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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60-70

60화. 음모의 내막 (1)

전쟁.

오시안의 입에서 이번 사건의 핵심이 언급되자 오를레아 왕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 무어냐. 설마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거냐?"

오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알았다면 이런 일에는 끼어들지도 않았겠지. 그저 방금 전의 일로 유추를 했을 뿐이다. 그 반응을 보니 정답인 모양이군."

"...!"

오를레아 왕녀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래. 잘 알고 있다니 이야기가 편하겠구나. 네가 지금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지 알고 있느냐? 너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계략에 말려든 것이다."

이쪽을 질책하는 말투에 오시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오를레아 왕녀를 응시했다.

목숨을 구해 줬다 해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잔소리를 하다니.

'그만큼 마음이 심란한 거로군.'

이쪽에게 따지는 오를레아 왕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만 봐도 그렇다.

본디 이 모든 사건의 과정을 알고 있는 그녀였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싫지만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기쁨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놓았기 때문에 당혹감과 불안감이 먼저일 것이다.

그래도 오시안은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꽤 무례하군."

"무례? 감히 왕족인 내게 무례라니...?"

"잊었나? 여기는 티르나다. 왕족이고 평민이고, 무례한 건 무례한 거지."

"...."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도 이상할 게 없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를레아 왕녀는 화를 내지 않고 한층 차분한 얼굴로 오시안을 응시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내 목숨을 구해 준 행동은 분명 칭찬받아 마땅하다."

"갑자기 솔직해졌군."

"하지만 그건 너무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다. 당장 나를 살렸다고 해서,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포기할 리가 없다. 지금은 겨우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다시 포위될 거다. 그들은 계속해서 나를 노리겠지. 내가 죽을 때까지. 그렇다면 그쪽도 같이 휘말리게 될 거다. 아니, 이미 휘말렸지."

호오.

오시안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오를레아 왕녀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받아들인 힘없는 꼭두각시 정도로 알았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가.

아니. 그렇기에 죽음을 받아들인 건가.

자신이 죽어야만 카를레앙 왕국에 큰 이득이 될 테니까.

하지만 뭐가 어찌 됐든 오시안에 의해 일차적인 계략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래.

이제 1차다.

이게 앞으로 몇 차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저 숨을 고를 타이밍일 뿐.

근본적인 상황 자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계속 그대로 있을 건가?"

"뭐?"

"그대로 있으면 추적자들이 따라붙을 거다."

"내 말을 뭘로 들은 게냐."

"잘 들었지. 티르나의 군부와 그쪽의 국가가 손을 잡고서 희생양을 골라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것. 그리고 내가 거기에 휘말리게 됐다는 것까지도."

전쟁을 일으키려는 목적은 뻔했다.

군비 확장. 그리고 군사의 규모 확대.

안 그래도 선혈형제단에 의해 테슬라 암즈를 탈취당해서, 군부는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다.

군부는 실수를 만회하고 도시 내에 지닌 자신들의 영향력을 늘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으니, 자신들의 영향력을 늘리려는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거겠지.'

한 나라의 군대가 가장 강성하고 큰 발언권을 가질 때가 언제인가?

바로 전쟁이 났을 때다.

오를레아 왕녀가 티르나에서 죽는다면, 카를레앙 왕국은 이때다 싶어서 티르나를 비난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왕의 혈족이 죽었으니 전쟁도 불사르리라.

당연히 티르나도 당하고만 있을 수 없으니 맞서 싸워야 했고, 그것이 바로 군부의 역할이었다.

"그걸 알면서...."

"그게 문제가 되나?"

오시안이 되물었다.

그 뻔뻔하기까지 한 질문에 오를레아 왕녀는 말문을 잃었다.

"게다가 이제 와서 지나간 일을 가지고 후회한들 늦지. 지금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걱정해야 할 때니까."

"그대는, 아니, 귀공은...."

오를레아 왕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시안을 지칭하는 말조차도 귀공이라는 높임말로 바뀌었다.

"대체, 누구인가? 어디의 귀족 출신인가?"

"그저 떠돌이 기사이자, 자유로운 해결사일 뿐이다."

"그럴 리가...."

오를레아는 무어라 따지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오시안이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과거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캐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왕족인 그녀였지만, 다른 왕족과 다르게 오만하게 남을 깔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만한 왕족들을 많이 봐온 탓에 그런 행동을 경멸했다.

"귀공은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것이 좋을 거다. 나와 함께 있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설마 지금 내 목숨을 걱정해 주는 건가?"

"어차피 저들의 목적은 나다. 나를 여기에 두고 간다 한들, 그쪽의 뒤를 쫓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죽으면, 나만 죽으면 전부 끝난다."

오를레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군."

오를레아가 고개를 들어 오시안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처음 비행선 정거장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참으로 조각 같은 남자였다.

저 유려한 얼굴을 보라. 모든 것에 질려 버린 듯한 퇴폐적인 눈동자와, 고심해서 깎아낸 것 같은 콧대와 턱선까지.

고명한 화가가 혼신을 기울여 그린 명화에서 직접 꺼내 온 것 같은 생김새다.

그가 해결사 무리에 서지 않았더라면, 오를레아는 오시안을 어딘가의 왕족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 그림이 말했다.

"이미 쫓아온 놈들이 있거든."

그렇게 중얼거리는 오시안의 시선이, 저 골목길의 모퉁이에 향해 있었다.

오를레아가 무슨 일이냐며 묻기도 전, 거친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있다!"

그들은 오를레아를 발견하더니 다짜고짜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반응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오시안이었다.

오시안은 적들이 모퉁이에서 튀어나올 걸 예측하고 미리 검을 뽑아 그 앞으로 쇄도했다.

저들이 오를레아 왕녀를 발견하고 총기를 드는 그 짧은 순간.

몸을 낮춰 사각지대에서 지척까지 접근한 오시안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총이 잘려나가고 어두운 골목 곳곳에 피가 튀었다.

어지간해서는 살려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저마다 신호기를 지니고 있었고, 조금의 틈만 생기면 지원군을 부를 테니까.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당하는 데 걸린 시간은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빠른 시간에 이루어진 싸움이었기에, 오를레아 왕녀는 자신이 또다시 죽을 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검을 뽑아든 오시안이 오를레아에게 다가왔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총을 쏘려고 하다니. 아무래도 이 근방은 그쪽을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로 가득 깔린 모양이다."

"그, 그러면...."

"가지."

"어디를 간단 말이냐?"

"어딘지는 몰라도 여기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안전할 거다."

오를레아는 오시안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를, 지켜 주겠다는 말이냐?"

"그걸 왜 묻지?"

오시안은 뭘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시큰둥하게 답했다.

"해결사로서 의뢰를 받았다. 의뢰는 그쪽의 호위였지. 그러니 그걸 수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건...."

...당연한가?

해결사에 대해서 어깨너머로만 들었지, 그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고 이 업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오를레아가 한 가지 아는 것은, 해결사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의뢰를 수행할 정도로 고지식하고 신념 있는 자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시안의 모습은 오히려 해결사라기보다는.

조금 더 옛날 이야기에서나 나올 법한....

"...기사?"

"흠. 역시 왕족 정도 되니 안목도 좋은 건가."

기사라는 말에 오시안은 목소리의 톤이 전보다 높아졌다.

희미하게 입가에 맺힌 미소만 봐도, 그가 상당히 기분이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의뢰 때문에 그쪽을 구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없지는 않아. 내 중개인이 이번 일과 접점이 있거든. 그래서 도우려는 것도 있다."

"그런 개인적인 이유로 말이더냐?"

"개인적인 이유. 그보다 충분한 것이 있나?"

"...."

"그리고 또 이번 일을 벌인 자들이 꾸미는 계략을 성공하는 꼴을 못 봐주겠더군. 전쟁이 나면 위정자 놈들이 만든 판 아래에서 무고한 사람들만 죽을 거다. 그중 절반 이상은 그쪽 나라의 시민들이겠지."

오를레아는 오시안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티르나의 군부와 카를레앙 왕국은 서로 지지부진한 참호전을 지속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화망에 갈아 넣을 것이다.

전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금전적인 이득이 커지니,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

"최소한 왕족으로서,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그쪽은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죽으면 안 된다니.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지만 오를레아는 오히려 그 말을 비웃고 싶었다.

자신이라고 죽고 싶어서 이런 곳까지 왔겠는가.

왕족이라 하지만 이미 계승권 싸움에서 밀려나 버린 신세다.

언니 오빠들은 그런 자신을 타국의 귀족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도화선으로 써먹고자 했다.

오를레아는 머리가 명석했기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했다.

자신의 국가가 티르나의 군부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것도.

언니 오빠들이 가장 뛰어난 자신을 경계하고, 싹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까지도.

그래서 받아들였다.

싫지만, 나라를 위해서라 생각하고 숭고한 자리를 떠맡기로 했다.

하지만 오시안이 말하고서야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일은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단지 시작일 뿐.

전쟁이 벌어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까.

얼마나 무고한 시민들이 징집당해서 전장으로 끌려가게 될까.

앞으로 벌어질 전쟁이.

과연 끝나기는 할까?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군."

"나는 그저...."

"본인이 정말로 왕족이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라. 죽음을 각오했다느니 하는 거짓말을 두르지 마. 그건 도망이다."

도망.

오시안은 오를레아가 애써 무시했던 잔혹한 진실을 꺼내 보였다.

오를레아 왕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자신은 도망치려 했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왕가의 삶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죽이고자 하는 살벌한 정치판에서.

귀족들의 폭정으로 흉흉해진 민심의 화살에서.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저 한 명의 왕족으로서, 숭고하게 죽었다는 허울만을 품에 안은 채.

"그러면, 내가 대체 뭘 어찌했어야 했느냐."

"싸워야지."

그거 말고 뭐 별수가 있을까.

"싸우라고?"

"그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싸워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패배할 바에는, 최소한 송곳니 하나는 박아 넣을 생각으로 하는 거다. 그러면 혹시 알까. 놈이 화들짝 놀라서 도망칠지."

단순히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시안이 플레이 하던 게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존재했으니까.

필드를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치는 특수한 이벤트였던 걸로 기억한다.

말을 타고 다니다가 갑자기 사위가 어둡게 변하며, 끔찍하게 생긴 괴물이 나타난다.

생긴 것도 위압감이 대단해서, 놈을 처음 마주한 유저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치려다 죽고 만다.

그나마 싸우던 자들은 강한 스킬을 퍼부어도 체력이 전혀 달지 않는 것에 절망한다.

그렇게 전부 포기하여 죽고, 나중에 같은 자리로 돌아가면 놈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도망만 치다가 죽어 버린 패배의 기억만 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놈과 맞서 싸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격을 아무리 퍼부어도 체력 게이지가 달지 않는 놈이지만, 오시안은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싸웠다.

패턴을 분석하고 타이밍을 재며,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다.

그렇게 해서 아주 미세하지만, 체력 게이지를 깎을 수 있었고.

괴물은 그 기세에 눌려 겁쟁이처럼 도망을 쳐버리는 것이다.

특이한 아이템을 남기고.

'용기의 보주라 했었나.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운 사람들에게만 주는 일종의 징표.'

게임을 플레이 하는 사람들 중 1%도 가지지 않은 아이템.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름만 멋진 허울 좋은 잡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건 증표였다.

도망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싸운 사람을 향한 명예의 증표.

그걸 가장 먼저 손에 얻은 것이 당시의 오시안이었다.

그것을 손이 쥐는 순간부터 깨닫고 만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러니 끝까지 싸워.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

오시안은 뽑아든 검을 휘둘렀다.

카앙!

오를레아 왕녀의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칼날이, 조용히 날아온 총알을 튕겨냈다.

"그렇게 한다면, 내가 널 지켜 주겠다."

"이야. 이거 참 멋진 말이네요."

오시안의 말에 박수를 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동 마스크를 쓴 남자였다.

오시안은 그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봤다.

"너. 그놈이군."

드뷔에 후작과 대화를 나누던 황동 가면을 쓴 군인이었다.

61화. 음모의 내막 (2)

"호오. 누구인가 했더니 그 해결사가 아닙니까."

가면을 쓴 군인은 오시안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군계일학.

해결사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오시안이라 멀리서 스쳐 지나가도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이 업계에서 보기 드물게 검이라는 냉병기를 쥐고서 명성을 떨치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설마 오를레아 왕녀를 데리고 이 먼 곳까지 피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뭐. 그것도 이제 끝이군요. 그 짧은 시간이 멀리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우리 손아귀 안이니까요."

"생각보다 빨리 왔군. 역시 잘 훈련을 받은 군인이라 그런가. 하지만 혼자서 괜찮나?"

"혼자? 누가 혼자라고 했습니까?"

오시안은 하나둘 늘어나는 기척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곳까지 도망친 지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았는데도 추적자들이 쫓아오는 속도가 빨랐다.

방금 전 소란을 듣고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이미 이 주변에 광범위하게 포위망을 뿌려둔 것이다.

"군인들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거든요."

가면을 쓴 군인이 자랑하듯 말했다.

그 목소리는 쾌활하고 가벼웠지만, 오시안을 향하는 가면 속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결사라고 얕잡아 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마지막 상황까지 오게 만든 상대를 향한 적대감과 짙은 경계심이 넘쳤다.

"지금이라도 오를레아 왕녀를 넘긴다면 없던 일로 해드리죠."

"없던 일이라고?"

오시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자, 가면을 쓴 군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해결사니까 자신의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잖아요? 이번 일에 높으신 분들의 의지가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을 거고. 몰랐으니 한 번 정도 봐줘서 나쁠 건 없죠."

"혓바닥이 길군."

"하. 기껏 자비를 베풀어 주려는데 말버릇이 너무 고약한 거 아닙니까? 고작 해결사 주제에."

"자비를 베푼다고 말을 할 거면 눈빛의 살기부터 죽이지 그런가."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검을 좌우로 크게 휘둘렀다.

서걱.

휘두른 검이 양 골목의 건물 외벽을 부드럽게 가르고 지나갔다.

안쪽에서 커헉 소리와 함께 몰래 대기하던 두 군인이 쓰러졌다.

"옥상에 포진한 놈들에게 시선을 쏠리게 만들고 대화를 이어 나가면서 포위하려는 시간을 벌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은 그만두지."

"이 해결사 새끼가!"

가면을 쓴 군인은 허리춤에서 쏜살같이 총을 꺼내 들었다.

이쪽의 수작이 들킨 이상 더는 존댓말도 뭣도 없었다.

뽑아든 총은 평범한 권총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머스킷 위에 여러 장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개조총이었다.

피슝.

방아쇠를 당기자 공기를 미세하게 가르는 소리만 울렸다.

방금 전, 소리 없이 날아온 그 총알이었다.

오시안은 검을 수직으로 세워 총알을 비스듬하게 갈랐다.

좌우로 부드럽게 잘려나간 총알이 양 골목의 벽에 처박혔다.

오시안이 반격을 가하려던 찰나, 건물의 옥상 위로 그림자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가면을 쓴 군인에게 달려들려던 오시안은 뒤로 빠르게 백스텝을 하며 물러났다.

투타타타!

방금 전 오시안이 있던 차리에 총알이 박히며 바닥에 돌부스러기가 튀었다.

어느덧 진형을 갖춘 군인들은 오시안을 향해 라이플을 겨누고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무차별적인 사격이 아니다. 정확하게 오시안의 퇴로까지 생각해서 펼치는 화망이었다.

오시안의 눈동자가 허공에 새겨진 붉은 점들을 포착했다.

