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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화

하인들은 물론이고 루시안마저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항상 근엄하던 지그문트 대공이 저리 체면을 벗어던진 채 웃다니.

한참 웃던 대공은 이내 옅게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면전에서 대놓고 반박당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아버지께 가주 자리를 이어받고 나서 한 번도 없었거늘, 설마 너한테 그런 소릴 들을 줄이야!"

"불편하셨다면 죄송할 따름입니다."

"내가 지금 기분이 나빠 보이느냐?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었다! 푸핫!"

몇 번 더 웃고 난 다음에야 대공은 간신히 웃음을 가라앉혔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미소를 지은 지그문트 대공이 입을 열었다.

"좋은 대답이구나. 남자라면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을 가져야 하는 법. 겨우 말 한마디에 이리저리 휘둘려서야 사내라 할 수 없지."

그 말에 루시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시험이었습니까?"

"그래, 시험이었지. 네가 겨우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지 아닌지 보고 싶었으니까."

어쩐지.

지그문트라면 루시안 혼자 이 일을 처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비록 넷째라지만 상대는 로그란 후작의 친자식.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라도 경호 자체는 소수나마 정예로 붙여줬겠지.

그에 비해 루시안은 휘하에 기사 하나 없는 상황.

욕심을 내서 어설픈 준비로 덮쳤다가는 본전도 못 건질 게 뻔했다.

이런 사정을 모를 사람도 아닌데 이상하게 과도한 기대를 한다 했더니만 시험이었다니.

"네 말대로다. 공에 눈이 멀어 여력도 안 되는 일에 손을 대는 건 멍청한 짓일 뿐이야. 머저리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중요한 건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부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

"스스로 정답을 찾지 못하고 헤맨다면 모를까, 윗사람의 눈치에 따라 이리저리 답을 바꾼다면 가주의 그릇 이전에 사내라 하기도 부족한 놈이다. 자기 말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누가 믿고 따르겠느냐?"

루시안은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의 의견에 휘둘리는 자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자보다 더 믿을 수가 없는 법이다.

후자는 진심을 말할 때라도 있지만, 전자는 진심이고 나발이고 언제든 말이 뒤집히니까.

"네 형들하고도 이와 비슷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첫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길을 나아갔지. 둘째는 이것저것 재어본 후에 절충안을 택했고. 하지만 정면에서 반박한 건 네가 처음이구나."

대공은 유쾌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누였다.

"어쨌거나 훌륭한 대답이었다. 네가 원하는 만큼 지원해주도록 하마. 어느 정도의 지원을 원하느냐?"

루시안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병력이 너무 많으면 수상쩍게 여길 테니 최대한 이목을 피해 소수정예로 움직여야 합니다. 문제는 상대의 경호도 소수정예 체제일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자칫하면 역으로 당할 수 있다는 소리군."

"예. 최악의 경우 지원군이 없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될 겁니다. 함정을 파고 기습까지 했는데도 후작가의 정예에게 패배한 꼴이니까요."

그러니 그런 꼴이 나지 않도록 최정예 병력을 달라는 소리.

루시안의 말뜻을 알아차린 대공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맹랑한 녀석 같으니. 내가 알아서 제일 좋은 패를 내놓으라 이거냐?"

"그럴 리가요. 전 그저 발데크의 명예를 위해...."

"흑사자 다섯을 보내주마."

"...!?"

흑사자란 소리에 루시안이 눈을 부릅떴다.

오직 가주만이 부릴 수 있다는 발데크의 그림자들.

가라사대 흑사자 하나가 기사 셋을 정면에서 도륙 내는 실력자라던가.

경비병 시절엔 동기들이 흑사자의 전설을 곧잘 안주처럼 꺼내곤 했다.

하지만 직접 목격하진 못했다기에 그저 실없는 괴담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짜 존재했다고?'

"왜? 겨우 다섯 명으로는 충분치 않더냐?"

"아, 아닙니다."

대공의 말에 루시안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충분치 않기는 무슨.

흑사자에 대한 소문이 반만 사실이더라도 차고 넘치는 전력이었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루시안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반드시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기대하마. 그리고 너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봐야 할 것이다."

물러서려는 루시안을 향해 대공이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발데크의 주인이 되면 어떤 힘이 주어지는지 말이다."

****

일주일 후, 루시안은 부하들을 이끌고 베스트라로 향했다.

제일 가까운 영지였던 만큼 도착하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엉망인 도시로군."

베스트라를 훑어보던 루시안이 혀를 찼다.

급격히 확장된 도시가 중구난방인 건 드물지도 않은 일.

하지만 베스트라는 그 엉망인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지어지다 만 건물이 왜 이리 많아? 심지어 몇 개는 대놓고 폐가네."

"속아서 오는 놈들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루시안의 의문을 풀어준 건 한스였다.

"아시다시피 여긴 켈하임에서 가까운 곳임에도 떨어지는 떡고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인은 그런 사실을 모르죠. 지도만 보는 인간들은 대도시에 가까운 만큼 중계 도시로 번성할 거라 착각하거든요."

"...설마 저 집들, 전부 사기당한 인간들 거냐?"

"바로 그겁니다."

루시안은 머리를 탁 짚었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건물에 비해 인구가 적다 싶더라니.

목 좋은 자리라고 사기를 당해서 왔다가 얼마 후에 진실을 알고 귀향해버린 거였나.

왜 이리 올리다 만 건물이 많은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완성되기 전에 사기당한 사실을 알았다면 더 지을 기력이 없었겠지.

"이런 데서는 건물 한둘 생겼다 사라져도 모르겠군."

"그게 제가 제조소를 지을 장소로 여길 고른 이유였습니다. 도련님께 들키긴 했습니다만."

뒤에서 루시안의 말을 받던 휴고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에는 대공에게도 안 들킨 계획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사슴 공자한테 들킬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어떻게 알아내셨는지 얘기 안 해주실 겁니까? 한스 선배도 모르시는 것 같던데."

"나중에 알려줄 테니 지금은 덫에 걸린 짐승을 잡는 데나 집중하자고. 준비는 어때?"

"완벽합니다. 남은 건 지원군뿐입니다만...."

휴고의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충 눈치챈 루시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 도움을 받은 게 그리 불만이냐?"

"아닙니다. 제가 가진 힘만으로는 한참 부족한 게 사실이니까요. 그저... 힘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입니다. 힘만 충분했다면 이번 일을 오롯이 도련님의 공적으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 급할 거 없어. 난 겨우 열여섯이고, 너도 기껏해야 서른을 좀 넘긴 수준이잖아. 기사가 될 기회는 앞으로도 넘칠 테니 차근차근 올라가자고."

말이 끝나자 휴고는 복잡한 얼굴으로 루시안을 쳐다봤다.

아주 약간의 원망과 한탄, 억울함이 섞인 듯한 표정.

왜 저러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 한스가 옆에서 루시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저, 도련님."

"응?"

"휴고는 올해 스물셋이라고 하던데요. 서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

루시안은 다시 휴고를 쳐다봤다.

꿈틀거리는 흉터, 덥수룩한 수염, 거친 피부.

누가 봐도 30살 이하로는 안 쳐줄 얼굴.

그런데 저 얼굴로 스물셋이라니.

"휴고."

"예, 도련님."

"그리 급할 거 없다. 난 겨우 열여섯이고 너도 기껏해야 스물을 좀 넘긴 수준이니...."

"정정하지 마십시오. 더 비참합니다"

"크흐흠! 그나저나 흑사자가 늦는구만.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지."

"삼공자."

갑자기 뒤에서 들린 소리에 세 사람이 일제히 흠칫했다.

특히 휴고는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나 검을 뽑기도 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뽑지 마라."

"...!?"

손등을 묵직하게 누르는 감촉에 휴고가 눈을 크게 떴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이리 근처에 올 때까지 기척을 못 느끼다니.

하지만 고개를 돌린 휴고의 눈에 들어온 건 겨우 두 명이 아니었다.

아무런 기척 없이 다가온 그림자는 무려 다섯.

심지어 진즉 검을 휘둘러 벨 수 있는 간격 안에 들어와 있었다.

모두가 당혹스러워하는 와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흑사자인가?"

"예. 대공 전하의 명령에 따라 삼공자를 지원하러 왔습니다."

"그거 고맙군. 그런데 괜찮다면 내 하인에게서 손 좀 떼주지 않겠나? 그렇게 계속 누르면 검을 놓고 싶어도 못 놓을 텐데."

"그리 하지요."

루시안의 말에 휴고를 누르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휴고가 비켜서자 비로소 흑사자 전원이 눈에 들어왔다.

무장은 겨우 검 한 자루, 방어구는 얇은 가죽 갑옷이 전부인 이들.

언뜻 보기에는 대도시에 널려있는 용병 중 하나로 착각할 만한 복색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결코 용병의 것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문득 루시안은 기억 속에 묻혀있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이 녀석들, 내 목을 자른 그놈이랑 분위기가 비슷하다.'

목이 베이는 그 순간까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던 검격.

설마 이들 모두가 놈이랑 비슷한 경지인 건가?

루시안은 무심코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만약 이들 모두가 정말로 그 기사와 동등한 실력이라면.

"대공 전하께서는 베스트라에 도착한 이후 삼공자의 말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시지요."

이번 일은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가 없는 셈이었다.

흑사자들을 보는 루시안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

루시안이 흑사자들에게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사냥감이 등장할 때까지 지정된 장소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신호를 주면 일제히 공격해라."

"죽이면 됩니까?"

"입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가능하면 생포하는 편이 낫겠지. 특히 후작의 아들은 최대한 상처 없이 제압하고."

이런 더러운 일에 동원되었다면 분명 입이 무거운 놈들이겠지.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운이 좋다면 살린 놈 중 하나가 후작에 대해 술술 털어놓을지도 모른다.

물론 운이 좋을 때의 이야기니 크게 기대해선 안 되겠지만.

원래 목적이던 후작의 넷째 아들을 사로잡는 것만 달성하면 나머지는 덤이었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된다. 상황을 보고 재량껏 판단하도록."

"예."

흑사자들의 담담한 대답에도 루시안은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이들 중 본인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 처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이었으나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진 않았다.

정말 오만인지, 아니면 실력에 걸맞은 자신감인지는 곧 밝혀질 테니까.

-여기가 맞는 것이냐? 외관부터 허름하기 짝이 없는데 설마 다른 데로 자금을 빼돌린 건 아니겠지?

-남들의 이목을 속여야 하는데 당연히 허름한 외관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부는 충실하니 직접 확인해보시지요.

조금씩 가까워지는 누군가와 휴고의 대화 소리에 루시안도 적당한 장소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이 제조소 안에 발을 들였다.

유인하기로 한 로그란 후작의 넷째와 그 호위들일 터.

루시안은 사냥감을 확인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검귀 펠릭스!?'

21화

순간 잘못 봤나 싶어 루시안은 눈을 부비고 다시 봤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봐도 틀림없는 검귀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후작의 아들 주위에 있는 열 명의 기사와 두 명의 하녀 사이에.

문제는 펠릭스의 복장이었다.

'웬 하녀복이야?'

백번 양보해서 펠릭스가 후작의 아들이거나 젊은 기사 중 하나였다면 이해했으리라.

용병으로 구르면서도 검술에는 절도가 있었고 묘한 귀티가 나던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후작의 아들도, 기사도 아닌 하녀라니?

원래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미남자긴 했지만 이건 대체.

'...설마 나와 만날 때는 남장을 하고 있던 건가?'

문득 루시안은 자신의 가정이 처음부터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올려 보면 애초부터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곱상한 얼굴이었다.

굳이 여장해서 하녀가 되었다기보다는 원래 여자였다가 용병이 될 때 남장을 했다는 편이 앞뒤가 맞을 터.

갑자기 밝혀진 옛 지인의 비밀에 머리가 복잡해질 무렵이었다.

"과연, 준비는 확실히 해뒀군. 만든 건 하나도 없지만 말이야."

"오늘이 첫 제조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직접 보시겠다고 하셔서 뒤로 미뤘을 뿐인데 마치 제 책임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놈, 말을 조심해라. 내가 네 친구인 줄 아느냐?"

휴고와 사냥감의 대화에 루시안은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검귀의 비밀이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은 놈의 포획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루시안은 펠릭스에게서 시선을 돌려 후작의 아들을 쳐다봤다.

'어리군. 나이는 나와 비슷한 정도인가?'

필립 로그란.

후작의 넷째 아들로 후계자 경쟁에는 참여조차 하지 않은 녀석.

형제들 간의 힘의 균형이 비등함에도 겁을 먹고 계승권을 바로 포기했다 들었다.

그래서 소심한 놈이 올 줄 알았더니만 휴고에게 저리 기세등등한 태도라니.

딱 보기에도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애송이였다.

"쓸데없는 소리는 관두고 제조를 시작해라! 나는 네놈이 일을 똑바로 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온 거지 잡담이나 하러 온 게 아니니까 말이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재료를 꺼내겠습니다."

짝짝

휴고가 손뼉을 두 번 치자 휘하에 있는 부하들이 냉큼 상자 쪽으로 향했다.

언뜻 보면 약의 재료를 가져오기 위해 이동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뒤로 빠지는 행동이었다.

휴고를 제외한 나머지가 후작가 일행에게서 충분히 멀어진 순간이었다.

"가라."

파파팟

"뭐냐!?"

신호와 동시에 흑사자 다섯이 숨어있던 장소에서 튀어 나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필립이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호위인 기사들은 만일을 대비하고 있었는지 빠르게 검을 뽑아 대응했다.

"어디서 감히...!"

푸확

"컥!"

호위로서는 더없이 완벽한 대응이었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아무리 정예라 할지라도 흑사자에 비할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두 배의 숫자를 가진 기사들은 흑사자의 일격조차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나가떨어졌다.

털썩

"크으윽!"

1분도 채 되지 않아 열 명의 기사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을 흘렸다.

누군가는 검 손잡이로 이마를 얻어맞아 기절했고, 누군가는 발목의 힘줄이 베여 서지도 못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상대를 무력화한 것이다.

같은 기사라 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실력 차이였다.

"이 머저리들이 지금 뭣들 하는 거냐! 서서 싸우란 말이다!"

얼씨구.

당장 도망가기도 부족한 시간에 제 기사들이나 타박하는 꼴이라니.

루시안은 혀를 차면서 흑사자 중 하나에게 명령했다.

"조용히 시켜서 데려오도록."

"예, 삼공자."

철컥

명령을 받은 흑사자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필립을 향해 다가갔다.

검집째로 후려패서 기절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한창 분노하던 필립은 그제야 기겁하며 소리쳤다.

"페, 펠리시아! 뭐하냐! 날 지켜! 검 휘두르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 년이면 이럴 때라도 도움이 되란 말이다!"

"...후우."

필립의 꼴사나운 외침에 하녀 중 한 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펠리시아라 불린 하녀는 벌벌 떠는 다른 하녀를 밀치고 옆에 있던 검을 주워들었다.

방금 전 흑사자가 쓰러뜨린 기사의 손에서 날려버린 검 중 하나였다.

"쯧, 괜히 힘 빼게 만드는군."

필립에게 다가가던 흑사자가 혀를 찼다.

기사도 아니고 일개 하녀가 검으로 뭘 하겠다는 건가?

