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 로티안
[악적 토벌: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피난민 구조: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전투는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성이 케이트와 피난민 무리 앞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남아있는 코볼트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 머리, 가슴 셋 중 하나에 화살이 박힌 코볼트 십여 마리가 바닥을 뒹굴었고, 순식간에 열 마리 이상이 죽어 나가는 것을 목격한 코볼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왔던 방향으로 도망쳤다.
"...대단하긴 하군요."
케이트가 쓰러진 코볼트들을 보며 작게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뭐랄까, 르네와 로빈이 순수하게 감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에 가까운 감탄이긴 했다.
본인들 말마따나 기억이 흐릿하지만 본래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거나 아니면 어제 바나데인이 유성에게 다소 건방지게 행동한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케이트지 않던가.
더욱이 어제 보니 바나데인도 겉으로만 툴툴거릴 뿐 정말로 벽을 세우고 건방을 떨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일단 사람들을 수습하자."
"네, 계승자님."
유성과 케이트가 군마에서 내려 간신히 살았다며 헐떡이고 있는 피난민들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기사님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반쯤 정신을 놓고 있던 피난민들 가운데서 그래도 정신줄을 붙잡고 있던 남자가 유성과 케이트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피난민들 역시 감사를 표하거나 고개를 숙여댔다.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유성은 제일 먼저 말을 꺼냈던 장년의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지쳐서 힘들겠지만 이동할 수 있겠습니까? 저기 언덕까지만 가면 됩니다."
유성이 바나데인과 궁수 부대가 서 있는 언덕을 가리키자 장년의 남자와 피난민들 모두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도 코볼트들의 시체가 굴러다니는 이곳보다는 군사들이 자리한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플랑메 마을 쪽에서 왔습니다."
상단 소속 상인이라고 자신을 밝힌 남자의 말을 들어보니 유성이 어제 있었던 마을과 대동소이한 상황이었다.
남자와 피난민들은 모두 같은 상단 소속이며 플랑메 마을로 향하던 도중 불과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급히 도망친 덕에 그나마 여기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설명을 마친 남자가 인사를 한 뒤 피난민들 사이로 돌아가자 르네가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말했다.
"플랑메 마을도 로토 숲의 인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르네가 바닥에 그린 지도를 보니 로토 숲 인근에 로토 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산 부근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서쪽에서 코볼트들이 밀려오고 있는 상황인가.'
로토 숲과 로토 산 모두 방위를 따지자면 서쪽이었다.
"서쪽의 다른 마을도 공격받고 있다면... 각지에서 밀려온 놈들이 합류해 로티안을 공격하려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르네가 그린 지도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로빈이 말하자 유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침공당한 마을들.
코볼트가 죽기 전에 말한 코볼트 왕자의 존재.
'코볼트의 왕자가 서쪽 일대의 코볼트들을 이끌고 왕국을 침공한다.'
르네의 지도대로라면 플랑메 마을 위쪽으로도 작은 마을들이 몇 개나 더 있는 상황이었다.
그 마을들 모두가 동시에 공격받았다 생각한다면 코볼트들의 숫자는 수백을 넘어 일천을 우습게 헤아릴 가능성도 있었다.
"다시 길을 서두르자."
유성의 말에 일행들 모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티안까지 남은 거리는 앞으로 하루 남짓.
유성은 르네와 로빈, 에드가를 돌아보더니 누구랄 것 없이 물었다.
"로티안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성의 방어는 어떠한지, 도시를 다스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유성의 물음에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잠깐의 눈빛 교환 후 로빈이 입을 열었다.
"로티안은 이 근방을 다스리는 라투스 남작의 도시입니다. 발투아 백작님과는 오래전부터 교분이 있던 분이시죠."
"그, 삼촌 같은 분이세요."
르네의 첨언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주인이 르네와 잘 아는 사이라면 이러나저러나 합류했을 때 힘을 합치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로빈이 계속해서 말했다.
"로티안은 왕국이 통일되기 이전 시대에 있던 소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라 변방 도시치고는 성곽이 높고 두터운 곳입니다."
꽤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당초 변방에 위치한 도시였던 터라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야기대로라면 제법 그럴싸한 성곽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사가 많지는 않겠지?"
유성의 물음에 로빈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변방의 도시치고는 제법 큰 편이지만 상주하는 병사의 숫자는 수십 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후방에서 라투스 남작의 기사들이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합류한다면... 그리고 도시 내에서 징병을 한다면 당장 300에서 400 정도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딱히 위협도 없는 변방의 도시에 수백 명이 넘는 병력이 상주하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
대부분이 농노 부대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지만 그래도 성곽을 끼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지금까지 침묵하던 에드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라투스 남작님은 젊은 시절 명성이 널리 퍼질 정도로 뛰어난 기사셨습니다. 상무정신을 강조하는 분이신 만큼 지금도 휘하에 그 수가 적지만 잘 훈련된 정예병을 기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무명을 떨치던 기사 영주와 그가 신경 써서 기른 소수의 정예병들.
이 역시 기쁜 소식이었지만 유성은 어쩐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야기들 고마워. 서두르자."
"네, 계승자님."
르네가 대표로 답하자 일행은 다시 입을 다문 채 길을 서둘렀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로티안 인근에 거의 다다르자 피난민들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이제 곧 안전한 성곽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로가 된 모양이었다.
그런 피난민들의 모습을 돌아본 르네가 작게나마 미소를 짓자 유성이 문득 물었다.
"르네, 라투스 남작과는 많이 친해?"
"네? 어... 네. 절 많이 귀여워해주셔서요."
뭔가 부끄러운 옛일이라도 떠오른 것인지 르네가 뺨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조용히 곁을 따르던 로빈이 말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한 말씀 드리자면, 아가씨께서 인사도 없이 지나갔다고 서운해하셨습니다."
"가출 중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
르네의 말대로라면 계시인 걸 증명하겠다고 혼자 집을 나온 마당이니 라투스 남작에게 어떻게 인사를 하러 가겠는가.
약간이지만 놀리는 기색이 섞인 유성의 말에 로빈은 바로 그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르네는 입술을 움츠리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가출이 아니라 계시를 받고 떠난 성스러운 여정이었는데요...."
실제로 빛의 계승자인 유성도 만났고.
하지만 그래도 가출은 가출이었고, 애당초 르네를 놀려주려고 말을 꺼낸 유성과 로빈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항변하는 대신 입술을 삐쭉이기 시작한 르네의 얼굴을 구경하던 유성과 로빈, 에드가가 거의 동시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인간을 초월한 기사의 청각이 먼 곳에서 들려온 소리를 감지한 것이었다.
"르네! 빛의 새를! 로빈, 피난민들을 멈춰 세워라!"
유성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르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서둘러 마법을 시전했고, 로빈은 피난민들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직후.
빛의 새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마자 르네가 비명처럼 외쳤다.
"싸우고 있어요!"
"라투스 남작이 성 밖으로 나와 싸우고 있는 건가?"
"마, 맞아요! 어떻게?"
르네가 깜짝 놀라 되물었지만 유성은 설명해주는 대신 다시 로빈 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로빈! 피난민들에게 인근에 숨어있으라 해라. 르네! 업혀!"
"네? 아, 네!"
르네가 폴짝 뛰어 등에 업히자 유성은 그녀를 단단히 붙잡은 뒤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에드가! 로빈과 함께 따라와라!"
"옙!"
갑자기 일행이 자신들을 두고 뛰어나가자 피난민들이 극도로 당황했지만 그들을 돌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젊은 시절 무명을 떨친 영주.
그가 키운 소수지만 잘 훈련된 정예병의 존재.
눈앞에 나타난 코볼트 무리.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놈들을 당장 쓸어버리겠다 소리치는 영주.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광경이 머릿속에 절로 떠오를 지경이었다.
물론 라투스 남작이 정말 뛰어난 무용을 발휘해 코볼트들을 쓸어버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그런 상황이면 르네가 어째서 비명 같은 외침을 질렀겠는가!
"으아아!"
"크헝! 컹!"
"영주님을 지켜라!"
전장이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로티안의 성곽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정확히는 거대한 늑대 위에 탄 코볼트가 휘두른 철퇴에 맞은 기사가 낙마하는 광경이었다.
면갑을 쓴 데다 애당초 얼굴이 보이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붉은색으로 도색한 갑옷만으로도 충분하였는지 르네와 로빈, 거기에 에드가까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위고 아저씨!"
"라투스 남작님이!"
"남작님!"
콰쾅!
기사- 라투스 남작이 바닥에 떨어졌다.
낙법이고 뭐고 없는 무자비한 착지에 르네가 다시 비명을 질렀고, 유성은 눈을 크게 떠 전장 전체를 눈에 담았다.
성 밖에 나와 있는 라투스 남작의 병력은 50 남짓.
기병은 예닐곱, 나머지는 모두 창병.
코볼트들의 숫자는 70에서 80.
모두 보병.
늑대에 탄 것은 라투스 남작을 날려버린 큰 놈뿐.
"케이트! 집결하라!"
업고 있던 르네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외치자 금빛 섬광과 함께 군마에 탄 케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성은 군마 위에 올라 케이트 뒤에 탔고, 상황을 바로 인지한 케이트는 전장을 주시했다.
"먼저 간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쓰러진 라투스 남작 주위로 코볼트들과 병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궁수 부대! 집결하라!"
달리던 와중에 외치자 등 뒤로 금빛 섬광과 함께 바나데인과 궁수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설명할 시간 따위 없었기에 유성은 바로 명령했다.
"쏴!"
이해했다.
궁수 부대는 바로 반응하지 못했지만 바나데인이 섬광 같은 속도로 활을 쏘았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 한 대가 유성과 케이트를 앞질렀다.
"크앙!"
쓰러진 라투스 남작을 향해 달려들려던 코볼트 한 마리가 머리에 화살을 맞았다.
그리고 그 순간 궁수 부대들 역시 화살을 쏘아댔다.
파파파팟!
바나데인과는 달랐다.
직사가 아닌 곡사였고, 그나마도 라투스 남작의 병사들이 맞을까 두려워 옆으로 쏴댔기에 코볼트들을 맞춘 화살은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견제의 효과는 충분했다.
난데없이 옆에서 날아온 화살을 보고 깜짝 놀란 코볼트들이 고개를 돌렸고, 라투스 남작을 날려버린 코볼트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졌다.
놈들이 고개를 돌리고 당황한 그 순간에도 케이트는 앞만 보고 달렸고, 어느 순간 포효하듯 외쳤다.
"카멜롯의 영광을!"
파앗!
찬란한 황금빛이 일었다.
농노 부대는 아직 나오지 않았고 궁수 부대는 멀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빛에 다시 한번 코볼트들이 놀라 자지러졌고, 라투스 남작의 병사들은 힘과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황금빛 속에서 군마가 달렸다.
거리를 좁혔고 마침내 당도하였다.
콰앙!
군마가 코볼트를 치었다.
그러고도 전진했고, 케이트가 깃발을 들었다.
어느새 안장 위로 올라앉은 유성이 안장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촤악!
공중에서 휘두른 검에 코볼트 한 마리가 베여 나자빠졌다.
착지하자마자 유성은 다시 검을 크게 휘둘러 공간을 만든 뒤 약속된 외침을 내질렀다.
"농노 부대! 집결하라!"
"우오오오오!"
흐릿한 빛과 함께 스무 명의 농노 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트가 주변에 있기 때문인지 등장하자마자 함성을 지른 그들은 눈앞의 코볼트들을 보고 도망치는 대신 무기를 휘둘렀다.
"키악!"
"켁!"
갑자기 스무 명이나 되는 병력이 눈앞에 나타나 공격을 퍼부어대는 상황이었다.
코볼트들은 큰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성은 목표를 포착했다.
거대한 늑대 위에 탄 코볼트.
코볼트 무리를 이끄는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4장 - 로티안 (2)
부대를 벗어나 지휘관이 홀로 적진에 파고든다.
실로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해야만 거둘 수 있는 승리 역시 있는 법이었다.
'일곱 걸음.'
유성은 거대한 늑대 위에 탄 덩치 큰 코볼트- 개 탄 개라 부를 수 있을 놈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기본적인 거리 가늠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유성의 것은 조금 특별했다.
무척이나 정밀한 거리 측정.
자신과 상대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체와 물체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대상의 길이나 너비가 얼마나 되는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거의 정확하게 거리를 잴 수 있었다.
하지만 유성의 능력은 단지 그것만이 아니었다.
판타지 모나크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던 능력.
유성은 공방의 간격을 잴 수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느끼는 것에 가까웠다.
유성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 속에서 적과 자신이 그리는 동세의 선이 서로 만나는지 여부를 느낄 수 있었고, 이를 걸음으로 표현했다.
한 걸음이면 공격이 닿는다.
두 걸음 이상이면 닿지 않는다.
이는 훈련을 통해 쌓은 능력이 아니었다.
기사도처럼 이 세계로 넘어오며 생긴 능력 역시 아니었다.
유성이 타고난 능력.
태어났을 때부터 지니고 있던 본연의 힘.
판타지 모나크는 물론이고 현실에서도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적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이 능력 덕분이었다.
'다섯 걸음.'
라투스 남작을 공격하기 위해 전열에 자리하고 있던 놈이었다.
그러니 적진 깊숙이 파고들 것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유성을 발견한 놈이 용력을 자랑하듯 늑대를 몰아 앞으로 튀어나왔다.
'세 걸음.'
간격이 더욱 좁아졌다.
놈과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늑대를 도약시킨 놈이 유성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실로 벼락같은 일격이었다.
완전 무장한 기사를 허공에 띄워버릴 정도의 힘이 실린 일격이었던 데다가 늑대의 도약까지 더해져 마치 트럭이 돌진해오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명중한다면 어느 부위든 박살이 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유성은 눈앞에 닥쳐오는 공격을 똑바로 바라볼 뿐 겁을 내거나 다급히 몸을 날리지 않았다.
'세 걸음.'
발을 멈춘다.
전진하지 않고 그저 멈춰 서서 상체를 기울인다.
철퇴가 유성의 눈앞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휘둘러졌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유성의 코앞, 손가락 한 마디가 겨우 될 법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허공만을 치고 지난다.
그리고 그 순간 유성과 놈 사이의 간격이 변했다.
'한 걸음.'
철퇴를 휘두른 놈이 당황했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공격이 허공만을 치고 지나니 자세 역시 무너졌다.
이제 막 착지한 늑대는 네 발로 착지의 충격을 흡수하느라 동작이 경직되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유성이 검을 역수로 쥐었다.
철퇴를 휘두르기 위해 몸을 반쯤 회전시킨, 결과적으로 유성에게 등과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한 거대 코볼트의 옆구리를 향해 사선 방향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크학!"
팽팽히 당겨진 옆구리에 검이 꽂힌 놈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손에 쥔 철퇴를 놓쳤다.
그리고 유성 역시 검을 놓고 몸을 회전시켰다.
철퇴를 놓친 거대 코볼트와 주인의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란 늑대를 시야에 담음과 동시에 지면을 박차 늑대의 등 위를 타고 올랐고,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이번에도 역수로 쥐고 거대 코볼트의 목에 찔러 넣는다.
"크헉!"
거대 코볼트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몸을 경직시켰다.
유성은 그런 놈의 목에 꽂힌 단검을 비틀어 상처를 벌린 뒤 단번에 뽑아냈다.
"크어...."
목에서 피분수를 뽑아내기 시작한 거대 코볼트의 입에서 비명이 아닌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성은 그런 놈을 재차 공격하는 대신 늑대의 등 위에서 뛰어내렸고, 거대 코볼트는 몇 번인가 더 애끓는 소리를 내더니 늑대 위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쿵!
온갖 소음이 난무하고 있는 전장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침묵이 펼쳐졌다.
코볼트들이 입을 크게 벌린 채 경악했고, 라투스 남작의 병사들 역시 그러했다.
심지어는 주인을 잃은 늑대마저 당황해 움직이지 않으니 전장 전체가 정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파이어 볼!"
르네의 낭랑한 외침이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사람 머리통보다 커다란 화염의 구가 코볼트들 한복판에 떨어지더니 그대로 폭발했다.
콰가강!
"크허헝!"
"커헝! 컹!"
코볼트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밀집해 있던 터라 피해도 컸다.
적어도 열 마리 이상의 코볼트들이 폭발에 휩쓸린 것 같았다.
거대 코볼트를 태웠던 늑대 역시 불꽃을 뒤집어쓰고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찬란한 황금빛이 유성의 등 뒤에서부터 밀려왔다.
유성은 쓰러진 거대 코볼트의 옆구리에서 검을 뽑아드는 대신 몸을 돌려 손을 뻗었다.
