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무궁한 삶의 길 (2)
-내 계획은 이렇다.
작전을 시작하기 20분 전.
지하지기의 안내를 따라 수로를 걷던 오시안이 자신이 생각해 둔 계획을 설명했다.
-이대로 버틴 뒤에 무사히 구출되어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을 거다. 또 이번과 같은 수작을 부리겠지.
오를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가장 걱정인 것은 당장의 생존도 있지만, 살아남은 이후가 문제였다.
-그저 도망만 치다가 구출 받은 공주. 이래서야 무사히 돌아가도 사람들의 위로와 호응을 받기 힘들겠지. 그러니 그것부터 바꾸는 거다.
-바꾼다니. 대체 어떻게 바꾼다는 것이냐?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어엿한 왕족이라는 걸 보여 줘야지.
-아아. 그렇군요. 각본을 짜자는 겁니까?
지하지기가 오시안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꿰뚫었다.
-단순히 꼭두각시로 이용당해 버려지는 사람이 아닌, 역경과 고난을 겪지만 그걸 끝내 이겨내는 역전의 주인공을 바라는 거군요. 그래야만 어엿한 왕족으로 추앙받을 수 있으니까요.
-어엿한 왕족이라니.
반면 오를레아는 조금 미덥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런 것도 지지 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제대로 된 세력이 없다면, 그저 휘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아.
-있다.
오시안이 누굴 말하는 건지 깨달은 오를레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곳까지 따라와 그녀를 살리려는 사람들.
-그들 또한 끈 떨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있을 뿐, 지지세력이라 할 수 있는 거창한 수준도 되지 않는다.
-그래. 되지 않겠지. 패잔병들만 모아 놓은 부대니까.
오시안은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할 말을 했다.
-그러니 만들어야지. 어엿한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오시안이 오를레아를 가리켰다.
-그 열쇠가 바로 너다. 네가 그들을 이끌어, 하나의 완벽한 세력을 만드는 거다.
*
타타타타탕!
총알이 동시에 5발이 날아왔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5발의 총알.
오시안의 눈에는 그 총알이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전부 보였다.
새하얀 검을 쥔 기사의 어깨 아래로 새하얀 망토가 드리워졌다.
티티티티팅!
백색 망토를 두른 오시안이 오를레아의 몸을 감싸듯 지켜 주었다.
성운비단의 힘이었다.
총을 쏜 병사들은 믿기지 않은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방어 마법인가? 저런 마법을 사용하는 학파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죽음의 포화 속에서 의연하게 걷는 공주와.
공주를 지키기 위해 검을 쥔 기사.
둘의 고요한 행진이 계속 이어졌다.
"막아!"
"초, 총이 안 먹힙니다!"
"이 등신들아 그게 안 되면 폭탄을 던지거나 대포라도 쏘란 말이야!"
드뷔에 후작의 발작적인 외침과 함께, 어디선가 날아온 로켓런처가 오를레아와 오시안의 지척에서 폭발했다.
붉은 화염과 함께 새까만 연기가 일어나며 시야가 가려졌다.
설마 구청 앞에서 대놓고 이런 테러를 벌일 줄은 몰랐는지 위병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드디어...!"
환희로 뒤덮였던 드뷔에 후작의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철컥.
검은 연기를 해치며 앞으로 걸어 나온 것은, 전신에 별빛을 빗어서 만들어 낸 새하얀 갑주를 두른 기사였다.
또 녀석이다. 자신이 데려온 마법사 부대를 완전히 박살을 내버린 그 해결사!
화르륵!
손에 쥔 것은 하늘의 빛으로 타오르는 검.
그리고 등 뒤에 아른거리는 것은 밤하늘을 잘라내서 만든 망토까지.
마치 끝 없이 펼쳐진 무한한 우주 너머에서 뚝 떨어져 나온 존재처럼 보였다.
그런 기사의 곁에는 상처 하나 없는 오를레아가 함께 있었다.
모두가 압도되어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광기에 차서 오를레아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암살 세력들이 총구를 당기는 것을 일순 멈추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기사의 호위를 받는 오를레아의 표정은 당당했다.
마치 이런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 의연하게 정면을 향하는 눈빛은 일견 도도하기까지 했다.
저 사람이, 정말로 오를레아 왕녀가 맞나?
남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싸움을 피하는 그 겁쟁이가 맞다고?
세간에 알려진 오를레아의 정보와 지금 그녀가 보여 주는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당차게 나아가는 오를레아는 버려진 공주 따위가 아니었다.
한 명의 어엿한 왕족이며 군주의 자질을 지닌 지배자였다.
한때는 씨앗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덧 발아한 싹은 눈부신 속도로 성장 중이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신기하구나.'
흩날리는 새하얀 빛의 입자들 사이에서, 오를레아는 마치 하늘의 별 속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거였구나.'
오시안이 처음에 자신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했을 때.
오를레아는 너무 과한 기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너의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자신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그의 검은 눈동자.
기대를 넘어서 확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념에 가득 찬 목소리까지.
한 번쯤은, 이 말에 자신의 미래를 걸어봐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꼭두각시 따위가 아니야. 버려진 왕족은 더더욱 아니고.'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왕가가 자신을 버리겠다고 한다면 그들과 투쟁할 것이다.
세상이 그녀를 억압하려 한다면 세상을 지배 해줄 것이다.
한 명의 어엿한 군주로서.
'물론, 내가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대 덕분이다.'
오를레아의 시선이 자신의 옆에 선 기사를 향했다.
'그대가 함께해 줬으니까.'
함께 죽음의 길을 걸어 주는 이가 있다.
그러니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야말로, 군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는 첫 번째 시험이었다.
저벅.
타오르는 별빛을 가슴에 품은 소녀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알렌시아 헤어가 부하들에게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암살이 실패할 것이 자명해졌다면, 더 나아가 아예 요인 제거가 불가능하다면 티르나는 빠르게 노선을 갈아타야 했다.
"뭣들 하는 거냐! 지금 당장 저 테러리스트들을 생포해! 그대들이 그러고도 티르나의 위병인가!"
"아, 알겠습니다!"
마법처럼 얼어붙었던 시간이 봄을 맞이했다.
오를레아를 노리던 군부의 암살자들과 드뷔에 후작이 부린 용병들이 하나둘 제압당했다.
위기와 불리함으로 점철되었던 전장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그렇지!"
그 광경을 창문 너머로 지켜보던 알베르토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상황의 주도권 자체가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갔다.
당장 이 광경을 지켜보는 '눈'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를레아 왕녀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다 못해 단번에 경계 레벨까지 격상시켜야 하는 수준까지 와 버린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서 이 상황에서 사절단으로서의 명분을 잊지 않았어. 이미 이 거리 자체는, 오를레아 왕녀의 무대가 되었다.'
거리에서 몸을 숨긴 시민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오를레아는 이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주인공이었다.
알베르토의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환경 때문에 지금까지 미처 피우지 못했던 군주로서의 재능이 이 순간 만개하려고 한다. 지금 보여 주는 모습만 해도 이미 그녀는 자신의 배다른 형제자매를 위협할 만한, 아니 오히려 충분히 능가할 수 있는 수준이야.'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오를레아 본인의 각오와 노력도 있었겠지만.
알베르토의 가늘어진 시선이 곁에 있는 기사를 향했다.
'해결사라고 하지 않았나?'
해결사였던 남자는 대체 무슨 수를 부린 건지 폭발 속에서 전신에 흰색 갑주를 입은 기사가 되어 있었다.
옛 동화에서 악룡을 쓰러뜨리고 공주님을 탑에서 구해 주는 정의로운 기사.
저걸 보는 순간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들 오를레아 왕녀의 카리스마에 정신이 팔려 있지만, 내가 보기엔 가장 주의해야 할 요주의 인물은 바로 저 남자야.'
날아오는 총알을 검으로 쳐내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눈먼 총알도 막아내거나, 특히 망토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폭발 속에서도 멀쩡하다는 것은 마법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될 지경이었다.
'본인은 그저 오를레아 왕녀를 에스코트해 주는 시종처럼 굴고 있지만, 저 남자가 이 모든 판을 짜 올린 메이커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33번 구지사인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어서 와서 이 무대 위의 연극에 어울리라고.
스트레스 때문에 주름으로 일관되었던 알베르토의 표정이 풀리다 못해, 허탈한 미소가 맺혔다.
"허. 이거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었네."
누군가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걸 잴 상황이 아니었다.
"이 전에는 이쪽에서 환영식을 연다고 해서 짬처리를 당했나 싶었는데, 오히려 보석이 굴러들어 온 셈이잖아?"
잘만 하면 카를레앙 왕국의 차후 군주가 될 수 있는 사람과의 인연을 만들 기회였다.
상대도 그 부분을 노리고 있었기에 이쪽을 부르는 거였고.
알베르토는 곧바로 옷걸이에 걸어 놓았던 외투를 집어 들며 집무실 문을 박찼다.
"이 자식들이 가만히 안 있어?! 뭣들 해! 제압하기 힘들면 그냥 죽여! 테러리스트 놈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마!"
"빌어먹을! 우리는 대의를 위해서 희생하는 거란 말이다!"
"대낮에 총 쏘고 폭탄 던지는 놈들이 대의는 무슨!"
아수라장이 된 구청 앞에서 드뷔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어느덧 그의 앞에는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한 오를레아 왕녀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를레아 왕녀 암살에 실패했다.
그녀를 이곳에서 죽게 만든 뒤에, 본국에 돌아가서 티르나와의 전쟁을 선포하기 위한 밑 작업이 모두 준비되어 있었는데 그게 전부 무산된 것이다.
애초에 실패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드뷔에 후작."
오를레아가 드뷔에 후작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분명 전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드뷔에 후작은 눈앞의 작은 소녀가 자신을 내려다볼 정도로 태산처럼 거대해진 착각을 받았다.
"지나가는 데 방해되니 비키도록."
오를레아는 드뷔에 후작을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둥, 자신의 유모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낄낄대며 웃던 남자를 향해 보이는 반응치고는 너무나도 차가웠다.
길을 비켜달라니.
화내고 분노하고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간단한 명령을 내렸을 뿐이다.
드뷔에 후작은 그래서 더 두려웠다.
겁쟁이라고 생각했던 그 막내 공주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자신이 정말로 위험한 사람을 적으로 돌려 버린 것 같아서.
"...."
드뷔에 후작이 뻣뻣한 움직임으로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그의 동공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감히 오를레아와 눈을 마주하지도 못했다.
왕녀와 항상 기싸움을 벌이며 그녀를 찍어 누르려던 드뷔에 후작이 밀려난 것이다.
오를레아는 드뷔에 후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서 구청 정문 앞에 당도했다.
오시안 또한 상황이 끝난 걸 확인하고는 성광갑주를 해제했다.
입구에서 나와서 기다리던 알베르토 구지사가 오를레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를레아 왕녀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 불미스러운 사건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으신 왕녀님의 고귀한 모습. 이 자리의 모두가 분명 똑똑히 보았습니다."
알베르토는 오를레아 왕녀의 공을 치켜세우며 호의적인 감정을 전혀 감추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라는 의도를 팍팍 내며 무대 위에 올라섰다.
"성대한 환영에 감사합니다. 알베르토 33번 구지사."
"아닙니다. 왕녀님 같은 고귀하신 분을 모실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알베르토의 싸늘한 시선이 잠시 드뷔에 후작에게 닿았다.
방해꾼은 어서 꺼져달라는 눈빛에 드뷔에는 입술을 몇 번 오물거리다가 자기 사람들을 이끌고 현장에서 벗어났다.
"방해꾼들도 사라졌고 불온 세력도 모두 제압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구지사는, 저와 어떻게 지내고 싶습니까?"
갑자기?
직설적인 물음에 알베르토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건 신호다.'
오를레아는 지금 막 한 명의 군주로서 각성했지만, 아직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은 미비했다.
이번 사건으로 추종하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그렇다 해도 확실한 한 방이 부족한 것도 사실.
오를레아는 그 한 방을 알베르토에게서 얻고자 했다.
'자신과 친분을 지닐 것인지, 내게 투자의 의향을 묻고 있어.'
비록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 줬다지만 아직 지지 세력이 미약한 막내 공주와 손을 잡는 것이 맞는가.
현실적으로 보면 당장 오를레아 왕녀가 넘어야 할 벽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저야 물론, 왕녀님과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 좋죠."
알베르토는 자신을 젊은 나이에 구지사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만든 과감한 판단과 감을 믿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눴다.
기다렸다는 듯 구청 소속 기자가 사진을 찍었다.
"자, 그러면 들어가시죠. 실력 있는 의사들과 사제들이 대기 중입니다. 혹시 모르니 상태를 확인하신 뒤에 괜찮으시다면 휴식을 취하시죠."
알베르토는 오를레아에게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시선으로 그 곁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오시안 또한 알베르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빤히 응시했다.
아니, 조금 달랐다.
오히려 이쪽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런 고고한 눈빛이었다.
'이것 봐라?'
알베르토의 눈썹이 일순 꿈틀였다.
71화. 도시라는 이름의 짐승 (1)
해결사와 한 지역의 구지사는 매우 큰 차이가 존재한다.
실질적인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지위가 계급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
해결사들은 구지사인 자신을 만나면 항상 고개를 숙이거나 어떻게든 연을 만들고자 비굴하게 굴었었다.
하지만 오시안은 달랐다.
구지사인 자신을 보고도 반가워하거나 기대의 눈빛을 보내기는커녕, 이쪽을 파악하려는 기색이 다분했다.
'이놈. 역시 평범한 해결사가 아니다.'
일단 외모부터 그렇다.
흑발에 흑안,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공을 들여서 조각을 한 것 같은 이목구비까지.
그 위에 카리스마와 귀티를 한껏 치장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완벽하게 타고난 외모라 할 수 있었다.
'대체 어디의 귀족이지? 애초에 이렇게 인상적인 흑발을 지닌 귀족이 있었나?'
아니, 티르나까지 흘러들어왔으니 다른 국가의 귀족일 수 있었다.
그것도 능력이 아주 뛰어난 귀족 말이다.
'외모도 외모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보여 주었던 그 실력도 대단하다.'
특히 그 백색 갑옷을 걸치고서 모든 공격을 막거나 튕겨냈던 광경.
마법은 아니다. 굳이 따지면, 이런 기이한 힘은 뮤턴트가 다루는 '초능력'쪽에 가까워 보였다.
'순혈을 중시하는 귀족 중에서는 뮤턴트의 힘이 발현되면, 가문에서 쫓아내는 곳이 많다고 들었어. 아마 그런 루트로 티르나에 흘러 들어왔을 수 있지.'
알베르토는 욕심이 났다.
'해결사로 두기엔 정말로 아까운 인재다.'
알베르토는 지금이라도 오시안에게 구청 소속이 되지 않겠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했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표정을 관리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 정도의 직위까지 올라왔다면 일의 경중을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지금은 오를레아 왕녀와의 독대가 우선이다.
