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F] 환생했더니 대공의 셋째 아들 1-248 @연재중
1화
-죽지 않는 용병은 삼류다. 그들이 비싼 돈을 받는 이유는 귀족과 영민 대신 죽기 위해서니까.
귀족들은 흔히 용병을 대상으로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당연하지만 이따위 말이 나올 때마다 용병들은 울컥했다.
위험할 때는 땅도 떼어주고 작위도 줄 것처럼 굴다가 전쟁만 끝나면 저따위로 말하다니.
자연스레 용병들은 경력이 오래될수록 귀족을 불신하고 혐오하는 성향이 강해졌다.
귀족에게 여러 번 고용되었다는 건 그만큼 못 볼 꼴도 많이 봤다는 소리였기에.
용병단장인 제이크도 그중 하나였다.
'진짜 핑계가 끝도 없이 나왔지.'
적의 피해가 너무 적다, 우두머리를 못 죽였으니 이긴 게 아니다, 국지전에서 이겼을 뿐 전황은 그대로다.
온갖 창의적인 핑계는 때로 용병들만이 아니라 고용주의 가신들마저 떨떠름하게 만들곤 했다.
게다가 핑계는 그토록 창의적이었으면서 결론은 모두 '약속했던 돈은 못 주겠다.'라는 것도 신기한 점이었다.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핑계를 들은 제이크도 이런 헛소리는 처음이었다.
"죽어주게."
"...."
제이크는 눈앞의 기사가 한 말에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건가?
다른 귀족이라면 모를까 이런 개소리를 할 인간이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피곤해서 귀가 잘...."
"잘못 들은 게 아니네. 죽어주게."
미친 새끼.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참으며 제이크가 기사를 노려봤다.
최근 연전연패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안 그래도 돈 받은 만큼은 했겠다, 슬슬 빠질 생각이었는데 대뜸 죽어달라니.
"경, 제 직업이 뭔지 아십니까?"
"용병이지."
"잘 아시는군요. 경께서 순간 저를 기사로 착각한 줄 알았습니다."
"차라리 그대가 기사였다면 좋았을 걸세."
그랬다면 차라리 부담 없이 부탁할 수 있었을 테니까.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피로와 자괴감이 두 눈에 가득했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앞뒤 없이 잘라 말한 모양이야. 오해의 소지가 있었어."
"오해?"
"실은 방어전을 부탁할 생각이었네. 다만 상황이 절망적이다 보니 말이 헛나왔군."
한마디로 양심에 찔릴 만큼 위험한 임무라 무심코 감상적이게 되었다 이건가.
하여간 사람 놀라게 하기는.
"괜찮습니다. 그러실 만도 하지요."
제이크는 속내를 숨긴 채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건 상대는 고용주의 오른팔.
괜히 짜증을 드러냈다가 잔금 지급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했다.
무엇보다 듣기에는 안 좋아도 저 말투 자체가 용병에 대한 배려.
지금까지 상식선에서 임무를 내린 만큼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정도는 지키겠지.
"임무는 간단하네. 내일 반역자들이 총공격을 걸어올 걸세. 주군께서 피신하시는 동안 나와 같이 적들을 막아주게."
"...예?"
"가능하면 오래, 내가 죽기 전까지는 지켜주게. 잔금은 그대가 퇴각할 때 이걸로 지급하도록 하지."
기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턱 내려놓았다.
성인 남성의 주먹만큼 큰 붉은 보석.
광채로 봤을 때 남부 끝자락의 광산에서만 채광되는 '왕자의 눈물'이 확실했다.
이 정도 크기라면 팔았을 때 용병단의 3년 치 고용비는 훌쩍 넘기고도 남겠지.
하지만 제이크는 보석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얼굴을 구겼다.
"경, 혹시 어제 뭘 잘못 드셨습니까?"
"난 멀쩡하네."
"원래 미친놈은 자기가 미쳤다고 안 합니다."
"말조심하게. 선을 넘으면 아무리 자네라도...."
"선을 넘은 건 당신이지. 댁들 무덤에 우리까지 끌어들여서 같이 묻히려고? 내가 멍청이로 보여?"
듣기엔 좋다.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 주군을 피신시키고 마지막까지 남아 희생하는 기사들의 미담.
그 와중 같이 싸웠던 용병들은 적당한 시점까지만 싸우다 수고했다며 대가를 주고 보낸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라면 껌뻑 속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이크는 충분히 닳고 닳은 용병이었다.
"댁이 총사령관이잖아. 그런데 댁이 죽을 때나 보내겠다고? 전멸하기 직전에나? 지랄하고 있네! 적이 우릴 순순히 보내줄 것 같아?"
"그대들은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니 적들도 무리하게 쫓지는 않을...."
"정확히는 놈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낸 용병이지! 적이 보기엔 뼛가루를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은!"
용병은 돈을 못 받게 된 시점에서 더 싸울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고용주가 죽은 순간 용병은 자연스레 도망가고 상대도 무리해서 쫓지 않는다.
괜히 추격했다가 죽자사자 저항하면 쓸데없이 손해만 보게 되는 셈이니.
문제는 그것도 서로 간의 감정이 크게 상하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일이란 거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놈들을 휘저어놨는지 알기나 해? 일개 병졸조차 내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데 잘도 놓아주겠다!"
아무리 돈으로 고용된 용병이라도 상대의 눈이 돌아가면 아무 소용 없는 법.
하물며 제이크는 적의 사령부를 괴멸 직전까지 몰아붙인 적도 있다.
분명 용병이고 나발이고 죽자사자 쫓아와서 죽여버릴 게 뻔했다.
당장 도망가도 추격대를 보낼 판인데 전장 한가운데서 빤히 보이는 위치에서 대기하라니.
"우릴 제물로 삼을 생각이군."
"...."
"댁들 주군이 도망칠 시간을 버는데 강제로 참가시킬 생각이라 이건가? 그것참 대단하군. 너무나 명예로워서 허리가 절로 굽혀지네!"
통렬한 비아냥에 기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나마 부끄러움은 아는 모양인지 얼굴에 수치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여기서 제이크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도 분명했다.
"...따르지 않겠다면 지휘권을 받아가겠네. 미안하지만 끝까지 함께해줘야겠어."
"내가 싫다면 어쩔 건데?"
"이걸 써야겠지."
철컥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이 살짝 뽑혀 나왔다.
여차하면 베어버리고 용병들을 대신 지휘하겠다는 소리였다.
헛웃음이 나오는 짓거리에 제이크가 혀를 찼다.
부하들은 제이크의 말이 아니면 따르지도 않을 테니 쓸데없는 짓이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불명예를 감수하기로 한 상황.
설명해봤자 듣지도 않을 테고, 만에 하나 믿더라도 이판사판으로 강행하리라.
"더러운 자식."
"미안하네."
"미안할 것 없어. 오히려 죄책감을 덜어줬으니 고맙지."
"뭐?"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댁의 목이라도 가져가야겠어. 어차피 도망치기에도 늦었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순간 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미안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경멸감만이 가득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어떻게 봤는데?"
"용병치고는 도의를 다하는 자. 어지간한 기사보다 기사다운 자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대도 한낱 용병이었어."
"얼씨구. 댁이 할 말인가?"
"아니. 하지만 내 마음도 편해졌군. 같은 쓰레기라면 굳이 거리낄 것 없으니 말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이 기사는 제이크가 살기 위해 이런 짓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이크는 그런 기사를 비웃듯 입가를 비틀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살아 돌아갈 생각 없어."
"뭣이?"
"지금 댁의 제안을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난 죽어. 문제는 우리 애들까지 죽는다는 거지. 그렇다면 최소한 우리 애들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어?"
"적의 추격은...."
"댁의 목과 내 목을 함께 바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결국 원한을 사는 건 병졸이 아니라 대장이니까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소리였는지 기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잠시 두 눈가를 파들거리던 기사는 이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하. 부하를 살리기 위해 죽겠다는 건가?"
"내가 꿈을 보여주겠다고 데려온 놈들이니까. 실패한 책임도 내가 져야지. 당연한 소리 아닌가?"
"당연한 소리... 그래, 당연한 소리지."
스르릉
말을 마친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이 완전히 뽑혀 나왔다.
물이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자세.
한 박자 늦게 제이크도 마주 검을 뽑았으나 입맛이 썼다.
'틈이 없네, 염병할. 대체 나보다 몇 수 위인 거야?'
상대와의 실력 차를 메꾸는 잔재주 몇 개는 알고 있지만, 눈앞의 기사에겐 도저히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릴 실력은 아니라지만 그것도 용병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
여러 군웅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눈앞의 기사에 비해선 한참 부족하다.
어쩌면 적에게 스스로 목을 바치기 전에 여기서 죽을지도 모를 상황.
뭐, 그것도 나쁜 결말은 아니겠지.
적어도 부하 놈들은 제이크가 죽은 걸 알자마자 일제히 전장에서 이탈할 테니까.
"차라리 그대가 내 주군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긴장한 제이크와 달리 기사의 목소리는 처연했다.
대대손손 섬기던 가신을 버림패로 도망친 주군과 눈앞의 제이크가 전혀 다른 존재로 보였다.
고귀한 혈통의 주군과 천박한 출신의 용병단장.
하지만 흐르는 피를 제외한다면 누가 진정한 왕에 어울리는 존재일까.
새삼 기사는 다시 터져 나오려는 한탄을 억누르며 말했다.
"미안하네."
"엿이나 드셔."
푸확
대답과 동시에 제이크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목에서 피가 울컥거렸다.
대체 언제 뽑고 언제 휘두른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약간의 이물감과 함께 검이 반대편으로 가 있어서 베어졌다는 걸 짐작했을 뿐.
예상은 했지만 허무해질 정도의 빠른 결판에 속이 쓰렸다.
'옘병.'
이겼음에도 자신의 승리를 처음부터 한 치도 의심하지 않은 기사는 여전히 담담했다.
긴장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여간 재능이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제이크의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
****
"...련님! 도련님!"
제이크는 문득 머리가 어지러운 걸 느끼며 깨어났다.
누군가가 귀에 대고 뭐라 소리치며 그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뭐지? 내가 살아있는 건가?'
그럴 리가.
분명 검이 목을 가르고 지나가는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전설 속의 성자가 와서 기적을 일으켜도 못 살릴 상황.
그렇다면 이건 꿈인가?
"도련님! 아이고, 도련님!"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감각이 생생했다.
귀에서 울리는 소리는 골을 울리고 몸이 흔들릴 때마다 구토가 올라올 지경이었으니.
그만 좀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기도 전에 상대가 손을 올렸다.
"제발 일어나십쇼! 이렇게 가시면 저도 죽는단 말입니다!"
짝, 짝, 짝
미친놈아, 그만 때려!
손바닥은 작은데 무슨 놈의 힘인지 한번 뺨을 갈길 때마다 골통이 흔들렸다.
양쪽 뺨이 새빨갛게 물들 지경이 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제이크가 소리쳤다.
"그만... 그만하라고...!"
"도,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제이크는 희끄무레한 시야 속에서 눈앞의 형체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목소리도 낮고 몸집도 작은 소년이었다.
얼얼한 통증에 제이크가 소년에게 항의하려던 순간, 소년이 왈칵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무사하셨군요, 도련님! 이대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뭐? 도련님?
뜬금없는 소리에 제이크가 두 눈을 껌뻑였다.
도련님이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용병 대우는 아무리 좋아봤자 준기사 취급이 고작일 터.
그런데 자신을 무슨 귀족 가문의 자제처럼 부르다니.
"아니, 남의 뺨을 신나게 갈겨놓고 무슨 헛소리를...!"
퉁퉁 부은 뺨을 만지작거리던 제이크의 몸이 멈칫했다.
얼굴을 만지는 손바닥이 너무도 부드러웠다.
분명 이전까지만 해도 굳은살로 가득했던 손이다.
원래 손이라면 이런 감촉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건만.
무슨 일인가 싶어 제이크가 자신의 손바닥을 확인했을 때였다.
"...이건 또 뭐야?"
2화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했던 손바닥은 어디에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검은커녕 펜도 안 잡아봤을 법한 부드러운 손.
심지어 햇볕까지 잘 안 받은 건지 새하얗다 못해 푸른 핏줄이 보일 지경이었다.
손바닥만이 아니다.
골격에서부터 근육까지 뭐 하나 옛날과 맞는 게 없었다.
혼수상태로 길어지면 근육도 빠진다지만 그 정도로 생길 변화가 아니었다.
이래서야 마치 머리만 떼어서 다른 몸에 붙인 것 같지 않은가.
'설마.'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제이크가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작은 손거울이 옆에 있었기에 냉큼 집어 얼굴을 비추어봤다.
"...!"
거울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던 용병 대신 금발의 소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머리만 빼고 다 바뀐 게 아니라 머리통마저 바뀌어버리다니!
