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 유성 성 (2)
유성 성의 광경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사실 시설이라고 해봤자 막사와 식당, 화장실에 대장간이 전부였던 터라 다들 딱히 할 일이 없는지 그냥 막사에서 쉬거나 나무 아래에서 쉬거나 수로에서 쉬거나 아무튼 어딘가에 앉든 서든 눕든 한 뒤 쉬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와중에도 대장간에서는 뭔가 일을 하는 거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막 티가 날 정도로 활동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유성은 유성 성을 그리 오래 쳐다보는 일이 없었는데, 르네는 달랐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는지 한 번 쳐다보기 시작하면 10분, 20분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시간 단위로 쳐다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그런 유성 성.
대체로 각자 편한 곳에 앉거나 서거나 누워서 쉬는 모습이 전부인 그곳.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식당 앞 광장에 크게 피운 캠프파이어를 중심으로 모여 앉은 병사들이 조촐하게나마 연회를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하연이겠죠?"
"승전의 밤이니까."
하지만 딱히 먹거리가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커다란 술잔에 평소 먹는 것으로 보이는 소소한 안줏거리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이거 설마 보급 문제인가.'
그러고 보면 평소에 먹는 식사는 대체 어디서 공급해오는 것일까.
궁금한 가운데 무심코 식당을 선택하니 이전에 보지 못한 선택지가 추가되어 있었다.
[고기 보급: 3pt]
[맥주 보급: 3pt]
"새 선택지네요? 뭐에요? 어떤 거예요?"
르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오니 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술이랑 고기 추가?"
"와. 술이랑 고기군요. 어... 개당 3pt? 맞죠?"
"응."
애당초 머리가 좋은 마법사인 터라 아라비아 숫자 정도는 진즉에 마스터한 르네였다.
한글도 딱히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도 어느 정도 구분은 하는 것 같았고 말이다.
'가르쳐 주면 금방 배우려나?'
워낙 머리가 좋으니 금방 배울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유성의 잡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술과 고기 추가라는 말을 들은 르네가 유성 성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간절한 눈빛을 유성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보급해 주세요. 보급해 주세요. 보급해 주세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르네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보급해주자."
6포인트면 정예 경기병대 3명을 추가할 수 있는 비용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쓰지 못할 포인트도 아니었다.
'사기 진작 문제도 있으니까.'
크게 승리했는데 카멜롯의 병사들도 좀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활짝 웃은 르네가 이번에는 기대된다는 얼굴로 유성 성을 보았고, 유성은 작게 웃은 뒤 포인트를 투자했다.
그러자 식당에 고기와 술 마크가 찍힌 박스들이 추가되었고, 취사 당번이던 지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무어라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오."
"와."
식당 주위로 병사들이 모여드는가 싶더니 방방 뛰며 만세를 하기 시작했다.
3등신으로 데포르메 된 병사들이라 무척이나 귀여웠는데, 병사들 사이에 있던 케이트는 방방 뛰진 않았지만 함께 만세를 하며 좋아했다.
잠시 술과 고기를 보며 만세를 하고 있는 케이트- 그러니까 실물 사이즈의 케이트를 상상한 유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이어서 추가된 돼지 통구이와 닭고기들.
만화 고기 같은 고기와 커다란 술잔을 든 병사들이 한데 모여 건배를 했다.
"와, 얼굴 빨개졌어요."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병사들의 얼굴이 발갛게들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휘청휘청 거리는 병사도 있었고, 노래를 부르는 병사도 있었다.
그런 병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르네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앗, 춤춘다. 케이트 언니가 춤추고 있어요!"
르네의 말대로였다.
얼굴이 발갛게 물든 케이트가 캠프파이어 앞에서 행복한 얼굴로 춤을 추고 있었다.
3등신 캐릭터다 보니 표정이라고 해봐야 ^ㅁ^ 정도였고, 춤 또한 몸을 흔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알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아무튼 병사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거의 아이돌이네."
군부대에 위문 공연 온 아이돌 가수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해보니 일단 군부대는 맞구나.'
작게 실소한 유성은 문득 바나데인과 다이애나가 궁금해져서 유성 성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성 님?"
"다이애나랑 바나데인을 찾고 있어."
"어, 그러고 보니 둘 다 안 보이네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열심히 찾다보니 구석진 곳에 크게 자란 나무 밑에 나란히 앉아있는 다이애나와 바나데인을 찾을 수 있었다.
술과 고기를 먹고는 있는데 뭔가 둘만 따로 격리- 아니, 둘이서 다른 모두를 격리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니 전부터 유독 둘이 붙어 다니는 거 같긴 했는데.'
둘이서 무슨 관계인 것일까.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그런 관계일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르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므흐흣 미소 지었는데, 그러다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저만치서 다이애나와 바나데인을 바라보던 지미가 무척이나 훈훈한 미소(^_^)를 지으며 엄지를 척 세웠기 때문이다.
"재밌네. 다들 행복해 보이고."
"그러게요. 다들 즐거워 보여요."
6pt의 행복을 보며 다시 미소 지은 유성은 자세를 바르게 고친 뒤 르네에게 말했다.
"좋아, 르네. 그럼 시설 추가를 마저 해볼까?"
어차피 새로운 병종을 추가하려면 시설 투자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유성의 말에 르네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승자님. 얼른요."
"그래."
현재 가진 예산은 부대 충원과 대장간 효과의 추가를 마치고 남은 70포인트.
[목욕탕 추가: 10pt]
[막사 레벨 업: 목욕탕 추가가 필요합니다.]
[식당 레벨 업: 10pt]
[대장간 레벨 업: 10pt]
[훈련소: 막사 Lv2가 필요합니다. / ???가 필요합니다. / 개척 레벨 2가 필요합니다.]
[금속제련소: 대장간 Lv2가 필요합니다. / 훈련소가 필요합니다. / ???가 필요합니다. / 개척 레벨 2가 필요합니다.]
[검술관: ???가 필요합니다. / 개척 레벨 2가 필요합니다.]
주르륵 떠오른 문구를 보던 유성은 미간을 좁혔다.
훈련소와 금속제련소와 검술관을 짓기 위해 필요한 선행 빌드가 있다는 건 이해가 갔지만, 그 선행 빌드 대부분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일단 ???면 뭐야 대체.'
거기다 개척 레벨?
"계승자님?"
무슨 일이냐는 듯 르네가 묻자 유성은 빠르게 선택지를 읽어주었다.
그러자 르네 역시 유성과 마찬가지로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였다.
"으음... 그럼 일단 알고 있는 선행 빌드를 진행해보는 건 어떨까요?"
타당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가장 선행해야 할 것은 역시나 훈련소의 설치를 위해 필요한 막사의 레벨 업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일단 목욕탕부터 지어야 하는 건가."
"어쩔 수 없네요."
하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방긋방긋 미소를 짓는 르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목욕탕 추가는 그녀의 오랜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목욕탕부터 설치하자."
"네, 유성 님."
유성이 목욕탕을 추가하자 수로 근처에 커다란 천막이 생겼다.
그러자 케이트를 비롯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가 천막 안을 살펴보았고, 병사들은 그저 오오~ 하며 좋아하는 가운데 술에 취한 케이트 혼자 방방 뛰며 무척이나 기뻐했다.
"음, 그냥 큰 욕조 정도 있는 건데 그래도 목욕탕이긴 하네."
레벨1이라 그런지 시설이 참 간소했지만 그래도 케이트가 좋아하는 걸 보니 마음이 훈훈해지는 유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비가 완전 어긋나있긴 하네.'
병사들 중에 여자 병사가 몇 명 섞여 있긴 했지만 대부분 남자인 터라 성비 차이가 거의 10배 가까이 나는 상황이었다.
'뭐, 알아서들 잘하겠지.'
남탕이 일단 여탕보다 세 배 정도 큰 거 같기는 하고.
목욕탕을 추가한 유성은 10포인트를 투자해 막사의 레벨을 높였다.
그러자 막사 천막이 조금이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바뀌었는데, 안쪽을 보니 장교들의 개인실이 생겨 있었다.
'칸막이 하나 추가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일반보병대 병사들이 살짝 시무룩해지긴 했지만 케이트를 비롯한 나머지 병사들 모두가 기뻐한 터라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오히려 그다음인가.'
막사 Lv2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훈련소의 건설 조건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대장간 역시 Lv2로 만들었다.
코볼트 신의 신기 문제도 있고, 병종 강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설이라 어차피 레벨 업이 필요한 시설이니 금속제련소의 조건도 채울 겸 바로 올린 것이었다.
"와, 대장간도 커졌어요."
병사들 사이에 섞여 술과 고기를 즐기던 퍼거스와 멜리사가 갑자기 커진 대장간으로 달려가더니 크게 환호하며 좋아했다.
[대장간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병종별 대장간 효과가 추가되었습니다.]
[대장간의 강화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오."
흥미로우면서도 위험한 냄새가 나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성 내에 시설물 최소 요건이 완수되었습니다.]
[유성 성 개척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유성 성의 초대권이 발부됩니다.]
[유성 성의 개척을 위해서는 직접 방문이 필요합니다.]
돌연 떠오른 문장들에 유성은 눈을 크게 떴다.
성의 개척.
개척 레벨을 올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
그리고 성의 초대권.
유성이 인지한 순간 하얀색 초대권의 모습이 담긴 새로운 빛의 창이 나타났다.
[초대권: 유성 성에 방문할 수 있다.]
[초대권 충전에 필요한 시간: 71시간 59분 45초.]
초대권을 사용하면 유성 성에 직접 방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더욱이 개척을 위해서는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 문구가 유성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개척. 어째서 개척이지?'
성의 건설이나 발전이 아니라 개척이란 표현이 쓰인 이유.
유성은 유성 성을 돌아보았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유성 성의 성벽은 온전하지 않았다.
정사각형 형태로 막힌 성이 아니라, ㄱ자 형태를 그리며 북쪽과 동쪽만이 막혀 있을 뿐 서쪽과 남쪽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서쪽과 남쪽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성내의 다른 곳을 개척하면 무엇이 추가되는 것일까.
"유성 님? 무슨 일이에요? 좋은 일인가요?"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르네가 결국 못 참고 유성에게 물었고, 유성은 초대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초대장이야. 저걸 쓰면 유성 성에 들어갈 수 있어."
"네? 정말요?"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크게 반응하는 르네의 모습에 빙긋 웃은 유성은 자신이 추론한 것들 역시 설명하였다.
지금 보이는 것은 유성 성의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들을 개척하면 새로운 시설들을 추가하거나 유물이나 보물 같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성의 설명에 르네는 더욱 흥분했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속상해했다.
초대권의 충전 시간이 다 되려면 앞으로 3일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으, 너무 길어요."
"좀 길긴 하지."
몸이 달아올라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구르는 르네 옆에서 유성 역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저만치에서 유성과 르네를 향해 다가오는 이가 하나 있었다.
제10장 - 유성 성 (3)
"두 분이서 뭐 하고 계셨어요?"
헤실헤실 웃으며 다가온 것은 얼굴이 발갛게 물든 로빈이었다.
보아하니 이쪽도 제법 취한 것 같았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조금 취해 있던 르네가 답했다.
"계승자님이랑 이야기 좀 하고 있었어."
"일주일도 넘게 붙어 계셨으면서 또요?"
"응, 또. 흐흣."
자기가 말해놓고도 뭔가 우스웠는지 웃음을 흘리는 르네의 모습에 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흐응흐응 거리더니 다시 헤실거리며 말했다.
"보기 좋지만 이만 내려들 오세요. 연회의 주인공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것도 그러네."
수긍한 르네가 유성을 돌아보았고, 두 여인의 시선에 유성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내려가 볼까?"
"네, 계승자님."
히히 웃은 르네가 유성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르네의 레벨 업이라든지, 변한 유성 성의 관찰이라든지 조금 더 관리할 일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아주 급한 건 또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따 자기 전에 하면 되겠지.'
마음을 편히 먹은 유성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르네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 * *
다음 날 아침.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깬 유성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아오."
최대한 자제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권하는 술을 마다하기 뭐했던 터라 계속 마시다 보니 결국 이 꼴이었다.
"으음."
상체를 일으킨 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물부터 찾아 마신 유성은 이제야 살겠다는 얼굴이 되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영주의 방.
유성 자신이 유격전을 나가 있는 사이에 정리가 끝났다며 어제 받은 방이었다.
'다행히 딱히 사고 같은 건 안 친 건가.'
유성 자신만 누워있던 침대를 한 차례 돌아본 유성은 다시 물을 마시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니까 어... 술 마신 거랑... 춤... 어, 그래, 춤. 르네랑 춤췄던 거랑....'
단편적으로 떠오른 기억들을 더듬던 유성은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흠칫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르네와 췄던 춤 같지 않은 춤 때문이 아니었다.
"상태창!"
분명 자기 전에 상태창을 건드린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포인트 낭비한 건 아니겠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르네.
르네의 레벨 업.
설마 술김에 르네를 권법소녀라든지 마법권법가라든지 아무튼 그런 이상한 테크로 유도한 것은 아니겠지?
[영웅 관리]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7
보유 pt: 0pt
무장: 참나무 지팡이 / 마법사의 로브
일반 스킬: 마력 강화 Lv3 / 전투명상 Lv1 / 군마 소환 Lv1
고유 스킬: 마력 저장 Lv1
고유 스펠: -
[르네가 마력 강화 Lv4를 획득: 7pt]
[르네가 맨손 격투 Lv1을 획득: 3pt]
[르네가 전투 명상 Lv2를 획득: 5pt]
[르네가 새로운 마법을 획득: 5pt]
[르네가 군마 소환 Lv2를 획득: 5pt]
[르네의 근력을 강화: 1pt]
[르네의 민첩을 강화: 1pt]
[르네의 체력을 강화: 1pt]
르네의 상태창을 빠르게 살핀 유성은 안도의 숨을 토했다.
다행히 맨손 격투를 찍거나 근력을 강화하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력 강화랑 전투 명상은 볼보 남작령에서 찍었던 거고, 새로 찍은 건 고유 스킬인가?'
르네의 고유 스킬인 마력 저장.
평소에 쓰지 않는 마력을 르네의 전용 마법 공간에 저장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스킬이었는데, 저장량에 한계가 있고 저장 가능한 기한도 3일뿐이지만 그래도 굉장히 유용했다.
'한 번에 몰아칠 수 있는 마력이 두 배 이상이 된 셈이니까.'
이미 마력량이 평범한 십 대 마법사의 몇 배에 달하는 르네였는데, 거기서 다시 두 배를 한다고 생각하니 실로 막대한 마력량이었다.
'그래 맞아. 르네도 엄청 좋다고 방방 뛰었던 거 생각나네.'
둘 다 취한 상태이긴 했지만 아무튼 둘이서 의논한 결과 마력 강화 대신 고유 스킬을 찍었던 기억이 난 유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권법은 그렇다 치고 고유 마법을 언젠가는 한번 좀 찍어보고 싶은데.'
효율성을 위해 마력만 찍다 보니 레벨이 7이 되도록 찍어보지 못한 고유 마법이었다.
지금까지 느낀 르네의 유능함을 보았을 때 고유 마법도 상당히 좋은 게 나올 것 같기는 한데,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라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늘 마력 강화를 찍고 마는 유성과 르네였다.
'다음에는 진짜 고민 좀 해보자.'
유성 자신의 레벨 업은 5의 배수 구간이 아니라 그런지 그냥 평범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선업치가 꽤 높아져서 그런지 유성 자신의 오라의 양과 밀도 모두 평범한 기사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판타지 모나크로 따지면 13레벨 기사가 30레벨 기사급 오라를 가진 셈인가.'
새삼 황금빛 오라를 일으켜본 유성은 마지막으로 초대권을 활성화 시켰다.
[초대권: 유성 성에 방문할 수 있다.]
[초대권 충전에 필요한 시간: 60시간 35분 21초.]
시간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3일 정도는 기다려야 하는 초대권이었다.
'진짜 궁금하긴 하네.'
어제는 술기운이 좀 돈 터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막상 유성 성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궁금해졌다.
저 유성 성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르네가 지팡이를 수납해두는 마법 공간처럼 일종의 아공간 속의 성인 것일까?
'가보면 알겠지.'
그리고 가려면 3일을 기다려야 하고.
어깨를 으쓱인 유성은 상태창을 지운 뒤 사람을 불러 세면과 식사를 했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이제는 제법 시중 받는 일에 익숙해진 유성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 남짓 뒤.
집무실에 자리한 유성 앞에 피로한 기색이 엿보이는 가신들이 집결하였다.
