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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50-60

50화. 마녀와 기사님

오시안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에나를 바라보았다.

싸움이 다 끝났는데 냅다 차로 받아 버릴 줄이야.

방금 전 황금불을 억제하면서 소리친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한 성깔 했다.

오시안은 곧바로 조수석에 탔다.

에나는 곧바로 지프차의 엑셀을 밟아 최고 속도로 달렸다.

마르티네스가 쓰러진 지금, 황금들판도 사라지고 없었기에 지프차는 막힘없이 쭈욱 나아갔다.

"저거, 저대로 둬도 괜찮은 건가?"

"누구요. 심판자요? 증기열차에 치이고도 그걸 녹여버린 괴물인데 고작 지프차에 치였다고 뭐 어떻게 되겠어요?"

하긴.

잘려나간 팔도 도마뱀 꼬리처럼 다시 되돌리는 놈인데, 이 정도로 치인 것에 죽을 리가 없다.

지금은 싸움의 여파로 가만히 있겠지만 금방 추스르고 회복하리라.

그걸 알면서도 에나가 냅다 들이받은 것은 지금까지 계속 쫓기던 사람의 울분이 터져 나온 결과였다.

"그보다 의외로군. 운전도 할 줄 알았나?"

"먹고살려고 하다 보니 온갖 잡다한 것들을 다 하게 되더라고요."

"마녀가?"

"그게 무슨 의미예요? 마녀면 뭐 위치크래프트로 돈 많이 벌 줄 알았어요?"

"아니었나."

에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돈을 번 적은 있었어요. 정확히 돈 때문은 아니고, 선의로 시작한 일이었죠."

"그 환상을 보여주는 능력 말인가."

"그냥 환상이 아니에요. 사용자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죠. 심지어 완전한 허상도 아니라 만질 수도 있고요."

에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돈을 받고 원하는 환상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에게 그걸 보여줌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게 해줄 수 있었으니까.

세간에서 비난하는 마녀의 힘이라 하지만 에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마녀의 힘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헛된 바람이었죠.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 아이의 환상이었다.

이 세상에서 아이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한다.

신문배달이나 잡심부름, 굴뚝 청소.

그중에서 가장 혹독한 일은 바로 탄광이었다.

탄광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서 광석을 옮기는 것은, 작은 체구의 아이들이 훨씬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그렇게 탄광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탄광이 무너지고 죽는 것 또한 아이들이었다.

에나에게 찾아온 노파는 그 탄광의 붕괴에서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어머니였다.

에나는 처음에 죽은 자식의 환상을 보여주었다.

죽은 자식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껴안는 어머니의 모습에 감동과 뿌듯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 노파는 계속 에나를 찾아와 자식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처음에 에나도 바라는 대로 해 줬지만, 계속 찾아오다보니 이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그랬더니 교단에 저를 신고했죠. 저 간악한 마녀가 자기 자식을 납치해서 잡아먹었다는 망상에 빠져서요. 그때 절 보며 눈을 부릅뜨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꿈에 나올 정도로 무서웠거든요."

참 웃기죠?

그렇게 묻는 에나의 표정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가장 원하는 환상을 보는 것은 좋지만, 성냥의 불이 꺼지는 순간 그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지죠. 말 그대로 바람 부는 순간 사라질 허상인 거예요. 그렇기에 짧고, 그렇기에 더욱 강렬하죠."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공허하고 삭막한 현실이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달콤한 꿈을 꾸고 싶어 해요. 특히 현실이 힘들고 고될수록 더더욱. 저는 선의로 그 사람들을 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달콤한 환상은 마약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이나 다름없었다.

능력에 매몰되어 더 망가지고, 졸지에는 광기와 집착만 남아서 애원한다.

그리고는 목 놓아 외치는 것이다.

마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최대한 위치크래프트를 자중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배웠어요. 이 운전도 그 일환 중 하나죠."

"힘든 일이었을 텐데 대단하군."

"당신만 할까요?"

에나의 핀잔에 조수석에 앉은 오시안이 피식 웃었다.

그 가벼운 대꾸는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비춰 보여서 에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대체 그건 뭐였어요?"

"뭘 말하는 거지."

"그, 검에서 뽑아낸 빛부터 해서 몸에 두른 망토요."

"기사의 기본 소양이다."

오시안으로서는 이렇게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성광검은 하늘의 기사가 사용하는 기본 특성 중 하나였다.

"기사요?"

에나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다는 듯 물었다.

"농담이죠?"

"그렇게 들렸다면 어쩔 수 없겠지. 다만 마녀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아니, 마녀야 아직도 실존해 있잖아요."

"기사도 실존하지 않나. 지금 바로 여기."

에나는 그게 말이 되냐고 따지려 물었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오시안이 기사가 아닐 건 또 뭐람?

검에서 눈부신 백광을 뿜어내고 몸에 새하얀 별빛의 망토를 둘렀다.

마법도, 성법도, 뮤턴트의 능력도,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오시안 본인이 지닌 고유한 무언가일 것이다.

그것을 오시안이 기사의 힘이라 명명했으면 기사인 것이었다.

'게다가 뭔가, 맞는 말인 거 같기도 하고.'

과거엔 분명 기사들이 존재했다.

지금은 전설, 혹은 동화로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실존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이정표 삼아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일들을 해왔다고 전해진다.

에나도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다.

정의로운 기사가, 악독한 용을 물리치고 공주님을 구하는 이야기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에게도 언젠가 멋진 기사님이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기사님이라니.'

옛 그리운 추억을 떠올린 에나가 지금의 상황과 비교를 해보고 속으로 작게 웃었다.

동화 속 기사님은 악룡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해 냈다.

하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기사님은 성직자를 물리치고 마녀를 구해 냈다.

동화 속 기사는 용맹하고 새하얀 말을 타지만, 오시안은 지프차를 타고 있었다.

그 기묘한 아이러니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심판자를 상대로 그렇게 싸울 생각을 했어요? 무려 당대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 알려진 괴물이었는데."

"많이 싸워 봤거든."

성기사와 pvp는 질리도록 해봤다.

오시안은 굳이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였다.

그래서 상시 pvp창을 열어놓고 승낙을 기다렸다.

보통 호기로운 사람들이 오시안에게 pvp를 신청했는데 그중 성기사 직업의 비율이 유독 높았다.

방랑기사를 상대로 그나마 오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직업이라 그렇다.

참고로 그 다음으로 많은 직군이 흑마법사와 야만전사였다.

오시안의 대답은 그런 기억을 토대로 한 거였지만, 받아들이는 에나는 달랐다.

'많이 싸워 봤다고? 교단의 성기사랑? 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

그러나 저 비밀이 많은 권태로운 모습을 보면 묻는다고 대답을 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보다 괜찮겠어요? 결국 교황청과 적대관계가 됐는데. 심지어 이름까지 알려 주고요. 지금이라도 증거를 없애는 게 낫지 않았어요?"

"소용없는 일이야."

오시안은 조수석 창가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황량한 벌판의 모습이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담겼다.

"그 어린 심판자가 죽었다면 교단에서도 흔적을 쫓겠지. 그러면 자연히 우리와 마주했다는 것이 알려져."

"그렇겠네요. 우리가 이 차를 타고 무사히 도시로 도착하면, 꼬리를 잡힐 테니까요."

"그래서 살렸다. 적어도 완전히 선을 넘는 짓은 하지 않겠다 한 거니까."

물론 이것은 적당히 떠오른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진심을 뽑으라면, 즐거운 싸움을 한 자비를 베푼 것에 가까웠다.

덕분에 성운단포를 사용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

"피곤하군. 눈 좀 붙여야겠어."

"네?"

"안전운전 부탁하지."

겉으로는 멀쩡한 척했지만, 사실 오시안은 당장이라도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성운단포를 사용하게 된 것은 다행인 일이지만, 처음 사용한 기술인만큼 엄청난 정신력을 잡아먹은 것이다.

어중간하게 사용했다면 모를까.

심판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처음 사용한 기술을 최대출력으로 쉬지 않고 내달렸다.

그 반동이 싸움이 끝나고 긴장이 탁 풀린 지금 밀물처럼 몰려온 것이었다.

오시안은 곧바로 눈을 감고 조용한 잠에 빠져들었다.

운전대를 쥔 에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야? 진짜 여기서 잔다고?

아니. 물론 고생하기는 했다. 무려 그 심판자를 상대로 승리를 따낸 것이다.

그 별빛을 두른 검은 또 어떤가.

심판자가 자랑하는 신성연금까지 모조리 베어낼 정도의 고화력의 검이었다.

아니, 그걸 검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검의 형태만 했을 뿐 사실상 열량의 덩어리가 아닌가.

그걸 두르고 싸운다면, 정말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했을 터다.

그래도 뭔가 처지가 바뀐 거 같지 않은가.

이쪽은 도움을 요청한 의뢰주인데, 왜 갑자기 해결사의 운전수 역할을 하게 된 거지?

"씨이. 일어나기만 해 봐. 바로 따질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나의 운전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마치 누군가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듯.

*

오시안이 눈을 뜬 것은 티르나에 도착했을 때였다.

차를 안쪽까지 끌고 갈 수는 없었기에 근방의 정비소에 적당히 맡긴 뒤, 두 사람은 따로 내부 교통편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바이올렛 폭스 주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내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오시안은 문고리를 여는 대신 귀에 감각을 집중해 안쪽의 대화를 엿들었다.

-이제 슬슬 돌아올 때 아니야? 뭔가 꽤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선로가 부서졌다 했으니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설마 포기하지 않은 거려나요?

-소문 들었는데 고철더미 녀석들도 움직였다던데? 심지어 그 악랄한 마피아들도 끼어 있다 하더라고. 적당히 눈치 보면서 나오지 않을까?

각자 로레인, 로난, 디올란이 한 말이었다.

그때 로레인이 장담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야 그렇겠지. 애초에 해결사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니까? 금방 돌아올 거야.

-로레인 씨가 그렇다고 확신하니까 뭔가 더 아닌 거 같군요.

-하. 그러면 뭐, 내기할까? 우리 막내가 임무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난 실패에 걸 거야. 왜. 쫄려?

피식.

자기가 없는 사이에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오시안은 문을 열고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무어라 떠들던 세 사람은 오시안을 보더니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로난이 평소와 같은 수상한 미소를 지으며 오시안을 반겨 주었다.

"후후. 오셨습니까. 오시안 씨. 조금 늦으셨군요."

"일 처리를 하다 보니 늦어지더군."

"뭐, 너무 상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결사의 일이라는 것이 항상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는 거죠. 저희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지? 나는 실패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만."

"예? 그게 무슨...."

오시안은 대답 대신 자리를 옆으로 살짝 비켜주었다.

그러자 오시안의 등 뒤에 가려져 있던 에나 그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나를 본 세 사람의 표정이 제각기 변했다.

로난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지며 가늘어진 눈이 더 길게 변했다.

디올란은 당황스러운 듯했고, 특히 로레인의 표정이 가장 알기 쉬웠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악이 담긴 모습이었으니까.

"의뢰주 에나 그룬트다. 그녀를 무사히 데리고 왔지."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세 사람, 특히 자신이 반드시 실패할 거라 말한 로레인을 주로 응시했다.

"어, 어어...."

로레인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곧바로 외쳤다.

"내, 내가 뭐랬어! 우리 막내 성공할 거라 그랬지!"

"예?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총기 손질을 깜빡했네! 나 잠시 먼저 간다!"

로레인은 대답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쌩 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 모습에 로난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디올란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큭큭 웃었다.

"...여기 해결사 집단 맞아?"

에나 그룬트는 그 우스운 광경에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시안은 에나 그룬트를 동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로나 롤랑. 이 해결사 사무소의 중개인이다. 인사해라"

로난은 에나를 향해 신사처럼 부드럽고 예의 있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나 그룬트 양. 바이올세 폭스의 중개인 로난 롤랑

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고명한 마녀를 만나게 되어 실로 영광입

니다."

에나는 그런 로난을 빤히 응시하더니, 조용히 오시안의 등 뒤로 숨었다.

오시안은 얼굴만 빼꼼 내민 에나를 향해 물었다.

"왜 그러지?"

"저 남자. 너무 수상해."

대체 어디가 수상하냐고 물어볼수 없었다.

사실 오시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실눈이잖아. 저런 사람들은 항상 그래. 속이 어디가 검다고 해야 하나.

반드시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어."

그러는 사이 로난을 향한 에나의 평가는 계속됐다.

부담스러워서 등 뒤에 숨은 주제에, 할 말은 꼬박꼬박 다 한다.

심판자를 차량으로 들이받았을 때도 느낀 거지만, 확실히 에나는 한 성깔

했다.

"후후후.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여린 마음에 상처

를 입는답니다."

"우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진짠데

로난은 속으로 탄식했다.

어째서 사람들은 자신을 볼 때마다 경계를 하는 걸까.

경각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항상 예의 있게 행동하고 미소까지 머금

는데 말이다

그렇게 오늘도 로난의 마음 한쪽에는 자그마한 스크래치가 새겨졌다.

누구도 모를 그만의 작은 상처였다.

"나는 디올란. 그쪽이 그 소문의 마녀야?"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디올란이 쾌활하게 미소 지었다.

평소 그답지 않게 꽤나 반가운 눈치였다.

에나는 그런 디올란을 반개한 눈으로 응시했다.

디올란에게서 무언가를 보려고 하는 것인지 한동안 빤히 바라보던 에나

가 이내 오시안에게 물었다.

"정말 당신 같은 남자가 여기 사무실에 소속되어 있는 게 맞아?"

"맞다만, 왜 그러지?"

"그냥. 어울리지 않느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실례다."

그사이 2층에서 눈치를 보던 로레인 폰크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로에인 폰크야. 이 사무실의 베테랑 해결사 중 하나

지."

"...에나 그룬트예요."

그나마 이 사람은 좀 멀정해 보이네.

바이올렛 폭스에 대한 에나의 평가가 살짝이지만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우선, 제 의뢰를 받아 주고 절 도와준 부분에 감사하게 생각해요. 물론

말로만 넘길 생각은 없어요. 제 힘이 필요하시다면 이번 보상에 상응하는

선에서 빌려드릴 생각이에요."

"흠. 그렇군요. 아, 혹시 저희 해결사 사무소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십니

까?"

마녀는 그 자체만으로 희귀한 인재다.

들어오게 된다면 바이올렛 폭스의 명성은 더욱 올라가게 될 것이 자명 했

다.

"...제 능력은 전투에 그렇게 적합하지 않아요."

에나의 능력은 약간의 실체를 지닌 환상.

그리고 주변의 불을 성냥으로 끌어모아 화기를 억제하는 정도.

그것만으로도 정말 상당한 능력이지만, 문제는 이 능력만으로 무언가

를 이루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의 활용도는 높지만, 에나는 그걸 전투에 활용을 할 생각까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페트라 교단에게서 도망칠 때도 싸움보다는 눈속임과 도주에 집중했던

것이 그녀다.

그 행동만으로 마녀의 성향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결사가 되는 것은 솔직히 힘들 거라고 봐요. 저는 싸움에 적합

하지도 않고 해본 적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해결사가 되는 것은 솔직히 힘들 거라고 봐요. 저는 싸움에 적합

하지도 않고 해본 적도 없으니까요."

"흠, 그건 확실히 아쉽군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의로의 보수로 소속

을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바깥에서 마녀는 차별과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티르나에서는 달랐다.

마녀가 지닌 힘은 이 도시에서는 축복이었다.

그녀의 힘만으로 도시에서의 직위는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

름없기 때문이었다.

물로 바깥세상에 익숙한 에나에겐 아직 그 평가가 잘 와 닿지 안았다.

"소문은 들었지만, 티르나는 역시 신기한 도시네요."

도시라고 해야 할까. 이미 어지간한 국가에 버금가는 규모라 사실상 도시

국가라 해도 좋으리라.

이곳의 소문은 에나도 충분히 들었따.

돈과 능력이 있다면, 범죄자도 먹고살 수 있는 곳이라고.

그렇기에 살기 위해서 여기로 도망쳐 온 것이 아닌가.

