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이후 기사로 사는 법
내가 즐겨하던 게임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1화. 게임 속으로 (1)
내가 즐겨하던 게임이 있다.
중세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하드코어한 게임.
난이도가 악명 높아서 무수한 게이머들을 좌절시켰던 나의 인생작.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냐면, 바로 내가 그 게임 속에 빙의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엔딩 이후 500년 뒤의 시대에.
*
어릴 적에 나는 게임을 참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면 코 묻은 돈을 들고 pc방에 달려가 살다시피 했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것은 나이를 먹어 사회초년생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만 예전에 보였던 열정은 많이 죽었다.
일에 치이고 현생을 살다 보니 지나치게 과도한 경쟁을 종용하는 게임은 기피하게 됐다.
자본으로 찍어 누르게 만드는 과금게임도 가진 돈이 부족했기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주로 하는 것은 싱글게임이었다.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고 판타지 세상을 여행한다는 느낌이 나의 지친 마음에 제격이었다.
난이도가 높은 것? 오히려 도전의식이 생겨서 좋았다.
내가 그 게임에 빠져든 것은 그래서일지도 몰랐다.
드넓은 초원에서 부딪치는 병장기들.
하늘을 가로지르는 신비의 생물.
거대한 던전과 왕국들.
그 모든 낭만을 그러모은 중세 판타지 배경의 오픈월드 RPG게임이었다.
화려한 그래픽, 높은 난이도 뛰어난 세계관까지.
사회 초년생인데도 불구하고 퇴근만 하면 주말을 끼어서 줄곧 그 게임만 붙잡았다.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걸로 악명이 높아서 무수한 게이머들을 좌절시킨 게임이었지만.
그것은 잊고 있었던 나의 오기와 도전정신에 기름을 부어 주는 격이었다.
[99회차 엔딩을 클리어 했습니다.]
시작부터 엔딩까지 총 99회차 마무리를 지었다.
정말 불태웠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즐겼다.
원래 더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은, 99회차 이후로 난이도가 전혀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 게임의 끝이 99회차까지밖에 없기도 했고.
'이제 정말 끝인가.'
내 인생게임이라 자부할 만한 게임이었지만 결국 끝이구나.
DLC도 모두 나왔겠다, 이제 더는 추가패치도 없을 거고 사실상 제작사의 다른 후속작 게임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으리라.
인생의 일부를 함께 한 게임이 끝났다는 생각에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실었다.
모니터 안쪽에는 99회차 엔딩 스크롤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 장면도 지긋지긋하게 본 거라 원래라면 스킵을 했을 테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냥 놔두고 있었다.
검은 화면에 웅장한 BGM과 함께 새하얀 글씨가 전부 올라갔다.
그리고 한 화면이 떠올랐다.
[다음 회차를 플레이 하시겠습니까?]
[YES/NO]
"뭐야?"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그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 게임은 99회차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로 아는데 다음 회차가 있다고?
어쩌면 오류나 버그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이런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마우스를 쥔 내 손은 YES 버튼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딸깍.
그리고 YES버튼에 커서를 가져가 누르는 순간.
───!!!
내 시야는 새까맣게 암전되었다.
*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공기는 축축하고 주변은 너무 어두웠다.
'여긴, 어디지?'
나는 기절하기 전 마지막 광경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분명 99회차 엔딩을 보고 게임을 끝내려 했는데, 다음 회차 플레이 버튼이 떠올랐고.
'그것을 누른 순간 갑자기 정신이....'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엔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지만 서서히 적응이 되어 내부의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려던 나는 그때 몸에 느껴지는 이질감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갑옷?'
걸치고 있던 일상복은 어딜 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갑옷이었다.
그것도 기사가 입을 법한 갑옷.
하지만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이 갑옷이 내 눈에 너무 익었다는 점이다.
'이거, 내가 한 게임 캐릭터가 시작할 때 입던 갑옷이잖아?'
내가 플레이 하던 게임은 캐릭터의 '태생'을 고를 수가 있다.
[방랑기사] [야만전사] [마법사] [성직자] [도적] [성기사] [흑마법사] [거지].
총 8개의 태생을 선택할 수 있는데 각 태생마다 초기 스탯과 스킬, 그리고 착용 장비가 달랐다.
나는 당연히 가장 정석적인 [방랑기사]를 선택했다.
근접캐를 선호하기도 하지만 공격력과 방어력, 체력이 매우 안정감 있는 기사가 이 하드코어 한 게임을 헤쳐 나가기 좋아 보였다.
실제로도 그게 맞았고.
내가 입고 있는 갑옷은 그런 기사 태생을 선택했을 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갑옷이었다.
기본 장비지만 그렇다고 성능이 나쁜 장비는 아니다.
이 게임은 장비의 등급이 없다. 각 장비마다 특색은 있지만 밸런스를 붕괴시킬 정도는 아니니까.
초반에 쥐여 준 철검으로 최종보스를 잡는 것도 가능한 것이 이 게임의 장점 중 하나였다. 물론 그러기엔 게임이 너무 어려워서 문제였지.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이걸 입고 있어?'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이 어두운 공간 내부가 나의 기억 한쪽을 자꾸 건드리고 있었다.
'이 광경. 이 구도. 너무 익숙해.'
시련의 예배당.
이곳은 게임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겪는 튜토리얼 구간이었다.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이걸 모를 수가 있을까.
동굴 내부를 조각해서 만든 작지만 화려한 신전의 모습.
은은한 야광석으로 녹청색 빛을 발하는 모습이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처음으로 게임을 시작하는 유저들은 내부의 광경에 감탄을 하다가 금방 욕을 내뱉고 만다.
바로 튜토리얼 구간 보스부터 정신 나간 난이도를 보여 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쪽 벽에 다가가 손으로 벽을 살짝 쓸었다.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며 느껴지는 돌조각의 감촉.
그 끝에 묻은 먼지의 냄새를 맡아보니 퀴퀴한 냄새가 났다.
'감촉도 전부 진짜다. 꿈이 아니야.'
자연스럽게 내 표정인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눈을 떠보니 게임 속과 흡사한 환경이었다. 심지어 입고 있는 갑옷은 게임 캐릭터의 그것이었고.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지 이유는 모른다.
다만 가능성이 높은 거라면 기절하기 전 마지막에 본 다음 회차 버튼을 클릭한 거겠지.
솔직히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이게 눈앞에 벌어진 현실인 이상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움직이자.'
어둡고 습한 예배당 안쪽에 계속 있다 보니 정신이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여기에 있으면 없던 폐소공포증도 생기겠다.
나는 걸었다.
일단 한시라도 빠르게 이 예배당을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으며.
처음에 불편했던 갑옷도 계속 걷다 보니 몸에 서서히 적응되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된 거지? 게임 속 세상에 정말로 온 건가? 그렇다면 지금 내 몸은 게임 속 캐릭터의 그것인가?'
그렇게 걷다 보니 눈앞의 공간이 뻥 뚫리며 자그마한 원형경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긴 튜토리얼 보스가 나오는 구간이다.
이 게임은 그 악명답게 튜토리얼 보스부터가 정신 나간 난이도를 자랑했다.
통칭 뉴비학살구간.
대부분 뉴비들은 이 튜토리얼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당연하다. 애초에 이 구간은 깨라고 만든 곳이 아니니까.
죽어야만 다음 단계로 진행이 되는 이벤트성 구간이었던 것이다.
튜토리얼 보스는 그저 이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게임은 이만큼 어려우니 이후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물러설 거면 여기서 게임을 종료하고 나가서 환불을 해라.
정말 눈물 나게 친절한 경고다.
대부분은 이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이지만 나는 달랐다.
정말 눈물 나는 트라이 끝에 나는 죽어서 가야 할 공간을 직접 정면에서 돌파한 것이다.
그때 느꼈던 말 못 할 쾌감은, 내가 이 게임을 접지 못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그건 게임이었을 때나 통하는 말이고.'
만약 이것이 현실이라면.
그때는 이 게임의 악랄한 난이도는 내 목숨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원형경기장 중심에 녀석이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쥐 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사가.
살아 있는 기사는 아니고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 장소에 접어들면 자동으로 움직이는 골렘이었다.
다만 골렘치고는 용의 형태를 한 특유의 멋들어진 갑옷 디자인과 악랄한 난이도 때문에 욕도 많이 먹고 극찬도 많이 받았다.
'문제는 그게 지금 내 상대라는 거지.'
지금은 숙이고 있지만 기억상 녀석이 몸을 일으키면 덩치가 2.5m는 될 거다.
그리고 무기는 사거리가 3m는 넘는 할버드다.
나는 허리춤의 무기를 살폈다.
평범한 롱 소드 하나. 그리고 등 뒤에 달려 있는 것은 적당한 크기의 중형 카이트 실드.
매 회차마다 지닌 장비가 초기화되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것은 기본지급 장비밖에 없다.
그러니 여기서 그나마 안정성을 생각한다면 방패였다.
이 게임에는 패링이라는 기술이 있다.
적이 공격하는 극한의 타이밍에 맞춰 방패를 휘두르면, 공격을 흘려내는 걸 넘어 튕겨내는 판정을 지닌 스킬.
그리고 이 패링이야말로 방랑기사에게 있어서 최강의 무기로 평가받았다.
'타이밍을 맞춰서 패링을 시전하면 공격을 차단할 수 있다.'
튜토리얼 보스의 경우에 모든 패턴을 다 꿰고 있으니까 대응을 하라 하면 못 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건 게임이니까 가능했던 건데.'
현실에서 방패를 타이밍 맞춰 휘두른다고 공격을 튕겨내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멋모르고 방패만 믿었다가 방패째로 할버드에 쪼개져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애써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지금 상황은 전부 현실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이 예배당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저 튜토리얼 보스를 뛰어넘어야 했다.
'가는 수밖에.'
나는 두려움을 억지로 몰아내고 발을 내디뎠다.
솔직히 두렵다.
평소의 나였다면 이런 위험을 무릅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그런데 이상하게 몸은 긴장되기는커녕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의 나는 평소의 나와 다르게 훨씬 더 용감하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뿐.
나는 왼손엔 방패를, 오른손에는 검을 쥐었다.
살면서 처음 쥐었어야 할 무기인데 이상할 정도로 손에 착 감겼다.
이러니 없던 용기도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좋아. 해 보자.'
나는 자세를 낮추고 튜토리얼 보스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아직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가만히 있었다.
이제 곧 숙였던 고개를 들며, 투구의 틈새 사이로 붉은 안광을 흘리기 시작할 것이다.
드드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키고는 옆에 꽂힌 할버드를 쥐고 자세를 잡겠지.
기억이 난다. 그것이 녀석의 등장 인트로 컷신이었다.
'우선 녀석의 옆에 할버드를...응?'
그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본래 튜토리얼 보스 옆에 있어야 할 할버드가 옆에 없었다.
'뭐지? 왜 없지?'
없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할버드의 손잡이 비슷한 것이 옆에 있기는 했다.
거의 다 부서진 그것을 손잡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튜토리얼 보스 상태를 유심히 살폈다.
몰랐는데 녀석의 상태도 뭔가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고개를 들었어야 할 녀석은 아직도 쥐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장 났잖아?'
2화. 게임 속으로 (2)
나는 튜토리얼 보스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녀석은 말 그대로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아니라 정교한 마법으로 움직이는 골렘이라서 그렇다.
문제는 녀석이 왜 고장이 났냐는 거다.
그 이유는 가까이서 살펴보니 알 수 있었다.
'오래됐어.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곳곳에 금이 가 있고 부식이 심각해.'
갑옷에는 금이 가득 가 있어서 겨우 형체만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가만히 방치된 모습 같았다.
그것도 최소 수백 년 가까이.
"...."
나는 한층 굳어진 표정으로 튜토리얼 보스를 살피다 그 뒤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차라리 싸우지 않은 것이 다행이기도 하면서도, 녀석의 뒤에 있을 석실 승강기가 작동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튜토리얼 보스를 지나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제단이 보였다.
제단의 중심에는 석판이 있었고, 이마저도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아마 꽤 오랜 시간 방치된 듯했다.
나는 그 위에 자연스럽게 섰다.
발을 딛는 곳이 움푹 들어가더니 이윽고 내가 탄 거대한 석판이 진동하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이건 멀쩡히 가동하는구나.
'혹시라도 이 승강기마저 가동하지 않으면 정말 답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하는 석판에 선 나는 생각에 빠졌다.
게임에서는 이렇게 석판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면, 그때 처음으로 바깥 세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서 광활하게 펼쳐진 판타지 세계의 아름다운 정경.