"비켜라."

흑사자는 가볍게 손에 들려있는 검을 검집째 휘둘렀다.

궤적은 곧지만 같은 기사라도 받아내기 힘들 만큼 빠른 일격.

그러나 휘둘러진 검은 펠리시아를 맞추지 못하고 허공을 갈랐다.

"무슨...!"

뻐억

"컥!"

선명히 울려퍼지는 타격음과 함께 흑사자가 몸을 휘청거렸다.

아래로 몸을 숙였던 펠리시아가 치솟아 오르며 폼멜로 턱을 올려친 것이다.

제대로 들어갔는지 어떻게든 몸을 겨누려던 흑사자는 이내 뒤로 쓰러졌다.

****

털썩

"...."

"...."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흑사자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났다.

"이런 미친!"

"하녀가 무슨 놈의...!"

남은 네 명의 흑사자는 일제히 달려들 듯한 기세로 펠리시아를 노려봤다.

하지만 끝끝내 동시에 덤비지는 않았다.

하녀를 상대로 흑사자 여럿이 달려든다면 수치일 뿐이니까.

"내가 간다."

이를 갈며 다른 누군가가 펠리시아에게 향했다.

쓰러진 동료와 달리 방심은 없었으나 반드시 일격에 끝낼 속셈인 것 같았다.

펠리시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푸확

"큽!?"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두 번째 흑사자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언제 빼 들었는지 흑사자는 이미 검으로 펠리시아가 있는 쪽을 벤 후였다.

그러나 펠리시아는 아슬아슬하게 피한 후 흑사자의 각반을 후려친 상태.

두 번이나 수치를 당한 흑사자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뭔! 그 공격에 반응했다고!?"

"말도 안 돼! 저 하녀가 우리와 비슷한 경지란 말이야!?"

"반응한 게 아니야. 미리 공격을 예상해서 움직인 거다."

"예?"

어리둥절해 하는 흑사자들을 향해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너희들 움직임 따윈 보지도 못했어. 그저 언제 움직일지, 어느 정도의 속도일지 예상하고 미리 지정한 대로 움직인 거지."

"...그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했으니 저러고 있는 거지. 잘 봐."

루시안은 턱으로 펠리시아를 가리켰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은 펠리시아의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마에 가득 맺힌 땀방울과 움찔거리며 경련하는 어깨.

단 두 번 공격을 피했을 뿐이건만 척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억지로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과하게 마력을 운용했지? 지금 근육이 찢어질 듯 아플 텐데, 괜찮나?"

"...."

펠리시아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동의나 마찬가지인 침묵에 뒤에 숨어있던 필립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페, 펠리시아! 죽더라도 날 지키고 죽어라! 그게 네 일이다! 알았지!?"

"닥쳐, 병신아. 정신 흐트러지니까 가만히 좀 있어."

"뭐, 뭐? 이 반편이가 어디서...!"

필립을 무시하며 펠리시아는 재차 자세를 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몸은 숨길 수 없었지만, 아직 한 번 정도는 반격할 기력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욱한 흑사자가 검을 뽑기 직전, 루시안이 앞으로 나섰다.

"비키도록. 내가 하겠다."

"삼공자!? 이건 제 싸움입니다!"

"그래서 죽일 생각인가? 흑사자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는 없으니 여기서 입을 막겠다?"

"분명 저희에게 재량권을 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 재량권은 철회하겠다. 미안하지만 이런 훌륭한 인재를 자네 체면 하나 때문에 죽일 수는 없거든. 살려서 거둬야겠어."

"그럼 제 손으로 제압해서 건네드리겠습니다."

"손이 미끄러졌다는 소릴 들을 것 같으니 거절하지. 뒤로 물러서도록."

흑사자는 분한 듯이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뒤로 물러섰다.

대공의 명을 받은 이상 루시안의 말에는 따라야만 했으니까.

다만 물러서면서 한마디를 남기는 건 잊지 않았다.

"조심하십시오. 직접 제압하시기로 한 이상 만약의 경우 저희가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좋게 돌려 말하긴 했지만, 굳이 앞에 나섰으니 다치더라도 본인 책임이라는 경고였다.

루시안은 대답 없이 피식 웃고는 굴러다니는 검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

'약하다.'

펠리시아는 루시안을 보자마자 대략적인 수준을 알 수 있었다.

근육량은 형편없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조차 생기지 않은 상태.

순수한 힘과 속도로 따지자면 앞서 싸웠던 두 사람보다 아득히 아래인 게 확실했다.

무엇보다도 방금 전 대화로 봐서는 눈앞에 있는 이 소년이야말로 대장일 터.

'인질로 잡으면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어.'

로그란 후작가의 명예나 뒤에 있는 머저리의 목숨 따윈 전혀 관심 없다.

하지만 남의 영지에서 이런 대형 사고를 친 이상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고매하신 귀족 나리들과 달리 펠리시아의 목숨은 언제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으니 말이다.

"후웁."

욱신거리는 근육에 다시 한번 마력을 흘려 넣었다.

다행히 아직 두세 번 정도라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적어도 눈앞의 귀족 도련님을 제압하긴 충분하리라.

"준비는 끝났나?"

"...."

펠리시아는 상대의 말에 눈을 찌푸렸다.

약해빠진 귀족 도련님의 여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몸 상태가 조금 안 좋아졌다고 해서 자기가 이길 줄 아는 건가?

'어디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가나 한번 보자고.'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펠리시아가 자세를 잡았다.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상대를 끌어들인 후 역습을 날릴 생각이었다.

상대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바로 펠리시아를 공격했다.

후웅

'겨우 사선베기? 나 참.'

뻔하디뻔한 공격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래서야 미약하게나마 경계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가볍게 공격을 피한 후 펠리시아가 검을 휘두르려던 찰나였다.

퍼억

"...!"

머리가 울리는 충격과 함께 펠리시아가 무릎을 꿇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직전 어느새 사선에서 아래로 경로를 꺾은 검이 보였다.

검의 기괴한 경로를 보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내 기술인데...?'

대체 무슨 수로.

의문을 완전히 떠올리기도 전에 펠리시아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좋아, 끝났군."

"...."

루시안을 바라보는 흑사자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분명 '강하다'고 말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상대였다.

겨우 두 번 흑기사와 비슷한 속력을 낸 것만으로도 근육에 경련이 왔으니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것도 확실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나 흑사자 중 한 명은 때려눕히고 다른 한 명에겐 유효타를 먹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추측이지만 초전이라면 어지간한 기사와 정면에서 붙더라도 전혀 밀리지 않았으리라.

'그런 실력자에게 삼공자가 단 한 합으로 이겼다고?'

기가 막혔다.

검을 배운지 두 달도 안 된 삼공자다.

사공자한테 이겼다는 소릴 들었어도 피차 검의 초보자였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겼건만.

흑사자조차 몰랐던 상대의 기술을 한순간에 간파하고 오히려 역공까지 가해서 한 방에 끝냈다.

심지어 상대의 기술을 그대로 모방해서 원하던 대로 죽이지 않고 제압하여 데려왔으니.

순수한 전투 센스라면 오히려 흑사자를 뛰어넘는 수준이라 봐도 무방했다.

'...발톱을 감춘 사자였다는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군.'

흑사자들의 시선이 달라지는 와중 루시안은 쓰러진 펠리시아를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자기보다 키 큰 상대가 사선으로 벨 때 무조건 숙여서 피하는 버릇은 역시 아직 못 고쳤네. 덕분에 쉽게 제압했어.'

22화

제대로 된 스승 없이 검을 배운 자들은 나쁜 버릇 하나둘 정도는 생기기 마련이다.

펠릭스의 경우 상대가 자신보다 크면 무조건 사선 베기를 아래로 피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래로 피하면 상대의 품에 파고들어 빠르게 반격하기 쉬웠던 탓이다.

하지만 매번 똑같은 방식을 쓴다면 주변에서도 간파하기 마련.

루시안은 우연히 같이 일하게 된 펠릭스의 전투를 보고 그 점을 지적했다.

-정말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중에 큰일 날 뻔했군.

몇 번이고 유용하게 써온 기술을 지적했기에 기분이 나빠질 만도 했건만, 펠릭스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즉시 다른 대응법을 몇 개 생각해 낸 후 그때그때 바꿔 사용하는 식으로 검술을 고쳤다.

당시 루시안은 그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약점을 알아도 고치는 방법을 몰라 그대로 두는 용병이 널려있거늘 며칠 만에 완벽히 보완하다니.

진정한 천재란 이런 인간을 두고 하는 소리구나 싶었다.

-보답으로 네 검술을 좀 고쳐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자칫하면 심각한 무례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검술을 고쳐준다는 것 자체가 자기 수준이 상대보다 높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은 흔쾌히 펠릭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구멍이 숭숭 뚫린 독학 검술인 데다 가르쳐주겠다는 상대는 세기의 천재 아닌가.

조금이라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었다.

-벨 때의 기세는 좋지만, 자세가 쉽게 흐트러지는 게 문제야. 한 번의 검격에 모든 힘을 싣기보다는 흘리고 반격하는 데 집중하는 편이 좋겠어.

펠릭스가 지적한 부분은 상당히 많았지만, 전부 루시안이 고민하던 부분이라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기분이었다.

엉망진창이던 루시안의 검술은 그날 이후 비로소 검식이라 불러줄 만한 수준이 되었다.

같은 고용주 아래서 일을 몇 번 같이했을 뿐이지만, 그 잠깐의 만남이 없었다면 루시안은 진즉 전장에서 죽었으리라.

'출세해서 꼭 은혜를 갚겠다고 했는데 펠릭스가 더 출세해버려서 흐지부지됐지.'

듣자 하니 헤어지고 몇 년 후에 그 재능을 알아본 변경백에 의해 정식 기사로 서임 받았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루시안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낡은 소식임에도 루시안의 처지는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사실 당연하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말이야. 재능을 알아보긴 개뿔. 그 변경백도 눈이 삐었지.'

펠릭스의 재능에 겨우 기사 서임이라니.

준남작에 근위 기사 자리까지 줘도 한참을 부족할 판인데 말도 안 되게 후려쳤다.

변경백쯤 되면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을 터.

모든 걸 알면서도 그토록 싼 값에 후려친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성별 때문인가.'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하기야 여기사란 명예직이 아닌 이상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

귀족 영애라면 아슬아슬 가능할지 몰라도 평민 출신 여성이 기사 서임을 받는 건 어림도 없다.

여성임을 숨기고 서임해준 것만으로도 펠릭스, 아니 펠리시아에겐 감지덕지한 일이었겠지.

장식용으로 세워두는 게 아니라 전장에서 공을 세워 더욱 출세할 기회를 줬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그녀도 루시안과 별다를 바 없는 불행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출생 때문에 하늘이 내려준 재능을 그토록 싸게 팔아넘겨야 했으니까.

'하지만 더는 아니지.'

이번 생에서 펠리시아가 자신의 재능을 싸게 팔 일은 없을 거다.

전생에서 약점이었던 부분을 루시안이 다 해결해줄 생각이었으니까.

그 대신 루시안의 곁에서 검을 휘둘러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휴고, 이 녀석 좀 데려가."

"...."

"휴고? 뭐해?"

"아, 예. 죄송합니다. 취급은 어떻게 할까요?"

"날뛰지 못하게 묶어두고 감시는 엄중하게. 하지만 대우는 부족함이 없게."

"알겠습니다."

휴고는 다른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펠리시아를 옮겼다.

남은 건 쓰러져서 끙끙거리는 기사들과 하녀 하나, 후작의 아들인 필립뿐.

도망갈 길이 완전히 막힌 필립은 분노로 몸을 떨며 휴고를 향해 소리쳤다.

"이 뒷골목 쓰레기 놈이 날 팔아넘겨!? 감히 로그란 후작가를 배반하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도련님!"

사색이 된 기사들이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필립을 쳐다보았다.

"로그란 후작가라. 감히 발데크의 앞마당에 약을 팔아먹으려 한 배후가 어딘지 궁금했는데 그쪽이었나. 이거 심문할 수고를 덜었어."

"...!"

"지그문트 발데크의 삼남, 루시안 발데크가 적법한 권리로 네놈들을 추포하겠다.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저항하지 말도록."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필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발데크 대공의 자식 앞에서 약을 팔아먹은 배후를 후작가라 한 꼴이 아닌가.

이젠 무슨 변명을 덧붙이건 빼도박도 못할 판이었다.

"기, 기다려주시오. 그게 아니라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는 개뿔. 아버지 앞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고. 끌고 가."

"예, 삼공자."

뒤늦게 변명하려던 필립을 향해 흑사자들이 다가갔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안 필립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잠깐! 내 발로 가겠소!"

"뭐요?"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한들 나는 로그란 후작가의 사공자! 포로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요청하오!"

이왕 밝혀진 거 아예 가문의 덕을 보시겠다?

얄팍한 필립의 꿍꿍이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발로 가기 싫으면 그냥 붙들려 가시지. 아니면 내가 직접 정강이뼈를 부숴줄 테니까."

"...."

루시안의 싸늘한 대답에 필립은 꼬랑지를 내렸다.

****

필립과 그 일당을 포획한 루시안은 즉시 켈하임으로 향했다.

동시에 지그문트 대공에게 먼저 전령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몇 가지 준비를 요청했다.

-영민들을 불러모아 범인들이 연행되는 장면을 보여주십시오. 범인 스스로가 신분을 자백했으니 이 모든 게 로그란 후작가의 짓이라는 걸 알릴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베른하르트 놈도 발뺌하는 데 진땀 좀 흘리겠어!"

지그문트 대공은 제안을 받자마자 폭소를 터트리고는 즉시 영민들을 불러모았다.

켈하임에 거의 도착했을 때 필립 일당은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보고 당황했다.

이래서야 얼굴이 대놓고 팔릴 게 아닌가.

"루시안 공자! 저희를 구경거리로 삼으실 생각입니까!?"

"이건 아닙니다! 최소한의 명예라도 보존하게 해주십시오!"

"차라리 죽이시오! 이런 일을 당하느니 죽는 게 낫소!"

필립은 둘째치고 기사들이 격하게 항의했다.

암살도 아니고 마약의 제조 및 판매를 돕다 잡혀 왔다.

기사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명예이건만 그 사실을 만천하에 밝히겠다니.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걸 막기 위해서도 절로 필사적이 되었다.

하지만 루시안은 기사들의 태도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기사의 신분으로 약의 판매를 거든 이상 그대들에게 이미 명예는 없다. 없는 건 더럽혀질 수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걷도록. 진즉 구정물에 삭힌 걸레건만 먼지 하나 더 닦는 게 대수일까?"

"무슨...!"

"루시안 공자!"

루시안의 말에 두 기사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일에 손을 대고도 아직 양심이란 게 남아있던 모양이나 그것도 겨우 둘.

나머지 기사들은 여전히 그저 분노하며 자신을 모욕했다고 아우성쳤다.

'하기야 제정신이 박혀 있었다면 애초에 이 일 자체를 거절했겠지.'

한숨을 쉰 루시안은 가문에서 대공이 보내준 병력을 향해 명령했다.

"반항하지 못하게 붙잡아라. 이동하는 도중 반항하면 후려쳐도 된다."

"그, 명색이 기사인데 괜찮겠습니까?"