그녀를 에스코트해 주며, 이쪽이 확실한 아군이라는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줘야 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들어서, 알베르토는 약간의 꾀를 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온 사람의 이름을 아직 여쭤보지 않았군요."
알베르토가 사자와 같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허허 웃으며 물었다.
그 모습에 오시안은 눈꼬리를 살짝 휘었다.
'내가 해결사라는 건 보고를 들어서 모르지 않을 텐데, 일부러 모르는 척하면서 나를 은근슬쩍 하나로 묶으려 드네?'
알베르토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오시안은 알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구청 안쪽으로 초대한 후에, 기회가 나는 순간 이쪽에게 제안을 할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오시안에게 그렇게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다.
33번 구지사와 이렇게 직접적으로 연을 트게 된다면, 어지간한 위병과는 다른 위치에서 시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결국에는 도시의 휘하에 소속된 공무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그런 자리가 평생 가도 얻기 힘든 목표이겠지만 오시안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 세상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아직 많아.'
당장 오늘 만났던 지하지기부터 그랬다.
그는 오시안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눈치였다.
또 스멀거리는 자매를 통해 소환되었던 고대신의 화신체도 그렇다.
변해 버린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고 즐겨하던, 게임 속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일전에 꾸었던 꿈도 그렇고. 나로서는 아직 궁금한 것들이 참 많아.'
그러니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많은 것들을 보아야 했다.
그런 입장에서 시의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발목에 족쇄를 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안으로 끌려간다면 원치 않더라도 강제로라도 도장을 찍게 될 수도 있을 터.
특히 알베르토 구지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구지사라 한다면 다들 나이 지긋한 중년부터 노인을 생각했는데, 알베르토는 인상만 험악하지 실제 연령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한 구역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걸 보면 정치적인 능력이 보통 뛰어난 것이 아닐 것이다.
'친분을 만들어 두는 것은 좋지만, 반대로 너무 가까워지면 피곤해지는 타입.'
능력이 뛰어난 만큼 보는 눈도 높을 거고 아랫사람들을 부리는 것도 꽤 험할 것이다.
오시안이 나름 도전을 즐기는 스타일이라 하더라도 저건 절대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오시안은 여기서 이만 끝내기로 했다.
해결사라고는 하지만, 그는 그것이 가능했다.
방랑기사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니까.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지."
오시안의 말에 알베르토가 설마 여기서 이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 말을 들은 오를레아는 잠시 어깨를 흠칫 떨었다.
하지만 왜 떠나냐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원래 이렇게 될 수밖에 없던 거였어.'
오를레아는 깨달았다. 오시안과 함께 그 길을 걷게 되었던 순간부터, 자신은 이제 고독한 싸움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오시안이 떠난다 하더라도 아이처럼 붙잡을 수도 없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다.
군주의 길을 걸으려는 자는 그만한 무게를 짊어져야만 했다.
"함께해 줘서 고마웠느니라."
오를레아가 오시안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의젓한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상당히 감탄하고 있었다.
오시안은 오를레아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녀에 대한 걱정은 굳이 사서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꾸나."
오를레아가 건넨 마지막 인사는 담백했다.
그만한 일을 겪었다면 헤어지는 것이 아쉬울 법도 할 텐데 오를레아는 그 감정을 억눌렀다.
꼭 나를 찾아오라거나 큰 보상을 하겠다는 말을 해도 됐을 것이다.
사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오를레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오시안은 모르지 않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여왕님이라 부르길 기대하지."
그 한마디에 오를레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고 싶구나."
"뭐지?"
"그대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지?"
그 질문의 의미는 단순했다.
평범한 해결사는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 외모도 마찬가지였다.
필시 오시안에게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것이 오를레아의 생각이었다.
오시안은 그런 질문에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함께 사선을 넘은 이 작은 소녀에게 특별히 알려주기로 했다.
"잘 들어라."
오를레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늘의 기사이며, 악신의 화신체를 쓰러뜨리고 황금의 성을 무너뜨린 자. 악마의 목을 베었으며 악룡을 쓰러뜨리고 끝내 세상을 지배하던 신들마저 베어 버린 최강의 남자다."
"...!"
오를레아는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시안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 설정이구나."
*
오를레아는 구청 직속 위병들의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구청으로 향했다.
이미 충분한 작별을 나누었기 때문에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오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저 남자.'
상황정리를 끝내고 구청으로 향하려던 알렌시아 헤어는 멀어지는 오시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시안과 왕녀가 지하수로로 도망친 것까지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랬던 오시안이 오를레아를 데리고서 이 난장판을 만들었다.
오를레아의 생각일까? 알렌시아가 보기엔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
분명 이 모든 상황을 만든 오시안은, 정작 오를레아나 알베르토가 충분한 사례를 하려는 걸 거부했다.
'구지사님과 왕녀님이 손을 잡을 때 찍은 사진. 거기서도 저 남자는 의도적으로 사각지대에 들어가 얼굴이 나오지 않게 했다.'
남들은 모르는 자연스러운 움직이었지만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알렌시아는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처음 만날 때도 평범하지 않은 해결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확신이 든다. 저 남자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의도적으로 사진에 찍히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자신을 감추려는 것이다.
대체 왜?
알렌시아는 곧바로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는 거야.'
어딘가의 귀족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시안이 보여 주는 행동을 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저렇게 실력이 뛰어나서야, 언젠가는 다시금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텐데.'
날카로운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도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혼자가 되길 자처하는 고독한 늑대.
알렌시아가 보기에 오시안은 딱 그러했다.
'하지만 티르나의 위병이 된다면 도시는 그를 비호해 줄 수 있다. 저 남자의 실력이라면 어쩌면, 단순한 위병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집행관이 될 수 있을지도.'
아니, 분명 그렇게 되리라.
알렌시아는 집행관이 된 오시안을 상상했다.
이 도시는 거대하지만 그렇기에 무수한 위협이 존재한다. 티르나는 그 위협마저도 품는 곳이지만 알렌시아는 그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철저한 정의로 모든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당연히 그걸 실행하기 위한 인력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었다.
'오시안. 너를 반드시, 티르나의 위병대에 들어오게 만들어 주마!'
오시안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알렌시아가 구청으로 향하려다가 이쪽을 보는 알베르토 구지사와 눈이 마주쳤다.
"...."
"...."
두 사람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눈빛만으로 서로를 이해했다.
알베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허락한다. 알렌시아 집행관. 자네를 믿는다.
알렌시아가 한층 결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반드시 그를 위병대로 데려오겠습니다.
'뭐지?'
오시안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불안감에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바이올렛 폭스 앞에서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때마침 도착한 오시안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최초로 왕녀 호위를 의뢰했던 프렌피츠가, 험악한 인상의 두 남자에게 양팔이 구속당한 채 끌려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쳐다보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위병을 부르려고 했지만, 두 덩치의 어깨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는 곧바로 관심을 끄고 제 갈길을 갔다.
"누, 누가 좀 도와주세요! 너, 너는?!"
프렌피츠가 오시안을 알아보더니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야기를 들었다! 오를레아 왕녀님께서 무사하다고! 왕녀님께 이야기해다오! 이 내가 왕녀님의 목숨을 살렸다고!"
프렌피츠는 희망에 들떴다.
계약 위반으로 인해 물어줘야 할 막대한 위약금.
오를레아라면 그것을 충분히 지불해 주고도 남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뭐?"
"오를레아는 지금 33번 구에서 알베르토 구청장과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너 따위 것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다는 거지."
"그, 그게 무슨...."
프렌피츠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웃기지 마!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희 해결사를 고용해서 공주의 목숨을 살렸다고! 바로 내가! 이 나를 건드리면, 그 뒷일은 감당할 수 있어?!"
"과연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군."
오시안은 두 덩치를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오를레아 왕녀는 이런 인간에게 관심조차 없으니 마음대로 해도 좋다."
"지랄하지 마! 이 개자식! 네가 왕녀님에게 이간질을 한 거냐!"
프렌피츠가 발악하면서 몸을 비틀자, 덩치 중 하나가 우악스러운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윽! 억! 죄, 죄송! 죄송, 합니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팔꿈치로 찍고.
프렌피츠의 얼굴이 뭉개지고 피가 섞인 이빨 몇 개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프렌피츠가 잠잠해지자 해결사중개소에서 나온 두 덩치가 그를 질질 끌고 갔다.
계약 위반의 위약금을 지불하지 못했으니 아무리 좋게 잡아도 어딘가의 실험체로 팔려 가게 되리라.
딸랑.
오시안이 바이올렛 폭스의 문을 열자 방울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오셨습니까."
기다렸다는 듯 로난이 오시안을 맞이해 주었다.
"축하합니다.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셨군요. 저는 오시안 씨가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보수는?"
로난은 펜던트를 들어 올렸다.
프렌피츠가 몰래 훔쳐 갔던 어머니의 유품을 제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수고 많았다."
"...그 말은 제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군요."
로난은 의자에서 일어나 오시안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오시안 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머니의 유품을 되찾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너라면 언젠가 다시 얻었을 거다. 내가 해 준 것은 그 기간을 앞당긴 것일 뿐이니까."
"과찬이십니다."
"다만, 아직 걱정되는 것이 남아 있군."
"걱정이라면?"
"드뷔에 후작. 그가 카를레앙 왕국으로 돌아가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단 말이지."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평소에도 짓고 있던 로난의 실눈이 더욱 길게 찢어졌다.
72화. 도시라는 이름의 짐승 (2)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프렌피츠야 본인의 잘못으로 저렇게 됐다지만 드뷔에 후작을 공식적으로 처리할 방법은 없는 걸로 아는데.
오시안의 눈빛으로 생각을 읽은 것인지 로난이 평소처럼 수상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내일 아침이면, 그는 신문의 후면에 장식도 되지 않을 초라한 형태로 결말을 맞이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왜냐면 그게."
로난이 손에 쥔 펜던트를 자신의 가슴팍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 티르나라는 도시니까요."
*
드뷔에 후작은 빠른 발걸음으로 비행선에 올랐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조마조마해하며 드뷔에 후작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였다면 그런 행동조차 고까워서 버럭 소리라도 질렀을 드뷔에 후작이 지금은 얌전하기만 했다.
그만큼 사안이 심각하다는 뜻.
정박했던 비행선이 떠오르며 티르나의 위를 날았다.
드뷔에 후작은 창밖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높게 솟은 첨탑과 시계탑, 도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오염된 강, 무수히 많은 사람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열차와 증기자동차까지.
공장 굴뚝에서는 뿜어내는 매연마저도 도시 자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들게 할 정도였다.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
점점 발전하는 도시.
그는 지금 이 탐스러운 도시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카를레앙 왕국이 저 도시를 차지할 기회가 멀지 않은 미래라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제기랄. 왜 하필이면 이 중요한 일을 실패해서는! 무엇보다도 오를레아 그년의 태도가 바뀌었어.'
드뷔에 후작은 자신을 차갑게 응시하던 오를레아의 눈빛을 떠올렸다.
원래도 싹은 보였다지만 그걸 막기 위해 철저하게 짓밟아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빌미로 그녀는 괄목상대할 성장을 이루고 말았다.
목숨의 위기 속에서 피운 재능의 꽃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크고 아름다운 법.
오를레아는 이제 평소에 그가 깔보고 무시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이대로 놔두면 안 돼. 그년은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우선 먼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어떻게든 윗분들을 설득해서 최소한 내가 실각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해.'
암살 실패로 많은 것을 잃겠지만, 아직은 괜찮다.
살아만 있다면 돌파할 방법은 마련할 수 있으니까.
머릿속으로 최대한 긍정적인 미래를 그리던 드뷔에 후작은 문득 위화감을 깨달았다.
'뭐지?'
바깥의 흐르는 풍경이 멈추었다.
"뭐냐. 무슨 일이야!"
"그, 그게 갑자기 비행선이 멈췄습니다!"
"비행선이 갑자기 멈추다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비행선이 멈췄다 하니 머리에 열이 확 올랐다.
드뷔에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선장실을 향했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거냐! 어서 가지 못해!"
문을 쿵쿵 두드려 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 이 자식들이 이거, 내가 요새 좀 가만히 있었다고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드뷔에 후작은 부하를 향해 턱짓했다.
기다렸다는 듯 장정들이 나서며 선장실의 문을 강제로 개방했다.
드뷔에 후작은 선장실 안으로 들어가 대체 어떤 놈인지 낯짝이나 보고자 했다.
하지만 텅 비어 버린 안쪽을 보는 순간, 드뷔에 후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다 어디 갔어?"
비행선을 조종해야 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 비행선은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온 거지?
무언가 이상하다.
드뷔에 후작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안함을 느꼈다.
거대한 뱀이 이미 그의 몸을 옭아매고 목덜미에 독니를 박아 넣기 직전 같은 느낌.
"대, 대체...."
치익. 치직.
기다렸다는 듯 비행선 내부의 통신기가 울렸다.
드뷔에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통신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아아. 만나서 반갑네. 드뷔에 알롱 로믈레시오 후작.]
"너는, 누구냐."
[나? 나는 그저 티르나에서 여러 일을 처리하는 일개 노부일 뿐이라네.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리에 올라오는 서류에 도장 몇 개 찍어 주는 일이 전부지.]
수화기 너머 노인은 겸양을 떨며 말했다.
드뷔에 후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게 원하는 것이 뭐지? 이대로 나를 어떻게 하려 한다면, 카를레앙 왕국과의 외교에 문제가 생길 텐데."
[하하하. 외교문제? 그거참 재미있는 말이군.]
인자하게 웃던 노인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먼저 일을 터뜨린 것은 자네가 아닌가.]
"...!"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만으로 주변 온도가 순간이지만 몇 도는 낮아진 것 같은 서늘함에 드뷔에 후작이 몸을 떨었다.
[모를 거라 생각했나? 군부와 짜고서 별 같잖은 수작질을 벌였더군. 할 거면 차라리 성공이라도 하지 그랬나.]
"그건...."
[암살에 성공했다면 이쪽도 맞춰서 어울려 줄 의향은 있었다네. 전쟁이 벌어다 주는 이익은 매우 막대하거든. 군부에 조금 비중을 떼어 주는 것은 배가 아프지만, 뭐 어떤가.]
그런데, 하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물론 그건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지. 자네는 실패했네. 도시의 일부라고 한다지만 난장판으로 만들면서까지 말이야. 뭐, 나름의 소득은 있었네. 오를레아 왕녀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재능 있고 강단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그래 봤자 그년은 본국에 오면 끈 떨어진 인형 신세다."
[과연 그럴까? 내가 보기엔 오히려 끈이 떨어졌기에 날개를 펼치고 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시답잖은 궤변은 집어치워! 그래서 이 비행선을 멈춘 이유가 뭐냐! 내게 뭘 바라지?!"