푸른 들판과 멀리 보이는 숲, 그보다 더 멀리 펼쳐지는 새하얀 봉우리의 산맥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비룡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꽃밭에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신비의 세계.
피폐했던 정신은 치유되는 것을 넘어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적신다.
미지와 낭만이 가득한 그 광경은 어둡고 축축한 지하 예배당에서 튜토리얼 보스에게 몇 번이나 도전을 한 끝에 성공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그것을 맛보는 순간 사람들은 처음의 그 힘들었던 기억은 까맣게 잊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이 게임을 시작해서 정말 다행이야, 라고.
도전을 했고 성공을 했기에 맛볼 수 있는, 이 세계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하나의 징표.
그것은 나로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고 내가 이 게임에 빠져든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지금 두근거리는 기대감은 그 경험의 발로였다.
게임의 그래픽으로도 아름답게 구현된 세계였는데 현실이 된 지금은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까.
'곧이다.'
이제 곧 저 위에서 석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감동을 다시금 느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었다.
덜컹!
승강기가 갑자기 멈추기 전까지는.
'뭐야.'
나는 승강기가 갑자기 고장이 났나 싶어서 확인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고장이 난 것이 아님에도 멈춘 이유는 간단했다.
더 올라갈 길이 없어서였다.
나는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딱딱한 바위의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석문이 안 열린다고?'
원래라면 지상으로 올라가면서 자동으로 열려야 할 석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승강기는 멀쩡하게 가동됐지만, 석문은 고장이 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거였다.
지금 나는 닫힌 석문과 승강기 사이에 끼어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점차 이 주변의 산소가 희박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잠깐만. 나 그러면 이대로 꼼짝도 못 하는 거야?'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다급해졌다.
"문 열어!"
나는 그대로 주먹을 쥐고 석문을 후려쳤다.
*
타타탕!
어두운 골목길 속에서 시끄러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두 집단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일방적으로 총을 쏘는 것은 한쪽이었다. 전부 험악한 인상과 함께 한쪽 팔뚝에 문신을 한 갱단이었다.
그들과 맞서 싸우는 자들은 커다란 공장을 진지로 삼은 채 바리게이트를 쌓아 놓은 노동자들.
상황은 갱단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쪽이 숫자도 더 많고 무기도 월등히 좋아서였다.
"으악!"
"저 미친 갱단 놈들! 머릿수가 너무 많아!"
"막아! 여기가 밀리면 끝이다!"
노동자들은 온갖 잔해들로 바리게이트를 쌓아 농성에 들어갔지만, 전부 총기류로 무장한 갱단들에게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 눈먼 총알에 맞은 부상자들이 늘어만 갔다.
"이 빌어먹을 놈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갱단까지 고용해?"
처음에는 별거 아니었다.
공장에서 일을 하던 도중 불의의 사고로 노동자 중 하나가 크게 다쳤는데, 공장 주인은 오히려 돈 한 푼 주지 않고 쫓아냈다.
그것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고 공장을 점거하여 증기기계를 가동시키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고용주가 협상은커녕 오히려 갱단을 고용해 한밤중에 습격을 가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기습이었고 노동자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싹 다 죽여! 고용주께서 본보기가 필요하시단다!"
갱단을 이끄는 두목은 바리게이트를 노려보며 명령을 내렸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이 도시에서 돈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후미진 곳에는 야드(경찰)들이 들이닥칠 일도 없었기에 누구도 이곳에서의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갱들은 더욱 거리낄 것 없이 총질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칠었다.
그들도 여기서 밀려나면 자신들은 끝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하루 벌어서 겨우 먹고사는 이들이었기에 여기서 도망친다 해도 남은 것은 굶어 죽는 것뿐.
혼자라면 모를까 가족이 딸린 노동자는 필사적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밀어! 싹 다 죽여!"
"버텨! 여기서 우리가 밀리면 가족들도 다 길바닥에서 죽는다!"
필사적으로 버티려는 자들과 어떻게든 밀어붙이려는 자들.
그 대립이 그야말로 극에 달하던 순간이었다.
쿵─! 쿵─!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북을 치는 것 같기도 했고 폭탄을 터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혼돈의 현장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뭐야?"
"지진인가?"
총성이 멈추고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총을 쏘던 갱단도, 바리게이트 뒤에서 결사항전을 하던 노동자들도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지축을 울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소리의 주기는 점차 짧아졌고 점점 커져만 갔다.
그 소리의 진원지가 가까워지는 느낌
동시에 자리의 모두가 어디에서 소리가 들려오는지 알 수 있었다.
"지하?"
소리는 땅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콰아앙─!!!
그 직후 지면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거대한 흙먼지가 비산했고, 거기에 휘말린 몇몇 갱들이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마치 거대한 폭탄이라도 터진 모양새에 갱단이 당황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폭탄이라도 터뜨린 것이라 착각했다.
반대로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도 당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이 폭발이 갱단이 벌인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폭발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그제야 먼지구름의 중심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또 뭐야?"
갱단 두목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땅속에서 튀어나온 남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장을 하고 있어서였다.
"기사?"
그는 은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흙먼지로 가득했지만, 저것은 분명히 갑옷이 맞았다.
허리춤에는 검도 찼고 등에는 방패도 달고 있었다.
배워먹지 못한 그였지만 저것이 이제는 사라져 버린 '기사'의 복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저 이상한 놈이 왜 갑자기 땅속에서 튀어나왔냐는 것이었다.
"너, 넌 뭐야 이 새끼야!"
난데없이 등장한 기사의 모습에 당황한 갱단 하나가 총구를 겨누며 외쳤다.
자신의 주먹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던 흑발의 기사는 자신에게 총을 겨눈 갱을 돌아봤다.
감정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
그 심연 같은 눈을 마주한 순간, 갱은 자기도 모르게 공포를 느꼈다.
"죽어!"
타앙!
그는 자연스럽게 방아쇠를 당겼다.
싱글액션 리볼버가 총구에서 불을 내뿜었다.
그 순간 모두가 머릿속으로 같은 모습을 그렸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질 기사의 모습을.
그 순간, 기사가 움직였다.
캉!
기사가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검을 전광석화처럼 뽑더니 날아오는 총알을 그대로 베어냈다.
물론 총알을 베어낸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밤이라 어두운 것도 있었지만 기사의 칼질이 너무 빨라서였다.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허공에 불꽃이 한번 튕긴 것.
그리고 잘려나간 총알이 바닥을 뒹구는 것뿐이었다.
*
나는 서늘한 바깥의 공기를 마시며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뭔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냐면 불끈 쥔 내 주먹이었다.
살기 위해서 일단 냅다 석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아마 평범한 경우였다면 주먹이 그대로 으스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주먹은 오히려 석문에 자국을 남기며 금을 가게 만들었다.
'석문 두께가 몇이었지?'
게임 내에서 석문은 꽤나 두꺼웠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맨손으로 부쉈다. 비산하는 흙무더기를 보면 석문 위를 상당한 양의 토사가 뒤덮은 모양인데 그마저도 날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내 손은 멀쩡해.'
나는 내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게임 속 나의 캐릭터는 99회차 방랑기사였다.
이 게임은 회차가 거듭될수록 매번 장비와 돈이 초기화되지만 딱 하나 유지되는 것이 있다.
바로 캐릭터의 스테이터스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몬스터 또한 그에 걸맞게 강해지기 때문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스탯을 고스란히 계승하는 것이다.
당연히 99회차까지 찍은 나는 방랑기사로 더 올릴 스텟이 없는 만렙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게임 내에서 무쌍을 찍지는 못한다. 보스도 그만큼 강했고, 워낙 난이도가 높은 게임이라 자주 죽어나갔다.
'그런데 만일 내가 99회차의 상태로 온 거라면.'
지금 내 신체능력은 대체 어느 수준이란 말인가.
"너, 넌 뭐야 이 새끼야!"
그때 누군가 나를 향해 외쳤다.
내가 고개를 돌리며 돌아보자 웬 족제비처럼 생긴 비열해 보이는 인간이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잠깐. 총?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이 게임은 중세 판타지 오픈월드 RPG게임이다.
그래. '중세'라는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중세에 총이 있을 리가 없다.
'아니, 그보다 복식부터 해서 주변 건물들도 뭔가 이상한데?'
애초에 여기는 어떠한 개간도 되지 않은 자연 그 자체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한쪽에는 커다란 공장까지 보인다.
굴뚝에서 매연은 안 나와도 상식이 있다면 저게 공장이라는 것은 알 것이다.
이건 마치 배경이 중세가 아니라 19세기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총구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족제비 녀석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기도 전에 녀석이 발작하듯 외쳤다.
"죽어!"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내 전신이 긴장을 머금었다.
동시에 시간이 느려졌다.
아니. 시간이 느려진 것이 아니다. 정확히는 내 사고가 가속해서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그리고 나는 이 기술에 대해서 알고 있다.
[방랑기사] 직업이 지니고 있는 기술 중 하나인 [전투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스킬.
적의 패턴을 분석하고, 막거나 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스킬로 초보자들이 애용하는 기술이었다.
물론 한계는 있다.
느려지는 시간은 채 3초도 지속되지 않으며 그마저도 연달아 쓸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 스킬이 발동했다.
총구가 불을 뿜으며 총알이 날아오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펼쳐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왜 그런지 모른다. 다만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을 했을 뿐이었다.
뽑아든 기본 롱 소드를 쥐고서 그대로 날아오는 총알을 향해 휘두른다.
어떠한 흔들림도 없는 검로가 그어지고 그대로 총알이 잘려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맙소사. 칼로 총알을 자르다니.
내가 해놓고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뭐지."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이쪽을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3화. 기사의 등장 (1)
"뭐지."
기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중후한 카리스마와 기백에 갱들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갱단 두목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 새끼들아, 뭣들 하는 거야! 그냥 쏴 죽여!"
"하, 하지만 방금 칼로 총알을...."
"당연히 우연이잖아! 우연! 대가리 안 돌아가? 한꺼번에 쏘라고!"
두목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 지르자 그제야 겁에 질린 부하들도 자세를 달리했다.
갑자기 등장한 저 갑옷 입은 기사가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 끼어든 이상 아군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죽여야 한다. 이 근처에서 목격자가 없게 해달라는 것이 고용주의 바람이었으니까.
뭐가 어찌 됐든 상대의 숫자는 고작 하나.
반면 이쪽은 무장인원이 자그마치 40명이 넘는다.
아무래도 공장노동자 측에서 해결사 나부랭이 하나를 고용한 모양인데 고작 하나면 이쪽도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두목의 명령에 물러나려던 부하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총구를 겨누었다.
그들은 살의가 담긴 시선으로 기사를 노려보았고, 기사는 그 살의를 곧바로 읽어냈다.
그 순간 기사의 모습이 촛불이 꺼지듯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 뭐야? 어디 갔어!"
"갑자기 사라졌어!"
갱들이 당황하며 주변을 살피는 순간 기사는 돌연 갱들이 모여 있는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등장을 눈치채려는 순간 기사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날카로운 롱 소드가 허공을 갈랐다. 달빛 아래에 빛나는 은빛 궤적이 갱단 5명을 스치듯 지나갔다.
5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것과 기사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재차 사라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갱들이 총구를 기사에게 겨누려 했지만, 그들이 본 것은 빈 허공뿐이었다.
"대체 어디로...."
뻐억!
그 말을 중얼거리던 갱의 턱 아래에 주먹이 날아와 꽂혔다.
바닥에 몸을 낮춰 빠르게 접근한 기사가 주먹으로 턱을 올려친 것이었다.
맨주먹에 맞았을 뿐인데 턱을 얻어맞은 자는 팽그르르 돌며 허공을 날았다.
비상하는 그가 지상에 추락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기사는 한 놈 한 놈 주먹과 발길질을 내질렀다.
주먹에 맞아 날아가거나 발에 차여 튕겨 나가거나 혹은 바닥에 대자로 뻗거나.
개중에는 덩치가 큰 행동대장도 있었는데 누구 할 것 없이 한주먹거리였다.
"으아아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갱이 기사를 향해 총을 무차별로 난사했다.
너무 당황해서 조준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거리가 지척이라 총알은 기사의 이마를 노리고 날아갔다.
기사는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상반신을 가볍게 스윽 틀었다.
총알은 기사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 너머에 있는 애꿎은 다른 갱을 맞췄다.
"뭔...."
거의 코앞에서 쏜 총알을 눈으로 보고 피하는 기행에 갱이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 틀어박히는 주먹에 그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됐다.