"약팔이 놈들이 기사는 뭔 기사. 신경 쓰지 말고 막 다루도록."

개개인의 원한은 사겠지만 어차피 버리는 일에 투입된 말단 기사들.

후작의 아들이면 모를까 이런 놈들 정도야 쉽게 잘라버릴 거다.

어떻게 대하든 후폭풍 따윈 전혀 없으니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놔, 놔라!"

"이놈들! 감히 기사에게!"

기사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흑사자에게 당한 상처로 서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으니까.

곧 우악스러운 병사들의 손길에 이끌린 채 필립 일당의 연행이 시작되었다.

"허, 이게 무슨 일이래? 기사 나리가 왜 병사들에게 끌려가?"

"마약을 제조하려다 잡혔다는군.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

"뭐? 기사가? 아니, 뭐가 아쉬워서 기사가 그딴 더러운 일에 손을 대?"

"듣자 하니 로그란 후작이 대공 전하를 싫어해서 몰래 벌인 일이라던데."

"심지어 저기 끌려가는 도련님은 그 아들이라면서?"

"세상에, 아들한테 약을 팔게 해? 후작 나리도 볼 장 다 봤구만."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수치스러움에 필립이 몸이 떨었다.

우습게도 그토록 모욕을 받았음에도 절대 저항은 하지 않았다.

가만히 수치를 견디는 게 저항하다 맞는 것보다 낫다 여기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미리 계획을 알아차리고 모조리 잡아들인 게 셋째 도련님이래."

"뭐? 그 사슴 공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되긴. 저 맨 앞에서 이끄시는 나리가 그분인 거 모르나?"

"죽다 살아나시더니 사람이 변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금 도둑질은 해도 씨앗 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역시 대공 전하의 아들인가 봐."

그 와중에 알음알음 루시안의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루시안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영민에게 더 잘보이도록 허리를 쭉 폈다.

이런 거창한 행사를 벌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루시안에 대한 인식 개선이었다.

소문이란 건 언제나 위보다는 아래에서 퍼져나가는 법.

이럴 때 적극적인 인식 개선을 하지 않는다면 사슴 공자라는 악명이 오래 남을 수도 있었다.

"대, 대공 전하!"

"전하시다!"

내성 입구로 향하는 길에 가까워지자 약간의 소란과 함께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자 루시안을 마중 나온 지그문트 대공이 보였다.

루시안은 말에서 내려 대공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루시안 발데크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필립 로그란 및 휘하 범죄에 가담한 이들을 압송했나이다! 마약의 제조 및 판매를 시도했으니 부디 엄중히 다스려 주소서!"

우렁찬 목소리에 영민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리 당찬 도련님이 그 사슴 공자라고?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바뀌는 걸 느낀 대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요 맹랑한 녀석. 이게 노림수였더냐?'

'겸사겸사입니다. 설마 이 정도도 안 된다고 하시진 않으시겠죠?"

루시안이 눈을 찡긋하자 대공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모두가 듣도록 크게 소리쳤다.

"역시 내 아들이구나! 참으로 훌륭하다! 차후 포상을 내릴 것이니 지친 몸을 누이도록 해라!"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평소 진중하던 대공이 크게 칭찬하자 영민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정말 그 사슴 공자가 대공 전하의 인정을 받을 만큼 바뀌었구나!

이 이상의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완벽한 증거.

말을 마친 대공은 루시안을 치하하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속삭였다.

"이제 만족하느냐?"

루시안은 씩 웃으며 아버지에게 화답했다.

"대만족입니다."

23화

대공은 루시안에게서 시선을 돌려 필립을 바라봤다.

그 서늘한 눈빛에 필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전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변명은 필요 없으니 입 다물어라.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네놈이 받을 존중 따윈 없을 것이다."

"오해이십니다! 이대로 해명 한 번 안 들으실 생각입니까!? 정녕 로그란 후작가와 척을 지시려 하십니까!"

"척을 진다?"

필립의 말에 대공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는군. 베른하르트 놈과는 진즉 척을 졌다. 남은 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이었지. 네놈이 명분을 제공했으니 남은 건 놈을 몰아붙이는 일뿐이다."

"...!"

"부디 베른하르트가 네놈을 버리지 않길 기도해라. 놈이 널 잘라버린다면 네놈은 제 가문에서의 입지 이전에 목숨을 걱정해야 할 테니."

"전하! 전하...!"

대공이 고개를 까딱이자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이 필립의 양어깨를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필립은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면서 마구 소리쳤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뒤이어 다른 기사들도 필립과 같은 방향으로 끌려갔다.

망신을 당할 대로 당한 상태라 그런지 아까 전과는 다르게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수고했다. 이제 들어가자꾸나."

모든 일이 일단락되자 대공은 루시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에 올랐다.

다시 영주관으로 향하기 직전,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린 대공이 재차 루시안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왜 하녀 하나만 따로 빼놓은 것이냐? 설마하니...."

"그 점은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크흠, 알겠다. 하기야 네 녀석도 남자니까."

마치 자식의 비밀을 캐지 않으려는 듯한 태도에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면 이상한 오해부터 풀어야 할 것 같았다.

****

루시안은 즉시 대공과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아까 대공이 말했던 '포상'에 대해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흑사자들에게 대략적인 개요는 보고 받았다. 일처리가 깔끔하더구나."

"과찬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지원해주신 덕이지요."

"겸양은 됐다. 포상으로 바라는 게 있느냐? 과한 게 아니라면 들어주마."

"음."

포상이란 소리에 루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건 없었지만 챙겨줘야 할 부하가 있었다.

"휴고를 기사로...."

"그건 안 된다."

대공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즉답하며 잘라버렸다.

아까 전과 달리 단호하기 그지없는 어조였다.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주인이 된 이상 약속을 이루어주기 위해 최선은 다해봐야 하니까.

"휴고에겐 공이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약을 팔기 위해 후작과 공모한 것도 놈이다. 너한테 들키지 않았다면 끝까지 갔겠지."

"만약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필립을 유인한 것도, 장소를 제공한 것도 전부 휴고였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기사가 되기엔 부족하다. 최소한 스스로 명예를 드높이고 모두가 부정하지 못하는 공을 세워야 했다. 놈이 이번에 세운 공을 남들 앞에서 당당히 밝힐 수 있겠느냐?"

루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휴고가 세운 공은 남들 앞에서 밝히기 힘들었다.

그가 암흑가에서 살아온 힘과 인맥으로 세운 공이니까.

"놈이 금화를 원한다면 궤짝으로 줄 수 있다. 원한다면 깨끗한 새 신분도 준비해주마. 하지만 기사가 될 수는 없다. 놈의 신분 때문이 아니라 공에 비해 과하기 때문이다."

구구절절 맞는 소리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주인으로서 할 일은 다 한 거겠지.

"아버지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지나친 요청을 드렸군요."

"알았다면 달리 원하는 걸 말하거라. 이번에는 과하지 않은 것으로 말이다."

"제가 잡아 온 하녀에게 검성의 수업을 받게 해주십시오."

"...뭐?"

전혀 예상치 못한 요구에 대공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

루시안은 대공의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펠리시아를 찾아갔다.

일시적으로 휴고의 사업장에 감금해놨지만, 필립 일당을 연행하면서 지하 감옥에 옮겨놓은 상태였다.

다만 지하 감옥이라고 해도 귀족 포로를 위한 감옥이었기에 시설 자체는 제법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펠리시아는 루시안을 보자마자 목에 날카로운 쇳조각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내 몸에 손을 대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겠습니다."

"...."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옆에 있던 한스를 바라보았다.

간수가 이미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감옥에 있는 동안 감시를 맡겨 놓았었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슨 소리긴요. 도련님께서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할 것 같으니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는 소리지요."

"아니, 대체 누가 그래?"

"본인이 그리 생각하는 걸 제가 어찌 고치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 도련님께서 말씀해주신 이유도 좀...."

뒷말을 흐리긴 했지만, 한스도 루시안이 댄 이유를 못 믿겠다는 소리였다.

하기야 본인조차 믿지 못할 소리기는 하지.

루시안은 한숨을 쉰 후 펠릭스, 아니 펠리시아를 쳐다봤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네 몸에 손을 댈 생각은 없다."

"...."

"하나도 안 믿는 얼굴이군."

"당연하지요. 아무 가치도 없는 일개 하녀만 뚝 떼서 따로 가뒀는데, 몸이 목적이 아니면 뭐가 목적이란 말입니까?"

"검술."

"네?"

"네 검술이 목적이다. 내 곁에서 검을 휘두르며 그 재능을 마음껏 꽃피워 볼 생각 없나?"

펠리시아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믿는다기보다는 자신을 혹하게 만들어 곁에 두려는 속셈이 아닌지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루시안은 대공에게서 받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검성 아이젠 경께 너를 제자로 추천해주마."

"...!?"

"아버지의 허락은 받았다. 아이젠 경께 전령도 보내뒀지. 원한다면 지금 당장 검성을 뵈러 갈 수도 있다. 어쩔 테냐?"

믿지 않겠지.

귀족도 아니고 일개 하녀에게 그런 기회를 준다니.

하지만 지나치게 먹음직스러운 미끼다.

함정이라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겠지.검을 독학한 자라면 언제나 스승의 존재에 갈증을 느끼는 법이니까.

하물며 검의 정점에 달한 검성이 봐준다면 더더욱 참을 수 없을 터.

한참 고민하던 펠리시아는 이내 루시안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럼 거짓으로 하는 말 같으냐?"

"적어도 진실일 가능성보다는 거짓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당장 매력적인 제안을 함으로써 제 자해를 막으려 한다던가."

"일개 하녀 상대로 아이젠 경까지 언급해가면서? 내가 왜? 그럴 바엔 그냥 여기서 보내준다는 약속만으로 충분하고도 남을 텐데."

반박할 수 없는 대답에 펠리시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더럽혀지느니 죽는 게 나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에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굳이 검성을 언급하지 않아도 멀쩡히 살려 보내준다고 흥정했으면 분명 흔들렸으리라.

분하지만 목숨 이전에 검성을 언급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대의 진심을 보여주는....

"...잠시만요, 제가 검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요?"

한창 고민하던 펠리시아는 이상함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그런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화 자체가 검술을 사이에 둔 흥정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나.

보통 검을 얼마나 잘 쓰던 하녀를 상대로 흥정할 때는 금전부터 언급할 텐데.

"한 번도 없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검사라면 당연한 거니까."

"검사? 제가 검사라고요?"

"그럼 아닌가?"

되묻는 말에 펠리시아는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동시에 뭔가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녀 주제에 감히 검을 휘두르는 반편이가 아니라 한 사람의 검사로 취급받다니.

"정말, 절 검성께 소개해주실 건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펠리시아에게 루시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루시안 발데크라는 이름에 맹세코."

귀족이 이름과 가문명을 동시에 댄다는 건 본인의 명예만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까지 걸겠다는 것.

결국, 펠리시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믿을 수 없는 제안이라도 이런 사람의 말이라면 한 번쯤 믿고 싶었기에.

****

루시안은 즉시 사람을 보내 아이젠에게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이전에 말했던 제자의 재목을 찾았으니 부디 만나 달라는 부탁이었다.

다행히 아이젠은 루시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삼공자께서 허언을 하실 분은 아니지요.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바로 연무장으로 나온다는 소리에 루시안은 휴고와 한스까지 불러 연무장으로 향했다.

갑자기 불려온 휴고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함정으로 쓰이고 용도를 다한 마약 사업을 정리하느라 한창 바쁘던 와중이었기에.

"굳이 저까지 이런 일에 함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간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뭐 어때. 이참에 아이젠 경과 안면이나 트자고."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가기 싫은 겁니다만. 저 같은 불량배 출신을 검성께서 어찌 보시겠습니까?"

"개과천선했으니 좋게 보시겠지. 사람을 볼 때 과거에 연연하시는 분은 아니니 긴장 풀라고."

루시안의 말에도 휴고는 영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펠리시아를 검성의 제자로 추천한다는 건 반대로 말해 공을 세운 휴고가 아니라 생판 외부인이 득을 본다는 소리.

여기서 펠리시아의 재능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내색은 안 하더라도 불만이 쌓이리라.

휴고를 진정으로 납득시키려면 그 하늘이 내린 재능을 직접 보여줘야만 했다.

일행을 이끌고 루시안이 막 연무장 입구에 도착한 때였다.

"...아버지?"

"고얀 녀석. 아이젠 경을 상대로 시간을 딱 맞춰 오다니. 조금 일찍 오는 성의 정도는 보이거라."

대공의 가벼운 질책에 루시안은 눈을 끔뻑였다.

아이젠 경과 약속한 장소에 왜 대공이 있단 말인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다름 아닌 검성의 제자를 추천하는 일이다. 내가 이런 중요한 일에 입회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더냐?"

그건 그랬다.

검성 아이젠이라면 제국뿐만 아니라 발데크 가문 내에서도 엄청난 입지를 가진 사람.

가주라면 마땅히 그 후계자에 대해서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자로 발탁된 것도 아니고 그저 시험만 볼 뿐인데 직접 보러 올 줄이야.

루시안이 놀라는 와중 대공의 시선이 옆에 있던 휴고에게로 향했다.

"네가 휴고로군. 이번 일에 제법 공적을 세웠다고 들었다."

"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공적만 따지기에는 옛날에 저지른 과오도 만만치 않지."

"죄송합니다. 허나 이젠...!"

"루시안은 그 점을 알면서도 널 기사로 추천했다. 자신에게 포상을 주지 않아도 되니 너에게 대신 주라면서 말이다."

휴고는 눈을 부릅뜨며 루시안을 쳐다봤다.

루시안이 실례라며 얼른 고개를 돌리라 손짓해도 석상처럼 굳어버려 움직이지 않았다.

대공은 그런 휴고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겐 실망스럽겠지만 나는 그 요청을 거부했다. 네 과거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른 포상이라면 모를까 평민을 기사로 만들기엔 한참 모자랐지."

"배, 백번 옳은 말씀이십니다."

"과한 포상을 요구한다는 건 자칫 본인의 평가마저 깎아 먹을 수 있는 위험한 일. 네 주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너에게 과한 포상을 해달라 요구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으면 좋겠구나."

고개를 푹 숙인 휴고가 잘게 몸을 떨었다.

무언가 쏟아지려는 걸 억제하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휴고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제가 그분께 해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저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모든 걸 바쳐 섬길 뿐입니다."

"흥."

코웃음을 치는 대공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척은 하지만 휴고의 대답이 제법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만족스러운 시선은 이내 다른 쪽을 바라보자마자 서늘하게 식었다.

"이 여자더냐? 네가 아이젠 경의 제자로 추천한다는 하녀가?"

"그렇습니다."

"대, 대공 전하를 뵙습...."

"한심하구나."

대뜸 튀어나온 대공의 질책에 펠리시아를 포함한 모두가 얼어붙었다.

지그문트 대공은 이내 루시안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비록 한 번 거절당했다 하더라도 네게는 포상을 받을 기회가 남아 있었다. 과한 범위만 아니라면 뭐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그런데 기껏 그 포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원한 게 이런 여자를 아이젠 경께 보이는 권리더냐?"

"...!"

