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선혈 형제단 (2)
"구해?"
안나는 처음에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오시안의 대답은 그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구한다는 단어는 그녀가 이 업계에서 일을 하면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오시안의 표정을 보는 순간, 안나는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남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건 아니야. 잊었어? 방금 전 어떤 꼴을 겪었는지."
"기습이었고, 내 전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겠다는 거야? 그 악마 같은 놈이 있는 곳으로?"
오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볍기까지 한 행동에 안나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칼을 들고 설치던 시점에서, 머리 하나가 어떻게 훼까닥 한 놈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안나는 오시안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난입자가 되돌린 총알이 그녀의 미간을 노릴 때, 오시안은 직접 나서서 그녀를 구해 주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저기 쓰러져 있는 부상당한 조나단을 데려온 것만 봐도 그랬다.
"설마 자존심 때문이야?"
"자존심은 아니다."
"아니기는."
안나가 본 오시안은 정말 웃긴 인간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칼을 무기로 쓰는 것도 그렇고, 말투도 어딘가 이상하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행동이다.
이 업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통수만 칠 생각을 한다.
최소한 배신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착한 놈 취급을 받을 정도다.
속인 사람이 욕을 먹기보다는 속은 놈이 욕을 먹는다.
여긴 그런 세계였다.
그런데 오시안은 달랐다.
이 티르나라는 무대에서 오시안은 매우 이질적 배우였다.
행동거지부터 해서 풍기는 분위기까지.
마치 장르 자체가 맞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왜 가려는 거지?"
다시 발전소로 가려던 오시안은 안나의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실 이성적으로 오시안은 저곳으로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방금 전 승부를 판가름내지 못한 싸움에 절치부심을 한 것도 아니다.
일부러 싸움을 통해 의도적으로 업을 쌓으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이게 아니었다.
그래, 그냥.
"도움을 받았거든."
"도움?"
"그래."
오시안은 방금 전 싸움을 떠올렸다.
난입자의 기습적인 마법은 오시안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었다.
아마 거기서 시간이 더 끌렸더라면, 죽지는 않아도 큰 부상을 피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때 도움을 준 것이 데이빗이었다.
그는 오시안을 지원해주기 위해 그 싸움에 끼어들었다.
자신 따위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살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물러나면 되는 거 아니야? 겨우 부지한 목숨이잖아."
데이빗에게 도움을 받았다 해도 그것이 그를 구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인정을 베풀어도 되돌려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쉬워할 수도 없다.
이 삭막한 세상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러나 오시안은 보았다.
모두가 자기 살겠다고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상황에서, 부상자를 챙기는 데이빗의 모습을.
업계의 베테랑인 그가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걸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을 살렸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을 죽인 테러리스트가 그런 데이빗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라니.
"그건 명예롭지 못하지."
오시안은 발전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나를 비롯한 생존자들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봤다.
*
"다들 괜찮나?"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어둡고 고요한 발전소 내부.
가까스로 도망친 데이빗은 주변을 확인하며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생존자들은 꽤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마음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데이빗은 무어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가 포기했다.
'그럴 만도 하지. 사실상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이곳에 갇혀 버린 거니까.'
발전소 안쪽은 고요했다.
아지트를 틀고 있다는 갱단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갱들은 이들을 모으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40명의 용병과 해결사들을 모으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마, 테슬라 암즈의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서겠지.
'선혈의 형제단. 그중에서 화염과 중력 마법을 펼치는 녀석은 하나뿐이지.'
화형의 다베르.
마법사임에도 포악한 성정과 자비 없는 잔혹한 성격으로 유명한 녀석이었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상대를 반드시 불로 태워 죽이는 미친놈이다.
선혈의 형제단 중에서 무력 순위는 낮지만, 그 과격한 방식 때문에 피해야 할 순위로는 손에 꼽는 녀석.
그런 녀석을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마주하다니.
운이 없어도 지지리도 없었다.
'최근 군부 쪽의 물자가 털렸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설마 그게 테슬라 암즈였을 줄이야.'
다베르는 과거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한쪽 팔을 잃고 그것을 의수로 대처했다.
그때 다베르의 소문에서는 테슬라 암즈를 사용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번에 녀석이 갑자기 나타난 것, 테슬라 암즈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최근 군부대가 습격당해 물자를 탈취 당했다는 것.
이 모든 일을 종합해 본 결과, 형제단이 테슬라 암즈를 빼앗고 그것을 다베르에게 이식한 것이다.
'도망칠 수 있나?'
데이빗은 열심히 방법을 강구했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알고 있다.
다베르 녀석은 지금 자신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천천히 사냥할 생각이라는 걸.
피치 못하게 발전소 안으로 들어오게 됐지만, 이곳은 결국 범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도망치는 것이 안 된다면 싸워야 한다는 건데.'
데이빗은 사기가 바닥을 친 용병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내 오토마톤도 부서졌어.'
로널드와 레지널드는 그가 아끼는 오토마톤이지만, 다베르의 화염마법을 버티지 못했다.
그렇다고 데이빗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싸우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이 자리에서 아직 싸울 수 있는 건, 저기 강철추종자뿐인가.'
이 상황에서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명상에 들어간 중년을 보며 데이빗은 속으로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전신이 강철로 된 개조인간이, 테슬라 암즈를 상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본인도 그걸 알고 있기에 다베르에게 덤비지 않은 것이 아닌가.
'다베르는 테슬라 암즈가 없어도 마법사로서 우리를 전부 쓸어버릴 강자다. 거기에 테슬라 암즈까지 착용하고 있으니.'
이쪽이 싸워서 이길 확률은 사실상 제로.
여기서 유일하게 걸어볼 수 있는 것은 지원군이다.
무사히 탈출한 사람들이 있을 테니, 티르나시에 연락을 해서 집행관을 불러온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선혈 형제단은 티르나 시에서 지정한 테러리스트로, 현상금이 수배되어 있기도 하니까.
'지원은 무슨.'
데이빗은 자신의 생각을 비웃었다.
도망친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겠는가.
그냥 무사히 살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넘기겠지.
데이빗은 그 행동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여기까진가.'
지휘관, 인형사.
그를 수식하는 칭호는 꽤 됐다. 나름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베테랑 해결사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도 여기서 이제 끝이었다.
슬프거나 아쉽다는 생각은 없었다.
이 칼날 밭을 걷기 시작할 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오리라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각오는 이미 오래 전에 끝마쳤다.
'그래도 역시, 그냥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
데이빗은 허리춤에서 호신용 권총을 뽑아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용병들이 말없이 바라봤고, 가만히 명상하던 강철 추종자도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뭘 할 생각이지?"
"싸워야지."
"죽을 거다."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개죽음 당하면, 원통해서 제대로 눈도 못 감지 않겠는가."
데이빗의 말은 허세가 아닌 진심이었다.
그 모습에 용병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가 괜히 베테랑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저런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나도 싸우지."
강철추종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겠나?"
"어차피 정해진 결말이라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는 수밖에."
강철추종자는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지만, 테슬라 암즈를 착용한 다베르에게는 그야말로 극악의 상성이다.
육체의 절반 이상이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자력에 영향을 받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는 데이빗과 함께 싸우고자 했다.
"이거 참 든든해서 어찌할 줄 모르겠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쩔 거지?"
데이빗이 묻자 용병들이 침묵했다.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까짓것 끝까지 발버둥 쳐 보자고. 어차피 살면 얼마나 오래 산다고 그래?"
그 용기 있는 발언에 다른 용병들도 전의가 피어올랐다.
다 타 버린 재 속에서도, 불씨는 아직 살아있었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데이빗이 말했다.
"좋아. 그러면 어디 한번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 볼까."
용병들이 전부 데이빗을 응시했다.
"밑바닥 인생에게도, 물어뜯을 이빨이 있다는 걸 보여주자고"
*
"벌레들이 아주 단단히도 숨었구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발전소.
다베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기저기 거대 파이프가 가득하고 온갖 금속으로 가득한 발전소는 사람이 숨을 공간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도망칠 길은 없고, 놈들이 숨어도 이쪽에서 찾아낼 방법은 있으니까.
다베르는 곧바로 정신을 집중해 몸에서 마나를 뽑아냈다.
마나는 다베르를 중심으로 파장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색적 마법]
이것이 있다면 용병들은 절대로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베르는 곧바로 색적을 통해 적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콰과광!
그의 머리 위에 폭발이 일어나며, 거대한 구조물이 떨어져 내렸다.
설치해놓은 트랩이 발동한 것이다.
"재밌네."
다베르는 오른팔을 들어 올려 마법을 발동했다.
단단한 마력의 장벽이 생기며 떨어지는 구조물을 막아냈다.
"지금이야! 쏴!"
동시에 매복해 있던 자들이 일제히 총을 쏘았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고, 화약의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일부 용병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폭탄을 모두 집어 던졌다.
설사 장갑차라 하더라도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릴 화력.
그러나 그 속에서도 다베르는 멀쩡했다.
"재롱잔치는 끝났냐?"
용병들의 얼굴이 절망감에 물들었다.
다베르는 방독마스크 안에서 그런 용병들을 비웃었다.
"꼴에 발악하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어서 지켜봤는데, 벌레들이 발버둥 쳐 봤자 벌레지."
다베르가 다시 마력을 일으키자 이를 악문 데이빗이 외쳤다.
"다들 물러나!"
타타타타탕!
데이빗은 그렇게 말하며 호신용 권총의 탄알을 모두 토해 냈다.
아직 마력의 장벽에 펼쳐져 있었지만, 데이빗의 신기 들린 사격은 정확히 똑같은 곳을 내리 5번을 때렸다.
그마저도 미약한 금을 가게 만들었을 뿐 장벽을 뚫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다베르는 자신의 장벽에 흠이 생겼다는 것이 적잖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거센 살기를 일으켰다.
"이 벌레새끼가. 네 녀석만큼은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파지직!
다베르가 쏘아낸 전류가 데이빗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듯 지나쳤다.
데이빗은 코트와 함께 피부가 지져지는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말없이 총알이 다된 권총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군용 단검을 꺼내들었다.
총알이 없다면 이 볼품없는 단검으로라도 물어뜯겠다고.
그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 이 새끼가."
다베르는 방독면 안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데이빗의 모습이 너무 거슬렸다.
"어디 전신이 지져지면서도 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지 봐주마."
다베르가 화염 마법을 일으키려는 순간, 한차례 펼쳐놓은 색적마법에 무언가 잡혔다.
"뭐야?"
무언가 온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다베르의 판단은 빨랐다.
곧바로 오른손에 모아놓은 마력을 흩트리고, 대신 테슬라 암즈의 출력을 올려 자기력을 일으켰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키이잉!!
방독면의 코앞, 10cm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고정된 날카로운 검 끝.
간담이 서늘해지는 광경 속에서 다베르는 자신을 향해 검을 찔러넣은 남자를 보았다.
"너...."
흑발의 미청년이 다베르를 향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을 끝내러 왔다."
31화. 별빛 (1)
오시안의 말에 다베르는 어이를 상실했다.
지금 이 미친놈이 뭐라고 한 거지?
"끝내? 끝낸다고?"
마치 자신을 낮잡아 보는 것 같은 오시안의 태도에 다베르는 분개했다.
"이 벌레 새끼가 지금 누구 마음대로 끝내냐 마냐 하는 거냐!"
그는 왼팔의 테슬라 암즈의 출력을 올렸다.
인간의 팔을 그대로 본뜬 것 같은 유려한 곡선을 지닌 금속 팔.
거기서 은은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시안은 검을 밀어내는 자기장과 힘겨루기를 할 준비를 갖췄다.
피잉-!
"...."
그때, 허공에 맺힌 힘의 흐름이 미묘하게나마 평소와 다른 기류를 띠었다.
광범위하게 거대한 힘을 뿌리는 것이 아닌,
한 점으로 집중된 것이다.
─판단은 빨랐고 움직이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빨랐다.
오시안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퍼엉!
직후 오시안의 뒤에 있던 강철 구조물에 거대한 구멍이 뻥 하고 뚫렸다.
그 광경을 지켜본 데이빗은 믿기지 않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자력의 범위를 최대한 좁혀서 위력을 극도로 끌어 올렸어!'
테슬라 암즈는 소문이 무성한 물건이었다.
과학기술의 집대성에 더불어 마도공학에 에테르워터까지 첨가된 물건.
하지만 실제로 본 테슬라 암즈의 성능은 오히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과소평가 돼 있었다.
강력한 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넘어, 자기장까지 다루는데, 그것의 범위와 위력까지 조절이 가능하다니.
평범하게 총과 화약을 사용하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재앙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믿기지 않는 것은 오시안이었다.
자신을 노리는 자기장을 이번에는 힘으로 밀어내기보다는 회피로 대응했다.
그 행동은 분명 옳았다.
범위가 좁아진 만큼 위력이 올랐으니, 이전처럼 힘겨루기로 싸우려 했다면 오시안이 밀렸을 거다.
그런데.
'어떻게, 피한 거지?'
다베르가 암즈를 내밀 때마다, 오시안은 그것을 눈치채고 귀신같이 몸을 뺀다.
다베르의 움직임이 느린 것도 아니었다.
그가 암즈를 발동시키는 속도는, 오랜 전장을 겪어온 데이빗도 겨우 눈으로 쫓을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오시안은 그것을 전부 피하고 있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콰과광!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금속 시설이 박살나 우그러지거나 파편을 흩날렸다.
그러나 다베르의 어떤 공격도 오시안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못했다.
"알고 보니 벌레가 아니라 미꾸라지새끼였구나!"
말은 그렇게 도발을 하면서 다베르는 속으로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첫 일격으로 녀석을 날려 보내고 순식간에 추가타를 꽂아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시안은 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 이쪽의 첫 일격을 피해 냈다.
지금까지 전부 정면에서 밀어붙이던 놈이 말이다.
녀석은 단순히 힘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직감, 혹은 짐승과도 같은 본능이 함께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오시안의 움직임을 처음에 따라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쪽의 눈으로도 쫓기 힘든 지경까지 갔다.
'싸우면서 빨라지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서서히 자신의 힘에 적응을 하고 있어.'
다베르는 성정이 불과 같았지만, 마법사로서 냉철한 지능도 보유하고 있었다.
방법을 바꿔야 한다.
다베르는 테슬라 암즈로 계속 오시안을 노리면서, 오른팔에 마력을 일으켰다.
화르륵─!!
어두웠던 발전소 내부가 삽시간에 주홍색으로 물들었다.
오른팔의 화염을 휘두르자 오시안을 향해 화염이 부채꼴 형태로 방사되었다.
'어디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오시안은 거대한 철제 구조물의 뒤에 몸을 숨겼다.
직후 구조물 위를 거대한 화염의 해일이 뒤덮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금속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녹는점을 견디지 못하고 테두리 부분이 흐물거리며 융해됐다.
광범위한 공격이라서 위력이 집중되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구조물째로 함께 녹아내렸을 것이다.
오시안은 그렇게 판단하면서 엄폐물을 빠르게 벗어났다.
반쯤 녹아내린 철재 구조물의 중심에 거대한 구멍이 뻥 뚫렸기 때문이다.
이쪽을 노리고 자기장 펄스를 쏘아낸 다베르의 공격이었다.
오시안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정면에서 싸우는 것은 좋지 않아.'
처음에는 힘겨루기를 통해 상대가 지닌 테슬라 암즈의 출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을 끝마쳤다.