"야 이 새끼들아! 한꺼번에 포위해서 쏘라고!"
두목이 명령을 내리자 갱이 기사를 동그랗게 포위했다.
기사는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자 한쪽 발을 들어 올려 바닥을 크게 찍었다.
쿠웅─!
고작 발을 한번 굴렀을 뿐인데 지면에 족적이 새겨지며 그의 몸이 5m 이상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오른 것이 아니다.
단순한 도약이었지만 너무 높아서 일순 하늘을 나는 줄 알았다.
전신에 무거운 갑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발구르기 한 번으로 포위망을 뛰어오르는 신체능력에 갱들은 아연실색했다.
달빛을 받은 그의 은회색 갑주가 은은하게 빛났다.
뛰어오른 기사가 다시 착지한 곳은 갱들이 모여 있는 곳의 중심이었다.
퍼억! 착지하면서 기사는 멍하니 이쪽을 올려다보는 녀석의 머리를 발로 밟아 그대로 짓뭉갰다. 동시에 손에 쥔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예기를 머금은 검광이 연달아 번쩍이며 터져 나왔다.
은색의 섬광과 붉은 실선이 교차하듯 그려졌다.
한 줄기의 선마다 공평한 죽음이 내려졌다.
갱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5명이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기사는 지치지도 않는지 다음 먹잇감을 찾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한쪽은 총을 든 40명이고 다른 한쪽은 칼을 쥔 한 명이다.
그런데 그 칼을 쥔 한 명이 40명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양떼 목장 안에 들어간 호랑이처럼 날뛰었다.
"아악! 내 팔!"
"시발 이게 뭐냐고!"
"이런 건 이야기 없었잖아!"
갱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나갔다. 일부 갱은 총을 쏘며 저항했지만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기사는 귀신같이 검을 휘두르며 허공에서 날아온 총알을 모조리 베어냈다. 불꽃이 튀고 잘려나간 총알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총을 쏜 녀석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으아아아! 도망쳐! 난 죽고 싶지 않아!"
그 공포스러운 광경에 갱들은 총을 버리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
두목은 그런 부하들을 닦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두려운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사실 누구보다도 당장 여기서 도망치고 싶은 것은 두목인 그였다.
이 미친 기사가 부하들을 썰어 대는 것을 봤을 때부터 그는 뭔가 이상하게 흘러감을 직감했다.
의뢰주에게 받은 돈이 있어도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즉시 도망쳐야 하는 것이 맞는데.
'꼬, 꼼작도 할 수가 없어!'
두목은 자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이유를 곧이어 깨닫게 됐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기사가 지금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산속에서 거대한 짐승을 마주하면 이런 기분일까.
두목은 손가락 하나, 눈꺼풀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순간 기사가 움직였다.
거리는 20m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그 거리는 기사에게 무의미했다.
기사가 한발을 내딛은 순간 신형이 길게 늘어나더니 지척에 나타났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몸을 이리저리 뒤틀려던 두목은 가까스로 떨리는 입술을 열며 무언가 외치려 했다.
"잠...!"
두목이 그 말을 입에 담기도 전에 검광이 번뜩였다.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을 힘없이 굴러갔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노동자들은 숨을 삼켰다.
그들로서는 기뻐하기보다는 지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갱들이 습격을 가했고 여러 명의 사망자와 함께 부상자가 생겼다. 그것도 모자라 겨우 점거하고 있던 공장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땅속에서 기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기사는 칼 한 자루로 갱단을 모조리 썰어 죽였다.
신께서는 하늘에서 구원자를 내려보내 사람을 돕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땅 아래에서 튀어나온 갑옷 입은 기사는 뭐라 불러야 할까.
천사? 악마?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을 수밖에.
그 순간 기사가 이쪽을 돌아봤다.
전투의 여파가 남은 흉흉한 시선이 닿자 노동자들이 숨을 집어삼켰다.
저 괴물이 갑자기 자신들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갱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그의 손속을 보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노동자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을 때 기사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딘가?"
*
"여기는 어딘가?"
노동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도 나는 지금 내심 크게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이유야 많다. 나는 그것을 차분하게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우선 첫 번째로 내 말도 안 되는 육체능력이다.
맨손으로 석문을 부수고 땅을 뚫고 올라온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날아오는 총알을 눈으로 보고 칼로 베어낼 정도라니.
검도조차 해 본 적 없는 내가 이런 깔끔한 검술을 펼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역시 지금 내 육체, 내가 육성하던 방랑기사 캐릭터의 영향이 컸으리라.
그것은 두 번째 요소와도 직결한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족히 수십 명은 썰었다.
칼을 쥐고 총을 든 상대를 말이다.
연쇄 살인마도 이렇게 안 죽일 것이다.
물론 이건 엄연히 저쪽이 먼저 나를 공격했기에 벌어진 정당방위긴 했다.
하지만 정당방위라 해도 사람을 죽이는 건 별개의 일이다.
그런데도 내 상태는 멀쩡했다. 어떠한 패닉도 쇼크도 없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담담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나이되 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나는 게임 속에서 키우던 방랑기사 캐릭터와 동화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놀란 3번째는 바로 이거다.
"다시 한번 그대들에게 묻겠다. 여기는 어디지?"
원래 내가 하려던 말은 여긴 어딥니까? 였다.
그런데 이 육체는 무슨 옛 사극에서나 볼 법한 거만한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말투가 이게 뭐야!'
나는 놀라면서 재차 물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말투를 억지로 교정하려 하니 몸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나는 그 순간 [방랑기사] 태생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떠올렸다.
모든 태생마다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 도적에게는 [비열함] 야만전사에게는 [단순함], 성직자에게는 [신실함] 등이 붙는다.
그중에서 방랑기사는 [기사도] [고귀함] [고지식함]이 있다.
[기사도]야 당연히 중세에서 기사들이 부르짖는 낭만과 같은 것.
[고귀함]은 방랑기사 태생이지만 대체로 기사는 귀족들만 될 수 있었기에 지닌 배경설정.
그리고 [고지식함]의 경우에는 이 방랑기사의 성격을 의미했다.
게임 내에서는 그저 기본적인 설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 지금 내게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그것이...."
멀리서 나를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긴장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에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남자였는데 나이는 40대로 보였고, 상당한 고초를 겪은 듯 안색이 초췌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살아 있어 저 무리의 지도자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중년의 남자는 우선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선 저희들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빌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오시안이다."
오시안은 내가 플레이하던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닉네임이었다.
"딱히 그대들을 도우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놈들이 먼저 나를 공격했기에 검을 뽑았을 뿐. 기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
"...?"
아씨 이놈의 말투가 또.
나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아닌지 중년의 노동자 아저씨 또한 나를 이상한 사람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몇 번 더 말투를 교정하려다 포기했다.
억지로 한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차후 천천히 고쳐 가면 되겠지.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여기가 어디냐는 거다.
"세 번째로 묻겠다. 이 이상은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군. 이곳은 어디지?"
"...티르나는 처음입니까?"
"티르나?"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떠오르는 이름은 없다.
내가 정말 몰라서 되묻자 아저씨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마치 '정말 이걸 모른다고?'라며 믿기지 않아 하는 눈치다.
그 시선이 상당히 뼈아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야기해 보거라."
내가 당당하게 나오자 아저씨는 당황해하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설명해 주었다.
티르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도시의 이름이고, 황금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발원지이며 가장 많은 증기기계가 발달한 미래의 지향점이라는 말까지 했다.
"잠깐 기다려라. 산업혁명? 증기기계?"
"네. 혹시 무슨 문제라도...?"
몰라서 되묻는 노동자 아저씨의 모습을 보자니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이 세상이 내가 플레이하던 게임의 세상이라 생각했다.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내가 알던 세상은 너무나도 많은 것이 바뀌고 말았다.
석실 승강기를 통해 올라온 지금 장소도 그렇다.
원래라면 광활한 대자연이 펼쳐져야 할 이곳은 매연 가득한 공장지대가 들어서 있었다.
'총을 쏘는 갱단. 기름때 가득한 노동자. 우뚝 선 공장과 굴뚝들.'
그 순간 나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플레이하던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온 것이 맞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딱 하나.
이 세상은, 내가 플레이하던 게임으로부터 수백 년은 지난 미래였던 것이다.
4화. 기사의 등장 (2)
나는 홀로 밤 도시의 골목길을 걸었다.
노동자들과는 금방 헤어졌다.
나를 향한 두려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데 같이 있기 어색해서였다.
터덜터덜 골목길을 걷던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람이 없는 밤거리였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불 꺼진 버려진 공장지대와 다르게 이곳은 빛으로 가득했으니까.
저 멀리 우뚝 선 높은 건축물들이 보였다.
"티르나."
나는 도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티르나는 말 그대로 거대한 도시였다. 건축 양식만 놓고 보면 19세기의 배경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발달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빛으로 가득한 건축물들을 보니 감정이 복잡해졌다.
내가 즐겨하던 게임은 중세 판타지 게임이었다.
하지만 지금 펼쳐진 풍경은 근대나 다름없었다.
중세에서 근대. 햇수로만 치면 수백 년은 흘렀을 것이다.
원작 배경이 약 14세기 느낌의 중세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니 거의 500년은 지났다 봐도 좋았다.
맙소사 500년이라니. 그것도 최소치로 잡은 거다.
이곳은 내가 알던 세상이되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다.
500년이라는 세월 동안 수많은 던전과 유적, 보스몬스터들은 모두 세월의 풍파 아래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이래서야 내가 이 세상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뭣하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몸뚱이뿐.
'그래도 이게 어디야.'
눈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보고 검으로 총알을 베어낸다.
이것만 해도 거의 초인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좋았다.
'게임 속 내 캐릭터의 레벨은 만렙. 기사로서 올릴 수 있는 스탯은 죄다 올렸지.'
이 게임에서 스탯은 [근력] [민첩] [체력] [정신력] [지력] [신앙]으로 총 6대 스탯이라 부른다.
[근력]은 당연하게도 신체의 힘을 구성한다.
근력이 높을수록 근접무기의 공격력이 강해지고 무거운 무기와 갑옷의 착용이 용이해진다. 당연히 방랑기사의 주 스탯이다.
[민첩]은 기동성이며 손재주이기도 하다. 무기 중에서는 기량이 많이 필요한 무기가 더러 있고, 스킬 중에서도 손재주가 필요한 것이 있다 보니 민첩 또한 근접캐릭터에겐 필수였다.
[체력]은 당연히 최대 HP를 의미한다. 동시에 지구력까지 영향을 준다. 이 게임 내에서는 지구력 게이지가 있어서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거나 달리는 것이 힘들다.
체력이 높다면 그것이 훨씬 더 용이해진다.
[정신력]은 반대로 MP, 즉 마나를 의미한다. 거기에 더해서 상태이상, 정신공격, 속성공격에 대한 저항률을 올려주기도 한다.
[지력]은 마법사나 흑마법사들이 올리는데 주문이나 마법의 위력을 높여주는 쪽이다.
나는 방랑기사라 태생적 한계 때문에 올릴 수 없는 스탯이었다.
[신앙]은 6대 스탯에서 [성직자]와 [성기사]가 담당하는 스탯이다. 다만 이 부분은 방랑기사 또한 올릴 수 있었고 나는 이걸 다 올렸다.
모든 스탯은 최대 99까지만 가능하다.
그리고 내 캐릭터는 6대 스탯 중에서 지력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99까지 찍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나였고.
'어디 길 가다 시비에 휘말려 죽을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하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그렇지만 몬스터는 다르다.
이 게임은 만렙이어도 길가의 잡몹에게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미친 게임이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문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다.
내가 이 세상에 빨려 들어온 것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돌아갈 방법도 있다는 거고.
나는 원인과 이유를 찾아야 했다.
칼 한 자루로.
강철과 기계태엽, 증기와 화약이 가득한 도시 속에서 말이다.
꼬르르륵!
그 순간 갑옷의 복대를 뚫고 나오는 우렁찬 소리에 나는 걷는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입에 뭘 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물 한 모금조차도 말이다.
게임 내에서는 공복도 시스템이 없다 보니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 만렙 캐릭터도 굶으면 얄짤없는 것이다.
특히 이 꽉 찬 근육이 가득한 몸뚱이는 조금만 움직여도 막대한 열량을 소모해, 많은 음식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밥부터 먹자.'
*
티르나의 한 술집.
딸랑!
문에 달아 놓은 방울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손님이 찾아왔다.
