여전히 미친 짓이라고.

하지만 르네의 말대로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흡!"

숨을 크게 삼킨 질리언은 눈을 꼭 감음과 동시에 옴팔로스의 장벽들을 아주 천천히 해제했다.

쿠구구-!

벽에 틈이 생기자마자 쏟아져 들어온 물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세 사람의 머리 위까지 물이 차오른 순간.

질리언이 벽을 완전히 해제하자 유성은 르네와 질리언을 단단히 안은 채 지면을 박차 수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커헉, 헉."

"하아, 하아."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는 르네와 질리언이었다.

유성은 그런 둘을 안은 채 지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수풀에 숨어 있던 루안이 르네에게 해자의 위치를 알게 해준 빛의 새를 어깨에 태운 채 뛰어나왔다.

"대성공입니다!"

유성은 그저 웃으며 질리언을 먼저 올려보낸 뒤 르네를 한 팔에 안은 채 지면 위로 기어올라 해자를 빠져나왔다.

"하윽, 흑."

질리언은 바닥에 늘어져 거친 숨만 토했고, 르네 역시도 기력이 다한 것인지 자꾸 몸이 축축 늘어졌다.

하지만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루셴에는 아직 적들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땅굴 안에서 마주했던 랫맨 마법사라면 모를까, 다크 엘프들은 수공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저기다! 쳐라!"

성벽 쪽에서 유성 일행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성문이 열리고 도개교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르네와 질리언이 각자 군마를 불러냈고, 유성은 르네와, 루안은 질리언과 함께 말 위에 올라 남쪽으로 달렸다.

"쫓아옵니다! 따라잡힐 것 같습니다!"

등 뒤를 돌아본 루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성문에서 뛰쳐나온 늑대 쥐를 탄 랫맨들의 숫자가 적어도 수백은 되는 것 같았다.

천마 기병대와 중갑 보병대는 이미 한 번 불러냈다.

지금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정예 보병대와 엘프 궁병대뿐이었다.

그들이라도 불러내 저들과 승부를 내야 할 것인가?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대장간의 레벨 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금속 제련속의 레벨 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할 수 있게 된 것.

유성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떠올랐다.

제17장 - 잠입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