오시안만이 볼 수 있는, 그 불길한 점이었다.

카가강!

오시안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잘려나간 총알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이런 미친. 저게 뭐야?"

"검으로 총알을 잘라내?"

"계속 쏴!"

일반적인 갱단이나 해결사들이었다면 이 광경에 얼어붙었을 테지만 군인은 역시 군인이었다.

잘 훈련된 그들은 사격을 늦추는 일 없이, 계속해서 오시안을 밀어붙였다.

'이거 좋지 않은데.'

군인들은 오시안이 지금까지 싸웠던 적과는 다른 의미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개개인의 판단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집단으로 움직였을 때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수십 명이 한 몸인 것처럼 동시에 움직이는 것은, 자신보다 거대한 포식자를 사냥하는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지휘자라 할 수 있는 가면을 쓴 군인이 등에 매달은 거대한 장총을 꺼내 들었다.

그가 쏘았던 권총처럼 개조가 들어간 라이플이었다. 총알을 장전해야 할 부분에 전선이 연결되어, 그의 판초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오시안의 직감이 경고했다.

'뭔가 온다.'

방아쇠가 당겨지고 총알이 쏘아졌다.

총알의 형상을 한 그것은 황금색의 캡슐이었다.

'저건... 그때 흑마법사가 썼던?'

캡슐이 허공에서 분해되며 안에 담긴 에테르 워터를 드러냈다.

물컹거리는 반고체 형태의 에테르워터에 각인된 마법이 발동되었다.

푸화악!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우는 고열의 화염.

불꽃이 파도처럼 골목길 전체를 일거에 휩쓸었다.

외벽에 달린 파이프들이 붉은 쇳물로 변해 흐물흐물 녹아내렸고, 널브러진 판자들이 새까만 숯으로 변했다.

사람 정도는 그 자리에서 산화시킬 위력의 화염이었다.

"쯧. 고작 해결사 하나를 위해 이 비싼 4성급 캡슐을 쓰게 하다니."

오시안을 포함해 그 너머의 오를레아 왕녀까지 제거할 수 있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황은 이걸로 끝...."

그렇게 전하려던 남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기이한 기운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붉은 화염이 가라앉으며 새빨간 불티가 흩날리는 골목길.

검게 타 버린 그 좁은 길목의 중심에 하얗게 빛나는 알이 놓여 있었다.

그 알의 끝이 스르륵 갈라지더니 마치 목련이 피는 것처럼 만개했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얀 망토를 두른 오시안과, 그 품 안에 안긴 오를레아 왕녀였다.

4성급 화염마법을 담은 캡슐의 공격 속에서도 두 사람은 멀쩡했던 것이다.

가면의 군인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분명 제대로 적중했을 텐데...."

오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몸에 닿자 가면을 쓴 군인은 어깨를 흠칫 떨었다.

"다들 피해...!"

그렇게 외치며 그는 몸을 납작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그러지 못했다. 오시안의 망토가 날개로 변해 그가 날아오르자, 군인들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흰색 죽음이 내려앉았다.

새하얀 실선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 끝에 걸리는 것은 사람 물건 가리지 않고 잘려나갔다.

판초 안에 두른 장갑, 휴대용으로 챙긴 소형 가드, 몸 곳곳에 두른 총기까지.

그것이 얼마나 단단하더라도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토막 나고, 잘려 나가고.

그 짧은 순간에 옥상을 차지했던 군인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검격이 얼마나 강했는지 건물 곳곳에서 참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도저히 검 한 자루로 보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오시안이 다시 오를레아 왕녀의 곁으로 착지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은 가면을 쓴 군인, 지휘관 한 명뿐이었다.

"이, 무... 슨!"

잘 훈련된 부하들이 전부 당했다.

방심을 했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상대가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은 해결사에, 심지어 혼자이며 무기는 칼 한 자루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서 총으로 압박을 가했다.

날아오는 총알을 쳐낼 정도의 검술을 지닌 것에도 개의치 않고 충분한 몰이사냥을 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그가 행한 모든 것의 결과였다.

'평범한 뮤턴트가 아니잖아!'

날아오는 총알을 칼로 쳐낼 정도의 동체시력이라면 뮤턴트나 혹은 강화인간이어야 했다.

하지만 강화인간은 극소수인 데다가 겉모습부터 티가 난다.

저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은 뮤턴트일 수밖에 없었다.

신체강화 계열이라면 마법으로 제압이 충분히 가능하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 새하얀 빛의 덩어리는 뭐란 말인가.

'저런 건 들어본 적 없다고!'

아니 애초에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빛으로 이루어진 망토라니. 심지어 그 형상이 자유자재로 바뀌기까지 한다.

오시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가면의 남자는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일부러 나만 살려뒀다!'

자신이 몸을 날려서 오시안의 검을 피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오시안은 처음부터 자신을 살려 둘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이 자리에서 지위가 제일 높고 아는 것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리라.

'수준을 너무 얕봤다. 감히 내가 상대할 녀석이 아니야.'

머리를 빠르게 굴린 그는 판단을 내렸다.

신속하게 군용판초 안에 손을 집어넣은 그는, 허리춤의 벨트 포켓에서 수류탄을 꺼내 핀을 뽑았다.

던진 것은 총 2개의 철제 원통.

오시안은 검 날로 그것을 좌우로 가볍게 튕겨냈다.

직후 푸쉬쉭 소리와 함께 투척물에서 새하얀 연기가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연막인가."

오시안은 그대로 검을 휘둘러 연막을 베어 내려 했다가, 묘한 느낌이 들어 뒤로 물러났다.

치이익.

새하얀 연막에 닿은 건물의 외벽이 뜨겁게 타올랐다.

오시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백린?"

오시안은 자신의 감각을 믿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설마 저런 것을 허리춤에 휴대용으로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뒤로 물러난 오시안은 오르레아 왕녀를 호위하듯 서며 망토를 움직였다.

펄럭이며 크게 휘둘러지는 별빛의 망토가 강풍을 일으켜, 새하얀 백린 연막을 저 너머까지 밀어냈다.

시간이 지나고 백린이 가라앉자, 다 타 버린 길목만 휑하니 남았다.

"도망친 건가."

상황을 판단하는 머리가 상당히 빨리 굴러가는 놈이었다.

불리하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백린탄을 뿌리고 부리나케 도주하다니.

오시안은 다음번에 같은 상황이 생기면, 다리라도 자르고 시작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정도면 시간은 벌었으니, 우리도 이만 여기서 벗어나야겠군."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오를레아 왕녀.

오시안은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기울여 눈을 맞추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끄덕.

오를레아 왕녀는 말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방금 전의 비현실적인 광경 때문에 아직도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검을 휘두르며 군인들을 상대하는 오시안의 모습은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비친 그의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별빛을 두른 기사님 같았다.

"그렇다면 이동하도록 하지. 정말로 걸을 수 있겠나?"

오를레아 왕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살짝 울먹이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왕녀의 모습에, 오시안은 어쩔 수 없다며 그녀를 안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오를레아 왕녀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오시안의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지금까지 죽음을 애써 의연하게 받아들이려고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또래의 아이처럼 보였다.

"그럼 가겠다."

*

"제길! 제길!"

오시안으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난 군인은 거칠게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씩씩거리던 흥분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이건 우리의 실책이 맞아.'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화를 내봤자 소용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무엇을 하느냐다.

그는 허리춤에서 통신기를 꺼냈다.

"저입니다. 실패했습니다. 왕녀와 함께하는 해결사의 실력이 상정했던 것 이상입니다. 다음 플랜을 요청합니다."

첫 번째 플랜은 오를레아 왕녀를 차에 탄 채로 죽이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저격수를 배치했고 운전수를 고용했으며,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차량 아래에 폭탄까지 달았다.

이 작전이 실패했을 때는, 직접 훈련받은 군인들이 나서서 신속하게 제거하는 것이 서브 플랜이었다.

이 서브 플랜마저 실패한 지금,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 다음 플랜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통신기 너머로 지시가 내려왔다.

[허가한다.]

"예. 그러면 합류 포인트 지점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본래라면 이쪽까지 가기도 전에 알아서 끝나야 할 일이었다.

사실상 불필요한 보험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가면의 남자는 빠른 발걸음으로 근처 빈 주택으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들의 힘을 빌려도 좋은가.'

그럴 것이, 지금 저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놈들은 평범한 놈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굳이 분류를 나누자면 아주 위험한 부류의 존재들이었다.

미치광이 살인자, 테러리스트, 흑마법사, 위험분류 뮤턴트, 이단추종자.

군인으로서 혐오하지 않을 수 없는 범죄자들이었다.

'하지만 실력만큼은 진짜다.'

가면의 남자가 건물 안에 들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군인들이 즉시 알아보고 경례를 취했다.

"울루아즈 놈들을 불러라."

62화. 스멀거리는 자매 (1)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오를레아 왕녀가 탈출했다니!"

드뷔에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자신에게 소식을 가져온 애꿎은 부하를 향해 손찌검을 했다.

짝 소리와 함께 뺨에 붉게 물든 남자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입술을 질끈 깨문 드뷔에 후작은, 한 대를 더 때리려다가 가까스로 분노를 참아내었다.

"상황은?"

"그것이...."

"어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계획은 본래대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중간에 해결사 하나가 끼어들어서 전부 망했다고...."

"뭐? 해결사?"

드뷔에 후작은 이해하기 힘든 것을 들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동시에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그 해결사가 누구인데."

"후작님도 기억에 있으실 겁니다. 그 검은 코트에 검은 머리를 한 칼잡이 있지 않습니까."

드뷔에 후작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뼛속까지 귀족인 자신조차, 초면에 더 높은 귀족인 줄 알고 위축됐던 사내가 아닌가.

'그런데 그놈이 오를레아 왕녀를 탈출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드뷔에 후작은 여기에 다른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진 것을 본 부하가 황급히 안심시키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 그래도 군부 쪽에서 나서서 알아서 처리를 해준다 하니 괜찮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 군부가 실수해서 벌어진 일이잖아! 그런데 또 믿으라고?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냐!"

드뷔에 후작의 일갈에 부하가 입을 다물었다.

화를 낸 후작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거리며 외쳤다.

"이번 일을 빌미로 본국은 군비를 보충하고 주변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더 많은 자금을 유통할 수 있었다! 억 수준을 넘어서 조 단위의 금액이란 말이다! 그것이 지금 무용지물이 되게 생겼는데 뭐? 기다려?!"

당장 이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드뷔에 후작이 움직였다.

"우리도 나선다."

"예, 예?"

"왕녀님께서 해결사에게 납치를 당했다. 당연히 구하러 가야 하지 않겠나."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눈치 빠른 부하는 바로 허리를 숙였다.

"예. 호위대를 전부 동원하겠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빨리 찾아야 할 거다.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티르나의 시장 귀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거다."

그렇게 된다면, 그쪽에서도 오를레아 왕녀를 위한 구조대를 파견할 확률이 높았다.

자칫 잘못하면 오를레아 왕녀의 암살이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그녀가 살아남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내가 투자한 모든 돈과 시간도 사라지겠지. 내 가문과 함께.'

드뷔에 후작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

군부와 드뷔에 후작이 걱정하던 것처럼, 오를레아 왕녀 암살시도 사건은 티르나의 주요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특히 이번 사건이 벌어진 33번 구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끄응. 돌아 버리겠군.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33번 구의 구지사, 알베르토 로렌초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으며 지끈거리는 두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뒤로 길게 길러 올백으로 넘긴 금발과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이어진 수염까지.

정치인치고는 꽤나 듬직하고 남자다운 모습이었지만, 그의 속마음은 그와 정반대였다.

"일이 잘못되면 내가 모가지라고."

구지사의 자리는 해당 구역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권한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는 없었다.

무언가 일이 터지면, 그 오물을 가장 먼저 뒤집어쓰는 것도 구지사의 자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를 보좌하는 비서가 묻자 알베르토는 의자에 등을 파묻으며 말했다.

"어떻게 하긴. 일단 최대한 이번 사건은 조용히 처리해야지. 언론사에 압박 넣어. 지금 보도 그만두라고."

"목격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만두라 해서 그만둘 작자들도 아니고요."

"완전히 감추라는 게 아니야. 최대한 미루라는 거지. 3일 정도는 여유 생기잖아? 그 사이에 우리 쪽도 손을 써야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후우. 그걸 이제 고민해 봐야지."

알베르토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덩치는 사자 같지만, 그 행동은 불안감에 떠는 소심한 사람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비서는 그런 구지사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구지사에 오른 인물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로비를 잘해서가 아닌, 순수하게 실무 능력으로 한 지역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저렇게 입으로는 푸념과 한탄을 내뱉어도 그의 머리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굴러가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구 방위군을 부르실 겁니까?"

"안 돼. 애초에 이번 일에 군부가 연관되어 있어. 이쪽이 움직이는 정보를 흘러가게 둘 수는 없지."

"그러면...."

"이번 사건은 자칫 잘못하면 전쟁까지 번질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야."

이웃 나라의 왕녀가 암살을 당할 뻔했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은 카를레앙 왕국인데, 그쪽이 평화사절단으로 보낸 순간 암살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티르나와 카를레앙 왕국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고 만다.

"아니. 어쩌면 그 부분을 노린 거려나."

"노렸다는 것은...."

"군부에서 손을 쓴 거겠지. 원래 호위도 그쪽이 담당하기로 했었잖아. 그런데 보란 듯이 사건이 터졌어."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거로군요."

"뭐, 티르나에서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지. 중요한 건 그게 내가 담당하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거고, 나는 그걸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거야. 상황이 지금 어떻지?"

"해결사 하나가 오를레아 왕녀를 구해서 현재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해결사가?"

알베르토가 처음으로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를레아 왕녀가 일단은 죽지 않았다고 했기에 그녀의 충실한 호위가 지켜 준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해결사라니?

그것도 하나라고?

"그게 누구인데?"

"저도 몰라서 바로 확인을 했습니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신입 해결사라고 합니다."

"...신입?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해결사는 프리랜서 직종이지만, 진입장벽도 그렇게 높지 않아서 어중이떠중이가 많았다.

이 도시에 하루에만 백 명이 넘는 해결사들이 새롭게 나타난다.

그만큼 흔하디흔하다는 말이었다.

그런 신입 해결사가 오를레아 왕녀를 구출하는 거대한 공을 세웠다는 말이, 알베르토 구지사에겐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안 그래도 최근 행적을 계속 조사해 봤는데, 아무래도 보통 신입이 아닌 모양입니다."

"보통이 아니라고?"

"일단 과거가 너무 깨끗합니다. 아무런 흔적이 없어요."

"하. 흔적이 없다고? 그러면 뭐, 갑자기 땅에서 불쑥 솟아나기라도 했나?"

비서가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자 알베르토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알았어. 농담은 그만할게."

"이런 상황에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것은 본받을 일입니다만, 때와 장소는 구분해 주시길."

"그래서 과거가 깨끗한 것도 모자라서, 뭐가 더 있나?"

"일단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매우 고귀한 기품이 흐른다고 하더군요."

"...흐음. 설마 어딘가의 귀족 출신인가?"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문에서 밀려나 티르나에 들어오는 귀족들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타고난 혈통이 있어서, 강한 힘을 지니기도 하죠."

"흐음. 뭐가 어찌 됐든, 지금 우리에게는 호재인 상황이야. 오를레아 왕녀를 구해 줬다는 건, 우리와 같은 뜻이라는 소리니까."

알베르토가 턱을 괴었다.