시끄러웠던 주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맥주가 가득 담긴 오크통 술잔을 부딪치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람들은 그 손님의 등장에 시선을 모았다.
"...."
"...."
"...."
평소였다면 그저 밥이나 술을 먹으러 온 사람이겠구나 싶었지만, 이번 손님은 그 행색부터가 지나치게 독특했기 때문이다.
손님은 지금 시대에서 보기 드문, 아니 어딜 가서도 보기 힘든 전신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철컥. 철컥.
걸을 때마다 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일하게 머리에만 투구를 끼지 않아서 얼굴이 훤히 드러났는데, 새하얀 피부에 흑발, 귀티 나는 수려한 외모가 어딘가 잘사는 집안의 도련님을 연상케 했다.
갑옷을 입은 청년, 오시안은 바 테이블 앞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모두가 그 광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일부는 자신이 술에 너무 취해서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오시안은 갱단에게서 털어온 돈을 꺼냈다.
"이보게 주인장. 여기 주문하나 하지."
그가 입을 열며 카리스마 있는 미성으로 말을 꺼내는 순간 주점의 모두가 이게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웅성웅성.
"저건 또 뭐야."
"기사? 아니면 기사에 심취한 또라이?"
"정신이상자인가? 요즘 시대에 누가 갑옷을?"
이 주점은 험악한 일을 하는 용병과 해결사들이 모이는 술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사를 보며 그를 분석하려 하거나 혹은 그의 기행에 적대감을 보이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오시안 또한 적대감을 느낀 것인지 술집의 손님들을 돌아봤다.
스윽.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일부 사람들에게 과시하듯 옆구리에 찬 검을 보여 주었다.
-이쪽은 칼을 지니고 있다. 이래도 까불 테냐.
오시안은 행동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 대응하듯 노려보던 일부 용병들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 우리는 총 있다. 어쩔래?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음."
오시안은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향했다.
오시안은 구태여 자신은 이 칼로 총알도 벨 수 있고 동체시력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보고 피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말해 봤자 믿지도 않을 테니까.
다만 오시안의 그 행동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총을 꺼내든 용병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오시안도 그걸 알았지만 대놓고 따지지 않고 그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기만 했다.
"여기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오시안의 앞에 모락모락한 연기를 내뿜는 양념 바른 양고기와 버터와 치즈를 발라서 구운 빵, 그리고 야채수프가 놓였다.
오시안은 그것을 한껏 들뜬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술은 어디 있지? 밥을 시키면 술도 기본적으로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오시안은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진심으로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정확히 술을 원하는 오시안의 '육체'가 벌이는 행동에 가까웠으니까.
다만 그 거만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바텐더는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물었다.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제일 독한 걸로."
"알겠습니다."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며 술병으로 가득 찬 찻장에서 해골모양 마크가 그려진 술병을 꺼내더니 투명한 잔에 부드럽게 따랐다.
주홍빛 술을 본 오시안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렇게 손을 뻗어 우선 이 고단한 세상에서의 첫 술을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이었다.
"형씨. 맛있는 거 먹는데 우리도 끼워 주지 않겠어?"
방금 전 오시안을 향해 웃어 보였던 3명의 용병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오시안의 근처에 다가왔다.
오시안은 술잔을 쥐려던 손을 멈칫했다.
주점의 손님들은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두트리 삼형제로군."
"저 괴짜 녀석도 운이 없지. 하필이면 저런 악질들이 있을 때 들어와서는."
3인방은 얼굴이 비슷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시피 형제였다.
두트리 삼형제로서 그들은 뒷세계에서 용병으로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자들이었다.
폭력의 세상 속에서도 나름 용병으로서 인지도가 있었지만, 그것이 썩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건 주변의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오시안이 고개를 찬찬히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건 삼형제의 장남을 바라보았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볼일?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우리 고귀하신 기사님께서, 갑자기 무슨 이유로 이런 술집을 찾아왔나 말이야."
장남은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이 마시려던 잔을 빼앗더니 한입에 자신의 목구멍에 털어놓았다.
"크으허! 독하긴 더럽게 독하군."
"그건 내 술이다만."
"우리 범생이 기사님이 못 드실 거 같아서 내가 대신 먹어 드린 거요. 왜, 고마워서 그러시나?"
장남의 말에 차남과 삼남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 모습에 오시안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오시안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감히 나를 욕보이기 위해 다가온 것이로군."
그 말에 두트리 삼형제는 서로를 돌아보더니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파하하하!
그 웃음은 삼형제 말고도 주점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오시안이 사용한 고상한 말투도 말투지만,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것을 이제야 확신하다는 듯 말하는 것이 보통 우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시안은 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듯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의 나는 기분이 좋다. 그러니 그대들의 방금 전 무례는 내 관대한 아량으로 넘어가 줄 테니 그만하고 볼일이나 보러 가도록."
"...하, 이 새끼 이거."
오시안이 배려하듯 말하자 장남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자식 이거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어이 형씨.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여길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커스단은 다른 곳에 있으니 당장 꺼져."
"...."
"뭐 노려보면 어쩌게. 이 새끼 이거 눈 치켜뜨는 거 봐라. 왜, 허리춤에 있는 그 잘난 칼이라도 뽑게?"
장남은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오시안의 갑옷에 손을 대지 못했다.
그보다 더 빠르게 오시안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장남의 얼굴이 주먹의 형태로 움푹 들어갔다. 코뼈가 주저앉고 이빨이 핏물과 함께 비산하듯 흩어졌다.
얻어맞은 장남은 그대로 주점을 가로질러 문을 부수고 바깥까지 튕겨 나갔다.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웃던 손님들이 일제히 웃음을 멈췄다.
"...."
"...."
그들의 시선이 주먹을 뻗은 오시안과 부서진 문을 번갈아 향했다.
'방금 주먹으로 사람을 저만큼 날린 거야?'
'두트리 삼형제의 장남의 덩치를 생각하면 무게가 거의 90은 넘게 나갈 텐데.'
모두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그 광경을 지켜볼 때 삼형제 중 남은 두 사람이 반응했다.
"형!"
"이 씨발 새끼가!"
차남과 삼남이 동시에 허리춤의 총을 뽑았다.
그것은 근거리에서 산탄으로 적을 박살낸다는 소드오프 샷건이었다.
형제가 오시안을 향해 총을 뽑고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오시안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2번 휘두르기엔 충분하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투둑. 툭.
"어?"
"이게 무슨...."
둘째와 셋째는 잘려나가 바닥을 나뒹구는 총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잘려나간 총의 단면은 예리한 무언가로 베어낸 것처럼 매끈했다.
두 형제가 갑자기 벌어진 현실에 미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검을 다시 허리춤에 건 오시안이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퍼억!
깔끔한 원투 스트레이트 펀치.
맏형처럼 얼굴을 얻어맞은 둘째와 셋째는 똑같이 날아가 주점의 문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주점은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가 방금 전 오시안이 보여주었던 믿기지 않는 신체능력과 무위에 경악 내지 감탄을 했다.
정작 그 광경을 자아낸 오시안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텐더를 향해 가볍게 말했다.
"부서진 문 값은 저 세 놈에게 받아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바텐더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5화. 수상한 제안 (1)
주점 내부가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것마냥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유일하게 사태의 당사자인 오시안만이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냐면 같은 음식을 주문했던 사람조차 '저게 저렇게 맛있어 보이는 요리였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이윽고 그런 가벼운 생각을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싸움이 벌어졌다.
주점 내부에서 싸움은 원래부터 자주 벌어지지만, 이곳은 애초에 평범한 주점이 아니었다.
뒷골목 해결사와 용병들이 찾아와 정보를 사고파는 거래의 장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내부에는 뒷세계 나름의 규칙이 존재했다.
싸움은 하더라도 내부에서는 금지.
할 거면 밖에서 나가서 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가끔 치고받고 싸우는 일은 있다. 그 부분은 융통성을 발휘해서 어느 정도 봐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난데없이 등장한 기사가 사람 셋을 때려눕힌 것은, 융통성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전례가 없어서였다.
두트리 삼형제가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맞지만, 먼저 손을 쓴 것은 당연히 오시안이었다.
주점 내부 사람들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규칙을 적용하면 오시안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에게 공격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모르고 찾아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업계에서 몰랐다고 봐주는 건 없다. 모르면 당연히 죽어야 했다.
하지만 용병들은 망설였다.
방금 전 오시안이 보여 준 믿기지 않는 신위 때문이었다.
'칼을 뽑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오시안이 장남을 날려버리고 이후 둘째와 셋째를 상대할 때.
두 사람이 총을 뽑는 것보다 먼저 오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언제 검을 잡았는지, 그리고 언제 휘둘렀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본 것은 이미 잘려나간 소드오프 샷건이 전부였다.
'그 두트리 장남을 인형 던지듯 날려버렸어.'
'대체 어떻게 돼먹은 신체능력이야?'
모두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오시안의 믿기지 않는 신체능력이었다.
그저 머리가 어떻게 된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였다.
자연스럽게 주점 내부의 사람들이 공통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 신체 강화능력 뮤턴트인가?'
'뮤턴트면 위험한데.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면 규칙을 어기는 거고.'
손님들이 고민할 때 일부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천천히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대놓고 접근하지 않고 멀리서 총을 쏜다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순간 양고기를 다 뜯고 수프까지 한 번에 들이킨 오시안이 접시를 탁 하니 놓더니 입을 열었다.
"경고하건데 총을 뽑지 않길 바라마."
그 말에 총에 손을 가져다 대려던 용병들이 흠칫했다.
오시안은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이쪽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방금 전 3명을 때려눕힌 건 저자들이 먼저 나를 모욕하고 내게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먹 하나로 봐줬지.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무기를 뽑는다면, 그때는 정말 내 검에 자비를 기대하기 힘들 거다."
방금 전 행동을 봐줬다고 말하며 경고하는 오시안의 태도는, 말로만 놓고 보자면 허세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압박감 때문인지 그 말을 허투루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꿀꺽.
용병들은 침을 삼키며 눈알을 굴려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할까 말까.
누가 먼저 총을 쏠 건지, 아니면 모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길 것인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결국 결론은 이 바닥의 룰을 집행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수면의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기포처럼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적의에 오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했는데 여기서 또다시 피를 보게 될 줄이야.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은 [기사도]에 어울리지 않았다.
오시안은 곧바로 검을 뽑을 준비를 갖추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극한까지 치달아 오르던 순간.
"저는 개인적으로 총을 뽑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주점의 구석진 테이블.
그 앞에 앉아서 조용히 와인을 홀짝이던 청년이 있었다.
실눈의 남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무수한 시선에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험악한 인상에 복장도 더러운 주점 사람들과 다르게 실눈의 청년은 주름 없는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주먹과 폭력을 쓰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청년은 부드럽게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뒤 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
"여러분들 모두가 총을 뽑아도 저분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요."
얼핏 그 말은 이 자리의 용병들의 자존심을 긁기 충분했지만, 그 말에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 말에 일부는 놀랐다는 듯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흠.'
오시안 또한 실눈 청년을 보며 호기심을 품었다.
폭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저 남자가 하는 말을 다른 용병들이 진중하게 듣고 있어서였다.
'한가닥하는 사람인가.'
최소 이 업계에서 이름이 있는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로난 롤랑."
가만히 듣고 있던 용병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로난 롤랑. 그렇게 불린 실눈의 청년은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임스 씨."
"그 말이 정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받아들이기 힘들군. 물론 자네의 말을 우리가 허투루 듣는다는 것은 아니네. 다만...."
"이해합니다. 그 말이 정말 신빙성이 있냐는 거겠죠."
로난의 말에 제임스라는 용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오시안에게서 멀어져 로난에게 모였다.
"제가 방금 전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거든요."
"무슨 소식?"
"최근 43번구에서 벌어진 파업사태를 아십니까?"
제임스는 그 말에 자신은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 이야기를 들은 일부 용병들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면화공장 파업 말이군."
"이러면 이야기가 편해지겠군요. 해당 공장에서 노동자 하나가 크게 다쳤는데, 고용주가 보상금도 주지 않고 쫓아냈다더군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요."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이지?"
"더 들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마저 이야기를 하자면 고용주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돈을 뿌려 용역을 고용했죠. 좀 위험한 용역을요."
"갱단."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에 로난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려 40명의 갱이 노동자들을 밤중에 습격했습니다. 노동자들이 그에 맞섰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상대는 총을 쥐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그게 지금 상황이랑 대체 무슨 연관이...."
"그런데 말입니다. 그 40명의 갱들이 갑자기 나타난 한 사람에게 패배했다고 합니다."