'그런데 어째 얼굴이 낯이 익은데.'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정신을 못 차리는 제이크를 보며 옆에 있던 소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크는 호흡을 가다듬고 소년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이시지?"
"예?"
"내 아버지 말이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지?"
실은 이 몸뚱이 주인이 누구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렇게 물었다간 어물쩍 넘어갈 수준이 아니게 된다.
막 일어나서 내뱉은 헛소리 정도로 넘어갈 만큼 묻고 정체를 추론해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뜬금없는 소리긴 했는지 소년은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했다.
"그야... 왕국의 기둥이신 지그문트 대공 전하시죠?"
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소년의 대답에 제이크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제야 이 몸뚱이의 주인이 누군지 기억났다.
'루시안 발데크.'
황제의 최측근인 발데크 대공가의 삼공자.
그리고 15년 전 제이크가 성문 경비병으로 있을 때 열여섯 나이로 죽은 소년이었다.
****
"나 참."
상황을 정리한 제이크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죽어서 15년 전으로 돌아간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다른 사람의 몸이라니.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생을 바꿀 기회란 생각도 들었다.
다름 아닌 귀족의 혈통, 그것도 대공의 혈통 아닌가.
그놈의 혈통을 극복하지 못해 밑바닥만 전전하던 제이크로서는 대박이 따로 없었다.
'무엇보다 얼굴도 마음에 들고.'
제이크는 다시 거울에 바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좀 깡마르긴 했으나 여러 미남미녀 중에서도 수위에 들만한 외모.
동네 처녀들이라면 옆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으로 쓰러질 거다.
예전엔 하루라도 잘생겨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이루어질 줄이야.
"크크크."
"도련님? 괜찮으신 거 맞지요?"
"흠흠, 괜찮다."
하인 소년, 한스의 말에 제이크가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어차피 이전 몸에 미련은 없다.
혈통은 둘째치고 이 당시엔 유일하게 남아있던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상황.
피붙이 하나 없는데 굳이 옛날 몸으로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용병 제이크가 아닌 삼공자 루시안으로 살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니 자신의 몸뚱이가 뭘 하고 있는지는 나중에 알아봐야겠지만.
"일단 산책 좀 하자. 오래 누워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니."
"예에? 조금 더 누워계시는 게...."
"아니, 누워봤자 나아질 것 같지 않아. 정원에서 맑은 공기라도 마셔야지."
지금은 일단 주변을 파악하는 게 먼저겠지.
제이크, 아니 루시안은 한스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채비를 마치고 정원으로 가자 새삼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여기도 많이 지나다녔지. 경호를 위해서 온 거라 정원의 풍경을 즐길 틈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발데크 가문에서 꽤 오래 근무했다.
고향을 떠난 후 경비병으로 시작하여 10년을 보냈으니.
상사의 횡령죄를 덮어쓰고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더 출세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래 봤자 평민인 이상 경비대장 혹은 백인장이 고작이었겠지만.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러냐?"
"왜 이러냐니요?"
"전부 날 쳐다보고 있잖아."
루시안이 지나갈 때마다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졌다.
저 멀리 일하던 하인도, 경비병도, 날 따라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중 일부는 일하다 말고 멈춰서서 노골적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암만 봐도 잘생긴 얼굴 한번 구경하자고 온 느낌은 아닌데.
"그야... 도련님이 밖으로 나온 게 1년 만이니까요?"
"뭐? 1년?"
"정확히 세면 1년 하고도 두 달입니다."
"내가 그 시간 동안 외출을 안 했다고?"
"아뇨, 아예 방 밖으로 안 나오셨죠."
"...!"
이런 미친.
원래 몸주인이 외부 활동을 잘 안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깥출입도 아니고 방 밖으로 1년 넘게 안 나왔다고?
아무리 생활에 불편함이 없다지만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숨이 심하게 차더라니.'
처음엔 깡마른 몸 때문에 중병이라도 앓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운동 부족이었나.
그토록 엉망으로 생활하고도 살이 안 붙은 게 다행이었다.
마른 몸을 찌우는 것보다 찐 몸을 빼는 게 훨씬 힘드니까.
'아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군.'
무려 1년 넘게 방 밖으로 안 나오던 인간이다.
달리 말하자면 누군가가 관찰할 시간이 거의 없던 거나 마찬가지.
성격이 변하거나 생활양식이 달라져도 크게 눈치채진 못하겠지.
예외는 가족 정도인데.
'그러고 보니 가족은 또 왜 안 찾아? 1년 넘게 방 밖으로 안 나오는 자식이라면 끌어내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현 대공인 지그문트의 성격은 루시안도 잘 알고 있었다.
일체의 타협을 안 하는 외골수이자 황제의 충신.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그만큼 의무와 규율에도 철저했다.
무인 기질도 꽤 있는 편이라 우는소리를 하는 병사에겐 가차 없이 굴기도 했고.
그런데 제 자식이 방에 콕 처박혀 있는 꼴을 잠자코 지켜봤다?
'이상하군.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이것저것 고민하다 보니 슬슬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졌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이놈의 약해빠진 몸은 벌써 지친 모양이다.
루시안이 한숨을 쉬며 도로 방에 돌아가려던 차였다.
"삼공자."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수염이 희끗희끗한 노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집사장 에드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몸이 움찔했다.
어린 시절 적대 가문의 볼모로 왔으나 시간이 지나 현 대공의 심복이 된 인물.
듣자 하니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 입을 열 수 있을 만큼 입지도 엄청나다고 들었다.
실제로 전생에서는 대공의 자식들이 그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도 목격한 적이 있으니.
"오랜만에 뵙는군요. 강녕하셨습니까?"
"...예, 조금 몸이 무겁긴 합니다만 건강합니다."
가벼운 인사말에 대답하며 한스를 힐끗거렸다.
집사장이 온 일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냐면서.
정작 한스는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고 바짝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래서야 정보 없이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밖에.
"그나저나 무슨 일이십니까? 집사장께서 최근 저를 찾으신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가문에 사고라도 생긴 겁니까?"
"음."
실질적으로 대공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에 말투가 절로 정중해졌다.
에드윈은 담담한 루시안의 태도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빠르게 표정을 되돌린 에드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대공가는 평안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무슨 일이기에...."
"대공 전하께서 삼공자를 부르십니다."
"...!"
****
루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눈앞의 남자를 힐끔거렸다.
현 대공가의 가주인 지그문트 발데크.
슬슬 수염이 하얗게 변하고 있음에도 노쇠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지간한 맹수 정도는 가볍게 물어 죽일 듯한 사자 같은 분위기.
어찌나 기백이 사나운지 코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저릿할 지경이었다.
날카롭게 루시안을 바라보던 대공은 이내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못난 놈."
불쾌함이 가득 담긴 음성에 눈이 끔뻑거렸다.
아니, 뜬금없이 왜?
"시위는 이제 끝났느냐?"
"예?"
"수면제를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입에 처넣었다고 들었다. 용케도 복용량은 잘 맞췄구나."
이게 무슨 소리지.
알 수가 없어 눈을 굴리고 있자 대공의 어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1년이 넘도록 방에 처박혀 있다가 끝내 내놓은 계책이 겨우 그것이더냐? 네가 나를 부르게 만들었으니 이기긴 했구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크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언제까지 어미가 죽은 걸 변명 삼아 어리광을 피울 참인지 지켜볼 생각이었다만 이젠 됐다. 시간이 지나면 정신 좀 차릴까 했는데 내가 멍청했구나."
루시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대공에겐 아들이 넷이고 전부 어머니가 달랐지. 내가 근무할 때는 삼공자의 어머니만 일찍 병사한 상태였고.'
이 몸의 주인이던 삼공자도 일찍 죽었기에 외가의 가족력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삼공자는 어머니가 죽고 나서 대공의 관심이 멀어지자 일종의 시위를 벌인 거였다.
방구석에 콕 처박혀서 안 나온 것도 나 좀 신경 써달라는 절규였겠지.
1년이 지나도록 대공의 답이 없자 수면제까지 복용하며 난리를 친 것이고.
'물론 시위니까 죽을 생각은 없었겠지만, 이런 몸뚱이로 치사량 직전까지 수면제를 복용했다간 확실하게 죽는다.'
삼공자의 계산이 어긋난 건 자신의 몸을 제대로 파악 못 했다는 것.
치사량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건강할 때의 상태가 기준이다.
그런데 1년 동안 방에 처박혀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 몸으로 복용한다?
스스로 저승 가는 편도행 마차에 탄 꼴이 아닌가.
전생에서는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지만 이런 뒷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제기랄.'
상황을 알게 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래 몸 주인이 생각 이상으로 한심한 놈이었다.
지그문트 대공은 황제의 최측근이자 대가문의 가주.
승냥이와 보이지 않는 칼날이 득실거리는 제국 정계의 거물이다.
당연히 평판에 영향을 주는 자식들을 보는 시선도 냉정할 수밖에 없다.
사자 새끼만 골라 키우고 나머지는 잘라버려도 이상하지 않건만 이런 어리광이나 부리다니.
"그래, 네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마음껏 해보아라. 이제 더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니."
대공의 차가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뜻 들으면 앞으로도 계속 방치하겠다는 말 같지만 어째 어조가 심상치 않았다.
최악의 경우 이대로 잘라버릴 생각일지도 모른다.
못난 자식을 변방에 보내거나 수도원에 출가시키는 건 귀족 사이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일 아닌가.
자칫하면 이전 몸주인의 헛짓거리로 기껏 얻은 기회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었다.
'별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은 없다.
위험 부담을 지더라도 정면돌파하는 수밖에.
루시안은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는 대공을 마주 보며 말했다.
3화
"이리도 화를 내시는 걸 보니 실로 제가 어리석었음을 알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충고, 결코 잊지 않도록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그것뿐이냐?"
"예. 그러니 이제 기뻐하셔도 됩니다."
"뭐?"
뜬금없는 루시안의 말에 대공이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기뻐하라니?
"아버지가 자식의 어리석은 행위에 화를 내고 질책함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아버지께서 분노 한번 하시지 않기에 서운한 마음을 품었습니다만 제 착각이었군요."
"...!"
"그러니 이제 기뻐하실 차례가 아닙니까? 죽다 살아난 자식입니다. 분노하셨으니 더는 참지 않으시고 제 손이라도 잡아주셔도 됩니다. 가족이니 눈물 한번 보이시는 게 대수겠습니까."
당돌한 말에 대공이 얼빠진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집사장 에드윈도 입을 쩍 벌렸다.
정중히 돌려 말했으나 속뜻은 명백했다.
한참 방치한 주제에 간신히 살아돌아온 아들에게 하는 게 질책뿐이냐는 소리.
동시에 질책밖에 할 게 없다면 아비 자격이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제발 통해라.'
루시안은 최대한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감히 하늘 같은 가주이자 대공의 눈앞에서 면박을 줬다.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눈을 까뒤집고 수도원에 감금시켜도 이상하지 않을 소리.
하지만 루시안이 아는 그 지그문트 대공이라면 다르게 반응하리라.
항상 눈치나 보는 쥐새끼보단 물어뜯는 들개가 더 낫다고 하던 사람이니까.
"허허."
2시간 같은 20초의 침묵 후.
지그문트 대공의 입에서 나온 건 고함이 아니라 헛웃음이었다.
기가 막힌 듯했지만, 그 이상으로 예상외의 사태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먹혔다!'
도박이 성공했다는 생각에 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공은 루시안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중얼거렸다.
"네가 나한테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사람이란 바뀌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저승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고도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방구석에 처박히는 일도 그만둘 생각이더냐?"
"1년이 넘게 방에만 있었더니 지긋지긋합니다. 이젠 때려치울 때도 되었지요. 그보다 지금은...."
루시안은 말을 멈추고 소매를 걷어 보였다.
살이 다 빠진 깡마른 팔뚝은 병자의 팔이나 마찬가지였다.
"우선 살부터 찌울 생각입니다. 꼴이 이래서야 검 하나 못 휘두를 테니 말입니다."
"검? 네가 검이라고?"
"살면서 검을 휘두를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몸조차 건사하지 못하는 놈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사내라면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어야지요."
"크흠."
지그문트 대공은 헛기침과 함께 몸을 뒤로 눕혔다.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살짝 찌푸린 얼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 같았지만 루시안은 알 수 있었다.
저건 웃음을 억지로 참을 때 나오는 표정이란 것을.
"말은 번드르르 하구나."
"진심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진심인지 허세인지는 나중에 밝혀지겠지. 가보거라."
"예."
루시안은 깊게 고개를 숙인 후 집무실에서 나왔다.
몇 발자국 멀어지자 참고 있던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럭저럭 잘 넘겼군.'
반쯤 내버린 자식의 한심한 이미지를 바꾸는 데는 성공했다.
오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으니 내치려는 생각은 접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조치.
장기간 성과가 없다면 결국 말만 번드르르한 놈이라 단정하리라.
그 전에 대공 앞에 그럴싸한 성과를 내보여야 할 터.