* * *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고생들이 많았다. 징집병들의 훈련과 피난민들의 수습 등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
유성의 치하에 시몽 경과 란트 경을 비롯한 가신들이 미소를 머금었다.
숙취로 고통스러워하던 르네 역시 작게나마 웃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시몽 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영주님, 이세리나 영애 또한 성내의 일을 처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시몽 경의 말에 유성을 비롯한 모두는 가신단 끝에 서 있던 이세리나를 돌아보았고, 그런 모두의 시선에 조금 당황한 이세리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겸양하듯 어설프게 예를 표했다.
'역시 행정 쪽에 재능이 있었나.'
왕의 안목으로 봤을 때 재능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확인했었으니까.
"이세리나 영애, 조력에 감사합니다."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니 저 또한 기쁩니다."
유성의 치하에 이세리나가 다시 예를 표하며 답했다.
사실 현재 이세리나의 위치는 꽤나 미묘한 편이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이웃 영지에서 피난 온 귀족 영애였지만, 유성이 트롤들과 고블린들을 처단하고 볼보 남작령을 해방하면서 볼보 남작령의 유일한 상속인이란 신분이 다시 부각된 탓이었다.
볼보 남작령은 분명 해방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남작령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니었다.
볼보 남작령의 중심이었던 볼로나의 경우엔 도시 전체가 피와 인육으로 범벅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다른 마을들도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한 실정이었다.
뭣보다 그냥 사람 자체가 부족했다.
사람이 살 수 없고, 애당초 살 사람도 없는 텅 빈 영지.
이세리나가 아무리 당찬 여인이라 해도 이런 상황에 볼보 남작령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세리나를 어떻게 대우해야 할 것인가.
일반적인 귀족이었다면 크게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랐을 터였다.
1. 이세리나와 결혼해 자연스럽게 볼보 남작령의 상속권을 흡수한다.
2. 이세리나를 살해해 볼보 남작령을 온전히 주인 없는 땅으로 만든 뒤 흡수한다.
유성에게는 양쪽 모두 딱히 끌리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쭉 이야기했듯이 현재의 볼보 남작령은 딱히 수작을 부려가면서까지 손에 넣어야 할 땅이 아니었고 말이다.
'애당초 나서서 일을 도왔다는 걸 보면 그냥 식객으로 있기보다는 뭐라도 일을 하고 싶은 것 같으니 행정 일을 좀 맡기면 될 것 같은데.'
마음을 정한 유성은 이세리나를 보며 말했다.
"이세리나 영애, 앞으로도 영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행정 일 쪽으로 계속 도움을 받고 싶다는 유성의 말에 이세리나는 밝게 웃으며 답했다.
"맡겨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영지의 일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세리나의 경우 유성에게 직접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유성에게 상당한 수준의 부끄러움과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일어난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영지의 일을 해결해준 유성에 대한 고마움에서 오는 부채감.
하지만 이러한 사실까지는 모르는 유성은 이세리나가 의외일 정도 밝게 웃으며 제안을 수락하자 그저 싹싹한 사람이라 잘 되었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이세리나의 건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영지의 일을 논하게 되었다.
안건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코볼트들에게 파괴된 마을들을 재건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볼보 남작령의 처리 문제였다.
"고블린들과 트롤들은 인육을 주식으로 삼았어요. 때문에 마을과 도시 모두 물자는 거의 그대로 남은 상태입니다."
르네가 어두운 얼굴로 꺼낸 말에 시몽 경을 비롯한 모두가 씁쓸한 얼굴이 되었지만 굳이 따지면 좋은 소식이기는 했다.
볼보 남작령의 물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로티안을 위해 쓰일 수 있다면 그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세리나가 눈치 빠르게 먼저 말을 꺼내자 시몽 경이 유성에게 말했다.
"영주님, 징집병들을 데리고 출병해 물자를 확보해오겠습니다."
"좋은 생각이다. 다만 시몽 경이 아닌 란트 경과 에드가 경에게 맡겼으면 한다."
유성의 지목에 란트 경과 에드가 경은 바로 예를 표했고, 시몽 경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시몽 경이 아닌 두 사람에 맡긴 것은 시몽 경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로티안을 꾸려나가는 데 시몽 경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는 걷는 것만으로도 훈련이 되는 법이죠. 볼보 남작령을 한 번 다녀오면 징집병들도 보다 군인다운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란트 경이 흐흐 웃으며 말하자 시몽 경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유성은 이번엔 행정을 맡은 관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피난민들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지?"
"수가 그리 많지 않아 모두 로티안의 주민들로 편입된 상태입니다. 다만 북부에서 볼보 남작령의 피난민들이 내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들을 통해 접한 소식이었다.
북부 카리안 백작령- 정확히는 백작령에 속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인 루셴으로 도망쳤던 피난민들이 로티안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루셴에서 피난민들의 수용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시몽 경의 말에 이세리나 영애가 미간을 좁혔지만 무어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유성이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카리안 백작에 대해 아는 사람 있나?"
"서부 변경 지대에서 두 번째로 강한 세력을 가진 자예요. 30대의 젊은 백작인데 야욕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르네가 조금은 싫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카리안 백작이 볼보 남작령은 물론이고 라투스 남작령- 로티안의 지원 요청을 모조리 무시한 데 그치지 않고 피난민들까지 돌려보낸 일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흉성이 시대가 도래한 지금,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화합하면 무척이나 좋겠지만 이는 이상론에 불과했다.
카리안 백작이 원군 파견은 물론이고 피난민 수용마저 거부한 것처럼 일단은 자신의 것을 지키는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피난민들은 모두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도록 하자. 볼보 남작령을 아예 내버려 둘 수는 없고 가까운 마을 두어 개 정도는 로티안에 편입시키는 편이 좋을 테니."
유성의 말에 이세리나를 비롯한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이후 유성은 합동 장례식과 구체적인 군사 파견 이야기를 논한 뒤 회의를 파했다.
정오가 조금 지난 후에 시작한 회의였는데 끝나고 나니 어느새 해 질 녘이 가까워져 있었다.
"쉬었다가 식당에서 보자."
"네, 계승자님."
사실 르네만이 아니라 이세리나 영애와 로빈 등등 여럿이 참여하는 식사 자리인 터라 저녁 약속이라 하기도 뭐했지만 아무튼 르네와 저녁 약속을 한 유성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한적한 안뜰로 향했다.
회의가 시작하기 전부터 유성을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루안 경."
유성의 부름에 금발의 미남자-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단을 이끄는 사제기사 루안이 엄숙한- 아니, 경건한 얼굴로 돌아서서 유성을 마주하였다.
제10장 - 유성 성 (4)
루안 팔부르크.
옴팔로스 교단의 사제기사.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유성이 느낀 그는 이상적인 성기사에 가까웠다.
착하고 정의롭고 우직하지만 결코 어리석진 않은.
그런 그가 유성 자신에게 독대를 요청해 왔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까지는 딱히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도 한 집단을 이끄는 자이니 뒤늦게나마 조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기 위함인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들어주는 것이 도리는 물론이고 사리에도 맞았다.
전투사제단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설사 이겼더라도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을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유성을 마주한 루안이 꺼낸 것은 공이나 보상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말이었다.
"성화의 불길을 보았습니다."
루안의 얼굴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마치 기도라도 올리는 것처럼 경건했다.
그런 루안을 마주한 유성은 조금이지만 당황했다.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루안의 엄숙한 표정과 진지한 목소리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화의 불길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성화의 불길.
유성 자신이 사용한 성왕십자검의 첫 번째 검인 열화의 불길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성화.'
성스러운 불꽃.
황금빛 불꽃을 놓고 다른 누구도 아닌 사제기사인 그가 굳이 성화라 부른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랬기에 유성은 약간의 고민 끝에 루안을 마주하며 물었다.
"아실 수 있는 겁니까?"
오라와 성화의 구분.
유성의 물음에 루안은 이번에도 엄숙한 얼굴로 답했다.
"예, 본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영주님의 불길에 호수의 여신의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옴팔로스 교단의 사제기사인 루안은 호수의 여신의 신성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신성이 누구의 것인지.
어디에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영주님. 호수의 여신께서는 모든 인간을 수호하시는 인간의 수호여신- 즉, 인간의 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신을 받들어 모시는 교단이 거의 존재치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루안의 물음에 유성은 생각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사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도 호수의 여신을 모시는 교단이나 성직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긴 하네.'
호수의 여신이 인간의 여신이라는 사실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를 모시는 교단이나 성직자는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유성은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루안을 바라보았고, 그 모습에 무언가 오해라도 한 것인지 침울한 얼굴이 된 루안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여신의 신성을 사용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철벽의 옴팔로스를 믿는 옴팔로스 교단의 성직자들은 옴팔로스의 힘을 빌린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사랑과 미의 여신인 에류시아 교단의 성직자들과 상업의 신인 비류다케 교단의 성직자들 역시 각자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호수의 여신을 받들어 모시는 이들 가운데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고, 기사들 중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호수의 여신이 인간들의 수호여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신들을 제쳐두고 호수의 여신을 받들어 모시는 이들 역시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믿음의 대가를 내어주는 신과 그렇지 않은 신.
인간들의 신앙이 호수의 여신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숫자가 적긴 하였지만 여신의 기적을 행사하는 자들이 존재했죠."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유성은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고, 루안은 그런 유성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성왕 아서 팬드래건과 원탁의 기사들."
인간의 왕과 그 기사들.
여신의 뜻을 받들어 인간의 세계를 만들어낸 신의 기사들.
"카멜롯의 후예를 자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로티안에는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먼 이방에서 온 로티안의 흑기사.
지금은 사라진 카멜롯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
떠돌이 기사들이 스스로를 포장하기 위해 그럴싸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유성의 카멜롯 이야기도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특히 루안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루안은 유성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자신이 보았던 성화의 불길을 떠올리며 물었다.
"성왕께서- 인간의 왕께서 마침내 돌아오신 것입니까?"
인간의 왕.
그랬다.
카멜롯의 왕은 곧 인간이란 종족 전체의 왕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성왕 아서 팬드래건이었으니 말이다.
500년 전 아서 팬드래건은 원탁의 기사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왕을 잃은 카멜롯은 무너졌고, 왕국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왕국들과 제국들이 생겨났다.
수많은 왕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인간의 왕을 자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성왕의 것이었기에.
언젠가 돌아올 아서 팬드래건의 지위였기에.
루안은 갈망하듯 유성을 바라보았다.
멸망한 지 이미 수백 년이나 지난 왕국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사인 동시에 성직자였다.
흉성의 시대가 도래한 때에 인간의 왕이 돌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는 신의 기적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무어라 답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약간의 고민 끝에 마음을 정한 유성은 자세를 바르게 한 뒤 루안을 마주하며 말했다.
"제가 호수의 여신의 계시를 받은 자냐고 물으시는 것이라면, 맞습니다."
"마침내!"
인간의 왕을 자처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긍정이나 다름없는 유성의 대답에 루안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검을 뽑아 유성에게 바치며 말했다.
"사제기사 루안, 돌아오신 인간의 왕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엄숙하며 경건한 그 모습은 기사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생각했다.
'안 받아주면 난리 나겠네.'
아니, 사실 유성 입장에서도 루안의 이런 행동은 꽤나 큰 호재였다.
사제기사 루안과 전투사제단을 통으로 흡수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말이다.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나쁘진 않겠지.'
유성 자신이 사기를 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호수의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자였으니까.
"그대의 충성을 기꺼이 받겠다."
유성이 그리 말하며 검을 받아 들자 루안은 감격한 얼굴로 유성을 바라보았고, 유성은 쓰게 웃는 대신 똑같이 엄숙한 얼굴로 루안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의 왕이시여."
말하는 루안의 목소리가 조금이지만 젖어 있었다.
가만 보니 눈시울도 붉었고 말이다.
하지만 루안은 바로 눈물을 보이는 대신 감정을 추스르듯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더니 그대로 유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의 왕께서 왕의 귀환을 대대적으로 선포하시지 않은 이유 역시 알 것 같습니다. 무지한 이들의 시기와 질투는 물론이거니와 사악한 존재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시겠죠."
정답이었다.
성왕의 계승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루안처럼 감격하고 검을 바치려는 자는 적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유성을 껄끄럽게 여길 자 역시 많을 것이 분명했다.
인간의 왕이 돌아왔다.
사실상 왕중왕이 돌아온 셈인데, 그럼 기존의 왕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들의 왕이 돌아왔다며 기뻐할까?
아니면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왕을 부정하고 해하려 들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단 왕들만이 아닐 터였다.
고위 귀족들을 비롯해 이미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
호수의 여신의 교단이 커지는 것을 꺼려하는 여러 교단의 성직자들 등등.
여기에 루안이 꺼낸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사실이었다.
괴물들 입장에서는 성왕의 계승자가 온전한 힘을 갖춰 성왕이 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제대로 자라기 전에 짓밟아 버리는 쪽이 무조건 좋았으니 말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피하기 위해 일단은 성왕이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루안의 말에 유성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 뒤 짧게 답했다.
"그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어차피 이제 곧 난세가 열릴 터였다.
앞으로 싸움을 계속해 나가면 유성 자신이 성왕의 계승자라는 사실이 어련히 퍼지게 되어 있으니, 굳이 벌써부터 트러블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혜안이십니다."
기분 좋게 웃은 루안은 새삼 다시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저와 전투사제단은 성왕 폐하의 군세에 합류하겠습니다."
기대했던 그대로의 말에 유성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루안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질리언 대사제가 문제입니다."
옴팔로스 교단의 실라테인 왕국 서부 지부를 총괄하는 질리언 대사제.
애당초 전투사제단이 볼보 남작령을 돕는 것을 꺼려하던 대사제였다.
그런 대사제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로티안을 도운 데다가 아예 유성 밑으로 붙기까지 하겠다는 루안과 전투사제단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만무했다.
그럼 그자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질리언 대사제도 성화의 불길을 알아볼 수 있을까?"
유성의 물음에 루안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고민하더니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 아마 가능은 할 겁니다. 예, 아마도."
'반응을 보니 그냥 부패한 성직자인가.'
게임이든 만화든 흔히 볼 수 있는 돈과 여자만 밝히는 타락한 성직자라든가.
"그, 뭐랄까. 분명 좋은 분이시기는 합니다. 은근히 상냥한 분이시기도 하고요."
루안이 다소 변명하듯 말하자 유성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비단 전투사제단의 일이 아니더라도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자니 이참에 한번 보는 게 좋겠지.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든 설득이 될 것도 같고."
루안처럼 성화의 불길 보고 바로 넘어오진 않겠지만 설득할 수단이라면 그 외에도 많이 가진 유성이었다.
"그럼 제가 자리를 주선해보겠습니다."
"부탁한다."
"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루안이 비장한 얼굴로 답하자 저도 모르게 웃을 뻔한 유성은 자세를 바르게 한 뒤 가슴 위에 오른 주먹을 올리며 말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로티안에서는 이미 흔히 쓰이는 예법이었지만 지금의 루안에게는 전혀 다르게 와 닿았다.
"카멜롯의 영광을."
어느새 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루안이 젖은 목소리로 화답했고, 유성은 결국 작게나마 미소를 머금었다.
* * *
루안과 이야기를 마친 유성은 예정대로 르네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루안의 합류 소식을 들은 르네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역시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이죠.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든다 했어요."
흐흐흣 웃은 르네는 로빈이 눈치를 주자 새삼 얼굴을 붉히며 표정을 수습했고, 유성은 자신의 마법사를 위해 최대한 소리 죽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르네는 왕도의 이야기를 꺼냈다.
"왕도에서 사자가 도착하려면 시일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요. 시몽 경이 수소문한 바에 따르면 서부 변경지대만이 아니라 왕국의 국경 거의 전체가 공격을 받고 있는 모양이에요."
흉성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어쩌면 왕국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공격을 받고 있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다.
일단은 로티안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징집병들은 분부하신 대로 내일 바로 출병할 예정이에요."
르네의 보고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자 회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더욱이 북부의 카리안 백작이 신경 쓰이는 유성이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을 종합해 봤을 때 볼보 남작령의 물자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결코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리안 백작과 질리언 대사제.
외부의 위협에 맞서 인류 전체가 똘똘 뭉친다면 참 좋겠지만 이상론에 불과했다.
바로 턱 끝까지 물이 차오르기 전까지는 자신의 잇속을 우선하는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까지가 운이 좋은 것이었을지도.'
라투스 남작과 시몽 경, 이세리나 영애, 루안 경 등등.