로난은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을 바라봤다.
주점 내의 사람들의 시선 또한 오시안을 향했다.
"그 사람은 갑옷을 입고 칼 한 자루를 쥔 채 40명이 넘는 갱단을 상대로 믿기지 않는 무위를 보였다 하더군요. 칼로 총알을 베어내는 건 예사요, 눈으로 날아오는 총알을 보고 피했다고요."
"...!"
그 말에 주점에 모인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로난이 이런 부분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 용병들이 잘 알았다.
그리고 그가 가져온 정보의 신뢰도는 절대로 낮지 않다.
지금 로난이 한 말은 전부 진실이라는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로난을 향했다가 다시금 오시안에게로 향했다.
오시안은 그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로난을 응시했다.
"소식이 빠르군."
그 말은 로난의 말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오시안은 덤덤히 말하는 것 치고는 솔직히 말해서 꽤나 놀랐다.
주변에 보는 눈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바로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을 곧바로 알아낸 로난의 정보력이 새삼 감탄스러웠던 것이다.
오시안의 말에 로난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정보로 먹고사는 중개사는 누구보다도 발 빠를 수밖에 없거든요."
중개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용병과 해결사들에게 일을 알아봐 주며 수수료를 중간에 챙기는 대행업자였다.
로난은 주점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처럼 즐거운 술자리인데 저는 피바람이 몰아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서 넘어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저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렇다는군요. 제임스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로난.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그게 진실이겠지. 하지만 봐. 사람 셋이 당했어. 너도 이곳의 규칙을 모른다 하지는 않겠지?"
제임스의 말에도 로난은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유지했다.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두트리 삼형제였죠."
"하지만 먼저 손을 쓰지는 않았지."
"그 대신 누구도 죽지 않았죠. 기사님은...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오시안이다."
"그렇군요. 오시안 씨는 검을 뽑았지만 그건 자기방어였을 뿐 실제로는 맨손만 쓰셨습니다. 검을 뽑은 것도 총을 잘라내는 것에 그쳤고요. 이 주점에서 주먹다짐 정도는 눈감아 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전례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번이 최초의 경우겠군요. 훌륭한 선례를 제임스 씨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쪽에 짐을 떠넘기는 로난의 말에 제임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오시안이 외부인이니까 다르다고 따지기엔, 지금 주점의 한 자리를 차지한 기사님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제길."
제임스가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쉬며 허리춤에 가져다 댄 손을 뗐다.
그 행동에 주점의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 무기에서 손을 떼고 다시금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주점은 삽시간에 원래의 떠들썩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퍽이나 신기하게 구경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로난이 오시안의 곁에 자연스럽게 합석하듯 앉았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이미 앉지 않았나. 그마저도 내가 멋대로 쫓아낼 권리는 없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로난은 씨익 웃으며 바텐더에게 술을 재차 주문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자신의 앞에 놓인 유리잔을 보며 로난을 힐끔 살폈다.
"기사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감사히 받지."
안 그래도 마시고 싶었던 생각이 들던 참이었기에 오시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로난을 향한 경계는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이 자식 실눈이잖아.'
자고로 실눈인 사람은 어딘가 뒤가 구린 법이었다.
일부러 정체를 숨긴다거나 혹은 눈을 뜨면 갑자기 숨겨왔던 힘이 흘러나온다거나.
'보통 숨겨진 실력자일 가능성이 높지.'
다만 아무리 살펴봐도 로난에게서는 숨겨진 힘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잘 숨긴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힘이 없는 것인지.
그걸 알 수 없는 오시안으로서는 우선 로난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도와준 점은 순수하게 고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거, 이거는 이거다.
"그래서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이런. 제 행동이 너무 속이 보였나요?"
"술 한 잔으로는 충분히 넘겨줄 수 있는 수준이지."
"그렇다면 더 시켜야겠군요."
로난은 그렇게 말하며 바텐더에게 눈짓을 했다.
바텐더는 자연스럽게 술병째로 오시안의 앞에 놓아 주었다.
오시안은 로난의 노골적인 행동에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지금 나를 술로 매수하겠다고?'
웃기는 이야기다. 세상 어떤 놈이 술에 매수된단 말인가.
그러면서 오시안은 잔에 따라진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마셔 주는 것은 처음 한 잔뿐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좋군."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전혀 반대의 것이었다.
술은 너무 맛있었다.
독한 술임에도 술을 원하는 기사의 육체가 그것을 너무나도 잘 받아들였다.
현실의 그는 술자리에서 소주조차 마시는 것을 기피했지만, 이 기사의 육체는 독한 위스키나 럼주 따윈 물처럼 마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몸이 술을 아주 좋아했다.
오시안은 자연스럽게 빈 잔을 보다가, 옆에 놓인 병을 쥐고 잔을 따랐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지."
6화. 수상한 제안 (2)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나를 도와준 로난 롤랑이라는 남자는 흔히들 말하는 중개인, 즉 브로커였다.
그가 나에게 다가와 노골적으로 호의를 얻으려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내 실력이 탐이 나니까 나를 고용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여도 내 신체능력은 확실히 괴물 수준이니까.'
나는 새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의 육체는 이미 초인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게임 속에서 만렙을 찍고 모든 스탯을 최대치까지 찍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날아오는 총알을 베어내는 묘기를 내가 할 줄은 몰랐는데.'
방금 전만 해도 시비를 걸었던 덩치 셋을 맨손의 힘만으로 멀리 집어 던졌다.
물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또다시 시비가 붙을 뻔했지만, 눈앞의 남자가 도와줬으니 문제는 없었다.
자신을 중개사라고 소개한 실눈의 남자.
로난 롤랑.
그는 내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속내를 읽으려 응시하고 있음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저러니까 더 수상해 보였다.
'이게 원작 게임이었다면 나름 비중 있는 NPC라는 걸 알겠지만, 여기는 아니란 말이지.'
당연히 눈앞에 있는 NPC, 아니 이제는 현실이 됐으니 실제 사람의 속내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당장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상대방의 직업을 통해 그가 뭘 바라는지 유추하는 것뿐.
"그래서 내게 뭘 바라지?"
...이놈의 말투가 또.
하지만 이건 억지로 교정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니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건 눈앞의 상대와 나눌 대화니까.
'실눈의 앞에서는 절대 방심 안 한다...!'
나는 눈을 부릅뜨며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
로난 롤랑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쪽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시선은 그야말로 칼날과 같아서, 조금만 방심을 하면 피부를 베일 것만 같았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사람이야.'
로난이 술집에서 그를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갑옷을 입은 오시안을 발견했을 때 로난은 그가 방금 전 들었던 소식통의 남자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40명의 총을 든 갱단을 상대로 칼 한 자루로 쓰러뜨렸다는 것은 아직 믿지 못했다.
정보라는 것은 제대로 검수하지 않으면 절반 이상이 헛소리인 법이다.
그렇기에 로난이 그를 유심히 응시하고 있을 때 두트리 삼형제가 타이밍 좋게 그에게 시비를 걸었고.
보기 좋게 호되게 당했다.
거기서 로난은 깨닫게 됐다.
오시안의 정보는 절대로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걸.
일격에 거구를 술집 바깥까지 튕겨내는 근력도 근력이지만, 삼형제 중 둘째와 셋째가 총을 겨눴을 때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휘두른 것이 그러했다.
'신체강화 능력을 지닌 뮤턴트. 그것도 상당히 높은 등급의 뮤턴트다. 놓칠 수 없어.'
뮤턴트는 100년 전부터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특별한 힘을 지닌 인간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뮤턴트는 마법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넘어가는 세상 속에서 나타난 존재들이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돌연변이.
마법사가 아님에도 기적과도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맨손에서 번개를 뽑아내거나 사람의 마음을 조종한다거나 혹은 피부가 강철처럼 단단해진다거나.
뮤턴트들의 능력은 천차만별이었으며, 비슷한 능력들도 등급에 따라 그 출력이 달랐다.
로난 롤랑이 보기엔 오시안은 뮤턴트였다.
그것도 신체강화능력을 지닌 뮤턴트.
'보통 신체강화 뮤턴트도 거기서 갈래가 갈리지. 근력이 강해진다거나, 피부가 단단해진다거나, 혹은 속도가 빨라진다거나.'
로난이 보기엔 오시안은 그 중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한꺼번에 상승하는 복합능력 뮤턴트였다.
근력과 스피드. 이 둘의 상승치가 높은 것을 보아 신체강화 뮤턴트 중에서도 상급으로 추정됐다.
'그런 자가 대체 어디서 이런 갑옷을 구하고 검을 휘두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누구와도 계약을 맺지 않은 백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쪽이 오시안을 영입하기만 한다면 그의 해결사 사무소에 큰 전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기에 우선 환심부터 사기 위해서 그가 주문했지만 미처 마시지 못한 술값도 대신 지불했다.
"우선 자기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해결사 사무소, 바이올렛 폭스를 운영하고 있는 로난 롤랑이라고 합니다."
로난은 오시안의 경계를 풀기 위해 고급스러운 보라색 명함을 건넸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렇게 오시안 씨에게 다가온 건, 제안을 한 가지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제안?"
오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슬린다기보다는 흥미가 돋았다는 반응이었다.
"예. 오시안 씨는 이 도시에 오신 것이 처음이죠?"
"...그걸 어떻게 알지?"
오시안이 경계하며 묻자 로난은 의아해하면서 오시안의 갑옷을 빤히 바라봤다.
오시안은 자신의 갑옷을 내려다보고 주변 용병들의 복장을 보더니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이 도시에 온 것은 처음이라 치지.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혹시 오시안 씨는 이 도시에서 무언가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
로난의 날카로운 질문에 오시안은 침묵했다.
티르나라는 거대한 강철의 도시에서 구체적으로 무얼 하겠다고 찾아왔을 리가 없다.
애초에 오시안은 정신을 차려보니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을 뿐이다.
겨우 바깥에 나왔더니 산업혁명의 도시가 들어서 있는데 목적이라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땅히 머무를 곳도 없으시고 돈을 벌 만한 마땅한 수단도 없으시겠군요."
오시안은 대답 대신 그저 말없이 테이블 위에 올린 손가락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로난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로난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일을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오시안은 잠자코 로난을 바라보았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도, 항거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 로난조차도 순간이지만 웃는 얼굴에 금이 갔을 정도.
주위에서 아닌 척하면서 두 사람을 힐끔 훔쳐보던 용병과 해결사들이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팔뚝 위로 닭살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뭐, 뭐지? 갑자기 오한이.'
'미친. 보기만 하는데도 소름이 다 돋는군.'
용병들이 모두 긴장하며 이 상황이 어떻게 끝날지 기대 어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로난은 손수건을 꺼내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왜 이러시지? 혹시 내 말에 뭔가 기분이라도 상하신 걸까?'
로난은 어째서 오시안이 이렇게 불편해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지금 오시안만 놓고 본다면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검을 뽑아 그에게 휘두를 기세였으니까.
설마 해결사 일을 제안한 것에 대해 자존심이라도 상한 걸까?
로난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잔뜩 긴장을 하고 있을 때 오시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중이었다.
'뭐지. 단순 임무가 아니라 영입제안을 받은 건가?'
사실 그는 별생각 없었다.
오히려 이런 곳에서 영입제안을 받을 줄 몰랐기에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뿐.
로난은 해결사 사무실을 운영한다고 했었다.
해결사라고 한다면 돈을 받고 여러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일들은 불법적이고 또한 폭력이 동반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전의 나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보다 더 나은 일은 없어.'
오시안은 불현듯 이 세상에 뚝 떨어진 불청객 같은 존재였다.
보장받을 신분도 없고 당장 머무르며 지낼 공간도 여의찮았다.
이 튼튼한 육체는 맨땅에서 자도 아무렇지 않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푹신한 침대에서 잔 현대인의 감정은 그걸 용인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있었으니 바로 돈이었다.
모든 것에는 돈이 든다.
특히 사람이 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의식주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갱단을 쓰러뜨리며 적당히 주머니를 턴 돈으로 밥값을 지불했다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었다.
그에겐 결국 돈을 벌 안정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원래 내가 알던 게임이었다면 퀘스트를 수행하며 보상으로 돈을 받거나, 아니면 간단한 용병의뢰를 했겠지.'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금 오시안이 할 수 있는 거라고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신체능력을 이용한 검술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걸로 돈을 버는 방법은, 정말로 공교롭게도 눈앞의 로난이 제안하는 해결사 말고는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오시안으로서는 오히려 옳다구나 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단지 바로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
로난이 보통 수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희는 오시안 씨에게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 줄 거라고 약조드립니다."
