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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40-50

40화. 마녀와 망명 (2)

마녀라는 울림은 오시안에게 딱히 큰 의문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시안은 이미 마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마녀. 마법을 배우고 사용할 줄 아는 마법사와 흑마법사와 다르게, 태생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

마녀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는 모른다.

혹자는 축복이라고 했고, 혹자는 저주라고도 했으니까.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마녀는 오직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특이한 체질이었다.

그리고 혈통을 가리지 않았다. 뒷골목 천애고아도 마녀일 수 있고, 고명한 귀족 가문에서도 마녀가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시안이 플레이 하던 게임에서 마녀들은 대부분 몹으로만 나왔다.

'조력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쓰러뜨려야 하는 보스 몬스터였지.'

태생적으로 거대한 힘을 지녔다 보니, 대부분 마녀들은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정신이 망가지거나 인간성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게임에서는 마녀는 극도로 불온한 존재라고 하면서 꽤나 많은 사냥을 당했었는데.'

그런 마녀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을 줄이야.

과거의 생존자인지, 아니면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마녀가 탄생한 것인지까지는 모르겠다.

대다수 마녀는 인류에게 적대적이었다.

아주 극히 일부의 소수만이 호의적일 뿐.

'그런 마녀가 망명요청이라.'

나라도 아니고 티르나라는 도시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것에서는 두 가지 정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티르나는 도시이면서도 국가 단위의 힘을 머금은 곳이라는 것.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마녀들은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망명 요청은 의뢰 중 하나인가?"

"그런 셈이죠. 무려 마녀가 직접 요청을 했으니까요. 그 말은 보수를 마녀가 직접 준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흔히 구하기 힘든 물건일지도 모르고, 혹은 지식일지도 모르는 거죠."

"다른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기 차고 넘친다는 말이로군."

"예. 그리고 추측하기로는, 아마 이 마녀는 자신이 의탁할 장소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티르나라는 도시에 와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니까요."

물론 마녀의 존재를 생각하면 금방 이름을 떨치고 자리를 잡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것과 한 조직에 몸을 담아서 활동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오시안도 극히 동감하는 바였다.

그도 바이올렛 폭스에 소속되지 않았더라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을 테니까.

"마녀가 의탁할 곳을 찾는다면, 티르나의 온갖 조직들이 탐내겠군."

"마녀의 힘은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고민입니다."

"뭐가 말이지?"

"솔직히 저희 입장에선 이 마녀 분을 초빙하는 것은 힘들거든요. 붙어야 할 상대가 워낙 많으니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죠."

"마녀의 힘을 욕심내는 건가?"

"힘이라기보다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라고 해두죠."

로난은 그렇게 말하며 평소처럼 수상함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해결사 일을 하는 마녀라니. 상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로난은 순수한 의도로 재미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오시안으로서는 로난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지닌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망명을 요청했다는 것은 현재 마녀가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말일 텐데.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요청을 할 리가 없지 않나."

오시안의 말에 로난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알다시피, 이 티르나는 자유의 도시죠. 실력과 돈이 있다면 뭐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바깥은 그렇지 않죠."

도시 자체가 독립권을 부여받은 티르나와 다르게 외부는 아직도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과거의 모습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녀를 향한 적대적인 차별도 그중 하나였다.

"바깥은 여전히 마녀사냥이 팽배해 있다는 건가."

"냅다 불로 태우던 옛날 정도까지는 아닙니다만, 마냥 우습게 볼 것도 아니죠."

"마녀 입장에선 살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오는 것이 맞겠군."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에 로난이 싱긋 물었다.

"오시안 씨는 마녀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뭐, 조금은."

오시안은 적당히 둘러댔다.

게임 속에서 마녀를 가장 많이 죽였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 세월이 흐른 만큼 마녀에게도 변화가 생겼을지.'

당장 엘딘만 봐도 오시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특이한 엘프였다.

세상이 바뀐 만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 또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마녀도 지금 같은 시대에 맞추어 바뀌었을까.

아니면 옛날 그대로의 마녀일 수도 있었다.

'마녀는 수명이 아주 길다고 했으니까.'

흥미가.

아주 강한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자신이 기억하는 게임의 흔적이 남았기에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었다.

본능이 속삭였다.

이 의뢰를 맡으면 지금 막힌 길을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이 의뢰, 언제부터이지?"

"하실 생각입니까?"

"이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힘들어도, 의뢰 자체를 할 수는 있지 않나."

망명을 요청했다는 것은 지금 마녀는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일 터.

그렇다는 것은 이 의뢰는 의뢰주인 마녀를 무사히 티르나까지 데려오는 것이 될 것이다.

'요인 호위라. 내겐 익숙한 퀘스트로군.'

게다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혹은 성격이 당돌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녀는 의뢰를 아무나 다 받을 수 있게 해 놨다.

사람을 딱히 가리지 않는 걸 보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인가.

아니면 다수의 경쟁자를 붙여서 가장 뛰어난 의뢰인을 고용할 생각인가.

'세상 물정을 모르기보다는 당돌한 쪽인가.'

오시안이 의뢰를 할 기색이자 로난은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오시안 씨. 이번 의뢰는 분명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위험인가."

"마녀의 존재는 분명 여러 조직에서 탐을 내기에 충분하죠. 하지만 이 의뢰는 아무나 맡지 않을 겁니다. 마녀를 추적하는 자들이 꽤나 무섭거든요."

오시안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녀가 도움을 요청을 했을 정도니 상대 또한 자신의 힘으로 상대하기 힘든 자들일 터.

"누구인데 그러지?"

"페트라 교황청입니다."

교황청.

그 말에 오시안은 그런 게 있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플레이 하던 게임에서도 종교는 존재했다.

빛과 질서, 황금과 자애의 신 「일루아」.

그런 일루아를 믿는 자들이 만든 나라가 신성 페트라시국이었다.

'이 세상에 실제로 신이 존재하고 신성과 기도가 효과를 보이는 걸 생각하면, 페트라 교황청이 지닌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지.'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런 페트라 교황청은 흑마법사와 마녀, 악마의 존재를 이단으로 규정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은 쇠퇴할 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런 페트라 교황청에서 의뢰주인 마녀를 노린다는 것은, 반대로 그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심지어 소문이 좋지 않습니다. 페트라 교황청에서 이번에 12성부 중 하나를 파견할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12성부?"

"페트라 교황청 직속기관의 이름입니다. 총 12개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각자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죠.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들은 페트라 교황청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나선다는 것은, 그들과 충돌을 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거로군."

"아무리 페트라 교라고 하더라도 티르나에서 자신의 권한을 휘두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싸울 가능성을 자처할 바보는 없죠. 이것만으로 송사리들은 모두 걸러질 겁니다."

"이 의뢰를 받는 놈들도 진짜들만 모인다는 소리인가."

들을수록 더욱 구미가 당겼다.

오시안은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교황청에서도 아주 강한 자들이 마녀를 쫓고 있으며, 마녀는 살기 위해서 티르나로 망명을 요청했다.

당연히 의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페트라 교황청과 척을 져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세력이 강하거나 무력이 강한 자들이 모일 터.

"하겠다."

"이런. 진심이십니까? 상대는 그 페트라 교황청인데요?"

"처음부터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으면서 발뺌을 하는군."

오시안이 장난스럽게 묻자 로난도 못 당하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검 없이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부엌칼이 있으니까."

"...진심이십니까?"

주점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득달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인가 했더니 바이올렛 폭스 소속인 디올란이었다.

마침 좋은 소식을 물고 왔다는 듯 디올란은 오시안을 발견하자마자 말했다.

"엘딘이 전해달래! 드디어 완성됐다고."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군."

흥미로운 의뢰에 맞춰서 완성된 검이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닐까.

*

"자. 받아."

엘딘은 오시안에게 검을 내밀었다.

검집에 담긴 검을 받아든 오시안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엘딘과 눈을 마주쳤다.

엘딘의 눈가에는 거뭇한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딱 봐도 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육체는 피로해도 그녀의 눈빛은 전에 없던 총기로 가득했다.

자신이 이런 검을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만드는데 더럽게 힘들더라. 그래도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만들어졌어. 한번 뽑아 보지 그래?"

"그러지."

오시안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어떠한 마법과 과학적인 처리를 하지 않은 순수한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은 놀랄 정도로 정갈하고 예리하며 깔끔하다.

오시안은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추는 검날을 응시하다가 그것을 쥐고 자세를 잡아보았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며 무게중심도 잘 잡혀 있다. 무엇보다 쥐는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검이라는 걸.

"최고로군."

오시안으로서는 그렇게 극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만드는 데 고생을 한 엘딘은, 그게 감상의 전부냐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무튼 나는 만들어 줬으니까 이만 쉬어야겠어."

"그래. 덕분에 이번 의뢰는 꽤나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의뢰?"

피로한 와중에도 흥미가 돋았는지 엘딘이 물었다.

"내가 만들어 준 무기를 받자마자 하는 의뢰라면 꽤 대단한 거겠지?"

"도시 바깥에서 망명 요청을 한 마녀가 있다더군."

"...잠깐. 그거 나도 들어본 거 같은데. 혹시 페트라 교황청과 관련 있다는 그거 아니야?"

"맞다."

"설마 그 의뢰를 하러 간다고?"

엘딘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가 이내 꾹 다물고는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내가 무슨 조언을 하겠어. 가서 죽지나 마."

"걱정해 주는 건가?"

"모처럼 좋은 무기를 만들었는데 그 주인이 첫 의뢰부터 냅다 죽으면 기분이 사납잖냐."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오시안은 뽑아든 검을 유심히 보다가 다시금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게 있으면 질 것 같지는 않거든."

*

의뢰 당일.

나는 34번구에 존재하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티르나에는 온갖 철로가 깔려 있는데, 당연히 도시 바깥으로 이어지는 철로도 있었다.

의뢰주인 마녀와 접선할 곳은 티르나의 바깥, 인접한 이웃 나라인 오스나팔로스 공화국이다.

'오스나팔로스라. 게임에서는 왕국이었는데 지금은 공화국인가. 지식과 책의 왕국으로도 유명했지.'

공화국이라 그런지 그나마 페트라 교황청의 입김이 약했고 티르나와 가까웠기에 접선 장소로는 적합했다.

바뀐 나라의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나는 허리춤에 걸린 검의 감촉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다.

'쭉정이들은 다 빠졌다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많은 숫자라.'

정차한 기차의 근처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저들은 전부 다 이번 마녀의 망명의뢰를 받아들인 자들이었다.

즉, 나의 경쟁자라는 소리였다.

그중에서 처음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검은 양복의 집단이었다.

'마피아?'

41화. 의뢰 실패 (1)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깔끔하게 빠진 양복으로 복장을 통일했는데 머리에 눌러쓴 모자까지 하면 누가 봐도 영락없는 마피아였다.

숫자는 서른가량.

전부 다 덩치가 상당한 것이, 육체를 쓰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해당 무리의 중심에 있는 남자였다.

다들 짙은 남청색 수트에 흔히들 빵모자라 부르는 플랫 캡(Flat cap)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단 한 명만 달랐다.

몸에 딱 맞는 새하얀 수트와 머리에 쓴 흰색 중절모까지.

심지어 얼굴에는 테가 없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언뜻 목 언저리에 드러난 머리색은 짙은 회색이라는 점도 인상 깊었다.

다들 험악한 인상을 지닌 것과 다르게 저 흰 양복의 남자만 선이 가늘고 깔끔한 외모였다.

다른 사람들이 행동대장이면 저 사람은 비서, 혹은 경리 같은 느낌.

'뭔가 있어 보이는 건 확실하군.'

제일 우습게 보이지만 그렇기에 얕보면 안 되는 인간이 분명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도 살폈다.

온갖 인간군상이 모이는 도시인 티르나답게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했다.

그중에서 다른 의미로 시선을 끄는 것은 폭주족 같은 인상의 집단이었다.

숫자는 10명 정도.

입고 있는 복장은 가죽 재질의 펑키한 스타일이었는데, 머리 곳곳에 스크래치 흔적을 남기거나 짙은 분홍, 녹색, 푸른색으로 염색을 해 놨다.

징 박힌 장갑이나 부츠만 봐도, 저들이 어떤 성향의 집단인지 쉽게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고, 아무래도 40번대 후반 구역의 고철더미 출신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기 서 있는 사람들은, 숫자가 꽤 적군.'

숫자는 셋.

집단이라고 부르기엔 꽤나 적지만, 그럼에도 저들의 위치를 생각하면 다른 집단에 꿀리지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 저기 셋은 마법사니까.

활동하기 편한 면바지에 와이셔츠, 그리고 적당한 조끼를 입었다.

그 위에 현대복식에 맞춰서 리파인한 로브를 걸침으로써 자신들이 마법사라는 걸 피력했다.

게임 속 마법사는 바람만 불어도 엄청 휘날릴 것 같은 펑퍼짐한 의복을 주로 입었는데 지금의 마법사들은 그러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젠 머리에 고깔모자도 안 쓰네.'

내가 마법사를 키우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마법사가 입는 옷은 기본적으로 폼이 안 났다. 룩덕질이 힘들다고 해야 하나.

기왕 할 거면 멋진 갑옷이 낫지 않냐고 해서 기사를 고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마법사는 그런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마법사를 키웠지.'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도 주변을 탐색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무슨 구형 건식 잠수복을 입은 사람도 보였고, 의수를 단 채 중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겉모습만 보면 범상한 자들이 하나도 없다.

전부 다 마녀의 의뢰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건가.'

아마 이 자리에서 놓고 본다면 내가 가장 연식이 짧을 것이다.

그럴 것이 해결사가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비록 여러 의뢰를 성공했다 하지만 티르나라는 도시 전체에서 보면 한없이 미천한 결과물일 뿐.

그러니 나는 항상 도전하는 사람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치이이익!

정차해 있는 열차에서 새하얀 증기가 우렁차게 뿜어져 나왔다.

이제 곧 출발한다는 신호에 역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열차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은 열차의 끝인 짐 수송 칸에 무언가를 싣고 있었다.

나는 로난이 구해다 준 표를 확인했다. 좌석은 2등칸이라고 적혀 있었다.

'2등칸이라.'

자본이 중요해진 세상이 되다 보니, 이런 열차에서도 급이 나뉘었다.

1등칸, 2등칸, 3등칸, 그리고 짐칸.

1등칸은 열차의 량 하나 전체를 개조해서 만든 자리다.

열차의 가장 앞부분을 차지하며 내부는 호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는데, 당연히 돈이 아주 많은 부유한 사람만 탈 수 있었다.

그리고 2등칸은 흔히들 일반석이라 부르는 곳이다.

다만 그렇게 좋은 건 아니고, 딱 앉아서만 갈 수 있는 수준.

그래도 3등칸보다는 낫다.

