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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10화. 바이올렛 폭스 (2)

오시안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로난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사인가. 확실히 이건 나쁘지 않은 컨셉이야.'

로난은 오시안을 이해해주기로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맞지도 않은 칼을 차고 다니고 있는 시점에서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화약이 발달하고 총과 대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칼잡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는 하지만 그 수는 극히 희미했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단련을 해도 총을 처음 잡아 본 사람이 쏜 총알에 맞아 죽는 것이 현실이었다.

편하게 조준하고 손가락만 당기면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세상에서 미련하게 땀을 흘려 가며 검을 휘두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인 것이다.

그럼에도 기사를 칭한다는 것은 낭만이나 확고한 신념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뮤턴트이기에 가능한 선택인 거겠지.'

신체강화 능력을 지닌 뮤턴트라면 무기를 가릴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겐 우월한 신체능력이 곧 무기였으니까.

하물며 날아오는 총알을 눈으로 보고 칼로 벨 정도라면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래서 특기가 검술. 이건, 확실히 먹히겠네.'

칼잡이를 컨셉으로 잡는다면 그거대로 명성을 쌓는 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해결사 업계는 신분을 따지지 않는 순수한 능력주의의 각축장이다.

황금의 도시 티르나는 길바닥 거지도 기회만 잡으면 억만금의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곳.

그러다 보니 해결사들도 워낙 경쟁이 치열했다.

오히려 오시안의 저런 컨셉은 희소성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애초에 더한 사람들도 많은데 특기가 검술 정도면 얌전한 편이기도 하고.'

총의 등장으로 기사가 사라졌다지만 아직도 냉병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총은 손맛이 없어서 칼이 좋다는 사람이나, 혹은 냉병기를 개조해서 총과 결합하는 기괴한 무기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티르나에는 넘쳤다.

그런 의미에서 갑옷을 입고 평범한 검을 휘두르는 오시안의 모습은 다른 의미로 희소성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특기는 검술로 적도록 하죠."

로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체강화 뮤턴트라고 적었다.

"그래서 일은 언제부터 하면 되는 거지?"

"그건 오시안 씨의 자유입니다. 언제부터 일을 수주하고 싶으신지 말씀을 드리면 제가 그에 맞춰서 준비를 하겠습니다."

"자유라. 그런 부분은 꽤나 편하군."

"그게 저희 업계의 장점 중 하나죠. 물론 실력이 뒷받침된다는 전제하에요. 다만 오시안 씨는 충분히 능력이 있으시니 원할 때 골라서 의뢰를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칭찬이 과하군."

오시안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로난이 자신을 띄워 주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말한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진심으로 말한 로난은 오시안이 부끄러움을 탄다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의뢰는 언제부터 하시겠습니까? 티르나에 오신 지 얼마 안 됐으니 한 2, 3일은 더 보고 결정하셔도 상관은 없을 거 같습니다만."

오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바로 하겠다."

"호오. 지금 말입니까?"

예상 밖의 대답에 로난이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어차피 쉰다고 해 봤자 거주지도 없는 내가 어디서 뭘 하겠나."

"저희 사무소가 숙소도 겸하고 있어서 한 며칠 정도는 편히 묵을 수 있습니다만."

"그래 봤자 가만히 누워 있을 바에는 한시라도 빨리 이 도시에 대해서 감을 익혀 두는 게 낫다. 게다가 애매하게 몸을 풀어서 그런가 손이 근질거리기도 하고 말이지."

오시안은 자신의 오른손을 쥐었다 펴며 중얼거렸다.

얼핏 보면 이상한 말처럼 비춰지겠지만 오시안은 진심이었다.

'특성의 영향 때문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검을 휘두르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느낌이야.'

본래 사회인으로서의 그는 그렇게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일이 끝나면 항상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으며, 취미생활도 전부 게임에만 한정되었다.

그런 그가, 지금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 몸이 간질거리는 감각을 느끼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썩 나쁘진 않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여야 하는 기사의 육체.

그러나 오시안은 그것이 나쁘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가 이런 것에 납득을 한 걸지도 모르고, 이러한 기사의 육체에 영혼이 적응을 해나가는 걸지도 몰랐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진 셈이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만한 의뢰는 있나?"

크게 기대를 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는데 로난은 말없이 오시안을 응시하더니 책상 서랍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오시안 씨가 원하는 의뢰입니다."

"준비성이 철저하군."

"기본적으로 해결사 사무소는 이러한 의뢰를 받으면 수주자가 나올 때까지 놔두는 경우가 파다합니다. 오시안 씨가 바라셨고, 때마침 들어와 있는 의뢰가 있으니 저는 그걸 꺼냈을 뿐이죠."

오시안은 봉투의 인장을 해제하며 안쪽에 있는 내용물을 살폈다.

이 세상에 오고 나서 대화가 통하는 부분에서 어렴풋이 느낀 거지만, 오시안은 처음 보는 문자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이런 부분은 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오시안은 글귀를 읽어 나갔다.

마지막 내용까지 다 읽고서 시선을 뗀 오시안이 입을 열었다.

"갱단 토벌이로군."

의뢰서에 적힌 내용은 갱단 토벌이었다.

오시안은 자연스럽게 처음 이곳에 온 날을 떠올렸다.

칼 한 자루로 빗발치는 총알의 사이에서 갱들을 쓰러뜨리던 기억.

그 기억으로 반추해 보자면 지금 오시안에게 갱단 토벌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가벼운 몸풀기라도 하는 정도는 되겠군."

"조금 더 괜찮은 의뢰는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오늘은 이것으로 참아 주십시오."

"신경 쓰지 않는다. 쉬라고 한 것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였으니까. 그보다는 여기에 적힌 47번 구역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예, 뭐가 궁금하십니까?"

"애석하게도 나는 아직 이 도시의 지리에 대해서 모른다. 간단하게 설명이라도 해 줄 수 있나?"

그거라면.

로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해나갔다.

"티르나는 거대한 도시입니다. 그냥 도시도 아니고 여러 마을과 작은 도시들이 뭉쳐지고 한데 합쳐지며 형성된, 도시국가나 다름없죠."

오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곳 주점까지 오면서 본 도시에 대한 감상은 정말 끝없이 넓다 였으니까.

"그리고 이 티르나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도시 바깥의 어촌, 마을 등을 집어삼키고 숲을 개간하며 새로운 구역을 늘리고 있죠."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군."

"네, 맞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티르나를 탐욕의 도시라고도 부릅니다."

탐욕의 도시라.

도시 안쪽에서 넘실대는 인간의 탐욕과, 도시 자체가 끝없이 바깥을 집어삼키며 세를 불려나가는 탐욕.

도시의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티르나는 너무나도 거대해졌기에 도시를 각 구역별로 나누었습니다."

"여기에 적힌 47번 구역처럼 말이군."

"예. 번호별로 지정된 구역은 현재 총 50번대까지 존재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오시안은 생각했다.

번호로 구역을 나눴다는 부분에서, 이 도시의 특성은 구역에 따라 달라질 거라는 걸.

그리고 오시안의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기본적으로 티르나에서 구역의 번호가 낮을수록 잘 사는 곳입니다. 반대로 구역의 번호가 높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곳이라는 소리로군. 구역이 50번대까지 있다 했으니 47번 구역은 꽤나 난잡한 곳이겠고."

"예. 하루 벌고 먹고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가득하며 뒷골목 양아치와 갱들이 판치는 곳이죠."

1~10번 구역은 도시의 핵심 지역.

말 그대로 도시의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번호의 숫자가 늘어나고 치안이 나빠졌다.

당연하게도 40번대 구역 이후부터는 도시의 외곽.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은 미개발 지역부터 해서 낙후되거나 버려진 구역을 의미했다.

"그리고 가실 때는 이걸 챙기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로난은 그렇게 말하며 보랏빛이 맴도는 카드 같은 것을 내밀었다.

"이건 뭐지?"

"출입증입니다."

"출입증?"

"오시안 씨도 이제 티르나에서 활동을 하시다 보면 깨달으시겠지만, 티르나는 정말로 거대한 도시입니다. 예, 너무 커서 구역별로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 있을 정도죠."

오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구역을 나누는 것은 21세기에서도 흔히 있던 일이었으니까.

"당연하게도 어떤 구역은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일종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물건이기도 하군."

"해결사들은 자주 도시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출입증은 필수인 셈이죠."

"그러면 이것만 있으면 나도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가?"

로난은 웃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것은 간이 출입증이라 30번대와 40번대 구역을 오가는 것만 가능합니다. 더 안쪽으로 가려면 더 제대로 된 출입증이 필요하죠. 그리고 그 출입증은...."

"내가 자격을 증명하거나, 혹은 더 비싼 금액을 들여 구매를 해야 하는 거로군."

오시안은 생각 이상으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 주자 로난은 살짝 놀랐다는 듯 맞장구를 쳐 주었다.

"예, 맞습니다."

"알겠다."

오시안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지도는 여기에 동봉되어 있으니 길을 찾는 데 어려움은 없겠지."

"무운을 빕니다. 기사님."

"무운은."

오시안은 피식 웃으며 사무실을 떠났다.

*

오시안은 지도를 따라 길을 걸었다.

그렇게 구역의 경계선에 도달할 때 즈음 저 너머에 거대한 장벽이 우뚝 선 것이 보였다.

도시의 구역을 나누는, 높이가 20m가 넘는 황동 벽.

그 입구에는 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게임 속과는 모습이 다르군.'

게임 속의 위병들은 잘 손질된 은색 갑옷을 차려입고 창과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위병들은 달랐다.

기본적으로 걸친 복장은 푸른색의 제복.

입가에는 방독면처럼 생긴 황색 마스크를 착용했고 해진 가죽장갑을 낀 두 손으로는 커다란 소총을 쥐고 있었다.

"정지. 출입증은?"

오시안을 발견한 위병이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방독 마스크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오시안은 자연스럽게 코트의 주머니에서 출입증을 꺼내 위병에게 건넸다.

출입증을 살핀 위병이 다시 오시안에게 돌려주며 그의 허리춤에 시선을 주었다.

"허리춤의 그건 뭐지?"

"검이다."

"...."

위병은 눈썹을 모으며 오시안을 노려보았다.

말투도 말투지만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이 영 정상적인 놈이 아니었던 것이다.

'해결사라는 족속들이 이상한 놈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출입증을 지니고 있어서 딱히 문제될 건 없었지만, 트집을 잡으라면 못 잡을 것도 없었다.

게다가 오시안의 말투는 이쪽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기도 충분했고.

"너...."

위병은 좀 더 세세하게 검문을 할 생각으로 오시안을 불렀다.

그때 오시안이 검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자 그는 마스크 안쪽의 입을 쏙 다물고 말았다.

위병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오시안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너, 너...."

위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 떠듬떠듬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무슨 일이지?"

이 묘한 분위기를 포착한 것인지 누군가 다가오며 물었다.

위병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며 경례를 했다.

"소, 소장님!"

소장이라는 말에 오시안 또한 호기심이 어린 시선으로 그쪽을 응시했다.

다른 위병들처럼 청색 제복을 입은 백발의 여인이었다.

위병과 다르게 입에는 방독마스크를 끼지 않았으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오시안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다.

남들이 다 무기를 들고 다니는 곳에서, 맨몸으로 다니는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으니까.

소장이라 불린 여인은 오시안과 위병을 번갈아 살피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그것이."

위병이 말을 절자 소장은 부츠를 신은 발로 위병의 발등을 거세게 짓밟았다.

위병은 마스크 안쪽에서 필사적으로 신음을 삼켰다.

싸늘한 붉은 눈동자가 벌벌 떠는 위병을 응시했다.

"세 번은 없다."

그러면서도 소장의 시선은 날카롭게 오시안의 몸을 훑었다.

11화. 검문소

소장은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위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이, 이자가 검문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검문에 응하지 않았다?"

"보십시오. 옆구리에 대놓고 이상한 물건을 차고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소장의 시선이 오시안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향했다.

아무리 봐도 어떠한 장식도 없는 순수한 검이었다.

날카로운 붉은 눈동자가 신기하다는 듯 오시안의 얼굴을 훑었다.

"네놈은 누구지?"

"오시안."

"오시안? 직업은?"

"해결사."

이제 막 영입된 초짜일 뿐이었지만 오시안은 굳이 거기까진 대답하지 않았다.

해결사라는 말에 소장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얼굴만 보면 어디 귀하게 자란 집안의 도련님인데, 옆구리에 찬 것은 검이고 직업은 또 해결사라니.

"그 검은 정말로 사용하는 건가?"

마치 정말로 검을 다룰 줄 아냐는 것 같은 물음에 오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사로서 지닌 그의 몸이 소장의 도발적인 언행에 언짢다는 감정을 품은 것이다.

'안 돼. 참아, 내 안의 방랑기사.'

오시안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했다.

상대는 아무리 봐도 이곳의 책임자를 넘어 높은 지위를 지닌 사람으로 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도시의 고위 경찰 정도 됐는데, 그런 자들과 시비가 붙어 봤자 전혀 좋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대한 정중하게 답하자.'

오시안은 괜한 싸움을 피하는 게 좋다 여기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 쓰는 무기를 들고 다니는 머저리도 있나?"

"뭐?"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오시안은 아차 싶었다.

하지만 한번 불이 붙은 기사의 육체는, 자신의 불쾌함을 전혀 감추려 들지 않았다.

"정 궁금하면 여기서 보여 줄 수도 있다."

"...."

소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일개 해결사가 자신을 보고도 겁에 질리지 않고 저렇게 대답한 것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허세? 하지만 눈빛만 보면 절대로 허투루 말하는 것은 아닌데.'

허세도 아니고 이쪽을 기만하고자 하는 기색도 없다.

눈앞의 오시안이라는 남자는 정말 진심으로 자신이 검을 다룬다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당당한 목소리를 듣다 보면 분명 믿고 있는 구석이 있다는 건데.

소장은 방금 전부터 자신의 본능을 바늘로 찌르듯 자극하는 감각을 무어라 정확히 정의를 내리기 힘들었다.

오히려 분노한 것은 처음 오시안과 시비가 붙었던 위병이었다.

"이 건방진 해결사 나부랭이가 감히 소장님께!"

위병은 고작 해결사 나부랭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소장님을 우습게 여겨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절반은 소장님께 잘 보이고 싶다는 계산된 행동이기도 했다.

위병은 허리춤에서 검은색 삼단봉을 꺼내 쥐었다.

"너 같은 새끼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위병은 그렇게 외치며 오시안의 머리를 향해 삼단봉을 휘둘렀다.

