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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화. Scotland Yard (2)

허억. 허억.

칼 잭슨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달렸다.

추적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생쥐 사역마는 보내주는 신호만 받을 수 있을 뿐, 적의 자세한 위치나 정체까지는 파악할 수는 없었다.

마법의 한계라기보다는 칼 잭슨의 실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아서였다.

어쩌면 근처 우연히 지나가던 부랑자라는 생각을, 칼 잭슨은 한사코 부정했다.

지금 시간대에 이런 후미진 장소까지 온 놈들이라고 한다면 딱 정해져 있지 않은가.

칼은 품 안의 시약병과 물건들을 확인하며 골목길의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운동 따윈 해본 적 없는 몸으로 달리려니 죽을 만큼 힘들었다.

'일단 하수도로 숨는다면...!'

칼이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탐색하려 할 때 그의 앞길을 일련의 사람들이 가로막았다.

"저기다! 칼 잭슨이다!"

"일단 잡아!"

"젠장!"

칼은 본능적으로 놈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추격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렇게 몰려다니는 걸 보면, 필시 자신이 도망친 블라섬 티어에서 나온 놈들이리라.

"뒤져 새끼들아!"

칼은 주머니에서 시약병을 꺼내 집어 던졌다.

바닥에 깨진 시약이 기포를 내더니 확 번지며 뿌연 매연을 일으켰다.

"무, 물러나!"

"피해라!"

그걸 본 추적자들이 얼굴이 창백해져서 뒤로 물러났다.

이 매연이 독안개나 혹은 질병 마법이라 생각한 것이리라.

'병신들.'

칼은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이것은 단지 눈속임용 연막일 뿐 신체에는 어떠한 해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흑마법에 대해 모르는 놈들은 저것이 위험한 공격인 줄 알고 잔뜩 쫄아 있다.

'이러면 쉽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에 칼은 미소 지었다.

그때 정면에서 또 다른 추격자가 나타났다.

숫자는 하나. 심지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요즘엔 보기 드문 칼이었다.

"이 자식은 또 뭐야?"

한 놈이면 시약병을 쓸 필요도 없었다.

칼 잭슨이 뻗은 손끝에서 검은 마력이 모이더니 이윽고 화살로 변했다.

암흑마법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검은 화살]이었다.

위력이 높지는 않지만, 급소만 맞춘다면 저렇게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녀석의 숨통을 끊기에는 충분했다.

칼 잭슨은 추격자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추격자가 손에 쥔 검을 휘두르자 날아가던 검은 화살이 잘려나가 허공에 흩어진 것이다.

"뭣...."

지금 뭘 한 거지? 검으로 마법을 베어냈다고? 그게 가능한 일이기는 한가?

눈앞의 현실이 칼의 상식과 충돌을 일으켰다.

검으로 마법을 없앴다는 사실 이전에, 애초에 흑마법사를 상대로 칼을 들고 설치는 바보가 지금 시대에 있을 리 없었다.

"다른 마법 더 없나?"

흑발의 남자, 오시안은 칼 잭슨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암흑마법 계열의 기초 마법, 검은 화살. 위력도 정확도도 형편없군. 설마 흑마법사라는 자가 고작 이런 것밖에 쓰지 못하진 않을 텐데."

혹시라도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담긴 시선에 칼이 이를 악물었다.

칼은 곧바로 품 안에서 황동색 금속으로 이루어진 구슬 같은 것을 꺼냈다.

"오냐, 네가 원한다고 하니 보여 주마!"

칼이 금속 구체를 오시안을 향해 집어 던졌다.

끼리릭.

날아가던 금속 구체의 기계태엽이 돌아가더니 이윽고 반으로 분리됐다.

그 순간 금속 구체의 안에 있던 마법이 발동됐다.

푸화악──!!

3성 저주마법 [부패폭발].

진한 보라색 폭발이 일어나며 오시안과 함께 골목길 일대를 집어삼켰다.

폭발의 위력만으로 얇은 철은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고, 폭발 이후엔 부패를 걸어서 숨통을 끊는 흑마법이었다.

'고작 저런 녀석에게 쓸 캡슐은 아니었는데.'

나중에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한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쫓기는 입장에선 지금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보라색 연기.

이제는 끝났으리라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화악!

거센 풍압과 함께 연기가 반으로 갈라지며 멀쩡한 오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칼이 눈을 부릅떴다.

*

"방금 그건 뭐였지?"

오시안은 칼이 집어던진 물건을 떠올리며 물었다.

칼이 처음에 사용한 검은 화살은 분명 마법이 맞았다.

하지만 이후에 집어 던진 것은 아무리 봐도 마법이 아니었다.

독특하게 생긴 금속 구체.

그런데 그것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커다란 위력의 마법이 발동했다.

당연히 게임 내에서는 없던 물건이다.

'집어 던지는 순간 마법이 발동하는 걸 보면 아마 마법을 저장했다가 발동하는 형식인가?'

효과만 놓고 보면 그 귀하다는 [스크롤]과 흡사하다.

하지만 스크롤은 기본적으로 귀한 만큼 가격이 매우 비쌌다.

아무리 다급하다 해도 이런 곳에서 가볍게 사용할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도 흑마법사가 말이다.

"고작 그게 전부는 아니리라 믿는다. 다른 것이 더 있으면 보여 봐라."

"으아아아!"

칼이 비명을 내지르며 품 안에 비축해 두던 금속 구체를 던졌다.

또 그거다.

오시안은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빤히 응시했다.

정신을 집중하자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오시안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금속 구체가 어떤 방식으로 발동하는지 눈으로 보았다.

던져진 금속은 이전과 같이 허공에서 태엽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반으로 갈라졌다.

안쪽에는 고체와 액체 사이의 투명한 젤리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미약한 빛을 내뿜는 순간, 총 3개의 내장된 마법이 발동됐다.

단단한 뼈로 이루어져 적을 꿰뚫는 [골격창].

새까만 연기로 적을 뒤덮어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검은 안개].

닿는 순간 강철도 부식시키는 [붉은 늪].

방금 전 보였던 3성 마법보다는 낮은 2성 마법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 충분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

'다 아는 마법들이네.'

뭔가 새로운 마법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익숙한 마법이 나오자 오시안은 살짝 실망했다.

"이건 못 막을 거다!"

칼이 호기롭게 외쳤다.

오시안은 그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날아오는 마법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쩌억!

가장 먼저 날아오던 뼈의 창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좌우로 흩어졌다.

휘둘렀던 검을 역수로 쥔 뒤 다시 반대로 휘둘렀다.

오시안을 집어삼키려던 검은 안개가 칼날에 찢겨 흩어졌다.

지면에 깔리던 붉은 늪이 오시안의 발목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지면을 가볍게 박차는 것으로 붉은 늪을 뛰어넘었다.

오시안은 허공을 훌훌 날아 칼의 앞에 착지했다.

"이게 끝이 아니어야 할 거다"

더 보여 줄 거 없나? 이런 스크롤 같은 거 말고 본인의 마법 말이야.

그러나 이쪽을 경악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칼 잭슨은, 이 이상으로 뭘 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이거 맞아?

흑마법사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된다고?

이상한 일이다.

'내가 알기론 아무리 조무래기 흑마법사여도 최소 3성 이상의 실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아무리 봐도 눈앞의 녀석은 그런 조무래기조차 되지 못해 보였다.

"쯧. 어쩔 수 없군."

"잠...!"

칼이 뭐라고 외치기도 전에 오시안의 주먹이 녀석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칼이 입가에 침을 흘리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흑마법사치고는 너무나도 허무한 최후였다.

'요즘 시대 흑마법사들은 원래 다 이렇게 약한가?'

게임 속에서 싸웠던 흑마법사들은 정말 말이 안 되게 강했다.

제대로 된 방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엄청난 권능을 발휘한 놈들이다.

지금처럼 발달한 시대라면, 최소한 그때보다 더 강해져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건 오시안의 착각이었다.

과거 흑마법사들이라고 전부 강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강한 흑마법사들만 살아남았을 뿐.

필요한 물건과 시체는 본인이 직접 공수했으며, 기사단과 신성교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사소한 일조차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런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은 실력이 있는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최소 5성 이상의 흑마법사들.

그런 녀석들조차 다회차부터는 가지고 놀던 오시안에게 칼 잭슨은 흑마법사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뭐가 됐든 큰 문제 없이 흑마법사를 사로잡았으니 의뢰 자체는 성공적으로 해결한 셈인가.'

그때 오시안의 시선이 한쪽 골목길을 향했다.

부러진 널빤지가 가득하고 녹슨 파이프가 즐비한 골목길의 중심.

은근한 수증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오시안의 날카로운 안력은 그 수증기마저 꿰뚫었다.

그곳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서 있었다.

흑마법사.

그것도 쓰러진 칼 잭슨과 달리 제대로 된 녀석이었다.

불청객 흑마법사는 한 손에 커다란 스태프 지팡이를 쥐고 얼굴에는 염소의 뼈로 이루어진 가면을 쓰고 있었다.

체구가 꽤 작았는데, 어차피 체급으로 싸우는 놈들은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흑마법사는 오시안의 질문에 스태프를 들어 칼 잭슨을 가리켰다.

"칼 잭슨을 데리러 왔습니다."

뼈 가면 안에서 웅웅거리며 울리는 목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오시안이 그 모습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쪽은 아무리 봐도 의뢰주인 회사 소속이 아닌 것 같다만."

"...."

"그럼 안 되겠군. 이 녀석은 내가 먼저 잡았다. 그러니 이만 물러나도록."

흑마법사가 뼈 가면 안에서 오시안을 빤히 응시했다.

무슨 마법적 처리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새까맣게 뚫린 동공 안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는 흑마법사 노동조합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칼 잭슨은 저희 노동조합의 신뢰에 먹칠을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거절하지."

"그쪽이 해결사라면, 저희 노동조합 측에서는 그에 합당한 사례비를 지급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거라면 서로에게도...."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거 같군."

오시안은 흑마법사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내가 먼저 잡았으니 너희들이 나설 일은 없다. 그러니 썩 꺼져라. 더러운 흑마법사."

오시안의 언행이 날이 서며 날카로워졌다.

어쩔 수 없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세상이 흑마법사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방랑기사인 오시안의 육신은 그들을 거부했다.

머리로는 흑마법사가 대접을 받는다는 걸 알아도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시안에겐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미 검을 뽑았을 테니까.

게다가 돈을 지불해 준다 해도 이미 받은 의뢰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해결사는 돈도 중요하지만 신뢰가 바탕이 되는 직업이다.

더 큰 돈에 마음을 바꿔먹으면, 누구도 의뢰를 넣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시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흑마법사는 고집을 굽히지 않고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칼 잭슨은 저희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뻔뻔한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오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데려갈 생각이지?"

"불가피한 무력을 동원할 생각입니다."

"그래? 그럼 해 봐."

그 말과 동시에.

파아앗!

흑마법사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검은 손이 되어 뻗어졌다.

처음에는 짜증의 감정을 품었던 오시안은, 의외라는 듯 눈을 빛냈다.

지금 흑마법사가 사용한 것은 3성급 암흑마법인 [그림자 손길]이었다.

그것을 준비 과정도 없이 곧바로 발동하다니.

그림자 손길의 숫자는 총 5개.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악귀의 손은 오시안을 피해, 뒤에 쓰러져 있는 칼 잭슨을 붙잡으려 들었다.

오시안과 싸울 생각보다는 일단 칼 잭슨을 회수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한 것이다.

검은 손아귀가 칼 잭슨에게 닿으려는 순간.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보군,"

오시안의 검이 움직였다.

파앗!

허공에서 빛이 몇 번 번쩍이더니, 그림자의 손이 잘려나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야말로 눈 깜짝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흑마법사는 오시안을 빤히 응시했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가면 속 고요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파문이 일었다.

21화. 블라섬 티어 (1)

'이게 되네.'

나는 내가 하고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칼질 몇 번으로 마법을 베어 버리다니.

'아니. 이미 칼 잭슨이 사용한 마법을 베기는 했는데.'

그거야 [골격창]은 뼈니까 잘라낸 거고, 매연 같은 건 검풍으로 가른 거니까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림자를 칼로 자르다니?

물론 진짜 그림자는 아니고, 흑마력으로 이루어진 마법일 뿐이지만.

칼질로 이게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원래 인게임 PVP에서는 이런 게 불가능했는데.'

기본적으로 게임은 1인용 RPG지만, 다른 유저들의 세계에 들어가거나 혹은 그 유저를 내 세계에 부르는 온라인 모드는 가능했다.

만나면? 당연히 서로 채팅으로 수다를 떨거나 함께 던전을 돈다.

하지만 역시 제일 많이 하는 것은 역시 플레이어들끼리의 대결, 즉 PVP(Player Versus Player)다.

나는 이 게임의 고인물답게 PVP에서도 높은 순위를 자랑했다.

방랑기사 PVP랭킹 1위.

딱히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나보다 더 잘하는 놈은 못 만나봤다.

'PVP도 엄청 했었지.'

그것도 꽤 즐거운 추억이었다.

문제는, 나중에 소문이 퍼진 건지 초대를 해도 아무도 내 세계에 오지 않았다는 거려나.

그래서 남의 세계에 멋대로 쳐들어가서 다 썰어버리기도 했다.

억지로 들어가는 경우에는 꽤 많은 패널티를 짊어져야 하는데, 나는 그 패널티를 짊어지고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재미없어서 오래 안 하고 그만뒀지만.'

아무튼 PVP에서 마법사를 상대할 때, 기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2개뿐이었다.

막거나 피하거나.

막는 것도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마법은 방패로 막아도 체력은 깎인다. 게임 수치상 저항률 100%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마법사를 상대로는 열심히 움직여서 공격을 피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 새로운 방법이 가능해졌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 했던가.'

그거 마음에 든다.

나는 눈앞의 흑마법사를 향해 칼끝을 까닥였다.

*

오시안의 도발에 흑마법사가 반응했다.

무미건조하던 그 목소리에 조금은 힘이 들어갔다.

"...제대로 가겠습니다."

흑마법사가 손에 쥔 스태프를 들어 올리더니 이윽고 바닥을 쿵 찍었다.

촤르륵!