군마를 타고 달려오는 케이트가 보였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었건만 유성을 보자마자 케이트 역시 손을 뻗었고, 유성은 그런 케이트의 손을 잡으며 도약해 군마 위에 올라탔다.
"케이트, 검을!"
"쓰십시오!"
케이트가 허리를 튕기듯 왼쪽 골반을 내밀자 유성은 그런 케이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을 뽑아든 뒤 높이 들며 외쳤다.
"전군! 돌진하라!"
쩌렁쩌렁한 외침에 농노 부대가 호응했다.
"우오오오오오!"
뿔 나팔 소리와 함께 농노 부대가 돌진했고, 유성은 그들이 아닌 라투스 남작의 병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 역시 움직였다.
순간 멈칫하며 서로를 돌아본 그들이었지만 이내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가라! 가라! 가라!"
"찢어발겨!"
라투스 남작의 기사들 역시 소리치며 돌진했다.
숫자는 여전히 코볼트들 쪽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기세가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으니 제대로 된 싸움이 될 턱이 만무했다.
전열의 코볼트들이 죽어나가자 후열의 코볼트들이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패주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회전에서 사상자가 폭증하는 것은 언제나 어느 한쪽이 패주를 시작할 때였다.
도망치기 위해 등을 내보인 코볼트들은 농노 부대와 병사들에게 있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에 불과했다.
팟! 팟! 팟!
바나데인이 쏜 화살들이 도망치는 코볼트들의 뒤통수를 꿰뚫었고, 르네가 펼친 마법이 놈들을 자빠지게 만들었다.
"섬멸하라!"
크게 외친 유성이 군마에서 뛰어내려 코볼트들을 향해 돌진했다.
케이트의 검을 휘두르며 코볼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니 그야말로 양떼 무리 속에 뛰어든 늑대와 같았다.
"키악!"
"칵!"
유성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코볼트들이 쓰러졌다.
안 그대로 이미 마음이 꺾인 코볼트들은 그런 유성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부림을 쳤고, 그러다 보니 자연 도망조차 제대로 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의 코볼트를 베어낸 유성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적을 섬멸했다.
저만치서 도망치다 바나데인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코볼트 한 놈이 마지막이었다.
유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농노 부대와 라투스 남작의 병사들이 상기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트가 깃발을 높이 들며 활짝 웃었고, 저만치 멀리에서 르네가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고 있었다.
로빈과 에드가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유성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럴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유성은 알고 있었다.
검을 높이 들어 행동으로 승리를 선포했다.
"우와아아아아!"
농노 부대와 라투스 남작의 병사들이 동시에 환호했다.
케이트가 카멜롯의 깃발을 크게 휘둘렀고, 르네가 유성을 향해 도도도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르네를 보며 유성은 기분 좋게 읊조렸다.
"상태창."
이겼으니 확인해야 하는 것.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5점 획득했습니다.]
[악적 토벌: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군사 구원: 선업 수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왕국검법 Lv2가 되었습니다.]
[제국검법 Lv2가 되었습니다.]
[지휘 가능한 병종이 증가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5점 획득했습니다.]
[농노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법사: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적군 섬멸'을 달성했습니다.]
레벨 업.
유성은 미소 지었다.
* * *
"계승자님! 우리가 이겼어요! 우리가 이겼다구요!"
몹시 흥분했는지 달려오자마자 유성을 와락 끌어안은 르네가 연신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유성 역시 그런 르네를 마주 꽉 끌어안았지만 잠깐뿐이었다.
르네는 까먹은 것 같지만- 아니, 전장에 선 거의 모두가 잊은 것 같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 라투스 남작은?"
"우리가 이겼- 네?"
마구 기뻐하던 르네가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그대로 다시 눈을 크게 떴고, 급히 돌아서서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거대 코볼트의 일격을 맞고 낙마한 라투스 남작.
그냥 낙마만으로도 잘못하면 나락가는 것이 사람인데 철퇴에 맞고 날아갔으니 정말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라투스 남작은 운명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을 탄 기병 하나가- 아니, 라투스 남작의 기사로 보이는 자가 유성과 르네에게 다가오더니 투구를 벗고 두 사람을 마주했다.
"시몽 경."
르네가 반사적으로 꺼낸 이름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기사- 시몽 경은 르네에게 눈인사를 한 뒤 유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력에 감사하오.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소."
유성은 무어라 답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굳이 유성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대신 나서줄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몽 경, 위고 아저씨는요? 괜찮은 거죠? 네?"
르네가 다급한 얼굴로 묻자 시몽 경은 만감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상을 입으셨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아, 다행이다."
한 차례 가슴을 쓸어내린 르네는 그대로 숨을 몇 번 고르더니 마법사답게 지금 필요한 말을 꺼냈다.
"시몽 경, 소개드릴게요."
잠시 말을 끊은 르네는 새삼 가슴을 활짝 편 뒤 당당한, 그리고 발랄한 얼굴로 유성을 가리켰다.
"빛의 계승자이신 유성 님이세요!"
르네의 소개에 로빈과 에드가였다면 깜짝 놀라 탄성을 질렀겠지만 시몽 경은 그렇지 않았다.
앞의 둘과 달리 르네가 받았다는 계시 자체를 몰랐고, 빛의 계승자가 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는 특이한 이름과 별개로 무척이나 화려한 칭호를 가진 자구나- 하긴, 그렇게나 대단한 기사도를 사용하는 걸 보니 상당한 실력자이긴 한 거 같은데- 하는 얼굴이 되어 담담히 말했다.
"라투스 남작님의 기사인 시몽입니다."
"천유성입니다."
유성 역시 담담히 답했고, 뭔가 기대했던 장면이 나오지 않자 실망한 르네는 입술을 살짝 삐쭉였다.
그런 르네의 모습에 작게 웃은 유성은 빛과 함께 사라지는 군단을 보며 놀라는 라투스 남작의 병사들을 지나 남작의 도시- 로티안을 바라보았다.
제5장 - 충격의 다이애나
시몽 경의 말마따나 목숨 자체는 건진 라투스 남작이었지만 쉬이 깨어나지는 못했다.
때문에 본래라면 아무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훈이 있다 한들, 신원불명인 유성이 내성 안에 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였지만 유성에게는 르네가 있었다.
라투스 남작과 조카 삼촌 하는 사이.
시몽 경을 비롯한 라투스 남작의 측근들 모두가 얼굴을 알고 있는 이웃한 백작령의 영애.
그런 르네가 신원을 보장하는 인물이니 유성은 신원불명의 이방인이 아닌 영주를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르네는 입술을 삐쭉였다.
"카멜롯의 후예인 방랑기사란 말이죠?"
"일단은 그렇게 하자."
유성을 호수의 여신께서 보내주신, 신들의 나라에서 온 빛의 계승자- 저 성왕 아서 팬드래건의 뒤를 잇는, 인류의 수호성국 카멜롯의 정통한 왕으로 소개하고 싶어 안달이 난 르네였지만 유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로빈이나 에드가와 달리 라투스 남작의 수하들은 르네가 받은 계시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심지어 르네를 오랫동안 보아온 백작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단짝이라 할 수 있을 로빈조차도 믿지 않은 것이 바로 르네가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르네가 호수의 여신의 계시를 받았고, 그 결과 빛의 계승자인 유성을 맞이했다.
유성은 호수의 여신이 보내주신 인류의 구세주이다.
이런 이야기를 라투스 남작의 수하들에게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오겠는가.
로빈이나 에드가와는 상황이 달랐다.
믿지 않거나 설사 어느 정도 믿더라도 검증을 하고 싶어 하는 무리가 나올 가능성이 컸다.
모두 불필요한 일이었다.
유성은 합리로서 상황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것은 코볼트의 왕자가 이끌고 나타날 코볼트의 무리로부터 도시와 성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괜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빛의 계승자 이야기를 꺼내기보다는 그냥 카멜롯의 후예인 방랑기사 정도로 유성의 신분을 위장하는 편이 나았다.
"설사 내가 빛의 계승자라는 걸 믿는다 해도 군대의 통수권 같은 걸 휙 하고 넘겨줄 리 없으니 그냥 지금처럼 하는 게 맞아."
유성의 논리적인 설명에 르네는 마법사답게 바로 이해하고 납득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알 것 같군요. 철없이 집을 나간 가출소녀 대신 계시를 받고 홀로 성스러운 여정을 떠난 성녀 대우를 받고 싶으신 거죠?"
"그, 그런 거 아니거든?!"
로빈의 날카로운 찌르기에 르네가 화들짝 놀라 부정했지만 이미 말투와 표정, 그리고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보면 답이 나온 셈이었다.
"지, 진짜로 아닌데."
르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재차 소심한 부정을 시도했지만 유성도 로빈도 에드가도 그냥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르네의 행동을 보면 아마 진짜로 저 이유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보다는 유성이 빛의 계승자로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소심한 반론을 펼치며 입술을 삐쭉이는 르네는 무척이나 귀여웠고, 그래서 유성과 로빈과 에드가는 그냥 르네를 놀리는 쪽으로 묵언의 합의를 보았다.
시몽 경은 부상을 입은 라투스 남작을 데리고 먼저 성에 들어갔고, 유성 일행은 시몽 경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는 몽트 경을 따라 성으로 들어갔다.
피난민들 역시 서둘러 성안으로 향했지만 병사들에게 사정청취를 받느라 바로 성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저 정도 규모의 피난민은 처음입니다."
몽트 경의 설명에 따르면 어젯밤부터 피난민들이 성문을 두드리기는 했지만 열댓 명도 되지 않는 무리였다고 한다.
아마 플랑메 마을에서 도망쳐왔던 상인들처럼 마을 밖에 있었던 덕에 화를 피한 자들이었던 모양이다.
'반대로 말하면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죽임을 당했다는 건가....'
입안이 씁쓸해지는 이야기였지만 유성은 굳이 입 밖에 내는 대신 몽트 경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피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라투스 남작님께서 급히 징병과 전투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러다 코볼트들이 나타났고, 놈들의 숫자를 보신 라투스 남작님께서 출진을 명하셨습니다."
그 이후는 유성이 본 대로였다.
"겨우 그 정도가 놈들의 전부일 리 없습니다. 아마 훨씬 더 큰 무리가 몰려올 겁니다."
로빈의 말에 몽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두렵다 하여 진실을 감출 수는 없는 법이었다.
로빈이 계속해서 말했다.
"코볼트들은 '코볼트의 왕자'라는 놈의 밑에 모이는 중입니다. 로토 숲에서 튀어나온 놈들이 모두 집결 중인 것 같으니 그 무리가 적어도 수백은 될 겁니다."
"코볼트의 왕자라 하셨소? 코볼트들이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오?"
몽트 경이 깜짝 놀라 되묻자 로빈이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그건 저희도 잘 모르겠지만... 코볼트들이 코볼트의 왕자라는 존재를 언급한 건 사실입니다."
몽트 경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정말로 코볼트들이 국가를 세웠다면 겨우 수십 마리가 아닌 수백 마리- 아니, 어쩌면 수천이 넘는 코볼트들이 로티안으로 몰려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방비는 어떻게 되고 있죠? 라투스 남작님 휘하의 병력을 총집결시키는 건 물론이고 이웃 영지... 어쩌면 왕도에도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라요."
르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몽트 경은 절로 가빠진 숨을 몰아쉰 뒤 빠르게 말했다.
"시몽 경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쉬고 계시죠."
그리고 정말로 돌아서서 걷는가 싶더니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허둥거리는 것이 영 믿음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이, 일단 저를 따라오시죠."
일련의 대화를 듣고 안색이 새파래지긴 했지만 그래도 본분을 잊지 않은 중년 여성- 아마도 성의 시녀장으로 보이는 여성의 안내를 따라 일행은 발걸음을 떼었다.
* * *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유성은 르네와 다른 곳으로 안내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대우를 박하게 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얼굴을 알고 있던 이웃 영지의 영애와 공훈을 세웠다지만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 기사를, 그것도 남녀를 한곳에 머물게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제법 좋은 손님방에 안내받은 유성은 시녀들이 내온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따뜻한 물에 목욕을 했다.
본래 유성이 생각한 것은 적당한 식사 뒤에 바로 다시 시몽 경을 마주하는 것이었지만 딱히 부르지 않는 것을 보니 이야기는 르네와 로빈, 에드가에게 들을 요량인 모양이었다.
때문에 유성은 조급해하는 대신 겨우 맞이하게 된 휴식의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코볼트들이 몰려오면 지금처럼 쉴 시간 따위 없을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더욱이 유성에게는 아까부터 무척이나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상태창!"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유성이 침대 위에 앉은 채 낮게 소리치자 빛의 창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업적 달성: 적군 섬멸]
[추가 5pt 획득]
[최대 소환 가능 부대: 3부대]
[군단 관리]
케이트의 농노 부대 Lv3(다음 레벨에 승급 선택 가능)
기수: 케이트
나팔수: 지미
구성원: 22+1(최대 : 30+1)
[농노 부대 5명 증원 1pt]
기수 챔피언: 케이트
레벨: 3
무장: 카멜롯의 깃발(사기치 +1) / 평범한 장검 / 가죽 갑옷 / 군마
기사도: 카멜롯의 영광(영향 범위 안에 들어온 아군의 의지와 전투력을 강화하고 적의 의지를 저하시킨다.)
[한스의 농노 부대(5인 구성) 추가 5pt]
[한스의 농노 부대에 기수 추가 1pt]
[한스의 농노 부대에 나팔수 추가 1pt]
바나데인의 궁수 부대 Lv2
부대장: 바나데인
구성원: 7+1(최대 15+1)
[궁수 부대 2명 증원 1pt]
새로운 병종
[경기병대(2인 구성) 추가 5pt]
[영웅 관리]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2
보유 pt: 3pt
무장: 참나무 지팡이/ 마법사의 로브
고유 스킬: -
고유 스펠: -
[르네가 마력 강화 Lv1을 획득 : 3pt]
[르네가 맨손 격투 Lv1을 획득 : 3pt]
[르네가 새로운 마법을 획득 : 3pt]
[르네가 군마에 탑승 : 3pt]
가지고 있는 것은 업적 pt까지 합쳐서 총 15pt.
'일단 병력 최대한 채우는 건 결정사항이고.'
농노 부대에 2pt, 궁수 부대에 4pt를 써서 전부 최대 인원으로 꽉꽉 채운다.
'총원이 그럼 영웅들 빼면 45명.'
보병 30에 궁병이 15.
남은 것은 9pt.
여기서부터가 고민이었다.
'내가 지금 한 번에 불러낼 수 있는 건 최대 세 부대.'
이미 두 부대를 운용하고 있으니 추가로 불러낼 수 있는 건 한 부대뿐이었다.
그럼 그 한 부대를 어떤 부대로 할 것인가.
1. 전열을 좀 더 늘려야 한다. 농노 부대를 새로 뽑는다.
2. 성곽을 낀 수성전이고, 전열로 쓸 징집병은 이미 많으니 나름 고급 병종인 궁수 부대를 새로 뽑는다.
3. 새로운 병종인 경기병대를 뽑는다.
1번은 일단 빠른 기각을 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2번 아니면 3번.
합리의 눈으로 바라보면 2번이었다.
징집병 중에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마 대부분이 그냥 창 들고 싸우는 전열 보병이 될 터이니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궁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는 것이 맞는 판단이었다.
더욱이 수성전 상황에서 경기병대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번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일반적인 경기병대와 달리 유성의 경기병대는 언제 어디서든 유성의 곁으로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막말로 수성전 중에 유성 혼자 성벽을 내려간 뒤 기병대를 소환, 적의 뒤를 쳐 적장을 급습하는 식의 전술도 가능할 터였다.
'물론 그랬다가는 적들에게 포위당해 개죽음당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래도 선택할 수 있는 전술적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다른 하나.
'영웅이 나올 거라 이거지.'
오는 길에 틈틈이 상태창을 살펴보며 혹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나 찾다 보니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병종별로 딱 한 번만 영웅이 나와.'
농노 부대나 궁수 부대를 새로 뽑아서 부대장이나 챔피언을 붙여도 케이트나 바나데인 같은 영웅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부대장과 챔피언이 붙을 뿐이지.
'하지만 경기병대를 추가하면 기병 영웅이 추가된다는 이야기지.'
최초의 경기병대니 기병 영웅이 나온다.
물론 앞의 두 번이 운이 좋았을 뿐 이번에도 케이트나 바나데인 같은 대박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오히려 둘 이상으로 강력한 영웅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영웅은 영웅일 거라 이거지.'
케이트와 바나데인의 전술적 가치는 실로 막대했다.