"포상 따윈 언제든 다시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라면 참으로 오만하구나! 좀처럼 없는 기회를 쓸데없는 데에 소모했으니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펠리시아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비록 당사자는 아니나 후작가의 후계자 경쟁을 눈으로 봐온 펠리시아다.

자식들이 얼마나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발버둥 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 한창 후계자 경쟁 중임에도 대공에게 상을 받을 기회까지 걷어차며 자신을 추천했다니.

정작 루시안은 아버지의 질책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그럴 일은 없습니다."

"뭣이?"

"오늘이 아버지께 포상을 요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더라도 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더없이 올바른 데에 썼으니까요."

"정녕 이 여자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 루시안에게서 튀어나왔다.

그저 아버지의 말에 반발하기 위해 둘러댄 말이 아니라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보셨는지는 모르나, 제게는 신의 축복을 받은 검사 하나만 보일 뿐입니다. 신분과 성별의 족쇄에 갇혀 하늘을 베고 바다를 가를 잠재력이 있음에도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못하는 불세출의 천재 검사 말입니다."

"...."

"지금은 아버지처럼 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멍청한 짓을 했다고 뒤에서 비웃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비웃음은 언젠가 칭송으로 바뀔 겁니다. 루시안 발데크야말로 역사의 뒤편에 묻힐 뻔한 차기 검성을 찾아낸 자라고요."

루시안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물방울 하나가 펠리시아의 뺨을 타고 흘렀다.

24화

검의 재능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열 살 때였다.

평소처럼 허드렛일을 하던 도중 배다른 오빠가 다가와 목검을 던져줬다.

-야, 결투 놀이하자. 너도 반은 귀족이니까 검 정도는 다뤄봐야지?

헛소리였다.

맨날 천것이니 뭐니 하면서 같은 피를 이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오라비였다.

검을 다뤄보기는커녕 같은 식탁에 앉아본 적조차 없거늘 갑자기 결투 놀이라니.

뻔한 괴롭힘이었지만, 펠리시아에게 거부할 권리 따윈 없었다.

-내가 먼저 공격한다! 막아봐!

신이 난 목소리와 함께 일방적인 농락이 시작되었다.

내려칠 듯 말 듯 하다가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목검이 날아왔다.

허벅지와 어깨를 맞을 때마다 심한 통증에 비명이 튀어 나왔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펠리시아는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보인다.'

이상하게도 다가오는 목검이 너무도 잘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육과 발의 움직임 자체가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펠리시아는 날아오는 검격을 모조리 쳐냈다.

심지어 간간이 보이는 빈틈 사이로 반격까지 날렸다.

-그, 그만! 그만하라고! 악!

몇 년 동안 검을 배운 오라비는 곧 펠리시아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제정신을 차렸을 때 아버지가 그 광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도 몰랐던 재능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 아버지가 칭찬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마저 들었다.

하지만 곧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제기랄, 태어난 것 자체가 오점인 년이 내 씨에서 아들에게 갈 재능까지 긁어갔구나.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군.

-가, 각하! 하늘이 내린 재능입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써먹지도 못할 계집년에게 재능이 있어 봤자지! 꼴도 보기 싫으니 마구간 일이나 돕게 해라!

-각하!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발밑에 쓰러진 오라비의 좁쌀 같은 재능에는 더없이 기뻐하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펠리시아의 재능은 아무리 커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마지막 기대마저 사라진 그 날, 펠리시아는 눈이 붓도록 통곡했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하고 슬플지언정 목검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자신이 원하던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감각이 더없이 좋았으니까.

목검을 휘두를 때만큼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오라비들과 그 휘하의 가신들은 그런 펠리시아를 비웃었다.

아무리 검을 잘 다뤄도 너는 수발이나 들다 죽을 운명이라면서.

질투와 열등감이 섞인 모욕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일개 하녀일 뿐이니까.'

귀족도 아니고 사내조차 아닌 펠리시아를 누가 검사라 인정할까.

사내 손에 들리면 하늘을 뒤집을 재능조차 하녀의 손에서는 썩은 과일만도 못했다.

그렇기에 이건 그저 하녀의 취미라 자신을 다독였다.

좋아서 하는 것이기에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면서.

"아버지께서 무엇을 보셨는지는 모르나, 제게는 신의 축복을 받은 검사 하나만 보일 뿐입니다. 신분과 성별의 족쇄에 갇혀 하늘을 베고 바다를 가를 잠재력이 있음에도 숨조차 마음대로 쉬지 못하는 불세출의 천재 검사 말입니다."

억지로 막아왔던 마음의 둑은 그 말에 터져버렸다.

그래, 사실은 다 거짓말이었다.

하녀로 살다 죽는 게 아니라 기사가 되고 싶었다.

전장에서 검을 휘둘러 펠리시아라는 이름을 모두에게 새기고 싶었다.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며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전부 다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기에 포기했을 뿐.

"지금은 아버지처럼 절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겁니다. 멍청한 짓을 했다고 뒤에서 비웃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비웃음은 언젠가 칭송으로 바뀔 겁니다. 루시안 발데크야말로 역사의 뒤편에 묻힐 뻔한 차기 검성을 찾아낸 자라고요."

그 포기한 꿈을 눈앞의 남자가 말하고 있었다.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심지어 차기 검성의 자리조차 노릴 수 있다고.

꿈만 같은 소리였다.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펠리시아의 믿음과 별개로 남자는 진심이었다.

처음 받아보는 믿음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만약 정말 기사가 될 수 있다면.'

충성할 대상을 고른다는 생각 따윈 지금껏 한 적도 없다.

애초에 기사가 될 수 없는데 누굴 고르고 말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기사가 될 수 있다면.

'이 사람에게 충성하고 싶다.'

****

"여전히 말은 번드르르 하구나."

대공은 냉정한 표정으로 루시안의 말을 잘라버렸다.

직접 증명하지 못한다면 아무 가치도 없다는 듯.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 네 결정이 과연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말이다."

홱 하고 등을 돌리는 지그문트 대공.

그러나 루시안은 대공이 돌아서는 순간 분명 보았다.

입술 끝자락이 미묘하게 씰룩거리는 것을.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시긴.'

그냥 셋째가 너희들한테 이 정도로 잘해줬다고 하면 될 텐데 굳이 자신의 입으로 내려친 후 루시안이 직접 올려주도록 했다.

대공 나름의 연출이겠지.

자신은 못 알아보는 네놈들의 가치를 네 주인은 알고 있다.

그러니 좋은 주인을 만난 행운에 감사하며 충성해라, 라는.

멀리 돌아가는 방식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루시안의 진심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낼 수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루시안은 진심을 담아 대공의 등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냉정한 척해도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그의 배려가 느껴졌다.

"허허, 삼공자만이 아니라 전하께서도 오셨군요."

그때, 연무장 안쪽에서 아이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모퉁이도 돌지 않았건만 기척으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다름 아닌 검성께 제자를 추천하는 일 아니오. 발데크 가문의 가주가 아니더라도 한 명의 기사로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소."

"제자라. 분명 삼공자께서 그런 말을 하시긴 하셨습니다만."

수염을 쓰다듬는 아이젠의 표정은 기묘했다.

아직도 루시안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바로 아이젠 앞에 펠리시아를 내밀었다.

"아이젠 경,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여기 제가 말씀드렸던 그 사람입니다."

"흐음."

아이젠의 시선이 펠리시아를 훑었다.

검성의 눈길에 펠리시아는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예를 취했다.

"펠리시아라고 합니다. 검성께...."

"됐다."

"예?"

"네 이름은 필요 없다. 궁금하지도 않고. 와서 목검이나 잡아 보거라."

아이젠은 목검을 연무장 바닥에 콱 찍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잠시 주춤거리던 펠리시아는 이내 목검이 박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목검은 두 뼘이나 돌바닥에 박힌 상태였다.

펠리시아가 힘을 주어 목검을 뽑자 아이젠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따위 마력 운용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예, 예?"

"마력 말이다. 기본조차 안 되어 있구나. 네 스승이 누구더냐?"

실망과 질책이 담긴 소리에 펠리시아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곧 차가운 시선을 못 이기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없습니다."

"뭣이?"

"스승은 없습니다. 그저... 남이 하는 걸 대충 보고 따라한 거라...."

"아무도 안 가르쳐줬는데 스스로 순환을 익히고 마력까지 운용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순환이 무엇인지요?"

펠리시아가 되묻자 이번엔 검성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 마력은 운용할 줄 알면서 순환이 뭔지는 모른다고?

"마력을 몸 전체로 퍼뜨려 다시 회수시키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 그건 잘 모릅니다. 남이 하는 걸 못 봐서."

"허! 갈수록 가관이구나. 그럼 어디 이것도 따라 해 보아라!"

아이젠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검성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뭘 따라하라는 거야?

하지만 펠리시아는 아이젠을 한번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까?"

"...!"

아이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남들이 보기엔 변화가 없었지만 분명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교감이 있었다.

"이, 이것도 따라 할 수 있겠느냐?"

잠시 후, 아이젠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변화는 보이지 않았으나 펠리시아만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신 게 맞는지요?"

"허, 허허!"

헛웃음을 내뱉은 아이젠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까 전이 길가의 돌멩이를 바라보는 눈이었다면, 이번에는 금의 순도를 측정해보는 눈이었다.

"목검을 들어라! 어서!"

"예? 큭!"

따앙

갑작스러운 호통에 깜짝 놀랐던 펠리시아는 반사적으로 목검을 들었다.

갑자기 쇄도해온 아이젠이 목검을 휘두른 탓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반응한 펠리시아에게 아이젠은 연속해서 검격을 날렸다.

따다다닥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루시안을 비롯한 참관자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펠리시아에게 맞추어준 것인지 속도는 평이했으나 기술의 현란함은 속도를 메꾸고도 남았다.

목과 허벅지, 다리 아래와 사타구니, 발목에서 골반까지.

숙련된 기사조차 앗 하는 사이 시야에서 놓칠 법한 검격이었다.

그런데 펠리시아는 그 모든 공격을 포착한 후 쳐내고 있었다.

"이것도 받아낼 수 있겠느냐!?"

쩌엉

"으윽!"

아이젠의 공격을 받아낸 펠리시아에게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력으로 강화한 충격량 자체가 맞부딪칠 수준을 넘어선 것 같았다.

이를 악문 펠리시아는 곧바로 움직임을 바꿨다.

쩌엉, 키기긱

"허!"

구경하던 지그문트 대공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미리 타격점보다 앞으로 목검을 내밀어서 충격을 최소화한 후 맞부딪치는 순간 흘린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눈앞에서 목검이 날아오는 와중 바로 시행하기엔 힘든 기예였다.

단박에 펠리시아가 대응법을 찾아내자 재차 아이젠의 검격이 바뀌었다.

현란하게 바뀌는 움직임에 펠리시아는 기겁하면서도 어찌어찌 따라갔다.

그렇게 3분이 지나갔다.

"하아! 하아!"

펠리시아의 입에서 바싹 말라붙은 호흡이 새어 나왔다.

벌써 근육에 무리가 온 건지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재차 다음 공격에 대응하려는 펠리시아를 보고 아이젠이 공격을 멈추었다.

호흡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있던 아이젠은 곧 지그문트 대공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 어찌 보셨습니까?"

"어찌 내게 물어보시오? 검성께서 직접 제자를 결정하는 자리이건만."

"전 이미 결론을 냈습니다. 다만 전하의 시선에는 어찌 비추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흐음."

대공은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쓸다가 대답했다.

"나는 실전에서 딱 두 번 써봤소."

"두 번?"

"방금 전 그 아이가 쓴 기술 말이오. 상대가 노리는 곳보다 앞에 검을 미리 가져다 댄 후 미끄러뜨리는 것. 이론이라면 쉽지 않소?"

누구나 검을 휘둘렀을 때 가장 크게 힘이 들어가는 자리를 노리기 마련.

그보다 앞에 검을 들이댄 순간 당연히 위력이 떨어진다.

검은커녕 싸움질만 조금 해봤어도 알 수 있는 단순한 이치다.

"하지만 실전에서 하기는 더없이 어렵소. 막는 데 실패하면 상대의 검에 몸을 내미는 격이니까. 설령 막는다 해도 조금만 잘못하면 손가락이 날아가지. 아직도 내 손가락엔 두 번째 시도에서 생긴 흉터가 남아있다오."

"목검은 진검과 달리 날이 안 섰습니다만."

"대신 손가락뼈가 박살 나지 않겠소? 나 같은 사람이면 모를까 치료할 비용도, 수단도 없는 사람에겐 사형 선고지. 검을 아예 손에서 놓아야 할 테니까."

그러나 펠리시아는 망설임 없이 시도하여 성공했다.

동시에 검격이 바뀔 때마다 비슷한 수단을 생각해내고 실행했다.

대련이라 할지라도 방어에 실패한 순간 평생 장애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전장에서는 1초도 안 되는 사이에 내린 판단이 목숨을 죽이고 살리지. 적어도 그 점에서는 누구보다 탁월하군. 기사로서는 몰라도 검사로서는 엄청난 재능이요."

"잘 보셨습니다. 저 역시 그 점에서 감탄했으니까요."

"그럼 이젠 아이젠 경이 알려주시오. 검성께서는 무얼 보셨소?"

대공의 물음에 아이젠의 시선이 펠리시아 쪽으로 향했다.

펠리시아는 자신이 칭찬받은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한 가지 물어보마."

"겨, 경청하겠습니다."

"마력이 보이느냐?"

잠시 머뭇거리던 펠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검을 휘두를 때 사용하는 푸르스름한 기운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보입니다."

"허허허."

아이젠의 입에서 초탈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랜 세월 맺혀있던 한을 떨쳐버린 듯한 웃음이었다.

잠시 하늘을 쳐다보던 아이젠은 이윽고 루시안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삼공자, 잠시라도 의심을 가졌던 이 늙은이를 용서해주십시오."

25화

"아이젠 경!"

루시안은 당황하며 아이젠을 일으키려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성이 무릎을 꿇다니!

하지만 아이젠은 바위처럼 일어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젊은 시절, 저는 오만했습니다. 애송이일 때는 그나마 겸손한 척이라도 했으나 검성이란 허명을 얻고 난 이후엔 제 명성에 취했지요."

"허명이라니요! 누가 감히 검성의 이름을 허명이라 하겠습니까?"

"아니요. 허명입니다. 그 이름에 집착한 결과 제대로 된 제자 하나 만들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자조하듯 웃는 아이젠의 입에서 옛날의 일이 흘러나왔다.

마치 성직자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것 같은 어조였다.

"항상 천재를 찾았습니다. 제자로 받아들이는 건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노력하는 수재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천재가 아니면 검성의 기술을 이어받을 수 없어서가 아니다.

제자가 천재여야 검성이라는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고 더 빛날 테니까.

스스로 검의 정점에 선 만큼 후계자 육성까지 단 하나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역사에 완벽한 제자를 남긴 스승으로 남고 싶었다.

"욕심에 눈이 돌아가 몇 번이고 찾아온 기회를 걷어찼습니다. 재능도 심성도 훌륭한 젊은이들을 눈에 안 찬다며 거절하고, 무시하고, 쫓아 보낸 결과."

말을 멈춘 아이젠이 자신의 주름진 손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이제 그 어떤 제자도 한 사람의 검사로 키워낼 수 없을 만큼 늙어버렸습니다."