반면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깥에서 받던 취급을 비슷하게 받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로난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

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마녀의 의뢰라는 것만으로도 손사래를 쳤을 텐데.

로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 이 도시의 매력이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그렇다 해도 해결사는 아직 아닌 것 샅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저희는 일단 에나 그룬트 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걸로 족합니다. 자주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맛있는 술 정도는 대접해드릴

수 있거든요."

에나는 시선을 돌려 오시안을 힐끔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요. 그리고 의뢰에 대한 보상 또한 확실히

할 생각이에요."

"보상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은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지?"

오시안이 물었다.

이 도시에 온 것은 좋지만, 그 이후에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지도 생각을

해둬야 했다.

"그건..."

에나는 그 부분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도시에 오고 난 뒤를 떠올리기엔, 당시 그녀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

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살아있고, 이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할 필요가 있었

다.

"뭐부터 해야 할지 좀 막막하네요."

자신의 능력으로 이 도시의 어딘가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에나는 거기

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로레인이 말했다.

"뭐, 상관없지 않을까? 마녀라는 이름값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니까. 뭘

해도 대접을 받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죠. 이 도시에는 이미 망명해 온 마녀들이 꽤 많이 있으니가요. 어쩌

면 에나 양의 등장을 눈치를 채고 벌써부터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에 달린 방울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활짝 열린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 한 소녀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은색과 보라색 투톤헤어를 양 갈래로 길게 묶은 소녀는 10대 중반으로

보였다.

몸에 입은 건 검은색 기조의 고딕 로리타 드레스.

피부는 분칠을 한 것처럼 하얗고 눈동자는 매우 작은 사백안이었다.

인형 같은 소녀였지만, 히죽이며 웃는 미소가 어딘가 썸뜩함을 느끼게 했

다.

"안녕?"

소녀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인사의 말을 담았다.

모두가 그녀의 존재감이 압도될 때, 오시안만이 소녀의 다른 부분에 시선

을 주었다.

소년느 피로 물든 것 같은 새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소녀는 또각거리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말하기가 무섭게 거물이 오셨네요."

로난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맞이해 주었다.

마치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반응에 모두가 의아해할 무렵.

안으로 들어온 소녀가 입을 열었다.

"카렌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니 가볍게 소

개할게. 카렌의 이름은 카렌이야. 마녀야."

자기를 마녀라 소개한 카렌은 사백안의 눈동자로 에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그 마녀구나? 만나서 반가워!"

"..."

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오시안의 뒤로 숨었다.

카렌은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였지만, 그녀에게서 숨길 수 없는 광기

의 편린이 엿보였다.

"설마하니 「발푸르기스의 밤」 에서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

"넌 누구야?"

"저는 로난 롤랑입니다. 이곳 , 바이올렛 폭스의 주인이며 중개인이죠."

"너, 뭔가 기분 나쁜네. 말 걸지 말아 줄래? 카렌은 저 마녀에게 볼일이 있

어."

어린아이와 같은 치기 어린 말투.

하지만 그걸 가능케 하는 데에는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이 깔려 있기 때

문이리라.

너, 우리 집회에 들어오지 않을래? 그러면 정말 재미있을거야."

카렌이 희번뜩한 눈으로 에나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에나는 그 모습에 불안감을 느꼈다.

"어, 음 좀 생각해 볼게요."

"으응?"

바로 승낙의 대답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 의외인지 카렌의 고개가 살짝 옆

으로 기울었다.

이윽고 그녀가 깔깔거리며 새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무래도 카렌이 말을 잘못한 모양이네!"

웃음을 뚝 그친 카렌이 한층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제안이 아니야. 명령이지. 너에게 거부권은 없어."

"네? 그게 무슨..."

아무리 발푸르기스의 밤의 마녀분이라 하셔도, 지금 행동은 도가 넘었

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상대가 어떤 무례를 범해도 웃으면서 넘기던 로난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나섰다.

"너는 빠져. 이건 카렌과 저 마녀 사이의 일이야."

"그럴 순 없겠군요. 이렇게 보여도 에나 그룬트 양은 저희에게 의뢰를 요

청한 의뢰주입니다. 의뢰주를 곤란케 하는 상황을 그냥 넘겨짚으라고요?"

그럴 수는 없겠네요.

로난은 카렌의 섬뜩한 눈빛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카렌의 표정에 희미하지만 짜증이 담겼다.

"그 말은, 지금 카렌에게 반항하겠다는 거야!"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졌다

카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찌릿한 기파가 피부를 따끔하게 만들었다.

스윽

방금 전까지 장난치며 웃던 로레인이 표정을 지우며 허리춤의 총에 손을

가져다 댔다.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며 머리를 괴고 있던 디올란의 눈매 또한 날카롭

게 변하며 살기를 머금었다.

그 광경에 카렌은 주눅 들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입가가 주욱 찢어졌다.

"재미있네. 너희들도 카렌과 같이 춤출 거야?"

챙!

직후 카렌의 양손에 무언가가 쥐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것은 매우 거대한 날을 지닌 작두칼이었다.

저 가녀린 팔뚝에서 무슨 힘이 있는 건지, 카렌은 자신의 상방신만 한 작

둑칼을 너무나도 쉽게 들어 올렸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저 작두칼을 대체 어디에 숨겨놨다가 갑자기 꺼냈냐

는 것이다.

'어, 어쩌지?'

에나는 그 모습에 안절부절못했다.

괜히 자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카렌을 따라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그때, 그녀의 어깨를 덮는

손길이 있었다.

에나의 시선이 옆을 향하자, 오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흑발의 미남자.

그는 올곧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고개를 저었따.

"..."

에나의 그 모습에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

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잘 해결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무슨 무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오시안의 차분한 목소리가 공간

을 꿰뚫었다.

"이쪽이 예의를 차려 주고 있을 때 물러나는 것이 좋을 거다."

카렌의 시선이 오시안을 향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그마한 동공이 오시안의 얼굴로 잔잔히 뜯어보았다.

"너는 누구야?"

"지금 그게 중요한가?"

스릉

오시안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바닥을 향해 비스듬히 겨누었다.

물러나지 않겠다면 그대로 베겠다는 경고.

"아하하. 너도 나랑 비슷한 걸 사용하는구나?"

카렌은 오시안이 손에 쥔 검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쉬워서 어째? 카렌이 사용하는 건. 그런 구닥다리보다 훨씬 , 훠얼씬

더 좋은 무기거든."

휘리릭.

카렌이 양손에 쥔 작두칼을 손가락으로만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겉모습만 흉악한 무기가 아닌지 회전할 때마다 작두칼은 대기를 가르며

거센 풍압을 일으켰다.

오시안은 그런 카렌을 향해 조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쪽의 무기가 더 싸구려 같은데."

"..."

카렌의 입가에 순간이지만 미소가 지워졌다.

다시 광기 어린 미소가 생겼지만, 그녀의 기분은 전보다 훨씬 저조해 보

였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오시안을 향해 쏟아졌다.

뒤에 있는 에나조차 안색이 창백해질 살기 속에서도 오시안은 아무렇지

않은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딱 맞군. 오히려 기분이 나쁜 건 나인데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비슷한 걸 사용한다 하지 않았나."

오시안은 별자루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까득,

손바닥과 자루가 마찰하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감히 사술로 만들어진 그따위 무기를, 나와 비교하려 들어"

그리고

검에서 별빛이 솟아났다.

51화. 발푸르기스의 밤 (1)

오시안은 에나 그룬트를 동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로난 롤랑. 이 해결사 사무소의 중개인이다. 인사해라."

로난은 에나를 향해 신사처럼 부드럽고 예의 있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에나 그룬트 양. 바이올렛 폭스의 중개인 로난 롤랑이라고 합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고명한 마녀를 만나게 되어 실로 영광입니다."

에나는 그런 로난을 빤히 응시하더니, 조용히 오시안의 등 뒤로 숨었다.

오시안은 얼굴만 빼꼼 내민 에나를 향해 물었다.

"왜 그러지?"

"저 남자. 너무 수상해."

대체 어디가 수상하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사실 오시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실눈이잖아. 저런 사람들은 항상 그래. 속이 어딘가 검다고 해야 하나. 반드시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어."

그러는 사이 로난을 향한 에나의 평가는 계속됐다.

부담스러워서 등 뒤에 숨은 주제에, 할 말은 꼬박꼬박 다 한다.

심판자를 차량으로 들이받았을 때도 느낀 거지만, 확실히 에나는 한 성깔 했다.

"후후후.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여린 마음에 상처를 입는답니다."

"우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진짠데.

로난은 속으로 탄식했다.

어째서 사람들은 자신을 볼 때마다 경계를 하는 걸까.

경각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항상 예의 있게 행동하고 미소까지 머금는데 말이다.

그렇게 오늘도 로난의 마음 한쪽에는 자그마한 스크래치가 새겨졌다.

누구도 모를 그만의 작은 상처였다.

"나는 디올란. 그쪽이 그 소문의 마녀야?"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디올란이 쾌활하게 미소 지었다.

평소 그답지 않게 꽤나 반가운 눈치였다.

에나는 그런 디올란을 반개한 눈으로 응시했다.

디올란에게서 무언가를 보려고 하는 것인지 한동안 빤히 바라보던 에나가 이내 오시안에게 물었다.

"정말 당신 같은 남자가 여기 사무실에 소속되어 있는 게 맞아?"

"맞다만, 왜 그러지?"

"그냥.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실례다."

그사이 2층에서 눈치를 보던 로레인 폰크가 쏜살같이 내려왔다.

"만나서 반가워. 나는 로레인 폰크야. 이 사무실의 베테랑 해결사 중 하나지."

"...에나 그룬트예요."

그나마 이 사람은 좀 멀쩡해 보이네.

바이올렛 폭스에 대한 에나의 평가가 살짝이지만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우선, 제 의뢰를 받아 주고 절 도와준 부분에 감사하게 생각해요. 물론 말로만 넘길 생각은 없어요. 제 힘이 필요하시다면 이번 보상에 상응하는 선에서 빌려드릴 생각이에요."

"흠. 그렇군요. 아, 혹시 저희 해결사 사무소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마녀는 그 자체만으로 희귀한 인재다.

들어오게 된다면 바이올렛 폭스의 명성은 더욱 올라가게 될 것이 자명했다.

"...제 능력은 전투에 그렇게 적합하지 않아요."

에나의 능력은 약간의 실체를 지닌 환상.

그리고 주변의 불을 성냥으로 끌어모아 화기를 억제하는 정도.

그것만으로도 정말 상당한 능력이지만, 문제는 이 능력만으로는 무언가를 이루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능력의 활용도는 높지만, 에나는 그걸 전투에 활용을 할 생각까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페트라 교단에게서 도망칠 때도 싸움보다는 눈속임과 도주에 집중했던 것이 그녀다.

그 행동만으로 마녀의 성향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결사가 되는 것은 솔직히 힘들 거라고 봐요. 저는 싸움에 적합하지도 않고 해본 적도 없으니까요."

"흠, 그건 확실히 아쉽군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의뢰의 보수로 소속을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바깥에서 마녀는 차별과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티르나에서는 달랐다.

마녀가 지닌 힘은 이 도시에서는 축복이었다.

그녀의 힘만으로 도시에서의 직위는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바깥세상에 익숙한 에나에겐 아직 그 평가가 잘 와 닿지 않았다.

"소문은 들었지만, 티르나는 역시 신기한 도시네요."

도시라고 해야 할까. 이미 어지간한 국가에 버금가는 규모라 사실상 도시국가라 해도 좋으리라.

이곳의 소문은 에나도 충분히 들었다.

돈과 능력이 있다면, 범죄자도 먹고살 수 있는 곳이라고.

그렇기에 살기 위해서 여기로 도망쳐 온 것이 아닌가.

반면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바깥에서 받던 취급을 비슷하게 받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로난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뢰를 받아들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마녀의 의뢰라는 것만으로도 손사래를 쳤을 텐데.

로난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 이 도시의 매력이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그렇다 해도 해결사는 아직 아닌 거 같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저희는 일단 에나 그룬트 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걸로 족합니다. 자주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맛있는 술 정도는 대접해드릴 수 있거든요."

에나는 시선을 돌려 오시안을 힐끔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요. 그리고 의뢰에 대한 보상 또한 확실히 할 생각이에요."

"보상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은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지?"

오시안이 물었다.

이 도시에 온 것은 좋지만, 그 이후에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지도 생각을 해둬야 했다.

"그건...."

에나는 그 부분까진 생각하지 않았다.

도시에 오고 난 뒤를 떠올리기엔, 당시 그녀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살아있고, 이제 앞으로의 일을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뭐부터 해야 할지 좀 막막하네요."

자신의 능력으로 이 도시의 어딘가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에나는 거기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로레인이 말했다.

"뭐, 상관없지 않을까? 마녀라는 이름값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니까. 뭘 해도 대접을 받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죠. 이 도시에는 이미 망명해 온 마녀들이 꽤 많이 있으니까요. 어쩌면 에나 양의 등장을 눈치를 채고 벌써부터 움직이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에 달린 방울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활짝 열린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 한 소녀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은색과 보라색 투톤헤어를 양 갈래로 길게 묶은 소녀는 10대 중반으로 보였다.

몸에 입은 건 검은색 기조의 고딕 로리타 드레스.

피부는 분칠을 한 것처럼 하얗고 눈동자는 매우 작은 사백안이었다.

인형 같은 소녀였지만, 히죽이며 웃는 미소가 어딘가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안녕?"

소녀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인사의 말을 담았다.

모두가 그녀의 존재감이 압도될 때, 오시안만이 소녀의 다른 부분에 시선을 주었다.

소녀는 피로 물든 것 같은 새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소녀는 또각거리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말하기가 무섭게 거물이 오셨네요."

로난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맞이해 주었다.

마치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반응에 모두가 의아해할 무렵.

안으로 들어온 소녀가 입을 열었다.

"카렌을 아는 사람이 있을 거고,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니 가볍게 소개할게. 카렌의 이름은 카렌이야. 마녀야."

자기를 마녀라 소개한 카렌은 사백안의 눈동자로 에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그 마녀구나? 만나서 반가워!"

"...."

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오시안의 뒤로 숨었다.

카렌은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였지만, 그녀에게서 숨길 수 없는 광기의 편린이 엿보였다.

"설마하니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넌 누구야?"

"저는 로난 롤랑입니다. 이곳, 바이올렛 폭스의 주인이며 중개인이죠."

"너, 뭔가 기분 나쁘네. 말 걸지 말아 줄래? 카렌은 저 마녀에게 볼일이 있어."

어린아이와 같은 치기 어린 말투.

하지만 그걸 가능케 하는 데에는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이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너, 우리 집회에 들어오지 않을래? 그러면 정말 재미있을 거야."

카렌이 희번뜩한 눈으로 에나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에나는 그 모습에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어, 음. 좀 생각해 볼게요."

"으응?"

바로 승낙의 대답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 의외인지 카렌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이윽고 그녀가 깔깔거리며 새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아무래도 카렌이 말을 잘못한 모양이네!"

웃음을 뚝 그친 카렌이 한층 날카로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제안이 아니야. 명령이지. 너에게 거부권은 없어."

"네? 그게 무슨...."

"아무리 발푸르기스의 밤의 마녀분이라 하셔도, 지금 행동은 도가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상대가 어떤 무례를 범해도 웃으면서 넘기던 로난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행동을 지적하면서 나섰다.

"너는 빠져. 이건 카렌과 저 마녀 사이의 일이야."

"그럴 순 없겠군요. 이렇게 보여도 에나 그룬트 양은 저희에게 의뢰를 요청한 의뢰주입니다. 의뢰주를 곤란케 하는 상황을 그냥 넘겨짚으라고요?"

그럴 수는 없겠네요.

로난은 카렌의 섬뜩한 눈빛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카렌의 표정에 희미하지만 짜증이 담겼다.

"그 말은, 지금 카렌에게 반항하겠다는 거야?"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졌다.

카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찌릿한 기파가 피부를 따끔하게 만들었다.

스윽.