'뭐, 어려울 거 없지.'
죽고 죽이는 난세 속에서 용병질로 먹고 살았다.
귀족 도련님으로 성취 좀 내보이는 거야 일도 아니지.
루시안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감춘 채 방으로 향했다.
이 새로운 삶에서 어떤 식으로 화려한 출사표를 던질까 고민하면서.
****
"허 참."
지그문트 대공은 말없이 연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방금 벌어진 일임에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모자랐던 놈이 그리 당당하게 나올 줄이야.
"봤나?"
"무엇을 말입니까?"
"저놈이 내 눈 똑바로 보면서 말하는 거."
"예.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더군요."
1년 전만 해도 눈동자를 헤엄치듯 이리저리 굴리던 놈이다.
눈은 못 마주치면서 볼멘소리로 툴툴거리던 게 어찌 그리 한심하던지.
심지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반박은커녕 다친 들개처럼 낑낑거렸다.
용기는 없고 불만만 많으면서 제 주장조차 제대로 못 하던 녀석.
그런 놈이 자기 목을 내놓고 당당히 포부를 밝힐 줄이야.
"어미한테 물려받은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삼공자도 전하의 아들 아닙니까. 그 피가 어디 가진 않겠지요."
"속단하지 말게. 말만 그럴싸하게 했을 뿐일지도 몰라."
"예전엔 그조차 못하던 분이셨죠. 심경의 변화가 온 건 확실합니다."
대공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반쯤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그래도 발데크의 씨앗.
아비로서 자식의 성장이 싫을 리가 있겠는가.
한때 가장 아꼈던 여인의 자식이니만큼 더욱더.
"그래도 완전히 믿기는 이르지. 정말 말뿐일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
"시험해보실 생각입니까?"
"시험이랄 건 없고 용돈이나 넉넉하게 주도록. 방에 처박히기 전에 줬던 것만큼."
루시안은 대공에게 밉보인 이후 가문의 지원이 거의 끊긴 상태였다.
식비나 하인들의 고용비를 제외하면 개인이 쓸 수 있는 돈은 전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 끊긴 지원을 재개하란 소리였다.
언뜻 보면 포상인 것 같지만 에드윈이 보기엔 시험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험이었다.
바깥 활동을 이제 막 하려는 사람에게 돈을 제대로 쓰라고 하는 셈이니.
여기서 제정신을 못 차리고 막 쓰거나 애먼 데 낭비했다가는 마지막 남은 기대마저 사라지리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삼공자께 가는 자금 중 일부가 다른 데로 새는 중입니다."
지그문트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명령한 적 없는 일이다.
즉, 누군가 가문의 돈을 사사로이 횡령하고 있다는 소리.
"어느 놈이 감히?"
"이공자께서 손을 쓰신 것 같습니다."
"뭐? 둘째가?"
"그분께는 푼돈조차 안 되는 액수니 아마 삼공자에 대한 견제가 아닐지."
"견제는 무슨. 심술이겠지. 하여간 그놈의 열등감하고는."
짧게 혀를 찬 대공이 자신의 차남을 떠올렸다.
능력은 나쁘지 않건만 옛날부터 속이 좁은 게 단점인 녀석.
외가 문제 때문에 셋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건 알고 있었다만 이리도 집요할 줄이야.
"조치를 취할까요?"
"그냥 놔둬."
지그문트 대공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작은 일 정도는 셋째가 알아서 해야지. 그마저도 못한다면 깊이가 빤한 녀석이고."
"힘들지 않겠습니까? 세력은커녕 심복 하나 없으신데."
"그야 자업자득이니 누구 탓을 하겠나? 그동안 정신 못 차린 대가지."
주변 관리만 제대로 했다면 이빨도 안 들어갔을 장난질이다.
모든 게 1년 동안 바깥 일에 손을 놓아버린 결과니 처리도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나.
"마침 잘 됐군. 셋째가 어찌 해결할지 보자고."
이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다시 와서 징징거린다면 기대는 말끔히 접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공의 예상을 뛰어넘어 아주 깔끔히 처리한다면.
'후계 경쟁에 다시 참여시켜주지 못할 것도 없지.'
생각을 마친 지그문트 대공은 옆에 밀어뒀던 서류로 다시 손을 내밀었다.
겨우 셋째 아들 일로 계속 신경을 쓰기엔 그의 업무가 너무도 많았기에.
****
루시안은 호기롭게 돌아간 이후 꼬박 하루를 누워있어야 했다.
오랜만에 움직여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대공의 기백까지 받아낸 탓이었다.
'진짜 질릴 정도로 약한 몸이군.'
체력이 이따위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나.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긴 했다만 체력 증진이 시급했다.
다행히 준비에 필요한 보상은 다음 날 바로 들어왔다.
"도, 도련님... 어제 뭘 하신 겁니까? 마법이라도 부리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마법 쓸 수 있었으면 이렇게 끙끙대고 있겠냐?"
"전하께서 1년 동안 끊으셨던 지원을 하루 만에 재개하셨으니 하는 소리죠."
뭔 생뚱맞은 소린가 했더니 대공이 다시 용돈을 내주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기껏해야 귀족 도련님이 용돈 다시 받게 된 게 뭐가 대수라고.
루시안은 코웃음을 쳤으나 액수나 확인해볼 생각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곧 적혀져 있는 숫자를 보고 웃음기를 지웠다.
"이게 삼공자, 아니 내 용돈이라고?"
"예."
"1년 치를 한꺼번에 준 건가?"
"그럴 리가요. 딱 한 달치인데."
"원래 이렇게 많이 받았어?"
"많기는요? 다른 도련님들께서는 훨씬 더 많이 받으실 텐데요."
"이런 미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명색이 대공, 그것도 황제의 오른팔이라는 발데크 가문이니 부유할 거라 생각은 했다.
그렇지만 영지 예산도 아니고 일개 셋째 아들 용돈을 이만큼 준다고?
이 정도면 어지간한 거대 용병단을 보름은 고용하고도 남을 돈인데.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지만 새삼 서글퍼지는군.'
이게 진짜 대귀족이라는 건가.
루시안이 씁쓰레함을 느끼면서도 막대한 액수에 만족감을 느낄 때였다.
'잠깐만, 이 액수면 체력 증진 수준이 아니라 체질도 뜯어고칠 수 있는 거 아닌가?'
갑자기 두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선천적인 체질은 근본적으로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진정 재능있는 자는 육체마저 타고나는 법.
천 년 전에 나온 말이지만 지금까지 쭉 정설로 여겨질 만큼 체질이란 무인에게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이 설은 지금으로부터 6년 후 완전히 뒤집힌다.
'연금술 길드에서 넥타르를 개발했으니까.'
신들의 음료라는 넥타르.
거창한 이름 때문에 처음에는 시건방진 작명이라며 수많은 항의가 들어왔다지.
그러나 효과를 알게 된 뒤로는 항의고 트집이고 죄다 쏙 들어갔다.
넥타르의 효능은 이름에 걸맞을 만큼 엄청났기에.
천하의 둔재도 어느 정도는 재능있는 몸으로 만들어주는 비약.
이런 약을 넥타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 하겠는가.
넥타르의 발명으로 쇠퇴해가던 연금술사 길드는 단숨에 제국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넥타르 예약 순번을 무기 삼아 황제조차 길드의 눈치를 봤을 정도.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딱 3년 동안의 짧은 봄이었지만.'
연금술사 길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세가 시작된 후 오만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힘 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길드가 파괴되고, 연금술사는 살해되었으며, 넥타르 제조 과정 상당수가 유실되었다.
남은 건 군데군데 중요한 내용이 빠진 극히 일부의 제조법이 전부.
대다수는 불완전한 넥타르 제조법을 쓰레기라며 내버렸다.
약이란 잘못 조합하는 순간 독으로 바뀌는 물건.
불완전한 제조법에 의존해서 약을 만들려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멍청한 짓을 실제로 했다가 죽는 놈도, 불완전하게나마 넥타르를 재현한 운 좋은 놈도 있었다.
그리고 전생의 루시안이 속한 쪽은 후자였다.
"한스, 나갈 채비 해라."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으셨는데 어디 가시게요?"
"약초상."
"예? 약초상!?"
한스는 뜨악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아니, 귀족 도련님이 약초상은 대체 왜?
4화
루시안은 곧바로 약초상으로 향했다.
가능하면 마차에 타고 싶었으나 이목을 끌 수는 없었기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걸어 가야만 했다.
한스는 옆에서 루시안을 부축하면서도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대체 약초상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약초상에 약초 사러 가지 뭘 하러 가겠냐?"
"그러니까 도련님께서 왜 굳이 약초를 사시냔 말입니다. 그냥 연금술사 길드에서 약으로 사시면 되잖아요?"
약초상과 연금술사 길드는 약초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사회적인 위상은 천지 차이다.
약초를 뜯어와 분류해 파는 게 고작인 약초상은 기껏해야 평민이나 하급 기사가 이용하는 시설.
품질관리부터 제대로 된 약의 제조까지 담당하는 연금술사 길드에 비하면 구멍가게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연금술사가 아니라 일개 도제한테 한 사람 몫의 약초꾼이 쩔쩔맬 정도.
당연히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라면 약초상이 아닌 연금술사 길드로 간다.
"뭘 보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는데 약초상은 그냥 약초 파는 구멍가게입니다. 연금술사 길드보다 나은 거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좋은 건 다 길드에 납품하고 중등품 이하만 판다니까요."
"아니까 그만 좀 해라. 내가 약초상에 전설의 영초라도 있기를 바라고 가는 줄 아냐?"
"아니었어요?"
"당연히 아니지. 연금술사 길드에서 취급 안 하는 물건이라 약초상으로 가는 거다."
"세상에 그런 약초가 어디 있습니까? 좋은 건 다 쓸어갈 텐데."
"약으로 제조할 수 없는 약초니까. 그냥 생으로 씹어먹는 게 가장 효험이 좋거든."
정확히는 이때까지 제조법이 발견되지 않은 약초라 하는 게 맞겠지.
앞으로 몇 년 후에 제대로 된 제조법이 발견되니까.
'월광초.'
달빛이 잘 드는 호숫가 근처에서 자라며 체력 증진에 상당한 효과가 있는 약초.
약효 자체는 뛰어난 편이라 가격도 상당하나 제조법이 없어 연금술사에겐 애물단지다.
영지를 가진 대귀족에게는 더 비싸고 좋은 약이 널려 있어 마찬가지로 인기가 없고.
기껏해야 일부 하급 귀족이나 영민들이 어쩌다 손에 넣으면 횡재했다고 좋아할 물건에 불과하다.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이라면 약초상 한 곳 정도는 탈탈 털어올 수 있다. 1년 후엔 이 돈으로도 어림없을 만큼 가격이 폭등하지만.'
1년 후, 연금술사 길드는 시중의 모든 월광초를 모조리 사들인다.
그 이유가 넥타르 개발 때문이란 게 알려지는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다시 생각해보면 의도적으로 넥타르의 희소성을 올리려는 이유도 있었으리라.
그러니 연금술사 길드가 움직이기 전에 가능한 많은 월광초를 사들여야 했다.
생각을 마친 루시안이 성 아래 마을로 향하려던 차였다.
'그러고 보니 전생의 나도 여전히 근무 중인가?'
****
루시안은 확인차 위병소에 있는 경비대장을 찾아갔다.
다행히 경비대장은 전생과 달라진 게 없었다.
처음엔 루시안이 누군지 못 알아보던 경비대장이었지만 금방 기억했는지 깜짝 놀라 일어섰다.
"도련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별일 아니다. 최근에 들어온 신병 중 찾는 사람이 있는데."
"신병 말씀이십니까?"
"그래. 부상자 때문에 은퇴한 병사가 늘어 경비병을 모집한 게 불과 한 달 전이잖나?"
경비대장이 무심코 헛바람을 삼켰다.
지금껏 방에 처박혀 있던 삼공자가 그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 그렇습니다. 일곱 명이 새로 들어왔죠."
"새로 입단한 병사 중 제이크라는 자가 있지? 나이는 열아홉이고 검은 머리에 지원할 때 활을 들고 왔을 텐데."
전생에서는 경비병에 지원한답시고 때 활을 들고 왔었다.
제대로 쏠 줄도 모르면서 일단 무기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결과적으로 비웃음을 당하긴 했으나 준비성 자체는 좋게 봐줘서 쉽게 통과했다.
동기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으니 이만큼 알려줬으면 바로 찾을 수 있겠지.
"죄송합니다. 그런 병사는 없습니다."
"뭐? 없다고?"
하지만 경비대장의 답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예, 없습니다. 경비병에 지원할 때 활을 들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있다면 소문이 퍼져도 벌써 퍼졌을 겁니다."
"그럼 열아홉 살에 검은 머리를 가진 병사는?"
"마찬가지로 없습니다. 검은 머리라면 손쉽게 볼 수 없는 색인데 그런 병사는 전혀 못 봤습니다."