소장이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 직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른 위병들은 보지 못했지만 소장은 똑똑히 보았다.

삼단봉이 자신의 머리에 닿기 전에, 오시안이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들어 삼단봉을 베어낸 것을.

그것은 위병이 팔을 휘두르는 찰나의 순간에 펼쳐진 일이었다.

"어?"

위병은 휘두르던 삼단봉이 정확히 삼등분이 되어 바닥에 떨어진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어째서 자신의 무기가 이렇게 변한 건지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대체...."

위병이 당황하는 순간.

카앙!

눈앞에서 불똥이 튀었다.

위병은 뒤늦게 이 불꽃이 오시안의 검과 소장의 금속 부츠가 충돌하면서 생긴 거라는 걸 깨달았다.

소장은 긴 다리를 쭈욱 뻗은 채, 위병의 얼굴을 향해 떨어지는 검을 다리로 막아낸 것이다.

오시안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소장을 응시했다.

자세히 보니 소장이 신은 부츠의 밑창이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소장이 입을 열었다.

"그만하지."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방금 전부터 오시안에게 고정되어 떠날 줄 몰랐다.

정작 그 시선을 받는 오시안은 여전히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오시안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증명이 된 거 같은데. 맞나?"

"...그래. 알겠다. 거기까지만 하도록. 부하의 무례는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

"소장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먼저 사과를 하는 소장의 모습에 위병이 당황했다.

소장은 그런 위병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 입 닥치라고.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는 소장의 모습에 위병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오시안이 검을 치우자 소장 또한 다리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묻겠다. 이름이 뭐라고?"

"오시안. 방금 전에도 대답하지 않았던가."

"...그랬었지. 나는 알렌시아 헤어라고 한다. 여기 있는 이 모자란 놈의 상사이자, 도시의 집행자이지."

집행자?

오시안은 집행자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장을 포함한 다른 위병들은 오히려 오시안의 무감각한 대응에 속으로 놀랐다.

티르나에서 집행자를 보고도 겁에 질리지 않다니.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방금 전 검을 휘두른 것을 보면 자신의 실력에 확신이 있던 걸지도 모르겠어.'

이 정도의 실력자가 고작 해결사라니.

알렌시아라 해도 이 도시의 전부를 아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남들에 비해 모르는 것은 없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방금 전, 눈으로 내 움직임을 쫓았다.'

알렌시아 소장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알렌시아는 곧바로 옆으로 길을 비켜 주며 말했다.

"이만 가 봐도 좋다."

"...."

이쪽을 곱게 보내 주는 알렌시아의 모습에 오시안은 그녀를 잠시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검문소를 떠나기 전, 오시안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오시안은 검문소를 완전히 벗어났다.

멀어지는 오시안의 뒷모습에 위병은 방독 마스크 안에서 이를 갈았다.

"소장님! 어째서 저 무례한 자를 그대로 보내 주신 겁니까!"

"시끄럽다."

"소장님!"

"멍청한 놈. 내가 왜 그를 그냥 보내 줬는지 아직도 모른다는 거냐?"

이쪽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소장의 시선에 위병은 말문이 턱 막혔다.

부하들에게 엄격해도 저렇게 노골적인 눈빛을 보내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그때 알렌시아 소장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쪽을 향해 한심하다는 시선에서, 놀라움과 경악으로.

뭐지? 왜 저러시지?

위병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자신의 입가가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엇?"

위병은 뒤늦게 자신의 방독 마스크가 반으로 잘려나갔음을 깨달았다.

위병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봤느냐. 내가 막지 않았더라면, 너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게. 이럴 수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멍청한 놈. 그러고도 네놈이 티르나의 위병이라 할 수 있나? 네놈은 징계다."

"어, 어째서입니까?"

"그걸 모르니 징계라는 거다."

알렌시아는 그렇게 팩 쏘아붙이고는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방금 전에 마주했던 오시안을 떠올리며.

'분명히 제대로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알렌시아는 분명 오시안의 검을 막았다. 그럼에도 부하의 마스크는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검을 휘두른 여파만으로 금속 마스크를 자르다니. 저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애써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당혹스러운 것은 알렌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거기서 계속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집행자로서 오시안과 싸우면 그를 제압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넘어서 그를 이길 수 있었을까?

집행자들에게만 주어진다는 아크파츠를 사용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렌시아는 자신이 힘을 숨긴 것처럼, 오시안도 무언가 숨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오시안이라. 기억해둬야겠어.'

어쩌면 큰 파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알렌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

인적이 완전히 끊겨 버린 47번 구역.

대낮인데도 좁고 높은 골목길 때문에 빛이 들어오지 않아 시종일관 칙칙한 그 장소에, 나는 드디어 도착했다.

오는 길에 약간의 소요가 있었지만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어디 보자. 일단 의뢰 자체는 47번 구역에 있는 갱을 정리하는 거라고 했었지.'

의뢰서에 세세한 자료가 정리되어 있어서 오는 길에 전부 다 파악을 끝낸 뒤였다.

갱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자라난 일종의 범죄자 집단.

게임 내에서도 도시마다 이런 범죄자 조직은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게임에서는 단검과 몽둥이를 들었지만, 이곳은 총으로 무장했다는 것 정도?

'47번 구역을 점령한 것은 블랙 스네이크라 불리는 갱단. 놈들은 순식간에 세력을 넓히며 사람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기업을 건드리기까지 했네.'

47번구는 티르나의 바깥과 가장 직접적으로 통해 있는 구역.

일종의 지나가는 통로로써의 역할을 지닌 장소였다.

하지만 치안은 썩 좋지 않았다.

47번구 말고도 어차피 도시 바깥으로 향하는 구역은 많았고, 도시 차원에서 47번구를 특별취급 해줄 필요가 없던 것이다.

'이 정도로 낙후됐으면 오히려 손대는 것이 돈 빨아먹는 일이겠지.'

47번구 안에도 치안을 담당하는 경관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뒷돈을 받거나 일하는 시늉만 하는 자들뿐이었다.

그러니 블랙 스네이크 같은 갱들이 활개 치는 것이겠지.

놈들은 세력을 늘리다 간이 부은 것인지, 결국 기업이 운송하는 트럭을 습격해 버린 것이다.

'47번구를 이용하는 기업이라 해도 끽해 봐야 중소기업 정도. 건드려도 탈이 없다고 판단을 한 거겠지.'

티르나는 거대한 도시다.

너무 커서 도시를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그 구역 하나가 어지간한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도시 안에 건물이 몇 개고 길목은 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곳에서 작정하고 숨으면 찾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생각보다 익숙했다.

게임 속에서도 여러 의뢰를 하려다 보면 불친절한 경우를 생각보다 자주 맞이하게 된다.

퀘스트를 받아도 화살표로 어디로 가야 한다고 알려주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유저가 자체적으로 탐색하고 헤쳐 나가야만 했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퀘스트와 NPC의 위치를 찾기 힘든 복잡한 구조까지.

특히 도시의 뒷골목은 뭘 하지도 못하고 시간 버리기 딱 좋은 곳이었다.

많은 유저들은 그런 퀘스트에 질려서 게임을 떠나거나, 혹은 다른 간단한 퀘스트를 수행하고는 했다.

나는 달랐지만 말이다.

'게임 속에서는 상호작용이 되지 않는 NPC가 많아서 무언가를 물어보고 찾는 것이 힘들었지만.'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

그러니 길거리 부랑자에게만 말을 걸어도 얻어낼 정보는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근처에서 적당히 알 만한 녀석을 찾아볼까 하던 차였다.

콰앙!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새빨간 사과 하나가 내 근처까지 굴러왔다.

나는 사과를 주워들고 소란이 난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여기서 장사할 거면 돈을 내야 할 거 아니야!"

"어디 자리 옮겨서 도망친다고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어? 여긴 우리가 꽉 잡고 있는 거 알지?"

"야. 뭣들 하냐. 때려 부숴."

딱 봐도 양아치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5명이, 과일가게 아주머니를 핍박하는 모습이 보였다.

양아치들은 가판대를 걷어차고 바닥을 구르는 과일을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아주머니는 저항을 해 보지만 상대가 될 턱이 없었다.

장한 한 명이 힘을 주며 밀어내자 아주머니가 털썩 쓰러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 행인들은 끼어들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최소한 이런 일이 한두 번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소리리라.

'그래. 이런 세상이니 철거니 용역이니 하는 놈들이 있겠지. 차라리 잘됐네.'

나는 손에 쥔 사과를 한번 던졌다 받은 뒤, 양아치를 향해 집어 던졌다.

퍼석!

일자로 날아간 사과는 5명 중에서 행동대장으로 보이는 녀석의 관자놀이에 틀어박혀 박살났다.

"이, 씨발 누구야!"

험상궂은 인상을 지닌 녀석이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냐?"

"그렇다. 내가 던졌다."

내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녀석들이 하,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이 형씨. 좋은 옷 입고 있는 거 같은데 왜 멀쩡하게 남 장사하는 데 와서 지랄이야 지랄이. 어?"

"그보다 하나 묻겠다."

"이 새끼 말투는 또 왜 이래?"

"방금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너희들, 여기 지리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길 좀 묻지."

내 물음에 양아치 넷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유일하게 웃지 못하고 나를 노려보는 것은 사과를 맞은 녀석뿐이었다.

딱 봐도 안다고 해도 절대로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당장 말해 주지 않아도."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굳이 검을 휘두를 필요도 없겠지.

나는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지금 바로 들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12화. 블랙 스네이크 (1)

용역 양아치들은 오시안의 말에 슬슬 짜증을 느꼈다.

겁만 줘서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니,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특히 사과를 얻어맞은 녀석은 콧김을 씩씩 뿜으며 벌써부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하필이면 제일 앞뒤 안 가리는 녀석을 화나게 만들었으니, 이제 저놈은 큰일 났다.

"야, 끼어들지 마라. 저 새끼는 내가 조질 테니까."

사과를 맞은 양아치는 오시안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그가 절대로 주먹에 손대중을 하지 않겠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 방 맞고 뒤지지 마라. 그러면 진짜 나한테 죽는다."

그렇게 말하며 오시안의 복부를 향해 내질러지는 주먹.

그러나 그 주먹은 목표에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

오시안이 가볍게 손을 뻗어 주먹을 잡아낸 것이다.

"그 말은 내가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뭐?"

"한 대 맞고 쓰러지지 말거라. 그러면 내가 재미없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고.

그렇게 말하려던 양아치는 복부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숨을 토해 내야만 했다.

오시안이 어느덧 가볍게 주먹을 뻗어 그의 복부를 때린 것이었다.

양아치의 몸이 기역 자로 꺾이다 못해 반으로 접혔다. 부릅뜬 눈알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거대한 덩치가 몇 미터를 날아가 바닥을 주욱 미끄러지다 건물 벽에 쿵 부딪쳤다.

"뭐지. 그렇게 호언장담하더니 고작 한 대도 버티지 못하는 건가?"

오시안은 꽤나 힘을 빼서 쳤다고 생각했는데도 양아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침을 질질 흘리기만 했다.

육체의 스펙이 지나치게 차이 나다 보니, 오시안의 입장에선 살살 쳤다 생각했는데도 너무 강했던 것이다.

주변에서 오시안이 맞을까 봐 조마조마하던 행인들은 모두 당황했다.

그것은 동료가 한 방에 당한 다른 양아치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시안의 눈동자가 남은 네 양아치들을 향했다.

양아치들은 몸을 움찔 떨었지만, 직후 이쪽은 숫자가 넷이나 된다는 걸 깨닫고 용기를 얻었다.

"쪼, 쫄지 마! 저 새끼 그래 봤자 혼자야!"

"한꺼번에 덮쳐!"

양아치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오시안을 둘러싸며 포위했다.

오시안은 그때까지도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네 방향에 선 양아치들 중 오시안의 뒤 선 녀석이 움직였다.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오시안의 등 향해 발길질을 내질렀다.

오시안은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마냥 내질러지는 발차기를 피한 뒤, 오히려 다리를 붙잡았다.

"어, 어어?"

오시안은 그대로 다리를 붙잡은 양아치의 몸을 둔기처럼 휘둘렀다.

콰직!

옆에서 달려들던 양아치가 함께 충돌하여 바닥을 뒹굴었다.

직후 한 놈이 챙겨온 각목을 휘둘렀다.

오시안은 가볍게 팔을 뻗었다. 주먹이 각목을 산산히 부쉈다.

"이, 이게...."

빠악!

양아치의 코뼈가 내려앉으며 피 묻은 이빨이 우수수 떨어졌다.

"으아아! 뒤져 이 씹새꺄!"

마지막 남은 녀석이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뽑아 오시안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오시안은 뻗었던 주먹을 빠르게 회수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상대방의 눈에 보이는 속도로 다시금 주먹을 내질렀다.

'병신 새끼!'

나이프를 쥔 양아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오시안의 주먹의 궤적에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이대로 주먹을 내지르면 본인의 손이 알아서 베일 터였다.

오시안의 주먹과 나이프가 맞닿는 순간.

챙강!

나이프가 산산조각이 나며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어?"

나이프를 내지른 양아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누가 봐도 맨주먹이 피를 뿌려야 할 광경이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양아치는 부서진 나이프의 파편에 망연자실했지만, 오시안의 주먹은 그렇다고 봐주지 않았다.

쿠웅!

오시안의 입장에선 가볍게 찍었을 뿐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무슨 트럭이 다가와 들이받은 느낌이었다.

양아치는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오시안에게 빌었다.

"마, 말할게요. 마, 말할 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그건 네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오시안이 시퍼런 안광을 흘렸다.

양아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

블랙 스네이크의 두목 제이콥 겔린은 퇴역군인으로 도시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이방인이었다.

불명예스럽게 퇴역한 나머지 제이콥은 퇴역군인 연금을 받을 수도 없었고, 도시 내에서 마땅한 직장을 구하기 요원했다.

그에 대한 소문이 돌았는지 기업들은 그의 고용을 꺼려했고, 먹고 살기 위해 제이콥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한정되어 있었다.

바로 약탈과 살인이었다.

제이콥은 47번 구의 자그마한 조직들을 하나씩 박살냈다.

이런 후미진 뒷골목에 있는 녀석들이라고는 허세만 가득한 양아치가 전부.

조직을 하나씩 와해시키고 새롭게 규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만의 세력을 일군 제이콥은 근방의 지리를 파악한 뒤, 새벽에 오가는 운송트럭들을 습격했다.

그런 식으로 제이콥과 그 부하들은 짭짤한 수익을 올리며 세를 더욱 키워 갔다.