방금 전까지 장난치며 웃던 로레인이 표정을 지우며 허리춤의 총에 손을 가져다 댔다.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며 머리를 괴고 있던 디올란의 눈매 또한 날카롭게 변하며 살기를 머금었다.

그 광경에 카렌은 주눅 들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입가가 주욱 찢어졌다.

"재미있네. 너희들도 카렌과 같이 춤출 거야?"

챙!

직후 카렌의 양손에 무언가가 쥐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것은 매우 거대한 날을 지닌 작두칼이었다.

저 가녀린 팔뚝에서 무슨 힘이 있는 건지, 카렌은 자신의 상반신만 한 작두칼을 너무나도 쉽게 들어 올렸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저 작두칼을 대체 어디에 숨겨놨다가 갑자기 꺼냈냐는 것이다.

'어, 어쩌지?'

에나는 그 모습에 안절부절못했다.

괜히 자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카렌을 따라가야 하나 고민을 하던 그때, 그녀의 어깨를 덮는 손길이 있었다.

에나의 시선이 옆을 향하자, 오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흑발의 미남자.

그는 올곧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

에나는 그 모습에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잘 해결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이게 무슨 무례인지는 모르겠지만."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한 장소에서, 오시안의 차분한 목소리가 공간을 꿰뚫었다.

"이쪽이 예의를 차려 주고 있을 때 물러나는 것이 좋을 거다."

카렌의 시선이 오시안을 향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그마한 동공이 오시안의 얼굴을 잔잔히 뜯어보았다.

"너는 누구야?"

"지금 그게 중요한가?"

스릉.

오시안이 허리춤의 검을 뽑아 바닥을 향해 비스듬히 겨누었다.

물러나지 않겠다면 그대로 베겠다는 경고.

"아하하. 너도 나랑 비슷한 걸 사용하는구나?"

카렌은 오시안이 손에 쥔 검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쉬워서 어째? 카렌이 사용하는 건, 그런 구닥다리보다 훨씬, 훠얼씬 더 좋은 무기거든!"

휘리릭.

카렌이 양손에 쥔 작두칼을 손가락으로만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겉모습만 흉악한 무기가 아닌지 회전할 때마다 작두칼은 대기를 가르며 거센 풍압을 일으켰다.

오시안은 그런 카렌을 향해 조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그쪽의 무기가 더 싸구려 같은데."

"...."

카렌의 입가에 순간이지만 미소가 지워졌다.

다시 광기 어린 미소가 생겼지만, 그녀의 기분은 전보다 훨씬 저조해 보였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오시안을 향해 쏟아졌다.

뒤에 있는 에나조차 안색이 창백해질 살기 속에서도 오시안은 아무렇지 않은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딱 맞군. 오히려 기분이 나쁜 건 나인데 말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비슷한 걸 사용한다 하지 않았나."

오시안은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까득.

손바닥과 자루가 마찰하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감히 사술로 만들어진 그따위 무기를, 나와 비교하려 들어?"

그리고.

검에서 별빛이 솟아났다.

52화. 발푸르기스의 밤 (2)

성광검.

지상에 강림한 별빛에 카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건, 뭐지?

그녀의 눈동자가 오시안의 손에 쥔 검에 못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검에서 갑자기 새하얀 빛이 솟아났다? 설마 저 사람도 마녀인가? 하지만 마녀는 여자만 될 수 있는데.

눈속임이라는 생각에도 미쳤지만, 카렌은 저 검이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느껴진다.

하늘색과 흰색이 뒤섞인 불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이.

저것은 닿는 것은 뭐든지 베어 버리는 고열량의 검이다.

동시에 카렌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품고 말았다.

아름답다고.

"어떻게 할 거지? 여기서 한번 붙어 볼 생각인가?"

오시안은 카렌을 향해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이곳이 바이올렛 폭스였기에 당장 휘두르지 않았을 뿐이지, 이 경고마저 무시한다면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카렌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에나를 잠시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손에 쥔 작두를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커다랗던 작두는 허리춤에 거는 순간 크기가 확 작아지더니 사라졌다.

"흥. 재미가 없어졌어. 카렌은 갈래."

카렌은 등을 돌리더니 바이올렛 폭스 주점을 그대로 떠나 버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에나 그룬트를 협박한 것치고는 생각보다 허무하게 떠나는 모습.

"후아, 다행이군요."

그때까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로난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것은 디올란과 로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 혹시나 이대로 싸움이라도 나면 어쩌나, 정말 속으로 쩔쩔맸는데 말이죠."

"...무서워한 것치고는 꽤 당당하게 말하던데."

"후후, 무섭다고 도망을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로난은 웃으며 대꾸하고는 에나를 돌아봤다.

"에나 그룬트 양. 괜찮으십니까?"

"아, 네. 네에."

"이런 일을 겪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오히려 더 나빠질 것 같아서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아, 아뇨.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죠. 감사하고 있기도 하고요."

에나는 방금 전 카렌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설마 여기 오자마자 다른 마녀가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티르나에서 마녀는 꽤나 귀중한 존재라고. 그러니 다른 마녀들이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하죠."

"그 마녀집회라는 곳이 그건가요?"

에나의 물음에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방금 전 찾아온 마녀 카렌은 티르나에 단 2개 있는 마녀 집회 중 하나인 발푸르기스의 밤 소속입니다."

"2개나 있다고?"

오시안도 그건 몰랐기에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하나는 들으셨다시피 발푸르기스의 밤입니다. 마녀들끼리 모여서 힘을 합치고, 서로 잘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조직이죠. 사실 조직이라기보다는 모임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뭐든지 하기 위해서 힘을 합칠 뿐, 조직으로써 갖춰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마녀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마녀 다과회」입니다."

"꽤 아기자기한 이름이로군."

"이쪽은 공적인 조직의 성향이 강한 곳이죠. 마녀의 힘을 지녔지만, 도시에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티르나 시와 공조하여 만들어진 곳입니다. 도시를 위협하는 자들을 상대하거나, 혹은 다른 중요한 사안이 있을 때 나서는 곳이죠."

"마녀도 성향에 따라 갈린다 이건가."

"그래도 전력은 다과회 쪽이 더 강합니다. 듣자하니 그쪽에는 전설의 마녀가 소속되어 있다고도 하니까요."

전설의 마녀라.

오시안은 문득 게임 속의 마녀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녀에게 딱히 주어진 수명이라는 것이 없다면, 어쩌면 자신이 알던 존재가 지금까지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상념은 로난의 이어지는 말에 끝났다.

"에나 그룬트 양은 그런 의미에서 요주의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마땅한 소속이 존재하지 않는 마녀. 티르나에 들어왔기에 이전까지 눈여겨보기만 하던 자들이 직접 접촉하겠죠."

에나의 가치는 그녀 스스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높았다.

자신이 원치 않더라도 사건에 휘말리게 되리라.

에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건 오시안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말인가?"

"이번 의뢰. 솔직히 말해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더라도 확률은 1할 아래라고 보았죠."

"그거 꽤 자존심이 상하는 평가로군."

"기분이 나쁘시겠지만 이게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하지만 오시안 씨는 그걸 보란 듯이 해내셨습니다. 마피아와 폭주족, 마법사들, 그리고 교황청의 추적자들 사이에서 말이죠."

그것은 오시안이 한 명의 해결사로서 완성이 되었다는 소리기도 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방해와 질시도 받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도, 어디선가 오시안 씨를 눈여겨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조심하란 말은, 로난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

발루드는 부하들을 이끌고 회의장에 향했다.

그가 소속되어 있는 노스 블라인더스는 주기적으로 이사진들이 모여서 여러 안건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시장은 어떻고, 도시의 세력다툼은 어떻게 흘러가고, 공무원들에 대한 뇌물은 어떤지, 지금 진행하는 사업의 진척은 잘 되는지.

발루드도 이사 중 하나였기에 회의는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그는 평소처럼 정갈한 백색 양복을 입은 채 흐트러짐 없는 머리를 유지했다.

"오오. 이야, 이게 누구야? 항상 깔끔 떠는 우리 발루드 이사님 아니야? 참 먼 길도 행차하셨어."

회의장 안으로 들어가니 반겨주는 경박한 목소리.

"여전히 격 떨어지는 언행이군요, 쿠르샤."

말을 건 사람은 불꽃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인상적인 남자였다.

와이셔츠를 가슴팍까지 풀어 헤친 채 비스듬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태도에서부터, 그의 자유분방한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노스 블라인더스 마피아의 이사 중 하나인 쿠르샤.

그는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다는 듯 입꼬리를 스윽 말아 올렸다.

"어때. 요즘 일은 잘되나? 내가 최근에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지."

"...."

"오. 이런.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고? 하긴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겠지. 천하의 발루드가 풋내기 해결사를 상대로 실패를 맛봤으니 말이야. 크하하!"

발루드는 쿠르샤의 말을 무시하며 주어진 자리에 앉았다.

다른 자리에는 이미 도착해 있는 이사들이 미리 와서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대화에 끼어들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지켜볼 뿐.

발루드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기며 생각했다.

'여전히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곳이야.'

모두가 동등한 이사의 자격을 지녔지만, 동시에 서로의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쪽이 실패를 했으니 그걸 빌미로 물어뜯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럼에도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것은, 더 강하고 확실하게 끝내기 위해서겠지.

'미친개 역할은 원래부터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쿠르샤에게 떠넘기고 말이지. 쿠르샤 녀석도 그걸 알면서 기꺼이 진행자 역할을 떠맡았군.'

그래 봤자 같잖은 수작질이다.

이쪽이 반응하지 않고 무시하면, 저 녀석도 제풀에 알아서 나가떨어지겠지.

하지만 발루드의 생각과 다르게, 쿠르샤는 모처럼 잡은 기회를 쉽게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 발루드 이사가 마음이 약해졌나 봐. 고작 핫바리 해결사 하나 상대 못 해서 말이야. 혹시 봐주기라도 한 건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내 말은, 그쪽의 실력이 너무 녹이 슨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

쿠르샤가 이죽이며 하는 말에 발루드에게서 강렬한 살기가 일어났다.

발루드는 얼굴에 쓴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렸다.

안경알이 하얗게 빛나며 그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그러면 이 자리에서 확인을 해 보시겠습니까?"

"오, 그거 재미있는데."

쿠르샤도 지지 않고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도 없는데 넘실거렸다.

뜨겁게 가열되는 둘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얼굴에 검버섯이 핀 초로의 노인이었다.

"둘 다 그만하게. 이런 자리에서 식구들끼리 싸우면 되겠나. 곧 회장님께서도 오시는데."

그 말에 발루드와 쿠르샤가 기세를 거둬들였다.

발루드는 애초에 그냥 해본 소리였다는 듯 평소의 태도를 고수했고, 쿠르샤는 킁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 풋내기 해결사와 제대로 싸워서 승부를 내지 못한 모양인데.'

발루드와 견원지간처럼 으르렁대는 사이라 하지만, 쿠르샤는 발루드의 실력을 알고 있다.

이 노스 블라인더스라는 역사가 있는 조직에서, 어느 날 갑자기 가입한 북부 야만족이 삽시간에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실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

발루드는 본인도 뛰어난 전투력을 지녔지만, 사람을 부리는 용병술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그렇기에 그가 담당하는 부서는 주로 용역, 인력사무소 쪽으로 치중되어 있었다.

남들이 다 물건을 통해 돈을 만지는 것과 다르게, 사람으로 돈을 버는 스타일.

그래서 다른 이사진들은 발루드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투박한 방식이라며 말이다.

'참으로 야만족다운 짓이지만, 그래도 그 실력만큼은 진짜란 말이지.'

강한 흥미가 들었다.

망명 요청을 한 소문의 마녀를 데려간, 그 잘난 해결사가 누구인지.

팀을 이룬 것도 아니고 혼자서 발루드를 상대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그 뒤를 쫓아온 교황청의 미친개를 상대로도 살아남았단다.

마주치고도 살아남은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아서 도주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존 자체만으로 그 오시안이라는 해결사는 근래 보기 드문 녀석이라는 뜻.

그리고.

'바이올렛 폭스 사무실이라 했지?'

해결사 업계에서도 극히 소수만 소속되어 있으며 빡빡한 규정 속에서도 회색 등급을 유지하고 있는 사무실.

자신의 귀에도 은근히 이름이 들릴 정도라면, 나름 알아주는 곳이리라.

'와하핫! 이거 재미있네. 기회가 되면 한번 찾아가도 나쁘지 않겠어.'

*

"새로운 마녀가 도시에 들어왔다고 해요."

어두운 공간.

새까만 어둠 속에서 새하얀 식탁보가 펼쳐진 테이블만 놓인 곳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듣기 좋게 울렸다.

그 말에 다른 방향에서 감탄에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 그게 정말이니?"

"그럼요. 듣자하니 페트라 교황청에 쫓겼다고 하던데, 무사히 도달했다고 하네요."

"그거참 다행이구나. 도시의 바깥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가혹한 곳이었을 텐데. 아직도 살아남은 아이가 있었을 줄이야."

"그 때문인지 벌써 발푸르기스의 밤이 나선 거 같아요."

"생각보다 빠르네."

"우리가 늦은 거야."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꺄르륵거리는 웃음소리.

차를 호록 마시고, 찻잔을 놓고, 주전자로 새로운 홍차를 따르고.

그렇게 담소를 나눈다.

마녀들의 다과회는 이런 곳이었다.

"흥미로운 소식이 하나 있다."

그때 테이블의 중심에서 황금색 불길이 화륵 피어올랐다.

그 목소리에 웃으며 떠들던 마녀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의 이목이 황금 불길에 집중됐다.

"새로운 마녀를 도시까지 안전하게 데려온 해결사가 있다더구나."

"그건 놀랍네요. 마탑의 마법사도, 뒷세계의 범죄조직도 아니고 일개 해결사가 그걸 해내다니."

"게다가 그 정화 심판자를 상대로 살아남았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아주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그게 뭐죠? 큰 언니."

"그자가, 별빛을 다룬다더구나."

별빛이라는 말에 주변 마녀들이 웅성거렸다.

고고히 타오르는 황금의 불이 말했다.

"이제는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던 과거의 유산이 다시 나타난 것인지는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

결정은 그 뒤에 하리라.

놔둘 것인지, 손을 잡을 것인지.

아니면 싹을 제거할 것인지.

*

"흐응."

도시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의 꼭대기 층.

그레이스 시커는 손에 쥔 와인잔을 흔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니까?"

그 남자가 이번에 또 일을 저질렀다.

물론 이런 소문은 아는 사람만 아는 거라, 막 커다란 명성까진 기대하기 힘들지만.

글쎄 그 남자가 과연 여기서 멈출까.

그레이스 시커는 이게 시작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후후. 재미있어."

권태에 젖어든 도시의 삶이, 조금은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

"특히 이번 일로 마녀의 영입을 실패한 사람들은, 오시안 씨에게 더욱 적대감을 키울 겁니다."

"그렇겠지."

"이 업계가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뛰어난 사람을 우러러보면서도, 어떻게든 그의 발목을 잡아 넘어뜨리려고 하죠. 경외는 하지만,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자들의 욕망이 더 강합니다. 여긴 그런 곳입니다. 그래도 되는 곳이죠."

그것이 바로 티르나의 뒷세계였다.

오시안은 이번 일을 기점으로, 이 세계에 제대로 발을 들이민 것이다.

이제 벗어나려 한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다.

스스로 들어온 지옥과 수렁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뿐이다.

"앞으로 많은 위기가 생길 겁니다."

방금 전처럼 카렌과 충돌할 뻔한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많은 사람들."

티르나의 위병, 집행관, 갱단, 범죄자, 마법사, 흑마법사, 교황청의 심판자.

"더 위험하고 강한 조직들."

해결사 연합, 도시의 대기업, 마탑, 마피아, 흑마법사 조합, 티르나 방위군, 마녀 다과회.

"잘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들."

선혈형제단, 발푸르기스의 밤, 교황청의 12성부, 도시에 암약해 있는 다른 비밀조직까지.

"오시안 씨는 그들과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무시하면서, 점차 마모되어 갈 겁니다."

순간이지만 로난의 표정에 미소가 사라지고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 모든 것을 각오할 수 있으십니까?"