방금 전과 같이 흑마법사의 그림자에서 손이 튀어나오더니 오시안을 향해 덮쳐들었다.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우며 다가오는 그림자의 손길은 얼핏 밀려오는 파도 같았지만.

'예상 범주 내야.'

오시안에겐 별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시안은 다가올 그림자의 손을 향해 검을 휘두를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타이밍 맞춰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그림자의 손이 변화를 보였다.

푸확─!!

거대한 손이 2개로 갈라졌다.

'늘어났다?'

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개로 갈라진 그림자의 손은 4개로. 4개는 다시 8개로.

그림자는 분열한 만큼 크기는 작아졌지만, 그 숫자는 눈대중으로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다.

마치 풀어놓은 실타래처럼 퍼진 그림자가 오시안의 주위를 에워쌌다.

흑마법사는 일부러 검의 사거리에 도달하기 전에 타이밍을 맞춰서 손을 분열시켰다.

그 찰나의 순간 오시안의 검의 사거리, 그 속도를 분석한 것이다.

그림자가 이윽고 거미줄처럼 오시안과 칼 잭슨을 뒤덮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동그랗게 감싸며 고치의 형태로 묶기까지 했다.

흑마법사는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고치를 손대지 않고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

잠시 뒤 저 고치 안에서 기절했을 해결사를 내버려둔 뒤 칼 잭슨을 회수하면 임무는 그걸로 끝.

흑마법사는 그림자로 뒤덮인 고치를 향해 다가갔다.

직후 흑마법사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머리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

스스로가 생각해도 의아한 일이었지만, 직후 벌어진 일을 생각하면 그 행동은 정답이었다.

쩍! 검은 고치가 쪼갠 장작마냥 세로로 갈라졌다.

그 안에서 멀쩡하게 서 있는 오시안을 보며 흑마법사가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어떻게?"

닿기만 해도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패닉에 빠뜨리는 공격인데, 거기에 갇히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정신력이 보통 강인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오시안은 정신력을 수치상으로 99까지 최대로 찍었기에, 이런 공격에는 거의 면역에 가까웠다.

콰앙!

오시안의 상체가 살짝 숙여지더니 그의 몸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그의 신형이 사라진 직후,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땅이 쿵 울리며 먼지 구름이 치솟았다.

초월적인 각력은 둘 사이의 거리를 찰나에 좁혔다.

오시안이 검이 번뜩이며 수평으로 휘둘러졌다.

흑마법사는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대응을 하지 못했다.

이겼다.

오시안이 그렇게 확신을 한 순간이었다.

카앙!

'음?'

검이 무언가에 막히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흑마법사가 쓰고 있는 염소 뼈 가면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어 마법진? 단순한 가면이 아니라 아티팩트였나?'

가면의 뻥 뚫린 동공을 통해 안쪽이 안 보인다 싶어서 무언가 마법적인 처리를 했다고 생각은 했다.

설마 거기에 더해 방어마법까지 새겨놓았을 줄이야.

힘을 빼서 휘둘렀다 해도 이 초인적인 신체능력을 감안하면 막아낸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흑마법사는 그 타이밍에 재차 마법을 발동시키려 했다.

이쪽이 빈틈을 보였으니 그것을 비집을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오시안은 그 뻔히 보이는 속내에 당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시안은 밀려나려는 검에 힘을 줬다. 카가가각! 마법진과 검날이 마찰하더니 이내 마법진을 베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칼날이 뼈 가면까지 닿았다.

서걱─.

반 토막 난 마법진과 함께 뼈 가면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얕았다.

가면만 잘라냈을 뿐 흑마법사는 아직 멀쩡했다.

휘둘렀던 검을 회수한 뒤 다시 내지르려는 순간 오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멈추고 말았다.

뼈 가면이 잘려나가며 안에 있던 흑마법사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가면 안의 흑마법사는 여자였다.

인형 같은 외모에 은발을 지닌 그녀는 귀족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귀티가 났다.

체구가 작아서 늙어빠진 노인네라고 생각했던 오시안에겐 꽤나 큰 충격이었다.

'아니 요즘 시대는 이런 꼬맹이가 흑마법을 배운다고?'

오시안은 자신이 보았던 흑마법사들을 떠올렸다.

게임 속에서 흑마법사들은 으레 음침하고 기괴하게 생긴 녀석들만 가득했다.

개중에는 여자 흑마법사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 경우도 뭐라 해야 할까, 딱 봐도 흑마법사 하게 생겼다.

무슨 의미냐면 끔찍할 정도로 못생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기절한 소녀는 아무리 나쁘게 보려 해도 흑마법사답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직업 차별이겠지만, 눈앞의 흑마법사는 오시안의 관상학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존재였다.

'보통 게임에서 이 정도 외모의 NPC였으면 스토리상 무조건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오시안의 검에 찰나의 망설임을 주었다.

"정지! 멈춰!"

그때 골목길 너머에서 황급히 달려온 로레인이 오시안을 향해 외쳤다.

로레인은 오시안이 검을 휘두르기 직전인 모습을 보며 거의 영혼이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다.

저 사람. 흑마법사 노동조합 출신 아닌가? 아무리 업무상 충돌한다 해서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자였다.

"운이 좋았군."

오시안은 흥이 식었다는 듯 허리춤에 검을 꽂아 넣었다.

상대도 딱히 이쪽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옛날에는 흑마법사라 하면 그냥 죽여도 됐는데.'

사실 지금도 그의 몸은 검을 휘두르고 싶어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흑마법사라는 이름이, 그의 육신에 깊게 각인된 [기사도]를 건드리고 있어서였다.

다만 오시안의 이성은 현대인의 것이었기에, 상대가 흑마법사라 해서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하려 하진 않았다.

"후우. 흑마법사는 안 건드린 거 맞지?"

"보다시피. 그보다 왜 이렇게 늦은 거지?"

오시안이 로레인을 힐책하듯 물었다.

로레인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늦기는 무슨. 이쪽은 쉬지도 않고 발에 땀 나도록 뛰었는데 뭐가 늦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따지려던 로레인은, 이미 쓰러져서 기절한 칼 잭슨을 발견하고는 입을 합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잡았네?"

"그럼 가짜로 잡는 경우도 있나?"

"게다가 저기 쓰러져 있는 저 흑마법사...."

로레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아는 사이인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아는 얼굴이야."

"꽤 유명한가 보군."

"유명? 그런 수준이 아니야. 엘리제 데나로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흑마법의 천재야."

"흑마법의 천재?"

"젊은 나이에 벌써 4성급 흑마법사이면서, 흑마법사 아카데미의 수석이기도 하다고!"

"잠깐. 흑마법사 아카데미라니?"

오시안이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었다는 듯 물었다.

"흑마법사 아카데미는 당연히 흑마법을 가르치는 대학교지. [칼리고 비블리오]라고 못 들어봤어? 엄청 유명하잖아."

"...혹시 여기 갱단 아카데미 같은 곳도 있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어? 뭐 깡패 육성이라도 하게?"

흑마법사 아카데미를 들은 내 기분이 지금 딱 그러거든.

오시안 갈 곳 잃은 그의 시선은 엘리제라는 흑마법사를 향했다.

어느새 깨어난 엘리제는 멀뚱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로레인도 그 투명한 시선을 느꼈는지, 오시안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괜찮은 거 맞지? 혹시 다치게 했다거나 한 거 아니고?'

'칼을 휘둘렀는데 가면이 잘 막아 줬으니 다친 곳은 없겠지.'

'뭐? 이 미친...!'

로레인은 화를 내려다 생각에 잠겼다.

'아니 4성급 흑마법사를 어떻게 이긴 거야?'

아무리 뮤턴트라 해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상태를 보아하니 오시안이 기습을 가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바닥에 쓰러진 칼 잭슨과, 주위에 새겨진 흑마법의 흔적까지.

이미 한 바탕 전투를 겪은 것이 맞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온 녀석이야?'

로레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오시안을 응시할 때였다.

골목길 한쪽이 어수선해지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가 떡 벌어진 덩치들에, 전부 상당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오시안과 로레인은 그들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 저놈들. 일 다 끝나니까 모습 드러내는 거 봐라."

로레인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블라섬 티어 회사에서 나온 사람들 중, 대표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해결사인가?"

고압적인 말투와 이쪽을 깔보는 듯한 시선.

이쪽을 아래로 본다는 걸 전혀 숨길 생각이 없었다.

로레인은 살짝 욱했지만 참았다. 오시안이 가만히 있어서였다.

"해결사 되냐고 물었다."

"그렇다."

일단 이번 임무를 수주한 것이 자신이었기에 오시안이 그렇다고 답했다.

기업에서 나온 팀장은 오시안을 보며 '이 자식은 뭐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쪽에 숙이지는 못할망정 당당하게 반말로 나서니 적잖게 당황한 것이다.

그의 시선이 오시안의 모습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스윽 훑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운이 좋았나?'

오시안의 복장은 아무리 봐도 흑마법사와 싸우기 적합하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죽바지에 와이셔츠, 그리고 조끼를 걸쳤을 뿐이다.

화살받이로 영입한 해결사가 설마 도망친 칼 잭슨을 사로잡다니.

'칼 잭슨은 3성급 흑마법을 담은 캡슐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 팀만으로는 무리라 판단했는데.'

그렇기에 회사 측에서는 캡슐을 대신해서 '소모'시켜 줄 해결사를 먼저 보낸 거였는데.

그 해결사가 덜컥 의뢰를 성공해 버렸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판단한 팀장이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칼 잭슨은 이만 우리가 데려가도록 하지. 보수는 곧바로 중개인을 통해 보내겠다."

팀장의 뒤에서 부하들이 기절한 칼 잭슨을 데려가려 했다.

오시안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말이다.

"뭐지?"

팀장이 이게 무슨 짓이냐며 오시안을 노려봤다.

오시안은 그런 팀장을 향해 말했다.

"우리 아직 계산해야 할 게 남아 있지 않았던가?"

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22화. 블라섬 티어 (2)

"일은 끝났다."

"일은 끝났지. 아직 미처 계산하지 못한 것이 남아있을 뿐이다. 가령, 갑자기 누가 경보를 울려서 칼 잭슨을 도망치게 만들었다거나."

그 말에 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오시안은 지금 블라섬 티어 사람들 때문에 일이 더 커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네크로맨시로 부리는 쥐를 잘못 건드린 것은 블라섬 티어에서 보낸 팀원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칼 잭슨은 꼬리가 붙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주를 선택했다.

다만 팀장은 굳이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기에 모르쇠로 잡아뗐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야. 들켰다면 그쪽이 들킨 거겠지."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고작 해결사 따위가 뭐 어쩔 거냐는 협박성 어린 눈빛이었다.

오시안은 그런 팀장의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팀장의 이마에 미약한 힘줄이 돋아났다.

'하청이나 받아먹는 해결사 새끼가....'

의뢰 하나 성공했다고 기고만장하다니.

블라섬 티어 경비들로부터 적대감이 흘러나왔다.

오시안은 그런 적의를 대면하면서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골목길 한쪽을 가리켰다.

"진짜 중요한 건 저쪽이다."

오시안이 가리킨 방향에는 흑마법사 소녀가 있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렸는지 반개한 눈은 상당히 멍해 보였다.

"흑마법사 조합에서 나왔다던데, 내가 사로잡은 칼 잭슨을 멋대로 데려가려고 하더군."

"뭐...?"

"이건 의뢰서에는 없던 일 아닌가? 갑자기 다른 흑마법사가 끼어들어서 목표를 탈취하려 하다니. 나는 칼 잭슨만 잡으면 되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

팀장의 얼굴이 구겨지자 로레인이 나섰다.

"의뢰에서 정보 누락은 명백히 그쪽의 과실이야. 그것까지 잡아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걸?"

"...로레인 폰크."

팀장이 로레인을 알아보고는 그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해결사를 얕보는 감정이 아닌, 약간의 떨떠름함과 더불어 미약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오시안은 그 모습에 의외라는 시선으로 로레인을 돌아봤다.

마냥 선배 취급만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름이 있었나 보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로레인도 약간 뿌듯하게 어깨를 세웠다.

봤지?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녀는 행동으로 그렇게 말했다. 물론 동시에 오시안을 지원해 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니면 여기서 누가 잘하고 못했는지 따지자고? 그러면 우리도 조합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데."

"그건...."

중개조합까지 이야기가 들어가면 곤란해지는 것은 당연히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숙이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팀장이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대기 중이던 팀원 중 하나가 외쳤다.

"고작 해결사 나부랭이가 어딜 건방지게!"

"뭐? 해결사 나부랭이?"

로레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방금 전 말을 한 회사 경비를 노려보았다.

경비는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오히려 젊었기에 혈기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기업에 들어온 것에 뿌듯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해결사를 아니꼽게 보고 있었다.

로레인이 그런 경비를 비웃었다.

"그래. 꼭 있지. 이렇게 실력의 차이도 모르는 채로 까부는 멍청이들이. 보통 그런 녀석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로레인은 손가락을 들어 올려 총의 형태를 취하고 상대방의 미간을 겨누었다.

"대가리에 구멍이 뚫리는 거야. 그러면 바람도 잘 통하고, 생각할 거리도 줄어서 좋아질걸?"

그 노골적인 도발에 블라섬 티어 경비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팀장이 분을 삭이며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보수를 다시 책정해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의뢰는 끝났다. 이제 와서 조건을 바꾸는 것이 가당키나 할 거 같나?"

"그거야 너희들이 제대로 의뢰를 줬을 때야 그렇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그쪽에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이쪽도 어쩔 수 없겠네."

"무슨 말이지."

"저기 저 아가씨 보이지? 아까 말했잖아. 흑마법사 노동조합에서 파견됐다고."

팀장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설마...."

"조건 안 받아들이면 저쪽 아가씨한테 칼 잭슨을 넘기지 뭐."

"지금 의뢰를 취소하겠다고? 중도에 취소할 거면 위약금이 얼마인지는 아나?"

"저쪽도 칼 잭슨을 원하는 거 같은데, 보수는 그쪽보다 더 잘 쳐 주지 않겠어? 이쪽이 내야 할 위약금까지 얹어 줘서 말이야."

"...."

팀장이 한층 무서워진 표정으로 로레인을 노려봤다.

허리춤을 향한 그의 손이 조금이지만 움찔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총을 뽑아 쏘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그만."