그리고 내린 결정은,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는 테슬라 암즈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범위한 자력을 뿌린다면 검에 힘을 주는 것으로 밀고 나가겠지만, 범위를 좁혀 출력을 높이면 그때는 이쪽도 버티기 힘들어진다.
상대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무분별한 자기력의 사용을 자제하고 이쪽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다행히도 오시안에게는 어마어마한 피지컬을 지닌 육체가 있었다.
힘에서 밀리지만, 이 육체의 힘은 단순히 힘만 강한 것이 아니었다.
'속도전으로 승부한다.'
상황만 놓고 보면 이 싸움은 오시안에게 불리했다.
이쪽이 지닌 것은 고작 칼 한 자루. 뛰어난 육체가 있다고는 하지만, 상대방은 그보다 훨씬 더 악랄하다.
금속을 상대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테슬라 암즈는, 검을 사용하는 오시안의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다베르는 마법까지 쓴다.
현재 관측된 마법만 해도 화염과 중력을 다루며, 그 위력은 4성급도 가볍게 사용할 정도.
이거라면 과거 그가 게임을 하던 시절 싸워온 보스 중에서도 중간급 이상은 가는 녀석이다.
그걸 기본 장비, 아니 그마저도 되지 않는 상태로 잡으라니.
'그것은 누구보다도 바라던 바지.'
씨익.
오시안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게임을 하던 그에겐 유리한 싸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으며, 무수한 도전을 해왔다.
마음이 꺾여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활로를 모색했다.
그렇게 적을 꺾었고 승리를 쟁취했다.
그러한 행동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반복해왔다.
눈에 보이는 총알을 검으로 몇 번 쳐내고, 남들보다 강한 힘으로 쉽게 몰아붙이는 싸움이라니.
근래 해온 그걸 과연 싸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래야 싸움이지."
오시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다베르의 눈매가 분노로 찡그려졌다.
방독 마스크 안쪽의 붉은 안광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싸움? 지금 싸움이라고 했냐?"
드드드드.
분노로 인해 용솟음치는 마력이 주위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황망하게 지켜보던 용병과 데이빗, 강철추종자는 뒤로 물러났다.
다베르가 오시안에게 정신이 팔린 지금이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는 기회였다.
'오시안.'
이번엔 부축을 받으며 물러나는 데이빗이 오시안을 돌아봤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시안은 데비잇을 향해 한번 피식 웃어주고는, 다시 잔상을 남기며 흩어지듯 사라졌다.
데이빗은 그 미소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못 당하겠군.'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전소를 탈출하는 데 주력했다.
*
어두운 발전소 내부가 밝게 비춰졌다.
그것은 내려간 전력을 누군가 복구시켜서가 아니다.
한 존재에 의해서, 발전소가 환한 빛으로 가득한 것이다.
"벌레 새끼들이 모두 도망치는구나."
오른팔에 새빨간 화염을, 왼팔에 푸른 전류를 두른 다베르가 오시안을 노려보았다.
갈색 판초 망토가 마력의 기세를 이기지 못해 거칠게 펄럭였다.
"쫓아가지 않아도 되나?"
"너부터 죽이고 나중에 쫓아가도 늦지 않아."
"오만한 발언이군."
"그러는 너야말로 각오는 된 거냐? 내 분노를 혼자서 어떻게 감당할 생각이지?"
방독면 안쪽의 붉은 안광이 호선을 그리며 샐쭉 휘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순수하게 즐거워서가 아니라는 것은, 폭발적인 살기만 봐도 알 수 있다.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감각.
겁화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따끔한 전류.
폭발하듯 휘몰아치는 마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플 지경이다.
모니터 너머로 캐릭터를 굴리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현실감.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이 검을 쥔 순간이 꿈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죽어!"
다베르가 오시안을 향해 양팔에 깃든 힘을 쏘았다. 적과 청의 색이 오시안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오시안은 그것을 피하려 하다가, 머리 위에 떠오른 보라색 고리를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중력 마법.
녀석은 이쪽이 피할 것을 대비해서 주위에 광범위하게 중력증가를 걸었다.
이것으로 오시안이 죽는 일은 없겠지만, 빠른 움직임은 봉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뿌드득.
오시안은 검을 쥔 손잡이에 힘을 주며 휘두를 준비를 갖췄다.
그 모습을 본 다베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고작 그딴 걸로 뭘 하겠다고!"
다베르가 비웃건 말건 오시안은 가장 먼저 다가오는 푸른 번개를 보았다.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다고 막아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받아치는 수밖에.
채애애앵─!!!
푸른 전류가 휘둘러지는 검에 맞닿는 순간 청명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마치 푸른 하늘 높은 곳에서 울리는 거대한 종소리처럼.
그것은 발전소 내부에 울려 퍼지며 주변 금속들과 공명음을 냈다.
오시안은 전류를 머금은 검에 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옆으로 회전시켰다.
오시안을 노리고 달려들던 전류는 오시안의 검결을 따라 회전하고, 그대로 사방으로 강렬한 스파크를 튀겼다.
오시안은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한 바퀴.
두 바퀴.
그렇게 세 바퀴째 회전하는 순간.
오시안은 뒤이어 다가오는 불꽃을 향해, 푸른 전류가 맺힌 검격을 때려 넣었다.
회전 속에서 방향을 잃은 번개는 오시안의 인도를 따라 불꽃을 향해 쏘아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두 힘이 서로 충돌해 소멸했다.
'성공했다.'
받아치기에 성공한 오시안은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게임에서만 가능하던 극악의 반격 스킬. [굽이치기]. 그게 정말로 될 줄이야.'
[방랑기사] 태생은 기본적으로 방어는 방패를 이용한 [패링]을 사용한다.
하지만 방패가 없는 경우를 상정해 검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패링]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굽이치기]였다.
일반적인 패링보다 난이도가 훨씬 더 어렵지만, 공격을 쳐내는 것을 넘어 되돌리는 기술.
'번개를 되돌렸으니 이 기술의 이름을 굽이치는 뇌류라 해야겠군.'
게임 속에서 그 무수한 회차를 겪어온 오시안조차도, 몇 번 성공시키지 못했던 기술을 현실이 된 지금 처음으로 펼친 것이었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
오시안은 검을 쥔 양손이 저릿한 걸 느꼈다.
번개를 되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성공일 뿐.
번개의 일부 힘은 완전히 되돌리지 못해 사방으로 휘몰아쳤으며, 그것은 검을 쥔 오시안의 양팔에도 고스란히 피해를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베르가 후속타를 날리지 않은 것이었다.
다베르는 믿기지 않은 광경을 본 것 때문인지, 거의 얼어붙어 있었다.
"검으로 번개를 되돌린다니. 네놈은, 대체...."
그런 건, 이제는 완전히 소실해 버린 고대 전설에서나 볼 법한 기예가 아닌가.
네놈은 대체 누구고 그 기술은 어디서 익힌 거냐고.
다베르는 구구절절하게 그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겠지. 원래도 네놈을 죽이는 데 진심이었지만, 이번엔 정말 제대로 가주마."
다베르는 테슬라 암즈를 힘껏 치켜세웠다.
투우웅─!!!
거대한 자기력이 테슬라 암즈로부터 뿜어져 나와 일대를 뒤덮었다.
부서지고 조각난 무수한 금속의 조각과 잔해들.
그것이 일제히 두둥실 떠올라 테슬라 암즈를 중심으로 한 다베르에게 모여들었다.
그것은 강철로 이루어진 정어리 떼의 군무를 보는 것 같았다.
오시안은 자신의 검이 끌려가지 않도록 손에 힘을 주며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좀 많이 너무하다고.
"어디. 이것도 피하거나 막아내 봐."
촤라라락!
테슬라 암즈가 오시안을 향하자, 무수한 금속의 해일이 오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시야를 강철의 파편이 뒤덮었다.
오시안은 두 다리에 힘을 준 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바로 직후 오시안의 발아래에 강철의 피라냐 떼가 스치듯 지나쳤다.
그러나 잔해들은 곧바로 방향을 틀어 오시안을 노렸다.
오시안은 전투로 인해 휘어져서 툭 튀어나온 강철 파이프를 밟아 재차 뛰어올랐다.
그 뒤를 잔해들이 헤집으며 매섭게 쫓아왔다.
카가가각!
발전소의 환풍구와 외벽, 기둥이 불똥을 튀기며 갈려나갔다.
그때 사람의 몸통만 한 철골이 오시안의 등을 노리고 쏘아졌다.
오시안은 허공에서 몸을 틀며 검을 수평으로 세웠다.
카앙!
검과 충돌한 철골은 오시안을 그대로 밀어내며 천장에 처박았다.
오시안의 몸이 천장을 뚫고 나가도 철골은 밀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발전소 옥상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고 나서야, 오시안은 철골을 반으로 가르며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챙──!!!
"...!"
치열한 싸움을 견디지 못한 롱소드의 날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허공에 체류한 오시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덧 밤이 되어 주변 일대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발전소에 전력을 공급받지 못한 주변 일대는 적적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무너진 옥상을 통해 다베르가 튀어 올랐다.
금속의 발판을 밟고서 선 그는 오시안을 향해 비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잘난 검이 부러졌구나!"
오시안은 그런 다베르를 향해 검을 휘두를 자세를 갖췄다.
밑동만 남은 부러진 검으로 말이다.
그 모습을 본 다베르가 방독면 안쪽에서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멍청한 새끼! 지금 이게 안 보이냐? 난 번개를 일으키며 화염을 부린다. 금속과 중력도 다룰 수 있지! 그런데도 싸우겠다고?"
테슬라 암즈에서 뿜어져 나온 전류가 주변 금속에 퍼져 뇌창으로 변해 오시안을 겨누었다.
오른팔에서는 강렬한 화염이 일어나며 불의 뱀이 똬리를 틀었다.
"고작 부러진 칼로 대체 뭘 할 수 있는데!"
다베르의 외침대로, 그는 온갖 기적 같은 힘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고작 부러진 칼 한 자루로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시안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모그가 가득한 밤하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 찬란했어야 할 하늘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분명히 저곳에 '별'은 존재한다.
"그래. 네 말대로, 부러진 검으로는 뭘 하기 힘들어."
그 순간 오시안은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하지만."
오시안은 부러진 검을 들어 올렸다.
부러진 날 위로 새하얀 불씨가 피어올랐다.
"별빛은 담을 수 있지."
32화. 별빛 (2)
생존자들은 황급히 발전소를 빠져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들의 등 뒤에서는 열렬한 폭발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뒤처지면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달리던 생존자들은 일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세계를 불사르듯 강렬한 섬광이 뒤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미친."
뒤를 돌아본 누군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 어린 말을 중얼거렸다.
부서진 발전소의 위로 다베르의 마력이 장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모든 걸 불사르는 화염의 뱀.
적을 꿰뚫을 무수한 푸른 번개의 창.
그리고 다베르의 몸을 높게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보랏빛 중력마법까지.
그런 다베르와 대적하는 것은 오시안.
거대한 힘을 몸에 두른 다베르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직후 벌어진 일에, 자리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오시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데이빗이 중얼거렸다.
"저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눈을 어지럽히는 마력의 격류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한 줄기 새하얀 빛을.
"별빛?"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빛은, 저 높은 하늘의 구름 너머에서 물방울처럼 뚝 떨어져 오시안의 검에 깃들었으니까.
"맙소사."
별빛은 오시안의 부러진 검에 깃들더니, 이윽고 거센 불길을 토해 냈다.
하얗게 치솟은 불꽃은 이윽고 검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데이빗은, 아니 그걸 넘어 도망치던 모두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모든 빛이 사라진 새까만 도시의 어둠 속.
과학의 발전으로 이제는 사라져 버린 하늘의 빛이.
지금 이 순간, 지상에 강림했다.
*
오시안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별빛을 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놀람도, 경악도 없었다.
이 의외의 상황 속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당연히 펼칠 수 있던 것을 해냈다는 소소한 감상뿐.
부러진 검을 쥐고 포기하지 않는 순간 느꼈다.
지금이라면 사용할 수 있다고.
'기사 태생의 4가지 고유 특성 중 하나인 성광(星光).'
오시안이 하던 게임에는 각 직업마다 고유한 특성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전에 싸웠던 흑마법사가 펼친 [사령술], [저주와 부패], [암흑마법] 등이 있다.
각 직업은 레벨을 올릴 때마다 해당 특성을 개화하며 더 다양한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개화시키다 보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단순히 평범한 태생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다른 말로는 진명(眞名)이 개방되는 것이다.
[흑마법사]의 경우에는 [죽음의 선지자].
[마법사]의 경우에는 [그랜드 마기아].
그것은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였고.
오시안의 직업인 [방랑기사]에게도 진짜 이름이 따로 있었다.
다베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외쳤다.
"그 빛은 대체 뭐냐! 네놈, 대체 정체가 뭐지?"
"내가 누구냐고?"
본디 방랑기사란 세계를 벗 삼아 떠도는 자들.
그들에겐 풀밭은 언제든 잠을 취할 수 있는 침대이며 바람은 여행을 함께 하는 친구다.
방랑기사는 여정에는 언제나 동료가 함께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음에도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으며, 밤이 되면 가야 할 곳을 안내해주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무수한 별빛이 그러했다.
하늘을 따르며 세계를 떠도는 그들의 이름.
"나는 하늘의 기사."
그래. 저 하늘에 존재하는 별이야말로 방랑기사의 친구이자 이정표이며.
"지금 이 자리에서, 네놈을 벨 남자다."
그들이 거머쥔 강력한 힘이었다.
*
다베르는 오시안의 검에 깃든 새하얀 불길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늘의 기사라고?"
흰색과 푸르스름한 두 색이 조화를 이루며 타오르는 검은 다베르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늘의 기사라는 이름 또한 기억에 없다.
전부 처음 보고, 처음 듣는다.
그러나 다베르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지금 오시안이 쥔 빛의 검은 가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짓. 가짜. 속임수.
그 무수한 가능성들을 머리로 떠올려 보지만, 그 가슴의 깊은 곳에서는 본능적인 파문이 일었다.
저 불길은 위험하다고. 저것은 절대 가짜가 아니라고.
그러니 어서 도망치라고.
"도망?"
뒤늦게 자신이 물러나려 했다는 걸 깨달은 다베르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고작 저런 걸 두려워한다고?"
부릅뜬 눈으로 오시안을 노려본다.
녀석의 손에 쥔 빛의 검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그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결국엔 검이다. 닿지 않으면 피해를 주지 못하는 검이란 말이다."
오시안이 손에 쥔 별빛검은 그 길이가 2m가 채 안 됐다.
지금 다베르가 짜낸 마법의 규모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모자란 규모.
숨겨놓은 패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이쪽이 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네까짓 놈이 하늘의 기사이니 뭐니 상관없다! 그 채로 불살라주마!"
다베르가 오른팔에 머금은 화염을 내질렀다.
팔뚝을 타고 똬리를 틀고 있던 화염의 뱀이 아가리를 벌리며 오시안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 집채만 한 덩치는 오시안을 비롯해 지상에 강림한 별빛을 한입에 삼킬 정도로 거대했다.
다베르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이쪽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 화력의 공격이다.
그것을, 고작 칼잡이가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승리의 확신에 찼던 다베르의 얼굴은, 직후 벌어진 광경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오시안이 불의 뱀을 향해 한 행동은 간단했다.
그저 손에 쥔 검을 쥐고, 뱀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을 뿐이다.