로난은 오시안이 여기서 으레 겁을 먹고 대답을 유보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디올란도, 로레인도 마찬가지였다.

"더 다양한 놈들을 만날 수 있다라."

하지만 오시안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입가에 은근한 미소마저 머금었다.

"재미있군. 누구라도 좋아. 얼마든지 와 보라고 해."

53화. 인지의 변화 (1)

오시안은 이번 싸움을 통해 성운비단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른 어중간하고 쉬운 일을 택했다면, 과연 지금처럼 될 수 있었을까?

오시안은 아니라고 보았다.

'꼭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긴 하지만.'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

오시안은 굳이 검을 쥐는 것을 고집하지 않아도 됐다.

신분이 불확실하다지만, 그런 사람도 받아 주는 곳은 어디든지 있을 테니까.

가령 인력이 궁한 식당의 종업원 같은 걸로 일을 해도 좋았다.

안전하게, 주어진 월급을 받으면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맞나?'

오시안은 전생을 떠올려 보았다.

가족도 없이, 홀로 회사를 다니면서 출퇴근만 반복하던 삶.

무기력과 권태로 점철된 그것을 그만두지 못한 것은 용기가 없어서였다.

삶에 회의감을 품으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딱 어항에 갇힌 금붕어의 꼴이 아닌가.

그럼에도 버틸 수 있던 것은 안식이 하나 있어서였다.

모니터 속에 펼쳐진 또 하나의 세상.

그곳에서 그는 자유였다. 어디든지 탐방하고 돌아다녔고 다양한 존재와 만나고 싸웠다.

때로는 분노하기도 했고 몇 번이고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이번에도 한 번만 더.

그런 생각으로 계속 견뎌왔다.

그리고 지금.

오시안은 꿈에 그리던 세상에 오게 됐다.

비록 이 세상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라졌고, 옛날 모습은 씻은 듯이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모험과 낭만이 있는 세계였다.

그런 곳에서 자신이, 과연 옛날과 똑같은 반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어.'

오시안은 그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은 하나였다.

"더 강한 녀석이 나타나도, 나는 계속 지금처럼 싸울 거다."

더 다양한 전투경험과 강자와의 싸움은, 그를 더 높은 경지로 이끌 양분이 되어 줄 테니까.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분명 언젠가 도달하게 되겠지.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에.

"알겠습니다."

로난은 어쩔 수 없다면서, 그러면서도 어딘가 만족 어린 미소를 흘렸다.

"사실 말하는 저도 마냥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의뢰를 성공한 날이니, 기쁜 마음으로 축하를 드리는 것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맞아 맞아! 그 정도 대답은 해 줘야 우리 후배라 할 수 있지!"

로레인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안은 이런 칭찬을 받을 정도인가 싶어서 물었다.

"그 정도인가? 난 기본적인 대답을 한 것 같은데."

"그 기본적인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들이 수두룩한데 뭐. 실력이 있어도 마음가짐의 문제가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의 수준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 후배는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네!"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기대고 있던 디올란이 덧붙였다.

"뭐, 여기 소속된 사람들은 다 고르고 골라서 데려온 사람들이니까."

"그것도 맞아. 로난 이 녀석, 생긴 건 되게 수상해 보여도 사람 고르는 눈은 뛰어나거든. 단순히 실력만 있다고 해서 데려오는 게 아니야."

"그럼 뭘 보고 데려오는 거지?"

"말했잖아. 마음가짐이라고."

"그걸 알 수 있나?"

"뭐, 본인은 그런 것이 느껴진다나 봐. 자신 나름의 촉이 있다고 하던데?"

로레인이 로난을 흘겨보며 말했다.

로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이번 대답으로 확실하게 됐어. 역시 너는 우리 사무실 소속 해결사에 어울려."

"방금 전 대답이 충분한 합격점이 된 모양이군."

"그래. 너도 이제 우리 가족이야!"

가족인가.

오시안은 왜 바이올렛 폭스가 평범한 해결사 사무소와 다른 느낌이 드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해결사들이 순수하게 돈과 실리로 뭉친 이익집단이라면,

이들은 그저 순수하게 정과 마음에 이끌린 자들이었다.

차가운 계약 관계로 묶인 것이 아닌, 따뜻한 감정으로 이루어진 집단.

오시안은 그 말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족이라.

그에겐 가족이 없다. 태어났다는 것은 생물학적 부모가 있다는 거겠지만,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환경은 고아원이었으니까.

그런 곳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아득바득 노력했고, 사회인으로서 나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허전함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가족이란 뭘까. 가족이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사탕을 떠올리는 것과 같았다.

떠올리려 해도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기 힘들었다.

두루뭉술하고 희미하고 간절히 바라다 포기하게 되는,

그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무언가라고만 여겼다.

'가족인가.'

그랬는데 지금, 로레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여기 소속된 해결사들은, 가족처럼 지낸다고.

가족 같은 회사, 같은 그런 타이틀과는 달랐다.

아마 그 말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곳에 소속된 해결사들 또한 저마다 말 못 할 과거나 아픔을 품고 있다는 것까지도.

'너는 그런 것도 꿰뚫고서 사람들을 모은 건가.'

오시안이 눈을 뜨며 로레인을 빤히 응시했다.

"어, 어...."

로레인은 오시안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좀, 선을 넘었나?'

오시안의 호쾌한 답변과, 모처럼 후배가 큰 의뢰를 성공했다는 기쁨에 축하해 준다는 마음으로 과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오시안은 딱 봐도 고귀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무슨 이유로 검을 쥐고 이 도시에 흘러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이 가족이라는 말을 함부로 꺼냈으니 기분이 상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어, 어쩌지?'

'내가 알아?'

로레인이 디올란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눈빛으로 물었지만, 디올란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때 오시안이 말했다.

"가족...."

"무, 물론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는 거야! 응. 아, 혹시 내 말이 뭔가 기분이 나빴다거나 하면...."

"...나쁘지 않군."

"어, 뭐라고?"

"나쁘지 않다고."

오시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이 짓는다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따스해 보이는 미소였다.

'미친....'

로레인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저 얼굴로 저런 미소라니, 진짜 반칙 아니야?'

물론 그 미소는 신기루처럼 금방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방금 전 미소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할 거지?"

오시안이 에나를 향해 물었다.

"나, 나?"

"그래. 모처럼 도시에 왔으니, 이제 뭘 할지 정해야 하지 않나."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머무르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면 어떤가."

"그건...."

"물론 강요는 아니다. 단지 고민을 해보라는 거지. 네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나가서 방금 전 마녀를 따라가도 된다."

"아니, 아무리 나라도 그건 좀...."

에나는 그렇게 말하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아. 사실 지금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면 여기에 머물러도 된다. 그렇지 않나. 로난."

"아하하. 제 의견도 물어주시는 겁니까? 이거 정말 감사하군요. 제 대답은 얼마든지 가능하다입니다."

"그치만... 나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야."

에나가 허심탄회하게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바이올렛 폭스 사람들을 보며 부럽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여기에 끼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이들에 비하면 자신은 뭔가 보잘것없다고 느낀 것이다.

"뭐야. 고작 그런 거였어? 우린 그런 거 신경 안 써!"

로레인이 걱정 말라며 에나를 위로했다.

"애초에 처음부터 다 잘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어?"

디올란과 로난의 시선이 오시안을 향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대부분은 자신이 뭘 잘하는지도 잘 몰라. 그런 건 차차 알아가는 거지. 그렇지 남자들?"

대답을 반쯤 요구하는 물음에 세 명의 남자들은 서로를 돌아볼 뿐이었다.

"그렇지, 남자들?"

"크흠, 그렇지."

"후후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제 눈에는 이미 에나 그룬트양의 가능성이 넘쳐 보이는군요."

"뭐, 보통 그런 거 아니겠어?"

이제야 대답이 나오자 로레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에나에게 말했다.

"그러니 천천히 생각해 봐. 너는 아직 젊고, 시간이 많이 있으니까. 급할 필요 없어."

"그,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에나 그룬트. 성냥불의 마녀가 바이올렛 폭스에 영입되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마녀의 능력 빼고 할 줄 아는 거 뭐 없어?"

"음. 별거 없어요."

"뭔데?"

에나가 말하는 것조차 쑥스럽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제빵, 요리, 주조, 작문, 서비스업, 차량운전 정도요. 그 외에 몇 개 더 있긴 한데 자랑할 거리는 아니에요."

"...."

자리의 모두가 에나를 황당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너무 많지 않아?

*

화려한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성당의 내부.

다른 성당과 다르게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 대신 크고 작은 무수한 양초들이 빛을 내며 내부를 주홍색으로 물들였다.

넓고 광활한 공간이지만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곳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소년은 성당의 맨 앞까지 걸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성하, 아버님의 어린양, 마르티네즈가 부름을 받고 찾아왔습니다."

"그래, 왔느냐."

성황이라 불린 자는 인자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었다.

그는 향불을 통해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촛대에 불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왜 너를 부른 줄 아느냐."

"...예. 염치가 없지만 저는 결국 이단의 사냥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수치스럽게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기까지 했죠. 부덕의 소치입니다."

"그래. 그 일에 실패했지. 하지만 나는 너를 탓하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란다."

촛대에 불을 붙인 성황이 마르티네즈를 돌아보았다.

마르티네즈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다.

"티르나로 가거라."

"예?"

마르티네즈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신실한 마르티네즈를 놀라게 만들 정도로 성황의 말은 충격적이었으니까.

"마르티네즈, 나는 네 실패를 탓하지 않는다."

"어째서...."

"너는 아직 젊다. 그리고 경험이 부족하지. 미래엔 필시 최고의 성기사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의 너는 부족하다. 이해하느냐?"

"예,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르티네즈는 지금까지 패배를 몰랐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패배를 겪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패배를 선사해 준 남자는, 이단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고귀하고 강한 자였다.

"세상은 넓다. 우리 페트라 교황청이 대륙 전역에 강한 권세를 자랑하지만,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도 있지. 그중 대표적인 곳을 너도 잘 알 거다."

"...죄악의 도시, 티르나."

"그곳에 온갖 것들이 도사리고 있지. 이단, 흑마법사, 그리고 악마의 존재마저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그곳에 가서 이단을 없애시길 바라십니까?"

"그럴 리가."

성황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마르티네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따스한 온기에 마르티네즈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향했다.

"나는 네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구나."

성황으로서가 아닌, 조금 더 마음을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 말에 마르티네즈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성황 폐하. 저는...."

"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많은 경험을 쌓거라. 그렇게 하면 너의 그 빛나는 재능은 더욱 다듬어져 완숙의 경지로 들어서게 될 테니."

성황은 마르티네즈의 어깨에서 손을 떼 등을 보였다.

"티르나에 우리 페트라 교단의 지부가 있을 거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한번 겪어 보거라."

"저는...."

"그건 너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하다. 임무에 실패한 자에게, 죄악의 도시로 유배를 보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르티네즈는 잘 안다.

성황이 자신을 얼마나 배려해서 저 말을 한 것인지.

다른 대주교들이나 성기사들이 자신의 임무 실패를 빌미로 벌을 내리라는 걸 어떻게든 유예하면서 내린 결과이리라.

마르티네즈는 그걸 알기에 감복하여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한 명의 성기사가 티르나로 향했다.

54화. 인지의 변화 (2)

나는 검을 휘둘렀다.

검의 날이 빛을 머금고 번뜩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내가 지금 검을 휘두르는 장소는 바이올렛 폭스 주점 뒤쪽에 마련된 자그마한 공터.

주변이 다른 건축물로 둘러싸여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수련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나는 검을 휘두르면서 그날의 감각을 집중했다.

'성운비단을 사용했을 때를 떠올리자.'

위에서 아래로 한 번의 검격.

그때마다 검 끝에서 은은한 별빛이 흘러나와 허공에 잔상을 만들었다.

몸을 움직였다.

내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등 뒤로 희끄무레한 별빛이 반짝였다.

'그날의 싸움은 내가 상대방의 특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어.'

내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것은 그날의 싸움.

황금 들판에서 마르티네즈와 담판을 벌였던 때다.

순수한 출력만 놓고 보면 마르티네즈는 나보다 훨씬 더 강했다.

내가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던 건, 성기사가 사용하는 스킬과 특성을 손바닥 위에 놓듯 꿰뚫은 것과.

성운비단의 사용법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성운비단의 특징은 착용자의 보호와 동시에 신체능력의 전반적인 상승.

특히 형상을 바꿀 수 있는 별빛 망토는 그 자체만으로 팔방미인이라 할 수 있는 기능이다.

짧지만 허공을 잠시나마 체공할 수 있거니와 빠르게 돌진을 가능하게 해주며, 여의치 않으면 공격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물론 상대가 아직은 어수룩했던 이유도 있겠지.

하지만 다시 녀석과 맞붙게 된다면, 이전처럼 확실한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힘의 분배가 필요해.'

성광검 자체는 이제 무난하게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막 사용법을 깨달은 성운비단은 그러지 않았다.

그날 애써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지, 성운비단을 과하게 사용한 탓에 상당히 정신적으로 지쳤었다.

과도한 출력에서 이어지는 탈진현상.

앞으로도 성운비단을 자주 사용해야 하는데, 힘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단기적으로 끝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출력을 최대한 아낄 필요가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적정량의 힘만. 딱 그 정도로 해야 해.'

힘의 분배는 중요하다.

시작부터 최대치로 달렸다간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지쳐 자빠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성운비단의 출력을 조절하는 법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오래 유지해도 지쳐서 쓰러지지 않게 조절하자.'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강하게 펼치고 싶으면 출력을 최대로 올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가늘고 길게 펼치려니 보통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게 아니었다.

섬세한 유리를 세공하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힘이 부족하면 모양이 안 나오고, 과하면 유리가 깨지는 상황 속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줄타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몇 번 해보니 감은 생각보다 금방 잡혔다.

당장은 아니지만 근시일 내로 성운비단의 사용법을 완전히 깨우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사용하는 건 어렵지만, 한번 깨닫기만 한다면 그 이후에는 쉬워. 그나마 천만다행이야.'

사용법을 모를 때는 어떻게 해야 깨달아야 하는지 막막한데, 한번 길을 뚫으면 그 이후는 숨 쉬듯 자연스럽다.

스킬을 배우는 것과, 해금한 뒤의 차이라 해야 하나?

하지만 이걸로 좋아하기엔 너무 일렀다.

아직 내가 사용해야 할 기술은 너무 많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성광뿐만이 아니야. 나중을 생각하면 언제까지고 이렇게 낙천적으로 굴 수 없어.'

일륜까지는 바라진 않는다.

적어도 최소 월흔까지는....

거기까지 생각을 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당장 되지도 않는 걸 붙잡는 것이 무의미한 탓도 있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실눈의 남자, 로난 롤랑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아씨 깜짝이야.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거였어?

"계속 지켜보고 있었나?"

"이런. 제가 혹시 수련을 방해했습니까?"

"아니, 안 그래도 막 끝내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모처럼 다들 모인 기념에 같이 식사나 할까 싶어서요."

생각보다 별거 아닌 이유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지."

*

바이올렛 폭스의 식탁에는 디올란과 로레인도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 준비된 요리가 나왔다. 막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오므라이스였다.

꽤나 조촐한 식사라 생각하면서 한입 떠먹은 오시안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거 누가 만든 거지?'

로레인과 디올란도 비슷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오믈렛이 이렇게 맛있다고?"

세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요리를 가져온 사람을 향했다.

에나 그룬트.

바이올렛 폭스에 새롭게 들어온 마녀.

그녀는 이런 반응이 꽤 부끄러웠는지 머리에 쓴 새빨간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벼, 별거 아니에요."

"아니, 별거 아닌 수준이 아닌데. 고급 레스토랑 요리도 이런 맛은 낼 수 없다고."

디올란은 그렇게 말하며 오믈렛을 와구와구 퍼먹었다.

로레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오믈렛을 응시했다.

"이거, 혹시 위치크래프트로 만든 거야? 그게 아니면 이런 맛이 난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그, 그냥 만든 건데요."

에나는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여러 일을 하다가, 주방보조로 일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요리는 그때 배웠어요."