그때 자연스럽게 오시안이 로레인과 팀장의 사이에 섰다.

그는 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지, 무표정한 얼굴로 팀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거기서 뽑으면, 그때는 봐주지 않는다."

팀장은 오시안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업에 정식으로 고용된 입장에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해결사가 이쪽과 맞먹으려든다는 사실에 짜증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으며 총을 뽑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팀장은 총을 뽑지 못했다.

마치 손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지? 왜 이래?'

그는 자신의 본능이 이상할 정도로 경고를 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때 옆에서 사태를 파악하던 부하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작게 귓속말을 전했다.

"저, 팀장님. 저기 저 흑마법사 아가씨. 그 사람입니다."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는데.

팀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렸다.

"야 이 새끼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사람이 누구인데."

"그, 있잖습니까. 흑마법사 노동조합에서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천재요."

"설마 엘리제 데나로바?"

"예. 아무래도 그 엘리제가 맞는 거 같습니다."

팀장의 시선이 다시 골목길에 서 있는 흑마법사를 향했다.

인형 같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갑게 보이는 은발.

분명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엘리제 데나로바의 인적사항과 똑같았다.

'이런 미친. 저 여자가 왜 여기에?'

젊은 나이에 4성급 흑마법사가 된 천재가 고작 칼 잭슨 따위를 잡으러 이런 곳까지 왔단 말인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엘리제가 직접 나섰을 정도면, 흑마법사 노동조합은 칼 잭슨의 포획에 진심이라는 말이었다.

이대로라면 칼 잭슨을 흑마법사 측에 빼앗기고 만다.

다급해진 팀장의 표정을 보는 순간, 로레인은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조건을 말했어. 선택은 그쪽이 하는 거지."

"그...."

"받아들일 거야? 아니면 거절할 거야? 거절하면 나는 저쪽이랑 이야기하고."

팀장은 이 이상 따져 봤자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도망친 칼 잭슨이 흑마법사 노동조합에 넘어가게 된다면?

'차라리 조금 겁을 줘서 협박을 할 수 있다면 모를까.'

반응을 보면 오시안은 저 엘리제 데나로바와 교전을 벌였고 승리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강자라는 소리였다.

팀장은 고민 끝에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제 선에서 멋대로 사안을 결정지을 수 없으니 본사에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지.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 줬으면 좋겠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부하들에게 어서 회사에 연락을 하라고 시켰다.

로레인은 그 모습을 보며 다행이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다 된 건가?"

"아? 좀 기다려야 해. 저쪽에서 확답을 줘야 하니까. 물론 돌아가는 꼴을 보면 우리 조건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겠지만 말이야."

"의외로군. 영락없이 싸울 줄 알았는데."

"어지간하면 싸우지 않는 게 좋지. 물론 저쪽이 억지를 부린다면 나도 피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해결사들은 어딜 가서도 얕잡아 보이면 안 되기에, 강하게 나설 필요가 있다고 로레인이 충고했다.

그것에 묘한 감상을 느끼고 있을 때, 오시안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엘리제 데나로바였다.

"뭐냐. 아직도 안 간 건가?"

이쪽을 말없이 응시하는 엘리제를 보며 오시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로레인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오시안은 방금 전 그녀의 목을 그대로 쳐냈을 것이다.

직접 마주한 본인도 자신이 죽을 뻔한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제는 오시안에게 다가왔다.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오시안을 향한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앞섰기 때문이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뭐?"

"이름."

짧게 말하는 엘리제를 보며 오시안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뜬금없이 이름을 묻다니.

그런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레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엘리제 데나로바가 말을 걸고 이름을 물어보다니?

로레인은 엘리제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지는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감정이 결여된 천재 흑마법사.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대화조차 섞지 않는 밀랍인형.

그런 엘리제가 오시안에게 먼저 이름을 물어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오시안의 반응이었다.

"알베르트."

"...?"

"내 이름. 알베르트다."

"알베르트...."

엘리제는 그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가면서 오시안이 토막 낸 뼈 가면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레인이 그 광경을 어처구니없게 지켜보다가 엘리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오시안에게 물었다.

"왜 본명을 알려주지 않은 거야?"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군. 왜 알려줘야 하지?"

"뭐? 왜냐니. 당연히 저런 흑마법사와 친분을 만든다면, 두고두고 도움이 되니까 그러지!"

그런 로레인의 말에 오시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필요 없다. 기사가 어찌 더러운 흑마법사 따위와 함께 지내야 한다는 말이지?"

"아니...."

원래도 미친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알고 보니 더 미친놈이었다!

'아니, 그보다 기사 컨셉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지키는 거였어?'

로레인이 한차례 심호흡을 한 뒤 물었다.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알려줘도 됐잖아."

"저런 흑마법사가 내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하나다. 분명 내 몸을 노리고 있는 거겠지."

"...더욱 이해가 안 가는데. 몸을 왜 노려?"

"나를 죽여서 자신의 종복으로 삼으려는 거겠지. 뻔한 거 아니겠나."

그거 완전 피해망상 아니야?

로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실패했습니다."

엘리제는 휴대용 통신기에다 대고 조합측에 연락을 취했다.

[...의외로군. 우수한 자네라면 성공할 줄 알았는데.]

"능력 있는 해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한발 늦었다니, 어쩔 수 없군.]

엘리제는 사실 늦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해결사와의 싸움에서 패배했지만.

통신기 너머 상대방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자기 멋대로 어림짐작으로 넘겨버렸다.

그만큼 엘리제의 실력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만 돌아오게.]

"네."

엘리제는 통신을 끊었다.

"...알베르트."

그녀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옮기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녀는 방금 전 오시안이 보여 준 움직임을 떠올렸다.

검을 휘두를 때, 코트 위로 도드라진 그의 선명한 근골의 형태까지.

시체를 만져 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육체보다도 극상의 육체라는 걸.

엘리제의 뺨에 미약하지만 홍조가 돋았다.

'그라면 분명 훌륭한 스켈레톤이 되어 줄 수 있을 거야.'

23화. 아득한 밤하늘 (1)

오시안과 로레인은 성공적으로 의뢰를 마치고 바이올렛 폭스로 돌아왔다.

이쪽을 반겨주는 로난에게, 로레인은 방금 전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블라섬 티어의 방해로 인한 칼 잭슨의 도주.

그리고 엘리제 데나로바의 등장과 블라섬 티어와의 갈등까지.

"그랬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랄 것이 있나. 나는 한 게 아무것도 없어. 이 녀석이 거의 다 했지."

로레인이 오시안을 턱짓하자 오시안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별거 아니었다."

허세나 겸양이 아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는 대답.

로레인은 '그렇다는데?'하는 시선으로 로난을 바라봤다.

로난은 이런, 하고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블라섬 티어에서 정보를 누락한 것은, 제가 협상을 통해서 보상을 확실히 뜯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쪽도 인정하고 넘겼으니, 아마 잘만 하면 기존 보수에서 2천 이상은 더 뜯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 정도인가?"

"물론 그 금액은 온전히 오시안 씨의 보수로 가게 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두 번째의 의뢰에서 이 정도로 버는 것은 이 업계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거든요."

오시안은 그 정도였나 싶은 일이었다.

애당초 칼 잭슨은 그가 기대한 바와 다르게 너무나도 나약한 상대였으니까.

'칼 잭슨이 위험하다기보다는, 그만큼 녀석이 가지고 도망친 기업 비밀의 값어치가 대단했다는 거려나.'

하지만 오시안의 흥미를 끄는 것은 분명히 있었다.

칼 잭슨이 도망치면서 사용한 소모성 물건의 존재였다.

그것에 대해서 물어보자 로난은 곧바로 답을 해줬다.

"캡슐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걸 캡슐이라 부르나?"

"예. 바깥에서 오셨다면 모를 수도 있습니다. 마법은 세월이 흐르면서 혁신적인 변화를 꾀했으니까요. 이제 마법은 더 편하고 더 빠르게 사용이 가능해졌죠."

"그 캡슐이라는 물건이 그걸 가능케 하는 거겠군."

"예. 에테르 워터를 고체화시킨 뒤 거기에 마법을 새겨 넣는 방식입니다. 금속 캡슐에 담아서 필요한 순간에 집어 던지기만 해도 마법을 펼칠 수 있죠."

굳이 따지자면 휴대가 더 용이해진 스크롤이라 볼 수 있었다.

스크롤을 하나 만드는 노력으로 캡슐은 10개를 넘게 만들 수 있었다.

스크롤은 또한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면 만들기 힘들다.

능력이 뛰어난 마법사도 제작시 실패할 가능성이 꽤 높았다.

하지만 캡슐은 그런 확률도 매우 낮았다.

마찬가지로 대량생산은 불가능하며, 이 또한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스크롤과 비교하면 세기의 발전이라 봐도 무방했다.

일반인도 이제 지니기만 하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

호기심 삼아 몇 개 정도는 챙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과연. 과학이 발전하니 별것들이 다 생기는군.'

캡슐의 존재는 오늘 들은 것 중에서 2번째로 놀라운 것이었다.

첫 번째?

당연히 흑마법사 아카데미가 아니겠는가.

'이제는 하다하다 흑마법사들이 양지로 올라와 떳떳하게 활동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가르치는 교육기관까지 있을 줄이야.'

비록 게임으로만 플레이 했던 세계였지만, 그만큼 그곳에 몰입했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을 여행하는 방랑기사가 됐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런 오시안에게 흑마법사가 받는 취급이 바뀐 것은, 시궁쥐가 사람이 된 것과 같은 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그보다 오시안 씨는 보수를 받으시면 무엇부터 하실 겁니까?"

"보수?"

"예. 이전에 받은 500만 르네를 포함해 앞으로 받을 7000만 르네는 절대로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물론 평생 먹고살 금액도 아니지만, 한순간 스쳐가듯 만지는 목돈치고는 매우 크죠."

"흠."

오시안도 그 부분은 동감했다.

돈을 벌었으니, 그에 따른 소비도 생각을 해야 할 판이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의식주를 고민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의도치 않은 여윳돈이 생긴 셈이었다.

오시안이 그런 고민을 하는 걸 눈치챈 로난이 대안을 꺼냈다.

"혹시 당장에 쓸 일이 여의치 않으시다면, 신분증부터 만드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신분증?"

"예. 그때 보셨을 겁니다. 40번대 구역으로 나가기 위해 제가 건네준 신분증을 말이죠."

"아. 그랬지."

티르나는 너무 거대한 도시다 보니 구역별로 그 수준의 천차만별로 갈렸다.

번호별로 구역이 나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구역을 오가는 곳에 위병의 통제가 존재했다.

특히 치안이 나빠지고 무법지대가 난무하는 40번대 통행구역은, 위병들이 가장 유심히 지켜보는 관문 중 하나였다.

"도시 내에서 신분증은 꽤 중요합니다. 티르나 도시민이라는 증표로 어딜 가서 무시 받지 않거든요. 그리고 좋은 신분증일수록, 도시의 구역을 돌아다니는 데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오시안은 위병이 검문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신분증은 통행증의 역할도 겸한다.

당연히 신분증이 좋으면 좋을수록, 어디를 가도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는 것이다.

오시안은 턱을 쓰다듬었다.

만일 그의 신분증이 좋은 것이었다면, 칼을 찬 것만으로 위병이 시비를 걸 일은 없으리라.

앞으로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입장에서 귀찮은 일을 피하려면 신분증은 필수였다.

"납득했다. 그렇다면 그 신분증은 어떻게 얻는 거지?"

"보통은 공무원들이 일하는 관공서에서 신청을 해야 합니다만. 그 일을 대행해주는 업체가 따로 있습니다. 티르나의 공무원들은 엉덩이가 무겁거든요."

이른바, 공무원 대신 신분증을 발급해 주는 하청이라는 말이었다.

불법은 아니었다.

티르나 시에서 공식적으로 허가를 한 일이었으니까.

"필요한 금액은 얼마나 되지?"

"신분증의 등급마다 다르지만, 당장에 불편함 없이 사용할 정도라면 5천만 이상은 생각하셔야 합니다."

"생각보다 엄청 비싸군. 본래 신분증을 만드는 데 그렇게 돈이 많이 드나?"

"예. 대신 등급이 높은 거라 한번 만들어 두면 두고두고 편할 겁니다. 25번 구역까지는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신분증이거든요."

25번대 구역까지 들어갈 수 있는 신분증이라니.

하지만 바꿔 말하면, 5천만이나 되는 돈으로도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산업혁명, 그리고 극단적인 자본주의. 참으로 대단한 사회가 됐어.'

아마 더 높은 구역으로 가고 싶다면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 거겠지.

오시안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나 만들겠다."

"예. 그렇다면 제가 좋은 곳으로 추천해드리겠습니다."

*

나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의뢰를 예상보다 빨리 끝냈지만, 신분증을 만들러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참 많은 일이 있었어.'

나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봤다.

거리에는 마차 대신 자동차가 새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감각을 곤두세우자 애써 외면했던 소리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 경적, 술에 취해 소리 지르는 주정뱅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노동자의 발걸음,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물, 시끄럽게 오락가락하는 기압계 계기판 소리까지.

고막까지 짜르르 울리는 소음이 이 주택을 넘어 더 넓게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며 고개를 흔들었다.

예리하게 곤두세운 감각이 다시금 무뎌지며 소음이 가라앉았다.

'조금만 더 감각을 곤두세웠다간 귀청이 떨어지겠어.'

방랑기사의 육체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예리했다.

나는 그밖에 다른 것을 더 확인해 보았다.

정신을 집중하자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전투의 시간]이 발동을 한 것이다.

하지만 진짜 전투가 아니라서 그런지 펼쳐지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일단 기본적인 태생이 가지고 있는 기본 스킬은 사용이 가능해.'

검을 휘두르는데 명중률과 치명타 보정이 붙는 [검의 의지].

방패로 막는 데미지 경감률이 증가하는 [방패효율 강화].

전투시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만드는 [전투의 시간].

정신지배와 환영, 매혹 등에 저항력을 대폭 올려주는 [흔들리지 않는 정신] 등등.

[검의 의지]와 [전투의 시간]만으로도 초반부에 해금되는 스킬들은 별 무리 없이 펼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본격적인 [전문 스킬]은 아직 사용할 수 없다.'

게임 속 스킬은 [기초 스킬]과 [전문 스킬]로 나뉜다.