지금까지 만난 이들을 하나하나 떠올린 유성은 고개를 돌려 르네를 보았고, 무슨 일이냐는 듯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 * *
다음날 정오.
란트 경과 에드가가 이끄는 징집병 삼백이 물자 회수를 위해 볼보 남작령으로 출발했다.
필로 마을의 생존자들과 피난민들 일부가 필로 마을에 정착하기 위해 그런 징집병들을 따라 나섰다.
다시 다음날 정오.
북부에서 피난민 이백여 명이 내려왔다.
유성은 이세리나와 관리들에게 피난민들을 재건 중인 마을들에 적절히 분배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해가 진 지 오래인 야심한 시간에 르네는 로빈과 함께 유성의 방문을 두드렸다.
"계승자님, 저 왔어요. 문 좀 열어 주세요."
왕의 마법사가 자신의 호위기사까지 끌어들여서 왕과 밀회를 가지려는 것일까?
전혀 아니었다.
르네의 얼굴은 기대와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로빈 역시 무척이나 흥분한 얼굴이었지만 이는 야심한 시각에 왕과 밀실에서 마주한다는 기쁨에서 야기된 것이 아니었다.
"어, 시간 맞춰 왔네. 10분 남았어."
유성의 말에 르네는 더욱 흥분된다는 듯 꽉 쥔 두 주먹을 허리 근처에서 흔들어댔다.
유성 성 초대권의 쿨타임까지 남은 시간은 약 9분하고도 45초.
사실 초대권에는 유성 성에 방문할 수 있다고만 나와 있는 터라 과연 르네도 함께 방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설사 방문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름의 즐거움이 남아 있다 생각하는 르네였다.
'계승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정확히는 3등신으로 데포르메 된 유성의 모습을 말이다.
르네와 달리 유성 성을 보지 못하는 로빈이었지만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르네가 워낙 흥분했기 때문에 덩달아 흥분한 것인지 르네의 손을 꼭 잡은 채 마른침을 삼켜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유성 성 초대권의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초대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떠오른 문구에 유성은 르네를 돌아보았고, 르네는 유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갈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으니 일단 손을 잡고 있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유성과 손을 잡은 르네가 돌연 움찔하더니 살짝 겁이 난- 아니, 놀란 얼굴로 유성을 돌아보았다.
"왜?"
"아니, 그, 생각보다 손이 커서요."
눈을 깜박이며 답한 르네는 돌연 다시 얼굴을 확 하고 붉혔고, 유성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로빈은 참으로 미묘한 눈이 되었고 말이다.
그리고 다시 10초 뒤.
유성이 르네의 손을 잡고, 르네는 다시 로빈의 손을 잡았다.
"그럼 사용할게."
"네, 계승자님."
"네, 영주님."
두 사람의 화답을 들은 유성은 오른손으로 예를 선택했다.
제10장 - 유성 성 (5)
취사 담당 지미(남, 21세)는 스튜가 가득 든 솥을 국자로 저으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뭘까.
아, 스튜구나.
내가 만들고 있었지.
맛있으려나.
케이트 대장 보고 싶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애롭게 미소 짓는 케이트의 모습을 상상하며 헤벌쭉 웃던 지미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눈앞에서 번쩍하고 섬광이 일더니 빛이 가신 자리에 사람 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후우, 조금 어지럽네. 괜찮아? 르네?"
"네? 아, 네. 괜찮- 로빈?"
어지럽다는 듯 잠시 비틀거리던 르네는 텅 빈 왼손을 보고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로빈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무리였나 보네."
유성 자신과 르네는 상태창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지만 로빈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래도 그냥 못 오기만 한 거면 다행이고요."
막 시공의 미아가 되거나 한 게 아니라면야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으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안도의 숨을 토한 르네는 새삼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고, 이내 자신 쪽을 보며 멍한 얼굴을 하고 선- 정확히는 국자를 든 채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지미를 발견하였다.
"와! 지미! 상태창에서 봤던 그대로예요!"
물론 상태창에서야 3등신이긴 했지만 아무튼 국자를 들고 취사병 노릇을 하는 건 똑같았다.
"과연, 제대로 도착한 건가."
유성 역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ㄱ자로 자리한 성곽과 주변 풍경이 상태창에서 본 것과 흡사했다.
'생각보다 더 높긴 하네.'
유성 성의 성곽은 무척 높았다.
30미터가 훌쩍 넘어 거의 40미터에 육박할 정도였는데, 성곽의 두께 역시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진짜 아공간 속인가?'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본 유성이 이번엔 땅을 돌아볼 때였다.
"계, 계승자님? 그리고 마법사님?"
겨우 정신을 차린 지미가 다가오며 말하자 르네가 먼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네, 지미. 저랑 계승자님이세요. 잘 지내셨어요?"
"네? 어, 저야 잘 지냈습니다. 헤헷."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인 지미는 엉거주춤한 주변의 병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는데, 아무래도 케이트나 바나데인을 데려오라는 뜻 같았다.
"그, 여긴 무슨 일이시죠?"
지미가 다시 조심스럽게 묻자 르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미의 행동과 표정, 목소리에 어쩐지 모르게 쩔쩔매는 것 같은 느낌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와 달리 유성은 이해할 수 있었다.
'부대에 갑자기 사단장 나타난 거랑 비슷한 건가.'
유성 성이 지미 입장에서는 주둔지라 할 수 있으니 정말 비슷한 상황이리라.
"괜찮아, 지미. 딱히 사열이나 검사하러 온 건 아니니."
"넵? 아, 넵."
지미가 다시 하하하 웃었지만 여전히 어색한 기색이 가득했다.
유성은 괜히 괜찮다느니, 정말 편히 있으라느니 같은 비현실적인 말을 하는 대신 그냥 서서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상태창으로 이미 수십 번도 넘게 본 주둔지였지만 실제로 보니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저게 대장간이구나.'
수로와 성벽 사이에 위치한 대장간은 레벨 업을 해준 덕분인지 생각보다 더 규모가 컸다.
덩치 큰 근육질 사내와 얼핏 여리여리해 보이지만 당찬 얼굴을 한 여자가 깜짝 놀라 대장간 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퍼거스와 멜리사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연이어 식당, 목욕탕, 화장실, 막사 등의 시설들을 쭉 돌아본 유성은 마지막으로 상태창으로는 볼 수 없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유성 성의 미개척지대.
막혀 있었다.
짙은 보라색 장벽이 마치 결계처럼 유성 성의 서쪽과 남쪽을 막고 있었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장벽을 친 자는 누구일까.
저 장벽은 어째서 존재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들이 동시에 떠올랐지만 무엇 하나 당장은 답을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계승자님, 여긴 어떻게."
무척이나 듣기 좋지만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유성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예상대로 케이트이긴 했는데, 평소와는 꽤나 다른 케이트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농노부대의 일원이었을 때보다 더 대충 입은 것 같은 허름한 옷차림에 젖은 머리칼과 살짝 달아올라 있는 하얀 피부.
완전 무장한 채 성녀처럼 자애로운 표정 아니면 늠름한 표정만 보여주던 케이트였던 터라 당황한 얼굴로 저리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또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케이트 언니."
"아, 네. 마법사님. 마법사님도 오셨군요?"
와 하고 달려오는 르네의 모습에 오히려 좀 안정을 되찾았는지 케이트의 얼굴에 다시 평온이 어리기 시작했다.
"쉬고 있었을 텐데 미안해."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니, 여기 오실 수도 있으셨군요?"
평온을 되찾긴 했지만 워낙 당혹스러운 상황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허둥대는 그녀였다.
"성의 개척을 위해 왔어. 자세한 이야기는 모두 모인 뒤에 했으면 하는데 바나데인과 다이애나는?"
"두 사람이라면...."
말꼬리를 흐린 케이트는 지미를 돌아보았고, 지미는 다시 이름 모를 병장- 르네는 누군지 아는 듯했지만 -을 돌아보았고, 그 병장은 다시 이름 모를 상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상병을 거쳐 일병을 지나 이등병에 도달했을 때 저만치서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바나데인과 다이애나였다.
"둘이 늘 붙어 다니는 게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나요?"
르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속삭이듯 말하자 유성은 쓰게 웃었다.
남의 연애사 보고 히히거리는 르네가 귀여운 것도 있었지만, 바나데인과 다이애나가 사귄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뭔가 매칭이 잘 안 되는데.'
말수가 없고 무뚝뚝한 다이애나와 마찬가지로 딱히 말주변은 없어 보이는, 귀족적인 바나데인의 조합이라니.
두 사람이 남몰래 밀회하는 장면을 떠올려본 유성은 결국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상상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올 수도 있었나?"
"카멜롯의 영광을."
어느새 다가온 바나데인이 놀란 얼굴로 묻는 것과 별개로 유성 앞에 도달한 다이애나는 일단 왼쪽 가슴 위에 오른 주먹부터 올리며 예를 표했다.
그러자 케이트는 앗-하는 표정이 되더니 뒤늦게 주먹을 올렸고, 지미를 비롯한 병사들도 서로를 돌아보더니 서둘러 주먹을 올렸다.
최종적으로 르네마저 엉거주춤 가슴 위에 주먹을 올리는 것을 본 유성은 쓴웃음을 삼킨 뒤 주먹을 가슴에 올리며 말했다.
"카멜롯의 영광을. 모두 편히 쉬도록."
"무슨 일이지?"
바나데인이 다시 묻자 유성은 다이애나와 정말 사귀는 것이냐고 묻는 대신 식당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이동하지.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보단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
유성의 말에 바나데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다가온 케이트가 안내하겠다며 앞장을 섰다.
그리하여 식당 천막 안.
딱히 자리를 지정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유성과 르네가 나란히 앉았고, 맞은편에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순으로 자리를 잡았다.
'식당 상태가 썩 좋지는 않네.'
이것도 결국 군대 시설이라 그런지 이상한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고.
하지만 지금은 시설 문제나 장병들의 고충 상담보다 우선시 할 이야기가 있었다.
유성은 세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 온 건 성의 개척을 위해서다."
"개척이요? 아."
유성의 말에 케이트가 반사적으로 동쪽을 돌아보았고, 바나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벽들 말이군. 걷어낼 방법이 있는 건가?"
"정확한 방법은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가능은 할 것 같다."
애당초 불가능하다면 초대권이 발급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전에 혹시 저 장벽에 대해 아는 것은 없나? 이 성이라든지."
유성의 물음에 케이트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본래 저희는 소환되지 않았을 때는 딱히 의식이 깨어있지 않았습니다. 좋은 꿈을 꾸며 잠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죠. 그런데 코볼트의 왕자와 싸운 이후부터는 지금처럼 성내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유성 성이 활성화된 시점과 같았다.
"우리도 이 성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것이 없다. 다만... 무척이나 익숙한 기분이 든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는 분명 과거에 이 성에서 머문 적이 있는 것 같다."
과거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 봉인된 카멜롯의 군세였다.
바나데인의 말을 들은 유성은 마지막으로 다이애나를 돌아보았고, 다이애나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평소처럼 딱딱한 얼굴로 답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쩐지 모르게 익숙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성은 카멜롯의 일부였던 것일까?
어쩌면 이 성 자체가 카멜롯이라든지.
흥미로운 가설이었지만 당장은 더 이상의 단서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일단 장벽 쪽으로 가도록 하지."
유성이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행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몇 분 뒤.
장벽 앞에 도달한 유성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장벽을 만져보았다.
매끄럽고 단단한 것이 마치 커다란 유리를 만지는 것 같았다.
"무척이나 강력한 마력이에요. 너무 강해서... 이 벽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이미지 자체가 떠오르지 않아요."
르네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약간이지만 두려움까지 섞인 목소리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누가 이런 장벽을 여기에 만든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유성은 초대권을 꺼내 장벽에 붙이듯 대어 보았다.
그러자 초대권에서 환한 빛이 일더니 유성의 눈앞에 빛으로 된 문장이 형성되었다.
장벽 너머에는 각종 위험과 악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척에 성공한다면 새로운 영역뿐만 아니라 잊히고 파묻힌 기억과 보물들 역시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개척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왕과 마법사, 그리고 왕의 기사들뿐입니다.
제1구역의 개척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유성은 바로 예를 선택하는 대신 르네와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무슨 문장이에요?"
르네가 제일 먼저 묻자 다른 이들 역시 궁금하다는 얼굴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성은 바로 답하는 대신 기사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카멜롯의 군세를 이끄는 유성 자신의 기사들.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이름만을 기억할 뿐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잊히고 파묻힌 기억들.'
새로운 영역이나 보물들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보상이었다.
"계승자님?"
케이트의 걱정 섞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유성은 상념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떠오른 문장을 해석해 주었다.
"장벽 너머의 개척...."
"기억인가."
케이트와 바나데인 역시 다른 보상들보다는 기억이 더 신경 쓰이는 모습이었다.
"일단 준비들하고 돌아와. 지금 상태로는 개척에 나설 수 없을 테니."
유성의 말에 비무장 상태인 자신들을 돌아본 기사들은 급히 예를 표한 뒤 막사로 향했다.
덕분에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르네가 조심스런 어조로 유성에게 물었다.
"계승자님, 이 성은 카멜롯인 걸까요?"
유성 자신도 떠올린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르네와 함께 장벽을 바라보던 유성은 돌아서서 성벽 쪽을 보았다.
40미터에 육박할 것 같은 높고 거대한 성벽.
가까이에 있을 때는 그 너머를 볼 수 없었지만 충분히 멀어진 지금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보랏빛 장벽.
성의 내부를 막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장벽이 성의 외곽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제11장 - 개척
무장을 마친 케이트와 바나데인, 다이애나가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케이트는 언제나처럼 커다란 깃발을 들었고, 바나데인은 활과 단검 외에도 허리에 장검을 한 자루 찼다.
다이애나는 일단 에니카를 타고 오긴 했는데 자기 혼자 말을 타고 있으니 좀 겸연쩍어하는 것 같았다.
'아니, 다이애나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거려나.'
어찌 되었든 세 기사들이 모인 셈이었는데, 그들 뒤에는 지미를 비롯한 병사들이 완전 무장 상태로 도열해 있었다.
군단의 장이라 할 수 있을 유성이 방문한 데 이어 기사들이 무장하고 어딘가로 달려가니 일단 따라온 모양이었는데, 다들 쉬고 있었던 데다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다보니 완전무장과는 별개로 조금이지만 당황한 기색들이 엿보였다.
"그, 병사들은 같이 못 가는 거죠?"
"어, 이렇게 되니 좀 미안한데."
르네가 살짝 속삭이듯 묻자 유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래서야 정말 주말에 쉬고 있는데 갑자기 사단장이 방문해서 깽판 친 꼴이었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그냥 해산하라고 하기도 뭐하긴 하니까.'
군단장과 기사들이 죄다 무장한 상태로 싸우러 가는데 병사들이 그냥 늘어져서 쉬고 있는 것도 좀 이상한 상황이긴 했다.
더욱이 개척 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무장한 상태로 대기하는 것이 사리에도 맞았다.
"준비되었습니다."
케이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병사들에게 장벽 앞에서 대기하며 쉴 것을 명한 뒤 다시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개척을 시작하겠다. 혹시 시간이 더 필요한 사람 있나?"
"없습니다."
유성의 물음에 케이트가 즉답했고, 바나데인은 미간을 좁히긴 했지만 이견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다이애나는 늘 그랬듯이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럼 시작하겠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유성은 상태창의 '예' 버튼을 눌렀다.
팟-!
순간 빛이 일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인 유성은 자신이 서 있던 장소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계승자님?"
르네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다 같이 이동한 것인지 르네뿐만 아니라 케이트와 바나데인, 다이애나도 주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장벽이 조금 열려서 문이 생길 거라 생각했는데, 아예 단체로 순간이동을 한 모양이었다.
"일단은 장벽 안인가."
유성 역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돌로 된 담장이 제법 넓은 공간을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너머로 보랏빛 장벽이 보였다.
담장 안쪽에 자리한 것은 넓은 공터와 2층 높이의 커다란 건물 하나뿐이었는데, 여기저기 부서지고 무너진 곳이 있어서 폐허처럼 보였다.
"훈련장일까요?"
발투아 백작가의 연병장을 떠올린 르네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기사들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들이 되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기억이 조금 돌아온 거야?"
유성의 물음에 케이트는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뚜렷이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익숙한 공간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따로 이견이 없는 것을 보면 바나데인과 다이애나 역시 케이트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벽으로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돌연 메마른 바람이 불어와 주변 일대를 휩쓰는가 싶더니 멀리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나의-----------, -------.]
작고 가냘픈 목소리였다.