"주방보조를? 그런데 이 정도 실력이라고?"

"오래 못 가서 그만뒀지만요. 그래도 셰프님이 잘 대해 주셔서 원래는 감자부터 깎아야 하는데 바로 보조 자리까지 올라갔어요. 제가 떠난다고 하니까 아쉬워하셨죠. 정말 좋으신 분이었는데."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요식업계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도, 보통 주방에 들어가면 밑바닥 일부터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바로 주방보조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건, 에나의 요리 실력이 정말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에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제가 오래 머무르지 못해서 금방 나왔지만요. 배움이 짧아서 만들 줄 아는 건 몇 개 안 돼요."

"...큰일이야. 만일 에나가 다른 메뉴까지 만드는 법을 배운다면, 여긴 해결사 사무소가 아니라 레스토랑으로 직종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어."

"로레인 양. 남의 가게 비전에 대해서 멋대로 떠들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로난이 가볍게 주의를 줬지만, 로레인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표정을 보니 정말 진지하게 이 주점을 식당으로 싹 다 뜯어고칠 생각이 분명했다.

에나가 급하게 나서며 로난을 옹호해 주었다.

"괜찮아요! 저, 주조도 할 줄 알거든요!"

"...주조? 그게 된다고? 그건 또 어디서 배웠는데."

"여러 알바를 하다가 주조장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좋은 분을 만나서...."

"그런데 여긴 술을 만들기보다는 그냥 칵테일로 만드는 건데? 주조까진 갈 필요 없어."

"아, 바텐더 자격증도 있어요."

"...."

오시안과 로레인, 디올란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거 맞아?

쟤 마녀 아니야?

왜 다른 쪽으로 더 유능한 거 같지?

이 정도로 다재다능하면, 굳이 위치크래프트가 없어도 해결사로서도 상당히 뛰어나지 않을까?

모두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피어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보다."

오시안이 운을 뗐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네, 말씀하시죠, 오시안 씨."

"여기에 우리 말고 다른 해결사는 없는 건가?"

모처럼 다 모였다고 했지만, 실제로 자리에 앉은 사람은 로레인과 오시안, 디올란이 전부였다.

개개인의 실력은 뛰어나겠지만.

해결사 사무소라 부르기엔 숫자가 너무 적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바빠서 없지만, 여기 소속된 해결사가 몇 명 더 있거든요."

"그랬나."

"다들 바쁘신 분들이라 얼굴을 비추기 힘들어서 그러지, 아마 조만간 뵙게 될 날이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지?"

로난은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하다.

그가 영입한 사람들이니만큼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뛰어날 터.

디올란, 로레인보다 더 업계 선배라면.

어딜 가서도 이름을 알리는 뛰어난 해결사일 가능성이 컸다.

"으음. 어떤 사람이냐니."

로레인은 고민하듯 턱을 쓸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드네. 그래도 뭐, 나쁜 사람들은 아니야. 조금 괴짜 같은 면은 있지만. 우리도 다 알지는 못하기도 하고."

"다 모른다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도 하고, 얼굴을 안 드러내거나, 항상 우리가 없을 때만 의뢰를 받아 가는 사람도 있어."

"그래? 그러면 저 사람도 그중 하나인가?"

오시안이 한쪽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모두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 사람? 여기에 다른 누가 더 있다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드는 것과 동시에.

"어라? 벌써 들킬 줄은 몰랐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목소리는...."

모두가 당황한 반응을 보일 때, 오직 로레인만 격하게 동공을 떨었다.

그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우리 귀여운 로레인. 어딜 그렇게 가려고 하니?"

누군가 로레인을 등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로레인을 뒤에서 껴안은 사람은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미인이었다.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단발의 머리는 금발과 핑크 투톤이었고,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다.

색기 넘치는 표정과 고혹적인 몸매까지.

누구나 길을 지나가면 한 번쯤은 돌아볼 정도로 성숙함이 돋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껴안긴 로레인은 천적을 만난 아기고양이처럼 몸을 굳힌 채 얌전히 있었다.

오시안으로서는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로레인을 껴안고 그녀의 머리에 뺨을 비비던 금발의 여인은, 이내 반짝이는 눈동자로 오시안을 응시했다.

"얘가 그 신입이야?"

시선에 깃든 것은 오시안을 향한 호기심.

자신을 어떻게 발견했는지 궁금한 것이리라.

"이런. 또 이렇게 사람을 놀래키듯 나타나시는 겁니까. 세렌 양."

로난의 부드러운 지적에 세렌이 배시시 웃었다.

"이게 내 즐거움 중 하나인걸. 아, 만나서 반가워. 내 이름은 세렌 그라시아. 신입의 이름은?"

"오시안이다."

"오시안이라. 눈썰미가 꽤 뛰어난가 보네. 내가 숨어있는 것도 다 살펴보고."

"그냥 보였을 뿐인데."

오시안으로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특별한 능력을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냥 거기에 무언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고, 자세히 살펴보니 한 여인이 서 있었을 뿐이니까.

그 존재감이 희미했던 걸 보아, 기척과 모습을 감추는 모종의 기술로 보였다.

"세렌 양, 의뢰는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까?"

"응. 의뢰 완료서는 여기."

세렌은 품 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 품 안이라는 것이, 꽤 깊은 곳에서 꺼낸 것이기에 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픽 돌렸다.

디올란도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오시안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로난은 실눈으로 종이를 응시하다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런. 여전히 장난이 짓궂으신 분이군요."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나 참. 너는 정말 재미없는 남자야. 어쩜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는 거야?"

"지금도 몹시 당황하는 중입니다만."

"응. 그 농담은 조금 재미있었어."

농담 아닌데.

로난은 살짝 시무룩해진 채, 의뢰 완료서를 펼쳐 읽었다.

제대로 의뢰를 완수한 걸 확인한 로난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 언니. 그보다 좀 놓아주면 안 돼요?"

"으응? 왜~. 나는 로레인이랑 이렇게 껴안는 게 좋은데?"

"제가 답답해 죽을 거 같다고요!"

로레인이 앓는 소리를 냈다.

저 실랑이를 보고도 로난이 말리지 않는 걸 보면, 둘 사이에 저런 일이 이전부터 흔하게 벌어진 것으로 보였다.

'세렌 그라시아인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났다.

마법?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위치크래프트라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마녀도 마법사도 아닌 다른 모종의 힘.

오시안이 머릿속으로 어떤 능력일지 생각하는 그때, 세렌의 관심의 화살이 이번엔 오시안을 향했다.

"오는 길에 소식 들었어. 최근에 의뢰 큰 거 하나를 완수했다면서? 해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성장 속도라니. 로난이 역시 사람 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세렌은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에게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윙크까지 했다.

어지간한 남자라면 단번에 표정을 녹여 버릴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는 덤이었다.

'와, 진짜 예쁘네.'

하지만 속마음과 다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오시안의 대답은 무덤덤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흐응."

세렌은 입꼬리를 삐뚜룸하게 세우더니 로레인으로부터 떨어졌다.

로레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때 세렌은 발랄한 발걸음으로 오시안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모처럼 들어온 신입인데, 궁금한 것이 있다면 이 누나에게 물어도 좋아. 뭐든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줄게. 아 물론 나에 관한 아주 은밀하고 신체적인 정보도 마찬가지야."

의도적으로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는 세렌은, 이래도 안 넘어올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오시안은 그런 세렌을 새까만 눈동자로 응시했다.

'뭐야, 정말 신입 해결사가 맞아?'

세렌은 오시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로난이 고른 인재에 실제로 큼직한 의뢰를 완수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이 정도로 '완성'되어 있는 사람은, 이 도시 전체를 뒤져봐도 극히 드문 케이스였다.

게다가 시선을 통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위압감.

'이건 그 아저씨한테서만 느낄 수 있는 건데.'

어디선가 느껴 본 기시감.

세렌 그라시아의 뇌리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이올렛 폭스의 서열 1위 해결사.

이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

특급 해결사.

바실리오.

'이 신입이 그 사람과 동급이라고?'

세렌 그라시아의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55화. 순위

세렌은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에이, 단순한 착각이겠지.'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구른 것도 모자라, 그 과거조차 불명확하고, 지니고 있는 무력은 자타공인 최강의 해결사라 불리는 남자다.

해결사라는 규격으로 묶는 것도 미안한 사람을 상대로, 이제 막 업계에 들어온 신입을 비교한다니.

세렌은 자신이 속으로 너무 나갔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품게 만들 정도라면, 무언가 있는 건 맞겠지.'

지금까지 보여 준 태도와 일전 성공한 의뢰까지.

오시안은 신입이지만, 분명 그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일 것이다.

'실력은 알겠어. 알겠는데, 인성은 과연 어떨까.'

해결사 업계는 항상 실력 지상주의다.

실력만 있으면,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이고 불법을 저질러도 용인해 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세렌은 그것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세렌이 이 업계에 일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재능 있고 젊은 해결사는 대게 성격이 개차반이거나 싸가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첫인상만 보면 돈 많은 집안의 도련님 같고.'

벼락부자는 아니고, 어딘가 역사와 명망이 있는 고위급 귀족이라 해야 할까.

차분한 태도와 앙다문 입술, 자신을 보고도 별다른 동요가 없는 고요한 눈동자까지.

그야말로 혼신을 다해 조각을 한 미남 같았다.

아니면 화가가 붓질 한땀 한땀 공을 들여서 그린 명화라거나.

바로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데도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외모.

거기에 방점을 찍는 것은 그 표정이었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어필하고 있는데도, 거기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티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 애초에 관심 자체가 없다는 뜻.

세렌은 거기에 감탄을 하면서도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궁금한 거 없어? 뭐든지 대답해 줄 수 있는데."

"뭐든지?"

그 말에 반응한 것을 보고 세렌이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 결국 이렇게까지 나오면 반응을 할 수밖에 없겠지.

"응, 뭐든지."

"그러면."

오시안이 세렌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너는 여기서 얼마나 강하지?"

"으, 응?"

너무 상식 밖의 질문이라 세렌이 목소리를 떨었다.

장난을 치는 건가 싶어서 오시안의 눈빛을 보았지만,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었다.

보여 준 태도를 생각하면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 같은데.

'얘, 원래 이런 성격이야?'

세렌이 눈동자를 스르륵 굴려 로난을 향해 물었다.

로난은 그 광경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참.

로난 녀석이 또 재미있는 신입을 데려왔다 싶으면서, 세렌은 방긋 웃었다.

"조금 더 프라이버시한 질문을 해도 상관없었는데, 아쉽네."

"관심 없다."

"...아 그러셔?"

저렇게 딱 잘라서 말할 것까지 있나?

세렌은 살짝 심통이 난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방금 전 오시안이 한 질문에는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내가 얼마나 강하냐 했지? 내 능력을 보면 알지 않을까?"

세렌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세렌은 마치 신기루라도 된 것처럼 존재하지 않게 됐다.

오시안의 눈길이 가늘게 좁혀졌다.

분명 은신 능력인데 기척까지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발견할 수 있던 것은 세렌이 능력을 가볍게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처음 보는 기술이야. 도적 계열들이 사용하는 고유 은신과는 달라. 그렇다고 마법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실종된 고대 주술도 아니야.'

게임 속에 존재하던 온갖 지식들이 떠올랐지만, 세렌의 능력은 그 어느 하나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없었다.

뒤바뀐 세상 속에서 새롭게 나타난 부류의 능력이라는 소리리라.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무언가 있다는 기척도 없다.

이런 능력이라면 확실히 로난이 데려올 만하다 싶다는 순간, 오시안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탁.

"어라?"

세렌은 오시안의 뺨을 찌르려던 손이 붙잡힌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심 당혹스러운 건 손을 잡은 오시안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뭔가 뺨이 찌르르 울려서 자기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고 말았다.

그랬는데 세렌의 손이 잡힌 것이었다.

"와, 신입 감 엄청나게 좋구나?"

세렌은 웃으며 말했지만, 오시안을 보는 눈빛이 한층 더 진지해져 있었다.

처음에 자신을 발견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잡아 줄 거야? 잘생긴 남자의 뜨거운 어프로치가 싫지만은 않은데, 슬슬 잡힌 손목이 아파 오려 그러거든."

"...그래."

오시안은 손을 놓아주었다.

"보다시피 내 능력은 이거야. 실상 전투에서는 크게 쓸모는 없지."

세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오시안은 그 대답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의 은신은 대단히 뛰어난 능력이었고, 그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일에 대체가 가능했지만.

직감이라 해야 할까, 본능이라 해야 할까.

세렌 그라시아에게는 단순히 저 능력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쪽이 이 사무소 서열 2위인가?"

"내가? 아하하. 그렇게 높게 봐줘서 고맙네. 미안하지만 나는 3번째야."

세 개의 손가락을 펼치며 말하는 세렌.

"3번째라."

"내 위에 둘이 더 있어. 그리고 여기 있는 디올란과 우리 귀염둥이 로레인은 5, 6번째고."

"그러면 내가 7번째겠군."

그렇다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3명이 더 있다는 말.

세렌도 상당히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인데, 이 사무소의 서열 1위는 대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함이 들었다.

'당장 로난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지만.'

로난이라면 오히려 웃으면서 직접 만나보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러니 묻지 않기로 했다.

대답을 강요하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고, 이런 궁금증은 나중의 재미로 남겨놓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아, 오믈렛 다 식었다."

로레인의 한마디에 일행들은 뒤늦게 식사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라?"

세렌은 자신이 식사를 방해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혀를 내밀었다.

"미안해, 친구들~."

저렇게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말하니 무어라 따지기도 그랬다.

"저는 우선 의뢰 관련해서 세렌 씨와 대화를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로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향했다.

세렌은 자연스럽게 로난의 뒤에 따라붙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 세렌은 오시안을 슬쩍 응시하더니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탁.

로난의 사무실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세렌이 입을 열었다.

"저거 뭐야?"

세렌이 말하는 저것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아는 로난은 그저 미소를 흘릴 분이었다.

"놀라셨습니까?"

"놀라고 자시고, 내 은신을 꿰뚫어 봤잖아. 처음 거야 장난치려고 적당히 숨은 거라 감이 좋아서 들킬 수 있다 쳐. 하지만 그다음에 한 건 나도 나름 진심을 다한 거였어."

그랬는데 걸렸다.

물론 손가락이 뺨에 닿기 직전까지 오시안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거의 직전, 섬전과도 같은 움직임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낸 것이다.

직전에 은신을 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듣기로는 신체능력 강화계열 뮤턴트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감각이 지나치게 예리한 거 아니야? 뭔가 이상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단순히 신체강화가 아니라, 검에서 뭐 이상한 걸 뽑아낸다며?"

"본인 말로는 별빛이라고 하더군요."

"과거도 알 수 없고, 티르나에 갑자기 나타났다 했었지."

세렌의 얼굴에 미소가 지워졌다.

"위험한 거 아니야?"

"...."

로난의 실눈이 세렌을 응시했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지만, 그 희미한 눈빛에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질책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나도 그냥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야. 과거가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잖아. 저 정도의 실력자라면, 어디에 있어도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야."

"이 도시에 그런 인물이 한둘은 아니죠."

"그걸 감안해도 이상하다는 거야. 어쩌면 저 아이는 [흰 집]에서 나온 걸지도...."

"세렌 그라시아."

처음으로 로난이 존댓말 없이 세렌의 이름을 불렀다.

오시안에 대해 무어라 더 말하려던 세렌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그 이상의 말은, 저의 안목에 대한 불신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해."

백기를 든 것은 세렌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조금 혼란스러워서 그랬어. 이제 막 해결사가 된 신입에게 내 은신이 간파당했잖아."

"이해합니다."

로난은 다시 생긋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아주 놀란 참입니다."

티가 안 났을 뿐이지, 로난은 오시안이 세렌의 손을 잡았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렌의 능력에 대해서는 그녀 다음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이 로난이었으니까.

세렌의 은신은 5성급 이상 마법사의 탐지마법에도 걸리지 않던 전적이 있을 정도다.

5성급 마법사의 탐지가 땅속의 개미까지 찾아낼 정도라는 걸 생각하면 가히 말이 안 되는 수준인 것이다.