[기초 스킬]의 경우에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특성이다.

하지만 보통 게임이 그렇듯, 대부분 직업들은 화려한 이팩트의 멋들어진 스킬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전문 스킬]이다.

직업별로 [전문 스킬]을 배우기 위해서는 레벨을 올려 특성을 해금해야 했다.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혹은 다른 직업 NPC에게 스킬을 가르침을 받거나 구매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나는 만렙 기사였으니, 모든 [전문 스킬]이 해금돼 있어야 하는데.'

스탯은 그대로 가져온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스킬의 해금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감을 못 잡은 걸지도 몰랐다.

게임으로는 그저 키보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스킬이 알아서 나갔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전투의 시간] 같은 기술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던 걸 감안하면.

사실상 해금이 되지 않았다는 쪽이 더 가능성 있었다.

그렇다면 해금에 조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조건이 무엇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레벨 업은...아니야. 이미 만렙을 찍은 캐릭터가 어떻게 더 레벨을 올리겠어.'

그렇다면 직업 퀘스트는 어떨까.

그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 방랑기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기사를 위한 퀘스트도 없다. 같은 기사 NPC로부터 스킬을 가르침 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이 정녕 없는가?

아니다.

마냥 단정 짓기에는 내 본능이 따로 속삭이고 있었다.

스킬을 해금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그게 뭔지 알아야 해.'

모든 태생들은 저마다 [특성]을 바탕으로 성장 루트가 갈린다.

흔히들 게임 용어로 테크 트리라고 한다.

당장 오늘 만났던 흑마법사만 해도 그렇다.

흑마법사는 사령술, 암흑마법, 저주와 부패 등 여러 테크가 나뉜다.

마법사도 원소마법의 계열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방랑기사에게도 이런 테크가 존재한다.

'전문 스킬만 해금할 수 있으면 앞으로의 일은 훨씬 더 편해질 거야.'

당장에는 주어진 신체능력만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지만 분명히 한계는 있다.

나는 내 힘에 자만하지 않는다.

계속 이 육체로만 먹고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내게는 이 세상에 떨어진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어.'

눈을 떠 보니 티르나라는 거대한 도시가 존재했다.

과연 그것이 우연일까?

어쩌면 이 도시의 깊은 곳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높은 신분 등급이 필요했고, 그것을 얻고자 하려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했다.

'가야 할 길이 멀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털썩 누웠다.

내일은 아침부터 신분증을 발급받아야 하니 일찍 자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고, 나른해진 정신은 곧바로 깊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이었다.

그렇게 어둡지 않은 남청색 도화지 위에, 다양한 색으로 반짝이는 점들이 총총히 찍혀 있다.

시원한 밤바람이 풀밭 위에 사라락 미끄러지며 내 뺨을 간질였다.

나는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은하수의 총청연한 색깔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금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천천히 걸었다.

입고 있는 옷은 잘 때 입은 평범한 셔츠와 면바지가 전부. 당연히 신발은 없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맨발에 닿는 풀의 감촉이 생경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걷다 보니 둔덕이 보였다. 나는 그 둔덕의 위에 올랐다.

고지대에 오르니 주변의 풍경이 더 잘 보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오로지 풀밭만으로 가득한 광활한 초원.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 그 끝에 맞닿는 것은, 거대하게 흐르는 은하수였다.

나는 별을 올려다보았고, 그 순간 별빛이 내게 속삭였다.

[인도자여.]

남자인 것 같기도, 여자인 것 같기도.

혹은 아이이거나 노인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목소리.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여. 세상의 쐐기여. 율법의 대적자여.]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 듯.

산골짜기의 등선을 울리는 메아리가 치듯.

그 목소리는 밀물처럼 내게 밀려와, 썰물처럼 떠내려갔다.

[그대. 업을 쌓아라.]

24화. 아득한 밤하늘 (2)

업을 쌓아라.

그 말이 내 마음속에 말뚝처럼 깊게 박혔다.

그 말이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정해 주는 것 같았다.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할 수 없었기에 대신 눈빛으로 물었다.

업을 쌓으면 어떻게 되느냐.

별빛은 침묵했다.

그 대신 내 뒤에서 하늘에 변화가 일었다.

오른쪽 하늘이 청아하고 써늘한 푸르스름한 색으로 물들었고.

왼쪽 하늘은 강렬하고 찬란한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별 하늘이 가득했던 그곳에 태양과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의 힘을 다룰 수 있으리.]

동시에 눈부신 천체의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잠에서 깬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머무는 방이었다.

창밖에는 어느덧 아침을 알리는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중이었다.

"거 참."

게임이 현실이 되니 이런 신기한 경험도 다 해 보네.

*

로난이 내게 추천해 준 곳은 티르나의 35번구였다.

35번구는 발명가, 기술자들이 가장 많이 있는 구역.

그래서인지 유독 거리에 신기한 물건들이 많이 보였다.

압축 증기를 시원하게 뿜어내는 증기 엔진, 태엽을 감으면 알아서 움직이는 자그마한 기계인형, 더 많은 압축 증기를 유통시킬 수 있는 합금 파이프,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태엽 등등.

깡! 깡!

몸에 기름때를 묻히며 한 손에는 스패너를 쥔 기술자들이 땀을 흘려가며 볼트와 너트를 조인다.

다른 한쪽에서는 만든 기계가 제대로 굴러가는지 검증을 하고 있었다.

거리는 철을 두들기는 소리, 똑바로 하라는 고함소리, 증기가 우렁차게 뿜어져 나오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무언가를 만들고, 고장 난 것을 고쳐주고.

노동자들이 가득한 공장과는 다르게 생기가, 그것을 넘어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곳이다.

나는 그 거리를 걷다가 나도 모르게 한쪽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리 한복판에서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웃통을 깐 채로 한쪽 팔을 수리공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그의 팔이 기계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기계 팔? 세상이 바뀌니 저런 것도 생기는군.'

수리공은 기계로 이루어진 팔을 돋보기로 살피며 미세하게 드라이버와 조립기로 조율하는 중이었다.

기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팔이 주먹을 쥐었다 펴고 있었다.

나는 그 팔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 정도로 정교한 기계 팔이라니. 지금 사람들은 팔이나 다리가 잘려도 평생 일 못 하면서 살지는 않겠네.'

나는 문득 기계 팔을 달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기계팔은 뭔가 로망이 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금 있는 이 몸이 가장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나는 통행증 역할을 하는 신분증을 만들려고 온 거지, 저런 걸 구경하기 위해 35번구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길이 엄청 복잡한데.'

약도를 건네받긴 했지만, 주변이 워낙 다양한 금속물품들이 많아서 길을 찾는 것이 힘들었다.

내가 그렇게 길치는 아닌데, 이 거리는 그걸 감안해도 너무 복잡했다.

일단 걸어 볼까 생각하는 그때였다.

콰직!

나무로 이루어진 의자가 나의 바로 앞에 날아와 박살이 났다.

만일 조금만 더 발을 내디뎠다면 직격 당했을 위치.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방금 전 의수를 조율하던 쪽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이 보였다.

"이 개 같은 새끼가. 지금 이 팔이 얼마짜리인 줄 알고! 흠집이 났잖아!"

의수의 남자는 자신의 기계 팔뚝에 새겨진 미세한 흠집을 가리키며 역정을 냈다.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팔뚝에 난 기스 말고도 그의 의수는 험하게 굴린 것인지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나 있었는데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본인도 그걸 모르진 않을 거다.

그럼에도 저렇게 뻔뻔하게 외치는 것을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됐고 수리비 내놔. 천만 르네. 그거면 넘어가줄 테니."

아. 수리비를 등쳐먹으려 하는 거였군.

쓰러진 기술자도 눈치가 없진 않았는지 눈을 부릅뜨며 기계팔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 양아치 자식이. 싸구려 의수를 기꺼이 고쳐줬더니 오히려 돈을 떼먹으려 들어?"

"뭐? 싸구려 의수? 이 땜장이 새끼가 돌았나."

괜히 찔린 것인지 의수를 착용한 남자는 기계팔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말을 듣지 않으니 기술자의 안면에 강철의 주먹을 꽂아 넣기 위해 팔을 내지르려는 순간이었다.

"길 좀 묻지."

나는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어 강철의 주먹을 한 팔로 붙들었다.

*

한 손으로는 내질러진 강철 의수를 가볍게 쥔 오시안은 의수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충분히 강하긴 하다. 아마 이 강도만으로 주먹을 내지르면 벽돌 정도는 쉽게 부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 기사의 육체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아니면 이 의수 자체가 약한 걸지도 모르고.'

오시안은 바닥에 쓰러진 기술자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 하비의 공방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하마터면 얼굴이 뭉개질 뻔한 기술자는 오시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눈을 크게 떴다.

강철 의수를 맨손으로 잡아?

아무리 싸구려 의수라 하지만 강철로 이루어진 군용의수는 그 파괴력이 남다르다.

살짝만 휘둘러도 사람 두개골을 부수는 것이 군용의수인데, 오시안은 그것을 맨손으로 잡아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히려 힘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바르르 떨리는 의수가 오시안의 손을 밀어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너, 너 뭐야. 이 씨발 이 새끼들이랑 한 패냐?"

팔을 붙잡힌 남성은 역으로 힘을 줘서 오시안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강철의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안 놔? 이 미친 새끼가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얼마짜리인지 내가 알아야 하나?"

오시안이 기계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끼기긱 소리와 함께 군용의수의 주먹이 우그러졌다.

"어, 어?"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리고 의수를 붙잡힌 남자도 눈을 크게 떴다.

맨손의 남자가 강철로 이루어진 의수를 종이마냥 구기고 있었다.

그것도 순수한 악력으로.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오시안이 힘을 준 손을 풀자 남자는 그제야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완전히 일그러진 강철 의수는 손이라는 형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압착기에 넣고 손 부분만 동그랗게 뭉쳐 놓은 것 같았다.

"히익!"

의수의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오시안은 그런 남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별 힘도 주지 않았는데 부서지는 걸 보니까 싸구려인가 보군. 다음에는 더 비싸고 튼튼한 걸로 맞추도록."

오시안의 시선이 닿자 의수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근처 공방에서 구경나온 기술자들이 그 모습을 한껏 비웃었고 동시에 오시안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오시안은 뭐 별일 했냐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쓰러진 기술자를 가볍게 일으켜 세웠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으셔도 됐는데."

오시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술자의 말대로 오시안이 굳이 나서서 도와준 것은 오지랖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시안에겐,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업을 쌓으라고 했었지.'

대체 그 업을 어떻게 쌓는 것인지 오시안은 아직도 모른다.

게임이었다면 경험치 정도로 해석하겠지만 이곳은 그러지 않았으니까.

다만 처음 며칠은 꾸지 않았던 꿈을 최근에 갑자기 꾸었다는 것.

오시안은 거기에 착안점을 두었다.

'칼 잭슨을 상대로 싸우고, 그 흑마법사 여자애랑도 싸웠지. 연관이 있다면 그쪽이겠고.'

업이라고 한다면 기사로서, 혹은 검을 쓰는 사람으로서 쌓아야 하는 일정의 업적일 수도 있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해봐서 나쁠 건 없었다.

그래서 위기에 빠진 기술자를 구해 준 것이다. 덤으로 의수를 지닌 잡범도 쫓아내고 말이다.

'뭔가 딱히 업이 쌓인다는 느낌은 없는데.'

상대가 너무 나약해서 업을 쌓을 정도는 아니라 이건가.

혹은 검을 뽑지 않아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뭐가 어찌 됐든, 몇 번의 시행착오는 이미 감안한 바였다.

"그래서 하비의 공방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예? 예."

기술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안내 좀 부탁하지. 여기 길을 영 모르겠거든."

맨손으로 의수를 우그러뜨린 남자가 한다는 말치고는 너무나도 소탈하다.

늙은 기술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예. 그럽죠."

*

하비의 공방까지 안내를 받은 오시안은 그 앞에 선 채 공방을 말없이 응시했다.

"흐음."

일단 찾아온 것까지는 좋은데, 하비의 공방은 이름과 다르게 공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잡화점에 가까워 보였다.

다른 곳은 셔터를 올리고 넓은 공간에서 사람 여럿이서 부대끼며 기계를 만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하지도 않고 열기도 없다.

오히려 이 근방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래도 로난이 추천을 해 준 곳이니 마냥 문제는 없을 거라 믿고 오시안은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못 보던 얼굴인데."

안쪽 가판대에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두 눈에는 이상하게 생긴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오시안이 물었다.

"그쪽이 하비인가?"

"어린놈이 어디서 반말이야? 그래. 내가 이 공방의 주인 하비다. 넌 또 뭐냐? 여긴 어떻게 왔어?"

"오시안. 로난이 추천해 줘서 왔다."

로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화를 내려던 노인이 못마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세 글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대체 로난은 이 노인에게 어떤 이미지이기에 반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

하비는 오시안의 모습을 훑다가 옆구리에 찬 검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옆구리에 찬 건 또 뭐야?"

"검이다. 혹시 처음 보나?"

"...내가 이 나이 먹고서 칼을 처음 봐서 물어본 거라 생각하는 거냐?"

하비는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로난이 보낸 놈에게 내가 괜한 말을. 그래. 뭐 여기까지 왔다면 뭘 원하는지는 알겠군. 신분증을 바라는 거겠지?"

"그래."

"얼마짜리로 생각하고 있지? 보나마나 신입 같은데, 당연히 300만짜리...."

"5천만."

5천만이라는 금액을 듣자 노인이 눈에 착용하고 있던 고글을 이마 위로 확 올렸다.

머리가 반 이상은 벗겨져서 어디까지 이마라고 할지 애매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 늙은이를 놀리면 못 쓰지."

하비의 불신 어린 목소리에 오시안은 굳이 설득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가판대 위에 가져온 돈을 턱 소리 나게 올렸다.

"어?"

하비는 척 봐도 적지 않은 돈의 금액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였군."

"이걸로 증명은 됐나?"

"이런 돈을 두고도 의심을 하면 그건 머저리지."

하비는 오시안에게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신청서야. 적도록 해."

"이런 건 없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싸구려나 그렇지. 5천만짜리면 필요한 거 몰라? 이 정도 급이면 공무원들도 눈여겨보는 거라고. 허투루 할 수 없어."