없다고? 이때 분명 근무한 지 한 달이 넘었을 텐데?
혹시 몰라 명부까지 확인해봤으나 정말 제이크란 이름은 없었다.
그 대신 다른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외형을 물어보자 갈색 머리의 청년이고 나이는 스물다섯이라 했다.
아무래도 전생에 경비병 시험에서 탈락한 누군가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조금 찜찜하지만... 뭐, 나쁜 결과는 아니군.'
전생의 자신이 멀쩡하게 살아서 같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기분이 이상했을 터.
존재가 사라진 건지, 아니면 역사가 달라진 건지 모르지만 마주칠 일이 없다면 잘된 일이겠지.
마지막 호기심을 털어버린 루시안은 한스와 함께 원래 목적지인 약초상으로 향했다.
덜컹
"누구요? 지금 쉬는 시간이니까 나중에 오쇼."
"요즘 약초상 주인들 위세가 대단하군. 귀족도 기다리게 만들다니."
"뭔 개소리... 헉!"
껄렁하던 약초상 주인은 루시안의 정체를 알고 곧 납죽 엎드렸다.
설마 귀족이 이런 구멍가게에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귀, 귀족 나리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신지...."
"당연히 약초를 사러 왔지. 내가 밥이라도 먹으러 왔겠느냐?"
루시안은 일부러 팍팍 비아냥을 내뱉었다.
경비병으로 근무할 때 바가지를 미친 듯이 씌우던 가게 주인이다.
크게 다쳤을 때는 약초값으로 무려 월급 석 달치를 가져가기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때의 소소한 복수나 해줄 요량이었다.
"죄송합니다! 멍청한 질문을 했습니다!"
"멍청한 질문이고 말고. 그러니 입은 닫고 약초나 내놔라."
"나, 남김없이 가져오겠습니다! 찾으시는 물건이...."
"월광초, 붉은 가시, 날개 초롱, 줄기꽃이다. 특히 월광초는 있는대로 가져와라. 나중에 따로 숨겨뒀다가 파는 게 적발되면 목을 내걸어버릴 테니 명심하고."
서슬 퍼런 기색에 가게 주인은 당장 창고로 달려갔다.
지은 죄 때문인지 원하는 물건을 말하자 미친 듯이 창고를 뒤져 가져온 월광초를 쏟아부었다.
역시 비싼 약재인 만큼 수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약초상 한곳에 있는 양치고는 상당했다.
"이게 저희 가게에 있는 월광초 전부입니다!"
"품질이 애매하군.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죄, 죄송합니다! 전부 내어드릴 테니 부디 용서를...!"
"됐다. 값은 지불하지."
안 그래도 평판이 좋지 않은데 권력으로 약초상 털어먹었다는 악명까지 더할 필요는 없으니까.
루시안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당시의 적정가를 내자 약초상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귀족이니 두둑하게 얹어줄 걸 기대했던 듯했다.
무심코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부 내어주겠다고 한 게 몇 초 전이더라?
"부족한가? 그럼 더 얹어주지. 대신 방금 시건방지게 나왔던 죄도 묻겠지만."
"아, 아닙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바닥에 약초상이 몇 번 고개를 찍는 모습을 본 후에야 루시안은 밖으로 나왔다.
가게 주인이 눈물 콧물 짜는 얼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이게 권력의 참맛이라는 건가?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한스는 이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련님, 어째 조금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응?"
"예전에는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한 번 못하시는 분이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데?"
"당당해지셨습니다. 위엄도 좀 있고요."
속이 뜨끔했다.
시중을 든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직속 하인.
위화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이상하냐?"
"이상하긴요. 엄청 좋습니다. 이제 저도 다른 하인들 사이에서 어깨를 펴고 다니겠네요."
다행히 한스는 주인의 변화가 기쁜 게 전부였다.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월광초를 한스에게 넘겼다.
"걱정 마라. 이젠 하인들 눈치를 안 보는 수준이 아니라 다른 놈들이 네 눈치를 보게 해주마."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짜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주인의 위세가 곧 하인의 위세라는 건 잘 안다.
지금껏 한스가 무시당한 건 그만큼 주인인 루시안이 한심해서였겠지.
그러나 앞으로는 다르리라.
이전의 루시안과 지금의 루시안은 전혀 다른 존재니까.
****
귀환하기 전에 루시안은 잡화점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더 샀다.
일반 영민들이 약을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들이었다.
연금술사 길드에서는 취급도 안 하는 하급품들이었지만, 루시안에겐 이쪽이 더 나았다.
'어차피 이것밖에 사용할 줄 모르니까.'
아무것도 없던 빈털터리 시절에 연금술에 사용되는 비싼 기구들을 무슨 수로 사겠는가.
영민들이 대충 짓이기고 졸여서 약 만들어 먹던 도구가 한계지.
이제 와 제대로 된 고급품을 산다 해도 사용법조차 제대로 모를 거다.
대충 준비를 끝낸 루시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방 밖에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들어올 것 같으면 몸으로 막아. 못 막겠으면 소리라도 지르고. 누가 뭐라 하면 내가 책임질 테니."
"다른 도련님들께서 오셔도요?"
"아버지께서 오셔도 막아."
한스는 식겁했으나 곧 루시안의 표정을 보고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혼자 남은 루시안은 대충 어질러진 책들을 구석에 밀어두고 약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조합이라 해도 약초를 짓이겨 즙을 낸 후 일정 비율로 조합하는 게 전부.
하지만 이 되다만 조합법조차 밖으로 새어나갔다간 세상을 뒤집어놓을 거다.
찾아올 사람이 없음에도 굳이 한스로 입구를 틀어막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주 작은 힌트를 찾아가는 것조차 엄청난 변수를 만들어낼 위험이 있으니까.
루시안이 약초의 즙을 짜내 섞은 후 램프로 가열하자 이내 알싸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매운 정도가 심해져 나중엔 눈물마저 흐를 지경이었다.
'하여간 전생에서는 이걸 무슨 정신으로 마셨던 건지.'
암만 생각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약이 아니라 독이라 의심할 텐데.
어지간히 절박하지 않았다면 입에도 대지 않았으리라.
시간이 지나 액체가 붉은색으로 바뀐 걸 확인한 루시안이 램프를 껐다.
냄새는 액체가 식으며 서서히 사라졌고 곧 붉은색의 약만이 남았다.
루시안은 심호흡을 한 후 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벌컥
"후우우!"
화끈한 액체가 루시안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곧 아랫배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마력!'
자연의 힘을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변환시킨 결과물.
그리고 쓰기에 따라 인간을 초인의 반열로 올려주는 힘이기도 했다.
'지금이 중요하다.'
마력을 관장하던 루시안은 집중하여 마력을 움직였다.
옛날의 감각을 되살리자 마력이 느릿하게 치골 쪽으로 내려갔다.
첫 번째 시도가 성공하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장 큰 고비는 넘긴 셈이니까.
'아니,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지. 순환이 남아있으니까.'
마력의 길을 따라 전신에 기운을 퍼뜨리고 회수하는 과정.
기사가 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순환'이었다.
일반적인 비약이라면 이때 마력이 전신에 스며들어 길을 조금 넓혀주는 정도로.
하지만 넥타르는 여기에 더해 근육과 뼈, 심지어 막혀있던 길마저 여는 게 가능하다.
문제는 아무런 단련을 안 한 사람일수록 순환시키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
처음 이후에는 그래도 훨씬 나아지지만, 그놈의 첫 순환이 문제였다.
꽉꽉 막힌 길을 강제로 후벼 파 뚫는 것 같은 고통이란!
'씁, 더럽게 아프겠군.'
현재 루시안의 육체는 농사일 한 번 안 해봤으니 아마 전생보다 심하리라.
찾아올 고통을 대비하고 루시안이 두 눈을 꾹 감은 채 마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통은 조금도 찾아오지 않았다.
잠시 후, 루시안은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거? 왜 막히는 게 없어?'
5화
마력은 미끄러지듯 몸 전체에 퍼져나갔다.
고통을 각오한 게 우스울만큼 아무런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길이 가장 넓을 때라는 갓난아기조차 어느 정도의 저항은 있을 터.
그런데 열여섯이나 먹은 육체에 저항이 없다니.
'혹시 몸에 이상이라도 있는 건가?'
만약 순환을 마치고도 정말 아무런 효용이 없는 육체라면.
혹은 길을 잘못 들어 기껏 복용한 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면.
온갖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런 루시안을 비웃듯 모든 게 순조로웠다.
어찌나 흐름이 매끄러운지 나중에는 힘을 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살짝 밀어주는 것만으로도 물레방아처럼 돌아갔으니.
막힘이 너무 없어서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약효는 덤이었다.
이렇게 순조롭다면 아마 약효의 효과도 2배, 3배가 될 터.
"허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정도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왜 이리 마력이 아무 저항 없이 몸을 흐르는지.
그리고 몸은 무슨 수로 이리도 순환을 가볍게 받아들이는지.
답은 하나였다.
'하늘이 내린 육체다.'
우습게도 이전 몸 주인의 한심한 정신머리와 달리 육체는 재능의 덩어리였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겠지.
고결한 기사조차 이런 육체를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넘겼으리라.
그런데 그런 육체가 일개 어리광쟁이 도련님에게 주어져 있었다니.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였군.'
루시안은 폭소가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설마 이런 대박이 터질 줄이야.
이제 이 재능은 대공가 구석에서 조용히 썩어가지 않으리라.
오롯이 모든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루시안의 손에 들어왔으니까.
****
그날 이후 루시안은 틈만 나면 비약을 복용하고 순환을 이어갔다.
하늘이 내린 육체는 매번 게걸스럽게 비약을 먹어치우고 몸 전체에 퍼뜨렸다.
한 번 순환이 이어질 때마다 뼈와 근육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되어갔다.
열화판이 아니라 진짜 넥타르를 마시면 이런 효과가 날까 싶을 정도였다.
그 와중 틈틈이 산책과 고열량의 식사를 병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능하면 효율을 생각해서 한 달 동안 순환만 계속하고 싶지만, 대공의 눈치가 보이니 어쩔 수 없지.'
내부는 급속도로 튼튼해지고 있었으나 외견은 여전히 깡마른 상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달라진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대공은 다시 실망하리라.
결국 말만 앞서는 놈에 불과했다면서 말이다.
방에만 처박혀 있는 꼴도 오해를 사기 딱 좋으니 더더욱.
'뭣보다 저택 구석구석을 알아두는 과정도 중요하니까.'
전생에 성문 경비병으로 일했기에 영지의 어지간한 구조는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경비병이 갈 수 있는 장소뿐이다.
예전에 발을 들이지 못한 장소까지 파악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한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다행히 3주 만에 몸은 상당히 건강을 되찾아 부축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직은 지팡이가 필요했으나 그마저도 일주일 정도면 필요 없어질 기세였다.
"도련님, 대체 무슨 약을 드신 겁니까? 전설에 나오는 불사조의 알이라도 구하셨어요?"
"불사조는 개뿔. 월광초랑 다른 약초 몇 개 섞어 마신 게 전부다."
"겨우 약초 몇 개 달여 마신 정도로 이 회복 속도가 말이 됩니까?"
혀를 내두르는 한스를 보며 루시안이 피식 웃었다.
나중엔 진짜 비밀을 알려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은 자신의 몸만 챙기기도 바쁘니까.
"됐고, 산책이나 계속하자."
"슬슬 들어갈 때 같습니다만."
"체력이 붙어서 괜찮아. 어지간한 데는 다 돌아봤으니 이제 연무장이나 가볼까?"
"예? 연무장은...."
한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왜 그래? 연무장에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냐?"
"굳이 따지자면 제가 아니라 도련님께 있지요."
"나?"
"예전에 제게 연무장에서 다른 도련님들께 혼나셨다고 했잖습니까. 이제 연무장이라면 지긋지긋해서 발도 붙이기 싫으시다면서요."
한마디로 안 좋은 추억이 있는 장소라는 건가.
그렇지만 옛날 일 따위로 연무장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의 루시안이 한 일도 아닌 데다 근시일 내로 직접 이용할 장소.
옛날 일 때문에 피하느니 정면 돌파하는 편이 낫겠지.
"괜찮으니까 그냥 가자."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내가 억지로 가려는 것처럼 보이냐?"
"그건 아닙니다만...."
"어차피 나중에 검술 수련을 위해서라도 갈 생각이었어. 1년 동안 안 가봤으니 견학이라도 해봐야지."
"검술요? 도련님이?"
이 자식이.
루시안이 슬쩍 흘겨보자 한스는 냉큼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앞으로 인식을 고치기 위한 고생길이 훤했다.
****
연무장에서는 한창 기사들이 검술 훈련을 하는 도중이었다.
루시안은 눈을 빛내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전생에서는 경비병 신분으로 들어올 수 없던 장소였기에 모든 게 신기했다.