3등칸은 앉아서 갈 공간이 없다. 말 그대로 전부 다 서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 사람들 대부분은 기차를 탄다면 3등칸에 몰린다.

량 전체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 들어차, 덜컹거리는 열차 속에서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다.

빨랫줄에 몸을 걸어서 잠을 청하는 곳을 숙박이라 하는 세상에 퍽이나 어울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란 좌석이라도 얻은 것이 다행인가.'

로난의 꼼꼼함과 철저한 준비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좌석이 있는 열차칸에 들어오니 한 무리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런. 방금 전 마피아들인가.'

진짜 마피아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일단 그렇게 보여서 이름을 붙였을 뿐.

아무래도 내가 타려는 좌석의 칸은 이 마피아들이 모두 차지한 모양이었다.

저들 또한 나를 발견하고는 시선을 모았다.

자신들이 전세를 낼 줄 알았던 칸에 의외의 사람이 있어서 탐탁지 않은 것일까.

어차피 나야 신경쓰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으려 통로를 걸었다.

툭.

그때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통로가 좁다 하더라도 이걸 못 볼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일부러 내게 와서 어깨를 부딪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뻔한 반응이 돌아왔다.

"너 이 새끼 뭐야. 어? 사람의 어깨를 쳤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니야."

험악한 얼굴을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는 것이, 마치 잔뜩 구겨놓은 종이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녀석이 손을 들어 올려 내게 뻗었다.

이대로 내 멱살이라도 쥐려는 것으로 보였고, 나는 그 손이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잡는 순간, 그때는 내 검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선보일 거라고 다짐했다.

"뭐 하는 겁니까."

그때 산통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열차 칸에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들렸다.

내게 손을 뻗으려던 조직원은 사색이 되어 차렷 자세가 되었다.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무심한 눈으로 보았다.

그 사람이다. 새하얀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남자.

"제가 뭘 하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그, 그것이 이 사람이 저와 부딪쳐 놓고도 사과의 말이 없어서...죄, 죄송합니다!"

"열차에서 소란은 금지입니다."

지극히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말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꽤나 뜬금없이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직원은 그 말에 알겠다며 곧바로 물러났다.

싸움을 기대하던 다른 조직원들도 잔뜩 긴장한 채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저 모습만 보면 평소에 얼마나 엄격하게 조직원들을 다스리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내 앞까지 다가온 남자를 보았다.

그 또한 나를 보았다.

우리 둘은 상대를 탐색하듯 서로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침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잿빛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이 실례가 많았군요."

정중한 사과의 어조. 방긋 짓는 미소까지.

나 또한 그에 호응하듯 답했다.

"사소한 일이었을 뿐이다."

"그렇습니까."

상대는 내 말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녀석은 처음부터 내게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발루드라고 합니다."

"오시안."

"저희 직원의 무례에 대해서 다시 사과드립니다."

발루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훌쩍 떠났다.

말투와 행동은 정갈하지만, 눈빛이 상당히 포악적이었다.

그래도 싸우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려나.

의뢰를 맡기도 전에 일을 벌이는 것은 나도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주변의 시선은 여전히 따가웠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운이 좋게도 내 좌석은 창가 자리였고, 내가 앉기가 무섭게 창밖의 풍경이 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열차가 출발했다.

*

"들었어. 우리 막내 보냈다며?"

주점에 들어오자마자 로레인이 로난을 향해 힐난하듯 한 말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왜 그걸 말리지 않았냐고 로난을 추궁하고 있었다.

"이런. 소식이 빠르시군요."

"됐고. 지금 제정신이야? 페트라 교황청이 관련 있는 일에 걔를 보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하. 문제? 있지 당연히. 애초에 오시안 걔는 이 업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어. 무력은, 솔직히 인정. 그 정도면 어딜 가서도 대접을 받겠지. 하지만 알잖아?"

"이 업계는 단순히 무력만으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죠."

로레인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

"그래! 게다가 이번 일에 끼어든 놈들을 봐. 마법학파까진 그러려니 하는데 크라임 펌 중 하나인 노스 블라인더스가 끼어 있잖아! 그 잔악한 마피아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로레인이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로난은 서류를 정리하면서 다루는 볼펜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회전시켰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블리딩 엣지」의 강화인간, 「고철더미」 출신의 폭주족들도 있죠."

"그런 곳에 막내를 보내?"

"정작 본인 앞에서 막내 취급은 하지도 않은 사람이 할 말입니까?"

로난의 지적에 로레인이 말문을 잃었다.

그 모습에 로난은 작게 웃었다. 행동은 저래도 로레인은 오시안이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 것이다.

자신보다 강하고 상대하기 힘든 분위기를 지녀도, 같은 사무소에서 일하는 동료이니까.

"제게는 가능할 거라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오시안 씨 본인이 가겠다고 하셨죠. 그것은 본인의 의지입니다. 제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네 역할은 혹시 모를 고삐를 잡는 거잖아."

"맞습니다. 정 위험하면 잡는 거죠. 잡지 않은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고요."

"그 마녀가 탐이 난 것은 아니고?"

로레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로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지금까지 조용히 지내며 바깥에서 버티다가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필시 무언가 사정이 있었을 테죠.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시안 씨입니다."

"너, 알면서도 보낸 거구나."

"오시안 씨는 정말 믿기지 않은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성장세는 저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죠. 그렇기에 위험합니다."

로난은 한층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성공은 좋죠. 세상 누가 그걸 마다하겠습니까. 하지만 때로는 실패의 고통도 필요한 법입니다."

"절대로 평범한 중개인이 할 말은 아니네."

보통 중개인은 해결사가 성공만 하면 좋아하지 실패하길 바라지 않는다.

의뢰의 성공은 곧 중개인에게도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난은 그보다 오시안의 미래를 더 걱정했다.

언제까지고 성공가도를 달리다 보면 브레이크가 고장 나고 만다.

그 순간 넘어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미리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나았다.

로레인도 로난의 속셈을 깨닫고는 혀를 내둘렀다.

"있지. 너는 역시 성격이 엄청 꼬였어."

"이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정말 상처받는답니다."

"엄살 부리기는. 그런 생각 하지도 않는 주제에."

로난은 상처를 받았다는 듯 어깨를 침울하게 떨어뜨렸다.

물론 로레인에겐 그것이 그저 과장된 엄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난은 그것이 참 슬펐다.

이쪽은 순수한 의도로 하는 건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심지어 진실을 말할 뿐인데도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경계를 했다.

'정말이지. 각박한 세상이네요.'

*

티르나를 벗어난 열차는 철로를 열심히 달렸다.

도시 바깥에는 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었다.

황금의 들판 사이로 듬성듬성 수확기계가 보였다.

증기를 뿜는 사족 보행의 전차였는데, 전면부에 낫이 자동으로 회전하며 밀을 수확하는 것이었다.

참 신기한 광경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도착지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그 순간 뇌리를 찌르르 가로지르는 느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뭐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콰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충돌이 철로를 흔들었다.

42화. 의뢰 실패 (2)

키기기기긱!

귀청을 찢으며 뇌리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났다. 달리던 열차가 급정거를 시전하며 철로와 마찰을 빚으며 나는 소리였다.

거대한 관성에 휩쓸린 사람들의 몸이 앞으로 확 쏠리며 사방에서 고함과 욕이 터져 나왔다.

"이런 제기랄! 또 뭐야!"

"다들 정신 차려!"

노스 블라인더스 마피아들은 앞좌석에 머리를 박거나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오시안만 마치 물리법칙을 위배하듯 의자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

열차가 완전히 멈추고 소요가 가라앉았을 때, 마피아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인원 체크해!"

"외부 습격은 아닙니다! 후속 공격이 없습니다!"

"고작 이런 걸로 다친 새끼는 없는 걸로 알겠다!"

괜히 복장부터 통일한 조직이 아니라는 듯, 그들은 혼란을 빠르게 떨쳐냈다.

오시안도 작금의 상황을 직감했다.

'열차를 직접 습격한 게 아니라 선로를 노린 건가.'

폭발음과 함께 열차가 멈췄다. 그렇다는 것은 누군가 노리고서 선로를 파괴한 것이다.

다행히도 열차가 탈선하는 일은 면했지만, 운행을 멈췄다는 것은 꽤나 큰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목적지인 도시까지 도착하지 못할 테니까.

부아아앙!

그때 바깥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기로 뜨겁게 태운 공기가 대기와 충돌을 자아내며 만드는 소음.

모두의 시선이 반투명한 창문 너머로 향했다.

"꺄호!"

"잘 있어라! 멍청이들!"

그렇게 외치며 빠르게 바깥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열차에 탑승하기 전에 보았던 폭주족들이었다.

형형색색의 머리색과 문신, 가죽 재질의 펑키한 스타일.

40번대 후반 구역의 고철더미 폭주족이었다.

'저건 또 뭐야.'

오시안은 신기하다는 듯 놈들이 탄 기계를 응시했다.

마치 거대한 다람쥐 쳇바퀴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독특한 디자인의 오토바이였다.

안쪽에 탄 사람은 고정되고, 커다란 일륜 바퀴만 빠르게 회전하며 달리는 방식의 모노휠 바이크였다.

부아앙!

모노휠 바이크는 양 옆으로 튀어나온 배기구를 통해 검은 매연을 거세게 뿜어냈다.

폭주족들이 각기 2명씩 탑승한 바이크 10여 대가 정차한 열차를 조롱하듯 지나쳤다.

"이 빌어먹을 고철더미 출신 새끼들이!"

"미리 작당을 하고 선로를 파괴시켜?"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 바이크를 준비한 놈들이다.

이 폭발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것인지는 명백한 일이었다.

'어쩐지 죄다 짐칸에 가까운 곳에 올라타나 했더니. 이걸 노리고 미리 준비해둔 거였나.'

오시안은 열차에 탑승하기 전, 폭주족들이 커다란 보자기에 쌓인 무언가를 짐칸에 실었던 걸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것이 지금 타고 달리는 모노휠 바이크인 모양이었다.

자신들은 미리 탈 것을 준비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 외딴곳에서 낙오시키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때 1등칸의 문이 열리며 백색 양복을 입은 발루드가 들어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바깥에서는 이사님이라 부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발루드가 불쾌하다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자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조직원이 황급히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사님!"

"상황은 어떻게 됐습니까."

"고철더미 놈들이 철로를 파괴하고 먼저 가버렸습니다. 모노휠까지 챙겨온 걸 보면 아주 작정한 것 같습니다."

"쯧. 대놓고 싸울 수는 없으니, 차라리 꼼수를 부리겠다는 거군요."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발루드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깃든 것이 전부였다.

'뭐가 있는 건가?'

때마침 발루드가 곧바로 손가락을 까닥이며 조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준비한 것을 꺼내십시오."

"네!"

발루드의 부하들이 신속하게 열차에서 내렸다.

이대로 멈춰 버린 열차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오시안도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됐다.

발루드의 부하들이 열차의 선두를 차지하는 1등칸으로 가더니, 일사불란하게 한쪽 벽을 옆으로 밀어냈다.

1등칸의 벽이 미닫이문처럼 너무나도 손쉽게 열리며 그 안에 담긴 물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차량?'

그냥 차량도 아니고 장정 여럿이 탑승할 수 있는 커다란 군용 지프차였다.

그런 차량이 1등칸에 각기 2대씩, 총 4대가 있었다.

사람 하나 타는 데도 막대한 돈이 드는 1등칸에 차량을 몰래 실어놓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은 돈지랄이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처음부터 미리 준비해놨던 건가.'

보통 1등칸은 귀중한 손님이 타는 곳이라 외부의 습격을 대비해 꽤나 튼튼하게 지어지는 곳이다.

당연히 저렇게 힘을 준다고 외벽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열차의 앞칸 자체를 개조했군.'

적어도 오시안이 알기로는 티르나의 열차는 '철도관리 위원회'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철도관리 위원회는 이름만 그렇지 시(市)가 인정한 공공기관이었다.

그 위원회에서 담당하는 열차를 개조했다는 건, 그것도 귀중한 손님이 타는 1등칸을 개조하는 건 아마 해당 기관에 막대한 로비를 한 결과물일 것이다.

티르나는 황금의 도시라는 이름답게 돈으로 되지 않는 일이 적었으니까.

'심지어 저런 걸 준비했다는 건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던 건가.'

그 순간 오시안의 머리 위로 3개의 그림자가 하늘을 가로질러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인위적인 강풍이 후폭풍처럼 몰아쳤다.

'마법사들까지.'

3명의 마법사 중 하나가 바람을 일으켜 허공을 새처럼 날았다.

저 속도라면 금방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다들 저마다의 방법으로 움직이는 건가.'

오시안은 이번 일에 끼어든 자들이, 지금까지 봐 왔던 도시의 해결사들과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당장 고철더미 출신의 폭주족들이 저지른 짓만 봐도 그렇다.

선로를 파괴시켰다.

만일 열차에 다른 조직원들이 타고 있지 않았다면 열차를 파괴시켰을 놈들이다.

"출발한다!"

"저 고철더미 새끼들을 따라잡자!"

때마침 발루드의 부하들도 차량에 탑승을 완료했고, 이내 우렁찬 엔진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철도가 파괴되어 열차가 멈추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어진 일이었다.

오시안은 그 광경에 새삼 깨달았다.

티르나라는 도시에서 무언가 일을 한다는 것은, 매사에 다양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는 걸.

'그렇군. 나는 지금까지 무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해 왔어.'

실제로 해결사들은 무력이 크게 작용하는 직종이다.

오시안의 신체능력과 기사로서의 능력은 이 업계에서 손에 꼽는 재능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무력만으로 부족한 순간이 있었다.

가령 지금처럼, 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의도치 않게 표류하게 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로난이 왜 자신에게 이 의뢰를 맡길 때, 묘한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야 알 거 같았다.

'나도 아직 갈 길이 멀었군.'

오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자신의 안일함을 과하게 자책하지는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다음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냐는 것이었다.

'도시 바깥으로 나오고 달린 지 꽤 됐어. 그런 상황에서 여기서 멈췄다는 것은, 목적지와 거리가 딱 중간이라는 거겠지.'

주위에 차량이 잘 돌아다니지 않는 외딴곳.

이대로 나아가기도, 그렇다고 다시 티르나로 돌아가기도 애매한 위치다.

아마 그걸 노린 거겠지.

2등칸에 탑승했던 사람들도 하나둘 바깥에 나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부서진 선로를 보고 의견을 나눴다.

"어떡하지? 이 상태라면 사실상 여기서 멈춰야 하는데."

"시에서 사람을 보내는 데만 반나절은 걸릴 거야. 고치려면 며칠은 걸릴걸."

"기관차 앞부분만 어떻게든 저 너머 선로로 옮기면? 일단 다 같이 힘을 합치면 되지 않겠어?"