그것도 그렇군.

오시안은 납득하며 신청서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

하비는 직업 쪽에 [기사]라고 적는 오시안을 보며 이걸 말릴까 말까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괜히 따져서 귀찮게 될 바에는, 이쪽이 알아서 수정을 가하면 그만이었다.

"아무튼 대충 알았으니 3일 뒤에 찾으러 와."

하비는 그렇게 말하며 공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오시안은 밖으로 나왔다.

신분증과 관련된 일도 일단 끝냈겠다, 오시안은 35번구에 온 김에 더 많은 것을 구경해 볼 생각이었다.

"저, 저기 저 녀석입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거대한 덩치 하나가 오시안을 향해 위협하듯 말했다.

"너냐? 내 동생의 팔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게."

자연스럽게 덩치의 옆으로 향한 시선.

그곳엔 오시안에게 의수가 완전히 박살이 난 남자가 있었다.

25화. 부서진 주먹 (1)

"내 동생의 팔을 이렇게 만든 것이 너냐고 물었다."

덩치가 안 그래도 험상궂은 얼굴을 더욱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옆의 양아치도 한 인상 했지만, 이 녀석은 산적 두목이라 불릴 만할 정도의 얼굴을 자랑했다.

수염은 없었지만 두 갈래로 갈라진 엉덩이 턱에 구레나룻을 길게 길렀으며 근육도 상당히 비대하다.

그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오른쪽 어깨에 달린 커다란 팔이었다.

옆의 양아치도 의수를 달고 있었지만, 그것은 적어도 사람 팔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덩치의 팔은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이질적이었다.

'아주 대포를 달고 다니는군.'

손가락도 5개가 아니라 3개만 달렸으며 전선이 연결된 어깨에서는 실린더가 작동하며 조금씩 새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일상의 실용성을 포기한 대신 거대한 무언가를 부수기 위해 특화된 것 같은 디자인이다.

"저 인간. 피 주먹 프랭크 아니야?"

"공업용 골렘 팔을 개조해서 달았다더니 소문이 진짜였군."

공방 거리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저들끼리 조용히 떠들었다.

그때 프랭크가 오시안에게 재차 물었다.

"어이. 귓구멍 막혔어? 내 동생 팔 이렇게 만든 게 너냐고 물었잖아."

"그렇다."

오시안이 뻔뻔하게 대답하자 프랭크는 눈썹을 치켜떴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오시안이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온다는 사실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

"킁. 네가 내 동생의 팔을 이 꼴로 만들었으니 보상을 받아야겠다. 그건 꽤 액수가 클 거야."

프랭크는 자신의 거대한 기계팔로 동생의 망가진 의수를 가리켰다.

의도적으로 기계팔을 움직이는 행동에서 그가 자신의 힘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동생의 무너진 자존심은, 그쪽을 몇 번 어루만져주는 걸로 퉁 칠 생각이야."

프랭크가 오시안을 향해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진심으로 동생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닌, 가지고 놀 장난감이 생겨서 기뻐하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오시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불량품 팔이 멋대로 망가졌는데 내가 왜 물어줘야 하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프랭크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들어먹지 못할 거 같군. 어디 한 군데는 부러져야 정신을 차릴 생각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프랭크는 오시안이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부하에게 이야기를 전부 전해 들었으니까.

'맨손으로 군용 의수를 뭉개 버렸다고 했던가.'

아무리 부하가 쓰는 의수가 급이 떨어지는 양산품이라 해도 한때 군에서 사용하던 의수다.

중고에 구식이라 해도 내구력 하나는 튼튼한데 그걸 맨손으로 우그러뜨린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눈앞의 오시안은 최소한 신체능력이 철을 우그러뜨릴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완력이 높은 뮤턴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대가 뮤턴트라는 걸 깨닫게 되면 싸움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는 그러지 않았다.

'뮤턴트? 그 새끼들 중에 거들먹거리다 내 팔에 대가리가 박살 난 새끼들만 몇 명인데.'

그가 '피 주먹'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지금 착용하고 있는 공업용 기계팔로,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압착기로 찍어내듯 다진 고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프랭크의 입장에선 오시안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체구도 자신보다 작은데, 이런 녀석이 육체능력이 뛰어나봤자 얼마나 하냐는 것이었다.

그 순간 프랭크는 오시안의 허리춤에 달린 물건을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요즘 것들은 칼 같은 걸 들고 다니나?"

오시안이 허리춤에 찬 검은 특별한 개조를 거치지 않은 순수한 롱소드였다.

아무리 뮤턴트라 하지만 이런 물건을 들고 다니다니.

보통 정신머리로 할 짓은 아니었다.

턱.

프랭크가 손을 뻗으려는 그때 오시안이 프랭크의 기계 팔을 붙잡았다.

"그 손 치워라."

프랭크는 꽤 진중해진 오시안을 향해 노골적으로 도발했다.

"휘유~. 뒤진 애비가 선물을 해 준 거라도 되나? 아니면 뭐 특이하게 보이고 싶어서 컨셉이라도 지키려는 거?"

"이건 경고다. 여기서 더 선을 넘으면, 그땐 나도 봐주지 않겠다."

"크핫핫! 선을 넘어? 진짜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만나는군!"

프랭크는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기계 팔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오시안의 팔을 쳐내고 검을 강제로 빼앗을 생각이었다.

"뭐야?"

하지만 힘을 주었는데도 오시안의 손은 밀려나지 않고 버텼다.

"꼴에 힘은 좀 있다 이거냐? 그래. 그 정도 힘은 있으니 내 동생의 팔도 망가뜨릴 수 있던 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프랭크는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고작 한손에 가로막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팔, 다시는 못쓰게 만들어 주마!'

프랭크는 왼팔로 기계 팔의 어깨에 있는 다이얼을 돌려 출력을 2단계까지 올렸다.

2단계는 전투 시 사용하는 단계로, 이때 낼 수 있는 출력은 강철도 우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

뮤턴트라 해도 맨몸이라면 충분히 부수고도 남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오시안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 새끼가!"

프랭크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힘을 더욱 주었다.

치이이익!

그의 오른팔에 거센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실린더가 거칠게 펌프질을 했다.

뜨거운 열기와 강한 에너지를 머금은 프랭크의 팔이 오시안의 손을 뼈째로 분쇄하려고 했다.

주변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공방 직원들이 놀랐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꼼짝도 안 하잖아?"

당장이라도 프랭크의 팔이 오시안의 손을 박살내고, 그의 상반신을 그대로 찍어 누를 거라 생각한 사람들은 의외의 양상에 눈을 크게 떴다.

프랭크가 안간힘을 다해 밀어내고 있음에도 오시안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계 팔의 출력이 최대치인 3단계까지 올라갔다. 현재 프랭크가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이었다.

끼기기깅.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프랭크의 기계 팔이 과부하에 걸리기 시작했다.

프랭크는 무언가 일이 잘못됨을 느꼈다.

그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게 출력의 전부인가?"

그때 내뻗은 팔 너머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오시안의 눈빛을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는 듯.

프랭크를 향한 오시안의 표정은 오히려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프랭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이 개자식이!"

오시안의 팔을 밀어내는 걸 포기한 프랭크는 잠시 손을 뒤로 빼 주먹을 말아 쥐었다.

투박하기까지 한 팔이 주먹을 쥐자 숫제 거대하고 뭉툭한 파일 벙커를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이 팔이 공업용 착암기(鑿巖機)로 만들어졌음을 감안하면 마냥 틀린 말도 아니었다.

"죽어!"

프랭크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오시안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내질러지는 주먹을 따라 흘러나오는 수증기가 궤적을 그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경악했다.

대낮부터 거리에서 살인 사건이 터지기 직전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똑같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똑같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후 그들이 눈을 떴을 때,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내지른 오시안의 손은 멀쩡했고, 반대로 프랭크의 기계 팔이 완전히 박살이 난 것이다.

주먹의 크기 차이만 5배.

한쪽은 합금으로 이루어진 기계 팔이고 다른 한 쪽은 피륙으로 이루어진 맨손이었다.

그것이 부딪치게 된다면 누구나 같은 결과를 머릿속으로 떠올렸을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강화 개조한 물건이, 맨주먹에 부서져...?"

지켜보는 사람들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팔이 완전히 박살이 난 프랭크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어, 어어. 내 팔...."

오른쪽 어깨부터 느껴지던 묵직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 부분을 제외한 아래가 완전히 박살이 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낸 오시안은 내질렀던 주먹을 회수하며 작게 쥐었다 폈다.

'이 정도는 거뜬하군.'

육체능력이 강하다는 건 알았으나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 전력으로 움직인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힘을 줬다고 생각할 때는 지하 예배당에 탈출하기 위해 석문을 부순 것 정도.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힘을 준 건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지금.

오시안은 자신의 신체능력이 어디까지 먹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 반응을 보면 상당히 위험한 물건인 건 확실해 보이고.'

오시안은 바닥에 조각조각 나 흩어진 파편을 스윽 훑었다.

'정작 때리면서 느끼는 감촉으로는 그렇게 튼튼한 거 같지는 않았어.'

프랭크가 달고 있던 의수는 공업용 골렘의 팔을 따로 떼서 개조한 물건이었다.

갱도의 잔해를 뚫거나 단단한 무언가를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라, 그 위력은 커다란 트럭도 끌 수 있을 정도의 출력을 자랑했다.

그것을 이긴 시점에서 오시안은 맨손으로 달려오는 트럭을 박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음에도 오시안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삐이이익!

때마침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더니 제복을 입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청색의 제복과 건장한 체구. 입가에 쓴 방독마스크와 머리에는 철모까지.

35번구의 치안을 담당하는 위병들이었다.

"거기! 지금 뭘 하는 거냐!"

오시안은 위병들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40번대 구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위병이 30번구 정도 되니까 이 정도의 소란에도 나서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현장에 온 위병은 총 3명.

그들은 사람들을 물리며 상황을 살피다 놀랐다.

"피 주먹 프랭크?"

프랭크는 이 구역에서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주먹패이자 용병이었다.

다른 평범한 의수도 아니고 공업용 팔을 달고 다니며 힘을 과시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 프랭크가 지금 길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심볼이자 자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기계 팔은 어딜 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주변에 흩어진 잔해가....'

위병은 방금 전 들어온 신고를 떠올렸다.

피 주먹 프랭크가 웬 젊은 남자와 시비가 붙었는데 이러다 누구 하나 실려 갈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현장에 왔는데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반대였다.

'대체 누가?'

위병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오시안을 발견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오."

오시안도 위병을 알아본 것인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또 만나는군. 마스크는 새로 맞췄나?"

며칠 전, 오시안에게 시비가 붙어 마스크가 잘려나간 위병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26화. 부서진 주먹 (2)

위병은 식은땀을 흘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 혹시나 싶어서 묻지. 저기 있는 프랭크의 팔을 부순 게 그쪽인가?"

위병이 오시안을 향해 최대한 엄숙하게 물었다.

"그쪽?"

"...그쪽입니까?"

오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자 아차 싶은 위병이 곧바로 말을 높였다.

뒤늦게 자신이 말을 높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오시안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게 아닌데.

위병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알았지만 그걸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자에 대한 공포는 누구나 동등하게 느끼는 법이니까.

주위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위병이 오시안에게 대하는 태도에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거칠게 윽박지르던 것이 위병들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 위병은 오시안에게 쩔쩔매는 것처럼 보였다.

"말해두지만 나는 팔을 부수지 않았다."

오시안은 위병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저게 알아서 부서졌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하나?"

"...생각하십니까?"

위병은 오시안의 뻔뻔한 태도에 강하게 나가려다,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를 뜨고 싶지만, 위병으로서 직업의식 때문에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팔이, 어떻게 알아서 부서지는...겁니까?"

"그냥 혼자서 출력을 올리더니 부서지더군. 원래부터 고장이 나 있던 거겠지. 불량품처럼."

"불량품이라고...요?"

"그래. 그쪽의 마스크처럼."

"...!"

그 말에 위병이 흠칫했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마스크를 손으로 만져 보고는, 멀쩡하다는 걸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눈을 감으면 생생히 떠올랐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지?"

"그건...."

위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여전히 망설였다.

그때 다른 위병 둘이 그에게 다가왔다.

"선배님. 상황 정리는 얼추 된 거 같습니다. 게다가 목격자 증언을 들어보면, 프랭크 녀석이 전부 문제였다고 하더군요."

"그래?"

위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화색이 되었다.

"그렇다면 문제를 벌인 프랭크만 데려가면 되겠군!"

"예? 뭐, 그렇죠. 그런데 따로 시비가 붙은 사람은 놔둬도 되는 겁니까?"

"크흠. 프랭크가 문제를 일으켰다면서. 그러면 프랭크만 잡아가면 되는 거지."

그 말에 후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임은 왜 선배가 갑자기 저렇게 기뻐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크흠흠. 문제를 일으킨 녀석을 체포했으니 우리는 이만 가보겠다."

"보겠다?"

"...아, 앞으로 이런 사건에 휘말리지 않게 주의하도록!"

꼴에 후임들 앞에서 체면은 지키고 싶은지 위병은 애써 오시안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자리를 쌩 떠나버렸다.

오시안은 위병의 뒷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다음에 혹시라도 만나게 된다면 이름이라도 물어봐야겠다.

*

"후후. 이야기 들었습니다. 피주먹 프랭크의 팔을 완전히 박살 내셨다면서요? 정말 대단하시군요."

바이올렛 폭스로 돌아온 오시안을 향해 로난이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자리에 앉은 채 실눈을 길게 늘이며 웃는 그 모습이 여간 수상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은 거지?"

오시안의 경계 어린 물음에 로난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어디서 들었냐니. 당시 현장에 목격자가 몇 명인데 소문이 충분히 날 만하지 않나?

로난은 난처하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말만 해도 너무 경계한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는 해야 브로커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보다 신분증은 어떻게 됐습니까?"

"며칠 기다렸다가 찾아오라고 하더군."

"그거 다행이군요. 덕분에 지금은 주머니에 여유자금도 없으실 테고, 혹시 의뢰 하나 맡아 보시겠습니까?"

그 자연스러움이 대단히 뛰어나, 알면서 살 수밖에 없는 고도의 상술처럼 느껴졌다.

"그걸 노리고 있었나. 일단 들어는 보지."