지원형 영웅인 케이트는 둘째치고 바나데인 하나만 봐도 궁수 부대 전원- 아니, 한 30명을 데려와도 바나데인 하나의 전력이 높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지금까지의 패턴상 경기병대는 1명 증원에 1pt는 들 테니 만들고 부대장 붙이고 한두 명 붙이면 pt를 다 쓸 거란 말이지.'
즉 다섯 명 정도가 다일 거란 이야기였다.
일반 궁수 부대 11명 vs 경기병 3명과 등급을 알 수 없는 영웅 한 명.
'후자로 가자.'
이건 후자가 맞다.
무조건 후자로 가야 한다.
마음을 정한 유성은 바로 포인트를 찍기에 앞서 르네의 항목을 보았다.
영웅 관리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2
보유 pt: 3pt
[르네가 마력 강화 Lv1을 획득 : 3pt]
[르네가 맨손 격투 Lv1을 획득 : 3pt]
[르네가 새로운 마법을 획득 : 3pt]
[르네가 군마에 탑승 : 3pt]
'역시 르네는 부대 관리처럼 따로 육성이 가능하구나.'
선택지는 마력 강화와 격투기와 군마와 새로운 주문.
'격투기는 대체 왜 있는 거지?'
마법암살자- 아니, 마법권사로라도 키우라는 것인가.
흥미가 가는 빌드였지만 어떻게 보면 르네의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유성은 흥미 위주의 선택지를 지우고 현실적인 고민을 하였다.
'마력 강화 아니면 새로운 주문이야.'
케이트의 군마처럼 르네가 항시 군마를 소환할 수 있다면 사실상 '기동 포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테니 전술적 가치가 폭증할 터였지만 지금은 수성전 상황이었다.
더욱이 케이트와 함께 군마에 탄다는 선택지도 있었으니 당장 군마를 태울 필요는 없었다.
'마력 강화로 가자.'
마법사는 자고로 마력이었다.
새로운 마법이라는 걸 보니 뭐가 나올지 모르는 랜덤 뽑기인 모양이었는데, 이럴 때는 국밥처럼 든든한 마력 강화를 택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나중에 르네한테 마력이 얼마나 강해졌나 물어봐야겠네.'
아무튼 마력 강화를 선택한 유성은 이내 다시 손을 놀려 경기병대를 군단에 추가했다.
부대 관리
경기병대 Lv1
구성원: 2(최대 : 5)
[경기병대에 1명 증원 1pt]
[경기병대에 부대장 추가 3pt]
'예상대로군.'
유성은 남은 4pt를 모두 써서 1명을 증원하고 부대장을 추가했다.
부대 관리
다이애나의 경기병대 Lv1
구성원: 3+1(최대 : 5+1)
'다이애나.'
새로 추가된 경기병 영웅.
과연 어떤 영웅일까.
이름만 봐서는 일단 여자일 거 같은데.
'불러보면 알겠지.'
유성은 참지 않았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애나, 집결해라."
황금빛 섬광이 유성의 눈앞에서 번쩍였다.
제5장 - 충격의 다이애나 (2)
츠화아-
금빛 섬광이 흩어진 자리에 나타난 것은 하얗고 커다란 군마 위에 탄 가죽 갑옷 차림의 여기사였다.
짙은 갈색 단발을 어깨 길이보다 조금 짧게 기른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외모.
미인이었지만 꾹 다문 입술과 무뚝뚝한 눈빛 때문인지 무척이나 딱딱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갈색 눈동자로 유성을 내려다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을 몇 번 깜박였고, 이내 알겠다는 듯 오른 주먹을 들어 자신의 왼쪽 가슴을 작게 두드렸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자리에서 일어선 유성이 똑같이 응답하자 여인- 다이애나는 오른 주먹을 내리고 다시 유성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말 위에 탄 채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는 여기사와 침대 시트를 물어뜯을지 말지를 고민하듯 가만히 침대 시트를 바라보는 하얀 군마를 마주하던 유성은 꽤나 어색한 헛기침을 토한 뒤 말했다.
"나는 천유성이다."
유성의 소개에 다이애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끝이었다.
여전히 멀뚱멀뚱 자신만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유성은 재차 헛기침을 토한 뒤 물었다.
"이름이 뭐지?"
물론 이미 상태창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굳이 물어본 것은 대화의 시작을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는지 다이애나가 꾹 닫혀 있던 입술을 열어 말했다.
"다이애나입니다."
그리고 다시 끝.
무슨 말을 던지든 바로 대화를 종결시킬 것 같은 다이애나의 모습에 유성은 그냥 자기가 많이 물어보자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돌연 아-하고 작게 탄성을 토한 다이애나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에니카입니다."
무슨 말일까.
사실 다이애나는 가명이나 예명이고 에니카가 본명이라는 이야기일까?
아니었다.
'아, 군마의 이름이 에니카라는 소리군.'
실제로 그러했는지 유성이 반사적으로 군마 쪽을 돌아보자 군마가 마치 그렇다고 대답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성은 생각했다.
'나쁘지 않아.'
커뮤니케이션이 다소 경직되어 있긴 하지만 일단 묻는 말엔 바로바로 답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중요한 건 화술보다는 전투력이었고 말이다.
"무기는 주로 뭘 사용하지?"
"창입니다. 검도 씁니다."
케이트의 등에는 창이 한 자루 매여 있었고, 허리춤에는 검이 한 자루 매달려 있었다.
"혹시 케이트랑 바나데인을 알아?"
"압니다."
"어느 정도로 알지?"
"이름만 압니다."
"그, 그래."
뭔가 더 대화를 이을 힘이 사라진다고 해야 할까.
어차피 필요한 정보는 대강 다 얻은 상태였기에 유성은 작게나마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예를 표하는 다이애나에게 똑같이 예를 표하자 이내 은빛 섬광과 함께 다이애나와 그녀의 군마 에니카가 사라졌다.
'상태창을 보자.'
궁수 부대장: 바나데인
레벨: 1
무장: 엘프 장궁, 단검
기사도: 꿰뚫는 일격(공격의 관통력과 위력을 강화시킨다.)
경기병 부대장: 다이애나
레벨: 1
무장: 단창, 장검
기사도: 충격의 다이애나(돌진 공격을 행할 시 대상과 주변 일대에 광역으로 충격파 피해를 입힌다.)
"오, 광역기."
쉽게 말해 랜스 차징을 박으면 박힌 상대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적들까지 피해를 입는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래, 역시 기병은 랜스 차징이지.'
다이애나의 경기병대가 랜스 차징하는 모습을 상상한 유성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경기병대와 랜스 차징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긴 했지만 나중에 중갑 기병대로 키워주면 그만이지 않은가.
'바나데인의 능력도 심플하지만 좋네.'
르네라면 '와! 엘프!'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상태창을 지우려던 유성의 눈앞에 새로운 빛의 창이 떠올랐다.
[휘하에 세 명의 기사들이 모였습니다.]
[기사단의 최소 요건을 달성했습니다.]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을 습득했습니다.]
* * *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 시간이었다.
유성의 방에 찾아온 르네 또한 옷을 갈아입었는지 검은색 로브 대신 수수한 디자인의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계승자 님, 위고 아저씨가 깨어나셨어요."
한 손에 등불을 들고 선 르네의 뒤에는 로빈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로티안의 주인인 위고 라투스 남작의 상태가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라투스 남작께서 계승자님과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고자 하십니다."
"중요한 이야기는 저랑 로빈이 대충 다 전했어요."
"남작의 반응은 어떻지?"
유성의 물음에 르네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답했다.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셨어요. 쉬고 계신 동안 시몽 경과 몽트 경이 성내에서 징병을 했고, 위고 아저씨는 남작령 내의 기사들을 모두 소집하셨어요. 이웃 영지들에도 빠짐없이 도움을 청하셨고요. 저희 가문을 통해 왕도에도 도움을 청할 거라 하셨어요."
발투아 백작가.
아직 이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유성이었지만 지금까지 얻은 단편적인 정보들만 모아 봐도 르네의 집안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싹싹한 게 오히려 좀 신기할 정도의 집안이라 봐야겠지.'
방대한 영지를 보유한 백작가.
로빈과 에드가의 이야기대로면 아예 기사단을 거느릴 정도로 휘하에 기사들도 많은 모양이었으니 그 세가 대단할 터였다.
"지원군이 그리 빨리 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늦진 않을 겁니다."
약간의 우려가 섞이긴 했지만 희망적인 로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다시 르네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 계승자님?"
평소와 조금 다른 유성의 시선에 르네가 부끄럽다는 듯 뺨을 붉히자 유성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르네, 마력이 강해지지 않았어? 얼굴도 좀 더 예뻐진 거 같은데?"
"네? 어, 어떻게? 정말요?"
'어떻게 아셨어요?'와 '정말 예뻐졌어요?'가 결합된 말에 유성은 다시 웃은 뒤 앞의 질문에만 답을 주었다.
"내가 성장시켰으니까."
"계승자님이요?"
"어, 르네는 왕의 마법사니까. 난 르네를 성장시킬 수 있거든."
유성의 말에 르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제어하기 위해 애썼고, 로빈은 유성과 르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유성에게 물었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르네의 소꿉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로빈이었다.
르네의 반응을 보니 '왕의 마법사'라는 말에 좋아 죽는 것과는 별개로 정말 마력이 강해진 것 같은데, 그렇다면 유성의 말이 사실이라는 소리였다.
마법사의 마력을 타인이 성장시킨다니.
그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로빈의 진지한 물음에 유성은 잠시 고민했다.
현대인이라면 그냥 '게임 시스템이 있어서 레벨 업 시킬 수 있어'라고 설명하면 바로 이해할 터였지만 로빈과 르네는 현대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유성은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음... 쉽게 말하면, 내가 불러내는 군사들이 싸워서 공훈을 쌓으면 난 그 공훈을 사용해서 군사들을 강화시킬 수 있어."
"어... 경험이 쌓여서 강해지는 것과 별개로 말입니까?"
"그래, 그것과 별개로. 예를 들어 내가 케이트... 케이트 알지?"
"네, 깃발 들고 다니는 엄청 예쁜 언니."
대답한 것은 르네였다.
엄청 예쁜 언니라는 표현이 좀 지나치게 친밀해 보였지만 르네다운 대답이기도 했기에 유성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케이트의 공훈치를 써서 왕국검법을 가르치면 케이트는 왕국검법을 쓸 수 있게 돼. 힘을 강화하면 힘이 세지고, 체력을 강화하면 체력이 강해지지."
레벨 업해서 스킬이나 스탯 찍을 수 있다는 소리를 풀어서 하고 나니 실로 신비하기 짝이 없는 능력이었다.
'물론 실제로 키울 수 있는 건 농노 부대지만 결과적으론 케이트도 성장하는 거니까.'
설명의 편의성을 위한 약간의 편집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런 유성의 설명에 르네와 로빈은 문자 그대로 경악하였다.
"그, 그럼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수 있겠군요?"
공훈치라는 게 필요하긴 하겠지만 아무런 수련이나 노력, 그리고 시간 없이도 능력을 성장시키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니.
단순히 생각해도 통상적인 속도보다 두 배- 아니, 몇 배는 빠른 성장이 가능할 터였다.
"어, 그런 셈이지."
유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빈은 너무 놀라 호흡 장애를 일으킬 수준이 되었고, 르네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은 눈으로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유성은 그런 두 사람에게 말을 이었다.
"본래라면 내가 불러내는 군사들, 그러니까 내 기사도에 속한 이들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르네에게는 할 수 있어."
"제가 왕의 마법사라서요?"
"그래, 르네는 나의, 왕의 마법사니까."
유성의 말에 르네가 다시 뺨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왕의 마법사.
호수의 여신을 모시는 르네에게 있어서는 실로 엄청난 칭호였다.
여신께서 직접 선택하신 성왕을 보필하는 존재로서 르네 자신 또한 선택받았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야기를 마저 진행해야 했기에 유성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한 로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까 쉴 때 르네의 공훈치를 사용해서 르네의 마력을 성장시켰어."
"마, 마력을 성장."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심호흡을 크게 한 로빈은 여전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도 살짝 꼬고 있는 르네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아가씨, 정말 마력이 강해지셨나요?"
"응? 어, 응. 갑자기 강해져서 혹시 어디 잘못된 건 아닌지 불안했는데... 계승자님이 성장시켜 주신 거였구나."
새삼 가슴 위에 손을 올린 르네의 얼굴에 마치 케이트처럼 자애롭고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로빈은 마찬가지로 평온해지는 대신 여전히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얼마나 강해졌어요?"
"어? 어... 기존의 마력이 10이었다면 15가 된 기분?"
"네?! 아, 아가씨! 엄청나게 강해진 거잖아요!"
10에서 15가 되었다니.
마력이 한 순간에 1.5배나 강해졌다는 소리 아닌가!
"맞아. 엄청나게 강해졌어."
사실 너무 강해져서 정말 이상이 생긴 건 아닌지 두려워하던 르네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유성이 원인이었다.
르네 자신이 왕의 마법사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편안.
그러니 행복.
내가 누구?
호수의 여신의 계시를 받은 왕의 마법사.
즉, 성왕의 마법사.
르네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기라도 한듯 다시 뺨을 붉히며 헤죽거리자 로빈은 유성을 보며 물었다.
"계승자님, 아가씨는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는 건가요?"
"강해질 수 있어. 그리고 강해져야지. 왕의 마법사니까."
유성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르네는 양주먹을 꼭 쥐더니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계승자님, 저, 대마법사까지 힘낼게요."
"그래."
다부진 결의를 한 마법사를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자니 로빈이 다시 유성에게 물었다.
"계승자님, 혹시 저도 어떻게 안 될까요? 저도 계승자님의 기사가 된다든가."
"미안. 르네만 특별한 거 같아."
"후후훗."
특별하다는 말에 르네의 입꼬리가 다시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고, 로빈은 마치 르네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대략 10여 분 남짓 후.
이미 성내를 잘 아는 르네와 로빈이기 때문인지 라투스 남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방까지 가는 동안 딱히 다른 이의 안내를 받지는 않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문 앞에 당도하자 집사처럼 보이는 장년의 남자가 안에 기별을 넣은 뒤 르네에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아늑한 분위기의 침실과 침대에 반쯤 누운 상태로 앉아 있는 노인이 하나.
'저기, 삼촌이라며.'
'할아버지라고 하면 싫어하셔서.'
르네와 귓속말 대신 짤막한 눈빛을 교환한 유성은 다시 정면을 보았고, 침대 위의 노인- 라투스 남작 역시 유성을 보았다.
제5장 - 충격의 다이애나 (3)
"위고 아저씨, 유성 님이세요. 유성 님, 위고 라투스 남작님이세요."
르네가 앞으로 나서며 양쪽을 소개하자 유성이 먼저 묵례하며 말했다.
"천유성입니다."
"위고 라투스 남작이오. 침실에서 맞이하는 무례를 용서하시오."
일흔 정도 되었을까.
길게 기른 머리칼과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라투스 남작은 키가 크고 어깨 역시 넓었지만 무척이나 마른 체구였다.
눈매가 날카로운 것과 별개로 전신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괜히 침실에서 이렇게 접견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유성은 일단 무난한 대답을 했지만 문득 다이애나 생각이 나서 입술을 움츠렸다.
무슨 말이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라투스 남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모두 들었소. 로티안을, 그리고 우리 르네를 구해주어 감사하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느꼈지만 무척이나 진중하고 예의가 바른 인물 같았다.
절로 호감이 생긴 유성은 여기서 무어라 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입에 담은 것은 조금 상투적인 대사였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실 반쯤은- 아니, 대부분 진실인 이야기이기는 했다.
르네를 구한 것도, 중간에 마을 사람들을 구한 것도, 그리고 로티안의 병사들을 구한 것도 모두 별다른 의식 없이 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괴물로부터 사람을 구한다.
이보다 당연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선업 수치가 오르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르네가 들었다면 '역시 여신님께서 계승자님을 선정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같은 대사를 했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던 라투스 남작이 이내 애석한 얼굴로 말하였다.
"보상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구려. 후에 반드시 보답을 할 터이니 사양하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결국 다이애나처럼 짧게 답한 유성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서 달리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이해한 것인지 이번에도 라투스 남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놀라운 기사도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젊은 나이에 벌써 2단계 기사도를 사용하다니, 대단하구려."
2단계 기사도.
기사도는 크게 3단계로 구분이 되었다.
1단계, 기사도를 자각하는 단계.
이 세계의 기사는 단순한 무인이 아니었다.
인간을 초월한 힘과 의지, 그리고 기술을 갖춘 초인 전사들.
기사도는 그러한 초인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증거였고, 기사도를 발현하지 못하는 자는 한 사람의 기사로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로빈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발투아 백작가의 정식 기사로 인정받은 것은 그녀가 기사도를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1단계 기사도는 대체로 효과가 단순한 편이었다.