"하지만 걱정이군. 우리보다 한발 빠르게 군부 측에서 움직였을 텐데. 그때까지 잘 버텨 줄 수는 있을지."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과회에는 연락해 봤나?"

"이미 했습니다."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지?"

"마녀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자신들은 이 일에 무관하다고 하더군요."

"제길. 일단 위병들 보내. 가까운 곳에 집행자 있지? 그쪽에도 연락 때리고. 근방에 집행자는 누구지?"

"알렌시아 헤어입니다."

"알렌시아. 그래, 백수침탁(白獸踸踔)의 그녀라면 믿고 맡길 만하지. 그대로 전달해. 상황 봐서 여의찮으면, [아크파츠] 해방을 허락하겠다고."

"하지만 그러면 도시에 피해가...."

"안 하면 전쟁이야. 차라리 적당히 일부 구역 날아가는 거면 싸게 먹히겠지."

"...알겠습니다."

그 순간 방문 밖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누가 찾아온 모양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누가...."

알베르토가 의아해하는 순간, 문이 덜컹 열렸다.

동시에 비서가 쏜살같이 움직이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이곳은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곳이다. 당연히 이곳까지 오는 길목마다 위병들이 줄지어 있다.

그런데 상대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다.

비서는 손에 쥐고 있던 파일철 사이에 끼워놓은 만년필을 쥐고 상대방의 경동맥을 향해 휘둘렀다.

"그만."

날카로운 펜촉이 살결에 닿기 전, 알베르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서의 동작이 멈췄다.

노도와 같이 달려들었음에도 멈추는 데 어떠한 경직도 없었다. 마치 그 모든 것이 한 동작인 것처럼 보였다.

"후우. 대체 누가 찾아왔나 했더니, 당신이 왜 여기에 온 겁니까."

"제가 오면 안 되는 곳에 왔나요?"

"그게 아니라...."

알베르토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만큼 지금 방문객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였다. 이 티르나라는 도시에서 아주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자신조차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재미있는 소식이 들려서 말이죠."

의복도, 머리카락도, 피부도.

모든 것이 새하얗다. 유일하게 하얗지 않은 것은 황금색 눈동자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미의 화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방긋 웃었다.

"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그 미소에, 알베르토는 자신이 천적 앞에 선 피식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로서는 그저 속으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 괴물이 왜 여기에 있는 거냐고.

*

"흠. 여기도 전부 깔려 있군."

오를레아 왕녀를 데리고 조용히 움직이던 오시안은, 도로 근처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놈들은 이 주변에 이미 깔려 있었다.

전처럼 건물 옥상을 질주할까 고민했지만, 상대도 바보는 아닐 테니 주 병력을 죄다 옥상 쪽에 배치해 뒀으리라.

그렇다고 변장도 여의찮다.

옷을 구할 수도 없거니와, 오시안과 오를레아는 외모에서부터 숨길 수 없는 아우라가 넘쳤다.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최대한 시간을 끄는 수밖에.'

군부가 일을 벌였지만, 그게 티르나 전체의 뜻은 아니다.

당연히 전쟁을 막기 위해 움직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오시안은 그 지원군이 올 때까지, 오를레아 왕녀를 무사히 지키기만 하면 됐다.

'그렇다면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나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오시안은 섬찟한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느냐."

오를레아 왕녀는 오시안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의아해하며 물었다.

"...따라붙었다."

"붙었다니. 설마 추적자가?"

"게다가 이번에 온 놈들은 보통이 아니야. 숫자는 적지만, 그렇기에 위험하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오를레아 왕녀는 오시안의 저 기이할 정도로 날카로운 감각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왕궁에서 활동하는 위병이나 마법사, 근위대장도 저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지는 못했는데 말이다.

물론 그걸 물어본다 해서 오시안도 마땅히 대답해 줄 말은 없었다.

이건 일종의 본능, 혹은 직감이었다.

오시안도 자신이 어떻게 추적자가 붙고 자신을 발견했다는 걸 눈치챈 건지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움직인다."

"어, 엇?"

오시안은 오를레아 왕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오를레아 왕녀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감히 왕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느냐, 같은 말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이 남자의 손이 참 크고 따뜻하구나는 감상만 들 뿐.

자신을 지켜 주려고 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몰랐다.

오시안과 오를레아는 골목길을 몇 번이고 꺾으며 움직였다.

하지만 추적자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자들이었다.

미개발 지역의 공터.

그곳에서 누군가 오시안과 오를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라라? 우리가 먼저 발견한 건가?"

눈매가 날카롭고 보이쉬하게 숏컷으로 친 녹발의 여인이었다.

마르고 탄탄한 몸에 키고 훤칠했다. 나름 키가 큰 오시안과 눈높이가 비슷할 정도.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시익 웃자 상어이빨처럼 날카로운 치열이 보였다.

오시안이 뒤를 돌아봤다.

막 공터에 들어온 길목으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의 여성과는 정반대로, 음울하고 음침함이 가득한 여성이었다.

심해를 보는 것 같은 프러시안 블루의 더벅머리와 다크서클이 가득한 채 내리깐 눈동자까지.

녹발 숏컷의 여자가 말했다.

"뭐 해? 집어삼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더벅머리 여성이 입고 있는 펑퍼짐한 남청색 드레스 치마의 자락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뭘 하는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푸화악!

무수한 빨판다리가 댐을 개방한 것처럼 쏟아져 나왔다.

63화. 스멀거리는 자매 (2)

"죄송하지만 이 의뢰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프렌피츠가 해결사 사무소에 들르자마자 들은 말이었다.

오스번 러셀.

잿빛 머리의 노신사인 그는 업계에서 베테랑으로 꼽히는 중개인 중 하나였다.

그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지만, 그 속뜻은 우회의 여지가 없이 직설적이었다.

잠시 눈두덩이를 매만진 프렌피츠가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어째서지?"

"몰라서 묻는다 생각하시면, 더욱 심각한 일이겠죠."

오스번은 새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테 없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지금 벌어지는, 오를레아 왕녀 암살미수 사건에 저희 해결사를 고용하시려는 거 아닙니까."

"그게 문제가 되나? 의뢰비가 부족하다면, 더 챙겨주겠네."

"아무래도 의뢰주께서는 저희들의 소식통을 너무 얕잡아보신 것 같군요. 이미 고용했던 해결사들이 모두 실패해서 그런 겁니까?"

폐부를 찌르는 말에 프렌피츠가 입을 다물었다.

"오를레아 왕녀의 암살사건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 사실을 숨긴 채 의뢰로 해결사들을 불러 모으셨죠."

"그건...."

"그것만으로도 위약금을 물어야 할 판인데, 이 상황에서 또 발품을 팔며 의뢰를 요청하시다니."

오스번 러셀이 눈을 번뜩였다.

인자한 노신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래된 관록을 지닌 중개인의 카리스마가 빛났다.

"우리 업계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

프렌피츠는 식은땀을 흘렸다.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파 보면 우습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해결사라 해 봤자 그저 돈으로 고용해서 갈아끼는 파츠,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우리도 보는 눈이 있고 듣는 귀가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더 예민하게 반응해야 하죠."

러셀은 목을 축이기 위해,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새하얀 손수건으로 입술을 톡톡 닦은 뒤 말을 이었다.

"이번 일에 군부가 개입해 있다는 건 이미 다 퍼졌습니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군부가 고용한 놈들입니다."

놀랍게도 군부는 범죄자들까지 고용했다.

문제는 그 범죄자들이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는 점이리라.

"울루아즈 교도소. 들어는 봤을 겁니다."

티르나는 거대한 도시답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당연히 그에 걸맞은 규모의 범죄들이 일어난다.

자유의 도시라는 멋진 이름.

반대로 그러한 자유의 아래 깃든 그림자 또한 짙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시민이 총을 들어도 위협적인데, 고등급 뮤턴트나 마법사, 흑마법사들이 범죄자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울루아즈 교도소는, 그런 특수 범죄자들만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이었다.

그곳에 수감된 범죄자들은 하나하나가 아주 위협적인 존재들.

그런데 군부는 그 범죄자들마저 이번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당신이 고용했던 해결사들 또한, 울루아즈 교도소 출신의 범죄자들에게 모두 당했겠죠. 아, 물론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죠."

"한 명이라면...."

"알면서 뭘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현재 오를레아 왕녀를 암살의 위협으로부터 구해 주고 있는 해결사가 있는데."

프렌피츠의 머릿속으로 오시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오스번은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고 할 말을 했다.

"그자가 남아 있으니 희망을 품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가 성공할 거라고 보는 건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감히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군요. 대신 적합한 사람이 따로 있죠."

"적합한 사람이라니."

오스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멀리서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린 프렌피츠는 상대를 알아보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로난 롤랑."

금발에 실눈,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미남자.

로난 롤랑이 테이블에 합석했다.

"이런이런. 프렌피츠 씨, 많이 곤란하신 모양이로군요. 어디, 일이 잘 진행되지 않습니까?"

주먹을 불끈 쥔 프렌피츠는 분노를 가라앉힌 뒤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건가? 지금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네가 애지중지하는 해결사, 과연 얼마나 버틸 거라고 생각하지?"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시안 씨는 아주 유능하신 분이거든요. 오히려 성공 이후를 생각해야 하죠."

"하. 성공 이후라고? 지금 이야기 못 들었나? 그 흉악 범죄자들이 끼어든 이상, 그쪽의 해결사도 죽는 건 시간 문제야. 당장 새로운 사람을 보내지 않으면...."

"내기하시겠습니까?"

로난의 말에 프렌피츠가 입을 다물었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오시안 씨라면, 분명히 이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끝낼 거라고요."

"...내 말을 뭐로 들었지? 당장 그 범죄자들 사이에서 이단의 신을 섬기는 광인들까지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알고 있습니다. 잊혀진 고대신을 섬기는 「스멀거리는 자매」는 유명하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야. 드뷔에 후작은 본인이 직접 문제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나설 거다. 군부도 계속 수색을 이어 나가겠지. 고작 해결사 하나가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나?"

"그러니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기를 하자고요. 저는 오시안 씨가 성공한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멍청한 건가,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그 해결사가 성공한다 치면, 내겐 좋은 일일 텐데?"

로난은 후후후 웃으며 서류 한 장을 프렌피츠에게 내밀었다.

"오히려 프렌피츠 씨는 저희가 실패하길 빌어야 할 겁니다."

서류의 내용물을 훑은 프렌피츠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건...."

"해결사 업계가 우습게 보이셨나 봅니다. 의도적으로 위험을 숨기고 의뢰를 여기저기 넣으셨더군요. 안 그래도 이번 사건 때문에 [조합]에서 소송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중개인 조합은 돈이 아주 많거든요. 이번 일에 최선을 다한 본보기를 보여드릴 겁니다."

"뭐? 그게 무슨...."

"그러니까 제 말을 요약하면."

로난이 실눈의 사이로 서슬 퍼런 눈빛을 흘렸다.

"이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당신은 끝이라는 겁니다."

*

쏟아지는 촉수 다발.

빨판이 달리고, 그 끝이 갈라지며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그것은 기형적인 문어의 다리를 보는 것 같았다.

미끌거리는 피부 위로 점액질이 흐르는 다리 수십 개가 치마폭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광경은 현실성과 아득히 멀어 보였다.

징그러운 광경에 사람은 압도되기 마련이다.

오를레아 왕녀는 무수한 문어 촉수가 격류처럼 다가오는 모습에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 순간 오시안이 나섰다.

뽑아 든 검 끝에서 치솟는 새하얀 빛.

별의 힘이 담긴 검이 횡으로 휘둘러지며, 공간을 새하얗게 찢어발겼다.

검의 궤적 안에 담긴 것은 뭐든지 찢겨 나갔다. 무수한 문어 촉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히, 히익! 어, 어떻게...!"

그 광경에 오히려 겁을 집어먹은 것은 스멀거리는 자매 중 동생 쪽인 아틸라였다.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걸 넘어서, 오시안의 검 끝에서 터져 나온 별빛을 보고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하! 형씨, 그래도 믿는 구석은 있었나 보네?"

그때 오시안의 등 뒤로 접근한 것은 언니인 크루아였다.

날렵한 움직임으로 오시안의 후방을 접한 그녀는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서 오시안을 향해 내질렀다.

주먹의 위로 녹색의 기운이 맺히더니, 심해에 사는 아귀의 머리가 튀어나와 오시안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크루아의 주먹은 완전히 내질러지지 못했다.

어느덧 그녀의 몸을 속박하고 있는 새하얀 빛줄기들 때문이었다.

"뭣?"

오시안이 두른 별빛의 망토가 여러 개로 갈라져 크루아의 몸 곳곳을 묶었다.

평범한 기운이 아니라는 걸 느낀 크루아는 주먹을 내지르는 대신 발을 크게 굴렀다.

꿀렁.

그녀의 발바닥이 바닥을 찍자, 둔탁한 소리 대신 지면이 수면처럼 찰랑이며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그리고 단단한 지면 속에서 거대한 녹색 상어의 머리가 튀어나오며 오시안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크루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크루아는 곧바로 몸을 뒤로 날렸다.

쩌억!

수직으로 그어진 새하얀 섬광이, 상어를 장작처럼 쪼갠 것을 넘어 크루아가 있던 자리마저 갈라버렸다.

좌우로 갈라지며 흩어지는 상어의 잔해 속에서, 오시안이 멀쩡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크루아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저 녀석, 대체 뭐야?'

본인의 공격에도 그랬지만, 동생인 아틸라의 모습을 보고도 겁먹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

보통 강철심장이라 하더라도 무수한 촉수 다발을 보면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느껴서 움직임이 굼떠지기 마련인데, 오시안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어떻게 돼 먹은 담력이야? 저 새하얀 빛은 대체 뭐고. 우리가 사용하는 힘이 쪽도 못 쓰고 있잖아.'

크루아는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보며 혀를 찼다.

오시안이 다루는 빛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이 다루는 힘과 아주 상극이라는 것은 알겠다.

성기사가 다루는 신성연금과는 다르다.

신성연금이 누군가에게 빌려온 성스러운 힘이라면, 저것은 한 개인이 갈고닦은 순수한 힘 그 자체였다.

"어, 언니. 저 사람, 위험해."

아틸라가 두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루아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두 사람은 고대의 신으로부터 힘을 받아서 강해졌다.

그중에서 동생인 아틸라는 신이 가장 총애했기에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지닌 존재. 그런 그녀인 만큼 그 의지를 읽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 아틸라가 저렇게 겁에 질렸다는 것은, 그 날카로운 영성으로 상대의 강함이 어느 수준인지 파악했다는 소리다.

"큭."

당장 무심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저 검은 눈동자만 봐도 그렇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크루아는 불끈 쥔 주먹이 땀으로 흥건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흐음."

정작 오시안은 크루아와 아틸라 자매를 꽤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 힘.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그거였구나.'

게임 속에서도 저런 힘을 다루는 존재가 있었다.

고대의 신.

미지의 세계에서 넘어온 외신으로서, 그 존재는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고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라고 한다.

서브컬쳐에서 유명한 요소를 게임사가 오마쥬와 어레인지 해서 만든 이벤트성 보스였다.

'메인 스토리와는 관련 없고, 그저 이벤트성 짧은 스토리가 전부였지만 상당한 임팩트를 남겼지.'

게임 속에서 몬스터들의 끔찍한 외형에, 많은 유저들이 입에서 욕설을 남발하게 만든 원흉.