이대로만 가면 블랙 스네이크는 중급규모의 갱단까지 발돋움할 수 있을 터였다.

"두목. 그보다 이거 괜찮은 거 맞습니까?"

"뭐가 말이냐."

제이콥의 사무실에서 부하가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이렇게 하다가 놈들이 사람을 보내면 어떡하죠? 듣자하니 전문 해결사가 올지도 모른다고 다들 무서워하던데."

제이콥은 멍청한 소리를 하는 부하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성격 같아서는 욕설을 내뱉으며 때려 주고 싶었지만, 명색에 조직의 리더니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했다.

"걱정 마라. 어차피 이런 후미진 곳까지 해결사가 올 일은 없으니까. 우리가 털어먹은 기업이라 해 봤자 규모가 그렇게 큰 놈들도 아니야. 사람을 고용할 돈도 부족한 게 현실이지."

치안이 나쁜 47번구를 통해 돌아다니는 기업이라 해 봤자 중견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기업이 전부.

진짜 기업들은 애초에 이런 치안이 나쁜 구역 자체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털어먹는다 하더라도 추적을 당할 일은 없었다.

설사 그들이 용병이나 해결사를 고용한다 하더라도 무마하며 넘길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그런 놈들한테 돈 받고 찾아오는 새끼들이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제이콥은 나름 실전을 겪어 본 군인이었고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이 골목길에서는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니 한동안은 계속 이 일을 해도 상관없다고 설명하려던 그때였다.

투쾅!

아지트 건물 아래층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콥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한쪽 뺨에 새겨진 흉터가 징그럽게 일그러졌다.

"어떤 미친 새끼가.... 야, 가서 확인해 봐."

제이콥이 눈짓을 주자 부하들이 황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구역에서는 고개도 못 들 어중이떠중이지만 47번구에서는 어깨에 나름 힘깨나 줄 수 있는 머릿수였다.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금방 제압하리라.

제이콥은 좀 있다가 벌집마냥 구멍이 송송 뚫린 시체의 몰골이나 한번 보러 가자고 생각했다.

퍼억!

타타탕!

끄아아악!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더욱 거대해졌다.

총소리와 비명소리. 탁자가 엎어지고 무언가 날아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까지.

순식간에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싸움이 이렇게까지 이어지는 것에 제이콥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한데? 설마 생각보다 숫자가 많은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며 몰아낸 양아치들이 연합해서 쳐들어온 걸지도 몰랐다.

'이 개새끼들이 감히 누굴 물려고 해? 싹 다 죽여주마.'

제이콥은 허리춤의 리볼버를 뽑아들며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군인으로서 경계심을 최대한 끌어올린 제이콥은 1층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 이게 무슨...."

1층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벽 곳곳에 박힌 총알자국과 부서진 탁자들. 흩뿌려진 붉은 피와 깨진 술잔까지.

바닥에 쓰러져 숨을 쉬지 않고 있는 녀석들은 방금 전 내려간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제이콥을 가장 놀라게 한 건, 이 광경을 만들어낸 것이 집단이 아니라 고작 1명이라는 점이었다.

"네놈이 제이콥인가?"

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제이콥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 이름을 알고 있다.'

제이콥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노리고 온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주변에 다른 동료는? 없다. 그렇다면 혼자 찾아온 해결사인가?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제이콥은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

노리는 것은 남자의 급소.

군에서 배운 사격술, 더블탭(Double tap)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리하게 펼쳐졌다.

더블탭은 단순히 총기를 빠르게 두 번 쏘는 기술이 아니다.

총을 쥐는 파지법부터 해서 총의 반동을 견디는 자세와 트리거 리셋까지 모든 것이 필요한 기술이었다.

그것은 제이콥이 해당 총기를 아주 오랫동안, 많이 쏴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검을 쥔 남자의 반응은 제이콥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팅! 팅!

손에 쥔 칼을 휘둘러 날아오는 총알을 쳐낸 것이다.

"그쪽은 제법 쏠 줄 아는군."

검은머리의 남자, 오시안은 제이콥의 사격실력에 감탄했다.

제이콥은 정확히 자신의 급소를 노렸다. 그것도 총기반동을 깔끔하게 제어하며 속사로 2발.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총을 무차별로 갈겨대던 놈들과 다르게 제대로 훈련을 받은 티가 났다.

반면 제이콥은 믿기지 않는지 눈을 부릅떴다.

'이, 이런 미친! 칼로 총알을 튕겨내?'

칼을 무기로 쓴다는 것도 믿기지 않은데, 그걸로 총알을 튕겨 내다니?

말도 안 되는 동체시력과 그걸 뒷받침해 주는 신체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이콥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강화인간이었다.

하지만 오시안의 몸에는 어떠한 시술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신체강화계열의 뮤턴트뿐.

그것도 등급이 아주 높은 놈이었다.

'저 정도 뮤턴트가 대체 왜...!'

*

오시안은 제이콥을 응시했다.

흉터가 아로새겨진 험악한 인상과 방금 전부터 풍기는 술 냄새까지.

방금 전 확인차 물었지만 블랙 스네이크 갱단의 두목인 제이콥이 확실했다.

오시안은 의뢰의 목적을 떠올렸다.

최근 47번구에서 날뛰는 블랙 스네이크 갱단의 정리.

여기서 말하는 정리란 단순히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 아닌, 근본적으로 싹을 잘라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살인, 강도짓이나 하는 놈. 죽여도 탈은 없겠지.'

"잠...!"

제이콥은 오시안의 눈가에 깃든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전쟁터에서 몇 번이고 겪어 보았던, 적군 병사에게서 많이 본 눈빛이었다.

바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의.

제이콥이 어떻게든 살기 위해 설득이라도 해 보려는 순간.

번쩍!

눈앞에 섬광이 몇 번 번쩍인다 싶더니 제이콥은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

제이콥은 오시안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신에 붉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오시안은 마룻바닥을 적시는 붉은 피를 심드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오시안은 안쪽을 스윽 둘러보다가 더 쓰러뜨릴 녀석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일단 증거품으로 적당히 뭐 좀 챙겨갈까.'

방금 전 제이콥이 2층에서 내려왔으니, 녀석의 방은 2층에 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2층으로 올라와 제이콥의 사무실 문을 연 오시안은, 안쪽에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한 명은 호리호리한 청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꽤나 큰 덩치였다.

둘 다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입었으며 얼굴에는 철로 된 가면을, 머리에는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오시안이 그렇게 묻는 순간 호리호리한 자가 입을 열었다.

"뭐야. 제이콥이 아니잖아. 넌 누구냐."

13화. 블랙 스네이크 (2)

오시안이 대답하지 않자 가면의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어차피 목격자는 없애야 하니까. 제거해."

그 말에 덩치가 움직였다.

철컥.

무언가 공이를 당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거구의 덩치가 포탄처럼 쏘아져 오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덩치가 오시안의 양 어깨를 잡더니 한쪽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날아가던 오시안은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며 벽에 충돌하기 전에 지면에 착지했다. 직후 덩치가 오시안을 향해 달려들어 어깨로 들이받았다.

오시안은 양팔을 교차시키며 방어에 들어갔다. 그 위에 덩치의 몸통박치기가 꽂혔다.

콰앙! 콰앙!

압도적인 질량과 무지막지한 근력.

덩치는 불도저처럼 오시안을 밀어내며 벽을 2개나 부쉈다.

벽돌파편이 비산하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진작 피떡이 됐을 위력.

하지만 덩치는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끼기기긱.

오히려 오시안을 밀어내던 어깨에서 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누구인지 물었는데 뜬금없이 공격이라니. 예의가 없군."

오시안은 덩치와 힘겨루기에 들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집어던지질 않나 어깨로 들이받질 않나.

둔중해 보이는 겉모습에 걸맞지 않은 빠른 모습이 신기해 구경하다 대응이 늦었다.

그걸 감안해도 오시안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맨몸으로 단단한 벽을 2개나 부쉈지만, 오시안은 아픈 구석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 몸통이지만 더럽게 튼튼하군.'

오시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시안은 눈앞의 적을 가만히 분석했다.

덩치는 자신의 힘을 견디는, 그것을 넘어 오히려 이쪽을 밀어내는 오시안의 모습에도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 아래층에서 상대했던 아마추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빠드득!

덩치가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마룻바닥이 빠득 소리와 갈려나갔다. 하지만 오시안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덩치가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덩치는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미는 힘에 저항하던 오시안은 아주 찰나지만 균형을 잃었다.

강대한 육체에 비해 그 숙련도는 아직 미숙했던 탓이다.

그 틈새를 덩치가 쏜살같이 비집고 들어갔다.

성인 남성 머리통만 한 주먹이 오시안의 얼굴을 향해 대포처럼 쏘아졌다.

파공성을 울리는 스트레이트는 맞는 순간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나갈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오시안은 엄청난 속도로 몸의 균형을 회복, 머리를 살짝 옆으로 젖히는 것만으로 주먹을 가볍게 피해냈다.

오시안은 몸을 뒤로 회전시켰다. 두 손으로 덩치의 내질러진 주먹을 어깨너머로 붙잡은 뒤, 그대로 지면에다가 메다꽂았다.

콰앙!

자신의 무게를 고스란히 등으로 받아낸 덩치였지만 가면 너머에서는 신음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오시안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이 녀석, 생각했던 것보다 맷집이 아주 튼튼했다.

"어디 그러면 얼마나 더 버티는지 보겠다."

오시안은 쓰러진 덩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우선 그 잘난 가면부터 벗겨 보자는 심산이었다.

오시안이 뻗은 주먹을 덩치의 솥뚜껑만 한 손이 그대로 붙잡았다.

"흠?"

오시안이 의외라는 시선으로 바라볼 때 덩치에게서 변화가 일었다.

치이익!

코트의 틈새로 새하얀 증기가 흘러나왔다.

평범한 인간의 몸에서 저런 반응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오시안은 자신의 주먹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압력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녀석의 힘이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올라갔다.

게다가 귀를 거슬리는 소리.

태엽 돌아가는 소리, 펌프가 치는 소리, 실린더가 왕복하는 소리까지.

전부 덩치의 몸속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너, 인간이 아니군."

오시안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덩치의 상반신이 튕겨져 나가듯 일어났다.

덩치는 오시안의 주먹을 놓지 않은 채 몸을 뒤틀어 다시금 정면에서 그와 마주 보았다.

살짝 찢어진 코트의 팔뚝 안쪽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강철로 이루어진 팔이 보였다.

덩치는 가면 너머에서 붉은 안광을 빛냈다.

마치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듯이.

*

호리호리한 체구의 가면남은 제이콥의 집무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기다렸다.

제이콥이 얼마나 사업을 확장했는지 확인하러 왔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제이콥은 웬 해결사에 의해 죽고 말았다.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버릴 패 중 하나였어. 오히려 그 해결사 녀석은 운도 지지리 없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우리를 마주할 줄이야.'

혼자서 블랙스네이크 갱단을 쓸어버릴 정도라면 꽤 실력자였을 테지만.

지금 오시안과 싸우고 있을 덩치는 그런 개인이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자율구동인형, 오토마톤(Automaton).

녀석은 그중에서도 전투용으로 제작되어 매우 튼튼하고 출력도 남다른 특제품이었다.

혼자서 갱단 여럿을 제거할 수 있는 오토마톤을 고작 해결사 하나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부서진 벽 너머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래도 그 해결사, 나름 믿는 구석은 있는 건지 꽤 버티는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잦아들었다.

'끝났나.'

이제 오토마톤이 짓이겨진 시체를 들고서 자신의 앞에 나타나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부서진 벽 너머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쿠웅!

시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이 데려온 오토마톤이었다.

한쪽 팔이 뜯겨 나간 오토마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도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했다.

가면남의 시선이 오토마톤에서 부서진 벽 너머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오시안이 오토마톤의 팔뚝을 쥐고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시안은 어깨에 떼어낸 팔뚝을 툭 걸치며 싸늘한 시선으로 가면남을 응시했다.

가면남은 코트 아래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전투용 오토마톤의 팔뚝을 저렇게 손쉽게 뜯어 버리다니?'

게다가 오토마톤의 상태를 보면 최소 3단계 이상 출력을 낸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오시안은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게 전부인가?"

오시안은 가면남을 향해 팔뚝을 겨누었다.

가면남은 그 행동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해결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마주해 보니 절대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숨겨 놓은 패가 있다면 더 보여 줘도 좋다만."

게다가 저 언행에서 느껴지는 여유까지.

오직 강자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런 태도에 가면남은 식은땀을 흘렸다.

정작 오시안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세상이 발전하니 로봇도 나오네.'

오토마톤은 오시안이 보기엔 로봇이나 다름없었다.

게임 속 세상에 비해서 매우 발달한 세계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족보행 로봇까지 있을 줄이야.

게다가 처음에 오토마톤이 움직였을 때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쉽게 구분 가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보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찾아와서 나를 공격한 걸 보면 블랙스네이크 갱단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하겠고.'

최소 놈들을 붙잡아서 심문을 해보면, 뭔가 정보가 더 나올지도 몰랐다.

그때 가면남이 입을 열었다.

"물러난다."

그가 말하자 오토마톤도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가면남의 옆에 섰다.

그 모습에 오시안이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가면남을 노려보았다.

"이제 와서 간다고 하면 내가 보내 줄 것 같나?"

가면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 순간 오시안이 쥐고 있는 오토마톤의 팔뚝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새하얀 증기가 뿌옇게 일어나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가면남은 폭발을 뒤로하고 오토마톤의 남은 멀쩡한 한 팔에 올라탔다.

오토마톤은 유리창을 깨부수며 건물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한 인간과 한 기의 오토마톤은 삽시간에 도시의 증기 너머로 사라졌다.

방 안의 가득 채운 증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오시안은 부서진 창문과 사라진 두 존재를 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설마하니 팔 자체가 폭발하는 기능이 있었을 줄이야.

'화약 냄새가 안 나서 방심했나.'

팔뚝 내부에 내장된 압축증기 캡슐을 터뜨린 것이었다.

팽창하는 수증기 자체가 일종의 폭탄 역할을 한 것.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부서진 강철 팔뚝의 파편은 그 자체만으로 탄환이 되어, 폭발의 압력과 함께 주변 일대를 휩쓸어 버렸으니까.

일정 범위 내에 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것이, 크레이모어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시안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오시안의 손에는 어느덧 검이 쥐어져 있었다.