그걸 오시안이 알아차린 것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당신이 놀랐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데?"

"정말입니다."

"거짓말."

"이런이런. 제 진심을 이렇게 몰라주시다니. 너무 서운하군요."

"날 위로해 줄 생각이라면 됐네요."

진짠데.

로난은 자신의 진심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애석했다.

로레인은 그렇다 쳐도 세렌은 또 오래 알고 지내온 사이인데 말이다.

"오시안 씨에 대해서는 너무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네. 내가 좀 많이 예민했나 봐."

"이해합니다. 그 정도로 오시안 씨가 보여 주는 모습은 너무 상식 밖이라서요."

오시안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로난이 오시안을 믿기로 했다면, 세렌도 이 이상 무어라 할 말은 없었다.

단순한 해결사와 중개인을 넘어서, 서로 신뢰관계로 묶여 있기에 가능한 타협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소식 못 들었어?"

"최근 들려오는 소식보다, 더 자세히 아는 분이 제 앞에 있지 않습니까."

"뭐, 똑같아. 아저씨는 오지 탐험 중이고, 그 왕재수는 평소처럼 떠돌고. 버릇없는 꼬맹이는 지금 막 의뢰에 들어갔을걸? 성격 생각하면 다 때려 부수고 오겠지."

"다들 무사하다니 다행이군요."

"사막 한복판에 떨어뜨려도 죽지 않을 사람들이잖아? 그보다 그 소식 들었어?"

"무엇 말입니까."

세렌은 은근한 눈빛으로 로난을 응시했다.

"카를레앙 왕국에서 티르나로 사절단을 보낸다 하더라고."

"카를레앙 왕국...."

왕국의 이름을 읊조린 로난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사절단이야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 겁니까?"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다니까."

소파에 옆으로 앉은 세렌은 팔걸이에 다리를 올렸다.

"카를레앙 왕조가 티르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알지? 절대왕권 국가에서는 자유의 도시를 껄끄럽다 못해 혐오하니까. 그래서 이전까지 보낸 사절단은 그저 행색만 갖춘 수준으로 했잖아."

"예, 그랬었죠."

"하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 카를레앙 왕국에서 보내는 사절단에, 왕족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고."

그 말에 로난의 눈꼬리가 휘었다.

"왕족이, 말입니까?"

"응. 물론 막 대단한 것은 아니고 서열 맨 끝자락에 있는 사람이야. 그렇다 해도 핏줄을 보낸다는 것은, 왕국이 평소와 다르게 무언가 다른 변화를 꾀한다는 소리겠지."

세렌은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 하나를 로난을 향해 휘리릭 날렸다.

로난은 책상 위에 가볍게 착지한 편지의 인장을 제거하고 내용물을 훑었다.

"물론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지와 함께 동봉된 사진에는, 작은 체구의 소녀 사진이 함께 끼어 있었다.

카를레앙 왕조의 핏줄이자, 현 왕위계승권 서열 꼴등.

새장 속 인형이라 불리는 오를레아 왕녀.

그녀가 온다는 것은, 티르나에서도 상당히 고위급 인사가 이번 일에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도시에 비바람이 불겠군요."

부디 그 비바람이 무사히 지나가길.

로난은 그렇게 바랄 수밖에 없었다.

56화. 왕족 호위 (1)

의뢰가 끝난 오시안은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훈련에 집중했다.

성광검과 성운비단을 깨우친 지금, 그것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수차례 노력을 들인 덕분에 상당한 진전을 가질 수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만이라도 만족스러운 성과라 할 수 있었겠지만,

놀랍게도 두 기술을 세밀하게 다듬을수록, 새로운 길에 대한 가능성이 어렴풋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희미하게 가능성이 보이는 정도야. 어렴풋이 이런 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제대로 구현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겠어.'

조바심을 느낄 필요는 없으리라.

이미 필요한 것들은 충분히 얻어낸 뒤였으니까.

이제는 고정 수련장이 돼 버린 공터를 나선 오시안은, 바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로난을 발견했다.

"평화의 사절단이 마침내 오는 모양이군."

로난이 읽고 있는 신문의 1면에 적힌 기사를 슬쩍 보고 한 소리였다.

어찌나 자주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런 시사나 분위기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오시안조차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로난은 펼쳤던 신문을 조용히 접으며 바 테이블 위에 놓았다.

"지금까지 말이 정말 많았으니까요.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카를레앙 왕국이라 했던가."

오시안으로서는 처음 듣는 곳이었다.

그가 알던 게임 시절의 배경과 지금은 너무 오랜 세월을 동떨어져 지냈다.

기존의 왕국과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것은 역사의 흐름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지도의 위치를 보건대, 나름 기억에 있던 곳이었다.

비옥한 땅과 넓은 평야, 목초지에서 소와 양떼를 키우는 걸로 유명했고 용병과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었다.

서브퀘스트가 많이 있어서 저곳에서 자주 평판작을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카를레앙 왕국이 티르나와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것이 그렇게도 신기한 일인가? 보통 사이가 나빴던 게 아닌 모양인데."

"비단 카를레앙 왕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티르나라는 도시는 주변 왕국에서 썩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거든요."

"자유의 도시라 그런가."

티르나는 도시지만, 동시에 하나의 국가나 다름없었다.

50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초거대도시 국가.

동시에 신분의 고하에 막론하고 능력이 있다면 천대받는 아인종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아직도 신분제가 만연해 있는 왕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티르나는 자신들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도시일 터.

하지만 그렇다고 티르나를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고작 도시라고 부르기엔 티르나의 규모가 지나칠 정도로 거대했기 때문이다.

티르나에 갖춰진 인프라도 인프라지만, 티르나라는 도시 자체가 지니고 있는 거대한 군사 규모는 어지간한 왕국은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군 관련자가 말하기를, 티르나가 지닌 힘이라면 대륙 전체와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했을 정도.

그러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티르나라는 도시가 고작 개인에 의해서 통치받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라는 특성답게, 티르나에는 무수한 지도자들이 존재한다.

다섯 시장부터 해서, 그 아래로 각 장관과 고위급 공무원과 최고행정책임자인 구지사(區知事).

그 외에도 마탑, 대기업, 군 주요 인사들까지.

티르나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기회의 장.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권한과 목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일들은 엄중한 회의를 거쳐서 진행된다.

당연히 전쟁같이 커다란 사안은 자체적인 내부 회의에서 기각될 수밖에 없다.

"티르나가 움직이지 않으니, 주변 국가에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죠. 티르나와 손을 잡고서 그들이 지닌 문물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기를 쓰고서 그들을 이 대륙에서 없애려고 하거나."

"카를레앙 왕국은 전형적인 후자의 국가였다는 거군."

"여러 왕국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카를레앙 왕국은 특히나 심했거든요. 그쪽 왕조는 뭐라고 해야 할까, 귀족들의 허영과 자만심이 유독 심해서요."

로난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능력도 없이, 그저 혈통만 좋게 타고난 머저리들이 지배하는 곳답죠."

평소답지 않은 로난의 날카로운 언행.

오시안은 그런 로난을 살짝 의외라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주 순간이지만, 카를레앙 왕국에 대해 말하는 로난에게서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아아. 물론 그렇다고 티르나가 옳다거나 정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의 도시라는 말은 듣기는 좋지만, 이곳에도 어둠은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과도한 능력 지상주의.

능력이 없는 자는 사회에서 도태되어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풍조까지도.

게다가 티르나는 황금의 도시라는 이명답게, 돈이 많은 것을 해결하는 곳이다.

불법을 저질러도 돈이 있으면 무마할 수 있고, 죄를 짓지 않아도 돈이 없으면 벌을 받는다.

과연 티르나와 왕국 중 어디가 더 낫냐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 또한 사실.

카를레앙 왕국과의 대립은 결국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닌, 이념과 이념의 싸움인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를레앙 왕국이 평화의 사절단을 보냈다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저도 그게 궁금한 참입니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물어뜯던 사이인데 웃으면서 악수하려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거든요. 뭐, 국제사회에서 그런 일이야 흔하다고는 하지만...."

"요컨대 뒤가 구리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요. 이런 때일수록 저희는 그저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는 것이 옳습니다."

"소나기는 피해 가라 이 말인가."

"아주 정확합니다."

오시안은 로난이 접은 신문에 적힌 글귀를 눈으로 훑었다.

카를레앙 왕국은 이번에 작정을 했는지, 사절단으로 무려 왕족을 보낸다는 문장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오를레아 왕녀.

비록 그것이 왕위계승권 서열 꼴찌의 어린 왕녀라 하더라도 왕족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는 남다르다.

그것 때문에 티르나에서도 이번 사태를 꽤 중요하게 여겨서 성대한 환영식을 한다는 말이 돌았다.

사이가 나쁘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 판단의 요지이리라.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이번 일은 시의 공무원들과 군 쪽에서 처리할 일이니까요. 저희 해결사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래, 그게 정상이겠지."

오시안은 그렇게 답하면서도 신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모른다.

단지, 신문의 기사를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정말로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오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찝찝함을 떨쳐냈다.

*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를레아 공녀의 티르나 방문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오시안은 늘 그렇듯 바이올렛 폭스로 나왔다.

해결사가 굳이 사무소에 들락날락거릴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 폭스 주점 뒤편에는 그래도 수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도 있으니 오시안으로서는 오지 않을 이유가 오히려 적었다.

딸랑.

문을 열자 방울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늘 그렇듯 가게의 문을 연 로난이 이쪽을 웃으며 반겨주었을 터.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손님이 먼저 와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50대에 접어든 남성이었다.

바이올렛 폭스에 이처럼 단신으로 의뢰를 하는 손님들은 꽤 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높은 의뢰비를 혼자서도 감당 가능한, 상당한 재력가들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이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해도 오시안은, 저 중년의 남자가 여타 의뢰인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의 복장도 복장이지만, 그와 마주 보며 앉아 있는 로난의 표정 때문이었다.

'흠.'

로난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실눈을 유지하며 미소를 잃지 않는,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은 표정.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시안은 로난이 지금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제안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지. 이건 가져가도록 하겠네."

오시안의 등장을 알아차린 중년의 남성은 테이블 위에 놓은 무언가를 챙기더니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오시안을 슬쩍 보더니, 의외라는 눈빛을 하며 그대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시안은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봤다.

자리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들으면 안 될 이야기라도 한 것 같았다.

"딱 봐도 평범한 의뢰인은 아닌 모양이군."

오시안은 바 테이블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지인인가?"

"정확히는 알았던 사람이었죠."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던 모양이군."

로난에게 지인이 있다는 거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로난 본인이 싫어하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꺼리는 인연이 있는 법이니까.

'굳이 그걸 캐물을 필요는 없지. 괜히 로난의 기분만 상하게 할 테니까.'

오시안은 에나가 출근을 한다면, 점심으로 뭘 만들어달라고 할지 메뉴를 고민했다.

최근 에나가 만들어 준 요리가 유명세를 탄 덕분에, 바이올렛 폭스 주점에는 밤만 되면 사람들이 꽤나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에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몸이 되어서, 그녀의 요리를 먹고 싶다면 손님이 오지 않을 때를 노려야만 했다.

"...방금 전 나갔던 남자는 프렌피츠입니다. 과거 저를, 아니 저희 어머니를 모셨던 남자이지요."

로난이 갑자기 말을 꺼낸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로난은 조금 전 프렌피츠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언제나처럼 바이올렛 폭스에 들어가서 아침 신문을 읽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그 남자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나?"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로군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는 얼굴 보지 말자고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의뢰를 요청하러 왔다."

프렌피츠는 자연스럽게 로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감히 당신이 제 앞에 앉아서는 안 될 텐데요?"

"의뢰를 받지 않겠다는 건가?"

"저희 사무소는 의뢰 정도는 얼마든지 가려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되는 곳이고요. 그리고 당신의 의뢰는, 아직 듣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군요."

그 말에 프렌피츠는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안주머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을 뿐.

그것을 본 로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걸 되찾고 싶지 않나."

로난의 눈꼬리가 순간이지만 파르르 떨렸다.

애써 감정을 추스른 로난이 프렌피츠를 응시했다.

그의 실눈이 이 전보다 한껏 가늘고 길게 찢어져 있었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들렸다면 어쩔 수 없지."

"이걸 들고서 저를 찾아올 정도라면, 그쪽도 어지간히도 절박한 와중인가 보군요. 어떻게든 권력에 빌붙으려는 그 태도가 가히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알고 있었나?"

"그 빌어먹을 추종자들이 오를레아 왕녀에게 줄을 섰다는 것은 전해 들었죠. 아마 알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그렇게 발품을 팔아서 쥔 것이 썩은 동아줄이었다고요."

로난의 도발에 프렌피츠는 비웃음으로 응대했다.

"흥, 아직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해야지.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 그게 아닐 텐데? 이걸 되돌려 받고 싶지 않나?"

프렌피르가 내민 물건.

그것은 펜던트 목걸이였다. 오래되었는지 사람의 손때가 타 있었다.

전혀 고급스럽지도 않고,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처럼 보였다.

하지만 로난에게는 남다른 물건이었다.

"그래도 꼴에 해결사 사무소를 한다니, 정식 의뢰에 맞춰서 의뢰서는 여기 두고 가지."

프렌피츠는 가져온 서류를 로난의 앞에 툭 던지듯 넘겼다.

로난은 그것을 받지 않았지만, 프렌피츠는 개의치 않아 했다.

어차피 그가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로난이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쥐었다.

프렌피츠의 입가에 조소가 맺히려는 그때, 방울 소리와 함께 주점의 문이 열렸다.

*

"권력을 위해 저를 배신했던 남자가, 제게 의뢰를 요청했더군요."

오시안은 말없이 로난을 빤히 응시했다.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저 가만히 오늘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는데, 의뢰의 내용까지 듣게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관심 없다고 하기도 그래서, 오시안은 일단 들어는 보기로 했다.

대체 그 내용이 뭔지 궁금하던 차이기도 했고.

"의뢰의 내용은... 오를레아 왕녀의 호위입니다."

57화. 왕족 호위 (2)

오를레아 왕녀의 호위라는 말에 오시안의 눈썹이 살짝 위로 휘었다.

이웃 나라 귀빈이 도시에 찾아오니 그녀를 위한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위 또한 그 일선 중 하나였다.

국가 단위의 귀중한 손님이 찾아오면 거의 대관식을 연상케 하는 이벤트가 열린다.

귀빈이 찾아왔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도로를 통제하고.

그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고.

그 사이를 위풍당당하게 행진한다.

해당 국가에서 찾아온 사람은 귀빈만이 아니다.

보좌와 경호를 위해 함께 딸려 오는 숫자만 해도 세자릿수가 넘는다.

상대가 왕족이니 그 규모는 가히 성대할 터다.

그런데 여기서 호위 임무가 왜 나오는 건지, 오시안으로서는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다.

"압니다. 그 정도의 귀빈이면 굳이 호위 같은 걸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거. 이미 누구보다 든든한 위병들이 있을 테니까요."

"하물며 이곳은 해결사 사무소다. 보통 이런 일을 맡기기엔 적합하지 않을 텐데."

아무리 해결사가 티르나에서 각광받는 직군이라 하지만, 이런 이벤트까지 갈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할 수는 있으리라.

해결사 업계에서 손꼽히는 자들은 그 실력이 어느 국가를 가도 대접을 받을 정도니까.

그걸 고려해도 이상하다.

이런 건 보통 해결사조합을 통해 공식적인 요청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프렌피츠는 로난을 개인적으로 찾아와 반쯤 협박까지 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 행동은 비정상적이었다.

오시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뭔가 숨겨진 내막이 더 있는 모양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난은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여유 가득한 실눈의 표정은 전혀 변하질 않았다.

로난이 오시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번 의뢰, 함정입니다."

"함정이라고?"

"저희를 노리는 함정이 아닙니다. 흔히들 업계에서 하는 말이죠. 규모가 크고 보상이 많은데, 의뢰 내용 자체가 시답잖은 것이라면 으레 숨겨진 위험이 존재하는 법이거든요."

"선혈형제단 사건 때처럼 말이지."