"...."

"더는 재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 사람 몫을 하는 제자를 키워낼 때까지 필요한 세월의 절대량은 줄일 수 없고, 제겐 그만한 시간조차 남지 않았으니까요. 참 우습지 않습니까?"

말년마저 흠결 하나 없는 검성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그 결과 남은 건 오점 하나 없는 텅 빈 공백이었다.

뒤늦게 아이젠은 미칠 듯한 후회로 가슴을 쥐어뜯었다.

설령 오점이 남더라도 인생의 방점을 찍어야 했다.

분명 신께서는 몇 번이나 기회를 주셨거늘.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지나간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검성 아이젠, 늙어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죽다. 그게 이 비참한 늙은이의 마지막 기록이 될 터였습니다. 그런데...."

아이젠은 루시안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땅에 이마를 붙였다.

"그 운명을 삼공자께서 바꿔주셨습니다."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삼공자. 덕분에 이 늙은이는 마지막 방점을 찍고 떠날 수 있을 듯합니다."

한참 동안 땅에 붙은 이마는 떨어지지 않았다.

검성이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에 모두가 침묵했다.

잠시 후, 아이젠은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서서 펠리시아를 바라봤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건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페, 펠리시아입니다."

"성은 없느냐?"

"...."

"신분을 묻고자 함이 아니다. 출신에 따라 밟아야 할 절차가 다르기 때문이지. 평민이라면 내 양녀로 들일 생각이다."

펠리시아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평민이 귀족이 되는 얼마 안 되는 방법의 하나가 바로 귀족 가문에 입양되는 것이었다.

절차는 가장 간단하고 쉬웠지만, 어지간해선 누구도 안 하려는 방법이기도 했다.

평민의 피가 섞인다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워하는 귀족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기 핏줄을 이은 자식이 있더라도 첩의 자식이나 사생아면 그냥 먼 친척 등을 입양해서 후계자로 삼곤 했지. 피가 순수하다면서.'

전생에 목격한 일을 떠올리며 루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평민의 피가 섞였다지만 친자식 아닌가.

사람이라면 뭐든 자기 씨를 이은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을 텐데 얼굴도 거의 못 본 친척에게 물려주는 게 낫다니.

루시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유였다.

"말해보아라. 성은 없느냐?"

"어머니의 성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성은...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냐?"

"로그란 후작가의 현 가주십니다."

"으음."

아이젠의 입에서 불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옆에서 듣고 있던 루시안도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제야 펠리시아의 인생 역정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사생아 취급이 천차만별인 건 알았지만, 심하군.'

첩의 자식이나 사생아는 부친의 태도에 따라 모든 게 바뀐다.

신분이 애매한 만큼 부친에게 애정이 있다면 정식 귀족으로 입양되기도 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존재 자체를 없애려고 태어나자마자 살해당한다.

보통은 하인 중에서 특별 취급을 받으면서도 적자들과는 명백히 선을 긋기 마련.

하지만 펠리시아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보통이 아니라 최악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불과했다.

마약 판매같이 더러운 일에 동행하도록 한데다 시중을 드는 상대도 가장 불편할 이복남매였으니.

누가 봐도 악의가 섞여 있는 인선이 아닌가.

'사생아를 수치로 생각하는 인간이었나 보군.'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조용히 있던 지그문트 대공의 입에서 모멸 섞인 욕설이 튀어나왔다.

주어는 없었으나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는 뻔했다.

그 말에 아이젠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제 네 이름은 펠리시아 브라이트너다."

"...!"

"앞으로 배울 게 많을 테니 각오하고 있거라. 검술부터 귀족의 작법까지 전부 익히려면 한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을 거다."

"가, 감사...!"

목이 메는지 무릎을 꿇은 펠리시아는 감사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이 이어질 기색이 없자 지그문트 대공이 손뼉을 치며 앞으로 나왔다.

"축하하오, 아이젠 경. 드디어 후계자를 찾으셨군."

"정말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는 이 아이 나름이지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햇병아리 때부터 마력을 보는 데다 어지간한 노병 이상으로 임기응변에 능한 아이 아니오? 가르침만 제대로 받는다면 순식간에 흡수하겠지."

대공의 말에 아이젠은 말없이 미소만 내보였다.

루시안은 옆에서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전생에 알지 못했던 정보를 곱씹었다.

마력을 보는 눈이라니.

상대가 마력을 어디에 집중하는지만 잘 살피면 공격을 미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어쩐지 신들린 검술을 선보이더라니, 어떻게 움직일지 전부 미리 알고 대처한 건가.'

그뿐만이 아니다.

체내의 마력을 볼 수 있다는 건 스승이 가르치는 기술을 날것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

굳이 힘들게 가르치지 않더라도 눈앞에서 시연만 잘해준다면 단숨에 원리를 파악하고 습득하는 게 가능하다.

여기에 펠리시아 개인의 전투 센스까지 더해지면 남들과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리라.

'아마 아이젠 경이 죽기 전에 차기 검성이란 이름을 짊어질 수준은 되겠지.'

아까 전 아이젠이 왜 그토록 루시안에게 경의를 표했는지 알 것 같았다.

비록 오만이라 치부하긴 했지만, 젊은 시절 추구했던 천재 제자에 대한 미련도 분명 있었을 터.

루시안은 마지막에 검성의 후계자를 남길 기회를 준 데다 마지막 미련까지 풀어준 셈이다.

"다시 한번 축하드리오. 역사적인 장면도 직접 볼 수 있었겠다, 슬슬 자리를 비켜드려야 할 때로군. 한동안 입양과 교육으로 바쁘실 테니."

"그렇겠지요. 급한 일이 끝나면 딸아이와 같이 찾아뵙겠습니다."

지그문트 대공은 루시안 일행을 향해 눈짓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자는 제스처였다.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과 같이 밖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주군!"

펠리시아가 큰 소리를 내며 한쪽 무릎을 탁 꿇었다.

하지만 뒷말이 나오기도 전에 아이젠이 펠리시아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만둬라."

"예?"

"넌 기사가 아니다. 막 귀족의 딸이 되었을 뿐이지. 작위 하나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건 어불성설."

"...!"

"주군을 섬기는 일에도 자격은 필요한 법. 충성 맹세는 어엿한 기사가 되고 난 이후에나 하거라."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펠리시아의 눈이 흔들렸다.

루시안은 그런 펠리시아를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겠다."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는 듯 펠리시아가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펠리시아는 루시안이 나갈 때까지 꿇은 무릎을 펴지 않았다.

****

루시안이 일으킨 파란은 영주관을 뒤흔들었다.

조르디와 조슈아에게 한 번씩 이긴 건 아무리 잘 쳐줘도 그릇의 크기를 보여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아예 가문 밖에서 대놓고 공적을 세워버리지 않았나.

그릇이 어쩌니저쩌니할 문제가 아니라 차기 가주에 한 걸음 가까워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 부를 단계는 한참 지났군."

"대공 전하께서 공을 몰아주셨을 가능성도 있다만."

"멍청한 소리! 아직도 대공 전하가 어떤 분인지 모르나?"

"현실을 보세. 삼공자는 이미 어엿한 가주 후보야."

"이번 일로 후계 구도가 완전히 뒤집혔어. 한동안 시끄럽겠군."

지금까지는 명백한 루시안의 열세이며 경쟁조차 성립될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번 일로 루시안의 위상은 조슈아와 비등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외가의 힘을 뺀 순수한 개인의 능력으로는 명백히 그 이상.

다른 형제들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는 경쟁자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가문이 한창 떠들썩할 무렵.

-아이젠 경께서 후계자를 들였다!

폭풍과도 같은 소식이 그 외의 모든 것을 파묻어버렸다.

기사들은 물론 발데크에 조금이라도 속한 자들은 경악했다.

평생 제자를 안 두던 검성이다.

그런데 살날도 얼마 안 남은 지금에서야 후계자라니.

"제기랄,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난들 아나? 궁금하면 아이젠 경께 직접 여쭤보시지?"

"미쳤나!? 검성께 어찌 그런 무례를!"

"그나저나 이제 차기 가주 경쟁은 어찌 되는 거지?"

"아니, 지금 생뚱맞게 왜 가주 경쟁이 나오나?"

기사들은 이상한 이야기를 꺼낸 동기에게 눈총을 주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며 굳은 표정으로 설명했다.

"아이젠 경이야 중립이었다지만, 그 제자마저 중립이란 법은 없지 않나."

"게다가 늘그막에 들인 후계자일세. 듣자 하니 양자로 입적까지 했다던데 애정이 상당하시겠지."

"아이젠 경께서 계속 중립을 유지한다면 모를까, 후계자가 지지하는 쪽에 힘을 실어준다면...."

"이런 미친! 당장 입 다물지 못하겠나!? 어디서 그런 큰일 날 소릴!"

서둘러 입을 막기는 했지만 이미 밖으로 새어 나온 말은 어쩔 수 없었다.

검성이 정말 중립을 깬다면 경쟁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는 일.

아이젠의 인격을 믿는 이조차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할 정도니 나머지는 더 심했다.

불온한 소문은 조금씩 수면 아래에서 퍼져 나갔고, 점차 표면화되어 입방아에 오르기 시작할 무렵.

-차기 가주는 가문의 주인이신 전하께서 정하시는 것이지 내가 정하는 게 아니오! 그대는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기사의 의무나 다하시오! 아니면 기사를 그만두고 정치나 하시던가!

검성의 일갈이 내성 전체를 흔들었다.

어느 멍청한 기사가 당사자 앞에서 소문을 언급한 결과였다.

짧은 헤프닝이었지만, 그날 이후 불온한 소문은 수그러들었다.

지금처럼 정치에는 손도 대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검성의 선언에 사람들이 안도하며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모두 모이거라.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사 한 번 하자꾸나.

지그문트 대공이 가문에 남은 자식들을 일제히 불러 모았다.

26화

"식사라."

대공의 전언을 들은 루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가족끼리 모이는 식사는 귀족 가문마다 의미가 천차만별로 다르다.

후계자 다툼이 의미 없는 작은 가문이라면 순수한 아침 식사에 불과했겠지.

하지만 발데크와 같은 거대한 가문 내에서 굳이 경쟁자들을 한 곳에 불러모은다?

가문과 관련된 중대한 발표가 있다는 소리다.

"무언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나 보군. 다행히 경중은 크지 않은 모양이지만."

"예? 대공 전하께서는 식사라고만 하셨는데요?"

"그 식사에 나랑 형제들만 불러모았잖아. 그것만으로 상황을 유추하기엔 충분하지."

한스의 의문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몸을 누였다.

후계자들이 손쓸 수 없을 만큼 큰일이었다면 부인들까지 모조리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은 루시안과 다른 형제들만을 식사에 초대했다.

즉, 부인들에게까지 알릴 필요는 없는 수준이나 가주 경쟁의 시험 문제로 내기는 딱 좋다는 소리다.

"아마도 이번에 과제를 하나 내주실 모양이야."

"과제요?"

"잘만 하면 새로운 공적을 세울 수도 있다는 거지. 어디까지나 내가 풀 수 있는 문제여야겠지만."

그 말에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휴고가 눈을 번뜩였다.

"혹여라도 외부에 나가실 일이 있다면 반드시 동행시켜 주십시오. 저도 한 손 거들겠습니다."

지그문트 대공과 만난 이후 휴고는 이전보다 더욱 의욕적이었다.

지금까지는 반쯤 기약 없는 믿음이었으나 대공의 입에서 기사라는 말이 나왔으니 꿈에 대한 확신이 들었겠지.

펠리시아가 검성의 양녀로 입적되는 걸 직접 보기도 한만큼 더욱 안달이 나기도 했을 테고.

다행히 펠리시아의 재능은 휴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라 질투 없이 향상심만 자극된 듯했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야. 애초에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수족이 너밖에 없잖아. 너 빠지면 누굴 데려가?"

"어··· 전 안 데려가시나요? 저도 도련님 수족인 줄 알았는데요."

"너는 집 봐야지. 아무리 그래도 가문을 텅 비워둘 수는 없으니까. 아니면 검술 배워서 같이 다닐래? 여차하면 전장에도 나가야 하는데."

"주인님께서 부재중이실 때 집을 잘 지키는 것도 종복의 의무죠. 맡겨만 주십쇼."

전장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한스는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휴고와 달리 출세가 좀 늦더라도 평안한 일상이 제일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인지."

루시안은 전생의 기억을 뒤져보았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발데크 가문에서 일했다고는 하나 일개 경비병의 신분.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빤한 수준이니 이런 중요한 일은 바깥에 새어나지 않고 끝났으리라.

'전말을 파악하려면 아버지께 직접 듣는 수밖에 없겠군.'

생각을 마친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주관 내 가족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원래 이런 건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는 법이니까.

****

"···."

"···."

루시안은 불편한 침묵이 감도는 식탁에서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마치 타이밍이라도 잰 것처럼 조르디와 조슈아도 루시안과 동시에 도착한 탓이었다.

평소라면 신경전이라도 한번 했겠지만, 곧 대공이 온다니 함부로 소란을 일으키기도 뭣했다.

"다 모였군. 시장할 테니 식사부터 하거라."

다행히 지그문트 대공은 금방 도착했다.

고지 시간보다 빠르게 온 것을 보면 이 불편한 침묵을 예상한 듯했다.

명목으로 내세운 식사는 아주 빠르게 끝났다.

하인들은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식기들을 치워버렸고, 대공은 즉시 본론을 꺼냈다.

"최근 국경 지대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정확히는 보른홀름 지방에서."

"보른홀름이라면 큰형님이 가 있는 곳 아닙니까?"

조슈아가 흠칫하며 되묻자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트리스탄을 파견한 장소지. 몇 달 전에 제국 해방연대 놈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으니까."

제국 해방연대.

속국 출신 인사들이 모여 다 같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는 슬로건을 내건 조직.

규모 자체는 작았지만 때때로 지방 반란을 주도하거나 고위 귀족을 암살해 제국을 뒤집어놓곤 했었다.

물론 대부분은 시도조차 못 하고 잡혔지만, 극히 드문 성공 사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으로서는 혀 아래 박힌 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 트리스탄에게서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다. 제국 해방연대 놈들만이 아니라 몬스터들까지 날뛰기 시작했다는 거다."

"설마 대이동입니까?"

루시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 가지 추측을 내뱉었다.

대이동이란 말 그대로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현상.

특정 몬스터 집단이 한 지역에서 지나치게 수를 불리면 먹이 사슬이 파괴되어 식량이 부족해진다.

결과적으로 집단 전체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다른 영역으로 먹을 걸 찾아 이동한다.

골치 아픈 건 이때 노리는 영역에 인간의 마을이나 성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는 거다.

몬스터가 볼 때는 인간도 훌륭한 식량이니까.

이때 대비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가벼운 토벌전 정도로 끝나지만, 대비가 미흡하면 엄청난 재앙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상 최대규모였던 대이동은 무려 마을 열 곳과 성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글쎄다. 언뜻 보면 그럴지 몰라도 속단하기엔 이르지. 보른홀름 지방에서 마지막 대이동을 잠재운 게 겨우 20년 전이니까."

"대이동의 주기가 최소 50년이란 걸 감안하면 너무 이르군요."