[뭐겠나. 티르나에서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 이대로 도망을 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나를 건드리면...!"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뭐?"
[이미 카를레앙 왕국과의 이야기는 전부 끝났으니까.]
그 충격적인 진실에 드뷔에 후작이 이를 깨물었다.
"지랄하지 말라 그래! 왕국에서 나를 버렸다고? 내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것이 얼마인데!"
[그쪽도 이번 일이 실패한 것 때문에 희생양을 만들길 원하는 눈치더군. 때마침 무수한 권한을 위임받고도 제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머저리가 떡 하니 준비돼 있으니, 이만한 기회가 어디 있나.]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노인의 목소리는 아침에 해가 뜨는 걸 말하는 사람처럼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니 이만 잘 가도록 하게, 드뷔에 후작. 마지막으로 나눈 담소였지만, 별로 재미는 없었다네.]
드뷔에 후작이 수화기를 놓고 바로 비행선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순간.
콰아아아앙!
비행선이 폭발하며 붉은 화염이 삽시간에 내부를 집어삼켰다.
불길에 휩싸인 비행선은 접경지대의 황야에 추락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
"허."
오를레아 왕녀 암살 사건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오시안은 신문의 기사를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사건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무마했다고?'
오를레아 왕녀 암살 사건.
앙숙이었던 카를레앙 왕국의 사절단으로 왔던 그녀가 죽을 뻔한 일은 전쟁마저 촉발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202 공수사단이 벌인 일은, 도시를 전복시키려는 기존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으로 변했군.'
군부의 군 자도 언급이 안 됐다.
202 공수사단이 주도해서 일을 벌였다지만 과연 그들만 용의자라 할 수 있을까?
그보다 더 윗선에서도 이를 알면서 묵과하거나 혹은 뒤에서 부추기던 자들이 있을 것이다.
크게 보면, 사실상 군부 자체가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문 기사에는 그런 내용이 단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군부라는 단어를 피하기라도 하듯, 기사는 테러리스트의 소행만 떠들었다.
정보의 은폐를 대가로, 군부는 아마 도시에서 쥐고 있는 여러 이권을 포기해야 했으리라.
신문에는 오를레아와 악수를 나누는 알베르토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다.
'알베르토 구청장. 이미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능숙하게 수완을 발휘할 줄이야.'
알베르토 로렌초 33번 구청장.
그는 오를레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구청에 모시듯 놔두며, 자신이 대신 인터뷰를 진행했다.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33번 구역의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위병대의 예산을 전년도보다 더 늘릴 생각입니다.
애초에 티르나의 공무원인 위병대는 알베르토의 휘하 사람들이니, 사실상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테러를 막고,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정의로운 정치인.
그가 시민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말하니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경제인들은 이번 일을 기점으로 올해 33번 구에 들어갈 예산이 전년보다 최소 3할은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정작 드뷔에 후작과 관련된 일은, 정말 저 뒤에 조막만 하게 실린 것이 전부군.'
그것도 비행선 중 하나가 고장으로 인해 티르나 바깥에서 추락했다는 말이 전부였다.
'안에 누가 타고 있고, 몇 명이 죽었는지는 언급조차 없어.'
카를레앙 왕국도 이번 일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걸 보아, 아무래도 실패의 책임을 전부 드뷔에 후작에게 떠넘긴 모양이었다.
'로난이 말했던, 티르나라는 도시라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티르나.
확실히 대단하면서도 무서운 곳이었다.
'하지만 뭐, 나와는 관계없지.'
오시안은 다 읽은 신문을 곱게 접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때마침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로레인과 에나가 식재료가 가득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오시안 씨. 축하드려요. 그리고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오! 신입! 이야기 들었어! 이번에도 멋지게 해결했다면서?"
에나는 헤실거리며 웃으며 말했고, 로레인은 오시안에게 다가가 친한 척 말을 걸었다.
"그래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해낸 일에 비해 보수는 의뢰 때 그대로겠지만, 이런 경험이 나중에 다 도움이 될 테니까."
아.
오시안은 왜 로레인이 저렇게 말하는지 뒤늦게 이유를 깨달았다.
오시안이 사전에 했던 계약은 오를레아 왕녀의 호위.
그것도 명분뿐인 호위라서 계약서에 명시된 의뢰 비용은 높지 않았다.
당연히 오를레아 왕녀를 살렸다 하더라도 그 대가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오를레아가 자체적으로 감사함을 담아 사례를 할 수는 있겠지만.
그녀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생각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터.
로레인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오시안을 위로해 준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원래 해결사 일을 하다 보면, 생각했던 보수를 못 받기는커녕 위약금을 물어줘야 할 때도 있으니까!"
"로레인 씨의 경우에는 계획에 없던 폭발을 일으켜서 사전 계획을 어그러뜨렸기 때문 아닌지요. 하필 화약이 가득 쌓인 탄약고를 날려버렸지 않았습니까."
때마침 2층에서 내려온 로난이 한 말이었다.
로레인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초짜 하나가 갱단에게 들켜서 벌집이 되기 직전이었으니까. 뭐라도 관심을 확 끌기 위해서 쏜 거야. 아무튼 덕분에 의뢰는 성공했었다고!"
"예. 성공은 했죠. 주변에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남겼지만요."
"그때 생긴 위약금 갚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리고 중요한 건 오시안이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했다는 거잖아? 그러니 너도 와서 위로해!"
"아. 그 부분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시안 씨의 보수가 곧 올 예정이거든요."
"응?"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 로레인이 점눈이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를레아 왕녀님께서 알베르토 구청장에게 사적으로 요청을 한 모양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해결사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달라고요."
"어...."
"알베르토 구청장 또한 그 부분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고 합니다."
로난은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의 앞으로 종이 하나를 스윽 내밀었다.
뭔데뭔데. 로레인이 오시안의 옆에 바짝 붙어서 종이에 적힌 글귀를 읽었다.
"이건 뭐야. 추가 보수금? 이거야 그냥 구색 맞추기라 하더라도 금액이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뒤에 적힌 단위 수를 세면 셀수록 로레인의 목소리가 모기만 하게 줄어들었다.
"어, 어어?"
신입 해결사는 물론, 중견 해결사조차 평생을 일해도 만질 수 없는 거금에 로레인의 눈동자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왜?"
미처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 눈빛은 '나는 못 했는데 너는 왜?'라고 묻고 있었다.
73화. 유령 사냥 (1)
로레인의 떨리는 동공이 오시안을 향했다.
탁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빛이 보이지 않아 어딘가 무섭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대체, 왜? 왜 너만?"
"어, 언니. 본심이 나오고 있어요."
에나가 로레인을 지적했지만, 로레인은 거기에 대답을 할 정신이 아니었다.
오시안이 이런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뭔가 억울했다.
로난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질투만큼 추한 것도 없습니다."
"뭐 임마!"
"오시안 씨 덕분에 33번 구에 편성될 예산도 늘었고, 재건을 빌미로 자기 권한도 강화했으니 구청장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거기에 더해서 오를레아 왕녀와 좋은 관계를 맺기도 했고, 정치인으로서 이미지 또한 좋게 쌓았다.
아직 임기 기간이 많이 남았지만, 다음 구청장 선거 때 재선의 확률이 높아진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음. 그런데 그 이상으로 이 정도의 돈을 준 걸 보면 어딘가 속내가 보이는 거 같기도 하네요."
에나 그룬트가 의외로 예리한 통찰력을 빛냈다.
"예, 맞습니다. 이 정도로 큰 액수를 준 것은 오시안 씨에 대한 구애나 다름없죠. 자기 밑으로 오라는 뜻입니다."
"그, 그러면 괜찮은 거 맞아요? 그것도 무려 구청장이잖아요! 이렇게 큰돈을 흔쾌히 넘겨줄 정도면, 오시안 씨에 대한 집착이 보통이 아닐 텐데...."
"공무원에는 관심 없다."
에나의 걱정을 단칼에 잘라내듯 오시안이 내뱉은 말이었다.
"게다가 꼭 그 밑으로 들어가라는 법은 없다."
"네?"
"그 남자도 내가 이런 금액에 혹하라고 보낸 건 아닐 거다.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정도겠지."
"이, 이 정도의 돈인데도요?"
"그만한 돈을 움직일 수 있는 자리니까."
오시안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해결사다. 공무원처럼 부리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지급하면 된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라는 듯한 말투.
그런 오시안의 태도에 로레인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름 해결사 일을 하면서 돈을 좀 만져 본 그녀조차도 보기만 해도 심장이 떨리는 액수인데, 오시안은 마치 돈을 길거리에 나도는 쓰레기 보듯이 하고 있었다.
'얘는 지금 놀라지도 않은 건가?'
로레인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시안의 생김새를 보면, 역시 어딘가의 귀한 집 자식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 정도의 금액이 눈에 안 찰 수밖에 없으리라.
정작 오시안의 속마음은 달랐다.
'이 정도의 큰 금액이라니. 더럽게 부담스럽네.'
오시안은 속이 더부룩했다.
알베르토가 이만큼 큰 금액을 보수로 지불한 시점에서 그를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꺼림칙했다.
'아래로 들어오면 더 주겠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그걸 보고 무턱대고 물었다가는 그때부터는 제대로 코가 꿰이는 거야. 지불한 거 이상으로 굴릴 테니까.'
오시안은 이 세상에 떨어지기 전, 회사원으로서 조직의 톱니바퀴로서 살았다.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이 보수에 담긴 의도를 잘 알았다.
'게다가 기사가 돼서 그런지, 묘하게 더 섬뜩하단 말이지.'
전생에서 이런 비슷한 느낌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더라.
군대에서 전역하기 전, 말년 병장이었던 자신에게 평소 사이좋았던 행보관님이 커피를 권할 때였나.
아니면 대학원생 때 교수님이 식사를 하자고 불렀을 때였나.
그때 오시안은 인간으로서의 강렬한 본능을 느꼈었다.
들어가는 순간 끝장이다!
그 느낌을 지금도 똑같이 받았다.
그런 속마음이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은 탓에, 에나와 로레인은 오시안이 전혀 한 치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고 철석같이 오해했다.
에나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아무튼 기뻐할 일이네요! 축하의 의미로 케이크라도 만들어야겠어요!"
"너, 케이크도 만들 줄 아니?"
"네. 제빵도 배웠거든요."
제빵을 배웠다고 케이크가 쉽게 만들 수 있는 거였나?
로레인이 뜨악한 얼굴로 에나를 응시했다.
제빵사(baker)와 케이크류의 디저트를 만드는 파티시에(Pâtissier)는 엄연히 다르다.
굳이 따지면 후자가 더 어려운 쪽에 속했다.
"혹시 다른 디저트도 만들 줄 알아?"
"아, 네. 어지간한 것들은 다 만들 줄 아는데요."
"...."
인증받은 파티시에들이 왕실에 전문적으로 헌상하는 디저트를 만든다는 걸 생각하면, 에나는 상당한 고급 인력이나 다름없었다.
로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우리 사무소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까."
"그 말은 본인에게도 통용된다는 거, 잘 알고 계시죠?"
로난이 지적했지만, 로레인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에나는 장 본 물건들을 들고서 부엌으로 사라졌고, 로레인은 할 일이 없는지 그대로 의자에 앉아 탁자에 철푸덕 엎어졌다.
심심해한다기보다는 오늘 오시안이 받은 보수의 금액을 보고 약간의 현타가 온 것이었다.
"나도, 돈 많이 벌고 싶은데...."
로난과 오시안은 그런 로레인의 투덜거림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뭐 어쩌겠는가. 현실이 이런 것을.
어차피 로레인도 딱히 크게 마음에 담아두고서 한 소리는 아니었기에, 하루 정도가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무소의 문이 열렸다.
"여기가 바이올렛 폭스 맞습니까?"
오시안은 손님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새로 온 손님은 인간이 아니었다.
우락부락한 덩치, 녹색 피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아래 어금니까지.
'오크?'
들어온 손님은 오크였다.
'오크는 몬스터였을 텐데.'
오시안의 기억 속에서 오크는 야만민족 중 하나로서,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적대하는 몬스터였다.
물론 오크가 나름의 문화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부족 생활을 하고 있는 걸 보면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오크는 몬스터였다.
그런 오크가 바이올렛 폭스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몸에 딱 맞는 검은 양복에, 눈가에는 테 없는 안경까지 쓴 채로.
'오크가 양복을? 게다가 안경까지 쓰고 정중하게 묻고 있어?'
흑마법사들이 양지로 나와서 활동하면서 관련 교육기관도 있다는 것까지도 알았지만,
설마 몬스터였던 오크가 유창하게 말을 하면서 인간사회에 녹아들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시안이 속으로 놀라거나 말거나, 로레인이 오크를 보는 순간 테이블에 처박았던 머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네! 여기가 바이올렛 폭스가 맞답니다! 무슨 의뢰를 하러 왔나요?"
로레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시안은 그걸 멀뚱히 바라봤고, 로난은 골이 아픈지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지?"
"돈 냄새를 맡은 겁니다."
"흠?"
오시안이 오크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오크라는 것에 집중해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저 오크가 입고 있는 양복의 재질부터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최대한 검소하게 입은 거 같은데 단번에 알아차린 로레인은 대체 뭘까.
그러거나 말거나 로레인은 오크를 향해 물었다.
"고객님. 무슨 의뢰를 요청하려고 그러시나요? 저 로레인 폰크. 바이올렛 폭스의 베테랑 해결사로서, 어떤 의뢰든지 성공해 보일 자신 있답니다!"
"어, 그게...."
로레인의 적극적인 어프로치에 잠시 당황한 오크는 차분하게 물었다.
"혹시 이곳에 오시안이라는 해결사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
방긋 웃던 로레인의 얼굴이 금이 쩍 갔다.
그 모습에 로난은 재미있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이씨."
로레인이 로난더러 웃지 말라며 강렬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로난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알겠다고 한 뒤, 오크를 향해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곳, 바이올렛 폭스의 중개인인 로난 롤랑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세바스티안이라고 합니다."
오시안은 오크의 이름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뿜을 뻔했다.
순전히 그러지 않은 것은 고고함을 잃지 않는 육체 덕분이었다.
오크 이름치고는 너무나도 고풍스럽지 않은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을 세바스티안이라 소개한 오크가 말을 이었다.
"저희 주인님께서, 능력 있는 해결사를 구하고 계셔서 찾아온 겁니다."
"호오. 주인이시라면?"
"델런 골디런입니다."
오시안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로레인은 다른 모양이었다.
"골디런? 설마 금광 채굴권을 지니고 있다는 그 골디런 가문?!"
"아는 곳인가?"
"그걸 어떻게 몰라? 아주 유명한 곳이잖아! 금광을 발견해서 단번에 대부호에 오른 집안이라고!"
금을 채굴하고 그것을 얻었으니 막대한 부를 지니고 있을 터.
오시안은 의문이 들었다.