로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상대에겐 해결사에게 급하게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다급한 일이 있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요. 그래서 저는 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괜찮겠나?"

오시안은 로난의 반응을 살폈다.

과거의 이야기를 일부 듣기만 했을 뿐이지만, 로난이 유품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로난은 그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유품입니다. 실질적인 가치는 전혀 없는 무의미한 산물이죠. 그걸 위해서 저희 해결사들을 위험한 임무에 밀어 넣으라니, 그런 짓은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로난의 말은 단순히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사람을 보낼 바에 어머니의 유품을 포기하겠다고 한 것이다.

"역시, 너는 평범한 중개인이 아니야."

오시안도 여러 일을 하면서 듣는 귀가 생겼고 보는 눈이 뜨였다.

해결사 업계는 거대한 조합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무소들이 산재한 형태로 굴러간다.

당연히 기본적인 골자는 사무소를 차린 중개인과, 그런 중개인과 계약을 한 해결사들이다.

중개인이 일을 받아오면, 해결사가 그걸 처리한다.

보상은 해결사가.

중개인은 약간의 수수료를.

악어와 악어새처럼 구성된 관계지만, 그것이 항상 좋은 작용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중개인들은 위험한 의뢰라는 걸 알면서도 해결사에게 숨기고 떠넘기기도 했고.

반대로 일부 해결사들은 자신이 받은 보수를 수수료로 가져가는 중개인과 분쟁을 일삼기도 했다.

오히려 로난 같은 케이스가 극히 손에 꼽을 정도로 이상한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다들 저에게 그렇게 말하곤 하더군요.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냐고."

"너는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건가."

"걱정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까요."

오시안은 문득, 주점에 들어왔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언제나와 같은 표정의 로난이었지만, 실눈 속 그의 시선이 유난히 테이블 위의 유품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의 것이라 했었지.'

문득 이 세상에 떨어지기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던 고아에게 부모님의 존재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움마저 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분명 낳아 준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오시안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내게도 어머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아이들처럼 손을 잡고서 어디를 놀러 가고, 잔소리를 하고, 아침에 깨워 주는.

그런 가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마음 때문인지 로난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그 프렌피츠라는 남자. 왕녀의 호위를 요청한 걸 보면 그쪽 파벌이겠지?"

"거의 확실하다 봐야죠."

"호위를 요청한 걸 보면, 그만큼 다급한 일이 있다는 거겠고. 내막은 설명해 주던가?"

"그럴 리가요. 그 남자는 저희가 뛰어나서 찾아온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하자는 쪽이죠. 저를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소리겠군."

왕녀를 추종하는 프렌피츠가 발품까지 팔아가며 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사건이 크게 벌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어쩌면 이번 평화 사절단 자체는 눈속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음모가 있다. 아주 커다란 음모가.

"로난."

"예, 오시안 씨. 말씀하십시오."

"절박한 사람에게서 주어진 의뢰보수 말고 얼마나 더 뜯어낼 수 있지."

"지금 그게 무슨...."

"의뢰를 받아들이겠다. 왕녀의 호위, 해보도록 하지."

그 말에 로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시안 씨,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으니까요."

"정말로 괜찮은 것이 맞나?"

로난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곧바로 답했다.

"...괜찮지 않더라도, 이건 제 일입니다. 제 개인사에 오시안 씨를 끼어들게 할 수 없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자못 진지한 어조.

그 말에는 약간이지만 질책의 감정도 담겨 있었다.

일에 사적인 감정을 넣지 말라는.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내린 선택이었다.

오시안이 그걸 무르겠다고 했으니 로난으로서는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 개인사지. 하지만 너는 나와 계약한 중개인이 아닌가."

"그건...."

"그리고 나는, 네가 고르고 고른 해결사 중 하나다."

오시안이 로난을 뚜렷하게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새하얀 별빛이 불꽃처럼 튀었다.

로난은 그 시선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도와달라고. 그 한 마디면 된다."

"그렇게 말하면."

로난이 입술을 떨며 물었다.

"도와주시는 겁니까?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기꺼이."

단호한 대답에 로난의 입이 다물어졌다.

오시안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도시에 떨어진 내게, 가장 먼저 도움의 손길을 준 것이 너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말입니까?"

"고작 그런 이유. 그걸로 부족한가?"

할 말을 잃은 로난에게 오시안이 말했다.

"중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사람으로서 네가 해야 할 말은 오직 하나다. 로난 롤랑. 너는 그 말이 뭔지 알고 있겠지."

"...."

"그러니 말해라."

오만하고 고압적인 말.

하지만 이상하게 그 행동이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하. 이런."

로난은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이내 평소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탁합니다, 오시안 씨."

*

오를레아 공주의 환영식이 거행되었다.

비행선을 타고 온 그녀는 친위대와 함께 정거장에서 내리고, 환영인파 속에서 움직일 채비를 맞추었다.

"너희들의 역할은 간단하다. 형식상이라지만 호위의 흉내를 내는 거지. 적당히 표정관리 하면서 행렬을 따라가기만 하면 돼."

티르나의 공무원이 서류철에 적힌 명단을 살피며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그녀는 안경알을 번뜩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기대는 하지 않아. 어차피 티르나의 경찰과 군부대 호위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그냥 사고만 치지 말고 적당히 머릿수만 채워."

그 목소리에는 해결사라는 직종 자체에 대한 모멸감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반박하는 해결사는 없었다.

티르나의 공무원과 굳이 마찰을 빚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이상으로 이 자리에 모인 해결사들의 수준이, 공무원에게 대놓고 항의를 할 정도로 뛰어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오시안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날을 세우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이쪽을 깔보는 언행은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다.

티르나 시의 공무원들이 프리랜서인 해결사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들어서 익히 알고 있지만.

그걸 지식으로 아는 것과 직접 마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한 마디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던 그때.

오시안을 향한 여 공무원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물론 오시안 씨는 믿을 만하니까 걱정하지 않지만요, 호호호."

"...."

다른 해결사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

오시안을 향한 그윽한 눈빛에는 약간의 열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이번 일이 끝나면 식사라도 같이하실래요?"

"...."

"어쩜. 과묵한 것도 이리 멋있으셔라."

일부러 무시하듯 반응을 안 했는데 과묵한 것이 멋있다고 한단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싶다가, 멀리서 동료가 여성 공무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제정신 좀 봐. 다음 브리핑 있다는 걸 까먹었네요.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할게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던 그녀는 오시안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자리를 떠났다.

오시안으로서는 참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사실에 속으로 작게 안도했다.

'일단은 허울뿐인 호위인가.'

실제로 모인 해결사들의 면면을 보면 업계에서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자들뿐이다.

어떻게든 행렬에 끼기 위해 최대한 차려입었지만, 험하고 거친 일을 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 지경.

그런 곳에 오시안이 서 있으니 군계일학을 넘어 혼자 태양처럼 빛이 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최근 이름값까지 생각하면 오시안이 제일 나은 해결사이기도 했고.

'시장의 관저에 방문하기 전까지 행렬은 이어질 테니, 그때까지만 호위하는 것이 이번 의뢰의 내용이었지.'

오시안은 관자놀이가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또 이 감각이다.

'이런 기분이 느껴질 때마다 뭔가 일이 있었는데.'

무언가 일이 터질 거라는 직감.

동시에 자신의 새로운 힘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가능성이 느껴졌다.

'자세한 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확인한 뒤에야 알겠지만.'

생각을 정리한 그때, 비행선 선착장 한쪽에서 부산스러움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른 해결사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쪽을 응시했다.

비행선의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제복을 입은 군인들과 화려한 복식의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라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오를레아 공주.

이번 의뢰의 핵심이자, 오시안이 호위를 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물론 말만 호위일 뿐, 오시안은 그녀의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이 그 처지였다.

'어차피 나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야.'

그래도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인형같이 생겼다는 말이 어울리는 소녀였다.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치렁치렁한 금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그녀가 조금만 더 자라면 경국지색의 미녀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가 어린 지금도 그 미모에서 빛이 난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오시안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오를레아 왕녀의 표정이었다.

'마치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이네.'

생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오히려 어딘가 침울한 기색마저 엿보인다.

그럼에도 한 폭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미색이 출중하다는 뜻이리라.

오를레아 왕녀는 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움직였다. 함께 온 친위대도 함께였다.

비행선 선착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 주었다.

왕족의 행차인 것이다.

그 길목에 선 해결사들도 황급히 좌우로 물러났다.

그렇게 오를레아 왕녀가 이쪽을 스쳐 지나가는 그때였다.

앞만 보고 걷던 왕녀의 시선이, 오시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별생각 없이 지켜보던 오시안은 왕녀와 눈이 마주치는 꼴이 됐다.

오시안을 본 왕녀의 공허한 눈동자가 살짝 이지만 크게 떠졌다.

'뭐지?'

대체 왜 자신을 보고 저러지 싶은 순간.

"이 무엄한 놈!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고개를 뻣뻣하게 드느냐!"

굵은 남성의 질타 어린 목소리가 오시안을 향해 쏟아졌다.

58화. 불안감 (1)

비행선 정거장 안에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이웃 왕국의 왕녀가 방문한다 해서 출입을 통제한 탓에 평소보다 사람의 숫자가 적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람들이 꽤 붐비는 장소였다.

그런 장소가 조용해졌으니, 작업을 하던 정비공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볼 정도였다.

소리를 지른 당사자는 구레나룻과 콧수염을 길게 기른 40대 남성이었다.

좋은 옷을 입고 어딘가 고지식하게 생긴 그는 시종일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는 시선이 모였음에도 뭘 쳐다보냐는 듯 거칠게 콧김을 뿜었다.

'하찮은 평민놈들이 어딜 감히.'

드뷔에 후작은 티르나에 온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절단으로 이 더럽고 오염된 곳으로 와야 한다니.

뼛속까지 귀족으로서 오만한 그는 티르나의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해결사 나부랭이 놈이 이쪽을 보고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 인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래서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래, 너 잘 걸렸다.'

드뷔에 후작은 내심 기꺼워했다.

이 짜증을 해소할 기회가 생긴 것도 있지만, 으레 이런 장소에 오면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기강 잡기'라고 할까.

어느 장소에 방문을 하더라도 일부러 상대의 속을 긁거나 트집을 잡으며 분위기를 험하게 굴리는 것이 그의 취미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그는 고귀한 핏줄이니까.

평민 따위는 벌레처럼 여겨도 되는 귀족이니까.

그의 눈에 오시안이 운 없이 걸렸을 뿐이다.

평소였다면 겁을 집어먹은 평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 검은머리 청년의 반응은 드뷔에 후작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

화물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서 뭐 어쩌라는 듯 멀뚱히 쳐다보기만 한다.

그 모습에 오히려 드뷔에 후작이 당황했다.

'뭐야 저놈.'

티르나는 계급에 의한 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들었다. 당연히 자국에서 평민들이 보여 주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드뷔에 후작도 고려하고 있던 점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이곳에서 일하는 놈이니, 나름 굽실거리면서 나올 줄 알았는데 아예 무반응이라니?

'잠깐. 설마 저놈도 귀족인가?'

일단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호통을 쳤지만, 자세히 모습을 뜯어보니 눈에 밟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행색부터 그렇다.

다른 해결사 놈들은 딱 봐도 험악한 일을 하게 생겼다는 듯 얼굴에서 티가 났다.

그런데 저 흑발의 청년은 그런 것이 없었다.

피부도 하얗고 선도 곱다. 입술을 꾹 다물고 무언가를 응시하는 모습은, 드뷔에 후작조차 감탄할 정도의 귀족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였다.

이쯤 되면 다른 귀족이 아닌가 싶지만, 해결사들끼리 모인 장소에 혼자 있는 것을 보면 또 그건 아니었다.

잠시 혼란이 찾아왔었지만, 태생부터 귀족인 드뷔에 후작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시안은 귀족이 아닌 평민이고, 저기 모인 해결사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까지도.

'그래. 설령 어디 귀족 출신이라 해도 티르나에 왔으면 사실상 몰락하거나 뒷배가 없는 놈이라는 소리겠지.'

거기서 확신을 얻은 드뷔에 후작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감히 아직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는 거냐!"

드뷔에 후작은 잘 걸렸다는 듯 오시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드뷔에 후작의 돌발행동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렇게 보여도 오를레아 왕녀의 호위 총 책임자였다.

그보다 높은 사람은 왕녀뿐이었지만, 그 왕녀조차도 지금 상황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드뷔에 후작이 기세등등한 것도 이상할 일이 없었다.

"저, 저기 후작님."

그때 드뷔에 후작의 앞을 한 해결사가 가로막듯 섰다.

헤실거리며 웃는 얼굴로 굽신거리는 그는, 여기 모인 해결사 중에서 연배가 가장 높은 자였다.

그걸 증명하듯 까무잡잡한 얼굴에는 주름과 잔상처가 가득했다.

"넌 뭐냐?"

"저는 해결사 볼렌이라 합니다."

"그래서."

"저기 저 청년이 해결사이지만 최근에 들어와서 뭘 잘 모릅니다. 후작님께서 하해와 같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

볼렌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짝─!

드뷔에 후작이 볼렌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친 것이다.

볼렌은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매만졌다.

드뷔에 후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어딜 건방지게 평민 새끼가 귀족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어?"

"그, 그게 아니라...."

"능력도 없는 해결사 새끼가, 그냥 머릿수 좀 채우려고 불렀더니 뭐라도 된 줄 아나? 아직도 현실파악이 안 돼? 아니면 되게 해줄까?"

드뷔에 후작이 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볼렌의 어깨를 꾸욱 눌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뺨을 맞고 모욕까지 당했지만, 볼렌은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티르나에서 모두가 평등하다.

귀족이고 평민이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드뷔에 후작과 볼렌이 대등해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계급을 별개로, 이번 행렬의 책임자인 드뷔에 후작은 볼렌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이었다.

티르나가 평등한 도시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네까짓 게 뭐라고...!"

"그, 그것이...."

볼렌이 재차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하지."

가볍게 읊조렸지만, 어딘가 낮게 울리면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에 듣지 못한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지금 상황을 잊고 '저런 목소리였구나'라고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뭐?"

당황한 건 드뷔에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거, 설마 내게 한 말이냐?"

"그러면 여기 그쪽 말고 누가 있지?"

오시안의 뻔뻔한 대답에 드뷔에 후작은 헛웃음이 나왔다.

저 건방진 평민놈이 드디어 미쳐 버렸구나 하고 오시안을 향해 다가갔다.

이놈은 뺨을 때리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아주 주먹으로 곤죽을 내줘야 정신을 차리겠지.

그럴 생각으로 오시안에게 다가가는 그때였다.

"멈추어라."

이번에 드뷔에 후작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전혀 의외의 사람이었다.

드뷔에 후작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왕녀님?"

"거기까지만 해라. 이러다 축하연에 늦겠구나."

"왕녀님. 지금 저 평민이 저를 무시했습니다. 이걸 그냥 두고 넘어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드뷔에 후작의 반박을 들은 오시안이 눈썹을 살짝 휘었다.

'자기가 모시는 왕족에게 말대꾸를 해?'

게다가 그런 드뷔에 후작의 행동을 오를레아 왕녀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주종관계가 아님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실권은 눈앞의 이 남자가 쥐고 있다는 말이군.'

권력이 없는 왕족은 귀족보다 못한 신세였다.

아마 이 자리가 개인적인 자리였더라면, 드뷔에 후작은 왕녀의 말을 코웃음 치며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공적인 자리다.

드뷔에 후작도 그걸 알기에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작게 혀를 찼다.

그는 적대감 어린 눈동자로 오시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왕녀님의 자비가 없었다면 네놈은 오늘 행렬에 끼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공식적인 자리니 일단 왕녀를 운운했지만, 그 목소리에서 충성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시안은 그런 드뷔에 후작의 말에 무반응으로 대꾸했다.

그것이 거슬리는지 드뷔에 후작이 재차 발끈하려 했지만, 나름 처세는 있는지 꾸욱 참고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오시안은 멀어지는 드뷔에 후작의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프렌피츠."

"뭐?"