'시설 좋네.'
훈련을 위한 무게추부터 중심 잡기를 위해 인위적으로 단단하고 무르게 만든 바닥들.
탈수나 그 밖의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음료와 가벼운 상처를 위한 외상약까지.
전투 훈련에 필요한 모든 게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이런 곳에서 훈련했다면 우리 애들도 전투력이 2배는 늘었을 텐데.'
루시안은 입맛을 다시며 한창 훈련 중인 기사들을 쳐다봤다.
대개 단련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일부는 루시안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놀랐을 뿐 금방 못본 척 훈련을 재개했다.
'좋은 자세다.'
섬기는 주군이라면 모를까 그 자식의 눈치까지 일일이 본다면 기사라 할 수 없지.
실제로 전생에서 잘 싸운 건 저런 부류의 기사들이었다.
괜히 주군이나 자식들에게 알랑거리며 선을 대려는 바보들이 아니라.
그때 한스가 옆에서 불안한 얼굴로 속삭였다.
"도련님.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 겁니까?"
"갑자기 또 왜?"
"여긴 기사님들이 수련하는 장소라 함부로 보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거?"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검식, 정확히는 고대 검식이라 불리는 기사의 비전.
단지 동작을 따라 하는 것만으로 깨달음을 주고 육체를 진화시키는 옛 지혜의 정수.
아득한 옛날 검사들은 이 검식을 터득하여 초인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가라사대 검 하나로 산을 쪼개고 바다를 갈랐다던가.
'솔직히 과장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만.'
그래도 전부 다 거짓말은 아니리라.
불과 백 년 전의 어느 검사가 성을 반으로 쪼갠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검식이 넘쳐나고 비약을 찍어내듯 만들었다는 옛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대에 흔했던 기술이라도 지금은 재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검식.
따라서 허락된 소수의 인간을 제외하고는 남의 수련을 보는 것조차 용서되지 않는다.
제자도 아닌 주제에 남의 검식을 보고 훔친다는 건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다는 소리니.
"도련님이야 상관없으시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감히 하인 주제에 검식을 봤다고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고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합니까? 도련님이 안 보실 때 뒤에서 푹 찌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검식은 그냥 본다고 해서 베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애초에 그럴 수 있으면 전투에서 검술이나 제대로 쓰겠냐? 따라다니면서 조금씩 베껴갈 텐데."
"네?"
사실 검식은 동작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동작에 따라 마력도 같이 움직여줘야 한다.
당연히 몸 내부에서 움직이는 마력을 눈으로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적대 관계인 기사라면 동작으로 기술도 유추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
그러나 검술에 제대로 아는 거 하나 없는 일반인이라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다.
"그, 그럼 기사님들께서는 왜 그리 예민하게 구시는 겁니까? 훈련하실 때 조금만 다가와도 엄청 화를 내시던데요."
"그야 기사들 입장에서는 평민들이 알아서 설설 기니까 일부러 오해하도록 조장하는 거지. 진실을 알면 태도가 풀어질 텐데 그 꼴 보고 싶겠어?"
안 그래도 평민들이 자기들 앞에서 쩔쩔매는 걸 좋아하는 기사들이다.
더 허리를 굽히게 만든다면 모를까 일부러 알려줘서 안심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 한스는 허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겨우 그런 이유로 지금껏 기사들에게 호통을 들었을 테니 억울하겠지.
그런데 실은 이보다도 훨씬 더 음습한 이유가 하나 숨겨져 있다.
'수련을 훔쳐봤다는 게 큰 죄라고 인식하고 있으면 트집을 잡아 패악질 부리기도 딱 좋으니까.'
기사 중에서도 정말 인간말종 같은 놈들은 이 오해를 정말 교묘하게 이용해먹는다.
은근히 통행이 잦은 장소에서 검식을 선보이다 누군가 오면 자기 수련을 봤다고 누명을 씌우는 거다.
이때 수련을 훔쳐본 사람은 죽어도 할 말이 없으니 어떻게든 기사의 분노를 진정시키려 이것저것 가져다 바친다.
그럼 기사는 만족할 때까지 난동을 피우다 적당한 수준이 되면 용서해주는 시늉을 하는 거다.
물론 이쯤 되면 다른 기사들에게도 쓰레기 취급을 받지만, 그것도 외부에 알려졌을 때나 가능한 일.
촌구석에 파견된 기사가 분풀이나 용돈 벌이로 주변 마을에 이런 연극을 하는 건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말해줘야겠군.'
기사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지는 것도 금물이지만, 선입견이 생기는 것도 썩 좋은 건 아니다.
조금 더 감정이 진정되고 냉정한 시야를 가지게 되었을 때 말하는 게 좋겠지.
루시안이 한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기사들의 검식을 다시 주시할 때였다.
"삼공자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다시는 안 오실 것처럼 떠나신 게 불과 1년 전이신데 말입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땀방울 하나 없는 젊은 기사가 보였다.
실눈에 가까운 작은 눈동자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
척 보기에도 좋은 의도로 접근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절 기억하시는지요?"
기사는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이며 루시안과 눈을 마주쳤다.
제 주인의 자식을 대함에도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태도.
루시안은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기사의 말에 대답했다.
"누구시더라?"
"...."
6화
여유롭던 기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한 기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하,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그때 삼공자께 친히 자세의 지도를 해드렸던 핸드릭입니다."
"그랬소? 기억이 잘 안 나서."
진심이 담긴 말에 기사, 핸드릭은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설마 루시안이 진짜 잊어버렸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애초에 만난 적이 없는 거지만.
"크흠, 아무튼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연무장이 무슨 일이 있어야 올 수 있는 장소였던가?"
"그건 아닙니다만 신기하여 여쭈었습니다. 이공자께 혼이 나신 게 불과 1년 전인데 다시 돌아오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경의라고는 손톱만큼도 담기지 않은 말투에 루시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1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일개 기사가 이따위로 나오는 걸까.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툭툭 던져보며 확인하는 수밖에.
"불과 1년 전이 아니라 1년이나 지났다고 해야겠지. 옛날 일 때문에 굳이 연무장을 피해다니는 것도 우스운 일. 앞으로는 검식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종종 방문할 생각이오."
"검식? 삼공자께서 말입니까?"
"뭐, 지금까지 단련에 소홀하긴 했지만 내 나이 열여섯이니 늦은 것도 아니지 않소?"
몸에 있는 '마력의 길'이 완전히 닫히는 건 스물다섯 살 전후.
그 이전이라면 얼마든지 검식을 익혀 기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한 만큼 길이 좁아져서 과정이 훨씬 험난한 게 문제일 뿐.
루시안이 정론을 말했음에도 핸드릭은 보란 듯 과장되게 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농담도 잘 하십니다! 삼공자의 나이라면 이미 늦었거늘 이제 와 검식을 배우시다니요!"
"늦었다? 열여섯이?"
"그렇습니다. 검식이란 기본적으로 열다섯 이전에 시작해야 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열여섯부터는 배워봤자 몸이 약간 튼튼해지는 정도지요."
"이상하군. 내가 알기로는 마력의 길은 스물다섯에 완전히 닫힌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순간적으로 핸드릭이 움찔했으나 그것도 아주 잠깐.
냉큼 다시 미소를 짓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마력의 길이 닫히는 건 확실히 스물다섯 이후가 맞습니다만, 열여섯이면 이미 좁아질 만큼 좁아진 상태입니다. 그 이전에 시작하면 된다는 건 이미 검을 익히기 늦은 이들의 덧없는 희망이지요."
"그렇소?"
"그렇습니다."
개소리.
루시안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도로 삼켰다.
스물다섯이 검식을 익히기에 이미 늦었다?
그럼 전생에서의 자신은 뭐란 말인가.
스물이 넘어서 익힌 검식으로 기사들이 있는 전장을 휩쓸고 다녔는데.
굳이 전생의 경험을 들먹일 것도 없다.
늦은 나이에 검식을 배워 역사에 이름을 남긴 기사들은 넘쳐나니까.
그런데도 열여섯이 늦은 나이라 지껄인다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정말 이 기사가 기초적인 교양조차 못 배웠거나, 아니면 일부러 거짓말을 하려고 작정했거나.
'검식의 기본조차 못 배운 인간이 아니고서야 전자일 리는 없으니 후자군.'
문제는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느냔 것이다.
평민들이야 잘 모른다지만 기사들 사이에서는 일반 상식에 가까운 지식이다.
만에 하나 루시안을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금방 들통날 터.
그런데도 시치미를 뚝 떼고 이런 무리수를 두다니.
"경과 내가 아는 지식은 꽤 다른 모양이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는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정 믿지 못하시겠으면 이공자께 여쭈어보십시오."
"이공... 아니, 형님께?"
발데크 가문의 이공자, 조르디 발데크.
전생에서는 일공자인 형과 치열하게 후계자 다툼을 벌였던 인간이다.
직접 본 적은 얼마 없지만 일처리 방식이 음습하고 교활한 면이 있었다.
'외부에서 사람을 고용한 뒤 써먹을 만큼 써먹고 보상을 안 준 적이 굉장히 잦았지.'
경비대 시절 루시안의 일 중 하나가 그렇게 버려진 이들의 돌격을 몸으로 막아서는 거였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보상은커녕 그냥 꺼지라니 귀족이고 나발이고 눈이 돌아갈 수밖에.
그때 조르디는 뒤에서 구경하며 비웃음이나 날렸지만 막아서는 루시안으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가끔은 어지간한 기사 이상의 강자도 섞여 있었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설마 이공자께서 틀렸다고 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루시안의 대답이 없자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핸드릭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그제야 루시안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바보로 만들 셈이었나.'
일부러 잘못된 지식을 심어줘서 다른 이들의 웃음거리로 만든다.
통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하는 형을 들먹여 반박하지 못하도록 한다.
만에 하나 본인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를 뗀다.
그러고 나면 기본 상식조차 몰랐던 바보 삼공자 하나만 남을 뿐.
'기가 막히는군.'
치졸한 방식도 우습지만, 그보다 황당한 건 대상이 루시안이라는 거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의 아들에게 이따위 짓거리를 하다니.
든든한 뒷배나 누군가의 사주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루시안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놀랍군. 우리 형님께서는 어린애조차 아는 사실도 모른다는 소리가 아닌가? 형님이 그토록 멍청하신 분이었나?"
닳고 닳은 루시안에게 이따위 괴롭힘은 너무 식상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으니까.
****
"...."
"...."
루시안의 말에 연무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창 훈련에 몰두하던 기사들조차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핸드릭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하니 루시안을 쳐다봤다.
"지,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형님께서 상식조차 모르는 머저리가 맞냐고 했네. 열여섯이면 검식을 배우기에 늦었다니? 이게 귀족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이공자의 말씀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핸드릭이 도끼눈을 떴으나 루시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탄식하듯 과장되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진정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단 말이군. 아, 이걸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발데크의 씨앗이 이토록 멍청하다니! 실로 가문의 수치다!"
갈수록 심해지는 어조에 핸드릭의 입이 뻐끔거렸다.
설마 루시안이 대놓고 조르디를 모욕할 줄은 몰랐기에 뭐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 우는 시늉을 하던 루시안은 이내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핸드릭을 바라봤다.
"잠깐, 다시 생각하니 무언가 이상하군. 경, 설마 모략을 꾸민 것인가?"
"모, 모략이라니요?"
"발데크 가문의 씨앗이 기본 상식조차 모른다고 모함을 한 게 아니냐는 말일세. 설마 다른 가문의 사주를 받고 형님의 이름을 들먹인 건 아니겠지?"
"그건 또 무슨...!"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우 이런 일로 다른 가문은 왜 끌어들여?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십시오, 삼공자! 지금 절 모욕하시는 겁니까!?"
"모욕이라니? 네놈이야말로 확실히 해라! 그따위 머저리 같은 소리는 누가 했느냐! 우리 형님께서 하신 소리냐? 아니면 네놈이 꾸민 소리냐? 어느 쪽이냔 말이다!"
땅, 소리를 내며 루시안이 바닥에 지팡이를 찍었다.
핸드릭은 미칠 지경이었다.
계속 우기자니 이공자가 머저리가 될 판이고, 맞다고 하자니 자신이 첩자가 될 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놀린 거라고 했다간 주군의 자식을 우롱한 기사로 찍힐 게 뻔했다.
'돌겠군. 이공자의 이름만 꺼내면 덜덜 떨던 겁쟁이가 갑자기 왜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거야?'
궁지에 몰린 핸드릭의 눈동자가 허공을 헤엄쳤다.
대답이 없자 루시안이 재차 호통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냐?"
"이, 이공자!"
핸드릭은 냉큼 새로 등장한 인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루시안을 대할 때와 달리 더없이 공손한 태도였다.
'조르디 발데크.'
올해 스무 살로 루시안보다 4살 연상의 둘째 형.