서로 경쟁관계인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진 지금 서로 의견을 공유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기관차 선두를 따로 옮기는 일이리라.

강화인간까지 있으니 가능성이 마냥 없는 건 아니었다.

"어이! 형씨도 함께하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손은 잡아야 하지 않겠어?"

눈썰미가 있는 해결사 중 하나가 오시안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아니. 됐다. 나는 걸어 갈 테니까."

"어, 어? 그래."

그 태도가 너무 단호해서, 해결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오시안의 복장을 가볍게 훑었다.

어차피 같이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걸어 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허리춤에 검이 뭐야 검이.'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놈인가?

그런 생각으로 물러나려다, 그래도 한 번쯤은 더 권하는 게 좋지 않아서 뒤를 돌아봤다.

그의 감각이 묘하게 오시안에게 집중이 된 것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뭐야.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주변을 서성이던 오시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다른 곳에 시선을 준 그 짧은 시간 동안 감쪽같이 사라졌다.

내가 헛것을 봤나?

남자의 얼굴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마냥 어벙하게 변했다.

*

선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평야 위를 여러 차량들이 내달렸다.

"이사님! 저기 고철더미 새끼들이 보입니다!"

선두로 앞서가던 폭주족들의 모노휠 바이크가 육안으로 쉽게 확인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모노휠 바이크도 분명 빠르지만, 노스 블라인더스에서 준비한 지프차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의 차량이 내뿜는 증기는 완전한 백색.

무려 에테르 워터를 증발시켜 연료로 사용하는 차량인 것이었다.

반면 모노휠 바이크의 매연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흑색.

불완전 연소를 의미했다.

소량의 에테르 워터에 여러 시약을 섞은 저급 연료를 사용하기에 나온 결과였다.

당연히 저런 연료는 장거리 이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이사님. 어떻게 할까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조직원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두 차량의 뒷좌석을 혼자 사용하던 발루드는 팔짱을 낀 채로 냉엄하게 말했다.

"본때를 보여 주십시오. 우리들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 말에 조직원들이 시익 웃더니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두 조직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선두의 차량이 후미의 모노휠 바이크를 따라잡았다.

콰직!

지프차가 모노휠 바이크의 뒤를 들이받았다.

균형을 잃은 바이크가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이윽고 옆으로 넘어지며 튕겨나가듯 뒤로 멀어졌다.

거기에 탑승한 폭주족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들이 벌써 따라왔다!"

"준비해둔 거 꺼내!"

고철더미의 폭주족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일부는 폭탄을 집어 던지고 일부는 총을 꺼내 차량의 바퀴를 노리고 쏘았다.

그러나 특별개조를 한 지프는 폭탄이 터지는데 끄떡도 하지 않았다.

군용으로 특수제작한 물건이라 사실상 장갑차라 봐도 무방했다.

노스 블라인더스의 조직원들도 반격했다.

지프의 천장의 열린 틈을 통해 머리를 내민 조직원이 토미건을 쏘았다.

투타타 거리며 불꽃이 튀고 가까이 다가왔던 모노휠 바이크가 잠자리 떼처럼 멀어졌다.

폭주족들은 방식을 바꿨다.

모노휠 바이크의 기동성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전환한 그들은 공격하려면 귀신같이 눈치를 채고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도 빈틈을 보이면 다가와 총을 쏘아댔다.

"저 날벌레 같은 새끼들이."

폭주족들은 지프차량을 향해 온갖 조롱과 욕을 날렸다.

범죄조직이라 해도 격이 있는 법인데 저들에겐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모습에 이를 간 블라인더스 조직원은 토미건의 탄창을 장전했다.

이쪽을 골리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총알을 선물해 줄 생각으로 눈동자를 굴리는데, 시야의 구석에 놀라운 것이 비췄다.

"무슨."

그것은 사람이었다.

두 다리로 땅 위를 내달리는 그 모습은 분명 사람이 맞았다.

분명 두 다리로 달리는데 멀리 보이던 모습이 삽시간에 가까워진다.

그리고는 이내 달리는 지프차와 모노휠 바이크를 가볍게 지나쳐 버렸다.

"꿈인가?"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이성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질주하는 차를 두 다리로 따라잡는다고?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폭주족들의 표정 또한 믿을 수 없는 걸 봤다는 듯 경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 견제하듯 계속 주고받던 총성이 단 한 발도 울리지 않았다.

43화. 사드나팔 (1)

오시안은 계속 달렸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피부를 때렸지만 멈추는 일은 없었다.

숨은 조금 가빴지만, 지금까지 달리던 걸 생각하면 이조차 놀라운 일이었다.

'힘이 강할 때부터 느낀 거지만, 체력도 무지막지하군.'

체력 수치를 끝까지 찍었으니 스테미너 게이지도 당연히 최대치일 터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거리를, 그것도 열차가 달려야 할 거리를 두 다리로 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심지어 먼저 출발했던 지프차와 오토바이 무리까지 따라잡지 않았던가.

그의 몸은 숫제 바람을 함께 머금은 채 내달리는 수준이 되었다.

지나갈 때마다 길에 자라난 높다란 풀들이 풍압에 휩쓸려 옆으로 크게 누웠다.

그렇게 달리길 10여 분.

오시안은 곧바로 마녀와 접선할 수 있는 도시 '사드나팔'에 도달했다.

사드나팔은 오스나팔로스 공화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자, 황금의 도시인 티르나와 가장 인접한 곳이었다.

그리고 유동인구가 매우 많은 측에 속했다.

대부분 티르나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거쳐 가기 때문이었다.

능력과 돈만 있다면, 신분과 관계없이 뭐든지 할 수 있는 도시는 기회의 땅처럼 비치는 법.

티르나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사드나팔을 거쳐 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드나팔은 커다란 통로 역할을 했고, 많은 종족들이 오가는 장이 되었다.

눈앞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만 해도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

오시안은 이곳에서 마녀를 찾아야 했다.

'일단 마녀 쪽에서 접선 장소로 기차역을 골랐었지.'

곧바로 역으로 향하던 오시안은 때마침 역 입구를 통해 빠져나오는 새하얀 의복의 무리를 보고 자리에 멈춰 섰다.

'페트라 교황청의 사제들.'

역에서 나온 페트라 교단 사람들은 저들끼리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삼삼오오 흩어졌다.

'설마 한발 늦었나.'

저들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페트라 교단이 마녀를 쫓아 역을 확인한 뒤라는 소리.

하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흩어진 걸 보면 마녀를 놓친 것이 분명했다.

'기회는 아직 남아있군. 문제는 도망친 마녀가 대체 어디로 향했냐는 건데.'

이 도시는 오시안도 처음 와본다.

게임에서는 몇 번이고 방문했지만, 너무 세월이 오래 흘러서 도시의 모습이 완전 달라져 있었다.

기본적인 도시의 구조는 그대로겠지만, 어느 구역에 뭐가 있는지는 확신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면, 저놈들이 먼저 의뢰주를 찾을 게 분명하다.'

페트라 교단은 괜히 오랫동안 이단을 사냥해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숨어 있는 이단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었고, 당연히 지금 돌아다니는 자들은 그 걸출한 실력을 가진 자들일 터다.

다만 확신을 갖고 움직이기보다는 서로 구역을 나눠서 흩어진 걸 보면, 의뢰주인 마녀가 무언가를 한 것은 분명했다.

그쪽도 마냥 무력하게 쫓기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쫓고 쫓기는 시간싸움이다. 이쪽에서 먼저 찾아서 데려가야 해.'

최악의 경우 페트라 교단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오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

골목길 입구에서 선 채로 신문을 펼치던 남자는 오시안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오시안은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자에게 말했다.

"페트라 교단이 쫓는 마녀의 위치를 말해라."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당신은 누구고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잡아떼는 건 그만두도록 해라. 처음부터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 않나."

오시안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적의가 없어서 내버려뒀을 뿐이었다.

아마 이 도시를 주름잡는 조직, 그것도 정보를 주업으로 삼는 놈들일 테니까.

그렇기에 지금 같은 상황에선 놈들이 필요했다.

"보아하니 말단인 거 같군. 상사에게 안내해라."

"...."

남자의 표정이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바뀌었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신문을 펼치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오시안의 손이 움직였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을 벌이겠다 이건가?"

"어, 어느새...."

오시안의 손이 남자의 총구를 붙잡았다.

남자는 힘을 줘 보았지만, 오시안의 손아귀에 잡힌 총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시안은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총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끼기기긱.

길게 솟은 총구가 휘더니 U자로 구부러지며 남자를 향했다.

"쏘고 싶으면 쏴도 된다."

"...."

남자의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렸다.

지금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순순히 오시안을 지부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비밀을 엄수하려 들지.

남자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그는 오시안의 어깨 너머를 향하더니, 이내 씨익 웃었다.

"이 새끼야 넌 뒤졌어. 그러게 누가 우릴 건드리래? 눈치를 챘으면 차라리 적당히 물러났어야지."

"허."

오시안 또한 그 이유를 알았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조직원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다른 사람들의 틈새에서 자연스럽게 섞이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본색을 드러내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주었다.

누구도 말리거나 경찰에 알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도시에서도 이런 일은 꽤나 비일비재해 보였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나도 괜한 대화로 시간을 잡아먹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

"뭐?"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물으려 했지만, 오시안의 주먹이 그의 안면에 틀어박히는 것이 먼저였다.

힘 조절은 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빨이 우수수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터졌을 테니까.

"이 새끼가!"

"죽어!"

주변에서 동료들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오시안은 그들을 보며 주먹을 풀었다.

"너희들은 검을 뽑을 필요도 없어 보이는군."

이윽고 일방적인 난투극이 벌어졌다.

*

오시안은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질질 끌며 철문 앞에 섰다.

"여기인가?"

"네, 네헤."

입술이 부르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남자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 발음으로 답했다.

오시안은 눈앞의 철문을 응시했다.

인적 드문 골목길에 이런 튼튼해 보이는 문이라니. 딱 봐도 중요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수고했다."

퍼억!

오시안은 녀석의 머리를 후려쳐 기절시켰다.

문을 두드리려던 오시안은 손을 멈췄다. 문 너머에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시안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응시했다.

"눈치 하나는 빠른 놈들이군."

오시안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바닥을 내리찍었다.

지면이 쿵 하고 크게 진동하더니, 이내 바닥에 푹 하고 꺼졌다.

부서진 지면의 잔해가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고 오시안 또한 아래로 향했다.

*

지하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쏟아지는 잔해를 바라봤다.

그것은 이곳의 정보조직 지부장인 렉슬러도 마찬가지였다.

"흠. 여기 다 모였군."

쏟아지는 매연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자신의 프록코트 어깨에 나앉은 먼지를 손으로 가볍게 툭툭 털어냈다.

기이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와 카리스마를 지닌 남자였다.

어딘가 고위 집안 출신이라도 되는지 모습에서 귀티가 절로 흘렀다.

무심하듯 조직원을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는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놈이다.'

렉슬러는 이미 보고를 들어서 오시안의 인상착의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허리춤의 검. 티르나에서 온 해결사. 마녀를 찾는 것으로 추정. 이쪽을 노리고 있음.

'그런데 어떻게? 분명 이 비밀통로는 절대 알 수가 없는데.'

게다가 더욱 말도 안 되는 것은 놈이 지상에서 지하를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는 거다.

굴착기도 아니고 인간이 맨몸으로 지면을 부수고 들어와? 뮤턴트라 하더라도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주위에서 부하들이 하나둘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렉슬러가 눈알을 굴렸다. 죽일 수 있나? 저 인간을?

애초에 싸우려고 한다면 못 싸울 것도 없었다. 여기 인원이 몇인데 그걸 피하겠는가.

다만 지금 페트라 교단이 이 도시에서 마녀를 추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괜히 눈에 띄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여기 지부장인가?"

"...."

오시안은 렉슬러를 정확하게 응시하며 물었다.

등 뒤에서 부하들이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고.

그들은 명령만 내리면 총을 뽑아 쏠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는 사이 오시안은 렉슬러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렉슬러의 눈이 부릅떠졌다.

다가오는 오시안의 등 뒤에서 무언가 아지랑이처럼 맺히는 환각을 본 것이었다.

렉슬러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먹을 쥔 손이 땀으로 흥건했다.

괴물.

녀석은 괴물이었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렉슬러의 판단은 빨랐다.

"동작 그만!"

그 외침은 부하들에게 한 말이었다. 부하들은 그 말에 모두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렉슬러가 오시안을 향해 정중히 물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내가 왜 찾아왔는지 모르나? 그러면 실망인데."

"...마녀는 도시의 남쪽 빈민가로 향했습니다.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 바로 출발하신다면 따라잡을 수 있으실 겁니다."

그제야 오시안의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의 만족감이 깃들었다.

렉슬러는 안도하려 했지만 갑자기 불쑥 내밀어진 오시안의 손에 의뭉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이건 왜...."

"위자료."

"예?"

"나를 공격하려 들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저, 정보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도망친 값이고."

"일방적으로 쥐어터진 것은 제 부하인 걸로 압니다만."

"정당하게 거래를 요청한 내게 먼저 총구를 들이민 것은 그쪽이었지."

"...."

부하의 입장에서는 충성심 때문에 그랬겠지만, 그것이 돌고 돌아 이렇게 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렉슬러는 오시안에게 상당한 금품을 넘겨줘야만 했다.

오시안은 만족하며 떠났고, 부하들이 눈치를 슬슬 보다가 렉슬러에게 다가와 물었다.

"지부장님. 그보다 괜찮겠습니까?"

"뭐가 새끼야."

"지금 이 도시에 그자도 와 있지 않습니까. 페트라 교황청 역대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는 성기사가. 왜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겁니까? 저러다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그러라고 한 거다. 내가 왜 말 안 했냐고? 당연하지. 가서 죽으라고 그런 거다."

부하도 그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강한 해결사 같았는데 운이 없군요. 하필이면 상대가 그 괴물이라니."

"그래, 교단에서도 500년 만에 역대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고 알려진 정화 심판자다. 상대가 안 되겠지."

렉슬러의 입이 삐뚜름한 조소를 머금었다.

"분명 죽을 거다."

*

"캬하! 여기 이거 봐! 페트라 교단 놈들, 허약해 빠지지 않았어?"

상반신을 탈의한 스킨헤드가 혀를 날름거렸다.

고철더미의 폭주족은 피투성이가 되어 싸늘한 주검이 된 페트라 교단의 사제들을 보며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보다 여기 마녀는 없는 모양인데?"

"에잉. 모양 빠지게. 제대로 찾은 줄 알고 몰래 쫓아왔는데 허탕이었네."

"뭣들 해? 빨리 움직여! 이러다가 그 양복쟁이 놈들한테 빼앗기겠다."