로난이 큰마음을 먹고 던지는 제안에도 오시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욱더 로난을 의심했다.
'업계 최고의 조건? 아무리 신체능력이 대단하기로서니 나 같은 녀석의 어디를 믿고 갑자기?'
오히려 이렇게 잘해 주려고 하니까 더욱더 수상했다.
이미 한번 수상하다는 인식이 박혀 버린 지금, 오시안은 로난을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오시안의 눈동자가 가늘어졌고, 로난은 더욱이 강해진 경계 어린 압박감에 속으로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그는 지금 얼굴에 미소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뭘까. 업계 최고의 대우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긴장감이 극한까지 치닫고, 멀리서 구경하던 용병조차 견디지 못하고 식은땀 가득한 주먹을 불끈 쥐는 순간.
오시안이 입을 열었다.
"제안은 흥미롭군. 다만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로 미루도록 하지."
한계까지 조여진 분위기가 탁 하고 풀렸다.
그때까지 숨도 못 쉬고 구경하던 용병들이 겨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고 그것은 로난도 마찬가지였다.
'왜들 이러지?'
정작 오시안은 자각이 없었기에 그런 사람들의 태도를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하하. 그랬군요. 제가 늦은 시간에 오시안 씨에게 민폐를 끼친 것은 아닌지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 그대는 나를 오히려 도와주었기에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나 또한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 피곤하기도 하고 말이지."
오시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을 표면상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다.
로난 또한 오시안의 말에 머리가 꽤 복잡해졌다.
'업계 최고의 대우라고 말을 했음에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어. 이 정도는 우습다 이건가?'
로난은 주변 용병들을 힐끔 살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일련의 사태를 목격하고 말았다.
나불대기 좋아하는 용병들이 이 소식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내일이면 소식을 주워들은 다른 중개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고.'
그리고 귀가 밝은 중개인은 오시안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그를 영입하려 들 것이리라.
그래서 일부러 이쪽이 술을 사면서 호의적인 태도로 접근을 한 뒤 바로 계약을 체결하려 했는데.
오시안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니면 설마 이걸 노리고?'
로난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일부러 확답을 하지 않고 내일로 미루는 점에서 오시안의 노림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경쟁 붙이기였다.
아마 피곤하다고 말한 것은 단순한 핑계일 테고 처음부터 이 상황을 유도했던 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로난은 다급해졌다.
"저, 오시안 씨."
"뭐지?"
"혹시 오늘 당장에 머무를 곳은 있으십니까?"
"아니. 아직은 없다만."
"아 그렇다면 이곳은 술집이지만 2, 3층은 여관도 겸하니 하룻밤 정도는 가볍게 머무르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숙박비를 대신 지불해도 괜찮겠습니까?"
로난으로서는 어떻게든 오시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이쪽이 이만큼 지극정성이라는 태도를 보여 줘야만 했다.
"...? 그러지."
정작 오시안은 로난이 왜 이렇게 해 주는지 몰랐다.
갑자기 혼자서 뭔가 다급해진 것도 그렇고, 해 주니까 고맙게 받을 뿐.
당장 오시안에게는 오늘 있는 일들을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마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장에 로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루의 말미를 달라고 한 것이었다.
육체는 아니어도 정신은 정말로 피곤했으니까.
'그래도 오늘 하루 묵을 곳은 다행히도 구했네.'
일단 올라가서 푹 자고 생각하자.
오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보지."
별 뜻 없는 오시안의 말에 로난의 얼굴이 한층 환해졌다.
7화. 힘의 증명 (1)
개인 방을 배정받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뻑뻑하지만 그래도 푹 가라앉는 감촉에, 내가 알던 중세와는 다른 세상이었지만 이 부분에서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중세의 여관이었다면 침대도 이것보다 덜 푹신하고 밑에 짚이나 깔았을 테니까.
'적어도 여기는 근대니까 그나마 사는 데 불편함은 없겠네.'
물론 그것도 중세와 비교했을 때지, 현대에서 살던 내게는 이곳도 불편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는 세상.
즐겨하던 게임은 이제 즐길 수도 없다.
'아니지. 지금이 게임 세상이잖아?'
그 생각이 미치자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인생게임은 좋아하지만, 게임이 인생이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방 한쪽에 마련된 거울을 살폈다.
거울 너머에서 검은 머리의 미남자가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피부는 하얗고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우수에 차 있었다. 별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 걸 텐데도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몸도 우락부락하지 않고 호리호리하게 잘 빠져있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어딘가의 고귀한 가문의 도련님이라 생각하겠지.
이질감이 들면서도 익숙한 저 모습은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방랑기사의 모습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게임을 플레이 할 때 만들었던 캐릭터 커스터마이즈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이 들어갔기 때문에 방랑기사지만 둔탁하고 우직한 느낌보다는 상당한 미형으로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게임을 할 때 캐릭터가 미형이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거 보면 진짜 커마 하나는 잘해서 다행이네.'
이 게임은 캐릭터를 생성할 때 커스터마이징의 자유도가 상당히 높았다.
기본적인 성별도 택할 수 있었으며, 피부색이나 얼굴을 손봐서 온갖 기괴한 형태로 바꿀 수도 있었다.
근육질의 몸매도 가능했고 신장을 작게 만든다거나, 혹은 노인처럼 바꾸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진짜 괜히 개성 살린답시고 이상한 커마를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흔히들 게임 속에서 고인물이라 불리는 놈들은 너무 할 것이 없어서 캐릭터 외형을 이상하게 꾸미는 걸로 유명했다.
옷도 무슨 누더기를 걸치면서 얼굴은 몬스터 뺨치게 기이하게 만들고 피부색도 핑크나 보라색으로 물들인다.
나도 그렇게 할까 고민을 했던 적도 있지만, 그래도 역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잘생기고 멋진 모습을 쭈욱 유지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이 정도로 잘생긴 모습이라면, 어딜 가서도 욕을 먹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직업은 아쉽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기사 대신 마법사를 키울 걸 그랬다.
게임의 난이도가 워낙 높아서 초반에 체력이 낮은 마법사는 뭘 해 보기도 전에 픽픽 죽어나가기 일상이었다.
후반에 아무리 빛을 본다고 해도 초반을 넘기지 못하면 그것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제일 안정적인 기사를 택한 것인데.
'아니, 됐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방랑기사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는 어지간하면 다 총을 들고 다니지만, 그래도 이 월등한 신체능력은 기사의 전유물이었으니까.
'게다가 흑마법사나 거지 태생이 아닌 것이 어디야.'
흑마법사면 정말 범죄자로 낙인찍혀서 시작부터 도망쳐 다녀야 했고, 거지 태생이었으면 나는 갑옷에 검이 아니라 팬티 한 장에 맨손으로 움직이게 됐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가느냐지.'
정신은 현대인의 것.
육체는 중세 기사의 것.
그러면서 사는 세상은 근대다.
온갖 시간대가 뒤섞인 뒤틀린 혼종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육체에 적응하는 것이 나의 최우선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괴리감이 들었으니까. 내뱉은 내가 놀랄 정도로.
그것이 방랑기사 태생이 지닌 특성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평생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으라면 마냥 답답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지는 않다는 거였다.
실제로 나에게 총을 쏜 그놈들의 시체에서 지갑을 털 때도 몸이 딱히 거부반응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아니면 원래 기사가 중세시대에 전국구 깡패 짓을 하던 놈이라 그런 걸지도.'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곧바로 갑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의 삶이 꽤 고단할 거라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지만, 지금만큼은 전부 잊고 푹 자고 싶었다.
*
다음 날 아침.
오전에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주점의 1층 식당에, 어쩐 일인지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지난 밤 이곳에서 술을 마셨던 용병들이었다.
"아직 안 나왔나?"
"기다려 봐. 금방 내려오겠지."
두런두런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던 용병 무리 중 일부는 가게 테이블의 한쪽에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평소의 여유 있는 태도와 달리 초조함마저 느껴지는 로난 롤랑이 앉아 있었다.
평소와 같은 주름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한 정장과 실눈이 인상적인 그는 답지 않게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으로 팔뚝을 툭툭 치고 있었다.
로난으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본 오시안의 실력은 진짜였다.
이 정도의 사람을 가장 먼저 발견했는데 다른 중개인에게 빼앗긴다?
그렇다면 최소 1년은 제대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리라.
그러니 로난으로서는 지금 당장 최고의 조건으로 그를 영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너무 섣부르게 접근하는 것은 그거 나름대로 문제였다.
지난밤 오시안에게 좋은 조건을 내걸었을 때도 그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을 경계하는 기색을 띠기도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서, 예의 바르게 제안을 건넬 생각이었다.
예의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은 그의 특기였으니까.
그 순간 철컥 철컥 하는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1층 식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향했다.
이런 특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 갑옷을 입은 오시안이 1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시안에 대해서 소문만 듣고 남는 시간차에 찾아온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는 속으로 허, 하고 감탄을 흘렸다.
요즘 시대에 맞지 않은 정신 나간 기사 흉내를 내는 놈이라고 하기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근육이 넘치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생긴 것만 보면 어디 귀한 집안에서 자란 도련님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러나 섣부르게 시비를 걸거나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밤 오시안의 무위를 목격한 사람들이 그의 등장에 긴장을 하기 시작해서였다.
자연스럽게 분위기 자체가 정적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아무렇지 않은 것은 오시안뿐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착석하여 음식을 주문하고자 했다.
그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로난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이곳에서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던 로난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발걸음으로 오시안에게 다가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시안 님."
"아, 그래. 로난이라고 했었지."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군요."
"뭐, 워낙 인상 깊어서 말이야."
실눈의 사람은 흔치 않아서, 라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말에 로난은 기뻐했다.
오시안이 자신을 기억해 주었다고 말한 부분에서, 적어도 밉보이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다만 특유의 포커페이스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술을 사 준다면."
"어, 아침부터 드시려는 겁니까?"
"그냥 해 본 소리였다."
"하하, 그랬군요."
로난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렇다고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왔다고 방심했다가 다 일궈낸 일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건 이 업계에서 흔하지 않던가.
그러니 최대한 조심해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좋은 제안을 건넬 생각이었다.
"그보다 로난."
"예. 오시안 님."
"저기 저 사람들은 자네의 동료인가?"
"예?"
로난은 그 말에 주점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전날 싸움 때문에 부서진 문은 아직 미처 복구하지 못한 채였는데, 그곳에서 쏟아지는 아침햇살을 등지며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숫자는 총 세 명이었는데 전부 제각기 개성이 돋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한 명은 드레스 차림의 묘령의 갈색머리 여인이었다. 목에는 새하얀 짐승의 털목도리까지 두르고 있었는데, 20대처럼도 보였고 40대처럼 연륜이 느껴지기도 했다.
한 명은 정갈하게 차려입은 잿빛머리 노신사였다.
프록코트를 입은 노인은 얼굴에 테 없는 안경을 쓰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전부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마지막 한 명은 어딘가 자유분방해 보이는 남자였다.
다리에 딱 맞는 가죽바지와 와이셔츠, 귀나 입술에 징을 박았으며 머리색도 염색을 한 모양인지 약간 형광빛이 맴도는 푸른색이었다.
풀어헤친 가슴팍은 운동을 했는지 근육이 꽤 도드라져 있었다.
그들을 알아본 로난의 표정이 미약하게 굳었다.
저들은 로난과 같은 업계 종사자인 헤드헌터들이었다.
그리고 꽤 오래 전부터 서로 충돌하며 사람을 빼가거나 하는 경쟁을 일삼은 자들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초대받은 손님은 아닌 모양이군."
로난의 미세한 반응에 오시안이 그렇게 말했다.
오시안이 있는 곳까지 다가온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말을 건 것은 묘령의 여인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당신이 어젯밤 나타났다는 정의로운 기사가 맞나요?"
"정의로운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라면 맞소."
"그렇군요. 저는 이자벨라 로스라고 해요. 업계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중개인이죠."
"그런가. 그렇다면 저 두 사람도 마찬가지겠군."
오시안의 말에 노인과 청년이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허허,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스번 러셀이라고 합니다."
"난 제이크 허드슨. 만나서 반갑다고, 형씨."
제이크라 소개한 남자는 허락받지도 않고 의자를 끌고 와 오시안의 근처에 앉았다.
무례하게 비추어지는 그 행동에 로난이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쏘아보았지만, 제이크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이 자리에 로난이 없는 사람인 것마냥.