귀공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미남이나 위로 치솟는 눈 때문에 인상이 유난히 사나워 보였다.
발데크 가문의 아들 중 루시안이 전생에서 가장 많이 본 인물이기도 했다.
그 이유 대부분이 썩 좋지 않은 것들이라 호감은 전혀 없었지만.
조르디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주변을 훑어보다 루시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또 네놈이냐? 루시안."
또라니?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하자 조르디가 비웃듯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1년 전에 내 가르침을 못 버티고 연무장에서 도망친 주제에 뻔뻔하구나. 낯짝이 대체 얼마나 두껍기에 또 어슬렁거리는 것이냐?"
가르침이란 소리에 루시안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연무장에서 대강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이 갔다.
'훈련을 빙자해서 망신을 줬군. 아니면 대놓고 구타라도 했거나.'
확실히 그런 일을 겪었다면 연무장에는 얼씬도 하기 싫을 만하다.
물론 현재의 루시안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애초에 네놈 같은 게 발데크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확인해볼 게 있는 데 딱 맞춰 오셨군요."
루시안은 조르디가 뭐라 더 지껄이기 전에 냉큼 말을 끊었다.
굳이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 끊긴 조르디는 불쾌한 듯 눈을 찌푸렸다.
"제멋대로 말을 끊어먹는 버릇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가지가지 하는구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형님께서 발데크의 수치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요."
"무슨 개소리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정말 형님께서 열다섯 이후에는 검식을 배우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자 조르디가 입을 닫았다.
잠시 후, 조르디는 죽일 듯한 시선으로 루시안을 노려봤다.
"그렇다면 어쩔 것이냐?"
위협이랍시고 한 짓이겠지만 우스울 따름이었다.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운 적도 없는 애송이가 노려보면 뭐 어쩌게?
피식 웃은 루시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어쩌기는요. 아버지께 형님을 수도원으로 보내달라고 해야지요."
"뭐?"
"검식을 아예 안 배운 사람이라면 모를까, 몇 년이나 배우신 분이 기본 중의 기본조차 모른다? 이는 자질이 없는 것을 넘어 뇌에 이상이 있다는 걸 뜻합니다."
"...!"
"지금이야 잘 까먹는 정도겠지만 증상이 심해져서 바지에 대변이라도 지리시면 어찌합니까? 이는 가문의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 수도원으로 가셔야지요. 앞으로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용히 사셔야겠습니다."
루시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무장은 깃털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7화
기사들 사이에서 루시안은 사슴 공자라 불린다.
조금만 위협해도 덜덜 떠는 꼴이 덤불에 고개를 처박은 사슴 같아서다.
그런데 그 사슴 공자가 이공자를 상대로 저런 폭언을 날리다니.
몇몇 기사는 자기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도, 도련님."
한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루시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맹수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당장이라도 도망치자고 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맹수 쪽이었다.
"가, 감히... 감히 네놈이...!"
어찌나 분노했는지 조르디의 뺨이 거칠게 떨렸다.
자칫 이성을 잃고 검이라도 휘두르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
그 매서운 살기에도 루시안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고개를 까딱였다.
"진정하시지요."
"진정? 지금 나보고 진정하라고 했느냐?"
"하기 싫으셔도 진정하셔야 할 겁니다. 핸드릭 경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하니까요. 여기서 저에게 해코지를 하시면 그가 진실을 말했다고 인정하시는 꼴 아닙니까?"
뿌득
조르디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강하게 이를 악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살려달라는 소리가 저 입에서 나올 때까지 두들겨 패고 싶었다.
한 달 전이었다면 정말 그리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달 전과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제기랄, 아버지께서 이 반푼이에게 지원을 재개하지만 않으셨어도...!'
끊은 지원이 이어졌다는 건 아버지의 기대도 살아났다는 것.
기대가 한풀 꺾인 뒤라면 모를까 지금 잘못 건드리면 지그문트 대공이 역정을 낼 수도 있다.
안 그래도 후계자 경쟁에서 한 끗발 밀리는 조르디로서는 피하고 싶은 사태였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그저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만 해주시면 되는데 이상하군요. 동전 뒤집기보다 더 쉬운 일이건만."
"그 입 닥쳐라!"
조르디는 분노를 삼키면서 뒤를 힐끗거렸다.
얼버무리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선이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여기서 대답을 하지 않고 물러서면 루시안에게 밀려 패배한 꼴이 된다.
그렇다고 억지로 밀어붙이자니 지기 싫어서 오기를 부리는 병신이 될 뿐이다.
'외통수다.'
머리가 지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머저리 하나 골려주려 했을 뿐이거늘 이게 뭔 꼴인가?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핸드릭 경의 말이 진실인가 봅니다. 설마 형님께서...."
"누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대답이 없는 틈에 루시안이 불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 하자 조르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난 그딴 말을 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핸드릭 경이 실수로 다른 사람과 헷갈린 모양이군."
"...!"
"핸드릭 경은 훌륭한 기사지만 기초를 뗀 지 제법 오래되었을 터. 헷갈려도 이상할 거 없지. 안 그런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핸드릭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뭐라 변명이 이어지기도 전에 조르디가 차갑게 핸드릭을 노려봤다.
그 스산한 눈빛에 핸드릭은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제가 헷갈렸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실수는 하는 법. 내 이름을 댔으나 의도하진 않은 일일테니 이대로 넘어가겠네. 앞으로는 조심하게나."
"이공자의 자비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수치심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핸드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공자의 명령 때문에 나섰다가 덤터기를 썼으니 이게 무슨 망신인가.
다른 기사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게 뻔했다.
핸드릭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운 조르디는 오연한 얼굴로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대답이 되었느냐?"
"충분히 되었습니다. 역시 형님께서는 지혜로우시군요. 같잖은 소리에 넘어가버린 제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거냐!"
"그럴 리가요. 새삼 핸드릭 경이 멍청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저걸 기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기사란 작자가 가장 먼저 배우는 기초조차 까먹다니. 쯧, 머리가 아니라 투구 걸이라 부르는 게 낫겠군요."
루시안의 모욕이 이어지자 핸드릭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혈압 때문에 안 그래도 붉던 얼굴이 이젠 거의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이 정도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핸드릭 경, 대답 좀 해보도록. 대체 어떻게 10년의 세월을 틀릴 수 있나?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가? 난 그대 같은 머리가 없어서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군."
"삼공자! 말이 심하십니다!"
"심하기는? 다른 기사들에게 한번 물어보게. 자네와 같은 착각을 한 사람이 있는지 말이야. 분명 한 명도 없을 걸세. 심지어 기사가 아닌 종자조차 말이야. 그대는 기사인 주제에 종자만도 못하나?"
"어, 어찌 제게... 그런 모욕을...!"
핸드릭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분노를 참느라 이를 악물다 너무 세게 깨문 것 같았다.
피식 웃은 루시안은 다시 조르디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기사 한 명 때문에 실례를 저질렀군요. 다행히 진실이 밝혀진 것 같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가 우습게 보이느냐? 자기 할 말만 하고 어디를 가겠다는 거냐!"
"죄송합니다만 전 아직 환자라 길게 대화하기 힘듭니다. 제게 볼일이 있으시다면 몸이 나은 후에 말씀해주십시오."
"감히!"
"최근 아버지께서 절 지켜보시는 중입니다. 형제간의 불미스러운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주체가 형님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지그문트 대공을 언급하자 조르디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안은 입을 다문 조르디를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연무장에서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조르디도 이내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두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는 바보가 된 기사 하나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
한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루시안을 뒤따랐다.
혹여라도 누군가 따라오는 게 아닌지 두 눈은 연신 등뒤를 훑었다.
"도, 도련님. 이래도 괜찮을까요?"
"뭐가?"
"핸드릭 경도 모욕했고, 이공자께서도 분노하셨잖습니까. 나중에 보복하는 거 아닐까요?"
"보복이라."
그 말에 루시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개 기사가 삼공자인 나한테 보복? 어디 해보라고 해. 기사 작위 박탈 정도로는 안 끝날 텐데 무슨 수로 보복을 할지 궁금하네."
충성은 기사를 이루는 근간이자 정체성.
그런데 주군의 자식에게 모욕 좀 받았다고 같잖은 보복을 하려 한다?
이건 단순히 속이 좁았다는 수준으로 끝날 게 아니다.
개인적인 이유로 그따위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기사의 정체성 자체를 훼손한 격이니까.
지그문트 대공이 직접 나서기도 전에 동료 기사들이 기사의 이름을 모욕했다며 썰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음습하게 손을 쓴다면 또 모르지만, 기사단장도 아니고 일개 평기사가 무슨 수단이 있다고 그러겠는가.
뒤에서 분을 삼키는 게 고작이리라.
"조르... 아니, 형님의 경우는 어쩔 수 없지. 보복이 걱정된다고 맨날 당할 수만도 없으니."
"예!? 그럼 진짜로 보복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핸드릭에게 뒤집어씌워서 나름 잘 빠져나간 것 같지만, 사실 오늘 일은 조르디에게도 큰 타격이다.
루시안이 그토록 모욕을 내뱉었음에도 막기는커녕 제대로 감싸주지도 않는 모습을 보였으니.
자기 사람도 제대로 보호해주지 못하는 주군으로 낙인 찍혔을 거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테니 한동안 분해서 잠도 못 자리라.
'대공의 눈치 때문에 대놓고 일을 벌일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갚아주려 하겠지.'
남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코지를 하면서 정작 본인이 당한 건 아무리 작은 일도 기억해두는 인간이다.
조만간 무언가 수작질을 부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루시안은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애송이가 수작질을 부려봤자지.'
결국 모략이란 당사자의 역량에 따라 무서움이 갈리는 것.
이제 막 스물이 된 애송이의 모략이 뭐가 무서울까.
어떤 짓을 하건 정면에서 쳐부숴 주면 그만인데 말이다.
****
"...이상하다, 왜 아무 일이 없지?"
자신의 방에서 몇 번의 순환을 마친 루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 이후 일주일이 지났건만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시안이 도발하듯 매번 같은 장소를 같은 시간에 산책해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루시안을 피해 숨어버린 것처럼 조르디는 잠잠했다.
'이대로 얌전히 찌그러질 놈이 아닌데.'
다른 형제도 아니고 반푼이 취급받는 루시안에게 한 방 먹은 거다.
되갚아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체면도 엉망이 될 터.
그런데 여태까지 아무 반응이 없을 줄이야.
"도련님,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내가 쉬는 동안 형님이 오지는 않았고?"
"예. 여전히 코빼기도 안 보이십니다."
"거 참, 그 인간이 이렇게 참을성 좋은 성격이었던가?"
"너무 신경 쓰지 마시죠. 이공자께서 진짜 포기하셨을 수도 있잖습니까? 대공 전하의 눈치라도 보이신 모양이죠."
당혹감을 느끼는 루시안과 달리 한스는 밝은 얼굴이었다.
잔뜩 걱정했는데 아무 일도 없으니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보다 용돈을 어찌 쓰실지 생각하시는 게 더 기분 좋지 않을까요? 오늘이 그날이잖습니까."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대공의 지원이 재개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전에 받은 건 월광초를 사느라 이미 탈탈 턴 지 오래.
마침 사뒀던 월광초와 다른 재료들도 딱 떨어진 상황.
오늘 나오는 돈으로 새 재료를 마련해 둬야 했다.
"시간도 됐겠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바로 받아오겠습니다!"
한스는 냉큼 재무부가 있는 건물로 달려갔다.
루시안의 용돈이 나오는 날은 본인의 봉급날이기도 하니 마음이 설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한스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한스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루시안이 직접 나가려던 때였다.
"도, 도련님."
뒤늦게 돌아온 한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무슨 일인가 싶어 루시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래? 누구한테 맞았냐?"
"그게 아니라... 이것 좀 보십시오."
루시안은 한스가 내미는 서류를 낚아챘다.
서류 자체는 한 달 전에 받은 것과 비슷했다.
다른 점은 지출 내역과 루시안의 몫으로 남은 내역이었다.
천천히 지출 내역을 읽어본 루시안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이런 미친...!"
루시안이 받는 액수는 한 달 전의 사분지 일로 줄어 있었다.
반대로 한스를 제외한 하인들의 고용비는 몇 배나 늘어난 상황.
중간에 누군가가 수작질을 부린 게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내역에 분노한 루시안은 서류를 구기며 일어섰다.
"이 서류 작성한 재무관이 누구야?"
8화
루시안의 용돈이 줄어들었다는 건 가볍게 끝날 일이 아니다.
말이 좋아서 용돈이지 그 출처는 어디까지나 가문의 예산.
즉, 이런 장난질을 한 시점에서 횡령죄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횡령죄는 무조건 사형이지.'
어지간하면 사형에서 제외되는 귀족 신분조차 횡령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예산에 손을 대는 건 가문의 목숨줄에 장난질을 친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물며 돈 관련해서는 반드시 깨끗해야 하는 재무부 관리가 이딴 짓을 했다?