검이 날카로워지는 기사도.
하늘을 나는 기사도.
눈에서 빔을 쏘는 기사도 등등.
기사도는 기사의 영혼 그 자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체되지 않고 성장하기 마련이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1단계 내에서는 위력이 강해지면 강해졌지 효과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 게 보통이었다.
1단계 기사도는 기사도의 시작이었지만 종종 현실적인 기사도의 끝이라는 평가 역시 받았다.
기사들 가운데 대부분이 1단계 기사도로 평생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2단계, 기사도를 발현하는 단계.
기사들 가운데 일부만이 2단계 기사도에 도달할 수 있었다.
2단계 기사도는 1단계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하거나 복잡한 효과를 가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분신을 만드는 기사도.
강철의 거인을 소환하는 기사도 등등.
그 효과와 위력 모두 1단계에 비해 월등히 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각국의 이름난 기사들은 대부분 2단계에 도달한 자들이었다.
3단계, 기사도를 구현하는 단계.
2단계에 도달한 기사들 가운데서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단계로, 3단계에 도달한 기사들은 자신의 기사도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었다.
사실상 현실 조작의 단계로, 발현자의 기사도에 맞추어 일부나마 세상 그 자체를 변모시키는 궁극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진짜 그냥 고유경계나 영역전개 같은 거지.'
3단계 기사도에 도달한 자는 일종의 전술핵 같은 존재였다.
초인들의 집단인 기사단과도 단독으로 대적이 가능한 괴물이었으니, 평범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군대 정도는 홀로 만 명을 당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 전체를 놓고 봐도 이름이 알려진 3단계 기사도의 사용자는 단 열 명에 불과했고, 그들은 기사도의 극에 도달했다 하여 극기사- '마스터 나이트'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었다.
'원탁의 기사들이 인류최강의 기사단인 이유가 다른 게 아니야.'
전원이 3단계 기사도의 보유자들.
그야말로 인류최강의 전투 집단.
여담이지만 판타지 모나크에서 일반 유저는 2단계 기사도까지가 한계였다.
즉, 판타지 모나크 부동의 1위였던 유성조차도 3단계 기사도는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다시 돌아가자면, 라투스 남작의 생각은 보편타당했다.
군대를 소환하는 기사도.
이게 어떻게 1단계란 말인가. 누가 봐도 2단계지.
20대 초반, 많이 잡아도 중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벌써부터 2단계 기사도를 사용하고 있으니 실로 전도유망한 젊은이라 할 수 있었다.
라투스 남작의 칭찬에 르네는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처럼 흥흥거리며 우쭐거렸고, 유성은 생각했다.
'1단계지만 그냥 그렇다고 하자.'
그랬다.
유성의 기사도인 빛의 계승자는 상태창의 정보에 따르면 현재 1단계인 상태였다.
1단계임에도 2단계, 그중에서도 강력한 기사도와 비견될 만하였으니 과연 성왕의 계승자에게 주어진 기사도다웠다.
하지만 굳이 또 떠들어댈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유성은 그저 과분한 칭찬에 감사하다며 다시 예를 표했고, 라투스 남작은 흡족한 얼굴로 그런 유성을 바라보았다.
'젊은 나이에 경지에 올랐으니 오만할 법도 하건만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구나.'
르네의 이야기대로면 로토 숲에서 우연히 만났다는데, 어쩌면 르네가 기연을 만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후훗."
여전히 제 일처럼 뿌듯해하는 르네의 모습에 작게 웃은 라투스 남작은 이내 표정을 고쳤다.
조카처럼 아끼는 르네의 신랑감으로 유력한, 그것도 굉장히 전도유망한 청년이 나타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즐거운 이야기만 나눌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볼트의 왕자가 온다.
이미 코볼트들에게 전멸당한 마을들이 존재한다.
놈들 가운데 일부가 로티안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코볼트의 왕자'라는 존재가 아무리 허황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한들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라투스 남작은 르네를 보며 말했다.
"르네, 너는 서둘러 발투아 백작가로 돌아가려무나."
"네. 어, 네?!"
별생각 없이 답했던 르네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자 라투스 남작은 엄격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로티안은 위험하다. 코볼트들이 얼마나 몰려올지 모르니 서둘러 떠나도록 하거라. 그리고 유성 경."
"예, 남작님."
"로티안에 남아줄 수 있겠소? 성을 지켜내기 위해 힘을 보태주시오. 이 또한 반드시 후에 보답하도록 하겠소."
르네는 집에 보내고 유성에게는 도움을 청한다.
실로 합리적인 요청이었지만 르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저는 가는데 유성 님은 남는다고요? 저, 저는 계승자님. 그러니까 유성 님의 마법사인데요? 그렇죠, 유성 님?"
도움을 청하는 것 같은 르네의 눈빛에 유성은 즉답하는 대신 라투스 남작 쪽을 보았다.
여전히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성이 뭐라 답하든 르네는 발투아 백작가로 보내겠다는 생각 같았다.
'여기서 뭐라고 해야 하려나.'
르네는 마법사고, 마법사는 전쟁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발투아 백작가의 차녀이자 라투스 남작에게는 손녀- 아니, 조카 같은 르네를 전쟁터에 남기라고 하는 말이 과연 통할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영주님! 영주님!"
헐레벌떡 달려온 청년 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시몽 경의 종자인 청년이었는데, 라투스 남작은 청년의 무례를 탓하는 대신 청년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은 유성과 르네, 로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 안의 모두로부터 시선을 받은 청년은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코볼트들이 나타났습니다!"
* * *
이미 해가 진 시간이었다.
달과 별이 밝다 한들 멀리까지 살피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발견이 늦어졌다.
서둘러 성벽 위에 오른 유성의 눈에 들어온 것은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코볼트의 무리였다.
"너무 많아."
옆에 서 있던 로빈이 저도 모르게 탄식하듯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유성의 눈에 들어온 코볼트의 무리만 하더라도 1천을 우습게 넘길 것만 같았다.
더욱이 저들은 모두 인간이 아닌 코볼트들이었다.
기사들에 비하면 미약한 놈들이었지만 훈련받지 않은 징집병들보다는 강했다.
더욱이 저게 끝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방비를 갖춰라!"
"각자 자리로!"
"불을 밝혀!"
시몽 경과 몽트 경이 성벽 위를 오가며 목이 터지라 외쳐댔다.
하지만 녹록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방비를 갖추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반나절 전의 이야기였다.
평소에 수성전 준비라도 해두지 않았다면 설사 징병으로 병력을 확보한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수비를 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무리 상무정신을 강조하는 라투스 남작이라지만 설마하니 수성전 준비가 되어 있겠-
'-는가 인데 되어 있다?'
그랬다.
성벽 위로 우르르 올라온 징집병들이 기존의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각기 성벽 위에 자리를 잡는데 그 동작들이 모두 어설프긴 했지만 적어도 아예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즉, 대충이라도 훈련을 해본 티가 난다는 소리였다.
더욱이 성벽에는 돌이나 기름을 떨어트리기 위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성벽 구석구석마다 투석용 돌들이 쌓여 있었다.
징집병들도 다들 농노 부대 수준이긴 하지만 무장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미친 노인네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시민들을 훈련시키고 성벽을 관리해 온 것은 모두 오늘을 위함이었으니.
비장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리는 라투스 남작의 모습에 여러 가지 의미로 감탄한 유성은 다시 성벽 위를 보았다.
어림잡았을 때 성벽 위의 병사는 300명 남짓.
코볼트들보다는 훨씬 더 적었지만 이쪽에는 성벽이 있었다.
물론 난공불락의 요새에 비교할만한 성벽은 아니었다.
해자도 없었고 높이도 7미터 남짓으로 그렇게까지 높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튼튼한 성벽과 성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성을 지키는 것은 라투스 남작의 병력만이 아니지 않은가.
르네가 유성을 보았고, 유성은 고개를 끄덕인 뒤 조금 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시몽 경과 몽트 경이 기대 섞인 얼굴로 유성을 돌아보았고, 로빈과 에드가는 눈을 빛냈으며, 라투스 남작은 진중하지만 열의 섞인 눈으로 유성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성벽 위에 가득한 징집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낮에 있었던 전투를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유성과 함께 입성한 피난민들에게서 유성에 대한 소문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군세를 부리는 자.
코볼트들을 짚단처럼 썰어 넘기는 칠흑의 기사.
유성은 수많은 이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성벽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저 먼 곳에서부터 밀려오고 있는 코볼트들의 군세가 두렵지 않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유성은 돌아서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성문 바로 위에 위치한 성곽에 선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농노 부대, 궁수 부대, 집결하라."
밤의 어둠을 밀어내는 섬광과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의 군세.
"오오오."
"오오오오!"
기사들은 물론이고 성벽 위의 모두가 감탄했다.
징집병들은 순간이나마 전방에서 밀려오는 코볼트들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잊을 정도였다.
물론 자세히 보면 손색이 있는 군세였다.
농노 부대는 이름 그대로 농노 부대였고, 궁수 부대 역시 무장 자체는 평범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군마 위에 탄 황금의 성녀와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던 요정의 궁수가 있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가슴 위에 주먹을 올리며 예를 표하는 그들에게 똑같이 예를 표한 유성은 정면을 보았다.
코볼트의 군세를 마주하였다.
제6장 - 격전
코볼트의 군세가 천천히 진군했다.
여전히 걷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느린 속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성벽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유성이 소환한 군세를 보며 환호하던 징집병들의 얼굴에 다시 두려움과 긴장의 빛이 번졌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코볼트의 군세가 명확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달빛이 밝은 것은 호재인 동시에 악재였다.
적들의 모습을 비교적 명확히 볼 수 있는 것은 호재였고, 그로인해 징집병들이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악재였다.
하지만 어차피 싸워야 할 적들이었으니 밝은 쪽이 훨씬 더 나았다.
거리는 계속해서 좁혀졌다.
유성은 달빛이 비친 놈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괴물이라고는 하나 나름의 옷을 입고 도구를 사용하는 코볼트들이었다.
공성탑이나 투석기 같은 본격적인 공성장비는 없었지만 기본적인 공성 수단은 갖추고 있었다.
전열에 커다란 사다리와 갈고리를 든 놈들이 여럿 보였다.
기본적으로 몸이 날랜 코볼트들이니 사다리나 갈고리가 걸쳐지면 인간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벽을 타고 오를 것이 분명했다.
일반적인 코볼트들 사이사이로 덩치가 큰 거대 코볼트들이 여럿 보였다.
등에는 투창을 여러 개 차고 있었고, 개중에는 큰 활을 든 놈도 있었다.
그리고 군세의 후열 부분.
마치 특별한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안개 같은 것이 펼쳐져 있어 명확히 내부를 살필 수 없었지만 유성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안에 놈들의 핵심 전력들이 숨어 있다.
코볼트의 왕자가 바로 저곳에 있다.
"온다."
유성이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전장의 공기가 바뀌었다.
걷고 있던 코볼트들이 돌연 함성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온다! 온다! 온다!"
누군가가 외쳤다.
성벽 위의 징집병들이 술렁거렸고, 채 억누르지 못한 두려움이 역병처럼 퍼져 나갔다.
시몽 경과 몽트 경도 분위기를 감지했다.
저마다 검을 높이 들며 징집병들을 독려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크허헝!"
"컹컹!"
코볼트들의 울부짖음이 성벽을 강타했다.
괴물의 포효는 인간의 공포를 야기했다.
도망치자. 도망치자. 여기 있다간 모두 죽고 말 거야.
성벽이 없었다면 벌써 수십 명도 넘는 탈주자가 생겼을 터였다.
실제로 성벽 위에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투스 남작이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입을 열었지만 부상 때문에 큰 소리를 내진 못했다.
수성전임에도 불구하고 싸우기 전부터 패배하는 상황이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쿵!
바로 그 순간 케이트가 깃발로 땅을 찍었다.
난잡한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밀려오는 괴물들의 포효에 맞서 낭랑하게 외쳤다.
"카멜롯의 영광을!"
파앗-!
맑고 고운 그것은 천상의 목소리와 같았다.
케이트로부터 발산된 찬란한 황금의 빛이 성벽 위를 뒤덮자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던 징집병들의 눈에 작지만 용기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물러서던 자들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울음을 터트릴 것 같던 이들이 이를 악물고 코볼트들을 노려보았다.
"맞서야 한다! 맞서야 한다!"
"으… 으아아!"
"우오오!"
"맞서 싸워!"
케이트의 외침에 성벽 위의 누군가가 호응했다.
이내 성벽 위의 모두가 두려움을 떨치고 전의를 돋우기 위해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엉망진창이군."
바나데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아주 작게나마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바나데인."
유성의 부름에 바나데인이 고개를 끄덕인 뒤 활을 쏘았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제일 앞에서 깃발을 들고 달리던 코볼트 한 놈이 화살에 맞아 고꾸라졌고, 그 순간 성벽 위의 사기가 최고점에 달했다.
"우와아!"
"쏴! 쏴! 죽여버려!"
"쏴라!"
마지막 외침은 시몽 경의 것이었다.
성벽 위에는 단 네 대뿐이었지만 노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징집병이 아닌 나름 훈련된 정병들이 붙어 있었다.
파파파팟!
노포에서 발사된 커다란 화살들이 코볼트들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유성의 궁수 부대 역시 바나데인과 더불어 쉴 새 없이 화살을 퍼부어댔다.
"온다! 온다!"
"키엑! 켁! 컥!"
대부분의 화살들이 명중했지만 모조리 쏘아 죽이기에는 이쪽의 공격이 너무 적었고, 동시에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죽어 나자빠지는 놈들을 짓밟고 코볼트들이 마침내 성벽 앞까지 당도하였다.
우르르 사다리를 걸고 기어오르기 시작하니 그 모습이 악귀와 다름이 없었다.
"사다리를 걷어내! 밀어내!"
쾅! 쾅! 쾅!
사다리 몇 개가 밀려 타고 오르던 코볼트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성벽 제일 앞줄에 서 있던 징집병 몇이 투창에 맞아 뒤로 밀려났다.
"으, 으아아!"
"막아! 막아!"
"크헝! 컹!"
본격적으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시작되었다.
"바나데인! 저격해!"
사다리를 타고 넘어오는 코볼트들을 베어 넘기며 유성이 소리치자 바나데인이 투창을 든 놈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키엑! 컥!"
투창병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발에 하나씩 쓰러트리니 날아오는 투창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성벽 위에서 그러한 사실을 인지한 자는 거의 없었다.
지독한 난전이었다.
공격하는 쪽도 수비하는 쪽도 체계라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유성은 전장 전체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추론하고 상상해 전체적인 상황을 인지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랬기에 유성만은 직후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있었다.
콰앙!
난폭한 소음 속에서도 분명히 들리는 굉음이었다.
땅을 크게 박찬 거체가 거의 날듯이 솟구쳐 올라 성벽 위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으아아!"
공포에 질린 징집병의 비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쿵-하는 굉음과 함께 그림자의 주인이 성벽 위에 착지했기 때문이다.
"크허헝!"
크게 포효한 거대 코볼트- 키가 5미터는 됨직한 무지막지한 거체의 괴물이 포효하며 손에 쥔 몽둥이를 휘두르자 끔찍한 참극이 일어났다.
범위 안에 들어와 있던 징집병들은 머리가 터지고 가슴이 박살나고 허리가 꺾여 죽었다.
피보라 사이에서 포효하는 놈의 모습에 다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자들이 솟구쳤다.
그리고 유성이 돌진했다.
포효하던 놈이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는 유성을 보았고, 그 순간 바나데인이 시위를 당겼다.
팟!
"크악!"
바나데인의 화살에 눈알에 꿰뚫린 거대 코볼트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유성은 계속해서 달렸다.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놈을 주시한 채 의식을 집중하였다.
지금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아니, 사용하지 못했던 힘을 사용하였다.
두근.
심장이 박동했다.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심장의 박동을 따라 마력이 솟구쳤다.
레벨 5.
판타지 모나크의 기사들이 체내의 마력을 외부로 방출할 수 있게 되는 시기.
그리하여 기사도와 함께 기사의 상징이라 불리는 오라 블레이드를 구현할 수 있게 되는 때.
물론 그래봐야 기초적인 수준이었다.
레벨 5 기사의 오라 블레이드는 검 위에 마력을 살짝 흘려보냈다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실제로 준기사인 로빈은 아직 제대로 된 오라 블레이드를 구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성은 달랐다.
유성이 움켜쥔 장검 위로 황금의 칼날이 덧씌워졌다.
군단 전투력에 의한 보정.
선업 수치에 의한 보정.
중첩된 보정이 유성의 영혼과 마력을 강화시켰다.