도시에 도착한 것까진 좋았고, 무언가를 쫓는 페트라 교단의 사제무리를 발견한 것도 괜찮았다.

당첨이구나 싶어서 놈들을 몰래 따라와 기습을 가했는데, 아무래도 마녀는 없는 모양이었다.

"엉? 저기 한 놈 남아있는데?"

부하의 물음에 폭주족들의 시선이 모두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언제 와있었는지 모를 사람이 서 있었다.

복식은 페트라 교단의 성기사의 것과 같은데, 차이점이 있다면 의복이 흰색이 아니라 회색이라는 것이었다.

"성기사? 그러자니 복장이 다른데."

"됐고 빨리 죽여. 시간 없다."

"크흐. 이럴 줄 알고 중화제를 안 꽂았지."

근육이 거칠게 부풀어 오른 스킨헤드가 침을 흘리며 성기사를 향해 건들건들 다가갔다.

그런 그의 양 어깨에는 보라색 약물이 담긴 앰플이 꽂혀 있었다.

"운이 없다고 여기라고. 성기사 양반. 세상살이가 다 그렇잖아?"

약물로 강화된 육체는 성기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그때 깊게 눌러쓴 후드로 얼굴이 가려진 성기사가 물었다.

"신실한 종으로서 묻겠다. 이단이여. 회개할 마음은 있는가?"

"회개? 이거 웃긴 새끼네. 야 이 병신아. 우리가 그런 걸 하겠냐?"

스킨헤드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직후 황금의 물결이 그의 손을 훑고 지나갔다.

황금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가 뻗은 팔도 마찬가지였다.

"어?"

스킨헤드는 당황스러웠다. 오른손이 팔뚝 아래로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그것도 무려 약물로 강화를 한 육체가 말이다.

성기사의 싸늘한 음성이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너희 모두를 정화하노니."

성기사의 몸에서 황금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죽음 속에서 회개하라."

44화. 사드나팔 (2)

오시안은 얻어낸 정보를 통해 마녀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렸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뛰기 힘드니 건물의 지붕을 밟으며 지나갔다.

그 발걸음은 빠르기도 하고 동시에 가벼워서, 사람들은 옥상 위를 달리는 오시안을 발견하지 못했다.

계속 달리다 보니, 규칙적으로 늘어선 건물이 하나둘 허름하게 변하며 판자촌이 나왔다.

'여기가 사드나팔의 빈민가인가.'

거리에 내려선 오시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보상은 이곳에 마녀가 숨어 있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너저분한 거리에 길을 알기 힘든 구조를 생각하면 숨기 적합하군.'

그런 오시안을 향해 거지들이 눈을 빛내며 하나둘 접근했다.

겉모습만 놓고 보면 오시안은 그 누구보다도 돈이 많아 보이는 귀족이었다.

빈민가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매력적인 먹잇감은 없을 것이다.

"꺼져라."

오시안은 그런 빈민가 거지들을 노려보며 짧은 한 마디를 건넸다.

그 목소리에 깃든 기묘한 힘 때문인지 빈민가 사람들이 멈칫했다.

하지만 막상 물러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말로 한다고 해서 제대로 들어먹었으면 이런 짓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찮게 됐군.

오시안은 여기서 괜히 드잡이질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마녀가 언제 갑자기 페트라 교단에 붙잡힐지 모르는 지금 시간이 부족했다.

퍼엉!

그때 멀리서 커다란 굉음이 터졌다.

빈민가 거지들이 몸을 움찔 떨며 삼삼오오 흩어졌다.

오시안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저기로군."

폭발은 계속 들려왔다. 폭발의 사이로 성스러운 황금빛 기파가 섞인 것이 보였다.

성직자가 사용하는 신성력이었다.

마녀와 페트라 교황청의 추적대가 마주친 것이 분명했다.

오시안은 폭심지를 향해 바람처럼 내달렸다.

주변의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빈민가 사람들의 틈새를 가로지르는데 어떠한 충돌도 없었다.

"뭐, 뭐지?"

"방금 뭐였어?"

빈민가 사람들은 오시안이 자신의 옆을 유령처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어리둥절했다.

오시안은 이윽고 바닥을 크게 굴렀다.

쿵, 하는 커다란 굉음과 함께 지면이 크게 요동치며 단단한 대지에 족적이 새겨졌다.

커다란 반동을 받은 오시안의 몸이 높게 솟구쳤다.

허공을 부유한 오시안은 더 넓어진 시야로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발견할 수 있었다.

붉은 망토를 두르고 도망치는 여인과, 그 뒤를 쫓는 새하얀 의복의 집단을.

눈에 별빛이 번뜩였다.

오시안의 몸이 먹잇감을 낚아채는 매처럼 떨어져 내렸다.

때마침 마녀는 막다른 길목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시안은 정확히 마녀와 페트라 교단의 추적대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폭탄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근방의 허름한 판자촌 집들이 바르르 떨렸다.

이윽고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며 오시안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도망치던 마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교황청의 추적대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추적대의 선두에 선 성기사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목과 턱이 두꺼운 40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그의 단호한 시선은 적대감을 머금은 채 오시안을 향했다.

그 말에 오시안의 눈동자가 성기사를 향했다.

"...!"

오시안의 눈동자에 아른거리는 새하얀 불길을 보는 순간 성기사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다른 사제들과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심한 눈동자 사이에 일렁이는 저 빛을 보라.

신을 향한 무궁한 신앙심조차 순간이지만 물에 녹아내리듯 흔들리게 만드는 위압감이 있었다.

하지만 추적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내고 오시안을 둘러싸고자 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보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여기서 뽑아야 하나.'

오시안은 곁눈질로 자신의 뒤에 있는 마녀를 슬쩍 살폈다.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겁에 질려 있었다.

'싸우면 휘말리겠군. 게다가 교단과 굳이 척을 져서 좋을 것도 없겠고.'

오시안은 다시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모처럼 새로 만든 칼이었지만, 아직 사용할 때가 아니었다.

"실례하지."

"뭐? 그게 무슨, 꺅!"

오시안은 곧바로 마녀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 모습에 성기사들이 뭘 하려는 거냐고 외치려는 순간, 오시안의 몸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나, 날았어? 마법사였나?"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지휘자는 그게 아니라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아니야. 저건 순수하게 각력만으로 뛰어오른 거다.'

사람 하나를 안아 들고 제자리 뛰기만으로 저렇게 솟구칠 수 있다고?

뮤턴트인가? 아니면 강화인간? 그게 어찌 됐든 상대가 티르나에서 온 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죄인의 도시.'

페트라 교단은 티르나를 죄인의 도시라 일컬었다.

티르나는 능력과 돈을 우대한다. 그러니 마녀고 흑마법사고 세기의 범죄자고 티르나에서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막강한 자금과 권력을 통해, 주변 왕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권을 넘어 그 이상의 영향력을 자랑했다.

페트라 교황청에서 몇 번이고 경고를 날려도 티르나의 시장이 코웃음으로 응대한 것은 꽤나 유명한 일화였다.

"뭣들 하나! 어서 뒤를 쫓아라! 이단이 탈출하게 둬서는 안 된다!"

추적대가 오시안의 뒤를 맹렬히 쫓았다.

*

오시안은 계속 달렸다.

판자촌의 복잡한 지리는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저 바람처럼, 지붕을 밟고 내달리면 그만이니까.

마음만 먹으면 밟는 족족 집을 붕괴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시안은 최대한 발걸음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마치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소리 없이 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당혹감으로 몸을 뒤틀던 마녀도, 이제는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허공에 떠오르고 떨어질 때는 자기도 모르게 오시안의 코트 자락을 손으로 꼬옥 쥐기도 했다.

하지만 새빨간 후드 아래 가려진 눈동자는 오시안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당혹, 경악, 동시에 안도감.

빈민가를 벗어난 오시안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들어와 마녀를 내려주었다.

"걸을 수 있겠나?"

"네, 네."

마녀는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지만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시안은 그제야 마녀의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금발. 약간 웨이브진 머리카락은 어깨에 갓 닿을 정도로 짧았다.

후드가 달린 붉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신비한 인상이 강했다.

"망명을 요청한 마녀. 맞나?"

"...에나. 에나 그룬트예요. 그쪽은?"

"오시안. 티르나의 해결사이자 기사다."

마녀 에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녀를 상대로 기사라고 자기소개를 하다니. 이 분위기를 타파하려는 그 나름의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표정은 또 세상 진지해서 에나는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뭐가 어찌 됐든 구해 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다른 동료는 어디에 있죠?"

"없다."

"예?"

에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오시안에게 되물었다.

"있었는데, 오는 길에 헤어지기라도 한 건가요?"

"아니. 없다. 처음부터 나는 혼자였다."

"무슨...."

에나는 머리가 아파 왔다.

위기의 순간 오시안이 자신을 구하러 와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혼자라니? 방금 전으로 보건데 능력은 대단히 뛰어난 모양이지만, 그래도 혼자는 무리가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하죠! 지금 상대가 누구인지 몰라서 그래요? 그 페트라 교황청이란 말이에요!"

"어차피 안 싸우고 이 도시를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특히 지금 이 도시에는...괴물이 하나 와 있다고요."

"괴물?"

"...반응을 보니 모르는 모양인데 그런 녀석이 하나 있어요. 그래도 누구보다도 먼저 도착하셨으니 이 도시를 빠져나갈 방법은 있으시겠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나름의 대비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

하지만 그 기대감은 무참히 박살났다.

"없다."

"어, 없다고요? 돌아가는 열차편은요?"

"열차를 타고 가려고 해도 의미 없을 거다. 이곳으로 통하는 급행 선로가 박살났거든. 게다가 교단에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역을 지켜보고 있겠지. 변장을 해서 뚫고 간다면 모를까."

"그건 안 될 거예요. 저들은 이단을 추적하는 데 이골이 난 자들이니까요. 제가 아무리 모습을 바꿔도 근처에 있다면 단번에 알아차릴 거예요."

이미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일까.

에나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아니면 따로 몰고 갈 차량도 없나요?"

"없다."

애초에 오시안은 여기까지 달려왔다.

비록 절반의 거리라고는 해도, 절대로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오시안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다. 방금 전처럼 안아 들고 티르나까지 달려갈 수 있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 같은데.'

혼자면 모를까 둘이 되면 확신이 힘들었다.

문득 오시안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니 있었다.

아주 튼튼하고 빠른 차량을 몰고 온 자들이.

"어쩌면 방법이 하나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요?"

"그래. 다만, 조금의 귀찮은 일은 감수해야 해."

"귀찮은 일이요?"

그 말에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에나의 표정에 일순 망설임이 깃들었다.

"...어쩔 수 없겠죠. 이 도시에 계속 남아있으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으니, 차라리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요."

"그렇다면 가도록 할까. 곧 놈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칠지 모르니 다시 이동한다."

"아. 잠깐만요."

에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한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조심히 꺼내 들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성냥갑이었다.

안에서 성냥 하나를 꺼낸 에나는 불을 붙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성냥의 불꽃 주위로 공간이 일렁이더니, 이윽고 에나와 똑 닮은 환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저것이 위치크래프트(Witchcraft).'

다른 이름으로는 마녀공예(魔女工藝)라 부르는, 마녀들의 고유한 마법.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다르며, 마녀마다 타고난 위치크래프트가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능력의 모티프가 전부 동화에 기인한다는 것.

오시안이 게임 속에서 보았던 마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혹자는 마녀의 마법을 메르헨(Märchen)이라고도 불렀다.

위치크래프트는 위력도 성능도 제각각이다.

바꿔 말하면 힘이 수치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왕국 하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수준의 마녀가 존재했으니까.'

실제로 마녀 '룸펠스틸츠헨'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는 힘으로, 왕국 전체를 황금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참 지독하기는 했다.

왕국에 발을 들이는 순간 황금 게이지라는 것이 생기고, 그것이 최대치가 되면 체력이 몇이고 자시고 무조건 황금으로 변해 즉사 판정이니까.

오시안도 마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많이도 죽었었다.

그래서 대부분 공략법이라는 것이, 해당 마녀가 각성하기 전인 회차 초반에 그녀를 찾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만큼 무수한 게이머들이 도전할 바엔, 차라리 싹을 제거하자고 입을 모았을 정도였다.

물론 오시안은 황금성에서 직접 잡아냈지만 말이다.

'이쪽의 능력은 성냥을 통해 환상을 보여 주는 쪽인가.'

그 수준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망치는 데는 꽤나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교단의 추적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은 이런 능력 덕분이리라.

"이걸로 시간은 조금 벌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바로 움직이지."

*

사드나팔의 도시 외곽.

그곳에 정차된 커다란 지프차를 발견한 에나의 눈에 광채가 흘렀다.

"저거라면 충분히 도시를 벗어날 수 있겠어요."

"그래."

"하지만 험악한 사람들이 차량을 지키고 있는데 괜찮겠어요?"

에나의 걱정대로 차량을 관리하는 인원이 남아 있었다.

하나같이 경계를 철저하게 하고 있어서 다가가는 즉시 발각될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방법이 있으니까."

"정말요?"

오시안은 곧바로 행동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말도 안 되는 신체능력으로 차량에 접근해 경계를 서는 자들을 모조리 때려눕힌 것이다.

에나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그런 오시안을 응시했다.

"다 끝났다."

"...네. 정말 훌륭한 방법이네요."

피지컬이 뛰어나면 이런 일도 쉽게 하는 법이구나.

에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차량에 탑승하기로 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그러면 안 되죠. 남의 차량을 몰래 도둑질하려고 하시다니."

"...."

오시안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게다가 우리가 모시려던 마녀님까지 데리고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하얀 양복과 흰 모자.

그 아래에 쓴 무테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흉악하게 빛났다.

45화. 야만전사 (1)

오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발루드와 그 부하들은 지금 한창 도시 안쪽을 뒤지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차량을 가져갈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소거법을 생각하면 당연한가. 저놈들도 바보는 아닐 테니, 내가 열차를 탈 수 없다는 걸 알 거고.'

즉 발루드는 오시안이 자신의 차량을 몰래 훔칠 거라는 걸 예상했다는 것이다.

발루드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신사답게. 비즈니스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들어는 보지."

"그녀를 넘기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냥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오시안은 에나 그룬트를 힐끔 살폈다.

"그거참 신사적인 제안이로군."

"거짓말이라 생각하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저희는 이런 부분에서는 확실히 약속을 지키니까."

"내가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약간의 폭력적인 수단이 동원되겠죠."

철컥.

그 말과 동시에 발루드의 옆에 도열한 마피아들이 오시안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전부 다 총기를 무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오시안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토미건이라 부르는 톰슨 기관단총이었다.

아무리 날아오는 총알을 베어내는 오시안이라 하더라도, 토미건 3정이 동시에 포화를 뿜으면 답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나 그룬트의 의견이었다.