"설령 대이동이 아니더라도 불온한 상황이란 건 변함없다. 제국 해방연대만 신경 쓰기에도 벅찬데 몬스터까지 날뛰고 있으니."

적어도 지금 보내놓은 인력만으로는 턱도 없다.

그 말이 나온 순간 세 사람은 대공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다.

"큰형님께서 지원이 필요하신가 보군요."

"그래. 너희들 중 하나가 가줘야겠다."

대공의 말에 조르디와 조슈아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득 될 게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먼저 파견되어 앞뒤 상황과 현장을 파악하고 있는 건 트리스탄이다.

당연히 지원자는 트리스탄의 보조가 될 터.

상황을 직접 지휘하긴커녕 경쟁자의 보조나 해야 하는데 누가 가고 싶겠는가.

최악의 경우에는 공을 세워도 트리스탄에게 다 뺏기고 들러리로 전락할 가능성조차 있으니 더더욱.

"굳이 저희 중 한 사람이 갈 필요가 있습니까? 휘하 기사단을 보내서 형님을 지원해도 충분히···."

"불가하다."

대공은 조르디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냉정히 잘라버렸다.

"이 이상 병력을 보내는 건 보른홀름 지역의 주변 영주들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 자칫하면 그들이 단체로 항의할 테니 정예 병력은 현상 유지가 한계다."

"잘 설명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 주변 영주들은 죄다 남작이나 준남작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잖습니까."

"물론 그렇지. 하지만 폐하께서 직접 지적하신다면 그땐 어찌하겠느냐? 국경지대에 왜 그리 군사를 집중시키느냐고 물으신다면 대답할 말이 있느냐?"

조르디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말대로 발데크 대공가 같은 거대 가문이 병력을 이동시키면 황제도 촉각을 곤두세울 게 뻔하다.

아무리 발데크 가문이 황제파라지만 군사 이동이란 건 그리 쉽게 넘어갈 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먼저 나선 조르디가 침몰하자 이번엔 조슈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무 병력 없이 몸만 간다면 저희라 해도 별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 주변에는 용병이 제법 많다. 몬스터 외에도 자잘한 충돌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니까. 너희 중 한 사람이 용병들을 고용한다면 부족한 병력은 손쉽게 채울 수 있겠지."

"아까 전 말씀하시길 병력을 집중시킬 경우···."

"오직 내게만 충성하는 정예 병력과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이 같다고 생각하느냐? 이런 간단한 이치조차 모르다니!"

대공의 음성에 짜증이 담기자 조슈아는 단박에 움츠러들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조슈아 대신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용병과 정예 병력은 다르지요. 고용주가 생긴다 한들 원래 그 주변에 있던 용병의 숫자 자체는 그대로. 병력이 이동하면서 주변을 술렁이게 만드는 폐해를 방지할 수 있겠군요."

"···그 말대로다."

"무엇보다 용병은 돈으로 움직이기에 고용하는 측은 힘들지만, 반대로 불온한 움직임을 걱정하는 이들에게는 안도감을 줍니다. 정말 위험한 명령은 듣지 않을 테고 여차하면 매수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분명 폐하께서도 용병 고용쯤은 너그럽게 봐주실 겁니다"

설명이 끝나자 대공은 화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루시안을 보는 대공의 눈에서 옅은 기대감이 맴돌았다.

"그럼 내가 왜 굳이 너희들 중 하나를 보내려는지도 알겠느냐? 굳이 너희에게 맡길 것 없이 트리스탄에게 용병을 고용하라 명령하면 되는데도 말이다."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용병은 다루기 어렵지요. 벼랑 끝에 몰리면 배신하여 도망가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용병들이 죽음 벗 삼아 일하기는 하나, 그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함입니다. 죽고 싶어서 일을 하는 게 아니지요."

무리한 명령을 강요받은 결과 계약을 파기하고 도망치는 용병들은 곧잘 있다.

신뢰를 중요시하는 루시안조차 전생에서 자살 돌격을 명령하는 고용주에게서 몇 번 도망쳐봤다.

그만큼 '계약 파기 후 도주'라는 건 용병들 사이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용주가 많다는 소리기도 하다만.

"문제는 지금 보른홀름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겁니다. 용병들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언제든 도망치려 하겠죠. 반대로 가문의 기사들은 그런 용병들을 막을 테고요."

목숨을 걸고 발데크의 영지인 보른홀름을 지켜내야 하는 기사.

그리고 정말 목숨이 위험해지는 요구를 하면 도망칠 생각이 가득한 용병.

서로 충돌하기 딱 좋은 조합이 아닌가.

자칫하면 유혈사태로 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큰형님께서 직접 지휘하신다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더라도 발데크 가문의 핏줄을 해코지한다면···."

"내가 직접 고용된 용병 놈들을 모조리 찾아 씨를 말려버리겠지."

지그문트 대공의 스산한 어조에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가문도 구성원이 말려든다면 그리 맹세하겠지만, 발데크 대공가가 가진 힘은 여느 가문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추격은 멈추지 않을 테고 무고한 마을 몇 군데가 휘말리더라도 기어코 최후의 한 명까지 찾아내 몰살시키리라.

"예. 당연히 용병들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겠죠. 따라서 큰형님의 지휘에는 목숨이 걸려있더라도 고분고분 움직일 테고요. 하지만 큰형님이 용병들을 직접 지휘하기엔 경계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보른홀름의 국경지대는 넓고 경계할 대상은 둘이나 있다.

당연히 병력도 넓게 퍼뜨려야 할 테니 직접 지휘한다면 용병이 아닌 정예 병력을 맡아야 할 터.

용병을 고용한다 해도 필연적으로 부관이나 다른 기사에게 맡기는 상황이 되리라.

그건 동시에 목숨이 위험해진 순간 용병들에게 유혈사태를 각오할 용기를 준다.

아무리 명망있는 기사라 하더라도 그 목숨값이 발데크의 혈족과 같을 수는 없으니까.

"저희 중 한 사람을 보내시려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닙니까? 지금 보른홀름에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 용병들을 제어할 수 있는 전선 지휘관이 절실할 때니까요."

"음."

루시안의 말이 끝난 순간 대공의 입가에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27화

"훌륭하다. 사실상 내가 할 말을 거의 다 했구나."

"과찬이십니다."

"다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몇 마디를 더하마. 너는 둘째 치더라도 다른 녀석들에겐 필요할 테니까."

뼈가 담긴 말에 두 형제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루시안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을 그들에게는 일일이 설명해줘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이번 일로 가주 후보로서의 평가도 깎였을 테니 속이 쓰리다 못해 후벼 파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지그문트 대공은 담담히 설명을 이어갔다.

"실은 트리스탄 녀석이 이미 용병을 고용해놓았다고 한다. 문제는 기껏 고용한 용병들을 제어할 수가 없다는 거지."

"제어할 수가 없다? 큰형님께서 직접 가셨는데도 말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용병 놈들이 우리와 흥정을 하고 싶은 모양이더구나. 당장 손이 귀한 걸 아는 거겠지."

한마디로 아쉬운 쪽은 발데크니까 돈을 더 달라는 건가.

용병으로서는 당연한 태도지만, 문제는 흥정이다.

흥정에 소질이 없다면 충분히 타결될 수 있는 합의점이 있음에도 깨지기 십상이니까.

"안타깝게도 트리스탄은... 이런 데 소질이 전혀 없는 녀석이니 말이다."

'그건 그래.'

루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봤던 트리스탄은 확고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굳이 따지자면 흥정이나 거래라는 단어 자체를 불쾌해하는 사람.

조르디와 달리 약속한 보상은 반드시 줬지만, 더 공을 세운 게 아닌 이상 추가로 주는 것도 없었다.

'일시적으로 차출되었던 켈하임 외곽 순찰 때가 생각나네. 별일 없어서 교대로 쉬는 시간을 줄 법도 했는데 절대 병력을 놀리지 않았지.'

가벼운 휴식 시간조차 그리 깐깐하게 구는 트리스탄이다.

가문에서 대량의 자금을 소모해야 하는 용병 고용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

아마 지금쯤 서로 합의점을 못 찾고 대치만 계속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너희들 중 하나를 파견하고 싶다. 가능하면 합의점을 타결하고 용병들을 지휘해줬으면 한다만."

"...."

대공은 과제와 함께 세 형제를 바라봤다.

그러나 조르디와 조슈아는 아까 전처럼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앞뒤 사정이 드러났다 해서 나아진 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도 하기 싫어지는 안건이었다.

자칫하면 믿음직스럽지 못한 용병들을 이끌고 전투에 몸을 던져야 할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정예 병력의 호위를 받아도 불안할 판인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르는 놈들을 끼고 다니라니.'

'게다가 잘해봤자 트리스탄의 보조라는 건 변함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조르디와 조슈아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직접 지목되지 않는 한 절대 자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지그문트 대공이 실망스러운 눈을 했을 때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

예상치 못한 루시안의 대답에 세 사람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대공조차 루시안이 자원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은 듯했다.

"괜찮겠느냐? 넌 지금까지 한 번도 켈하임을 벗어난 적이 없는 데다 병력을 이끈 경험도 전무할 텐데."

"이참에 둘 다 경험해 볼 기회가 온 셈 치지요.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니까요. 다만 용병들에게 댈 자금은...."

"충분히 지원해주마. 부족할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거라. 단, 한계는 있으니 그 점은 유의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이 정도 답변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어차피 대공이 말하는 한계까지 쓸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용병과 흥정이라. 간단하지.'

루시안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전문 분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기 무섭게 루시안은 떠날 준비를 했다.

어차피 더 남아서 할 것도 없겠다 조금이라도 빨리 준비하는 편이 나았다.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가 아닌 만큼 더더욱.

'용병 시절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적은 많지만, 한 번에 이리 멀리 가는 건 나도 처음이군.'

대공가는 영지가 넓은 만큼 끝자락에 있는 국경지대까지의 거리도 멀었다.

다행인 건 중간에 큰 강이 있어 수로를 통해 편히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순수한 육로로 갔다면 이동하는 데 드는 고생이 두 배는 늘어났으리라.

"한스, 집 지키는 건 네게 맡긴다. 내가 없는 동안 조르디나 조슈아가 이상한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조심하고."

"걱정 마십시오. 예전이라면 모를까 그분들도 지금은 함부로 도련님의 거처에 손을 대진 못할 겁니다."

한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휴고의 부하 출신 하인들을 쳐다봤다.

하긴, 저 녀석들이라면 어지간한 수작은 안 먹히겠지.

부하 중에서도 믿을 만한 놈들로 고르고 골라 데려왔다고 하니까.

"휴고는 나랑 같이 간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큰형님의 보조야. 공을 세울 기회는 없을지도 몰라."

"그렇더라도 가만히 궁둥이만 붙이고 있는 것보단 낫겠지요. 그리고 저마저 곁에 없으면 누가 도련님 수발을 들겠습니까?"

휴고의 넉살 좋은 말에 루시안은 피식 웃으며 수긍했다.

"그것도 그렇지. 그럼 대충 챙길 것만 챙겨서 출발하자고. 어지간한 건 아버지께서 지원해주실 테니까."

빠르게 준비를 마쳐서 휴고와 같이 성문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루시안을 마중 나왔다.

이전에 후작의 아들을 급습할 때 동행했던 흑사자 다섯 명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삼공자. 여전히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나도 반갑긴 한데... 설마 자네들이 이번 여정의 호위인가?"

"예. 솔직히 삼공자의 호위를 감당할 만한 소수 정예 조직은 저희뿐이잖습니까?"

흑사자의 말에 루시안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소수 정예로 움직이면서 발데크의 차기 가주 후보쯤 되는 거물을 완벽히 호위하려면 흑사자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딱 알맞은 인선이긴 했다.

'그래도 옛날에는 전설의 비밀 조직이란 느낌이 있었는데, 자꾸 만나니까 신비함이 없어지는 기분이란 말이지.'

"앞으로 한동안 삼공자와 함께하게 되었으니 구분할 이름이 필요하겠지요. 레이먼이라 불러주십시오."

흑사자 중에서 대장 격인 자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이름을 댔다.

이어서 다른 네 명도 각각 마틴, 빈센트, 주드, 위드로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다만 레이먼이 이름을 대기 전에 내뱉은 말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냥 자기 이름이라고 하면 될 걸 굳이 '구분할 이름'이라니?

"그거 본명 맞나?"

"돌려쓰는 세 개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호위 임무를 할 때 주로 쓰지요."

"...."

대놓고 가짜 이름이란 말에 루시안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어디까지나 이름만 댔을 뿐 성은 대지 않았다.

보아하니 죄다 가명이고 상황에 맞춰 바꿔쓰는 모양이었다.

'암살이나 뒷공작 같은 더러운 일도 맡는다더니, 진짜인가 보군.'

하기야 떳떳지 못한 일을 하는데 본명을 드러낼 수는 없겠지.

루시안은 굳이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들에게도 사정은 있을 테고 아마 그 사정이란 가주만 아는 비밀일 테니까.

형식적인 통성명이 끝나자 레이먼이 미리 준비한 말을 내밀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최대한 빠르게 가려 하는데 말을 타실 줄 아십니까? 속도를 내며 오랜 시간 달리려면 제법 요령이 필요합니다만."

"뭐, 이참에 배워보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사실 루시안은 말타기에 제법 자신이 있었다.

용병임에도 전생에서는 이런저런 일로 자주 타고 다녔으니까.

전장에서의 승마술은 기사만 못해도 달리는 거라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레이먼이 건네주는 군마의 고삐를 루시안이 잡아챘을 때였다.

"저, 도련님."

"왜?"

"전 말을 한 번도 못 타봤는데요."

"...."

휴고의 난감한 표정에 루시안은 머리를 짚었다.

****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란 구입에 드는 비용부터 유지비까지 장난이 아니다.

암흑가 건달패였던 휴고로서는 당연히 타본 경험이 없을 수밖에.

하지만 휴고를 배려하느라 천천히 가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삼공자인 루시안도 서두르는 상황인데 휴고는 일개 하인이었으니 더더욱.

"어쩔 수 없죠. 제가 가면서 가르치겠습니다."

"가르칠 시간이 있나? 제대로 가르치려면 하루로는 부족할 텐데."

"원래 이런 건 실전에서 배우는 겁니다. 여유로울 때 천천히 배우는 것보단 고통스럽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해야죠."

레이먼은 그리 말하며 휴고를 말 위에 올렸다.

그리고 휴고에게 있어서 사흘간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자, 잠깐! 엉덩이가 아파 죽겠습니다!"

"다리로 말을 붙잡아! 자꾸 힘이 빠지니까 방아처럼 찧어대지!"

"그렇게 하면 말이 날뛰는데요!"

"너무 세게 조이지는 말고 안 흔들릴 정도만! 등을 쭉 펴고 체중은 엉덩이 안쪽으로! 무작정 꼿꼿이 서려 하지 말고 말의 움직임에 맞춰!"

"조금만 천천히...!"

"그럴 시간 없다! 뒤처지면 두고 갈 테니 알아서 따라와!"

"끄어억!"

다행히 휴고의 신체는 검식을 익힌 덕에 일반인보다 훨씬 튼튼했고, 일반인이라면 열 번은 엉덩이가 쪼개졌을 상황임에도 버텨내었다.

어떻게든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레이먼의 가르침을 익힌 덕도 있었다.