유성의 신체 능력이 5레벨임에도 불구하고 10레벨 기사에 필적하듯 마력 역시 그러하였다.
작렬하는 황금의 칼날은 달빛 아래에서 선명한 빛을 발했다.
유성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할 수 없던 일을 가능케 하였다.
'두 걸음.'
유성이 간격을 재었다.
눈을 잃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의 움직임은 거칠고 난폭했지만 그뿐이었다.
눈먼 공격 따위를 허용할 유성이 아니었다.
숨을 멈춘다.
상체를 낮춰 몽둥이를 피한 뒤 더욱더 거리를 좁힌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놈의 하체.
유성은 기둥을 방불케 하는 놈의 종아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악!"
절단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근육을 가르고 뼈를 끊었다.
유성이 스쳐 지나간 순간 균형을 잃은 놈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유성은 멈추지 않았다.
반전하여 돌진함과 동시에 양손으로 쥔 검을 머리 뒤로 넘겼다.
병사들이 그런 유성을 보았다.
거대 코볼트가 주저앉는 소리에 놀란 코볼트들 역시 유성을 보았다.
휘두른다.
위에서 아래로.
벼락같은 일격이 거대 코볼트의 목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쿵!
단칼에 잘린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 잃은 놈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주변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
"황금의 기사!"
"칠흑의 기사!"
통일되지 않은 호칭과 환호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 바나데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유성 역시 기뻤다.
짜릿한 성취감에 전율이 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유성은 검을 들어 환호에 호응하는 대신 빠르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굉음과 진동이 성벽 전체를 뒤흔들었다.
콰앙!
성문이었다.
마르고 키가 큰 거대 코볼트가 성벽 위에 올라 시선을 끄는 사이에 성벽 바로 앞까지 치달은 또 다른 놈이, 하체보다는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근육질의 거대 코볼트가 망치로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애당초 노린 것이었기에 유성이 쓰러트린 거대 코볼트의 착지 지점과 성문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콰앙!
재차 성벽이 뒤흔들렸다.
그리고 유성은 판단했다.
성문은 지킬 수 없다.
이제 곧 부서질 것이다.
그렇다면 부서진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유성이 등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도주가 아니었다.
성벽 반대편에서 상체를 내민 유성은 지면을 향해 소리쳤다.
"경기병대! 집결하라!"
츠팟-!
금빛 섬광과 함께 다이애나를 필두로 한 경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령을."
다이애나 유성을 올려다보며 짧게 말했고, 유성은 성문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들이박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성문이 박살났다.
콰앙!
구겨진 철문이 성벽에서 떨어져 나가자 코볼트들이 함성을 질렀고, 성문을 부순 거대 코볼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성 안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다이애나 역시 그러했다.
성문이 아닌 대로를 향해 말을 달렸다.
어느새 뽑아든 창을 옆구리에 단단히 끼고 반전하여 성문을 마주하였다.
거대 코볼트가 다이애나를 보았다.
다이애나 역시 거대 코볼트을 보며 작고 짧게, 하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돌진한다."
에니카가 달렸다.
다이애나의 뒤에 쐐기 진형으로 자리한 경기병대 역시도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돌진이 아니었다.
다이애나의 기사도가 다이애나뿐만 아니라 경기병대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경기병대 전체가 마치 하나의 창이 된 것만 같았다.
콰앙!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창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폭발적인 가속으로 거대 코볼트와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고, 다이애나의 창끝이 미처 피하지 못한 거대 코볼트를 향해 작렬했다.
콰가가가강!
창끝에서부터 상상도 못 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랜스 차징이 아니었다.
성벽에 매달려 충돌 순간을 바라보던 유성 역시도 상상도 못 한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상체가 소멸하고 하체만이 남은 거대 코볼트와 파편만을 남긴 채 흩어진 코볼트들을.
충격의 다이애나.
돌진 공격을 행할 경우 강력한 충격파로 전방을 휩쓴다.
부서진 성문 인근이 코볼트들의 피와 고기조각으로 뒤덮였다.
성벽 위에서는 굉음만 들릴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성문 너머에 자리한 코볼트들은 아니었다.
난폭하게 돌진하던 코볼트들마저 동작을 멈추고 멍한 얼굴로 성문과 박살이 난 코볼트들과 묵묵히 자리한 다이애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물러난다."
경악 어린 시선 속에서 담담히 말한 다이애나는 경기병대와 함께 말을 돌려 다시 대로로 향했다.
충격의 다이애나는 분명 강력한 기사도였지만 랜스 차징을 위한 거리가 필요했고, 애당초 경기병대가 적과 붙어서 싸우는 건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다시 성문이 비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성 말고도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성문을 지켜야 한다! 물건을 쌓아라!"
몽트 경이었다.
라투스 남작이 나름 공들여 키운 정병들과 함께 나타난 그는 성문 앞에 병사들을 세움과 동시에 징집병들을 동원해 각종 물건들을 성문 앞에 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코볼트들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성문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케이트! 바나데인! 르네!"
이제 성벽보다는 성문이 문제였다.
유성이 연달아 외치자 각기 흩어져 싸우던 이들이 유성을 돌아보았다.
유성은 그들을 이끌고 성벽을 내려갔다.
코볼트들이 난잡하게 흩어진 잔해를 넘어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난전이었다.
금방이라도 돌파될 것 같은 아슬아슬한 방어선을 향해 유성은 기사들과 함께 달렸다.
그리고 그랬기에 유성은 보지 못했다.
코볼트의 무리 끝에 자리하고 있던 검고 짙은 안개가 움직이는 것을, 안개를 뚫고 나온 무언가가 성문을 향해 똑바로 질주하고 있는 것을!
"막-"
거기까지였다.
분전하던 몽트 경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정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은 안개와 함께 등장한 무언가가 휘두른 거대한 도끼가 자신의 앞에 가로놓인 모든 것들을 갈라놓았다.
성벽, 코볼트, 병사들, 몽트 경.
거대한 도끼가 그린 깨끗한 궤적 안에 자리하고 있던 모든 것이 동강이 나 쓰러졌다.
입을 벌린 채 무어라 외치던 모습 그대로 무너져 내린 몽트 경의 시신이 바닥에 털썩하고 쓰러졌고, 병사들과 몽트 경의 잘린 몸에서 동시에 피가 솟구쳐 올랐다.
피와 바람과 굉음에 검은 안개가 흩어졌다.
거대한 낫을 들고 선 것은 키가 3미터 남짓한 거대한 코볼트였다.
단순히 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신을 빠짐없이 감싸는 보랏빛 갑옷과 손에 든 낫은 결코 평범한 물건들이 아니었다.
코볼트 신의 신기들.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코볼트의 왕자였다.
코볼트 신의 대사제인 동시에 대전사.
몰락하고 쇠퇴했다고는 하나 신성을 유지한, 저 코볼트 신의 신혈이 흐르는 존재.
코볼트의 왕자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성벽 아래에서 내려와 달려오던, 자신을 보고 본능적으로 멈춰선 유성과 기사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6장 - 격전 (2)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여 년 전.
성왕 아서 팬드래건은 원탁의 기사들을 이끌고 인세를 위협하는 수많은 악적들을 토벌하였다.
카멜롯이 건국되기 이전, 세계를 지배하던 야만의 존재들.
인간의 빛을 탐해 몰려들었던 그들은 성왕의 검에 패해 다시 빛이 없는 세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코볼트의 신 역시 그러한 존재들 가운데 하나였다.
카멜롯이 멸망하고 오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어둠 속에서 고개를 내민 코볼트의 신은 다시 한번 인간의 불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피를 이은 신혈자 가운데 하나를 인세에 내보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선 것은 코볼트의 신의 대신관이자 대전사.
코볼트 신의 신혈을 이은 정통한 코볼트의 왕자였으니.
그는 한눈에 유성의 비범함을 눈치챘다.
유성에게 감도는 호수의 여신의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놈은 웃었다.
코볼트의 왕자로서 갖춘 힘을 마음껏 방출하였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
포효가 성벽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저급하고 미약하다 하나 그 포효에는 분명 코볼트 신의 신성이 깃들어 있었다.
케이트의 황금빛을 쐰 인간들이 용기를 일으키듯이 포효를 들은 코볼트들이 서로 공명하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야만성이 들불처럼 크게 일어났고, 반대로 포효를 들은 인간들은 본능적인 공포에 빠져들었다.
그 순간 유성은 직감했다.
코볼트의 왕자를 쓰러트리지 못하면 이 전투는 무조건 패배한다.
설사 코볼트 전부를 몰살한다 해도 코볼트의 왕자가 살아 있다면 이 도시는 함락당하고 만다.
숨을 가다듬었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 맞서기 위해 억눌러온 두려움이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로부터 발산된 은은한 황금빛이 유성과 기사들을 감싸주었다.
바나데인이 시위에 걸린 화살을 당겼고, 멀리서 다이애나가 다시 창을 들어올렸다.
카멜롯의 기사들.
그들의 의연함에 로빈과 에드가도 용기를 되찾았다.
르네 역시도 입술을 깨물며 지팡이를 꼭 움켜쥐었다.
"간다."
유성이 말했다.
이쪽을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코볼트의 왕자를 향해 돌진했다.
케이트와 르네가 그 뒤를 따랐다.
바나데인이 어느새 당긴 시위를 놓았다.
파앗!
유성을 앞서나간 화살은 언제나와 같이 빠르고 정확했지만 이번에는 표적을 꿰뚫지 못했다.
코볼트의 왕자가 눈앞에서 화살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지만 바나데인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바로 두 번째 화살을 재었다.
돌진하는 유성과 케이트의 발걸음도 늦춰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 로빈이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코볼트의 왕자가 웃었다.
움켜쥔 화살을 내던지며 소리쳤다.
"와라! 인간의 검들아!"
콰가가!
코볼트의 왕자가 휘두른 도끼의 충격파에 주변 일대가 뒤흔들렸다.
성문이 부서진 성벽 위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었고, 바나데인의 재차 쏜 화살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유성이 도달했다.
충격파의 영향력이 끝난 순간 마치 보고 있었다는 듯 순간적인 가속으로 거리를 좁힌 유성이 코볼트의 왕자의 품을 향해 돌진했고, 왕자가 재차 도끼를 휘둘렀다.
'한 걸음.'
츠파핫!
파공음이 귀를 울렸다.
아슬아슬하게나마 도끼를 피한 유성은 그대로 돌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카캉!
코볼트 왕자의 갑옷과 충돌한 검이 금속음을 내며 튕겨져 나갔다.
갑옷에도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오라 블레이드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보랏빛 갑옷의 표면에 흐르는 코볼트 신의 신기가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성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졌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이트의 공격이 코볼트의 왕자를 향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유성과 달리 아직 그리 강력한 오라 블레이드를 쓸 수 없는 케이트의 공격은 코볼트 왕자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코볼트 왕자가 거칠게 휘두른 도끼를 피하기 위해 바닥을 구른 케이트의 귀에 거친 땅울림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이애나였다.
재차 펼쳐진 그녀의 기사도는 마치 성난 노도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코볼트의 왕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미 정해진 수순이라는 듯 손바닥을 펼치며 주문을 외우니 악신의 장벽이 펼쳐졌다.
콰가강!
그것은 충격이었다.
다이애나가 일으킨 충격파와 악신의 방벽이 정면에서 충돌해 강한 반발력을 일으켰다.
경기병대가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내동댕이쳐졌다.
선두에 섰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에니카와 다이애나가 바닥을 뒹굴었고, 코볼트의 왕자가 부서진 성문 근처까지 밀려났다.
그리고 다시 유성이 움직였다.
갑옷에 보호받지 않는 몇 안 되는 부위인 머리를 노리기 위해 측면에서부터 파고들어 갑작스러운 도약 공격을 펼쳤다.
카카캉!
코볼트 왕자의 오른팔 수갑이 유성의 공격을 막아냈다.
간발의 차로 간신히 막아냈기 때문인지 코볼트 왕자의 얼굴에 희열 섞인 미소가 번졌다.
콰앙!
르네가 발사한 화염구가 코볼트 왕자의 등을 강타함과 동시에 폭발했지만 알 수 있었다.
코볼트의 왕자는 건재하다.
왕자의 갑옷을 뚫을 수 없다.
"크하하하핫!"
불꽃을 뚫고 나온 코볼트의 왕자가 광소하며 유성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방어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공격 일변도였기에 빠르고 강력했다.
더욱이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충격파가 일어 주변을 뒤흔드니 피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누군가가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유성은 이를 악물고 간격을 재었다.
눈에 보이는 도끼의 궤적만이 아니라 충격파까지 읽어내야만 했다.
반격의 틈을 찾기 어려웠다.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놈의 갑옷을 뚫을 수 없었다.
르네가 다시 한번 마법을 펼쳤다.
바나데인이 화살을 쏘았고, 코볼트의 왕자는 둘의 공격을 각각 갑옷과 수갑으로 막아내더니 유성이 아닌 둘을 향해 돌아서며 크게 도끼를 휘둘렀다.
츠콰학!
단순한 충격파가 아니었다.
검붉고 탁한 기운이 날카롭고 거대한 칼날이 되어 르네와 바나데인을 향해 쏜살처럼 나아갔다.
유성은 반대편에 있어서 막을 수 없었다.
르네는 순간 몸이 굳었고, 바나데인이 그런 르네의 허리를 낚아채듯 안았다.
칼날과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케이트가 깃발을 세웠다.
쾅!
검붉은 칼날과 깃발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검붉은 칼날이 붕괴했지만 깃발 역시 부러졌다.
다급히 힘을 발휘한 케이트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고, 코볼트의 왕자가 재차 유성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리고 코볼트들이 움직였다.
싸움터가 조금씩 이동함에 따라 개방된 성문을 지나 코볼트들이 성내로 들어섰다.
성벽 위에서도 방어선의 일부가 뚫려 성벽 아래로 내려오는 놈들이 있었다.
코볼트들이 쓰러진 다이애나와 케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르네와 바나데인이 급히 그런 둘을 보호하려 했지만 두 사람에게 밀려드는 코볼트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코볼트의 왕자가 크게 웃으며 유성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유성은 피했지만 온전하진 못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충격파가 왼쪽 어깨를 찢고 지났다.
얕지 않았다.
피가 솟구쳤고, 격통이 밀려왔다.
마치 인두로 살을 지지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온 뒤 처음 입는 부상이었다.
아팠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유성은 이를 악물고 인내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정면을 주시했다.
"잡았다."
코볼트의 왕자가 웃으며 말했다.
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유성이니 이제 더 많은 공격을 허용할 터였다.
공격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피하지 못하게 될 터이니 이제 유성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유성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갈등했다.
숨겨둔 수를 펼치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기회가 없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놈의 시선을 돌릴 시간이.
놈의 발을 붙잡을 시간이.
하지만 놈에게 잠시나마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은 유성 자신뿐이었다.
다이애나와 케이트는 부상을 입은 데다 코볼트들에게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르네와 바나데인의 원거리 공격은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만들 수 없었다.
로빈과 에드가는 물론이고 시몽 경도 무리였다.
애당초 성벽 위에서 몸을 뺄 수 없는 세 사람이었다.
코볼트의 왕자가 도끼를 당겼다.
유성이 각오를 굳혔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돌진해오는 자가 있었다.
* * *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더 이상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 * *
노인이었다.
더욱이 부상을 입은 몸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맹하게 돌진했다.
미친 것이 아니었다.
과욕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각오를 굳힌 것이었다.
* * *
라투스 남작은 남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작위를 물려받은 몸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기사를 선망하였고, 인간의 시대를 연 위대한 성왕 아서 팬드래건과 원탁의 기사들을 동경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무재가 썩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기사도를 발현한 것도 남들보다 늦은 나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것처럼 무훈시를 남길 만한 기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기사도를 자각했다는 사실에, 자신의 삶과 영혼이 반영된 그 힘에 감사했다.
* * *
노인- 라투스 남작의 전신에서 붉고 선명한 기운이 마치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라투스 남작의 기사도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정신없이 싸우던 시몽 경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삼켰다.
위고 라투스의 기사도.
생명의 불꽃.
스스로의 생명을 불태운 대가로 초월적인 힘을 얻는 기사도.
범부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위대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의 소망이 담긴 그것.
라투스 남작이 본래의 나이보다 훨씬 더 노쇠한 이유였다.
성문 앞에서 코볼트들과 싸울 때 기사도를 사용하지 못한 이유였다.
더 이상은 무리다.
다시 한번 기사도를 사용하면 그것이 최후의 불꽃이 되리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투스 남작은 결심했다.
코볼트의 무리를 이끌고 나타난 악신의 자손을 향해, 정확히는 악신의 자손과 맞서고 있는 타지의 기사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는 이 영지의 기사가 아니었다.