그런 간단한 행동이었다.
'그랬는데 대체 저건 뭐야?'
새하얀 검은 너무나도 손쉽게 뱀의 머리를 수직으로 갈라 버렸다.
오시안의 검은 뱀의 머리에서 그치지 않고 꼬리까지 반으로 잘라냈다.
장작처럼 좌우로 쪼개진 불의 뱀이 불씨를 흩날리며 소멸했다.
세상을 불사를 것만 같던 주홍색 화염은 하얀 불길 앞에 불타 스러졌다.
'저건 뭐야.'
불을 태우는 불이라니 이런 건 들어본 적 없다.
아니. 애초에 저 하얀 것이 불이기는 할까?
다베르는 눈앞의 광경 속에서도 테슬라 암즈를 가동시켰다.
자력이 발생하며 허공에 떠오른 무수한 금속 파편들이 오시안을 겨누었다.
그것도 강렬한 전류를 머금은 파편이.
금속 파편이 오시안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고깃덩어리를 발견한 굶주린 피라냐 떼와 같았다.
오시안은 좌에서 우로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검 끝에서 하얀 빛이 폭사하며 전류를 머금은 파편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지이잉.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다베르가 테슬라 암즈의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미처 냉각시키지 못한 테슬라 암즈가 과도한 출력에 삐걱거렸지만, 다베르는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 오시안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베르는 동시에 허공을 비산하는 자잘한 파편들을 끌어모아 오시안의 몸 주위를 새장처럼 둘렀다.
"죽어!"
파지지직!
푸른 전류가 흐르는 감옥에 오시안을 가둔 채, 그대로 전기에 지져버릴 생각이었다.
그 직후 푸른 감옥을 뚫고 새하얀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검은 수직으로, 수평으로, 대각선으로 끝없이 회전하듯 휘둘러졌다.
파칭!
전류의 감옥은 산산조각이 났다. 오시안은 흩어지는 파편을 하나 발로 디디며 다베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웃기지 마라!"
쿠구구궁.
발전소의 지붕이 들썩이더니, 이윽고 거대한 금속 잔해들이 지붕을 뚫고 떠올랐다.
잔해들은 보랏빛 마력에 휩싸여 있었다.
자력으로 들어 올릴 수 없는 중량의 잔해를, 중력마법으로 무게를 줄여서 끌어올린 것이다.
다베르의 손짓을 따라, 거대한 잔해가 오시안을 향해 쏘아졌다.
잔해는 [역학마법]의 갈래인 중력마법의 힘이 깃들어 허공에서 수차례 가속했다.
지상에서 하늘을 향해 치솟는 그것은 마치 역행하는 운석 같았다.
아무리 튼튼한 오시안이라 하더라도, 닿기만 한다면 뼈째로 분쇄될 것이 자명한 일.
시야를 가득 채우는 집채만 한 덩어리.
오시안은 그 위기의 순간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믿는다.
이 순간, 그의 검은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라 해도, 이 별빛 아래에 스러질 거라는 걸.
왜냐하면 이 별빛이야말로 기적의 힘.
이제는 사라져 버린─동화 속 이야기.
그리고 전설의 재현이니까.
서걱─!
일격.
거대한 질량의 잔해는 손쉽게 반으로 갈라졌다.
오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그 무엇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다베르는 다급하게 남은 마력을 쥐어 짜냈다.
끌어올리고 남은 잔해에 마력을 부여해 강도를 올리고, 자신의 앞에 방패처럼 내세웠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방어마법을 사용해, 방패 위에 마나로 이루어진 방벽을 덧씌웠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생긴 방벽이 무려 5겹이나 됐다.
그 직후 새하얀 유성이 방벽 위로 떨어졌다.
───!!!
귀청을 찢는 소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모든 걸 쉽게 베어 넘겼던 오시안의 검이 처음으로 막혔다.
그러나 밀리는 일도 없이, 두 힘은 완벽히 균형을 이루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구름 아래에서 피어난 한 줄기 별빛.
한 줄기 희망의 빛은 다베르가 펼친 마법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고 볼품없었다.
당장이라도 스러지고.
사라질 것만 같이 위태롭다.
그럼에도 계속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모두의 마음속에, 어린 시절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삭막한 현실에 적응하기 전, 아직 동심이 가득한 아이였던 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그거 아니? 저 하늘 위에는 아름다운 불빛이 있다고 한단다. 그것은 절대 시들지도, 꺼지지도 않고 영원히 타오르지.
아이들은 그 말에 환상을 품었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대기가 오염된 도시에서는 별빛을 볼 수 없었다.
세상은 하늘의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도시에서 자라 태어날 때부터 별빛을 본 적이 없던 그들은 그렇게 어른이 됐다.
어른들이 된 그들은 여전히 별빛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마 그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 찬연하면서도 청정한 아름다움은 분명 이야기 속의 기적.
그렇기에 지켜본다.
거대한 힘 앞에 스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저것이 정말로 기적이라면, 그것은 절대 꺼지지 않을 테니까.
드드드드.
요동치는 힘이 완벽한 길항을 이루었다.
다베르는 이를 악물고 남은 힘을 전부 쥐어 짜내며 외쳤다.
"넌 뭐냐!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 거지?!"
그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다베르의 당초 목적은 탈취를 한 테슬라 암즈의 성능 테스트였다.
그래서 일부러 갱단을 뒤에서 조장해 발전소를 점거했다.
발전소를 탈취하기 위해 용병과 해결사들이 찾아올 터.
놈들을 상대로 가볍게 성능만 확인하면 그만인 일.
그래서 놈들을 습격했고, 모조리 쳐 죽일 생각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오시안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대체 뭐냐고!"
보잘것없는 놈이라 생각했다.
다른 놈들과 달리 검을 쓴다는 특이점을 빼면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너는 어디 소속이지? 천상의 종소리? 참회의 심문관? 아니면 이 도시의 새로운 집행자라도 되는 거냐? 티르나에서 몰래 키워낸 강화병사?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오시안은 온갖 허황된 추측을 쏟아내는 다베르를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저 하늘의 기사라고."
"뭐?"
"그리고 지금은 부업으로 해결사를 하고 있지."
방독면 속 다베르의 눈동자가 거칠게 지진을 일으켰다.
쩌적.
그 순간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힘에 균열이 갔다.
다베르의 마력 방벽에 조금씩이지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잘한 실선은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그것은 곧 다베르의 파멸을 고하는 신호와도 같았다.
다베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잠깐! 거래를 하자! 여기서 나를 보내 준다면, 그에 걸맞은 사례를...."
"말하지 않았나. 나는 해결사라고."
오시안이 다베르의 말을 날카롭게 잘라냈다.
"신뢰가 생명인 해결사에게 의뢰 도중 새로운 의뢰를 받으라니."
오시안이 쥔 순백의 검에 변화가 생겼다.
화륵.
불길이 더 강해졌다.
하얀 불길은 푸르스름한 기운마저 섞여, 그 자체만으로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건, 명예롭지 못하지."
손에 쥔 별빛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모든 삿된 것들을 없애기 위하여.
그리고 이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기 위해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순간만큼은 다베르 조차 말문을 잃고 그 빛의 아름다움에 현혹되고 말았다.
이것은 길 잃은 자들을 인도해주는 희망의 빛.
하늘에서 타오르는 별을 넘어선, 이제는 사라져 버린 명예를 좇는 자들의 고귀한 영광이었다.
유성검(流星劍).
파칭!
허물어진 방벽 위로 쏟아진 하늘의 빛이 다베르를 집어삼켰다.
33화. 업계 선배 (1)
지상에 착지한 오시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발전소의 천장은 마치 거대한 검으로 한번 베어 가른 것처럼, 거대한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뻥 뚫린 천장 위로 스모그가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좀 과했나."
오시안은 뺨을 긁적였다.
갱단을 몰아내고 그 흑막까지 처리했지만, 의뢰주들이 딱히 좋아할 것 같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발전소 내부의 핵심 시설은 멀쩡하다는 것 정도?
그걸 감안해도 저 거대한 흔적을 메꾸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흠. 녀석은 그사이에 도망쳤나."
오시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다베르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다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성검에 당해서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린 걸까?
그건 아니었다.
오시안은 마지막에 검 끝에서 느껴진 감촉을 기억한다.
다베르를 향한 유성검은 정확히 그를 베었지만, 그 가열찬 빛이 전신을 태우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에 다베르가 모든 힘을 쥐어짜내 몸을 뒤로 뺀 탓이었다.
'베기는 확실히 벴으니 그 흔적은 남아야 하는데.'
녀석이 추락한 위치가 이곳이니 그래도 찾다 보면 뭐가 나오리라.
그렇게 생각한 오시안의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여기 있군."
바닥에 일부 새겨진 핏자국과 잘려나간 팔 한쪽.
찢어진 붕대가 둘러진 그것은 다베르의 것이 분명했다.
팔이 잘렸는데 핏자국은 크지 않았다.
아주 약간이지만 살 타는 냄새가 코끝에 남았다.
'잘려나간 팔의 단면을 직접 불로 지져서 지혈을 한 건가.'
그 상황에서 단숨에 지혈을 하고, 그대로 도망을 치다니.
인성이 썩 좋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실력이나 판단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러니 티르나에서 적색 수배가 내려온 테러리스트가 됐겠지.
살짝 아쉽게 됐다.
반대쪽 팔을 잘랐다면 그 테슬라 암즈라는 물건을 득템할 기회였는데.
'완전히 끝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은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언젠가 다베르는 자신의 잘린 팔의 복수를 위해 다시금 눈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시안은 그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을 테니까.
'모처럼 성광의 사용법도 익혔고.'
다만 익혔기에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성광(星光)」의 힘은 그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것이 게임 속이었다면 스킬 단축키 하나를 누르는 것으로 발동이 됐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마음가짐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성광의 사용법은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다.
앞으로 몇 번은 더 사용해야 감을 잡을 수 있는 부류.
그러니 첫 성공에 그렇게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이제 3개의 특성 중 하나를 뚫었을 뿐이니까.'
아직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특성은 2개나 더 남아 있었다.
게다가 「성광(星光)」이라는 특성도 기술이 유성검(流星劍) 하나가 아니다.
유성검은 성광 특성을 막 뚫자마자 배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공격기다.
그만큼 가장 많이 쓰고 범용성도 있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해당 특성에는 때에 따라서는 더 효율적인 스킬도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성광갑주(星光甲冑)」, 아니면 「성운비단(星雲飛湍)」정도를 배우면 앞으로 큰 걱정은 없을 거 같은데.'
물론 그것도 최소한의 조건이다.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사용하는 것이 좋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당장 오늘만 해도, 일반적인 단체의뢰에서 적색수배범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오시안은 자신의 육체가 만능이 아님을 알았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고 나니 더욱 경각심이 들었다.
'더 주의해야겠어.'
오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전소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주위는 어두웠지만, 오시안은 발전소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저렇게 다닥다닥 모여 있으면 모르려야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다들 안 돌아갔나?"
오시안이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용병들도 아직까지도 자신이 이 의뢰를 성공했다는 사실에 얼떨떨해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대표로 나선 것은 데이빗이었다.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뭘 말이지?"
"그건...."
"내가 말 하지 않았나? 나는 기사다."
오시안의 대답에 데이빗은 잠시 복잡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함부로 정체를 드러낼 수 없겠지. 이해하네. 해결사들 중에서는, 자신의 과거에서 도망친 자들도 있으니까."
그건 다른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부상을 입은 조나단도, 강철추종자도 호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 말게. 우리가 막돼먹은 놈들이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있어. 목숨을 빚졌는데 은인을 욕보일 짓을 할 놈들은 아니야."
뭔가 다들 큰 오해를 하고 있었지만, 오시안은 굳이 그것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그러기엔 오늘의 전투로 오시안도 적잖게 지쳤다.
"그보다 그거, 정말로 별빛이었나?"
데이빗은 자신이 방금 전에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한 줄기 빛이, 다베르의 모든 마법을 일거에 뚫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아직도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게 진짜이고 가짜고 중요한가?"
오시안이 도리어 그렇게 묻자 데이빗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큭큭! 그래. 그랬지.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린 덕분에 살았고, 의뢰도 완수했으니까."
데이빗은 웃으면서 엉망이 된 발전소 입구를 바라봤다.
"다만 의뢰주들 입장에선 적잖게 당황하겠군."
"적색 수배자를 쫓아낸 대가치고는 값싸지."
"놈은 어떻게 됐지? 처리했나?"
"도망쳤다."
그거 아쉽군.
진심으로 말하는 데이빗과 용병들을 향해 오시안이 뒷말을 덧붙였다.
"대신 도마뱀처럼 꼬리를 하나 두고 가더군."
"꼬리?"
"아마 녀석은 앞으로 밥을 테슬라 암즈로 먹을 거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숟가락이 되겠지."
그 말뜻을 뒤늦게 알아들은 용병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다.
오시안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제야 싸움이 끝났다는 것이 실감됐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물론 죽은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는 함께 활동하던 동료를 잃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업계가 다 그렇다.
결국 어디서 누군가 총을 맞아 죽어도, 거기에 크게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용병들은 오시안에게 언젠가 만나면 거하게 맥주 한잔을 사겠다는 말을 남기며 흩어졌다.
조나단 또한 거구의 덩치를 숙여 오시안에게 인사를 했고, 강철추종자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남은 것은 데이빗이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나?"
"의뢰 들어가기 전에 했던 말 기억나나?"
오시안은 데이빗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 오토마톤."
"자네가 일전에 싸웠다는 그 오토마톤. 팔이 폭발했다고 했었지. 그 성능은 분명 배틀 트렌치 사에서 만든 특수등급 오토마톤이 분명해."
"그걸 다루는 자라면 보통이 아니겠군."
"그래. 팔이 폭발했다는 것은, 아마 해당 오토마톤은 전신이 그런 기능이 있을 거야."
"왜지?"
"혹시라도 흔적이 남으면 안 되니까. 증거물이 남지 않도록 그냥 터뜨려 버리는 거지. 펑, 하고."
오시안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자네의 오토마톤처럼?"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아."
삽시간에 표정이 어두워진 데이빗을 본 오시안은 아차 싶었다.
반응을 보니 제대로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됐네. 이미 부서진 걸 어쩌겠는가. 살아있는 것도 감사히 여겨야지. 그것도 생명의 은인 앞에서 말이야."
크흠. 오시안은 괜히 어색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데이빗이 큭큭 웃었다.
오시안은 뒤늦게 데이빗이 자신처럼 장난을 쳤다는 걸 깨닫고 피식 웃었다.
"아무튼 조심하게. 특수등급 오토마톤을 개인적으로 다루며 뒤에서 무언가 일을 종용한다면, 내가 아는 선에서는 대기업의 비서 정도는 될 테니까."
여기서 데이빗이 말한 '비서'라는 것은 업계 은어였다.
기업의 지저분한 일을 뒤에서 몰래 처리하는 실력자들.
대기업에 따로 고용된 자들을 업계에서는 '비서'라고 부른다.
"놈이 정확히 어디 소속인지 모르지만, 대기업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두 손 안에 꼽게 되는 거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데이빗은 대기업이 연관돼 있는 시점에서, 이 이상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나름 업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해도, 그는 밑바닥에서 조금 명성을 얻은 수준이다.
기업 단위로 움직이는 자들이 머무는 세계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심하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이로군. 물론 자네 실력 정도면 상대가 기업의 비서라 하더라도 괜찮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지 않나."