"이번에는 그냥 의뢰도 아니고, 상당히 큰 의뢰입니다."

"큰 의뢰라. 혹시 흑마법사 단체를 잡으러 가는 건가?"

"후후후. 그런 일이 있다면 정말 큰일이겠군요. 다행히도 그건 아닙니다."

"조금 아쉽군. 그래서 의뢰라는 것은?"

"단체의뢰입니다. 단체라고 붙는 만큼 최소 인원이 스물 이상을 넘어갈 겁니다. 당연히, 이번 의뢰는 그에 걸맞은 대규모죠."

대규모 의뢰인가.

오시안의 눈동자에 흥미가 담겼다.

"무슨 의뢰지? 내용은."

"폭력단체들이 화력 발전소 하나를 불법점거 했다고 합니다. 43번구에 있는 발전소는 39번구의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해 주고 있는데 그 때문에 지금 해당 구역에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오시안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왜 39번구의 발전소가 43번구에 있지? 보통 자기 구역에 놓지 않나?"

"화력 발전소는 오염물질이 많이 나오거든요. 공기도 탁하게 만들고. 그러다 보니 39번구 주민들은 발전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39구청에 항의를 해서 막아 버렸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오시안은 묘한 감상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예. 그러다 보니 발전소는 전반적으로 땅값이 싸고 낙후된 구역에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곳에는 연료를 아무리 태워도 피해를 볼 사람이 없거든요."

물론 43번구에도 사람은 산다.

하지만 도시는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가난한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 곳을 폭력단체가 점거를 했다?"

"예. 이틀 전 갑자기 습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돈을 요구하고 있죠. 기간까지 돈을 내놓지 않으면 발전소 시스템을 완전히 박살을 내겠다고요. 발전소는 몇 시간만 멈춘다 하더라도 큰 손해거든요."

"일종의 인질을 잡은 셈이로군."

이번에 의뢰주는 티르나 시에 허가 받아서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오시안은 거기서 약간의 이상함을 느꼈다.

"발전소 정도로 중요한 시설을 기업이 담당해도 괜찮은 건가? 그런 건 보통 도시에서 총괄할 거 같은데. 사실상 공공시설이지 않나."

"물론이죠. 하지만 오시안 씨. 생각을 해 보세요. 티르나는 넓습니다. 그 넓은 도시에 전기니 가스니 하는 것들을 보급하려면 얼마나 많은 발전소가 필요할 거 같습니까?"

티르나가 정확히 얼마나 넓은지 모르는 오시안의 입장에선,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구역 하나가 어지간한 작은 도시 규모라는 걸 감안하면.

필요한 발전소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으리라.

"그래서 보통 이번 의뢰와 관련된 발전소는 티르나 시(市)에서 특별허가를 받은 기업이 운영합니다. 시라고 모든 것을 다 관리할 수 없으니 기업에 하청을 넣는 거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외부 집단에게 빼앗기면 그 자격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겠는데. 그 기업이라는 작자들은 발전소를 제대로 지키긴 한 건가?"

"지키지 않은 게 아니라 못 지킨 겁니다."

기업에서도 방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발전소를 빼앗기면 치명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경비를 고용해서 근처를 지키게 만들었다.

하청을 받은 일인 만큼 잘 유지만 한다면 나중에 더 큰 건수도 따낼 수 있게 되니까.

문제가 있다면 이번에 들이닥친 폭력단체의 규모가 꽤 컸다는 점이리라.

"발전소를 지키던 경비들이라 하더라도 쪽수에 밀리면 돈이고 뭐고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목숨이 중요하니까요."

"그 점거된 발전소를 해결사들과 용병을 고용해서 다시금 탈취하려는 것이 이번 의뢰의 내용이겠군."

발전소를 불법 점거한 폭력단체 연합이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히 보통 규모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사건이면 도시에서 직접 나서지 않나?"

"일단 명목상 시에서는 이번 일을 기업과 일부 폭력적인 노동자들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갱인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노동자라. 도시는 이번 상황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는 말이로군. 책임은 전부 기업이 떠안는 거고."

"예. 기업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일이겠지만, 반대로 이쪽 업계에서는 환영할 일이죠. 많은 해결사들이 파이를 나눠먹고도 남을 일거리가 생긴 거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보수보다도 명성에 있었다.

해결사들은 프리랜서라 명성이 있어야 의뢰가 자주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해결사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지금처럼 제대로 무대가 갖춰진 상황은 흔치 않았다.

"아마 많은 해결사들이 모일 겁니다. 돈과 명예. 성공만 하면 그 두 개를 다 얻을 수 있는 의뢰니까요."

물론 그 일을 위해서 총알과 죽음을 무릅쓸 각오는 필수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늘 말하는 거지만 선택은 오시안 씨의 자유입니다."

단체 의뢰라.

그렇다면 자신 말고도 여러 해결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사실 누구를 만난다는 것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돈과 명성도 마찬가지.

대신 오시안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번 의뢰를 성공으로 이끌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업karma]이었다.

오시안은 피주먹 프랭크를 쓰러뜨렸을 때, 아주 미세하지만 자신의 몸 안에 차오르는 모종의 기운을 느꼈다.

그것이 꿈에서 들었던 업이라는 것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작 이름을 날린 개인으로 얻은 업은 너무 조촐했지만 아쉬워하지 않았다.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그걸 실행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이번 단체의뢰는, 그 업을 쌓기에 최적의 요건이었다.

"받아들이지."

*

43번구의 폐공장.

녹이 슨 증기기계의 잔해와 시궁쥐들로 가득한 곳에 40여 명의 해결사와 용병, 청부용역들이 모여 있었다.

"더럽게 많이도 모였군."

"모처럼 열린 큰 이벤트를 놓칠 수야 있나."

"듣자하니 근방 갱들이 전부 연합을 했다고 하는데, 괜찮으려나? 이거 자칫 잘못하다가 벌집 되는 거 아니야?"

"괜찮고 자시고 고작 40번대 구역의 갱이 뭐 얼마나 대단하겠냐. 숫자만 믿고 깝치는 거겠지. 여기 모인 사람들도 적은 숫자도 아니고."

"그건 그래."

용병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상대를 분석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저기 보여? 저기 총 쥐고 있는 사람."

"K이니셜이 새겨진 쌍권총에 올백으로 넘긴 붉은 머리카락. 설마 총잡이 키드인가?"

"그래. 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더군. 저 총에 미간이 뚫린 해결사만 두 자릿수가 넘어."

"저 거구는 어떻고? 저 녀석, 강철 피부의 조나단 런셀이야. 뮤턴트인데 피부를 금속으로 바꿀 수 있다더군."

"제길. 쟁쟁한 녀석들이 죄다 모였군."

큰 의뢰는 이래서 문제였다.

이쪽도 나름 이름값이 있고 실력에 자신이 있음에도 와 보면 더한 녀석들이 가득했다.

"저격수 안나와 인형사 데이빗도 있어."

"업계 미친놈들이 죄다 모였군. 의뢰가 아니라 미친놈들 경영대회인가?"

"이봐. 그렇게 따지면 여기서 제일 조심해야 할 놈이 따로 있어."

"누구인데?"

"저기 가만히 앉아서 눈 감고 기도하는 놈 있지?"

한쪽에 무릎을 꿇고 얌전히 기도를 하는 50대 중반의 남자가 있었다.

독실한 신도처럼 보이는 그는 긴장감이 가득한 현장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차분해 보였다.

"여기서 기도를? 설마 사제인가?"

"아니. 오히려 더 위험한 놈이지. 저 녀석, '강철추종자' 소속 개조인간이야."

그 말에 몰래 대화를 나누던 용병이 숨을 삼켰다.

강철추종자.

이 업계에서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무거움과 피비린내를 모르는 녀석은 없었다.

"가장 기피해야 할 미친놈이군."

"그런 셈이지. 이 자리 최고 미친놈이라고."

경계해야 할 인물 리스트를 정리하려던 용병들은, 뒤늦게 현장에 새로 나타난 사람을 발견하고 시선을 돌렸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머리카락 색은 보기 드물게 흑발에, 험한 일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외모가 곱상하고 피부가 깨끗했다.

화려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외모는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이라 해도 믿을 모습.

그런데 이질적인 것이 하나 있었다.

"뭐야 저거. 옆구리에 칼이야?"

그는 어떠한 화기도 없이 칼 한 자루만 덜렁 차고 있었다.

당황한 용병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27화. 단체 의뢰 (1)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모였군.'

자신과 같은 해결사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눈대중으로 파악한 사람들만 약 40명.

물론 모두가 경계해야 할 네임드는 아니었다.

그나마 신경을 쓸 만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딱 봐도 티가 났다.

당장 저기 보이는 거구만 해도 그렇다.

얼마 전 보았던 프랭크보다 훨씬 더 거대한 덩치.

옷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은 근육은 그가 얼마나 단련을 열심히 했는지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무기를 들고 있지도 않고, 방탄복을 입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건 맨몸으로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실력자라는 것.

'뮤턴트인가 보군.'

오시안은 거구의 뮤턴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방금 전부터 계속 시선이 가는 특이한 사람이 있어서였다.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50대 남성이었는데, 오시안은 그에게서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사람인데 사람 같지 않다고 해야 하나.

그의 몸에서 생기라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몸속에 피 대신 다른 것이 흐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때 기도하던 남성이 감았던 눈을 뜨더니 오시안을 응시했다.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눈동자.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용병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강철추종자를 처음 본 오시안의 감상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신기한 사람이군.'

정작 오시안은 이 자리에서 자신이 가장 신기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무려 무기로 검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다른 무기가 있냐면 또 그건 아니었다.

단출한 옷차림의 오시안에겐 권총 한 자루 숨길 곳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맨몸에 칼 한 자루만 덩그러니 가져온 것이다.

'뭐지 저놈. 미친놈인가?'

'지금 이 자리가 어디인데, 총도 아니고 칼을 가져와?'

일반적인 총도 명함도 못 내미는 공간에 롱 소드라니.

큰 의뢰를 앞두고 긴장감 때문에 예민해진 차에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오시안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당연히 곱지 않았다.

딱 봐도 세 보이지도 않았고 강자의 패기라곤 모래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런 사람은 으레 이런 자리에서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었다.

서로 힘 꽤나 쓴다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그때부터는 주도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는 법.

용병들이 눈치를 슬슬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같이 시선은 오시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용병보다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어? 저기."

"이런."

그를 알아본 용병들이 모두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붉은 머리의 총잡이, 키드가 오시안에게 다가가고 있어서였다.

'키드가 움직였다.'

'저 녀석은 이제 끝났군.'

키드는 뛰어난 사격술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사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단순한 사격술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성격에 있었지.

업계에서 그의 칭호가 괜히 키드(아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듯 키드는 하는 행동이 아이처럼 유치하기까지 했다.

어린아이의 잔혹함은 때로는 어른조차 기겁하게 만든다.

키드의 명성은 바로 그 아이와도 같은 잔악함에 있었다.

그에게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적정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키드는 어슬렁거리는 발걸음으로 오시안에게 다가가 그를 불렀다.

"이봐 형씨. 여기 처음이야?"

"음?"

자리에 모인 40여 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 향했다.

주변 반응을 신경 쓰지 않던 강철추종자도, 우락부락한 근육을 뽐내던 조나단 러셀도 마찬가지였다.

오시안의 지척까지 접근한 키드는 그의 허리춤에 걸린 칼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이야. 진짜 재미있는 형씨네. 혹시 그 칼, 진짜 사용하는 거야?"

"사용하지 않을 거면 가져오지도 않았다."

"오오. 멋진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키드의 표정은 오시안을 놀릴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시안은 그런 키드의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형씨는 이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는 찾아온 거야?"

"의뢰를 받았지. 발전소를 점거한 폭력단체를 쫓아내달라는."

"그래 맞아.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 해결사. 용병. 뮤턴트까지. 그런데 형씨는 좀 그렇단 말이지."

"무엇이 말이지?"

오시안의 물음에 키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가지고 놀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으레 그가 지어 보이곤 하던 표정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 형씨는 솔직히 뭐가 없어 보이잖아? 요즘 같은 시대에 칼이 뭐야 칼이. 게다가 특수한 개조를 거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유가 있어?"

"누구보다도 잘 쓸 자신이 있으니까."

"오오.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네. 잘 쓸 줄 아니까 쓴다. 멋진 대답이야."

키드는 실실 웃으면서 오시안을 툭툭 건드리듯 말했다.

"근데 이런 자리에 찾아올 거면, 조금 더 차려입고라도 오지 그랬어. 얼굴에 분칠도 하고 알록달록한 옷 입고 칼 차면 광대처럼 보이기라도 했을 텐데."

그 말에 주변에서 듣고 있던 용병들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사방에서 비웃음이 날아옴에도 오시안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오. 그렇게 들렸나? 그래도 마냥 눈치가 없지는 않네."

"그래서 뭐. 날더러 이 자리에서 꺼지라고 말 하고 싶은 거고?"

"그러면 뭐, 서로에게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

"싫다면?"

오시안이 강하게 나오자 키드는 흠, 하고 턱을 쓰다듬었다.

"싫다라.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데. 본인이 싫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여기에 온 것도 본인의 선택이고."

"이해해주는 건가?"

"물론이지."

키드는 그렇게 말하며 불시에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들었다.

순식간에 뽑혀져 나온 총구가 오시안의 이마를 겨누었다.

그 속도는 혹시나 싶어서 지켜보고 있던 용병들조차 움직임을 놓쳤을 정도로 신속했다.

주변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뭐야. 왜 갑자기 입을 다물고 그래. 아, 혹시 이것 때문에 겁을 먹기라도 한 거야? 농담이야 농담. 그냥 장난 좀 친 거라고."

오시안이 말없이 키드를 응시하자 그는 킥킥 웃음을 흘렸다.

"워워. 무섭게 왜 그래? 어? 그렇게 노려보면 뭐, 칼이라도 휘두르게?"

"그렇다면?"

"이것 봐라. 지금 이마에 총구가 들이밀어져 있는데도 그런 허세가 나와?"

그 말에 오시안이 피식 웃었다.

"총? 무슨 총을 말하는 거지?"

"뭐?"

키드는 오시안의 하는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거 안 보여?"

오시안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낀 키드가 뭐라고 따지려는 순간이었다.