그녀가 여기서 오시안을 등지고 발루드에게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아니. 확률만 놓고 보면 사실상 확정이라 봐도 무방했다.

오시안은 다시 에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어딘가 불안한 표정으로 오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요?"

"가도 좋다."

"네?"

"어차피 나와 있는 것보다, 저쪽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안전하겠지.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에나는 그 말에 황망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해요?"

"네 의견을 묻는 거다."

"...그렇다면 만약에 말이에요."

에나는 조심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저쪽의 제안을 거절하고 그쪽과 함께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저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드나?"

"...애초에 저렇게 험악한 인상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 리가 없잖아요. 돈 받고 사람도 죽이는 사람들인데."

"나도 돈 받고 사람을 죽였는데?"

"그쪽은, 그...뭔가 달라요."

에나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뭔가 다르다고.

그것은 자신을 비호해 주는 자 없는 세상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마녀가 지닌 일종의 직감이었다.

"제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에나는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 맑은 눈동자를 마주한 오시안은 진실된 답을 꺼냈다.

"그렇다면 싸우겠지."

"저 사람들과요?"

"그걸 포함해서 이쪽을 방해하는 모두와."

꽤나 오만한 말이었을까.

에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제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저희는 오늘 처음. 그것도 방금 전에 막 만났잖아요."

"이게 지금 내가 맡은 일이니까."

그 목소리에는 추호의 거짓도 기만도 없었다.

에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의무 같은 것은, 그냥 쉽게 버리면 되잖아요. 지금 세상 사람들은 다 그런데."

그 말에 오시안은 피식 웃었다.

"그건 명예롭지 못하지."

"...."

명예롭지 못하다니.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도저히 들어볼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에나는 이보다 더 믿음직스러운 대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그저 오시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자 안도하며 납득을 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는군."

오시안이 발루드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대답에 발루드는 안 그래도 차가운 눈동자를 더욱 무겁게 가라앉히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적당히 손봐드리세요."

그 말에 토미건을 든 부하들이 앞으로 나섰다.

철컥. 장전된 총구가 오시안을 향했다. 그 방향은 각기 팔과 다리.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그들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틱.

"어? 뭐야."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총기 점검도 제대로 안 했어?"

"아, 아니야! 분명 차량에서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다고!"

그렇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거다.

그때 발루드가 부하들을 향해 조용히 일갈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눈이 있다면 저걸 똑바로 보십시오."

그 말에 뒤늦게 조직원들은 오시안의 등 너머 에나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에나는 한 손에 성냥불을 붙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불꽃과 함께 타는 불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위치크래프트...!"

조직원들도 바보는 아닌지라 총이 발사되지 않는 이유를 곧바로 깨달았다.

오시안은 속으로 나지막이 감탄했다.

'이런 능력도 있는 건가.'

고인물 게이머의 감으로, 저 성냥의 불이 타오르는 동안에는 총기 같은 화기류는 작동이 불가능한 것으로 추측됐다.

성냥불의 아지랑이를 통해 환상을 만들어 내는 능력도 제법 대단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동시에 어째서 사람들이 마녀의 능력을 탐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오래는 못 버텨요!"

"알고 있다."

오시안은 몸을 풀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발루드가 입을 열었다.

"뭣들 합니까. 설마 총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은 아니겠죠?"

"...."

노스 블라인더스 조직원들이 모두 총을 버리고 다른 무기들을 꺼내들었다.

곤봉, 단검, 망치 등등.

총을 사용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한 무기들은 모두 준비해 둔 그들이었다.

물론 평범한 무기는 아니었다. 당장 곤봉만 해도 끝에 푸른 전류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다른 무기는 두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오시안은 그걸 보고도 검을 뽑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적당히 몸풀기는 되겠군."

그 말과 함께 선두에서 마피아 조직원이 고함을 내지르며 오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전류가 흐르는 곤봉이 오시안의 정수리를 노렸다.

오시안은 상반신을 살짝 틀어 피해 준 뒤, 손을 뻗어 마피아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약간의 힘을 줘서 밀어냈다.

투쾅! 190cm가 넘는 거구가 마치 공성추에 맞은 것마냥 뒤로 튕겨 날아갔다.

뒤따라 달려오던 마피아들이 거기에 휩쓸려 볼링핀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뮤턴트다! 신체 강화능력자야!"

"포위해서 한꺼번에 덮쳐!"

마피아들이 오시안을 포위해서 공격하려 했지만, 오시안은 그 전에 이미 그들의 틈새에 파고든 상태였다.

어? 마피아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오시안의 손이 움직였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찬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기사의 초월적인 육체의 힘이 더해지며 초월적인 폭력을 자아냈다.

오시안에게 한 대 맞아 멀리 튕겨 나간 조직원이 발루드의 발 앞에 쓰러졌다.

발루드는 그런 부하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이사님.... 죄송합니다."

"기상."

발루드는 그런 부하를 향해 냉기가 풀풀 흘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부하는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저걸 일어나?'

오시안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발루드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아무리 힘을 빼고 쳤다고 하지만, 한동안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됐을 텐데.

실제로 몸을 일으키는 조직원의 얼굴은 고통으로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어났다.

그것은 눈앞의 백색 양복 남자의 명령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발루드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기립한 부하에게 칭찬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 대신 어깨에 걸치고 있는 흰색 코트와 머리에 쓴 모자를 그에게 넘겼다.

부하는 그것을 조심히 받아들었다.

"꼭 있단 말이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기어이 귀찮게 만드는 사람들이."

발루드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가죽 장갑을 꺼내 손에 끼며 말했다.

"이래서야 제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꽤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군."

"제가 왜 이들에게 이사님이라 불리는지 아십니까?"

"머리가 좋아서?"

"그것도 있지만."

발루드는 허리에 홀스터 벨트를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허리 부분의 홀스터에 꽂혀 있는 무기를 각기 양손에 쥐었다.

그것은 손도끼였다.

"제가 제일 강하기 때문입니다."

"호오. 도끼라."

발루드가 꺼낸 도끼는 아무리 봐도 개조가 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즉, 그러니까 순혈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사님이 도끼를 꺼내 들었다."

"저 새끼는 이제 뒤졌군."

오시안에게 속절없이 당하던 마피아 조직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 남자가 그렇게 강한 건가. 오시안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발루드가 오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지척까지 접근한 발루드는 오시안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오시안은 고개를 뒤로 확 꺾었다. 날카로운 도끼날이 그의 머리 몇 가닥을 잘라냈다.

'빠르다.'

발루드는 첫 일격이 빗나가자 반대쪽 손의 도끼를 휘둘렀다.

오시안은 그 모습에 판단을 내렸다. 물러나면 그대로 흐름을 빼앗겨 당한다.

곧바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칼집 안에서 은빛의 검신이 드러나며 발루드의 도끼와 맞물렸다.

카앙!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공격을 막아낸 오시안은 힘을 줘 발루드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자 발루드 또한 두 다리에 힘을 주며 견뎠다.

"뭐?"

처음이었다. 자신의 피지컬이 바로 먹히지 않은 상대는.

동시에 발루드의 부하들도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이사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어?"

"저렇게 비등하다고?"

오시안은 의외라는 눈으로 발루드를 응시했다.

"사용하는 무기도 그렇고, 겉모습과 다르게 꽤나 난폭한 사람이었군."

발루드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서늘한 눈동자는 고요한 살기를 머금은 채 오시안을 응시할 뿐이었다.

오시안은 피식 웃으며 곧바로 자세를 달리했다.

[굽이치기]

기사의 기본적인 스킬.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거나 막아내는 기술이었다.

검이 옆으로 살짝 기울이자 도끼날이 매끄러운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검끝이 크게 튕겨 휘둘러지며 도끼날을 멀리 쳐냈다.

두 자루의 도끼 중 한 자루가 멀리 날아갔다.

무기 중 하나를 잃은 발루드가 쯧 하고 혀를 차는 순간 오시안이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강.

롱 소드와 한손 도끼가 허공에서 연달아 충돌했다.

발루드는 한 손으로도 어떻게든 오시안의 검을 막아냈지만,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오시안은 그 빈틈을 노려 그대로 발루드를 제압하고자 했다.

하지만 발루드의 표정을 보는 순간, 공격을 포기하고 곧바로 상반신을 숙였다.

직후 방금 전 오시안의 뒤통수가 있던 자리에 튕겨 나간 도끼가 날아왔다.

발루드는 날아온 도끼를 한 손으로 잡아내며 다시 쌍수로 전환했다.

"이걸 피해?"

처음으로 발루드에게서 감정의 격동이 드러났다.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마냥 돌아오는 도끼를 피한 오시안의 움직임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정작 오시안은 숙였던 상반신을 일으키며 그 힘과 함께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발루드는 도끼를 교차하듯 세우며 오시안의 검을 막아냈다.

콰앙!

냉병기가 부딪치는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굉음이 터졌다.

"큭."

발루드는 이를 악물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전완근이 팽창하며 그의 와이셔츠의 팔뚝 부분이 펑 하고 터졌다.

카가가각. 발루드의 두 다리가 깊은 고랑을 패며 주욱 밀려났다.

지척에서 맞붙었던 둘의 거리가 5m가량 벌어졌다.

발루드는 자신의 저려 오는 양팔을 믿기지 않은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처음에 대등했다 생각한 힘겨루기는 이번에 발루드의 패배로 끝맺음했다.

발루드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과 싸우는 동안에도 오시안은 힘 조절을 하고 있었다는 걸.

발루들의 물음에 오시안은 대답 대신 검을 고쳐 쥐며 그의 두 팔을 빤히 응시했다.

튕겨냈던 도끼가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마치 엘딘의 공방에서 봤던 투척 도끼처럼 말이다.

그러나 발루드의 도끼는 따로 개조가 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와이셔츠 아래에 가려진 팔뚝에는, 검은색의 문신이 팔뚝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렇군. 너, 야만전사 였나."

46화. 야만전사 (2)

야만전사.

차가운 만년설로 뒤덮인 북대륙에 거주하는 거인족의 후예들을 일컫는 말이다.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8개의 태생 중 하나로 유명했다.

"과연."

오시안은 발루드의 피지컬을 보며 납득했다.

야만전사는 [방랑기사], [성기사]와 함께 근접 삼인방으로 불렸다.

강력한 한 방 딜이라는 모토를 지녔으며, 근접 캐릭터 중에서 힘이 가장 강했다.

폭딜을 보고 싶다면 원거리는 마법사, 근접은 야만전사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발루드가 놓쳤던 도끼를 다시 손에 쥔 것도 야만전사의 특성 중 하나였다.

그들은 「룬 각인」를 통해서 무기나 육체에 룬을 새겨 신비로운 힘을 다룰 줄 안다.

그중 가장 기초적인 것은 무기에 부여하는 「회수의 룬」.

투척한 무기를 부메랑처럼 되돌려 손에 쥐는 스킬이었다.

돌아오는 무기가 가하는 데미지도 살벌하다.

야만전사와 처음 싸우면, 자기도 모르게 뒤통수에 들어오는 데미지에 죽기 일쑤였다.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기술.

하지만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 오시안은 즉각 반응할 수 있었다.

상대방이 회수의 룬을 다룬다면, 당연히 노리는 것은 자신의 뒤통수일 테니까.

"어쩐지 힘이 세다 싶더니. 야만전사면 그럴 만하지."

오시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마피아 조직원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이, 이사님 앞에서 그 단어를 입에 담다니...!"

그 반응에 오시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야만전사에게 야만전사라 하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나?"

"예. 문제가 있죠. 아주 큰 문제가요."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발루드였다.

그는 착 하고 가라앉은 눈으로 오시안을 응시했다.

차가운 북풍을 그대로 머금은 싸늘한 눈빛은 닿는 것은 뭐든지 얼려 버릴 기세였다.

"저는 제 출신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정갈하고 신사적이게 굴죠."

"양손에 도끼를 들고 휘두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도끼질도 신사적으로 하는 겁니다. 거칠게 고함을 내지르지 않고, 동작은 과하지 않으며, 빠르고 날렵하게 숨통을 끊죠. 그게 제 미학입니다."

발루드의 행동거지는 북부 야만전사와 어울리지 않았다.

대부분 야만전사들은 웃통을 까고, 뭘 할 때마다 크게 고함을 내지르며 단순하게 행동했다.

그게 그들의 전통이기도 했다.

하지만 발루드는 깔끔한 양복을 차려입었고 말을 할 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의 태생을 생각하면 극단적으로 반대에 서 있다 봐도 무방했다.

"당연히 저는 전사라 해도 야만적이라는 말이 붙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의 출신을 안다고 해서, 제 앞에서 그런 단어를 꺼내는 사람도 없고 말입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글쎄. 모르겠군."

"그 말을 한 사람들은 전부 저에게 죽었으니까요."

발루드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방금 당신도 똑같은 말을 입에 담았군요."

그 서슬 퍼런 미소에 깃든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광기였다.

평소에 보여 주는 행동 속에 저런 짐승이 꿈틀거리고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시안은 저 모습에서야 발루드가 제대로 된 야만전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많이 변하긴 했군. 야만전사가 양복을 입고 도끼를 휘두르는 시대가 되다니."

살짝 푸념하듯 한 소리였지만 그것은 발루드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발루드는 싱긋 웃었다.

"또 하셨네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오시안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왼쪽?

아니. 오른쪽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수직으로 세우는 순간 두 자루의 도끼가 검날을 때렸다.

콰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바람이 휘몰아쳤다.

오시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견디는 것을 넘어 힘으로 밀어낼 생각이었다.

그 순간 발루드의 양 팔뚝의 검은 문신에서 은은한 붉은 빛이 흘러나왔다.

오시안의 검에 가해지는 힘이 확 늘었다.

이런.

오시안은 곧바로 맞받아칠 생각을 접고 뒤로 슬쩍 물러났다.

"증강의 룬...."

일시적으로 육체능력을 대폭 상승시켜 주는 효과를 가진, 야만전사의 대표적인 룬이었다.

"잘 알고 계시군요."

발루드가 오시안을 곧바로 따라잡았다.

그의 움직이는 속도도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빨라져 있었다.

그것은 아마, 저 양복바지 아래에 새겨진 룬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는 이동속도와 공격속도를 올려주는 「신속의 룬」인가.'

카가가가강!

뒤로 물러나는 오시안과 그 뒤를 쫓는 발루드.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의 팔이 잔상을 일으키며 무기를 휘둘렀고 허공에서 무수한 섬광이 연달아 번뜩였다.

몸을 겨우 추스른 조직원들은 초인들의 대결을 입을 벌린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 도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룬을 사용하는 이사님과 대등하게 싸우는 거지?"

그들이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오시안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검을 휘두를 줄 아는 신체강화 뮤턴트인 줄 알았다.

발루드가 룬을 사용하면 그대로 죽어 없어질 그런 놈이라고.