"휘유, 정말로 갑옷과 칼을 차고 있을 줄이야. 형씨 이야기는 들었어."
"이야기?"
"어젯밤 그거 있잖아. 칼 한 자루로 갱단을 쓸어버렸다면서?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자시고도 없다. 그저 검을 휘둘렀을 뿐."
"그거 증명할 수 있어?"
제이크의 말에 오시안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로난은 그 모습에 난처해했으며 오스번과 이자벨라는 끼어들지 않고 관망의 태도를 취했다.
제이크 허드슨은 최근 갑자기 기세를 타고 급격하게 성장한 중개인이었다.
듣기로는 규모가 큰 마피아형 범죄조직을 뒷배로 두고 있다는 말도 나올 정도.
그만큼 제이크 허드슨의 성장세는 눈부실 정도였다.
그 지나친 성공 때문인지 제이크는 예의를 눈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허물없이 다가간다고 좋게 보기도 했지만, 업계에서 나름 자리를 잡은 사람들에게는 저 행동은 지나친 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영입을 하러 온 상대방의 능력을 의심하다니.
싸우자는 생각으로 오지 않고서야 절대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로난은 오시안의 상태를 살폈다.
적어도 로난이 지난밤에 보기엔, 오시안은 걸어오는 시비나 싸움을 절대로 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증명이라."
오시안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멋쩍게 웃으며 넘기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롭게 변한 채 제이크를 응시했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8화. 힘의 증명 (2)
주점 내부의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태를 흥미롭게 구경했다.
대부분은 제이크의 행동에 오시안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다.
제이크는 지금 의도적으로 오시안을 도발하고 있었다.
아마 소문만으로 그가 정말 칼로 총알을 베는 남자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이리라.
실제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호기심 차에 찾아온 자들 대부분은 오시안의 실력에 반신반의를 품고 있었다.
힘이 강한 것은 맞고, 칼을 휘두르는 것도 맞지만.
그것과 총알을 베어낸다는 것은 완전 별개의 것이다.
40명의 갱들을 단신으로 쫓아냈다는 것도 어쩌면 과장되게 부풀려진 소문일 수도 있었고.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되니 구경꾼들 입장에서는 썩 나쁠 것이 없었다.
"그래. 그쪽이 증명을 바란다고 하니, 이쪽으로서는 조금 아량을 베풀어서 보여 줄 수야 있지."
"이야. 그냥 던져 본 말이었는데 정말로 보여 주겠다고? 형씨, 못 하는데 사실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무리하는 것은 아니지?"
하하하.
제이크의 농담에 주변에서 작게나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입을 하러 온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대해도 되는가 싶었지만, 이것은 제이크 나름의 계산이 깔린 행위였다.
'보아하니 나이도 어려 보이고, 생긴 것만 보면 좋은 곳에서 자란 거 같은데 이 업계에 뛰어든 걸 보면 꼭 그런 건 아닐 테고.'
실실 웃으며 말하는 것과 반대로 제이크의 눈동자는 예리하게 오시안을 분석했다.
'시작부터 갑옷에 검까지.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 이름을 알릴 생각인가? 머리는 썼는데 티가 너무 나는걸. 여기가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지.'
제이크는 오시안을 그저 유명세를 얻기 위해 일부러 복장을 저렇게 하고 다니는 애송이 정도로 평가했다.
다만 갱단과 싸운 것도 그렇고 반응을 보면 실력은 분명 있을 터.
실력을 완전히 파악한 뒤 적당히 구슬려서 오히려 이쪽으로 영입하는 것은 나쁘지 않을 터다.
'제까짓 게 튕기면 얼마나 튕긴다고. 어차피 돈이랑 여자 좀 쥐여 주면 알아서 숙이고 들어오겠지.'
제이크가 이 바닥에서 본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은 명성을 원했고 돈을 많이 벌길 바랐다.
혈기 넘치는 피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제이크는 그런 자들의 욕망을 읽을 줄 알았고 그걸 부추겨 자신의 아래에 두었다.
오시안도 분명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거라는 것이 제이크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확인은 그쪽이 할 건가?"
오시안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렇게 묻자 제이크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이 겁을 집어먹었다는 걸 깨달은 제이크의 미소에 약간이지만 금이 갔다.
'이 새끼.'
제이크는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연히 나는 안 하지. 왜냐면 나는 그저 중개인일 뿐이니까. 중개인이 나서서 싸우는 일은 없잖아? 중개인이 잘하는 걸 해야지."
"그렇다면?"
"혹시 몰라서 내가 사람을 하나 데려왔지. 어이! 밖에서 기다리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지 그래?"
제이크의 부름에 부서진 문을 통해 누군가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성인 평균 신장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장신의 남성이었다.
민머리에 두툼한 입술,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얼굴에는 검은 도료로 특유의 문신까지 하고 있어서 상당히 위협적인 인상이었다.
"야, 저거 타이우 온두라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제이크가 불렀다면 확실할 거고. 설마 타이우가 실력을 확인하러 온 건가? 그 '무법자'가?"
자리에 모인 용병들이 웅성거리다가 타이우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입을 합 다물었다.
타이우는 그런 용병들을 보며 비웃음을 날렸다. 용병들은 발끈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 난폭한 용병들조차 입을 다무는 시점에서 타이우가 용병들 사이에서 얼마나 악명이 자자한지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인가?"
제이크의 뒤에 선 타이우는 오시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낮게 울리는 묵직한 목소리는 그 자체만으로 상대방에게 압박감을 주기 충분했다.
오시안을 향한 타이우의 시선은 썩 곱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오시안은 싸움 한번 해 본 적 없어 보이는 도련님이었으니까.
"별 볼일도 없어 보이는군."
타이우는 고작 이런 놈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여기까지 온 것에 적잖은 자존심이 상했다.
"어이 애송이. 꼴에 관심 좀 끌어 보겠답시고 이상하게 차려입은 거 같은데, 도망치고 싶다면 지금 당장 꺼지는 걸 추천하지."
타이우는 오시안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겁을 주듯 으르렁댔다.
제이크는 그런 타이우를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시안이 타이우를 보고 겁에 질리길 원했다.
이것이 제이크가 업계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압도적 힘이라는 채찍을 이용해 자존심을 짓밟고,
쩔쩔 매는 상대를 돈과 여자라는 당근을 통해 현혹하는 방법.
그렇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드는 것이 제이크가 상대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그런 것에 굴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끝은 썩 좋지 않았다.
한때 제이크의 제안을 끝끝내 거절하던 한 해결사가 다음날 강가에 떠다니는 시체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그 이상 무례한 행동은 좋지 않습니다."
로난이 만류를 하며 나서려 하자 타이우는 로난에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뭐? 내가 귀가 안 좋아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 말해 보겠어?"
"...."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던 로난의 얼굴에 미소가 완전히 지워졌다.
로난도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듯 타이우의 반쯤 협박에 가까운 말에 다시금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거기까지만 하지. 어차피 볼일은 나한테 있는 거 아닌가."
오시안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은 그때였다.
타이우의 시선이 다시금 오시안을 향했다.
이번에는 꽤나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대신 나서 주겠다 이거냐?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군."
"그래서, 어디 한번 실력을 확인을 해 보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귓가에 들려왔다.
오시안은 천천히 타이우의 앞에 가서 섰다.
덩치만 놓고 보면 머리 하나는 차이가 났다.
누가 보더라도 오시안이 싸워서 이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건방진 놈. 진짜로 나에게 덤빌 생각이냐?"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오히려 그쪽이 그걸 바라는 것 같군. 그렇다면 기꺼이 그 방식으로 응해 줄 생각이 있다만."
"뭐?"
"아니면 혹시 이제 와서 겁이라도 질리셨나."
오시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도발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 말에 타이우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타이우는 손을 뻗어 오시안의 갑옷의 멱살 부분을 손으로 쥐었다.
이대로 힘을 줘서 오시안을 지면에 패대기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팔에 힘을 아무리 줘도 오시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타이우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무렵, 오시안의 손이 불쑥 그에게 뻗어졌다.
오시안은 한 손으로 타이우의 목을 움켜쥐더니 아래로 확 당겨 그의 머리를 테이블에 내리찍었다.
콰직! 타이우의 머리가 테이블과 충돌해 정확히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제이크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우가 당했어?'
이렇게 보여도 타이우는 신체강화 능력을 지닌 뮤턴트다.
오시안도 신체강화 뮤턴트라는 이야기가 돌았기에, 기세를 한번 꺾을 생각으로 비슷한 능력의 타이우를 불러온 것이었다.
그런데 타이우는 오시안의 멱살을 쥐고도 꼼짝도 못 했다. 반대로 오시안에게 한 방 먹기까지 했지.
로난을 비롯한 두 헤드헌터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으아아!"
부서진 파편 속에서 타이우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찢어진 그의 이마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이우는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한번 스윽 훑더니 이내 눈이 뒤집혔다.
"죽여 버리겠어!"
본래는 그저 힘의 차이를 보여 주며 오시안에게 위압감을 심어 줄 생각이었지만 피를 본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타이우는 진심으로 오시안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는 뮤턴트로서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오시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거리도 가까우니 굳이 총을 뽑을 필요는 없었다.
타이우는 맨손으로도 상대방을 찢어죽일 자신이 충분했다.
타이우의 두 손이 오시안의 머리를 부여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오시안의 주먹이 움직이며 타이우의 턱 아래를 올려쳤다.
타이우도 그것을 보았다. 그래도 일부러 무시하고 행동을 이어나가려 했다.
신체를 강화시킨 그는 육체가 바위보다 더 단단한 상태였다.
지금 그에게 주먹을 내지르는 것은 오히려 본인의 뼈가 으스러질 일이었다.
퍼억!
그러나 타이우는 뇌를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힘차게 뻗은 두 손도 축 늘어졌다.
오시안은 내지른 오른손을 회수한 뒤 왼손에 주먹을 으득 말아 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타이우의 명치를 향해 내질렀다.
파앙─!
주먹으로 사람의 몸을 때렸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경쾌하고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이우의 몸이 기역 자로 거칠게 꺾였다. 부릅뜬 눈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돌출됐다.
공중에 살짝 뜬 타이우의 몸은 오시안이 힘을 줘 밀어내자 멀리 튕겨져 날아갔다.
테이블 3개를 연달아 부수며 날아간 타이우는 벽에 처박히고서야 겨우 멈췄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용병들은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신체강화 능력을 지닌 뮤턴트 타이우를 오히려 맨손으로 제압을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무, 무슨 위력이.'
'같은 뮤턴트 맞아?'
지난밤 오시안의 힘을 본 사람들은 역시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확인차 왔던 사람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얼떨떨해했다.
오시안은 쓰러진 타이우를 보며 가볍게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는 이쪽을 경악 어린 시선으로 응시하는 제이크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증명은 다 끝난 거 같은데.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별 볼 일 없군."
제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적의 어린 강렬한 시선으로 오시안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오시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먼저 시비를 걸어 놓고서 뜻대로 되지 않으니 화를 내다니. 어떻게 돼 먹은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그보다 방금 그 타이우라 했던가. 생각보다 너무 약한데.'
겉모습만 보고 꽤 살벌하다 싶었는데 실제로 싸워 보니 별거 없었다.
순간 멱살을 쥐는 힘은 나쁘지 않았고, 턱을 때릴 때 느껴지는 묘한 저항감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저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힘을 '약간' 더 주는 것으로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오시안은 제이크를 싸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제이크는 표정관리를 하려고 애를 썼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이 무산됐으니 제이크는 이제 다른 방법을 취해야 했다.
"...그래. 제대로 봤어. 형씨 실력이 확실히 대단하네."
제이크는 다시금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말투와 달리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저 쓰러진 친구는 내가 데려가 봐도 될까. 어디 한 군데 부러진 것 같으니 빨리 치료를 맡기고 싶거든."
"그쪽은 뭐 없나?"
"나? 내가 뭘?"
"그쪽이 증명해 달라 해서 증명을 해 줬으니, 당연히 그쪽도 상응하는 걸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오시안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들은 제이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니면 그냥 웃으면서 말로만 때울 생각은 아니겠지?"
제이크는 눈알을 굴리며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걸 모를 오시안이 아니었다. 그는 제이크가 도망치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길목을 막듯이 섰다.
"흠?"
그때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살기에 오시안이 뒤를 돌아봤다.
그의 입가에 미약하지만, 미소가 맴돌았다.
"아직 기절하지 않다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꽤 튼튼하군."
"허억. 허억."