그런 곳에서 대체 왜 해결사를 구하기 위해서 온 걸까.
"저. 그보다 오시안 해결사님을 뵙고 싶은데, 혹시 오늘 나오지 않은 것입니까."
"나다."
로난이 소개하기 전에 오시안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오시안을 본 세바스티안은 안경 너머의 눈을 크게 떴다.
"아, 당신이?"
"뭐가 문제지?"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분이셔서."
세바스티안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오시안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의 귀에 들리는 소문으로,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지닌 해결사라는 것만 알았을 뿐.
보통 해결사들이 거친 일을 한다는 걸 알았기에 세바스티안은 오시안을 매우 험악한 인상의, 혹은 어딘가 다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런 귀공자 같은 외모라니.
상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게다가 신기한 것은 초면인데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 나를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무슨 의뢰지?"
지금껏 물심양면 주인을 모셔 왔던 세바스티안은 그래도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가 보기에 오시안은 분명 어딘가의 귀족 도련님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해결사 일을 하다니. 무슨 말 못 할 과거사라도 있는 걸까?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사소한 사실이 아니었기에 세바스티안은 정신을 차리고 질문에 답했다.
"제 주인이신 델런 님께서 뛰어난 실력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뛰어난 실력자라. 이유는?"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가문 내부의 일이다 보니 여기서 말하기에는 조금 껄끄러운 부분이."
세바스티안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간단했다.
의뢰를 받아들여야만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다만 그 행동이 당당하다기보다는, 조금 눈치를 보는 기색이 있는 걸 보아 말을 하는 본인도 크게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대방에게 진실을 감추고서 일부러 뻔뻔하게 행동하는 것이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억지라도 입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재산 때문이 아닌지요?"
그때 로난이 불쑥 끼어들면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세바스티안이 애써 아닌 척하려 했지만, 그의 동공이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그가 이번 일이 초짜라는 걸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최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주이신 다이크 골디런이 인사불성에 빠졌다고요."
"그, 그건...."
"최대한 감춘다고 감췄지만,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분이 어언 몇 달간 두문불출하셨으니 그런 이야기가 새어 나올 수밖에 없죠. 이제는 80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딱히 이상해할 것도 없고요."
"...."
"델런 님은 제가 알기론 그중 세 번째 아들. 그런데 해결사를 모으고 있다는 것은...."
루난의 실눈이 더욱 길게 찢어졌다.
"무력을 동원할 일이 필요한 거군요. 혹시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라도 되는 겁니까?"
세바스티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이상, 더는 비밀로 할 수가 없었다.
"우선 방금 말씀하신 건 대부분 맞습니다. 다이크 님이 현재 인사불성에 빠진 것도, 그리고 후계자 관련된 것도. 다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뭐가 더 있다는 말이군요."
후후후.
로난이 즐겁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수상함이 가득한 미소에 세바스티안이 잔뜩 굳어서 움찔거렸다.
로난의 미소를 마주한 그는 잔뜩 겁을 먹은 모양새였다.
자신보다 머리 2개는 더 작은 인간의 미소에 겁을 집어먹는 오크라니.
오시안은 또 묘하게 납득했다.
로난의 미소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다들 왜 저를 그런 눈빛으로 보시는 건가요?"
정작 로난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크흠. 일단 말씀을 잇자면, 아직 후계자를 정할 때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먼저 해결할 일이 있기 때문이죠."
"해결할 일이라. 흥미가 생기네요. 정확히 어찌 된 일입니까?"
"유령."
세바스티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였다.
"다이크 가주님의 목을 거둬갈 유령을, 제거해 줬으면 합니다."
동시에.
찌릿!
오시안의 미간을 타고 기묘한 전류가 흘렀다.
이것은 직감이었다.
이 의뢰를 받아야 한다는.
74화. 유령 사냥 (2)
"유, 유령이라니."
로레인이 목소리를 떨었다.
어지간한 일에 놀라지 않는 그녀가 당황할 정도로 세바스티안이 말한 의뢰는 터무니없었다.
"왜 의뢰를 이 자리에서 말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알 것 같네요."
로난이 곤란하다는 듯 후후 웃어 보였다.
"이래서야 진실을 말했다 하더라도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요. 장난치지 말라는 반응이나 나온다면 차라리 나을 수준이네요."
세바스티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을 우려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난은 그런 세바스티안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름 교육을 잘 받았다고는 하지만 어리숙한 부분이 보이는군요.'
보통 이런 부분에서 의뢰주인 그들이 일단은 갑이기 때문에 조금 더 뻔뻔하게 나와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바스티안은 이쪽이 한번 찔러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무슨 일인지 가볍게 불어버렸다.
이쪽 업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오시안 씨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도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나름의 정보망은 있다는 소리인데.'
그런 쪽으로 귀는 밝지만, 막상 중개인 업계에서 어떻게 의뢰를 넣을지는 모르다니.
디테일한 부분이 아쉬운 미숙함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안타깝다고 해서 선의로 저들의 의뢰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들의 미숙함은 곧 이쪽의 이득으로 직결되기도 하는 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시안의 의지였다.
아무리 좋은 보수를 지닌 의뢰라 하더라도 오시안이 내키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었다.
'지금까지 오시안 씨의 행보를 보면,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무엇보다 바로 얼마 전에 대형 사건을 하나 끝낸 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로난은 아주 잘 알았다.
오시안이 이번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보수도 크게 받았으니, 오시안 씨가 길게 몇 주 가까이 쉰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도 없겠죠.'
로난이 그렇게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순간.
오시안이 세바스티안을 향해 물었다.
"유령을 잡는데 굳이 해결사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런 쪽이면 오히려 사제를 부르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나."
오시안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로난은 의외라 생각을 하면서도 세바스티안의 답변을 기다렸다.
오시안의 질문은 합리적이었으니까.
유령을 잡아달라면서 해결사를 부른다? 그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유령 같은 고스트 계열 몬스터의 경우에는 사제가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사제라고 해서 돈을 받고 의뢰를 받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게... 저희가 가장 먼저 시도했던 방법이 그거였습니다."
"그랬는데도 안 됐다? 사제의 실력이 부족했나?"
"나름 유명하고 이름있는 사제님을 모셨습니다. 실제로 그분의 신성력은 전문가가 봐도 대단한 수준이었고요.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사제가 유령을 제령하는 데 실패했다라."
게다가 세바스티안은 이렇게 말했다.
목숨을 거둬가는 유령을 막아달라고.
"그렇다면, 유령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거로군."
"...."
세바스티안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누군가가 일부러 가주인 다이크를 암살하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암살을 주도한 자가, 그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자식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그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그랬는데도 나를 찾아온 건가?"
"오시안 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저희 도련님께서 말씀해 주신 거지만요."
도련님이?
이건 또 의외였다. 이런 것은 세바스티안 같은 역할이 직접 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였지?"
"사제와는 다른 성스러운 힘을 쓴다고 하셨습니다."
성스러운 힘이라 부르는 것은 성광(星光)을 말하는 것이리라.
오시안은 가볍게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성광검은 지금까지 의뢰를 수행하면서 몇 번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작열하는 백색 검은 오시안을 상징하는 기술이 되었다.
그걸 두고 성스러운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성광검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 어딘가를 울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그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직접 본 적은 없으면서, 들리는 소문을 가지고 나를 부르려고 한다고?'
세바스티안의 주인인 델런 골디런이 2가지 부류의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하나는 그저 들리는 소문만 철석같이 믿는 귀가 미농지처럼 얇은 남자이거나.
다른 하나는 반대로 소문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탁월한 직감의 소유자이거나.
보통은 전자가 대부분이지만, 오시안은 왠지 그가 후자의 남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 또한 기사의 감각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유령을 운운했을 때, 묘한 느낌을 받았어.'
운명의 이끌림이라고 해야 할까.
오시안은 세바스티안이 말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오시안은 이것과 비슷한 감각을 느꼈을 때를 상기했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일이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성광검을 뽑았을 때? 아니야. 그보다는 조금 더 나중에. 그래, 처음 성운비단을 펼쳤을 때였어.'
성운비단을 처음 사용한 것은 에나를 구하기 위한 의뢰에서, 마르티네즈와 싸우면서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 오시안은 내면의 불꽃이 타닥 하고 튀는 것을 느꼈다.
마치 폭죽에 불을 붙이듯 그것이 발화하여 하나의 온전한 기술로 전환되었던 것.
그다음 비슷한 감각을 느낀 것은 당연히 성광갑주를 둘렀을 때였다.
그때도 오시안은 무언가 불꽃 같은 것이 타오른다는 것을 느꼈다.
'별빛의 힘 때문인가.'
별의 힘은 성광검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음속의 신념이나 용기와 같은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별빛은 평소에 얌전하지만, 한번 불이 붙어서 확장이 일어나면 그대 오시안은 마치 봉인이 한 꺼풀 풀리기라도 하듯 새로운 기술을 펼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별빛의 발화 조건에는 무엇이 있는가.
당연히 오시안의 심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그게 꼭 오시안의 것만은 아니었다.
'별빛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존재한다.'
정확히는 별빛을 발화할 수 있는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오시안과 만나고 화학작용을 하면서 내면의 불씨가 일어나게 되면, 그 불씨의 힘이 오시안에게도 깃들어서 더욱 강해지는 형태였다.
'그렇다면 아무나 붙잡고 같이 다니면 별빛이 생기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별빛은 누군가에게 다 생길 정도로 흔한 것이 아니었다.
'별빛은 자격을 지닌, 일부 특정한 사람들과 마주하면서 새롭게 강화된다. 마치 게임 속에서 레벨업을 할 때마다 스킬포인트를 얻는 것처럼.'
어쩌면 기사로서 모든 스킬이 완전히 해금되지 않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일종의 스킬 포인트를 필드에서 수집하는 형식인가. 기사로서의 힘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겠어.'
물리적인 스탯은 그대로지만, 그 외에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성광이 전부.
그마저도 아직 성광의 완전함을 깨우치지 못했다.
만약 힘이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면.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그런 힘과 감응해서 내면에 불씨를 지니고 있던 거라면.
'어쩌면 반대로, 누구도 찾아내지 못한 파편이 다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로군.'
세바스티안이 말했던 유령에 직감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유령 당사자가 됐건, 혹은 쓰러진 다이크 골디런이 됐건, 세바스티안의 주인인 델런이 됐건.
이번 일은 그가 본래 지녔어야 할 '힘'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흥미롭군."
성광의 힘을 벌써 3개나 깨우쳤기 때문일까.
이전보다 감각이 더욱 예리해진 것을 느꼈다.
마치 다음 이정표가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안내라도 해주기라도 하는 느낌.
굳이 비유하자면, 게임에서 퀘스트를 승낙했을 때 지도에 표시를 찍어 주는 가이드가 따라붙은 것 같았다.
오시안은 여기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그 의뢰. 받아들이기로 하겠다."
"저, 정말입니까?!"
세바스티안이 반색하며 물었다.
본래 여기서 의뢰를 받아 준다고 해서 저렇게 기쁜 티를 내는 것은 초짜나 할 행동이지만, 세바스티안은 그런 자각도 없었다.
"오시안 씨, 괜찮으시겠습니까?"
로난이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물었다.
마치 오시안이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에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
"그 유령의 존재가 뭔지 궁금하기도 하고, 안 그래도 이번에 새롭게 얻은 깨달음을 소화할 기회도 필요했으니까."
성광갑주를 사용하게 됐으니 이제 이걸 어떻게 다루는지 연습해야 했다.
게임이야 버튼 하나를 딸깍 누르면 알아서 스킬이 자동으로 시전 된다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다르다.
기술을 구현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 그 모든 시작부터 과정, 그리고 마무리까지가 세심하게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차라리 망토만 달랑 있던 성운비단은 나았다.
성광갑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별빛으로 두른 전천후 대인전 전투형태.
당연히 힘과 정신력의 소모가 말이 안 될 정도로 컸다.
알베르토 로렌초 구지사는 오시안이 일부러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그 힘을 풀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냥 지쳐서 알아서 풀린 거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실전으로 성광갑주의 숙련도를 올릴 수도 있으니, 가서 나쁠 건 없겠지.'
게다가 이번 의뢰의 중요한 점 중 하나는 바로 보수가 명확하게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일단 실력 있는 해결사들을 모은 뒤에, 직접 델런이 평가를 한 뒤에 개별적으로 보수를 측정하는 것 같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낮게 받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기대하지 않은 것 이상을 얻을 수도 있다는 소리.
이미 큰돈을 벌어서 돈에 대한 욕심은 당장은 없다.
저들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의뢰를 요청했다. 돈 이상이 되는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언제부터 움직이면 되지? 안내해라. 오크."
"저, 저는 세바스티안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만."
"이름은 이미 알고 있다. 오크."
"...."
세바스티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흰 여인은 홀로 창가에 앉아 도시 바깥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무미건조한 눈동자에는 33번 구 도시의 모습이 펼쳐졌다.
누군가는 거기서 활기를 느끼고, 누군가는 분주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흰 여인은 달랐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이 황동의 도시는 그저 무채색에 가까웠다.
오로지 단 하나.
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는 그 남자뿐이었다.
"아아."
그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술을 비집고 기쁨의 탄성이 흘러나온다.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는데도, 오시안이 바로 그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녀는 참아야만 했다.
똑똑.
그때 그녀가 거주하는 방의 문을 누군가 정중히 두드렸다.
그녀는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는 이걸로 충분히 의도를 전했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라고 말한 적 없지 않았나요?"
"그쪽도 제 집무실에 한번 멋대로 들어왔으니 이걸로 똑같다고 치죠."
그렇게 말한 것은 33번 구지사인 알베르토였다.
"게다가 여기는 구청입니다. 구지사인 제가 돌아다니지 못할 곳은 없다고 봅니다만."
"제가 있는 곳은 달라요. 특별하니까요."
"뭐, 그런 걸로 생각하죠."
"그래서 왜 찾아왔죠?"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흰 여인을 향해 알베르토가 물었다.
"알렌시아 헤어 집행관에게 들었습니다. 당시 오를레아 왕녀님 암살 관련해서, 현장에서 그들을 발견했음에도 바로 접촉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셨다고요."
"예. 그랬죠. 덕분에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잘 풀렸고요."
"왜 그러셨던 겁니까?"
알베르토는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흰 여인은 설마 오시안이 그렇게 행동할 걸 알고서 이 모든 것을 그렸던 걸까?
아무리 그녀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모종의 이유가 있을 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거든요."
"무슨 준비 말입니까."
"그런 것이 있어요."
흰 여인은 이 건에 대해서 더는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베르토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 했다.
그래도 방금 전의 대화로, 흰 여인이 눈여겨볼 정도로 오시안이 뛰어난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은 확신하게 되었으니까.
'반드시 영입하고 말겠다!'
알베르토는 뛰어난 인재를 향한 열망을 마음속에서 불태웠다.