휴고의 고통은 사흘 후 중간 지점인 항구에 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끝났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보른홀름 바로 앞에 있는 항구도시 빌룬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습니다. 바람이 잘 따라주면 이틀 안에도 갑니다만 느릴 때는 나흘까지도 걸립니다."

"빌룬에서 보른홀름까지는 말을 타고 얼마나 가야 하지?"

"천천히 가도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다행이군. 그 정도면 휴고의 엉덩이도 버티겠지."

두 사람의 농담에도 휴고는 입 하나 벙긋하지 못했다.

반쯤 쪼개진 엉덩이 때문에 끙끙 소리밖에 안 나왔으니까.

루시안은 휴고를 배려해 배 위에 있는 동안에는 푹 쉬게 해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뱃멀미는 없냐? 뱃멀미까지 있으면 골치 아픈데."

"다행히 배는 어린 시절 몇 번 타봤습니다. 아버지가 뱃사람이었으니까요."

"그건 처음 듣는 소리군."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자주 탄 것도 아닙니다. 제가 다 크기도 전에 배가 뒤집혀서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의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휴고는 담담했다.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워낙 흔한 일이라 비극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말을 타는 요령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요."

나중에, 라는 단어에는 유독 힘이 실려 있는 걸 보면 기사가 되었을 때를 이야기 하는 듯했다.

하기야 기사라면 승마는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교양이니 좀 힘들더라도 이참에 익혀두는 편이 좋겠지.

루시안 일행을 태운 배는 사흘 후 아침 목적지인 빌룬에 도착했다.

"딱 좋군요. 아침 식사만 마치고 바로 출발하면 저녁이 되기 전에 일공자를 뵐 수 있을 겁니다."

레이먼의 말대로 움직이자 정말로 하늘이 붉어지기 전에 보른홀름의 성이 보였다.

아직 거리가 있지만 이대로 천천히 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것 같았다.

목적지에 다 왔다는 사실에 모두 안도하고 있을 때, 앞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일련의 무리가 말을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발데크 가문의 기사들도 섞여 있고요."

"큰형님인가? 날 봤다고 마중을 나올 분은 아닐 텐데."

"뒤쪽에 일공자께서도 계시긴 합니다만... 마중이 아니라 앞에 있는 무리를 쫓는 것 같군요."

레이먼의 말에 루시안이 마력을 눈에 집중시켰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화된 안력이 저 멀리서 달려오는 존재를 포착했다.

발데크 가문 소속 기사단에게서 말을 타고 도망치는 존재는 총 여섯.

검은 후드를 쓰고 정체를 숨기고 있으니 척 보기에도 떳떳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거 아무래도 도와야겠지? 좋은 일 하다가 걸려서 쫓기는 건 아닐 테니."

"그래야겠지요. 다만 다 잡을 수는 없겠군요."

상대가 여섯이라는 걸 확인한 레이먼이 눈을 찌푸렸다.

흑사자의 숫자가 다섯이란 걸 생각하면 한 명은 놓칠 수밖에 없었다.

휴고는 승마술도 제대로 못 익힌 상태고 루시안은 호위 대상이라 논외였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맨 왼쪽에 있는 놈은 내가 맡지. 나머진 댁들이 제압하도록."

"예? 삼공자!"

"도련님!?"

말리려는 레이먼과 휴고를 뒤로 하고 루시안이 말을 달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레이먼은 당황했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소리쳤다.

"제기랄! 흩어져서 도망치는 놈들부터 다 잡아!"

"삼공자의 호위는...!"

"늦었어! 명령대로 해!"

그래, 늦었지.

이 상황에서는 흑사자가 아무리 서둘러도 앞서 나간 루시안이 먼저 상대와 충돌할 테니까.

이미 호위하기에 늦었다면 루시안이 제안한 대로 움직이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비켜라, 애송이!"

루시안이 도주 경로를 막아서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걸걸한 목소리로 위협하며 말 위에서 칼을 뽑았다.

그러나 루시안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말을 달리며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했다.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는 루시안의 모습에 검은 후드의 남자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전부 네가 자초한 일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베고 지나갈 생각인지 남자의 목소리에 짙은 살기가 묻어 나왔다.

강렬한 기세를 보니 이대로 정면에서 부딪쳐 힘으로 꺾어버릴 생각인 듯했다.

이윽고 루시안과 격돌하는 지점에서 남자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른 순간.

쩌어엉

"꺽...!?"

쇳덩이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28화

"이 무슨!?"

"세상에!"

성인 남성이 하늘로 솟구치는 장관에 도망자를 쫓던 발데크 가문의 기사들은 기겁하며 멈춰섰다.

공중으로 붕 떠오른 검은 후드의 남자는 두 바퀴를 회전하고 나서야 바닥에 떨어졌다.

쿠당탕

"끄으윽!"

불행인지 다행인지 머리 대신 등으로 착지를 한 덕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나 충격으로 인해 그대로 기절했다.

루시안은 쓰러진 남자와 금이 간 자신의 검을 번갈아 살펴보고는 혀를 찼다.

"쯧, 좋은 검이었는데."

힘으로 날려버린 건 좋지만 검까지 깨질 줄이야.

나름 좋은 걸 골라와서 멀쩡할 줄 알았는데 놈이 사용하던 무기도 꽤 상등품이었던 모양이다.

루시안은 미련 없이 검을 버리고 멈춰선 발데크 가문의 기사들을 쳐다봤다.

"뭐하나? 아직 살아있으니 포박해라!"

"...그대는 누구시오?"

"루시안 발데크다. 아버지를 섬기는 자가 내 얼굴도 모르느냐?"

"사, 삼공자!? 실례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눈을 찌푸리던 기사단장은 루시안의 정체를 듣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냉큼 옆에 있던 기사들을 시켜 남자를 포박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흑사자들도 도망자들을 모두 제압한 듯했다.

"도련님!"

한 박자 늦게 루시안을 쫓아온 휴고는 기겁한 표정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겁니까!? 자칫하면 큰일 날 수도 있었습니다!"

"걱정 마라.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아니라 다 계산하고 나선 거니까."

"계산이라니요? 적의 실력조차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지간한 실력자가 아닌 이상 마상 전투에서 취할 행동은 뻔해."

마상 전투에서 양측이 정면충돌을 할 경우엔 공격 방법이 많지 않다.

바닥에 발을 붙일 수가 없기에 잘못하면 반발력으로 낙마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고속으로 움직여 정교한 기술을 쓰기 힘든 건 덤이다.

'기껏해야 타이밍을 맞춰 찌르거나 베는 수밖에 없는데, 달리는 말에서 장창도 아니고 짧은 검으로 찌르기를 했다간 역으로 당하기 십상이지.'

남은 방법은 정확한 타이밍에 베고 지나가는 것뿐.

루시안은 그때를 노려 정확히 검을 휘두른 게 전부다.

검끼리 맞부딪치면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근력을 낼 수 있는 쪽이 유리하니까.

마력의 순도와 펠리시아의 기술을 고려하면 루시안이 밀릴 리가 없었다.

'하여간 육체 하나만큼은 끝내준다니까. 이전 몸뚱이로 같은 짓을 했다간 근육통으로 하루는 고생했을 텐데 지금은 저리지도 않네.'

새삼 루시안이 축복받은 육체의 성능에 놀라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이구나."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검붉은 머리칼의 사내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루시안은 기억 속 그대로인 남자의 모습에 바로 고개를 숙였다.

"예,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큰형님."

트리스탄 발데크.

모계 유전의 머리색이 특징인 발데크 가문의 일공자.

외모는 대공과 제일 닮지 않았지만, 차기 가주 자리에는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는 존재였다.

특유의 냉담한 표정으로 루시안을 바라보던 트리스탄이 입을 열었다.

"해줄 이야기가 많다만, 일단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해라.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자꾸나."

****

루시안 일행은 트리스탄과 그가 이끄는 기사단을 따라 보른홀름 성으로 향했다.

성 주변은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었으나 그들을 보는 주민들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최근 병사들이 용병들과 몇 번 충돌했다. 별거 아닌 일이었다만 겨우 그 정도로도 저들은 불안한 모양이다."

"저들은 정말 별거 아닌 일인지 큰일로 번질 전조인지 모르니까요. 자칫하면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우습지도 않은 소리다."

주민들의 심정을 루시안이 대변하자 트리스탄은 불쾌한 듯 눈을 찌푸렸다.

"유혈 사태란 건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나를 비롯한 기사들이 주제 모르는 용병들을 쥐잡듯 없애버릴 뿐이지. 분쟁도 격이 맞는 상대여야 일어나는 법. 그 사실을 놈들만 모르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를 들어 보니 용병들한테 쌓인 게 제법 많아 보였다.

루시안은 트리스탄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였다.

"용병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듣습니까?"

"말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귓등으로 흘리고 있지. 너와 흑사자가 잡은 놈들이 누군지 아느냐?"

"누굽니까?"

"제국 해방연대 놈들이다. 이 주변을 돌아다니다 잡혔지."

그 말에 루시안의 표정도 살짝 굳어졌다.

이미 존재가 알려졌음에도 성 주변을 대놓고 돌아다닌다?

경계망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는 소리다.

발데크 가문에 소속된 이들이 경계를 소홀히 할 리는 없을 테니 원인은 용병들의 태업일 터.

"우스운 소리지만 내 휘하의 정예는 위험지역에 파견된 탓에 보른홀름 앞마당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래서 용병 놈들에게는 주로 안전하고 방비가 잘 된 지역의 경계를 맡겼지만...."

"돈을 더 주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시위하는 중이군요."

"그래.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목을 잘라 성벽에 내걸고 싶을 지경이다. 위험한 지역도 아닌데 돈까지 더 달라니? 천박한 용병놈들!"

으득, 하고 트리스탄의 이 가는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위험한 지역도 아니고 비교적 안전한 지역의 경계를 맡겼음에도 일을 안 하려 하니 속에서 천불이 나겠지.

하지만 루시안이 볼 때는 이 사태가 발생한 원인에는 트리스탄의 몫도 상당했다.

'손이 부족하다는 걸 너무 대놓고 알렸어. 몸값을 비싸게 받을 절호의 기회를 용병이 놓칠 리가 없지. 게다가 지나치게 위험지역을 피해서 배치한 것도 악수야.'

애초에 용병은 돈 받고 위험한 일을 대신 해주는 일이다.

그런데 굳이 위험한 지역을 피해서 파견한다?

목숨을 건사하지 못할 만큼의 위험이 숨어있다고 알려주는 꼴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래서야 굳이 안전한 곳에 배치한다고 해서 감사할 리가 없다.

나중에 진짜 큰일이 터지면 한꺼번에 내보내려고 아껴두는 것으로밖에 안 보일 테니까.

'그리고 트리스탄 역시 실제로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 용병이 시세를 읽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얕본 게 문제군.'

닳고 닳은 용병은 생존 감각에 한해서는 노회한 귀족조차 넘어선다.

무슨 수작을 꾸미는지는 위험한 냄새가 난다 싶으면 냉큼 발을 빼거나 리스크 이상의 보수를 요구하기 마련.

고용주가 볼 때는 괘씸한 작태일지 모르나 용병으로선 당연한 행동이었다.

"상황이 어렵긴 하나 네게 많은 걸 기대하진 않는다. 어차피 조르디와 조슈아에게 반쯤 떠밀려 내려온 것일 테니."

설명을 마친 트리스탄은 조용히 말했다.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말도, 경멸이 담긴 조롱도 아니라 진심을 말하는 태도였다.

"가서 용병들을 감시하고, 여차할 때 도망치는 걸 막아라. 명목상으로나마 네가 지휘하고 있다면 놈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테니. 어차피 목숨이 위험하면 보수가 어찌 됐건 알아서 싸우겠지."

한마디로 탈영병을 막는 고기 방패 역할이나 하란 뜻.

명령조차 아닌 통보에 루시안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이런 소릴 하는 건지.

"큰형님께서는 뭔가 착각하시는 듯 합니다."

"착각?"

"첫째, 저는 떠밀려 내려온 게 아니라 자원해서 왔습니다. 둘째, 형님과 달리 제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있습니다. 셋째, 아버지께 이미 협상을 위한 금전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

그 말에 지금껏 무뚝뚝하던 트리스탄의 표정이 무너졌다.

첫째와 둘째는 넘어가더라도 셋째는 간과할 수 없는 듯했다.

"아버지께서 네게 협상을 맡기셨다고?"

"예. 여기 아버지께서 형님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트리스탄은 루시안의 품에서 나오는 편지를 냉큼 낚아챘다.

봉인에 새겨진 인장을 확인한 후 바로 내용을 읽어내리자 트리스탄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정말로 아버지의 필체로군."

"봉인에 박힌 인장 확인하고도 필체까지 보십니까?"

"내가 없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야 이것저것 있었지요."

루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대공이라면 모를까 굳이 트리스탄에게 이것저것 설명할 의무는 없었으니까.

잠시 루시안을 노려보던 트리스탄은 이내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걸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지. 어디 원하는 대로 해보아라. 단!"

짧게 소리치는 트리스탄의 눈에서 스산한 안광이 번뜩였다.

다른 두 형제와 달리 손에 직접 피를 묻혀 본 사람의 살기였다.

"만약 네가 같잖은 공명심으로 가문에 해를 끼친다면 내가 용서치 않겠다. 설령 아버지께서 용서하시더라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이미 가주가 된 것 같은 트리스탄의 말에 루시안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말했다.

"저는 제가 받아야 할 것을 깎아 먹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트리스탄은 할 말을 잃고 눈을 껌뻑였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가주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 말하는 선전포고나 다름 없었으니까.

잠깐의 침묵 후, 트리스탄이 조용히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용병들은 중앙 분수대 근처의 물총새 여관에 묵고 있다. 놈들과 협상을 할 생각이라면 그쪽으로 가보아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지요."

루시안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 중앙분수대 쪽으로 내려갔다.

휴고와 호위로 배정된 흑사자 다섯 명도 그 뒤를 따랐다.

멀어지는 루시안의 뒷모습을 보는 트리스탄의 표정은 더없이 미묘했다.

'사람이 어찌 저리 달라졌단 말인가?'

실전을 겪어보지 않은 애송이라면 오줌을 지릴 수도 있는 살기였다.

그런데 그 살기를 정면에서 받고도 저리 당당하게 나올 줄이야.

트리스탄이 가문에 있을 때만 해도 사슴처럼 떨던 모습이 마치 거짓 같았다.

'아니, 아직 속단하기엔 이르지.'

아무리 패기가 넘치더라도 결국 능력보다는 자신감의 문제.

현실과 괴리된 자아도취에 빠져 일시적으로 보이는 현상일 가능성도 있다.

이번 협상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고 나서야 진면목을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만약 이번 협상에서 저 패기에 걸맞은 결과를 들고 온다면.

'...차기 가주 자리를 위협할만한 경쟁자가 새로 생길지도 모르겠군.'

****

트리스탄에게서 멀어지자마자 물러서 있던 레이먼이 다가왔다.

얼굴이 심상치 않은 게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삼공자, 잠깐 저랑 대화 좀 하시죠."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하지. 지금은 좀 바빠서."

"아니, 지금 하셔야겠습니다. 방금 전선에 나서신 건 대체 뭡니까?"