하지만 메마른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 먼 곳에서 들려오기 때문인지 내용을 이해하기는커녕 목소리의 성별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누구일까.
그리고 대체 무슨 내용인 것일까.
귀를 기울이던 유성은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케이트?"
케이트만이 아니었다. 기사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 귀를 기울이기만 하는 유성 자신과 르네와는 달리 기사들은 저마다 심각한 얼굴로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이트, 괜찮아? 케이트?"
유성이 어깨를 흔들며 묻자 케이트는 퍼뜩 정신이 든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는 목소리야? 무언가 기억이 났다든가."
유성의 물음에 케이트는 입술을 깨물더니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분명 알고 있는 목소리인 것은 분명-"
"적이다!"
크게 외친 것은 바나데인이었다.
유성 역시 놀라 먼 곳을 보니 바람 때문에 일어난 모래먼지 너머로 이형의 무언가가 보이는 것 같았다.
[늑대 거미 0/500]
[늑대 거미 여왕 0/1]
[개척 목표: 여왕거미를 쓰러트리고 구역을 해방하라.]
반사적으로 발동시킨 상태창에 승리조건이 출력되었다.
"오백?!"
"온다!"
유성의 목소리와 바나데인의 목소리가 겹쳤다.
촤자자자작-!
사박사박 걷는 소리가 겹치고 겹치자 커다란 소음이 되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소리에 르네는 어깨를 움츠렸고, 바나데인은 시위를 당겼다.
유성이 소리쳤다.
"군마를 소환해! 적은 늑대거미다!"
적의 숫자가 압도적이니 기동하며 싸워야 했다.
명령을 받은 르네와 케이트는 즉각 군마를 소환했고, 바나데인은 에니카에 올라 다이애나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거미 떼가 몰려들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쏟아져 나온 그것들은 크기가 모두 달랐다.
작은 놈은 조금 커다란 개 정도의 크기였지만, 큰 놈은 사자나 호랑이 같은 대형 육식동물을 방불케 하는 크기였다.
털이 수북이 난 갈색 거미들이 여덟 개의 눈을 빛내며 몰려오니 그 모습 자체로 공포였는데 놈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반적인 거미처럼 거미줄을 치는 대신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늑대거미들답게 이동 속도도 빠를 뿐만 아니라 도약력까지 대단했다.
촤자자자작!
파파파팟!
달리고 뛰며 밀려드니 실로 노도와 같았다.
잠시만 지체해도 거미떼에 파묻혀 압사당할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빠르게 판단했다.
"남쪽으로!"
담벼락이나 건물이 없는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유성이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하자 르네와 기사들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이동하면서 싸운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가 달리며 깃발을 높이 들자 황금빛 기운이 원형으로 뻗어나갔다.
그러자 물밀듯이 달려들던 거미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달려오던 기세 때문에 영향력 안에 들어간 놈들은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유성은 열화의 검을 발동시킨 뒤 늑대 거미들을 짓밟고 나아감과 동시에 놈들을 불태웠다.
바나데인 역시 이번에는 활 대신 검을 들고 달려드는 거미들을 베었다.
"멈추지 마! 이동해야 한다!"
케이트가 펼친 카멜롯의 영광 덕분에 어느 정도 여유 공간이 있었지만 사방이 이미 거미들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카멜롯의 영광이 있든 없든 밀려든 놈들 때문에 압사당할 판이었다.
"큰 놈이 온다!"
바나데인의 외침에 유성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바나데인의 말처럼 거대한 놈이 거미들을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크다!"
"여왕인 것 같아요!"
다리 길이가 5~7미터는 족히 됨직하다보니 덩치가 문자 그대로 집채만 했다.
순식간에 다가온 놈은 다른 거미들처럼 달려들어서 무는 대신 입에서 독극물을 쏟아냈다.
츠하악!
"끼에에!"
짙은 녹색의 독이 어찌나 독한지 독극물을 뒤집어 쓴 거미들이 비명과 함께 녹아내렸다.
일행은 급히 말을 도약케 해 간신히 피했지만 덕분에 흩어지고 말았다.
"파이어 월!"
홀로 고립된 르네가 급히 화염의 장벽을 세워 거미들을 밀어냈다.
케이트가 그런 르네 쪽으로 달렸고, 다이애나와 바나데인이 그 옆에 바짝 붙었다.
하지만 다시 합류하는 것이 정답은 아니었다.
유성은 더욱 큰 불길을 일으킨 뒤 거대 거미를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시선을 끌겠다!"
유성이 거미들을 불태우며 거대 거미에게 돌진하자 바나데인이 급히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
파파팟!
연달아 날아간 화살이 거대 거미의 눈알 3개를 거의 동시에 터트렸다.
거대 거미가 비명을 질렀고, 유성은 말 등 위에 두 발을 올려 앉더니 그대로 도약해 거대 거미의 가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직!
외피가 단단했지만 열화의 검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놈의 가슴 깊이 검을 박아넣은 유성은 손잡이를 잡고 매달림과 동시에 열화의 불길을 치솟게 하였다.
"키아악!"
가슴 속이 불타기 시작한 거대 거미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자 주변에 있던 거미들이 밟히고 짓뭉개져 죽어나갔다.
유성은 이를 악물고 검에 매달린 채 버텼고, 바나데인은 혼란한 와중에도 거대 거미의 눈알을 두 개 더 터트리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키아-"
그리고 마침내 거대 거미가 쓰러졌다.
"해냈어요!"
르네가 크게 기뻐하며 외쳤지만 유성은 이를 악물었다.
상태창에 뜬 문구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늑대 거미 212/500]
[늑대 거미 여왕 0/1]
여왕거미가 아닌 늑대 거미의 카운트가 올라갔다.
즉, 놈은 여왕이 아닌 일반 거미란 뜻이었다.
"키아아아!"
바로 그때 사방에서 거대한 괴성이 들려왔다.
거대 거미들이었다.
한 방향 당 두어 마리씩 나타나니 그 수가 무려 일곱이었다.
놈들이 달려들었다.
그런데 유성은 사방이 아닌 다른 곳을 보았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기 때문이다.
"맙소사."
르네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머리 위.
압도적으로 거대한 거미가 하늘에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다리 하나의 길이가 십여 미터는 족히 됨직한, 실로 거대한 괴물이었다.
저게 여왕이다.
저게 여왕이 아닐 수는 없다.
"피해!"
유성은 외침과 동시에 거대 거미를 넘어 몸을 던졌다.
여왕거미가 거대 거미들처럼 독극물을 뱉어냈기 때문이다.
츠화악-!
하지만 양이 달랐다.
워낙에 거대한 여왕거미였기에 독극물이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순식간에 지면을 뒤덮었다.
"키에엑!"
"키악!"
독극물에 휩쓸린 거미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그런데 휩쓸린 건 거미들만이 아니었다.
다리에 독이 튄 케이트의 군마가 쓰러졌고, 케이트는 바닥을 구르는 와중에도 급히 역소환을 펼쳤다.
"케이트 언니!"
르네가 쓰러진 케이트를 향해 달리며 손을 뻗었다.
케이트는 군기를 바닥에 꽂아 다시 한번 황금빛 기운을 방출한 뒤 르네의 손을 붙잡고 레이니의 등에 올랐다.
"미치겠군."
그새 거미여왕을 향해 화살을 쏘아댄 바나데인이 미간을 좁혔다.
화살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명중했지만 거미여왕의 눈알에 박히기는커녕 튕겨나갔기 때문이다.
쿠웅!
그리고 마침내 거미 여왕이 지상에 착지했다.
거대 거미들이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고, 거미 여왕은 일행에게 돌진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알을 낳기 시작했다.
[늑대 거미 312/500]
[늑대 거미 315/550]
[늑대 거미 334/600]
늑대 거미들의 최대 숫자가 실시간으로 늘어났다.
거대 거미들의 공격에 휩쓸려 죽는 거미들 역시 적지 않았지만, 늘어나는 거미들의 숫자가 더 빨랐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가 이를 악물고 기운을 발산했다.
일행들을 집결시키고 대화를 나눌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찬란한 태양과 같은 빛에 거대 거미들조차 주춤하며 물러서자 일행은 케이트를 중심으로 뭉쳤고, 르네가 빠르게 말했다.
"거미 여왕에게 다가가게 해주세요! 제가 결판을 낼게요!"
구체적인 방법조차 제시되지 않은 선언이었지만 유성은 바로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되도 않는 말을 꺼낼 르네가 아니었다.
"케이트! 이쪽으로!"
유성의 명령에 케이트는 레이니의 위에서 뛰어 유성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유성이 여왕거미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일점돌파다. 나와 다이애나가 길을 열고 르네가 그 뒤를 달린다."
거기까지 말한 유성의 두 눈에서 강렬한 황금빛이 일었다.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
그것만으로도 유성의 의도를 이해한 기사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르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유성이 돌진했다.
케이트와 함께 카멜롯의 영광을 펼치니 직경이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의 반구가 유성과 케이트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키아아악!"
거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넘어 죽어 나가기 시작했고, 거대 거미들조차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유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질풍의 아우라를 발동시킨 뒤 다이애나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여왕거미를 향해 돌진했다.
르네와 유성이 동시에 창을 앞으로 세웠다.
여왕 거미의 머리와 몸체는 워낙 높은 있어 맞출 수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달린다.
그리고 꿰뚫는다.
공간을 파괴한다!
콰아아아아아아-!
다이애나의 기사도와 유성의 기사도가 동시에 발동했다.
두 사람의 앞에 자리하고 있던 평범한 늑대거미로부터 황금빛 섬광이 폭발했고, 거대한 충격파가 거대 거미는 물론이고 주변 일대를 휩쓸며 길을 만들어냈다.
"가! 르네!"
유성과 다이애나가 양옆으로 갈라서며 길을 열어주자 르네를 태운 레이니가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충격파에 휩쓸린 것은 거미여왕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런 르네에게 바로 공격을 가할 수는 없었다.
"레이니! 돌아가!"
엉거주춤한 자세로나마 안장 위에 올라섰던 르네가 허공을 향해 도약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르네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마력으로 말미암은 염동력으로 펼친 행동이었다.
"키아!"
그런 르네를 향해 거대 거미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바나데인이 시위를 놓았다.
바나데인뿐만 아니라 유성의 기사도까지 실린 황금빛 화살이 거미여왕의 눈을 꿰뚫었다.
"키악!"
너무나 오랜만에 경험한 통증에 거미 여왕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르네는 그런 거미 여왕의 머리에 착지했다.
바로 눈앞에 위치한 거미 여왕의 눈동자들이 일시에 르네에게 향했다.
르네는 두려움을 느꼈다.
아니, 생리적인 거부감과 혐오감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워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바나데인이 깨트린 눈알을 향해 몸을 날리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야압!"
르네의 주먹이 거미 여왕의 눈알을 향해 작렬했다.
어설픈 기합과 달리 내지른 주먹은 거미 여왕의 눈알을 단박에 꿰뚫었고, 르네의 팔이 눈알 안쪽까지 깊이 들어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눈알 안쪽에서 주먹을 활짝 편 르네가 미리 준비해뒀던 마법을 발동시켰다.
"프리-즈!"
기본적인 냉기 마법이었지만 마력의 양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는 특성이 있었다.
그리고 르네는 자신의 마력을 모조리 쏟아붓는 데 그치지 않고 고유 스킬까지 발동시켰다.
[마력 저장]
저장해둔 마력까지 한 번에 투입한다.
이름하야 프리즈 부스티드.
지옥의 냉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마법의 힘이 눈알을 통해 거미 여왕의 뇌를 비롯한 내장 기관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콰직! 콰직! 콰직!
눈알들은 물론이고 머리와 목 등의 표피를 뚫고 날카로운 얼음 기둥들이 솟구쳤다.
얼어붙은 뇌가 깨져나가 즉사한 거미 여왕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여왕을 잃은 거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꺄아!"
거미여왕의 머리 위에 있던 르네가 균형을 잃고 추락했다.
마력이 바닥 난 상태라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성이 있었다.
왕의 시간을 사용해 녹초가 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유성은 르네를 향해 달렸고, 두 팔을 뻗어 추락하는 르네를 받아냈다.
"와."
감정 표현이 별로 없는 다이애나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대체 어떻게 했냐는 얼굴로 감탄했고, 바나데인은 놀라서 눈을 깜박이다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와아."
유성의 품에 안긴 르네 역시 어안이 벙벙하다는 얼굴로 멍한 목소리를 내었다.
커다란 두 눈을 깜박이는 그녀를 보며 유성은 팔이 아프다느니, 힘들다느니 같은 말을 하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했어, 르네. 역시 왕의 마법사야."
담백한 칭찬에 르네는 얼굴을 붉히더니 이내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늑대 거미 421/600]
[늑대 거미 여왕 1/1]
[개척 목표 달성]
[제1구역 개척에 성공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 30점을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파괴된 훈련소 확보(수리 가능)]
[파괴된 금속 제련소 확보(수리 가능)]
연달아 떠오른 상태창 문구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지만 유성은 본능적으로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태창 문구에는 아직 나오지 않은 또 다른 보상.
유성은 르네를 품에 안은 채 금속 제련소로 추정되는 건물을 돌아보았다.
건물 안쪽에서부터 은빛 섬광이 은은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저 안에 있는 것.
메마른 바람과 함께 다시 한번 먼 곳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11장 - 개척 (2)
[-----, ---의 불을---용이----- 심연---]
목소리의 내용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성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누구일까.
그녀도 카멜롯과 관련된 인물인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거미여왕과 같이 카멜롯에 적대하는 존재인 것일까.
'개척을 하니 성별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어.'
목소리가 좀 더 또렷해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성의 개척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목소리의 정체 역시 명확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유성은 르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건물 쪽을 보았다.
거미여왕을 쓰러트린 직후 밝게 터졌던 은빛 섬광은 어느새 은은한 빛이 되어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저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무언가.
"르네, 일단 업을게."
마력을 모두 방출할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늘어져 있는 르네에게 다가서며 말하자 르네는 말할 힘도 없는지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 겨우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유성은 그런 르네의 모습에 빙긋 웃은 뒤 등에 단단히 업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유성이 르네를 업는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케이트가 그리 말하며 앞장서기 시작하자 바나데인과 다이애나는 자연스럽게 유성의 등 뒤에 서서 주변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나름의 경호 포지션을 짠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후.
건물 안에 들어선 일행은 어렵지 않게 주변을 살펴볼 수 있었다.
건물 안쪽에서부터 은은하게 번져오는 빛 덕분에 내부가 상당히 밝았기 때문이다.
'뭔가 정밀한 작업을 하는 공장 같은 건가?'
정체를 쉬이 알 수 없는 커다란 기구들이 창고 같은 곳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대장간 같지는 않았지만 뭔가 비슷한 일을 하는 곳 같다는 느낌이었다.그리고 건물의 중심.
새카만 방패가 허공에 떠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높이는 대략 1미터 남짓.
생긴 것은 전형적인 라운드 쉴드였는데, 직경은 60cm 남짓으로 제법 커다란 편이었다.
검은 표면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은 황금빛 사자의 문장.
르네는 멍하니 방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성 역시 다르지 않았다.
분명 처음 보는 방패임에도 불구하고 마주하는 순간 가슴 한 켠이 욱신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일까.
방패로부터 느껴지는 호수의 여신의 기운 때문인 것일까?
"가레스의 방패."
케이트가 말했다.
유성을 비롯한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자 정작 말을 한 케이트가 놀라 눈을 깜박였다.
마치 방패를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이름인 것 같았다.
"케이트, 이 방패를 알겠어?"
유성의 물음에 케이트는 입술을 몇 번인가 달싹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레스. 가레스의 방패인 것 같습니다."
유성은 바나데인과 다이애나 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 또한 케이트와 흡사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 방패를 알고 있다.
저 방패의 주인은 가레스이다.
"원탁의 기사 가레스."
아서왕을 수호하는 12명의 원탁의 기사들 가운데 하나.
유성은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방패를 마주한 순간 판타지 모나크에서 지나치듯 보았던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럼 저 방패가 원탁의 기사의 방패라는 거죠?"
업혀 오는 사이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는지, 르네가 힘이 없는 얼굴과 목소리로나마 감탄을 표했다.
다름 아닌 원탁의 기사의 무구였으니까.
이 세계에 있어 원탁의 기사는 신화이자 전설인 동시에 역사였으니, 힘이 있든 없든 감탄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가레스의 방패.'
원탁의 기사의 방패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 성이 정말 카멜롯의 일부이기라도 한 것일까?
심호흡을 한 유성은 방패로 다가가 손을 뻗어보았다.