75화. 골디런 (1)
"직접 모시겠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오시안을 최고급 증기 자동차에 태웠다.
검은색의 유려한 디자인의 자동차는, 고작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것치고는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셋째 아들이라 했는데, 해결사 하나를 부르는 데도 이런 고급 차량을 사용할 정도라면 돈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지. 역시 금광을 발견하고 떼부자가 된 집안은 다르다 이건가.'
특히 다이크 골디런의 경우에는 단순 금광 채굴만으로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이 아니다.
금으로 번 돈만으로도 평생은 떵떵거리며 먹고 살 수 있는 다이크였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 자금을 바탕으로 도시 전역에 벌이는 다양한 사업에 투자했고, 큰 건을 연속으로 성공하며 재산을 몇 배 가까이 불렸다.
더 위험한 도박을 수차례 감행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성공한 것이다.
그야말로 야수의 심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투자의 귀재이자 천부적인 사업가였다.
"출발하겠습니다."
오시안의 옆에 앉은 세바스티안이 말하자 운전수가 출발했다.
오시안은 바깥으로 흘러 지나가는 풍경을 살폈다.
"어디로 간다고 했었지?"
"아, 네. 저희는 골디런 가문의 별장이 있는 29번 구로 향할 겁니다."
"29번 구라...."
티르나의 구역에 대해서 대략적인 정보를 접한 오시안은 20번 대 구역으로 넘어간다는 말에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했다.
"20번 대 안쪽부터는 경계가 더 심해지는 데다가 신분증 검사도 철저히 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갈 수 있나?"
"예. 뭐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야기는 전부 끝나 있으니까요."
역시 돈이 많아서일까.
증기 자동차는 막히는 일 없이 도로를 주욱 달렸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건축물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잘 조성된 숲이었다.
'숲. 아니, 공원인가.'
29번 구는 거대한 인조 공원이 자리 잡은 구역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보이는 저택들은 상당히 크고 화려해 보였다.
'돈 많은 대부호들의 별장이 주로 있는 곳이라고는 들었지만, 도시의 구역 하나에 이만한 크기의 인조 공원을 조성해 놨을 줄이야.'
공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는데 전부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서울로 치면 반포동 정도 되려나?
오시안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자동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입니다."
차가 멈춰 선 곳은 딱 봐도 으리으리해 보이는 저택의 앞이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경악했다.
'부자 만나러 간다고는 들었는데, 더럽게 크네.'
이 정도면 대체 얼마짜리 집일까.
이번에 알베르토 구지사에게 받은 보수도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저런 저택을 산다는 것은 꿈도 못 꿀 것 같았다.
'이런 곳에 나 같은 해결사를 불렀다고?'
이쯤 되니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의아하다 못해 부담스러움이 느껴질 정도.
반대로 세바스티안은 그런 오시안의 모습을 힐끔 살피더니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놀랍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저택을 마주하는 순간 위축되기 마련인데.'
애초에 다이크 골디런은 초대받은 손님을 초장부터 찍어누르기 위해서 일부러 별장을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즉 의도가 다분한 건축물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오시안은 어떤가.
'미동조차 없다. 마치 자신이 당연한 곳에 오기라도 한 것마냥, 그저 태평하기만 해.'
이곳을 몇 번이나 봐 온 자신도 적응이 되지 않아 문을 드나들 때마다 긴장을 하는데, 오시안에게는 그런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도 느낀 거지만, 역시 어딘가의 고명한 귀족 출신이었던 걸까?'
오시안이 해결사가 되기 전에 어디서 뭘 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시안 본인도 기사였다고만 말하고 그 외의 것은 말하지 않았다.
아마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리라.
다들 그의 외모와 행동거지를 통해, 아주 귀한 집안의 사람이었다는 것만 유추할 뿐.
세바스티안은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저택을 보고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안 들어가나?"
오시안은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세바스티안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예, 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세바스티안은 오시안을 데리고 저택의 안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넓은 홀이 보였다. 바깥에서 봐도 훌륭했는데 안쪽은 더 했다.
말 그대로 돈을 덕지덕지 발랐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저택의 바깥에서 한번 1차로 놀라게 하면, 이곳은 거기서 한 번 더 충격을 가하는 형태로 디자인된 로비였다.
세바스티안은 솔직히 이 정도면 충분히 놀랄 만도 하겠지 하며 슬쩍 오시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여기 안에 들어왔는데도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다니.'
아무리 세심하게 살펴봐도 오시안의 눈동자나 입꼬리나 그 미세한 움직임조차도 없었다.
지금 오시안이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림은 무려 최근 경매장에서 10억이 넘는 값을 주고 사 온 거장의 그림인데도 말이다!
'비싸 보이는 그림이네.'
정작 그림에 대한 문외한인 오시안에게 그런 건 없었다.
그냥 그림이 비싸 보이는구나 정도의 감상뿐.
결국 오시안을 놀라게 하는 걸 포기한 세바스티안은 그를 델런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오시안은 델런 골디런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호기심이 들었다.
'셋째라 들었는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한데.'
다이크 골디런에게는 4명의 자식이 있다.
첫째인 장남 데이빗 골디런.
둘째인 차녀 마실리 골디런.
셋째인 델런 골디런.
그리고 막내인 마리아 골디런.
전부 다 한 명의 부인에게서 나온 자식이었다.
보통 돈 많은 부호들이 첩을 여럿 들이는 것이 일상인 것을 생각하면 다이크는 매우 이례적인 순애보를 보여 주는 편이었다.
다만 그렇다 해서 형제자매들이 사이가 좋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다이크가 인사불성에 빠진 지금, 막대한 유산에 대한 지분으로 난장판이 될 테니까.
"어머, 이게 누구니?"
그때 맞은편 복도에서 하이톤 목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세바스티안은 하필이면 곤란한 사람을 마주했다며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가까이서 걷고 있던 오시안은 확실하게 들었다.
"세바스티안.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 다 있네."
"...오랜만입니다, 마실리 아가씨."
마실리 골디런.
다이크의 차녀로 오시안이 만나러 가는 델런의 바로 맞누이 되는 사람이었다.
오시안은 마실리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드레스와 모자. 반지와 팔찌, 목걸이는 전부 다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어 값이 비싸 보이는 것들이었다.
긴 갈색 머리를 지닌 미녀였는데, 얼굴에 화장을 과하게 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 보였다.
그녀는 세바스티안과 친하다는 듯 말을 걸었지만.
'일부러 그런 거로군.'
세바스티안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감정은 혐오와 모멸감이었다.
"네 주인이 지금 혼자서 가만히 있는데, 그 아래 시종이라고 하는 너는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델런 님께서 손님을 데려오라고 하셔서, 마침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하아. 손님? 그 아이는 그래서 안 돼. 지금 아버님께서 몸져누운 상황인데 손님은 무슨 손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실리의 주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히 마실리 본인을 보필하는 시종도 있었지만, 오시안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구지?'
해결사는 아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 사람에게서 짙은 피냄새가 날 리가 없었다.
'해결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사람인 것은 알겠군.'
190이 넘는 키에 어딘가 딱딱한 인상을 지닌 반삭의 남자였다.
그 또한 오시안을 보더니 이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발의 의도가 다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오시안은 그런 남자를 말끔히 무시했다.
꽤 강해 보이는 것은 맞지만, 이쪽을 위협할 만한 수준이냐면 또 그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안.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어. 대체 왜 냄새나는 오크가 아직도 우리 저택에 머물러 있는지 말이야. 네가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아가씨. 그건...."
"아니면 그런 걸 설명할 두뇌도 없는 걸까?"
마실리는 세바스티안을 향해 대놓고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세바스티안이 오크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녀의 날 선 목소리는 어딘가 표독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마실리가 오시안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세바스티안이 데려온 사람이니 그저 그럴 거라 생각하고 관심을 주지 않았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시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마실리의 뺨에 미세하게 홍조가 돌았다.
"저, 혹시 실례하지만 귀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세바스티안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격식을 차린 물음.
오시안은 그런 마실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시안이다."
"네? 혹시 성은...."
"없다. 그냥 오시안이다."
"그, 그렇다면 무슨 일로 저 오크랑 함께 오신 건지...."
"해결사가 의뢰를 받아서 오지 다른 이유가 있을까?"
"해, 해결사?"
마실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세바스티안과 오시안을 번갈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세바스티안이 해결사 쪽이고 오시안이 그를 부리는 주인에 가까운 외모였기 때문이다.
"뭐냐. 해결사 나부랭이였어?"
마실리의 뒤에 선 남자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나 참. 그래도 어디 고명한 조직에서 사람을 보낸 건 줄 알았는데, 제대로 된 소속도 없이 떠도는 해결사였다니. 이런 급 낮은 놈이 골디런 저택에 멋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
"넌 누구지?"
"나? 내가 누구인지 몰라? 나는 호머 루이스. [슈프리머시] 소속 2급 뮤턴트다."
슈프리머시?
오시안은 그게 뭔지 고민하다가 예전에 로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뮤턴트들이 모여서 만든 하나의 조직이라고 했던가.'
과거 뮤턴트가 처음 이 세상에서 나타났을 때, 그들은 차별과 박해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였지만 그 때문에 인간이 두려움을 사서 그들을 차별한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며 뮤턴트의 숫자도 늘어난 지금, 티르나에서 뮤턴트는 곧 타고난 재능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런 뮤턴트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 바로 [슈프리머시]였다
태생부터 인간보다 우월한 자들이기에 그런 이름을 쓴 것이다.
"애초에 너 같은 해결사 나부랭이라는, 급이 다른 사람이라 이거다."
호머는 오시안을 향해 이죽거리며 말했다.
오시안은 그런 호머를 보며 물었다.
"별로 그렇게 뛰어나 보이진 않는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오시안은 호머가 말하는 2등급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고, 슈프리머시 조직 소속이 그렇게 뛰어난지도 잘 몰랐다.
다만 지금 눈앞의 호머 루이스라는 남자는, 아무리 좋게 쳐 줘도 그가 쓰러뜨렸던 울르아즈 흉악범인 볼라보다 약해 보였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냐."
오시안의 말에 호머가 발끈하며 나섰다.
그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손가락이 울긋불긋 거리며 무언가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마실리가 말려야 함에도, 정작 그녀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시안의 외모에 혹하기는 했지만, 델런의 집사인 세바스티안이 데려온 남자이니 여기서 치운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저택에서 소란은 금지입니다."
세바스티안이 나서며 호머를 말렸지만, 호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부릅떴다.
"더러운 오크 새끼는 짜져 있어. 길바닥 오물이나 주워 먹던 새끼 주제에 양복 좀 입었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나 보지? 그 잘난 모가지에 썰어 줄까? 이 열등 종족 새끼야?"
믿기 힘들 정도의 폭언에 대신 반응한 것은 오시안이었다.
"넌 안 되겠군."
오시안은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호머의 말은 아무리 그래도 선을 제대로 넘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싸우지 말아요!"
그것을 막은 것은, 갑자기 둘 사이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림자의 벽이었다.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죠!"
끓어오르던 분위기를 맥 없이 흩트리는 말.
목소리의 주인은 갈색 머리에 인형처럼 귀여운 소녀였다.
마실리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어린,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
골디런 집안의 막내인 마리아 골디런이었다.
그런 마리아의 곁에는, 그림자의 벽을 만들어 낸 것으로 보이는 흑마법사가 함께였다.
"허."
오시안은 그 흑마법사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흑마법사 또한 오시안을 보더니, 머리에 쓴 산양 뿔 가면의 안쪽 눈동자가 더 커지는 게 보였다.
엘리제 데나로바.
이전에 만났던 괴짜 흑마법사 소녀도, 이 저택에 온 것이었다.
76화. 골디런 (2)
엘리제 데나로바.
오시안이 처음에 의뢰를 맡았을 때, 오시안과 약간의 충돌을 일으켰던 흑마법사 소녀였다.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그건 엘리제도 마찬가지인 듯 가면 너머의 그녀의 시선이 오시안에게 못 박힌 듯 떨어지질 않았다.
저쪽에서 딱히 아는 척을 해 오지 않았기에 오시안도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흑마법사이기도 했지만, 엘리제 데나로바라는 사람 자체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쳐도 이 자리에 자식이 벌써 둘이나 모인 건가.'
둘째와 막내.
둘 다 딸이었지만 성격은 서로 정반대로 보였다.
차녀인 마실리는 표독하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다면, 막내인 마리아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다이크의 나이가 거의 80이라 들었는데, 막내가 생각보다 어리군.'
마실리의 나이는 화장을 감안해도 40대였지만, 마실리는 아무리 높게 쳐도 스물이 채 안 돼 보였다.
차녀가 결혼을 일찍 했다면 딱 저 나이대의 자식이 있을 법했다.
어쩌면 저 정도의 나이 차가 있기에 같은 아버지에서 나온 딸임에도 성격의 차이가 있는 걸지도 몰랐다.
"마리아, 학교는 어쩌고 여기에 온 거니?"
마리아를 향한 마실리의 눈빛은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동생이라기보다는 눈엣가시를 여기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활기차게 답했다.
"오늘은 쉬는 날! 무엇보다 아빠가 아프다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서 여기, 내 친구를 데려왔어!"
친구라고 말하며 마리아는 곁에 따라온 엘리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엘리제가 몸을 움찔 떨었지만, 그걸 알아차린 것은 오직 오시안뿐이었다.
마실리가 고용한 [슈프리머시] 소속 뮤턴트들은 엘리제를 알아보고는 꽤 위축되어 있었다.
뮤턴트로서 자부심을 보인 만큼 실력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그만큼 엘리제 데나로바라는 이름이 주는 힘이 크다는 소리.
그런 엘리제를 허물없이 대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대범한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친구라고 했나? 또래라는 걸 생각하면 또 그렇게 보이는데. 단순한 고용 사이는 아닌 모양이로군.'
그러거나 말거나 마실리와 마리아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아버님은 건강하게 일어나실 테니까. 혹여라도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걸 해결하는 것은 차녀인 내 역할이야. 그러니 너는 학교나 열심히 다녀. 그게 네가 돕는 일이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버지가 아픈 건 이 집안 모두의 일이야. 그러니 나도 도우러 온 거고."
"마리아. 네가 이번 일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소꿉장난 같은 게 아니야."
"나도 기본적인 것은 다 알아. 그래서 이렇게 든든한 친구도 데려왔는걸!"
"그래 봤자 고작 한 명. 뭘 할 생각인데?"
"흥. 언니가 잘 몰라서 그래. 엘리제가 얼마나 강한데! 언니가 뒤에 데리고 온 사람들 한 트럭을 가져다 놔도 엘리제는 못 이길걸?"
그 말에 마실리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치솟았다.
아무리 그래도 막내의 헛소리가 도가 지나쳤다 싶어서 무어라 말을 하려는 그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실리의 시종이 그녀에게 조심히 귓속말을 전했다.