르네가 데려오긴 했지만 결국 이방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싸우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악신의 자손을 막아내고 있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경의를 표하고픈 일이었다.
라투스 남작은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갔다.
각오를 굳히고 최후의 불꽃을 일으켰다.
라투스 남작으로서 영지와 영민들을 지키기 위해.
어린 시절 다짐했던 기사의 맹세를 지키고자.
콰앙!
라투스 남작이 휘두른 불의 검이 코볼트 왕자의 도끼를 정면에서 쳐냈다.
코볼트의 왕자는 진심으로 당황했고, 그것이 틈을 만들었다.
라투스 남작은 사납게 웃으며 돌진했다.
직전의 일격으로 알 수 있었다.
설사 남은 생명을 모조리 불태운다 할지라도 눈앞의 괴물을 처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괴물을 쓰러트리기 전에 라투스 남작 자신의 생명이 먼저 사그라지리라.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적의 수급을 취하고 공명을 얻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르네와 함께 온 남자.
오래전 사라진 카멜롯의 후예를 자처하는 타지의 기사.
그를 믿었다.
이제는 정말 한 줌밖에 남지 않은 생명을 불태우며 코볼트의 왕자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유성이 그런 라투스 남작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떠한 설명도 없었지만 바라본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유성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라투스 남작이 일으킨 최후의 불꽃이 코볼트의 왕자와 충돌하는 그때 남겨둔 최후의 수를 사용하였다.
왕의 시간.
왕의 권한으로 선포하는 기사단 명령.
제한된 시간이나마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의 기사도를 모두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성왕의 힘.
유성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잠들어 있던 용의 심장이 깨어나 용의 마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케이트의 기사도가 발현했다.
유성의 전신에서 은은한 황금의 빛이 일었다.
바나데인과 다이애나의 기사도가 동시에 발현했다.
유성이 움켜쥔 검 위로 아침의 태양과도 같은 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전장의 모두가 그 빛에 주목하였다.
싸우던 이들까지도 돌아서서 유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코볼트의 왕자는 그럴 수 없었다.
라투스 남작의 검과 코볼트 왕자의 도끼가 다시 한번 정면에서 충돌했다.
무지막지한 충격파와 함께 라투스 남작과 코볼트의 왕자가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라투스 남작의 불꽃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늙고 지친 몸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코볼트의 왕자는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유성이 달려오고 있었다.
코볼트의 왕자의 눈에도 유성의 검이 보였다.
'도망쳐야 해!'
맞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몸을 피하고 잠시 시간을 벌면 직전의 늙은이처럼 성왕의 계승자 역시 지쳐 쓰러지고 말리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화살이 날아왔다.
바나데인의 것이었다.
코볼트의 단검에 등을 찔리면서도 내쏜 화살이 코볼트 왕자의 의식적 사각을 파고들었다.
화살이 머리에 맞았다.
깊진 않았다.
하지만 코볼트 왕자의 찰나를 빼앗았다.
그리고 르네의 마법이 작렬했다.
"프리즈!"
코볼트의 왕자의 발치에서 얼음이 타고 올랐다.
몽트 경과 병사들- 그리고 라투스 남작이 흘린 피로 만들어진 선홍빛 얼음이었다.
쩌적!
이번에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코볼트 왕자의 눈앞에 유성이 당도했다.
놈이 발악처럼 휘두른 도끼를 간발의 차로 피해내며 더욱 거리를 좁혔다.
노리는 것은 한 점.
유성 자신이 연격을 가하고, 라투스 남작의 마지막 일격으로 인해 벌어진 갑옷의 틈바구니.
허리에 생긴 작은 틈.
유성의 찌르기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전장에 선 이래 처음으로 고통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코볼트의 왕자를 노려보며 유성은 세 기사의 기사도를 한 번에 운용하였다.
케이트의 빛.
바나데인의 관통력.
다이애나의 충격파.
그 세 가지가 하나 되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찌르기와 동시에 거대한 힘을 발산했다.
파아아아아아아아-!
칼끝에서 응축된 충격파가 코볼트 왕자의 육신 내부에서부터 폭발했다.
성벽과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파공성과 함께 일어난 빛이 마치 떠오르는 태양처럼 주변 일대를 황금으로 물들였다.
코볼트의 왕자는 버틸 수 없었다.
놈을 지켜주던 신성의 벽이 붕괴하였고, 신혈자의 강건한 육신조차도 내부에서의 충격은 어찌할 수 없었다.
코볼트 왕자의 비명이 굉음이 만들어낸 침묵 속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황금의 빛이 사그라졌다.
금빛으로 변했던 유성의 눈동자가 다시 본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유성은 거친 숨을 토하며 정면을 보았다.
코볼트의 왕자가 쓰러져 있었다.
악신의 갑옷은 부서졌고, 놈의 상체는 제대로 된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끊어진 놈의 머리가 바닥을 뒹굴었다.
유성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너무나 경이로운 광경에 모두가 침묵하였고, 이내 누군가가 최초의 함성을 터트렸다.
"으아아!"
그저 기쁨에 찬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 되었다.
성벽 위는 물론이고 전장에 자리한 모두가 저마다의 무기를 높이 들며 환호성을 높였다.
아직 전투 중이었다.
수백 마리가 넘는 코볼트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인간의 기사가 코볼트의 왕자를 꺾었다.
인간의 기사가 승리했다!
우레와 같은 인간들의 함성 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왕자의 죽음을 목도한 코볼트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유성은 긴 숨을 토했다.
허리를 곧게 세운 뒤 코볼트의 왕자를 쓰러트린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재차 터진 함성 속에서 코볼트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포효하며 반격에 나섰다.
케이트를 필두로 한 카멜롯의 기사들이 유성을 바라보았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들의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유성이 그런 그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르네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로티안 수성전.
인간의 군세가 코볼트의 군세를 격퇴했다.
승리의 밤이었다.
제7장 - 로티안의 주인
자신들의 왕자를 잃은 코볼트들은 더 이상 군세라 할 수 없었다.
패닉에 빠진 놈들은 사분오열하여 정신없이 도망치기 바빴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그런 놈들을 손쉽게 사냥하였다.
케이트와 바나데인이 절뚝이면서도 카멜롯의 군세와 징집병들을 지휘해 코볼트들을 몰아 붙였다.
하지만 유성은 그런 두 사람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어느새 달려온 르네의 어깨에 기댄 채 발걸음을 떼어 라투스 남작에게 다가갔다.
"이겼... 구나...."
라투스 남작의 목소리였다.
토해낸 피로 얼룩진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산 자의 생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초점이 사라진 눈은 금방이라도 어둠에 잠길 것 같았고, 목소리 또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작고 가늘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작게나마 미소가 어려 있었다.
유성은 르네와 함께 라투스 남작의 머리맡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위고 아저씨."
르네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다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라투스 남작이 오른손으로 땅을 더듬자 유성은 그 위에 르네의 손을 겹쳐 주었다.
라투스 남작이 다시 한번 미소지었다.
이미 빛을 잃은 그의 눈이었지만 유성을 향하며 가냘픈 목소리를 토해냈다.
"감사... 하오...."
로티안을 위해 싸워주어서.
로티안을 지켜주어서.
"유성 님은 성왕의 계승자세요. 호수의 여신께 계시를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모시러 갔던 거예요."
르네가 아이처럼 울면서 말했다.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라투스 남작은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납득할 수 있었다.
악신의 자손에 맞서던 유성의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온 성왕의- 아니, 기사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성왕의 계승자가 돌아왔다.
그를 도와 악신의 자손을 쓰러트리고 로티안을 지켜냈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항상 바라마지 않던 기사의 무훈시로 남을 만한 업적이었다.
하지만 라투스 남작은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악신의 자손들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성왕의 계승자 또한 돌아왔다.
이는 곧 전설처럼 전해지던 흉성의 시대가 진정으로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티안은 계속해서 위협받으리라.
르네와 영지민들 또한 더 큰 시련을 마주하게 되리라.
"성왕의... 계승자...시여...."
라투스 남작 자신은 이제 죽는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르네와 함께 나타난 성왕의 계승자.
라투스 남작 자신에게는 영지를 상속받을 상속자가 없으니 어쩌면 이 또한 운명일지 몰랐다.
"로티안을... 받아... 주십...."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말이지만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유성은 라투스 남작을 잘 몰랐다.
하지만 영지를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불태운 그의 마지막 싸움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랬기에 차마 그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유성이 허락하자 라투스 남작의 얼굴에 옅게나마 다시 미소가 번졌다.
"르네...."
"네, 아저씨."
르네가 다시 울면서 답했다.
라투스 남작은 그런 르네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 싶었지만 무리였다.
그저 맞닿은 손에 조금이나마 힘을 싣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라투스 남작이 눈을 감았다.
다시 울리기 시작한 승리의 함성이 르네의 울음소리를 감춰주었다.
* * *
라투스 남작의 시신을 마주한 시몽 경은 자신의 주군에게 마지막 예를 표한 뒤 처음 마주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담담히 자신이 해야 할 말들을 입 밖에 내었다.
유성에 대한 감사.
전투의 승리와 남은 뒷수습에 관한 이야기들.
본래는 유성에게 할 만한 이야기들이 아니었다.
큰 공을 세우긴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타지의 기사, 엄밀히 말하면 용병과 같은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라투스 남작이 로티안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지금 승리의 주인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명확하였다.
그랬기에 시몽 경은 르네에게서 라투스 남작의 유언을 전해 들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유성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한 뒤 라투스 남작의 시신을 수습할 따름이었다.
유성은 무너진 성문 인근에서 르네와 나란히 앉아 전장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 있던 코볼트들을 일소한 징집병들과 일선 지휘관 역할을 수행한 남작의 병사들이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대승입니다."
케이트와 바나데인, 다이애나.
농노 부대와 궁수 부대가 유성의 앞에 도열했다.
케이트는 지친 얼굴로나마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바나데인은 다리 쪽에 부상을 입은 다이애나를 부축한 채 유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유성은 카멜롯의 기사들을 한 차례 바라본 뒤 그들 뒤에 도열한 카멜롯의 병사들을 보았다.
수가 절반가량으로 줄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도시를 지켜냈다는 자부심과 승리의 기쁨이 어려 있었다.
'지미도 있네.'
나팔수 지미.
여기저기 옷이 찢기고 잔 상처도 제법 많았지만 그래도 당당히 선 그가 유성을 보며 히죽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 유성 역시 웃었다.
'이겼구나.'
정말로 진짜.
코볼트의 왕자를 쓰러트리고 승리했구나.
새삼스럽게 느낀 승리에 다시 웃은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바라보았다.
먼저 주먹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카멜롯의 영광을."
"카멜롯의 영광을."
케이트를 필두로 유성의 군단 모두가 마주 예를 표했다.
르네가 뒤늦게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자 케이트는 빙긋이 웃었고, 지미 역시 넉살 좋게 웃었다.
군단이 빛이 되어 사라졌다.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병사들과 징집병들이 흉내 내듯 주먹으로 자신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모두가 유성을 바라보았다.
"르네."
"네, 계승자님."
바로 돌아온 대답에 유성은 다시 털썩하고 자리에 앉았고, 얼른 따라 앉은 르네가 그런 유성을 부축했다.
숨결이 닿을 만치 가까워진 르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유성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 슬슬 한계인 거 같아."
왕의 시간을 사용한 여파에 더해진 전투의 피로.
순간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웃했던 르네였지만 이내 무슨 말인지 이해했는지 주먹까지 불끈 쥐며 씩씩하게 말했다.
"안심하고 주무세요. 뒷일은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가슴까지 탕탕 두드리며 하는 말에 다시 웃은 유성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수마가 몰려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르네는 자신에게 기댄 채로 기절하듯 잠든 유성의 모습에 빙긋 웃었다.
작게나마 다시 감사의 말을 속삭인 뒤 시선을 멀리하였다.
어느새 저 먼 곳에서부터 새벽이 밀려오고 있었다.
* * *
유성은 눈을 떴다.
그러자 낯선- 아니, 한 번 봤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성에 마련된 유성 자신의 숙소.
눈을 한 번 크게 감았다 뜬 유성은 밀려드는 잠기운을 이겨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굳게 닫힌 창문 밖에서 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낮.
전투의 다음 날.
왼쪽 어깨에 약간 통증이 있어 돌아보니 잘 감긴 붕대가 보였다.
잠든 사이에 르네가 치료해둔 모양이었다.
'역시 유능해.'
새삼 왕의 마법사를 칭찬한 유성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주전자로 목을 축인 뒤 긴 숨과 함께 몸을 늘어트렸다.
이겼다.
승리했다.
코볼트의 왕자를 격퇴하고 로티안을 지켜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
"상태창."
작게 읊조린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대량의 문구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20점 획득했습니다.]
[악신의 후예 격파: 선업 수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도시구원: 선업 수치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능력치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지휘관 스킬 포인트를 30점 획득했습니다.]
[지휘 가능한 새로운 병종이 추가되었습니다.]
[군수 시설의 설치가 가능합니다.]
[왕국검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제국검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용왕심법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용의 심장이 개방됩니다.]
[새로운 스킬들을 획득했습니다.]
[농노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승급 가능!)]
[농노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승급 가능!)]
[궁수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승급 가능!)]
[궁수 부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승급 가능!)]
[경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경기병대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르네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업적 달성: 도시의 구원자]
[업적 달성: 악신의 대적자]
[업적 달성: 빛의 계승자]
"와."
많구만.
진짜 많았다.
레벨도 오르고 스킬도 생기고 군단의 레벨도 오르고 업적도 잔뜩 달성하고 아예 처음 보는 무언가도 생기고.
'군수 시설 설치?'
이 또한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이지만 대충 어떤 것인지 감이 오는 문구였다.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영지에 대장간이나 시장 같은 걸 설치했었는데.'
대장간을 추가하면 자연히 군단에 추가할 수 있는 장비가 늘어났고, 시장을 추가하면 식량이나 무기뿐만 아니라 아이템 같은 것들도 구할 수 있었다.
'빨리 이것저것 올려주고 싶네.'
포인트도 항상 많아봐야 15포인트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그냥 순수하게 얻은 포인트만 50포인트가 넘었다.
업적도 여러 개 달성했으니 모두 합치면 50pt가 훌쩍 넘으리라.
'거기에 농노 부대가 드디어 승급이 가능하다 이거지.'
일반 보병대.
부대가 강해지면 부대의 영웅이 강해지고, 부대와 영웅이 강해져 군단이 강해지면 유성 자신이 강해진다.
즉, 농노 부대가 일반 보병대로 승급하면 그것만으로도 유성 자신에 대한 보정 효과가 증가해 유성 자신의 전투력이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일반 보병대가 보고 싶기도 하고.'
어째 자꾸 눈이 가는 지미뿐만이 아니었다.
부대가 아예 승급을 하는 것이니 케이트의 변화 또한 적지 않으리라.
하지만 유성은 바로 상태창에 몰두할 수 없었다.
문 너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계승자님, 르네입니다. 들어갈게요."
유성이 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예의상 건네는 것 같은 말이 문밖에서 들려오자 작게 웃은 유성은 침묵했고, 이내 예상대로 르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어나셨군요."
쟁반에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겨 온 르네가 활짝 웃더니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유성은 마주 웃은 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르네에게 물었다.
"혹시 잠을 못 잔 건 아니지?"
"네? 어... 자긴 잤어요. 조금이지만."
아하하 웃은 르네는 가져온 음식들을 유성에게 권했다.
아침으로 먹기 편한 고기 수프와 부드러운 빵이었는데, 한 입 먹자마자 식욕이 확 솟구친 탓에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르네는 유성이 잘 먹는 모습에 다시 빙긋 웃더니 간단하게나마 상황을 보고했다.
"코볼트들은 멀리 도망쳤고, 시몽 경이 징집병들을 수습했어요. 로빈과 에드가도 도왔고요."
전투의 뒷수습은 단순히 패잔병 정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아군의 시신 수습과 살아남은 아군의 재편 역시도 중요한 일이었다.
어제의 전투로 징집병 가운데 거의 3분의 1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에둘러 전달한 르네는 유성이 식사를 마치자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시몽 경이 위고 아저씨의 가신들과 함께 계승자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제... 로티안의 영주가 되셨잖아요."
라투스 남작이 생각났기 때문인지 잠시 목소리가 흐려진 르네였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티안의 영주.
라투스 남작의 유언.
새삼 가슴이 먹먹해진 유성은 조금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르네, 라투스 남작에겐... 자식이 없었어?"
영지의 정당한 상속자.
유성의 물음에 르네는 씁쓸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시몽 경이 어째서 어제 그리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는지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로티안의 영주.'
유성 자신이 로티안을 물려받았다.