"새겨듣지."
"그래. 앞날이 창창한 사람에게 내가 말이 많았군. 슬슬 은퇴라도 해야 할까 싶어."
"정말인가?"
"원래라면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그럴 생각이었지. 내 밥줄이라 할 수 있는 오토마톤도 다 부서졌고."
지금까지 모아둔 돈도 있겠다.
이대로 물러난다 해도 크게 쪼들리며 살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쪽이 싸우는 걸 보니 마음이 바뀌었어."
데이빗은 오시안이 보여 준 빛을 기억한다.
그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빛을 짊어진 것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젊은 청년이었다.
그 빛은 데이빗을 머나먼 과거로 이끌었다.
자신이 아직 순수함을 지니던 어린 시절.
동화 속 이야기에 눈을 빛내던 그때로.
어쩌면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그날의 꿈이야말로, 이제는 사라져 버린 별빛이 아니었을까.
"괜히 불이 지펴지는 기분이었어. 내가 여기서 멈춰도 되나 싶더군."
지금은 사라졌다고 여긴 덧없는 아름다움이었다.
하지만 데이빗은 깨달았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열망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어쩌면 알고서도 외면했던 그것을, 드디어 마주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해볼 생각이네."
"부서진 오토마톤을 새로 맞추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군."
"하하하! 그래. 더 열심히 해야지.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데이빗은 그렇게 말하며 머리에 쓴 모자를 벗어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오시안을 향해 경외와 존중을 담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좋겠군."
그 인사를 남기고 데이빗은 자리를 떠났다.
어두운 골목길 너머로 사라져 가는 데이빗을 본 오시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빛 한 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시안은, 유난히 그 너머가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바이올렛 폭스로 돌아온 오시안을, 로난과 로레인이 반겨주었다.
이쪽을 보는 시선을 보아하니 아마 일찍부터 계속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오시...."
"후배! 이야기 들었어! 선혈 형제단의 다베르란 놈을 쓰러뜨렸다면서!"
로레인이 자신의 일인 것마냥 잔뜩 신이 나서 외쳤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로레인 씨, 조금은 진정해 주세요."
로난은 그런 로레인을 진정시키며 오시안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시안 씨."
"그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꽤 많은 일이 있었다고요."
"아무래도 소문이 다 돈 모양이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으니까요."
로난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여긴 것인지, 오시안이 오기 전부터 마음속에 준비한 질문을 꺼냈다.
"손으로 빛을 휘둘렀다고 하던데요."
"그렇다. 무려 별빛이었지."
"처음부터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나도 최근에 사용하게 된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오시안은 거짓 없이 말했지만, 로난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 것으로 하죠."
"진짜라니까."
"그것도 기사와 관련된 설ㅈ...과거인 거죠? 물론 이해합니다."
"...."
왜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만 말하는데도 그걸 믿어 주지 않는 걸까.
오시안이 이 일련의 상황에 골치 아파하는 순간, 2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시선을 보내자 로난이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오시안 씨는 아직 만나지 않았군요. 지금 제 집무실에는 저희 사무실 소속 해결사가 한 분 더 와 있습니다."
호오?
오시안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34화. 업계 선배 (2)
생각해 보니 바이올렛 폭스에서 만난 해결사는 로레인밖에 없었다.
정작 그 로레인은 선배로서 괜찮냐고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았다.
"뭐, 왜."
오시안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로레인이 과민하게 반응했다.
오시안은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젓고는 롤랑에게 물었다.
"그래서 만나면 인사라도 해야 하나?"
"아마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겁니다만."
로난은 조금 난처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오시안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으니까.
2층 계단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계단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너냐?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엄청난 신입이!"
귓가를 크게 울리는 야성미가 느껴질 정도로 강렬하다.
오시안은 자신을 응시하는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상대방을 살폈다.
체구가 꽤 건장한 미청년이었다.
피부는 갈색. 오랜 야외생활을 통해 태운 것이 아닌 선천적인 피부색으로 보였다.
머리카락은 피부색보다 더 어두웠다. 약간 갈색기가 도는 부분에서 흑발인 오시안과 차이점이 있었다.
새하얀 치아 사이로 언뜻 보이는 송곳니가 그의 야성을 더욱 돋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하나 잡아끄는 것이 있었으니, 다리에 착용한 부츠였다.
유일하게 저것만 오래되어 꽤 헤져 있었는데, 상당히 아끼는 신발 같았다.
"소문은 들었어! 그 선혈 형제단 녀석을 혼쭐을 내 줬다면서? 엄청나게 강한 모양이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을 향해 손가락을 척 가리켰다.
"한판 붙어 보자!"
"...."
오시안이 이게 대체 뭐냐는 시선으로 로난을 돌아봤다.
로난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봐! 내 말 안 들려? 누가 더 강한지 승부를 내자고!"
"디올란 씨?"
로난은 방긋 미소를 지으며 갈색 피부의 남자, 디올란을 응시했다.
"초면에는 예의를 지켜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면 제가 곤란하거든요."
그 미소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압박감에 디올란이 어버버거렸다.
"조용히 해 주실 거죠?"
"아니, 그게...."
"이런. 아무래도 제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디올란 씨. 제가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말은 부탁이라고 했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야생의 늑대처럼 굴던 남자는 삽시간에 강아지처럼 쪼그라들었다.
"후후. 감사합니다. 역시 디올란 씨와는 말이 잘 통한단 말이죠."
말이 통한다고? 협박이 아니고?
오시안이 그 광경을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로레인이 추가로 설명을 해 주었다.
"여기 이 녀석은 디올란이야. 바이올렛 폭스 소속 해결사고 일단은 업계에서 꽤 이름 날리는 녀석이지. 나보다도 먼저 들어왔어."
"그쪽의 선배였나?"
"그래. 전혀 안 그래 보이지? 보다시피 이 녀석, 완전히 천방지축 날뛰는 놈이라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거든."
"아니 내가 언제...."
억울함에 뭐라고 따지려던 디올란은 로난이 다시 지그시 바라보자 입을 다물었다.
그야말로 인간상성이 따로 없었다.
로레인보다 업계 선배라면 이곳에서 일한 지 꽤 됐을 텐데 이런 취급이라니.
'하지만 다부진 몸 봐도 보통 단련을 한 것은 아닌 걸 알겠어. 무기는 따로 없는 모양이고, 총은 안 쓰는 건가?'
이 도시에는 마법사, 흑마법사, 뮤턴트, 아인종 등 워낙 많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가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저렇게 보여도 마법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 확인해 보자! 그 소식 정말이야? 무려 그 선혈 형제단을 쓰러뜨렸다면서?"
디올란이 호박색 눈동자를 빛내며 오시안을 응시했다.
그 눈빛 안에는 강자를 향한 호승심이 담겨 있었다.
초면에 한판 붙어 보자고 말을 했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매우 호전적인 성향이 분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쓰러뜨린 건 아니고 녀석이 도망쳤지만 말이야."
"그것도 대단한 거 아니야? 그것도 칼 한 자루로 상대했다며! 혹시 무슨 특별한 아티팩트라도 쓴 건가?"
"그냥 평범한 검이다."
오시안은 그것을 증명하듯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았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디올란의 표정이 이내 황당함으로 뒤덮였다.
"부러졌는데?"
"부러졌지. 싸우다 보니 내구도가 다 했더군."
진짜로 평범한 철검이라고?
디올란은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부러진 검을 응시하다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무기가 그래서야 아쉽게 됐네! 제대로 붙어 보고 싶었는데!"
디올란은 초면에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호기롭게 외쳤다.
그때 옆에서 로난이 디올란을 지그시 응시했다.
"...농담이었어."
로난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군.
이해는 한다. 로난은 오시안이 보기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언제 갑자기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배신자의 상이 아닌가.
그런 로난의 아래에 모인 해결사 사무소라.
다른 해결사들은 또 얼마나 특이한 놈들이 있는지 이쯤 되면 호기심마저 들었다.
"계속 서 있는 것도 그러니 다들 자리에 앉을까요."
로난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렇게 원형 테이블에 네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디올란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합석한 꼴이 됐다.
"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미 소식을 전해들은 로난이지만, 그래도 사건의 당사자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것만은 못하다는 걸 안다.
오시안은 자신이 그날 겪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갱들을 제압해 나가던 도중 다베르가 습격을 했고, 그가 군부에서 탈취했던 테슬라 암즈를 사용했다고.
"테슬라 암즈라니."
그 부분에서 로난은 솔직하게 놀랐다.
"그게 뭔데?"
디올란이 산통을 깼다.
다만 그 얼굴은 정말로 모르는 기색이 가득했다.
로레인이 가자미눈을 뜨며 말했다.
"기업과 군부가 합작으로 만들어낸 특수등급 의수야. 정제된 에테르 워터를 원료로 사용하고 마법까지 접목시켜서 개인이 대대에 버금가는 힘을 발동할 수 있다는 물건이지."
"만든다고 소문은 무성한 물건이었죠. 설마하니 완성이 됐을 줄은 몰랐군요. 아무래도 최종 테스트 단계에서 빼앗긴 모양입니다."
그 귀중한 걸 테러리스트들에게 탈취당하다니.
물론 선혈 형제단이 평범한 테러리스트들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그런 다베르를 오시안이 쓰러뜨렸다는 거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빛을 냈다던데, 혹시 지금도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아쉽게도 지금은 안 된다."
성광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 겨우 뽑아낸 것이다.
처음 사용한 것이라 원한다고 바로바로 뽑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로레인은 숫제 질렸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골치가 아파 보이는 것은 로난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선혈 형제단이 끼어들었다니. 이거 불안해지군요."
"문제 있나?"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들은 이름에 형제단이 붙은 것처럼 조직원들끼리의 관계가 꽤나 좋은 편입니다. 거기의 막내를 건드렸으니, 형누나들이 오시안 씨를 찢어발겨 개밥으로 주고 싶어 할 겁니다."
"그거참 고상한 표현이로군. 그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일까?"
"형제들은 매일 서로 투닥거리지만, 밖에서 동생이 맞고 들어오면 누구보다 분노하는 법이죠."
그렇게 말하니 묘하게 확 와 닿았다.
오시안은 다베르의 실력을 떠올렸다.
4성급 마법도 어렵지 않게 구현하는 다베르는 분명 대단한 마법사가 맞았다.
그런 놈이 한 조직의 일개 막내라니.
그렇다면 그 형제단의 두목은 얼마나 강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성광만으로는 부족하겠는데.'
느긋하게 굴 생각은 없었지만, 나머지 특성도 빨리 개방할 필요가 지금 하나 더 늘었다.
"그래도 당장에는 형제단이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도 눈치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이번 일로 티르나 시에서 눈여겨볼 테니, 형제단이라 하더라도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겠죠. 군부도 이를 악물고 찾으려 들 겁니다."
"그건 다행이로군."
"뒤늦게나마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끝내셔서 다행입니다."
물론 이번 단체 의뢰는 본래의 취지가 많이 퇴색됐다.
상대는 갱단도 아니었고 심지어 발전소의 일부는 무슨 전쟁을 벌인 건지 반파되었으니까.
도중에 죽은 용병들도 꽤 많았다.
그래도 핵심 시설은 지켜냈고, 결과적으로 발전소 탈환은 성공했다.
거기서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당연히 오시안이었다.
"이번 일로 오시안 씨의 명성이 매우 올랐습니다."
"그런가?"
"티르나 전체로 보면 아직 모자라지만, 이쪽 업계에선 벌써부터 뜨겁더군요. 아마 다른 네임드들도 슬슬 오시안 씨를 눈여겨보기 시작할 겁니다."
물론 업계 최고라 해도 해결사들 사이에서의 평가다.
해결사는 온갖 일들을 다 해 주지만, 도시 전체에서 보면 그 직종은 결국 마이너일 수밖에 없다.
마이너의 메이저가 되어도, 메이저의 마이너보다 평가가 박할 수밖에.
그렇다고 해결사의 네임드가 또 약하다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이 도시엔 그만큼 강자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다만 썩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경쟁이 심한 업계이니, 대부분은 오시안 씨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겠죠. 어쩌면 일부는 오시안 씨가 더 자라기 전에 짓밟으려 들 겁니다."
로난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남 일이라고 쉽게도 말하는구나.
"짓밟는다라."
오시안은 그 말을 중얼거리다가 디올란과 눈빛이 마주쳤다.
단순히 우연이었지만 디올란은 그렇게 느끼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난 그렇게 안 하거든?"
아무래도 방금 전 싸우자고 했던 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호승심 넘치던 것과 비교하면, 생각 이상으로 소심한 반응.
오시안이 로난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면 뭐, 길 가다 습격이라도 당한다는 이야기인가?"
"없지는 않죠."
어? 정말로?
오시안이 그런 시선으로 묻자 로난이 설명을 해 주었다.
"여기엔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선 뭐든지 하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습니다."
"그거참 살벌하군."
"그래도 당장엔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일단 저희 사무소는 회색등급이니까요."
"회색등급?"
또 처음 듣는 단어가 나왔다.
오시안이 그게 뭐냐고 묻자 로난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해결사 업계는 도시 전역에 뻗어 있을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마치 거미줄처럼 말이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서 중개연합이 생겨났고, 그 아래에 해결사 사무소들이 저마다의 등급을 받게 됐습니다."
"그 회색이라는 것도 중개연합에서 부여한 등급인가?"
"예. 해결사들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보니, 분류할 필요가 있거든요."
해결사 사무소는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흑색.
백색.
그리고 회색.
"백색은 정직하고 합법적인 일을 처리해주는 곳이죠. 사람을 찾는다거나 정보를 모아온다거나 도시에서 진행하는 사업을 돕는다거나 하는 일로요."
"흑색은 그렇다면 그 반대겠군."
"맞습니다. 그들은 반대로 지저분한, 불법적인 일을 처리하죠. 사실 갱단과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면 위험하죠."
"그렇다면 회색은...."
"둘 다죠.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의뢰를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색 사무소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모든 일을 다 처리하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순간 백색이나 흑색이 되기 때문이다.
백색이라고 나쁜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흑색이라고 합법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국 전부 정도의 차이다.
회색 사무소는, 어떤 의미로는 두 일을 전부 균형 있게 처리하는 곳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칭호에 가까웠다.
"그렇군. 소수로도 잘 굴러가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나."
합법과 비합법의 일을 모두 진행한다면 주변에서 경쟁자들의 견제도 꽤나 심할 것이다.
그럼에도 바이올렛 폭스는 멀쩡하게 굴러간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사무소의 주인, 로난 롤랑이라는 인물의 뛰어난 수완 덕분이겠지.
그 이상으로 소속 해결사들의 실력도 우습게 볼 수 없으리라.
소수로 굴러간다면 그만한 힘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무튼 이번 일로 꽤나 큰돈을 벌게 됐으니 다시금 축하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모처럼 생긴 큰돈이지만 계속 들고 다닐 수는 없을 겁니다. 은행에라도 맡기는 편이 좋겠죠."
"그러면 그쪽이 또 추천하는 은행이 있겠군."
"그렇죠."
"소개해 준 김에 수수료도 떼고."
"이런. 못 당하겠군요."
로난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걸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중개인이란 그런 것으로 돈을 버는 직종이었으니까.
"최우선적으로 할 일이 있다."
오시안은 자신의 옆구리의 칼집을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무기를 새로 맞춰야 하거든."