그러자 가레스의 방패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더니 마치 돌아갈 자리를 찾았다는 듯 스스로 날아 유성의 왼팔에 자리했다.
[황금사자의 방패]
원탁의 기사 가레스의 방패.
아그라베인의 동생인 가레스가 사용하던 방패로, 강력한 수호의 힘이 담겨 있다.
손에서 놓쳐도 소유주에게 돌아오는 기능이 있다.
[고유 스킬: 황금사자의 방벽]
방패의 표면 위로 황금의 방벽을 펼친다.
선업치가 높을수록 방벽의 크기와 강도가 강해진다.
상태창 문구를 읽은 유성은 다시 방패를 돌아보았다.
팔에 차고 있었지만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 팔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유성은 조심스럽게 방패의 표면을 어루만져 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크고 단단한 체구와 달리 얼굴은 어렸다.
개구쟁이 소년처럼 활짝 웃고 있는 갈색 머리 청년의 얼굴.
'가레스.'
아그라베인의 동생.
원탁의 방패.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상념에서 깨어난 유성은 기사들을 돌아보았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세 기사들의 전신에서 은은한 빛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언니?"
르네가 당황해서 목소리를 내었지만 케이트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할 따름이었다.
유성은 그런 케이트와 두 기사들을 깨우는 대신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의 변화가 유성의 눈에 들어왔다.
[기사 케이트에게 채워져 있던 기억의 봉인이 하나 해금되었습니다.]
[왕국검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기사도: 카멜롯의 영광의 효과가 강화되었습니다.]
[기사 바나데인에게 채워져 있던 기억의 봉인이 하나 해금되었습니다.]
[고유 스킬: 고속 기동을 떠올렸습니다.]
[기사 다이애나에게 채워져 있던 기억의 봉인이 하나 해금되었습니다.]
[다이애나의 파트너 에니카가 본래의 힘을 일부 되찾았습니다.]
[다이애나의 클래스가 천마기사로 변경됩니다.]
유성은 급히 다이애나와 바나데인을 태우고 있는 에니카 쪽을 돌아보았다.
하얗고 은은한 빛이 에니카의 전신을 뒤덮는가 싶더니 이내 커다란 섬광이 일었고, 빛이 가신 자리에 나타난 것은 순백의 군마가 아닌 하얗고 거대한 날개를 가진 순백의 페가수스였다.
"아니, 에?"
르네는 너무 놀라 제대로 된 말도 하지 못했고, 유성 역시 깜짝 놀라 눈을 깜박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다이애나가 눈을 떴다.
그녀는 변해버린 에니카를 보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에니카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에니카."
다이애나의 부름에 에니카가 작게 푸드덕거렸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유성은 연이어 바나데인과 케이트를 보았다.
에니카만큼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기억의 봉인이 하나 해금됨에 따라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
"바나데인, 케이트."
유성의 부름에 바나데인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과거의 일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아니, 내가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과거의 전투법.
새로이 추가된 고속 기동이란 고유스킬을 활용한 전투법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유성은 이번엔 케이트를 보았다.
기대 섞인 유성의 시선에 케이트는 조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나데인과 비슷합니다. 저도 조금은...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입니다."
비록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진 못 했지만 기사들의 전투력이 전원 증강되었다.
'개척 이거 정말 좋은 걸지도.'
원탁의 기사의 무구도 얻고 기사들의 기억도 조금이지만 돌아오고 전투를 통한 스킬 포인트와 경험치도 얻고-
[파손된 훈련소가 추가되었습니다.]
[파손된 금속 제련소가 추가되었습니다.]
"오!"
시설도 얻고.
주먹을 불끈 쥔 유성은 바로 다시 상태창을 열었다.
"역시."
유성이 기대했던 문구.
[중갑 보병대: 40pt]
필요조건들이 모두 해금되어 추가가 가능해진 신 병종.
유성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 *
금속 제련소 밖으로 나오자 아는 얼굴들이 잔뜩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지미를 필두로 한 카멜롯의 군세였다.
"장벽이 사라지고 은빛 섬광이 솟구쳐서 달려와 봤습니다."
아예 별개의 공간으로 순간이동을 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장벽 하나만 걷어내면 닿을 수 있는 장소였던 모양이다.
"지미, 혹시 커다란 거미들을 보지 못했나?"
"아뇨, 못 봤습니다."
"거미요? 못 봤습니다."
유성의 물음에 즉답한 지미는 그렇지 않냐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고, 다른 군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백 마리가 넘는 거미들이 전부 어디를 간 것일까.
거미여왕과 함께 사라진 것일까?
아니면 다른 장벽 너머로 도망간 것일까.
전자라면 다행이었지만 후자라면 안심할 수 없었다.
'불침번 서라고 할 수밖에.'
상태창으로 보아하니 불침번도 없이 살던 모양인데 이젠 안 될 말이었다.
한편, 유성이 속으로 얼마나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지미는 케이트를 돌아보며 애타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한 케이트는 짤막하게나마 장벽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거미여왕과 거미들의 격파.
그로 말미암은 개척의 성공.
건물 안에서 발견된 원탁의 기사의 무구까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지미와 군사들은 유성의 팔에 자리한 가레스의 방패를 보고 감탄했고, 연이어 유성의 등에 업혀 있는 르네를 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역시 마법사님."
"대단하십니다."
"정말 감탄했습니다."
거미여왕의 눈알에 주먹을 박아 넣은 뒤 마법으로 뇌를 얼려버렸다는 이야기에 군사들이 감탄하자 르네는 에헤헤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손을 움직일 기운이 있었다면 뒷머리라도 긁적였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너희뿐인가?"
"예?"
유성의 물음에 지미가 반문한 그때였다.
쿵! 쿵! 쿵! 쿵!
군사들의 뒤편에서부터 땅울림 소리가 울리더니 일단의 무리가 오와 열을 이룬 채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을 다 가릴 것 같은 거대한 방패와 두터운 은빛 갑주.
눈구멍 외에는 모두 막혀 있는 단단한 투구.
갑옷 채로 상대를 박살 낼 것 같은 도끼 창까지.
스무 명으로 구성된 중갑 보병대의 등장에 지미와 군사들은 다들 놀란 얼굴이 되었다.
같은 편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당장 느껴지는 위압감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중갑 보병대, 왕의 부름을 받아 당도하였습니다."
중갑 보병대의 가장 좌측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무래도 중갑 보병대의 지미 같은 존재인 모양이었다.
그걸 느꼈는지 지미가 살짝 복잡한 시선을 보낼 때였다.
유성은 중갑 보병대에게 쉬라 말한 뒤 르네를 돌아보았고, 르네는 유성이 무엇을 하려는지 바로 이해하였다.
이제까지 새로운 병종을 추가하면 바로 연이어 추가했던 것.
[중갑 보병대에 부대장 추가 : 20pt]
유성이 상태창을 건드린 직후.
황금빛 섬광과 함께 새로운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같은 시각.
볼보 남작령 북부에 위치한 철벽의 신 옴팔로스를 모시는 철벽 교단의 수도원.
옴팔로스의 철벽은 인류를 수호하는 장벽을 의미하였으니, 자연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사들은 두 가지 분야에서 뛰어남을 보였다.
하나는 방어술.
방위를 위한 전투술 수련은 옴팔로스 교단의 사제들에게 있어서는 기도와 같았다.
그렇기에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사들은 비단 전투사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전투 능력을 갖춘 것이 보통이었다.
다른 하나는 건축술.
철벽의 신 옴팔로스의 가르침은 단순했다.
외적으로부터 인류를 지킬 방벽을 세우라.
그렇기에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사들은 건축술- 그중에서도 특히 방벽을 세우는 일에 뛰어났는데, 그 기술력은 세계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투에 능하고 건축술에 능한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사들.
여기에 성직자인 만큼 신성 마법도 사용할 수 있었으니,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사들은 어딜 가든 환영받기 마련이었다.
의사, 건축가, 전사의 일을 혼자서 모두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저 세 가지 일에 모두 능한 자는 교단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식 수도사들의 경우 다들 기본 이상은 하였으니, 환영받는 인재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섯 개의 왕국과 하나의 제국.
여섯으로 갈라진 세계 어디를 가도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을 찾아볼 수 있는 데에는 교단의 이러한 유용함이 근거가 되었다.
그런 옴팔로스 교단의 지부 가운데 하나.
실라테인 왕국 서부에 위치한 수도원은 그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답게 요새를 방불케 했다.
수도원 전체는 물론이고 주변 일대까지 두루 살필 수 있는 높은 첨탑의 최상층.
수도원장의 방에 자리한 대사제 질리언은 사제기사와 전투사제들이 죄다 자리를 비운 덕에 난민들만 가득하게 된 수도원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다 책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밝게 피운 촛불 아래에는 서신 두 장이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한 장은 수도원 북부에 위치한 카리안 백작령을 지배하는 카리안 백작의 것이었고, 다른 한 장은 허가도 없이 전투사제단을 몽땅 이끌고 나가버린 사제기사 루안의 것이었다.
"나쁜 사람들 같으니."
이러나저러나 한평생 성직자로 산 탓에 욕설에 대해 무지한 편인 질리언인 터라 '나쁜 사람들' 이상의 욕설을 입 밖에 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질리언은 괜히 창의적인 욕설을 짜내기 위해 끙끙거리는 대신 그냥 아는 욕을 한 번 더 하기로 하였다.
"진짜로 나쁜 사람들 같으니."
한숨을 푹 내쉰 질리언은 터덜터덜 걸어 책상 앞에 앉았다.
올해 나이 스물셋.
허리에 닿을 만치 검고 긴 머리칼을 가진 그녀는 분홍색 눈동자와 약간 처진 눈매가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예쁜 얼굴로 활짝 웃는 대신 미간을 좁히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카리안 백작은 밀려드는 난민들도 죄다 쫓아내고 볼보 남작령이 망하는 걸 구경만 하더니 일이 다 끝난 지금에서야 군사를 내보내니 난민을 수용하니 미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인구는 곧 힘이었으니 더 이상 트롤들이나 고블린들이 따라붙을 위험이 없어진 난민들도 흡수하고 덤으로 볼보 남작령도 일부를 꿀꺽 할 속셈이 분명했다.
물론 수도원의 비축 식량을 빠르게 소진시키고 있는 난민들을 이대로 데리고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은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미운 것은 미운 것이었다.
사제기사 루안은 더 미웠다.
누구는 난민들이 안 불쌍하고 볼보 남작령이 안타깝지 않았겠는가?
옴팔로스 교단의 전투사제들이 막강하다고는 해도 겨우 수십으로 뭘 어찌한단 말인가.
어설프게 나섰다가는 애꿎은 사상자만 늘릴 판이었다.
때문에 경거망동하지 말고 요새를 지키며 난민들을 수용하라 했던 것인데 그런 자신의 명을 어기고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이제는 아주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 대사제님도 로티안에 와보시면 알 겁니다.
"알긴 뭘 알아. 이 나쁜 사람이."
서신에 쓰인 글귀에 새삼 다시 화가 난 질리언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른 채 생각에 잠겼다.
'일단 백작.'
사실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수도원의 비축 식량도 간당간당하니 그냥 난민들을 백작령으로 올려 보내면 될 일이었다.
조금 얄밉긴 해도 크게 보면 그도 결국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영지를 지켜낸 게 되었으니 난민들을 보내면 안 될 이유가 없었다.
'다음은 루안.'
일단 죽거나 다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로티안의 영주를 도와 트롤들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구했으니 이러나저러나 장하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래도 얄밉네.'
일 마쳤으면 재깍 사제들 데리고 돌아와서 경과도 보고하고 잘못도 빌고 무사한 얼굴도 보여주고 해야지 왜 안 돌아온단 말인가.
'이거 나보고 오라는 건데.'
이런저런 말들이 쓰여 있었지만 결국 질리언 자신보고 로티안에 오라는 내용이었다.
왜 이러는 것일까.
로티안에 오면 알 거라는 건 또 무슨 소리이고.
'영주한테 뭔가 있나?'
로티안의 흑기사.
최근에는 열화의 흑기사라는 이명이 추가된 남자.
그간의 행보를 보면 뭔가 있을 것 같기는 했다.
적어도 무척이나 강한 기사임에는 분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
단순히 강한 것만으로 루안이 지금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후, 어쩔 수 없지."
작게 중얼거린 질리언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서신들을 서랍 안에 넣고 봉한 뒤 창밖을 돌아보았다.
"로티안에 가자."
난민들 북부로 보내는 일이야 그냥 사제들 시켜도 될 일이었지만 루안 건은 결국 질리언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만 했다.
'갔는데 모르겠기만 해 봐라. 아주 혼을 내줘야지.'
마음 같아서는 참회실에 일주일은 가둬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골병이 날 가능성이 높으니 사흘 정도만 가둬둬야지.
마음을 정한 질리언은 조금이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꾸렸다.
수도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몇 년 만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흘 뒤 오후.
로티안에 도착한 대사제 질리언은 루안의 말대로 알게 되었다.
제12장 - 대사제 질리언
황금빛 아래 나타난 것은 거대한 덩치의 근육질 노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 아래 자리한 부리부리한 두 눈과 다시 그 아래 자리한 풍성한 수염.
그렇지 않아도 큰 덩치인데 여기에 두꺼운 중갑까지 걸치고 있으니 그 크기가 실로 굉장했다.
솔직히 말해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와."
르네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솔직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저 놀라움.
저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경이.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의 팔뚝 두께가 르네의 허리보다도 더 두꺼워 보였기 때문이다.
'나보다 거의... 머리 두 개 이상은 큰 거 같은데?'
유성 자신의 키가 180cm 중반이니 노인의 키는 작게 잡아도 230cm 전후는 된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압도적으로 거대한 남자.
회색 중갑을 걸친 남자의 왼손에는 마치 벽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사각 방패가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단두대의 칼날을 그대로 가져다 붙인 것 같은 거대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뭔가 로봇 같다.'
흉갑 부분에 사자머리 모양 장식이 붙어 있어서 그런지 사람보다는 어릴 적 보았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봇 같다는 생각이 드는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 노인이 유성을 비롯한 모두를 돌아본 뒤 도끼로 방패를 두드렸다.
"카멜롯의 영광을."
오른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대신 도끼와 방패로 예를 표하는 노인의 모습에 유성은 가슴을 펴고 주먹을 들어올렸다.
"카멜롯의 영광을."
"기사 헥토르, 인사드립니다."
"천유성이다."
유성이 눈을 마주한 채 이름을 밝히자 노인- 헥토르는 히죽 웃더니 다른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오랜만이다."
노인의 인사에 세 기사들은 복잡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희에 대해 잘 아시나요?"
서로 이름자 정도밖에 모르던 세 기사들이었다.
혹시 노인은 다른 것일까?
케이트만이 아니라 바나데인 역시 조금 기대된다는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모두의 시선에 노인은 다시 하하핫 웃더니 호쾌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잘 모른다. 하지만 이름은 알겠군.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기억이 난다. 그래, 케이트. 언제나 앞장서던 우리들의 선봉. 바나데인, 활잡이. 다이애나, 천공의 기사."
세 기사들의 특징을 정확히 포착해낸 호칭들이었다.
'바나데인만 호칭이 좀 미묘하지만.'
아무튼 바나데인이 활을 쏘는 것은 맞으니까.
유성은 감탄하는 케이트와 약간 놀란 표정을 짓는 다이애나, 그리고 살짝 기분 나쁜 얼굴의 바나데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세 사람은 헥토르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어?"
유성의 물음에 바나데인과 다이애나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는지 고개를 가로젓거나 입을 다물었지만 케이트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겨우 말을 만들어냈다.
"강합...니다. 네, 맞아요. 강합니다. 특히 완력이 대단합니다."
겨우 생각해냈다는 듯 케이트가 말하자 바나데인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힘이 센 건 그냥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다이애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트는 입술을 움츠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헥토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이 난다. 나는 두 번째로 힘이 강했다."
"두 번째로요?"
르네가 저도 모르게 묻자 헥토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래, 두 번째. 완력으론 내가 두 번째였지. 첫 번째는 아니었어."
"그럼 누가 제일 강했다는 거지?"
바나데인의 물음에 헥토르는 흐흣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건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군. 바로 대답은 못 하겠어."
거기까지 말한 헥토르는 다시 르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지? 아가씨가 왕의 마법사인가?"
르네의 키는 160cm 전후이니 둘 사이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키 차이가 있었지만 르네는 무서워하거나 움찔하는 대신 오히려 환한 얼굴이 되어 답했다.