팔뚝이 폭발하면서 생긴 파편의 탄환을, 오시안이 검으로 모조리 쳐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오시안의 등 뒤의 벽은 파편이 박힌 것 없이 깨끗했다.

주변만 다 갈가리 찢긴 광경이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

오시안은 뭔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챙기려다가 활짝 열린 금고가 텅 비어 있는 걸 보고 포기하기로 했다.

그 가면을 쓴 놈이 뭘 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자신들과 관련된 증거를 모두 빼돌린 뒤였다.

'어차피 내 의뢰는 블랙스네이크 갱단의 토벌이었으니까 굳이 귀찮게 일을 벌일 필요는 없지만.'

이번 사건의 뒤에 무언가 배후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썩 개운한 기분은 아니었다.

도시도 워낙 넓다 보니 온갖 조직들이 판을 쳐도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서도 말이다.

오시안은 검을 허리춤에 꽂은 뒤 갱단 아지트 바깥으로 나왔다.

치이익! 끼릭. 끼릭.

골목길 곳곳에서는 기계태엽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오시안의 시야에 과거 게임에서 보던 도시의 골목과 지금 보는 풍경이 대비됐다.

몇 번을 봐도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의뢰를 끝내고 다시 돌아가려고 하던 오시안은 발걸음을 멈췄다.

"...."

고개를 돌린 오시안은 증기가 피어오르는 건물 옥상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

'뭐지?'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 대던 주시자는 오시안이 이쪽을 돌아보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쪽을 봤다고? 설마 들킨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오시안과의 거리는 단순 수치상으로만 200m 이상 떨어져 있다.

심지어 이쪽은 몸을 감추고 있는데다 주변은 황동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증기로 인해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맨눈의 사람이 건물 옥상에 있는 자신을 포착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단순한 우연일지도 몰라.'

순간 도망칠까 했던 주시자는 애써 불안을 억누르며 재차 스코프로 오시안의 모습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녀석 어디 갔어?'

방금 전까지 골목길에 서 있던 오시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시자는 무언가 불안감을 느꼈다.

우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목 뒤에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움직이지 마라."

"...."

주시자는 당황했다.

이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오시안이 허리에 차고 다니던 칼이 분명했다.

'대체, 어느새?'

오시안을 놓친 것은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시안은 그 짧은 시간 속에서 200m가 넘는 거리를 주파해 이쪽의 후방을 점한 것이다.

심지어 이곳은 건물 옥상이었는데도 말이다.

"방금 전 나를 지켜보고 있었지. 목적이 뭐지?"

"...."

말하는 걸 보면 이쪽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전부 꿰뚫고 있었다.

순간 스코프 너머에서 자신을 돌아본 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주시자가 착용한 방독면 안쪽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좋다."

오시안이 검에 힘을 주려는 순간, 주시자가 외쳤다.

"잠깐!"

14화. 산업시대의 길 (1)

주시자는 곧바로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워워. 진정해. 방금 전 지켜보게 된 건 미안하게 됐어."

주시자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신의 얼굴에 채워진 방독면 마스크를 벗었다.

머리에 쓴 가죽모와 고글까지 치우자 풍성한 아이보리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오시안은 의외라는 듯 눈을 떴다.

설마하니 여자였을 줄이야. 그것도 상당한 미인.

"이쪽은 네 적이 아니야. 오히려 도우려고 한 거지. 진짜야. 믿어달라고."

"믿는다."

"정말?"

"그래. 시선에서 살기나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 말에 주시자는 그런 것도 아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알아줘서 다행이네. 이참에 자기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로레인 폰크라고 해."

"오시안이다."

"그래. 오시안. 방금 전에 왜 지켜보고 있었냐 했지?"

"내가 첫 의뢰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혹시라도 정 아니면 도와주기 위해서 온 거겠지."

오시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답에 로레인은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어?"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

오시안이 비록 총알을 눈으로 보고 쳐내는 무위를 지녔다 하지만, 가진 바 능력과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도 방심하는 순간 죽는 것이 실전이다.

오히려 로난의 입장이었다면 이쪽이 의뢰를 당장에 하겠다고 했을 때 그를 말려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로난은 오시안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안전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어. 이거 참. 한 방 먹었네."

로레인은 오시안이 보여 주는 의외의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로난이 말하기를 티르나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라 했는데.

말하는 걸 보면 어디서 몇 년은 굴러먹다 온 베테랑 같지 않은가.

"사실 로난은 별말 안 했지만, 내가 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헛걸음한 거 같지만 말이야."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혹시 방금 전 수상한 이인조가 도망치는 걸 보지 못했나?"

"수상한 이인조?"

"가면을 쓰고 코트를 입은 녀석들이다."

"아, 봤어. 유리창을 깨부수고 삽시간에 사라지던데. 갱단은 아니라서 그냥 놔두기는 했는데."

"그렇군."

로레인이 살짝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혹시 무슨 일 있던 거야?"

"별거 아니다."

"무슨 일이었는데?"

"그냥 블랙스네이크 갱단의 배후에 수상한 집단이 하나 있더군. 우연히 마주치니 나를 죽여서 증거를 인멸하려했지. 그래 놓고 실패하니까 그대로 도망쳤다."

"...별거 아닌 일이 아닌데?"

로레인은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오시안을 응시했다.

"모습은? 아니면 정체는 확인했어?"

"모른다. 싸울 때도 가면을 쓰고 있었고, 나와는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거든. 대신 한 가지는 안다. 한 놈은 인간의 모습을 한 기계였다."

"기계? 아, 오토마톤이었다고?"

오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레인은 도망치던 이인조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녀석은 동물원 원숭이마냥 건물 옥상을 훌쩍 뛰어다녔는데, 오토마톤이라 하니까 그 움직임이 납득이 갔다.

"잠깐. 그보다 그 녀석, 한쪽 팔 없지 않았나?"

"내가 떼어냈다. 힘 좀 주니까 부러지더군."

"...내가 자세히 안 봐서 뭐라 말을 잘 못 하겠는데, 그 녀석 평범한 오토마톤은 아니지 않았어?"

"오토마톤은 처음 봤지만 평범한 것 같았다. 떼어낸 팔이 따로 폭발을 했을 뿐."

"...그거, 절대로 평범한 오토마톤이 아니잖아."

로레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오시안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복장 어디에도 폭발에 휘말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폭발의 소리는 그녀도 똑똑히 들었으니까.

따로 떼어낸 팔이 폭발하다니. 그 정도라면 보통 오토마톤이 아닐 거다. 아마 혼신을 기울여 만든 특제품이겠지.

그것을 오시안이 단신으로 제압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폭발에서도 멀쩡한 모습은 또 어떤가.

로레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로난 이 미친놈! 누가 누구더러 뒤를 봐주라는 거야!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잖아!'

사실 로난은 가려는 로레인을 말렸고, 오히려 멋대로 찾아온 것은 로레인이었지만 그녀는 애꿎은 로난을 탓했다.

로난이 들었더라면 퍽이나 억울해했을 일이었다.

물론 로레인 입장에선 바이올렛 폭스에 들어온 신입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누가 뭐래도 그 로난이 직접 찾아가서 영입을 제안한 상대가 아닌가.

로난은 항상 실눈을 뜨며 미소를 잃지 않아서, 퍽이나 뒤가 구려 보이는 녀석이지만.

그럼에도 이 바닥에서 안목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그런 로난이 상당히 신경을 쓸 정도의 신입이라기에 꽤 실력 있고 싹수 보이는 녀석이구나 싶었는데.

이건 정도가 다르지 않은가.

"잠깐. 그러면 안쪽에 있는 블랙스네이크 갱단은?"

"전부 처리했다."

"아, 응. 그렇구나."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로난에게 귀띔을 들었다. 오시안이라는 신입은 날아오는 총알을 칼로 쳐낼 줄 안다고 했던가.

이쪽이 옥상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까지 눈치 챈 걸 보면, 마냥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원래 뮤턴트가 다 이런가?'

로레인도 나름 뮤턴트 몇을 만나 보았고, 적으로 싸워본 적도 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서 오시안처럼 몸이 날렵하고 감각이 예리한 뮤턴트는 없었다.

"아무튼, 그보다 좀 골치 아프네. 설마 이번 일에 이상한 놈들이 엮여 있었다니."

"그러면 위험해지는 건가?"

"아직은 괜찮을 거야. 다만 조금 조심해야겠지."

"짐작 가는 놈들은 있나?"

"없어. 모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의심 가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거야."

로레인은 설치해 놓은 저격소총을 회수하며 말했다.

"티르나에는 별의별 조직들이 많아. 그만큼 실력자들도 많지. 특제 오토마톤을 부리며 뒤에서 갱단을 조종하는 놈들이라면, 놀랍게도 두 손으로도 다 꼽지 못할 정도라고."

그 말을 들은 오시안은 이 도시가 새삼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었다.

하필 그런 녀석들을 첫 의뢰부터 마주하게 되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그런가. 아무튼 의뢰는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니 먼저 가 보도록 하겠다."

"어? 어어. 그래. 수고했어."

오시안의 말에 로레인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업계에서 너의 선배이고, 너의 그 이상한 말투는 대체 뭐냐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원래 이 업계는 강한 놈이 선배고 갑이었다.

"아 참 그리고."

로레인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고 말았다.

오시안은 그런 레인의 모습에 피식 웃더니 턱으로 그녀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허리춤의 그것. 뽑지 않는 판단은 칭찬해 주지."

오시안은 그 말을 남기고 골목길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혼자 남게 된 로레인은 오시안의 지적에 잠시 동안 할 말을 잃었다.

'아까 그걸 눈치챘다...?'

방금 전 오시안이 그녀의 뒤를 점했을 때.

로레인은 저격총을 손에서 놓고 곧바로 허리춤의 홀스터에 꽂힌 총을 뽑아들려 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뇌리를 관통하는 본능 때문이었다.

-여기서 총을 뽑으면 최소 팔 하나는 날아간다.

로레인은 그 순간 총에서 손을 떼고 곧바로 항복의사 표시를 보냈다.

그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저 시야각도에서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로레인은 위장 판초를 두르고 있었다.

당연히 오시안의 위치에서 로레인이 총을 뽑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시안이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의 감각이 로레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예리하다는 소리였다.

로레인은 자신의 직감을 믿길 천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표정이 굳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 씨. 이래서야 선배 체면이 서질 않는데.'

로레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막내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기뻐했는데, 이래서야 이쪽이 애송이 취급을 받게 생겼지 않은가.

*

갱단을 모두 정리한 오시안은 곧바로 바이올렛 폭스로 돌아왔다.

1층 로비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로난은 오시안을 보더니 기쁘게 맞이했다.

"놀랍군요. 설마 이렇게 빨리 끝내고 오실 줄이야."

"그런 것치고는 내가 올 걸 알고 있었군."

"하하. 그럴 리가요. 단지 우연히 1층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시안은 그 말에 코웃음 쳤다.

그런 헛소리를 대체 누가 믿냐는 투였다.

'진짠데.'

로난은 억울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을 말하는데도 믿어 주질 않는 걸까.

"그렇다면 그 아가씨도 그쪽이 보낸 것이 아니라 이건가?"

"로레인 씨를 만나셨군요. 본래 저는 말리려 했는데, 로레인 씨가 신입이 왔다는 소식에 멋대로 움직여 버렸지 뭡니까."

오시안은 자신을 어색하게 바라보던 로레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준비를 철저히 한 걸로 보아 누군가 강제로 시켜서 억지로 온 반응은 아니었다.

정말 선배로서 위기의 순간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건가.

문제는 도와주기는커녕 숨어서 지켜본 걸 들켜 버렸으니, 당사자 입장에선 보통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해 보니 여기에 나 말고도 다른 해결사들이 더 있겠군."

"예. 물론이죠.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나름 실력 있는 분들이 꽤 있답니다."

"로레인도 그중 하나인가?"

"성격이 좀 왈가닥에 제멋대로라서 그렇지, 뛰어난 저격수거든요. 전직 군부 출신이기도 했고요."

"그렇군."

"지금은 다들 바쁘셔서 보기 힘들지만, 언젠가 다른 분들도 뵙게 될 겁니다. 다들 좋은 분들이시니 친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로난은 가볍게 웃어 보인 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의뢰는 제대로 완수하신 것 같습니다만, 반응을 보시면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죠?"

"그런 것도 아나?"

"무언가 말씀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아, 제가 너무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로난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오시안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뒤, 자신이 갱단 아지트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로난은 곤혹스러운지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표정은 여전히 실눈이라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뒤에서 갱단을 조종하는 무리가 있었다라. 게다가 그 정도의 오토마톤을 사용할 정도라면, 보통 규모가 아닐 테죠."

"짐작 가는 놈들이라도 있나?"

혹시 로난이라면 뭘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오시안이 약간의 기대감을 품으며 물었다.

로난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모릅니다. 짐작 가는 곳이 한두 군데여야죠."

"그런가."

"뭔가 노골적으로 실망하신 기색이네요. 이 티르나에는 조직이 너무 많습니다. 저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죠."

다만, 하고 로난이 말을 이었다.

"추측이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추측이라고?"

"예. 상황을 보아하니 그 정체불명의 조직은 뒤에서 블랙스네이크 갱단을 지원해 주며 일을 벌였다고 했었죠. 자연스럽게 일부 기업들이 피해를 봤고요."

"그랬지."

오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난이 박수를 짝 하고 쳤다.

"사실 저도 어렴풋이 들은 소식인데, 저희들에게 의뢰를 넣은 기업들이 한 기업에게 인수 제안을 받았었다고 합니다. 저희에게 의뢰를 넣기 한 달 전에 말이죠."

"인수 제안이라고?"

"예. 까놓고 말해서 거대 기업이 작은 기업들을 삼켜서 세를 키우려는 거였죠. 당연히 거절했고요. 애초에 의뢰주가 함께 할 만한 비전이 없었거든요. 인수는 무산됐고, 그 이후에 사건이 터졌죠."

"그 말은 즉, 인수를 하려던 기업이 제안을 거절당한 것이 앙심을 품고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건가?"

"그런 셈이죠. 실제로 이런 일이 티르나에서는 흔하게 벌어지기도 한답니다. 도시의 온갖 기업들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거든요."

티르나는 발달한 도시지만, 그 내부는 야생의 정글을 연상케 할 정도로 치열했다.

대부분 기업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타인의 자리를 넘보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그렇다고 선 넘는 짓은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시정부의 철퇴를 맞게 될 테니까.

그러다 보니 기업 간의 싸움은, 더욱 은밀해지고 저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번처럼.

갱단을 뒤에서 조종해 상대 기업에 물질적인 피해를 입힌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개판이로군.'