35화. 새로운 검 (1)
로난은 오시안의 부러진 검을 보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무기라. 후후. 확실히 필요해 보이네요."
"그래서 묻는 건데, 혹시 검을 취급하는 곳 중에서 유명한 대장간 있나?"
칼을 만드는 대장간이라.
로난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칼은 어디서나 만듭니다. 하지만 대게 그런 경우는 일상에서 활용하는 식칼부터 해서, 공업용 절단기나 총기류의 부속 단검 같은 거죠."
로난은 오시안의 검을 슬쩍 보았다.
저 검이 어떠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 그는 똑똑히 기억한다.
"보통 그런 곳은 오시안 씨가 쓰는 검은 만들지 않습니다. 만들어 달라고 한다면 만들어 주겠지만, 그 성능은 기대하기 힘들겠죠."
오시안은 왜 없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롱소드를 만드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검이라는 것은 단순히 모양만 낸다고 해서 똑같은 성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검의 길이, 무게중심, 날의 상태, 철의 강도까지.
고려해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정보를 모으는 입장으로서, 이런 부류는 취급 자체를 안 하는지라."
"됐다."
오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로난은 중개인도 하지만, 이 업계에서 여러 정보를 물어다 주는 정보 상인의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오시안은 로난만큼 박학한 사람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정보가 없다라.'
모든 정보는 등급이 매겨져 있다.
모두가 모르지만 알려지면 큰 파장을 몰고 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
정보의 가치는 그것에 따라 책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시안이 원하는 정보는 정보 시장 내에서도 취급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검이라. 나는 총포상만 다녀서 잘 모르겠네."
로레인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주 무기는 총기. 당연히 검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세 사람의 시선이 디올란을 향했다.
그리고는 관심을 꺼트리듯 동시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얘는 모를 것 같다는 공통된 생각 때문이었다.
"난 알아."
디올란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뭐? 네가?"
로레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디올란이 불쾌한지 눈썹을 찌푸렸다.
"뭔데 그 반응은. 내가 뭐 알면 안 되나?"
"요즘 시기에 칼 만드는 곳이 어디에 있다고."
"나는 오히려 모르는 게 신기한걸. 오래됐지만 그래도 꽤 유명한 곳이라 다들 알 줄 알았는데?"
"어딘데?"
"엘딘의 망치모루장."
오시안으로서는 당연히 처음 듣는 이름.
하지만 로난과 로레인은 아는 모양인지 저마다 반응을 보였다.
"아, 거기. 그런데 거기서 옛날에 쓰던 구닥다리 롱 소드도 취급하나?"
뭐? 구닥다리?
오시안은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가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머리론 별생각 없는데 기사의 육체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헙."
로레인도 그걸 눈치채고 식은땀을 흘리며 오시안의 시선을 피했다.
디올란은 자신이 쪽도 못 쓰는 로레인이 오시안의 앞에서 얌전해지자 그걸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러면서 방금 전에 받은 질문에 대답을 하는 건 빼먹지 않았다.
"알잖아. 공방주인 경력이 오래됐다는 거. 지금이야 만들지 않는다 해도 그 양반 어릴 때 정도 되는 옛날에는 많이 만들었지. 최소한 실전에서 써먹을 무기는 만들어 줄걸."
"그런가."
디올란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쯤은 찾아가 볼 만한 것 같았다.
"갈 거면 최대한 빨리 가는 것이 좋을 거야."
"왜지?"
"그쪽이 좀 인기가 있어서 예약이 밀릴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댁이 무기가 없다는 걸 알면 그때를 노리고 건드리는 놈들이 있을 테니까."
"나를?"
"선혈 형제단을 쫓아냈다는 실력자라는 건 알지만, 그걸 온전히 믿는 사람은 없거든. 특히 이렇게 허황된 소문일수록 더더욱."
"그렇군."
오시안도 그 부분에는 딱히 토를 달지 않았다.
성광을 뽑지 못했다면 오시안은 다베르에게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다베르는 강했다.
4성 마법을 즉석에서 난사하는 놈이니 당연한 평가였다.
'그런 놈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초짜 해결사가 쓰러뜨렸다? 확실히,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이야기로군. 내가 저질렀지만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야.'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그것이 마냥 조작된 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소문이 100프로 다 진짜라 믿지 않을 것이다.
디올란이 말을 이었다.
"이 업계엔 그런 놈들이 많아. 헛소문이 돌아도 그걸 잡아먹어서 자신의 성장 밑거름으로 쓰려는 하이에나들이지. 아마 너는 한동안 많이 시달릴 거야.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자리가 몇 번이고 생길 거고. 계속 의심하는 사람들과 부딪칠 걸."
그러니 포기할 거라면 지금 포기해라.
디올란의 말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충고는 이쪽을 걱정해서 하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적어도 오시안은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면 보여 줘야지."
오시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언젠가 다가올지 모를 싸움을 보듯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디올란은 그런 오시안의 눈빛을 살피더니 하얀 치아를 보이며 씨익 웃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 대답이네."
*
서양 속담에 쇠가 뜨거울 때 두들기라는 말이 있다.
쇠가 달아올랐을 때 두들겨야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로,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오시안이 엘딘의 망치모루장이라는 곳으로 바로 향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렇다고 그쪽도 같이 올 줄은 몰랐는데."
오시안은 자신을 따라 나온 디올란을 보며 물었다.
"뭐, 소개를 시켜 준 것도 나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길 안내까지 해주면 좋잖아?"
"위치는 나도 들어서 안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마. 새로운 후배가 들어왔으니 선배로서 도움을 주는 것뿐이니까. 게다가 공방거리는 복잡해서 길 찾기가 쉽지 않다고."
아무리 후배라지만 처음 만난 사이인데 길 안내를 해준다니.
그렇게 할 일이 없나?
하지만 오시안은 굳이 그걸 따지지 않았다.
디올란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듯, 오시안 또한 이 디올란이라는 사람이 궁금하던 차였으니까.
오시안은 아직 이 세상을 모른다.
그가 알던 세계는 너무 많이 바뀌었다.
알던 것들이 남아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생소하기만 하다.
적응을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나 지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상대가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라면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디올란은 제격인 인물이었다.
못미더워 보인다 해도, 로난과 함께 활동하는 해결사라면 그 실력만큼은 진짜일 테니까.
"그래서 그쪽은 무슨 무기를 쓰지?"
오시안의 물음에 디올란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오시안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곧바로 눈치챘다.
"주먹이로군."
"맨주먹은 아니야. 나한테도 착용하는 무기는 있으니까."
잘려나간 팔도 통짜 기계로 대체가 가능한 세상이다.
아마도 사용하는 무기는 너클.
튼튼한 주먹을 뒤덮는 강철 너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능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시안은 디올란에게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밑천은 최대한 숨겨야 하는 업계였기에,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는 너는 계속 검만 사용했나?"
"뭐, 그런 셈이지."
굳이 따지자면 검밖에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이 되겠다.
게임 속에서는 시스템 때문이라면, 현실이 된 지금은 육체가 그저 검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뿐.
"앞으로도 계속 검을 사용할 거고?"
"바뀌는 일은 없겠지."
"좋은 각오네. 뭐, 그 정도는 돼야 로난이 데려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는 디올란의 목소리에는 로난을 향한 신뢰감이 묻어나 있었다.
"로난이 그렇게 대단한가?"
"그쪽도 로난이 영입해서 온 거 아니야? 그렇다면 그가 꽤 비범하다는 걸 알 텐데?"
"적어도 다른 중개인들 보다는 훨씬 더 정중하고 조건이 좋았으니까."
"그 사람의 보는 눈은 대단히 뛰어나. 그렇게까지 행동했다는 것은, 그쪽에게 그만한 가능성을 봤다는 거야. 실제로 로난은 사람을 골라 받는 것으로 유명해. 그리고 로난이 뽑은 사람은, 최소한 이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지."
"그건 본인도 포함인가?"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장난스럽게 웃던 디올란이 다만, 하고 말을 이었다.
"좀 그런 게 있단 말이지. 항상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무섭다고 해야 할까. 보통 그런 사람들은 뭘 숨기고 있거든. 아주 크고 무서운 거 말이야."
"그건 부정할 수 없겠군."
인상만 본다면 로난의 진짜 정체가 이 도시의 숨겨진 어둠의 실력자라 해도 믿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오시안은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뭐, 도움은 되니까."
"그렇지."
이 순간 두 남자에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오시안은 디올란과 한층 더 내적으로 친해진 걸 느꼈다.
"아. 도착했네. 저기야."
저 앞에 커다란 공방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이 걷는 거리는 불의 거리라 해서, 철을 직접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불의 거리는 건물마다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중에서 엘딘의 망치모루는 특히나 큰 공방에 거대한 간판을 달고 있어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잘나가는 곳이라 규모가 큰가 보군. 대충 이름만 들어보면 드워프들이 만든 곳이겠지?'
티르나에서는 여러 종족들이 한데 모여서 지내고 있으니, 아마 이런 곳에서 망치를 두들기는 것은 드워프이리라.
그런 생각으로 공방에 들어간 오시안은 신기한 모습을 구경하게 됐다.
카가가각!
공방의 주인은 눈에 고글을 착용하고 빠르게 회전하는 그라인더로 금속을 미세하게 갈고 있었다.
무수한 불꽃이 튀며 깎여나간 금속의 파편이 아래에 쌓인다.
옛 대장간에선 볼 수 없는 현대적인 작업방식을 하는 것은 놀랍게도 드워프가 아니었다.
"엘프?"
공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짙은 황갈색 머리카락을 위로 묶어 올린 엘프 여성이었다.
기본적으로 철을 만지는 곳이다 보니 내부는 후끈했고, 엘프는 꽤나 간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오시안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인지 엘프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는 오시안을 돌아봤다.
"뭐야. 손님이야?"
눈에 착용한 고글을 치우자 에메랄드색과 같은 벽안이 오시안을 빤히 응시했다.
"여기가 엘딘의 망치모루라고 들었는데."
"그래 맞아. 내가 엘딘이고. 여기 주인이지."
"...드워프가 아니었다고?"
근방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간의 주인이 엘프라는 것이 오시안으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엘딘은 그 말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야. 무슨 불만이라도 있어?"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이 친구가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디올란. 여길 찾아온 건 물건 수리라도 맡기려는 거야?"
둘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아니. 오늘 목적은 이쪽."
"새로 무기를 구하러 온 쪽인가. 그래서 형씨. 반응을 보아하니 댁이 살던 곳에서는 드워프가 대장간을 했나 보지?"
"...보통 드워프가 하지 않나?"
오시안은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기본적인 상식이었다.
적어도 오시안이 플레이 하던 게임 속에서는, 유명 대장장이는 죄다 드워프였다.
엘딘은 그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적 드워프야. 드워프들이 손재주가 뛰어나긴 한데, 그것도 옛날 일이야.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시대가 바뀐다 해도 이 정도로 바뀌나?
오시안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오시안의 상식 속 엘프들은 숲 깊은 곳에서만 지냈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친화력이 강한 종족이었다.
대부분이 미남미녀이며 수명이 길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까지도.
그것은 비단 게임뿐만이 아니라 영화나 만화, 소설 같은 매체에서 공통적으로 지닌 클리셰였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엘딘은 예쁜 걸 제외하면 엘프라는 틀을 정면에서 깨부수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쇳가루 풀풀 날리는 곳에서 일하는 엘프라니? 기사가 갑옷 대신 프릴 달린 드레스를 입은 수준이 아닌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네. 이봐, 형씨. 내가 이 일을 몇 년을 했다고 생각해?"
"엘프의 수명은 엄청 기니까...못해도 100년은 되나?"
"한참을 틀렸어. 400년이다."
"400년이라고?"
드워프의 평균 수명은 300살이다.
그것은 게임 내에서 정해진 공식설정이었다.
즉 눈앞의 엘프는 한 드워프가 태어나고 죽는 생애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이 일을 해왔다는 소리였다.
오시안은 왜 이곳이 유명한지 깨달았다.
400년 전통의 엘프 대장장이 공방?
30년 동안 한길을 파는 사람은 장인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300년 동안 한 엘프는 무슨 칭호를 들어야 한단 말인가.
주위에 다 5년에서 10년 전통 내건 간판 사이에서 200년 전통 간판을 단 중화요리 전문점이 있다면?
사람들은 다 그곳으로만 갈 것이다.
오시안의 눈빛이 변한 걸 본 엘딘은 턱을 들곤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가슴팍을 쳤다.
"잘 왔어. 뭐든 주문해 봐! 쇠로 만드는 거라면 뭐든지 만들어 줄 테니까! 400년 평생 안 만들어 본 게 없다고."
"뭐든 말인가?"
불쑥 튀어나온 오시안의 말.
엘딘은 잠시 말을 멈추고 흥미롭다는 듯 눈앞의 남자를 훑어보았다.
"...흐음."
그리곤 씨익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36화. 새로운 검 (2)
고글을 벗어던진 엘딘은 근처에 놓인 수건으로 뺨과 이마에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말해두는데 드워프들이 인기 있던 것도 감각으로 철을 분석하던 시절의 이야기야. 요즘처럼 합금강재가 발달한 세상엔 그런 종족의 경계 따윈 없어."
아주 옛날에 드워프들이 대단한 무기를 만들 수 있던 것은 철에 내포된 탄소의 양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드워프들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종의 특성이었다.
드워프들은 감각적으로 철에 내포된 불순물의 존재 여부와 탄소의 함량, 철의 질까지 알아차린다.
그들이 장인으로 불리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 차이를 좁혀 주다 못해 뛰어넘게 해 준 것이 바로 과학이었다.
현대의 제강기술은 인간조차도 드워프에 버금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래서 형씨는 뭘 보러왔지? 나야 만드는 게 워낙 많거든."
"당연히 무기를 구하러 왔다."
"무기라. 총 같은 경우에는 이쪽은 부품만 따로 주문제작을 하지 총 자체를 취급하지는 않아. 구하려면 총포상 쪽을 둘러보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찾는 무기는 총 같은 게 아니야."
엘딘은 그 대답에 의아해하다가 오시안이 허리춤에 찬 롱 소드를 보며 눈을 빛냈다.
"잠깐. 허리춤의 그거 설마 검이야?"
엘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거 놀랍네! 설마하니 아직도 이런 시대착오적인 무기를 대놓고 들고 다니는 바보 같은 녀석이 있을 줄이야! 한번 봐도 되나?"
말은 그렇게 해도 엘딘은 꽤나 기뻐 보였다.
"안 될 건 없지."
오시안은 롱 소드를 엘딘에게 건네주었다.
부러진 날도 회수를 했기 때문에 롱소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있었다.
롱 소드를 세심하게 살피던 엘딘은 감탄사를 흘렸다.
"세상에 이건...."
"왜. 생각보다 좋은 칼이라 놀랐나?"
"정말 쓰레기 같은 칼이야."
"...."
"이 투박한 디자인을 생각하면 절대 예장용 검은 아니야. 그렇다면 실용적인 목적으로 쓰이는 걸 텐데 이 정도로 철의 질이 나쁘다고?"
엘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몸에 박혔다.
검을 소중히 여기는 방랑기사로서, 비록 부러졌다 하더라도 자신의 무구가 욕보인다는 것은 가슴이 아픈 일이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가 있냐기보다는, 흠...다른 의미로 놀랍다고 봐야겠네. 그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구시대적인 검이야. 혹시 유물을 모으는 취미라도 있어? 이쯤 되면 거의 1000년 전 물건일 텐데 관리 하나는 잘했네."