재무관이 아니라 재무장관이라 할지라도 즉결처형되어 성벽에 목이 걸릴 사안이다.
대체 어떤 미친놈인지 몰라도 오늘이 제삿날이 되리라.
그리 생각하고 재무부를 찾아갔건만.
"오해이십니다, 삼공자! 횡령이라니요!"
재무관은 횡령이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겁한 얼굴이었다.
루시안의 서늘한 눈빛에 재무관은 연신 머리를 쿵쿵 찍으며 소리쳤다.
"저, 저는 어디까지나 보고대로 처리했을 뿐입니다! 원하신다면 당장 증명할 수 있습니다! 부디, 부디 한 번만 확인해 주십시오!"
눈물 콧물을 흘리며 덜덜 떠는 게 여차하면 오줌이라도 지릴 기세였다.
재무관을 범인이라 예상하던 루시안은 눈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댁이 슬쩍한 게 아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여덟 신에 맹세코 거짓을 고한다면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그럼 누가 이런 식으로 예산을 짜라고 했는데? 보고대로 처리했다고 했다며?"
"삼공자 아래의 하녀장이었습니다! 예산안은 언제나 하녀장이 가져왔잖습니까!"
"뭐? 하녀장?"
성별에 따라 하녀장, 혹은 하인장이라 불리는 직책으로 하인들의 우두머리.
작은 가문이라면 한두 명이 전부지만 큰 가문이라면 꽤 여럿이 있다.
하인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한두 명이 다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데크 가문이라면 아마 대공의 자식과 아내마다 개별적으로 있을 터.
재무관이 말하는 하녀장은 아마 루시안 주변의 하인들 담당이리라.
"기가 막히는군."
하녀장이란 소리에 루시안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이 좋아서 하인들을 총괄하는 직책이지 본인도 하인 중 하나.
그런데 기사조차 목이 잘릴 횡령을 하녀장 따위가 저질렀다고?
"지, 진짭니다! 매번 하녀장이 제게 예산안을 보냈고, 저는 그대로 짜준 게 전부입니다! 예전에 삼공자께서 하녀장에게 친필 허가장도 주셨잖습니까!"
"알았으니 생각 방해하지 말고 좀 닥치도록. 계속 땍땍거리면 공범으로 엮어버릴 테니."
"흡!"
재무관은 냉큼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덜덜 떠는 재무관을 뒤로한 채 루시안은 생각에 잠겼다.
일단 루시안이 하녀장에게 예산을 맡긴 건 확실했다.
은근슬쩍 예산안에 손을 대는 것도 간단한 일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보상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높지 않은가.
액수가 많다 한들 목숨을 걸 정도는 절대 아니건만.
'그냥 직접 대면해서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군.'
한숨을 쉰 루시안은 집무실에서 떠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책임이 명확한 이상 발뺌은 통하지 않으니 어떤 식으로든 답이 나오리라.
****
"하녀장인 제니입니다. 절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하녀장은 도도한 인상의 젊은 여성이었다.
기껏해야 20대로 보이는 외모에 루시안이 눈을 끔뻑였다.
보통 하녀장이라면 경험 많은 중장년 아닌가?
젊다 못해 어릴 정도인데 저 나이로 하녀장이라고?
"저, 하녀장께서 바뀌신 겁니까?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나 님이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생각에 잠긴 사이 한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 말에 제니라는 하녀장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전 하녀장은 나이 때문에 그만둔 지 벌써 두 달째다. 모르고 있었나?"
"아니, 그야... 전 하녀장님과 자주 볼 일이 없으니까...."
"한심하군. 도련님의 시중을 들면서 주변 상황도 모르면 어쩌자는 건지."
제니의 질책에 한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찌그러졌다.
그 모습에 루시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직책 자체야 하녀장이 더 높겠지만 한스는 루시안 전속이다.
전속 하인은 주인의 얼굴과 다름없는 위치인데 주인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타박하다니.
이건 반쯤 루시안을 무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루시안이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코웃음까지 치며 비웃음을 띄웠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이 아이가 제게 말해준 것이 없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답니다."
"...예산안 때문에 불렀다. 이걸 작성한 게 너인가?"
"그렇습니다. 도련님께서 이전 하녀장에게 권한을 주셨다고 해서 그대로 인계받았지요."
"인계? 내가 권한을 준 건 네가 아니고 전 하녀장일텐데?"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예산안은 기한 전에 꼭 작성해야만 하고, 도련님께서는 이에 신경을 안 대시니 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무슨...!"
시건방진 제니의 태도에 한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도저히 하녀장이 섬기는 주인에게 내뱉을 말투가 아니었다.
루시안은 더 뭐라 하려는 한스를 제지하며 말했다.
"그래, 그 점은 이해하마. 그럼 다른 걸 묻겠는데 이 예산안은 어떻게 된 거지? 왜 멋대로 내가 받아야 할 금액을 줄여 하인들의 봉급을 늘인 거냐?"
"예산의 배정 또한 도련님께서 맡기셨다고 들었기에 임의로 조정했습니다. 최근 하인들이 워낙 바빴던 데다 봉급에 대한 불만이 크더군요."
"그래서 내게 말도 없이 이런 짓을 했다고?"
"도련님께서 1년이 넘게 관여하시지 않아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제 착각이었군요.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 주시지요. 한 달만 더 참으시면 되는 일 아닙니까?"
선을 아득히 넘어버린 발언에 한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젠 얕보는 걸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루시안도 더는 참기 힘들었기에 일어서서 다른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
"아무나 한 명 나가서 채찍을 가져와라. 어디 채찍에 맞고 난 후에도 이따위 태도인지 한번 보자."
"...."
"...."
루시안의 외침에도 주변 하인들은 우물쭈물거리며 나서지 않았다.
마치 루시안보다 제니를 두려워하는 태도였다.
그 꼴을 본 한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들 뭣합니까? 도련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얼른 채찍 가져오십쇼!"
"...."
"이 인간들이 진짜! 그냥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어, 잠깐! 한스!"
"기다려! 좀 진정해!"
"아니, 왜 막습니까!? 도련님 명령이라고! 당신들 미쳤어!?"
보다 못한 한스 쪽에서 직접 움직이려 하자 하인들이 몸으로 문을 틀어막았다.
사실상 제니를 보호하기 위해 루시안의 명령을 어긴 셈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루시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놓고 루시안의 명령을 어겼다는 건 그보다 무서운 존재가 엮여 있다는 것.
"너, 뒷배가 있구나?"
"뒷배라니요. 그저 이공자이신 조르디 도련님과 젖남매 사이일 뿐입니다."
의기양양한 제니의 말에 하인들이 왜 저리 난리인지 알 수 있었다.
젖남매라면 조르디를 돌봐준 유모의 친자식이란 소리.
신분은 다르더라도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가까울 수밖에 없다.
하인들로서는 당연히 부담스러우리라.
잘못했다간 조르디한테 찍혀서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조르디 눈치를 보느라 내 명령을 무시했다는 거지.'
하인들의 목을 날릴 수 있는 건 조르디만이 아니다.
루시안 역시 맘만 먹으면 하인들 모가지 정도는 가볍게 날릴 수 있다.
그런데도 루시안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니를 보호했다.
조르디가 무서운 만큼이나 루시안이 우습게 보인다는 증거였다.
'가관이군.'
한숨을 쉰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은 했지만 전임자가 싸놓은 똥이 생각보다 푸짐했다.
원래는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된 거 여기서 기강을 잡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한스, 따라와라."
"예? 어디로 가시게요?"
"따라오면 알아."
루시안이 문앞으로 서자 하인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이대로 나가서 채찍을 가져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도, 도련님. 부디 진정하십시오."
"하녀장께서도 나쁜 뜻은 없을 테니...."
"채찍 가져오는 거 아니니까 비켜. 밖에 좀 다녀와야겠다."
확답을 듣고 나서야 하인들은 천천히 문에서 비켜섰다.
그 꼴을 보고 재차 한숨을 쉰 루시안이 문밖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역시 도련님은 현명하시군요. 조르디 님께서도 분명 그 처신을 칭찬하실 겁니다."
은근히 조르디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말투에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루시안은 제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떠났다.
어차피 몇 시간 후에는 자신의 처신을 미친 듯이 후회할 테니까.
****
"도련님! 대체 그 망할 여자는 왜 내버려 두신 겁니까?"
한스는 분이 안 풀렸는지 연신 씩씩거리다 기어코 소리쳤다.
자신이 욕을 먹은 것보다 루시안이 무시당한 게 더 분한 모양이었다.
"다른 놈들이 안 가져오면 직접 가져오셔서 때리셔도 그만 아닙니까? 도련님께서 작정하시면 아무도 못 막을 텐데!"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래 봤자 나만 손해였을 거다."
"예?"
"하녀장이 괜히 조르디의 젖남매로 바뀌었겠냐? 미리 손을 써둔 거다. 아마 내가 채찍을 가져왔다 한들 순순히 맞아주지도 않았을걸."
맞기는커녕 오히려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쳤을 거다.
다른 하인들은 조르디의 눈치가 보여 잡지도 않았을 거고.
추측이지만 아마 루시안이 직접 잡으려 해도 소용없었겠지.
진짜 조르디의 젖남매라면 주변에 어떻게든 보호해줄 사람을 배치해뒀을 테니까.
"아마 그대로 도망쳐서 형님에게, 아니 조르디에게 갔겠지. 그리고 예산안에 관한 이야기는 싹 빼고 말을 꾸며내서 날 쓰레기로 만들었을 거다. 별 같잖은 이유로 조르디의 젖남매를 벌하려 한 망나니로 말이야."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이 먹히겠습니까?"
"안 먹혀도 먹히게 만드는 게 모략이야. 당장 내 곁에는 진실조차 제대로 말해줄 사람이 없지만, 그놈 곁에는 없는 말도 만들어줄 인간이 널려 있잖아."
"대, 대공 전하께 사정을 말씀드리면...."
"그게 가장 최악의 선택지지. 자기 하인조차 제대로 못 다루는 꼴을 보면 아버지가 날 어떻게 보시겠냐?"
무엇보다 이 일의 발단 자체는 루시안이 일개 하녀장에게 예산안 편성이란 중대사를 맡긴 거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그 역시 루시안의 치부로 자연스레 드러날 터.
그렇기에 가능하면 이번 일은 외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제니가 입을 놀릴 기회를 주면 줄수록 루시안만 손해니까.
설명을 들은 한스는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도련님께는 세력이 없잖아요? 스스로 처리하시려고 해도 움직여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야 지금부터 만들어야지."
"예?"
"가문에 내 사람이 없으면 밖에서 만들어 오면 그만이잖아. 안 그래?"
루시안의 미소에 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한스가 다시 물어보려던 찰나 루시안이 발걸음을 멈췄다.
"도착했군."
"목적지가 여기셨습니까? 처음 와보는 곳인데... 도박장!?"
한스는 뜨악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기껏 지그문트 대공이 다시 지원을 시작했는데 그 돈으로 도박을 하겠다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스가 뜯어말리려던 찰나.
"손님 받아라, 이것들아!"
콰앙
루시안의 발길질이 도박장의 문을 부서질 듯한 기세로 열어젖혔다.
9화
"발데크 가문의 삼공자가 우리 도박장에 찾아왔다고?"
"예, 두목."
"푸핫! 그 사슴 공자가 이젠 노름에도 손을 대는군!"
휴고는 부하의 보고에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귀족 손님은 드물지 않았지만, 기사도 아니고 대공의 자제라니.
"가지고 온 돈은 제법 두둑하겠군."
"처음 들어왔을 때 돈주머니부터 꺼내놓았답니다. 제대로 판을 벌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던데요."
"카드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을 텐데 꿈도 야무지구만."
짧게 혀를 찬 휴고의 입가가 비틀렸다.
이래서 귀족 도련님이란 것들이 마음에 안 든다.
안방에서 뭐든 제 뜻대로 돌아가니까 세상도 다 제 뜻대로 돌아갈 줄 알고 있으니.
이대로 모진 세상을 제대로 경험해주는 것도 재밌겠지만, 본전을 뽑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오늘은 적당히 작업만 치고 보내. 처음부터 다 털어버리면 안 되는 거 알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용돈 몇 푼 쥐여서 귀가시키겠습니다."
"적당한 양념도 잊지 말고. 아슬아슬하게 이겨야 제 실력인 줄 알지."
"물론입니다. 멋들어지게 연출해보죠."
남을 도박에 빠뜨리려면 따는 맛부터 알려줘야 하는 법.
처음에는 적당히 잃어주며 도박의 늪에 빠뜨릴 생각이었다.
몇 번 이기고 나면 기고만장할 테고, 그 이후엔 조금씩 따면서 도전 욕구를 자극한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밀당을 하다보면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오지 못하리라.
"사슴 공자에서 비루먹은 들개 공자가 되는 것도 금방이겠구만. 대공도 걱정이 크겠어. 열여섯이나 먹은 자식 놈이 저래서야 원."