난이도는 난이도대로 높고, 그에 비해 주는 보상은 너무 적어서 이걸 깨라고 만든 건지 의문인 이벤트였다.

심지어 이벤트의 최종 보스는 고대 신의 화신체로서, 그 난이도가 극악을 달려서 게임 내에서도 최악의 보스를 꼽을 때 항상 한 손 안에 들어갈 정도.

오시안도 이벤트를 깨기 위해서, 정말 셀 수도 없는 많은 도전을 했었다.

'추억이네.'

완전히 달라진 세상 속에서도, 자신이 그토록 애정하고 즐기던 게임의 요소가 이어져 왔다는 사실에 오시안은 감회에 젖었다.

그런 오시안의 기색에, 두 자매는 몸을 흠칫 떨었다.

"어, 언니. 저 사람...."

"그래. 저 녀석."

크루아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지금 즐거워하고 있어."

세상에.

고대의 신을 섬기는 자신들의 힘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압도한 것을 넘어서 이제 이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어, 언니. 도망치자. 이, 이건 승산이 없어."

"도망치면? 계속 그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게? 모처럼의 기회야. 자유의 몸으로 살 수 있는 기회라고."

"하, 하지만 이런 꼴로는...."

"우리는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 싸워왔잖아. 여기서 물러날 수 없어. 아틸라, 그걸 부탁해."

"...알겠어. 언니의 뜻이 그렇다면."

크루아의 말에 아틸라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녀들은 이단의 신을 섬기는 존재였지만,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인간은 신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신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인간을 고르는 것이지.

그런 의미에서 고대의 신에게 선택받은 두 자매의 운명은, 그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게 뒤틀리고 만 것이리라.

그래서 두 자매는 이 힘을 얻는 순간 결심했다.

어떻게든 아득바득 살아남아서, 행복한 삶을 쟁취하기로.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눈앞의 남자를 쓰러뜨려야 했다.

아틸라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오소서."

그 순간 무언가 박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던 아틸라가 몸을 활처럼 꺾더니 눈을 까뒤집으며 간질 환자마냥 바르르 떨었다.

오를레아 왕녀는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온다. 무언가 오고 있다.

아틸라의 머리 위.

그곳에 파칫, 소리와 함께 공간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공간의 균열을 비집고 자그마한 촉수 하나가 튀어나오나 싶더니, 삽시간에 크기를 불려 나가며 거대한 무언가로 탈바꿈했다.

중앙에 떠오른 것은 뒤룩거리는 커다란 눈동자.

그 눈동자를 중심으로 살덩어리들이 새끼줄처럼 꼬이고 뭉쳐지며 전반적으로 커다란 불가사리의 형상을 띄었다.

고대신의 살점 일부를 강림시킨 것이었다.

화신체의 등장에 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차가운 심해의 깊은 곳에 빠진 것처럼 숨을 쉬기 힘들어지고 피부에 오한이 돌았다.

간절한 부름을 받은 화신체는 눈알을 뒤룩거리며 오시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오시안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

화신체는 경악했다는 듯 동공이 작게 축소되었다.

64화. 뒤엉키는 흐름 (1)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크루아는 기이한 반응을 보이는 살덩어리의 모습에 당황했다.

눈알 달린 살덩어리는 그 끔찍한 외형에 걸맞은 힘을 지닌 존재였다.

고대신의 화신체.

비록 본신의 살점 극히 일부만 가지고 왔다고는 하지만 고대신의 힘을 지닌 존재다.

이 자리에 현현하는 것만으로도, 가장 뛰어난 감응력을 지닌 아틸라가 모든 힘을 소진한 것을 넘어 오랫동안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큰마음을 먹고 불렀는데 이 반응은 대체 뭐란 말인가?

꾸르르륵.

꿈틀거리는 촉수와 살덩어리의 사이로, 커다란 눈동자가 길을 잃은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자신의 적을 건방지다는 듯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어야 하는데 정작 겁에 질린 것은 본인이고 오시안은 어딘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쟤는 왜 표정이 저렇게 편안한데?'

보통 화신체를 마주하면 인간은 공포에 질려야 하는데 오시안은 편안하다 못해 오히려 눈을 빛내고 있기까지 했다.

오히려 화신체가 오시안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호오, 나를 알아보는 건가."

화신체의 반응에 오시안은 확신을 얻었다.

저 화신체는 자신을 알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내가 99회차를 끝낼 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지역 퀘스트를 클리어 한 적이 있었지.'

처음에야 화신체와 싸우는 것이 어려웠지, 99회차까지 갔으면 어렵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회차에 걸맞게 늘어난 화신체의 체력은 상당히 높았지만, 그 이상으로 높아진 이쪽의 공격력과 데미지, 컨트롤이 모든 것을 압살해 버렸다.

99회차에서 화신체와 싸우면서 오시안이 새롭게 달성한 기록은 최단기 노히트 클리어.

말 그대로 화신체를 상대로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그 어떤 유저들보다 가장 빠르게 잡은 것이다.

당연히 그때 싸웠던 화신체는 지금 눈앞에 나타난 놈과 동일하다.

오시안이 플레이 하던 99회차의 기억을 지닌 놈이라는 소리였다.

꾸르르르륵.

화신체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고는 해도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본체가 아닌, 힘의 일부를 지닌 화신체라 하더라도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았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인간을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던 고대 신이, 처음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사건이었다.

그런데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놈은 분명 세상의 말뚝을....

꾸르르륵.

촉수 다발이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었다.

겁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 괴물이 왜 여기에 있는 건데?

단순히 겉모습만 닮았다면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신체는 오시안을 보는 순간 그 내면에 담긴 힘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이다.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던 그 인간.

인간이면서 초월적인 힘을 선보이며, 검에서 천체의 힘을 뿜어내던 기사!

"흠?"

꾸르르릉.

오시안이 의아하게 반응하자 화신체는 간질에 걸린 것처럼 몸을 크게 떨더니, 이윽고 한 점으로 수축하듯 사라지며 역소환되었다.

말이 역소환이지 사실상 도망친 것이다.

크루아는 그 모습을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화신체가, 겁에 질려서 도망쳤어? 그것도 인간한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화신체를 소환하기 위해 막대한 힘을 소모한 여동생 아틸라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언니."

"아틸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화신체가 왜 갑자기...."

"그것이 엄청난 감정의 동요를 보였어."

아틸라는 화신체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것인지, 양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절대로 저 인간과 싸우면 안 된대."

"아틸라, 그보다 너 괜찮아? 화신체를 불렀는데도, 전보다 멀쩡한 거 같아."

"어?"

아틸라도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는지 의문을 표했다.

평소 그녀는 고대 신의 목소리 때문에 항상 신경쇠약에 걸려 있었다. 말을 더듬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심각할 경우에는 환각을 보기도 하고, 힘이 조절되지 않아 촉수가 멋대로 날뛸 때도 있었다.

그녀가 악의가 없었음에도 고등급 위험분자로 찍혀서 교도소에 갇힌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아틸라는 멀쩡했다.

머리는 맑았고 말도 더듬지 않았다. 평소 그녀의 몸 바깥으로 넘실거리려던 촉수도 오늘따라 유독 얌전했다.

몸 곳곳을 만져 본 아틸라가 눈물을 흘렸다.

"크, 크루아 언니. 나... 나 지금 되게 멀쩡해."

"아틸라...."

크루아는 자신의 여동생을 품 안에 꼬옥 안아 주었다.

고대 신의 힘 때문에 항상 괴로움을 달고 살던 여동생이었다.

지나치게 뛰어난 감응력과 재능은, 아틸라에게 힘과 함께 고통을 안겼다.

다른 신을 믿었더라면 성녀가 되었을 자질을 지녔음에도, 고대 신 때문에 티르나에서도 위험한 존재로 낙인이 찍혔다.

아틸라에게 괜찮을 거라 말하며 위로를 했지만, 고대 신의 힘을 지닌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던가.

"아틸라...!"

"언니!"

자매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았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더냐."

특히 오를레아 왕녀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찾아온 고대신의 추종자 자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끔찍한 사술을 사용하며 오시안을 궁지에 몰아세웠고, 최후의 수단으로 신의 살점 조각이라 할 수 있는 화신체까지 불렀다.

그때 오를레아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오시안이 강하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저건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는데, 그 은혜를 보답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마음 졸이고 괴로워했던가.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살덩어리의 화신체는 오시안을 보더니 꼬리를 말고 도망쳐 버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머리로 생각하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남자는 대체....'

그걸 뒤늦게 깨달은 크루아, 아틸라 자매도 오시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저 인간은 대체 뭐지?'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지금 불쾌함마저 느끼고 있어.'

오시안은 애매하게 끝난 상황에 내심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아쉽네. 한번 또 붙어 보고 싶었는데.'

화신체를 보는 순간, 한창 열심히 게임을 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컴퓨터 모니터 너머로 보이던 3d 그래픽 덩어리가 아닌, 실제 현실로 구현된 화신체다.

그 리얼한 징그러움에 약간의 압박감은 느꼈지만, 기사의 육체는 그 사소한 감정의 동요를 가볍게 억눌렀다.

남은 것은 격렬한 호기심.

수백 년이 지나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세상 속에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녀석을 다시금 마주했다.

녀석은 과연 예전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을까? 공격 패턴은? 현실이 됐으니 게임 시스템의 한계를 벗어나 더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아니면 못 보던 기술을 사용할지도 모른다.

게이머로서, 그리고 이 세상을 가장 좋아하던 한 명의 팬이자 고인물로서 도무지 확인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열망이었다.

그런데 화신체 녀석은 마치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줄행랑을 쳐 버렸다.

그 태도에서 느껴지는 명백한 당황스러움은, 오시안에게 놈은 자신이 아는 고대 신의 화신체가 맞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오시안의 시선이 크루아와 아틸라 자매를 향했다.

"읏."

"히익!"

두 자매는 서로를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오시안은 말없이 두 자매를 응시했다. 그 강렬한 시선에 크루아는 식은땀을, 아틸라는 눈을 뒤집고 혼절하기 직전까지 갔다.

"녀석을 또 부를 수 있나?"

오시안의 물음은 두 자매를 더욱 경악케 만들기 충분했다.

그 끔찍한 괴물이 떠났는데 안도하기는커녕 또 부를 수 있냐고 물어본다고?

혹시라도 또 소환할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감에 나온 질문이 아니라 정말 아쉬움에 어쩔 수 없이 물어보는 질문이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두 자매는 생각했다.

자신들은 지금, 정말 터무니없는 인간을 상대로 시비를 걸었다는 걸.

"됐다."

오시안은 고개를 픽 돌려 오를레아에게 다가갔다.

극한까지 달아오른 긴장감이 탁 하고 풀리자 크루아가 오시안을 향해 물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거야?"

발걸음을 멈춘 오시안이 고개만 살짝 돌려 답했다.

"그래."

"어째서? 우리는 너희들을 노렸는데...."

"공격에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크루아와 아틸라는 처음부터 오시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사용하는 기술이 외적으로 흉측해서 그렇지, 실제로 그 의도는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쪽에 가까웠다.

죽이려 들었다면 똑같이 대응했겠지만,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이었다.

그 이상으로 오시안은 그녀들을 건드리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한 감 같은 것이지만.'

하지만 이 감이라는 것을 우습게 여길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오시안은 그 판단을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즐거운 구경거리를 보여줬으니, 그 대가라고 생각하도록."

고대신의 살점으로 구현한 화신체를 고작 즐거운 구경거리라 부르다니.

그릇의 크기부터가 다르다.

대체 왜 저런 남자가 이런 도시에서 해결사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크루아와 아틸라 자매는 안도했다.

비록 이번 임무를 실패했으니 다시금 교도소에 갇히게 될지 모르지만,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어디인가.

고대신이 한 차례 물러난 덕분에 아틸라의 상태도 호전되었으니 크루아로서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언젠가 찾아올 자유를 위해서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안 되지. 안 돼.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떡하나?"

푸욱!

어디선가 날아온 날카로운 금속 창이 크루아의 등을 꿰뚫은 것은 그때였다.

"크학!"

"언니!"

아틸라는 기겁하며 크루아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창은 크루아의 급소를 빗겨나가 그녀의 날갯죽지만 뚫은 것에 그쳤지만, 얼마나 강하게 던졌는지 창날이 바닥에 못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어, 어떡해. 괜히 나를 구하겠다고...."

본래 창이 날아온 궤도에는 아틸라가 있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크루아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몸을 날린 것이었다.

"크, 크윽!"

크루아는 손으로 창대를 잡아 뽑으려 했지만 쉽게 뽑히지 않았다.

마력이 가득 담긴 창대는 자신의 힘을 억지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기습을 해?!"

크루아의 충혈된 눈동자가 뒤를 향했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대충 걸친 옷 위로 도드라지는 우람한 근육과, 짧게 친 탈색된 노란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을 X자로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까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곰을 보는 느낌의 남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크루아! 지금 이 꼴이 뭐냐! 마치 작살 맞은 오징어 같잖아!"

"볼라. 너 이 새끼!"

볼라라 불린 남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크루아의 모습을 잔뜩 흥분 어린 눈동자로 쳐다봤다.

"큭큭. 그래. 계집애는 그렇게 바닥에 처박혀 있으라고. 그게 어울리니까."

"너 미친, 거냐? 여기서 내분을, 일으킨다고?"

"내분? 언제부터 우리가 동료였지? 애초에 그 왕녀라는 년을 잡아 오거나 죽이는 것만이 우리 목적 아니었나?"

볼라의 시선이 오를레아에게 향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경쟁자라고."

맹수와 같은 그 눈동자가 샐쭉 휘어지며 포악한 빛을 흩뿌렸다.

볼라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거 보기 드문 상등품이로군. 어차피 죽일 건데 데려가기 전에 가지고 노는 것 정도는 해도 되겠지?"

그렇게 성큼 걸어가던 볼라는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오시안 때문이었다.

"엉? 너는 뭐냐?"

오시안은 꽤 장신이었지만 190이 넘는 볼라는 그런 오시안을 가볍게 내려다보았다.

"아, 네가 그 해결사라는 놈이로군. 설마 이런 순간에도 나서는 거냐? 꼴에 사내새끼라고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구만."

볼라는 웃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표정이 삽시간에 일그러지며 오시안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죽여주마!"

사람을 산 채로 찢어 죽일 수 있는 위력의 팔 휘두르기가 오시안의 머리에 닿기도 전.

콰앙!

오시안이 손으로 볼라의 얼굴을 잡은 뒤, 그대로 바닥에 먼저 처박아 버렸다.

"말이 너무 많아."

65화. 뒤엉키는 흐름 (2)

꽈드득!

볼라의 머리가 단단한 지면을 부수고 깊게 처박혔다.

박힌 머리를 중심으로 바닥에 거미줄 같은 금이 쩍쩍 갔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근육을 지닌 거구임에도 물구나무서듯 바닥에 머리가 박힌 광경은 어딘가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오시안을 향해 위험하다고 말하려던 크루아와 아틸라 자매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오직 오를레아만이 '그래도 이건 이해가 가는 수준이구나'하고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볼라를, 단 일격에?"

체급의 차이도 차이지만, 볼라는 겉모습에서 볼 수 있듯 강력한 힘과 근접전을 위주로 하는 괴물이었다.

그런 볼라가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그 찰나지간에 머리를 붙잡아 바닥에 메다꽂았다는 것은 오시안의 육체 능력이 볼라에 뒤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말이 많은 것치고는 지나치게 싱겁군."