실제로 거의 천 년 전 물건이라 하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까.
오시안은 그런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골동품으로 팔면 돈 좀 되겠어. 멀쩡했다면 말이야."
"...."
연이어 날아오는 혹평에 오시안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랑기사는 세계를 떠도는 기사이지만 뒷이야기를 보면 한때 꽤 뛰어난 가문 출신이라는 설정이 존재했다.
방랑기사로 시작할 때부터 주어지는 롱소드는 당시에 사용하던 물건으로서, 게임에서도 중상급은 되는 무기였다.
아무런 부가효과가 달리지 않은 일반 롱소드가 그 정도의 평가인 것이다.
순수 바닐라 스텟 무기에서는 거의 정점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천 년이 지나 제강법과 야금기술 그리고 금속가공이 발달한 지금.
오시안의 검은 시대착오적이다 못해 이제는 사용하지 않을 유물이 되고 말았다.
"요즘처럼 철에 원하는 원소를 비율로 조절해서 섞을 수 있는 시대에 이런 저급 탄소강 재질의 롱소드라니. 길거리 생선가게 아낙네가 사용하는 부엌칼도 이것보단 튼튼할걸."
"...."
오시안의 정신이 21세기 현대인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즉시 엘딘을 향해 결투를 신청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방랑기사의 육체가 격한 분노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참아. 내 안의 방랑기사.'
오시안은 멋대로 날뛰려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억눌러야 했다.
그래서 입도 열지 않았다.
괜히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종족비하 발언이 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그래서 이런 무기를 새로 만들어 달라는 것은, 그쪽도 괴짜의 부류에 들어간다고 해도 무방한 거겠지?"
오시안은 화를 식히기 위해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이쪽도, 라는 말은...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로군."
"당연하지. 당장 형씨 옆에 있는 사람만 해도 그렇고."
디올란은 그 지적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괴짜 대신 시대를 앞서가는 고독한 선구자라 불러주겠어?"
"어린놈이 벌써부터 이상한 소릴 하기는."
디올란에게 가벼운 핀잔을 준 엘딘은 오시안의 모습을 잔잔히 살폈다.
피부는 하얗고 머리는 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잘 정돈해서 그런지 기품이 넘쳤다.
얼굴도 잘생겼다. 엘프라서 미적의식이 높은 엘딘조차 그렇게 느낄 정도였다.
'어디 높은 귀족가문의 후계라도 되는 거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특유의 고귀함은 또 어떤가.
그녀가 주로 무기를 만들고 파는 주 고객층을 생각하면, 오시안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어디 귀족가문 도련님이 온 줄 알았다.
'이 녀석 대체 정체가 뭐지?'
엘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오시안은 엘딘의 말에서 새로운 호기심을 느꼈다.
"나 말고도 이런 부류의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나?"
"냉병기? 없지는 않지. 이 도시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놈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무기를 쓰려는 놈이 어디 없으려고."
"하지만 검을 쓰는 사람은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맞아. 이렇게 '순수한' 롱소드를 쓰는 사람은 없지. 냉병기라 해도 다 자신만의 「개조」를 거친 무기들이거든."
"개조라고?"
"화기도 아니고 냉병기도 아닌, 굳이 따지자면 온병기 정도는 되려나?"
오시안으로서는 아직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머리로는 어렴풋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지만, 실제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혹시 그 물건들도 볼 수 있나?"
"뭐, 못 보여 줄 것도 없지.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거니까. 오랜만에 내 컬렉션들 좀 한번 개방해 볼까."
엘딘은 괜히 장인이 아닌지 자신의 물건에 자부심이 넘쳤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작품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길 바란다.
엘딘은 오시안과 디올란을 이끌고 작업장 옆에 붙어 있는 창고로 향했다.
간이식으로 창고라 불렀지만, 사실상 무기 진열대에 가까운 곳이었다.
"호오."
오시안은 도열해 있는 무기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곳에 있는 무기들은 다 제각기 형태가 달랐지만, 냉병기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검, 창, 도끼, 너클, 톤파, 할버드, 철퇴 등등.
총을 구할 거면 괜히 총포상에 가라고 했던 말이 과언이 아니듯, 엘딘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요즘 시대에서는 사용하지 않을 물건들이었다.
물론 그것은 오시안의 감상일 뿐.
이쪽 업계에서는 엘딘의 무기는 나름 유명한 편이었다.
"한번 구경해 보겠어?"
"이건 뭐지?"
오시안은 한 손에 잡히는 봉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손잡이의 길이는 30cm남짓이었고 두께는 상당했다.
봉의 끝에는 아이 머리통만 한 검은 철구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생긴 것만 보면 메이스인데, 그러자니 형태가 너무 단출했다.
"아, 그거? 모닝스타야."
"이게 모닝스타라고?"
"줘 봐."
오시안은 자칭 모닝스타를 엘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엘딘은 창고 한쪽의 문을 열고 안으로 향했다.
사격장처럼 생긴 내부는 개발한 무기를 테스트 하는 공간이었다.
"잘 보라고."
엘딘은 그렇게 말하며 20m정도 떨어진 철판을 향해 뭉툭한 철구 부분을 겨누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건가 싶은 순간 새까만 철구에서 스파이크가 삐죽 솟구쳤다.
"호오."
평소에 저걸 숨겼다가 드러내는 형식인가?
그러나 놀라운 일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다.
"이 무기의 진가는 바로 이거야."
엘딘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이윽고 손잡이에 달린 스위치를 달칵 눌렀다.
퍼엉!
그 직후 철구가 그대로 대포처럼 발사됐다.
봉의 한쪽에 탄피가 튀어나오고 동시에 새하얀 압축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쩌엉!
철구가 철판을 때리며 나는 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오시안은 그제야 저 손잡이가 왜 두꺼운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철구를 쏘아내기 위한 추진체와 와이어가 담겨 있어서였다.
이윽고 손잡이와 철구를 연결해주는 와이어가 팽팽히 당겨지더니 철구가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왔다.
뾰족하게 솟은 스파이크도 모습을 감춘 뒤였다.
"어때? 이렇게 회수도 가능해."
"...어떠냐고 물어도, 평범한 물건은 없는 건가?"
오시안은 눈앞의 광경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냥 메이스인 줄 알았는데 사실 모닝스타였고, 심지어 그것을 대포처럼 발사하다니?
이쯤 되면 모닝스타도 아니고 슈팅스타라 불러야 할 판이었다.
과학력에 놀랐다기보다는 냉병기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 버린 비상식이 놀라울 지경.
이럴 거면 그냥 총을 쏘는 게 더 낫지 않나?
"평범한 거라니. 꽤나 까다로운 손님이네. 그러면 이건 어때?"
엘딘은 한쪽에 세워진 창을 가져와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여러 부착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봉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어. 게다가 이 버튼을 누르면?"
키이이잉.
창끝의 날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돌아가서 관통력을 올려주지. 그리고 손잡이를 한번 옆으로 휙 꺾어 주면."
퍼엉!
창날의 끝에서 새하얀 증기가 터져 나오며 창날이 철판에 날아가 박혔다.
"이렇게 쏠 수도 있어. 압축증기 카트리지를 이용한 사출 방식이야."
지금 세상은 괜히 증기공학이 발달한 것이 아니었다.
압축증기를 이용한 순간적인 폭발을 무기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과학이 기이한 방향으로 발달한 세상.
오시안은 자신이 정말 별세계에 왔음을 실감했다.
"아니면 이 손도끼는 어때?"
"손도끼?"
오시안은 손도끼를 알아보았다.
그야 그럴 것이 손도끼는 [야만전사]가 사용하는 주무기 중 하나였으니까.
"이건 장갑이랑 세트야."
"그건 또 무슨 특징이 있지? 혹시 도끼날이 발사하기라도 하나?"
"뭐? 내가 뭐 다 쏘는 것만 만드는 줄 알아?"
"...아니었다고?"
"하. 그거참 재미있는 선입견이네. 이거나 똑똑히 봐 둬."
엘딘은 오른손에 쥔 손도끼를 들고 그대로 투척 자세를 취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듯 자세가 각이 잡혀 있었다.
오랫동안 망치를 휘둘러온 탓인지 군살 하나 없는 탄력적인 근육이 도드라졌다.
엘딘이 있는 힘껏 손도끼를 던지자 손도끼는 일직선으로 날아가 철판에 박혔다.
지이잉.
저걸 왜 집어던졌지 하는 순간, 엘딘이 착용한 금속 장갑의 이음매에서 주홍색 빛이 흘러나왔다.
철판에 꽂힌 도끼가 바르르 떨리더니 회전하듯 날아와 그대로 엘딘이 착용한 장갑에 안착했다.
"어때?"
"...그건 좀 유용해 보이는군."
자력을 이용해 투척도끼를 회수하는 방식이라.
도끼의 손잡이를 특수 재질로 만든 것이리라.
오시안은 일전에 싸웠던 다베르의 테슬라 암즈를 떠올렸다.
저 장갑 또한 테슬라 암즈와 비슷한 과학이 적용된 물건이 분명했다. 물론 열화판으로 말이다.
"북부 전사들이 사용하는 회수의 룬과 비슷하군."
[야만전사] 태생은 도끼를 사용하고, 당연하게도 무기를 투척하는 기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무기에 「룬 각인」을 통해 여러 효과를 부여할 수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회수의 룬」이었다.
"뭐야. 그런 것도 알고 있어? 그걸 따라한 게 맞긴 해. 다만 좀 더 사용하기 편하지. 룬각인은 거의 소실된 기술이거든."
"소실됐다고?"
"애초에 북부 야만족 놈들은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것만 좋아하는 놈들이야. 심지어 외부와 왕래가 거의 없지. 기술이 발전하기는커녕 퇴보하는 게 당연해.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
엘딘은 이 기술은 그런 소실된 것들을 과학으로 복구해서 만든 것이라 설명했다.
"어때? 내가 만든 무구들은, 이런 다양한 것들이 있어. 과학과 마법이 접목된 것들이지. 물론 가격대도 다양하고, 당연히 마법이 훨씬 더 비싸."
"내가 주로 사용하는 무기는 검이다. 그쪽 계열로 보고 싶은데."
"안 될 건 없지."
엘딘은 자신이 만든 공방의 제품이 비싸다고 말했음에도 오시안의 표정이 변하지 않은 걸 눈치 챘다.
즉 이 눈앞의 귀공자처럼 생긴 청년은 최소한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여기 이 검은 어때? 내 자신작이야."
엘딘은 오시안에게 칼집에 들어간 검을 보여 주었다.
꽤나 특이한 형태의 검이었다. 손잡이부터 해서 코등이에 금속 재질이 붙어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가장 특이한 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칼집이었다.
"칼집이 특이하군."
"이건 특수합금으로 만든 칼집이야. 그리고 사용 방법은 간단하지."
엘딘은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과연 검을 어떻게 뽑을지 흥미롭게 지켜보는 순간, 검이 빗살과도 빠른 속도로 뽑혀져 나왔다.
파앙─!
엘딘은 순수한 팔의 힘으로 뽑은 게 아니다.
칼집 아래에서 새하얀 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며, 그 반동으로 검을 뽑아 휘두른 것이다.
압축증기를 터뜨리며 그 반동으로 검을 뽑아 휘두르는 방식.
이른바 스팀발도술이었다.
37화. 큰 누나 (1)
"...검집에서 검을 뽑는 사이에 마찰력으로 본래 속도를 잃을 텐데?"
발도술이라는 것은 얼핏 보면 멋있고,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효율의 극치를 달린다.
검집에서 검을 뽑는 사이에 운동에너지가 상당히 소실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들 발도, 거합(居合)이라 부르는 기술은 실전성이 없다.
굳이 실전을 따지면 상대를 방심시킨 뒤 득달같이 뽑아 휘두르는 암살에 특화되어 있는 정도.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애초에 이건 마찰이 없거든."
엘딘은 그렇게 말하며 뽑은 검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었다.
놀랍게도 검은 칼집과 어떠한 마찰도 없이 손쉽게 들어갔다.
"마찰력 없이 뽑아낼 수 있도록, 칼집과 날 사이의 공간에 미세한 자력을 흘려두고 있지. 자기부상의 원리인데, 이러면 뽑는데 저항감이 없어. 오히려 증기를 터뜨리며 얻는 가속을 최대치로 받지."
엘딘은 자력이 그렇게 강한 것은 아니라서 반발력은 없고 딱 칼집과 칼날 사이의 빈 공간을 만드는 정도라 했다.
즉 사실상 칼집은 말만 칼집이지 검을 빠르게 휘두를 수 있게 만드는 활주로나 다름없는 것이다.
마법과 과학기술이 복합적으로 깃든, 상당히 신묘한 검이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
엘딘의 물음에 오시안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말없이 주시할 뿐이었다.
'뭐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엘딘은 오히려 기묘한 압박감을 흘려내는 오시안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검을 쓴다고 해서 보여주긴 했는데, 너무 과했던 걸까.
어쩌면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시안의 속내는 그러지 않았다.
'...멋있네.'
실제로 사용이 가능한 발도술이라니.
심지어 바뀐 시대의 과학과 마법이 접목된 기술이다.
그야말로 로망을 한가득 자극하는 요소의 집합체였다.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기사의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검이라니.
이런 게 검이냐고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휘둘러 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겠지.'
애초에 무용한 짓이다.
오시안의 육체는 저 압축증기를 터뜨리며 얻은 가속도보다 더 빠르게 검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러니 저 기능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었다.
굳이 저걸 산다면 사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디에 전시하는 용도일 것이다.
"나는 그냥 다른 기능 없는 튼튼한 검이면 된다."
오시안은 아쉬움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긴장감이 탁 풀린 엘딘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쪽도 순혈이 좋다 이거지?"
"순혈?"
"몰랐어? 어떠한 개조도 거치지 않은 순수한 냉병기. 그걸 요즘은 순혈이라고 불러. 반은 경탄, 반은 놀리는 걸로 부르는 거지."
"나 말고도 순혈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나 보군."
"말했잖아. 여기는 그런 무기를 주로 취급하는 곳이라고. 저기 주렁주렁 성능이 달린 것들은 새로운 고객을 위한 맞춤 제작이고, 내 주 종목은 오히려 순혈 무기에 가깝지."
엘딘은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의 키와 어깨의 간격, 팔의 길이를 세심히 살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이 도시에는 온갖 기인들이 가득하거든. 너처럼 '검'을 쓰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이렇게 '순혈 검'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지. 그런데 보통 이런 부류는 둘이란 말이지. 그냥 멋만 챙긴 쭉정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엄청난 실력자이거나."
엘딘은 측정이 전부 끝났는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순혈무기를 나한테 만들어달라고 찾아온 너는,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다는 거겠지."
"...."
엘딘은 이쪽을 후자로 봐주는 듯했다.
오시안은 대꾸하는 대신 시선으로 그게 꼭 중요한 일인가? 하는 의미를 전달했다.
엘딘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따로 검에 원하는 건 있어?"
"없다. 방금 전에 말했다시피, 그저 튼튼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아주 험하게 굴릴 생각이로군. 뭐, 걱정하지 마. 어지간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튼실한 녀석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대금은 어떻게 할 거지?"
"선금 500만. 나머지는 완성 후에 받도록 하지."