휴고는 차갑게 웃으며 턱을 살살 쓸었다.
생각지도 못한 카드가 손에 들어왔으니 어찌 쓸지가 고민이었다.
안 그래도 대공이 반쯤 관심을 끄고 있는 삼공자다.
적당한 도박빚 하나 씌워두면 제 아비에게 들킬까 무서워서라도 하라는 대로 움직일 터.
'잘만 하면 본전은커녕 몇 배로 뽑아낼 수 있겠군. 안 그래도 최근 대공가 내부의 협력자가 필요하던 시점인데.'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너무 조급해하면 사냥감이 놀라 도망칠 터.
넉넉하게 기간을 두고 조금씩 늪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했다.
한 석 달 정도 공들여 작업을 쳐두면 되리라.
문제는 어느 타이밍에 이 비장의 카드를 써먹느냐였다.
"두, 두목."
상념을 깨우는 부하의 목소리에 휴고는 눈을 찌푸렸다.
"보고 끝낸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또 와?"
"그게... 방금 보고한 사슴 공자 말입니다만...."
"그놈이 왜? 문제라도 있어?"
"문제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사슴 공자가 도박장을 다 털고 있습니다."
"뭐?"
휴고는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휴고에게 부하가 확인시켜주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 도련님 도박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작업을 치기는커녕 작정하고 달려들어도 도박사들이 못 이기는데 어쩌죠?"
"...!"
****
도박사는 악마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면 이리될 수 있는 거지?
아니, 이게 애초에 가능한가?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정신줄을 부여잡은 도박사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크, 크림슨 로즈입니다."
"나도 크림슨 로즈다."
심하게 떠는 도박사와 달리 루시안은 가볍게 카드를 내려놓았다.
질 생각은 조금도 안 하는 듯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내 승리군. 패는 똑같아도 카드의 숫자는 내가 조금 더 높으니까."
"...."
그 말에 도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안이 자신과 똑같은 패를 내놓은 게 벌써 다섯 번.
그리고 그때마다 약간의 숫자 차이로 승리하고 있다.
더 높은 패를 내면 모를까 매번 똑같은 패로 상대를 농락한다?
수십 년 도박판에서 구른 그조차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져, 졌습니다."
"벌써 그만두려고? 재미 좋았는데."
루시안은 입맛을 다시며 올려놓은 칩을 쓸어갔다.
이미 산처럼 쌓인 칩의 산은 한층 더 높아졌다.
주변의 다른 도박꾼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 저게 다 뭐야?"
"뭐긴 뭐야. 전부 저 도련님이 딴 칩이지. 저게 저만큼 쌓이기도 하네."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그냥 손기술인가?"
"바로 옆에서 봐도 뭘 하는지 모르겠던데."
"사슴 공자라더니 꾼이 따로 없구만."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도박장을 관리하는 에릭이 얼굴을 찌푸렸다.
애송이 도련님 상대로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이를 갈던 에릭은 이내 축 늘어져 있는 도박사의 멱살을 쥐고 구석으로 향했다.
"이 미친 새끼가! 졌습니다는 뭔 놈의 졌습니다야? 다시 해서 잃은 만큼 복구하라고!"
"불가능합니다. 저 도련님이 한 수 위인데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너, 죽고 싶냐? 이대로 물러서면 네 손이 멀쩡할 것 같아?"
"손이 아니라 팔을 자르셔도 소용없습니다. 더 잃고 모가지가 날아가느니 팔로 끝낼 수 있는 지금 그만두렵니다."
아무리 협박해도 도박사가 축 늘어져 있자 에릭은 미칠 지경이었다.
휴고에게 연락은 했지만, 이렇게 많이 잃은 이상 자신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
최소한 휴고가 오기 전에 잃은 금액을 약간은 되찾아 와야 했다.
"한심한 놈."
"두, 두목!"
하지만 휴고의 방문은 에릭의 예상보다 빨랐다.
보고 받은 것보다 더 많이 쌓인 칩을 보며 휴고가 혀를 찼다.
"잘 한다. 믿고 맡겨놨더니 이 꼴은 뭐냐? 조직의 자금을 다 거덜 낼 셈이냐?"
"두목, 그게 아니라...."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하여간 믿었던 내가 병신이지."
차가운 목소리에 에릭은 눈을 질끈 감으며 물러섰다.
그래도 더 잃기 전에 휴고가 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휴고라면 저 애송이 도련님이 무슨 수를 쓰든 삼킨 돈을 도로 뱉어내게 할 수 있을 테니까.
****
한스는 멍하니 쌓인 칩과 루시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털리긴커녕 오히려 도박사를 탈탈 털어버리다니.
도련님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도련님, 정말로 마법을 쓰신 겁니까?"
"마법은 무슨. 그냥 기술이지."
"도박 기술은 또 어디서 배우신 건데요?"
"그냥저냥 어쩌다보니."
루시안은 카드패를 만지작거리며 한스의 질문을 얼버무렸다.
실은 전생에서 어느 외팔이 기사를 구해주고 배운 기술이다.
기사는 역전의 용사 같은 외모와 달리 소심한 겁쟁이였으나 도박 기술 하나만은 초일류였다.
다만 기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고위 귀족들의 도박판에 끼었다가 간파되어 팔이 잘렸다고 했다.
평소에 호적수랑 대결하다가 잘렸다고 했기에 진실을 말해줬을 때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래도 성격은 꽤 괜찮은 인간이었는데 말이지. 그놈의 도박이 뭐라고.'
"도련님, 잠깐 저 좀 보시겠습니까?"
쓴웃음을 짓는 루시안의 귀에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더 큰 근육질의 남자가 보였다.
눈에서 입술 아래까지 이어지는 인상적인 흉터에 루시안이 미소지었다.
'드디어 오셨군.'
흑상어 휴고.
뒷골목 불량배 출신으로 시작했으나 후일 다섯 영지의 암흑가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인물.
난세가 도래하자 스스로 남작을 참칭하며 일어서서 당당히 군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출신 때문에 주변에서 수많은 무시와 경멸을 받았으나 그만큼 수완도 뛰어난 걸로 유명했다.
루시안이 죽을 때까지도 세력을 멀쩡히 유지했으니 헛소문은 아니리라.
잠깐 칩의 산을 바라보던 휴고는 흉터를 씰룩거리며 루시안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실력이 대단하신 것 같은데, 이런 작은 판에서 놀지 말고 큰판으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큰판이라?"
"위쪽에 큰손이신 분들만 이용하는 판이 따로 있습니다. 거기서는 한 판에 지금 도련님께서 모으신 칩만큼의 액수가 오락가락하지요."
"오호라."
루시안은 흥미가 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 반응을 본 휴고는 히죽 웃다가 이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니 안 되겠군요."
"뭣이? 실컷 꼬드겨 놓고 왜 갑자기 딴소리냐?"
"위층은 액수도 커지지만 그만큼 판을 벌이시는 분들의 실력도 뛰어납니다. 도박장은 손님의 즐거움을 위해 있는 곳이니만큼 흥을 깰만한 짓은 안 하는 게 좋겠군요."
"내가 진다고? 이 루시안 발데크가? 이 쌓인 칩들을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오느냐!"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오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건방진 놈! 당장 안내해라! 큰손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어디 솜씨 좀 봐야겠다!"
짐짓 화난 척을 하며 루시안이 일어서자 휴고가 난처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도련님께서 그토록 바라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단, 잃으신 금액을 돌려드릴 수는 없으니 그 점은 양해해주십시오."
"내가 그리 구차한 짓을 할 것 같으냐? 쓸데없는 걱정 말고 안내나 해라!"
"송구합니다. 당장 안내해드릴테니 분노를 가라앉히시지요."
휴고는 쩔쩔매는 연기를 하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짧은 찰나 입가에 맺히는 미소는 숨길 수 없었다.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흑상어 휴고도 애송이 시절은 어쩔 수 없군.'
달리 말하자면 아직은 루시안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뜻.
새삼 루시안은 과거로 돌아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다 한들 다 성장하지 못한 새싹이라면 그 전에 마음껏 품에 안거나 꺾을 수 있다는 뜻.
그 첫 번째 시험대는 눈앞의 흑상어가 되리라.
****
한스를 아래에 대기시킨 루시안은 3층으로 올라왔다.
확실히 특별한 고객 전용인 건 맞는지 1층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잘 꾸며져 있었다.
방안에 들어오자 이미 한창 판을 벌이던 세 사람이 루시안을 보고 눈을 끔뻑였다.
"뭐야? 신참인가?"
"나이가 너무 어린데."
"휴고, 어디서 애송이를 데리고 온 건가?"
"말조심하십시오. 이분이 바로 발자크 대공의 셋째 아드님이신 루시안 도련님입니다."
"헛! 이런 실수를...!"
휴고의 말에 다른 이들이 허둥지둥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그들은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두 명은 꽤 큰 상단의 후계자였고 다른 한 명은 자작가의 차남이라 했다.
각자의 소개를 들은 루시안은 코웃음을 쳤다.
'지랄한다. 급조한 설정이라지만 참 성의도 없군.'
화려한 수도라면 모를까 유흥가의 규모로 따지면 그리 크지 않은 영지다.
상단의 후계자나 자작가의 차남쯤 되면 더 질펀하게 놀 수 있는 장소로 갈 터.
셋 다 휴고의 부하들을 적당히 분장시킨 후 사칭하는 게 분명했다.
아마 루시안을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으로 봤기에 설정에도 공을 들이지 않았으리라.
루시안은 속아넘어가는 척하면서 남은 자리에 끼었다.
"자, 모처럼 새로운 분이 더해지셨으니 판을 새로 벌이도록 합시다."
"평소처럼 제가 심판을 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그 전에...."
휴고는 히죽 웃으며 카드들을 손으로 탁탁 털었다,
그러자 옅게 묻어있던 마력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속임수는 쓰지 않도록 하지요. 게임은 정정당당해야 재밌지 않겠습니까?"
'역시 눈치챘군.'
루시안이 아래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마력을 이용한 속임수 덕이었다.
카드마다 마력의 흔적을 조금씩 다르게 묻힌 후 적당한 손기술과 조합하는 기술.
마력을 볼 수 없는 일반인 상대로는 무적이나 마찬가지지만 순환을 통해 마력의 감지가 가능한 이를 상대로는 쓸모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루시안은 일부러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제 시작하지요! 패를 돌리겠습니다!"
휴고는 루시안의 반응에 만족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결과는 연전연패.
속임수를 못 쓰니 진짜 도박사들과의 대결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루시안이 벌어들인 칩을 죄다 잃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건 말도 안 돼! 한 판 더!"
"도련님, 이미 칩이 떨어지셨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칩이 없으면 빌릴 수도 있다고 들었다만."
루시안이 눈치를 보며 묻자 휴고가 히죽 웃었다.
지금껏 기다리던 말이었다.
"물론 가능하지요. 얼마나 빌리시겠습니까?"
"가능한 한 최대로! 빌려줄 수 있는 만큼 전부다!"
"하하하! 화끈하시군요! 여기 있습니다!"
멍청한 도련님 같으니라고.
상황이 너무 순조롭게 풀리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딴에는 한 방에 만회할 생각이겠지만 생기는 건 귀족 도련님 용돈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뿐이리라.
휴고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카드를 돌렸다.
이윽고 마지막 패를 공개할 때가 되자 루시안은 심하게 머뭇거렸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패를 공개해주십시오."
"아니, 그게... 패가 좀 안 좋아서...."
"좋든 안 좋든 패를 내셔야 게임이 이어질 거 아닙니까? 설마 이대로 없던 판으로 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정말 꼭 봐야겠나?"
"도련님이 패배로 끝내신다면 상관없습니다만."
"하아! 어쩔 수 없군. 이게 내 패일세."
루시안은 휴고의 재촉에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아무 조합도 아닌 무효패에 휴고가 재차 웃음을 터트리려던 때였다.
"참, 자네 마약 사업은 잘 되어가나? 최근 지하에서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본격적인 판매는 언제부터 시작하나?"
"...예?"
마치 아침밥이 뭐냐 물어보는 듯한 태도에 휴고가 눈을 끔뻑였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휴고를 쳐다보며 루시안이 가볍게 말했다.
"자네 로그란 후작가에서 사주받았잖나? 마약 유통으로 우리 영지를 좀 휘저어 달라고 말이야. 그분도 참 치졸하시다니까. 후작씩이나 되어서 그딴 뒷공작이나 하다니."
"...!"
"그나저나 두둑하게 받은 지원금으로 이웃 영지에 제조소까지 차렸으니 자네도 참 대단해. 걸렸다간 주변의 모든 가문이 자네 사지를 찢어 죽이려 할 텐데. 하하하!"
루시안의 웃음소리가 퍼지는 와중 휴고를 포함한 네 사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입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던 토끼가 사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