티르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해결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둘의 싸움은 어느 한쪽도 밀리지 않는 백중세를 이루었다.

아니, 오히려 오시안이 더 여유가 있어 보였다.

"흡."

그 순간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서로 무기를 맞닿은 채 힘겨루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발루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증강의 룬」과 「신속의 룬」까지 사용했는데 오시안은 여전히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에 맞춰 기어를 끌어올리듯, 그의 움직임은 방금 전보다 더 빨라졌다.

"아직 전력이 아니라 이겁니까?"

그렇다면 그 방심이 너를 죽게 만드는 것이라고.

발루드는 그 뒷말을 삼키며 다른 기술을 사용했다.

쩌저적.

발루드의 손도끼 날에 새하얀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한기가 풀풀 흩날렸고 발루드의 입에 입김이 서렸다.

서리의 냉기는 주변으로 퍼지며 오시안에게도 미쳤다.

"「냉기의 혼」? 설마 서리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던 거였나."

하지만 그 반응은 당황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오시안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발루드가 사용하는 기술을 꿰뚫어 보았다.

그리고 그 파훼법까지 말이다.

쿠웅!

오시안이 다리를 들어 올려 진각을 크게 밟았다.

그 중심으로 폭풍 같은 파동이 휘몰아치며 허공에 맴돌던 냉기를 사방으로 밀어냈다.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난 발루드는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오시안을 응시했다.

"대체 어떻게...."

대부분 상대는 이쪽의 기술을 보여 주면 당황하다가 대처하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오시안은 달랐다.

뒤에서 날아오는 도끼를 피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발루드가 무슨 패를 꺼내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냉정하게 대처했다.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당신. 노르드 출신이었습니까?"

"내가 그렇게 보였나?"

오시안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북부인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북부인에게 보이는 특유의 신체적 특징이 전혀 없었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

"그냥 알고 있을 뿐이다."

발루드가 무슨 패를 꺼내더라도 오시안은 대처가 가능했다.

그야 그럴 것이, 그는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야만전사와도 셀 수 없이 많이 싸웠기 때문이다.

야만전사는 공격을 당해도 경직이 없어서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특징을 지녔다.

그러다 보니 유저들 사이에서 PVP를 할 때도 상당히 선호를 받는 직업 중 하나였다.

오시안은 거기서 무수한 야만전사 유저들을 만났고.

전부 꺾었다.

남들에겐 놀라운 발루드의 능력도 오시안에게는 지겹도록 맞상대한 요소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놀랍긴 하네, 이 녀석. 야만전사의 특성을 2개나 사용할 줄이야.'

야만전사에게는 3가지 특성이 존재한다.

몸에 문신을 새기며 룬 마법을 발동하는 [룬 까마귀].

무기에 냉기와 폭풍번개 힘을 부여하는 [서리늑대].

그리고 마지막 특성은 [광포한 곰]으로, 체력이 낮아질수록 더 강해지며 체력흡수까지 달린 특성이었다.

발루드는 그 특성의 3개 중 2개를 사용하고 있었다.

보통 NPC들은 한 가지 특성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질적인 수준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영웅급 NPC는 그게 가능했지.'

게임 속에서도 상당한 비중과 능력을 차지하는 영웅급 NPC.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다루는 특성의 최고점을 찍은 존재였지만, 그중에서 드물게 다른 특성까지 섭렵한 자들도 있었다.

발루드도 그중 하나였던 것이다.

'뭔가 게임을 하던 때 생각이 나서 반갑네.'

현실이 되고 지나치게 변해 버린 세상 속에서, 과거 즐겨하던 게임의 흔적을 찾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오시안은 발루드가 자신을 공격하는 행동조차 즐겁기 짝이 없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광전사의 포효」를 사용할 건가? 「폭풍매의 부름」을 써도 좋겠지. 아니면 「불사의 룬」을 사용해 달려들어도 상관없다."

"당신, 그걸 대체 어떻게...."

오시안의 입에서 부족에게 전해지는 온갖 비기들이 흘러나오자 발루드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개중에는 이제는 소실되어 전설로만 남은 이름도 적잖게 있었다.

발루드는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오시안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살의조차 잊고 말았다.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오시안은 그런 발루드의 반응에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뭐지. 설마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

"그런가. 아직 애송이였던 건가."

눈에 띄게 실망했다는 반응에 발루드는 입술을 뿌득 깨물었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서려는 순간 등 뒤에서 부하의 간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 이사님! 큰일입니다!"

"뭡니까."

소식을 물어온 부하가 발루드에게 다가와 조용히 귓속말을 전했다.

오시안은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발루드는 슬쩍 오시안을 보더니, 이내 쯧 하고 혀를 찬 뒤 도끼를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턱짓을 했다.

눈치를 살피던 조직원들은 몸을 추스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에나 그룬트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러난다고? 이렇게 갑자기?

발루드가 오시안을 향해 말했다.

"운이 좋군요."

"뭐?"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저희는 마녀를 포기합니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오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갑자기 포기한다라. 무언가 있군."

"그것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겠죠."

알아서 물러나 준다 하니 오시안도 다행인 일이었다.

여기서 발루드와 싸우면서 시간을 끌면 추적대가 곧바로 이쪽을 따라잡을 테니까.

아니. 어쩌면 그 소식을 들었기에 빠지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 추적대 때문에 발루드가 다 잡은 먹잇감을 포기한다고?

오시안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페트라 교황청과 싸울 생각으로 이만한 전력을 이끌고 온 것치고는 너무 쉽게 포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물러나는 발루드의 표정을 보면, 마녀인 에나를 향한 미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발루드와 부하들은 오시안이 탈취하려던 지프차 한 대를 두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뭐, 뭐죠? 저 사람들. 갑자기 왜 가 버리는 거고, 차는 왜 두고 가는 거죠? 이거 저희 보고 타고 떠나라는 거 맞죠?"

"그래 보이는군."

"대체 왜...."

"일단 준 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어서 타라. 우리도 여길 벗어난다."

오시안은 에나와 함께 차량에 탑승했다.

전생에 1종 보통을 따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운전을 못 해서 여기에 남게 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오시안은 액셀을 밟아 차량을 출발시켰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찝찝함을 느끼면서 말이다.

차량은 사드나팔을 벗어나 평야를 내달렸다.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철도를 이정표 삼아 그대로 따라 달리면 됐으니까.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추적자도 없었고 방해꾼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저, 저희 무사한 거죠?"

에나는 안도하듯 물었지만 오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안전하다는 생각이 더욱 큰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오시안은 곧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차량이 갑자기 급정거를 하자 하마터면 앞 유리에 머리를 박을 뻔한 에나가 꺅 소리를 냈다.

그녀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 시선으로 오시안을 돌아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체 뭘 보는...."

에나 또한 정면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앞에 황금의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벌판의 중심에 회색의 복장을 한 사람이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눌러쓴 회색 후드 너머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괴, 괴물...."

에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47화. 정화 심판자 (1)

커다란 군용 지프차가 황야를 내달렸다.

그 안에서 마피아 조직원들은 잔뜩 얼어붙은 채, 뒷좌석에 앉은 발루드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전 오시안과의 싸움 이후로 발루드는 계속 저기압이었고, 저 상태에서 잘못 걸리면 좋을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 눈치가 없는 사람은 항상 있는 법이었다.

"이사님. 그런데 저희 왜 마녀를 코앞에서 놓아준 겁니까?"

그렇게 물은 것은 아직 이쪽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조직원이 놀라서 무어라 말하는 것보다도 먼저 발루드가 입을 열었다.

"그게 궁금하십니까?"

"예? 예. 놓아준 것도 놓아준 거지만, 굳이 차량까지 두고 갈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랬습니다."

"뭐, 궁금할 만도 하겠군요.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물러나겠다고 했으니. 이 부분은 확실히 제 불찰입니다."

발루드는 슬쩍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지금 마녀를 쫓는 페트라 교황청의 추적자들 사이에 아주 위험한 인물이 끼어 있다고요."

"위험한 인물, 말입니까? 하지만 저희 노스 블라인더스는...."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신뢰가 있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고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막내라 하더라도 무언가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가...."

"페트라 교황청의 칼 중 하나입니다. 황금의 불길로 이단을 태워 죽이는 미치광이. 정화 심판자라 불리는 괴물이죠. 그리고 그 녀석에게, 방금 전 고철더미 녀석들이 전멸했습니다."

"예? 그, 그 폭주족들이 말입니까? 바이커 갱단?"

고철더미 소속은 폭주족이라 해서 마냥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약물은 신체를 강화시키며 불법 개조시술을 통해 인간을 초월한 놈들도 더러 있었으니까.

그런 놈들이 전멸을 당했다니.

"이번 임무에 참여했던 마법사들도 물러났습니다. 그들도 아는 것이죠. 정화 심판자를 상대로 싸움은 무리라는 걸.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그렇다면 굳이 차량을 남겨둔 것은...."

"미끼죠.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정화 심판자에게 잡아먹히라고 던지는 미끼. 저희는 그사이에 도로를 우회해서 티르나로 무사히 물러날 겁니다."

운전대를 쥐고 있던 조직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칼잡이와 마녀는 사실상 죽은 목숨이군요."

"그럴 겁니다."

발루드가 뒷말을 덧붙였다.

"그 괴물의 손에 걸려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

에나 그룬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놈이다.

자신을 쫓던 페트라 교황청에서 보낸 신앙의 괴물.

다른 성기사나 사제가 쫓아오는 것은 괜찮다.

그것이 상급 성기사나 고위 사제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놈은 다르다.

저 녀석만큼은, 절대로 마주하면 안 됐었는데.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오시안은 운전대에서 손을 놓으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티르나에서 사드나팔로 오는 길에 이런 들판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면서 봤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마치 환경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허리까지 올라오는 밀을 닮은 황금색 풀이 바람을 따라 넘실거리고 있었다.

전부 저기 혼자 서 있는 녀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황금의 들판]. 성기사의 고유 스킬 중 하나.'

저 황금의 벌판은 진짜 식물이 아니라 성기사가 사용하는 신성력으로 구성된 필드였다.

사용자를 비롯한 파티원에게 온갖 버프를 걸어주는 효과로 유명했다.

'실제로 효과는 그렇게 크지 않고, 신성력은 엄청나게 소모해서 그저 생긴 것이 예쁜 광역 버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붙은 별명이 예쁜 쓰레기였는데.

저 벌판의 크기를 보라.

시야를 가득 채우는 황금의 벌판은 지평선의 너머까지 이어진 것 같았다.

게임 내에서 벌판의 크기는 사용자를 중심으로 반경 30m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저것은, 최소한 그 20배 이상은 돼 보였다.

'원래도 비효율적인 스킬로 유명했는데 그걸 저 정도 범위로 펼친다고?'

신성력이 얼마나 방대하면 저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조수석에 앉은 에나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교황청의 다른 추적자들에게 쫓길 때도, 노스 블라인더스 마피아에게 포위당했을 때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려라."

오시안은 그 말을 남기며 차량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황금벌판을 향해 걸어갔다.

추수를 앞둔 것 같은 황금 들판에 들어서자, 몸에 스치는 식물이 바스스 흩어지며 황금 가루로 산화했다.

오시안은 그 가루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필드의 극히 일부임에도 느껴지는 충만한 신성력.

그것이 오시안의 정신을 더욱 날카롭게 일깨웠다.

성기사 또한 깊게 눌러 쓴 회색의 후드 안쪽에서 오시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무기질적이라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 읽기 힘들었다.

계속 걸어가던 오시안은 이윽고 성기사와 20m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한차례 바람이 불며 황금 들판 위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걸 보면, 사실상 다 알고 있다 봐도 무방하겠군."

"마녀를 넘겨라."

성기사는 단답으로 제 할 말만 했다.

사실상 일방적인 선포나 다름없었다.

마치 너에겐 그것만으로 족하다는 듯.

"그러지 않겠다면?"

하지만 오시안은 역으로 물었다.

그 말에 성기사의 눈빛이 조금이지만 날카롭게 변했다.

"마녀와 한패로 간주하고 이단으로서 심판을 내릴 뿐."

"나는 딱히 다른 종교를 믿지도 않고, 마녀를 데려가는 것은 업무를 받았을 뿐인데 말이지."

"마녀와 동행을 하면 그것이 누구라도 이단이다."

타협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답에 오시안이 작게 웃었다.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은 아니고?"

"이단이여. 신실한 종으로서 묻겠다. 회개할 마음은 있는가?"

"회개를 하겠다고 한다면 봐주고 넘어가 줄 용의가 있나?"

"적어도 고통 없이 아버지의 곁으로 보내 줄 수는 있다."

미친놈.

오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겠군. 나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 없거든."

스르릉.

오시안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투명하리만치 맑은 검신의 위로 햇빛과 황금빛이 뒤섞여 산산이 흩어졌다.

"그렇다면 정화할 뿐이다."

심판자 또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더니 이윽고 한손에 감기는 둔기를 꺼내 들었다.

플랜지드 메이스(Flanged Mace)라 부르는 무기였다.

깔끔하고 단출한 디자인이, 딱 검소한 사제나 성기사들이 쓸 법한 무기였다.

오시안과 심판자는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둘의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오시안의 코트자락이 흩날렸고, 성기사의 로브 망토 또한 크게 펄럭였다.

그 직후.

오시안의 검에서 새하얀 섬광이 줄기처럼 솟구쳐 올랐다.

하늘의 기사가 지닌 고유 특성, [성광검(星光劍)]이었다.

그에 호응하듯 심판자의 메이스에는 황금빛 기류가 맴돌았다.

성기사들이 다루는 신성력이었다.

이윽고 둘은 서로를 향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었다.

황금의 들판을 가로지른 두 사람은 정확히 중심에서 맞닥뜨렸다.

지상에 강림한 별빛과 신앙의 황금빛이 서로 충돌했다.

카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들판이 동심원을 그리며 바깥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들판을 구성하던 신성력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가루처럼 산화하며 주변에 황금의 색채를 뿌렸다.

그 광경은 동화처럼 몽환적이고 아름다웠지만, 누구도 그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첫 공격은 상대의 실력을 대략적으로 가늠하기 위한 전초전.

오시안은 적당히 검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자 심판자의 몸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자신이 더 강하다거나 안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나왔다.

"하늘에 계신 아버님. 거룩한 자비로 이 어린양을 보호하소서."

기도문과 함께 심판자의 몸을 신성력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밀리던 힘이 이윽고 대등한 단계까지 도달했다.

버프로 인한 신체능력 강화.

야만전사와는 다른 의미로 성기사가 근접 직군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걸 이미 알고 있던 오시안은 놀라지 않고 검을 살짝 뒤로 뺀 뒤, 허리를 뒤틀며 자리에서 회전했다.

촤악!