엘딘은 마치 선심을 썼다는 듯 말했다.
"순혈이라고 말한 것치고는 가격이 꽤나 나가는군."
오시안이 그렇게 묻자 엘딘이 뭐? 하는 시선으로 오시안을 노려보았다.
"말했잖아. 튼실한 녀석으로 만들어 준다고. 당연히 들어가는 재료는 평범하지 않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 정도면 정말 거저나 마찬가지니까."
호탕하게 웃으며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엘딘의 말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처음 만나는 사이라 크게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쌓아온 명성은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닐 터.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기능은 있었으면 좋겠군."
"오. 뭔데?"
"자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금속을 사용해 줄 수 있나?"
"자력?"
그건 왜?
그렇게 물으려던 엘딘의 표정이 이내 순간 변했다.
"잠깐....최근에 그 선혈 형제단을 혼쭐내줬다는 사람이 당신이었어?"
"그 소식이 벌써 여기까지 번졌나?"
"자리에 얌전히 망치만 휘둘러도 알아서 소식을 전해주는 고객들이 많거든."
엘딘은 상당히 유명한 장인이었기에, 당연히 그녀를 찾는 주 고객층 또한 돈이 많은 사람들이다.
티르나에서 돈이 많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만큼 뛰어난 실력자라는 뜻과 직결한다.
그런 의미에서 엘딘은 남들은 쉽게 듣지 못하는 소문을 가장 빠르게 접하는 쪽이었다.
"뭐, 그런 고객들조차 대부분 헛소문이라고 하지만 몇몇은 진지하게 가능성 있다고 했었지. 실제로 목격담도 있기도 하고."
"그 소문을 정말로 믿나?"
"나도 처음에는 안 믿었지. 하지만 그쪽의 모습을 보니, 가능성이 완전히 없지는 않겠는걸."
엘딘은 팔짱을 끼며 오시안의 모습을 살폈다.
위엄과 카리스마,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득한 남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밤하늘 같은 새까만 눈동자만 봐도 그렇다.
미적인 기준을 초월해 버린 엘프에게도 이 남자는 심히 매력적으로 비칠 정도다.
이 정도의 신비로움을 품은 사람이 평범할 리가 있나.
"설마 이 검이 부러진 것도...."
"테슬라 암즈라는 물건, 꽤 신기하더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정작 목소리는 태평하기 짝이 없다.
그 말을 들은 엘딘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꽤 신기? 그걸 그렇게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고! 무려 군부대에서 현대의 과학과 마법을 모조리 모아서 만들어 낸 특제 물품이야. 그걸 고작 신기하다는 감상으로 끝낸다고?"
강철을 두드리는 시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엘딘에게는 약간의 공돌이 기질도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테슬라 암즈는 감탄이 나오는 물건일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예산을 때려박아 만들어 낸, 장인 개인은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할 물건.
그런 엘딘의 감상과 정반대로, 오시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 귀중한 것치고는 너무 쉽게 빼앗기지 않았나."
"아니, 그만큼 선혈 형제단이 대단한 거지!"
그렇게 말하면 오시안이 돌려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그 선혈 형제단 놈을 내가 이겼다."
"...."
엘딘도 이 부분에서는 반박이 불가능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어. 아무튼 자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걸 원한다는 거지?"
"가능한가?"
"가능해. 칼날 외부에 비자성 코팅을 하는 형식으로 가공이 가능한 시약이 있거든. 소모성 총알에는 하기 힘든 물건이지만, 계속 쓸 검에는 가능하겠지."
"따로 주의할 점은 있나?"
"사용하다 보면 코팅이 손상되지만, 주기적으로 새롭게 갈아 주면 돼. 그럴 때마다 돈이 깨지지만, 뭐 댁 실력을 생각하면 상관없으려나."
"그렇다면 그걸로 하겠다."
오시안은 엘딘에게 약속한 선금을 지불했다.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운이 좋았네. 지금이 딱 비수기라서 예약이 하나도 잡히지 않을 때였거든. 3일이면 될 거야."
"그렇다면 그때 다시 찾아오지."
*
엘딘과의 만남을 끝마친 오시안은 디올란과 함께 공방을 나왔다.
"놀랍네."
디올란이 공방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꺼낸 말이었다.
오시안이 디올란을 힐끔 쳐다봤다.
"뭐가 놀랍다는 거지?"
"엘딘의 태도 말이야."
오시안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자 디올란은 아, 소리를 냈다.
"정말로 이 도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문제 있나?"
"아니. 실력만 있으면 상관없지. 그보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엘딘 말이야. 원래는 저렇게 친근한 엘프가 아니야. 성격이 엄청나게 더럽거든."
"더럽다고?"
오시안은 엘딘을 떠올려 보았다.
더럽다는 것치고는 이쪽을 대하는 태도는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호탕한 것이 오시안의 마음에 들 정도였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그가 플레이 하던 게임 속 엘프 npc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파탄 났다.
그래서 유저들은 항상 그런 엘프들 보면서 '더러운 깐프 녀석들'하고 혀를 찼었다.
하지만 엘딘은 그러지 않았다.
"원래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야. 엘딘은 장인으로서 자존심이 엄청나게 강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실력이 없는 녀석의 무기는 만들어 주지도 않지."
"그 정도인가?"
"물론 팔기야 팔겠지. 하지만 그건 시중에서도 흔히들 구할 수 있는 것들이고 엘딘의 오더 메이드는 다르거든. 보통 완전히 입증된 사람 아니면 거들떠도 안 봐. 그런데도 의뢰를 받아들였을 줄이야. 정말 제대로 인정을 받은 셈이지."
"잘도 나를 그런 곳에 소개시켜 주었군."
오시안의 지적에 디올란이 장난스레 웃었다.
"애초에 저런 걸 만드는 곳 중에서 엘딘만 한 장인은 없어. 이런 건 부가적인 일일 뿐이라고."
"그래서 의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되었나?"
"물론. 축하해. 엘딘의 새로운 단골고객이 되었군."
별로 축하받을 일도 아닌 것 같았지만 오시안은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도 검 한 자루에 선금 700만은 확실히 비싸긴 하더군."
원래 500만이었지만 반자성(反磁性) 코팅까지 합쳐서 계산했기에 700만이 된 것이었다.
그 반응에 디올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700만?"
"왜 그러지? 혹시 너무 비싸서 그런가?"
"무슨 소리야. 그 반대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엘딘이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 했다고?"
"순혈 롱소드 하나 제작하는 데 비쌀 이유는 없을 텐데."
"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엘딘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무기를 만들어 주지 않아. 그리고 만들어 준다면 가격 하나는 엄청나게 매긴다고. 당장 내가 사용하는 무기만 해도 선금으로 5천이 들었어."
"5천이나? 순혈 무기인가?"
"아니. 그렇다고 순혈이 더 싸다는 보장도 없어. 듣자하니 소문 중에는 엘딘에게서 순혈 무기를 만들어 달라던 사람이 있었는데 선금만 1억을 불러서 포기했다는 말이 있어. 엘딘은 그만큼 순혈 무기라고 해서 가격에 타협을 두지 않아."
1억이라니.
"그쪽이 유난히 비싼 재료를 원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 아닌가."
"엘딘은 항상 최고의 재료만을 사용해. 상대방의 요청이 있든 없든 말이야."
"그래도 최신 무기와 비교하면 가격이 덜 들 수밖에 없지 않나?"
"엘프가 만드는 무기를 엘븐제라 하지? 엘븐제 순혈 무기는 그 자체만으로 강고해. 사용자에 따라 최신 무기에 꿀리지 않는 거지. 가격이 달라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야. 무기를 쥐게 될 상대가 본인의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단지 그 차이지."
즉 무기가 어떤 것이냐는 것은 가격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디올란이 혀를 내둘렀다.
"참고로 선금으로 1천만 아래로 받은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직까지 없었어."
그 엘프가 그 정도로 뛰어난 장인이었다니.
역시 이 세상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
무기 제작 의뢰를 끝내고 오시안은 머무는 숙소로 돌아왔다.
고요한 방 안은 어둠이 직접 찾아온 것처럼 깜깜했다.
창밖에서 켜진 가스등의 빛이, 마치 무언가에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방에 들어오지 못한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순간, 오시안의 눈동자 안에 일순 하얀 섬광이 일었다.
마치 별과도 같은 빛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왔군."
오시안은 창가와 인접한 테이블 앞에 앉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림자가 오시안을 기다렸다는 듯 이쪽을 돌아보았다.
오시안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대단한 강자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형제단이라고 해서 지도자는 맏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큰누나였나."
그 말에 긴 생머리를 찰랑이는 그림자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38화. 큰 누나 (2)
오시안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싸늘한 시선으로 불청객을 노려볼 뿐이었다.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았으면 좋겠어."
한껏 여유가 묻어나오는 감미로운 목소리.
오시안은 멈췄던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카펫을 밟는 그의 발걸음은 매우 당당했다.
이윽고 오시안은 불청객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검은 그림자에 떠오른 붉은 눈동자가 샐쭉 휘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겁을 먹지 않다니. 담력이 대단하네."
"무서워해야 하나?"
오시안은 짐짓 도발적인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머릿속은 꽤나 복잡했다.
'하필 검이 없을 때 이렇게 마주할 줄이야.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
오시안은 테이블 아래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기사인 그에겐 검이 없으면 안 됐다.
상대가 어중간한 실력자라면 순수한 육체능력으로 뭉개 버릴 수 있겠지만, 지금 눈앞의 손님은 그런 어중간한 상대가 아니었다.
'선혈 형제단의 머리.'
이 방에 넘실거리는 어둠도, 아마 그녀의 능력 중 일부겠지.
그것을 증명하듯, 오시안이 맞은편에 앉자 상대방의 모습이 방금 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일부러 어둠을 무르며 자신의 모습을 선보인 것이다.
새까만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미인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검다. 유일하게 다른 색을 지닌 것은 새하얀 피부와,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전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최소 20대 중반 정도. 도시에서 가장 위험하다 평가받는 테러리스트의 대장치고는 지나치게 젊다.
"그레이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레이스 시커라고 해. 선혈 형제단의 맏이 역할을 하고 있어."
"오시안. 해결사 겸 기사다."
오시안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자신을 그레이스라 소개한 여인을 가늠하고자 뚫어져라 응시했다.
선혈 형제단 소속인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최근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복수.
선혈 형제단은 그 이름에 걸맞게 소수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돈독하다 들었다.
동생이 밖에서 맞고 들어왔으니, 당연히 가족으로서 보복에 나설 수밖에.
오시안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
성광을 사용했을 때 오시안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당장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자신감은 덤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여인은 그런 오시안의 확신을 불신으로 바꾸는 존재였다.
'당장 성광은 사용할 수 있다.'
오시안은 지금 성광을 뽑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 성광을 뿜어낼 매개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검이 없으면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번뿐이야.'
별빛 자체를 담을 매개체가 없어도, 그것을 대충 검의 형태로 바꾸어 휘두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 휘두르면 끝나는 단발성 공격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 별빛을 담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검의 형태가 가장 적합했다.
최소한 식기로 쓰는 나이프 정도만 있어도 3번까진 휘두를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별빛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리라.
기사의 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 싸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 집에 멋대로 찾아온 이유가 뭐지?"
"그야 당신도 알고 있잖아? 최근에 우리 귀여운 막내가 누구한테 호되게 맞고 들어와서 말이야."
오시안은 대답하는 대신 그레이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래서 뭐, 복수하러 온 거라고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런 오시안의 눈빛에 흉흉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 안에 타오르는 별빛이 그에 감응하며 더 강한 빛을 냈다.
만일 그레이스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그녀의 목을 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무 무섭게 노려보지 말아 주겠어?"
그러나 그레이스는 오시안의 도발적인 시선에 오히려 너스레를 떨었다.
"처음에는 우리 막내를 괴롭힌 게 누구일까, 조금 훈계를 할 생각으로 온 것은 사실이야."
"표현이 꽤나 고상하군."
말이 훈계지, 사실상 피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조직의 이름에 선혈(Blood)가 붙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레이스는 하얗고 고운 손가락으로 오시안을 가리켰다.
"그래서 고민을 해봤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동생이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아니야. 면목이 살지 않아. 명색에 큰누나인데 가볍게 넘기면 남들이 우습게 볼 거잖아?"
그레이스의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담겼다.
동시에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어둠과 동화되어 있어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이 주변 일대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퍼져 있었다.
동시에 공간 전체가 오시안을 옥죄듯 강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그래서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 줘야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든."
"본보기라."
오시안은 그 말을 중얼거리더니 그레이스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화륵.
그 내면의 별빛이 폭발할 것처럼 찬란하게 타올랐다.
천천히 오시안을 좀먹으며 집어삼키려던 어둠이 그 빛에 놀라 뒤로 물러났다.
둘은 서로 입을 열지 않은 채 눈싸움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가장 먼저 기세를 거둔 것은 그레이스였다.
"농담이야. 뭘 그렇게까지 노려보고 그래? 사람 무섭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그레이스가 방 안의 어둠을 모두 없앴다.
이윽고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주홍빛 불빛이 방 내부를 채웠다.
"오늘은 그냥 인사만 나누려고 온 거야. 우리 막내가 민폐를 끼쳤으니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겠어? 그게 큰 누나인 내 역할이었을 뿐이야."
그레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깃들어 있었고, 이성을 홀리는 색기가 가득했다.
그레이스의 미모 또한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오시안은 거기에 홀리지 않았다.
아름답기에 위험한 것이 있는 법이다.
그가 보기엔 그레이스는 피를 머금은 검은 장미였다.
장미도 고풍스러운 표현이다.
저건 사람을 잡아먹는 꽃이다. 멋모르고 다가갔다가는 잡아먹히고 만다.
그레이스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오시안을 보며 후훗, 하고 웃었다.
"만나서 즐거웠어. 다음에는, 제대로 인사를 나눴으면 좋겠네."
"제대로 인사를 나누고 싶다면, 방문 선물이라도 들고 오도록 해라."
마치 아랫것을 대하는 건방진 말투.
그러나 그레이스는 그것에 토를 달지 않았다.
오시안이 저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까.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난 걸까.
그레이스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머리카락이 마치 실타래처럼 움직이며 그녀의 몸을 고치처럼 감싸더니, 이내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진 것이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싸늘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동시에 오시안의 눈동자에서 타오르던 별빛도 푸스슥 꺼졌다.
'갔군.'
오시안은 그제야 긴장을 풀며 어깨에 힘을 뺏다.
손바닥을 확인해보니 약간이지만 축축해져 있었다.
상대가 그냥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성광을 다룰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는데.'
역시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 도시에 과연 그레이스 시커 같은 사람이 대체 얼마나 더 있을까.
'힘이 더 필요해.'
성광의 다른 기술과 그 외에 다른 특성까지.
그것들을 전부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
조용한 골목길에 모습을 드러낸 그레이스 시커는 뒤를 돌아봤다.
"많이 기다렸니?"
"아닙니다."
엄숙하고 예의가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2m에 가까운 체구를 지닌, 깔끔한 슈트를 입은 거한이었다.
선혈 형제단에서 실질적인 서열 2위, 둘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가 물었다.
"누님. 괜찮겠습니까?"
"뭐가?"
"다베르 말입니다. 목숨은 부지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히 큽니다. 한동안은 안정을 취해야 하니 아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막내가 당한 것에 복수를 해야 하지 않느냐.