'마실리 아가씨. 막내 아가씨의 말씀은 조금 철없어 보이시겠지만, 저 옆에 있는 흑마법사의 실력은 진짜입니다.'
'그게 정말이에요?'
'예. 엘리제 데나로바라고, 흑마법사 아카데미에서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한 아이입니다. 흑마법사 노동조합 소속으로 간혹 의뢰를 받아 일을 해결해서 실전 경험도 나름 풍부하고요.'
'우리가 고용한 사람과 비교하면 어떻죠?'
'슈프리머시도 절대로 약한 조직은 아닙니다만, 그렇다 해도 이 숫자로는 애매할 수 있습니다.'
둘이 나누는 귓속말이었지만 청각이 예리한 오시안은 전부 들을 수 있었다.
"...흥.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래 봤자 시간낭비일 뿐이겠지만."
마실리는 여기 남아서 입씨름해 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했는지 멋대로 말을 끊으며 그대로 휙 가 버렸다.
물론 지나가면서 세바스티안을 한번 노려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너. 내가 기억해 뒀다."
호머는 오시안을 지나칠 때 일부러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누가 기억해 둔다는 건지.
뻔한 협박이었지만 오시안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아저씨! 안녕!"
"안녕하십니까, 막내 아가씨."
"오랜만에 보는데 덩치는 더 커진 거 같네요! 오크라서 그런가? 뭘 먹으면 그렇게 커지나요? 진짜 막 사람 잡아먹는 건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요."
세바스티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발언이 무례하다는 걸 이 당돌한 아가씨는 과연 알고는 있는 걸까.
그래도 마실리와 비교하면 마리아의 태도는 퍽 귀여운 수준이었다.
최소한 세바스티안을 대놓고 모욕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아저씨는 언제까지 여기서 일하시나요?"
"네?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저희 집에서 천한 오크를 키워서 냄새가 난데요. 솔직히 저는 냄새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런데 제 친구들이 싫어하니까 좀 그러잖아요?"
"아가씨. 그게...."
"그래서 언제 쫓아낼 거냐고 묻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쫓아내기는 좀 그래서, 제가 물어보기로 했어요."
마리아의 순진무구한 질문.
오크인 세바스티안을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행동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저는 델런 도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저를 내보내지 않는 이상, 저는 언제까지고 그분 곁에서 머무를 겁니다."
"오빠도 참. 취향이 특이해서 문제네요. 오크가 뭐가 좋다는 건지."
세바스티안은 그 말을 묵묵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저 말을 듣고 불쾌해하거나 화를 낼 권리 자체가 없었다.
"와! 그보다 여기 잘생긴 오빠는 누구인가요?!"
마리아는 오시안을 보더니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빛냈다.
"델런 도련님께서 초대한 손님입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아저씨 이제 잘리는 건가?"
세바스티안은 이제 될 대로 되라 싶은 심정으로 허허 웃었다.
미소에는 힘이 없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할 일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또 봐요! 가자, 엘리제."
마리아가 엘리제 데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빠르게 찾아온 침묵 속, 오시안은 세바스티안에게 무슨 말을 할지 잠시 고민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바스티안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못 볼 꼴을 보여드리고 말았군요."
"괜찮은 건가?"
"...이 집에서 겪은 취급이야 이제 익숙해졌으니까요."
"반응을 보아하니 하루 이틀이 아닌 모양인데, 용케도 견디면서 남아 있군."
"전부 제가 모시는 델런 도련님 덕분이죠. 그분께서 저를 거두어 주신 덕분에, 저는 이렇게 있을 곳에 머무를 수 있게 됐습니다."
대체 델런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세바스티안이 이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걸까.
오시안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셋째를 상상해 보았다.
어딘가 유약하거나 사근사근거리는 친절한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아인종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능력대로 대해 주는 그런 착한 사람 말이다.
집무실에 도착한 세바스티안이 문을 두드렸다.
"델런 님, 말씀하신 해결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안쪽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델런 골디런의 모습이 보였다.
"왔나?"
델런이 오시안을 슬쩍 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또 의외인데.'
오시안은 델런이 유약하거나 친절한 남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그는 오히려 정반대의 인상이었다.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과 인상.
딱딱하고 사무적인 말투와 목소리.
올백으로 깔끔하게 넘긴 사무적인 스타일.
40대인 차녀와 20대인 막내 사이임을 짐작하던 딱 서른으로 보이는 그는 차갑고 이지적인 느낌의 남자였다.
"왔군. 네가 바로 그 해결사인가?"
"오시안이다."
오시안이 그렇게 답하자 옆에 있던 세바스티안이 뜨악 하고 놀랐다.
설마하니 고용주에게 초면부터 반말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델런은 놀랍게도 그런 부분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당당한 게 보기 좋군. 부디 실력도 그 태도만큼 했으면 좋겠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해결사를 고용하는 데 이유가 뭐겠나. 당연히 의뢰지."
"의뢰 내용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세바스티안이 제대로 설명은 해 주지 않은 모양이군."
"유령이 나타났다는 이야기 정도만 해서 말이지."
한 치의 밀림도 없는 대화.
세바스티안은 어째서인지 주인이 둘이나 된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델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소파 앞의 작은 테이블에는 미리 준비해 둔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그 정도면 대충 기본적인 건 알고 있다 봐야겠군."
"유령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래, 우선 우리 집 노인네가 갑자기 쓰러진 것부터 가야겠어."
우리 집 노인네라니.
그래도 아버지일 텐데 가족 사이가 좋지는 않은 걸까.
"나이에 맞지 않게 그렇게 정정하던 양반이 갑자기 쓰러졌어. 우리가 모르던 지병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몰랐는데, 의사를 불러와 보니 딱히 그런 건 아니라더군. 그냥 영문 모를 상태로 쓰러진 거야."
"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로군."
"그래. 혹시나 마법 혹은 흑마법이나 다른 무언가 저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 그러지 않고서야 며칠이 지나도 노인네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으니까."
델런이 잔을 들더니 커피를 가볍게 들이켰다.
"누군가 노인네를 노렸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재산 싸움인가. 용의자는?"
"우선 나는 아니라고 해두고 싶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겠지. 사실 누가 안전하고 그런 건 없어. 여기 집안 모두가 그럴 가능성이 넘치는 사람들이니까."
"솔직하군."
"아무튼, 문제는 다음에 터졌지. 갑자기 한밤중에 이상한 유령이 나돌기 시작한 거야."
유령.
세바스티안이 했던 이야기였지만 또 이게 나오니 뭔가 묘한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유령이라는 느낌이 강했지. 뭔가 보자기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손에는 낫 같은 커다란 날붙이를 쥐고 있었어. 어떤 의미로는 사신이라고 봐도 무방하겠군."
"사신이라...."
"아무튼 녀석이 나타나고 나서 저택은 엉망이 됐지. 아직까지 피해자는 나오고 있지 않았지만, 목격자들이 많고 그걸 보고 졸도한 사람도 적지 않아. 노인네가 쓰러진 뒤에 나타난 사신 모습의 유령이라니. 이 별장에 저주가 내렸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더군."
유령의 출몰 이후 저택 내에서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다이크의 수명이 다했으며 저 유령은 다이크의 목숨을 거둬가기 위해 직접 찾아온 거라고.
"고명한 사제고 뭐고 소용없었어. 신성력 앞에서도 녀석은 멀쩡했다고 하더군."
"직접 보지는 않았나?"
"상급 사제가 자기 혼자서 해결하겠다고 나섰다가, 사색이 되어 도망친 것은 보았지."
사색이 되어 도망쳤다니.
대체 얼마나 강한 유령이길래 그런 걸까.
델런이 오시안을 슬쩍 살피더니 차갑게 웃었다.
"보아하니 거짓말이거나 혹은 무언가 헛것을 본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딱히 그건 아닌데.'
오시안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만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다 보니, 델런으로서는 오시안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뭐, 나도 말 몇 마디로 설득할 생각은 없다. 따라와라."
잔을 비운 델런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델런이 오시안과 세바스티안을 데리고 간 곳은 저택 인근의 정원이었다.
"여기다. 사제가 이곳에서 유령을 마주하고, 패배하여 도망쳤지."
델런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을 턱짓했다.
"최소한 증거는 필요하겠지? 저게 그 증거다."
정원의 한쪽에는 새하얀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분수대가 있었다.
평소였다면 물을 시원하게 뿜어야 할 그 분수대가 지금은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분수대는 무언가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선으로 잘려 나가 있어서였다.
"사제가 유령과 싸우면서 남긴 흔적이다. 싸웠다고 보기에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힘자랑처럼 보인다만."
오시안은 그 흔적을 자세히 눈여겨보았다.
거대한 참격이었다.
대리석 분수대를 비롯해, 그 주변 바닥까지 한번 훑고 지나간 모양.
하지만 더욱 오시안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그 참격이 만든 흔적이었다.
분수대에 아직 고여 있는 물이, 베어낸 흔적을 따라 서리가 끼듯 얼어 있었다.
"이건...."
"왜. 신기한가?"
델런의 물음에 오시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흔적이다."
77화. 골디런 (3)
"아는 흔적이라고?"
델런이 의아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는 눈빛. 오히려 모르는데 일부러 잘 보이려고 막 질러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있었다.
"못 믿는 눈치군.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자리에 처음 온 해결사가 안다고 하면, 오히려 믿는 게 이상하지 않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오시안은 괜한 입씨름 대신, 흔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본적으로 유령은 음의 기운이 강하다. 고스트 계열 몬스터들도 그런데, 놈들이 나타나면 기온이 내려가거나 서리가 내려앉거나 하는 경우가 다분하지."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리고 고스트계열 몬스터는 인간의 정신이나 마음을 뒤흔드는 공격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식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녀석이 없지는 않지만 아주 드물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고스트 계열 몬스터는 수천 년은 된 지하 묘굴 같은 곳에서나 겨우 볼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도 보스 몬스터로 존재하기는 했는데, 딱 한 마리뿐이었고 그마저도 대륙 오지에나 있었으니 대단히 희소했다.
그게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불러냈다거나.
"게다가 여기에 남은 흔적을 보면, 지나칠 정도로 예리하다."
오시안은 잘려나간 대리석 분수대의 단면을 살폈다.
얼마나 예리하게 베어냈는지 분수대의 단면이 매끄러운 수준이었다.
"고스트 계열 몬스터는 낫을 휘두른다 하더라도 거의 잡아 찢는 수준으로 투박한 상처를 내는 편이다. 이렇게 예리한 흔적은 남길 수 없어."
"그 말은, 유령의 짓이 아니다?"
"정확히는, 유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게 진짜 유령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알고 있다는 흔적이라는 의미는?"
"여기에 껴 있는 얼음과 서리, 이게 가능한 경우가 3가지나 있다."
델런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첫째는, 당연히 얼음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지."
"마법사라고?"
"얼음 마법은 단순히 상대를 얼리거나 하지 않아. 오히려 정제된 얼음 원소 마법은 얼음의 칼을 휘둘러 상대방을 절단내기도 한다. 냉기효과는 부가요소지."
"호오. 마법사라. 매우 흥미로운 추론이군.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북부 바바리안이다."
"야만민족을 말하는 거로군."
"그들은 혹한의 냉기와 함께 지내며, 그 냉기를 다루는 힘을 터득한 자들이지. 날붙이만 있다면 거기에 서리의 힘을 부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야만전사 직업의 3가지 트리 중 [서리 늑대]트리를 갈 경우에 냉기와 번개, 폭풍의 힘을 다룰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역시 얼음 속성을 부여하는 냉기의 혼 스킬이리라.
그 설명을 옆에서 듣고 있던 세바스티안은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했다.
'뛰어난 해결사라고는 들었지만, 이런 흔적만 가지고 이 정도로 추론을 해내다니.'
세바스티안도 이게 꼭 유령의 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품었지만,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용의자를 추려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시안은 정원에 남은 흔적만 가지고 단번에 분석을 한 것이다.
해결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정도로 폭넓은 지식이라니.
역시 해결사가 되기 전 그는 범상치 않은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마법사에 야만족들이라.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는 뭐지?"
"세 번째는... 흠. 아마 없다고 봐야겠지. 전부 사라졌거든."
오시안의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느꼈지만 델런은 굳이 그걸 캐묻지 않았다.
"아무튼, 유령의 소행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 거로군. 사제가 퇴치하지 못한 이유도 납득이 가. 진짜 유령이 아니라면, 사제의 신성력이 먹혀들 리가 없겠지."
"이러면 정말로 집안사람들 쪽에서 누군가 나올지도 모른다."
오시안의 말에 델런이 차갑게 웃었다.
"각오라도 해두라는 건가? 아까도 말했지만 이렇게 될 거라고 쉬이 짐작은 하고 있었어."
"그런가."
오시안은 미묘한 불안감이 저택을 감도는 것을 느꼈다.
그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오시안은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적한 정원의 풍경만이 있을 뿐.
방금 전 느낀 시선도 그저 착각일 뿐이었다는 듯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분명 누군가 지켜본 것 같았는데.'
분명 착각은 아닐 것이다.
아마 델런의 다른 형제자매가 고용한 사람들 중 능력이 특출난 누군가가 지켜본 거겠지.
"그보다 다이크 가주의 상태는 어떻지?"
"노인네는 여전히 인사불성이다."
"확인은 해봤나?"
"처음에 봤을 때 거의 핏기가 가신 채 시체처럼 누워 있었지. 그래도 숨은 쉬고 있더군. 다만 그 이후에는 본 적이 없다. 의료진들과 비서가 출입을 막았거든. 안정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비서?"
"더스틴 크루거. 노인네와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 온 직장 동료다. 아버지 옆에서 열심히 일을 보필해서 도운 덕분에 이 집안에서 발언권은 노인네에 버금가지."
그 사람이 다이크의 병실 출입을 막았다는 말에 오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믿을 만한 사람인가?"
"노인네가 다른 건 몰라도 옆에 사람 하나는 잘 뒀지. 최소한 내 형제자매보다는 믿을 만해."
"그러면 현재 다이크 골디런의 상태는 확인해 볼 수 없는 건가?"
"더스틴 아저씨가 지키고 있으니까. 설사 자식들이라 해도 출입이 불가능해. 아니, 오히려 자식들이니까 더 안 되려나."
더스틴 비서 입장에서는 자식들 또한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안정을 핑계로 다이크의 침실에 그 누구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명분 또한 충분했다.
다이크의 목숨을 거둬갈 유령이 나타났으니, 그를 지키겠다며 돈을 주고서 사람들 또한 고용한 것이다.
혹시라도 별장 내부에서 물리적인 충돌 사건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충분하게 제압이 가능하도록 말이다.
'생각보다 저택 내부의 상황이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같은데.'
막내 마리아가 부른 엘리제 데나로바도 그렇고.
차녀가 고용한 뮤턴트 조직도 그렇고.
게다가 집사라는 양반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싸움꾼을 고용했다고 한다.