로티안의 영주가 되었다.
갑자기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갑자기 다른 세계에 오고, 카멜롯의 영혼들을 소환하며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성왕의 계승자니 어쩌니 했지만 영지나 왕국이 생긴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 영지가 생겼다.
너무나 갑자기이긴 했지만 유성 자신의 거점이 생겼다.
'여기서부터인가.'
흉성의 시대.
성왕의 계승자.
악신의 후손들.
숨을 크게 고른 유성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아, 그럼 가볼까?"
상태창으로 군단 관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쪽 역시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로티안의 영주 자리를 온전히 이어받는 것.
로티안의 영주로서 라투스 남작이 남긴 가신들을 마주하는 것.
"네, 유성 님."
활짝 웃으며 답한 르네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성을 안내했다.
시몽 경을 비롯한 로티안의 가신들이 모여 있는 영주의 집무실을 향해서였다.
제7장 - 로티안의 주인 (2)
라투스 남작이 배정해주었던 유성의 숙소와 영주의 집무실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로티안이 일개 남작의 성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것도 있었지만, 처음 유성이 로티안에 왔을 때만 해도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온 손님이었던 터라 외곽 쪽에 숙소를 배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집무실까지 이동하는 데 시간이 제법 필요하게 되었고, 자연 유성은 스스로의 인내심에 대해 다시 한번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 역시 못 참겠다.'
레벨 업을 했는데 당장 확인을 안 하고 나중으로 미룬다니.
'군단 관리는 못 하더라도 레벨 업 정도는 체크하자.'
뭐가 올랐는지, 새로 생긴 게 무엇인지 등등.
"상태창."
유성이 낮게 읊조리자 옆에서 걷던 르네가 유성을 돌아보았지만 유성은 그녀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줄 수 없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빛의 창들에 이미 집중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름: 천유성
성별: 남
직업: 견습 기사
레벨: 8
지위: 초급 지휘관
특이사항: 성왕의 계승자, 군단의 주인, 원탁의 계승자, 용의 심장
[기사도]
[빛을 계승하는 자]
[성왕 스킬]
왕국검법 Lv2 / 제국검법 Lv2 / 용왕심법 Lv2 / 용왕로 Lv1(New!) / 왕의 안목 Lv1(New!) / 군마 소환 Lv1(New!)
[기사단 명령]
왕의 시간
[군단 관리]
[군수 시설 추가]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능력치였다.
레벨이 3개나 오른 덕에 전반적으로 크게 상승했는데, 그중에서도 마력의 상승치가 다른 능력치의 거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용왕심법의 레벨이 오른 것도 있지만 용왕로 덕분이구나.'
용왕로.
용의 심장이 개방됨에 따라 얻게 된 새로운 패시브 스킬.
[용의 심장이 용의 마력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원래 설명이 단순할수록 효과가 강력한 법이었다.
'선업 보정치랑 군단 보정치도 있으니... 마력 하나는 동 레벨 기사들의 네 배... 아니, 거의 다섯 배에 육박할 정돈데?'
실로 어마어마한 마력 량이었다.
'군단 보정치는 육체 능력에 대한 보정 효과가 크고 선업 수치는 마력이나 정신력 같은 능력치에 보정 효과가 크구나.'
벌써부터 이런데 나중 가면 진짜 막 수십 미터짜리 오라 블레이드를 휘두르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게 웃은 유성은 또 다른 신 스킬인 왕의 안목을 살펴보았다.
[성왕은 곧 인간의 왕. 왕의 눈은 인간의 재능을 간파한다.]
'오.'
조금 멋을 부린 것 같은 문구였지만 보자마자 바로 이해가 되는 설명이었다.
재능을 간파한다.
즉, 재능을 알아본다.
유성은 바로 고개를 돌려 르네를 보았고,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는 유성을 슬쩍슬쩍 훔쳐보던 르네는 흠칫 놀라 움찔하였다.
하지만 유성은 무어라 말을 늘어놓는 대신 바로 왕의 안목을 발동시켰다.
파앗-!
유성의 눈동자가 왕의 시간을 사용할 때처럼 금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색색의 빛이 유성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연이어 떠오른 것은 간단한 형태의 심볼들.
단순했지만 보자마자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대충 이런 식인 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심볼로 표시된다.
해당 재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하나의 분야 내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재능인지 여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왕의 안목의 현재 레벨은 1.
레벨이 높아지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르네는 역시 마법에 재능이 있네.'
르네를 봤을 때 떠오른 심볼은 네 가지.
하나는 당연히 마법이었고, 나머지는 각각 행정, 기승, 격투기였다.
'격투기... 격투기 맞겠지?'
심볼 모양이 주먹이랑 발이니.
"르네."
"네, 계승자님."
유성의 부름에 르네가 즉답했다.
유성은 한 걸음 물러나 그런 르네의 전신을 한 눈에 담더니 살짝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혹시 격투기 배운 적 있어?"
"네? 아, 아뇨. 없는데요?"
생각도 못한 질문이라는 듯 르네가 당황까지 하자 유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숨은 재능이란 건가.'
물론 그렇다고 르네를 딱히 격투가로 전직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이래저래 흥미로운 재능이기는 했다.
'재능의 정도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혹시나 권왕급 재능이라면 정말 전직시키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
물론 여신이 '왕의 마법사'로 지목한 르네인 만큼 마법 재능이 더 우수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말이다.
'기승 재능도 나쁘지 않아. 아니, 좋아.'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났을 때도 말을 타고 있던 르네였다.
기승의 재능은 '무언가를 타는 재능'을 말하니, 말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잘 탈거라 생각하면 이래저래 좋은 보조 재능이라 할 수 있었다.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아예 용 타고 다니는 마법사들도 있었으니까.'
마운틴 트롤이나 팬텀스티드 같은 괴물을 타고 다니는 경우도 흔했고 말이다.
'행정 쪽에 재능이 있는 것도 좋아.'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로티안의 영주가 된 상황이었다.
흉성의 시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로티안에 그치지 않고 세력을 더 키워나가야 하는데, 최측근이자 신뢰할 수 있는 르네가 행정에 밝다는 건 무척이나 좋은 일이었다.
"역시 왕의 마법사야. 유능해. 정말 유능해."
"네? 어... 감사... 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당황한 르네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감사하자 다시 웃은 유성은 걸음을 서둘렀다.
마음 같아서는 군단 관리- 특히 새로 추가된 군수 시설이란 걸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집무실이 가까워진 마당이었다.
아쉽지만 처음 계획대로 군단 관리는 집무실에서의 용무 이후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군마 소환은 이름 그대로 군마를 부르는 걸 텐데, 이것도 보고 싶지만 일단은 참아야지.'
지금까지는 케이트의 군마를 같이 타거나 빌려타는 식이었는데 이제 유성 자신에게도 군마가 생겼다니 몹시 궁금하기는 했다.
'레벨이 붙었다는 건 발전도 가능하다는 거겠지?'
군마 자체가 강해진다거나, 스킬 자체가 업그레이드되어서 천마 소환 같은 걸로 바뀐다거나.
'가장 타고 싶은 건 역시 드래곤인데.'
기사의 끝판왕은 당연히 용기사가 아니겠는가.
저도 모르게 다시 상태창에 시선이 간 유성이었지만 이번에는 금방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집무실에 가까워진 것과 별개로 르네가 다시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시몽 경과 위고 아저씨의 가신들이 집무실에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란트 경도 오늘 아침에 도착했고요."
"란트 경? 후방에 있던 기사인가?"
"네, 로티안 후방의 마을을 관리하던 기사입니다. 시몽 경만큼이나 오랫동안 위고 아저씨를 모신 기사라 저와도 안면이 있어요."
르네의 설명에 유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르네의 반응을 보니 딱히 문제가 될 인물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영지 운영에 쓸 기사가 한 명 늘었다는 거니 희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가신들은 행정관들을 이야기하는 거지?"
"네, 다들 오랫동안 로티안에서 일한 이들이고, 시몽 경이 있으니 통솔에도 문제가 없을 거예요. 다들 계승자님의 활약을 보기도 했고요."
유성이 무얼 걱정하는지 짐작했는지 르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가신들의 대장이라 할 수 있을 시몽 경이 유성의 편이었고, 유성의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았으니 반항이나 텃세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르네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이제는 정말 집무실 앞에 도달했다.
집무실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 둘이 동경과 존경의 빛이 가득한 눈으로 유성을 바라보았고, 르네는 쿡쿡 웃더니 경비병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 주세요."
"네? 아, 넵!"
급히 답한 경비병들이 허둥거리며 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드러난 문 너머의 광경.
의식적으로 숨을 고른 유성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영주의 집무실은 제법 넓은 편이었다.
보통 집무실 하면 사무를 보는 작은 방 같은 곳을 떠올리기 쉽지만 영주의 집무실은 가신들과 회의를 하고 외부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 역할도 겸했기에 크고 넓은 것이 보통이었다.
단상 위에 화려하진 않지만 커다란 영주의 의자가 있었고, 그 아래쪽에 시몽 경을 비롯한 라투스 남작의 가신들이 단상의 좌우로 줄을 맞춰 서 있었다.
모두 여섯.
왼쪽에 선 셋은 아는 얼굴이었고, 오른쪽에 셋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로빈하고 에드가도 일단 여기 있는 건가.'
본래라면 르네와 함께 발투아 백작가로 돌아가야 할 두 사람이었지만 르네가 로티안에 머물게 되면서 같이 남게 된 모양이었다.
물론 임시조치에 가까운 상황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모자란 마당에 기사급 인재가 둘이나 남게 된 것은 분명 호재였다.
시몽 경 옆에 서서 이쪽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과 눈인사를 나눈 유성은 반대편에 선 세 사람도 가볍게 훑어보았다.
시몽 경의 맞은편에는 덩치가 크고 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고리 눈의 남자가 똑바로 서서 유성을 쳐다보았고, 행정관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와 젊은 사내는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염이 란트 경이겠네.'
후방 마을에서 원군을 이끌고 왔다는 라투스 남작의 마지막 기사.
대충이나마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 뒤 시몽 경을 마주하자 그가 정중히 예를 표한 뒤 말했다.
"라투스 남작님의 유언에 따라 영주의 인을 바치겠습니다. 자리에 앉으시죠."
시몽 경이 영주의 의자를 가리키자 로빈과 에드가는 늘 그랬듯이 눈을 빛냈고, 란트 경으로 추정되는 수염 남은 입을 꾹 다문 채 유성을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영주의 의자 앞에 선 뒤 숨을 한 번 크게 골랐다.
유성은 라투스 남작을 잘 알지 못했다.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너무 짧았고, 그나마도 두 번에 불과했다.
영주의 의자에 앉아 집무를 보는 모습은 아예 본 적조차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 최후가 너무나 장렬했기 때문일까.
코볼트의 왕자에 맞서 최후의 불꽃을 일으키던 라투스 남작의 뒷모습을 떠올린 유성은 짧게나마 묵념을 한 뒤 자리에 앉았다.
높은 자리였다.
단상 아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몽 경의 곁에 서 있는 르네의 얼굴 역시 보였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 짓고 있었다.
시몽 경이 유성에게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쟁반 위에 올린 영주의 인을 바쳤다.
"라투스 남작님의 유언에 따라 유성 경에게 로티안 영주의 인을 바칩니다."
은으로 된 반지와 그 위에 자리한 동그란 인장.
딱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유성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라투스 남작님의 유지를 잇겠습니다."
무겁게 답한 유성은 조심스럽게 반지를 집어 든 뒤 오른손 약지에 끼웠다.
간단한 의식이었지만 이로써 유성은 로티안과 인근 마을 일곱 개를 다스리는 영주가 되었다.
시몽 경이 묵례한 뒤 물러서자 르네가 영주의 의자 옆에 시립했고, 란트 경과 행정관 두 사람이 단상 아래에서 일렬로 서 예를 표했다.
"기사 란트가 인사드립니다."
"행정관 가스파르가 인사드립니다."
"행정관 보조 바질이 인사드립니다."
아까부터 뻣뻣하게 서서 쳐다보기에 어떻게 나오나 했는데 의외로 정중히 예를 표하는 란트 경이었다.
'한번 봐볼까.'
이러나저러나 이제 한 배를 탄 입장이었다.
더욱이 눈앞의 이들 모두가 유성 자신의 가신들이 된 셈이니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라투스 남작님의 유지를 받들어 로티안의 영주 자리를 물려받게 된 천유성입니다."
일단 세 사람의 인사를 받아준 유성은 바로 왕의 안목을 발동시켰다.
파앗-
유성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느낀 것인지 가신들 모두가 순간 흠칫했지만 그렇다고 무어라 말을 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란트 경을 제외한 모두는 오히려 경의 어린 눈으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전투에서 보았던, 코볼트의 왕자를 쓰러트렸던 황금의 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가신들과 별개로 유성은 감탄과 실망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로빈과 에드가는 예상대로 준수하다.
아직 재능의 정도를 알아볼 순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검술을 비롯한 전투술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빈은 작문? 작문이겠지? 아무튼 그쪽에도 재능이 있는 거 같고.'
반면 행정관 두 사람에게서는 이렇다 한 재능을 찾기 어려웠다.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닌데 좀 약하다고 해야 할까?
아직 재능의 정도까지는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 왕의 안목이었지만 그래도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시몽 경이랑 란트 경도 그냥 평범한 거 같네.'
시몽 경이라 그렇다 쳐도 란트 경은 외모가 어쩐지 모르게 삼국지의 장비를 떠올려서 기대했는데 그냥 시골 기사 A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요리에 재능이 있긴 한 것 같지만... 요리사 할 일은 없겠지.'
하지만 유성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애당초 변방 영지의 가신들인데 S급 인재들이 모여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으니 말이다.
흉성의 시대에 맞서기 위한 싸움은 싫어도 세계구급 싸움이 될 터이니 인재 또한 차근차근 모아가면 될 일이었다.
'애당초 카멜롯의 기사들도 있고.'
새삼 세 사람을 왕의 안목으로 봤을 때가 기대된 유성은 왕의 안목을 해제하였다.
"시몽 경, 전후 처리는 어떻게 되었죠?"
평시라면 연회라도 열며 새로운 영주의 취임을 축하했을 터였지만 지금은 사실상 전시였다.
유성의 물음에 시몽 경은 바로 답하기 앞서 다른 것을 입에 담았다.
"말씀을 편히 하시죠. 유성 님은 이제 로티안의 주인이십니다."
"...알겠다."
척 봐도 유성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로빈과 에드가에게 말을 놓을 때와는 달랐다.
유성 자신보다 적어도 스무 살은 많아 보이는 시몽 경에게 하대를 하자니 아무래도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고, 나중에는 결국 익숙해질 일이기도 하였다.
유성의 다소 어색한 하대에 시몽 경은 아주 작게 미소 짓더니 본래 유성이 건넸던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아침부터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라투스 남작님의 시신은 어젯밤 수습해 염을 한 상태입니다."
시작부터 무거운 이야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성벽과 성문의 파손 정도는 어느 정도지?"
"성벽은 며칠 내로 복구 가능한 수준이지만 성문의 파손이 심합니다. 성문이 자리한 성곽 부분이 아예 내려앉다시피 한데다가 성문 역시 새로 제작해야 하니 복구에 적어도 보름 이상이 소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내에 남은 코볼트들은 없나?"
"수색 중이지만 숨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타당한 이야기였다.
성내보다는 놈들이 어디까지 도망갔는지, 놈들에게 함락당한 마을들은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시몽 경의 보고를 모두 들은 유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 상황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사실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정을 내린 유성은 로티안의 영주로서 첫 지시를 내렸다.
제7장 - 로티안의 주인 (3)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온 시간.
로티안의 주민들은 성벽 앞에 모여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잔해만 치운 성문 앞에 세워진 거대한 제단과 높게 치솟은 불꽃.
그 앞에 도열한 로티안의 병사들.
유성이 내린 영주로서의 첫 명령은 장례식이었다.
라투스 남작만이 아닌, 그날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모든 장병들을 기리기 위한 합동 장례식.
대단한 것은 준비할 수 없었다.
큰 불을 피우고 꽃을 바친 것이 사실상 전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장례식이었다.
로티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모두를 기리기 위한 행사였다.
장례식은 본래 죽은 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것.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것.
크게 피운 불꽃 아래에서 르네가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수의 여신의 경전에 실린 조문을 낭송했다.
따라서 흐느끼는 자도 있었고, 먹먹한 얼굴로 그저 불꽃을 바라보는 자도 있었다.
유성은 라투스 남작의 마지막 모습과 카멜롯의 병사들을 떠올렸다.
로토 마을 전투에서 처음으로 목숨을 잃었던 젊은 농노 부대원의 얼굴이 생각났다.