얼굴에서 손을 가볍게 뗀 오시안은 손목을 털어내며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굳이 싸움의 경중을 둔다면 크루아, 아틸라 자매 쪽이 상대하기 좀 더 까다로웠다.

이쯤 됐겠지 싶은 순간 아직 창대에 박혀 있는 크루아가 소리쳤다.

"조심해! 놈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

크루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볼라가 움직였다.

두 다리로 지면을 굳게 디딘 뒤, 허리에 힘을 주어 머리를 그대로 뽑아냈다.

"이거 내가 아무래도 오해를 했나 보군. 방금 전의 일격, 꽤 매웠다. 해결사."

볼라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눈동자에서 포악한 적의를 빛냈다.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한 방 먹은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그 보답이라고 하기엔 뭣 하지만, 지금부터 전력으로 네놈을 찢어 죽여주마."

볼라는 몸에 걸친 양복의 외투를 거칠게 벗어 던지더니 전신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루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필이면 어중간하게 건드린 나머지 볼라의 심기를 자극하고 말았어!'

볼라는 사람을 산 채로 100명 넘게 찢어 죽인 희대의 살인마이자 학살자다.

변방의 자그마한 시골 마을을 도륙한 그의 과거는 당시 신문의 1면을 장식할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었다.

증언에 의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었으며, 현장은 그야말로 피와 시체로 가득했다고 한다.

범행은 금방 탄로 났고, 이후 볼라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르다가 사로잡혔다.

울루아즈 교도소에 갇히기 전 한 기자가 볼라를 향해 물었다.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왜 모조리 죽였냐고. 그들과 무슨 원한관계가 있는 거냐고.

그때 볼라가 했던 말은 상당히 유명했다.

-원한관계? 그런 건 없다. 나를 처음 본 그놈들은 오히려 내게 웃으면서 스프를 건네주었지. 단지 그게 이유일 뿐이야.

그 말을 들은 현장의 사람들은 말문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도 아니고, 웃으면서 먼저 따스하게 다가온 사람들을 그저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죽여버리다니 말이다.

볼라는 그런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볼라가 아직까지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그의 가치가 상당히 높기 때문이었다.

"보아라!"

볼라의 몸이 점차 거대해졌다.

원래도 거대한 그의 전신에 갈색의 털이 자라나고 주둥이가 길게 늘어났으며 우람한 양손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자라났다.

볼라를 응시하던 오시안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향했다.

어느덧 거대한 곰으로 변한 볼라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수인족?"

볼라가 보여준 모습은 수인족들이 사용한다는 야수화(野獸化)와 흡사했다.

하지만 오시안은 이내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야수화를 사용한다 해서 저렇게 덩치가 몇 배나 커지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오시안이 게임 속에서 본 수인족의 야수화는, 인간과 짐승의 형상이 절반씩 섞이며 체형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설마 뮤턴트인가?"

"호오. 눈썰미도 여간내기가 아니구만 그래."

볼라는 수인족이 아닌 인간, 그것도 뮤턴트였다.

뮤턴트로서의 그의 능력은 말 그대로 수인족과 같은 야수화를 할 수 있는 것.

체구가 커지며 근력과 체력, 근지구력 모든 것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두터운 가죽은 총알 따위는 쉽게 튕겨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도 가능하지!"

볼라의 양손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맺혔다.

오시안은 저것도 볼라가 뮤턴트로서 지닌 능력인가 유심히 지켜보았다.

"뭐 하는 거야! 피해!"

볼라가 팔을 휘두르는 걸 본 크루아가 외쳤다.

오시안은 공격을 막아내려고 했다가,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에 지면을 박차고 몸을 뒤로 뺐다.

볼라의 팔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고, 그 궤적을 따라 단단한 지면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볼라의 손톱이 닿지도 않았지만, 순수한 풍압만으로 저런 흔적이었다.

휘둘러지는 손의 궤적을 따라 푸른 기운이 잔상처럼 남았다.

오시안은 크루아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저게 대체 뭐냐고.

"볼라는 뮤턴트면서도 마나 유저야! 녀석과 근접전은 위험해!"

마나 유저?

오시안은 순간 그게 뭔가 했다가, 최근에 여러 일을 하면서 배운 지식 중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마나 유저. 본래 게임에는 존재하지 않는 케이스였지.'

게임 내에서 마나를 사용하는 직업은 마법사와 흑마법사뿐이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대부분 푸른색 MP게이지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 마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기사와 사제의 경우에는 신성력이라 할 수 있으며, 야만전사의 경우에는 선조의 힘, 냉기의 힘일 수도 있었다.

방랑기사인 오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기사가 다루는 힘은 오러라 부르는데, 오시안 다루는 건 오러 중에서도 가장 깊고 정순한 하늘의 힘이었다.

적어도 마법사와 흑마법사를 제외한 다른 직업이 마나를 다룬다는 설정은 게임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고, 마나를 다루는 사람도 새롭게 늘어났기에 따라온 변화겠지.'

볼라가 재차 팔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공격.

오시안은 잽싸게 옆으로 몸을 빼서 공격을 회피했다.

볼라의 곰 발바닥이 후려친 지면이 쿵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예전이었다면 마나를 다룰 줄 알면 마법사가 될 자질을 지녔다고 해서 마법사의 수제자로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마나를 다루는 자들의 숫자가 늘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차고 넘치는 수준이 된 것이다.

마나를 다룬다는 것이 마법사가 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던 것은 과거의 일.

더군다나 이 시대의 마법사란, 마나를 다룰 줄 알면서 고도화된 마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도, 뛰어난 암기력과 두뇌까지 갖춰야 했다.

마법을 구현하는 재능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일 마나를 다룰 줄 알지만,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이 지금의 '마나 유저'였다.

마법이 없어도 마나 자체가 지닌 순수한 힘은 그들을 일반인보다 강하게 만들었다.

육체의 강화, 근력 상승, 반응속도와 민첩의 극대화, 그 외에도 다른 효과까지.

오시안은 저것이 기사가 다루는 오러와 방식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엄연히 다른 힘이었다.

오러는 저런 껍데기만 사용하는 힘보다 훨씬 더 정순하고 파괴적인 것이었으니까.

"미꾸라지처럼 잘만 피해 다니는구나!"

볼라는 오시안을 계속해서 노리며 팔을 휘둘렀고 오시안은 회피에 전념했다.

강철조차 찢어발기는 손아귀가 넓은 공간을 압박하니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다.

거구의 덩치와 흉악하게 생긴 곰으로 변한 외모가 주는 압박감도 한몫했다.

볼라의 공격을 피하며 계속 뒤로 물러나던 오시안은 어느덧 벽까지 몰리게 됐다.

"더는 도망칠 곳도 없구나!"

마침내 사냥감을 몰이사냥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볼라는 희열을 느끼며 오시안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우선 내 머리를 처박았던 네놈의 그 한쪽 팔부터 잘라주마!"

푸른 마나를 머금은 앞발이 오시안의 팔에 닿으려는 순간.

번쩍!

별빛이 지상에 강림했다.

강력한 열덩어리로 이루어진 섬광이 치솟았고, 팔 하나가 잘려 나가 허공에 팽그르르 회전했다.

쿠웅!

먼지를 일으키며 지면에 떨어진 것은 억센 갈색 털로 뒤덮인 볼라의 왼팔이었다.

"크아아아악!"

뒤이은 볼라의 비명이 공터를 넘어 사방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팔뚝 아래 잘려 나간 단면으로 붉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대, 대체 방금 뭘 한 거냐!"

오시안에게 바닥에 처박혔을 때도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거야 자신이 방심했으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왼손이 날아간 경우는 달랐다.

뮤턴트로서의 능력인 야수화까지 사용하고, 더불어 양손에 마력까지 둘렀다.

3성 마법사가 쏘아낸 마법도 이 마력과 뮤턴트로서의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오시안의 검에서 일렁이는 저 별빛은 전혀 달랐다.

"대체 그 힘은 뭐냔 말이냐! 어떻게 내 마력을 저항도 없이 파고들 수 있는 거지?"

오시안이 휘두른 성광검은 볼라의 마력과 두꺼운 가죽, 억센 털, 질긴 근육, 강철처럼 단단한 뼈.

그 모든 것을 저항도 없이 부드럽게 가르며 베어냈다.

고작 저런 이쑤시개 같은 검 한 자루가, 자신이 지닌 힘보다 더 강하다는 말인가?

볼라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크와아악!"

볼라는 눈을 까뒤집으며 멀쩡한 오른팔을 휘둘렀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팔이 다가오는 타이밍에 맞춰 성광검을 휘둘렀다.

서걱!

허공에 그어지는 백색과 연푸른색이 혼합된 불길.

볼라의 오른팔이 이번에는 어깻죽지부터 주욱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세상에."

겨우 창대를 뽑아낸 크루아는 상처를 지혈하며 멍하니 그 광경을 응시했다.

그 볼라를, 마나 유저이면서 뮤턴트이기까지 한 괴물을 상대로 오시안은 유리하다 못해 압도적이었다.

'나는, 저런 것과 싸워서 생포를 하겠다고 한 거야?'

얼마나 터무니없는 상대에게 시비를 걸었는지 깨달은 크루아는 목숨이 붙어 있다는 지금에 감사하게 됐다.

"크워어어어!"

양팔이 잘려 나간 볼라는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쟁이마냥 뒷걸음질을 쳤다.

오시안은 그런 볼라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저벅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행동은 무방비하기 그지없었지만, 오른손에 쥔 검에서 이글거리는 별빛은 전혀 달랐다.

계속 뒷걸음질을 치던 볼라가 이번에는 역으로 도망칠 곳을 잃고 벽에 등을 부딪치고 말았다.

"으으!"

볼라는 두려움에 몸을 떨더니, 오시안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에 맞춰 입을 쩌억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곰의 아가리 안쪽에서 푸르스름한 마력이 맺혔다.

"죽어!"

고함과 함께 내질러지는 것은 마력을 담은 포효였다.

근거리에서 맞을 경우, 철갑을 입은 사람도 그 자리에서 분쇄시켜 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서 머리를 들이밀어 주니 편하군."

서걱.

성광검은 너무나도 가볍게 마력 포효를 반으로 가르며 볼라의 목을 훑었다.

볼라의 눈동자가 탁하고 풀리더니, 머리가 스르륵 하고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머리를 잃은 곰의 육신이 바닥에 쿵 하고 쓰러지며 뮤턴트화가 해제됐다.

자리에 남은 것은 인간이었던 볼라의 시체뿐.

볼라를 처리한 오시안은 오를레아를 데리고 자리를 뜨고자 했다.

그 순간 오시안의 직감이 찌르르 하고 울리며 경종을 울렸다.

촤아악!

오시안의 등 뒤로 새하얀 망토가 펼쳐지더니 고치처럼 그 몸을 에워쌌다.

근처의 건물 옥상에서 빛이 번쩍인 것은 그때였다.

꽈르르릉!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엄청난 전하의 폭풍이 성운비단을 때렸다.

번개는 한 번만 내리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대기를 가로지르는 번개는 이 새하얀 알을 완전히 부수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를레아 왕녀는 눈을 부릅떴다.

저 정도의 번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기억하기로 몇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왕녀님, 이런 곳에서 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오를레아 왕녀로서는 전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골목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의 곁에서 자신의 콧수염을 매만지는 드뷔에 후작은, 오를레아 왕녀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너저분하고 위험한 곳까지 도망치시다니. 이러다 왕녀님의 옥체에 상처라도 입으면 국가적 손실이 아닙니까."

"드뷔에 후작...."

오를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드뷔에는 이제 오를레아에게 가식의 가면조차 쓰지 않았다.

"하여간 사람 애먹게 하는 데는 도가 텄군. 그러게 고통 없이 보내 주려 했을 때 갔어야지. 네깟 것 하나 살겠다고 주변 놈들이 대체 얼마나 죽어야 하는 거지?"

"나, 나는...."

"그 비참한 인생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면 기쁜 얼굴로 웃으면서 죽었어야지."

오를레아 왕녀를 노려보는 드뷔에 후작의 눈동자에 경멸과 조소가 번들거렸다.

"네 유모가 죽기 전에 그러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나?"

"...!"

오를레아는 눈을 부릅떴다.

왕위 계승권 최하위이며, 주변에 지지 세력이 없던 오를레아에게도 유일하게 믿음을 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보살펴 온 그녀의 유모.

하지만 유모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자신이 섬기는 오를레아 왕녀를 시해하려는 혐의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것은 거짓이었다. 오를레아를 아끼는 유모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었다.

"뭐야. 설마 아직도 몰랐던 거냐? 하하하. 이거 참. 죽기 전에 좋은 사실 하나 알고 가는군. 뭐, 그냥 선물이라 생각해 둬."

오를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드뷔에 후작의 조롱보다도 그의 말에 화조차 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유모는 살 수 있었을까?'

유모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검을 쥔 오시안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나 때문에.

내가 괜히 살아남으려 해서.

"내가, 죽었어야 했어."

오를레아의 양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완전히 꺾여 버린 오를레아를 본 드뷔에가 직속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뭐 하고 있는 거냐. 어서 끝내지 않고."

마법사는 계속해서 오시안을 향해 번개를 내리치고 있었다.

가지고 놀기라도 하는 건지 여전히 마법을 사용하는 그를 다그치는데, 정작 돌아오는 반응이 의외였다.

"이봐. 뭐 하는 거냐고!"

드뷔에 후작은 그제야 마법사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가득하다는 걸 눈치챘다.

마치 목표로 했던 적이 아직도 죽지 않은 것처럼.

오히려 마법을 사용하는 자신의 마력이 조금씩이지만 바닥을 보이고 있어서, 조바심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설마?

드뷔에 후작의 시선이 오시안의 몸을 감싼 새하얀 고치를 향했다.

번개가 그쳤다.

마법사는 숨을 헐떡이며, 허리춤의 파우치에서 푸른 포션을 꺼내 그걸 마시려 했다.

그 순간 새하얀 고치의 실타래가 풀리며 안쪽에 있던 오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컥.

발걸음을 내딛는 소리에 금속음이 울린다.

화르륵.

대낮이라고는 하지만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에 새하얀 빛이 감돌았다.

새하얀 불길로 이루어진 전신 갑주를 입은 그것은, 동화 속에서 볼 법한 기사님이었다.

공주님이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서 구해 준다는.

별빛의 기사 말이다.

얼굴까지 완전히 가리는 투구의 속에서 오시안의 눈동자가 청명한 빛을 흘렸다.

[성광갑주(星光甲冑)]

FULL ARMOR.

"너희가 마지막이 맞나? 아니, 그걸 따질 필요도 없겠군."

투구 안쪽의 안광이 강하게 타올랐다.

"전부 다 끝내주마."

66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1)

침묵이 맴도는 곳에서 오직 오시안의 발소리만이 유일하게 울려 퍼졌다.

기사다.

그것도 흔히 왕가에서 작위를 받고서 예장용 검을 쥔 기사가 아닌, 옛이야기에서 볼 법한 정통파 기사.

세련된 디자인의 새하얀 전신 갑주와 투구. 그 안에서 흐르는 푸른 안광.

어깨 아래로 펄럭이는 새하얀 망토는, 그 안쪽 안감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밤하늘의 은하수를 그대로 잘라와 펼치기라도 한 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손에 쥔 은빛의 장검 위로 은은한 흰색 불길이 아른거렸다.

그 광경에 상황을 지켜보던 모두가 압도되었다.