"앗, 알아보셨군요! 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왕의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입니다."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통통 두드리기까지 하자 헥토르의 얼굴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흐흣, 왕의 마법사는 우리들보다도 더 왕에 가까운 존재. 당대의 왕을 잘 보필하게나."
"넵! 몸과 마음을 바쳐 왕을 보필하겠습니다."
르네가 씩씩하게 답하자 헥토르는 다시 웃더니 솥뚜껑 같은 손으로 르네의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하였다.
분명 화기애애한 광경이었지만 둘의 덩치 차이가 너무 크다보니 뭔가 불안한 광경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유성은 르네를 자신 쪽으로 슬쩍 끌어당긴 뒤 헥토르를 보며 말했다.
"헥토르,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나도 잘 부탁하오, 우리들의 어린 왕이여."
'어리다'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얕잡아 보거나 무시하는 투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친근함의 표시로 봐야 옳을 것 같았다.
물론 케이트는 용납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헥토르, 말을 가려주시죠."
케이트가 낮게 경고하듯 말하자 헥토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응, 그래. 이런 게 케이트 역할이기도 했으니까. 군기반장. 그래, 딱딱한 아가씨."
"어쩐지 알 것 같군."
바나데인이 슬쩍 말을 보태자 다이애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케이트는 살짝 화가 난 얼굴이 되어 작게 말했다.
"르네, 다 보입니다."
"합."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던 르네가 흠칫하며 입을 닫자 유성도 결국 작게나마 웃고 말았다.
"아무튼 다들 잘 부탁할게.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으니."
개척을 끝내고 볼 일도 얼추 끝난 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상태창 한쪽에 기존에 없던 귀환 버튼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성의 말에 케이트는 헥토르를 돌아보았고, 헥토르는 흐흣 웃더니 다이애나의 옆에 가서 섰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일렬로 서서 예를 표하는 네 명의 기사들에게 르네와 함께 예를 표한 유성은 르네의 손을 꼭 잡은 뒤 귀환 버튼을 눌렀다.
* * *
"다녀오셨어요?"
빛이 한 번 번쩍이고 나더니 장소가 바뀌었다.
유성 자신의 방 안.
눈앞에 서서 말을 건네는 것은 로빈이었다.
"아, 로빈. 그래. 잘 다녀왔다."
공간이동의 여파 덕분인지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는 가운데 유성이 말하자 르네 역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으... 기다린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어?"
안에서 보낸 시간은 다 합쳐서 두 시간이 되지 않았다.
르네의 물음에 로빈은 살짝 새초롬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두 시간이 조금 안 되었을 거예요."
아무래도 안과 밖의 시간의 흐름이 동일한 모양이었다.
"그보다, 정말 다녀오신 건가요? 그 성이라는 곳에?"
"응, 다녀왔어. 다들 만나기도 했고."
로빈의 물음에 르네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항상 상태창으로만 보던 유성 성을 직접 다녀왔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난 것 같았다.
"르네, 밤이 늦었으니 일단 로빈과 돌아가서 쉬도록 하자."
"아, 네. 계승자님.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르네도. 오늘 제일 멋진 활약은 르네가 했잖아?"
"헤헷."
유성의 치하에 르네는 뺨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러자 잠자코 있던 로빈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무슨 활약이요?"
"이따 이야기해줄게."
다시 흐흣 웃은 르네는 표정을 다듬은 뒤 유성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르네. 로빈도."
"물러가겠습니다."
르네보다는 조금 더 품위 있게 예를 표한 로빈은 그대로 르네와 함께 유성의 방을 나섰다.
"후우."
혼자가 되자 새삼 숨을 길게 내쉰 유성은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털썩하고 누웠다.
이 세상에 와서 이것저것 적응했지만 여전히 적응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일이었다.
'아무튼.'
똑바로 누운 유성은 상태창을 열었다.
유성 성을 비추자 이전보다 훨씬 거대해진 유성 성과 새로이 생긴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와하핫 웃고 있는 3등신 거인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케이트가 힘들어 보이네.'
처음에 활잡이 운운한 거 때문에 바나데인하고 알력이 생기면 어쩌나 했는데 오히려 케이트와 살짝 상성이 안 좋아 보이는 헥토르였다.
'아니, 오히려 상성이 좋은 거려나.'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도 있고.
'뭐, 알아서 잘 지내겠지.'
케이트는 케이트고, 헥토르도 제법 어른스러운 것 같았으니까.
마음을 편히 먹은 유성은 미간을 좁힌 채 한숨 쉬고 있는 케이트에게서 시선을 뗀 뒤 유성 성 전체를 돌아보았다.
새로운 건물들과 새로운 병종, 새로운 영웅.
"새로운 장비."
인벤토리에서 꺼낸 가레스의 방패를 한 차례 살펴본 유성은 몸을 길게 늘어트렸다.
개척은 성공적이었다.
메마른 목소리와 유성 성을 둘러싼 보라색 장벽 등 의문점이 생기긴 했지만, 어찌 보면 저것들 또한 개척을 통해 얻게 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개척을 하러 가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알지 못 했던 것들이니 말이다.
유성 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장벽 너머에서부터 들려온 메마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개척을 이어나가보면 알겠지.'
건물을 늘리고 유성 성을 가꿔나가면 다음 개척을 위한 초대권이 나타나리라.
마음을 편히 먹은 유성은 다시 유성 성의 모두를 바라보았고, 자연스레 미소를 머금었다.
* * *
사흘 뒤 오전.
집무실에 자리한 유성의 눈앞에는 여러 안건들이 쌓여 있었다.
피난민들의 관리 문제.
성벽의 복구 문제.
볼보 남작령으로 떠난 부대에서 보내온 소식.
로티안 남부에 위치한 파괴된 마을들에 대한 정찰보고 등등.
이세리나를 비롯한 행정관들의 설명을 들으며 안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유성은 침음을 삼켰다.
시몽 경이 말했던 것처럼 이세리나는 제법 유능한 행정관이었다.
이쪽으로는 사실상 문외한인 유성이 보더라도 제법 일이 잘 굴러가는 느낌이 들었으니 말이다.
피난민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자리를 줘 자급자족을 가능케 한다.
일손이 필요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성벽의 보수와 쓰러트린 괴물들의 해체에 필요한 인부, 전사자들의 빈자리를 채울 신병 등등.
'역시 괴물들의 시신은 돈이 되는구나.'
뼈나 가죽 같은 부산물들만이 아니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세계의 괴물들 역시 몸에 크든 작든 마석을 품고 있었다.
마석은 이름 그대로 마력이 담긴 돌이었기에 각종 마도구의 개발과 기동에 소모품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번에 해치운 트롤들은 다들 제법 커다란 마석을 품고 있어서 로티안의 예산 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카리안 백작은 아직 큰 움직임은 없는 것 같고... 문제가 있는 건 성벽 보수 쪽인가.'
코볼트들과의 싸움으로 반파된 남쪽 성벽.
성문조차 무너질 정도로 크게 부서진 성벽은 아직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건축가가 없어.'
성벽은 그냥 돌로 쌓아 만든 담벼락 같은 것이 아니었다.
튼튼하게 복구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기술자가 필요했다.
'일단 로티안에는 없는 거 같은데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하려나.'
언제 다시 로토 숲 방면에서 괴물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성벽의 복구를 서둘러야만 했다.
"이세리나 영애, 근방에서 건축 기술자를 구할 수 있을까요?"
유성의 물음에 이세리나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팔(八)자로 모으며 말했다.
"로티안에서는 전문적인 성곽 기술자를 찾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카리안 백작령에서 구하려면 구할 수 있겠지만 데려올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고요."
영민들의 이동이 영주의 통제를 받는 시대였다.
"그래도 한번 검토해 주세요. 성벽을 저대로 방치할 수는 없으니."
"네, 그리하겠-."
이세리나가 예를 표하며 물러나려던 순간이었다.
"주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루안 경의 목소리였다.
"들어와라."
유성이 허락하자 루안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보다 조금 상기된 얼굴이었다.
"루안 경, 무슨 일이지?"
유성의 물음에 루안은 기쁜 어조로 말했다.
"대사제가 도착했습니다."
질리언 예나트리.
옴팔로스 교단의 실라테인 왕국 서부를 담당하는 서쪽 지부의 장.
그의 등장 소식에 유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12장 - 대사제 질리언 (2)
로티안에 도착한 질리언은 적잖게 감동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길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옴팔로스 교단의 수도원에서 로티안까지는 말을 달릴 경우 이틀에서 사흘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말이 이틀에서 사흘이지 보통은 여행하다 쉬기 마련이었고, 당연히 그 장소는 마을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 수도원과 로티안 사이에 제대로 된 마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렀던 마을의 참상을 떠올린 질리언은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괴물들의 시체들과 마을 주민들의 시신들.
괴물들의 시체는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시신들은 아니었다.
죽음의 방식들이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다.
질리언은 몇 번이나 구역질을 한 뒤에 울면서 마을 입구에 쓰러져 있던 어린 아이의 시신 두 구를 땅에 묻었다.
온전한 시신이 아니었기에 아이들의 시신을 수습하며 손이 벌벌 떨리고 다시 구역질이 나왔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괴롭고 두려운 것은 둘째치고 시신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질리언은 울면서 기도한 뒤 마을을 떠났다.
그 후로 이틀 동안 질리언은 마을에 들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로티안에 도착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릴 뿐이었다.
질리언이 평범하게 여행했다면 닷새는 족히 걸릴 길을 사흘 만에 주파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물론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질리언의 행색은 꾀죄죄했고, 누적된 피로로 안 그래도 울상인 얼굴은 더욱 울상이 되어 있었다.
졸리고 배고프고 씻고 싶다.
이 세 가지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던 질리언에게 있어 남작령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를 가진 로티안의 성벽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일단 씻고 먹고 잔 다음에 일어나서 루안을 만나야지.'
당장은 무리다.
말에서 내리면 두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질리언은 성문 쪽으로 다가갔다.
로티안의 성문은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으으...."
줄이 제법 빠르게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수백 명이나 되는 인파다 보니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세월이 걸릴 것 같았다.
때문에 질리언은 생각했다.
새치기를 하면 어떨까.
성문에 가서 내가 옴팔로스 교단의 대사제라고 하면 바로 통과시켜 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통과시켜줄 거 같은데?
내가 한시라도 빨리 루안을 만나는 게 공익적으로 좋-은 거 같지는 않네....
다시 울상이 된 질리언은 흑흑 눈물을 삼키며 줄의 제일 끝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질리언 대사제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전투사제 필이 이쪽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투사제 필."
질리언이 반사적으로 말하자 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리언에게 다가왔다.
"예, 필입니다. 대사제님. 루안 경을 만나러 오신- 아, 열화의 흑기사님을 뵈러 오신 거군요?"
필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질리언은 어설프게 웃은 뒤 허리를 곧이 펴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필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고, 오랜만에 마주하니 그 또한 기뻤지만 무릇 대사제란 언제 어느 때고 최소한의 위엄을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
"루안 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질리언이 나름 위엄 있는 얼굴로 우아하게 말하자 필은 아, 또 저러시는구나- 하는 얼굴로 웃더니 성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시죠."
"알겠습니다."
고삐를 넘겨받은 필이 종자처럼 앞서 나가자 질리언은 주먹을 꾹 쥐었다.
줄을 서지 않고 바로 통과하는 게 기뻤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
"네, 대사제님."
"무사한 모습을 보니 기쁘군요."
"하핫, 대사제님과 흑기사님 덕분입니다."
필의 얼굴과 목소리를 보니 로티안의 영주에게 아주 푹 빠진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자인 것일까.
루안도 필처럼 흑기사에게 푹 빠진 상태인 것일까?
'좀 호감이 가긴 해.'
로티안을 구한 흑기사.
볼보 남작령의 사람들을 구하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준 열화의 성기사.
마을의 참상을 직접 보았기 때문인지 괴물들을 무찌른 로티안의 영주에게 마음이 가기는 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성문을 통과하니 더욱 커졌다.
로티안의 전경은 엉망진창이었다.
남쪽 성벽은 여기저기 무너져 있었고, 피난민들의 천막이 성벽을 따라 엉망진창으로 세워져 있어 외관상으로도 보기 흉했고 안 좋은 냄새도 났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활기가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큰 싸움이 두 번이나 있었고, 터전을 잃고 피난 온 이들도 많을 텐데 활기라니.
물론 무슨 축제라도 열린 것처럼 사람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시국에 비해 활기가 있어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것일까.
질리언은 그 이유를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지만 필은 답을 알고 있었다.
연달아 쟁취한 기적 같은 승리로부터 비롯된 활기였다.
이겼다.
이길 수 있다.
내일을 그릴 수 있다.
거기에 더해진 것이 영웅의 존재.
괴물이 사람을 죽이는 현실 속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영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전쟁영웅이라는 것이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있으면 이길 수 있다.
그와 함께라면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로티안에는 바로 그런 영웅이 존재했다.
코볼트의 왕자를 일대일 대결로 꺾고, 거대한 트롤들을 격파해 두 번이나 도시를 구한 열화의 흑기사가.
"루안 경은 내성에 계십니다."
필이 꺼낸 말에 주변을 돌아보던 질리언은 흠칫 놀라 움찔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필이 말을 내성 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성으로 바로 간다 → 루안을 바로 만난다 → 일단 씻고 자고 먹은 뒤 루안을 만난다는 계획이 헝클어진다.
"왜 그러시죠?"
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질리언은 아주 살짝 울상이 된 얼굴로 답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대사제의 몸으로 배고프고 졸리니까 일단 먹고 자고 싶다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던 질리언은 슬픔을 삼킨 채 의연한 표정을 지었고, 필은 고개만 몇 번 갸웃한 뒤 다시 내성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약 반 시간 뒤.
그나마 화장실은 다녀올 수 있었던 질리언은 로티안의 영주에 대한 호감도 점수를 조금 더 높였다.
화장실이 무척이나 깨끗했기 때문이다.
"후우."
대기실 의자에 앉은 질리언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루안을 기다렸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루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사제님."
"루안 경."
"오셨군요. 기다렸습니다."
루안이 활짝 웃으며 다가오자 질리언은 손바닥을 세워 그를 멈춰 세운 뒤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루안 경, 일단 경과 전투사제들이 무탈하다는 것에 감사하겠습니다. 옴팔로스 님께 감사 기도를."
질리언이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자 루안도 똑같이 기도를 했다.
그리고 직후.
기도를 마친 질리언은 루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저는 루안 경의 행동에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입니다."
멋대로 출진하여 자리를 지키라는 명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전투가 끝난 뒤에도 로티안에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으니 명령을 두 가지나 어긴 셈이었다.
"루안 경, 로티안에 도착하면 제가 알게 될 거라 하셨죠?"
루안이 지금처럼 행동한 이유.
"자, 알려주시죠."
질리언이 어서 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자 루안은 질리언에게 조금 더 다가서더니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주군께서 기다리십니다."
"잠깐, 주군? 설마 로티안의 영주를 말하는 건가요?"
"예, 제 주군이십니다."
"루안 경?"
교단에 속한 사제기사가 주군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거의 경악하는 질리언의 모습에 루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더니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일어나시죠. 대사제님도 주군을 뵈면 아실 겁니다."
무엇일까.
대체 뭘 알게 된다는 것일까.
'설마 로티안의 영주가 최면이라도 거는 건가? 마법이라든지.'
그럼 따라가는 것도 위험한 것이 아닐까?
막 나도 최면 걸려서 로티안의 영주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아니.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폭주하던 망상을 갈무리한 질리언은 미심쩍은 얼굴로 루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 끊어내긴 했지만 그런 망상이 들 정도로 의아한 루안의 행보였기 때문이다.
대체 뭘 봐서 그런 거지?
로티안의 흑기사가 사실 엄청난 미녀라 루안을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남자라던데?
혹시 마성의 남자?
다시 시작된 망상의 폭주였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물리적인 이유로 끊어지고 말았다.
로티안의 영주가 기다리고 있을 집무실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주군, 질리언 대사제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라."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루안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질리언은 숨을 크게 삼킨 뒤 루안을 따라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 사람이 로티안의 영주구나.'
영주의 의자 앞에는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이 아니라 흰색 계통 옷을 입고 있었지만 머리칼과 눈동자 색 때문인지 흑기사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기분이었다.
큰 키와 잘 짜인 몸.
이국적이지만 잘생긴 얼굴.
옆에는 눈에 띄게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칼의 미녀가 서 있었다.
질리언은 일단 로티안의 영주를 마주한 뒤 예를 표했다.
"옴팔로스 교단의 실라테인 왕국 서부 지부장을 맡고 있는 대사제 질리언 예나트리입니다."