'흉성의 시대....'
이제 시작이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어젯밤과 같은 전투가 이어질 터였다.
숨을 크게 고른 유성은 오른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큰 불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졌다.
* * *
장례식이 마무리된 것은 자정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장작을 모두 삼킨 불꽃이 달빛 아래 사그라지자 징집병들과 주민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고, 너무 울어 눈이 붉게 물든 르네 역시 로빈의 부축을 받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혼자가 된 유성은 아직 정리 작업이 끝나지 않은 영주의 방 대신 숙소로 향했다.
중간에 란트 경이 술병과 술잔을 들고 유성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시몽 경의 적절한 차단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번 합동 장례식 건으로 두 사람 모두 유성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진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깊은 밤.
달빛 외에는 이렇다 할 조명도 없는 방의 침대 위에 앉은 유성은 마음을 정리했다.
장례식은 끝났고, 영주 취임도 일단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래, 다음.
일어난 이후 지금까지 너무 하고 싶었지만 계속 참고 있던 것을 해야 할 때.
"상태창."
농노 부대의 일반 보병대 승급, 추가적인 부대 관리, 군수 시설 추가, 기사들의 레벨 업과 추가된 스킬 확인, 르네의 성장 등등.
유성의 인내에 보답하듯 빛의 창이 떠올랐고, 빠르게 훑어본 유성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기대했던 것과 기대 이상의 것.
상태창을 조작하는 유성의 손길이 빨라졌다.
* * *
[업적 달성: 도시의 구원자]
[장비: 로티안의 깃발(아군의 방어력 소폭 증가) 획득]
[지휘관 스킬 포인트 5점 획득]
[업적 달성: 악신의 대적자]
[패시브 스킬: 악신의 대적자(인간의 적에 대한 공격 대미지 10% 증가) 획득]
[지휘관 스킬 포인트 5점 획득]
[업적 달성: 빛의 계승자]
[패시브 스킬: 빛의 계승자(성기사 스킬의 위력 10% 증가) 획득]
[지휘관 스킬 포인트 5점 획득]
[군수 시설: 대장간 추가 가능]
[보유 pt: 65pt]
[최대 소환 가능 부대: 3부대]
[군단 관리]
케이트의 농노 부대 Lv4(승급 가능!)
기수: 케이트
나팔수: 지미
구성원: 12+1(최대: 40+1)
[농노 부대 5명 증원 1pt]
기수 챔피언: 케이트
레벨: 4
무장: 카멜롯의 깃발(사기치 +1) / 평범한 장검 / 가죽 갑옷 / 군마
기사도: 카멜롯의 영광(영향 범위 안에 들어온 아군의 의지와 전투력을 강화하고 적의 의지를 저하시킨다.)
[한스의 농노 부대(5인 구성) 추가 5pt]
[한스의 농노 부대에 기수 추가 1pt]
[한스의 농노 부대에 나팔수 추가 1pt]
바나데인의 궁수 부대 Lv4(승급 가능!)
부대장: 바나데인
구성원: 9+1(최대 30+1)
[궁수 부대 2명 증원 1pt]
다이애나의 경기병대 Lv3(다음 레벨에 승급 가능)
부대장: 다이애나
구성원: 2+1(최대 10+1)
[경기병대 1명 증원 1pt]
[영웅 관리]
왕의 마법사: 르네 발투아
레벨: 3
보유 pt: 5pt
무장: 참나무 지팡이 / 마법사의 로브
고유 스킬: -
고유 스펠: -
[르네가 마력 강화 Lv2를 획득: 3pt]
[르네가 맨손 격투 Lv1을 획득: 3pt]
[르네가 전투 명상 Lv1을 획득: 3pt]
[르네가 새로운 마법을 획득: 3pt]
[르네가 군마에 탑승: 3pt]
[르네의 근력을 강화: 1pt]
[르네의 민첩을 강화: 1pt]
[르네의 체력을 강화: 1pt]
눈앞을 가득 채운 문장들을 빠르게 읽은 유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업적 보상들이 나쁘지 않아.'
추가 포인트는 없었지만 아이템과 패시브 스킬들을 얻었다.
더욱이 패시브 스킬들의 효과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단순 합산이 아니라 퍼센트 증가야.'
즉, 유성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효과 역시 강해지는 스킬들이라 할 수 있었다.
'군단 보정이랑 선업 수치 보정도 있으니 성기사 스킬들은 진짜 엄청 강해지겠네.'
보정의 보정의 보정이라고 해야 할까.
'악신의 대적자랑 빛의 계승자도 중복이 될 테고.'
인간의 적을 상대로 할 때는 통상보다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차피 싸울 상대는 인간의 적이라 이거구만.'
특정 적을 상대로만 강해지는데 어차피 싸울 게 그놈들뿐이다.
'생각해보니 인간들이 상대라도 먹히는 게 아닐까?'
아직 '계승자' 지위이긴 했지만 유성 자신은 기사왕 아서 팬드래건의 뒤를 잇는 성왕- 즉, 인간의 왕이었다.
그러니 유성 자신의 적은 곧 인간의 적이 되는 것이 아닐까?
살짝 미친 소리 같았지만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시험해볼 날이 없길 바라야겠지만... 일단 될 거 같기는 하네.'
고개를 끄덕인 유성은 유일한 장비 보상인 로티안의 깃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군에게 방어력 버프를 주는 깃발.
마음에 드는 능력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군단에 기수 영웅이 케이트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깃발 두 개 들면 되는 일 같기도 한데.'
보기에 좀 그렇겠지만 깃대에 깃발을 두 개 단다거나.
유성은 일단 어떻게 되나 보자는 생각으로 로티안의 깃발을 케이트에게 장착시켜 보았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카멜롯의 깃발에 로티안의 깃발이 더해집니다.]
[카멜롯의 깃발이 강화됩니다.]
[카멜롯의 깃발: (영향 범위 안에 들어온 아군의 의지와 전투력을 강화하고 적의 의지를 저하시킨다 / 아군의 방어력을 소폭 상승시킨다)]
"오."
카멜롯의 깃발에 로티안의 깃발 효과가 더해졌다.
'역시 카멜롯의 깃발이라 이건가.'
가만 보니 효과만 더해진 게 아니라 본래 있던 능력 역시도 약간이지만 강화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강화하다보면 진짜 대단한 깃발이 되겠는데?'
뭔가 케이트의 전용 장비라는 느낌도 들었고 말이다.
'깃발 전용 궁극기 같은 게 생길지도.'
즐거운 상상을 잠시 해본 유성은 다음 항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장간이라.'
군수 시설 추가.
딱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판타지 모나크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부대를 꾸밀 경우 영지가 있다면 영지에, 영지가 없다면 부대 내에 간이로나마 대장간이나 식당 같은 시설들을 설치할 수 있었다.
'대장간을 설치하면 무구의 생산, 수리가 가능해지고 식당을 설치하면 사기치가 오르고 하는 식이었지.'
그 외에도 시장이나 병원 등등 다양한 효과를 가진 시설들이 많이 있었다.
'뭔가 대장간이 현실에 나타날 것 같진 않은데... 일단 추가해보자.'
[대장간 추가: 10pt]
[대장장이 추가: 3pt]
10pt.
대장장이까지 포함한다면 13pt.
결코 적지 않은 포인트였지만 투자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대장간을 신설합니다.]
['유성 성'에 대장간이 추가됩니다.]
[대장장이 퍼거스가 추가되었습니다.]
[보조 대장장이 멜리사가 추가되었습니다.]
[부대의 무장 관리가 가능해졌습니다.]
[영웅들의 무장 관리가 가능해졌습니다.]
연달아 떠오른 문구에 유성은 눈을 빛냈다.
'유성 성.'
유성 캐슬. 유성의 성
살짝 미묘한 이름이었지만 듣자마자 감이 오기는 했다.
케이트를 비롯한 카멜롯의 군단이 소환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 머무는 장소.
그곳에 대장간과 대장장이가 추가되었다.
퍼거스의 대장장이 집단 Lv1
구성원: 2(최대 2명)
대장장이 퍼거스
레벨: 1
보조 대장장이 멜리사
레벨: 1
'얘들도 부르면 나타나는 건가?'
유성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유성 성]
상태창 한 귀퉁이에 처음 보는 버튼이 생겼다.
가볍게 눌러보니 고전 2D 도트 게임을 연상시키는 성의 평면도가 나타났는데, 안에는 데포르메 된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 얘가 케이트인가? 얘는 지미고?'
3등신 정도로 데포르메된 도트였지만 특징들이 부각된 덕분인지 금방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근데 성이 좀 휑하긴 하네.'
성 안에 있는 시설이라고는 병사들이 자는 숙소와 대장간이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레벨1이라는 느낌이 팍팍나는 부실한 모습들이었다.
'얘네 여기서 그냥 다 같이 자는 거였나.'
개인실도 없이 커다란 천막 안에서 케이트, 바나데인, 다이애나 세 사람이 병사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는 느낌이었다.
'대장간에는 대장장이 두 명이 있네.'
수염이 덥수룩한 근육질의 남자가 아마 퍼거스이고 그 옆에 있는 갈색 머리 여자가 멜리사인 모양이었다.
'이거 시설 추가는 어떻게 하는 거지?'
창을 여기저기 두드리다보니 건물 추가 메뉴가 나오긴 했는데 대부분이 잠겨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유성 자신의 레벨이 올라야 더 많은 시설들을 추가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에 훈련소 같은 거 추가하면 가만 놔둬도 숙련도가 오르고 그러려나?'
방치형 게임들처럼 말이다.
식당이나 술집 같은 오락시설보다 훈련소부터 떠올리는 유성을 보았다면 카멜롯의 군단원들 모두가 슬퍼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당초 이런 성격이었기에 랭킹 1위를 했던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이 성을 키우면 된다 이거구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꿀 수 있고, 키울 수도 있는 유성 자신의 성.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런지 그냥 뽈뽈 거리고 돌아다니는 영웅들과 병사들만 보고 있어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친 유성은 다시 군단 관리 메뉴를 활성화 시켰다.
'남은 건 52pt.'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단연 농노 부대와 궁수 부대의 승급이었지만 그보다 우선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피해가 커.'
로티안 수성전의 결과 군단병의 반수 이상이 갈려나간 상황이었다.
특히 근접전을 수행한 농노 부대의 피해가 컸다.
'승급하기 전에 일단 병력 보충부터 하자.'
판타지 모나크 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승급 후에는 병력 증원에 필요한 pt가 증가할 터이니 승급 전에 미리 인원을 늘려두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케이트의 농노 부대 Lv4
구성원: 35+1 예비대: 2
바나데인의 궁수 부대 Lv4
구성원: 26+1 예비대: 1
다이애나의 경기병대 Lv3
구성원: 10+1
병력 충원을 최대로 하지 않은 건 승급할 경우 레벨이 초기화되면서 부대의 최대 구성원 숫자가 줄어들 것이 분명한 것과 대장간 효과를 사용하기 위한 pt를 아껴두기 위함이었다.
병력 충원에 사용한 포인트는 총 22점.
잔여 포인트는 30점.
[농노 부대를 일반 보병대로 승급: 10pt]
[궁수 부대를 정예 궁수 부대로 승급: 10pt]
도합 20pt.
유성은 주저 없이 버튼을 눌러 두 부대를 모두 승급시켰다.
그러자 선택 문구가 나타났다.
[일반 보병대의 무장을 선택하십시오.]
[1. 창]
[2. 검과 방패]
'이건 창이지.'
검과 방패를 든 군단병도 끌리긴 했지만 보병대가 하나뿐인 상황이라면 역시 창이었다.
'죽창은 이제 졸업이구만.'
즐거운 마음으로 창을 선택한 유성은 다시 상태창을 보았다.
케이트의 일반 보병대 Lv1
기수/부대장: 케이트
나팔수/부부대장: 지미
구성원: 30+1(최대: 30+1) / 예비대: 7
[보병대 5명 증원: 2pt]
[대장간 추가 효과: 나무 방패 장착: 10pt]
부대장: 케이트
레벨: 4
무장: 카멜롯의 깃발(New!) / 평범한 장검 / 징 박힌 가죽 갑옷(New!) / 둥근 나무 방패 (New!) / 군마
기사도: 카멜롯의 영광
칭호: ???의 챔피언(New! / 잠김 상태)
스킬: 왕국 검법 Lv1(New!)
'오.'
부대 레벨이 오르면서 케이트에게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장비들이 추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킬도 생겼고, 아직 잠김 상태이긴 해도 칭호가 생겼다.
'지미도 부부대장으로 승격했네.'
딱히 영웅이라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승진이었다.
'대장간 효과는 매력적이지만 지금 남은 건 10pt뿐이니까 다른 것들도 보고 결정하자.'
병력 충원을 아예 안 했다면 세 부대 모두 대장간 효과를 달아주는 것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애당초 무리한 이야기였다.
일단 병력 보충이 되어야 뭐든 가능했으니 말이다.
'다음은 바나데인.'
바나데인의 정예 궁수 부대 Lv1
부대장: 바나데인
구성원: 20+1(최대: 20+1) / 예비대: 7
[궁수 2명 증원: 3pt]
[대장간 추가 효과: 불화살 장착: 10pt]
궁수 부대장: 바나데인
레벨: 4
무장: 엘프 장궁 / 단검 / 가죽 갑옷(New!)
기사도: 꿰뚫는 일격(공격의 관통력과 위력을 강화시킨다.)
칭호: ???의 사수(New! / 잠김 상태)
스킬: 속사 Lv1(New!)
'오, 불화살.'
그래 이거지.
속성 공격 하나쯤은 갖춰줘야지.
'바나데인도 속사 스킬이 생겼네.'
지금도 빨리 쏘는데 더 빨리 쏜다는 말인가?
즐거운 미소를 지은 유성은 마지막으로 경기병대를 보았다.
다이애나의 경기병대 Lv3
부대장: 다이애나
구성원: 10+1
[경기병대 1명 증원 1pt]
[대장간 추가 효과: 편자 장착: 10pt]
경기병 부대장: 다이애나
레벨: 3
무장: 단창 / 장검 / 가죽 갑옷(New!) / 나무 방패(New!)
기사도: 충격의 다이애나
'아직 부대 승급을 안 해서 그런가 다이애나는 좀 심심하네.'
하지만 다이애나의 경기병대도 1레벨만 더 올리면 승급을 할 터이니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편자를 장착하면 기병들의 이동 속도와 속도 유지력이 증가하는구만.'
보병대의 나무 방패 장착.
궁병대의 불화살 장착.
기병대의 편자 장착.
남은 포인트가 10점이니 세 가지 선택지 가운데 당장 고를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불화살로 가자.'
이건 불화살이다.
불화살을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불화살 장착]
[잔여 포인트: 0pt]
알뜰하게 포인트를 모두 사용한 유성은 다시 유성 성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기대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 좋아."
부대원들의 모습이 바뀌었다.
농노답게 낡고 해진 옷을 입고 있던 농노 부대는 이제 없었다.
검은 상의와 하의 위에 소매 없는 회색 옷을 겹쳐 입은 창병들이 숙소 근처에 도열해 있었고, 케이트의 모습 역시 조금 변하였다.
'이건 지미네.'
케이트 근처에서 연신 자기 옷을 보며 마음에 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있는 덩치 큰 사내의 모습에 유성은 쿡쿡 웃었다.
그리고 정예 궁수 부대.
작지만 큰 변화라고 해야 할까.
이들도 변했다.
마치 정예 부대라는 것을 피력하듯 깃발 꽂은 베레모 비슷한 모자들을 쓰고 있었는데, 허리춤에 보니 기름병들이 보였다.
'불화살 용도구나.'
연이어 경기병대가 모여 있는 곳까지 본 유성은 순간 눈을 번쩍였다.
마구간도 없어 기둥에 대충 매어둔 말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녀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이트의 군마처럼 칠흑의 군마였는데, 덩치가 좀 더 좋았다.
'생각해보니 이거 내 말 아니야?'
이번에 새로 추가된 군마.
'이름도 지어줘야겠네.'
이제 보니 경기병대의 말들에는 다들 이름이 있었다.
케이트의 군마에도 이름이 붙어 있는 걸 보니 아마 유성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케이트가 군마 이름을 지어준 모양이었다.
'부대원들도 다 이름이 있구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새삼 인지하고 나니 성 안에 자리한 병력들이 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포인트 모아서 시설 추가 해줘야겠다.'
당장 포인트 쓸 곳이 태산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구간이나 식당 정도는 있어야겠지.
마지막으로 케이트와 바나데인, 다이애나를 한 명씩 돌아본 유성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상태창을 닫았지만 이내 다시 열었다.
한 명, 깜빡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7장 - 로티안의 주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