오를레아 왕녀를 죽이려던 드뷔에 후작도, 마법을 쏘아낸 마법사도, 스멀거리는 자매도, 멀리서 볼라의 죽음을 구경하며 눈치를 보던 교도소의 범죄자들도.

철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시안이 주저앉은 오를레아의 곁에 섰다.

오를레아는 오시안의 모습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두거라."

"...."

"그대의 힘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대로 끝난다 한들 그다음에는 더한 놈들이 몰려올 거다. 아무리 그대라 하더라도 버티지 못하겠지."

오를레아는 생각했다.

어째서 주변 사람들이 죽게 되는 건가.

그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됐다. 누군가와 인연을 맺으면 안 됐다.

아니, 애초에 태어나서도 안 됐던 것이다.

"짧게나마 그대 덕분에 삶을 더 이룰 수 있었다. 본래 나의 것이 아니었던 운명이었는데 큰 선물을 받은 셈이지. 그러니 이만 되었다."

오를레아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더해졌다.

"그 이상 해버리면, 나는... 염치 불고하고 또 살고 싶어지고 만다."

자신이 살면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

죽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오를레아의 뇌리로 마지막에 스치는 것은 자신을 향해 걱정 말라며 웃어 보였던 유모의 모습이었다.

오시안은 그런 오를레아를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오른손에 쥐어진 검을 응시했다.

극한의 상황까지 몰리며 감각이 극도로 예리해진 순간, 오시안이 떠올린 것은 하나의 활로를 여는 가능성이었다.

"살면 되지 않나."

"그게 무슨...."

오를레아는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동자가 오시안의 투구를 향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단순히 생각 없이 나온 말인지 그 의중을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싫다니. 그것이 마치 본인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그 태도가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군."

오시안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그게 왜 그쪽의 잘못이지? 죽인 놈들의 잘못 아닌가."

성운비단 속에서 오시안은 바깥의 대화를 전부 엿들었다.

극도로 예민한 청각은 천둥소리 너머에서 드뷔에 후작이 지껄인 말을 선명히 잡아냈다.

그래서 오시안은 오를레아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 나는...."

"아니면 여기서 살아남은 이후가 두려운가?"

정곡을 찌르는 말에 오를레아가 입술을 다물었다.

사실은 두려웠다.

이곳에서 아득바득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더욱 가혹한 왕실의 환경일 테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화가 나지도 않나?"

"난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고 죽음을 택한다고? 너를 위해 죽은 사람들이 과연 그걸 원할까?"

"그건...."

"내가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니 잘은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들이 너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 같군."

뒤이은 오시안의 말은 오를레아의 어깨를 흠칫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살아 남으라고."

-왕녀님. 꼭 살아주세요.

인자한 얼굴로 웃으면서 자신의 손을 꼬옥 쥐여 주던, 유모의 거칠고 따스한 손길이 문득 피부 위로 아른거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도.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오시안은 검을 들고 정면을 응시했다.

정신을 차린 드뷔에 후작이 주변 사람들을 닦달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대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봤거든."

오시안은 오를레아 왕녀를 데리고 피신하면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폈다.

겉으로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보다 깊은 내면에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졌다.

오시안은 알았다. 오를레아 왕녀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 죽어갔는가.

이 여자는 억지로 얼마나 많은 삶을 떠안았는가.

그러니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닌 척하면서도, 살기 위해서 희망을 꿈꾸는 얼굴을."

멀리서 마법사가 마력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드뷔에 후작의 부하들이 각기 총을 꺼내 이쪽을 겨누었다.

마법사와 총기병의 조합. 숫자는 대략 40명.

그것을 상대하는 것은.

갑옷과 칼 한 자루를 쥔 기사 한 명뿐.

무기도, 머릿수도, 환경도 불리하다.

애초에 싸움 자체가 성립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오시안은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보여 주도록 하지."

살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오시안이 검을 쥐고 자세를 낮췄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드뷔에 후작의 입이 무언가 외쳤다.

입모양을 보건데 '쏴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당겨지는 방아쇠와 불을 뿜는 총구.

총알의 방향은 오시안과 오를레아를 향해 있었다.

오시안은 그걸 보고서 지면을 박찼다.

그의 몸이 대포처럼 정면으로 주욱 쏘아졌다.

사선으로 피해서 움직인다거나 할 수 없었다.

그의 뒤에는 오를레아 왕녀가 있었다.

여기서 총알을 피하면 죽는 것은 그녀가 될 터.

성광갑주.

오시안은 별빛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백색의 갑주를 믿기로 했다.

날아오는 총알의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총기가 아닌, 군부가 사용하는 특수개량 총기라 그 위력이 사뭇 남다른 물건이다.

오시안은 그것을 보고도 멈칫하거나 피하려 들지 않았다.

선택한 것은 우직한 돌진.

총알이 갑주 위에 닿는 순간.

티티티팅.

총알은 갑주를 이루는 기묘한 힘에 밀려 부서지거나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성광갑주는 외압에 절대로 굴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날아오는 총알을 맞고도 멀쩡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빛났다.

"뭐, 뭣들 하는 거야! 계속 쏴!"

드뷔에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총구가 쉬지 않고 불을 뿜었고 오시안의 갑옷 위를 소나기처럼 두드렸다.

오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황소처럼 노도와 같은 기세로 거리를 좁히는 그때 마법사 부대가 준비한 마법을 발동했다.

번쩍!

허공에 맺히는 마력과 함께 눈부신 빛이 폭발, 강력한 전기가 오시안을 향해 일자로 쭈욱 쏘아졌다.

오시안은 달리는 자세 그대로 성광검을 들어 번개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푸른 전류가 새하얀 불길과 맞닿는 순간 물에 녹아 사라지는 소금처럼 와해되어 흩어졌다.

마치 방금 전 마법이 신기루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파지직 거리며 허공에서 꿈틀대는 실지렁이 같은 잔여 전류만이, 방금 전 마법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어, 어떻게 검으로 마법을...."

마법을 펼친 마법사 당사자와 주변 보조 마법사들의 표정이 아연했다.

오시안은 그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어떠한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오시안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었고.

기사가 지녀야 하는 덕목이었다.

돌파.

마침내 지척까지 접근한 오시안이 적의 전열과 충돌했다.

선두에는 자신의 덩치만 한 커다란 방패를 쥔 보병이 가로막았지만, 전신갑주를 한 오시안의 돌격은 막지 못했다.

오시안의 등 뒤로 나폴거리는 망토가 날개처럼 펼쳐져 새하얀 고리(Ring)를 만들었다.

지이잉하는 소리와 함께 명멸하는 고리가 오시안의 등을 떠미는 거대한 가속을 선물했다.

콰지직!

방패는 성광갑주에 닿기 무섭게 으스러졌다.

오시안은 그야말로 전차나 다름없었다.

전열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휩쓸리며 우수수 튕겨 나가 사방을 뒹굴었다.

그럼에도 오시안은 멈추는 일이 없었다.

[마나 프로텍션(mana protection)]

방어마법이 펼쳤다.

마법사들이 합공해서 펼친 방어마법은 오시안의 손에 죽은 볼라라 하더라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하지만 오시안은 그런 방어마법진 위에 달리는 자세 그대로 어깨를 냅다 들이박았다.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오시안을 비웃으려는 순간.

쩌어엉!

방어마법이 크게 울리며 주위로 먼지가 푸스스 일어났다.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이 자신의 몸을 울려 속이 진탕되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멈췄으니 됐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은, 직후 금이 가는 마법진을 보는 순간 바뀌고 말았다.

쩌적. 쩍.

거미줄 같은 금이 가는 마법진이.

이윽고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맨몸으로 우리가 펼친 마법진을 부순다고?"

"이건 마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마법진과 충돌하면, 보통은 부딪친 쪽이 피범벅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현실은 그 반대.

부서진 것은 마법진이었고, 오시안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싸아아아.

얼굴을 거린 백색 투구 안쪽의 검은 틈새에서 청색 안광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은 등골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여기서 또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했지만, 오시안이 보여 준 퍼포먼스가 너무 압도적이라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겁에 질린 양 떼의 사이로 코뿔소가 들이닥친 격이었다.

오시안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지면에 깊은 족적을 남기다 못해 금을 쩍쩍 가게 했다.

노도와 같은 질주에 휩쓸린 마법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오를레아는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장엄한 광경이었다.

동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은 기사님이 적진을 홀로 질주한다.

굽히지 않고, 멈추지 않으며, 끝내는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저것이... 기사."

오를레아는 기사가 무엇인지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돌파하는 자이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자다.

이 순간 오를레아 왕녀의 가슴 깊은 곳에 꺼져 있던 장작의 불씨가, 별빛의 힘을 받아 화륵 타올랐다.

투쾅!

최후에 드뷔에 후작의 직속 마법사가 쓰러지면서 상황은 삽시간에 정리됐다.

오시안은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을 살폈다.

드뷔에 후작만 보이지 않았는데, 자신이 돌진하는 걸 보자마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친 것이다.

타이밍을 보니 위험하다 싶어서 눈치채고 빠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오시안의 모습이 무서워서 도망친 것.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군. 설마하니 이렇게 바로 빠질 줄이야.'

오시안은 드뷔에 후작을 쫓을까 싶었지만, 그 생각을 접었다.

여기서 호위 대상인 오를레아를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선.'

오시안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어딘가 피부를 훑는 기분 나쁜 감각. 시선에서 이쪽의 수준을 가늠하려 드는 불순함이 느껴졌다.

거기에 은근하게 느껴지는 흉악한 기운까지.

크루아와 아틸라, 볼라와 같이 울르아즈 교도소 출신의 범죄자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놈들도 눈치는 있는지 오시안을 향해 달려드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아마 볼라가 내 손에 죽은 것을 알기 때문이겠지.'

거기에 더해 성광갑주를 두르고 맨몸으로 마법사부대를 부숴 버렸는데 그걸 보고도 싸우겠다고 오면 바보인 걸 인증하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텐데.'

군부가 풀어 놓은 흉악범들은 오를레아 왕녀를 죽이는 것으로 사법거래를 받아냈다.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금 그 가혹한 교도소에 처박혀야 할 테니 놈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를레아를 노릴 터.

'그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불안한 요소를 제거하는 게 맞지만.'

오시안은 흉악범 몇 놈이 있는 곳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

"봤어?"

"그래. 놈이 우릴 포기했군."

비쩍 마른 50대 중반의 음울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와, 등 뒤에 다용도 기계 팔을 단 30대 중반의 사내가 쌍안경에서 손을 뗐다.

"애초에 이쪽을 못 본 거 아니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볼라를 쓰러뜨린 놈이니 경계해서 나쁠 건 없지."

"하아. 저런 놈과 싸우라니. 솔직히 나는 그런 걸 원치 않은데."

볼라를 단칼에 베어 버린 놈과 싸우라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는 게, 이미 그들의 몸에는 위치 추적기가 심어 있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군부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그거야 어떻게든 몸 안의 추적기만 제거하면 된다는 소리지만.'

일단은 오를레아 왕녀를 노리는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때 뒤에서 섬찟한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언제부터인지 두 명의 여인이 자신들의 뒤에 서 있었다.

"대체 언제?"

그중 50대 중년인은 상대를 알아보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알렌시아 헤어."

티르나의 위병,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전력인 집행관의 칭호를 지닌 여인.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울르아즈에 사로잡힌 것도 알렌시아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분노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알렌시아는 그야말로 만전이었다.

특히 두 다리에 착용한 각반.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금속 재질의 검은 부츠 같기도 한 저것은 알렌시아 헤어가 지닌 특수한 무구인 아크 파츠였다.

하지만 그런 알렌시아보다 더 경계되는 대상이 있었다.

그야말로 흰색. 피부도 머리색도 입고 있는 의복도 다 하얗다.

그 아름다운 모습은 너무나도 미려해서 오히려 이질감이 들 정도.

더 이상한 건, 저 백색의 여인은 지금 자신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대체 어디를?'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

그곳은 저 멀리 떨어진, 오시안이 있는 곳이었다.

백색의 여인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드디어 찾았어, 나의 그분."

그녀의 눈이 황홀하다는 듯 샐쭉 휘었다.

67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2)

알렌시아 헤어는 뺨을 발그레 물들인 흰 여인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구장님께서 함께하라고 보낸 조력자이기는 하지만, 신원미상에 능력이 어떤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못 미덥군.'

집행관인 자신을 못 믿어서 동행자를 보냈다는 사실. 딱히 그것에 대한 불만은 아니다.

굳이 불만을 짚어내라면 이 흰 여인이 보여 주는 태도에 있으리라.

'흉악한 범죄자를 눈앞에 두고도 한눈을 팔다니. 내가 지켜 줄 거라 믿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가?'

그나마 추측을 해보자면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풍겨오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은, 그녀의 감각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알렌시아와 마찬가지로 흰 여인의 비범함을 알아차린 것은 사법거래 흉악범들이었다.

특히 나이 지긋한 중년인은 흰 여인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오싹함에,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도망쳐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알렌시아 헤어도 위험하지만, 특히 저 새하얀 여자는 더 위험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흰 여인은 지금 범죄자인 그들을 눈여겨보지 않고 있다.

황홀해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저 너머, 방금 전까지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현장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아아.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혹시나 싶어서 찾아오길 정말로 잘했어."

당장이라도 기뻐서 뛰쳐나갈 것 같던 흰 여인은 이내 이성을 되찾았는지 고개를 저었다.

"뵙고 싶지만, 이런 미숙한 상태로 찾아가면 오히려 그분께 민폐일 뿐."

그 대신으로나마.

그 뒷말을 중얼거린 흰 여인의 시선이 마침내 두 범죄자에게 닿았다.

퍼어엉!

허공에 검은 독안개가 터졌다.

음울한 인상의 남자가 발동한 흑마법으로, 3성급 흑마법인 [부패의 숨결]이었다.

넘실거리는 검은 안개를 본 30대 중반의 기계공이 눈치껏 행동에 들어갔다.

그의 등 뒤에 달린 기계팔의 손날이 활짝 펼쳐지더니 프로펠러처럼 변했다.

부와아앙!

날이 빠르게 회전하며 거친 바람을 일으켰다. 검은 독안개가 흰 여인과 알렌시아 헤어를 향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피하십시오!"

알렌시아 헤어가 경고하며 물러났지만, 흰 여인은 그때까지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알렌시아가 그 모습을 보며 어쩌려고 저러는지 의아해하려는 순간이었다.

"주변 버러지 정도는, 직접 이 손으로 제거해야겠지."

작게 중얼거린 흰 여인이 독 안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기운이 독안개를 향해 쏘아졌다.

너무나도 작고 여리해 보이는 기운이었지만, 독안개는 그것에 닿기 무섭게 새하얀 빛으로 변하며 가루처럼 사라졌다.

독 안개 너머에서 도망치려던 두 범죄자들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새하얀 기운은 허공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2개로 갈라지며 각기 하나씩 범죄자들을 노렸다.

"당할 것 같냐!"

그들은 괜히 울르아즈 교도소에 갇힌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각기 방어에 나섰다.

흑마법사가 흑마력을 끌어 올리자 그의 몸을 보라색 갑옷이 뒤덮었다.

흑마법 계파 중 하나인 저주술에서도 손꼽히는 난이도의 [포이즌 아머]였다.

기계팔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등에 달린 팩에서 다른 기계팔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팔 끝에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오며 새하얀 기운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범죄자는 자리에서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알렌시아 헤어가 황급히 다가가 둘의 상태를 살폈다.

'죽었다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순간적이나마 이해를 하지 못했다.