설명을 들은 오시안은 생각보다 야만스럽게 굴러가는 도시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납득하고 말았다.

"기업은 때로는 자신들이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 비밀리에 범죄자들을 지원해 주죠. 혹은 자신들이 직접 키우기도 합니다."

로난은 티르나의 유명한 민간군사기업(PMC) 중 몇 개는 대기업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만든 곳이라고 설명을 부연했다.

"아마 오시안 씨가 마주했던 자들은, 해당 기업에서 몰래 부리는 자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명을 다 들은 오시안은 피식 웃었다.

"모른다더니 다 알고 있군."

"모르는 게 맞습니다. 이건 확신이 아닌, 그저 상황과 단서를 사용한 추측일 뿐이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로난도 반쯤 확신한 기색이었다.

"그렇다면 위험한 거 아닌가? 해당 기업과 척을 졌으니까."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쪽이 해결사인 오시안 씨에게 앙심을 품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요."

"나를 죽이려 했는데도?"

"하지만 오시안 씨가 이기셨죠.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방법을 택할 겁니다."

"다른 방법?"

로난이 깍지를 낀 두 손으로 턱을 괬다.

가늘게 뜬 실눈 안쪽에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바로 오시안 씨에게 의뢰를 넣는 거죠."

15화. 산업시대의 길 (2)

"허."

오시안은 로난이 한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나에게 의뢰를 넣는다고? 그 말은 즉,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의뢰로 날 제거할 생각이라는 건가?"

오시안의 추측을 로난은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부정했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고?"

"제가 말한 것은 정말 그쪽이 순수하게 오시안 씨의 능력을 높게 사서 의뢰를 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일을 방해했는데?"

"그걸로 실력을 증명하셨죠."

오시안은 그제야 로난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다.

"그렇군. 방해를 받았다 해도 상대가 정말 뛰어난 실력자라면...."

"예, 바로 손바닥을 뒤집듯이 태도를 달리하죠."

"기업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가?"

"기업은 오직 '이익'을 위해 굴러가는 집단입니다. 상대가 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해결사라면, 그들은 과거에 있던 일조차 깔끔하게 잊고 손을 잡으려 하죠."

그 말에 오시안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기업이라 하더라도, 감정이 섞인 행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 기업 같은 곳이 제일 보복 잘하는 곳 아닌가?'

오시안이 납득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자 로난이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공공적인 명예가 훼손당했다면, 기업은 보복에 나설 겁니다. 기업은 이미지를 중요시 여기니까요."

"공공적인, 명예 말이지."

곧바로 핵심을 짚는 오시안의 말에 로난은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안 씨가 이번에 겪은 것은 기업의 비공식적인 음지의 사건. 거기서 일을 방해받았다고 훼손될 명예도 없죠. 오히려 그걸 빌미로 오시안 씨를 건들려고 한다면, 그건 반대로 자신들이 뒤에서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고 역으로 실토하는 꼴이고요."

"그렇군. 이해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세상의 기업은 상당히 이성적으로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걸 넘어서 피가 흐르는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자신들과 반목했던 사람조차도, 새로운 전력을 기용할 기회가 생긴다면 손부터 내밀다니.

"기업이란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자들이었군."

머리로는 납득이 갔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계산적인 자들이었다.

보통은 감정적으로 분노하거나 어떻게든 보복하려고 들 텐데 말이다.

따지고 보면 오시안에게는 좋게 돌아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걸 보는 입장에서 말로 형용키 힘든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기업은 명예 같은 걸 따지지 않으니까요. 따르는 것은 오직 실리. 추구하는 것은 이윤. 그렇기에 그들은 티르나라는 험난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중견기업 이상으로 성장한 겁니다."

중견 기업이 그 정도란 말인가.

그렇다면 티르나에서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곳들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오히려 오시안 씨에게는 좋은 일이죠. 새로운 의뢰주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이 일이 잘 된다면 고정 의뢰주가 생길지도 모르고요."

"고정 의뢰주가 뭐지?"

"말 그대로 한 사람에게만 의뢰를 맡기는 단골 고객 같은 겁니다."

"별로 매혹적인 선택지 같지는 않은데."

"해결사들은 프리랜서죠. 일을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지만, 반대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은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해결사 업계는 순수한 실력지상주의다.

실력이 없다면 의뢰는 들어오지 않는다.

의뢰주들은 경력자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 초짜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같은 초짜라면, 그때는 유망주를 원한다.

몸값이 오르기 전이라는 부분에서, 경력자보다 더 나은 점도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의뢰주들은 실력자들을 지정해서 의뢰를 넣는다.

"업계에서는 그것을 '지정 의뢰'라고 부릅니다. 보통 명성을 쌓아서 별명이 있거나 하는 베테랑의 경우에 이런 지정 의뢰를 받을 자격이 생기죠."

그렇게 '지정 의뢰'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신뢰도를 쌓아 가면 그 다음 단계가 가능해진다.

기업, 티르나 시, 마탑, 협회 등.

거대한 조직에서 중요한 의뢰를 신청할 때 한 해결사만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넣는 의뢰를 '고정 의뢰'라고 부른다.

고정 의뢰는 이 티르나의 무수히 많은 해결사들 사이에서도 특 A급만 받을 수 있는 의뢰였다.

그리고 이 고정의뢰는 해결사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안정성'의 시초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의뢰를 넣은 조직에 소속되어 그쪽의 명함을 달고 활동할 수도 있다.

해결사의 일을 은퇴하고 기업의 외부 고문이 되는 셈이다.

돈도 많이 벌고 수입의 안정성도 확보된다.

이게 모든 해결사들이 바라는 가장 정석적인 루트였다.

오시안은 별로 좋게 내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삶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어느 한 곳에 소속되면 그만큼 벌이는 안정적이지만, 반대로 자유가 사라진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종속된 삶.

자유를 갈망하는 '방랑기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끔찍한 건 없었다.

"아무튼 오시안 씨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 잘 될 테니까요."

"딱히 걱정은 안 했다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로난은 방긋 웃어 보였다.

"언제 갑자기 기업이 오시안 씨에게 의뢰를 넣을지 기대되는군요."

"혹시 기업 말고도 다른 의심 가는 조직은 없나?"

"의심 가는 조직이요?"

"그냥 이 티르나에 어떤 자들이 있는지 간단하게 말해주면 좋다."

"그거야 어렵지 않죠."

로난은 도시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흉악한 지명수배자, 퇴역군인, 도시 내부에서 세력을 키우는 범죄조직, 사이비 종교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오시안은 그 설명을 들으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던 놈들은 거의 다 사라졌구나.'

게임 내에서는 부정한 흑마법사들, 외신을 섬기는 이단자, 타락한 오염괴물 등 적대집단은 많다 못해 넘쳤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며 놈들도 다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지금 와서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조직들이 대거로 등장했다.

오시안은 문득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원작 게임에 있던 조직들이나 보스 몬스터 같은 놈들은 어떻게 됐지?'

게임 속에는, 세월의 흐름에 저항이 가능한 존재들이 더러 있었다.

고대의 망령, 봉인된 악마, 저주받은 용, 영험한 짐승 등.

그런 놈들은 아직까지 살아있을 가능성이 꽤 높았다.

'아니면 중간에 퇴치됐을 수도 있고. 바뀐 세상에 아직 적응이 안 되니 잘 모르겠군.'

게임에서 비밀 던전이 있던 자리에 공장이 들어섰다.

던전은 산 안쪽에 있었는데, 산째로 밀어 버린 것이었다.

그 안에 있던 던전, 내부의 몬스터, 갖가지 보상 등.

그것들도 함께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음 의뢰까지 이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봐야겠어.'

우선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필수였다.

그렇게 된다면 오시안이 지니고 있는 지식도, 먼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금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

로난이 적어 준 숙소에 도착한 오시안은 입구에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39번 구 거주구의 공동주택(Tenement House).

앞으로 오시안이 살 곳이었다.

오시안의 방은 그중 3층이었다.

'겉보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쩡해 보이는데.'

공동주택은 본래 돈이 그렇게 많지 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주로 꽃집 주인, 점원, 노동자, 마부, 기술자들이 살았다.

심지어 그들 중 대다수는 같은 집을 사용했는데, 이유는 바로 높은 집세 때문.

다행히도 오시안은 로난이 편의를 봐준 덕분에 동거인 없이 혼자서 지낼 수 있었다.

이런 부분에선 중개인의 존재는 참 편했다. 어지간한 귀찮은 일들은 전부 처리해 주니까.

로난이 유독 능력 있는 사람인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나중에 돈을 더 모아서 단독주택으로 가면 된다고 했던가.'

오시안은 잠을 잘 곳만 있으면 상관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론 돈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돈은 많이 있으면 좋은 법이니까.

3층의 방은 밝은 갈색과 은은한 황동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부에는 생활에 필요한 가구들이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가죽소파에 바닥에 깔린 융단과 창가에 새겨진 커튼까지.

놀랍게도 지금 세상은 냉장고도 있었다.

'뭔가 내가 살던 원룸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

회사에 취직한 뒤 빠른 출퇴근을 위해 회사 근처의 원룸에 자리를 잡았었다.

수도권이라 그런지 원룸은 한없이 좁았는데 월세는 살인적이었다.

월세니 관리비니 다 내고 나면 월급은 얼마 남지도 않을 정도.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삶은 꿈도 꾸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면 주말까지 함께 게임으로 불태웠었다.

'무엇보다 여기는 그저 거쳐 가는 집이라는 거지.'

집만 보면 오히려 지금의 삶이 현생보다 더 좋아 보였다.

'분명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말이지.'

오시안은 막상 돌아가면 뭘 하게 될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딱히 없었다. 그냥 다시 예전처럼 회사에 출근하고 일을 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좁은 원룸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입장에서, 굳이 그런 단조롭고 답답한 삶으로 돌아가야 할까?

'모르겠다.'

오시안은 적당히 창가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가져온 책을 펼쳤다.

로난에게서 빌려온 물건이었는데 이 세상의 역사가 담긴 책이었다.

'인 게임에서도 이런 잡다한 아이템들의 설명을 자주 읽고는 했지.'

게임 속에서 가끔 주울 수 있는 책은 글귀가 2, 3페이지밖에 없었지만 여기는 책 전체를 다 볼 수 있었다.

이걸 보면 이 세상이 현실이라는 것이 매우 실감이 나고 만다.

오시안은 곧바로 책을 펼쳐 그것을 읽었다.

이 세상이 빙의를 한 특혜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언어여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원작의 엔딩 이후에 세월이 얼마나 흘렀으며, 또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큼지막한 사건은 확실히 뇌리에 담아둘 필요가 있었다.

책의 몇 페이지를 넘기던 오시안은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기계의 발명과 에테르 워터의 새로운 사용방법처의 발견?"

에테르 워터.

산업혁명이 벌어진 이후 작금의 세상에서 필수불가결한 신규 에너지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시안이 게임을 하던 시절에는 전혀 없던 것이기도 했다.

'이 세상으로 치면 석유쯤 되는 물건이로군.'

석유와 차이점을 꼽자면, 에테르 워터는 이름 그대로 '물'인 것이다.

일반적인 물과 다르게 고농도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

오시안은 에테르 워터에 대한 항목을 자세히 살폈다.

에테르 워터가 발견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한 모험가가 거대한 지하 동굴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흐르는 에테르 워터를 발견한 것이 시초였다.

에테르 워터는 이른바 마나가 녹아든 지하수다.

다른 이름으로는 신이 내린 물이라고도 불렸다.

책에는 흑백의 삽화가 함께 붙어 있었다.

갈라진 땅의 틈새로 솟아나는 에테르 워터를 온몸으로 맞는 광부들의 사진이었다.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발달 이후 사람들은 증기기관에 이 에테르 워터를 사용했다.

고농도의 에너지를 품은 에테르 워터는 증기기관과 맞물려 엄청난 효율을 뽑아냈고, 세상에 필수불가결한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게 신비와 마법의 세계는 기계와 산업의 시대에 접어들게 됐다.

'도시 곳곳에서 올라오는 새하얀 증기는 바로 그 에테르 워터의 수증기였구나.'

에테르 워터는 세상의 많은 것을 바꾸었다.

더 이상 마차는 말이 끌지 않았다.

대신 도로를 누비는 것은 새하얀 증기를 내뿜는 자동차였다.

커다란 상단의 행렬은 철도와 증기기관차가 대신했다.

하늘을 나는 비행선이 세계로 뻗어나가게 됐으며, 교통의 발달로 온 종족들이 통합되었다고 한다.

오시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세상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하지만 역시 세상의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바로 이거인가.'

책의 페이지를 넘긴 오시안은 해당 항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해당 페이지의 상단에는 커다란 블랙레터 글자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기사의 몰락]

16화. Fallen Knight

[기사의 몰락]

오시안에게 있어서 매우 자극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문구였다.

게임 속에서의 직업일 뿐이었지만 오시안은 이 글귀에서 나온 기사 본인이었다.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기사란 오시안의 정체성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기사가 게임의 엔딩 이후 지금의 세상이 오기까지의 긴 세월 사이에 몰락해 버렸다고 하니.

오시안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언짢음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기사가 사라질 줄이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화약이 생기고 총과 대포가 나타나면서 기사의 존재는 그 의의를 잃었으니까.

지구의 역사에서도 기사들은 그렇게 몰락하지 않았던가.

물론 게임의 기사는 현실의 기사와 많이 달랐다.

게임에서는 각 직업마다 [스킬]이 있기 때문이었다.

[스킬]을 지닌 기사라면 기본적으로 총기에 대한 방비가 가능하다.

적어도 오시안이 아는 '방랑기사'는 총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육체의 영향 때문에 기사라는 자부심에 심취해 있는 것도 있지만, 게임을 플레이 한 고인물로서 객관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거기도 했다.

실제로 작중 게임 속에서 마주치는 기사 NPC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무력을 자랑했다.

용병무리도 못 잡는 몬스터를 혼자서 때려잡는데 총이 대수일까.

'하지만 그건 기존의 기사들에 한한 이야기고. 이후 기사가 될 자들은 그러지 못했군.'

책에는 명확한 이유가 적혀 있었다.

기사가 사라진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후대에 기사가 될 자들이 없어서다.

당시의 기사들은 총의 발명 속에서도 실력을 발휘하며 살아남았겠지만.

새롭게 검을 휘두르는 후대의 기사들에겐 달랐던 것이다.

모든 강자가 처음부터 강한 것은 아니다.