"아주 효율적인 작전이었지? 덕분에 다 잡았잖아. 완벽한 결과였어."

"결과만 좋으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다 몸에 큰 상처라도 생겼다간...!"

"다행히도 내 몸은 멀쩡해. 괜히 최악을 가정하면서 좋은 기분 망치지 말고 넘어가자고."

"삼공자!"

레이먼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루시안은 무시하고 귀를 후볐다.

어차피 비슷한 일이 재차 벌어지면 그때도 이번처럼 튀어나갈 터.

괜히 두 번 다시 같은 일은 안 하겠다고 한 다음 어기는 것보단 아예 약속을 안 하는 게 나았다.

"자, 조용히. 슬슬 분수대가 보이는데 용병들한테 이러는 꼴을 보이면 어찌 생각할까? 내부 단속도 못 한다고 퍽 우습게 보이겠지?"

"...!"

"그러니 이야기는 나중에, 여유로울 때 하자고. 일단 지금은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최선 아니겠어?"

루시안의 넉살에 레이먼은 이를 악물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숨을 고르며 뒤로 빠졌다.

다만 그 와중에 한마디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넘어가겠지만, 다음에도 같은 일을 벌이시면 화장실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엉덩이 닦으실 때도 위험한 짓 안 하시나 지켜볼 테니 각오하시길."

"...그건 좀 무서운데."

묘하게 현실적인 대안이 나오자 루시안은 몸을 떨었다.

레이먼을 비롯한 흑사자라면 그 정도는 진짜 할 것 같았다.

나중에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루시안이 여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곧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개판이군."

29화

용병은 대개 목돈이 들어올 경우 생각 없이 펑펑 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직업인 만큼 차라리 즐기기라도 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당연히 생활상도 자연스레 무계획적이고 방탕해지기 마련.

루시안도 용병이었던 만큼 그들의 삶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안조차 지금 용병들이 보이는 꼴에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끔찍하군."

걸을 때마다 발에 채이는 술병.

여기저기 널려 있는 토사물.

거나하게 취한 채 잔을 던져대는 용병들까지.

광란의 파티가 끝난 새벽이면 모를까 도저히 초저녁에 볼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끄억! 누구여? 여기는 우리가 전세 냈는데?"

"외지인인가? 거참, 모처럼 즐기고 있는데 분위기 깨는구만."

"꼬맹이가 꼴에 호위까지 거느렸네? 돈 많나?"

"푸하하하!"

용병들이 루시안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거친 일을 하는 자들 특유의 더러운 농담에 휴고와 흑사자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삼공자."

"됐으니까 가만히 있어."

루시안은 나서려는 레이먼을 만류한 후 굴러다니는 술병 하나를 들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여관 중앙의 천장을 향해 집어 던졌다.

와장창, 후두두둑

"뭐여!?"

"이런 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용병들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제야 술이 깬 용병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분노한 용병들이 달려오기 전에 루시안은 재차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루시안 발데크. 현 발데크 대공이신 지그문트 발데크 전하의 셋째 아들이자 네놈들의 고용주인 트리스탄 발데크 공의 동생이다."

"···!"

"잠시 대화를 하고 싶은데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아서 충격 요법을 썼지. 잘 먹힌 것 같아 다행이군. 아니면 꿀물이라도 더 필요한가?"

루시안의 신분을 알게 되자 용병들은 일제히 주춤했다.

상대가 대공의 아들이라면 손끝 하나라도 대는 순간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용병들이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다.

"뭐, 꿀물은 필요 없겠습니다. 잠은 제대로 깼으니 말입니다. 근데 발데크 가문의 도련님께서는 대체 왜 이 지랄이신지요?"

"···이런 시건방진!"

선을 넘는 무례에 레이먼의 손이 허리춤에 걸린 검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바로 검을 뽑아서 베어버릴 기세였다.

루시안은 레이먼의 어깨를 붙잡아 막고는 튀어나온 용병을 바라봤다.

텁수룩한 수염에 베인 흉터가 가득하여 휴고만큼 인상이 험악해 보였다.

'이놈이 구심점인가.'

다른 사람들은 생각 없고 주제 파악 못 하는 용병의 폭언으로 들리겠지.

하지만 루시안이 볼 때는 전부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치고 내뱉은 소리였다.

'주도권이 넘어갈 것 같으니까 나서서 막고, 일부러 폭언을 내뱉어서 자신들이 꿀릴 게 없는 입장이란 걸 알렸어. 아직 대화도 시작하지 않은 시점이라 시기도 절묘해.'

수위만 따지자면 귀족 모독죄로 목이 잘릴 수도 있는 발언.

그러나 동시에 루시안이 대화를 원한다면 딱 한 번 정도는 넘어가 주리라 확신했으리라.

어떤 이유에서든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피를 봤다간 판 자체가 엎어질 테니까.

경험만 많은 게 아니라 나름의 정치 감각도 있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인간.

'하지만 시건방지군.'

만에 하나란 건 언제나 있는 법인데도 자기 작전에 의문을 품지 않다니.

능력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다 못해 오만한 수준이었다.

"이름이 뭐지?"

"친구들은 절 '붉은 칼날 스벤'이라 부르지요."

"그래, 스벤. 한 가지만 묻겠다. 자네와 다른 친구들은 대체 왜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거지? 내가 듣기로는 용병 계약은 이미 끝났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루시안이 별명을 한 귀로 흘리며 묻자, 스벤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럴 리가요. 안타깝게도 트리스탄 나리와 저희의 계약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더 비싼 값에 고용되고 싶은데, 대뜸 그보다 적은 돈을 주시면서 일하시라 하시니 어쩌겠습니까?"

"과연. 그래서 그 돈은 받았고?"

"물론 잘 받았습니다. 계약금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굳이 주신다는 걸 사양할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안 그런가, 친구들!?"

"그렇고말고! 씀씀이가 훌륭하신 트리스탄 공 만세!"

"그리고 그 돈으로 사 먹는 술과 안주도 만세!"

"푸하하하하!"

용병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트리스탄이 준 돈을 '계약금'이 아닌 '적선'이라고 우길 요량인 것 같았다.

루시안은 여유로운 스벤과 그에 동조하는 용병들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이건 안 되겠군.'

트리스탄은 형편없는 협상 솜씨로 일을 그르쳤고, 스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양보할 생각이 없다.

용병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도 다 까발려진 데다 스벤에 대한 주변의 신뢰도도 하늘을 찌른다.

이래서야 무슨 소릴 하건 제대로 된 협상이 될 리가 없었다.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십쇼. 충분한 금액만 지불하시면 그때부터는 개처럼 일할 테니까요. 이래 봬도 저희가 일 처리 하나만큼은 확실합니다."

루시안이 다 포기했다고 생각한 건지 스벤의 입에서 위로 아닌 위로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목소리에 담긴 승리감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심각한 착각에 빠진 스벤을 보며 루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충분한 금액만 지불한다면 정말 어떤 일이든 처리해주나?"

"물론입니다. 액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내 추측이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쩔렁, 촤르륵

루시안은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책상 위로 던졌다.

대충 묶은 끈이 풀어지며 주머니 안에 있던 금화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화끈하다며 감탄하던 용병들은 이내 금화의 문양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배, 백금화! 빌헬름 대제 탄신 기념주화다!"

"뭐!? 이런 미친!"

"삼공자!"

용병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고 흑사자들 역시 기겁했다.

통칭 백금화로 불리는 빌헬름 대제 탄신 기념주화.

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 대제를 기리는 백금화로 십수 년에 한 번씩만 찍는다는 기념주화.

한 닢만으로도 일반적인 금화 수백 닢의 가치가 있으며 대륙 어디든 즉시 환전이 가능했다.

그런데 그 백금화를 주머니 가득 넣어서 던져놨으니.

꿀꺽

용병들은 영롱하게 빛나는 백금화를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저 액수라면 남은 인생을 어지간한 귀족보다도 더 호화스럽게 살 수 있는 액수가 아닌가.

여기 있는 전원이 나눈다면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당장 용병을 은퇴할 정도는 되리라.

스벤조차 이만한 액수는 예상치 못했는지 연신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크, 크흠! 크허험! 이거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시군요. 좋습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루시안 발데크의 이름을 걸고, 붉은 칼날 스벤을 죽이는 자에게 이 백금화 전부를 주겠다."

"···!?"

함박웃음을 억누르며 금화 주머니에 손을 뻗던 스벤은 이어서 나온 루시안의 말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

여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명령 자체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방금 일이 끝난 용병들에게 서로 죽이라느니 싸워보라느니 하는 고용주는 많았으니까.

그 대부분이 들을 가치도 없는 희롱질이었기에 용병이라면 무시하는 게 보통.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액수가 보상으로 걸려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시발, 방금 뭐라 한 거야? 저만한 금액을 한 명한테 몰아주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지간한 귀족 가문도 휘청거릴 액수인데."

"그래도 우리가 다 보는 앞에서 이름을 걸고 맹세했잖아."

"가문까지 언급한 이상 은근슬쩍 무마할 수준은 넘어섰다고 봐야지."

용병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지자 스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온갖 고생 끝에 이룬 결속을 이런 식으로 뒤흔들어버릴 줄이야.

이대로 놔뒀다간 저 감언이설에 흔들리는 놈이 속출할 터.

무슨 말이라도 해서 용병들의 주의를 끌 필요가 있었다.

"이보십쇼, 도련님! 지금 무슨···!"

스릉

스벤이 뭐라 하기도 전에 루시안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처음엔 공격하려는 줄 알고 흠칫했으나 루시안의 검이 향한 곳은 본인의 손이었다.

서걱

"도련님!?"

휴고의 비명을 무시한 채 루시안은 벤 손바닥으로 피를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모든 용병이 보도록 주먹을 들어 올리고는 쩌렁쩌렁 소리쳤다.

"하늘의 여덟 신이시여! 루시안 발데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노니, 눈앞의 이 남자를 죽이는 자에게 이 주머니에 담긴 모든 것을 양도하겠나이다! 이를 어긴다면 더는 푸른 피의 일원이 아닐진저! 부디 굽어살피소서!"

"아아."

레이먼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만신전의 맹세. 별다른 속박은 없는 그저 맹세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통과 역사적 의미로 따지자면 그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저 맹세를 하고 약속을 들어주지 않은 제국 황제는 없으니까.

평민도 아닌 귀족이 만신전의 맹세를 어겼다간 평생 비웃음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가문에서도 쫓겨날 터.

'이젠 진짜로 돌이킬 수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누군가 스벤을 죽인다면 진짜로 저 백금화를 다 줘야 한다.

지불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다른 이가 나서기 전에 모두가 듣는 앞에서 맹세를 취소하는 것뿐.

약속을 지킬 사람이 없다면 맹세를 무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으니까.

"미친, 방금 그거 만신전의 맹세 아냐? 동화로만 들어봤는데."

"그냥 맹세잖아. 실제로 어긴다 해서 천벌 받는 건 아니라고."

"멍청아! 귀족이 만신전의 맹세를 어기면 가문에서 쫓겨난다고!"

"뭐? 그럼 진짜로 저 백금화를 다 준다는 거야?"

루시안의 맹세가 끝나기 무섭게 용병들의 동요가 한층 더 심해졌다.

하지만 동요는 심해졌을지언정 직접 나서는 이는 없었다.

저런 의뢰에 응해서 동료의 등을 찌른다는 건 공공의 적이 된다는 뜻.

오늘 처음 보는 귀족 도련님의 맹세만 믿기에는 불안한 감이 있었다.

"한심한 놈들."

그런 용병들을 보며 루시안이 경멸을 담아 소리쳤다.

"명예를 걸고 신께 맹세했다. 그런 맹세조차 믿지 못한다면 이 백금화를 다 받을 자격은 없지."

루시안은 백금화를 반만 내려놓고 나머지는 다시 주머니로 담았다.

갑자기 반으로 줄어든 백금화에 용병들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금화 반을 회수하여 맹세를 철회한 후 다시 소리쳤다.

"하늘의 여덟 신이시여!"

이번에도 같은 맹세가 울려 퍼졌으나, 금액은 반으로 줄어든 상태.

용병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두 번째도 나서는 자가 없자 루시안은 재차 금액을 반으로 줄였다.

처음 금액의 사분지 일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세 번째 맹세가 울려퍼지자 몇몇 용병이 다급히 일어나 소리쳤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도련님!"

"닥쳐라! 나는 맹세를 지킬 사람을 찾으러 온 거지 네놈과 한가하게 대화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다!"

"그러니까 그걸 어찌 믿느냔 말입니다! 최소한의 보증을 해주신다면···!"

"믿고 말고는 네 마음이다. 허나 만신전의 맹세조차 믿지 못한다면 뭘 더 해줘야 한단 말이냐?"

루시안은 코웃음과 함께 또다시 맹세를 철회하고 남은 백금화를 거의 다 쓸어갔다.

이번에도 반 정도는 남겨놓을 거라 생각한 용병들은 기겁했다.

이제 남은 액수는 귀족이나 대상인들의 삶 같은 호화로운 생활은커녕 기껏해야 평민 세 사람 정도가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그마저도 일반적인 용병이라면 손에 쥐어보긴커녕 남의 손에 들린 것도 못 볼 액수였다.

"하늘의 여덟 신이시여!"

"···이런 썅!"

덜컹, 덜커덩

네 번째 맹세가 울려 퍼진 순간 일부 용병들이 벌떡 일어나 무기를 잡았다.

이번 기회마저 놓치면 안 된다는 결연한 눈빛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삽시간에 바뀐 분위기에 스벤이 할 말을 잃고 뒷걸음질 칠 때였다.

"당장 그만두지 못해! 이게 무슨 꼴이냐!"

누군가 용병들에게 일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스벤과 같은 탁자에 앉았던 젊은 용병이었다.

"지금 저 이간책에 넘어가서 어쩌자는 거냐! 맹세니 뭐니, 귀족 도련님의 헛소리를 정말 믿는 거냐!?"

"오오, 에이든!"

스벤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부단장 에이든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주변을 한 차례 노려본 에이든은 스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스벤 단장이 지금까지 너희를 대신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잊은 거냐!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겨우 저 정도의 돈으로 배반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크흐흠!"

"뭐, 나는 부끄러움 같은 거 모르지만."

푸욱

에이든의 말에 한껏 거드름을 피우려던 스벤은 이내 옆구리가 화끈해지는 걸 느끼고 눈을 부릅떴다.

언제 꺼낸 건지 단검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너, 너···!"

"미안하우, 단장. 하지만 이해해주쇼."

콰득

"꺽!"

"댁도 날 두 번이나 버리는 패로 써먹었잖아. 난 이번이 처음이지만, 실패한 당신과 달리 성공했으니까 서로 똑같은 셈 치자고."

꽂힌 단검을 에이든이 한 바퀴 돌리자 스벤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내장을 헤집은 건지 단검이 뽑히는 와중에도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에이든은 몇 번 더 찔러 확인 사살을 마친 후 쓰러진 스벤을 옆으로 던졌다.

털퍼덕

"도련님, 맹세를 지켜주십시오."

제 상관을 처리한 에이든이 귀기 어린 눈동자로 루시안을 마주 보았다.

루시안은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남아 있는 백금화를 모아 직접 에이든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물론 지키고말고."

30화