두 흉악범은 흰 여인에게 저항을 하기 위해 각자 기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새하얀 기운은 마치 허깨비처럼 둘의 저항을 무시하듯 몸에 닿았고.

'그리고 죽었다고? 이렇게 상처도 없이?'

흉악범들이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정작 이 일의 당사자인 흰 여인은 돌멩이 정도를 치웠다는 듯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꼭 죽일 필요가 있었습니까?"

알렌시아가 흰 여인을 보며 물었다.

이렇게 바로 죽일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면,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귀찮다는 듯 바로 죽였다는 점에서 저 흰색 여인의 인간성이 의심이 갔다.

"응?"

알렌시아가 설마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흰 여인이 의아하게 반응했다.

"왜 그러는 거야? 어차피 죽일 대상이었잖아. 흉악범이라면서."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일단 사로잡는 것이 우선입니다.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교도소에서 나왔다는 것은 누군가와 거래를 했다는 소리니까요."

뒷배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사로잡아 심문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지였다.

그 말에 흰 여인이 흥미롭다는 듯 황금색 눈동자로 알렌시아를 응시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왜...."

"굳이 심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까. 이번 일에 끼어든 군부잖아?"

"군부라 하더라도 범위가 넓습니다. 그 모두가 공범이라 할 수는 없죠."

"어차피 군부를 쑤시면 놈들이 알아서 내부에서 징계할 놈을 쳐 낼 거야. 정확히 누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는 관심 없다는 거지."

"만일 군부가 연관되어 있다면, 어차피 이들은 도주하지 못했을 겁니다. 군부에서 몸에 폭탄을 심어 놓았을 테니까요."

"그렇겠지. 흉악범들의 뭘 믿고서 일을 맡기겠어. 하지만 거기 두 녀석은 아니야. 자기들끼리 이미 폭탄을 해제했거든."

알렌시아가 눈을 부릅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무래도 거기 있는 그 기계공 짓 같은데, 이렇게 벌레들이 활개 치는 걸 놔둘 바에야 발견한 즉시 죽이는 것이 훨씬 나아. 물론 나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유에 가깝지만."

그렇게 말하며 흰 여인은 다시금 뺨을 발그레 붉히며 한 곳을 응시했다.

알렌시아는 그제야 흰 여인이 대체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시안이라고 했던가? 그 해결사.'

흰 여인은 오시안의 모습을 황홀한 눈빛으로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알렌시아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구장님이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이, 대체 왜 오시안에게 저런 호의적인 행동을 보인단 말인가.

'첫 만남 때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역시 뭔가 숨겨진 것이 있는 남자였나.'

알렌시아는 당장 드는 의문을 접기로 했다.

우선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교도소를 탈출한 흉악범들을 사로잡는 일이었으니까.

*

오시안은 멀리서 느껴지는 시선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시선 자체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뭔가 미묘했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나를 적대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무시하는 게 낫겠지.'

오히려 이쪽을 노리려던 다른 흉악범들을 대신 처리해 준 걸 보면, 잠재적인 아군이라 봐야 했다.

오시안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언제 새로운 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지금은 오를레아를 데리고서 이 자리를 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고마워."

상처를 빠르게 회복한 오시안에게 장녀 크루아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저 빌어먹을 볼라 녀석에게 죽었겠지."

"딱히 너희를 돕기 위함이 아니었다."

"알아. 그래도 도움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야. 나중에 이 빚은 꼭 갚겠어."

"너희는 붙잡힌 몸이 아니었던가?"

오시안의 물음에 크루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손에 쥔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피가 묻어 있는 그것은 자그마한 폭탄이었다.

"우리 몸에 심어진 폭탄이지. 우리 말고도 다른 녀석들 전부도 마찬가지야."

"그냥 풀어 주면 위험하니 놈들도 나름의 보험을 들인 것이었군."

"맞아. 하지만 나와 아틸라는 달라. 이런 것 정도, 얼마든지 꺼낼 수 있지."

아틸라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펑퍼짐한 치맛자락 아래로 촉수의 끝부분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니, 오시안은 어떻게 꺼냈냐고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아무튼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

"...감사해요."

아틸라도 쑥스럽게 오시안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크루아와 아틸라 자매는 그 말을 남기고 근처 하수구 뚜껑을 열더니 아래로 사라졌다.

오를레아가 그 모습을 보며 질색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잘도 저런 지저분한 곳을 갈 생각을 하는구나."

"뭘 그런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지?"

"응?"

"우리도 간다."

오를레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자, 잠깐만. 그대,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뭘 말이지?"

"정말로 더 냄새나고 더러운 하수구로 가겠다고? 왕녀인 나를 데리고?"

"방금 전 싸움으로 시선을 너무 끌었다. 이대로 시간을 벌려면, 최소한 건물 위에서 포위당하는 일은 벗어나야 해."

그래서 내린 선택지가 바로 지하수로였다.

미로처럼 복잡한 지하수로라면 최소한 적들을 마주쳐도 습격의 범위를 좁힐 수 있었으니까.

"차라리 이대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이 맞지 않나."

"앞으로 찾아올 놈들이 꼭 이쪽에 호의적인 지원군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시안은 멀리서 느껴지던 시선을 떠올렸다.

이쪽에 대해 호의적인 기색은 있었지만 지켜보기만 할 뿐 따로 접근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완전한 아군은 아닌, 관조자의 입장이라는 소리였다.

"오히려 아군이라고 여기며 경계심을 풀었다가 기습을 당하면 그때는 어쩔 생각이지?"

"그건...."

그대가 또 지켜 주면 되지 않은가.

오를레아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염치가 없기도 했지만, 오시안의 지적대로 자신이 너무 긴장이 풀어진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살아야 한다. 그보다 중요한 건 없지. 아무리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 처박히더라도 사는 것이 우선이다. 그걸 잊지 않았을 터."

"...이해했다. 내 생각이 짧았구나."

지금 오를레아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군부가 적으로 돌아섰으며, 그들과 결탁한 일부 위병들도 마찬가지다.

그녀와 함께 온 왕국의 사절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의심을 해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저들의 손아귀가 뻗쳐 있는지.

'어차피 이 싸움은 이쪽이 버티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다.'

그리고 오를레아가 여기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흑발의 남자.

오시안이었다.

"들어가지. 죽을 만큼 싫지만 말이야."

"아마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다."

오시안은 스멀거리는 자매가 사라진 맨홀 뚜껑을 발로 가볍게 툭 차서 열었다.

보통 저런 맨홀 뚜껑은 함부로 열지 못하게 무게가 100kg이 넘는다.

그것을 발로 가볍게 툭 차서 열어 버린 점에서 오시안의 괴력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그런 소박한 지식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 오를레아는 열린 구멍 아래의 검은 어둠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하더라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장소에서 좋은 음식과 좋은 옷만 입었던 그녀다.

이런 냄새나는 골목길, 그보다 더 지저분한 지하수로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가야겠지.

오를레아는 오시안을 향해 조막만 한 손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눈썹을 치켜떴다. 이내 그녀의 손을 잡아 공주님처럼 안아 주었다.

"간다."

"...."

오를레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안은 곧바로 오를레아를 데리고 구멍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약간의 부유감과 함께 지하수로에 도착한 오시안은 생각보다 악취가 심하지 않다는 사실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크루아와 아틸라 자매는, 먼저 가 버린 건가.'

그쪽도 쫓기는 처지니 이런 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은 없으리라.

"괜찮나?"

"으윽. 뭐, 뭐. 생각보다 버틸 만은 하구나."

오를레아는 그래도 이런 환경이 익숙하지 않은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히려 멀쩡해 보이는 오시안을 보며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자못 고귀해 보이는 사람일진데, 이런 무감각한 반응이라니. 이런 환경이 익숙하기라도 하다는 걸까?'

어쩌면 오시안은 겉모습과 달리 무수한 풍파를 넘어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오를레아는 더욱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오시안에게 더는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두 사람은 지하수로를 걸었다.

처음에 힘들어하던 오를레아는 점차 악취에 적응이 됐는지, 이제는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지하수로를 구경하고 있었다.

"신기하구나. 티르나는 모든 것이 발달한 도시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지하수로라는 것도 이렇게나 크고 방대하게 지을 수 있다니."

지하수로라 해서 그냥 물이 흐르는 수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이 통하는 것은 기본이고 곳곳이 커다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고 절벽처럼 깎아지는 구역이나 3차원 미로처럼 변하는 곳도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는 곳.

이쯤 되면 지하수로가 아니라 지하미로라 불러야 할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메아리 소리.

금속이 울리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가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오를레아는 어째서인지 전신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대. 들었나?"

"흠. 아무래도 뭔가 있는 모양이군."

지하에 커다란 악어라도 사는 걸까.

오시안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제삼자가 끼어들며 말을 걸었다.

"근처에 사는 흔한 괴물일 뿐입니다. 너무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에 오를레아는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애초에 그 기척을 느끼고 있던 오시안은 무심한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얼굴에 역병의사 방독면을 쓴, 짙은 갈색 코트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68화. 지하지기

"네놈은 누구냐."

오시안이 날 선 반응을 보이자, 역병의사 가면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은 싸울 의도가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렇게 노려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적이 아니니까요."

"그걸 어떻게 믿지?"

"그랬다면 기습을 가했겠지, 이렇게 대놓고 여러분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오를레아가 오시안의 등 뒤로 숨으며 그의 코트자락을 손으로 꼬옥 쥐었다.

그 모습에 역병의사 가면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아무래도 제가 의도치 않게 자극을 한 모양이군요. 흐음.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무사히 이곳을 탈출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길? 그게 무슨 소리지?"

"티르나의 지하수로는 미로처럼 복잡합니다. 단순히 2차원적인 것을 넘어 공간이 위와 아래로도 퍼져 있어 3차원 미로를 연상케 하죠. 함정도 있고, 절벽도 있고, 또 하수구 속에는 무서운 괴물이 살기도 합니다. 또 의도치 않게 '경계'를 넘으면, 아래쪽 거주민들이 예민하게 반응하거든요. 제가 길잡이가 된다면 두 분은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으실 겁니다."

"네놈이 누구인데 그러지?"

"자기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지하지기라고 합니다."

"지하지기라니. 특이한 이름이구나."

오를레아의 말에 지하지기가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재밌으시군요. 물론 이건 제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지하지기는 제 역할의 호칭일 뿐이죠."

"...."

오를레아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었다.

"모르시겠지만 티르나의 지하는 거대합니다. 방금 전 말했다시피 거주민들도 존재하거든요."

"거주민?"

"시궁창 협회, 폐수처리단, 유해청소부. 꽤나 다양하게 있죠, 이곳에도 나름의 사회가 존재하며 생각보다 방대하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지하지기를 맡고 있습니다. 외부의 침입자를 발견해 위협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혹은 길 잃은 자를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 주기도 하는 역할이죠."

지하지기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어깨에 얹고, 다른 손은 뒷짐을 지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를레아 왕녀님과, 그 유명한 오시안 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지하지기는 소식에 귀가 밝은 편입니다. 위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누구보다도 예민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래서 어지간한 상황은 다 꿰차고 있다고 봐도 좋죠."

지하지기는 손가락으로 지상을 가리켰다.

"물론 지금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 우리를 돕겠다고?"

오를레아가 경계심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당장 오를레아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해합니다. 왕녀님께서는 현재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 오시안 님을 제외하면 주변에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시니 제가 의심스러울 만도 하시겠죠. 하지만 반대로 저는 왕녀님을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왜지?"

"애초에 티르나의 지상과 지하는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거든요. 지상에서 어지간한 일이 벌어져도 지하까지 영향을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들은 언제나 철저한 '중립'의 위치에 있죠."

"중립이라면 우리에게 잘 대해 줄 필요도 없을 텐데?"

오를레아의 지적은 퍽 날카로웠다.

지하지기는 그 반응에 낮은 웃음을 흘렸다.

다만 오시안은 그 순간 지하지기의 시선이 오를레아가 아닌 자신에게 닿았다는 걸 느꼈다.

역병의사 가면의 렌즈에 무슨 처리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시선 자체는 느껴진 것이다.

'뭐지?'

오시안은 그 시선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이쪽을 향하는 지하지기의 시선은 적대적인 감정이 일절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호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제게 길을 안내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오시안과 오를레아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오를레아는 정말 지하지기를 믿어도 괜찮은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오시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안내해라."

그 말에 지하지기가 기쁘다는 듯 방긋 웃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랬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하지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를레아는 딱히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지하지기가 의심스러웠지만, 오시안이 괜찮다고 판단을 내렸기에 그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앞장서는 지하지기의 뒤를 오시안과 오를레아가 따랐다.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복잡한 지하수로였지만, 지하지기는 이곳이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것 마냥 거침없이 움직였다.

간혹 길을 걸을 때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으아악!

아아아악!

웅웅거리며 울리는 그 섬뜩한 소리에 오를레아가 몸을 떨었다.

오시안 또한 저것이 평범한 비명이 아니라는 걸 알고 눈을 가늘게 떴다.

"주변이 시끄럽군. 여긴 원래 이런가?"

"하하. 그럴 리가요. 지하수로는 상당히 조용한 곳이랍니다. 다만 오늘은 유난히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 많이 오는 모양이군요."

"손님이라. 우리들을 잡으러 온 놈들인가."

"지하수로에 무턱대고 들어온다면 저렇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곳은 길잡이가 필수인 곳이죠."

금방 멎을 것 같던 비명 소리는 상당히 길게 이어졌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총을 쏘는 소리와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상대도 허무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고 반격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저들은 절대 저희가 있는 곳까지는 올 수 없을 겁니다. 이곳은 그런 곳이니까요. 아, 그보다 가는 길에 적적한데 이야기나 좀 할까요?"

"무슨 이야기지?"

"지금의 상황 말입니다. 위쪽에서 두 분을 열심히 찾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뭔가 좋은 의견이라도 있는 모양인가?"

"이런. 의견이라뇨. 저 따위에게 너무 과분한 말이군요."

"겸양이 지나치군."

오시안의 지적에 지하지기는 손으로 가면의 아래 부분을 쓰다듬었다.

"제 소견을 듣고 싶으시다면, 자그마한 지혜 정도는 어떻게든 쥐어짜내 보겠습니다."

앞장서서 걷던 지하지기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우선 지금 흘러가는 상황에 대해서 재차 확인을 해봐야겠군요. 현재 오를레아 왕녀님을 노리는 세력은 왕국과 군부입니다. 군부는 전쟁을 통해 예산 확충을, 왕국 또한 군부와의 거래로 무기 정보를 얻기 위함이죠."

"소견이라 치기엔 꽤나 많은 걸 알고 있지 않나."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들리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주변이 엿듣는 건 걱정하지만, 땅 아래에서 엿듣는 것은 고려하지 못하거든요."

후후 하고 낮게 웃은 지하지기가 말을 이었다.

"사방이 적인 상황. 하지만 왕녀님께도 마냥 불리하지는 않습니다. 군부의 의견은 티르나의 전체 의견과 다르기 때문이죠. 현재 사건이 벌어진 구역의 구장이 위병들을 이끌고 나서고 있습니다."

한쪽은 오를레아를 지키기 위해.

한쪽은 오를레아를 죽이기 위해.

"아마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군부의 인사들 또한 선택을 내릴 겁니다. 왕녀님의 암살에 실패를 했으니, 꼬리를 자르려 들겠죠. 그들까지 가세한다면 암살세력은 빠르게 진압될 겁니다."

그러니 답은 간단했다.