"천유성입니다. 이쪽은 제 마법사인 르네 발투아입니다."
로티안의 영주- 유성이 부드러운 어조로 답하자 질리언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였다.
"잠깐, 발투아라면...."
"르네 발투아가 인사드립니다. 발투아 백작가의 차녀입니다."
르네가 케이트를 흉내 내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질리언은 얼른 표정을 수습한 뒤 마주 미소를 지었다.
발투아 백작가의 차녀라니.
그럼 로티안의 영주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게 발투아 백작인 건가?
서부 변경지대뿐만 아니라 실라테인 왕국 전체로 봐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힘을 가진 발투아 백작가였다.
루안이 말한 알게 될 거라는 것이 발투아 백작가와의 연결이었나?
'아니, 근데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루안이 권력을 좇는 성격인 것도 아니고.
질리언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자 루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더니 유성을 보며 말했다.
"주군."
"그래, 알겠다."
사실 유성도 꽤 놀란 상황이었다.
루안의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땐 배가 툭 튀어나온 속물적이고 탐욕스러운 노사제를 마주할 줄 알았는데 정작 나타난 것은 가녀린 외모를 가진 젊고 청순한 미녀 사제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진짜 될지도.'
루안이 말했던 설득법.
"대사제님, 봐주십시오."
짧게 말한 유성이 검을 뽑아들자 깜짝 놀란 질리언은 힉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던 터라 이번에도 당황한 유성이었지만 그랬기에 더욱 더 빨리 다음 단계로 진행했다.
질리언이 비명이라도 지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성왕십자검 제일검, 열화.
유성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칼날을 타고 황금빛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꺅."
질리언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여기까지 왜 부르나 했더니 설마 자신을 제거하려는 목적이었을 줄이야!
흑흑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질리언은 정말로 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정말로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대사제님, 괜찮습니다. 눈을 뜨고 보시죠."
다독이는 것 같은 루안의 목소리에 질리언은 살짝 실눈을 뜨고 정면을 보았고, 이내 눈을 깜박였다.
"아?"
유성의 검 끝에서 타오르는 황금빛 성화.
그 안에 담겨 있는 호수의 여신의 신성.
"어, 어떻게?"
카멜롯이 사라진 이래로 호수의 여신의 신성을 발하는 존재는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아니, 잠깐 설마?
질리언의 분홍빛 눈동자가 커지자 르네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유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 한번 소개드립니다. 호수의 여신께서 점지해주신 빛의 계승자. 성왕 아서 팬드래건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자. 천유성 님이십니다."
빛의 계승자.
마침내 돌아온 인간의 왕.
질리언은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린 채 루안을 돌아보았고, 루안은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사제님, 전 대사제님도 알아보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울보에 겁도 많고 은근히 속물적이지만 착하고 성실한 대사제였으니까.
질리언은 반사적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옴팔로스시여, 진정 인간의 왕이 돌아온 것입니까?'
정말로 답을 구한다기 보다는 너무 놀란 나머지 튀어나온 반사적인 기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렇다.]
머릿속에 들려온 목소리.
옴팔로스의 응답.
질리언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뒤 유성을 보았다.
아침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황금빛 성화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내 돌아온 인간의 왕.
루안의 말대로였다.
질리언은 알게 되었다.
제12장 - 대사제 질리언 (3)
성왕 아서 팬드래건.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인간의 세계를 건설한 자.
그렇기에 인간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자.
하지만 그의 치세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원정군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왕을 잃은 카멜롯은 자연스럽게 무너져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그날 이래로 인간의 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섯 개의 왕국과 하나의 제국이 건설되었지만 그들 가운데 누구도, 심지어는 대륙 최강을 자처하는 제국의 황제조차도 감히 인간의 왕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못하였다.
호수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
지혜와 용기로 무지와 공포를 몰아내 인간의 세계를 건설한 위대한 자.
그것이 성왕.
그것이 인간의 왕.
그렇기에 그 누구도 함부로 참칭할 수 없는 존재.
질리언은 가쁜 숨을 토했다.
너무도 놀란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간 품고 있던 많은 의문들이 오히려 시원하게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코볼트의 왕자와 거대한 트롤들을 연달아 쓰러트릴 수 있었을까?
인간의 왕이니까.
루안이 교단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주군으로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왕이니까.
어떻게 호수의 여신의 신성을 품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왕이니까!
"하아, 하아, 하... 성왕. 네, 그래요. 성왕이었군요.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질리언은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하였다.
의식하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육성으로 말하고 나니 좀 더 이해가- 아니, 납득이 되는 기분이었다.
로티안의 영주는 인간의 왕이다.
오백여 년의 공백을 넘어 마침내 인간의 왕이 돌아온 것이다.
가슴 벅찬 일이었다.
호수의 여신은 모든 인간의 신들을 이끄는 존재였으니, 옴팔로스 교단의 대사제에게 있어서도 인간의 왕은 실로 신성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신성한 존재를, 문자 그대로 성왕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말까지 섞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줄이야.
새삼 다시 뛰기 시작한 심장을 진정시키듯 가슴을 살짝 짓누른 질리언은 습관대로 옴팔로스에게 감사 기도를 올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별안간 번쩍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였다.
"자, 잠깐!"
인간의 왕이 돌아왔다.
그런데 인간의 왕의 귀환에는 한 가지 전설이 따라붙어 있었다.
인간의 왕이 돌아오는 때.
인간의 왕이 돌아와야만 하는 상황.
"저기, 저, 그럼, 그, 지, 진짜 흉성의 시대가 시작된 건가요?"
질리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묻자 르네가 우울하지만 단호한 얼굴로 답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흉성의 시대가 시작된다.
로티안과 볼보 남작령에서 일어난 전쟁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질리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마을에서 보았던 참혹한 광경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우욱!"
질리언이 헛구역질을 하며 비틀거리자 곁에 있던 루안이 깜짝 놀라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대사제님?"
"하아, 하아, 하...."
질리언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자신을 부축한 루안을 돌아보았다.
"괜찮, 괜찮아요."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괜찮다는 말을 쥐어짜낸 질리언은 의연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흉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분명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왕 역시 돌아오지 않았던가.
질리언은 유성을 돌아보았다.
질리언이 연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예상 밖의 모습에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질리언에게는 유성의 존재 자체가 많은 위안이 되었다.
"후우, 후우, 후.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 물이라도 좀 드릴까요?"
걱정 섞인 유성의 물음에 하얗게 질렸던 얼굴을 이번엔 새빨갛게 물들인 질리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네, 부탁드릴게요."
"르네."
"네, 계승자님."
르네가 얼른 집무실 한 쪽에 놓여 있던 주전자의 물을 따라 질리언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그냥 바로 마시기가 민망해 뒤로 반쯤 돌아선 질리언은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후우...."
그래도 물 한 잔 마시고 나니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일까.
그것과는 별개로 무언가 하나 중요한 것을 깜박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빼먹은 것.
인간의 왕과 흉성의 시대에 너무 놀라 만만찮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깜박하고 만 것.
"아!"
순간 번쩍하고 고개를 든 질리언은 다급히 루안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루안 경!"
"네, 대사제님."
"저, 저! 방금 옴팔로스 님의 신탁을 받았습니다!"
"예?"
루안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여기서 갑자기 신탁이라니.
거기다 다른 누구도 아닌, 평사제보다도 못한 신성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질리언 대사제가 신탁을 받았단 말인가?
놀라움이 가득한 루안의 얼굴을 마주한 질리언은 입술을 한 차례 깨물더니 다시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 제가 너무 놀라서 진짜 인간의 왕이 돌아온 것이 맞는지 묻는 기도를 올렸는데, 옴팔로스 님께서 대답을 해주셨- 아니, 루안 경. 그 눈은 뭐예요? 진짜라니까요?"
"음... 예, 믿겠습니다."
"아니이! 진짜라니까?! 착각이나 개꿈이나 환청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진짜 신탁이었다고요!"
질리언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 발까지 굴러가며 소리치자 루안은 몹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걸 지켜보던 르네는 유성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 어쩐지 대사제님의 기분을 알 것 같아요."
"그, 그래. 그렇구나."
어색하게 답한 유성은 다시 질리언 쪽을 보았다.
여전히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 때문인지 어느새 진지해진 루안이 질리언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사제님, 옴팔로스 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단순히 어르는 것이 아닌 진지한 어조였기에 질리언 역시 더 칭얼대거나 하는 대신 눈물을 닦아내고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그렇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짧은 한마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철벽의 옴팔로스께서 눈앞에 자리한 자가 인간의 왕임을 긍정하셨다.
질리언의 대답에 루안은 환희에 찬 얼굴로 유성을 돌아보았고, 르네 역시 환한 얼굴이 되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질리언 역시 유성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하얘졌다 빨개진 때문인지, 아니면 신탁을 받았기 때문인지 머리는 물론이고 온몸이 뜨거웠다.
마치 열병이라도 난 것처럼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질리언은 평소 신성마법과 거리가 멀었던 자신에게 옴팔로스의 신탁이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머리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질리언은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유성에게 말했다.
"성왕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
"예?"
"더는 못 버틸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질리언은 그대로 눈을 감더니 풀썩하고 제자리에 쓰러졌다.
"질리언 대사제?!"
깜짝 놀란 유성이 단에서 내려와 질리언에게 달려갔고, 바로 옆에 서 있던 루안도 다급히 쓰러진 질리언에게 손을 뻗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르네가 당황해서 묻자 질리언의 코 끝에 손을 가져다 댄 루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기절하신 것 같습니다."
작금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기절하고 말았다.
뭔가 참 당혹스러우면서도 눈앞의 질리언에게 어울리는 일 같았다.
그랬기에 유성은 절로 흐른 이마의 땀을 닦아낸 뒤 루안에게 물었다.
"그, 루안 경. 질리언 대사제는 어떤 사람이지?"
"보시다시피 좋은 사람입니다. 다만 신성력이 대사제치고는 많이 약한 편입니다."
"아, 그래서."
신탁을 가지고 왜 그런 촌극이 벌어졌나 했더니 애당초 신성력과 거리가 먼 자였던 모양이다.
'루안이 처음 질리언을 소개할 때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알 것 같네.'
질리언이 황금빛 성화에 담긴 신성력을 보지 못할까 봐 걱정한 이유.
유성 자신은 질리언이 타락한 사제라 그런가 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신성력이 약한 게 이유였던 모양이다.
"잠깐, 그럼 어떻게 대사제 직위에 오른 거지?"
질리언은 그냥 대사제가 아니었다.
대사제란 직위를 생각한다면 너무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다.
신성력이 강해서 빠르게 승급한 게 아니라 반대로 신성력이 약하다면 대체 무슨 수로 대사제가 된 것일까?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의아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딱히 본단에 문의를 하거나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루안 자체가 올곧은 성기사인 것도 있었지만, 질리언의 인품이나 일처리에 문제가 없으니 굳이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그보다 주군, 다른 누구도 아닌 질리언 대사제가 옴팔로스 님께 직접 신탁을 받다니... 역시 제 주군이십니다."
자신의 믿음이 증명받기라도 한 것처럼 환히 웃는 루안이었다.
워낙 잘생긴 루안이다 보니 무척이나 보기 좋았지만 그래서 더욱 부담을 느낀 유성은 어색하게 웃어준 뒤 르네에게 말했다.
"르네, 질리언 대사제를 부탁해도 될까?"
"네, 제게 맡겨주세요."
빙긋 웃은 르네는 마법으로 질리언 대사제의 몸을 허공에 띄운 뒤 유성과 루안에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루안, 너도 일단 나가서 쉬자."
"예, 그리하겠습니다."
루안이 기쁜 얼굴로 예를 갖춘 뒤 물러나자 방 안에는 유성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하아."
영주의 의자에 털썩하고 앉은 유성은 숨을 길게 내쉰 뒤 작게 웃었다.
새삼 지금의 상황이 재밌게 느껴진 탓이었다.
"질리언 대사제."
예상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지만 아무튼 이 정도면 잘 해결된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작게 웃은 유성은 몸을 길게 늘어트렸다.
* * *
다음 날 오후.
그간 쌓인 노독 때문인지 만 하루 만에 깨어난 질리언은 깨끗한 예복으로 갈아입은 뒤 유성 앞에 나섰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옴팔로스 님을 모시는 질리언 예나트리입니다."
하루 동안 푹 쉰 데다가 제대로 꾸민 덕에 어제보다 훨씬 더 미모가 살아난 질리언이었다.
르네가 성격과 달리 요염한 느낌의 미녀라면, 질리언은 성격 그대로 유순하면서도 청순한 느낌이 드는 우아한 미녀였다.
질리언이 다시 한번 예를 갖춘 뒤 말했다.
"옴팔로스 님이 직접 명하셨으니 저 또한 유성 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유성이 성왕의 계승자라 해서 질리언이 루안처럼 충성을 바치거나 주군으로 모실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평소 질리언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그저 예를 갖추고 물러나는 선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질리언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옴팔로스의 신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옴팔로스가 굳이 신탁까지 내리며 질리언의 기도에 응답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니, 그 의도는 둘째치더라도 옴팔로스가 신탁까지 내려줬는데 예만 표하고 물러서는 것은 옴팔로스의 사제로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대사제 질리언.'
루안을 통해 다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제법 유능한 인물이었다.
신성력이 약한 터라 신성마법 쪽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다른 쪽으로 비상한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질리언 대사제는 건축학과 수리학, 그리고 고문서 해독에 능통합니다.'
왕의 안목으로 보니 루안의 말 이상이었다.
그림과 작문에도 재능이 있으니 그냥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은 다 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행정 일도 시키면 잘할 거 같은데?'
이세리나의 내정 능력치를 100점 만점에 80점 정도라 한다면 질리언은 100에 가까운 90점대라 할 수 있었다.
삼국지로 치자면 간손미와 제갈량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마법에 르네가 있다면 내정에는 질리언이 있구나.'
내정 분야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꽉 찬 육각형 능력치를 갖춘 질리언을 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유성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유성 옆에 자리하고 있던 르네가 기대 섞인 얼굴로 질리언에게 물었다.
"질리언 님, 옴팔로스 교단 본단에도 연락을 할 수 있을까요?"
유성이 가진 신성을 통해 성직자들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이었다.
그렇다면 이를 이용해 옴팔로스 교단 전체의 지원을 받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당장 질리언이 옴팔로스의 신탁을 받았다는 사실만 전해도 효과가 상당할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런 르네의 기대와 달리 질리언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 할 수는 있지만 본단에서 제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아, 네."
대체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르네는 질리언의 얼굴이 더욱 우울해지자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일반 사제 이하의 신성력을 갖춘 대사제가 갑자기 신탁을 받았다면서 변방의 영주를 성왕이라 주장하면 믿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더욱이 옴팔로스 교단의 본단은 실라테인 왕국이 아닌 제국에 있었으니 애당초 소식이 오가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릴 터였다.
당장 아직도 영주직 계승에 대한 회답을 왕실로부터 받지 못하고 있는 유성 자신이지 않던가.
그랬기에 유성은 질리언을 위로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질리언 대사제님이 합류해주신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인걸요. 정말 감사합니다."
유성의 말에 질리언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르네랑 마찬가지로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저도 루안 경과 마찬가지로 로티안에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예, 성벽 복구의 감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문 분야라 그런지 제법 자신 있게 답하는 질리언이었다.
'이세리나한테 건축가 구해달라고 부탁한 건 취소해야겠네.'
빙긋 웃은 유성은 다시 한번 질리언의 합류를 환영했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질리언의 합류로부터 보름 뒤.
로티안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단은 성곽의 복구.
질리언이 합류하자 거짓말처럼 성벽 보수 속도가 빨라졌다.
단순히 복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강화라고 해야 할까.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조차 모르겠지만 전보다 더 튼튼한 성벽을 만든 질리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예 해자까지 파기 시작했다.
볼보 남작령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밀려든 피난민들 덕분에 일손은 남아도는 수준이었던 터라 공사 진행 속도는 쾌속을 유지했다.
시몽 경이 나선 물자 회수 작전도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었다.
시체로 가득한 볼보 남작령에서 식량뿐만 아니라 성벽 보수를 위한 자제까지 모조리 회수하는 대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수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는데, 특별한 수를 하나 쓴 덕분이었다.
"회수한 물자는 전부 너희 것이다."
고향을 잃고 무일푼이 된 난민들에게 있어서는 실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고향도 있고 가정도 있는 징집병들에게도 매력적인 제안이었고 말이다.
"물자 회수가 빨라서 좋긴 하지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시몽 경의 의문은 타당했다.