몸을 일으킨 타이우가 숨을 헐떡이며 오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살기가 가득한 그의 눈빛은 이미 무언가 결심을 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타이우는 허리춤에 달려 있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권총이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매우 컸다.
사냥용 소총인 엘리펀트 건을 개조해서 만든 개인 권총.
총알의 구경도 대형이라, 쏘는 것 자체만으로 거대한 반동을 자아내지만, 신체강화능력자 타이우가 쓰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무기였다.
다만 사람에게 쓰기에는 지나친 화력 때문에 어딜 가서 함부로 꺼내는 무기가 아니었다.
하물며 룰이 적용되는 주점 내에서 총질이라니.
아무리 '무법자'라 하더라도 이건 선을 넘은 짓이었다.
그러나 타이우는 지금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주거엇!"
타이우는 부서진 턱으로 어눌한 발음을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코끼리의 뼈도 박살내는 거대한 탄환이 불을 뿜으며 오시안을 향해 쏘아졌다.
아음속의 탄환이 오시안에게 닿으려 했다. 그 순간 오시안의 손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허리춤의 검을 쥐었다.
스칵!
찰나의 순간에 그어진 은빛 섬광이 정확히 총알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검이 너무나도 빠르고 예리한 나머지 총알은 날아가는 힘을 잃지 않았다.
양옆으로 갈라진 총알이 주점의 벽에 틀어박혔다.
주점 내부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아쇠를 당긴 타이우도 자신이 무엇을 본 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다인가?"
9화. 바이올렛 폭스 (1)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주점 내부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눈으로 봤음에도 머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타이우가 분을 참지 못하여 홧김에 총을 쏘았고 오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단지 그것이 전부였다.
그랬는데 오시안은 피를 뿌리며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총알이 반으로 갈라져 주점의 벽에 박혔을 뿐이다.
'저, 저 새끼. 정말로 칼로 총알을 쳐낸 거야?'
쳐냈다기보다는 정확히 베어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사실 쳐내나 잘라내나 제3자의 입장에선 전부 거기서 거기였다.
둘 다 불가능한 일인 것은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전날 오시안에게 퍼진 소문이라는 것이 절대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40명의 갱단을 상대로 칼 한 자루로 쫓아냈다더니 날아오는 총알을 벨 줄 알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설마하니 타이우도 자신이 쏜 총을 오시안이 벨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얼어붙은 채였다.
"대, 대체 어떻게.... 아무리 신체강화 능력의 뮤턴트라도 이런 건 불가능할 텐데."
"그저 벴을 뿐이다."
"그저? 그저, 라고?"
"그래. 그보다 너...총을 쐈군."
오시안의 차가운 목소리에 타이우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1층 주점에 모인 구경꾼들이 전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타이우는 모르지 않았다.
타이우는 용병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새끼들이 지금 누구에게 감히!
그러나 용병들은 이번만큼은 타이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상처 입은 사자는 하이에나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했다.
하물며 주점 내부의 룰을 위반한 사람이면 더더욱 그랬다.
오시안도 그것을 알았기에 타이우의 행동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이 검을 휘두를 명분을 주기에 충분했다.
"오, 오지 마!"
오시안이 천천히 다가오자 타이우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발음은 한층 나아졌지만, 그의 두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타이우는 오시안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누구도 그런 오시안을 말리지 않는다는 걸, 이것은 정당한 처형이라는 것도 알았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타이우가 발악을 위해 손에 쥔 총을 오시안에게 재차 겨누었다.
그의 손끝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오시안의 모습이 촛불이 훅 꺼지듯 사라졌다.
어디지?
타이우의 눈동자가 돌아가며 오시안의 모습을 찾으려는 순간이었다.
사라진 오시안이 타이우의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타이우가 입을 벌리며 무어라 외치는 것보다도 먼저, 오시안의 검이 그의 명치로 찌르듯 파고들었다.
"커헉!"
타이우가 고통에 찬 숨을 내뱉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자신을 죽이는 오시안이 아닌, 동업자인 제이크였다.
어떻게 좀 해 달라는 그 눈빛을 제이크는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 모습에 타이우는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오시안은 타이우의 명치에 박아 넣은 검을 뽑았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르자 검날에 묻은 피가 마룻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오시안은 자신을 향한 시선에 모두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이 녀석은 이곳의 규칙을 무시하고 총을 뽑아서 그것을 쏘았다. 그래서 나는 그 위반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물었지. 거기에 불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오시안의 말에 반박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타이우가 잘 죽었다는 듯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오시안은 다시금 제이크를 바라봤다.
"아직도 증명이 더 필요한가?"
"...그럴 리가."
"그러면 속히 여기서 가 줬으면 좋겠군. 명예롭지 못한 자의 피를 한 번 더 보고 싶지는 않거든."
노골적으로 모욕이 담긴 언사였지만 제이크는 거기에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쓰러진 타이우의 시체를 들쳐업은 뒤 주점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오시안은 그런 제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자, 그러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보지."
방금 전까지 그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이자벨라와 오스번의 눈동자에는 숨기지 못한 탐욕이 깃들었다.
총알을 벤다는 소문을 실제라는 걸 알게 됐으니 더욱이 탐이 나는 것이었다.
다만 탐욕은 탐욕이고 반대로 두 사람은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됐다.
오시안은 제이크의 사무실의 해결사인 타이우를 죽였다.
오시안을 영입한다는 것은 결국 훌륭한 전력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제이크와 척을 지는 것을 의미했다.
제이크 자체는 절대 두려운 사람이 아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자존심이 지나치게 높고 성격이 나쁘다. 수완만 있을 뿐 그 이상 가는 것은 없는 것이 제이크였다.
그보다 두려운 것은 제이크의 뒤에 있는 거대한 조직이었지.
놈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입장에선, 오시안은 품기에 매우 꺼려지는 인재였다.
오시안은 자신을 향한 눈동자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계약은 누구와 해야 할지 이미 정해진 것 같군."
오시안의 시선이 로난을 향했다.
로난 롤랑.
이 남자는 그가 제이크와 시비가 붙고 타이우를 죽일 때까지도, 그 태도에 어떠한 변화가 없었다.
"정말 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애초에 그러려고 어젯밤부터 계속 기다려온 것이 아니었나?"
"그건, 예...그렇네요."
로난은 따지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로난의 결심을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업계 최고의 대우를 선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시안과 로난은 악수를 나누었다.
당장에는 가계약일 뿐이지만 이 거래가 흔들리는 일은 절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곧바로 저희 사무실로 가시겠습니까?"
"사무실?"
"예. 이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지기는 했는데, 앞으로 자주 들리실 곳이니 미리 가 보셔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러지."
오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나가는 그의 뒤를 로난이 따라가려 할 때, 뒤에서 로난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축하해, 로난. 꽤나 능력 있는 사람을 영입했네."
나가려던 로난은 멈칫하더니 자신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자벨라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해 보였다.
"이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은 무슨. 설사 운이라도 이 업계에선 그것도 실력이라는 거 잊었어? 아무튼 다시 한번 축하하고, 동시에 조심하라고 전해 주고 싶네."
이자벨라가 말하는 조심이라는 말은 제이크를 의미했다.
타이우가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당했으니 제이크는 나중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시안을 노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오시안을 영입한 로난도 마찬가지였다.
"조심해. 제이크는 뱀처럼 음흉한 남자야. 겉으로는 웃으며 대하지만, 속은 그 녀석처럼 배배 꼬인 사람도 드물거든."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하니 다행이네. 적어도 나는 이 업계에서 너를 꽤 높게 치거든. 맨날 웃는 얼굴에 속내는 알 수 없어서 수상하지만."
"이런, 제가 말인가요? 너무 그렇게 말씀하시면 상처입니다만."
이자벨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상처? 되지도 않은 엄살은 집어치워."
"...."
진짠데.
로난은 어째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쪽이 웃으면 경계하고, 이쪽이 힘들다 해도 믿지 않았다.
세상이 각박해서 그런 걸까.
로난은 머리에 쓴 모자를 벗으며 가슴팍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걱정해 주신 건 감사드리는 일입니다만, 앞으로 이건 온전히 저와 오시안 씨가 짊어지고 나가야 할 길. 충고만큼은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잘해 봐."
"허허, 앞으로 자주 보게 됐으면 좋겠네. 로난."
"예. 오스번 씨도 안녕히 계십시오."
업계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눈 로난은 벗어든 모자를 다시 머리에 쓰며 주점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오시안이 팔짱을 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인사는 나눠야 할 거 같아서요."
"안부 인사를 나눌 정도의 시간은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지."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 혹시 바로 사무실에 가기 전에 따로 어딜 들렀다 갈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딱히 상관은 없다만, 어디로 갈 생각이지?"
"옷가게요."
"옷가게? 거기는 왜?"
오시안이 정말로 모른다는 눈빛으로 묻자 로난은 말없이 오시안의 갑옷을 응시했다.
오시안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갑옷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아."
갑옷이 너무 편해서 깜빡 잊고 있었다.
*
딸랑.
옷가게에서 나온 오시안은 자신이 걸친 복장을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활동하기 편한 갈색 가죽바지에 새하얀 와이셔츠. 그 위에 입은 간단한 조끼와 겉에 걸친 프록코트까지.
갑옷에 비하면 낫기는 하지만 오시안으로서는 이런 복장도 적응이 안 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반대로 로난은 오시안의 모습을 한번 스윽 훑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확실히 옷을 갈아입으시니 느낌이 사는군요."
오시안은 원래 갑옷을 입었을 때도 어딘가의 귀공자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는데 본격적으로 꾸미니 가히 장난이 아니었다.
옷 가게 점원뿐만이 아니라 주인장도 나와서 호들갑을 떨었을 정도고, 지금도 거리를 지나가면서 행인들이 오시안을 슬쩍 바라볼 정도였다.
"갑옷은 가게 측에서 따로 보내 준다고 하니 저희는 바로 사무실로 가도록 하죠."
"...그러지."
오시안은 갑옷이 없어서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뒤늦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웃겨서 속으로 자조 어린 웃음을 흘렸다.
이 세상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갑옷이 그립단 말인가.
그래도 차라리 나은 일이었다. 허리춤의 롱 소드는 그대로였으니까.
두 사람은 근처의 승강장으로 가 트램에 탑승했다.
30번대 구역을 주행하는 노면전차였는데 오시안은 그 내부에 앉아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정말 다른 세상이로군.'
갱단도 있고 총도 쏘고 건축물 양식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이렇게 노면전차까지 있으니 완전히 근대화된 세계라는 것이 실감됐다.
지금도 거리에는 증기를 내뿜는 자동차들이 더러 지나다니고 있었으며, 사람이 아닌 아인종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윽고 노면전차가 한 정거장에서 멈췄고 오시안과 로난은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평범하게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에 간판을 단 가게였다.
"이곳이 저희 해결사 사무소인 [바이올렛 폭스(Violet Fox)]입니다. 들어가시죠."
해결사 사무소라 뭔가 특이할 줄 알았는데 거리에 보이는 다른 건물과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로난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에 설치된 방울이 울렸다.
"호오."
건물 내부 풍경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목조 테이블과 의자. 한쪽에 놓인 소파와 벽에 걸린 액자들.
황동 파이프가 천장과 벽에 설치되어 있었고 천장의 등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내부를 비추었다.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축음기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한쪽 벽에는 기다란 진열대가 있었다. 그 진열대 위에는 가지각색의 술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곳도 주점이었나?"
"부업이죠. 해결사 일은 하는 일이 다양하다 보니 이런 식으로 식당이나 주점으로 함께 운영하며 손님들을 모아서 정보를 얻고는 합니다."
로난은 곧바로 오시안을 데리고 2층의 사무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로난은 곧바로 계약서를 건네주었다.
"여기 계약서입니다. 읽어 보시고 혹시라도 조건이 부족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로난에게서 계약서를 건네받은 오시안은 그것을 빠르게 훑었다.
이 업계의 조건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보건데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것을 넘어서 솔직히 현대의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좋은 대우였다.
"아, 그리고 오시안 씨의 특기를 적어야 하는데 혹시 뭘 잘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의뢰를 수주할 때 필요하거든요."
오시안은 계약서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내 특기는 검술이다. 그렇게 알아두면 된다."
"어, 음. 그러니까 오시안 씨는 검을 다룬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너도 보지 않았던가."
"그랬죠. 아, 그렇다면 이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곤란하시다면 그 부분은 공란으로 남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나는 그 전에 방랑기사였으니까."
"...."
로난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컨셉이시군요."
10화. 바이올렛 폭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