이쪽은 바깥의 상황이 끝날 때까지 시간만 벌면 그만인 것이었다.

"제가 안전한 세이프 하우스까지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이 지하에는 외부의 공격에 대피하기 위한 여러 안전구역이 있으니까요."

심지어 지하지기는 안전 장소까지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오를레아가 더욱 강한 경계의 눈초리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볼 때, 오시안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우리에게 지나치게 호의적이군."

"그렇습니까? 실제로 호의를 사고픈 알량한 계산적인 마음으로 한 말입니다."

"하지만 솔직하지는 않아."

그 말에 지하지기는 잠시 말을 멈췄지만, 자연스럽게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도와드리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함정이나 그런 것도 없고요."

"알고 있다."

오시안은 곧바로 답했다.

저것이 함정이라고 의심을 할 법도 한데도 너무 단호한 대답이라 오히려 말을 꺼낸 지하지기가 살짝 당혹스러워 할 정도였다.

'애초에 위험 경보는 울리지도 않으니까.'

오시안은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깨닫게 된 능력을 신뢰했다.

위험을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고 해야 할까.

'방금 전부터 지하수로를 지나면서, 몇몇 구역은 붉은 기운이 넘실대는 것이 보였어.'

그 색은 오를레아를 노리던 총알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그 말은 즉, 일종의 위기감지를 느낄 수 있는 직감을 터득한 셈이었다.

그리고 지하지기에게는 어떠한 붉은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그것이 적대적인 자에게만 드러나는 것인지 아니면 감정을 숨기면 알 수 없는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함정이라 하더라도 '위험하지는 않다'는 것이 오시안의 판단이었다.

"...흠흠. 그래서 저는 세이프 하우스에서 바깥의 상황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지하지기의 판단은 옳았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적들은 알아서 자멸할 상황.

굳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던 것이다.

하지만.

"안 된다."

오시안은 거절의 말을 입에 담았다.

그것도 아주 단호하게.

그 말이 의외였던 걸까.

오를레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오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지하지기가 발걸음을 멈추고 오시안을 돌아보았다.

"물론 제 의견은 그저 고려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지만. 어째서인지 묻고 싶군요."

"세이프 하우스에서 시간을 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으니까."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여기서 무사히 탈출하게 된다고 해보지. 그렇다면 그녀는 어디로 가게 되지?"

"그야...."

지하지기와 오를레아는 오시안이 무얼 말하려는 건지 깨달았다.

"왕국으로 돌아가겠지. 암살의 위협을 겪었으니 왕궁 내에서 갇히듯이 지낼 거고."

"암살세력의 위협에 여전히 노출된다는 소리군요."

죽이는 데 실패한 암살세력이, 오를레아가 본국에 돌아온다고 해서 그대로 놔둘까?

오시안은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오히려 더 악착같이 죽이려 들면 들었지.

"그게 아니면 반대로 티르나에 머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암살의 위협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쳤기 때문이라면서요."

"그 또한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몸은 회복될 거고, 왕국은 그걸 빌미로 공주의 신변을 요구하겠지. 그러지 않는다면...."

"또 그걸 빌미로 영향력을 행사할 거고요."

"그래."

오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엔 문제를 덮어 놓고 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그러니 다른 선택을 내려야만 하지."

"확실히 그렇다면 조금 곤란하기는 하군요."

"내게 생각이 있다."

그 말에 오를레아가 물었다.

"생각이라니, 무언가 계획이 있는 것이냐?"

"물론. 하지만 이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목숨을 잃는다는 말에 오를레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불확실하고 실패 확률이 높은 일.

자칫 잘못하면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선택은 그쪽의 몫이다. 그래도 하겠나?"

오시안이 물었다.

결국 이번 시간의 열쇠는 그녀가 쥐고 있었으니까.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에게, 다시 죽음의 길을 걸으라니.

심지어 당사자에게 어린 소녀에게 결정을 내리라니.

아주 가혹한 일이었다.

오를레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아직도 죽을 뻔했던 상황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핏기가 가시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그래도.

"그대가 함께해 준다면."

혼자가 아니라면.

누군가 곁에 있어 준다면.

하겠다고.

오를레아는 그렇게 답했다.

그 말에 오시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인상에 어울리지 않는, 마치 주변에 꽃이라도 피는 것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공주님의 바람이라면, 기사로서 기꺼이."

69화. 무궁한 삶의 길 (1)

오시안이 이야기한 방법이란 이러했다.

우선 이쪽의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알베르트 구지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다만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그에게 접근하는 것이었다.

"의견을 재고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다시 생각해 봐도 이건 미친 짓입니다."

지하지기는 오시안에게 물었다.

아무리 봐도 오시안이 말 한 방식은, 지하세계에서 사는 지하지기의 관점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부류였던 것이다.

"여기까지 안내해 줘서 고맙다."

오시안의 대답에서 이미 그가 마음을 굳혔다는 걸 깨달은 지하지기가 어깨에 힘을 쭈욱 뺏다.

오시안이 저렇다는데 그가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작전의 핵심 당사자인 오를레아 왕녀 또한 결연한 표정이지 않은가.

지하지기는 저런 부류는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이 위로 올라가시면 바로 33번 구청에서 500m 떨어진 거리가 나옵니다."

그러니 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무운을 빕니다."

떠나가는 사람들의 등을 향해 응원의 한 마디 해주는 것.

오시안은 그런 지하지기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

"...."

지하지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럴 리가요. 오시안 님이 이 도시에 온 것은 최근이 아닙니까. 저는 이 도시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고 자란 토박이라서요. 사실상 이번이 처음 만남입니다."

"그런가."

"예. 다만 듣는 귀가 있다 보니, 오시안 님의 무용담에 관심이 있고 팬이 됐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 이번에도, 그 무용담의 이야기에 멋진 한 문장의 글귀를 적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지하지기는 오시안과 오를레아를 향해 처음에 했던 신사의 인사를 건네며 뒤로 물러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 일터에서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이 세상의 유일한 기사시여."

지하지기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출귀몰한 퇴장보다도 오시안을 당혹케 하는 것은 자신을 보고 유일한 기사라 한 지하지기의 한 마디였다.

'뭐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나?'

당장 지하지기를 찾아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

오시안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당장 눈앞의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중에 다시 이곳을 찾아오게 된다면, 그때 물어봐야겠어.'

오시안은 오를레아를 향해 물었다.

"준비는 됐나?"

"그래."

오시안이 오를레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오를레아는 오시안의 한쪽 팔 위에 올라타며 그의 품에 안기듯 앉았다.

"그럼 간다."

오시안이 나머지 한쪽 손으로 검을 뽑아 들고 지상을 뛰어올랐다.

*

33번구 구청 앞 거리.

사복을 입고서 서성거리고 있는 군인들이 투덜거렸다.

"제길. 우리는 왜 이런 곳에서 대기냐고."

"운 좋은 줄 알아. 지금 현장에 나간 놈들 죄다 박살이 나고 있다더라."

"총 한번 제대로 쏘면 끝나는 일을 여기까지 끄는 것도 웃기네. 대체 어쩌다 우리 군 기강이 이렇게 해이해진 거지?"

그 말에 동료 군인은 상대가 그만큼 만만치 않은 놈이 붙었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말마따나 군 기강이 해이해진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불만을 표현 병사의 말은 계속됐다.

"우리는 적을 죽이기 위해 훈련했어. 티르나라는 도시를 수호하고,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걸 바쳤다고. 그런데 빌어먹을 이게 대체 뭐야?"

202 공수사단.

현재 오를레아 왕녀의 암살에 관여한 부대의 이름이었다.

공수부대의 역할은 전쟁이 나면 공중에서 적의 후방에 내려서 적의 후면을 타격하는 일.

쉽게 말하면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서 자살에 가까운 위험천만한 작전을 수행하는 자들이라는 소리였다.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무장, 굳건한 육체를 지닌 자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당연히 정예로서 여타 군인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202 공수사단은 티르나의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였다.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훈련을 거듭해 왔지만, 전쟁이 없는 지금의 시대에서 그들의 역할은 그저 예산만 축내는 기생충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최근에 군부대 개편 건의안에서, 202 공수사단은 해체될 목록의 순위에 올랐고 그게 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칵 퉤. 우리가 뭘 위해서 개고생을 하면서 노력했는데, 이런 우리를 해체하겠다고?"

해체한다고 해서 군인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아마 잘게 찢어져서 다른 부대로 전입되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피나는 훈련을 받아오며 끈끈한 전우애로 뭉친 자들이었다.

그런 202 공수사단을 해체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명예에 흠집을 내다 못해 갈가리 찢어 버리는 짓이었다.

뭘 위한 피나는 훈련이었나.

무엇을 위해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 가며 버텨왔나.

무거운 군장과 총을 들고 뛰어 본 적도 없는 노인네들이 종이 위에 멋대로 끄적인 잉크 하나가 도시의 탄생과 함께해 온 부대를 죽인다니?

이럴 수는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우리 권리는 우리가 쟁취해야 하는 거야."

"그래. 우리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어. 비록 이번 일에 끼어든 우리들은 죽겠지만, 우리가 남긴 유산은 차후 다른 전우들에게 명예를 안겨 줄 거다."

그때 두 군인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잡혔다.

"뭐지? 지금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저거...."

"...오를레아 왕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금발의 소녀가 구청거리의 대로변 중심에 서 있었다.

모습을 감추지도 숨지도 않은 채, 모두가 보라는 듯 당당하게.

그 모습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훈련받은 군인인 그들조차 순간 상황판단이 되지 않았을 정도.

"무전 돌려. 위병 놈들이 나서기 전에 끝내야 해."

사복을 입은 그들은 자연스럽게 등허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옷의 실루엣 아래로 잡히는 묵직한 권총의 감촉이 오늘따라 유난히 손에 착 감겼다.

*

알베르토 로렌초는 오를레아 왕녀와 오시안이 사라졌다는 말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람을 보냈는데 놓쳤다고?"

[죄송합니다, 알베르토 구지사님. 접촉을 하기도 전에 하필이면 지하수로로 대피한 터라....]

"...지하수로라면 더 문제야. 자칫 잘못했다가는 아래쪽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수도 있다고. 두 사람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고."

[아니면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해결사도 멍청하지는 않으니,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시간을 끌려고 할 겁니다.]

"그래. 차라리 그렇다면 낫겠지.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안 그래도 지금 중립의 위치로 눈치만 보던 몇몇이, 이쪽을 돕겠다고 거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는 군의 장성이라 부를 수 있는 인사들 또한 섞여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들.'

오를레아 왕녀가 죽는다면 군부의 입장에서는 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득이 되고도 남았지.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일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서, 202 공수사단의 꼬리를 자를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다.

'지금처럼 이쪽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은, 사실상 왕녀의 암살실패를 인정하고 꼬리를 자르는 쪽으로 가는 모양인데.'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33번 구 전역의 위병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괜찮아. 시간만 끌면 돼. 그냥 어디 짱 박혀서 고개 숙이고 얌전히 있으면 된다고.'

그런 알베르트의 기도가 무색하게, 구청 정문의 보초에게서 날아온 전보는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뭐?! 다시 한번 말해 봐!"

거구의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력에, 통신기 너머의 보초병이 목소리를 떨었다.

[그, 그것이. 500m 너머 대로변에, 오를레아 왕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

알베르토는 창가에 달라붙어 눈을 부릅떴다.

"이...!"

저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금발과 화려한 푸른색 드레스가 그의 눈에 선명하게 잡혔다.

알베르토는 욕을 내뱉으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보초가 차라리 낮잠을 자다가 헛것을 봤으면 했다.

지금 이게 현실이라면, 암살세력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꼴이었다.

"대체 왜? 안 그래도 구청 근처의 위병들도 모두 내보내서 이쪽에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이라는 걸 할 머리가 있다면 이런 건...!"

알베르토의 절규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타앙!

공기를 찢는 잔혹한 소리가 구청 앞 도로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혹시 몰라서 매복을 하고 있던 202 공수병이 오를레아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총을 쏜 것.

안 돼. 늦었어.

알베르토의 눈동자가 절망에 물들었다. 그의 눈앞에 전쟁이라는 미래가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그리고 직후, 그는 보았다.

희망이라는 기적을.

*

카앙!

허공에 튀는 불꽃.

그리고 산화하듯 사라지는 총알.

오를레아는 쓰러지지 않았다.

여전히, 구청을 응시하며 자리에 올곧게 서 있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총을 쏜 군인이었다.

"저 녀석은...."

어느새인가, 오를레아의 곁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 검을 늘여뜨리고 있는 검은 코트를 입은 흑발의 남자.

그가 날아오는 총알을 허공에서 쳐낸 것이었다.

날아오는 총알을 칼로 쳐내? 그렇다는 것은 상대는 최소한 마나유저이거나 신체능력 강화 계열의 뮤턴트가 분명했다.

군인은 판단했다.

지금 자신들의 무기로는 절대로 저 녀석을 뚫을 수 없다고.

"지원군은? 위병 놈들이 올 거야!"

"왔어! 안 그래도 근처라 이쪽이 더 빨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 옥상 곳곳과 골목길에서 판초를 쓴 군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군인들은 거리 한복판에 당당하게 서 있는 오시안과 오를레아를 발견하고는 잠시 몸을 흠칫 떨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과감한 행동을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은 것.

또 동시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위병들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광경에, 순간이지만 이 넓은 거리의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오를레아는 시야에 잡히는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걸 보았다.

겉으로는 애써 평온한 척하고 있지만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오를레아...!"

부랴부랴 잔여 호위대를 이끌고 구청 입구에 나타난 드뷔에 후작이, 분노와 당혹감이 뒤섞인 눈동자로 오를레아를 노려보았다.

현장에 속속히 도착하는 사람들을 본 오시안이 입을 열었다.

"이걸로 무대는 갖춰졌다."

오를레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일부러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가지."

오를레아가 떨리는 첫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그녀의 눈앞에서 카앙 하고 불꽃이 튀었다.

어느새 검을 늘어뜨리던 오시안은 검을 비스듬하게 휘두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총알이 분쇄되며 흩어지는 불꽃과 코끝을 스치는 짙은 납과 화약의 냄새.

삭막한 왕성이라 하더라도 접해 보지 못한 원초적인 파괴와 죽음의 흔적.

그것을 마주한 것은 이제, 더 큰 세상과 싸워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어린 소녀였다.

"믿어라."

오시안의 말이, 그런 소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소녀의 가슴 깊은 곳에 새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별빛과도 같은 불꽃을.

쓰읍. 후우.

호흡을 한번 가다듬은 오를레아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타앙! 카앙!

눈앞에서 터지는 불꽃.

충격과 함께 불어닥치는 바람에 금발이 크게 출렁였다.

그러나 그녀는 안전했다.

그 모습에 하나둘 속속히 도착하는 202 공수병들이 기함해서 외쳤다.

"뭣들 해! 더 쏴!"

"전부 쏟아부으란 말이야!"

"죽여!"

저주와 원념이 담기는 말이 오를레아의 발목을 붙잡는다.

"멈추지 마라."

카앙!

어느새 오시안의 검은 흰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주황색 불꽃은 순백의 성광에 먹혀 사라졌다.

"두려워하지 마라."

카앙!

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내가."

카앙!

소녀에게 길을 열어 준다.

"네 곁에 있으니까."

이 길의 끝에 있는 것은 원래였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미래.

생이란 죽음을 뚫고 나아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

그러니 가자.

가능성으로 뒤덮인, 무궁한 삶을 향해.

70화. 무궁한 삶의 길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