난민들의 배를 불리는 것도 좋지만 두 번의 전투로 인해 빠르게 소진되고 있는 로티안의 창고를 채우는 일 역시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시몽 경의 우려는 애당초 계획의 발안자였던 질리언에 의해 빠르게 해결되었다.
"어... 세금... 거두실 거죠?"
난민들이 챙겨온 것에서 세금으로 적절히 뜯어 가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에 시몽 경은 탄복했고, 유성 역시 감탄했다.
질리언과 시몽 경이 활약하는 동안 루안은 전투사제단을 이끌고 볼보 남작령 북부의 마을들을 순회했다.
물자 회수와 텅 비게 될 수도원의 자산을 회수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사실 한 가지 목적이 더 있었다.
카리안 백작에 대한 경계.
질리언이 운영하던 수도원의 난민들을 모두 흡수한 카리안 백작은 인도적 구조 목적 운운하며 볼보 남작령으로 슬금슬금 군사를 내려 보내고 있었다.
굳이 카리안 백작과 적대할 마음은 없는 유성이었지만 그렇다고 볼보 남작령의 물자를 공짜로 내줄 마음 역시 없었다.
루안 경이 전투사제단과 징집병들을 이끌고 북부 마을을 순회하는 한편 볼보 남작령의 정당한 상속자인 이세리나 영애의 이름을 내세우자 카리안 백작은 볼보 남작령 북부 언저리를 맴돌 뿐 섣불리 군사를 남하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보름 뒤.
트롤들과의 전투로부터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때.
남쪽에서부터 다시 불길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제13장 - 시체들의 밤
실라테인 왕국 서부에는 다섯 명의 백작이 존재했고, 그들 가운데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갖춘 이는 발투아 백작이었다.
하지만 발투아 백작의 경우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에 일반적인 백작들과 같은 선에 놓고 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발투아 백작을 제했을 때 서부 제일을 칭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일 것인가.
의견이 분분했지만 보통은 나머지 넷 중 둘로 후보가 좁혀지고는 했다.
비옥한 곡창지대를 가진 아르투아 백작과 철광을 가지고 있는 카리안 백작.
만약 두 백작의 영지가 서로 인접해 있었다면 크든 작든 소란이 있었겠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영지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카리안 백작령은 서부 변경지대와 중앙을 잇는 부분에 위치했고, 아르투아 백작령은 사실 서부라기보다는 남부에 가까운 위치였다.
두 영지 사이에는 몇 개인가 되는 남작령들이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볼보 남작령이었다.
"결국 볼보 남작령은 공백지로 남게 되었군."
카리안 백작령 내에서도 가장 발달한 도시인 기셴.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집무실 안에서 카리안 백작은 도시의 전경이 아닌 책상 위의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볼보 남작령은 괴물들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볼보 남작의 딸인 이세리나가 살아남기는 했지만 애당초 한 번 시집갔다가 돌아온 미망인에 불과했다.
평소였다면 정략혼이든 납치혼이든 밀어붙여서 진즉에 볼보 남작령을 집어삼켰을 카리안 백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로티안의 흑기사.'
라투스 남작의 뒤를 이어 로티안의 영주가 된 이국의 기사.
이세리나는 카리안 백작 자신이 아닌 로티안의 흑기사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그 결과 볼보 남작령은 사실상 로티안의 흑기사 손에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만치 않은 자이다.'
갑자기 어디서 솟았는지 알 수 없는 놈이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자였다.
놈의 무위에 대한 소문 가운데 절반만 진짜여도 서부 제일의 기사를 자처함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코볼트의 왕자를 단신으로 참한 자.
마법사 하나만을 데리고 볼보 남작령을 횡단하며 수많은 고블린들과 트롤들을 참하고 백성들을 구한 자.
성만한 크기의 거인 트롤을 쓰러트린 트롤 슬레이어.
그런데 놈이 가진 것은 무력만이 아니었다.
본인의 지혜든, 아니면 항상 데리고 다닌다는 마법사의 지혜든 놈은 제법 영리한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남작령을 먹지 않았어.'
놈은 이세리나라는 명분을 손에 쥐고 있음에도 볼보 남작령을 취하지 않았다.
놈이 가져간 것은 그저 로티안 근처에 있는 마을 하나와 볼보 남작령의 물자뿐이었다.
물론 남작령 전체의 물자이니 그 양이 결코 적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는 볼 수 없는 행보였다.
그런데 놈은 어째서 그리했을까.
답을 구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카리안 백작 자신이 볼보 남작령을 그저 방관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유일 터이니 말이다.
'언제 다시 괴물들이 밀려들지 알 수 없다.'
세간에는 흉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겁주기 위한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지던 예언이었지만 이제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로티안과 볼보 남작령뿐만 아니라 실라테인 왕국 곳곳에서 괴물들의 군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격받은 것은 실라테인 왕국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네 왕국들과 제국 역시도 괴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물론 소문일뿐 아직 진위 여부가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실라테인 왕국 전역이 공격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발투아 백작령과 남부 아르투아 백작령에 괴물의 군세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말이다.
라투스 남작령을 공격한 코볼트들은 미개척지인 로토 숲 너머에서부터 밀려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볼보 남작령을 친 고블린들과 트롤들 역시 로토 숲과 이어진 미개척지에서 나타났으니, 언제 또 새로운 괴물의 군세가 미개척지에서부터 밀려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볼보 남작령은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다.
이미 파괴된 땅을 억지로 흡수해 지켜야 할 곳을 늘리는 것은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물론 로티안의 경우엔 우리보다 여력이 훨씬 부족한 것도 이유겠지만.'
애당초 로티안은 고작해야 남작령의 도시였다.
남작령들 중에서는 제법 큰 편이었지만, 백작령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큰 전투를 두 번이나 치르기까지 했으니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자로군.'
이번에 놀란 것은 그 무위와 볼보 남작령을 취하지 않고 물자만 흡수한 영리함 때문이 아니었다.
놀란 것은 로티안의 흑기사가 보여준 수완이었다.
'옴팔로스 교단 서부 지부를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성직자이긴 하나 동시에 기사이기도 한 사제기사 루안은 전장에서 함께 싸우기까지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사제인 질리언까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줄이야.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질리언 대사제가 겁이 많고 울보이기는 해도 사리 분별은 똑바로 하는 자인데.
'협박이라도 한 거려나.'
평소 모습만 보면 우아한 미녀지만 실상은 겁 많고 소심한 울보에 가까운 질리언 대사제의 얼굴을 떠올린 카리안 백작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협박당해 엉엉 우는 질리언 대사제의 얼굴은 너무나 쉽게 떠올랐지만, 막상 그녀가 협박에 굴해 누군가의 수하를 자처하는 모습은 영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여자니까.'
신성력이 약해서 그렇지 무척이나 신실한 자이기도 했다.
협박에 굴해 세속 군주에게 무릎 꿇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럼 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질리언 대사제를 움직인 것일까.
"각하께서는 질리언 대사제를 무척이나 높이 평가하시는군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하고 있자 조용히 시립해 있던 호위기사 루이즈가 낮게 말했다.
카리안 백작이 속으로 한 고민이지만 얼굴만 봐도 대충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는 투였다.
"높이 평가할 만한 여자니까. 수도원에만 처박아 두기에는 아까운 능력을 가진 여자다."
카리안 백작의 말에 루이즈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톡 쏘듯이 말했다.
"그냥 예뻐서 그런 거 아닙니까?"
"질리언 대사제가 좀 많이 미인이기는 하지. 자꾸 괴롭히고 싶어지는 마성의 매력도 갖추고 있고. 왜, 혹시 질투라도 하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약간이지만 토라진 어조로 답한 루이즈가 입을 꾹 닫자 카리안 백작은 그저 쿡쿡 웃은 뒤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볼보 남작령이 함락되고 한 달.'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 역시 아니었다.
'정말 흉성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라면... 이제부터가 시작이겠지.'
지도에서 눈을 뗀 카리안 백작은 창밖을 돌아보았다.
로티안과 볼보 남작령의 서쪽- 로토 숲이 있는 방향이었다.
* * *
같은 시각.
로티안의 서쪽 성벽에는 수십 명의 인부들이 저마다 술잔 하나씩을 들고 단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고기가 잔뜩 쌓인 접시들 외에도 두 사람이 올라가 있었는데, 검은 머리칼을 길게 기른 분홍 눈동자의 여인과 짙은 보라색 머리칼을 어깨 길이까지 기른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었다.
흑발의 여인- 질리언 대사제가 두 손으로 컵을 꼭 잡은 채 인부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 덕분에 무사히 공사가 끝났습니다. 모두들 정말 감사합니다."
질리언답게 작은 목소리였지만 모두들 집중하고 있었기에 전달에는 문제가 없었다.
공사 책임자인 질리언의 짧은 인사가 끝나자 르네는 뭐 더 할 말 없냐는 눈으로 질리언을 보았고, 질리언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르네는 시원하게 웃더니 인부들을 돌아보며 활기차게 말했다.
"자, 영주님이 돌리신 술과 고기예요. 모두들 한잔할까요?"
찡긋하고 윙크까지 하니 인부들이 얼굴을 붉히며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을 들어올렸다.
르네는 그런 인부들의 술잔에 건배하듯 자기 술잔으로 가볍게 허공을 치더니 그대로 높이 들며 소리쳤다.
"로티안을 위하여!"
"위하여!"
"유성 님을 위하여!"
"위하여!"
"마시자!"
"마시자!"
르네를 따라 수십 명의 인부들이 동시에 외치니, 그것만으로도 모두의 기분이 고조되었다.
잔뜩 신이 난 르네는 이번에도 선창하듯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꿀꺽꿀꺽.
한 번에 잔을 비우겠다는 듯 멈추지 않고 마셔대자 인부들이 오오오 감탄하며 르네의 가늘고 긴 목과 꿀렁이는 목울대를 바라보았다.
"캬!"
마침내 잔을 비운 르네가 빈 잔을 머리 위에서 뒤집자 인부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마셔요! 마셔! 구경만 할 거예요?"
르네의 질책 아닌 질책에 인부들은 와 하고 웃으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그런 인부들의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보던 르네는 질리언 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질리언 대사제님도 진짜 수고 많으셨어요."
"모두가 노력해준 덕분이죠."
질리언은 수줍게 뺨을 붉히며 말했고, 어느새 새 술잔을 들고 온 르네는 건배하자는 듯 술잔을 흔들었다.
질리언이 합류하고 한 달 남짓.
질리언은 코볼트의 군세와의 싸움으로 무너진 서쪽 성벽을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로티안의 외성을 에워싼 해자까지 완성하였다.
물론 말이 해자지 그냥 성벽을 따라 땅을 길게 판 것에 불과했지만 그렇다 해도 해자는 해자였다.
물이 흐르지도 않고, 폭과 깊이가 각각 2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성의 방어력이 상당히 증대될 것이란 것은 이쪽 방면에 문외한인 르네조차도 쉬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걸 기본으로 해서 더 넓고 깊은 해자를 만들 겁니다. 성벽도 더 보강할 거고요."
질리언이 평소와 달리 제법 다부진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목소리와 눈빛에 성취감과는 종류가 다른 즐거움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성벽을 세우고 해자를 파는 일 자체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이 팍팍 났다.
'하긴, 철벽의 옴팔로스를 모시는 입장이니까.'
옴팔로스 교단의 대사제가 성벽 세우는 일을 즐거워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터였다.
"두고 보세요. 로티안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테니까."
두 손으로 술잔을 꼭 쥔 채 질리언이 웃으며 말했다.
내용이야 둘째치더라도 반짝이는 눈빛과 살짝 달아오른 뺨 덕분에 마치 꿈꾸는 소녀처럼 보였다.
그랬기에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르네는 적당히 좋은 말을 입에 담았다.
"질리언 대사제님이 합류해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옴팔로스 님의 안배시니까요."
다시 수줍게 웃은 질리언은 르네처럼 호탕하게는 아니었지만 찔끔찔끔이나마 술을 마셨다.
"다들 즐기고 있군."
"계승자님."
언제 왔는지 유성이 다가오자 르네가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었고, 질리언은 얼른 예를 표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질리언만이 아니었다.
단상 아래에 있던 인부들도 유성을 알아보고 엉거주춤하게나마 예를 표하자 유성은 괜찮다는 듯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르네가 재빨리 내민 술잔을 받아 들고 외쳤다.
"다들 수고했다. 마음껏들 먹고 마셔라."
"우오오!"
"영주님 만세!"
"열화의 흑기사 만세!"
환호성을 지른 인부들이 다시 술과 고기를 즐기기 시작하자 유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르네와 질리언 쪽으로 돌아섰다.
"헤헷, 영주님 쑥스러워하시기는."
그새 좀 취했는지 르네가 으흐흐 웃으며 말하자 유성은 긍정이나 부정을 하는 대신 질리언에게 말했다.
"해자도 그렇지만 완공된 성벽에 놀랐습니다. 전보다 훨씬 견고해 보이더군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질리언도 술기운 덕분인지 수줍게나마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그런데 성직자가 술 마셔도 되는 건가.'
옴팔로스 교단은 상관없는 걸지도.
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한 잔을 더 비운 르네가 물었다.
"유성 님, 이세리나 언니 쪽은 어때요?"
케이트도 그러더니 이세리나도 어느새 언니였다.
유성은 친화력 좋은 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마석 판매 루트를 확보했어. 본래 인연이 있는 상단이라더군."
"진짜요? 다행이다."
괴물들에게서 회수한 마석은 로티안과 라투스 남작령 내에서는 소화할 수 없는 물품이었다.
유성 성의 대장장이들이 일부 요청을 하긴 했지만 남는 양이 워낙 많은 터라 외부로 판매해야 했는데 다행히 이세리나를 통해 판매 루트를 구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즐겁게 놀아. 르네도 그간 고생이 많았잖아?"
기습 치하에 르네는 뺨을 붉히며 웃더니 약간은 조르듯이 말했다.
"헤헤헷, 그럼 상태창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얼마든지."
르네의 취미는 유성 성 관찰이었으니까.
유성이 수락하자 르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따 밤에 영주님 방에 갈게요."
"그래."
사실 오늘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유성 성 구경하러 유성의 방에 자주 들락거리는 르네였다.
때문에 둘 사이에서는 매우 건전한 대화였지만 사정을 모르는 질리언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밤에 방으로 찾아간다는 말을 하는 마법사와 그걸 좋다고 수락하는 영주라니.
질리언이 눈동자를 휙휙 굴리는 가운데 또 다른 남녀 한 쌍이 단상에 다가섰다.
로빈과 에드가였다.
두 사람을 발견한 유성은 르네와 질리언에게 적당히 인사말을 남긴 뒤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예를 표하는 로빈과 에드가에게 답례한 유성은 둘과 함께 내성 쪽으로 걸으며 보고를 받았다.
"발투아 백작령과 아르투아 백작령 모두 괴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이쪽과 달리 군대 단위의 대대적인 침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문에 따르면 이 근방 일대만이 아니라 미개척지와 인접한 왕국 전역에서 괴물들이 출몰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는 예상대로의 이야기였다.
"발투아 백작령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노파심에 다시 묻자 로빈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발투아 백작령은 서부 제일의 강군을 보유하고 있고 이브나일 단장과 기사단 역시 있으니까요."
그래도 걱정이 되긴 하는지 말이 조금 길어졌지만 정말로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왕국 전역이 공격받고 있다.
로빈과 에드가에게 보고 받지는 않았지만 아마 다른 왕국들과 제국 역시도 괴물들의 공격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개중에는 볼보 남작령처럼 아예 초토화된 지역 역시 존재할 터였다.
흉성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면한 사태였다.
유성은 로토 숲 방향을 돌아보았다.
로토 숲 너머에서 쳐들어온 코볼트들.
놈들은 격퇴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언제 또 다시 새로운 괴물의 군세가 밀려들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알 수 없는 게 아냐. 놈들은 반드시 온다.'
유성은 로티안 서쪽 방면의 마을들을 복구하지 않은 이유였다.
"정찰병들의 정기 보고는 어떻게 되었지?"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이상 없다고 합니다."
로토 숲 방면에 파견해둔 정찰병들의 이야기였다.
르네가 마법으로 만든 신호탄과 연기 신호 등을 통해 하루에 두 번씩 서쪽 방면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알겠다. 두 사람도 이제 그만 쉬도록."
"예, 영주님."
예를 표한 두 사람은 단상 위의 르네에게 다가갔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성은 다시 한번 로토 숲 방향을 돌아보았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13장 - 시체들의 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