기사들도 처음부터 그런 실력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들은 수련과 노력을 통해서 강해졌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의미하다면?

아무리 검을 열심히 휘둘러도 총이면 방아쇠 한번 당기고 끝나는 싸움이다.

하물며 총과 대포는 세월이 흐를수록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장전속도가 빨라지고 위력이 높아졌으며 사거리도 길어졌다.

그런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기사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이건 비단 기사만의 문제는 아니군. 본래라면 있어야 할 야만전사 직업도 마찬가지니까.'

오시안은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가 내부에 기재된 삽화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흑백의 삽화에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드밀리옹 사망사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드밀리옹 발자크.

기사이자 준 귀족인 그는 당대 최고의 재능을 지닌 기사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총기의 발달로 인해 기사의 존재는 역사의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드밀리옹의 존재는 기사의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혹자는 그가 몰락해가는 기사를 다시 살릴지도 모른다고 떠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말았다.

그를 살해한 것은 높은 경지의 기사도, 막대한 서클을 지닌 마법사도 아니었다.

산적.

그것도 총을 든 산적이었다.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 평가받았던 드밀리옹이 산적이 된 패잔병들을 추적하다 총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이거 참.'

책에 적힌 내용을 보니 오시안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당시 토벌의 선두에 나선 드밀리옹은 고작 산적 따위에게 라는 방심 때문에 투구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드밀리옹을 쏴 죽인 산적도 드밀리옹을 노리고 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두려움에 질려서 패닉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사격을 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 총탄이 드밀리옹의 미간을 꿰뚫은 것이다.

방심. 부주의. 우연.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최고의 기재로 꼽히던 기사가 사망한 것이다.

기사의 희망이 총에 맞아 죽다니.

이 사건은 당대 사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이 세상에는 기사를 넘어 검을 다루는 칼잡이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잠깐만. 그러면 내가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기사인가?'

사람들이 자신을 왜 이상한 놈 보듯이 봤는지 조금이지만 이해가 갔다.

전쟁터에서 남들이 다 총 쏘는데 혼자 칼 들고 싸우는 놈이 있으면, 당연히 시선을 잡아끌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짜 생각해 보니 미친놈 맞네.'

그래도 어쩌겠는가.

자신이 지금 그 기사로 살아가고 있는데.

다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이 기사의 육신은 같은 직종의 몰락에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꾸 좀이 쑤시고 몸이 근질거리는 것이, 검을 쥐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정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분노에 차서 발작하지 않는다는 점이려나.

오시안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밤이 찾아온 지금, 거리의 가스등이 주홍빛 빛을 뿌리고 있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검고 어두웠다.

게임 속에서도 밤낮은 존재했다.

그때는 어디를 가도 밤하늘은 눈부신 별빛으로 가득했다.

오시안은 아직도 북부 차가운 설원에서 오로라와 함께 빛나던 밤하늘의 풍경을 잊지 못했다.

그것이 고작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되어 모니터에 비춘 풍경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별빛은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증기와 공장의 매연, 탁해진 공기.

지상의 빛이 강해질수록 하늘은 거기에 실망하기라도 하듯 빛을 감추었다.

그 광경을 어딘가 우수에 차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시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법사 키울걸."

*

"도망친 흑마법사를 잡아오라는 의뢰라고?"

"예, 그렇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바이올렛 폭스에 출근한 내가 혹시 의뢰가 있냐고 묻자마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흑마법사라."

나는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었다.

흑마법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위험한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을 일컫는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이 원소를 바탕으로 한 여러 마법을 선보인다면.

흑마법사들은 흑마력을 이용해 시체를 다루거나 저주, 부패 등 부정적인 힘을 다룬다.

'플레이어가 선택 가능한 직업 중에서도 하나 있었지.'

흑마법사는 다른 직업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강력한 힘을 지닌 직업이었다.

아마 순수한 공격적인 측면에서는 전체 직업 중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

게다가 흑마법사는 스켈레톤을 비롯한 언데드 소환수를 부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엄청난 안정성을 보유하여 이 악랄한 게임의 난이도를 크게 낮추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만큼 매력적인 직업.

하지만 그럼에도 흑마법사를 택한 유저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흑마법사를 고를시, 모든 NPC들과 적대상태가 되기 때문이지.'

이 게임에는 NPC나 거대한 세력을 상대로도 일종의 평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평판을 최대치로 찍으면 물건을 살 때 할인이 된다거나 퀘스트의 보상이 늘어나는 등 여러 혜택이 있다.

그런데 흑마법사 직업을 선택하면 이 평판이 시작부터 최저치를 찍는다.

단순히 0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마이너스.

어디를 가도 무조건 선공을 당하며 척살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흑마법사 유저들은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숨어만 살아야 했지.'

그나마도 갈 수 있는 곳은 무법지대나 중립지대 같은 곳인데, 그곳에서도 끽하면 선공을 당하고는 했다.

몬스터와의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안정성을 부여받은 만큼, 흑마법사들은 다른 부분에서 온갖 패널티를 주렁주렁 다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흑마법사들이 남아있을 줄이야.'

그런데 의뢰의 내용이 상당히 의외였다.

생포? 사살도 아니고 생포라니.

'예전이었으면 흑마법사는 무조건적인 척살의 대상이었는데.'

지금 시대에서는 마냥 죽이지만은 않는다는 건가.

그건 의뢰 내용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기는 했다.

"기업에서 흑마법사를 잡으려 한다라."

로난이 전해 준 의뢰서의 내용을 보면 상황이 꽤 재미있게 흘러갔다.

의뢰주는 적당한 중소규모의 기업이었다.

블라섬 티어(blossom tear) 제약회사.

말 그대로 포션과 화장품, 약을 만드는 회사였다.

"왜 잡으라고 하는지는 알고 있나?"

"아마 같이 일을 해서일 겁니다."

"일을 한다고? 제약회사가 흑마법사랑?"

"예. 본래 제약회사는 연금술사들을 영입해서 포션을 제작하고는 하죠. 하지만 이 블라섬 티어에서 연금술사 한 분이 은퇴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군."

게임 내에서도 연금술사와 비슷한 직업은 있었다.

마법사가 스킬트리를 제작계열로 타면 연금술사와 동일한 성능을 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포션 제작 단가가 비싸고 전투력이 너무 낮아서 각광받지 못한 특성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많이 다른가 보다.

"연금술사들은 매우 고급 인력입니다. 단순한 포션 제작 말고도 귀부인들이 사용하는 고품질의 화장품과 향수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로난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러했다.

연금술사가 은퇴해서 제약회사에는 큰 구멍이 났다.

어떻게든 다른 연금술사를 데려와야 하는데 워낙 인기직종이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당장에 약품은 납부해야 하는 회사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 만다.

바로 흑마법사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보면 막 인체실험이나 그런 위험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연금술사를 대신하는 느낌으로 데려온 거 같은데.'

기업에게도 대접을 받는 흑마법사라니.

아무래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세상은 흑마법사에게도 썩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흑마법사로도 키워 볼 걸 그랬나.

"그래서 그 흑마법사는 왜 잡으라는 거지?"

"튀었다고 합니다."

"도망쳤다고?"

"예. 심지어 회사의 중요한 물건들도 몇 개를 함께 들고 도망친 것으로 보입니다. 계약위반과 더불어 절도죄까지 적용된 거죠."

나는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흑마법사들을 믿은 것이 잘못 아닌가?"

내가 흑마법사를 안 키워 봐서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게임에서 만난 흑마법사 NPC들은 죄다 사기꾼에 미친놈, 또라이였다.

뭐만 하면 인신공양에 악마소환은 기본 예시오, 히든 보스몬스터 포지션에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을 정도다.

"회사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겁니다. 해당 흑마법사는 나름 업계에서 신용도가 있었거든요. 흑마법사 노동조합 소속이었으니까요."

흑마법사 노동조합?

이젠 또 별의별 단어가 다 튀어나온다.

그냥 적당히 인정받으며 사는 줄 알았는데 아예 대놓고 양지에 나와서 활동하는 중이었구나.

"그래서 회사는 그 노동조합에는 따져 봤나?"

"예. 그쪽에서 추천해 줬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따졌다고 합니다. 문제는 노동조합 측에서도 자기들이 속았다며 억울하다고 말했다는 거죠."

"흐음."

회사 입장에서는 흑마법사 노동조합에 화를 내려 해도 상대가 저렇게 나오니 곤란하게 됐겠군.

평소라면 여기서 법정 공방까지 치고 들어가야 했지만.

당장에 포션을 공급하지 않으면 회사는 큰 손실을 보게 될 위기에 처해 있었을 거고.

"그래서 당장 급하니까 해결사에게 의뢰를 요청한 건가."

"예. 그런 셈입니다."

"하지만 놈을 생포해도 이미 구멍이 난 포션 공급은 어떻게 할 수 없지 않나."

"아마 블라섬 티어는 노동조합 측과 새로운 협상을 하려 들 겁니다."

"붙잡은 흑마법사를 인질로 삼겠다는 건가."

"그런 셈이죠. 위자료를 뜯어내고 그 돈으로 새로운 연금술사를 고용하려 할 겁니다."

"당장에 대타를 구할 수는 없지만, 구멍이 난 매출은 채울 수 있다는 건가. 어떻게든 붙잡아야 할 이유가 넘치는군."

참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게 됐다.

"그래서, 네가 보기엔 이 의뢰는 어떻게 생각하지?"

나의 질문에 로난은 언제나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의뢰, 반대입니다."

17화. 위험한 의뢰 (1)

이 의뢰를 반대한다.

의뢰를 받아서 해결사에게 전해주는 중개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로난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가 이런 말을 허투루 내뱉지 않을 사내라는 건 알았다.

그렇다면 필시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이 내 추측이었다.

"이유는 총 2가지입니다."

2개나 있었군.

로난은 손가락을 하나씩 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첫 번째. 수지타산이 맞지 않습니다."

"의뢰 보수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내가 업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렇게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여기 적힌 보수만 보자면 꽤나 훌륭한 편 아닌가?"

보수 금액 3천만.

거기에 별도로 회사차원에서 포션을 추가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게임 속에서 포션은 상당히 귀한 소모품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와서는 과거에 비해서 희귀성이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가치가 빛을 잃는 것은 아니다.

도망친 흑마법사 하나를 붙잡는 것으로 이 정도 금액이면, 솔직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보수 자체는 분명히 훌륭한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저희가 상대해야 할 것이 흑마법사라는 걸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일단 상대가 흑마법사인데, 그와 만나서 좋게 타일러서 제조법을 되찾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작정하고 회사의 제조법을 훔친 것이기에 모종의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 녀석에게 훔친 제조법을 내놓으라 한다고 순순히 돌려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흑마법사와 싸움을 상정해야 하는데, 보통 해결사들은 그런 걸 꺼려합니다."

"왜 꺼려하지?"

"그야 위험하니까요."

"아."

나는 로난이 왜 저런 말을 했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해결사들 입장에서 흑마법사는 상당히 꺼려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흑마법사들이 다루는 힘에 있었다.

흑마법사들은 상대방의 몸을 망가뜨리는 데 매우 특화된 존재다.

저주, 질병, 부패, 독.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마법조차 자칫 잘못하면 평생 후유증을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하다.

해결사는 결국 몸이 생명이다.

의뢰가 들어오면 단발성으로는 돈벌이는 되지만 그걸로 평생을 먹고살 수는 없었다.

정기적인 수익처가 생겨야 하는데 몸이 망가지면 들어오는 의뢰도 없다.

결국 남은 삶을 뒷골목 구정물 위에서 앉아 구걸이나 하면서 마감해야 하는 것이다.

'흑마법사들이 보통 까다로운 놈들이 아니긴 하지.'

게임 속에서 마주쳤던 흑마법사들은 하나같이 위험한 놈들이었다.

언데드 군단을 부려 도시 하나를 집어삼키려는 놈이라거나.

지하 동굴에서 악마강림 의식을 진행하여 지옥의 문을 열려고 한다거나.

늪지대의 폐허에서 늪 전체를 질병에 감염시켜 인근 왕국을 전복시키려는 놈도 있었다.

당연히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이 평범한 흑마법사일 리도 없었고, 싸움에 들어가면 도통 상대하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나름 이 게임의 고인물이라 자부했던 나도 꽤 많은 게임오버의 회색화면을 봐야 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로난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자칫 흑마법사의 저주에 당하기라도 했다가는 며칠은 앓아눕는 것은 고사하고 영구적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흑마법사는 여러 번 싸워온 경험자가 아니면 어지간하면 기피하는 대상입니다. 오시안 씨에게도 이른 상대고요."

"어, 음."

나는 네가 상상도 못 할 흑마법사들을 많이 잡았다고 말을 할까 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실제로 흑마법사들을 잡은 건 게임 속이었지 현실이 된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머지 하나는 뭐지?"

"흑마법사의 뒤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뒤라면, 그 도망친 흑마법사가 모종의 꿍꿍이를 지니고 있다 이건가."

"예. 단순히 우발적인 범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또 혹시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노동조합인가 뭔가를 의심하는 거로군."

로난은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합도 조합이지만 해결사들을 고기방패로 써먹으려는 회사의 행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입니다."

"고기방패인가."

"회사에도 부리는 인력은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해결사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폭력의 힘을 다루는 자들은 해결사의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경호원, 사설경비, 군인, 용병, 용역 깡패, 히트맨.

이 세상에 힘이 필요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그 수요는 끝이 없었다.

잘나가는 기업 또한 자신들의 사업장을 보호하기 위해 비싼 돈을 들여 사람들을 고용한다.

블라섬 티어 제약회사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들이 고용한 사설병력이 있음에도 해결사에게 의뢰를 요청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해결사가 흑마법사와 싸워서 힘이 다 빠지면 그때 끼어들어서 날름 헤쳐 먹겠다는 거로군."

"바로 그겁니다. 애초에 저들은 해결사들이 진심으로 도망친 흑마법사를 잡아온다고 기대조차 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조금 시간을 끌어서, 흑마법사의 힘을 빼게 만드는 것이 전부라 여기고 있죠."

이렇게 보면 해결사 업계도 참 복잡하구나 싶었다.

의뢰를 받으려 해도 의뢰주가 이렇게 통수를 칠 준비나 하고 있고 말이다.

이런 것에 보험이나 복지가 있을 리도 없었다.

"흑마법사와 싸우면 보통 후유증이 그렇게 심하게 남나?"

"거의 60퍼센트 이상 확률로 재기불능에 빠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생각보다 낮은데?"