투두둑.

키드가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이 난데없이 조각나더니 바닥에 볼품없이 떨어졌다.

"어?"

키드는 물론이거니와 그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

부서진 총의 단면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오시안이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왼쪽 허리춤에 걸려 있던 롱 소드가 대체 언제부터인지 그의 오른손에 쥐여 있었다.

"너...방금 칼 휘두른 거 봤어?"

"...못 봤어."

가까이 붙어 있던 키드야 사각지대에서 휘둘러서 못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지만.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조차 오시안이 검을 휘두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내, 내 총이...."

키드는 잘려나간 자신의 총을 허탈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업계 코드네임 이니셜을 박아 넣은 오더 메이드 권총이었다.

무려 한 정에 2천만이나 하는, 그의 자랑이나 다름없던 무기였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볼품없이 조각나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수리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이 개새끼가!"

키드는 남은 한 정의 권총을 허리춤에서 뽑으려 했다.

상대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건 알지만, 방금 전에는 방심해서 당한 것.

진지하게 임한다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그때 끼어드는 목소리에 오시안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췄다.

총구를 겨누려던 키드는 뒤늦게 자신의 미간 앞에 칼날이 다가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그의 나머지 한 정의 권총이 반으로 매끄럽게 쪼개졌다.

"아, 으. 아."

다리에 힘이 풀린 키드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금 정말로 죽을 뻔했다는 걸 깨달은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무래도 서열 정리는 완전히 끝난 것 같군."

오시안은 검을 회수한 뒤 말을 건 사내를 응시했다.

정장 롱코트를 입은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반백의 수염을 기른, 어딘가 고풍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미중년.

"멋진 광경 잘 봤네. 자네가 바로 그 소문의 오시안이로군?"

"나를 아는가?"

"칼 한 자루로 갱단 아지트 하나를 없애 버렸는데 모를 수가 있나. 게다가 최근에는 도주한 흑마법사도 별 무리 없이 생포했지."

오시안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보통 칼을 쓰는 사람의 소문이 돈다면 대부분은 헛소리로 치부했을 텐데 이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아. 내 정신 좀 봐. 나는 데이빗 로지어라고 하네. 나도 해결사 일을 하고 있지."

데이빗의 자기소개에 그를 알아본 용병들이 속닥였다.

"지휘관 데이빗이 나섰어."

"맙소사. 업계 베테랑이 여기에 참여하다니."

용병들의 작은 소리를 예민한 기감으로 잡아낸 오시안이 입을 열었다.

"꽤 유명인이었군."

"갑자기 떠오르는 초신성 앞에서는 부끄러운 명성일 따름이지."

데이빗은 그렇게 말하며 박수를 작게 두 번 쳤다.

짝짝.

그러자 데이빗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두 덩치가 움직이며 다가왔다.

오시안은 덩치의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눈을 빛냈다.

'오토마톤이잖아?'

검은 양복을 입고 머리에 모자까지 쓴 그것은 오토마톤이 분명했다.

얼굴이 이목구비도 없는 밋밋한 강철로 이루어져 있었으니까.

오토마톤은 주저앉은 키드를 질질 끌더니 폐공장 바깥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총이 없는 총잡이는 이 의뢰에 낄 수 없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키드는 저항도 하지 못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오토마톤에게 저런 정교한 작업은 어렵다 들었는데 데이빗의 오토마톤은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실?'

데이빗과 오토마톤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연결되어 있었다.

실에는 마력이 흐르고 있었는데 데이빗이 직접 조종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걸로 세밀한 조종을 하는 건가.'

오시안은 왜 데이빗의 이름 앞에 '지휘관'이 붙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오시안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것은 저 오토마톤이었다.

오시안은 저것과 비슷한 디자인과 동치의 오토마톤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얼마 전에.

"하나 묻지."

오시안의 검은 어느새 오토마톤에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데이빗조차 반응하지 못한 속도였다.

"뭔가."

데이빗은 당황함을 숨기며 대답했다.

설마하니 여기서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 줄은 몰랐다.

"그 오토마톤. 어디서 난 거지?"

"...어디서라니."

데이빗은 오시안의 모습을 살폈다.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 오토마톤을 베어 버릴 듯한 기세였다.

28화. 단체 의뢰 (2)

"그건 왜 묻나?"

"내 기억 속에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서 말이야."

질문을 하는 오시안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데이빗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워워. 진정하게. 무슨 오해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이 생각하는 사람과 나는 전혀 연관이 없어."

"그걸 어떻게 알지?"

"이 업계에서 오래 굴러먹다 보면 늘어나고 싶지 않아도 늘어나는 것이 눈치지. 자네, 내가 다루는 오토마톤과 비슷한 걸 다루는 자와 싸움이 붙었던 모양이지?"

오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거였군. 내가 비슷한 걸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그쪽과 연관이 있다고 착각할 만도 해."

"다르다 이건가?"

"그쪽이 크게 착각을 한 것이 아니라면, 아마 내가 다루는 오토마톤과 그 오토마톤은 같은 회사에서 만든 것일 거야."

"같은 회사?"

"오토마톤을 제작하는 회사는 크게 2개가 있다네. 티르나의 대기업 중 하나인 앤틱 테크(Antique Tech).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배틀 트렌치(Battle Trench)지."

"이름만 들으면 그쪽이 사용하는 것은 후자의 제품이겠군."

"맞네. 앤틱 테크는 일상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오토마톤을 제작하고, 배틀 트렌치는 전투용 오토마톤을 제작하거든."

데이빗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양 뒤에 도열한 오토마톤을 엄지로 척 가리켰다.

"이 두 녀석은 로널드와 레지널드라 하네. 배틀 트렌치 사에서 만든 2등급 오토마톤으로, 꽤나 비싼 녀석이지."

"그래 보이는군."

"당연히 배틀 트렌치 사의 제품은 이 녀석들처럼 덩치가 크고 몸이 튼튼한 놈들이 많아. 아마 그쪽과 싸웠다는 녀석도 배틀 트렌치 제품을 쓰는 거겠지. 제작사가 같으니 덩치 규격도 비슷할 테고."

"그렇다면 그쪽의 오토마톤도 팔이 폭발하는 기능 같은 것이 있나?"

오시안이 그날 본 기억을 토대로 묻자 데이빗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팔이 폭발했다고?"

"잘려 나갔는데 무슨 처리를 한 건지 갑자기 폭발하더군. 파편을 흩뿌리면서 말이야."

"...그거라면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정도 기능이 있는 것은 1등급. 아니, 증거를 남기지 않는 특수등급에 가깝겠군."

"그런 걸 사용하는 녀석들이 흔한가?"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말이야."

데이빗은 그렇게 말하다 자신의 가슴팍 호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생각보다 지체됐군. 이제 움직일 시간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세."

오시안도 일단은 의뢰를 위해 왔기 때문에 데이빗의 의견에 동의했다.

최소한 데이빗이 자신이 알던 그 녀석들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은 확인이 됐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이제 올 사람들도 다 온 거 같고, 슬슬 맡은 바 의뢰를 수행하러 가 보겠나들?"

한차례 벌어진 소란이 가라앉은 뒤 데이빗이 묻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무기를 챙겨들었다.

총잡이 키드가 탈락한 것은 의외였지만 그가 가져가야 할 몫이 모두에게 돌아가게 됐으니 어찌 보면 다행인 일이었다.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저 사람.

대부분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오시안을 곁눈질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칼질로 그 키드를 가지고 놀았다.

게다가 데이빗이 한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데, 그렇다면 루키인가?'

'루키인데 저 정도 실력이라니. 진짜 세상 불공평해서 못 살겠군.'

키드의 몫만큼 이쪽으로 들어오는 돈이 늘었다고 좋아하기엔 일렀다.

오시안 정도의 실력이라면 아무리 칼을 쥐어도 갱단 정도는 손쉽게 정리할 테고, 그렇다면 이쪽에 돌아오는 몫도 줄어들지도 모르니까.

공장을 벗어난 용병과 해결사 무리들은 저 멀리 보이는 발전소를 목표로 삼아 이동했다.

정해둔 작전은 없었다.

오래전부터 함께해 온 거면 모를까 오늘 처음 보는 얼굴끼리 합을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작전을 세운다면 수익분배는 어떻게 할 거고, 누가 위험한 1선에 설지도 정해야 한다.

그러면 의뢰를 시작하기도 전에 서로 싸우다가 무산되고 만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발언권이 강한 사람이었다.

"뭐, 이제 와서 내 지휘를 따르라 하지는 않겠네. 어차피 실전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말이야."

데이빗은 각자 개별행동으로 움직이되 정 위급할 때 지원을 해주자는 방향을 제시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그게 가장 적당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대는 오합지졸인 갱이다.

그들이 연합을 해서 숫자가 많다지만 이쪽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갱보다 싸움에 더한 전문가들이다.

혼자서 소규모 갱단 하나를 모두 쓸어버릴 수 있는 실력자들도 더러 포진해 있으니, 싸움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않으리라.

"다들 승낙한 걸로 알고 다시 움직이겠네."

적당히 빨리 끝내고 보수를 타먹을 생각으로 움직이던 그때였다.

좁은 길목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숨어 있던 갱단이 권총을 쏘기 시작했다.

타타탕!

"전방에 적이다!"

"엄폐물 세워!"

기습적인 공격이었지만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도 당황하지 않은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선두에 선 덩치가 큰 용병이 등에 착용하고 있던 방패를 꺼내 정면에 세웠다.

촤자자작.

철판이 양옆으로 퍼지더니 이윽고 훌륭한 엄폐물로 변했다.

총격전에서 사용하는 휴대용 엄폐기였다.

'오. 저런 물건이 있구나.'

오시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봤다.

용병들은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긴 뒤 차분하게 반격을 가했다.

기껏해야 싸구려 권총이나 쏴재끼는 갱들은 본격적인 무장을 한 용병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갱 몇 명이 피를 뿌리고 쓰러지자 나머지 녀석들이 냅다 등을 돌려 도망쳤다.

"별거 아니네."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용병들은 서로 킬킬대며 웃으며 설치한 엄폐물을 회수한 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골목에서의 싸움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로널드. 레지널드."

데이빗이 명령하자 두 오토마톤이 성큼성큼 걸어가며 정면에 섰다.

갱들은 오토마톤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총탄은 오토마톤의 단단한 피부에 막혀 힘없이 튕겨 나갔다.

"쏴 버려."

투타타타타!

데이빗이 부리는 두 오토마톤은 양손으로 토미건을 들어 갱단에게 쏘았다.

총알에 면역이며 두려움을 모른 채로 총을 쏘는 오토마톤은, 갱에게 지옥에서 올라온 저승사자 그 자체였다.

뮤턴트 조나단 런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크하압!"

그가 기합을 내지르자 살색이었던 피부가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이윽고 피부 전체가 강철로 뒤덮인 조나단은 갱단에게 육탄돌격을 시도했다.

갱들이 놀라서 총을 쏘았지만 조나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퍼억.

그가 돌진하며 어깨로 들이받은 갱이 멀리 튕겨 나갔다.

"이 개새끼가!"

담이 큰 갱단 중 하나가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 조나단의 옆구리를 찔렀다.

쨍강! 단검은 조나단의 피부에 기스 하나 내지 못하고 힘없이 부러졌다.

"어, 어?"

갱은 부러진 단검을 보다가 이윽고 조나단의 주먹에 얻어맞아 쓰러졌다.

조나단은 그야말로 성난 황소처럼 엄폐물을 부수고 갱들을 집어던지며 날뛰었다.

오시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며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봤다.

'이래서야 내가 나서기도 애매하군.'

대부분 싸움은 서로 엄폐물을 사이에 두고서 총알을 주고받는 형태로 이어졌다.

그나마 조나단 정도가 근접해서 날뛰었지만, 그것은 그가 총알을 맞아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엄호해주는 용병들도 조나단이 총에 맞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무차별 엄호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실제로 조나단은 총알에 뒤통수를 맞았지만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나도 끼어들고자 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때였다.

"조심해!"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골목길 2층 창문이 덜컹 열리며 갱이 상체를 불쑥 내밀었다.

매복 습격.

갱은 자신의 아래를 지나가는 용병들을 향해 산탄총을 겨누었다.

"뒤져라 이 새끼들아!"

살의가 가득한 외침과 함께 갱이 방아쇠를 당겼고.

직후 새하얀 섬광이 총과 함께 갱의 상반신을 훑고 지나갔다.

총이 반으로 쪼개지고 갱 또한 피를 뿌리며 축 늘어졌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용병들의 시선이 섬광의 발원지로 향했다.

"별거 없군."

그곳에서는 허리춤에 검을 꽂아 넣고 있는 오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단 한 번의 칼질로, 찰나의 기습을 무마시킨 것이다.

'칼 한 자루로 이게 돼?'

'거리는 또 어떻게 닿은 거야?'

주위 용병과 해결사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오시안을 응시했다.

"씨발!"

"다들 튀어!"

갱단은 이대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 판단했는지 발전소로 도망쳤다.

용병들은 굳이 저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이동한다."

용병들은 서로 신호를 보내며 동시에 움직였다.

이윽고 좁은 길목이 사라지고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엄폐를 할 곳이 없어서 총알이 날아오면 꼼짝없이 당할 곳이었지만, 휴대용 엄폐기를 지닌 이들에겐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용병들은 엄폐기를 밀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전소는 갱단이 농성을 위해 여기저기 고철들을 쌓아 입구를 차단했는데, 용병들에게는 그저 귀여운 앙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방해가 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갱들은 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모양인데?"

"조잡한 갱들이 다 그렇지 뭐. 딱 봐도 가망 없다고 생각하고 뿔뿔이 튄 거 아니야? 그러면 우리야 더 편하지."

"집중해라. 아직 우리 임무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용병 대장이 자신이 이끄는 팀원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그 또한 내심 일이 잘 풀리는 것에 꽤 안도한 기색이었다.

오랜만의 단체 의뢰에, 모인 사람들도 꽤나 쟁쟁해서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할 거라 생각했다.

걱정과 다르게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할 만했다.

아니, 그걸 넘어 오히려 돈을 거저먹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해결사와 용병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담겼다.

그때 오시안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딱딱하게 굳었다.

"이보게. 갑자기 왜...."

데이빗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서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쿵───!!!