아직 만나지는 않았지만, 아마 장남인 데이빗도 이에 필적하는 사람들을 고용했을 터.
'만일 정말로 누군가 재산을 노리고서 다이크 골디런을 암살하려고 했던 거라면.'
그리고 그것이 완벽하게 끝맺지 못해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까지 오게 된 거라면.
여기서 한발만 더 나가게 된다면, 이 별장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뀌고 말 것이다.
'이래서였나. 내 감각이 울렸던 것은.'
세바스티안으로부터 설명을 듣는 순간 찌릿하게 느껴지던 기묘한 감각.
고작 유령이라는 이야기만으로 이런 느낌을 받았을 리가 없었다.
실제로 와서 확인을 해보니, 저택 내부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그걸 노려서인지, 본래라면 이 정도 크기의 저택을 돌아다녀야 할 사용인들 또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시안의 시선이 델런을 향했다.
"왜 나를 부른 거지? 지금 상황을 보면 이 별장에서 감도는 분위기는 보통의 것이 아니다. 그쪽도 이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런데 고작 해결사 하나만 불렀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얼핏 소문을 들었거든."
델런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최근 33번 구에서 있었던 사건. 카를레앙 왕국의 사절단인 왕족을 암살하려던 심각한 일이었지. 결국엔 테러리스트들의 실패로 돌아갔지만, 간담이 서늘해질 수 있는 일이었어. 듣자 하니 왕녀의 탁월한 기지와 능력으로 상황을 타개했다고 하는데."
델런이 피식 웃었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듣는 귀가 있거든. 커다란 음모 하나에 해결사 하나가 끼어들었다는 소식 정도는 전용 정보망으로 접하기 어렵지 않았어."
"그게 나라는 걸 용케 알아냈군."
"그래. 다만 명확하게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었어. 누군가 노골적으로 정보를 은폐했거든. 단지 그 상황에, 네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말에 오시안의 뇌리로 알베르토 구지사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돈을 그렇게 많이 줬나 했더니, 정보 은폐에 대한 사과비도 함께 들어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고용했지."
"제대로 된 명확한 정보도 없는데 나를 고용한 건가?"
"투자자로서의 감이라고 해두지."
에둘러서 감이라고 말했지만, 그 사실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말 그대로 단편적인 정보만 보고, 오시안이라면 왠지 가능할 거 같아서 고용한 것이다.
'제정신이 아니군.'
생긴 것만 보면 있는 사실조차도 하나씩 조목조목 뜯어보고 깐깐하게 따질 것만 같은데.
정작 과감한 판단도 그렇고 이쪽의 무례한 태도를 대범하게 받아치는 것도 그렇고.
겉모습만 그렇지 그 내면에는 뜨거운 야수 한 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뛰어난 투자자이자 사업가인 다이크 골디런의 자식답다고 해야 하나.
'차녀와 막내를 봤을 때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는데.'
셋째라는 미묘한 자리임에도 가장 아버지의 기질을 짙게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델런.
어쩌면 델런이 오시안을 고용했듯, 오시안이 그의 의뢰를 받아들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몰랐다.
'재미있군.'
오시안은 앞으로 있을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
오시안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의 자신이었다면, 절대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오히려 이러한 감정과 판단은, 그의 육신이라 할 수 있는 기사가 내릴 법한 것이라는 걸.
기사로서 여러 사건을 겪어가면서, 오시안의 내면 또한 변화를 겪은 것이다.
어쩌면 변화라기보다는 애써 모르고 있던 내면의 '본질'을 깨달은 것일지도 몰랐다.
"다른 해결사는 더 고용하지 않아도 되나?"
"그런 불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별로 내키지는 않는군."
"그것도 일종의 감인가?"
"그렇다고 해두지."
즉 델런은 오직 오시안 하나만 믿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판단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다."
*
밤이 찾아왔다.
저택은 혹시 모를 유령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 불을 잔뜩 켜놓았다.
델런은 세바스티안과 함께 세이프룸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혹시 모를 전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밖에서 포탄이 날아와도 멀쩡한 곳이니, 고용주가 위험에 처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오시안은 저택의 중심.
사람들이 모인 홀에 서서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다.
"하, 저 새끼 저거."
[슈프리머시] 소속 호머 또한 오시안과 같은 생각으로 중앙 홀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는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오시안을 노려보았다.
해결사가 자신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못마땅한데, 이런 상황에서 무기라고 할 게 칼 한 자루밖에 없으니 보통 배알이 꼴리는 게 아니었다.
"진짜 손봐주고 싶게 생겼네."
"적당히 해 호머. 우리는 의뢰받으러 온 거지, 괜한 분쟁을 일삼으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런 호머를 말린 것은 같은 [슈프리머시] 소속 뮤턴트인 레이첼이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숏컷으로 자른 레이첼의 말에 호머는 칫 하고 혀를 찼다.
이 자리에 모인 [슈프리머시] 소속 뮤턴트 중 레이첼이 가장 강했고, 그녀가 리더였기에 호머는 그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레이첼이 그런 호머를 향해 뒷말을 덧붙였다.
"끝나고 나면 네가 알아서 해."
"그렇다면야 뭐."
호머가 시익 웃으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괘, 괜찮은 거 맞지? 믿을 수 있는 거 맞냐고!"
과묵하고 진중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징징대는 목소리.
오시안은 곁눈질로 목소리의 주인을 힐끔 살폈다.
'저 사람은.'
40대로 보이는 유약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그 얼굴에 고용주인 델런의 인상이 남아있는 걸 보면 형제가 분명했다.
장남 데이빗 골디런.
그를 처음 본 오시안의 평가는 ᄄᆞᆨ 이러했다.
'호부견자로군.'
지금은 병상에 누운 다이크였지만, 아들인 델런의 모습을 보면 그가 매우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라는 걸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저게 정말 집안을 이끌 장남이 맞는지, 그는 시종일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동생이랑 차이가 너무 심한데.'
차라리 히스테리 부리는 차녀나, 천진무구한 막내가 나을 지경이었다.
다만 데이빗이 고용한 사람들의 수준은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야. 마법사들이잖아.'
자신의 학파를 증명하는 로고가 박힌 로브를 입은 마법사였다.
현대에 맞춰 리파인 된 디자인의 로브를 입은 그들은 총 5명.
그중에서 선두에 선 50대로 보이는 남자의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최소 4성급 마법사였다.
"걱정하지 마시죠. 저희가 나선 이상 이번 일은 깔끔하게 처리될 겁니다."
4성급으로 추정되는 마법사가 모두가 들으라는 듯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의뢰에 들어가기에 앞서 괜한 방해꾼들부터 쫓아내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방해꾼이라고 말하는 마법사의 시선은 정확히 오시안을 향해 있었다.
"쓸모없는 쥐새끼는 없는 것이 나으니까요."
화륵.
마법사의 손가락 끝에서 화염이 피어올랐다.
78화. 밤의 사신 (1)
마법사의 말에 오시안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의외라기보다는 역시나 올 것이 왔다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고용된 실력자들이 모였는데, 이런 기싸움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별다른 경력도 없는 해결사나 용병들도 서로 견제가 심하게 들어가는데 저런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특히 이번 의뢰의 보수는 절대로 적은 것이 아니었다.
델런조차도 오시안 하나에게 주는 보수만으로 아직 그 값을 제대로 매기지 않았다.
그의 성격상 절대로 돈을 후려칠 일은 없을 거고, 또한 골디런 가문의 자금을 생각하면 그 보수는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는 될 터.
오시안이야 보수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특히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그런 욕망이 더 심한 편이었다.
마법사들은 연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진다.
마법사 개인 공방, 실험품, 약제, 시약, 에테르 워터, 마도서 등등.
비싼 것은 한없이 비싸질 수 있는 재료들.
마법사들은 항상 자금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실력자들이라면 돈이 없지는 않겠지만, 돈이라는 것은 결국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어중간한 거금으로는 4성급 마법사를 고용할 수 없을 테니, 아마 다른 조건을 더 붙인 거겠지.'
아마 주기적으로 자금을 충당해 주는 스폰서가 되어 주기로 했을 확률이 높았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걸어오는 시비를 피할 생각은 없지만.'
오시안은 상대방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저쪽이 선을 한 번만 더 넘는다면, 그 순간 바로 검을 뽑을 각오도 마다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싸우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낫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겠지.'
오시안이 괜찮다 해도 상대방 측에서 싫어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웃으면서 사이좋게 지내자고 말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시비를 건다면 그거대로 상관없다.
실력을 보여 주면 그만이니까.
오시안이 속으로 그런 결정을 내릴 때, 마법사의 시비는 계속 이어졌다.
"어이 해결사. 못 들은 척하지 마라."
조소와 멸시가 가득 깔려 있는 눈빛.
마법사가 기본적으로 귀족 대우를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 오만함을 보이는 것은 신기해할 것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상대를 깔보는 마법사의 기조는 오시안만 노리지 않았다.
"이런 장소에 근본 없는 변종괴물 놈들까지 오다니. 이래서야 같이 있는 우리들의 격이 떨어지는 수준이잖아."
마법사는 정확하게 [슈프리머시]를 지적하는 말을 꺼냈다.
변종 괴물.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발생한 뮤턴트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었다.
"뭐라고?!"
"저 새끼들이 감히."
그 말에 [슈프리머시] 소속 뮤턴트들이 발끈했다.
과거에나 뮤턴트들이 변종으로 차별을 받았다지만, 티르나에서는 달랐다.
뛰어난 능력과 조건을 타지 않은 기이한 힘 덕분에 그들은 하나의 직위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다 보니 뮤턴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현 인류보다 더 진화한, 신인류라고 지칭하는 자들이 생기는 추세였다.
조직의 이름을 [슈프리머시]라고 지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더 우월하고 더 뛰어난 존재.
그런 자부심을 지니고 있기에 그들은 서로 의기투합해서 뭉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마법사가 그 자부심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말을 꺼낸 것이다.
뮤턴트들로부터 거대한 살기가 일어나며 마법사들을 향했다.
마법사들도 지지 않았다.
'이거 참.'
사방에 시비를 걸고 다니는 마법사들의 꼴을 보면 마치 자신들이 최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이해는 한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재능이 필요할 테니까.
마나를 다루는 것은 기본적이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지식과 두뇌도 필수일 터.
그런 조건에서 4성이나 되는 경지를 이룩했다면 귀족조차 우습게 보일 터.
하지만 과연 실력 또한 그 거만함에 걸맞을까.
오시안의 손이 허리춤의 검에 닿았다.
마법사들 또한 마력을 끌어올렸고, 뮤턴트들은 저마다의 능력을 발현하려 들었다.
의뢰를 시작하기도 전에 한바탕을 하려는 순간.
"거기까지만 하시죠. 저택 내에서 소란은 엄금합니다."
홀 전체를 울리는 묵직한 목소리.
홀을 한눈에 눈에 담을 수 있는 2층의 계단 위.
그곳에 정갈한 턱시도를 입은 60대 노인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더스틴 아저씨!"
다이크의 동업자이자 집사라 할 수 있는 더스틴 크루거.
염소 같은 콧수염을 기르고 얇상하고 유약한 인상과 다르게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지닌 그는 데이빗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데이빗 도련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다이크 님께서 아프신 와중에 얌전히 있지는 못할망정 별장에서 소란을 일으키려 하시다뇨."
"저, 저는 제 나름대로 아버지를 위해서 사람을 부른 겁니다!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 겁니까!"
데이빗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오히려 제 동생들이 불러 모은 저 근본도 모르는 잡것들이 저택 별장을 돌아다니는데, 왜 더스틴 아저씨는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자식인 저희는 아버지를 뵙지도 못하게 출입까지 막고 말이죠."
"유령이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더스틴을 도발했다.
"유령은 핑계잖아요? 사실 우리를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자식들 중 누군가 아버지를 몰래 살해하려고 한다고 말이죠."
설마 그 말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더스틴의 반응은 더욱 신랄했다.
"예. 당연히 데이빗 도련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버지의 자식인 우리를 감히 의심하느냐?
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예. 의심합니다'였다.
제대로 한 방 먹은 데이빗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델런이었다면 애초에 저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을 텐데.'
저렇게 화가 났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야 어떻게 사업을 하고 사람을 부린단 말인가.
장남이니 조금 대단한 사람일 거라고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데이빗은 그저 오냐오냐 큰 나이 먹은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는 아저씨는요? 아저씨는 떳떳합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지요?"
"아저씨라고 완전히 무고하진 않을 텐데요? 일부러 아저씨가 일을 벌이고서, 저희 탓으로 돌리는 거 아닙니까?"
더스틴은 항상 다이크의 옆에서 그를 보좌해 준 비서.
바꿔 말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평생 2인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는 소리였다.
데이빗의 말은, 다이크를 질투해서 2인자인 그가 독살을 사주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내는 거고.
"사실 아버지는 진작 깨어날 수 있었는데, 아저씨가 못 깨어나게 하는 거 아닙니까?"
승기를 잡았다는 듯 말하는 장남의 모습에 더스틴은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언제 갑자기 일이 터질지 모르니 도련님은 세이프룸에서 기다리고 계시길."
이쪽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물러나라는 집사의 말에 데이빗이 발끈하려는 그때였다.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저택을 밝히던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삽시간에 찾아온 어둠.
밝았던 만큼, 갑자기 밀려온 어둠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만들 정도로 칙칙했다.
"꺄아아아악!"
동시에 어디선가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소리?"
"막내 아가씨?!"
그 비명의 주인은 막내인 마리아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냐며 모두가 의아해하는 순간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시안이었다.
오시안은 곧바로 손에 검을 뽑아 들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 발걸음은 바람처럼 빨랐는데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어, 어?"
"우리도 이동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전부 한가락 하는 사람들.
그들은 오시안이 움직이는 걸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육체강화 능력을 지닌 뮤턴트 2명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반응속도가 빠른 것이 장점이었기에, 오시안을 쫓다 못해 바로 제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뭐, 뭐야?!"
"거리가 안 좁혀져!"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오시안의 뒷모습.
그것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쪽이 능력을 발동하며 뒤쫓고 있는데도 따라잡지 못한다고?
설마 저쪽도 신체강화계열 뮤턴트인가? 그것도 이쪽보다 등급이 더 높은?
상대가 그런 착각을 하거나 말거나, 오시안은 끝 없이 이어지는 저택의 복도를 달렸다.
별장이라고 들었지만, 저택이 얼마나 큰지 한참을 달려야 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오시안이 본 것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마리아 골디런과 그녀를 지키듯 서 있는 엘리제.
그리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서 낫을 들고 있는 사신이었다.
'사신?'
몬스터? 아니면 다른 무언가?
그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엘리제가 녀석과 대치하는 것으로 보아, 예의 그 유령이 맞아 보였으니까.
"비켜라."
오시안의 말을 들은 엘리제가 뼈가면 너머로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바로 옆으로 비켜 줬다.