"그마저도 어떻게든 약과 치료로 방비해서 그 정도입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90퍼센트가 넘어간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90퍼센트라."

심지어 저 확률은 싸워서 이길 경우를 상정한 것이다.

싸워서 패배하면 90퍼센트고 뭐고 없다.

그냥 죽는 것이다.

"해 볼 만하네."

"예?"

"해 볼 만하다고."

"방금 한 말씀이 이해가 안 가는데 조금 더 설명을 들어도 되겠습니까?"

"흑마법사 잡는 게 위험하다면서. 그리고 의뢰주는 해결사를 허수아비로 내세워서 상황을 지켜보다 끼어들려고 하고."

"그렇죠."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 보도록. 위험한 일 없이 흑마법사를 빠르게 사로잡으면 되는 거 아닌가? 놈들이 간 보다 끼어들 타이밍도 잡지 못하게 말이지."

물론 말로는 누가 못할까.

하지만 나는 묘하게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확신 어린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지닌 육체의 능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시안 씨. 만약에 그게 전부 다 가능하다고 가정합시다."

"가정이 아니라 가능하다."

"아, 예. 정정하겠습니다. 가능하다고 치죠."

"가능하다니까."

"그렇다 해도 오시안 씨가 이 의뢰를 맡을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크게 궁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로서는 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 말고도 다른 해결사들에게 의뢰가 갔나 보군."

"지명의뢰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죠."

나는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실 로난이 이렇게 말리는 것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이런 위험이 산재한 의뢰를 굳이 마다하지 않고 받을 이유는 없으니까.

지뢰밭이 있다는 걸 알면 옆으로 피해 가지 거길 가로질러 갈 생각은 안 한다.

그런데 로난은 지금 날 숫제 지뢰밭 위에서 탭댄스를 추는 놈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도 뭐, 안전하게 돈 벌면 좋기야 한데.'

원래의 나였다면 조금 더 신중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가 플레이 하던 캐릭터가 되었다.

정의감 넘치고 모험을 숭상하며 용감한 방랑기사 말이다.

그러다 보니 미세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이 방랑기사의 성격과 일부 동화되고 말았다.

전보다 조금 더 무모해졌고, 더 용감해졌다.

'그렇다 해도 의뢰를 수행하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의지야.'

나는 내가 하던 게임 속 세상에 떨어졌다.

그냥 게임 그대로도 아니고 무려 수백 년은 더 지난 미래다.

완전 다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앞으로 얼마나 살아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을 할 필요가 있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나는 지금 상황을 약간 DLC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DLC가 뭔가.

DownLoadable Contents의 약자로 패키지 게임에서는 신규 확장팩이나 추가 패치, 컨텐츠 같은 걸 말한다.

그런 나는 이 게임을 아주 오랫동안 붙잡고 즐겼다.

남들이 가 보지 못한 비경을 돌아다녔고 숨겨진 보스들도 많이 잡았다.

더는 이 게임에 추가 패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붙들며 99회차 엔딩까지 본 고인물이다.

그런 내게, 내가 알던 게임 속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게임을 사랑하는 한 명의 사람이자 고인물로서, 이보다 더 가슴 뛰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거 같았다.

돌아가 봤자 친구나 가족도 없고 일만 반복하는 인생을 보낼 것 아닌가.

그런 건 전혀 가슴이 뛰지 않는다.

하지만 이 세상은 달랐다.

앞으로 무엇이 있을지, 또 무슨 일이 도사리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게 뛴다.

그러니 남들에게 기피되는 위험한 의뢰마저도 나에게는 새로운 컨텐츠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말하니 꼭 미친놈 같군.'

나는 속으로 자조하듯 웃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이 세상이 현실임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데이터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다.

내가 보는 풍경은 UI가 존재하는 모니터 화면이 아닌 실존하는 풍경이고.

그러니 나는 거기에 맞춰서 열심히 살아 볼 생각이었다.

열심히 살려면? 우선 돈부터 벌어야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번 돈으로 뭘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그런 고민은 벌어둔 뒤에 해도 늦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나는 이 의뢰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남들이 기피하는 의뢰인 만큼, 이걸 성공적으로 끝낸다면 명성이 더 올라갈 테고, 더 나은 의뢰들이 들어올 테니까.

"...진심이시군요."

"농담으로 의뢰를 받을 생각은 없다."

"후우. 말린다고 해도 들으실 생각은 없어 보이고요."

"의뢰는 최대한 빨리 수행하면 되겠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로난은 그렇게 말하며 2층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혹시 몰라서 의뢰에 대한 정보를 다시금 교차검증을 할 생각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보여 준 행동만 봐도 유추가 가능하지만 로난 롤랑은 생각이 깊고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다.

'딱 실눈캐다운 수상함도 겸비하고 있지.'

적대적인 입장이면 퍽이나 수상하겠지만, 같은 팀이라면 묘하게 든든하다.

절대로 허투루 일을 진행하지 않으리라.

'아마 안정성을 빌미로 사람을 하나 붙여준다거나, 혹은 브로커의 권한으로 의뢰를 반려할 수도 있겠는데.'

그러면 조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흑마법사를 상대로 잘 싸울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딸랑.

그때 주점의 문에 달린 방울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평소보다 크게 울린 걸 보면 이번에 들어온 손님이 보통 활기찬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고개를 돌려 입구를 응시하자, 막 들어온 상대도 나를 발견하고는 눈이 마주쳤다.

"켁."

그리고는 순간이지만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상아색 머리를 지닌 미녀 총잡이, 로레인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잘됐군."

18화. 위험한 의뢰 (2)

집무실에서 심사숙고 끝에 마음을 결정한 로난은 주점의 1층으로 내려왔다.

오시안에게 사람 1명을 함께 데려가라는 말을 하려던 로난은 로레인을 보고는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오시안이 계단에서 내려온 로난을 맞이해 주었다.

"왔나?"

"로레인 씨가 오셨군요."

평소였다면 대낮부터 술을 달라고 보챘어야 할 로레인은 묘하게 얌전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로레인은 오시안의 눈치를 살피며 평소보다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로난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선배로서 분위기를 잡으려 했다가 되려 당해 버렸군요.'

망나니 같은 로레인은 전부터 후임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러댔다.

딱히 이 업계가 선후임을 나누지는 않음에도 그렇게 말하는 건, 그냥 편하게 부려 먹을 부하를 원한다는 소리였다.

다만 바이올렛 폭스는 해결사를 함부로 받지 않았다.

능력이 철저하게 검증된 자들을 로난이 엄선해서 영입을 제안하기 때문에, 여타 중개소에 비해서 소속 해결사가 극히 적었다.

아마 로레인도 그걸 알기에 더욱 애타게 후임을 원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목이 마르다 못해 반쯤 포기하려던 찰나에 들어온 신입.

로레인으로서는 선배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 주며 위엄을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새롭게 들어온 신입은 그녀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러두었는데 말이죠.'

이 모든 것은 결국 로레인의 업보라 생각하며, 로난은 오시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본래라면 가이드 한 명을 옆에 붙이는 조건으로 의뢰를 받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그래."

"썩 훌륭한 가이드를 구하셨으니, 저로서는 더는 막을 수 없겠군요."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로레인이 도끼눈을 뜨며 로난을 노려보았다.

'야 이 실눈 자식아. 누구 맘대로 가이드야? 죽을래?'

로레인은 오시안이 보이지 않게 입을 벙긋거렸지만 로난은 오시안에게 몸을 돌려 버렸다.

로레인은 그 모습에 욱 했지만 대놓고 항의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니 옆에 있는 오시안이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바로 가실 겁니까?"

"일처리는 빠르면 좋으니까."

*

티르나의 43번구는 거대한 공업지대다.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터덜거리며 배회했다. 다크서클이 가득한 얼굴에는 생기라곤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는 커다란 트럭이 새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돌아다녔다.

트럭기사는 히스테릭하게 경적을 울려댔다. 경적 소리에 도로 위 쥐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시안은 인도에 서서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봤다.

"신기해?"

옆에서 반강제적으로 따라 나오게 된 로레인이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시안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노동자가 있고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건 그가 살던 세계에서도 많이 본 광경이었다.

대신 공장 굴뚝마다 나오는 매연에 관심이 갔다.

어떤 공장은 흑색 매연을, 어떤 공장은 백색 매연을 뿜어내고 있었다.

두 매연이 서로 뒤엉키며 하늘의 구름과 섞이니 대낮인데도 주위는 우중충했다.

"검은 건 목탄과 석탄의 흔적이고, 하얀 건 에테르 워터를 태우면서 나오는 백연이야."

오시안의 시선이 어디를 향한 건지 알아차린 로레인이 묻지도 않은 걸 설명했다.

"에테르 워터는 공업에서 필수불가결한 자원이거든. 일반 물을 끓이는 것보다 세 자릿수가 넘는 에너지 효율을 보이는데 누가 마다하겠어."

"하지만 검은 연기가 훨씬 더 많아 보이는데."

"모두가 같은 자원을 사용할 수 없는 거지."

에테르 워터는 그냥 증발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가공과정과 조정이 필요한 원료였다.

그러다 보니 에테르 워터를 사용할 수 있는 기업과 그러지 못한 기업이 나뉘게 됐고, 그것이 곧 기업의 등급을 규정하는 척도가 되었다.

에테르 워터를 다루지 못하는 곳은 질 낮은 석탄과 목탄으로 연료를 때웠다.

그런 곳의 굴뚝에서 흘러나오는 매연은 새까말 수밖에 없었다.

검은 연기는 곧 모자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티르나에서 사람들이 공장의 등급을 매기는 방법은 간단해. 매연의 색깔을 보는 거야."

매연의 색깔이 하얗다면 에테르 워터를 사용하는 것이니 화이트 기업.

반대로 매연의 색깔이 까맣다면 블랙 기업.

그런 관점에서 43번구 공업지대는 화이트기업보다 블랙기업이 더 많이 즐비한 구역이라 볼 수 있었다.

"솔직히 여기에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아. 조금만 머물러도 폐가 썩어 버릴 거 같거든."

"딱히 별거 아니다만."

오시안 또한 43번구의 공기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감각이 예민했기에 코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악취와 공기 중에 포함된 독성을 맡아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육체가 손상되는 일은 없었다.

이보다 훨씬 더 농축된 독성을 마신다 하더라도 엄청난 용력을 머금은 육신은 그 독마저 분해했을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모르는 로레인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하여간. 뮤턴트들은 이래서 안 돼. 평범한 사람의 기분을 전혀 헤아릴 줄 모른다니까?"

"뮤턴트?"

로레인의 투덜거림에 오시안이 반응했다.

"전부터 그러던데, 왜 나를 뮤턴트라 부르는 거지?"

오시안은 그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뮤턴트는 에테르 워터가 발견된 이후 생겨난 돌연변이라 했었지.'

뮤턴트는 게임 내에서는 없던 존재였다.

인류가 에테르 워터를 발견한 이후 그것이 여러 마법산업에 사용이 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러던 도중 세상에는 특이한 체질을 지닌 자들이 태어났다.

마력이 없이도 신체능력이 뛰어나거나 불을 뿜는다거나 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

과학의 발전과 환경오염으로 인해 인간의 유전자가 변질을 일으켜 탄생하게 된 신인류.

세상은 그들을 뮤턴트라 불렀다.

오시안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뮤턴트 취급을 한다는 것이 영 껄끄러웠던 것이다.

오시안의 질문에 로레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황망하게 떴다.

"뮤턴트를 뮤턴트라 부르지 그러면 뭐라고 불러?"

"나는 뮤턴트가 아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평범한 인간이야."

"평범한 인간이 칼 한 자루로 총을 든 놈들을 그렇게 썰어 제낀다고? 지나가던 개도 안 웃을 농담인데."

"농담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면 그 말도 안 되는 신체능력은 대체 뭔데?"

로레인의 물음에 오시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거야 게임을 플레이 할 때 만렙을 찍으면서 스탯을 최대치까지 올렸으니까.

차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시안이 대답하지 않자 로레인이 그것 보라며 코웃음을 쳤다.

세상 어디에 평범한 인간이 칼로 총알을 베? 뮤턴트 아니면 안 되는데.

'물론 아주 옛날에 검의 극의에 달한 기사들이 있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 적 일이야? 엄청 옛날이잖아.'

로레인은 오시안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했다.

애초에 정상적인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남들 다 총 쏘고 다닐 때 혼자만 칼을 휘두르는데 정상인이 할 발상이 아니었다.

"의뢰내용서는 다 확인했지? 꼼꼼히 읽어야 해."

"전부 다 읽었다."

로레인은 은근하게 자신이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어필하려 들었다.

"뭔데. 한번 설명해 봐. 어디 틀리기만 해 봐."

"틀리면 어쩔 생각이지?"

"...어? 그, 그야 선배로서 친절하게 정정해 줄 생각이지."

이쪽이 조금 세게 나오자 곧바로 움츠러드는 로레인.

오시안으로서는 그 행동이 뭔가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자존심 세우기 같아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도망친 흑마법사의 이름은 칼 잭슨."

오시안이 읽었던 서류에는 칼 잭슨의 흑백사진도 찍혀 있었다.

양 뺨이 움푹 패여 있고 눈이 퀭한 비쩍 마른 40대 중년인의 모습.

그 모습을 본 오시안의 감상은 이랬다.

'얼굴이 딱 흑마법사 하게 생겼군.'

본래 직업에 따른 편견은 없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이상하게 흑마법사 녀석들은 관상만 봐도 딱 흑마법을 하게 생겼었다.

"다루는 마법의 주 계열은 질병, 부 계열로는 기초 네크로맨시와 저주마법이 있었지."

질병과 저주.

확실히 해결사들이 꺼려할 만한 조합이었다.

일단 이런 계열은 싸움 자체가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다.

싸움 이후에도 저주와 질병의 잔재가 육신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현재 칼 잭슨은 제조법을 들고 도주했는데, 43번구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 사실상 확신이라 봐야겠지."

"뭐야. 다 알고 있네?"

로레인의 목소리에는 안도와 아쉬움이 반쯤 섞여 있었다.

"뭐, 그 정도면 내가 딱히 조언해 줄 것도 없네. 그러면 빨리 움직이자고. 이러는 사이에도 녀석이 언제 도망칠지 모르니까."

"위치는 알고 있는 건가?"

"뻔하잖아? 도주한 흑마법사가 43번구에 숨었다면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지. 골목 깊은 곳에서 운영하는 여관 같은 곳에서 묵고 있을 거야. 거긴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곳이라, 구린 일을 한 녀석들이 숨기에 적합하거든."

"그렇군."