일정 거리를 둔 채로 움직이는 40명의 집단 무리의 중심에 무언가가 뚝 떨어졌다.

거대한 충격과 함께 땅이 울렸으며 먼지구름이 뿌옇게 올라왔다.

"뭐, 뭐야!"

"습격인가?!"

갑자기 폭탄이라도 떨어졌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람의 형태였으니까.

모두가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좌중에서, 크레이터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 숙였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쓰읍. 하아.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방독 가면. 입가로 이어진 호스는 갈색의 누더기 판초의 틈새 어디론가 이어져 있었다.

활동하기 편한 가죽부츠, 면바지, 그리고 양팔에 두른 붕대까지.

어딘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용병의 모습을 한 그것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쏴!"

용병들의 판단은 빨랐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이 절대 아군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공격을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다.

불청객 근처의 용병들은 눈치 빠르게 총구를 그에게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데이빗이 외쳤다.

"안 돼! 다들 피해!"

그러나 그 외침은 시끄러운 총성이 묻혀 사라졌다.

총알이 쏘아지고, 방독면의 사내를 향해 닿으려는 그때였다.

사내의 왼팔이 살짝 움직였고, 동시에 주위에 푸른 전류가 번뜩였다.

지이이잉.

날아가던 총알이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히기라도 한 듯 허공에서 정지했다.

어?

총을 쏜 용병들은 일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건 또 뭔...."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유언이 되었다.

방독면의 사내가 왼팔을 뻗자 멈췄던 총알이 고스란히 용병들에게 돌아갔다.

용병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삽시간에 10명이나 되는 사망자가 벌어졌다.

습격자의 왼팔의 붕대가 찢어지며 내용물이 드러났다.

그것은 금속으로 만들었다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기계팔이었다.

어깨에 총을 맞았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은 용병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테, 테슬라 암즈다!"

직후 적의 왼팔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번개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29화. 선혈 형제단 (1)

파지지직!

전자기의 폭풍이 몰아치며 주변이 뿌연 먼지로 뒤덮였다.

가려지는 시야 속에서 푸른 전류가 번쩍이는 것은 선명하게 보였다.

"테슬라 암즈라니! 저런 걸 단 녀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테슬라 암즈.

군에서 제작한 특수등급 의수로 특별한 능력이 탑재되어 있는 의수를 뜻했다.

고출력의 전기를 내뿜는 테슬라 암즈는 티르나를 통틀어서 단 몇 대만 제작이 됐을 정도의 귀중품.

절대 평범한 갱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난입자가 정말 대단한 강자라는 소리.

용병과 해결사들은 대체 왜 저런 인간이 갑자기 나타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길 피해! 뒤로 빼라고!"

"살고 싶으면 튀어!"

이 전까지 위기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대처하던 용병들이 패닉에 빠졌다.

그 상황에서 제대로 움직이는 자들은, 나름의 명성을 얻은 해결사들이었다.

타앙!

일행의 가장 후미에서 대기 중이던 저격수 안나가 난입자를 향해 저격소총을 쏘았다.

뿌연 먼지구름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지만, 그녀의 총알은 그런 것 따위는 개의치 않다는 듯 정확히 난입자의 미간을 노렸다.

지이잉.

그때 난입자가 반응했다.

난입자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테슬라 암즈를 내밀자 강력한 자기장이 발생하며 총알을 허공에 고정시켰다.

쓰읍. 하아.

난입자의 방독면의 동그란 고글 너머에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그것은 안나를 비웃듯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었다.

피잉─!

직후 허공에 고정된 총알이 안나를 향해 되돌아갔다.

"...!"

스코프를 통해 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던 안나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저격수인 그녀에게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 있는 기동력은 없었다.

안나가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저격수 안나가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칼을 쥔 오시안의 등이었다.

"물러나라."

오시안의 근처에 반으로 깔끔하게 잘린 총알이 뒹굴고 있었다.

자신의 저격소총에 사용하는 대구경 탄환이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지금 오시안은, 날아오는 총알을 칼로 베어낸 것이다.

그것에 경악을 느끼는 것도 잠시, 오시안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난입자의 지척까지 접근한 오시안의 참격이 미간을 노렸다.

"이건 또 뭐야?"

키이잉──!!

그러나 난입자가 테슬라 암즈를 다시 내미는 순간, 오시안의 검격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아무리 빠른 검술이라 하더라도 휘두르는 검은 결국엔 금속.

자력에 영향을 받는 이상 절대 닿을 수 없었다.

"칼을 사용해? 별 웃기는 놈이 다 있네."

오시안의 모습을 유심히 살핀 난입자가 떠들었다.

그만큼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오시안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멍청한 건지 용감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검을 휘두르려는 건...."

"말이 많구나."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팔에 힘을 주었다.

뿌드득!

전신의 근육에 용력이 샘솟으며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던 검이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난입자는 서서히 다가오는 검을 보며 방독면 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아오는 총알도 허공에서 고정시키는 강력한 자기력이다.

그것을 순수 육체의 힘으로 밀어낸다고?

"...건방진 벌레 새끼가."

난입자는 오시안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동시에 오시안의 검을 밀어내던 자기력이 더욱 강해졌다.

쿠웅!

오시안이 두 다리로 딛고 있던 지면이 크게 요동치며 금이 쩍 갔다.

그럼에도 오시안은 뒤로 밀려나지 않고 버텼다.

오히려 더욱 힘을 주기 시작하자 강력해진 자기력을 뚫고 한발 더 나아갔다.

'아직 가능해.'

오시안은 느꼈다.

지금 검이 막힌 상황에서도, 육체의 능력은 아직 한계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육체능력.

오시안은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콰드득!

지면이 한차례 크게 내려앉았지만, 오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난입자는 방독면 속에서 눈을 빛냈다.

"그래. 벌레치고는 확실히 힘은 쎄네."

이 정도의 자기력이면 총알뿐만 아니라 돌진하는 대형 트럭도 손쉽게 날려버릴 정도다.

그것을 맨몸의 인간이 버티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이쪽이 출력을 올렸는데 오시안은 그 이상으로 힘을 가하며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는 성능 테스트만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난입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은근하게 찢어진 붕대에 드러난 팔은 인간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오른손에 마력이 맺혔다.

"마법사...?"

오시안은 설마 이 상황을 초래한 자가 마법사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시대의 마법사는 예전처럼 로브를 걸치고 지팡이를 쥐면서 나 마법사요, 하고 티를 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몰골만 보고 직업을 유추할 수 없었던 것이 큰 실수였다.

"멍청한 새끼. 이미 늦었어."

난입자는 오시안을 향해 오른팔을 내밀었다.

보랏빛으로 맺힌 힘이 오시안의 머리 위에 천사의 고리처럼 원을 그렸다.

그리고 거대한 압력으로 오시안의 몸을 짓눌렀다.

쿠웅!

3성 중력마법 [그래비티 프레스(Gravity Press)]가 발동했다.

특정 범위 내의 중력을 급증시키는 중력마법.

자기력과 힘겨루기를 하던 오시안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조금씩 우위를 점하던 힘이 삽시간에 동률을 이루었다.

오시안의 두 다리가 땅에 발목까지 파고들었고 근육에 조금씩이지만 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이건 순수 육체의 힘으로는 버티기 힘든데.'

오시안이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그런 생각을 할 때, 난입자는 그 이상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테슬라 암즈의 출력을 받아내면서 동시에 그래비티 프레스를 몸으로 버텨?'

그래비티 프레스는 맨몸의 인간이 맞으면 압착기에 찌그러진 것 마냥 짜부라지는 위험한 마법이다.

그런데 오시안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이걸 맞고도 버티고 있었다.

그야말로 상식을 초월하는 육체능력.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해결사라면,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엄청난 명성을 얻었으리라.

"그러면 뭘 해. 어차피 너는 여기서 죽을 텐데."

난입자는 그렇게 말하며 마력에 더욱 힘을 주어 출력을 올리려 했다.

총알이 날아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로널드! 레지널드! 쏴!"

지휘관 데이빗의 명령에 두 오토마톤이 토미건을 연사했다.

난입자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오시안에게 가하려는 마력을 다른 쪽으로 선회, 새로운 마법을 발현시켰다.

허공에 반투명한 마력의 장벽이 생성되었다.

토미건의 총알이 우산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장벽을 때렸다.

오시안의 몸에 부하가 사라졌고, 그걸 본 데이빗이 외쳤다.

"뒤로 물러나게!"

"이 귀찮은 날벌레 같은 새끼가. 너희들부터 처리해 주마."

난입자는 순간 테슬라 암즈의 출력을 최대치까지 끌어 올렸다.

갑자기 급증한 힘에 오시안의 몸이 검과 함께 뒤로 멀리 날아갔다.

광범위하게 뿌린 자기력을 한 점에 집중한 것이다.

오시안을 재빠르게 밀어낸 난입자는 데이빗에게 시선을 돌렸다.

데이빗은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오토마톤을 앞으로 내세우며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직후 불덩어리들이 날아와 오토마톤을 집어삼켰다.

화르르륵!

파지지직!

오른팔에 화염을, 왼팔에 전류를 두르며 사방으로 휘몰아치는 난입자는 그야말로 인세에 강림한 악마였다.

광범위한 화염이 다른 용병들을 집어 삼켰다.

"아아악!"

"살려줘!"

그때 피부를 경질화 시킨 조나단이 난입자에게 달려들었다.

"우워어어!"

"이 덩치는 또 뭐야?"

난입자는 조나단을 비웃으며 중력 마법을 발동했다.

2성 중력마법인 [그래비티 펄스]가 조나단의 명치를 강하게 때렸다.

콰지직!

"크허억!"

총알도 튕겨내던 강철의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벗겨졌다. 조나단의 몸이 물수제비처럼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 광경을 본 용병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테슬라 암즈 하나만으로 벅찬데 심지어 마법사라니.

게다가 저 정도 위력의 마법을 손쉽게 사용하는 걸 보면 최소 4성급 마법사다.

어딜 가서도 정예전력으로 대접을 받는 자인 것이다.

여기서 전부 죽는다.

그 생각으로 자리에 얼어붙은 용병들을 일갈한 것은 데이빗이었다.

"뭣들 해! 발전소 안으로 대피해!"

데이빗은 부상당한 용병 하나를 들쳐 업으며 외쳤다.

퇴로가 막힌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발전소 안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난입자는 그런 자들을 비웃었다.

"내가 그렇게 놔둘 줄 알고?"

난입자는 테슬라 암즈를 뻗어 발전소 안으로 도망치는 용병들을 겨누었다.

이대로 전기를 일으켜 한꺼번에 지질 생각.

끼기긱.

그러나 바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왼팔에 가해지는 부담에, 난입자는 테슬라 암즈를 살피곤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그 이상한 새끼 때문에."

테슬라 암즈에서 새하얀 연기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과도한 출력 때문에 과열된 것이다.

난입자는 오시안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원래라면 일방적으로 쓸어버릴 싸움에서, 그 한 놈 때문에 테슬라 암즈의 출력 제한을 오버해 버렸다.

자체 냉각기능을 통해 식히고는 있지만, 한동안 성능 저하는 피할 수 없으리라.

난입자는 오시안이 날아간 장소를 살폈다. 녀석은 죽지 않았는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운 좋은 새끼.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죽여주마."

난입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발전소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에 도망친 벌레들을 잡아 죽일 시간이었다.

*

"허억. 허억. 그 새끼는? 쫓아오나?"

"아니. 안 와. 아무래도 따돌린 거 같은데?"

"이런 제길. 지금 몇이나 산 거지?"

골목길로 도망친 자들은 인원을 확인했다.

무사히 도망친 사람들은 5명.

쿠웅!

그때 거구의 조나단이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용병들은 그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라 총을 뽑았다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보고 바로 총구를 내렸다.

조나단을 데려온 것은 오시안이었던 것이다.

'경질화를 유지한 거구를 멀쩡하게 들고 와?'

'방금 전에도 테슬라 암즈에 맞섰던 거 같은데. 대체 힘이 얼마나 세면?'

아무튼 귀환자가 2명 늘어서 숫자는 총 일곱.

용병들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씨발. 테슬라 암즈 사용자라니. 저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저 새낀 대체 뭐야?"

용병들이 저마다 떠들 때, 대답을 해준 것은 저격수 안나였다.

"들어본 적 있어. 최근에 군부대 창고가 습격당해서 중요 물품들을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다고."

"잠깐. 나도 들어봤어. 그거, 선혈 형제단(Blood Brotherhood)의 짓이었잖아."

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이 일을 벌인 자들이 아주 유명했으니까.

"선혈 형제단? 위험한 놈들인가?"

오시안 묻자 용병이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소수의 강자로만 구성된 테러 조직이야. 아주 악랄하고 정신이 나간 놈들이지. 구성원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조직보다 강한 놈들인데, 온갖 위험한 놈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티르나에서 적색딱지가 붙은 놈들이지."

"방금 녀석도 그 선혈 형제단이라는 거로군."

"그런 셈이지. 제길. 왜 저런 미친놈들이 이런 곳에...."

그보다 문제는 의뢰다.

저 미친 테러광이 나타났다면, 이쪽의 힘만으로는 싸울 수 없었다.

"데이빗이랑 그 강철추종자는?"

"안쪽에 있겠지. 그리고 그 괴물은 안쪽에 도망친 놈들을 쫓은 모양이고."

"다 뒤졌겠군. 아니면 곧 뒤질 운명이거나."

절망. 좌절. 공포.

용병들은 방금 전 난입자가 보여 준 광경에 몸을 떨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추스르고 일어난 것은 저격수 안나였다.

"난 이만 가봐야겠어."

"뭐? 의뢰는 어쩌고?"

"당연히 실패지 뭘 묻고 있어? 목숨을 부지한 것만으로 고맙게 여겨. 아, 그리고 오시안이라고 했지? 구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목숨을 빚졌어."

오시안은 대답 대신 기절한 조나단을 가리켰다.

"갈 거면 저 녀석을 부축해서 데려가도록 해라."

"...그쪽은 안 갈 거야?"

오시안의 말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안나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그래."

"...여기 남아서 뭘 하려고?"

"가서 구해야지."

예상 밖의 말에 안나를 포함한 용병들이 눈을 크게 떴다.

30화. 선혈 형제단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