그렇기에 선혈 형제단의 두목인 그레이스가 직접 오시안을 찾아가지 않았던가.
당한 만큼, 아니 그 이상 갚아 주는 피의 복수를 위해서.
요즘 활동이 뜸했던 만큼, 그레이스가 직접 움직이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가 될 터.
하지만 그레이스 시커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오시안을 마주했음에도 대화를 나누고 조용히 물러났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거구의 남자는 그래서 더욱 의문스러웠다.
대체 왜 죽이지 않은 거지?
"다베르의 일은 아쉽지만, 그래도 목숨은 붙어 있잖아? 그러면 된 거야."
"알겠습니다."
깔끔한 대답에 그레이스가 동생에게 물었다.
"어머. 왜 그러는지 물어보지 않는 거니?"
"누님이 그렇게 선택을 내리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재미없기는."
그레이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행동은 그렇게 해도,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방금 전 마주했던 흑발의 남자를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오시안이라고 했던가.'
처음 다베르가 팔이 잘린 채로 가까스로 돌아왔을 때, 그레이스는 그 복수를 다짐했다.
감정적으로 분노를 한 것은 아니었다.
다베르는 귀여운 막내지만 평소에 누나 형들의 속을 많이 썩이던 아이였으니까.
그 아이와 사이가 좋은 형제자매들은 분개했지만, 맏누나인 그레이스는 단지 필요에 의해서 오시안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했던 그 남자는.
'뭔가 있어.'
탈취한 테슬라 암즈를 착용한 다베르를 상대로 칼 한 자루로 승리했다.
다베르가 패닉에 빠진 상태에서 말하기를, 오시안은 이상한 빛을 사용했다고 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했던가?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직접 보니 알겠네.'
자신이 만들어 낸 어둠 속에서 피어오른 그 새하얀 안광.
처음에는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던 그레이스는 그걸 마주한 순간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것과 싸우면 안 된다.
아니, 싸울 수는 있다. 당시 오시안은 검조차 쥐고 있지 않았다.
무기조차 없는 상대라면 그녀가 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팔 하나는 그에게 내줬으리라.
그것도 최선의 결과였다. 어쩌면 눈 한쪽까지 줘야 했을지도 모른다.
강자로서 느낀 예지에 가까운 직감이 도출한 결론이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둘째를 부르면 무리 없이 죽일 수 있었겠지만,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진다.
'안 그래도 막내 때문에 지금 도시의 위병과 군부, 집행자까지 눈에 불을 켜고서 우릴 찾으려 들고 있는데 괜히 시끄럽게 굴면 이쪽만 피곤해지지.'
아직은 맛보기일 뿐.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는 것은 나중이었다.
물론, 오시안에게 흥미가 생겨서 지켜보려 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레이스는 이번에만 특별히 변덕을 부려 보기로 했다.
'별을 품은 기사라. 과연 그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과연 그는 이 황금의 도시에 변화를 가져와 줄까.
아니면 이 도시의 탐욕에 집어삼켜질까.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제길."
해리스는 떨리는 입술로 거친 함성을 토해 냈다.
그는 해결사였다. 그렇게 알아주지도, 그렇다고 마냥 수준이 낮지도 않은 수준의 해결사.
그가 이번에 맡은 의뢰는 파업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일당을 더 달라고 본격적인 파업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배운 것이라곤 없는 놈들이 갑자기 파업을 시도했을 리가 없었다.
그 뒤에 노동조합의 입김이 들어갔음을 알았고, 그렇기에 이쪽도 특단의 대책으로 해결사와 용역을 부른 것이었다.
어차피 노동자들은 싸움이라고는 허름한 술집에서 주먹질을 해본 것이 전부다.
그래서 총질을 허공에 몇 번 해주면 바퀴벌레 떼마냥 알아서 흩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런 것이 있다고는 말 안 했잖아!'
해리스의 시선이 공장 입구에서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를 보았다.
양어깨와 등 뒤의 배기구에서 새하얀 증기를 뿜어내는, 높이만 4m가 넘는 커다란 황동색 거체.
스팀슈트(Steam Suit).
또 다른 이름으로 풀 메탈 오우거(Full Metal Ogre)라 부르는 그것은 에테르 워터의 증기로 가동시키는 탑승형 강화외골격 병기였다.
두꺼운 장갑을 두른 거대한 떡대는 고작 총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였다.
벌써 앞장서서 달려들던 용병 몇이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즉사였다.
파업을 종용한 노동조합 측에서 아무래도 이번 일을 작정하고 밀어주는 듯했다.
'이대로 후퇴를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려던 해리스의 시선에,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스팀슈트를 향해 다가가는 남자의 뒤통수가 보였다.
해리슨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건 또 뭐야."
깔끔한 프록코트를 입은 흑발의 남자였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귀족 같은 기품마저 느껴졌다.
해리스는 그제야 저 남자가 자신과 같은 의뢰를 받은 해결사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름이 오시안이라고 했던가?
그런 그가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는 거대한 스팀슈트를 향해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도 놀라운데, 더 웃긴 것은 그의 손에 쥐어진 무기였다.
"저거, 부엌칼이야?"
39화. 마녀와 망명 (1)
키이잉. 철컹! 치이이익!
실린더가 맹렬히 회전하며 스팀슈트의 등 뒤에서 새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증기갑옷을 입은 조종사는 도망치는 용병과 해결사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끽해봐야 콩알 같은 총이나 쏘는 놈들에게, 스팀슈트는 장갑차에 버금가는 위상을 지녔다.
당연히 싸울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하리라.
'이제 적당히 자리를 지키면 되는 거겠지.'
조종사가 그렇게 생각할 때,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도 몰래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당당하게 걸어온다.
누구인지 살펴보니 깔끔한 복장을 갖춰 입은 검은머리 미청년이었다.
곧 죽어도 해결사로는 보이지 않는 고귀한 외모. 거기에 또 어울리지 않게 오른손에는 부엌칼을 지니고 있었다.
부엌칼? 미친놈인가?
적당히 쫓아낼까 싶었지만 조종사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방심하지 말자.
특히 지금처럼 노동조합 측에서 뒤에서 지원을 해주며 파업을 종용하는 경우, 업무처리를 더욱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스팀슈트의 조종사는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프로의식에 투철했다.
쩌억.
덩치에 비해 양팔이 기이할 정도로 비대한 스팀슈트의 주먹이 벌어지며 오시안을 향했다.
이대로 몸을 움켜쥔 뒤 으깬 고깃덩어리로 바꾸려는 순간, 오시안의 손이 움직였다.
쉬릭.
허공에 섬광이 번뜩이며 부엌칼이 소리도 없이 춤을 췄다.
동시에 스팀슈트의 내밀어진 손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해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부서진 흉부장갑 틈새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스팀슈트의 조종사도 마찬가지였다.
특수강화합금으로 만들어진 팔을 무슨 무 자르듯이 잘라 버리다니?
심지어 지금 오시안이 휘두른 것은 딱 요리재료나 썰기 적합한 부엌칼이었다.
겉모습만 부엌칼이지 사실은 세기의 명검이라도 되는 건가?
당황하는 것과 별개로 조종사는 나머지 멀쩡한 팔을 움직였다.
철컹!
스팀슈트의 두꺼운 팔뚝의 해치가 열리더니 거대한 말뚝이 튀어나왔다.
튼튼한 사족보행 탱크의 장갑에도 시원하게 구멍을 뚫어버릴 수 있는 파일벙커였다.
본래라면 같은 스팀슈트의 조종사를 노리기 위한 근접무장을, 방어구도 없는 사람에게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죽어!"
도저히 인간에게 쓸 물건이 아니었지만,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낀 조종사는 그런 걸 판단할 때가 아니었다.
치이이익!
에테르 워터를 증발시키며 차오르는 공압(空押)으로 쏘아지는 파일벙커의 거대한 말뚝.
그러나 오시안은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스팀슈트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손이 재차 잔상을 그리며 움직였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속도의 휘두르기.
미세한 실선이 파일벙커를 포함한 스팀슈트의 나머지 한쪽 팔 전체를 뒤덮었다.
스팀슈트의 팔이 예리한 단면을 보여주며 그대로 잘려나갔다.
거대한 강철의 말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이런 괴물이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조종사가 당황하는 사이 오시안은 거대한 몸체를 향해 부엌칼을 휘둘렀다.
카앙!
부엌칼은 스팀슈트의 장갑을 뚫지 못했다.
팔이야 관절을 통해 썰어낼 수 있다지만 몸체는 달랐다. 탑승자를 보호해야 하는 명목으로 더 두꺼운 장갑을 둘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위에 고스란히 칼자국이 새겨지는 걸 본 조종사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괜찮다. 놈의 공격은 자신에게 닿을 수 없었다.
"응?"
그렇게 생각하던 조종사는 오시안의 행동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오시안은 공격이 막혔음에도 뒤로 물러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양손으로 부엌칼의 손잡이를 굳게 쥐었다.
팔뚝의 전완근이 힘을 머금는 순간 칼날이 하늘에서 땅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졌다.
그 찰나, 스팀슈트의 조종사는 보았다.
부엌칼의 끝에서 터져 나오는 새하얀 빛을.
스팀슈트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부엌칼은 막히는 일 없이 부드럽게 관통했다.
쿠우웅!
이윽고 반으로 갈라진 스팀슈트가 좌우로 쓰러졌다.
안쪽에 있던 조종사와 함께.
뿌연 먼지구름이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보던 용병들과 해결사는 자신들이 꿈을 꾸고 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부엌칼 한 자루로 스팀슈트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런 말을 술자리에서 농담으로 했더라도 주위에서 재미없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분명 그럴 텐데.
지금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해리스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이 기적을 행한 남자를 바라봤다.
그것은 도망을 치던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오시안은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자신이 휘두른 부엌칼을 살폈다.
방금 전 성광검을 사용한 것으로, 칼날이 완전히 맛이 가 버렸다.
형체만 거의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무리하게 힘을 줘서 휘두른 탓인지 손목이 조금 시큰했다.
"흠. 역시 무기가 문제인가."
부엌칼로 스팀슈트를 썰었는데 손목이 조금 시큰한 걸로 끝났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
하지만 오시안은 진지하게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확실히 날카로움은 처음 주어지는 롱소드보다 더 강하긴 하단 말이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시대의 부엌칼은 오시안이 일전에 사용했던 검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데다가 검의 규격이 달라서 그런지 성광 한 번에 날이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소모성 무기라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싸울 때마다 부엌칼을 주렁주렁 들고 의뢰에 나가는 것은 조금 그랬다.
가볍게 잡념을 떨쳐낸 오시안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여러 쌍의 시선을 향해 말했다.
"귀찮은 놈들은 모두 정리했다. 이제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해리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안은 빠르게 정리되는 현장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파업을 종용한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제압당해 끌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
저놈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동료들을 부추겨서 잘 가동하던 공장을 점거한 놈들이다.
처음 오시안이 마주했던 노동자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진심으로 힘든 것을 견디지 못하고 터진 거라면, 저쪽은 충분한데도 욕심을 부린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의 배후에는 노동조합이 존재했다.
티르나라는 도시는 온갖 조합이 가득했다. 그중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은 가장 흔하게 볼 수 있으며, 티르나에서도 꽤 커다란 조직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
그들 또한 누군가의 뒷돈을 받고, 파업을 종용하거나 시위를 일으키게 만드는 일을 한다.
결국 모든 조직과 집단은 돈과 이익관계로 굴러가는 것이다.
산업혁명이 벌어진 지금 도시에서 멀쩡하게 활동을 하는 조직이란 결국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시안은 스팀슈트의 조종사를 죽인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망설임도 없었다.
저자 또한 돈을 받고 사람을 죽였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대충 정리가 다 된 것 같다고 판단한 오시안은 현장을 벗어났다.
어차피 의뢰는 성공했고, 그 뒤에 따르는 보수 또한 로난이 지불해 줄 테니까.
계속 저 자리에 있어 봤자 귀찮은 놈들만 꼬일 뿐이었다.
'이미 충분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오시안은 자신을 몰래 따라오는 여러 기척을 느꼈다.
적대적인 감정은 없고, 오히려 이쪽을 분석하고 확인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소문의 기사가 정말 실력자인지 확인을 하려는 조직의 끄나풀일 것이다.
'이 도시는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하나의 구역이 어지간한 중소규모 도시급이라고는 알았지만, 그것도 그냥 추정치일 뿐이다.
게다가 도시에 넘치는 조직들은 또 어떤가.
정말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오시안이 일전에 상대했던 갱단이나 그런 놈들은 발톱의 때조차 되지 못할 정도였다.
대규모 범죄조직은 얼마나 거대하고, 대기업들은 얼마나 강대할 것이며, 이 도시의 시의회는 또 어떨 것인가.
그 선혈 형제단조차도, 이 도시에서 함부로 활동을 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곳에서 고작 칼 한 자루만 믿고 설치고 다니는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 더 강해져야겠지.'
그레이스 시커를 만나며 깨달았다.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는걸.
비록 당시에 검이 없었다 하더라도 패배를 직감한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더욱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생존이라는 원초적인 목적도 있지만, 향후 무슨 일을 하더라도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한 대비이기도 했다.
오시안은 자신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남은 특성의 해금.
답은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특성의 해금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싸움. 더 많은 강자와의 싸움을 통해 강해져야 해.'
그렇게 생각한 오시안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자신이 싸움을 추구하다니.
이것도 방랑기사의 육체가 미치는 영향인가 생각을 해봤지만, 우스울 따름이었다.
어쩌면 원래 자신이 이런 사람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가만히 알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진짜 자신이, 기사라는 육체를 통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이걸로는 부족해.'
스팀슈트는 매우 신기하고 획기적인 병기였지만, 그래봤자 부엌칼 하나에 쉽게 썰려 버렸다.
쉬운 적을 쓰러뜨리고 돈을 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오시안은 그것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뭔가 내면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무언가가 계속 불만을 토로하는 기분.
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을 품으며 오시안이 바이올렛 폭스 주점의 문을 열었다.
따릉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던 로난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실눈이 오시안을 보더니 조금 더 크게 휘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임무는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별거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의뢰에 대한 간략하게 보고할 것은 없었습니까?"
"스팀슈트가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거였지만, 도망치는 용병들이 그렇게 외쳤으니 사실이겠지."
"스팀슈트라. 평범한 파업가들이 할 짓은 아니니, 뒤에서 지원을 해 준 세력이 있었겠군요."
"그래서 베었다."
마치 길을 가다가 돌이 보였다, 그래서 치웠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평탄한 어조.
그 말에 로난은 작게 웃었다.
후후후 하고, 늘 그렇듯 수상함이 가득 넘치는 미소였다.
"성에 차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보였나?"
"무기 때문은 아닐 테고, 뭔가 있습니까?"
의뢰가 너무 쉬워서.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건방지게 느껴질 것 같아서 오시안은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다 문득 로난이 보고 있는 서류에 시선이 갔다.
"그건 뭐지?"
"아, 최근에 들어온 소식들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선혈 형제단이 움직이는 것 외에도, 도시에는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흐음."
오시안은 서류의 내용에 흥미를 가지고서 그것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러다 문득 익숙한 단어를 보고, 그 종이를 하나 주워들었다.
"이건...."
"아. 거기에 흥미가 동하십니까?"
[마녀의 망명 요청에 대한 건]
오시안이 집어 든 서류 앞장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40화. 마녀와 망명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