술술 나오는 대답에 오시안은 왜 로난이 로레인을 데려가라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도시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오시안에게는 이런 세밀한 부분의 지식이 부족했으니까.

"다만 대놓고 골목길로 들어가면 좋지 않아."

"사역마 때문이로군. 놈은 네크로맨시를 배웠으니, 골목길마다 죽은 쥐의 시체를 이용해 감시망을 깔아뒀을 테니까."

"...왜 이렇게 잘 알아? 흑마법사 잡는 거 처음 아니었어?"

오시안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래. 너도 다 숨기는 과거가 있다 이거지? 알았어."

로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허공 높이 짓쳐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끝에 갈고리가 달린 총이 쥐여 있었다.

투웅!

갈고리가 쏘아지더니 공장의 옥상난간에 걸렸다.

로레인의 몸이 그대로 쭈욱 쏘아져 옥상 위로 향했다.

갈고리 와이어를 회수한 로레인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으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봐 후배! 올라오고 싶으면 이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는 것도...!"

로레인이 그렇게 외치려는 순간 오시안의 신형이 그녀의 얼굴 코앞까지 다가왔다.

꺄악! 로레인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오시안은 로레인을 뛰어넘어 옥상에 착지했다.

로레인은 너무 놀라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난간 아래와 오시안을 번갈아 살폈다.

"뭐, 뭐야?! 어떻게 한 건데?"

"그냥 뛰었다."

"...."

로레인은 오시안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숙련된 해결사인 그녀도 그래플링 건으로 가까스로 올라오는 높이를 그냥 뛰어서 올라오다니?

게다가 정작 오시안의 모습을 보면 숨이 차거나 지친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래 놓고 뭐? 자기는 뮤턴트가 아니야?'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로레인은 문득 로난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사 컨셉을 잡고 거기에 심취해 있으니까 알아서 받아주라 했던가. 하여간 해결사 놈들은 정상이 없어요.'

로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선배로서 멋진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해도 오시안은 기상천외한 능력을 선보이며 그녀의 기대감을 무참히 짓밟았다.

'진짜 나 완전 길 안내원 역할로만 온 거 같잖아?'

로레인은 괜히 욱한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길을 아니까 잘 따라오라고."

이렇게 된 이상 길 안내라도 확실히 해 줄 생각이었다.

로레인이 앞장서서 빠르게 움직이자 오시안이 그 뒤를 쫓았다.

굴뚝이 달린 건물의 옥상을 연달아 뛰어넘으며 움직이던 로레인은, 이윽고 허름한 부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아마 이곳 어딘가에 도망친 흑마법사가 숨어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하던 찰나 로레인은 켁 하고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오시안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 확 끌었기 때문이다.

"콜록! 야 임마! 갑자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쉿."

오시안은 검지를 세워 로레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진중한 모습에 로레인은 화를 억눌렀다. 해결사로서의 본능이 무언가를 감지한 것이었다.

"저기."

오시안이 조용히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로레인도 그제야 하늘을 나는 희끄무레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새?'

그것은 뼈로 이루어진 새였다.

녀석은 주위를 배회하며 건물 옥상을 잔잔히 살피고 있었다.

"아니 미친. 여기도 사역마로 감시하고 있었다고?"

조금만 반응이 늦었다면 들켰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동시에 로레인은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오시안을 돌아봤다.

'이 녀석은 그걸 또 어떻게 안 거야?'

오시안은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움직이지."

"뭐? 지금 바로?"

"하늘을 나는 사역마라 해도 시야의 사각은 존재한다. 엄폐물을 끼고 잘 움직이면 들키지 않고 접근할 수 있어."

"아니,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정 어려우면 나만 잘 따라와라. 내가 길을 알려줄 테니까."

명백한 짐짝 취급이었다.

'내가, 내가 선배인데.'

로레인은 울상이 되어 오시안의 뒤를 쫓았다.

19화. Scotland Yard (1)

오시안은 굴뚝이 가득한 건물의 옥상 위를 걸었다.

분명 행동은 평범하게 걷는 것인데, 그의 신형은 마치 유령처럼 옥상 위를 미끄러졌다.

그 뒤를 쫓는 로레인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아니 어떻게 한 번도 안 걸리는 거지?'

공중을 감시하는 흑마법사의 사역마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총 5마리의 새들이 주기적으로 주변을 배회하며 혹시 모를 침입자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뭔가 일정한 패턴이라도 있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새들의 움직임은 딱히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해결사 업계에서 물을 많이 먹은 로레인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내하겠다는 오시안은 거침이 없었다.

그 무모한 행동은 놀랍다 못해 박수 받아 마땅할 정도였다.

이윽고 감시망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자, 로레인은 정말로 성공했다는 사실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뒤를 돌아봤다.

"흑마법사의 새는 시야가 좁지."

그때 앞장서서 걷던 오시안이 입을 열었다.

로레인은 순간 자신의 속마음을 오시안이 꿰뚫어본 게 아닐까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걸 어떻게든 무마하려고 높은 고도로 올라가면 반대로 물체가 작게 보여 적을 찾기 힘들어진다. 자연스럽게 일정 고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돼."

너무 작게 보일 정도로 멀어서도 안 되고, 좁은 시야각이 걸릴 정도로 가까워서도 안 됐다.

"항상 일정 고도를 유지한 채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놈이 볼 수 있는 지형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 수 있다. 그걸 알면 사각을 파고드는 건 손쉬운 일이지."

오시안은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들키지 않고 이 감시망을 지나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로레인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그 시야각이라든지 사각지대는 어떻게 아는데?'

이런 것은 안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무수한 실전을 통해 배운 자만이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지.

'그렇다는 것은, 이 녀석은 이런 게 몸에 익을 정도로 흑마법사와 많이 싸워 봤다는 거야?'

로레인이 숫제 괴물을 보는 시선으로 오시안의 등을 응시했다.

정작 오시안은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흑마법사들이 뼈로 이루어진 짐승의 사역마를 쓰는 거야 워낙 흔한 일이지.'

이 게임의 초반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힘은 약하다.

속도도 느리고 공격력은 약하면서, 맞으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죽는다.

튼튼하고 안정감이 있는 방랑기사 캐릭터도 마찬가지.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간혹 비밀스러운 의식을 진행하는 흑마법사들을 토벌하게 되는데, 그때부터가 정말 지옥 같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숲에서는 정말 온갖 짐승들이 흑마법사의 감시자였지. 그런 놈들의 시선을 피해 움직이는 건 미친 짓이었고.'

흑마법사의 아지트로 쳐들어가야 할 때가 되면 게임의 장르가 바뀌고 만다.

판타지 RPG에서 극한의 잠입 스릴러 게임으로 말이다.

'조금만 잘못 걸리면 곧바로 사방에서 언데드가 들이닥쳤지.'

그러면 거의 확정적으로 플레이어의 죽음을 의미하는 회색 화면을 봐야 했다.

사역마를 제거하면서 움직이는 방법?

사역마를 건드리는 순간 흑마법사는 준비한 언데드 군단을 보낸다.

그러면 그 물량에 집어삼켜져 다시 게임 오버.

'차라리 도적이라면 은신 잠입기술 때문에 들어가기라도 쉽지. 둔중한 기사 캐릭터는 그마저도 안 되고.'

칼과 방패로 정면승부를 하는 캐릭터로 짐승의 눈을 피해 잠입을 해야 한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정말 많이도 죽었었다.

그런 짓을 세 자릿수가 넘게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흑마법사가 부리는 사역마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이나, 사역마의 행동 패턴, 흑마법사의 대응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도 내가 알던 흑마법사에 비해서 감시가 많이 허술한데.'

오시안은 공중을 돌아다니는 새가 5마리밖에 없다는 것에 의아해했다.

로레인은 그마저도 정말 많다고 생각했지만, 오시안이 그런 속내마저 알 수는 없었다.

오시안의 입장에선 정말 적은 것이 맞았으니까.

'보통 흑마법사들은 저런 새를 거의 50마리 이상 부리지 않나?'

그냥 새만 부리지 않는다.

독수리나 매의 뼈로 이루어진 사역마는 상대하는 입장에선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일반 새나 독수리나 눈알이 없어서 보는 범위는 비슷하지만, 나는 속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한 경우에는 무슨 벌레까지 다루던데.'

풀벌레 우는 수풀 근처에 갔다가 언데드들이 몰려왔을 때는 정말 키보드를 부수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 분노를 그대로 응축해서 흑마법사와 마주했을 때 풀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박봉의 월급에서 고정 지출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이거 조심해야겠는데.'

네크로맨시를 익혔는데 저 정도라면 안도할 수 없다.

반대로 다른 분야에서 엄청나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으니까.

'질병이라 했으니, 어지간하면 광역 공격을 사용하겠지. 시간을 주면 이쪽이 불리하겠어.'

어느덧 두 사람은 목표로 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도망친 흑마법사 칼 잭슨의 간이 은신처.

로레인은 허리춤에서 자그마한 황동 망원경을 꺼냈다.

한 건물을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있네. 칼 잭슨. 확인했어."

"그래. 나도 보이는군."

"...보인다고?"

로레인은 오시안과 칼 잭슨의 은신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저격수인 그녀도 어딜 가서도 눈 나쁘다는 소리는 안 듣는데, 오시안과 비교하면 스스로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

"...몇 층인데?"

"4층의 2번째 창문.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군."

혹시나 싶어서 물었더니 정확한 대답이 돌아왔다.

"...뭔가 너랑 있으면 내가 되게 초라하게 느껴지는데."

"단련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단련은 개뿔이.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녀석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데."

"제일 쉬운 방법은 기습을 가하는 거지."

"기습?"

"그렇다. 다만 저 더러운 흑마법사 놈이 집 주위에 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니, 조금 신중하게 움직여야겠지만 말이야."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다 퍼뜩 고개를 어느 한쪽으로 돌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불청객이 왔군."

"뭐?"

로레인이 무슨 소리냐며 오시안이 본 곳을 돌아봤지만, 연기를 내뿜는 건물 옥상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흑마법사 칼 잭슨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주변의 경계를 철저히 했다.

'제길.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어.'

블라섬 티어 제약회사를 뒤통수 치고 제조법을 들고 도망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추격이 너무 빨리 붙어서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43번 구역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최소 티르나 밖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추격이 불가능한 50번대 구역까지는 가야 했는데.

'지금도 밖에서 추격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고 있겠지.'

지금이야 이렇게 숨어 있지만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이리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직까지 추격자로 보이는 자들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적어도 정찰을 보낸 사역마의 시선으로는 그러했다.

칼 잭슨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가 직후 자신의 처지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런 제기랄. 그놈의 도박으로 빚을 지지만 않았더라도!'

칼 잭슨은 비록 등급은 낮을지언정 흑마법사 노동조합에 들어가 나름 신뢰가 있는 흑마법사라는 이름표를 받았다.

적당히 전공을 살려서 지냈더라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업무에 관해서는 그는 분명히 신뢰도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사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칼은 사설 도박장에서 홧김에 배팅했다가 돈을 꼴아 버렸고, 그로 인해 그는 지금 업무로는 지불하기 힘든 거액의 빚을 지게 됐다.

뒷골목 양아치들이 자다가도 벌벌 떠는 흑마법사도 빚을 지게 되면 그때는 수금하러 온 양아치에게 덜덜 떨어야 했다.

자본이 지배하는 티르나는 그런 곳이었다.

돈이 목숨보다 귀하고, 그 무게가 생명보다 무거운 곳.

칼은 자신의 처지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 자신에게 넙죽 고개를 숙이던 양아치 놈들이, 도박에서 빚을 진 순간 하이에나처럼 눈을 번들거리는 그 모습이란.

'씨발 새끼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다 이거지?'

우선 빚을 갚아야 했다.

블라섬 티어라는 제약회사에 고용되어서 나름 준수한 월급이 나온다고 하지만, 그 월급으로는 평생 가도 빚을 갚기는 요원한 일.

그래서 칼 잭슨은 일을 저질렀다.

기업의 비밀을 빼돌린 것이다.

'이 제조법만 다른 제약회사에 가져다 팔면 빚을 충당할 수 있어.'

어디 충당뿐일까. 오히려 돈이 남을 것이다.

포션 제조법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기업 간에 서로 빼돌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그 이후에는 그 돈을 들고 티르나를 벗어나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면 끝.

그러나 이러한 칼의 계획은 초장부터 어그러지고 말았다.

사전에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추적이 빨리 붙어서 먼 곳까지 도주하지 못한 것이다.

'블라섬 티어는 상관없어. 누가 오더라도 상대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다른 쪽이야.'

그가 뒤통수를 친 것은 블라섬 티어 제약회사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 노동조합도 있었다.

그들은 칼을 믿고서 신뢰보증을 서 주었는데 칼이 그것을 배신한 것이다.

아마 조합의 입장에서도 적잖은 손해를 입었을 것이다.

조합에 붙잡히게 된다면 그때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같은 흑마법사였기에 칼은 그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내가 대체 왜 그래서는.'

도망치기 전까지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는데 현실은 그러지 않았다.

칼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한들 늦는 법이었다.

'후우. 일단 눈이라도 좀 붙일까.'

도망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아직까지 사역마에게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추적자들은 이 근처까진 붙지 않은 모양.

조금은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칼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그때였다.

한쪽 구석에 있는 뼈로 된 쥐의 머리가 퍼석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

밀려오던 수마가 확 달아났다.

칼은 쭈그리고 앉았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씨...."

혹시 몰라서 골목길 사이마다 간이로 설치해 두었던 트랩이 발동했다.

그리고 그것은.

추격자가 이 근방까지 붙었다는 말을 의미했다.

*

"어, 어어? 저 자식 도망치는데?"

로레인은 황급히 움직이는 칼 잭슨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오시안도 보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챘나 보군."

"설마 들켰나? 이 근방에는 녀석의 사역마가 없을 텐데...."

"우리가 아니야. 다른 놈들이 걸린 거지."

"다른 놈들? 설마 블라섬 티어 놈들인가? 이 자식들 우리한테 의뢰 넣어놓고 뒤에서 뒤통수를 치려 들어?"

"차라리 잘 됐다."

오시안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공방에 틀어박힌 간악한 흑마법사가 스스로 바깥에 나왔으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까."

제삼자가 끼어들었다고 해서 바뀌는 일은 없다.

뭐든 먼저 잡은 놈이 임자니까.

"움직인다."

오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옥상 지붕을 박차고 내달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로레인은 순간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 같이 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레인이 오시안의 뒤를 따랐다.

20화. Scotland Yard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