그녀가 양쪽에 부리고 있던 두 스켈레톤도 자연스럽게 대치를 멈추고 길을 터 줬다.
그 틈새를 비집고 난입한 오시안의 검에 별빛이 담겼다.
성광검(星光劍).
흰색과 하늘색이 뒤섞인 불꽃이 봉화처럼 피어오르며 어둠을 밝혔다.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진 별빛이 사신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신은 오시안의 검을 보고 뒤로 빠르게 물러나며 궤적에서 벗어났다.
'이걸 피해?'
오시안은 의외라는 듯 사신을 응시했다.
근처에 마리아와 엘리제가 있어서 힘을 빼서 휘두른 공격이었다 해도, 설마 상대가 피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방금 전 피하면서 보여 준 움직임이 상당히 날렵했다.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오시안은 우선 마리아와 엘리제의 상태를 확인했다.
둘은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마리아도 사신의 등장에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을 분 기습을 당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엘리제가 사령술을 통해 스켈레톤을 소환, 그녀를 지켜 줬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엘리제는 오시안이 쥐고 있는 별빛검을 보며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전에 봤을 때 오시안은 성광검을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저 믿기지 않는 기적을 처음 목도한 셈이었다.
"우와."
그 별빛에 매료된 것은 엘리제만이 아니었다.
마리아 또한 오시안이 쥔 새하얀 검을 보며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쳐다봤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사신과 대치하는 오시안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폭의 명화였다.
두 사람이 무사한 걸 확인한 오시안이 눈앞의 적을 응시했다.
기다란 흰색 로브를 걸치고 있는 해골이었다.
손에는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사신의 형태나 다름없었다.
'정원에 새겨진 참흔과 사람들이 보았다는 유령의 형상. 아무래도 녀석이 맞는 모양이군.'
낫을 든 해골을 한 몬스터는 게임 내에서도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신선했다.
뭐가 어찌 됐든 의뢰의 해결을 위해서라면 눈앞의 녀석을 쓰러뜨려야 하는 것이 맞을 터.
'패턴을 보고 분석한 뒤에 싸워야 하는 게 맞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들이랑 인질까지 있는 상황이니 빠르게 끝낸다.'
출력을 올린 성광검이 불길처럼 타오르며 길이가 1.5배 이상 길어졌다.
일격에 끝낸다.
그런 생각으로 오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본 사신이 뒤로 황급히 도망쳤다.
설마 여기서 도망을 쳐? 오시안은 곧바로 사신의 뒤를 쫓았다.
저쪽이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은, 이쪽의 공격이 제대로 적용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대로 등 뒤에 성광검을 꽂아 넣으려는 순간.
[자, 잠깐! 좀 진정해 보시겠어요?!]
사신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79화. 밤의 사신 (2)
놀랍게도 사신은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여성의 것이었다.
'몬스터가 말을 해?'
눈만 감고 목소리만 들었다면, 상당한 미색의 여인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게다가 이쪽을 중재하려는 듯한 저 다급한 외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오시안이 성광검을 휘두르자, 사신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수평으로 휘두른 검이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완전히 빗나간 것은 아닌지라, 사신이 머리에 쓰고 있던 로브 자락의 끝이 살짝 잘려 나갔다.
[꺄악! 또야! 또 휘둘렀어!]
"안 피하면 되지 않나."
[안 피했으면 죽었을 거라고요!]
"이미 죽은 해골인데?"
[한번 죽어도 또 죽는 건 싫거든요!]
치열한 전투를 기대한 오시안으로서는 맥이 빠지는 반응이었다.
결국 오시안은 사신을 추격하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휴. 드디어 제 이야기를 들어주려는 거로군요.]
오시안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꺄악! 사신이 놀라서 재차 회피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제대로 피한 것이다.
[갑자기 왜 또 검을 휘두르는 건데요!]
"아니, 나도 모르게 그만."
애초에 낫을 든 해골의 모습으로 미세먼지 한번 마셔본 적 없는 맑고 깨끗한 여성의 목소리를 내면 이쪽이 더 곤란한 법이었다.
외모와 목소리가 매치되지 않는 것도 적당한 수준에서 해야지, 이건 너무 급이 다르지 않은가.
오시안은 사신을 가만히 응시했다.
녀석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입을 연 건지 확인을 해보려는 것이었다.
'얼굴이 없으니 표정을 읽을 수가 없네.'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도 그저 검은 구멍뿐이니, 감정 자체를 느끼기 힘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의심과 경계를 지우면 안 됐지만, 오시안은 이상하게 저 사신에게서 위험을 느낄 수 없었다.
위기를 감지하는 그의 감각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저 사신은 최소한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정체가 뭐지."
오시안이 성광검을 해제하며 물었다.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건가요....]
오시안이 다시금 검에 별빛을 불러일으키려 하자 사신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저는 무에르테라고 해요! 저주의 개념이 형상화된 영적인 존재이죠!]
"저주가 형상화돼?"
[그냥 알기 쉽게 소환수 정도로 봐주시면 될 거 같아요.]
자신을 소환수라고 소개하는 무에르테의 태평한 목소리.
오시안은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무에르테를 응시했다.
자세히 보니 고스트계열 몬스터로서 응당 지녀야 할 스산함이나 거북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주 특유의 불길함이 느껴지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는 오시안이다. 해결사지."
[요즘 해결사는 검에서 빛도 뽑고 그러나요?]
"잡설은 됐고, 목적이 뭐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이크 골디런을 죽이려 들었지?"
그 말에 무에르테가 어깨를 움츠렸다.
[네에? 죽이다뇨. 제가 죽이긴 누굴 죽여요!]
"다이크 골디런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저택에 유령이 나타났다. 게다가 목격자의 증언과 딱 맞아떨어져."
[증언이라뇨!]
"손에 쥔 낫과 로브를 뒤집어쓴 사신의 형태. 딱 네가 아닌가?"
[...어, 그렇게 말하면 저도 뭐라고 할 말이 없긴 한데.]
무에르테가 고개를 세차게 젓더니 외쳤다.
[아무튼 저는 억울하다구요! 사람을 건드린 적... 은 없지는 않지만! 그 다이크 골디런이라는 사람이 쓰러진 건 제 탓이 아니에요!]
"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나."
[정말이에요! 애초에 이 저택에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란 말이에요!]
"오늘이?"
그럴 리가.
저택에서 유령을 목격했다는 증언은 며칠 전부터 나왔다.
무에르테가 오늘 처음으로 왔다면, 그전에 목격된 유령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방금 전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중간에 길을 잃기라도 한 걸까? 저택이 넓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
묘하게 오시안의 기감을 건드리는 무언가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조용."
오시안이 그렇게 말하자 무에르테가 입을 합 다물었다.
물론 그래 봤자 해골이라서 티가 잘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 찾아온 고요.
그제야 오시안은 먼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투?"
무에르테가 여기에 있는데 싸울 일이 있나? 아니면 설마 방금 전 신경전 때문에 내분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이에요? 저기요! 저도 알려 줘요!]
무에르테가 무어라 물었지만, 오시안은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소란이 벌어진 곳으로 향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소음이 더 커졌다.
복도 모퉁이를 돌며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 검은 무언가 날아왔다.
오시안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가는 그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익숙한 얼굴.
오시안이 어둠을 틈타 움직이자 그 뒤를 빠르게 쫓던 [슈프리머시] 소속 육체강화 뮤턴트 중 하나였다.
퍼퍼퍼펑!
붉은 화염이 복도 전체를 가득 채웠다.
어둠을 밀어내는 불꽃은 인위적인 것. 정확히는 마법에 의한 것이었다.
3성 화염마법.
연쇄폭발(chain detonation)이었다.
허공에서 일어나는 불꽃이 구체로 연달아 터지며 복도 전체를 집어삼켰다.
창문이 부서지고, 복도의 카페트가 타고, 벽의 외장재가 열기에 녹아 줄줄 흘러내렸다.
마법을 쓴 당사자는 오만함을 보였던 4성 마법사.
과연 그는 자부심을 지닐 만한 실력이었는지 마법의 위력이 상당히 남달랐다.
물론 선혈 형제단과 싸웠던 오시안에게는 그렇게 대단한 수준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건 오히려 선혈 형제단 소속인 다베르가 이례적인 편이었다.
사람을 태워죽이는 데 특화된 그는 괜히 화형의 다베르라 불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평범의 기준에서 보자면 저 마법사의 실력 또한 상당히 출중한 편이었다.
"됐다!"
그 뒤를 보조해 주는 동료 마법사가 기뻐하며 외쳤다가, 폭염이 가라앉은 뒤 모습을 드러낸 적을 보더니 안색이 나빠졌다.
붉은 화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화염과는 반대되는 서슬 퍼런 푸른색이었다.
냉기를 머금고 있는 창백한 푸른빛의 로브가 바람이 불지도 않은데 허공에서 멋대로 나폴거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무에르테가 해골의 얼굴이었다면 녀석은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 아래로 새까만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기다란 양손에 쥐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수확하기 위한 대낫이었다.
그 낫마저도 평범한 낫이 아니라는 듯, 푸르스름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리가 없이 공중에 떠 있는데도 신장이 2m는 넘어 보였고, 기다란 두 팔로 쥔 낫은 4m가 넘었다.
유령의 주위에는 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하나는 방금 전 목이 날아간 시체였고, 다른 하나는 쇄골부터 허리까지 사선으로 베인 뮤턴트였다.
그 또한 [슈프리머시] 소속 뮤턴트 중 하나였다.
낫에 베인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에는 출혈이 없었다.
베인 단면을 따라 상처에 서리가 끼며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오시안은 낮에 보았던 분수대의 서리를 떠올렸다.
'저놈이다.'
상급 사제의 제령도 통하지 않았다는 진짜 유령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는 사이 유령은 자신에게 마법을 쏜 4성 마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가 없이 허공을 부유하며 움직이는 유령이 손에 쥔 낫을 크게 휘둘렀다.
푸른 낫은 저택의 벽째로 주변을 절단해 버렸다.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의 내부를 버터라도 가르는 것처럼 베어낸 것이다.
"큭!"
그것을 막기 위해 4성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했다.
뜨거운 불길의 벽이 눈앞에서 불쑥 솟구치며 주변으로 현란한 불빛을 뿌렸다.
2성 마법, 플레어 쉴드(flare shield)였다.
상성이라 할 수 있는 뜨거운 불길에도 불구하고 유령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크게 휘둘러진 낫이 불의 장벽조차 베어 버렸다.
푸르스름한 냉기가 불길을 가르며 흩었다.
그것만으로도 낫에 깃든 냉기가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법사가 위험에 빠지려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뛰쳐나오며 유령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은 제복을 입은 스켈레톤이었다.
엘리제 데나로바가 사령술로 소환한 두 스켈레톤이 각기 창을 휘두르며 유령을 노렸다.
마법사를 노리던 유령은 낫을 회수, 두 자루의 창을 막아냈다.
스켈레톤이 사용하는 창은 평범한 창이 아니었다.
이미 거기에 상당한 흑마력이 깃들었는지, 검은 기운이 낫의 손잡이를 타고 유령에게까지 번지려고 했다.
그러나 유령이 몸에서 냉기를 더 강하게 뿜어내자 흑마력은 거기에 밀려 그대로 산화하고 말았다.
그사이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4성 마법사는 뼈가면을 쓴 엘리제를 보더니 치욕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제길. 흑마법사 따위에게 도움을 받다니."
"...."
도움을 받은 주제에 매우 건방진 말이었지만 엘리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은 방금 전부터 저 푸른색 유령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위험해."
엘리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등장과 동시에 뮤턴트 둘을 단번에 제압한 것도 그렇고, 3성 마법을 맞고도 멀쩡한 것도 그렇고.
저 유령은 절대로 평범한 녀석이 아니었다.
유령 또한 새롭게 나타난 엘리제를 보며 낫을 고쳐 쥐었다.
로브 아래로 검은 음영밖에 없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엘리제를 타깃으로 바꾼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때 엘리제의 뒤에서 호머가 외쳤다.
"단테! 아르고! 이 자식이!"
호머가 유령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울긋불긋 일어나던 오른손의 피부가 펑 터지더니 붉은 핏줄기가 총탄처럼 튀어나와 유령에게 쏘아졌다.
유령은 두 손으로 낫을 쥐고 그것을 가볍게 휘둘렀다.
낫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가 날아오는 피를 모조리 얼려버렸다.
호머는 그 모습에 이를 악물며 피를 더 많이 뽑아냈다.
손에 쥔 피가 채찍으로 변하며 부글거리며 끓었다.
채찍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뱀처럼 움직였다.
그걸 확인한 유령이 재차 낫을 휘두르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유령을 붙잡았다.
"쿨럭! 호머! 끝내 버려!"
유령의 낫에 의해 상반신이 베인 뮤턴트, 아르고였다.
남다른 생명력을 지닌 그는 방금 전 일격에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갑자기 뒤를 잡힌 유령은 전신에서 냉기를 뿜어냈다.
뒤에서 유령을 붙들고 있던 아르고의 피부에 서리가 끼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유령은 어깨를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얼어붙은 아르고가 동상처럼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흩어졌다.
뒤이어 쏘아진 피의 채찍도, 유령이 휘두른 낫에 허무하게 쉽게 잘려나가 버렸다.
동료가 희생해 가며 만들어 준 기회조차도 먹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호머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엘리제의 스켈레톤이 유령에게 달려들었다.
뼈만 남았다고 보기에는 믿을 수 없는 신속함으로 움직인 두 스켈레톤이 양옆에서 유령을 동시에 노렸다.
양쪽에서 찔러오는 창.
유령은 바짝 낮추더니 낫을 수평으로 쥐고, 자리에서 360도 회전했다.
유령을 중심으로 푸른 궤적이 완벽한 원을 그렸다.
거기에 걸린 두 스켈레톤이 상하체가 분리되어 쓰러졌다.
그러나 스켈레톤의 역할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째깍.
스켈레톤이 입고 있는 찢어진 의복 사이.
그 안쪽에 몰래 숨겨 놓은 시한폭탄이 터졌다.
콰아앙!
상당한 화약을 넣은 폭탄답게 그 위력은 저택의 일부를 크게 울릴 정도였다.
폭발 마법으로 아슬아슬했던 외벽의 일부가 그대로 와르르 무너졌을 정도.
그러나 유령은 여전히 멀쩡했다.
그 폭발 속에서 몸 주위에 얼음의 장막을 두르며 폭발의 열기와 충격을 최소화한 것이었다.
비장의 수단인 폭탄마저도 불발된 엘리제였지만 그녀는 별로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유령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는 유령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남자의 차례였다.
"지금이야."
엘리제의 말과 동시에.
어둠을 찢어발기는 별빛의 검이, 유령의 등 뒤를 향해 크게 휘둘러졌다.
80화. 유령의 정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