2m까지 늘어난 성광검이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거기에 닿은 황금 이삭이 잘려나가며 허공에 가루처럼 흩날렸다.

휘두르듯 날아온 성광검을 본 심판자가 메이스를 들어 올렸다.

직후 메이스에 깃든 황금의 신성력이 선명해지더니 방패의 형태를 취했다.

콰앙!

방패의 위로 검이 꽂혔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심판자는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지면에 고랑이 패이며 황금의 들판에 한 줄기 상흔이 생겨났다.

그러나 오시안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방패 너머 심판자가 멀쩡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충격은 분명 몸에 전달됐을 거다. 하지만 그걸 실시간으로 회복한 거야.'

조금씩이지만 몸에 깃드는 황금빛만 봐도 그렇다.

심판자가 오시안에게 달려들었다. 오시안은 그런 심판자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며, 성광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격돌하는 백과 금의 빛줄기 속에서, 더욱 세밀하게 적을 파고든 것은 백색이었다.

서걱!

이번에는 제대로 유효타가 터졌다.

오시안의 검이 심판자의 왼팔을 어깻죽지부터 베어낸 것이었다.

심판자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팔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음에도 주춤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잘려나간 팔이, 의복과 함께 재생되었다.

마치 주위에 황금의 빛무리가 모여 팔을 구성하는 모양새였다.

'이래서 성기사 놈들과 싸우기 싫은 건데.'

성기사는 야만전사나 방랑기사처럼 근접전에 특출 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서 싸울 수 있는 근접 직군으로 묶이는 것은, 저 질긴 생명력에 있었다.

'단번에 숨통을 끊어놓지 않으면 언제든지 상처와 체력을 회복하는 놈들.'

괜히 게임에서 성기사를 상대로 바퀴벌레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과 혐오의 감정을 담아 붙인 별명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심판자가 움직였다.

방패를 구성하던 신성력이 이윽고 거대한 십자가로 변했다.

심판자는 그 십자가를 들고 오시안을 향해 달려들어 힘차게 휘둘렀다.

육중한 질량에서 오는 파괴적인 위력.

오시안은 정면에서 받아치는 대신 성광검을 비스듬하게 세워 공격을 흘려냈다.

튕겨 나간 십자가는 형태가 바뀌더니 금색의 창으로 변해 오시안에게 쏘아졌다.

오시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로 백덤블링을 하며 회피했다.

오시안이 있던 자리에 황금의 불길이 일어나며 주변 일대를 태우고 있었다.

'게다가 저 녀석이 사용하는 특성. 한두 개가 아니야. 역시 평범한 성기사가 아니라 영웅급이었나.'

성기사 또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존재하기 때문에 육성의 방향에 따라 특성이 갈리게 된다.

성기사의 능력은 [신찬(神讚)]이라 부르는 기도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찬은 규율에 따라 크게 3가지 특성으로 나뉜다.

[유구한 황금의 규율]

[신성한 심판의 규율]

[성스러운 가호의 규율]

각기 회복, 공격, 방어에 특화된 특성이었다.

그중에서 지금 저 심판자가 사용하는 규율은 위의 3가지 예시에 전부 다 해당됐다.

심판자는 황금창을 회수, 양손에 각기 커다란 황금색 톤파로 바꾸었다.

자세를 잡은 심판자를 본 오시안이 중얼거렸다.

"신성연금(神聖鍊金)."

방랑기사에게 성광이 있다면 성기사에게는 신성연금이 존재한다.

성광이 검의 형태로만 엄청난 절삭력과 위력을 뽑아내는 것이라면, 신성연금은 신성력을 원하는 형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힘의 출력에서는 성광에 밀리지만, 상황에 따른 대처능력은 그보다 더 위.

그리고 저 정도의 신성연금을 사용하는 성기사라면 최소 교황청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일 것이다.

"잘 아는군. 하늘에 계신 아버님이 거룩하게 굽어살피시어 내린 권능이시지."

"교황청도 할 일이 없군. 고작 마녀 하나를 잡겠다고 이 정도의 실력자를 보내다니 말이야."

"내가 자처한 일이다. 이 세상에서 이단을 잡아 뿌리를 뽑는 일이다. 거기에 크고 작은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정신이 아니군.

군대로 치면 별을 단 장성이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담배꽁초를 줍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소한 짓.

그런데도 본인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그 행동을 옳다고 추구하고 있었다.

'이거. 시간을 끌면 이쪽이 더 불리해지겠는데.'

성기사와 싸워 본 오시안이기에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지치지 않는 괴물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한 방에, 단기결전으로 끝내야만 했다.

하지만 하나의 특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신찬을 전부 사용하는 놈을 상대로 그게 가능하냐는 건데.

오시안은 슬쩍 한쪽을 바라본 뒤, 심판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화려한 검술도 없이, 우직하게 힘으로 심판자를 밀어 넣었다.

타고난 근접전은 오시안이 한수 더 위였기에 심판자는 차분하게 방어에 들어가면서도 뒤로 천천히 밀려났다.

그러나 과하게 몰아치는 공격치고는 심판자에게 제대로 된 유효타가 들어가지 않았다.

무의미한 발악이라고 말하려던 심판자는, 직후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빠아아앙!

그리고 볼 수 있었다.

거대한 강철 배장기(排障器)를 내세우며 돌진하는 증기열차의 모습을.

심판자가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전에.

증기열차가 그대로 심판자를 들이받았다.

48화. 정화 심판자 (2)

됐다.

증기열차에 치여 사라지는 심판자의 모습을 보며 오시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심판자가 사용한 황금들판에 가려진 이곳은, 원래 기차가 지나가는 철도가 있던 자리였다.

'선로가 파괴돼서 오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쓸모없는 칸을 모두 분리하고 엔진룸만 그대로 옮겨서 온 건가.'

열차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저들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능력이나 힘을 지닌 자들이 더러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덕분에 심판자를 철로까지 몰아 세워, 열차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어? 방금 뭔가 부딪친 거 같은데?"

"알 게 뭐야! 눈치 없는 놈이 알아서 뒤진 거겠지!"

증기열차에 탄 해결사들은 심판자를 들이받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쏴아아아.

그 순간 황금들판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한쪽으로 눕기 시작했다.

오시안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들판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황금들판은 사용자가 죽으면 알아서 해제되는 스킬인데?'

그런데도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건.

오시안의 동공이 확장됐다.

"이런."

오시안의 그런 중얼거림과 동시에, 황금들판을 구성하는 신성력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금빛 빛무리가 향하는 곳은 증기열차의 전면부.

심판자를 들이받은 열차가 멈춘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 이거 뭐야?"

"열차는 왜 또 멈춘 거고...."

열차에 탄 사람들이 의아한 소리를 냈다.

일부 감이 좋거나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표정을 굳혔다.

직후 황금빛 기둥이 솟구쳤다.

소리 없이 폭발한 금빛 기둥은 증기열차를 문자 그대로 갈아버렸다.

증기열차의 새까만 전면부가 황금 불길에 휩쓸려 타올랐고, 그 너머에 올라탄 사람들도 전부 마찬가지였다.

비명은 없었다.

정화의 불길에 닿은 자들은 삽시간에 황금의 재가 되어 가루처럼 흩날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최소 30명.

그중에서 폭발 직전 눈치를 보고 탈출한 소수를 제외하면 일거에 쓸려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솟구치는 황금 기둥의 중심에서 심판자가 몸을 우뚝 일으켰다.

거센 바람으로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가 뒤로 뒤집혀 맨얼굴이 드러났다.

정화 심판자라는 이름과 딱딱한 말투와 다르게 선이 상당히 고운 금발 소년이었다.

나이는 높게 쳐야 10대 후반 정도.

'말투나 하는 행동에서 나이를 꽤나 먹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다만 세상을 다 살았다는 듯 공허한 눈동자는 저 나이또래가 가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하수처럼 끝없이 솟구치는 황금의 신성력은 저 심판자의 재능이 가히 하늘에 닿았다 해도 무방했다.

'발루드는 영웅급 자격을 지닌 녀석이었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은.'

이미 영웅의 경지로 완성된 성기사였다.

그 말은.

아직 성광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자신이 상대하기 힘든 적이라는 소리다.

계속해서 솟구치던 황금의 기둥이 점차 가늘어지더니 사라졌다.

주위에 흩날리던 불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시안은 방심하지 않았다.

황금기둥이 사라진 것은 그저 겉으로 보는 것만 그렇다.

실제로 그 방대한 힘은, 저 심판자의 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단은 모두 정화한다."

그렇게 중얼거린 심판자를 향해 총탄이 날아들었다.

"으아아! 이 괴물 새끼야!"

방금 전 열차에서 가까스로 뛰어내려 목숨을 건진 해결사였다.

그는 특수개조를 한 대구경 탄환을 심판자에게 마구 쏘았다.

그러나 총알은 심판자의 몸에 닿기도 전, 황금의 불길에 타서 가루처럼 사라졌다.

"이건 뭔...."

총알을 튕겨내는 것도, 심지어 고열로 녹이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분해해 버리다니?

심지어 그냥 탄환도 아니고 몬스터의 단단한 두개골도 한 방에 부숴 버릴 대구경 탄환이다.

해결사가 멍하니 심판자를 바라봤다.

그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미는 모습까지도.

살려줘.

해결사가 그렇게 말을 하려는 순간.

화르륵!

황금의 불길이 일어나 그의 몸을 태워 버렸다.

비명도, 자비도, 원성도 없는 화려하면서도 고요한 죽음.

치이이익!

증기를 억세게 내뿜는 소리에 심판자의 무심한 시선이 뒤를 향했다.

그리고 본 것은, 거대한 황동으로 이루어진 주먹이었다.

구형 잠수복처럼 생긴 슈트를 입은 블리딩 엣지(Bleeding Edge)의 강화인간이었다.

압축 증기를 터뜨린 반동으로 가속을 머금은 초중량 펀치.

두껍고 거대한 철판에도 동그랗게 구멍을 뚫어버리는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다.

누구라도 반응하지 못하고 막아낼 수 없다.

상대가 더한 괴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화륵!

강화인간의 주먹이 황금의 불길과 함께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강화인간이 불을 꺼뜨리려 했지만, 불길은 점점 더 잠수복 슈트 위로 번지며 이윽고 전신을 집어삼켰다.

총탄과 화약, 마법에도 내구성이 있는 최첨단 슈트가 삽시간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안쪽에 탑승한 강화인간도 어떻게 됐는지 뻔한 일이었다.

방해꾼을 모조리 정리한 심판자가 오시안을 응시했다.

그 차가운 시선에는 죽음이 담겨 있었다.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냉혹함이라니.

'아이러니로군.'

이 의뢰를 맡기 전까지만 해도 저런 괴물과 싸우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시안은 말없이 검을 고쳐 쥐었다.

심판자는 그런 오시안의 모습에 눈에 이채를 띄었다.

"...이단이여. 도망치지 않는 건가."

"이제 와서 도망치겠다고 한다면, 살려는 줄 건가?"

도발적인 어조에 돌아온 대답은 놀랍게도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렇다."

"왜지? 네 입장에서는 나는 이단일 텐데."

"분명 너는 저 간악한 마녀와 붙어서 신의 뜻을 거부한 자다. 하지만 네가 보여준 기개와 그 힘. 그 정순한 힘은 베풀어주는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광을 말하는 건가.

저 호의는 아마, 오시안이 지니고 있는 최대치로 찍은 신앙스탯 때문이리라.

오시안은 자신의 검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백열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눈감아 주겠다는 건가?"

"마녀를 두고 떠나라. 그렇게 한다면 이번 일은 눈감아 주겠다."

오만하기까지 한 말.

하지만 심판자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그는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저 녀석은 같은 인간으로 보면 안 됐다.

지금처럼 목숨을 살려준다고 할 때, 곱게 물러나는 것이 분명 옳았다.

그게 옳은데.

"그러지 못하겠군."

"...진심인가? 나와 싸우면 너는 죽는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싸움에서 등을 돌린다라."

오시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타고 온 지프 차량에 시선을 보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에나가 공포와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에 맡기고 따로 도망이라도 치면 될 텐데도, 그녀는 오시안이 시킨 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말을 잘 듣는 건지.

오시안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심판자가 의아한 반응을 보일 때, 오시안이 한층 맑아진 눈동자로 심판자를 응시했다.

"그건 명예롭지 못하지."

죽는 것은 두렵다. 당연히 싫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이었다.

"기껏 자비를 베풀었건만."

화륵.

심판자의 양손에 뜨거운 황금색 불길이 타올랐다.

그것이 이윽고 양손에 각기 거대한 망치의 형상을 취했다.

모든 삿된 것들을 불사르는 심판의 불꽃.

그것을 두른 심판자가 엄숙히 선고했다.

"이제 신께 자비를 바라지 마라."

"처음부터 자비를 구한 적은 없었어."

성광검이 오시안의 감정에 동조하듯 더욱 강하게 타올랐다.

어디 올 테면 와 보라는 오시안의 도발적인 눈빛에 심판자가 움직였다.

촤악.

그의 두 팔이 좌우로 그게 휘둘러졌다.

둘의 거리는 30m가 넘었다. 하지만 심판자가 휘두른 무기의 궤적을 따라, 황금의 불길이 부채꼴로 넓게 퍼졌다.

황금의 들판 위를 내달리는 거대한 화마.

오시안은 그것을 향해 성광검을 크게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황금의 불길이 좌우로 쩌억 갈라지며 길을 텄다.

오시안은 열린 길을 내달렸다.

초인적인 각력으로 자리를 박찬 오시안은 삽시간에 심판자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거리를 좁히면 그만이었다.

오시안은 성광검을 휘둘렀다.

신성연금은 분명 범용성이 뛰어난 기술이다. 하지만 힘의 밀집도와 절삭력은 성광검이 위였다.

심판자도 그걸 알기에 무기 2개를 교차하듯 오시안의 공격을 막아냈다.

황금의 불길이 넘실거리는 황금의 망치가 크게 흔들렸다.

심판자는 힘겨루기에 들어간 상태에서 눈을 감았다.

오시안은 싸우는 와중에 미쳤다고 눈을 감느냐며 타박하지 않았다.

저것은 성기사가 기도를 할 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나는 믿나이다. 성부시여. 흠숭과 같은 영광을 제게 주시옵소서."

짧고 간결하지만 그렇기에 신실한 기도문.

그것이 읊어지는 순간 심판자의 등 뒤로 황금의 문양이 후광처럼 떠올랐다.

[무구한 황금]

성기사 직업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버프였다.

'이 상태로 정면 힘 승부는 무리다.'

그렇다면 방식을 바꾼다.

오시안은 곧바로 검에 힘을 뺐다. 자연스럽게 심판자의 몸이 오시안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심판자가 다시금 자세를 잡으려 했지만, 오시안은 그 찰나의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심판자가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그 짧은 틈새에 오시안의 검이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두 개의 거대한 전투망치가 그 검의 움직임에 이끌렸다.