"날 고용한 사람 이름이다."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곳에는 로난에게 반쯤 협박으로 의뢰를 넣은 프렌피츠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냥, 알아두라고."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희미한 미소까지 더했다.

드뷔에 후작은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거친 발걸음으로 왕녀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의 칼날 같은 눈동자가 프렌피츠를 향했고, 프렌피츠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두 사람은 따로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것이다.

드뷔에 후작의 불같은 성미를 생각하면, 프렌피츠는 한 대 맞는 걸로는 끝나지 않겠지.

그렇게 왕녀와 그 휘하 사람들이 물러나자, 볼렌이 오시안에게 와 감사를 전했다.

"도와줘서 고맙네."

"오히려 도움은 이쪽이 받은 거 같은데. 왜 나선 거지? 우린 오늘 초면이 아닌가."

"그랬지. 하지만 내 동생놈이 도움을 받았거든. 발전소 사태 때 말이야."

아, 그때 함께 했던 해결사 중 한 명이 가족이었던 건가.

동생과 형이 쌍으로 해결사라니.

'하긴. 내가 여기 처음 와서 시비 걸린 놈들도 삼형제였으니까.'

이런 부분에서 묘한 인연이 생기게 될 줄이야.

동생이 목숨을 빚졌다 해도 발렌이 굳이 나설 이유는 없었다.

약간의 계산이 깔려 있다 하더라도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결국 순수한 호의였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다시 자기소개를 하지. 발렌이네."

"오시안이다. 바이올렛 폭스에서 일하고 있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네. 꽤 유명하거든. 그쪽 사무소."

"그런가."

"그보다 하마터면 크게 된통 당할 뻔했어. 저 성격 더러운 귀족에게 걸리면 티르나라 하더라도 피곤해지거든."

그런가?

오시안은 딱히 그걸 걱정하지 않았기에 크게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건드리면 어차피 그 이상으로 돌려줄 생각이었으니까."

"하하하. 자네 농담도 재미있게 잘하는군."

"...."

"...농담 맞지?"

발렌은 그걸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저 멀리서 곧 행진을 시작한다는 안내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가지."

"어, 어. 그래야지."

발렌은 얼떨떨하게 답하면서 먼저 걸어가는 오시안의 뒤를 따랐다.

*

비행선 정거장 바깥으로 나오자 푸른 하늘과 뜨거운 태양빛이 반겨주었다.

오를레아 왕녀가 고급 차량에 탑승했다.

지붕이 없이 훤히 열린 디자인의 차량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시안은 드뷔에 후작을 발견했다.

왕녀와 같은 차량을 탈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드뷔에 후작은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지?'

몸에 판초 우의 같은 걸 둘렀고, 얼굴에는 황동으로 이루어진 가면을 썼다.

총기를 지닌 것을 보면 공식 호위대인 것 같았다.

"군인이로군."

오시안이 뭘 보는지 눈치챈 발렌이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군부에서 호위에 나섰다는 말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었어. 이래서야 우리는 정말 들러리나 다름없겠네. 그러고 보니 이번 평화 사절단을 추진한 것도 군부였다고 하던데."

발렌의 말에 오시안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신문에서 기사를 읽었기에 내막은 아는 바였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이 거슬렸다.

'드뷔에 후작은 저 군인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지?'

왕녀를 태운 차량이 곧 출발하는데 그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양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프렌피츠가 초조해할 정도.

행진이 시작되었다.

먼저 길을 트기 위한 차량이 출발하고, 그 뒤를 왕녀가 탄 차량이 출발했다.

증기 오토바이와 군 차량이 호위로 따라붙었다.

이웃 나라 왕녀의 방문에 시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거리에 나와 그 행렬을 구경했다.

온갖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환호하거나 기뻐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저 지금 열리는 이 이벤트를 흥미롭게 지켜보는 편이었다.

'우리는 뒤쪽에 배치인가.'

오시안을 비롯한 해결사들은 왕녀가 탄 차량과 멀리 떨어진 자리를 받았다.

행렬의 후미이자 끝자락이라 봐도 무방했다.

사실상 병풍 취급인 것이 맞았다.

그러나 거리가 떨어졌다 하더라도, 오시안은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볼 수 있었다.

상식을 초월하는 안력은, 멀리 떨어진 왕녀의 수심 어린 표정마저 선명하게 보았다.

'느낌이 영 좋지 않은데.'

오시안은 주변 건물을 살폈다.

꽤나 높게 솟아오른 건물 옥상에는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혹시 모를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서다.

대낮에,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암살을 시도할 간 큰놈들은 존재하지 않을 터다.

하지만 이성은 그렇게 외쳐도, 본능은 자꾸만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불안한 생각은 금방 현실이 됐다.

앞에서 일어난 약간의 소요에 행진이 느려졌다.

"무슨 일이지?"

주위에서도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 사전에 정해진 일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윽고 행진이 시작됐다.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루트가 바뀌었다?'

찌르르.

뇌리를 타는 불안감이 더욱 강해졌다.

59화. 불안감 (2)

사전에 알리지 않은 탓인지 새로 들어선 거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 않아 꽤나 한산했다.

게다가 건물 옥상마다 배치되어 있던 군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더라도 목격자가 줄어드니 찾기 쉽지 않을 터.

'좋지 않은데.'

오시안의 눈동자가 건물의 창가를 훑었다.

유리창은 빈말로도 투명하다 하기 힘들었다. 그늘이 드리워진 창 안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이상, 경계를 끌어 올려야만 했다.

비슷한 기류를 읽은 것은 해결사들도 마찬가지인지, 그들은 저들끼리 작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거,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갑자기 진행 방향이 바뀌었어. 사전에 이런 말은 없지 않았나?"

하지만 수상한 것과 별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역할은 병풍처럼 서 있는 것.

이 도시 한 바퀴를 다 돈다고 해도 묵묵히 따라야만 하는 게 그들의 처지였다.

'솔직히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니 이대로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맞지만.'

인적이 없는 거리에 들어서자 뇌리를 찌르는 느낌이 뚝 하고 끊기듯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의 고요와 같은 것.

여기다.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면, 바로 여기서 벌어지는 것이다.

'따라붙던 호위들도 은근하게 빠져서 숫자가 줄었어.'

특히 오를레아 왕녀의 주위에 배치된 사람들의 숫자가 많이 줄었다.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인 신호였다. 호위의 당사자인 왕녀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아니.'

오시안은 보았다.

이전보다 수심에 잠겨 있는 오를레아 왕녀의 표정을.

보는 사람들 때문에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저 얼굴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

죽음을 각오했다는 건,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옆에서 사람을 이끌던 드뷔에 후작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 남자 또한 공범이라는 소리겠지.

'근본도 없는 해결사들을 호위로 부른 것은 이런 이유였나.'

티르나의 군부, 그리고 카를레앙 왕국의 친위대.

전부 한패였다.

아마 이 근처에 왕녀를 죽일 암살자가 대기하고 있겠지.

방식은 어렵지 않다. 그저 총 한 자루만 쏠 줄 알면,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상황이 만들어졌으니까.

'구해야 할 명분 같은 것은 없어.'

오히려 그녀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이 거대한 음모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셈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호위임무를 실패했다는 사소한 오명만 달고서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다.

지극히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이다.

하지만.

'내 임무는 그녀의 호위다.'

스스로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저 앞에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은 본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억지로 떠맡기는 죽음은 타살이나 다름없다.

스릉.

오시안은 검을 뽑았다.

이전까지 희미했던 감각이, 검을 뽑는 순간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변했다.

'보인다.'

누군가에게 죽음을 안겨 줄 점이 보였다.

허공에 생성된 붉은 점은 새까만 균열에 흘러나오는 악마의 눈동자 같기도 했다.

그 불길한 빛이 서서히 움직이며, 오를레아 왕녀의 심장을 가리켰다.

저거다.

불빛을 확인한 오시안은 검을 쥐고 지체 없이 움직였다.

누구도 오시안의 움직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오시안은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멀리서 총을 격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극한까지 예리해진 오시안의 시선에 날아오는 총알이 잡혔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오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총알의 끝부분이 오시안의 검과 맞닿는 순간.

─시간이 원래의 흐름대로 돌아왔다.

타앙! 캉!

총성이 울리는 것과 오를레아 왕녀의 눈앞에서 불똥이 튀기는 것, 잘려나간 총알이 바닥을 뒹구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무, 무슨...."

옆에서 지켜보던 호위도, 운전을 하던 운전사도, 당사자인 오를레아 왕녀도.

모두 눈이 동그랗게 변한 채 오시안을 응시했다.

하지만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초, 총이다!"

"암살자야!"

모인 사람들이 패닉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다.

행렬을 이어 나가던 사람들도 당황하며 어찌할 줄 몰라했다.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보고도 모르나? 호위 대상을 지켰을 뿐이다."

위병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도와줘서 고맙다기보다는, 오히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냐는 책망과 일이 틀어져서 큰일 났다는 혼란에 가까웠다.

그런가.

이 녀석도 관련이 되어 있는 건가.

오시안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을 멍하니 응시하는 오를레아 왕녀를 향했다.

이 작은 소녀는 자신이 목숨을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 자신이 오늘 여기서 죽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그때 오를레아 왕녀의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지며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그대는...."

무언가 말하려던 오를레아 왕녀의 눈동자가 조수석을 밟고 선 오시안의 옆으로 향했다.

오시안은 왜 그러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몸이 한 바퀴 빠르게 회전했다.

서걱!

운전수가 꺼낸 권총이 깔끔한 단면을 드러내며 잘려나갔다.

"검?"

운전수는 손잡이만 남은 권총을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오를레아 왕녀를 구한 사람이 지닌 무기라는 것이 고작 검 한 자루라는 것이 믿기지 않은 눈치였다.

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오시안의 발바닥이 그의 얼굴을 걷어찼다.

피를 뿌리며 쓰러진 운전수.

오시안은 직후 새빨간 불빛이 자신의 몸 곳곳에 생성된 걸 발견했다.

"위험...!"

오를레아 왕녀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오시안의 검이 춤추듯 움직였다.

카가가가강!

급소를 노리고 날아온 총알 5발이 전부 조각나서 바닥을 뒹굴었다.

오를레아 왕녀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경고가 의미가 없는 것도 있지만 오시안이 보여 준 무위가 너무 터무니없던 것이다.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총알을 베어 낸다고? 그게 가능이나 한가?

오를레아 왕녀는 나이가 어리지만, 머리는 총명했다.

그렇기에 오시안이 보여 준 모습이 얼마나 상식을 초월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를레아는 오시안을 기억했다. 해결사치고는 그 외모가 지나치게 출중해서 기억에 남았었더랬다.

'티르나의 해결사는 다 이런 괴물만 있는 건가?'

그러자니 이 상황에서 나선 것은 오시안이 유일했다.

이 남자만 주머니 속에 튀어나온 송곳처럼 특출 나다는 소리였다.

오를레아 왕녀의 판단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덧 오시안의 억센 팔뚝이 그녀의 허리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실례하지."

"...!"

오시안은 오를레아 왕녀를 안아 들고 빠르게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웃 왕국이라 하더라도 왕족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이것만으로 죄를 면할 수 없겠지만 오시안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방금 전 뛰어오른 차량이 붉은 불꽃과 함께 폭발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왕좌왕하는 시민들 사이로, 품 안에서 권총을 뽑아 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량에 폭탄을 설치. 그것도 모자라 주변에 따로 암살자까지 배치해 뒀을 줄이야."

이런 짓을 벌인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매우 용의주도하다는 것은 알겠다.

오시안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오를레아 왕녀는 여기서 죽었겠지.

하지만 이미 끼어든 이상.

"죽게 놔두지 않는다."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건물의 벽 한쪽을 밟고 재차 도약했다.

오시안이 떨어질 때를 맞춰서 총격을 가하려던 암살자는 그가 오히려 높이 뛰어오르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친. 저거 뭐야?"

"하늘을 날았어?"

벽을 밟고 도약한 오시안은 건물의 옥상에 착지했다.

원래라면 저격수가 배치되었어야 할 옥상은 한산했다.

하지만 오시안은 안도하지 않았다.

이미 이 구역 전체가 오를레아 왕녀를 죽이기 위한 하나의 함정이 되었다.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암살자들은 쉬지 않고 몰아칠 것이다.

당장 건물 아래층이 어수선한 걸 보면, 암살자들이 계단을 통해 뛰어오는 모양이었다.

"소용없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

그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오를레아 왕녀는 오시안을 향해 나지막이 경고했다.

물론 오시안은 그 말을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검집에 검을 꽂은 뒤, 두 손으로 왕녀를 안아 들었다.

흔히들 공주님 안기라 부르는 자세.

오를레아 왕녀의 신분을 생각하면 실로 적절한 이름이었다.

"반경 3km 이내에 적들이 깔려 있다. 티르나의 군부도 마찬가지. 그들도 모두 한패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그렇다면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도...."

"경고 하나 하지. 지금부터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거다."

오시안의 등 뒤로 새하얀 별빛이 드리워지며 망토의 형상을 갖췄다.

"혀를 깨물고 싶지 않다면."

[성운비단(星雲緋緞)]

오를레아 왕녀는 오시안의 등 뒤로 펼쳐진 별빛의 망토에 넋을 잃었다.

그러나 놀라기엔 아직 일렀다.

등 뒤에 새겨진 망토가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펄럭이더니, 새하얀 가루를 분사하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밀어내기 위해 추진력을 가하려는 모양새.

이윽고 오시안이 바닥에서 발을 떼며 달리기 시작했다.

오를레아 왕녀는 자기도 모르게 오시안의 옷자락을 자그마한 손으로 꼭 쥘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오시안이 달리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도착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막 옥상의 문을 부수고 들어온 암살자들은, 저 멀리 흰색의 꼬리를 그리며 멀어지는 오시안의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감히 쫓아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뭐? 왕녀가 탈출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포위망을 벗어나? 술이라도 마신 거냐! 시간이 얼마나 됐다고 벌써 벗어났다는 거야! 포위 반경만 3km다! 1분 만에 벗어난다는 게 말이 되나!"

외부에서 대기하던 사람들도 갑자기 들려온 소식에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건물 옥상을 달려? 그래 봤자 구역이 나뉘는 대로변에 도착하면 갈 곳도 없어! 뭐? 그게 이쪽 방향으로 갔다고? 대체 어디에...."

수화기에 대고 그렇게 외치던 사람은 불현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 무수한 증기자동차와 트램이 다니는 넓은 도로.

그 위를 가로지르는 유성이 있었다.

"이게 뭔...."

그가 손에 쥔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일이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멀어지는 유성을 보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어두운 골목길.

오시안은 이쯤이면 됐겠다 싶어서 오를레아 왕녀를 천천히 놓아 주었다.

오를레아 왕녀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오시안의 손길을 벗어나기 무섭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드레스가 더럽혀지는 걸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그럴 여력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왜냐."

오를레아 왕녀는 오시안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왜 나를 구했지?"

"그 반응을 보건대,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군."

오를레아 왕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모를 리가 있을까. 애초에 그녀가 티르나에 보내진 것은 하나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티르나의 평화협정의 사절단으로 찾아와, 이곳에서 극단주의 사람에 의해 총에 맞아 죽는다. 그게 그쪽의 역할. 맞지?"

"...알고 있었느냐?"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판을 깔면 모를 수가 없지. 이웃 나라에 간 왕녀가 총에 맞아 죽었으니 자국민이라면 분노할 수밖에 없을 터. 드뷔에 후작은 본국으로 돌아가, 티르나에 대한 성토를 할 거고."

오시안의 입에서 내막이 흘러나오자 오를레아 왕녀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 단순히 무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흠. 어디 보자, 본래라면 호위를 수행해야 할 군부가 갑자기 빠진 것을 보면... 그쪽도 사실상 한패라 봐야겠군. 이번 협정을 추진한 것도 군부의 입김이 있었으니 처음부터 노린 건가."

잠시 턱을 쓰다듬던 오시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목표는 전쟁이군."

군부와 카를레앙 왕국.

둘은 손을 잡고서 오를레아 왕녀를 제물로 삼아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60화. 음모의 내막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