심판자의 몸에 큰 빈틈이 드러났다.

오시안은 크게 회전시키던 검을 회수하며, 그대로 심판자의 목을 향해 성광검을 찔러 넣었다.

상대방이 큰 버프를 사용하면서 생긴 빈틈을 제대로 찌른 일격이었다.

아무리 팔다리를 잘라내도 재생한다지만, 과연 목을 쳐내도 그렇게 될까?

그러나 오시안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백열하는 성광검의 끝이 심판자의 목 바로 앞에 막혀서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이다.

"위대한 아버지께서 나를 비호하시나니."

그사이 심판자가 새로운 신찬기도를 사용한 것이다.

'이런 미친. [빛의 보루]를 이렇게 빨리 펼친다고?'

[빛의 보루]는 수호와 관련된 [성스러운 가호의 규율]에 속한 최상위 기도였다.

효과는 간단하다.

3초 무적.

이 기도가 유지되는 3초에 한해서 성기사는 어떠한 물리적 마법적 피해에 면역이 되는 것이다.

게임 속에서 만렙 성기사도 이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최소 2초의 시전시간이 필요했다.

그마저도 정신력 스탯을 올려서 99를 찍어, 최대한 시전속도를 줄이고 줄인 끝에 나온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 괴물은 0.1초도 걸리지 않아 펼쳤다.

'이런.'

공격이 막힌 것에 동요한 탓인지 역으로 이쪽의 빈틈이 드러나고 말았다.

심판자가 오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화하라."

직후 황금의 성화가 오시안에게 방사형으로 뿜어져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오시안은 반사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피부에 닿는 불길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한 것은 심판자도 마찬가지였다.

오시안을 태웠어야 할 황금의 불이 갑자기 소멸하듯 픽 꺼졌다.

누군가 외부의 개입으로 신의 권능을 침해한 것이다.

"감히...."

심판자가 노기 섞인 목소리로 한쪽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의 끝에는 그가 죽이고자 하는 마녀가 있었다.

에나 그룬트.

지프차에서 내린 그녀는 한 손에 성냥을 치켜든 채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쥔 성냥의 머리가 황금색 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내, 내 앞에서 감히 불을 써?"

심판자를 향하는 에나의 눈빛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했다.

허세를 담아 말하고 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내가 그냥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냐!"

하지만 에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눈앞의 기사, 오시안과 같은 이유로.

49화. 성운비단

살았다.

오시안은 에나 그룬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에게 의도치 않은 도움을 받고 말았다.

그때 에나의 시선이 오시안과 마주쳤다.

"이걸로 목숨 빚은 갚았어! 그러니까 꼭 이겨!"

그 당찬 외침에 오시안은 웃음을 흘렸다.

"기꺼이."

심판자가 그 광경에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더욱 강해졌다.

"이단 따위가 신의 뜻을 우롱하는가."

"꺄악!"

에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타오르는 성냥의 불길이 확 강해지더니, 이윽고 성냥을 모조리 태워 버린 것이었다.

에나는 반사적으로 성냥을 놓았고, 봉인되었던 성화가 다시 심판자의 몸에 깃들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오시안이 거리를 벌리기에 충분했다.

심판자는 그런 오시안을 무시하고 에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마녀를 죽이는 것이었다.

오시안과 드잡이질을 하면서 시간을 끌 필요가 없던 것이었다.

에나는 다급하게 성냥갑에서 새로운 성냥을 꺼내려 했지만, 그보다 심판자의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더 빨랐다.

방사형으로 뿜어진 황금불은 에나를 향해 들불처럼 밀려들었고.

그대로 성광검에 의해 반으로 갈라졌다.

좌우로 흩어지는 뜨거운 황금빛을 본 에나가 떨리는 시선으로 오시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오시안은 그런 에나의 반응을 무시하며 심판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녀석은 강하다. 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괴물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스텟을 최대치로 찍은 자신조차, 저 괴물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했다.

순수한 힘의 차이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러니 응당 이런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오시안은 스스로를 기사라 소개했지만, 그의 본질은 그저 게임을 좋아하는 소시민 회사원이다.

기사의 육체가 내미는 용기보다도, 머릿속에서 차분하게 내리는 계산이 더 우선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은 것은 그 소시민이었던 자신이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처럼 싸우라고. 도망치지 말라고.

이 전까지 존재했던 육체와 정신의 괴리가, 이 순간만큼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혈 형제단과 싸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오시안은 자조하듯 웃었다.

'어쩌면 나는, 원래부터 기사가 어울렸던 걸지도 모르겠어.'

그렇기에 오시안은 도망치지 않았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그것이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어둠일지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찬란하게 타오르니까.

"...무슨."

오시안의 마음가짐에 일어난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것일까.

심판자는 좋지 않은 직감을 느끼고 신성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쏴아아아.

황금 들판이 그의 의지에 따라 풍랑을 맞은 바다처럼 요동쳤다.

저 백열하는 검은 확실히 위험하다.

그 절삭력은 이쪽의 신성연금을 쉽게 잘라내며 정화와 심판의 불길마저 갈라버릴 정도였다.

순수한 힘의 밀집도와 예리함만 따지면, 이쪽이 사용할 수 있는 어떠한 규율의 기도도 저 검만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저것은 양날의 검이다.

검이기에, 한쪽 방향에서 오는 것만 벨 수 있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완전한 자비의 불길로 전부 타오르게 하소서."

심판자가 기도를 읊자 들판에 불길이 확 번져나갔다.

사방에서 일어난 불길은 심판자의 의지를 따라 꿈틀거리며 오시안과 에나를 향해 덮쳐들었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것 같은 광경.

전후좌우.

피할 공간 없이 동시에 밀려드는 성화는 칼 한 자루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끝이다."

심판자의 선언과 동시에 불길이 오시안과 에나를 집어삼켰다.

이것으로 저들은 황금의 재가 되어 정화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심판자는, 황금의 불길 속에서 꿈틀거리는 빛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불길이, 밀려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황금의 불길이 무언가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힘이 다한 성화는 서서히 가라앉으며 잠잠해졌고, 그 성화를 견딘 힘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새하얀 구체였다.

마치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따와 그대로 지상에 옮겨놓으면 저런 느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순간 새하얀 구체가 정수리부터 갈라지며 꽃잎처럼 펼쳐졌다.

목련 꽃봉오리가 봄을 맞아 만개하듯, 사방으로 펼쳐지는 빛은 이윽고 한 남자의 몸에 깃들어 하나의 형태로 변했다.

그것은 망토였다.

찬란한 별빛을 잘라서 원단으로 만든 것 같은 망토가 바람 없이 펄럭였다.

목과 어깨 부분에 산들거리는 새하얀 깃털이 영롱히 빛났다.

[성운비단(星雲緋緞)]

하늘의 기사의 특성, 성광이 지닌 스킬 중 하나.

별빛의 힘이 깃든 망토를 몸에 둘러 모든 저항력과 방어력, 이동속도를 상승시켜주는 자버프 스킬.

별빛의 망토를 두른 오시안은 한층 가라앉은 시선으로 심판자를 응시했다.

"이제야."

망토의 틈새로 쥐어진 검에는 여전히 성광검이 뜨겁게 이글거렸다.

"서로 비슷해졌군."

"...!"

심판자는 다급하게 불길을 일으켰다.

스스로가 왜 그렇게 초조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인지의 영역을 벗어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다시금 들판에 성화가 번지며 사방에서 오시안과 에나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 순간 오시안의 망토가 움직였다.

크게 확장되듯 펄럭이던 망토가 오시안과 에나의 몸을 휘감으며 고치처럼 변했다.

그 위를 성화가 쏟아졌지만 두 사람에게 어떠한 피해도 입히지 못한 것이다.

오시안은 성운단포를 다시 망토의 형태로 되돌렸다.

꽃이 만개하듯 펼쳐지던 고치가 망토로 변해 오시안에게 붙는 모습은 일견 아름답기까지 했다.

에나는 그 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검에서 빛을 뿜어내는 것도 신기했는데, 황금의 불길을 막아내는 저 망토는 뭐란 말인가.

'마치, 신화 같아.'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에나는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성냥갑에서 여분의 성냥을 꺼낸 에나는 오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 가보세요."

"그러지."

오시안은 자세를 낮췄다.

달려 나가기 위해 취하는 자세였다.

촤아아악!

그 직후 망토가 거대한 에너지를 양어깨에서 분사시켰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별빛의 가루가 스프레이처럼 뿜어지고 오시안은 그 반동을 발판삼아 심판자를 향해 돌진했다.

서걱.

오시안과 심판자 사이의 황금 들판이 반으로 갈라졌다.

마치 세상이 쪼개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심판자는 본능적으로 신성연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세 겹.

그가 이토록 많은 방패를 만든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서걱!

단 일격에 3개나 되는 신성연금 방패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너머에 있던 심판자의 오른팔 또한 잘려 나갔다.

"...!"

잘려나간 팔은 의복과 함께 곧바로 수복됐지만, 심판자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방금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저 망토의 효과인가?

원래도 뛰어난 절삭력의 검이, 망토가 부가해 주는 속도와 시너지를 일으켜 더 예리해졌다.

그러는 사이 심판자를 지나친 오시안이 방향을 틀었다.

자리에서 멈추는 일 없이, 망토의 가속을 그대로 받은 오시안의 몸이 옆으로 크게 선회했다.

그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새하얀 섬광이 허공에 잔류하듯 남았다.

마치 혜성이 지나가며 생기는 오로라를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지상을 내달리는 혜성이 다시금 심판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 성스러운 힘은 도저히 이단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단의 것이 아니라고?'

심판자는 자기가 본능적으로 떠올린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투철한 신앙심이 순간이지만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부정하듯 심판자의 양손에 황금의 불길이 타올랐다.

타오르는 불길이 무기의 형상을 취했다. 대부분의 신성력을 그대로 눌러 담은 폴 암이었다.

방패를 몇 겹을 둘러도 저 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렇다면 이쪽도 똑같이 무기로 되받아치는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 비천한 어린양을 굽어살피소서."

심판자는 기도를 읊었다.

간절하게.

진실하게.

그 신실한 신념은 전신을 내달리며 그에게 용기와 힘을 선사해주었다.

길이만 5m가 넘는 대형 폴암을 쥔 두 손에 황금빛이 깃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의 위에 황금의 고리가 맺히며 헤일로(Halo)가 생겼다.

헤일로의 모양은 바깥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가시나무 왕관을 닮았다.

"나 간절히 믿나니. 이 손에 영광의 승리를."

무표정했던 심판자의 얼굴에 감정이 깃들었다.

그것은 지금 상황에 대한 답답함, 분노를 넘어 오시안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바치겠나이다."

심판자를 향해 돌진하던 오시안은 그의 표정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좋은 표정이군."

그 중얼거림을 상대가 들을 수 없었겠지만, 이쪽을 향한 적의가 더 강하게 타오르는 걸 보면 대충 낌새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심판자는 자세를 잡았다.

오시안이 다가오는 타이밍에 맞춰 모든 신성력을 응집한 금빛 폴암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자신의 몸에 온갖 버프를 둘러 최대치로 강화시켰고 최대 신성력을 담은 연금무기까지 준비됐다.

그야말로 전력을 다하려는 속셈.

오시안은 그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등 뒤의 망토가 분사하는 별가루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졌다.

오시안은 한 줄기 섬광이 되어 심판자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심판자는 기다렸다는 듯 폴암을 휘둘렀다.

성광검과 금빛 폴암이 충돌했다.

그 힘의 충돌에 빛이 크게 번뜩였다.

빛은 한 점으로 응축되더니 이윽고 서서히 크기를 불려 나갔다.

구체로 흩어지는 금빛에 닿은 황금들판이 가루처럼 흩어졌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에나도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윽고 빛이 서서히 가라앉은 걸 확인한 에나가 눈가를 가린 팔을 내렸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폭발의 중심지를 바라봤다.

황금 들판이 사라진 자리에는 커다란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 이겼어?"

자리에 멀쩡히 서 있는 것은 오시안이었고, 쓰러진 것은 심판자였다.

결국 오시안이 승리한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심판자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지상에서 벌어진 소란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마치 세상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대체 얼마 만에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가.

아버님은 저 위에 계시다 했지만, 그는 기도를 위해 항상 손을 마주잡고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위가 아닌 아래를 보며 이단과 악인을 향해 피의 철퇴만을 휘둘러 왔다.

거부감은 없었다.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에.

하지만 처음으로 패배를 겪고 말았다.

척.

오시안의 검 끝이 심판자의 턱 아래를 겨누었다.

이글거리던 그 유구한 별빛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를 생각하면, 그 별빛이 아니더라도 목을 베는 순간 끝나리라.

끝인가.

심판자가 그렇게 생각할 때 오시안이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은?"

"...?"

그건 갑자기 왜 묻는단 말인가.

설마 죽이기 직전에 이쪽을 모욕이라도 할 생각인가.

하지만 심판자는 곧바로 그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가 싸우면서 느낀 오시안은, 절대 누군가를 모욕하거나 하려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름이 궁금해서 묻는다는 건데.

"...마르티네스."

대체 왜 이름을 답했는지 심판자는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했다.

이름을 들은 오시안은 꽤나 신기하다는 듯 그 이름을 몇 번이나 곱씹더니 이내 검을 치웠다.

"오시안이다."

"...죽이지 않는 건가?"

"그래."

"어째서?"

오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니, 나도 너에게 한 번의 자비를 베푸는 것이 맞으니까."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오시안은 지금의 상황에 꽤나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넘어, 성광의 새로운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모처럼 성기사와 PVP를 하는 느낌이 들어서 옛날 생각이 나기도 했고.'

마르티네스와의 싸움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래서 모처럼 자비를 베풀려는 것이었다.

"...교단은 너희들의 존재를 용납지 않을 거다."

"그래? 그러면 몇 번이고 찾아와도 좋다."

오시안은 오히려 그 소식을 기꺼워했다.

이런 강자와 싸우다 보면 새로운 특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마르티네스는 오히려 반가워하는 오시안의 모습에 말문을 잃었다.

"그리고 아직 어려 보이는데, 벌써부터 세상 다 살았다고 하지 마라."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검을 회수해 칼집에 집어넣었다.

마르티네스는 그런 오시안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끼이익. 쾅!

무어라 말을 하려던 마르티네스를 지프차가 들이받았다.

마르티네스는 그대로 멀리 튕겨 날아가 흙바닥에 처박혔다.

오시안은 멍한 표정으로 날아간 마르티네스를 응시했다.

그때 차량 운전석의 창문이 열리며 에나가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자, 이제 가요!"

"...."

50화. 마녀와 기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